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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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17 텃밭 가꾸기 및 농사 준비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선거로 인해 즉문즉설 강연이 취소되는 바람에 텃밭을 가꾸는 등 농사를 짓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nbspnbsp아침에 봉오리 져 있던 매화꽃이 오후에는 활짝 필 정도로 오늘은 햇살이 따뜻한 완연한 봄날이었습니다.nbspnbsp어제 밤 늦게 울산 두북에 도착해서 휴식을 취한 후 오늘 아침 공양을 마치자마자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상추, 고추 등 각종 채소를 심기위한 준비작업을 하였습니다.nbsp마당의 잔디밭 일부분을 밭으로 사용하기 위해 먼저 잔디를 뽑아내고 채소밭과의 경계를 나누기 위해 고랑을 판 후 개울에 가서 얕은 돌멩이를 주워 와서 잔디가 채소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경계석을 세웠습니다. 스님은 여러 가지 돌을 가지런하게 경계석 쌓는 일에 전념하였는데 정말 가지런하고 예쁘게 잘 쌓았습니다. 또 일부분은 남은 벽돌로 경계석을 쌓기도 했습니다.nbspnbsp그런 후 땅을 뒤집으며 돌 등을 골라내고 작물을 심기 좋게 땅을 고르고 두둑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nbspnbspnbsp장독대가 있던 자리에는 흙을 더 채우고 밭을 만들었는데, 작년에는 이곳에 배추를 심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상추를 심기 위해 흙과 모래를 더 붓고 발효퇴비를 넣어 골고루 섞고 고르게 갈아서 두둑을 만들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장독대 밑에 고소를 심었던 땅에도 경계석을 놓는 작업을 했습니다.nbspnbsp원래는 상추, 고추 등 작물을 심는 것까지 마치려 했으나 경계석 쌓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작물을 심는 것은 이번 주말에 하기로 하고 물을 주고 연장을 정리한 후 작업을 마무리하였습니다.nbsp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없이 계속 농사일만 한 하루였습니다.nbsp저녁 공양을 마치고 나서 원고 교정 업무를 본 후 밤 11시에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내일은 아침 7시에 경동교회에서 열리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조찬 기도회에 참석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후 저녁 7시에는 청주 CJB 미디어센터에서 ‘통일이야기’를 주제로 2016년 첫 번째 통일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03.18. 53,284 읽음 댓글 25개

2016.3.16 부처님 출가일 기념법회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에서 부처님이 출가하신 날을 맞이해 기념법문을 했습니다.nbspnbsp불교에서는 4대 명절이 있는데, 첫째가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인 음력 4월 8일이고, 둘째가 출가하신 날인 음력 2월 8일, 셋째가 성도하신 날인 음력 12월 8일, 넷째가 열반하신 날인 음력 2월 15일입니다. 오늘은 그 중 출가하신 음력 2월 8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nbspnbspnbsp새벽 기도 후 아침 7시부터 스님은 평화재단에서 조찬 모임을 하느라 바쁜 아침을 보냈습니다. 조찬 모임을 마치고 아침 10시가 되어 출가일 기념법회를 하기 위해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스님이 법상에 오르고 10시 정각에 출가일 기념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지하철 3호선이 갑자기 멈추는 사고가 생겨서 유난히 늦게 도착하는 분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스님은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왜 그래요?” 하며 환한 웃음과 함께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출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양한 비유를 들어가며 재미있게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오늘은 불기 2559년 부처님 출가 기념일입니다. 제가 ‘불기 2559년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눈치가 ‘2560년인데요’ 하는 것 같네요. 제가 왜 2559년이라고 했을까요? 아직 4월 초파일이 지나지 않았거든요. 4월 초파일이 지나야 2560년이 되는 거예요. 몰랐지요?”nbspnbsp“예.”nbspnbsp“2600여 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인도 북쪽 히말라야 산 기슭 카필라바스투라는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셔서 태자로 명명이 되고, 29년간 왕궁에서 살다가 오늘, 음력으로 2월 8일 밤에 아무도 몰래 동쪽 성문을 나와서 출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출가일’, 또는 ‘출가절’이라고 합니다.nbspnbsp출가란 뭘까요? 글자 그대로만 따지면 집을 나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가출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 숨은 뜻은 다릅니다. 여기 사는 게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집을 뛰쳐나가는 건 가출이에요. 그래서 가출은 더 좋은 집으로 가고 싶은 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남자하고 못 살겠다고 나가서 저 남자하고 살겠다는 격이지요. 그런데 출가는 집이 굴레임을 깨닫고 집을 불살라버리는 거예요. 가출과는 차이가 큽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결혼생활해 보니까 ‘아, 결혼생활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구나’, 직장에 다녀보니까 ‘아, 직장이 모든 고뇌의 원인이구나’, 돈 벌어보니까 ‘돈이 모든 번뇌의 원인구나’ 해서 그만둬버리는 게 출가입니다. 이 직장 나와서 며칠 있다가 또 저 직장 구해서 들어가고, 이혼했다가 또 다른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부모 속박이 싫어서 집 나왔다가 외로우니까 도로 집에 기어들어가고 이렇게 윤회하는 건 가출이에요.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건 가출이고, 출가는 오고감이 없어지는 겁니다.nbspnbsp그럼 왜 이렇게 집을 나가거나 들어오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걸까요? 집은 2가지 모순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집은 우리를 보호해 주는 보금자리입니다. 지붕이 있어서 비와 햇빛을 막아주고, 벽이 있어서 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고, 도둑도 막아줍니다. 그리고 집이라는 말 속에는 부모, 아내, 남편, 자식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보호해 주는 보금자리가 집입니다. 그런데 둘째로, 집은 나를 가두기도 합니다. 천장도 막혀있고 벽도 막혀있으니까 못 나가잖아요. 또 부모는 나를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나를 속박하는 굴레이기도 합니다. 남편이나 아내도 마찬가지로 나를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나를 속박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집은 감옥, 굴레예요.nbspnbsp고향도 집과 그 뜻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떠도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하지요. 나그네는 보호받을 데가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다 고향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곳에서의 삶은 또 감옥살이에요. 고향에 가면 양반, 상놈 따지고, 형님, 동생 따지고, 부모 자식 따지고, 예의 따지고, 윤리 따지고, 이렇게 구속받는 게 많잖아요. 이렇게 우리는 집이 감옥이나 굴레 같기 때문에 뛰쳐나가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막상 뛰쳐나가면 보금자리가 없어지니까 외로워서 또 고향을 찾고, 집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들어가면 얼마나 편안합니까? 대신에 또 조금 있으면 다시 감옥이나 굴레처럼 느껴져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또 뛰쳐나가는 겁니다.nbspnbsp이렇게 계속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하는데 집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뭐가 잘 안 되면 이사를 하잖아요. 한국에서 뭐가 잘 안 되면 외국으로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 안 되면 지방으로 가고, 지방에 있던 사람은 또 서울에서 한번 살아보기를 원하지요. 또 요즘은 도시 사는 사람들이 귀농한다고 난리고, 결혼한 사람들은 ‘못 살겠다. 이혼하겠다’ 하는데, 또 결혼 못한 사람은 결혼한 게 부러워서 ‘어떻게 나도 결혼 한번 해 볼까’ 그러고, 자식 없는 사람은 자식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자식 있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오고가는 게 윤회입니다. 그것처럼 집도 굴레로만 생각하고 집을 나가면 보금자리도 없어지니까 외로워져서 다시 찾아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또 굴레의 성격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렇게 집은 두 가지 모순된 성격을 같이 품고 있습니다.nbspnbsp그런데 우리의 관념에는 ‘집은 보금자리다’ 하는 생각이 더 강하게 박혀 있잖아요. 그래서 보금자리는 원하지만 굴레는 싫은 거예요. 같이는 살되 간섭은 안 했으면 좋겠고, 지원은 해 주되 간섭은 안 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건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와 같이 살면서 나를 지원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나를 간섭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스님은 누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겁이 납니다. 뭘 또 간섭하겠다고 덤빌지 모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달콤함 때문에 독도 같이 받아 마시려고 하지요.nbspnbspnbsp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 출가하려고 뜻을 밝히면 부모가 말리고, 또 밝히면 부모가 말리기를 한 열 번쯤 하느라고 한 10년의 세월을 보낸 것 같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 10년을 단순히 방황만 하면서 보냈겠어요? 아닙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답을 찾아보려고 수행을 하신 거예요. 진짜 자발적으로 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하셔서 스승을 만난 뒤 3개월 만에 스승의 경지까지 오르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 많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미 정진하신지가 오래 됐기 때문에 금방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왕궁이 안온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모든 고통의 핵심임을 꿰뚫어보신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길이 뭔지는 미처 몰랐지만 적어도 ‘이건 아니다’ 하는 건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미련 없이 떠났던 것입니다.nbspnbsp부처님은 부모님 허락을 받고 출가해 보려는 시도를 여러 번 해 보셨어요. 그러나 이 길은 허락받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처님께서는 어렵사리 출가를 하셨는데, 동문을 나가면서 ‘내가 깨닫기 전에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돌아오지 않겠다.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지언정, 극약을 먹고 죽을지언정, 깨닫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답을 찾으면 다시 돌아와서 당신의 가족들에게도 그 좋은 법을 알리겠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시종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시종에게 ‘왕궁으로 돌아가서 아버님께 전해라. 내가 불만이 있어서 왕궁을 나간 것도 아니고, 나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서 나간 것도 아니며 나 혼자 천상에 태어나려고 궁을 나온 것도 아니라고 전해라. 일체 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서 나는 궁을 나왔다. 내가 만약 이 답을 찾는다면 반드시 궁으로 돌아가서 부왕을 뵙고 좋은 법을 나눠가지겠다’ 라고 하셨습니다.nbspnbsp여러분들도 만약 집에 아들이나 딸이 갑자기 없어지거든 ‘이게 누구 꼬임에 빠졌나? 이게 불만이 있어서 그러나?’ 하고 생각할 거 아니겠어요? 우리 문경에도 가끔 그런 부모님들이 찾아오십니다. 부처님의 부모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그렇게 해명을 하고자 하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났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통해서 성도한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부처님께서 성도할 수 있었던 건 출가라는 시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새로운 길을 아직 못 찾았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길은 아니라는 확실한 답을 얻고 나갔던 것이니까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아직도 ‘이게 아니다’는 결론을 못 내렸어요. 그래서 늘 미련을 못 버리는 거예요.nbspnbsp그런데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꼭 집을 떠나야 되거나 결혼을 안 해야 되는 건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거지요. 즉 마음에서 집착이 끊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신은 그 당시 풍속대로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으셨지만, 또한 새롭게 재가수행자의 길도 열어 주셨습니다.nbspnbsp재가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몸은 세속에 있더라도 마음은 욕망의 가치관으로부터 떠나야 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재가수행자는 그냥 욕망대로 살아도 되는 게 아닙니다. 출가수행자는 돈을 자꾸 만지면 돈에 욕심을 내고 돈에 대한 집착을 못 버리니까 못 만지게 하는 것이고, 여러분들은 만져도 집착을 안 하니까 재가수행자로 살도록 놔둔 거예요. 그러니 자기가 수준이 안 된다 싶으면 다들 출가를 하세요.nbspnbspnbsp스스로 점검했을 때 여자를 만나거나 돈을 만지거나 하면 거기에 집착한다든지,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 그 지위를 자기 것이라고 착각한다든지, 자식이 다 컸는데도 집착을 한다면 ‘아, 나는 재가수행자 수준은 안 되는구나’하고 출가수행자의 길을 가세요. 그걸 제가 ‘안녕히 계십시오’ 하라고 표현한 겁니다. 가끔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던데,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건 ‘이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는 자꾸 때가 묻어서 이 진흙탕 속에 살 수준이 안 된다’, 즉 ‘출가수행자가 되라’ 하는 뜻입니다. 웃는 걸 보니 여러분들도 재가수행자의 길을 엄청 좋아하네요.nbspnbsp그래요. 저는 도저히 수준이 안 되어서 지금 이렇게 출가수행자의 길을 가는데, 여러분은 얼마나 복을 많이 지었으면 이렇게 재가수행자의 길을 가십니까? 다들 훌륭하십니다.nbspnbspnbsp만약에 수행자가 정치를 하면 권력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단지 권력이나 지위가 세상과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그 권력이나 지위를 마땅히 쓰는 겁니다. 또 돈을 가졌다면 그 돈을 사유화하는 게 아니라 그 돈을 세상에 필요한 곳에 마땅히 쓰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우리가 재가수행자라고 말합니다. 뭘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하는 나의 마음의 자세가 어떠냐가 중요합니다.nbspnbsp항상 우리는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나무 밑에서 잠자고, 길거리에서 얻어먹고도 당당하셨고, 행복하셨고, 심지어 늘 남을 위해서 베풀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겉모습만 보면 거지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어디 가서 ‘달라’는 소리를 안 하셨기 때문에 거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먹고 살만하면서도 늘 의식주를 걱정하잖습니까? 얼마나 많이 먹어야, 얼마나 잘 입어야, 얼마나 큰 집에 살아야 이 걱정이 끝이 날까요? 그건 끝이 안 나는 걱정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늘 이 정도 먹는 것, 이 정도 입는 것, 이 정도 자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기면서 생활하면 우리가 부처님보다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nbspnbsp그러니 수행자는 첫 번째, 당당해야 됩니다. 비굴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겸손해야 됩니다.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아닌 것으로 자기를 삼는 게 교만입니다. 돈으로 자기를 삼고, 인물로 자기를 삼고, 지위로 자기를 삼는 게 교만입니다. 그리고 항상 자유롭고 행복해야 합니다. 부처님만큼 그렇게 원만한 성격으로 완전히 자기의 업식을 고치지는 못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성질을 내더라도 제자리로 얼른 돌아와야 합니다.nbspnbsp그것을 계속 붙들고 합리화하면 안돼요. ‘내가 또 업식에 끌렸구나’ 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입이 한번 쑥 나왔다가도 금방 들어가야 되는데, 3일이고 4일이고 꽁 해서 있으면 곤란합니다. 그런 걸 두고 ‘사로잡혀서 수행자임을 망각했다’ 라고 합니다. 그렇게 빨리 돌아오다 보면 사로잡히는 횟수가 줄어들고, 업식이 일어나더라도 그 유지기간이 짧아집니다. 그래서 늘 행복하게 편안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한테 의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오히려 남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의지처가 되어주려는 주인의 자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의 출발이 출가입니다.nbspnbspnbsp오늘 출가절을 맞아서 앞으로 기도할 때는 ‘복 주세요’ 하지 말고, 주인의 자세로 돌아가셔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 아닌 것에 의지하고 살았던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치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듯이 집에서 나오세요. 그게 출가입니다. 이런 출가의 의미를 오늘 다시 한번 새겼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재가수행자의 길을 갈 수준이 안 되면 빨리 출가를 하라는 말씀에 모두들 웃음을 빵 터뜨렸습니다. 스님이 이야기해 준 출가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고 나니 마음이 참 가벼워졌습니다.nbspnbsp대중들은 출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으며 300배 정진을 함께 했습니다. 정토회는 오늘 출가일을 시작으로 다음주 수요일인 열반일까지 전국 법당에서 8일 동안 용맹정진 기간을 갖습니다. 매일 300배 정진을 하고 영상으로 스님의 법문을 듣습니다. 스님은 다음 열반일에 다시 서울 정토회관에서 기념법문을 직접 해줄 예정입니다.nbspnbsp출가일 기념법회를 마친 후 스님은 찾아온 손님과 몇 차례 미팅을 가진 후 오후 4시가 되어 울산 두북으로 출발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두북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내일은 선거로 인해 희망강연이 취소되어 하루종일 농사일을 할 예정입니다.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03.18. 52,025 읽음 댓글 28개

2016.3.15 BTN 방송 녹화 및 의정부 즉문즉설 강연

nbsp오늘 스님은 오후 2시에nbspBTN에서 대담 프로그램 녹화 촬영을 한 후 저녁 7시 30분에는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2016년 첫번째 희망세상만들기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nbspnbsp어제 농사일을 마치고 새벽 2시에 울산 두북을 출발한 스님은 6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치과에 들러 치료를 받은 후 곧바로 대담 프로그램 녹화가 예정된 BTN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BTN에서는 작년 11월 1일부터 매주 방송된 ‘법륜 스님이 안내하는 붓다의 길 깨달음의 길’ 20부 작, 마지막 녹화 촬영이 오후 2시부터 있었습니다. 인도성지순례를 통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내용이 매주 방송되었는데 오늘은 그 뒷이야기와 방송을 보며 궁금했던 내용들을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nbspnbsp▲ BTN 법륜스님이 안내하는 붓다의 길 깨달음의 길 녹화 현장nbsp오후 2시부터 시작된 대담의 사회는 지난 2009년에 스님이 안내하는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는 배우 김여진씨가 해주었습니다. 김여진씨는 그동안 방송 출연을 쉬면서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출산 이후 3년 동안 아기를 키우는데 전념했는데, 오랜만에 스님을 만나 뵙고 너무나 반가워 했습니다.nbspnbsp▲ 대담 사회를 맡은 배우 김여진씨nbsp스님은 방송을 어떻게 보셨는지, 순례지에서 하는 법문의 포인트나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무엇인지, 순례지에서 경전독송을 하는 이유, 사르나트에서 오계를 받고 가사를 수하도록 하는 이유, 밥통을 들고 다니는 까닭,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하는지, 빡빡한 일정인데 개인적으로 힘들지 않은지, 성지마다 갖고 계신 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스님이 가장 사랑하는 부처님의 성지는 어디인지, 전정각산 아래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웠고 22년이 지났지만 아직 불교를 가르치지 않았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 많은 질문에 대해 스님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대담을 마치면서 김여진씨가 “지난 5개월 간 인도성지순례를 함께했던 시청자들에게 순례를 마무리하는 한 말씀을 부탁한다”고 하자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구체적인 사회와 역사 속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셨고 깨달으신 분’이라고 보지 않고 ‘하늘에 계신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추상적인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분이 아니고 우리와 똑같이 이 세상을 사신 분이에요. 부처님께서는 먹는 건 매일 얻어 드셨어요. 또 인도에서는 죽은 시신을 화장할 때 덮는 천을 분소의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그걸 주워서 입으셨어요. 자는 건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주무셨고요. 우리가 아는 ‘절’이라는 건물은 모두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청빈한 생활을 하셨는데도 늘 행복하셨고, 마음이 편안하셨고, 자유로우셨고, 어떤 두려움도 없으셨습니다. 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nbspnbspnbsp그 당시 인도에는 300여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에 제일 큰 나라가 마가다국이었습니다. 그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당시 제일 크고 좋은 집과 제일 좋은 마차를 가졌고, 제일 좋은 옷을 입었고, 제일 좋은 음식을 먹었고, 제일 아름다운 여인들을, 그것도 여러 명을 부인으로 두었고, 제일 값나가는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갖 걸 다 가진 빔비사라왕은 늘 번뇌와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삶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아무 것도 갖지 않았던 부처님은 늘 행복하셨습니다.nbspnbsp그래서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찾아와 ‘인생이 괴롭다’며 하소연을 하니 부처님께서는 좋은 법문을 해 주셨고, 그 법문을 들은 왕은 기뻐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을 찾아가서 절 하나 지어달라든지 좋은 옷이나 마차를 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부처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청빈하게 사셨으면서도 가장 당당하고 풍요롭게 세상의 주인으로서 사셨습니다.nbspnbsp여러분들도 그런 부처님의 삶을 생각하면서 여러분들도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베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베풀지 못할 아무런 이유 또한 없습니다. 무엇으로든 베풀 수가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도 베풀 수 있고,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으로도 베풀 수 있고, 작은 돈으로도 가난한 아이들에게 음식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하게 살고, 자유롭게 살고, 베풀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도 성지순례를 시청하는 동안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끼셨다면, 그것은 성지순례의 공덕이자 성지순례를 5개월간 시청하신 공덕일 것입니다.”nbspnbsp이렇게 약 1시간 30분 동안의 녹화 촬영을 마치고 스님은 그동안 촬영하고 편집하고 방송하느라 고생이 많았던 BTN 관계자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건네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방송국을 나왔습니다. 오늘 녹화한 내용은 3월 28일 오전 11시 20분에 BTN에서 방영됩니다.nbspnbspnbsp저녁 7시 30분부터는 의정부 예술의전당 대극장에서 800여 명이 가득 자리를 메운 가운데 2016년 첫 번째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nbspnbsp▲ 의정부 예술의전당 대극장nbsp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평일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강연장을 찾아준 분들에게 스님은 환한 웃음으로 인사말을 건네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오늘이 2016년도 희망세상만들기 즉문즉설 강연의 첫날입니다. 그 첫 강연을 의정부에서 하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nbspnbspnbsp2016년이 시작되자마자 북한에서 핵실험을 하니까 남한에서는 강경대응을 표명하고, 다시 북한에서 로켓을 발사하니까 남한에서는 개성공단을 폐쇄했습니다.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도망도 안 가고, 라면 사재기도 안 하고 이렇게 사는 걸 보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6.25전쟁을 치르는 등 지난 70년을 갈등과 분쟁 속에 살다 보니까 좋게 말하면 면역력이 생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좀 무뎌진 것이겠지요.nbspnbsp이렇게 갈수록 통일의 희망은 멀어지고, 평화는 위태로워지고, 경제는 어려워지고, 빈부격차도 심해지니까 ‘살기가 너무 어렵다. 미래의 희망이 없다’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 말들을 하는 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연세 드신 분들은 과거를 한번 돌이켜 보세요. 우리가 지금 살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30년 전이나 50년 전에 비하면 그래도 더 낫지요? 의식주 모든 면에서 더 낫습니다. 또 요즘 민주주의가 후퇴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때 독재시대 보다는 지금이 낫습니다.nbspnbsp이런 제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어디를 기준으로 볼 것이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좋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지금이 굉장히 어려운 시기이고, 나쁠 때를 기준으로 하면 지금이 훨씬 좋은 시기입니다. 저도 지금 이 시대가 좋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시기가 좋거나 안 좋거나, 경제사정이 좋거나 어렵거나, 날씨가 따뜻하거나 춥거나 하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시기가 안 좋다고 괴로워 할 일인가?’ 하는 건 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물론 겨울보다는 봄이 좋지요. 그렇다고 겨울에는 우울하게 지내고, 봄에만 즐겁게 지내야 될까요? 그건 아니에요. 겨울은 날씨가 좀 안 좋은 건 맞지만 우리는 겨울에도 웃으며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경제사정이 좀 안 좋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우울하고 괴롭게 살아야 할까요? 그건 아니지요. 왜냐하면 옛날에 비하면 훨씬 낫거든요. 옛날에도 즐겁게 살았는데, 지금 즐겁게 살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nbspnbspnbsp제 얘기를 듣고 ‘스님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 그저 나 하나 마음만 잘 먹으면 된다고 얘기하는데, 그런 태도는 세상의 정의를 외면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말의 요지는 이겁니다. 세상은 내 뜻대로 다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어릴 때 각자 꿈이 있었을 텐데, 지금 다 그때 원하던 대로 됐어요?”nbspnbsp“아니오.”nbsp“그때 꿈꾸었던 결혼생활을 지금 누리고 있어요?”nbsp“아니오.”nbsp“애를 키워보니까 애가 내 뜻대로 크던가요?”nbsp“아니오.” nbspnbsp“그렇게 뜻대로 안 되는 게 이 세상살이입니다. 그러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인생을 괴롭게 살아야 할까요? 그래야 된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괴롭게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반드시 괴로워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힘들다고 난리를 피우면 인도나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은 왜 저렇게 힘들다고 난리일까? 한국 가보니까 먹고 살만 하던데’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반드시 괴로워 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nbspnbsp어차피 세상은 내 뜻대로 다 안 됩니다. 내 뜻대로 되면 즐겁고 내 뜻대로 안 되면 괴롭다면, 우리는 늘 즐거웠다가 괴로웠다, 즐거웠다가 괴로웠다, 이렇게 널뛰기 하듯이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내 뜻대로 다 되면 좋겠지만 내 뜻대로 안 되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깨닫기가 힘든 거지요.nbspnbsp옛말에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잖아요. 내 뜻대로 됐다고 좋아하고, 내 뜻대로 안 됐다고 울고불고 할 일이 아니라 ‘좀 더 지켜봐야 된다. 안 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고, 되는 게 더 나쁠 수도 있으니 내 뜻대로 되고, 안 되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마라’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걸 깨달으면 살기가 훨씬 좋아집니다.nbspnbspnbsp또 실제로 세상이 좀 더 좋게 되면 더 좋겠지요. 겨울보다는 봄이, 독재보다는 민주주의가, 빈부격차가 심한 것보다는 빈부격차가 작은 게, 긴장이 고조되는 것보다는 평화로운 게 살기가 낫다는 건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된다고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늘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제 말은 그렇게 행복하게 살면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지,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괴로워하면서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웃으면서 즐겁게 이 세상을 좋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먼 길도 웃으면서 갑시다.”nbspnbsp스님은 시작부터 즉문즉설 강연의 핵심이 되는 내용을 명쾌하게 일러주었습니다. 이미 청중들의 마음은 많이 가벼워져 보였습니다.nbspnbsp이어서 약 2시간 30분 동안 5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의 명쾌하고 속 시원한 답변에 강연장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동생들이 너무 미워서 괴롭다고 하소연한 할머니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할머니는 며칠에 걸쳐 질문 내용을 종이에 적었다며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펼치며 질문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저는 형제가 많았지만 아무리 힘들고 배고파도 10원 한 장 빌리거나 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nbsp그런데 동생들이 말하기를 빚을 얻어 장사를 해 보았더니 잘 되어서 조금만 돈이 있으면 다시 해 보겠다고 해서 제가 ‘한 번에는 못 주고 나누어서 주겠다. 너희들도 내 사정을 잘 알지 않느냐. 이자는 안 주어도 좋으니 본전은 꼭 갚아라. 잘 살아봐라’ 하고 약속한 지가 벌써 오래 됐습니다. 강산이 몇 번 변했어요. 그런데 그런 저에게 동생들은 본전도 갚지 않으면서 오히려 ‘욕심 많다. 지독하다. 죽으면 갖고 가느냐’ 하면서 여기저기 입질을 하고 다니니... 저는 다투기도 싫고 해서 왕래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안 보고, 안 들으면 편할 줄 알았는데, 분노가 치밀고 한이 쌓입니다. 남편은 악하거나 나쁜 사람은 아닌데, 속을 뒤집는 말만 던지며 책임을 질 줄 모릅니다. 저는 여태 참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억울하고, 분하고, 서럽기만 한지 모르겠습니다. 인덕이 없으면 좋은 일을 해도 지탄만 받는다던데 제가 팔자를 그렇게 타고 났을까요? 제가 속이 좁고, 이해만 바라기 때문일까요? 스님, 저 좀 깨우쳐주세요.”nbsp“올해 연세가 어떻게 nbsp되세요?”nbsp“73세입니다.”nbspnbsp“제가 하나씩 물어볼 테니까 대답을 해 보세요. ‘돈을 빌려줬다, 그런데 못 받았다’ 이게 요점이지요? 어쨌든 동생들한테 돈을 빌려주고 이자는 그만두고 본전만 갚으라고 했는데, 동생들이 안 갚았다는 게 요점이잖아요 그런데 빌려간 돈을 안 갚았으면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야 되는데, 동생들이 ‘돈 좀 준 걸 갖고 뭘 그러느냐? 동생한테 줬으면 그만이지’ 그런다는 거예요?”nbspnbsp“그런 것도 아니고요. 아주 정말 화나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욕심이 많다. 지독하다. 죽을 때 돈 가지고 가느냐, 그것 없어도 사는데’라고 한대요. 또 중간에서 이리저리 말을 전하며 입질하는 동생이 형제간에 이간질을 하고 다니니까 제가 미쳐서 죽을 지경입니다.”nbspnbsp“그러니까 질문자가 동생한테 돈을 주면서 이자는 됐고, 본전만 달라고 했는데, 본전을 안 주는 것까지도 괜찮지만 동생들이 질문자더러 욕심이 많다며 도리어 욕을 한다는 거네요. 안 갚는 것까지는 좋은데 거기다가 욕심이 많으니 어쩌니 하면서 내 욕까지 해서 분하다는 것이지요?”nbsp“예. 분하다기보다도 화가 나요.”nbsp“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 남편이 뭐라고 그럽니까?nbspnbsp“남편은 뭐 그냥... 앞에서 말했잖아요. 대화도 안 된다고요. 남편은 그냥 놀기만 좋아하시고, 양반이라 편하게 사시거든요.”nbsp“질문자가 벌어서 남편도 먹여 살렸어요?”nbsp“예, 그랬으니까 남편이 이런 문제에 관여를 못 하지요. 얼마가 있는지도 잘 몰라요.”nbsp“남편 모르게 동생들한테 빌려줬어요?”nbsp“몰래 빌려주지는 않았어요. 줬다고는 했어요. 액수만 말 안 했지요.”nbsp“남편은 얼마 줬는지를 모르니까 ‘그걸 갖고 뭘 그러냐?’고 하는 거지요. 자기하고 상의하고 준 것도 아니고, 질문자 마음대로 줬으니까요. 그냥 잊어버리는 게 낫겠네요.” nbspnbspnbsp“그런데요, 이게 벌써 강산이 몇 번 변했다고 했잖아요. 그때는 서운한 걸 몰랐는데요, 이제는 제가 이렇게 주저앉아서 일을 못 하고 있으니까요, 코드를 안 꽂아도 앉아있으면 머리속에서 영화 필름이 저절로 돌아갑니다.”nbsp“늙으면 자꾸 옛날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외국인이랑 결혼해서 외국 가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젊을 때는 외국 남자랑 살아도 되고, 외국에서 살아도 괜찮다가, 나이가 들어 60이 넘고, 70이 넘으면 음식도 옛날보다 밥이나 김치나 된장찌개를 더 먹게 된다고 합니다. 그럼 외국인인 남편도 나이가 들수록 치즈나 고기를 더 먹겠지요? 그러다 대부분 먹는 것 때문에 싸우고 이혼을 합니다. 그걸 ‘회귀 본능’ 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어릴 때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님 모셔봐서 아시겠지만 늙으면 늘 옛날 얘기만 하잖아요.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또 한단 말이에요. 질문자는 73세라고 했는데 만약 83세가 되거나 93세가 되면 계속 이 얘기만 할 거예요.nbspnbspnbsp그래서 아들도 ‘듣기 싫다’, 손자도 ‘듣기 싫다’고 하게 될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한 맺힌 일이 있으면, 그걸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업식이라고 하는데, 그 상처는 계속 덧납니다. 육체도 다치고 난 뒤 날이 흐리면 쑤시고 저리듯이 늙으면 늙을수록,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생각이 떠오르고, 갈수록 화는 더 납니다. 그래서 건강만 나빠집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그 돈 안 받고도 지금까지 살았잖아요.”nbsp“잘 살았지요. 그런데 괘씸해서 그렇죠..”nbsp“왜 괘씸해요?”nbsp“하는 짓이 너무 미워요. 내 것 주고도 뺨맞는 격이니까요. 그래서만 미운 것도 아니고, 남편과 대화도 안 되는데, 어쩌다가 남편이 막 내 속을 뒤집는 엉뚱한 소리를 하면 제가 화가 치밀어서 제 머릿속이 또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말씀입니다.”nbsp“제가 보기에는 질문자가 동생한테 돈을 줄 때 자기가 번 돈이라고 영감하고 의논도 안 하고 턱 줘놓고 얼마 줬다고 말도 안 하니까 영감님은 그게 섭섭해서 질문자가 동생들한테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nbspnbsp“아이고, 스님. 제가 돈 액수를 안 밝혔으니까 다행이지, 밝혔다면 남편이 저한테 돈을 더 뜯어내려고 했을 겁니다. 그랬으면 저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남편한테는 ‘조금만 줬다’ 라고만 얘기했던 거예요.”nbsp“질문자가 그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자꾸 화를 내면, 남편은 돈을 조금 주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벌써 잊어버렸는데, 늙어서 자꾸 그 얘기를 꺼내니 남편도 점점 듣기가 싫어지는 겁니다.”nbsp“아니오, 남편이 듣는 데서는 얘기를 안 합니다. 저 혼자 문 닫고 지랄을 하지요.”nbspnbsp“그럼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첫째, 내 돈을 줬지요? 둘째, 그 돈 생각하느라고 계속 괴롭지요? 그럼 누구 손해예요?”nbsp“그래서 스님한테 찾아 왔지요.”nbspnbsp“질문자가 바보예요. 형제간에는 원래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에요. ”nbsp“제가 원체 바닥부터 기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동생들의 힘든 사정이 너무 잘 이해가 됐거든요.”nbsp“그럼 질문자는 동생들이 지금까지 계속 힘들어서 밥도 못 먹고 사는 게 좋아요? 그래도 좀 먹고 사는 게 좋아요?”nbsp“먹고 사는 게 좋죠.”nbsp“그럼 동생들이 전부 밥도 못 먹고 구걸하면서 살면, 질문자는 동생들한테 ‘왜 너희들, 그 돈 안 돌려주느냐?’ 라고 할까요? 안 할까요? 만약에 동생들이 지금도 갚을 형편이 못 된다면, 질문자가 동생들한테 섭섭할까요? 안 섭섭할까요? 동생이 돈 줄 형편이 못 될 정도로 가난하다면 질문자가 동생한테 이렇게 화가 날까요? 안 날까요?”nbsp“그런데 제 형편이 지금 형편만 같으면 안 줘도 상관없는데, 그때는 제가 정말 살기가 힘들었는데도 돈을 줬거든요. 그게 너무 답답해요.”nbspnbsp“질문자는 형편이 어려운 동생한테 돈을 빌려줬는데, 그 동생이 지금은 잘 살면서도 질문자의 돈을 안 갚고, 고맙다는 소리도 안 하니까 화가 난다는 건데, 질문자 생각대로라면 동생이 쫄딱 망해서 거지가 돼버려야 속이 시원하겠네요. ‘거봐라 내 돈 안 갚으니까 네가 그렇게 됐지 하면서 속이 시원할 거 아닙니까?”nbsp“그건 아닙니다.”nbspnbsp“뭘요, 지금 보니까 심보가 그런데요. 질문자는 동생이 싹 망해 버리면 좋겠어요? 아니면 내 돈을 안 갚더라도 동생이 밥 먹고 사는 게 좋아요? 동생이 내 돈을 안 갚을 바에야 싹 망해 버리는 게 속이 시원하겠어요? 내 돈을 못 갚더라도 내 동생이니까 잘 사는 게 좋겠어요?”nbsp“제 욕만 안 하면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nbsp“그러니까 동생이 자꾸 질문자를 욕하니까 동생이 싹 망해 버리면 좋겠어요?”nbsp“그건 아니지요.”nbsp“그래도 밥 먹고 사는 게 좋겠죠?”nbsp“그러니까 저도 그걸 잊어버리려고 하는데 잘 안 돼요.”nbspnbsp“그러니까 그냥 내 돈 안 갚는 동생이 벼락 맞아서 팍 죽어버리면 좋겠어요?”nbsp“아닙니다.”nbsp“그래도 재산 좀 가지고 사는 게 좋겠어요?”nbsp“그래도 사는 게 좋지요.” nbspnbspnbsp“그러면 됐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세요. ‘동생이 내 돈 안 갚는 거는 괘씸하지만 벼락 맞아서 팍 망해 버리는 거보다는 그래도 내 돈 가져가서 저렇게 먹고 사는 게 좋은 일이다’ 하면서 ‘부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세요. 질문자의 공덕으로 동생들이 그렇게 잘 살면 좋잖아요. 그걸 질문자가 자꾸 괘씸하게 생각하면 동생들이 망해요.”nbspnbsp“그래서 제가 어떻게 기도하면 좋겠어요?”nbsp“‘내 덕에 동생들이 잘 사는 건 참 보기 좋다’ 하는 마음으로 ‘부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세요. ‘내 덕에 동생들이 잘 사는 게 보기 좋구나. 우리 어머니가 보시면 나를 얼마나 예뻐하시겠느냐?’ 하고 기도를 하면 돌아가신 어머니도 질문자를 보면서 ‘네가 동생들을 잘 거둬서 동생들이 잘 사니 고맙다. 나는 너한테 잘 못해 줬는데 너는 동생들한테 잘해 줘서 고맙다’라고 하실 거예요.”nbsp“어머니가 다 보시고 돌아가셨는데요.”nbsp“돌아가신 어머니가 귀신이 되어서 질문자를 보고 좋아할 거라고요.”nbsp“아버님도 ‘그만 좀 줘라. 너도 망한다’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어요. 제가 너무 주니까요.”nbsp“어쨌든 그렇게 줬는데도 못 사는 게 나아요? 준 거 받아서 잘 사는 게 나아요?”nbsp“제가 그렇게 기도하면 화나는 마음이 없어지겠습니까?”nbspnbsp“내가 도와줬는데도 못 사는 게 좋아요? 내가 도와준 걸 근거로 해서 잘 사는 게 좋아요?”nbsp“아,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잘 사는 게 좋지요.”nbsp“그렇게 알면 기도할 게 뭐 있어요? ‘아이고, 좋다’ 그러면 되지요. 아직도 분이 안 풀려요?”nbsp“아니에요. 분이 안 풀린다기보다도 진짜 너무 화가 나요.”nbsp“이 세상은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안 된다고 했지요. 내 자식도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는데, 동생들이 어떻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겠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게 부처님, 하나님이 아니에요. 지금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위기인데도 내 뜻대로 바로 잡지 못 하고 살고 있는데, 질문자한테 돈 좀 빌려서 안 갚는 동생들 고치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겠어요? 별로 중요한 일 아니에요. 그러니 그걸 고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조금 도와줬는데 너희가 그렇게 잘 사니 참 고맙다. 내가 도와준 보람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한번 따라해 보세요.nbsp나는 너희를 생각해서 조금 도와줬는데, 너희가 그것을 잘 활용해서 잘 사니 너무 너무 고맙다.”nbsp“나는 너희를 생각해서 조금 도와줬는데, 너희가 그것을 잘 활용해서 잘 사니 너무 너무 고맙다.” nbspnbsp“용서를 하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용서를 할 게 없다는 걸 깨우쳐야 됩니다. 제가 ‘동생들을 용서하시라’ 하는 얘기를 한 게 아니에요. ‘동생들이 망해 버린 것보다는 그래도 내가 준 돈 받아서 잘 사니까 좋구나’라고 생각을 바꿔버리면 용서해 줄 게 없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진실을 딱 깨우치면 그냥 한 여름밤 꿈에 불과합니다. 그걸 깨우쳐야 합니다. 그러니 ‘네가 잘못했지만 내가 용서해 준다’는 말은 영원히 용서가 안 된다는 말이나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했던 건 ‘저들은 못된 놈들이지만 용서해 주시라’ 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질문자도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머리에는 ‘옳다, 그르다’는 관념이 꽉 박혀있으니까요.”nbsp스님의 답변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답답함을 하소연하던 할머니는 마침내 활짝 웃었습니다.nbsp하소연이 계속 되자 청중석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분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할머니가 활짝 웃자 강연장은 순식간에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nbspnbsp답변을 마친 후 스님은 “공개된 강연 자리가 아니라면 사실 할머니의 답답함을 더 들어드려야 하는데...” 하며 미안한 마음을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nbspnbsp5명의 질문에 대해 모두 답변을 하니 이제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직 질문을 신청한 3명이 더 남아 있었지만 스님은 양해를 구하고 다음 강연장에 다시 찾아오라고 당부한 후 강연을 모두 마쳤습니다. 열정적인 강연을 해준 스님에게 다시 한번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nbsp강연이 끝나자 곧바로 책 사인회가 로비에서 열렸습니다. 작년 이후 오랜 만에 열린 강연인데다가 얼마전 새책 ‘행복’이 새로 나오면서 사인회를 기다리는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30분이 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면서도 스님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nbspnbsp▲ 책 사인회nbsp마지막으로 오늘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과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강연장을 나왔습니다.nbspnbsp▲ 봉사자들과 함께 기념 촬영nbsp내일은 부처님이 출가하신 날입니다.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 서울 정토회관에서는 출가재일 기념 법문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부처님의 열반기념일인 다음주까지 일주일 동안 정토회의 전국 법당에서는 ‘8일 출가열반 용맹정진’ 기간을 갖습니다.nbsp※ 2016년 봄,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갑니다. 강연일정 확인하시고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오세요. 강연은 선착순 무료입장입니다. 질문자 접수는 강연장에서 받습니다.

2016.03.17. 155,075 읽음 댓글 30개

2016.3.14 감자 심기 및 농사일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겨우내 언 땅을 갈아 엎고, 여러 해 묵은 발효된 똥을 퍼서 텃밭에 뿌린 후 씨감자를 심고 봄농사를 위한 텃밭 정비를 했습니다.nbspnbsp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기도 200일째 정진을 마친 후 서울에서 밤새 차를 타고 내려와 새벽 4시 30분 울산 두북에 도착했습니다. 잠깐 눈을 붙인 후 곧바로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원래 스님은 올해 봄에 씨감자를 북한에 보내서 식량 증산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유엔 안보리 제재로 인해 씨감자를 북한에 보낼 수 없게 되어 국내에서 먼저 실험 재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두북수련원과 문 수련원에서 실험 재배를 하기로 했지만, 스님은 “텃밭에서 얼마라도 직접 재배해봐야 하는데, 오늘이 아니면 감자를 심을 시간이 없다” 하며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나와 일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먼저 작년 겨울 뒷뜰에 묻어 둔 장독대에서 김장 김치를 꺼내 통에 담았습니다. 한 줄기 집어서 맛을 보니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그 맛이 일품이었습니다.nbspnbsp▲ 작년 겨울 땅속 장독대에서 묵힌 김장 김치nbsp그런데 묻을 때 날씨가 따뜻하더니 공기가 들어간 채로 겨울을 나서 그런지 약간 시큼한 맛이 있긴 했습니다. 이 배추와 무는 작년 가을에 스님이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것입니다. 작년에 수확이 쏠쏠 했기 때문에 올해도 스님은 배추를 여러 포기 심을 작정입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작년 가을에 고소를 꺾어 말린 것을 마당에 가지고 나와 고소 씨앗을 훑어 내었습니다. 텃밭에 다시 심기 위해 우수수 떨어진 씨앗을 잘 긁어모아 두었습니다.nbspnbsp▲ 고소 씨앗 털기nbsp작년에 고소를 심었던 곳에는 겨울 동안 얼지 않도록 부직포를 덮어 두었는데, 부직포를 걷어 내자 푸릇푸릇한 잎들이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스님은 푸른 잎들을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습니다.nbspnbspnbsp추운 겨울을 잘 이겨내서 그런지 고소의 향이 아주 강했습니다. 스님은 “새로 씨앗을 심어서 키우는 것보다 얼지 않도록 살려 두었다가 그것을 다시 키우면 봄에 훨씬 빨리 먹을 수 있다”고 하면서 유난히 푸른 몇 개의 잎을 따서 점심 때 먹을 수 있게 씻었습니다.nbspnbsp▲ 고소밭 잡초 제거nbsp그런데 고소밭에 잡초가 많이 섞여 자라고 있었습니다. 고소와 잡초가 잎모양이 비슷해서 분간이 잘 되지가 않았는데 스님은 용케도 잡초를 쑥쑥 뽑아내었습니다. “잡초 뽑으라고 아무나한테 맡기면 고소도 다 뽑아버린다”면서 웃음을 머금었습니다.nbspnbsp잡초를 깨끗이 뽑아낸 후 꽃샘추위에 얼지 않도록 남은 비닐을 재활용해서 살포시 덮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오면 새순이 많이 돋아나 있을 것입니다.nbspnbspnbsp한편 텃밭 한쪽에는 메마른 가지에 복숭아꽃이 분홍색 새순을 활짝 드러냈습니다. 스님은 “아이고, 이거 봐라” 하면서 무척 반가워 했습니다. 봄이 오는 소식을 자연은 온 몸으로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nbspnbsp▲ 복숭아꽃 새순nbsp복숭아꽃 새순이 전해주는 봄소식에 한층 마음도 즐겁고 가벼워졌습니다. 스님은 겨울 동안 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국화 화분과 도토리나무 모종 화분을 가져왔습니다. 국화 화분은 이미 새싹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스님이 물을 두어 차례 듬뿍 주자 메마른 흙이 쏴 하고 물을 빨아들이며 새싹이 더 살아나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 국화, 도토리 화분 물주기nbsp몇 가지 일을 마친 후 이제 본격적으로 감자를 심을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화장실에서 몇 년 묵은 발효된 똥을 펐습니다. 이곳을 다녀간 많은 분들이 차곡차곡 잘 쌓아두었는데, 오늘은 그 결실을 보는 날입니다. 발판으로 쓰는 나무를 걷어내지 못해 삽질을 하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요령껏 조금씩 수 차례를 푸니 발효되어 흙 같이 된 똥을 일부 들어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화장실 똥 퍼서 거름 만들기nbsp화장실에서 푼 똥은 곧바로 텃밭의 거름으로 뿌렸습니다. 똥과 흙을 잘 섞어 텃밭 전체를 한번 갈아 엎은 후 고랑을 만들었습니다. 감자를 심으려면 턱이 조금 높아야 한다고 해서 땅을 조금 깊이 팠습니다.nbspnbsp▲ 감자 심을 밭고랑 만들기nbsp땀을 뻘뻘 흘리며 삽질을 한 결과 제법 높이가 있는 밭고랑이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심는 감자는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전북 순창에 있는 씨감자 연구소에서 가져온 1세대 씨감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재배해서 거둔 씨감자의 눈을 칼로 딴 2세대 씨감자입니다. 물론 1세대 씨감자가 병충해도 없고 튼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조건과 방식으로 씨감자를 심어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실험 재배를 해볼 계획입니다.nbspnbsp스님은 씨감자를 올해 북한에 보내어 각 도별로 실험 재배를 해보고, 내년부터는 북한에서 씨감자 생산을 직접 하려고 씨감자연구소 측과 이미 협의를 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보낼 수 없게 되자 많이 아쉬워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nbspnbsp“우선 한국에서라도 먼저 실험 재배를 해 보면 내년에 북한에서 재배할 때 어떤 문제점이 생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거름을 한 땅과 안 한 땅, 비닐을 씌운 땅과 그냥 노지, 일반 감자와 씨감자, 추운 문경이나 봉화와 따뜻한 두북, 이렇게 서로 다른 조건과 방식으로 재배해 보면서 그 차이를 알면 내년에 북한 실정에 맞게 어떤 종류를 얼마만큼 지원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nbspnbsp이렇게 해서 실험 재배의 시작을 오늘 텃밭에서 하게 된 것입니다.nbspnbsp▲ 1세대 씨감자. 원래는 반듯했는데 싹이 나서 조금 쭈글해진 모습.nbspnbsp▲ 감자의 눈 주위를 잘라내서 심어야 하는 2세대 씨감자.nbspnbsp땅이 얼지 않고 습기를 유지하도록 비닐 멀칭을 한 후 25cm 간격으로 감자를 하나씩 심었습니다. 쑥쑥 잘 자라길 기원해 봅니다.nbspnbsp▲ 감자 심기nbsp감자 심기를 모두 마치고 나니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내친 김에 앞 마당에도 채소를 심기 위해 땅을 갈아 엎었습니다. 작년에 국화를 심었던 자리는 고스란히 남겨 두고, 열심히 땅을 뒤집은 후 마당에 난 잔디와 구분되게 낮은 둔턱을 만들었습니다.nbspnbspnbsp▲ 채소밭 만들기nbsp이곳에는 무엇을 심을지 아직 스님도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뒤뜰에 감자를 심었으니 작년에 뒤뜰에 심었던 상추, 고추, 가지, 토마토, 깻잎 등을 앞마당에 심지 않을까 싶습니다.nbspnbsp마당 옆쪽 담벼락 밑에는 원추리가 많이 심어진 길죽한 땅이 있는데, 여기도 새싹이 빨리 돋아 나도록 비닐을 덮어 두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시골에 내려오면 원추리 나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nbspnbspnbsp▲ 원추리가 심어진 밭nbsp스님은 농사일이 무척 재미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며 삽질 하고, 호미로 땅을 고르고,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했는데도 아주 가볍고 즐거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봄 농사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텃밭이 깔끔하게 정비된 모습을 보며 스님은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밥을 먹고 있는데 마당을 내다보니 저 멀리 나무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앞산이 보였습니다. 스님은 앞산을 보며 한마디 했습니다.nbspnbsp“저기 산에 나무들 좀 봐라. 울창하지? 내가 어렸을 때는 저 산이 민둥산이었어. 그런데 저렇게 울창해졌네.”nbsp자연 속에서 마음껏 땀흘려 일한 오늘 하루야말로 스님에게는 가장 큰 휴식이 된 것 같습니다. 언젠가 법문에서 “인생의 마지막 모습이 농사꾼이었으면 한다”라고 했던 스님의 말씀이 유난히 귓전을 맴도는 하루였습니다.nbspnbsp하루 종일 웃으며 일하던 스님도 저녁이 되자 “아야야” 하며 결린 어깨와 다리를 어루만졌습니다. 매일 이동하며 강연만 하다가 오랜만에 몸을 써서 그런 것 같습니다. 농사일만 하면서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스님의 하루엔 이보다 더 급한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nbspnbsp내일은 새벽 3시에 울산 두북을 출발해 서울로 올라가 불교TV에 출연해 ‘붓다의 길 깨달음의 길’을 주제로 대담 프로그램 녹화를 한 후 저녁 7시 30분에는 의정부 예술의전당 대극장에서 올해 첫 ‘희망세상만들기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nbspnbsp ※ 2016년 봄,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갑니다. 강연일정 확인하시고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오세요. 강연은 선착순 무료입장입니다. 질문자 접수는 강연장에서 받습니다.

2016.03.15. 45,942 읽음 댓글 62개

2016.3.13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 기도 중 200일째 기도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기도 중 200일째 날을 맞이하여 기념 법문을 한 후 기도 릴레이에 30분 동안 동참했습니다.nbspnbsp8시 30분에서 숙소를 나온 스님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는 동안 원고 교정 업무를 보았습니다.nbspnbsp▲ 블라디보스톡 공항nbsp11시 25분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한 스님은 한국 시간으로 12시 35분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는 틈틈이 연해주 독립운동사에 대한 자료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nbspnbspnbsp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수행팀에서 마중을 나와주어서 김밥을 먹으며 서울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인천공항 도착nbsp오후 2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스님은 곧바로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연이어 가졌습니다. 미팅 후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밤에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기도를 시작한지 200일째를 맞이하여 기도에 동참한 대중들을 위해 격려 말씀과 더불어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밤 10시 30분이 되자 지난 100일 동안 통일기도에 참여했던 약 200여 명의 대중들이 정토회관 1층 법당을 가득 메웠습니다.nbspnbsp▲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기도 중 200일째 기념 법회nbsp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대중들이 법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라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먼저 스님은 천일기도를 시작한 후 지난 200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상기시켜 주면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오늘은 정토회가 민족의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면서 천일기도를 시작한지 200일째 되는 날입니다. 지난 늦여름에 시작했는데, 어느 덧 가을, 겨울이 지나고 이제 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nbspnbspnbsp처음 100일은 북한의 목함 지뢰 사건으로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다시 협력의 길을 가자고 합의를 한 직후부터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감격적인 역사적 현실도 경험하며 보냈습니다. 그런데 200일에 들어와서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연초에 북한의 핵실험이 있자 한국은 강경대응을 표명했고, 다시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자 한국은 개성공단 철수를 결정했으며, 다시 북한이 개성공단 재산을 몰수하자 한국은 북한의 수뇌부를 제거하겠다는 참수 작전 훈련을 했고, 다시 북한이 청와대를 공격하겠다고 나서자 한국에서는 북한이 핵을 발사할 기미가 보인다면 선제공격을 해서 제거하겠다며 대응을 했습니다. 여기에 북한도 선제공격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나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세계 최강인 미국의 최신예 무기들이 총동원돼서 1970년대 이후로 약 40년 만에 최대의 공격형 군사훈련이 진행되고 있고, 그에 맞서 북한에서는 100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원입대하는 전시 체제로 돌입해 ‘미제와 그 괴뢰인 일당들을 섬멸하겠다’며 극심한 언어폭력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nbspnbsp이런 가운데 정토회는 하루도 쉬지 않고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기도를 했지만 결과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지난 100일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희망보다는 좌절을 가져다 준 100일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의 집무실 바로 밑이 기도실이기 때문에 제 방에서는 목탁소리가 24시간 끊이지 않고 들립니다. 밤에는 법당으로 내려가서 기도하니까 소리가 조금 약할 수도 있겠지만 또 밤이라 고요해서 잘 들리거든요. 그래서 24시간 기도 소리가 들립니다. 지난 100일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신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주야로 애 많이 쓰셨습니다. 사람이 애를 많이 쓰면 애쓴 결과가 있어야 보람이 있는데 그렇지 못해 좀 지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수행에는 마장이 따르는 법입니다. 보통은 마장이 밖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만 잘 살펴보면 마장은 밖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속에 있습니다. 사건은 바깥에서 일어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지치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 마장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희망을 잃어버리는 게 진짜 마장입니다.nbspnbspnbsp개인도 천일기도를 하면 100일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기도를 하면 더 잘 돼야 되는데 거꾸로 더 장애가 생기게 되면 ‘내가 기도를 잘못하고 있나? 기도가 부정 탔나?’ 해서 중간에 그만두는 게 십중팔구입니다. 마장은 우리가 마땅히 넘어야 할 산임을 알아야 되는데 기도를 하면 바로 좋아지는 줄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천일기도를 하는 중에 수많은 난관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아무 영험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중단하고 싶은 장애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개개인이 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힘을 합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 지친 개인이 있다 하더라도 도반들이 대신해 주면서 하나가 지치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식으로 하면 난관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nbspnbspnbsp예부터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이렇게 한번 크게 푸닥거리를 하고 나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수 있을 겁니다. 서로에게 막연한 낙관이나 기대가 없는 상태가 되면 오히려 관계가 더 개선될 수 있습니다. 갈등보다는 평화가 서로에게 이익임을 알게 된다면 ‘갈등이 있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더 나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과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난 사건은 사건일 뿐이지만 그 사건을 유의미하게 만들어내는 건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nbspnbsp법문을 시작하기 전 대중들은 다소 기운이 빠져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개성공단 전면 폐쇄를 비롯해 전쟁 위기로까지 치닫고 있는 최근의 남북관계에 대한 좌절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님의 격려 말씀을 듣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스승이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진단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지금 이 시기에 기도가 필요한지 설명하면서 어떤 자세로 기도에 임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일본과 미국은 남한의 친구이고,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친구이니까, 이럴 때 남북이 서로 잘 협력한다면 이런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남북이 할 수 있습니다. 일본과 미국을 설득할 때는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할 때는 북한이 한다든지, 또 미국과 일본을 견제할 때는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할 때는 남한이 하는 식으로 협력한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국면이 될 수도 있지요. 그런데 현재 남북은 서로 불신하면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경쟁하다 보니까 더 경쟁이 치열해져서 일촉즉발의 적대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한은 북한의 위협 때문에 옛날 친구들에게 더 가까이 가서 미·일과 군사적 협력을 더 긴밀히 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것은 중국이 우려하던 일이므로 결국 중국의 견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북한은 굶어죽으면서도 군비를 확충해서 방어를 하든지, 그것도 안 되면 중국의 안보 우산 아래로 들어가서 한국이 미·일에 협력하듯이 중·러에 협력해서 자기 체제를 보전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 지금 우리가 서있습니다.nbspnbspnbsp그러니 남북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남한은 점점 미·일 군사동맹체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고, 그러면 무기수입을 늘려야 하고, 그러면 중국과의 관계도 점점 나빠지니까 경제도 어려워지고, 경제는 어려워지는데 군비는 늘어나니까 결국 국민들의 생활은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수출 위주의 경제구조이다 보니까 안보가 위태로우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북한은 한국과의 갈등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특별한 무기, 즉 남한이 갖고 있지 않은 핵무기를 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국제사회가 용인하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제재를 받게 되었고, 그래서 원래도 좋지 않았던 경제가 더욱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더욱더 ‘나만 죽나 같이 죽자’ 하는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견디지 못하겠으면 결국 친중 정권이 들어서서 중국의 군사보호 아래에서 체제유지를 꾀하게 되겠지요. nbspnbspnbsp그래서 지금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상황은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천지신명의 옹호를 받아야 한다’, ‘상식적인 범위에서 노력해서는 해결이 안 되겠다’ 이렇게 여겨질 만큼 수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물러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런 목표의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천지신명이 우리를 옹호해 줄지 여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의 뜻을 받아줄 건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그분들의 영역이니까 그건 그분들께 맡겨놓고, 다만 우리는 그렇게 믿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nbspnbspnbsp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게 뭐겠어요? 이 난국을 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서 정부가 그런 일을 해 나가도록 뒷받침하는 일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생각이 다 다른데, 그게 되겠습니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 된다고 생각하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지금 사분오열되어 있지만, 국민 대다수가 고등학교 이상 졸업자이니까 조금만 각성을 한다면 함께 뭉쳐서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nbspnbsp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를 돌아보면, 그때는 지도자도 너무 부족했고, 국민들도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었고, 또 우리를 둘러싼 외세들도 너무 강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전 국민이 동참하여 3.1운동이 일어났고, 또 해외에서도 나름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하다보니까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어쨌든 상해임시정부도 만들어냈잖아요. 성공은 못 했지만 역사를 돌아봤을 때 그때 그거라도 안 했다면 우리가 지금 무슨 민족적 자존심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성공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실패했더라도 지금 우리에게는 그 자체로 자랑스러운 민족적 역사로 남았잖아요.nbspnbspnbsp그때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훨씬 역량도 있고, 통일운동을 하기도 쉬운 조건에 놓여있습니다. 다만 그때만큼 절실하지가 않다는 게 문제이지요. 아직도 ‘누가 해 주겠거니’ 하고 막연한 생각을 하거나 ‘저렇게 한다고 되겠나’ 하는 패배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 내가 이 나라를 지켜야 된다’ 하는 주인의식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nbspnbsp내일은 우리 민족의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면서 천일기도를 시작한지 201일째가 되는데, 300일을 향해 가는 이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기운이 바뀔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야 하고, 또 계획한 기간 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능히 해 나가야 합니다. 전부 다 24시간 기도 소리가 들리는 제 방에서 주무실래요?nbspnbspnbsp24시간 기도소리를 들으면 약간 방심하다가도 ‘아, 내가 통일의 원을 세웠지’ 하는 걸 잊지 않게 되거든요. 법문 들을 때만, 목탁 칠 때만 기억하다가 생활하면서는 깜빡 잊고 살게 되면 원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화두 참구를 할 때도 화두에 딱 집중해야 화두 타파가 되거든요.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겁니다. 정신이 집중되어 있어야 아이디어도 나오고, 추진력도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고무 풍선에 숨을 한 모금 불어넣었다가 도로 한 모금 뺐다가 다시 불어넣었다가 빼는 일을 반복하니까 빵 터지지 않고 늘 고만고만하게 가는 겁니다. 그렇다고 긴장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세운 원에 집중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초발심시 변정각’이라고 하잖아요. 한번 마음을 냈으면 100일, 1000일을 쭉 집중해서 가야 됩니다.nbspnbsp남하고 얘기하다가 깜빡 놓칠 수도 있고, 넘어져서 ‘아야’ 하다가 놓칠 수도 있지만, 놓쳤다가도 바로 돌아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분들이 정말로 원을 가진 사람인지,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인지, 그냥 멍청하게 사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가끔 있어요.nbspnbspnbsp물론 일반인과 비교하면 여러분들은 굉장히 훌륭한 사람들이고 진짜 귀한 사람들이에요.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난관을 풀려면 이 정도로는 어려워요. 정세가 나날이 불리한 쪽으로 가고 있는데, 그 장애를 뚫고 나가려면 불리한 정세보다 우리의 내적인 힘이 더 커야 하거든요. 아무런 노력도 안 하고 있는데 상황만 점점 더 나빠진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희망이 생기는 게 아니라 점점 불리해질 뿐입니다.nbspnbsp장애를 뚫고 나갈 힘이라는 건 바로 여러분들의 삶에 대한 진실성, 성실성, 집중력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딱 집중해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만화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땐 다 집중을 하잖아요. 어떤 일을 즐기는 마음으로 해야 집중력이 높아지고, 효력도 생깁니다. 그런데 가끔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냥 비몽사몽간에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nbspnbspnbsp딱 집중해서 해야 합니다. ‘나의 이런 지극 정성에 어떻게 영험이 없을소냐’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예쁘다’, 조상님이 보시기에 ‘참 갸륵하다’, 귀신이 보고도 감동해서 ‘도와줘야 되겠다’ 싶을 정도로 정성을 쏟아야 됩니다. 또 마음이 진실해야 합니다. 마음이 거짓되면 천지신명이 감동을 안 하겠지요. 부처님말씀처럼 꾸준히 근면하고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꾸준히 하는 게 수행의 왕도라면 왕도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수행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nbsp장애를 뚫고 나가려면 삶에 대한 진실성, 성실성,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모두들 공감을 하며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통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있는지 스님의 지극한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 마음은 대중들에게도 다시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격려 말씀과 기념법문을 해준 후 스님은 천일기도 200일째를 맞이하여 1초도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릴레이기도 중 0시부터 0시 30분까지를 이어서 했습니다.nbspnbsp▲ 천일기도방에 부착된 날짜 표시판nbsp정토회관 2층 기도실에서는 계속 릴레이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1층 법당에서도 스님이 기도를 시작하자 대중들도 함께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배 한 배 절을 했습니다.nbspnbsp“넓고 깊은 원력 세워 보살도를 닦고 닦아 고통중생 구하시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nbspnbsp▲ 0시부터 0시 30분까지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이어가고 있는 법륜 스님nbsp스님 말씀처럼 지금의 첨예한 남북 갈등이 막연한 기대감을 버리고 오히려 진전된 관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갈등이 없었던 것보다는 있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더 나을 수도 있는 그런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 나도 작은 노력을 기울여 볼 것을 다짐해 봅니다.nbspnbspnbsp이렇게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기도 200일째 기념 법회와 기도를 모두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서울을 출발해 울산 두북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올해 봄에 씨감자를 북한에 보내서 식량 증산을 도모하고자 했는데 유엔 안보리 제재로 인해 씨감자를 북한에 보낼 수가 없게 되어 국내에서 먼저 실험 재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두북 수련원과 문경 수련원에서 실험 재배를 하기로 했지만, 스님은 “텃밭에서 얼마라도 직접 재배해봐야 하는데, 내일이 아니면 감자를 심을 시간이 없다” 하며 길을 재촉했습니다.nbspnbsp밤새 차를 타고 내려가 새벽 4시 30분에 울산 두북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땅을 먼저 갈아 엎고, 화장실에서 몇 년 묵은 발효된 똥을 퍼서 텃밭에 뿌린 후 씨감자를 심는 일을 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더 되면 텃밭 정비도 함께 할 계획입니다. ※ 2016년 봄,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갑니다. 강연일정 확인하시고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오세요. 강연은 선착순 무료입장입니다. 질문자 접수는 강연장에서 받습니다.

2016.03.15. 37,705 읽음 댓글 25개

2016.3.12 러시아 크라스키노(Kraskino), 우수리스크(Ussuriisk) 답사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독립운동과 발해 유적지를 찾아 크라스키노 지역과 우수리스크 지역을 답사했습니다. nbspnbsp어제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에 참가했던 일행들이 모두 깊이 잠든 새벽 5시. 영하 12도의 날씨에 칼바람이 부는 가운데 스님은 숙소를 나왔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답사를 다닐 계획입니다. 스님은 매년 8월이면 대중들을 이끌고 동북아 역사기행을 다니는데, 올해는 특별히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추가했습니다. 연해주에는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유적과 발해성 유적이 곳곳에 발견되었지만 아직 국내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신한촌역사회복재건 사업을 하게 된 인연으로 동북아 역사기행 코스에 연해주 일정도 추가하게 되면서 오늘은 하루 종일 답사를 다니기로 했습니다.nbspnbsp털모자, 목도리, 손장갑을 두둑히 착용하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블라디보스톡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독수리 전망대’ 입니다. 전망대에서는 화려한 금각교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져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nbspnbsp▲ 블라디보스톡 독수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각교nbsp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참가자들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면 독수리 전망대에 올라 이곳이 부동항으로 유명하다는 점과 함께 지형 지세를 설명해주면 좋겠다”고 하면서 조선소를 비롯해 곳곳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nbspnbsp블라디보스톡에서 차를 타고 내륙으로 2시간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습니다. ‘우수리스크’라는 지명은 ‘늪’을 뜻하는 ‘우수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곳이 옛날부터 늪이 많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발해 때는 솔빈부로 5경·15부·62주의 15부 중에 하나였습니다.nbspnbsp우수리스크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북쪽 외곽에 위치한 ‘4월 참변 추모비’입니다. 4월 참변은 일본군이 1920년 4월 45일 연해주 지역 러시아혁명군 관공서는 물론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톡 등지의 한인 집단거주지를 대대적으로 공격, 방화, 학살 등을 자행한 사건으로, 당시 우수리스크에 거주하던 애국지사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거주하던 한인 동포 300여명이 학살되었습니다. 새벽녘이라 영하 12도의 한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데도 스님은 한참 동안 묵념을 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했습니다.nbspnbsp▲ 4월 참변 추모비nbspnbsp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우수리스크 외곽에서 발견된 발해성 유적입니다. 나지막한 산에 외성과 내성을 쌓고, 수이푼강을 일부 자연 해자로 한 산성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nbspnbsp▲ 수이푼 강을 자연 해자로 한 발해 산성nbspnbsp먼저 외성의 윤곽을 살펴보기 위해 강이 보이는 비교적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이곳에서 돌멩이로 된 대포 알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하고, 적의 공격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참호를 판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nbspnbsp▲ 외성을 끼고 참호를 팠던 흔적nbsp다시 외성에서 내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으로 이동해 보았습니다. 성벽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높은 둔덕이 길게 뻗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내성 밖에는 다시 개울을 파서 해자를 만든 흔적도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내성과 내성을 둘러싼 해자로 추측되는 곳nbsp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동쪽에서 붉은 해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내성 안에는 현재 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성벽 전체를 다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부족해 일부 구간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대략적으로는 굉장히 큰 규모의 성이었음을 짐작만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다음에 다시 오면 성벽을 따라 전체를 한바퀴 둘러봐야겠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내비쳤습니다. 길을 내기 위해 성벽을 파헤친 곳에는 흙을 차곡차곡 쌓았던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이곳이 성벽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흙을 쌓았던 자욱이 줄무늬로 남아 있는 모습nbsp우수리스크에는 이 산성 외에도 시내에는 평지성이 있었다고 하는 옛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평지성은 1km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성이 나란히 있어서 옛날부터 이곳을 ‘쌍성자’ 라고 많이 불렀다고 합니다. 시내에 발해 시대 때의 절터로 추측되는 곳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지나가는 길에 잠깐 엿볼 수 있긴 했지만 ‘쌍성자’의 연원이 되는 평지성 유적은 찾지 못하고 우수리스크를 나왔습니다.nbspnbsp우수리스크를 나와서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할 때 출발역이었다고 하는 라즈돌리예역을 지나 ‘크라스키노’로 향했습니다. 라즈돌리예역을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직진하면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고, 오른쪽으로 계속 가면 북한의 나진 선봉까지 연결됩니다. 스님 일행은 크라스키노로 가기 위해 나진 선봉까지 연결된 도로를 약 3시간 동안 쉼없이 달렸습니다.nbspnbsp크라스키노로 가는 중간에 ‘바라바시’라고 불리우는 마을의 한 휴게소에 정차했습니다. 바라바시는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13도의군이 최초로 결집한 곳으로 여기서 유인석 선생이 도총재로 추대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해 일제를 몰아내는 것이었는데 이범윤, 이남기 선생도 이 때 함께 했었다고 합니다.nbspnbsp▲ 13도의군이 최초로 결집한 곳, 바라바시nbspnbsp바라바시를 지나 다시 한참을 달리니 두 갈래의 길이 나왔습니다. 왼쪽으로 가면 북한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중국 훈춘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스님 일행은 북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갔습니다. nbspnbsp▲ 왼쪽이 북한으로 가는 길, 오른쪽이 중국을 가는 길.nbspnbsp북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을 기념하는 비석이 나타났습니다. 단지동맹이란 안중근과 11명의 동지들이 1909년 3월초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이라 쓰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 일을 말합니다. 2001년 연추 마을 강변에 세워졌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해 유니베라 농장 입구인 현재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nbspnbsp▲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nbsp스님이 유니베라 농장 입구에 도착하자 장민석 법인장님이 나와서 반갑게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원래는 법인장님이 이곳 유적지를 안내해 주려고 했는데 급히 다른 용무가 생겨 장화를 빌려주고 크라스키노 발해성으로 가는 길만 안내해 준 후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nbspnbsp▲ 유니베라 농장 장민석 법인장님nbsp다음으로 향한 곳은 크라스키노에서 발견된 발해의 염주성 유적입니다. 크라스키노는 중국 훈춘 및 한반도 북부를 연결시켜 주던 군항 ‘포시에트’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발해는 건국 이후부터 일본과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이 오갔다고 합니다. 험한 바닷길을 통한 교류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발해의 사신단은 이곳 염주성에서 일본으로의 대장정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 염주성은 발해 시대 때 동경용원부 관할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nbspnbsp스님은 작년 여름에 염주성의 동쪽에 자리한 겔만 교수님의 캠프를 방문했었습니다. 당시 염주성과 캠프 사이에 위치한 강이 범람해 성 안으로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교수님의 설명만 들었는데, 오늘은 서문 쪽으로 연결된 길을 선택해 걸어가 보았습니다.nbspnbsp아직 눈이 녹지 않았지만 개울은 녹기 시작해 발이 진흙에 쑥쑥 빠지기도 했습니다. 갈대로 뒤덮인 흙길보다는 눈으로 덮인 개울 길이 더 찾기가 쉬워 눈 덮인 얼음길을 한참 동안 걸었습니다.nbspnbspnbsp초행길이라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며 동북아 역사기행 때 어떤 길로 안내해야 대중들이 쉽게 올 수 있는지를 여러차례 검토했습니다.nbspnbspnbsp장화를 신고 한참을 걸으니 기찻길이 나왔습니다. 이 기차길은 러시아의 하산역을 지나 북한의 두만강 철교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북한으로 이어지는 기차길이라고 하니 뭔가 의미가 남달라 보여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nbspnbsp▲ 북한으로 이어지는 기차길nbsp40분 남짓 걸었을까요. 장화를 신어서 그런지 다리가 저리고 아플 무렵 염주성 유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성벽이 마치 하트 모양처럼 약간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니 곳곳에 발굴이 진행된 흔적이 보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겨울이라 땅이 파인 곳은 모두 얼음이 꽁꽁 얼어 있어 자세히 들여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nbspnbspnbsp우선 동문 쪽으로 가서 동문의 발굴 현장을 살펴본 후 남문, 서문을 거쳐 성을 한바퀴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동문 자리는 이미 많은 발굴이 진척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 발해 염주성의 동문 자리nbspnbsp그런데 성문의 모양이 무척 특이했습니다. 성문 밖으로 옹성이 두 손을 보듬은 모양으로 둘러쌓여 있었는데 스님도 “참 독특하다” 라고 하면서 “자료를 더 찾아봐야겠다” 고 했습니다. 작년 여름에 겔만 교수님을 만났을 때는 교수님이 이 성의 지형도를 보여주었는데 이렇게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었습니다.nbspnbspnbspnbsp▲ 겔만 교수님이 그려준 성문 모양nbsp다시 성벽을 따라 계속 걸으니 남문 자리가 나타났고, 이어서 서문 자리도 보였습니다.nbspnbsp▲ 성벽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nbsp특히 서문 자리에는 가장 많은 발굴이 진척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얼음이 꽁꽁 얼어 있어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많은 유물이 이곳에서 출토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서문 자리 주위에 발굴 터nbspnbsp발굴이 한참 진행 중이어서 그런지 곳곳에서 발해 기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발해 기와의 특징은 뒷면에 그물망이 촘촘이 엮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기와도 이와 비슷하지요. 그리고 기둥을 받쳤던 용도로 사용된 주춧돌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발해 기와nbspnbsp▲ 기둥을 얹었을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nbsp이렇게 발해 염주성 곳곳을 자세히 둘러본 후 다시 성을 나왔습니다. 갈대숲 사이로 저 멀리 눈 덮인 산이 펼쳐져 절경을 이루었습니다.nbspnbsp염주성을 나와서는 하산전투기념비가 있는 언덕에 올랐습니다. 언덕에 오르니 저 멀리 바다 건너 포시에트 항구는 물론 염주성 성터와 연추 마을을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었습니다. 칼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절경에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nbspnbsp▲ 하산전투기념비가 있는 언덕nbsp스님은 이곳에서 다시 염주성의 위치와 크기를 다시 한 번 가늠해 보았습니다. 또 옆으로 눈을 돌리니 산 아래 연추 마을이 보였습니다. 연추 마을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머물다 간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지신허 마을과 함께 18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한인 마을인데, 남북으로 45km에 걸쳐 하·중·상연추 3개 마을이 연이어 있었다고 합니다. 1900년도에 들어오면서 최재형과 이범윤, 안중근 등이 동의회를 조직하는 등 연해주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던 곳입니다.nbspnbsp▲ 저 멀리 바닷가에 보이는 것이 염주성nbsp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원산, 청진에서 배를 타고 포스에트항에 내린 뒤 말을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달려가던 독립운동가들의 동선을 거센 바람을 따라 그려보니 가슴이 애틋해졌습니다.nbspnbsp▲ 산 아래 마을이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연추 마을nbsp하산전투기념비가 있는 언덕을 내려오자 오후 2시 30분이 되었습니다. 3시에 이곳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훈춘으로 가는 버스 막차가 출발한다고 해서 버스 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답사를 함께한 좋은벗들 동북아 역사기행 준비 스텝인 이승용님과 김경희님은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중국 훈춘으로 향했습니다. 8월에 동북아 역사기행팀을 이끌고 중국 훈춘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국경을 넘어와야 하는데, 실제로 국경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실무 점검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님은 스텝들이 무엇을 체크해야 하는지 꼼꼼히 점검한 후 두 사람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nbspnbsp▲ 중국 훈춘으로 가는 버스nbspnbsp이렇게 답사 일정을 모두 마친 후 스님은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습니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식사를 하지 못해 허기가 지고, 또 영하의 날씨에 장화를 신고 오래 걸었더니 다리가 아팠는데, 그럼에도 스님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염주성에 관한 연구 자료를 열심히 읽으며 열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nbspnbspnbsp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저녁 6시가 넘었습니다. 숙소에 도착한 후 원고 교정 업무와 각종 보고서들을 체크하고 저녁 식사를 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은 아침 8시 30분에 숙소를 나와 11시 25분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 한국 시간으로 12시 35분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03.14. 37,393 읽음 댓글 23개

2016.3.11 (오후)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 및 우수리스크 방문

nbsp앞서 오전에 열렸던 ‘연해주 한민족사’와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에 대한 학술회의에 이어서 오후 2시부터는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이 열렸습니다.nbspnbsp신한촌은 해외에 형성된 최초의 코리아타운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항일 민족지사들의 집결지이자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던 곳입니다. 그러나 1920년 4월 신한촌 참변인 일제의 대습격 학살과 만행, 1937년 9월 스탈린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로 신한촌은 해체되고 현재는 해외한민족연구소가 1999년에 세워놓은 기념탑 세 개만이 이곳이 신한촌이었다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nbspnbsp▲ 아파트 단지 사이에 세워져 있는 신한촌을 상징하는 기념탑nbsp이에 2015년 8월 15일 광복 70주년을 기하여 ‘신한촌역사회복재건위원회’가 법륜 스님을 위원장으로, 이창주 국제한민족재단 상임의장을 집행위원장으로 해서 구성되었습니다. 오늘 기공식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감된 한민족 독립운동의 역사와 선열들의 숨결을 회복 재건하고 통일 한반도로 내딛는 초석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마련되었습니다. nbspnbspnbsp오후 2시가 되자 각계 각층의 사회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애국 선열을 위한 묵념과 함께 기공식이 시작되었습니다. nbspnbsp▲ 애국 선열을 위한 묵념nbsp먼저 법륜 스님이 앞으로 나와 개식사를 하였습니다.nbspnbsp▲ 개식사를 하고 있는 법륜 스님nbsp“오늘 이렇게 많은 종교인, 경제인, 사회인사 분들이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해서 한 자리에 모여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한국의 5개 종단 대표들이 이렇게 다 참여하기가 쉽지 않은데, 김명혁 목사님을 비롯해서 김홍진 신부님, 김대선 교무님, 천도교 교령님을 대신해서 임형진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 사무처장님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nbspnbsp또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해서 지원해 주신 후원자님들도 참여해 주셨고, 또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참여해 주셨고, 또 재외 동포들에 대해 많이 연구해 오신 전문가 교수님들도 참여해 주셨습니다. 특히 이창주 교수님을 비롯한 국제한민족재단 관계자 여러분께 이렇게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오늘 각자가 믿는 모든 신들의 가호를 받아서 저희가 하고자 하는 일이 큰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nbsp각자가 믿는 모든 신들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는 스님의 이야기에 5개 종단의 종교인들은 큰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습니다.nbspnbsp▲ 기공식에 참여한 5대 종단의 종교인들nbsp이어서 이창주 교수님이 나와 경과보고를 하면서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부족하지만 함께 뜻을 모아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또 김명혁 목사님은 축사를 하면서 “우리 선배들이 개인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3.1독립운동을 이뤄냈듯이 우리들도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혼심의 힘을 다하자”며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홍신 작가님도 축사를 통해 “이런 뜻깊은 일을 통해 후손들에게 우리들은 떳떳한 선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며 기쁜 마음을 전했습니다. 또 재외 동포를 대표해서 이원주 필리핀JTS 대표님이 “이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통일을 위해 작은 역할을 해 나가겠습니다” 라고 인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nbspnbsp▲ 축사를 하고 있는 김명혁 목사님nbsp다음은 공사를 책임질 건축사무소 대표이사님이 나와 공사 개요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부터 3개월 동안 설계를 진행하고, 1차 공사가 3개월 간 진행된 후 다시 2차 공사가 3개월 동안 진행되어서 올해 안에 공사가 모두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먼저 담장을 제대로 친 후 담장 안에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의 얼굴 부조를 새기고, 한국적 문양으로 대문도 만들고, 전시관도 20평 가량으로 한 동을 짓고, 한국의 유적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누각도 하나 세운다는 기본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미 기본 조감도가 나와 있어서 황량한 이곳이 어떻게 바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 기념관 건축 조감도nbsp이어서 공사를 시작하는 마음을 모아 기념 시삽을 했습니다. 시삽 전에는 테잎 컷팅식도 가졌습니다. 먼저 5대 종단을 대표한 종교인들이 나와 다함께 시삽을 했습니다. “하나, 둘, 셋” 하고 외치자 삽에 흙을 얹어 힘차게 흩뿌렸습니다.nbspnbsp▲ 기공식 시삽nbsp다음은 학계와 경제계, 독립운동가 후손을 대표해서, 다음은 좋은벗들과 국제한민족재단의 실무자들이 연이어 시삽을 했습니다. 모두들 역사적인 순간을 만끽하며 얼굴에 함박 웃음을 머금었습니다.nbspnbsp▲ 학계, 경제계를 대표해서 다함께nbspnbsp이어서 경제인을 대표해서 김장만님이 만세 삼창을 선창했습니다. 참석한 내외빈들도 힘차게 두 손을 높이 들면서 만세를 외쳤습니다.nbspnbsp▲ 만세 삼창nbsp마지막으로 김홍진 신부님, 김대선 교무님, 장구갑 천도교 교령사님의 축도가 있었습니다. 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통일을 위해서는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이 모습만으로도 이미 무덤 속의 선조들이 무척이나 기뻐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nbspnbsp▲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이웃 종교인들의 축도nbsp이렇게 기공식을 모두 마치고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황량하게 기념탑만 세워진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미안해하고 죄스럽고 가슴이 아팠는데, 오늘 기공식을 계기로 무거운 마음들을 모두 날려 버릴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에 올라탄 내외빈들은 고려인들의 숨결과 독립운동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우수리스크로 이동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수리스크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법륜 스님이 이곳 연해주와 연해주에 얽힌 독립운동사, 발해 유적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우리는 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자꾸 우리 민족 하나만 생각하니까 중국에 비해 왜소하다고 생각하는데, 고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까지는 우리 나라가 중국보다도 앞선 문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한나라가 우리 고조선 영토의 일부를 빼앗아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동북방의 우리 영토 일부가 중국 한족한테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그에 대해서 ‘조선의 고토를 회복하자’ 하고 일어난 것이 ‘다물군’ 입니다. 다물이란 ‘옛 땅을 되찾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물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구국 의병입니다. 주몽도 다물군에 속했기 때문에 고구려를 세울 때 다물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하자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가 일어섰고, 발해가 요나라에 망하자 말갈족의 후예인 금나라가 일어섰고, 금나라가 멸망하자 청나라가 일어섰으니까 이 동북 지역은 거의 우리 민족과 우리 형제 민족들이 늘 관할을 했던 곳입니다.nbspnbspnbsp이 동북 지역이 일부라도 중국의 한족에게 지배를 받은 것은 한사군한테 넘어갔던 게 처음이었고, 두 번째는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명나라가 옛 원나라 영토를 관리하게 됐던 때이고, 세 번째는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지금 중국이 관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연해주는 청나라 땅이었는데, 강희제가 동진해오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어서 아무르강 이남으로는 못 넘어오게 해서 막았어요. 그러다가 청나라가 약해지니까 러시아가 더 밑으로 내려와서 아이훈 조약을 맺어서 하바로스크 지역까지 차지했습니다. 결국 북경조약으로 이곳 연해주까지 러시아가 차지한 건 1860년입니다. 겨우 150년밖에 안 됐어요. 즉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지고 전후 처리 문제로 복잡할 때 러시아가 개입해서 해결해 준 것을 계기로 연해주를 할량 받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러시아가 진출해서 들어왔습니다.nbspnbsp1860년 이전에도 이미 우리 민족이 여기에 들어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러시아 땅이 아니었고 주인 없는 땅이었는데, 1860년에 러시아가 여기를 지배하면서 여기 사는 우리 조선인에게도 등록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1863년에 처음으로 13가구가 등록을 하다 보니까 공식적으로는 1863년에 처음 이주했다고 하는 것인데, 살기는 이미 그전부터 들어와서 살았던 겁니다. 왜냐하면 두만강만 건너면 여기는 주인 없는 땅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두만강을 건너서 지금의 하산에서 조금 더 올라오면 크라스키노가 나오는데 거기가 연추 마을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한 곳도 거기였고, 독립운동가들의 군사훈련 연병장도 거기에 있었으니 연추마을은 무장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셈입니다.nbspnbsp그리고 많은 분들이 최재형 선생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기록에 보면 최재형 선생은 1860년대에 부모님을 따라 연추 마을로 이주해 왔다가 블라디보스톡까지 오게 되었는데, 너무 가난하니까 길거리에서 구걸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블라디보스톡에서 배를 운행하는 한 선장이 구걸하는 아이를 보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켰다고 해요. 그래서 최재형 선생은 한국사람 중에 서양교육을 제일 먼저 받은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러시아 말도 잘하고, 여러 재주가 있다 보니 여기서 사업으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또 양부모가 러시아 사람이다 보니 후원도 받았고요. 특히 연추에 있는 러시아 부대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일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또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 해군으로 참전을 했다고 합니다. 보통 부자가 되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최재형 선생은 그런 경력이 있다 보니 일본에 대한 저항감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최재형 선생이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었고, 이범윤 선생이 간도 관리사를 하다가 나라가 기울어지니까 을사늑약 이후에 여기 와서 의병운동을 할 때 최재형 선생이 부자라는 소문을 듣고 도움을 요청했나 봅니다.nbspnbsp그 다음에 유인석 장군도 넘어와서 13도 의군을 조직했고, 그러면서 여기는 최재형 선생이 거의 다 지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돈도 많았지만 러시아 군대에 식료품을 공급하는 일을 했으니까 군대와 아주 잘 알아서 러시아의 최신무기를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사들여 독립군에 공급을 했나 봐요. 마치 최진동 장군의 형제들이 봉오동 지역을 개척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봉오동 전투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재정을 모두 지원했듯이 최재형 선생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 이후 권업회 창설, 권업신문 발간, 상해임시정부 재정부장 등의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1920년도에 신한촌 참변이 일어나자 결국 최재형 선생도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 잡혀 총살을 당해 죽게 됩니다.nbsp우수리스크는 옛 발해의 솔빈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시내에서 발해의 평지성이 발견되었고, 외곽에는 산성이 1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성이 2개 있었다고 해서 우수리스크, 즉 ‘쌍성자’라고 불리웠던 겁니다. 옛날 지명에는 다 쌍성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이 1㎞ 정도 간격을 두고 2개 있었다고 하던데 시내 개발을 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제대로 답사를 못 했습니다. 산에 있는 성만 지난번에 김홍신 작가님과 같이 올라가서 토성으로 쌓은 것만 확인했거든요.nbspnbsp▲ 버스 창 밖. 꽁꽁 언 바다.nbsp이렇게 봤을 때 우리가 이곳으로 역사기행을 온다면 결국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발해의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고, 둘째, 독립운동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어요. 독립운동유적지는 초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주로 운동했던 곳이 있고, 나중에 김일성이 머물렀던 B캠프 자리 등이 있어요.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당한 라즈돌리예 역에서 5분 정도만 더 가면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처음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와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nbspnbsp스님이 설명을 계속 하고 있는 사이 버스 창밖으로는 꽁꽁 언 바다가 보였습니다. 조금 더 가니 다리가 하나 보이고 도로가 길게 쭉 뻗어 있었는데, 스님은 이 길이 북한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nbsp▲ 북한까지 연결된 도로nbsp조금 더 차를 달리자 1937년도에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당했다고 하는 라즈돌리예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황막한 기차역을 보니 지금도 한 맺힌 절규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밭에서 일하다 말고 호미를 던져둔 채, 부엌에서 밥 하다 말고 숟가락을 던져둔 채 강제로 기차를 타야 했다고 하니, 거기다가 먹을 것도 없이 수만리를 짐짝처럼 기차에 실려 가야 했으니, 그 탄식이야 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nbspnbsp▲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라즈돌리예 역.nbsp라즈돌리예 역에서 조금만 더 가니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처음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와 건물이 보였습니다. 번듯한 2층 건물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nbspnbsp▲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nbsp버스는 이제 우수리스크로 접어 들었습니다. 먼저 우수리스크 외곽에 있는 이상설 유허비를 찾았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한국 독립을 주장했으며, 연해주에서는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순국한 분입니다. 선생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에 뿌렸는데,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에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선생의 넋이라도 조국의 품으로 안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참가자 일동은 묵념을 했습니다.nbspnbsp▲ 이상설 유허비nbsp다음은 최재형 선생이 1920년 4월 5일 새벽 일제에 체포될 당시까지 거주했던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 거리 38번지 옛 집을 방문했습니다.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양국의 국기를 새기고 최 선생의 업적을 담은 동판이 부착되어 있어 이곳이 유적지임을 기념하고 있었습니다.nbspnbsp▲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을 지낸 옛 집nbsp마지막으로 우수리스크 시내에 위치한 고려인문화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센터 안에는 19세기 이후의 한인 이주사부터 시작해서 연해주에서 있었던 다양한 항일 독립운동 역사,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의 아픔, 다시 희망을 찾아 돌아온 재이주의 역사가 사진과 글로 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한 장, 글 한 줄을 읽으며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nbspnbsp▲ 고려인문화센터nbsp이렇게 우수리스크 지역 방문을 모두 마친 후 다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식사 자리에서는 오늘 선조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여러 유적지를 둘러본 소감을 서로 나누며 감동의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식사를 마치면서는 마지막으로 스님이 일어나서 이번 신한촌 역사회복재건 사업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을 부탁했습니다.nbspnbspnbsp“오늘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은 그래도 신한촌 역사회복과 재건을 위해 후원금을 많이 내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만 돈을 내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이 사업이 잘 되도록 주위 사람들 중에 다섯 명씩 더 모아 오셔야 합니다. 알았지요?nbspnbsp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한테 돈 달라는 얘기는 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정토회 법당 만들 때도 돈 내라는 소리는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창주 교수님이 하도 사정을 해서 돈을 좀 내라는 말을 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이번 한 번만 돈 내라는 얘기를 하고 끝을 내려고 하니까 대신 여러분들이 모금을 좀 많이 해 주세요. 후원금을 많이 낸 33인에게는 신한촌 기념관 준공식을 할 때 돌에 이름을 새겨 드린다고 하네요. 이걸 갖고 신문 광고까지 낼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nbsp참석한 내외빈들은 큰 박수로 스님의 뜻에 공감을 표하고 그렇게 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nbspnbsp우수리스크를 출발한 일행은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습니다. 밤 9시 무렵에 숙소에 도착해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은 참석한 내외빈들 모두가 아침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스님과 실무자 몇 명은 올해 8월에 있을 동북아 역사대장정 코스를 개발하기 위해 이곳에 하루 더 남아서 발해 유적과 독립운동 유적이 있는 크리스키노 지역과 우수리스크 지역을 조금 더 답사할 예정입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03.13. 52,655 읽음 댓글 28개

2016.3.11 (오전) 신한촌역사회복재건 학술회의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의 2일째 날을 맞이해 한민족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기념 학술회의에 참석해 개막연설을 한 후 각계 각층 인사들과 함께 기공식을 갖고, 독립운동의 얼이 서려 있는 우수리스크 지역을 방문했습니다.nbspnbsp먼저 오전 9시부터는 ‘러시아 연해주 극동대륙의 한민족 통사와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을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학술회의장 창 밖에는 ‘아무르만’이라고 불리우는 바다가 보였는데, 얼음이 꽁꽁 얼어 있어 이곳이 러시아 땅임을 실감나게 했습니다.nbspnbsp▲ 영하 10도의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 아무르만nbsp학술회의는 제1회의와 제2회의로 나뉘어져 진행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발표가 있기 전에 먼저 스님이 ‘러시아 한민족사의 숨결과 흔적’을 주제로 개막연설을 하였습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한 학술회의nbspnbsp“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우리 민족의 근대사와 독립운동사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1800년대 이후에 조선왕조는 국가가 사실상 붕괴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백성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특히 1860년대에 있었던 기근과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이 기아로 굶어 죽는 비참한 일도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주로 남쪽에 살던 국민들은 견디다 못해서 민중봉기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던 삼도 민중봉기입니다. 그러나 북쪽에 살던 민중들은 그런 저항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압록강을 건너서 서간도로, 두만강을 건너서 북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할 수 있는 출구가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로의 이주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nbspnbsp▲개막연설을 하고 있는 법륜 스님nbspnbsp그런 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국내적으로는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개화파가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갑신정변이 있었지만 실패로 끝났고, 또 아래로부터 민중들의 삶을 개선해 보고자 동학혁명이 일어났지만 이 또한 지배자들이 외세를 끌어들여서 혁명을 진압하는 바람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끌어들인 외세들끼리 다투게 되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3.1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그것 또한 실패로 끝났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종말로 1945년에 해방을 맞긴 했지만 우리 힘으로 해방을 이루어낸 게 아니다 보니까 결국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그것은 또한 6.25전쟁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은 통일은커녕 평화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게 지난 우리 민족의 근현대 150년 역사입니다.nbspnbsp그런 가운데 국외적으로는 국내 상황이 힘드니까 1860년대부터 가난한 백성들이 스스로 생존을 위해서 해외이주를 시작했고, 나라가 아예 기울어진 이후부터는 애국지사들이 이민자들의 삶을 기초로 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투쟁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해외독립운동사입니다. 해외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살펴보면 이주민의 수가 가장 많았던 북간도가 첫 번째 중심지였고, 연해주가 두 번째 중심지였고, 또 압록강 건너 서간도가 세 번째 중심지였습니다. 또 일부는 중국 관내로도 들어가 상해가 네 번째 중심지가 되었고, 다섯 번째로는 미국의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연해주는 우리 해외독립운동사의 제1 또는 제2의 성지임에도 지금 우리 역사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이번 신한촌역사회복재건 사업이 우리 역사에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나 민족의 이민사를 제대로 반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nbspnbsp러시아는 우리 민족에게 때로는 희망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1863년에 우리 민족이 두만강을 건너 최초로 지신허 마을에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이곳 블라디보스톡이나 우수리스크 등에도 이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이곳이 이민자들에게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이어서 1904년도에 있었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분들이 이곳 연해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때 간도 관리사를 하던 이범윤 선생과 의병장을 하던 유인석 선생도 이리로 넘어와서는, 이미 이곳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최재형 선생의 후원을 받아서 국내진공작전을 펴는 의병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또 안중근 의사도 최재형 선생의 도움으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단지동맹을 이곳 연추 마을에서 하게 됩니다. 이때만 해도 블라디보스톡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돕는 중요한 후원세력의 근거지였습니다.nbspnbsp그러나 1910년을 지나서 제1차 세계대전이 임박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과 연합국으로 협력하게 되면서 이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 부대의 해산을 종용하게 됩니다. 1910년경 유인석, 이범윤 선생을 중심으로 13도 의군을 창설할 때만 하더라도 13도 의군은 우리 민족 최대의 의병부대였는데, 러시아의 압력으로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한 채 해산하게 됩니다. 그 일을 계기로 최재형 선생은 권업회를 만들어서 산업 신장을 꾀하는 듯 위장하는 식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1910년 이후에 러시아와 일본이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일은 이곳에 사는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좀 더 본격화하는데 큰 장애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러시아에게 첫 번째로 배신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nbspnbspnbsp그러다가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고, 러시아혁명정부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다시 러시아는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희망이 됩니다. 그래서 연해주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고, 독립운동도 활기를 띠게 됩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19년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이곳 연해주에서도 3.17독립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최초로 임시정부 형태의 ‘대한 국민의회’가 형성되고, 그것이 나중에 상해임시정부와 통합을 해서 실질적인 임시정부가 형성되게 됩니다. 우리는 상해임시정부만 생각하는데, 그것의 주축이 된 이동녕, 이동휘, 문창범, 최재형, 이상설, 이런 분들은 모두 연해주 출신의 독립운동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1920년도에 우리 고려인 독립운동세력과 러시아 혁명세력이 연합해서 3월에 일본군을 무찌르는 성과도 냈는데, 4월에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이 지역에 있던 독립운동세력이 학살되는 4월 참변을 겪게 됩니다.nbspnbsp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북간도로 들어가서 북간도에 있던 독립운동세력과 협력해서 6월에는 봉오동전투,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런 승리가 우리 민족에게는 큰 희망이 되었지만 결국 일제의 보복, 즉 무자비한 탄압으로 수많은 이주민이 학살되고, 재산이 불태워지는 경신참변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독립운동세력이 더 이상 중국 안에서 백두산을 근거지로 삼아 있을 수가 없게 되자 결국 1920년 말에는 모두 러시아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1921년도에 연해주에 있던 독립군 세력과 북간도에 있던 독립군이 전부 러시아의 자유시로 모여들게 되었는데, 그때 군 주도권을 둘러싸고 연해주의 독립운동세력 중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르크추크파가 러시아로부터 군권을 허락받고 러시아혁명군과 함께 무장해제를 불응하는 독립군을 엄청나게 학살하는 흑하사변, 즉 자유시참변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말엽부터 시작되어 20세기 초엽까지 형성되었던 3,500명 규모의 독립군 최대 세력이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와해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1921년에 우리 독립운동의 최대 세력이 러시아혁명군에 의해서 해산되어 버리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러시아에게 두 번째로 배신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nbspnbsp그리고 1937년에 스탈린은 여기 사는 우리 한인들에게 일본군의 간첩으로 활동한다는 혐의로 2500여 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여 죽였을 뿐만 아니라 17만 명이나 되는 우리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연해주에 뿌리내렸던 한인들의 삶이 송두리채 뿌리 뽑혀서 사라지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1940년에 다시 러시아가 일본과 갈등을 겪으면서 동북연군에 참여했던 많은 민족지사 중 일부가 러시아로 넘어왔고, 그들이 1945년에 소련군과 같이 북한에 들어와 북한정부의 구성원이 되면서 어찌 보면 민족분단의 하나의 축을 형성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nbspnbsp이렇게 역사를 되돌아보면, 러시아는 고통받던 우리 민족에게, 또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애국지사들에게 때로는 희망이 되어주었고, 때로는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의 이런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외국에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그런 보이지 않는 위험을 안게 된다는 교훈을 이런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nbspnbsp좋은벗들에서는 매년 여름 중국의 북간도, 서간도로 역사기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만 아직 연해주는 일정에 포함시키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국제한민족재단에서 매년 시베리아횡단여행을 하다가 이곳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를 재건하는 게 필요하다는 제안을 적극적으로 해주어서 이와 같이 신한촌 복원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도 늘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라서 형편은 어렵지만 함께 해 보자는 마음을 내어 오늘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바쁘고 어려운 가운데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말씀을 드립니다.”nbsp스님의 감사 인사에 참석자들도 뜨거운 박수 갈채로 화답했습니다.nbspnbspnbsp한민족의 통사가 가장 많이 서려 있는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희망과 좌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져 왔습니다. 게다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연구조차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 하면 안중근 의사만 떠올리게 되는데,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민족지사들이 이국 땅에서 이름 없이 묻혀 갔을지 가슴이 저미어 왔습니다. 또 러시아가 우리에게 준 희망과 좌절의 양면성을 얘기하며 지나치게 외세에 의지하면 안 된다는 역사적 통찰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nbspnbsp이곳 연해주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제관을 넓혔고, 시대에 저항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립의 깃발을 올렸고, 임시정부의 시초인 국민의회도 여기서 조직되었고,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고 생각하니 이곳이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하게 여겨졌습니다. 다행히 ‘신한촌역사회복재건위원회’를 통해 오늘 다시 그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쁜 날인 것 같습니다. nbspnbsp이어서 제1회의에서는 임채완 전남대 교수님이 ‘러시아 연해주 한인의 이주 역사’에 대해 발표를 하였고, 김게르만 카자흐스탄국립대학 교수님이 ‘한민족의 허브 신한촌’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특히 제1회의를 마치면서 패널로 참가한 김홍신 작가님은 신한촌의 재건이 평화통일의 지름길로 이어지길 당부했습니다.nbspnbsp▲패널 토론을 하고 있는 김홍신 작가님nbspnbsp“독립운동의 현장은 민족 정신을 지켜주는 백신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위대한 영웅이 나타난다고 하죠. 100년 전 처럼 지금도 대한민국은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데, 신한촌 재건은 어쩌면 우리가 이런 전쟁의 상황을 극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바둑의 세계 최강자를 인공지능이 이겼는데, 따뜻한 평화통일도 우리가 빨리 해내지 못하면 앞으로 국경수비도 로봇이 하게 될지 모릅니다.nbspnbsp그렇게 되면 남북분단은 영원히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오늘 신한촌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비단 신한촌 재건의 문제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민족 정신사의 재건으로 이어지게 해서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지름길을 우리가 만들면 좋겠습니다.” nbspnbsp이어서 제2회의에서는 김성민 건국대 교수님이 ‘고려인의 민족 정체성’에 대해, 송지나 블라디보스톡 극동대학 교수님이 ‘최초의 코리아타운 신한촌의 조선독립운동사’에 대해 발표해 주었습니다. 특히 송지나 교수님은 고려인으로서 개인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신한촌의 역사를 알려주어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nbspnbsp제2회의를 마치면서는 스님이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주었습니다. 발해 이야기와 송지나 교수님의 개인 가족사를 관심있게 들었다고 하면서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으로 네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nbspnbsp“첫 번째로, 이 연해주는 발해 시대의 동경용원부의 일부와 솔빈부에 속했습니다. 땅 면적을 기준으로 보면 연해주가 당시 발해의 전체 영토 중 3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 연해주에 묻혀있는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nbspnbspnbsp두 번째로, 조금 전 송지나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역사는 가족사로 접근했을 때 훨씬 더 깊이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제 옆에 최성주 선생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봉오동전투를 이끈 최진동 장군님의 동생 최운산 장군님의 손녀이십니다. 송지나 선생님도 그 3세손이 되시고요.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신한촌의 역사와 봉오동 전투의 사실들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우리는 ‘봉오동 전투’ 하면 ‘홍범도 장군’만 떠올리는데, 실제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병사들 밥 해 먹이고, 훈련시키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 준 노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잖습니까. 그런 역사는 아마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 구술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사의 경우에는 그 당시에 ‘내가 독립운동 한다’ 하는 걸 알리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실제 독립운동을 해도 증거를 다 소멸하면서 했잖습니까. 그런 사정이 있었는데, 오늘 날 학자들이 독립운동사를 정리할 때 너무 증거주의만 고집하니 안타깝습니다.nbspnbsp저도 저희 스승님으로부터 3.1독립운동에 대해 들을 때 스승님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학문적으로는 채택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증거가 없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독립운동지사의 손자 되시는 두 분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세 번째로, 이번 자료집에 애국지사 여덟 분의 사진이 실렸는데, 이분들은 이미 한국에서 잘 알려진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분이 최재형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최재형 선생의 도움을 받아서 처음으로 국외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분들이 13도 의군의 대장을 했던 유인석 선생과 간도관리사를 했던 이범윤 선생입니다. 저는 이 두 분에 대한 자료가 좀 더 복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연해주에서 제일 유명했던 분은 문창범 선생이잖아요. 얼마나 유명했으면 별명이 ‘대통령’이었겠습니까. 그리고 65세의 연세로 안중근 의사처럼 폭탄을 투척한 연해주의 노인동맹소속 강우규 지사도 계시잖습니까. 이 분들에 대한 것도 이번에 복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네 번째로, 역사학자들이 러시아와 우리 민족사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첫째,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에 러시아는 우리에게 희망이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인 1910년에 우리가 13도 의군을 만들었을 때 그걸 못하게 한 게 제정러시아 정부였습니다. 제정러시아와 일본과의 협력관계 때문에 그랬던 건데,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양만 바꿔 만든 권업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둘째, 러시아 혁명이 우리 독립운동의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었고, 또 우리는 1920년에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에서 승리도 했는데, 일본군의 공격에 못 이긴 만주 군벌 장작림이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를 믿고 러시아로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북간도 독립군과 연해주 독립군이 다 합쳐져서 3500명 이상의 대부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군권투쟁이라고 하는 내부의 문제도 있었지만 어쨌든 볼셰비키에 의해서 궤멸됐다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셋째,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그렇게 탄압을 받고 있는데도 러시아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첩자노릇을 한다면서 연해주에서 2500명 이상을 학살하고 17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습니다. 넷째, 러시아는 결정적으로 1945년에 우리 민족이 분단되도록 하는데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분단은 결국 6.25전쟁으로 이어졌고, 현재도 우리 민족은 그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우리의 희망이기도 했고, 우리에게 좌절도 준 러시아와 우리 민족과의 문제, 즉 연해주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융합해 낼 거냐가 우리 역사학자들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하시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nbsp스님의 네 가지 제안에 학자들도 모두 공감을 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이렇게 ‘연해주 한민족의 역사’에 대한 학술회의를 모두 마쳤습니다. 학술회의를 마치고 나니 왜 신한촌의 역사를 회복하고 재건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이 더욱더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nbsp점심식사를 한 후 참가자 전원이 꽁꽁 얼어 붙은 아무르만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곧 봄이 오면 얼음도 서서히 녹아나듯이 전쟁의 위험에까지 치달은 남북관계도 해빙 무드가 빨리 찾아오길 간절히 기원해 보았습니다.nbspnbsp▲ 학술회의에 참가한 내외빈 모두 함께nbspnbsp기념사진 촬영을 마치고 나서는 기공식을 하기 위해 곧바로 신한촌으로 이동했습니다. 신한촌으로 이동하는 길에는 고려인 송지나 교수님이 블라디보스톡 시내 곳곳을 안내해 주었습니다.nbspnbsp창밖으로 보이는 많은 건물들이 제정러시아 때 지어진 건물들인데 14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nbspnbspnbsp또 이곳 블라디보스톡에는 레닌 동상이 2개 있었는데 페레스트로이카 때 동상 1개는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송지나 선생님은 혁명정부가 교회를 폭파하는 소리를 어머니가 듣고 너무나 무서워했던 기억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폭파된 자리에는 레닌 동상이 세워졌는데 페레스트로이카 때 다시 레닌 동상이 철거되고 현재는 그리스정교회 교회가 새로 지어졌다고 합니다.nbsp▲ 레닌 동상이 철거된 자리에 새로 세워진 교회nbsp과거 신한촌이 자리했던 곳에는 지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도로가 새로 나고 아파트가 줄지어 건설되면서 신한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현재로서는 분간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사이에 삼각지 모양의 좁은 공터 위에 기둥 세 개가 떡하니 놓여 있어 그나마 이곳이 신한촌이었음을 표시해 주고 있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오후 2시부터는 이곳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각계 각층 인사가 자리한 가운데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03.12. 41,778 읽음 댓글 18개

2016.3.10 발우공양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도착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서울공동체 발우공양에 참석해 ‘일과 수행의 통일’에 대해 법문한 후 신한촌 역사회복재건 기공식 및 학술회의를 위해 각계 각층 인사를 모시고 인천공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새벽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은 정토회 서울공동체 발우공양에 참석해 공양을 드셨습니다.nbspnbsp▲ 발우공양nbsp공양을 드신 후에는 지난 일주일 동안 필리핀JTS 사업장을 방문하고 온 소회를 이야기하면서 그 중 대중 생활과 관련해서 애로사항이 제기되었던 것을 공유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특히 삶 속에서 ‘일과 수행의 통일’을 실천해 나가려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지난번에 인도에 방문했을 때 대중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애로사항에 대해서 들었는데, 이번에 필리핀에 방문했을 때도 역시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을 생각하면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데, 대중 생활을 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데요. 대중 생활이 어려워 문제제기를 자꾸 해서 내부 화합이 잘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nbspnbsp과거에는 자기네 마음대로 자유롭게 산다고 밥도 같이 안 먹고 따로 먹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니 지금까지 그렇게 생활하던 습관 때문에 수행과 대중 생활을 제대로 못해서 문제가 되고 있나 봐요. 지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작년 봄부터 필리핀과 인도 사업장을 수행공간으로 하고, 수행자들이 봉사하는 것으로 하되 그걸 못 하겠다는 사람은 다 회향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인도네시아에서는 사업장을 다 철수했고요. 정토회 설립취지 대로 앞으로는 해외 구호사업장도 수행자들이 수행하고 봉사하는 수행도량으로 정했는데, 아직도 그렇게 살지 않던 과거의 습관이 남아서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지요.nbsp개인의 삶을 보더라도 밥은 먹고 싶고, 살찌는 건 겁이 나고, 살찌는 거 생각하면 안 먹어야 되고, 먹고 싶은 거 생각하면 먹어야 되고 그렇지요. 해외 구호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생각하면 봉사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되고, 그럴려면 봉사자들의 취향을 허용해야 된다는 문제가 남습니다. 또 주어진 사명이 ‘수행자들이 살면서 봉사하는 수행도량화 해야 한다’ 하는 것이니까 수행도량의 원칙을 잡아야 되는데, 또 원칙을 잡으니까 사람이 떨어져 나가고, 사람을 잡으려니까 원칙이 어그러지고, 이런 것 때문에 고민이 생깁니다.nbspnbsp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칙을 중심으로 해서 갈 사람은 가게 하고, 그래서 일이 안 된다면 안 되는 대로 해야겠지요. 아니면 일을 우선해야 된다면 원칙은 젖혀두고 그 사람이 요구하는 대로 받아들여서 일을 할 수 있게 하든지요. 그러니까 이거든 저거든 하나로 결정하면 문제해결이 제일 쉽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은 모두 행자대학원생이니까 수행이 절대적 중심이지 다른 게 중심일 수 없잖아요. 그래서 수행원칙에서 어긋나면 그대로 회향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인도나 필리핀은 수행원칙과 일이 충돌한다는 거죠. 통상 이것도 포기할 수 없고, 저것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번뇌가 생기는 건데 둘 다 필요하다면 둘 다 하는 게 수행입니다.nbspnbsp그럴 때는 ‘원칙을 지키되 일도 해야 되고, 일을 하되 원칙도 지켜야 된다’ 하는 게 과제가 되겠죠. 그 과제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중도’입니다. 그 사람들의 취향을 받아들여서 일이 되도록 함과 동시에 수행도량의 원칙도 지켜가면서 그 사람들과 갈등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이게 수행 과제가 되는 겁니다.nbspnbspnbsp‘도대체 어떻게 하란 얘기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일에 책임을 안 지는 사람이나 수행도량을 지킬 책임이 없는 사람은 그 둘 중에 하나의 입장만 취하면 됩니다. 그러나 수행도량의 원칙도 지켜야 되고 일도 반드시 해내야 될 책임을 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둘을 어떻게 조화롭게 해 나가느냐가 수행이 됩니다.nbspnbsp다시 말해서 모순을 승화시키는 게 수행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모순된 그 두 가지가 늘 갈등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직장을 구할 때는 월급이 많으면 일이 많고, 일을 좀 수월히 하면 월급이 적고, 결혼 상대자를 구할 때는 돈은 많은데 사람 성질이 더럽고, 성질은 좋은데 돈이 없고, 이런 것처럼 이 세상에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없습니다. 다 자기 입장에서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볼 때 부족한 것이지 그 사람 자체는 원래 그런 거예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두 가지를 다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nbsp그래서 첫 번째, 욕심 때문에 두 가지 번뇌가 생길 때는 욕심을 내려놔야 됩니다. 두 번째, ‘밥은 먹고 싶다’ 이건 까르마, 업식, 마음이고, ‘먹으면 안 된다. 건강에 나쁘다’ 이건 생각이잖아요. 이런 갈등은 이성과 감성 사이의 갈등, 마음과 생각 사이의 갈등입니다. 이런 건 어떻게 중도적으로 통일할 수 있을까요? 생각에 우선을 두면 의지로 버텨야 되니까 심리가 억압을 받게 되고, 긴장이 되고, 그러면 행복하지가 못 하지요. 욕구를 따라가면 일시적으로는 기쁜데, 결과적으로는 나한테 손해가 됩니다. 그 둘을 어떻게 조정할 거냐 하는 게 중도입니다.nbspnbsp요구를 따라가지 않으면서 긴장도 하지 않는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경직되지 않는다, 사람들을 포용하면서도 원칙은 지켜나간다, 이런 과제들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극복을 해야 합니다. 그런 모순이 없는 세상에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일은 해야 되는데 사람은 없거나 또는 사람은 있는데 돈이 없거나 이런 식의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괴로움 없이 해결해 나가느냐가 바로 우리가 직면한 인생의 현실적 과제입니다.nbspnbspnbsp여러분 개인적으로는 아마 몸이 아파서 쉬니까 일이 안 되고, 그렇다고 좀 나아서 일을 하려니까 또 몸이 안 따라주는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그 사이에서 또 갈등을 하게 될 텐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픈 몸으로 일을 할 때는 아프지만 조금이라도 일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을 해야 된다’는 부담감과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갈등을 여러분 스스로 조정할 수 있어야 아파도 편안하고, 일을 안 해도 편안하고, 일을 많이 해도 편안하고, 밤잠 안 자고 일을 해도 편안하고, 아프면서 일을 해도 편안할 수 있는 거예요.nbspnbsp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처작주’입니다. 즉 ‘어느 곳에 처하든 주인이 돼라’는 주인의식이 중요합니다. 물러나는 마음을 낼 때는 주인의식이 없을 때입니다. 물러나는 마음이 나면 마치 남의 일처럼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첫 번째는, 자기가 해결해야 될 과제로 딱 삼는 자세, 즉 주인의식과 책임감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긴장하지도 않으면서 깨어있는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로, 그게 잘 안 될 때는 꾸준히 연습해 나가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 자세로 조금씩 완성시켜 나가는 게 수행입니다. 명상하고 절하는 것만 수행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갈등이나 자기 몸 상태를 가지고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수행하면서 늘 중도를 체험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 모두 편안한 가운데 밝게 일을 해 나가는 수행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몇몇 행자님이 인도나 필리핀을 다녀온 뒤로 건강이 안 좋다고 하던데, 그럴 이유가 뭐예요? 마음이 해이해져서 행자라는 걸 잊었던 거 아니에요?nbspnbspnbsp어쨌든 몸을 잘 추스르세요. 그러면서 당면한 현실에서 주어지는 과제들을 대할 때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되느냐? 이게 수행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고 하지 말고, 수행삼아 잘 풀어보세요.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똥 치우는 일, 밭가는 일, 밥하는 일이 주어질 수도 있는데, 어떤 일이 주어지든 수행삼아 하다 보면 똥 치우는 방법, 밭 갈거나 밥하는 기술을 익힐 수가 있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모든 게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nbspnbsp제가 어릴 때 풀이나 나무 벤 거, 낫질하거나 괭이질 한 거, 말뚝 박은 거 등이 그 일로써 끝난 게 아니라 의외로 생활할 때도 도움이 되고, 수행할 때도 도움이 되고, 해외활동 할 때도 도움이 됐거든요. 밥할 때나 연탄불 갈 때 불을 안 꺼뜨리려고 애쓰던 일, 그런 게 수행입니다. 감옥 가고, 두드려 맞고, 고문당한 것도 그때는 고통이었지만 지나놓고 보면, 돌이킬 수만 있으면 그게 다 수행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경험이든 다 자기 삶의 일부가 되고, 성장의 밑거름이 됩니다.”nbspnbsp어떤 일이 주어지든 수행삼아 하다 보면 모든 것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씀에 공동체 대중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곧 선거가 다가오게 되는데 공동체 대중들도 부재자 투표 신청을 해서 주권행사를 꼭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nbsp“4월 중순에는 선거가 있으니까 미리 부재자 투표를 신청해서 주권행사를 하세요. 우리 사회가 지금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잖습니까. 1, 2월 수출은 지난 해에 비해 거의 20 가까이 감소했다고 하잖아요. 그런 가운데 빈부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현 정부가 들어설 때 경제성장을 강조했지만 성장도 안 되고 있고, 경제민주화를 얘기했지만 빈부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고, 청년실업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고, 노인복지를 해결한다지만 OECD 가입국 중에 노인빈곤율이 제일 높고, 남북관계는 전쟁 위기에 처할 정도로 나빠졌고, 두만강 프로젝트도 멈췄습니다.nbspnbspnbsp또 요즘처럼 국내정치가 시끄럽고 유별난 건 처음 봅니다. 여당은 여당 내부적으로 싸우고, 여당과 청와대가 싸우고, 여야가 싸우고, 야당도 갈라져서 싸우고, 갈라져 나간 데서는 또 그 안에서도 싸우고, 남아있는 쪽도 싸우고, 남북 간에도 싸우고, 한일 간에도 싸우고, 한중 간에도 갈등하고, 지금 이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제, 정치, 안보, 통일, 국민 통합, 평화 유지가 다 위기에 처했습니다. 국민 통합은 커녕 국민 분열의 시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총체적인 국가 불신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아요.nbsp특히 국가권력이 중앙에, 그 중에도 대통령에게 너무 독점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번 선거가 끝난 뒤 보수도 보수와 중도 보수로 나뉘고, 진보도 중도 진보와 진보로 나뉘어서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받을 수 있는 다당제 구조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사안에 따라 서로 연정하는 식이 되어서 국가도 안정되고, 지금과 같은 극한적 갈등도 없어질 겁니다. 양당 구조는 선의의 경쟁을 할 때는 좋은 모델인데, 이렇게 극한적 투쟁을 할 때는 국가가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러니 이번 총선에서 가능하다면 통일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 양당 구조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 한 당의 독주를 막는 것,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그런 문제들을 푸는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선출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이런 관점을 갖고 주권행사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nbspnbsp공동체 대중들은 스님의 말씀에 모두 공감을 표하며 한 말씀 한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도 국민들이 각성해서 투표에 제대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발우공양을 모두 마친 후 스님은 짐을 챙겨 오전 10시 20분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인천공항에는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염원하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속속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았습니다.nbspnbsp▲ 인천 국제공항nbsp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은 극동 시베리아 대륙의 한민족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민족독립운동의 성지이자 최초의 코리아타운입니다. 항일민족지사들의 집결지이자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으며, 임시정부의 모체인 국민의회를 결성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유서깊은 곳의 흔적과 숨결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어 이번에 좋은벗들과 국제한민족재단의 주도로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현장에서 갖기로 한 것입니다.nbspnbsp스님은 모든 참석자들이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간단하게 한 명씩 소개를 해주며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 참가자 소개 시간nbsp간단히 자기 소개를 마치고 드디어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오후 1시 35분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한반도의 북동쪽 끝부분에 접한 블라디보스톡nbsp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하자 국제한민족재단에서 실무자 두 분이 대형 버스로 마중을 나와 참석자 일행 모두를 숙소로 데려다 주었습니다.nbspnbspnbsp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는 아직 흰 눈이 쌓인 너른 벌판이 펼쳐지기도 하고,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 모스크바까지 이어진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잠시 보이기도 했습니다.nbspnbsp▲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nbsp또 도심을 지나 바닷가에 다다르니 석양에 비친 얼음 바다가 절경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다 위로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며 참가자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바다nbsp오후 6시에 숙소에 도착해 짐을 푼 후 7시부터 다함께 저녁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식사는 처음으로 한인촌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구한촌 지역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했습니다. 구한촌 지역에는 작은 항구가 하나 있었는데, 부산이나 속초, 청진에서 출발하면 이곳에 배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초창기에는 항구 주위에 한인촌이 형성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이곳이 개척리라고 불리는 구한촌이라는 설명에 모두들 카메라를 들고 사진에 담아가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nbspnbsp▲ 구한촌 지역에 위치한 식당nbsp저녁식사를 하기 전 스님이 김명혁 목사님에게 식사기도를 청했습니다. 특히 스님은 김명혁 목사님을 비롯한 이웃종교인들과 10여 년 전부터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마음을 모아오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들끼리 모일 때는 서로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데, 우리 이웃종교인들이 모였을 때는 한번도 다툰 적이 없습니다.”라고 자랑스러워 하면서 식사기도를 정성껏 해주었습니다.nbspnbsp▲ 식사기도를 해주고 있는 김명혁 목사님nbsp“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축북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배경이 모두 다르지만 3.1운동을 일으켰던 선배들을 기리며 종교와 모든 차이를 초월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굶어죽는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지 방법을 찾고자 모였습니다.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초개와 같이 던지고 오히려 기뻐했던 우리 선조들을 기리며 어떻게 해야 우리들이 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이룰 수 있을지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음식에 부끄럽지 않은 우리들이 될 수 있게 축북해 주시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nbsp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다같이 큰 목소리로 ‘아멘’ 하고 맛있게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참석자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스님이 간단하게 이번 행사의 취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이번 행사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스님nbsp“우리가 해외의 독립운동 유적지라고 해서 북간도와 서간도에는 많이들 가고, 또 상해에도 많이들 갑니다. 하지만 이곳 연해주는 매우 중요한 곳임에도 발걸음이 뜸했는데, 최근에 들어와서 연해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연 30만명으로 늘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하며 살았던 이 지역에 현재는 고려인도 별로 없고, 그 터는 이미 다 폐허가 되었고, 다만 비석을 3개 세워 두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해요. 그래서 이곳의 얼을 살리고 알리자는 제안이 있어서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좋은 취지의 일이라서 저도 함께 하게 되었고요.nbspnbsp뜻은 있지만 재정을 마련할 여력이 안 되어서 여러분들 모시고 우선 작게나마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그 뜻을 기려주시고, 내일 기공식을 하는 것을 계기로 여러분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서 신한촌 역사회복과 재건을 위한 일들을 함께 해나가면 좋겠습니다.”nbsp스님의 행사 취지에 대한 말씀에 모두를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이번 신한촌 역사회복과 재건 사업을 책임지고 해나갈 국제한민족재단의 이창주 교수님이 이번 행사의 대략적인 소개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 국제한민족재단 이창주 교수님nbsp“우리 현대사에서 독립운동의 시원이 바로 이곳입니다. 애국지사들이 대부분 여기서 집결을 했었고, 여기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민족의 성지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무명의 돌기둥 세 개 밖에 없어요. 이렇게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는 선열들의 열망과 함성, 흔적과 숨결을 회복 재건하자는 취지로 이번에 기공식을 하게 되었습니다.”nbspnbsp이창주 교수님은 열변을 토하며 이번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이 일을 염원해 왔는지 그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교수님은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학술대회 시간에 이야기하겠다고 하면서 인사말씀을 마쳤습니다.nbspnbsp이어서 28명의 참가자 전원이 각자 어떤 마음으로 이번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목사님, 신부님, 교무님 등 종교인들을 포함해, 시민단체와 대학에서도 여럿이 참여를 했습니다. 모두가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사회 인사 분들이신데, 그 중 몇 분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nbsp먼저 김홍신 작가님은 “잃어버린 발해의 역사를 찾아다니며 이곳을 여러 번 다녀갔는데, 그 때 우리 민족의 혼을 발견했던 그 경험 때문에 이곳에 올 때마다 행복합니다. 이번에도 그런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라며 기쁜 마음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nbspnbsp또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의 원장으로 계신 조민 박사님은 이렇게 소감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로 유인석 의병장 이런 분들은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이곳 블라디보스톡으로 왔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왔는데, 이제는 비행기나 배 말고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오면 어떻겠습니까. 두만강 철교를 건너 이곳 블라디보스톡으로 올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면서 오늘을 회상해 보고 싶습니다.”nbsp특히 생명미디어센터에서 온 최성주님은 특별한 사연을 이야기해 주어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최운산 장군이라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고, 또 봉오동을 직접 개간해서 만드셨던 분이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는데, 저희 세대가 지나가면 이제 할아버지가 하셨던 일들이 모두 묻혀져 버리게 될 것이란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지금이라도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번 행사를 알게 되었고요. 저도 작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늘 참석하게 되었습니다.”nbsp▲ 특별한 사연을 갖고 참가한 생명미디어센터 최성주님nbspnbsp각자 참석하게 된 사연은 다양했지만 조국이 기울어 가던 시절에 피 흘리며 목놓아 울부짖던 애국지사들의 아리랑이 서린 현장을 다시 회복하고 재건하자는 그 염원만큼은 한마음 한 뜻이었습니다. 마지막에 김홍신 작가님은 더욱이 이 마음이 한반도 통일을 향한 염원으로까지 나아가기를 기원하면서 “통일을 위하여” 라고 건배사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첫째날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 9시부터 ‘러시아 한민족사의 숨결과 흔적’을 주제로 법륜 스님의 개막 연설이 있은 후 ‘연해주 극동대륙의 한민족사’,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을 주제로 학술 회의를 가집니다. 또 오후에는 신한촌으로 이동해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을 가진 후 우수리스크로 이동해 독립운동유적지를 방문하고 돌아올 예정입니다.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03.11. 58,234 읽음 댓글 3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