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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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3일 법륜스님의 하루(탄센, 삐쁘라하와)

벌써 성지순례 시작한 지 열흘이 넘었습니다. 참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8대 성지 중 6개를 순례했고, 쉬라바스티와 상카시아를 남겨 두고, 오늘은 멀리 설산이 보이는 탄센으로 가기 위해 새벽 3시에 대성 석가사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어두운 새벽을 버스를 타고 달렸습니다. 눈을 뜨니 새벽 6시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 모르고 잤습니다. “아직 해가 안 떴어요. 올라가다 보면 해가 뜨겠네요.” 하면서 스님께서 대중들을 이끌고 앞서 나가섰습니다. 탄센은 인도와는 날씨가 완전 달랐습니다. “여기는 옛 탄센왕국입니다. 대부분이 불교인이고, 몽골리안이예요. 그래서 여기는 깨끗해요. 집집마다 화장실이 다 있으니, 인도에서처럼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면 안 됩니다. 안개도 안 끼고 공기도 좋죠? 여기가 해발 2000미터입니다. 안개가 우리 발밑에 있는 거예요.” 꼭 우리나라 맑은 가을 날씨 같았습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능성이에 도착했을 때 아침 해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얼굴을 보여주는 해를 보며 다 같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모두들 사진 찍느라 바빴습니다. 해를 보며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도 떠오르는 해를 향해 두 손을 모우셨습니다.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스님께서는 북한의 굶주리는 동포들이 하루 빨리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남북의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셨을 것입니다. nbsp 조금 더 오르니, 멀리 설산이 보였습니다. 설산에는 햇빛이 비쳐서 더 잘 보였습니다. 산꼭대기 불상 모셔진 곳을 관리하는 분이 저 멀리 보이는 설산이 ‘안나푸르나’이고 그 옆에 보이는 봉우리가 ‘다울라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공덕을 많이 지은 사람이 있나 봅니다. 200명 중 한 명이라도 부정을 타면 저렇게 깨끗하게 안 보일텐데 오늘은 정말 잘 보이네요. 하하하” 스님의 농담을 들으며 다들 즐거워했습니다. 새벽 3시에 출발해서 3시간동안 차를 타고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설산도 잘 보이고, 산 너머 너머로 멋진 일출도 보고,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아 기분이 더 좋았습니다. 제 사진기로는 멀리 설산이잘 잡히지 않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사진 올려봅니다. nbsp 4호차가 중간에 화장실 가느라 조금 늦게 도착을 해서 기다리는 시간에 산꼭대기까지 산책을 했습니다. 넓은 운동장이 있어 그 곳에서 전체 레크레이션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들이쉬며 산에서 몸을 풀었습니다.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nbsp 버스를 주차시켰던 곳에서 해온 밥으로 식사를 하고, 바로 출발했습니다. 오늘 쉬라바스티에 도착해야 하는데, 긴 여정이라 서둘러 버스에 탔습니다. 네팔과 인도 국경을 통과하면서 비자 업무에 여전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버스와 성지순례객들은 먼저 인도로 넘어가고, 실무자들이 내려 비자업무를 처리했습니다. 국경을 통과해서 쉬리바스티로 가는 길에 삐쁘라하와 석가족 진신사리탑 참배를 했습니다. “삐쁘라하와는 전체 8개의 사리탑 중 하나로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입니다. 이제 8개 진신사리탑 중 남아있는 3개 탑을 모두 참배했습니다. 1898년 영국인이 탑 터를 발굴할 때, ‘카필라바스투’라는 명문의 사리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후 1970년에 인도가 이미 발견된 사리용기보다 깊은 곳에서 ‘옴 데바푸트라 승원, 카필라바스투 비구상가’라고 새겨진 사리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이 두 용기는 델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사리용기 안에는 부처님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성지순례 마지막 날에 델리박물관에 가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할 수 있습니다.” 진신사리탑 앞에서 예불을 모시고,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하고, 스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nbsp 2600년전의 진신사리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삐쁘라하와 참배 후 버스를 타고 오랜 시간 이동을 했습니다. 가는 길에 차안에서 각 조별로 한명씩 대표로 자기소개와 함께 성지순례 소감을 밝히고, 노래를 했습니다. 대부분 어렵게 인도순례에 참가했고, 부처님과 스님께 감사의 말을 많이 전했습니다. 전체 소개가 끝나고, 차량별로 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로를 알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쉬라바스티 천축선원에 도착하니 오후 9시가 다 되었습니다. 5년전 왔을 때는 없던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불사가 엄청 많이 이루어졌구나 싶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저녁을 먹고, 이틀 동안 지내는 숙소라 간단한 빨래도 하고 휴식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45안거 중 24안거를 나셨다는 쉬라바스티에 왔습니다. 기원정사가 있는 곳입니다. 내일은 기원정사에서 하루 종일 일정이 있습니다. 기대됩니다. 내일 쉬라바스티 소식 전하겠습니다.

2013.01.18. 15,073 읽음 댓글 7개

2013년 1월 12일 법륜스님의 하루(룸비니)

새벽 5시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새벽 예불을 했습니다. 예불 후 바로 어두운 새벽 길을 걸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룸비니동산으로 갔습니다. 입구에서부터 향을 사르고 정근을 하며 부처님 탄생지로 들어갔습니다. 아쑈카 석주가 이 곳이 룸비니동산임을 알려주는 듯 늠름히 서 있었습니다. 자리를 펴고 앉아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고,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 부처님의 탄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기록한 경전이 본생경입니다. 본생경에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중 발심 수행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맨 처음 선혜동자가 발심하여 수행하는 이야기로 시작되는데요, 사슴왕 이야기, 원숭이 왕 이야기 등 희생, 봉사, 보시 이야기로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전생의 공덕으로 선혜동자가 도솔천의 천주인 호명보살로 머물다가 카필라성의 주인인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로서 우리는 불교의 4대 성지를 모두 참배했습니다. 8대 성지 중에서는 여섯 번째 성지입니다.” 하시면서 발우공양을 할 때 소심경의 제일 첫 구절 독송을 하셨습니다. “불생 가비라 성도 마갈다 설법 바라나 입멸 구시라” 스님께서 온 마음으로 독송하시는 소리에 눈물이 났습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시고, 도를 이루시고, 법을 설하시고, 입멸에 드신 과정들이 쭉 그림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룸비니동산에 스님을 모시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감사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국과 부처님 탄생 설화를 조각해 둔 유적지를 둘러보고, 성스러운 곳에서 108배 정진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nbsp 룸비니동산에서 천천히 걸어서 대성 석가사로 돌아왔습니다. 식사준비가 되어 있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 후 버스를 타고 부처님께서 출가전 29년간 살았던 카필라성으로 갔습니다. 큰 보리수 아래 태자궁터라고 이야기한다는 유적지에 앉아 경전을 읽고 명상을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 부처님의 성장기, 농경제, 사문유관에 이어 유성 출가까지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싯다르타는 12살 때 농경제에 참가한 후부터 농부의 고통과 소의 큰 눈망울의 눈물이 생각나 깊은 사색에 드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후 사문유관을 통해 생노병사의 고해에 대한 사색에 더 깊이 빠져 들다가 북쪽문 밖에서 수행자를 만나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바로 출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속에 있으면서도 깊은 명상에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29살에 왕위를 뛰어넘어 출가를 했습니다. 세상을 뛰어넘어 출가를 했다고 해서 우리는 이를 유성출가라고 합니다.” “오늘 이 곳에서 사춘기 싯다르타가 농경제에서 가졌던 문제의식과 전정각산에서 정진하면서 고행주의와 쾌락주의 양극단 속에서 가졌던 문제의식, 이 두 가지 문제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출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점검해 봐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근본적으로 시작한다는 출가의 정신을 다시 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유성출가하셨다는 동쪽 성벽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대중들이 다 함께 ‘싯다르타의 출가’ 노래를 부르면서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떠올려 봤습니다. 동쪽 성벽을 지나 북쪽으로 갔습니다. 당시의 연못터도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자, 한 번 보세요. 부처님이 29살까지 살았던 카필라성의 자연환경입니다. 같이 자연환경을 보면서 걸어봅시다.” 하시는 스님을 따라 농작물을 심어놓은 논 사이로 걸었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nbsp 버스를 타고 다음 성지인 쿠단으로 갔습니다. “이 곳은 부처님이 출가 후 12년만에 돌아왔을 때 정반왕이 부처님을 마중나온 곳입니다. 석가족이 다 수다원과를 얻었는데 수다원과를 얻지 못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정반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왜 정반왕만 유독 수다원과를 증득하지 못했는지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정반왕에게는 부처님은 없고 오직 아들만 있었기 때문에 부처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가장 가까이에 부처님이 출현했는데도 깨닫지 못한 정반왕을 보면서 안타까우면서도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구나 싶었습니다. 쿠단에서 참배를 드리고 명상을 하고 랑그람으로 향했습니다. 랑그람 입구에서부터 정근을 하며 탑을 세 바퀴 돌고 예불을 하고 경전 독송을 했습니다. nbsp “랑그람은 부처님의 8개의 진신사리탑 중 하나로 꼴리족이 세운 탑입니다. 아쑈카왕이 진신사리탑 전체를 헐 때도 이 진신사리탑은 헐지 못했다고 합니다. 용왕이 아쑈카왕에게 자기가 사리를 더 잘 지킬 수 있다고 해서 헐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원형이 잘 보존된 귀한 탑입니다. 8개의 진신사리탑 중 신기하게도 부처님의 종족인 석가족과 외가인 꼴리족, 부처님이 제일 좋아하셨던 리차비족의 사리탑만 세상에 발견되어 알려져 있습니다.” nbsp “이 곳은 성지순례객 만 명 중 한 명이 겨우 왔다가는 곳입니다. 이 곳에 온 것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스님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기 때문에 몸은 좀 피곤할지 모르지만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nbsp 랑그람에서 대성 석가사로 돌아오는 길에 로히니강에 들렸습니다. 많이 가물어 석가족과 꼴리족이로히니강물을 서로 사용하기 위해서 다투다가 나중에 전쟁의 위기까지 갔을 때 부처님께서 직접 오셔서 전쟁을 막았던 일화가 있는 곳입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저들은 어리석어서 분명히 전쟁을 할 것이고, 피를 강물흘리듯이 흘릴 것이다. 내가 그 곳에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것이다.’ 부처님이 직접 현장에 오셔서, 양쪽 군대 대장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여러분 물이 귀합니까? 피가 귀합니까?’ 양족 군대 대장들이 ‘부처님 어찌 하찮은 물을 피에다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했을 때 부처님께서 ‘그렇다면 그 하찮은 물을 위해서 귀한 피를 물흘리듯이 하려고 하지 않소.’ 그들은 그 말에 감정에 복받쳐 있다가 깨어났습니다. 양 종족은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서로 협력해서 수로를 개척하고 물을 나뉘어 가지면서 가뭄을 극복했습니다. 오늘날 남북 관계도, 여야 관계도, 지역감정도, 부부싸움도 이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이런 싸움을 부처님께서 염려하셔서 스스로 찾아가셔서, 그들을 깨우쳐서 평화를 유지시켰습니다.이것이 불교의 평화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이 싸우든 말든 세상일이니까 외면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요청하지 않는다면 나와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어리석어서 분명히 큰 희생을 치를 것이라고 해서 싸움의 현장으로 가서 전쟁을 막았습니다. 이것이 평화에 대한 불교인들의 역할입니다. 지난번 열반경 서분에서도 보셨다시피 마가다국 아자타삿투왕이 밧지족을 침공하려고 할 때 전쟁을 해라, 마라가 아니라 ‘나라가 망하지 않는 7가지’를 설함으로 해서 그들을 깨우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불교의 제 1계율인 불살생, 비폭력이라고 하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더 나아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적극적인 평화운동이 부처님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로히니 강물을 가지고 싸운 것을 말린 일입니다. 이 경전을 읽을 때마다 남북간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감정에 치우친 서로의 지도자들을 설득해서 평화를 유지시키는 것, 평화를 공고히 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준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nbsp 로히니 강가에서 해당되는 경전을 서서 간단히 읽고 대성석가사로 돌아왔습니다. 식사 후 저녁 예불을 드리고 간단한 법회를 했습니다. “오늘은 열반당을 거쳐 끝으로 부처님의 일생을 마무리 하고, 새로이 부처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룸비니에서의 탄생, 카필라성에서의 어린 시절, 성도 후 처음 왔을 때 정반왕이 부처님을 환영했던 쿠단 유적지, 마야부인의 고향인 콜리족이 세운 사리탑인 랑그람, 부처님 평화의 정신을 나타내는 로히니 강을둘러보았습니다. 벌써 순례가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내일은 석가족이 세운 빠쁘리하와 사리탑을 친견할 예정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래 머무셨던 기원정사와 사위성을 순례하고 그 다음에 상카시아 참배를 하는 것으로 해서 10대 성지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경전도 많이 읽었죠? 경전에서는 오직 진리를 깨우치는 것, 바르게 살아가는 것, 마음을 맑게 가지는 것, 성내고 욕심내고 어리석지 말 것,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남을 괴롭히지 말고, 거짓말 하지 말고, 술 마시지 말 것, 항상 마음을 바르게 사념할 것, 해탈을 할 것, 세상에는 계급 차별, 남녀의 차별이 있지만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 갈등이 있을 때 감정을 가라앉히고 평화를 도모할 것, 이런 것을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부처님을 믿으면 복 많이 받는다, 좋은 데 간다.’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90는 경전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경전에 있는 것은 1도 제대로 실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불교와 부처님의 삶은 차이가 나서 혼란이 온다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고타마라는 한 수행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유심히 살펴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님께서 참으로 자상하게 하나 하나 일러주셔서 정말 많이 배우고 편안한 성지순례가 되고 있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2013.01.18. 18,844 읽음 댓글 9개

2013년 1월 11일 법륜스님의 하루(쿠시나가르)

오늘은 열반당을 참배하고 룸비니로 가는 일정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새벽 일찍 일어나 짐을 싣고다음 순례를 위해 떠났습니다. 안개가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버스는 거북이 걸음처럼더듬듯 조심스레 천천히 운전을 해 나갔습니다. 어제 늦어서 가지 못했던 춘다의 공양터로 갔습니다. 안개 속에 고요히 춘다의 공양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nbsp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출현함에 두 가지 공양을 한 사람이 최상의 공덕을 얻으니 첫째가, 여래가 무상정득정각을 성취하려고 할 때 와서 받들어 공양한 사람이요, 둘째는 여래가 열반하려고 할 때에 마지막으로 와서 받들어 공양한 사람이니라’ 하셨습니다. 성도전에 올린 수자타의 공양은 누구나 다 이해가 되고 공경하게 되지만 부처님 열반 전의 마지막 공양인 춘다의 공양이 위대하다는 것은 아무나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으나 그 공양으로 인해 병을 얻어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려 하자 춘다는 괴로워 하였습니다. 이런 춘다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돌아가시게 되었지만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춘다의 공양이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막 공양의 공덕이 있음을 찬양함으로써 춘다를 위로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춘다의 공양터에 참배를 하는 것입니다. 수자타의 공양은 수자타의 지극한 정성을 보여준다면, 춘다의 공양은 바로 부처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공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춘다가 올린 ‘스카라 맛다바’를 드시고 식중독으로 심한 설사를 하셨습니다. 탈이 나셨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부처님은 어떤 경우에도 고요적정하셨습니다.”라는 스님 말씀이 큰 울림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위대하신 부처님, 거룩하신 부처님... 안개 가득 낀 춘다의 공양터에서 거룩하신 부처님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쿠시나가르에서의 하루를시작했습니다. 춘다의 공양터에서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을 생각하며 정성껏 예불을 드리고, 명상을 한 후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신 카쿳타강으로 향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병든 몸을 이끌고 대중들과 함께 카쿳타강에서 잠시 휴식을 하시고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시고 물을 드셨습니다. 이 물을 먹으면 모든 병이 나을 수도 있으니 이 강물에손도 씻고 물도 드셔 보세요.” 스님의 말씀에 따라 성지순례객들이 모두 버스에서 내려 카쿳타강가로 갔습니다.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몸을 씻으신 강에 우리도 손을 씻었습니다. 날이 차가운데 비해 물은 그리 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손은 씻으면서 물은 마시지 않자, 스님께서 먼저 물을 드시고떠서 먹여 주자, 주변에서 물을 떠 마시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아침의 맑은 강물에 손을 씻고, 부처님을 찬탄하며 다음 장소인 열반당으로 향했습니다. nbsp 안개는 계속 짓게 끼어 있었습니다. 열반당 들어가는 입구에서 정성껏 향을 피워 들고, 정근을 하면서 들어가는데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열반당 바깥에서 경전 독송을 하고 명상을 하고,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nbsp “아난 존자가 안타까워서 부처님께 물었어요. 부처님은 왕궁도 아니고 왜 이렇게 한적한 숲속에서열반에 드십니까? 그랬을 때 부처님께서 숲속에서 열반에 들어야 누구라도 친견하고 싶으면 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이나 평민이나 천민까지도, 산짐승, 들짐승까지도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숲속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법을 잘 받아서 깊고 미묘한 이치를 생각하고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법과 계율에 따라 올바로 행하면 그것을 일러 여래를 참으로 공양하는 것이라 하느니라.’며 청정한 계율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음 네 가지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과 다름없고, 부처님이 계시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중생들이 굶주려 있으면 그들에게 음식을 공양하여 목숨을 잇게 하고, 둘째는 중생들이 병들어 고통받고 있으면 그들을 보살피고 공양하여 편안하게 하여 줄 것이며, 셋째는 가난하고 고독한 자가 있으면 그들과 함께 하고 공양하며 보호하여 주고, 넷째는 청정하게 수행을 하는 이가 있으면 그를 위하여 옷과 밥을 공양하고 외호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하셨습니다. JTS가 설립되어 수자타아카데미, 필리핀, 북한돕기 등을 하고 있는 것은 부처님의 이 말씀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마지막 설법에서 ‘마치 낙숫물이 떨어져 돌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이 끊임없이 정진을 해라.’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근본 정신을 이어받아 쉼없이 수행정진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불자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스님께서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과 열반 전의 모습들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시는데, 스님의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마음과 공경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위대하신 부처님, 거룩하신 부처님...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부처님 열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지고, 부처님이 바로 옆에 계신 듯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열반의 마지막 순간까지 여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신 그 모습이 실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열반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예불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스님의 발원문을 들으며 사람들이 소리없이 눈물을 닦았습니다. 스님께서는 발원을 하시면서 굶주리는 북한동포들이 빨리 굶주림에서 벗어나기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셨습니다. 스님은 언제나 북한, 통일, 평화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안온하게 계십시오. 이제 남은 일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마지막 스님의 마지막 발원에 더 숙연해지고, 많은 사람들이nbsp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nbsp 열반당에서 나와 부처님 화장터인 라마바르총으로 향했습니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는 장례절차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장례절차는 재가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수행자들은 쉼없이 정진하라고 하셨습니다.아난존자가 세 번을 물었을 때 전륜성왕과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내려오는 풍습대로, 전례대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왕족이었기 때문에 왕족의 예에 맞게 장례를 하도록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다비 모습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nbsp “스님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같애요. 스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 그 때 그 상황이 그림처럼 그대로 떠올라요.” 참가자 중 한 분이 스님 말씀을 듣고는 감탄하며 이야기합니다. 스님과 함께 순례를 다녀보면 경주순례 때는 당시 신라에 사셨던 분 같고, 중국역사기행을 가면 발해 당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같고, 인도에 오면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큼 그 시대의 상황들은 잘 묘사해 주셔서, 절로 마음이 동하고, 감동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라마바르총에서 나와 룸비니로 향했습니다. 인도, 네팔 국경에서 두 시간 넘게 비자업무를 한 후 네팔 국경을 넘어 룸비니 대성 석가사로 이동했습니다. nbsp 인도와 네팔 국경은 외국인들은 들고 나는 것이 조금 까다로운 듯 했지만 현지인들은 그냥 이름만 국경이지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국경을 저렇게 자유롭게 오가는데,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합니다. 빨리 통일이 되어야 우리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텐데...”하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남과 북도 네팔과 인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대성 석가사에 가니 맛있는 저녁밥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nbsp 오랜만에 만나는 청국장, 김치에 저녁밥을 가득 가득 담아 먹었습니다. 저녁 예불을 하고, 스님께서 대성 석가사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이 곳 네팔 룸비니 대성 석가사는 용성조사님의 유훈 10사목 중 부처님 4대 성지를 잘 가꾸라는 유지에 따라 불심도문큰스님이 발원하시고 법신스님이 18년을 사시면서 대작불사를 완성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 탄생한 도량에 한국불교의 위용을 드러내는 불사를 했습니다. 부처님 성지에 가면 한국절은한 군데도 제대로 된 데가 없어서 항상 저희들도 외국절에서 숙박을 했는데 룸비니는 대성 석가사가 규모도 크고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편의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법신스님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냅시다.” 스님 말씀에 이어 대성 석가사 주지이신 법신스님의 환영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법신스님을 뵈면 옆집 아저씨처럼 편안한 느낌입니다. 저도 오랜만에 뵈어서 좋았습니다. 대성 석가사에서 이틀을 자게 되어서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빨래도 했습니다. 밥도 맛있고, 씻기도 좋고, 잠자리도 괜찮은 편이라 다들 편안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동산, 부처님 29년간 성장하고 살아온 카필라성, 부처님 성도 후정반왕이 부처님을 마중나온 쿠단, 부처님의 평화의 정신을 잘 알 수 있는 로히니강 등을 참배할 계획입니다. 쿠시나가르를 참배하면서, 부처님의 열반의 과정들은 함께 하면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내일은 8대 성지 중의 하나인 룸비니 순례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nbsp

2013.01.17. 19,360 읽음 댓글 10개

2013년 1월 10일 법륜스님의 하루(바이샬리)

아침 일찍 라즈기르에서 바이샬리로 출발했습니다. 파트나를 흐르는 강가강은 4개의 강이 모여 큰 강가강을 이루는데 안개가 심해서 원래 일정보다 30분 일찍 일어나 3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2개방의 사람들이 3시 30분 출발할 때까지 자는 바람에 20분 늦은 3시 50분에 출발했습니다. 내일부터는 방을 미리 두드려서 깨워야 할 것 같습니다. 바이샬리로 가는 길은 역시 안개가 심했습니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아 차가 속도를 내지 못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시간도 줄일 겸 차에서 먼저 바이샬리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의 8대 성지 가운데 사르나트, 보드가야, 라즈기르에 이어 네 번째로 바이샬리에 가고 있습니다. 바이샬리는 굉장히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현재 유적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첫 번째,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당시 인도사회에서 제일 좋아했던 도시입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를 보려면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을 보라고 하셨습니다.바이샬리는 시민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가지는 공화제 국가였습니다. 상가는 바이샬리가 모델이었습니다. 리차비족과 밧지족이 바이샬리를 이루는 종족이었어요. 열반경에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으로 밧지족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7가지를 설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밧지족이 자주 모임을 갖는다는 것은 독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재를 하는데는 자주 모임을 할필요가 없잖아요. 모일 때 의기투합한다는 것은 민주적이면서도 통합적인 것을 말하죠.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거나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준법정신이 투철하다는 것입니다. 노인을 경애하고 존중하며 숭배하고 공양하고, 양가의 부인이나 규수를 폭력으로 붙잡아 가거나 구속하거나 가두지 않는다는 것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지를 잘 가꾸냐는 전통문화를 잘 보호한다는 것이고, 위대한 수행자를 초빙해서 잘 받든다는 것은 세계적인 석학이나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존중해서 정치에 잘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이 중 하나만 이뤄져도 좋을텐데, 이 7가지가 이뤄지는 것은 오늘날 봐도 이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잖아요. 이것이 부처님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국가형태였습니다. 바이샬리가 공화국 제도의 기원이라 해서 지금도 인도 중앙정부에서 국회가 개원할 때면 관리들이 카라우나 포칼 연못에서 물을 떠 가지고 가서 성수로 사용하며 의식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공화제의 원류라고 보는 것이죠. 두 번째,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열반을 선언한 곳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안거 장소였고, 마지막 안거 끝나고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한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곳에 왔을 때 아주 유명한 암나팔리라는 기생이 있었어요. 사교계의 여왕, 유곽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어요. 암나팔리가 부처님께 귀의를 하고 암나팔리 망고동산을 기증했어요.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 오셔서 어떤 망고나무 아래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유녀 암마팔리의 망고동산이었어요. 그래서 암나팔리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아침 공양 초대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침묵으로 승낙을 하셨어요. 그런데 이 나라 왕족이 암나팔리보다 뒤에 부처님께 갔어요. 암나팔리에게 십만금을 줄테니 부처님 공양 초대권을 넘겨달라고 했어요. 암나팔리는 이 바이샬리 전체를 다 줘도 안된다고 했어요. 부처님에게 귀의한 사람은 비록 유녀일지라도 이렇게 당당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유녀 암나팔리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께 공양 올린 유명한 사건이 있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바이샬리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도시였습니다. 여성들이 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샤키족의 여성들이 세 번이나 청했는데도 승낙하지 않았어요. 부처님이 바이샬리로 오셨어요. 샤키족 여성들이 카필라바스투에서 이 곳 바이샬리까지 맨발로 험난한 길을 따라왔습니다. 이 곳에서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승낙하셨어요. 바이샬리는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한 곳입니다. 당시 여성은 삼종지도를 걸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결혼하면 남편,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주인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출가한다는 것은 여성이 스스로 한 사람으로 대우받는, 소위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인격을 인정받는다는 것이죠. 누구의 딸, 누구의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갖는 거예요.바이샬리는 세계 최초의 여성해방의 성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비구니 제도가 있지만 남방에서는 없어졌습니다. 남방에서 비구니제도를 복원하려고 해도 사회적 저항이 심합니다. 여성이 최초로 출가해서 비구니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에 이 곳에서 비구니 수계를 한다면 저항이 적지 않겠나 하는 생각합니다. 또 이 곳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 2결집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하는 유마경의 배경이 이 바이샬리입니다. 유마의 집, 유마거사의 집터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이 도시가 진보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이샬리가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서로 가져 가서 기념탑을 쌓겠다고 할 때 공평하게 8등분으로 나누어서 각각 탑을 쌓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이샬리 리차비족이 가져가서 모셨습니다. 8개 진신사리탑 중 3개가 발견되었는데그 중 하나인 바이샬리 진신사라탑터에 지금 우리가 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신사리를 모신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기초만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바이샬리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것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입니다.” 스님께서 바이샬리에 대한 설명을 다 해 주셔서 전체적으로 이해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저도 바이샬리란 도시가 좋습니다. 스님으로부터 차안에서 전체적으로 설명을 듣고, 진신사리탑 앞에 내려 기도를 하다보니 안개가 조금 걷히면서 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nbsp 성지순례객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세 바퀴 돌면서 정근을 하고, 자리에 돌아와 예불을 올렸습니다. 경전 독송을 하고 스님으로부터 진신사리탑에 대한 설명을 듣고 부처님을 생각하며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경전 중 여성 출가에 대한 부분을 독송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의 당당함을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진리에 대한 열의가 느껴져서 눈물이 나고,마하파자파티부인과 부처님, 아난다의 대화 속에 나타난 믿음과 사랑이 느껴져서 눈물이 났습니다.그리고 지금의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까지의 많은 여성들의 눈물과 피땀이 있었음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습니다. 최초의 비구니 수계를 받은 마하파자파티는 부처님의 이모이자 새어머니입니다. 진신사리탑터에서 국제선원 관계자를 만났는데, 가까이 있는 베트남 절에서 세계여성불자대회인‘샤카디타대회’가 열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길에 스님께서 잠시 들러서, 전체 대중들 공양비에 보태라고 보시금을 전달하고 원후봉밀터로 향했습니다. nbsp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에서 기도를 하고,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원후봉밀터는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발우가 제자들 것 사이에 섞여 있었는데, 원숭이가 부처님 발우에 꿀을 가득채워 공양했다는 곳입니다. nbsp 식사 후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케사리아탑터를 참배한 후 쿠시나가라로 향했습니다. 케사리아대탑은 부처님이 바이샤르를 떠나자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을 좇아 칸타키강까지 왔습니다. 부처님은 칸타키강을 건너시고, 증표로 부처님의 발우를 바이샤르 사람들에게 띄워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을 기념해 세운 탑이 케사리아대탑입니다. nbsp 춘다의 공양터에 들릴 예정이었는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이동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내일로 미뤘습니다. 사탕수수 수확철이라 사탕수수를 실은 트랙터를 비롯, 소와 말이 끄는 수레, 화물트럭들이 도로를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차가 좋아도 어쩌겠어요? 저렇게 우마가 끄는 수레가 앞에 가고 있으니 속도를 낼 수도 없죠. 인도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한국 사람들만 늦다고 답답해하는 거예요. 이런 길을 가봐야 인도에 와봤다 할 수 있어요. 보세요. 중앙선 개념도 없잖아요?” 큰 도로인데도 깊게 파여 있어서 조수들이 뛰어가 옆에 있는 큰 돌을 바퀴 밑에 받치고 겨우 차가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인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거예요. 길이 많이 좋아져서 이 정도입니다. 여기에 비까지 오면 더 어렵지요. 진흙탕이 되어서 시속 20km도 못 갑니다.” nbsp 일정표의 2시간이 실제로는 4시간이 되었습니다. 4시간동안 중간 중간 자기도 하고, 구경도 하면서쿠시나가르에 도착했습니다. 쿠시나가르 대한사에 도착해서 법당 참배를 하고, 미리 준비된 저녁식사를 하고, 인근에 있는 중국절, 티벳절, 스리랑카절로 나눠서 들어갔습니다. 내일 먹을 밥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절 자체적으로 발전기를 돌려서 쓰다보니, 전력이 약해서 밥솥 3개만 꽂으면 전체 전원이 나가 버립니다. 스리랑카절은 전원 코드도 1층에만 있어서, 16개조 밥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내일은 춘다의 공양터, 카쿳타 강, 열반당, 부처님 화장터에 갔다가 네팔로 이동하는 일정입니다.nbsp내일 뵙겠습니다.

2013.01.17. 19,649 읽음 댓글 11개

2013년 1월 9일 법륜스님의 하루(라즈기르)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5시에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라즈기르로 향했습니다. 짙게 안개가 끼어 차가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라즈기르에 도착했습니다. 날도 추웠습니다. 스님께서도 “무슨 날씨가 이렇게 춥나?”하면서 발토시를 하셨습니다. 인도가 많이 춥다고 옷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해서 설마 하면서도 겨울 옷 준비를 많이 해 왔는데,정말 날이 많이 추워서 안 입을 줄 알았던 겨울옷을 겹쳐 입고 인도의 새벽을 보내고 있습니다. “라즈기르는 북인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꽃피우던 곳으로, 당시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였습니다. 라즈기르는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고장입니다. 부처님은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출가하여 이 곳에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하였고, 빔비사라왕과 첫 만남을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성도 후 1000명의 비구를 이끌고 돌아와 오랫동안 머물면서 교화설법하여 빔비사라왕은물론 사리풋트라와 목갈리나, 마하 가섭 등 유명한 제자의 귀의를 받고 최초의 불교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스님께서 라즈기르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라즈기르에서 맨 먼저 간 곳은 영축산이었습니다. 영축산 오르는 입구에는 빔비사라왕이 말에서 내려 부처님을 뵈러 올라가는 빔비사라 로드가 시작되는 곳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선생경이 설해지기도 했고, 데바닷타가 돌을 굴려부처님 발을 다쳤을 때, 아난존자가 이 곳까지 부처님을 엎고 내려와 지이바카로부터 응급 처치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는 스님의 말씀에 그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nbsp 영축산으로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부처님은 이 산에 머무시면서 반야심경, 법화경 등 잘 알려진 대승경전이 설하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계셨던 곳, 빔비사라왕이 직접 이 곳까지 걸어와서 부처님을 친견하던 곳, 부처님의 제자들이 수행하던 굴들, 데바닷다가 돌을 굴린 곳... 2600년전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가깝게 다가오고, 상상 속의 부처님이 아니라 현실의 살아계셨던부처님으로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nbsp 영축산 정상에서 참배를 하고,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부처님 당시를 생각하며 명상을 했습니다. 부처님 이 곳에 앉아 설법을 하셨던 부처님... 스님께서는 영축산을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영축산과 부처님, 빔비사라왕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축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빔비사라왕 감옥터로 이동했습니다. 가는 길 양 옆에 부처님의 주치의였던 지이바카 망고동산과 집터를 지나쳐 갔습니다. 빔비사라왕 감옥터에서는 빔비사라왕과 위제희 부인, 아들 아자타삿투, 데바닷다에 대한 이야기를재미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곳은 또한 위제희 부인을 위해서 관무량수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하다고 하셨습니다. nbsp 이 곳에서 각 조별로 아침을 먹고 다음 순례 장소인 죽림정사로 향했습니다. 죽림정사에서도 참배를 하고 경전독송을 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스님께서 죽림정사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죽림정사는 라즈기르 북문 밖으로 나가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위치한 최초의 정사입니다. 라즈기르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공양을 하겠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부처님이 거절하시자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기증한 곳이 죽림정사입니다. 코살라국의 수닷타 장자가 사위성에 지은 기원정사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죽림정사는 대나무가 많았으나, 2년 전 ‘대나무 꽃’이 피어 모두 죽고, 새롭게 대나무숲을 조성하고있었습니다. nbsp 죽림정사를 나와 칠엽굴로 향했습니다. 춥던 날이 해가 나니 금새 따뜻해졌습니다. 칠엽굴은 산으로 1.5km 가량 올라가야 해서, 땀을 흘리며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칠엽굴은 부처님과 직접 관계가 있는 곳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부처님 말씀이 잘못 전해질 수 있어서 이 곳 칠엽굴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정되는 최고의 장로 500명이 모여 부처님이 말씀하셨던 경과 율을 결집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가장 많이 들었던 아난다 존자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 부처님께서...’하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면, 나머지 제자들이 ‘맞다’, 혹은 ‘거기에는 이런 부분이 더 들어간다’ 하며, 부처님이 말씀하셨던 것을정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제 1결집이라고 합니다. 이후 제 2결집은 바이샬리에서, 제 3결집은파탈리푸트라에서 있었습니다.” 칠엽굴 입구에 앉아 스님께서 당시 결집할 때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nbsp 칠엽굴에서 천천히 내려와 나란다대학으로 이동했습니다. 나란다대학은 2팀으로 나눠서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쁘리앙카지와 JTS 실무자 김혜원 님이 통역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나란다대학은 불교대학이지만 불교만 가르친 것이 아니고 힌두교라든지 다른 종교나 철학이나 수학 등 전 학문을 가르친 종합대학이었다고 합니다. 7세기경 현장법사가 이 곳에 왔을 때는 학생 수가 만명, 선생이 천 오백명이었다고 합니다.” 스님에게 나란다대학에 대한 전체적인 말씀을 듣고, 나란다대학에 들어가서 구체적인 설명은 현장의 가이드로부터 들었습니다. 쁘리앙카지와 김혜원씨가 통역을 해줘서 현장 곳곳을 다니면서 자세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1km만 발굴했는데 그 길이가 10km나 되었다고 합니다. 10분의 1만 발굴된 상태라고 합니다.내부에는 불상 모신 곳, 강당과 침실, 도서관, 목욕탕 등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당시 어마어마한 학교였겠구나 싶었습니다. 대단했습니다. 7세기까지 세계 최고의 대학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슬림이 침공해 대부분 파괴하고, 도서관은 6개월이나 불탔다고 합니다. 지금도 도서관 벽면이 불에 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오늘은 라즈기르의 영축산, 빔비사라왕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대학까지 순례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당시 가장 진보적인 도시였다고 하는 바이샬리로 갑니다. 바이샬리라는 도시를 떠올리면 부처님이 쿠시나가르로 가시기전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돌리듯이 천천히 바이샬리를 돌아보셨다는 장면이 항상 떠오릅니다. 내일은 바이샬리 순례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2013.01.16. 16,671 읽음 댓글 8개

2013년 1월 8일 법륜스님의 하루(수자타아카데미, 개교기념식)

수자타 아카데미에 울려 퍼지는 도량석 목탁소리를 듣고 일어났습니다. 종성에 이어 아침 예불과 천일결사기도를 하고, 6시 20분에 교문 앞에 모였습니다. 날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스님께서 많이 피곤한 사람은 휴식을 하고 전정각산 아침 산행을 할 사람만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올라가는 입구에도 탑터가 있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작은 물웅덩이가 있었습니다. “이 곳이 전정각산에서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곳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모두 여기서 물을 마십니다. 부처님도 이 물을 마셨다고 해서 ‘부처님 샘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건기라 모든 곳의 물이 마르고 없는데, 이곳에는 물이 조금 있네요.” nbsp 돌산이라 걷기가 불편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래도 소가 다니면서 길을 내어놓아 그나마 다니기 쉬운 길이라며, 가시나무가 많으니까 조심해라는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걷다가 분위기가 안온한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잠시 쉬었습니다. 맨 마지막 사람이 올 때까지 다 같이 명상을 했습니다. “자, 여기까지라도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는 힘든 사람은 따라오지 마시고, 여기 앉아서 명상을 하고 계셔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스님의 원래 속도대로 빠르게 산을 오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산 정상 부근에 명상하기 좋은 자리가 있었습니다. 전에 스님께서 명상하고 계신 사진이 정토회 달력으로 나온 적도 있었습니다. 같이 갔던 사람들이 스님께 자리에 한 번만 앉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비디오, 사진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 뒤에 포토존을 이루고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참 멋있는 장면이었습니다. nbsp 산 정상에 올라가니 주변 경치가 멋있었습니다. 거기다 저 멀리 붉은 태양이 떠올라 운치가 더했습니다. “스님. 부처님도 여기서 저렇게 해가 뜨는 것을 보셨을까요?” “당연하죠. 여기서 6년을 사셨으니까 일출도 당연히 보셨겠죠.” “와, 부처님이 일출을 보셨던 곳에서 우리도 일출을 보고 있다는 것이네요? 와, 정말 행복합니다.” nbsp 전정각산에서 내려와 아침식사를 맛있게 했습니다. 잠시 휴식을 하고 설성봉 거사님 추모식을 했습니다. 설성봉 거사님과 함께 부산정토회에서 활동을 했던 하경화 님이 발원문을 읽고, 설거사님과 함께 서울, 대전정토회 등의 불사를 같이 했던 청덕님이 추모문을 읽었습니다. 청덕님은 추모문을 읽으면서 많이 울어서 동참한 사람들도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어서 비구니스님들과 함께 정성드려 천도제를 봉행했습니다. 착한 염소같은 작은 눈으로 두꺼운 안경너머 우리를 바라보던 거사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부산정토회에서 같이 활동할 때 거리에 모금하러 나가고, 사무실에서 같이 회의하고, 가끔씩 옥상에 올라가 이런 저런 이야기도 참 많이 나눴었던 설성봉 거사님. 거사님 덕분에 수자타아카데미는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다시 전하며 왕생극락을 기원했습니다. nbsp 추모식을 하는 동안에 학교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과 동네 사람들, 부다가야에서 오신 스님들과 국회의원 등의 내빈들이 수자타아카데미 19주년 개교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개교기념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을 위해 그동안 준비한 학생들의 공연이 하나 둘 무대에 올라오면서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습니다. 학생들의 공연 하나 하나가 재미있고 또한 감동적이었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그냥 뒀으면 거리에서 동냥을 하고 있을 아이들인데, 학교가 설립되고 교육을 받다 보니 이렇게 도시의 어느 아이들 못지않는 자랑스럽고 늠름한 학생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하게 되는 자리였습니다. nbsp nbsp nbsp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처음 박명주 군에게서 태권도를 배웠던 학생이 전 인도 태권도대회에서 우승을해서 2개 분야에서 금메달을 따서 세계선수권대회 참가자격을 받았는데, 인도에서 여권이 늦게 나와 작년 11월에 한국에서 있었던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그 소식에 기념식에 참가한 대중들이 ‘아이구, 쯧쯧’하며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받은 메달을 오늘 스님께서 직접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감격스런 장면이었습니다. nbsp 성지순례객들도 정말 좋아했습니다. “뿌듯했어요.”“울컥해서 많이 울었어요.”“스님이 너무 자랑스럽고 고맙고 말로 다하지 못하겠어요.” 유영굴까지 쭉 줄서서 구걸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어엿한 수자타 아카데미 학생이 되어서 춤도 추고 태권도도 하고 컴퓨터도 배웁니다. “언제나 스텝진을 자비롭게 돌봐주시는 미얀마 큰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19년 동안 계속 지원해 주신 한국의 후원자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 함께 있지는 못하지만, 한국에 계신 후원자님들께 감사함의 큰 박수를 보내 주십시오.” 스님께서 그동안 도와주신 모든 분들게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내년이면 수자타 아카데미도 20주년을 맞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도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둥게스와리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학부형의 많은 참여와 어르신들의 도움, 한국 후원자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함께 노력해서 이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랄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저희들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학생들을 바라보는 스님의 얼굴 표정이 환했습니다. 미얀마절의 큰스님과 스님, 박지나, 김기진 JTS 대표님이 무대에 올라가서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습니다. nbsp 성지순례객들도 오늘은 인도식으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유미죽과 뿌리와 달과 야채를 손으로 먹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 음식 준비하느라 정말 수고가 많았겠다 싶었습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는 마을 방문이 있었습니다. 6개 마을로 나눠서 실제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가 도울 것이 뭐가 있겠는지 살펴보기 위해 마을 방문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두르가푸르라는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이 곳은 스님께서 93년에 한 달간 살았던 동네이기도 했습니다.“가야에서 출퇴근하기도 어려워서 이 동네에 방 하나 달라고 했더니 이 방을 줬어요. 이 방에서 한 달간 살았죠. 이 집 아들이 우리 학교 교사를 했어요.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졸업한 유일한 청년이었어요. 그 때 제가 이 마을 사람 10명에게 45평씩 보시 받아서 학교를 시작했어요. 없는 사람에게도 이렇게 보시받았죠.” 스님께서는 20여년 전의 일들을 떠올리며 한 달간 사셨던 집도 소개를 해주고, 그 때 있었던 일들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몇 집을 돌아봤습니다. 둘러본 집에는 목도리, 모자 등 작은 선물도 했습니다. nbsp 마지막 방문한 집은 마당에 나락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 동네에서 잘 사는 집인 것 같았습니다. 작은 집에 작은 할머니, 부부, 자녀 6명, 결혼 안 한 남자동생 2명까지 11명이 사는 집이었습니다. 11명이 사는데 다른 집보다는 좀 낫지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집 안을 돌아보고 가족과 함께 사진 촬영도 했습니다.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렇게 살 수가 있는 건가? 지금도 그 충격이 남아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집 밖에 나와 있는지 알겠더라고요. 집에 있어도 할 일도 없고, 집도 춥고, 햇빛도 안 들어오고. 그래서 다 밖에 나와 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하나같이 얼마나 손이 찬지 몰라요.” “음식 안 남기고 먹어야겠어요. 물도 전기도 아끼고. 정말 내가 많은 것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저렇게 사람이 살 수도 있구나 싶어서 현재의 제 삶이 벅차도록 고마웠습니다.” “돌아가면 바로 JTS 후원금을 늘려야겠어요.” “피아노를 배워서 몇 년 후에는 이곳에 와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고 싶어요.” 마을 방문을 하고 와서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하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이 있는지 토론을 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저녁 예불 후 강당에 모여서 소감 발표시간을 가졌습니다. 많은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많은 배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 마지막 정리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소감문 잘 들었습니다. 저희가 사업을 시작한지 내년에 20년이 되는데 제일 많이 변한 것은 아이들 교육입니다. 지금은 20세 이하 젊은이들은 7080가 글을 압니다. 아이들은 자라고 그들이 변해가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지역 발전의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처음에 새마을 운동 비슷한 것을 하려해도 같이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230년 기다려야한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청년이 되면 마을의 주민이 되면 마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해서 제일 중요시한 것이 아이들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질병에 병들어 죽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해서 보건의료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마을 최고의 질병이 결핵이었는데, 이제 결핵의 위험으로부터 거의 벗어났고, 유아사망률도 급격히 줄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빈곤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20년 전에는 벽돌집이 거의 없었는데 정부지원으로 마을절반이상이 벽돌로 이루어진 변화가 왔으나, 수입구조는 20년 전과 큰 차이가 없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조별로 제안한 사항들에 대해서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잘못 이해가 된 것은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어려움에 대한 설명도 해 주셨습니다. 전체적으로 직접 마을 방문을 함으로써 두 눈으로 상황을 직접 볼 수 있어서 대안도 이야기할 수 있었고, 현재 내 삶이 얼마나 풍족한지에 대해서 느낄 수도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라즈기르로 이동할 계획입니다. 라즈기르에서 영축산, 빔비사라왕 감옥터, 칠엽굴, 나란다 대학 등을 순례할 계획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2013.01.11. 22,266 읽음 댓글 19개

2013년 1월 7일 법륜스님의 하루(보드가야, 수자타아카데미)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새벽 4시 30분 기상해서, 5시에 다같이 강당에서 새벽 예불을 올렸습니다. 예불 후, 바로 부다가야까지 걸어가기 위해서 학교 교문앞에 모였습니다. 어젯밤 12시까지 스텝들과 공양 조에서 준비한주먹밥과 오렌지 한 개를 교문 입구에서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아직 깜깜한 새벽인데다, 날씨도 싸늘했습니다. “자, 여기서 뒤떨어지면 못 따라 옵니다. 쳐지지 말고 잘 따라 오세요.” 참가자들을 2줄로 세워서 긴 줄을 만들어 부다가야로 향했습니다. 걷기 시작하면서 전정각산을 향해 먼저 서서 삼배를 드리고 걸었습니다. “어두워서 안 보이지만, 여러분들 앞에 있는 산이 부처님께서 6년동안 고행했던 전정각산입니다.전정각산을 향해서 먼저 서서 삼배드리겠습니다.”스님 말씀을 따라 삼배를 드리고 어둠을 뚫고 길을 걸었습니다. 2600년 전 부처님께서도 이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하늘에 그믐달이 떠 있고, 마을의 개짓는 소리가 온통 마을을 흔들었습니다. 날이 차츰 밝아지니 안개가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nbsp 새벽부터 볼 일 보러 나온 사람도 있고, 가족이 다같이 나와서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어린 여자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새벽 공기는 갈수록 차가워졌습니다. 온 몸을 오싹하게 하는 아침 추위였습니다. “날이 추우니 좋은 점도 있네요. 빨리 가자 하지 않아도 다들 빨리 걷네요.” 스님 말씀처럼 추우니까다들 걸음을 빨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건기라 네이란자라강에 물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에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물을 건넜던 기억이 있는데 신발도 벗지 않고 편안하게 강을 건넜습니다. “부처님이 고행림을 나와서 네이란자라강에서 목욕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아마 힘이 없어 물에 쓰러져 떠내려 가다가 아사나 나뭇가지를 잡고 강기슭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저쪽이 부처님이 쓰러지셨던 곳입니다. 참배를 하고 경전독송하겠습니다.” nbsp 긴 행렬이 때로는 밀밭길을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강을 건너기도 하고, 마을길을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가는 길에 네이란자라강 옆에 인도정토회에서 명상센터를 할려고 구입한 터를 지나 수자타 공양터로 이동했습니다. 수자타공양터에는 탑 2개가 쌓인 흔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가에 쓰러져 있는 볼품없는 수행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강가에 쓰러졌을 때 지극정성으로 부처님을 보살핀 수자타의 후손들이 여기 살고 있습니다. 수자타의 후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마음으로 수자타 아카데미를 지었습니다.” 스님 말씀을 들으니 수자타의 공양이 더 위대하게 느껴졌습니다. 참배를 한 후 경전독송을 하고, 아침에 싸온 주먹밥을 먹었습니다.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양념한 밥 위에 달걀 후라이까지 올려져 있어서 정성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날씨가 차가워져서 옷을 단단히 입고 오지 않은 사람들은 많이 떨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해가 뜰 때 기온이 가장 많이 내려가는데 이 곳은 해가 났는데도 안개가 끼여서 기온이 계속 내려가고 있어서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맨 발로 뛰어다녔습니다. 수자타 공양터에서 계속 더 걸어서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했던 곳으로 갔습니다. 이 곳도 역시 힌두사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앉아서 충분히 설명을 해야 하는데, 추워서 서서 간단히 설명을 한다고 하시면서 부처님의 카사파 3형제를 교화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 전법선언을 하신 후, 이 곳 병장촌으로 오셔서 카사파 3형제를 교화함으로써 1000명의 제자가 생긴 것은 이후 교단발전에 있어서도 큰 전환점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우루벨라 가섭 교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이야기가 많은데 간단하게 설명을 해서 아쉬웠습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수자타의 집터였습니다. 아쑈카 대왕도 수자타의 공양을 위대하게 생각해서 탑을 크게 쌓은 것 같았습니다. 참배를 하고 참가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탑 전체를 애워싸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보현행원을 다같이 불렀습니다. nbsp 부처님이 걸으셨던 것처럼 저희도 걷고 또 걸어서 부다가야에 도착했습니다. 11km정도 걸었습니다. 부처님은 길에서 태어나셔서, 길에서 평생을 사시다가 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부처님이 2600년 전 걸었을 땅을 내 발로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살아났습니다. 부다가야 대탑에 도착해서, 스텝들이 준비한 공양물을 가지고 부처님께 사시 공양을 올렸습니다. nbsp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곳. 우리도 부처님이 앉으셨던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경전을 읽고명상을 하면서 아득히 먼 2600년전 한 수행자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nbsp 대탑에서 참가자들에게 자유시간을 주고, 기도도 하고, 점심도 자유롭게 사 먹고 오후 1시 30분에 대탑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자유시간에 점심도 안 먹고 기도를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언제 이 좋은 곳에 다시 오겠어요? 부처님 계셨던 곳에서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했습니다.108배 하고, 명상하다 왔습니다. 점심은 이렇게 바나나 몇 개 샀어요.”하며 바나나를 들어 보이는 거사님의 표정이 환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들어오니, 음악 소리가 빵빵 터지고 있었습니다. 어제는 성지순례객들이 밤 늦게 수자타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아이들과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아이들이 성지순례객을 환영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스승에게나 환영하는 사람에게 꽃목걸이를 해 주고, 꽃을 뿌립니다. 스님께 학생들이 꽃목걸이를 많이 걸어줘서 앞이 안보일 정도였습니다. nbsp 앞에는 흰 코끼리를 탄 어린 아이가 꽃을 뿌리며 길을 안내하고, 뒤에 선 성지순례객들에게도 아이들이 꽃목걸이를 모두 걸어줬습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환영을 받은 적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학교에 들어와 법당 참배를 하고, 이어서 설성봉 거사님 추모탑에 참배한 후 받은 꽃목걸이를 추모탑에 빙 둘러 걸었습니다. nbsp 이어서 쉬는 틈없이 바로 전정각산으로 향했습니다. 둘쨋 날 기차시간 때문에 일정 전체가 약간 늦어진 면이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 힘들면 산에 오르지 말고 유영굴에 가 있어라는 스님 말씀에도 사람들은 끝까지 스님을 따라 산에 올랐습니다. 스님께서 칼산 끝에 서서 학교 주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nbsp 전정각산을 내려와 유영굴 참배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곳 전정각산에서 6년 고행을 하고 성도를 위해 떠날 때 섭섭해 하는 산신을 위로하기 위해 이 동굴에 부처님의 그림자를 남기고 떠나셨다고 해서 유영굴이라 이름붙였다 합니다. 모두 유영굴 참배를 하고, 경전 독송을 하고 당시 부처님을 떠올리며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새벽부터 걸으면서 부다가야 주변의 부처님의 자취를 그대로 느낀 하루였습니다. 많이 걸었고, 많이 보았고, 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루를 빡빡하게 지내서 그런지, 저녁을 준비해 준 분들의 정성이 그대로 녹아 있어서 그런지 저녁은 꿀맛이었습니다. 저녁 공양 후, 수자타 아카데미사업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도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자기가 맡은 각 파트 사업을 발표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지이바카 병원, 마을개발, 인도정토회 불교부흥사업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 마지막 정리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매우 세밀하게 사물을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지, 뭐가 중요한지, 뭐가 부족한지를 바로 아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깊은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관찰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후 9시 30분경에 전체 일정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는 새벽부터 열심히 다녔습니다. 모두들 몸은 피곤해도, 부처님의 삶을 직접 느낄 수 있었던 하루여서 마음은 그 무엇보다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전정각산 올랐다가, 설성봉 거사님 추모제를 하고, 10시에 수자타아카데미 19주년 기념식을 하고, 오후에는 전정각산 인근 마을 방문을 할 예정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nbspnbsp

2013.01.09. 20,530 읽음 댓글 25개

2013년 1월 6일 법륜스님의 하루(사르나트, 수자타 아카데미)

어제 사르나트에 연락을 해 보니 아침 6시에 문을 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5시 30분에 기상해서, 6시 10분에는 사르나트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행사 준비차 사전팀이 사르나트에 가보니 7시에 문을 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출발하려고 차에 탔던 사람들에게 다시 호텔로 들어가서 쉬다가 연락을 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런 일도 인도니까 더 쉽게 양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30분가량 더 호텔에 머물다가 사르나트로 향했습니다. 사르나트는 부처님께서 5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던 곳입니다. 불교인로서는 참으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부처님이 있었고, 설한 법이 있었고, 법을 들은 5비구가 있었기에 그 법이 260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지금 나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려오고 있는 것 같아서, 언제나 사르나트에 가면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납니다. 또한 사르나트는 야사 비구가 출가한 곳이고, 야사 비구 친구들이 모두 출가함으로써 처음으로 61명의 비구 교단이 성립하게 되었고, 드디어 부처님께서 전법선언을 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야사의 부모님이 재가자로서 처음 삼귀의, 오계를 받게 되어 우바이, 우바새가 탄생한 곳이기도 해서 우리 불자들에게는 특히 의미있는 도시가 바라나시의 사르나트인 것 같습니다. 초전법륜 성지 입구에서부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들어갔습니다. 정근을 하면서 탑을 세 바퀴 돌고 탑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간절한 마음으로 사시예불을 올렸습니다. 사시예불 후 스님께서 이 곳 사르나트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 설명을 자세히 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을 생각하며 숨을 들이쉬고, 내어쉬면서 다같이 명상을 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nbsp 그리고 이 곳은 처음으로 구리가 장자가 삼귀의 오계 수계를 받은 곳으로 우리도 그와 같이 이 곳에서 삼귀의 오계 수계를 받아 12일간의 단기 출가를 통해서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수행자로서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를 해 나가자는 의미로 수계식을 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nbsp 이어서 삼귀의 오계 수계식이 거룩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법륜스님을 수계법사로 모시고, 가사를 받고, 향으로 연비를 함으로써 성지순례 참가자들이 모두 부처님 재자로서 삼귀의 오계를 받았습니다. 노란 가사까지 받아서 수행자로서의 위의를 다 갖췄습니다. 혜초스님께서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1년간이나 배를 타고 인도에 와서 부처님 성지를 순례를 했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우리도 성지순례기간동안 수행자로서 하루 하루 생활할 것임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계식을 마치고는 사르나트 탑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조별 사진도 찍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사르나트를 나오면서 아쑈카 대왕 때 만든 아쑈카 석주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시면서, 처음 인도에 오셨을 때의 경험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nbsp 스님의 인도와의 첫 인연을 들으며 사르나트에서 나와 바로 앞에 있는 박물관 관람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박물관내 공간이 좁고 대중이 너무 많아 박물관에서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어 입구에서미리 전체 설명을 먼저 하셨습니다. 참가대중들이 박물관 관람을 하는동안 스님께서는 잠시 수련장 부지가 나왔다고 해서 주변에 부지를 보러 다녀오셨습니다. 물가가 많이 올라서, 전보다 10배 이상 땅값이 올랐다고 합니다. 부지의 위치와 값을 알아보고 박물관 앞으로 돌아오니 참가자들이 거의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시간이었습니다. nbsp 사르나트에서 조금 떨어진 영불탑으로 이동했습니다. 영불탑은 5비구가 부처님을 맞이했던 곳에 탑을 세워 영불탑이라 이름했습니다. 시간이 없어 차에서 내려 영불탑 앞에서 스님 설명만 간단하게 듣고 바로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는 둥게스와리로 이동했습니다. nbsp “지금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 이 길은 부처님이 전법선언을 하고,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사르나트에서 부다가야로 내려온 길입니다. 그 전에 부처님이 성도 후 5비구를 교화하기 위해 거꾸로 부다가야에서 사르나트로 걸어갔던 곳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걸어서 갔던 길을 오늘 우리는 편안하게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20년째 이 길을 가고 있는데 사르나트에서 부다가야가 250km인데, 오늘 시간이 제일 적게 걸린 것 같애요. 보통 810시간 정도 걸리는데 오늘은 6시간밖에 안 걸리네요. 도로가 갈수록 잘 정비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하셨던 전정각산 아래 수자타 아카데미로 가고 있습니다. 숙소가 좀 불편할 것입니다. 숙소가 좋은 날은 첫 날과 마지막 날 밖에 없습니다. 숙소가 불편하더라도 수자타 아카데미는 우리가 직접 지은 집이라 마음은 더 편할 것입니다. 15년전부터 들어온다던 전기는 아직도 안 들어오고 있습니다. 불을 지펴 뜨거운 물을 끓여 놓았으니 물을 떠가서 세수를 하시면 됩니다.” 겨우 버스가 지나갈 듯한 덜컹이는 비포장 도로로 한참 들어가니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었습니다.그런데 어두워서 건물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박명송 군이 전체 공양준비를 맡아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저녁예불을 하고, 스님으로부터 수자타아카데미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인도와 인연이 된 것은 1991년이었습니다. 지금부터 22년전이죠. 단체 관광으로 왔다기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인연으로 인도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배낭여행도 아닌 단체 관광도 아닌 상태로 처음 인도에 왔습니다. 그 때 저는 인도를 너무 그리워했기 때문에 비행기 활주로에서 내리자마자 땅바닥에 이마를 대고 오체투지 절을 했습니다. 인도라는 곳에 온 것이 그렇게 기뻤습니다. 버스를 타고 캘커타시내에서 박물관 옆 골목에 있는 어떤 한 모텔에 갔더니 방이 없었어요. 어떻게 어떻게 해서 캘커타하우스라는 게스트하우스에 들게 되었는데 방 하나에 100루피 였습니다.사전교육받기를 미네랄 워트 외 물은 절대 먹지마라, 그리고 1루피 이상 아이들에게 주면 아이들이 따라와서 순례가 지속될 수 없다는 등의 주의를 받았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물을 사러 나갔습니다. 깜깜한 골목에 나섰는데 어떤 여인이 저를 잡았어요. 1루피 주었더니 안받고 또 달라해서 1루피 주니 안받았습니다. 그러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아래 서서 보니 조그마한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 아이를 보자 아이배에 손을 댓다가 입에 댓다를 반복하는 거예요. 아이가 배고프다는 뜻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이끄는대로 따라갔습니다. 조그마한 가게 앞에서 분유통을 가리켰습니다. 아이가 배고파 분유 사달라고 하나보다 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물어보니 60루피라 하였습니다. 제가 너무 깜짝 놀라서 도망치다시피 그냥 와버렸습니다. 물만 사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는데 마음이 찝찝했습니다. 그래서 들어오자마자 같이 간 교수님에게 60루피면 얼마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2400원이라고 해요. 그 당시 1루피가 40원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2400원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뭐라 할 수 없이 마음이 찌릿찌릿했습니다. 아이 배고프다고 우유 사달라는데, 그냥 돌아온 나를 내 자신이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다시 사주러 나가니 여인이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그 때 제 자신에 대해 굉장히 실망을 하였습니다. 늘 민중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것 같이 해놓고, 막상 눈앞에서 아기 우유를 사달라는 것을 외면하는 모순투성이의 나를 발견하고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면서 자연히 감정이 억제되고 냉정해져 가는 그런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또한 사회운동을 하며 자선사업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거시적인 것, 근본적인 것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것처럼 하다가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것에는너무 소홀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제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언젠가 내가 이 빚을 꼭 갚으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저희들이 인도JTS사업은 93년도에 시작하였고, 이 곳 수자타아카데미는 94년도에 시작했습니다.인도JTS는 첫째, 문맹퇴치를 위한 교육사업이고, 둘째는 결핵, 산모건강, 모자 건강 등 유아사망률을 줄이기 위한 마을의 질병퇴치사업이고, 셋째는 마을개발사업입니다. 이곳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입니다. 첫째 인도에서 제일 살기 어렵습니다. 가난합니다. 둥게스와리마을은 천민들의 집단마을입니다. 마을에 부자가 없습니다. 둥게스와리 산주변에 있는천민들 집단거주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곳 둥게스와리는 돼지를 키우거나, 산에 돌을 캐거나, 일부는 부자집 농사를 거들어주며 사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교육혜택은 전혀 못받고 있었습니다. 최소한도 사람으로 태어나서 초등학교 교육, 글 읽을 줄 아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수자타 아카데미를 설립했습니다. 적어도 간단한 질병, 이질, 결핵에 의해 죽는 사람은 없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질병퇴치 운동을 벌였습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결핵은 거의 퇴치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마을의 빈곤퇴치라는 것은 거의 제대로 해결이 안된 상태입니다. 빈곤하게 생활하는 그 삶 자체는 뚜렷한 해결책을 못잡고 있는 그런 상태에서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고, 기초교육을 받는 그런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스님께서 인도와의 첫 인연, 인도 사업을 하게 된 계기, 아이의 우유를 사달라고 하던 여인의 이야기, 현재 수자타 아카데미의 상황과 어려운 점 등 수자타 아카데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강의를 마치자 시간이 거의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피곤한 것 같았습니다. 스님께서 푹 쉬라고 하며 내일 아침일정에대해서 간단히 공지를 하고 마쳤습니다. 오늘은 차를 많이 타고 와서 좀 피곤한 것 같습니다. 내일은 아침 4시 30분 기상해서 5시에 기도하고, 예불 후에는 걸어서 부다가야까지 가는 일정입니다. 내일 일정도 만만치 않겠네요. 내일 뵙겠습니다.

2013.01.08. 19,157 읽음 댓글 16개

2013년 1월 5일 법륜스님의 하루(강가강)

덜커덩거리는 기차 안에서 한참을 자고 눈을 떴습니다. 새벽 5시 전이었습니다. 어젯밤 10시부터 5시까지 푹 잤습니다.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세상모르고 잤습니다. 눈을 뜨니 찬바람도 많이 들어오고, 바깥은 안개가 가득 낀 느낌이고, 새벽녘 기차에 인도 사람들이우르르 타고 내리고 타고 내리곤 했습니다. 완행열차라 조금 가다 쉬고, 조금 가다 쉬기를 반복했는데도 저는 집에서 잔듯이 참 잘 잤습니다. nbsp 새벽 5시, 무변심 법사님의 집전으로 송수신기로 천일기도를 했습니다. 달리는 새벽 기차 안에서 도반들과 함께 기도하는 느낌도 좋았습니다. 기차는 섰다 달리기를 계속 반복하고, 스텝들은 늦어진 일정을 어떻게 수습하고, 이후 일정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 회의를 했습니다. 사르나트에서 수계식을 하는 순서에 대해서,나눠줄 물품을 어떻게 순서 있고 편리하게 전달할지, 어떻게 해야 전체의식이 여법하게 진행될 수 있을지, 공양 물품부터 향 전달, 가사 전달, 신발 벗어 놓는 위치까지 하나하나 다 점검을 했습니다. nbsp 그런데 12시 10분경에 무갈사라이역에 도착할 예정이던 기차가 연착하여 오후 1시 30분경에 도착했습니다. 내려서 공용 짐을 다 같이 개미떼처럼 들고 나르고, 개인 짐까지 실으니 또 1시간 가량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nbsp 오후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습니다. 무갈사라이역에서 사르나트로 갔다가, 사르나트에서 수계식을 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전체 일정을 바꾸셨습니다. 부처님의 법이 처음 설해진 사르나트가 성지순례로서 첫 방문하는 성지인 만큼 여유롭게 순례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을 하신 것 같습니다. 무갈사라이역에서 바로 강가강으로 갔습니다. 인도성지순례 네 번째인데 해질녘에 강가강에 간 것은 오늘 처음이었습니다. 2인 1조로 자전거 릭샤를 타고, 30루피에서 50루피까지 가격을 흥정하며 힌두교인들이 성스러운 곳으로 여기는 강가강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자전거, 릭샤, 오토바이, 자가용, 소, 개까지 길거리를 지나가고, 차들은 낼 수 있는 경적은 다 울려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갈 때는 자전거 릭샤를 타고 다시 차로 돌아올 때는 여러 명이 어울려서 오토릭샤를 탔는데, 이리저리 피해서 운전하는 것을 보고 같이 탄 분이 운전 잘 한다고 감탄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강가강 선착장 앞에 도착하셔서 사람들이 배를 탈 수 있도록 위치를 안내해 주고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다 왔을 때 스님도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해질녘인데다 노를 젓는 배를 타니 한층 운치가 더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강가강과 강가강물을 성수로 생각하는 힌두교도인들의 문화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강가강에서 목욕을 하면 업이 사라진다고 믿었던 힌두교도인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강 저 쪽에 보이는 모래벌이 우기가 되면 다 물에 잠긴다는 설명도 해 주셨습니다. 우기가 되면 저 강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옛날 인도에서 고통 받는 이 피안의 언덕을 너머, 저 강 너머 희망의 세상으로 가는 것을 도피안이라고 했다던 스님 말씀도 기억이 났습니다. nbsp 배를 타고 화장장이 있는 곳으로 가봤습니다. 장작불이 곳곳에서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오늘 화장을 많이 하네요. 요즘 추워서 얼어 죽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거리의 걸인들도 동냥을 해서 자기 화장할 돈은 자리밑에 모아놓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돈으로 화장을 해 줍니다.” 강물 가까이에는 노란 천, 황금색 천으로 시신을 둘러싸고, 가족들이 손으로 강가강물을 한 움큼씩 떠서 시체 얼굴 쪽에 뿌리는 장면도 보였습니다. 화장장 주변에는 나무가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나무가 활활 잘 타도록 관솔을 사서 넣고, 전단향나무도 같이 태웁니다. 자 다 같이 돌아가신 영가를 생각하며 해탈주 3독과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따라 다같이 화장장을 바라보며 영가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염불을 했습니다. nbsp 해가 지면서 기온도 따라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내의도 입고 오리털 파카로 온 몸을 감싸고도 올 해는 더 추운 것 같다며 덜덜 떨고 있는데, 현지 인도인들은 얇은 옷에다 양말도 신지 않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참 춥게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강가강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물을 입에 넣고, 몸을 씻는 여자분을 보면서 종교적인 부분이라 저런 것이 가능하겠구나 싶었습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버스를 타라는 스님 말씀에 다들 자전거 릭샤 하나씩을 다시 흥정해서 버스가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전체 중 4명이 제 시간에 오지 않아 차는 그냥 출발했습니다. 갈 때부터 스님께서 “늦게 오면 개인들이 알아서 수라비호텔로 오세요.”라고 설명을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오후 7시 10분경에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호텔내 큰 공간이 없어서 옥상에다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는 말에 밖에서 추워서 떨다가 온 사람들이 “아이고... 너무 춥겠는데...”했지만,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보고는 다들 음식 먹기 바빴습니다. 오늘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시간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다들 인도음식인데도 가리지 않고 잘 먹었습니다. 역시 시장기가 제일 좋은 반찬이었습니다. 맛도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2층 홀로 내려가 바닥에 깔판을 깔고 앉아 오늘 참가한 사람들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 이번 성지순례에는 어떤 지역의 어떤 사람들이 참여를 했는지 정도는 같이 알고 성지순례를 해야 되지 않겠냐며 직접 사회를 보셨습니다. 경남, 경북, 미주, 유럽, 서울, 충청, 광주 등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참가했습니다. nbsp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서 공직에 사표를 내고 왔다는 분도 있고, 여태껏 법당에서 스님 얼굴 본 것보다 성지순례 와서 하루 이틀 사이에 얼굴 본 시간이 훨씬 많다며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이렇게 있는 것 자체가 참으로 감사하다는 분도 있었고, 열의에 차서 왔지만 감기와 이국이 주는 피곤함이 아직 얼굴에 묻어있어 인상이 굳어 있는 분도 있었습니다. 소개를 들으며 많이 웃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지순례 마지막 날까지 운전을 담당해 줄 운전사와 조수를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이라 그런지 많이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했습니다. 앞으로 수고해 주실 것을 요청하며 수고비도 드렸습니다. “우리가 다른 성지순례에 비해서 제대로 못 먹고, 제대로 못 자지만 그래도 버스 하나는 직접 보고검증까지 해서 최고급으로 준비합니다. 인도성지순례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라 저희가 버스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무갈사라이역에서 버스를 타며 스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버스를 워낙 오래 타야 하기 때문에 운전자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까지 한 대의 차량도 사고 없이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바라며 모두가 드라이버지와 컨턱트에게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nbsp 내일부터 본격적인 성지순례가 될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지 사르나트를 방문하고, 원래 일정대로 수자타 아카데미로 갈 예정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2013.01.07. 19,553 읽음 댓글 55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