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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 (인도 17일째) 아그라, 성지순례 정리 강연
nbsp안녕하세요? 인도에서 맞이하는 17일째 아침입니다.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을 이끌고 아그라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송수신기에서 들려오는 유수 스님의 새벽예불 소리에 맞춰 각자 숙소에서 기도를 마친 성지순례단은 6시에 버스에 탑승하여 상카시아를 출발했습니다. 원래 6시 30분에 출발 예정이었으나 대중들이 6시에 모두 탑승을 완료하는 바람에 30분 일찍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새벽 5시부터 짐을 다 챙겨서 버스 앞에 가져다 놓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스님은 “좋아요. 한국에 돌아가시면 기도도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셔서 꼭 챙겨 하세요” 라며 웃었습니다. 내일 모레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잠을 설친 사람들이 많았나 봅니다.nbspnbsp상카시아에서 아그라로 가는 길은 안개가 자욱해서 버스도 가다서다를 반복했습니다. 인도의 겨울 날씨는 이렇게 항상 안개가 짙어서 특히 기차의 경우 6시간 이상 연착되는 것은 기본입니다.nbspnbsp▲ 안개가 자욱한 도로nbsp11시가 다 되어서 아그라의 외곽에 다달았을 무렵 스님은 이제 30분만 더 가면 아그라 성에 도착한다고 알려주면서 아그라, 아그라 성, 타지마할, 인도의 역사 전반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아그라는 인구가 100만명 정도 되고요. 인도의 근대 왕조였던 무굴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무굴제국의 왕궁이었던 아그라 성이 유명하고요. 또 여러분들이 잘 아는 타지마할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리고 무굴제국을 완성시킨 사람이 악바르대제인데요. 악바르대제의 무덤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4050km 나가면 악바르대제 때 새로운 왕궁을 건설했지만 30년 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했던 시켄드라바드 유적지도 있습니다.nbspnbsp▲ 아그라성nbsp오늘 우리가 가는 아그라성은 악바르대제 때 지은 겁니다. 야무나강의 서쪽 면에 지어져서 동쪽 면은 야무나강을 해자로 하고, 성벽을 높이 쌓아서 그 안에 궁궐을 지었습니다. 1565년에 짓기 시작해서 1573년에 완공을 했다고 하니까 8년 내지 9년 걸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역사와 비교하면 시기는 한 100년 앞서지만 악바르대제는 청나라의 강희제와 비슷합니다.nbspnbsp악바르대제의 뒤를 이은 사람이 ‘자한 기르’이고요. 자한 기르 때 영토가 더 넓어졌고, 자한 기르 다음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타지마할을 만든 ‘사자한’입니다. 사자한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 영토를 더욱 더 넓히고 선정도 많이 베풀었다고 해요. 그런데 부인을 워낙 사랑해서 그 부인을 위해서 무덤을 만든 것이 타지마할입니다.”nbsp야무나 강을 건너자 곧바로 높게 솟은 붉은 성벽으로 이루어진 아그라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nbspnbsp아그라성 앞 주차장에 버스를 정차시키고 모두 내려서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제밤 숙소에서 미리 해 둔 전기밥통의 밥과 반찬으로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아그라성을 구경하러 들어갔습니다.nbspnbsp▲ 아그라성 앞에서 점심 식사nbsp대중들이 아그라성을 관람하는 사이 스님은 먼저 숙소로 돌아와 저녁 프로그램 준비 상황을 점검한 후 원고 교정 등 업무를 보았습니다.nbspnbsp대중들은 오후 3시에 숙소로 들어와 조별로 성지순례 소감문 작성과 소감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15일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직접 글로 쓰며 다시 정리해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nbspnbsp오후 5시에는 강당에 모여 조별로 한 명씩 소감문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총 12명을 각 조를 대표해서 발표를 했는데, 각기 느낀 점이 정말 다양했습니다.nbspnbsp▲nbsp소감문 발표nbspnbsp스님은 대중들의 발표를 유심히 경청하며 틈틈이 메모를 했습니다. 발표가 모두 끝나자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을 언급해 주면서 모두가 다시 한번 명심했으면 하는 부분은 자세히 설명을 보태주었습니다.nbspnbspnbsp특히 길거리에서 극빈자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 것과 관련해서 부처님의 ‘사문유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더 유심히 살펴볼 것을 강조했습니다.nbspnbsp“인도의 빈곤 실태를 보면서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여러분들도 동참하겠다는 마음을 냈다는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이번 여정에 캘커타가 안 들어갔는데 제가 인도에 처음 왔을 때는 캘커타로 들어왔어요. 캘커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빈곤 도시 중 한 곳이어서 인도 중에서도 구걸하는 사람이 특히 많은 편이에요. 그 때는 방 하나에 200루피 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주로 묵었는데, 한번은 인도 전통 무용 공연을 보러 캘커타 시내에 있는 5성급 호텔에 갔었어요. 그런데 안에 들어가니 궁전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릇도 전부 금빛이고, 건물 안은 죄다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수영장도 있고, 야자수도 무성했어요.nbspnbspnbsp그런데 호텔을 들어갔다가 나오면 바로 호텔 입구에서부터 장애가 있는 걸인들이 엎드려 있거나 동전통을 끌고 기어다닙니다. 저는 거기서 사문유관을 봤어요. 부처님이 왕궁에 있다가 왕궁 밖에 나갔을 때 대면했을 정황이 너무나 절실히 다가왔습니다.nbsp한 소년이 이런 정황에 부딪혔을 때 인간의 생각은 결국 두 가지로 흘러가요. 하나는 ‘내가 저런 꼴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겁니다. 이게 지금 우리들이 따르는 세속의 길이에요. 결국은 경쟁에서 이기는 거예요.nbspnbsp또 다른 하나는 ‘함께 행복해지는 길이 뭘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타마가 처음에 궁 밖으로 나가서 농경제에 참여했다가 농부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저들의 불행 위에 나의 행복이 있구나’ 하고 자각했지만,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해결 방법을 부모님이나 스승님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답을 못해 주었기 때문에 그게 고뇌가 되었어요. 그것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 게 사문유관이 아니었나 해요.nbspnbspnbsp경전을 읽어보면 고타마가 마주친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의 묘사가 아주 구체적입니다. 늙었는데 보호받지 못하고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사람, 즉 가족과 일가 친척이 모두 떠나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모습, 턱은 숨에 차고 가래가 끓고 눈이 안 보이고 다리가 떨리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요. 당시에는 노예가 늙어서 쓸모가 없으면 갖다 버렸잖아요. 병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길거리에 버려진 행려자의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도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죽은 시신이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모습이에요.nbspnbsp그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90가 노예였어요. 민주정치를 꽃피웠다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시민은 1020이고 나머지는 모두 노예였으니까요. 지금도 인도에서 상위 카스트라고 하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가 전 인구의 15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상위계급이 자꾸 늘어나게 마련인데, 늘어난 게 15라고 하니 그 당시에는 10도 안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nbsp이런 것을 인도에 와서 직접 보고 느꼈기 때문에 저는 부처님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이 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책에서 ‘사람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이런 식으로 좀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배워요. 그런데 호텔 앞에서 제 나름의 사문유관을 경험하면서 사춘기의 소년이었던 부처님이 어떤 사유를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고뇌하다가 결국은 모순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극복하는 쪽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가셨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nbspnbspnbsp오늘날 여러분이 한국이나 미국, 독일, 일본에 살다가 여기 들어오면 그게 바로 사문유관인 거에요. 여러분들이 사는 나라가 궁궐이고, 여기 도착하면 성 밖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국에 있다가 여기 오면 부처님이 성문 밖을 나갔을 때 받았던 혼란과 충격을 직접 경험해보게 되죠. 그러니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사문유관을 다시 읽어보셔야 해요. 그냥 ‘동문으로 나가서 늙은 사람을 보았다’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늙음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고 병든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잘 살펴보세요.nbsp이처럼 사문유관을 확실하게 체험해야 붓다의 출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출가가 확실히 이해돼야 불법을 이해한다고 볼 수 있어요. 왕위를 버리는 출가 없이 우리가 불법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nbspnbsp그 대표적인 예가 위제희부인이에요. 위제희부인도 부처님 법문을 듣고 엄청나게 좋아하며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던 독실한 불교 신자였어요. 그런데 그 때의 불교는 불교가 아니었어요. 위제희 부인은 남편이 왕이고 아들도 왕이 될 사람이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였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남편과 아들이 왕위를 두고 싸우는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둘이 싸우면 하나는 이기고 하나는 질 수밖에 없잖아요. 남편이 이기면 아들이 죽고, 아들이 이기면 남편이 죽어요. 이 세상 어떤 여자도 그런 고통을 겪는 여자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가 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제일 행복하지도 않지만 제일 불행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어중간한 게 원래 좋아요. nbspnbspnbsp위제희부인이 이 모순을 알기 전에 알았던 불법은 불법이 아닌 거예요. ‘아, 부처님 말씀 참 논리적이다, 합당하다, 부처님 인격이 훌륭하시다’ 하고 자기 행복에 겨워서 그저 좋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그 모순에 딱 처하자 위제희부인은 ‘나는 이 세상이 싫습니다. 이런 괴로움이 더 이상 없는 세상을 원합니다’라고 했어요. 그 내용이 기록된 경전이 ‘관무량수경’입니다.nbspnbsp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도 6년 고행을 하셨어요. 이렇게 일부러 고생도 하는데, 우리가 일부러 고생할 필요도 없이 그냥 주어지는 고생이야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인생, 주어진 고행을 굳이 피할 필요가 없어요. 부처님은 왕위를 버리고 일부러 그 길을 가셨는데, 우리는 왕위가 주어지지도 않았으니 버릴 것도 없잖아요. 얼마나 쉬워요? nbspnbspnbsp인생의 고뇌를 알려면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보고,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고생도 해봐야 하는데 저절로 아이가 말을 안 들어주잖아요. 인생을 경험하려면 일부러도 고생을 해 볼만한데 공짜로 주어지는 것을 굳이 피할 필요가 없고, 그걸 갖고 ‘죽는다, 산다’ 야단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nbsp이것이 재앙이 곧 복임을 아는 거예요. 한편으로 보면 재앙이고 불행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사실은 복이고 행복이에요.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느냐에 따라서 재앙이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합니다.nbspnbsp‘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외우기는 쉽지만 그걸 경험하기는 쉽지 않아요. 우리가 불경과 교리를 공부해도 해탈이 안 되는 이유는 신해행증 중에서 해, 즉 이해할 뿐이지 그것을 경험해서 증득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생 경험의 기회를 굳이 회피할 필요는 없어요. 지은 인연의 과보를 안 받으려고 회피하면 그게 내내 따라다녀요. 부처님께서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 깊은 산속 깊은 바다속에 숨는다 하더라도’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걸 보면 요즘 새로 개발한 미사일이 생각나요. 열추적기 달린 신형 미사일은 아무리 피해도 끝까지 따라다니잖아요. nbspnbsp그러니까 우리가 이걸 터득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락이 고임을 터득해야 했는데, 우리는 불행이 곧 행복임을 터득해버리면 인생이 자유로워지겠죠. 붓다의 가피가 우리가 말하는 복으로 안 오고 재앙으로 오는 줄 알아야 해요.nbsp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은 고뇌를 통해서 들린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도 잘 안 들리지만 우리가 굉장한 고통에 처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구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부처님의 복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가 구하는 것은 윤회의 세계 안에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nbsp그런 데서 여러분들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사문유관을 조금이나마 느끼셨길 바랍니다. 사문유관을 느끼게 되면 삶이 조금 달라져요. 여기서 마냥 힘들어하고 ‘지저분해서 다시는 인도 쳐다보기도 싫다’ 이런 게 아니었다면, 앞으로 여러분들의 삶에 여러분들도 모르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돌아가서 또 잊어버리고 지내더라도 한번 경험한 건 늘 쌓여 있어서 여러분들의 삶에 크든 작든 변화를 가져와요.nbspnbspnbsp구걸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돈을 줬든, 주지 않았든, 귀찮아했든, 그건 다 내 까르마의 반응이거든요. 그걸 감싸줬다고 해서 잘 했고, 그걸 내쳐서 잘못한 건 아니에요. 저도 제일 처음에 왔을 때는 외면하고 내쳤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보는 게 중요합니다.”nbsp부처님이 경험한 사문유관을 오늘날에 비유하면 한국이나 선진국은 부처님이 출가 전에 살았던 왕궁과 같고, 이곳 인도의 극빈자들의 삶은 성 밖의 사문유관과 같다는 말씀이 다시 한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인도 성지순례는 부처님의 사문유관을 직접 경험해보는 시간이었던 셈입니다.nbspnbsp각각의 소감문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모두 들려준 후 마지막으로 스님은 문화 기행과 성지 순례의 차이점을 알려주면서 이제 성지순례를 마치면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겠는지 강조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nbspnbsp“아잔타 석굴이며 엘로라 석굴, 산치 대탑 같은 곳에 가면 오늘 아그라 성 보았듯이 구경거리가 많아요. 그러나 그것은 순례가 아니라 문화기행이에요. ‘이건 몇 세기에 마련했고 이건 언제 작품이고 이건 무슨 양식이고...’ 이렇게 문화와 예술 작품을 보는 겁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우리가 다녔던 길은 문화기행이 아니라 순례예요. 순례는 거기에 허물어진 벽돌더미가 없어도 큰 상관이 없어요.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교훈이 되느냐가 중요합니다.nbspnbspnbsp그리고 문화기행은 편안하게 하는 것이 좋아요. 문화기행이나 여행은 호텔에 자고, 설명도 자세히 듣고, 사진도 찍으면서 즐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순례는 일부러 고행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편안하지도 않아요. 여러분들이 따로 호텔에 잔다고 해도 우리가 그동안 묵었던 순례자 숙소와 크게 차이가 날까요? 우리가 다녔던 것보다 더 빨리 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타고 다닌 차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우리가 먹은 밥보다 더 맛있는 밥을 먹을까요? 아니에요. 안개 없는 날, 안 추운 날만 골라서 다닐 수도 없어요. 큰 도시가 아닌 시골 유적지에서는 어차피 호텔에 들어가도 난방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호텔에 가면 좀 낫지 않겠냐고 하지만, 제가 다 시도해 봤는데 오십보백보예요. 호텔이 세수 좀 하기 쉬운 정도예요.nbspnbsp그리고 우리는 14일 동안 10대 성지를 다니는데 문화기행을 온 분들은 8일 만에 다 다니려니 더 바빠요. 기원정사에서 마주쳤을 때 봤겠지만 도착해서 입구만 겨우 보고 30분 만에 갔잖아요. 사위성에서는 아예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설명만 듣고 갔어요. 하루에 두 군데씩 보려니 아무리 설명을 줄여도 시간이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돈 많이 들인다고 꼭 좋은 게 아니에요. 궁금하면 나중에 여행사 상품으로 다시 한 번 와서 비교해 보세요.nbspnbsp그래서 순례는 고생을 좀 하는 게 좋아요. 방금 고생을 좀 더 하게 해달라는 제안도 있었는데, 고생을 좀 더 하면 느끼는 게 더 많긴 해요. 그런데 여기서 고생 더 시켰다가는 거사님들한테 제가 맞아죽을 것 같아요. 거사님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제가 머리카락만 붙었으면 벌써 다 뜯겼을 것 같은데, 머리카락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nbspnbspnbsp우리가 성지에 가든, 여기에 오든, 뭘 하든, 결국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인생이 행복해질 거냐’입니다. 그저 경전이 나오면 경전 이야기를, 부부싸움 이야기 나오면 부부싸움 이야기를, 고생한 이야기 나오면 고생한 이야기를 소재 삼을 뿐이에요. 결국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가질 때 행복해지느냐가 핵심이에요. 술을 마셔도, 밥을 먹어도, 남녀가 함께 있어도 이 이야기 빼고 할 이야기가 뭐 있겠어요? nbspnbsp앉아서 뭘 먹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연애도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한다며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간단하다. 공부하는 여자랑 둘이 앉아서 술 마시면서 공부 이야기를 하면 된다.’ 둘이 이야기하면서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고, 이렇게 셋 다 할 수 있어요. nbspnbsp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이 종교화되어 있는 불교는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해요. 불교는 종교 가운데 하나이지만, 불법은 ‘종교 가운데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종교를 넘어서 있습니다. 종교의 범주에 들어가는 요소도 있지만 넘어서 있어요. 그 안에는 과학의 요소도 있고, 인문학의 요소도 있고, 문화사의 요소도 있지만 그런 특정한 범주를 넘어선 진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개인 신앙이 무슨 종교이고 무슨 종파인지 너무 따지지 마세요. 그건 그냥 개인이 좋은 대로 하세요. 교회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성당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다른 종파인 절에 가고 싶으면 가면 됩니다. 천주교 쪽은 좀 멋있잖아요. 음악이 웅장하게 울리는 가운데 뭐라 뭐라 하면 ‘또한 사제와 함께’ 엄숙하게 말하잖아요. 교회에 가면 또 노래 부르고, 이것저것 재미있어요. 절에 가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목탁 치고 염불하니까 좀 재미는 없지요. 대신 조용하게 지내려면 절이 좋지요.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으면 아무데도 안 가면 돼요. nbsp그러나 모든 인간은 종교가 뭐든, 종교가 있든 없든, 행복하기를 원해요. 오늘 행복했다가 내일 괴로움이 되는 이런 행복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바뀌지 않는 행복, 속박으로 도로 바뀌지 않는 자유가 열반과 해탈입니다. 그런 행복을 조금이라도 확대해나가고 싶으면 이 마음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마음 공부를 하면 이런 요소를 성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논어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서양 철학에서도 일부 발견할 수 있고, 과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요. 꼭 불경을 읽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눈을 좀 크게 뜨고 멀리서 관조하면 행복의 윤곽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건 좁히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고, 넓히면 우주를 다 집어넣어도 어디 들어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고 하잖아요.nbspnbsp그런 관점에서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없다’, ‘어릴 때 무슨 경험을 했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무슨 경험을 했든 안 죽고 지금 살아 있다는 거예요. 우여곡절을 겪고도 지금 살아 있으니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산 사람은 다 행복해야 해요. 죽은 뒤의 세계는 죽은 뒤에 가서 보면 되니까 우선 놓아두고, ‘지금 내가 행복하다’ 이것을 중시해야 합니다.nbspnbspnbsp성지순례 온 것이 몸은 좀 고단하고 고생은 좀 했지만 여러분들 삶의 큰 양식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nbsp마지막까지 애정어린 조언을 듬뿍 쏟아내어 준 스님에게 모두 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치고 저녁 만찬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15일 동안 낡은 순례자 숙소에서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꾀죄죄하게 다녔는데, 오늘은 고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 데다가 푸짐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나왔습니다.nbspnbsp스님은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세수는 하고 가야하니까 오늘은 호텔에서 자는 것”이라며 웃음을 보인 뒤 테이블 별로 건배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한껏 흥이 오른 만찬장의 분위기를 이어서 조별로 장기자랑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어떤 조는 트로트를 부르며 성지순례 내용으로 개사를 해서 부르기도 했고, 어떤 조는 빨간 목도리를 통일되게 걸치고 나와 신나는 댄스를 보여주었고, 어떤 조는 바보 분장을 하고 나와 재미있는 율동과 구호를 보여주어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nbspnbspnbspnbsp▲ 조별 장기자랑 시간nbsp준비할 시간도 별도로 주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순식간에 팀웍을 발휘해 재미있게 장기자랑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며 15일 동안 동고동락한 내공을 가득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친교의 시간을 통해 성지순례단은 더욱더 하나가 된 기분입니다.nbspnbspnbspnbsp장기자랑 시간을 모두 마친 후 스님은 내일 아침에 출발할 때 숙소에 두고 가는 물건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당부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은 아침 6시 30분에 숙소에서 나와 먼저 타지마할을 관람한 후 곧바로 델리로 이동해 라즈가트와 간디 박물관, 델리 박물관을 연이어 관람하고 공항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스님은 성지순례단을 공항까지 배웅한 후 델리 정토법당에서 주무실 예정입니다.nbspnbsp ※ 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nbsp쉽고 명쾌한 강의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신 분에 한해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나는 인도 성지순례에 우선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 nbsp
2016.1.21 (인도 16일째) 상카시아, 성지순례 회향식
nbsp안녕하세요? 스님이 인도에 도착한지 16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 스님은 성지순례단 C팀을 이끌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10대 성지를 순례하는 여정 중 마지막 순례지인 상카시아로 향했습니다.nbspnbsp새벽 3시 20분에 일어나 짐을 챙겨 버스에 올라탄 순례단은 4시 정각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했습니다. 이른 출발이지만 늦게 일어나 허둥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이 이제는 모두들 익숙해진 것 같았습니다.nbspnbsp버스에서는 곧바로 새벽예불과 천일결사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버스 안이든 어디든 순례자들의 기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nbspnbspnbsp기도가 끝나자 버스에 불이 꺼지고 모두들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쉬라바스티를 출발하여 럭나우를 거쳐 상카시아로 가는 여정은 10시간에 이르는 대장정입니다. 성지순례 기간 중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일정이기도 합니다.nbspnbsp창밖으로 날이 밝아오자 잠시 차를 세우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 기간 동안 늘 그래왔듯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으로 흩어져 자연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해결하고 버스에 다시 탔습니다. 어제 비가 내려서 그런지 뿌연 안개를 한껏 머금은 인도의 아침 공기가 제법 상쾌하게 느껴졌습니다. nbspnbspnbsp한참을 달리다가 도로 변에 짜이가게가 있는 곳에 버스를 세우고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순도순 야외에서 먹는 식사가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것 같습니다.nbspnbspnbsp도로에 자욱한 안개는 운치를 더했습니다. 그동안 날씨가 제법 따뜻해서 이상기후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오늘은 안개가 자욱한 원래의 인도 겨울 날씨를 제대로 만끽했습니다.nbspnbspnbsp먼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버스 안에서는 차량 별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버스에서 내리고 올라타기 바빠서 소개도 제대로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한 분 한 분의 인생 이야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내어놓는 진솔한 이야기에 마음이 활짝 열린 순례객 중에서는 신나게 노래를 한가락 뽑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참 좋은 사람들을 성지순례에서 만났다’며 기쁜 표정이었습니다.nbspnbsp▲ 자기소개 시간nbsp즐겁게 자기소개 시간이 이어지고 있는 사이 스님이 “곧 강가강이 5개의 지류로 나눠지기 전의 원류가 되는 강가강을 지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강변 모래사장 위에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힌두교 순례자들이 빼곡이 천막을 치고 있는 풍경이 펼쳐졌습니다.nbspnbsp순례객들은 스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모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스님은 웃으면서 한마디를 보태었습니다.nbspnbsp▲ 5개의 지류로 나눠지기 전의 원류가 되는 강가강nbsp“우리들이 하는 성지순례를 고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보다 훨씬 더 부자인 사람들도 저렇게 강변에 한 달씩 천막을 치고 기도를 해요. 굉장하죠?” nbspnbsp힌두교 신자들이 얼마나 믿음이 굳건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무슬림이 침공해도, 기독교가 들어와도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nbspnbsp새벽 4시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드디어 상카시아에 도착했습니다. 약 10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가사를 수하고 향에 불을 붙이고 탑을 한 바퀴 돈 후 예참 불공이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 상카시아 스투파nbsp이 탑은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법을 설한 후 하강한 곳으로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상징적 의미를 지난 장소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부처님이 태어난지 일주일만에 돌아가셔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느 해 안거 때 도리천궁으로 가셔서 마야부인에게 석 달간 법을 설하고 하강하셨다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후 아쇼카 왕은 이곳에 석주와 대규모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nbspnbspnbsp예불을 마치고 이어서 스님은 10대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친 대중들을 위해 간절히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순례한 인연공덕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스님의 모습에 순례객들도 합장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했습니다.nbspnbsp발원 기도 후 스님은 다른 성지에서 했던 것과는 달리 해탈주 삼독을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어머니의 은혜를 갚고자 했던 의미가 있는 곳이어서 우리들도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 영가님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자는 것이지요.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상카시아 성지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저희가 도착한 이곳이 부처님의 8대 성지 가운데 8번째 성지인 상카시아입니다. 인도말로는 ‘상키사’라고 부릅니다. 유래는 이렇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해 안거철에 어디에도 안 계셨다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어디 계시나 싶어서 모든 제자들에게 물어봐도 부처님과 안거를 같이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은 목련존자가 신통 제일이니까 목련존자에게 부처님이 어디 계신지 알아봐 달라 부탁했습니다. 목련존자가 신통으로 온 우주를 살펴보니까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계셨어요.nbspnbspnbsp부처님의 어머니 마하 마야대비는 부처님이 태어나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나머지 대중은 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해탈을 얻었는데 어머니는 먼저 돌아가셔서 이 좋은 법을 만나지 못하셨잖아요. 비록 복을 지어서 천상에는 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해탈은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도리천에 계신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그곳으로 가서 설법을 하셨습니다.nbspnbsp부처님이 안 계시자 부처님을 너무 그리워한 대중들이 목련존자에게 ‘그럼 부처님이 언제쯤 오시냐?’ 묻자 ‘안거 끝나고 오신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디로 오실 것인지 여쭤보라고 하자 다시 목련존자가 가서 여쭈었더니 ‘상카시아 성 밖으로 오겠다’고 대답하셨다 해요. 저기가 상카시아 성인데 여기가 성 밖이예요. 그 때가 9월 보름이었어요. 인도 달력으로는 7월 보름입니다. 그래서 보름이 되자 이곳에 많은 대중들이 모여들었다고 해요. 부처님을 가운데로 모시고, 인드라신과 범천 즉 브라만 신이 옆에 시립을 해서 하강을 하셨어요. nbspnbsp그래서 이 모습을 표현한 조각에는 항상 계단이 세 개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는 것을 표현한 겁니다. 그리고 가운데에 부처님이 계시고 양쪽에 두 신이 있는 모양입니다. 조각에 부처님의 얼굴을 새기기 전까지는 계단의 가운데에 부처님의 발자욱 두 개를 새겨 놓았어요. nbspnbsp▲ 상카시아스투파 앞에 모셔진 조각. 부처님의 하강 모습을 표현.nbspnbsp nbsp이 때 어떤 비구니 스님이 자신이 맨 앞에서 부처님이 내려오시는 것을 가장 먼저 마중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절을 하면서 ‘부처님, 제가 첫 번째로 마중을 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부처님께서 ‘아니다’ 그러셨어요. 비구니 스님이 주위를 아무리 돌아봐도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그렇게 얘기하시니까 ‘그럼 누가 먼저 부처님을 마중했습니까’ 하니 부처님께서 ‘수보리가 가장 먼저 나를 보았느니라’ 하셨어요. 그런데 수보리는 그 때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영축산에 있었거든요. 수보리는 명상을 하다가 부처님을 뵈러 가려고 일어났는데 그 때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쳤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도로 앉았는데 이것을 부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수보리가 가장 먼저 나를 봤다’고 하신 겁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육신을 보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는 뜻입니다.nbspnbsp그리고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때도 이런 말씀을 하셨죠.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니라.’ 이런 말씀 때문에 금강경에도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모두 다 진리를 보는 자가 여래를 본다는 얘기와 같은 뜻입니다.nbspnbsp그런데 아직 저도 도대체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지는 확실하게 잘 모르겠어요. 연구가 좀 더 되어서 어떤 사건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었는지 밝혀보아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신앙적으로는 당연히 부처님이 천상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셨다고 얘기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인류문화사적으로 보면 어떤 스토리가 이렇게 변한 것인지는 앞으로 우리가 더 연구를 해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nbspnbspnbsp다만 브라만 신과 인드라 신이 부처님을 시립했다고 하는 것은 깨달은 자 ‘붓다’가 신들의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붓다가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도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고 하셨잖아요. 또 태어나실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고 표현된 부분, 또 여래의 10대 명호 중에 ‘천인사’, 즉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라고 표현한 것 등을 보면 인도인들은 신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는데 깨달은 자, 붓다는 신들의 스승이 되는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인도에는 700만의 신이 있다고 할 정도인데, 그 당시 인도에서 최대의 신이 인드라신과 브라만신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두 신이 부처님을 시립하고 옹호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도의 불교는 신을 부정하지 않고 그 모든 신이 부처님을 옹호한다고 해서 불법을 옹호하는 호법 선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의 신앙이나 믿음을 존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과 신앙으로는 해탈할 수가 없다는 점은 분명히 한 것이죠.nbspnbsp각자 자기 신앙을 갖는 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카톨릭 신자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불법을 공부하는 데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부처님을 믿고 불법을 공부해도 되고, 하나님을 믿고 불법을 공부해도 되고, 종교 없이 불법을 공부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불법은 일반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기존에 있던 여러 종교들과 갈등을 빚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도 대웅전 옆에 칠성각, 산신각을 지어서 각자의 전통 신앙을 믿을 수 있게 해주었잖아요. 그것처럼 저도 만약 서양에 가면 법당도 짓지만 그 옆에 성당도 하나 지어주고, 교회도 하나 지어주어서 각자 자기 신앙을 믿게 해줘야겠죠. 즉 남의 신앙에 대해서는 좋으니 나쁘니 하는 이야기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nbspnbspnbsp다만 여기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스님으로 출가한다는 것은 가족 관계에서는 굉장히 불효가 되잖아요. 애지중지 키워 놓았는데 자식이 출가를 해버리면 부모 입장에서도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부인 입장에서도 남편이 출가를 하거나, 자식 입장에서도 부모가 출가를 하면, 얼마나 무책임하게 느껴지겠어요. 좋게 말하면 출가란 정으로 묶여 있는 인간 관계를 뛰어 넘어서 일체를 평등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만, 내 가족만 위하는 태도를 넘어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가 좋더라도 이런 것이 당시에 사회적으로 전파되는 과정에는 갈등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었겠죠.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 효사상이 크니까 더 심했습니다.nbspnbsp그래서 상카시아의 설화는 ‘부처님의 출가가 불효가 아니다’, ‘출가가 가족 관계를 부정한 개념이라기 보다는 정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는 것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어요. 부처님도 출가하고 성도하신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척들을 다 출가시키고 해탈하도록 하셨잖아요. 우리 나라에서처럼 유교문화에서는 효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출가가 문제가 되었는데, 인도 문화에서는 출가 자체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상카시아에서 이런 설화가 나온 것을 보면 가족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아우르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nbspnbspnbsp모든 것을 다 끊어버릴 수 있어도 부모의 정은 끊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수행자가 되어 절에 들어와 있어도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부모에 대한 정이 다 남아 있어요. 이렇게 부모의 정이 남이 있는 것이 사실 수행에는 굉장히 장애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성년이 되거나 출가를 하게 되면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정을 좀 끊어줘야 해요. 그래야 자식이 자기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 자꾸 자식에게 끈을 묶어서 옭아매려고 해요? 평생 동안 투자한 것 찾아먹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nbspnbsp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은혜를 안 입는 것인데 부모의 은혜는 안 입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은혜 조금 줬다고 평생 따라다니면서 ‘내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하잖아요. 불자라면 이것을 좀 풀어주셔야 해요. 스무 살까지는 보살펴주고 스무 살이 넘으면 정을 탁 끊어서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세요.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살더라도 서로를 너무 속박하지는 말자 이런 얘기입니다.nbspnbsp그러니 이런 의미가 깃든 곳에서 순례를 마쳤으니 불보살님과 천신들에게도 감사해야 하지만 조상님들께도 감사해야겠죠? 그래서 방금 전에 해탈주를 함께한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안 입은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어요? 스님도 이런 말을 해도 어릴 때 부모님이 젖 먹이고 밥 먹이고 옷 입히고 해주었으니까 자랄 수 있었던 거잖아요. 부처님도 아무리 부처가 되었어도 부모님의 은혜는 갚아야 했겠죠. 부처님이 부모님의 은혜를 갚은 방법은 무엇이었겠어요? 바로 설법을 해서 깨우쳐주는 것이었습니다.nbspnbspnbsp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바로 이곳에서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불러 볼까요?”nbsp“네”nbspnbsp스님의 제안에 따라 다함께 ‘어머님 은혜’ 노래를 불렀습니다.nbspnbspnbsp“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nbspnbsp많은 순례객들이 갑자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거나,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nbspnbspnbsp머나먼 이국 땅에 와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그 마음이 더 애틋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는 아무리 헤아려도 그 은혜가 한량이 없겠죠.nbspnbsp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경전을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지순례의 마지막 경전 독송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전법을 다짐하기 위해 부루나존자의 전법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부루나존자는 아주 거칠고 사나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도 기꺼이 들어가서 전법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순례객들은 그 내용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도 이 좋은 법을 널리 전할 것을 다짐했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5분 쯤 가니 스님이 상카시아 석가족을 위해 담마센터를 지어주려고 마련한 부지가 나타났습니다. 아직 담마센터는 지어지지 않았고 주위에 벽만 네모나게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순례단 일행이 부지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석가족 청년들이 나와서 환영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짧게 이곳 부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 상카시아 담마센터 부지nbsp“이곳은 상카시아 석가족들을 위해서 담마센터를 지어주려고 저희가 사놓은 부지예요. 제일 안 쪽은 숙소와 학교를 짓고, 가운데에는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홀을 만들고, 입구에는 상카시아스투파를 재현해서 지어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nbspnbsp저희들이 방금 전 참배한 상카시아스투파가 석가족 불자들과 힌두교 브라만들 사이에 분쟁이 좀 있어요. 석가족들은 불교 탑이니까 자기들이 관리하겠다고 하고, 브라만들은 ‘무슨 소리냐. 우리가 조상 대대로 여기서 기도해 왔는데’ 이러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싸우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내가 지어줄게’ 이랬거든요. 그런데 아직 못 지어주고 있어요. 돈도 돈이지만 공사할 사람이 없어요. nbspnbsp이 앞에 계신 분들이 모두 석가족 청년들입니다. 제가 전정각산에 앞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처음 세웠을 때 여기 있는 청년들이 와서 학교를 운영했어요. 다함께 인사를 하겠습니다. 나마스떼.”nbspnbsp이곳에 오겠다는 한국인 책임자가 아직 없어서 담마센터가 지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참 안타깝게 들렸습니다. 누군가가 인도불교 부흥을 발원하며 이곳에 오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며 담마센터 부지를 돌아서서 나왔습니다.nbspnbspnbsp원래는 이곳 부지에서 매년 회향식을 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춥다며 석가족 청년들이 담마센터 부지 옆에 있는 법당 안에서 회향식을 할 수 하도록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례객들은 모두 법당으로 이동했습니다.nbsp법당 입구로 들어서자 석가족 청년들은 순례객 한 명 한 명에게 환영의 의미로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스님이 맨 먼저 입장하자 스님에게는 엄청나게 큰 꽃목걸이를 걸어주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습니다.nbspnbspnbsp두 사람이 스님의 꽃목걸이를 부축하는 가운데 스님이 먼저 앞으로 가자 뒤이어 순례객들이 법당 안으로 들어섰습니다.nbspnbspnbsp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드디어 제27차 인도 성지순례 회향식이 거행되었습니다.nbspnbsp▲ 제27차 인도 성지순례 회향식nbspnbsp스님은 순례단으로부터 청법가와 삼배를 받고 순례를 회향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우리는 부처님이 처음 법바퀴를 굴리신 바라나시 사르나트, 초전법륜 성지에서 구리가장자처럼 삼귀의 오계를 받고 가사를 수한 후 10대 성지를 하나하나 발로 밟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또 거기서 설해진 경전을 읽으면서 순례를 했습니다. 부처님이 천상에서 하강했다고 하는 오늘 이곳 상카시아를 끝으로 이제 순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한국에서 출발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15일 동안 여러분 모두에게 주어진 조건은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곳에서 자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행동을 하는 등 똑같은 조건에 있었음에도 각자가 얻은 소득은 조금씩 다 다릅니다. 처한 환경이 달랐다면 몰라도 똑같은 환경 속에 있었음에도 우리가 얻은 소득이 각자 다르다면 그것을 우리는 자기 업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그릇에 따라서 얻은 소득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이 그릇을 앞으로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좋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그릇에 행복을 담을 수도 있고 불행을 담을 수도 있습니다. 그 그릇을 가볍게 할 수도 있고, 무겁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nbspnbsp그런데서 여러분들이 15일 간 순례를 한 인연 공덕으로 삶이 가벼워지고 더 기뻐지고, 나만을 생각하는 삶에서 가족, 이웃, 나라, 인류, 만생명을 생각하는 쪽으로 조금 넓어지거나, 그저 먹고 입고 자는 것에 급급하는 데서 해탈과 열반 쪽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가 깊어지거나, 이런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래서 순례한 이 시간과 경비가 아깝지 않도록 결산을 잘 해나가시기 바랍니다.nbspnbspnbsp어떤 분들은 ‘저는 별로 감흥이 없었는데 어떡하죠?’ 이런 질문들을 해요. 감흥이 없었던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에요. 감흥이 없었으면 감흥이 없는 것이 현실이고, 기뻤다면 기쁜 것이 현실이에요. 그 어떤 것도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안 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눈물이 날 것이라는 내 기대에 안 맞은 것일 뿐입니다. 눈물이 나야 할 이유도 없고, 감흥이 커야 할 이유도 없고, 감흥이 없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반응이든 내 업식에 따라서 일으킨 반응인데 내 업식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나는 이런 업식이구나’ 하고 다만 알아차릴 뿐이어야 합니다.nbspnbsp제가 3호차를 타고 왔는데 한 거사님이 나누기를 하면서 여기 와서 다른 건 몰라도 담배라도 하나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가 순례를 하면서 중도를 배웠잖아요.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해서 피우면 쾌락이고, 피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면 고행이 됩니다. 내가 얼마나 더 참을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피우고 싶어하는구나’ 이렇게 다만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피우고 싶다고 해서 피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피우고 싶은 것을 이를 악 다물고 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구나’ 알아차리면 됩니다. 피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즉 중독성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업이 주인인 것입니다. 습관이 하자는 대로 내가 따라다니는 것이죠.nbspnbspnbsp그러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겠다. 습관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되겠다. 습관을 따라가지 않으니 이 습관이 난동을 부리는구나. 자기 하고싶은 대로 못하게 한다고 난리를 치는구나.’ 이렇게 다만 알 뿐이어야 합니다. 담배를 피워야 한다, 안 피워야 한다, 좋다, 나쁘다, 자꾸 이렇게 접근하지 말고, ‘이 욕구를 안 들어주니 다른 것으로 시비를 해서 불평불만을 만드는구나. 몸을 아프게 만드는구나. 30년 피운 것도 이렇게 난동이 심한데 몇 생을 습관들여 온 것은 얼마나 난동이 심하겠느냐.’ 이렇게 다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nbspnbsp거기에 끌러가면 노예가 되고, 그것을 억압하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니 다만 알아차리고 내버려 둡니다. 난동을 피우면 난동을 피우는대로 그냥 놓아두면 시간이 흐르면 제풀에 꺾여서 나가 떨어집니다.nbspnbspnbsp그러니 여기 와서 당장 업식을 바꾸거나 고치지는 못할지라도 지금까지 내가 노예로 살았던 그 업식에 내가 어떻게 대응을 할지 터득해서 이것 하나는 계속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비록 연습을 하다가 실패해서 업식을 따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시도해 보고 또다시 시도해 봐야 합니다. 누에고치가 자기 입에서 난 실로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 갇혀서 답답하게 살아가듯이 내가 지은 업식에 내가 갇혀서 평생 감옥살이를 해왔는데,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어 그 구멍을 뚫고 훨훨 날아가듯이 이제 여러분들도 업식의 굴레를 뚫고 자유롭고 행복한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그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nbspnbsp오늘 가사를 반납하게 되지만, 수행이 무슨 가사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순례를 하는 기간 동안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되겠다 하는 이치를 알았다면 이것이 큰 소득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성지순례를 한 인연공덕으로 더 행복해지고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길 바랍니다.nbspnbspnbsp사실 고생한 건 별로 없잖아요. 잘 놀았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하는 말로 인사를 드립니다.” nbspnbsp스님이 격려 말씀에 모두들 크게 웃으며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지순례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수행자로의 삶은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nbspnbsp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곧이어 가사를 반납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다함께 삼배를 하면서 ‘그동안 출가수행 잘했습니다. 밖에 가서도 수행 잘하겠습니다.’ 하고 다짐을 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순례객들이 호궤합장을 한 상태에서 수계식 때 받았던 가사를 고이 접어서 머리 위로 올리니 각 조별로 법사님들이 지나가면서 가사를 받았습니다.nbspnbspnbsp가사를 여법하게 반납하는 대중들을 보며 스님은 “불가에서는 일곱 번까지 출가를 거듭할 수 있다”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언제든 다시 출가를 하라는 말씀이었는데, 아마도 가사를 벗을 때의 시원섭섭한 마음을 달래주려 하셨나 봅니다.nbspnbsp이어서 순례객들은 13일 동안 성지순례를 안내하고 진행해 준 법사님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각 차량을 담당한 차장님들, 조원들을 위해 머슴 역할을 톡톡히 해준 조장님들, 실무 스텝들이 차례로 일어나자 역시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 순례를 안내해 준 법사님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순례객들nbsp모두들 아쉬움이 컸는지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24시간 고락을 함께했기에 정이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사홍서원을 끝으로 회향식을 마친 후 법당 밖으로 나오니 석가족 청년들이 준비한 성지순례단 환영 행사가 조촐하게 열렸습니다. 이미 마당에는 석가족 청년들이 따뜻한 짜이와 식빵, 사브지를 정성껏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nbspnbsp순례단은 짜이와 식빵, 사브지를 맛있게 먹으며 추위를 녹였습니다. 석가족 청년들은 “날씨가 추우니 짜이를 일인당 세 잔씩 마셔야 한다”고 하면서 웃음을 보였습니다.nbspnbspnbsp상카시아에는 전 인도에서 석가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데 약 200만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 힌두교이고 절도 없고 해서 스님은 오래 전부터 이곳 석가족 집성촌 마을에 불상 점안식을 해주고 법회와 수련도 일 년에 한 차례씩 해오고 있습니다. 스님은 순례객들에게 석가족 청년들의 불교 부흥 활동에 많은 후원과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석가족 청년들을 대표해서 수바스지가 순례단을 환영하는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석가족 청년회 대표 수바스지nbsp“한국에서 이곳까지 오셔서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환영하기 위해 멀리서 석가족들이 왔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대부분 자녀들, 부인들과 함께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nbspnbsp법륜 스님이 인도를 방문하셔서 25년 전부터 이곳에 석가족들을 위한 절도 지어주시고, 법문도 해주시고, 많은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매년 한국인들이 이곳에 방문해주시는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전에는 1년에 한 팀씩 방문하셨는데 이번에는 세 팀씩 나뉘어서 와서 더 기쁘고 좋습니다.nbspnbsp짜이와 음식을 정성껏 준비했으니 맛있게 드세요. 성지순례를 마치셨으니 보다 더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수바스지의 환영 인사에 순례단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며 응원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이 때 수바스지의 부인이 갑자기 보여서 스님이 덧붙여 소개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여기 옆에 분이 수바스지의 부인이에요. 수바스지는 20대 때 저를 만났어요. 제가 인도 불교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칠 사람은 손을 들어라고 할 때 손을 든 사람이에요. 그런데 평생을 안 바치고 이 부인한테 장가를 갔어요.nbspnbspnbsp그래서 제가 이 부인한테 ‘남편이 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남편을 나한테 줄래? 아들을 나한테 줄래?’ 물으니까 자기 남편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 되고 3년 후에 준다고 대답했어요.” nbspnbsp스님과 수바스지 가족의 재미있고 깊은 인연에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석가족 청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소개가 될 때마다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은 석가족 청년들에게 인도불교 부흥을 위한 일에 사용하라고 보시금을 전달하면서 그 취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저는 뭐든지 공짜로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항상 반반씩 함께 참여하도록 합니다. 자기들이 절을 지으면 저는 불상을 기증하고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래서 동네마다 절을 짓고 있어서 제가 매년 인도에 올 때마다 점안식을 해주거든요.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불상 값을 기증하도록 하겠습니다.” nbspnbsp석가족 청년들은 보시금을 받은 후 감사 인사를 하면서 자신들도 스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건넸습니다. 석가족들은 인도 과자 세 상자와 숄을 스님에게 전달했습니다.nbspnbspnbsp소박한 선물에 순례객들은 웃으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웃고 박수를 치면서도 순례객들은 스님이 발원한 인도불교 부흥 사업이 이 석가족 청년들을 시작으로 활짝 꽃피우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았습니다. nbspnbsp이렇게 석가족들과 순례단이 서로 조금씩 친해져갈 무렵, 이제는 행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석가족들은 아쉬운 마음이 컸는지 다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법당을 나왔습니다.nbspnbsp▲ 석가족과 정토회 성지순례단 모두 함께nbsp옛날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에는 인도 승려들이 우리 나라에 불교를 전하러 왔었는데, 170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도에는 불교가 거의 사라지고, 이제 다시 우리들이 인도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 사실이 참 묘한 인연처럼 느껴졌습니다. 은혜를 받고 다시 그 은혜를 갚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nbspnbsp아쉬움을 뒤로 하고 석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에서는 저녁 식사로 라면을 조별로 끓여 먹었습니다. 성지순례 기간 때 먹는 라면 맛은 천하일미였습니다.nbspnbspnbsp식사 후 저녁에는 성지순례 회향의 기쁨을 다시 상기하며 조별로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로 정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나누기가 진행되는 방마다 웃음과 박수가 끊이질 않았습니다.nbspnbsp▲ 성지순례를 회향하며 조별 마음나누기 시간nbsp내일은 각자 방에서 새벽 5시에 예불과 기도를 한 후 6시에 아그라를 향해 출발합니다. 이제 성지순례를 모두 마쳤기 때문에 아그라에서는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 등을 구경하며 순례자가 아닌 여행객이 되어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nbsp ※ 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nbsp쉽고 명쾌한 강의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시면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나는 인도 성지순례에도 우선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 nbsp
2016.1.20 (인도 15일째) 성지순례단 C팀 쉬라바스티 순례
nbsp안녕하세요? 인도에 온 지 15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과 B팀에 이어 C팀을 이끌고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신 곳 ‘쉬라바스티’를 순례했습니다.nbspnbsp새벽 5시에 천축선원 법당에서 예불과 기도를 한 후 6시 20분에 기원정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님이 맨 앞에 서고 그 뒤를 이어 기러기떼처럼 한 줄로 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천히 걸었습니다.nbspnbsp어둑한 새벽 안개를 가르며 기나긴 행렬을 이루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간간히 차들이 지나가면서 헤드라이트를 비추자 순례단의 기나긴 행렬이 잠시 불빛에 비춰질 뿐 순례단은 조용히 한 발 한 발에 집중했습니다.nbspnbspnbsp한참을 걷자 어느덧 새벽 안개가 걷히고 기원정사가 환하게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스님의 뒤를 따라 순례객들은 부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곳을 참배하고 탑돌이를 하였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설법을 했다고 하는 곳nbsp▲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 상징했다고 하는 보리수 나무nbsp마지막으로 부처님이 머무신 처소로 알려진 간다 쿠티 앞에 서서 합장하고 삼배를 한 후 탑돌이를 마쳤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머문 처소 ‘간다 쿠티’nbspnbsp이어서 간다 쿠티를 바라보며 예참 불공을 올렸습니다. “지심정례공양...” 하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기원정사에 울려퍼졌습니다.nbspnbsp▲ 예참 불공nbsp예참 불공을 마치고 스님은 상카시아를 제외한 9대 성지를 무사히 마친 순례단이 성지순례를 마지막까지 무사히 마칠 것과 그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며,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회향할 것을 발원하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기원정사를 창건했으며 신심이 깊은 재가 수행자로 널리 알려진 수닷타 장자의 nbsp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사위성은 부처님이 성도 후 45년 중에서 무려 25안거를 보낸 곳이기 때문에 초기 경전의 절반 정도가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스님은 사위성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화 사례들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경전 독송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위성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화 사례는 경전 속에도 아주 실감나게 묘사가 되어 있어 어느 때보다 경전 독송이 재미있었습니다. nbspnbspnbsp▲ 경전 독송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스님은 2600년 전 당시 사회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면서 불법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스님의 설법이 시작되자 간간히 빗방울이 날리기 시작했지만, 순례객들은 전혀 동요 없이 모자를 쓰는 것을 제외하곤 오롯이 스님의 법문에 집중했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법문하신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들어도 때로는 깨닫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신비주의, 계급적인 사고, 성차별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졌다는 이런 사실이야말로 정말 기적이라고 할 만합니다.nbspnbsp불교 가르침의 근본 목적은 우리 삶의 행복과 자유를 향한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듯이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구나 욕망을 굉장히 절제하는 가르침이에요. 그런데 그 절제가 단순히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도 아닙니다. 욕망대로 행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욕망과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욕망과 싸운다는 것 또한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잘 이해하고 욕망을 알아차리되 그 욕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가라고 가르칩니다.nbsp그런 관점을 보여주는 몇 가지 교화 사례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계율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었어요. 출가사문들은 대부분 먹는 것은 얻어서 먹고, 입는 것은 분소의를 주워서 입고, 자는 것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자는 것이 기본적인 생활이었어요. 부처님이 출가사문의 길을 처음 제시한 게 아니라 그 출가사문의 길에 부처님도 참여하신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하실 때도 절대 목욕을 하면 안 된다거나 자리를 살피면 안 된다거나 부드러운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식의 금기나 엄격함 같은 게 좀 있었어요. 그러나 붓다는 중도를 깨달으면서 그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해탈의 길에 들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6년 고행하실 때는 계율에 대해 굉장히 엄격했다면 중도를 발견하신 이후에는 유연해진 셈입니다. 친구들의 눈에는 그게 해이해진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 부처님은 해이해진 게 아니라 유연해지셨어요. 그래도 지금 우리가 보면 굉장히 엄격한 모습이지만 당시 고행주의의 기준에 비하면 유연해졌다고 볼 수 있어요.nbspnbsp그런데 교단 안에서 데바닷타라는 사람이 계율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데바닷타는 부처님과 같은 석가족 출신이고 재주가 뛰어나서 데바닷타를 따르는 재가신자들이 많았습니다. 데바닷타는 자기가 부처님의 뒤를 이어 교단을 이끌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해요. 그러나 그저 사람들이 부처님을 존경했을 뿐이지, 부처님은 당신이 교단의 지도자라든지 교단을 이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교단의 지도자는 누가 하거라’라는 이야기를 하실 분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그러나 데바닷타는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께 자기가 그런 역할을 좀 하겠다 말씀드렸지만 부처님께서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셨어요.nbspnbspnbsp‘데바닷타여, 상가에 특별히 지도자를 정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자기 수행을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럴 필요가 있다 해도 장로인 사리푸트라나 목갈리나가 있지 않느냐.’nbsp부처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자기가 후계자가 되기 어렵다는 걸 안 데바닷타는 이렇게 대중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의 지도력을 보이기 위해 어느 날 부처님께 ‘수행자라면 마땅히 이건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첫째, 먹는 음식은 하루 한 끼만 먹어야 하고, 걸식을 해야 하고, 물고기가 든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둘째, 입는 옷은 분소의만 입어야 한다는 거예요. 셋째, 자는 것은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만 자야지 처마 밑 같은 장소에서 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엄격주의라고 할 수 있겠죠.nbspnbsp부처님은 그게 틀렸다고도 맞다고도 하지 않으셨어요. 다만 그 엄격주의에서 생겨나는 모순을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출가수행자가 분소의를 입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지만, 분소의만 입어야 한다고 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정해놓으면 예를 들어 500명이 갑자기 출가를 했는데 화장장에 가보니 시체를 싸서 버린 분소의가 300벌밖에 없을 때 200명은 벌거벗고 지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렇다고 200명 분의 천을 마련해서 시체를 한번 쌌다가 다시 벗겨서 입는다면 인위적인 형식주의가 되는 거예요. nbspnbsp그러니 분소의를 주워 입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분소의가 없을 때는 그냥 새옷을 입어도 됩니다. 분소의를 놔두고 새 옷을 입자는 것도 아니고, 분소의만 입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에요. 분소의를 입는 것은 좋은 일이고 훌륭한 일이고 칭찬받을 일이지만 분소의만 입어야 된다고 단정하게 되면 이런 모순이 발생한다는 거예요.nbspnbsp수행자가 나무 밑이나 동굴에 자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부처님은 항상 자발성을 중시하셨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는 건 훌륭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만 해야 한다고 단정해버리면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데 동굴을 발견하지 못하면 비를 맞고 자야 하잖아요. 그럴 때는 빈집의 처마 밑 정도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집이나 좋다고 하진 않고 빈집이라는 제한을 두시기는 했습니다. 빈집의 처마 밑이라도 그건 인위적인 것이어서 원래 고행주의에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수행자가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데 해당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의 처마 밑이라면 나무 밑이나 동굴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겁니다.nbspnbsp마찬가지로, 걸식을 하는 건 좋은 일이고 훌륭한 일이지만 신심 있는 재가 수행자가 공양을 초대할 때 응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루 한 끼 먹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환자나 사미나 사미니는 두 끼 먹을 수도 있어요. 사미나 사미니는 미성년자가 출가한 경우라서 아직 더 성장해야 하니까요. 채식을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고기가 들어 있는 음식을 주면 먹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안 받는다 하면 걸식 정신에 어긋나고, 고기만 건져낸다고 해도 분별이잖아요. 수행의 핵심은 분별하지 않는 데 있지, 거기에 고기가 섞여 있나 안 섞여 있나가 핵심은 아니라는 거예요.nbspnbsp이걸 자칫 잘못 들으면 계율을 어기는 쪽으로 가기 쉽지만, 부처님 말씀의 뜻은 계율을 어기자는 게 아니라 그런 경직된 자세가 중도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이건 누가 들어도 합당한 이야기에요.nbspnbspnbsp이처럼 불교는 신행, 즉 말하고 행동하는 게 굉장히 절제돼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윤리나 도덕이 그 사람을 옭아매거나 속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속박이 안 되려면 스스로 행해야 해요. 남의 눈치를 보면서 하면 그게 감옥이 되지만, 스스로 즐거이 한다면 그게 속박이 되지 않습니다. 나무 밑에 자는 것도 걸식하는 것도 분소의 입는 것도 마찬가지에요.nbspnbsp종교라는 것도 그래요. 이렇게 깨달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사유가 자꾸 자유로워져야 해요. 이 ‘자유롭다’는 건 자기 욕망대로 한다는 것과는 개념이 조금 달라요. 이게 참 어렵죠. 우리는 자유라고 하면 자기 마음대로 하려 들고, 절제하라고 하면 억압하려 듭니다. 그래서 중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중도는 자발적인 선상에서 연습을 해야 중도가 되지, 억지로 해서는 중도를 터득할 수 없어요.nbspnbsp아무튼 부처님의 가르침은 2,600년 전의 가르침인데도 참으로 자유롭고 합리적이에요. 전법선언 할 때도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하라’ 이런 말이 나오잖아요.nbspnbsp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일부러 우상화시킬 필요가 없어요. 붓다의 인격 그 자체가 최상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상화시켜서 인격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더 많아요. 신격화시켜서 오히려 격하시키는 격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그대로가 ‘천인사’,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라고 하죠. 우리의 관념은 항상 인간 위에 신을 두는데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런 신의 관념보다 더 위여서 거기로부터 벗어난 개념이에요. 지금 우리의 학교 교육이나 세상의 윤리나 모든 사상은 신을 사람의 위에 둡니다. ‘천부인권’이란 말도 ‘하늘이 부여한 인권’이란 뜻이잖아요. 거기 비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신들까지 포함한 세계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신 아래에 존엄한 게 아니라 신을 넘어 존엄한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도 인권은 해칠 수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러니 여러분들은 불교를 자꾸 다른 종교와 비슷하게 만들면 안 돼요. 다른 종교와 경쟁하려 들거나 비교우위를 차지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러냐? 아이고, 그거 좋구나’ 하고 다른 종교를 그냥 다 인정해 주세요. 다른 철학, 다른 과학, 다른 사상, 다른 종교를 모두 그대로 두고도 불법은 그 한 단계 위에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걸 갖고 경쟁하거나 시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불교가 더 나으니 어쩌니 비교해서 시비하는 것 자체가 불교의 격을 낮추는 일입니다.”nbsp스님의 깊이 있는 법문에 순례객들도 모두 큰 박수를 보내며 공감을 표했습니다. 부처님이 많은 제자들과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설법을 하신 바로 이곳에서 스님으로부터 이렇게 깊이 있는 법문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순례객들은 모두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아침 겸 점심 식사 시간을 순례객들에게 주었습니다. 기원정사 밖을 나가 넓은 공터에서 조별로 자리를 깔고 앉아 전기밥솥을 꺼내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nbspnbsp식사 후에는 자유롭게 기원정사를 둘러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을 수 있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자유시간을 갖기 전에 스님은 일대일로 기념사진도 찍어 주었습니다.nbspnbsp▲ 스님과 일대일 기념사진 촬영nbsp스님과의 기념사진 촬영을 마친 순례객들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부처님이 머무신 간다 쿠티, 아난다 존자가 머물렀던 곳, 라훌라 존자가 머물렀던 곳,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던 곳,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생각하기 위해 심었다는 보리수 나무, 후세에 승려들이 머물기 위해 지어진 승방터 등 곳곳을 둘러보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다음은 1시간 동안의 개인 정진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을 찾아 108배를 하는 분, 명상을 하는 분 등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지에서의 감흥을 느끼며 정진을 했습니다.nbspnbspnbspnbsp이렇게 기원정사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후 다시 길게 한 줄을 이루어 사위성을 향해 들어갔습니다. 마치 부처님과 제자들이 탁발을 하러 사위성으로 들어가던 그 때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듯이 묵언을 한 채 천천히 사위성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었습니다.nbspnbsp▲ 기원정사를 나와 사위성을 향해 한 줄로 걸어가는 순례단nbspnbsp사위성 안에는 앙굴리말라 탑과 수닷타 장자의 탑이 높게 솟아 있었습니다. 묘하게도 악인으로서 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달은 사람과 선인으로서 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달은 사람의 탑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스님은 이것을 가르켜 “부처님의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것을 말해준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먼저 앙굴리말라 탑을 한 바퀴 돌고 삼배를 한 후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이 어떻게 99명을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를 교화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nbspnbsp▲ 앙굴리말라의 탑nbsp그리고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수닷타 장자의 탑으로 이동해 탑을 한바퀴 돈 후 삼배를 하고, 5분 간 자유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객들은 탑 위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탑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스님의 설명을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nbsp▲ 수닷타 장자의 탑nbsp다시 스님은 순례객들을 이끌고 사위성을 가로질러 동문쪽으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는 A팀과 B팀이 걸어갔던 길과는 달리 북문에서 남문 쪽으로 길게 뻗은 길을 향해 걸어보았습니다. 남문 쪽으로 난 길에는 한참 유적지 발굴이 이루어지다가 홍수가 나서 침수가 되어버린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nbspnbsp▲ 유적지 발굴이 이루어지다가 홍수로 침수가 된 흔적nbsp스님은 곧게 뻗어 있는 길이 지대가 낮은 것을 보고선 “이 길이 아마 사위성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주작대로인 것 같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에는 건물이 세워지지 않아서 후대에 건물이 무너져서 지대가 높아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nbspnbsp▲ 북문에서 남문으로 곧게 뻗은 주작대로로 추측되는 길nbsp곧게 뻗은 길을 한참 걸으니 남문 자리로 보이는 곳이 나타났고, 다른 곳과 달리 옹성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둔덕도 보였습니다. 조금더 고고학적인 고증이 필요해 보였습니다.nbspnbsp▲ 남문 자리로 통해 사위성을 나오고 있는 순례단nbsp이렇게 성문을 나오니 논길이 펼쳐졌습니다. 논길을 걸어 나오니 베사카 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동원정사’가 나왔습니다. 아쇼카석주로 추정되는 곳이 신령스럽게 모셔져 있었는데, 그곳을 순례객들은 세 바퀴 돌고 삼배를 했습니다.nbspnbsp▲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nbspnbsp자리에 앉은 순례객들을 향해 스님은 이곳에 절을 지은 베사카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먼저 이 절은 녹자모 강당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왜 그런 이름이 불려지게 되었는지 설명을 한 후, 이어서 이곳에 절이 지어진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자리에 앉은 채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베사카 부인이 어느 날 기원정사에 설법 들으러 가면서 아주 값비싼 외투를 걸치고 갔어요. 아버지가 아주 부자였는데, 시집올 때 아버지가 딸을 귀하게 여겨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외투를 주었거든요. 더운 지역에서 외투라고 하니 실제로는 무슨 옷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요즘으로 치면 수십 억, 수백 억 원쯤 되는 으리으리한 옷이었어요. 법문 듣는 동안 비싼 외투는 벗어서 하인더러 들고 있게 하고 법문을 들은 뒤 기뻐하며 돌아왔는데, 집에 와서 하인더러 옷을 달라고 하니까 그만 정사에 놔두고 왔다는 거예요. 빨리 가서 찾아오라고 하인을 보내려다가, 부인이 하인을 다시 불러 이렇게 일렀어요. ‘네가 놓아둔 자리에 옷이 그대로 있으면 가져오고, 아난존자가 이미 보관을 했거들랑 그냥 보시하고 오너라.’nbspnbspnbsp법회가 끝나면 아난존자가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둘러보고 두고 간 물건이 있으면 보관했다가 나중에 찾아주잖아요. 베사카 부인은 불자니까 보시를 할 인연이면 인연을 따라 보시하고 오라고 한 거예요.nbsp하인이 가봤더니 이미 아난존자가 외투를 보관하고 있다가 내어줬어요. 그래서 하인이 ‘아이고, 우리 주인님이 보시하고 오라고 했습니다’라고 했지만 아난존자가 보시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승단에는 값비싼 옷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하인이 할 수 없이 옷을 다시 가져왔어요. 베사카 부인은 마음에서 이미 보시를 해버렸으니 승단에서 이 옷을 받지 않는다면 옷을 팔아서 그 돈으로 보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곳 사위성 부자들이 왕사성 부자들보다 좀 못했는지, 워낙 비싼 물건이어서 아무도 살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베사카 부인이 천만 금을 내고 자기 옷을 자기가 샀어요. 그렇게 낸 옷값으로 지은 것이 이 동원정사라고 합니다.nbspnbsp당시에는 건물을 안 짓는 게 풍습이었으니 아마 땅을 구입해서 숲을 마련한 게 아닐까 해요. 그래서 부처님을 이곳에 머물도록 청해서 부처님은 이곳에서 여섯 번의 안거를 나셨다고 합니다. 기원정사에서 보낸 19번의 안거와 여기 동원정사에서 보낸 안거를 합쳐서 25번의 안거를 사위성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동원정사가 지어진 유래예요.nbspnbsp4대 정사라고 하면 첫 번째가 죽림정사, 두 번째가 기원정사, 세 번째가 이 동원정사예요. 네 번째는 암라빨리가 부처님의 마지막 여로에 기증한 암라원입니다. 암라빨리가 나중에 출가해 비구니가 되어서 암라원은 후대에 비구니절이 되었어요. 이곳 동원정사도 부처님이 머무시던 당시에는 비구니절이 아니었지만 기록을 보면 나중에 비구니절이 됩니다. 4대 정사 중 뒤의 2개가 비구니절이 되었고 둘 다 여성이 지었는데 모두 장부 같은 여성들이었어요.nbspnbsp저쪽을 보면 동쪽 성문 벽 밖에 프라세나짓왕이 비구니들을 위해서 마련해준 절이 있습니다. 스님들은 숲에서 살잖아요. 비구니, 즉 여성수행자들이 숲에서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지내다 보니 성추행을 많이 당했어요. 성 안에는 수행자가 못 사니까 성벽에 붙여서 절을 마련해 주어 비구니들을 보호하려 했던 것 같아요. 왕이 지은 절이라고 해서 절 이름이 ‘왕사’입니다. 저기도 비구니절이에요. 나중에는 물론 건물이 들어섰지만 초기에는 건물이 아니라 숲이에요.nbspnbsp경전에 기록된 비구니들의 게송을 보면 낮에 숲에서 정진을 하고 있는데 마왕 마라가 나타나서 유혹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나다니던 남자들이 유혹을 했던 거예요. 게송을 보면 그 당시 비구니들이 얼마나 정진의 힘이 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숲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지나가다가 ‘당신 눈이 참으로 아름답다’며 유혹을 했어요. 그러자 손가락으로 자기 눈알을 빼서 가져가라고 내어줬대요. nbspnbspnbsp굉장하지요? 눈을 빼서 내미는데 무슨 다른 욕망이 일어나겠어요? 정진의 힘이 그런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회적 조건이 여성이 출가해 수행하기에는 그만큼 어려웠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동원정사는 이런 유래가 있으니까 특히 여성 신자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곳입니다.nbsp그리고 동원정사가 여성이 지은 절이다 보니 여성 신자들이 많이 다녔나 봐요. 옛날 부처님 당시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신자들이 다 절에 와서 참회하고 포살을 합니다. 한 번은 베사카 부인이 포살에 참가한 약 500명의 여자들한테 각자 무슨 소원을 빌고 있는지 물어봤어요. 늙은 여성들은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어요. 중년 여성들은 남편이 하룻밤이라도 둘째 부인에게 안 가기를 원했어요. 결혼한 젊은 여자들은 아들 낳는 게 소원이라고 했어요. 처녀들은 인물 잘생기고 마음씨 너그럽고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는 게 소원이래요. 예나 지금이나 똑같죠? nbspnbsp그래서 베사카 부인이 그 500명의 여성을 데리고 기원정사로 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청하면서 ‘여기 500명의 대중이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했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법문하셨어요.nbspnbsp‘육신이라는 것은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중생들은 윤회의 사슬로 올가미를 만드는 것을 자청하느냐? 그러니 그런 무익한 것에 마음을 쓰지 말고 윤회의 사슬을 끊는 해탈을 향해 나아가라.’nbsp여기 성지순례에 오신 분들 보니까 일본이며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에서 많이들 왔는데 그 정도면 이미 받은 복이 충분하지 않아요? 아직도 부족해요? nbspnbspnbsp요즘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만 해도 받은 복이 충분해요. 밥 먹지, 옷 입지, 비 안 새는 집에서 잠 자지, 차 있지, 그러면 됐지요. 그러니 이제 복은 그만 구하고, 마음이 자유롭고 행복한 해탈의 길을 좀 더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까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 인생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nbspnbsp처음에는 규모가 너무 볼품 없어서 그 중요성이 다가오지 않았는데, 스님이 동원정사가 지어진 유래를 실감나게 들려주니 그제서야 비로소 그 의미가 깊이 다가왔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은 왜 이렇게 규모가 작은지, 힌두교의 링가가 왜 놓여 있는지 대중들이 의아해하는 것을 헤아리며 아직 고고학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곳 지형지세를 꼼꼼히 답사한 후 스님이 추측해본 나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nbspnbspnbsp“원래의 동원정사가 이렇게 작았을 리는 없어요. 제 생각에는 이 앞에 있는 동네가 전부 동원정사 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유적지가 오래되어 허물어진 곳은 지대가 높으니까 사람들이 다 거기에 집을 짓고 살거든요. 평지에는 별도의 언덕이 없는 데다가 지대가 낮은 곳은 쉽게 물에 잠기니까요. 상카시아도 내일 가서 보면 동네가 있는 곳이 지대가 높습니다. 사위성도 보면 바깥보다 지대가 높아요. 지난번에 여기 비가 와서 이곳 랍띠 강 전체가 범람해서 죄다 물바다가 되었는데 안 잠긴 곳이 사위성과 기원정사와 저 큰 도로뿐이었다고 해요.nbsp여기 보면 링가가 있지요. 링가는 힌두교에서 다산을 상징합니다. 불교가 사라지고 이곳은 나중에 힌두교, 즉 브라만이 지키고 있는 동네 기도처가 되었는데 사실은 이게 링가가 아니라 아쇼카석주라고 합니다. 여기가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라는 걸 알리는 석주였는데, 유적지가 파괴되면서 힌두교인들이 석주의 윗부분을 자르고 다듬어서 링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여기 계시는 스님은 브라만인데 머리 깎고 출가해서 여길 지키고 있어요.”nbsp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의문이 많이 풀어지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이렇게 동원정사 참배를 마치고 순례단은 논두렁 길을 따라 걸으며 숙소로 향했습니다.nbspnbsp그런데 동네 아이들 100여 명이 구걸을 하러 모여 들어서 아수라장이 될 뻔 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순례단을 먼저 보내고, 동네 아이들을 한 줄로 앉혀 모두가 안심하고 사탕 한 움큼씩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준 후 사탕을 나눠주었습니다.nbspnbspnbsp아이들이 온순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오랜 시간 인도에서 구호활동을 해 온 스님의 연륜과 경험이 느껴졌습니다. 아이들은 사탕을 받고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그럼에도 몇몇 아이들은 계속 순례객들 따라오며 구걸을 했습니다. 한 거사님은 땅바닥에 머리를 수 차례 조아리며 쫓아오는 아이들 때문에 무척 곤혼스러워 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 구걸을 하며 먼 길을 계속 따라오는 아이들nbsp그러나 한적한 논두렁길로 들어서니 시골 마을이 나타났고, 이 동네 아이들은 순례객을 봐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손을 흔들 뿐 아무도 구걸을 하지 않았습니다. 500미터 남짓한 거리의 두 마을이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 참 신기했습니다.nbspnbsp▲ 구걸하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웃기만 하는 시골 아이들nbsp스님은 이 모습을 보고 “관광객들이 자꾸 주기 때문에 아이들을 거지로 만드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왜 스님이 수자타아카데미를 만들었는지와도 일맥 상통하는 말씀이었습니다.nbspnbsp순례객들은 화사한 유채꽃밭과 망고나무 숲을 지나 서로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로 돌아왔습니다.nbspnbsp▲ 망고나무 숲nbsp저녁식사 후 저녁 6시 30분부터는 스님이 이번 성지순례를 총정리하는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바라나시를 시작으로 보드가야, 라즈길, 바이샬리, 쿠시나가라, 룸비니, 카필라바스투 등 이번 성지순례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이 중요했고, 무엇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스님의 명쾌한 정리 말씀에 성지순례의 감흥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습니다.nbspnbspnbsp강연을 마치면서 스님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자신을 가볍게 만들어나가야 함을 강조했습니다.nbspnbsp“옛날 이야기를 자꾸 할 필요도 없고, 미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고, 지금이 중요해요. 어쩌고 저쩌고 토를 달거나 머리 굴리지 말고, 상대가 욕할 때 빙긋이 웃는 연습을 한번 해보세요.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진찰을 해보더니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암인 것 같습니다’ 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발견하셨군요’ 라고 하세요. nbspnbspnbsp암은 오늘 생긴 게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이잖아요. 어차피 돈 들여 검사했는데 한 번에 발견했으니 좋은 일이에요. 지금 발견 못했다면 나중에 또 돈 들여서 검사를 해야 하잖아요. 의사가 기막혀 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소?’라고 물으면 ‘저는 부디스트입니다’라고 대답하세요. nbspnbspnbsp이것이 바로 유마거사가 병든 몸을 갖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과 같아요. 불행을 행복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재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재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재앙인 거예요. 그냥 하나의 사건인데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게 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이 말하는 재앙이 복인 줄 알아버리면 인생 해탈하는 거예요.nbspnbsp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불편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로워지면 그게 큰 복이에요. 불편한 것으로부터 자기가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세상살이에 훨씬 더 자유로워진 겁니다. 그런 공부를 하려고 돈 들여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런데 얼굴이 대부분 밝아진 것 같긴 하지만 몇몇은 내내 인상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먹는 게 못마땅했는지, 자는 게 못마땅했는지, 화장실이 못마땅했는지, 스님이 너무 늦게까지 붙들어서 잠 안 재우고 법문해서 못마땅했는지, 뭐가 그리 못마땅했는지 모르겠어요. nbsp이렇게 직접 경험하면서 배우는 거예요. 경험하면서 배워야 내 것이 되지, 지식으로 배우는 것은 지식으로 끝나요. 성지순례는 체험학습이에요. 어려움에 부닥쳐서 ‘아, 내가 사로잡혔구나’하고 알고, 넘어지면서 딱 깨치는 거예요. 넘어진 걸 보고 다른 사람이 걱정이 되어서 ‘아이고, 어째’ 하면서 일으켜 세워줄 때 빙긋이 웃어보세요. 그러면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겠죠. ‘당신은 뭔데 이럴 때 웃소?’ 하거들랑 ‘부디스트입니다’ 라고 하세요. nbspnbsp우리의 가장 큰 힘은 무슨 세력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고, 바로 이 행복입니다. 행복을 여러분들의 가장 큰 힘으로 삼으세요. ‘이 상황에서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다,’ 이게 가장 큰 힘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괴로워하겠지만 나는 이 상황에서도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거예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취해서 전봇대 붙들고 오줌누고, 지하철 계단에 쓰러져서 자는 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이에요. 내내 자기를 괴롭히면서 약 먹고 죽겠다고 하는 것도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어쨌고 어릴 때 가난했고 뭐가 어쨌고 하면서 지나간 이야기를 갖고 자기를 괴롭히잖아요.nbspnbspnbsp더 이상 자기 에너지를 자기를 괴롭히는 데 쓰지 말고 이렇게 자기를 가볍게 만들어 나가야 해요. 우리는 워낙 무겁게 사는 습관이 많이 들어서 잘 안 되는데, 그래도 자꾸 노력을 해야 해요. 가볍게, 좋게 생각하세요. 긍정적 사고는 낙관적 사고와는 달라요. ‘뭐든지 잘 될 거다’ 이런 게 아니라, 이미 일어나버린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넘어지면 앉아서 울지 말고 일어나야 해요. 지금 일어나는 게 중요하지, 앉아서 우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차가 지나가버렸으면 지나간 걸로 자꾸 시비하지 마세요. 이미 지나간 차는 잊어버리고 다음 차나 잘 잡을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nbsp이제 순례를 마치고 각자 사는 나라로 돌아가면 성지순례에서 배운 경험이 삶의 행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해주려는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은 깨달음은 논리를 뛰어넘는다고 하면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다시 한 번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부처님 말씀 중에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한번 보세요. 어느 동네를 갔더니 웬 아이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아버지 때문에 못 살겠어요’라는 거예요.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할머니 무덤가에 가서 뗏집을 짓고 하루 세 번씩 거기에 공양물을 갖다 올리며 운다는 거예요. 인도는 무덤이 없는데 왜 이런 묘사가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중국 사람이 번역하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어쨌든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러고 있어서 집안에 아무것도 일이 안 된대요. 부처님이 가만히 듣더니 아이한테 뭐라고 뭐라고 말했어요. 부처님 말씀을 들은 아이는 씩 웃으며 돌아갔습니다.nbspnbspnbsp조금 있으니 온 동네에 아무개네 집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이 났어요. 인도는 소가 죽어도 소고기를 안 먹으니까 그냥 버려둡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죽은 소 앞에 가서 꼴을 한 움큼 들이밀면서 ‘소야, 먹어라. 소야, 먹어라’ 이러는 거예요. 사람들이 ‘야 인마, 죽은 소가 어떻게 먹냐?’라고 해도 신경 안 쓰고 계속 ‘소야, 먹어라, 소야, 먹어라’ 이래요. 그래서 결국 그 집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이 퍼져서 무덤가에 있던 아버지에게까지 들어갔어요. 아들이 미쳤다니까 아버지가 찾아왔겠죠. 아이가 그 짓을 하는 걸 본 아버지가 ‘이 놈의 자식아, 죽은 소가 꼴 먹으라고 한다고 어떻게 먹냐’하고 화를 벌컥 내니까 아이가 올려다보면서 ‘그럼 아버지는요?’ 이랬대요. 그래서 아버지가 탁 깨달았어요. nbspnbsp이렇게 깨달음은 지식하고 좀 달라요. 깨달음은 논리가 있긴 하지만 논리도 초월합니다. 단순한 지식과는 개념이 좀 달라요.”nbsp스님은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 온갖 가지 이야기를 잘 알고 있어서 대중들의 상황을 살피며 그 때 그 때마다 적절한 부처님의 교화 사례들을 쑥쑥 꺼내어 주었습니다.nbspnbsp오늘도 스님이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세세히 설명을 해준 덕분에 부처님 당시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기분을 느끼며 기쁜 마음으로 오늘 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nbspA팀, B팀, C팀의 쉬라바스티 순례 안내를 모두 마쳤기 때문에 스님은 내일부터 다시 C팀을 따라 상카시아로 함께 이동할 예정입니다. 상카시아를 마지막으로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은 부처님의 10대 성지순례를 모두 마치게 됩니다. nbspnbsp※ 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nbsp쉽고 명쾌한 강의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시면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나는 인도 성지순례에도 우선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 nbsp
2016.1.19 (인도 14일째) 쉬라바스티 인근 절, 학교 방문 및 C팀 마중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쉬라바스티에 있는 인도 절과 인터 칼리지을 방문하여 보시금을 전달한 후 오후에는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과 함께 천불화현탑을 참배하고 저녁에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nbsp새벽 3시 20분이 되자 성지순례단 B팀이 상카시아까지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스님도 새벽에 주차장에 나와 버스에 탑승한 순례객들이 출발하자 손을 흔들며 반갑게 배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안녕히 가세요”nbspnbsp스님의 환한 웃음에 순례객들도 아쉬움이 큰지 버스 창밖으로 계속 손을 흔들었습니다.nbspnbspB팀을 떠나보낸 후 오전에는 원고 교정과 한국에서 온 보고서들을 처리하며 숙소에 머물렀습니다. 점심 때가 되자 스님은 “주위에 방문할 곳이 있다”며 길을 나섰습니다. 먼저 쉬라바스티에 있는 인도 절을 방문하여 보시금을 전달했습니다.nbspnbsp▲ 쉬라바스티 인도 절nbsp현재 인도 절에는 5명의 스님들이 상주하고 있는데, 불교가 거의 사라진 인도에서 인도 절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무척 소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해마다 이곳 인도 절에 보시금을 전달하고 있는데, 오늘도 방문을 하니 인도 스님들은 반갑게 스님을 환영하면서 공경 합장하고 찬탄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스님은 작년에 비해 절이 많이 정비된 모습을 보고 인도 스님들을 더욱 격려해 주었습니다.nbspnbsp▲ 인도 스님들에게 보시금을 전달하는 스님nbsp이어서 쉬라바스티에서 운영되고 있는 인터 칼리지를 방문했습니다. 스님은 이 학교를 설립한 쁘라게난다 스님과 20여 년 전부터 인도 불교 부흥을 위한 활동과 관련해 인연을 맺어오고 있습니다.nbspnbsp▲ 제트완 인터 칼리지 방문nbsp스님이 학교에 도착하자 운영위원장님과 교장선생님이 반갑게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스님의 발에 손을 대며 합장 공경의 예를 한 후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nbspnbsp▲ 스님을 반갑게 환영하고 있는 학교 운영위원장nbsp스님은 학교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보시금을 전달한 후 학교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6학년부터 12학년까지 총 15개 반에 900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학년별로 각 반에 스님을 모시고 들어가자 학생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준비한 꽃송이를 스님께 전달했습니다.nbspnbsp▲ 스님께 꽃을 드리는 학생들nbsp스님은 수십 송이의 꽃을 받으며 학생들의 환영에 웃음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세요”라며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또 어떤 학생에게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 라고 물어보기도 했고, 또 어떤 반에는 스님들이 수업을 듣고 있어서 더욱더 격려를 해주기도 했습니다.nbspnbsp▲ 스님께 꽃을 건네는 스님들nbsp학교를 모두 둘러본 후 스님은 선생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각 선생님들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자세히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nbsp스님이 선생님들을 격려한 후 학교를 떠나려고 하자 선생님들은 학교 바로 옆에 이 지역에 근세에 와서 처음으로 지어진 절이 있는데 지금은 매우 낡아서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며 보수 공사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nbspnbsp▲ 낡아서 지붕이 일부 붕괴되어 있는 절nbsp스님은 그 자리에서 도와주겠다고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천축선원으로 돌아와서 천축선원이 공사를 도와주는 형식이 되도록 지원금을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돈이 다른 곳에 유용되지 않고 절을 짓는데에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쉬라바스티에 있는 중국 절로 향했습니다. 중국 절은 기원정사와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 붙어 있었습니다. 7층으로 된 큰 누각이 있어 멀리서도 금방 눈에 뛰었습니다.nbspnbsp▲ 중국 절nbsp스님은 중국 사람들이 이 절을 지을 때 7층 누각을 만든 이유에 대해 “현장 법사님이 인도 성지순례를 한 후 지은 책에 기원정사에 7층으로 된 큰 탑이 있었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현재 중국 절은 중국 사람들이 모두 철수하고 전혀 운영이 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이 절을 승려들을 교육하기 위한 사미 학교로 사용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곳곳을 꼼꼼히 점검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지만 방이 25개나 있고 잘 보수하면 아주 훌륭한 학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nbspnbsp중국 절 답사를 마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인도는 지금 건기에 해당하는데 비가 오는 모습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건기에는 밭이 바짝 마르게 되는데 비가 오니 밭작물에게 얼마나 좋아” 하면서 웃음을 지었습니다. nbspnbsp이렇게 쉬라바스티 주변에 있는 곳을 모두 방문한 후 스님은 다시 천축선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번 인연 맺은 사람들을 잊지 않고 늘 챙겨주는 스님의 모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nbspnbsp오후 4시가 되자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이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A팀과 B팀에 비해 1시간 30분이나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급하게 C팀을 환영하기 위해 천불화현탑으로 향했습니다. C팀은 네팔에서 인도국경을 통과할 때 대응을 비교적 잘 했는지 2시간 만에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nbspnbspC팀이 도착하자 스님은 손을 흔들며 “쉬라바스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송수신기로 익숙한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너무나 반가워하며 버스에서 내렸습니다.nbspnbsp▲ 천불화현탑nbsp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불화현탑에 올라 탑돌이를 한 후 자리에 앉아 저녁예불을 올렸습니다.nbspnbspnbsp예불을 마친 후 스님이 천불화현탑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쉬라바스티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300여 개 나라 중 16대국이 있었고 16대국 중 초강대국 둘이 있었는데 하나가 마가다국이고 다른 하나가 코살라국이었어요. 마가다국의 수도가 왕사성이고 코살라국의 수도가 사위성, 즉 이곳 쉬라바스티입니다.nbspnbsp‘쉬라바스티’는 ‘풍요롭다’는 뜻입니다. 마가다국은 전통적인 선진강국인데 코살라국은 신흥강국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이곳 사위성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군사적으로도 강력하지만 문화 수준은 좀 뒤처지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수닷타 장자의 초대를 받고 부처님이 이곳에 오시긴 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문명 수준이 좀 떨어지다 보니까 신통력을 보여주는 걸 좋아하고 복 빌기를 좋아해서 삿된 외도가 오히려 융성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오셨는데도 귀족이나 지식인 계층 일부를 제외하면 불법에 귀의하는 자가 많지 않았어요.nbspnbsp이를 안타까이 여긴 수닷타 장자가 부처님께 간절히 청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신통은 중생을 현혹하므로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곳 주민들이 어리석어서 외도가 융성하니 부처님께서 뭔가 이적을 좀 보여주셔야 이 사람들이 따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어느 날 쉬라바스티 성 동문 밖 이곳에 대중들을 모으라고 하셨대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부처님이 망고 한 개를 드시고 그 씨를 땅에 심었더니 대중이 보는 앞에서 싹이 트고 자라 금방 큰 망고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려 다시 노랗게 익었는데, 그 모든 망고가 다 부처님으로 화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천불화현이 출현한 뒤 부처님께서 하늘로 가셨다고 해요.nbsp그런데 이 이야기는 우리가 배운 부처님의 삶이며 인격과는 잘 안 맞아요. 나중에 대승불교에 들어와 생긴 이야기도 아니고 초기불교 때부터 있는 이야기인데 무슨 연유로 이런 이야기가 생겼을까요? nbspnbspnbsp‘부처님은 신통이 자재하시니까 그러실 수 있겠다’ 하는 신앙적인 것을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실제로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기록에 남았는지 아직 저도 확실히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어쨌든 이곳은 그런 이적을 보인 장소여서 이렇게 다른 곳보다 유별나게 큰 탑이 세워졌습니다.nbsp그 이후로 쉬라바스티에서 부처님 법에 귀의하는 자가 늘어나고 결국은 이곳에서 불법이 융성하게 되었다고 해요. 물론 그렇게 되어서 좋은 점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부처님을 시기 질투한 외도들이 부처님을 해치려 들었던 사건이 여기서 많이 생겼습니다. 왕사성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지만 여기서는 외도들이 부처님을 해치려고 다양한 음해를 벌였어요. 당시 여기가 문명이 뒤처진 곳이다 보니 신흥 사상가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천불화현은 그런 경쟁 속에서 불법이 우위에 서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까 해요.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이렇게 큰 탑을 세운 것 같습니다.nbspnbsp8대 성지를 상징하는 조각이 있다고 했죠? 우선 4대 성지가 있고, 그 다음에 왕사성을 상징하는 조각은 ‘취상조복’, 즉 술취한 코끼리가 부처님께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모양입니다. 바이샬리의 상징은 ‘원후봉밀’, 즉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리는 모양이고, 이곳 쉬라바스티는 ‘천불화현’이에요. 상카시아는 도리천에 가신 부처님이 하강하는 모습입니다. 인드라와 브라만이 부처님의 양쪽에 시립해서 계단을 타고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이에요.nbspnbspnbsp이 시간대에 여기 오면 석양을 볼 수 있어요. 맑은 날 여기 올라와서 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걸 마치 실제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만 오늘은 안개가 자욱해서 그런 풍경을 보기 어렵습니다. 일단 오늘은 이 천불화현탑을 친견하고 들어가서 저녁에 법회를 한 뒤 내일은 기원정사와 사위성을 둘러보겠습니다.”nbspnbsp스님의 말씀대로 어떤 사건이 이곳에서 있었기에 천불화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지 정말 궁금함이 일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꼭 고증이 되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순례객들은 천불화현탑에서의 옛일을 생각하면서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어둑해질 무렵 천불화현탑에서 내려와 숙소인 천축선원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천축선원에서 순례객들을 위해 따뜻한 국과 저녁식사를 마련해 주어 순례객들은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세면도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순례객들에게 저녁마다 맛있는 국을 끓여주고 있는 천축선원 적조행보살님nbsp이어서 저녁 7시부터는 천축선원 주지 대인스님을 모시고 저녁법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스님이 직접 대인 스님을 순례객들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 절을 창건하신 분이 대인 스님이십니다. 대인 스님께서 17년 전에 이곳에 오셔서 순례자들을 위해 숙소를 마련하시고, 이제는 동네 주민들을 위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도 지어주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보건소도 운영하고, 올해 3월부터는 학교도 열어서 수업도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nbspnbsp보통 순례자 숙소에 가보면 불사한다고 야단인데 진행은 잘 안되는 곳이 많아요. 그런데 이곳은 불사한다는 소리도 없이 매년 올 때마다 하나씩 진행이 되고 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조용히 이렇게 순례자들을 위한 아늑한 숙소를 마련해 주셨어요. 깊이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순례객 모두 대인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스님의 소개를 이어 받아 대인 스님이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온 인류에 부처님의 법을 전하시려고 다니시는 법륜 스님의 모습을 보면 부처님 당시가 절로 떠오릅니다. 저는 여기 있으면서 방문하는 순례자들과 이곳 주민들을 시봉하고 살고 있습니다. 걸망을 메고 부처님 8대 성지를 순례하다가 이곳에 와보니 여러 나라에서 도량을 지어놓고 있는데 오직 한국에서 지은 도량은 없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많은 한국 불자님들의 요청도 있고 해서 그냥 머슴 노릇 좀 해보자 해서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로 이곳에 온지 17년 째입니다.nbspnbsp매년 1월 마다 법륜 스님과 정토행자님들이 방문해 밝은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가시는 덕분에 저는 1년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습니다. 정토행자님들을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러요.” nbspnbsp대인 스님의 인자한 미소에 순례객들도 환하게 웃었고, 법당 안에는 훈훈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스님의 그을린 얼굴을 보니 머나먼 이국 땅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지 헤아려졌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과의 즉문즉설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스님은 먼저 밝게 웃으면서 순례객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특히 C팀은 세계 각국과 정토회 안팎에서 모인 분들이기 때문에 순례가 어땠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nbspnbspnbsp“제가 바라나시에서 여러분을 처음 만났을 때 세계 각국에서 그리고 전국에서, 또 정토행자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다국적군으로 C팀이 편성되어 있는 걸 보고 손발이 좀 안 맞아서 고생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땠어요? 다니면서 손발을 다 맞췄어요?”nbspnbsp“예”nbsp“훈련이 됐어요?”nbsp“예”nbsp“아이고, 다행이다.” nbspnbsp걱정이 되었는데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걸 보고 스님은 밝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오늘은 그동안 순례하면서 들었던 의문이나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하면 스님의 생각을 들려주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다양한 질문이 많았지만 모두가 궁금해할 수 있는 한 가지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nbsp성지순례를 하면서 각 성지마다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과 관련된 경전을 독송했는데, 경전의 내용이 실제 부처님의 말씀과 어느 정도 이질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는 질문이었습니다.nbspnbspnbsp“경전이 부처님 당시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기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종교들을 봐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의 손이 가면서 정치적인 내용도 개입이 되어 진리가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경전을 자세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불교 경전도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나중에 제자들이 구전으로 전하다가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때 실제 부처님의 말씀과 경전의 내용이 어느 정도 이질성이 있다고 봐야 하는지 궁금합니다.”nbspnbsp“오늘 제가 법문한 것도 그 뜻을 서로 달리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지금 이야기한 걸 금방 돌아가서 조별 나누기를 해도 ‘그게 아니라 이런 뜻이야’, ‘아니야, 네가 잘못 들었어’ 이러는 판에 어떻게 2600년 전 부처님 이야기가 그대로 전해지겠어요? 그것도 부처님이 한 자리에서 한 사람만 두고 이야기한 게 아니라 여기 가서 이 사람 두고 이야기하고, 저기 가서 저 사람 두고 이야기하고, 또 45년 동안 한 이야기를 또 500년이나 지난 뒤에 문서화했으니 고스란히 그대로 실릴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그러나 불경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부처님은 우선 어쨌든 80세까지 사셨잖아요. 여러 가지 비난도 받고 음해도 받았지만 그래도 예수님처럼 정치적으로 탄압받아 사형당하는 일은 안 겪었기에 깨달음 이후의 전법이 비교적 평탄한 편이었어요. 그리고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깨달았다고 하는 아라한이 500명이나 모여서 이게 부처님 말씀인지 아닌지 다 확인 작업을 거쳤습니다. 500명이 확인 작업을 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제일 많이 들은 아난다가 초안을 내면 500명이 다 들어보면서 ‘그건 아니야’ 하고 수정도 하고, ‘그게 빠졌어’ 해서 보충도 하고, 이렇게 하나하나 다 확인해서 결집을 했다는 거예요.nbspnbsp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걸 글로 쓰는 게 아니라 외워야 했어요. 외우려니까 부처님이 오래 말씀하셨다 해도 그 중 요지만 외워야 하잖아요. 그런데도 이걸 신문기사 쓰듯 반드시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이렇게 딱 붙여서 외웠습니다. 경전의 편집 방식이 그랬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금강경’에 나오는 ‘여시아문’, 즉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들은 사람이 기록자예요. 경전 내용을 요즘에 비유해서 신문기사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할 때의 ‘나’는 기사를 쓴 사람, 즉 기자입니다. 그는 바로 아난존자예요. 금강경 첫머리를 보면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의 1250명 대중과 함께 있을 때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고 나중에 수보리가 이러저러하게 질문하니 부처님이 이러저러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라는 식으로 시작해서 내용이 전개됩니다. 앞부분이 그렇게 정리되어 있어야 외우기가 쉽잖아요. 그런 식으로 정리해놓고 그 내용을 다 같이 확인했어요. 500명이 다 같이 확인해서 암송하고 하나 끝내고 또 하나 끝내는 식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불경에 기록된 내용은 비교적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500명이 일일이 확인하긴 했지만 그 뒤에 시간이 흐르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여기 편집에서는 빠졌다’ 이런 주장이 나왔어요. 그래서 그것이 경전 안에 안 들어갔는데도 계속 중요한 가르침으로 구전되어 내려와서, 100년쯤 지난 뒤에 그 중의 일부를 다시 보충했습니다.nbspnbsp그런데 부처님이 참 존경스러운 것은, 부처님이 이런 일이 생길 줄 미리 알고 기준을 정해놓았습니다. ‘내가 열반한 뒤에 분명히 부처님에게 직접 이야기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생기거든 기존에 없다고 하여 무조건 아니라고 하지도 말고, 부처님한테 들었다고 무조건 믿지도 말라. 지금까지 붓다에게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받은 바에 견주어서 이 가르침이 합당한지를 보고, 합당하거든 수용하고 합당하지 않거든 버려라.’ 라고 해요. 지금까지 정리되어 내려온 가르침에 견주어 판단하라는 겁니다.nbsp또 여래는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계율이나 경전에 의거해서 진리는 검증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어느 경전에 써놨다고 해서 그걸 무조건 진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nbspnbsp역사가 흘러내려오면서 부처님 이름을 빙자해서 소위 ‘위경’이라는 게 숱하게 제작되었습니다. 그런 것은 내용을 딱 보고 이런 기준으로 판단하면 됩니다. 우선 연기법에 어긋나면 진리가 아니에요. 뭘 어떻게 하면 복을 많이 받고 수명이 길어진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안 맞습니다. 이렇게 불법의 원칙을 딱 몇 가지만 알면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즉 중도에 어긋나도 불법이 아니고, 사성제에 어긋나도 불법이 아니고, 연기법에 어긋나도 불법이 아니고, 삼법인에 어긋나도 불법이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nbspnbsp부처님 법은 누구를 해치는 법이 아니고 이치에도 어긋남이 없어요. 전법선언에 ‘사람과 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누굴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라는 겁니다. 다음으로 ‘법을 설할 때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설하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치에 합당치 않은 이야기는 불법이 아니에요.nbspnbsp그러면 불법은 논리적인 지식일까요? 아닙니다. 때로는 논리를 뛰어넘는 것도 있어요. 논리에 어긋나는 것은 불법이 아니지만 또한 논리를 뛰어넘을 수도 있어요. 논리에도 갇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법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어요.nbspnbspnbsp논리를 뛰어넘는 것과 논리에 어긋나는 것은 달라요. 내일 기원정사에 가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참으로 합당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요. 요즘 우리가 들어도 놀랄만한 이야기들입니다.”nbsp경전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순례객이 궁금해하는 많은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순례객들이 먼 길을 달려와서 피곤한 것을 헤아리며 오늘은 일찍 잘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그런데 오늘은 좀 일찍 자야 해요. 내일은 어떻게 보면 차를 안 타니까 제일 좋은 날이지만, 어떻게 보면 제일 힘든 날이에요. 차를 타면 어쨌든 차 안에서 잘 수 있지만 내일은 차를 안 타니까 하루 종일 졸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힘들다면 힘든 날이고, 차를 안 타니까 좋다면 좋은 날인데 오늘 저녁에는 눈을 좀 붙여둬야 합니다. 그런데 내일은 밤새도록 안 자고 법문해도 괜찮아요. 모레 최장거리를 가기 때문에 차 안에서 계속 자야 해요. nbspnbspnbsp그러니 오늘은 일찍 끝내지요. 저는 언제든지 밤샘해서 법문을 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그만 하자’ 하면 그만하고 ‘더 하자’ 하면 더 하고. 저는 상관없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만 하자’ 할 걸 제가 알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nbspnbsp자, 오늘 먼 거리 오느라 피곤했으니 이만 자고 내일 또 공부합시다.”nbsp스님의 배려를 느끼며 오늘은 순례객 모두 10시도 안 되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nbsp내일은 하루 종일 사위성을 걸어서 순례할 예정입니다. 부처님은 사위성에서 24번 또는 25번의 안거를 지내셨다고 합니다. 기원정사에서 19년, 베사카 부인이 건립한 동원정사에서 5년 혹은 6년, 그래서 총 24년 또는 25년을 지내신 것이지요. nbspnbsp그동안 순례객들은 성지순례 일정이 빠듯해서 앞사람만 쳐다보고 쫓아가기 바빴지만, 내일은 하루 종일 차도 안 타고 걸어다니면서 여유롭게 기원정사를 둘러보고 법문도 충분히 듣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nbsp ※ 법륜 스님의 쉽고 명쾌한 강의를 1년 동안 들을 수 있는 2016년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시면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나는 인도 성지순례에도 우선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 nbsp
2016.1.18 (인도 13일째) 성지순례단 B팀 쉬라바스티 순례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B팀을 이끌고 부처님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 쉬라바스티를 순례한 후 저녁에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새벽 6시에 예불과 기도를 마친 성지순례단 B팀은 한 줄로 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기원정사로 향했습니다. 맨 앞에는 스님이 앞장섰습니다. 새벽 안개를 가르며 고요히 걸어가는 기나긴 행렬을 보니 이곳 사위성에서 설해진 금강경의 한 구절이 그대로 재현이 된 것 같았습니다. nbspnbspnbsp‘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기수급고독원에 대비구중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 공양 때가 되어 큰 옷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신 채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로 밥을 빌어 본 곳으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nbspnbsp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10대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순례단은 이제 순례의 막바지에 이르러 기원정사에 당도하자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습니다.nbspnbspnbspnbsp스님은 손에 향을 든 순례단을 이끌고 기원정사 곳곳을 탑돌이하고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신 자리, 부처님이 머무신 처소, 아난 존자가 물을 떠서 부처님께 드렸다는 우물 터,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했던 자리,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생각하기 위해 심은 보리수 나무, 라훌라 존자의 처소, 앙굴리말라의 처소, 후대 승려들이 머문 승방터 등을 모두 참배한 후, 법회를 하기 위해 부처님이 머문 처소인 ‘간다 쿠티’ 앞에 다시 섰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수행승들을 위해 설법을 했던 장소nbsp▲ 아난다가 부처님께 물을 떠다 주었다고 하는 우물nbsp▲ 라훌라 존자가 머무른 처소nbsp지심정례공양... 예참 불공과 함께 160여 명의 순례단이 간다 쿠티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하자 동쪽에서 붉은 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다고 하는 바로 이곳에서 예불을 올리는 이 순간은 순례객 모두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nbspnbsp▲ 아침 예불nbsp예불을 마치고 스님은 순례객을 위해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고, 이어서 이곳 기원정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창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경전 속에 등장하는 사위성에서 일어난 갖가지 교화 사례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또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실제 경전 속에서는 그 내용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함경의 절반 가까이가 이곳 사위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니 오늘 독송한 내용 말고도 어마어마한 사례들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경전 독송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부처님이 특히 사위성에서 외도들의 모함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새겨야 하는지 강조했습니다.nbspnbsp“사위성은 신흥강국으로 등장한 코살라국의 새로운 도시였기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문명이나 문화로 보면 수준이 좀 낮았나 봅니다. 그래서 삿된 외도들이 성행했어요. 부처님이 여기에서 외도들의 모함을 특히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방금 읽은 경전에 나와 있듯이 여러 가지 모함을 받고 승가가 오해를 받을 때마다 수닷타 장자나 베사카 부인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사성에 계실 때도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니까 이런 비난의 소리가 들렸다고 해요.nbspnbspnbsp‘어제는 누구의 아들을 빼앗아가더니 오늘은 누구의 남편을 빼앗아가네. 내일은 또 누구의 제자를 빼앗아 갈 것인가.’nbspnbsp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을 빼앗겼다는 관점으로 보고 이렇게 비난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말에는 이렇게 대답하라고 했어요.nbspnbsp‘여래는 진리를 설하는 자다. 법다이 설하는데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nbspnbspnbsp이렇게 해서 그 비난이 멈추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도 일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비난을 받게 되어 억울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위대하신 분도 오해와 비난을 받았는데 어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오해와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수행 중에 베푸는 보시도 중요하고, 계를 청정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억울하고 분한 일을 잘 참아내는 인욕 또한 매우 중요한 수행입니다.”nbspnbsp성지에서 직접 읽는 경전 독송의 감동도 컸지만, 스님이 핵심을 다시 짚어주니 당시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순례객 모두 매번 성지에 도착할 때마다 예불을 정성껏 올렸는데, 예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삼귀의를 좀 더 자세히 풀어놓은 것이 예불문입니다. 우리가 늘 조석으로 예불을 하고 다녔지요? 이 예불문은 ‘오분향 예불문’이라고 합니다. 다섯 가지 향을 부처님께 올리고 예불한다고 해서 ‘오분향 예불문’이라고 하고, 절을 일곱 번 한다고 해서 ‘칠정례 예불문’이라고도 합니다.nbspnbsp인도에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전단향처럼 좋은 향 다섯 가지를 꽂아서 향기를 피우면서 제사를 지내요.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께 올리는 향은 그런 전단향이니 무슨 향이니 하는 게 아닙니다.nbspnbsp첫째, 계향 즉 ‘계율을 청정하게 지킨다’, 또는 ‘언행이 바르다’고 이르는 인격의 향기예요. 계를 청정히 지키는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둘째, 그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 선정의 향기로 공양을 올립니다. 셋째, 어리석음을 없앤 지혜로운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넷째, 온갖 속박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해탈의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nbsp우리가 살다보면 남에게 이익을 주기보다는 손해를 끼칠 때가 많아요. 그런데 나를 때리는 사람, 내 물건에 자꾸 손해끼치는 사람, 나한테 성추행하는 사람, 나한테 욕설하고 사기 치는 사람,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사람과는 같이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부모라도 힘들고, 배우자라 해도 힘들고, 그런 자식이 있어도 힘듭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 사람, 즉 ‘그 사람은 나를 절대로 해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에게 절대로 손해 끼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한테 절대로 사기 치거나 욕설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한테 행패 부리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보통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착한 사람 즉 남에게 해를 안 끼치는 사람이 돼야 해요.nbspnbsp그런데 ‘우리 마누라나 남편은 착하기는 한데 늘 불안정하다’ 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늘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도 같이 살기엔 좀 힘들어요. 그래서 착한 것만 갖고는 안 되고, 두 번째로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nbspnbsp세 번째로, 착하기도 하고 마음도 편안한데 앞뒤가 꽉 막혀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어요.그러면 속이 터지죠.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이 살기 좀 힘들어요. 그러니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람이 좀 영리해서 말귀도 금방금방 알아듣고 일머리도 금방금방 돌아가야 같이 살기 쉽잖아요.nbspnbsp네 번째로,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그건 안 되겠는데요’, ‘그거 해봐도 안 될 거예요’ 라며 늘 사물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이에요. 그게 아니라 뭐든지 이야기하면 ‘네. 해보죠, 뭐’ 혹은 ‘네, 해봅시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해요. 이처럼 어떤 윤리나 도덕이나 의식에 꽉 묶여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좀 자유롭고 열려 있는 사람이 가지는 향기가 해탈의 향기예요.nbspnbsp다섯 번째로, 해탈지견향은 부처님의 지혜예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마지막 단계입니다.nbsp이런 다섯 가지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예불을 올릴 때 ‘계향’이라고 말할 때는 ‘계율을 청정히 지키겠습니다’ 라고 다짐해야 해요. ‘정향’이라고 말할 때는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을 닦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혜향’ 할 때는 ‘지혜를 증득하겠습니다’ 라고 다짐하세요.nbspnbspnbsp이 다섯 가지로 시방에 계시는 한량없는 불법승 삼보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공양을 올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수행의 다섯 가지 향으로 공양을 올린 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예불입니다.nbsp자, 그럼 이곳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각자 한가하게 정진을 좀 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nbsp예불문에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 뜻에 더욱더 집중해서 예불을 해봐야겠다는 다짐이 생겼습니다.nbspnbsp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순례객들은 기원정사 곳곳에 흩어져 개인 정진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무 밑에서 명상을 하는 사람, 조별로 모여서 공동 정진을 하는 사람들, 간다 쿠티를 바라보며 300배 절을 하는 사람 등 모두들 성지에서 받은 감동을 정진을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승화하고 있었습니다. nbspnbspnbsp▲ 개인 정진 시간nbsp대중들이 정진을 하고 있는 사이 차량별로 줄을 서서 스님과 일대일로 기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듯이 모두들 설레여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활짝 웃었습니다.nbspnbsp▲ 기념사진 촬영nbsp이렇게 기원정사에서 법회를 모두 마친 후 다함께 사위성을 향해 걸었습니다. 대중 일동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대로 걷기 시작하자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들어가는 순례단nbsp“이제 사위성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천이백오십명이 기러기떼처럼 한 줄로 성 안으로 들어가서 골목 골목으로 흩어진 다음 걸식을 하고 나서 기원정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는 ‘환지본처’라고 표현하죠. 본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드셨다는 뜻입니다. 천이백오십 대중이 매일 가서 걸식을 해도 괜찮을 정도였으니 이 사위성이 얼마나 크고 부유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죠.”nbspnbsp부처님 당시를 재현하듯 긴 행렬을 이루며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향했습니다. 160여 명이 한 줄로 가도 이렇게 긴 행렬이 되는데 천이백오십 명이 줄을 지어 걷는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사위성은 정말로 큰 규모였으리라 짐작해 볼 뿐입니다.nbspnbsp사위성 서문 쪽으로 들어서자 두 개의 큰 탑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스님이 송수신기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왼쪽에 보이는 이것은 앙굴리말라를 기념하는 탑이고, 저기 오른쪽에 있는 것은 수닷타 장자를 기념하는 탑입니다. 수닷타 장자는 선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사람이고, 앙굴리말라는 악인이었다가 참회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었어요. 먼저 앙굴리말라 수투파를 정근하면서 참배하겠습니다.”nbsp▲ 왼쪽이 앙굴리말라 스투파, 오른쪽이 수닷타 장자 스투파nbsp대중들은 스님을 따라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고 삼배를 한 후 자리를 깔고 앉았습니다.nbspnbsp▲ 앙굴리말라 스투파nbsp스님은 부처님이 어떻게 99명을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를 교화했는지 당시의 모습을 영화보듯이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앞에 있는 탑은 앙굴리말라를 기념해서 세운 앙굴리말라 수투파입니다. ‘앙굴리’는 ‘손가락’, ‘말라’는 ‘염주’라는 뜻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원래 이 지역의 부유하고 좋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여기서 서북쪽인 파키스탄 지역에 당시 유명했던 탁실라라는 교육 도시로 유학을 보냈어요. ‘부처님의 일생’에서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어린 시절은 ‘유학기’라고 해서 공부하는 시기예요. 그래서 78살 때 유학을 보내서 1617살까지 공부를 마친 뒤 돌아오는데, 그 당시에는 멀리 유학을 가면 우리의 옛날 서당처럼 스승의 집에 기숙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를 가르친 훌륭한 스승은 나이가 아주 많았습니다. 아마 5060살 정도였던 것 같지만, 당시에는 50살만 되어도 할아버지였으니까 요즘으로 치면 780살 정도 된 느낌이었나 봐요. 그런데 부인은 20대 중반이어서 아주 젊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어린 시절에 그 집에 들어가 공부하니까 스승의 부인인 사모님이 엄마처럼 잘 보살폈는데, 아이도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서 귀여움을 받았다고 해요.nbspnbspnbsp그러다 스승이 아이를 질투해서 문제가 생겼어요. 스승의 질투가 원인인 것은 맞지만, 질투가 생긴 이유에 대한 설명은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하나는 유학 온 아이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 하니까 그 지역 출신 학생들이 모함했다는 거예요. 앙굴리말라가 1516살이 되어 당시 기준으로는 장성했으니까 스승에게 ‘앙굴리말라와 사모님 사이가 수상하다’라고 고자질을 했어요. 스승이 줄곧 그 말을 믿지 않다가, 어느날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니 사모님이 손으로 밥을 앙굴리말라의 입에 떠넣어주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느꼈다고 해요.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잖아요. 떠넣어준 것은 어릴 때 해주던 버릇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nbsp또 다른 이야기로는 밥을 먹다가 방안에 쥐가 들어왔대요. 둘이서 쥐를 잡는다고 법석을 피우다가 옷자락이 엉키고 살갗이 드러났는데 마침 그때 스승이 돌아와서 보고 두 사람 사이를 오해했다고 기록한 것도 있습니다.nbspnbsp또 다른 하나는 남편은 나이가 많고 제자는 용모 반반한 청년이다 보니 사모님이 앙굴리말라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해요. 그래서 스승이 멀리 외출하고 둘만 있을 때 사랑을 나누자고 청했는데 앙굴리말라가 거절했다고 해요. 자기가 몇 년을 극진히 사랑으로 대해줬는데 자기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니까 굉장히 자존심도 상했고, 이 아이의 성격으로 보아 남편에게 이야기할 것 같으니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도 들었겠죠. 그래서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옷을 찢고 흐트러뜨린 뒤 막 울었다는 거예요. 놀란 남편이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내가 이 아이를 엄마처럼 돌봤는데 당신이 없는 사이 이 아이가 나를 추행하려 했소’ 라고 이야기했대요. 그래서 남편은 제자를 사랑하던 마음은 없어지고 제자를 나쁘게 생각하게 되었어요.nbsp구체적인 사정이 어떻든 오해가 생겼어요. 그래서 스승은 제자에게 ‘네게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라고 말했는데 이 아이 입장에서는 스승이 훌륭한 분이니 배울 게 더 있다고 생각해서 ‘아닙니다, 아직 저는 더 배울 게 많습니다’ 라고 답했어요. 있겠다고 하니 더 수상하게 보이잖아요. 가라는 스승과 계속 있겠다는 제자 사이의 실랑이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스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남았다. 승천, 즉 산 육신을 가진 채 바로 하늘나라에 가는 게 마지막 공부인데 그것은 실제로 행하기가 너무나 어려우니 가르쳐줘봐야 네가 할 수 없다.’nbsp그러자 이 청년이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 못 한다 하더라도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맹세한 거예요. 그래서 가르쳐준 비법이라는 게 사람을 100명 죽여서 그 손가락 1,000개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면 바로 승천한다는 것이었습니다.nbspnbsp이게 바로 사로잡힘이에요. 청년은 거기에 딱 빠져서 그날부터 수행이랍시고 사람을 죽인 뒤 손가락을 엮어서 목에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본래 이름은 없어지고 ‘앙굴리말라’, 즉 손가락 염주를 한 희대의 살인마가 되었어요.nbsp그러자 당시 사회에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전부 두려워하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사람을 죽여야 손가락 염주를 완성할 텐데 사람들이 도망가니까 사람을 따라 자꾸 내려와서 이제 쉬라바스티로 내려온다는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왕에게 탄원해서 요즘 말로 하자면 치안이 허술하니까 빨리 잡아달라고 졸랐습니다. 병사 몇 명쯤 보내봐야 숲속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공격하니까 도로 다 잡혀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다 보니 괴력을 가져서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는 헛소문까지 났어요. 어떤 확신을 가지면 두려움이 없으니까 실제로 그렇게 되는 면도 있었을 겁니다.nbsp그런데 여기서 경전의 기록이 또 두 가지로 다릅니다. 하나는 앙굴리말라가 99명을 죽이고 마지막 1명만 죽이면 승천한다고 믿는 상태에서 쉬라바스티 가까이에 왔다는 거예요. 왕이 나서서 이 사람을 잡겠다고 하니 그 어머니가 부처님께 찾아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nbspnbsp다른 하나는 부처님이 길을 가는데 사람들이 도망쳐오면서 ‘부처님, 그 길을 가지 마지 마십시오. 그리로 앙굴리말라가 옵니다’라고 외쳤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여래는 두려움이 없소’ 이렇게 답하고 계속 길을 갑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거슬러서 길을 갔습니다. 한참을 가니까 숲에서 칼과 방패를 든 앙굴리말라가 나타났어요. 앙굴리말라는 한 사람만 더 죽이면 자기가 승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다들 도망가서 사람을 만나기 어렵던 중에 부처님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칼을 쥐고 ‘사문아, 게 섰거라’ 하고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습니다.nbspnbsp그러나 부처님은 그러거나 말거나 평소 걷던 대로 천천히 걸어가셨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쫓아가도 부처님에게 닿지를 않는 거예요. 멈추라고 마구 소리를 지르다가 헐레벌떡 쫓아와서 부처님 앞을 막아서면서 ‘왜 멈추라는데 멈추지 않았느냐?’ 이렇게 화를 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나는 이미 멈춘 지 오래다.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너다’ 이렇게 말했어요. 부처님의 특이한 화법입니다. 화제를 바꿔버려요.nbspnbsp그러자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고, 이 말에 발끈한 앙굴리말라가 문제제기를 했어요. ‘말도 안 된다. 너는 계속 걸었고 나는 지금 멈춰 있는데 왜 네가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고 하느냐?’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어요. ‘나는 남을 해치는 것을 멈춘 지 오래되었으나 너는 아직 남을 해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성냄을 멈춘 지 오래 되었으나 너는 아직 성냄을 멈추지 못했다.’nbspnbspnbsp앙굴리말라는 스승의 술수에 걸려들어 정신을 잃었다가 이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너무나 몹쓸 짓을 저지르고 엄청난 죄를 지은 거예요. 그래서 방패와 칼을 던지고 무릎을 꿇으며 출가하기를 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가 이미 진리에 눈을 뜨고 깨달음을 얻은 줄 알고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부지런히 정진해서 괴로움이 소멸되는 열반의 세계로 가라’ 라고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nbspnbsp그런데 부처님이 출가사문이 된 앙굴리말라를 데리고 기원정사로 돌아왔을 때 마침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께 인사를 왔어요. 정사에 들어올 때는 누구든지 무장을 해제해야 하니까 병사들을 밖에 세워두고 왕만 들어와 인사를 올리는데, 정사 밖에 잘 무장된 날랜 병사 1,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세워 두었어요. 게다가 그 중 500명은 기마부대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물어보셔습니다.nbspnbsp‘무슨 일이오? 전쟁이라도 났소?’‘아닙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지만 앙굴리말라라는 희대의 살인자가 나타나서 온 나라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군대를 끌고 잡으러 가는 중에 부처님께 인사드리러 들렀습니다.’‘대왕이시여, 만약 그 앙굴리말라가 모든 악행을 멈추고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면 어떻겠소?’‘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제가 그분께 예를 갖추고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그 살인자가 악행을 멈출 리 만무하며 출가사문이 될 리는 더욱 만무합니다.’nbspnbsp그러자 부처님이 옆에 앉아 있는 비구를 가리키며 ‘이 존자가 바로 앙굴리말라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왕이 갑자기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거예요. 괴력을 가졌다는 희대의 살인마를 지금 무장해제하고 호위병 한 명도 없이 마주했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자 부처님이 ‘대왕이여,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는 아힘사요. 더 이상 누구도 해치지 않는 사람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앙굴리말라의 법명은 ‘아힘사’입니다. ‘비폭력’, ‘불살생’이라는 뜻이에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안온한 수행자여서 대왕이 절을 하고 필요한 게 무엇이든 공양을 올리겠다고 하니까 앙굴리말라가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양을 사양했어요. 그때 왕이 부처님을 찬탄했습니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거룩하십니다. 누구도 조복하지 못할 사람을 조복하고, 길들이지 못할 사람을 길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창과 칼을 가지고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을 부처님은 오직 말씀으로 그를 조복하고 다스렸습니다.’nbsp춘다의 공양이 붓다를 위대하게 했듯이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더욱 더 위대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앙굴리말라 같은 사람이 법에 귀의해서 성자가 됨으로 해서 여래의 법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였으니까요.nbspnbsp우리 정토회도 그런 것 같아요. 착한 사람이 정토회에 와서 수행자가 되면 별로 영향력이 없는데, 성질 더럽고 못된 사람이 법문 듣고 변하니까 ‘어쩌다가 저렇게 됐냐’며 주위에서 난리가 나서 나중에는 형제며 가족들이 모두 정토회에 옵니다. nbspnbspnbsp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출가 스님이 되었다는 소문이 나니까 또 문제가 되었어요. 앙굴리말라가 출가하기 전에는 집집마다 줄을 묶고 줄에 종을 달아서 앙굴리말라가 나타나면 서로들 비상연락을 했습니다. 누가 줄을 잡아당겨 종소리로 알리면 온 도시가 전부 대문을 잠그고 창문을 닫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출가사문이 됐다니까 아침에 탁발하러 오는 스님들 중 누가 앙굴리말라인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전부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공양을 안 주는 거에요. 앙굴리말라를 출가시켜 놓으니까 다른 사람들까지 밥도 못 얻어먹게 생겼어요. 상가의 이미지가 확 떨어져 버렸습니다.nbspnbsp앙굴리말라도 발우를 들고 탁발하러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서 여인이 아이를 낳고 있었어요. 막 아기 머리가 나오던 참인데 ‘앙굴리말라가 온다’라고 누가 소리치니까 여인이 놀라서 그만 까무러쳐 버렸어요. 애가 나오다가 멈췄으니 산모도 아이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어요. 앙굴리말라가 기원정사로 와서 부처님께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nbsp‘앙굴리말라여, 다시 그 집으로 가거라. 그 집으로 가서 이렇게 말해라.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nbsp그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말이 안 맞지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는 ‘출가한 이래로’라는 뜻입니다. 그 전은 다 꿈속의 이야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집에 가서 이렇게 말했더니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고 합니다.nbsp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이제는 앙굴리말라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어요. 그러자 그 동안은 겁내서 도망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보복을 하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성내에 탁발을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몽둥이로 쳐서 결국은 깊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기록이 조금씩 달라요. 부처님이 소식을 듣고 앙굴리말라가 쓰러진 곳에 왔다고도 하고, 앙굴리말라가 피투성이가 되어 정사로 돌아왔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부처님이 오셨을 때 앙굴리말라는 이렇게 말했어요.nbspnbsp‘여래시여, 저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nbsp돌과 몽둥이에 맞아 죽으면서도 마음에 진심이 일어나지 않고 편안히 열반에 들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아라한과를 증득했기에 순교를 할 때도 아무런 번뇌가 없었어요.nbsp이것이 앙굴리말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위성 사람들이 앙굴리말라를 위한 탑을 이곳에 세운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왔을 때는 여기에서 앙굴리말라가 숨었다고 하면서 ‘앙굴리말라 굴’이라고 했어요. 저쪽으로 가서 보면 탑에 희한하게 굴이 뚫려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기어서 들어가 보고, 굴을 통과하면 오래 산다는 속설도 있었는데 지금은 막아놨네요. 생각해보면 시내 한복판인데 앙굴리말라가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나왔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 이곳은 앙굴리말라가 탁발하러 왔다가 돌에 맞아서 열반에 든 곳이어서 기념탑을 세운 것 같아요.nbsp저 건너편은 선인으로서, 즉 착한 사람으로서 제일 유명한 사람인 수닷타 장자의 집터예요. 그래서 저기에 또 그를 기리는 탑을 쌓아서 지금은 두 탑이 마주보고 있게 되었습니다.nbspnbsp앙굴리말라를 교화한 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법은 악한 이나 착한 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든 사람에게 평등합니다. ‘그가 과거에 어땠나’ 하는 것은 꿈속의 이야기이고, 어떤 사람이든 깨달을 수 있고, 깨달으면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과거에 지은 과보는 받아야 해요.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과거에 지은 악업의 과보를 받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열반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는 일체의 두려움과 성냄도 없이 편안하게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자, 그럼 경전에 나오는 앙굴리말라의 이야기를 독송해보겠습니다.”nbsp스님이 말씀해준 내용이 경전 속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독송해 보았습니다. 부처님이 기절한 임산부를 보고 당황해하는 앙굴리말라를 보고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해라고 하는 대목과 마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저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목은 언제 들어도 큰 감동입니다.nbspnbsp이렇게 앙굴리말라 스투파 참배를 마치고 이어서 수닷타 장자의 스투파로 건너가 참배를 했습니다.nbspnbsp▲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나와서 수닷타 장자 스투파로 이동하는 순례단nbsp비록 지금은 허물어져 있지만 기단의 규모를 보니 당시에는 얼마나 크게 세워졌을지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수닷타 장자 스투파nbsp다시 순례객들은 지금은 정글로 변한 사위성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사위성의 동문으로 나와 베사카 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동원정사를 참배했습니다.nbspnbsp▲ 정글로 변한 사위성 안nbsp동원정사에서 스님은 베사카 부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또 실감나게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nbsp이렇게 순례를 마치고 나서 대중들은 숙소로 돌아와 세면을 마치고 조별로 모여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먹었습니다. 식사 후 6시부터는 스님의 성지순례 총정리 강연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약 10여 명이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들었던 의문에 대해 온갖 질문들을 쏟아내었습니다. 스님의 답변을 들으며 의문이 하나씩 하나씩 풀어지자 대중들의 얼굴도 점점 밝아져 갔습니다.nbspnbspnbsp오늘은 그 중에 부처님이 탁발을 하셨던 것은 어떤 수행적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물었던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오늘 순례객들은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직접 탁발을 하듯이 걸어가면서 많은 감흥을 느꼈는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더 깊이 부처님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오늘 사위성을 순례하면서 탁발하는 것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많은 수행자들이 탁발을 하시는데 그것이 어떤 수행적 의미를 가지는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nbspnbsp“머리를 깎고 집을 나오고 탁발하는 것은 부처님이 처음 만든 게 아니라 그런 인도의 문화에 부처님도 동참한 거예요. 브라마니즘에 반대한 비주류, 즉 사문류에 부처님도 합류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당시에는 ‘사문류’가 비주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기에 육사외도도 다 사문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이나교와 불교를 제외한 그 당시 사상들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우리 나라에는 자이나교가 없다 보니 이제 출가사문은 불교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 당시 하나의 수행적 문화였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nbspnbsp그리고 그걸 바꿀 수도 있는데 굳이 그대로 살리는 의미는 일체의 생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먹는 것은 그냥 얻어서 먹으면 되고, 입는 것은 남이 버린 옷을 주워서 입으면 되고, 자는 것은 아무데서나 자면 돼요. 그렇게 놓아버릴 수 있어야 우리가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nbspnbsp또 하나, 탁발에는 만인을 평등하게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만행을 해봤는데 얻어 먹어보면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나’라는 것을 털끝만큼이라도 움켜쥐고 있으면 얻어먹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JTS 모금할 때 나눠주는 팜플렛을 상대가 안 받아도 좀 머쓱하고, 모금함을 가져가서 이야기해도 열 명이면 열 명 다 그냥 가버리면 좀 머쓱하잖아요. 그냥 내 돈 확 집어넣고 와버리고 싶어져요. nbspnbspnbsp또 이 몸을 유지하는 약으로 밥을 먹기 위해서 탁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시해 주는 사람은 내 생존을 영위해주는 사람이에요. 비록 그 사람이 아무리 가난하고 천민이라도 내가 그 집에서 밥을 빌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잘난 척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니까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nbspnbsp또 한 끼 밥을 빌어서 먹는 걸 해결하니까 권력자나 부자에게 굳이 굽신거릴 이유가 없어요. 나에게 집이나 돈 같은 게 필요하면 돈 가진 사람이나 지위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겠지만, 나에게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데 임금이 있으면 뭐하고 부자가 있으면 뭐하겠어요? 그러니 임금한테도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임금 앞에서는 일부러 고개를 숙이지 않고 뻣뻣하게 군다는 뜻이 아니라, 임금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밥을 빌어서 먹기 위해서는 천민한테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서고 가장 높은 자의 위에 선다는 뜻입니다. 이게 출가사문의 길입니다. 만인을 평등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에는 차별이 있지만 붓다는 세상을 평등하게 본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걸식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nbspnbsp여러분들이 JTS 모금하는 것도 일종의 걸식 연습과 비슷해서 수행에 굉장히 도움이 돼요. 사실은 불교 교리 100번 공부하는 것보다 그거 한 번 해보는 게 더 나아요. 몇 번 해보면 괜찮아지지만 처음 할 땐 굉장히 어색합니다. 스님 강연 홍보한다고 길거리에서 1인용 피켓 들고 서 있어도 처음엔 좀 부끄럽잖아요. 괜히 다들 나만 보는 것 같고, 혹여 친구라도 만나면 ‘미쳤다’ 소리 들을 것 같고 온갖 생각이 들어요. nbspnbsp우리는 다 ‘나’라는 걸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탁 놓아버리면 편안해요. 그런데 이것은 무슨 불교 교리를 외우거나 불교학 박사학위를 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행해보면서 ‘아, 내가 지금 상을 짓고 집착하고 있구나’ 이런 걸 자각하고 자꾸 놓아보다 보면 어떤 것도 편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연습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nbsp단순히 남의 밥을 빌어먹는 것이 아니라 내 수행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이 탁발이고 모금활동임을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평생 동안 탁발을 함으로써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서고 가장 높은 자의 위에 섰다는 말씀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nbspnbsp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니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스님은 목에 파스를 붙이고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순례객들에게 “밤새 이야기해 보자”며 마음을 내었지만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순례객들을 위해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이 괴로운 이유는 기대가 높기 때문이예요. 나무 밑에서 잔다고 생각하고 성지순례를 오면 이 정도 숙소는 정말 괜찮게 느껴져요. 처음에 올 때 나무 밑에서 자는 수준이라고 미리 이야기 듣고 왔으니까 지금 괜찮지, 그냥 왔으면 시위를 하고 난리를 피웠겠죠. 스님 머리가 남아 있었으면 다 뜯겼을 거예요. nbspnbspnbsp성지순례하는 것만 공부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보는 것이 다 공부입니다. 여러분들이 침낭에서 자고, 밥도 그냥 밥통에 해서 하루 두 끼 먹고, 차에서 졸면서도 이렇게 웃고 재미있게 살 수 있다면 집에 가서 못 웃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아무리 남편이며 아내가 뭐라고 한들 저보다야 잘 해줄 거 아니에요. 남편이며 아내가 저처럼 여러분들을 붙잡고 종일 끌고 다니면 ‘사람 죽이려고 하나?’ 이러고 대번에 싸움이 났겠죠. 안그래요? nbsp여러분들이 이런 경험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조금씩 자유롭게 하는 법을 터득해가야 합니다. 제가 일부러 고생시키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자기 삶을 자유롭게 하려고 우리가 지금 이런 공부를 하는 거예요. 똑같은 벽돌 더미인데 그거 하나 더 보면 뭐하고, 덜 보면 뭐하겠어요? nbspnbspnbsp눈감고 마음을 코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관해버리면 시간도 없어지고 공간도 없어져요. 여기 앉아서 코끝을 보나, 한국에 앉아서 코끝을 보나, 어제 보나, 오늘 보나, 일체의 시공간이 사라지고 그냥 숨 들락거리는 것밖에 안 남아요.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사실 성지가 어디 있고 오지가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항상 우리는 공으로, 텅 빈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래도 이왕 성지에 왔으니 성스럽게 생각하는 마음도 내야 하겠죠. 먹는 거야 뭘 먹어도 좋지만 맛있는 걸 먹을 때는 맛있게 먹어야 해요. 맛에 집착하지 말라고 해서 맛있는 걸 굳이 인상 쓰고 먹을 필요는 없어요. nbsp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점점 자유로워지도록 하라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지, ‘부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이런 게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행복해지는 게 스님이 원하는 바지, ‘법륜 스님이 최고다’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가장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법에 귀의하면 그 길로 갈 수 있다 해서 법에 귀의하라는 것입니다.nbspnbsp그런 관점을 가져서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해 자기 삶을 행복하게 한 사람은 불법에 가까워진 사람이고, 성지 순례 하는 동안 괴로운 사람은 집에 가도 괴롭고 어디를 가도 괴로워요. 여기 가도 괴롭고, 저기 이사해도 괴롭고, 혼자 살아도 괴롭고, 결혼해도 괴롭고, 늙어도 괴롭고, 젊어도 괴롭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혼자 살면 귀찮은 게 없어 좋고, 같이 살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고, 늙으면 할 일 없어 좋고, 젊으면 할 일이 많아서 좋고, 이렇게 다 좋아요. 몸이 아파도 괜찮아요. 아프면 좀 누워 있을 수 있어서 좋고, 온갖 약도 먹어볼 수 있어서 좋아요. 안 아프면 그런 약을 언제 또 먹어보겠어요?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마련한 다양한 약도 한번 먹어봐야 할 거 아니에요. nbspnbspnbsp또 아프면 시봉도 좀 받을 수 있고 주변에서 걱정도 좀 해줍니다. 세상만사가 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조금씩 조금씩 더 자유로워져가야 합니다.nbsp내일은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하는 것 알고 있죠? 일찍 나가보는 것도 좋아요. 3시 반에 일어난다고 해도 한국 시간으로는 7시입니다. 7시에 일어나는 게 뭐가 힘들어요? 그러니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차피 한국 가면 한국 시간으로 살아야 하니까 아예 지금부터 한국 시간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3시, 4시에 일어나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은 것은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7시, 8시에 일어나는 셈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괜히 시차 적응했다가 한국에 돌아가서 또 힘들여 바꾸느니 여기서도 그냥 한국 시간 그대로 생활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nbspnbsp이렇게 해서 여행이 여러분들에게 큰 공덕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nbspnbsp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절로 힘이 났습니다. 몸이 편찮으심에도 오히려 대중들을 더욱 격려해주는 스님에게 모두 뜨겁게 박수를 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아무리 고단한 상황도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마음을 보는 순례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강조하는 스님의 모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성지순례단 B팀의 쉬라바스티 순례 일정도 모두 끝이 났습니다. B팀은 내일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해서 상카시아를 향해 출발합니다. 스님은 이어서 C팀을 환영 마중하고 천불화현탑을 참배한 후 즉문즉설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17 (인도 12일째) 사위성 자전거 순례, 성지순례단 B팀 마중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신 곳인 사위성을 한 바퀴 순례한 후 성지순례단 B팀을 천불화현탑에서 맞이하고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새벽 3시 20분이 되자 성지순례단 A팀이 일제히 기상하여 상카시아로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순례객들이 모두 버스에 탑승하자 스님은 천축선원 입구에 서서 출발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nbspnbsp“순례 잘 마치고 한국에서 봐요.”nbsp▲ 상카시아로 떠나는 A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스님nbsp환한 웃음으로 배웅해 주는 스님에게 순례객들도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습니다.nbspnbsp아침 식사 후에는 천축선원의 대인 스님과 다실에서 차담을 나누었고, 차담을 마치고 나서는 그저께 동원정사를 답사한 것에 이어서 사위성을 답사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스님은 예전부터 사위성 전체를 둘러보고 싶었다고 합니다.nbspnbsp천축선원에서는 승용차를 타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스님은 “눈에 익힐려면 걸어다니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승용차를 타면 시골길을 가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천축선원을 나왔습니다. 각종 물건들을 판매하는 시장통을 지나니 한적한 시골길이 나왔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녀보는 것이 꿈’이라고 자주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렇게 잠시 여유 시간이 주어지니 “오늘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하며 신나게 자전거 패달을 밟았습니다.nbspnbsp시골길을 한참 달리니 기원정사 뒤쪽으로 아주 큰 규모의 태국 절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웅장한 크기에 금칠을 해서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보였습니다. 게다가 기원정사 뒤쪽의 아주 너른 땅을 모두 구입해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성지 바로 가까이에 이렇게 큰 절을 짓는 것은 이곳을 순례하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nbspnbsp▲ 거대한 규모로 지은 태국 절nbsp사위성의 서쪽에서 시작한 자전거 순례는 사위성 북쪽에 넓게 흐르고 있는 랍띠강에 이르렀습니다. 강폭이 크고 깊이도 꽤 있어 보였습니다. 스님은 강물에 손을 담그고 땀을 식히며 주위의 지형지세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nbspnbsp▲ 사위성 주위를 흐르는 랍띠강nbsp경전에는 사위성 주위에 강이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은 강이 흐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지형을 유심히 살펴본 후 “지금은 강이 이리로 흐르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사위성 바로 앞으로 강이 흘러서 해자 역할을 했던 것 같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리시간에 배운 우각호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즉, 곡류하던 하천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측면 침식이 심해져 경로가 점차 바뀌다가 결국 새로운 물길이 만들어져 예전의 물길 일부가 쇠뿔 모양의 호수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nbspnbsp그래서 이번에는 부처님 당시에 사위성 성벽을 따라 흘렀으리라 추정되는 물길의 흔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스님의 예상대로 북쪽 성벽에는 누가 봐도 성벽을 방어하기 위한 해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길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었습니다. 더욱이 해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지 북쪽 성벽은 다른 쪽 성벽보다 높이가 비교적 낮았습니다.nbspnbsp▲ 사위성 앞에 자연 해자를 이루며 강이 흘렀던 흔적nbsp스님은 자전거를 타고 사위성 성벽을 따라 계속 갔습니다. 시골길이라 너무 울퉁불퉁 해서 자전거는 자꾸 덜컹덜컹 하고 엉덩이에 불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한 차례 자전거에서 넘어지기도 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의 관심은 오직 사위성 성벽의 규모와 크기, 해자를 이루었던 흔적에 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nbspnbsp▲ 저 멀리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사위성 북쪽 성벽nbsp성을 둘러싸고 바깥에 난 길이 너무 험해 결국 성 안으로 들어와서 동문 쪽으로 나가 다시 북문 쪽으로 되돌아와서 성벽을 살펴보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냥 언덕 같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온통 벽돌 무더기였습니다. 조금만 땅을 파면 벽돌이 부서져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지막한 언덕들은 부처님 당시에는 벽돌로 높이 쌓아 올려진 성벽이였던 겁니다.nbspnbsp▲ 성벽을 이루고 있었던 벽돌더미nbsp스님은 다시 사위성의 남문 쪽을 향했습니다. 길이 험하면 자전거에서 내려 걷기도 하고, 평탄한 길이 나오면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기를 반복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사위성의 서문, 북문, 동문, 남문을 따라 한바퀴를 모두 둘러보고 나니 꼬박 3시간이 걸렸습니다. 스님은 “사위성이 정말 크지? 고구려의 국내성이나 신라의 반월성에 비해 이 사위성이 10배는 더 큰 것 같다”며 발해의 상경용천부 보다도 훨씬 큰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지 않고 걸어갔으면 아마 하루종일 걸어도 못 둘러보았을 것”이라며 웃음을 보였습니다.nbspnbsp사위성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스님이 천축선원으로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자 대인 스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반갑게 스님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는 사위성을 혼자서 순례하던 한국인이 피살을 당한 채 시체로 발견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nbspnbsp스님은 “길이 험해서 엉덩이가 얼마나 아픈지...” 하면서 천축선원에서 차려준 늦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휴식을 취하며 성지순례단 B팀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nbspnbsp네팔에서 인도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오후 3시에 도착 예정이던 B팀은 5시 30분이 되어서야 쉬라바스티 천불화현탑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먼 길을 달려온 순례단을 향해 스님은 환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순례객들은 가사를 수하고 향을 피운 채 길게 줄을 지어 천불화현탑으로 올라갔습니다.nbspnbsp▲ 천불화현탑nbsp먼저 탑을 바라보면서 다함께 저녁예불을 올렸습니다. 해가 점점 지고 있는 가운데 순례객들의 “지심귀명례” 하는 소리가 저녁 노을과 함께 은은히 울려퍼졌습니다. nbspnbspnbsp예불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순례단을 위해 간절한 목소리로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저희 한국에서 온 정토행자 대중 일동은 부처님의 10대 성지를 순례하는 중 오늘 이렇게 쉬라바스티 사위성에서 부처님이 천불로 화현하신 천불화현탑에 예불하고 찬탄하고 참회하고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이와 같이 천불화현탑을 순례하고 예불 올린 공덕으로 순례 대중들 모두 건강하고 마음이 맑고 행복하고 자유로워 부처님 가르침대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nbspnbsp이와 같이 쉬라바스티 천불화현탑을 참배한 인연 공덕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에 회향하오니 남북 간에 긴장이 해소되고, 화해하고 협력하여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는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서로 상생하는 통일이 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오늘 이와 같이 천불화현탑 순례 참배 인연 공덕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조상 영가님들 뿐만 아니라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또한 모두 왕생극락케 하옵소서.nbspnbspnbsp오늘 저희의 이런 발원을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nbsp지난번 바라나시에 이어서 다시 한번 순례를 무사히 마칠 것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발원하는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많은 순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nbspnbsp천불화현탑 참배를 마치고 천축선원으로 들어온 순례단은 곧바로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천축선원에서 따뜻한 국을 준비해 주어서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저녁 7시 30분부터는 천축선원 주지 대인 스님을 모시고 저녁 법회가 열렸습니다. 대인 스님은 순례단을 환영해 주면서 짧은 인사말로 법문을 대신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천축선원 주지 대인 스님은 그동안은 주로 순례객들을 위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 이제는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집도 지어주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보건소를 운영해서 치료도 해주고, 새해에는 학교와 도서관도 완공해서 3월에 개교를 한다고 합니다. 또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승려들 교육 문제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스님과 늘 의논하고 같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런 대인 스님의 활발한 활동에 대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순례객들이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궁금한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스님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하자 여러 사람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nbspnbsp오늘은 그 중에서 왜 인도는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난하고 평화롭지 못한지 물었던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인도를 다니다보면 왜 이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가는지 의문이 드는데 스님의 답변을 들으니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nbspnbspnbsp“인도는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잖아요.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성인이 난 곳이면 당연히 우리들보다 잘 살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해야 될 텐데 왜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가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nbsp“그런데 우리는 60년 전에 이보다 훨씬 못 살았어요. 일제강점기 때 우리 나라 사람들 사는 모습을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인도의 불가촉천민보다 못합니다. 양반과 상놈 차별도 더 심했고, 사는 것도 더 못 살았어요.nbspnbspnbsp제가 어릴 때만 해도 아이를 낳으면 소위 ‘반타작’을 했어요. 저도 그래서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두 살 어립니다. 대부분 두세 살 안에 죽기 때문에 호적에 빨간줄 긋기 싫어서 그냥 두었다가 동생을 보면 비로소 호적에 올려줬어요. 그러면 어느 하나가 죽더라도 빨간줄 안 긋잖아요. 그래서 저희 집은 죄다 형의 호적상 나이가 동생의 나이와 똑같습니다. 동생이 안 생기더라도 보통 두세 살까지는 키워보고 그때까지 안 죽어야 비로소 호적에 올렸어요. nbspnbspnbsp그래서 첫째, 질문자는 지금의 한국과 인도만 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중국도 100여 년 전에는 자기들 보다 훨씬 작은 나라인 일본에게도 먹힐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요. 앞으로 20년 뒤에는 중국이 한국보다 더 나아질 수도 있어요.nbspnbsp이게 제행무상입니다. 인도도 부처님이 출현하시고 아쇼카왕 시대에는 전 세계에서 최고 가는 문명을 자랑했습니다. 내일 가보시면 알겠지만 2,600년 전에 지어진 사위성의 크기가 경주 반월성의 10배는 될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여긴 굉장한 나라예요. 그러나 모든 나라는 흥망성쇠를 거듭하잖아요. 인도도 그래요. BC 3세기 아쇼카왕 때는 세계 최고의 문명을 가졌고, 그 이후의 쿠샨왕조나 굽타왕조 시대까지도 문명의 규모며 기술 수준이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16세기에도 무굴제국이라는 무슬림 대제국을 건설했죠. 그러다 무굴제국이 망하고 서구의 침략을 받으면서 피폐해진 거예요.nbsp그런데 지금 인도가 다시 일어나고 있어요. 이제 막 잠을 깨서 일어나는 중입니다. 그러니 50년 뒤에 평가하면 ‘인도는 이렇게 잘 사는데 한국은 왜 이렇게 못 사나?’라고 할 수도 있어요. 우리는 남북 간에 긴장이 고조되어서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끝장이에요. 원자력발전소 몇 개 터지고, 북한 핵 몇 개 터지면 형편 없어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모든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 우리는 최근에 450년 전부터 지금까지 흥하는 국면에 놓여 있었고, 인도는 그동안 쇠하는 국면에 있다가 이제 흥하는 쪽으로 막 돌아선 참이라 그래요.nbsp두 번째로, 우리가 순례하는 이 지역이 힌두스탄 대평원인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이 지역은 농업이 중심인 시대에는 최고로 문명이 발달했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농촌이라는 것은 보수적이잖아요. 농업에 안주하기 때문에 카스트제도도 남아 있고, 여러 가지가 쉽사리 변하지 않아요. 그런데 인도의 산업화는 이 힌두스탄 평원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남쪽의 벵갈로르, 서쪽의 뭄바이 등지에서는 이미 굉장히 소득이 높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사는 한국사람과 인도사람을 비교해보면 인도사람의 소득이 훨씬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똑같이 이민 와서 사는 인도사람은 저렇게 소득 수준이 높은데 한국사람은 기독교인이라서 저러나?’ 라고 이야기할 수 없고, ‘미국에 오래 산 흑인이나 스페니쉬는 왜 새로 이민 온 한국 사람보다 못 사는 게 천주교를 믿어서 그러나?’ 라고 할 수 없어요. 이렇게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는 중에 단편적인 것만 보고 비교하면 안 됩니다.nbspnbspnbsp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된 사고방식이에요. 지금의 모습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믿는 나라는 잘 사는데 왜 불교 믿는 나라는 못 사느냐?’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독교 믿는 나라 중에는 필리핀도 있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있잖아요. 반면 기독교 안 믿는 나라인 일본은 장기 불황이라고 하면서도 얼마나 잘 살아요?nbsp그러니 특정한 비유를 그렇게 들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살고 싶으면 염소를 비유로 들고, 여자가 여러 남자를 데리고 살고 싶으면 벌을 비유로 들면 되잖아요. 일부일처 제도를 주장하려면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고 달이 하나인 것을 가져와 비유하면 돼요. 비유라는 것은 이렇게 위험합니다. 전부 자기가 필요할 때 자의적으로 갖다 붙이는 것이거든요. 공자님 같은 사람이 태어난 중국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는 아편이다 뭐다 해서 피폐했는데, 그렇다고 그게 다 공자님 책임일까요? nbspnbspnbsp그러니 그런 비유와는 관계가 없고, 다만 우리 모두는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처님이 인도에 태어났다고 해서 인도가 내내 부강하라는 법은 없어요.nbspnbsp세 번째는, 불법은 내가 어떻게 행복하고 자유로워지는가에 대한 것이지 물질 문명이 얼마나 발달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자꾸 그렇게들 개념을 해석하려 듭니다. 그러니 인도사람들이 이렇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면 ‘이건 부처님 덕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한국은 경제력이 세계 13위이고 1인당 GDP가 28위인데도 왜 행복지수는 117위냐?’ 하고 물으면, 인도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힌두교를 안 믿어서 그렇다’ 라고 할 겁니다. 비난할 의도를 가진다면 ‘기독교를 많이 믿으니 그렇지’라고 이야기할지도 몰라요. nbspnbsp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비유이고 사고방식입니다. 인도 안에서도 우리가 다니는 지역은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이기에 현재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가장 낙후한 지역이자 봉건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여기가 가장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어요. 농경사회에서는 비옥한 토지를 갖춘 지역이 유리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농경에 기반을 둔 지역이 낙후하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우리도 지금 그렇잖아요. 비옥한 토지를 자랑하는 전라도 지역이 오히려 낙후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전라도가 훨씬 잘 살았어요. 음식만 봐도 경상도 음식은 짜고 먹을 게 별로 없는데 전라도 음식은 풍성하잖아요. 물자가 풍부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nbsp질문자는 “네,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며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구걸하는 아이들, 수많은 병자들을 길거리에서 보았는데, 스님의 답변을 들으니 ‘그렇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nbspnbsp이 외에도 순례객들은 정말 많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스님은 모든 질문에 대해 정성을 다해 답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약 2시간 동안의 법회가 모두 끝나자 다시 한 번 열정적으로 법문을 들려준 스님에게 모두 큰 박수를 보냈고 사홍서원을 끝으로 밤 10시가 다 되어서 법회를 마쳤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내일은 새벽부터 하루 종일 사위성 주위를 걸으며 순례를 하기 때문에 피곤할 수 있으니 오늘은 푹 주무세요” 라고 하면서 법회를 마쳤습니다.nbspnbsp순례객들은 일찍 잠들러 숙소로 돌아갔고, 스님은 늦게까지 원고 교정을 보다가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서 천축선원을 출발해 기원정사까지 행선을 하며 걷고, 오전 내내 기원정사에서 시간을 보낸 후, 오후에는 앙굴리말라 탑과 수닷타 장자의 탑을 참배하고, 마지막으로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를 순례한 후 숙소로 돌아올 예정입니다.nbsp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16 (인도 11일째) 성지순례단 A팀 기원정사 순례
nbsp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을 이끌고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래 머무신 곳인 쉬라바스티에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했습니다.nbsp nbsp 새벽예불 후 160여 명의 순례단은 가사를 정갈히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축선원을 출발하여 기원정사까지 한 줄로 서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앞뒤 간격이 떨어지지 않게 왼발 오른발을 알아차리며 행선을 하면서 기다랗게 줄을 지어 새벽 안개를 갈랐습니다.nbsp nbsp nbsp 천이백 비구가 기러기떼처럼 긴 행렬로 탁발을 하러 갔던 것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정진을 하듯이 걷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nbsp nbsp nbsp 가는 도중 어느덧 날이 밝아 자전거를 탄 주민들도 보이고, 어린 아이들이 꽃을 팔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한 인도인이 준 꽃을 한송이 들고 기원정사로 들어섰습니다.nbsp nbsp 아침이 밝자 공원처럼 깔끔하게 꾸며놓은 기원정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례단은 향에 불을 붙이고nbsp긴 행렬을 이루며 기원정사 곳곳을 스님을 따라 물 흐르듯이 밟아보며 부처님과 당시 제자들의 숨결을 느껴보았습니다.nbsp nbsp nbsp 부처님이 머무셨다는 자리에 세워진 ‘간다 쿠티’라는 곳을 바라보며 멈춰서서 삼배를 한 후 법회가 열리는 공터로 이동해 예불을 정성껏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바로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다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격스러웠습니다.nbsp nbsp nbsp 예불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간절한 목소리로 순례단을 위해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성지 어느 곳을 가든 항상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시는데 오늘따라 머나먼 이국 땅에서 다시 듣는 간절한 기도는 지금의 남북관계를 떠올릴 때 더욱 가슴이 아리는 것 같았습니다.nbsp nbsp nbsp 이어서 순례단이 모두 자리에 앉자, 스님은 기원정사의 창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해 주어서 벽돌 더미에 불과한 유적지가 영화를 보듯이 재현되는 기분이었습니다.nbsp nbsp “여기가 기원정사입니다. 인도 말로는 ‘제따 바나’라고 해요. ‘제따’는 사람 이름이고 ‘바나’는 숲이라는 뜻이에요. 우리말로는 ‘기원정사’, 금강경에는 ‘기수급고독원’이라고 표기된 곳입니다.nbsp nbsp nbsp 춥지만 그래도 여기 오니까 다른 성지보다는 아늑하죠? 다른 곳은 그냥 길가 같은데 여기는 사찰 같은 기분이 들어요. 부처님이 처음으로 기증받으신 절이 죽림정사입니다. 죽림정사에서 본 연못 이름이 칼란다카 연못이에요. 부처님이 성도 후 왕사성에 머물면서 교화활동을 왕성히 하셨는데 교화 3년째 되던 해에 칼란다카 연못을 부처님께 기증한 사람이 칼란다카 장자입니다. 장자는 요즘 말로 하면 사업가에 해당합니다. 사업을 해서 왕사성에서 손꼽히는 큰 부자였던 이 분은 부처님법에 귀의해서 아주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nbsp nbsp 칼란다카 장자는 사위성에 사는 수닷타 장자와 사업상 서로 교류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절친했습니다. 수닷타 장자가 왕사성에 가면 친구인 칼란다카 장자의 집에 머물면서 대화도 나누고 사업도 함께 했으므로nbsp늘 아주 반갑게 맞이해줬어요. 그런데 이번에 왕사성을 방문했을 때는 친구 본인이 안 나오고 하인이 나와서 주인이 좀 바쁘니까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안내하는 거예요.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친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헐레벌떡 오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섭섭했는지 수닷타 장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nbsp ‘뭐가 그리 바쁜가? 아들딸 시집 장가라도 보내는가?’ ‘아이고, 내가 아들 장가보내고 딸 시집보내는 그런 일로 자네같이 귀한 손님을 기다리게 하겠는가?’nbsp ‘그러면 그것보다 더 큰 일이 뭐가 있어서 그러나?’ ‘부처님이 내 식사 초대에 응하셔서 내일 우리 집에 식사하러 오신다네. 그래서 부처님과 일행분들께 대접할 음식을 일일이 감독하고 같이 준비하느라 바빴어.’ ‘부처님이라니? 아니, 이 세상에 부처님이 출현했단 말인가?’ ‘아니, 자네는 그것도 몰랐는가?’ nbsp nbsp 부처님은 그때 이미 왕사성에서는 유명하셨어요. 여러분들이 가서 봤듯이 빔비사라왕, 사리푸트라, 목갈리나, 마하가섭 존자 등이 모두 귀의해서 이미 천이백오십 대중이 성립했을 때이니까요. 그러나 사위성에서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수닷타 장자는 친구에게서 부처님의 설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친구의 이야기만 듣고도 감복을 한 거예요. 친구가 ‘자네는 정말 복이 많네. 부처님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내일 여기에서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어.’라고 말한 후 늦은 밤이라 자러 들어간 뒤에도 수닷타 장자는 흥분이 되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nbsp nbsp 그렇게 잠을 설치고 새벽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집을 나와 산책을 하다가 나무 밑에 누가 nbsp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앉아 있는 자세가 너무나 편안하고 여법해서 저 분이 부처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절을 하면서 ‘혹시 부처님이 아니십니까?’라고 했더니 ‘그렇소.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요.’ 이러는 거예요. 누가 처음으로 인사하는데 부처님이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 됐소’라고 답한 사람이 마하가섭존자를 비롯해 모두 세 사람인데 수닷타 장자가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법을 청했고, 법을 듣고 수닷타 장자가 초견성을 했습니다. 금강경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런 표현이 나오지요? 바로 그 수다원, 즉 첫 번째 단계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걸 빨리어로는 ‘소따빠나’라고 해요.nbsp nbsp 초견성을 얻은 수닷타 장자는 너무너무 기뻐서 부처님을 사위성으로 초대했습니다. ‘부처님, 저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저희 나라에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저희 나라로 와 주십시오.’ 이렇게 초대하자 부처님이 침묵으로 승낙하셨어요.nbsp nbsp 그래서 수닷타 장자는 장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부랴부랴 말을 타고 사위성으로 돌아와 부처님이 3개월 후에 와서 머무를 처소, 즉 부처님과 1250명의 비구 대중이 머무를 장소를 마련하러 나섰습니다. 죽림정사를 이미 봐서 모델로 삼을 수 있었어요. 수행자의 처소는 성에서 너무 가까우면 번다하고, 성에서 너무 멀면 걸식하거나 생활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성으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즉 조용하면서도 비교적 마을에 가까운 곳이 되어야 합니다. 왕사성의 북문에서 죽림정사까지의 거리랑 사위성의 서문에서 기원정사까지의 거리가 거의 같습니다. 성문 밖으로 500700미터 정도, 즉 1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위치에요.nbsp nbsp nbsp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가 적격이라 땅 주인을 알아봤더니 이 나라의 태자인 거예요. 이 큰 제국의 왕자가 소유한 땅이니까 당연히 팔지 않겠죠. 우리 같으면 안 되겠다고 바로 포기했겠지만 수닷타 장자는 이 좋은 숲을 반드시 부처님의 처소로 마련해드리고 싶었기에 태자를 찾아갔어요. 이 태자 이름이 ‘제따’입니다. 한자로는 ‘기타’라고 하고 빨리어로는 ‘제따’예요. 태자에게 찾아가서 서문 밖에 있는 이 땅을 사고 싶다니까 안 판대요. 그러자 장자가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소’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백지수표를 준 거예요.nbsp nbsp 그럴 때 바로 싫다고 거절하지 않는 게 당시의 예법이었습니다. 바로 ‘안 됩니다’라거나 ‘싫습니다’라는 말을 못 해요. 뭔가 거기에 대한 답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주겠소’라고 하니까 태자가 안 팔겠다는 뜻은 보여야겠고 답은 해야 하니까 ‘그러면 이 땅에 그 면적만큼 황금을 까시오’라고 답한 겁니다. 사실상 안 팔겠다는 뜻으로 가격을 터무니없이 매긴 거예요. 그럴 때 ‘그건 너무 비쌉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 말고 실제로 받을 금액을 말하세요’라고 할 수 없었어요. 이미 자기가 얼마든지 좋다며 백지수표를 냈기 때문에 가격 흥정은 더 이상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장자가 ‘알았습니다’ 이러고 갔어요. nbsp 태자는 장자가 포기하고 돌아간 줄 알았지만 수닷타 장자는 그 값으로 사려고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래서 금고를 열어 금화를 죄다 마차에 실어와 숲에다 깔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금으로 땅을 덮어봤자 얼마나 덮겠어요? 숲 입구에 조금 깔고 나니 금이 다 떨어져 버렸어요. 태자가 와서 보니까 턱도 없잖아요. 그래서 속으로 ‘그것 봐라, 네가 돈 좀 있다고 까불더니. 이제 안 사겠지’라고 생각하고 이제 포기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래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가진 어음을 전부 금으로 바꾸고 비밀창고에 두었던 돈까지 다 꺼내왔어요. 땅에 금을 까느라 친구들에게 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졸지에 집도 다 팔고 장자는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됐어요. 그래도 턱없이 조금밖에 못 깔았어요. nbsp 수닷타 장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개중에는 이런 설도 있어요. 그렇게 돈이 다 떨어졌는데도 장자는 포기를 하지 않고 구걸을 했어요. 요즘 말로 하면 보시 받으러 다녔다는 겁니다. 돈을 어쩌는지 보려고 태자가 금화를 한 닢 줬더니 거지가 된 장자가 그 금화를 가지고 바로 숲으로 달려가서 다시 땅에 깔았다고 합니다. nbsp nbsp nbsp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한 태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이 땅을 이렇게까지 구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장자가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실 땅을 구하려고 그럽니다’라고 답했어요. 태자가 그 답을 듣고 더 놀랐어요. 사업하는 사람이 이토록 탐을 내는 걸 보고 땅에 대단한 보물이라도 묻혀 있는 줄 알았는데 사업과는 전혀 관계없고 수행자들이 머물 처소를 마련하려고 그런다잖아요.nbsp nbsp 도대체 그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더니 장자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했습니다. 설명을 들은 기타 태자가 수닷타 장자의 정성에도 감동하고 부처님에 대해서도 감동해서 나머지 땅을 기증해준 겁니다. 돈을 안 받고 준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낸 돈만 받고 나머지 땅을 다 그냥 내어준 겁니다. 받은 금액은 원래 제시했던 금액의 10분의 1도 안 되지만 사실 땅값은 받을 만큼 다 받은 셈이에요. 그러나 제시한 금액에는 턱없이 못 미치기 때문에 이 숲은 기타 태자가 기증한 셈이 된 겁니다.nbsp nbsp 기타 태자가 기증한 땅에 급고독 장자가 정사를 지었다고 해서 기원정사를 ‘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부릅니다. 지금 둘러보면 건물터가 많지만 이 건물들은 모두 200300년 지난 뒤에 지은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건물을 짓지 않았고, 지어도 기껏해야 초막 정도였습니다.nbsp nbsp 이렇게 수닷타 장자가 제따바나를 얻어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처소를 마련했고, 부처님은 죽림정사에 이어 두 번째 정사를 기증받았습니다. 수닷타 장자의 기원정사 창건 이야기는 여러 설화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습니다. 박물관에 가보면 금을 실은 수레와 땅바닥에 깔린 금을 묘사한 그림이나 벽화가 수없이 많아요. 수닷타 장자는 교단에 기여한 정도는 물론이고 신심의 깊이와 수행 정도에서도 부처님의 10대 제자에 버금갑니다.nbsp nbsp 그런데 이곳 사위성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강국이었지만 신흥강국이어서 문화수준은 떨어지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이 지역에는 소위 삿된 외도들이 판을 치고 기복이 성했습니다. 누가 신통을 보이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이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바른 정법에 귀의하기가 어려운 상태였어요. 그래서 초기에는 이곳에서 교화하기가 좀 어려웠습니다.nbsp nbsp 그러나 사람들이 부처님과 불법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여기에서 많은 출가자들과 후원자들이 나타납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부처님께 ‘유행을 하실 때는 몰라도 우기 때 안거는 여기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청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45년 교화 활동 중 24안거를 여기서 했다고 해요. 이곳 기원정사에서 19안거를 하고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에서 다섯 번 혹은 여섯 번의 안거를 해서 총 24안거 혹은 25안거를 했다고 합니다. 동원정사에 머무신 회수는 기록이 약간 차이나지만 기원정사에서 19안거를 했다는 기록은 일관됩니다. 전체 안거의 절반 이상을 사위성에서 머무르신 거예요. nbsp 이런 걸 보면 부처님이 이곳 사위성과 기원정사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어요. 어제 우리가 하루 만에 왔을 정도로 여기는 카필라성에서 가깝습니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언어나 종족이 석가족과 거의 같은 계열이어서 문화도 유사점이 많았을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이 우리나라 사람인데 미국에 가서 이름을 날리다가 북경에 와서 활동하시는 것과 비슷해요. 북경은 서울과 가깝기도 하고 문화나 언어, 음식 같은 데서 여러 가지 유사성이 많으니까 안거는 미국 뉴욕보다는 중국 북경 쪽에서 많이 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nbsp 그런데 이곳은 한국 불자들에게 특별히 더 유명합니다. 첫째, 금강경이 설해진 장소라고 알려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3.1독립운동의 불교계 대표이신 백용성 스님께서 ‘4대 성지를 가꾸어라’라고 하시면서 하나를 더 보태셨어요. 4대 성지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 도를 이루신 곳, 설법하신 곳, 열반하신 곳인데 여기에 부처님의 장기 주석지인 사위성의 기원정사를 잘 가꾸라는 말씀을 더하셨습니다. 8대 성지나 10대 성지가 아니라 이렇게 5대 성지를 지칭하셨어요. nbsp nbsp 이렇게 기원정사는 절이 지어진 계기가 아주 신심 깊은 재가 신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어요. 또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신 곳입니다. 가장 오래 머무셨으니까 설법도 여기에서 가장 많이 하셨겠죠. 그래서 경전을 보면 설법한 장소가 제따바나일 때가 가장 많습니다. 아함경 내용 중 거의 절반 가까이가 사위성 제따바나에서 설해졌어요. 금강경에서도 경이 설해진 장소가 제따바나, 즉 기원정사로 되어 있습니다. 조계종은 특히 금강경을 소위 경전으로 삼기 때문에 불자들이 늘 금강경을 독송하잖아요. 그래서 특히 한국 불교인들에게는 이 기원정사가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4대 성지를 제외하면 여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어요.” nbsp 스님의 실감나는 이야기에 순례단은 흠뻑 몰입되었습니다. 특히 수닷타장자가 기원정사를 마련한 것이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파산이 될 정도로 온갖 정성을 기울인 것이였다는 말씀은 새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경전을 읽을 때와 달리 스님의 육성으로 직접 들으니 수닷타장자의 신심이 얼마나 컸는지 가슴으로 다가왔습니다.nbsp nbsp 이어서 스님의 설명이 경전 속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또 이곳 사위성에서 일어난 수많은 부처님의 교화 사례들을 경전으로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 nbsp nbsp 특히 이곳 사위성은 금강경이 설해진 곳으로 한국 불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곳인데, 금강경도 함께 독송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금강경이 설해진 곳에서 금강경을 직접 읽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nbsp nbsp 경전 독송을 마치자 아침 안개가 짙게 드리우면서 제법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추위를 느끼는 대중들을 배려하며 따뜻한 국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면서 식사 시간을 주었습니다. 너무 추운지 어떤 조는 둥글게 원을 만들어 방한 체조를 하기도 해서 큰 웃음을 주기도 했습니다.nbsp nbsp ▲ 추위를 이기고자 방한 체조를 하는 순례객들 nbsp 천축선원에서 배달해 온 따뜻한 된장국은 추위를 녹이기에 충분했고 맛도 일품이었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니 드디어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nbsp nbsp nbsp nbsp nbsp 이어서 다시 법회 장소에 모여 스님의 설법이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렇게 쉬라바스티에 머물며 스님의 법비를 맞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nbsp nbsp 스님은 이곳 사위성에서 있었던 갖가지 교화 사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들도 많았는데 그 이야기들이 모두 이곳 사위성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니 더 귀를 쫑긋 세우게 되었습니다.nbsp nbsp nbsp 그 중에서 말리카부인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이야기한 대목과 프라세나짓왕과의 대화 내용은 무척 감명 깊게 다가왔습니다.nbsp nbsp “옛날의 왕조 사회에서 백성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제일 귀한 게 누구냐?’리고 물으면 왕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또 결혼한 부인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게 누구냐?’라고 물으면 남편이라고 대답해요. 그런데 이 여인은 굉장하지요? 남편이 왕이 아니어도 남편이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하물며 남편이 왕이면 당연히 ‘당신입니다’라고 해야 할 텐데 ‘나 자신입니다’라고 대답한 거예요. 옛날에 이런 말 하면 그대로 죽임을 당할 일이에요. 그런데 죽이지 않은 왕도 대단하죠. 그 말을 듣고 부처님께 여쭈니까 ‘그렇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이 소중하다 해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답하신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nbsp nbsp 그리고 프라세나짓왕과 부처님의 대화 중 아주 유명한 대화가 있습니다.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프라세나짓왕이 부처님께 여쭸어요. 그러면 보통 군대가 강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주로 할 텐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 nbsp nbsp 모든 산천초목까지 다 왕의 소유였던 절대왕정 시대에 백성을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라고 말한 거예요. 전 세계 어떤 사람도 절대 왕정 시대에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라. 그러면 굳이 왕이 복을 구하기 위해서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도 하셨고, ‘왕이 만약에 지혜가 없다면 한 나라를 바르게 이끌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생명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 한다’ 이런 말씀까지 하셨어요. 대통령은 국민의 머슴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주권재민 시대에도 청와대에 가서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성들 하나 하나의 고통을 자기 자식의 고통처럼 보고 대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도 우리 사회를 보면 세월호 사건이든 강정마을이든 대통령이 정말 자기 자식이며 자기 가족의 일처럼 생각해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 붓다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nbsp 이 외에도 스님은 부처님이 고통받는 사위성 대중들을 교화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듣듯 눈을 감고 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목소리는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nbsp nbsp 이어서 스님은 이번 순례객 중에서 어제 한국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신 분이 있다고 하면서 다함께 천도재를 같이 지내주자고 했습니다. 순례를 포기하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스님은 부처님의 성지인 바로 이곳에서 천도재를 함께 지내줄테니 순례를 함께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면서 상주를 위로하고 천도재를 여법하게 지내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영가시여,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지금에 이르러 영가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고?nbsp nbsp 영가시여, 만약에 영가가 살아 생전에 아무리 좋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죽어가는 생명을 한없이 살리고, 가난한자를 한없이 돌보고, 괴로워하는 자를 한없이 위로하고, 진실을 말하고 위로한 온갖 공덕을 쌓았다 하더라도 지금에 이르러 이 법사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꿈속에서 지은 공덕과 같아 해탈 열반에 이르지 못할지니. 영가시여, 살아 생전에 사람을 해치고, 남의 물건을 뺏고, 남을 괴롭히고, 거짓말을 하고, 욕설을 하고, 술 먹고 취했다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이 법사의 질문에 능히 답을 할 수 있다면 갖가지 모든 죄업이 꿈 속에서 저지른 것과 같아 능히 눈을 뜨고 꿈을 깨면 그 죄업이 흔적조차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영가시여, 영식을 오롯이 하여 이 법사의 질문에 능히 답해 보시오.nbsp nbsp 영가가 이 법사의 질문에 단박에 깨달음을 얻으면 즉시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지만, 만약 영가가 이 질문에 단박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오늘 여기 모인 청중들이 부처님께서 장기 주석하신 이 성스러운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영가를 위하여 해탈주를 독송할테니 이 해탈주를 잘 듣고 저 아마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로 왕생하시어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고 아미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 마침내 해탈열반을 성취하소서.” nbsp 스님의 설법이 끝나자 대중들은 아버님 상을 당한 순례객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해탈주를 함께 독송해 주었습니다. 상주가 된 분은 법을 설해준 스님과 대중들에게 삼배를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 nbsp nbsp 이어서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동안 일정에 쫓기어 성지에 도착해도 예불 올리고 설명이 끝나면 곧바로 버스에 다시 탑승하기 바빴는데, 오늘은 시간이 많이 주어져서 기원정사 곳곳을 거닐어보고, 혼자서 정진도 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 nbsp nbsp nbsp 순례객들은 아난존자가 부처님에게 물을 떠다주었다고 하는 우물,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모셨다고 하는 보리수나무,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을 했다고 하는 곳 등을 천천히 거닐어 보기도 하고, 부처님의 처소인 간다 쿠티 앞에서 108배 절을 하거나 명상을 하기도 했습니다.nbsp nbsp ▲ 부처님이 머무셨던 처소, 간다 쿠티 nbsp ▲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을 했다고 하는 곳 nbsp 그리고 대중들이 정진을 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순례단 전체를 위해 일대 일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순례객들에게는 이 사진 한 장이 평생을 두고 남을 기념이 될 것입니다. 마치 대학 졸업 사진을 찍듯이 모두들 가슴 설레여 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습니다.nbsp nbsp ▲ 스님과 일대 일로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 nbsp 이렇게 기원정사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후 순례단은 다시 장구한 행렬을 이루며 부처님의 제자들이 탁발을 하기 위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사위성으로 들어갔습니다.nbsp nbsp 사위성 서문을 지나 곧이어 앙굴리말라스투파, 수닷타장자의 스투파가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앙굴리말라스투파를 참배한 후 스님으로부터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어떻게 부처님을 만나 교화가 되었고, 그의 마지막 죽음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함께 그에 관련된 경전을 독송했습니다.nbsp nbsp ▲ 앙굴리말라스투파 nbsp 또 수닷타 장자의 스투파에서는 탑 위까지 줄을 지어 올라가 참배를 한 후 탑을 향해 삼배를 올렸습니다.nbsp nbsp ▲ 수닷타장자 스투파 nbsp 이어서 다시 사위성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이 코스는 27번째 성지순례를 오면서 처음으로 가보는 길입니다. 어제 스님이 답사를 마치고 새롭게 만든 코스입니다.nbsp nbsp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니 황량한 정글이 나타났습니다. 당시에는 가장 번성했을 도시였 텐데 황무지로 변해 있었고, 인적이라곤 구걸하는 아이들만 지치지 않고 끝까지 순례객을 따라왔습니다.nbsp nbsp ▲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는 순례단 nbsp 사위성 동문으로 나오니 부처님이 비구니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 왕사 터가 나왔고, 다시 논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베사카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풀바람 비하르. ‘동원정사’가 나타났습니다. 어제 스님이 답사한 바로 그곳입니다.nbspnbspnbsp nbsp 순례단은 동원정사 유적지를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돈 후 자리를 펴고 앉아 스님으로부터 베사카부인의 깊은 신심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 nbsp ▲ 동원정사, 풀바람 비하르 nbsp 동원정사를 참배하는 것으로 쉬라바스티에서의 순례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새벽에 순례를 시작했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습니다. 다시 천축선원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유채꽃이 만발해 있어서 하루 종일 순례를 하느라 걸었던 노곤함을 달래 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스님은 “여러분이 언제 한번 이런 시골길을 걸어보겠어요?” 하면서 순례를 마친 대중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습니다.nbsp nbsp 조별로 전기밥솥에 밥을 지어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7시부터는 다시 저녁 법회가 열렸습니다. 스님은 이제 마지막 순례지로 상카시아만 남겨 놓고 있는 대중들을 위해 총정리가 될 수 있는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순례단이 그동안 돌아본 바라나시, 전정각산, 보드가야, 라즈길, 바이샬리, 쿠시나가라, 룸비니, 카필라바스투, 랑그람, 쿠단, 삐쁘라하와 등을 주욱 상기시켜주며 그곳에서 알아야 핵심 내용들을 다시 짚어 주었습니다. 14일 동안의 순례가 다시 한눈에 그려지는 기분이었습니다.nbsp nbsp 그리고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객들은 순례를 하면서 들었던 다양한 의문들을 스님께 질문했고,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2시간 30분 동안의 강연을 모두 마치고 스님은 마지막으로 이제 순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면 좋을지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 nbsp “성지순례를 하면서 느낀 점이 좀 있어요?” nbsp “네” nbsp nbsp “첫째, 성지를 참배한 것 말고도 인도에 와서 보고 배운 것이 참 많았지요? 그러니 한국에 돌아가면 너무 물질에 연연하는 삶에 대해 좀 재고를 해보셨으면 해요. 그러면 죽을 때까지 근심 걱정이 끝이 안 나요. 조금 한 템포 떨어져서 삶을 바라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nbsp nbsp 둘째, 우리가 불교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2600년 전이었는데도 얼마나 합리적이고 바르고 균형잡혀 있으셨습니까. 그 가르침은 지금 들어봐도 기가 막힌 얘기잖아요. 오늘날도 부처님 만큼 그렇게 유머있고 위트있고 똑바르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우리는 왕이 되려고 꿈을 꾸는데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버렸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 길은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nbsp nbsp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는 자세와 부처님의 인격을 닮아가려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자꾸 이러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닮아가려는 태도가 필요해요. 부처님과 당시 수행자들의 삶을 우리의 삶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그 때보다 더 잘 먹잖아요. 어디에 자도 그때보다 더 잘 자고요. 무엇을 입어도 그때보다는 잘 입고요. 일부러 입던 옷을 벗고 분소의를 입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먹고 입고 자는 것 가지고 안달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nbsp nbsp nbsp 누군가가 특별히 더 좋은 옷을 주지 않아도 지금 입고 있는 이 정도 옷은 입고 살 수 있잖아요. 그렇게 안달하지 않아도 어차피 먹게 되어 있고, 자게 되어 있고, 입게 되어 있어요. 적당하게 먹을수록 여러분들 건강에도 좋아요. 요즘 시대는 전부 다 비만이 문제이지 영양 실조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때가 지나면 안 먹어야 해요. 일부러 먹기 싫어서 안 먹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주는 대로 그냥 먹는 겁니다. 이렇게 살면 사는 것이 훨씬 편해져요.nbsp nbsp 마음이 편안해지면 내가 갖고 있는 재능도 효과가 더 나요. 그러면 능력이 더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효율이 더 생겨요. 재능을 다른 곳에 낭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길이 있어요. 또 이 길은 현재만 좋은 길이 아니고 미래도 좋은 길이에요.nbsp nbsp 그리고 정토회가 가는 방향은 진보적인 방향이기 때문에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잘 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것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차를 타면 가만히 있어도 목적지에 가게 되어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정토회에 몸을 담고 있으면 앞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본인이 안달이 나서 자꾸 내려서 문제죠. 그래서 제가 ‘붙어만 있어라’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장 다 버리고 들어와서 머리 깍고 스님이 되라는 얘기는 안 하잖아요. 다만 너무 세속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겁니다.nbsp nbsp 약간 한발 떨어지면 훨씬 행복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던 일을 다 해나갈 수 있어요. 한 템포만 늦추면 안달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해나갈 수 있어요. 스님도 침대에 누워서 안 잘 뿐이지 차를 타고 가면서 자든 어떻게든 다 자면서 사는 거예요. 잠을 안 자고 어떻게 살겠어요? 대신 몇 시에 누워서 자고, 몇 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없어서 좀 문제이긴 하지만요.nbsp nbsp 인도에서 한국식으로 살려하면 좀 힘들어요. 그런데 한국식으로 살겠다는 생각만 놓아버리면 인도만큼 살기 편한 곳이 없어요.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사람들 눈치 보고 잔뜩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데 여기는 긴장하고 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그러나 내 식대로 살려고 하면 뜻대로 잘 안 되어서 힘들어져요. 그러니 떠내려가는 물에 맡겨 놓고 그냥 살면 돼요. 그러면서 내 계획은 내 계획대로 갖고 있되 그것을 고집만 안 하면 됩니다.nbsp nbsp nbsp 성지순례도 절대로 인도식으로만 하지 않아요. 우리식으로 해요. 그런데 고집하면 갈등이 생겨요. 고집은 안 해요. 길이 막히면 내려서 밥 먹으면 되고, 국경을 막아도 별 차질이 안 생기잖아요. 왜냐하면 중간에 몇 시간씩 차질이 생겨도 늘이고 줄일 수 있도록 스폰지를 다 넣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룸비니 갈 때 몇 시간 늦게 가도 차질이 안 생겨요. 그 날은 가는 일정만 잡아 놓았거든요. 어제 늦게 도착해서 천불화현탑을 못보면 오늘 가서 보고 밥을 한 시간 늦게 먹으면 되잖아요. 이렇게 노하우가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 계획대로 가되 그러나 순간순간은 인도 현지 사정에 맞춰야 해요. 여기에 안달하면 성질이 나서 못 살아요. 버스가 털렁털렁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맞추되 계획은 딱 세워놓고 조정해 가면서 살면 되듯이 인생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세요.” nbsp 스님의 격려는 순례단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스님은 과로가 누적되어 편두통이 계속 있으신지 목 뒤에 파스를 계속 붙이고 있었음에도 열정적인 강연을 해주었습니다.nbsp nbsp 온 힘을 기울여 성지에 대해 설명하고, 부처님의 삶을 다시 재해석해 주고, 대중들이 순례를 잘 하도록 사전답사까지 꼼꼼히 챙겨준 스님에게 순례단은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nbsp nbsp nbsp 내일 순례단 A팀은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해 4시에 상카시아로 출발합니다. 스님은 새벽에 A팀을 배웅한 후 오후에는 다시 B팀을 맞이해 천불화현탑을 함께 참배할 예정입니다. nbspnbsp 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15 (인도 10일째) 성지순례단 A팀 쉬라바스티 도착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쉬라바스티 지역의 불교유적지를 답사했고, 오후에는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을 맞이하고 천불화현탑을 참배한 후 저녁에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어젯밤 보드가야에서 차를 타고 13시간 반이 걸려 쉬라바스티에 도착한 스님은 한국 절인 천축선원에서 하룻밤을 주무셨습니다. 새벽예불과 기도를 마치고 아침에는 천축선원 주지인 대인스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차담을 나누는 중에 스님이 베사카 부인이 창건한 동원정사의 위치에 대해 묻자 대인스님은 쉬라바스티에는 최근에 발굴된 여러 불교 유적지가 있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성지순례 때 마다 이곳을 방문하지만 늘 시간에 쫓겨서 주위를 답사해 보지 못했다며 대인 스님과 함께 답사를 나섰습니다. nbspnbsp먼저 경전에 많이 나오는 베시카부인이 지은 절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인도말로 ‘풀바람 비하르’ 라고 불리우는 곳이었습니다. 스님 일행이 도착하자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인도 출신 스님이 나와서 이곳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베사카 부인이 지은 절, 동원정사nbsp‘풀’은 ‘동쪽’이라는 뜻이고 ‘바람’은 명상하는 곳, 즉 ‘정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동원정사’라고 부를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정사를 창건한 베사카부인은 부처님 당시에 재가 수행자 중에서 가장 신심이 컸던 분으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남자 재가 수행자 중에 가장 신심이 컸던 분이 수닷타장자라면 여자 재가 수행자 중에 가장 신심이 컸던 분은 베사카부인이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이곳은 비구니 처소였다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비구니 처소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베사카부인이 지은 절이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는 자연스럽게 비구니 처소가 된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은 45안거 중에 25안거 내지 24안거를 쉬라바스티에서 보냈다고 하고, 그 중 19안거를 기원정사에서 보내셨기 때문에 이곳 동원정사에서는 다섯 번 내지 여섯 번을 지내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중요한 곳이지만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많이 닿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nbspnbsp벽돌로 둘러쳐진 곳 안에는 작은 돌기둥이 신령스럽게 모셔져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힌두교의 ‘링가’입니다. 이곳을 지키는 스님은 “이것이 원래부터 링가였던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발자취를 상징하는 아쇼카석주였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쇼카석주가 깊이 묻혀 있었는데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고 나서 힌두교에서 이 아쇼카석주를 잘라서 링가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nbspnbspnbsp스님은 유적지가 높은 지대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후세에 벽돌이 무너져내리면서 지대가 높아졌을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유적지 바로 옆에 인도 스님이 운영하는 법당이 있어 참배를 했습니다. 스님은 “내일 오후에 한국에서 순례객 150여 명과 함께 다시 이곳을 방문하겠다”고 인사하고 절을 나왔습니다.nbspnbsp▲ 동원정사 터에서 출토된 유물들nbsp절에서 나와 논두렁 길을 조금 걸으니 사위성의 동문이 나왔습니다. 또 동문 바로 앞에는 왕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해 지은 절, 즉 ‘왕사’라고 불리우는 절터가 발견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여성 출가자는 외호를 받지 않으면 위험했기 때문에 왕이 사위성 바로 가까이에 절을 지어준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저 멀리 보이는 것이 사위성 동문 쪽 성벽▲ 동문 바로 앞에 있는 왕사 터nbspnbsp동문을 통해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니 황무지로 변해있는 정글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곳이 가장 번성한 도심이었을텐데 황량하게 변해 있는 모습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습니다.nbspnbsp▲ 동문을 통해 사위성 안으로 들어온 스님 일행nbsp사위성 안에는 곳곳에 땅에 묻힌 벽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발에 채이는 벽돌들을 보며 이곳이 2500년 전에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음을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사위성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벽돌nbsp다시 사위성 서문 쪽으로 계속 걸으니 수닷타장자 스투파가 나타났습니다. 스투파 앞에서 삼배를 한 후 답사를 마쳤습니다.nbspnbsp▲ 수닷타 장자의 스투파nbsp답사를 마치고 나서 스님은 “내일 A팀을 안내할 때는 코스를 좀 바꾸어야겠다”고 하면서 오늘 답사한 것을 토대로 기존에 순례하던 코스에서 ‘동원정사’를 참배하는 것을 추가했습니다. 어떤 순서로 순례를 하면 동선이 가장 효과적일지 고민한 후 스님이 짠 코스대로 다시 길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마을로 난 길을 순례객들이 걸어야 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다시 답사를 해보니 논두렁으로 난 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을 안내하기 위해서 직접 답사하고 꼼꼼히 체크하는 스님의 모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nbspnbsp오후에는 원고 교정 업무를 보면서 휴식을 하다가 오후 5시 정도에 성지순례단 A팀이 쉬라바스티에 다 와간다는 연락을 받고 마중을 나갔습니다. A팀은 쉬라바스티에 도착하자마자 스님과 함께 천불화현탑을 참배할 예정이어서 스님도 천불화현탑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덕생법사님, 선주법사님, 자광법사님과 함께 8대 성지 순례를 모두 마친 A팀은 스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해가 넘어가서 어둑해진 가운데 드디어 A팀의 버스 4대가 나란히 천불화현탑 앞에 도착했습니다.nbsp스님은 천불화현탑 앞에서 “쉬라바스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며 환한 웃음으로 순례객들을 맞이해 주었습니다.nbspnbsp▲ 천불화현탑nbsp순례객들은 가사를 수하고 향을 피운 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차례로 줄을 지어 천불화현탑 위로 올라갔습니다. 점점 어두워지더니 탑돌이를 모두 마치자 해가 다 지고 말았습니다. nbspnbspnbsp저녁예불을 이곳 천불화현탑에서 올린 후 이어서 8대 성지 순례를 마치고 먼 길을 달려온 순례객들을 위해 스님이 축원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순례객들이 앉아 있는 탑 위에는 다행히 인도 스님들이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어서 겨우 순례객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 스님이 이곳 천불화현탑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쉬라바스티, 즉 사위성에 있는 천불화현탑입니다. 사위성은 코살라국의 수도입니다. 코살라국은 마가다국과 함께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2개 국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곳 왕은 프라세나짓왕이었습니다. 코살라국은 신흥 강국이었습니다. 마치 유럽이 전통 강국이라면 미국이 신흥 강국이고, 지금 미국이 전통 강국이라면 중국이 신흥 강국이듯이 말이죠. 그렇게 신흥 강국이다 보니까 군사적, 경제적으로는 매우 강력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많이 뒤떨어졌던 것인지 종교적, 사상적, 철학적인 부분에는 조예가 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육사 외도들의 가르침이 널리 성행했다고 합니다.nbspnbspnbsp부처님이 수닷타 장자의 초청을 받고 이곳에 오셔서 설법을 하셨지만 아주 뛰어난 일부 엘리트들을 제외하고는 불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닷타장자는 무척 안타까워 하면서 부처님께 ‘이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방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외적으로 신통력을 좀 보여주셔야겠습니다’ 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인격이나 말씀하신 걸로 봐서는 맞지 않는 일인데 어쨌든 그렇게 청하자 부처님께서 어느 날 ‘성 밖으로 모여라’라고 하시자 대중들이 이곳에 구름처럼 많이 모였답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은 성에서 좀 떨어진 곳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망고 하나를 드신 후 그 씨를 땅에 심었더니 금방 싹이 트고 자라서 거목이 되었고 망고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그 망고가 다 부처님으로 변했답니다. 그것을 두고 ‘천불이 화현을 했다’고 하는 곳입니다. 그 후 부처님은 하늘로 오르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쉬라바스티 사람들은 그 일로 인해서 불법에 귀의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이곳이 쉬라바스티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알려지면서 이렇게 큰 기념탑이 쌓이게 된 것입니다.nbspnbsp술 취한 코끼리가 부처님께 항복했다는 ‘취상조복’이 라즈길을 상징하고,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이 바이샬리를 상징한다면, 쉬라바스티를 상징하는 것은 ‘천불화현’입니다. 지금은 비록 허물어진 탑이지만 산같이 높은 탑이 쌓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좀 늦었지만 천불화현탑을 참배했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먼 길을 오시느라 특히 국경을 드나드느라고 애 많이 쓰셨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통을 쓰지 말라고 가르치셨다고 알고 있어서 왜 이런 유적지가 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그만큼 사위성에서는 육사 외도의 공격이 많았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nbspnbsp늦은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천불화현탑 참배를 무사히 마치고 순례객들은 쉬라바스티의 유일한 한국 절인 천축선원으로 들어갔습니다.nbspnbspnbsp천축선원에서는 따뜻한 국과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어서 순례객들 모두 무척 기뻐했습니다.nbspnbsp▲ 천축선원nbsp그동안 전기밥솥과 밑반찬으로 끼니를 해결하느라 따뜻한 국을 구경해보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맛본 국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나 봅니다. 게다가 오늘은 스님이 직접 국을 떠주었습니다.nbsp순례객들은 익숙한 목소리로 스님이 “따뜻한 국 맛있게 드세요”라고 하자 마치 고향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난 듯 기뻐했습니다.nbspnbsp저녁 7시 30분부터는 천축선원 법당에서 저녁 법회가 열렸습니다. 스님은 천축선원 주지인 대인스님께 순례객들을 위해 좋은 법문을 들려달라고 하면서 법을 청했습니다.nbspnbsp대인스님은 어떻게 해서 이곳 인도에 불사를 하게 되었는지, 지금은 어떤 일들을 천축선원에서 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준 후 간단히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게으름을 피우다가도 법륜스님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들 때가 많습니다. 법륜스님 보다 제가 잠도 더 많이 자는 것 같고요. 부끄러움을 느끼고 스님을 의식하면서 저도 항상 본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정토행자님들이 신년에 세원 원력들이 꼭 이루어지시길 바랍니다.”nbsp대인스님의 법문에 이어서 스님의 즉문즉설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먼저 스님은 순례객들에게 성지순례를 해본 소감이 어떤지 물어보면서 법회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성지를 한바퀴 돌아보니까 어땠어요?”nbsp“좋았어요.”nbspnbsp“뭐가 좋았어요?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따라다니기에 급급했죠? 본 것이라고는 허물어진 벽돌 밖에 기억이 안 나지요? 여기저기 가봐도 똑같죠? nbspnbsp한국 같으면 산 모양이라도 다른데, 인도는 평평한 곳에 이 탑인지 저 탑인지 이곳인지 저곳인지 그냥 동그란 탑이 하나 있고, 소똥도 있고, 개똥도 있고, 그저 버스에서 내리면 머리 숙이고 절이나 좀 하고 그랬죠? 저녁에 도착하면 밥 해먹기 바빴을 것이고요. nbspnbspnbsp여러분들이 순례하면서 궁금한 점을 메모해 놓으라고 바라나시에서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순례하면서 궁금했던 점, 경전 독송하면서 궁금했던 점, 수자타아카데미에 대해 궁금했던 점, 성지에 있는 한국 절을 보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nbspnbsp스님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여러 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2시간 20분 동안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nbspnbsp그 중에서 순례객 한 분의 질문은 많은 공감을 얻고 큰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감흥이 크지 않다며 어떡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nbspnbspnbsp성지순례를 다녔는데 그냥 무덤덤 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니 환희심이 나고 좋아야 되는데, 별로 감흥이 없이 당황스럽습니다. 제가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제가 너무나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제가 제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nbspnbsp“그러니까 내 마음이 이러저러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된다는 얘기지요? ‘내 마음은 성지에 가면 흥분되고 좋고 눈물이 나야 하는데 이게 왜 눈물도 안 나고 기쁘지도 않냐?’ 이거나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면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해야 하는데 왜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냐?’ 이거나 사실은 똑같은 애기예요.nbspnbspnbsp질문자가 갖고 있는 고민의 본질은 ‘내 마음은 이래야 한다’라고 정해 놓았는데 내가 생각하는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이 지금 안 움직인다는 거예요. 자기 욕구를 중심에 놓고 ‘안 된다’고 문제 삼는 겁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바로 ‘쾌락주의’라고 말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를 넘어선 제3의 길인 중도를 발견했다고 이번 순례를 하면서 여러 차례 들었잖아요.nbspnbsp질문자가 제대로 수행을 하려면 ‘아, 내 마음이 이렇구나’하고 알아차려야 해요. 이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에요. 내 마음이 들뜨면 ‘아, 내가 성지에서 마음이 들뜨는구나’ 하고 알고, 내 마음이 슬프면 ‘아, 내가 저런 아이를 보면 슬픈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고, 무덤덤하면 ‘아, 내가 이럴 때 무덤덤하구나’하고 알아야 해요.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 마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흥분해야 좋은 것도 아니고 가라앉아야 좋은 것도 아닙니다.nbsp질문자는 벌써 좋고 나쁘다는 생각, 즉 선입관을 갖고 있잖아요. ‘나는 성지에 오면 막 눈물날 줄 알았더니 눈물이 안 나니까 문제다’라고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성지에 와서 깨진 벽돌 보고 눈물 흘리는 게 뭐 중요해요? ‘나는 어떠해야 한다’라는 전제를 미리 해놓으니까 지금 내가 안 그렇다는 걸 갖고 문제 삼는 거예요. ‘우리 남편은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 하고 결혼했는데 살아보니까 안 그렇다고 문제 삼는 것과 똑같아요.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금 일어나는 마음을 보면 되잖아요.nbspnbsp여러분은 인도 아이가 막 돈을 달라고 조르니까 불쌍하다고 말하지만, 내가 그걸 불쌍하게 여겨 울어봤자 아이에게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이런 경계에 부딪히니 내 마음이 이렇게 일어나는구나’하고 알아야 해요. 불쌍하다며 주는 건 아이를 위해서 주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주는 거예요. 내가 불쌍하게 여기니까 주는 겁니다. 그 애는 불쌍한 애가 아니에요. 불쌍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요? 정작 그 아이는 재미로 한번 시험해 보는지도 모르는데요. nbspnbspnbsp‘내 업식이 이렇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이렇게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돈을 줬다가도 아이가 안 가고 또 달라고 하면 성질을 팍 내잖아요. 불쌍하면 계속 불쌍해야지, 왜 두 번 달라 한다고 성질을 내요? nbsp그러니 ‘아, 내 업식이라는 게 이렇구나’ 이렇게 자기를 보는 공부를 하세요. 다니면서 바깥 성지만 보지 말고 마음 성지도 보라고 제가 계속 이야기했잖아요. 마음이 시시각각 어떻게 바뀌는지 살펴보면 더 재미있어요. 벌써 다 잊어버렸죠?nbspnbsp다시 정리하면 질문자의 문제의 본질은 ‘내 마음은 이래야 한다’라는 전제를 두고 내 마음이 그렇지 않다고 해서 문제 삼는 거예요. ‘내 마음이 이래야 한다’, ‘세상이 이래야 한다’, ‘인도가 이래야 한다’ 이렇게 정하지 마세요. ‘인도는 이래야 한다. 이럴 줄 알았다’ 했는데 정작 와 보니 안 그러니까 지금 힘든 거예요. ‘한국에서 내가 인도를 잘못 생각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nbsp제가 봉암사에 부목으로 있을 때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돈에 너무 의지하고 살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돈도 하나도 없이 살고, 간식도 안 먹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수행하려고 작정했는데 제가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장작을 패는 모습이 신도님들에게는 너무 불쌍해 보였나 봐요. 그래서 저는 간식 안 먹기로 결심했는데 간식을 갖다 주고, 저는 돈을 몸에 안 지니려고 하는데 돈도 찔러주고 갑니다. 그러면 그건 제가 정말로 불쌍한 사람인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보기에 불쌍한 거예요. 우리가 지나가면서 ‘저 사람 불쌍하다’라고 하지만 그 사람이 진짜 불쌍한 건지 내가 보기에 불쌍한 건지 생각해보세요. 저도 다 떨어진 옷 입고 꾀죄죄한 행색으로 여기 앉아 있으면 여러분들이 지나가면서 보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제가 정말로 불쌍한 사람인가요?nbsp그러니까 그건 다 우리들의 마음이에요. 불쌍한 마음이 든 건 좋아요. 그런데 불쌍함에 사로잡혀서 슬프면 안 돼요. 연민이 일어나는 건 좋지만, 슬퍼하지 말고 실제로 어떻게 도울 건지를 생각해 보세요. 내가 사탕을 하나 줘서 그 아이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주는 게 편하다고 하면 주면 돼요. 그 아이는 하루에 10루피만 받아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 계속 따라다니는 거예요. 물건을 한 개 판다고 그날 장사를 다 한 게 아니잖아요. 10개 가져왔으면 10개 다 팔아야 하고 100개 가져왔으면 100개 다 팔아야 해요. 그런 것처럼 그 아이도 10명에게 받아야 한단 말이에요. 같은 사람에게 10번을 받든, 사람을 바꿔가며 10번을 받든 그 아이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한번에 10,000루피를 주면 안 따라와요. nbspnbspnbsp그러니까 그 아이는 내가 주든지 안 주든지 그냥 누구에게든 돈을 받으려고 ‘박시시, 박시시’ 이럴 뿐이에요. 그게 내 마음에 거슬리면 주면 되고 안 거슬리면 안 주면 됩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에요. 그 아이는 돈을 안 준다고 나한테 성질내지 않는데 나는 그 아이가 날 따라다닌다고 성질내는 거예요. 귀찮기야 하지만 귀찮다고 하는 것도 내 문제예요. 뒤에 따라오도록 두는 내가 힘들겠어요? 따라다니는 아이가 힘들겠어요? nbspnbsp성질은 내도 괜찮지만 어쨌든 그런 것이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점을 봐야 합니다.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안 주고, 그건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면 돼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nbspnbsp뭘 정말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리에서 10루피든 100루피든 주는 것도 필요하고, 또 제대로 도와주려면 더 근본적인 지원을 하는 것도 필요해요. 구걸은 나쁘다고 하지만 그 사람이 10루피가 필요할 때 10루피를 버는 것도 필요해요. 저도 처음에 구걸에 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둥게스와리에서 구걸하고 사는 장애인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구걸을 꼭 나쁘다고 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오늘 얼마 벌었는지 물어보면 ‘오늘은 30루피 벌었어’, ‘오늘은 50루피 벌었어’, ‘오늘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300루피 벌었어’ 이러는데, 장사하는 사람이 오늘 장사해서 얼마 벌었는지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 사람은 그게 자기 하루 수입원이잖아요. 단지 물건을 주고 돈을 받으면 괜찮다고 하고, 물건을 안 주고 돈을 받으면 나쁘다고 하는 차이일 뿐입니다. 다만, 아이들은 교육상 나빠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은 잘 안 주지만, 어쨌든 그건 그 사람들의 생활이에요.nbspnbsp시장가면 물건 사라고 계속 부르면서 호객행위를 하지만 사고 안 사는 건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박시시, 박시시’하고 따라올 때 주고 싶으면 주고 안 주고 싶으면 안 주면 돼요. 그건 여러분들의 자유예요. 그러나 이제 그런 모습을 보고 ‘아,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좀 도와야겠다’ 하면 개인적으로 그렇게 주는 방법도 있지만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학교나 구호기관의 활동을 후원하거나 직접 자원봉사를 하는 것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어요. 근본적으로 보면 여러분들이 상대적으로 가진 게 많으니까 좀 주기는 줘야 하지만, 어떻게 주는 게 좋을지는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하면 돼요.nbspnbspnbsp요지는 자기 마음의 문제니까 자기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봐야 한다는 겁니다. 산을 보고 시비하듯이 지금 자기를 보고 ‘성지에 왔는데 왜 나는 눈물도 안 나냐’하고 시비하는 거예요. 그걸 두고 ‘자기 마음 자기가 모른다’고 해요.” nbspnbsp스님의 답변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입재식 때 밖을 보는 성지순례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보는 성지순례를 꼭 할 것을 스님이 강조했는데, 까막득히 잊고 있다가 순례객들은 오늘에서야 다시 그 마음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니 순례객들은 그동안 궁금했던 의문이 많이 풀렸다며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동안 법사님들의 안내를 계속 받다가 오랜만에 다시 스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나 반가워 했습니다.nbspnbspnbsp내일은 한국 불교인들에게는 마음의 교양인 금강경이 쓰여졌다는 기원정사로 가서 오전 내내 스님의 설법을 듣고 정진을 할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사위성으로 들어가서 수닷타 장자와 앙굴리말라의 수투파를 참배한 후 오늘 답사한 베사카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동원정사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nbsp※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14 (인도 9일째 제2편)_수자타의 공양
nbsp부처님이 6년 고행 후 전정각산에서 내려와 쓰러지셨던 자리에 세워진 탑을 참배한 후 다시 마을 사이로 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nbspnbsp조금 더 걸으니 무덤 같이 생긴 작은 탑터가 보였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으셨던 곳이라고 알려주면서 먼저 탑을 향해 삼배를 했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은 곳nbsp스님은 삼배를 마친 후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오른쪽 앞에 무덤같이 생긴 작은 탑이 보이지요? 여기가 부처님이 수자타로부터 공양을 받으신 곳이에요. 여기는 부처님이 앉았던 자리, 여기는 수자타가 앉았던 자리입니다. 공양 올렸던 자리에 이렇게 탑을 쌓았어요.nbspnbsp뒤쪽을 보면 동네에 큰 탑이 있는데 저곳이 수자타의 집터예요. 그리고 왼쪽에 있는 절이 수자타템플이에요. 수자타의 공양터 주위에 수행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수행하니까 훗날 절이 지어졌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가 없어지고 지금은 힌두 절이 되었습니다. 수자타템플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있지만 지금은 힌두 사원이에요.”nbspnbsp수자타템플이 힌두 사원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무척 씁쓸하게 들렸습니다. 성지를 가꾸는 일이 아직 더디기만 한 것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nbspnbsp수자타로부터 부처님이 공양받는 장면이 기록된 내용에 대해 경전 독송을 함께 한 후 순례단은 우루벨라 가섭이 수행했다고 하는 곳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마을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아이들이 계속 스님을 따라와 구걸을 했습니다. 중국말로 스님을 뜻하는 ‘스부’를 계속 말하며 심지어 스님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나 집요하게 따라와서 그 모습을 본 순례객 중 한 명이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사탕 하나 주고 아이들 그만 따라오게 하면 안 돼요?”nbspnbspnbsp그러자 스님은 길을 계속 걸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왜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우게 되었는지 스님의 고민이 담긴 진솔한 이야기였습니다.nbspnbsp“한 개만 줘서 떨어질 아이들이면 벌써 그렇게 했지요. 한 개만 주겠다는 것은 정말로 아이들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얄팍한 생각을 하니까 해결이 안 되지요.nbsp▲ 구걸을 하며 한참 동안 스님 뒤를 쫓아온 아이들nbsp그래도 여러분들은 저보다는 나아요. 저는 제일 처음에 인도 왔을 때 실수를 많이 했어요. 캘커타에 도착해서 물을 함부로 먹지 말라고 해서 밤에 물을 사러 나갔어요. 그런데 누가 컴컴한 데서 제 팔을 잡으면서 구걸을 하는데 아무리 뿌리쳐도 자꾸 따라와요. 컴컴한 데서는 몰랐는데 가로등 밑에 가서 보니 아기를 안은 아주머니였어요. 손을 자꾸 아기 입에 댔다가 배에 대기를 반복해서 아기가 배고프다는 뜻인 줄 알았어요. 잡아당기는 대로 따라 가봤더니 조그마한 구멍가게로 데려가서 분유통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요. ‘분유 사달라는 소리구나’ 싶어서 제가 ‘How much?’ 라고 가격을 물었어요. 그랬더니 가게 주인이 ‘식스티 루피’, 즉 60루피라는 거예요.nbspnbsp그런데 제가 인도 오기 전에 사전교육을 단단히 받았거든요. 아이들이 ‘박시시’를 요구할 때는 아무리 많이 줘도 1루피 이상 주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1991년도니까 벌써 25년 전이어서 물가가 그랬는데, 60루피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서 그냥 도망가 버렸어요. 그래도 사달라는 거 안 사주고 온 게 마음에 계속 걸리잖아요. 그래서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와서 안내하는 교수님한테 60루피가 우리 돈으로 얼마인지 물었더니 2,400원이라는 거예요. 2,400원 달라는데 그걸 마치 전 재산이라도 달라고 한 양 도망을 와버린 거예요. 마음이 아파서 돈을 가지고 다시 나가봤지만 어느새 없어져 버리고 안 보였어요. 그래서 혼자서 반성을 많이 했죠.nbspnbsp어릴 때 마음 같으면 주고도 남았을 텐데 첫 번째로는 승려가 되면서 냉정해졌고, 두 번째로는 사회운동 하면서 불쌍한 사람이나 개인을 돕는 것보다 사회제도를 바꾸는 걸 중시하다 보니 자선 같은 걸 좀 부정적으로 생각했어요.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생각했거든요. 그러다보니 이제 제 마음이 너무 냉정해진 거예요. 마음은 따뜻하지만 생각이 냉정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은 가난한 사람 앞에서 오히려 따뜻하게 작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nbspnbspnbsp그런 나를 보고 반성이 되니까 가방을 뒤져서 기본적인 옷만 빼고 나머지 수건이며 옷이며 돈이며 전부 다 꺼내서 캘커타 거리에서 달라는 대로 막 나눠줬어요. 그렇게 되니 이제 순례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지금 우리 대중들처럼 무리를 지어 제 뒤를 따라다녔거든요. 한국에서 함께 온 일행들이 ‘그래, 너 잘났다’ 하고 얼마나 불평이 많았는지 몰라요. 그래서 나중에는 완전히 왕따가 됐어요.nbspnbsp그러다가 어느 시골길에서 밥을 먹는데 동네 아이들이 있기에 과자를 줄려고 ‘이리 와, 이리 와’ 하고 불렀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보기만 하고 안 와요. 사탕을 준다고 하니까 애들이 오는 게 아니라 도망을 가버리는 거예요. 그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어요.nbspnbsp‘가난해서 거지가 생기는 게 아니라 뭘 줘서 거지가 생기는 것이구나.’nbsp관광지에서만 아이들이 이렇게 구걸을 하지, 관광객이 없는 일반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구걸하는 게 전혀 없고 뭘 주면 오히려 부끄러워서 도망가는 거예요. ‘아, 내가 참 생각을 잘못했구나’ 싶었어요. 그 뒤로는 아무리 따라다니며 졸라도 안 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안 주는 원칙을 딱 정해서 다녔는데, 저기 수자타수투파에서 다리 못 쓰고 두 팔로 걷는 아이가 계속 따라다녀요. 그때는 안 주기로 마음 먹은 뒤라서 몸이 불편한 아이고 뭐고 무조건 안 줬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여기까지 따라오니까 또 번뇌가 생기잖아요. ‘안 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 애는 어쨌든 뭐든지 하나 얻어야 먹고 살아가는데...’ nbspnbspnbspnbsp그 때부터는 ‘주긴 줘야 하는데 어떻게 주어야 하나? 거지가 되도록 줘서는 안 된다’ 이게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깊은 고민이 되면서 학교를 짓게 되었어요. 다른 곳이 아닌 수자타템플에서 그런 아이를 만났기 때문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지은 거예요. 1991년에 여기서 그 경험을 하고 원래 여기다 학교를 지으려고 했어요. 그때는 인도에 처음 왔으니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이걸 화두로 두고 고민만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1993년도에 유영굴을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에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고 학교를 짓기 시작한 거예요.nbspnbsp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사람이 꼭 잘한 것만 좋은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결과가 좋을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잘못했다고 너무 양심의 가책만 느끼고 울고불고 하지 마세요. 운다고 뭐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잘못했으면 잘못한 줄 알아서 확실히 반성하고 앞으로 정신 차리고 살면 돼요.”nbsp작은 실수였지만 그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니 도리어 큰 일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씀은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도 스님의 작은 실수와 참회에서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nbspnbsp모래 사장이 넓게 펼쳐진 곳에 숲이 있었는데 그 숲 속에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흰색 벽으로 둘러쳐진 건물의 좁은 문으로 들어서자 우물처럼 생긴 작은 화룡굴이 보였습니다.nbspnbsp▲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nbsp이곳에서 스님은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한 이야기를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우리벨라 가섭의 수행 도량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그 동생인 나디 가섭과 가야 가섭의 수행 도량이 있었습니다. 당시 수행자가 1000명이나 되었던 큰 교단이었어요. 이 나라의 왕인 빔비사라 왕이 1년에 한 번씩은 이분에게 공양을 올릴 정도로 유명한 분이셨어요. 부처님은 이 근처인 전정각산에서 수행하셨으니까 이 분들이 어떻게 수행했는지 잘 아셨겠죠. 그래서 5비구를 교화한 뒤에 나도 우루벨라촌으로 가겠다고 하셨던 이유는 이 분들이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셨기 때문에 그러셨던 겁니다.nbspnbspnbsp이곳에 오셔서 하룻밤을 자고 가려고 청하자 우루벨라 가섭은 화룡이 있는 굴에서 자라고 한 겁니다. 굴이라고 하는 것이 옆으로 생긴 굴이 아니라 우물처럼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뱀을 보관했던 겁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아침이 되어서 죽은 줄 알았던 부처님이 잘 쉬었다고 하면서 나와서 깜짝 놀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제압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좀더 사실적인 이야기로는 부처님이 굴 속에서 명상을 하고 있으니까 뱀이 나와서 몸을 칭칭 감고 지나갔는데 부처님은 무념무상의 상태로 있었다고 합니다. 뱀이 나무 위로 올라갈 때 나뭇가지를 꽉꽉 물면서 올라가요, 그냥 올라가요? 그냥 올라가지요. 그것처럼 부처님이 하나의 무정물처럼 편안하게 있으니까 뱀이 그냥 지나간 겁니다. 우리는 긴장을 하고 울찔하니까 뱀이 물게 되는 것이겠죠.nbspnbsp이 외에도 우루벨라 가섭은 부처님과 360가지 신통력 경쟁을 했다고 해요. 우루벨라 가섭의 교만을 꺾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에게 ‘마음 속에 질투심이 있는 한은 해탈하기 어렵소‘ 이렇게 말하자 그 때서야 우루벨라 가섭은 자기도 자기의 본심을 몰랐는데 그 본심을 딱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이 확 밝아졌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저도 출가하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그렇게 경솔하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당신 밑에는 오백명의 제자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우루벨라 가섭이 제자들에게 ‘나는 오늘 큰 스승을 만났다. 나는 이 분의 제자가 되기로 했으니 너희는 너희 갈 길을 가라.’고 하자 제자들 또한 ‘우리는 스승님을 존경하고 살았는데, 스승님이 더 큰 스승의 제자가 되신다니 우리 또한 그분을 모시겠습니다.’라고 해서 다같이 출가를 하게 됩니다.nbspnbsp이어서 나디 가섭과 가야 가섭도 함께 출가를 하게 되어 1000명의 제자가 생겼는데, 부처님께서 이 1000명의 비구를 두고 설법한 내용이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들이 그동안 불을 섬겼는데 그 불은 껐다. 그러나 밖의 불을 끈 것이지 마음 속에 탐진치 삼독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러니 부지런히 정진해서 삼독의 불을 끄라고 하신 겁니다. 이 1000명의 대중을 이끌고 왕사성으로 들어갔습니다.”nbsp정말로 이곳에는 화룡이 있었던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현장에 오니 경전에 기록된 내용이 거짓이 아니고 모두 사실이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nbspnbspnbsp보드가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아주 웅장한 규모로 세워진 수자타의 공양을 기념한 탑 앞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수자타의 공양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 수자타의 공양을 기념한 탑nbsp“이 수자타의 공양은 훗날 최고의 공양으로 칭송 받습니다. 수자타의 공양은 사실 수자타를 위대하게 만들었죠. 왜냐하면 부처님인 줄 알면 누구나 다 공양을 올릴 수 있지만, 수자타는 쓰러져 있는 길가의 노숙자에게 공양을 올렸는데 그 분이 나중에 부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강을 하나 더 건너서 저쪽 편으로 가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는 보드가야가 나옵니다.”nbspnbsp순례단은 탑을 한 바퀴 돌면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했습니다. 탑의 규모가 워낙 커서 한 참을 돌아야 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얼마나 이 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렸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수자타의 공양탑을 돌아서 나온 후 스님은 해마다 10대 성지를 순례하면서 탑의 규모를 비교했을 때 느낀 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규모로 보면 보드가야 대탑보다 수자타의 공양탑이 훨씬 더 큽니다. 쉬라바스티에 가면 천불화현탑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부처님께 발우를 받은 걸 기념하는 케사리아의 봉발탑도 어마어마하게 커요. 재가 신자들이 탑을 쌓다 보니 그런 공덕이나 기적에 관련되는 탑이 규모가 큰 경향이 있어요. 후대에 그런 곳에 더 보시를 더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 당시 사람들도 얼마나 복을 구했는지를 엿볼 수 있지요.”nbspnbsp탑의 규모가 시사하는 점을 캐치해 내는 스님의 안목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nbspnbsp드디어 순례단은 보드가야로 향하는 긴 다리를 만났습니다. 강 건너 편에는 높이 우뚝 솟은 대탑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부처님은 대탑이 세워진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49일 동안의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nbspnbsp▲ 보드가야로 가는 다리nbsp가사를 수하고 보드가야 대탑을 참배하러 들어가는 순례객들에게 스님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한 후 순례단 C팀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가사를 수한 대중들의 모습이 아주 흐뭇해 보였는지 스님은 “이제 진짜 중 같다” 하면서 웃음을 보였습니다.nbspnbsp▲ 성지순례 C팀과 작별 인사nbsp보드가야 대탑 앞에는 대탑을 관리하고 있는 마하보디템플이 있는데, 스님은 해마다 대탑을 참배할 때 보시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하보디템플 주지 스님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보시금을 전달했습니다.nbspnbsp▲ 마하보디템플 주지 스님과 인사nbsp마하보디 템플 주지 스님도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직접 제작한 인도 달력을 선물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순례단 C팀과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스님은 쉬라바스티로 향했습니다. 쉬라바스티는 부처님께서 24번의 안거를 보낸 곳으로 가장 오래 머무신 곳입니다. 스님은 쉬라바스티에서 다시 A팀, B팀, C팀을 차례대로 맞이할 예정입니다.nbspnbsp보드가야에서 쉬라바스티는 자동차로 15시간 동안 가야 하는 먼 거립니다. 스님과 수행팀 일행은 긴 여정을 앞두고 운전기사와 함께 차 앞에서 기념 사진을 한 장 찍고 출발했습니다.nbspnbsp▲ 보드가야에서 쉬라바스티까지 15시간 동안의 대장정을 앞두고nbsp중간에 한 번 내려서 점심 식사를 한 것을 제외하곤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nbspnbspnbsp아침 9시 30분에 보드가야에서 출발했는데 밤 11시가 넘어서 쉬라바스티의 한국절 천축선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13시간 30분 만에 왔으니 1시간 30분이나 당겨 도착한 셈입니다.nbspnbsp▲ 천축선원nbsp내일은 쉬라바스티에서 어떻게 성지순례를 할지 사전 답사를 한 후 저녁에는 순례단 A팀을 맞이하고 법문도 해줄 예정입니다.nbspnbsp▼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nbsp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