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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13. 두북 어르신 봄 나들이 / 대구 수성대 희망강연
nbsp nbsp 오늘은 법륜스님께서 두북 어르신들을 모시고 봄나들이를 하시는 날입니다. 스님께서는 두북 수련원에서 법사님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한 후 경주남산 답사 때문에 두북수련원에 와 있는 신규법사님들의 만행 후 첫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는 19일에 있을 경주남산 순례에 대해 누가 어느 코스로 갈 것인지, 어떤 것을 답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았습니다. nbsp nbsp 오전 7시에는 두북 어르신들을 모시고 봄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올해는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에 사찰순례를 하고, 부석사 인근에 있는 소수서원과 선비촌도 함께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것이라고 해서 행사준비를 담당한 해운대정토회 봉사자들의 걱정이 많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전날 밤부터 부산전역에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봉사자들이 정토수련원에 집결한 새벽 6시경까지도 그칠 줄을 모르고 추적주적 내렸습니다. 오늘의 나들이행사를 위하여 전날 두북에서 주무신 법륜스님께서도 비가 오는데 어르신들이 괜찮을지 염려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해 온대로 행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그저 최선을 다해 할 일을 할뿐,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모두들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의 걱정과는 달리 마을 어르신들께서도 대부분 시간에 맞춰 나오셨고, ‘우리는 비를 예사로 맞는다’시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는 모습들을 보니 우리가 너무 소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오히려 부끄러워졌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네 대의 버스에 일일이 오르셔서 비가 오는데도 이른 새벽부터 나오시느라고 수고하셨다는 인사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편 “비 맞고 농사도 지었는데 비 맞고 노는게 뭐가 문제겠어요?” 하시며 기운찬 덕담도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르신 129명과 봉사자 21명, 법륜스님과 화광법사님까지 모두 152명의 인원이 질서 있게 두북을 출발하였습니다. nbsp 봉사자들은 차 안에서 어르신들께 수신기와 간식 등을 나누어드려서 간단한 아침식사 겸 요기를 하시도록 하고, 건천휴게소와 안동휴게소에서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시게 한 후 오전 10시 25분에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남쪽에서 출발한 버스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차창을 때리던 빗발은 점점 가늘어지더니 차에서 내릴 즈음엔 흐리고 쌀쌀할 뿐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남녘에서는 이미 지고 있는 벚꽃, 개나리, 목련과 진달래 들이 부석사를 향해 오르는 길목에서 한껏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nbsp nbsp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 앞에 다다르자 스님께서는 먼저 도착하신 어르신들을 잠시 대기시키시고 부석사에 대해서 그리고 일주문의 의미 등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부석사는 신라시대에 가장 유명하신 스님인 원효, 의상, 자장 중에서 의상조사께서 지으신 절입니다. 676년에 지었으니 1,300년 이상 되었습니다. 의상조사께서 중국 유학을 다녀오신 후 화엄종 본찰로 삼아 지으셨습니다. 일주문이라는 의미는 사바세계와 부처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으로 불이문이라고도 합니다. 부석사 바로 뒤에 보이는 산은 봉황산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올라가시면서 봄꽃 구경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nbsp nbsp 일주문을 지나 약간 오르막길을 오르시면서 스님께서는 영주시는 예전에 영풍군 또는 풍기군이라고 하여 영주와 풍기를 포함하는 이름이었고 풍기는 원래 인삼으로 유명했는데 요즘에는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사과가 더 유명해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 천왕문을 바라보며 오르는 왼편 길가에는 당간지주라고 하는 두 개의 기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기둥 사이에 큰 깃발을 꽂아 ‘여기가 화엄종찰이다’라는 표시를 하였다.” 설명해주셨습니다. 네 분의 사천왕들을 모신 천왕문에 들어 서시면서는 ‘사천왕은 동서남북의 하늘을 맡아 악귀로부터 지켜내는 천신들’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부석사 경내로 들어서자 가파른 계단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어르신들이 따라 오르시기에 힘이 들 것을 염려하시어 “빨리 오르지 마시고 천천히 오르세요. 이래서 부석사는 조금이라도 젊을 때 와야 합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부석사에 오면 저 축대들을 잘 봐 두어야 합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들을 가지고 이처럼 안정적이고 아름답게 축대를 쌓았다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축대를 쌓으려는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연구해 가곤 합니다.”라고 하셔서 어르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셨습니다. nbsp nbsp 흰색과 자색의 아름다운 목련이 부석사 경내의 곳곳에서 수줍게 우리를 맞아주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국보급 건축물들이 들어선 경관은 신라고찰로서의 중후한 풍모를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르신들과 함께 잠시 쉴 자리를 찾아보시다가 아담한 잔디밭에 모두 앉게 하신 후 부석사에 대한 여러 가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본격적으로 들려 주셨습니다. nbsp “부석사라는 이름은 뜰 부, 돌 석, 즉 돌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는 데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신라시대의 의상스님은 원효스님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위해 길을 떠나셨다가 밤이 되어 비가 많이 내리자 비를 피해 잠을 청하려고 굴속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원효스님께서 한밤중에 목이 말라 주위를 더듬어보니 웬 바가지 안에 물이 있어서 그 물을 달게 마시고 주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날이 밝아 눈을 떠 보니 지난밤에 자신이 마신 물은 해골 속에 고여 있던 썩은 물이었던 겁니다. 순간 구역질이 올라와서 간밤에 마신 물을 모두 토해내셨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자 더럽고 깨끗한 게 모두 마음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 ‘일체유심조’의 원리를 증득하심으로써 유학을 가려던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nbsp 그러나 의상스님은 유학의 뜻을 굽히지 않고 배를 타고 당나라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신도 집에 하룻밤 머물었는데 신도 딸인 선묘낭자라고 하는 여인이 의상스님의 기상에 반해서 연정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상스님께서는 여인을 잘 감화시키셨고, 선묘낭자는 의상스님의 평생 제자가 되기로 원을 세웠습니다. 의상스님은 화엄종의 3대 교조인 지엄화상아래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nbsp nbsp 그 무렵, 신라와 당나라가 힘을 합해 멸망시킨 고구려, 백제 땅을 모두 당나라가 다 차지하려고 하자, 신라와 당나라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당나라가 큰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상스님께서 이를 급히 신라에 알리기 위해 당나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황급히 떠나시는 스님을 배웅하지 못한 선묘낭자는 스님이 타신 배를 향해 바다로 뛰어들면서 스님께 드리려고 마련해두었던 법복 선물을 힘껏 던져서 선물만은 스님의 배에 가 닿았으나 몸은 바다에 빠져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 선묘낭자가 죽어서도 의상스님을 지켜드리기 위해 큰 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nbsp 이후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문무대왕이 의상스님의 공적을 기려 큰 절을 지어드리고자 의상스님으로부터 직접 터를 잡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의상스님께서는 이곳 부석사의 터를 고르셨는데 문제는 이곳에 500명의 도적떼가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용이 된 선묘낭자가 커다란 돌을 공중에 뜨게 하니 도적들이 깜짝 놀라 모두 도망을 가는 바람에 비로소 이 절을 지을 수 있었고 절 이름이 부석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용의 머리 부분은 무량수전의 부처님 앉으신 자리 부분에, 꼬리부분은 무량수전 앞마당의 석등 부분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nbsp 둘러앉으신 어르신들은 스님의 재미나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올라오는 동안 힘들었던 것도 잊으시는 듯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께서는 부석사에는 국보가 다섯 개나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나라에서 국보가 일곱 개 있는 불국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절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과 그 안의 소조아미타여래상, 무량수전 앞마당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등, 조사님들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과 그 안의 벽화 등 다섯 가지가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또 부석사의 대웅전인 무량수전은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곳이므로 극락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아미타는 인도말이고 한문으로 번역하면 ‘무량수’ 또는 ‘무량광’ 이라고 한다는 설명도 덧붙여주셨습니다. nbsp 또한 스님께서는 두북 정토수련원의 모든 살림살이를 살뜰히 돌보시면서 마을 어르신들과도 가족처럼 친근하신 법성행 보살님께서 최근에 법사수계를 받아 ‘화광법사’님이 되셨다면서 소개해주시자 어르신들께서는 따뜻한 박수로 축하해주셨습니다. nbsp 이어서 어르신들과 함께 ‘안양문’이라고 쓰인 문을 향해 오르시면서 안양문이란 ‘극락 가는 문’이라는 뜻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안양문을 통과하자 고색찬연한 무량수전과 석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서 안양문을 보니 안양루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들어올때는 극락으로 가는 문이었고, 극락에 들어와서 보면 노니는 누각이란 것 같습니다. nbsp 무량수전에는 고요히 선정에 드신듯한 웅장한 아미타부처님이 동쪽을 향해 앉아계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르신들이 참배를 올리시는 동안 무량수전 왼편 마당에 있는 ‘부석’을 보여주셨습니다. 과연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묘한 형상이었습니다. nbsp nbsp 무량수전 앞에서 단체 사진촬영을 한 후,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지나 조사당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오르시면서 예전에는 이 길이 좁다란 오솔길이어서 저 위에 보이는 조사당이 훨씬 더 크게 보였는데, 길이 넓어지니 조사당이 너무 작아 보인다며 아쉬워하셨습니다. 조사당에 오르니 건물 모양이 작고 심플해서 옛 선사들의 소박함이 물씬 풍기는 듯했습니다. 이 조사당 건물도 800년 전의 것으로 국보라고 다시 말씀해주셨습니다. 조사당 안에는 진품은 아니지만 국보로 지정된 벽화가 있습니다. 또 조사당 앞에는 의상조사가 심었다는 ‘선비화’라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nbsp nbsp 내려오시는 길에 일반 관광객들의 이런저런 질문에도 정성껏 답해주시는 스님의 모습이 참 따뜻했습니다. 법륜스님임을 알아보고 반가워하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절에서 내려오신 스님께서는 미리 음식을 준비해 둔 식당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셨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던 봄비에도 불구하고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참석하시느라, 또 가파른 부석사 순례 길을 따라오시느라 힘드셨을 어르신들도 된장찌개와 생선구이 등으로 차려진 점심을 맛있게 드셨습니다. 모든 분들이 식사를 마치자 스님께서는 모처럼의 나들이 길에 오르신 어르신들의 여흥을 돋우어 주시기 위해 노래자랑을 하셨습니다. 어르신들께서는 신이 나서 흥겨운 노래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주름진 얼굴들이 모두 시름을 잠시 잊고 어깨춤을 들썩여가며 초롱초롱 빛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어르신들께서는 매해 이렇게 잊지 않고 나들이 행사를 마련해주시는 법륜스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nbsp nbsp 이제 다시 버스에 올라 소수서원을 향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창밖 풍경을 보시며 밭에 심어진 거뭇거뭇한 것들은 거의 다 인삼이고 벌판과 언덕에 심어진 과수원의 나무들은 거의가 다 사과나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요즘에는 풍기인삼보다 금산인삼이 더 유명하지만 아직 풍기에도 인삼밭이 많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nbsp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니 나란히 이어진 선비촌과 소수서원 주차장에 당도했습니다. 소수서원은 원래는 절터였는데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되면서 풍기군수로 오게 된 주세붕이 절을 허물고 서원 즉, 사립학교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소수서원의 소는 이을 소, 수는 닦을 수로 ‘옛 선현의 바른 가르침을 이어서 닦자’는 뜻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원래는 안향이라는 유학자를 기리는 백운동서원이었는데, 이황이 군수로 오면서 국왕으로부터 인정받는 사액서원이 되었고 명칭도 소수서원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소수서원의 입구로 들어서자 오른편 길가에 부석사의 일주문 지나서 보았던 당간지주와 똑같이 생긴 돌기둥 두 개가 있어서 깜짝 놀랐는데 이것이 바로 이곳이 절터였음을 말해주는 증표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불교탄압의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는 듯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nbsp 소수서원의 오른쪽 담장을 따라서는 아름다운 풍광의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주변은 아담하게 잘 가꾸어진 모습이었습니다. 학교 건물인 본관은 수리 중이어서 천막이 둘러져있었고 뒤쪽에 기숙사와 장서각, 영정각, 사료관 등이 있었습니다. nbsp nbsp 소수서원의 후문을 나오니 주변이 잘 조성된 공원이었고 여기서 조금 걸으니 바로 선비촌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연결되었습니다. 이곳은 옛날 고택들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일종의 민속촌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해우당 고택, 두암 고택 등으로 이름 붙여진 기와집들을 둘러보시며 정말 큰 부자들이 살던 집이라고 하시며, 보통의 시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규모라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런 집들의 문간채 정도밖에 안 되는 집에서 사셨다고 하니 어르신들께서 여기저기서 공감을 표합니다. nbsp nbsp 고택들 안에는 여러 가지 옛날 살림살이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스님을 따라다니시는 어르신들과 함께 베틀이니 기름틀이니 도리깨니 하는 옛 살림살이에 쓰시던 물건들에 대해 함께 회상하시며 공감을 나누시는 모습이 참 친근하고 훈훈했습니다. nbsp 선비촌의 관람을 마치고 이제 스님과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르신들께 마지막 인사를 하시면서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르신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이제 농사일은 놀이삼아 하세요. 죽기 살기로 하지 마시고 재미삼아 하시면서 무엇보다 건강을 잘 돌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들 딸 손자 위한다고 땅문서 집문서 내어주지 마세요. 논도 나누어주시더라도 먹고 살 만큼은 꼭 남겨두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셔야 합니다. 안녕히들 돌아가세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서시면서 스님께서는 우리 봉사자들에게도 한 말씀 하십니다. “차 안에서 꼭 음악 틀어드리세요.” 네, 스님... 어르신들을 극진히 생각하시는 스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nbsp 스님과 함께 어르신 봄나들이를 잘 마치게 되어서 너무도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부석사를 떠나 올해 첫 희망강연이 있는 대구로 향했습니다. 강연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대구법당에 들러서 원고교정등 업무를 보신 후 강연인 대구 수성대학으로 향했습니다. nbsp 대강당 입구에 들어서니 봉사자들의 따뜻한 웃음이 시샘 많은 봄추위를 다 녹일 듯합니다 저녁 여섯시부터 하나둘 메워지던 자리는 어느덧 강연시간인 7시가 되자 700여명으로 꽉 찼습니다. 계단에도 사람들이 자리를 빼곡하게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 무대로 나오시자 봇물 터지듯 박수와 환호성으로 대강당이 떠나갈 듯합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비가 오는데도 많이 참석해주셨다고 하시면서 오늘 노인분들 모시고 부석사 다녀온 이야기, 다니면서 꽃구경 한 이야기등 하시면서 무리하게 놀고 있다고 하니 참가하신 대중분들이 모두 크게 웃으시며 긴장을 푼 것 같습니다. nbsp 올해 첫 희망강연이라 그런지 스님께서는 질문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시 설명해주시면서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nbsp nbsp 오늘은 늦은 시간까지 아홉분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명쾌한 길을 제시하시며 우선 질문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시고 듣는 이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넌지시 일러주십니다. 질문자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며 대화를 듣다보면 어느 순간 질문자와 청중이 함께 “네 알겠습니다” 하며 환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nbsp 외국에서 10년정도 살다가 외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에 들어와 사는데 친정 엄마와 남편의 사이가 좋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아내, 육남매의 맏이로서 부모님 모시고 동생들 거두며 살았는데 자꾸만 행패를 부리는 둘째 동생을 보며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고 싶다는 환갑이 넘은 남자분, nbsp nbsp 다친 오빠를 간호하고 있는데 자꾸만 오빠가 짜증을 내서 참고 참다가 화를 내고 후회한다는 여린 마음의 39살 여동생, nbsp 그리고 39살 된 아들이 건강이 좋지 않아 수술까지 했는데도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괴로워하는 걸 보고 갚아주면 다시 또 술을 마시고 돈을 빌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답답하다는 어머니, nbsp 정신분열증과 우울증으로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는데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 방법을 알고 싶고, 노모한테서도 독립하고 싶다는 부산에서 온 45세 남자분, nbsp 우울증으로 아파트 6층에서 투신해 자살을 시도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새 삶을 얻어 티벳불교를 접하였다가 힐링캠프에 나온 스님을 뵈러 한국에 왔는데 직업이 횟집 주방장이어서 살생을 하는 것 같다며 어찌해야 하는 지를 묻는 중국 교포, nbsp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남편이 사업이 망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안스러워 남편과 아들과 함께 잘 살고 싶은데, 고등학교를 자퇴한 아이 때문에 괴로워 하는 48세의 엄마, nbsp nbsp 어린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묻는 젊은 아빠, nbsp 그리고 청송에 내려와서 함께 농사를 짓겠다는 29살의 아들이 미덥지 못한 엄마의 유쾌한 질문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으로 질문한 분과 스님과의 대화를 옮겨봅니다. nbsp “저는 청송에서 사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29살된 아들이 직장을 1년 정도 다니다가 사과농사를 같이 짓고 싶다고 합니다. 같이 살면 많이 부딪힐 것 같은데 제가 어떻게 아들을 봐야할지, 수익이 생기면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좀 있으면 결혼을 할 것 같은데 같이 살아야 할지, 아니면 제가 따로 나가서 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nbsp “농사일이 할 만 합니까?” 라며 스님께서는 질문을 듣고 몇가지를 다시 물었습니다. nbsp “딸 둘은 각각 외국과 서울에서 잘 살고 있고 남편은 작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현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nbsp nbsp “아들이 농사에 대해서 잘 알아요?” nbsp “제가 농사를 30년 지었는데 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말합니다. 친구나 지인들한테서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아들을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nbsp “엄마는 사장이고, 너는 종업원이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시키고 네가 3년 간 종업원으로서 성실히 하면 진급도 시켜주고, 대우도 해주겠다. 계산은 종업원으로 월급으로 주겠다. 3년간 너를 지켜본 뒤에 어떻게 할지 결정하겠다고 하시면 됩니다. 한번 종업원으로 채용해 보고, 괜찮으면 계속 같이 하고 아니면 내보내면 됩니다.” nbsp nbsp “아들은 자신이 가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아들 생각이지요.” nbsp “제게 가게가 하나 있는데 이것도 해 보고 싶어 하는데 아들에게 줄까요?” 라고 다시 질문합니다. nbsp “계약서를 쓰세요. 그래도 약간 아는 사람이니까 조금 싸게 해서 계약서를 쓰고 임대해 주세요. 20살이 넘었기 때문에 엄마, 자식이라는 관계로 넘겨주게 되면 원수가 됩니다. 사장종업원간에 계약서를 쓰면 사장종업원끼리는 원수가 되어도 이해관계이므로 감정이 상하지 않는데, 그게 정에 끌려서 잘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남에게 과수원을 맡기거나 파는 게 낫습니다. 이렇게 하면 절대 부모자식 간에 원수관계가 안 됩니다.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이 회사를 넘보지 말고, 이 회사 내에서는 엄마자식이 아닌 임대를 하는 관계로 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키워준 것으로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하시면 됩니다.”라고 하시며 스님께서는 오늘 강연을 전체적으로 정리해주셨습니다. nbsp “자식을 보살피는 것도 부모고, 자식을 망치는 것도 부모입니다. 자신을 안온하게 하는 것도 집이고, 자신을 속박하는 것도 집입니다. nbsp 자식을 보살피는 것은 3살 때까지는 100, 초등학교 때는 70, 중학교는 50, 고등학교는 30, 대학을 들어가면 완벽하게 독립을 시켜야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다 이렇게 해요. nbsp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을 보살펴야 할 때 보살피지 않고, 자립시켜야 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아 자식을 망칩니다. nbsp 자식이 부모를 괴롭히는 것이 남편에게서 괴로움 받는 것보다 10배는 더 힘듭니다. 전생의 원수가 부모·자식이 된다는 헛된 말을 믿지 말고, 자식은 부모를 고맙게 생각하고 부모는 자식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nbsp 우리가 낚시를 할 때 맛있는 것을 미끼로 하지요. 쥐약도 쥐가 좋아하는 음식에 놓지요. 그러므로 좋아 보이는 게 사실은 굉장히 위험해요. 쥐가 접시에 맛있는 것이 딱 놓여있으면 ‘이것이 내 것이 아닌데’ 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덥석 물으면 어떻게 될까요? nbsp nbsp 그래서 부처님께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부처이기 때문에 천하 누구에게도 비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당당하라 그러면 교만하고, 겸손하라 그러면 비굴해집니다. 겸손하되 당당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알이 차야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숙인 벼는 알이 찬 법입니다. nbsp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만 정신 차리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다른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게 사십시오.” nbsp 스님께서는 한분한분 질문하신 분들이 놓치고 있는 점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행복해야 함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됩니다. nbsp 강연이 끝난 후 스님의 책에 사인을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많은 이들이 스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nbsp nbsp 사인회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시고는 다시 두북으로 이동하셨습니다.
2015.4.12 용성조사 제75주기 열반일 기념법회
nbsp nbsp nbsp 오늘은 용성조사 열반 75주기 기념법회가 있는 날입니다. 스님과 서울 공동체 대중들, 그리고 SBS 촬영팀은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 3시에 전라북도 장수군에 있는 죽림정사로 출발했습니다. 죽림정사에는 문경공동체 행자원의 행자님들이 행사와 공양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유수스님을 비롯한 법사님들과 서울 공동체 대중들, 그리고 문경공동체 행자원 대중들과 함께 6시 30분에 발우공양을 하셨습니다. 도문 큰스님께서 오셨더라면 참 흐뭇해 하셨을 텐데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nbsp nbsp 스님과 법사단, 그리고 서울공동체 대중들은 9시 30분부터 교육관에서 다례재를 올렸습니다. 석가여래부촉법 제1세 마하가섭 존자로부터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해동 법맥을 이은 역대조사들에 대한 지극정성으로 다례를 올렸습니다. 이어 기념법회가 열렸는데, 일요일인데도 기념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600여 명의 대중들이 모였습니다. nbsp 벚꽃이 만발한 화창한 일요일, 대지는 푸른 옷을 갈아입은 모습이었습니다. 생동하는 봄기운이 느껴지는 가운데, 죽림정사에는 쉼 없이 찬바람이 불어 닥쳐 자꾸 옷깃을 여며야 했습니다. 죽림정사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위치한 장안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행정지명으로는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입니다. 이곳은 백용성 조사님의 탄생지로 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 기념사업회와 백용성조사 유훈실현 후원회의 주도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용성조사님의 유지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습니다. nbsp nbsp 용성조사님은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석가여래계대법 제75세, 조선불교중흥율 제6조이시며, 불교의 지성화·대중화·생활화운동을 전개하는 등 현대 한국 불교의 기초를 닦은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이십니다. 또한, 용성조사님은 1919년 기미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를 대표해서 서명하셨고, 그 이후 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운동가이십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오늘 용성조사님의 제75주기 열반일 기념법문을 통해, 용성조사님의 평생의 삶을 다시한번 정리해 주시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배워야할 바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시절에는 나라의 독립이 시대적 과제였다면, 오늘 이 시점에서 시대적 과제는 분단된 나라의 통일입니다. 발해 멸망이후 대륙을 잃고 반도에 갇혀 강대국의 변방으로 전락한지 일천여년만에 그 천년의 한을 풀고 동북아에서 자주 독립국가로서 옛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민족의 통일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고구려가 다물사상으로 건국이념을 삼았듯이 우리는 새로운 100년의 비젼을 위해 통일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원력보살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nbsp nbsp 기념법회가 끝난 뒤 즉문즉설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nbsp nbsp 질문하는 사람은 6명이었습니다. 여자와 음식에 대해서는 절제가 잘 안 된다는 분,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은데, 수행에서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말라고 하셔서 사회문제를 등한시하라는 의미로 들린다는 분, IMF 이후에 남편이 주식투자에 빠져있어서 걱정이라는 분, 친정어머니에게 마음이 많이 일어난다는 분, 그리고 환경운동을 하다 보니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인간들이 혐오스러워진다는 분 등 대단히 솔직한 질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중에서 세월호 관련 질문과 답변을 나눕니다. nbsp 질문자는 “광화문에서 슬퍼하는 분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고 왔습니다.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도웁게 된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는데, 사회에서는 억울한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때 함께 공감하고 위로를 나누게 되면 서로가 치유가 되는 듯합니다. 억울한 일들은 밝혀야 되는 것이 아닌지요?”라고 질문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밝혀야 한다면 밝혀야지요. 그렇지만 때론 침묵이나 때를 기다려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밝히는 것이 상대에게 억울함이 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추행당한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무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보왕삼매론의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해가 안돼서 이건 아니지 않나 이런 생각에 빠졌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여러 다양한 계층과 사례들을 접하고 상담하면서 이해하게 됐습니다. 세상에 죽을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도, 내막을 알고 보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한 일이 많았습니다. nbsp 억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진실을 밝히려고 하면, 얼마 못 가 지치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실이 규명되지 않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어 밝혀질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몇몇 국민의 힘으로 밝히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른 정부가 들어서서 국민 다수가 참여해 원인규명을 할 수 있도록, 사회를 보다 투명한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때로는 더 효율적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이뤄지지 않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규명이 안 된다고 해서 분노하면, 그만큼 허탈해지고 냉소하다가 결국 바뀌지 않는 정치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돌아서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일이 어렵더라도, 그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하더라도, 만약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분노하기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바꿀 수 있는 방법 쪽으로 힘을 모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nbsp nbsp 세상에 분노할 일이 많은데, 분노하기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그쪽으로 꾸준히 정진하고 힘을 모아가는 일이 수행이라는 말씀이 많이 와 닿았습니다. nbsp 즉문즉설을 마친 뒤 사홍서원으로 1부 행사를 끝내고 대웅전 계단에서 단체 사진 촬영이 있었습니다. 대웅전 계단에서 스님의 당부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nbsp nbsp “암울한 시대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수행의 관점을 놓치지 않으시며 민족과 불교 중흥을 위해 애쓰신 백용성 조사님의 뜻 깊은 열반일을 맞아 이곳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성조사님의 생가 터에서 면면히 흐르는 민족사와 불교사의 정수를 온 몸으로 느끼고 새기셨기를 바랍니다. 용성조사님의 뜻이 오늘 정토회 활동을 통해 이어져가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내가 몸담은 정토회가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한 곳임을 확신한다면 외부의 그릇된 소견에 흔들리지 말고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히 활동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재삼 당부하셨습니다. nbsp 간부수련과 담당자 수련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셔서 피곤하실법한데도, 스님께서는 여전히 힘 있고 활기찬 모습으로, 때로는 단호하고 명쾌한 답변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이런 스승님의 은덕에 힘입어 우리의 삶이 더 가벼워져서, 용성스님의 유훈을 잘 받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bsp 오전 내내 심하게 불던 바람이 잦아지면서 경전반 학생들은 따스한 봄볕 아래 묘수법사님과 무변심법사님으로부터 사찰안내를 받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사찰 경내를 다니시면서 오늘 행사를 위해 애써준 담당자들과 따스한 정담을 나누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스승을 통해 과거로부터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조사의 원력과 노고를 새기고, 원대한 미래를 꿈꾸는 정토행자로 거듭나리라 믿습니다. nbsp 내일은 두북어르신 봄 나들이가 있습니다.
2015.4.11. 탑곡수련원 운력, 서울 공동체 포살 및 백일 출가생 법문
nbsp nbsp 스님께서는 두북정토수련원에서 새벽예불과 기도를 드린 후 원고교정 업무와 정원 가꾸는 일을 하시다가 오전 10시 경에 서울에서 내려온 공동체 대중들과 만나 이른 점심식사를 하셨습니다. 서울공동체 대중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1시간 기도를 하고, 아침식사를 아주 간단히 한 뒤 6시에 출발해 두북수련원으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nbsp nbsp 점심식사를 마치고 두북수련원에 간단히 짐을 푼 뒤, 다들 울력복장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지난주에 비가 안 왔으면 탑곡수련원에 올라가 밭이랑에 비닐을 씌우는 일을 하려고 했는데, 오늘 하게 된 것입니다. 고추 파종 시기가 다가오는데, 일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탑곡수련원을 담당하는 화광법사님이 애타하는 모습이셨습니다. 대중들은 화광법사님의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잘재잘 벚꽃구경을 하면서 탑곡으로 올랐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대중들이 두북수련원에 짐을 내려놓고 울력복장으로 갈아입을 동안에 울력을 마치고 어디로 가야 멋진 꽃구경을 할 수 있을지 답사를 다녀오셨습니다. 탑곡수련원에도 벚꽃나무와 탐스러운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습니다. 졸졸졸 내려오는 작은 골짜기 물에 햇살이 반짝이는데, 그 위에 벚꽃잎들이 흩날리는 모습이 그림처럼 예뻤습니다. nbsp nbsp 꽃구경도 잠시, 다들 울력 담당자의 설명을 들으려고 한 자리에 둥그렇게 모여들었습니다. 울력 담당자는 3인 1조로 모둠을 배정해서 한 명이 비닐을 넓고 팽팽하게 펴주는 역할을 하고, 나머지 2명이 밭이랑 좌우에서 삽으로 흙을 떠서 덮어주는 역할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공기가 안 들어가도록 팽팽하게 잘 잡아줘야 하고, 또 흙으로 비닐의 양 가장자리를 잘 다지면서, 중간 중간에도 흙덩이로 눌러주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nbsp nbsp 다들 오랜만에 하는 농사울력이라 요령을 잊어버렸지만 한 이랑을 실험삼아 해보면서 감각을 익혀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스님께서도 한 조에 들어가셨습니다. 뒤늦게 SBS촬영팀이 와서 스님께서 삽을 들고 밭이랑에 비닐 씌우는 모습을 열심히 촬영했습니다. 어디서 부우우웅 벌떼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싶어 고개를 드니, 헬리캠이었습니다. nbsp nbsp 열심히 삽질을 하던 대중들은 신기해서 올려다보다가 곧 다시 일에 집중했습니다. 어떤 조는 아주 힘차고 씩씩하게 작업을 하고, 어떤 조는 자기들끼리 이렇게 하라느니, 저렇게 해야 한다느니 아웅다웅 시끌벅적 떠들기도 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는 자기들 몸 상태에 맞게 속도를 조절하면서 일하다 쉬었다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 SBS 촬영팀에게 “자 이제 그만 찍고 같이 일합시다”라고 하셔서 대중들은 그냥 우스개소리로 들었는데, PD님들이 진짜 교대로 들어와서 같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PD님들의 일솜씨가 아주 좋으셔서 속도가 더 붙었습니다. 대중들은 이제 PD님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웃고 떠들며 그러나 일은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영 서툴러서 오늘 안으로 다 하겠나 싶었는데, 다들 각자의 방식대로 개미떼처럼 일하다보니 2시간 여 만에 거의 7080를 마쳤습니다. nbsp nbsp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갔다 오신 화광법사님께서 까만 비닐로 가지런히 정렬된 밭고랑을 보시곤 입이 저절로 귀에 걸렸습니다. 한 시름 놓으신 표정이셔서 대중들도 환하게 마주 웃었습니다. 스스로들 뿌듯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 불현 듯 “자 쉬고 하자”고 하십니다. 다들 일손을 놓고 커다란 벚꽃나무 그늘 아래로 모여들었습니다. 참을 담당한 팀이 라면을 끓여 냈는데, 다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봄볕 아래, 흙냄새를 맡으며 즐겁고 신나게 울력을 해서인지 기분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또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 적당한 노동을 하고 먹는 참이라 더더욱 맛있었겠지요. nbsp 먹으면서도 쉴 새 없이 대중들의 수다는 계속됩니다. 특히 스님과 함께 조를 이뤘던 도반들에게 유쾌한 위로를 여기저기서 건넵니다. 다른 조는 쉬엄쉬엄 속도를 조절하면서 일했는데, 스님 조는 정말 한 번도 안 쉬고 내리 2시간 가까이 일했거든요. 스님과 함께 했던 조는 거의 말도 없이 일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nbsp 안 그래도 작년에 비해 우리의 작업 속도가 엄청 빠른 것 같다는 한 도반의 얘기에, 헬리캠 덕분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카메라가 찍든 말든 신경 안 쓰고 자기들 속도대로 작업한 조가 있는가 하면, 헬리캠이 자꾸 날아들어서 거의 쉬지 못한 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공동체 대중들은 스님께서 힘든 일을 하면서도, 또 거의 안 쉬고 일을 하면서도,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게, 누구의 표현대로라면 ‘사부작 사부작’ 가볍게 일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감탄했습니다. 그만큼 몸을 쓰는 일에 단련이 되신 것도 있겠지만, 몸에 집착하지 않고 그러나 일에 집착하지 않는 그런 ‘중도’의 진리가 몸에 배어난 모습이셨기 때문입니다. nbsp nbsp 그러고 보니 오늘 작업 속도가 빨랐던 건, 헬리캠을 의식한 것보다는 이렇게 몸소 본을 보여주는 스승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스승님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히 따라 배우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스승님께서는 부처님의 법문을 알기 쉽게 깨우쳐 주시는 것뿐만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을 몸소 실천하고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자연히 감화되는 것 같습니다. nbsp nbsp 물이 한강처럼 흥건한 라면과 약간 설익은 라면을 먹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으로 먹고 나서 다시 1시간 동안 나머지 30의 공정을 마저 마쳤습니다. 비닐작업을 마친 뒤에 스님께서는 탑곡수련원 주변의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시고, 나머지 대중들은 고추밭에 울타리를 치는 작업을 했습니다. 고라니나 멧돼지가 들어오면 곤란하니까요. 그 작업까지 마치니 얼추 3시가 되었습니다. 다들 흐르는 골짜기 물에 삽과 장갑을 씻고, 차량에 농기구를 실은 뒤 벚꽃 나무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SBS 촬영팀이다, 서울 공동체 대중이다, 뭐다를 다 떠나서, 오늘은 각자 땅을 일구는 농부가 되어 신나게 일한 아주 기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저녁에도 일정이 계속 있으니까 산책할 시간은 없다며, 드라이브를 하면서 꽃구경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미리 봐두신 곳을 향해 차량들이 줄지어 따랐습니다. ‘외와마을’의 어느 가파른 산길로 올랐는데, 오르는 길이 어찌나 험한지 차량 안에서 쿵쿵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가다보니 여기저기 연달래꽃들이 화사하게 피었습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진달래꽃이 더 많더니, 이번엔 연달래꽃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까지 올라가니, 멀쩡한 산을 깎아 채석장으로 사용하는 곳이 나타났습니다. 볼썽사납게 파헤쳐진 모습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려는 찰나, 갑자기 조수석에서 “오른쪽을 봐요. 오른쪽”하고 다급한 소리를 지릅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돌리니, 연달래꽃이 산허리에 지천으로 깔려있습니다. 장관입니다. nbsp nbsp 스님께서 차량에서 나오셔서 다들 차를 세우고 스님 뒤를 따랐습니다. 스님께서는 채석장 먼지가 날아들어 꽃 색깔이 투명하지가 못하다며 아쉬워하셨습니다. 대중들은 진달래꽃 사이사이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사진을 찍으며, 환호성을 지르고 웃고 떠들었습니다. 그 시끄러운 와중에도 SBS 촬영팀은 스님께 “꽃을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왜 좋아하시는지” 인터뷰를 합니다. 스님께서는 답변 대신 그저 빙긋이 웃으십니다. “무슨 꽃을 좋아하시냐?”는 질문에는 “분홍꽃도 좋고 보라꽃도 좋고”라고 대답하십니다. 보라꽃 좋아하신다는 얘기는 이미 거듭 거듭 확인중입니다. nbsp 누군가 저 꽃들 사이에 대중 전체가 올라가서 사진을 찍자고 해서, 비탈진 경사를 따라 하나둘 올랐습니다. 그런데 나무마다 먼지들이 수북해서 머리와 옷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았습니다. 꽤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니, 헬리캠이 벌떼 몰고 오듯 부우우웅 소리를 내며 다가왔습니다. 다들 환호성을 지르며 힘차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방송 방영분에선 아마도 편집이 되겠지만 그래도 재미난 추억거리가 될 장면이었습니다. nbsp 다들 기분 좋지만, 노곤한 몸을 이끌고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스님께서는 대중들이 씻고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일을 또 하시다가, 저녁 예불 시간에 맞춰 오셨습니다. nbsp nbsp 오늘은 서울공동체의 정기포살일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아침 9시부터 포살과 나누기가 진행되고, 오후에 울력을 하겠지만, 오늘은 두북수련원에 왔으므로 울력부터 하고 포살을 저녁에 하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지도법사님께서 직접 계본을 낭독해주셨습니다. 늘 녹음된 목소리로만 듣다가 스님께서 직접 법상에 앉으셔서 계본 낭독을 해주시니, 훨씬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nbsp 포살은 “수행자로서 부처님의 삶을 닮아가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40계본을 두고 스스로를 뉘우치며 대중 앞에 발로 참회하는” 승가의 전통 의식입니다. nbsp 40계본이란, 1.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2.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 3.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4. 거짓말을 하지 말라. 5. 술, 담배, 마약 등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지 말라 등 부처님께서 주신 계율을 정토회 수행 원칙에 맞게 현대식으로 다시 구성한 것입니다. nbsp 대중은 계를 어긴 것에 대해 3배로서 발로 참회하게 됩니다. 40계본을 다 지켜야 마땅하지만 잘 못 지키는 계율이 많다보니, 그 중에서도 ‘이번 달엔 이것만은 반드시 지켜보자’ 하는 것을 공동실천과제로 삼습니다. nbsp 평소에는 포살을 담당하는 팀에서 공동실천과제로 계본 하나를 정하는데, 오늘은 지도법사님께서 특별히 그 계본에 대한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이번 달 집중실천과제는 ‘28번. 일에 집착하여 몸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입니다. 그런데 이 계본은 ‘27번 몸에 집착하여 몸을 사리지 않는다’라는 계본과 쌍을 이룹니다. 그래서 오늘 스님께서는 이 두 계본을 연관 지어 설명해주셨습니다. nbsp 27번 몸에 집착하여 몸을 사리지 않는다. 28번. 일에 집착하여 몸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27번과 28번이 서로 치우치는 양극단에 속합니다. 몸에 집착해서 몸을 사리는 것이 제1의 길이라면, 일에 집착해서 몸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제2의 길입니다. 중도는 몸에 집착해서 일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일에 집착해서 몸을 함부로 사용해도 안 됩니다. 이것이 중도의 길입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 몸을 사리죠. ‘아프면 어떡하나.’하면서 꾀를 부립니다. 마음속에 이런저런 핑계가 생기면서 자꾸 몸을 사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몸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고 한 것입니다. nbsp 몸에 집착한다는 것은 싫은 마음에 사로잡힌다는 뜻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좋고 싫고를 놓아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싫은 마음에 사로잡혀서 몸을 사리는 것이 제1의 길이라면, 좋아하는 마음으로 일에 집착해서 몸에 무리가 가도록 하는 것이 또 하나의 치우침입니다. 몸에 집착해도 치우침이고 일에 집착해도 치우침이 됩니다. 몸에 집착하면 일을 꺼리거나 두려워하게 되고, 일에 집착하면 몸을 자기도 모르게 무리하게 쓰게 됩니다. nbsp 그런데 우리가 일에 집착했는지 안했는지의 기준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요? 몸을 약간 사려서 몸을 조심한 게 잘 한 건지, 아니면 약간 몸의 거부반응이 오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싫은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넘어버림으로 해서 자기 업식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가야할지 우리는 늘 헷갈립니다. 중도라는 것은 현실 속에서 풀기가 어렵습니다. 늘 자기도 모르게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치게 되죠.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드러난 것이 핵심이 아니라, 그 뿌리가 까르마로부터 일어난 욕구, 욕망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nbsp 좋고 싫고는 나의 까르마로부터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더 써도 괜찮은데 하기 싫은 마음이 있어서 어떤 핑계를 대고, 싫은 마음에 사로잡혀서 일에서 물러난다면, 그것은 몸을 사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좋아하는 마음에 사로잡혀서 몸의 상태를 넘어서도록 일하다가 건강이 나빠진다면, 그건 몸을 함부로 사용한 것이 됩니다. nbsp 바깥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보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여전히 혼란스러울 겁니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내가 지금 약간 싫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구나, 그러다보니까 마음에서 자꾸 핑계를 대면서, 몸을 사리고 있구나’ 발견하게 됩니다. 표현은 몸이지만 뿌리는 마음이기 때문에 안으로 돌이켜서 살펴보면서 ‘아 싫어하고 있구나’ 알아차리게 되면, 그냥 해버리는 게 좋습니다. 이래야 까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nbsp 어떤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도 몸은 그만 먹으라고 하는데, 몸은 생각하지 않고 더 먹고 싶은 욕망에 따라 음식을 더 먹고 나중에 과식을 해서 힘들거나 몸에 무리가 가지 않습니까? 그럴 때 몸을 함부로 쓰는 것입니다. 꼭 일할 때만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일, 해야 한다는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서 몸에 무리가 가도록 일하면 그렇습니다. nbsp 오늘도 일하면 몸에 무리가 가죠. 그럴 땐 또 몸에 집착해서 “내가 과했나? 괜히 했네? 이렇게 후회하는 마음으로 가면 욕망에 끄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일의 필요에 의해 몸에 무리가 가더라도 자기가 기꺼이 한 것이면, 지금 내 몸이 피로하더라도, 몸의 상태가 아픈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예상한 문제이므로, 몸은 피곤하거나 아프지만 그것으로 괴로워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는 다시 말하면 몸에 약간 무리가 가도, 몸을 함부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몸을 함부로 사용했다는 것은 뭐냐면, 약간 후회하는 마음이 들 때입니다. 그것은 일에 집착해서, 그때 상황에 집착해서 함부로 사용한 것이 됩니다. nbsp 인생이라는 것은 컨디션이 좋을 때만 일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픈 상태에서도 일할 수 있고, 졸리는 상태에서도 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상태에 대해서 잘 알고, 까르마, 욕망에 끄달려 가지 않아야 합니다. nbsp 아픈 몸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아픈 게 나아야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게 나아야 일을 할 수 있다면 아마 저는 평생 아무 일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아픈 것은 아픈 거고, 일은 일하는 건데, 아픈 것을 무시하고 일을 하면 어때요? 몸을 망쳐서 앞으로 일을 못합니다. 다 나아야 일을 하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한 안 아플 수가 없기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픈 건 아픈 건데 그 아픈 것이 논다고 꼭 낫는 건 아니거든요. 일과 적절하게 배합이 되어야 합니다. 늘 심리적으로 욕망에 끄달리다보면 스트레스로 몸이 아프거든요. 그래서 그 마음을 잘 살피면 아픈 몸으로도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nbsp 아프니까 쉬어도 되고 아프지만 일할 수도 있는 그것을 늘 자기가 주인이 돼서 아픈 것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서 조율해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27, 28번 계율, 중도에 대한 것입니다. 치우치지 말자 이런 얘기죠. 여러분들이 같이 경험도 나눠보면서, ‘아 이런데서 내가 약간 집착했구나, 그래서 문제다’가 아니라, 치우치는 자기를 보면서 적절하게 다시 해보고, 다시 해본다면, 여러분들은 건강도 회복할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즉 건강을 회복한다는 것이 안 아프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nbsp 다리가 없는 사람은 다리가 없이 일하고, 팔이 없는 사람은 팔 없이 일하는 거지, 팔이 있어야 일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픈 거는 아픈거고 없는 거는 없는 거고, 그 안에서 일을 하는데, 팔이 하나 없는 사람이 팔이 두 개 있는 것처럼 일을 하려고 하면 열등의식이 생깁니다. 그 수준에 맞게끔 적절하게 일을 하면 돼요.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팔이 두 개 있는 사람의 잣대로 보면 안 되고, ‘저 사람이 팔이 하나 없는데도, 적절하게 저 일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고맙게 받아들이는 게 필요합니다. 네 그렇게 한 번 해보면서 중도를 배워 나가 봅니다.” nbsp 몸을 사리는 것과 몸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잘 몰랐는데, 오늘 상세히 풀어주셔서 새로운 앎이 생겼습니다. 드러난 현상을 보지 말고,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말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드러난 현상으로 보면 둘이 헷갈리는데,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일을 하기 싫은 마음인가, 일에 집착하는 마음인가, 싫고 좋음에 갇혀있는 것인가 아닌가. 앞으로는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중들은 포살이 끝난 후 조별 나누기에서 지도법사님의 법문을 통해 자기의 사례와 경험들을 나누며, “몸이나 일에 집착해서 문제라고 할 것이 아니라, 집착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놓아버리는 연습을 가볍게 해보자”고 다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공동실천과제에 대해 법문을 해주시곤 바로 옆방으로 이동하셔서 문경공동체에서 온 백일출가생들에게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오늘은 24기 백일출가생 26명에게는 100일 중 48일째 되는 날인데, 두북수련원에서 중간 수련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백일출가생들에게 들어올 때의 마음과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의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nbsp nbsp “시작할 때는 자기 나름대로 백일출가에 대해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고 하루하루가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중간을 넘으면 익숙해져 설렘과 긴장이 사라지고 의미를 가지고 도전한 것이 약화되고 오히려 며칠 남았는지 세어보게 됩니다. 마음을 내서 스스로 도전한 건데 적극성은 어느덧 사라지고 소극적으로 변하면서, 그저 의무감으로 백일을 채우자는 생각으로 빠집니다. 그러면 점점 참고 버티는 게 됩니다. nbsp 처음에는 힘들게 시작해서 점점 좋아지는데 중간부터는 갈수록 나빠지게 되는 거죠. 처음 정토회에 온 사람들은 부처님 법을 만나서 ‘내 욕심이구나’ 하고 이게 어느 정도 돌이켜지니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수행문을 읽으면 가슴에 와 닿고, 너무 좋아서 이대로 공부하면 나도 부처님처럼 되겠다 하고 봉사를 합니다. 그게 초발심이라 하는데 초발심이 무섭습니다. 오래 수행한 사람보다 법문도 잘 들리고 일도 열심히 하고요. nbsp nbsp 그런데 자기 카르마가 원래의 그 생각을 내려놓으면서 좋아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현상이 생깁니다. 바로 부처님 법이라는 기준을 움켜지고 주변을 판단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야 할 수행의 잣대를 자기 남편과 아이들, 정토회 도반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이대면서 분별을 냅니다. 이럴 때는 스님의 법문도, 수행문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부처님의 진리라는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죠.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이 아상과 아집이라 하고, ‘이게 진리다’ 움켜쥐는 것이 법상, 집착 하는 것을 법집이라고 합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부처님의 진리는 밖이 아니라 내 안으로 돌이켜서 자기를 살피고 변화시키는 기준으로만 삼아야 합니다. nbsp nbsp 100일이 갈수록 의미 있는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회향하기 전날과 입재한 첫날이 동일한 의미 있는 하루가 될 때 백일출가입니다. 처음 입재해서 첫날과 이튿날 하루하루 배우는 것이 많았고, 일주일 지났는데 한 달 지낸 것 같잖아요. 그 하루와 끝나기 전날 하루가 같은 하룬데, 끝나기 전날 하루는 아무 의미 없이 보내게 됩니다. 여기 들어오기 전을 생각해보세요. 정말 백일출가를 해보려고 반대를 무릅쓰고 왔잖아요. 그러다 막상 여기 들어오니까 어때요? 날짜 때우기식으로 버티기만 한다면, 자기 인생을 낭비하는 게 되잖아요. nbsp 계율은 수행자를 보호해주기 위해 울타리를 쳐준 것이니,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려고 해봅니다. 이렇게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배워가며,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해보는 경험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내리막길의 50일이 아니고 한 계단 더 딛고 가는 50일이 되길 바랍니다.” nbsp nbsp 한 시간 여동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제 막 절반의 문턱에 다다른 백일출가생들에게는 다시 초발심으로 돌아가도록 해주신 스님의 법문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하루종일 몸 쓰는 일로 지치실법도 한데, 저녁 공동체 포살과 백일출가생 법문까지 해주신 스님께서는 다시 또 원고교정을 하셨습니다. 내일 새벽 3시에 죽림정사로 출발해야 하는데 스님께서는 오늘도 일찍 잠자리에 드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nbsp
2015.4.10. 기획위 회의 및 나무심기
nbsp nbsp 스님께서는 오늘 아침 대중공사시간을 통해 몇가지 당부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대중들이 저녁예불에 빠졌다고 참회하는 내용을 들으시고는 업무상 그리고 사무실 거리상 빠지게 되는데, “계율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계율을 수정하던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무변심 법사님께 방안을 마련할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의 경우, 택시운전사가 기도 시간이 되면 손님이 차를 타고 있음에도 양해를 구하고 기도 시간을 지킨다.”고 말씀하시면서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업무상 현실적으로 지키기가 어려운 계율은 개선해나가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nbsp nbsp 대중부는 ‘일반대중에게 공지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으로 강조하였는데 공동체 성원들이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 공동체 대중과 일반대중들과의 사이에 미묘한 갈등과 어려움이 있다고 하시면서 다시 한 번, 수행의 방향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정리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 “요즘은 어떤 업무지시가 있을 때 아래로 갈수록 칙에 대하여 아주 경직되게 적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행은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원칙을 잘 고수하되 대중에게는 유연해야 합니다. 이것은 ’원칙은 나에게만 엄격하게 적용하고 남에게 잣대를 대지 않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유연해지지요. 자율적이면서도 질서가 잡히는 것은 그 원칙에 철저했을 때 가능합니다. 스스로는 원칙을 잘 지키되 대중에게는 유연해야 됩니다. 본인은 안 지키면서 남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갈등이 심해집니다.” nbsp nbsp 그러시면서 공동체 성원들이 대중부와 함께 하면서 꼭 지켜야 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먼저, 법회시간에는 핸드폰을 다 끄도록 하기 때문에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둘째, 이번에 통일학교의 경우 공동체 대중들이 법회후 나누기를 빠지면서 분위기가 안좋아졌다고 하는데, 대중부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는 나누기까지 다 참여하도록 한다. 세 번째, 명상할 때 일체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명상시간에 주로 공동체 성원들이 움직인다는 문제제기가 있다.”고 하시면서 대중들과 할 때 공동체 성원들이 업무 때문에 놓치기 쉬운 것들을 짚어주시면서 서로 협력해 나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nbsp nbsp 끝으로 스님께서는 내일 두북 수련원에서 가질 운력 일정과 모레 용성큰스님 오도일의 일정에 대해서 점검 하신 후 회의에 참가하시느라 서둘러 일어섰습니다. nbsp 곧바로 평화재단에서 기획위 모임에 참여하셨습니다. 이후에 몇가지 업무를 보신 후 점심공양을 하고 두북으로 이동하셨습니다. nbsp nbsp 5시 30분경 두북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부모님 산소로 가서 벚꽃을 심으셨고, 또 주변 정비도 함께 하셨습니다. nbsp 7시가 넘어 모든 운력을 마무리 한 후 오늘은 일찍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2015.4.9. 정토불교대학 담당자 수련
nbsp nbsp 두북수련원에서 새벽예불을 드린 후 6시 30분경 유수스님과 교육팀 2분, 해외에서 오신 2분과 함께 마곡사로 출발하였습니다.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꽃으로 추위를 잊게 하는 화창한 봄날, 전국에서 모인 정토불교대학 담당자들은 마곡사 입구에 모여 즐겁게 나들이를 준비하고 있었니다. nbsp 일주문을 지나 다함께 모일수 있는 장소에서 간단히 입재식을 한 후 해탈문을 지나 마곡사의 솔바람 길, 백범 김구선생의 명상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평온한 마음을 주는 편한 길도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오르막 길, 돌들이 알알이 박힌 길을 조금은 힘겹게 걷다가 문득 고개 돌려 보니 마치 진연분홍 구름이 연상되는 진달래꽃 길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nbsp nbsp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며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이었습니다. 진달래꽃이 봄이 왔음을 알리며 우리들을 반기듯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빠져있는 것 같았습니다. nbsp nbsp 따뜻한 햇볕아래 야외에서 스님의 지도에 따라 20분간 명상을 하며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어 봅니다. 솔잎 부비는 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모두가 한 몸이 되는 순간입니다. 명상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스님과 함께 잠시 대화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nbsp 어느 지역 법당의 담당자분이 스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소속된 법당이 이제 갓 생긴 신생 법당이어서 시시콜콜 빚어지는 내부갈등에 대한 고민과 일부 신도님들이 사소하지만 법당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에 분별심이 나고, 또 그런 사람을 보고 신규 불자들이 보고 배울까봐 걱정되고, 얘기하면 가르친다고 뭐라하는 것 같아 갈등이 생긴다고 합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질문을 듣고 웃으시며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질문자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자기 이익과 물질적 편의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적게 자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정토회가 창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질문자는 이런 사람이 와서 맑은 물을 흐린다고 생각하고 흐린 물 때문에 맑은 물을 버릴까 염려된다는 질문자의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정토행자로서는 아닙니다. 정토행자는 흐려진 세상을 맑게 만들겠다고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진흙탕을 두려워 할 게 아니라 깨끗하게 만들자는 게 정토회의 취지입니다. 대다수 사람이 정토회에 오지를 않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정토회에 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로 불편해 하면 안됩니다. ‘나의 수행문제이다.’라는 관점을 정확하게 잡고 일해야 합니다. nbsp nbsp 불편한 마음을 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아까 산에 오르막을 오를때 힘들었지만 이후에 이렇게 편안하게 있게되는 것처럼 이런 사람을 수용하며 힘든 경험을 해보고 극복하면 앞으로 어느 누구를 만나도 편안함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nbspnbsp nbsp 스님과의 짧은 대화시간이었지만 질문자의 답답한 마음을 뚫어주는 답변이었습니다. 이후 마곡사 보물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에 대해 스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빠르게 산을 내려왔습니다. nbsp 경내에 참배의 예를 취하고 공양 후 수련관에서 본격적인 불교대학 담당자들을 위한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산에서의 질문자처럼 솔직히 이야기해야 한다 하시며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불교대학 담당자들의 고민이 녹아있는 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습니다. 그 중에 몇가지를 소개하면, nbsp nbsp 첫 번째 질문은 “큰 아이가 사춘기때 힘든 고비가 와서 정토회에 온 덕분에 잘 넘겨 그 은혜를 갚으러 불교대학 담당자가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맡은 지역 법당 입학생이 적어 참가자들이 야간으로 이동하고 안 나올까봐 걱정이 되어 수업전날 떨리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까?” nbsp 스님께서는 “정토회 창립목표는 2600년전 근본불교 사상을 이 땅에 다시 구현하는게 설립취지입니다. 인구의 1 정도만 올바른 관점을 갖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의 접근이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읍,면,동에 수행처 한 개 쯤 두려고 합니다. 그러면 가르침이 생활 속에서 실현되고 그 길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입학생이 많으면 좋지만,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면 됩니다. 일은 사람이 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면 됩니다. 불교대학 학생이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가면 좋지만 중도에 그만둬도 좋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좋지만 수행자는 날씨에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자는 농사철 최선을 다하되 수확에 연연해하지 않고, 어떤 일의 결과에도 연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답해주셨습니다. nbsp 두 번째는 “서대문 법당에서는 2년간 불교대학 진행해보니 입학생들이 첫 수업때 처음nbsp해 보는 예불의식과 불교용어 등으로 당황해합니다. 입학하기 전 이런 것들을 알려주었으면 합니다”라고 건의하였습니다. 이 건의사항에 대해서 스님께서는 칭찬 아끼지 않으시며 수용하시겠다고 답하셨습니다. nbsp 세 번째 질문은 “담당을 맡으면서 나는 편한데 남편은 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편은 이번에 불교대학 졸업하고 정토회 그만두면 명품백을 사주겠다고 합니다. 불편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1년만 하고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이 질문에 답변을 하시기 전 어떤 봉사자의 남편분께서 쓰신 편지를 읽어 주셨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정토회 활동으로 아이와 남편의 불만을 토로한 내용이었습니다. 스님께서 남편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된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정토회에서 봉사하는 일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남편에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짜증내면서 우울하게 남편과 하루 종일 보내는 것보다는 밥 한끼 덜 해줘도 성질 고쳐 남편 마음 이해하며 함께 보내는 게 낫지 않습니까? 내가 바른 길이라 생각하면 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하고 숙이며 성질부리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남편이 불평하더라도 위축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고비를 넘어가면 그게 어떤 길이 되든 괴로워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게 됩니다. 누군가의 노예가 되는게 아니라 내 길을 분명하게 걸어가는 것이 행복의 길입니다.”라고 답을 주셨습니다. nbsp nbsp 네 번째 질문은 “엄마, 아빠가 이혼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왔으며, 엄마와의 성격차이로 누군가에게 맞추는 것이 힘이 듭니다. 그런데 불교대학 담당을 맡으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이 불편하고 일반사람을 만나면 힘들고, 저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으려 하는게 힘듭니다.”라고 질문하니 스님께서는 nbsp “수행은 나의 욕구를 알아차릴 뿐 억누르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업식으로 일어난 상태를 올바로 알아차리는 연습은 금방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늘 일어납니다. 마음을 자기 쪽으로 돌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연습해 나가다 보면 옛날보다 좋아집니다. 그 문제를 안 보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과제로 삼고 연습하다 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뛰어넘다보면 부처의 길로 가게 됩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질문을 계속 받으시면서 담당자들의 고민을 들어주시려 애쓰셨습니다. 담당자가 JTS, 통일활동 등에 대해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와서 고민하는 것, 윗사람과 부딪치는 고민 등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많은 분들이 고민하는 정토회 활동하면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한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해주셨습니다. nbsp “아이 나이에 맞는 정토회 활동범위는 3세 전까지는 무조건 아이곁에 있어야 합니다. 4세에서 7세에는 엄마가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엄마가 자기 중심을 잡으면서 아이에게 늘 웃으며 이야기해야 합니다. 엄마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요. 아이에게도 조금씩 역할을 주어 설거지도 나눠할 수 있으면서 같이 보내야 합니다. 초등학교때 50 정도 함께 하고, 중고생이 되면 30정도 함께 해서 이렇게 조금씩 독립할 수 있는 범위를 만들어 주세요” nbsp nbsp 긴 시간 불교대학 담당자들의 고민을 열성적으로 들어주시고 함께 나눠주시는 스님의 열정에 감사한 마음이 컸습니다. 스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각 지부별로 나와 자신의 지부를 대표하는 응원메세지를 발표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물단지 한 가득 안고 가는 기분으로 봄 나들이를 마쳤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서울로 출발하셔서 9시에 외부인사와 만남을 가진 후 정토회관으로 오셔서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nbsp 내일은 조찬을 겸한 기획위 회의가 있습니다.
2015.4.8. 정토회 활동가 수련 이틀째
nbsp nbsp 오늘은 활동가 수련 이틀째입니다.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여 5시부터 법륜스님과 함께 유수스님의 집전에 맞추어 천일결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참가 대중 모두가 108배를 하며 기도를 하기에는 두북수련원 강당이 좁아서 지부별로 나누어 잠을 잤던 각 방에서 도반의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기도를 마쳤습니다. nbsp nbsp 천일결사 기도가 끝난 후 일정은 스님과 함께 산책을 하는 순서였습니다. 그런데 부슬비가 내려서 산책을 하지 못하고 강당에 다함께 모여 어제 밤늦게까지 진행했던 활동가 수련을 이어갔습니다. 정토회 봉사 활동을 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고민을 대중 앞에 내어놓고 의문이 드는 것은 스님께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대중에게 “잘 주무셨어요. 불편하지 않으셨어요?”하시며 인사를 하신 후 “어제 문제 제기 했던 것에 대해서 제가 의견을 말씀 드렸는데 그래도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 하는 추가 의견이 있으면 말씀하세요.”하시며 질의응답을 시작하셨습니다. nbsp nbsp 추가 의견이 없자 스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이런 얘기들이 ‘현안의 실무’인데 수행 차원에서는 다 중도적 관점입니다.”하시며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nbsp “불교에서는 이것을 ‘중도’라 하고, 유교에서는 ‘중용’이라 하고, 플라톤은 ‘The golden mean’이라 하며 조금씩 다르지만 이것이 모두 중도의 개념입니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이쪽에 치우치지지도 않고 저쪽에 치우치지지도 않고, 또 ‘시중’이라 해서 그 때 그 때 적절함이라 합니다. nbsp nbsp 딱 정해져 있지 않고 그 때 그 때의 적절함이라 하는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하는 이런 개념은 아닙니다. 원칙은 지키데 그것이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데 혼란스럽지 않은 이것을 중도라 합니다.nbsp 그러니깐 우리가 해탈로 나아가야 하는 그 길에서 원칙은 지키되 경직되지 않는 것입니다. nbsp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면 출가수행자는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먹는 것에 있어서 걸식을 하고 음식에 탐착하지 않으며 하루 한 끼를 먹고, 입는 것은 분소의를 주워 입고, 자는 것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잔다.’라 되어 있는데 부처님 당시 제자들은 법에 따라서 적절하게 수행 정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제자 데바닷타가 고행주의자에 비해 부처님 제자들이 더 유연하다 보니깐 문란한 것이 아니냐 해서 원칙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하며 문제 제기하였습니다. nbsp nbsp 지금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냇가에 가서 목욕을 하고, 풀 한 움큼을 땅에 깔고 앉고, 굶어서 쓰러져 의식을 잃을 정도가 되어서 미움을 끓여서 먹는 이런 정도가 경직된 고행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출가수행자 답지 못하지 않느냐 하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nbsp 데바닷타는 다섯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어야지 가끔 두 끼를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걸식을 해서 얻어 먹어야만 하는데, 식사 초대에 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다. 채식만 해야 하는데, 물고기가 든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소의만 주워 입어야 하는데, 새 옷을 입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무 밑, 동굴 속이 아니라 처마 밑, 빈 집 등 인공적인 곳에서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수행자의 생활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엄격하게 생활원칙을 확인해주십시오.’하며 부처님께 건의를 하였습니다. nbsp 이런 문제제기에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로서 하루 한 끼만 먹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하루 한 끼만 먹어야 된다. 이렇게 경직되게 정하면 안 된다. 왜냐면 환자는 치료를 위해, 어린 사미들은 성장하는 시기이므로 하루 두 끼 먹을 수도 있다. nbsp nbsp 수행자가 걸식을 하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믿음 있는 신자들의 공양 초대에 응할 수도 있다. 채식을 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걸식을 하는데 고기가 들어오면 먹을 수도 있고 어린아이나 환자들은 필요에 의해 약으로 먹을 수도 있다. nbsp 나무 밑이나 동굴 속에서 자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일 경우에 동굴이 없으면 사람이 안 사는 집 또는 처마 밑에서 잘 수가 있다. nbsp 분소의를 입는 것은 정말 훌륭한 일이다.그러나 분소의가 없을 때는 새 옷을 입을 수도 있다.’라며 원칙을 지키되 너무 경직되게 적용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분소의를 입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분소의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때 경직되게 생각을 하면 벗고 있던지 아니면 새 옷을 시체를 한 번 쌌다가 입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럴 때는 새 옷을 입어도 된다.’하셨습니다. nbsp nbsp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문란하게 되겠지만, 이것은 문란한 것이 아니라 경직된 것을 유연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원칙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기본 정신을 갖되 그것을 너무 경직되게 적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nbsp 이게 ‘적절함’입니다. 불교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유교의 핵심이고, 플라톤 철학의 핵심입니다. 정치 또한 적절해야 합니다. 갈등이라는 것도 치우치니깐 생기는 것입니다. nbsp 부처님 당시에는 제1의 길은 욕망을 따라가는 쾌락이고, 제2의 길은 욕망을 억압하는 고행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 두 길, 치우친 길밖에 없었는데 이것을 떠난 중도의 길을 발견하신 것이 부처님의 위대함입니다. nbsp 여러분들도 일을 하면서 늘 치우칩니다. 원칙을 지켜라 하면 경직되게, 유연하게 해라 하면 문란하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적용을 합니다. nbsp 이것은 마음 밑에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에 대한 대응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욕구를 따라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억제하는 것입니다. nbsp nbsp 자기 욕구가 있으니깐 이렇게 하고 싶으면 원칙을 내걸어 강요하고, 싫으면 ‘대중이 이렇게 원합니다.’ 하며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nbsp 수행자는 원칙에도 맞고 대중이 요구한 것도 수용해야 하는데, 자기 욕망을 가지고 경직되게 적용을 합니다. 전체 원칙을 어기면서 대중 핑계를 대고, 또는 대중의 요구를 안 받고 비민주적으로 하면서 원칙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마음 밑뿌리에 자기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nbsp 우리가 명상을 할 때 통증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통증을 통증으로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듯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연습을 계속해서 극복하려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nbsp nbsp 지금은 안 되지만 원칙도 지키고 유연도 해지는 그런 적절함을 구사할 수가 있도록 노력을 해 나가야 합니다. nbsp 수행과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어떤 형식이 아닙니다. 일을 하든 무엇을 하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그 마음을 살펴서 불편한 것은 자기에게 돌이켜 편안하게 하고 이 편안함 가운데서 대중에게 이익이 되고 좀 더 효과적인 것을 끊임없이 찾아가서 만들어 나가는 연구를 늘 해야 합니다. nbsp 봄에 꽃이 피고, 잎이 피는 것은 이 시기에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꽃과 잎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때 이미 이 새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꽃 피고 잎 필 때 무관심한 것을 ‘도’다. 이러면 안 됩니다. 꽃 필 때는 꽃을 좋아하데, 그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낙엽이 떨어질 때 슬프지 않습니다. 이런 적절함이 중도입니다. nbsp nbsp 우리가 지금 제기하는 모든 문제는 중도에서 어긋나서 생기는 것이고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중도를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연습하면서 터득해 나가는 이게 수행입니다.” 이렇게 중도에 관해서 설명을 마치시고 스님께서는 추가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nbsp 세 개의 의견이 나왔습니다. 법당으로 들어오는 보시물을 비용 처리 할 수 있는지?’, ‘다과 비용을 공금처리 할 수 있는지?’, ‘경전반 운영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관한 건의와 질문이 있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다시 묻고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간 주부에게 적용한 것이 저녁 직장인에게 꼭 맞는 것도 아니고, 국내에서 ‘맞다.’ 고 해외에서도 ‘맞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연구를 해야 합니다. 서울에서 제기되는 것이 지방에서는 안 맞을 수도 있고, 큰 법당에서 적용되는 것이 작은 법당에서는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nbsp nbsp 이런 경우에는 수행적 관점에서 정토회 취지에 관계되는 것은 해외고 국내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화나 정서와 관계되는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논의해서 조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nbsp 부처님 법에 관한 것은 시간이 흐르든 지역이 달라지든 일치해야 하고, 문화적인 요소는 시대가 달라지면 바뀌고 지역이 달라지면 바뀌어야 합니다.” 하시며 여러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시면서 질의응답 시간을 마쳤습니다. nbsp nbsp 질의응답이 끝난 후에는 두북 수련원에서 정성껏 준비한 아침공양을 먹고 두 번째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수련을 시작하기 전 “대구 보살 나와 노래공양 올리세요”하시니 대구법당 총무를 맡고 있는 이명숙 보살님께서 나와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한층 돋구었습니다. 이명숙 보살님은 ‘신곡을 발표하겠습니다.’ 하시며 ‘당돌한 여자’를 신나게 불렀고 이어서는 대전법당의 김민아 보살님이 ‘섬마을 선생님’을 열창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 “질문 세 개 받고 노래 한 번 하고 또 질문 받는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하시며 다소 지루해 질 수 있는 시간을 놀이와 함께 엮어서 분위기를 신나게 만들어 주시자 대중 모두는 웃으면서 수련을 시작하였습니다. nbsp ‘함께 일하는 봉사자가 매사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서 어떡해야 하는지?’ ‘저녁부의 공양문제에 관한 건의’ ‘가을 경전반 수업을 봄불대 운영방식과 같게 적용하는 것에 대한 질문’ 등이 있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매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상가가 망하지 않는 7가지 방법 중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함부로 정하지 말고, 이미 정해진 것은 함부로 허물지 마라’는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 때나 없앨 때는 충분히 검토하고 사안에 따라서는 대의원회를 거치는 절차상의 민주주의와 대중의견을 수렴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필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nbsp 이렇게 답변을 하신 후에는 행정처장님을 비롯하여 각 지부 사무국장님들께 지금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듣는 순서를 가졌습니다. nbsp nbsp 각 지부 사무국장님들이 어려움과 고민을 이야기 할 때 대중은 공감하였고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도반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nbsp 두 번째 질의응답을 끝낸 후에는 점심 공양을 하고 대청소를 한 후 스님과 함께 남산으로 출발하였습니다. nbsp nbsp 삼릉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스님과 함께 벚꽃이 만개한 도로변을 걸어 포석정까지 간 후 남산 오솔길을 따라 되돌아와 삼릉에서 회향식을 가졌습니다. nbsp 회향식에서 스님께서는 “정토회 창립의 목표가 하나는 불교중흥이고 또 하나는 민족중흥입니다. 불교중흥의 핵심은 이 ?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구현하는 것이고, 민족중흥의 핵심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으니깐 이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자는 것인데 이것은 분단된 이 나라를 통일해서 천 년의 한을 풀어 민족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nbsp nbsp 대중들은 1박 2일 동안의 수련으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천 년의 한을 풀 통일의 꿈’을 안고 각 지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nbsp 원래 오후에는 대중들과 남산을 오르는 일정이었으나 내리는 비로 인해 삼릉에서 벚꽃을 보고 헤어진 것이 아쉬우셔서 대중들이 모두 떠나고 난 후 스님께서는 다시 남산을 올랐습니다. 해외지부 사무국장인 김순영보살님, 호주에서 온 유영진 보살님, 무변심법사님과 함께 남산의 남쪽인 열암곡 석불좌상이 있는 곳까지 다녀왔습니다. 아직도 위에는 진달래가 한창이었습니다. nbsp nbsp 내일은 공주 마곡사에서 불교대 담당자, 경전반 담당자 수련이 있습니다.
2015.4.7. 제1기 통일학교 경주역사기행
nbsp nbsp 오늘 새벽 2시 30분경 경주에 도착하신 스님께서는 휴식을 취하시다가 오전 9시부터 경주 역사기행 일정에 합류하셨습니다. 오늘은 제1기 통일학교 역사기행이 있는 날입니다. 오늘 기행에는 제1기 통일학교 수강생들과 간부 활동가 등 총 220여 명이 함께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제일 먼저 법흥왕릉에서 입재 법문을 하셨습니다. 법흥왕은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여기 벚꽃길이 좋으니 걸어 다니면서 역사기행을 해야 하는데, 참가자들이 늙어서 버스 타고 다니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셔서 참가자들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nbsp nbsp “오늘 경주 역사기행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첫째, 우리 민족사의 활동무대 가운데 한반도의 동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인 신라가 어떻게 민족사의 주류로 등장할 수 있었는가? 둘째,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국력이 작은 신라가 어떻게 통일의 중심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셋째,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않은 신라가 통일을 함으로써 민족사 전체로 볼 때 어떤 손실이 있었는가? 우리가 앞으로 통일을 해나갈 때 신라처럼 비약적 발전을 하며 주변 환경의 주역이 될 수 있는지, 이럴 때 역사의식의 부재가 나중에 민족사에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알아보려합니다. nbsp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 비로소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 중 절반은 작은 부족국가였습니다. 이때 낙동강 유역에서 6개의 가야는 부족국가 연맹체였으며, 신라보다 국력이 컸습니다. 신라는 기원후 514년 법흥왕 때부터 비약적 발전을 이뤘고, 개혁개방 정책을 폈습니다. 그 당시 신라는 폐쇄적으로 외래문물을 금지하고 불교를 철저히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nbsp nbsp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내부의 개혁을 통해 신라의 국력을 강화시키고 쇠락해진 가야와의 통일을 논의했습니다. 지난 시간 가야의 침공을 받았지만 무력으로 되갚지 않고, 신라는 가야를 포용하려 했고, 가야 또한 자존심을 끝까지 내세우지 않고 통합에 합류를 했습니다. 신라의 포용 정책의 첫 번째는 가야의 국교인 불교를 수용하고 공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nbsp 두 번째,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유신 장군같이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가 삼국통일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들 중에는 가야인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신라는 이처럼 가야와 합의 통합으로, 영토의 확대, 문명의 발전, 인재의 육성으로 비약적인 상승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통합은 112가 아니라 115나 10이 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nbsp nbsp 동독과 서독의 통일 과정에서 보더라도 서독은 통일 이전에 공산당 활동 등을 인정해 주었고, 연방제가 이미 되어 있었기에 동독은 각 주별로 합류만 하면 되었습니다. 정치적 탄압도 없었고, 당시 동독 화폐 마르크는 서독 마르크의 절반의 가치였지만 동일한 금액으로 교환 해주었습니다. 이로써 동독인들은 두 배의 이익을 보게 되었습니다. 동독은 통일을 통해서 손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 이후 저항세력이 없었습니다. nbsp 신라도 율령반포라는 개혁정책과 불교공인이라는 개방정책을 통해 가야와 통합을 함으로써 해서 순식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라가 한반도의 변방에서 주류로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nbsp “법흥왕릉은 경주의 외진 곳에 있어 오기가 쉽지 않지만, 통일역사기행을 한층 더 의미 있게 시작하고자 이곳에서부터 출발지를 잡았다”는 스님의 말씀을 새기며 ‘통합’이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오는지 다시 한 번 가슴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nbsp 다음은 진흥왕릉으로 이동했습니다. 무열왕릉에 주차를 한 후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니 신라왕들의 무덤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초기 왕들의 무덤들이라서 그런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참가자들이 오는 대로 진흥왕릉이 잘 보이는 곳에 둘러앉도록 한 후에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nbsp “법흥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다음 왕위 계승자는 어머니계로 따지면 법흥왕의 외손자이고, 아버지계로 따지면 법흥왕의 조카입니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것이 당시 신라의 최고 순수혈통이었습니다. 형제간에는 결혼을 안 하기 때문에 형제를 제외하고 가까울수록 순수혈통인 성골이고, 멀수록 진골입니다. 성골이 되려면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왕의 자식이라야 합니다. 조선시대 유교방식대로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신라의 독특한 혈통을 통한 질서유지 방법입니다. 진흥왕의 치세 중 3분의1은 실제로는 어머니인 법흥왕의 딸의 치세입니다. 보통 부모의 유업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은 아들보다는 딸이 더 잘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nbsp nbsp 신라는 진흥왕 시절,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나라의 국력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삼국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황룡사도 이때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통일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다음왕인 진평왕은 이때 확대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바다 건너 수나라와 외교를 긴밀히 해서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막아내었습니다. 땅을 뺏기고 찾고 하는 전쟁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nbsp 진흥왕릉을 떠나 태종무열왕릉으로 걸어갔습니다. 진흥왕릉의 규모보다는 더 크고 정비된 왕릉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nbsp nbsp “진평왕이 죽은 뒤 왕위 계승권에 문제가 생기자 내부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김춘추는 무리하게 왕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고, 이모를 왕위에 옹립합니다. 그분이 선덕여왕입니다. 이 시절 김춘추가 한 일은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역할을 많이 하였습니다. 특히 선덕여왕 때는 백제 의자왕 초기였는데, 매우 강성할 때였습니다. 신라로서는 백제와 끊임없는 무력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의자왕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내치에 소홀해지면서 백제 내부의 혼란이 가중되던 차에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nbsp nbsp 김춘추는 54세쯤 왕위에 오르고, 재위 시절에 삼국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8년간 재위하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에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태종이라는 칭호는 나라를 굳건히 한 사람에게 부여 합니다.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 김인문은 당나라와의 외교에 긴밀하게 협조하여 사후에 태대각간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태종무열왕릉의 비석 받침대인 거북이는 용맹하게 머리를 쳐들고 섬세한 조각으로 몸통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듯이 조각됐는데,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있습니다.” nbsp nbsp 통일의 기초를 확실히 다진 태종무열왕릉에 삼배를 올리고, 친한 친구이자 처남이며 통일 전쟁의 최고의 조력자인 김유신 장군묘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김유신 장군묘를 가는 길은 경주에서도 소문난 벚꽃명소입니다. 벚꽃이 많이 떨어졌지만, 아직도 화사한 풍경을 선사하여 보는 참가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기나긴 벚꽃터널을 지나 김유신 장군묘에 도착했습니다. nbsp 김유신 장군묘는 마치 왕릉처럼 울타리까지 둘러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김유신 장군의 묘가 아니라 왕릉이 아니냐는 오해가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신라 말기에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이라는 추대를 받았던 점을 감안하면, 왕릉의 규모로 재정비했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nbsp nbsp “김유신 장군은 가야의 마지막 왕의 증손자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신으로 추앙받는 사람은 김유신이 유일합니다. 김유신은 담이 크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몰락 왕족의 후예로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김유신의 어머니는 아들의 출세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김유신은 젊은 나이에 화랑으로써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에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에 1개의 도독부를 설치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한미연합군이 북한을 제패해서 통일이 될 줄 알았는데, 미군이 한국군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북한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nbsp nbsp 당시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옛땅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에 공격을 감행합니다. 그 뒤 나당전쟁이 8년 동안 이어집니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였지만,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676년,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서 삼국통일을 이룩합니다.” nbsp 신라의 자주성을 지키는 데 김유신 장군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이라는 칭호에 이어 신으로 숭상받기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bsp nbsp 김유신 장군 묘를 내려오는 동안에도 여전히 날씨는 쌀쌀하고 추웠습니다. 어느덧 점심식사 시간이었기에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옹기종기 모여앉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각 지역별로 스님과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친 뒤 사천왕사지와 선덕왕릉, 능지탑으로 이동했습니다. 스님께서는 호국사찰에 얽힌 신라의 자주성과 신라 백성들의 염원을 재미난 전설로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선덕여왕릉에서는 “주변국의 조롱도 많이 받고, 내부의 반란도 많았지만 지혜로운 리더십으로 극복해나갔던 선덕여왕을 본받아, 우리 통일의병들도 주위의 비난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하셨습니다. nbsp nbsp 능지탑을 지나서 마지막 일정인 황룡사지와 분황사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경주의 곳곳은 만개한 벚꽃의 아름다움이 화사하게 펼쳐졌습니다. 분황사를 바라보며 통일역사기행 회향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신라가 갑자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가야와 합의통일을 하면서였습니다. 신라는 내부적으로 개혁을 하고, 가야의 것을 수용해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법흥왕의 유지를 진흥왕의 어머니인 딸이 잘 계승했고, 손자인 진흥왕이 잘 계승했습니다. 진흥왕의 치적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비견할만합니다. 당시 세계패권국가인 당과 손을 잡아 신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현상을 보면, 현재 남한이 미국과 손잡고 유리한 국면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부상하면서 불리해 질 수도 있습니다. 남한이 북한을 포용해서 통일을 하면 민족에 번영이 오고, 동아시아의 번영을 가져옵니다. nbsp nbsp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통일운동은 통일 의지를 가진 좋은 지도자를 만들어야 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정부를 선택해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의병의 역할입니다. 선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사람이 잘하고 있는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요행을 바라는 방식은 안 됩니다. 통일을 추진할 정부를 구성해서 미·중을 잘 아우르는 외교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변국에 다 이익이 되는 외교 정책이어야 합니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실현해 가야합니다. 불교는 자기를 행복하게 가꾸는 수행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토로 가꾸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곳에 통일국가를 만드는 것이 민족중흥이고, 전 세계인을 위한 보살행을 해 나가는 것이 불교중흥입니다. 우리 후손은 넓은 시야로 넓은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우리가 계획하고 기초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nbsp nbsp 경주역사기행을 통해서 우리가 통일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통일운동에 앞장서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nbsp 경주역사기행을 마치고 정토회 간부 활동가들 약 200여명은 다시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와서 저녁 7시 30분부터는 간부 활동가 수련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자연 속에 살면 꽃이 피는 시기와 어떻게 피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주역사기행을 했지만, 꽃놀이도 겸했습니다. 기분이 좋으셨습니까?”라고 인사를 건네시며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nbsp nbsp “인도 운전수들은 희한하게 푯말이 없는데도, 또 안개가 자욱한데도 길을 잘 압니다. 인간 네비게이션처럼 방향과 남은 거리를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도는 카스트 사회다보니 운전수도 계급이 있어 어릴 때부터 아버지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한 10년쯤 지켜보다가 운전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운전을 하려면 차 정비를 먼저 배우고 익힌 뒤에 운전대를 잡게 되니, 본능적으로 운전을 할 수 있는 겁니다. nbsp nbsp 그래서 어릴 때 어떻게 자라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빨래나 청소, 일하는 걸 보면 다 큰 대학생인데도 70살 넘은 노인보다 못합니다. 어릴 때 손빨래를 안 해 보니까 백일행자들도 잘 못해요. 사람들의 기본 기능은 잘 쓰면 발달하고, 안 쓰면 둔해집니다. 아이들을 보호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자립할 수 없게 만든 결과가 된 겁니다. nbsp 그래서 내가 어떻게 형성됐느냐에 따라 감정이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선악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과 마음은 어릴 때부터 형성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것이 업식이고, 까르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의 노예입니다.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인생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형성된 것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전생이 있어서 운명이 고정됐다고 봤어요. 그런데 불교는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한 것으로 봤습니다.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까르마도 변할 수 있는 것이고, 해탈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현재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습니다. nbsp nbsp 현재 내가 움직이는 뿌리가 까르마라면,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운 대로, 습관대로 삽니다. 이 사실을 알면 손실이 예측되는 것은 하지 않게 되죠. 또 하기 싫어도 이익이 있는 거면 능히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존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형성된 것에 의한 정신작용 또는 마음작용의 문제이므로, 수행문을 늘 정성들여 읽도록 합니다. nbsp 둘째, 수행자라면 관점이 정확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나에게 적용하면 보약이지만, 남에게 적용하면 비수가 됩니다. 잘 관찰해보면, 정토회원들이 일반인보다 훨씬 포용력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 다른 일반 신도들보다 분별심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nbsp 정토회는 다른 절에 비하면 천주교나 교회처럼 잘 조직되고 훈련이 되어있어 장점이 있지만 그 잣대로 남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분별심이 많을 수 있어요. 그래서 자원활동가들 사이에 다툼이 많습니다. 자기 틀이 강한 사람들은 보통 사회생활에서 만족이 안 되니까, 다른 곳보다 정토회가 맞을 것 같아 활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잣대를 내려놓고 다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늘 분별이 많습니다. nbsp 변화의 잣대는 나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내가 어제의 나보다 나아졌는가? 이것이 내 질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들이 까다로운 사람인지 알고 있어요? 정토회 활동가들을 보면, 똑똑하지만 분별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남이 보면 ‘사회활동하면서 봉사도 하고, 주체적이다’ 이렇게 보는 장점이 있지만, 여러분들의 분별심 때문에 일반인들이 정토회에 적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nbsp nbsp 특히 활동 초심자는 정토회 원칙에 대해 경직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정토회 전체가 경직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순입니다. 늘 법문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수행의 관점을 놓치지 말고, 수행을 기초로 환경 봉사나 통일 운동, 복지 운동을 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불편함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활동도 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자기 마음에 불편함이 있으면 지치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자기를 봐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정해진 원칙으로 하되, 남에게 강요하지는 말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불편해져서 하는 얘기는 내 분별심일 뿐입니다. 우리 활동가들은 일사분란하게 일하고, 원칙을 잘 지켜야 하지만, 법당은 유연하고 부드럽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올해의 과제로 삼고 해보면 좋겠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간부활동가들에게 수행이 무엇인지, 수행자로서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길고도 상세하게 다시 일러주셨습니다. 수행의 원칙은 철저히 나에게 적용하되, 일반인들은 포용하면서, 정토회를 찾는 모든 분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바른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하라는 스님의 당부 말씀을 깊이 새겼습니다. nbsp nbsp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활동가들의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올해부터 불대수업 중에 30분 정도 봉사를 해보는 방식을 시행 중인데, 저녁 반은 시간이 길어져서 어려움이 있다는 질문, 가을불대 등은 중간에 봉사 30분을 하는 것으로 바꿔서 불만이 있다는 질문, 정초 순회 법회 때 사회자 멘트를 급하게 수정하거나 또 밴드 방을 갑자기 폐쇄해서 불만을 제기받았다는 질문, 사시예불을 하는데 다른 행사가 옆에서 열리는 바람에 예불에 방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질문, 출가열반재일 기도 때 300배 정진을 다 못하시는 분들에게 어떻게 안내를 해줘야 하는지 궁금하다는 질문 등 실무 차원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쏟아내고, 말씀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nbsp nbsp 법당에서 중요한 소임을 맡아 그만큼 열심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느꼈던 답답함과 고충들이 여실히 느껴졌습니다. 질의응답시간은 예상보다 뜨거운 열기 속에 두북 수련원의 밤이 깊도록 끝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내일 수련 일정을 진행해야 하므로, 아쉬움을 접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
2015.4.6. 길벗 강연, 종교인 모임
nbsp nbsp 오늘 새벽 3시에 경주에서 출발하여 7시 10분 평화재단에 도착하신 스님께서는 7시 30분부터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 참석하셨습니다. nbsp 오늘은 특별히 통일부 관계자분이 참석하셔서 현재 북한의 상황과 남북관계 현황, 그리고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nbsp 참석하신 분들 모두 20여년 넘게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면서, 북한과 교류경험이 많으신 분들이고, 특히 종교인모임으로 모여 활동한 것도 이미 10년이 넘었기 때문에, 질문의 내용이나 대화는 현실의 난제를 풀어갈 해법들로 모아졌습니다. nbsp nbsp 종교인모임 참가자들은 인도주의 지원을 하면서 “생색을 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쉽게 취약계층이란 표현을 쓰지만 북한 측에서는 전부 다 취약계층이거나 아예 취약계층이 없다고 할 정도로 정치적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북한과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북한이 좋다는 게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출발해야 문제가 풀릴 수 있습니다”는 등 접근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누셨습니다. nbsp 현재 북한 측에서 개성공단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는 데, “다른 나라에 비하면 저임금이니, 임금을 인상은 해주되 협의의 절차를 제대로 밟아 가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nbspnbsp 인도주의 지원경험이나 교류협력의 경험이 오래되다보니 북한 정부나 현 남한 정부 양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런저런 정책 제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대북접근방식이 북한에 미끼를 던지거나 생색내려는 모습, 또 우리 식만 강조하고 고집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애정 어린 비판이 주를 이뤘습니다. 종교를 떠나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하고,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나눠지려는 진지한 제안이 넘쳐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nbsp 이후 스님께서는 연속해서 방문자들과 면담을 하셨는데, 필리핀에서 활동하다가 들어온 오성근 법우님의 인사를 받았고, 또 김은숙 처장님과 간단히 업무논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nbsp nbsp 점심 공양 후 3번의 만남을 더 가진 후 저녁 7시부터는 정토회 길벗모임에서 주관한 강연에 참석하셨습니다. 강연을 준비한 길벗은 종교와 상관없이 방송, 영화, 연극 등 예술인들이 모여서 마음공부와 사회봉사를 함께 하는 모임입니다. nbsp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대중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연기자들, 드라마 작가들, 제작자들과 감독들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일까요? 또 그들에게 스님은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요? nbsp 지난 10여 년 동안 길벗은 봄가을로 법륜스님을 모시고 즉문즉설을 열어왔습니다. 최근에는 강연이 커져서 500여 석의 강당을 꽉 채우고도 통로와 강단 위에서까지 들어야 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지만 정작 주최자인 길벗 종사자들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다 보니 자신들의 고민을 솔직하게 나누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이런 애로사항을 아시고 이번에는 작은 모임으로 준비해 보라 하셔서 오랜만에 방송, 문화, 예술인들만이 모여 작지만 깊은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첫 인사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고민을 터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터놓기도 쉽지 않은데 대중 앞에서 그런 고민을 꺼내놓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대중 앞에 자기 고민을 꺼낸다면 그것만으로도 반은 해결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하시면서 개인 상담보다 여러 사람 앞에 고민을 터놓았을 때 효과가 좋다고 하셨습니다. nbsp 그 이유에 대해서는 “첫째 그만큼 이미 자신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배심원 제도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대중들이 객관적인 판단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혼자서 생각할 때는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꺼내놓고 보면 세상에 특별할 일은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꺼내놓고 이야기 하다보면 고뇌하던 일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고, 더 좋은 것은 “고민이 아니네” 혹은 “별일 아니네”, “울 것도 없네”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그 문제를 직시해서 해결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정말 더 중요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구나” 이렇게 자각하는 것이야 말로 아주 좋은 해결책이라고 하셨습니다. nbsp 해결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시며, 남이 들으면 어떡하나 너무 고민하지 말고 친구에게 털어놓듯 주제에 구애 받지 않고 편안하게 생각하라며 강연장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풀어주셨습니다. nbsp 사회자가 먼저 길벗모임을 대표하여, 공통적으로 느끼고 고민하는 문제를 질문하였습니다. nbsp “저희 길벗에는 많은 작가와 연기자들이 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을 하지만 오랜 동안 무명의 시간을 보내면서 원망과 자책이 늘어만 갑니다. 포기할까 고민도 하지만 결국 다시 이 길로 돌아오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작품을 쓰고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까요?” nbsp nbsp 이 기조 질문에 스님께서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작품을 쓰고 연기할 수 있을까 이지만, 결국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요?” 로 들린다는 직설로 답변을 시작하셨습니다. nbsp “요즘은 교회나 절의 성공조차 교회가 크고 신도가 많다는 식의 물량으로 계산을 하려는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사회, 즉 돈이 주인인 사회에 살기 때문입니다. 직업이나 남편을 선택할 때도 돈을 기준으로 삼는데, 그렇다면 시청률이 높아 돈을 많이 버는 작품이 좋은 작품일까요? 지금 인기가 좋아도 10년, 100년 후면 쓰레기가 될 작품과 지금 인정을 받지 못해도 100년 뒤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 중 어느 것이 좋은 작품일까요? nbsp 좋은 작품이란 남의 평가에 연연하기보다는 자신이 쓰고 싶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며 행복해야 하는데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작품을 쓰다보면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다 보면 인기 있는 다른 사람 작품을 따라 하게 되는데 그게 과연 오래 갈 수 있을까요? 어찌어찌해서 일시적으로 인기를 끌다가 상황이 바뀌어 인기가 떨어지면 엄청난 좌절감을 느끼는데 그것은 대중에게 끌려 다니는 것이지 자신이 주인인 삶이 아닙니다. nbsp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도 그들의 문제고, 안 쳐다보는 것도 그들의 문제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을 쓰되, 인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편하게 쓰면 됩니다. 편하게 연기하고 노래를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 누구라도 집중해서 하게 되고, 속된 표현으로 미치게 되는데, 이렇게 집중이 되면 창조가 시작됩니다. 쓰고 싶어 쓰고, 연기하고 싶어 연기하고, 그리고 싶어 그리고, 노래하고 싶어 노래하면 그것이 곧 놀이가 되고 노동이 되지만 돈에 팔려서 글을 쓰고 연기를 하니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nbsp nbsp 그리고 인기에 연연하여 좀 높아지면 교만해졌다가 인기가 떨어지면 좌절하게 되는데, 대중이란 늘 불을 쫓는 나방처럼 이 사람 좋아했다, 저 사람 좋아했다 하는 법입니다. 거기에 너무 끌려 다니며 자기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됩니다. nbsp 특히 길벗은 매일 평가 받으며 살아야 하는 직업 종사자들인 만큼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 인기가 높아지든 낮아지든 ‘저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즐기면서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품 같은 인기에 끌려 살다보면, 남이 볼 때는 부러울지 모르지만 본인에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남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하시며 좋은 연기란 본인이 만족하는 연기이고, 좋은 작품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예수님도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한 채 십자가에 못 박혔고, 원효대사도 명예 회복되기까지 500년이 걸렸으며, 천주교 신자들이 100년 전엔 수난을 당했으나 지금은 성인으로 추대된 것을 예로 드시면서 성인으로 추대 받든 악평을 받든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평가할 뿐, 그것이 그 분들의 본질과 상관없는 것처럼 좋은 연기, 나쁜 연기라는 남의 평가에 중독되지 말고 연기를 하는 분은 마음껏 자신의 연기를 하고 작가는 자신의 글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nbsp “내일 죽어도, 모레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고, 늙어도, 인기가 떨어져도 아무 문제가 없도록 내가 좋아하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관점을 갖고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비슷하니 오히려 더 많은 호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인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 늘 대중의 인기에 연연해 할 수밖에 없고 방송사의 요구에 맞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길벗 모임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시는 한편 따끔한 일침이 들어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nbsp 첫 번째 공통 질문에 이어 젊은 신인 연기자가 두 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nbsp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정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학교 다닐 때 왕따를 당하다 보니까 연기를 하면서도 악역이나 다양한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하면서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제 마음 속에서는 어렸을 적 상처가 떠오를 때도 있고, 그때의 나로 돌아가서 힘들어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 속 번뇌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nbsp nbsp “그러니까 어렸을 때 왕따를 좀 당했어요?” “네.” “그러면 지금 자기가 왕따 당하는 연기를 하면 잘 할 수 있을까요?” “잘할 수 있겠죠.” “그래요, 왕따를 당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왕따를 당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왕따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연기를 하면 잘 할 수 있으니까 유리하겠지요. 왕따 경험이 없는 사람이 감독의 지시에 따라 연기를 하면 부자연스러운데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 그런 연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더 잘할 수 있겠죠. 어떤 경험이든 경험 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만들면 본인이 연기하는데 자산이 되지만, 그것을 상처로 가지고 있으면 지금 말한 대로 연기가 끝난 뒤 괴로워지는 겁니다. 경험이 모두 상처가 되는 건 아니에요. 상처라는 것은 심리적으로 그 경험의 응어리, 심리적 흉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 심리적 흉터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아 내가 어릴 때 왕따를 당했던 것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어서 이렇게 힘들구나’ 자각하는 거예요. 치유하려고 하면 상처가 오히려 덧나게 됩니다. 아직 상처가 있으면 ‘아 아직 상처가 남아있구나 육체에 흉터가 남듯이 마음에도 아직 남아있어 괴로움으로 일어나는구나.’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상처에 빠져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놈의 자식이 이랬지, 저랬지.’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요. nbsp 반대로 자기가 왕따 시키는 역을 하면 어떨까요? 왕따 시키는 역을 해보면 왕따를 시키는 사람은 왕따를 시킨 게 아니라 ‘그냥 그때 자신의 성질나는 대로 했을 뿐이구나 나는 괴로웠는데 본인은 괴롭힌 기억을 못하는 구나.’를 알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괴롭힌 게 아니기 때문에 기억도 못해요. 그런데 상처 받은 사람은 아무 때 어느 곳에서 어떻게 괴롭힘을 당했는지까지 다 기억하죠. 그래서 세상에는 상처 받은 사람은 많은 데, 상처를 준 사람은 별로 없어요. nbsp nbsp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상대를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누구도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내 속에 상처가 있다는 것이거든요. 과거의 상처를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경험이 돼서 자산이 되지만, 그것을 상처로 움켜쥐고 있으면 죽을 때까지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어렸을 때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그 부분에 있어서는 사고가 성장을 하지 않습니다. 성장이 멈추는 거죠, 내가 여덟 살 때 엄마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자신이 술을 먹거나 어떤 상황이 되면 여덟 살 때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풀어줘야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해서 어른이 됩니다. 그렇다고 그때 상처를 풀어야겠다고 조급함을 가지면 안 되고 상처를 알아차리면 조금씩 풀리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릴 때 왕따 당한 경험을 상처로 움켜쥐고 있지 말고 경험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를 기억해도 기억은 있지만 괴롭지는 않게 됩니다. 오히려 어려운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nbsp “상처를 경험으로 승화시켜서 연기의 자산으로 쓰라”는 스님의 말씀은 창작자들의 모임인 길벗에게 꼭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 nbsp nbsp 다음 질문자는 운이 좋아 작은 방송사의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지만 더 큰 방송사로 나가기 위해 계속 면접을 보고 경쟁을 하다 보니 자꾸 이기적이고 독해지는데, 간절한 마음은 유지하되 이기적인 마음은 비우고 싶다는 질문을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많은 대학 졸업자가 취직을 못하고 있는데, 작은 방송사 계약직이라도 취직을 한 것은 좋은 일이니 먼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지금 취직 못한 사람이 더 많고, 지금 가진 직장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니 고마운 줄 알아야 합니다. nbsp 더 나은 방송사에 가고 못 가고는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방송사에서 원해야 되는 일이니 나는 다만 내게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지금 업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일해야 합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웃으면서 있다 보면 더 나은 곳에 갈 확률도 높습니다.”라며 지금 현재에 감사하고, 그리고 항상 웃으며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nbsp 덧붙여 방송 연예인, 아나운서, 작가는 사회적으로 선호하는 직업이므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인기의 수명이 짧아 그 인기에 목을 매는 순간 불행해진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치열한 경쟁이 싫다면 월급과 직위도 없고 은퇴도 없는 스님과 농부가 최고라고 우스개 말씀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직종이다 보니 치열한 경쟁과 짧은 인기는 당연한 것이지만, 한 때 꽃으로 피워보는 것이라며 “길게 가고 싶으면 잎으로 살면 되고, 그래도 꽃으로 한 번 펴 봤다, 일장춘몽이라도 이걸로 한 번 해봤다며 여기에 만족할 줄 알고 가볍게 받아들이면 결과적으로 롱런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롱런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불안하고 초조해져 오히려 나쁜 결과가 올 수 있습니다”는 말씀을 들으니, 어떤 목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셨습니다. nbsp nbsp 늘 시청자들과 방송사에게 평가를 받아야 하니 불안과 긴장 속에 지내는 시간은 많고,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지면 질수록 쉽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던 길벗 종사자들은 비슷한 고민에 시원한 답변을 주시는 스님 말씀에 완전히 몰입한 듯, 강연장은 진지한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nbsp 그 외도 글을 쓰고 싶은 작가 지망생인데, 천성이 게을러서 그런지 인내심이 부족해서 그런지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열심히 집중해서 일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런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는지 묻는 분, 반려자 문제로 고민하는 여성 질문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이혼한 뒤 다시 연애를 해 봐도 첫 남편만한 남자가 없는 것 같아 전 남편과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질문들도 있었습니다. nbsp nbsp 벚꽃망울만큼이나 터뜨리고 싶은 궁금증이 눈망울마다 가득했지만, 어느새 예정된 시간이 훌쩍 지나자 스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강연을 총정리 해주셨습니다. nbsp “결론적으로 첫째, 방송인, 연예인, 연기자, 작가라는 직업이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을 알면서 여러분이 선택한 것이니 그걸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설악산 가겠다는 사람이 고무신 신고 오르면서 ‘산이 왜 이리 높냐’고 타박하면 안 되듯이, 고무신 신었으면 뒷동산을 가야하고, 설악산 가려면 그만큼 장비를 준비해서 힘이 들 각오를 해야 합니다. 꼭 설악산이 뒷동산 보다 낫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nbsp 그리고 두 번째 인기라는 것은 경쟁이 치열한 만큼 수명이 짧다는 것입니다. 이 직업을 선택할 때 그런 예측을 했다면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봄에 잎이 필 때 낙엽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봄 잎이 낙엽 흉내를 내면 애 늙은이가 되는 것이고, 봄 잎이 낙엽을 못 보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니까낙엽을 보되 봄 잎은 봄 잎으로 피어나고, 꽃은 꽃으로 3일 만에 떨어져도 만족해야 합니다, 그래도 한 번은 폈다가 떨어지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인기가 중요하되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기다움이 중요하고 작가는 쓸 뿐이지 평가에 연연해하지 마세요. 물론 그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평가와 인기에 연연하지 않을 때, 여러분 자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나날이 행복하십시오” nbsp nbsp 지난 주말,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 덕분에 파릇한 새싹과 예쁜 꽃망울이 터져 나왔듯이 스님의 시원한 즉문즉설에 길벗들의 창작 싹이 저마다 움을 틔우길 기대해 봅니다. 강연을 다 마친 후 다함께 기념 촬영을 한 후 스님께서는 내일 있을 제1기 통일학교 경주역사기행을 위해 또 밤길을 달렸습니다. 경주로 가는 길에 잠시 서초동에 들러서 오늘 귀국한 ‘정토회 해외지부 사무국장’인 김순영보살님의 인사를 받은 후 바로 경주로 향하셨습니다. nbsp nbsp nbsp
2015.4.5.두북 수련원에서 서울, 문경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nbsp nbsp 스님께서는 모처럼 여유로운 주말을 맞으셨습니다. 숨 쉴 틈도 없이 하루에도 몇 건씩 중요한 일정을 소화하시느라 늘 바쁜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서울 공동체 대중들과 탑곡수련원에서 농사운력을 하기로 했는데 어제 저녁부터 비가 와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 여유로운 일정이었습니다. nbsp 서울 대중들은 원래대로라면 아침 일찍부터 탑곡수련원에 올라가 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운력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밭이랑마다 비닐을 씌우는 일을 하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땅이 너무 질척거려 흙을 덮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탑곡수련원 운력을 못하게 됐으니 두북수련원에 있는 JTS창고를 어떻게 정리하면 될지 살펴보고 의논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몸이 너무 피곤한 사람은 울력에 나오지 말고 푹 쉬다가 같이 점심식사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몸이 아파서 공동체 울력에 빠지고 쉬게 되면 알게 모르게 마음의 부담을 느끼게 마련인데, 스님께서 먼저 배려해주시니 휴식을 취하는 대중들도 모처럼 마음 편히 쉬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대중들이 JTS 창고 운력을 하는 동안 화광법사님과 수련원 안팎을 돌아보면서 수련원 내에서 정비해야 할 것과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안내를 받으면서 수련원을 둘러보셨습니다. nbsp 그리고 JTS 창고에 잠시 들러 어떤 물건들이 얼마나 있는지 한번 둘러보시고 창고에 보관된 물품들을 어디에 어떻게 지원하고 정리할 것인지에 대해 잠시 의논하시기도 하셨습니다. nbsp nbsp 두북수련원을 둘러보신 후 탑곡수련원으로 이동하셨습니다. 탑곡수련원에서는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농사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들을 주고 받으셨습니다. nbsp 점심 식사 시간에는 마을잔치가 열린 것 같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최말순 보살님께서 대중들을 위해 부추전과 파전, 그리고 맛있는 후식들까지 맛깔난 식단을 마련해주시고, 어제 도반의 언니가 보시해주신 먹거리까지 더해져 식탁이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습니다. 한쪽에서는 고소한 기름을 둘러 부추전과 파전을 지지고, 한쪽에서는 쉼 없이 웃음꽃이 피어나는 정겨운 풍경이었습니다. SBS 촬영팀도 오늘은 카메라를 놓고 마음 편히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nbsp nbsp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소임에 따라 뒷정리를 했는데, 서울 대중들이 가고 나면 곧 문경 대중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본래 사용하기 전의 자리처럼 깔끔하게 치웠습니다. 그리고는 곧 스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식사를 잘 했는지 물어보시고는, 어제 역사기행 다녀온 소감을 나눠보자고 하십니다. nbsp nbsp 스님 옆에 앉아 있던 도반부터 한 사람, 한 사람 어제 청년대학생 청년들의 역사기행에 뒤따라 다녀온 소감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꽃놀이를 실컷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고, 300명 넘는 젊은 청년대학생들을 만나 덩달아 기분이 즐거웠다는 얘기, 예전에는 꽃이 예쁜 줄 모르겠더니 나이가 들면서 꽃이 정말 예뻐지더라, 스님을 닮아서인지 꽃이 좋아졌다는 얘기, 스님의 배려 덕분에 역사기행까지 할 수 있어 감사했다는 소감이 이어졌습니다. 스님께 감사한 마음을 표할 때마다 스님께서는 “아유 낯간지럽다”시며 웃으셨습니다. nbsp 공동체 성원으로 같이 살지만, 그동안 서로 맡은 소임이 달라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별로 없는데, 이번에 두북수련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차량 안에서 큰 소리로 통일노래를 메들리로 부르면서 피로가 확 풀렸고, 또 스님과 함께 역사기행을 다녀서 들뜬 기분이었다는 소감도 있었습니다. nbsp nbsp 또 통일의 기회가 이번 한 번뿐이라는 스님 말씀에 정말 가능할까 회의적인 마음도 있었는데,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서 신라와 가야가 통합한 사례를 다시 돌아보면서 ‘우리도 가능하겠구나’ 희망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라와 가야가 통합해서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루고 국가 발전을 이룬 얘기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대목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과 빗대어 말씀해주셔서 이해하기가 쉬웠고, 신라와 가야의 통합 얘기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생생한 과제로 다가왔습니다. nbsp 자기 업무와 연관시켜 스님의 통일강좌와 역사기행을 통해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의 이 좋은 컨텐츠들을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접근하기 쉽고 편리하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알리면 좋을지,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연구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nbsp 자연스럽게 우리는 도반들의 생각과 소감 속에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며 성장합니다. 여기에는 늘 스승님의 통찰력과 구체적이고도 실현가능한 조언이 더해져 언젠가 현실로 이뤄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간이 그냥 흘려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놀면서 일하는 일과 수행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소감을 귀 기울여 들으시고는, 봄에는 공동체 성원들과 꽃놀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경위를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나도 사실은 경주 기행을 한 것이, 예전에 대불련 학생들이나 청년들 데리고 현장 학습을 하러 다닐 때 한창 다니다가 중간에는 평리아나 청리아 등 특별한 일정 빼고는 안했어요. 예전에는 꽃 피는 순서도 다 알았는데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어요. 그러다 전국 300강하면서 전국을 다니잖아요.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어떤 꽃이 피는지, 산 아래에서 산 위로 언제 꽃이 피는지, 꽃 피는 시기가 달라지는 것을 다시 알게 된 거야. 그러니 우리 대중들도 봄에는 자연을 느끼는 게 좋겠다 싶어서 4월 한 달만이라도 주말에는 두북에 내려오자고 제안을 하게 된 겁니다. 이번 역사기행은 청년들의 수가 많고, 꽃놀이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일반적으로 역사 강의를 할 때보다 12이나 23 수준밖에 못했어요. 만약 촬영을 한다면 통일의병 역사기행 할 때나 이렇게 집중적으로 역사 얘기를 할 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사람 수도 많고, 시간에 쫓기니까 그렇게까지 자세히 얘기는 못했어요. 이번 4월 주말에는 여기 계속 있게 되는 것 같아요. 통일의병 역사기행도 있고, 청리아와 평리아 역사기행도 있고, 불대생 경주 남산 순례도 있고. 나도 이런 일들이 안내하는 것이기도 하고, 놀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해요. 다만 봄에는 농사를 좀 지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잘 안 나네요. 앞으로는 여러분들도 봄에 여기 내려오는 것을 정례화 하다시피 해서 꽃놀이도 하고 자연을 벗삼아 그렇게 지내봅시다. 내년에는 백운산 등반을 하면 좋겠어요. 저도 여기 살면서 치술령이라고, 초등학교 교가에도 ‘치술령 정기를 받아’ 이런 가사가 있는데, 한 번도 못 올라가봤어요. 단석산에도 못 올라가봤고. 거기 가려고 해도 한나절은 시간을 내야 해요. 이번에는 그럴 시간이 없지만, 다음에는 운동 삼아 기분 전환겸 한 번 가보는 것도 좋겠어요.” nbsp lt벚꽃 나무gt 벌써 내년 4월 일정을 짜는 스님 말씀에 공동체 성원들의 얼굴이 저절로 밝아집니다. 지난 2주 연속 두북수련원에서 일정을 보내고 있는데, 서울을 떠나 자연과 벗 삼는 것이 왜 필요한지 다들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불현 듯 당신의 마지막 과제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 “제가 법문이나 사회활동이나 이런 데서 은퇴하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게 농사와 수행을 결합하는 농업공동체를 구성해보는 일이에요. 자원봉사와 전문가가 결합해서, 또 도시문명과 농촌문명을 결합하고, 일과 수행이 결합되는, 그래서 놀이를 생산화사키는 이런 모델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이게 미래 문명 전환의 계기가 될 거라고 봐요. 꼭 앉아서 명상을 한다든지, 운동한다고 밥 먹고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한다던지,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낭비하는 거잖아요. 동물은 어때요? 노동이 운동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공짜로 먹으니까 운동을 따로 한단 말이죠. 그래서 이런 것을 결합하는 방식, 이게 미래 문명을 여는 길이 될 것으로 생각해요. 우리가 민족의 과제인 통일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민족이니 통일이니 이런 것을 넘어서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이런 것을 실험해보는 것이 필요해요.” nbsp 모든 일은 정토행자들이 스스로 일궈나가도록 하고, 우리 공동체 성원들은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생태문명을 실험해보자는 말씀을 이전에도 여러 차례 듣기는 했지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는 하루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일 문제가 어서 평화롭고 지혜롭게 해결돼서 우리 스님께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시면서 인류문명의 새 기틀을 닦는 일에 기여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nbsp 업무관련 논의까지 간단히 마친 뒤, 스님께서는 서둘러 일어나시며 두북수련원 앞마당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셨습니다. 커다란 벚꽃나무 두 그루가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는 앞에서, 스님께서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위치를 잡아보시면서, “어느 게 더 낫나. 벚꽃나무가 한 그루만 나오는 게 낫나, 두 그루가 다 나오는 게 낫나?” 물어보셨습니다. 대중들은 웃으면서 카메라 위치를 잘 잡는 도반에게 부탁하는 게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스님께서도 곧 카메라를 넘겨주시고는 대중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SBS촬영팀과의 기념 촬영까지 마친 뒤 모두 각 차량에 탑승해 백운산으로 향했습니다. nbsp 급경사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을 오르고 올라 평평한 산길에 이르러 차량들을 먼저 보내고 대중들은 내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백운산에는 유독 연분홍 진달래꽃이 많이 보였습니다. 간혹 꽃망울이 크고 진한 분홍 꽃도 보였는데, 그럴 때마다 스님께서는 발을 멈추시고는 대중들에게 여기 보라며 손짓을 해주셨습니다. 대중들은 스님께서 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잘 알기에 꽃이 보이면 “우와아” 평소보다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서로 “좀 더 영혼을 담아서 감탄해야지”라며 한바탕 웃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산나물 이름과 꽃 얘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다들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서울 공기가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됐노라고 말씀드리니, 스님께서는 “그렇지. 나도 서울에서 자면 5시간을 자도 머리가 안 개운해. 그런데 여기 오면 하루에 3시간만 자도 아주 가볍고 개운하게 일어나. 그러니 사람은 공기 맑은 데서 살아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거야”라며 시골예찬을 하셨습니다. nbsp nbsp 스님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저 앞에 차량 운전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서있습니다. 스님과 대중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던 가 봅니다. 시간이 늦어지기도 하고 비가 온 뒤라 춥기도 해서 더 걷지는 못하고, 다시 차량에 올라타 언양의 작천정으로 향했습니다. 작천정은 마침 벚꽃축제가 열려 수많은 인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벚꽃터널 밑으로 사람들이 물결처럼 올라갔다 내려오고 길목 옆에는 온갖 먹거리와 볼거리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일행들을 놓칠까 싶어 종종걸음으로 선두에 가시는 스님 뒤를 따라붙으면서도, 대중들은 연신 핸드폰 카메라를 들어 쏟아질 것 같은 벚꽃을 찍기에 바쁩니다. 몽실몽실한 벚꽃이 얼마나 탐스럽게 피었는지 사진을 찍으면서도 절로 입이 벌어집니다. nbsp 작천정은 “수석이 기이해서 마치 술잔을 주렁주렁 걸어놓은 듯 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조선 세종대왕 시절에 지방의 학자들이 세종대왕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작천정이라는 정자도 있고, 임진왜란 때는 많은 의병이 순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nbsp lt탑곡 수련원의 앵두나무gt 기나긴 벚꽃터널을 지나 시끌벅적한 거리를 빠져나오자, 작괘천이라는 시내가 흐르는 조용한 계곡이 나타납니다. 몇 년 전에 스님께서 친히 일러주셔서 이곳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한 기억이 났습니다. 스님께서는 위에 온천장이 생기면서 물이 그렇게 맑지는 않다고 하셨습니다. 어제 내린 비로 강물은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넘쳐흘렀습니다. nbsp 계곡을 짧게 둘러보신 스님께서는 저녁에 문경대중들과 일정이 잡혀있어 여기서 그만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과 헤어지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할 만한 장소가 없으니 각자 알아서 먹고 싶은 것 사먹고 가라며 용돈을 주기 시작하자 또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께 세뱃돈으로 천원만 받아도 다음 생에 스님 따라 인도에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익히 들어온 터라, 스님 용돈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스님께 용돈 받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어 대중들은 한 사람, 한 사람 합장하고 용돈을 받아들었습니다. 대중들은 간단히 저녁 요기를 한 뒤 서울로 향하기로 하고, 스님께서는 문경 대중들과 일정을 보내기 전에 모종을 심어야 한다며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nbsp nbsp 문경 공동체 대중들과의 일정은 저녁 7시 30분부터 시작됐습니다. 문경 공동체에는 수련을 진행하는 법사님들과 교육팀, 수련팀, 살림팀 그리고 행자원 등이 있습니다. 이번 모임에는 각 부서에서 소임을 맡고 있는 실무자와 상근자 40여 명이 함께 했습니다. 서울 공동체에는 10년, 20년이 넘는 오래된 실무자들이 모여 있다면, 문경 공동체에는 갓 백일을 넘긴 상근자들로 초심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스님께 인사 올리는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문경 대중들은 내일 천마총 앞에서 자전거를 빌려 첨성대와 계림을 지나 교동 최씨 저택을 구경하고, 교촌교와 월정교 앞으로 해서 경주박물관을 거쳐 황룡사지에서 사시예불을 드린 뒤 분황사에 갔다가 보문단지를 둘러보는 일정을 보낼 계획이라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일정을 가만히 들어보시더니 차로도 15분 걸리는 거리를 자전거로 20분을 잡았다며, 그렇게 주파할 수 있겠느냐 웃으며 물으셨습니다. 스님 머릿속에는 지명만 들어도 거리와 시간이 착착 계산되는 자동계산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면 꽃놀이를 더 잘 할 수 있을지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nbsp nbsp nbsp 일정 공유를 한 뒤에 곧이어 상근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수련팀에서 수련장 시설을 맡고 있는 한 상근자는 불쌍한 아이들을 돕고 싶어 소득이 적은데도 봉사활동을 해왔는데,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딸이 시력을 잃어가고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돕고 살았는데도 내 딸에게 힘든 일이 오니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병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자기 안의 모순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순에 어떻게 처신해야 될지 여쭤보았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진단을 통해 암을 발견하면 좋은 일입니다. 발견을 못했으면 암인 줄 모르고 살다가 죽었을 텐데, 암인 줄 알았으니 이제는 선택이 자신한테 주어진 게 아니겠어요? 알기 전에도 잘 살았으면, 알고 난 뒤에 방황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으니 이게 더 큰 모순입니다. 자기가 모순된 마음을 가진 줄 딱 알아차리고 각성한다면 내 아이를 돕는 데 남의 아이 돕는 것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있어서 내 아이만큼은 병에 안 들기를 원하는 것은 절에 들어와서 살아도 수행과 아무 관계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놓쳤을 때 놓쳤구나 바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놓칠 수 있지만 놓쳤을 때 바로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게 수행입니다.” nbsp 행자원에서 백일출가 스텝 소임을 맡고 있는 한 젊은 상근자는 스님께 무대공포증을 호소했는데, “무대공포증이 있는 걸 알면 됩니다. 무대공포증이 있는데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자기가 문제를 만드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있어서 말이 잘 안 나와요.’ 이렇게 사람들 앞에 솔직하게 인정하고 생활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극복이 되는데, 그걸 숨기고 없는 것처럼 살려고 하니 더 긴장되고 자꾸 안 되는 쪽으로 가는 겁니다. 이처럼 부족한 게 있기 때문에 여기 들어와서 사는 것이 아니겠어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준 이 과제를 문제 삼지 말고,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이런 생각 자체를 놓아버리고 수행정진하세요.”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nbsp 올해 1년 째 상근중인 대학 휴학생인 상근자도 “잘하려고 하면 완벽하게 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자포자기로 빠지고, 또 완벽하게 하다가 자포자기 했다가 반복합니다. 최근에는 우울증 진단을 받아 일을 편하게 하다가도 잘하려다 보면 숨이 턱 막힙니다. 정도를 어떻게 맞춰야 될지 어렵습니다.”라고 스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잘 해야지 하면서 노력은 안하니까 모순이 생긴다”고 집어주셨습니다. 또 ‘잘 한다’의 기준은 상대적인 데 있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상대 평가는 내가 속해있는 상황에 따라 나오기 때문에 내 실력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며, 나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일에 목매달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안하는 것보다는 열심히 하는 게 낫지만 그 결과가 좋을지 나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할 뿐”이라 말해주십니다. nbsp “수행이라는 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부딪히면서 ‘내가 성질이 이렇구나, 내가 저런 점에 집착했네.’ 발견하면서 자기 상태를 점검하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내 습관을 잘 알면 더 이상 그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법사님들 보고 나는 언제 법사님들처럼 될까하는 마음도 욕심입니다. 수행한지 20년, 30년이 되도 부족하지만, 그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런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지만 계속 노력할 뿐입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시면서 내 능력이 어떠했다가 아니라 ‘지난 오십 몇 년 동안 근면하고 성실하게 정진해왔노라.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nbsp nbsp 스님과의 시간을 마친 문경공동체 상근자들의 얼굴이 밝아보였습니다. 절에 들어와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불편한 마음들을 보게 되는데, “놓치지 않는 게 수행이 아니라 놓쳐도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것이 수행”이라는 말씀에 한결 가벼워진 모습입니다. “자전거를 배우며 수없이 타다가 넘어져도 내가 타고자 연습하고 있다면, 그건 넘어져도 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문경 대중들은 조금 더 자기 과제에 집중하고자 새롭게 발심하며 스님께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늦은 시각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질문에 정성껏 대답해주셨습니다. 내일은 아침부터 평화재단에서 종교인모임 조찬이 있어 새벽 3시에 서울로 출발할 예정입니다.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