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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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13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 기도 중 200일째 기도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기도 중 200일째 날을 맞이하여 기념 법문을 한 후 기도 릴레이에 30분 동안 동참했습니다.nbspnbsp8시 30분에서 숙소를 나온 스님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는 동안 원고 교정 업무를 보았습니다.nbspnbsp▲ 블라디보스톡 공항nbsp11시 25분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한 스님은 한국 시간으로 12시 35분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는 틈틈이 연해주 독립운동사에 대한 자료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nbspnbspnbsp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수행팀에서 마중을 나와주어서 김밥을 먹으며 서울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인천공항 도착nbsp오후 2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스님은 곧바로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연이어 가졌습니다. 미팅 후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밤에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기도를 시작한지 200일째를 맞이하여 기도에 동참한 대중들을 위해 격려 말씀과 더불어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밤 10시 30분이 되자 지난 100일 동안 통일기도에 참여했던 약 200여 명의 대중들이 정토회관 1층 법당을 가득 메웠습니다.nbspnbsp▲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기도 중 200일째 기념 법회nbsp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대중들이 법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라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먼저 스님은 천일기도를 시작한 후 지난 200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상기시켜 주면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오늘은 정토회가 민족의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면서 천일기도를 시작한지 200일째 되는 날입니다. 지난 늦여름에 시작했는데, 어느 덧 가을, 겨울이 지나고 이제 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nbspnbspnbsp처음 100일은 북한의 목함 지뢰 사건으로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다시 협력의 길을 가자고 합의를 한 직후부터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감격적인 역사적 현실도 경험하며 보냈습니다. 그런데 200일에 들어와서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연초에 북한의 핵실험이 있자 한국은 강경대응을 표명했고, 다시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자 한국은 개성공단 철수를 결정했으며, 다시 북한이 개성공단 재산을 몰수하자 한국은 북한의 수뇌부를 제거하겠다는 참수 작전 훈련을 했고, 다시 북한이 청와대를 공격하겠다고 나서자 한국에서는 북한이 핵을 발사할 기미가 보인다면 선제공격을 해서 제거하겠다며 대응을 했습니다. 여기에 북한도 선제공격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나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세계 최강인 미국의 최신예 무기들이 총동원돼서 1970년대 이후로 약 40년 만에 최대의 공격형 군사훈련이 진행되고 있고, 그에 맞서 북한에서는 100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원입대하는 전시 체제로 돌입해 ‘미제와 그 괴뢰인 일당들을 섬멸하겠다’며 극심한 언어폭력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nbspnbsp이런 가운데 정토회는 하루도 쉬지 않고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기도를 했지만 결과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지난 100일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희망보다는 좌절을 가져다 준 100일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의 집무실 바로 밑이 기도실이기 때문에 제 방에서는 목탁소리가 24시간 끊이지 않고 들립니다. 밤에는 법당으로 내려가서 기도하니까 소리가 조금 약할 수도 있겠지만 또 밤이라 고요해서 잘 들리거든요. 그래서 24시간 기도 소리가 들립니다. 지난 100일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신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주야로 애 많이 쓰셨습니다. 사람이 애를 많이 쓰면 애쓴 결과가 있어야 보람이 있는데 그렇지 못해 좀 지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수행에는 마장이 따르는 법입니다. 보통은 마장이 밖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만 잘 살펴보면 마장은 밖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속에 있습니다. 사건은 바깥에서 일어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지치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 마장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희망을 잃어버리는 게 진짜 마장입니다.nbspnbspnbsp개인도 천일기도를 하면 100일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기도를 하면 더 잘 돼야 되는데 거꾸로 더 장애가 생기게 되면 ‘내가 기도를 잘못하고 있나? 기도가 부정 탔나?’ 해서 중간에 그만두는 게 십중팔구입니다. 마장은 우리가 마땅히 넘어야 할 산임을 알아야 되는데 기도를 하면 바로 좋아지는 줄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천일기도를 하는 중에 수많은 난관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아무 영험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중단하고 싶은 장애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개개인이 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힘을 합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 지친 개인이 있다 하더라도 도반들이 대신해 주면서 하나가 지치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식으로 하면 난관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nbspnbspnbsp예부터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이렇게 한번 크게 푸닥거리를 하고 나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수 있을 겁니다. 서로에게 막연한 낙관이나 기대가 없는 상태가 되면 오히려 관계가 더 개선될 수 있습니다. 갈등보다는 평화가 서로에게 이익임을 알게 된다면 ‘갈등이 있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더 나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과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난 사건은 사건일 뿐이지만 그 사건을 유의미하게 만들어내는 건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nbspnbsp법문을 시작하기 전 대중들은 다소 기운이 빠져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개성공단 전면 폐쇄를 비롯해 전쟁 위기로까지 치닫고 있는 최근의 남북관계에 대한 좌절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님의 격려 말씀을 듣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스승이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진단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지금 이 시기에 기도가 필요한지 설명하면서 어떤 자세로 기도에 임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일본과 미국은 남한의 친구이고,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친구이니까, 이럴 때 남북이 서로 잘 협력한다면 이런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남북이 할 수 있습니다. 일본과 미국을 설득할 때는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할 때는 북한이 한다든지, 또 미국과 일본을 견제할 때는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할 때는 남한이 하는 식으로 협력한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국면이 될 수도 있지요. 그런데 현재 남북은 서로 불신하면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경쟁하다 보니까 더 경쟁이 치열해져서 일촉즉발의 적대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한은 북한의 위협 때문에 옛날 친구들에게 더 가까이 가서 미·일과 군사적 협력을 더 긴밀히 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것은 중국이 우려하던 일이므로 결국 중국의 견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북한은 굶어죽으면서도 군비를 확충해서 방어를 하든지, 그것도 안 되면 중국의 안보 우산 아래로 들어가서 한국이 미·일에 협력하듯이 중·러에 협력해서 자기 체제를 보전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 지금 우리가 서있습니다.nbspnbspnbsp그러니 남북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남한은 점점 미·일 군사동맹체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고, 그러면 무기수입을 늘려야 하고, 그러면 중국과의 관계도 점점 나빠지니까 경제도 어려워지고, 경제는 어려워지는데 군비는 늘어나니까 결국 국민들의 생활은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수출 위주의 경제구조이다 보니까 안보가 위태로우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북한은 한국과의 갈등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특별한 무기, 즉 남한이 갖고 있지 않은 핵무기를 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국제사회가 용인하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제재를 받게 되었고, 그래서 원래도 좋지 않았던 경제가 더욱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더욱더 ‘나만 죽나 같이 죽자’ 하는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견디지 못하겠으면 결국 친중 정권이 들어서서 중국의 군사보호 아래에서 체제유지를 꾀하게 되겠지요. nbspnbspnbsp그래서 지금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상황은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천지신명의 옹호를 받아야 한다’, ‘상식적인 범위에서 노력해서는 해결이 안 되겠다’ 이렇게 여겨질 만큼 수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물러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런 목표의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천지신명이 우리를 옹호해 줄지 여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의 뜻을 받아줄 건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그분들의 영역이니까 그건 그분들께 맡겨놓고, 다만 우리는 그렇게 믿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nbspnbspnbsp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게 뭐겠어요? 이 난국을 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서 정부가 그런 일을 해 나가도록 뒷받침하는 일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생각이 다 다른데, 그게 되겠습니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 된다고 생각하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지금 사분오열되어 있지만, 국민 대다수가 고등학교 이상 졸업자이니까 조금만 각성을 한다면 함께 뭉쳐서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nbspnbsp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를 돌아보면, 그때는 지도자도 너무 부족했고, 국민들도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었고, 또 우리를 둘러싼 외세들도 너무 강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전 국민이 동참하여 3.1운동이 일어났고, 또 해외에서도 나름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하다보니까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어쨌든 상해임시정부도 만들어냈잖아요. 성공은 못 했지만 역사를 돌아봤을 때 그때 그거라도 안 했다면 우리가 지금 무슨 민족적 자존심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성공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실패했더라도 지금 우리에게는 그 자체로 자랑스러운 민족적 역사로 남았잖아요.nbspnbspnbsp그때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훨씬 역량도 있고, 통일운동을 하기도 쉬운 조건에 놓여있습니다. 다만 그때만큼 절실하지가 않다는 게 문제이지요. 아직도 ‘누가 해 주겠거니’ 하고 막연한 생각을 하거나 ‘저렇게 한다고 되겠나’ 하는 패배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 내가 이 나라를 지켜야 된다’ 하는 주인의식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nbspnbsp내일은 우리 민족의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면서 천일기도를 시작한지 201일째가 되는데, 300일을 향해 가는 이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기운이 바뀔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야 하고, 또 계획한 기간 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능히 해 나가야 합니다. 전부 다 24시간 기도 소리가 들리는 제 방에서 주무실래요?nbspnbspnbsp24시간 기도소리를 들으면 약간 방심하다가도 ‘아, 내가 통일의 원을 세웠지’ 하는 걸 잊지 않게 되거든요. 법문 들을 때만, 목탁 칠 때만 기억하다가 생활하면서는 깜빡 잊고 살게 되면 원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화두 참구를 할 때도 화두에 딱 집중해야 화두 타파가 되거든요.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겁니다. 정신이 집중되어 있어야 아이디어도 나오고, 추진력도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고무 풍선에 숨을 한 모금 불어넣었다가 도로 한 모금 뺐다가 다시 불어넣었다가 빼는 일을 반복하니까 빵 터지지 않고 늘 고만고만하게 가는 겁니다. 그렇다고 긴장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세운 원에 집중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초발심시 변정각’이라고 하잖아요. 한번 마음을 냈으면 100일, 1000일을 쭉 집중해서 가야 됩니다.nbspnbsp남하고 얘기하다가 깜빡 놓칠 수도 있고, 넘어져서 ‘아야’ 하다가 놓칠 수도 있지만, 놓쳤다가도 바로 돌아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분들이 정말로 원을 가진 사람인지,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인지, 그냥 멍청하게 사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가끔 있어요.nbspnbspnbsp물론 일반인과 비교하면 여러분들은 굉장히 훌륭한 사람들이고 진짜 귀한 사람들이에요.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난관을 풀려면 이 정도로는 어려워요. 정세가 나날이 불리한 쪽으로 가고 있는데, 그 장애를 뚫고 나가려면 불리한 정세보다 우리의 내적인 힘이 더 커야 하거든요. 아무런 노력도 안 하고 있는데 상황만 점점 더 나빠진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희망이 생기는 게 아니라 점점 불리해질 뿐입니다.nbspnbsp장애를 뚫고 나갈 힘이라는 건 바로 여러분들의 삶에 대한 진실성, 성실성, 집중력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딱 집중해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만화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땐 다 집중을 하잖아요. 어떤 일을 즐기는 마음으로 해야 집중력이 높아지고, 효력도 생깁니다. 그런데 가끔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냥 비몽사몽간에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nbspnbspnbsp딱 집중해서 해야 합니다. ‘나의 이런 지극 정성에 어떻게 영험이 없을소냐’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예쁘다’, 조상님이 보시기에 ‘참 갸륵하다’, 귀신이 보고도 감동해서 ‘도와줘야 되겠다’ 싶을 정도로 정성을 쏟아야 됩니다. 또 마음이 진실해야 합니다. 마음이 거짓되면 천지신명이 감동을 안 하겠지요. 부처님말씀처럼 꾸준히 근면하고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꾸준히 하는 게 수행의 왕도라면 왕도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수행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nbsp장애를 뚫고 나가려면 삶에 대한 진실성, 성실성,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모두들 공감을 하며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통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있는지 스님의 지극한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 마음은 대중들에게도 다시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격려 말씀과 기념법문을 해준 후 스님은 천일기도 200일째를 맞이하여 1초도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릴레이기도 중 0시부터 0시 30분까지를 이어서 했습니다.nbspnbsp▲ 천일기도방에 부착된 날짜 표시판nbsp정토회관 2층 기도실에서는 계속 릴레이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1층 법당에서도 스님이 기도를 시작하자 대중들도 함께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배 한 배 절을 했습니다.nbspnbsp“넓고 깊은 원력 세워 보살도를 닦고 닦아 고통중생 구하시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nbspnbsp▲ 0시부터 0시 30분까지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이어가고 있는 법륜 스님nbsp스님 말씀처럼 지금의 첨예한 남북 갈등이 막연한 기대감을 버리고 오히려 진전된 관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갈등이 없었던 것보다는 있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더 나을 수도 있는 그런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 나도 작은 노력을 기울여 볼 것을 다짐해 봅니다.nbspnbspnbsp이렇게 평화와 통일을 위한 천일기도 200일째 기념 법회와 기도를 모두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서울을 출발해 울산 두북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올해 봄에 씨감자를 북한에 보내서 식량 증산을 도모하고자 했는데 유엔 안보리 제재로 인해 씨감자를 북한에 보낼 수가 없게 되어 국내에서 먼저 실험 재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두북 수련원과 문경 수련원에서 실험 재배를 하기로 했지만, 스님은 “텃밭에서 얼마라도 직접 재배해봐야 하는데, 내일이 아니면 감자를 심을 시간이 없다” 하며 길을 재촉했습니다.nbspnbsp밤새 차를 타고 내려가 새벽 4시 30분에 울산 두북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땅을 먼저 갈아 엎고, 화장실에서 몇 년 묵은 발효된 똥을 퍼서 텃밭에 뿌린 후 씨감자를 심는 일을 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더 되면 텃밭 정비도 함께 할 계획입니다. ※ 2016년 봄,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갑니다. 강연일정 확인하시고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오세요. 강연은 선착순 무료입장입니다. 질문자 접수는 강연장에서 받습니다.

2016.03.15. 37,396 읽음 댓글 25개

2016.3.12 러시아 크라스키노(Kraskino), 우수리스크(Ussuriisk) 답사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독립운동과 발해 유적지를 찾아 크라스키노 지역과 우수리스크 지역을 답사했습니다. nbspnbsp어제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에 참가했던 일행들이 모두 깊이 잠든 새벽 5시. 영하 12도의 날씨에 칼바람이 부는 가운데 스님은 숙소를 나왔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답사를 다닐 계획입니다. 스님은 매년 8월이면 대중들을 이끌고 동북아 역사기행을 다니는데, 올해는 특별히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추가했습니다. 연해주에는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유적과 발해성 유적이 곳곳에 발견되었지만 아직 국내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신한촌역사회복재건 사업을 하게 된 인연으로 동북아 역사기행 코스에 연해주 일정도 추가하게 되면서 오늘은 하루 종일 답사를 다니기로 했습니다.nbspnbsp털모자, 목도리, 손장갑을 두둑히 착용하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블라디보스톡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독수리 전망대’ 입니다. 전망대에서는 화려한 금각교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져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nbspnbsp▲ 블라디보스톡 독수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각교nbsp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참가자들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면 독수리 전망대에 올라 이곳이 부동항으로 유명하다는 점과 함께 지형 지세를 설명해주면 좋겠다”고 하면서 조선소를 비롯해 곳곳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nbspnbsp블라디보스톡에서 차를 타고 내륙으로 2시간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습니다. ‘우수리스크’라는 지명은 ‘늪’을 뜻하는 ‘우수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곳이 옛날부터 늪이 많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발해 때는 솔빈부로 5경·15부·62주의 15부 중에 하나였습니다.nbspnbsp우수리스크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북쪽 외곽에 위치한 ‘4월 참변 추모비’입니다. 4월 참변은 일본군이 1920년 4월 45일 연해주 지역 러시아혁명군 관공서는 물론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톡 등지의 한인 집단거주지를 대대적으로 공격, 방화, 학살 등을 자행한 사건으로, 당시 우수리스크에 거주하던 애국지사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거주하던 한인 동포 300여명이 학살되었습니다. 새벽녘이라 영하 12도의 한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데도 스님은 한참 동안 묵념을 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했습니다.nbspnbsp▲ 4월 참변 추모비nbspnbsp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우수리스크 외곽에서 발견된 발해성 유적입니다. 나지막한 산에 외성과 내성을 쌓고, 수이푼강을 일부 자연 해자로 한 산성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nbspnbsp▲ 수이푼 강을 자연 해자로 한 발해 산성nbspnbsp먼저 외성의 윤곽을 살펴보기 위해 강이 보이는 비교적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이곳에서 돌멩이로 된 대포 알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하고, 적의 공격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참호를 판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nbspnbsp▲ 외성을 끼고 참호를 팠던 흔적nbsp다시 외성에서 내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으로 이동해 보았습니다. 성벽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높은 둔덕이 길게 뻗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내성 밖에는 다시 개울을 파서 해자를 만든 흔적도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내성과 내성을 둘러싼 해자로 추측되는 곳nbsp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동쪽에서 붉은 해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내성 안에는 현재 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성벽 전체를 다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부족해 일부 구간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대략적으로는 굉장히 큰 규모의 성이었음을 짐작만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다음에 다시 오면 성벽을 따라 전체를 한바퀴 둘러봐야겠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내비쳤습니다. 길을 내기 위해 성벽을 파헤친 곳에는 흙을 차곡차곡 쌓았던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이곳이 성벽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흙을 쌓았던 자욱이 줄무늬로 남아 있는 모습nbsp우수리스크에는 이 산성 외에도 시내에는 평지성이 있었다고 하는 옛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평지성은 1km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성이 나란히 있어서 옛날부터 이곳을 ‘쌍성자’ 라고 많이 불렀다고 합니다. 시내에 발해 시대 때의 절터로 추측되는 곳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지나가는 길에 잠깐 엿볼 수 있긴 했지만 ‘쌍성자’의 연원이 되는 평지성 유적은 찾지 못하고 우수리스크를 나왔습니다.nbspnbsp우수리스크를 나와서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할 때 출발역이었다고 하는 라즈돌리예역을 지나 ‘크라스키노’로 향했습니다. 라즈돌리예역을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직진하면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고, 오른쪽으로 계속 가면 북한의 나진 선봉까지 연결됩니다. 스님 일행은 크라스키노로 가기 위해 나진 선봉까지 연결된 도로를 약 3시간 동안 쉼없이 달렸습니다.nbspnbsp크라스키노로 가는 중간에 ‘바라바시’라고 불리우는 마을의 한 휴게소에 정차했습니다. 바라바시는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13도의군이 최초로 결집한 곳으로 여기서 유인석 선생이 도총재로 추대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해 일제를 몰아내는 것이었는데 이범윤, 이남기 선생도 이 때 함께 했었다고 합니다.nbspnbsp▲ 13도의군이 최초로 결집한 곳, 바라바시nbspnbsp바라바시를 지나 다시 한참을 달리니 두 갈래의 길이 나왔습니다. 왼쪽으로 가면 북한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중국 훈춘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스님 일행은 북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갔습니다. nbspnbsp▲ 왼쪽이 북한으로 가는 길, 오른쪽이 중국을 가는 길.nbspnbsp북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을 기념하는 비석이 나타났습니다. 단지동맹이란 안중근과 11명의 동지들이 1909년 3월초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이라 쓰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 일을 말합니다. 2001년 연추 마을 강변에 세워졌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해 유니베라 농장 입구인 현재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nbspnbsp▲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nbsp스님이 유니베라 농장 입구에 도착하자 장민석 법인장님이 나와서 반갑게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원래는 법인장님이 이곳 유적지를 안내해 주려고 했는데 급히 다른 용무가 생겨 장화를 빌려주고 크라스키노 발해성으로 가는 길만 안내해 준 후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nbspnbsp▲ 유니베라 농장 장민석 법인장님nbsp다음으로 향한 곳은 크라스키노에서 발견된 발해의 염주성 유적입니다. 크라스키노는 중국 훈춘 및 한반도 북부를 연결시켜 주던 군항 ‘포시에트’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발해는 건국 이후부터 일본과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이 오갔다고 합니다. 험한 바닷길을 통한 교류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발해의 사신단은 이곳 염주성에서 일본으로의 대장정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 염주성은 발해 시대 때 동경용원부 관할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nbspnbsp스님은 작년 여름에 염주성의 동쪽에 자리한 겔만 교수님의 캠프를 방문했었습니다. 당시 염주성과 캠프 사이에 위치한 강이 범람해 성 안으로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교수님의 설명만 들었는데, 오늘은 서문 쪽으로 연결된 길을 선택해 걸어가 보았습니다.nbspnbsp아직 눈이 녹지 않았지만 개울은 녹기 시작해 발이 진흙에 쑥쑥 빠지기도 했습니다. 갈대로 뒤덮인 흙길보다는 눈으로 덮인 개울 길이 더 찾기가 쉬워 눈 덮인 얼음길을 한참 동안 걸었습니다.nbspnbspnbsp초행길이라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며 동북아 역사기행 때 어떤 길로 안내해야 대중들이 쉽게 올 수 있는지를 여러차례 검토했습니다.nbspnbspnbsp장화를 신고 한참을 걸으니 기찻길이 나왔습니다. 이 기차길은 러시아의 하산역을 지나 북한의 두만강 철교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북한으로 이어지는 기차길이라고 하니 뭔가 의미가 남달라 보여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nbspnbsp▲ 북한으로 이어지는 기차길nbsp40분 남짓 걸었을까요. 장화를 신어서 그런지 다리가 저리고 아플 무렵 염주성 유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성벽이 마치 하트 모양처럼 약간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니 곳곳에 발굴이 진행된 흔적이 보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겨울이라 땅이 파인 곳은 모두 얼음이 꽁꽁 얼어 있어 자세히 들여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nbspnbspnbsp우선 동문 쪽으로 가서 동문의 발굴 현장을 살펴본 후 남문, 서문을 거쳐 성을 한바퀴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동문 자리는 이미 많은 발굴이 진척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 발해 염주성의 동문 자리nbspnbsp그런데 성문의 모양이 무척 특이했습니다. 성문 밖으로 옹성이 두 손을 보듬은 모양으로 둘러쌓여 있었는데 스님도 “참 독특하다” 라고 하면서 “자료를 더 찾아봐야겠다” 고 했습니다. 작년 여름에 겔만 교수님을 만났을 때는 교수님이 이 성의 지형도를 보여주었는데 이렇게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었습니다.nbspnbspnbspnbsp▲ 겔만 교수님이 그려준 성문 모양nbsp다시 성벽을 따라 계속 걸으니 남문 자리가 나타났고, 이어서 서문 자리도 보였습니다.nbspnbsp▲ 성벽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nbsp특히 서문 자리에는 가장 많은 발굴이 진척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얼음이 꽁꽁 얼어 있어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많은 유물이 이곳에서 출토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서문 자리 주위에 발굴 터nbspnbsp발굴이 한참 진행 중이어서 그런지 곳곳에서 발해 기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발해 기와의 특징은 뒷면에 그물망이 촘촘이 엮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기와도 이와 비슷하지요. 그리고 기둥을 받쳤던 용도로 사용된 주춧돌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발해 기와nbspnbsp▲ 기둥을 얹었을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nbsp이렇게 발해 염주성 곳곳을 자세히 둘러본 후 다시 성을 나왔습니다. 갈대숲 사이로 저 멀리 눈 덮인 산이 펼쳐져 절경을 이루었습니다.nbspnbsp염주성을 나와서는 하산전투기념비가 있는 언덕에 올랐습니다. 언덕에 오르니 저 멀리 바다 건너 포시에트 항구는 물론 염주성 성터와 연추 마을을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었습니다. 칼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절경에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nbspnbsp▲ 하산전투기념비가 있는 언덕nbsp스님은 이곳에서 다시 염주성의 위치와 크기를 다시 한 번 가늠해 보았습니다. 또 옆으로 눈을 돌리니 산 아래 연추 마을이 보였습니다. 연추 마을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머물다 간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지신허 마을과 함께 18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한인 마을인데, 남북으로 45km에 걸쳐 하·중·상연추 3개 마을이 연이어 있었다고 합니다. 1900년도에 들어오면서 최재형과 이범윤, 안중근 등이 동의회를 조직하는 등 연해주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던 곳입니다.nbspnbsp▲ 저 멀리 바닷가에 보이는 것이 염주성nbsp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원산, 청진에서 배를 타고 포스에트항에 내린 뒤 말을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달려가던 독립운동가들의 동선을 거센 바람을 따라 그려보니 가슴이 애틋해졌습니다.nbspnbsp▲ 산 아래 마을이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연추 마을nbsp하산전투기념비가 있는 언덕을 내려오자 오후 2시 30분이 되었습니다. 3시에 이곳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훈춘으로 가는 버스 막차가 출발한다고 해서 버스 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답사를 함께한 좋은벗들 동북아 역사기행 준비 스텝인 이승용님과 김경희님은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중국 훈춘으로 향했습니다. 8월에 동북아 역사기행팀을 이끌고 중국 훈춘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국경을 넘어와야 하는데, 실제로 국경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실무 점검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님은 스텝들이 무엇을 체크해야 하는지 꼼꼼히 점검한 후 두 사람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nbspnbsp▲ 중국 훈춘으로 가는 버스nbspnbsp이렇게 답사 일정을 모두 마친 후 스님은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습니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식사를 하지 못해 허기가 지고, 또 영하의 날씨에 장화를 신고 오래 걸었더니 다리가 아팠는데, 그럼에도 스님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염주성에 관한 연구 자료를 열심히 읽으며 열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nbspnbspnbsp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저녁 6시가 넘었습니다. 숙소에 도착한 후 원고 교정 업무와 각종 보고서들을 체크하고 저녁 식사를 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은 아침 8시 30분에 숙소를 나와 11시 25분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 한국 시간으로 12시 35분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03.14. 37,059 읽음 댓글 23개

2016.3.11 (오후)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 및 우수리스크 방문

nbsp앞서 오전에 열렸던 ‘연해주 한민족사’와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에 대한 학술회의에 이어서 오후 2시부터는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이 열렸습니다.nbspnbsp신한촌은 해외에 형성된 최초의 코리아타운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항일 민족지사들의 집결지이자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던 곳입니다. 그러나 1920년 4월 신한촌 참변인 일제의 대습격 학살과 만행, 1937년 9월 스탈린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로 신한촌은 해체되고 현재는 해외한민족연구소가 1999년에 세워놓은 기념탑 세 개만이 이곳이 신한촌이었다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nbspnbsp▲ 아파트 단지 사이에 세워져 있는 신한촌을 상징하는 기념탑nbsp이에 2015년 8월 15일 광복 70주년을 기하여 ‘신한촌역사회복재건위원회’가 법륜 스님을 위원장으로, 이창주 국제한민족재단 상임의장을 집행위원장으로 해서 구성되었습니다. 오늘 기공식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감된 한민족 독립운동의 역사와 선열들의 숨결을 회복 재건하고 통일 한반도로 내딛는 초석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마련되었습니다. nbspnbspnbsp오후 2시가 되자 각계 각층의 사회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애국 선열을 위한 묵념과 함께 기공식이 시작되었습니다. nbspnbsp▲ 애국 선열을 위한 묵념nbsp먼저 법륜 스님이 앞으로 나와 개식사를 하였습니다.nbspnbsp▲ 개식사를 하고 있는 법륜 스님nbsp“오늘 이렇게 많은 종교인, 경제인, 사회인사 분들이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해서 한 자리에 모여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한국의 5개 종단 대표들이 이렇게 다 참여하기가 쉽지 않은데, 김명혁 목사님을 비롯해서 김홍진 신부님, 김대선 교무님, 천도교 교령님을 대신해서 임형진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 사무처장님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nbspnbsp또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해서 지원해 주신 후원자님들도 참여해 주셨고, 또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참여해 주셨고, 또 재외 동포들에 대해 많이 연구해 오신 전문가 교수님들도 참여해 주셨습니다. 특히 이창주 교수님을 비롯한 국제한민족재단 관계자 여러분께 이렇게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오늘 각자가 믿는 모든 신들의 가호를 받아서 저희가 하고자 하는 일이 큰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nbsp각자가 믿는 모든 신들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는 스님의 이야기에 5개 종단의 종교인들은 큰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습니다.nbspnbsp▲ 기공식에 참여한 5대 종단의 종교인들nbsp이어서 이창주 교수님이 나와 경과보고를 하면서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부족하지만 함께 뜻을 모아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또 김명혁 목사님은 축사를 하면서 “우리 선배들이 개인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3.1독립운동을 이뤄냈듯이 우리들도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혼심의 힘을 다하자”며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홍신 작가님도 축사를 통해 “이런 뜻깊은 일을 통해 후손들에게 우리들은 떳떳한 선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며 기쁜 마음을 전했습니다. 또 재외 동포를 대표해서 이원주 필리핀JTS 대표님이 “이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통일을 위해 작은 역할을 해 나가겠습니다” 라고 인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nbspnbsp▲ 축사를 하고 있는 김명혁 목사님nbsp다음은 공사를 책임질 건축사무소 대표이사님이 나와 공사 개요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부터 3개월 동안 설계를 진행하고, 1차 공사가 3개월 간 진행된 후 다시 2차 공사가 3개월 동안 진행되어서 올해 안에 공사가 모두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먼저 담장을 제대로 친 후 담장 안에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의 얼굴 부조를 새기고, 한국적 문양으로 대문도 만들고, 전시관도 20평 가량으로 한 동을 짓고, 한국의 유적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누각도 하나 세운다는 기본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미 기본 조감도가 나와 있어서 황량한 이곳이 어떻게 바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 기념관 건축 조감도nbsp이어서 공사를 시작하는 마음을 모아 기념 시삽을 했습니다. 시삽 전에는 테잎 컷팅식도 가졌습니다. 먼저 5대 종단을 대표한 종교인들이 나와 다함께 시삽을 했습니다. “하나, 둘, 셋” 하고 외치자 삽에 흙을 얹어 힘차게 흩뿌렸습니다.nbspnbsp▲ 기공식 시삽nbsp다음은 학계와 경제계, 독립운동가 후손을 대표해서, 다음은 좋은벗들과 국제한민족재단의 실무자들이 연이어 시삽을 했습니다. 모두들 역사적인 순간을 만끽하며 얼굴에 함박 웃음을 머금었습니다.nbspnbsp▲ 학계, 경제계를 대표해서 다함께nbspnbsp이어서 경제인을 대표해서 김장만님이 만세 삼창을 선창했습니다. 참석한 내외빈들도 힘차게 두 손을 높이 들면서 만세를 외쳤습니다.nbspnbsp▲ 만세 삼창nbsp마지막으로 김홍진 신부님, 김대선 교무님, 장구갑 천도교 교령사님의 축도가 있었습니다. 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통일을 위해서는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이 모습만으로도 이미 무덤 속의 선조들이 무척이나 기뻐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nbspnbsp▲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이웃 종교인들의 축도nbsp이렇게 기공식을 모두 마치고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황량하게 기념탑만 세워진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미안해하고 죄스럽고 가슴이 아팠는데, 오늘 기공식을 계기로 무거운 마음들을 모두 날려 버릴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에 올라탄 내외빈들은 고려인들의 숨결과 독립운동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우수리스크로 이동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수리스크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법륜 스님이 이곳 연해주와 연해주에 얽힌 독립운동사, 발해 유적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우리는 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자꾸 우리 민족 하나만 생각하니까 중국에 비해 왜소하다고 생각하는데, 고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까지는 우리 나라가 중국보다도 앞선 문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한나라가 우리 고조선 영토의 일부를 빼앗아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동북방의 우리 영토 일부가 중국 한족한테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그에 대해서 ‘조선의 고토를 회복하자’ 하고 일어난 것이 ‘다물군’ 입니다. 다물이란 ‘옛 땅을 되찾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물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구국 의병입니다. 주몽도 다물군에 속했기 때문에 고구려를 세울 때 다물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하자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가 일어섰고, 발해가 요나라에 망하자 말갈족의 후예인 금나라가 일어섰고, 금나라가 멸망하자 청나라가 일어섰으니까 이 동북 지역은 거의 우리 민족과 우리 형제 민족들이 늘 관할을 했던 곳입니다.nbspnbspnbsp이 동북 지역이 일부라도 중국의 한족에게 지배를 받은 것은 한사군한테 넘어갔던 게 처음이었고, 두 번째는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명나라가 옛 원나라 영토를 관리하게 됐던 때이고, 세 번째는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지금 중국이 관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연해주는 청나라 땅이었는데, 강희제가 동진해오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어서 아무르강 이남으로는 못 넘어오게 해서 막았어요. 그러다가 청나라가 약해지니까 러시아가 더 밑으로 내려와서 아이훈 조약을 맺어서 하바로스크 지역까지 차지했습니다. 결국 북경조약으로 이곳 연해주까지 러시아가 차지한 건 1860년입니다. 겨우 150년밖에 안 됐어요. 즉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지고 전후 처리 문제로 복잡할 때 러시아가 개입해서 해결해 준 것을 계기로 연해주를 할량 받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러시아가 진출해서 들어왔습니다.nbspnbsp1860년 이전에도 이미 우리 민족이 여기에 들어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러시아 땅이 아니었고 주인 없는 땅이었는데, 1860년에 러시아가 여기를 지배하면서 여기 사는 우리 조선인에게도 등록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1863년에 처음으로 13가구가 등록을 하다 보니까 공식적으로는 1863년에 처음 이주했다고 하는 것인데, 살기는 이미 그전부터 들어와서 살았던 겁니다. 왜냐하면 두만강만 건너면 여기는 주인 없는 땅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두만강을 건너서 지금의 하산에서 조금 더 올라오면 크라스키노가 나오는데 거기가 연추 마을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한 곳도 거기였고, 독립운동가들의 군사훈련 연병장도 거기에 있었으니 연추마을은 무장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셈입니다.nbspnbsp그리고 많은 분들이 최재형 선생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기록에 보면 최재형 선생은 1860년대에 부모님을 따라 연추 마을로 이주해 왔다가 블라디보스톡까지 오게 되었는데, 너무 가난하니까 길거리에서 구걸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블라디보스톡에서 배를 운행하는 한 선장이 구걸하는 아이를 보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켰다고 해요. 그래서 최재형 선생은 한국사람 중에 서양교육을 제일 먼저 받은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러시아 말도 잘하고, 여러 재주가 있다 보니 여기서 사업으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또 양부모가 러시아 사람이다 보니 후원도 받았고요. 특히 연추에 있는 러시아 부대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일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또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 해군으로 참전을 했다고 합니다. 보통 부자가 되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최재형 선생은 그런 경력이 있다 보니 일본에 대한 저항감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최재형 선생이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었고, 이범윤 선생이 간도 관리사를 하다가 나라가 기울어지니까 을사늑약 이후에 여기 와서 의병운동을 할 때 최재형 선생이 부자라는 소문을 듣고 도움을 요청했나 봅니다.nbspnbsp그 다음에 유인석 장군도 넘어와서 13도 의군을 조직했고, 그러면서 여기는 최재형 선생이 거의 다 지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돈도 많았지만 러시아 군대에 식료품을 공급하는 일을 했으니까 군대와 아주 잘 알아서 러시아의 최신무기를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사들여 독립군에 공급을 했나 봐요. 마치 최진동 장군의 형제들이 봉오동 지역을 개척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봉오동 전투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재정을 모두 지원했듯이 최재형 선생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 이후 권업회 창설, 권업신문 발간, 상해임시정부 재정부장 등의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1920년도에 신한촌 참변이 일어나자 결국 최재형 선생도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 잡혀 총살을 당해 죽게 됩니다.nbsp우수리스크는 옛 발해의 솔빈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시내에서 발해의 평지성이 발견되었고, 외곽에는 산성이 1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성이 2개 있었다고 해서 우수리스크, 즉 ‘쌍성자’라고 불리웠던 겁니다. 옛날 지명에는 다 쌍성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이 1㎞ 정도 간격을 두고 2개 있었다고 하던데 시내 개발을 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제대로 답사를 못 했습니다. 산에 있는 성만 지난번에 김홍신 작가님과 같이 올라가서 토성으로 쌓은 것만 확인했거든요.nbspnbsp▲ 버스 창 밖. 꽁꽁 언 바다.nbsp이렇게 봤을 때 우리가 이곳으로 역사기행을 온다면 결국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발해의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고, 둘째, 독립운동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어요. 독립운동유적지는 초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주로 운동했던 곳이 있고, 나중에 김일성이 머물렀던 B캠프 자리 등이 있어요.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당한 라즈돌리예 역에서 5분 정도만 더 가면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처음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와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nbspnbsp스님이 설명을 계속 하고 있는 사이 버스 창밖으로는 꽁꽁 언 바다가 보였습니다. 조금 더 가니 다리가 하나 보이고 도로가 길게 쭉 뻗어 있었는데, 스님은 이 길이 북한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nbsp▲ 북한까지 연결된 도로nbsp조금 더 차를 달리자 1937년도에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당했다고 하는 라즈돌리예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황막한 기차역을 보니 지금도 한 맺힌 절규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밭에서 일하다 말고 호미를 던져둔 채, 부엌에서 밥 하다 말고 숟가락을 던져둔 채 강제로 기차를 타야 했다고 하니, 거기다가 먹을 것도 없이 수만리를 짐짝처럼 기차에 실려 가야 했으니, 그 탄식이야 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nbspnbsp▲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라즈돌리예 역.nbsp라즈돌리예 역에서 조금만 더 가니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처음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와 건물이 보였습니다. 번듯한 2층 건물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nbspnbsp▲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nbsp버스는 이제 우수리스크로 접어 들었습니다. 먼저 우수리스크 외곽에 있는 이상설 유허비를 찾았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한국 독립을 주장했으며, 연해주에서는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순국한 분입니다. 선생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에 뿌렸는데,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에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선생의 넋이라도 조국의 품으로 안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참가자 일동은 묵념을 했습니다.nbspnbsp▲ 이상설 유허비nbsp다음은 최재형 선생이 1920년 4월 5일 새벽 일제에 체포될 당시까지 거주했던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 거리 38번지 옛 집을 방문했습니다.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양국의 국기를 새기고 최 선생의 업적을 담은 동판이 부착되어 있어 이곳이 유적지임을 기념하고 있었습니다.nbspnbsp▲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을 지낸 옛 집nbsp마지막으로 우수리스크 시내에 위치한 고려인문화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센터 안에는 19세기 이후의 한인 이주사부터 시작해서 연해주에서 있었던 다양한 항일 독립운동 역사,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의 아픔, 다시 희망을 찾아 돌아온 재이주의 역사가 사진과 글로 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한 장, 글 한 줄을 읽으며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nbspnbsp▲ 고려인문화센터nbsp이렇게 우수리스크 지역 방문을 모두 마친 후 다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식사 자리에서는 오늘 선조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여러 유적지를 둘러본 소감을 서로 나누며 감동의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식사를 마치면서는 마지막으로 스님이 일어나서 이번 신한촌 역사회복재건 사업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을 부탁했습니다.nbspnbspnbsp“오늘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은 그래도 신한촌 역사회복과 재건을 위해 후원금을 많이 내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만 돈을 내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이 사업이 잘 되도록 주위 사람들 중에 다섯 명씩 더 모아 오셔야 합니다. 알았지요?nbspnbsp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한테 돈 달라는 얘기는 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정토회 법당 만들 때도 돈 내라는 소리는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창주 교수님이 하도 사정을 해서 돈을 좀 내라는 말을 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이번 한 번만 돈 내라는 얘기를 하고 끝을 내려고 하니까 대신 여러분들이 모금을 좀 많이 해 주세요. 후원금을 많이 낸 33인에게는 신한촌 기념관 준공식을 할 때 돌에 이름을 새겨 드린다고 하네요. 이걸 갖고 신문 광고까지 낼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nbsp참석한 내외빈들은 큰 박수로 스님의 뜻에 공감을 표하고 그렇게 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nbspnbsp우수리스크를 출발한 일행은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습니다. 밤 9시 무렵에 숙소에 도착해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은 참석한 내외빈들 모두가 아침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스님과 실무자 몇 명은 올해 8월에 있을 동북아 역사대장정 코스를 개발하기 위해 이곳에 하루 더 남아서 발해 유적과 독립운동 유적이 있는 크리스키노 지역과 우수리스크 지역을 조금 더 답사할 예정입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03.13. 52,324 읽음 댓글 28개

2016.3.11 (오전) 신한촌역사회복재건 학술회의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의 2일째 날을 맞이해 한민족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기념 학술회의에 참석해 개막연설을 한 후 각계 각층 인사들과 함께 기공식을 갖고, 독립운동의 얼이 서려 있는 우수리스크 지역을 방문했습니다.nbspnbsp먼저 오전 9시부터는 ‘러시아 연해주 극동대륙의 한민족 통사와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을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학술회의장 창 밖에는 ‘아무르만’이라고 불리우는 바다가 보였는데, 얼음이 꽁꽁 얼어 있어 이곳이 러시아 땅임을 실감나게 했습니다.nbspnbsp▲ 영하 10도의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 아무르만nbsp학술회의는 제1회의와 제2회의로 나뉘어져 진행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발표가 있기 전에 먼저 스님이 ‘러시아 한민족사의 숨결과 흔적’을 주제로 개막연설을 하였습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한 학술회의nbspnbsp“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우리 민족의 근대사와 독립운동사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1800년대 이후에 조선왕조는 국가가 사실상 붕괴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백성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특히 1860년대에 있었던 기근과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이 기아로 굶어 죽는 비참한 일도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주로 남쪽에 살던 국민들은 견디다 못해서 민중봉기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던 삼도 민중봉기입니다. 그러나 북쪽에 살던 민중들은 그런 저항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압록강을 건너서 서간도로, 두만강을 건너서 북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할 수 있는 출구가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로의 이주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nbspnbsp▲개막연설을 하고 있는 법륜 스님nbspnbsp그런 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국내적으로는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개화파가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갑신정변이 있었지만 실패로 끝났고, 또 아래로부터 민중들의 삶을 개선해 보고자 동학혁명이 일어났지만 이 또한 지배자들이 외세를 끌어들여서 혁명을 진압하는 바람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끌어들인 외세들끼리 다투게 되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3.1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그것 또한 실패로 끝났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종말로 1945년에 해방을 맞긴 했지만 우리 힘으로 해방을 이루어낸 게 아니다 보니까 결국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그것은 또한 6.25전쟁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은 통일은커녕 평화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게 지난 우리 민족의 근현대 150년 역사입니다.nbspnbsp그런 가운데 국외적으로는 국내 상황이 힘드니까 1860년대부터 가난한 백성들이 스스로 생존을 위해서 해외이주를 시작했고, 나라가 아예 기울어진 이후부터는 애국지사들이 이민자들의 삶을 기초로 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투쟁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해외독립운동사입니다. 해외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살펴보면 이주민의 수가 가장 많았던 북간도가 첫 번째 중심지였고, 연해주가 두 번째 중심지였고, 또 압록강 건너 서간도가 세 번째 중심지였습니다. 또 일부는 중국 관내로도 들어가 상해가 네 번째 중심지가 되었고, 다섯 번째로는 미국의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연해주는 우리 해외독립운동사의 제1 또는 제2의 성지임에도 지금 우리 역사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이번 신한촌역사회복재건 사업이 우리 역사에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나 민족의 이민사를 제대로 반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nbspnbsp러시아는 우리 민족에게 때로는 희망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1863년에 우리 민족이 두만강을 건너 최초로 지신허 마을에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이곳 블라디보스톡이나 우수리스크 등에도 이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이곳이 이민자들에게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이어서 1904년도에 있었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분들이 이곳 연해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때 간도 관리사를 하던 이범윤 선생과 의병장을 하던 유인석 선생도 이리로 넘어와서는, 이미 이곳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최재형 선생의 후원을 받아서 국내진공작전을 펴는 의병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또 안중근 의사도 최재형 선생의 도움으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단지동맹을 이곳 연추 마을에서 하게 됩니다. 이때만 해도 블라디보스톡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돕는 중요한 후원세력의 근거지였습니다.nbspnbsp그러나 1910년을 지나서 제1차 세계대전이 임박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과 연합국으로 협력하게 되면서 이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 부대의 해산을 종용하게 됩니다. 1910년경 유인석, 이범윤 선생을 중심으로 13도 의군을 창설할 때만 하더라도 13도 의군은 우리 민족 최대의 의병부대였는데, 러시아의 압력으로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한 채 해산하게 됩니다. 그 일을 계기로 최재형 선생은 권업회를 만들어서 산업 신장을 꾀하는 듯 위장하는 식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1910년 이후에 러시아와 일본이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일은 이곳에 사는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좀 더 본격화하는데 큰 장애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러시아에게 첫 번째로 배신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nbspnbspnbsp그러다가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고, 러시아혁명정부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다시 러시아는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희망이 됩니다. 그래서 연해주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고, 독립운동도 활기를 띠게 됩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19년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이곳 연해주에서도 3.17독립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최초로 임시정부 형태의 ‘대한 국민의회’가 형성되고, 그것이 나중에 상해임시정부와 통합을 해서 실질적인 임시정부가 형성되게 됩니다. 우리는 상해임시정부만 생각하는데, 그것의 주축이 된 이동녕, 이동휘, 문창범, 최재형, 이상설, 이런 분들은 모두 연해주 출신의 독립운동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1920년도에 우리 고려인 독립운동세력과 러시아 혁명세력이 연합해서 3월에 일본군을 무찌르는 성과도 냈는데, 4월에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이 지역에 있던 독립운동세력이 학살되는 4월 참변을 겪게 됩니다.nbspnbsp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북간도로 들어가서 북간도에 있던 독립운동세력과 협력해서 6월에는 봉오동전투,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런 승리가 우리 민족에게는 큰 희망이 되었지만 결국 일제의 보복, 즉 무자비한 탄압으로 수많은 이주민이 학살되고, 재산이 불태워지는 경신참변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독립운동세력이 더 이상 중국 안에서 백두산을 근거지로 삼아 있을 수가 없게 되자 결국 1920년 말에는 모두 러시아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1921년도에 연해주에 있던 독립군 세력과 북간도에 있던 독립군이 전부 러시아의 자유시로 모여들게 되었는데, 그때 군 주도권을 둘러싸고 연해주의 독립운동세력 중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르크추크파가 러시아로부터 군권을 허락받고 러시아혁명군과 함께 무장해제를 불응하는 독립군을 엄청나게 학살하는 흑하사변, 즉 자유시참변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말엽부터 시작되어 20세기 초엽까지 형성되었던 3,500명 규모의 독립군 최대 세력이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와해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1921년에 우리 독립운동의 최대 세력이 러시아혁명군에 의해서 해산되어 버리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러시아에게 두 번째로 배신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nbspnbsp그리고 1937년에 스탈린은 여기 사는 우리 한인들에게 일본군의 간첩으로 활동한다는 혐의로 2500여 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여 죽였을 뿐만 아니라 17만 명이나 되는 우리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연해주에 뿌리내렸던 한인들의 삶이 송두리채 뿌리 뽑혀서 사라지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1940년에 다시 러시아가 일본과 갈등을 겪으면서 동북연군에 참여했던 많은 민족지사 중 일부가 러시아로 넘어왔고, 그들이 1945년에 소련군과 같이 북한에 들어와 북한정부의 구성원이 되면서 어찌 보면 민족분단의 하나의 축을 형성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nbspnbsp이렇게 역사를 되돌아보면, 러시아는 고통받던 우리 민족에게, 또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애국지사들에게 때로는 희망이 되어주었고, 때로는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의 이런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외국에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그런 보이지 않는 위험을 안게 된다는 교훈을 이런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nbspnbsp좋은벗들에서는 매년 여름 중국의 북간도, 서간도로 역사기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만 아직 연해주는 일정에 포함시키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국제한민족재단에서 매년 시베리아횡단여행을 하다가 이곳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를 재건하는 게 필요하다는 제안을 적극적으로 해주어서 이와 같이 신한촌 복원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도 늘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라서 형편은 어렵지만 함께 해 보자는 마음을 내어 오늘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바쁘고 어려운 가운데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말씀을 드립니다.”nbsp스님의 감사 인사에 참석자들도 뜨거운 박수 갈채로 화답했습니다.nbspnbspnbsp한민족의 통사가 가장 많이 서려 있는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희망과 좌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져 왔습니다. 게다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연구조차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 하면 안중근 의사만 떠올리게 되는데,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민족지사들이 이국 땅에서 이름 없이 묻혀 갔을지 가슴이 저미어 왔습니다. 또 러시아가 우리에게 준 희망과 좌절의 양면성을 얘기하며 지나치게 외세에 의지하면 안 된다는 역사적 통찰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nbspnbsp이곳 연해주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제관을 넓혔고, 시대에 저항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립의 깃발을 올렸고, 임시정부의 시초인 국민의회도 여기서 조직되었고,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고 생각하니 이곳이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하게 여겨졌습니다. 다행히 ‘신한촌역사회복재건위원회’를 통해 오늘 다시 그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쁜 날인 것 같습니다. nbspnbsp이어서 제1회의에서는 임채완 전남대 교수님이 ‘러시아 연해주 한인의 이주 역사’에 대해 발표를 하였고, 김게르만 카자흐스탄국립대학 교수님이 ‘한민족의 허브 신한촌’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특히 제1회의를 마치면서 패널로 참가한 김홍신 작가님은 신한촌의 재건이 평화통일의 지름길로 이어지길 당부했습니다.nbspnbsp▲패널 토론을 하고 있는 김홍신 작가님nbspnbsp“독립운동의 현장은 민족 정신을 지켜주는 백신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위대한 영웅이 나타난다고 하죠. 100년 전 처럼 지금도 대한민국은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데, 신한촌 재건은 어쩌면 우리가 이런 전쟁의 상황을 극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바둑의 세계 최강자를 인공지능이 이겼는데, 따뜻한 평화통일도 우리가 빨리 해내지 못하면 앞으로 국경수비도 로봇이 하게 될지 모릅니다.nbspnbsp그렇게 되면 남북분단은 영원히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오늘 신한촌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비단 신한촌 재건의 문제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민족 정신사의 재건으로 이어지게 해서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지름길을 우리가 만들면 좋겠습니다.” nbspnbsp이어서 제2회의에서는 김성민 건국대 교수님이 ‘고려인의 민족 정체성’에 대해, 송지나 블라디보스톡 극동대학 교수님이 ‘최초의 코리아타운 신한촌의 조선독립운동사’에 대해 발표해 주었습니다. 특히 송지나 교수님은 고려인으로서 개인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신한촌의 역사를 알려주어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nbspnbsp제2회의를 마치면서는 스님이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주었습니다. 발해 이야기와 송지나 교수님의 개인 가족사를 관심있게 들었다고 하면서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으로 네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nbspnbsp“첫 번째로, 이 연해주는 발해 시대의 동경용원부의 일부와 솔빈부에 속했습니다. 땅 면적을 기준으로 보면 연해주가 당시 발해의 전체 영토 중 3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 연해주에 묻혀있는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nbspnbspnbsp두 번째로, 조금 전 송지나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역사는 가족사로 접근했을 때 훨씬 더 깊이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제 옆에 최성주 선생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봉오동전투를 이끈 최진동 장군님의 동생 최운산 장군님의 손녀이십니다. 송지나 선생님도 그 3세손이 되시고요.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신한촌의 역사와 봉오동 전투의 사실들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우리는 ‘봉오동 전투’ 하면 ‘홍범도 장군’만 떠올리는데, 실제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병사들 밥 해 먹이고, 훈련시키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 준 노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잖습니까. 그런 역사는 아마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 구술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사의 경우에는 그 당시에 ‘내가 독립운동 한다’ 하는 걸 알리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실제 독립운동을 해도 증거를 다 소멸하면서 했잖습니까. 그런 사정이 있었는데, 오늘 날 학자들이 독립운동사를 정리할 때 너무 증거주의만 고집하니 안타깝습니다.nbspnbsp저도 저희 스승님으로부터 3.1독립운동에 대해 들을 때 스승님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학문적으로는 채택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증거가 없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독립운동지사의 손자 되시는 두 분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세 번째로, 이번 자료집에 애국지사 여덟 분의 사진이 실렸는데, 이분들은 이미 한국에서 잘 알려진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분이 최재형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최재형 선생의 도움을 받아서 처음으로 국외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분들이 13도 의군의 대장을 했던 유인석 선생과 간도관리사를 했던 이범윤 선생입니다. 저는 이 두 분에 대한 자료가 좀 더 복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연해주에서 제일 유명했던 분은 문창범 선생이잖아요. 얼마나 유명했으면 별명이 ‘대통령’이었겠습니까. 그리고 65세의 연세로 안중근 의사처럼 폭탄을 투척한 연해주의 노인동맹소속 강우규 지사도 계시잖습니까. 이 분들에 대한 것도 이번에 복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네 번째로, 역사학자들이 러시아와 우리 민족사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첫째,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에 러시아는 우리에게 희망이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인 1910년에 우리가 13도 의군을 만들었을 때 그걸 못하게 한 게 제정러시아 정부였습니다. 제정러시아와 일본과의 협력관계 때문에 그랬던 건데,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양만 바꿔 만든 권업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둘째, 러시아 혁명이 우리 독립운동의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었고, 또 우리는 1920년에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에서 승리도 했는데, 일본군의 공격에 못 이긴 만주 군벌 장작림이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를 믿고 러시아로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북간도 독립군과 연해주 독립군이 다 합쳐져서 3500명 이상의 대부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군권투쟁이라고 하는 내부의 문제도 있었지만 어쨌든 볼셰비키에 의해서 궤멸됐다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셋째,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그렇게 탄압을 받고 있는데도 러시아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첩자노릇을 한다면서 연해주에서 2500명 이상을 학살하고 17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습니다. 넷째, 러시아는 결정적으로 1945년에 우리 민족이 분단되도록 하는데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분단은 결국 6.25전쟁으로 이어졌고, 현재도 우리 민족은 그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우리의 희망이기도 했고, 우리에게 좌절도 준 러시아와 우리 민족과의 문제, 즉 연해주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융합해 낼 거냐가 우리 역사학자들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하시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nbsp스님의 네 가지 제안에 학자들도 모두 공감을 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이렇게 ‘연해주 한민족의 역사’에 대한 학술회의를 모두 마쳤습니다. 학술회의를 마치고 나니 왜 신한촌의 역사를 회복하고 재건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이 더욱더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nbsp점심식사를 한 후 참가자 전원이 꽁꽁 얼어 붙은 아무르만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곧 봄이 오면 얼음도 서서히 녹아나듯이 전쟁의 위험에까지 치달은 남북관계도 해빙 무드가 빨리 찾아오길 간절히 기원해 보았습니다.nbspnbsp▲ 학술회의에 참가한 내외빈 모두 함께nbspnbsp기념사진 촬영을 마치고 나서는 기공식을 하기 위해 곧바로 신한촌으로 이동했습니다. 신한촌으로 이동하는 길에는 고려인 송지나 교수님이 블라디보스톡 시내 곳곳을 안내해 주었습니다.nbspnbsp창밖으로 보이는 많은 건물들이 제정러시아 때 지어진 건물들인데 14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nbspnbspnbsp또 이곳 블라디보스톡에는 레닌 동상이 2개 있었는데 페레스트로이카 때 동상 1개는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송지나 선생님은 혁명정부가 교회를 폭파하는 소리를 어머니가 듣고 너무나 무서워했던 기억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폭파된 자리에는 레닌 동상이 세워졌는데 페레스트로이카 때 다시 레닌 동상이 철거되고 현재는 그리스정교회 교회가 새로 지어졌다고 합니다.nbsp▲ 레닌 동상이 철거된 자리에 새로 세워진 교회nbsp과거 신한촌이 자리했던 곳에는 지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도로가 새로 나고 아파트가 줄지어 건설되면서 신한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현재로서는 분간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사이에 삼각지 모양의 좁은 공터 위에 기둥 세 개가 떡하니 놓여 있어 그나마 이곳이 신한촌이었음을 표시해 주고 있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오후 2시부터는 이곳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각계 각층 인사가 자리한 가운데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03.12. 41,465 읽음 댓글 18개

2016.3.10 발우공양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도착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서울공동체 발우공양에 참석해 ‘일과 수행의 통일’에 대해 법문한 후 신한촌 역사회복재건 기공식 및 학술회의를 위해 각계 각층 인사를 모시고 인천공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새벽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은 정토회 서울공동체 발우공양에 참석해 공양을 드셨습니다.nbspnbsp▲ 발우공양nbsp공양을 드신 후에는 지난 일주일 동안 필리핀JTS 사업장을 방문하고 온 소회를 이야기하면서 그 중 대중 생활과 관련해서 애로사항이 제기되었던 것을 공유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특히 삶 속에서 ‘일과 수행의 통일’을 실천해 나가려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지난번에 인도에 방문했을 때 대중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애로사항에 대해서 들었는데, 이번에 필리핀에 방문했을 때도 역시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을 생각하면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데, 대중 생활을 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데요. 대중 생활이 어려워 문제제기를 자꾸 해서 내부 화합이 잘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nbspnbsp과거에는 자기네 마음대로 자유롭게 산다고 밥도 같이 안 먹고 따로 먹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니 지금까지 그렇게 생활하던 습관 때문에 수행과 대중 생활을 제대로 못해서 문제가 되고 있나 봐요. 지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작년 봄부터 필리핀과 인도 사업장을 수행공간으로 하고, 수행자들이 봉사하는 것으로 하되 그걸 못 하겠다는 사람은 다 회향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인도네시아에서는 사업장을 다 철수했고요. 정토회 설립취지 대로 앞으로는 해외 구호사업장도 수행자들이 수행하고 봉사하는 수행도량으로 정했는데, 아직도 그렇게 살지 않던 과거의 습관이 남아서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지요.nbsp개인의 삶을 보더라도 밥은 먹고 싶고, 살찌는 건 겁이 나고, 살찌는 거 생각하면 안 먹어야 되고, 먹고 싶은 거 생각하면 먹어야 되고 그렇지요. 해외 구호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생각하면 봉사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되고, 그럴려면 봉사자들의 취향을 허용해야 된다는 문제가 남습니다. 또 주어진 사명이 ‘수행자들이 살면서 봉사하는 수행도량화 해야 한다’ 하는 것이니까 수행도량의 원칙을 잡아야 되는데, 또 원칙을 잡으니까 사람이 떨어져 나가고, 사람을 잡으려니까 원칙이 어그러지고, 이런 것 때문에 고민이 생깁니다.nbspnbsp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칙을 중심으로 해서 갈 사람은 가게 하고, 그래서 일이 안 된다면 안 되는 대로 해야겠지요. 아니면 일을 우선해야 된다면 원칙은 젖혀두고 그 사람이 요구하는 대로 받아들여서 일을 할 수 있게 하든지요. 그러니까 이거든 저거든 하나로 결정하면 문제해결이 제일 쉽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은 모두 행자대학원생이니까 수행이 절대적 중심이지 다른 게 중심일 수 없잖아요. 그래서 수행원칙에서 어긋나면 그대로 회향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인도나 필리핀은 수행원칙과 일이 충돌한다는 거죠. 통상 이것도 포기할 수 없고, 저것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번뇌가 생기는 건데 둘 다 필요하다면 둘 다 하는 게 수행입니다.nbspnbsp그럴 때는 ‘원칙을 지키되 일도 해야 되고, 일을 하되 원칙도 지켜야 된다’ 하는 게 과제가 되겠죠. 그 과제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중도’입니다. 그 사람들의 취향을 받아들여서 일이 되도록 함과 동시에 수행도량의 원칙도 지켜가면서 그 사람들과 갈등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이게 수행 과제가 되는 겁니다.nbspnbspnbsp‘도대체 어떻게 하란 얘기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일에 책임을 안 지는 사람이나 수행도량을 지킬 책임이 없는 사람은 그 둘 중에 하나의 입장만 취하면 됩니다. 그러나 수행도량의 원칙도 지켜야 되고 일도 반드시 해내야 될 책임을 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둘을 어떻게 조화롭게 해 나가느냐가 수행이 됩니다.nbspnbsp다시 말해서 모순을 승화시키는 게 수행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모순된 그 두 가지가 늘 갈등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직장을 구할 때는 월급이 많으면 일이 많고, 일을 좀 수월히 하면 월급이 적고, 결혼 상대자를 구할 때는 돈은 많은데 사람 성질이 더럽고, 성질은 좋은데 돈이 없고, 이런 것처럼 이 세상에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없습니다. 다 자기 입장에서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볼 때 부족한 것이지 그 사람 자체는 원래 그런 거예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두 가지를 다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nbsp그래서 첫 번째, 욕심 때문에 두 가지 번뇌가 생길 때는 욕심을 내려놔야 됩니다. 두 번째, ‘밥은 먹고 싶다’ 이건 까르마, 업식, 마음이고, ‘먹으면 안 된다. 건강에 나쁘다’ 이건 생각이잖아요. 이런 갈등은 이성과 감성 사이의 갈등, 마음과 생각 사이의 갈등입니다. 이런 건 어떻게 중도적으로 통일할 수 있을까요? 생각에 우선을 두면 의지로 버텨야 되니까 심리가 억압을 받게 되고, 긴장이 되고, 그러면 행복하지가 못 하지요. 욕구를 따라가면 일시적으로는 기쁜데, 결과적으로는 나한테 손해가 됩니다. 그 둘을 어떻게 조정할 거냐 하는 게 중도입니다.nbspnbsp요구를 따라가지 않으면서 긴장도 하지 않는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경직되지 않는다, 사람들을 포용하면서도 원칙은 지켜나간다, 이런 과제들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극복을 해야 합니다. 그런 모순이 없는 세상에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일은 해야 되는데 사람은 없거나 또는 사람은 있는데 돈이 없거나 이런 식의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괴로움 없이 해결해 나가느냐가 바로 우리가 직면한 인생의 현실적 과제입니다.nbspnbspnbsp여러분 개인적으로는 아마 몸이 아파서 쉬니까 일이 안 되고, 그렇다고 좀 나아서 일을 하려니까 또 몸이 안 따라주는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그 사이에서 또 갈등을 하게 될 텐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픈 몸으로 일을 할 때는 아프지만 조금이라도 일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을 해야 된다’는 부담감과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갈등을 여러분 스스로 조정할 수 있어야 아파도 편안하고, 일을 안 해도 편안하고, 일을 많이 해도 편안하고, 밤잠 안 자고 일을 해도 편안하고, 아프면서 일을 해도 편안할 수 있는 거예요.nbspnbsp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처작주’입니다. 즉 ‘어느 곳에 처하든 주인이 돼라’는 주인의식이 중요합니다. 물러나는 마음을 낼 때는 주인의식이 없을 때입니다. 물러나는 마음이 나면 마치 남의 일처럼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첫 번째는, 자기가 해결해야 될 과제로 딱 삼는 자세, 즉 주인의식과 책임감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긴장하지도 않으면서 깨어있는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로, 그게 잘 안 될 때는 꾸준히 연습해 나가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 자세로 조금씩 완성시켜 나가는 게 수행입니다. 명상하고 절하는 것만 수행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갈등이나 자기 몸 상태를 가지고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수행하면서 늘 중도를 체험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 모두 편안한 가운데 밝게 일을 해 나가는 수행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몇몇 행자님이 인도나 필리핀을 다녀온 뒤로 건강이 안 좋다고 하던데, 그럴 이유가 뭐예요? 마음이 해이해져서 행자라는 걸 잊었던 거 아니에요?nbspnbspnbsp어쨌든 몸을 잘 추스르세요. 그러면서 당면한 현실에서 주어지는 과제들을 대할 때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되느냐? 이게 수행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고 하지 말고, 수행삼아 잘 풀어보세요.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똥 치우는 일, 밭가는 일, 밥하는 일이 주어질 수도 있는데, 어떤 일이 주어지든 수행삼아 하다 보면 똥 치우는 방법, 밭 갈거나 밥하는 기술을 익힐 수가 있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모든 게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nbspnbsp제가 어릴 때 풀이나 나무 벤 거, 낫질하거나 괭이질 한 거, 말뚝 박은 거 등이 그 일로써 끝난 게 아니라 의외로 생활할 때도 도움이 되고, 수행할 때도 도움이 되고, 해외활동 할 때도 도움이 됐거든요. 밥할 때나 연탄불 갈 때 불을 안 꺼뜨리려고 애쓰던 일, 그런 게 수행입니다. 감옥 가고, 두드려 맞고, 고문당한 것도 그때는 고통이었지만 지나놓고 보면, 돌이킬 수만 있으면 그게 다 수행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경험이든 다 자기 삶의 일부가 되고, 성장의 밑거름이 됩니다.”nbspnbsp어떤 일이 주어지든 수행삼아 하다 보면 모든 것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씀에 공동체 대중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곧 선거가 다가오게 되는데 공동체 대중들도 부재자 투표 신청을 해서 주권행사를 꼭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nbsp“4월 중순에는 선거가 있으니까 미리 부재자 투표를 신청해서 주권행사를 하세요. 우리 사회가 지금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잖습니까. 1, 2월 수출은 지난 해에 비해 거의 20 가까이 감소했다고 하잖아요. 그런 가운데 빈부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현 정부가 들어설 때 경제성장을 강조했지만 성장도 안 되고 있고, 경제민주화를 얘기했지만 빈부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고, 청년실업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고, 노인복지를 해결한다지만 OECD 가입국 중에 노인빈곤율이 제일 높고, 남북관계는 전쟁 위기에 처할 정도로 나빠졌고, 두만강 프로젝트도 멈췄습니다.nbspnbspnbsp또 요즘처럼 국내정치가 시끄럽고 유별난 건 처음 봅니다. 여당은 여당 내부적으로 싸우고, 여당과 청와대가 싸우고, 여야가 싸우고, 야당도 갈라져서 싸우고, 갈라져 나간 데서는 또 그 안에서도 싸우고, 남아있는 쪽도 싸우고, 남북 간에도 싸우고, 한일 간에도 싸우고, 한중 간에도 갈등하고, 지금 이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제, 정치, 안보, 통일, 국민 통합, 평화 유지가 다 위기에 처했습니다. 국민 통합은 커녕 국민 분열의 시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총체적인 국가 불신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아요.nbsp특히 국가권력이 중앙에, 그 중에도 대통령에게 너무 독점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번 선거가 끝난 뒤 보수도 보수와 중도 보수로 나뉘고, 진보도 중도 진보와 진보로 나뉘어서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받을 수 있는 다당제 구조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사안에 따라 서로 연정하는 식이 되어서 국가도 안정되고, 지금과 같은 극한적 갈등도 없어질 겁니다. 양당 구조는 선의의 경쟁을 할 때는 좋은 모델인데, 이렇게 극한적 투쟁을 할 때는 국가가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러니 이번 총선에서 가능하다면 통일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 양당 구조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 한 당의 독주를 막는 것,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그런 문제들을 푸는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선출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이런 관점을 갖고 주권행사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nbspnbsp공동체 대중들은 스님의 말씀에 모두 공감을 표하며 한 말씀 한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도 국민들이 각성해서 투표에 제대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발우공양을 모두 마친 후 스님은 짐을 챙겨 오전 10시 20분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인천공항에는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염원하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속속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았습니다.nbspnbsp▲ 인천 국제공항nbsp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은 극동 시베리아 대륙의 한민족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민족독립운동의 성지이자 최초의 코리아타운입니다. 항일민족지사들의 집결지이자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으며, 임시정부의 모체인 국민의회를 결성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유서깊은 곳의 흔적과 숨결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어 이번에 좋은벗들과 국제한민족재단의 주도로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현장에서 갖기로 한 것입니다.nbspnbsp스님은 모든 참석자들이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간단하게 한 명씩 소개를 해주며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 참가자 소개 시간nbsp간단히 자기 소개를 마치고 드디어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오후 1시 35분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한반도의 북동쪽 끝부분에 접한 블라디보스톡nbsp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하자 국제한민족재단에서 실무자 두 분이 대형 버스로 마중을 나와 참석자 일행 모두를 숙소로 데려다 주었습니다.nbspnbspnbsp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는 아직 흰 눈이 쌓인 너른 벌판이 펼쳐지기도 하고,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 모스크바까지 이어진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잠시 보이기도 했습니다.nbspnbsp▲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nbsp또 도심을 지나 바닷가에 다다르니 석양에 비친 얼음 바다가 절경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다 위로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며 참가자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바다nbsp오후 6시에 숙소에 도착해 짐을 푼 후 7시부터 다함께 저녁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식사는 처음으로 한인촌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구한촌 지역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했습니다. 구한촌 지역에는 작은 항구가 하나 있었는데, 부산이나 속초, 청진에서 출발하면 이곳에 배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초창기에는 항구 주위에 한인촌이 형성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이곳이 개척리라고 불리는 구한촌이라는 설명에 모두들 카메라를 들고 사진에 담아가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nbspnbsp▲ 구한촌 지역에 위치한 식당nbsp저녁식사를 하기 전 스님이 김명혁 목사님에게 식사기도를 청했습니다. 특히 스님은 김명혁 목사님을 비롯한 이웃종교인들과 10여 년 전부터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마음을 모아오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들끼리 모일 때는 서로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데, 우리 이웃종교인들이 모였을 때는 한번도 다툰 적이 없습니다.”라고 자랑스러워 하면서 식사기도를 정성껏 해주었습니다.nbspnbsp▲ 식사기도를 해주고 있는 김명혁 목사님nbsp“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축북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배경이 모두 다르지만 3.1운동을 일으켰던 선배들을 기리며 종교와 모든 차이를 초월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굶어죽는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지 방법을 찾고자 모였습니다.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초개와 같이 던지고 오히려 기뻐했던 우리 선조들을 기리며 어떻게 해야 우리들이 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이룰 수 있을지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음식에 부끄럽지 않은 우리들이 될 수 있게 축북해 주시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nbsp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다같이 큰 목소리로 ‘아멘’ 하고 맛있게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참석자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스님이 간단하게 이번 행사의 취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이번 행사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스님nbsp“우리가 해외의 독립운동 유적지라고 해서 북간도와 서간도에는 많이들 가고, 또 상해에도 많이들 갑니다. 하지만 이곳 연해주는 매우 중요한 곳임에도 발걸음이 뜸했는데, 최근에 들어와서 연해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연 30만명으로 늘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하며 살았던 이 지역에 현재는 고려인도 별로 없고, 그 터는 이미 다 폐허가 되었고, 다만 비석을 3개 세워 두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해요. 그래서 이곳의 얼을 살리고 알리자는 제안이 있어서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좋은 취지의 일이라서 저도 함께 하게 되었고요.nbspnbsp뜻은 있지만 재정을 마련할 여력이 안 되어서 여러분들 모시고 우선 작게나마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그 뜻을 기려주시고, 내일 기공식을 하는 것을 계기로 여러분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서 신한촌 역사회복과 재건을 위한 일들을 함께 해나가면 좋겠습니다.”nbsp스님의 행사 취지에 대한 말씀에 모두를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이번 신한촌 역사회복과 재건 사업을 책임지고 해나갈 국제한민족재단의 이창주 교수님이 이번 행사의 대략적인 소개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 국제한민족재단 이창주 교수님nbsp“우리 현대사에서 독립운동의 시원이 바로 이곳입니다. 애국지사들이 대부분 여기서 집결을 했었고, 여기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민족의 성지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무명의 돌기둥 세 개 밖에 없어요. 이렇게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는 선열들의 열망과 함성, 흔적과 숨결을 회복 재건하자는 취지로 이번에 기공식을 하게 되었습니다.”nbspnbsp이창주 교수님은 열변을 토하며 이번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이 일을 염원해 왔는지 그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교수님은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학술대회 시간에 이야기하겠다고 하면서 인사말씀을 마쳤습니다.nbspnbsp이어서 28명의 참가자 전원이 각자 어떤 마음으로 이번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목사님, 신부님, 교무님 등 종교인들을 포함해, 시민단체와 대학에서도 여럿이 참여를 했습니다. 모두가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사회 인사 분들이신데, 그 중 몇 분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nbsp먼저 김홍신 작가님은 “잃어버린 발해의 역사를 찾아다니며 이곳을 여러 번 다녀갔는데, 그 때 우리 민족의 혼을 발견했던 그 경험 때문에 이곳에 올 때마다 행복합니다. 이번에도 그런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라며 기쁜 마음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nbspnbsp또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의 원장으로 계신 조민 박사님은 이렇게 소감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로 유인석 의병장 이런 분들은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이곳 블라디보스톡으로 왔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왔는데, 이제는 비행기나 배 말고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오면 어떻겠습니까. 두만강 철교를 건너 이곳 블라디보스톡으로 올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면서 오늘을 회상해 보고 싶습니다.”nbsp특히 생명미디어센터에서 온 최성주님은 특별한 사연을 이야기해 주어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최운산 장군이라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고, 또 봉오동을 직접 개간해서 만드셨던 분이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는데, 저희 세대가 지나가면 이제 할아버지가 하셨던 일들이 모두 묻혀져 버리게 될 것이란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지금이라도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번 행사를 알게 되었고요. 저도 작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늘 참석하게 되었습니다.”nbsp▲ 특별한 사연을 갖고 참가한 생명미디어센터 최성주님nbspnbsp각자 참석하게 된 사연은 다양했지만 조국이 기울어 가던 시절에 피 흘리며 목놓아 울부짖던 애국지사들의 아리랑이 서린 현장을 다시 회복하고 재건하자는 그 염원만큼은 한마음 한 뜻이었습니다. 마지막에 김홍신 작가님은 더욱이 이 마음이 한반도 통일을 향한 염원으로까지 나아가기를 기원하면서 “통일을 위하여” 라고 건배사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첫째날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 9시부터 ‘러시아 한민족사의 숨결과 흔적’을 주제로 법륜 스님의 개막 연설이 있은 후 ‘연해주 극동대륙의 한민족사’,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을 주제로 학술 회의를 가집니다. 또 오후에는 신한촌으로 이동해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을 가진 후 우수리스크로 이동해 독립운동유적지를 방문하고 돌아올 예정입니다.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03.11. 57,914 읽음 댓글 30개

2016.3.8~9 한국 귀국 및 각종 미팅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3월2일부터 8일까지 6박7일 동안의 필리핀, 호주 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nbspnbsp어제밤 11시 10분에 호주 멜번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0시간을 비행해서 오늘 새벽 6시에 대만 타이베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밤새 이동을 하는 비행기여서 스님도 비행기 안에서 잠을 청했습니다.nbspnbsp▲ 밤새 10시간 동안 이동하는 비행기 안nbsp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타이베이공항에 내려 2시간을 머물렀습니다. 공항에 머무는 동안 스님은 한국에서 온 보고서를 체크하고, 원고 교정 업무도 보았습니다.nbspnbsp▲ 타이베이 공항nbsp다시 아침 8시에 타이베이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조금 더 걸려 11시 20분에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창 밖으로 바라본 인천공항은 안개가 많고 무척 흐려 보였습니다.nbspnbsp▲ 인천 국제공항nbsp인천공항에서 짐을 찾고 도착장으로 나오니 수행팀에서 실무자 두 분이 나와 마중을 해주었습니다. 짐을 차에 싣고 곧바로 서울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공항 마중을 나온 수행팀nbspnbsp인천공항에서 서울 정토회관으로 가는 길에는 그동안 한국에서 진행된 일에 대해 보고를 받은 후 모레부터 3박 4일 동안 있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방문과 신한촌 역사관 기공식 행사와 관련해 점검을 했습니다.nbspnbsp오후 1시 무렵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하자 1층 법당에서는 오늘 입학한 정토불교대학생 서초반 학생들이 입학식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식사 중인 학생들에게 다가가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했습니다.nbspnbsp“오늘 입학하셨어요? 결석하지 말고 1년 동안 꾸준히 다니셔야 해요.”nbspnbsp▲ 정토불교대학 서초법당 주간반 입학식nbsp스님의 해맑은 모습에 불교대학 신입생들도 너무나 반가워하며 “네” 하고 크게 대답했습니다.nbspnbsp비행기에서 밤을 꼬박 샌 스님은 간단히 세면을 한 후 곧바로 오후 2시부터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 재단 실무자들과 연이어 미팅을 가졌습니다.nbspnbsp많은 분들이 스님을 뵙고 싶어했지만 스님이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미팅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8일과 9일 양일 간은 스님을 찾아온 손님들, 그리고 정토회 대중 대표들과 연이어 미팅을 계속 가졌습니다.nbspnbsp내일은 오후 1시 30분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합니다. 3월 10일부터 13일까지 3박4일의 방문 기간 동안 스님은 한국과 러시아 교민 사회의 주요 관계자들과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한 학술회의를 열고, 신한촌 유적 조형 및 역사관 공사 기공식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

2016.03.10. 49,625 읽음 댓글 36개

2016.3.7 (호주 2일째) 멜번(Melbourne) 즉문즉설 강연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호주 멜번에 살고 있는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nbspnbsp점심이 되자 멜번 정토법당에는 몇몇 봉사자들이 단체로 와서 김밥 만드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오늘 강연 준비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의 저녁 식사를 위해 김밥 150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nbsp▲ 멜번 정토법당nbsp스님은 수고하는 봉사자들을 격려한 후 다함께 마당에서 기념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봉사자들은 일손을 도우려고 법당에 왔다가 뜻밖에 스님을 가까이에서 뵙고 무척 기뻐했습니다.nbspnbsp▲ 김밥을 만들고 있는 봉사자들과 함께nbsp특히 이곳 멜번 정토법당은 김밥으로 유명한 유영진 보살님이 부총무로 있는 곳입니다. 보살님은 연세가 많으시지만 이곳 호주에서 오직 김밥을 맛있게 만드는 것으로 초창기 법당 운영 경비도 마련하고, 봉사자들도 모았기 때문에 ‘김밥 보살님’으로 이곳 봉사자들 사이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nbspnbsp오후 5시에 멜번 정토법당을 나온 스님은 강연이 열리는 박스힐 타운홀에 일찍 도착해 먼저 봉사자들과 기념사진부터 찍었습니다.nbsp강연이 끝나면 비행기 출발 시간이 촉박해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해야 해서 미리 사진을 찍어두기로 한 것입니다.nbspnbsp▲ 박스힐 타운홀 nbsp이어서 책 사인회도 강연 전에 먼저 가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스님의 환한 얼굴을 보고 반가움을 표했습니다. 어떤 분은 반가운 마음에 “스님, 가까이서 보니 더 잘 생기셨어요” 라고 했는데, 스님은 nbsp“중이 잘 생겨서 뭐하노?” 라고 대답해 큰 웃음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사인하실 때 제 이름도 같이 적어주세요” 라고 요청하면 “내 이름은 내가 적고, 당신 이름은 당신이 적어야지” 라고 응수해서 위트있게 넘어가기도 했습니다.nbspnbsp▲ 책 사인회nbsp이렇게 사인회까지 미리 마치고, 저녁 6시가 되자 소개 영상과 함께 즉문즉설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멜번에 살고 있는 300여 명의 교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이 무대 위에 오르자 큰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nbsp먼저 스님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할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은 학교에도 가고,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하고, 이민도 가고, 가게도 마련하고, 사업도 하고, 아이도 낳아서 키우고, 이렇게 자기 좋을 대로 하면서 살잖아요. 자기가 좋을 대로 살았으니까 행복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좋을 대로 살아놓고 괴롭다고 그래요. 자기가 좋아서 결혼해 놓고 괜히 결혼했다고 하고, 자기가 좋아서 사업을 벌여놓고 괜히 일을 벌였다고 하고, 자기가 취직해 놓고는 못 다니겠다고 하고, 자기가 아이를 낳아서 키워 놓고는 왜 저런 아이를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잖아요. 이것이 인생의 괴로움입니다. 이럴 때 ‘왜 그럴까?’ 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좋을 대로 살았는데 왜 괴로울까요?nbspnbsp만약 결혼해서 부부 간에 갈등이 심해서 괴롭다면 그 원인은 뭘까요? 교회를 안 다녀서 하나님한테 벌 받아서 그런 거예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 거예요, 사주팔자가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어리석어서 그런 거예요?”nbsp“어리석어서 그런 거예요.”nbsp“그런데 여러분들은 내가 어리석어서 이런 괴로움을 자초했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합니다. 대부분 내가 전생에 저 사람과 원수여서 그런가, 궁합이 안 맞아서 그런가, 이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그러나 괴로움은 우리들의 어리석음에서 빚어집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즉 무지라는 뜻입니다.nbspnbsp반면 우리가 바르게 알게 되면 두 가지 삶의 자세가 나타납니다. 첫째,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해서는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내가 모르고 쥐약을 먹었지만 내가 한 일이니까 배가 아픈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니까요. 둘째, 대신에 다음에 이런 일이 닥친다면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즉 이미 지은 인연에 대해서는 그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다시는 이런 인연을 짓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nbspnbsp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먹고 나서 배가 아플 때는 다시는 안 먹겠다고 하지만, 막상 배가 고프면 또 먹게 되고, 그러면 또 배가 아프고, 한번만 살려주면 다시는 안 먹겠다고 해놓고, 배가 고프면 또 먹게 됩니다. 아이한테 화를 내지 않아야겠다고 해놓고 아이가 하는 행동을 보면 또 성질이 확 나고 이렇게 되풀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괴로움을 능히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다음부터는 아무리 좋아보여도 나쁜 결과가 나타날 것은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삶이 조금 더 행복해지는 쪽으로 개선이 되어갈 수가 있습니다.”nbspnbsp이미 지나간 과거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쁜 결과가 나타날 것은 하지 않으면 된다는 아주 간명한 메시지에 머리가 시원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오늘은 비행기 출발 시간 때문에 8시가 되면 딱 강연을 마쳐야 해서 스님은 이렇게 화두를 던진 후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총 6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는데, 그 중에 한 분의 고민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nbsp무대 위에서 여는 이야기를 하던 스님은 “무대가 너무 높아서 여러분과 거리가 너무 떨어진 것 같다” 하면서 무대 아래로 내려와 청중과 가까이에서 호흡을 하며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한 남자분이 호주에서 살면서 일을 계속 하고 싶지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며 막막한 마음을 호소했습니다. 스님의 답변에 청중석은 웃음 바다가 되고, 유쾌한 문답에 질문자의 마음도 아주 가볍게 되었습니다.nbspnbsp“저는 호주에 와서 일을 한 지 7년 정도 되었는데요. 호주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호주에 계속 살고 싶지만 타의에 의해서 지금은 어쨌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할지 너무 막막해서 스님께 질문을 드립니다.”nbsp“서울역에 가면 노숙자들이 많잖아요? 그분들은 왜 노숙자가 되었을까요?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니까 노숙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노숙자들의 과거 직업을 조사해 보면 농사 짓다가 노숙자가 된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매일 막노동을 하는 사람이 노숙자가 된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그 대부분이 첫째, 작은 기업이라 할지라도 사장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IMF 때나 어떤 이유로 사업이 망해서 다시 재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직장을 다닐 때 간부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과거를 먹고 살아요. 자신의 과거 때문에 지금 아파트 수위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막노동을 하든지 하는 것을 못해요. ‘나도 한 때는 사장을 했는데...’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를 당한 것도 맞지만 이 정신적인 문제도 함께 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이 사람들을 노숙자의 쉼터라고 해서 수용시설을 마련해 준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노숙자의 쉼터라고 하는 곳에는 규칙이 있어서 술먹고 와서 주정도 하면 안 되고, 밤늦게 와도 안 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하라고 하면 답답해서 못 사는 사람들이예요. 차라리 1000원이라도 구걸해서 소주 한 병 마시고 역 앞에 누워 있는 게 숫제 더 편한 겁니다. 도움을 주는 수용시설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 갖고는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nbspnbsp이렇게 과거에 좋았던 기억에 사로잡히면 현재의 삶이 불행해지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현재는 결혼도 하고 먹고 살기 괜찮지만 어릴 때 너무 가난해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든지 하는 상처가 있어서 현재는 남이 봐도 괜찮은 데도 늘 과거의 상처로 인해서 현재의 삶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nbspnbsp만약 질문자도 지금 그런 경험을 갖고 있다면, 한국에 가면 거의 십중팔구는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한국 사회가 지금 빡빡하기 때문입니다. 호주도 지금 빡빡해지고 있지만 한국 사회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면 취직이 안 되든지 직장 생활이 어렵거나 하면 늘 호주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지금 타의에 의해서 한국에 가게 되었다고 하니까 그 인간에 대한 미움을 저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질문자는 지금 불행이 이미 예약되어 있는 사람입니다.nbspnbspnbsp교회에 좀 다니세요. 성경 말씀에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라’ 하는 말이 있잖아요.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쫓겨서 가게 되었다는 것이 ‘5리를 가자’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10리를 가줄게’ 한다는 것은 아무리 옆에서 붙잡아도 모든 걸 팽개치고 내가 선택해서 한국에 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가게 되었으니까 한국에 가는 것을 누구 때문에 억지로 간다는 이 생각을 하고 있는 한은 필연적으로 과거에 사로잡혀서 미워하고 원망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한국으로 가야되는 상황이 되었으면 내가 그 상황에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수처작주라고 합니다.nbspnbsp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동남아에 있는 노동자들이 한국에 오고 싶어서 밀입국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한국 시민권이 없어서 잡히면 추방됩니다. 그런데도 한국에 숨어 들어와서 공장에 취직도 하고 잘 살잖아요. 거기에 비하면 질문자는 한국 시민권도 있잖아요. 그러니 사실은 질문자가 한국에 가는 것을 힘들어 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좀 빡빡하긴 하지만 그래도 살만한 나라예요. 요즘 전쟁이 날까 싶어서 겁내는 사람들도 좀 있기는 있지만요.nbspnbsp그러니 생각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것 밖에는 길이 없어요. 과거에 ‘호주에서는 어땠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한국에서 못 살아요. 좋은 경험이 자산이 안 되고 추억으로 남으면 미래가 불행해져요. 그 때는 그 때이고 나는 다시 또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이 중요하지 과거를 늘 생각하면 불행을 자초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게 되었다면 한국에 가고 싶지만 못 가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쉽게 갈 수 없는 한국에 가게 되었다고 생각을 바꾸어야 해요. 그런데 가기 싫은데 쫓겨 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질문자는 불행을 예약해 놓은 사람입니다. 불행하지 않으려면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저도 오늘밤에 한국에 가는데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똑같이 한국으로 가는데 자기는 왜 죽을 것처럼 힘들어해요?”nbspnbspnbsp“아직 직장을 잡은 것은 아니여서 한국에 가면 먼저 백일출가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nbsp“아주 잘 생각하셨어요. 백일출가를 하면 취직이 금방 됩니다. 백일 동안이나 출가 승려 생활을 했으니까 부처님의 가피로 취직이 된다고 보통 말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에는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것은 맞아요. 그런데 중소기업이라든지 생산직이라든지 저임금에 좀 일하기 힘든 직장은 한국에도 많습니다. 그런 곳은 사람을 못 구해서 전부 동남아에서 외국인들이 와서 그 일들을 합니다. 지금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100만 명 이상 들어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인력이 부족합니다. 중소기업 사장들을 만나보면 직원 50명이 필요한데 30명 밖에 못 구한 곳이 대부분이예요.nbspnbsp백일출가를 하게 되면 먼저 3일 동안 만배를 해야 돼요. 1분이라도 초과하면 무효가 되어서 새로 만배를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절 하는 것이 쉬운 것 같지만 이 무거운 몸을 들어다가 놓았다가 하는 동안에 번뇌가 치성합니다. ‘이러다가 다리 병신 되는 거 아닌가’, ‘이게 무슨 불교냐’, ‘부처님은 고행을 버리라고 했는데 이건 고행이다’ 이런 생각부터 시작해서 옛날에 누구한테 맞았던 기억, 질문자 같으면 나를 한국으로 오게 한 사람 등 온갖 생각이 일어나서 절을 하다가 집어치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요. 그렇게 중간에 가버리는 사람이 꼭 생깁니다. 그러나 충동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계속 절을 하다보면 이런 충동이 일어났다가 가라앉고, 저런 충동이 일어났다가 가라앉고, 이렇게 수십 수백 가지 충동이 일어났다가 가라 앉습니다. 그렇게 만배를 하고 나면 최소한 백일은 절에서 살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nbspnbsp처음에는 자기가 좋아서 들어왔지만 살아보면 힘드니까 중간에 도망을 가고 싶어지는데 그런 것에 대한 예방이 이미 만배를 하는 동안에 이뤄지는 겁니다. 못 견딜 사람들은 만배 할 때 이미 다 가버리거든요. 이런 심리적인 이유 때문에 만배 프로그램을 둔 겁니다. 중간에 그만두고 가버리면 본인도 손해고 저도 손해잖아요.nbspnbsp그리고 백일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서 300배를 한 후 바로 부엌에 가서 밥을 지어야 해요. 또 하루 종일 막노동을 합니다. 막노동을 하는 중간중간에는 일을 하면서 일어났던 분별심을 다 드러내야 합니다. ‘성질이 나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집에 가버리고 싶었다’ 하는 마음나누기를 계속 합니다. 저녁에는 10시가 되면 무조건 자야 하는데, 한 방에 20명, 30명이 다같이 자니까 코를 고는 사람도 있고 온갖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잠을 못 잔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왜냐하면 눈을 붙이자 마자 벌써 눈을 떠야 하는 새벽이거든요.nbspnbspnbsp세상 일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세상에서는 고생만 하지 고생하면서 일어나는 마음을 자기가 자각하도록 해주는 것이 없는데, 백일출가는 딱 하나 그것이 더 추가되어 있어요. 거기다가 어떤 일도 방긋 웃으며 ‘예’ 하고 해야 한다는 것이 과제로 주어집니다. 명심문이 그렇게 정해져 있어요. 그렇게 잘 될까요? 당연히 잘 안 되지요. 안 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이 될 때까지 계속 연습합니다. 그렇게 백일을 생활하고 나오면 지천에 깔린 게 직장이예요. 여기서는 월급도 안 받고 오히려 자기 돈을 내고 와서 막노동을 했는데, 밖에 나가면 아무리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돈을 주잖아요. 직장을 구하는 기준이 ‘300만원을 주느냐, 400만원을 주느냐’ 하는 것에서 ‘절에서는 한 푼도 안 주는데 여기서는 주네’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일이 많아도 밖에서는 새벽 4시에 깨우지는 않아요. 밤 10시까지 일을 시키지는 않아요.nbspnbspnbsp그래서 밖에 나가서 사는 것이 아주 쉬워집니다. 무슨 일을 하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돼요. 백일출가를 해서 행자로 산다는 것은 가장 낮은 자세로 하심을 해서 마치 하인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무슨 일을 해도 행자로 살 때 보다는 존중 해줘요. 그래서 취직이 잘 되는 겁니다. 이것을 ‘법의 가피’라고 합니다. 원하는 것을 이뤄지게 해준다는 신의 가피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nbspnbsp그리고 이런 생활이 체질에 맞다고 생각이 되면 정토회에 들어와서 평생 무보수로 살면 돼요. 그러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돈을 갖겠다고 하니까 살기가 힘들지 내가 갖겠다는 생각만 놓아버리면, 인도에 가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고, 필리핀에 가서 원주민들도 도울 수 있고, 무슬림 지역에 가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고, 얼마든지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살아도 하루 세 끼 밥은 다 먹어요. 벌거벗고 다니지 않고 옷은 다 입고 다녀요. 침대에서 자느냐 바닥에서 자느냐의 차이 밖에 없지 잠은 다 자요. 되게 졸리면 굿을 해도 잔다 하잖아요.nbspnbsp저도 지금 3일 연달아서 밤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하루종일 생활하거든요. 피곤해서 어떡하냐고 그러시는데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순 없잖아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몸이라는 게 자기도 살아야 하니까 비행기만 타면 잠을 자게 돼요. 여러분들은 비행기를 타면 잠이 안 온다고 하는데 그것은 집에 와서 잠을 잘 수 있으니까 잠을 안 자는 거예요. 저는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가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몸이 이 때 안 자면 자기는 죽는 거예요. 그러니 몸이 알아서 다 자게 되어 있어요. 자는 것은 앉아서 자나 누워서 자나 별 차이가 없어요. 자는 게 중요하지요. 누워서 잠이 안 오고 뒤척거리는 것보다 앉아서 자는 게 더 잘 잘 수도 있어요.nbspnbspnbsp인생이라는 것이 궁하면 통하게 되어 있듯이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공부를 하면 삶이 자유로워집니다. 저는 여러분보다 더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제가 하는 일이 여러분들이 하는 일보다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어떤 일이든지 재미있게 합니다. 이것도 나쁘게 생각하면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가령 즉문즉설을 매일 하다 보면 매일 똑같은 질문들을 하잖아요. 그래서 365일 매일 똑같은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고 나서는 제가 얘기한 대로 아무도 안 해요. 묻기만 하지 제가 얘기한 대로 안 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어요. 묻기만 하고, 물어놓고는 얘기한 대로 하지는 않고, 그러니 얼마나 재미없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걸 안 따져요. 묻는다는 것은 그 개인에게는 다 애절한 사정이 있는 거잖아요. 그 한 사람의 고민은 항상 처음 듣듯이 듣고, 또 제가 얘기한 대로 하고 안 하고는 그 사람의 인생이니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제가 관여하는 것은 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걸 조금 터치한 정도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임하니까 재미있게 할 수 있지요.nbspnbsp이렇게 즉문즉설을 하루에 두 번씩 할 때마다 10명의 고민을 들으면 얼마나 많이 듣게 됩니까. 제작년에 세계 100회 강연 할 때는 1000명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생이 괴로운 1000명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저한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신이 평생 살아온 엑기스를 저한테 얘기해 주니까 그것들을 연구하면서 저의 능력도 점점 더 커져가는 겁니다. 이것을 좋게 생각하면 정말 좋은 일이고, 이것도 지겹게 생각하면 하루도 못할 일이 되는 겁니다. 생각하기 나름이예요.nbspnbspnbsp그러니 참 좋은 생각을 하셨어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백일출가를 하고 사회로 나가면 호주만 좋은 나라가 아니고 대한민국도 좋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천당만 좋은 세상이 아니라 이생도 좋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렇지 않고 호주만 자꾸 생각하게 되면 평생 불행이 예약된다는 점을 꼭 명심하세요.”nbsp“네, 감사합니다. 많이 가벼워졌습니다.”nbsp백일출가를 하게 되면 어떤 심리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지 적나라한 비유에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뒤바뀌는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약속한 2시간이 다 지나가고 8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몇몇 분들이 손을 들고 더 질문을 하고 싶어 했지만,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어서 마지막으로 한 분의 질문만 더 받고 8시 30분이 되어 강연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강연을 마치면서 스님은 오늘 얘기나눈 모든 이야기의 요점이 무엇인지 정리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오늘 이 사람 저 사람의 많은 고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제 얘기의 요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남자든 여자든 늙었든 젊었든 장애가 있든 없는 성적 취향이 동성애든 양성애든 피부가 검든 희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거잖아요.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였든 살아 있는 사람은 다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우리는 자꾸 불행할 수밖에 없는 핑계를 자꾸 댑니다. 왜냐하면 ‘엄마 때문에, 남편 때문에, 누구 때문에...’ 하면서 불행이 밖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니다. 그러나 불행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불행의 원인은 자기에게 있는데 그 이유를 밖에서 찾는 겁니다. 자기가 불행하고 싶어서 불행하다면 자기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그렇게 살라는 겁니다. 그러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핑계를 대는 조건을 떼야 합니다. 남편이 일찍 들어오면 일찍 들어와서 힘들다고 하고, 늦게 들어오면 늦게 들어와서 힘들다고 하고, 부모가 없으면 없어서 효도할 수가 없다고 힘들어하고, 부모가 있으면 있어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은 불행하다고 이미 결정해 놓고 ‘있으면 있어서 불행하다’, ‘없으면 없어서 불행하다’ 자꾸 이럽니다.nbspnbsp항상 좋게 생각해야 해요. 시부모님이 안 계시면 시집살이 안 해서 좋다고 생각하고, 부모님이 계시면 효도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아이가 있으면 아이 키우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이가 없으면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생각해 보세요. 저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겨요. 이렇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밤에 늦게 들어가도 잔소리하는 마누라가 없잖아요. 이것만 생각해도 얼마나 좋아요. 제가 만약 결혼을 했으면 이런 상황을 용납 안하겠지요. 맨날 싸우고 있을 거예요.nbspnbspnbsp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장점을 늘 좋게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긍정적 사고’라고 합니다. 긍정적 사고는 ‘무조건 잘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낙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나버린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호주에 이민을 와서 사기를 당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것을 붙들고 괴로워 하고만 있지 말고 ‘남의 나라에 왔으니 학습비를 좀 내었다’ 하고 여기는 겁니다. 이렇게 이미 일어나버린 일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마저도 경험으로 자꾸 축적이 되어서 결국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nbsp스님의 열정적인 말씀에 힘이 절로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2시간 30분 동안 중간에 자리를 뜨는 사람 없이 오롯이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 멜번 교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강연이 30분 늦게 끝났지만, 교통 안내를 하느라 강연 전에 미처 사진을 같이 찍지 못한 봉사자들이 있다고 해서 스님은 조금 더 시간을 내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멜번 정토법당 회원들과 함께사진을 찍고 나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단주를 스님이 직접 봉사자들의 손목에 걸어주었습니다. 해외에서는 단주를 구하기 어려운 데다 스님이 직접 걸어주신다고 하니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 봉사자들에게 단주를 선물하는 스님차량에 올라타고 박스힐 타운홀을 출발하여 9시 30분 무렵에 멜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서는 이번 시드니 강연과 멜번 강연을 총괄한 정은지 시드니정토회 총무님, 운전을 해주신 김삼구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특히 운전을 해주신 분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사인한 책을 선물했습니다.nbspnbsp▲ 공항 마중을 해준 운전봉사자 김삼구님과 정은지 시드니정토회 총무님nbsp밤 11시 10분에 멜번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8시간 30분을 비행하여 타이베이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타이베이공항에서 2시간을 머문 후 아침 8시에 다시 출발하여 인천공항에는 낮 11시 무렵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한국에 귀국한 후에는 평화재단에서 연이어 손님들과 미팅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03.08. 105,333 읽음 댓글 38개

2016.3.6 (호주 1일째_오후) 시드니(Sydney) 즉문즉설 강연

nbsp오전 11시부터 오후에 3시까지 진행되었던 시드니와 멜번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에 이어서 오후 4시부터는 시드니에 살고 있는nbsp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nbspnbsp강연이 열린 시드니대학교 이스턴 에비뉴 오디토리엄에는 시드니정토회 회원들이 일찍부터 와서 곳곳을 장식하고 안내 표지를 붙이며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장소를 찾아오기가 어려워 여러명의 봉사자들이 곳곳에서 안내를 도맡아 주었습니다.nbspnbsp▲ 시드니대학교 이스턴 에비뉴 오디토리엄nbsp특히 어제 저녁에는 오페라하우스 앞에도 찾아가 전단지를 돌리는 등 많은 사람들이 오늘 강연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의 노력 덕분에 강연장은 좌우에 빈자리를 조금 남기고 거의 만석이 되어 350여 명이 자리했습니다. 특히 젊은 청년들이 많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습니다.nbspnbspnbsp소개 영상에 이어서 스님이 무대에 오르자 교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 스님을 반겼습니다. 스님은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 교민 사회의 여건을 헤아리며 오전에 교회는 잘 다녀왔는지 물어보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nbspnbspnbsp“오전에 교회는 다 잘 다녀오셨어요? 왜 강연시간을 오후 4시로 잡았을까요? 여러분들이 오전에는 교회에 다녀오라고 그런 거예요. 강연을 오전에 하면 ‘교회 가야 되나? 강연 가야 되나?’ 고민할까 싶어서요.nbspnbsp저는 한국에서 4일 전에 출발해서 필리핀에 들렀다가 왔습니다. 저희 JTS가 필리핀 민다나오에 있는 산악지대의 원주민 마을과 무슬림 분쟁지역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거든요. 산악지역에는 공산반군인 신인민군이 있고요, 무슬림지역에는 MILF라는 모로이슬람민족해방전선이 있습니다. 두 곳 모두 분쟁지역이다 보니까 학교가 제대로 운영이 안 됩니다. 학교 건물도 없지만 선생들도 안 가려고 하고요. 그래서 저희 JTS에서는 2003년부터 1년에 3개 내지 5개의 학교를 계속 지어왔습니다. 그렇게 저희가 학교를 지어주면 교육청에서는 선생님을 파견해 주겠다고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필리핀에 47번째와 48번째 학교의 준공식을 하고 이곳으로 온 겁니다...” nbspnbspnbsp필리핀 민다나오에 48번째 학교를 준공했다는 소식에 모두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안부를 전한 후 곧이어 질문을 받았습니다.nbspnbsp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스님께 자신의 고민을 말했습니다. 6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대부분 청년들이었는데, 아주 솔직한 질문에 대중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재미있게 법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오늘은 그 중에서 엄마가 동생을 너무 편애해서 힘들다고 하소연했던 한 여성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질문한 분은 대구에서 온 여성이었는데, 경상도 사투리로 아주 솔직한 표현들을 거침없이 해서 대중들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nbspnbspnbsp“엄마는 제 동생을 너무 편애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편애라고 생각을 안 하세요. 제 동생이 어릴 때부터 엄청 왕따를 당했는데, 저는 동생이 맞고 들어오면 때린 애를 찾아가서 두들겨 패줬습니다. 어릴 때부터 대학 때까지 그랬어요. 그런데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남동생을 너무 편애하시니까 저는 독립적으로 제 일은 제가 다 알아서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동생이 20살이 넘은 다음에도 계속 편애하시더라고요. 동생이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하면 사주고, 차도 사달라면 사주고, 졸업할 때 60만 원짜리 신발도 사주고, 120만 원짜리 옷도 사주고요. 그러니까 제가 ‘왜 동생한테만 해 주고 나는 안 해 주느냐?’고 했더니 엄마는 ‘너는 돈 벌잖아’라고 하셨습니다. 동생과 저는 2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요.nbspnbsp동생은 군대에 갔을 때도 불쌍한 척하면서 ‘아, 다른 애들은 다 사먹는데, 나만 못 먹고 있다’며 전화를 해서 저는 미칠 지경이었지만 1, 2만 원씩 보태줬습니다. 그렇게 받기만 했으면 엄마한테도 그만큼 해 드려야 되는데, 동생은 전혀 신경을 안 씁니다. 그러니까 동생은 고마운 마음이 없는 겁니다. 동생이 머리는 좋아서 대기업에 취직을 했는데, 입사하자마자 차를 샀습니다. 그런데 차 보험료가 비싸니까 엄마한테 달라고 했나 봐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제가 돌겠더라고요. 동생은 완전 ‘또라이’에요.”nbspnbsp“동생이 좀 얄미운 짓을 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질문의 요점이 뭐예요?”nbsp“얼마 전에 남편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남편 친구 때문에 제가 법원에 가야 될 상황이 된 거예요. 그런데 벌써 그런 일이 두 번째입니다. 제가 속상해서 엄마한테 말씀드렸더니 항상 하던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참아야 된다고. 제가 결혼한 지 거의 2년째인데, 무조건 참으라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nbspnbspnbsp“그러니까 질문자는 지금 남편이 문제예요? 엄마가 문제예요?”nbsp“엄마요. 엄마는 전혀 공감을 못 하세요. 제 얘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동생한테만 관심이 있어요.”nbspnbsp“질문자의 아이가 몇 살이에요?”nbsp“아직 아이는 없어요.”nbspnbsp“그러면 질문자가 아직 아이를 못 낳아봐서 그래요. 아이를 낳아서 키워보면 엄마가 왜 그렇게 하는지 알게 됩니다. 부모가 관심을 갖고 예뻐하는 아이는 스스로 알아서 잘 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부모는 뭘 잘 못해서 ‘아이고, 저게 나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하고 걱정되는 자식한테 더 정을 갖는 법이에요. 그러니까 엄마는 동생이 남자아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동생이 어릴 때부터 왕따 당하고 자기 일을 잘 못 챙기기 때문에 더 신경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제 자식을 아끼는데, 그걸 왜 질문자가 질투해요?”nbsp“제가 한국에 살았을 때는 100만 원씩 꼬박꼬박 저금을 해서 엄마한테 한꺼번에 천만 원씩 드렸어요. 저는 필요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돈이 다 동생한테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저보다 더 많이 벌어요. 월급이 400만 원인데, 왜 엄마가 걔한테 돈을 주는지 저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nbspnbspnbsp“그건 질문자가 엄마가 안 되어 봐서 그래요. 큰아들은 돈을 잘 벌고 작은아들은 돈벌이가 시원찮으면, 큰아들한테 받은 돈을 작은 아들한테 주는 거예요. 큰아들이 노름을 해서 빚을 지면 엄마가 큰아들에게 욕은 해도, 작은 아들한테 돈을 얻어서 큰아들 빚을 갚아주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부모의 심정이에요. 그건 옳다 그르다고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게 엄마의 인생이니까 질문자는 엄마에게 간섭을 안 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질문자가 엄마한테 돈을 줬으면 그 돈으로 엄마가 엿을 사먹든 빵을 사먹든 동생을 주든 그건 엄마의 자유입니다.”nbsp“그게 문제가 아니라 동생은 ‘나는 결혼을 하면 엄마를 안 모시고 살 거다. 내가 왜 모시고 사냐?’ 라고 말합니다.”nbsp“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건 동생의 자유입니다.”nbsp“그건 자식의 도리가 아니잖아요.”nbsp“20살이 넘으면 부모의 짐을 안 져도 됩니다.”nbsp“엄마는 20살이 넘은 동생한테 계속 지원을 하고 있는데요.”nbsp“그건 엄마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질문자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nbsp“그래서 제가 동생과 근 5년간 연락을 안 했습니다.”nbsp“제가 보기에는 질문자가 또라이네요. 질문자가 힘들어하는 핵심 원인은 엄마의 사랑에 대한 질투심이에요. 그건 안 좋은 거예요. 질투할 사람이 없어서 동생한테 질투를 해요?”nbspnbsp“제 고민이 질투심 때문이라는 건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어요.”nbsp“그걸 질문자가 모르니까 저한테 질문하는 것이지요. 첫 번째, 20살이 안됐을 때 부모가 나를 도와주는 건 부모의 책임과 의무이고, 내가 그런 부모의 말을 들어야 되는 것도 하나의 책임과 의무에 속합니다. 그런데 20살이 넘으면 자식이 어떻게 하든, 부모가 어떻게 하든, 서로 간섭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엄마한테 천만 원을 줬다는 건 자기가 좋아서 준 거잖아요. 질문자도 스스로 얘기했듯이 ‘필요 없어서 줬다’고 했잖아요. 자기가 돈이 필요 없으니까 엄마한테 갖다 버린 거란 말이에요. 엄마는 큰딸이 갖다버린 걸 주워서 작은 아들을 줬는데, 그게 뭐가 문제예요?”nbsp“제가 경상도 사람이다 보니 부끄러우니까 ‘아, 필요 없다. 가져라’고 말했던 거지요.”nbspnbsp“그래도 그렇게 말한 책임을 져야지요. 질문자가 엄마한테 돈을 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는 게 스스로에게 더 낫고 기분이 더 좋으니까 그렇게 한 거잖아요. 그리고 엄마는 그걸 받아서 자기가 주고 싶은 사람이나 자기가 봤을 때 ‘안됐다’ 싶은 사람한테 주는 거지요.nbspnbsp많은 분들이 저한테 ‘이건 꼭 스님 쓰세요’라고 말하면서 돈이나 옷, 음식을 줍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만 실제로 사람들이 주는 걸 제가 다 먹었으면 저는 벌써 배가 터져서 죽었을 거고, 제가 다 입었으면 매일 10겹은 껴입고 다녀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필요한 사람들과 나눠서 씁니다.nbspnbsp그러니까 질문자가 ‘내가 준 돈은 엄마가 썼으면 좋겠다’ 하는 건 질문자의 마음이고, 그 돈을 자기가 쓰는 게 좋을지, 아들한테 주는 게 좋을지는 엄마가 결정할 일입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자꾸 엄마를 간섭하잖아요.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질문자는 엄마한테 돈을 준 걸 여기서 막 자랑하는 것 같아요.”nbsp“제가 엄마한테 돈을 드리는 이유는 엄마 집이 전셋집입니다. 한국에서는 2년마다 전셋집 계약을 갱신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일부러 목돈을 만들어서 드리는 거예요. 한국의 전세가가 얼마나 오르는지 제가 모르니까요. 그런데 엄마는 반찬도 허름하게 드시면서, 돈은 외제차 끌고 다니는 아들한테 다 주니까 제 마음이 안 좋아요.”nbspnbsp“질문자는 엄마가 선택한 인생에 자꾸 간섭하고 있어요. 부모가 자식을 간섭해도 자식이 싫어하는데, 자식이 왜 엄마를 간섭해요? 엄마에게 돈을 안 주는 건 불효가 아닌데, 엄마 인생에 간섭하는 건 불효에 속합니다.”nbsp“그럼 얼마 정도 드려야 돼요?” nbspnbsp“천만 원을 주든 1억 원을 주든 10원 한 장 안 주든 그건 질문자의 자유예요. 제 말은 준 것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라는 거예요.nbsp질문자의 동생이 굉장히 현명한 거예요. 약간의 보호 본능을 일으켜서 엄마로부터도 도움을 받고, 또 취직을 해서 돈도 벌고, 또 결혼해서는 엄마도 안 모시고요. 그런데 질문자는 돈 벌어서 엄마한테 주고, 나중에 또 엄마 모셔야 되고... 제가 볼 때는 질문자가 엄마를 모실 것 같아요.”nbspnbsp“예, 맞아요. 이리로 모시고 오려고요.”nbsp“좋은 거예요. 동생이 안 모시겠다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내 엄마 내가 모시는데, 누가 모시든 무슨 상관이에요. 스님이 보기엔 동생이 또라이가 아니라 질문자가 또라이에요.nbspnbspnbsp자기 모습을 자기가 못 보고 있어요. 영리한 척 잔머리는 굴리지만요. 질문자의 고민은 동생 문제도 아니고, 엄마 문제도 아니고, 자기 문제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사를 자기 생각대로 규정짓고 있거든요. 늙은 부모를 자꾸 자기의 가치기준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금 질문자도 생각을 잘못하고 있어요. 그런 마음으로 엄마를 모시면 같이 살면서 서로 원수가 됩니다.nbspnbsp어린 자식한테는 모범을 보여야 되고, 늙은 부모한테는 맞춰야 됩니다. 그저 부모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마음대로 하시도록 배려해야 됩니다. 엄마가 주고 싶은 대로 주고,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데, 왜 질문자가 그걸 보고 미쳐서 날뛰고 그래요? 질문자의 생각이 잘못된 거예요. 정말 고쳐야 해요. 계속 그러면 부모형제 사이에 서로 감정이 상해서 질문자만 외로워집니다. 엄마하고도 연락 안 하고, 동생하고도 연락 안 하고 살면 자기만 외롭지요.”nbsp“그런데 저는 이렇게 연락 안 하고 사는 게 오히려 편하기도 합니다. 진짜 편해요.”nbsp“편하면 그렇게 사세요. 그런데 자기가 진짜 편하면 저한테 왜 질문을 할까요? 안 편하니까 묻겠지요. 아이고, 진짜로 질문자가 또라이 맞네요.”nbspnbspnbsp“예, 엄마하고 연락 안 하는 건 불편하더라고요. 엄마랑 연락 안 한지 8개월쯤 되니까 남편이 ‘이건 아닌 것 같다’면서 스님께 한번 여쭤보라고 하더라고요.”nbsp“남편이 답을 몰라서 스님한테 물어보라고 한 게 아니에요. 남편이 말해 봐야 질문자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그나마 질문자가 좋아하는 법륜 스님이 말하면 좀 알아들을까 싶어서 물어보라고 한 거예요. 제가 한 얘기를 남편한테 전해 보세요. 그럼 남편이 ‘내가 똑같은 얘기를 벌써 몇 번이나 했잖아’ 라고 할 거예요.”nbspnbsp“속이 시원합니다. 이제 해결됐어요. 감사합니다.”nbspnbsp스님의 물음에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로 꼬박꼬박 대답을 잘 하던 질문자는 마침내 활짝 웃었습니다. 스님도 경상도 출신이어서 경상도 사투리로 대답을 해주었는데 사투리가 죽이 척척 맞아들어가는 모습에 대중들은 박장대소를 했습니다.nbsp질문자가 웃으며 자리에 앉자 청중석에 앉아 있던 다른 한 분이 질문자에게 응원의 한 마디를 해주고 싶다며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nbspnbsp“스님, 제가 질문자에게 응원의 한 마디를 해 드리고 싶어서요. 조금 창피할 수도 있을 텐데 저렇게 용기 내어서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질문하신 분은 참 순수한 분이세요.”nbsp아마도 질문자에게 스님이 또라이라고 농담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응원의 마음을 보내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자 스님은 경상도 사투리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하면서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예, 맞아요. 제가 질문자한테 농담으로 또라이라고 그랬는데 그게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결혼생활 20년이 됐는데도 남편이 아내한테 항상 ‘아이고, 못 생긴 게. 나나 너를 데리고 살지 누가 너를 데리고 살겠어’ 라고 하는 건 ‘예쁘다’는 뜻입니다. 경상도 남자들은 ‘예쁘다’는 말을 하려면 머리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아서 제대로 못합니다.nbspnbsp그러니까 질문자도 ‘엄마, 이거 엄마 용돈으로 쓰세요’라고 예쁘게 말을 못 하고 ‘나 필요 없으니까 엄마 가져라’라고 했다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걸 잘 알아들어야 해요. 질문한 당사자는 제가 ‘또라이’라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잖아요. nbspnbsp경상도 사람들은 말을 삐딱하게 하는 습관이 있어요. 그래서 울산, 경주 쪽은 이럽니다. ‘내일 우리 집에 놀러와라’ 그러면 ‘응, 갈게’ 하고 대답하면 될 텐데, ‘가면 뭐 주는데?’라고 말합니다. 약속시간에 좀 늦으면 ‘좀 늦었구나’ 하면 될 텐데, ‘난 니 오다가 뒈진 줄 알았다’ 그래요.nbspnbspnbsp말투가 그래요.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공양간 봉사자들이 설거지를 끝내고 뒤늦게 밥 먹는 걸 보면 ‘아이고, 수고했다. 다른 사람 공양할 수 있도록 다 준비해 주느라 이제야 먹는구나’ 하면 좋을 텐데, 저도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내력이 그래서 ‘아직도 먹나? 몇 그릇 째고?’ 라고 말이 나가요. 경상도 사람들은 제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듣는데 서울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 공양간 뒷정리까지 다 하고 이제 겨우 숟가락 들었는데 몇 그릇 째냐고요?’ 라고 항의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참회한 적이 있습니다.”nbspnbsp경상도 사투리가 쏟아지면서 강연장은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보다 더 웃기는 코메디가 없다며 박수를 쳤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마치니 벌써 약속한 2시간 30분이 다 되었습니다. 정말 유익하고 재미있고,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젊은 청년들이 오늘 강연에 많이 참석한 것을 헤아리며 너무 눈치보면서 살지 말고 조금 더 유연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nbspnbsp“젊을 때는 욕도 좀 얻어먹고, 실수도 하면서 살아야지, 실수를 안 하려고 하면 아무 일도 못 해요. 실수도 하고, 반성도 하고, 사과도 하면서 살 생각을 해야 자유롭게 살 수 있어요. 살얼음판 걷듯이 세상을 살다 보면 평생 내 인생을 못 삽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에 태어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눈치 보며 살아요?nbspnbspnbsp오히려 살아가면서 조정을 하세요. 그냥 덜렁덜렁 살면서 ‘저 사람은 서울 사람이라 이런 얘기를 못 알아듣는구나. 그러니까 말조심을 해야 되겠다’, ‘저 사람 하는 말에 내가 상처를 입었는데, 저 사람이 경상도 남자라 저러지 속마음은 안 그렇구나’ 하는 걸 알아 가면 됩니다. 정토회에서 오래 수행한 보살님이 말하길, 자기 남편이 ‘내가 못 생긴 너하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라’고 하는 말이 ‘예쁘다’는 뜻인 줄 알아듣기까지 20년이 걸렸답니다. 그 보살님이 절에 간다고 할 때마다 남편이 ‘가지 마라’ 라고 하니까 보살님이 ‘그래도 가야 된다’ 고 했대요. 그러니 남편이 ‘가려거든 다시는 들어오지 마라’ 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보살님이 ‘예, 알겠어요. 빨리 들어올게요’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이 거칠게 말은 하지만 그 말이 ‘빨리 들어오라’는 뜻임을 헤아린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알아들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nbspnbsp그냥 살아가면서 맞춰가면 되는 거예요. 요즘은 너무 존중하고 또 존중받으려니까 결혼생활이 피곤해서 오래 같이 못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겁니다. 그러니 그냥 대충 사세요. 대충 살면서 맞춰 가면 됩니다. 시댁에 가보면 대강 시댁 분위기가 파악되잖아요. nbsp‘남편만 봐서는 이해가 잘 안 됐는데, 시댁에 가보니까 집안의 분위기가 이래서 남편이 저렇다는 걸 알겠다’ 이렇게 헤아리면서 이해하고 맞춰 살면 됩니다. 사람이 한 번에 탁 바뀔 수는 없어요.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이기적이에요? 안 이기적이에요?”nbsp nbsp“이기적이에요.”nbspnbsp“그런데 왜 자꾸 남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해요? 모든 인간이 이기적인데요. 그 이기적인 인간들끼리 서로 적절하게 이익을 공유하는 게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다 성격도, 생각도, 믿음도 다르니까 그 다름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조절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극단주의는 우리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 옳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삶을 조금 유연하게 사세요.nbspnbsp내일 당장 천국에서 기차가 와서 ‘데려가겠다. 가자’고 하면 당장 따라갈 거예요? 아마 안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죽겠다, 못 살겠다’고 하지만 여기서 더 살고 싶지요? 그러니 조금만 양보하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이왕 사는 거 조금 더 행복하게 삽시다.”nbspnbsp스님의 마무리 말씀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함성이 오랫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만큼 오늘 강연이 참 감동적이었고 좋았다는 대중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이 되었습니다.nbspnbsp강연을 마친 후 책 사인회가 무대 앞에서 열렸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스님을 가까이에서 뵙고자 많은 교민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습니다.nbspnbsp▲ 책 사인회nbsp스님은 환한 웃음과 함께 교민들 한 명 한 명과 눈도 맞추어 주고 “힘내세요” 라고 격려 말씀도 해주었습니다. nbspnbspnbsp교민들이 모두 강연장을 빠져나가자 행사장 뒷정리를 하고 있던 시드니정토회 회원들 모두가 함께 모여서 스님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강연장 곳곳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회원들 모두가 열정적으로 활동을 해서 그런지 1년 사이에 봉사자들이 부쩍 늘어난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 오늘 강연을 준비한 시드니정토회 회원들nbsp스님은 봉사자들 모두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단주를 하나씩 손목에 걸어주었습니다. 단주가 동그란 알맹이로 되어 있어서 공항 검색대에 걸려서 갖고 나오는데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너무나 기뻐하는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니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가져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 단주를 선물하고 있는 스님nbsp수고한 봉사자들에게 합장으로 감사 인사를 한 후 스님은 다시 시드니공항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운전 봉사를 해주는 거사님이 가는 길에 오페라하우스가 보인다며 데려다 주었습니다. 스님은 해외에 어디를 가도 늘 공항에서 강연장만 왔다가기 바쁜데, 오늘은 조금 여유가 생겨서 오페라하우스를 잠시 거닐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nbspnbsp▲ 하버 브릿지의 야경nbsp바닷가에 다다르니 저 멀리 하버 브릿지가 보이고, 그 옆에 웅장한 규모의 오페라하우스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바닷 바람이 강해서 아주 시원했습니다. 사진 한 장만 간단히 찍고 다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시드니의 랜드마크인 오페라하우스nbsp밤 10시에 시드니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1시 40분에 멜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어제도 밤 비행기, 오늘도 밤 비행기를 탔는데, 내일도 밤 비행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제 밤 비행기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nbspnbsp▲ 밤 11시 40분. 멜번공항 도착nbsp멜번공항을 나오니 멜번정토회에서 김승주님이 마중을 나와 스님 일행을 안전하게 멜번 정토법당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새벽 1시에 멜번 정토법당에 도착하니 늦게까지 집에 가지 않고 기다리던 멜번정토회 회원들이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습니다.nbspnbsp▲ 멜번 정토법당nbsp스님은 “수고 많으셨다”고 감사 인사를 한 후 휴식을 취하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nbspnbsp내일은 멜번 정토법당에 머물다가 오후 5시에 강연이 열리는 박스힐 타운홀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멜번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한 후 밤 11시 비행기로 한국으로 출발합니다.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03.07. 126,174 읽음 댓글 54개

2016.3.6 (호주 1일째_오전) 시드니 멜번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시드니와 멜버른에서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을 위해 수계식 법문을 해준 후 오후에는 시드니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nbspnbsp어젯밤 10시 비행기로 필리핀 마닐라 공항을 출발한 스님은 밤새 8시간을 비행하여 아침 9시에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의자에 앉아 잠을 잔 셈입니다.nbspnbsp▲ 8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앉아 잠을 자는 스님nbsp다만 에어콘 바람이 너무 강해서 몸에 한기가 들었는지 갑자기 콧물과 기침이 나와 조금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도 원고 교정을 계속 하였습니다.nbspnbspnbsp입국 수속을 밟고 아침 10시가 넘어 공항 밖으로 나오니 시드니정토회 정은지 총무님과 운전봉사자 정귀수님이 반갑게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강연장인 시드니대학교로 향했습니다.nbspnbsp▲ 공항 마중을 나온 정은지 총무님과 운전봉사자 정귀수님nbsp11시부터 곧바로 정토불교대학 수계식이 예정되어 있어서 아침 식사는 이동하는 차 안에서 도시락으로 먹었습니다. 시드니정토회에서 정성껏 도시락을 싸주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nbspnbsp▲ 이동하는 차 안에서 아침 식사nbsp수계식이 열리는 시드니대학교 이스턴 에비뉴 오디토리엄에 도착하자마자 스님은 곧바로 화장실에서 세수만 하고 행사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먼저 오전에는 수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시드니정토회 총무 소임을 맡고 있는 정은지님의 경과 보고와 함께 수계식이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 경과보고를 하고 있는 시드니정토회 정은지 총무님nbsp시드니 정토불교대학은 2010년 2월에 처음 시작되어 지금까지 74명이 졸업을 하였으며, 오늘은 시드니에서 15명, 멜번에서 7명, 총 22명이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졸업생 중에서 오늘 수계를 받는 사람은 시드니 정토법당 12명, 멜번 정토법당 4명을 포함해 총 16명입니다.nbspnbsp▲ 시드니, 멜번 정토불교대학 수계식nbsp이렇게 16명이 가사를 여법하게 수하고 자리한 가운데 수계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에게 삼귀의 오계 수계를 하기에 앞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역사를 거쳐 오늘의 나에게 이르렀는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 후 오계를 지키는 것이 왜 소중한 것인지 그 의미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한국에서 학교 선생님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 불교신자인 선생님들은 확실히 아이들을 때리는 비율이 낮다는 통계가 나올까요? 술주정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까 불교신자들은 확실히 적다는 통계가 나올까요? 폭행하는 사람을 경찰이 잡아서 조사해 보니까 불교신자는 거의 없다는 통계가 나올까요? 도둑을 잡아서 조사해 보니까 불교신자는 특별히 적다는 통계가 나올까요? 성추행범을 잡아서 전부 조사해 보니까 불교신자는 거의 없다는 통계가 나올까요?nbspnbspnbsp만약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불교신자라는 게 무슨 대수겠어요? 불교신자면 뭐하고 기독교신자면 뭐하고 무교면 어떻겠어요? 그런 불교신자는 아무런 불교적 가치가 없는 그냥 부처님한테 복 빌기 위해서 신자가 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불교신자의 수가 늘든 줄든 이 세상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nbspnbsp그렇게 이름만 불교신자인 사람들에게 수계하려고 제가 밤새도록 비행기 타고 와서 아침부터 이렇게 강단에 앉아 있겠어요? 한 명이라도 불교 수행자가 늘어나는 만큼 세상이 좋아져야 된다는 믿음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nbspnbspnbsp불자들이 다섯 가지 기본계율, 즉 오계만 지켜도 이 세상은 정말 좋아질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친구들이 ‘야, 너는 좋겠다. 엄마가 불자여서 공부하라는 잔소리 들을 일은 없겠네’, 학생들이 ‘야, 올해는 선생님이 불자여서 매 맞을 일은 없겠다’, 사업가들이 ‘거래처 사장이 불자라고 하니까 사기당할 일은 없겠다’, 환자들은 ‘의사가 불자라니 과잉진료 받을 일은 없겠다’ 이렇게 말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오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됩니다. 오계를 잘 지키면 세상에 살면서도 부처의 길을 갈 수가 있는 거예요.”nbspnbsp다섯 가지 계만 잘 지켜도 우리 사회가 참 좋아질 것이라는 말씀이 오랫동안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이 다섯 가지 계율을 지키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왜 오계를 지켜야 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오계를 하나 하나 읊어 주면서 수계 대중들이 잘 지킬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nbspnbspnbsp“이것이 우바새, 우바이들의 계이니 그대들은 몸과 목숨을 다하여 능히 잘 지키겠습니까?”nbsp“잘 지키겠습니다.”nbspnbsp대중들이 큰 목소리로 잘 지킬 것을 약속하자 스님은 모두에게 불명과 수계증을 수여했습니다. 한 명 한 명 앞으로 나오게 해서 수여한 불명의 의미를 모두 해석해 주었습니다.nbspnbsp▲ 불명과 수계증 수여식nbsp“앞에 서 계신 분의 불명은 ‘능인화’ 입니다. 만불 가운데 세 번째 부처님의 명호가 ‘능인’ 여래불입니다. 능인이란 ‘어질고 전능하다’는 뜻인데 이것은 모든 중생을 어질게 두루 보살피시는 부처님이란 뜻이 됩니다. 부처님의 이름인 ‘능인’을 따서 ‘능인화’라는 불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별로 어질게는 안 생겼네요? 앞으로는 어질게 살아야 해요. 알았지요?”nbsp“예.”nbspnbsp“두루뭉술하게 모든 사람을 좋게 봐줘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다 불쌍한 사람이에요. 우리 눈으로 보면 술 먹고 행패부리는 사람이 나쁜 인간이지만 그 사람의 까르마,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어릴 때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자기도 자기를 어쩌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 까르마를 봤을 때는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능인화 보살님은 앞으로 상대의 입장에서 보고 능히 다 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nbspnbsp스님의 짧고 명쾌한 해설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습니다. 이번에는 남자 분이 불명을 받았습니다.nbspnbspnbsp“거사님의 불명은 ‘덕주’입니다. 만불 가운데 1543번째 부처님의 명호가 덕주여래불입니다. ‘베푸는 자 가운데에 주인이다’ 하는 뜻입니다. 집에 쌓아둔 게 많이 있어요? 재물이 없으면 마음으로도 베풀고, 몸뚱이로도 베풀어야 돼요. 그래서 거사님은 항상 사람들에게 뭘 얻을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거사님이 바로 베푸는 자의 주인이기 때문에. 알았죠?”nbsp“예.”nbsp“물이 고이면 썩지만 물을 자꾸 퍼내면 새물이 나오듯이, 자꾸 베풀면 영원히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분이 바로 덕주 거사님입니다.”nbspnbspnbsp이렇게 스님은 수계를 받은 16명에게 불명의 의미를 자상하게 일러주었습니다. 수계식을 마치고 나서 대중들 모두 하나같이 “스님은 속마음을 꿰뚫어보시는지 딱 저 사람에게 맞도록 불명을 해설해 주셨다”며 아주 좋아했습니다.nbspnbsp10분 간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오후 1시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이 열렸습니다. 졸업식에는 경전반 졸업자까지 포함해 총 26명이 참석했습니다. 졸업생들이 스님께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졸업생들을 격려해주면서 조금 더 포용적이고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이 되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nbsp“불자는 사회의식 수준이 보통 사람보다는 높아야 됩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불교신자는 일반 국민들보다 의식수준이 높을까요? 그건 학벌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nbspnbsp▲ 정토불교대학 졸업식nbsp예를 들어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반대해도 종교인은 용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인과 그 부모는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또 얼굴이 검다고, 여자라고, 장애가 있다고 차별받으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다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태어났는데 그렇게 돼있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차별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가 않습니다.nbspnbsp기독교 신앙에 비추어서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첫 번째로 기독교에서는 천하 만물을 다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잖아요. 그럼 그 사람들도 하나님이 창조한 거잖아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만 창조했지 그런 사람들은 창조를 안 했대요. 그럼 ‘하나님이 천하 만물을 창조했다’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니잖아요. 두 번째로 그들도 하나님이 창조한 게 맞다면 하나님이 소위 불량품을 창조했다는 거잖아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면서 왜 불량품을 만드나요? 그러니까 일부 기독교인들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건 곧 자기 신앙을 부정하는 게 됩니다.nbspnbsp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의식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2,600년 전에 태어나셨는데도 계급차별과 남녀차별을 부정하셨습니다. 요즘도 아니고 2,600년 전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시에 사회적 저항을 많이 받으셨지요.nbspnbspnbsp우리는 그런 부처님이 가셨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마음이 닫혀있으면 안 됩니다. 열려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정체성은 확고히 갖되 타인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길을 가는 게 수행자입니다. 여러분, 수행자로서 자랑스럽게 이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졸업을 축하합니다.”nbsp스님의 따뜻한 격려말씀에 모두들 크게 박수를 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스님의 감로 법문이야말로 졸업생들에게는 가장 큰 졸업 선물인 것 같았습니다.nbspnbsp졸업장 수여를 마친 후 졸업생들은 머나먼 이국땅에 살고 있는 26명을 위해 밤새 비행기를 타고 와서 4시간에 걸쳐 수계식과 졸업식을 해준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꽃다발을 건네고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손수건을 꺼내nbsp눈물을 닦는 분들이 많았습니다.nbspnbsp▲ ‘스승의 은혜’를 부르는 졸업생들nbsp스님의 법문에 모두들 들뜬 마음이 되어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진정한 수행자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뒤에 자리한 선배 도반들과 가족들이 큰 박수로 격려의 마음을 보내주었습니다.nbspnbsp▲ 시드니, 멜번 정토불교대학, 경전반 졸업생 모두 함께nbsp수계식과 졸업식은 오후 3시가 넘어서 끝났습니다. 30여 분 동안 여유가 생겨 늦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스님은 한국과 계속 전화 연락을 하며 필요한 업무를 챙기셨습니다.nbspnbsp이어서 오후 4시부터는 시드니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35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감동적이고 재미가 넘쳐나는 대화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다음 이야에 계속 됩니다.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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