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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실상화 보살님의 법문 따라 걸어온 길
좋은 법문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바꾸고, 그 삶이 다시 한 공동체의 뿌리가 되기도 합니다. 실상화 보살님의 이야기는 부처님의 삶이 알고 싶다는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질문은 법륜스님과의 인연으로 이어졌고, 가정법회를 거쳐 마침내 청주 법당이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글은 한 사람의 간절함이 어떻게 오랜 시간 이어진 수행과 실천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이어진 그 인연의 길을 따라가 봅니다. 법문을 듣고 홀딱 빠졌지요 실상화 님은 오랜 불자였습니다. 초하루와 보름마다 절에 다니며 부처님 일대기를 공부할만큼 신심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늘 지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어떻게 살다 가셨는지, 그 삶의 내력이 정말 알고 싶었어요.” 다니던 절 스님께 여러 차례 법문을 청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늘 “책을 보라”는 답뿐이었습니다. 경전 공부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서 실상화 보살님은 삶으로 들려주는 불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토회에 젊은 스님이 있는데, 법문을 정말 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직접 서울로 그 스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서울에서 만난 스님은 당시 ‘최석호 법사’라 불리고 있었습니다. 법륜스님과 실상화 보살님 실상화 보살님은 법륜스님께 청주로 와서 법문을 해주실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여쭈었습니다. “법문을 듣겠다는 사람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얼마든지 가겠습니다.” 청주 금강회관에서 열린 첫 법문. 그날 실상화 보살님은 배움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며 깊은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 감정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따로 뭐가 좋았다기보다, 법문을 너무 잘하셔서 홀딱 빠졌지요. 스님 법문을 듣고 나면 다른 스님 법문이 귀에 안 들어와요. 스님 입만 쳐다보면서 ‘아,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 있구나’ 이러면서 감탄했지요.” 단순한 경전 풀이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을 꿰뚫는 불교였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그날 이후 계속해서 법문을 청했습니다. 이후 한 달에 한 번, 일요일마다 청주 금강회관에서 법륜 스님의 금강경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법문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의 자제인 김승수 님 역시 정토회와 인연을 맺어 경전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김승수 님은 곁에서 지켜본 어머니의 삶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다 겪은 세대예요. 좌익이다, 빨갱이다 하는 이념 때문에 가족이 죽고 흩어지는 걸 겪은 분이죠.” 어머님의 사진을 보여주며 과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아들 김승수 님 일제강점기와 전쟁, 혼란의 시대 야마시로 하루꼬로 남아있는 실상화 보살님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김승수 님 두 오빠를 따라 음성수봉소학교에 다니셨던 어머니는 공부를 아주 잘하셨어요. 큰오빠가 반장이여서 반장네 집으로 불렸다고 해요. 청주상고 재학 중이던 둘째 오빠가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해군이 되었고, 태평양 전쟁 중 전사했습니다. 해방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주고보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교사로 있던 큰오빠는 북쪽으로 간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 후로 어머니 집안은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이 찍혔어요.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말조심하라며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쉿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습니다. 단어 하나만 잘못 말해도 빨갱이라며 서로 신고하고 잡혀가던 그런 시절이었지요. 어머니의 혼담이 오가던 시기는 할아버지께서 면장으로 재직 중이던 때였습니다. 장남이었던 아버지께 집안일을 맡기고 싶어 하시던 상황이었습니다. 좌우 갈등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명하고 한 인물 하는 어머니를 큰 며느리로 맞이하는 데에 빨갱이 집안이라는 딱지는 할아버지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나 봅니다. 결혼 후 저를 낳고, 1년이 갓 넘은 때에 한국 전쟁이 터졌습니다. 돌잡이인 저를 업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청주를 향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밤고개를 앞에 두고 아버지가 잠깐 담배를 태운다고 거리를 두고 걷는 사이 청주에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돌잡이를 품에 안고 있던 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와 갑작스런 생이별을 당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그 순간은 아마 공포 그 자체였을 겁니다. 피난길에서 저에게 줄 젖이 없어, 밭에 버려진 참외를 주워다가 어머님이 잘게 씹어 참외죽으로 만들어 제 입에 넣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옥천까지 내려갔다가 세 달 뒤,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하면서 어버지와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모순과 갈등은 어머니의 가슴 깊숙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을 거예요. 1953년, 한국전쟁 끝무렵에 어머니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세상의 혼란과 아픔은 어머니 몸으로 나타났나봐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심한 배앓이로 생사를 오간 적이 있으셔요. 병원에 갔다가 복막염을 진단 받고 자궁 제거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외아들이 되어 버렸지요. 어머님의 지난 삶을 풀어내는 김승수 님의 목소리에는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을 수밖에 없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그 고통을 치유하고 단단하게 삶을 지켜내 온 어머님에 대한 존경심이 진하게 묻어있었습니다. 법정 스님이 실상화 보살님께 보낸 편지 혼란과 모순의 시대를 살아온 실상화 보살님은 법정스님을 만나며 삶의 방향을 잡았고, 이후 법륜스님을 만나면서 수행과 삶이 하나로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8월, 동북아 역사기행 중 백두산 천지에서 어머니께서는 법륜스님과 함께 백두산을 여행하던 중 압록강에서 북한을 바라보며 깊은 대화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전쟁과 분단으로 찢어진 민족의 현실을 마주하며, 부처님의 가피로 그러한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을 돕는 수행 정진의 삶을 살기로 뜻을 모으셨다고 해요. 어머니께서는 법명 실상화처럼 불교, 특히 실천 불교를 지향하는 법륜스님의 정토회를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수행 정진하며 치유의 삶을 살아가신 거지요. 만일결사, 멈추지 않는 수행 실상화 보살님의 나이 65세였던 1993년, 제1차 만일결사에 입재합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제1차 만일결사를 회향하기까지 30년이 걸린다는 걸 알기에 잠시 망설였습니다. 회향하지 못할 게 다분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만일결사에 입재하기를 권하던 무변심 법사님에게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어떻게 만일을 채우느냐.”라고 반문하던 실상화 보살님은 만일결사 초창기 입재자로 수행의 길을 끝까지 걸었고, 정말로 만일결사를 회향했습니다. 1997년부터는 청주 실상화 보살님 집에서 법륜스님을 모시고 매주 법회를 열었습니다. 스님은 반야심경을 강의하셨고 매주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청강했습니다. 공간이 부족해 미닫이 문을 모두 떼어내 앉을 자리를 마련했고, 실상화 보살님은 서른 명이 넘는 참석자들을 위해 매주 국수를 삶았습니다. 1999.6.21 백일법문 회향식 2003년 8월, 백담사 활동가 수련회. 맨 왼쪽 묘수 법사 옆 실상화 님 4개월 정도 진행하다가 10월 경에는 날이 추워져 다른 회원의 집으로 옮겨서 법문을 진행했고, 법륜스님과 유수스님이 번갈아 오시며 육조단경, 반야심경, 신심명, 법성게, 부모은중경 등을 강의해 주셨습니다. 2017년, 실상화 보살님의 여든여덟 번째 생신.right 보수 법사님은 매주 화요일 저녁에 오셔서 불교대학 강의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청주 법당의 초석이 만들어졌습니다. 청주 법당 부총무를 맡았을 때도 신실한 마음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총무를 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는지 묻는 질문에 “내가 좋아서 한 건데, 힘들 게 뭐가 있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화회 활동에서도 실상화 보살님은 자연스러운 중심이었습니다. 무엇인가 하자고 하면 연화회 보살님들이 기꺼이 따라주었습니다. 아들 김승수 님이 옆에서 한 마디 덧붙이셨습니다. “어머니는 타고난 리더 보살이셨어요.” 스님은 저의 스승입니다 1998년, 실상화 보살님은 법륜스님의 미국 5개주 강연에 동행했습니다. 독일과 미주 지역을 오가며 스님의 전법 여정을 곁에서 지켜본 시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스님이 얼마나 검소하게 전법 활동을 이어가는지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교포들의 집에 머물며 비용을 아끼고, 음식도 사서 드시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대중을 위한 법문에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때의 한 장면을 김승수 님이 풀어주었습니다. “제가 마일리지가 있어서 어머니 비즈니스석 표를 끊어드렸는데, 어머니가 ‘내가 어떻게 그걸 타, 스님이 타야지’ 하시면서 그 표를 스님께 드리고 본인은 이코노미석에 앉아 가셨어요.” 실상화 보살님에게 법륜스님은 아들처럼 정을 주는 존재이자, 분명한 스승이었습니다.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스님은 저의 스승입니다.” 2003. 2. 223. 1 미국 LA정토수련원 개원식에 동행한 실상화 보살님 10년의 시간, 하나의 법당 무엇보다 실상화 보살님은 정토회 청주 법당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입니다. 청주 금강회관에서의 강연이 중단된 뒤 약 3년 반 동안 청주 활동가들이 서울로 올라가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법륜스님과 유수스님이 번갈아 청주로 오시며 가정법회를 운영한 4년의 시간이 이어집니다. 공간이 부족해 미닫이 문을 떼기도 하고, 마당에 천막을 치기도 했습니다. 조립식 건물을 세웠을 때는 추운 데서 법문을 들을 아내가 걱정된다며 한 거사님이 보일러 시공비를 보시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공간을 보시받게 되었고, 청주 법당을 마련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춰졌습니다. 서울 활동가들이 오가며 시멘트를 나르고, 지업사를 운영하는 회원으로부터 도배장판도 보시받으며 재정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2001년 3월 11일 일요일, 1년이 넘는 준비 끝에 청주법당 개원식을 열었습니다. 법륜스님, 유수스님, 묘당 법사님과 청주 활동가 등 170여 명이 함께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이 맺은 작은 법문 인연이, 10여 년의 시간을 거쳐 하나의 법당으로 자리 잡은 날이었습니다. 2001. 3. 11 청주법당 개원식에서 사회를 맡은 실상화 보살님 실상화 보살님의 필기 노트, 사회자 멘트와 법문을 들으며 쓴 메모가 있다. 보시는 조건 없는 믿음 실상화 보살님은 2004년 정토회 보시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도 끝까지 사양했습니다. “내가 상 받을 자격이 없는데…” 그러나 실상화 보살님에게 보시는 공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살고 있던 집을 보시한 이유도 단순했습니다. “법륜스님 하시는 일이 너무 좋았어요. 대중을 위해 전법하시는 게 좋았고, 잘 써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요. 무엇보다 보시를 해야 내 마음이 편했어요. 그리고 우리 아들이 너그럽고 착해서, 내가 보시하는 데 일절 간섭하지 않았어요. 아들 덕분에 마음 편하게 살았지요.” 2004.12.12 정토행자 보시상 수상 상패 2025년, 실상화 보살님 문안 온 법사님들 옆에서 김승수 님이 어머님 말씀에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집 말고도 서울에 정토사회문화회관 짓는다고 할 때 2천만 원 보시하셨어요. 경제 활동도 안하시는 분이 언제 그렇게 살뜰하게 돈을 모으셨는지 제가 깜짝 놀랐어요. 한번은 저한테, ‘내가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데, 보시할 때 되면 꼭 입금해달라.’라고 말씀하셔서 제가 입금하고 그랬지요. 몇 달 전, 법륜스님과 유수스님이 병문안을 오셨습니다. 그 때 스님이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숟가락, 밥그릇도 없던 시절에 실상화 보살님이 다 챙겨주셨어요. 쌀도 보시하시고, 그 덕분에 법회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원망과 분노가 아닌 치유 김승수 님이 한 역사학자와 만나 어머니의 삶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는 실상화 보살님의 집안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사의 비극을 한 집안이 온전히 감당한 듯합니다. 깊은 위로를 전하며,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가족과 정토회, 그리고 법륜스님과의 인연 속에서 조건 없이 내어놓으며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주상보시로 삶을 실천하며,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나가신 것 같습니다. 손녀의 혼례식. 뒤에는 실상화 보살님이 1981년에 수놓은 반야심경 병풍. 2025년 11월, 리포터와 대화 중인 실상화 보살님 일제 강점기와 전쟁,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실상화 보살님은 가족과의 생이별을 겪고 여러 죽음을 보며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처는 불법을 만남으로써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고통을 원망이나 분노로 남기지 않고, 불법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전법으로 풀어내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개인의 비극을 수행과 나눔으로 전환한 그 삶은, 트라우마를 넘어서는 한 인간의 조용하지만 단단한 실천의 기록입니다. 글김난희 편집이주현
청년지부 강화도 역사 기행
청년지부에서 기획한 이번 강화도 역사 기행은 정명 법사님의 간결한 해설로 시작되었습니다. 강화도의 전근대와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소를 방문했고, 자세하고 유익한 설명으로 역사 지식을 넓히는 계기였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청년들은 임무에 참여하고, 점심을 함께하며 따뜻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인터넷에서 지도를 찾아봅니다. 지도를 볼 때는, 글을 읽듯이 가장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로 훑어봅니다. 그리고 가고 싶은 여행지, 맛집 등을 빼곡히 표시해 놓습니다. 가장 북서쪽에 있는 강화도를 자주 들여다보며, ‘아, 강화도에는 밴댕이나 민물장어가 유명하구나. 전등사, 백련사, 보문사라는 이름난 절이 있네, 다음에 꼭 가봐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강화도의 바다 풍경 강화도는 삼별초 항쟁,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국사 시간에 배운 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고, 작년 여름 수도권 청년지부와 함께한 덕수궁 역사 기행이 좋았기에 공지가 나오자마자 냉큼 신청했습니다. 재작년과 작년에는 학사 돕는 이, 청년페스타 방 탈출 담당 등 여러 봉사를 맡았기에, 이번만큼은 ‘일반 참가자’로 편히 즐기고 싶어 역사 탐방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며칠 뒤 청년지부에서 운전이 가능한지 물었고, 저는 ‘수처작주, 보살행’의 마음을 떠올리며 “네”라고 답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이번 역사 기행에서는 스태프들을 태우는 운전사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 기행 전날까지 역대 최악의 한파가 찾아와 걱정이 많았습니다. 당일은 부처님 가피 덕분인지 날이 좋았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반들을 차에 태우고 강화도로 향했습니다. 한 차례 길을 잘못 들어 조급해지고 긴장하기도 했습니다. 차 안에서 첫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저마다 참여하는 마음가짐이 달라 듣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누다 보니 어느덧 강화에 도착했습니다. 한파 탓에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강화해협은 강처럼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얼어붙은 바닷길이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염하와 도로 사이는 철책이 길게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강화는 북한과 접경 지역으로 군사 시설이 많았습니다. 아름다운 풍경과 차가운 철책의 대비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며, 묘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연미정 연미정에서 의병 자세를 취하며 역사의식을 불어넣는 청년들 정명 법사님의 역사 해설로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기행지인 ‘연미정’은 정묘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와 형제 관계 조약을 맺었던 곳입니다. 정묘호란이라는 굴욕적인 역사를 겪고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까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조선 조정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참회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연미정에서는 물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한 땅을 바로 눈앞에서 조망할 수 있어 신기했습니다. 선조들은 우리 땅이니 그저 아름답다고 바라봤을 텐데, 씁쓸했습니다. 강화산성 남문 두 번째 기행지는 ‘강화산성’이었습니다. 강화산성 동문을 거쳐 남문으로 이동했습니다. 당대 최강이었던 몽골군에게 끝까지 항전했던 삼별초 이야기가 가슴에 남습니다. 강화에서 진도와 제주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운 선조들의 얼과, 위기 앞에서 똘똘 뭉친 백성의 정신은 유구히 이어졌습니다. 또한 남문에서 김상헌의 형, 김상용이 병자호란 때 자폭했던 일화와 그 후손들이 권문세가로 세도 정치의 폐단을 이끌었다는 점은, ‘불구부정’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는 점을 깨닫게 했습니다. 기다리던 점심 식사는 조원들과 밴댕이 정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혹 강화도에 가면 풍물 시장에서 밴댕이를 꼭 맛보길 바랍니다. 세 번째 기행지, ‘선원사지’는 고려시대 사찰 터로,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기기 전까지 보관했던 역사적인 곳입니다. 어렸을 때 ‘팔만대장경’을 떠올리면 ‘전쟁 통에 불경 목판 제작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인력 낭비, 국고 낭비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팔만대장경 제작은 당시 흩어진 국론을 통합하고 기강을 세우는, 현대에 비유하면 제작 자체가 핵 미사일급의 위력이었다.”라는 정명 법사님의 설명을 듣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정족산성에서 본 강화도 전경 전등사 둘레길 돌탑 다음 기행지는 ‘전등사’였습니다. 전등사는 특이하게 일주문이 없습니다. 대신 정족산성 문을 통해 절로 들어가는 구조였습니다. 이 정족산성이 단군의 세 아들이 지었다는 삼랑성의 후신이라는 점도 신기했습니다. 강화도는 단군과도 맞닿아 있구나 싶었습니다. 섬 자체가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박물관이라는 말이 크게 공감되었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전등사 대웅전에서 108배를 올리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은 곳은 마지막 기행지였던 ‘광성보’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찾은 ‘무명용사 무덤’은 청년들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이름 없는 용사들, 특히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함경도 출신의 호랑이 포수였다는 사실이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선조나 조상이라 하면 으레 남한 지역 사람들만을 떠올렸던 제 안의 관념도 그 순간 허물어졌습니다. 북한 땅에서 살던 이들 또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 흘린 우리의 조상이라는 생각이 들자, 분별심이 옅어지며 형용하기 어려운 슬픔과 아픔이 밀려왔습니다. 또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그려진 장면처럼, 신미양요 당시 역부족임을 알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맞섰던 조상들의 이야기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래, 이것이 우리 얼이고 우리 정신이다. 나는 오늘 어떤 변명을 하며 살아왔는가? 자신을 돌아보며 깊이 참회했습니다. 여러모로 깊은 생각과 새로운 마음가짐을 심어준 기행이었습니다. 이 기행을 정성껏 준비한 정명 법사님과 도반들에게 감사합니다. 다른 도반들도 기회가 된다면, 꼭 역사 기행에 참여하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맺습니다. 글청년지부 김동한 사진청년지부 김동한 편집광주전라지부 서광주지회 여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