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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8 (인도 13일째) 성지순례단 B팀 쉬라바스티 순례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B팀을 이끌고 부처님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 쉬라바스티를 순례한 후 저녁에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새벽 6시에 예불과 기도를 마친 성지순례단 B팀은 한 줄로 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기원정사로 향했습니다. 맨 앞에는 스님이 앞장섰습니다. 새벽 안개를 가르며 고요히 걸어가는 기나긴 행렬을 보니 이곳 사위성에서 설해진 금강경의 한 구절이 그대로 재현이 된 것 같았습니다. nbspnbspnbsp‘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기수급고독원에 대비구중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 공양 때가 되어 큰 옷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신 채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로 밥을 빌어 본 곳으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nbspnbsp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10대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순례단은 이제 순례의 막바지에 이르러 기원정사에 당도하자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습니다.nbspnbspnbspnbsp스님은 손에 향을 든 순례단을 이끌고 기원정사 곳곳을 탑돌이하고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신 자리, 부처님이 머무신 처소, 아난 존자가 물을 떠서 부처님께 드렸다는 우물 터,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했던 자리,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생각하기 위해 심은 보리수 나무, 라훌라 존자의 처소, 앙굴리말라의 처소, 후대 승려들이 머문 승방터 등을 모두 참배한 후, 법회를 하기 위해 부처님이 머문 처소인 ‘간다 쿠티’ 앞에 다시 섰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수행승들을 위해 설법을 했던 장소nbsp▲ 아난다가 부처님께 물을 떠다 주었다고 하는 우물nbsp▲ 라훌라 존자가 머무른 처소nbsp지심정례공양... 예참 불공과 함께 160여 명의 순례단이 간다 쿠티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하자 동쪽에서 붉은 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다고 하는 바로 이곳에서 예불을 올리는 이 순간은 순례객 모두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nbspnbsp▲ 아침 예불nbsp예불을 마치고 스님은 순례객을 위해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고, 이어서 이곳 기원정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창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경전 속에 등장하는 사위성에서 일어난 갖가지 교화 사례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또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실제 경전 속에서는 그 내용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함경의 절반 가까이가 이곳 사위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니 오늘 독송한 내용 말고도 어마어마한 사례들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경전 독송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부처님이 특히 사위성에서 외도들의 모함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새겨야 하는지 강조했습니다.nbspnbsp“사위성은 신흥강국으로 등장한 코살라국의 새로운 도시였기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문명이나 문화로 보면 수준이 좀 낮았나 봅니다. 그래서 삿된 외도들이 성행했어요. 부처님이 여기에서 외도들의 모함을 특히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방금 읽은 경전에 나와 있듯이 여러 가지 모함을 받고 승가가 오해를 받을 때마다 수닷타 장자나 베사카 부인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사성에 계실 때도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니까 이런 비난의 소리가 들렸다고 해요.nbspnbspnbsp‘어제는 누구의 아들을 빼앗아가더니 오늘은 누구의 남편을 빼앗아가네. 내일은 또 누구의 제자를 빼앗아 갈 것인가.’nbspnbsp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을 빼앗겼다는 관점으로 보고 이렇게 비난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말에는 이렇게 대답하라고 했어요.nbspnbsp‘여래는 진리를 설하는 자다. 법다이 설하는데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nbspnbspnbsp이렇게 해서 그 비난이 멈추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도 일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비난을 받게 되어 억울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위대하신 분도 오해와 비난을 받았는데 어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오해와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수행 중에 베푸는 보시도 중요하고, 계를 청정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억울하고 분한 일을 잘 참아내는 인욕 또한 매우 중요한 수행입니다.”nbspnbsp성지에서 직접 읽는 경전 독송의 감동도 컸지만, 스님이 핵심을 다시 짚어주니 당시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순례객 모두 매번 성지에 도착할 때마다 예불을 정성껏 올렸는데, 예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삼귀의를 좀 더 자세히 풀어놓은 것이 예불문입니다. 우리가 늘 조석으로 예불을 하고 다녔지요? 이 예불문은 ‘오분향 예불문’이라고 합니다. 다섯 가지 향을 부처님께 올리고 예불한다고 해서 ‘오분향 예불문’이라고 하고, 절을 일곱 번 한다고 해서 ‘칠정례 예불문’이라고도 합니다.nbspnbsp인도에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전단향처럼 좋은 향 다섯 가지를 꽂아서 향기를 피우면서 제사를 지내요.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께 올리는 향은 그런 전단향이니 무슨 향이니 하는 게 아닙니다.nbspnbsp첫째, 계향 즉 ‘계율을 청정하게 지킨다’, 또는 ‘언행이 바르다’고 이르는 인격의 향기예요. 계를 청정히 지키는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둘째, 그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 선정의 향기로 공양을 올립니다. 셋째, 어리석음을 없앤 지혜로운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넷째, 온갖 속박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해탈의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nbsp우리가 살다보면 남에게 이익을 주기보다는 손해를 끼칠 때가 많아요. 그런데 나를 때리는 사람, 내 물건에 자꾸 손해끼치는 사람, 나한테 성추행하는 사람, 나한테 욕설하고 사기 치는 사람,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사람과는 같이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부모라도 힘들고, 배우자라 해도 힘들고, 그런 자식이 있어도 힘듭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 사람, 즉 ‘그 사람은 나를 절대로 해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에게 절대로 손해 끼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한테 절대로 사기 치거나 욕설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한테 행패 부리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보통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착한 사람 즉 남에게 해를 안 끼치는 사람이 돼야 해요.nbspnbsp그런데 ‘우리 마누라나 남편은 착하기는 한데 늘 불안정하다’ 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늘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도 같이 살기엔 좀 힘들어요. 그래서 착한 것만 갖고는 안 되고, 두 번째로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nbspnbsp세 번째로, 착하기도 하고 마음도 편안한데 앞뒤가 꽉 막혀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어요.그러면 속이 터지죠.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이 살기 좀 힘들어요. 그러니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람이 좀 영리해서 말귀도 금방금방 알아듣고 일머리도 금방금방 돌아가야 같이 살기 쉽잖아요.nbspnbsp네 번째로,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그건 안 되겠는데요’, ‘그거 해봐도 안 될 거예요’ 라며 늘 사물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이에요. 그게 아니라 뭐든지 이야기하면 ‘네. 해보죠, 뭐’ 혹은 ‘네, 해봅시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해요. 이처럼 어떤 윤리나 도덕이나 의식에 꽉 묶여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좀 자유롭고 열려 있는 사람이 가지는 향기가 해탈의 향기예요.nbspnbsp다섯 번째로, 해탈지견향은 부처님의 지혜예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마지막 단계입니다.nbsp이런 다섯 가지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예불을 올릴 때 ‘계향’이라고 말할 때는 ‘계율을 청정히 지키겠습니다’ 라고 다짐해야 해요. ‘정향’이라고 말할 때는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을 닦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혜향’ 할 때는 ‘지혜를 증득하겠습니다’ 라고 다짐하세요.nbspnbspnbsp이 다섯 가지로 시방에 계시는 한량없는 불법승 삼보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공양을 올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수행의 다섯 가지 향으로 공양을 올린 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예불입니다.nbsp자, 그럼 이곳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각자 한가하게 정진을 좀 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nbsp예불문에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 뜻에 더욱더 집중해서 예불을 해봐야겠다는 다짐이 생겼습니다.nbspnbsp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순례객들은 기원정사 곳곳에 흩어져 개인 정진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무 밑에서 명상을 하는 사람, 조별로 모여서 공동 정진을 하는 사람들, 간다 쿠티를 바라보며 300배 절을 하는 사람 등 모두들 성지에서 받은 감동을 정진을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승화하고 있었습니다. nbspnbspnbsp▲ 개인 정진 시간nbsp대중들이 정진을 하고 있는 사이 차량별로 줄을 서서 스님과 일대일로 기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듯이 모두들 설레여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활짝 웃었습니다.nbspnbsp▲ 기념사진 촬영nbsp이렇게 기원정사에서 법회를 모두 마친 후 다함께 사위성을 향해 걸었습니다. 대중 일동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대로 걷기 시작하자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들어가는 순례단nbsp“이제 사위성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천이백오십명이 기러기떼처럼 한 줄로 성 안으로 들어가서 골목 골목으로 흩어진 다음 걸식을 하고 나서 기원정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는 ‘환지본처’라고 표현하죠. 본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드셨다는 뜻입니다. 천이백오십 대중이 매일 가서 걸식을 해도 괜찮을 정도였으니 이 사위성이 얼마나 크고 부유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죠.”nbspnbsp부처님 당시를 재현하듯 긴 행렬을 이루며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향했습니다. 160여 명이 한 줄로 가도 이렇게 긴 행렬이 되는데 천이백오십 명이 줄을 지어 걷는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사위성은 정말로 큰 규모였으리라 짐작해 볼 뿐입니다.nbspnbsp사위성 서문 쪽으로 들어서자 두 개의 큰 탑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스님이 송수신기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왼쪽에 보이는 이것은 앙굴리말라를 기념하는 탑이고, 저기 오른쪽에 있는 것은 수닷타 장자를 기념하는 탑입니다. 수닷타 장자는 선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사람이고, 앙굴리말라는 악인이었다가 참회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었어요. 먼저 앙굴리말라 수투파를 정근하면서 참배하겠습니다.”nbsp▲ 왼쪽이 앙굴리말라 스투파, 오른쪽이 수닷타 장자 스투파nbsp대중들은 스님을 따라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고 삼배를 한 후 자리를 깔고 앉았습니다.nbspnbsp▲ 앙굴리말라 스투파nbsp스님은 부처님이 어떻게 99명을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를 교화했는지 당시의 모습을 영화보듯이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앞에 있는 탑은 앙굴리말라를 기념해서 세운 앙굴리말라 수투파입니다. ‘앙굴리’는 ‘손가락’, ‘말라’는 ‘염주’라는 뜻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원래 이 지역의 부유하고 좋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여기서 서북쪽인 파키스탄 지역에 당시 유명했던 탁실라라는 교육 도시로 유학을 보냈어요. ‘부처님의 일생’에서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어린 시절은 ‘유학기’라고 해서 공부하는 시기예요. 그래서 78살 때 유학을 보내서 1617살까지 공부를 마친 뒤 돌아오는데, 그 당시에는 멀리 유학을 가면 우리의 옛날 서당처럼 스승의 집에 기숙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를 가르친 훌륭한 스승은 나이가 아주 많았습니다. 아마 5060살 정도였던 것 같지만, 당시에는 50살만 되어도 할아버지였으니까 요즘으로 치면 780살 정도 된 느낌이었나 봐요. 그런데 부인은 20대 중반이어서 아주 젊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어린 시절에 그 집에 들어가 공부하니까 스승의 부인인 사모님이 엄마처럼 잘 보살폈는데, 아이도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서 귀여움을 받았다고 해요.nbspnbspnbsp그러다 스승이 아이를 질투해서 문제가 생겼어요. 스승의 질투가 원인인 것은 맞지만, 질투가 생긴 이유에 대한 설명은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하나는 유학 온 아이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 하니까 그 지역 출신 학생들이 모함했다는 거예요. 앙굴리말라가 1516살이 되어 당시 기준으로는 장성했으니까 스승에게 ‘앙굴리말라와 사모님 사이가 수상하다’라고 고자질을 했어요. 스승이 줄곧 그 말을 믿지 않다가, 어느날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니 사모님이 손으로 밥을 앙굴리말라의 입에 떠넣어주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느꼈다고 해요.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잖아요. 떠넣어준 것은 어릴 때 해주던 버릇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nbsp또 다른 이야기로는 밥을 먹다가 방안에 쥐가 들어왔대요. 둘이서 쥐를 잡는다고 법석을 피우다가 옷자락이 엉키고 살갗이 드러났는데 마침 그때 스승이 돌아와서 보고 두 사람 사이를 오해했다고 기록한 것도 있습니다.nbspnbsp또 다른 하나는 남편은 나이가 많고 제자는 용모 반반한 청년이다 보니 사모님이 앙굴리말라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해요. 그래서 스승이 멀리 외출하고 둘만 있을 때 사랑을 나누자고 청했는데 앙굴리말라가 거절했다고 해요. 자기가 몇 년을 극진히 사랑으로 대해줬는데 자기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니까 굉장히 자존심도 상했고, 이 아이의 성격으로 보아 남편에게 이야기할 것 같으니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도 들었겠죠. 그래서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옷을 찢고 흐트러뜨린 뒤 막 울었다는 거예요. 놀란 남편이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내가 이 아이를 엄마처럼 돌봤는데 당신이 없는 사이 이 아이가 나를 추행하려 했소’ 라고 이야기했대요. 그래서 남편은 제자를 사랑하던 마음은 없어지고 제자를 나쁘게 생각하게 되었어요.nbsp구체적인 사정이 어떻든 오해가 생겼어요. 그래서 스승은 제자에게 ‘네게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라고 말했는데 이 아이 입장에서는 스승이 훌륭한 분이니 배울 게 더 있다고 생각해서 ‘아닙니다, 아직 저는 더 배울 게 많습니다’ 라고 답했어요. 있겠다고 하니 더 수상하게 보이잖아요. 가라는 스승과 계속 있겠다는 제자 사이의 실랑이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스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남았다. 승천, 즉 산 육신을 가진 채 바로 하늘나라에 가는 게 마지막 공부인데 그것은 실제로 행하기가 너무나 어려우니 가르쳐줘봐야 네가 할 수 없다.’nbsp그러자 이 청년이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 못 한다 하더라도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맹세한 거예요. 그래서 가르쳐준 비법이라는 게 사람을 100명 죽여서 그 손가락 1,000개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면 바로 승천한다는 것이었습니다.nbspnbsp이게 바로 사로잡힘이에요. 청년은 거기에 딱 빠져서 그날부터 수행이랍시고 사람을 죽인 뒤 손가락을 엮어서 목에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본래 이름은 없어지고 ‘앙굴리말라’, 즉 손가락 염주를 한 희대의 살인마가 되었어요.nbsp그러자 당시 사회에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전부 두려워하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사람을 죽여야 손가락 염주를 완성할 텐데 사람들이 도망가니까 사람을 따라 자꾸 내려와서 이제 쉬라바스티로 내려온다는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왕에게 탄원해서 요즘 말로 하자면 치안이 허술하니까 빨리 잡아달라고 졸랐습니다. 병사 몇 명쯤 보내봐야 숲속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공격하니까 도로 다 잡혀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다 보니 괴력을 가져서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는 헛소문까지 났어요. 어떤 확신을 가지면 두려움이 없으니까 실제로 그렇게 되는 면도 있었을 겁니다.nbsp그런데 여기서 경전의 기록이 또 두 가지로 다릅니다. 하나는 앙굴리말라가 99명을 죽이고 마지막 1명만 죽이면 승천한다고 믿는 상태에서 쉬라바스티 가까이에 왔다는 거예요. 왕이 나서서 이 사람을 잡겠다고 하니 그 어머니가 부처님께 찾아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nbspnbsp다른 하나는 부처님이 길을 가는데 사람들이 도망쳐오면서 ‘부처님, 그 길을 가지 마지 마십시오. 그리로 앙굴리말라가 옵니다’라고 외쳤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여래는 두려움이 없소’ 이렇게 답하고 계속 길을 갑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거슬러서 길을 갔습니다. 한참을 가니까 숲에서 칼과 방패를 든 앙굴리말라가 나타났어요. 앙굴리말라는 한 사람만 더 죽이면 자기가 승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다들 도망가서 사람을 만나기 어렵던 중에 부처님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칼을 쥐고 ‘사문아, 게 섰거라’ 하고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습니다.nbspnbsp그러나 부처님은 그러거나 말거나 평소 걷던 대로 천천히 걸어가셨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쫓아가도 부처님에게 닿지를 않는 거예요. 멈추라고 마구 소리를 지르다가 헐레벌떡 쫓아와서 부처님 앞을 막아서면서 ‘왜 멈추라는데 멈추지 않았느냐?’ 이렇게 화를 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나는 이미 멈춘 지 오래다.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너다’ 이렇게 말했어요. 부처님의 특이한 화법입니다. 화제를 바꿔버려요.nbspnbsp그러자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고, 이 말에 발끈한 앙굴리말라가 문제제기를 했어요. ‘말도 안 된다. 너는 계속 걸었고 나는 지금 멈춰 있는데 왜 네가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고 하느냐?’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어요. ‘나는 남을 해치는 것을 멈춘 지 오래되었으나 너는 아직 남을 해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성냄을 멈춘 지 오래 되었으나 너는 아직 성냄을 멈추지 못했다.’nbspnbspnbsp앙굴리말라는 스승의 술수에 걸려들어 정신을 잃었다가 이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너무나 몹쓸 짓을 저지르고 엄청난 죄를 지은 거예요. 그래서 방패와 칼을 던지고 무릎을 꿇으며 출가하기를 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가 이미 진리에 눈을 뜨고 깨달음을 얻은 줄 알고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부지런히 정진해서 괴로움이 소멸되는 열반의 세계로 가라’ 라고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nbspnbsp그런데 부처님이 출가사문이 된 앙굴리말라를 데리고 기원정사로 돌아왔을 때 마침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께 인사를 왔어요. 정사에 들어올 때는 누구든지 무장을 해제해야 하니까 병사들을 밖에 세워두고 왕만 들어와 인사를 올리는데, 정사 밖에 잘 무장된 날랜 병사 1,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세워 두었어요. 게다가 그 중 500명은 기마부대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물어보셔습니다.nbspnbsp‘무슨 일이오? 전쟁이라도 났소?’‘아닙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지만 앙굴리말라라는 희대의 살인자가 나타나서 온 나라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군대를 끌고 잡으러 가는 중에 부처님께 인사드리러 들렀습니다.’‘대왕이시여, 만약 그 앙굴리말라가 모든 악행을 멈추고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면 어떻겠소?’‘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제가 그분께 예를 갖추고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그 살인자가 악행을 멈출 리 만무하며 출가사문이 될 리는 더욱 만무합니다.’nbspnbsp그러자 부처님이 옆에 앉아 있는 비구를 가리키며 ‘이 존자가 바로 앙굴리말라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왕이 갑자기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거예요. 괴력을 가졌다는 희대의 살인마를 지금 무장해제하고 호위병 한 명도 없이 마주했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자 부처님이 ‘대왕이여,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는 아힘사요. 더 이상 누구도 해치지 않는 사람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앙굴리말라의 법명은 ‘아힘사’입니다. ‘비폭력’, ‘불살생’이라는 뜻이에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안온한 수행자여서 대왕이 절을 하고 필요한 게 무엇이든 공양을 올리겠다고 하니까 앙굴리말라가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양을 사양했어요. 그때 왕이 부처님을 찬탄했습니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거룩하십니다. 누구도 조복하지 못할 사람을 조복하고, 길들이지 못할 사람을 길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창과 칼을 가지고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을 부처님은 오직 말씀으로 그를 조복하고 다스렸습니다.’nbsp춘다의 공양이 붓다를 위대하게 했듯이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더욱 더 위대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앙굴리말라 같은 사람이 법에 귀의해서 성자가 됨으로 해서 여래의 법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였으니까요.nbspnbsp우리 정토회도 그런 것 같아요. 착한 사람이 정토회에 와서 수행자가 되면 별로 영향력이 없는데, 성질 더럽고 못된 사람이 법문 듣고 변하니까 ‘어쩌다가 저렇게 됐냐’며 주위에서 난리가 나서 나중에는 형제며 가족들이 모두 정토회에 옵니다. nbspnbspnbsp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출가 스님이 되었다는 소문이 나니까 또 문제가 되었어요. 앙굴리말라가 출가하기 전에는 집집마다 줄을 묶고 줄에 종을 달아서 앙굴리말라가 나타나면 서로들 비상연락을 했습니다. 누가 줄을 잡아당겨 종소리로 알리면 온 도시가 전부 대문을 잠그고 창문을 닫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출가사문이 됐다니까 아침에 탁발하러 오는 스님들 중 누가 앙굴리말라인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전부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공양을 안 주는 거에요. 앙굴리말라를 출가시켜 놓으니까 다른 사람들까지 밥도 못 얻어먹게 생겼어요. 상가의 이미지가 확 떨어져 버렸습니다.nbspnbsp앙굴리말라도 발우를 들고 탁발하러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서 여인이 아이를 낳고 있었어요. 막 아기 머리가 나오던 참인데 ‘앙굴리말라가 온다’라고 누가 소리치니까 여인이 놀라서 그만 까무러쳐 버렸어요. 애가 나오다가 멈췄으니 산모도 아이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어요. 앙굴리말라가 기원정사로 와서 부처님께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nbsp‘앙굴리말라여, 다시 그 집으로 가거라. 그 집으로 가서 이렇게 말해라.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nbsp그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말이 안 맞지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는 ‘출가한 이래로’라는 뜻입니다. 그 전은 다 꿈속의 이야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집에 가서 이렇게 말했더니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고 합니다.nbsp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이제는 앙굴리말라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어요. 그러자 그 동안은 겁내서 도망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보복을 하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성내에 탁발을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몽둥이로 쳐서 결국은 깊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기록이 조금씩 달라요. 부처님이 소식을 듣고 앙굴리말라가 쓰러진 곳에 왔다고도 하고, 앙굴리말라가 피투성이가 되어 정사로 돌아왔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부처님이 오셨을 때 앙굴리말라는 이렇게 말했어요.nbspnbsp‘여래시여, 저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nbsp돌과 몽둥이에 맞아 죽으면서도 마음에 진심이 일어나지 않고 편안히 열반에 들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아라한과를 증득했기에 순교를 할 때도 아무런 번뇌가 없었어요.nbsp이것이 앙굴리말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위성 사람들이 앙굴리말라를 위한 탑을 이곳에 세운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왔을 때는 여기에서 앙굴리말라가 숨었다고 하면서 ‘앙굴리말라 굴’이라고 했어요. 저쪽으로 가서 보면 탑에 희한하게 굴이 뚫려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기어서 들어가 보고, 굴을 통과하면 오래 산다는 속설도 있었는데 지금은 막아놨네요. 생각해보면 시내 한복판인데 앙굴리말라가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나왔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 이곳은 앙굴리말라가 탁발하러 왔다가 돌에 맞아서 열반에 든 곳이어서 기념탑을 세운 것 같아요.nbsp저 건너편은 선인으로서, 즉 착한 사람으로서 제일 유명한 사람인 수닷타 장자의 집터예요. 그래서 저기에 또 그를 기리는 탑을 쌓아서 지금은 두 탑이 마주보고 있게 되었습니다.nbspnbsp앙굴리말라를 교화한 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법은 악한 이나 착한 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든 사람에게 평등합니다. ‘그가 과거에 어땠나’ 하는 것은 꿈속의 이야기이고, 어떤 사람이든 깨달을 수 있고, 깨달으면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과거에 지은 과보는 받아야 해요.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과거에 지은 악업의 과보를 받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열반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는 일체의 두려움과 성냄도 없이 편안하게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자, 그럼 경전에 나오는 앙굴리말라의 이야기를 독송해보겠습니다.”nbsp스님이 말씀해준 내용이 경전 속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독송해 보았습니다. 부처님이 기절한 임산부를 보고 당황해하는 앙굴리말라를 보고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해라고 하는 대목과 마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저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목은 언제 들어도 큰 감동입니다.nbspnbsp이렇게 앙굴리말라 스투파 참배를 마치고 이어서 수닷타 장자의 스투파로 건너가 참배를 했습니다.nbspnbsp▲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나와서 수닷타 장자 스투파로 이동하는 순례단nbsp비록 지금은 허물어져 있지만 기단의 규모를 보니 당시에는 얼마나 크게 세워졌을지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수닷타 장자 스투파nbsp다시 순례객들은 지금은 정글로 변한 사위성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사위성의 동문으로 나와 베사카 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동원정사를 참배했습니다.nbspnbsp▲ 정글로 변한 사위성 안nbsp동원정사에서 스님은 베사카 부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또 실감나게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nbsp이렇게 순례를 마치고 나서 대중들은 숙소로 돌아와 세면을 마치고 조별로 모여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먹었습니다. 식사 후 6시부터는 스님의 성지순례 총정리 강연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약 10여 명이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들었던 의문에 대해 온갖 질문들을 쏟아내었습니다. 스님의 답변을 들으며 의문이 하나씩 하나씩 풀어지자 대중들의 얼굴도 점점 밝아져 갔습니다.nbspnbspnbsp오늘은 그 중에 부처님이 탁발을 하셨던 것은 어떤 수행적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물었던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오늘 순례객들은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직접 탁발을 하듯이 걸어가면서 많은 감흥을 느꼈는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더 깊이 부처님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오늘 사위성을 순례하면서 탁발하는 것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많은 수행자들이 탁발을 하시는데 그것이 어떤 수행적 의미를 가지는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nbspnbsp“머리를 깎고 집을 나오고 탁발하는 것은 부처님이 처음 만든 게 아니라 그런 인도의 문화에 부처님도 동참한 거예요. 브라마니즘에 반대한 비주류, 즉 사문류에 부처님도 합류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당시에는 ‘사문류’가 비주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기에 육사외도도 다 사문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이나교와 불교를 제외한 그 당시 사상들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우리 나라에는 자이나교가 없다 보니 이제 출가사문은 불교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 당시 하나의 수행적 문화였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nbspnbsp그리고 그걸 바꿀 수도 있는데 굳이 그대로 살리는 의미는 일체의 생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먹는 것은 그냥 얻어서 먹으면 되고, 입는 것은 남이 버린 옷을 주워서 입으면 되고, 자는 것은 아무데서나 자면 돼요. 그렇게 놓아버릴 수 있어야 우리가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nbspnbsp또 하나, 탁발에는 만인을 평등하게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만행을 해봤는데 얻어 먹어보면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나’라는 것을 털끝만큼이라도 움켜쥐고 있으면 얻어먹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JTS 모금할 때 나눠주는 팜플렛을 상대가 안 받아도 좀 머쓱하고, 모금함을 가져가서 이야기해도 열 명이면 열 명 다 그냥 가버리면 좀 머쓱하잖아요. 그냥 내 돈 확 집어넣고 와버리고 싶어져요. nbspnbspnbsp또 이 몸을 유지하는 약으로 밥을 먹기 위해서 탁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시해 주는 사람은 내 생존을 영위해주는 사람이에요. 비록 그 사람이 아무리 가난하고 천민이라도 내가 그 집에서 밥을 빌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잘난 척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니까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nbspnbsp또 한 끼 밥을 빌어서 먹는 걸 해결하니까 권력자나 부자에게 굳이 굽신거릴 이유가 없어요. 나에게 집이나 돈 같은 게 필요하면 돈 가진 사람이나 지위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겠지만, 나에게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데 임금이 있으면 뭐하고 부자가 있으면 뭐하겠어요? 그러니 임금한테도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임금 앞에서는 일부러 고개를 숙이지 않고 뻣뻣하게 군다는 뜻이 아니라, 임금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밥을 빌어서 먹기 위해서는 천민한테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서고 가장 높은 자의 위에 선다는 뜻입니다. 이게 출가사문의 길입니다. 만인을 평등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에는 차별이 있지만 붓다는 세상을 평등하게 본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걸식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nbspnbsp여러분들이 JTS 모금하는 것도 일종의 걸식 연습과 비슷해서 수행에 굉장히 도움이 돼요. 사실은 불교 교리 100번 공부하는 것보다 그거 한 번 해보는 게 더 나아요. 몇 번 해보면 괜찮아지지만 처음 할 땐 굉장히 어색합니다. 스님 강연 홍보한다고 길거리에서 1인용 피켓 들고 서 있어도 처음엔 좀 부끄럽잖아요. 괜히 다들 나만 보는 것 같고, 혹여 친구라도 만나면 ‘미쳤다’ 소리 들을 것 같고 온갖 생각이 들어요. nbspnbsp우리는 다 ‘나’라는 걸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탁 놓아버리면 편안해요. 그런데 이것은 무슨 불교 교리를 외우거나 불교학 박사학위를 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행해보면서 ‘아, 내가 지금 상을 짓고 집착하고 있구나’ 이런 걸 자각하고 자꾸 놓아보다 보면 어떤 것도 편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연습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nbsp단순히 남의 밥을 빌어먹는 것이 아니라 내 수행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이 탁발이고 모금활동임을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평생 동안 탁발을 함으로써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서고 가장 높은 자의 위에 섰다는 말씀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nbspnbsp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니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스님은 목에 파스를 붙이고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순례객들에게 “밤새 이야기해 보자”며 마음을 내었지만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순례객들을 위해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이 괴로운 이유는 기대가 높기 때문이예요. 나무 밑에서 잔다고 생각하고 성지순례를 오면 이 정도 숙소는 정말 괜찮게 느껴져요. 처음에 올 때 나무 밑에서 자는 수준이라고 미리 이야기 듣고 왔으니까 지금 괜찮지, 그냥 왔으면 시위를 하고 난리를 피웠겠죠. 스님 머리가 남아 있었으면 다 뜯겼을 거예요. nbspnbspnbsp성지순례하는 것만 공부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보는 것이 다 공부입니다. 여러분들이 침낭에서 자고, 밥도 그냥 밥통에 해서 하루 두 끼 먹고, 차에서 졸면서도 이렇게 웃고 재미있게 살 수 있다면 집에 가서 못 웃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아무리 남편이며 아내가 뭐라고 한들 저보다야 잘 해줄 거 아니에요. 남편이며 아내가 저처럼 여러분들을 붙잡고 종일 끌고 다니면 ‘사람 죽이려고 하나?’ 이러고 대번에 싸움이 났겠죠. 안그래요? nbsp여러분들이 이런 경험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조금씩 자유롭게 하는 법을 터득해가야 합니다. 제가 일부러 고생시키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자기 삶을 자유롭게 하려고 우리가 지금 이런 공부를 하는 거예요. 똑같은 벽돌 더미인데 그거 하나 더 보면 뭐하고, 덜 보면 뭐하겠어요? nbspnbspnbsp눈감고 마음을 코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관해버리면 시간도 없어지고 공간도 없어져요. 여기 앉아서 코끝을 보나, 한국에 앉아서 코끝을 보나, 어제 보나, 오늘 보나, 일체의 시공간이 사라지고 그냥 숨 들락거리는 것밖에 안 남아요.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사실 성지가 어디 있고 오지가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항상 우리는 공으로, 텅 빈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래도 이왕 성지에 왔으니 성스럽게 생각하는 마음도 내야 하겠죠. 먹는 거야 뭘 먹어도 좋지만 맛있는 걸 먹을 때는 맛있게 먹어야 해요. 맛에 집착하지 말라고 해서 맛있는 걸 굳이 인상 쓰고 먹을 필요는 없어요. nbsp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점점 자유로워지도록 하라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지, ‘부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이런 게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행복해지는 게 스님이 원하는 바지, ‘법륜 스님이 최고다’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가장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법에 귀의하면 그 길로 갈 수 있다 해서 법에 귀의하라는 것입니다.nbspnbsp그런 관점을 가져서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해 자기 삶을 행복하게 한 사람은 불법에 가까워진 사람이고, 성지 순례 하는 동안 괴로운 사람은 집에 가도 괴롭고 어디를 가도 괴로워요. 여기 가도 괴롭고, 저기 이사해도 괴롭고, 혼자 살아도 괴롭고, 결혼해도 괴롭고, 늙어도 괴롭고, 젊어도 괴롭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혼자 살면 귀찮은 게 없어 좋고, 같이 살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고, 늙으면 할 일 없어 좋고, 젊으면 할 일이 많아서 좋고, 이렇게 다 좋아요. 몸이 아파도 괜찮아요. 아프면 좀 누워 있을 수 있어서 좋고, 온갖 약도 먹어볼 수 있어서 좋아요. 안 아프면 그런 약을 언제 또 먹어보겠어요?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마련한 다양한 약도 한번 먹어봐야 할 거 아니에요. nbspnbspnbsp또 아프면 시봉도 좀 받을 수 있고 주변에서 걱정도 좀 해줍니다. 세상만사가 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조금씩 조금씩 더 자유로워져가야 합니다.nbsp내일은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하는 것 알고 있죠? 일찍 나가보는 것도 좋아요. 3시 반에 일어난다고 해도 한국 시간으로는 7시입니다. 7시에 일어나는 게 뭐가 힘들어요? 그러니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차피 한국 가면 한국 시간으로 살아야 하니까 아예 지금부터 한국 시간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3시, 4시에 일어나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은 것은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7시, 8시에 일어나는 셈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괜히 시차 적응했다가 한국에 돌아가서 또 힘들여 바꾸느니 여기서도 그냥 한국 시간 그대로 생활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nbspnbsp이렇게 해서 여행이 여러분들에게 큰 공덕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nbspnbsp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절로 힘이 났습니다. 몸이 편찮으심에도 오히려 대중들을 더욱 격려해주는 스님에게 모두 뜨겁게 박수를 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아무리 고단한 상황도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마음을 보는 순례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강조하는 스님의 모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성지순례단 B팀의 쉬라바스티 순례 일정도 모두 끝이 났습니다. B팀은 내일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해서 상카시아를 향해 출발합니다. 스님은 이어서 C팀을 환영 마중하고 천불화현탑을 참배한 후 즉문즉설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17 (인도 12일째) 사위성 자전거 순례, 성지순례단 B팀 마중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신 곳인 사위성을 한 바퀴 순례한 후 성지순례단 B팀을 천불화현탑에서 맞이하고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새벽 3시 20분이 되자 성지순례단 A팀이 일제히 기상하여 상카시아로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순례객들이 모두 버스에 탑승하자 스님은 천축선원 입구에 서서 출발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nbspnbsp“순례 잘 마치고 한국에서 봐요.”nbsp▲ 상카시아로 떠나는 A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스님nbsp환한 웃음으로 배웅해 주는 스님에게 순례객들도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습니다.nbspnbsp아침 식사 후에는 천축선원의 대인 스님과 다실에서 차담을 나누었고, 차담을 마치고 나서는 그저께 동원정사를 답사한 것에 이어서 사위성을 답사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스님은 예전부터 사위성 전체를 둘러보고 싶었다고 합니다.nbspnbsp천축선원에서는 승용차를 타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스님은 “눈에 익힐려면 걸어다니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승용차를 타면 시골길을 가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천축선원을 나왔습니다. 각종 물건들을 판매하는 시장통을 지나니 한적한 시골길이 나왔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녀보는 것이 꿈’이라고 자주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렇게 잠시 여유 시간이 주어지니 “오늘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하며 신나게 자전거 패달을 밟았습니다.nbspnbsp시골길을 한참 달리니 기원정사 뒤쪽으로 아주 큰 규모의 태국 절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웅장한 크기에 금칠을 해서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보였습니다. 게다가 기원정사 뒤쪽의 아주 너른 땅을 모두 구입해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성지 바로 가까이에 이렇게 큰 절을 짓는 것은 이곳을 순례하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nbspnbsp▲ 거대한 규모로 지은 태국 절nbsp사위성의 서쪽에서 시작한 자전거 순례는 사위성 북쪽에 넓게 흐르고 있는 랍띠강에 이르렀습니다. 강폭이 크고 깊이도 꽤 있어 보였습니다. 스님은 강물에 손을 담그고 땀을 식히며 주위의 지형지세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nbspnbsp▲ 사위성 주위를 흐르는 랍띠강nbsp경전에는 사위성 주위에 강이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은 강이 흐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지형을 유심히 살펴본 후 “지금은 강이 이리로 흐르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사위성 바로 앞으로 강이 흘러서 해자 역할을 했던 것 같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리시간에 배운 우각호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즉, 곡류하던 하천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측면 침식이 심해져 경로가 점차 바뀌다가 결국 새로운 물길이 만들어져 예전의 물길 일부가 쇠뿔 모양의 호수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nbspnbsp그래서 이번에는 부처님 당시에 사위성 성벽을 따라 흘렀으리라 추정되는 물길의 흔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스님의 예상대로 북쪽 성벽에는 누가 봐도 성벽을 방어하기 위한 해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길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었습니다. 더욱이 해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지 북쪽 성벽은 다른 쪽 성벽보다 높이가 비교적 낮았습니다.nbspnbsp▲ 사위성 앞에 자연 해자를 이루며 강이 흘렀던 흔적nbsp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사위성 성벽을 따라 계속 갔습니다. 시골길이라 너무 울퉁불퉁 해서 자전거는 자꾸 덜컹덜컹 하고 엉덩이에 불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한 차례 자전거에서 넘어지기도 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의 관심은 오직 사위성 성벽의 규모와 크기, 해자를 이루었던 흔적에 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nbspnbsp▲ 저 멀리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사위성 북쪽 성벽nbsp성을 둘러싸고 바깥에 난 길이 너무 험해 결국 성 안으로 들어와서 동문 쪽으로 나가 다시 북문 쪽으로 되돌아와서 성벽을 살펴보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냥 언덕 같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온통 벽돌 무더기였습니다. 조금만 땅을 파면 벽돌이 부서져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지막한 언덕들은 부처님 당시에는 벽돌로 높이 쌓아 올려진 성벽이였던 겁니다.nbspnbsp▲ 성벽을 이루고 있었던 벽돌더미nbsp스님은 다시 사위성의 남문 쪽을 향했습니다. 길이 험하면 자전거에서 내려 걷기도 하고, 평탄한 길이 나오면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기를 반복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사위성의 서문, 북문, 동문, 남문을 따라 한바퀴를 모두 둘러보고 나니 꼬박 3시간이 걸렸습니다. 스님은 “사위성이 정말 크지? 고구려의 국내성이나 신라의 반월성에 비해 이 사위성이 10배는 더 큰 것 같다”며 발해의 상경용천부 보다도 훨씬 큰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지 않고 걸어갔으면 아마 하루종일 걸어도 못 둘러보았을 것”이라며 웃음을 보였습니다.nbspnbsp사위성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스님이 천축선원으로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자 대인 스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반갑게 스님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는 사위성을 혼자서 순례하던 한국인이 피살을 당한 채 시체로 발견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nbspnbsp스님은 “길이 험해서 엉덩이가 얼마나 아픈지...” 하면서 천축선원에서 차려준 늦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휴식을 취하며 성지순례단 B팀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nbspnbsp네팔에서 인도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오후 3시에 도착 예정이던 B팀은 5시 30분이 되어서야 쉬라바스티 천불화현탑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먼 길을 달려온 순례단을 향해 스님은 환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순례객들은 가사를 수하고 향을 피운 채 길게 줄을 지어 천불화현탑으로 올라갔습니다.nbspnbsp▲ 천불화현탑nbsp먼저 탑을 바라보면서 다함께 저녁예불을 올렸습니다. 해가 점점 지고 있는 가운데 순례객들의 “지심귀명례” 하는 소리가 저녁 노을과 함께 은은히 울려퍼졌습니다. nbspnbspnbsp예불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순례단을 위해 간절한 목소리로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저희 한국에서 온 정토행자 대중 일동은 부처님의 10대 성지를 순례하는 중 오늘 이렇게 쉬라바스티 사위성에서 부처님이 천불로 화현하신 천불화현탑에 예불하고 찬탄하고 참회하고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이와 같이 천불화현탑을 순례하고 예불 올린 공덕으로 순례 대중들 모두 건강하고 마음이 맑고 행복하고 자유로워 부처님 가르침대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nbspnbsp이와 같이 쉬라바스티 천불화현탑을 참배한 인연 공덕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에 회향하오니 남북 간에 긴장이 해소되고, 화해하고 협력하여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는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서로 상생하는 통일이 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오늘 이와 같이 천불화현탑 순례 참배 인연 공덕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조상 영가님들 뿐만 아니라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또한 모두 왕생극락케 하옵소서.nbspnbspnbsp오늘 저희의 이런 발원을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nbsp지난번 바라나시에 이어서 다시 한번 순례를 무사히 마칠 것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발원하는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많은 순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nbspnbsp천불화현탑 참배를 마치고 천축선원으로 들어온 순례단은 곧바로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천축선원에서 따뜻한 국을 준비해 주어서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저녁 7시 30분부터는 천축선원 주지 대인 스님을 모시고 저녁 법회가 열렸습니다. 대인 스님은 순례단을 환영해 주면서 짧은 인사말로 법문을 대신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천축선원 주지 대인 스님은 그동안은 주로 순례객들을 위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 이제는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집도 지어주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보건소를 운영해서 치료도 해주고, 새해에는 학교와 도서관도 완공해서 3월에 개교를 한다고 합니다. 또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승려들 교육 문제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스님과 늘 의논하고 같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런 대인 스님의 활발한 활동에 대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순례객들이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궁금한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스님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하자 여러 사람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nbspnbsp오늘은 그 중에서 왜 인도는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난하고 평화롭지 못한지 물었던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인도를 다니다보면 왜 이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가는지 의문이 드는데 스님의 답변을 들으니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nbspnbspnbsp“인도는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잖아요.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성인이 난 곳이면 당연히 우리들보다 잘 살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해야 될 텐데 왜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가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nbsp“그런데 우리는 60년 전에 이보다 훨씬 못 살았어요. 일제강점기 때 우리 나라 사람들 사는 모습을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인도의 불가촉천민보다 못합니다. 양반과 상놈 차별도 더 심했고, 사는 것도 더 못 살았어요.nbspnbspnbsp제가 어릴 때만 해도 아이를 낳으면 소위 ‘반타작’을 했어요. 저도 그래서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두 살 어립니다. 대부분 두세 살 안에 죽기 때문에 호적에 빨간줄 긋기 싫어서 그냥 두었다가 동생을 보면 비로소 호적에 올려줬어요. 그러면 어느 하나가 죽더라도 빨간줄 안 긋잖아요. 그래서 저희 집은 죄다 형의 호적상 나이가 동생의 나이와 똑같습니다. 동생이 안 생기더라도 보통 두세 살까지는 키워보고 그때까지 안 죽어야 비로소 호적에 올렸어요. nbspnbspnbsp그래서 첫째, 질문자는 지금의 한국과 인도만 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중국도 100여 년 전에는 자기들 보다 훨씬 작은 나라인 일본에게도 먹힐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요. 앞으로 20년 뒤에는 중국이 한국보다 더 나아질 수도 있어요.nbspnbsp이게 제행무상입니다. 인도도 부처님이 출현하시고 아쇼카왕 시대에는 전 세계에서 최고 가는 문명을 자랑했습니다. 내일 가보시면 알겠지만 2,600년 전에 지어진 사위성의 크기가 경주 반월성의 10배는 될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여긴 굉장한 나라예요. 그러나 모든 나라는 흥망성쇠를 거듭하잖아요. 인도도 그래요. BC 3세기 아쇼카왕 때는 세계 최고의 문명을 가졌고, 그 이후의 쿠샨왕조나 굽타왕조 시대까지도 문명의 규모며 기술 수준이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16세기에도 무굴제국이라는 무슬림 대제국을 건설했죠. 그러다 무굴제국이 망하고 서구의 침략을 받으면서 피폐해진 거예요.nbsp그런데 지금 인도가 다시 일어나고 있어요. 이제 막 잠을 깨서 일어나는 중입니다. 그러니 50년 뒤에 평가하면 ‘인도는 이렇게 잘 사는데 한국은 왜 이렇게 못 사나?’라고 할 수도 있어요. 우리는 남북 간에 긴장이 고조되어서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끝장이에요. 원자력발전소 몇 개 터지고, 북한 핵 몇 개 터지면 형편 없어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모든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 우리는 최근에 450년 전부터 지금까지 흥하는 국면에 놓여 있었고, 인도는 그동안 쇠하는 국면에 있다가 이제 흥하는 쪽으로 막 돌아선 참이라 그래요.nbsp두 번째로, 우리가 순례하는 이 지역이 힌두스탄 대평원인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이 지역은 농업이 중심인 시대에는 최고로 문명이 발달했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농촌이라는 것은 보수적이잖아요. 농업에 안주하기 때문에 카스트제도도 남아 있고, 여러 가지가 쉽사리 변하지 않아요. 그런데 인도의 산업화는 이 힌두스탄 평원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남쪽의 벵갈로르, 서쪽의 뭄바이 등지에서는 이미 굉장히 소득이 높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사는 한국사람과 인도사람을 비교해보면 인도사람의 소득이 훨씬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똑같이 이민 와서 사는 인도사람은 저렇게 소득 수준이 높은데 한국사람은 기독교인이라서 저러나?’ 라고 이야기할 수 없고, ‘미국에 오래 산 흑인이나 스페니쉬는 왜 새로 이민 온 한국 사람보다 못 사는 게 천주교를 믿어서 그러나?’ 라고 할 수 없어요. 이렇게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는 중에 단편적인 것만 보고 비교하면 안 됩니다.nbspnbspnbsp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된 사고방식이에요. 지금의 모습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믿는 나라는 잘 사는데 왜 불교 믿는 나라는 못 사느냐?’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독교 믿는 나라 중에는 필리핀도 있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있잖아요. 반면 기독교 안 믿는 나라인 일본은 장기 불황이라고 하면서도 얼마나 잘 살아요?nbsp그러니 특정한 비유를 그렇게 들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살고 싶으면 염소를 비유로 들고, 여자가 여러 남자를 데리고 살고 싶으면 벌을 비유로 들면 되잖아요. 일부일처 제도를 주장하려면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고 달이 하나인 것을 가져와 비유하면 돼요. 비유라는 것은 이렇게 위험합니다. 전부 자기가 필요할 때 자의적으로 갖다 붙이는 것이거든요. 공자님 같은 사람이 태어난 중국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는 아편이다 뭐다 해서 피폐했는데, 그렇다고 그게 다 공자님 책임일까요? nbspnbspnbsp그러니 그런 비유와는 관계가 없고, 다만 우리 모두는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처님이 인도에 태어났다고 해서 인도가 내내 부강하라는 법은 없어요.nbspnbsp세 번째는, 불법은 내가 어떻게 행복하고 자유로워지는가에 대한 것이지 물질 문명이 얼마나 발달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자꾸 그렇게들 개념을 해석하려 듭니다. 그러니 인도사람들이 이렇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면 ‘이건 부처님 덕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한국은 경제력이 세계 13위이고 1인당 GDP가 28위인데도 왜 행복지수는 117위냐?’ 하고 물으면, 인도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힌두교를 안 믿어서 그렇다’ 라고 할 겁니다. 비난할 의도를 가진다면 ‘기독교를 많이 믿으니 그렇지’라고 이야기할지도 몰라요. nbspnbsp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비유이고 사고방식입니다. 인도 안에서도 우리가 다니는 지역은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이기에 현재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가장 낙후한 지역이자 봉건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여기가 가장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어요. 농경사회에서는 비옥한 토지를 갖춘 지역이 유리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농경에 기반을 둔 지역이 낙후하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우리도 지금 그렇잖아요. 비옥한 토지를 자랑하는 전라도 지역이 오히려 낙후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전라도가 훨씬 잘 살았어요. 음식만 봐도 경상도 음식은 짜고 먹을 게 별로 없는데 전라도 음식은 풍성하잖아요. 물자가 풍부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nbsp질문자는 “네,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며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구걸하는 아이들, 수많은 병자들을 길거리에서 보았는데, 스님의 답변을 들으니 ‘그렇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nbspnbsp이 외에도 순례객들은 정말 많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스님은 모든 질문에 대해 정성을 다해 답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약 2시간 동안의 법회가 모두 끝나자 다시 한 번 열정적으로 법문을 들려준 스님에게 모두 큰 박수를 보냈고 사홍서원을 끝으로 밤 10시가 다 되어서 법회를 마쳤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내일은 새벽부터 하루 종일 사위성 주위를 걸으며 순례를 하기 때문에 피곤할 수 있으니 오늘은 푹 주무세요” 라고 하면서 법회를 마쳤습니다.nbspnbsp순례객들은 일찍 잠들러 숙소로 돌아갔고, 스님은 늦게까지 원고 교정을 보다가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서 천축선원을 출발해 기원정사까지 행선을 하며 걷고, 오전 내내 기원정사에서 시간을 보낸 후, 오후에는 앙굴리말라 탑과 수닷타 장자의 탑을 참배하고, 마지막으로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를 순례한 후 숙소로 돌아올 예정입니다.nbsp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16 (인도 11일째) 성지순례단 A팀 기원정사 순례
nbsp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을 이끌고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래 머무신 곳인 쉬라바스티에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했습니다.nbsp nbsp 새벽예불 후 160여 명의 순례단은 가사를 정갈히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축선원을 출발하여 기원정사까지 한 줄로 서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앞뒤 간격이 떨어지지 않게 왼발 오른발을 알아차리며 행선을 하면서 기다랗게 줄을 지어 새벽 안개를 갈랐습니다.nbsp nbsp nbsp 천이백 비구가 기러기떼처럼 긴 행렬로 탁발을 하러 갔던 것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정진을 하듯이 걷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nbsp nbsp nbsp 가는 도중 어느덧 날이 밝아 자전거를 탄 주민들도 보이고, 어린 아이들이 꽃을 팔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한 인도인이 준 꽃을 한송이 들고 기원정사로 들어섰습니다.nbsp nbsp 아침이 밝자 공원처럼 깔끔하게 꾸며놓은 기원정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례단은 향에 불을 붙이고nbsp긴 행렬을 이루며 기원정사 곳곳을 스님을 따라 물 흐르듯이 밟아보며 부처님과 당시 제자들의 숨결을 느껴보았습니다.nbsp nbsp nbsp 부처님이 머무셨다는 자리에 세워진 ‘간다 쿠티’라는 곳을 바라보며 멈춰서서 삼배를 한 후 법회가 열리는 공터로 이동해 예불을 정성껏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바로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다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격스러웠습니다.nbsp nbsp nbsp 예불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간절한 목소리로 순례단을 위해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성지 어느 곳을 가든 항상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시는데 오늘따라 머나먼 이국 땅에서 다시 듣는 간절한 기도는 지금의 남북관계를 떠올릴 때 더욱 가슴이 아리는 것 같았습니다.nbsp nbsp nbsp 이어서 순례단이 모두 자리에 앉자, 스님은 기원정사의 창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해 주어서 벽돌 더미에 불과한 유적지가 영화를 보듯이 재현되는 기분이었습니다.nbsp nbsp “여기가 기원정사입니다. 인도 말로는 ‘제따 바나’라고 해요. ‘제따’는 사람 이름이고 ‘바나’는 숲이라는 뜻이에요. 우리말로는 ‘기원정사’, 금강경에는 ‘기수급고독원’이라고 표기된 곳입니다.nbsp nbsp nbsp 춥지만 그래도 여기 오니까 다른 성지보다는 아늑하죠? 다른 곳은 그냥 길가 같은데 여기는 사찰 같은 기분이 들어요. 부처님이 처음으로 기증받으신 절이 죽림정사입니다. 죽림정사에서 본 연못 이름이 칼란다카 연못이에요. 부처님이 성도 후 왕사성에 머물면서 교화활동을 왕성히 하셨는데 교화 3년째 되던 해에 칼란다카 연못을 부처님께 기증한 사람이 칼란다카 장자입니다. 장자는 요즘 말로 하면 사업가에 해당합니다. 사업을 해서 왕사성에서 손꼽히는 큰 부자였던 이 분은 부처님법에 귀의해서 아주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nbsp nbsp 칼란다카 장자는 사위성에 사는 수닷타 장자와 사업상 서로 교류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절친했습니다. 수닷타 장자가 왕사성에 가면 친구인 칼란다카 장자의 집에 머물면서 대화도 나누고 사업도 함께 했으므로nbsp늘 아주 반갑게 맞이해줬어요. 그런데 이번에 왕사성을 방문했을 때는 친구 본인이 안 나오고 하인이 나와서 주인이 좀 바쁘니까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안내하는 거예요.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친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헐레벌떡 오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섭섭했는지 수닷타 장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nbsp ‘뭐가 그리 바쁜가? 아들딸 시집 장가라도 보내는가?’ ‘아이고, 내가 아들 장가보내고 딸 시집보내는 그런 일로 자네같이 귀한 손님을 기다리게 하겠는가?’nbsp ‘그러면 그것보다 더 큰 일이 뭐가 있어서 그러나?’ ‘부처님이 내 식사 초대에 응하셔서 내일 우리 집에 식사하러 오신다네. 그래서 부처님과 일행분들께 대접할 음식을 일일이 감독하고 같이 준비하느라 바빴어.’ ‘부처님이라니? 아니, 이 세상에 부처님이 출현했단 말인가?’ ‘아니, 자네는 그것도 몰랐는가?’ nbsp nbsp 부처님은 그때 이미 왕사성에서는 유명하셨어요. 여러분들이 가서 봤듯이 빔비사라왕, 사리푸트라, 목갈리나, 마하가섭 존자 등이 모두 귀의해서 이미 천이백오십 대중이 성립했을 때이니까요. 그러나 사위성에서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수닷타 장자는 친구에게서 부처님의 설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친구의 이야기만 듣고도 감복을 한 거예요. 친구가 ‘자네는 정말 복이 많네. 부처님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내일 여기에서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어.’라고 말한 후 늦은 밤이라 자러 들어간 뒤에도 수닷타 장자는 흥분이 되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nbsp nbsp 그렇게 잠을 설치고 새벽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집을 나와 산책을 하다가 나무 밑에 누가 nbsp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앉아 있는 자세가 너무나 편안하고 여법해서 저 분이 부처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절을 하면서 ‘혹시 부처님이 아니십니까?’라고 했더니 ‘그렇소.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요.’ 이러는 거예요. 누가 처음으로 인사하는데 부처님이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 됐소’라고 답한 사람이 마하가섭존자를 비롯해 모두 세 사람인데 수닷타 장자가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법을 청했고, 법을 듣고 수닷타 장자가 초견성을 했습니다. 금강경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런 표현이 나오지요? 바로 그 수다원, 즉 첫 번째 단계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걸 빨리어로는 ‘소따빠나’라고 해요.nbsp nbsp 초견성을 얻은 수닷타 장자는 너무너무 기뻐서 부처님을 사위성으로 초대했습니다. ‘부처님, 저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저희 나라에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저희 나라로 와 주십시오.’ 이렇게 초대하자 부처님이 침묵으로 승낙하셨어요.nbsp nbsp 그래서 수닷타 장자는 장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부랴부랴 말을 타고 사위성으로 돌아와 부처님이 3개월 후에 와서 머무를 처소, 즉 부처님과 1250명의 비구 대중이 머무를 장소를 마련하러 나섰습니다. 죽림정사를 이미 봐서 모델로 삼을 수 있었어요. 수행자의 처소는 성에서 너무 가까우면 번다하고, 성에서 너무 멀면 걸식하거나 생활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성으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즉 조용하면서도 비교적 마을에 가까운 곳이 되어야 합니다. 왕사성의 북문에서 죽림정사까지의 거리랑 사위성의 서문에서 기원정사까지의 거리가 거의 같습니다. 성문 밖으로 500700미터 정도, 즉 1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위치에요.nbsp nbsp nbsp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가 적격이라 땅 주인을 알아봤더니 이 나라의 태자인 거예요. 이 큰 제국의 왕자가 소유한 땅이니까 당연히 팔지 않겠죠. 우리 같으면 안 되겠다고 바로 포기했겠지만 수닷타 장자는 이 좋은 숲을 반드시 부처님의 처소로 마련해드리고 싶었기에 태자를 찾아갔어요. 이 태자 이름이 ‘제따’입니다. 한자로는 ‘기타’라고 하고 빨리어로는 ‘제따’예요. 태자에게 찾아가서 서문 밖에 있는 이 땅을 사고 싶다니까 안 판대요. 그러자 장자가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소’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백지수표를 준 거예요.nbsp nbsp 그럴 때 바로 싫다고 거절하지 않는 게 당시의 예법이었습니다. 바로 ‘안 됩니다’라거나 ‘싫습니다’라는 말을 못 해요. 뭔가 거기에 대한 답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주겠소’라고 하니까 태자가 안 팔겠다는 뜻은 보여야겠고 답은 해야 하니까 ‘그러면 이 땅에 그 면적만큼 황금을 까시오’라고 답한 겁니다. 사실상 안 팔겠다는 뜻으로 가격을 터무니없이 매긴 거예요. 그럴 때 ‘그건 너무 비쌉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 말고 실제로 받을 금액을 말하세요’라고 할 수 없었어요. 이미 자기가 얼마든지 좋다며 백지수표를 냈기 때문에 가격 흥정은 더 이상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장자가 ‘알았습니다’ 이러고 갔어요. nbsp 태자는 장자가 포기하고 돌아간 줄 알았지만 수닷타 장자는 그 값으로 사려고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래서 금고를 열어 금화를 죄다 마차에 실어와 숲에다 깔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금으로 땅을 덮어봤자 얼마나 덮겠어요? 숲 입구에 조금 깔고 나니 금이 다 떨어져 버렸어요. 태자가 와서 보니까 턱도 없잖아요. 그래서 속으로 ‘그것 봐라, 네가 돈 좀 있다고 까불더니. 이제 안 사겠지’라고 생각하고 이제 포기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래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가진 어음을 전부 금으로 바꾸고 비밀창고에 두었던 돈까지 다 꺼내왔어요. 땅에 금을 까느라 친구들에게 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졸지에 집도 다 팔고 장자는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됐어요. 그래도 턱없이 조금밖에 못 깔았어요. nbsp 수닷타 장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개중에는 이런 설도 있어요. 그렇게 돈이 다 떨어졌는데도 장자는 포기를 하지 않고 구걸을 했어요. 요즘 말로 하면 보시 받으러 다녔다는 겁니다. 돈을 어쩌는지 보려고 태자가 금화를 한 닢 줬더니 거지가 된 장자가 그 금화를 가지고 바로 숲으로 달려가서 다시 땅에 깔았다고 합니다. nbsp nbsp nbsp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한 태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이 땅을 이렇게까지 구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장자가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실 땅을 구하려고 그럽니다’라고 답했어요. 태자가 그 답을 듣고 더 놀랐어요. 사업하는 사람이 이토록 탐을 내는 걸 보고 땅에 대단한 보물이라도 묻혀 있는 줄 알았는데 사업과는 전혀 관계없고 수행자들이 머물 처소를 마련하려고 그런다잖아요.nbsp nbsp 도대체 그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더니 장자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했습니다. 설명을 들은 기타 태자가 수닷타 장자의 정성에도 감동하고 부처님에 대해서도 감동해서 나머지 땅을 기증해준 겁니다. 돈을 안 받고 준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낸 돈만 받고 나머지 땅을 다 그냥 내어준 겁니다. 받은 금액은 원래 제시했던 금액의 10분의 1도 안 되지만 사실 땅값은 받을 만큼 다 받은 셈이에요. 그러나 제시한 금액에는 턱없이 못 미치기 때문에 이 숲은 기타 태자가 기증한 셈이 된 겁니다.nbsp nbsp 기타 태자가 기증한 땅에 급고독 장자가 정사를 지었다고 해서 기원정사를 ‘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부릅니다. 지금 둘러보면 건물터가 많지만 이 건물들은 모두 200300년 지난 뒤에 지은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건물을 짓지 않았고, 지어도 기껏해야 초막 정도였습니다.nbsp nbsp 이렇게 수닷타 장자가 제따바나를 얻어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처소를 마련했고, 부처님은 죽림정사에 이어 두 번째 정사를 기증받았습니다. 수닷타 장자의 기원정사 창건 이야기는 여러 설화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습니다. 박물관에 가보면 금을 실은 수레와 땅바닥에 깔린 금을 묘사한 그림이나 벽화가 수없이 많아요. 수닷타 장자는 교단에 기여한 정도는 물론이고 신심의 깊이와 수행 정도에서도 부처님의 10대 제자에 버금갑니다.nbsp nbsp 그런데 이곳 사위성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강국이었지만 신흥강국이어서 문화수준은 떨어지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이 지역에는 소위 삿된 외도들이 판을 치고 기복이 성했습니다. 누가 신통을 보이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이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바른 정법에 귀의하기가 어려운 상태였어요. 그래서 초기에는 이곳에서 교화하기가 좀 어려웠습니다.nbsp nbsp 그러나 사람들이 부처님과 불법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여기에서 많은 출가자들과 후원자들이 나타납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부처님께 ‘유행을 하실 때는 몰라도 우기 때 안거는 여기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청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45년 교화 활동 중 24안거를 여기서 했다고 해요. 이곳 기원정사에서 19안거를 하고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에서 다섯 번 혹은 여섯 번의 안거를 해서 총 24안거 혹은 25안거를 했다고 합니다. 동원정사에 머무신 회수는 기록이 약간 차이나지만 기원정사에서 19안거를 했다는 기록은 일관됩니다. 전체 안거의 절반 이상을 사위성에서 머무르신 거예요. nbsp 이런 걸 보면 부처님이 이곳 사위성과 기원정사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어요. 어제 우리가 하루 만에 왔을 정도로 여기는 카필라성에서 가깝습니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언어나 종족이 석가족과 거의 같은 계열이어서 문화도 유사점이 많았을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이 우리나라 사람인데 미국에 가서 이름을 날리다가 북경에 와서 활동하시는 것과 비슷해요. 북경은 서울과 가깝기도 하고 문화나 언어, 음식 같은 데서 여러 가지 유사성이 많으니까 안거는 미국 뉴욕보다는 중국 북경 쪽에서 많이 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nbsp 그런데 이곳은 한국 불자들에게 특별히 더 유명합니다. 첫째, 금강경이 설해진 장소라고 알려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3.1독립운동의 불교계 대표이신 백용성 스님께서 ‘4대 성지를 가꾸어라’라고 하시면서 하나를 더 보태셨어요. 4대 성지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 도를 이루신 곳, 설법하신 곳, 열반하신 곳인데 여기에 부처님의 장기 주석지인 사위성의 기원정사를 잘 가꾸라는 말씀을 더하셨습니다. 8대 성지나 10대 성지가 아니라 이렇게 5대 성지를 지칭하셨어요. nbsp nbsp 이렇게 기원정사는 절이 지어진 계기가 아주 신심 깊은 재가 신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어요. 또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신 곳입니다. 가장 오래 머무셨으니까 설법도 여기에서 가장 많이 하셨겠죠. 그래서 경전을 보면 설법한 장소가 제따바나일 때가 가장 많습니다. 아함경 내용 중 거의 절반 가까이가 사위성 제따바나에서 설해졌어요. 금강경에서도 경이 설해진 장소가 제따바나, 즉 기원정사로 되어 있습니다. 조계종은 특히 금강경을 소위 경전으로 삼기 때문에 불자들이 늘 금강경을 독송하잖아요. 그래서 특히 한국 불교인들에게는 이 기원정사가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4대 성지를 제외하면 여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어요.” nbsp 스님의 실감나는 이야기에 순례단은 흠뻑 몰입되었습니다. 특히 수닷타장자가 기원정사를 마련한 것이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파산이 될 정도로 온갖 정성을 기울인 것이였다는 말씀은 새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경전을 읽을 때와 달리 스님의 육성으로 직접 들으니 수닷타장자의 신심이 얼마나 컸는지 가슴으로 다가왔습니다.nbsp nbsp 이어서 스님의 설명이 경전 속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또 이곳 사위성에서 일어난 수많은 부처님의 교화 사례들을 경전으로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 nbsp nbsp 특히 이곳 사위성은 금강경이 설해진 곳으로 한국 불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곳인데, 금강경도 함께 독송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금강경이 설해진 곳에서 금강경을 직접 읽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nbsp nbsp 경전 독송을 마치자 아침 안개가 짙게 드리우면서 제법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추위를 느끼는 대중들을 배려하며 따뜻한 국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면서 식사 시간을 주었습니다. 너무 추운지 어떤 조는 둥글게 원을 만들어 방한 체조를 하기도 해서 큰 웃음을 주기도 했습니다.nbsp nbsp ▲ 추위를 이기고자 방한 체조를 하는 순례객들 nbsp 천축선원에서 배달해 온 따뜻한 된장국은 추위를 녹이기에 충분했고 맛도 일품이었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니 드디어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nbsp nbsp nbsp nbsp nbsp 이어서 다시 법회 장소에 모여 스님의 설법이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렇게 쉬라바스티에 머물며 스님의 법비를 맞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nbsp nbsp 스님은 이곳 사위성에서 있었던 갖가지 교화 사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들도 많았는데 그 이야기들이 모두 이곳 사위성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니 더 귀를 쫑긋 세우게 되었습니다.nbsp nbsp nbsp 그 중에서 말리카부인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이야기한 대목과 프라세나짓왕과의 대화 내용은 무척 감명 깊게 다가왔습니다.nbsp nbsp “옛날의 왕조 사회에서 백성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제일 귀한 게 누구냐?’리고 물으면 왕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또 결혼한 부인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게 누구냐?’라고 물으면 남편이라고 대답해요. 그런데 이 여인은 굉장하지요? 남편이 왕이 아니어도 남편이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하물며 남편이 왕이면 당연히 ‘당신입니다’라고 해야 할 텐데 ‘나 자신입니다’라고 대답한 거예요. 옛날에 이런 말 하면 그대로 죽임을 당할 일이에요. 그런데 죽이지 않은 왕도 대단하죠. 그 말을 듣고 부처님께 여쭈니까 ‘그렇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이 소중하다 해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답하신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nbsp nbsp 그리고 프라세나짓왕과 부처님의 대화 중 아주 유명한 대화가 있습니다.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프라세나짓왕이 부처님께 여쭸어요. 그러면 보통 군대가 강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주로 할 텐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 nbsp nbsp 모든 산천초목까지 다 왕의 소유였던 절대왕정 시대에 백성을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라고 말한 거예요. 전 세계 어떤 사람도 절대 왕정 시대에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라. 그러면 굳이 왕이 복을 구하기 위해서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도 하셨고, ‘왕이 만약에 지혜가 없다면 한 나라를 바르게 이끌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생명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 한다’ 이런 말씀까지 하셨어요. 대통령은 국민의 머슴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주권재민 시대에도 청와대에 가서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성들 하나 하나의 고통을 자기 자식의 고통처럼 보고 대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도 우리 사회를 보면 세월호 사건이든 강정마을이든 대통령이 정말 자기 자식이며 자기 가족의 일처럼 생각해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 붓다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nbsp 이 외에도 스님은 부처님이 고통받는 사위성 대중들을 교화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듣듯 눈을 감고 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목소리는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nbsp nbsp 이어서 스님은 이번 순례객 중에서 어제 한국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신 분이 있다고 하면서 다함께 천도재를 같이 지내주자고 했습니다. 순례를 포기하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스님은 부처님의 성지인 바로 이곳에서 천도재를 함께 지내줄테니 순례를 함께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면서 상주를 위로하고 천도재를 여법하게 지내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영가시여,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지금에 이르러 영가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고?nbsp nbsp 영가시여, 만약에 영가가 살아 생전에 아무리 좋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죽어가는 생명을 한없이 살리고, 가난한자를 한없이 돌보고, 괴로워하는 자를 한없이 위로하고, 진실을 말하고 위로한 온갖 공덕을 쌓았다 하더라도 지금에 이르러 이 법사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꿈속에서 지은 공덕과 같아 해탈 열반에 이르지 못할지니. 영가시여, 살아 생전에 사람을 해치고, 남의 물건을 뺏고, 남을 괴롭히고, 거짓말을 하고, 욕설을 하고, 술 먹고 취했다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이 법사의 질문에 능히 답을 할 수 있다면 갖가지 모든 죄업이 꿈 속에서 저지른 것과 같아 능히 눈을 뜨고 꿈을 깨면 그 죄업이 흔적조차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영가시여, 영식을 오롯이 하여 이 법사의 질문에 능히 답해 보시오.nbsp nbsp 영가가 이 법사의 질문에 단박에 깨달음을 얻으면 즉시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지만, 만약 영가가 이 질문에 단박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오늘 여기 모인 청중들이 부처님께서 장기 주석하신 이 성스러운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영가를 위하여 해탈주를 독송할테니 이 해탈주를 잘 듣고 저 아마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로 왕생하시어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고 아미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 마침내 해탈열반을 성취하소서.” nbsp 스님의 설법이 끝나자 대중들은 아버님 상을 당한 순례객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해탈주를 함께 독송해 주었습니다. 상주가 된 분은 법을 설해준 스님과 대중들에게 삼배를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 nbsp nbsp 이어서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동안 일정에 쫓기어 성지에 도착해도 예불 올리고 설명이 끝나면 곧바로 버스에 다시 탑승하기 바빴는데, 오늘은 시간이 많이 주어져서 기원정사 곳곳을 거닐어보고, 혼자서 정진도 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 nbsp nbsp nbsp 순례객들은 아난존자가 부처님에게 물을 떠다주었다고 하는 우물,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모셨다고 하는 보리수나무,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을 했다고 하는 곳 등을 천천히 거닐어 보기도 하고, 부처님의 처소인 간다 쿠티 앞에서 108배 절을 하거나 명상을 하기도 했습니다.nbsp nbsp ▲ 부처님이 머무셨던 처소, 간다 쿠티 nbsp ▲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을 했다고 하는 곳 nbsp 그리고 대중들이 정진을 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순례단 전체를 위해 일대 일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순례객들에게는 이 사진 한 장이 평생을 두고 남을 기념이 될 것입니다. 마치 대학 졸업 사진을 찍듯이 모두들 가슴 설레여 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습니다.nbsp nbsp ▲ 스님과 일대 일로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 nbsp 이렇게 기원정사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후 순례단은 다시 장구한 행렬을 이루며 부처님의 제자들이 탁발을 하기 위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사위성으로 들어갔습니다.nbsp nbsp 사위성 서문을 지나 곧이어 앙굴리말라스투파, 수닷타장자의 스투파가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앙굴리말라스투파를 참배한 후 스님으로부터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어떻게 부처님을 만나 교화가 되었고, 그의 마지막 죽음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함께 그에 관련된 경전을 독송했습니다.nbsp nbsp ▲ 앙굴리말라스투파 nbsp 또 수닷타 장자의 스투파에서는 탑 위까지 줄을 지어 올라가 참배를 한 후 탑을 향해 삼배를 올렸습니다.nbsp nbsp ▲ 수닷타장자 스투파 nbsp 이어서 다시 사위성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이 코스는 27번째 성지순례를 오면서 처음으로 가보는 길입니다. 어제 스님이 답사를 마치고 새롭게 만든 코스입니다.nbsp nbsp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니 황량한 정글이 나타났습니다. 당시에는 가장 번성했을 도시였 텐데 황무지로 변해 있었고, 인적이라곤 구걸하는 아이들만 지치지 않고 끝까지 순례객을 따라왔습니다.nbsp nbsp ▲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는 순례단 nbsp 사위성 동문으로 나오니 부처님이 비구니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 왕사 터가 나왔고, 다시 논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베사카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풀바람 비하르. ‘동원정사’가 나타났습니다. 어제 스님이 답사한 바로 그곳입니다.nbspnbspnbsp nbsp 순례단은 동원정사 유적지를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돈 후 자리를 펴고 앉아 스님으로부터 베사카부인의 깊은 신심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 nbsp ▲ 동원정사, 풀바람 비하르 nbsp 동원정사를 참배하는 것으로 쉬라바스티에서의 순례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새벽에 순례를 시작했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습니다. 다시 천축선원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유채꽃이 만발해 있어서 하루 종일 순례를 하느라 걸었던 노곤함을 달래 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스님은 “여러분이 언제 한번 이런 시골길을 걸어보겠어요?” 하면서 순례를 마친 대중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습니다.nbsp nbsp 조별로 전기밥솥에 밥을 지어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7시부터는 다시 저녁 법회가 열렸습니다. 스님은 이제 마지막 순례지로 상카시아만 남겨 놓고 있는 대중들을 위해 총정리가 될 수 있는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순례단이 그동안 돌아본 바라나시, 전정각산, 보드가야, 라즈길, 바이샬리, 쿠시나가라, 룸비니, 카필라바스투, 랑그람, 쿠단, 삐쁘라하와 등을 주욱 상기시켜주며 그곳에서 알아야 핵심 내용들을 다시 짚어 주었습니다. 14일 동안의 순례가 다시 한눈에 그려지는 기분이었습니다.nbsp nbsp 그리고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객들은 순례를 하면서 들었던 다양한 의문들을 스님께 질문했고,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2시간 30분 동안의 강연을 모두 마치고 스님은 마지막으로 이제 순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면 좋을지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 nbsp “성지순례를 하면서 느낀 점이 좀 있어요?” nbsp “네” nbsp nbsp “첫째, 성지를 참배한 것 말고도 인도에 와서 보고 배운 것이 참 많았지요? 그러니 한국에 돌아가면 너무 물질에 연연하는 삶에 대해 좀 재고를 해보셨으면 해요. 그러면 죽을 때까지 근심 걱정이 끝이 안 나요. 조금 한 템포 떨어져서 삶을 바라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nbsp nbsp 둘째, 우리가 불교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2600년 전이었는데도 얼마나 합리적이고 바르고 균형잡혀 있으셨습니까. 그 가르침은 지금 들어봐도 기가 막힌 얘기잖아요. 오늘날도 부처님 만큼 그렇게 유머있고 위트있고 똑바르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우리는 왕이 되려고 꿈을 꾸는데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버렸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 길은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nbsp nbsp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는 자세와 부처님의 인격을 닮아가려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자꾸 이러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닮아가려는 태도가 필요해요. 부처님과 당시 수행자들의 삶을 우리의 삶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그 때보다 더 잘 먹잖아요. 어디에 자도 그때보다 더 잘 자고요. 무엇을 입어도 그때보다는 잘 입고요. 일부러 입던 옷을 벗고 분소의를 입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먹고 입고 자는 것 가지고 안달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nbsp nbsp nbsp 누군가가 특별히 더 좋은 옷을 주지 않아도 지금 입고 있는 이 정도 옷은 입고 살 수 있잖아요. 그렇게 안달하지 않아도 어차피 먹게 되어 있고, 자게 되어 있고, 입게 되어 있어요. 적당하게 먹을수록 여러분들 건강에도 좋아요. 요즘 시대는 전부 다 비만이 문제이지 영양 실조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때가 지나면 안 먹어야 해요. 일부러 먹기 싫어서 안 먹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주는 대로 그냥 먹는 겁니다. 이렇게 살면 사는 것이 훨씬 편해져요.nbsp nbsp 마음이 편안해지면 내가 갖고 있는 재능도 효과가 더 나요. 그러면 능력이 더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효율이 더 생겨요. 재능을 다른 곳에 낭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길이 있어요. 또 이 길은 현재만 좋은 길이 아니고 미래도 좋은 길이에요.nbsp nbsp 그리고 정토회가 가는 방향은 진보적인 방향이기 때문에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잘 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것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차를 타면 가만히 있어도 목적지에 가게 되어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정토회에 몸을 담고 있으면 앞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본인이 안달이 나서 자꾸 내려서 문제죠. 그래서 제가 ‘붙어만 있어라’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장 다 버리고 들어와서 머리 깍고 스님이 되라는 얘기는 안 하잖아요. 다만 너무 세속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겁니다.nbsp nbsp 약간 한발 떨어지면 훨씬 행복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던 일을 다 해나갈 수 있어요. 한 템포만 늦추면 안달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해나갈 수 있어요. 스님도 침대에 누워서 안 잘 뿐이지 차를 타고 가면서 자든 어떻게든 다 자면서 사는 거예요. 잠을 안 자고 어떻게 살겠어요? 대신 몇 시에 누워서 자고, 몇 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없어서 좀 문제이긴 하지만요.nbsp nbsp 인도에서 한국식으로 살려하면 좀 힘들어요. 그런데 한국식으로 살겠다는 생각만 놓아버리면 인도만큼 살기 편한 곳이 없어요.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사람들 눈치 보고 잔뜩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데 여기는 긴장하고 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그러나 내 식대로 살려고 하면 뜻대로 잘 안 되어서 힘들어져요. 그러니 떠내려가는 물에 맡겨 놓고 그냥 살면 돼요. 그러면서 내 계획은 내 계획대로 갖고 있되 그것을 고집만 안 하면 됩니다.nbsp nbsp nbsp 성지순례도 절대로 인도식으로만 하지 않아요. 우리식으로 해요. 그런데 고집하면 갈등이 생겨요. 고집은 안 해요. 길이 막히면 내려서 밥 먹으면 되고, 국경을 막아도 별 차질이 안 생기잖아요. 왜냐하면 중간에 몇 시간씩 차질이 생겨도 늘이고 줄일 수 있도록 스폰지를 다 넣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룸비니 갈 때 몇 시간 늦게 가도 차질이 안 생겨요. 그 날은 가는 일정만 잡아 놓았거든요. 어제 늦게 도착해서 천불화현탑을 못보면 오늘 가서 보고 밥을 한 시간 늦게 먹으면 되잖아요. 이렇게 노하우가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 계획대로 가되 그러나 순간순간은 인도 현지 사정에 맞춰야 해요. 여기에 안달하면 성질이 나서 못 살아요. 버스가 털렁털렁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맞추되 계획은 딱 세워놓고 조정해 가면서 살면 되듯이 인생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세요.” nbsp 스님의 격려는 순례단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스님은 과로가 누적되어 편두통이 계속 있으신지 목 뒤에 파스를 계속 붙이고 있었음에도 열정적인 강연을 해주었습니다.nbsp nbsp 온 힘을 기울여 성지에 대해 설명하고, 부처님의 삶을 다시 재해석해 주고, 대중들이 순례를 잘 하도록 사전답사까지 꼼꼼히 챙겨준 스님에게 순례단은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nbsp nbsp nbsp 내일 순례단 A팀은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해 4시에 상카시아로 출발합니다. 스님은 새벽에 A팀을 배웅한 후 오후에는 다시 B팀을 맞이해 천불화현탑을 함께 참배할 예정입니다. nbspnbsp 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15 (인도 10일째) 성지순례단 A팀 쉬라바스티 도착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쉬라바스티 지역의 불교유적지를 답사했고, 오후에는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을 맞이하고 천불화현탑을 참배한 후 저녁에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어젯밤 보드가야에서 차를 타고 13시간 반이 걸려 쉬라바스티에 도착한 스님은 한국 절인 천축선원에서 하룻밤을 주무셨습니다. 새벽예불과 기도를 마치고 아침에는 천축선원 주지인 대인스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차담을 나누는 중에 스님이 베사카 부인이 창건한 동원정사의 위치에 대해 묻자 대인스님은 쉬라바스티에는 최근에 발굴된 여러 불교 유적지가 있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성지순례 때 마다 이곳을 방문하지만 늘 시간에 쫓겨서 주위를 답사해 보지 못했다며 대인 스님과 함께 답사를 나섰습니다. nbspnbsp먼저 경전에 많이 나오는 베시카부인이 지은 절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인도말로 ‘풀바람 비하르’ 라고 불리우는 곳이었습니다. 스님 일행이 도착하자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인도 출신 스님이 나와서 이곳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베사카 부인이 지은 절, 동원정사nbsp‘풀’은 ‘동쪽’이라는 뜻이고 ‘바람’은 명상하는 곳, 즉 ‘정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동원정사’라고 부를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정사를 창건한 베사카부인은 부처님 당시에 재가 수행자 중에서 가장 신심이 컸던 분으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남자 재가 수행자 중에 가장 신심이 컸던 분이 수닷타장자라면 여자 재가 수행자 중에 가장 신심이 컸던 분은 베사카부인이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이곳은 비구니 처소였다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비구니 처소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베사카부인이 지은 절이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는 자연스럽게 비구니 처소가 된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은 45안거 중에 25안거 내지 24안거를 쉬라바스티에서 보냈다고 하고, 그 중 19안거를 기원정사에서 보내셨기 때문에 이곳 동원정사에서는 다섯 번 내지 여섯 번을 지내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중요한 곳이지만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많이 닿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nbspnbsp벽돌로 둘러쳐진 곳 안에는 작은 돌기둥이 신령스럽게 모셔져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힌두교의 ‘링가’입니다. 이곳을 지키는 스님은 “이것이 원래부터 링가였던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발자취를 상징하는 아쇼카석주였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쇼카석주가 깊이 묻혀 있었는데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고 나서 힌두교에서 이 아쇼카석주를 잘라서 링가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nbspnbspnbsp스님은 유적지가 높은 지대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후세에 벽돌이 무너져내리면서 지대가 높아졌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유적지 바로 옆에 인도 스님이 운영하는 법당이 있어 참배를 했습니다. 스님은 “내일 오후에 한국에서 순례객 150여 명과 함께 다시 이곳을 방문하겠다”고 인사하고 절을 나왔습니다.nbspnbsp▲ 동원정사 터에서 출토된 유물들nbsp절에서 나와 논두렁 길을 조금 걸으니 사위성의 동문이 나왔습니다. 또 동문 바로 앞에는 왕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해 지은 절, 즉 ‘왕사’라고 불리우는 절터가 발견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여성 출가자는 외호를 받지 않으면 위험했기 때문에 왕이 사위성 바로 가까이에 절을 지어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저 멀리 보이는 것이 사위성 동문 쪽 성벽▲ 동문 바로 앞에 있는 왕사 터nbspnbsp동문을 통해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니 황무지로 변해있는 정글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곳이 가장 번성한 도심이었을텐데 황량하게 변해 있는 모습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습니다.nbspnbsp▲ 동문을 통해 사위성 안으로 들어온 스님 일행nbsp사위성 안에는 곳곳에 땅에 묻힌 벽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발에 채이는 벽돌들을 보며 이곳이 2500년 전에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음을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사위성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벽돌nbsp다시 사위성 서문 쪽으로 계속 걸으니 수닷타장자 스투파가 나타났습니다. 스투파 앞에서 삼배를 한 후 답사를 마쳤습니다.nbspnbsp▲ 수닷타 장자의 스투파nbsp답사를 마치고 나서 스님은 “내일 A팀을 안내할 때는 코스를 좀 바꾸어야겠다”고 하면서 오늘 답사한 것을 토대로 기존에 순례하던 코스에서 ‘동원정사’를 참배하는 것을 추가했습니다. 어떤 순서로 순례를 하면 동선이 가장 효과적일지 고민한 후 스님이 짠 코스대로 다시 길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마을로 난 길을 순례객들이 걸어야 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다시 답사를 해보니 논두렁으로 난 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을 안내하기 위해서 직접 답사하고 꼼꼼히 체크하는 스님의 모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nbspnbsp오후에는 원고 교정 업무를 보면서 휴식을 하다가 오후 5시 정도에 성지순례단 A팀이 쉬라바스티에 다 와간다는 연락을 받고 마중을 나갔습니다. A팀은 쉬라바스티에 도착하자마자 스님과 함께 천불화현탑을 참배할 예정이어서 스님도 천불화현탑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덕생법사님, 선주법사님, 자광법사님과 함께 8대 성지 순례를 모두 마친 A팀은 스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해가 넘어가서 어둑해진 가운데 드디어 A팀의 버스 4대가 나란히 천불화현탑 앞에 도착했습니다.nbsp스님은 천불화현탑 앞에서 “쉬라바스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며 환한 웃음으로 순례객들을 맞이해 주었습니다.nbspnbsp▲ 천불화현탑nbsp순례객들은 가사를 수하고 향을 피운 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차례로 줄을 지어 천불화현탑 위로 올라갔습니다. 점점 어두워지더니 탑돌이를 모두 마치자 해가 다 지고 말았습니다. nbspnbspnbsp저녁예불을 이곳 천불화현탑에서 올린 후 이어서 8대 성지 순례를 마치고 먼 길을 달려온 순례객들을 위해 스님이 축원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순례객들이 앉아 있는 탑 위에는 다행히 인도 스님들이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어서 겨우 순례객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 스님이 이곳 천불화현탑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쉬라바스티, 즉 사위성에 있는 천불화현탑입니다. 사위성은 코살라국의 수도입니다. 코살라국은 마가다국과 함께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2개 국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곳 왕은 프라세나짓왕이었습니다. 코살라국은 신흥 강국이었습니다. 마치 유럽이 전통 강국이라면 미국이 신흥 강국이고, 지금 미국이 전통 강국이라면 중국이 신흥 강국이듯이 말이죠. 그렇게 신흥 강국이다 보니까 군사적, 경제적으로는 매우 강력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많이 뒤떨어졌던 것인지 종교적, 사상적, 철학적인 부분에는 조예가 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육사 외도들의 가르침이 널리 성행했다고 합니다.nbspnbspnbsp부처님이 수닷타 장자의 초청을 받고 이곳에 오셔서 설법을 하셨지만 아주 뛰어난 일부 엘리트들을 제외하고는 불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닷타장자는 무척 안타까워 하면서 부처님께 ‘이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방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외적으로 신통력을 좀 보여주셔야겠습니다’ 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인격이나 말씀하신 걸로 봐서는 맞지 않는 일인데 어쨌든 그렇게 청하자 부처님께서 어느 날 ‘성 밖으로 모여라’라고 하시자 대중들이 이곳에 구름처럼 많이 모였답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은 성에서 좀 떨어진 곳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망고 하나를 드신 후 그 씨를 땅에 심었더니 금방 싹이 트고 자라서 거목이 되었고 망고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그 망고가 다 부처님으로 변했답니다. 그것을 두고 ‘천불이 화현을 했다’고 하는 곳입니다. 그 후 부처님은 하늘로 오르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쉬라바스티 사람들은 그 일로 인해서 불법에 귀의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이곳이 쉬라바스티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알려지면서 이렇게 큰 기념탑이 쌓이게 된 것입니다.nbspnbsp술 취한 코끼리가 부처님께 항복했다는 ‘취상조복’이 라즈길을 상징하고,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이 바이샬리를 상징한다면, 쉬라바스티를 상징하는 것은 ‘천불화현’입니다. 지금은 비록 허물어진 탑이지만 산같이 높은 탑이 쌓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좀 늦었지만 천불화현탑을 참배했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먼 길을 오시느라 특히 국경을 드나드느라고 애 많이 쓰셨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통을 쓰지 말라고 가르치셨다고 알고 있어서 왜 이런 유적지가 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그만큼 사위성에서는 육사 외도의 공격이 많았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nbspnbsp늦은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천불화현탑 참배를 무사히 마치고 순례객들은 쉬라바스티의 유일한 한국 절인 천축선원으로 들어갔습니다.nbspnbspnbsp천축선원에서는 따뜻한 국과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어서 순례객들 모두 무척 기뻐했습니다.nbspnbsp▲ 천축선원nbsp그동안 전기밥솥과 밑반찬으로 끼니를 해결하느라 따뜻한 국을 구경해보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맛본 국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나 봅니다. 게다가 오늘은 스님이 직접 국을 떠주었습니다.nbsp순례객들은 익숙한 목소리로 스님이 “따뜻한 국 맛있게 드세요”라고 하자 마치 고향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난 듯 기뻐했습니다.nbspnbsp저녁 7시 30분부터는 천축선원 법당에서 저녁 법회가 열렸습니다. 스님은 천축선원 주지인 대인스님께 순례객들을 위해 좋은 법문을 들려달라고 하면서 법을 청했습니다.nbspnbsp대인스님은 어떻게 해서 이곳 인도에 불사를 하게 되었는지, 지금은 어떤 일들을 천축선원에서 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준 후 간단히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게으름을 피우다가도 법륜스님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들 때가 많습니다. 법륜스님 보다 제가 잠도 더 많이 자는 것 같고요. 부끄러움을 느끼고 스님을 의식하면서 저도 항상 본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정토행자님들이 신년에 세원 원력들이 꼭 이루어지시길 바랍니다.”nbsp대인스님의 법문에 이어서 스님의 즉문즉설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먼저 스님은 순례객들에게 성지순례를 해본 소감이 어떤지 물어보면서 법회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성지를 한바퀴 돌아보니까 어땠어요?”nbsp“좋았어요.”nbspnbsp“뭐가 좋았어요?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따라다니기에 급급했죠? 본 것이라고는 허물어진 벽돌 밖에 기억이 안 나지요? 여기저기 가봐도 똑같죠? nbspnbsp한국 같으면 산 모양이라도 다른데, 인도는 평평한 곳에 이 탑인지 저 탑인지 이곳인지 저곳인지 그냥 동그란 탑이 하나 있고, 소똥도 있고, 개똥도 있고, 그저 버스에서 내리면 머리 숙이고 절이나 좀 하고 그랬죠? 저녁에 도착하면 밥 해먹기 바빴을 것이고요. nbspnbspnbsp여러분들이 순례하면서 궁금한 점을 메모해 놓으라고 바라나시에서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순례하면서 궁금했던 점, 경전 독송하면서 궁금했던 점, 수자타아카데미에 대해 궁금했던 점, 성지에 있는 한국 절을 보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nbspnbsp스님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여러 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2시간 20분 동안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nbspnbsp그 중에서 순례객 한 분의 질문은 많은 공감을 얻고 큰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감흥이 크지 않다며 어떡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nbspnbspnbsp성지순례를 다녔는데 그냥 무덤덤 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니 환희심이 나고 좋아야 되는데, 별로 감흥이 없이 당황스럽습니다. 제가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제가 너무나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제가 제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nbspnbsp“그러니까 내 마음이 이러저러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된다는 얘기지요? ‘내 마음은 성지에 가면 흥분되고 좋고 눈물이 나야 하는데 이게 왜 눈물도 안 나고 기쁘지도 않냐?’ 이거나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면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해야 하는데 왜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냐?’ 이거나 사실은 똑같은 애기예요.nbspnbspnbsp질문자가 갖고 있는 고민의 본질은 ‘내 마음은 이래야 한다’라고 정해 놓았는데 내가 생각하는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이 지금 안 움직인다는 거예요. 자기 욕구를 중심에 놓고 ‘안 된다’고 문제 삼는 겁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바로 ‘쾌락주의’라고 말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를 넘어선 제3의 길인 중도를 발견했다고 이번 순례를 하면서 여러 차례 들었잖아요.nbspnbsp질문자가 제대로 수행을 하려면 ‘아, 내 마음이 이렇구나’하고 알아차려야 해요. 이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에요. 내 마음이 들뜨면 ‘아, 내가 성지에서 마음이 들뜨는구나’ 하고 알고, 내 마음이 슬프면 ‘아, 내가 저런 아이를 보면 슬픈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고, 무덤덤하면 ‘아, 내가 이럴 때 무덤덤하구나’하고 알아야 해요.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 마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흥분해야 좋은 것도 아니고 가라앉아야 좋은 것도 아닙니다.nbsp질문자는 벌써 좋고 나쁘다는 생각, 즉 선입관을 갖고 있잖아요. ‘나는 성지에 오면 막 눈물날 줄 알았더니 눈물이 안 나니까 문제다’라고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성지에 와서 깨진 벽돌 보고 눈물 흘리는 게 뭐 중요해요? ‘나는 어떠해야 한다’라는 전제를 미리 해놓으니까 지금 내가 안 그렇다는 걸 갖고 문제 삼는 거예요. ‘우리 남편은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 하고 결혼했는데 살아보니까 안 그렇다고 문제 삼는 것과 똑같아요.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금 일어나는 마음을 보면 되잖아요.nbspnbsp여러분은 인도 아이가 막 돈을 달라고 조르니까 불쌍하다고 말하지만, 내가 그걸 불쌍하게 여겨 울어봤자 아이에게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이런 경계에 부딪히니 내 마음이 이렇게 일어나는구나’하고 알아야 해요. 불쌍하다며 주는 건 아이를 위해서 주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주는 거예요. 내가 불쌍하게 여기니까 주는 겁니다. 그 애는 불쌍한 애가 아니에요. 불쌍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요? 정작 그 아이는 재미로 한번 시험해 보는지도 모르는데요. nbspnbspnbsp‘내 업식이 이렇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이렇게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돈을 줬다가도 아이가 안 가고 또 달라고 하면 성질을 팍 내잖아요. 불쌍하면 계속 불쌍해야지, 왜 두 번 달라 한다고 성질을 내요? nbsp그러니 ‘아, 내 업식이라는 게 이렇구나’ 이렇게 자기를 보는 공부를 하세요. 다니면서 바깥 성지만 보지 말고 마음 성지도 보라고 제가 계속 이야기했잖아요. 마음이 시시각각 어떻게 바뀌는지 살펴보면 더 재미있어요. 벌써 다 잊어버렸죠?nbspnbsp다시 정리하면 질문자의 문제의 본질은 ‘내 마음은 이래야 한다’라는 전제를 두고 내 마음이 그렇지 않다고 해서 문제 삼는 거예요. ‘내 마음이 이래야 한다’, ‘세상이 이래야 한다’, ‘인도가 이래야 한다’ 이렇게 정하지 마세요. ‘인도는 이래야 한다. 이럴 줄 알았다’ 했는데 정작 와 보니 안 그러니까 지금 힘든 거예요. ‘한국에서 내가 인도를 잘못 생각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nbsp제가 봉암사에 부목으로 있을 때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돈에 너무 의지하고 살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돈도 하나도 없이 살고, 간식도 안 먹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수행하려고 작정했는데 제가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장작을 패는 모습이 신도님들에게는 너무 불쌍해 보였나 봐요. 그래서 저는 간식 안 먹기로 결심했는데 간식을 갖다 주고, 저는 돈을 몸에 안 지니려고 하는데 돈도 찔러주고 갑니다. 그러면 그건 제가 정말로 불쌍한 사람인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보기에 불쌍한 거예요. 우리가 지나가면서 ‘저 사람 불쌍하다’라고 하지만 그 사람이 진짜 불쌍한 건지 내가 보기에 불쌍한 건지 생각해보세요. 저도 다 떨어진 옷 입고 꾀죄죄한 행색으로 여기 앉아 있으면 여러분들이 지나가면서 보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제가 정말로 불쌍한 사람인가요?nbsp그러니까 그건 다 우리들의 마음이에요. 불쌍한 마음이 든 건 좋아요. 그런데 불쌍함에 사로잡혀서 슬프면 안 돼요. 연민이 일어나는 건 좋지만, 슬퍼하지 말고 실제로 어떻게 도울 건지를 생각해 보세요. 내가 사탕을 하나 줘서 그 아이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주는 게 편하다고 하면 주면 돼요. 그 아이는 하루에 10루피만 받아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 계속 따라다니는 거예요. 물건을 한 개 판다고 그날 장사를 다 한 게 아니잖아요. 10개 가져왔으면 10개 다 팔아야 하고 100개 가져왔으면 100개 다 팔아야 해요. 그런 것처럼 그 아이도 10명에게 받아야 한단 말이에요. 같은 사람에게 10번을 받든, 사람을 바꿔가며 10번을 받든 그 아이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한번에 10,000루피를 주면 안 따라와요. nbspnbspnbsp그러니까 그 아이는 내가 주든지 안 주든지 그냥 누구에게든 돈을 받으려고 ‘박시시, 박시시’ 이럴 뿐이에요. 그게 내 마음에 거슬리면 주면 되고 안 거슬리면 안 주면 됩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에요. 그 아이는 돈을 안 준다고 나한테 성질내지 않는데 나는 그 아이가 날 따라다닌다고 성질내는 거예요. 귀찮기야 하지만 귀찮다고 하는 것도 내 문제예요. 뒤에 따라오도록 두는 내가 힘들겠어요? 따라다니는 아이가 힘들겠어요? nbspnbsp성질은 내도 괜찮지만 어쨌든 그런 것이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점을 봐야 합니다.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안 주고, 그건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면 돼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nbspnbsp뭘 정말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리에서 10루피든 100루피든 주는 것도 필요하고, 또 제대로 도와주려면 더 근본적인 지원을 하는 것도 필요해요. 구걸은 나쁘다고 하지만 그 사람이 10루피가 필요할 때 10루피를 버는 것도 필요해요. 저도 처음에 구걸에 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둥게스와리에서 구걸하고 사는 장애인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구걸을 꼭 나쁘다고 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오늘 얼마 벌었는지 물어보면 ‘오늘은 30루피 벌었어’, ‘오늘은 50루피 벌었어’, ‘오늘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300루피 벌었어’ 이러는데, 장사하는 사람이 오늘 장사해서 얼마 벌었는지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 사람은 그게 자기 하루 수입원이잖아요. 단지 물건을 주고 돈을 받으면 괜찮다고 하고, 물건을 안 주고 돈을 받으면 나쁘다고 하는 차이일 뿐입니다. 다만, 아이들은 교육상 나빠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은 잘 안 주지만, 어쨌든 그건 그 사람들의 생활이에요.nbspnbsp시장가면 물건 사라고 계속 부르면서 호객행위를 하지만 사고 안 사는 건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박시시, 박시시’하고 따라올 때 주고 싶으면 주고 안 주고 싶으면 안 주면 돼요. 그건 여러분들의 자유예요. 그러나 이제 그런 모습을 보고 ‘아,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좀 도와야겠다’ 하면 개인적으로 그렇게 주는 방법도 있지만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학교나 구호기관의 활동을 후원하거나 직접 자원봉사를 하는 것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어요. 근본적으로 보면 여러분들이 상대적으로 가진 게 많으니까 좀 주기는 줘야 하지만, 어떻게 주는 게 좋을지는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하면 돼요.nbspnbspnbsp요지는 자기 마음의 문제니까 자기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봐야 한다는 겁니다. 산을 보고 시비하듯이 지금 자기를 보고 ‘성지에 왔는데 왜 나는 눈물도 안 나냐’하고 시비하는 거예요. 그걸 두고 ‘자기 마음 자기가 모른다’고 해요.” nbspnbsp스님의 답변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입재식 때 밖을 보는 성지순례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보는 성지순례를 꼭 할 것을 스님이 강조했는데, 까막득히 잊고 있다가 순례객들은 오늘에서야 다시 그 마음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니 순례객들은 그동안 궁금했던 의문이 많이 풀렸다며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동안 법사님들의 안내를 계속 받다가 오랜만에 다시 스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나 반가워 했습니다.nbspnbspnbsp내일은 한국 불교인들에게는 마음의 교양인 금강경이 쓰여졌다는 기원정사로 가서 오전 내내 스님의 설법을 듣고 정진을 할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사위성으로 들어가서 수닷타 장자와 앙굴리말라의 수투파를 참배한 후 오늘 답사한 베사카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동원정사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nbsp※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14 (인도 9일째 제2편)_수자타의 공양
nbsp부처님이 6년 고행 후 전정각산에서 내려와 쓰러지셨던 자리에 세워진 탑을 참배한 후 다시 마을 사이로 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nbspnbsp조금 더 걸으니 무덤 같이 생긴 작은 탑터가 보였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으셨던 곳이라고 알려주면서 먼저 탑을 향해 삼배를 했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은 곳nbsp스님은 삼배를 마친 후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오른쪽 앞에 무덤같이 생긴 작은 탑이 보이지요? 여기가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으신 곳이에요. 여기는 부처님이 앉았던 자리, 여기는 수자타가 앉았던 자리입니다. 공양 올렸던 자리에 이렇게 탑을 쌓았어요.nbspnbsp뒤쪽을 보면 동네에 큰 탑이 있는데 저곳이 수자타의 집터예요. 그리고 왼쪽에 있는 절이 수자타템플이에요. 수자타의 공양터 주위에 수행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수행하니까 훗날 절이 지어졌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가 없어지고 지금은 힌두 절이 되었습니다. 수자타템플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있지만 지금은 힌두 사원이에요.”nbspnbsp수자타템플이 힌두 사원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무척 씁쓸하게 들렸습니다. 성지를 가꾸는 일이 아직 더디기만 한 것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nbspnbsp수자타로부터 부처님이 공양받는 장면이 기록된 내용에 대해 경전 독송을 함께 한 후 순례단은 우루벨라 가섭이 수행했다고 하는 곳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마을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아이들이 계속 스님을 따라와 구걸을 했습니다. 중국말로 스님을 뜻하는 ‘스부’를 계속 말하며 심지어 스님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나 집요하게 따라와서 그 모습을 본 순례객 중 한 명이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사탕 하나 주고 아이들 그만 따라오게 하면 안 돼요?”nbspnbspnbsp그러자 스님은 길을 계속 걸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왜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우게 되었는지 스님의 고민이 담긴 진솔한 이야기였습니다.nbspnbsp“한 개만 줘서 떨어질 아이들이면 벌써 그렇게 했지요. 한 개만 주겠다는 것은 정말로 아이들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얄팍한 생각을 하니까 해결이 안 되지요.nbsp▲ 구걸을 하며 한참 동안 스님 뒤를 쫓아온 아이들nbsp그래도 여러분들은 저보다는 나아요. 저는 제일 처음에 인도 왔을 때 실수를 많이 했어요. 캘커타에 도착해서 물을 함부로 먹지 말라고 해서 밤에 물을 사러 나갔어요. 그런데 누가 컴컴한 데서 제 팔을 잡으면서 구걸을 하는데 아무리 뿌리쳐도 자꾸 따라와요. 컴컴한 데서는 몰랐는데 가로등 밑에 가서 보니 아기를 안은 아주머니였어요. 손을 자꾸 아기 입에 댔다가 배에 대기를 반복해서 아기가 배고프다는 뜻인 줄 알았어요. 잡아당기는 대로 따라 가봤더니 조그마한 구멍가게로 데려가서 분유통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요. ‘분유 사달라는 소리구나’ 싶어서 제가 ‘How much?’ 라고 가격을 물었어요. 그랬더니 가게 주인이 ‘식스티 루피’, 즉 60루피라는 거예요.nbspnbsp그런데 제가 인도 오기 전에 사전교육을 단단히 받았거든요. 아이들이 ‘박시시’를 요구할 때는 아무리 많이 줘도 1루피 이상 주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1991년도니까 벌써 25년 전이어서 물가가 그랬는데, 60루피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서 그냥 도망가 버렸어요. 그래도 사달라는 거 안 사주고 온 게 마음에 계속 걸리잖아요. 그래서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와서 안내하는 교수님한테 60루피가 우리 돈으로 얼마인지 물었더니 2,400원이라는 거예요. 2,400원 달라는데 그걸 마치 전 재산이라도 달라고 한 양 도망을 와버린 거예요. 마음이 아파서 돈을 가지고 다시 나가봤지만 어느새 없어져 버리고 안 보였어요. 그래서 혼자서 반성을 많이 했죠.nbspnbsp어릴 때 마음 같으면 주고도 남았을 텐데 첫 번째로는 승려가 되면서 냉정해졌고, 두 번째로는 사회운동 하면서 불쌍한 사람이나 개인을 돕는 것보다 사회제도를 바꾸는 걸 중시하다 보니 자선 같은 걸 좀 부정적으로 생각했어요.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생각했거든요. 그러다보니 이제 제 마음이 너무 냉정해진 거예요. 마음은 따뜻하지만 생각이 냉정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은 가난한 사람 앞에서 오히려 따뜻하게 작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nbspnbspnbsp그런 나를 보고 반성이 되니까 가방을 뒤져서 기본적인 옷만 빼고 나머지 수건이며 옷이며 돈이며 전부 다 꺼내서 캘커타 거리에서 달라는 대로 막 나눠줬어요. 그렇게 되니 이제 순례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지금 우리 대중들처럼 무리를 지어 제 뒤를 따라다녔거든요. 한국에서 함께 온 일행들이 ‘그래, 너 잘났다’ 하고 얼마나 불평이 많았는지 몰라요. 그래서 나중에는 완전히 왕따가 됐어요.nbspnbsp그러다가 어느 시골길에서 밥을 먹는데 동네 아이들이 있기에 과자를 줄려고 ‘이리 와, 이리 와’ 하고 불렀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보기만 하고 안 와요. 사탕을 준다고 하니까 애들이 오는 게 아니라 도망을 가버리는 거예요. 그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어요.nbspnbsp‘가난해서 거지가 생기는 게 아니라 뭘 줘서 거지가 생기는 것이구나.’nbsp관광지에서만 아이들이 이렇게 구걸을 하지, 관광객이 없는 일반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구걸하는 게 전혀 없고 뭘 주면 오히려 부끄러워서 도망가는 거예요. ‘아, 내가 참 생각을 잘못했구나’ 싶었어요. 그 뒤로는 아무리 따라다니며 졸라도 안 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안 주는 원칙을 딱 정해서 다녔는데, 저기 수자타수투파에서 다리 못 쓰고 두 팔로 걷는 아이가 계속 따라다녀요. 그때는 안 주기로 마음 먹은 뒤라서 몸이 불편한 아이고 뭐고 무조건 안 줬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여기까지 따라오니까 또 번뇌가 생기잖아요. ‘안 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 애는 어쨌든 뭐든지 하나 얻어야 먹고 살아가는데...’ nbspnbspnbspnbsp그 때부터는 ‘주긴 줘야 하는데 어떻게 주어야 하나? 거지가 되도록 줘서는 안 된다’ 이게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깊은 고민이 되면서 학교를 짓게 되었어요. 다른 곳이 아닌 수자타템플에서 그런 아이를 만났기 때문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지은 거예요. 1991년에 여기서 그 경험을 하고 원래 여기다 학교를 지으려고 했어요. 그때는 인도에 처음 왔으니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이걸 화두로 두고 고민만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1993년도에 유영굴을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에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고 학교를 짓기 시작한 거예요.nbspnbsp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사람이 꼭 잘한 것만 좋은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결과가 좋을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잘못했다고 너무 양심의 가책만 느끼고 울고불고 하지 마세요. 운다고 뭐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잘못했으면 잘못한 줄 알아서 확실히 반성하고 앞으로 정신 차리고 살면 돼요.”nbsp작은 실수였지만 그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니 도리어 큰 일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씀은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도 스님의 작은 실수와 참회에서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nbspnbsp모래 사장이 넓게 펼쳐진 곳에 숲이 있었는데 그 숲 속에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흰색 벽으로 둘러쳐진 건물의 좁은 문으로 들어서자 우물처럼 생긴 작은 화룡굴이 보였습니다.nbspnbsp▲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nbsp이곳에서 스님은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한 이야기를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우리벨라 가섭의 수행 도량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그 동생인 나디 가섭과 가야 가섭의 수행 도량이 있었습니다. 당시 수행자가 1000명이나 되었던 큰 교단이었어요. 이 나라의 왕인 빔비사라 왕이 1년에 한 번씩은 이분에게 공양을 올릴 정도로 유명한 분이셨어요. 부처님은 이 근처인 전정각산에서 수행하셨으니까 이 분들이 어떻게 수행했는지 잘 아셨겠죠. 그래서 5비구를 교화한 뒤에 나도 우루벨라촌으로 가겠다고 하셨던 이유는 이 분들이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셨기 때문에 그러셨던 겁니다.nbspnbspnbsp이곳에 오셔서 하룻밤을 자고 가려고 청하자 우루벨라 가섭은 화룡이 있는 굴에서 자라고 한 겁니다. 굴이라고 하는 것이 옆으로 생긴 굴이 아니라 우물처럼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뱀을 보관했던 겁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아침이 되어서 죽은 줄 알았던 부처님이 잘 쉬었다고 하면서 나와서 깜짝 놀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제압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좀더 사실적인 이야기로는 부처님이 굴 속에서 명상을 하고 있으니까 뱀이 나와서 몸을 칭칭 감고 지나갔는데 부처님은 무념무상의 상태로 있었다고 합니다. 뱀이 나무 위로 올라갈 때 나뭇가지를 꽉꽉 물면서 올라가요, 그냥 올라가요? 그냥 올라가지요. 그것처럼 부처님이 하나의 무정물처럼 편안하게 있으니까 뱀이 그냥 지나간 겁니다. 우리는 긴장을 하고 울찔하니까 뱀이 물게 되는 것이겠죠.nbspnbsp이 외에도 우루벨라 가섭은 부처님과 360가지 신통력 경쟁을 했다고 해요. 우루벨라 가섭의 교만을 꺾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에게 ‘마음 속에 질투심이 있는 한은 해탈하기 어렵소‘ 이렇게 말하자 그 때서야 우루벨라 가섭은 자기도 자기의 본심을 몰랐는데 그 본심을 딱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이 확 밝아졌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저도 출가하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그렇게 경솔하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당신 밑에는 오백명의 제자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우루벨라 가섭이 제자들에게 ‘나는 오늘 큰 스승을 만났다. 나는 이 분의 제자가 되기로 했으니 너희는 너희 갈 길을 가라.’고 하자 제자들 또한 ‘우리는 스승님을 존경하고 살았는데, 스승님이 더 큰 스승의 제자가 되신다니 우리 또한 그분을 모시겠습니다.’라고 해서 다같이 출가를 하게 됩니다.nbspnbsp이어서 나디 가섭과 가야 가섭도 함께 출가를 하게 되어 1000명의 제자가 생겼는데, 부처님께서 이 1000명의 비구를 두고 설법한 내용이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들이 그동안 불을 섬겼는데 그 불은 껐다. 그러나 밖의 불을 끈 것이지 마음 속에 탐진치 삼독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러니 부지런히 정진해서 삼독의 불을 끄라고 하신 겁니다. 이 1000명의 대중을 이끌고 왕사성으로 들어갔습니다.”nbsp정말로 이곳에는 화룡이 있었던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현장에 오니 경전에 기록된 내용이 거짓이 아니고 모두 사실이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nbspnbspnbsp보드가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아주 웅장한 규모로 세워진 수자타의 공양을 기념한 탑 앞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수자타의 공양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 수자타의 공양을 기념한 탑nbsp“이 수자타의 공양은 훗날 최고의 공양으로 칭송 받습니다. 수자타의 공양은 사실 수자타를 위대하게 만들었죠. 왜냐하면 부처님인 줄 알면 누구나 다 공양을 올릴 수 있지만, 수자타는 쓰러져 있는 길가의 노숙자에게 공양을 올렸는데 그 분이 나중에 부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강을 하나 더 건너서 저쪽 편으로 가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는 보드가야가 나옵니다.”nbspnbsp순례단은 탑을 한 바퀴 돌면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했습니다. 탑의 규모가 워낙 커서 한 참을 돌아야 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얼마나 이 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렸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수자타의 공양탑을 돌아서 나온 후 스님은 해마다 10대 성지를 순례하면서 탑의 규모를 비교했을 때 느낀 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규모로 보면 보드가야 대탑보다 수자타의 공양탑이 훨씬 더 큽니다. 쉬라바스티에 가면 천불화현탑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부처님께 발우를 받은 걸 기념하는 케사리아의 봉발탑도 어마어마하게 커요. 재가 신자들이 탑을 쌓다 보니 그런 공덕이나 기적에 관련되는 탑이 규모가 큰 경향이 있어요. 후대에 그런 곳에 더 보시를 더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 당시 사람들도 얼마나 복을 구했는지를 엿볼 수 있지요.”nbspnbsp탑의 규모가 시사하는 점을 캐치해 내는 스님의 안목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nbspnbsp드디어 순례단은 보드가야로 향하는 긴 다리를 만났습니다. 강 건너 편에는 높이 우뚝 솟은 대탑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부처님은 대탑이 세워진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49일 동안의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nbspnbsp▲ 보드가야로 가는 다리nbsp가사를 수하고 보드가야 대탑을 참배하러 들어가는 순례객들에게 스님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한 후 순례단 C팀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가사를 수한 대중들의 모습이 아주 흐뭇해 보였는지 스님은 “이제 진짜 중 같다” 하면서 웃음을 보였습니다.nbspnbsp▲ 성지순례 C팀과 작별 인사nbsp보드가야 대탑 앞에는 대탑을 관리하고 있는 마하보디템플이 있는데, 스님은 해마다 대탑을 참배할 때 보시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하보디템플 주지 스님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보시금을 전달했습니다.nbspnbsp▲ 마하보디템플 주지 스님과 인사nbsp마하보디 템플 주지 스님도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직접 제작한 인도 달력을 선물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순례단 C팀과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스님은 쉬라바스티로 향했습니다. 쉬라바스티는 부처님께서 24번의 안거를 보낸 곳으로 가장 오래 머무신 곳입니다. 스님은 쉬라바스티에서 다시 A팀, B팀, C팀을 차례대로 맞이할 예정입니다.nbspnbsp보드가야에서 쉬라바스티는 자동차로 15시간 동안 가야 하는 먼 거립니다. 스님과 수행팀 일행은 긴 여정을 앞두고 운전기사와 함께 차 앞에서 기념 사진을 한 장 찍고 출발했습니다.nbspnbsp▲ 보드가야에서 쉬라바스티까지 15시간 동안의 대장정을 앞두고nbsp중간에 한 번 내려서 점심 식사를 한 것을 제외하곤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nbspnbspnbsp아침 9시 30분에 보드가야에서 출발했는데 밤 11시가 넘어서 쉬라바스티의 한국절 천축선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13시간 30분 만에 왔으니 1시간 30분이나 당겨 도착한 셈입니다.nbspnbsp▲ 천축선원nbsp내일은 쉬라바스티에서 어떻게 성지순례를 할지 사전 답사를 한 후 저녁에는 순례단 A팀을 맞이하고 법문도 해줄 예정입니다.nbspnbsp▼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nbspnbsp
2016.1.14 (인도 9일째 제1편)_네이란자라 강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과 함께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마치고 쓰러지셨던 네이란자라강을 건너 수자타의 공양을 받고 되살아난 곳을 순례한 후 다시 A팀을 맞이하기 위해 쉬라바스티로 향했습니다.nbspnbsp어제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하룻밤을 잔 성지순례단 C팀은 새벽 4시 20분에 일제히 기상해 새벽예불을 올린 후 4시 50분에 수자타아카데미 정문 앞에서 보드가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깜깜한 새벽이라 렌턴을 하나씩 들고 줄을 지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수자타아카데미 정문을 나오니 가장 먼저 방갈비가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JTS가 세운 유치원을 렌턴으로 비춰 먼 발치서 어렴풋이 본 후 천천이 마을 사이를 가로질렀습니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 가득했습니다. 스님은 가장 앞장서서 걸으며 부처님의 삶과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별이 많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성도절이 며칠 안 남았어요. 오늘이 14일이니까 내일 모레네요. 동방에 샛별이 떴나 한번 보세요. 샛별이 있으면 날짜가 비슷한 거고, 없으면 날짜가 틀린 겁니다. nbsp부처님의 일생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인도에 직접 와서 이렇게 경험해보면서 경전 기록과 비교해 봐야 합니다. 예컨대 ‘부처님이 아쇼카나무 꽃 가지를 잡고 태어났다’라고 하면 실제로 아쇼카꽃이 언제쯤 피는지를 보고 대강 몇 월인지 가늠해봐야 해요. ‘음력 12월 8일에 동방의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음력 12월 8일 경에 이곳에 직접 와서 동방의 샛별이 보이는지와 남방에 전해 내려오는 바이샤카월 보름날에 샛별이 반짝이는지를 살펴보면 어느 쪽이 좀 더 맞겠는지 알 수 있어요.nbspnbsp전해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라고 해서 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고 다 객관적 사실인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조금만 과학적으로 검증하면 어떤 이유로 이런 이야기가 나왔고,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요즘은 다 찾을 수 있어요. 인류의 이동 경로도 언어뿐 아니라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대충 어떻게 이동했는지 알 수 있는 것과 같아요.”nbsp송수신기로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하늘 위를 바라보니 정말 동쪽에 반짝이는 샛별이 보였습니다. 부처님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시다가 아마 이 시간 즈음에 샛별을 보셨겠구나 싶었습니다. 항상 직접 경험해보고 연구하는 스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한참 동안 마을 길을 따라서 걷자 지금은 건기여서 모래 사장처럼 되어 있는 네이란자라 강이 저 멀리 보였습니다. 강 너머에는 붉은 불빛이 유독 밝게 보이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라고 스님은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순례객들이 네이란자라강에 발을 내딛자 스님은 퀴즈를 하나 내었습니다.nbspnbsp“우리는 지금 네이란자라강 입구에 있어요. 전정각산에서 부처님이 내려오셨을 때 여기가 아니라 강 저편, 즉 오른쪽으로 건너간 곳에서 목욕하다가 쓰러지셨어요. 여기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한번 맞춰보세요.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강을 처음으로 만난 이곳에서 목욕을 하셨어야 할텐데 왜 굳이 저편으로 건너가셨을까요?”nbsp스님이 낸 퀴즈를 풀고자 많은 순례객들이 이런저런 답변들을 내어 놓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있게 답하지 못하고 웅성거리기만 하자 스님의 생각을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여기서 보면 강바닥이 다 평평해보이지만 산 위에 올라가서 보면 강바닥의 높이가 달라요. 우리가 출발한 지역은 높고, 숲과 마을이 있는 오른쪽 건너편은 낮아요. 그러니 물이 조금밖에 없을 때는 강물이 저쪽만 흐르고, 우기가 되어 물이 많아져야 여기까지 물이 차는 거예요. 강가강도 지금은 건기라서 앞쪽에만 물이 흐르는데 우기가 되면 nbsp그 너머 모래사장까지 물이 흐른다고 했잖아요.nbspnbsp그러니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내려오실 때가 우기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렇다고 지금처럼 물이 없는 때도 아니였겠죠. 원래 이때 쯤 저쪽으로 건너가려면 신발 벗고 건너야 하는데 올해는 특히 가물어서 강 전체가 말라버렸다고 해요.nbspnbsp여러분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지 몰라도 저는 현장 답사를 할 때 ‘어, 왜 쓰러진 곳이 저 건너편이지? 이쪽이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전정각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봤더니 평평한 줄 알았던 강바닥이 경사져 있었던 거예요. 여름에 큰 홍수 질 때만 전체에 물이 차고, 대부분은 강 한쪽으로만 물이 흐르는 거예요.”nbsp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정말 그랬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바닥이 온통 모래로 되어 있어서 발을 내딛기가 조금 힘겹기도 했지만, 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다보니 어느새 강을 거의 다 건넜습니다.nbspnbsp그러자 강 건너편에서 마을 아이들이 마구 달려와 “나마스떼” 하고 인사를 건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에 아이들이 달려와서 인사를 하자 스님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nbspnbspnbsp“어디서 우리를 이렇게 새벽부터 환영해 주겠어요?” nbsp순례객 모두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 어디를 가더라도 동네 아이들은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인도성지순례의 즐거움 중에 하나가 바로 동네 아이들의 이런 모습이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귀찮아 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네이란자라강을 건너오자마자 곧바로 허물어진 탑터가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쓰러진 곳에 세워진 탑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없으면 그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논두렁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많이 훼손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탑을 바라보며 부처님이 쓰러지셨을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부처님은 여기 오셔서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셨어요. 때를 벗기는 목욕이라기보다 6년간 지친 몸을 물에 담근 것이죠. 허기진 상태에서 물에 들어갔다가 일어나면 현기증이 나잖아요. 일어나다가 눈 앞이 핑 돌아서 아마 그냥 쓰러지셨나 봐요. 강바닥이 평평하니까 물살이 세지는 않지만 조금 떠내려가다가, 나뭇가지를 잡고 언덕으로 올라오셨다고 해요. 그때 잡은 나뭇가지 이름이 아사나나무라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nbspnbspnbsp옛날 인도 사람들은 모든 산과 나무에 다 신이 깃들어 있고, 모든 존재마다 다 성품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아트만 사상이에요. 독일어를 공부하면 명사에 여성과 남성이 따로 있듯이 모든 것에 정과 부정의 성품이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남자는 정하고 여자는 부정하고, 보리수는 정한 것에 들어가고 반얀트리는 부정한 것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구분지었습니다. 그런 당시의 사고방식에 따라 경전에는 ‘나무의 신이 가지를 늘어뜨려서 부처님을 잡아 건져올렸다’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당시의 사고방식, 즉 당시 경전을 기록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그랬기 때문에 요즘처럼 ‘나뭇가지를 잡고 기어올라왔다’ 이러지 않고 ‘나무 신이 가지를 늘어뜨려 건져올렸다’라고 기록한 겁니다.nbspnbsp부처님이 나무그늘 밑에 앉아 계실 때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늘이 이동한 것도 ‘나무 신이 싯다르타를 위해서 가지를 옮겨 그늘을 드리웠다’라고 표현하는 게 인도의 전통문화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표현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돼요.nbspnbsp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제가 둥게스와리에 가니까 사람들이 집에 소똥을 바르고 있어요. 이유를 물어보니까 저를 가리키며 신이 왔으니 영접하는 거래요. 여기에는 교육을 관장하는 신이 있는데, 어느 신도 누구 하나 학교를 지어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외국에서 낯선 사람이 와서 학교를 짓고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니까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신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nbspnbspnbsp경전을 읽을 때 신의 개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이라고 해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나 유일신 개념과는 달라요. 옛날에는 우리도 나무에는 목신이 있고, 물에는 수신이 있고, 산에는 산신이 있고, 뒷간에도 신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 개념이에요.nbsp부처님이 쓰러지셨다는 자리에 훗날 아쇼카왕이 탑을 쌓았어요. 그렇다고 물에다 바로 탑을 쌓으면 떠내려가 버릴 테니까 쓰러진 자리 가까이의 물가에 탑을 쌓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흔적만 남고 다 파괴되었어요. 옛날부터 여기가 성스러운 곳이라고 알려졌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그 탑 자리 위에 힌두 사원을 하나 세웠는데 요즘은 그 사원마저 파괴되었습니다.nbsp자, 여기서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내려오셨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nbsp경전 독송을 하니 그 때의 모습이 다시 그림 그리듯이 머릿 속에 펼쳐졌습니다. 스님의 설명처럼 나무 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고 나서 읽으니 내용이 더욱 실감나게 읽혀졌습니다.nbsp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우리가 정법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nbspnbsp“부처님이 여기 쓰러져 있는 것을 저 앞 마을 촌장의 딸인 수자타라는 소녀가 발견했습니다. 경전에는 그 집 소가 4백 마리가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장에 와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소들이 풀을 뜯다가 목이 마르면 물이 흐르는 이 강가로 옵니다. 수자타는 소젖을 짜러 강가로 왔다가 수행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우유에다가 곱게 간 쌀과 코코넛을 넣어 끓인 밀크 라이스, 즉 유미죽을 먹인 거예요. 죽을 드신 곳은 이곳이 아니고 여기서 500m 위쪽에 가면 있습니다. 수자타의 집도 좀 더 가깝고 지대도 약간 높아요. 거기 가면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 올린 곳임을 알리는 탑이 있습니다.nbspnbspnbsp여기서 우리가 정법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몸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 굶주림이 깨달음의 원인이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어요. 깨달음과 고행은 별개의 문제인데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음식을 안 먹고 굶주리며 고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오해하기 쉬워요. ‘누구는 잠을 안 잤다’, ‘누구는 허리를 땅에 안 붙였다’, ‘누구는 단식을 어느 정도 했다’ 이런 것을 깨달음과 연관시키면 안 되지만 우리 중생은 자꾸 그런 식으로 연관시켜서 신비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nbsp두 번째, 그렇게 음식을 안 먹었는데도 부처님이 아주 건강하다는 오해가 또 생길 수 있어요. 즉 ‘부처님이 음식을 안 먹어도 사실 수가 있다’라는 식의 오해가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실제로 음식을 받아드셔서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육체란 것은 음식을 먹어야 유지가 되잖아요. 음식에 탐착하지 말라는 것이지 음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의미에서 정법에 대한 관점이 아주 분명히 잡혀야 합니다.nbsp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여기에서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 왕족이었기에 늘 하인을 두고 사셨어요. 옛날 양반은 반드시 개인 시중을 드는 종이 있어서 여자 같은 경우 결혼하면 종도 따라갔어요. 싯다르타 태자에게도 찬다카라는 마부가 항상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출가 이후에는 누구의 시봉을 받는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하인이나 종이 자기 생활을 받들도록 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 삶을 자기가 유지했습니다.nbspnbsp다만 연세가 드시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아난존자가 시봉을 했지만 그것은 월급을 받고 한 노동이 아니었어요. 같은 도반으로서 제자가 스승을 시봉한 것이지 하인은 아니었잖아요. 이게 부처님 당시 상가의 모습이에요. 상가에서는 다 자기가 자기를 돌보거나 도반끼리 돕는 겁니다.nbspnbsp그런데 신라시대를 보세요. 의상이나 자장 같은 유명한 스님들이라 해도 그 시대가 계급사회다 보니 절에 반드시 사노, 즉 절의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밥하고 일해서 스님들을 먹여 살렸어요. 이것은 그 사회의 계급제도가 그대로 유지되는 거예요. 그러나 부처님은 차원이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신라시대의 유명한 승려 중 그런 계급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다면 원효나 혜공 정도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학문으로 보면 의상이나 다른 사람과 비슷할지 몰라도 수행면에서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nbspnbspnbsp오늘날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디든 사찰 구조를 보면 다 절에서 월급을 주고 밥하는 공양주며 사무 보는 사람을 따로 둡니다. 지금의 사회, 즉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 놓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건물을 짓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먹고사는 생활의 문제는 어떤 사람도 고용해서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늘 밥해주는 사람 따로 있고, 빨래해주는 사람 따로 있는 삶을 살다가 이렇게 같이 생활하면 불편하죠. 서로 도와주고 밥을 해주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당번을 정해서 서로 나눠 하지, 누군가가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nbsp제가 절에서 부목을 해봤는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스님이고 공양주이지만 월급을 받고 일하면 그 사람에게는 스님이 아니라 사장이에요. 세속의 고용주 관계인 겁니다. 같은 수행자로 들어와서 누구는 부목하고 누구는 뭘 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지금의 불교에서 스님들 대부분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학문적으로 불교가 어떻고 철학이 어떻다고 가르치는 교수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수행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 불교의 현실이 근본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뭐가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봐야 해요.nbspnbsp이게 꼭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대부분의 종교가 다 그러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정법을 이야기하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할 때는 완전히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그걸 늘 염두에 두어서 내가 멀어졌더라도 어느 정도 멀어진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nbspnbsp많은 사람들이 ‘일 많으니까 사람들 월급 주고 고용해서 시키면 된다’라고 해요. 옛날에 하인을 안 시키면 일이 안 된 것처럼 요즘 같은 사회에 전문가를 고용해서 일하지 않으니까 전문성이 떨어져서 정토회는 일이 잘 안 돼요. 자원봉사를 1년 하다 가버리고 3개월 하다 가버리는 식이니까요. 그러나 현재까지는 어쨌든 모든 걸 다 자원봉사자로 해결하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정토회 전체에 월급 받는 사람은 한 명도 고용한 적이 없어요.nbspnbspnbsp그러나 방송국을 운영하거나 출판사를 운영하려면 사실 어려워요. 그러나 아직은 다 봉사자들이 하고 있어요. 여러분 같은 봉사자들이 총무 하고, 대표 하고, 여러 소임들을 맡아서 일을 다 하다 보니 다들 죽을 지경이지요. 가정생활 해야지, 직장생활 해야지, 정토회 소임도 맡아서 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수행자로서 하는 거니까 너무 욕심내지는 않는 거예요. 여기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대중들도 다 자원봉사자로서만 참여한다는 원칙이 서 있어요.”nbsp정토회가 왜 모든 일을 자원봉사 방식으로만 운영해가려고 하는지 순례객들은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며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처님은 평생 동안 걸식을 하고 나무 밑에서 자는 등 스스로 자기 삶을 유지했듯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 살면서도 부처님의 그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바로 자원봉사 시스템을 확대해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쓰러지신 곳에 세워진 허물어진 탑터 앞에서 참 소중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다시 마을 사이로 난 논두렁 길을 따라 걷다가 정토회가 명상 센터를 짓기 위해 구입해 놓은 공터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많은 여행객들이 수자타아카데미를 방문했다가 명상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그 수요를 해결해주고자 이곳에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 정토회 명상센터 부지nbsp명상센터 부지에서 다함께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주먹밥과 삶은 계란, 오렌지를 도시락으로 싸주어서 전기밥솥을 들고 오지 않고도 아주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저 멀리 강의 동편에서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올라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nbspnbsp▲ 일출을 보며 먹는 아침 식사nbsp명상센터 부지를 나오자 대문 앞에는 스님으로부터 사탕을 받고자 많은 아이들이 긴 줄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한 명 한 명에게 사탕을 주며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nbspnbspnbsp사탕을 주고 나서 스님은 뿌듯한 표정으로 왜 성지를 순례할 때마다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제가 내생에 인도에 태어나면 제자가 많을 거예요. 사탕 먹고 이미 약속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요. 옛날에는 한국말로 ‘이 사탕 하나 먹은 인연으로 다음 한 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다 따라하도록 했어요. 요즘은 그냥 저 혼자 속으로만 말하지만요. 이처럼 공짜가 없다는 게 인연과보예요. nbspnbsp그리고 저는 다음 생에 쓸 돈도 많이 준비해놨어요. 세뱃돈을 주면서 ‘이생에 안 갚아도 되지만 다음 생에는 동그라미 네 개 더 붙여서 갚아라’라고 합니다. nbspnbsp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나는 이거 안 받겠습니다’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문제없다’며 받아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갚으려면 만나야 하잖아요. 내생에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좋은 거래요. 그래서 ‘야, 그것 참 기특한 생각이다’라고 했어요.” nbsp걷는 동안 송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이야기는 계속 웃음을 자아내었습니다. 스님과 함께 순례를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인 것 같습니다.nbspnbsp이어서 순례단은 부처님이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곳에 세워진 탑을 향해 걸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nbsp ▼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nbspnbsp
2016.1.13 (인도 8일째)_오후_전정각산
nbsp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준비한 환영행사를 마친 후 스님은 정토회 순례단을 이끌고 부처님이 6년 고행한 전정각산에 올랐습니다.nbspnbsp전정각산의 중턱에는 부처님이 수행하며 머무셨다는 유영굴이 있었습니다. 유영굴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는데, 스님은 순례객들을 공터의 나무 그늘 아래에 앉게 한 후 전정각산과 관련된 부처님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전정각산입니다. 들어보셨죠? ‘전정각’이라는 말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 계셨다’는 뜻으로 한문으로 ‘前正覺’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정문 앞에 지은 절 이름도 ‘전정각사’입니다. 인도 말로는 ‘뿌락 뽀디 힐’이고, 동네 사람들은 ‘둥게스워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가야 지역에서는 “둥게스워리 가자”고 해야지, “전정각산 가자”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 카필라성에서 출가를 하신 후 왕사성으로 오셔서 두 분의 스승을 모시고 수행을 하신 뒤에, 그분들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이 아님을 아시고, 스승 곁을 떠나서 이곳 가야로 오셨습니다. 왕사성에서 여기까지는 약 80㎞, 즉 200리가 됩니다. 그렇게 오셔서 가야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산의 북쪽이 가야 시내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야산에 오르셔서 주위를 주욱 둘러보니까 앞에 네이란자라강이 앞으로 흐르고, 그 강 동편에 수행하기 좋은 처소가 있었습니다.nbspnbspnbsp여기는 가야 사람들이 시체를 가져다 버리는 시타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곳에 오셔서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을 제대로 안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도 행하지 않은 깊은 정진을 하리라’ 고 결심을 하시고 용맹정진을 하시는데, 친구 다섯 명이 정말 존경할 만큼 정진을 하셨습니다. 여기는 시타림이라 사람이 사는 데가 아니니까 먹을 것도 없고, 걸식할 데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음식도 거의 안 드셔서, 기록에 보면 ‘하루에 대추 한 알을 먹었다’고 되어 있고, 그것도 이틀에 한 알 먹다가 삼 일에 한 알 먹다가 일주일에 한 알 먹는 식으로 하셨답니다. 저는 ‘왜 대추일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 동네에 와서 살아보니까 여기 대추나무가 많더라고요. 원래 이런 험한 산에는 가시나무가 많은데, 대추나무가 바로 가시나무잖습니까. 잎도 좁고요. 그래서 대추나무는 이렇게 건조한 곳에 잘 살 수 있는 나무인 것입니다.nbspnbsp고행주의자들은 몸이 편안한 걸 구하면 안 되기 때문에 목욕도 하지 않고, 음식도 구하지 않고, 잠도 가능하면 안 잤습니다. 어쨌든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5년이나 용맹정진하셔서 한 마디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셨는데, 특히 선정에 드셨을 때는 움직이질 않으셨나 봐요. 그래서 목욕도 하지 않은 몸에 먼지가 앉고, 때가 끼어서 이끼가 다 자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앉아서 꼼짝도 안 하니 마치 석고상처럼 보였는지 가끔 시타림에 물건을 주우러 오는 천민 아이들이 부처님을 두고 편이 나뉘어서 ‘저 수행자는 이미 죽었어’, ‘아니야, 아직 살았어’라고 입씨름을 했어요. 어떤 아이가 부처님을 향해 돌멩이를 탁 던지거나 막대기로 머리를 때려도 꼼짝하지 않으시니까 ‘봐라, 죽었잖아’, ‘아니야, 살았다니까’ 그러다가 아이들이 심지어 나뭇가지를 부처님의 귀에 꽂고 돌멩이로 칩니다. 죽었나 살았나 확인한다고 그런 거죠. 그 통증이 어땠을까요? 그래도 부처님은 가만히 계셨다고 합니다.nbspnbsp우리는 참선하다가 모기가 물어도 탁 치고 그러는데, 부처님께서는 심지어 숨을 멈추신 적도 있었습니다. 숨을 오래 멈춰보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울룩불룩하면서 늑골이 칼로 도려내어지는 것 같거든요. 여러분들은 숨을 좀 멈춰보다가 답답하면 놓아버리니까 잘 모르겠지만 경전에 보면 그 묘사가 굉장합니다. 그런데 진짜 숨을 오래 멈추고 있어 보면 그 묘사가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지요. 스님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저는 고문을 당해 봤잖아요. 숨 못 쉬는 고문을 당해 보니 그 묘사가 정확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우리도 뭐든 해 보면 알지만, ‘노력한다’든지 ‘참는다’는 건 뭘 말합니까? 긴장이 된다는 거죠. 결국 긴장한 상태는 마음이 편안한 상태는 아닙니다. 모든 긴장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풀어져야 선정이 깊이 들어가지, 긴장된 상태에서는 선정에 깊이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고행을 하셨는데도 오히려 선정의 깊이는, 부처님이 어릴 때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걸 보고 나무 밑에서 바로 초선정에 들어갔을 때 수준이 될까 말까 했던 겁니다.nbspnbsp우리는 바라는 게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은 상태를 ‘기분 좋음, 기쁨, 행복, 즐거움’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괴로울 때는 왜 괴롭습니까? 바라는 게 안 되어서 괴로운 거잖아요. 원하는 것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서 “하나님, 부처님” 온갖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이 이런 수준인데, 이건 다 마왕의 아들이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100 들어준다”는 게 마왕 파순의 말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그래서 욕망이라는 건 추구할수록 커지기 때문에 끝이 안 납니다. 그래서 ‘욕망을 억압해야 해탈이 온다’는 입장이 고행주의입니다. 즉, 어떤 욕구도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그건 결국 욕구를 억제한다는 건데, ‘억제’는 결국 ‘긴장’입니다.nbspnbspnbsp부처님이 쾌락과 고행을 다해 보셔도 해탈을 못 했을 때 돌아보니까 이게 정반대의 길 같았는데, 사실은 하나였던 겁니다. 두가지 길 모두 욕구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따라가거나 도피하거나 둘 다 욕구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욕구에 반응하지 않는, 즉 대응을 하지 않는 길을 발견하셨는데 그것은 욕구나 감각을 다만 욕구나 감각으로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정념’, ‘알아차림’입니다. 다만 알아차릴 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리가 아프면 펴거나 이를 악다물고 참는데 다만 통증을 통증으로만 느끼는 거예요. ‘통증이 있구나’ 하면서 통증을 통증으로만 느끼지, 아프다고 다리를 펴거나 아프지만 참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거나 펴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합니다. 통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싫어하기 이전의 상태, 즉 다만 알아차림으로 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제3의 길을 발견하시고 고행을 멈추셨습니다. 고행을 멈추었다는 걸 쾌락을 쫓아가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참는 것만이 길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걸 따라가야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적 긴장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새로운 길, 중도를 발견하시고 이 산을 따라 한 5㎞를 가서 네이란자라강으로 하산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 그 길을 따라가게 되는데, 부처님은 거기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성도하셨는데 성도한 자리는 여기서 8㎞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자연 샘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산의 유일한 샘터로써 ‘고타마의 샘, 붓다의 샘’으로 불리는데 지금은 건기라 샘물이 말라 있습니다.nbspnbsp부처님은 이곳 전정각산에서 6년이나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8대 성지에다 10대 성지라면 카필라성과 전정각산을 넣어야 됩니다. 그러면 전정각산을 바라보면서 함께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nbsp설명을 마친 후 스님은 실제 경전 속에서는 이 모습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살펴보자며 경전을 펼쳐 들었습니다. 순례객 모두 다함께 전정각산을 마주 보고 앉아 경전을 독송했습니다.nbspnbspnbsp경전에는 부처님의 수행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아서 그 때의 정황을 머릿 속으로도 아주 선명히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이곳에서 극도의 고행을 행했던 부처님의 구도의 정열을 되새겨보며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2600년이 지난 지금도 동네 아이들이 순례객을 따라 올라와 나무에 매달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nbspnbsp스님으로부터 전정각산의 전체적인 조망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순례객들은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의 칼능선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해질녁 무렵이여서 노을이 아주 멋있었습니다.nbspnbspnbsp산 아래에는 수자타아카데미가 한 눈에 보이고, 산을 둘러싸고 마을마다 JTS가 세운 유치원도 보였습니다.nbspnbsp칼능선을 따라 곳곳에 탑이 세워진 흔적이 보였습니다. 산에 있는 동글동글한 탑들은 현재 남아있는 것만 16개가 된다고 합니다. 거의 산꼭대기마다 탑이 있었습니다. 붓다가 이 산 어디서 명상했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 아쇼카왕이 쌓은 건데, 다른 데는 나중에 추가로 더 탑을 쌓았지만 여기는 오지이다 보니까 아쇼카왕 때 쌓은 원형 탑을 빼고는 손 댄 사람이 없어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은 것이라고 스님이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머무신 곳곳에 세워진 탑nbspnbsp산을 오르며 흘렸던 땀은 전정각산 위에 부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금방 다 식었고, 순례객들은 기념 사진을 찍거나 둥게스와리 마을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멀리서 바라 본 둥게스와리 마을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습니다. 물론 산 아래로 내려와서 가까이서 보면nbsp마을 주민들의 삶은 너무나 비참하지만 말이죠.nbspnbsp▲ 전정각산 위에서 내려다 본 수자타아카데미nbsp저녁 7시에 예불을 함께 올린 후 7시 30분부터는 지이바카병원 2층 홀에서 수자타아카데미와 인도JTS 소개가 있었습니다.nbspnbsp인도JTS 책임자로 있는 보광법사님이 전체 사업에 대해 소개해준 후 교육, 의료, 마을개발, 총무 등 각 파트별로 사업 소개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결핵환자의 경우 299명이던 환자 수가 거의 대부분 완치되고 지금은 10명만 JTS에서 관리 중이라고 하자 순례객들은 크게 감동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 교육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쁘리앙카님nbsp또 지난 4년 동안 JTS의 영양식 지원으로 저체중아 비율이 88였는데 지금은 10만 심각한 것으로 판단되어 집중 관리되고 있다고 합니다.nbspnbsp그리고 1993년 스님이 처음 학교를 세울 때는 이곳 마을에서 문자해독자는 단 2명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문맹률이 많아 낮아져서 전체 주민의 nbsp70가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nbspnbsp또 최근에는 염소 은행을 만들어서 염소를 분양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시범 분양을 받아간 스텝들로부터 반응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사업성과들에 대해 보고를 들으면서 순례객들은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nbspnbsp▲ 작년부터 새롭게 시작한 염소 분양 사업, GOAT BANKnbsp그리고 각 파트별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스텝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인도인 스텝들은 대부분이 4살, 5살 등 어렸을 때 스님을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어릴 때 스님이 마을에서 나눠주던 비스켓을 먹었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인도인 스텝들의 모습에 순례객들은 또 한번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구걸하던 아이들이 의젓한 선생님이 되어 있거나 학교의 리더가 되어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큰 감동이었습니다.nbspnbspnbsp소개가 모두 끝나고 인도인 스텝들은 스님과 순례객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인도식 막춤을 보여주었습니다. 행사장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난 뒤, 스님의로부터 ‘수자타아카데미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강연을 듣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현재 인도JTS 사업이 해온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이곳에서 구호활동을 시작한지 올해 23년째가 됩니다. 제가 1993년에 처음 여기를 방문했고, 학교를 시작한 것은 1994년 1월부터입니다.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기까지 했으니까요.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어쨌든 그런 우여곡절 끝에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nbspnbspnbsp학교는 정말 많은 봉사자들의 봉사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은 이 학교 출신 아이들이 자라서 봉사를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모레 여러분들이 가게 될 부처님 성지, 상카시아에 사는 석가족 청년들이 이리로 내려와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누구든 인도 사람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해야 했을 거잖아요? 그런데 가야와 보드가야에 있는 교수, 청년들을 데리고 시작해 보니까, 그들이 우리 정토회처럼 정직하게 안 하고, 구호품도 떼어먹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 석가족 청년들이 내려와서 학교를 운영하게 된 것입니다.nbspnbsp원래 학교를 시작할 때는 종교적인 것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석가족 청년들이 불교신자이다 보니까 아이들한테 삼귀의도 가르치고, 나중에 유치원을 지어주니까 그 2층에 법당을 짓겠다고 해서, 아까 여러분들이 본 ‘전정각사’라는 법당을 짓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처음 의도와는 달리 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 이미지가 되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 주위에 있는 가야의 청년들이 와서 초기에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들고, 날고, 이러면서 이런 저런 사고도 생기고, 그러면서 자꾸 교체가 되어가다가 지금은 이 학교의 학생 출신 선생님들이 전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 학교의 학생 출신이 아닌 사람은 쁘리앙카 교장선생님과 까메스와르 의사선생님 뿐이고, 나머지는 다 여기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으니까, 나이는 서른 살이 채 안 되는데도 경력은 다 20년 이상 된 봉사자들입니다. nbspnbsp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문맹 퇴치에는 거의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문맹퇴치’는 유치원에서 계속 이어 나가고 있고, 초등학교는 가능하면 정부학교에 역할을 넘기고 있고, 여기는 예술학교나 기술학교를 하면 좋겠다 싶습니다. 뭔가 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가르쳐야지, 이 아이들은 공부해서 대학을 나온다고 해도 실업자밖에 안 되거든요. 여기는 대학을 나와 경찰이나 공무원 시험을 쳐서 통과한다고 해도 뒷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니까요. 아무리 얘들이 안타까워도 우리가 불법적인 걸 도울 수는 없잖아요. 여기 전기가 22년째 안 들어왔던 이유도 우리가 뒷돈을 안 줘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아마 뒷돈으로 줄 돈의 약 수백 배를 기름 값으로 썼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좋은 일을 하려는데 뒷돈을 써가면서 할 건 없잖습니까. 그래서 촛불 켜고 지내다가 외부 사람이 올 때만 발전기를 돌리는 식으로 버텼던 겁니다.nbspnbspnbsp이제는 학교운영의 목적을 문명퇴치 수준에서 좀 바꿔보려고 초등교육을 정부 학교에 맡기고 폐지하려고 했지만 안 되는 이유가 정부학교는 대부분 그 지역 양민들이 다니거든요. 지역마다 양민과 천민이 섞여 사는데, 주로 우리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천민 아이들인데 정부학교에 보내도 적응을 못해요. 양민 아이들에게 기가 죽어 10명 중에 3명만 학교를 다니는 겁니다. 양민 아이들은 우리 학교에서 안 받으니까 정부학교에 100 등록을 하는데, 천민 아이들은 정부학교를 안 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천민 아이들은 받는 걸로 했습니다.nbspnbsp그러니까 항상 신입생을 받을 때는 정부학교에 우선 등록하도록 하고, 정부학교에 등록 안 한 아이들만 여기서 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는 양민 아이들 비율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 학교 교육에 조금 변화가 있게 된 겁니다.nbspnbspnbsp그리고 수자타아카데미는 그동안은 정부에서 인가한 학교가 아니었어요. 그냥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만든 학교인데, 규모가 워낙 커지니까 지난해에 처음으로 사립 초등·중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겁니다. 왜냐하면 졸업생들이 상급학교를 갈 때 정부학교 이름을 빌려야 했는데, 전에는 무조건 빌려주더니 지금은 잘 안 해주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수자타아카데미 이름으로 졸업장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nbspnbsp우리가 왜 정부학교로 등록을 안 했느냐고요? 몰라서 등록 안 한 게 아닙니다. 정부학교가 되면 자격 있는 교사를 둬야 하는데 인도 규정상 자격 있는 교사는 석사학위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월급도 많이 줘야 합니다. 그런 자격을 갖춘 교사가 여기 와서 봉사할 리 만무하지요. 하물며 우리가 월급을 보장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봉사정신으로 일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또 우리의 시스템은 중학생이 되면 유치원생을 가르치고, 고등학생이 되면 초등학교 1, 2학년을 가르치고, 대학생이 되면 3, 4, 5학년을 가르치고, 스텝이 되면 중학생을 가르치고, 이렇게 서로 돌아가면서 가르치는 시스템인데, 우리가 정부 시스템으로 들어가면 운영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신청을 안 한 겁니다.nbspnbsp게다가 애초에 세웠던 ‘문맹퇴치’란 목적은 이제 이 지역에서 15개 마을마다 있는 유치원 교육으로 어느 정도 달성했기 때문에 이제는 사립학교로 가는 길밖에 없다 싶어서 인가를 내게 된 것입니다. ‘문맹퇴치’는 앞으로는 유치원을 더 강화하는 것으로 풀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유치원을 전부 중학생이 가르쳤는데,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는 견습선생, 2학년은 담임선생, 3학년은 원장이었거든요. nbspnbspnbsp지금은 조금 더 높여서 유치원을 고등학생과 중학교 상급생이 가르치고, 대학생이 관리하는 것으로 바꿨고, 또 새롭게 쁘리앙카 교장선생님도 오시고, 보광법사님도 오시고 해서, ‘문맹퇴치’라는 목표에서 더 진일보한, 괜찮은 학교로 전환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됐습니다. 그래서 교사들도 자격을 다시 획득하는 시스템으로 전환이 되어야 합니다. 인도에서 교사자격을 획득하려면 일반 대학보다 꽤 많은 돈이 듭니다. 그래도 어쨌든 장기적으로 그렇게 갈 수밖에 없겠지요.nbspnbsp병원도 지금껏 보건소 수준으로 운영했는데, 그 이유가 의사를 외부에서 데려온다고 해도 그 사람은 봉사가 잘 안 되잖습니까. 제이티에스는 ‘봉사자로만 구성한다’는 이념이니까, 월급 시스템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도 지금 극복해야 될 문제입니다. 보건소 수준에서 병원 수준으로 가려면 한국에서 전문 의사나 은퇴한 의사가 와야 하는데, 봉사자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파독 간호사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 중에 여기 성지순례 왔다가 자기가 은퇴하면 오시겠다는 분이 계십니다.nbspnbsp인도의 의사들이 봉사자로 오긴 옵니다만 전업이 아니라 파트타임으로, 자기 병원에 가기 전에 여기 와서 하루에 2시간씩 봐주고 가는데 우리가 교통비는 드립니다. 인도는 중국처럼 ‘마을 의사’ 식으로, 정식 의과대학을 안 나와도 병원에 오래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동네에서만 의료활동을 할 수 있게 자격증을 주는데 상시적으로 있는 까메스와르 선생님은 그런 의사예요. 그런데 자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20년의 풍부한 임상경험이 있으니까 주치의나 다름없어요. 우리도 아프면 다 그 선생님한테 가야 돼요.nbspnbspnbsp그런데 제일 핵심은 마을개발, 무엇보다 주택개량입니다. 여기서는 주택문제가 결핵 등 모든 질병의 원인이거든요. 그 다음에 소득 문제인데 그건 간단한 게 아니에요. 이곳의 소득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좀 어렵지만 협동조합이라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여기는 ‘고리채’ 문제가 있으니까 마을금고도 조성하고, 또 생산협동조합을 만들어서 동네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공동판매하고, 또 조합을 만들어서 공동구매를 해서 서로 나누면, 시멘트 등을 싸게 구입할 수도 있지요.nbspnbsp그런 걸 하려면 젊은이들이 1년씩 파견 와서 봉사하는 정도로는 할 수가 없고, 사회적 경험도 풍부하고, 좀 장기적인 계획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첫째 경험이 많은 연세 드신 분이 필요한데, 그분들은 언어도 잘 안 되고, 고집이 세어서 공동생활이 잘 안 됩니다. 젊은이들은 음식도 이것저것 먹고, 말도 조금 하고, 적응도 잘 하는 대신에 전문지식이 없고요.nbspnbsp저 같은 사람이 이런 데 살면 참 좋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제가 어릴 때 살던 곳과 형편이 같으니까 특별히 배운 게 없어도 됩니다. 어릴 때 배웠던 낫질, 괭이질 하나도 여기서는 다 선진기술에 속하거든요. 살아온 경험 자체가 여기서는 기술이 되니까요. 그런데 그런 분들은 공동체 생활이 어려워요. 어쨌든 저희가 여기까지는 왔는데 앞으로 제일 중요한 건 돈도 아니고 인력입니다. 인력이 있어야 돈이 더 필요해지는데 인력이 없으니까 돈이 있어도 쓸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nbspnbsp성지순례를 할 때 우리 스스로 밥을 해 먹고, 숙소도 별로 좋지도 않고, 버스비 빼고는 돈 들 일이 별로 없는데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받나 싶지요. 여러분들 눈치 보니까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학교를 짓는데 든 돈의 대부분은 성지순례에서 남은 돈입니다. nbspnbspnbsp제가 처음에 ‘학교 지을 돈을 어디서 구하나?’를 생각했을 때 두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하나는 제가 성지를 안내해서 돈을 버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목탁을 치고 절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때 정토회는 작은 셋방 하나 얻어가지고 시작한 수준이었으니까 돈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고생을 하더라도 성지순례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제가 처음부터 이렇게 얘기하고 성지순례를 시작했어요.nbspnbsp‘따로 돈 내지 말고, 대신 호텔에 잘 거 순례자 숙소에서 자고, 호텔에서 밥 먹을 거 직접 해 먹자. 대신에 내가 안내는 잘 해줄 테니까 몸만 좀 고생하면 된다. 기분이 나면 나중에 돌아가서 보시를 더하더라도 따로 보시 안 해도 되니까 우선 순례 기간 동안 만이라도 검소하게 살고 남겨서 좋은 일에 쓰자’nbsp그래서 한 번 성지순례를 하면 그것으로 건물 한 동 짓고, 2년 모아서 한 동 짓고, 이런 식으로 해 왔습니다.nbspnbspnbsp저희가 인도에 세운 목표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종교에 관계없이 인도의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구호활동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불교인으로서 인도 불교를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상카시아의 석가족들에게 수련센터를 마련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센터를 짓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거든요. 우리가 그걸 위해서 한국에서 모금활동 같은 건 안 합니다. ‘절 지으니까 돈 내라’ 이런 소리를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순례만 해도 보시를 한 게 됩니다. 그렇다고 따로 더 돈을 내도 안 받지는 않아요. nbspnbspnbsp그런데 제가 여기서 돈을 써보면, 같은 돈인데 같지가 않습니다. 미국, 한국, 유럽에서 쓰는 1달러하고 여기서 쓰이는 1달러를 비교해 보면 여기서 쓰이는 게 10배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여러분들이 절약한 커피 한 잔 값이 여기 아이들 10명의 급식비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기쁘게 고생을 하셔야 됩니다.” nbspnbsp“예.” nbsp“그러니 여기서 고생한다고 입을 내밀고 그러면 겨우 복 지어놓고 그 복을 감하게 되는 겁니다. 인도에서 버스 빌리고, 버스기사 고용하는 데만 돈을 주지, 여기 스텝은 모두 봉사자로서 누구도 이 일을 하고 따로 돈 받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인력충원이 잘 안 되어서 운영에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여러분이 이렇게 와서 보시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제가 제일 원하는 보시는 ‘몸 보시’입니다. 자신들의 재능을 여기에 몇 년씩 보시를 했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은 성지순례하고 공부해서 좋고, 또 여기 와서 고행함으로써 수행에도 도움이 되고, 또 그것이 그냥 수행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돈이 여기 아이들의 밥이 되고 책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종교가 다른 사람들은 수자타아카데미에 쓰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은 상카시아에 가보면 알겠지만 인도에 극소수 남아있는 경전 한 권, 법요집 한 권도 없는 불교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nbsp성지순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공덕을 짓는 것이 된다는 스님의 말씀에 순례객들은 무척 기뻐하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수자타아카데미에서 자원봉사하고 있는 스텝들 중에는 작년에 성지순례를 할 때 큰 감동을 받고나서 다시 이곳으로 봉사를 하러 온 거사님 한 분이 있었는데 오늘 스님 법문을 듣고 올해는 또 어떤 분이 이곳으로 봉사를 하러 올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도 마음을 내는 분이 있었으면 좋겠네요.nbspnbsp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습니다. 순례객들이 잠자리에 든 사이 스님은 성지순례 스텝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사무실에서 회의를 했습니다.nbspnbsp내일은 새벽 4시 20분에 기상해 예불을 올린 후 5시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출발해 보드가야까지 걸어서 이동할 예정입니다. 부처님이 이곳 전정각산에서 6년간 고행하시다가 고행을 멈추고 보드가야까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nbspnbsp▼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nbspnbsp
2016.1.13 (인도 8일째)_오전_수자타아카데미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부처님이 6년 고행한 전정각산과 이곳 천민들을 위해 스님이 세운 학교 ‘수자타아카데미’에 대해 안내했습니다.nbsp새벽 5시가 되자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은 바라나시 사르나트 숙소에서 일제히 함께 출발했습니다. 오늘은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유수스님의 집전으로 새벽예불과 기도를 했습니다.nbsp기도를 마치고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자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기차를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도로에는 대부분 트럭이 줄지어 가고 있었습니다.nbsp해가 뜨고 나서 조금 있으니 중간에 긴 다리가 나타나 순례단의 단잠을 깨우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순례단이 가고 있는 이 길이 부처님께서 성도 후 걸어갔던 길이라고 알려주면서 다리가 놓인 이 강은 숀강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nbsp“우리가 지나가는 이 길을 따라서 부처님께서 성도 후 첫 번째로 이 길을 걸어오셔서 다섯 비구를 교화하셨고, 우리처럼 다시 이 길을 따라서 보드가야로 가셔서 우루벨라 가섭 등 1천명을 교화하셨어요. 그때 오고 가셨던 길이 바로 이 길이예요.nbsp자, 이제 강이 하나 보이죠? 이 강은 숀강입니다. 5개의 강이 강가강으로 합류해요. 야무나강, 강가강, 그하그하라강, 간타키강은 히말리야 간에서 내려오는 강줄기이고요. 데칸고원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흘러서 강가강으로 합류하는 강줄기가 숀강이예요. 폭이 굉장히 넓습니다. 지금은 건기라서 사막처럼 모래만 보이는데, 우기가 되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마치 바다 같습니다. 다리에 전봇대가 주욱 세워져 있죠? 총 몇 개나 되는지 한번 세어보세요.”nbsp숀강을 건너 다시 한참을 달린 후 도로 가에 버스를 세우고 잠시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적당한 식사 장소를 찾기 위해 차를 세우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는데, 나중에 이유를 알고 보니 운전 기사들도 인도 음식을 사먹을 수 있고, 우리들도 도시락을 꺼내 먹을 수 있는,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장소를 찾다 보니 그랬다고 합니다. 운전 기사들까지 세심히 배려하는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 전기밥솥을 갖고 다니며 이동 중에 적당한 장소가 나타나면 어디서든 식사를 하는 순례단식사를 마치고 다시 열심히 달려 12시가 넘어서 드디어 가야 근교에 이르렀습니다. 가야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야산이었습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가야산을 가리키며 스님은 짧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왼쪽에 보이는 것이 가야산입니다. 코끼리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상두산이라고도 불립니다. 이곳에서 부처님이 1000명의 비구를 두고 설법을 했다고 합니다. nbsp부처님께서 라즈길에서 가야로 오셔서 바로 저 가야산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네이란자라 강 동편이 수행하기가 좋겠다고 하면서 전정각산으로 가셨습니다.nbsp그리고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 정진하시고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바라나시로 가셨습니다. 바라나시에서 오비구를 교화하고 다시 이곳으로 와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을 교화하고, 그들을 따르던 1000명의 비구를 이곳 가야산 아래에 모아놓고 설법을 했다고 전해지는 자리입니다.”직접 올라가보지는 못했지만 경전 속에 나오는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보니 부처님의 삶이 역사적 사실로서 더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nbsp버스는 다시 네이란자라강을 건넜습니다. 건기여서 강물이 많지 않았습니다.nbsp“이 강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실 때 나오는 네이란자라 강입니다. 왼쪽에 힌두 템플이 많이 보이는데 저곳이 부처님이 교화한 나디 가섭의 수행터입니다. 저 아래로 가면 가야 시내가 나옵니다...”nbsp네이란자라 강을 건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정각산이 바로 보였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로 들어가는 길에는 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였습니다. 스님이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는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고 하는데, 오늘 순례객들은 버스를 타고 학교 앞까지 들어갔습니다.nbsp▲ 전정각산수자타아카데미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꽃목걸이를 들고 순례객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nbsp스님과 순례객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학생들이 차례대로 한 명 한 명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환영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꽃목걸이를 받아서 목이 무거울 정도였습니다.nbsp먼저 정문 앞에 자리한 전정각사 법당에 들어가 참배를 한 후 고 설성봉 거사님의 부도탑을 참배했습니다. 고 설성봉 거사님은 한국 JTS의 스텝으로 파견되어서 기술학교를 건축하신 분입니다.nbsp수자타아카데미가 생기고 나서 무장한 강도 집단으로부터 세 번 습격을 받았는데, 설성봉거사님은 세 번째 습격 때 총격에 맞아서 이곳에서 사망하셨습니다. 2002년 1월 10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부도탑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설성봉 거사님의 서거 이후로는 학교가 한 번도 습격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성봉 거사님이 돌아가신 후 이곳에 경찰 한 개 소대가 10년 이상 계속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는데 설성봉 거사님의 희생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이 지역의 치안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래서 JTS에서는 설성봉 거사님의 기일을 맞이하여 이곳에서 늘 재를 지내는데, A팀이 와서 먼저 재를 지냈기 때문에 C팀은 설성봉 거사님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해탈주 삼독을 했습니다.nbsp설성봉님의 영정 사진을 보며 많은 순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의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고가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이어서 스님이 직접 수자타아카데미 곳곳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이바카병원, 기숙사, 대강당, 게스트하우스, 홍보관, 교무실, 초등학교 건물, 기술학교 건물, 식당 등을 차례대로 둘러보았습니다. 모두들 생각했던 것보다 웅장한 규모의 건물들을 보고, 그동안 다녀갔던 봉사자들의 노고에 감탄했습니다.nbsp▲ 지이바카병원▲ 기숙사▲ 초등학교, 중학교, 기술학교학교 투어를 마치자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짜이와 비스켓을 정성껏 마련해 주었습니다. 순례객들은 학생들이 따라주는 짜이 한 잔과 비스켓을 받아들고 매우 기뻐했습니다.nbsp▲ 순례객들에게 짜이와 비스켓을 나눠주고 있는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짜이를 마시고 나서는 쁘락보디홀 대강당에서 학생들이 준비한 순례단 환영행사가 열렸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순례객들을 위해 그동안 갈고 닦은 춤과 노래 솜씨를 멋지게 보여주었습니다.nbsp▲ 쁘락보디홀 대강당신나는 인도 음악에 맞춰 저학년팀, 고학년팀, 남학생팀, 여학생팀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저학년팀은 아주 애교스럽고 귀여운 춤들을 보여주었고, 여학생팀은 예쁜 인도옷을 입고 나와서 너무나 아름다운 춤동작을 보여주었습니다.nbsp특히 태권도를 보여 준 아이들은 예년과 달리 힘찬 기합 소리가 아닌 신나는 음악 반주에 맞춰 태권도 시범을 보여주어서 큰 웃음을 선사했습니다.nbsp순례객들은 구걸하던 아이들이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멋진 공연을 보며 박수치고 웃음을 보였지만, 웃는 얼굴에는 감동의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수자타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전정각산 아래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nbsp아이들의 멋진 공연이 끝나고, 학교의 설립자인 스님이 무대로 올라와 학생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오늘 공연을 위해 오랜 시간 연습했다고 합니다.nbsp“나마스떼 그동안 잘 지냈어요?”nbsp“네”nbsp“공부 잘 하고 있어요?”“네”nbsp“올해 1년 동안 한 번도 결석 안 한 사람 손들어 보세요.”“저요” “올해는 수자타아카데미가 설립된지 22년이 됩니다. 이제 한참 청년의 나이입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나무 밑에서 아주 작게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건물이 조금씩 조금씩 지어지고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이렇게 커지게 되었습니다.nbsp지금 선생님들은 대부분 수자타아카데미 출신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 선생님이 되거나, 의사가 되거나, 마을의 지도자가 되거나,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nbsp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여러분들이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여러분들이 공부할 수 있게 후원을 해주신 분들입니다. 그동안 우리들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뜻으로 큰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nbsp“단야바드” nbsp“이번에 오신 분들은 한국에서만 오신 분들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왔습니다. 제가 소개를 좀 해드릴게요.”nbsp스님은 미국, 캐나다, 일본, 독일,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등 전세계에서 온 순례객들 한 명 한 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환영의 박수를 크게 쳤습니다.nbsp“이렇게 세계 각국에서 오셨어요. 여러분들은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여러분들도 앞으로 공부를 잘 하면 인도 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떤 나라에 가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만 살고 싶어요? 다른 나라에도 가보고 싶어요?”nbsp“다른 나라에도 가보고 싶어요.”“그렇게 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해요.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집안일도 잘 하고, 학교 청소도 잘 해야 해요. 알았지요?”“네”“오늘 공연 잘 봤어요. 제가 매년 올 때마다 똑같은 것만 봤는데, 오늘은 모든 공연이 다 처음 본 거였어요.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나온 거 보고 따라한 거예요? 텔레비전에서 나온 것보다는 여러분들이 동네에서 막 추는 춤이 있잖아요. 그걸 보여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지금 한번 나와서 보여줘봐요.” nbsp그러자 아이들이 서로 나와서 막춤을 추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연주해주는 전통 타악기에 맞춰 아이들이 늘 추는 춤이라고 합니다. 수십 명이 무대로 나와 몸을 흔들자 순식간에 행사장은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아이들의 막춤에 순례객들도 흥이 나서 함께 무대로 나와 몸을 흔들었습니다.nbsp이 모습을 지켜보던 순례객들은 박장대소를 하고, 그렇게 한국인 순례자들과 천민마을 아이들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지만, 이렇게 웃음과 눈빛, 신나는 춤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nbsp아이들은 스님을 향해 꽃가루를 날렸고, 이렇게 설립자를 잊지 않고 매년 정성껏 반겨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순례객들은 다시 한 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nbsp감동의 무대를 뒤로 하고 순례객들은 수자타아카데미를 빠져나와서 전정각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학교 정문 앞은 부처님이 6년 간 고행했다고 하는 시타림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허물어진 탑터가 남아 있는데, 여기서부터 스님의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nbsp“학교 앞을 나오면 바로 돌무더기가 보입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시체더미 속에서 수행정진 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여인이 죽기 전에 이곳에 버려졌는데 아직 의식이 있었나 봐요. ‘내 옷을 저 수행자가 입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자, 부처님께서 그 여인에게 덮여 있던 옷을 입었다고 해요. 그러자 그 여인이 천상에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념해서 이곳에 수투파을 세웠는데 기초석만 남고, 마을 가까이에 있다보니 벽돌은 다 없어졌어요.이 산은 부처님이 6년간 고행을 했다는 전정각산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 머문 산이라고 해서 인도말로는 ‘쁘락 보디 힐’입니다. 이 지역 이름은 ‘부정한 땅’ 이라는 뜻을 가진 ‘둥게스와리’입니다. 저 위에 하얀 건물이 보이는데, 저기에 부처님이 6년 고행하실 때 주로 머무신 동굴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곳에 오래 계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남아있다고 해서 ‘유영굴’이라고 부릅니다.”스님은 유영굴까지 올라가는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수자타아카데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nbsp“제가 1993년도에 인도에 왔을 때 이 유영굴을 참배하려고 보드가야에서 여기까지 걸어와서 처음 방문을 했어요. 올라가는 길이 오솔길이었는데 지금 여기 할머니들이 앉아 있듯이 조그마한 애들이 입구에서부터 저기 유영굴까지 줄을 서서 주욱 앉아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무슨 요일이니? 학교가 쉬는 날이니?’ 라고 물어보니 아니래요. 그래서 ‘일요일도 아닌데 왜 학교도 안 가고 여기 있니?’ 하니까 여기는 학교가 없대요. 애들이 수백 명이 있는데 학교가 없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유영굴을 참배하고 마을로 내려와서 마을 어른들과 nbsp얘기를 해봤어요. 그런데 진짜 학교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교를 짓자 해서 시작이 된 겁니다.nbsp‘아이들도 너희들의 아이들이고, 나라도 너희 나라이지 않냐. 나는 출가해서 아이도 없는데 왜 나 혼자 학교를 지어야 하느냐. 너희들도 뭐라도 좀 해라.’ 하니까 자기들은 가난해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대요. 그래서 ‘땅이라도 내놔라’ 하니까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땅을 1가트씩 10명이 보시를 했어요. 1가트는 45평입니다. 그곳이 처음으로 수자타아카데미가 지어진 터입니다. 저는 이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보시를 받아낸 사람이예요. nbsp이렇게 해서 학교를 짓기 시작했는데, 일단 나무 밑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려고 보니까 동네 청년 중에 한 명이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녔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이 8학년까지 다녔다고 해서, 그 둘이 선생님을 하라고 하고 학교를 시작했어요. 저는 우물에서 물통으로 물을 퍼날라가면서 건물을 짓기 시작해서 1년 동안 한 층을 지었어요.nbsp그런데 강도가 습격해서 선생님들이 두들겨 맞고, 밥 해먹던 도구며 숟가락까지 다 빼앗기자 겁을 내서 철수를 하겠다고 하기에 제가 다시 와서 학교를 열었어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학교가 열려서 공부가 계속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교실 세 칸에 교무실 한 칸이면 충분하겠다 싶었는데, 아침 조회 때마다 아이들이 자꾸 쓰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의사를 데려와서 건강검진을 시켰어요. 의사가 하는 말이 약이 급한 것이 아니라 영양실조가 심하기 때문에 숫제 우유 하나와 비스켓 하나를 주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급식을 시작했어요.nbsp학생 수를 150명 정도로 예상하고 급식을 시작했는데, 급식을 하니까 졸지에 학생 수가 300명이 되었어요. 그래서 1층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이 늘어나서 2층을 또 지은 거예요. 그러다보니 건물 짓는데 3년이 걸리게 되었습니다.”nbsp22년 전 스님이 유영굴을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이곳 마을 사람들과 의논해서 수자타아카데미가 처음 열리게 되었다는 설명을 스님과 함께 유영굴로 올라가면서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nbsp아직도 유영굴로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병자들이 누워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수자타아카데미에서는 지난 22년 동안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교육과 캠페인을 꾸준히 해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한 수행자의 발원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 눈 앞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nbsp유영굴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습니다. 스님은 순례객들을 공터에 앉게 한 다음 전정각산과 관련된 부처님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nbspnbsp
2016.1.12 (인도 7일째)_오후_성지순례 C팀 강가 강 투어
오전에 사르나트 순례 일정을 모두 마친 후 오후에는 인도의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면서 힌두교의 성지인 바라나시의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nbsp강가강으로 향햐는 길은 너무나 많은 인파들이 있어서 자칫하면 사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여러 차례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버스에 내려 두 명씩 짝을 지어 자전거 릭샤를 타고 다사스와메드가트로 향했습니다.nbsp다사스와메드가트에서 배를 탄 순례객들은 강가강을 따라 라지가트까지 향했습니다.nbsp중간에 강가강의 화장터에 가까이 다가가자 순례객들은 조용히 화장이 이뤄지는 풍경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물끄러미 시신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있는 순례객들에게 인도의 화장 풍습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저기 계단에 저렇게 시신이 있잖습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계단에 많네요. 저길 보세요. 저쪽도 그렇고 저기 구석에 황색 금빛 천을 많이 갖다 버려놨죠? 저걸 분소의라고 해요. 분소의는 더 떨어진 옷이라기 보다는 시체를 쌌던 천이니 부정탄다고 해서 누구도 손을 안 대는 옷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누구도 손 대기를 꺼려해서 버린 옷을 입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가사의 원형입니다.저기 시신이 있는데 얼굴이 보이죠? 발도 다 보이네요. 저렇게 시신을 들고 와서 물에 한번 적셨다가 가져가잖아요. 만약 인도에서 한국사람이 죽으면 여기서 화장해서 유골만 가져가면 되는데 한국 사람들은 꼭 시신을 냉동시켜서 한국까지 가져오라고 하잖아요. 인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관을 만드는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도사람들은 가족이 죽으면 바로 이곳으로 가져와서 화장을 합니다.자, 나무아미타불 10번 부르며 염불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왕생극락하옵소서.”nbsp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바라며 간절히 염불을 한 후 다시 스님은 강가강과 관련된 경전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nbsp“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경전에 나온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릴게요. 어느 날 비사카부인이라고 하는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을 찾아왔어요. 왜 그리 슬퍼하는지 물어보니 사랑하는 손자가 죽었다는 거예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소? 적으면 좋소?’라고 물었어요. ‘많으면 좋다’고 하자 ‘사랑하는 사람이 이 쉬라바스티 시민만큼 많으면 어떻겠소?’라고 다시 물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라고 부인이 대답했습니다.nbsp부처님이 다시 ‘그러면 이 쉬라바스티 성에는 하루에 몇 명이 죽소? 한 명, 두 명, 열 명?’ 하고 묻자 부인이 ‘그 이상 죽을 겁니다’라고 대답했어요. 하루 열 명이 뭐예요, 지금도 한꺼번에 열 명 이상 화장하고 있잖아요. 그러자 부처님이 ‘그러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매일매일 슬피 울어야 겠구려’ 라고 했습니다. 그때 비사카부인이 깨달았어요. 그래서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nbsp이렇게 죽은 사람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게 해탈인데 여러분들은 지금 화장터를 보면서 좀 깨쳐졌어요? nbsp‘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기에 슬프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행복하다’ 이 두가지는 모순이에요.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매일 죽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 사람은 매일매일 슬퍼야 하잖아요. 부처님은 그 슬픔에 어떤 모순이 있는지를 비사카 부인이 깨닫도록 한 거예요.nbsp강가강에서 하신 부처님 말씀 중 유명한 것으로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미니라는 한 젊은이가 ‘저 바라문들이 말하기를 아무리 사람이 죄를 많이 지어도 강가강에서 목욕을 하면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들의 말이 맞다면 강가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가겠구나’라고 하셨어요.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입니까?”강가강 위를 유유히 흘러가며 강가강과 관련된 경전 속의 이야기들을 들으니 그 이야기가 더욱 더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nbsp배에서 내려 다시 가트로 올라오는 길에는 강변에 많은 빨래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빨래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는데 스님은 “인도 사람들은 우리처럼 빨래를 돌판에 놓고 방망이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옷을 돌판에 턱턱 치면서 빨래를 한다”고 얘기하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nbsp강가강 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스님은 강가강을 둘러본 소감을 순례객들에게 물어보면서 한마디 덧붙여 주었습니다.nbsp“화장하는 모습 잘 보셨어요? 나중에 스님도 죽거든 울고불고 하지 마세요. 알겠죠? 그 영감 온갖 것 간섭하고 바쁘게 살더니 이제 좀 쉬겠네 하면서 잘 죽었다고 생각해야 해요.”nbsp스님의 이야기에 모두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웃고 있는 사이에 버스는 야사가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신발을 벗어 놓고 강을 건넜다고 하는 바루나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경전에 나오는 지명들이 보여서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겠구나’ 하는 것이 실감났습니다.▲ 바루나 강숙소로 돌아와서 조별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전기밥솥에 밥을 앉히고 한국에서 가져온 반찬들을 꺼내니 순식간에 푸짐한 상이 차려졌습니다. 강가강에서의 감흥이 아직 가시지 않은지 밥을 먹으면서도 강가강의 화장터를 보고 난 소감을 계속 나누었습니다.nbsp저녁 6시부터는 스님이 성지순례를 떠나는 C팀 전체를 위해 부처님의 일생과 10대 성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C팀은 해외에서 오신 분들이나 정토불교대학생들이 아닌 일반 참가자들도 섞여 있어서 A팀과 B팀 때 보다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그 중에서 오늘은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의 마지막 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준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부처님의 성도 후 6년까지는 연대순으로 경전에 기록이 잘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사실적으로 적혀 있어요. 그런데 활동하신 45년을 다 연대순으로 기록하기는 쉽지 않아서, 그 이후에는 연대순이 아니라 교화 사례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몇 년도에 뭘 하셨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nbsp그러다가 부처님이 80세가 되어 돌아가시기 직전의 마지막 한 해는 매일 날짜별로 부처님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 여행을 기록한 경전이 열반경입니다. 경의 시작을 보면 영축산에 부처님이 계실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아자타사투가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아들도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어 석가족을 멸망시켰어요. 아자타사투는 부처님과 적대 관계였다가 나중에 크게 뉘우치고 부처님의 착실한 재가신자가 되긴 했지만, 그 때의 아자타사투는 이웃 나라인 밧지족과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신하더러 부처님을 찾아가 이 전쟁에서 이기겠는지 물어보도록 시킵니다. 열반경은 그 이야기로 시작됩니다.nbsp아자타사투의 신하가 왕을 대신해서 부처님께 문안을 드리고 ‘지금 왕이 밧지족을 치려고 하는데 이 전쟁에서 승패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물어요. 부처님은 이긴다거나 진다는 말씀을 안 하시고 대신 옆의 아난존자에게 묻습니다. ‘내가 옛날에 밧지족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하고 있느냐?’ 이렇게 일곱 가지를 확인해요. 그 일곱 가지에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 약자를 보호하는 것, 전통을 잘 계승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아난다가 ‘그들은 아직도 그것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것이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입니다. 대신이 들어보더니 ‘부처님, 일곱 가지 중의 한 가지만 지켜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밧지족이 일곱 가지를 다 지키고 있다면 망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무력으로는 안 되겠고 다른 계책을 세워봐야 하겠습니다’ 이러고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전쟁을 막은 거예요. 부처님이 세상에 무관심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전쟁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도 전쟁을 막으신 겁니다.그리고 부처님은 죽림정사로 오셔서 상가, 즉 승단이 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를 설하시고 파탈리푸트라로 가서 앞으로 200년 후 여기가 대도시가 되겠다고 예언하십니다.nbsp그리고 강가강을 건너서 바이샬리로 건너가 망고나무 아래에 앉아 계셨어요. 수행자가 자신의 망고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 공양을 올리는 게 당시 풍습이었나 봅니다. 부처님이 앉아 계셨던 망고나무는 그 지역에서 천하제일 기생으로 손꼽히는 암나팔리의 것이었어요. 그래서 암나팔리가 마차를 타고 와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너무너무 기뻐서 부처님께 ‘내일 아침에 제가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하니 부처님이 승낙하셨어요.nbsp그리고 암나팔리가 돌아가는 길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차를 타고 오던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왕족들과 마주쳤습니다. 왕족들보다 기생인 암나팔리가 부처님 식사 초대권을 먼저 가져가서 왕족들이 실망했습니다. 체면을 생각하면 자기들이 먼저 초대해야 하잖아요. 왕족들이 암나팔리에게 초대권을 넘겨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해서, 10만금을 주겠노라 제안했어요. 그랬더니 암나팔리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어르신들, 호의는 고맙지만 싫소. 이 바이샬리 나라를 다 준다 해도 나는 응하지 않겠소.’nbsp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어요. 이건 교만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왕족들에게 태도가 그랬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릿차비 족왕족들은 할 수 없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께 다시 요청합니다. ‘내일 아침에 우리가 식사 초대를 하겠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선약이 있다고 거절하셨어요.nbsp초대권을 내어주지 않는 기생도 굉장하지만, 기생과 먼저 약속했다고 왕족의 초대를 거절하는 부처님도 굉장하죠? 제가 여러분들과 식사 약속했다가 청와대에서 초대를 받으면 어떻게 할까요? 전화해서 ‘내일 급한 일이 있으니 다음으로 미루자’라고 하는 게 십중팔구일 겁니다. nbsp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왕궁에 여러 번 초대했지만 부처님은 한 번도 안 갔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을 참으로 귀하게 여겨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였는데도 부처님은 왕궁에 한 번도 가지 않고 늘 산속의 동굴에 머무셨어요. 왕이 식사초대를 해서 왕궁에 부처님을 모시면 자기 인생 괴로운 걸 하소연할 텐데, 부처님이 왕궁에 안 오시니까 자기가 부처님을 찾아갈 수밖에 없잖아요. 부처님이 산꼭대기에 있으면 왕이 산꼭대기까지 가야 해요. 그래서 지금 왕사성 근방에 가면 동굴마다 ‘빔비사라킹로드’라는 게 있습니다. 왕이 부처님을 보러 가니까 신하들이 왕 때문에 죽기살기로 길을 닦아놓아서 아직도 그 축대가 남아 있어요. 부처님이 영축산에 계시니까 왕이 자기 고민이 있으면 부처님을 뵈러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지금은 관광객이 많으니까 새 길을 닦았는데 그 밑에는 2,500년 전에 닦았던 그 길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nbsp왕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집에 제일 좋은 마차에 제일 좋은 침실에 제일 좋은 음식에 제일 좋은 보석은 다 가지고 살아요. 부처님은 맨발에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밥은 얻어먹고 다니는 거지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이 괴롭다며 왕에게 뭔가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신발 한 켤레 달라고 이야기해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온갖 것을 다 가진 왕이 부처님을 찾아와 하소연한 적은 무척 많습니다.nbsp2,6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부처님을 흉내조차 내기 어렵습니다. 자는 것도 부처님을 흉내조차 낼 수 없고, 먹는 것도 흉내조차 낼 수 없고, 입는 것도 흉내조차 낼 수 없고, 세상에 대해서도 흉내조차 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을 존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만족하고 살아야 해요. ‘부처님도 이렇게 사셨는데 우리가 뭘 불평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호화판으로 사는 거예요.nbsp왕은 그렇게 많이 가지고도 늘 불안해서 침실 입구며 성문 안팎으로 경비병을 세우고 살지만 부처님은 높은 산속 동굴 속에서도 주위에 아무도 없이 잘 생활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부처님의 삶을 통해 자유와 행복의 길이 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26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은 흉내내기조차 어려운 검소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을 들으니 작은 것에 불평 불만을 가졌던 모습들이 되돌아봐졌습니다.nbsp또 스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소개하면서 부처님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을 한가지 더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부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 반드시 ‘내가 부처님한테 들었는데...’,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반드시 생겨날 거라는 거예요. 그럴 때 ‘그건 경전에 없으니 네 이야기는 거짓말이야’ 이렇게 말해도 안 되고, 부처님한테 들었다고 한다 해서 ‘그러냐?’ 이렇게 말해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말할 때 지금까지 경전에 기록돼 있는 내용을 살펴봐서 내용이 이와 합당하면 그의 이야기를 수용하고, 내용이 합당하지 않으면 그의 이야기를 수용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부처님이 말했다고 해서 무조건 믿지 말라는 거예요. 부처님의 위대함은 이런 데 있어요.nbsp과거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계율이나 경전에 근거해서 진리를 검증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것이라고 해서 다 진리라면 강가강에서 목욕하면 천국에 간다는 것도 진리가 되겠죠. 그래서 항상 이치에 맞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설법할 때도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해라’ 이런 이야기가 나오잖아요.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은 지금 시대에도 참으로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으며 동시에 이론에 갇히지도 않는 진리예요.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인도에 와서 순례를 하는 거예요.한국불교는 무조건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해도 안 되고, 소승불교를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소승불교는 소승불교의 수행법과 계율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태도 등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 ‘소승’이라는 말만 가지고 무시하면 안 돼요. 또 우리 대승불교에도 모순도 있고 한편 많은 장점도 있습니다. 티벳 불교도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nbsp그러나 문화와 담마는 구분해야 합니다. ‘담마’는 ‘진리’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진리에 귀의하는 것이지 어떤 문화에 귀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는 나라마다 서로 다르고, 그것은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니 티벳불교나 남방불교를 보고 ‘에이, 저건 불교가 아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돼요. 그건 티벳불교 문화이고 남방불교 문화니까 존중해야 합니다. 한편 요즘 우리나라 젊은 스님들은 우리나라 불교를 무시하고 티벳이나 미얀마로 가서 배우는 데만 열을 올리는데 그것도 올바르지 않아요. 불교만 잘났다고 내세우면서 기독교는 다 틀렸다고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불교와 기독교가 똑같다고 말해도 안 됩니다. 사과와 배는 같은 과일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어서 서로 다르잖아요. 사과만 과일이고 배는 과일이 아니라고 말해도 안 됩니다.nbsp그런 데서 우리가 자기 정체성도 가지면서 다른 것들에 대한 이해와 포용성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중도예요. 정체성이 너무 지나치면 배타성이 되고, 포용성이 너무 지나치면 자기 정체성이 없어져버려서 이렇게 양극단으로 치우치게 됩니다.”이렇게 태어나서 열반하실 때까지의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모든 설명을 마치니 강연을 시작한지세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nbsp밤이 늦어져서 강연을 마쳐야 할 시간이 되자 스님은 마지막으로 바깥 구경만 하지 말고 자기 내면 구경도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nbsp“우리는 이렇게 바라나시에서 보드가야를 지나 라즈길로 갑니다. 라즈길에서 바이샬리를 거쳐서 쿠시나가라로 가서 부처님 열반하신 모습을 보고, 룸비니와 카필라바스투로 가서 부처님의 태어나심과 어릴 때 성장과정, 사문유관 등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던 쉬라바스티에 가서는 주로 부처님의 교화사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nbsp그리고 나서 부처님이 어머니를 위해서 하늘나라에 가서 교화하고 내려오셨다는 상카시아를 마지막으로 성지순례가 끝납니다. 상카시아에서 가사를 반납해요.nbsp이런 순례를 순례객으로서 다니면 재미가 있어요. 오줌누는 것도 재미있고, 모든 에피소드가 다 재미있어집니다. 그런데 이걸 여행으로 생각하면 좀 힘들어요. 세수도 잘 못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쫓기기도 하고, 무거운 짐도 들어야 한다고 성질내면서 다니면, 돈은 돈대로 버리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몸과 마음은 괴로운 지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쁘게 다니면 돈도 안 아깝고, 시간도 안 아깝고, 이보다 더 큰 경험이 없어요. 그러니 바깥 구경만 하지 말고 자기 내면 구경도 하세요.nbsp다니면서 보니 오늘도 아주 복잡하죠? 생기가 돌지 않습니까? 저는 인도에 올 때마다 홍수에 쓰레기 쓸려 내려가듯이 사람과 소와 돼지와 릭샤가 막 섞여서 흐르는 광경을 보면서 이런 데 살면 우울증에 걸릴 일은 없겠다 싶어요. 생기가 저절로 돌고 어딜 가도 친절하잖아요. 어디서 여러분들을 이렇게 환영해주겠어요? nbsp이처럼 재미있게 생각하면 재미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여기 와서 3일만 지나면 인도를 다 고쳐놓고 가려고 합니다. ‘인도 정부는 뭐하나? 길도 안 고치고 뭐하나? 이런 데는 좀 이렇게 하지. 인도 사람은 왜 이것도 안 하느냐?’... 그래서 순례 왔다가 인도 대통령 노릇을 해요. 그런 교만을 떨면서 자기만 괴롭히다가 가지 말고, 여기에 순응하면서 즐기셔야 합니다. 알았죠?” nbsp스님의 이야기에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면서 웃었습니다. 오늘 강연은 해외 참가자, 일반 참가자 등 초심자들을 더욱 배려하는 스님의 애정을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이은 강연과 순례 일정으로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세 시간 동안 열강을 해준 스님에게 순례객들은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nbsp내일은 스님도 C팀과 함께 버스를 타고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가야로 향합니다. 새벽 5시에 바라나시를 출발해 낮 12시 무렵에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할 예정입니다.nbsp※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