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9.14 농사일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 하는 남편에게 화가 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하루 종일 농사일을 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논으로 나갔습니다. 논물의 높이를 살펴보고 물이 빠질 수 있게 삽으로 논둑을 터주었습니다.



논을 한 바퀴 둘러보고 비닐하우스로 내려와 4동에 배추 모종을 심었습니다. 한 두둑에 250 여개를 심었습니다. 스님은 배추 모종을 심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모종값이 두 배로 올랐어요. 배춧값이 떨어지면 모종값이나 별 차이 없어요. 이러니 농민들이 어떻게 살겠어요.”




배추를 다 심고 산 윗밭으로 가보았습니다.

산 윗밭으로 가는 길에 흙이 쌓여 물이 항상 고이곤 했습니다. 스님은 행자들에게 이 길에 물이 잘 빠지도록 흙을 다 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길에 가보니 이미 굴삭기로 길을 깔끔하게 다 치운 뒤였습니다.

“잘했네요”

발길을 돌려 몸이 불편하신 마을 어르신 밭으로 갔습니다. 어제 풀을 다 베고 수로를 뚫어주어서 물은 다 빠져있었습니다. 그래도 수로에 아직 흙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굴삭기로 흙을 퍼서 땅이 낮은 곳에 뿌려주었습니다. 스님은 옆에서 흙을 펴고 돌과 나무뿌리를 치워주었습니다.



능숙하게 굴삭기를 다루는 묘당법사님이 자격증도 있다는 말을 듣고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솜씨가 좋네요. 이제 마을에 태풍 복구 사업도 해볼까요?”

수로에 흙을 다 퍼내고, 아래에 배추 심을 땅으로 가보았습니다. 트랙터로 밭을 갈아야 하는데 감나무 가지가 뻗어있었습니다. 스님은 트랙터에 닿지 않을 만큼 감나무 가지를 베었습니다.


자른 가지에 붙은 감을 따내고 한쪽으로 싹 치웠습니다. 덜 익은 감으로 감식초를 담기로 했습니다.


울력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은 거리는 짧았지만 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쓰레기가 보이면 쓰레기를 치우고, 풀이 보이면 풀을 베고, 담장에 엉긴 덩굴을 보면 걷어냈기 때문입니다.



길에 쓰러진 코스모스를 세워주는 것을 끝으로 울력을 마쳤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마을 사람이 다급하게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차가 빠졌는데 좀 도와주세요.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여기밖에 없어서...”

스님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차가 빠진 곳으로 가봤습니다. 바퀴 밑에 철판과 나무 막대기를 대고 시동을 걸어보았지만, 바퀴가 계속 헛돌았습니다.

덤프트럭을 가져와 끈으로 연결하고 차를 끌어 보았습니다.

“하나, 둘, 셋!”

다행히 차가 한 번에 빠져나왔습니다.

“아이고, 스님. 고맙습니다.”

차 주인은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오늘은 회의나 법회 일정이 없어서 오후에도 농사일을 했습니다.

새벽에 참깨를 치운 2동에 새로운 두둑 두 개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 땅에서 봄에는 감자가 자랐고, 여름에는 참깨가 자랐고, 이제 배추가 자랄 차례입니다. 오후에는 비닐을 씌우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쇠갈퀴로 이랑을 평평하게 펴주었습니다.


초가을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은 문을 열어놓아도 후텁지근했습니다. 50m가 되는 한 줄을 다 고른 후에 잠시 쉬었습니다.

다음 이랑도 평평하게 골랐습니다.


쇠갈퀴를 잡은 스님의 팔이 울긋불긋했습니다. 어제 논에서 벼 세우기를 하다가 풀독이 올랐나 봅니다. 농사짓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랑을 고르며 나온 돌과 참깨 줄기, 뿌리는 다 주워 모았습니다. 돌은 골라내어 비닐하우스 앞에 뿌려 단단하게 다져주었습니다.

평평하게 고른 이랑 위에 부직포를 깔았습니다. 얼마 전 참깨 밭을 정리할 때 스님은 부직포를 한쪽으로 말아 ㄷ자심으로 고정해 두었었습니다. 오늘은 ㄷ자심을 빼고, 부직포를 펴고, 다시 그 ㄷ자심을 박아주기만 하면 됐습니다. 다시 사용할 수 있게 정리를 잘해 두어서 일이 한결 수월했습니다.




두둑에는 40cm 간격으로 표시를 하고, 크게 구멍을 뚫었습니다.


구멍마다 호미로 파고 밑거름을 넣어준 후 물을 충분히 주었습니다. 이렇게 배추 심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오후에도 논에 올라가 논물을 살펴보았습니다. 노랗게 익어가는 벼는 점점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곡식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더니, 벼가 꼭 논둑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습니다.


“논물이 많이 빠졌네요. 이제 땅이 젖을 정도만 물이 있어야 해요.”

논을 둘러 보고 나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울력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공동체 법사님들과 봉화 수련원에 가서 풀을 베고 청소를 하는 등 수련원을 점검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주 금요일에 있었던 정기법회 중에 있었던 즉문즉설 한 편을 소개해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하는 남편에게 화가 납니다

“남편이 제가 듣기 싫은 소리를 잘 골라 해서 화가 납니다. 저는 ‘알았어’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남편이 그 말을 안 해주니까 자존심이 무척 상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남편에게 주로 어떤 말을 듣고 싶은데요?”

“제가 ‘여보, 나 빵 먹고 싶은데 좀 사주면 안 될까요?’ 이러면 말 끝나기가 바쁘게 ‘아이고, 안 된데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남편은 경상도 사람입니다.”

“질문자는 경상도 사람이에요, 서울 사람이에요?”

“경상도 사람입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말을 그런 식으로 한다는 걸 같은 경상도 사람이 이해를 못해요?”

“안 사주더라도 말을 돌려서 ‘내일 사줄게’ 하든지, 아니면 ‘빵이 먹고 싶나’ 이렇게 한 번이라도 물어보면 화가 덜 날 텐데, 단칼에 거절을 하니까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 화가 납니다.”

“질문자의 마음이 이해는 돼요. 그런데 그런 말이 듣고 싶으면 서울 남자랑 결혼을 하지 왜 경상도 남자랑 결혼을 했어요?” (웃음)

“계속 경상도에 살다 보니 경상도 남자랑 결혼하게 됐습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남편을 서울 사람으로 바꾸면 되죠.” (웃음)

“다른 면은 또 좋은 점도 많아요. 남편이 그 부분만 조금 바꿔줬으면 하는 제 욕심입니다.”

“남편이 그렇게 말해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런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한테 자꾸 영어로 얘기하라고 요구하듯이 질문자는 지금 그렇게 말할 줄 모르는 사람한테 자꾸 말을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질문자가 괴로운 것은 남편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할 줄 모르는 사람한테 자꾸 그렇게 말해 달라고 요구를 하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질문자의 잘못이에요.

이럴 때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남편에게 그런 말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 생긴 대로 말하도록 놔두는 거예요. 그냥 남편한테 적응해서 사는 겁니다.

둘째, 내가 아주 돈이 많거나, 아주 예쁘거나 해서 남편이 나한테 딱 매달리도록 해서 꼼짝 못 하도록 하는 겁니다. ‘당신 말버릇 안 고치면 헤어질 거야.’ 이렇게 협박을 해서 남편이 고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거예요. 질문자는 그런 걸 갖고 있어요?”

“없습니다.”

“셋째, 남편과 헤어지는 겁니다. ‘당신하고 나는 안 맞으니까 당신은 당신 알아서 살아라. 나는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하고 한번 살아보고 죽고 싶다.’ 이렇게 말하고 남편으로부터 도망을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세 가지 방법 중에 질문자는 어느 게 제일 낫겠어요? 저는 어떤 방법이 더 좋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는 겁니다.

첫째, 남편과 이혼을 하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남자하고 한번 살아볼래요? 둘째, 남편을 어떻게 해서든 고쳐볼래요? 셋째, 남편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말하는 걸 배우지 못해서 도저히 그렇게 못하니까 아예 기대하지 않고 같이 살래요?”

“네. 세 번째를 선택하겠습니다. 남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남편은 그렇게 말해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연습이 안 되어 있는 거예요. 악의를 갖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 버릇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지적을 자꾸 받게 되면 나중에는 아예 입을 다물게 됩니다. ‘말하면 또 실수한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말을 아예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질문자는 또 말을 안 한다고 타박을 하겠죠. ‘이제는 아예 무뚝뚝하게 말도 안 하고 지나가네’ 이러면서요. 그래서 남편이 자기 나름대로는 상냥하게 말하려고 노력한다는 게 또 과거의 습관을 못 버려서 예전처럼 말이 툭 튀어나와 버립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알았다는 거예요?”

“남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영어밖에 할 줄 모르는 외국 사람을 만나서 ‘당신이 한국말을 잘해서 나와 한국말로 소통이 되면 좋겠다’ 하는 건 아무 소용없는 생각이잖아요. 남편에게 ‘빵 좀 사 와요’ 그랬더니 남편이 ‘그래, 빵이 먹고 싶나’ 이렇게 말이라도 해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할 줄 모르는 사람한테 자꾸 그걸 요구하니까 남편과는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라고 말하는 거예요. 다시 생각해 보세요. 이게 괴로워할 일이에요?”

“네,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할 줄 모르는 남편에게 계속 그렇게 말해 달라고 요구했던 제 잘못이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에요.” (웃음)

“네, 고맙습니다.”

전체댓글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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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여래심

모든 관계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하고는 동감과 이해를 바라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2020-10-13 00:16:28

박범숙

우리남편 습관이 생각납니다
뭐사라가자 그러면 다음에 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안가요
전 약점을 잡아서 버릇을 고쳤어요

2020-09-30 12:49:07

박영란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자꾸 한국말 해달라고 다그치는격ᆢ내가 그렇게 살고있구싶네요

2020-09-21 22: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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