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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 인도성지순례 여덟째날 - 바이샬리 진신사리탑터, 원후봉밀터, 케사리아 탑
라즈기르에서 묵은 호텔은 정원도 룸도 인도 성지순례 코스가 아닌 듯 쾌적했습니다. 안개가 많아 이동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여 4시에 출발해야 하는 일정이라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짧은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한 사람도 늦잠을 자지 않고 제시간에 출발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스님의 첫인사로 시작한 오늘 하루도 일정이 빼곡합니다.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둠을 뚫고 차량은 행렬을 지어 출발하였고, 육지의 강의 다리로는 가장 길다는 마하트마간디브릿지를 건너 5시간여를 달려서 8대 성지 중 하나인 바이샬리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 차 안에서 천일결사 기도를 올린 후 성지순례 기간 중 공부 삼을 명심문과 발원문을 합창했습니다. 명심문 온갖 분별심은 다 내 업식이 지어내는 상일 뿐입니다.발원문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오늘 첫 순례지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탑이었습니다.스님께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이곳에 대한 안내를 해주셨습니다.부처님 열반 후 유골인 사리를 8개 나라의 민족이 나눠 가지고 가서 기념탑을 쌓았는데, 8개 중에 현재 3개의 탑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찾은 탑이 바이샬리의 릿챠비족이 세운 탑이고, 진신사리는 파트나박물관에 보관중이라고 합니다. 인도에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처럼 관리가 철저하지 않아서 현재는 다 허물어져 없어지고 밑둥치의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친견한다는 것은 몇 생애에 걸쳐 복된 일임을 알고 가사를 수하고 향을 피워들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탑을 세 바퀴 돌았습니다. 아직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예불공양을 올리고 스님께서는, “이 진신사리탑을 친견한 인연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오니, 배고픈 자는 배불리 먹고, 병든 이는 속히 쾌차하며,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배움이 성취되는 등 고통받는 일체중생의 갖가지 소원이 원만 성취되어지고, 분단된 지 68년,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적대관계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하루 속히 통일한국이 이루어지기를 발원합니다. 그리고 북한 주민이 굶주림과 추위와 병듦에서 벗어나고 갖가지 인권침해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발원니다.”고 하셨습니다. 바이샬리는 부처님 이후에 점점 쇠퇴하다가 아쇼크 왕 때 멸망하고 2300년 동안 나라의 중심지가 된 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유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부처님과의 큰 인연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당시 인도에 300여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절대왕국인 마가다국이나 코살라국과는 달리 국정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공화정이었던 바이샬리를 부처님은 특별히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의 길을 떠날 때 “여래가 이 아름다운 도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라고 하시며 돌아보셨고, “도리천의 사람들을 보고 싶다면 바이샬리의 릿챠비족을 보라”고 할 만큼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던 도시였으며, 지금도 인도에서 국회가 새로이 개원할 때는 이곳 카라우나 포칼 연못의 물을 가져가 성수로 사용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 바이샬리는 여성 최초의 출가지로서 여성 해방운동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당시의 풍속으로는 삼종지도로서 어려서는 아버지의 딸로, 결혼하면 남편의 아내로,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어머니로 남자에 예속되어 존재할 뿐, 여성 스스로는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을 못 받던 시절이었습니다.nbspnbspnbsp “부처님 당시 여자가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누구의 소유가 아닌 스스로 자기 이름으로 불린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천민인 우파리도 출가를 허용하는 계급타파를 주장하신 부처님이시지만, 여성의 출가는 승낙하기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출가한 사람이 많았던 석가족에는 아버지나, 남편이나 아들이 없는 여성이 500명이나 되었고, 불법에 귀의한 500명의 여성을 대표하여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마하파제파티가 세 번이나 출가를 청하셨지만 승낙을 안 하시고 부처님은 이곳 바이샬리로 오셨다고 합니다.”이에 500명 여성들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맨발로 부처님 뒤를 따라 가필라성에서 바이샬리까지 왔다고 합니다. 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본 아난다 존자의 요청을 받은 부처님께서 8가지 조건을 걸어 어렵게 승낙을 하여 첫 500비구니가 탄생했다고 하시며, 초기 비구니 스님들의 결의에 찬 수행담도 들려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여성들이 출가를 하였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된 이들도 있었으나, 현재 인도 등 남방불교에서는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여성의 출가가 인정되는 우리나라 불교와 스님이 안 계실 때는 재가신도도 당당하게 목탁을 치며 예불할 수 있는 정토회와 함께인 것이 새삼 뿌듯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유행차 바이샬리로 오셨을 때 유녀 암라팔리의 망고원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에 암라팔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리고 기쁨에 넘쳐서 다음날 공양을 청하였고 수락을 받고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찾아오던 바이샬리 왕족인 릿챠비족 사람들의 수레와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공양 초대권을 10만금과 바꾸자는 릿챠비족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 풍요로운 바이샬리 마을 전부를 준다 해도 양도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불법에 귀의한 이들의 특별한 자부심이 넘치는 자세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곧이어 부처님을 친견한 릿챠비족이 부처님을 공양에 초대했으나, 부처님께서는 암라팔리와의 선약이 있다고 왕족의 초대를 거절하셨다고 합니다.부처님은 세상에 대한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에 왕족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는데, 만약 스님이 부처님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이튿날 공양 후 설법을 듣고 감동한 암라팔리는 자신의 망고원을 승단에 기증하게 되었고, 후대에 그곳에 큰 절이 지어졌다고 합니다.nbspnbspnbsp 이처럼 바이샬리는 세계여성운동의 성지로 가꾸어도 될 만큼 진보적 도시였으며, 스님께서는 바리샬리에 비구니의 첫 출가를 기념하는 비구니 사찰과 여학교를 세우고, 여성의 행복과 권리주장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의 간절한 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해봅니다.nbspnbsp 부처님께서는 큰 가뭄이 들어서 걸식이 힘들어진 500 제자들에게 인연따라 흩어지라고 하고, 부처님은 아난존자와 함께 벨루바나에서 우안거를 지냈는데, 연로하신 부처님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아난존자는 안거 중에 돌아가실까 염려하였으나, 한편으론 부처님이 열반 이후의 어떤 말씀도 안 하셔서 안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유수행으로 우안거를 넘기고 제자들을 불러서 유명한 ‘법등명 자등명’을 설하셨다고 합니다. 계정혜 삼학을 잘 닦으라는 설법도 바이샬리에서 하셨습니다.그리고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다음은 8대 성지 중 아쇼카 석주가 가장 잘 보존된 원후봉밀터로 갔습니다. 이곳에서도 예불공양과 경전독송, 명상시간을 가졌습니다. 500개나 되는 수행자들의 발우 중 원숭이가 부처님의 발우를 알아보고 꿀을 공양 올린 곳이고, 수천마리의 원숭이들이 땅을 파헤쳐 연못을 만들어서 부처님을 목욕하게 한 것을 기념한 곳이라고 합니다. 햇볕에 눈이 부셔서 다들 찡그리는 것을 보시고 스님께서는, 재단 차릴 곳이 이 위치뿐이어서 대중들이 햇볕을 보게 되었다며 눈이 부셔도 이해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햇볕의 방향까지도 늘 대중을 먼저 배려하심에 감동하고 죄송했습니다.스님께서는 식사 때면 조별로 순회하시며 공양을 하십니다.11시가 넘어서야 먹게 된 오늘 아침공양은 광주전라지역 식구들과 함께 하셨는데, 일일이 한 사람씩 이름과 소임을 물어주셨고, 지지부진한 광주불사도 챙겨주셨습니다.8차년도부터 새로 시작하는 광주전라지부를 잘 꾸려보라는 격려 말씀도 주셨습니다.점심을 먹고 난 식곤증 덕분인지, 8일째 빡세게 돌아가는 여독 때문인지, 다음 순례지로 떠나는 차안에선 거의 대부분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중 스님의 송수신기 안내에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nbspnbsp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이란 케사리아탑 앞에 모이니 320명 인원이 적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을 떠나보내기가 아쉬웠던 바이샬리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와 전송하고서도, 떠나지 못함을 보시고, 강을 건너신 부처님께서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에 띄웠고 떠내려 온 발우를 기념하는 탑을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스님께서 처음 성지순례를 다니시던 때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탑이고, 156년 전 쯤 인도에 오셨을 때, 케사리아탑이 발견된 신문을 보았지만, 이처럼 큰 탑인 줄도 모르고 들르지 않았었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한쪽은 발굴이 덜 되어 나무가 자라는 산의 형태인 탑에는 군데군데 반짝이는 금박이 되어 있었습니다. 불교신자 중 금박지를 붙이는 것은 태국문화이고, 흰 천을 걸어두는 것은 티벳문화, 꽃이나 향을 올리는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 버스에서 일행이 내리면 금새 장사진을 치는 아이들의 구걸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동네 아이들이 다 모이는 듯합니다. 줄을 세우고 참배 때 올린 공양물을 나눠주면 풍경이 그들에게는 축제처럼 즐거운 일이지만 보는 내 마음은 측은하고 씁쓸합니다.nbspnbsp 케사리아탑 참배를 마치고 쿠시나가라로 향하는 길은 울퉁불퉁 덜컹거리고, 먼지는 뿌옇고 차안은 한여름처럼 더웠습니다. 인도에서라도 에어컨을 틀지 말자는 원칙이라 더위를 견뎌내야 했는데 그나마 간타키강을 건너는 다리 앞에서 공사를 하느라고 도로가 좁아지면서 차들이 막혀서 30분여를 다리 위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오늘은 길도 내내 막혔습니다.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인도에서 예정대로 안 된 처음 사건이니 그나마 감사한 일이라고들 했습니다. 덕생법사님께서는 어느 해인가 상카시아에서 아그라로 가는 길이 막혀서, 버스에서 1박을 하고 새벽에 호텔에 도착했던 적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천천히 지나가는 반대 차선의 차안에서는 대형버스가 줄줄이 늘어선 우리 일행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손을 흔듭니다. 우리는 또 그러는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줍니다.nbspnbspnbsp 어제 저녁 숙소에서 빨았다가 안 마른 수건이며 양말들을 커튼줄에 줄줄이 널어놓고, 쿨쿨 잠을 자고, 차가 멈추면 들에 나가 큰일도 작은 일도 척척 해결하는 풍경들이 어느새 인도인이 다돼 가는 듯 재미있습니다.nbspnbspnbsp 간타키 강가에서는 누군가의 화장이 진행되고 있었고, 차를 타고 지나는 인도의 들녘은 평화롭고 풍요로웠습니다.스프링쿨러가 뿌리듯 촉촉한 이슬이 내리는 이곳은 건기라지만 작물들에겐 충분한 강수량일 듯합니다. 야자수 바나나 나무가 조화롭게 자라는 들녘에 밀, 유채, 땅콩, 감자, 브로컬리가 잘 자라고 사탕수수밭은 이제 막 수확철인 듯 보입니다.nbspnbspnbsp 어릴 적 고향집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동네를 지날 때면, 아이들은 좋아라 손을 흔들어대고, 갖가지 모양으로 소똥을 말리는 풍경이 구경할 만 합니다.nbspnbsp 시간이 늦어져서 오늘 예정인 춘다의 공양터는 가지를 못하고, 제주 관음사가 본사인 대한사에 들러 우리 입맛에 꼭 맞는 정성스런 저녁공양을 먹고 호텔에 여정을 풀었습니다.nbspnbsp 내일은 오늘 보지 못한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인 춘다의 공양터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셨다는 카쿳타 강과 열반당, 라마르총을 참배하고 룸비니를 찾아 네팔 국경을 넘습니다.nbspnbsp 감기가 심한 듯한 스님께서 푹 주무시고 내일은 쾌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4.1.9. 인도성지순례 일곱째날 - 라즈기르 영축산, 빔비사라왕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 대학
성지순례 7일째입니다. 3일 동안 편히 풀어놓았던 짐을 싸서 다시 길을 떠납니다. 지난밤 수자타아카데미에 보시할 물건과 반찬들을 내어 놓았기에 가방의 무게는 좀 가벼워졌습니다. 순례단은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서 아직도 깜깜한 새벽 5시, 부처님의 성도 전과 성도 이후 이야기와 유적이 넘쳐나는 라즈기르로 출발합니다. 버스 안에서 새벽예불을 하고 스님께서 오늘 일정을 안내합니다. 영축산과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대학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오늘 일정은 정말 기대됩니다.라즈기르의 옛말은 라자그라하인데 왕사성을 말합니다. 라자는 왕이라는 뜻이고, 그라하는 집을 뜻합니다. 그러니 라자그라하는 왕의 집이 있는 성이란 뜻입니다. 라자그라하는 부처님 당시 북인도의 강대국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스님께서 안내해주셨습니다.nbspnbsp 또한 왕사성은 부처님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라 합니다. 카필라 성을 떠나 출가하신 부처님은 이곳 왕사성에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하셨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과 첫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성도 후는 1천 명의 비구와 함께 돌아와 이곳에 자주 머물면서 교화 설법하여 빔비사라 왕은 물론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 마하가섭 등 유능한 제자의 귀의를 받고 최초의 불교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받은 곳이기도 합니다.nbspnbsp스님은 영축산을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부처님께서 자주 머무시며 법을 설하시고 교화하신 왕사성에 대한 안내를 쉽고 재미있게 해주셨습니다.nbspnbsp 영축산 입구에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빔비사라 로드’ 표지판이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갔던 길이 있고, 신하들도 뒤로 하고 왕 혼자 부처님을 만나러 걸어갔던 길을 만납니다. 강대국 최고 통치자인 빔비사라 왕의 고뇌의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부처님을 만나서 내어 놓았던 고민만큼 가벼워졌을 것이라 상상해봅니다.“우루벨라 가섭을 통해 부처님을 알게 된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의 법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왕자일 때 평생 소원이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내가 왕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이 내 나라에 출현하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그 부처님을 만나 뵙는 것이고, 넷째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모든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부디 저의 왕궁에 오셔서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수용하지 아니하십니다. 부처님은 걸식만을 했고 궁성 출입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은 왕사성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왕궁 밖에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대나무 숲을 부처님께 기증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후에 가게 될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입니다.”nbspnbsp 당시 강대국 왕의 공양도 물리치는 부처님과 그런 부처님의 법문을 청해 듣기 위해 궁 밖에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수 있는 숲을 기증하는 빔비사라 왕의 아름다운 모습을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새겨야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곳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려고 던진 돌 파편에 부처님이 발을 다쳐 제자 아난에게 업혀 내려와 지바카가 응급치료를 했던 곳이기도 하고, 선생경, 일명 lt육방예경gt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lt육방예경gt은 법륜스님의 인기 저서 lt스님의 주례사gt의 근거가 된 경전이기도 합니다. 스님과 함께 영축산으로 오릅니다. 스님은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하시면서도 앞장서 가시면서 영축산에서의 부처님 교화모습을 설명하시는데,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예경심이 듣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하였습니다. 스님의 성지에 대한 설명도 감동이지만 부처님을 대하는 스님의 모습 그 자체가 더 큰 법문으로 다가옵니다.nbsp “영축산은 부처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한 곳으로 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이 바로 이곳이며, 또 염화시중의 미소와 관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반야심경, 열반경, 법화경 등 많은 경전이 설해진 곳입니다.” 이외에도 교훈이 되는 설화의 많은 부분이 영축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영축산 정상 바로 아래 아난다굴, 사리불굴, 목련굴, 마하가섭굴을 참배하고 부처님이 법을 설하시던 영축산 정상을 향해 공양단을 차립니다.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께 예불공양을 올리고 당시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하신 경전을 독송합니다. 이곳에서 설하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데 마음이 색다릅니다. “부처님이 영축산에 계실 때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왕이 어떻게 하면 밧지족을 침공하여 승리할 수 있는지를 신하를 통해 부처님께 여쭙게 되는데, 이때 부처님은 묻는 말에 대한 답변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지 7가지 사례를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모두 밧지족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나라가 번영하는 길, 평화의 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국론이 분열된 우리 나라의 상황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봅니다.”nbsp영축산에서 내려와 빔비사라 왕 감옥터로 갔습니다. 부처님의 주치의였던 지바카의 집과 망고 숲을 지나쳐 가면서 스님께서는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게 해주셨습니다.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아자타삿투 왕자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이곳 감옥에 가두고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처님과 빔비사라 왕, 그리고 왕비인 위제희 부인, 그의 아들 아자타삿투는 경전에 여러 번 등장하는 인물인 만큼 이들의 이야기를 현대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해보면 좀 더 지혜로운 길을 가지 않을까 여겨집니다.아자타삿투왕은 감옥에 갇힌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못 먹게 엄명을 내리자 왕비 위제희 부인은 위장하여 온몸에 꿀반죽을 한 밀가루를 몸에 붙이고 감옥으로 가서 왕에게 음식을 공급하게 됩니다. 이전 왕의 아내이자 현재 왕의 어머니인 위제희 부인은 이 상황이 괴로워 영축산에 있는 아난다 존자에게 법을 청하였고 이에 부처님께서 직접 오셔서 관무량수경을 설하여 그를 깨치게 합니다.nbspnbsp 빔비사라 왕 감옥 터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오늘 아침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지어준 밥에 온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죽림정사로 이동하였습니다.죽림정사에서도 예불공양을 올리고 경전동송을 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그리곤 스님께서 죽림정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부처님께서는 성도 후 1천 명 제자와 함께 당시 가장 강대국인 왕사성으로 오셨습니다. 이때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을 위해 궁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의 대나무 숲을 부처님께 기증하게 됩니다. 인도의 대나무 숲은 수행자들이 수행하기엔 아주 접합한 곳으로 이것이 최초 사원 죽림정사입니다.”죽림정사는 대나무가 많았으나 몇 년 전 대나무 꽃이 피어 모두 죽고 새로이 대나무 숲을 만들고 있었습니다.부처님과 제자들이 죽림정사에 머무실 때, 당시 부처님의 5비구 중 가장 늦게 깨친 앗사지의 탁발 나온 모습을 보고 사리불이 감동하여 친구 목건련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곳입니다. 또한 마하가섭 존자도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있을 때 귀의하게 되는 등 불교교단의 기반이 형성되어지는 본격적인 교화활동이 펼쳐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이 마지막 열반을 떠나시기 전 영축산을 내려와 이곳 죽림정사에서 ‘승단이 망하지 않은 7가지 법’을 설하신 곳이기도 합니다.죽림정사를 나와 바로 칠엽굴로 갔습니다. 칠엽굴 가는 길엔 유난히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아이들, 천으로 둘둘 말아 가짜 아이를 만들어 구걸하는 아이, 장애인 노인이 길거리에 가득하였습니다.칠엽굴은 부처님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현재 전해오는 부처님 말씀을 결집한 역사적인 곳입니다.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 가르침을 멋대로 해석할 것을 우려한 가섭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한 장로 500명을 동굴에 모아놓고 부처님 말씀을 기록, 정리한 곳입니다. 부처님을 가까이서 모신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라고 송을 하면 500아라한이 하나하나 부처님 말씀의 진위여부를 확인해서 첨삭해서 정리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긴장감과 감사함이 가득합니다. 이 결집으로 인해 부처님의 법이 면면히 흘러 나에게까지 전해왔으니 말입니다. 이것을 제1결집이라고 합니다. 제2결집은 바이샬리에서, 제3결집은 파탈리푸트라에서 있었습니다. 캄캄한 굴 안을 들어갔다 나와서 칠엽굴 앞에 앉아 스님으로부터 경전 결집에 대한 안내를 듣는데 우리가 500아라한이라도 된 듯 착각을 하게 합니다. 칠엽굴에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스님은 산 아래 라즈기르의 정경을 설명해 주시며 성지순례 초창기의 갖은 에피소드들을 들려주셨습니다.어느새 오늘의 마지막 여정지 나란다대학입니다. 오기 전에 사진과 책에서 이미 봐왔는데도 한눈에 전체가 조망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규모에 우선 놀라게 됩니다. 나란다 대학은 부처님 열반 후 불교가 번창하면서 세워진 사상 최초 최대의 대학으로 7세기경 현장스님이 방문했을 때는 교사가 천오백 명, 학생 1만 명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하는데, 이슬람의 침공으로 모두 불태워지고 남은 흔적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현재 발굴된 길이가 1km인데 전체 길이가 10km라고 하니 정말 세계 최대의 대학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거 같습니다. 이렇게 오늘은 라즈기르의 영축산과 빔비사라 왕 감옥터, 죽림정사, 칠엽굴, 나란다대학 등, 부처님의 왕성한 교화활동 만큼이나 빡빡했던 하루였습니다.nbspnbsp내일은 여성이 최초로 출가한 곳,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 공양을 했다는 바이샬리와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로 갑니다. 인도 성지의 인터넷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바로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2014.1.8 인도성지순례 여섯째날 -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0주년, 전정각산, 둥게스와리 마을방문
새벽 5시, 성지순례단들의 성스러운 새벽예불이 수자타아카데미 교정의 어둠을 불 밝히듯 열어젖힙니다. 예불 후 6시 10분, 전정각산을 오르기 위해 지바카병원 정문에 모였습니다.동쪽 전정각산 능선 너머엔 벌써 붉은 기운이 퍼져 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는 오늘이 개교 20주년이라 곳곳이 분주함으로 들썩입니다.순례단은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으로 한걸음 한걸음 따라갑니다. 산 입구에서 스님은 돌이 많으니 “조심해서 천천히 따라 오세요”라고 일러 주십니다.nbspnbsp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네모난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스님께서 내려가시며 “이 산에 유일하게 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사람도 동물도 함께 먹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는 웅덩이 위쪽 돌무덤 옆 작은 웅덩이를 가리키며 아마 이곳이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시며 드시던 물인 것 같다며 이곳을 ‘부처님 샘터’라 불린다 하셨습니다. 이곳에는 가시나무가 많은데 옷에 걸리면 가시가 꼭 움켜쥐고 있어 억지로 떼어내면 옷이 망가지니 살살 달래줘야 한다며 세심하게 일러 주십니다. 바위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쉬었다 가자고 하셨습니다.nbsp바람 한 점 없어 춥지 않아 아마 부처님께서 이러한 곳에서 명상을 하셨을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스님의 안내에 따라 모두 명상을 했습니다. 마치 3천년 전 부처님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스님은 명상하는 순례자들을 보시며 “마치 새들이 앉아 있는 것 같네요” 하십니다.정상에 도착하자, 이곳이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고행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설명하시는데 어떤 것이 탑인지 참 궁금했습니다. 흔히 탑은 흙으로 봉긋하게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는 건 돌무더기뿐입니다. 전정각산에는 6기의 탑이 세워졌는데 정부에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도굴꾼에 의해 탑이 커다랗게 구멍이 파여 점점 훼손되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nbspnbsp 하산 후 바로 아침밥을 먹고 설성봉거사님 부도탑 앞에서 12주기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설성봉거사는, 1998년 생업을 그만두시고 북한동포 돕기를 시작으로 정토회에 입문하여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해왔으며, 특히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의 정토법당 불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인도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2002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기술학교를 운영하다 괴한에게 총을 맞아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그때 설거사님과 함께 활동한 이화승님이 ‘뭐든지 부탁만 하면 염소 눈처럼 작은 눈으로 빙긋이 웃으며 들어주던 거사님’을 떠올리며 추도문을 낭독할 때 참가자 모두 그분의 뜻이 꼭 이루어져 모두가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거사님의 희생이 지금은 이곳 수자타아카데미에 빛으로 돌아오셔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된 것 같습니다.nbspnbsp 수자타 20주년 개교 기념행사를 하기 위해 아침부터 학교는 분주합니다. 스님께서는 행사 전,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주신 위말라야스님과 차담을 나누고, 학교에 오시는 내외빈들을 일일이 맞으셨습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수자타아카데미는 이 마을을 이끌어 갈 건장한 청년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초대 손님도 3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우선 인도 중앙정부 국회의원인 MP 하리만지, 보드가야 대탑 주지스님과 사무국장, 설성봉거사님 사건 때 많은 도움을 주신 위말라야 스님, 방글라데시 템플 주지스님 외 14분, 미얀마 템플 주지스님, INEB 사무국장, 지역 국회의원, 지역 공무원, 석가족의 초기 활동가와 수자타아카데미 초창기 교사, 성지순례단 320명, 수자타아카데미 부지를 기증하신 동네 주민, 그리고 수자타아카데미 학생 1000여 명, 가까운 동네 주민들이 아침 9시부터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습니다.20주년 기념행사는 수자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굵직한 행사를 거침없이, 분주하지만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며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 뭉클해지고 한 사람의 원이 이렇게 이루어져 가니 커다란 감동이 물 밀리듯 밀려옵니다.고등학생은 초등학생의 선배 겸 선생님이 되어, 중학생은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 배움과 가르침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강당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떠들면 언니 오빠들이 조용하라 하니 금방 시끌시끌했던 행사장은 바로 조용해지곤 합니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바쁩니다.수자타 교가와 환영가를 우렁차게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밝고 힘찹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빠지지 않는 색동 한복 입고 추는 꼭두각시 춤, 인도 전통무용과 코끼리 춤, 태권도 공연의 실력은 대단했습니다. 인도 태권도 대회에 출전해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인기와 감동을 한꺼번에 받은 건 수자타아카데미 20년 퍼포먼스였습니다. 구걸로 하루를 살아가던nbspnbsp아이들이 lt우리도 이제 공부하고 있어요gt라고 하기까지 20년 역사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스님이 이곳 마을에 쏟아부었던 사랑과 노고, 부처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 확인하니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주루룩 흐릅니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아이들의 공연 또한 감동이었습니다. 저마다 숨어있는 이이들의 끼를 이끌어 내어 아이들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굶주린 이들은 먹어야 하고 아픈 아이들은 치료를 해야 하고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은 배워야 한다고 구호처럼 외치던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nbspnbspnbsp 행사 막바지에 스님께서 무대에 오르시자 큰 박수가 쏟아집니다. 스님은 그동안 수자타아카데미가 있기까지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오늘 초대된 분들을 한분 한분 무대로 부르시어 소개하시고 일일이 감사의 선물을 드렸습니다.nbspnbsp “수자타아카데미 20주년이 되기까지 이렇게 많은 이들의 후원과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처음 초등하교 7명으로 시작한 학교가 이제 마을마다 15개의 유치원이 들어섰고 1천 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곳은 학교를 안 가는 아이가 없습니다. 20년 전에는 학교는 가면 안 되는 곳으로 알았던 것이 이제는 안 가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아이가 학교에 다닙니다. 이 아이들이 저의 보살입니다.수많은 사람들이 결핵으로 죽어 갔으나 이제 결핵으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배고프거나 약이 없어 죽거나 산모가 죽는 일 또한 없습니다.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곳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간 해온 것처럼 계속 해갈 것입니다. 이 아이들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이 아이가 잘 자라 가정의 희망이 되고 지역의 희망이 되고 인디아의 희망이 되도록 우리 모두 아이들에게 협력해주시기를 바랍니다.”nbspnbsp 개교 1주년 때 운동장 한쪽에 심은 보리수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수자타아카데미의 넓은 그늘이 되어주듯, 20년 전 한 수행자의 원은 이렇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 행사가 끝나자 순례객도 학교에서 준비한 인도식 점심을 먹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자타에게서 공양받은 유미죽과 뿌리, 달, 야채샐러드와 오렌지를 맛있게 먹고 오후에는 각 차량별로 수자타아카데미 인근 둥게스와리 마을을 둘러보러 가기로 하였습니다. 인도 JTS에서 마을개발 사업을 하는 곳으로, 아자드비가, 스리람푸르, 안투비가, 두르가푸르, 소라즈비가, 만코시힐, 아마르푸르, 자그디스푸르 마을입니다. 스님께서는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두루가푸르 마을로 갔습니다. 20년 전, 처음 스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둥게스와리에는 학교를 졸업한 단 2명이 있었는데 그중 한분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스님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집을 둘러보았습니다. 집이 비교적 깨끗하였는데,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10년 정도 선생님으로 봉사를 하고, 지금은 정부학교 교사로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전에 사용했던 큰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초기에는 턱이 없어서 오염된 물이 바로 들어와서 콜레라와 전염병의 온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물에 턱에 만들어 오염된 물이 우물 안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우물을 개선하다가 차츰 핸드펌프를 설치하여 지금은 우물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핸드펌프로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JTS는 15개 마을에 68개의 핸드펌프를 설치, 지원하고 있습니다.nbspnbsp 흙먼지가 펄펄 나는 길을 걸어가니 처음 이곳에서 학교를 지을 땅을 기증한 분이 스님께 오셔서 인사를 하셔서 스님께서 저희들에게 이 분을 소개시켜주셨습니다. 처음으로 땅을 기증하신 분이라고 하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저희들이 기쁘게 박수를 쳤습니다. 이어서 유일하게 이곳 출신이면서 학교 선생님을 하신 분이 나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하자 스님께서는 이 집에서 처음 머무르셨다고 하시면서 집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때의 집은 23년 전이라서 허물어지고 없고 그곳에 다시 새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스님께서 머물렀던 흙집을 사진으로 찍어서 흙담 벽에 스님 모습을 그려놓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래된 사진이었으나 수자타 아카데미와 인도 JTS의 역사를 보는 듯하여 감격스러웠습니다. 스님께서 깜깜한 방에 염소를 키우고 한쪽 옆에 볏집을 깔아서 주무시던 일화를 설명해주셨는데 사실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창기 수자타 아카데미의 건물 1층 한 칸도 다 짓지 않은 상태에서 개원한 사진 등 오래된 사진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보여주었는데 생생한 역사를 보는 듯하였습니다.nbspnbsp 이어서 다음 집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 비교적 잘 사는 듯하여 가보니 문만 같은 집이고 그 옆에 허물어가는 흙집의 한칸에 염소 한 마리 송아지 두 마리와 함께 할머니가 기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할머니가 살고 있는 방이 스님께서 처음 머물렀던 집의 모습과 똑같다고 하였습니다. 2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기는 이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깜깜한 방에 송아지와 염소와 같이 사니 겨울에는 온기가 있어서 아마도 더 따뜻할 것 같다고 설명하십니다. 이곳에서 스님께서 선물을 드리고 또 다음집으로 이동을 해보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한 할머니가 남편도 자식도 다 먼저 보내고 손녀딸과 그 손녀딸의 자녀들과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두르가푸르 마을의 극빈자 중의 극빈자인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5명인데 본인의 나이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의 나이를 다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엄마가 정말 조그마하여 엄마의 나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는데 제일 큰 남자아이가 수자타아카데미 5학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 딸아이에게 오빠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몇 년차로 태어났는지 등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시고 이름도 물어보고 하면서 아무래도 10살 같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10살이라고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어린동생들은 유치원에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자아이도 수자타 아카데미의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정부학교로 가도록 하였는데 이곳에서 차별이 심하여서 학교를 중단하였다고 스님께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불가촉천민마을 아이들이 정부학교에 가도 차별이 심하니 중도에서 학교를 포기하고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는 이곳 여자아이 2명에게 다시 학교에 오라고 스님께서 당부를 하고, 또 이곳 실무자들에게 정부학교에 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을 조사하여 다시 학교에 받아들이는 것을 고민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방문하니 집에 소똥말린 것들을 보관하고 천정의 한켠에도 소똥을 모아두었는데 소똥이 연료로 사용되니 재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벽이나 나무에 소똥을 잘 펴서 발라서 말리고 있는 장면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nbspnbsp그리고 다음집으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시는데 할머니는 먼 친척집의 처마에 벽을 세워서 처마와 벽사이가 이 할머니가 기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이 그대로 다 통하는데도 옷도 이불도 변변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왜 구걸을 하지 않느냐고 하니 너무 늙어서 구걸도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담요를 가져다주겠다고 하니 따라 나오시면서 쌀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쌀과 담요를 주시겠다고 하면서 실무자에게 쌀과 담요를 할머님께 전달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나오자 할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참 많이 먹먹해집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에서 보내는 적은 돈의 후원금들이 이분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담요와 쌀과 식수로 돌아가는 것을 현장체험 하듯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을을 천천히 돌아보니 나오니 아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손을 잡습니다. 그렇게 2시간 30여분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인 학교로 돌아왔습니다.nbspnbsp 학교에 돌아와서도 스님은 오늘 행사로 멀리 상카시아에서 찾아오신 석가족 청년 활동가들과 차담을 나누셨습니다.저녁에는 전체 순례단이 모두 모여 마을을 다녀온 소감을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nbspnbsp 내일은 라즈기르의 영축산과 칠엽굴, 나란다대학을 가는 일정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2014.1.7 인도성지순례 다섯째날 - 보드가야 대탑, 우루벨라가섭 교화터, 수자타 공양터
5일째 성지순례 날입니다. 오늘 일정은 어느 성지보다도 기대가 됩니다. 부처님의 수행과 성도, 교화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는 일정이기 때문입니다.새벽 5시, 새벽예불을 마치자마자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밤새 만들어준 주먹밥을 받고 길을 떠납니다. 안개가 자욱한 칠흙 같은 어둠 속에 서로가 빛이 되어가며 부처님이 가셨을 그 길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오늘은 버스로 가는 게 아니라 도보 순례입니다. 부처님께서 네이란자라 강변에서 쓰러져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수자타마을, 우루벨라 가섭과 500명을 교화한 곳, 그리고 부처님의 성도지 보드가야 대탑입니다.건기로 인해 바짝 마른 네이란자라 강 모랫길을 앞서 가는 도반의 발자국과 작은 후레쉬 불에 의지하며 45년을 길에서만 교화하시며 법을 전하신 부처님 당시를 상상해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니련선하 강 모랫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긴 순례단을 보니 1250명의 제자와 함께하는 부처님의 교화행렬과 지금 이 길을 가는 이들이 함께 오버랩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임이 자랑스러워집니다.둥게스와리 마을의 골목골목을 지나고 논밭 길을 지나는 여정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날이 희뿌옇게 밝아올 무렵 인도 JTS에서 건립 중인 명상센터 예정지에 도착하여 주먹밥으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언젠가는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이곳 명상센터에서 인도 불교의 부흥을 위해 일하리라 발원해봅니다.“부처님께서는 네이란자라 강 건너 전정각산의 고행림에서 6년간 수행을 하시다가 중도를 발견하고 산에서 내려오시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이전의 생활이 욕망의 충족으로 얻어지는 쾌락을 맛보며 지내왔다면 출가 후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그것 또한 욕망의 반응으로 살아오심을 알고 이 마저도 버리고 욕망을 다만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중도를 발견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게 됩니다. 네이란자라 강을 건너 목욕을 하다가 쓰러지셨는데 마침 소젖을 짜서 돌아오던 촌장의 딸 수자타가 이를 발견하고 우유에 쌀을 넣은 죽을 공양 올린 자리가 바로 이곳입니다. 그 자리를 기념하여 아쇼카 왕이 탑을 쌓았던 곳입니다. 그 죽을 드신 부처님은 그래서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쌓은 탑터 주위에 수자타 템플이 세워졌지만 현재는 힌두교 절로 남아 있습니다.”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성도 직전 올린 수자타의 공양이 왜 불교 최고의 공양인지를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수자타의 공양이 중요한 것은 부처님을 위대하게 한 게 아니라 수자타를 위대하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인 줄 알고 공양을 올리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냥 길거리에 쓰러져가는 수행자를 정성스럽게 간호했는데 그 사람이 부처가 됐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천하고 작고 낮은 자가 부처가 됐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하는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통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수자타의 공양이며, 수자타의 공양이 칭송되는 이유입니다.우리가 둥게스와리의 학교를 ‘수자타아카데미’라고 이름붙인 이유도 어쩌면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수자타의 후예일 것이고, 많은 순례자나 부처님마저도 그들의 공양을 받은 분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공덕으로 우리들에게 불법이 전해졌고, 법을 받은 우리가 이곳에 와서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가 있으며, 수자타가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공양 올려서 살려서 붓다를 만들었듯이 우리도 버려진 아이들을 부처님을 공양하듯이 하자는 것입니다. 도와준다는 개념보다는 공양 올린다는 개념에서 수타타아카데미라 이름하였습니다.”네이란자나 강은 두 갈래로 나뉘어 흐르는데 왼쪽을 모하나 강, 오른쪽을 네이란자나 강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우루벨라 마을은 이 두 강 사이에 있으며 우루벨라 가섭이 500명의 제자와 함께 수행하던 곳은 지금의 모하나 강변에 있습니다. 이들은 불을 피워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불을 숭배하는 집단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60명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모두 전도의 길을 떠나라’ 하고는 당신도 우루벨라로 가서 교화하겠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에 도착하여 부처님은 우루벨라 가섭에게 ‘하룻밤 재워달라’고 했으나 여기는 잘 장소가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어디든지 좋다’고 했어요. 여기서 어디든지 좋다고 한 것은 네 맘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루벨라 가섭은 ‘남은 장소는 독룡이 있는 굴밖에 없다’면서 그곳으로 안내하며 내심 ‘오늘 젊은 수행자가 한 명 죽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죽은 줄 알았던 부처님이 멀쩡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우루벨라 가섭이 이 젊은 수행자가 보통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래도 자기의 신통보다는 못하다고 여기고 360가지의 신통으로 내기를 했다고 해요. 그만큼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당시 독룡이 살았다는 굴은 우루벨라 가섭이 이후 부처님 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코브라를 조각해 놓고 힌두교 사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부처님의 우루벨라 가섭의 교화를 보면서 지식이나 재주를 많이 가진 이는 그만큼 법을 만나기 쉽지 않으며, 바꾸어 말하면 전법이 쉽지 않다는 의미이니 온갖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부처님께서 이미 그 길을 일러주셨으니 그분이 가신 길만 따라가면 되니 이 또한 감사할 뿐입니다.논과 밭이 어우러진 둑길을 지나는 긴 행렬, 이른 새벽의 도보순례여서 몸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마을과 밀밭을 지나 부처님께 공양올린 수자타의 집터에 이르렀습니다. 수자타의 공덕을 기려 큰 탑이 세워져 있었습니다.드디어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 보드가야의 대탑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 일부는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을 준비하여 앞서 나가고 나머지 일행은 가사를 수하고 긴 행렬을 이루어 대탑에 이르렀습니다. 얼마 전 티벳 승려들의 참배시 대탑에서 폭발사고가 있어 검문이 좀 삼엄합니다. 우리는 대탑을 돌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고 탑의 4면을 빙 둘러 에워싸고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과 사시예불을 올렸습니다. 참배객이 많아 오래 머물 수 없어 명상원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스님으로부터 보드가야 성지에 대한 설명에 이어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설하신 경전을 다함께 합송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보드가야 하면 부처님께서 깨달은 곳으로만 알고 있지만 이곳은 부처님의 수행, 성도, 교화를 함께 하신 중요한 곳입니다. 특히 부처님의 전법 교화에 있어 중요한 곳입니다.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에서는 60명을 교화한 데 비해 이곳 우루벨라에서는 1천 명을 교화하셨습니다.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수행자 집단의 교화를 통해 당시 대국인 마가다국의 왕을 교화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가섭 3형제와 함께 왕사성으로 갔기 때문에 빔비사라 왕을 쉽게 교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그러고 보니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신 전정각산과 부처님께서 사르나트에서의 전법선언 후 대규모로 교화를 하신 우루벨라도 모두 보드가야를 중심으로 위치해 있습니다.순례 일행은 차량별로 나뉘어 법사님의 인솔아래 찬찬히 보드가야 대탑을nbsp 다시 참배하고 개인별로 기도명상을 하며 짧지만 성도지에서의 시간을 알차게 보냈습니다.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부처님 성지순례는 마을마다 다니면서 나이 드신 분들에게 불교 성지에 대한 전설이나 구술을 받아 성지순례지도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인도 성지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일본에서 정리한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불확실한 부분도 있고 해서, 그래서 앞으로 인도와 한국 청년 108명과 함께 한 달 정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그 일을 마음껏 해보고 싶어요. 인도가 산업화가 되면 전설이나 구술이 모두 없어지기 때문에 그 전에 해야 하는데 언제 가능할지 모르겠네요.”그러자 여기저기 청년 아닌 어른들도 함께 하고 싶다며 아우성입니다. 대중의 요청대로 우리 손으로 부처님 성지를 다시 쓰는 그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순례 일정이 진행될수록 스님의 성지에 대한 애정과 한 인간으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재조명, 그리고 그 법에 대한 귀의도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우리의 삶은 늘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열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부정해도 안 되고, 한계 속에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인간에게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여기서 부처님이 성도하심은 인간이 가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 희망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은 우주가 한 번 생기는 거보다 더 귀한 일이라고 했습니다.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하다는 데 희망이 있는 게 아니라 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붓다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우리는 이번 순례에서 이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나이, 직업, 남녀,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희망적인가. 비록 눈물을 흘리지만 이에 젖지 않고, 슬픔을 느끼지만 빠지지 않고, 화를 내고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만 이에 메이지 않고 일어서서 도전하고 나아갈 수 있는 거, 죽음이 다가올 때 호흡기를 끼고 몸부림 치기보다는 때가 되면 미소 띠고 죽을 수 있는 삶, 이런 삶을 가지면 좀더 복되지 않은가. 부처님 법을 만났으면 지위, 학벌, 남녀, 더 나아가 성격이나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은가.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루를 살더라도 자기 자신을 만끽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세상에 유용하게 쓰이고 생을 마칠 수 있으면 복되지 않은가.이것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피가 아닐까. 이보다 더 큰 선물을 우리가 이 세상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부다가야 대탑에서 붓다가 되는 것을, 단순히 능력적인 면에서 보지 말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이렇게 부처님께서 수행, 성도, 교화하신 보드가야 순례를 마치고 숙소인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하여 저녁에는 lt수자타아카데미의 오늘gt이라는 주제로 현재 활동상에 대한 현지 활동가의 프리젠테이션과 스님 강의가 있었습니다.내일은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0주년 행사가 있습니다. 행사 후에는 둥게스와리 지역의 마을 방문이 있습니다.
2014.1.6. 인도성지순례 넷째날 - 가야산, 수자타아카데미, 전정각산
새벽 5시,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바라나시 호텔을 나서 부처님의 성도지인 보드가야로 향합니다. 부처님은 성도 후 처음 법을 전하기 위해 이 길을 따라 보드가야에서 바라나시로 오셨고 다시 전법선언 후 사르나트에서 보드가야의 우루벨라로 가신 길입니다. 총 거리는 260km 정도. 사방이 평평해서 동서남북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 길을 맨발로 천천히 걸어서 가는데 보름 정도 걸리셨다고 합니다.순례단도 부처님이 가셨던 그 길을 따라 바라나시에서 보드가야로 56시간을 버스로 이동합니다. 인도는 지금 겨울이라고 하는데 창밖 풍경은 봄날 같습니다. 유채꽃도 보이고 농가에서는 손으로 볏짚을 털어 탈곡하는 모습이 2,600년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풍경 속에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잔잔한 감동이 느껴집니다.nbspnbsp 잠시 정차하여 들판에서 점심을 먹고 가야산에 거의 도착할 무렵 4호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습니다. 수리되기를 기다리자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듯하여 4호차 탑승자는 다른 차량으로 뿔뿔이 나뉘어 탔습니다. 열렬한 환호로 4호차 도반들을 맞이하여 10여 분을 더 달리니 가야산이 나옵니다.“이 산을 경전에서는 상두산이라고 합니다. 산이 코끼리 머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코끼리 상, 머리 두자 해서 상두산입니다. 이곳 현지에서는 가야산이라고 불리고요. 부처님은 출가 후 남쪽으로 내려오셔서 라즈기르, 지금의 라자그라하, 왕사성에 오셔서 두 분의 스승을 찾아서 수행하시고 그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이 아님을 아시고 스승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 때 같이 수행하던 다섯 명의 도반들이 부처님과 함께 떠났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왕사성 서문으로 나오셔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 이르러서 먼저 이 산에 올라 주위를 쭉 둘러보셨대요. 사방을 쭉 둘러보니까 동쪽으로 네이란자라 강이 흐르고 있거든요. 그 강 건너편에 언덕이 있는데 거기가 수행하기가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그리로 건너가셨다 그래요.”스님을 따라 230여 분을 올라 가야산 정상에 서니 보드가야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경전에 기록된 걸 보면 당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수행을 너무 게으르게 한다고 본 거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나는 용맹정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리라’ 이런 원을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고 그 적당한 장소로서는 강 건너편에 있는 지금의 마을인 ‘둥게스와리’ 우리 경전에는 쁘락보디힐 그러니까 전정각산이죠. 거기가 좋겠다고 보신 거 같습니다. 그곳은 계급이 낮은 가야 사람들이 죽으면 화장을 못하고 그냥 시체를 갖다 버린 곳입니다. 그 숲을 우리가 시타림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의 둥게스와리는 시타림입니다.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도 바라나시 사람들의 시타림이었어요. 그런 것처럼 강을 건너서 시체를 갖다 버리니까 일반인이 접근을 잘 안 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조용해서 수행하기에 좋겠다고 생각하시면서 동편을 내다보고 저곳에 내가 가서 정진을 해야 되겠다는 원을 세우는 장면이 경전에 나옵니다.”nbspnbsp안개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아서 네이란자라 강 건너편 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니 마음이 비장해집니다.nbsp“그리고 경전에 다시 이곳이 나오는데 부처님이 사르나트로 가셨다가 60명의 제자들에게 전법선언을 하시고 부처님 홀로 이곳으로 옵니다. 여기보다 남쪽으로 좀 내려가면 우루벨라에 가섭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수행을 하고 있었어요. 부처님께서 가섭 삼형제와 그의 제자 1000명을 교화하고 설법을 하셨는데 그 설법한 장소가 이 가야산입니다. 그때 설한 설법을 ‘불의 설법’이라고 해요. 불을 섬기던 가섭형제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을 섬기던 이전의 모든 도구들을 강에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바깥의 불은 껐다.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이 삼독의 불을 꺼라’ 이런 설법이에요. 이 불의 설법을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산상수훈과 비교합니다.”nbspnbspnbspnbsp 가야산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30여 분을 더 가서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니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320명이나 되는 순례단에게 일일이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열렬히 환영해 줍니다. 이런 환영을 받을 자격이 있나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20여 년간 이렇게 되기까지의 공로를 생각하니 감사함과 더불어 이것이 인도인들의 환영하는 방식인가보다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집니다.“둥게스와리는 부정한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머무시고 깨달음을 얻음으로 해서 이곳이 가장 성스러운 곳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불교 성지가 대부분 당시에는 부정한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땅에는 성스러움도 더러움도 없고, 결국은 사람이 부정하게 생각하면 부정한 것이 되고 성스럽게 생각하면 성스럽게 된다는 이런 의미입니다.”nbspnbsp 학교 내에 있는 전정각사에 들러 참배를 하고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하셨던 전정각산으로 향했습니다. 올라가는 길에는 다른 성지와 마찬가지로 구걸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습니다.nbspnbsp“제가 처음에 왔을 때 사진을 보면요, 전정각산 올라가는 길이 오솔길인데 양쪽에 빡빡하게 환영하는 인파처럼 그렇게 아이들이 앉아서 구걸을 했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구걸의 행렬은 없어지지 않는데 이건 관광객이 오기 때문에 이 동네뿐만 아니라 이웃동네에서도 몰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걸식은 끝이 안 나는 것 같아요. 다만 우리가 수자타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못하도록 해서 이제 그 아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여기 계시는 아저씨 같은 경우는 동네 유지인데 멀쩡하신 분인데... 근데 처음엔 저도 이걸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우리가 가게를 운영하듯이 이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생계수단인 거죠? 근데 그걸 우리 생각을 가지고 무조건 하라 마라하기가 그렇죠.”nbspnbspnbsp 산에 오르기 전 부처님께서 수행하셨다는 유영굴에서 이곳에서 설하신 경전을 독송하기 위해 둘러앉으니 전정각산이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집니다. 저 산에서 부처님은 6년간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고행을 하셨다고 합니다.nbspnbsp“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끝간데까지 했는데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그때 어떤 것을 발견했느냐 하면, ‘욕망을 따라가는 것도 욕망을 억압하는 것도 근본원인은 욕망에 대한 작용이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고 그분께서는 바로 다만 욕망인 줄 알아차릴 뿐이다. 다만 알아차리고 지켜볼 뿐이지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억압하지도 않은 거예요. 이렇게 제3의 길을 발견하셨어요. 이것을 우리가 중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서쪽 네이란자라 강가로 가서 목욕을 하고 쓰러졌는데 수자타가 공양 올린 유미죽을 드시고 건강을 회복하여 정진을 해서 마침내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신 거죠”nbspnbsp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에 올랐습니다. 높지는 않지만 온통 삐죽삐죽한 바위로 된 험한 산능성이를 벌벌 떨면서 따라갔습니다. 스님은 치렁치렁한 가사를 입고 어찌 그리도 잘 가시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산에서 내려와 간단한 세면을 하고는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정성껏 준비해 주신 한국식 식사를 맛있게 했습니다.nbspnbsp식사 후에는 저녁예불을 하고 스님으로부터 수자타아카데미의 역사와 현황 및 과제 등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내일 모레가 수자타아카데미 20주년 기념일이라 학교에서는 한 달 전부터 준비에 분주했다고 합니다. 강의를 마치자 시간이 거의 10시가 되었습니다. 다들 많이 피곤한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스님께서는 성지순례단 스텝진과 함께 지금까지 진행된 성지순례의 중간평가와 이후 일정에 대해 점검을 하시고,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0주년 행사 준비상황을 일일이 챙기시느라 늦은 시간까지 회의가 이어졌습니다.nbspnbsp 내일은 아침 4시 30분에 기상해서 5시에 기도하고, 예불 후에는 걸어서 보드가야까지 가는 일정입니다.
2014.1.5. 인도성지순례 셋째날 - 바라나시 사르나트
순례단을 싣고 전날 하우라 역을 출발한 기차는 밤새 11시간을 달려 아침 6시 30분에 바라나시의 무갈사라이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역에 도착하기 전 5시에 기차 안에서 송수신기로 다함께 아침예불과 기도를 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스님께서는 25년 인도성지순례 역사상 기차가 제 시간에 도착한 건 처음이라며 이는 인도에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로서, 아마 이번 참가자들이 공덕을 많이 지어서 그런 거 같다고 하십니다. 그동안 612시간 연착 또는 기차 운행이 갑자기 취소된 사례 등을 듣고 보니 남은 순례 일정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nbspnbsp 새벽 2시 30분경에 개교 20주년을 맞은 수자타아카데미에 보낼 물품을 가야 역에 내리고, 무갈사라이 역에 도착한 순례단은 8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바라나시의 강가강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순례기간 동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이동해 줄 버스라고 하시며, 그래서 순례단이 탈 버스는 인도에서도 가장 좋은 버스라고 하셨습니다. 직접 버스에 타고 보니 몇 년 전에 왔을 때의 버스보다 훨씬 크고 깨끗하여 한국의 버스와 다름없는 걸 보니 순례준비 하나하나에 세심함이 보였습니다.nbspnbsp 무갈사라이 역을 출발한 버스는 바라나시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가강을 건너서 바라나시 시장 인근 산스크리트 유니버시티에 도착했습니다. 순례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개인별로 자전거 릭샤를 타고 강가강의 다샤스와메드 가트로 이동하였습니다. 바라나시 시장은 얼핏 보기에 사람과 동물, 온갖 교통수단이 뒤엉킨 혼돈과 무질서를 연상하지만 다시 보면 인도 그들만의 문화가 그대로 간직된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처럼 보여 인도의 역동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성과 속이 함께하는 강가강, 릭샤를 타고 이동하면서 인도의 문화와 풍속, 인도만이 지닌 깊은 속살을 더 깊이 보고 느낍니다.nbsp강가강에는 눈으로도 보이는 가까운 강 어귀에서 한쪽은 성스러운 성수로 목욕을 하며 업을 씻어내는가 하면 한쪽엔 한 생명을 떠나보내는 의식이 진행중입니다. 시체를 덮은 주황색 천들이 여기저기 나부끼는 걸 보니 뭇 삶의 마지막을 보는 거 같아 더 경건해집니다. 더불어 시타림에 나부끼는 시체를 덮은 주황색 천이 불교의 가사의 유래라는 말씀을 듣고 보니 인간 붓다에 대한 존경스러움이 더 지극해집니다. 이제 막 가트에 들어와 강가강에 몸을 담근 후 장작더미에 올려져 화장을 기다리는 시체부터 화장이 진행중이거나 또는 모두 타고남은 잿더미,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을 보며 삶의 무상함을 다시금 눈으로 가슴으로 확인합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해탈주와 아미타불 염불을 하며 모든 존재들이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기를 기원합니다.nbspnbsp 인도를 대표하는 릭샤 체험과 강가강으로 인도를 깊고 짧게 체험하고 다음 순례지인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인 초전법륜지 사르나트로 향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동하는 차안에서 사르나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사르나트는 부처님께서 성도 후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이며, 불법승 삼보가 이루어진 곳이고 전법선언을 한 곳입니다.”전법이 일상인 정토행자에게는 더 의미깊은 곳이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오는 듯합니다. 사르나트 입구에 도착한 순례단은 스님의 안내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사르나트의 유적지와 탑을 세 바퀴 돌아 다메크스투파 앞의 넓은 잔디밭에 모였습니다. 그리곤 한국에서 준비해온 공양물을 정성껏 차려서 부처님께 예불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초전법륜과 사르나트 성지, 이곳에 남은 유적인 인도의 국장 아쇼카 석주, 고고학박물관의 유물들, 안타깝게 형체만 겨우 남아 있는 다르마라지크 스투파 등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스님께서는 2014년 성지순례단이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부처님 법을 널리 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보탬과 쓰임이 되는 정토행자가 되자고 초전법륜 성지에서 발원해 주셨습니다.또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그날과 만일결사를 성취할 수 있도록 참여 대중 모두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이곳에서 말씀하신 경전을 전체가 함께 독송을 하였습니다.부처님께서 이곳 사르나트에서 설하신 경전을 직접 읽으니 2,600년의 시공을 거슬러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마냥 경전의 구절구절이 온몸에 새겨집니다.“오 카운디냐는 깨달았다. 카운디냐는 정각을 얻었다. 여래의 교법은 깊고 깊어 말로는 다할 수 없고 오묘하고 적정하여 이름붙일 수도 없다. 이제 가장 뛰어난 카운디냐가 여래의 진리에 법안을 밝히니 이제 부처님의 법이 그 빛을 찾았구나.”이리하여 부처님의 법은 다섯 비구와 야사, 야사의 친구와 부모님이 깨달음을 얻어 세상 속으로 나아가고 멀리 한국에까지 그 법이 전해져 많은 대중들이 함께 하게 되니 부처님이 그러하시듯 이제 미약하나마 그 일에 함께하는 원을 세워봅니다. 그리고 이 뜻깊은 장소에서 순례 일행은 법륜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삼귀의와 오계 수계를 받아 순례기간 동안 출가한 마음으로 다 같이 부처님의 제자로서 오계를 지킬 것을 맹세하며 호궤합장 자세로 연비를 받았습니다. 짧은 순례기간이지만 이제 수행자로서 가사까지 받아 지니고 부처님과 법사님께 삼배를 올리고 거룩한 수계식을 마치니 알지 못할 뭉클함에 눈물이 가득해집니다.nbsp 사르나트의 다메크스투파를 배경으로 가사를 입고 단체 사진과 조별 사진을 촬영하는데, 순례자들의 얼굴에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는 자랑스러운 제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사르나트 바로 앞에 위치한 고고학박물관에서 초전법륜상과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귀한 유물들을 직접 관람하였지만,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보여드릴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합니다.nbspnbsp 오늘 마지막 순례지인 영불탑에 들렀지만 생각보다 일찍 출입문을 닫아 참배는 못하고 탑 앞에서 스님의 설명을 간단하게 듣고 아쉬운 마음을 반야심경 봉독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영불탑은 다섯 비구가 성도 후 사르나트로 오신 부처님을 맞이했던 곳으로 야쇼카 왕이 이를 기념하여 세운 탑이라고 합니다.nbspnbsp 오늘 일정을 마친 순례단은 숙소인 수라비호텔에서 맛있는 인도식 만찬을 먹으며 스님의 직접 진행으로 차량별 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순례 참가자 대부분이 정토회의 활동가들이어서인지 짧은 소개를 통해서도 전법의 활약상과 약진이 눈에 띄게 두드러져 소개 때마다 마음이 모아지고 함께 하는 이 길이 감사할 뿐입니다. 더불어 스님께서는 오늘부터 마지막 날까지 우리의 발이 되어주시는 운전기사님께 작은 선물과 함께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였습니다.nbspnbsp 내일은 새벽 5시에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약 260km 떨어진 부처님이 성도하신 곳, 보드가야로 갑니다.
2014.1.4 인도성지순례 둘째날 - 캘커타
인도 성지순례 둘째 날입니다. 어제 320여 명의 순례자들이 인천공항에 집결해 싱가포르, 홍콩, 방콕을 거쳐, 4일 1시 30분에 콜카타의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천공항에서 콜카타까지는 19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혜초스님이 배를 타고 육로로 걸어 인도에 도착하기까지 3개월이 걸린 것에 비하면 우리는 아주 쉽게 인도에 온 것입니다.nbspnbspnbsp 이른 새벽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식당 바닥에 돗자리나 담요 등을 깔고 아침 기도를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나라 인도에서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묵은 숙소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시설로 인도 순례객에게는 최상의 시설이라고 했습니다. 아침 공양을 간단히 마치고 8시 반부터 입재식 및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습니다. 법륜스님이 단상으로 나오시자 순례객들은 뜨거운 환호와 함께 박수를 칩니다. 스님께서는 특유의 말씨로 “너무 그러니 내 참 부끄럽고마” 하고 농담을 하시자, 순례객들이 배를 잡고 웃습니다. 참가자 8명 중 한 명은 해외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참여 열기가 정말 뜨겁습니다. 올해는 법륜스님이 이사장으로 계시는 국제구호단체 JTS가 인도 불가촉천민 마을에 어린이들을 위해 세운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0주년이 되는 해여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nbspnbspnbsp 콜카타는 인도에서도 매우 가난한 도시라고 합니다. 이런 콜카타를 순례지로 잡은 것에 대해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사문유관을 경험해 보기 위해서라고 이렇게 설명하십니다.nbspnbspnbsp “부처님께서 왕궁 성문을 나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셨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을까? 하는 것을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호텔 안이 왕궁이라면, 밖으로 나와 거지들이 누워있는 풍경은 사문유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1991년 한국에서 인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 굶주리는 아기를 안고 구걸을 하고 있는 여인을 만났을 때처럼, 청년 시타르타는 어떤 고뇌를 했을까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nbspnbsp 스님께서는 인도성지순례를 어떤 자세로 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인도에는 10년 전부터 공항도 새로 짓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지만, 아직도 3천여 년 전의 생활방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다양한 바깥구경을 하다 보면 내면의 변화가 다양하게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는 바깥만 보는 게 아니라 내면을 보면서 자기의 업식을 살피는 시간입니다.”nbspnbsp “밖을 보는 것은 상을 보는 것이며, 내면을 보는 것은 법을 보는 것입니다. 내면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바깥 경계와 내면의 차이가 클수록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 내 내면 속에 숨겨진 업식이 다양하고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내 성질이 이렇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nbspnbsp “15일 동안 함께 지내면 식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밥 먹고, 양치질하고, 똥싸고 하다 보면 정도 생기고 미움도 생깁니다. 식구가 되면 자기 성질을 3일 이상 못 숨깁니다. 하지만 내 성질을 보며 실망할 필요는 없어요. 성질을 내면 쾌락이고 성질을 참으면 고행이며 성질을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것, 이게 중도입니다. 일상에서 내 마음을 지켜보고, 나누기할 때는 드러내는 게 좋아요.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압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고 복종입니다. 자기 성질을 다 드러내는 것은 횡포예요. 성지순례를 통해 정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후에는 콜카타 시내와 식물원을 구경했습니다. 시내를 구경하며 인도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매우 가난하지만 밝은 표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콜카타식물원에 들러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라는 반얀나무를 구경했습니다. 나무 줄기에서 뿌리가 자라 땅속으로 박혀 끝도 없이 가지가 뻗쳐나가는 것을 보며, 세상 만물이 모두 연관되어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연기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nbsp이후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첫 교화를 하신 사르나트로 가기 위해 하우라 역에서 무갈사라이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하우라역은 델리콜카타선의 출발역인데, 정말 대단합니다. 역사는 기차를 타려는 승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판자나 천을 깔고 누워있습니다. 기차를 타려면 밀리는 인파 속에서 달려가야 합니다. 맨몸으로 타도 힘든데 무거운 짐을 가지고 타니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단체 짐이 하도 많아 좀 건강한 이들은 두번 세 번 먼거리 짐을 옮겼습니다. 마치 군대같이 모두들 일사분란하게 그 많은 짐을 옮겨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일행 320명은 거의 작전을 펼치듯이 기차를 무사히 탈 수 있었습니다. 기차에 오르니 온통 땀으로 젖어있습니다.nbspnbsp 당시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마치 육이오 전쟁을 체험하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사무유관을 여기에서 경험합니다. 이걸 느껴보라고 콜카타 일정이 배치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법륜스님께서는 손수 짐을 드시고 순례객을 이끄십니다. 가르침을 베풀고자 애쓰시는 스님을 보며 가슴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스님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순례객은 불평은커녕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들어주며 신속하게 움직입니다. 오히려 살아 생전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며 즐거워합니다. 무거운 짐을 이고지고 달리는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기차칸에서 같은 조원끼리 마음나누기를 합니다. 우리 조원은 모두 직장인인데 인도성지순례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몇 사람은 이를 위해 사표 쓸 각오마저 해야했습니다.nbspnbspnbsp 7시 30분에 콜카타를 떠난 기차는 다음날 새벽 무갈사라이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다음엔 어떤 경험이 전개될까요?
2014.1.3 인도성지순례 첫날
인도로 성지 순례를 떠나기 위해 정토행자 분들이 이른 새벽부터 집을 나서서 아침 6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모였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는 7차년을 마무리 하고 8차년을 힘차게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활동가 중심으로 순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nbspnbsp 청년 정토회 38명을 포함하여 전년 보다 훨씬 많은 303명의 전국 정토회 활동가와 스텝과 법사님들을 포함하여 총 320명이 지도법사님의 안내에 따라 부처님의 발자취를 순례하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 공항에 도착하니 먼저 나와서 준비를 하고 계신 스텝 분들과 유수스님 그리고 법사님들께서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조별로 출국수속 절차를 밟으며 전국에서 모인 도반들과도 반갑게 잠깐씩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도반들의 얼굴에 부처님의 고향 인도로 여행을 떠나는 기쁨이 만연하였습니다.nbsp이번에는 순례객이 많아서 세 대의 비행기로 나누어서 인도 캘커타를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청년 정토회 활동가들은 홍콩을 경유하여 인도에 들어가고, 대중활동가들은 두 대의 비행기로 나누어서 싱가포르와 방콕을 경유하여 캘커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nbspnbsp 방콕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니 스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고 공항 한 쪽으로 안내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 예전 같으면 이 자리에서 순례 전 입재식과 오리엔테이션을 했는데 이번에는 인원이 많아 비행기를 나누어 타게 되어서 공식적인 입재식과 오리엔테이션은 캘커타에 순례객 전원이 모여서 하기로 하고 오늘은 스님께서 우리와 함께 순례를 하게 된 분들을 소개해 주시고 간략한 일정설명이 있었습니다.nbspnbspnbspnbsp 김홍신 작가님, 현기환 전 국회의원님, 길벗의 탤런트 박진희씨를 스님께서 재미있게 소개하셨고 순례객 전원은 힘찬 박수로 환영하였습니다. 순례단 중 한 분이 ‘박진희가 누구야’하는 말을 듣고 스님께서는 ‘나하고 수준이 똑같은 사람 여기도 있네’ 하셔서 모두가 한바탕 웃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연예인이라고 아무 때나 사진 찍자고 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그리고 해외 정토회에서 오신 분들을 소개하는 순서에 이어 차량 담당 법사님과 JTS 박지나 대표님을 비롯하여 실무자 분들을 소개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또한 불교TV 김범수 피디님께서 지난 번 불교티비에서 방영되었던 수자타 아카데미 소개 프로그램 2회분 짜리를 22회로 방영할 계획으로 촬영을 위해 순례에 참가하셨습니다.nbspnbsp 스님께서는 자세한 일정에 관한 것은 내일 공식적인 오리엔테이션에서 하고 오늘은 대략적인 인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기후적 환경에 관하여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 일정 설명에 이어서 스님께서는 성지순례에는 어떤 여행이 맞는지에 대해서 예전 경험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nbsp 스님께서는 “두 가지 경우로 여행을 다 해보았습니다. 직접 배낭여행 하듯이 해보았고, 큰스님을 모시고 호텔가서 자며 편안히 해보기도 했는데 그건 순례가 아니었습니다.nbspnbspnbsp 우리가 하는 순례는 완전히 배낭여행처럼은 못해도 그에 준하는 형태로 호텔이 아닌 곳이나 절에서 개인침낭을 이용해 자고 밥도 우리가 해 먹으며 15박 16일을 지내게 됩니다. 이렇게 함께 한 순례객은 직계 가족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랫동안 시간을 함께 한 식구와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식구는 정이 들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미움 또한 생깁니다. 떨어져서 볼 때는 좋은데 가까이서 볼 때는 ‘참 문제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nbspnbsp 지금이야 우리가 웃고 반갑다 좋아하지요 그런데 한 삼일이 지나면 본성이 나오기 시작해요. 밥도 안하고 밥통도 들고 다니지 않으면서 밥만 먹고 가는 사람, 화장실에 들어가서 오래 있는 사람, 아침에 눈만 뜨면 화장만 하고 있는 사람 등...” 이렇게 스님이 말씀하시자 순례객은 또다시 한바탕 웃었습니다.nbspnbsp 스님께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상대편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그런 것들이 내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하고 습관이 달라서 생긴 문제이지 나쁜 의도는 아니고 생활하는 습관이 다른 것이고 이것은 모여서 살면 생기는 문제이므로 이것을 자기로 돌려서 살펴봐야 합니다.nbspnbsp ‘내가 나쁘다’도 아니고 ‘저사람이 나쁘다’도 아니고 ‘내 업식이 이렇구나’ ‘저런 것을 싫어하는 업식을 갖고 있구나’ ‘저러면 좋아하구나’ ‘저러면 꼴보기 싫어하구나’ ‘내 업식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며 자기를 아는 하나의 좋은 과제로 생각하면 됩니다.‘뭔 수행자가 저런가’ ‘정토회에 저런 인간이 있었나’ 라며 마음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식구가 되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결혼할 때와 똑같아요. 떨어지면 좋아 보이는데 가까이 가면 이런 문제가 있고 반대로 식구는 가까이 있으면 안좋은데 떨어져 있으면 그립고 그게 식구거든요.nbspnbspnbsp 그래서 식구가 떨어져도 밉지가 않고 가까이 있어도 밉지가 않으면 ‘이게 도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좋고 싫고를 떠나라는 얘기도 되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둘이 있어도 귀찮지 않다’ 이게 도입니다.nbspnbsp 그러니 수행 삼아서 순례를 하셔야 합니다. 밖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마음 구경이 더욱 좋습니다. 우리가 15일 동안 지내는 환경이 평소 지내던 한국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감정이 예민해져서 조금만 잘해줘도 고맙고 조금만 잘못하면 너무 밉고 이렇습니다. 이럴 때 감정을 문제 삼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옳다 그르다 하지 말고 이런 경지에서는 감정이 이렇게 일어나는구나 하시며 수행삼아 순례를 해야 합니다.”nbspnbsp 스님께서는 이렇게 당부의 말씀을 하신 후 인도에 관해 궁금한 사항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진신사리, 일불승, 인도의 불교 상황 등에 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차분히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여성 순례자 한 분께서는 ‘순례를 하다가 인도가 너무 좋아서 그냥 여기서 봉사해도 되나요?’라고 질문을 하셨는데 스님께서 ‘그 얘기는 인도 좋은 남자 만나서 살아도 되는지 묻는 거 같네요’ 하시자 모든 분들이 한바탕 웃었습니다.nbspnbsp 스님께서는 “봉사는 할 수 있지만 제대로 인도에서 살수가 있는지 한국에서 점검을 받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순봉사도 우리가 학교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 안에 봉사자의 숙소가 있고 그 숙소에서 인도 사람도 함께 살고 있는데 우리가 한국식대로 평범하게 살지라도 그들에게는 우리 사는 모습이 초호화판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nbspnbsp 그래서 인도 사람이 볼 때 차이가 나지 않도록 살아야 하니깐 한국사람들이 좀 힘들어 합니다. 때문에 우선 문경수련원에 가서 좀 살아야 합니다. 그냥 봉사가 아니라 수행하면서 봉사할 수가 있느냐 이것이 점검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최소한 일 년을 있어야지 잠깐씩 하는 봉사는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질문하신 분은 한국에 오셔서 봉사를 신청하시면 됩니다.”이렇게 질의응답 마치고서는 차량별 모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준비해 온 간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 소개를 하고 이번 성지 순례를 시작하며 드는 소감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삼일 후에 내 성질이 드러나더라도 이쁘게 봐주세요’ 하는 도반의 나누기에 함께 웃으며 즐겁게 공항에서 시간을 보낸 후 밤 10시쯤 출발하여 12시 경에 캘커타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nbspnbspnbsp 각자의 짐을 찾고 수자타 아카데미로 갈 공용짐을 찾아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가 넘었습니다. 간단히 세면을 한 후 침낭 속에서 휴식을 취하였습니다.nbspnbsp 내일은 아침 7시에 식사를 한 후 8시부터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콜카타 식물원을 관람한 후 하우라 역으로 이동하여 기차로 무갈사라이로 이동할 계획입니다
2014.1.2. 정토회 2014년 시무식
오늘은 2014년 정토회 시무식이 있는 날입니다. 스님께서는 오전 7시 30분에 한차례 미팅을 가진 후 오전 8시40분부터 10시까지 성도재일 기념 법문을 녹화 촬영 하셨습니다. 원래 성도재일은 1월8일인데 스님께서 인도성지순례를 가시기 때문에 사전에 기념 법문을 미리 녹화해 놓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성도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1시간 20분 동안 열강을 해주셨습니다. 10시부터는 2014년 정토회 시무식이 열렸습니다. 서울 정토회를 비롯하여 수도권, 경기권 지역에서 활동하는 200여명의 활동가 분들이 함께 자리해 스님께 새해 인사로 삼배를 올리고, 스님의 신년 법문도 함께 듣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윤여준 원장님과 김홍신 작가님도 시무식에 함께 하셔서 새해 인사말을 나눠주셨습니다. 특히 윤여준 원장님은 이번 주를 끝으로 지난 6년 동안 맡아 오시던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장 소임을 모두 내려놓기로 하셨습니다. 윤여준 원장님은 “평화재단과 함께한 지난 6년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값지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며 함께 한 대중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스님과 대중들 모두 그동안 평화재단을 위해 힘 써주신 그 노고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김홍신 작가님은 이번에 스님과 함께하는 인도성지순례를 떠나십니다. 스님께서 ‘대붓다’ 라는 책을 쓰라고 권유하셔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또 많은 영감을 얻고 책을 쓰기 위해 인도성지순례를 떠난다고 하셨습니다.이어서 시무식 기념 법문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법문을 해주셨습니다.“새해는 제 7차 천일결사가 끝나고 제 8차 천일결사가 시작되는 한해가 되겠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떤 일이 닥칠지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몸을 크게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또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갑작스런 병이나 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재산을 날릴 수도 있고 지위가 갑자기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는데 이런 일이 안 일어날 수가 없는 게 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크고 작은 일이 늘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하나에 좋아하고 싫어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괴로워한다면 우리 인생이 늘 널뛰기처럼 웃었다 울었다 하면서 한 세상 보내게 됩니다. 좋은 것은 일어났으면 해서 따라다니느라 헐떡거리게 되고, 싫어하는 것은 안 일어났으면 해서 피해 다니느라 헐떡거리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이 어떻게 되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런 일들을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에 너무 널뛰기 하지 않는, 그런 자기 힘을 먼저 갖추어야 됩니다.내 인생에 대해서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부처님도, 하나님도, 아내도, 자식도, 스승도,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밥을 대신 먹어줄 수 없는 것처럼 이 기쁨과 슬픔을 그 누가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여러 가지 변화, 태풍이든 사고든, 다 예측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 그걸 예측해서 요리저리 피해 살려다 보니까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때로는 비굴해지고 때로는 유혹에 끌려들고 허망한 데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또 내 가족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냥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먼저 받아들일 수 있는, 즉 이런 상황에 덜 끄달리는 자기 힘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는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저 사람은 절에 다니니까 사고가 안 일어났다 이런 걸 신앙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정말 신앙이라면 ‘아, 저 사람은 저런 경우를 당했는데도 헤쳐 나가는 힘이 있구나’ 이게 수행이고 신앙입니다.그 어떤 어려운 경우에도 능히 이겨낼 수 있고 흔들림이 없다면, 환경이 좋을 때야 말할 것도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도 늘 무슨 요행을 바랍니다. 그래서 헐떡거리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 우선 내가 내 인생에 주인이 되어야 하고,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합니다. 불교 믿는다고 누가 대신해 주는 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또 따라 행하면 내가 그런 존재로 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이런 건 없어요.그런데서 먼저 자기 입지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이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어요. 이 문제는 오직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염두 해 두고 스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서 결국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심이 있느냐 없느냐 수행이 됐느냐 안 됐느냐는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해 봤을 때 어떻게 여기에 임하느냐 그것만이 평가의 기준입니다. 거기에 수행자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신앙의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정진을 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선 자기 정진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행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면 안 됩니다. 보이기 위해서 한 것은 죽음 앞이나 어려움에 부닥치면 아무 쓸모가 없어요. 흔들리는 자기를 보고 그 흔들리는 것을 넘어서는 그쪽으로 나아가는 이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누구도 희생하면 안됩니다. 남을 위해서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진짜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내가 희생이 안 되어야 합니다. 희생이 되면 나중에 억울해 집니다. 부처님을 원망하게 되고 스님을 원망하게 되고 수행을 중간에 그만두게 됩니다. 왜? 자기를 희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자기 희생이 아니라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한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세상에 보탬이 되려고 하는 일은 세상이 너무 크다 보니 혼자서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세상의 갈등을 좀 해소시킨다던지, 굶어죽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던지, 이런 세상의 변화는 혼자서 조금조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작은 힘이지만 우리가 힘을 모아서 함께 대응을 해야 작은 변화라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토회라는 수행 공동체를 만든 것입니다. 정토회는 수행자들이 모여서 뭔가 세상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기여해보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째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수행법을 우리 이웃에게 전해서 그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도록 인연을 맺어주자 하는 전법을 합니다. 둘째는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 세상을 위해서 쓰레기 제로운동이든, 환경문제든, 평화문제든, 차별을 극복하는 문제든, 통일을 향한 문제든 우리가 대중들 보다 좀 더 앞장서서 해보자 이런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남북 갈등을 해결해서 통일로 가는 길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작은 기여라도 해보자 하는 겁니다. 또 환경 실천을 위해서는 빈그릇 운동을 하고, 또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는 기아질병문맹 퇴치운동을 하고, 갈등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오는데 특히 한반도에는 통일이 올 수 있도록 우리가 통일의병이 되어보자 이런 활동을 하자는 겁니다. 이렇게 활동하고 수행하는 모범을 전국 시군구에 설립해 보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정토회가 우리 대한민국 안에 있기 때문에 결국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하고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데 기여를 할 때 정토회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점점 더 갈등이 심해지고 혼란이 가중될 때 우리가 좀 더 이것을 해소할 수 있는 역할을 해 나가야 합니다. 또한 여러 민족 간의 갈등이 있고 세계에는 많은 변화들이 있는데, 가능하면 지구의 사람들이 좀 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우리가 기여를 해보자는 것들이 우리가 점차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웃으면서 내일 죽어도 후회 없이 해봅시다. 얼마까지 해야 성공이 아니라 하는 것 자체가 성공이 되도록 그렇게 우리가 해봅시다. 자기희생이 생기지 않도록, 남이 봤을 때는 헌신이지만 나는 그것이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어서 하나도 헌신하는 게 아닌, 그렇게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래 할 수 있습니다. 오래 해야 세상에 변화가 옵니다. 즐거워야 오래 하지 괴로우면 오래 못합니다. 항상 마음을 가볍고 즐겁게 가지고 꾸준히 해 나가야 우리들이 바라는 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꿈을 꾸며 손 맞잡고 함께 간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지나놓고 보면 인생의 큰 보람입니다. 좀 힘이 들고 고생이 된다 하더라도 그런 어려운 가운데 서로 신뢰하고 돕고 노력해서 원을 성취할 때, 고생은 지나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 보람 있어 집니다. 그런 3년이 되도록 해봅시다. 파도가 쳐야 파도 타는 재미가 있잖아요. 저는 늘 윈드서핑을 생각합니다. 파도가 없으면 재미가 없어요. 회오리 바람이 몰아쳐야 역시 한 세상 살만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날이 어두워야 작은 촛불이 밝습니다. 낮에 켜 놔봐야 누가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어두운 밤은 밤대로 좋아요. 촛불이 빛나니까. 또 낮은 낮대로 좋습니다. 세상이 밝으니까. 이런 세상이 오든, 저런 세상이 오든 험난한 세상이 불어 닥치면 할 일이 많아서 좋고 세상이 고요해지면 농사 짓거나 참선하면 되니까요. 물이 평지로 흐르면 고요해서 좋고, 언덕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서 또 좋고, 이렇게 세상이 오는 대로 기꺼이 맞아들일 그런 마음으로 새해를 맞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행복한 나날이 되기를 바랍니다.”참석한 대중들 모두 스님의 법문을 듣고 큰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스님께 삼배로 새해 인사를 올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각 부서별로 앞에 나와서 간단히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으로 빙 둘러서서 차례대로 돌아가며 윤회의 악수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한 분 한 분의 손을 꼭 잡으며 “한해 동안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하시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활동가들도 스님과 악수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한분 한분과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다 보니 몇몇 분들은 금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이렇게 좋은 스승님을 만나 좋은 법을 공부하며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으니 이것 자체가 큰 기쁨으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마음 따뜻한 악수의 시간을 뒤로 하고 사홍서원을 끝으로 시무식을 마쳤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정토회의 2014년 새해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nbsp점심은 새해를 맞이하여 맛있는 떡국이 나왔습니다. 대중들은 떡국을 먹고 각자의 업무 공간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스님께서는 점심공양 후 저녁까지 제8차 천일결사 준비위원들과 회의를 하고 또 결사행자 회의에도 참석하셨습니다. 이어서 저녁공양 후에는 법사단 회의를 하셨습니다.내일은 제20차 인도 성지순례를 떠나십니다. 인도 성지순례 이야기는 성지순례에 참석한 활동가들이 직접 현장에서 계속 글을 올려주실 예정입니다. 인도에서 계속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