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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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4 (인도 9일째 제1편)_네이란자라 강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과 함께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마치고 쓰러지셨던 네이란자라강을 건너 수자타의 공양을 받고 되살아난 곳을 순례한 후 다시 A팀을 맞이하기 위해 쉬라바스티로 향했습니다.nbspnbsp어제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하룻밤을 잔 성지순례단 C팀은 새벽 4시 20분에 일제히 기상해 새벽예불을 올린 후 4시 50분에 수자타아카데미 정문 앞에서 보드가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깜깜한 새벽이라 렌턴을 하나씩 들고 줄을 지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수자타아카데미 정문을 나오니 가장 먼저 방갈비가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JTS가 세운 유치원을 렌턴으로 비춰 먼 발치서 어렴풋이 본 후 천천이 마을 사이를 가로질렀습니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 가득했습니다. 스님은 가장 앞장서서 걸으며 부처님의 삶과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별이 많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성도절이 며칠 안 남았어요. 오늘이 14일이니까 내일 모레네요. 동방에 샛별이 떴나 한번 보세요. 샛별이 있으면 날짜가 비슷한 거고, 없으면 날짜가 틀린 겁니다. nbsp부처님의 일생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인도에 직접 와서 이렇게 경험해보면서 경전 기록과 비교해 봐야 합니다. 예컨대 ‘부처님이 아쇼카나무 꽃 가지를 잡고 태어났다’라고 하면 실제로 아쇼카꽃이 언제쯤 피는지를 보고 대강 몇 월인지 가늠해봐야 해요. ‘음력 12월 8일에 동방의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음력 12월 8일 경에 이곳에 직접 와서 동방의 샛별이 보이는지와 남방에 전해 내려오는 바이샤카월 보름날에 샛별이 반짝이는지를 살펴보면 어느 쪽이 좀 더 맞겠는지 알 수 있어요.nbspnbsp전해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라고 해서 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고 다 객관적 사실인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조금만 과학적으로 검증하면 어떤 이유로 이런 이야기가 나왔고,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요즘은 다 찾을 수 있어요. 인류의 이동 경로도 언어뿐 아니라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대충 어떻게 이동했는지 알 수 있는 것과 같아요.”nbsp송수신기로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하늘 위를 바라보니 정말 동쪽에 반짝이는 샛별이 보였습니다. 부처님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시다가 아마 이 시간 즈음에 샛별을 보셨겠구나 싶었습니다. 항상 직접 경험해보고 연구하는 스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한참 동안 마을 길을 따라서 걷자 지금은 건기여서 모래 사장처럼 되어 있는 네이란자라 강이 저 멀리 보였습니다. 강 너머에는 붉은 불빛이 유독 밝게 보이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라고 스님은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순례객들이 네이란자라강에 발을 내딛자 스님은 퀴즈를 하나 내었습니다.nbspnbsp“우리는 지금 네이란자라강 입구에 있어요. 전정각산에서 부처님이 내려오셨을 때 여기가 아니라 강 저편, 즉 오른쪽으로 건너간 곳에서 목욕하다가 쓰러지셨어요. 여기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한번 맞춰보세요.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강을 처음으로 만난 이곳에서 목욕을 하셨어야 할텐데 왜 굳이 저편으로 건너가셨을까요?”nbsp스님이 낸 퀴즈를 풀고자 많은 순례객들이 이런저런 답변들을 내어 놓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있게 답하지 못하고 웅성거리기만 하자 스님의 생각을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여기서 보면 강바닥이 다 평평해보이지만 산 위에 올라가서 보면 강바닥의 높이가 달라요. 우리가 출발한 지역은 높고, 숲과 마을이 있는 오른쪽 건너편은 낮아요. 그러니 물이 조금밖에 없을 때는 강물이 저쪽만 흐르고, 우기가 되어 물이 많아져야 여기까지 물이 차는 거예요. 강가강도 지금은 건기라서 앞쪽에만 물이 흐르는데 우기가 되면 nbsp그 너머 모래사장까지 물이 흐른다고 했잖아요.nbspnbsp그러니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내려오실 때가 우기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렇다고 지금처럼 물이 없는 때도 아니였겠죠. 원래 이때 쯤 저쪽으로 건너가려면 신발 벗고 건너야 하는데 올해는 특히 가물어서 강 전체가 말라버렸다고 해요.nbspnbsp여러분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지 몰라도 저는 현장 답사를 할 때 ‘어, 왜 쓰러진 곳이 저 건너편이지? 이쪽이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전정각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봤더니 평평한 줄 알았던 강바닥이 경사져 있었던 거예요. 여름에 큰 홍수 질 때만 전체에 물이 차고, 대부분은 강 한쪽으로만 물이 흐르는 거예요.”nbsp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정말 그랬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바닥이 온통 모래로 되어 있어서 발을 내딛기가 조금 힘겹기도 했지만, 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다보니 어느새 강을 거의 다 건넜습니다.nbspnbsp그러자 강 건너편에서 마을 아이들이 마구 달려와 “나마스떼” 하고 인사를 건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에 아이들이 달려와서 인사를 하자 스님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nbspnbspnbsp“어디서 우리를 이렇게 새벽부터 환영해 주겠어요?” nbsp순례객 모두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 어디를 가더라도 동네 아이들은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인도성지순례의 즐거움 중에 하나가 바로 동네 아이들의 이런 모습이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귀찮아 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네이란자라강을 건너오자마자 곧바로 허물어진 탑터가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쓰러진 곳에 세워진 탑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없으면 그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논두렁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많이 훼손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탑을 바라보며 부처님이 쓰러지셨을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부처님은 여기 오셔서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셨어요. 때를 벗기는 목욕이라기보다 6년간 지친 몸을 물에 담근 것이죠. 허기진 상태에서 물에 들어갔다가 일어나면 현기증이 나잖아요. 일어나다가 눈 앞이 핑 돌아서 아마 그냥 쓰러지셨나 봐요. 강바닥이 평평하니까 물살이 세지는 않지만 조금 떠내려가다가, 나뭇가지를 잡고 언덕으로 올라오셨다고 해요. 그때 잡은 나뭇가지 이름이 아사나나무라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nbspnbspnbsp옛날 인도 사람들은 모든 산과 나무에 다 신이 깃들어 있고, 모든 존재마다 다 성품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아트만 사상이에요. 독일어를 공부하면 명사에 여성과 남성이 따로 있듯이 모든 것에 정과 부정의 성품이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남자는 정하고 여자는 부정하고, 보리수는 정한 것에 들어가고 반얀트리는 부정한 것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구분지었습니다. 그런 당시의 사고방식에 따라 경전에는 ‘나무의 신이 가지를 늘어뜨려서 부처님을 잡아 건져올렸다’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당시의 사고방식, 즉 당시 경전을 기록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그랬기 때문에 요즘처럼 ‘나뭇가지를 잡고 기어올라왔다’ 이러지 않고 ‘나무 신이 가지를 늘어뜨려 건져올렸다’라고 기록한 겁니다.nbspnbsp부처님이 나무그늘 밑에 앉아 계실 때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늘이 이동한 것도 ‘나무 신이 싯다르타를 위해서 가지를 옮겨 그늘을 드리웠다’라고 표현하는 게 인도의 전통문화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표현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돼요.nbspnbsp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제가 둥게스와리에 가니까 사람들이 집에 소똥을 바르고 있어요. 이유를 물어보니까 저를 가리키며 신이 왔으니 영접하는 거래요. 여기에는 교육을 관장하는 신이 있는데, 어느 신도 누구 하나 학교를 지어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외국에서 낯선 사람이 와서 학교를 짓고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니까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신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nbspnbspnbsp경전을 읽을 때 신의 개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이라고 해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나 유일신 개념과는 달라요. 옛날에는 우리도 나무에는 목신이 있고, 물에는 수신이 있고, 산에는 산신이 있고, 뒷간에도 신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 개념이에요.nbsp부처님이 쓰러지셨다는 자리에 훗날 아쇼카왕이 탑을 쌓았어요. 그렇다고 물에다 바로 탑을 쌓으면 떠내려가 버릴 테니까 쓰러진 자리 가까이의 물가에 탑을 쌓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흔적만 남고 다 파괴되었어요. 옛날부터 여기가 성스러운 곳이라고 알려졌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그 탑 자리 위에 힌두 사원을 하나 세웠는데 요즘은 그 사원마저 파괴되었습니다.nbsp자, 여기서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내려오셨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nbsp경전 독송을 하니 그 때의 모습이 다시 그림 그리듯이 머릿 속에 펼쳐졌습니다. 스님의 설명처럼 나무 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고 나서 읽으니 내용이 더욱 실감나게 읽혀졌습니다.nbsp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우리가 정법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nbspnbsp“부처님이 여기 쓰러져 있는 것을 저 앞 마을 촌장의 딸인 수자타라는 소녀가 발견했습니다. 경전에는 그 집 소가 4백 마리가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장에 와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소들이 풀을 뜯다가 목이 마르면 물이 흐르는 이 강가로 옵니다. 수자타는 소젖을 짜러 강가로 왔다가 수행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우유에다가 곱게 간 쌀과 코코넛을 넣어 끓인 밀크 라이스, 즉 유미죽을 먹인 거예요. 죽을 드신 곳은 이곳이 아니고 여기서 500m 위쪽에 가면 있습니다. 수자타의 집도 좀 더 가깝고 지대도 약간 높아요. 거기 가면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 올린 곳임을 알리는 탑이 있습니다.nbspnbspnbsp여기서 우리가 정법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몸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 굶주림이 깨달음의 원인이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어요. 깨달음과 고행은 별개의 문제인데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음식을 안 먹고 굶주리며 고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오해하기 쉬워요. ‘누구는 잠을 안 잤다’, ‘누구는 허리를 땅에 안 붙였다’, ‘누구는 단식을 어느 정도 했다’ 이런 것을 깨달음과 연관시키면 안 되지만 우리 중생은 자꾸 그런 식으로 연관시켜서 신비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nbsp두 번째, 그렇게 음식을 안 먹었는데도 부처님이 아주 건강하다는 오해가 또 생길 수 있어요. 즉 ‘부처님이 음식을 안 먹어도 사실 수가 있다’라는 식의 오해가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실제로 음식을 받아드셔서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육체란 것은 음식을 먹어야 유지가 되잖아요. 음식에 탐착하지 말라는 것이지 음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의미에서 정법에 대한 관점이 아주 분명히 잡혀야 합니다.nbsp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여기에서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 왕족이었기에 늘 하인을 두고 사셨어요. 옛날 양반은 반드시 개인 시중을 드는 종이 있어서 여자 같은 경우 결혼하면 종도 따라갔어요. 싯다르타 태자에게도 찬다카라는 마부가 항상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출가 이후에는 누구의 시봉을 받는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하인이나 종이 자기 생활을 받들도록 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 삶을 자기가 유지했습니다.nbspnbsp다만 연세가 드시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아난존자가 시봉을 했지만 그것은 월급을 받고 한 노동이 아니었어요. 같은 도반으로서 제자가 스승을 시봉한 것이지 하인은 아니었잖아요. 이게 부처님 당시 상가의 모습이에요. 상가에서는 다 자기가 자기를 돌보거나 도반끼리 돕는 겁니다.nbspnbsp그런데 신라시대를 보세요. 의상이나 자장 같은 유명한 스님들이라 해도 그 시대가 계급사회다 보니 절에 반드시 사노, 즉 절의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밥하고 일해서 스님들을 먹여 살렸어요. 이것은 그 사회의 계급제도가 그대로 유지되는 거예요. 그러나 부처님은 차원이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신라시대의 유명한 승려 중 그런 계급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다면 원효나 혜공 정도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학문으로 보면 의상이나 다른 사람과 비슷할지 몰라도 수행면에서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nbspnbspnbsp오늘날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디든 사찰 구조를 보면 다 절에서 월급을 주고 밥하는 공양주며 사무 보는 사람을 따로 둡니다. 지금의 사회, 즉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 놓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건물을 짓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먹고사는 생활의 문제는 어떤 사람도 고용해서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늘 밥해주는 사람 따로 있고, 빨래해주는 사람 따로 있는 삶을 살다가 이렇게 같이 생활하면 불편하죠. 서로 도와주고 밥을 해주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당번을 정해서 서로 나눠 하지, 누군가가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nbsp제가 절에서 부목을 해봤는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스님이고 공양주이지만 월급을 받고 일하면 그 사람에게는 스님이 아니라 사장이에요. 세속의 고용주 관계인 겁니다. 같은 수행자로 들어와서 누구는 부목하고 누구는 뭘 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지금의 불교에서 스님들 대부분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학문적으로 불교가 어떻고 철학이 어떻다고 가르치는 교수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수행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 불교의 현실이 근본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뭐가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봐야 해요.nbspnbsp이게 꼭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대부분의 종교가 다 그러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정법을 이야기하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할 때는 완전히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그걸 늘 염두에 두어서 내가 멀어졌더라도 어느 정도 멀어진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nbspnbsp많은 사람들이 ‘일 많으니까 사람들 월급 주고 고용해서 시키면 된다’라고 해요. 옛날에 하인을 안 시키면 일이 안 된 것처럼 요즘 같은 사회에 전문가를 고용해서 일하지 않으니까 전문성이 떨어져서 정토회는 일이 잘 안 돼요. 자원봉사를 1년 하다 가버리고 3개월 하다 가버리는 식이니까요. 그러나 현재까지는 어쨌든 모든 걸 다 자원봉사자로 해결하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정토회 전체에 월급 받는 사람은 한 명도 고용한 적이 없어요.nbspnbspnbsp그러나 방송국을 운영하거나 출판사를 운영하려면 사실 어려워요. 그러나 아직은 다 봉사자들이 하고 있어요. 여러분 같은 봉사자들이 총무 하고, 대표 하고, 여러 소임들을 맡아서 일을 다 하다 보니 다들 죽을 지경이지요. 가정생활 해야지, 직장생활 해야지, 정토회 소임도 맡아서 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수행자로서 하는 거니까 너무 욕심내지는 않는 거예요. 여기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대중들도 다 자원봉사자로서만 참여한다는 원칙이 서 있어요.”nbsp정토회가 왜 모든 일을 자원봉사 방식으로만 운영해가려고 하는지 순례객들은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며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처님은 평생 동안 걸식을 하고 나무 밑에서 자는 등 스스로 자기 삶을 유지했듯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 살면서도 부처님의 그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바로 자원봉사 시스템을 확대해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쓰러지신 곳에 세워진 허물어진 탑터 앞에서 참 소중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다시 마을 사이로 난 논두렁 길을 따라 걷다가 정토회가 명상 센터를 짓기 위해 구입해 놓은 공터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많은 여행객들이 수자타아카데미를 방문했다가 명상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그 수요를 해결해주고자 이곳에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 정토회 명상센터 부지nbsp명상센터 부지에서 다함께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주먹밥과 삶은 계란, 오렌지를 도시락으로 싸주어서 전기밥솥을 들고 오지 않고도 아주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저 멀리 강의 동편에서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올라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nbspnbsp▲ 일출을 보며 먹는 아침 식사nbsp명상센터 부지를 나오자 대문 앞에는 스님으로부터 사탕을 받고자 많은 아이들이 긴 줄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한 명 한 명에게 사탕을 주며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nbspnbspnbsp사탕을 주고 나서 스님은 뿌듯한 표정으로 왜 성지를 순례할 때마다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제가 내생에 인도에 태어나면 제자가 많을 거예요. 사탕 먹고 이미 약속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요. 옛날에는 한국말로 ‘이 사탕 하나 먹은 인연으로 다음 한 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다 따라하도록 했어요. 요즘은 그냥 저 혼자 속으로만 말하지만요. 이처럼 공짜가 없다는 게 인연과보예요. nbspnbsp그리고 저는 다음 생에 쓸 돈도 많이 준비해놨어요. 세뱃돈을 주면서 ‘이생에 안 갚아도 되지만 다음 생에는 동그라미 네 개 더 붙여서 갚아라’라고 합니다. nbspnbsp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나는 이거 안 받겠습니다’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문제없다’며 받아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갚으려면 만나야 하잖아요. 내생에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좋은 거래요. 그래서 ‘야, 그것 참 기특한 생각이다’라고 했어요.” nbsp걷는 동안 송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이야기는 계속 웃음을 자아내었습니다. 스님과 함께 순례를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인 것 같습니다.nbspnbsp이어서 순례단은 부처님이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곳에 세워진 탑을 향해 걸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nbsp ▼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nbspnbsp

2016.01.16. 48,060 읽음 댓글 52개

2016.1.13 (인도 8일째)_오후_전정각산

nbsp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준비한 환영행사를 마친 후 스님은 정토회 순례단을 이끌고 부처님이 6년 고행한 전정각산에 올랐습니다.nbspnbsp전정각산의 중턱에는 부처님이 수행하며 머무셨다는 유영굴이 있었습니다. 유영굴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는데, 스님은 순례객들을 공터의 나무 그늘 아래에 앉게 한 후 전정각산과 관련된 부처님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전정각산입니다. 들어보셨죠? ‘전정각’이라는 말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 계셨다’는 뜻으로 한문으로 ‘前正覺’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정문 앞에 지은 절 이름도 ‘전정각사’입니다. 인도 말로는 ‘뿌락 뽀디 힐’이고, 동네 사람들은 ‘둥게스워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가야 지역에서는 “둥게스워리 가자”고 해야지, “전정각산 가자”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 카필라성에서 출가를 하신 후 왕사성으로 오셔서 두 분의 스승을 모시고 수행을 하신 뒤에, 그분들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이 아님을 아시고, 스승 곁을 떠나서 이곳 가야로 오셨습니다. 왕사성에서 여기까지는 약 80㎞, 즉 200리가 됩니다. 그렇게 오셔서 가야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산의 북쪽이 가야 시내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야산에 오르셔서 주위를 주욱 둘러보니까 앞에 네이란자라강이 앞으로 흐르고, 그 강 동편에 수행하기 좋은 처소가 있었습니다.nbspnbspnbsp여기는 가야 사람들이 시체를 가져다 버리는 시타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곳에 오셔서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을 제대로 안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도 행하지 않은 깊은 정진을 하리라’ 고 결심을 하시고 용맹정진을 하시는데, 친구 다섯 명이 정말 존경할 만큼 정진을 하셨습니다. 여기는 시타림이라 사람이 사는 데가 아니니까 먹을 것도 없고, 걸식할 데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음식도 거의 안 드셔서, 기록에 보면 ‘하루에 대추 한 알을 먹었다’고 되어 있고, 그것도 이틀에 한 알 먹다가 삼 일에 한 알 먹다가 일주일에 한 알 먹는 식으로 하셨답니다. 저는 ‘왜 대추일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 동네에 와서 살아보니까 여기 대추나무가 많더라고요. 원래 이런 험한 산에는 가시나무가 많은데, 대추나무가 바로 가시나무잖습니까. 잎도 좁고요. 그래서 대추나무는 이렇게 건조한 곳에 잘 살 수 있는 나무인 것입니다.nbspnbsp고행주의자들은 몸이 편안한 걸 구하면 안 되기 때문에 목욕도 하지 않고, 음식도 구하지 않고, 잠도 가능하면 안 잤습니다. 어쨌든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5년이나 용맹정진하셔서 한 마디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셨는데, 특히 선정에 드셨을 때는 움직이질 않으셨나 봐요. 그래서 목욕도 하지 않은 몸에 먼지가 앉고, 때가 끼어서 이끼가 다 자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앉아서 꼼짝도 안 하니 마치 석고상처럼 보였는지 가끔 시타림에 물건을 주우러 오는 천민 아이들이 부처님을 두고 편이 나뉘어서 ‘저 수행자는 이미 죽었어’, ‘아니야, 아직 살았어’라고 입씨름을 했어요. 어떤 아이가 부처님을 향해 돌멩이를 탁 던지거나 막대기로 머리를 때려도 꼼짝하지 않으시니까 ‘봐라, 죽었잖아’, ‘아니야, 살았다니까’ 그러다가 아이들이 심지어 나뭇가지를 부처님의 귀에 꽂고 돌멩이로 칩니다. 죽었나 살았나 확인한다고 그런 거죠. 그 통증이 어땠을까요? 그래도 부처님은 가만히 계셨다고 합니다.nbspnbsp우리는 참선하다가 모기가 물어도 탁 치고 그러는데, 부처님께서는 심지어 숨을 멈추신 적도 있었습니다. 숨을 오래 멈춰보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울룩불룩하면서 늑골이 칼로 도려내어지는 것 같거든요. 여러분들은 숨을 좀 멈춰보다가 답답하면 놓아버리니까 잘 모르겠지만 경전에 보면 그 묘사가 굉장합니다. 그런데 진짜 숨을 오래 멈추고 있어 보면 그 묘사가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지요. 스님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저는 고문을 당해 봤잖아요. 숨 못 쉬는 고문을 당해 보니 그 묘사가 정확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우리도 뭐든 해 보면 알지만, ‘노력한다’든지 ‘참는다’는 건 뭘 말합니까? 긴장이 된다는 거죠. 결국 긴장한 상태는 마음이 편안한 상태는 아닙니다. 모든 긴장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풀어져야 선정이 깊이 들어가지, 긴장된 상태에서는 선정에 깊이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고행을 하셨는데도 오히려 선정의 깊이는, 부처님이 어릴 때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걸 보고 나무 밑에서 바로 초선정에 들어갔을 때 수준이 될까 말까 했던 겁니다.nbspnbsp우리는 바라는 게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은 상태를 ‘기분 좋음, 기쁨, 행복, 즐거움’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괴로울 때는 왜 괴롭습니까? 바라는 게 안 되어서 괴로운 거잖아요. 원하는 것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서 “하나님, 부처님” 온갖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이 이런 수준인데, 이건 다 마왕의 아들이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100 들어준다”는 게 마왕 파순의 말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그래서 욕망이라는 건 추구할수록 커지기 때문에 끝이 안 납니다. 그래서 ‘욕망을 억압해야 해탈이 온다’는 입장이 고행주의입니다. 즉, 어떤 욕구도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그건 결국 욕구를 억제한다는 건데, ‘억제’는 결국 ‘긴장’입니다.nbspnbspnbsp부처님이 쾌락과 고행을 다해 보셔도 해탈을 못 했을 때 돌아보니까 이게 정반대의 길 같았는데, 사실은 하나였던 겁니다. 두가지 길 모두 욕구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따라가거나 도피하거나 둘 다 욕구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욕구에 반응하지 않는, 즉 대응을 하지 않는 길을 발견하셨는데 그것은 욕구나 감각을 다만 욕구나 감각으로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정념’, ‘알아차림’입니다. 다만 알아차릴 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리가 아프면 펴거나 이를 악다물고 참는데 다만 통증을 통증으로만 느끼는 거예요. ‘통증이 있구나’ 하면서 통증을 통증으로만 느끼지, 아프다고 다리를 펴거나 아프지만 참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거나 펴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합니다. 통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싫어하기 이전의 상태, 즉 다만 알아차림으로 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제3의 길을 발견하시고 고행을 멈추셨습니다. 고행을 멈추었다는 걸 쾌락을 쫓아가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참는 것만이 길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걸 따라가야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적 긴장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새로운 길, 중도를 발견하시고 이 산을 따라 한 5㎞를 가서 네이란자라강으로 하산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 그 길을 따라가게 되는데, 부처님은 거기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성도하셨는데 성도한 자리는 여기서 8㎞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자연 샘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산의 유일한 샘터로써 ‘고타마의 샘, 붓다의 샘’으로 불리는데 지금은 건기라 샘물이 말라 있습니다.nbspnbsp부처님은 이곳 전정각산에서 6년이나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8대 성지에다 10대 성지라면 카필라성과 전정각산을 넣어야 됩니다. 그러면 전정각산을 바라보면서 함께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nbsp설명을 마친 후 스님은 실제 경전 속에서는 이 모습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살펴보자며 경전을 펼쳐 들었습니다. 순례객 모두 다함께 전정각산을 마주 보고 앉아 경전을 독송했습니다.nbspnbspnbsp경전에는 부처님의 수행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아서 그 때의 정황을 머릿 속으로도 아주 선명히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이곳에서 극도의 고행을 행했던 부처님의 구도의 정열을 되새겨보며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2600년이 지난 지금도 동네 아이들이 순례객을 따라 올라와 나무에 매달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nbspnbsp스님으로부터 전정각산의 전체적인 조망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순례객들은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의 칼능선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해질녁 무렵이여서 노을이 아주 멋있었습니다.nbspnbspnbsp산 아래에는 수자타아카데미가 한 눈에 보이고, 산을 둘러싸고 마을마다 JTS가 세운 유치원도 보였습니다.nbspnbsp칼능선을 따라 곳곳에 탑이 세워진 흔적이 보였습니다. 산에 있는 동글동글한 탑들은 현재 남아있는 것만 16개가 된다고 합니다. 거의 산꼭대기마다 탑이 있었습니다. 붓다가 이 산 어디서 명상했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 아쇼카왕이 쌓은 건데, 다른 데는 나중에 추가로 더 탑을 쌓았지만 여기는 오지이다 보니까 아쇼카왕 때 쌓은 원형 탑을 빼고는 손 댄 사람이 없어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은 것이라고 스님이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머무신 곳곳에 세워진 탑nbspnbsp산을 오르며 흘렸던 땀은 전정각산 위에 부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금방 다 식었고, 순례객들은 기념 사진을 찍거나 둥게스와리 마을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멀리서 바라 본 둥게스와리 마을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습니다. 물론 산 아래로 내려와서 가까이서 보면nbsp마을 주민들의 삶은 너무나 비참하지만 말이죠.nbspnbsp▲ 전정각산 위에서 내려다 본 수자타아카데미nbsp저녁 7시에 예불을 함께 올린 후 7시 30분부터는 지이바카병원 2층 홀에서 수자타아카데미와 인도JTS 소개가 있었습니다.nbspnbsp인도JTS 책임자로 있는 보광법사님이 전체 사업에 대해 소개해준 후 교육, 의료, 마을개발, 총무 등 각 파트별로 사업 소개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결핵환자의 경우 299명이던 환자 수가 거의 대부분 완치되고 지금은 10명만 JTS에서 관리 중이라고 하자 순례객들은 크게 감동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 교육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쁘리앙카님nbsp또 지난 4년 동안 JTS의 영양식 지원으로 저체중아 비율이 88였는데 지금은 10만 심각한 것으로 판단되어 집중 관리되고 있다고 합니다.nbspnbsp그리고 1993년 스님이 처음 학교를 세울 때는 이곳 마을에서 문자해독자는 단 2명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문맹률이 많아 낮아져서 전체 주민의 nbsp70가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nbspnbsp또 최근에는 염소 은행을 만들어서 염소를 분양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시범 분양을 받아간 스텝들로부터 반응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사업성과들에 대해 보고를 들으면서 순례객들은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nbspnbsp▲ 작년부터 새롭게 시작한 염소 분양 사업, GOAT BANKnbsp그리고 각 파트별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스텝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인도인 스텝들은 대부분이 4살, 5살 등 어렸을 때 스님을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어릴 때 스님이 마을에서 나눠주던 비스켓을 먹었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인도인 스텝들의 모습에 순례객들은 또 한번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구걸하던 아이들이 의젓한 선생님이 되어 있거나 학교의 리더가 되어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큰 감동이었습니다.nbspnbspnbsp소개가 모두 끝나고 인도인 스텝들은 스님과 순례객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인도식 막춤을 보여주었습니다. 행사장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난 뒤, 스님의로부터 ‘수자타아카데미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강연을 듣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현재 인도JTS 사업이 해온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이곳에서 구호활동을 시작한지 올해 23년째가 됩니다. 제가 1993년에 처음 여기를 방문했고, 학교를 시작한 것은 1994년 1월부터입니다.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기까지 했으니까요.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어쨌든 그런 우여곡절 끝에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nbspnbspnbsp학교는 정말 많은 봉사자들의 봉사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은 이 학교 출신 아이들이 자라서 봉사를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모레 여러분들이 가게 될 부처님 성지, 상카시아에 사는 석가족 청년들이 이리로 내려와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누구든 인도 사람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해야 했을 거잖아요? 그런데 가야와 보드가야에 있는 교수, 청년들을 데리고 시작해 보니까, 그들이 우리 정토회처럼 정직하게 안 하고, 구호품도 떼어먹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 석가족 청년들이 내려와서 학교를 운영하게 된 것입니다.nbspnbsp원래 학교를 시작할 때는 종교적인 것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석가족 청년들이 불교신자이다 보니까 아이들한테 삼귀의도 가르치고, 나중에 유치원을 지어주니까 그 2층에 법당을 짓겠다고 해서, 아까 여러분들이 본 ‘전정각사’라는 법당을 짓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처음 의도와는 달리 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 이미지가 되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 주위에 있는 가야의 청년들이 와서 초기에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들고, 날고, 이러면서 이런 저런 사고도 생기고, 그러면서 자꾸 교체가 되어가다가 지금은 이 학교의 학생 출신 선생님들이 전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 학교의 학생 출신이 아닌 사람은 쁘리앙카 교장선생님과 까메스와르 의사선생님 뿐이고, 나머지는 다 여기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으니까, 나이는 서른 살이 채 안 되는데도 경력은 다 20년 이상 된 봉사자들입니다. nbspnbsp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문맹 퇴치에는 거의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문맹퇴치’는 유치원에서 계속 이어 나가고 있고, 초등학교는 가능하면 정부학교에 역할을 넘기고 있고, 여기는 예술학교나 기술학교를 하면 좋겠다 싶습니다. 뭔가 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가르쳐야지, 이 아이들은 공부해서 대학을 나온다고 해도 실업자밖에 안 되거든요. 여기는 대학을 나와 경찰이나 공무원 시험을 쳐서 통과한다고 해도 뒷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니까요. 아무리 얘들이 안타까워도 우리가 불법적인 걸 도울 수는 없잖아요. 여기 전기가 22년째 안 들어왔던 이유도 우리가 뒷돈을 안 줘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아마 뒷돈으로 줄 돈의 약 수백 배를 기름 값으로 썼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좋은 일을 하려는데 뒷돈을 써가면서 할 건 없잖습니까. 그래서 촛불 켜고 지내다가 외부 사람이 올 때만 발전기를 돌리는 식으로 버텼던 겁니다.nbspnbspnbsp이제는 학교운영의 목적을 문명퇴치 수준에서 좀 바꿔보려고 초등교육을 정부 학교에 맡기고 폐지하려고 했지만 안 되는 이유가 정부학교는 대부분 그 지역 양민들이 다니거든요. 지역마다 양민과 천민이 섞여 사는데, 주로 우리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천민 아이들인데 정부학교에 보내도 적응을 못해요. 양민 아이들에게 기가 죽어 10명 중에 3명만 학교를 다니는 겁니다. 양민 아이들은 우리 학교에서 안 받으니까 정부학교에 100 등록을 하는데, 천민 아이들은 정부학교를 안 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천민 아이들은 받는 걸로 했습니다.nbspnbsp그러니까 항상 신입생을 받을 때는 정부학교에 우선 등록하도록 하고, 정부학교에 등록 안 한 아이들만 여기서 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는 양민 아이들 비율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 학교 교육에 조금 변화가 있게 된 겁니다.nbspnbspnbsp그리고 수자타아카데미는 그동안은 정부에서 인가한 학교가 아니었어요. 그냥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만든 학교인데, 규모가 워낙 커지니까 지난해에 처음으로 사립 초등·중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겁니다. 왜냐하면 졸업생들이 상급학교를 갈 때 정부학교 이름을 빌려야 했는데, 전에는 무조건 빌려주더니 지금은 잘 안 해주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수자타아카데미 이름으로 졸업장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nbspnbsp우리가 왜 정부학교로 등록을 안 했느냐고요? 몰라서 등록 안 한 게 아닙니다. 정부학교가 되면 자격 있는 교사를 둬야 하는데 인도 규정상 자격 있는 교사는 석사학위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월급도 많이 줘야 합니다. 그런 자격을 갖춘 교사가 여기 와서 봉사할 리 만무하지요. 하물며 우리가 월급을 보장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봉사정신으로 일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또 우리의 시스템은 중학생이 되면 유치원생을 가르치고, 고등학생이 되면 초등학교 1, 2학년을 가르치고, 대학생이 되면 3, 4, 5학년을 가르치고, 스텝이 되면 중학생을 가르치고, 이렇게 서로 돌아가면서 가르치는 시스템인데, 우리가 정부 시스템으로 들어가면 운영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신청을 안 한 겁니다.nbspnbsp게다가 애초에 세웠던 ‘문맹퇴치’란 목적은 이제 이 지역에서 15개 마을마다 있는 유치원 교육으로 어느 정도 달성했기 때문에 이제는 사립학교로 가는 길밖에 없다 싶어서 인가를 내게 된 것입니다. ‘문맹퇴치’는 앞으로는 유치원을 더 강화하는 것으로 풀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유치원을 전부 중학생이 가르쳤는데,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는 견습선생, 2학년은 담임선생, 3학년은 원장이었거든요. nbspnbspnbsp지금은 조금 더 높여서 유치원을 고등학생과 중학교 상급생이 가르치고, 대학생이 관리하는 것으로 바꿨고, 또 새롭게 쁘리앙카 교장선생님도 오시고, 보광법사님도 오시고 해서, ‘문맹퇴치’라는 목표에서 더 진일보한, 괜찮은 학교로 전환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됐습니다. 그래서 교사들도 자격을 다시 획득하는 시스템으로 전환이 되어야 합니다. 인도에서 교사자격을 획득하려면 일반 대학보다 꽤 많은 돈이 듭니다. 그래도 어쨌든 장기적으로 그렇게 갈 수밖에 없겠지요.nbspnbsp병원도 지금껏 보건소 수준으로 운영했는데, 그 이유가 의사를 외부에서 데려온다고 해도 그 사람은 봉사가 잘 안 되잖습니까. 제이티에스는 ‘봉사자로만 구성한다’는 이념이니까, 월급 시스템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도 지금 극복해야 될 문제입니다. 보건소 수준에서 병원 수준으로 가려면 한국에서 전문 의사나 은퇴한 의사가 와야 하는데, 봉사자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파독 간호사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 중에 여기 성지순례 왔다가 자기가 은퇴하면 오시겠다는 분이 계십니다.nbspnbsp인도의 의사들이 봉사자로 오긴 옵니다만 전업이 아니라 파트타임으로, 자기 병원에 가기 전에 여기 와서 하루에 2시간씩 봐주고 가는데 우리가 교통비는 드립니다. 인도는 중국처럼 ‘마을 의사’ 식으로, 정식 의과대학을 안 나와도 병원에 오래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동네에서만 의료활동을 할 수 있게 자격증을 주는데 상시적으로 있는 까메스와르 선생님은 그런 의사예요. 그런데 자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20년의 풍부한 임상경험이 있으니까 주치의나 다름없어요. 우리도 아프면 다 그 선생님한테 가야 돼요.nbspnbspnbsp그런데 제일 핵심은 마을개발, 무엇보다 주택개량입니다. 여기서는 주택문제가 결핵 등 모든 질병의 원인이거든요. 그 다음에 소득 문제인데 그건 간단한 게 아니에요. 이곳의 소득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좀 어렵지만 협동조합이라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여기는 ‘고리채’ 문제가 있으니까 마을금고도 조성하고, 또 생산협동조합을 만들어서 동네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공동판매하고, 또 조합을 만들어서 공동구매를 해서 서로 나누면, 시멘트 등을 싸게 구입할 수도 있지요.nbspnbsp그런 걸 하려면 젊은이들이 1년씩 파견 와서 봉사하는 정도로는 할 수가 없고, 사회적 경험도 풍부하고, 좀 장기적인 계획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첫째 경험이 많은 연세 드신 분이 필요한데, 그분들은 언어도 잘 안 되고, 고집이 세어서 공동생활이 잘 안 됩니다. 젊은이들은 음식도 이것저것 먹고, 말도 조금 하고, 적응도 잘 하는 대신에 전문지식이 없고요.nbspnbsp저 같은 사람이 이런 데 살면 참 좋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제가 어릴 때 살던 곳과 형편이 같으니까 특별히 배운 게 없어도 됩니다. 어릴 때 배웠던 낫질, 괭이질 하나도 여기서는 다 선진기술에 속하거든요. 살아온 경험 자체가 여기서는 기술이 되니까요. 그런데 그런 분들은 공동체 생활이 어려워요. 어쨌든 저희가 여기까지는 왔는데 앞으로 제일 중요한 건 돈도 아니고 인력입니다. 인력이 있어야 돈이 더 필요해지는데 인력이 없으니까 돈이 있어도 쓸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nbspnbsp성지순례를 할 때 우리 스스로 밥을 해 먹고, 숙소도 별로 좋지도 않고, 버스비 빼고는 돈 들 일이 별로 없는데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받나 싶지요. 여러분들 눈치 보니까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학교를 짓는데 든 돈의 대부분은 성지순례에서 남은 돈입니다. nbspnbspnbsp제가 처음에 ‘학교 지을 돈을 어디서 구하나?’를 생각했을 때 두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하나는 제가 성지를 안내해서 돈을 버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목탁을 치고 절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때 정토회는 작은 셋방 하나 얻어가지고 시작한 수준이었으니까 돈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고생을 하더라도 성지순례에 동참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제가 처음부터 이렇게 얘기하고 성지순례를 시작했어요.nbspnbsp‘따로 돈 내지 말고, 대신 호텔에 잘 거 순례자 숙소에서 자고, 호텔에서 밥 먹을 거 직접 해 먹자. 대신에 내가 안내는 잘 해줄 테니까 몸만 좀 고생하면 된다. 기분이 나면 나중에 돌아가서 보시를 더하더라도 따로 보시 안 해도 되니까 우선 순례 기간 동안 만이라도 검소하게 살고 남겨서 좋은 일에 쓰자’nbsp그래서 한 번 성지순례를 하면 그것으로 건물 한 동 짓고, 2년 모아서 한 동 짓고, 이런 식으로 해 왔습니다.nbspnbspnbsp저희가 인도에 세운 목표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종교에 관계없이 인도의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구호활동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불교인으로서 인도 불교를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상카시아의 석가족들에게 수련센터를 마련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센터를 짓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거든요. 우리가 그걸 위해서 한국에서 모금활동 같은 건 안 합니다. ‘절 지으니까 돈 내라’ 이런 소리를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순례만 해도 보시를 한 게 됩니다. 그렇다고 따로 더 돈을 내도 안 받지는 않아요. nbspnbspnbsp그런데 제가 여기서 돈을 써보면, 같은 돈인데 같지가 않습니다. 미국, 한국, 유럽에서 쓰는 1달러하고 여기서 쓰이는 1달러를 비교해 보면 여기서 쓰이는 게 10배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여러분들이 절약한 커피 한 잔 값이 여기 아이들 10명의 급식비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기쁘게 고생을 하셔야 됩니다.” nbspnbsp“예.” nbsp“그러니 여기서 고생한다고 입을 내밀고 그러면 겨우 복 지어놓고 그 복을 감하게 되는 겁니다. 인도에서 버스 빌리고, 버스기사 고용하는 데만 돈을 주지, 여기 스텝은 모두 봉사자로서 누구도 이 일을 하고 따로 돈 받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인력충원이 잘 안 되어서 운영에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여러분이 이렇게 와서 보시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제가 제일 원하는 보시는 ‘몸 보시’입니다. 자신들의 재능을 여기에 몇 년씩 보시를 했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은 성지순례하고 공부해서 좋고, 또 여기 와서 고행함으로써 수행에도 도움이 되고, 또 그것이 그냥 수행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돈이 여기 아이들의 밥이 되고 책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종교가 다른 사람들은 수자타아카데미에 쓰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은 상카시아에 가보면 알겠지만 인도에 극소수 남아있는 경전 한 권, 법요집 한 권도 없는 불교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nbsp성지순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공덕을 짓는 것이 된다는 스님의 말씀에 순례객들은 무척 기뻐하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수자타아카데미에서 자원봉사하고 있는 스텝들 중에는 작년에 성지순례를 할 때 큰 감동을 받고나서 다시 이곳으로 봉사를 하러 온 거사님 한 분이 있었는데 오늘 스님 법문을 듣고 올해는 또 어떤 분이 이곳으로 봉사를 하러 올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도 마음을 내는 분이 있었으면 좋겠네요.nbspnbsp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습니다. 순례객들이 잠자리에 든 사이 스님은 성지순례 스텝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사무실에서 회의를 했습니다.nbspnbsp내일은 새벽 4시 20분에 기상해 예불을 올린 후 5시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출발해 보드가야까지 걸어서 이동할 예정입니다. 부처님이 이곳 전정각산에서 6년간 고행하시다가 고행을 멈추고 보드가야까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nbspnbsp▼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nbspnbsp

2016.01.16. 44,570 읽음 댓글 38개

2016.1.13 (인도 8일째)_오전_수자타아카데미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부처님이 6년 고행한 전정각산과 이곳 천민들을 위해 스님이 세운 학교 ‘수자타아카데미’에 대해 안내했습니다.nbsp새벽 5시가 되자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은 바라나시 사르나트 숙소에서 일제히 함께 출발했습니다. 오늘은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유수스님의 집전으로 새벽예불과 기도를 했습니다.nbsp기도를 마치고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자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기차를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도로에는 대부분 트럭이 줄지어 가고 있었습니다.nbsp해가 뜨고 나서 조금 있으니 중간에 긴 다리가 나타나 순례단의 단잠을 깨우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순례단이 가고 있는 이 길이 부처님께서 성도 후 걸어갔던 길이라고 알려주면서 다리가 놓인 이 강은 숀강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nbsp“우리가 지나가는 이 길을 따라서 부처님께서 성도 후 첫 번째로 이 길을 걸어오셔서 다섯 비구를 교화하셨고, 우리처럼 다시 이 길을 따라서 보드가야로 가셔서 우루벨라 가섭 등 1천명을 교화하셨어요. 그때 오고 가셨던 길이 바로 이 길이예요.nbsp자, 이제 강이 하나 보이죠? 이 강은 숀강입니다. 5개의 강이 강가강으로 합류해요. 야무나강, 강가강, 그하그하라강, 간타키강은 히말리야 간에서 내려오는 강줄기이고요. 데칸고원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흘러서 강가강으로 합류하는 강줄기가 숀강이예요. 폭이 굉장히 넓습니다. 지금은 건기라서 사막처럼 모래만 보이는데, 우기가 되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마치 바다 같습니다. 다리에 전봇대가 주욱 세워져 있죠? 총 몇 개나 되는지 한번 세어보세요.”nbsp숀강을 건너 다시 한참을 달린 후 도로 가에 버스를 세우고 잠시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적당한 식사 장소를 찾기 위해 차를 세우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는데, 나중에 이유를 알고 보니 운전 기사들도 인도 음식을 사먹을 수 있고, 우리들도 도시락을 꺼내 먹을 수 있는,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장소를 찾다 보니 그랬다고 합니다. 운전 기사들까지 세심히 배려하는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 전기밥솥을 갖고 다니며 이동 중에 적당한 장소가 나타나면 어디서든 식사를 하는 순례단식사를 마치고 다시 열심히 달려 12시가 넘어서 드디어 가야 근교에 이르렀습니다. 가야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야산이었습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가야산을 가리키며 스님은 짧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왼쪽에 보이는 것이 가야산입니다. 코끼리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상두산이라고도 불립니다. 이곳에서 부처님이 1000명의 비구를 두고 설법을 했다고 합니다. nbsp부처님께서 라즈길에서 가야로 오셔서 바로 저 가야산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네이란자라 강 동편이 수행하기가 좋겠다고 하면서 전정각산으로 가셨습니다.nbsp그리고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 정진하시고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바라나시로 가셨습니다. 바라나시에서 오비구를 교화하고 다시 이곳으로 와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을 교화하고, 그들을 따르던 1000명의 비구를 이곳 가야산 아래에 모아놓고 설법을 했다고 전해지는 자리입니다.”직접 올라가보지는 못했지만 경전 속에 나오는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보니 부처님의 삶이 역사적 사실로서 더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nbsp버스는 다시 네이란자라강을 건넜습니다. 건기여서 강물이 많지 않았습니다.nbsp“이 강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실 때 나오는 네이란자라 강입니다. 왼쪽에 힌두 템플이 많이 보이는데 저곳이 부처님이 교화한 나디 가섭의 수행터입니다. 저 아래로 가면 가야 시내가 나옵니다...”nbsp네이란자라 강을 건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정각산이 바로 보였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로 들어가는 길에는 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였습니다. 스님이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는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고 하는데, 오늘 순례객들은 버스를 타고 학교 앞까지 들어갔습니다.nbsp▲ 전정각산수자타아카데미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꽃목걸이를 들고 순례객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nbsp스님과 순례객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학생들이 차례대로 한 명 한 명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환영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꽃목걸이를 받아서 목이 무거울 정도였습니다.nbsp먼저 정문 앞에 자리한 전정각사 법당에 들어가 참배를 한 후 고 설성봉 거사님의 부도탑을 참배했습니다. 고 설성봉 거사님은 한국 JTS의 스텝으로 파견되어서 기술학교를 건축하신 분입니다.nbsp수자타아카데미가 생기고 나서 무장한 강도 집단으로부터 세 번 습격을 받았는데, 설성봉거사님은 세 번째 습격 때 총격에 맞아서 이곳에서 사망하셨습니다. 2002년 1월 10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부도탑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설성봉 거사님의 서거 이후로는 학교가 한 번도 습격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성봉 거사님이 돌아가신 후 이곳에 경찰 한 개 소대가 10년 이상 계속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는데 설성봉 거사님의 희생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이 지역의 치안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래서 JTS에서는 설성봉 거사님의 기일을 맞이하여 이곳에서 늘 재를 지내는데, A팀이 와서 먼저 재를 지냈기 때문에 C팀은 설성봉 거사님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해탈주 삼독을 했습니다.nbsp설성봉님의 영정 사진을 보며 많은 순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의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고가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이어서 스님이 직접 수자타아카데미 곳곳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이바카병원, 기숙사, 대강당, 게스트하우스, 홍보관, 교무실, 초등학교 건물, 기술학교 건물, 식당 등을 차례대로 둘러보았습니다. 모두들 생각했던 것보다 웅장한 규모의 건물들을 보고, 그동안 다녀갔던 봉사자들의 노고에 감탄했습니다.nbsp▲ 지이바카병원▲ 기숙사▲ 초등학교, 중학교, 기술학교학교 투어를 마치자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짜이와 비스켓을 정성껏 마련해 주었습니다. 순례객들은 학생들이 따라주는 짜이 한 잔과 비스켓을 받아들고 매우 기뻐했습니다.nbsp▲ 순례객들에게 짜이와 비스켓을 나눠주고 있는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짜이를 마시고 나서는 쁘락보디홀 대강당에서 학생들이 준비한 순례단 환영행사가 열렸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순례객들을 위해 그동안 갈고 닦은 춤과 노래 솜씨를 멋지게 보여주었습니다.nbsp▲ 쁘락보디홀 대강당신나는 인도 음악에 맞춰 저학년팀, 고학년팀, 남학생팀, 여학생팀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저학년팀은 아주 애교스럽고 귀여운 춤들을 보여주었고, 여학생팀은 예쁜 인도옷을 입고 나와서 너무나 아름다운 춤동작을 보여주었습니다.nbsp특히 태권도를 보여 준 아이들은 예년과 달리 힘찬 기합 소리가 아닌 신나는 음악 반주에 맞춰 태권도 시범을 보여주어서 큰 웃음을 선사했습니다.nbsp순례객들은 구걸하던 아이들이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멋진 공연을 보며 박수치고 웃음을 보였지만, 웃는 얼굴에는 감동의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수자타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전정각산 아래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nbsp아이들의 멋진 공연이 끝나고, 학교의 설립자인 스님이 무대로 올라와 학생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오늘 공연을 위해 오랜 시간 연습했다고 합니다.nbsp“나마스떼 그동안 잘 지냈어요?”nbsp“네”nbsp“공부 잘 하고 있어요?”“네”nbsp“올해 1년 동안 한 번도 결석 안 한 사람 손들어 보세요.”“저요” “올해는 수자타아카데미가 설립된지 22년이 됩니다. 이제 한참 청년의 나이입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나무 밑에서 아주 작게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건물이 조금씩 조금씩 지어지고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이렇게 커지게 되었습니다.nbsp지금 선생님들은 대부분 수자타아카데미 출신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 선생님이 되거나, 의사가 되거나, 마을의 지도자가 되거나,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nbsp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여러분들이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여러분들이 공부할 수 있게 후원을 해주신 분들입니다. 그동안 우리들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뜻으로 큰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nbsp“단야바드” nbsp“이번에 오신 분들은 한국에서만 오신 분들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왔습니다. 제가 소개를 좀 해드릴게요.”nbsp스님은 미국, 캐나다, 일본, 독일,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등 전세계에서 온 순례객들 한 명 한 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환영의 박수를 크게 쳤습니다.nbsp“이렇게 세계 각국에서 오셨어요. 여러분들은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여러분들도 앞으로 공부를 잘 하면 인도 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떤 나라에 가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만 살고 싶어요? 다른 나라에도 가보고 싶어요?”nbsp“다른 나라에도 가보고 싶어요.”“그렇게 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해요.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집안일도 잘 하고, 학교 청소도 잘 해야 해요. 알았지요?”“네”“오늘 공연 잘 봤어요. 제가 매년 올 때마다 똑같은 것만 봤는데, 오늘은 모든 공연이 다 처음 본 거였어요.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나온 거 보고 따라한 거예요? 텔레비전에서 나온 것보다는 여러분들이 동네에서 막 추는 춤이 있잖아요. 그걸 보여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지금 한번 나와서 보여줘봐요.” nbsp그러자 아이들이 서로 나와서 막춤을 추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연주해주는 전통 타악기에 맞춰 아이들이 늘 추는 춤이라고 합니다. 수십 명이 무대로 나와 몸을 흔들자 순식간에 행사장은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아이들의 막춤에 순례객들도 흥이 나서 함께 무대로 나와 몸을 흔들었습니다.nbsp이 모습을 지켜보던 순례객들은 박장대소를 하고, 그렇게 한국인 순례자들과 천민마을 아이들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지만, 이렇게 웃음과 눈빛, 신나는 춤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nbsp아이들은 스님을 향해 꽃가루를 날렸고, 이렇게 설립자를 잊지 않고 매년 정성껏 반겨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순례객들은 다시 한 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nbsp감동의 무대를 뒤로 하고 순례객들은 수자타아카데미를 빠져나와서 전정각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학교 정문 앞은 부처님이 6년 간 고행했다고 하는 시타림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허물어진 탑터가 남아 있는데, 여기서부터 스님의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nbsp“학교 앞을 나오면 바로 돌무더기가 보입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시체더미 속에서 수행정진 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여인이 죽기 전에 이곳에 버려졌는데 아직 의식이 있었나 봐요. ‘내 옷을 저 수행자가 입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자, 부처님께서 그 여인에게 덮여 있던 옷을 입었다고 해요. 그러자 그 여인이 천상에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념해서 이곳에 수투파을 세웠는데 기초석만 남고, 마을 가까이에 있다보니 벽돌은 다 없어졌어요.이 산은 부처님이 6년간 고행을 했다는 전정각산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 머문 산이라고 해서 인도말로는 ‘쁘락 보디 힐’입니다. 이 지역 이름은 ‘부정한 땅’ 이라는 뜻을 가진 ‘둥게스와리’입니다. 저 위에 하얀 건물이 보이는데, 저기에 부처님이 6년 고행하실 때 주로 머무신 동굴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곳에 오래 계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남아있다고 해서 ‘유영굴’이라고 부릅니다.”스님은 유영굴까지 올라가는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수자타아카데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nbsp“제가 1993년도에 인도에 왔을 때 이 유영굴을 참배하려고 보드가야에서 여기까지 걸어와서 처음 방문을 했어요. 올라가는 길이 오솔길이었는데 지금 여기 할머니들이 앉아 있듯이 조그마한 애들이 입구에서부터 저기 유영굴까지 줄을 서서 주욱 앉아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무슨 요일이니? 학교가 쉬는 날이니?’ 라고 물어보니 아니래요. 그래서 ‘일요일도 아닌데 왜 학교도 안 가고 여기 있니?’ 하니까 여기는 학교가 없대요. 애들이 수백 명이 있는데 학교가 없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유영굴을 참배하고 마을로 내려와서 마을 어른들과 nbsp얘기를 해봤어요. 그런데 진짜 학교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교를 짓자 해서 시작이 된 겁니다.nbsp‘아이들도 너희들의 아이들이고, 나라도 너희 나라이지 않냐. 나는 출가해서 아이도 없는데 왜 나 혼자 학교를 지어야 하느냐. 너희들도 뭐라도 좀 해라.’ 하니까 자기들은 가난해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대요. 그래서 ‘땅이라도 내놔라’ 하니까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땅을 1가트씩 10명이 보시를 했어요. 1가트는 45평입니다. 그곳이 처음으로 수자타아카데미가 지어진 터입니다. 저는 이 동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보시를 받아낸 사람이예요. nbsp이렇게 해서 학교를 짓기 시작했는데, 일단 나무 밑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려고 보니까 동네 청년 중에 한 명이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녔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이 8학년까지 다녔다고 해서, 그 둘이 선생님을 하라고 하고 학교를 시작했어요. 저는 우물에서 물통으로 물을 퍼날라가면서 건물을 짓기 시작해서 1년 동안 한 층을 지었어요.nbsp그런데 강도가 습격해서 선생님들이 두들겨 맞고, 밥 해먹던 도구며 숟가락까지 다 빼앗기자 겁을 내서 철수를 하겠다고 하기에 제가 다시 와서 학교를 열었어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학교가 열려서 공부가 계속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교실 세 칸에 교무실 한 칸이면 충분하겠다 싶었는데, 아침 조회 때마다 아이들이 자꾸 쓰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의사를 데려와서 건강검진을 시켰어요. 의사가 하는 말이 약이 급한 것이 아니라 영양실조가 심하기 때문에 숫제 우유 하나와 비스켓 하나를 주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급식을 시작했어요.nbsp학생 수를 150명 정도로 예상하고 급식을 시작했는데, 급식을 하니까 졸지에 학생 수가 300명이 되었어요. 그래서 1층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이 늘어나서 2층을 또 지은 거예요. 그러다보니 건물 짓는데 3년이 걸리게 되었습니다.”nbsp22년 전 스님이 유영굴을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이곳 마을 사람들과 의논해서 수자타아카데미가 처음 열리게 되었다는 설명을 스님과 함께 유영굴로 올라가면서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nbsp아직도 유영굴로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병자들이 누워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수자타아카데미에서는 지난 22년 동안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교육과 캠페인을 꾸준히 해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한 수행자의 발원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 눈 앞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nbsp유영굴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습니다. 스님은 순례객들을 공터에 앉게 한 다음 전정각산과 관련된 부처님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nbspnbsp

2016.01.15. 49,443 읽음 댓글 36개

2016.1.12 (인도 7일째)_오후_성지순례 C팀 강가 강 투어

오전에 사르나트 순례 일정을 모두 마친 후 오후에는 인도의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면서 힌두교의 성지인 바라나시의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nbsp강가강으로 향햐는 길은 너무나 많은 인파들이 있어서 자칫하면 사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여러 차례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버스에 내려 두 명씩 짝을 지어 자전거 릭샤를 타고 다사스와메드가트로 향했습니다.nbsp다사스와메드가트에서 배를 탄 순례객들은 강가강을 따라 라지가트까지 향했습니다.nbsp중간에 강가강의 화장터에 가까이 다가가자 순례객들은 조용히 화장이 이뤄지는 풍경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물끄러미 시신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있는 순례객들에게 인도의 화장 풍습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저기 계단에 저렇게 시신이 있잖습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계단에 많네요. 저길 보세요. 저쪽도 그렇고 저기 구석에 황색 금빛 천을 많이 갖다 버려놨죠? 저걸 분소의라고 해요. 분소의는 더 떨어진 옷이라기 보다는 시체를 쌌던 천이니 부정탄다고 해서 누구도 손을 안 대는 옷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누구도 손 대기를 꺼려해서 버린 옷을 입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가사의 원형입니다.저기 시신이 있는데 얼굴이 보이죠? 발도 다 보이네요. 저렇게 시신을 들고 와서 물에 한번 적셨다가 가져가잖아요. 만약 인도에서 한국사람이 죽으면 여기서 화장해서 유골만 가져가면 되는데 한국 사람들은 꼭 시신을 냉동시켜서 한국까지 가져오라고 하잖아요. 인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관을 만드는 문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도사람들은 가족이 죽으면 바로 이곳으로 가져와서 화장을 합니다.자, 나무아미타불 10번 부르며 염불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왕생극락하옵소서.”nbsp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바라며 간절히 염불을 한 후 다시 스님은 강가강과 관련된 경전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nbsp“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경전에 나온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릴게요. 어느 날 비사카부인이라고 하는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을 찾아왔어요. 왜 그리 슬퍼하는지 물어보니 사랑하는 손자가 죽었다는 거예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소? 적으면 좋소?’라고 물었어요. ‘많으면 좋다’고 하자 ‘사랑하는 사람이 이 쉬라바스티 시민만큼 많으면 어떻겠소?’라고 다시 물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라고 부인이 대답했습니다.nbsp부처님이 다시 ‘그러면 이 쉬라바스티 성에는 하루에 몇 명이 죽소? 한 명, 두 명, 열 명?’ 하고 묻자 부인이 ‘그 이상 죽을 겁니다’라고 대답했어요. 하루 열 명이 뭐예요, 지금도 한꺼번에 열 명 이상 화장하고 있잖아요. 그러자 부처님이 ‘그러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매일매일 슬피 울어야 겠구려’ 라고 했습니다. 그때 비사카부인이 깨달았어요. 그래서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nbsp이렇게 죽은 사람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게 해탈인데 여러분들은 지금 화장터를 보면서 좀 깨쳐졌어요? nbsp‘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기에 슬프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행복하다’ 이 두가지는 모순이에요.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매일 죽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 사람은 매일매일 슬퍼야 하잖아요. 부처님은 그 슬픔에 어떤 모순이 있는지를 비사카 부인이 깨닫도록 한 거예요.nbsp강가강에서 하신 부처님 말씀 중 유명한 것으로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미니라는 한 젊은이가 ‘저 바라문들이 말하기를 아무리 사람이 죄를 많이 지어도 강가강에서 목욕을 하면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들의 말이 맞다면 강가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가겠구나’라고 하셨어요.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입니까?”강가강 위를 유유히 흘러가며 강가강과 관련된 경전 속의 이야기들을 들으니 그 이야기가 더욱 더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nbsp배에서 내려 다시 가트로 올라오는 길에는 강변에 많은 빨래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빨래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는데 스님은 “인도 사람들은 우리처럼 빨래를 돌판에 놓고 방망이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옷을 돌판에 턱턱 치면서 빨래를 한다”고 얘기하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nbsp강가강 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스님은 강가강을 둘러본 소감을 순례객들에게 물어보면서 한마디 덧붙여 주었습니다.nbsp“화장하는 모습 잘 보셨어요? 나중에 스님도 죽거든 울고불고 하지 마세요. 알겠죠? 그 영감 온갖 것 간섭하고 바쁘게 살더니 이제 좀 쉬겠네 하면서 잘 죽었다고 생각해야 해요.”nbsp스님의 이야기에 모두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웃고 있는 사이에 버스는 야사가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신발을 벗어 놓고 강을 건넜다고 하는 바루나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경전에 나오는 지명들이 보여서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겠구나’ 하는 것이 실감났습니다.▲ 바루나 강숙소로 돌아와서 조별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전기밥솥에 밥을 앉히고 한국에서 가져온 반찬들을 꺼내니 순식간에 푸짐한 상이 차려졌습니다. 강가강에서의 감흥이 아직 가시지 않은지 밥을 먹으면서도 강가강의 화장터를 보고 난 소감을 계속 나누었습니다.nbsp저녁 6시부터는 스님이 성지순례를 떠나는 C팀 전체를 위해 부처님의 일생과 10대 성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C팀은 해외에서 오신 분들이나 정토불교대학생들이 아닌 일반 참가자들도 섞여 있어서 A팀과 B팀 때 보다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그 중에서 오늘은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의 마지막 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준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부처님의 성도 후 6년까지는 연대순으로 경전에 기록이 잘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사실적으로 적혀 있어요. 그런데 활동하신 45년을 다 연대순으로 기록하기는 쉽지 않아서, 그 이후에는 연대순이 아니라 교화 사례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몇 년도에 뭘 하셨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nbsp그러다가 부처님이 80세가 되어 돌아가시기 직전의 마지막 한 해는 매일 날짜별로 부처님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 여행을 기록한 경전이 열반경입니다. 경의 시작을 보면 영축산에 부처님이 계실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아자타사투가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아들도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어 석가족을 멸망시켰어요. 아자타사투는 부처님과 적대 관계였다가 나중에 크게 뉘우치고 부처님의 착실한 재가신자가 되긴 했지만, 그 때의 아자타사투는 이웃 나라인 밧지족과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신하더러 부처님을 찾아가 이 전쟁에서 이기겠는지 물어보도록 시킵니다. 열반경은 그 이야기로 시작됩니다.nbsp아자타사투의 신하가 왕을 대신해서 부처님께 문안을 드리고 ‘지금 왕이 밧지족을 치려고 하는데 이 전쟁에서 승패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물어요. 부처님은 이긴다거나 진다는 말씀을 안 하시고 대신 옆의 아난존자에게 묻습니다. ‘내가 옛날에 밧지족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하고 있느냐?’ 이렇게 일곱 가지를 확인해요. 그 일곱 가지에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 약자를 보호하는 것, 전통을 잘 계승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아난다가 ‘그들은 아직도 그것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것이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입니다. 대신이 들어보더니 ‘부처님, 일곱 가지 중의 한 가지만 지켜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밧지족이 일곱 가지를 다 지키고 있다면 망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무력으로는 안 되겠고 다른 계책을 세워봐야 하겠습니다’ 이러고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전쟁을 막은 거예요. 부처님이 세상에 무관심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전쟁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도 전쟁을 막으신 겁니다.그리고 부처님은 죽림정사로 오셔서 상가, 즉 승단이 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를 설하시고 파탈리푸트라로 가서 앞으로 200년 후 여기가 대도시가 되겠다고 예언하십니다.nbsp그리고 강가강을 건너서 바이샬리로 건너가 망고나무 아래에 앉아 계셨어요. 수행자가 자신의 망고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 공양을 올리는 게 당시 풍습이었나 봅니다. 부처님이 앉아 계셨던 망고나무는 그 지역에서 천하제일 기생으로 손꼽히는 암나팔리의 것이었어요. 그래서 암나팔리가 마차를 타고 와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너무너무 기뻐서 부처님께 ‘내일 아침에 제가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하니 부처님이 승낙하셨어요.nbsp그리고 암나팔리가 돌아가는 길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차를 타고 오던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왕족들과 마주쳤습니다. 왕족들보다 기생인 암나팔리가 부처님 식사 초대권을 먼저 가져가서 왕족들이 실망했습니다. 체면을 생각하면 자기들이 먼저 초대해야 하잖아요. 왕족들이 암나팔리에게 초대권을 넘겨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해서, 10만금을 주겠노라 제안했어요. 그랬더니 암나팔리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어르신들, 호의는 고맙지만 싫소. 이 바이샬리 나라를 다 준다 해도 나는 응하지 않겠소.’nbsp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어요. 이건 교만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왕족들에게 태도가 그랬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릿차비 족왕족들은 할 수 없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께 다시 요청합니다. ‘내일 아침에 우리가 식사 초대를 하겠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선약이 있다고 거절하셨어요.nbsp초대권을 내어주지 않는 기생도 굉장하지만, 기생과 먼저 약속했다고 왕족의 초대를 거절하는 부처님도 굉장하죠? 제가 여러분들과 식사 약속했다가 청와대에서 초대를 받으면 어떻게 할까요? 전화해서 ‘내일 급한 일이 있으니 다음으로 미루자’라고 하는 게 십중팔구일 겁니다. nbsp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왕궁에 여러 번 초대했지만 부처님은 한 번도 안 갔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을 참으로 귀하게 여겨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였는데도 부처님은 왕궁에 한 번도 가지 않고 늘 산속의 동굴에 머무셨어요. 왕이 식사초대를 해서 왕궁에 부처님을 모시면 자기 인생 괴로운 걸 하소연할 텐데, 부처님이 왕궁에 안 오시니까 자기가 부처님을 찾아갈 수밖에 없잖아요. 부처님이 산꼭대기에 있으면 왕이 산꼭대기까지 가야 해요. 그래서 지금 왕사성 근방에 가면 동굴마다 ‘빔비사라킹로드’라는 게 있습니다. 왕이 부처님을 보러 가니까 신하들이 왕 때문에 죽기살기로 길을 닦아놓아서 아직도 그 축대가 남아 있어요. 부처님이 영축산에 계시니까 왕이 자기 고민이 있으면 부처님을 뵈러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지금은 관광객이 많으니까 새 길을 닦았는데 그 밑에는 2,500년 전에 닦았던 그 길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nbsp왕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집에 제일 좋은 마차에 제일 좋은 침실에 제일 좋은 음식에 제일 좋은 보석은 다 가지고 살아요. 부처님은 맨발에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밥은 얻어먹고 다니는 거지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이 괴롭다며 왕에게 뭔가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신발 한 켤레 달라고 이야기해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온갖 것을 다 가진 왕이 부처님을 찾아와 하소연한 적은 무척 많습니다.nbsp2,6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부처님을 흉내조차 내기 어렵습니다. 자는 것도 부처님을 흉내조차 낼 수 없고, 먹는 것도 흉내조차 낼 수 없고, 입는 것도 흉내조차 낼 수 없고, 세상에 대해서도 흉내조차 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을 존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만족하고 살아야 해요. ‘부처님도 이렇게 사셨는데 우리가 뭘 불평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호화판으로 사는 거예요.nbsp왕은 그렇게 많이 가지고도 늘 불안해서 침실 입구며 성문 안팎으로 경비병을 세우고 살지만 부처님은 높은 산속 동굴 속에서도 주위에 아무도 없이 잘 생활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부처님의 삶을 통해 자유와 행복의 길이 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26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은 흉내내기조차 어려운 검소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을 들으니 작은 것에 불평 불만을 가졌던 모습들이 되돌아봐졌습니다.nbsp또 스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소개하면서 부처님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을 한가지 더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부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 반드시 ‘내가 부처님한테 들었는데...’,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반드시 생겨날 거라는 거예요. 그럴 때 ‘그건 경전에 없으니 네 이야기는 거짓말이야’ 이렇게 말해도 안 되고, 부처님한테 들었다고 한다 해서 ‘그러냐?’ 이렇게 말해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말할 때 지금까지 경전에 기록돼 있는 내용을 살펴봐서 내용이 이와 합당하면 그의 이야기를 수용하고, 내용이 합당하지 않으면 그의 이야기를 수용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부처님이 말했다고 해서 무조건 믿지 말라는 거예요. 부처님의 위대함은 이런 데 있어요.nbsp과거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계율이나 경전에 근거해서 진리를 검증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것이라고 해서 다 진리라면 강가강에서 목욕하면 천국에 간다는 것도 진리가 되겠죠. 그래서 항상 이치에 맞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설법할 때도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해라’ 이런 이야기가 나오잖아요.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은 지금 시대에도 참으로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으며 동시에 이론에 갇히지도 않는 진리예요.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인도에 와서 순례를 하는 거예요.한국불교는 무조건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해도 안 되고, 소승불교를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소승불교는 소승불교의 수행법과 계율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태도 등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 ‘소승’이라는 말만 가지고 무시하면 안 돼요. 또 우리 대승불교에도 모순도 있고 한편 많은 장점도 있습니다. 티벳 불교도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nbsp그러나 문화와 담마는 구분해야 합니다. ‘담마’는 ‘진리’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진리에 귀의하는 것이지 어떤 문화에 귀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는 나라마다 서로 다르고, 그것은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니 티벳불교나 남방불교를 보고 ‘에이, 저건 불교가 아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돼요. 그건 티벳불교 문화이고 남방불교 문화니까 존중해야 합니다. 한편 요즘 우리나라 젊은 스님들은 우리나라 불교를 무시하고 티벳이나 미얀마로 가서 배우는 데만 열을 올리는데 그것도 올바르지 않아요. 불교만 잘났다고 내세우면서 기독교는 다 틀렸다고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불교와 기독교가 똑같다고 말해도 안 됩니다. 사과와 배는 같은 과일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어서 서로 다르잖아요. 사과만 과일이고 배는 과일이 아니라고 말해도 안 됩니다.nbsp그런 데서 우리가 자기 정체성도 가지면서 다른 것들에 대한 이해와 포용성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중도예요. 정체성이 너무 지나치면 배타성이 되고, 포용성이 너무 지나치면 자기 정체성이 없어져버려서 이렇게 양극단으로 치우치게 됩니다.”이렇게 태어나서 열반하실 때까지의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모든 설명을 마치니 강연을 시작한지세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nbsp밤이 늦어져서 강연을 마쳐야 할 시간이 되자 스님은 마지막으로 바깥 구경만 하지 말고 자기 내면 구경도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nbsp“우리는 이렇게 바라나시에서 보드가야를 지나 라즈길로 갑니다. 라즈길에서 바이샬리를 거쳐서 쿠시나가라로 가서 부처님 열반하신 모습을 보고, 룸비니와 카필라바스투로 가서 부처님의 태어나심과 어릴 때 성장과정, 사문유관 등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던 쉬라바스티에 가서는 주로 부처님의 교화사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nbsp그리고 나서 부처님이 어머니를 위해서 하늘나라에 가서 교화하고 내려오셨다는 상카시아를 마지막으로 성지순례가 끝납니다. 상카시아에서 가사를 반납해요.nbsp이런 순례를 순례객으로서 다니면 재미가 있어요. 오줌누는 것도 재미있고, 모든 에피소드가 다 재미있어집니다. 그런데 이걸 여행으로 생각하면 좀 힘들어요. 세수도 잘 못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쫓기기도 하고, 무거운 짐도 들어야 한다고 성질내면서 다니면, 돈은 돈대로 버리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몸과 마음은 괴로운 지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쁘게 다니면 돈도 안 아깝고, 시간도 안 아깝고, 이보다 더 큰 경험이 없어요. 그러니 바깥 구경만 하지 말고 자기 내면 구경도 하세요.nbsp다니면서 보니 오늘도 아주 복잡하죠? 생기가 돌지 않습니까? 저는 인도에 올 때마다 홍수에 쓰레기 쓸려 내려가듯이 사람과 소와 돼지와 릭샤가 막 섞여서 흐르는 광경을 보면서 이런 데 살면 우울증에 걸릴 일은 없겠다 싶어요. 생기가 저절로 돌고 어딜 가도 친절하잖아요. 어디서 여러분들을 이렇게 환영해주겠어요? nbsp이처럼 재미있게 생각하면 재미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여기 와서 3일만 지나면 인도를 다 고쳐놓고 가려고 합니다. ‘인도 정부는 뭐하나? 길도 안 고치고 뭐하나? 이런 데는 좀 이렇게 하지. 인도 사람은 왜 이것도 안 하느냐?’... 그래서 순례 왔다가 인도 대통령 노릇을 해요. 그런 교만을 떨면서 자기만 괴롭히다가 가지 말고, 여기에 순응하면서 즐기셔야 합니다. 알았죠?” nbsp스님의 이야기에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면서 웃었습니다. 오늘 강연은 해외 참가자, 일반 참가자 등 초심자들을 더욱 배려하는 스님의 애정을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이은 강연과 순례 일정으로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세 시간 동안 열강을 해준 스님에게 순례객들은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nbsp내일은 스님도 C팀과 함께 버스를 타고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가야로 향합니다. 새벽 5시에 바라나시를 출발해 낮 12시 무렵에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할 예정입니다.nbsp※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01.13. 50,001 읽음 댓글 50개

2016.1.12 (인도 7일째)_오전_성지순례 C팀 사르나트 순례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인도에 머문지 7일째를 맞이하여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을 이끌고 붓다가 처음으로 법을 설한 사르나트와 인도인들이 신성시하는 강가강을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오늘도 각자 숙소에서 새벽 예불과 기도를 마치고 6시 30분에 사르나트로 향했습니다. 7시에 정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정토회 순례단이 향을 피우며 입장을 했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서 첫 설법을 한 곳, 다르마라지크 수투파nbsp“석가모니불”을 염하며 한 발 한 발 스님을 따라 걸으면서 부처님이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서 법을 설한 자리에 세워진 다르마라지크수투파를 한 바퀴 돌고, 이어서 두 번째로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다메크수투파를 세반퀴 돌았습니다.nbspnbspnbsp▲ 부처님이 두번째로 법을 설한 곳, 다메크 수투파nbspnbsp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동이 틀 무렵, 순례단 C팀 100여 명은 다메크수투파 앞에서 정성을 다해 예불공양을 올렸습니다. 예불이 끝나자 스님은 15일 동안 순례를 떠나는 대중들을 위해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nbspnbsp“우러러 바라옵니다.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네께 지성귀의하오며 발원하옵나니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토행자들이 오늘 이렇게 부처님께서 처음 진리의 법바퀴를 굴리신 바라나시 사르나트 녹야원 다메크스투파 앞에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면서 참회하고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이와 같이 참배한 공덕으로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하신 순례대중 일동이 과거 지난 생에 지은 모든 업장 소멸되고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여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기를 바라옵니다. 저희들의 간절한 발원을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또한 오늘 초전법륜성지 참배 인연공덕으로 이번 14박 15일 순례기간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건강하게 기쁜 마음으로 순례를 마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옵소서.nbspnbsp오늘 저희들이 부처님의 초전법륜성지 녹야원 참배 인연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고통 받는 일체 중생들 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옵시고, 특별히 저희가 태어나고 자란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여 마침내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먼저 돌아가신 조상영가님들께도 회향하오니 조상영가님들뿐만 아니라 일체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함께 왕생극락케 하옵소서. 오늘 저희의 이런 발원을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nbsp스님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순례단도 한 마음이 되어 합장을 하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특별히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할 때는 많은 대중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예불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대중들을 향해 스님은 이곳 사르나트에서 성지순례를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면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실 때의 정황과 그 때 이곳에서 일어난 몇 가지 일화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바로 이곳 사르나트에서 부처님이 설법을 하심으로써, 그리고 그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이가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우리 중생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생에게 있어서 부처님이 출현한 이곳 사르나트에서 우리가 순례 여정을 출발하기로 했어요. 교통상황이나 순서로 봐도 여기서 출발해 한 바퀴를 도는 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인도로 들어올 때 델리로 들어오거나, 캘커타로 들어오거나, 뭄바이로 들어오는 등 여러 방법이 있고, 인도 안에서도 기차든 비행기든 여러 가지 오는 방법이 있지만, 전부 바라나시에 모여 출발해서 부처님의 8대 성지를 순례하도록 계획을 잡았습니다.”nbspnbsp이어서 야사라는 한 청년의 출가에 대해 재미있게 이야기를 한 후 그 아버지인 구리가 장자의 삼귀의 오계 수계와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곳 바라나시에서 야사라는 청년이 출가를 했는데, 야사가 ‘출가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답했어요. ‘오라, 비구여.’ 이게 끝이예요. 어떤 절차가 필요 없어요. 옛날에는 깨달으면 그 자리에서 출가를 했어요. 부처님께서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부지런히 정진해서 괴로움의 뿌리를 뽑아라.’ 이렇게 말하자, 곧바로 야사는 출가 사문이 되었습니다.nbspnbsp그런데 야사의 아버지인 구리가 장자가 아들이 없어진 줄 알게 되었어요.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 하고, 온 동네를 다 찾아도 아들이 없어요. 하인을 풀어서 찾으라 시켜놓고 자기도 찾으러 다니다가 바루나 강변에서 아들의 신발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강을 건너 이곳까지 와서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nbspnbsp우리 아들 못 봤냐고 물으니까 부처님께서는 ‘장자여,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이렇게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킨 뒤 야사 비구를 보여줬어요. 아들을 본 장자가 몹시 반가워하면서 ‘너희 어머니가 널 찾느라 몹시 괴로워하고 있으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라고 했지만 아들이 안 가겠대요. 아버지가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너는 귀하게 자랐기에 이런 들녘이나 숲속에서 살 수 없다’라고 다시 설득했더니 아들이 이렇게 말했어요. ‘아버지, 제 얼굴을 한번 보십시오. 이제까지 저를 본 중에 지금처럼 제가 행복해 보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이 행복한 곳을 두고 그 괴로운 곳으로 왜 돌아가야 합니까?’nbspnbsp아버지와 아들이 생각 차이가 많죠? 아버지는 아들이 그 동안 좋은 곳에 살았으니 먹고 입고 자는 것이 불편한 이곳에서는 못 산다고 만류하는 것이고, 아들은 지금 이렇게 편안한 곳에 있는데 그 괴로운 세속으로 왜 다시 돌아가야 하냐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의 답을 듣고 아들을 보니까 과연 얼굴이 환하고 정말 행복해 보여요. 그래서 아들의 권유로 아버지가 부처님께 법을 청했고 부처님은 장자를 위해서 법을 설했는데, 장자도 법을 듣자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서 구리가 장자는 최초의 재가수행자가 되었습니다.nbspnbspnbsp‘재가신자’라는 말은 최근에 생긴 말입니다. 원래 불교에는 ‘신자’라는 말은 없고 ‘수행자’란 말만 있습니다. 출가해서 수행하는 사람이 있고 재가에서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데 구리가 장자는 재가수행자가 된 거예요. 이 분의 신앙고백이 이렇습니다.nbspnbsp‘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심과 같고, 덮여 있는 것을 벗겨내어 보여주심과 같고,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주심과 같고, 어두운 밤에 등불을 비춰주심과 같이 갖가지 설법으로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상가, 스님들께 귀의합니다.’nbspnbspnbsp이렇게 스스로 삼보에 귀의하자 부처님께서 답하셨습니다.nbspnbsp‘장하다. 삼보에 귀의한 자는 다섯 가지를 지켜야 한다. 첫째,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된다. 둘째, 주지 않은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서는 안 된다. 셋째, 삿된 음행을 해서는 안 된다. 넷째,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삿된 소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nbspnbsp마지막에 ‘삿된 소견을 갖지 말라’는 나중에 ‘술 마시고 취해서는 안 된다’ 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구리가 장자가 ‘오늘부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 가르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기꺼이 오계를 받자 최초의 재가수행자가 되었습니다.nbspnbspnbsp구리가 장자의 공양 초청을 받아 부처님과 야사는 장자의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는 야사의 어머니와 부인이 있었지만 야사는 이미 출가했으니 수행자로서 집에 간 거예요. 그래서 공양을 받고 야사의 어머니와 부인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셨는데, 설법을 들은 두 분 역시 다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서 그들 또한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받아서 재가수행자가 되었습니다.nbsp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는 사부대중 중 세 가지가 처음으로 생겼어요. 출가 남자 수행자인 ‘비구’, 재가 남자 수행자인 ‘우바새’, 재가 여자 수행자인 ‘우바이’가 생겼습니다. 출가 여자 수행자인 ‘비구니’는 한참 후에 바이샬리에서 생깁니다.nbspnbsp그래서 이곳에서 구리가 장자가 계를 받았듯이 우리도 오늘 이곳에서 삼귀의 오계를 받고 재가수행자가 되어서 가사를 수하게 됩니다. 여기 있는 동안은 출가수행자처럼 가사를 수하고 12일 동안 수행자로서 순례를 합니다. 8대성지 순례를 다 마친 뒤 상카시아에 가면 속퇴를 시켜드립니다. 그때 계속 출가 수행자로 남고 싶은 사람은 그냥 저를 따라가면 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가사를 반납하고 돌아가면 돼요. 그러나 여기 있는 동안은 모두 수행자로 살아야 합니다. nbspnbsp그리고 이곳 사르나트에서 전법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우루벨라의 병장촌으로 가서 교화 설법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루벨라는 부처님이 6년 고행하셨던 곳이에요. 두 사람씩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고 해서 다들 흩어지고, 부처님은 여기서 혼자 다시 보드가야로 가셨어요. 보드가야에서 여기까지 혼자 오셨다가 다시 혼자 가신 것입니다.nbspnbspnbsp이렇게 여기에서 첫 법바퀴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온 거예요. 스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여러분들이 ‘스님이 부처님을 좋게 설명하려고 혼자서 지어서 하는 이야기 아닌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불경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금 경전을 펴보세요.”nbsp이어서 경전을 펴고 방금 스님이 설명한 내용을 경전을 독송하며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스님이 아주 실감나는 설명 덕분에 마치 그 당시를 그대로 재현해보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상상을 해볼수 있었습니다. 경전의 내용도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nbspnbsp▲ 경전 독송nbspnbsp경전 독송까지 마치고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설하신 그 때의 정황을 떠올리며 명상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곳에 내가 지금 와 있구나’ 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습니다.nbspnbsp해가 다 뜨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자 잠시 휴식을 취하며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젯밤 숙소에서 조별로 전기밥솥에 밥을 해놓도록 했는데, 오늘은 첫 번째로 전기밥솥을 개봉하는 순간이여서 밥이 잘 된 조와 그렇지 않은 조 사이에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지에서 오순도순 함께 먹는 밥맛은 꿀맛이었습니다.nbspnbsp▲ 점심시간nbsp대중이 식사를 하는 동안 스님은 아이들이 물건을 훔쳐가지 않도록 법회가 열린 장소를 지켜주었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법회가 열렸던 곳으로 모두 모이자 드디어 삼귀의 오계 수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스님이 계사가 되어 삼귀의 오계를 설하자, 대중들은 마치 2600여 년 전에 바로 이곳에서 부처님께 귀의한 구리가 장자처럼 기쁜 마음으로 참회와 연비를 마쳤습니다.nbspnbspnbsp▲ 삼귀의 오계 수계식nbspnbsp“이제 참회와 연비를 마쳤습니다. 선남자, 선여인들이여, 따끔한 그 찰나에 여러 생에 지은 모든 죄업이, 마치 마른 풀이 불에 타 사라지듯 즉시 소멸되었습니다. 여러 대중들의 몸과 마음은 깨끗해지고 순결해졌습니다. 이제 그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삼보님께 귀의할 차례입니다.”nbsp“저희 수계자들은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저희 수계자들은 거룩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nbsp저희 수계자들은 거룩하신 대중들께 귀의합니다.nbspnbsp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재가 수행자로 받아주십시오. 저희들은 오늘부터 이와 같이 목숨이 다하기까지 귀의합니다.”nbsp순례단은 이렇게 삼귀의를 한 후 오계 수계를 약속했습니다. 스님이 오계에 대해 하나 하나 설하자 모두 “잘 지키겠습니다” 하고 크게 대답하고 절을 했습니다.nbspnbsp삼귀의 오계를 수계 받은 순례단 모두에게 법사님들은 가사와 바랑을 전달했습니다. 태어나서 가사를 처음으로 수해보는 대중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스님은 어떻게 가사를 수하는지 자세히 알려주며 “오늘부터는 성지를 참배할 때마다 꼭 가사를 수해야 합니다” 라고 강조했습니다.nbspnbspnbsp▲ 가사를 수하는 순례객들nbspnbsp여법하게 가사를 수하자 정말로 출가수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순례단은 정말로 수행자의 마음으로 15일 동안 순례를 떠날 것을 다짐하며 부처님이 법을 설하신 다메크수투파를 향해 삼배를 올렸습니다.nbspnbspnbsp수계식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스님은 이곳 사르나트에 있는 유적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신물간다쿠티를 세운 담마팔라 스님에 대해서는 특별한 인연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저기 보이는 신물간다쿠티는 마하보디소사이어티를 창시한 담마팔라가 지은 절입니다. 참 묘하게도 그 분과 우리 한국 불교를 일으켜 세우신 용성 조사님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 분이 세운 단체 이름이 마하보디소사이어티인데, 용성 조사님이 세운 단체 이름도 대각회입니다. 이름이 똑같습니다. ‘대’는 ‘마하’를 뜻하고, ‘각’은 ‘보디’를 뜻하고, ‘소사이어티’는 ‘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하신 일도 담마팔라 스님은 인도불교 부흥을 시작했다면, 용성 조사님은 조선불교 부흥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두 분은 교류도 있으셨어요.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용성 조사님께서도 인도 성지순례를 하시는 중에 담마팔라를 만난 것 같아요. 담마팔라가 일본에 왔다가 한국까지 와서 용성 조사님께 부처님의 사리를 주고 갔습니다. 조계사 앞마당에 사리탑이 하나 있는데, 그 사리탑은 용성 조사님이 담마팔라로부터 받은 사리를 봉안해 놓은 것이예요.”nbsp비행기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용성 스님과 담마팔라가 서로 교류를 할 수 있었는지 다소 놀랍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제서야 왜 용성 스님이 인도에 있는 5대 성지를 잘 가꾸어라는 유훈을 남겼는지도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듯 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순식 간에 100여 명의 대중들이 나란히 줄을 섰습니다.nbspnbsp▲ 단체사진nbspnbsp또 단체사진을 찍은 이후에는 곧바로 조별 사진을 찍었습니다. 두 조씩 순서대로 동시에 포즈를 취하자, 그 사이를 스님이 번갈아 가며 아주 빠른 속도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효율적으로 사진을 찍는 스님의 모습을 보며 모두들 감탄을 했습니다.nbspnbsp▲ 조별사진nbspnbsp다음은 법사님들의 안내에 따라 사르나트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다메크수투파 앞을 지나 다르마라지크수투파와 물간다쿠티를 더 자세히 둘러보고, 사르나트박물관, 신물간쿠티에 차례대로 가까이 가보았습니다. 1호차는 유수 스님, 2호차는 희광 법사님, 3호차는 스님이 직접 안내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성도 후 첫 안거를 머무신 곳, 물간다쿠티nbsp순례를 마치고 나서는 다섯 명의 친구들이 부처님을 영접한 자리에 세워진 영불탑을 참배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을 이끌고 영불탑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다함께 탑을 향해 삼배를 하도록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짧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영불탑nbspnbsp“이곳이 부처님과 5비구가 처음 만난 영불탑입니다. 모든 탑은 처음부터 이렇게 크게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쇼카대왕이 지을 때는 작게 지었고, 그 뒤에 쿠샨왕조 때 덧붙이고, 굽타왕조 때 또 덧붙인 겁니다. 그래서 규모가 이렇게 커진 겁니다.nbspnbsp인도에 이렇게 와보면 경전에 나오는 얘기들의 흔적이 다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이 5비구와 처음 만난 곳, 첫 번째로 설법한 곳, 두 번째로 설법한 곳, 부처님이 머무시던 곳 등 많은 곳에 기념탑을 세웠기 때문에 경전에 나온 내용 그대로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nbsp이것으로 사르나트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오후에는 인도의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면서 힌두교의 성지인 바라나시의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강가강 순례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에 이어집니다...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01.13. 43,783 읽음 댓글 39개

2015.1.11 (인도 6일째) 성지순례 C팀 바라나시 도착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B팀을 수자타 아카데미로 떠나보낸 후 C팀을 환영 마중하고 입재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새벽 4시 20분에 일제히 기상한 성지순례 B팀은 짐을 모두 싣고 5시에 바라나시를 출발해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는 가야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아침식사 후 원고 교정 업무를 보다가 9시가 되자 인도 현지인과 함께 사르나트 주변 답사에 나섰습니다.nbspnbsp답사를 하고 와서 스님은 “용성조사님의 유훈 중에 5대 성지를 잘 가꾸어라는 말씀이 있는데, 초전법륜성지인 사르나트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둘러보았다”고 하면서 꼼꼼히 표시해 둔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르나트가 전세계 불교인들의 성지로 잘 가꾸어지길 발원해 봅니다.nbspnbsp11시에는 버스 세 대를 이끌고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을 마중하기 위해 바라나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C팀이 공항 밖으로 나오자 스님은 환한 웃음과 함께 꽃목걸이를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걸어주며 “환영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모두들 너무나 기뻐했습니다.nbspnbspnbspnbsp버스에 탑승한 순례객들을 향해 송수신기로 스님이 익숙한 목소리로 다시 환영인사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사르나트 녹야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nbspnbsp특히 C팀에는 해외에서 오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독일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스트라스부르크,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DC, 중국 통화, 라스베가스, 토론토, 일본 쿄토, 오사카, 캐나다 캘거리, 베트남 하노이,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해 특색을 더했습니다.nbspnbsp1호차에 탄 스님은 해외에서 온 분들을 위해 직접 마이크를 잡고 어디서 왔는지를 일일이 확인하며 인사를 건냈습니다.nbspnbspnbsp“고생해야 한다는 건 알고 왔어요? 모르고 왔어요?”nbspnbsp“알고 왔습니다.”nbsp“세수할 수 있는 날은 시작하는 날과 끝나는 날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늘하고 내일은 샤워를 열심히 해놓으세요.” nbspnbsp“그냥 강가강에서 세수하면 안 되나요?”nbsp“강가강에서 세수하면 좀 문제가 생기는데요. 왜냐하면 강가강에 몸을 담그면 천국에 간다고 하잖아요. 얼굴만 씻으면 얼굴만 천국 가버리고 몸둥이는 지옥 가면 어떡해요? 목욕하려면 다 해야지요. nbspnbspnbsp일교차가 커서 아침에는 추운데 낮에는 런닝 입고 다녀도 될 정도예요. 그래서 첫째, 감기 걸리기가 쉬워요. 지금 인도가 이상기후인지 2월달에 더워지는데 지금이 2월달 날씨처럼 더워요.nbsp둘째, 먼지가 너무 많기 때문에 저녁에 숙소 가서 코를 풀면 새까만 게 나와요. 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복잡해요. 그리고 길거리에는 인류 역사상 만들어진 모든 탈 것들이 한꺼번에 다녀요. 교통 수단의 박물관이예요. nbspnbspnbsp그런데 1호차는 해외 여러 곳에서 참가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잘하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고, 못하면 골치 아플 것 같네요. 먼지가 많다느니, 숙소가 안 좋다느니, 화장실이 없다느니, 이런 불평을 자꾸 하니까요. 지금 참가한 나라들을 대충 보니까 골치 아프게 생겼어요. 잘 사는 나라에서 오신 분들은 진짜 편하게 살다가 오신 분들이거든요. 미국, 유럽, 일본 등 전부 깔끔한 나라들이잖아요. 제일 깔끔한 곳에서 제일 지저분한 곳으로 온 겁니다.”nbspnbsp“먼저 성지순례 다녀온 도반들이 다 알려줘서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nbsp“미국 같은 곳은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부딪히는 걸 굉장히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사람 부딪히는 것은 아무런 일도 아니고, 차가 서로 부딪히고 긁혀도 아무도 신경 안 써요. 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뒤에 자전거가 와서 탁 박아버려서 덜커덕 하고 그래요. 시내 중심가로 가면 더 복잡해요.nbspnbspnbsp저기에 소가 쓰레기장 뒤지고 있는 것을 보세요. 부처님 말씀에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 실감나죠? 불구부정입니다.” nbspnbsp온갖 것이 뒤죽박죽인 길거리를 보면서 또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참가자들은 인도의 매력에 흠뻑 매료되었습니다. 스님이 설명하는 동안에도 반대편 차선에서 추월을 하는 차량 때문에 부딪힐 뻔한 아찔한 순간이 펼쳐졌습니다.nbspnbsp이틀 동안 먼 길을 온데다가 어제밤에는 델리공항에서 노숙을 했기에 모두들 피곤했는지 숙소에 도착하자 순례객들은 곧바로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습니다.nbsp저녁 6시부터는 만찬과 더불어 소개 시간, 오리엔테이션, 스님의 입재법문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nbsp식사를 마친 순례객들에게 먼저 스님은 이번 C팀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C팀은 다국적군입니다.”라고 하면서 A팀과 B팀은 정토불교대학생들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C팀은 해외에서 오신 분들과 일반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먼저 해외에서 오신 분들이 앞으로 나와 각자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전세계 각지에서 온 25명이 차례대로 인사를 했습니다. 한 명 한 명 소개될 때마다 박수가 이어졌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스텝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C팀은 유수 스님의 안내로 희광법사님, 보광법사님이 함께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차량을 담당하면서 인도인들을 상대하는 일을 도맡아 줄 이화승님, 실무를 담당하는 김경희님, 정순례님이 차례대로 소개되었습니다.nbsp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이 “바라나시와 쉬라바스티 안내를 맡은 법륜입니다” 라고 하자 행사장은 열렬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이번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버스 운전기사들이 소개되었습니다. 1,2,3호차 각각 기사님과 조수가 소개되자 해당하는 버스 탑승자들은 박수와 환호로 반가운 마음을 포현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버스 운전기사들에게는 박지나 JTS 대표님과 이화승님이 선물도 증정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모두 마치고, 삼귀의 반야심경 봉독과 함께 입재식이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로 다양한 특색을 이루고 있는 C팀 참가자들을 위해 생활 안내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해외 참가자들은 한국에서 온 참가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사전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nbspnbsp“여러분들이 태어나서 가족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오래 같은 숙소에서 자고, 늘 밥을 같이 해먹고, 하루종일 같이 차를 타고, 같이 행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거예요. 보름을 같이 사니까 식구가 돼서 사는 거예요. 식구가 얼굴이 예쁜지, 돈이 많은지, 지위가 높은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식구가 돼서 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책임을 다하는 거예요.nbspnbspnbsp그런데 같이 살아보면 꼭 ‘밉상’이 한 조에 한두 명씩 나옵니다. 밥 먹을 때만 숟가락 들고 오고, 일할 때는 어디 갔는지 없다가, 밥 먹을 때 되면 또 숟가락 들고 나타나는 사람이 가끔 있어요. 말은 안 하겠지만 제가 지금 대충 보니 벌써 누군지 알겠어요. nbspnbsp여기 조장이나 차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모두 똑같은 순례객입니다. 조장이나 차장이라고 해서 주어진 특혜는 하나도 없습니다. 똑같은 순례객이면서 다만 봉사로 차장을 맡았을 뿐인데 차장이나 조장이 자기를 위해 서비스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굉장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니 식사당번도 돌아가면서 하고, 물건 들 때도 반드시 돌아가면서 들고, 차에 탈 때도 꼭 앞자리에만 앉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지 말고 자리도 돌아가면서 앉읍시다.nbspnbsp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면서 지식으로만 배우고, 하는 행동은 전혀 딴판이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니 순례를 하면서 내 삶이 나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과 함께해 갈 수 있도록 옆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내면 좋겠습니다. 이런 게 열흘 쯤 연습이 되면 집에 가서도 생각과 행동이 조금 달라질 수 있어요.nbsp뭐든지 똑같이 나누자는 건 아닙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조금 적게 할 수도 있고 힘 있는 사람은 조금 무거운 것을 들 수도 있어요. 이렇게 조금씩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어쨌든 자기 직분을 함께해 나간다는 생각을 갖고 순례를 하면 좋겠습니다.nbspnbspnbsp최근에 와서는 이 순례를 정토회 회원이 아닌 사람에게 개방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 여행은 서비스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정토회에서는 다들 자립적으로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일반인이 오면 초기에 다소 적응하기 어렵고 불평이 다소 있습니다. 앞에서 보셨겠지만 각 차에 있는 법사님 한 분씩을 빼고는 실무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해요. 내일부터 당장 예불할 자리를 한 장 깔더라도 여러분들이 가서 깔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1호차가 자리 까는 당번이라면 1호차가 짐 다 들고 가서 깔아야 하고, 조 안에서도 누군가 당번이 되어 밥통을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율적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순례예요.”nbspnbsp이 외에도 스님은 순례 기간 동안 의식주 전반에 대해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지난 20여 년 동안 성지순례를 해오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스님의 법문 덕분에 다소 어색했던 긴장감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밝아졌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성지순례의 의미와 순례를 하기 위해 필요한 인도의 기후, 자연, 사회,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준 후 마지막으로 부처님이 살았던 당시의 배경에 대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한 인간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자란 환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라는 게 자기가 잘난 것 같지만 크게 보면 환경의 산물입니다. 내가 원래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한국말을 하는 거예요.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하는 가치관과 사고는 물론 밥 먹는 방식, 똥누는 방식, 심지어 웃는 모습까지도 다 환경적 산물이에요. 그 사람이 태어나서 자란 역사적, 자연적 환경을 알아야 그의 행동이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환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저 사람 이상하다’ 자꾸 이렇게 됩니다.nbspnbspnbsp부처님은 자랄 때는 당시 주류사회에 속했어요. 그런데 어린 나이부터 이 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이 생겨서 그걸 선생님과 주류사회에 물어봐도 답을 못 구했어요. 그러다가 북쪽 문으로 나가서 출가사문을 만나 대화를 하다가 굉장한 감동을 받았기에 출가사문의 길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은 주류에서 자라서 비주류에 참여하고, 6년 고행을 할 때는 비주류 계통의 스승에게서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은 불교에서만 ‘출가사문’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비주류를 다 ‘출가사문’이라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6 계파가 있고, 62 견해가 있고, 360 견해가 있었습니다. 즉 서로 다른 주장들이 엄청나게 많이 존재했습니다. 부처님은 그 중 한 분이셨다가 중도를 발견하시고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nbspnbsp주장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주류의 핵심은 신에게 제사를 잘 지내서 우리들의 욕구, 욕망을 얼마나 잘 충족시키느냐가 중요했어요.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게 행복입니다. 이걸 쾌락주의라고 해요. 그런데 비주류에서는 우리들의 욕구, 욕망은 절대로 충족해서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고행주의라고 했어요. 부처님은 쾌락주의에서 고행주의로 갔다가 쾌락도 고행도 다 버리고 중도를 발견했습니다. 이 말은 부처님은 주류에서 성장해서 비주류로 갔다가 비주류에서 다시 중도로 돌아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3의 길, 새로운 길을 열었어요. ‘중간’이라는 뜻의 ‘중도’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첫 설법이 중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중도가 뭔지 제대로 알 수 있어요. 그냥 ‘중도’라고만 하면 무엇의 중도인지 모르잖아요.nbspnbsp부처님은 1,000년 간 지속된 브라만문명 중에서 브라만문명의 쇠퇴기, 즉 전통사상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사상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사회적 혼란기에 출현해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어요.nbspnbsp부처님의 시대는 정치적으로도 대격변기였어요. 당시의 인도에는 300여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16개 나라가 대국으로 꼽혔습니다. 그 16대국 가운데 2개 나라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지구상에 200여 개 나라가 있고 G20, 다시 말해 20개의 대국이 있고 그 가운데 G2, 즉 2개의 초강대국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G20 대신 G16이라는 게 차이예요. nbspnbsp부처님은 두 초강대국의 수도인 왕사성과 사위성, 그리고 16대국을 주로 다니시며 교화와 설법을 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300여 개의 나라 중 부처님이 태어나신 카필라바스투는 소국에 속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비하면 가야 정도 돼요. 아직 절대 왕정이 확립되기 전의 부족 연맹 국가 수준이었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nbspnbsp기록에 따르면 부처님은 갠지스강 유역인 힌두스탄평원에서 주로 활동을 하셨습니다. 지금의 지명으로 보면 서북쪽으로는 델리를 넘어가지 않으셨고, 동남쪽으로는 캘커타를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이 여기만 고집하신 게 아니라 당시 문명이 발달한 곳이 여기였기에 여기에 머무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8대 성지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주로는 비하르주, UP주, 네팔 등 이렇게 2개의 나라와 3개의 주에 부처님의 8대 핵심 유적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nbspnbsp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부처님을 이해해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돈과 시간을 들이고 고생해가며 현장에 온 이유는 첫째, 부처님의 가르침인 해탈과 열반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것을 실제로 증득하고 가르친 붓다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현장 실습을 하는 거예요. 실제로 현장에 가서 자연환경과 사회적 배경을 보고 그때 있었던 부처님과 제자들의 문답을 경험하면서 ‘지금 이 시대에 붓다가 출현한다면 어떤 인격일까’를 생각해야 좀 더 우리 생활 속에서 붓다 담마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오늘은 이런 자연적·역사적 배경을 말씀드리고 내일은 부처님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정리한 뒤 한 발 한 발 순례를 해나가겠습니다. 첫날에 많이 피곤할텐데 수고들 하셨습니다.” nbsp오늘은 본격적으로 순례를 시작하기에 앞서 풍부하게 교양을 쌓는 기분이었습니다. 다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는지 눈을 껌벅이는 분들도 몇몇 보여서 스님은 조금 일찍 강연을 마쳤습니다. 2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준 스님에게 모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순례단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고, 스님은 내일 성지순례 준비상황을 점검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은 A팀, B팀과 마찬가지로 C팀도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바퀴를 굴리신 사르나트로 가서 수계식을 한 후 오후에는 강가강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nbspnbsp※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01.12. 50,023 읽음 댓글 49개

2016.1.10 (인도 5일째) 성지순례 B팀 사르나트 순례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B팀을 이끌고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바퀴를 굴린 초전법륜성지 사르나트를 안내한 후 강가강을 함께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새벽 5시에 일제히 기상해서 각자 숙소에서 예불과 기도를 마친 순례단은 6시 30분에 ‘사르나트’로 향했습니다. 날씨가 어제보다 더 쌀쌀해진 가운데 한기가 조금씩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길가에는 집집마다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nbspnbspA팀이 순례할 때와 마찬가지로 매표소 직원이 정문을 열어주자 스님이 가장 앞에 서서 순례단을 이끌고 사르나트에 들어섰습니다. 순례단 모두 향을 피우고 합장한 채로 ‘석가모니불’을 염하면서 한 발 한 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스님의 뒤를 좇았습니다.nbspnbsp▲ 다르마라지크 수투파nbsp먼저 부처님이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다르마라지크수투파를 한 바퀴 돌고, 이어서 두 번째로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다메크수투파를 세바퀴 돌았습니다. 장대한 행렬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 다메크 수투파nbsp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다메크수투파 앞에서 순례단은 예불공양을 올렸습니다. 예불이 끝나자 스님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순례단의 건강과 순례 공덕의 회향을 발원하자 순례단도 스님과 한 마음이 되어 그렇게 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nbspnbsp▲ 예불 공양nbsp스님은 예불공양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순례단을 향해 이곳 사르나트에 대해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특히 부처님이 사르나트에 오셨을 때 일어난 많은 일화들을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먼저 부처님께서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곳 사르나트로 오기까지의 과정, 사르나트에서 다섯 비구를 만나 처음으로 법을 설하는 모습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초전법륜성지, 사르나트, 녹야원입니다. 여러분들은 조금 전 입구를 통해 들어오면서 탑의 기초석이 있는 동그란 부분을 한 바퀴 돌았는데요, 거기가 초전법륜성지, 즉 부처님께서 첫 번째로 설법을 하신 곳입니다. 탑 이름은 다르마라지크수투파, ‘법륜탑’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설법한 자리가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이 앞의 탑입니다. 이 탑은 다메크수투파라고 합니다. 다르마라지크수투파가 더 크고, 더 중요하지만 그것은 파괴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두 번째로 설법하신 곳을 상징하는 이 다메크수투파 앞에서 부처님께 예불공양을 올렸습니다. nbspnbspnbsp이곳 사르나트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이곳은 초전법륜성지이고, 불법승 삼보가 성립된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재가신자에게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nbspnbsp이어서 이 지역 최고 부자의 외동 아들이였던 야사의 출가 과정과 전법 선언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부처님을 포함해서 여섯 명의 아라한들이 이곳에서 정진을 하고 있는데, 아주 잘 차려입은 한 젊은이가 말을 타고 이 숲을 지나갔습니다. 부처님이 그 젊은이를 보시더니 ‘저 젊은이가 내일 아침이면 이곳에 와서 나의 제자가 되겠구나’ 하셨어요. 그러니까 다섯 명의 제자들이 ‘아이고, 부처님. 저 청년은 이곳 카시국의 최고 부자인 구리가장자의 외동아들입니다. 그는 온갖 친구들과 어울려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출가한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그 젊은이는 화려하게 차려입고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어떤 여인의 시체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에서 너무 냄새가 나니까 인상을 팍 썼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멀리 떨어져 있는 시체를 보고도 인상을 쓰며 지나가는데, 여러 시체들이 섞여있는 곳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수행자, 즉 부처님을 보고 너무 인상이 깊어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하며 지나갔습니다. 그 젊은이가 바로 야사입니다.nbspnbsp야사가 그날 밤 파티가 열린 연회장에서 무희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놀다가 술에 취해서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에 깨어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촛불이 휘황하게 타고 있는 가운데, 어제 저녁에 같이 놀던 그 아름다운 무희들이 전부 술에 취해서 엎어지고, 자빠져서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희들은 술을 먹고 자고 있었으니까, 어떤 사람은 코도 골고, 어떤 사람은 토해 놓고, 어떤 사람은 가슴을 드러내놓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야사는 어제 시타림에서 이리 저리 버려져 뒹굴던 시체들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 아름다운 연회장이 어찌 무덤과 같은 것인가?’라며 괴로워했습니다.nbspnbsp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젯밤에 아름다운 무희들과 춤을 춘 것은 ‘락’이고, 지금 시체더미처럼 보이는 것은 ‘고’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야사는 ‘락이 곧 고’임을 자각한 것입니다. ‘인생이 고다, 일체가 고다’ 하는 건 ‘일체는 고와 락의 윤회다’는 뜻입니다. 야사가 그날 새벽녘에 떠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어제 시체더미 속에서도 편안하게 있던 한 수행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나방이 불을 따라 날아가듯이, 어제 자기가 본 수행자에게 마음이 끌려서, 이곳 사르나트로 오는 길에는 바루나 강이 있는데, 그 강에 신발을 벗어놓고 강을 건너 이 숲으로 와서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야사를 맞았고, 야사는 부처님께 엎드려서 ‘괴로워 죽겠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법을 설했고, 야사는 그 법을 듣고 단박에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출가를 청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그러니 이 법에 따라 정진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라.’nbspnbspnbsp그래서 야사는 출가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섯 비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는 첫 번째 제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원래 수행자였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것이고, 야사는 어제까지만 해도 세속에서 오욕락을 즐기던 사람인데 바로 이렇게 단박에 깨달은 것입니다. 야사가 그렇게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밤에 락이 곧 고임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nbspnbsp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야사 비구와 그 가족을 교화했습니다. 그런데 ‘야사가 출가수행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니까, 바라나시에 사는 야사의 절친한 친구네 4명이 ‘야사처럼 그렇게 놀기 좋아하는 애가 출가수행자가 되다니’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경전에는 그 친구들이 ‘그렇게 훌륭한 친구가 출가수행자가 되었다니 우리도 한번 가보자’라고 했다고 좋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다른 경전에는 ‘저건 틀림없이 그 수행자가 괴력으로 야사를 꼬였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구하러 가자’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 친구 네 명이 부처님을 찾아왔다가 야사 비구가 편안하게 있는 것을 보고 우려를 덜었고, 야사 비구의 권유로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뒤 모두 출가했습니다.nbspnbsp부처님 당시에 인도에는 300여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 대국이 16개 국이었습니다. 야사 비구가 부잣집 아들이다 보니까 국제적으로 놀았는지, 국제적으로 50명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서로 연락을 해서 또 야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50명의 친구들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이제 총 60명의 아라한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가 다섯 비구, 두 번째가 야사와 네 명의 친구, 세 번째가 50명의 친구, 이렇게 해서 총 60명이 되었고, 부처님까지 포함하면 총 61명의 아라한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60명의 제자들을 두고 전법 선언을 했습니다.nbspnbsp‘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너희들도 해탈을 얻었다. 자, 이제 전법의 길을 떠나거라. 사람들과 신들의 안락과 이익을 위하여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하라.’nbspnbsp그래서 60명의 아라한이 흩어지게 됩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나도 우루벨라촌으로 가서 교화설법을 하겠다’라고 선언하시고, 부처님은 혼자서 우루벨라촌, 즉 지금의 보드가야가 있는 지역,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신 그 근방으로 가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 등 1,000명의 비구를 교화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원래 불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교화해서 1,000명의 대중을 이끌고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으로 가서 빔비사라왕을 교화하고, 빔비사라왕으로부터 죽림정사를 기증받게 됩니다.nbspnbspnbsp이런 교화의 역사가 바로 바라나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nbsp불법승 삼보가 최초로 성립된 곳일 뿐만 아니라 교화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는 점이 인상깊게 다가왔습니다. 사르나트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가슴 깊이 느껴졌습니다.nbspnbsp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설명해준 내용들이 경전 속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다함께 독송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 한 참가자에게 소감을 물어보니 “그냥 경전을 읽을 때는 잘 와닿지가 않았는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다시 경전을 읽으니 한 구절 한 구절이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며 감격스러움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성지에 직접 와서 스님과 법사님의 안내를 직접 들어야 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제대로 알 것 같습니다.nbspnbsp다음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법바퀴를 굴리신 그 때의 정황을 떠올려보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침 일찍 입장한 덕분에 관광객이 별로 없어 아주 고요한 가운데 명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명상을 마치고 나니 배속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큰 아쇼카 나무가 있는 한쪽 구석을 가르키며 식사 장소를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 조별 식사 시간nbsp순례단 모두가 조별로 식사를 하러 간 사이 스님은 법회를 했던 다메크수투파 앞에서 자리를 지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잠시만 방심하면 인도 아이들이 물건을 훔쳐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식사를 마치고 수투파 앞으로 모두 모이자 곧이어 수계식이 열렸습니다. 스님은 순례단 B팀 160여 명에게 삼귀의 오계를 설하고 순례 기간 동안 출가수행자의 마음으로 오계를 잘 지킬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순례단은 “잘 지키겠습니다” 하고 크게 대답했습니다.nbspnbsp▲ 수계식nbsp수계를 받은 대중에게 법사님들이 가사와 바랑을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나눠주었습니다. 노란색 가사를 여법하게 수하자 방금 전까지 단순한 관광객이였던 사람들이 일순간 수행자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nbspnbsp▲ 연비nbsp스님은 가사를 수한 순례단을 향해 환한 웃음으로 격려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가사를 수하니 모두 승려 같네요. 머리만 깍으면 딱 좋겠는데, 머리도 깍을까요?”nbspnbsp“잘 안들려요.” nbsp“머리 깍기 싫으니까 안 들린다고 그러네요. 승려 생활이라고 해봤자 딱 12일이에요. 12일 동안은 예불할 때도 가사를 딱 수하고 해야 됩니다. 성지를 참배할 때도 반드시 입구에서 딱 가사를 수하고, 향을 하나씩 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알았지요?”nbsp“예.”nbspnbsp이렇게 A팀 160여 명에 이어 B팀에서도 수행자 160여 명이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수계식을 마친 대중들은 부처님이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수투파를 향해 삼배를 하면서 수행자의 마음을 다시 가슴에 새겼습니다. nbsp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사르나트에 있는 수투파와 유적들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졌는지 역사적 변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nbspnbsp“부처님이 이곳 사르나트에서 머무셨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입니다. 부처님이 계실 때는 여기가 숲이었습니다. 그것도 시체를 가져다 버리는, 사람들이 ‘부정 탄다’고 말하는 숲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머무셨기 때문에 이 땅이 부정한 곳에서 성스러운 곳으로 바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200년이 지나도록 여기엔 건물이 없었습니다. 수행자는 인공적으로 지은 건물 안에 들어가서 자지 않았고, 그저 인공적으로 짓는다는 게 비를 피하는 초막 정도였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200년 후에 전인도를 통일한 아쇼카대왕이 부처님을 너무 존경해서 불교에 귀의를 해습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부처님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다 찾아갔습니다. ‘이곳이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이다’ 라고 하면 거기에 기념탑을 세우고, 또 ‘수자타의 집이 여기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고, ‘여기가 부처님께서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곳이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고, ‘여기서 6년 동안 고행하셨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고, ‘여기서 물 드셨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는 식으로,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때부터 열반하신 때까지 발자취를 모두 찾아가 탑을 세웠는데, 얼마나 많이 세웠느냐 하면, 인도에서 ‘수도 없이 많이 세웠다’는 의미로 ‘8만 4천개의 탑을 세웠다’라고 합니다.nbspnbsp그리고 원래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은 여덟 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개는 못 건드리고, 나머지 일곱 개 탑에서 사리를 일부 꺼내어서 자신이 탑을 세운 곳마다 넣어서 모든 부처님의 발자취를 징표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8대 성지에는 ‘아쇼카 석주’라고 하는 기둥도 세웠습니다. ‘여기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여기는 처음으로 설법하신 곳이다’라는 식으로 전부 기둥에 표시를 했습니다. 만약에 아쇼카왕이 그런 표시를 안 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이곳이 초전법륜성지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없어진지 700년이 되었기 때문에 성지가 다 황무지나 정글이 돼버렸거든요.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영국 사람들이 탐사를 하면서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를 발견하고, 또 거기에 기록돼 있는 문장도 발견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의 발자취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장 법사님이 ‘룸비니에서 어디만큼 동쪽으로 가니까 뭐가 있더라’고 기록한 것도 근거가 되어서 지금 부처님 성지가 대부분 복원된 것입니다.nbspnbspnbsp이렇게 해서 아쇼카왕 시대에 처음으로 기념탑이 세워졌습니다. 다만 절은 안 지었습니다. 아쇼카왕 당시를 ‘마우리아왕조’라고 하는데, 그게 B.C. 3세기입니다. 최초로 조각과 같은 형태를 만든 것은 마우리아왕조 시대입니다. 그리고 마우리아왕조가 망하고, 인도 전체가 다시 통일된 때가 A.D 1세기에서 3세기입니다. 이 때가 쿠산왕조 시대이고, 가장 유명한 왕은 카니시카왕입니다. 이 왕조는 원래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뒤 마치 아리안족이 남하해서 내려왔듯이 인도 대륙까지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1세기 내지 3세기 시대의 탑이 수 천 군데에 있습니다. 그것을 탈레반들이 대포를 쏴서 완전히 파괴하거나 부수었습니다. 제가 아프카니스탄에서 구호활동을 할 당시에 직접 돌아볼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프카니스탄이 무슬림 국가이지만 원래 불교 국가였습니다.nbspnbsp이 쿠산왕조 시대에 불상이 처음 나옵니다. 원래는 감히 부처님을 사람 모양으로 그리지 못했어요. 대신 마우리아왕조 시대에는 부처님을 보리수나 발바닥 모양으로 상징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우리아왕조가 멸망하고 알렉산더대왕이 펀잡 지방까지 쳐들어 왔어요. 그 영향을 받아서 조각이 발달합니다. 그게 간다라예술이라는 겁니다. 이 간다라예술 시대의 불상을 보면 조각이 사람 모양으로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또 쿠산왕조 시대 때 많은 절이 지어지기 시작합니다. 성지에 탑만 있는 게 아니라 스님들이 사는 집, 즉 절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nbspnbspnbsp그리고 쿠샨 왕조가 망한 뒤 5세기에 들어선 왕조가 굽타 왕조입니다. 여기 있는 탑들은 대부분 굽타왕조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한 1,600년 전의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이후인 장수왕 시대에 해당됩니다. 원래 있던 탑에다가 다음 시대에 더 덧붙여서 더 크게 만들고, 다음 시대에도 더 덧붙여서 더 크게 만들다 보니 탑이 이렇게 커진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크게 만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탑을 발굴하다 보면 여기까지는 마우리아시대의 것, 여기서부터는 쿠산시대의 것, 이 바깥은 굽타시대의 것, 또 이 바깥은 어느 시대의 것이라고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사르나트에 있는 현재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굽타시대의 것입니다. 여기서 나온 조각들도 대부분 굽타시대, 즉 5세기의 것입니다.”nbsp이 외에도 스님은 이곳 주변에 자리잡은 건물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설명을 다 듣고 나니 ‘그래서 오늘날 이런 모습이 되었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nbspnbsp마지막으로 다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처럼 네 줄로 서서 반팔 나란히를 한 다음 좌양좌를 하니 가지런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모두 환하게 웃으며 성지에서의 감격을 사진 한 장에 담아 두었습니다.nbspnbsp▲ B팀 단체 사진nbsp그리고 스님은 조별로도 한 장씩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순례단을 위해 계속 웃음을 보여주었습니다.nbspnbsp▲ 조별 사진nbsp이어서 무변심 법사님, 묘당 법사님, 여광 법사님, 대광 법사님, 네 분의 안내로 사르나트 지역의 유적지 곳곳을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법사님들을 따라 차량별로 흩어진 순례단은 부처님이 첫 안거를 보내신 곳에 지어진 물간다쿠티, 아쇼카대왕이 세운 석주, 사르나트박물관, 담마팔라 전법사가 세운 신물간다쿠티 비하르 등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nbspnbsp이렇게 사르나트 순례를 모두 마치고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영접한 자리에 세워진 영불탑으로 향했습니다. 영불탑의 앞면과 옆면, 뒷면까지 둘러본 후 탑 꼭대기에 있는 건물에 대해 모두들 의아해 하자 스님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nbspnbsp▲ 영불탑. 차우간디수투파.nbsp“탑 꼭대기에 있는 이상한 건물이 보이죠? 저것은 불교의 탑이 아닙니다. 무굴제국을 세운 사람이 처음 전쟁에서 패했을 때, 여기에 비구니 스님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으로 도망 와서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중에 대제국을 건설하자, 그걸 기념해서 탑 위에 저렇게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 저것은 무슬림이 세운 것입니다.”nbsp영불탑을 짧게 둘러본 후 곧바로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오늘은 일요일인데다가 시크교의 축제날이었습니다. 산스크리트대학에서 하차해 고돌리아촉까지는 무사히 들어갔으나 고돌리아촉부터 수많은 인파들이 축제 행렬을 구경하느라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nbspnbspnbsp겨우 인파를 뚫고 강가강 주변 다사스와메드 가트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보다 일찍 도착해 오는 순서대로 탈 수 있게 배를 잡아 주었습니다.nbspnbsp▲ 다사스와메드 가트nbsp배가 모두 출발하자 스님의 안내가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A팀과는 다른 코스로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A팀 때는 버스가 갓길 주차를 해서 벌금을 물고 먼 곳으로 이동이 되어 한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B팀 때는 스님의 제안에 따라 다사스와메드가트에서 배를 타고 강 하류로 내려가서 라즈가트에서 배에서 내리는 코스로 변경했습니다.nbspnbspnbsp유유히 강가강을 따라 내려가니 저 멀리 뿌연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에 화장터가 보였습니다. 스님은 배를 화장터 가까이에 다가가게 한 후 인도인들의 화장하는 문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이 앞에 보이는 곳이 그 유명한 강가강의 화장터입니다. 지금 누군가가 뭘 들고 강물 쪽으로 내려오고 있지요? 저 사람이 들고 있는 게 시신이고, 시신을 덮은 천이 분소의입니다. 저렇게 들고 와서 강물에 한 번 적셨다가 계단에 둔 뒤에 불에 태우는 겁니다. 살았을 때도 죄업를 씻기 위해 강물에 목욕을 하지만, 죽었을 때도 한 번 강물에 적셔지도록 하는 것입니다.nbspnbspnbsp장작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놓고, 다시 그 위에 장작을 쌓습니다. 그런 뒤에 장작더미 가장 밑에 지푸라기 같은 걸로 불을 붙입니다. 우리도 옛날에 상여를 메고 다리나 개울을 건널 때 상여꾼들이 ‘상여가 안 간다’며 제자리에 있으면 상주가 행여에 돈을 꽂아줘야 상여꾼들이 움직였듯이 여기도 ‘장작에 불이 안 붙는다’면서 불을 안 붙이고 있으면 상주가 와서 돈을 줘야 불을 붙이고 그럽니다.nbspnbsp이 전체가 화장터입니다. 한꺼번에 열 군데, 스므 군데씩 화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불붙고 있는 데는 전부 다 화장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이 붙는 데를 보세요. 시신이 보이지요? 시신이 불에 다 타면, 그 재를 모두 쓸어서 강에 넣어버립니다.nbspnbspnbsp기름이 지글지글 끓어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럽니다. 삼겹살 굽듯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삼겹살 구워서 먹는걸 좋아하는데, 그것도 다 남의 시신을 먹는 것 아닙니까? 뭐가 맛있다고 그렇게 구워먹습니까?” nbspnbsp시체가 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대중들에게 스님이 삼겹살은 뭐가 그렇게 맛있다고 구워먹냐고 하자 정신이 번쩍 차려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체가 타는 모습을 본 몇몇 사람들은 마음을 쉽게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nbspnbsp그러자 스님이 돌아가신 영가들을 위해 다함께 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nbspnbsp“자, 그럼 기도하겠습니다. 합장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열 번 하겠습니다.”nbspnbspnbsp간절히 염불을 한 후 다시 한번 화장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화장하려는 사람이 돈을 많이 주면 장작을 많이 쌓고, 적게 주면 적게 쌓아서 시신을 태워줍니다. 입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도 최소한 장작값은 벌어놓아야 자기가 죽었을 때 화장을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 사람들이 구걸하는 자리 밑에 보면 자기가 죽을 때 쓸 장작값은 모아놓고 있습니다.nbspnbspnbsp화장이 끝났을 때 시체가 하나도 안 남고 모조리 타야 되니까, 마지막에는 향나무를 뿌립니다. 그러면 마치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불이 확 타올라서 시체가 흔적도 없이 타는 겁니다. 화장이 끝나면 뼈만 남고 흔적도 없이 타야 되는데, 어린애들은 보통은 반만 타다가 맙니다. 그러면 강물에 쓸어 넣어버립니다. 한국에서도 애기들 무덤은 안 만들잖습니까. 여기도 애기들이 죽으면 몸에 돌을 매달아서 강에 던지는 식으로 수장도 합니다.nbspnbspnbsp여기는 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상주는 머리를 빡빡 깎고 꽁지만 조금 남겨 놓습니다. 저기에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들은 상주라는 뜻입니다.”nbsp강가강 화장터의 풍경이 순례객들에게 많은 충격을 던져준 것 같았습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도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겐 아직 낯선 풍경이라는 사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 라즈가트nbsp이렇게 강가강 순례까지 마치고 나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밥솥으로 조별로 저녁 식사를 해먹었습니다.nbspnbsp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자 김치, 깻잎, 고추장, 멸치볶음 등 온갖 반찬들이 꼬깃꼬깃 비닐에 싸인 채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성지순례의 백미는 바로 이렇게 식사를 조별로 직접 해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순례객들은 “돈 절약, 시간 절약, 배탈 예방, 입맛 최고, 일석사조인 것 같다” 하면서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nbspnbsp▲ 조별 식사 시간nbsp저녁 6시부터는 저녁 강연이 열렸습니다. 스님은 12일 동안 법사님들과 함께 부처님의 10대 성지를 순례하는 대중들에게 “자세한 설명은 성지에서 법사님들께 직접 들을 수 있다”고 하면서 10대 성지 전체와 부처님의 일생 전반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그 중에서 오늘은 부처님의 사문유관과 유성출가에 대한 스님의 법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사문유관’이라고 해서, 동쪽 문으로 나가서 늙은 사람을 보고, 남쪽 문으로 나가서 병든 사람을 보고, 서쪽 문으로 나가서 죽은 사람을 보면서, 삶의 생노병사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하셨고, 결국 북쪽 문으로 나가서 사문류 계통의 수행자를 만나 그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nbspnbspnbsp기존의 브라만교에서는 아무런 답을 못 찾다가, 그 사문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출가도 결심했지만, 부모의 강력한 반대로 출가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었어요.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출가를 결심하셨고, 스물아홉 살에 출가를 하셨으니까 거의 10년 동안, 이미 마음은 냈지만 부모의 반대 속에서 수행생활을 했습니다.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생활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6년 고행’만을 ‘수행’이라고 하면 너무 짧지요. 몸은 비록 세속에 있었지만 이미 엄청난 사색과 수행을 하셨기 때문에 출가하신 이후 금방 스승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부처님은 밤에 성벽을 넘어서 몰래 출가를 했습니다. 부모가 도저히 승인을 안 해 주니까 ‘유성출가’, 즉 몰래 성을 넘어서 출가를 했던 것입니다.nbspnbsp그런데 ‘왕’이나 ‘왕궁’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대상이잖습니까. 그래서 노래를 잘해도 가수왕이라고 하고, 뭐든지 좋은 것에는 왕을 붙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세속은 얼마나 왕이 되기를 추구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그 왕위를 버리셨습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도 제일 많이 갖고, 권력적으로도 제일 많이 갖고, 인기도 제일 많이 갖게 되는 것을 뜻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행복의 길이 아니라며 버리신 겁니다.nbspnbsp이것을 볼 때 현재의 우리 불교는 출가정신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다 부처님이 버리신 그 ‘왕위’를 얻기 위해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며 ‘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숫제 어느 신에게 빌면서 ‘나 왕 되게 해 주세요’, ‘나 뭐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논리적으로는 앞뒤가 맞습니다. 신은 우리가 빌면 해 준다고 전제를 하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서 이런 복을 구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그 복이 행복으로 가는 길,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며 버리셨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그 ‘버림’이 얼마나 확실한 것이었느냐? 출가하셔서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 이르러 탁발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부처님께서 깨닫기 전으로써 수행자였을 때입니다. 그때 빔비사라왕과 길에서 만나게 됩니다. 왕이 보니까 수행자의 자태가 원만하거든요. 그래서 신하들에게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봐라’라고 하니 신하들이 알아보고는 ‘저 분은 카필라성의 왕자였는데, 지금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왕자가 출가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지 ‘왕자가 출가했다’는 소문이 벌써 세상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nbspnbsp그래서 빔비사라 왕이 수행자에 대한 예를 갖추면서 ‘당신은 누구요? 왕자가 출가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당신이 그 사람이오?’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서 ‘맞습니다. 제가 바로 카필라성의 고타마 시타르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이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수행자가 되는 것은 너무 아깝소. 그러니 내 여동생과 결혼을 해서 내 나라를 같이 다스립시다’ 라고 첫 번째 제안을 했습니다. 카필라성은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마가다국의 1개 주에도 해당이 안 될 정도로 작은 나라인데 왕은 부처님께 대국을 같이 경영하자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nbspnbsp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으로 거절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같이 경영을 하자는 제안이 부처님의 마음에 안 차나 보다 싶어서 두 번째로 ‘그렇다면 당신이 이 나라를 다스리시오’라며 선뜻 왕위를 내어줄 의향을 보였습니다.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승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왕은 세 번째로 ‘이분이 남의 것을 갖는 걸 미안해서 그러나 보다’ 싶어서 ‘나에게 강한 군대가 있는데, 내가 이 군대를 당신에게 빌려줄 테니, 이 군대로 이웃나라를 쳐서 대국을 만드시오’라고 제안을 했는데, 그때서야 부처님께서는 ‘대왕이시여, 어떤 사람이 입안에 있는 가래가 필요 없다고 탁 뱉었는데, 남이 뱉은 가래를 보고 자기 것보다 더 굵다며 그것을 집어먹을 사람이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nbspnbsp“없어요.”nbspnbsp“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왕위’를 ‘내 입에 있는 가래’에 비유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내 나라의 왕위도 버리고 나왔는데, 내가 왜 남의 나라를 다스리겠으며, 남의 나라를 빼앗아서 다스리는 것은 더더욱 당치도 않다’는 뜻인 것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는 ‘왕위’라는 것에 대한 붓다의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이 일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분명치 않으면, 우리가 출가 수행을 하면서도 늘 흔들리게 됩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유성출가, 즉 왕위를 버리고, 성을 뛰어넘어 출가하신 분입니다.”nbsp부처님은 왕위를 버리시고 출가하셨는데, 왜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왕위를 다시 찾고 있냐는 물음은 순례객들에게 성지순례 기간 동안 풀어야 할 큰 화두를 던져준 것 같았습니다.nbspnbsp이 외에도 스님은 부처님의 일생과 10대 성지에 대해서 약 두 시간 동안 강의를 해주었습니다. 스님께서 몸이 아프셔서 강연 중간에 한 차례 휴식을 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스님은 한 가지라도 순례객들에게 더 알려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강연을 마치면서 법사님들과 12일 동안 성지순례를 떠날 대중들에게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런 부처님의 삶을 잘 새겨서 좋은 마음으로 이 순례를 다니십시다. 인도까지 와서 인도사람 미워하고, 인도정부 욕하고 다니면 누구만 손해입니까? 나만 손해입니다. 그러니 좋게 생각하는 버릇을 자꾸 들이는 게 필요합니다.nbspnbsp다만 조심은 해야 되겠지요. 순례가 재미있도록 하되 조심도 해야 됩니다. 긴장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유의는 해야지, 막 방심해서 일행도 잃고 길도 잃어서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하세요.”nbsp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대중들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스님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짠해졌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오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순례객들은 모두 숙소로 돌아가 먼길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내일 스님은 성지순례 C팀을 마중하기 위해 바라나시 공항에 다녀온 후 저녁에는 입재 법문을 해줄 예정입니다.nbspnbsp※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01.11. 105,360 읽음 댓글 53개

2016.1.9 (인도 4일째) 성지순례 B팀 입재식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 5시에 성지순례 A팀을 보드가야로 떠나보낸 후 오후 1시에는 성지순례 B팀을 마중 환영하고, 저녁에는 성지순례 입재 법문을 했습니다.nbspnbsp새벽 4시 20분이 되자 숙소 각 방마다 알람소리가 울렸습니다. 4시 50분까지 모든 짐을 싣고 출발 준비가 끝나자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스님이 걸어나왔습니다.nbspnbspnbsp버스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 스님은 순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송수신기로 말했습니다.nbspnbsp“쉬라바스티에서 다시 만나요. 그 때까지 즐겁게 순례하고 오세요”nbspnbsp순례객들도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웃음으로 답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을 보드가야로 떠나보낸 후 오전에는 원고 교정 업무와 성지순례 준비 상황을 점검한 후 오전 11시가 되자 다시 성지순례단 B팀을 환영 마중하기 위해 바라나시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보자기로 싼 꽃목걸이를 풀어헤치고 순례객이 나올 때까지 뙤약볕 아래서 기다렸습니다. 긴 줄을 지어 순례객이 차례대로 출국장을 빠져나오자 스님이 환한 웃음으로 한 명 한 명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nbspnbsp“환영합니다.”nbspnbspnbsp스님의 한 마디에 순례객들은 어제밤 공항에서 노숙을 했던 고생스러움이 모두 녹아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떡해서 우리에게 이런 영광이” 하면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nbspnbspnbsp순례객 모두가 버스에 올라타자 드디어 바라나시 근교에 위치한 사르나트로 향해 출발했습니다. 송수신기를 통해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버스 안에서 일제히 환호가 터져나왔습니다. nbspnbsp“사르나트 녹야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nbspnbsp“스님, 반가워요”nbspnbspnbsp“어제 저녁에 잘 주무셨어요?”nbsp“네”nbspnbsp“얼굴 표정을 보니까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요.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은 이렇게 노숙하듯이 계속 다녀야 해요. 그런데 오늘과 내일 일정인 바라나시와 끝나는 날 일정인 아그라에서만 호텔에서 자고 나머지 일정은 전부 순례자 숙소에서 잡니다. 그래서 침낭을 꼭 챙겨야 해요.nbspnbsp침낭과 여권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14일 동안 밥은 안 먹어도 죽지는 않아요. 그래도 밥을 먹고 다녀야 하니까 전기밥솥을 잘 챙겨다녀야 하고요. 잠을 자려면 침낭이 꼭 있어야 되고요. 예불 공양을 올려야 하니까 가사, 깔판, 경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부터는 순례자로서 14박 15일 동안 지내는 겁니다. 알겠지요?”nbsp“네”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바라나시 국제공항입니다. 바라나시 시에서 서북쪽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동남쪽으로 내려가서 사르나트로 갑니다.nbspnbsp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도시의 역사가 4천년 정도 됩니다. 물론 바라나시보다 더 먼저 생긴 도시들이 있겠지만 그 도시들은 지금은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아요. 지금도 사람이 사는 도시 중에 부처님 당시에도 큰 도시였는데 지금도 큰 도시인 것은 바라나시가 유일합니다. 왕사성, 사위성, 바이샬리, 카필라바스투는 지금 작은 시골로 남아 있습니다.nbspnbsp그리고 바라나시는 힌두교의 최대 성지입니다. 강가강의 주변에 도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은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사르나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갖다 버렸던 시타림이었어요. 부처님께서 그곳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기 때문에 초전법륜성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사슴이 많이 살았나봐요. 그래서 사슴동산, 녹야원이라고 불리웠습니다.nbspnbsp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세수도 못했으니까 오늘 숙소에 들어가면 세수도 하시고 보름 동안 다닐 짐정리까지 다 해놓고 저녁식사 후에 입재식을 하겠습니다.”nbsp스님의 환영 인사와 간단한 안내가 끝나자 이제 순례객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늘 깨끗한 거리를 다녔는데, 하루 아침에 쓰레기와 짐승, 사람이 뒤섞인 혼잡한 거리를 보니 모두들 혀를 차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아이고, 저런 곳에 도대체 사람이 살 수가 있나?”, “소가 도로에 누워서 안 비키네요.”, “저기 사람들 바글바글한 것 좀 보세요.”nbspnbspnbsp낯선 인도의 풍경이 모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나 봅니다. 40분 남짓 지나자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숙소를 배정 받고 짐을 푼 후 어제밤 공항에서 뒤척이며 잔 피로를 풀었습니다.nbspnbsp오후 5시가 되자 방콕 공항을 경유해서 온 또다른 팀이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숙소 입구에서 한 명 한 명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역시 모두들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nbspnbspnbsp저녁 6시부터는 만찬과 더불어 입재식과 입재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은 오늘 첫날과 마지막 날 단 이틀 뿐입니다. 뷔페로 준비된 인도 음식들을 하나씩 접시에 담아와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nbspnbsp식사가 끝나갈 무렵 스님이 일어서서 어떤 사람들이 순례에 참가했는지 하나 하나 소개를 해주었습니다.nbsp서울정토회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서대문, 성동, 노원, 제주, 송파, 양천, 수원, 용인, 분당, 남양주, 춘천, 원주, 강릉, 인천, 일산, 안양, 부천, 대전, 천안, 청주, 광주, 순천, 목포정토회까지 전국 경향 각지에서 160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각 지역이 불려질 때마다 소속 정토회 참가자들은 환호를 하면서 손을 들었습니다. 특히 제주도와 남양주, 안양에서 많이 참가해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nbspnbspnbsp그리고 이번 순례를 준비할 스텝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1호차를 담당하면서 인도JTS에서 8년이나 근무한 여광 법사님, 2호차를 담당하면서 성지를 안내해 줄 무변심 법사님, 3호차를 담당하면서 인도JTS에서 5년 동안 근무한 대광 법사님, 4호차를 담당한 묘당 법사님, 인도인 스텝인 아미타부, 실무를 맡은 임혜진님이 차례로 소개되자 순례객들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특히 마지막에 “바라나시와 쉬라바스티 일정 안내를 맡은 법륜입니다.” 라고 스님이 당신을 소개하자 행사장은 떠나갈 듯한 함성과 환호가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목숨이죠. 우리들의 목숨을 담보해 줄 운전 기사님들을 소개합니다.” 라고 하자 스님이 소개될 때 질렀던 함성 만큼이나 큰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nbsp박지나 JTS 대표님과 여광 법사님이 기사님들 모두에게 선물을 건네자 기사님들 중 한 분이 답례로 인도 노래를 멋지게 불러주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도 “지금까지 인도인들이 불렀던 노래 중에서 가장 잘 부른 것 같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소개를 모두 마치고, 순례객들은 삼귀의, 반야심경, 청법가, 삼배를 하며 스님에게 입재 법문을 청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성지순례를 할 때의 마음 자세, 인도의 기후, 지형 등 자연환경과 사회 문화적 환경에 대해 알기 쉽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먼저 순례를 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서는 그동안 26번의 성지순례 기간 동안 있었던 온갖 사례들을 이야기 다양한 예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살피는 순례를 해볼 것을 제안했습니다.nbspnbsp“화장실을 어떻게 가는지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가다가 차를 세우고 “왼쪽 남자, 오른쪽 여자”라고 하면 그냥 가서 간단하게 누고 와야 됩니다. 여기는 화장실이 없는 게 아니라 화장실 아닌 곳이 없습니다. nbspnbspnbsp다만 동네에 가서 누면 안 됩니다. 인도 사람들도 아무 데나 누는 건 아니고, 다 벌판에, 사람이 없는 데로 가서 누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어차피 일주일만 지내고 나면 볼일 보러 갈 때 버스와의 간격이 점점 좁아져서, 심지어 버스 옆에서 눠서 민망할 정도입니다. nbsp그래도 한 10미터는 떨어져야지, 너무 차 옆 붙어서 누면 안 됩니다. 첫날은 한 200미터까지 걸어가서 누던데, 그러다가 점점 가까워져서 일주일 지나면 아무 데서나 그냥 눕니다. nbsp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 순례자들이 ‘인도에는 화장실이 없다’고 하니까 인도 스텝이 ‘인도에는 화장실 아닌 곳이 없다’고 했던 것이고, 둘째, 너무 차 옆에서 누는 걸 보고 ‘아이고, 좀 다른 데로 가지. 엉덩이가 다 보이잖아’ 라고 하니까 누군가가 ‘보는 자기만 괴롭지, 뭐’ 라고 했던 것입니다. nbspnbsp그러니까 보더라도 못 본 척 하세요. “봤다”고 하지 마세요. 그래야 아무 데나 누지요. 안 그러면 멀리 가야 되잖습니까. 그렇게 생활을 간편하게 해야 됩니다.nbspnbsp이렇게 한 열흘 살고 한국에 가면 여러분들이 뭘 먹어도 이 보다 잘 먹고, 뭘 입어도 이보다 잘 입고, 어디에 자도 이보다 잘 자기 때문에, 한국에서 살면서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꺼도 됩니다. 완전히 의식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며칠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문제지만요.nbspnbsp그래서 이 여행은 순례이기도 하지만, 마치 여러분들이 깨달음의 장에 가서 5일 동안 많은 걸 느끼고 오듯이, 새로운 걸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땀나도 씻지도 못하고, 국이 없어서 밥도 안 넘어간다’라고 생각하면 여행 내내 인상 쓰면서 괴롭게 보내야 됩니다.nbspnbsp그러나 정말 순례자의 마음을 가지면 여행 내내 기쁠 뿐만 아니라 한국에 돌아가서도 사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동안 늘 전전긍긍하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요. 순례 다녀와서 인생이 확 바뀌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보살님은 남편이 죽은 뒤 아이 셋을 키우느라고 굉장히 살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성지순례를 올까말까 망설였는데, 성지순례를 하면서 자기가 가진 게 너무 많다는 걸 자각했답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금 아주 자유롭게 자신 있게 산답니다. 순례의 공덕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상 쓰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nbsp성지순례에는 첫째 ‘바깥 구경’, 즉 바깥에 있는 성지를 보는 게 있고요, 둘째 ‘경계에 부딪쳐서 일어나는 자기 마음이 얼마나 죽 끊듯이 시쭉빼쭉 하는지’를 보는 게 있습니다. 자기의 분별심을 늘 살피면서 간다면 아마 순례 중에 깨달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순례를 하면서 바깥에 있는 다양한 것들을 구경하기도 하지만, 경계에 부딪쳐서 아주 다양하게 일어나는 자기 마음을 놓치지 말고 구경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은 더 큰 의미의 성지순례가 될지도 모릅니다.”nbsp이렇게 스님이 직접 재미있게 생활 안내를 해주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을 통해 순례객들이 어떻게 수행을 할 수 있는지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다음은 부처님이 태어나셨던 인도의 기후, 자연, 사회문화, 역사적인 환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문명입니다. 그럼 이 문명의 주체는 누구겠습니까? 인도 대륙에 원래 살고 있던 민족을 흑인 계열의 ‘드라비다족’이라고 하는데, 인더스 문명의 창조자는 이 드라비다족이라고 봅니다.nbspnbspnbsp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에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살던 종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인 계열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힌두쿠시를 넘어서 파키스탄, 즉 인도 북쪽에 있는 펀잡 지방으로 남하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내려와서 서쪽으로 간 사람들을 ‘서아리안’이라고 합니다. 이 서아리안이 중동의 이란 그리고 유럽까지 건너가서 오늘날 유럽 민족이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펀잡 지방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을 ‘동아리안’이라고 합니다. 이 동아리안족이 바로 브라만문명의 창시자들입니다.nbspnbsp이렇게 3,500년 전에 남하해서 내려왔을 때 이 사람들은 원래 유목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 신을 찬미했습니다. 그렇게 ‘찬미’한 여러 가지 노래를 우리가 ‘베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다문명’이 발달했습니다.nbspnbsp그 다음에 이 사람들이 갠지스강 유역의 힌두스탄 평원을 점점 정복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많이 세웠는데, 이 시대를 ‘종교시대’라고 합니다. 종교시대에 들어가서 카스트제도가 정립되었습니다. 신을 찬미하는 브라만계급, 정복을 하는 무사계급인 크사트리아 계급, 목축하고 농사짓고 장사하는 바이샤계급, 즉 평민계급. 그리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렸는데 그 노예 계급을 수드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4개의 계급이 발생하게 됩니다.nbspnbspnbsp그리고 정복이 거의 다 끝나자 제일 한가한 사람들이 무사계급들이 됩니다. 그래서 무사계급에서 많은 사색가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브라만 계급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적인 역할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철학적 사색을 많이 하면서 소위 ‘철학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걸 ‘우파니샤드 철학’이라고 합니다. 가장 핵심 되는 사상은 ‘범아일여설’입니다. 저 우주에 ‘브라만’이라는 신이 있고, 나에게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자아가 있는데, 이 ‘범아’가 하나가 되는 것이 해탈이고 구원이라는 게 ‘범아일여설’입니다.nbspnbsp그 다음에 네 번째 시기가,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입니다. 즉 브라만 사상의 많은 모순이 발생하게 되면서 전통으로 내려온 주류의 브라만들과 브라만사상에 문제제기를 하는 비주류의 사문이 출현했습니다. 혈통으로서의 종교인이 아니고 자기가 선택해서 출가하고 종교인이 되는, 즉 수행자가 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걸 ‘사문류’라 그럽니다. 이렇게 브라만의 가르침에 대해 모순을 많이 제기하면서, 마치 중국의 춘추시대에 출현했던 백가쟁명처럼 온갖 주장이 나오게 됩니다. 유물론을 비롯해서 신을 부정하는 얘기 등등 많은 사상이 나오는데, 이 시기를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라고 합니다.nbspnbsp그러니까 3,500년 전부터 시작된 브라만 문명은 부처님이 출현한 2,600년 전부터 쇠퇴기에 들어갑니다.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 즉 사상적, 정치적으로 굉장히 혼란한 시기, 소위 ‘대혼란의 시기’에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입니다.nbspnbsp부처님이 출현한 당시에 국제질서는 어땠을까요? 지금 지구상에는 UN에 가입한 나라만 200여 개가 되잖습니까. 그 당시 인도 대륙에는 크고, 작은 나라가 300여 개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16개의 대국이 있었고요. 그 중에 초강대국인 ‘G2’가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이었습니다. 마가다국의 수도가 왕사성이고, 코살라국의 수도가 사위성입니다. 부처님은 그 ‘G2’의 수도에서 제일 교화활동을 많이 하신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뉴욕과 베이징에서 주로 활동을 하신 것이고, 또 ‘G7’에 해당되는 런던, 파리, 베를린, 도쿄, 모스크바 등에서도 활동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16대국에 다 다니시면서, 즉 인도의 전 세계를 다니시면서 교화활동을 하신 것입니다.nbspnbsp지금의 인도 지도로 본다면 부처님의 활동 무대는 북인도에 속합니다. 북인도라고 해도 지금의 카슈미르 지역이 아니고, 델리에서 캘거타 사이의 힌두스탄 평원이 주로 부처님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이 지역에는 산이 거의 없고 전부 평원입니다.nbspnbspnbsp제일 위쪽은 히말라야 아래의 룸비니인데,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 바로 히말라야 산 아래에 속하는 카필라성의 룸비니입니다. 거기도 평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50㎞만 북쪽으로 가면 바로 히말라야 산맥이 시작됩니다. 여름엔 저 북쪽으로 히말라야 산맥이 병풍처럼 보였겠지만 실제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은 평지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도를 이루신 보드가야는 데칸고원의 끝자락입니다. 그러니까 200m 내지 300m 높이의 언덕 같은 산이 있는 지역입니다. ‘부처님이 수행했다’고 하는 라즈길이나 보드가야에는 200m 내지 300m의 낮은 산들이 있습니다. 전정각산도 히말라야 같은 산이 아닙니다. 이 두 군데를 빼고, 여러분들이 13일 동안 전인도를 다니시면서 산이라고는 조그만한것도 하나 구경을 못 하고, 대평원만 계속 다니게 되는 겁니다.nbspnbsp부처님은 카필라성의 룸비니, 즉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셔서 남쪽으로 내려가서, 그 당시에 최고의 번성지인 ‘왕들의 집’, 즉 ‘라자그라하’라고 불리는 왕사성에서 스승을 만나 공부를 하셨고, 그곳을 떠나 가야로 와서 6년 수행을 하시다가 성도를 하셨는데 그래서 그 지역은 ‘보드가야’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시국의 바라나시에 와서, 내일 우리가 가게 될 사르나트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드가야 우르벨라촌으로 가서 천 명의 수행자를 교화하시고, 다시 왕사성으로 오셔서 빔비사라왕을 교화하고, 수다타 장자의 초대를 받아 2대 초강대국이었던 사위성의 쉬라바스티로 가셔서 교화활동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성도 후 6년, 출가 후 12년 만에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돌아가셔서 석가족을 위해서 교화하셨습니다. 그렇게 전지역을 다니셨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이런 자연과 역사, 사회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 살면서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글자만 보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이, 그런 질문, 그런 대답이 있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알고 우리가 법을 이해해야 합니다.nbspnbsp우리나라에는 산이 많으니까 이상세계가 ‘산 너머’잖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리랑 고개를 넘는다’고 표현하는데, 인도문화에서는 강폭이 넓으니까 못 건너가잖습니까. 인도인들에게 이상세계는 ‘강 건너 저 언덕’입니다. 그래서 ‘피안’, 즉 ‘저 언덕’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또 ‘저 언덕으로 넘어가는’ 것이 주로 ‘배’로 묘사가 되어서 ‘반야용선’이라는 말도 쓰지요. 그런 용어들이 다 인도의 자연환경과 관계가 있는 겁니다.nbspnbsp스님들이 탁발을 하거나 한 벌의 옷을 입고 사는 문화는 이곳의 기후에서나 가능하지, 한국의 기후에서는 한 벌의 얇은 옷을 입고 추운 겨울을 못 견딜 것입니다. 그러나 남방불교, 즉 남쪽의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같은 따뜻한 나라에서는 인도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복장으로는 살 수가 없어서 승복도 바뀐 것입니다.nbspnbsp저도 여기 와서 있어보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은 인도보다 훨씬 따뜻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열대우림지역이니까요. 그런데 인도는 겨울에 춥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수행자들이 겨울에는 참 추웠겠다’는 걸 알 수 있고요. 또 여기는 안개가 너무 짙게 낍니다. 그래서 안개가 자욱한 속에서 만남이 이루지는 것도 여기 와서 직접 기후를 경험해 봐야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춥다, 덥다”만 하지 말고, ‘이런 기후, 이런 추위와 더위에서 어떻게 지내셨을까?’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nbspnbspnbsp또 여기서는 “박시시”, 즉 걸식을 요구하는 것이 천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지를 굉장히 천하게 보는데, 여기는 공무원도 “박시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러는 게 좀 이상하지만 여기서는 “선의를 베푸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요구한다고 꼭 다 줘야 되는 건 아닙니다. 이런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걸 이해하시면 됩니다. 특히 중국은 이런 것과 상반되는 문화라서, 걸식문화가 유지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절에서 밥을 해 먹게 된 것인데, 남방불교 스님들은 절에서 밥해 먹는 걸 보고 “절이 살림집이냐? 무슨 수행자들이 저러느냐?”고 하는 겁니다. 기후환경과 사회적 배경이 다르면 생활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nbsp부처님이 살았던 자연적인, 시대적인 배경에 대해 풍부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현재 인도에서 불교는 어떤 비중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근세에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무슬림을 믿는 파기스탄과 방글라데시, 힌두교를 믿는 인도, 불교를 믿는 스리랑카로 나뉘어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도 대륙 안에는 무슬림이 약 11, 힌두교가 80, 불교는 0.5, 자이나교도 0.5, 시크교가 한 2, 기독교가 한 2입니다. 그래서 인도는 현재 힌두교 국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불교인들은 동쪽인 버마의 경계지점에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 소수 민족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황인종인데, 그 사람들이 소수민족으로서 소승불교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곳에서는 티벳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여기도 소수민족입니다. 그 다음에 뭄바이를 중심으로 해서 중서부가 마하쉬트라 주인데, 인도 독립의 영웅이라는 천민 출신의 ‘암베드카르’가 힌두교로는 카스트 해방을 못 이끌기 때문에 불교로 개종을 해서 그 카스트 전체가 불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게 200만 명 내지 300만 명이 됩니다.nbspnbsp그래서 인도에는 동쪽의 소승불교, 북쪽의 탄트라, 즉 밀교, 최근에 일어난 신불교, 이렇게 해서 500만 명 내지 600만 명 정도 되는 불교 인구가 있습니다. 이 중에 소수민족들은 별로 힘이 없고, 암베드카르 계열은 정치적 파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계급해방론을 주장하면서 정당도 만들었는데, 그 정당은 인도 내에서 세 번째로 큰 정당으로서 연정을 통해 집권당이 되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지금 인도에서 불교는 거의 소수인데다가 주로 동쪽이나 북쪽에 치우친 소수민족 중심이기 때문에 대륙에서는 거의 보이지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부분의 성지가 다 힌두교의 소유로 돼버렸습니다. 부다가야 대탑까지도 힌두교 소유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불교를 배척하지는 않고, 자신들의 일부로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비쉬누신의 여덟 번째 화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났지만 힌두교와는 완전히 다른,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치적인 가르침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무슬림의 침입을 받고 나서 나중에 힌두교로 흡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오늘은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그 배경이 되는 많은 지식들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인도인들의 행동과 삶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nbspnbsp두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 준 스님에게 순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라고 말하자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출발해 이틀 동안 먼길을 오느라 너무 피곤한 것 같았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강연을 마친 후 순례객들은 숙소로 올라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nbsp내일은 새벽 4시 20분에 일어나 예불과 기도를 각자 숙소에서 한 후 6시 30분에 초전법륜성지인 ‘사르나트’로 이동합니다. 오전에는 사르나트에서 수계식을 하고, 오후에는 강가강을 둘러볼 예정입니다.nbsp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01.10. 45,033 읽음 댓글 30개

2016.1.8 (인도 3일째) 성지순례 A팀 사르나트 순례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성지순례 A팀을 이끌고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인 ‘사르나트’를 순례한 후 강가강을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새벽 5시에 각자 숙소에서 예불과 기도를 마친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은 짐을 싣고 6시 30분에 사르나트로 향했습니다.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아 정문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입장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120여 명의 순례객은 길게 줄을 선 채 향을 하나씩 들고 목탁 소리에 맞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천히 탑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먼저 붓다가 처음으로 법을 설했다고 하는 ‘다르마라지크 수투파’를 한바퀴 돌았습니다.nbspnbsp▲ 붓다가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 다르마라지크 수투파nbsp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탁발을 하기 위해 차례로 줄을 서서 마을로 걸어갔듯이 순례단도 마치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에 왔다는 감격에 벌써부터 눈시울을 붉히는 분들이 보였습니다.nbspnbspnbsp다음은 두 번째로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다메크 수투파’를 세바퀴 돌았습니다. 다메크 수투파는 아주 크고 웅장해서 멀리서도 한 눈에 그 모습이 드러났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순례단의 맨 앞에 서서 탑돌이를 마쳤고, 곧이어 탑을 향해 사시공양 예불이 이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의례적으로 하던 예불과는 정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셨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는 예불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 예불 공양nbsp정성을 다해 머리 숙여 예불을 한 후 스님은 순례단을 위해 발원 및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성지순례단 A팀 모두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성지순례를 마치고 그 공덕을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널리 회향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nbspnbsp순례단이 모두 자리에 앉아 바로 스님의 안내가 이어졌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은 오늘 이곳에서 수계를 받게 됩니다. 성지순례기간 동안 여행객이 아닌 순례자로서, 즉 출가수행자로서 수계를 받고 가사도 받아서 앞으로 예불할 때는 반드시 스님들처럼 가사를 수하고 예불을 하겠습니다.nbspnbsp부처님이 룸비니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육신을 두고 하는 말이고, 정확하게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붓다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우리 중생에게 있어서의 부처님은 바로 이곳에서 처음 설법을 하심으로 해서 출현하게 된 거예요. 중생에게 붓다가 출현한 곳은 붓다가 설법을 하셔서 어리석은 우리를 깨우쳐줌으로써 우리도 붓다가 되는 길을 열어준 이곳 초전법륜 성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서 순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nbsp그리고 부처님께서는 45년간 설법을 하시고 쿠시나가라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붓다는 육신을 버림으로 해서 모든 중생의 가슴 속에 붓다의 씨앗을 심었고, 그 결과 일체 중생이 붓다가 되는 길을 열어놓으셨어요.nbsp붓다는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 자리에 49일간 머물며 깨달음의 기쁨을 즐기셨습니다. 이것을 법열, 즉 법의 기쁨이라고 해요. 법의 기쁨을 즐기신 후에 이 좋은 법을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세상을 둘러봤더니 세상 사람들이 다 어리석음에 둘러싸여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이 좋은 법을 그들에게 전해서 그들 또한 이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도록 해줘야겠다.’nbspnbspnbsp누가 이 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니까 붓다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마지막 스승이었던 웃타카 라마푸트라가 가장 지혜로운 자였어요. 그분이라면 이 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붓다가 신통을 통해서 살펴보니 스승이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 전에 만났던 아라라 까라마라는 스승을 다시 떠올려서 살펴보니 그 분 또한 바로 전날 밤에 돌아가셨어요. 두 분의 스승 모두 이미 돌아가셨기에 법을 이야기하고 나눌 수가 없었어요.nbspnbsp세 번째로 떠올린 사람들이 자기와 함께 6년간 수행했던 다섯 명의 도반들이었습니다. 이 도반들은 붓다가 중도를 발견해서 고행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가자 수행을 포기했다고 단정해서 붓다를 떠났던 이들이에요. 여섯 명이 같이 수행할 때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너무너무 극심한 고행을 성실히 하니까 도반들이 그 모습을 보고 친구이지만 존경했습니다. 그러다 부처님께서 고행을 버리자 모두 실망해서 ‘저 사람은 더 이상 수행자가 아니다’라고 하고는 전정각산을 떠나 이곳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트에 있는 고행림, 즉 시체를 갖다 버리던 시타림으로 왔어요. 당시의 붓다는 자신의 정진에 집중하느라 도반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비판하고 떠났지만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었기에 부처님께서는 법을 전하러 스스로 이곳까지 걸어오셨습니다. ‘사람들이여, 내가 깨달았으니 나에게 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법을 전할 사람을 찾아서 붓다 스스로 이곳까지 오셨어요. 여기까지 오는 길이 250km 가량 되는데 11일 만에 오셨다고도 하고 15일만에 오셨다고도 합니다. 대략 보름 정도를 걸어오셨다고 볼 수 있어요.nbsp부처님께서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한 바라문을 만났어요. 부처님의 자세가 너무나 바르고 원만하니까 바라문이 부처님께 ‘당신은 누구를 스승으로 하는 어떤 수행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고 있지 않소. 나는 원만히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가르칠 스승은 없습니다. 나는 일체를 깨달았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부처님은 사실대로 말했지만, 이 사람에게는 조금 건방지게 들렸는지 ‘흥’ 하며 가버렸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바라문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을 좋은 기회를 놓친 거예요.nbspnbspnbsp부처님이 계속 걸어와서 바라나시에 도착하니 드넓은 강가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뱃사공에게 ‘나를 좀 건네줄 수 있소?’라고 청하니 ‘당연히 건네 드리겠습니다. 다만 저는 먹고 살아야 하니 뱃삯을 주셔야 합니다.’라고 했어요. 가진 게 없어 뱃삯을 줄 수 없다 하니 사공도 건네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강을 뛰어넘어버렸다고 해요. 훌훌 날아서 건너버리니까 뱃사공이 놀라서 기절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라문이 자기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붓다를 보지 못했다면, 사공은 자기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붓다를 알아보지 못한 거예요.nbspnbsp그렇게 바라나시로 오신 부처님은 서쪽문으로 들어가셔서 탁발을 하고 동쪽문으로 나오셔서 바라나시의 북쪽에 있는 사르나트에 도착하셨습니다. 다섯 친구가 수행을 하다가 고타마 싯다르타가 오는 걸 보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기를, ‘저기 고타마 싯다르타가 온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수행을 포기한 사람이니 가까이 오더라도 수행자로서는 예우를 하지 말자’라고 했어요. 요즘으로 치면 같이 출가한 스님 여섯 명이 공부하다가 한 명이 속퇴를 했는데 몇 년 만에 돌아온 것과 같아요. 그러면 옛날의 친구이긴 하지만 절에서 이 사람을 스님으로는 대우할 수 없으니 속인으로 대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출가수행자로서는 예우를 하지 말자고 한 거예요.nbspnbsp출가수행자에 대한 당시의 예우는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먼 길을 맨발로 걸어왔으니 발 씻을 물을 주는 것이고 하나는 앉을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지 말자고 미리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부처님이 가까이 오자 자기도 모르게 한 사람은 일어나서 ‘여기 앉으십시오’ 하고 자리를 권하고, 한 사람은 물을 떠와서 ‘발을 씻으십시오’ 라고 권했습니다. 생각은 예우하지 말자고 했지만 몸은 예우하는 쪽으로 간 거예요. 마음에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는 예우하자고 하면서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생각으로는 하지 말자고 했지만 마음에 이미 6년간 같이 살아온 신뢰가 있으니까 마음이 저절로 움직인 겁니다.nbspnbsp그렇게 자리에 앉으신 부처님께 한 도반이 ‘고타마시여, 신수가 참 좋구려’라고 말을 걸었어요. 요즘 말로 하면 ‘야, 얼굴 좋다’ 이렇게 말한 셈이죠. 좋게 말하면 칭찬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수행 포기하고 맛있는 것 먹더니 좋아졌구나’ 이런 뜻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나를 더 이상 고타마라 부르지 마시오. 나를 여래라 부르시오’ 라고 답했습니다. 친구들이 ‘그러면 당신이 깨달았단 말이오? 그렇게 극심한 고행을 하고도 못 깨달았는데 수행을 포기하고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소?’ 라고 반박하자 부처님께서는 ‘나는 수행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답하셨습니다.nbspnbsp도반들은 부처님의 친구들이었지만 부처님을 믿지 않았어요. 그들은 부처님이 수행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함께 지냈던 지난 6년 동안 내가 한 번이라도 거짓말 한 적이 있소?’ 고타마는 거짓말 한 적이 실제로 한 번도 없었으니 새삼스럽게 거짓말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친구들이 의심을 풀고 ‘그렇다면 당신이 깨달은 그 좋은 법을 우리들에게도 들려주십시오’ 이렇게 법을 청했습니다.nbspnbsp고타마와 도반들이 만난 곳은 여기서 남쪽으로 1km 정도 되는 곳에 있는 영불탑 자리입니다. ‘부처님을 환영한 탑’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환영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환영을 안 한 탑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이름이 영불탑입니다. 부처님은 영불탑에서 1km 정도 더 숲속으로 들어오셔서 아까 본 다르마라지크 스투파가 있던 자리에 앉으셔서 초저녁에 명상을 하셨습니다. 초야에 명상을 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시고, 중야에 즉 한밤 중에는 명상을 풀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도록 하고, 후야에 즉 새벽녘에 비로소 설법을 하셨습니다.nbspnbsp그때 처음 설법한 내용이 중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수행자라면 쾌락과 고행을 둘 다 버리고 쾌락에 대한 집착도 고행에 대한 집착도 모두 놓아야 한다는 거예요. 쾌락은 당시 주류 사회의 수행법이고, 고행은 거기에 반대한 비주류의 수행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 두 가지를 다 버려야 한다, 즉 중도를 행해야 한다는 게 첫 번째 설법이에요. 그리고 그 중도에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이 있다 하여 팔정도를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이 고다苦諦’, ‘이것이 고의 원인이다集諦’, ‘이것이 고의 소멸이다滅諦’, ‘이것이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道諦’라고 하는 사성제를 설하셨습니다. 첫 설법에서 말씀하신 중도, 팔정도, 사성제, 이 세 가지가 불교의 핵심사상이에요.nbspnbspnbsp이 첫 법문을 듣고 다섯 명 중 한 명인 콘단야가 탁 깨달았어요. ‘깨달음의 장’을 하다 보면 앞이 꽉 막혀서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에 탁 깨닫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아요. 콘단야가 깨달아서 얼굴이 환해진 것을 부처님이 보시고 ‘콘단야가 깨달았다 콘단야가 깨달았다’ 하며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가 이 법을 이해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오직 부처님 한 분밖에 이 법을 알지 못했는데 콘단야가 깨달았다는 것은 이 법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을 때보다 더 기뻐하셨다고 해요.nbsp콘단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스승으로서 예우한 거예요. 원래 다들 친구였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승으로서 예우하는 모습을 보고 깨닫지 못한 네 명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마치 ‘깨달음의 장’에서 깨달은 이의 대답을 듣고 못 깨달은 사람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nbspnbsp그렇게 3일 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두 명이 또 깨달았어요. 3일 내내 공부에 집중한 거예요. 깨달은 세 명이 탁발을 하고, 부처님과 나머지 두 명은 계속 더 정진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3일 만에 나머지 두 명이 더 깨달아서 1주일 만에 다섯 명이 다 깨달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nbspnbsp그래서 이곳에서 삼보가 성립되었습니다. 보드가야에서 스스로 깨달은 이 붓다가 나왔고, 이곳 사르나트에서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이를 위해 가르침을 편 담마가 나왔고,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은 상가가 구성되었어요. 그냥 머리 깎고 스님이 되면 상가가 되는 게 아니에요.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야 상가의 구성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깨달은 이 붓다,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해주기 위한 가르침인 담마,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서 이루는 상가, 이렇게 불법승 삼보가 성립되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불교에서 최고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불법승 삼보입니다. 붓다, 담마, 상가 중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수 없습니다. 상가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붓다 혼자만 깨닫고, 붓다의 가르침을 들어서 깨달음을 얻은 이가 아무도 없다면 우리 역시 공부해봐야 헛수고잖아요. 그러니 붓다, 담마, 상가 이 세 가지가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 불법승 삼보가 바로 여기에서 성립되었습니다.”nbsp성지에서 듣는 스님의 법문은 그 감동이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뱃사공은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바라문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부처님의 법을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많은 대중들이 공감을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같은 이유로 부처님의 법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야사 등 청년 55명의 출가와 전법 선언, 최초로 재가수행자가 된 구리가 장자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사르나트 성지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다함께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경전에는 바라나시 사르나트에서 일어난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자세히 듣고 나서 그 일이 있었던 현장에 직접 와서 읽으니, 한 구절 한 구절이 정말 가슴으로 다가왔습니다.nbspnbsp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는 부처님 당시에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며, 또 성지에 온 감흥을 편안하게 지켜보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도 고요히 선정에 들었습니다.nbspnbspnbsp몇몇 분들에게 물어보니 명상을 하면서 ‘언제 또 이곳에 다시 와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감정이 북받쳤다고 합니다.nbspnbsp동이 틀 무렵에 법회를 시작했는데 벌써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날이 밝아져 있었습니다. 스님이 순례객들에게 “배고파요? 밥 먹고 수계식을 할까요? 지금 바로 수계식을 할까요?” 라고 물어보자 다들 이구동성으로 “밥 먹고요” 라고 대답했습니다.nbspnbsp탑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으로 모두 이동해 조별로 돗자리를 깔고 앉아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어제밤 숙소에서 미리 해놓은 보온밥통에 담긴 밥과 한국에서 가져온 깻잎, 김치, 고추장 등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nbspnbspnbsp이어서 수계식이 열렸습니다. 이곳 바라나시에서는 야사라는 젊은 청년이 출가를 했고, 야사의 아버지도 야사를 찾으러 왔다가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면서 최초로 삼귀의 오계 수계를 받은 재가수행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최초의 삼귀의 오계 수계식이 열린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 한국에서 온 160여명의 순례객들 또한 수계를 받게 된 것입니다.nbspnbspnbspnbsp가사와 바랑을 모두에게 나눠준 후 스님은 순례객들에게 “이제 진짜로 수행승이 된 것 같네요” 하며 웃었습니다. 특히 앞모습은 조금 부족해 보여도 뒷모습은 아주 가지런하고 정돈되어 보였습니다.nbspnbspnbsp수계식을 여법하게 마치자 이제 160여 명의 수행자가 탄생했습니다. 스님은 가사를 수한 순례객들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다시 한번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승려생활이라고 해도 12일 정도 밖에 안 돼요. 그 정도야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요?”nbsp“예” nbsp“이제 먹고 입고 자는 건 잊어버리고 편안하게 성지순례를 하십시오. 상카시아에 가서 마칠 때 출가수행자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사람은 저와 함께 가고, 집으로 가겠다는 사람은 그때 가사를 반납하면 됩니다. nbspnbspnbsp이튿날 아그라에 갈 때는 가져온 좋은 옷이 있으면 한나절 관광할 때 입을 수 있게 봐줄 거예요. 그러나 그 외의 일정 중에는 모두들 수행자로서 항상 가사를 수하고 스님과 똑같이 생활해야 합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스님과 신도가 따로 없고 출가수행자, 재가수행자 이렇게 수행자만 있었습니다. 우리는 재가수행자로서 여법하게 순례를 해보겠습니다.”nbsp가사를 수한 160여 명의 수행자들은 큰 박수와 큰 목소리로 12일 동안 수행생활을 해볼 것을 다짐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오전 내내 초전법륜성지인 사르나트에서 시간을 보낸 후 마지막으로 스님은 각 차량별로 선주 법사님, 덕생 법사님, 자광 법사님의 안내에 따라 주변을 더 자세히 둘러보라고 하면서 이곳 주변에는 어떤 건물들이 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왼쪽으로 보이는 절과 탑은 불교가 아니라 자이나교의 것입니다. 불교가 없어지고 그 자리가 비어 있으니까 자이나교가 자기들 성지라며 절을 지어버린 거예요. 이제 세월이 오래 됐으니까 어쩔 도리 없이 자이나교의 것이 되었습니다.nbspnbspnbsp이 뒤쪽은 1800년대 말, 즉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아나가리카 담마팔라’라는 스리랑카 사람이 복원한 절입니다. ‘아나가리카’는 출가 스님이 아니라 재가 법사를 뜻해요. 이 분은 ‘마하보디 소사이어티’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평생을 인도성지 복원운동에 바쳤습니다. 저기 보이는 허물어진 절터가 부처님이 머물렀던 자리에 세워졌던 물간다쿠티예요. 담마팔라는 유적지는 그냥 놓아두고 그 옆의 빈터에 물간다쿠티를 다시 복원했어요. 복원한 절을 새로운 물간다쿠티라고 해서 ‘나야 물간다쿠티’라고 부릅니다. 신 녹야정사라는 뜻입니다.nbspnbsp이 담장 너머는 마하보디 소사이어티가 관리하는 땅이고, 저기는 자이나교에서 관리하는 땅이고, 여기는 지금껏 버려져 있다가 최근에야 인도 정부가 울타리를 치고 복원해서 입장료를 받고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에는 울타리도 없이 버려져 있어서 주변의 외국 절들이 조금씩 청소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요즘 인도 경제가 조금 좋아지면서 성지 정비를 활발히 하는 편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전부 그냥 버려져서 도굴도 많이 당했어요. 우리 같은 순례객이 오면 온갖 걸 들고 와서 사라고 하는데 대부분은 모조품이지만 개중에는 진짜도 꽤 있었어요. nbspnbspnbsp아직도 문화재가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 이유는 첫째, 인도에는 문화재가 너무 많아요. 둘째, 인도는 현재 힌두교 국가니까 불교에 대해서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국가 신앙이 아니라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는데, 이제는 인도가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대표적인 것이 불교가 되다 보니 최근 들어 유적복원사업을 비롯한 불교문화 진흥사업이 크게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또 불교 신자들의 인도순례가 워낙 많고 특히 인도와 외교적으로 밀접한 스리랑카, 태국 등 주위의 동남아 국가들이 대부분 불교국가여서 지금은 불교에 굉장히 우호적입니다.nbspnbspnbsp현재 불교 성지의 대부분은 다 힌두교 소유입니다. 불교가 없어진 뒤 그 유적들을 다 힌두교에서 차지하고 관리해왔기 때문이에요. 내일 방문할 부다가야 대탑도 소유주는 힌두교입니다. 돌려달라고 계속 싸운 결과 지금은 이사회가 불교인 4명, 힌두교인 5명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래도 위원장은 힌두교인입니다. 우리가 보시금을 내면 탑 관리에 쓰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힌두교에 소유권이 있어요. 그런 형편을 염두에 두고 둘러보시면 되겠습니다.”nbsp부처님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지만 그동안 관리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다섯 생애는 인도에 태어나겠다는 원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왜 스님이 자주 하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인도에 다시 새롭게 불교가 꽃피우길 기원해 봅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수계식을 모두 마친 후 다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평생 동안 딱 한 장만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위해 모두 가지런히 줄을 맞춰 섰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스님은 조별로도 사진을 nbsp함께 찍어 주었습니다. 스님과 일대일로 사진찍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개인 사진은 쉬라바스티에 가서 찍어주겠다고 하자 모두들 안심하고 즐겁게 조별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법사님들이 차량 한 대씩 맡아서 성지 주위를 안내했고, 스님도 차량 한 대를 맡아서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승단 안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 판결을 하던 곳,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자리 바로 옆에 세워진 물간다쿠티, 아쇼카왕이 이곳은 부처님의 성지임을 기념해서 세운 아쇼카 석주, 최초로 설법한 자리인 다르마라지크 스투파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분쟁을 조정하던 법정nbsp▲ 물간다쿠티nbsp▲ 아쇼카 석주nbsp사르나트를 나와서는 자이나교 사원을 지나 신물간다쿠티로 향했습니다. 참배할 사람들은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참배를 하고, 나머지는 스님을 따라 뒤쪽 사르나트 동물원 주위를 따라서 산책하면서 담마 팔라 전법사의 기념탑을 먼 발치서 바라보았습니다.nbspnbsp신물간다쿠티 주변에는 아쇼카트리가 아주 많았습니다. 마야부인이 산기를 느끼고 이 아쇼카트리를 잡고 부처님을 낳았다고 하지요. 인도에 직접 오니 경전에 등장하는 나무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nbspnbsp▲신물간다쿠티 주위에 빼곡이 늘어선 아쇼카트리nbsp이렇게 사르나트 순례를 모두 마치고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영접한 곳에 세워진 영불탑을 참배했습니다. 보통 앞면과 옆면만 보고 나오는데, 스님의 안내 덕분에 보수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뒷면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영불탑nbsp다음은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 강가강은 인도인들이 가장 신성시 여기는 강입니다.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고 있고, 사람이 죽으면 강가에서 화장을 해서 이 강에 뿌리기도 합니다.nbspnbsp강가강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무척 복잡하고 많은 인파로 붐벼서 산스크리트대학 앞에 버스를 주차하고, 순례객 모두 자전거릭샤를 타고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 오토릭샤, 자전거릭샤, 오토바이, 승용차, 인력거, 각양 각색의 버스, 도로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소, 온갖 운반 수단이 뒤엉킨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먼저 가서 배를 예약하려고 오토릭샤를 탔는데, 오토릭샤가 강가강 가까이에 진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버려서 결국 한참을 걸어야 했습니다.nbspnbspnbsp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30명, 40명씩 배를 한 대씩 타고 출발했습니다.nbspnbsp▲ 강가강nbspnbsp4대의 배가 모두 출발이 되자 스님은 강가 강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강 주변에는 목욕을 할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놓았습니다. 물이 내려가면 내려가는 대로 내려갈 수 있고, 물이 차면 차는 대로 또 올라갈 수 있어요. 우기에는 계단이 없는 저 위쪽까지 물이 차올라서 강이 바다처럼 보여요. 바라나시 앞을 흐르는 강가강은 야무나 강과 강가강 두 개가 합쳐져서 흐르는 거예요. 바라나시 위쪽의 알라하바드에서 합쳐져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파트마에 가면 그하그라하강과 간타키강과 숀강까지 네 개의 강이 합쳐집니다. 지금은 낮이라 보이지 않지만 밤에는 여기서 횃불을 피워놓고 브라만들이 ‘뿌자’라고 하는 전통 제사를 많이 지냅니다.nbspnbsp인도 사람들은 여기서 목욕을 하면 죄가 다 없어진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손을 담그면 나중에 손만 천국에 가요.” nbspnbsp“입만 담그면요?”nbsp“그럼 입만 천국에 가요.” nbspnbspnbsp스님의 유머에 순례객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스님이 설명을 하고 있는데, 과자를 파는 어린 아이가 와서 스님에게 과자를 좀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스님이 얼마냐고 묻자 아이는 10루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10루피를 주면서 2개를 달라고 하자 아이는 손사래를 치면서 1개만 주었습니다. 스님이 “장사 잘하네” 하며 웃자, 순례객들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nbspnbsp스님은 과자를 사주면서 아이에게 갈매기를 불러 모아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신이 난 듯 “아오”, “아오”를 크게 외치자 순식간에 갈매기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즐거움을 선사해 준 아이에게 모두 환호를 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배가 다시 방향을 틀어 계속 가더니 드디어 화장터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스님의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저기 가면 대나무를 두 개 걸친 사이에 또 작은 대나무를 걸치고 그 위에 시신을 얹는 걸 볼 수 있어요. 그걸 두 명, 혹은 네 명이 메고 여기 가져와서 물에다 한번 적셨다 건져서 불에 태워요.nbspnbsp▲ 계단에 황금색 천으로 덮어진 것이 시체nbsp시신을 덮은 저 황금빛 천이 분소의입니다. 분소의는 떨어진 옷, 즉 헌 옷의 개념이 아니에요. 시신을 덮었던 부정한 옷이라고 해서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거지조차도 손대지 않고 버립니다.nbspnbsp여기 나무 많이 재놨잖아요. 저렇게 시신을 태워요. 저기 계단에 갖다 둔 시신이 보입니까? 여기 버려둔 것 같은 대나무 두 개를 사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시신을 얹어서 오는 거예요. 위에 덮은 저 옷이 분소의예요. 저기 보여요? 다리가 불에 타다가 뚝 떨어진 게 있으면 대나무를 써서 거두어 올리기도 합니다. 화장이 끝나면 불을 물로 대충 끄고 강에다 집어 넣어버려요. 몸의 일부가 덜 탄 것은 갈매기들이 파먹어요.nbspnbsp자, 돌아가신 영가들을 위해 나무아미타불 10번만 하겠습니다.”nbspnbspnbsp스님의 제안에 따라 모두들 합장하고 아미타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염했습니다.nbspnbsp“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왕생극락 하옵소서.”nbspnbsp웃고 즐기던 마음도 순간 숙연해졌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죽음도 그냥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nbspnbsp이렇게 강가강을 둘러본 후 다시 복잡하게 얽힌 도로 위로 나왔습니다. 시간 여유가 좀 생겨서 조별로 삼삼오오 흩어져 길가에서 짜이 한 잔 씩을 사먹었습니다. 스님도 법사님들과 함께 골목길로 들어가 라시 한 잔을 사먹었습니다.nbspnbsp▲ 라시 가게nbsp라시는 요플레와 맛이 비슷했습니다. 라시를 담았던 토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가게 주인이 땅바닥을 가르켰습니다. 여러 번 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쉽지만 인도인들의 문화에 그냥 순응해 봅니다.nbspnbsp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바루나강을 건넜습니다. 다리를 건너며 스님은 “이 강이 바로 야사 비구가 신발을 벗어 놓고 부처님께로 건너갔다는 바로 그 강입니다.” 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특히 청년들은 다리 위에 잠시 멈춰 서서 출가를 고민하던 야사 비구를 생각하며 잠깐 사색에 잠겨 보기도 했습니다.nbspnbsp▲ 바루나강nbsp숙소로 돌아와서 세면과 휴식을 취한 후 저녁 6시 30분부터 다시 스님의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에는 스님이 모든 성지를 안내하지 않고 시작할 때 바라나시 일정과 마지막에 쉬라바스티 일정만 안내합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부처님의 일생 전체와 이번 성지순례 코스 전반에 대해 스님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한국에서 인도로 출발하기 전날 연이어 아홉 번의 미팅을 가지면서 몸에 무리가 많이 갔는데, 그래서 그런지 어제부터 몸살기운과 함께 편두통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목 뒤에 파스를 붙인 채 강연을 계속 했습니다.nbspnbspnbsp부처님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 모습은 어떠했는지, 부처님은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는지, 그 가르침은 무엇이었는지, 10대 성지를 순례할 때 각 성지마다 꼭 알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 성지순례를 통해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약 두 시간 동안 설명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사회적 실천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정토회의 모습이 부처님의 삶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석가탄신일 즈음 BBC에서 방영한 부처님의 생애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명상이며 개인의 깨달음에 관련된 내용이 많았습니다. 서양 사람들도 그런 쪽으로 많이 수행하고 있는지 소승불교화된 느낌이 들고, 사회 변화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nbspnbsp정토회는 대승불교의 맥을 이었기에 평화재단이며 JTS 등의 사회활동 기구를 두고 사회변화를 위한 활동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이나 상가가 어떤 재단을 만든 것도 아니고 그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조직적인 활동을 한 것 같진 않습니다. 개인의 수행을 강조하는 소승불교적인 모습과 우리가 지금 하는 활동을 비교해본다면 어떤 것이 그 당시의 모습에 가까울지 궁금합니다.”nbsp“사회적인 비판의식은 그것을 가진다고 해도 오래 가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아져서 왕과 귀족들도 모두 불교를 믿어서 불교가 기득권화 되면 자연히 변질이 일어납니다. 기독교도 그래요. 기독교는 원래 가장 가난한 자들이 중심이 된 민중해방적 신앙인데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완전히 기득권화 되었어요.nbspnbspnbsp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여성 해방을 주장하셔서 비구니제도를 두었지만,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500여 년 만에 인도에서 비구니제도가 없어졌어요. 인도의 전통문화에서는 여자는 해탈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해탈할 수 없는데 출가해서 무엇 하겠어요? 여자는 일단 죽어서 다음 생에 남자부터 된 뒤에 출가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설령 부처님 당시에 워낙 남녀 차별이 심해서 여성출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여성출가를 허용해야 해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여성출가를 허용했는데 오늘날 남방불교에서는 여성출가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게 전통이기 때문이에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본받아온다고 하면서도 이런 문화적인 측면에는 굉장히 비불교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겁니다.nbsp달라이 라마로 대표되는 티벳불교는 굉장히 종교적으로 훌륭하고 인격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죽어서 환생한다고 하잖아요. 환생을 정말 한다면 모든 사람이 환생해야 말이 될 텐데, 일부 몇 명만 환생한다고 합니다. ‘린포체’는 ‘환생자’라는 뜻인데, 3천 명 정도만이 환생했다고 인정받습니다. 왕의 아들이면 무조건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듯이, 환생자라고 확인된 사람은 일반인과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3천 명의 환생자 중 여자가 한 명도 없어요. nbspnbspnbsp그런 건 부처님의 가르침인 담마가 아니라 문화라고 볼 수 있겠죠. 불교와 힌두교가 섞이면서 나온 하나의 고유한 신앙체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전세계를 다니며 활동하는 지성인이지만, 그들의 교리 중에는 이런 모순이 있어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는 모순이 없지만 이렇게 신앙화되면 모순이 생겨요. 남방불교에도 여성출가를 불허한다는 모순이 있고, 티벳 불교에도 환생자 중 여자가 없다는 모순이 있습니다. 이렇듯 현실에서 그분들이 훌륭하다고 해서 다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nbspnbsp부처님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조직을 실제로 만들지는 않으셨어요. 그렇다고 사회를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로히니 강을 경계로 둔 꼴리족과 석가족이 물 때문에 전쟁을 할 뻔 했을 때 부처님이 직접 가셔서 ‘물이 귀하냐? 피가 귀하냐?’라고 말리신 적이 있습니다.nbspnbsp또 아자타사투 왕이 밧지족과 전쟁 준비를 할 때 승패가 어떻게 될지 부처님께 묻자 그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밧지족이 민주화되어 있는 나라인가’를 물어보면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 7가지 법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걸 들은 왕이 밧지족은 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아서 전쟁을 일으키려던 마음을 접었습니다. ‘전쟁 하지 말라’ 이런 말씀을 직접적으로 하진 않으셨지만 이렇게 전쟁을 막으셨어요.nbspnbspnbsp석가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코살라국의 왕이 군사를 앞세우고 쳐들어 올 때는 그 길목에서 세 번이나 뙤약볕에 앉아 요즘 말로 하면 단식 농성을 하셨어요. 그러나 세 번째에도 그걸 짓밟고 가려고 했을 때 저항은 하지 않으셨습니다.nbspnbsp그리고 남녀차별이나 계급차별 같은 문제에 대해 굉장히 단호하게 대응하셨습니다.nbspnbsp이런 예들을 보면 부처님은 사회의 평등의식과 인권의식을 분명히 갖고 계셨지만 그걸 정치 운동화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승불교가 너무 개인적으로 흐르다 보니까 이건 불교의 근본에서 벗어난 게 아니냐고 해서 좀 더 사회 실천적인 요구를 한 게 대승불교의 흥기입니다.nbsp그러니 첫째, 가르침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최대한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여성출가를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부처님이 허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안 해야 할까요? 부처님이 당시에 허용하지 않으셨다 해도 우리는 해야 할까요?”nbsp“해야 해요.”nbspnbsp“그래요. 부처님의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것이 설령 평등하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적 조건에서는 실현하지 못 할 게 있고, 오늘날 실현할 게 있기 때문입니다. 꼭 여성에 대한 사례가 아니더라도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을 두루 살펴서 부처님이 평등성을 갖고 계셨는지 여부를 봐야지, 부처님이 그 때 안 하셨다고 무조건 지금도 안 해야 한다는 건 옳지 않아요.nbsp인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으면 동쪽으로 가라고 하지만, 춘천 사람이 물으면 서쪽으로 가라고 해야 해요.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동해 바다에 빠져 죽으니까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 찾아와 물어본 춘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경전에는 동쪽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소승과 대승의 서로 다른 입장이 나오는 거예요. 경전에는 ‘동쪽으로 가라’라는 기록뿐인데 춘천 사람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가 딜레마입니다.nbspnbsp그래서 소승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율에 더해 ‘논’이라는 게 있습니다. 경율론 삼장이라고 하잖아요. ‘부처님이 인천 사람에게 동쪽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춘천 사람에게는 곧 서쪽으로 가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줘야 해요. 이게 ‘논’입니다. 아무렇게나 해석하면 안 돼요. 예컨대 북쪽으로 가라는 뜻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오신다 해도 똑같이 말씀하실 정도로 정확도가 있어야 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보디사트바, 즉 보살의 지위에 오른 이가 설명해야 ‘논’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nbspnbsp이렇게 설명하는 게 소승의 논이라면 대승불교인들은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춘천 사람이 부처님께 서울 가는 길을 물었더니 부처님께서 서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라고 기록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소승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지금까지 본 경전 중에 그런 말이 없었으니까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걸 대승비불설이라고 해요. 그런데 대승은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당연히 춘천 사람에게는 서쪽으로 가라고 하시지 않겠느냐? 그러니 굳이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없이 서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해도 괜찮다’라는 입장입니다. 이것이 소대승의 불설8231비불설 논쟁입니다.nbspnbsp‘글자를 넘어버리면 바로 서쪽이라는 답이 나오는데 뭘 그깟 글자에 매여서 그러느냐?’ 이것이 대승의 주장이에요. 그래서 동쪽이라는 언어에 집착하지 말라, 즉 법집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면서 ‘공’을 이야기합니다. 반면 소승은 부처님이 하시지 않은 말을 대승이 마음대로 지어내어서 한다고 해서 ‘대승비불설’을 주장하기에 서로 논쟁이 됩니다.nbsp역사적 사실이 어떤지를 굳이 하나하나 따져서 비교한다면 소승의 이야기가 맞고, 큰 틀에서 철학적으로 본다면 대승의 이야기가 틀리지 않습니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제가 정토불교대학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그걸 해석해서 여러분들의 생활에 적용시켜 이야기한다면 소승의 방식입니다. 지금처럼 그냥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교리니 뭐니 하는 설명 없이 바로 이야기하는 즉문즉설은 대승의 방식이에요. 다만 대승의 문제는 자기 이야기라고 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 그 말을 부처님이 했다고 말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야 그냥 제 수준에서 하니까 논쟁거리가 안 되지만, 스님이 말해놓고는 부처님이 했다고 해버리니까 논쟁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겠지요.nbspnbspnbsp그러니 ‘소승이냐, 대승이냐’보다는 ‘그게 진실이냐’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좋겠습니다. 자꾸 대승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접근하면 모순이 생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믿음의 측면에서 대승을 받아들이면 현장에 왔을 때 모순이 생깁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는 말을 정말로 했는지 따져서 접근하면 모순이 되지만, 그것을 상징적 언어로 받아들여 접근하면 모순이 없듯이, 대승의 가르침은 ‘그것이 진실이냐’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분별하면 됩니다. ‘실제로 그 말을 썼느냐, 안 썼느냐’를 자꾸 따져서 접근하면 모순이 생겨요.”nbsp정토회에서 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 활동이 부처님의 삶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질문한 청년은 아주 만족해 하며 자리에 앉았습니다.nbspnbsp이 외에도 질문을 하고자 하는 분들이 더 있었지만 스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일찍 강연을 마쳤습니다. 그럼에도 순례객들은 아픈 몸으로도 많은 법문을 설해 준 스님에게 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성지순례 둘째날 일정을 모두 마친 후 순례객들은 숙소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은 내일 새벽 4시 20분에 기상해서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한 전정각산 아래에 세워진 수자타아카데미로 향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보드가야 대탑 참배를 시작으로 법사님들과 함께하는 12일 동안의 성지순례를 시작합니다.nbspnbsp스님은 내일 다시 바라나시 공항으로 나가서 성지순례단 B팀을 마중한 후 저녁에는 입재식 강연을 해줄 예정입니다.nbsp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01.09. 66,608 읽음 댓글 57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