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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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5. 인도성지순례 열사흘째 - 상카시아

오늘은 8대 성지 중의 하나인 상카시아를 참배하고 오후에는 제25차 인도성지순례단 대장정을 회향하는 날입니다. 이곳 쉬라바스티에서 상카시아까지는 버스로 10시간,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제 저녁 스님께서 예년에는 4시 30분에 출발했는데 안개가 끼면 차도 막히고 일정에 차질이 있으니 30분 일찍 출발하자고 하셨습니다.새벽 3시에 차에 짐을 싣고 3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이제 순례에 적응이 된 건지 이른 새벽 2시 50분부터 짐을 싣고 예정보다 빨리 출발을 했습니다. 어둑어둑한 어둠과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 한참을 달려 강가 강의 지류를 지나칠 때 다리 오른쪽에서는 순례자 텐트가 셀 수 없이 늘어져 있고 왼편에서는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텐트 곳곳에는 힌두교 신자들이 무려 백만 명이나 모여 축제를 한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의 공존,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10시 30분, 시골 작은 동네의 힌두 신전 앞뜰에서 옹기종기 모여 맛나게 아침을 먹고 오후 1시 40분경에 상카시아에 도착했습니다.상카시아는 부처님께서 도리천궁에서 백일간 어머니에게 설법하신 후 하강한 곳으로 이를 기념하여 탑을 조성한 곳입니다. 스님과 함께 상카시아 대탑 탑돌이를 하고 예불공양, 법회를 했습니다. 스님은 상카시아 근교 5개의 디스트릭에는 인구의 20가 석가족이라며 이곳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상카시아 얘기를 실감나게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마야대비는 아기를 낳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부처님은 성도하시고 교화 활동을 하시다가 먼저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해 설법을 하고자 어느 우안거 때 도리천궁으로 가셨습니다. 한철 동안 부처님이 보이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신통제일인 목갈리나존자에게 부처님이 어디 가셨냐고 여쭈었더니 목갈리나존자가 삼매에 들어 천상계를 살펴보니 부처님께는 도리천궁에서 어머님과 천상사람들을 위해 교화설법을 하고 계셨습니다. 목갈리나 존자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지금 천궁에 계십니다.” 하니 사람들은 “부처님이 보고 싶습니다. 그립습니다. 언제 오십니까?” 하니 목갈리나존자는 다시 삼매에 들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사리푸트라는 어디에 있느냐” 하니 “지금 상카시아 성에서 안거중입니다.” “그럼 안거가 끝날 때 쯤 상카시아 성 밖으로 내려가겠다.” 하셨답니다. 제석천은 부처님께서 세상으로 내려가실 계단 세 개를 놓아 왼편에는 제석천이 칠보의 일산을 들고, 오른편에는 범천이 불자를 들고 부처님을 옹호하며 가운데 계단으로 부처님이 이곳 상카시아로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당시 브라흐만과 인드라는 인도의 최고 신이었습니다. 이처럼 붓다는 인간과 신들의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합니다. 천상은 신들의 세계, 천하는 인간들의 세계 즉 신과 인간을 통틀어 가장 존귀한 존재이다, 신들마저 부처님을 옹호하고 법문을 듣고 깨닫는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불교는 객관적으로 볼 때 세계 7대 종교 가운데 하나이지만 불법은 7대 종교와 비교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다 포함하면서 그 위에 종교를 초월한 진리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 적대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민족종교나 토속신앙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진리의 세계를 건설했습니다. 법을 알아야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상천하 무여불 시방세계 역무비, ‘하늘 위 하늘 아래 부처님 같으신 분 없으시고 온 세계에 부처님과 비교할 분 없다.’ 이것은 불자로서의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기적과 관련된 4대 성지, 즉 성난 코끼리가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영축산, 원숭이가 꿀을 공양한 바이샬리, 천불화현을 보였다는 쉬라바스티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곳 상카시아 이야기,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3개월 있다 하강한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면 효와 연관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효사상과 연관지어볼 때 출가는 불효가 아닙니다. 진리를 깨우쳐 세상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것이지 나 혼자 안온을 찾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상카시아는 재가신자들에게는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상카시아에는 전 인도에서 석가족이 제일 많이 살고 있습니다. 23백만 명 가량 됩니다. 이들의 상까시아에 대한 공경은 우리나라 국민의 백두산 이상입니다.nbspnbspnbsp 상카시아 대탑 참배 후 석가족 마을로 출발했습니다. 명상센터 부지에 도착하니 동네 어르신과 청년 그리고 꼬마들까지 모여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삶은 감자와 따끈한 짜이 그리고 과일 등 석가족의 공양을 후하게 받았습니다. 그 공양물을 받고 보니 내가 이걸 먹어도 되는지? 스님 덕분에 석가족을 만나고 공양물을 받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이 밀려옵니다. 순례자들은 벅찬 감동과 함께 맛나게 먹었습니다. 석가족이 최고로 존중하는 예우는 발에 입을 맞추거나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는 것이라 합니다. 석가족들이 준비한 꽃목걸이를 스님께 그리고 법사님과 순례자들에게 일일이 걸어주었습니다. 석가족의 최고의 환영을 받으니 스님의 같은 제자라는 것이 더욱 기쁩니다.nbspnbspnbspnbsp 그리고 석가족 청년의 환영사가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중학교 2학년부터 한국에는 불교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 불자를 꼭 만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1991년 아그라에서 순례하는 한국인들 가운데서 법륜스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인연이 되어 스님께서는 법당도 지어 주시고 불상, 염주, 책들을 보시해 주셨고 불법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법륜스님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 석가족은 집에도 부처님과 같이 스님 사진을 붙여놓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석가족들의 스님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느껴져 순례자들은 숙연해졌습니다. 그분은 순례단과 석가족은 한가족이라고 하며 언제든지 집을 방문해 달라며 마치 형제를 맞는 듯 기뻐하는 걸 보니 스님께서 한국 아닌 인도에서도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이렇게 큰일을 하고 계셨다니, 순례가 진행될수록 부처님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시는 스님의 행적에 말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전해옵니다. 그래서 스님은 성지순례단 귀국 후에도 이곳에 남아 석가족들과 법회와 명상수련을 지도하시고, 현재 진행중인 불사 점검 등의 일로 인도에 체류하신다고 합니다.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도 스님께서 석가족을 위해 마련해 주셨다고 합니다. nbspnbspnbsp 석가족의 환영 속에 25차 성지순례단 회향식을 했습니다.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에서 삼귀의 오계를 받고 가사를 수하고 시작된 15일간의 긴 여정은 끝났습니다. 순례를 시작할 때는 여정이 길지 않나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일정이 짧지는 않았는지 너무 서둘러 다닌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스님께서는 보름간 수행자의 자세로 부처님 발자취를 따라 우리 내면을 보는 공부를 했고 이제 저자로 나가 그분의 가르침대로 원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마무리하셨습니다.회향식에서 하신 스님의 법문이 너무 좋아 한국의 도반님과 나누고자 올려봅니다.nbspnbsp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부처님의 제자로서 한발 한발 정성스럽게 다녔습니다. 하지만 성지순례 도중 자는 거, 입는 거, 먹는 것 등에 반응하는 나를 보니 생각으로는 성스러움을 추구하지만 실제 행동은 늘 자기 삶의 습관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업식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 해도 지나고 보면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울타리 감옥은 자기를 합리화해서 탈출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생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막상 해보면 우리 까르마는 요사스럽게 백억 가지로 화현해서 의식을 바꿔가며 늘 그런 삶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순례를 하면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밟으면서 붓다를 그리워하고 찬탄하고 존경하는 것도 신심입니다. 하지만 늘 한계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절망할 수 있지만 우리는 붓다의 제자이기에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인생이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 하니깐 자신의 삶이 신의 뜻에, 전생에 따라, 사주에 따라 숙명이다 또는 운명은 정해져 있다 하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은 인생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한 것 같은데 늘 제자리로 돌아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울타리를 박차고 벗어나, 육도 윤회를 해탈하신 분이 오늘 우리가 존경하고 따르는 부처님이십니다. 그분도 우리와 똑같은 존재이고 똑같은 한계 속에서 성장하시고 어쩌면 우리보다 더한 한계에서 자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우리보다 더한 한계 속에서도 넘어지면 일어나고 꾸준한 노력, 정진, 불방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고요히 지속적으로 하셨습니다. 안 되는 것을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안 되니깐 연습을 꾸준히 하셔서 그 한계를 넘으셨고 그것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셔서 오늘 우리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불자는 더 이상 숙명론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붓다가 수행하실 때 늘 마왕이 나타나 ‘해탈이란 없다’ ‘열반이란 없다’라는 속삭임을 극복한 이는 천하에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러한 속삼임과 번뇌를 넘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셨고 ‘천상천하 무여불, 시방세계 역무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처럼 되는 것을 발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계를 인정하고 뛰어 넘어 미래를 두 눈으로 보며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 수행정진입니다.”nbspnbspnbsp “한국에서 태어난 인연으로 우리 땅의 구조적 고통인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인연으로 남녀노소, 종교, 사상, 이념에 관계없이 기여해야 합니다. 불자로서 불교가 이 땅에 꼭 있어야 할 역할을 해야 합니다한국불교의 문제점은, 담마인 진리의 법이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한국불교가 현실에서 하고 있는 일은 불법과 아무 상관없는 복을 비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현실의 삶에서 겪는 고뇌와 고통이 진리와 관계없이 가고 있습니다. 불교 아닌 삶은 멈춰야 하고 삶의 고뇌를 해결하는 역할을 불교가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불교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며 그래야 한국불교가 희망이 있습니다.우리는 그런 역할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이번 8차 천일결사 때에 시군구 읍면동에 법의 씨앗이 되고 정거장이 되고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을 8차년에 만들고자 합니다.불교를 통해 작은 희망을 발견한 이들이 우리 국민에게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해서 다음 만일은 세계인에게 희망이 되고자 합니다. 교포가 희망이 되고 세계인에게 희망이 되어 봅시다.다음 만일은 인도 석가족이 인도불교의 희망이 되도록, 서양불교 발전의 기초가 될 수 있도록 이번 만일 중에 그 씨앗이 되고자 터를 닦습니다.성지순례는 우리 마음에 희망의 씨앗을 간직하고 붓다가 활동했던 인도에 불교가 부흥될 수 있도록 이곳 석가족을 교민이라 생각하고 인도의 교두보가 되도록 씨앗을 뿌리고자 합니다.”nbspnbsp 이렇게 스님과 순례단은 상카시아에서 석가족과 함께 새로운 원을 세우고 회향식을 했습니다.nbspnbsp 내일은 순례단 자유 일정으로 인도의 관광도시인 아그라로 갑니다.

2014.01.18. 19,591 읽음 댓글 18개

2014.1.14. 인도성지순례 열이틀째 - 쉬라바스티 기원정사

오늘은 천불화현탑과 기원정사, 사위성의 앙굴리말라 탑터, 수닷타 탑터 참배 일정이 있습니다. 4시 30분 기상하여 숙소인 천축선원 법당에서 가사를 수하고 예불과 천일결사기도를 마쳤습니다.nbspnbsp 어젯밤 스님께서 오늘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순례하는 일정이라고 안내를 하셔서 날마다 반복되는 옷차림이 또 고민되었습니다. 작년 순례객들이 추워서 힘들었다는 정보 덕분에 속옷도 겉옷도 따뜻한 옷들을 준비했는데 올해는 스님께서 성지순례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따뜻하다고 할 만큼 내내 더운 날씨여서, 행여 오늘은 추울까 싶어 따뜻한 옷을 입고 나섰다가 한겹씩 벗느라 진땀을 흘리곤 했습니다. 오늘은 먼 길을 걷는다고 하니 두꺼운 옷 대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서 보았는데 하루종일 햇볕을 만날 수 없는 안개 낀 흐린 날씨가 계속되어 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춥다’라는 표현을 써본 날이었습니다.nbspnbsp 오늘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순례지를 찾아가는 행선 순례일정입니다. 스님께서 천천히 걸으면서 수행하는 자세로 자기 동작에 깨어 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왼발이 나갈 땐 왼발에, 오른발이 나갈 땐 오른발에 깨어있고, 정근 소리도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집중해 보라고 하셨습니다.짐은 스탭 차량편에 보내고, 대중은 가사를 수한 채 바랑만 메고 새벽길을 나섰습니다.nbspnbspnbsp 천축선원 입구에 씌어진 Who am I? 라는 문구에 눈길이 멈춰집니다. 몸도 마음도 서두르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여 손끝 코끝 발끝에 집중하여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처음 느껴보는 듯한 평온한 여유가 찾아옵니다. 이렇게 천천히 가는 길도 있는데 쫓기듯 정신없이 살아왔구나. 무엇을 찾아서 어디로 향해 가느라 늘상 바쁘게 쫓기며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nbspnbsp문득 스님을 출가하도록 만들었던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가느냐?”고 물으신 도문스님과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스님을 선두로 황금색 가사를 여법하게 수한 대중들이 기러기떼처럼 줄을 지어 천불화현탑으로 향해 갑니다.nbspnbspnbspnbsp 무변심 법사님의 목탁과 유수스님의 염불소리와 대중들의 석가모니불 정근소리가 안개 자욱한 사위성의 새벽을 깨웁니다.nbspnbspnbsp 쉬라바스티는 강가 강 서북쪽에 위치한 코살라국의 수도였고, 코살라국은 당시 300여 개 인도의 나라 중 호전적이고 다혈질의 기질을 가진 국가로 강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였다고 합니다. 마가다국은 오랜 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는 온화하고 역사 깊은 나라라고 한다면, 코살라국은 신흥국가로 경제, 정치, 군사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했지만 문화, 종교, 사상적인 면으로는 뒤쳐지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를 존경한다거나 그 중요성을 잘 몰라서 부처님이 교화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기적은 불법의 진의가 아니라고 가르치셨지만 이곳 사위성에서는 천불화현의 기적을 몸소 보인 후에야 왕족과 이교도들을 교화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교도들은 여러 가지 사건으로 부처님을 비방하고 위해하는 많은 경전의 일화들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 사위성을 상징하는 천불화현탑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부처님께서 망고씨를 심어 순식간에 거목으로 자라게 한 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였고, 그 열매가 전부 부처님 모습으로 변하게 했는데 이때 천 분의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하여 ‘천불화현’이라 하며, 군중들을 교화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후에 아쇼카 왕이 이것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웠는데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큰 동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탑 주변을 에워싼 늪들은 탑을 쌓느라 흙을 파내서 만들어진 늪이라고 하며, 날씨가 맑은 날엔 주변을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nbspnbspnbsp 천불화현탑을 둘러싸고 앉아서 귀에 쏙쏙 들어오는 스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예불을 모시고 아침 명상을 가졌습니다.nbspnbsp 기원정사를 향해서 다시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먼동이 트고 안개 속에 아스라하던 320명 행렬의 모습이 선명해지니 2,600년 전 부처님 뒤를 따르던 분소의를 입은 수행자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깊은 감동으로 코끝이 찡해옵니다.nbspnbspnbspnbsp 가는 길에는 민가보다는 각 나라의 사찰들이 줄지어 있어서 불교인들이 8대 성지중의 하나인 기원정사를 얼마나 특별하게 여기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길가에는 인도를 상징하는 보리수, 반얀트리, 야쇼카나무, 망고나무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자귀나무와 아왜나무가 고목을 이루고 있어 정겨웠습니다. 길섶엔 우리나라 쑥을 닮은 들풀을 비롯해 며칠간의 인도생활에서 친해진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부처님 발자취 따라 내딛는 한발 한발을 가볍게 도와주었습니다.nbspnbsp 8시 무렵에 기원정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손에 손에 향불을 피워든 채 넓은 기원정사의 유적지 구석구석을 돌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행선하였습니다. 아난다 보리수나무, 부처님 당시의 우물, 부처님이 행선하던 곳 등 부처님의 행적을 기리는 많은 기념물들이 있었고 그동안 다녀온 성지 중 가장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옅은 안개가 깔린 파란 잔디와 붉은 벽돌탑들 사이를 노란 가사를 입은 긴 행렬이 꼬불꼬불 포행하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장관이었습니다. 참배 중이던 남방 스님들과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고, 사진도 찍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함께 하기도 합니다.nbspnbspnbsp 삼귀의를 모신 후 스님의 발원이 이어집니다. 성지순례기간 동안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감동만큼이나 스님의 발원문 또한 매일 가슴을 찡하게 하는 감동입니다.오늘도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사위성 기원정사에서 예불공양 올리며 참회발원을 하였습니다. 대중들의 소원 원만성취와 남북통일, 굶주리고 춥고 병든 북한 주민들을 위한 발원, 국민화합과 안정, 하나뿐인 지구의 환경보전과 기아 질병 문맹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위해 발원하셨습니다.nbspnbsp 기원정사는 당시 사위성의 큰 기업가이고 자선사업가였던 수닷타 장자가 세웠다고 합니다.nbspnbspnbspnbsp 외로운 이를 돕는 사람이라 하여 한자로는 급고독장자라고 하며. 제따왕자 소유의 땅에 급고독장자가 세웠다 하여 기원정사를 기수급고독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수닷타가 사업차 왕사성에 갔다가 절친한 친구에게서 부처님의 설법을 전해 듣고는 크게 감동하여 잠을 설쳤다고 합니다. 쉽고 명쾌한 법륜스님의 법문을 처음 듣던 날이 떠올라 수닷타의 감동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수닷타가 숲속을 산책하다 비범한 자태의 부처님을 알아뵙고 인사를 올렸을 때, “내 당신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요”라고 반기셨고, 그 자리에서 부처님 설법을 듣고 깨달아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하며, 이때 부처님을 사위성으로 초대하였고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처소로 기원정사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재가신자 중 제일제자인 수닷타 장자의 부처님에 대한 신심에 대한 많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깨달은 후 45년 동안 교화활동을 하면서 45안거 중 24안거를 사위성에서 보내시고 그중 19안거를 기원정사에서 보내셨으며, 경전의 약 40가 이곳 기원정사에서 설하신 것으로 전해옵니다. 아함경의 수많은 교화사례와 주요 대승경전의 배경도 기원정사가 많다고 합니다.nbspnbspnbsp 금강경을 설해서 더욱 유명한 기원정사에서 금강경과 수닷타 장자의 귀의와 기원정사를 기록한 불설 중본기경 중 수닷타의품 등 경전을 한 시간 가량 독송하고 점심공양을 먹었습니다.nbspnbsp 집을 떠나온 지 12일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각종 밑반찬이 풍성한 반찬에 조별로 밥솥채 싸온 밥을 나눠먹는 도반들의 정겹고 밝은 웃음소리가 기원정사에 가득합니다. 오늘은 점심 식사 후에 스님과 함께 개인사진을 찍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감기로 힘들어 하시면서도 대중들을 위해서 일일이 사진 모델을 자처해주신 스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nbsp 점심 후에는 대중이 함께 108배를 하고 명상과 경전을 독송한 후 스님의 법문이 있었습니다.부처님의 여러 교화사례와 귀의하는 수행자가 많아지면서 다른 교도들이 시기하여 모함했던 사례들을 쉽고도 재미있게 전해주셨고 귀한 법문도 설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자비스러운 마음과 사랑의 마음이 얼마나 큰가 알 수 있는, 아이를 잃고 괴로워하는 여인을 깨우쳐주는 얘기와 똥꾼 니다이와 주리반특을 비롯한 몇 가지 교화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부처님 교화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교만한 자를 지혜의 칼날로 교만을 깨트린 가르침과 고통받는 중생들을 자비의 손길로 보듬어서 깨우쳐주는 말씀이셨다고 합니다. 천민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똥꾼 니다이가 똥물이 옷에 튀겨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물에 씻어보라고 하시며 어떻게 됐느냐 물으시고 깨끗해졌다고 하자 옷이라고 하는 천에 똥물이 묻으면 더러워지고, 씻으면 깨끗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는 본래 천하고 귀한 것이 없고, 천한 의식을 갖게 되면 천해지고 천한 까르마를 소멸시켜버리면 청정해진다고 하는 생활상에서 일어나는 비유를 통해서 쉽게 깨우쳐 주셨고, 바보 주리반특이 아무리 해도 깨우치지 못할 때 청소를 하면서 ‘티끌을 털고 떼를 닦아라’를 계속 반복하며 청소를 하게 하다가, 더러운 것이 청소를 하면 깨끗해지듯이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도 닦으면 청정해진다고 가르치신 것은 자비의 말씀입니다.붓다는 배우지 못하고 천하다고 내팽개치고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nbspnbsp 붓다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고,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찾아 왕위를 버리셨고 끝간 데 없는 고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는 세상 속에 계셨고 세상 속에 계셨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더럽다고 내팽개치고, 세상을 외면하고 멀리하지 않고 늘 세상 속에 계셨습니다.어리석은 중생도 깨우치기만 하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음을... 현재 인간이 한계를 겪고 있는 것을 인정하되, 그 한계 속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 내면 새롭고 자유로운 세상 행복한 세상이 열린다는 것. 그렇게 되기 위해서 굶거나 고행을 하거나 잠을 안 잘 필요는 없으며 누구나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지만, 그 욕망을 부정해도 안 되고 욕망에 끄달려서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욕망이 있는 것을 인정하되 다만 욕망이 욕망인 것을 알아차리고 욕망에 끄달리지 않을 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붓다가 제시한 길은 검소한 길이고 청정한 길이고 바른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고행의 극단주의는 배격하셨습니다.내가 옳다고 하는 것마저도 지나치게 상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정진할 때도 욕망에 끄달려서 마음이 흥분되는 것은 고통의 씨앗이 될 수 있고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긴장하는 스트레스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차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러나 거기에 매이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아무도 배격하지 않고 자기에게도 행복이 되고 남에게도 이익이 되는 그런 길을 가셨지만, 세상으로부터 칭찬만 받았던 것은 아니고 때로는 비난과 질시가 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떤 이기심을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이었습니다.사람들이 바른 길을 따라 귀의하는 것도 다른 쪽 사람들에겐 붓다가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장애에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붓다마저도 때로는 비난받고 때로는 모함을 당하는데 우리같은 수준의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함을 받지 않고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좋은 일만 생기리라 생각하는 건 지나친 욕심이라고 하셨습니다.nbspnbsp 여유로운 기원정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줄을 지어 사위성에 있는 앙굴리말라 탑터로 갔습니다.새벽정진을 마치고 마을 사람들이 밥 먹는 시간이 되면 부처님과 제자들이 줄지어 탁발을 가셨던 그 길을 걸었습니다.당시라면 재가신자들도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팠을 텐데 1,250명이나 되는 수행자들을 공양할 정도라면, 당시의 수행자들이 얼마나 존경받는 분들이셨는지, 재가신자들의 수행자에 대한 경외심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해 보았습니다.nbspnbspnbsp 앙굴리말라 탑터는 쇠창살로 경계가 되어 있어 탑에 올라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올해 처음 만나는 모습이라니 관리가 되고 있다는 반가움과 직접 올라가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교차되었습니다.죽은 사람의 손가락으로 천 개 염주를 만들어 천상에 나고자 했던 앙굴리말라가 교화되어 받은 법명이 비폭력무저항의 뜻을 지닌 ‘아힘사’라고 하셨습니다. 잡아함경의 앙굴마경을 독송하여 참배의 뜻을 기렸습니다.nbspnbsp 인간적 붓다와 인간적 법륜스님을 동시에 만나는 성지순례였습니다.감기약에 취해서 잠깐 졸았다고도 하시고, 산을 오를 때는 숨이 차는 소리가 송신기를 타고 흐르기도 했습니다. 정토행자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우리를 혼도 내시고, 때때로 재밌는 농으로 웃음을 선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앙굴라마라 탑터에서 던진 스님의 조크 중, 인도에서 가장 폭력적인 사람은 앙굴리말라이고, 독일에서는 칼휘둘러라고 하셔서 한바탕 웃었고, 기원정사에서 대중 속으로 뛰어든 개들을 죽비를 쳐서 손수 쫓아내시면서, 소리만 크지 아프지는 않다고 말씀하셔서 대중들을 웃게 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앙굴리말라 탑터 건너에 위치한 수닷타 탑터에서는 삼귀의로 참배하고 대중들이 흩어져서 탑 주변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이나 기원정사 같은 몇 군데를 제외한 대부분 성지들이 함부로 버린 쓰레기들로 안타까웠는데 다음 일정에 쫓겨서 지나치다가 청소기가 지나간 듯 깨끗해진 탑터를 나오는 마음이 뿌듯했습니다.nbspnbsp 어제는 새벽 2시부터 하루 종일 운전을 하고, 내일은 12시간에 걸쳐 상카시아로 이동하는 강행군이라 오늘 하루는 편히 쉬시라고 했던 버스 기사님들이 일찌감치 오셔서 기다리다가 일행을 천축선원으로 이동시켜주셨습니다. 잠자리도 먹거리도 불편한데 비포장에 가까운 도로를 매일 안전운행 해주시는 드라이브지와 조수님들의 프로정신이 존경스럽고 감사합니다.숙소에 도착한 스님께서는 천축선원 주지스님과 신축부지를 살펴보시고, 인근에 있는 인도 절을 방문하셨습니다. 15년 전엔가 기원정사에 오셨을 때 보시를 한 인연을 맺고, 그 후론 이곳에 올 때마다 들러서 격려차 방문하여 보시하곤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음 생에는 인도에 나셔서 중생구제에 힘쓰시겠다는 원을 말씀하시곤 하시던 스님다우십니다’ 하고 또 감동하였습니다. 극진히 맞아서 예를 갖추시는 그곳 스님들을 한 분한 분 손잡아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nbspnbsp 저녁공양은 끼니 중 가장 맛있게 기억된다는 라면이었습니다.수년 동안 연습된 결과겠지만 320명분의 라면을 끓이는데 흡사 자동화공장처럼 착착 끓여대는 모습에 도와주려고 들어왔던 천축선원 비구니 스님께서는 끼어들지도 못하고 한참을 구경만 하셨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도 대전식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라면을 맛있게 드시고 인도 절에서 선물 받으신 과자를 나누어 주셨습니다.nbsp 저녁예불은 천축선원의 주지스님이신 대인스님과 함께 진행했습니다.걸망 메고 유행하시는 걸 좋아하셔서 인도에 왔다가 금강경이 설해진 대승불교의 요람인 기원정사에 우리나라 절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인연이 닿아 불사를 하게 되었고, 인연닿는 순례객들을 시봉하며 인근 인도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펼치며, 학교를 짓는 중이시라는 대인스님께서는 봉사도 성지순례도 수행처럼 행하는 법륜스님과 정토행자님들이 한국불교의 희망이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머나먼 인도 땅에서 쾌적한 방과 맛있는 우리 음식으로 대접해주신 대인스님께 감사드리며, 천축선원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원만성취되도록 힘찬 큰 박수를 보내드렸습니다.nbspnbsp 내일은 새벽 3시에 기상하여 12시간을 달려서 석가족의 후예들이 불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상카시아를 참배할 예정입니다.nbsp

2014.01.17. 19,995 읽음 댓글 4개

2014.1.13. 인도성지순례 열하루째날 - 탄센, 삐쁘리하와 진신사리탑터

새벽 3시. 오늘은 더 일찍 기상하여 탄센으로 향합니다. 순례단이 차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동안 버스는 어둠을 헤치고 아슬아슬한 산길을 달려 해발 2천 미터 고지의 옛 불교왕국 탄센에 도착했습니다. 탄센에 온 이유는 설산을 보기 위해서입니다.“성지순례 일정이 3분의 2쯤 지나면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지치고 해서 오늘은 산행을 하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은 그래도 산에 가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그래야 좀 기운이 나잖아요? 맨날 습기차고 음침한 데 있다가 산에 쑤욱 올라가 햇살이 짱 비치는 그런 곳으로.... 또 인도까지 와서 설산 구경도 못했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먼발치에서라도 아 설산이 저런 거구나, 부처님이 설산, 설산 하는데 설산수도상은 아니더라도 젊은 시절에 부처님은 설산을 보셨겠다. 왜? 자기 나라에 연결되어 있으니까 이런 걸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스님의 말씀대로 인도의 먼지와 소음과 습기 속에서 열흘 가량 순례를 하다 보니 약간 지치는 듯했는데 네팔에 오니 왠지 공기도 다른 듯하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nbspnbsp 네팔은 인도보다는 소득 수준이 낮지만 사람들이 깔끔하고 생활수준은 인도보다 낫다고 하더니 정말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올라와 보는 그 높은 산꼭대기에 길을 내고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참 대단해 보였습니다. 동네를 지나 계단을 한참 오르니 시야가 탁 트여 일출을 보기 적당한 장소가 나옵니다.nbspnbsp“저 쪽에 설산 보이지요? 저기부터 벌개지면서 해가 떠오릅니다” 산들과 구름을 붉게 물들이면서 서서히 해가 떠오르자 모두들 탄성을 지릅니다. “오늘을 우리 새해 첫날로 하자”시며 스님이 lt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gt 노래를 부르자고 하십니다. 다 함께 노래를 부르니 오늘이 정말 새해 첫날인 듯합니다.nbspnbsp해가 뜨니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설산,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봉이 공중에 떠 있는 듯 신비스럽게 느껴집니다.nbspnbsp“여러분들 복이 많습니다. 안나푸르나 저렇게 잘 보이기 어려운데 누구 복인가요?”“스님 복입니다.” “아니다. 그러면 올 때마다 잘 보여야 하는데?” “하하하...”스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조금 더 올라가니 넓은 공터가 나옵니다.nbspnbsp그곳에서 청년정토회 회원들의 진행으로 1시간 정도 몸을 풀며 재미있는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는 동안 스님은 주변 숲길을 답사하시고 레크리에이션이 끝나자 빨리 걸을 수 있는 사람만 따라 오라며 숲길로 앞장서 가십니다. 이곳 소나무는 잎이 유난히 길어서 빗자루를 만들어도 좋을 듯합니다. 스님을 따라가자니 조금 숨이 가쁘긴 하지만 새벽 삼림욕이 몸과 마음을 깨우는 듯합니다.nbsp산을 내려와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는 다시 인도로 향해 갑니다.nbspnbsp비자업무를 신속하게 하려고 JTS 실무자들이 국경으로 선발로 나가서 준비한 서류를 미리 제출했지만 버스가 도착해야 처리해준다 하여 도착 후 40여 분을 버스에서 기다렸습니다. 서류 처리가 끝나고 군인들이 버스 안까지 들어와 제법 까다롭게 검문을 한 후에야 버스는 출발합니다.nbspnbspnbsp다음 순례지는 삐쁘라하와 석가족의 진신사리탑입니다.“오늘 저희들은 카필라바스투의 샤끼야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을 친견 공양 올리옵나니, 이와 같은 인연공덕은 참으로 희귀하고 희귀한 일이라, 다생겁래로 지어온 한량없는 공덕이 있기에 오늘 이렇게 진신사리탑 세 군데를 마지막으로 친견하오니 이와 같이 진신사리탑 친견 인연 공덕으로 친견 대중일동 다생겁래로 지은 업장 모두 소멸하고 갖가지 재앙 막아지고 각자의 원하는 바 소원들이 원만성취케 하여주옵소서.부처님 발자취 따라 인도성지순례 기간 동안일기가 순일하여 일정이 잘 맞추어지고 대중들이 무사한 순례 인연공덕 제불보살님들께 감사드리오니 순례의 마지막까지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되게 하여지이다.”nbspnbsp“참으로 희귀한 진신사리탑을 세 군데나 친견한 인연공덕, 저희가 태어나고 자란 인연 있는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회향하오니 이 친견 인연공덕으로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가 정착되고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과거 한국전쟁동안 헤어진 이산가족들 죽기 전에 그 한을 풀 수 있게 또한 생사를 모르는 분들은 생사를 확인할 수 있게 북한으로 납치되거나 월북하거나 한 사람들 또 남한으로 내려와서 장기 복역하는 사람들 이제 전쟁 끝난 지 60년이 지났으니 과거의 모든 한을 잊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 주옵소서.nbspnbsp통일 되는 그날 이전이라도 북한의 2천만 동포들 굶주림의 고통과 추위의 고통과 병환의 고통에서 하루속히 벗어날 수 있도록 남한정부와 국민이 자비심을 베풀어 인도적 지원이 하루속히 재개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북한주민들이 겪고 있는 갖가지 인권침해와 장기적으로 구금되어 있는 관리소가 해체되고 고문당하는 그런 고통이 없는 사회가 되도록 북한의 지도층들이 크게 마음을 내게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옹호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오늘 부처님 진신사리탑 친견 인연공덕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오니 세계가 태평하고 하나밖에 없는 지구의 환경이 보존되고 사람이 태어남에 조건으로 차별받지 않는 그런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또한 저희 이런 발원공덕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조상영가님들 또한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왕생극락케 하옵소서.nbsp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nbspnbsp 스님의 발원문이 마음속 깊이 울립니다. 이번 진신사리탑에서도 스님은 통일에 대한 발원을 지극한 마음으로 올렸습니다.nbspnbsp “삐쁘라하와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은 여덟 개의 최초의 사리탑 가운데 하나로서 카필라바스투의 샤키야족, 석가족들이 부처님의 사리 일부를 얻어 가서 세운 탑입니다. 그러니 여덟 개의 탑 가운데서 부처님이 출생한 종족, 친족들이 모셔가서 세운 탑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특별히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리탑은 지금부터 한 130여 년 전, 19세기 말엽에 영국 사람에 의해서 발굴이 돼서 거기에서 사리용기가 발견됐습니다. 그리고 그 사리 용기 안에 유골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부처님의 사리, 부처님의 유골을 발견한 겁니다. 인도가 독립된 뒤에 2차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1차 발굴한 것보다 더 아래쪽에 더 깊은 곳에 사리용기가 또 발굴이 됐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발굴된 사리함은 2개고 유골 또한 2군데 담겨 있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처음 가져와서 쌓은 사리탑에 아쇼카 대왕이 그 사리를 꺼내서 다른 곳에 일부 쓰고 이 사리탑을 더 크게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또 그 위에다가 탑을 새로 만들면서 사리를 또 넣은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됩니다. 이 사리함과 사리는 순례 마지막 날 델리박물관에서 직접 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삐쁘라하와 샤끼야족이 세운 진신 사리탑은 거의 완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리탑은 밑받침이 네모나 있습니다. 바이샬리 탑은 밑이 둥글었죠? 이것은 네모진 건 아마 두 번째 탑을 더 크게 쌓으면서 모양이 이런 모양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는, 2,600년 전에 세운 최초의 탑 가운데 현재 발견된 것이 세 개인데 그 세 개를 다 친견했습니다. 근데 묘하게도 그 셋이 다 부처님과 굉장히 가까운 그런 사람들이 모셔간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리탑은 부처님의 친족인 석가족이 부처님의 유골을 가져가서 세운 사리탑이에요. 어제 친견한 랑그람 사리탑은 부처님의 외가에서 가져가서 세운 사리탑이고, 바이샬리 사리탑은 릿차비족, 부처님이 가장 아꼈던 도시, 바이샬리 사람들이 가져가서 세운 사리탑입니다. 이 세 개가 2,6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 발견됐다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고 또 그 가운데 이 세 개만이 유독 발견됐다는 것은 그만큼 인연이 귀중한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nbspnbsp 스님의 말씀을 듣고나서 순례단은 불법승 삼보에 7배씩 21배로 정성스럽게 예를 올린 후 기념촬영을 하고 버스는 다시 쉬라바스티로 출발했습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5시간가량을 가야 하는 먼 길이지만 나누기와 노래로 지루하지 않게 올 수 있었습니다.오는 중에 스님은 청년들이 타고 있는 1호차로 옮겨가서 청년들과 질의응답을 하시며 청년들을 격려했습니다. 청년들은 스님을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쉬라바스티의 천축선원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웬만한 호텔 못지않은 좋은 시설과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스님들을 뵈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선원에서 준비해 주신 식사를 하고 간단한 세면을 한 후 내일 필요한 짐을 챙깁니다.nbspnbsp 내일은 기원정사와 앙굴리말라 탑터, 천불화현 탑터 등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2014.01.17. 18,564 읽음 댓글 6개

2014.1.12 인도성지순례 열째날 - 네팔 카필라바스투, 쿠단, 랑그람

네팔 룸비니 대성석가사의 첫날이 시작되었지만 새벽 안개로 주변을 전혀 구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 4시 30분, 대웅전에서 법신 주지스님 이하 여러 스님들과 함께 예불을 올리는데 감동이 몰려옵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에서 그것도 한국의 사찰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예불을 드린 후 법신스님께 삼배의 예를 드리고 환영의 말씀을 들었습니다.nbspnbsp 안개가 여전히 자욱하였지만 순례단은 손전등을 밝히며 30여 분 걸어서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에 도착했습니다. 아쇼카 석주 앞에서 예불공양과 스님의 법문, 그리고 경전 독송을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불교 4대 성지의 초기 모습과 성도 및 열반의 길을 따라 가는 순례를 통해 부처님의 정법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547가지를 모아 놓은 본생경 중 첫 번째 선혜동자 이야기를 실감나게 해주셨습니다. 선혜동자가 연등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리고 진흙탕에 자기의 몸을 던져 부처님께서 밟고 지나가게 하는 지극한 마음과, 호명보살이 마야부인의 모태에 들어간 태교 이야기, 산달이 가까운 마야부인이 출산을 위해 카필라성 동문으로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간 지점인 룸비니 동산에서 아기부처님을 탄생하신 과정을 들으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자체만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옆구리로 아기를 낳았다는 것은 인도의 전설에 브라만은 신의 입에서, 크샤트리아는 옆구리에서, 수드라는 발바닥에서 태어난다고 하므로 부처님은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씩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인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육도육회를 벗어나 해탈할 것을 상징하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하늘과 인간계의 가장 고귀한 존재가 누구나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의미라는 말씀을 새기며 잘 정비된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대성석가사로 돌아와 아침공양을 맛있게 먹고 다음 순례지로 출발하였습니다.nbspnbspnbspnbsp 9시 30분경에 부처님이신 고오타마 싯다르타께서 29년 간 생활하셨던 카필라바스투로 출발하여 1시간 뒤에 도착하였습니다. 허물어진 벽돌더미만이 우리 순례단을 맞이하였지만 스님께서는 전륜성왕이라는 세속적인 출가 전에 생활하셨던 그 모습을 떠올려보자고 하셨습니다.nbspnbspnbsp 큰 나무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간단한 의식 후 출가에 대하 경전을 독송하고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성지마다 열리는 야단법석이지만 부처님의 고향에서 올리는 법회는 여느 때와는 다른 내 고향에 온 듯 따사롭고 평안합니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경전을 독송하는 내내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부처님을 지극하게 경배하는 스님의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법문으로 온몸에 깊이 새겨집니다. 부처님과, 스님, 그리고 순례탄에 대한 찬탄과 환희로움 속에 카필라바스투를 돌아봅니다.nbspnbspnbspnbsp 새가 벌레를 쪼아먹는 모습을 보면서 왜 하나가 살려면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하는 것인가? 다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없는가를 고뇌하신 어린 부처님의 모습을 상상하며 순례유관을 합니다.동문으로 나와 늙은 사람을, 남문에서는 병자를, 서문에서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발견하고, 나도 저렇게 될 것이며 어떻게 이 괴로움을 멸할 수 있을까 생각에 잠긴 이곳의 소중함을 떠올려야 한다고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nbspnbsp 북문에서 수행자를 만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 사문이 될 것을 결심하고 결국 29세에 동문을 통해 왕궁을 나와 출가를 하셨습니다. 그 동문으로 순례단은 이동하였습니다. 동문 앞에서 모두 함께, 지금은 허물어진 벽돌만이 있지만 부처님을 생각하며 유수스님의 선창으로 출가의 노래를 배우며 불렀습니다.노래 가사 중 ‘왕궁의 부귀영화도 한순간 던져버리고 외로운 구도의 길을 구름 따라 헤매이셨네. 보리수나무 그늘아래서 명상 속에 깨달으셨네’ 라는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출가 가능성이 있는 청년들에게 잘 새기면서 부르라고 하시어 모두 한바탕 웃었습니다.nbspnbspnbspnbsp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동문을 출발하여 북문쪽으로 나와 부처님이 어릴 적 다니셨을 그 길을 걸어가며 고타마 싯다르타의 유년기를 그려봅니다.nbspnbspnbsp 그리고 다음 순례지 쿠단으로 향하였습니다.쿠단은 부처님께서 출가 12년 후, 성도 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아들을 정반왕이 마중나온 것을 곳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 있습니다. 탑위의 계단을 따라 석가모니불 정진을 하며 탑을 둘러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성도 후 3년 뒤에 쉬라바스티에 부처님께서 오셨다는ㅕ이야기를 들은 정반왕이 사신을 보내어 고향 방문을 청하였지만 보낸 사신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하여 함흥차사가 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 쿠단에서 나오며 스님께서는 입구에 줄지어 앉아있는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다음 생에는 나와 같이 인도불교 부흥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약속하자”며 공양물을 나눠주십니다. 성지마다 모이는 아이들에게 성지에 올린 공양물을 일일이 나눠주시며 이렇게 발원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음 생에는 함께 일할 사람이 이렇게 많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하셨습니다. nbspnbspnbsp 다음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랑그람을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사리를 8등분하여 각 나라로 보내져 세워진 탑 중 마야 부인의 고향인 꼴리족이 세웠다는 랑그람을 친견하였습니다. 지금은 탑의 모양이야 긴 세월에 무너졌지만, 진신사리탑 중에 헐리지 않은 유일한 곳이라고 합니다. 아쇼카 왕이 다른 곳은 사리탑을 헐고 사리를 꺼내 부처님의 발자취마다 사리를 넣은 탑을 세웠지만 이 사리탑은 용왕이 사리탑을 잘 지키겠다고 하여 헐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이곳 랑그람까지 한국 불자들이 단체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우리가 이렇게 랑그람을 친견한 공덕을 우리 모두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 오늘 일정의 마지막 방문지는 로히니 강변이었습니다. 역시 인도가 실감나는 하루, 이동시간이 지체되어 로히니 강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깜깜하여 후레쉬 불로 조심조심 찾아갔습니다. 로히니 강은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와 마야부인의 고향인 꼴리족의 데바다하 사이를 흐르는 강물인데, 어느해nbspnbsp농사의 기반이 되는 강물 때문에 두 부족은 전쟁일보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출신 부족과 외가 부족이 물 문제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아시고 중재를 직접 하셨다고 합니다. 귀중한 피가 이 강물을 채우고 흐르게 되지 않았음을 우리 순례단이 교훈을 삼아야 한다고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늦은 밤에 이 강변에 온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토행자는 부처님의 로히니 강변의 가르침에 따라 남한과 북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통일 한국이 되도록 돌아오는 8차 천일기도 기간중에 평화와 통일을 위한 통일 의병 1만 명 양성에 다 같이 힘을 모읍시다”고 당부하셨습니다.대성석가사의 마지막 공양 중 특히 청국장을 맛있게 먹고 대웅전에서 저녁 법문으로 오늘 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집은 보금자리이면서 속박과 굴레이다. 출가는 굴레만이 아니라 보금자리마저 불태우는 것이다. 부처님은 왕궁과 왕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한 위대한 유성출가를 하셨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셨습니다.nbspnbsp 그리고 어려운 환경과 힘든 여건에서도 전법과 법당을 운영해 가고 있는 해외와 전국의 법당 담당자 소개와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다들 힘들지만 지금 절망하고 좌절하면 고통의 씨앗으로 남겠지만 좋은 경험으로 삼고 정진하면 20년 뒤에 돌아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하시며 좋은 수행이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캐나다와 독일과 그리고 필리핀, 호주 등 해외 정토회 소개를 먼저 해주셨고, 그리고는 전라도와 강원도를 시작으로 중앙사무처 활동가까지 모두 소개하시고 다시 한 번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시면서 오늘 긴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nbspnbsp 내일은 네팔의 마지막 일정으로 새벽 3시에 탄센으로 출발하여 일출을 보고 다시 인도 국경을 통과하여 쉬라바스티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2014.01.15. 23,622 읽음 댓글 13개

2014.1.11 인도성지순례 아홉째날 - 춘다의 공양터, 쿠시나가르 열반당

오늘도 순례단은 일찍 일어나서 각자 개인짐과 공용짐을 챙겨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짐을 버스에 먼저 싣고 숙소에서 예불과 아침기도를 하였습니다.nbspnbsp 유수스님의 집전에 맞추어서 숙소 바닥에 깔판을 깔고 아니면 딱딱한 침대 위에서 108배를 하고 나니 찌뿌듯한 몸도 풀리고 마음도 한결 가볍게 순례지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오늘 첫 번째 갈 곳은 어제 늦게 도착하여 순례하지 못했던 ‘춘다의 공양터’입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열반 전 마지막으로 공양을 드신 곳입니다. 오늘 순례하는 곳은 ‘춘다의 공양터’ 처럼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가게 됩니다.nbspnbsp 춘다의 공양터 근처에 아침 7시에 도착하여 1호차가 공양물을 준비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앞에 서고 나머지 순례단이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순례기간 동안에는 차량별로 각 성지마다 공양물을 준비해서 정해진 순번에 따라서 올리고 있습니다.nbspnbsp 춘다의 공양터에 도착하여 가사를 수하고 자리를 정열한 후 스님께서는 “오늘 아침에 비가 와서 여기서 예불를 못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시원하게 날씨가 좋아서 천지신명께 감사드립니다”고 하시며 춘다의 공양에 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여기는 춘다가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께서 최후의 공양을 드신 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 선언을 하신 후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북서쪽으로 이동하시다가 칸타카 강을 건너 저희들이 지금 있는 파바마을에 이르셨습니다. 신분이 천민이었던 대장장이 아들 춘다는 자신의 망고나무 아래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예배를 드린 후 법을 청해 듣고 너무나 감동하여 ‘내일 아침 제가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하였고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수락을 하셨습니다.”nbspnbsp 아난존자는 걱정스런 얼굴로 “지금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하여 부자도 공양을 준비하기 어려운데 춘다는 가난하여 공양을 준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부처님께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걱정하지 말아라. 춘다는 공양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nbspnbsp 춘다는 기쁜 마음으로 공양을 준비한 후 이튿날 아침 부처님께 찾아와 “공양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때를 아소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nbspnbspnbsp 우리는 보통 ‘스님 식사 드세요’ 하는데 이건 명령입니다. ‘안 드시면 치울 겁니다’라는 식이지요. 스님의 말씀에 듣고 있던 순례단은 한바탕 웃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우리가 할 일은 다 되었으니 부처님께서 아무 때나 하시면 되옵니다’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nbspnbsp 춘다의 말을 듣고 부처님께서 춘다의 집으로 가니 갖가지 음식으로 공양 준비가 되었는데 그 중에 ‘스카라 맛다바’라는 음식이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음식을 받으신 후 이 음식은 대중에게는 주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후 이 음식은 그 누구도 소화할 수 없으니 땅에 묻어라 하시고 공양을 마치셨습니다. 공양을 마치신 후 법을 설하신 후 부처님은 약간 고통스러운 얼굴로 아난다에게 어서 떠나자 하시며 대중과 함께 북쪽으로 길을 떠나셨습니다.nbspnbsp 한참을 가신 후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아난다야, 몸이 좋지 않구나” 하시며 쉬었다 가자 하신 후 피가 섞인 설사를 하셨습니다. ‘스카라 맛다바’라는 음식을 드신 후 급성 식중독에 걸리셨습니다. 또다시 길을 가다 힘든 몸을 쉬시며 아난다에게 목이 몹시 마르구나 하셨지만 아난다는 ‘방금 수레 오백 대가 강을 지나가 물이 맑지 않습니다’라며 물을 뜨러 가지 않자 부처님께서 두 번 더 말씀을 하셨고 세 번 들은 아난다가 물을 뜨러 가니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난다는 여래의 위신력에 감탄하며 물을 떠왔습니다.nbspnbsp 여기서 부처님께서 “물을 다오” 할 때 “네에 알겠습니다” 하며 물을 떠다가 ‘물이 흐려서 안 되겠습니다’ 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자기 눈으로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을 25년간 시봉한 아난다도 자기 생각이 옳다 하면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도 수행을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입니다.nbspnbsp 물을 드시고 기운을 차리신 부처님은 카쿳타 강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신 후 자리를 깔고 누우신 후 아난다에게 춘다는 어찌하고 있는지 물으셨습니다.nbspnbsp 아난다는 “춘다는 자신이 올린 공양으로 부처님께서 병환을 얻어 괴로워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공양의 공덕이 전혀 없다고 수근거립니다”’라고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오라 하시고 아난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여래에게 올린 공양 중에 공덕이 가장 큰 것이 두 개가 있느니라. 여래가 깨닫기 전에 올린 공양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여래가 열반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이니라.”nbspnbsp 최고의 공양이라 정평이 나 있는 수자타의 공양에 비해 춘다의 공양은 대비가 되는데 이것은 한 사물을 놓고 부처님을 돌아가시게 한 공양이라 볼 수도 있고 다른 쪽에서 보면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공양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춘다의 공양을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올린 공덕이 큰 공양으로 보셔서 대중들 마음속에 있던 춘다를 향한 원망이 없어지고 춘다 또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nbspnbspnbsp 그래서 오늘 우리가 춘다의 공덕을 기려 후세 사람들이 세운 탑 앞에 있습니다. 춘다가 올린 스카라 맛다바는 독성이 있는 야생토란으로 추측할 수가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첫째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기쁜 마음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도 밤새도록 야생을 채취해서라도 공양을 준비한 춘다의 갸륵한 마음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nbspnbsp 둘째는 주면 주는 대로 받는 걸식의 원칙에 따라서 자신은 받으셨지만 그 해로움을 아시고 대중에게는 주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받은 후에는 드시지 않던지 아니면 신통력으로 치료를 하는 경우는 세상에 많지만 그 음식을 드시고 돌아가시면서 그 음식을 주신 이를 칭송한 사람은 어쩌면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몸뚱이를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음 씀씀이를 어떻게 쓰는지가 위대한 것입니다. 수자타의 공양이 수자타를 위대하게 했다면 춘다의 공양은 여래의 마음이, 그 위신력이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괴로워하는 춘다를 위로하였습니다.nbspnbsp 이것을 성경과 비교해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도 자신을 못 박은 자를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하신 것과 비교하면 부처님께서는 춘다가 잘못했으니 용서해준다가 아니라 춘다는 훌륭한 일을 했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두 성인이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같은 모습이지만 그 마음 씀씀이는 문화적 언어적 차이겠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nbspnbspnbsp 스님께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신 후 비가 와서 깔판을 깔지 못해서 조금은 불편하지만 춘다가 부처님께 올리셨던 정성을 생각하면서 공양예불을 올리도록 하자 하셨고 순례단은 정성스럽게 공양예불을 올렸습니다. 스님께서는 다른 성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남북한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셨습니다.순례단은 예불이 끝난 후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셨던 카쿳타 강으로 출발하였습니다. 8시쯤에 도착하여 강가에 내려가니 물이 참 맑았습니다. 순례단 몇몇이 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데 스님께서도 강가로 내려오셔서 먼저 손으로 물을 떠서 드신 후 마시면 감기가 다 낫는다 하시며 우리에게도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셔보라고 하니 순례자 한 분이 물을 받아 드셨습니다.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다음 순례지인 열반당으로 출발하였습니다.열반당에 도착하여 순례단은 향을 피워 두 손에 합장하여 들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열반당 주위를 돌며 참배한 후 열반당 왼편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스님께서 열반의 모습에 관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 “부처님께서는 낡은 수레가 삐거덕리며 움직이듯 병들고 늙은 몸을 이끌고, 그러나 대중 앞에 서서 사자처럼 당당하게 걸어 히라냐바티 강을 건너 여기 사라나무 숲으로 오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라쌍수 밑에서 북으로 머리를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사자처럼 발을 포개고 누우셨습니다. 얼굴방향은 태어날 때는 동쪽이셨지만 열반에 드실 때는 서쪽으로 두셨습니다.nbspnbsp 이렇게 누우신 후 아난다에게 내가 오늘 밤에 열반에 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꽃이 필 시기가 아닌데 사라나무가 꽃을 피우고 하늘에서 음악이 울려 퍼지며 꽃비가 내리자 이게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는 아난다에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이것은 하늘의 신들이 여래의 열반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것은 제일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일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신기한 기적적인 현상도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 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숲속에서 열반에 들어야만 짐승과 새를 비롯한 모든 중생 누구든지 본인만 원하면 여래를 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여래가 오늘 밤 열반에 든다는 말을 듣고 슬픔에 빠진 아난다에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슬퍼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롯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nbspnbsp 또한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열반에 든 후에는 4대 성지를 생각하고 사념처에 의지하고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 하시며, 이는 여래께 올리는 공양과 똑같은 공덕의 공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첫째는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배부르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아픈 이에게 약을 주어서 치료하는 것이고 셋째는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는 것이고 넷째 청정하게 수행하는 자를 외호하는 것이다.”nbspnbsp 이것을 현대화한 것이 JTS의 3대 이념이라고 스님께서는 설명을 해주시며 성경구절 중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것과도 유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nbspnbsp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여래가 열반에 들기 전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으라 하셨는데 아무 대답이 없고 아난존자가 ‘우리는 아무런 의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나는 29살에 출가하여 51년을 부지런히 근면히 수행정진 했다. 그러니 너희들도 게으르지 말고 수행정진 하라. 낙숫물이 바윗돌을 뚫듯이.’ 이렇게 최후의 말씀을 하시고 열반에 들었습니다.스님께서는 설명을 마치시고 순례단과 함께 공양예불을 올리신 후 발원을 하셨습니다.nbspnbsp 거룩하신 부처님이시여 이곳에 안온히 머무소서. 이제 세상에 남은 일들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저희를 깨우쳐주신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하실 일은 다 마치셨습니다. 이제 다시는 부처님께 이 일을 해달라 저 일을 해달라 하지 않고 세상에 모든 일들을 저희가 앞장 서 하겠습니다.’nbspnbspnbsp 이 부분을 말씀 하실때 순례단은 가슴 깊이 감동하며 마음에 새기었습니다.nbspnbsp 이렇게 감동된 마음으로 순례단은 열반당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담아 예불을 올린 후 밖으로 나왔습니다.nbspnbspnbsp 1,2호차는 스님과 함께 조별 사진촬영을 하고 약간의 자유시간을 가진 후 다음 순례지인 라마바르총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라마바르총은 부처님을 다비하신 곳입니다.라마바르총에 도착하여 스님의 설명을 듣고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하여 참배한 후 순례단은 어제 숙소에서 지어온 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비가 올듯하여 서둘러 점심을 먹고 네팔 국경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네팔국경으로 가는 길에 가끔씩 소나기가 내렸습니다.nbspnbsp 네팔 국경을 통과하여 오늘의 숙소인 대성석가사에 도착하니 저녁 8시 30분이었습니다. 순례단은 짐을 풀고 법당 참배 후 대성석가사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저녁 공양을 먹고 조별로 나누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탄생하신 룸비니를 걸어서 순례한 후 카필라바스투 등을 갈 계획입니다.

2014.01.15. 22,910 읽음 댓글 14개

2014.1.10. 인도성지순례 여덟째날 - 바이샬리 진신사리탑터, 원후봉밀터, 케사리아 탑

라즈기르에서 묵은 호텔은 정원도 룸도 인도 성지순례 코스가 아닌 듯 쾌적했습니다. 안개가 많아 이동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여 4시에 출발해야 하는 일정이라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짧은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한 사람도 늦잠을 자지 않고 제시간에 출발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스님의 첫인사로 시작한 오늘 하루도 일정이 빼곡합니다.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둠을 뚫고 차량은 행렬을 지어 출발하였고, 육지의 강의 다리로는 가장 길다는 마하트마간디브릿지를 건너 5시간여를 달려서 8대 성지 중 하나인 바이샬리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 차 안에서 천일결사 기도를 올린 후 성지순례 기간 중 공부 삼을 명심문과 발원문을 합창했습니다. 명심문 온갖 분별심은 다 내 업식이 지어내는 상일 뿐입니다.발원문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오늘 첫 순례지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탑이었습니다.스님께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이곳에 대한 안내를 해주셨습니다.부처님 열반 후 유골인 사리를 8개 나라의 민족이 나눠 가지고 가서 기념탑을 쌓았는데, 8개 중에 현재 3개의 탑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찾은 탑이 바이샬리의 릿챠비족이 세운 탑이고, 진신사리는 파트나박물관에 보관중이라고 합니다. 인도에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처럼 관리가 철저하지 않아서 현재는 다 허물어져 없어지고 밑둥치의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친견한다는 것은 몇 생애에 걸쳐 복된 일임을 알고 가사를 수하고 향을 피워들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탑을 세 바퀴 돌았습니다. 아직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예불공양을 올리고 스님께서는, “이 진신사리탑을 친견한 인연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오니, 배고픈 자는 배불리 먹고, 병든 이는 속히 쾌차하며,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배움이 성취되는 등 고통받는 일체중생의 갖가지 소원이 원만 성취되어지고, 분단된 지 68년,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적대관계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하루 속히 통일한국이 이루어지기를 발원합니다. 그리고 북한 주민이 굶주림과 추위와 병듦에서 벗어나고 갖가지 인권침해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발원니다.”고 하셨습니다. 바이샬리는 부처님 이후에 점점 쇠퇴하다가 아쇼크 왕 때 멸망하고 2300년 동안 나라의 중심지가 된 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유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부처님과의 큰 인연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당시 인도에 300여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절대왕국인 마가다국이나 코살라국과는 달리 국정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공화정이었던 바이샬리를 부처님은 특별히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의 길을 떠날 때 “여래가 이 아름다운 도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라고 하시며 돌아보셨고, “도리천의 사람들을 보고 싶다면 바이샬리의 릿챠비족을 보라”고 할 만큼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던 도시였으며, 지금도 인도에서 국회가 새로이 개원할 때는 이곳 카라우나 포칼 연못의 물을 가져가 성수로 사용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 바이샬리는 여성 최초의 출가지로서 여성 해방운동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당시의 풍속으로는 삼종지도로서 어려서는 아버지의 딸로, 결혼하면 남편의 아내로,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어머니로 남자에 예속되어 존재할 뿐, 여성 스스로는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을 못 받던 시절이었습니다.nbspnbspnbsp “부처님 당시 여자가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누구의 소유가 아닌 스스로 자기 이름으로 불린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천민인 우파리도 출가를 허용하는 계급타파를 주장하신 부처님이시지만, 여성의 출가는 승낙하기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출가한 사람이 많았던 석가족에는 아버지나, 남편이나 아들이 없는 여성이 500명이나 되었고, 불법에 귀의한 500명의 여성을 대표하여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마하파제파티가 세 번이나 출가를 청하셨지만 승낙을 안 하시고 부처님은 이곳 바이샬리로 오셨다고 합니다.”이에 500명 여성들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맨발로 부처님 뒤를 따라 가필라성에서 바이샬리까지 왔다고 합니다. 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본 아난다 존자의 요청을 받은 부처님께서 8가지 조건을 걸어 어렵게 승낙을 하여 첫 500비구니가 탄생했다고 하시며, 초기 비구니 스님들의 결의에 찬 수행담도 들려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여성들이 출가를 하였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된 이들도 있었으나, 현재 인도 등 남방불교에서는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여성의 출가가 인정되는 우리나라 불교와 스님이 안 계실 때는 재가신도도 당당하게 목탁을 치며 예불할 수 있는 정토회와 함께인 것이 새삼 뿌듯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유행차 바이샬리로 오셨을 때 유녀 암라팔리의 망고원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에 암라팔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리고 기쁨에 넘쳐서 다음날 공양을 청하였고 수락을 받고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찾아오던 바이샬리 왕족인 릿챠비족 사람들의 수레와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공양 초대권을 10만금과 바꾸자는 릿챠비족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 풍요로운 바이샬리 마을 전부를 준다 해도 양도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불법에 귀의한 이들의 특별한 자부심이 넘치는 자세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곧이어 부처님을 친견한 릿챠비족이 부처님을 공양에 초대했으나, 부처님께서는 암라팔리와의 선약이 있다고 왕족의 초대를 거절하셨다고 합니다.부처님은 세상에 대한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에 왕족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는데, 만약 스님이 부처님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이튿날 공양 후 설법을 듣고 감동한 암라팔리는 자신의 망고원을 승단에 기증하게 되었고, 후대에 그곳에 큰 절이 지어졌다고 합니다.nbspnbspnbsp 이처럼 바이샬리는 세계여성운동의 성지로 가꾸어도 될 만큼 진보적 도시였으며, 스님께서는 바리샬리에 비구니의 첫 출가를 기념하는 비구니 사찰과 여학교를 세우고, 여성의 행복과 권리주장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의 간절한 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해봅니다.nbspnbsp 부처님께서는 큰 가뭄이 들어서 걸식이 힘들어진 500 제자들에게 인연따라 흩어지라고 하고, 부처님은 아난존자와 함께 벨루바나에서 우안거를 지냈는데, 연로하신 부처님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아난존자는 안거 중에 돌아가실까 염려하였으나, 한편으론 부처님이 열반 이후의 어떤 말씀도 안 하셔서 안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유수행으로 우안거를 넘기고 제자들을 불러서 유명한 ‘법등명 자등명’을 설하셨다고 합니다. 계정혜 삼학을 잘 닦으라는 설법도 바이샬리에서 하셨습니다.그리고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다음은 8대 성지 중 아쇼카 석주가 가장 잘 보존된 원후봉밀터로 갔습니다. 이곳에서도 예불공양과 경전독송, 명상시간을 가졌습니다. 500개나 되는 수행자들의 발우 중 원숭이가 부처님의 발우를 알아보고 꿀을 공양 올린 곳이고, 수천마리의 원숭이들이 땅을 파헤쳐 연못을 만들어서 부처님을 목욕하게 한 것을 기념한 곳이라고 합니다. 햇볕에 눈이 부셔서 다들 찡그리는 것을 보시고 스님께서는, 재단 차릴 곳이 이 위치뿐이어서 대중들이 햇볕을 보게 되었다며 눈이 부셔도 이해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햇볕의 방향까지도 늘 대중을 먼저 배려하심에 감동하고 죄송했습니다.스님께서는 식사 때면 조별로 순회하시며 공양을 하십니다.11시가 넘어서야 먹게 된 오늘 아침공양은 광주전라지역 식구들과 함께 하셨는데, 일일이 한 사람씩 이름과 소임을 물어주셨고, 지지부진한 광주불사도 챙겨주셨습니다.8차년도부터 새로 시작하는 광주전라지부를 잘 꾸려보라는 격려 말씀도 주셨습니다.점심을 먹고 난 식곤증 덕분인지, 8일째 빡세게 돌아가는 여독 때문인지, 다음 순례지로 떠나는 차안에선 거의 대부분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중 스님의 송수신기 안내에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nbspnbsp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이란 케사리아탑 앞에 모이니 320명 인원이 적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을 떠나보내기가 아쉬웠던 바이샬리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와 전송하고서도, 떠나지 못함을 보시고, 강을 건너신 부처님께서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에 띄웠고 떠내려 온 발우를 기념하는 탑을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스님께서 처음 성지순례를 다니시던 때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탑이고, 156년 전 쯤 인도에 오셨을 때, 케사리아탑이 발견된 신문을 보았지만, 이처럼 큰 탑인 줄도 모르고 들르지 않았었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한쪽은 발굴이 덜 되어 나무가 자라는 산의 형태인 탑에는 군데군데 반짝이는 금박이 되어 있었습니다. 불교신자 중 금박지를 붙이는 것은 태국문화이고, 흰 천을 걸어두는 것은 티벳문화, 꽃이나 향을 올리는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 버스에서 일행이 내리면 금새 장사진을 치는 아이들의 구걸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동네 아이들이 다 모이는 듯합니다. 줄을 세우고 참배 때 올린 공양물을 나눠주면 풍경이 그들에게는 축제처럼 즐거운 일이지만 보는 내 마음은 측은하고 씁쓸합니다.nbspnbsp 케사리아탑 참배를 마치고 쿠시나가라로 향하는 길은 울퉁불퉁 덜컹거리고, 먼지는 뿌옇고 차안은 한여름처럼 더웠습니다. 인도에서라도 에어컨을 틀지 말자는 원칙이라 더위를 견뎌내야 했는데 그나마 간타키강을 건너는 다리 앞에서 공사를 하느라고 도로가 좁아지면서 차들이 막혀서 30분여를 다리 위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오늘은 길도 내내 막혔습니다.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인도에서 예정대로 안 된 처음 사건이니 그나마 감사한 일이라고들 했습니다. 덕생법사님께서는 어느 해인가 상카시아에서 아그라로 가는 길이 막혀서, 버스에서 1박을 하고 새벽에 호텔에 도착했던 적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천천히 지나가는 반대 차선의 차안에서는 대형버스가 줄줄이 늘어선 우리 일행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손을 흔듭니다. 우리는 또 그러는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줍니다.nbspnbspnbsp 어제 저녁 숙소에서 빨았다가 안 마른 수건이며 양말들을 커튼줄에 줄줄이 널어놓고, 쿨쿨 잠을 자고, 차가 멈추면 들에 나가 큰일도 작은 일도 척척 해결하는 풍경들이 어느새 인도인이 다돼 가는 듯 재미있습니다.nbspnbspnbsp 간타키 강가에서는 누군가의 화장이 진행되고 있었고, 차를 타고 지나는 인도의 들녘은 평화롭고 풍요로웠습니다.스프링쿨러가 뿌리듯 촉촉한 이슬이 내리는 이곳은 건기라지만 작물들에겐 충분한 강수량일 듯합니다. 야자수 바나나 나무가 조화롭게 자라는 들녘에 밀, 유채, 땅콩, 감자, 브로컬리가 잘 자라고 사탕수수밭은 이제 막 수확철인 듯 보입니다.nbspnbspnbsp 어릴 적 고향집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동네를 지날 때면, 아이들은 좋아라 손을 흔들어대고, 갖가지 모양으로 소똥을 말리는 풍경이 구경할 만 합니다.nbspnbsp 시간이 늦어져서 오늘 예정인 춘다의 공양터는 가지를 못하고, 제주 관음사가 본사인 대한사에 들러 우리 입맛에 꼭 맞는 정성스런 저녁공양을 먹고 호텔에 여정을 풀었습니다.nbspnbsp 내일은 오늘 보지 못한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인 춘다의 공양터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셨다는 카쿳타 강과 열반당, 라마르총을 참배하고 룸비니를 찾아 네팔 국경을 넘습니다.nbspnbsp 감기가 심한 듯한 스님께서 푹 주무시고 내일은 쾌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4.01.14. 22,180 읽음 댓글 12개

2014.1.9. 인도성지순례 일곱째날 - 라즈기르 영축산, 빔비사라왕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 대학

성지순례 7일째입니다. 3일 동안 편히 풀어놓았던 짐을 싸서 다시 길을 떠납니다. 지난밤 수자타아카데미에 보시할 물건과 반찬들을 내어 놓았기에 가방의 무게는 좀 가벼워졌습니다. 순례단은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서 아직도 깜깜한 새벽 5시, 부처님의 성도 전과 성도 이후 이야기와 유적이 넘쳐나는 라즈기르로 출발합니다. 버스 안에서 새벽예불을 하고 스님께서 오늘 일정을 안내합니다. 영축산과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대학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오늘 일정은 정말 기대됩니다.라즈기르의 옛말은 라자그라하인데 왕사성을 말합니다. 라자는 왕이라는 뜻이고, 그라하는 집을 뜻합니다. 그러니 라자그라하는 왕의 집이 있는 성이란 뜻입니다. 라자그라하는 부처님 당시 북인도의 강대국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스님께서 안내해주셨습니다.nbspnbsp 또한 왕사성은 부처님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라 합니다. 카필라 성을 떠나 출가하신 부처님은 이곳 왕사성에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하셨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과 첫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성도 후는 1천 명의 비구와 함께 돌아와 이곳에 자주 머물면서 교화 설법하여 빔비사라 왕은 물론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 마하가섭 등 유능한 제자의 귀의를 받고 최초의 불교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받은 곳이기도 합니다.nbspnbsp스님은 영축산을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부처님께서 자주 머무시며 법을 설하시고 교화하신 왕사성에 대한 안내를 쉽고 재미있게 해주셨습니다.nbspnbsp 영축산 입구에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빔비사라 로드’ 표지판이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갔던 길이 있고, 신하들도 뒤로 하고 왕 혼자 부처님을 만나러 걸어갔던 길을 만납니다. 강대국 최고 통치자인 빔비사라 왕의 고뇌의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부처님을 만나서 내어 놓았던 고민만큼 가벼워졌을 것이라 상상해봅니다.“우루벨라 가섭을 통해 부처님을 알게 된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의 법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왕자일 때 평생 소원이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내가 왕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이 내 나라에 출현하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그 부처님을 만나 뵙는 것이고, 넷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모든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부디 저의 왕궁에 오셔서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수용하지 아니하십니다. 부처님은 걸식만을 했고 궁성 출입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은 왕사성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왕궁 밖에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대나무 숲을 부처님께 기증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후에 가게 될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입니다.”nbspnbsp 당시 강대국 왕의 공양도 물리치는 부처님과 그런 부처님의 법문을 청해 듣기 위해 궁 밖에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수 있는 숲을 기증하는 빔비사라 왕의 아름다운 모습을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새겨야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곳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려고 던진 돌 파편에 부처님이 발을 다쳐 제자 아난에게 업혀 내려와 지바카가 응급치료를 했던 곳이기도 하고, 선생경, 일명 lt육방예경gt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lt육방예경gt은 법륜스님의 인기 저서 lt스님의 주례사gt의 근거가 된 경전이기도 합니다. 스님과 함께 영축산으로 오릅니다. 스님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하시면서도 앞장서 가시면서 영축산에서의 부처님 교화모습을 설명하시는데,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예경심이 듣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하였습니다. 스님의 성지에 대한 설명도 감동이지만 부처님을 대하는 스님의 모습 그 자체가 더 큰 법문으로 다가옵니다.nbsp “영축산은 부처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한 곳으로 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이 바로 이곳이며, 또 염화시중의 미소와 관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반야심경, 열반경, 법화경 등 많은 경전이 설해진 곳입니다.” 이외에도 교훈이 되는 설화의 많은 부분이 영축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영축산 정상 바로 아래 아난다굴, 사리불굴, 목련굴, 마하가섭굴을 참배하고 부처님이 법을 설하시던 영축산 정상을 향해 공양단을 차립니다.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께 예불공양을 올리고 당시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하신 경전을 독송합니다. 이곳에서 설하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데 마음이 색다릅니다. “부처님이 영축산에 계실 때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왕이 어떻게 하면 밧지족을 침공하여 승리할 수 있는지를 신하를 통해 부처님께 여쭙게 되는데, 이때 부처님은 묻는 말에 대한 답변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지 7가지 사례를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모두 밧지족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나라가 번영하는 길, 평화의 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국론이 분열된 우리 나라의 상황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봅니다.”nbsp영축산에서 내려와 빔비사라 왕 감옥터로 갔습니다. 부처님의 주치의였던 지바카의 집과 망고 숲을 지나쳐 가면서 스님께서는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게 해주셨습니다.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아자타삿투 왕자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이곳 감옥에 가두고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 그리고 왕비인 위제희 부인, 그의 아들 아자타삿투는 경전에 여러 번 등장하는 인물인 만큼 이들의 이야기를 현대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해보면 좀 더 지혜로운 길을 가지 않을까 여겨집니다.아자타삿투왕은 감옥에 갇힌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못 먹게 엄명을 내리자 왕비 위제희 부인은 위장하여 온몸에 꿀반죽을 한 밀가루를 몸에 붙이고 감옥으로 가서 왕에게 음식을 공급하게 됩니다. 이전 왕의 아내이자 현재 왕의 어머니인 위제희 부인은 이 상황이 괴로워 영축산에 있는 아난다 존자에게 법을 청하였고 이에 부처님께서 직접 오셔서 관무량수경을 설하여 그를 깨치게 합니다.nbspnbsp 빔비사라 왕 감옥 터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오늘 아침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지어준 밥에 온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죽림정사로 이동하였습니다.죽림정사에서도 예불공양을 올리고 경전동송을 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그리곤 스님께서 죽림정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부처님께서는 성도 후 1천 명 제자와 함께 당시 가장 강대국인 왕사성으로 오셨습니다. 이때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을 위해 궁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의 대나무 숲을 부처님께 기증하게 됩니다. 인도의 대나무 숲은 수행자들이 수행하기엔 아주 접합한 곳으로 이것이 최초 사원 죽림정사입니다.”죽림정사는 대나무가 많았으나 몇 년 전 대나무 꽃이 피어 모두 죽고 새로이 대나무 숲을 만들고 있었습니다.부처님과 제자들이 죽림정사에 머무실 때, 당시 부처님의 5비구 중 가장 늦게 깨친 앗사지의 탁발 나온 모습을 보고 사리불이 감동하여 친구 목건련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곳입니다. 또한 마하가섭 존자도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있을 때 귀의하게 되는 등 불교교단의 기반이 형성되어지는 본격적인 교화활동이 펼쳐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이 마지막 열반을 떠나시기 전 영축산을 내려와 이곳 죽림정사에서 ‘승단이 망하지 않은 7가지 법’을 설하신 곳이기도 합니다.죽림정사를 나와 바로 칠엽굴로 갔습니다. 칠엽굴 가는 길엔 유난히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아이들, 천으로 둘둘 말아 가짜 아이를 만들어 구걸하는 아이, 장애인 노인이 길거리에 가득하였습니다.칠엽굴은 부처님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현재 전해오는 부처님 말씀을 결집한 역사적인 곳입니다.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 가르침을 멋대로 해석할 것을 우려한 가섭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한 장로 500명을 동굴에 모아놓고 부처님 말씀을 기록, 정리한 곳입니다. 부처님을 가까이서 모신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라고 송을 하면 500아라한이 하나하나 부처님 말씀의 진위여부를 확인해서 첨삭해서 정리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긴장감과 감사함이 가득합니다. 이 결집으로 인해 부처님의 법이 면면히 흘러 나에게까지 전해왔으니 말입니다. 이것을 제1결집이라고 합니다. 제2결집은 바이샬리에서, 제3결집은 파탈리푸트라에서 있었습니다. 캄캄한 굴 안을 들어갔다 나와서 칠엽굴 앞에 앉아 스님으로부터 경전 결집에 대한 안내를 듣는데 우리가 500아라한이라도 된 듯 착각을 하게 합니다. 칠엽굴에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스님은 산 아래 라즈기르의 정경을 설명해 주시며 성지순례 초창기의 갖은 에피소드들을 들려주셨습니다.어느새 오늘의 마지막 여정지 나란다대학입니다. 오기 전에 사진과 책에서 이미 봐왔는데도 한눈에 전체가 조망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규모에 우선 놀라게 됩니다. 나란다 대학은 부처님 열반 후 불교가 번창하면서 세워진 사상 최초 최대의 대학으로 7세기경 현장스님이 방문했을 때는 교사가 천오백 명, 학생 1만 명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하는데, 이슬람의 침공으로 모두 불태워지고 남은 흔적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현재 발굴된 길이가 1km인데 전체 길이가 10km라고 하니 정말 세계 최대의 대학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거 같습니다. 이렇게 오늘은 라즈기르의 영축산과 빔비사라 왕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대학 등, 부처님의 왕성한 교화활동 만큼이나 빡빡했던 하루였습니다.nbspnbsp내일은 여성이 최초로 출가한 곳,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 공양을 했다는 바이샬리와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로 갑니다. 인도 성지의 인터넷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바로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2014.01.13. 23,687 읽음 댓글 12개

2014.1.8 인도성지순례 여섯째날 -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0주년, 전정각산, 둥게스와리 마을방문

새벽 5시, 성지순례단들의 성스러운 새벽예불이 수자타아카데미 교정의 어둠을 불 밝히듯 열어젖힙니다. 예불 후 6시 10분, 전정각산을 오르기 위해 지바카병원 정문에 모였습니다.동쪽 전정각산 능선 너머엔 벌써 붉은 기운이 퍼져 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는 오늘이 개교 20주년이라 곳곳이 분주함으로 들썩입니다.순례단은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으로 한걸음 한걸음 따라갑니다. 산 입구에서 스님은 돌이 많으니 “조심해서 천천히 따라 오세요”라고 일러 주십니다.nbspnbsp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네모난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스님께서 내려가시며 “이 산에 유일하게 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사람도 동물도 함께 먹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는 웅덩이 위쪽 돌무덤 옆 작은 웅덩이를 가리키며 아마 이곳이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시며 드시던 물인 것 같다며 이곳을 ‘부처님 샘터’라 불린다 하셨습니다. 이곳에는 가시나무가 많은데 옷에 걸리면 가시가 꼭 움켜쥐고 있어 억지로 떼어내면 옷이 망가지니 살살 달래줘야 한다며 세심하게 일러 주십니다. 바위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쉬었다 가자고 하셨습니다.nbsp바람 한 점 없어 춥지 않아 아마 부처님께서 이러한 곳에서 명상을 하셨을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스님의 안내에 따라 모두 명상을 했습니다. 마치 3천년 전 부처님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스님은 명상하는 순례자들을 보시며 “마치 새들이 앉아 있는 것 같네요” 하십니다.정상에 도착하자, 이곳이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고행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설명하시는데 어떤 것이 탑인지 참 궁금했습니다. 흔히 탑은 흙으로 봉긋하게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는 건 돌무더기뿐입니다. 전정각산에는 6기의 탑이 세워졌는데 정부에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도굴꾼에 의해 탑이 커다랗게 구멍이 파여 점점 훼손되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nbspnbsp 하산 후 바로 아침밥을 먹고 설성봉거사님 부도탑 앞에서 12주기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설성봉거사는, 1998년 생업을 그만두시고 북한동포 돕기를 시작으로 정토회에 입문하여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해왔으며, 특히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의 정토법당 불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인도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2002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기술학교를 운영하다 괴한에게 총을 맞아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그때 설거사님과 함께 활동한 이화승님이 ‘뭐든지 부탁만 하면 염소 눈처럼 작은 눈으로 빙긋이 웃으며 들어주던 거사님’을 떠올리며 추도문을 낭독할 때 참가자 모두 그분의 뜻이 꼭 이루어져 모두가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거사님의 희생이 지금은 이곳 수자타아카데미에 빛으로 돌아오셔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된 것 같습니다.nbspnbsp 수자타 20주년 개교 기념행사를 하기 위해 아침부터 학교는 분주합니다. 스님께서는 행사 전,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주신 위말라야스님과 차담을 나누고, 학교에 오시는 내외빈들을 일일이 맞으셨습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수자타아카데미는 이 마을을 이끌어 갈 건장한 청년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초대 손님도 3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우선 인도 중앙정부 국회의원인 MP 하리만지, 보드가야 대탑 주지스님과 사무국장, 설성봉거사님 사건 때 많은 도움을 주신 위말라야 스님, 방글라데시 템플 주지스님 외 14분, 미얀마 템플 주지스님, INEB 사무국장, 지역 국회의원, 지역 공무원, 석가족의 초기 활동가와 수자타아카데미 초창기 교사, 성지순례단 320명, 수자타아카데미 부지를 기증하신 동네 주민, 그리고 수자타아카데미 학생 1000여 명, 가까운 동네 주민들이 아침 9시부터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습니다.20주년 기념행사는 수자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굵직한 행사를 거침없이, 분주하지만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며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 뭉클해지고 한 사람의 원이 이렇게 이루어져 가니 커다란 감동이 물 밀리듯 밀려옵니다.고등학생은 초등학생의 선배 겸 선생님이 되어, 중학생은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 배움과 가르침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당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떠들면 언니 오빠들이 조용하라 하니 금방 시끌시끌했던 행사장은 바로 조용해지곤 합니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바쁩니다.수자타 교가와 환영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밝고 힘찹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빠지지 않는 색동 한복 입고 추는 꼭두각시 춤, 인도 전통무용과 코끼리 춤, 태권도 공연의 실력은 대단했습니다. 인도 태권도 대회에 출전해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인기와 감동을 한꺼번에 받은 건 수자타아카데미 20년 퍼포먼스였습니다. 구걸로 하루를 살아가던nbspnbsp아이들이 lt우리도 이제 공부하고 있어요gt라고 하기까지 20년 역사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스님이 이곳 마을에 쏟아부었던 사랑과 노고, 부처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 확인하니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주루룩 흐릅니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아이들의 공연 또한 감동이었습니다. 저마다 숨어있는 이이들의 끼를 이끌어 내어 아이들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굶주린 이들은 먹어야 하고 아픈 아이들은 치료를 해야 하고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은 배워야 한다고 구호처럼 외치던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nbspnbspnbsp 행사 막바지에 스님께서 무대에 오르시자 큰 박수가 쏟아집니다. 스님은 그동안 수자타아카데미가 있기까지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오늘 초대된 분들을 한분 한분 무대로 부르시어 소개하시고 일일이 감사의 선물을 드렸습니다.nbspnbsp “수자타아카데미 20주년이 되기까지 이렇게 많은 이들의 후원과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처음 초등하교 7명으로 시작한 학교가 이제 마을마다 15개의 유치원이 들어섰고 1천 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곳은 학교를 안 가는 아이가 없습니다. 20년 전에는 학교는 가면 안 되는 곳으로 알았던 것이 이제는 안 가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아이가 학교에 다닙니다. 이 아이들이 저의 보살입니다.수많은 사람들이 결핵으로 죽어 갔으나 이제 결핵으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배고프거나 약이 없어 죽거나 산모가 죽는 일 또한 없습니다.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곳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간 해온 것처럼 계속 해갈 것입니다. 이 아이들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이 아이가 잘 자라 가정의 희망이 되고 지역의 희망이 되고 인디아의 희망이 되도록 우리 모두 아이들에게 협력해주시기를 바랍니다.”nbspnbsp 개교 1주년 때 운동장 한쪽에 심은 보리수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수자타아카데미의 넓은 그늘이 되어주듯, 20년 전 한 수행자의 원은 이렇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 행사가 끝나자 순례객도 학교에서 준비한 인도식 점심을 먹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자타에게서 공양받은 유미죽과 뿌리, 달, 야채샐러드와 오렌지를 맛있게 먹고 오후에는 각 차량별로 수자타아카데미 인근 둥게스와리 마을을 둘러보러 가기로 하였습니다. 인도 JTS에서 마을개발 사업을 하는 곳으로, 아자드비가, 스리람푸르, 안투비가, 두르가푸르, 소라즈비가, 만코시힐, 아마르푸르, 자그디스푸르 마을입니다. 스님께서는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두루가푸르 마을로 갔습니다. 20년 전, 처음 스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둥게스와리에는 학교를 졸업한 단 2명이 있었는데 그중 한분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스님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집을 둘러보았습니다. 집이 비교적 깨끗하였는데,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10년 정도 선생님으로 봉사를 하고, 지금은 정부학교 교사로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전에 사용했던 큰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초기에는 턱이 없어서 오염된 물이 바로 들어와서 콜레라와 전염병의 온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물에 턱에 만들어 오염된 물이 우물 안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우물을 개선하다가 차츰 핸드펌프를 설치하여 지금은 우물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핸드펌프로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JTS는 15개 마을에 68개의 핸드펌프를 설치, 지원하고 있습니다.nbspnbsp 흙먼지가 펄펄 나는 길을 걸어가니 처음 이곳에서 학교를 지을 땅을 기증한 분이 스님께 오셔서 인사를 하셔서 스님께서 저희들에게 이 분을 소개시켜주셨습니다. 처음으로 땅을 기증하신 분이라고 하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저희들이 기쁘게 박수를 쳤습니다. 이어서 유일하게 이곳 출신이면서 학교 선생님을 하신 분이 나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하자 스님께서는 이 집에서 처음 머무르셨다고 하시면서 집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때의 집은 23년 전이라서 허물어지고 없고 그곳에 다시 새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스님께서 머물렀던 흙집을 사진으로 찍어서 흙담 벽에 스님 모습을 그려놓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래된 사진이었으나 수자타 아카데미와 인도 JTS의 역사를 보는 듯하여 감격스러웠습니다. 스님께서 깜깜한 방에 염소를 키우고 한쪽 옆에 볏집을 깔아서 주무시던 일화를 설명해주셨는데 사실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창기 수자타 아카데미의 건물 1층 한 칸도 다 짓지 않은 상태에서 개원한 사진 등 오래된 사진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보여주었는데 생생한 역사를 보는 듯하였습니다.nbspnbsp 이어서 다음 집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비교적 잘 사는 듯하여 가보니 문만 같은 집이고 그 옆에 허물어가는 흙집의 한칸에 염소 한 마리 송아지 두 마리와 함께 할머니가 기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할머니가 살고 있는 방이 스님께서 처음 머물렀던 집의 모습과 똑같다고 하였습니다. 2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기는 이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깜깜한 방에 송아지와 염소와 같이 사니 겨울에는 온기가 있어서 아마도 더 따뜻할 것 같다고 설명하십니다. 이곳에서 스님께서 선물을 드리고 또 다음집으로 이동을 해보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한 할머니가 남편도 자식도 다 먼저 보내고 손녀딸과 그 손녀딸의 자녀들과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두르가푸르 마을의 극빈자 중의 극빈자인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5명인데 본인의 나이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의 나이를 다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엄마가 정말 조그마하여 엄마의 나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는데 제일 큰 남자아이가 수자타아카데미 5학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 딸아이에게 오빠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몇 년차로 태어났는지 등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시고 이름도 물어보고 하면서 아무래도 10살 같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10살이라고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어린동생들은 유치원에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자아이도 수자타 아카데미의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정부학교로 가도록 하였는데 이곳에서 차별이 심하여서 학교를 중단하였다고 스님께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불가촉천민마을 아이들이 정부학교에 가도 차별이 심하니 중도에서 학교를 포기하고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는 이곳 여자아이 2명에게 다시 학교에 오라고 스님께서 당부를 하고, 또 이곳 실무자들에게 정부학교에 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을 조사하여 다시 학교에 받아들이는 것을 고민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방문하니 집에 소똥말린 것들을 보관하고 천정의 한켠에도 소똥을 모아두었는데 소똥이 연료로 사용되니 재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벽이나 나무에 소똥을 잘 펴서 발라서 말리고 있는 장면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nbspnbsp그리고 다음집으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시는데 할머니는 먼 친척집의 처마에 벽을 세워서 처마와 벽사이가 이 할머니가 기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이 그대로 다 통하는데도 옷도 이불도 변변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왜 구걸을 하지 않느냐고 하니 너무 늙어서 구걸도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담요를 가져다주겠다고 하니 따라 나오시면서 쌀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쌀과 담요를 주시겠다고 하면서 실무자에게 쌀과 담요를 할머님께 전달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나오자 할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참 많이 먹먹해집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에서 보내는 적은 돈의 후원금들이 이분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담요와 쌀과 식수로 돌아가는 것을 현장체험 하듯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을을 천천히 돌아보니 나오니 아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손을 잡습니다. 그렇게 2시간 30여분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인 학교로 돌아왔습니다.nbspnbsp 학교에 돌아와서도 스님은 오늘 행사로 멀리 상카시아에서 찾아오신 석가족 청년 활동가들과 차담을 나누셨습니다.저녁에는 전체 순례단이 모두 모여 마을을 다녀온 소감을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nbspnbsp 내일은 라즈기르의 영축산과 칠엽굴, 나란다대학을 가는 일정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2014.01.11. 22,975 읽음 댓글 12개

2014.1.7 인도성지순례 다섯째날 - 보드가야 대탑, 우루벨라가섭 교화터, 수자타 공양터

5일째 성지순례 날입니다. 오늘 일정은 어느 성지보다도 기대가 됩니다. 부처님의 수행과 성도, 교화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는 일정이기 때문입니다.새벽 5시, 새벽예불을 마치자마자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밤새 만들어준 주먹밥을 받고 길을 떠납니다. 안개가 자욱한 칠흙 같은 어둠 속에 서로가 빛이 되어가며 부처님이 가셨을 그 길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오늘은 버스로 가는 게 아니라 도보 순례입니다. 부처님께서 네이란자라 강변에서 쓰러져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수자타마을, 우루벨라 가섭과 500명을 교화한 곳, 그리고 부처님의 성도지 보드가야 대탑입니다.건기로 인해 바짝 마른 네이란자라 강 모랫길을 앞서 가는 도반의 발자국과 작은 후레쉬 불에 의지하며 45년을 길에서만 교화하시며 법을 전하신 부처님 당시를 상상해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니련선하 강 모랫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긴 순례단을 보니 1250명의 제자와 함께하는 부처님의 교화행렬과 지금 이 길을 가는 이들이 함께 오버랩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임이 자랑스러워집니다.둥게스와리 마을의 골목골목을 지나고 논밭 길을 지나는 여정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날이 희뿌옇게 밝아올 무렵 인도 JTS에서 건립 중인 명상센터 예정지에 도착하여 주먹밥으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언젠가는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이곳 명상센터에서 인도 불교의 부흥을 위해 일하리라 발원해봅니다.“부처님께서는 네이란자라 강 건너 전정각산의 고행림에서 6년간 수행을 하시다가 중도를 발견하고 산에서 내려오시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이전의 생활이 욕망의 충족으로 얻어지는 쾌락을 맛보며 지내왔다면 출가 후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그것 또한 욕망의 반응으로 살아오심을 알고 이 마저도 버리고 욕망을 다만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중도를 발견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게 됩니다. 네이란자라 강을 건너 목욕을 하다가 쓰러지셨는데 마침 소젖을 짜서 돌아오던 촌장의 딸 수자타가 이를 발견하고 우유에 쌀을 넣은 죽을 공양 올린 자리가 바로 이곳입니다. 그 자리를 기념하여 아쇼카 왕이 탑을 쌓았던 곳입니다. 그 죽을 드신 부처님은 그래서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쌓은 탑터 주위에 수자타 템플이 세워졌지만 현재는 힌두교 절로 남아 있습니다.”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성도 직전 올린 수자타의 공양이 왜 불교 최고의 공양인지를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수자타의 공양이 중요한 것은 부처님을 위대하게 한 게 아니라 수자타를 위대하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인 줄 알고 공양을 올리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냥 길거리에 쓰러져가는 수행자를 정성스럽게 간호했는데 그 사람이 부처가 됐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천하고 작고 낮은 자가 부처가 됐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하는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통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수자타의 공양이며, 수자타의 공양이 칭송되는 이유입니다.우리가 둥게스와리의 학교를 ‘수자타아카데미’라고 이름붙인 이유도 어쩌면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수자타의 후예일 것이고, 많은 순례자나 부처님마저도 그들의 공양을 받은 분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공덕으로 우리들에게 불법이 전해졌고, 법을 받은 우리가 이곳에 와서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가 있으며, 수자타가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공양 올려서 살려서 붓다를 만들었듯이 우리도 버려진 아이들을 부처님을 공양하듯이 하자는 것입니다. 도와준다는 개념보다는 공양 올린다는 개념에서 수타타아카데미라 이름하였습니다.”네이란자나 강은 두 갈래로 나뉘어 흐르는데 왼쪽을 모하나 강, 오른쪽을 네이란자나 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우루벨라 마을은 이 두 강 사이에 있으며 우루벨라 가섭이 500명의 제자와 함께 수행하던 곳은 지금의 모하나 강변에 있습니다. 이들은 불을 피워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불을 숭배하는 집단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60명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모두 전도의 길을 떠나라’ 하고는 당신도 우루벨라로 가서 교화하겠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에 도착하여 부처님은 우루벨라 가섭에게 ‘하룻밤 재워달라’고 했으나 여기는 잘 장소가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어디든지 좋다’고 했어요. 여기서 어디든지 좋다고 한 것은 네 맘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남은 장소는 독룡이 있는 굴밖에 없다’면서 그곳으로 안내하며 내심 ‘오늘 젊은 수행자가 한 명 죽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죽은 줄 알았던 부처님이 멀쩡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우루벨라 가섭이 이 젊은 수행자가 보통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래도 자기의 신통보다는 못하다고 여기고 360가지의 신통으로 내기를 했다고 해요. 그만큼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당시 독룡이 살았다는 굴은 우루벨라 가섭이 이후 부처님 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코브라를 조각해 놓고 힌두교 사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부처님의 우루벨라 가섭의 교화를 보면서 지식이나 재주를 많이 가진 이는 그만큼 법을 만나기 쉽지 않으며, 바꾸어 말하면 전법이 쉽지 않다는 의미이니 온갖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부처님께서 이미 그 길을 일러주셨으니 그분이 가신 길만 따라가면 되니 이 또한 감사할 뿐입니다.논과 밭이 어우러진 둑길을 지나는 긴 행렬, 이른 새벽의 도보순례여서 몸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마을과 밀밭을 지나 부처님께 공양올린 수자타의 집터에 이르렀습니다. 수자타의 공덕을 기려 큰 탑이 세워져 있었습니다.드디어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 보드가야의 대탑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 일부는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을 준비하여 앞서 나가고 나머지 일행은 가사를 수하고 긴 행렬을 이루어 대탑에 이르렀습니다. 얼마 전 티벳 승려들의 참배시 대탑에서 폭발사고가 있어 검문이 좀 삼엄합니다. 우리는 대탑을 돌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고 탑의 4면을 빙 둘러 에워싸고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과 사시예불을 올렸습니다. 참배객이 많아 오래 머물 수 없어 명상원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스님으로부터 보드가야 성지에 대한 설명에 이어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설하신 경전을 다함께 합송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보드가야 하면 부처님께서 깨달은 곳으로만 알고 있지만 이곳은 부처님의 수행, 성도, 교화를 함께 하신 중요한 곳입니다. 특히 부처님의 전법 교화에 있어 중요한 곳입니다.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에서는 60명을 교화한 데 비해 이곳 우루벨라에서는 1천 명을 교화하셨습니다.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수행자 집단의 교화를 통해 당시 대국인 마가다국의 왕을 교화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가섭 3형제와 함께 왕사성으로 갔기 때문에 빔비사라 왕을 쉽게 교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그러고 보니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신 전정각산과 부처님께서 사르나트에서의 전법선언 후 대규모로 교화를 하신 우루벨라도 모두 보드가야를 중심으로 위치해 있습니다.순례 일행은 차량별로 나뉘어 법사님의 인솔아래 찬찬히 보드가야 대탑을nbsp 다시 참배하고 개인별로 기도명상을 하며 짧지만 성도지에서의 시간을 알차게 보냈습니다.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부처님 성지순례는 마을마다 다니면서 나이 드신 분들에게 불교 성지에 대한 전설이나 구술을 받아 성지순례지도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인도 성지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일본에서 정리한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불확실한 부분도 있고 해서, 그래서 앞으로 인도와 한국 청년 108명과 함께 한 달 정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그 일을 마음껏 해보고 싶어요. 인도가 산업화가 되면 전설이나 구술이 모두 없어지기 때문에 그 전에 해야 하는데 언제 가능할지 모르겠네요.”그러자 여기저기 청년 아닌 어른들도 함께 하고 싶다며 아우성입니다. 대중의 요청대로 우리 손으로 부처님 성지를 다시 쓰는 그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순례 일정이 진행될수록 스님의 성지에 대한 애정과 한 인간으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재조명, 그리고 그 법에 대한 귀의도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우리의 삶은 늘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열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부정해도 안 되고, 한계 속에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인간에게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여기서 부처님이 성도하심은 인간이 가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 희망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은 우주가 한 번 생기는 거보다 더 귀한 일이라고 했습니다.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하다는 데 희망이 있는 게 아니라 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붓다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우리는 이번 순례에서 이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나이, 직업, 남녀,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희망적인가. 비록 눈물을 흘리지만 이에 젖지 않고, 슬픔을 느끼지만 빠지지 않고, 화를 내고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만 이에 메이지 않고 일어서서 도전하고 나아갈 수 있는 거, 죽음이 다가올 때 호흡기를 끼고 몸부림 치기보다는 때가 되면 미소 띠고 죽을 수 있는 삶, 이런 삶을 가지면 좀더 복되지 않은가. 부처님 법을 만났으면 지위, 학벌, 남녀, 더 나아가 성격이나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은가.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루를 살더라도 자기 자신을 만끽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세상에 유용하게 쓰이고 생을 마칠 수 있으면 복되지 않은가.이것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피가 아닐까. 이보다 더 큰 선물을 우리가 이 세상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부다가야 대탑에서 붓다가 되는 것을, 단순히 능력적인 면에서 보지 말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이렇게 부처님께서 수행, 성도, 교화하신 보드가야 순례를 마치고 숙소인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하여 저녁에는 lt수자타아카데미의 오늘gt이라는 주제로 현재 활동상에 대한 현지 활동가의 프리젠테이션과 스님 강의가 있었습니다.내일은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0주년 행사가 있습니다. 행사 후에는 둥게스와리 지역의 마을 방문이 있습니다.

2014.01.10. 24,166 읽음 댓글 2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