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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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8.9 역사기행 여섯째날 - 요전자24개석, 상경용천부, 흥륜사, 도문조중국경

오늘도 4시에 발해의 왕성이 있던 상경용천부로 이동하였습니다. 가는 길에 요전자 24개석을 보았는데, 어제 본 강동 24개석과 같은 형태와 비슷한 크기로 요전자 마을의 밭에 있는 것으로 특별히 보호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nbsp 상경용천부에 도착해서 먼저 박물관을 들러 발해의 유물, 유적들도 둘러보고 궁성의 모형을 보고 그 규모를 짐작해 봅니다. 화려했던 옛 명성을 짐작 할 수 있듯이 왕성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지고 기단부분들만 남았지만, 내성과 외성의 길이나 각 궁궐이 놓였던 기단의 크기를 보면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발해의 역사만큼이나 유적이나 유물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nbsp 상경용천부는 입구에 오봉루가 있고 그 뒤에 제1궁궐부터 제5궁궐까지 순서대로 있었으며, 기단의 높이도 제1궁궐부터 차례로 낮아지며서 각 궁궐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중에서 제2궁궐터가 가장 큰데, 아마도 이곳이 왕이 정사를 보던 곳이었을 것 같습니다. 제4궁궐은 온돌까지 발견된 것을 보면 왕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 이었을 것입니다. 궁내에는 어화원이라는 큰 화원도 있었고 내성과 외성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nbsp 지금은 거의 허물어지고 기초석이나 주춧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이 주춧돌 위로 궁궐이 복원되기를 바라며 우리의 역사에서도 발해의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nbsp상경용천부를 떠나면서 또다시 발해를 그리며 옛 영광을 상상해 봅니다.nbsp 흥륜사는 발해시대의 절로 발해가 멸망한 후 불타 없어졌다가 청나라때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발해시대의 석등, 불상과 청나라때의 돌거북등 유물이 함께 있었습니다 . nbsp 발해시대의 유일한 불상앞에서 공양미를 올리고 법륜스님의 집전으로 사시예불을 올렸습니다. 스님께서 직접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이 하루바삐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며, 또 625 희생자들의 왕생극락을 빌려 축원해주셨습니다. nbsp 점심을 먹고 봉오동전투터로 향했습니다. 봉오동전투터 앞의 개울물이 불어서 도로를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버스가 지나갈 정도는 되었습니다. 봉오동전투터 기념비는 더 잘 정비하기 위해 현재의 기념비를 떼어내고 계단을 쌓는등 공사중이어서 약간은 어수선한 느낌이었습니다. 봉오동전투는 삼일독립운동 후 계속되는 일본의 통치속에 비정규군인 우리의 독립군이 정규군인 일본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의 사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nbsp 봉오동전투터에서는 이번 역사기행에 참가하신 분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중학생들이 제주가 되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봉오동전투터에서 전사한 우리의 독립군들은 물론 전쟁의 희생양이 된 일본의 군사들의 영혼까지 기리며, 또 이후에는 이 땅에 전쟁이 없는 평화롭기를 기원하였습니다. nbsp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고 기념촬영을 한 후 두만강을 따라 한반도 최북단인 온성군 풍서리까지 가면서 다시 북한땅을 바라다 보았습니다, 가는 길에 스님께서는 처음 JTS를 통해 온성군에 농업지원을 하면서 수확량을 3배이상 올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북한은 주체농업에 의해 밀식재배를 했었는데, JTS의 지원으로 중국의 신농법으로 하면서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이래서 될것인지 걱정하다 오히려 자라면서 가지가 벌어지고 수확량이 더 많아지면서 매우 좋아했던 이야기들을 해주셨습니다. nbsp 다음은 두만강을 따라 걸으면서 중국의 도문과 북한의 온성간 놓인 국경다리를 둘러보았습니다.nbsp 저녁식사를 한 후 그 자리에서 ‘독립운동사’에 대한 저녁 강의가 있었습니다.nbsp “1811년 서북지역 주민들의 불만으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지만, 리더십부재로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1860년 이후에는 전국 곳곳에서 민중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nbspnbsp 1860년에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만들었고, 1864년에 순교할때까지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그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최제우 선생의 뒤를 이어 최시형 선생에 의해 전국적 조직을 만들면서 동학혁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nbspnbsp 조선시대 젊은 지식인층, 즉 개화파는 세계가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가는데 우리만 뒤떨어진다고 우리도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개화파들은 일본쪽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며 일본의 도움으로 개혁하려 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갑신정변입니다. nbsp 지난 200년간 청나라의 세상이었지만, 청나라는 지는 해였고 일본은 떠오르는 세력이었지만, 떠오르는 세력이 아직 영향력이 약한데 이것을 읽지 못하고 개화파들이 일본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니 청나라 군대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국내가 분열되니까 외세에 이용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nbsp 이것은 지금의 우리 현실과도 비슷합니다. 미국은 이제부터는 지는 해이고 중국은 떠오르는 해에 해당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떤 포지션을 취할 것인가는 역사속에서 배움이 있어야 합니다. 떠오르는 신세력과 너무 빨리 함께 하면 세력의 힘에 억압받게 되고, 너무 늦어지면새로운 세력에 침략받게 됩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기본적으로 자기 주관이 뚜렷해야 하고 자신의 역량을 알고 주변정세를 정확하게 읽어야 구세력과 어떻게 함께 하면서 신세력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nbspnbsp 갑신정변이 일어난지 10년 후 동학혁명이 일어났는데, 왕조의 중앙권력은 이를 무마 하기 위해 전주관찰사를 파면하고 동학이 내건 개혁 10조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동학군들은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2차 봉기를 했지만, 관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군에 요청했고 청이 조선에 관여하자 일본군도 들어오게 되면서 청일 양군에 의해 동학혁명은 무참히 패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작게는 30만, 많게는 60만이 학살되었습니다. 동학혁명은 민중에게 엄청난 희망이었지만, 또 그 패배는 엄청난 좌절이었습니다.nbsp 이런 과정속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이기면서 조선에 대한 주도권이 청에서 일본으로 넘어오게 되었고, 고종황제는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황제로 칭하였지만, 현실적인 역량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대원군은 개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서원을 철폐하고 개혁정책을 시행할 정도로 국내정세는 잘 알았지만,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쇄국정책을 씀으로 해서 그의 개혁속도는 세상의 변화속도보다 늦어지다 보니 수구파로 분류되고 반개혁적인 인물로 평가되었던 것입니다.nbsp 조선에 대한 권한을 일본이 행세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간섭을 하는 나라가 미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 미국이 협의를 해서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관장하는 것을 서로 인정한 것이 카쓰라태프트 협약입니다.nbsp 두 번째 카쓰라태프트 협약은 해방후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분할하고 군정을 실시한 것이고, 세번째는 지금 미국은 북의 핵을 중국이 제거한다면 북의 관할권을 중국이 행사하는 것을 미국이 양해하겠다는 분위기입니다. 미국이 중국에 요구하는 것은 미국이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국제 질서 안에 들어오라는 것이고, 중국은 커진 국력에 맞는 국제적인 영향력을 미국이 인정해라는 것입니다. 미국은 중국이 가진 영향력등을 중국이 북핵제거에 협력한다면 고려해서 제3의 카쓰라태프트 협약을 맺을 수도 있습니다.nbspnbsp 이처럼 우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읽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1907년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면서 군대출신이 의병에 동참하면서 의병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1910년에 오면 의병이 몰락하는 분위기로 가니까 국내에서 의병활동하던 사람들은 결국은 포기하거나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러시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nbsp그렇게 해서 이 만주지역으로 많은 독립투사들이 뜻을 품고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용정벌을 중심으로 연변지역은 매우 넓었기에 수십만이 넘어와서 개척했습니다. 논농사는 조선족이 와서 개척한 것이며 이렇게 이루어지니까 이것을 기반으로 학교도 세우고, 독립을 준비하고, 무장을 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것입니다. nbsp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3.1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결국 비폭력운동으로는 안되는구나 해서 무력항쟁을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의 승리로 일본의 압력이 세어지니까 중국은 독립군에게 중국영내에서 나가라고 하고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일으켜 중국으로 일본군이 들어오게 되자 독립군들은 백두산으로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독립군들이 화룡 청산리에서 일본군이 추격하는 것을 되돌아서 공격한 것이 청산리 전투입니다. 김좌진 장군이 한 것을 청산리전투라고도 하고 광의의 청산리 전투는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10월 21일에서 26일 사이에 있었던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고동하등에서 승리한 전투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1920년대 이 소식은 삼일운동에 실패한 우리 국민에게 엄청난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지역의 민간인들을 독립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는 등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nbsp 이처럼 우리의 독립은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로 이루어졌고, 독립운동사를 보면 어느민족보다 적극적이며 용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운동도 민족의 독립을 우리손으로 이루지 못함으로 외세에 의해 남북이 갈리게 되고 분단으로 남북이 체제경쟁을 하면서 오히려 많은 독립운동사들의 규모가 축소 되어버렸습니다.nbspnbsp 축소된 규모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화해가 필요하고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민족의 독립운동역사가 반쪽이 될지, 온전하게 될지 결정이 될 것입니다.” nbsp우리의 독립운동사가 단순히 이 시기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민중들의 의병활동부터 내려오게 되었음을 다시 한번 새겨보는 시간이었습니다.nbsp 내일은 원래 청산리 전투터, 용정의 대성중학교, 일송정, 대종교 3인묘를 보고 연길에서 전체 마무리를 하고 심양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제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절반정도 되기에 일정을 조정해서 내일 아침에는 좀 더 일찍 일어나고 연길에서 일정을 취소하고 오후에는 백두산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스님께서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해 일정을 조정해서 다시 백두산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2013.08.11. 16,075 읽음 댓글 5개

2013.8.8. 역사기행 다섯째날 - 백두산, 장백폭포, 동모산성, 강동24석

오늘은 어제 보지 못한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차량에 올랐습니다. 어제 백두산 남쪽은 출입이 금지 되었기에 오늘은 북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출발할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긴장하기도 했습니다.nbsp 우리가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을때는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와 있었습니다. 실무자들은 서둘러서 표를 끊고 참가자들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습니다. 백두산 정상에 오르니 구름이 몰려와 천지는커녕 한치 앞도 분간하기가 어려웠고, 바람은 매우 세게 불고 있었습니다. 진한 구름속에 갇혀 있던 백두산 정상과 천지는 구름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를 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 바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그러다 몇십분이 흐른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천지를 맑은 하늘과 함께 온전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구름속에 갇힌 천지를 기다리는 간절함 속에 잠시 보이는 천지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천지를 보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있어서 좀 더 기다리는 동안 천지를 가둔 구름이 비를 뿜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우리들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장백폭포로 이동했습니다. 이제는 비가 아예 퍼붇기 시작했습니다. 가지고 간 우비나 우산이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nbsp 스님과 우리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장백폭포를 보고 잠시 경관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쏟아지는 빗줄기를 좋아만 할 수 없어서 다시 다음 장소인 소천지로 이동했습니다.nbsp 스님께서도 비를 맞으면서 우리에게 계획된 모든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애를 쓰셨고, 참가자들도 비를 맞아 추운 가운데에서도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스님 뒤를 따랐습니다.nbsp 소천지는 작은 천지라는 뜻으로 작은 연못이 맑고 고요하며 하늘을 그대로 물에 품고 있는 모습이 천지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서 소천지의 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수면이 일렁거리고 있었고, 소천지 입구를 제외하고는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nbsp 소천지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버스를 탈 수 없어서 우리들은 중간 버스승차장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추위에 떨면서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그러나 버스들이 씽씽 달리는 길이다 보니 스님께서는 혹여나 사고가 생길까 계속 대중들을 챙기며 주의를 주면서 움직였습니다. nbsp 녹연담은 통제를 해서 볼 수가 없었고, 지하산림은 차를 기다리며 지체한 시간이 많았고 또, 더 이상 비를 맞고 추위에 떨 수 없어서 다음을 기약하고 우리들이 타고간 버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nbsp 아침을 옥수수로 대신 한 채 비를 맞은 터라 다들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nbspnbsp 점심을 먹고 난 후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가운데 스님께서는 동모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신 후 오전 일정으로 피곤할테니 한숨 자라는 배려까지 해주셨습니다.nbspnbsp 동모산성은 얕은 야산에 산성을 쌓은 것으로 주위는 평지이므로 주변에서 오는 적들을 한누에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대석하가 흐르고 있고, 우물도 있고, 병영자리, 거주지도 있습니다. 평지성은 영승유지로 추정되나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대석하와 목단강이 만나는 자리에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곳이 평지성이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오리정도 떨어진 곳에 육정산 공동묘지가 있는데 여기서 정혜공주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발해인의 기록물이 나왔는데,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발해인 기록한 기록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최근에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는데, 아직 중국 정부가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수 없으나 이것이 공개될 때 발해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nbsp 강동 24개석은 아직 정확하게 무엇에 쓰였던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건축물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무엇에 쓰인 건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nbsp 저녁을 먹은 후 숙소에서 발해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nbsp “이곳 돈화는 발해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첫 도읍지인 동모산성을 보았고, 강동 24개석을 보았습니다. 내일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에서 주로 왕성터를 볼 수 있는데, 이것으로 발해의 국력,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상경용천부는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당나라 장안성 다음으로 2번째 큰 도시였습니다. nbsp 발해의 문화는 규모는 컸지만, 정교성등을 보면 문화 수준은 신라보다 떨어졌습니다. 신라의 유물은 중국것과 비교해도 정교함에 있어 더 우세합니다. 발해의 수도는 고구려의 국경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발해의 영토는 연해주까지 고구려의 2배 정도가 되었습니다. 발해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구려가 멸망을 하고 지배층이 분열, 항복을 해버리니까 백성들은 유민이 되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 유입되었습니다. nbsp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9개의 도독. 46주, 100개현을 설치 하여 직할 통치하였습니다. 그중 28,000호 사람들을 당나라로 잡아가는등 역사상 이렇게 잔인하게 탄압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중국의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을 대단했습니다.nbspnbsp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이 주도가 되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하였으나 대부분의 백성은 말갈족이었습니다.nbsp 고구려 영토의 2배로 확장해 번성하던 발해의 갑작스런 멸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백두산의 화산폭발설도 있고, 또, 발해가 번영하면서 안주하게 되었고 주변의 거란을 만만히 보면서 멸망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nbsp 이후 발해를 계승한 민족이 없었습니다. 고려도 명확히 발해를 계승한다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발해가 멸망한 후 역사가 사라졌다가 조선조 실학자들에 의해 발해에 대해 우리역사로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을 뿐입니다.nbsp 이처럼 우리가 통일을 할 때 어떤 국가 이념으로 어떻게 북한을 수용할 것인지에 따라 우리의 역사가 바뀌게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왜소해지기도 하고 자존감이 없어질수도 있고, 오히려 고구려, 발해의 옛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nbsp 이렇게 강의를 듣고 ‘발해의 옛 영광을 꿈꾸며’ 발해의 첫 수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내일은 발해의 웅장한 문화를 볼 수 있는 상경용청부로 갈 예정입니다.

2013.08.09. 17,565 읽음 댓글 6개

2013.8.7. 역사기행 넷째날 - 림강, 영광탑, 백두산

새벽 4시에 림강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호텔측의 체크가 늦어져서 약 20분이 늦은 채 출발했습니다. 림강은 발해시기에 서경압록부의 소재지로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최근에 림강 부근에서 발해의 유물, 유적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역사기행 참가자들은 시장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아침을 해결했습니다. 중국 서민들의 실생활을 잘 알수 있었고, 우리가 직접 사먹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nbsp 림강을 떠나 압록강을 따라 장백으로 향했습니다. 압록강 건너 보이는 북한은 여전히 가슴아픈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예년에 비해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뙈기밭들은 여전했지만, 그래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였고 예전보다 활발해 보였습니다. 압록강 건너 보이는 북한의 뙈기밭은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예년보다는 조금 나아보인다는 스님의 말씀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압록강을 따라 가면서 보이는 북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북한은 자기가 농사를 지어도 자기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데 소홀하게 되고 수확량이 떨어지게 되고, 개인은 먹고 살기 위해 집주위 산을 개간해서 농사를 지어 자기것이 되기 때문에 열심히 짓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자기것이 되어 좋지만, 국가적으로는 손실입니다. 그래도 북한 주민들이 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에 살아남은 것도 다 이 뙈기밭 덕택입니다. nbsp 북한이 계속적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현재는 농업생산량의 배분을 바꾼다고 합니다. 생산량의 70는 개인이 처분 가능하고, 나머지 30에 대해서 정부가 공급하는 농자재에 대해 감가하고 남으면 농민에게 현금으로 배분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꺼번에 시행한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30만 개인이 처분했는데, 이제는 70로 바뀌었습니다. 북한의 관리들도 북한의 농업 시스템이 이렇게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회의를 하면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하는 소수가 주장을 강하게 하면서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nbspnbsp 역사적으로 볼 때 전쟁이 나면 끝까지 싸우자는 사람들이 있고, 타협하자는 사람들이 있는데, 역사속에서는 싸우자고 하는 사람들이 잘했던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통받는데도 끝까지 싸우자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nbsp 90년대 후반에 북한 난민을 수도 없이 만나고 이야기 해봤을 때, 이념과 현실은 차이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백성들을 팽개치고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난민들을 만나고 가장 가슴 아팠던 말이 ‘다 죽고 지혼자 왕하면 뭐하노?’라는 말이었습니다.”라는 스님 말씀에 다시한번 북한의 굶주리는 사람들이 스쳐지나 갑니다.nbsp 압록강 건너 북한땅을 보면서 스님의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새 북한의 혜산이 내려다 보이는 영광탑까지 왔습니다.nbsp영광탑은 발해시기의 탑으로 그 밑에는 무덤으로 되어 있습니다. 준비해 간 제물을 차려놓고 간단히 예불을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압록강 건너 혜산이 바로 눈앞에 보였습니다. 북한을 가장 가깝게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건너 보이는 혜산은 강변에 벽을 쳐서 제대로 보이지 않게 해 놨지만, 강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nbsp 점심을 먹고 난 후 백두산 남편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중에 슬픈 소식 하나를 들었습니다. 며칠전 내린 비로 백두산 남편이 폐쇄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문입구까지 갔다가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서문으로 이동했습니다. 여기서도 시간이 늦어서 입구에서 모형을 보고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nbsp 백두산은 내일 북문으로 갈 예정입니다. 만약 비가 온다면 이 또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역사기행은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찾아가는 것이지만 그래도 최고의 묘미는 백두산 천지를 보는 것인데, 아쉬움이 많습니다. 혹시나 내일 비가 오면 어쩔까하는 걱정도 됩니다. nbsp 오늘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한 관계로 숙소에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북한에 대한 스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오늘은 하루종일 압록강을 따라 가면서 북한의 산하, 마을,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중간중간에 스님의 설명을 듣긴 했지만, 오늘 저녁 강의를 북한을 주제로 스님께서 정리해주셨습니다. “북한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것이건 부정적인 것이건, 사실대로 접근해야 합니다. 일제 시대와 분단이 연관이 돼 있어서 제대로 평가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nbsp 1920년까지 독립운동의 주류는 대종교였고, 1930년 이후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은 소수였고 사회주의 계열이 주류였습니다. 상해임시정부가 유명무실해지자 무장투쟁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 공산당으로 편재되어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일단 조국의 독립을 위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국내 다수 국민들은 소작농 철폐등 사회주의가 당시 시대의 주류였습니다. 해방 후 남쪽은 미군정이 북쪽은 소련 군정이 들어섰는데, 서로 경쟁 상대가 된 것입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문제는 해방의 주도 세력이 미국과 소련 외세였지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독립을 우리가 당당히 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분단 자체가 우리 책임은 아니지만, 미국은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을 추천한 것이었고, 소련은 5년 정도 하바로브스크에 와서 소련군으로 활약했던 김일성을 내세운 것입니다. 외세의 힘이 강력한 상황에서 김구, 조만식 등 외세와 함께 하지 않았던 국내 세력은 클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nbsp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한은 부정선거등 각종 문제들이 많았지만, 경제개발에 성공해서 1970년대 들어서 남북한 세력이 비등비등해지니까 서로의 체제를 인정한 위에 통일문제를 협의 하게 된 것입니다. 남쪽은 각각 독자적으로 국가를 유지하는 통일에 대한 원칙적인 통일인 연합제를 주장하고, 북쪽은 연방제를 주장했습니다. 7.4남북공동선언에서 세 가지 합의를 한 것입니다. 이때까지도 북한이 공세적인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북한은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는 올림픽이 끝나자 민주화운동도 성공해서 체제의 정당성이 강해졌습니다. 북한은 1989년에 세계청소년축전을 88서울 올림픽에 견주어서 과도하게 평양을 건설하면서 재정이 악화됐고, 주체농법, 자립경제가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nbsp 거기다 결정적으로는 소비에트와 동유럽이 붕괴되어 북한 경제가 중대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치명적인 것은 에너지 공급이 멈춘 것이었습니다. 전기가 안 들어오니까 석탄을 못 캐고, 탄광이 무너지고, 탄을 못 캐니 다시 발전소를 못 돌리고 이렇게 악순환인데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자본주의 세계와 거래를 할수도 없었습니다. 북한이 대량아사가 발생한 것은 첫째는 북한정부의 잘못이지만, 둘째는 남한 정부의 잘못도 있습니다. 또,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장기전을 한 것도 북한경제의 몰락을 가속화한 것입니다. 현재 북한의 경제와 사회는 붕괴된 상태였고 정치와 군사는 아직 굳건한 상태인 것입니다.nbspnbsp 북한의 긍정적인 점을 얘기하면 보수세력은 친북이라고 하고, 북한의 피폐한 점을 얘기하면 북한과 남한의 진보세력은 반북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친북, 반북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 위에서 접근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북한의 과거 긍정적인 점은 인정하고 그리고 내부 모순이 심해지면서 인권문제등 부정적인 면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nbsp 북한은 통일해야 할 대상인 동시에 현실에서는 최대 적대적인 당사자라는 이중 모순이 있습니다. 남북간 화해, 교류, 협력을 하되 북한의 도발에는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합니다. 체제유지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면서 북한을 우리 민족사 내부로 어떻게 포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서민들은 인도적 지원을, 중상층 사람들은 남북경제교류로, 최상류층은 신분보장을 해주고 체제보장을 해주어야 통일의 길을 열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쪽의 우파가 통일을 위해 북쪽을 포용해주어야 합니다. 중국의 대만에 대한 포용에서 시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힘있는 우리가 끌어안으면서 가면 신라가 가야를 통일할 때처럼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은 현재 아무리 통일을 얘기해도 통일보다는 체제유지가 급해서 남쪽이 주장했던 각자의 체제를 유지하자는 것에 남북연합의 큰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도 성장동력이 소진된 현재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북한을 껴안고 가야 합니다. 인도주의 측면, 과거 아픔을 청산하는 측면, 미래의 비전을 만드는 측면,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측면, 평화를 완전히 정착시키는 측면 등 10가지, 20가지를 잡아도 남북한이 통일해야 합니다. 젊은세대는 통일에 부정적인데, 미래의 비전을 만들기 위해서 통일이 어떤 이익을 가져오느냐가 새로 검토돼야 합니다.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새롭게 통일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기행은 이런 기본 인식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 고단한 몸을 끌고 이렇게 역사의 현장을 찾아 다니는 것입니다.” nbsp 스님께서는 북한에 대한 상황도 이해하고 남한의 상황도 이해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힘을 합해 나가야 할 것에 대해 당부하시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역사기행을 다니는 것도 이런 통일운동중의 하나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 내일은 오늘 보지 못한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다시 백두산에 오를 예정이며, 오후에는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볼 예정입니다.

2013.08.08. 16,818 읽음 댓글 5개

2013.8.6. 역사기행 셋째날 - 국동대혈, 5회분5호묘,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새벽 4시에 국동대혈로 출발했습니다. 국동대혈은 고구려 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가는길에 이곳 마을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관음상을 모신 관음굴을 들렀습니다. 중국은 문화혁명때 종교를 부정하기 때문에 모든 민간 신앙을 없앴다가 최근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동굴에다 관음상을 모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음의 평안과 평화통일을 기원하였습니다. 관음굴과 사랑바위를 보고난 후 국동대혈로 이동했습니다.nbspnbsp 국동대혈은 큰 동굴이 동서로 뚫린 형태로 국내성의 동쪽에 큰 대혈이 있다는 뜻으로 고구려의 왕들이 직접 여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고구려 왕들은 정치적 최고 권력자임과 동시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그 당시를 생각하며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nbsp 국동대혈을 내려와서 압록강가를 따라 숙소로 오는 길에 압록강 건너 보이는 북한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북한의 집들은 예전의 우중충한 회색빛에서 흰색벽과 푸른 지붕으로 새단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거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몇 년전만 해도 죽은 도시같은 느낌의 북한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스러웠습니다.nbsp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난 후 해외사무국장인 김순영법우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실무자들은 모두 모여 스님과 함께 김순영님의 어머니의 왕생극락을 바라며 간단히 천도재를 지냈습니다.nbsp 5회분 5호묘는 고구려 벽화고분중 유일하게 내부 관람이 가능한 곳입니다. 5회분 5호묘 안에는 죽은 시신을 보관하는 3개의 관대가 있었고, 벽화는 장식적인 문양과 설화적인 묘사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nbsp 장군총은 고구려의 적석무덤으로 7계단 22층으로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워 아는 것보다는 훨씬 어마어마한 규모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장군총 뒤의 한쪽 모서리가 무너져 있긴 했지만, 거의 원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전만해도 무덤안에 들어가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관광객들도 많고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서 보는 것만 가능했습니다. nbsp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때 만든 것으로 호태왕의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고구려 건국부터 호태왕까지의 역사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석의 돌에다 업적을 새긴것이며 비석의 크기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nbsp 광개토대왕릉은 한면의 길이가 장군총의 약 2배이상의 크기를 가진 규모였습니다. 무덤만으로도 그당시 광개토대왕의 호탕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nbsp 오늘은 다니다 보니 한국관광객들도 눈에 보입니다. 그 중 일부는 스님을 알아보고 함께 사진찍자고 하는분들도 계시고, 인사를 하고 가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백산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은 백산에서 잠을 자고 내일 백두산을 가려고 합니다.nbsp 백산의 숙소에서 저녁을 먹고 난 후 스님으로부터 세 번째 강의를 들었습니다. 오늘은 고조선부터 현재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한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셨고 특히 역사의 정통성 계승, 그리고 힘이 약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에서 현재 남북한의 통일을 위한 방안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nbsp “고조선이 쇠락하고 분열이 되어 번조선, 진조선, 막조선으로 되었다가 나중에 조선이 한으로 바뀌면서, 변한, 진한, 마한으로 되었습니다. 중국쪽에 위치한 것이 번조선이었고, 가장 오른쪽에 있던 막조선은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가 산으로 들어가 버림으로 해서 해모수가 단군이 되어 부여로 명하였습니다. 고조선이 힘을 잃으니 열국시대가 되었고, 열국시대의 맹주는 부여가 되었습니다.nbspnbsp 이후에 주몽은 부여의 적통을 계승하여 고구려를 건국했기 때문에 건국이념이 조선의 옛땅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nbsp 고구려의 대무신왕때 와서 부여가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부여의 대소왕이 전사하면서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성장하게 되고, 부여는 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열국시대, 오국시대를 거치고 부여는 문자왕때 고구려에 합병되었고 이후 삼국시대가 되었습니다.nbspnbsp 주몽의 고구려 건국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비류와 온조가 백제를 건국했는데도, 백제를 정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백제의 건국이념이 조선의 고토 회복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라도 마찬가지입니다. nbsp 이후에 고구려가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이 분열해서 동생은 신라로, 맏이 남생은 당으로 가서 협력하는 등 내부분열이 가속화 되면서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역사의식의 부족으로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nbspnbsp 고조선이나 고구려가 망할 때 가장 큰 원인은 내부분열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내부분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강경정책에 대한 반발이 큰 원인입니다. 권력을 유지하려면 독재를 해야 하고, 그러면 내부는 깨져 내부분열이 일어나고 백성들은 애국심이 사라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망국으로 가게 되지요.nbsp 삼국중에서는 고구려만이 고조선의 고토회복이라는 국가이념을 가지고 나라를 운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15대 미천왕때 고조선의 옛영토를 회복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모용왕이 침입을 해서 연나라에 사대의 예를 취하게 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nbspnbsp 소수림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관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방정책을 폈다는 것입니다. 고국양왕에 와서 자리를 잡았고 바로 광개토대왕으로 이어지면서 다시 국가이념에 충실하는 확장정책을 폈습니다. 고구려는 남으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장수왕 후반부터 문자명왕때까지 태평성대를 이뤘습니다.nbsp nbsp nbsp신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법흥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금관가야와 합병했는데, 가야는 신라와 철천지 원수지간이었지만, 과거의 원한을 씻고 합의 통일을 이루어 냈습니다. 합의통일이라는 것은 상대의 모든 문화를 수용하고, 지배세력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가야의 왕족이 신라의 왕족으로 흡수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재를 등용한 것이 신라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첫 번째 요소가 되었습니다. 가야 마지막왕의 증손자가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으로 가야출신들은 주로 군대에서 활약했습니다.nbsp 남북이 합의 통일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북한은 군대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를 보면 아이디어를 얻을 것이 많습니다.nbspnbsp 나당연합군에 의해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것은 당을 몰아낸 676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만큼 신라도 자주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nbsp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북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민족적으로는 말갈족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nbsp 민족사에서 발해를 잊어버림으로 해서 잃어버렸고, 신라가 통일을 하다보니 신라중심의 역사가 정리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려가 이 부분을 잘 연결해 내었습니다.nbspnbsp 다만 고구려, 발해 아래에 있던, 문화가 다른 말갈8228여진8228거란8228선비족을 떼내어 버림으로 해서 거대한 동북아의 문명사가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통합해서 계승했다면 당당한 동북아의 거대한 역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것들을 어떻게 문명사적으로 통합을 해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낼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이것이 치유가 된다면 중국을 두려워할 것도 없고 얕잡아 볼 것도 없습니다.nbsp 지금 남북이 역사를 계승할 때도 백년뒤에 민족사의 단절없이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를 신라, 발해, 고려를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nbspnbsp 세계 문명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이제는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명이 도래하는 조건은 되었지만, 문명의 중심이 되려면 군사력, 경제력만으로는 안됩니다. 문명이 앞서야 합니다. 이것은 정신적 철학이 앞서야 하고, 인권, 소수자등 모든면에서 앞서야 합니다. 동아시아 도래가 자동적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분간은 민족적 갈등이 심화될 수도 있습니다. nbsp 중국은 인권이나 소수민족문제등 여러측면에서 문명을 이끌수가 없고, 일본도 침략과 만행에 대해 사과하고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명을 이끌수가 없습니다. 한국도 지금처럼 남북이 대결한다면 문명을 이끌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국이 합의 통일을 한다면 남한사람이 애국열사능에 참배하고, 북한사람이 국립묘지에 참배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엄청난 힘이 되고 동아시아 시대의 문명을 이끌수가 있습니다.nbsp 이것은 세계의 갈등을 치유하는데도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보고 크게 나가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릴 수 있을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입니다.nbsp 앞으로 우리가 북한과 통일을 할 때 무엇을 중요시 해야 하고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지를 다짐하면서 하루를 마무리 했습니다.nbsp 내일은 림강에서 아침을 먹고, 영광탑을 방문하고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백두산을 오르는 일정이 있습니다.

2013.08.08. 20,074 읽음 댓글 5개

2013.8.5. 역사기행 둘째날 - 오녀산성, 환도산성, 국내성

어제 모든 일정을 마무리 하고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다행히 오늘은 아침 일정이 조금 여유가 있었습니다. 보통 3시 전후로 기상하여 이동하는데, 오늘 아침은 5시 50분에 기상하였습니다. 기상 후 짐을 챙겨 현관으로 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나서도 비가 내리고 있어서 오녀산성에 오르는 것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동안 스님께서 고구려 시대의 홀본, 집안지역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고구려가 처음 세워질 때 소서노와 주몽의 이야기, 유리왕이 왕위 오르면서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백제를 건설한 이야기, 유리왕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집안으로 수도를 옮긴 이야기등을 듣고 있는 가운데 비가 그치면서 오녀산성에 오르는 것이 허락되어서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오녀산성으로 향했습니다. nbsp 오녀산성에 도착해서 기념관을 둘러보고 산성입구까지 차로 이동한 후 가파른 계단을 올랐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니 숨이 찼는데, 스님께서는 제대로 드시지도 않으시면서 오르는 길이 많이 힘드셨을텐도 모든 일정을 저희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nbsp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첫 수도이며, 오녀 산성 아래로는 비류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오녀산성은 깍아지른 절벽위의 평지에 사람들이 살았으며, 여기에는 전망대, 병영자리, 우물터, 식량 창고자리터가 남아 있습니다. 오녀산성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천연의 요새로 적의 침입이 거의 불가능 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산성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물과 곡식이 있어야 되는데, 이곳 오녀산성에는 우물터가 있어 지금도 샘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녀산성을 오를 수 있는 곳은 서문쪽 밖에 없는데 서문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옹자형 성문을 쌓았습니다. 산허리에 있는 동쪽 성벽의 동문은 공자형 성문이었습니다.nbsp 오녀산성을 내려와서 점심을 먹고 환도산성, 국내성이 있는 집안으로 향했습니다. 환도 산성은 지형지세가 좋고 자연조건이 워낙 견고해서 적의 공격을 막기에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락이 잘 안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425년간 2번의 함락이 있었습니다. 환도산성에서 바라보면 국내성까지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밖에서 오는 적들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nbsp 고구려 산성의 특징중 하나는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를 이루게 되는데,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한 조를 이루어 평상시에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위급할때는 환도산성으로 이동했었습니다.nbspnbsp 환도산성 입구에는 산성하 무덤떼가 있습니다. 산성아래 무덤들이라는 뜻의 고구려 무덤으로 아래에는 기단을 쌓고 맨위는 큰돌을 얹은 적석무덤입니다. 이런 무덤형식은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양식입니다. 계급이 높을수록 기단의 수가 많아지게 쌓았습니다. nbsp 국내성은 평지성으로 고구려 제2대 유리왕부터 제20대 장수왕까지 425년간 통치하던 곳입니다. 지금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고 성벽들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국내성은 중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고 앞으로 30여년에 걸쳐 사람들을 이주시키기로 했습니다. 국내성의 동쪽벽은 거의 형체를 찾아볼 수가 없고 남, 서, 북쪽벽은 일부 성벽들이 남아 있고 성문 자리도 남아 있습니다. 서문은 공자 형태로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국내성의 남쪽벽 자리를 따라 걷는 길은 압록강을 따라 건너편에는 북한이 보입니다.nbsp 건너편 북한이 보이는 압록강변에서 사진을 찍고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저녁먹기가 약간 미안하기 했지만, 또 우리는 우리의 일정이 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을 뒤로 하고 저녁을 먹고 숙소로 와서 저녁강의를 들었습니다. 어제보다 약 1시간 정도 빨리 도착했습니다. nbsp오늘은 스님께서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은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통일된 대한민국이 가질 정통성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nbsp “대한민국의 뿌리는 대한제국이고, 대한제국의 뿌리는 조선왕조입니다. 조선왕조는 삼전도의 굴욕으로 청나라에 종주권을 잃었다가 조선조 말엽 고종때 청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국권회복을 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쓰고 고종황제로 칭했습니다. 조선왕조의 뿌리는 고려왕조이며,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 것은 다른 변화없이 왕의 성만 바뀐 것입니다. 고려왕조의 뿌리는 고구려입니다. 왕건이 창건할 때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다고 했으면 우리의 민족사는 2천년으로 한정 되었을 것입니다. 역사의식은 발해를 계승하지만, 현실은 신라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함으로써 동시에 발해, 신라를 계승한 것이 된 것입니다. 고구려는 주몽이 부여의 왕인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부여가 뿌리입니다. 동부여, 백제도 그 뿌리를 부여에 뒀고 정통성을 고구려가 계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모수는 부여를 세울 때 나는 단군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단군조선을 계승했고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며, 환웅은 환인의 아들로 환인의 한나라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민족사는 환인의 한나라까지 약 9천여년이 넘는 것입니다. nbsp 앞으로 우리가 통일국가를 이룰 때 국호, 국시를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통일국가를 계승할 때, 북한을 배제하고 할 것인지, 아니면 북한까지 같이 계승할 것인지에 대해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통일 국가의 정통성을 북한을 포함해서 계승한다면 북한의 독립운동가들도 함께 계승하게 될 것이고, 배제한다면 일본에 항거했던 독립운동중 사회주의 계열의 것이 모두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민족사의 정통성에 상당한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북간에는 지금까지 정통성 경쟁을 해 왔습니다. 초기에는 북한이 우세했지만, 지금은 남한이 우세합니다. 남한은 초기에는 정통성에 취약점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지난 60여년 동안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정부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제는 남북한이 어떤 역사의식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민족사를 온전하게 이어가며 우리 민족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줄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nbsp 오늘은 우리 민족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살펴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면서 하루를 마무리 했습니다.nbsp 내일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국동대혈과 꿈에도 그리던 장군총, 광개토대왕릉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2013.08.06. 20,622 읽음 댓글 3개

203.8.4 중국역사기행 첫째날 - 요녕성 박물관, 백암산성

오늘은 제19차 중국 역사기행 첫날입니다. 126명의 참가자들은 예정된 시간보다는 약간 늦게 심양공항에 도착했지만, 무사히 심양공항을 빠져 나와 요녕성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요녕성 박물관으로 향하는 버스안에서 스님께서는 요하 문명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하강 유역의 홍산문명은 황하문명보다 앞선 것입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만리장성 밖은 오랑캐 땅이라고 하여 중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이 만리장성 밖에서 발견되다보니 당황해 했습니다. 유물이 나온 것만이 아니라 성이 발견되고 거대한 적석무덤, 신전, 제단이 발견되었습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용문화인데, 이지역에서 최고 오래된 용과 봉황이 나왔습니다. 중국의 갑골문자보다 더 오래된 문자인 도부문자도 나왔습니다. 이제까지는 중국 문명의 시원을 황하문명, 장강문명으로 하였으나, 지금은 요하문명과 황하문명을 중국문명의 시원으로 한다고 규정한 것이 동북공정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nbsp 요하문명은 인류 최고의 문명이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도 쌍벽을 이룰 정도이며, 단군조선을 넘어 환웅의 배달나라가 유물적으로 증명이 된 것입니다. 환인시대에 해당하는 9천년전 유물도 나왔습니다. 약 6천여년전 유물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3단으로 된 제단이 발견되었고, 신전 특히, 여신전이 발견되었는데, 여신의 손모양이 곰 손모양처럼 보이는 것도 나왔습니다. 단군신화가 유물로 나온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무덤은 주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양식인데, 고구려 무덤과 같은 적석총이 발견되었고, 그 규모도 고구려 무덤 이상으로 초기 국가가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nbsp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역사에 남아 있는 이런 기록들을 단순히 신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꿔야 합니다. 고구려만이 갖는 독특한 무덤, 성곽문화, 이것이 바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고대문화, 배달문명이었던 것입니다.nbsp 이곳 요녕성 박물관은 요하문명의 일부 유물만 전시되어 있고, 요하문명의 대다수 유물, 유적은 내몽고 자치구에 있습니다. 고조선 시대를 중심으로 발달된 청동기 문화, 배달문명시대에 해당되는 잘 다음어진 옥기문화, 그보다 앞선 신석기 문화가 요하문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nbsp 요녕성 박물관은 제1관은 구석기와 신석기, 동석병용기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2관은 상주시대에 해당하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이, 제3관은 진한시대 이후 당나라시대까지nbsp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nbsp 요녕성 박물관을 나와 백암산성을 향했습니다. 2시간을 달려 도착한 백암산성은 한창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nbsp 백암산성은 고구려의 산성으로 지금은 연주산성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백암산성을 따라 걸어 오르면서 스님께서는 백암산성의 특징, 고구려 산성의 특징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백암산성은 산성을 보호하기 위해 덧성을 쌓았고, 성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치를 쌓았습니다. 고구려성의 특징은 돌을 마름모꼴로 다듬어 마름모의 끝이 서로 맞물리도록 하여 서로 지탱할 수 있도록 견고하게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nbsp 백암산성은 북쪽으로는 높고, 동쪽으로는 태자하가 흐르면서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적이 주로 서쪽으로 침공해 올 위험이 있어 서쪽으로는 성을 두껍고 견고하게 쌓아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암산성의 맨 꼭대기인 망대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적이 오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시야가 트여있었습니다. 옛고구려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기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nbsp 백암산성을 떠나 환인으로 이동하는 길에 본계현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다시 2시간 30분을 이동하여 숙소가 있는 환인에 도착하자마자 짐은 로비에 그대로 둔채 강의장으로 향했습니다.nbsp 비록 늦은 시간에 몸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바로 강의장으로 향하면서 역사기행 첫날, 우리역사 전반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nbsp “우리나라사람들은 크게 3가지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가 중국에 대한 문명사적 열등감인데 역사적으로는 상고사부분입니다. 우리의 뿌리인 상고사에 대해 많은 유실과 왜곡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중국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 상고사의 유실과 왜곡은 우리의 문명이 중국문명의 아류, 변방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nbspnbsp 둘째, 일본에 대한 식민지배의 상처인데 주로 근대사 부분입니다. 우리나라가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일본의 침략을 받고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우리가 스스로 자주독립을 이뤘다면 피해의식이 없을텐데, 외세의 힘으로 이루어진데다가 그 이후에 남북간 분단으로 인해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자기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편에 대한 독립운동역사를 왜곡하거나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는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민족적 자존감이 생길수가 없습니다.nbspnbsp 셋째는 미국등 서구문명에 대한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식계층이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와서 국민들을 개도했습니다. 현재 우리사회 발전이라는 것이 서양을 모방하는 것이고,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철학, 종교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것은 낙후되어 있고 서양것은 발전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근원적인 열등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nbsp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정립이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를 둘러싼 주변의 국제질서, 국제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된다는 것, 우리의 역량을 충분히 정확하게 파악해야하며 창조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적 사고를 하려면 열등감이 극복되어야 합니다. 열등감은 문명의 역류현상이 일어나면 극복이 됩니다.nbspnbsp 그렇기에 우리의 역사를 민족사가 아니라 문명사로 다루어야 합니다. 중국은 이제까지의 한족 문화를 오늘날 다민족의 중국문화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흡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우리의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자는 것이 아니라 잊어서 잃어버렸던 역사를 되찾아 바로 잡자는 것입니다.nbspnbsp 이런 것을 가지고 중국과 역사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극복이 되어야 한국과 중국간에도 좋은 관계가 유지되고 그래야만 도래하는 동아시아시대를 함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인종적으로 중국의 한족은 남방 몽골리안, 우리나라는 북방몽골리안이고,nbsp문화적으로도 중국은 차이나 티벳어족, 우리나라는 우랄 알타이어족입니다. 서로 섞여 살뿐, 문화적으로는 그 뿌리가 서로 다릅니다.nbsp 중국과 우리는 문화의 출발이 서로 다릅니다. 문명은 앞선쪽에서 낮은 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nbsp 우리의 과거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이 역사학과를 나와서 평생 역사연구와 정립에 몸담아야 합니다.nbsp해모수라고 할 때 한문으로 적어놨는데 뜻을 새겨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순 우리말로 해석하면 ‘해를 모시는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천제를 섬기는 자라는 뜻이지요. 수리는 맨 꼭대기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언어를 모두 재해석해야 합니다. 일본의 천왕문화속에는 우리의 전통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왕이라는 것은 신정일치이며 천왕은 등극할 때 반드시 신내림을 받아야 합니다. 역사의 복원은 현장에서 조사할 뿐 아니라 사서를 참고할때는 그들의 편견에서 본 기록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별자리의 이동도 조사하고, 백두산 폭발등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도 있습니다.nbspnbsp 역사의 현장을 다니면서 우리 민족의 자존의 뿌리를 찾아 회복하는 그런 여행효과를 얻기를 바랍니다.”nbsp 오늘 역사기행 첫날 11시가 넘어 마무리 되었지만,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대단한 민족임을 자각하며 잠자리에 든 하루였습니다.

2013.08.05. 20,783 읽음 댓글 4개

2013.8.3.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모임, 불교대 경전반 담당자 워크숍, 천준위 회의 및 2번의 미팅

오늘 아침 7시 30분부터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종교인 기자회견에 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서초동 정토법당에서 전국 불교대, 경전반 담당자 약 380여명이 참석한 워크숍이 진행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법문에서nbsp“왜 불교대학을 운영하는가? 어떤 목적으로 설립이 되었는가?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운영, 관리할 것인지를 점검해야 기술적인 문제도 함께 해결될 것입니다.nbsp 불교 신자는 불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식중심으로 불교 공부를 해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불법의 가르침은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nbsp 청년불자들은 지식적으로만 불교를 공부하기 때문에 신앙심이 부족합니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와도.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극복하고자 정토 불교대학이 생겨나오게 되었습니다. 실천적 불교사상의 첫 머리에 왜 불교를 공부하는가? 왜 불교가 삶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이런 점을 알고 다른 종교와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불교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불교의 첫걸음으로 배워야 합니다. 두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면 부처님은 누구신지?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근본 가르침은 무엇인지? 네 번째, 시대가 흘러가면서 변화과정은 무엇인지? 소승, 대승이 왜 생겼는지 알아야 우리와 다른 나라의 불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그런데 한 종파에 들어가면 그 종파의 교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를 가지면 더 배타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도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선방에 다니는 신도들은 일반 절에 다니는 신도를 수준이하로 보는 현상도 있습니다. 스님이 되어 신도를 하인 취급하기도 합니다. 무슨 불교를 배웠기에 이렇게 되냐? 이런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도 가지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포용성을 키우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수계를 할 때에도 돈 얼마주고 받기 때문에 계를 받아도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한다면, 한국 남자가 얼마나 외도를 했느냐?하는 설문 조사를 한다면 절에 다니는 남자는 한국 남자 평균보다 적을까요? 그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늘 보시해라라고 가르치지만 불교신자가 많이 보시할까요? 불살생 등 계율을 불교신자가 더 잘 지킬까요? 문화적인 것은 남아있으나 가치관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불교신자가 되어도 불교적인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불교신자가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숫자가 많은 것으로는 세상에 아무 변화도 줄 수 없습니다. 불자라면 선택하는 삶의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기부금 조사를 하여 차이가 안난다면 불교대학을 지식으로만 배우고 있지, 가치관의 변화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깨달음의 장, 나누기 수련, 성지순례를 다녀옴으로써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불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본인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불대 담당자는 관점을 잘 알고 관리를 해야 합니다. 설령 동국대 불교대학을 나왔다 하더라도 정토 불교대학을 다시 다니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 전체에 대한 통찰력, 삶과 연관된 수행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최고 이상은 깨달음이며 깨우침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원을 세울 수 있습니다. 불교의 궁극적 이상이 열반과 해탈이라는 첫 출발로써 의미가 있으며 실천도 같이 병행하기 위해 봉사, 기도로 자기정진, 깨달음의 장이 필요합니다. 공부를 수직적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도반과 나누기를 하면서 타인의 눈을j 통해 나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법문을 들어야하고 나누기를 해서 지식에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누기를 하지 않는 것은 조퇴와 같습니다. 절반만 한 것. 나누기도 교과 과정, 둘째가 나누기, 깨달음의 장, 봉사활동이고, 셋 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수행은 사로잡힘에서 벗어나 나를 행복하게 할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자리이타의 전통사상에 입각한 것이며, 보시는 재물로써 남을 돕는 것, 봉사는 재능으로 남을 돕는 것 이 세 가지를 실천하는 것이 정토불교대학의 설립취지와 목적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1만 있어도 그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세상은 변할 수 있습니다. 정토회 만일결사의 목표이기도 하며 이것은 전국 기초구에 100명에 해당됩니다. 이것을 한 생의 목표로 삼은 것이 만일결사입니다. 원래 불교대학과 경전반은 한 과정으로 경전반에서는 기본을 터득한 입장에서 자기가 경을 보며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금강경은 대승경전 중 초기 사상으로 교이면서 선사상, 반야심경과 함께 선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육조단경입니다. 자기가 체득되도록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며 기본이 잡혀있으면 이후는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진실한 불자가 되도록 인력을 키워내는 것이 정토불교대학입니다. 여러분이 반장, 담임역할을 하며 향후 1년에 5천명이 들어오더라도 5천만 명이 되려면 백년이 소요되는데, 이것을 3년 안에 하려면 5만 명씩 10년이 필요합니다. 오는 분들이 빠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경전반으로 인도,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도록 하고 졸업자는 다시 담당자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합니다. 가능하면 입학은 많게 졸업은 다 하도록,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늘어나면 우리사회는 저절로 밝아집니다.”라며 왜 불교대학을 우리가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각 지역의 불대 담당자들은 스님께 업무를 하면서 생기는 고민들을 질문했습니다. ‘진행하면서 스스로 부족한 마음이 많아 걱정인 분, 계획성이 없는데 어떻게 계획적으로 할 수 있는지 고민인 분, 깨장을 가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가야하는데, 억지로 보내는 것 같아 고민인 분, 봉사가 많아지면서 어떻게 남편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지, 또 아이들을 위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고민인 분, 부처님은 왜 걸식을 하셨고, 부처님이 출가한 것이 실제로 아내와 아버지에게 아픔을 준 것은 아닌지 질문하신 분, 수행과 일상생활속에서 갈등이 있어 고민인 분’등 다양한 분들이 평소 고민하던 것을 내어놓고 스님께 진리의 말씀을 듣기를 웠습니다. 스님께서는 법문을 마치자마자 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해서 평화연구원의 김형기 원장님과 만남을 가졌고, 이어서 천준위위원들과 함께 8차년을 구상하는 회의를 함께 했습니다. 이후에도 2차례의 미팅을 더하였고, 원고수정등의 업무를 하고 난 후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내일부터는 동북아 역사기행을 위해 중국으로 출국하게 됩니다.

2013.08.04. 16,170 읽음 댓글 1개

2013.8.2. 실무자 안거 마지막 격려말씀, 한겨레 인터뷰 및 미팅

스님께서는 어제까지 진행된 실무자 안거에 대한 소감문을 보고서 오늘 아침 실무자들에게 앞으로 우리가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지 정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수련때 돌이킨 것이 일상생활에서는 잘 안된다고 하는데, 누구나 그렇습니다. 명상할 때 보면 서서 다닐때는 괜찮다가도 앉으면 다시 다리가 아픈 것과 같습니다. 이런 가운데 늘 자신을 돌이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잘 점검하려면 도반끼리 항상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함께 모여 자기성찰하고 상대가 수행적 관점을 놓치는 것 같은 것을 비판이 아니라 알려주는 자리를 자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재 우리는 수행집단이지만 분위기는 일반 집단과 같습니다. 생활하다 스트레스 받으면 때로는 잡담하던지, 험담하던지, 자기 억압된 마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nbsp 밖에서 보면 수행자이지만, 우리와 가까이 있는 대중들이 보면 우리문화가 수행문화로 아직 제대로 정착이 안되어 있습니다. 대중들이 볼 때 ‘실무자들이 사는 것을 보면 짜증내고 하는 것은 우리들과 비슷하지만, 끝날 때 나누기 하고, 돌아보고 자기를 체크하고 서로에게 격려되는 문화가 다르구나’ 하는 이런 문화가 정착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계율에 법에 관계되지 않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즉문즉설할 때 연애도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할 때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연애하면 된다는 것처럼 수행도 해야 하고 놀기도 해야 할 때 수행자로서 놀이문화를 어떻게 가질것인가이며 이런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술을 안먹는 계율이지만 설령 술을 한잔 먹는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의 소재이고 우리들의 대화내용이 수행에 관계되는 이야기이거나 원력에 관계되는 이야기라면 이럴 때 술 한잔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어요? 대중들이 볼 때 저사람들은 술을 한잔 먹더라도 늘 정진의 관점을 가지고 있구나하는 이런 것들이 정착될 때 대중들도 자기들과 같은 줄 알았는데, 역시 다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평화재단의 경우 실력을 높여서 전문 연구가들을 뛰어 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평소에는 하인처럼 허드렛 일하며 지낸다 하더라도 같이 어울려서 서로 함께 할 때 뭔가 다르구나하는 것이 도덕적 우월성을 가진 자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는 억압심리가 있습니다. 공식적 자리에서는 그런 문화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문화가 힘이 없습니다. 티벳불교의 장점은 서양사회에서도 자기를 지켰기 때문에 서양사람들이 티벳문화를 접근하고 존중합니다. 우리는 우리것을 버리고 서양사회에 동조해버려서 전파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속에 있을 때 원칙을 지킴으로 해서 세속이 궁금해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가 동화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세속을 동경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삶이 속박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규칙을 정하고 통제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같이 있을때는 가능합니다. 세속에 가서 살아도, 세속과 어울려도, 집에서 부모님 간호하고 3년을 있다 와도 다만 가서 필요에 의해 있었을뿐이지, 세속은 있을 곳이 못되는구나하고 자각하고 돌아오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까지 안되니까 늘 힘들면 세속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nbsp 시집 온 여성이 늘 친정을 그리워 하면서 친청을 불사르지 못하는 것처럼 세속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밖에서 보거나 정토회 대중이 보면 정토회의 지도자입니다. 내가 무슨 정토회 지도자인가 하지만 밖에서는 여러분들을 정토회 지도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지금 정토회를 구성하는 중심 멤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위치에서 우리의 문화가 어떤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3년 계획을 세워서 법당을 수백개를 만들고, 일년에 깨달음의 장을 몇 명이나 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중심이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부족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늘 정진하는 문화. 일상 삶이 그런 관점을 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통일에 대한 원이 있다면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자리에 있던 그 관점에서 대화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이런 것들을 이루어가게 되는데, 의식만 있으면 말이 강하고 사석에서는 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nbsp 역사나 사회가 변화하려면 내부로부터 변화가 없으면 설령 큰 성과를 냈다하더라도 결국 내부로부터 붕괴가 됩니다. nbsp 미얀마, 티벳불교가 아직 부처님의 법에 대한 큰 원칙을 지키고 있지만, 미얀마가 개발이 되었을 때, 티벳이 개발될 때에도 계속 유지가 될까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세속과 떨어져 산속에 있어 유지된 것은 확장성은 없습니다.nbspnbsp 우리가 잘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깊이 들여다보면 중심적 가치, 환경적 가치, 윤리적 가치가 딱 잡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사회에 유의미한 것도 많지만, 현재로서는 확장이 되면 분열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많습니다. 나가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가치관의 측면에서는 분명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수행이라고 이름을 붙인다고 수행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nbsp 그런면에서 우리가 미래를 설계할 때 여러분의 삶의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낸 소감문을 읽어보면서 느껴진 것은 돌이켜졌는데, 실생활에서 돌아가면 잊어버리고 전전긍긍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버린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주말등에는 서로 모여 차도 마시면서 자발적 수행의 모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함께 나누기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문화들이 형성되면 여러분들이 자각한 것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혼자서는 힘듭니다. 이런 문화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입니다. 밑 마음에서 변화가 와야 삶의 변화가 오게 됩니다. 이런 수련을 통해서 자기 바닥마음을 가까이 접근하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은 일상에서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본 것을 현상유지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일년 동안 할 일이고, 이것을 유지한 상태에서 정진을 하면 내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수련을 하고 난 후 한달 만에 없어져버리니까 더 깊이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판 때 묻히는 것은 1020년 했잖아요?. 혼자서 잘 자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지하려면 도반들이 도와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정진하십시오.” 스승님의 가르침 잘 새겨서 더욱 더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nbsp 스님께서는 실무자 안거의 마지막 격려 말씀을 해 주신 후 두북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에 경주 남산 삼릉에서 포석정까지 잠시 산책을 하셨습니다. 가는 길에 스님께서 젊은 날에 활동할 때 머물렀던 망월사를 들러서 그때 도와주셨던 노보살님께 인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오후 5시부터는 한겨레 신문과 개성공단문제로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현재 남북이 개성공단 중단문제로 서로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어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것에 대해 스님께서는 우리가 민족통일을 위해 대화를 하는 것이라면 남북이 서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인터뷰하셨습니다. nbsp 이후에도 2번의 미팅이 있은 후 밤 10시가 넘어서야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nbsp 내일도 아침 7시 30분부터 종교인 모임을 시작, 전국 불교대, 경전반 담당자 워크샵, 천준위 회의등 모두 6번의 모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2013.08.03. 17,681 읽음 댓글 6개

2013.8.1. 실무자 안거 마지막날

오늘은 실무자 안거 마지막날이었습니다. 법륜스님께서는 어제까지 21일간의 1차, 2차, 3차 명상수련을 마치고 오늘 실무자 안거 마지막날 함께 해주시면서 각 개인의 수행점검을 해주시고, 내년부터 시작하는 8차년도 사업에 대해 큰 방향에서 실무자들의 의견을 듣고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어제까지 21일간의 단식을 마무리 하시고 오늘부터는 복식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3끼를 다 먹고 있는 우리들보다 더 힘차게 우리 실무자들의 수련을 마무리 해주셨습니다. nbsp오전에는 주로 개개인의 수행적 고민에 대해 지도해 주셨습니다. 실무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고집이 세다하고 또 한가지 일에 빠지면 주위를 잘 살피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업무가 버거워서 두렵고 물러서는 마음이 생기고, 수련을 하고 나면 힘이 나서 가서 다시 해봐야지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제대로 잘 안되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명상을 하다보니 평소에 불편한 사람들에게 말을 해대며 시원해 하는 모습이 있었는데, 이제 착한척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평소 사람들이 징징댄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이런 나를 좀 더 살펴보면 되겠는지, 평소에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데 명상때 살펴보니 속으로 불만을 쌓고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안듣고 속마음과 겉이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는데, 언행일치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평소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은데 가끔씩 관성화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생각으로 아는구나 해서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는 등 각자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스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실무자들이 고민하고 있는 몇몇 사례를 가지고 자세하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nbsp 그중에서도 한 실무자는 ‘평소 나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서운해지고 기운이 빠지기도 하고 일이 하기 싫어지기도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스님께 했는데, 이것은 모든 실무자, 활동가들이 대부분이 겪기도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nbsp스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분석하자면 업무가 자기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엄마가 자기 말을 안들어 줄 때 엄마에게 ‘공부안해’하는 것은 공부가 자기일이 아니고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토회 같으면 업무가 법륜 스님의 것이고 법사단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도 어릴 때는 자꾸 부모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엄마한테 죽어버린다고 협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삶이 자기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에 대한 책임도 나의 일이고, 민족에 대한 책임도 나의 일이고, 정토회의 일도 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정토가 지향하는 일을 나혼자 하려면 힘들고 감당이 안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어 일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커집니다. 누가 주인인지 객인지 모를 때 끝에 보면 알게 됩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이 주인이고 인사 받고 가는 사람이 객이고, 고맙다고 돈 주는 사람이 주인이고 돈 받는 사람이 객입니다. 아직 우리가 완전히 주인이 안되서 그렇습니다. 아직도 누군가의 일이다.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수처작주’ 어디를 가든 주인이 되라. 자기가 주인이 되면 인사 받을 일이 없어지고 오히려 인사를 하게 됩니다. 어디를 가든, 어떤일을 하든 거기서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떤 업무를 하게 될 때 이웃집과 비교하면 내 일이 되는데, 우리집안에서 비교하면 부부지간에도 또 니 일, 내 일 나누게 됩니다. 어디든지 처하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꾸 저 사람 일이라고 생각하면 섭섭해집니다. 그래도 정토회 조직은 다른 조직에 비해서 덜한 편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내가 섭섭해 하면 이 일을 내 일로 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라며 우리가 업무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nbsp 오후에는 각부서별로 8차년 사업을 계획하면서 크게 쟁점이 되는 부분을 가지고 스님께 질문하고 조언을 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다 계획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쟁점이 되는 부분은 스님께 조언을 구해서 좀 더 자세한 계획을 짜려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큰 방향에서 이후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원칙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nbsp 오늘도 늦은 시간까지 스님께서는 실무자들과 함께 하면서 수행지도를 해주시고 또, 8차년 사업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가져주셨습니다. 단식이 끝난 직후라 힘드실텐데도 전혀 내색없이 오히려 우리들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게 됩니다. nbsp 스님께서는 내일 아침 실무자들에게 수련 마무리 인사를 하고 두북에서 다시 서울로 가셔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2013.08.02. 15,965 읽음 댓글 5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