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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7일 법륜스님의 하루(델리, 성지순례 마지막날)
오늘 아침은 여유있게 출발했습니다. 8시 30분경 델리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마투라박물관에 들러 당시 불상과 조각품들을 관람했습니다. 처음 성지순례를 할 때는 많이 추웠는데, 며칠 전부터는 날이 풀려서 낮에는 많이 더웠습니다. 더운 버스안에서 땀을 흘리며 델리로 향했습니다. 델리로 들어오니, 대도시의 분위기가 느껴지면서오히려 편안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도시에서의 삶이 몸에 젖어 있어서 편안한 느낌인 것 같습니다. 오후 4시경에 델리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스님께서 같이 박물관에 들어가셔서 불상과 조각품들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델리박물관에서 삐쁘라하와 석가족 진신사리탑에서 발견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했습니다. 스민과 참가자들이 우슬착지로 참배를 드렸습니다. “영롱한 구슬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스님 말씀처럼 뼈 조각이네요. 2600년전의 뼈 조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정말 부처님이 한 분의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이 더 확연히 다가옵니다.” 델리박물관을 관람한 후, 공항 가까운 호텔에서 마지막 만찬이 있었습니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야외에서 인도 전통 공연도 보면서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조별로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피리를 부르기도 하고, 독창을 하기도 했습니다. 해외에서 오신 분들과 인도여행을 더 할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델리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델리공항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잘 가라고 직접 손을 잡아주시며 인사를 하셨습니다. 성지순례객들은 모두 공항으로 들어가 출국 심사를 하고, 저희는 공항 밖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인도델리불자회 법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델리불자회 법당에서 자고, 내일 오전 스님 법회를 한 후, 오후 4시 30분 기차를 타고 유피주 이타와로 가서 석가족 수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내일 소식 전하겠습니다.
2013년 1월 16일 법륜스님의 하루(아그라)
새벽 4시, 상카시아에서 아그라로 출발했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이동을 해서 성지순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가더라도 시차적응은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일찍 일어나 차를 타고 가면서 자는 아침 잠도 참 맛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스님께서 오늘 관광할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스님께서 인도 역사와 중국 역사를 비교해서 정확한 연도까지 말씀하시며 설명해 주셔서, 오늘도 저희가 감탄을 했습니다. 정확한 연도까지 어떻게 저렇게 다 알 수가 있을까? 스님은 외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톱니바퀴가 딱 딱 맞아서 돌아가듯이, 서양 역사, 동양역사가 환히 그림 보듯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이 곳은 인도 무굴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마우리아 왕조 이후 가장 큰 나라였습니다. 무굴 제국은 중국의 원나라나 청나라처럼 외부에서 인도를 침입해서 세운 나라로 몽골의 후예입니다.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아내 아르주망 바누 베굼을 기리기 위해 22년에 걸쳐 지은 무덤입니다. 샤 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직후, 더 이상 아름다운 건축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고자 공사에 참여했던 2만명의 공인의 손목을 다 잘랐다고합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스님께서는 밖에 계시고 성지순례객들만 들어가 관람을 했습니다. 타지마할에 들어가 가이드를 한 명 교섭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7대 불가사의라 할 정도로 대단한 건축이었습니다. 붉은 대리석에 불을 비추면 붉게 빛이 나고, 나무를 깎은 듯이 자연스럽게 대리석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타지마할은 4면 어디에서 보나 같은 모양으로 보이고, 기둥의 한 부분은 착시현상을 이용해 4면의 기둥이 8면으로 보이도록 해 놓은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건축물이라 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착취를 당했을까 살펴졌습니다. 타지마할에서 다시 아그라포트로 갔습니다. “아그라포트는 타지마할과 야무나강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마주보고 있는 성입니다. 16세기말 무굴제국의 악바르황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천연 해자를 이용하기 위한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타지마할을 축조하면서 너무 많은 재정을 낭비한 샤 자한이 말년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한데, 샤 자한은 야무나 강 너머의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탑에 갇혀 있다가 결국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샤 자한이 숨진 탑에서 멀리 안개 사이로 타지마할이 고요히 서 있었습니다.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를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잠시 쇼핑을 하고, 숙소인 호텔로 돌아왔습니다.스님께서 처음 말씀하셨듯이, 첫 날과 마지막날은 숙소가 호텔이라 따뜻한 물도 나오고, 럭셔리했습니다. 스님께서 마지막으로 성지순례 전체 정리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성지 순례 했던 곳 하나 하나를 짚어 가면서 다시 전체를 자세히 정리해 주셨습니다. 15일 동안의 생활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스님 강연 후, 조별로 소감문을 쓰고, 조별 발표를 한 후, 전체가 다시 모여서 소감 발표를 했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는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십여년전 성지순례 왔을 때 유영굴 앞에서 구걸하던 아이들이 이제 학생이 되어 구걸하는 아이들이 없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하고 스님이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불교 대학 다니면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으면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열반당에서 ‘부처님. 이제 저희가 하겠습니다. 안온히 계십시오.’하시던 스님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남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로서, 지독한 가난 속에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의 모습이 눈에 제일 많이 들어왔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해 부처님이 한 분의 인간으로 다가오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닮아가고 싶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시어머니의 며느리를 교화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해되었습니다. 어머니께 지혜롭게 대하지 못한 저의 모습이 참회됩니다.” “법륜스님을 다시 알게 되었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법륜스님이야말로 제대로 된 부처님의 제자인 것 같습니다. 이 인연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통일의병이 되어야겠단 다짐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더 정진해서 성실한 불자로 이타적인 삶을 살겠습니다. 올바른 삶을 살겠습니다.” “인도성지순례는 불교대학 결석처리 하지 말아 주세요.” “켈커타의 인상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안개가 개인 기분으로 인간 붓다를 만났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로 당당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가사를 받고 수계를 받는 것에 눈물이 났습니다.” “변함없는 열정으로 가르쳐 주시는 스님께 눈물나도록 감사합니다.” “군대시절 이후 이렇게 바쁘게 지내기는 처음입니다.” 울먹울먹하면서 소감문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5일동안 같은 조원들끼리도 정이 많이 들어서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마음도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자기 현실이 감사하고 고맙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nbsp 스님께서 소감문을 듣고 간단하게 정리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내가 부족한 줄 알고, 상처투성이인 것을 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틀렸을 때 틀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희망이 있습니다. 좋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고물상의 딸이라서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어릴 때의 상처가 평생의 나를 좌우합니다. 이것이 몸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내가 어떤 집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제법이 공한 줄을 알아서떨쳐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탄센에 가서 인터넷만 되면 살고 싶다는 그런 마음, 가난하면서도 여유를 즐기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한국에서 가지면, 한국에서 욕심을 내려놓으면 한국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소감 발표 후, 만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도에 왔지만 밥솥을 들고 다니면서 밥을 해 먹어서 인도 음식 먹을 기회가 적은데, 오늘 저녁은 간만에 인도음식을 맛볼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음식이 정말 푸짐하게 나왔습니다. 인도 음식은 올 때마다 더 입에 맞아지는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객들도 접시에 가득 가득 음식을 담아 갔습니다. 이제 집에 갈 날도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nbsp분위기도 들떴습니다. 성지순례 기간동안 생일이었던 사람들의 생일파티도 있었습니다. 케익에 촛불을 켜고 축하행사를 했더니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조별로 나와 노래도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찬 후, 내일 새벽 델리로 가면서 차에서 먹을 주먹밥을 각 조별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사용했던 자리, 가방, 밥솥, 반찬통, 그리고 인도에 보시할 옷이나 반찬 등을 모두 내어놓았습니다. 스텝들이 늦은 밤까지 짐정리를 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로 갈 짐과 서울로 보낼 짐을 분류하고, 단단히 테이핑을 해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nbsp 내일은 델리로 이동해서 박물관 관람을 하고, 출국 수속을 할 예정입니다. 내일 소식도 간단하게 전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2013년 1월 15일 법륜스님의 하루(상카시아)
오늘은 인도성지순례 중 가장 오래 차를 타는 날입니다. 부처님의 8대 성지 중의 하나인 상카시아로 가는 일정인데, 거리가 워낙 많이 떨어져 있어, 보통 성지순례객들은 잘 찾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천축선원에서 새벽 2시 20분 기상해서 3시에 상카시아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출발한 지 1시간쯤 지났을 때 5호 차량이 고장이 났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총 6대의 차량이 같이 움직이고 있는데 5번째 차량 고장으로 차 고칠 때까지 전체가 다 2시간 가량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기다렸습니다. 차를 고쳐서 출발을 했는데 이번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우리 가는 길 앞을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도도 내지 못하고 천천히 가다보니, 원래 10시간 계획했던 시간이 14시간이 되어서 상카시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차 안에서 실컷 잤습니다. 그리고 저희 차량은 어제 차량 탑승한 사람 반만 소개를 했는데, 오늘 남은 사람들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간이 충분해서 그런지, 활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진한 나누기가 진행되었습니다. 20년을 벼러서 성지순례에 온 분도 있고, 오고 싶어도 시어머니 재사 때문에 못 오다가 마침 윤달이 들어 시어머니 재사가 인도성지순례 기간을 피해 있어서 얼른 신청해서 왔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워낙 조용해서 차에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남자분은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데 현장에서 워낙 말도 많이 하고 지쳐 길을 잃은 듯해서 성지순례를 오게 되었는데 부처님과 법륜스님을 통해 새로 길을 찾게 된 것 같다며 환희심을 표현한 분도 있고, 아들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괴로워하다가 법륜스님을 알게 되었는데 3년은 정진을 해라고 해서 그 회향으로 성지순례를 와서 참으로 감사하고 고맙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아프고 힘들어서 성지순례 오기 전 닝겔까지 맞고 죽어도 부처님의 땅 인도에서 죽자 하면서 왔는데, 와서는 안 아파서 신기하다며 감사함을 표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미국에서 간호사를 하고 계신 분은 앞으로 지이바카병원 책임을 지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앞에서 아이패드로 우리 가고 있는 길을 살피면서, 조용히 나누기를 듣고 계셨습니다. nbsp 14시간을 달려가도 인도는 산이 없이 계속 넓은 벌판이었습니다. 상카시아쪽으로 갈수록 넓은 벌판 가득 농작물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넓은 감자밭이 눈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벌판의 야생 공작들이 눈을 심심치 않게 해 주었습니다. nbsp 원래 1시에 상카시아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오후 5시에 도착했습니다. 석가족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탑터 입구에 아쑈카 석주가 이 곳이 부처님의 성지임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정토회에서 인도불교부흥사업의 일환으로 상카시아에 인도 석가족을 위해 절을 지어주기로 해서,부지를 구입하고 불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원래 절을 짓기 위해 구입한 부지에서 성지순례 회향식을 할 계획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바람에 어두워져서 그 곳까지 가지 못하고, 부처님께서 도리천궁에서 하강하셨다는 탑터에서 회향식을 했습니다. 부처님 어머니 마야부인은 부처님 태어나시자마자 일주일만에 돌아가셔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어느 해 안거 때 도리천궁의 마야부인에게 3달간 법을 설하고 하강하셨다는 이 곳의 탑터에 참배를 했습니다. 탑을 세 바퀴 돌고 정성껏 예불을 올리고 잠시 명상을 하고, 경전 독송을 했습니다. 스님께서 상카시아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nbsp “어느 해 안거 때 대중들이 부처님을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그 때 목갈리나가 부처님은 어머니를 위해 도리천궁에서 법을 설하고 어느 시에 상카시아로 하강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생겼을까 생각해 보면, 수행자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위해 출가를 하지만, 가족이 볼 때는 마음이 아픈 것 같습니다. 아무리 성인이라도 부모님의 은혜, 특히 어머니의 정성을 잊지 못합니다.그래서 부처님도 생모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궁에서 3달간 법을 설하고 하강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200년 즈음에 아쑈카 석주가 세워졌는데, 그것으로 봤을 때 초기부터 있었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하강하실 때 좌우로 제석천과 인드라천인 옹립해서 내려왔다는 것은, 당시 가장 세력이 컸던 두 신보다 부처님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처님도 어머니를 위해 도리천궁에 가서 법을 설하고 내려오셨다고 하는데, 우리도 우리들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버이 은혜’ 노래를 다같이 불러봅시다.” 스님의 말씀에 따라 대중들이 다같이 ‘어버이 은혜’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고, 석가족이 준비한 등불만 켜진 밤에 고요히 노래가 흘러 들었습니다.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훌쩍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nbspnbsp 이어서 바로 인도성지순례 회향식을 했습니다. 오늘 부처님 8대 성지인 상카시아를 마지막으로 성지순례 회향을 하고, 내일과 모레는 타지마할 관광과 박물관 관람 등이 잡혀져 있습니다. 스님께서 회향 법문을 하시면서 성지순례 전체를 쭉 짚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결국 2600년 전 과거로 돌아가서 살펴봤지만, 우리가 사는 것은 현실입니다. 2600년이 지난 지금 인도가 아닌 한국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부처님의 삶을 재현할 것인가? 수많은 종교의 하나인 불교가 아니라 수많은 종교를 뛰어넘고 수많은 사상을 뛰어 넘어, 남녀나 민족이나 인종이나 종교나 그런 것을 뛰어넘어서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행복을 가질 수 있도록, 속박받는 사람들에게 좀더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그런 길로 내 스스로 살아야 하고, 내 가족, 내 이웃, 세상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 그것이 결국 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부처님께서는 계급차별이 있는 세상에서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남녀 차별이 있는 세상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치시고, 그것을 세상속에서 작은 모델로 상가에서 실현을 했다면 오늘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이 세상 속에서 실현시키는 일이지 않겠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이 세상속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탐욕있는 곳에 탐욕에 물들지 않고 탐욕을 여의는 세상이 되도록, 성냄이 있는 세상에서 성내지 않고 성냄을 여의는 세상이 되도록, 갈등이 있는 곳에 갈등에 휩쓸리지 않고 갈등을 화해할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여러분들이 일상 삶 속에서 붓다의 삶을 늘 비교해 보면서 내가 어떻게 붓다를 닮아갈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사는 것이 붓다의 삶인가? 이름과 형식, 모양 이런 데 집착해서 볼 것이 아니라 바로 진실을 봐야 됩니다. 그런데서 이번 성지순례가 여러분들 인생에 새로운 희망, 새로운 등불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이런 순례를 통해서 사상이나 이념, 종교 등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지나친 탐욕에 얽매여 있다면 순례를 통해서 다 내려놓아버리고, ‘나’라 할 것도 없고, ‘내 것’이라 할 것도 없고, ‘내가 옳다’ 할 것도 없는 그런 텅 빈 자리로 돌아가서 좀 더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들 다 행복하기를, 자유롭기를, 우리만이 아니라 생명 가진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우리처럼 살아가기를, 자타일시성불도 하기를 발원합니다. 성지순례 잘 마쳤습니다. 이제 여러분들 각자의 몫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각자의 몫으로 돌아왔습니다’라는 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해서 길을 알려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회향 법문 후, 사르나트에서 삼귀의, 오계 수계를 하면서 받았던 가사를 정중히 다시 반납을 했습니다. 이로써 성지순례는 회향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스님께서 오늘 이 행사를 준비해준 석가족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석가족이 우리를 위해 간식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1시에 도착한다고 해서 그 전부터 와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행사를 준비한 분들은 YBS 회원들입니다. 20년전부터 인연이 되어 이 지역 석가족의 20가 불교에 귀의를 하고, 해마다 불상지원, 수련 지원 등 인도불교부흥사업을 해 오고 있습니다. YBS회원 10여명이 수자타아카데미 초기 학교 교사도 하고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지순례를 마치고 떠나면 저는 석가족 법회, 석가족 수련, 불상 점안식 등의 일정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지금 그 행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하면서 인도 석가족에 대해서, 인도불교부흥사업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무 감동받았어요. 스님께서 수자타아카데미만이 아니라 인도불교부흥을 위해서도 저렇게 오랜 세월동안 일을 해 왔구나 싶으니까 그냥 눈물이 나네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큰 틀에서 진행되는 일들이참 많구나 싶었습니다. 석가족이 환영해 주는 것은 생각도 못 했는데, 기뻐고 고맙고 감사해요. 이렇게 눈물이 나네요.” 상카시아에서 석가족의 환영을 받고, 인도불교부흥사업을 꾸준히 해 온 것들에 대해 성지순례객들이 많은 감동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인도불교부흥사업을 위해 오래 전부터 큰 원을 세워서 부처님의 8대 성지에 부처님의 교화사례와 맞는 불사를 계획하고, 천천히 불사를 해 오고 있습니다. nbsp 따뜻한 감자와 짜이, 식빵과 당근, 구화바 등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늦게 도착해서 회향식까지 하고 나니 다들 배가 고팠는데, 석가족이 간식을 준비해 주셔서 정말 감사히, 맛있게 먹었습니다. 짜이도 인도에 와서 먹은 짜이 중에 제일 맛있었습니다. 즉석에서 인도불교부흥사업을 위해, 석가족 지원을 위해 즉석에서 보시금이 걷어졌습니다. 5만 루피 가까이 모금이 되어서, 5만 루피를 채워 석가족에게 지원을 했습니다. 다들 마음이 따뜻해져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nbsp 숙소에 돌아와 조별로 라면을 끓여 먹고 하루를 접었습니다. 나라 밖에 나와서 먹는 라면 맛은 언제 먹어도 꿀맛입니다. 오늘로써 성지순례 일정이 마쳐졌습니다. 부처님의 4대성지, 8대성지, 10대 성지를 다 돌아보는 만만치 않은 일정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벌써 끝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습니다. 내일은 아그라로 가서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를 보고, 성지순례를 정리하는 일정들이 잡혀져 있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nbsp
2013년 1월 14일 법륜스님의 하루(쉬라바스티)
새벽 4시 30분 기상을 해서 5시에 천일결사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후 모두 가사를 수하고 숙소였던 천축선원에서 천불화현탑으로 걸었습니다. 새벽 어둠이 약간 남아있는 길을 한 줄로 서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날씨도 그리 춥지 않고 안개도 끼지 않아 상쾌한 새벽공기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천불화현탑은 부처님께서 사위성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부처님께서 망고를 먹고 그 씨를 땅에 심어 순식간에 싹을 틔워 거목으로 자라게 한 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망고나무 열매 하나하나에 부처님이 화현하여 1000분의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해서 천불화현이라고 합니다. 왕사성에는 부처님 법을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 곳 사위성에는 부처님을 알지 못했는데,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교화되었다고 합니다. 문화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이 곳 사위성 사람들을 처음에 교화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부처님께서 사위성 사람들을 교화하는 장면을 생각하며 명상을 하였습니다. nbsp 천불화현탑에서 천천히 걸어 기원정사로 갔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이 가장 편안한 상태로 걸으셨다고 합니다. 1250명의 비구들이 기러기떼처럼 걸어서 걸식을 하였습니다. 하루 15km가량을 걸었습니다. 너무 늦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오직 지금 자신의 동작에 깨어서 걸어 봅니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걷는 걸음에만 집중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1250명의 대중들과 밥을 빌러 사위성으로 들어가시듯이 천천히, 마음에 깨어서 걸어 봅니다.” nbsp 천불화현탑에서 기원정사로 가는 길에 저 멀리서 빨갛고 둥근 해가 떠올랐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걸식을 하러 걸어가는 1250명의 비구스님이 되어 걸었습니다. 그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기원정사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처소인 간다쿠티를 한 바퀴 돌며 탑돌이를 하고, 잔디밭에 넓게 앉았습니다. 이 잔디밭의 곳곳에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앉아서 수행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우리도 앉아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찬탄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 기원정사의 유래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도말로는 ‘제따바나’ 즉 ‘제따의 숲’이라고 합니다. 제따 태자가 제공한 숲과 급고독 장자가 세웠다고 하여 ‘기수급고득원’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줄여 기원정사가 된 것입니다. 급고독은 ‘외로운 이를 돕는 자’라는 뜻으로 인도 말로는 ‘아난드 핀디카’라고 하며 수닷타 장자의 별명입니다. 수닷타는 전 재산을 정법에 다 바쳐 부처님에게 공양드리며 불법에 귀의하였습니다.” “수닷타 장자가 왕사성 친구집에 왔다가 부처님을 만나게 되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께 사위성으로 오시도록 요청을 드렸습니다. 사위성으로 돌아온 수닷타 장자는 왕사성의 죽림정사처럼 왕궁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아 수행하기 좋은 처소를 찾던 중 제따의 숲을 발견하고 제따왕자에게 그 숲을 팔기를 요청했습니다. 제따태자가 숲에 금화를 모두 깔면 팔겠다고 하자, 수닷타 장자가 곡간 문을 열어 실제 금화를 까는 모습에 감동을 해서 나머지 부분을 보시했습니다.이렇게 기원정사가 생기게 되고, 부처님께서는 45안거 중 19안거를 기원정사에서 보내셨습니다.” nbsp “어때요? 좋죠? 저도 기원정사가 참 좋습니다. 부처님께서 45안거 중 24안거를 사위성에서 하셨으며, 그 중 19안거를 하신 곳이라 그런지 이 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하고 좋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저도 인도성지순례에 왔다 가면 항상 기원정사가 제일 마음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앉아 있어도 편안하고, 천천히 걸어도 좋고, 편안하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어느 곳에 있어도 참 좋습니다. 예불과 기도를 하고, 스님의 기원정사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잠시 휴식을 했습니다. 그동안 스님께서도 염주를 들고 천천히 절을 하셨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대승불교의 요체인 금강경을 설하신 배경과 핵심 내용, 오분향 예불문에 대해법문을 해주시고, 기원정사에서 있었던 부처님의 여러 이야기들을 해 주셨습니다. “부처님 법을 듣고 달라진 사람들, 유녀 암나팔리, 신통력을 쓰지 못하게 하자 죽을 때도 신통력을 쓰지 않고 죽은 목갈리나, 부처님 설법 때 존다는 말을 듣고 아예 잠을 자지 않아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천안을 얻은 아니룻다, 장사하는 사람임에도 부처님께 귀의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놓은 수닷타 장자 등 부처님 법에 귀의한 사람들의 신심은 대단했습니다. 또한 참으로 당당했습니다.” nbsp “금강경 뿐만 아니라 많은 경전이 사위성을 배경으로 설해졌습니다.또 여러분들이 잘 아는 가난한 여인의 등불도 이 곳이 배경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곳에 머문 시간이 많다보니 전해지는 이야기도 참 많았습니다. 경전 독송을 하면서 부처님의 병든 비구를 간호하는 이야기, 눈 먼 아니룻다의 바늘에 실을 끼어주시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독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처님의 큰 자비심과 인자함, 자상함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코살라국 프라세나짓왕에게 훌륭한 왕이 되는 길에 대해서도 설하셨습니다. ‘첫째, 백성을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해라. 둘째, 타인의 희생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아서는 안 된다. 셋째,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해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어리석으면 나라는 고사하고, 자기 목숨도 지키기 어렵습니다. 국가 지도자가 이렇게 국민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죠? 2600년전, 절대왕국의 시대에 부처님은 왕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위대함과 당당함을 다시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정말 오랫동안 기원정사에 있었습니다. “여태껏은 성지순례오면 오후 4시경에 이 곳에 도착해서 경전읽고 법문하기에 바빴는데, 지난 20여년 동안 오늘처럼 이렇게 하루 종일 여유있게 기원정사에 있었던 적이 없었어요. 처음입니다. 참 좋네요.” 법문 후에는 스님과 함께 차량별로, 조별로, 개인들까지 다 사진을 찍었습니다. nbsp 사진을 찍고 기원정사를 나와 앙굴리말라탑터로 향했습니다. “이제 사위성으로 들어갑니다. 기원정사에서 나와 사위성의 서쪽문으로 들어갑니다. 부처님과 1250명의 비구들이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걸식하러 걸어갔던 길입니다.” 스님께서는 정말 자세하고 자상하게, 부처님이 살아오신 것처럼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앙굴리말라탑터에 도착해서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앙굴리’라는 말은 손가락이란 뜻이고, ‘말라’는 목걸이라는 말입니다. 앙굴리말라는 100명의 사람을 죽이고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든 살인마였습니다.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교화해서 출가하게 하고 깨닫게 한 것은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이시여, 참으로 위대하시고 거룩하십니다.” 하며 찬탄한 것처럼 부처님의 위대함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앙굴리말라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안온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은 바로 부처님 법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nbsp 앙굴리말라탑터에 참배를 하고, 맞은 편에 있는 수닷타 장자의 탑터에도 참배를 했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재가신자지만 부처님의 10대 제자에 버금가는 분이었습니다. 왕사성에는 지바카, 사위성에는 수닷타 장자와 베사카 부인으로, 실제 교단에 많은 영향을 끼친 분들입니다.”nbsp nbsp 수닷타탑터에서 천축선원으로 돌아와 라면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저녁예불을 했습니다. nbsp 저녁예불 후에는 천축선원 주지이신 대인스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단한 원력으로 불사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대인스님 말씀 후에는, 다같이 금강경이 설해진 곳이니만큼 금강경을 한 번 더 독송하고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상카시아로 갑니다. 오랫동안 차를 타야겠네요. 내일 상카시아에서 뵙겠습니다.
2013년 1월 13일 법륜스님의 하루(탄센, 삐쁘라하와)
벌써 성지순례 시작한 지 열흘이 넘었습니다. 참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8대 성지 중 6개를 순례했고, 쉬라바스티와 상카시아를 남겨 두고, 오늘은 멀리 설산이 보이는 탄센으로 가기 위해 새벽 3시에 대성 석가사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어두운 새벽을 버스를 타고 달렸습니다. 눈을 뜨니 새벽 6시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 모르고 잤습니다. “아직 해가 안 떴어요. 올라가다 보면 해가 뜨겠네요.” 하면서 스님께서 대중들을 이끌고 앞서 나가섰습니다. 탄센은 인도와는 날씨가 완전 달랐습니다. “여기는 옛 탄센왕국입니다. 대부분이 불교인이고, 몽골리안이예요. 그래서 여기는 깨끗해요. 집집마다 화장실이 다 있으니, 인도에서처럼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면 안 됩니다. 안개도 안 끼고 공기도 좋죠? 여기가 해발 2000미터입니다. 안개가 우리 발밑에 있는 거예요.” 꼭 우리나라 맑은 가을 날씨 같았습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능성이에 도착했을 때 아침 해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얼굴을 보여주는 해를 보며 다 같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모두들 사진 찍느라 바빴습니다. 해를 보며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도 떠오르는 해를 향해 두 손을 모우셨습니다.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스님께서는 북한의 굶주리는 동포들이 하루 빨리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남북의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셨을 것입니다. nbsp 조금 더 오르니, 멀리 설산이 보였습니다. 설산에는 햇빛이 비쳐서 더 잘 보였습니다. 산꼭대기 불상 모셔진 곳을 관리하는 분이 저 멀리 보이는 설산이 ‘안나푸르나’이고 그 옆에 보이는 봉우리가 ‘다울라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공덕을 많이 지은 사람이 있나 봅니다. 200명 중 한 명이라도 부정을 타면 저렇게 깨끗하게 안 보일텐데 오늘은 정말 잘 보이네요. 하하하” 스님의 농담을 들으며 다들 즐거워했습니다. 새벽 3시에 출발해서 3시간동안 차를 타고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설산도 잘 보이고, 산 너머 너머로 멋진 일출도 보고,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아 기분이 더 좋았습니다. 제 사진기로는 멀리 설산이잘 잡히지 않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사진 올려봅니다. nbsp 4호차가 중간에 화장실 가느라 조금 늦게 도착을 해서 기다리는 시간에 산꼭대기까지 산책을 했습니다. 넓은 운동장이 있어 그 곳에서 전체 레크레이션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들이쉬며 산에서 몸을 풀었습니다.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nbsp 버스를 주차시켰던 곳에서 해온 밥으로 식사를 하고, 바로 출발했습니다. 오늘 쉬라바스티에 도착해야 하는데, 긴 여정이라 서둘러 버스에 탔습니다. 네팔과 인도 국경을 통과하면서 비자 업무에 여전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버스와 성지순례객들은 먼저 인도로 넘어가고, 실무자들이 내려 비자업무를 처리했습니다. 국경을 통과해서 쉬리바스티로 가는 길에 삐쁘라하와 석가족 진신사리탑 참배를 했습니다. “삐쁘라하와는 전체 8개의 사리탑 중 하나로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입니다. 이제 8개 진신사리탑 중 남아있는 3개 탑을 모두 참배했습니다. 1898년 영국인이 탑 터를 발굴할 때, ‘카필라바스투’라는 명문의 사리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후 1970년에 인도가 이미 발견된 사리용기보다 깊은 곳에서 ‘옴 데바푸트라 승원, 카필라바스투 비구상가’라고 새겨진 사리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이 두 용기는 델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사리용기 안에는 부처님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성지순례 마지막 날에 델리박물관에 가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할 수 있습니다.” 진신사리탑 앞에서 예불을 모시고,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하고, 스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nbsp 2600년전의 진신사리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삐쁘라하와 참배 후 버스를 타고 오랜 시간 이동을 했습니다. 가는 길에 차안에서 각 조별로 한명씩 대표로 자기소개와 함께 성지순례 소감을 밝히고, 노래를 했습니다. 대부분 어렵게 인도순례에 참가했고, 부처님과 스님께 감사의 말을 많이 전했습니다. 전체 소개가 끝나고, 차량별로 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로를 알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쉬라바스티 천축선원에 도착하니 오후 9시가 다 되었습니다. 5년전 왔을 때는 없던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불사가 엄청 많이 이루어졌구나 싶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저녁을 먹고, 이틀 동안 지내는 숙소라 간단한 빨래도 하고 휴식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45안거 중 24안거를 나셨다는 쉬라바스티에 왔습니다. 기원정사가 있는 곳입니다. 내일은 기원정사에서 하루 종일 일정이 있습니다. 기대됩니다. 내일 쉬라바스티 소식 전하겠습니다.
2013년 1월 12일 법륜스님의 하루(룸비니)
새벽 5시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새벽 예불을 했습니다. 예불 후 바로 어두운 새벽 길을 걸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룸비니동산으로 갔습니다. 입구에서부터 향을 사르고 정근을 하며 부처님 탄생지로 들어갔습니다. 아쑈카 석주가 이 곳이 룸비니동산임을 알려주는 듯 늠름히 서 있었습니다. 자리를 펴고 앉아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고,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 부처님의 탄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기록한 경전이 본생경입니다. 본생경에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중 발심 수행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맨 처음 선혜동자가 발심하여 수행하는 이야기로 시작되는데요, 사슴왕 이야기, 원숭이 왕 이야기 등 희생, 봉사, 보시 이야기로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전생의 공덕으로 선혜동자가 도솔천의 천주인 호명보살로 머물다가 카필라성의 주인인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로서 우리는 불교의 4대 성지를 모두 참배했습니다. 8대 성지 중에서는 여섯 번째 성지입니다.” 하시면서 발우공양을 할 때 소심경의 제일 첫 구절 독송을 하셨습니다. “불생 가비라 성도 마갈다 설법 바라나 입멸 구시라” 스님께서 온 마음으로 독송하시는 소리에 눈물이 났습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시고, 도를 이루시고, 법을 설하시고, 입멸에 드신 과정들이 쭉 그림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룸비니동산에 스님을 모시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감사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국과 부처님 탄생 설화를 조각해 둔 유적지를 둘러보고, 성스러운 곳에서 108배 정진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nbsp 룸비니동산에서 천천히 걸어서 대성 석가사로 돌아왔습니다. 식사준비가 되어 있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 후 버스를 타고 부처님께서 출가전 29년간 살았던 카필라성으로 갔습니다. 큰 보리수 아래 태자궁터라고 이야기한다는 유적지에 앉아 경전을 읽고 명상을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 부처님의 성장기, 농경제, 사문유관에 이어 유성 출가까지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싯다르타는 12살 때 농경제에 참가한 후부터 농부의 고통과 소의 큰 눈망울의 눈물이 생각나 깊은 사색에 드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후 사문유관을 통해 생노병사의 고해에 대한 사색에 더 깊이 빠져 들다가 북쪽문 밖에서 수행자를 만나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바로 출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속에 있으면서도 깊은 명상에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29살에 왕위를 뛰어넘어 출가를 했습니다. 세상을 뛰어넘어 출가를 했다고 해서 우리는 이를 유성출가라고 합니다.” “오늘 이 곳에서 사춘기 싯다르타가 농경제에서 가졌던 문제의식과 전정각산에서 정진하면서 고행주의와 쾌락주의 양극단 속에서 가졌던 문제의식, 이 두 가지 문제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출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점검해 봐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근본적으로 시작한다는 출가의 정신을 다시 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유성출가하셨다는 동쪽 성벽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대중들이 다 함께 ‘싯다르타의 출가’ 노래를 부르면서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떠올려 봤습니다. 동쪽 성벽을 지나 북쪽으로 갔습니다. 당시의 연못터도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자, 한 번 보세요. 부처님이 29살까지 살았던 카필라성의 자연환경입니다. 같이 자연환경을 보면서 걸어봅시다.” 하시는 스님을 따라 농작물을 심어놓은 논 사이로 걸었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nbsp 버스를 타고 다음 성지인 쿠단으로 갔습니다. “이 곳은 부처님이 출가 후 12년만에 돌아왔을 때 정반왕이 부처님을 마중나온 곳입니다. 석가족이 다 수다원과를 얻었는데 수다원과를 얻지 못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정반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왜 정반왕만 유독 수다원과를 증득하지 못했는지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정반왕에게는 부처님은 없고 오직 아들만 있었기 때문에 부처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가장 가까이에 부처님이 출현했는데도 깨닫지 못한 정반왕을 보면서 안타까우면서도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구나 싶었습니다. 쿠단에서 참배를 드리고 명상을 하고 랑그람으로 향했습니다. 랑그람 입구에서부터 정근을 하며 탑을 세 바퀴 돌고 예불을 하고 경전 독송을 했습니다. nbsp “랑그람은 부처님의 8개의 진신사리탑 중 하나로 꼴리족이 세운 탑입니다. 아쑈카왕이 진신사리탑 전체를 헐 때도 이 진신사리탑은 헐지 못했다고 합니다. 용왕이 아쑈카왕에게 자기가 사리를 더 잘 지킬 수 있다고 해서 헐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원형이 잘 보존된 귀한 탑입니다. 8개의 진신사리탑 중 신기하게도 부처님의 종족인 석가족과 외가인 꼴리족, 부처님이 제일 좋아하셨던 리차비족의 사리탑만 세상에 발견되어 알려져 있습니다.” nbsp “이 곳은 성지순례객 만 명 중 한 명이 겨우 왔다가는 곳입니다. 이 곳에 온 것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스님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기 때문에 몸은 좀 피곤할지 모르지만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nbsp 랑그람에서 대성 석가사로 돌아오는 길에 로히니강에 들렸습니다. 많이 가물어 석가족과 꼴리족이로히니강물을 서로 사용하기 위해서 다투다가 나중에 전쟁의 위기까지 갔을 때 부처님께서 직접 오셔서 전쟁을 막았던 일화가 있는 곳입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저들은 어리석어서 분명히 전쟁을 할 것이고, 피를 강물흘리듯이 흘릴 것이다. 내가 그 곳에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것이다.’ 부처님이 직접 현장에 오셔서, 양쪽 군대 대장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여러분 물이 귀합니까? 피가 귀합니까?’ 양족 군대 대장들이 ‘부처님 어찌 하찮은 물을 피에다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했을 때 부처님께서 ‘그렇다면 그 하찮은 물을 위해서 귀한 피를 물흘리듯이 하려고 하지 않소.’ 그들은 그 말에 감정에 복받쳐 있다가 깨어났습니다. 양 종족은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서로 협력해서 수로를 개척하고 물을 나뉘어 가지면서 가뭄을 극복했습니다. 오늘날 남북 관계도, 여야 관계도, 지역감정도, 부부싸움도 이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이런 싸움을 부처님께서 염려하셔서 스스로 찾아가셔서, 그들을 깨우쳐서 평화를 유지시켰습니다.이것이 불교의 평화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이 싸우든 말든 세상일이니까 외면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요청하지 않는다면 나와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어리석어서 분명히 큰 희생을 치를 것이라고 해서 싸움의 현장으로 가서 전쟁을 막았습니다. 이것이 평화에 대한 불교인들의 역할입니다. 지난번 열반경 서분에서도 보셨다시피 마가다국 아자타삿투왕이 밧지족을 침공하려고 할 때 전쟁을 해라, 마라가 아니라 ‘나라가 망하지 않는 7가지’를 설함으로 해서 그들을 깨우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불교의 제 1계율인 불살생, 비폭력이라고 하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더 나아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적극적인 평화운동이 부처님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로히니 강물을 가지고 싸운 것을 말린 일입니다. 이 경전을 읽을 때마다 남북간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감정에 치우친 서로의 지도자들을 설득해서 평화를 유지시키는 것, 평화를 공고히 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준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nbsp 로히니 강가에서 해당되는 경전을 서서 간단히 읽고 대성석가사로 돌아왔습니다. 식사 후 저녁 예불을 드리고 간단한 법회를 했습니다. “오늘은 열반당을 거쳐 끝으로 부처님의 일생을 마무리 하고, 새로이 부처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룸비니에서의 탄생, 카필라성에서의 어린 시절, 성도 후 처음 왔을 때 정반왕이 부처님을 환영했던 쿠단 유적지, 마야부인의 고향인 콜리족이 세운 사리탑인 랑그람, 부처님 평화의 정신을 나타내는 로히니 강을둘러보았습니다. 벌써 순례가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내일은 석가족이 세운 빠쁘리하와 사리탑을 친견할 예정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래 머무셨던 기원정사와 사위성을 순례하고 그 다음에 상카시아 참배를 하는 것으로 해서 10대 성지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경전도 많이 읽었죠? 경전에서는 오직 진리를 깨우치는 것, 바르게 살아가는 것, 마음을 맑게 가지는 것, 성내고 욕심내고 어리석지 말 것,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남을 괴롭히지 말고, 거짓말 하지 말고, 술 마시지 말 것, 항상 마음을 바르게 사념할 것, 해탈을 할 것, 세상에는 계급 차별, 남녀의 차별이 있지만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 갈등이 있을 때 감정을 가라앉히고 평화를 도모할 것, 이런 것을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부처님을 믿으면 복 많이 받는다, 좋은 데 간다.’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90는 경전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경전에 있는 것은 1도 제대로 실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불교와 부처님의 삶은 차이가 나서 혼란이 온다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고타마라는 한 수행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유심히 살펴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님께서 참으로 자상하게 하나 하나 일러주셔서 정말 많이 배우고 편안한 성지순례가 되고 있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2013년 1월 11일 법륜스님의 하루(쿠시나가르)
오늘은 열반당을 참배하고 룸비니로 가는 일정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새벽 일찍 일어나 짐을 싣고다음 순례를 위해 떠났습니다. 안개가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버스는 거북이 걸음처럼더듬듯 조심스레 천천히 운전을 해 나갔습니다. 어제 늦어서 가지 못했던 춘다의 공양터로 갔습니다. 안개 속에 고요히 춘다의 공양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nbsp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출현함에 두 가지 공양을 한 사람이 최상의 공덕을 얻으니 첫째가, 여래가 무상정득정각을 성취하려고 할 때 와서 받들어 공양한 사람이요, 둘째는 여래가 열반하려고 할 때에 마지막으로 와서 받들어 공양한 사람이니라’ 하셨습니다. 성도전에 올린 수자타의 공양은 누구나 다 이해가 되고 공경하게 되지만 부처님 열반 전의 마지막 공양인 춘다의 공양이 위대하다는 것은 아무나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으나 그 공양으로 인해 병을 얻어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려 하자 춘다는 괴로워 하였습니다. 이런 춘다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돌아가시게 되었지만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춘다의 공양이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막 공양의 공덕이 있음을 찬양함으로써 춘다를 위로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춘다의 공양터에 참배를 하는 것입니다. 수자타의 공양은 수자타의 지극한 정성을 보여준다면, 춘다의 공양은 바로 부처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공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춘다가 올린 ‘스카라 맛다바’를 드시고 식중독으로 심한 설사를 하셨습니다. 탈이 나셨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부처님은 어떤 경우에도 고요적정하셨습니다.”라는 스님 말씀이 큰 울림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위대하신 부처님, 거룩하신 부처님... 안개 가득 낀 춘다의 공양터에서 거룩하신 부처님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쿠시나가르에서의 하루를시작했습니다. 춘다의 공양터에서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을 생각하며 정성껏 예불을 드리고, 명상을 한 후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신 카쿳타강으로 향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병든 몸을 이끌고 대중들과 함께 카쿳타강에서 잠시 휴식을 하시고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시고 물을 드셨습니다. 이 물을 먹으면 모든 병이 나을 수도 있으니 이 강물에손도 씻고 물도 드셔 보세요.” 스님의 말씀에 따라 성지순례객들이 모두 버스에서 내려 카쿳타강가로 갔습니다.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몸을 씻으신 강에 우리도 손을 씻었습니다. 날이 차가운데 비해 물은 그리 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손은 씻으면서 물은 마시지 않자, 스님께서 먼저 물을 드시고떠서 먹여 주자, 주변에서 물을 떠 마시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아침의 맑은 강물에 손을 씻고, 부처님을 찬탄하며 다음 장소인 열반당으로 향했습니다. nbsp 안개는 계속 짓게 끼어 있었습니다. 열반당 들어가는 입구에서 정성껏 향을 피워 들고, 정근을 하면서 들어가는데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열반당 바깥에서 경전 독송을 하고 명상을 하고,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nbsp “아난 존자가 안타까워서 부처님께 물었어요. 부처님은 왕궁도 아니고 왜 이렇게 한적한 숲속에서열반에 드십니까? 그랬을 때 부처님께서 숲속에서 열반에 들어야 누구라도 친견하고 싶으면 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이나 평민이나 천민까지도, 산짐승, 들짐승까지도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숲속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법을 잘 받아서 깊고 미묘한 이치를 생각하고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법과 계율에 따라 올바로 행하면 그것을 일러 여래를 참으로 공양하는 것이라 하느니라.’며 청정한 계율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음 네 가지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과 다름없고, 부처님이 계시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중생들이 굶주려 있으면 그들에게 음식을 공양하여 목숨을 잇게 하고, 둘째는 중생들이 병들어 고통받고 있으면 그들을 보살피고 공양하여 편안하게 하여 줄 것이며, 셋째는 가난하고 고독한 자가 있으면 그들과 함께 하고 공양하며 보호하여 주고, 넷째는 청정하게 수행을 하는 이가 있으면 그를 위하여 옷과 밥을 공양하고 외호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하셨습니다. JTS가 설립되어 수자타아카데미, 필리핀, 북한돕기 등을 하고 있는 것은 부처님의 이 말씀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마지막 설법에서 ‘마치 낙숫물이 떨어져 돌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이 끊임없이 정진을 해라.’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근본 정신을 이어받아 쉼없이 수행정진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불자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스님께서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과 열반 전의 모습들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시는데, 스님의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마음과 공경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위대하신 부처님, 거룩하신 부처님...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부처님 열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지고, 부처님이 바로 옆에 계신 듯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열반의 마지막 순간까지 여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신 그 모습이 실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열반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예불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스님의 발원문을 들으며 사람들이 소리없이 눈물을 닦았습니다. 스님께서는 발원을 하시면서 굶주리는 북한동포들이 빨리 굶주림에서 벗어나기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셨습니다. 스님은 언제나 북한, 통일, 평화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안온하게 계십시오. 이제 남은 일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마지막 스님의 마지막 발원에 더 숙연해지고, 많은 사람들이nbsp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nbsp 열반당에서 나와 부처님 화장터인 라마바르총으로 향했습니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는 장례절차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장례절차는 재가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수행자들은 쉼없이 정진하라고 하셨습니다.아난존자가 세 번을 물었을 때 전륜성왕과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내려오는 풍습대로, 전례대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왕족이었기 때문에 왕족의 예에 맞게 장례를 하도록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다비 모습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nbsp “스님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같애요. 스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 그 때 그 상황이 그림처럼 그대로 떠올라요.” 참가자 중 한 분이 스님 말씀을 듣고는 감탄하며 이야기합니다. 스님과 함께 순례를 다녀보면 경주순례 때는 당시 신라에 사셨던 분 같고, 중국역사기행을 가면 발해 당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같고, 인도에 오면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큼 그 시대의 상황들은 잘 묘사해 주셔서, 절로 마음이 동하고, 감동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라마바르총에서 나와 룸비니로 향했습니다. 인도, 네팔 국경에서 두 시간 넘게 비자업무를 한 후 네팔 국경을 넘어 룸비니 대성 석가사로 이동했습니다. nbsp 인도와 네팔 국경은 외국인들은 들고 나는 것이 조금 까다로운 듯 했지만 현지인들은 그냥 이름만 국경이지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국경을 저렇게 자유롭게 오가는데,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합니다. 빨리 통일이 되어야 우리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텐데...”하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남과 북도 네팔과 인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대성 석가사에 가니 맛있는 저녁밥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nbsp 오랜만에 만나는 청국장, 김치에 저녁밥을 가득 가득 담아 먹었습니다. 저녁 예불을 하고, 스님께서 대성 석가사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이 곳 네팔 룸비니 대성 석가사는 용성조사님의 유훈 10사목 중 부처님 4대 성지를 잘 가꾸라는 유지에 따라 불심도문큰스님이 발원하시고 법신스님이 18년을 사시면서 대작불사를 완성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 탄생한 도량에 한국불교의 위용을 드러내는 불사를 했습니다. 부처님 성지에 가면 한국절은한 군데도 제대로 된 데가 없어서 항상 저희들도 외국절에서 숙박을 했는데 룸비니는 대성 석가사가 규모도 크고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편의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법신스님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냅시다.” 스님 말씀에 이어 대성 석가사 주지이신 법신스님의 환영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법신스님을 뵈면 옆집 아저씨처럼 편안한 느낌입니다. 저도 오랜만에 뵈어서 좋았습니다. 대성 석가사에서 이틀을 자게 되어서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빨래도 했습니다. 밥도 맛있고, 씻기도 좋고, 잠자리도 괜찮은 편이라 다들 편안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동산, 부처님 29년간 성장하고 살아온 카필라성, 부처님 성도 후정반왕이 부처님을 마중나온 쿠단, 부처님의 평화의 정신을 잘 알 수 있는 로히니강 등을 참배할 계획입니다. 쿠시나가르를 참배하면서, 부처님의 열반의 과정들은 함께 하면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내일은 8대 성지 중의 하나인 룸비니 순례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nbsp
2013년 1월 10일 법륜스님의 하루(바이샬리)
아침 일찍 라즈기르에서 바이샬리로 출발했습니다. 파트나를 흐르는 강가강은 4개의 강이 모여 큰 강가강을 이루는데 안개가 심해서 원래 일정보다 30분 일찍 일어나 3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2개방의 사람들이 3시 30분 출발할 때까지 자는 바람에 20분 늦은 3시 50분에 출발했습니다. 내일부터는 방을 미리 두드려서 깨워야 할 것 같습니다. 바이샬리로 가는 길은 역시 안개가 심했습니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아 차가 속도를 내지 못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시간도 줄일 겸 차에서 먼저 바이샬리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의 8대 성지 가운데 사르나트, 보드가야, 라즈기르에 이어 네 번째로 바이샬리에 가고 있습니다. 바이샬리는 굉장히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현재 유적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첫 번째,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당시 인도사회에서 제일 좋아했던 도시입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를 보려면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을 보라고 하셨습니다.바이샬리는 시민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가지는 공화제 국가였습니다. 상가는 바이샬리가 모델이었습니다. 리차비족과 밧지족이 바이샬리를 이루는 종족이었어요. 열반경에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으로 밧지족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7가지를 설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밧지족이 자주 모임을 갖는다는 것은 독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재를 하는데는 자주 모임을 할필요가 없잖아요. 모일 때 의기투합한다는 것은 민주적이면서도 통합적인 것을 말하죠.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거나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준법정신이 투철하다는 것입니다. 노인을 경애하고 존중하며 숭배하고 공양하고, 양가의 부인이나 규수를 폭력으로 붙잡아 가거나 구속하거나 가두지 않는다는 것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지를 잘 가꾸냐는 전통문화를 잘 보호한다는 것이고, 위대한 수행자를 초빙해서 잘 받든다는 것은 세계적인 석학이나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존중해서 정치에 잘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이 중 하나만 이뤄져도 좋을텐데, 이 7가지가 이뤄지는 것은 오늘날 봐도 이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잖아요. 이것이 부처님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국가형태였습니다. 바이샬리가 공화국 제도의 기원이라 해서 지금도 인도 중앙정부에서 국회가 개원할 때면 관리들이 카라우나 포칼 연못에서 물을 떠 가지고 가서 성수로 사용하며 의식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공화제의 원류라고 보는 것이죠. 두 번째,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열반을 선언한 곳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안거 장소였고, 마지막 안거 끝나고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한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곳에 왔을 때 아주 유명한 암나팔리라는 기생이 있었어요. 사교계의 여왕, 유곽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어요. 암나팔리가 부처님께 귀의를 하고 암나팔리 망고동산을 기증했어요.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 오셔서 어떤 망고나무 아래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유녀 암마팔리의 망고동산이었어요. 그래서 암나팔리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아침 공양 초대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침묵으로 승낙을 하셨어요. 그런데 이 나라 왕족이 암나팔리보다 뒤에 부처님께 갔어요. 암나팔리에게 십만금을 줄테니 부처님 공양 초대권을 넘겨달라고 했어요. 암나팔리는 이 바이샬리 전체를 다 줘도 안된다고 했어요. 부처님에게 귀의한 사람은 비록 유녀일지라도 이렇게 당당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유녀 암나팔리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께 공양 올린 유명한 사건이 있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바이샬리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도시였습니다. 여성들이 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샤키족의 여성들이 세 번이나 청했는데도 승낙하지 않았어요. 부처님이 바이샬리로 오셨어요. 샤키족 여성들이 카필라바스투에서 이 곳 바이샬리까지 맨발로 험난한 길을 따라왔습니다. 이 곳에서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승낙하셨어요. 바이샬리는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한 곳입니다. 당시 여성은 삼종지도를 걸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결혼하면 남편,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주인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출가한다는 것은 여성이 스스로 한 사람으로 대우받는, 소위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인격을 인정받는다는 것이죠. 누구의 딸, 누구의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갖는 거예요.바이샬리는 세계 최초의 여성해방의 성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비구니 제도가 있지만 남방에서는 없어졌습니다. 남방에서 비구니제도를 복원하려고 해도 사회적 저항이 심합니다. 여성이 최초로 출가해서 비구니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에 이 곳에서 비구니 수계를 한다면 저항이 적지 않겠나 하는 생각합니다. 또 이 곳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 2결집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하는 유마경의 배경이 이 바이샬리입니다. 유마의 집, 유마거사의 집터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이 도시가 진보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이샬리가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서로 가져 가서 기념탑을 쌓겠다고 할 때 공평하게 8등분으로 나누어서 각각 탑을 쌓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이샬리 리차비족이 가져가서 모셨습니다. 8개 진신사리탑 중 3개가 발견되었는데그 중 하나인 바이샬리 진신사라탑터에 지금 우리가 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신사리를 모신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기초만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바이샬리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것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입니다.” 스님께서 바이샬리에 대한 설명을 다 해 주셔서 전체적으로 이해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저도 바이샬리란 도시가 좋습니다. 스님으로부터 차안에서 전체적으로 설명을 듣고, 진신사리탑 앞에 내려 기도를 하다보니 안개가 조금 걷히면서 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nbsp 성지순례객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세 바퀴 돌면서 정근을 하고, 자리에 돌아와 예불을 올렸습니다. 경전 독송을 하고 스님으로부터 진신사리탑에 대한 설명을 듣고 부처님을 생각하며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경전 중 여성 출가에 대한 부분을 독송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의 당당함을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진리에 대한 열의가 느껴져서 눈물이 나고,마하파자파티부인과 부처님, 아난다의 대화 속에 나타난 믿음과 사랑이 느껴져서 눈물이 났습니다.그리고 지금의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까지의 많은 여성들의 눈물과 피땀이 있었음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습니다. 최초의 비구니 수계를 받은 마하파자파티는 부처님의 이모이자 새어머니입니다. 진신사리탑터에서 국제선원 관계자를 만났는데, 가까이 있는 베트남 절에서 세계여성불자대회인‘샤카디타대회’가 열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길에 스님께서 잠시 들러서, 전체 대중들 공양비에 보태라고 보시금을 전달하고 원후봉밀터로 향했습니다. nbsp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에서 기도를 하고,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원후봉밀터는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발우가 제자들 것 사이에 섞여 있었는데, 원숭이가 부처님 발우에 꿀을 가득채워 공양했다는 곳입니다. nbsp 식사 후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케사리아탑터를 참배한 후 쿠시나가라로 향했습니다. 케사리아대탑은 부처님이 바이샤르를 떠나자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을 좇아 칸타키강까지 왔습니다. 부처님은 칸타키강을 건너시고, 증표로 부처님의 발우를 바이샤르 사람들에게 띄워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을 기념해 세운 탑이 케사리아대탑입니다. nbsp 춘다의 공양터에 들릴 예정이었는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이동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내일로 미뤘습니다. 사탕수수 수확철이라 사탕수수를 실은 트랙터를 비롯, 소와 말이 끄는 수레, 화물트럭들이 도로를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차가 좋아도 어쩌겠어요? 저렇게 우마가 끄는 수레가 앞에 가고 있으니 속도를 낼 수도 없죠. 인도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한국 사람들만 늦다고 답답해하는 거예요. 이런 길을 가봐야 인도에 와봤다 할 수 있어요. 보세요. 중앙선 개념도 없잖아요?” 큰 도로인데도 깊게 파여 있어서 조수들이 뛰어가 옆에 있는 큰 돌을 바퀴 밑에 받치고 겨우 차가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인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거예요. 길이 많이 좋아져서 이 정도입니다. 여기에 비까지 오면 더 어렵지요. 진흙탕이 되어서 시속 20km도 못 갑니다.” nbsp 일정표의 2시간이 실제로는 4시간이 되었습니다. 4시간동안 중간 중간 자기도 하고, 구경도 하면서쿠시나가르에 도착했습니다. 쿠시나가르 대한사에 도착해서 법당 참배를 하고, 미리 준비된 저녁식사를 하고, 인근에 있는 중국절, 티벳절, 스리랑카절로 나눠서 들어갔습니다. 내일 먹을 밥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절 자체적으로 발전기를 돌려서 쓰다보니, 전력이 약해서 밥솥 3개만 꽂으면 전체 전원이 나가 버립니다. 스리랑카절은 전원 코드도 1층에만 있어서, 16개조 밥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내일은 춘다의 공양터, 카쿳타 강, 열반당, 부처님 화장터에 갔다가 네팔로 이동하는 일정입니다.nbsp내일 뵙겠습니다.
2013년 1월 9일 법륜스님의 하루(라즈기르)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5시에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라즈기르로 향했습니다. 짙게 안개가 끼어 차가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라즈기르에 도착했습니다. 날도 추웠습니다. 스님께서도 “무슨 날씨가 이렇게 춥나?”하면서 발토시를 하셨습니다. 인도가 많이 춥다고 옷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해서 설마 하면서도 겨울 옷 준비를 많이 해 왔는데,정말 날이 많이 추워서 안 입을 줄 알았던 겨울옷을 겹쳐 입고 인도의 새벽을 보내고 있습니다. “라즈기르는 북인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꽃피우던 곳으로, 당시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였습니다. 라즈기르는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고장입니다. 부처님은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출가하여 이 곳에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하였고, 빔비사라왕과 첫 만남을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성도 후 1000명의 비구를 이끌고 돌아와 오랫동안 머물면서 교화설법하여 빔비사라왕은물론 사리풋트라와 목갈리나, 마하 가섭 등 유명한 제자의 귀의를 받고 최초의 불교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스님께서 라즈기르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라즈기르에서 맨 먼저 간 곳은 영축산이었습니다. 영축산 오르는 입구에는 빔비사라왕이 말에서 내려 부처님을 뵈러 올라가는 빔비사라 로드가 시작되는 곳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선생경이 설해지기도 했고, 데바닷타가 돌을 굴려부처님 발을 다쳤을 때, 아난존자가 이 곳까지 부처님을 엎고 내려와 지이바카로부터 응급 처치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는 스님의 말씀에 그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nbsp 영축산으로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부처님은 이 산에 머무시면서 반야심경, 법화경 등 잘 알려진 대승경전이 설하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계셨던 곳, 빔비사라왕이 직접 이 곳까지 걸어와서 부처님을 친견하던 곳, 부처님의 제자들이 수행하던 굴들, 데바닷다가 돌을 굴린 곳... 2600년전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가깝게 다가오고, 상상 속의 부처님이 아니라 현실의 살아계셨던부처님으로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nbsp 영축산 정상에서 참배를 하고,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부처님 당시를 생각하며 명상을 했습니다. 부처님 이 곳에 앉아 설법을 하셨던 부처님... 스님께서는 영축산을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영축산과 부처님, 빔비사라왕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축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빔비사라왕 감옥터로 이동했습니다. 가는 길 양 옆에 부처님의 주치의였던 지이바카 망고동산과 집터를 지나쳐 갔습니다. 빔비사라왕 감옥터에서는 빔비사라왕과 위제희 부인, 아들 아자타삿투, 데바닷다에 대한 이야기를재미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곳은 또한 위제희 부인을 위해서 관무량수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하다고 하셨습니다. nbsp 이 곳에서 각 조별로 아침을 먹고 다음 순례 장소인 죽림정사로 향했습니다. 죽림정사에서도 참배를 하고 경전독송을 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스님께서 죽림정사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죽림정사는 라즈기르 북문 밖으로 나가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위치한 최초의 정사입니다. 라즈기르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공양을 하겠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부처님이 거절하시자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기증한 곳이 죽림정사입니다. 코살라국의 수닷타 장자가 사위성에 지은 기원정사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죽림정사는 대나무가 많았으나, 2년 전 ‘대나무 꽃’이 피어 모두 죽고, 새롭게 대나무숲을 조성하고있었습니다. nbsp 죽림정사를 나와 칠엽굴로 향했습니다. 춥던 날이 해가 나니 금새 따뜻해졌습니다. 칠엽굴은 산으로 1.5km 가량 올라가야 해서, 땀을 흘리며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칠엽굴은 부처님과 직접 관계가 있는 곳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부처님 말씀이 잘못 전해질 수 있어서 이 곳 칠엽굴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정되는 최고의 장로 500명이 모여 부처님이 말씀하셨던 경과 율을 결집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가장 많이 들었던 아난다 존자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 부처님께서...’하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면, 나머지 제자들이 ‘맞다’, 혹은 ‘거기에는 이런 부분이 더 들어간다’ 하며, 부처님이 말씀하셨던 것을정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제 1결집이라고 합니다. 이후 제 2결집은 바이샬리에서, 제 3결집은파탈리푸트라에서 있었습니다.” 칠엽굴 입구에 앉아 스님께서 당시 결집할 때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nbsp 칠엽굴에서 천천히 내려와 나란다대학으로 이동했습니다. 나란다대학은 2팀으로 나눠서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쁘리앙카지와 JTS 실무자 김혜원 님이 통역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나란다대학은 불교대학이지만 불교만 가르친 것이 아니고 힌두교라든지 다른 종교나 철학이나 수학 등 전 학문을 가르친 종합대학이었다고 합니다. 7세기경 현장법사가 이 곳에 왔을 때는 학생 수가 만명, 선생이 천 오백명이었다고 합니다.” 스님에게 나란다대학에 대한 전체적인 말씀을 듣고, 나란다대학에 들어가서 구체적인 설명은 현장의 가이드로부터 들었습니다. 쁘리앙카지와 김혜원씨가 통역을 해줘서 현장 곳곳을 다니면서 자세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1km만 발굴했는데 그 길이가 10km나 되었다고 합니다. 10분의 1만 발굴된 상태라고 합니다.내부에는 불상 모신 곳, 강당과 침실, 도서관, 목욕탕 등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당시 어마어마한 학교였겠구나 싶었습니다. 대단했습니다. 7세기까지 세계 최고의 대학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슬림이 침공해 대부분 파괴하고, 도서관은 6개월이나 불탔다고 합니다. 지금도 도서관 벽면이 불에 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오늘은 라즈기르의 영축산, 빔비사라왕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대학까지 순례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당시 가장 진보적인 도시였다고 하는 바이샬리로 갑니다. 바이샬리라는 도시를 떠올리면 부처님이 쿠시나가르로 가시기전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돌리듯이 천천히 바이샬리를 돌아보셨다는 장면이 항상 떠오릅니다. 내일은 바이샬리 순례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