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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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8.19. 필리핀 JTS사업장 방문 위해 출국

스님께서는 어제 북경에서 일정을 마무리 하시고 밤 12시가 넘어서 인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정토회관에 도착하셔서 짐을 풀자마자 다시 싸고 제대로 쉬시지도 못하고 오늘 새벽에 8시 10분 비행기로 필리핀으로 출발하셨습니다.nbsp nbsp 스님께서는 22일까지 JTS의 사업장이 있는 필리핀 민다나오를 방문해서 3개 지역에서 1개의 고등학교와 2개의 초등학교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입니다.nbspnbsp 필리핀에서의 소식은 현지에서 오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2013.08.19. 16,003 읽음 댓글 6개

2013.8.17.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 일송정, 대종교 3인묘, 청산리 기념탑, 백두산

오늘은 백두산을 한번 더 가는 날이었습니다. 지난번에 비로 천지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르지도 못한 백두산을 다시 가 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nbsp 백두산으로 가기전에 일송정에 올라 용정시내, 혜란강을 내려다보며 처음 이땅에 와서 이 곳을 일구었던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눈물을 머금었을까 하는 생각에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nbsp 참가자중 한 학생이 바이올린으로 선구자를 연주하니 더욱 우리 가슴을 울렸습니다. 비록 일송정의 기념비에는 새겨지지 못했지만, 우리 가슴에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nbsp 대종교 3인묘로 가는 길에 발해시대 제2 수도였던 중경현덕부, 서고성을 바라보며 비록 논밭사이에 있지만, 멀리서나마 보이는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으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nbspnbsp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선생, 2대 교주 김교헌선생,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선생의 묘에 가서nbsp직접 잔을 올리며 참배도 하였습니다.nbsp그분들을 비롯하여 이땅의 독립을 위해 사라져간 많은 선열들에 대한 묵념도 함께 하였습니다.nbsp 청산리 기념탑으로 가기전에 화룡시장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었습니다.nbsp 청산리 기념탑에서는 참가자중 가장 어린 사람이 직접 잔을 올리며 참배했습니다. 이땅의 독립을 위해 사라져간 독립군들과 더불어 독립군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학살된 주민들, 단지 전쟁이라는 이유로 죽어야만 했던 일본군인들, 이땅에 있었던 전쟁으로 인해 사라져간 모든 이들의 넋을 기리며 잔을 올리며 참배를 했습니다. 모두들 평안히 가시고 이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기원했습니다. nbsp 여기까지의 일정을 마치고 법륜스님께서는 동북아 대장정 참가자들과의 일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백두산 일정을 추가로 조정하는 바람에 스님께서는 항일독립유적지 참배를 끝으로 참가자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였습니다. 참가자들은 스님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스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스님께서도 아쉬움을 안고 참가자들을 서둘러 백두산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이곳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 어르신들을 접대하는 일정이 잡혀 있어서 이곳에 남으셨습니다. 그분들은 스님이 이곳에서 조선족 가난한 사람들과 탈북난민을 도울 때 스님을 도우셨던 의로운 분들입니다. 또, 스님께서는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지원을 하기 위해 이곳에 국수공장을 설립하는 문제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하셔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청년들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nbsp 참가자들은 못다 본 천지를 보기 위해 다시 장백으로 이동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안개가 짙어질때는 실망감이 왔다가 백두산 가까이에서는 다시 해가 나기 시작하자 기대감에 설레이기도 했습니다. 서문 아래에 도착하자 서둘러 점심을 먹고 바로 서문으로 향했습니다. 서문앞에 도착하니 하늘이 맑아지고 해도 쨍쨍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백두산 천지를 향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도 천지는 우리를 향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1시간 이상을 천지에서 기다렸으나 또다시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nbspnbsp 오늘 비록 천지를 보지는 못했지만, 천지앞에서 천지가 보이기를 기다리며 한판 신명나게 놀아보기도 했습니다. 서문아래로 돌아와서 오늘까지 7일간의 일정을 마무리 하며 소감문을 작성하고 나누기를 한후 저녁을 먹고 심양으로 향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일 아침 일찍 북경을 방문하고 밤늦게 서울로 오셨다가 다음날 아침일찍 필리핀으로 가실 예정입니다.

2013.08.19. 16,157 읽음 댓글 3개

2013.8.16. 발해의 왕궁, 상경용천부, 독립운동의 첫 승전지 봉오동전투터

새벽 3시에 출발하여 5시 30분에 발해의 첫 수도였던 동모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올라가보지는 못하고 대석하를 앞에 두고 바라다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바라보이는 동모산성은 발해의 웅장한 규모를 생각해 보면 매우 작은 산성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바라보이는 산은 비록 작아 보이지만, 산성에 올라가보면 주위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 여기를 처음 수도로 정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nbsp 돈화 시장에서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난 후 발해에만 있는 강동 24개석을 보고 발해진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옛날 발해왕이 다니던 주작대로를 따라 흥륭사로 가서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올렸습니다. 스님께서는 남북통일,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해주셨습니다. 흥륭사에는 발해시대의 석등, 석불좌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석등은 현무암으로 되어 있으며 웅장하기는 하지만 정교함은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nbsp 상경용천부로 이동했습니다. 상경용천부는 발해의 3번째, 5번째 수도였습니다. 거대한 왕성의 기단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상경용천부는 모두 5개의 궁궐로 되어 있었고, 각 궁전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nbsp 점심을 먹은 후 도문의 봉오동 전투터로 이동했습니다.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정도 늦어져서 봉오동 전투터에서 제사는 간단히 올렸습니다. 청년대표 2명이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라져간 독립투사들에게 잔을 올렸습니다. 비가 오는 관계로 서서 절을 하고 묵념을 하는 것으로 그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서둘러 북한의 온성쪽을 바라보며nbsp 두만강을 따라nbspnbsp올라갔으나,nbsp가는 중간에 날이 어두워져서 두만강과 건너 북한의 산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계속 되는 비로 공사중인 도로를 제대로 통과하기가 어려워서 차를 돌려 바로 연길로 향했습니다. 이번 역사기행은 계속해서 비를 몰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조금 개다가 비가 내리거나 구름이 덮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nbspnbsp 오늘은 이동하는 중에 청년들이 적어낸 질문을 가지고 즉문즉설의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청년들은 그동안 공부했던 역사나 사회문제, 그리고 개인의 문제등을 질문하였습니다.nbsp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하는데,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하는지 고민하는 분, 환단고기에 신교라는 것이 나오는데, 증산교와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 하는분, 동북공정, 서북공정, 서남공정에 대해서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분,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하는데, 가족에게는 짜증이 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인 분, 똥고집과 신념을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분.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인 분,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는 편인데, 스님처럼 집중해서 뭔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 하는 분, 생각이 많아서 고민인 분등이 스님께 답을 구했습니다. 스님께서는 환단고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숩니다. “환단고기는 환웅시대와 단군시대의 옛날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고구려 시대에 배달 유기 100권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문진이 신집오권을 썼다고 하지만 전해오지 않고 있습니다. 고구려 멸망이후 사료들이 유실되고 고려시대때의 기록이 일부 남아 있었습니다. 조선조 말엽에 와서 삼국시대때 기록의 일부와, 고려시대때 고기 일부가 개인에게 전해오던 것을 모아서 책으로 묶어 내었습니다. 그것이 일제 강점기때는 묻혔다가 1970년대 후반에 다시 나왔으나 사람들의 관심이 별로nbsp없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에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천황의 뿌리를 찾고 있었는데, 환단고기를 보니까 이것이 천황의 옛 뿌리이겠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우리나라도 먹고사는 것이 나아지면서 환단고기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nbsp 이 책은 한권으로 된 책이 아니라 환웅시대의 이야기, 단군시대의 이야기, 북부여의 이야기, 삼한시대 이야기 등 따로따로 내려오던 것을 모아서 한권으로 묶은 것입니다. 삼국유사에도 단군신화를 기록하면서 ‘고기에 의하면’ 이라고 쓰고 있습니다.nbspnbsp 내용을 보면 누군가 가짜로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내용이 너무나 방대하고 그렇게 쓰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 내려오던 기록물이나 구전들이 모아져서 만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환단고기에 보면 백두산이 울고 천지가 넘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백두산이 폭발해서 천지의 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5개의 별이 일직선상에 있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검증해 나간다면 좋은 사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하문명에서 나온 제단, 여신상등도 환단고기와 맞춰보며 검증할 수도 있겠습니다.nbspnbsp 이것이 다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씩 검증해 나간다면 우리 옛기록물로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길이 막혀 돌아오기도 하고 길을 잘못 들기도 해서 밤9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식사 자리에는 발해사를 60여년간 연구해 오신 방학봉 교수님이 오셔서 인사를 드렸습니다.nbspnbsp 방학봉교수님께서는 동북아 대장정을 하는 청년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먼저 뜻을 세워야 하고 반드시 무엇을 하겠다고 결정을 했으면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먹을 것, 입을 것, 자는 것을 모두 다해가면서는 할 수 없습니다. 밤에 발 뻗고 잘 수 없을 정도로 해야 합니다. 국가의 인재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미래는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라며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 방학봉교수님께서는 청년들과 인사를 나눈 후 자리를 뜨셨고, 이어서 스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nbsp “늘 우리는 눈으로는 멀리보고 희망을 가지되, 두발은 현실속에 딛고 있어야 합니다. 현실을 부정하면 허황된 사람이 되고 현실만 생각하면 안주하게 됩니다.nbsp 우리가 과거 역사를 둘러보는 것은 과거의 지식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봄으로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길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nbspnbsp 이럴때 승리한 것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과거 실패경험도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과거역사속에서 실패한 것 보면 앞으로 되풀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실패든 성공이든 지나간 일이고 그것을 통해서 앞으로 닥칠 미래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참고가 되어야 합니다.nbspnbspnbsp 명나라가 중국 천하를 지배하고 있었을 때. 한때 명나라의 부는 세계전체의 60까지 될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절반으로 강대합니다. 우리는 미국의 보호를 몇십년을 받으면서 미국에 저절로 기대게 되었고, 미국이라는 선진국에게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물며 조선시대는 어떠했겠습니까? 자금성을 봤을 때 얼마나 주눅 들었을까요? 그러니까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를 취했고, 명나라가 자기 부모같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명나라 시대가 지나자 우리 밑에 있던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워 우리보고 ‘야 내가 형님 할게, 네가 동생해라’ 하니 기분 나빴던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명나라하고 외교관계 끊으라고 하니 우리는 명나라에 반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의 제안을 거부하고 저항하다 결국은 청나라 태종의 침입을 받고 임금이 삼전도에 가서 무릎 끓고 신하되기를 맹세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의 종주권을 청나라에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nbsp 우리는 역사적 변화를 읽지 못하고 과거 생각에 사로잡혀 주권을 잃어버리는 고통 겪었던 것입니다. 또 그런 강대한 청나라를 상전으로 모시고 200년 이상 살다보니 일본이 급성장을 해서 뜨는 해가 되고 오히려 청이 지는 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느것이 지는 것인지, 어느것이 뜨는 것인지 몰랐던 것입니다.nbspnbsp 지금 남북관계는 남한입장에서는 이제까지 미국에 의지해 와서 안보를 지키고 경제를 성장시켜 왔습니다. 모든 기득권 세력들은 미국이 영원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이 아직 강력한 나라이지만 지는 해입니다. 아직 중국은 미국보다 약하지만 결국 1020년 후에는 힘의 균형점이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nbsp 우리가 국제정세에 자주적이어야 하고 자기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소중히 생각해야합니다. 개인인생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운명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나라가 성장하면 그 속에 사는 국민 개개인도 같이 성장하게 되고 나라가 내리막길로 가면 국민 개개인도 내리막길로 가게 됩니다.” nbsp 이렇게 역사기행을 통해서 자기의 미래도 교훈을 얻지만 국가의 미래도 교훈을 얻어 우리민족의 미래를 우리가 결정해서 새로운 백년을 맞을 수 있기를 당부하셨습니다.

2013.08.18. 18,502 읽음 댓글 3개

2013.8.15. 민족의 영산, 그리고 웅장한 백두산

오늘은 백두산에서 하루종일 보내는 일정이었습니다. 다들 들뜨고 신나했습니다.nbsp 새벽 3시에 장백에서 출발한 버스는 백두산 자락을 따라 이도백하로 갔습니다. 스님께서는 백두산 자락을 따라 고개를 넘어 백두산의 서쪽인 송강하를 지나 북쪽 아래인 이도백하로 가는 이 길은 해발 1,000미터를 거의 수평으로 계속 달리는데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곳은 없을 것이라고 감탄하십니다.nbspnbsp 백두산은 260만년전에 화산이 분출해서 생긴것이라고 합니다. 화산이 여러차례 폭발하고 함몰되고 또다시 폭발하기를 반복하면서nbsp고인 천지는 칼데라 호에 해당합니다. 천지는 해발 2,200미터에 위치하며nbsp수심이 384미터로 서해바다 어떤 곳도 이렇게 깊은 곳이 없다고 합니다. 천지는nbsp동서가 좁고 남북이 긴 타원형으로 남북의 길이는 4.95km 정도이며, 동서의 길이는 3.35km 정도입니다. 천지의 물은 60가 지하수이기에nbsp비룡폭포의 물량이 가뭄이어도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아침을 먹고 백두산 북쪽으로 갔습니다. 오늘은 햇볕이 쨍쨍합니다. 북문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백두산의 정상에는 약간의 구름이 걸려 있었습니다. 표를 끊고 천지로 가는 짚차를 갈아타려고 중간 승차장에 내리니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천지가 있는 봉우리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고 구름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올라가도 천지를 볼 가능성이 없기에 비룡폭포부터 가기로 했습니다. 비룡폭포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참가한 학생들은 천지를 못볼까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비룡폭포에서 스님과 참가자들은 한명씩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동안 구름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비룡폭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nbsp 비룡폭포를 나와 소천지로 향했습니다. 소천지는 작은 천지라는 뜻으로 주변의 경관을 그대로 호수에 담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운데, 오늘은 역시 비가 내리고 있고 소천지로 흘러드는 물이 많다 보니 수면이 일렁거려 주변경관을 비추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소천지 주변을 한바퀴 돌아서 다시 녹연담으로 갔습니다.nbsp 녹연담은 물이 매우 맑고 깊어서 물색이 짙은 녹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녹연담에 떨어지는 2개의 폭포도 작지만 예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녹연담을 둘러본 후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는 동안 조별로 스님과 김제동씨와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nbsp 그런데, 구름을 걷히기를 기다리는데, 오히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를 피해 기다리다가 비가 좀 잦아들자 천지를 가기는 어렵고 바로 지하산림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은 천지로 가는 짚차가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지하산림으로 이동했습니다. 지하산림으로 가는 동안 비는 더 세차게 내렸습니다. 비와 안개로 지하산림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nbsp 지하산림에서 나오니 해가 나기 시작합니다. 하늘을 보니 해는 나지만 구름이 하얗게 덮여 있습니다. 혹시나 천지에 갈 수 있을지nbsp다시 물어보니 오늘은 천지로 올라가는 것이 폐쇄되고 천지에 있는 관리인들도 철수를 했다고 해서 아쉬움을 가지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nbsp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스님 강의에 앞서 저희들도 간단히 광복절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애국가를 부르고 호국선열들에 대한 묵념하는 시간을 하졌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스님 강의에 이어 김제동씨의 강의도 있었습니다.nbsp 스님께서는 오늘 천지를 보지 못했기에 모레 일정을 조정해서 다시 천지를 볼 수 있도록 해보자고 하니까 참가한 젊은 청년들은 모두 환호를 지르고 좋아합니다. 내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문제없다고 흔쾌히 동의합니다. 오늘은 스님께서는 발해의 역사에 대해 정리해주셨습니다. “발해는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서 잃어버린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발해의 역사를 다시 우리의 역사로 되찾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의 실학자들에게서부터 입니다. 발해는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에 1시간 내지는 2시간을 배우게 되는데, 제 기억에 남는 건 발해 제목하에 석등사진 하나입니다. 내일 가는 흥륭사에 그 석등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발해유물은 영광탑, 흥륭사 대웅전의 석불좌상, 석등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공개되지는 않지만 벽화와 왕관이 나오고 있고 많은 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발해인들은 스스로 발해역사를 써서 남아 있는 것은 한 점도 없었는데, 정혜공주묘가 발견되면서 그안에 발해역사 기록물이 나왔습니다. 발해인들이 쓴 발해역사기록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nbspnbsp 고구려는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부여를 계승하는 입장을 가졌고, 다물사상이라고 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것을 건국이념에서 밝혔습니다. 고려는 발해의 역사를 건너뛰어 고구려와 연결되어 계승되었습니다. 고려가 분열된 발해와 신라를 제치고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미도 되고, 분열된 국가를 모두 포용했다는 뜻도 됩니다. 대조영은 동모산에 산성을 짓고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698년으로 고구려 멸망이후 30년 만입니다. 발해는 순식간에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10대 선왕에 와서야 해동성왕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919년에 발해는 거란의 침입으로 많은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925년 2차 침입으로 부여성이 함락당하고 바로 수도까지 함락당하며 926년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발해의 유민들은 발해의 부흥을 위해 투쟁했지만, 역량이 부족하였습니다. 발해는 이제 우리 역사속으로 편재해서 역사의 정통성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역사의식은 고구려에서 발해로 그리고 고려로 이렇게 이어지고 또 현실적으로는 발해와 함께 신라를 이어 내려갑니다, 이 문제는 다시 와서 남북한을 어떻게 계승해 나갈것인지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어서 김제동씨는 청년들의 눈높이에서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아주 재밌게 풀어주셨습니다. 청년들은 중간중간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고 아주 즐거워 했습니다.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 하고 내일도 새벽 3시에 발해의 유물을 찾아 발해진으로 갈 예정입니다.

2013.08.17. 15,771 읽음 댓글 3개

2013.8.14. 압록강 줄기따라 백두산까지, 발해의 유일한 탑 영광탑

오늘은 새벽 4시에 백두산이 있는 장백으로 출발했습니다. 어제 일정을 빠듯하게 한 덕분으로 오늘은 여유가 좀 있었습니다. 집안에서 장백으로 버스를 타고 압록강을 따라 북한을 바라보면서 가는 일정이었습니다.nbsp 압록강이 흐르는 신의주에서 백두산까지가 400km인데, 압록강 줄기따라 가는 실제 길이는 800km정도라고 합니다. 그만큼 압록강이 굽이굽이졌다는 것입니다.nbspnbsp 스님께서는 압록강을 따라 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북한 지역에 대한 설명이나 북한의 현재 상황등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nbsp 무창을 지나면서는 조선시대 최윤덕 장군이 4군을 설치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nbsp압록강 건너 자강도가 보입니다. 자강도는 북한의 군수산업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지원을 하면서 모니터링을 할 때 다른 지역은 어느 정도 방문해서 모니터링을 하는 것이 가능한데 자강도는 일체 허락이 되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다. 압록강을 따라 장백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북한의 산은 온통 뙈기밭으로만 되어 있고, 보이는 집들은 허름한 회색빛 너와집인 것 같습니다. 남한의 첩첩산골이라는 곳, 어디를 가도 이런 집들은 찾아볼 수가 없는데, 국경너머에 보이는 집들이 이런 정도이니 북한의 내부는 더 심할 것이라는 것이 짐작됩니다. 압록강 너머 보이는 북한의 뙈기밭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인데, 우리 눈에 보이는 뙈기밭은 북한 전역에 비하면 인구가 적고 산이 많아서 뙈기밭 면적이 적은 편이라고 합니다. 산꼭대기까지 거의 빈틈없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도 적은 편이라고 하니 북한 전역은 아마 나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듯 합니다.nbsp 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은 노동자들에게 식량배급이 거의 안되기 때문에 도시근교 340리 산에는 빈틈없이 뙈기밭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도시 노동자들은 새벽34시에 일어나 뙈기밭에서 일하고 와서 회사 출근하고 다시 퇴근해서 밭으로 갔다가 캄캄한 밤이 되어야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힘은 많이 들고 수확량은 떨어져 개인은 그나마 수확을 할 수 있으니 좋지만, 국가적으로 보면 노동력은 많이 투여하면서 실제적인 수확량은 적기 때문에 매우 큰 손실이라고 합니다. 요즘 북한은 예년에 비해 상황이 좀 나아진 것 같습니다. 보기에는 뙈기밭의 농사가 제대로 될까 싶을 정도로 옥수수가 듬성듬성한데도 예년보다는 나은 편이고 또 지나가며 보이는 집들의 굴뚝과 공장 굴뚝에는 연기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 같습니다.nbsp 북한은 요즘 수확량의 분배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nbsp농지를 분조단위, 가족단위로 나눠주고 생산량의 70는 개인이 자유처분하고 나머지 30는 비료등 농자재를 감가하고 난 후 국가시세로 현금으로 배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nbsp북한에 변화가 조금씩 보이고 있다고도 합니다.nbsp 이렇게 압록강을 따라 건너 보이는 북한의 지역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가다보니 어느새 장백에 도착했습니다. 장백 건너 보이는 북한 땅은 혜산입니다. 인구 30만명이 사는 큰 도시로 양강도의 도청소재지입니다. nbsp 혜산을 지나 압록강을 따라 백두산까지 갔었습니다.nbsp큰 물줄기는 어느새 작아져서 중국과 북한이 개울같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nbsp 압록강이 시작되는 백두산 끝까지 갔지만 아직도 천지로 가는 길은 지난번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막혀 있어서 압록강을 따라 북한을 바라보며 백두산을 갔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nbsp 다시 백두산을 내려와 장백으로 돌아 왔습니다.nbsp 발해의 유일한 탑이 있는 탑산으로 올랐습니다. 여기에 있는 영광탑의 아래는 무덤이고 그 위를 탑으로 쌓았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건너 혜산이 앞동네처럼 보입니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었으며 뙈기밭도 함께 있었습니다.nbsp 영광탑앞에서 우리는 예불을 드렸고 스님께서는 굶주리는 북한의 동포들이 하루바삐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그리고 이땅에 전쟁으로 죽어간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이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고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하셨습니다. nbsp 이렇게 하루 일정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숙소에서 간단히 정비를 한 후에 다시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 스님께서는 먼저 오늘 일정의 주 목적은 압록강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었음을 알려주시면서 “북한산야를 보면서 가슴아픈 사람도 있고,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면서 안타까워 하시는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nbspnbsp 북한의 굶주리는 사람을 돕는 일을 1996년부터 시작했는데, 인도적 지원뿐 아니라 북한의 식량 위기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중국에 북한의 난민들이 많이 와 있다고 알리고, 북한의 식량난등 경제가 열악하다고 알리기도 했습니다.nbspnbsp 북한의 어린아이들이나 여성들이 굶주리면 살려야하고, 군인들이라도 다치면 치료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인도주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나라라도 보편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중국에 넘어온 북한난민을 보호해야 합니다. 굶어 죽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넘어온 것이기에 보호해야 합니다. nbsp 한국안에서 정치적 입장에서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면서 상대를 비판합니다. 북한을 볼 때도 부정정적인 것은 부정적이라 하고, 긍정적인 것은 긍정적으로 봐야 합니다.nbspnbsp 20대는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는데, 50대 이후에는 일본에 친일을 했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젊을 때 독립운동한 공과가 모두 없어져버립니다. 젊을때 나쁜 짓 한 사람이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면 훌륭한 것만 기록합니다. 젊은 시절을 미화해 버립니다. 젊을 때는 가진 것은 없지만, 용기, 정의감이 있다면, 나이가 들면 지켜야 될게 많다 보니 타협하게 됩니다. 젊을때 정의감 있는 사람도 나이가 들면 현실에 타협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삶입니다. 자꾸 명분론으로 접근하다보니, 끝까지 독립운동한 사람이 몇 명 되지 않는 것입니다. nbsp우리가 북한에 접근할 때도 북한의 좋은 점은 좋다고 말하고,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북한은 초기에는 남한보다 긍정적인 요소가 많았지만, 지금은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습니다. 친북, 반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대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nbspnbsp 우리가 남북한을 이야기 하려면 독립운동사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남북한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주의가 젊은 층에 점점 확산이 되면서 대다수 사람들이 사회주의 시각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북이 분단이 된 뒤에 북한은 소련이, 남한은 미국이 나눠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nbspnbsp 미 군정하의 3년 동안 학교, 경찰, 행정관리, 군대를 운영하기 위해 일제시대때 경험이 있는 사람을 그대로 시켰습니다. 새로 체제를 잡기 위해서는 경험이 있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되니 그렇게 했지만, 민중이 보기에는 일제시대때 해먹던 사람이다 보니,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해방이 되면 죽었구나 했는데, 미국이 이들의nbsp지위를 복귀시켜 주니 미국에 붙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독립운동가이고 그들은 대부분이 사회주의자였기에 빨갱이라고 탄압하게 된 것입니다. nbsp 소련에서는 김일성을 내세우기가 쉬웠습니다. 독립운동도 했고, 나이도 젊고 해서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남한보다는 훨씬 자주적 사람, 독립운동한 사람으로 구성하고 친일 세력을 척결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북한이 주민의nbsp지지가 더 많았습니다. 더구나nbsp남쪽은 부정선거를 하면서 억지로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북쪽에서nbsp밀어 붙이면 통일이 되겠다 싶어서 밀어 붙였는데, 결국 국제 정세를 전혀 읽을 줄 몰랐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5060년대 북한에는 천리마 운동하면서 잘사는 국가로 바뀌었고, 남쪽은 데모나 부정부패로 거지가 많아지면서 월북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nbspnbsp 70년대 들어오면 북한은 60년대 말에 미소분쟁이 일어나면서 북한은 자기 배후가 분열이 되다보니, 좁아지면서 주체가 나오면서 독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고, 남한은 군사독재로 경제적 개발이 되어가면서 70년대는 남북한이 비슷해지면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nbsp 북한의 모든 경제가 30년간 후퇴한 반면 남한은 고도성장을 하면서 오히려 남한이 절대 우위에 서게 되었습니다.nbsp 새로운 통일 운동은 남한은 원래 통일에 대한 소극적인 전통에서 말이 없고 북한은 적극적이었는데, 자기 체제유지에 급급해지니 남북한 통일운동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념을 떠나서 상식적으로 이제 통일은 남한이 주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nbsp 남한은 북한을 포함해서 우리민족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북한은 과거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부정적 요소가 더 많습니다. 권력이 아들에게 승계되는등 정통성이 없고, 경제력도 붕괴되었습니다. 군사력도 남한이nbsp앞섭니다.nbspnbsp 남한은 북한과 싸움해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은nbsp아닙니다. 평화를 관리해야합니다. 통일을 주도해서 통일국가를 만들고 앞으로 전개될 동아시아 시대의 문명을 주도해 나가야 합니다. nbsp 통일의 첫 번째 이익은 고통받는 주민들에게 돌아가야합니다. 북한주민이 다 굶어 죽더라도 통일만 하면 된다는 것은 안됩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는 통일이 우선입니다.nbspnbsp 통일비용이 부담된다고 하는데, 북한이 갖는 지하자원이 1조 달러 이상 입니다. 북한을 소비로 볼것인지, 투자로 볼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북한의 개발을 자꾸 소비적 개발에서 보면 안되고 투자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nbsp 북한의 안타까움을 이해하고 북한의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고 실사구시적으로 접근해야합니다”nbsp 앞으로 북한을 우리가 어떻게 관리하고 함께 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주셨습니다.nbsp 내일은 백두산 가는 날입니다.

2013.08.16. 17,925 읽음 댓글 5개

2013.8.13. 천손, 드높은 고구려의 기상 - 국동대혈,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5회분5호묘, 환도산성, 국내성

아침 5시에 고구려 유적이 있는 집안으로 출발했습니다. 오는 도중에 오늘의 일정을 조정해서 모레 예정된 국동대혈을 먼저 가고 오후에는 광개토대왕릉, 장수왕릉, 5호문 5호묘, 환도산성, 국내성을 가기로 했습니다. 모레 백두산 남문을 오르기로 되었있었지만, 백두산 남문이 지난 비로 약 한달간 폐쇄되었기에, 압록강을 따라 백두산 남문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그대로 진행하기 위해 오늘 일정을 조금 조정했습니다. nbsp집안으로 가는 길은 통화에서 들어가는 북로길과, 환인에서 들어가는 남로길 2갈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동통화간 고속도로를 1시간 가량 타다가 통화집안간 국도를 따라가는 북로길로 갔습니다.nbspnbsp 342년에 연나라의 선비족 모용황이 군대를 끌고 고구려를 침입했는데, 이때 고구려에서는 남로는 험난하니 북로로 침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력부대는 북로를 막고 있었고, 고국원왕이 직접 지휘해서 남로에 최소한의 군대로 대비했었습니다. 모용왕은 오히려 험난한 남로로 쳐들어 오니 고구려 군은 패하여 후퇴를 하여 국내성이 함락 당했고 환도산성까지 점령되었습니다. 북로로 갔던 연나라 군사는 고구려군에 패했고,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다시 연나라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이에 모용황이 철수하면서 미천왕의 시신을 파서 들고 갔고, 왕의 모후와 왕후를 비롯해 고구려인 5만여명을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에 고국원왕이 추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nbsp 북로. 최후 방어선은 관마산성이며, 장군총에 사용했던 큰 돌은 오녀봉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합니다. 장군총의 돌들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했는데, 여기를 조사하다 보니 산에 다듬다 둔 돌, 구멍 뚫린돌들이 있어서 장군총의 돌과 오녀봉의 돌을 성분비교를 해보니 같게 나왔기에 여기서 가져온 돌이라고 확인되었습니다. 여기서 장군총까지 어떻게 운반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데, 겨울에 개울이 얼었을 때 얼음위로 운반하지 않을까라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nbspnbsp 우리는 역사적인 북로길을 따라 집안에 도착해서 바로 국동대혈로 이동했습니다. 국동대혈을 가는 길에 이 마을의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는 관음굴과 사랑바위를 들렀습니다. 국동대혈은 나라의 동쪽에 큰 동굴이 있다는 뜻으로 고구려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습니다. 옛날 천부인이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 방울을 가지고 왔던 것처럼 고구려 왕도 제사 지낼 때 거울, 칼, 방울을 지니고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약 1500년 전 고구려인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나라와 백성들의 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했듯이 120여명의 역사기행 참가자들도 남북의 평화통일을 기원하였습니다. nbsp 점심을 먹고 난 후 바로 장군총으로 갔습니다. 장군총은 맨위의 지붕부분은 유실되고 없지만, 아랫기단은 계단식 7단이며 무덤이 무너지지 않도록 큰 돌로 기단을 받치고 있는 형태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고구려 무덤중 가장 원형이 잘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 무덤의 특징은 횡혈식 적석총으로 아랫기단을 계단식 17단으로 쌓은 것인데, 이러한 양식은 주변 어느나라에서도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양식이 요하문명의 유물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nbsp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때 세운 비석으로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자연석에다가 4면에 글을 새겼는데, 지금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집으로 싸여있습니다. 자연석을 이용한 양식도 주변국에는 없는 양식이라고 합니다. nbsp 광개토대왕릉은 지금은 허물어져 돌무더기와 무덤실이 남아 있으며 받침돌도 20개중에 13개만이 남아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보다 길이는 2배, 넓이는 4배가 넘는 규모입니다.nbsp 5호분 5호묘는 이지역 20여개의 고구려 벽화고분중 유일하게 공개된 곳입니다. 고분안 벽화는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그렸지만, 각종 설화등을 함축하여 그리기도 했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등의 사신도를 그리고 있기도 했습니다. nbsp 벽화들만 전시된 전시실에 있는 벽화를 보면 옛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기도 했고, 신단수 아래 곰이 있는 것을 보면 단군신화가 실제적인 우리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nbsp 환도산성은 국내성이 위협을 당할때등 비상시에 임금이 피신하거나 군사들이 방어를 하던 곳입니다. 환도산성은 자연지세가 워낙 견고해서 적의공격을 막기에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성벽이 남아 있는데, 성문은 옹자형 성문인데 성문앞에 서면 양옆의 공격에 위압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성안이나 성밖에서 바라보면 웅장한 산의 위력에 주눅이 들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잉어를 잡았다는 음마지도 있었고, 국내성이 내려다 보이는 망루도 일부 허물어졌지만 그대로 있었습니다. 환도산성앞에 서면 고구려인들의 거대한 위상과 웅장함이 절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nbsp 요동태수가 침입해서 환도산성까지 밀고 왔을 때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만 하면서 요동태수가 지치기를 기다렸고 요동태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는 고구려의 총지휘관인 을두지가 지나가다 촌로가 잉어를 잡아가는 것을 보고 그 잉어를 몇 마리 잡고 술을 내고 요동태수에게 직접 글을 써서 수고했다. 이제 돌아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이 잉어와 이 글을 받은 요동태수는 아직도 성안에 물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고는 철수를 했다고 합니다. nbsp 환도산성앞에는 산성하 무덤떼라고 해서 고구려인들의 무덤들이 기단을 그대로 가지고 윗부분이 허물어진 상태로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고구려 특유의 무덤형식을 알수 있습니다. 계단식 기단을 쌓고 그 안은 강돌로 채우고 그위는 집을 설치한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의 계급에 따라 기단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는 7단이 최대로 높은 것입니다.nbsp 국내성은 약 425년간 수도로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는데,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30년안에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내보고 발굴을 할 예정입니다. 동쪽 성벽은 완전히 허물어져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서쪽벽이 그나마 가장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원 성벽은 약 12미터 높이라고 하는데, 서쪽벽만 해도 5미터 정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남쪽 성벽은 압록강변을 따라 있었습니다. nbsp 국내성의 4면의 길이는 동서가 짧다. 서가 동보다 100미터 더 긴 형태로 4면의 길이가 다 다릅니다. 서쪽은 서는 통구하라는 강이 있어서 구불구불하게 되다 보니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또, 북쪽보다는 남쪽이 더 깁니다. 이는 남쪽벽이 압록강에 면해있기 때문입니다. 국내성의 동과 북의 성벽이 만나는 모서리를 둥글게 해서 치를 쌓았습니다. 북쪽과 동쪽은 해자를 파서 성벽을 보호했습니다. nbsp 오늘은 일정을 변경해서 조금 빠듯하게 다니다 보니 저녁식사후 강의도 9시에 하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오늘 일정에 대해 정리를 해 주신 후 고구려가 건국한 후 고조선의 옛땅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말타고 달리며 기상을 드높이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고구려의 국력이 왕성할 때, 또 국력이 기울어 위험에 처했을 때등 고구려의 건국부터 멸망까지의 역사를 들으며 이렇게 강성하던 고구려가 멸망하고 변방의 조그마한 부족국가였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신라는 정통성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주변국과의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었고 내부가 견고하게 정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부의 분열로 인해 결국 멸망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nbspnbsp 앞으로 남북이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구려를 보면서, 신라가 통일을 하는 과정을 보면서 그 교훈을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13.08.15. 17,550 읽음 댓글 1개

2013.8.12. 고구려의 성, 그 웅장함 - 백암산성, 오녀산성

새벽 4시에 고구려의 성의 특징이 잘 남아 있는 백암산성으로 향했습니다. 6시 30분경 백암산성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우산을 쓰고 비를 맞으며 백암산성을 올랐습니다. 스님께서도 우산을 쓰고 산성에 올라 백암산성의 특징에 대해 청년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nbsp “백암산성은 현재 연주산성이라고 불리며 요동성을 보호하기 위한 산성의 하나로 지형지세를 잘 이용하여 매우 견고하게 쌓은 성입니다. 백암산성은 고구려성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적이 성벽을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치를 성의 안팎으로 쌓았으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백암산성은 성 밖에 다시 덧성을 쌓아서 성을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성벽은 돌을 마름모꼴로 깎아 각 모서리가 서로 맞물리게 하여 잘 빠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쌓고 보이는 벽은 편편한 돌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성벽의 아랫부분은 무너지지 않게 7단 정도를 계단식으로 쌓은 후 위로는 일자형으로 쌓았습니다.nbsp 백암산성은 동쪽은 절벽으로 태자하가 흐르고 있어 성을 쌓지 않았고, 북쪽은 가파른 지세로 인해 성벽을 좁게 낮게 쌓았으며, 서쪽으로는 트여 있기 때문에 성벽을 높고 두껍게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nbsp 본계현에서 점심을 먹고 오녀산성이 있는 환인으로 향했습니다.nbsp 환인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스님께서는 우리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우리와 함께 있는 중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중국의 역사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nbsp“중국의 역사 시작은 삼황오제설화로 우리로는 단군신화에 해당합니다. 단군이 한사람이 아니라 임금을 뜻하는 것처럼 중국의 경우도 신농씨라고 하면 한사람이 아니라 그 문화를 계승한 한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임금, 순임금이 각각 1백년씩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요임금의 나라가 1백년 되었고, 순임금의 나라가 1백년되었다는 뜻입니다. nbsp삼황은 유사이전으로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라고 하기도 하고,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를 삼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nbsp황제헌원씨 바로 앞이 신농씨. 신농씨와 황제헌헌씨는 다른시대이며 다른 민족입니다. 황제헌원씨가 유웅국 군왕이 되는 이후를 유사이후라고 합니다.nbspnbsp 황제, 전욱, 제곡의 시대, 요시대, 순시대는 모두 성이 다르며 부족이 바뀌어 가면서 문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 오제 시대가 약 1,000년간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한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각각의 문화가 약 200년씩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nbsp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우왕이nbsp하나라를 만들었고, 하나라는 4백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은나라까지 전설의 시대였으나, 은허에서 수많은 청동기 유물, 갑골문자등이 나오면서 은나라도 역사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은나라는 지금부터 3.6003,000년 전에nbsp있었던 나라로nbsp전 300년은 상나라, 그 뒤 300년은 은나라라 부릅니다. 이제 중국도 삼황오제를 역사로 정비해 나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nbspnbsp 우왕의 하나라, 탕왕의 상나라는 지금부터 43천년전이며 BC 1046년 즉 3,000년 전에 주나라가 생겼습니다. 주나라는 봉건제 국가로 중앙을 임금이 다스리고 나머지 변두리는 제후들에게 독립적으로 나누어 주었고 그것을 자손에게 상속했습니다. 조세제도는 정전법으로 정비했고, 가부장제도가 정립되었습니다. nbsp BC 770년BC 403년까지를 춘추시대라고 하는데, 그 이전을 서주, 그 이후를 동주라고 합니다. 이때 제후국이 300개정도 되었으나, BC403BC221년의 전국시대에는 작은 나라를 없애고 통합하여 전국이 7개 나라진, 초, 제, 연, 한, 위, 조로 투쟁했는데, 이것을 전국7웅이라고 합니다. 이후 진나라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여, 나라마다 길이, 넓이, 부피를 측량하는 것이 달랐는데, 이것을 통일하였고, 염8228철을 국가가 전매를 하였던 것입니다.nbsp 춘추전국시대에는 공자, 맹자의 유가, 노자, 장자의 도가, 겸양가, 묵가, 법가, 연횡책, 합종책등 백가쟁명의 시대였습니다. 진시황은 법가로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사상적인 통일을 하기 위해 법가를 제외한 모든 사상서를 불태웠는데, 이를 분서갱유라고 합니다.nbsp 요즘말로는 사상, 이념,nbsp출판, 언론을 탄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nbsp 오늘 저녁에 우리의 역사에 대해 배우기 전에 간단하게 중국의 역사에 대해 배웠습니다.nbsp 산 정상의 모습이 독특한 오녀산성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녀산 아래 도착해서 박물관부터 둘러 보았습니다. 오녀산성의 모형도, 전체 사진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고구려의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nbsp 박물관을 나와 버스를 타고 오녀산성 아래까지 가서 오녀산성 정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녀산성 정상에서 스님께서 해주시는 주몽과 소서노의 이야기, 유리왕이 아버지인 주몽을 찾아온 이야기등을 듣고 있는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옹성이 있었던 서문자리에서 설명을 듣고 있을 때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비는 어느새 굵어지면서 천둥소리도 들렸습니다. 서둘러 빠르게 이동하면서 병영자리터, 온돌, 우물터등을 둘러본 후 동문으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동안 쏟아지던 비가 다시 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역사기행에서는 비가 함께 다니는 것 같습니다.nbsp 공자형의 동문자리에서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은 후 버스가 있는 정차장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첫 서울로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홀본산성으로 불렀습니다. 산성아래로는 비류수가 흐르고 있으며 산 정상부근의 깍아지른 절벽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으며 산정상은 평평해서 사람들이 살수 있는 넓직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nbsp오늘 하루 비록 비를 맞으면서 다니긴 했지만, 옛고구려인들의 기상과 삶을 상상하며 덩달아 힘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nbsp 저녁강의에서는 우리민족의 정통성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리고 통일 대한민국은 어떤 정통성을 이어갈 것인지, 그 이전에 어떻게 남북이 서로 합의하여 서로의 장단점을 살려나갈것인지, 그것에 따른 우리가 통일한국을 준비하는 자세에 대한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nbsp 내일은 집안으로 가서 고구려의 웅장한 유물들을 볼 예정입니다.

2013.08.13. 18,929 읽음 댓글 3개

2013.8.11. 찬란했던 요하문명, 민족의 뿌리를 찾아서 - 요녕성 박물관

어제 밤새 달려온 버스는 아침 7시경에 심양공항에 도착했습니다. 7박 8일간의 중국역사기행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가기 위해 수속을 밟습니다. 스님께서는 역사기행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한분한분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시며 인사를 하셨습니다.nbspnbsp 역사기행 참가하신 분들은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스님께서는 오늘부터 또다시 청년들과 함께 역사기행을 한번 더 할 예정입니다. 심양공항 입국장에서 청년 역사기행팀을 기다리니 맨 먼저 김제동씨가 나옵니다. 김제동씨는 올 여름휴가로 이번 동북아 역사기행을 하기로 했답니다. nbsp 심양이 있는 요녕성의 서쪽은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와 함께 고조선 시대의 활동무대였고, 고조선보다 앞선 환웅의 배달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고구려 발해 역사기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의 뿌리에 해당하는 요하문명을 먼저 알아보기 위해 요녕성 박물관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nbsp 요녕성 박물관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스님께서는 우리의 고대문명인 요하문명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nbsp “요녕성 서쪽 조양시 근처에서 홍산문화의 유물이 나왔는데, 5천년전에 이미 구리를 제조할 수 있는 문명이었으며, 여신, 재단, 돌무덤등이 나왔습니다. 이것으로 이 시기에 고대국가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6,000년5,000년전 사이의 유물인데, 중국의 역사시작은 약 5000년전이며 장강문화와 황하문명을 시원으로 한다고 했는데, 그 이전 유물들이 나오게 되니까 중국은 국가적으로 논의를 해서 중국문명의 시원은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으로 한다고 정리한 것이 동북공정입니다.nbsp 만리장성 밖 유목민족이 세운 문화를 현재 중국이 그 영역을 통치한다는 이유로 중국 문명으로 편재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명의 계승자인 부여 고구려 발해는 자동적으로 중국의 지방문명으로 편재되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nbsp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환인의 한나라는 약 9,000년6,000년, 환웅의 배달나라는 6,0004,300년 사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는 있는데, 역사를 뒷받침할 유물, 유적이 없고, 중국은 이지역에서 유물, 유적은 출토되었는데, 이를 뒷받침 할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nbsp 한나라, 배달나라, 조선나라의 위치를 요서지역이라고 추정해 왔는데, 이 지역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가 되었습니다. 여러 상식적으로 볼 때 배달시대, 고조선의 유물로 보입니다. 적석총은 지금까지는 어디에도 없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양식이었는데, 여기서 발견된 적석총과 고구려의 무덤이 거의 같은 양식입니다. nbsp 이런 배달문명시대에 이미 녹도문 문자가 있었고, 고조선시대에는 지금 한글의 원형인 가림토 문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환웅천황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천부인 3개청동거울, 청동방울, 청동검을 가지고 왔는데, 이시기에 이미 청동기가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단군신화에서도 곰이야기가 있는데, 고구려 벽화에 보면 신단수 아래 곰이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지역에서 발견된 일부 여신의 손모양이 곰 손모양입니다. nbsp 이런것에서 고대사를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홍산문명은 시기적으로 배달문명에 해당하고 하가점 하층.상층문화는 단군시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 요녕성 박물관은 요녕성에서 발견된 것만 전시되어 있는데, 배달문명과 고조선문명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요하문명의 유물중 80는 내몽고 자치구의 적봉시에 있습니다. 양쪽을 다봐야 우리의 고대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nbspnbsp 요녕성 박물관은 요하문명중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우하량에서 나온 홍산문화중 여신상과 옥기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nbsp 스님께서 요하문명에 대해 그리고 그 유물이 전시 되어 있는 요녕성 박물관에 대해 먼저 설명해 주셨습니다. 도착한 요녕성 박물관은 제1관은 문명의 서광이라고 하여 28만4만년전 구석기와 8,0007,000년 전의 신석기 유물과 5,000년전 홍산문화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2관은 중국의 하상주시대의 북방인 이곳에서 출토된 고조선 시대의 발견된 유물이 전시된 곳으로 주로 청동기 유물입니다. nbsp 점심식사를 하고 숙소에 도착하여 청년들은 조별로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녁시간에는 우리가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왜 역사를 이야기 하는지에 대해 스님께서 정리해 주셨습니다.nbspnbsp “인간은 시간적 공간적 존재이며 이것은 곧, 사회적 역사적 존재임을 말합니다. 나를 알려면 시간적 공간적관계를 알아야 하고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역사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개인처럼 열등의식을 먼저 치료해야 합니다. 열등의식이라는 것은 열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상처입니다. 민족도 상처가 있으면 민족이 자주적이지 못하게 됩니다. 나타나는 현상은 첫째는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해집니다. 반대로는 자기들이 이 세상의 중심이다라는 과대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열등의식과 교만은 동일 한 것입니다.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은 같이 다닙니다. nbsp 우리민족도 좋은점이 있고 나쁜 점도 있는데, 민족적인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열등의식이 3가지 있습니다. 첫째가 중국에 대한 열등의식입니다. 중국이 문화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무엇이든지 중국으로부터 건너왔다, 침략을 당했다, 우리는 변방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면서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이 생기는 것처럼. 중국은 문화의 중심이고 우리는 변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교가 국교인 조선시대에는 심지어 중국을 부모의 나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 두 번째는 일본에 대한 열등의식입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따라 배웠습니다. 특히 침탈을 당해서 일본에 대한 상처가 깊습니다. 독도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독도를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처럼 상처가 있으면 더 민감하게 됩니다.nbsp 세 번째는 미국등 서구문명에 대한 열등의식입니다. 우리사회 발전이라는 것이 서양을 모방한 것이고,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철학, 종교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 것은 낙후되어 있고 서양 것은 발전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근원적인 열등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가지 민족적 열등의식은 역사적 조건에서 도래했습니다. 이 세가지 상처를 치유해야 새로운 시대, 동아시아시대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 나가서 아무런 열등의식 없이 당당하고 평등하게 나아가려면nbsp민족적 상처가 우선 치유 되어야 합니다. nbsp 이번 역사 순례의 주 과제는 상고사입니다. 중국에 대한 열등의식을 어떻게 치유 할것인가입니다. 우리가 역사 복원이라는 문제를 풀기위해서는 핵심을 잡고 해야 합니다. 고구려라는 중심을 잡고 고구려의 뿌리는 어디인가, 고구려의 문화를 누가 계승했는가로 접근해 나가는 것입니다.nbspnbsp 발해의 역사는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것이 되었습니다. 발해사람이 쓴 자기기록은 한점도 없고, 요즘 발굴하면서 무덤, 비석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발해역사는 중국 당나라 역사 기록에 조금 남아 있습니다. 남한이 가진 장단점과 북한이 가진 장단점을 어떻게 조화롭게 만들어 갈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사실적으로 접근해 가면서 과거를 살피고 미래를 돌아보자는 것이 이번 역사기행의 취지입니다. 어떤일을 할때는 핵심을 잡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아도 재미가 없으면 하기 어렵습니다. . 재밌게 지내면서 그 안에 내용도 만들어가는 그런 역사기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nbsp 앞으로 진행될 동북아 대장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임해야 하고 무엇을 찾을 것인지를 스님께서 정리해주시면서 오늘 첫날을 마무리 했습니다.nbsp 내일은 고구려 성인 백암산성, 오녀산성을 갈 예정입니다.

2013.08.12. 18,753 읽음 댓글 4개

2013.8.10. 역사기행 일곱째날 - 일송정, 대종교3인묘, 청산리 전투터, 백두산 서문

오늘은 새벽 3시 30분에 일송정으로 출발했습니다. 오늘 백두산을 보고 심양으로 출발하려면 서둘러야 했습니다. 새벽 5시30분경에 비암산 일송정에 도착해서 용정시를 내려다보며 스님께서는 처음에 우리 민족이 이곳에 와서 살아가기 위해 정글로 덮혀있던 이 땅을 가꾸고 이만큼 살게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리고 설움을 견디었을 것이라며 우리선조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당시 우리 선조들은 그 외로움과 한을 달래기 위해 여기와서 고향을 그리며 ‘고향의 봄’을 부르기도 했답니다. nbsp 일송정 아래에 일송정 기념탑을 만들고 시비를 세웠는데, 원래는 선구자를 새기려고 했으나 민족감정을 고취시킨다고 허락 되지 않아서 다른 시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선구자, 고향의 봄 노래를 불렀습니다. 일송정에서 부르는 선구자, 고향의 봄은 또다른 느낌이었습니다.nbsp 대종교 3인묘로 가면서 논밭 한가운데 있는 발해의 두 번째 수도인 중경현덕부의 서고성을 바라보며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직 성벽이 남아 있었고 매우 큰 터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nbspnbsp 대종교 3인묘는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 2대교주 김교현, 서일의 묘로 초기 독립운동의 주류는 대종교인들이었습니다. 처음 이분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음에 감사함을 느끼며 이후에 우리가 이들의 정신을 잘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법륜스님께서 이곳을 방문했을때에는 이들의 묘가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풀이 무성했었는데, 대종교에 조상들의 묘를 관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어졌다고 합니다. 역사기행팀은 이곳에 올 때 마다 낫을 가지고 와서 벌초를 하고 있습니다.nbsp 지금까지 우리는 청산리 마을 기념탑에서 기념식을 하지 않고 백운평을 지나 직소택까지 가서 청산리전투터에서 사라져간 독립운동가들을 기렸는데, 오늘은 기념탑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라져간 독립운동가들과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재를 지냈고,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 없기를 기원했습니다.nbsp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백두산으로 다시 향했습니다. 4시간을 달려 도착한 백두산 서문아래에서 먼저 점심을 먹고 백두산으로 올랐습니다. 미니버스를 타고 약 40여분 이동하고 다시 1400여 계단을 걸어오른 백두an산에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안개가 걷힌 중간중간 모습을 보이는 천지를 볼 수 있었지만, 환호성을 지르게 할 만큼 푸른 천지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천지를 제대로 본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들르려고 했던 금강협곡등도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포기했습니다. 오늘 밤새 달려서 내일 아침에 심양에 도착해야 서울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저녁일정이 더 이상 늦출수가 없어서 백두산 천지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nbsp 다시 식당에 도착해서 스님께서 이번 역사기행을 정리해주시고 마무리 해주시는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이번 역사기행 전체 일정을 되짚어 주면서 과거 역사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동아시아 시대를 열어가는 것으로 인류에게 더 나은 대안적인 역할을 한다면 인류사에도 크게 기여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목적을 깔고 우리는 역사기행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앉아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구려 유적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뿌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고구려의 문화가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고민하며 역사기행을 기획했습니다. nbsp 처음 우리가 심양에 도착해서 요하문명이 전시된 요녕성 박물관을 들렀고 백암산성에 올라서 고구려 성벽의 독특한 치, 옹성을 봤습니다. 둘째날은 고구려의 첫수도인 오녀산성 에 올라서 자연의 위엄이라 할까, 자연지세를 이용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 환도산성을 둘러보았습니다. 셋째날은 고구려인들이 국동대혈에서 천손임을 잊지 않고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것을 알았고, 광개토대왕릉, 장수왕릉, 5회분 5호묘를 보고 전시된 벽화속에서 단군신화의 내용도 봤습니다. 넷째날은 백두산으로 가는길에 압록강을 따라서 최윤덕이 개척한 사군이 있는 여연, 자성, 무창, 우예지역을 바라보며 그 지역의 모서리를 돌아서 양강도의 중심인 혜산이 내려다 보이는 발해의 유일한 탑인 영광탑 참배했습니다. 압록강 상류를 따라 백두산 남문으로 왔지만 들어갈 수가 없어서 서문으로 와서 모형도를 보았습니다. 다섯째날은 백두산 북문을 통해 올랐는데, 천지의 아주 일부만을 보고 아쉬움이 남아서 오늘 다시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이번의 아쉬움은 백두산에서 사진다운 사진을 찍지 못한 것입니다. 돈화로 가서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성, 강동 24개석을 보았습니다. 여섯째날은 요전자 24개석. 상경용천부를 둘러보고, 발해의 유물인 석등, 불상을 보았습니다. 상경용천부의 황성옛터를 둘러보고 발해에 대한 자긍심을 가졌습니다. 연변 조선족 자치구인 도문으로 와서 우리선조들이 처음 중국땅으로 넘어와서 새로운 삶의 현장을 개척한 것이 토대가 되어서 일제 강점기 나라의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음을 보았고 온성의 최북단을 둘러보았습니다. 일곱째날인 오늘 아침에 용정 우물가를 지나 비암산 일송정에서 선구자를 불렀고, 중경현덕부인 서고성을 지나왔으며, 대종교 3인묘에서 애국적인 그들의 삶을 기렸습니다. 청산리 기념탑 앞에서 그들의 원혼을 달래고 백두산 서문으로 올라서 천지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구름에 가려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을 보지 못했습니다.” nbsp 오늘까지 7일간의 일정을 다시 정리해주시면서 스님께서는nbsp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남의 민족도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우리도 우리의 정체성을 침해받지 않고 남의 정체성도 침해하지도 않으면서 공동의 번영을 만들어가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nbsp 서로 연대해서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미래 문명의 선진적 방향입니다. 아직도 상대를 억압하거나 스스로 자존을 가지지 못한 경우, 설령 자존감을 가졌어도 서로 대립하는 수준등 이것을 뛰어 넘어 자존감도 갖고 상호존중하고 공동의 번영을 누리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일본에 사는 한국사람도 편하고, 한국에 사는 화교도 편하고, 중국에 사는 조선족도 편할 수 있습니다.nbsp 소수자가 핍박받게 되면 저항하게 되고 그러면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지금보다는 이런 문제들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과거역사에서 교훈으로 삼아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가지고 함께 새로운 백년을 꿈꾸자고 하시면서 7박8일간의 모든 역사기행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이번 역사기행에 참여하신 분들은 단식을 하시면서도 우리와 함께 모든 일정을 해주시고 이끌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법륜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2013.08.11. 17,199 읽음 댓글 4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