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2015.1.19 인도성지순례 13일째 상카시아
▲ 상카시아 탑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3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제 8대 성지의 마지막 여정인 상카시아로 향합니다.nbspnbsp새벽 3시에 일어나 짐을 챙겨서 버스에 올라타니 500여명이 탑승한 13대의 버스는 새벽 4시에 일제히 상카시아로 출발했습니다. 이른 출발이지만 늦게 일어나 허둥대는 사람이 없습니다. 순례 초에는 처음 하는 순례에 긴장해서 그랬는데, 지금은 익숙해 져서 인 듯 합니다. 어떤 도반은 일찍 눈이 뜨여 5분만 더 눈 붙이고 싶었으나 매일 108배를 마치고 명상 중인 옆 자리의 도반님을 보고는 벌떡 일어난다고 합니다.nbspnbsp새벽 4시에 차가 출발하자 여느 아침처럼 스님께서 수신기로 “잘 주무셨어요” 하시며 오늘의 일정을 짧게 알려 주십니다. “쉬라바스터를 출발하여 럭나우를 거쳐 8대 성지의 마지막 여정인 상카시아로 갑니다. 안개가 끼지 않아 버스가 잘 가네요. 차량별로 새벽 예불 해주세요.” 차량 별로 약 30분간 새벽 예불을 마치니 버스 안의 불이 꺼지고 순례단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nbspnbsp▲ 쉬라바스티에서 상카시아로 향하는 길nbspnbsp아침 7시경 차에서 내려 10여분 휴식을 하며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13일 동안 늘 그래왔듯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으로 흩어져 자연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해결하고 옵니다. 습기를 한껏 머금은 인도의 아침공기가 참 상쾌했습니다.nbspnbsp▲ 버스에서 내려 야외 화장실을 향해nbsp한참을 달려가는데 스님께서 미국에서 순례에 참가한 한 보살님의 아드님이 뇌사 상태에 빠져 위독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주시면서 함께 생전예수재를 지내고 기도를 하자고 하십니다. 유수스님의 염불과 무변심 법사님의 집전으로 500여명의 순례단은 버스 안에 앉은 채로 다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nbspnbsp▲ 순례객 중 한 분의 아드님이 위독해서 함께 생전예수재를 지냈습니다.nbspnbsp아드님이 위독한 보살님은 함께 기도를 하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보살님이 최대한 빨리 미국의 아드님 곁으로 가실 수 있게 계속 전화통화를 하며 교통편을 알아보시고, 또 어제 기원정사에서 경전독송을 통해 만났던 아들을 잃은 여인, 손자를 잃은 베사카 부인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보살님을 위로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럭나우 공항 근처에 보살님을 내려드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고 순례의 여정은 계속 되었습니다. nbspnbsp▲ 아드님이 위독해서 급히 미국으로 돌아가시는 순례객을 배웅해 주시는 스님nbsp한참을 달려가는데 스님께서는 곧 강가강이 5개 지류로 나눠지기 전의 원류가 되는 강가 강을 지날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가 나타나자 강변 모래사장 위에 기도를 하기 위해 온 힌두교 순례자들이 초막을 치고 빼곡이 들어선 풍경이 펼쳐집니다. 인도 사람들은 강가 강을 무척 신성하게 여기는데, 이곳에 초막을 치고 보름씩 한달씩 머물며 기도한다고 합니다.nbspnbsp▲ 인도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강가강nbsp스님께서는 “힌두인들이 믿음이 얼마나 굳건한지를 알 수 있다”하시면서 “인도인들은 이렇게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무슬림이 침공해도 기독교가 들어와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 “이렇게 믿음이 굳건해야 실천행동이 나오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믿음이 갖는 힘을 강조해 주셨습니다.nbspnbsp10시 30분경 차를 멈추고 볕과 그늘이 적절한 곳에서 아침 겸 점심 공양을 했습니다. 순례단이 공양 준비를 하자 근처 숲에서 야생 원숭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에 100마리 이상의 원숭이가 살고 있다”고 하시면서 원숭이가 몰려오는 입구에서 직접 원숭이들을 쫓으셨습니다. “망고 나무의 원숭이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원숭이는 망고를 따서 던진다고 해요. 저기 보세요, 원숭이 엉덩이가 빨간게 맞죠” 하시면서 순례단이 공양을 시작한 이후까지 원숭이 떼를 쫓아 주시고 공양 분위기도 가볍게 띄워 주신 후 다소 늦게 공양을 하셨습니다. 3호차에서 준비한 반찬으로 9조와 함께 공양게송을 시작으로 함께 공양을 드셨습니다. 야외에서 하는 공양이었지만 접시에 예쁘게 깍아 놓인 사과와 포도에서 스승님께 공양을 드리는 도반님들의 정성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공양 후에는 근처 유채밭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유채밭에 물 주고 있는 보살님들 빨리 오세요.” 라며 버스 탑승을 유머있게 재촉하셨습니다. nbspnbsp도로 양쪽으로 이어지는 평원에는 노란 유채밭과 아직 꽃이 피지 않은 감자밭이 넓고 푸르게 펼쳐져 우리나라의 봄날 같은 풍경이 이어 졌고 그 뒤로 키가 훌쩍한 나무들이 드문드문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였습니다.nbspnbsp버스 안에서는 차량 별로 이번 순례에 대한 소감 나누기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천상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신 후 하강하신 곳인 상카시아 유적지로 가고 있는 중이여서 그런지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경전반 수강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경전반 등록을 결심했다”는 말에 차안의 모든 순례자들이 환호의 박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한자로 된 경전을 뜻도 모르고 읽었는데 처음으로 쉬운 경전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하고, 어떤 분은 “평소 배려해 주고 맞추어 준 남편에게 처음으로 감사했고, 순례기간 동안 도반들에게 받은 도움들을 어려운 이웃에게 회향하겠다”고 하고, 어떤 분은 “싯타르타의 출가 노래를 함께 불렀을 때 생노병사에 대해 오랫동안 느껴왔던 것이라 너무 공감이 되어서 눈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순례를 하면서 법륜 스님이 인간 붓다의 삶에 대해 가지는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어서 감동이었다” 고 하고, 어떤 분은 “기원정사를 포행 할 때 나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느낌들의 나누기로 차안의 분위기가 한층 훈훈해 졌습니다. nbspnbspnbsp▲ 버스 안 마음나누기nbsp스님께서는 “각 차량별로 나누기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송수신기 채널을 돌려 가면서 다 들었다”고 하시면서 “어떤 차는 노래도 부르고 기타도 연주하고 꼭 소풍 온 것 같더라”며 웃으셨습니다.nbspnbsp새벽 4시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3시가 되어서야 드디어 상카시아에 도착했습니다. 무려 11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스님께서는 예상보다 1시간 늦었다고 하십니다. 가사를 수하고 향에 불을 붙이고 탑을 세바퀴 돈 후 공양 예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곳의 탑터는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 법을 설한 후 하강한 곳으로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소라고 합니다.nbspnbsp▲ 상카시아 탑nbsp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은 부처님이 태어나시자마자 일주일 만에 돌아가셔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어느해 안거 때 도리천궁으로 가셔서 마야부인에게 3달간 법을 설하고 하강하셨다는 이 곳에 이후 아쇼카 왕은 석주들과 대규모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nbspnbsp스님은 상카시아 탑 앞에서 간절한 발원을 하셨습니다.nbspnbsp“대한민국에서 온 정토행자 대중 오백여명 일동은 차사천하 남섬부주 인디아 우프라 프라데시주의 이곳 상카시아, 부처님이 천상에서 하강하신, 8대 성지 중 마지막 성지를 참배하고 부처님께 공양 예불 올리고 찬탄 공경하면서 발원하옵나니 저희 상카시아 대탑 참배 인연공덕으로 다생겁래로 지어온 모든 업장 소멸되고 성불하는 그날까지 세세생생 보살도 행하기를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또한 부처님께서 탄생하신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때 안거 중에 도리천으로 승천하셔서 어머니 마하마야 대비와 천상의 대중 일동을 위하여 설법하시고 대범천과 제석천을 대동하시고 이곳 상카시아 성밖으로 하강하신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어떤 사람도 어머니의 끝없는 공덕을 입고 태어나고 자랐으니 그 어머니의 공덕을 잊지 않고 어머니의 공덕을 길이길이 기억하고 그 은혜를 갚으라는 뜻으로 이와같이 보이신 것입니다. 저희 또한 이곳을 참배하며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며 그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nbspnbsp이와 같은 참배 인연 공덕으로 먼저 돌아가신 조상영가님들 모두 왕생극락케 하여 저희들이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소서.nbspnbsp오늘 이렇게 부처님 태어나시고 성도하시고 설법하시고 열반하신 곳을 포함하여 부처님께서 교화활동하신 저 왕사성 저 사위성 저 바이샬리 이곳 상카시아까지 8대 성지를 모두 참배하였으며, 또 부처님이 6년 고행하신 전정각산과 부처님께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카필라성 등 10대 성지를 순례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중 발견된 3개의 탑, 바이샬리와 랑그람,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 참배한 이 모든 공덕을 고통받는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배고픈 자는 배불러 지고, 병든 자는 속히 쾌차하여지고,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배움이 성취되는 등 고통받는 일체 중생들 모두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nbspnbsp또한 저희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연으로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 병고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들 하루 속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갖가지 인권침해로 인간다운 삶이 영위되지 않는 북한동포들에게 자유와 행복이 속히 도래될 수 있게 옹호하여 주옵소서. 올해로 해방 70주년 분단 70주년 이산가족의 애환이 깊으니 올해 분단 70주년을 기하여 남북한이 화해하고 교류하고 협력하여 한반도의 다시는 분쟁과 전쟁이 없도록 나아가 서로 협력하여 통일의 기운을 만들어 마침내 한반도가 통일될 수 있도록, 뿐만 아니라 한중관계 한일관계도 개선되어 동양 삼국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여 함께 번영하므로써 이웃나라가 서로 공생공존할 수 있어 세계 문명의 중심을 이룰 수 있도록 발원하옵나니 성지순례 참배 인연공덕으로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천륭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또한 지난 2주 성지순례 기간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이와같이 오백 대중이 순례를 마칠 수 있게 됨에 제불 보살님들께 감사드리오며 남은 일정 또한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성지순례 참배 대중 일동은 성지순례를 통하여 이제 사람으로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때리거나 죽이거나 헤치는 행위를 하지 않고, 훔치거나 빼앗는 손해끼치는 행위를 하지 않고, 성추행 성폭행 등 괴롭히는 행위를 하지 않고, 거짓말 욕설 등 말로도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술을 먹고 취하여 행패 피우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사람다운 길을 갈 수 있는 그런 서원을 꼭 지킬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시고 더 나아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베풀고 돌볼 수 있도록,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괴로운 이를 위로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밝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순례를 마치며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대승보살의 길을 갈 수 있길 순례 참배 대중 일동은 서원을 세웁니다.nbspnbsp또한 검소하게 살되 당당하며 겸손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서 세상에 불자됨이 자랑스럽고 이 세상에 불자가 있음으로해서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그런 불자 되기를 발원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은 저희 참배 대중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륭팔부 신중님들은 저희의 이 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이어서 스님은 “장시간 버스타고 온다고 힘들었어요?” 물어 보시면서 이곳 상카시아 성지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잘 오셨습니다. 이곳이 마지막 성지입니다. 어느해 우기철 안거에 부처님이 일체 보이시질 않았습니다. 누구도 부처님을 본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근심이 많았습니다. 부처님이 어디 가셨을까?nbspnbsp그런데 신통제일 목갈리나 존자께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도리천궁에 가셔 계신다. 어머니를 위해서 설법을 하러 가셨다” 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태어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으니까 부처님의 설법을 못 들었잖아요. 그래서 어머니를 비롯한 도리천궁에 있는 천인들을 위해서 설법하러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오시는지 물어보니 10월 보름날 이곳에서 하강하신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를 기념한 탑이 이 상카시아 스투파입니다.”nbspnbspnbsp법문을 마치고 상카시아에 관련된 경전을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경전독송을 마치고 잠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상 후에는 스님의 요청으로 한 법우가 나와서 ‘어머니의 은혜’를 선창하고 오백 순례단도 모두 함께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 스승님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스승의 은혜’를 불러보자”고 하셔서 이번에는 무변심 법사님의 선창으로 ‘스승의 은혜’를 함께 불러 보았습니다.nbspnbspnbsp곳곳에서 눈시울을 붉히거나 조용히 눈물을 닦는 순레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조금씩 저물어 가는 주위에 까마귀 떼가 낮게 날아서 숙연한 분위기를 더하는 듯 했습니다.nbspnbsp▲ 어머님의 은혜,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히는 순례객nbsp스님께서도 노래를 함께 부르신 후 “우리 모두는 부모님과 스승의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시며 법문을 마치시고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서둘러 버스에 탑승하라 하셨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성지를 나서며 어김없이 동네 아이들을 위해 사탕을 나눠주시며 아이들의 행복과 인도 불교의 부흥을 발원하셨습니다.nbspnbsp▲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시는 스님nbsp버스를 타고 5분쯤 가니 스님께서 상카시아 석가족을 위해 담마 센터를 지어주려고 마련한 부지가 나타났습니다. 아직 담마 센터는 지어지지 않았고 주위에 벽만 네모나게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순례단 일행이 부지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석가족 청년들이 나와서 스님과 순례단을 환영해 주었습니다.nbspnbsp▲ 상카시아 담마 센터 건립 부지. 인도성지순례 회향식nbsp오후 5시30분경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시작으로 제26차 인도성지순례 회향식이 열렸습니다. 스님께서는 해가 져서 어두워진 으스름 속에서 마지막 회향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오계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500여 대중을 한명이라도 더 깨우쳐 주시려는 스님의 간절한 마음과 순례단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nbspnbspnbsp“여러분들이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바라나시의 사르나트에서 구리가 장자의 부부처럼 삼귀의 오계를 받고 출가한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시작한지 오늘로써 열하루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열흘 간 단기 출가를 했다고 볼 수 있죠. 그 열흘 동안 우리는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바라나시의 사르나트, 6년 고행하신 전정각산,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 일천 비구를 교화하신 우리벨라 가섭터, 가야 가섭을 교화한 가야산, 처음 사찰이 건립된 죽림정사, 왕사성, 영축산, 칠엽굴을 순례하고, 그리고 바이샬리의 진신사리탑과 원후봉밀터를, 그리고 께사르 스투파를 거쳐서 파바마을의 춘다 공양터, 쿠시나가라의 열반당, 부처님을 화장한 라마바르총, 그리고 네팔로 넘어 가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29세까지 성장하신 카필라성, 그리고 석가족이 부처님을 영접한 쿠단과 꼴리족이 세운 랑그람 진신사리탑을 참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도로 와서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그리고 천불화현탑을, 그리고 사위성의 기원정사를 참배하고, 오늘 이제 상카시아의 부처님이 하강한 곳의 탑을 참배함으로 해서 10대 성지순례를 마치고 3개의 진신사리탑까지 참배를 마쳤습니다.nbspnbsp진행되는 과정에 자는 것도 불편하고 씻는 것도 불편하고 대소변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불편하고 많은 것이 불편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많은 대중이 움직이다 보니 복잡하기도 하고 쫓기기도 하고 그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아무 차질 없이 오백 대중이 성지순례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신중님들이 옹호하셨나 싶을 정도였습니다.nbspnbspnbspnbsp오늘 회향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부디스트라고 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잖아요. 붓다라는 사람은 수행자예요. 우리가 부디스트가 된다는 것은 불교를 믿는 종교인이 된다는 개념이 아니예요. 수행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부처님의 법에 귀의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여러분들은 성지순례까지 하셨으니까 불자로서 미니멈은 좀 지켜주셨으면 해요. 자신이 불자라고 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면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둘째, 남에게 손해는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아무리 성질이 나도 욕설을 하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섯째, 술을 안 먹으면 좋지만 먹더라도 취해서 주정을 해서는 안됩니다. 부디스트가 이것을 증명하는 징표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미니멈이 안지켜지기 때문에 수행자는 고사하고 평범한 인간도 못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처님이 정한 이 다섯가지 계율은 무슨 성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워라 이런 얘기입니다.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오계는 지킨다’ 이것 하나는 결심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무지로 인해서 일어났다면 깊이 참회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nbspnbsp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든지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준다든지 남을 위로해 준다든지 하면 더 좋죠. 돈 벌 일이 있으면 열심히 버세요. 벌어서 베푸는 데에 쓰면 되잖아요. 여기 보니까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습니까? 미국이나 한국에서 낭비하지 말고 이런 곳에 주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사는 데에 도움이 되겠어요?nbspnbsp그러니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아닌 것으로 자꾸 나를 삼지 마세요. 나이가 내가 아니며, 지위가 내가 아니며, 재물도 내가 아닙니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삼고 그게 부족하다고 비굴하거나 그게 좀 있다고 교만하거나 그러지 말고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nbspnbspnbsp그런데 부처님은 2600여년 전에 바라문이라고 목에 힘주고, 왕이라고 목에 힘주고, 돈 많다고 목에 힘주고, 천민이라고 고개도 못 들고, 여자라고 고개도 못 들고 사는 그런 세상에 평등한 인간 존엄을 선언했기 때문에 존경이 되는 겁니다. 지금 시대에 그런 얘기를 하셨으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얘기라서 그렇게 할 수 있겠다 싶은데, 지금 들어도 훌륭한데 그 시대에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 시대에 상가 안에서만이라도 모델을 만들려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는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한 인간이 그렇게 올바르게 사물을 인식했다는 것, 나아가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다는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세상은 붓다가 말한 쪽으로 한발 한발 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도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 대로 행하면 아마 인류 사회에서 가장 선각자가 될 거예요. 가장 진보적이고 앞선 사람이 될 거예요.nbspnbsp그러니 우리 불자들이 세상에 뒤쳐진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을 한발 앞서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까 전세계적으로 상위 1가 가진 재산이 나머지 99가 가진 재산을 넘어섰다고 해요. 이건 새로운 계급 사회예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이것을 완화시키는 쪽으로, 지구환경을 보존하는 쪽으로,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 쪽으로, 평화가 도래하는 쪽으로, 개인이 행복한 쪽으로 나부터 우리가 함께 해나간다면 개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나 얼마나 소중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성지순례 오셔서 붓다가 2600년 전에 깨닫고 실험적으로 시도한 이런 일을, 붓다는 위대하다고 이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그분이 뿌린 씨앗을 우리가 가꾸고 수확하는, 그것을 우리가 이 세상에 실현하는 사람이 되자는 큰 원을 한번 세워보시기 바랍니다.nbsp▲ 회향 법문을 하는 동안 날이 저물었습니다.nbspnbsp열흘 동안 수행 생활을 하시고 오늘 이제 가사를 반납하게 되는데 수행 생활이 만만치 않았죠? 이렇게 수행 생활 체험한 것을 일상 생활 속에 적용해보면 그래도 자그마한 집이라도 있는 것이 고맙고, 세끼 밥먹는 것이 고맙고, 가족이 있는 것이 고맙고,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이 고맙습니다. 이렇게 고맙게 생각하고 살면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것으로 성지순례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일어나셔서 저 멀리 부처님을 향해 삼배를 드리고 또 법사님들에게 삼배를 하고 가사를 반납하겠습니다.“nbspnbsp해가 다 지고 컴컴한 저녁 6시 20분경 차량 및 조별로 각각 수계를 받았던 법사님들께 가사를 반납하면서 회향식은 끝이 났습니다.nbspnbsp▲ 법사님께 가사를 반납하며nbsp스님께서 웃으시면서 “법적으로 일곱번 까지는 출가를 거듭할 수 있다”고 말씀하셔서 순례단들 모두 웃었는데 가사를 벗을 때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nbsp이어서 석가족 청년들이 준비한 스님과 성지순례단 환영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상카시아에는 전 인도에서 석가족이 제일 많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석가족 청년들은 스님께 꽃목걸이를 하나씩 걸어주며 스님께 합장 공경을 표했습니다. 어두워서 석가족들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이곳 부지에 석가족의 불교 교육을 위한 담마 센타를 지어주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상카시아 스투파 위에 힌두 탬플이 있어서 석가족과 갈등이 있으므로 스님께서 이곳 부지에 부처님께서 하강하시는 모습으로 불상을 하나 지어주고 대중이 집회할 수 있는 큰 강당도 지어주기로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불사를 추진할 책임자가 없어서 지금은 조그만 사무실만 지어놓고 추진을 못하셨는데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석가족이 200만 정도 살고 있는데 대부분 힌두교이고 절도 없고 해서 스님께서 여기 석가족 집성촌 마을에 불상 점안식을 해주고 법회와 수련도 일년에 한차례씩 해오고 있으십니다. 스님께서는 순례객들에게 석가족 청년들의 활동에 후원과 관심을 당부하셨습니다. 스님의 당부를 듣고 순례객들 모두 십시일반으로 상카시아 석가족 불자 모임을 위해 후원금을 즉석에서 내어 주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석가족을 대표해서 수바스지가 순례단을 환영하는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성지순례객들을 가족처럼 반갑게 맞이해준 석가족 분들nbsp“상카시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을 환영하러 석가족이 여기 올 수 있어서 너무 너무 기쁩니다. 밥과 계란, 짜이를 준비했는데 맛있게 드셔주십시오. 스님과 인연을 맺은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일년에 이렇게 하루만 뵐 수 있어서 너무 섭섭합니다. 한달만이라도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스님께서는 저희들을 위해 많은 불상을 보시하셨고, 저희들이 기도할 수 있게 기도집을 만들어주셨고,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저희 석가족을 위해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감사드립니다.”nbsp▲ 석가족들로부터 불교 포교의 바램을 듣고 기립박수로 응원의 마음을 보내주는 순례객들nbsp수바스지의 환영 인사에 순례단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주었고, 많은 분들이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하며 응원의 마음을 보내주었습니다. 아마도 스님께서 발원하신 인도 불교 부흥 사업이 이 석가족 청년들을 시작으로 활짝 꽃피기를 바라는 순례단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nbspnbsp환영식 후 순례단은 석가족 청년들이 준비해준 밥과 짜이를 맛있게 먹었습니다.nbsp▲nbsp석가족들이 준비해준 짜이와 밥nbsp그리고 각 숙소로 나뉘어 들어가서 성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nbspnbsp이제 인도성지순례는 후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짐은 점점 가벼워 지고 마음은 풍성해지는 듯 합니다. 내일은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로 유명한 아그라로 가서 자유일정으로 인도의 또다른 모습을 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
2015.1.18 인도성지순례 12일째 쉬라바스티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2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부처님이 성도 후 가장 오랜 기간 머무셨다는 기원정사가 있는 쉬라바스티에서 그 숨결을 느끼며 하루 종일 머뭅니다.nbspnbsp기원정사 가까이에 있는 한국 절인 천축선원과 스리랑카 절에서 하룻밤을 묵은 순례단은 새벽 4시30분에 일제히 기상하여 5시에 법당과 법당 복도에 줄을 맞추고 앉아 새벽 예불을 함께 올렸습니다. 천축선원의 법당은 복도 끝에 위치해 있는데 내부는 하얀 벽면으로 정갈하고 포근한 분위기였습니다. 어제 하루 동안 순례를 하며 불편함에 사로잡혀 바깥 경계를 탓하며 내 마음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 하루를 시작합니다.nbspnbspnbsp▲ 천축선원에서의 새벽 예불nbsp아침 예불 후 500여명의 순례객은 가사를 정갈히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정문 앞에서 천불화현탑까지 한줄로 서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앞뒤 간격이 떨어지지 않게 왼발 오른발을 알아차리며 ‘행선’을 하면서 길고 긴 줄을 지어 새벽 안개를 가릅니다. 스님께서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한 눈 팔지 말고 오백 비구가 기러기처럼 걸어갔던 것처럼 천천히 한 시간 가량 정진하며 가자”고 하십니다.nbspnbsp조금 벗어나니 도로가 나왔습니다. 어스럼한 불빛에 수행자들이 도로에 한줄로 길게 늘어선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간간이 트럭이 몇 대 지나갈 뿐 주변은 어둠이 자욱한 가운데 천불화현탑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nbsp동산 모양을 한 탑을 중심으로 우리 500여명 순례객은 석가모니 염불을 하며 스님을 따라 두 줄 세 줄 질서있게 탑돌이를 하는데, 이는 마치 바다를 가르는 날렵한 보트가 파도를 가르듯 멋지고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nbspnbspnbsp탑돌이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천불화현탑은 어떤 곳인지 간단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nbspnbspnbsp“이곳 사위성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인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수행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자타장자 등 많은 분들이 ”이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무언가 기적을 보여주셔야 이들에게 믿음이 생기겠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 간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들의 얘기가 합당하다고 생각하셔서 아무날 아무시에 성 밖에 나오너라 하시고는 이 지점을 지정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이곳에 모였을 때 부처님께서 망고씨 하나를 이곳에 심어서 조금 기다리니까 싹이 트고 점점 자라서 나무가 큰 고목이 되어 꽃이 피고 망고가 주렁주렁 열렸다고 합니다. 조금 있으니까 그 망고가 전부 부처님으로 화해서 천 부처님이 동시에 출현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위성 사람들은 그제서야 부처님 법을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쉬라바스티를 상징할 때는 천불화현의 그림이 그려집니다.nbsp이것은 부처님의 법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얘기인데 인도의 종교적인 성향과 맞딱드려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이 초기부터 널리 알려진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성스러운 곳에 저희들이 왔기 때문에 탑을 향해 삼배를 먼저 하겠습니다.“nbsp이어서 선 채로 탑을 향해 삼배를 하고 반야심경을 봉독하였습니다.nbspnbsp순례단은 다시 그 정열 그대로 기원정사를 향해 도보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도중 어느덧 날이 밝아 자전거 탄 주민들도 보이고 형제인지 친구인지 모를 소년 둘이서 따라오며 꽃을 팔기도 했습니다.nbspnbsp가다가 Korea Temple 이라고 씌어진 간판을 지나갔는데 알고 보니 순례단이 묵었던 천축선원이었습니다. 양옆에 태극 모양의 돌이 눈에 들어오니 인도 불교성지에 한국 절이 있어 자랑스러웠습니다.nbspnbspnbsp오백명이 한줄로 길게 서서 기원정사를 향해 걷는 길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오백 제자들과 함께 사위성으로 걸식을 하러 가기 위해 이렇게 걸어가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치 당시의 부처님 제자 중에 한 명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무변심 법사님의 낭랑하고도 맑은 목소리를 따라 한발 한발 계속 걷다보니 어느덧 서서히 기원정사가 가까워져 왔습니다.nbspnbspnbsp7시 30분쯤이되자 공원처럼 꾸며놓은 기원정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례객들은 향에 불을 붙이고 석가모나불 정근을 하면서 드디어 기원정사로 들어갑니다. 500여명이 길게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질 않았는데, 긴 행렬이 기원정사 곳곳을 스님을 따라 물흐르듯이 밟아보며 부처님과 당시 제자들의 숨결을 느껴봅니다.nbsp부처님이 머무셨다는 자리에 세워진 ‘간디 쿠타’ 라고 하는 작은 탑을 바라보며 500여명의 순례객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섰습니다. 스님께서는 기원정사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여기까지 걸어오신다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이곳이 부처님이 작은 초막에 머무셨던 ‘간다쿠티’ 자리입니다. 성도 후 3년 만에 수다타장자가 이 아름다운 동산을 부처님께 기증을 해서 이곳 기원정사에 부처님과 천이백오십명의 비구와 함께 머무셨습니다.nbspnbsp아까 전에 우물을 하나 돌았는데 그것은 부처님이 드시던 우물입니다. 아난 존자가 그 물을 퍼서 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발을 씻을 물을 떠드렸다고 합니다.nbspnbsp또 아까전에 직사각형으로 네모난 부분을 돌았는데 그 자리는 부처님이 행선하셨던 자리입니다. 열아홉 발자욱이니까 부처님의 보폭이 어느 정도이셨는지 한번 재어보면 됩니다. 편안하게 걷는데도 스물네 발자욱이 되면 부처님이 나보다 보폭이 크셨다고 생각하면 되고, 열일곱 발자국 밖에 안된다고 하면 부처님이 나보다 보폭이 적으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nbsp부처님이 성도 후 45년 동안 24안거를 사위성에서 보내셨는데, 그러니까 절반이 넘는 시간을 사위성에서 보내신 겁니다. 그 가운데 19안거를 이곳 기원정사에서 보냈습니다. 즉 이곳은 부처님이 가장 오래 주석하셨던 곳입니다. 그래서 불교 경전의 절반 가까이가 이곳에서 설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부처님이 머무셨던 자리를 향해서 먼저 삼배를 드리겠습니다.”nbsp삼배를 정성껏 올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공양 예불을 올립니다.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바로 이곳에서 예불을 올리다니 또한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bspnbspnbsp예불을 마치고 이어서 스님께서 간절한 발원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저희 한국에서 온 정토불교대학생과 졸업생과 정토행자 대중 오백여 일동은 부처님께서 장기 주석하셨던 코살라국 쉬라바스티 사위성 기원정사에 두손 모아 합장하옵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면서 간절하게 발원하옵니다. 부처님께서 장기 주석하시고 금강경이 설해진 이곳 기원정사 참배 인연 공덕으로 대중 일동은 다생겁래의 업장이 소멸하고 세세생생 보살도 행하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또한 우리가 태어난 대한민국에 회향하오니 이 인연공덕으로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병듦에서 벗어나고 갖가지 인권침해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런 복덕이 내리기를 발원하옵니다. 또한 남북 간의 전쟁이 없는 항구적 평화체제가 수립되고 한발 나아가 통일 대한민국을 발원하오며, 통일 대한민국은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과 협력하여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여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하늘의 모든 신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또한 저희들의 기원정사 참배 인연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세계는 평화롭고 세계 만민은 행복하여지이다. 인간 세상에 갖가지 차별을 떠나고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부처의 본성을 밝혀 해탈열반을 성취하기를 발원하옵니다. 또한 이곳을 참배한 인연공덕으로 조상 영가님들과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함께 왕생극락하옵소서. 제불보살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륭팔부 모든 신중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이어서 순례단은 모두 자리에 앉고, 스님께서는 기원정사의 창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스님은 항상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머릿 속으로 그릴 수 있게 묘사해 주십니다. 그래서 벽돌 더미의 유적지가 곧 부처님 당시의 상황으로 금새 재현이 됩니다.nbspnbspnbsp“저희가 참배한 이곳은 여기 말로 ‘제따바나’입니다. 제따는 사람 이름이고 바나는 숲이란 뜻입니다. 즉 제따의 숲이란 뜻입니다. 제따를 한문으로 써서 우리식으로 읽으면 ‘기타’가 됩니다. 기타 태자의 숲인데 이것을 한문으로 옮기면 ‘기수급고독원’입니다. 그리고 ‘급고독’ 이란 말은 수닷타장자의 한문 이름입니다. 외로운 이를 돕는 자란 뜻입니다. 그래서 기타 태자의 숲인 ‘기수’에 ‘급고독’ 장자가 절을 지엇다고 해서 합하니까 ‘기수급고독원’이 되는 것입니다. 기수급고독원을 줄인 말이 ‘기원정사’가 됩니다.nbspnbsp이 절이 어떻게 지어졌느냐 하면요. 부처님께서 성도 후 3년 죽림정사에 계실 때 사위성에 사는 수자타장자가 사업을 하러 왕사성에 갔어요. 왕사성의 친구 집에 갔더니 몇 번을 불러도 안나와서 섭섭해 하고 있는데, 친구가 급히 나오면서 “내일 아침에 부처님과 대중들을 공양 초대를 해서 그거 준비하느라고 바빴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수닷타장자는 부처님의 법문과 그 행적에 대해 친구로부터 얘기를 듣게 됩니다. 친구는 들어가고 밤에 잠을 자는데 내일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다고 하니까 잠이 오질 않는 거예요. 밤을 새고 안개가 자욱한 새벽녘에 숲속을 산책하는데 저 나무 밑에 수행자가 앉아 있는데 너무나 거룩해 보이는 거였어요. 그래서 다가가서 절을 하면서 “부처님이 아니십니까?” 하니까 그렇다고 하시면서 “장자여, 내 당신이 오기를 이미 오래 기다렸소” 라고 하십니다. 장자는 부처님께 설법을 청했고 그 설법을 듣고 장자는 마음의 무지가 다 사라지고 법열의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저희 나라 사위성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법을 듣기를 원합니다” 하고 요청하니 침묵으로 승낙하십니다.nbspnbspnbsp장자는 기쁜 마음으로 사위성에 돌아와서 3개월 후에 부처님이 오실 것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죽림정사처럼 성으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이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소유주가 이 나라의 기타 태자였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찾아가서 “이 숲을 저에게 파십시오” 한 거예요. 그런데 이 기타 태자가 기분이 좀 나빴나봐요. ‘이게 돈 좀 있다고 그러는가’ 싶어서 “안 판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자타장자가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하니 태자는 파지 않을 심상으로 “금화를 깐다면 그만큼 팔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자는 창고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금을 가져와서 이 땅에 깔았습니다. 그런데 그 양이 입구에 좀 깔고 마는 정도 밖에 안되었어요. 이 소식을 듣고 태자가 깜짝 놀라 가보니 진짜 금을 깔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는 친구들에게 다 연락해서 금을 빌려와서 깔고 온갖 방법으로 금을 깔려고 했어요. 그래서 기타 태자가 “도대체 이 땅을 사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고 묻습니다. 그러자 장자는 자신이 만난 부처님에 대해서 주욱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태자가 감동을 해서 “그렇게 좋은 일이라면 나머지 땅은 내가 기증을 하겠소” 라고 합니다.nbspnbsp그래서 이곳이 기타 태자의 이름을 따서 제따의 숲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제따의 숲이라고 하면 급고독 장자의 노고는 빠지게 되잖아요. 그래서 제따의 숲에 급고독 장자가 절을 지었다고 해서 ‘기수급고독원’ 이를 줄여서 ‘기원정사’라고 한 겁니다. 많은 조각과 그림에 기원정사의 창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수닷타장자는 부처님을 만나기 전에도 자선 사업가로서 좋은 일을 많이 해왔으며, 부처님을 만난 이후에는 재가 신자였지만 10대 제자에 버금가는 역할을 했다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닷타장자처럼 10대 제자에 버금가는 역할을 한 재가 신자로 왕사성의 지이바카, 사위성의 베사카 부인도 함께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 분들은 승단을 운영하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해서 경전에도 수없이 언급된다고 합니다.nbspnbspnbsp그리고 이곳 사위성에 있었던 다양한 교화 사례를 재미있고 실감나게 들려주셨습니다. 먼저 왕이 백성을 마음대로 죽이고 하찮은 물건처럼 취급하던 시대에 프리세나짓왕이 찾아와서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서 부처님께서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십시오” 라고 대답해주신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청와대에 찾아가서 이런 얘기를 하기가 어려운데 절대 왕정의 시대에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하니 부처님의 사회적 인식과 그 당당함에 깊은 존경의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곳 기원정사는 45안거 중에 19안거를 부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수많은 설법이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교화 사례들을 주욱 들려주셨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듣듯 눈을 감고 수신기로 스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머리 속으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nbspnbsp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앙굴리말라를 교화한 이야기, 눈먼 비구를 교화한 이야기, 병든 비구를 교화한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경전을 통해 만나고 스님의 생생한 법문을 통해 다시 만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nbspnbspnbsp하지만 부처님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비난이나 위협도 많았다고 합니다. 육사외도의 한 종파가 자기 신자의 딸에게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법문을 하고 있는데 가서 임신한 배를 보이면서 “당신은 제자들만 돌보고, 당신 애기가 낳을 때가 다 되어가는데 왜 돌보지 않느냐?” 고 하면서 난처한 상황을 만들게 한 이야기, 아주 예쁜 처녀에게 저녁만 되면 정사 쪽으로 걸어가게 하고 아침만 되면 정사에서 걸어나오게 해서 그 처녀를 실종시킨 다음 기원정사에서 비구들이 성추행을 하고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려서 비구들이 탁발을 하나도 못 얻어먹게 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 왕사성에서 “어제는 누구의 아들을 뺏어가더니, 오늘은 누구의 남편을 뺏어가더니, 내일은 또 누구의 제자를 뺏어갈고?” 이런 노래를 부른 이야기 등을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nbsp그러나 많은 비난을 받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여래는 다만 진리의 길을 갈 뿐이다. 그 진리의 길을 듣고 귀의하지 않는 자 누가 있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스님께서는 “우리도 늘 오해를 받고 비난을 받을 수 있는데 그 때 우리는 늘 붓다를 생각해야 합니다. 붓다처럼 위대한 분도 비난을 받고 곤궁에 처했는데 우리 같은 수준에서 뭐 그렇게 억울해할 필요가 있겠어요?” 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비난이나 오해를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수용할 것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nbspnbsp또 부처님께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병든 비구를 찾아가서 위로해 주시면서 정진도 해야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도 늘 함께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수행자들이 왜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가 되는 이야기라며 자세히 들려주셨습니다. 특히 대만의 자재공덕회가 이런 사상을 기초로 일천만명의 봉사자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는 사례를 함께 소개해 주셨습니다.nbspnbsp그리고 부처님께서 이곳 기원정사에 계실 때 천이백오십명이 한 줄로 서서 골목골목 들어가서 차례로 밥빌기를 마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셔서 밥을 먹고 발우를 씻고 옷을 접어두고 명상에 들었는데, 그 때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보고 장로 수보리가 일어나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금강경’도 바로 이곳 기원정사가 배경이라고 강조하시면서 다함께 그 내용이 되는 경전을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500여명의 순례단은 세 번에 걸쳐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치면 다시 스님의 설명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아니룻다가 “눈은 잠을 먹이로 하는데, 해탈열반은 정진을 먹이로 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잠을 자지 않고 정진을 하다가 눈이 멀었지만 천안통을 얻었다는 이야기, 마하가섭 존자가 한번 지적을 받고 소박하게 살아서 두타 제일이 된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법에 귀의한 사람들의 마음 자세에 대해서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암나빨리는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왕자들이 천금을 준다고 했지만 부처님께 공양 올릴 기회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그 당당함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nbsp또 절약하는 승가, 계급차별을 타파한 이야기,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에게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서 해방시킨 아름다운 모습, 손녀를 잃고 슬퍼하다가 부처님의 법을 듣고 밝아진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임을 강조해 주셨습니다.nbspnbsp“부처님 문답의 가장 큰 특징은 대화의 화제를 바꾸면서 스스로 모순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이렇다 저렇다라고 답을 하는 것이 아니고 너가 그렇다면 이렇게 되겠네 하시며 그 모순을 바로 깨치게 해주셨습니다. 부처님이 어느날 바라문의 집에 탁발을 하러 갔더니 그 바라문이 막 욕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빙긋이 웃으셨어요. 우리라면 입씨름을 했겠지만 ”왜 웃나?“고 따지는 말에 부처님께서는 화제를 딱 바꾸면서 ”당신 집에 손님이 가끔 옵니까? 그 사람이 선물 사올 때가 있죠. 선물을 사왔는데 그 선물을 안 받으면 그 선물이 누구 것이요?“ 라고 묻습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냐?“고 답하자 부처님은 ”당신이 지금 나한테 욕을 선물했는데 그 욕을 내가 안받으면 그 욕은 누구 것이요?“ 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 때 그 바라문이 탁 깨닫고 부처님을 극진히 모셨다고 합니다. 이 모습만 보면 어떻습니까? 저 두 사람은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기에 보자마자 공양을 올리나 싶죠. 그러니까 우리가 자꾸 전생과 내생 이야기를 하는데 삼생이 지금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하는 것이 내생에도 영향을 주지만 전생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 바라문이 욕을 한다고 같이 맞대응을 해서 욕을 했으면 삼생이 악연이 되는데, 부처님은 빙긋이 웃음으로해서 삼생이 선연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의 길은 먼 것이 아니고 상대가 욕을 할 때 빙긋이 웃어주면 삼생의 업이 다 녹는 겁니다. 그런 부처님의 법을 생각하면서 다음 경전독송을 해보겠습니다.”nbsp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며 다시 경전독송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를 떠올리며 명상의 시간도 가져봅니다.nbspnbspnbsp명상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이렇게 화제를 바꾸어서 자신의 모순을 깨닫게 한 부처님의 교화사례를 다양하게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이어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별로 모여 앉아 점심 공양도 하고, 산책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양을 하고 있는데 주위에 원숭이들이 곳곳을 습격해서 먹을 것을 뺏어갔습니다. 어떤 분은 원숭이가 밥을 담은 락앤락 통을 뺏어 들고 나무 위로 달아나서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또 스텝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은 곳에는 원숭이가 간식이 가득 든 봉지를 들고 달아나서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원숭이들은 사탕봉지를 뜯어서 사탕을 하나씩 까서 먹기까지 했습니다.nbspnbsp▲ 락앤락 통을 뺏어간 원숭이nbsp원숭이에게 음식을 뺏기기는 했지만 순례객들은 모두 다 이런 상황을 재미있어 했습니다. 더군다나 바이샬리에서는 원숭이들이 부처님을 알아보고 꿀공양을 올렸다는데 이런 원숭이들이 그렇게 했다니 참으로 희귀한 일이였구나 다시한번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머물렀던 간다 쿠티, 부처님이 드셨던 우물, 부처님의 제자들이 머무셨다고 하는 곳곳의 정사터, 부처님을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했던 코삼비 쿠티, 부처님이 행선하셨던 곳,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생각하라고 아난 존자가 보드가야에서 가져온 보리수 나무 등에 대해서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곳곳을 둘러보며 기원정사에서의 부처님의 체취를 느껴봅니다.nbspnbsp▲ 간디쿠티 위에 올라가 기념 사진을 찍는 순례객들nbsp▲ 부처님이 행선을 하셨다는 곳을 직접 거닐어 보며nbsp▲ 아난다가 부처님께 드릴 물을 떳다는 우물nbsp▲ 아난다가 보드가야에서 가져왔다는 보디 트리nbspnbsp휴식 중간에 공양을 하고 있는데 스님께서는 쉬시지도 않으시고 “그래도 인도에 왔는데 스님과 개별 사진을 다들 찍고 싶다고 하니까 시간을 드리겠다” 고 하시면서 일대일로 스님과 개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내주셨습니다. 500여명이 한명씩 나와 사진을 찍어야 해서 일인당 3초씩 “하나, 둘, 셋” 하면 나와서 찍고 들어가고 하는 식으로 1시간이 넘게 사진만 찍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이어서 경전독송과 법문 시간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인격은 그 자체로도 빛나지만 더욱더 빛나는 것은 나쁜 이를 만났을 때 더욱 빛을 발하셨다”고 하시면서 춘다의 공양과 마지막 제자 수바드라를 대했던 부처님의 태도, 앙굴리말라의 교화이야기 등을 들려주시며 붓다의 위대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99명을 죽인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닫고 귀의를 한 후에 하루는 걸식을 나갔어요. 어떤 집에 걸식을 하러 갔는데 앙굴리말라가 오니 산모가 이를 보고 놀라서 기절을 하고 쓰러졌어요.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부처님께 돌아가서 ”내가 이미 지난 악행을 참회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아힘사 비구여,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한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해라. 그리고 “당신이 출가한 이후로는 그런 적이 없지 않소?” 이렇게 말씀하지자 앙굴리말라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말을 하니 그 여인이 정신이 들어서 애기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괴력을 가진 사나이가 아니고 온순한 수행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다시 돌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제 앙굴리말라가 나타나도 도망을 가지 않고, 전부 돌멩이를 가져와서 집어 던졌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시내에 탁발을 하러 갔다가 무수한 돌멩이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결국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품에서 ”저는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하면서 순교를 했습니다. 이렇게 괴력을 가진 사람이 불법에 귀의하게 되면 자기가 죽어도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잖아요. 우리는 자기가 위험하면 괴력을 드러내서 사람들을 다 도망가게 해버렸을 겁니다. 앙굴리말라에게는 죽는 것보다 불법이 더 우위에 있었던 겁니다.”nbsp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머리를 내리쳐서 겸손하게 만들었고, 또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를 주셨고,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위로하고 격려해서 자신감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이런 부처님의 여러 모습을 스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이곳은 금강경이 설해준 곳이기 때문에 한국 불자들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한국에 돌아가서 아함경을 비롯해서 금강경을 꼭 공부해 볼 것”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그리고 성지를 참배할 때마다 예불문을 계속 되뇌였는데 스님께서는 예불문의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께서 직접 쓰신 부처님의 삶을 묘사한 발원문을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발원문을 다 읽고 스님께서 “불자로서의 자부심을 좀 느껴요?”라고 물으셨고 대중은 힘차게 “네”라고 답했습니다. “우리는 불법을 많이 알기는 하는데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하시며 “자기를 괴롭히지 말고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안 죽고 산 것만 해도 인생은 성공한 것이예요” 라고 덧붙이시고, “자기를 아끼며 살자”는 말씀으로 법문을 마무리해주셨습니다.nbspnbsp오후 3시 무렵 사홍서원으로 마무리하고 다시 순례단은 가사를 수하고 한 줄로 서서 사위성을 향해 갑니다.nbspnbspnbsp앙굴라말라의 탑과 수닷타장자의 탑이 마주보고 있는 사위성에 도착하여 앙굴라말라의 탑을 먼저 한바퀴 돌고 계속해서 수닷타장자탑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앙굴리말라의 탑은 아마도 앙굴리말라가 돌멩이를 맞고 쓰러진 곳에 세워진 곳이 아니겠냐며 스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nbsp▲ 앙굴리말라의 탑nbsp그리고 수닷타장자의 탑 주변을 둘러싸고 삼귀의 반야심경을 올렸습니다. 재가신자로서 10대 제자만큼이나 큰 공로를 하신 그 마음을 생각하며 탑을 향해 정성껏 합장을 했습니다.nbspnbsp▲ 수닷타장자의 탑nbsp삼삼오오 모여 사진도 찍고 화장실도 다녀온 후 모두 천축선원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도착하니 오늘 저녁공양은 라면이라는 유수 스님의 공지가 나옵니다. 오랜만에 나온 특별식에 모두들 기뻐하면서 공양간으로 향했습니다. 라면을 후후 불어서 먹는데 추운 날씨 긴 여정에도 모두 활기차고 환한 모습입니다.nbsp▲ 천축선원nbsp오후 6시 10분, 공양 후 천축선원 야외에 모셔진 불상 앞에서 야단법석이 열렸습니다. 천축선원 주지스님이신 대인 스님께 법문을 청하여 들었습니다.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시는 법륜 스님과 정토행자님들이 한국 불교의 진정한 대안이 아닌가” 하시면서 대인스님 또한 정토행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감동적인 법문을 들려주셨습니다.nbsp▲ 천축선원의 대인스님nbsp이어서 법륜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오늘 법문 내용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nbsp“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가 무엇인가 많은 불자들이 궁금함이 많은데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간에도 서로 벽이 있죠.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나라 모든 인종 모든 계급, 이런 칸막이를 무너뜨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 통찰하는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즉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진리의 요소가 있으면 수용을 해가는 그런 가르침인데 어찌 불교 안에 소승이니 대승이니 칸막이를 가르고 우열을 논하는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소승은 살생만 안하면 된다, 도둑질만 안하면 된다, 사음만 안하면 된다, 거짓말만 안하면 된다는 이 미니멈에 너무 집착한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죠. 그러나 소승의 장점은 그건 지킨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대승은 살생 안하는 것이나 도둑질 안하는 것으로 부처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고, 가난한 이를 위해서 베풀고, 거짓말 안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알려주고, 욕설 안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자비롭게 위로해 주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이익되게 하라는 것이 원래 대승의 정신이었습니다. 소승이 미니멈에만 만족하기 때문에 그 한계를 지적하고 더 적극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대승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대승이 되려면 소승 수행을 다 지키고 대승을 해야 합니다.nbspnbspnbsp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해탈 즉 성불입니다. 자기가 괴롭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만 괴롭지 않으면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대승의 수행법은 그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 베풀어라는 것입니다. 대승은 어느정도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느냐면 그 표현이 ‘비록 내가 성불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중생을 다 구제해야 되겠다’ 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대승이 잘못된 것은 자기 정진을 안한다는 겁니다. 남을 다 돕지 못해서 괴롭고, 일을 벌려놓고 수습을 못해서 괴롭고, 불쌍한 사람을 보고 불쌍해서 괴롭고, 이렇게 세상에 좋은 일을 하지만 스스로 괴로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세상에서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수행자는 아닙니다. 그래서 이 대승의 문제점은 미니멈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멕시멈의 베푸는 원은 있는데 미니멈의 자기 원칙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세속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 대승불교인들이 깊이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괴롭지 않는 경지로 가는 수행은 기본입니다. 그것을 딛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nbspnbsp수행의 관점을 놓치면 불평불만이 생깁니다. 수행의 관점을 놓치면 우리가 이렇게 순례를 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요. 우리가 이렇게 불편을 감수하면서 순례를 하는 이유는 그 미묘한 법을 가르치셨던 그 분에 대한 존경 때문에 순례를 하는 것이거든요.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에 이 세상에 출현해서 인간이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이 미묘한 법을 설한 그 분을 존경해서 나도 그분처럼 조금이라도 닮아가려고 하고, 또 이런 사람이 직접 있었는지 정말 이런 법문을 설했는지 이렇게 직접 확인하러 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다니면서 불평불만을 하고 다닌다면 좀 문제겠죠. 불편하면 짜증이 나게 되어있는 우리의 이 업식을 보고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잖아요. 그런데서 우리는 수행자로서 순례하는 것이지 여행객이 아닙니다. 스님도 이렇게 다니면 불편해요. 그러나 이 불편이 불만이 되면 안됩니다. 나도 모르게 불만으로 나타나면 즉시 되돌이키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nbspnbsp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대승이니 소승이니 너무 나누면 안됩니다. 다만 대승은 소승이 갖는 한계를 극복해보려고 일어난 새로운 운동입니다. 그래서 소승인 테라바타보다 우리가 조금 더 나아가야 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테라바타 보다 더 나은 것이 별로 없어요. 이론적으로만대승을 주장하지 실제 삶이 미니멈의 인격을 안 갖추고 있습니다. 대승이 대승답지가 못하죠. 당연히 선불교도 대승불교가 갖는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나온 불교인데 이것 또한 선불교가 선불교답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것이 선불교인데 지금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테바바타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 기본을 조금 더 다지자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발 한발 나아가서 대승의 종지와 선의 종지를 이어나가자는 것입니다.nbspnbsp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다는 이치가 일치가 안되면 대승은 세속화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서 우리는 늘 수행자로서의 미니멈인 기본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미니멈을 딱 잡고 남을 손해 끼치지 않는 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수행자로서의 기본을 하고 다음으로 보디사트바로 한발 더 나아가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걸 순례를 하면서 다시 돌아봤으면 해요.”nbsp스님의 법문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500명 순레객들은 일찍 취침을 하였습니다. 어느새 내일 상카시아가 8대 성지 순례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은 새벽 3시20분에 기상하여 4시에 상카시아로 출발합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
2015.1.17 인도성지순례 11일째 탄센, 삐쁘라하와
▲ 탄센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1일째 되는 날입니다.nbspnbsp이른 새벽 2시 30분, 룸비니 대성 석가사의 정원에는 하늘의 별과 옅은 안개가 탄센으로 떠나는 순례객들을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품과도 같았던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짐을 버스로 옮기며 좌석에 앉으니 수신기에서는 스님의 익숙하고도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와 출발을 독려했습니다.nbspnbsp▲ 새벽 2시 30분, 룸비니 대성석가사를 출발하며nbsp오늘 일정은 히말라야 설산인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를 볼 수 있는 탄센의 언덕까지 오르는 산행으로 시작합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 안에서 천일결사 기도가 시작됩니다. 버스 좌석에 앉아 다리와 양손을 모으고 새벽 예불이 시작됩니다. 낮으면서도 또렷한 음성으로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를 마쳤습니다.nbspnbsp천일결사기도가 끝나자, 버스 불이 꺼지고 순례객들은 앉은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버스가 절벽과도 같은 위험한 길을 따라 해발 2000미터를 오르는 동안에도 순례객들은 잠에 빠져 있다가, 탄센 도착을 알리는 스님의 음성에 따라 옷을 주섬거려 입고, 무지 추울 것이라 예상하고 겹겹이 껴입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nbspnbsp500여명의 순례단 선두에 서신 스님께서는 대중들에게 누차에 걸쳐 천천히 오라며 당부하셨습니다. 선두가 너무 빨리 가면 후미가 힘들다 하시며, 올라가는 길의 왼쪽으로 붙어서 오라고 당부하셨지만, 대중들은 조금이라도 스님 곁에 서서 오르려고 줄이 두터워지는 모양새였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여기는 옛 탄센 왕국의 땅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도이며 몽골리안인데 아무리 지형이 험해도 물만 있으면 어디든 사람들은 살 수 있다” 고 하시면서 이곳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산 곳곳에 물을 뜰 수 있는 샘터가 보였습니다. 이 산에는 나무가 많아서 이렇게 물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리는 깨끗하고, 길가 나무들은 꽃들이 노랗게 빨갛게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탄센 마을 사람들은 순례단을 신기해하면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습니다.nbspnbsp꼬불꼬불 언덕길로 1km 정도를 가다보니 계단이 나왔습니다. 계단 길 옆으로는 벌써 복사꽃이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한 계단씩 올라가자, 여기가 고지대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발 아래 산들 사이로 안개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안개바다 위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며, 청명한 하늘이 열렸습니다.nbspnbspnbsp햇살을 받으며 아름다운 여인의 머릿결 같은 솔잎이 반짝였습니다. 키가 커다란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가자, 폭신한 흙길과 소나무 내음에 그간 먼지와 긴 이동거리에 피곤했던 순례객들의 심신이 치유되는 듯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길을 걸으시면서도 설산의 위치를 짚어주시며 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카필라성에서 설산을 보시면서 성장하셨을 것라고 일러주시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 저 멀리 안나푸르나가 보입니다.nbspnbsp언덕 위에 전망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가 돌아 나오면서 달맞이꽃 같은 노란꽃 무리를 만나고, 길을 안내해주려는 것인양 스님 뒤를 따라 다니는 동네 개들도 보았습니다.nbspnbspnbsp햇살 따뜻한 넓은 터가 있는 곳에 다다라 조금 쉬기로 했습니다. 휴식 후 스님께서 노래 잘 하는 사람들 나오라 하셔서 몇 분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신기로 구성진 노래 가락을 들려오자 몇몇 분들은 추임새를 넣고 순례단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nbspnbspnbsp순식간에 흥이 오르고 너도 나도 서로 노래를 부르려는 사람들이 손을 듭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아쉽게도 “이제 그만해요. 오늘 갈 길이 바빠요.” 하셔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산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내려오는 길은 가벼웠습니다. 목표를 향해 올라갈 때보다 여유가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 사는 모습이 눈에 정겹게 들어왔습니다. 버스 주차한 곳으로 가서 조별로 모여 도란도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는데 상쾌하고 쾌적한 산행 이후의 밥맛이 꿀맛입니다.nbspnbspnbsp이어서 스님께서는 대성 석가사의 총무 스님을 소개해주셨고 총무 스님은 산행 동행 이후 남은 순례 일정 동안 건강하시라는 인사 말씀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식사 후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먼 길을 출발입니다. 인도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국경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미리 도착하여 출입국 수속 준비를 해주신 실무자 스텝분들 덕분으로, 순례객들은 편안하게 빠른 수속을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nbspnbsp국경을 통과해서 쉬라바스티로 가는 길에 카필라성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러 출발합니다. 차창 너머로 수평선까지 펼쳐진 연두빛 밀밭과 노란 유채밭이 보입니다. 간혹 차창을 통해 만나는 아이들은 활짝 웃으며 손을 힘껏 흔들어줍니다. 울퉁불퉁 비포장 시골길을 한참 동안 달려야 했는데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순례객들은 피곤하여 모두다 잠을 청하느라 조용했습니다,nbspnbsp덜컹 거리며 달린 끝에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터에 도착했습니다. 오는 도중에 2호차는 차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를 하러 가야 해서 2호차 순례객들은 모두 다른 차로 나뉘어서 탑승했고, 13호차가 도중에 접촉사고가 나서 수습을 하고 오느라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약간의 사고가 있었지만 먼길을 무사히 도착해서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nbspnbsp▲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nbsp도착하자마자 공양물 준비팀은 제기와 제상, 과일과 과자, 사탕을 가지고 공양올릴 준비를 합니다. 스님과 대중들은 향에 불을 켜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탑을 세 바퀴 돌았습니다.nbspnbspnbsp향받이에 향을 모으고 500 대중 각자의 자리를 잡고 예불 준비를 합니다. 자리가 정돈되자 무변심 법사님의 목탁에 맞추어 일제히 예불을 올립니다. 합장하고 몸을 숙여 절을 올립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께서 발원문을 낭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오늘 저희들은 카필라바스투 샤끼야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을 친견하오니 이같은 공덕은 참으로 희유하고도 희유한 공덕이라, 다생겁래로 지어온 한량없는 공덕이 있기에 오늘 이렇게 진신사립탑 세 군데를 마지막으로 친견하오니 이와 같이 진신사리탑 친견 인연공덕으로 대중 일동은 다생겁래로 지은 업장 모두 소멸하고 이 공덕을 고통받는 이들에게 회향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이러한 발원 공덕을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조상 영가님들 또한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극락왕생 하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nbsp예불과 발원문이 끝나자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터에 대한 스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스님께서는 아주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듯이 말씀해주십니다.nbspnbsp“먼 길을 돌아 잘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입니다. nbsp우리가 세가지 진신사리탑을 친견했는데 그 첫째가 바이샬리 진신사리탑, 둘째가 랑그람 진신사리탑, 셋째는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입니다.nbspnbsp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은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이 부처님의 진신사리 8분의1을 가져가서 세운 탑입니다. 이 지역 이름을 따서 유적지의 이름은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입니다. 너무 많이 봐서 뭐가 뭔지 분간이 잘 안갈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그거인 것 같고, 사진을 봐도 구분이 안될 거예요. nbspnbspnbsp카필라성도 네팔에 있고, 부처님을 영접한 쿠단 유적지도 네팔에 있고, 룸비니도 네팔에 있고, 랑그람 스투파도 네팔에 있는데, 왜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은 인도에 있을까요? 여기서 3km만 가면 국경입니다. 국경을 통과하여 돌아오다보니까 5시간 걸렸지만 사실은 바로 곁에 있습니다. 카필라성과 룸비니의 중간쯤 되는 곳의 약간 아래 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카필라국의 영토 안에 있었고요.nbspnbsp이 사리탑은 1800년대 후반에 영국 사람이 이 탑을 발굴 했습니다. 사리 용기에서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나왔는데 델리 박물관에 지금 보관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인도가 독립한 후 이 사리탑을 재발굴 했는데 사리탑의 더 아래쪽에 다시 사리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탑이 덧붙여 쌓다 보니 그렇습니다. 이 진신사리탑은 아쇼카 왕 이전에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바로 세워진 탑입니다. 이 사리탑에서는 유골 일부와 명문도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곳은 확정적인 곳입니다.nbspnbspnbsp코살라국의 프리세나짓 왕이 부처님께 귀의한 후 부처님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석가족의 공주를 자신의 후비로 받아들이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이 석가족들이 자존심이 세니까 그렇게 하기는 싫은데 안할 수는 없으니까 하녀를 공주로 분장을 시켜서 시집을 보냈어요. 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이 여인은 왕후는 아니지만 아주 대우받는 후비였어요. 그런데 다른 비의 아들들은 어머니의 고향에 다녀오는데, 이 비의 아들은 어머니가 친정에 가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커서 계속 조르니까 할 수 없이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한 겁니다. 카필라바스투에서는 코살라국의 왕자가 오니까 잘 대우를 해서 보냈어요. 그런데 이 왕자가 돌아가다가 무엇을 방에 두고와서 그것을 가지러 다시 방에 들어가니까 자신이 잤던 방을 하인들이 청소를 하다가 “에이, 더러워” 하면서 소금을 막 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하녀 출신의 아들이 궁중으로 들어가 좋은 방을 차지했으니까 부정 탔다는 겁니다. 그러니 비밀을 아는 사람이 볼 때는 저 아들이 왕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하녀의 아들이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어머니한테 따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사정을 이야기 한 겁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석가족에 대해서 굉장히 적개심을 갖게 되었습니다.nbspnbsp이런 인연이 있는데, 프리세나짓 왕의 아들들이 수십명이여서 왕위를 갖고 쟁탈전을 했는데 결국 이 석가족 하녀의 아들이 형제들을 다 죽이고 왕이 됩니다. 권력을 잡고 나서 제일 먼저 복수하려고 한 대상이 석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서 석가족을 멸해라고 명령합니다. 엄청난 군대가 공격 명령을 받고 카필라성으로 향하는데 그 소식을 듣고 부처님은 군대가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뙤약볕에서 명상을 딱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군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면서 “부처님, 왜 뙤약볕에 앉아 계십니까? 저기 나무 그늘도 있는데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무리 나무 그늘이 좋다 해도 친족의 그늘보다는 못하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장군이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다시 명을 받고 왔는데 또 부처님께서 같은 자리에 앉아 계신 거예요. 똑같은 문답이 오고 갑니다. 이제 세 번째는 ‘부처님이 계시더라도 그냥 갈 수 밖에 없다’ 하고 각오를 하고 나오니 부처님께서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가보니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안 나오셨어요.nbspnbspnbsp결국 성이 함락되고 왕도 잡힌 겁니다. 그런데 왕이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였어요. 명령이 석가족을 멸종시켜라는 것이니까 아이든 어른이든 남자란 남자는 다 죽인 겁니다. 그런에 이 왕이 사정을 했어요. 내가 이 연못에 들어가서 나올 동안까지만 이 사람들을 도망가게 놓아 주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물을 파내니 왕이 물 속에 들어가서 그 머리를 풀어서 나무 뿌리에 묶어 놓고 죽은 겁니다. 그동안에 석가족의 일부가 도망을 갈 수 있었습니다. 도망간 석가족은 왕족이 아니라 수드라의 신분으로 전락해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석가족도 크샤트리아 계급이 아니고 수드라에 속해 있습니다. 대부분 농사 짓고 살고 있고 자녀들은 공무원을 하기도 하고 있습니다.nbspnbsp그런데 이 석가족은 자신의 뿌리가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어요. 인도에 불교가 없어지고 700년이 흘렀으니까요. 다 힌두교 신자가 되었죠. 그러다가 근대 교육이 시작되면서 자신이 부처님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많은 석가족들이 불교 개종 운동을 지금 하고 있어요. 상카시아 지역에 가면 사키아라는 카스트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데 지금 힌두교에서 불교로 한 20 정도 개종을 했습니다. 인구로 따지만 20만명 정도 될 겁니다. 그래서 저희 정토회에서도 그들을 위해서 상카시아에 석가족들을 위한 절을 지어주려고 불사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nbspnbspnbspnbsp그러니 참 묘하죠. 부처님도 왕위를 버렸고, 아들도 출가를 했고, 부인도 출가를 했는데, 이 출가한 사람들은 다 살았어요. 부귀를 누리던 사람은 역사적인 변화 속에서 살해를 당하거나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불멸 후에 이 탑이 쌓아진 것을 보면, 출가한 스님들 중에 석가족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에 탑을 쌓았을 수 있고요. 또 이런 역사와 관계 없이 카필라성이 복속되었지만 이 도시가 없어질 수는 없으니까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탑을 쌓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이런 큰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것은 인연의 이치가 그랬기 때문에 부처님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어요. 그러나 부처님은 법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어요. 이런 성스러운 곳에 지금 우리가 와 있습니다.”nbsp이어서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친견히고 공양을 올리고 108배를 올리면서 순례객들은 스님께서 누차에 걸쳐 말씀하긴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더 느꼈습니다.nbspnbsp진신사리탑터를 나와서 스님께서는 구걸하는 아이들을 일렬로 앉혀서 한명 한명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탕을 똑같이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 사탕 먹고 다음 생애에는 스님이 되겠습니다” 라고 따라하라고 하십니다.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른채 무작정 따라하면서 사탕을 받고선 마냥 좋아합니다.nbspnbspnbsp버스에 올라타서는 쉬라바스티 천축선원에 도착할 때까지 8대 성지와 3군데의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면서 그동안 느꼈던 나누기와 장기자랑 시간을 가지면서 하루의 회포를 풀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먼 거리를 달려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오늘 숙소인 쉬라바스티의 천축선원에 도착했습니다. 별을 보고 시작한 이른 하루를 밤이 깊어 별을 보면서 길고 뿌듯한 하루 일과를 마칩니다. 숙소에 짐을 풀자 일정을 정리하는 잔잔하고 세심한 스님의 안내 음성이 수신기를 통해 들려왔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순례단이 모두 숙소로 들어간 후, 천축선원 주지 대인 스님을 비롯해 이곳에서 불사를 하고 계신 스님 분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같이 차담을 나누셨습니다. 천축선원에서는 정토회 순례단을 위해 오늘과 내일 국과 밥, 반찬 등을 정성껏 지어 주신다고 하셔서 스님들께서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새책 lt지금여기 깨어있기gt와 수건, 양말, 다이어리, 치약, 비누, 볼펜, 커피, 샴푸, 런닝 등 생필품 한 박스를 선물했습니다.nbspnbspnbsp내일은 기원정사가 있는 이곳 쉬라바스티에서 새벽 정진으로 하루를 시작해 천불화현탑과 기원정사, 앙굴리말라탑, 수자타장자탑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이곳 쉬라바스트에서 하루 종일 부처님의 숨결을 느끼며 머물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nbspnbspnbsp
2015.1.16 인도성지순례 10일째 룸비니
▲ 부처님이 태어나고 자란 카필라성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0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자라신 네팔 룸비니에서 하루를 시작합니다.nbspnbsp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 4시30분 대웅전에서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오백여 대중이 모여 법륜 스님과 대성 석가사 총무 보현 스님과 함께 부처님이 태어나신 이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불을 드리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nbspnbsp▲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의 새벽 예불nbsp아직은 캄캄한 새벽,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천일결사기도를 올리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해졌습니다.nbspnbsp▲ 버스 안에서의 천일결사 기도nbsp고요한 새벽 들길을 달리는 버스 안, 차가운 기온으로 뿌옇게 흐려진 창을 연신 닦아내는 버스 조수와 먼 순례 여정을 함께하는 운전기사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한 마음입니다.nbspnbsp이윽고 버스는 안개가 자욱한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캄캄한 어둠을 뚫고 모두들 헤드 랜턴을 비추며 발을 딛고 가사를 여법하게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카필라성의 서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경주의 반월성처럼 생긴 성터에 자리를 잡고 안아 순례단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의 삶에 대하여 스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nbspnbsp▲ 카필라성 안의 태자 궁터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의 고국인 카필라바스투라는 나라이고요. 또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이기도 하고,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이 터는 태자 궁터입니다. 부처님의 집터이죠. 부처님의 고향에 오셔서 부처님이 자란 터에 지금 앉아 있습니다. nbspnbsp정반왕은 40세가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그 기쁨이 너무 컸고 그래서 아들 이름을 싣다르타라고 지었습니다. 싣다르타는 ‘모든 것이 다 뜻대로 이루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히말라야 산에 사는 아시타 선인을 불러서 아이의 운명을 점치게 했습니다. 아시타 선인은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눈물을 흘립니다. 정반왕이 왜 그런가 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세속에 남아 있다면 왕들 중에 왕인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 수도를 하게 되면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가 혼란스럽다 보니 세상을 태평스럽게 하는 성왕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거나 전통 사상이 무너지고 사상이 혼란스러워지니까 모든 것을 깨달은 이 붓다의 출현을 기대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아시타 선인은 ”이 아이는 출가 사문이 되어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다만 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이 분의 가르침을 듣고 나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해서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납니다” 라고 말합니다.nbspnbspnbsp태자는 어느덧 자라서 12살이 되었고 왕이 되는 학습을 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농경제에 참석했습니다. 농부가 밭갈이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농부의 몰골이 너무 비참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고통스러울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부가 쟁기질을 하면서 소를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 채찍을 맞은 소의 엉덩이에 피가 맺혔습니다. 왜 사람은 조금 편리하기 위해서 저렇게 소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쟁기가 땅을 갈자 땅 속에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 나왔습니다. 새들이 날아와서 그 벌레들을 쪼아 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태자는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는 죽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이런 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농경제에 참석하지 않고 염부수 나무 아래에 앉아 소의 큰 눈망울에 고인 눈물을 생각하면서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정반왕은 농경제가 끝나고 아들을 찾았습니다. 아들이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이 너무나 거룩해서 자기도 모르게 절을 했다고 합니다.nbspnbsp이 사건 이후로 싣다르타 태자는 즐거움은 잠시 뿐이고 늘 농경제에서 본 중생의 고통이 생각나고 그러면 즐거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또 사색에 잠기는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반왕은 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많은 별궁을 짓고 연회를 베풀고 했지만 아들의 얼굴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습니다.nbspnbsp농경제 사건 이후 얼마 뒤에 세상에 나가서 민중들의 생활을 시찰했는데, 동쪽 문으로 나가서 늙은이를 만났고, 남쪽 문으로 나가서는 병든 이를 만났습니다. 서쪽 문으로 나가서 죽은 이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기도 하지만 당시 계급 사회에서 민중의 고통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싣다르타는 중생의 고통에 대해서 깊이 느끼게 되고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서서 그 고통이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출가가 인생이 뜻대로 안되어서 하는 것으로 많이들 생각하는데 경전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출가를 했다는 그 원력이 경전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사회 도피처럼 생각하는 이 이미지를 우리가 바꿔야 합니다. 출가는 큰 원을 세워 세상을 뛰어넘는 행위입니다.nbspnbspnbsp북쪽 문으로 나갔을 때 수행자를 만났습니다. 거기에 한 수행자가 조용히 앉아 있는데 몰골은 늙고 병든 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습니다. 입고 입는 옷은 초라하고 몰골은 늙었지만 그의 품위는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그래서 싣다르타는 그 출가사문을 만나면서 모든 고뇌를 벗어날 새로운 길을 발견한 듯 했습니다. 즉 ‘껍데기의 모습은 거지와 똑같은데 인간이 어떻게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저렇게 품위있게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nbspnbsp그래서 정반왕은 혹시 자기가 오래 왕을 해서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해 그런가 해서 한 지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태자가 그 지역에 갔을 때 역시 노예 계급은 헐떡 거리며 일을 하고 있고 소도 숨을 헐떡거리며 쟁기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잘 다스린다는 것은 소에게도 고통이고 노예에게도 고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의 고삐를 풀어서 자연으로 돌려보내라, 그리고 노예 계급을 해방시켜라”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인류사에서 주인이 하인을 해방시킨 첫 번째 시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아무리 잘 통치한다고 해도 그것은 계급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싣다르타가 더욱더 세상에서는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없다고 느낀 계기가 돕니다. 즉 세상의 평화와 행복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 계층의 평화와 행복이지 또 다른 계층에는 큰 고통이고 속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는 불행해야 하는 그런 모순을 느낀 것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출가를 굳건히 결심하고 부모에게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는 길이 있다면 나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누구도 저에게 그 길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 길을 찾아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눈물도 싣다르타의 출가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nbspnbsp출가하는 그날 밤 새벽에 일어나서 아기가 마음에 걸려 문을 살짝 열어보니 부인이 아기를 품에 안고 자고 있었어요. 부인이 깰까 해서 그만두고 나와서 동쪽 문을 뛰어넘었다고 합니다. 왜 성을 뛰어넘었다고 말할까요? 우리 모두는 왕이 되는 것이 꿈이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왕의 지위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왕궁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는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자세여야 합니다. 그 때 출가할 때 ‘내가 깨달아서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할 수 있는 그 좋은 법을 얻기 전까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이런 대결정심을 내고 출가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이곳에서 사셨던 29년 동안의 삶입니다.nbspnbspnbsp어쩌면 이 이야기가 우리와는 더 가깝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붓다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지만 젊은 시절의 붓다는 우리와 똑같이 고뇌하고 헤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청년 싣다르타의 고뇌를 느껴보는 것은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대중과 함께 경전독송을 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다시한번 순례단에게 nbsp“오늘을 사는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지는 못하더라도 좀 검소하게 살아보자”고 하셨습니다. “적게 먹고, 옷을 검소하게 입고, 큰 집으로 자꾸 이사 가려고 하지 말고 좀 검소하게 살아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인류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을 추구하자”고 덧붙이셨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슬이 내린 새벽 카필라성에 앉아 청아한 무변심 법사님의 선창에 따라서 ‘싣다르타의 출가’ 노래를 따라 부르니 한국으로 돌아가면 헐떡거림과 욕심을 좀 내려놓고 더불어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 무변심 법사님이 부르는 ‘싣다르타의 출가’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며nbsp그리고 부처님이 유성출가를 하셨다는 동문으로 가 보았습니다. 원래는 이곳에서 ‘출가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데 이번에는 순례객이 너무 많아 그러지 못하고 잠시 둘러보기만 했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유성출가를 했다는 카필라성의 동문nbsp순례단 전체는 부처님처럼 동문을 뛰어넘지는 못하고, 북문 쪽으로 난 작은 개구멍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소년 싣다르타가 걸었을 논밭이 보이는 시골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탑터가 나타났는데 정반왕과 마야부인을 기린 탑이거나 싣다르타가 북문에서 수행자를 만난 것을 기념한 탑일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탑돌이를 하고 다시 돌아나왔습니다.nbspnbspnbsp카필라성 주위 마을은 2600여년 전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곳 사람들은 헐벗어 있었고 지나가는 순례객들을 향해 구걸의 눈빛을 간절히 보내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다음 순례지인 쿠단으로 향했습니다. 쿠단은 성도 후 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처님을 정반왕이 마중나온 곳으로 이를 기념한 탑이 있는 성지입니다. 스님께서는 성도 후 사위성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들은 정반왕이 부처님께 사신을 보내 왕궁으로 초청하였지만 사신으로 간 사람들 모두 부처님을 친견 후 깨달음을 얻어 출가해 버려서 함흥차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 주셨습니다.nbsp▲ 쿠단nbsp그리고 석가족이 모두 깨달음을 얻었는데 유독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가 정반왕이었다고 합니다. 정반왕에게 부처님은 오직 아들로만 보였기 때문에 그 집착심으로 인해 가장 가까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정반왕의 얘기를 듣고 나니 아무리 부처님과 가까워도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깨달음의 기회도 놓치게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쿠단에 세워진 탑에는 옛날 당시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문양을 직접 보고 만져보며 옛 숨결을 그대로 느껴보았습니다.nbspnbspnbsp다시 대성 석가사로 돌아와서 점심 공양을 맛있게 먹고 룸비니로 걸어갔습니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긴 수로를 따라 1km 걸어가니 드디어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도착했습니다. 어여쁜 꽃이 피어있고, 아름드리 보리수가 있는 아름다운 이곳에서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 스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순례단을 위해 발원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 룸비니nbspnbsp그리고 부처님의 전생담을 기록한 본생경과 부처님의 탄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 동산입니다. 아까 전에 갔던 카필라성과는 28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아이를 낳기 위해 아침 일찍 카필라성을 출발하여 마야 부인의 고향인 데바다하로 가다가 카필라성과 데바다하의 중간 쯤인 이곳에서 산기를 느끼고 아이를 낳았습니다.nbspnbspnbsp그러니 부처님께서는 태어날 때도 길에서, 도를 이룬 것도 길에서, 설법도 길에서, 돌아가시는 것도 길에서,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전 생애가 ‘도’와 관계가 깊습니다. nbspnbsp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즉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과거 수행 이야기가 담긴 자아카타, 한문으로는 본생담이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무려 547편이 남아 있습니다. 내용 전체를 대강 보면 부처님이 처음 발원해서 보디사트바가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보살로 살아간 이야기이고, 마지막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과거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에 선혜라는 이름의 한 동자로 태어나셨습니다. 고귀한 바라문 집안에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20대 초반에 모든 재산을 물려 받았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부모님이 지금의 재산을 모으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는데 돌아가시면서 한푼도 못가져 가는 것을 보고 진정으로 자기 것이 아닌 재산과 명예와 지위에 한평생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를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많은 재산을 왕에게 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숲속으로 가서 수행자가 됩니다.nbspnbspnbsp스승을 찾아 나섰다가 오백 바라문이 모여서 진리를 논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오백 바라문이 묻는 질문에는 선혜 동자가 다 대답을 하는데, 선혜 동자가 묻는 질문에는 오백 바라문이 아무도 대답을 못했어요. 그래서 오백 바라문 중에 한 사람이 “여기서 당신의 스승이 될 사람은 없소. 지금 이 세상에는 연등부처님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라면 당신의 스승이 될 수도 있소” 라고 말하자, 선혜 동자는 연등부처님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연등부처님 근방에는 사람들이 구름때처럼 모여서 곁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견을 못하고 교외로 나가니까 사람들이 길을 닦고 있었어요. 부처님이 이 길로 지나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혜 동자도 길을 닦기로 했습니다. 신통력이 있었기 때문에 신통력으로 길을 닦을 수도 있었는데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몸으로 길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연등부처님과 대중이 오는데 길을 다 못 닦았어요. 그래서 자기 옷을 벗어서 깔았어요. 그래도 모자라서 자기 몸을 뉘었어요. 그래도 모자라서 자기 머리를 풀어서 던졌어요. 그러면서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과 상가 대중이 저를 밟고 지나가십시오” 이렇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신심이 깊구나. 이 인연 공덕으로 다음 생에 부처를 이루리라” 하셨어요.nbspnbsp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보디사트바가 되어서 어떤 때는 원숭이로, 어떤 때는 코끼리로 태어나서 행하는 수많은 보살행이 나옵니다. 그 끝부분에 해당된다고 생각되어지는 얘기가 도솔천의 천주인 호명 보살이 된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세상 사람들이 붓다의 출현을 갈구하는데 그 붓다가 되실 예정자가 호명보살이예요. 그래서 호명보살이 저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누구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할 것인지 살펴서 마야부인을 어머니로 정반왕을 아버지로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 몸을 나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아가 여섯인 흰 코끼리가 되어 마야 부인의 태중에 드는 모습이죠. 이런 전생 이야기가 나옵니다.”nbsp이렇게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듣고, 또 마야부인의 몸에서 태어난 이야기, 태어나서 동서남북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첫 일성을 하신 이야기, 이것은 육도 윤회를 벗어나서 해탈하리란 것과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의미란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신 이유를 들으니 참으로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부처님의 탄생의 과정이 쓰여져 있는 경전을 독송한 후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아쇼카 석주와 부처님의 발자국과 부처님 탄생 설화를 새겨놓은 건물 안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조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무려 52조나 되다 보니 사진 촬영을 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스님과 함께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다며 모두들 기뻐하면서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편안하고 안온한 룸비니 동산을 뒤로하고 다음 순례지인 로히니 강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nbsp nbsp nbspnbsp로히니 강은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와 마야부인의 고향인 꼴리족의 데바다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어느해 가뭄이 심해 석가족과 부처님의 외가족인 꼴리족이 서로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싸움이 시작되어 급기야는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를 부처님께서 중재하셨던 일화가 있는 곳이여서 스님께서는 지나가는 길에 그 일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 로히니 강nbsp“로히니 강 분쟁 사건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부처님이 이를 말린 사건입니다. 석가족과 꼴리족 양쪽 종족의 논밭이 가뭄이 들어서 타들어 갔어요. 이렇게 가다가는 농사를 다 망치게 되니까 한쪽만이라도 곡식을 살리자고 해서 서로 물을 가져가려고 입씨름을 하게 된 거예요. 입씨름을 하다가 결국 주먹 싸움이 되고 주먹 싸움이 서로 돌멩이를 집어 던지는 패싸움이 된 겁니다. 농민들의 분쟁이 결국 군대가 개입하면서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살상을 막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분쟁의 현장에 오십니다.nbspnbsp양쪽 지도자를 불러놓고 물어봅니다. “물이 귀합니까? 사람의 피가 귀합니까?” 그러자 양쪽 지도자가 “어떻게 귀한 피를 하찮은 물에 비유합니까” 대답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그 하찮은 물을 위해서 그 소중한 피를 흘리려고 하지 않소” 라고 얘기합니다. 그 때 그들은 감정에 휩싸여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격화된 감정이 누그러지고 양 종족은 협력을 해서 수로를 새로 개발해 가뭄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nbspnbsp우리는 바로 그 로히니 강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경전을 읽으면서 강이 얼마나 좁으면 서로 돌멩이를 던지며 싸우나 했는데, 정말 돌멩이 갖고 싸울만한 거리죠?nbsp이렇게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두 부족은 전쟁을 멈추고 오히려 수로를 확충하는 쪽으로 힘을 모음으로 해서 더 발전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미움 있는 곳에서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워할 일 없는 곳에서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워할만한 일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미워하지 않을 때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우리 남북 간에도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nbsp그러니 우리 불자들이라면 미워할 만한 상황에서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반도에서도 미워하는 증오의 감정을 종식시키는데 우리 불자들이 좀 더 앞장선다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가져오는데 더 기여를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nbsp그리고 버스 안에서 로히니강에 관한 경전을 읽었습니다. 하루 빨리 남북 대결이 청산되어 통일이 이루어져 남북한 국민들의 고통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 버스 안에서 로히니 강에 관련된 일화가 담긴 경전 독송nbsp다음은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랑그람을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진신사리는 8등분이 되어 각 나라에 모셔졌는데 그 중 부처님의 외가 쪽인 꼴리족이 사리를 가져와 세운 이 탑은 아쇼카 왕 때도 헐리지가 않았다고 합니다.nbspnbsp아직까지 원형이 잘 보존된 귀한 진신사리탑인데, 스님께서는 “이 곳은 성지 순례객 만 명 중에 한 명이 겨우 왔다 가는 곳입니다. 이곳에 온 것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하며 이곳에 참배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인연인지 알려주시며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nbspnbsp“이곳은 라마 마을의 꼴리족이 부처님의 사리 일부를 가져가서 탑을 쌓은 곳입니다. 이곳이 더 소중한 이유는 아쇼카 왕이 사리탑을 헐어서 사리를 꺼내었는데 이곳만은 헐지를 못했다고 해요. 그것은 여기를 지키는 용왕이 ”당신이 나 보다 사리를 더 잘 지킬 수 있으면 모셔가라“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여기 주위가 빙 돌아가면서 강입니다. 호수 속에 탑을 쌓아놓은 것처럼 섬과 같이 딱 형성되어 있어요. 묘합니다. 이 탑을 헐려고 할 때 큰 뱀이 나타나지 않았겠느냐 싶어요. 인도에서는 뱀을 용왕이라고 해서 성스럽게 생각하거든요.nbspnbsp▲ 랑그람 진신사리탑nbsp그 이후에도 동네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이 탑을 도굴하려고 하는 사람이 탑에 손을 대면 동네 사람들에 얘기에 의하면 천둥이 치거나 사람이 즉사하거나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요. 그래서 여기는 손을 대면 안된다는 소문이 나서 이 탑은 도굴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발굴도 하지 못했다고 해요. 얼마 전에 발굴 했는데, 탑 자체에도 손을 안 대고 변두리만 파서 탑의 형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확인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다른 탑은 다 발굴을 해서 사리를 꺼내었는데, 여기는 아직 발굴이 안되었으니 만약 발굴이 된다면 사리 용기에 부처님 몸의 유골 중에 8분의 1이 가득히 담겨 있겠죠. 그래서 8개의 사리탑 중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랑그람 진신사리탑입니다.nbsp그런데 우리나라 성지순례객들도 여기 와서 참배를 하고 가야 하는데, 이런 사리탑이 있는지도 모르는 분이 많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여기 참배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한국 불교인들을 대표해서 왔다고 생각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불 공양을 올리겠습니다.“nbsp순례단은 진신사리탑을 빙 둘러싸고 정성스럽게 마련한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드리고, 108배 정진을 하였습니다.nbspnbspnbsp이곳은 아이들이 거칠고 위험한 지역이여서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해서 108배 정진을 하는 동안 몇 분씩 자신이 정진하던 자리 앞으로 나와 탑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특히 랑그람 사리탑 앞에서는 이번 인도 성지순례 스탭들과 법사단도 스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인도성지순례 스탭들과 함께nbsp▲ 법사단과 함께nbsp▲ 그룹별로 사진 촬영nbsp오늘 마지막 순례 일정을 마치고 대성 석가사로 돌아왔습니다. 석가사에서 준비한 맛있는 공양을 도반들과 함께 나눠 먹으며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 nbspnbsp저녁 식사 후에는 대웅전에 모여 기쁜 마음으로 저녁예불을 장엄하게 드렸습니다. 예불 후에는 바로 이어서 스님의 즉문즉설 시간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동안 성지순례를 하며 궁금한 점들이 많이 있었을텐데 스님께 직접 질문해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질문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니 곳곳에서 쉴새 없이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자상하게 대답해 주셨고, 또 성지순례를 하며 잠자리를 비롯해 여러 가지가 불편한데 처음 성지순례를 할 때의 경험담을 들려주시면서 순례단을 다시한번 격려해 주셨습닌다.nbspnbsp▲ 대성 석가사 대웅전에서 즉문즉설nbsp“한꺼번에 많이 오다 보니까 불편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조사를 해봅시다. 생각보다 고생이 심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겁을 되게 주더니 생각보다는 낫네 이런 분 손들어 보세요. 오리엔테이션 한 수준 그대로다 이런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제가 입재식 할 때 입 나온다고 얘기했죠? 그래서 성지순례도 하지만 마음 공부도 좀 하라고 했죠? 그동안 입이 좀 나오신 분 손들어 보세요. 다시 들어갔어요? 아직도 입이 나와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직도 입이 잘 안들어가는 사람은 저한테 알려주세요. 제가 가위로 잘라 드릴게요. nbspnbspnbsp사실은 남자들도 군대 다녀온 이후로 이런 생활은 처음 해보셨죠? 군대 말고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런 생활을 할 기회가 없을 거예요. 지금 저희도 대대 병력이 아마 넘을 거예요. 그러니 남자 분들은 군대에 다시 온 기분일 것이고, 여자 분들은 이런 경험이 아마 처음일 거예요. 수학 여행을 가도 이렇게는 안하잖아요. nbspnbsp여러분들이 너무 편하게 살아서 이런 생활을 한번 해봐야 되는데... 제가 룸비니에 처음 왔을 때는 네팔 절에서 잤어요. 바닥이 시멘트였는데 주지 스님이 동네에 가서 멍석을 빌려와서 그것을 깔고 그 위에 잤어요. 처음에 1차, 2차, 3차 성지순례는 굉장했습니다. 바이샬리에서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자는데 침대 한개에 두명이 올라가서 자다가 침대가 무너졌어요. 내일 가는 기원정사에서도 그 때는 스리랑카 게스트하우스 하나 정도 있었거든요. 거기서는 바깥 처마 밑에서 잔 적도 있었어요. 자고 일어나니까 침낭 밖에는 물이 흥건하더라구요. 그래도 우리는 침낭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남방 불교 사람들은 담요 한 장 덮고 그냥 자요. 따뜻한 곳에 사니까 우리보다 더 추울텐데 말이죠.nbspnbsp그래서 기준이 무엇이냐가 중요해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불편하다고 해도 저는 처음 순례왔을 때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만하면 괜찮다’, ‘그래도 옛날보다는 낫다’ 이런 생각을 하고 다니는데, 여러분들은 많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nbspnbsp첫째 숙소가 좀 불편하고, 둘째는 대중이 이렇게 많이 모여 다니는 것이 불편하고, 셋째 항상 화장실이 급하죠. 일정이 이렇게 빡빡한 이유는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일정을 다른 성지순례의 두 배인 17일이나 잡고 왔는데도 늘 시간에 쫓기는데, 사실은 다른 순례객들보다 하루에 34시간을 더 많이 써요. 대부분 아침 먹고 8시쯤 출발하는데 우리는 새벽3시에 출발 하잖아요. nbspnbspnbsp저 같은 특수한 경우는 자주 오지만 여러분들은 두 번 올 일은 아니니까 한번 온 김에 최대한 많이 보여드리려고 해요. 언제 랑그람을 다시 가볼 것이며, 설산 이름만 들었지 쳐다보기라도 한번 해봐야 할 것 아니예요? 지금 프로그램이 조금 힘들기는 해도 앞에 다녀온 사람보다는 훨씬 수월한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은 다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개선한 결과이고, 초기에는 욕심만 내어서 시행착오를 많이 했거든요. 전기밥솥 들고 오는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처음에는 가스 버너 들고 다녔거든요. 아무튼 여러분들이 힘든 것은 맞지만 그래도 상당히 개선된 것입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힘들다고 느끼신 분은 내년에 올려고 하는 사람들을 좀 말리세요. nbspnbsp아무튼 이곳에 오기가 정말 어렵기 때문에 조금 쫓기더라도 열심히 다녀야 돼요. 그래도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고생을 감수해 주시니까 밝은 얼굴로 다닐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nbsp스님의 격려를 듣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났습니다. 스님의 자상한 배려 속에서 고생은 좀 하지만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는 시간임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힘을 불어넣어 주신 스님께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오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잠자리에 듭니다.nbspnbsp내일은 새벽 2시20분에 기상해서 3시에 출발하는 일정입니다. 탄센으로 가서 해발 2천미터의 산 위에 올라 저 멀리 8천미터 높이의 히말라야 산 봉우리들과 일출 모습을 보고 내려올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다시 국경을 넘어 인도로 와서 삐쁘라와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쉬라바스티로 갑니다. 한국에 있는 도반들도 성지순례의 감동을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
2015.1.15 인도성지순례 9일째 쿠시나가라
nbsp▲ 쿠시나가라 열반당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9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오시다가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그 음식을 드시고 큰 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카쿠타 강에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시고 이곳 쿠시나가라 사라나무 숲에 이르러서 그날 밤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오늘은 그 여정을 따라 어제 왔던 길을 17km 정도 다시 돌아가서 춘다의 공양터를 참배하고, 또 부처님께서 마지막 목욕을 하셨다는 카쿠타 강을 참배한 후 쿠시나가라로 다시 와서 열반당을 참배하는 일정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국경을 통과하여 네팔로 넘어갑니다.nbspnbsp새벽 5시, 성지순례단은 쿠시나가라의 곳곳에 흩어진 숙소에서 각 숙소별로 송수신기로 새벽 예불을 올리면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nbspnbsp▲ 쿠시나가라 숙소에서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정진nbsp예불을 마치자마자 각자의 짐을 버스에 싣고, 어제 쿠시나가라에 늦게 도착하여 가보지 못한 ‘춘다의 공양터’로 출발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열반 전 마지막으로 공양을 드신 곳입니다. 밖은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공기는 축축하였으나, 1월이라 많이 추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인도의 1월은 얼어죽을 정도는 아니구나 하며 버스에 올랐습니다.nbspnbsp‘춘다의 공양터’로 가는 길에 스님께서는, 이번 성지순례 참가자 중에 가을 불대생이 많은 관계로 부처님의 일생 중 열반 부분은 공부하지 못한 이가 다수 있음을 아시고, 버스 안에서 특별히nbsp자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nbsp아난다 존자가 시냇가에 가보지도 않고 물이 흐려 부처님이 드실 수 없다고 만류한 대목을 이야기 해주시면서,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부처님 말씀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법문해 주셨습니다.nbspnbsp모두들 이른 새벽 일정이 계속 되다보니 잠에 들었는지 조용하자 스님께서는 “누가 스님 법문은 시작하면 졸린다고 수면제라고 하던데, 내 법문이 얼마나 하찮으면 수면제로 써요”라고 농담을 하셔서 모두들 웃으며 덜 깬 잠을 깨고,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스님의 법문을 계속 들었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이곳 쿠시나가라로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왜 이곳으로 오셨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부처님도 돌아가실 때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겠느냐며, 카필라바스투로 돌아가기 위해 이 길로 지나가시다가 열반에 드셨다고 설명하는 분도 있는데 아무튼 이곳 쿠시나가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바야샬리의 사람들을 충분히 위로해드리고 간타키 강을 건너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아난다 존자에게 하신 법문을 옛날 이야기를 해주시듯 술술 풀어 주시며 춘다의 공양이 갖는 의미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몸이 몹시 아프셨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춘다가 올린 공양 때문에 부처님이 병이 나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가난하면 차라리 공양을 올리지 말 것이지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다 춘다 때문이라고 힐책할 것과, 춘다가 자책하고 있을 것을 염려하셔서 부처님께서 춘다에게 해준 이야기를, 스님께서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춘다가 걱정하고 있으니까 ”네가 올린 공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다“ 라고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춘다의 공양은 기독교의 유다처럼 나쁘게 비칠 수도 있었는데,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서 여래에게 올린 마지막 공양이 되어서, 춘다의 공양은 불교사에 길이 길이 칭송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춘다의 공양터까지 참배를 하러 가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위대함입니다.nbspnbsp어떤 사람은 음식에 독성이 든 줄 미리 알고 안 먹는 사람도 있고, 독성 있는 음식을 먹고도 끄떡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독성이 든 음식을 먹고 토해버리고 괜찮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그 음식을 먹고 죽으면서 그 음식을 제공한 자를 위로하고 칭찬한 자는 역사 상에서 없었습니다. 그만큼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을 위대하게 하셨습니다. 육신에 집착하지 않고 공양 올린 자의 마음을 살피시는 부처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라고 한 예수님의 사랑과 비견되는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도 공양 올린 자의 아픔을 살피셔서 위로하셨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이어서 카쿳타강에서 목욕을 하신 부처님의 행적을 이야기하시면서 “절반이 졸고 있네 안 잔다고 하더니” 하시며, 9일째로 접어들면서 마음과는 달리 지친 육신으로 피곤해하는 순례객들에게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밤에는 누워 자고 낮에는 앉아서 자고. 한국 가서 새벽 3시에 일어났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하셔서, 저희는 스님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는지 겸연쩍어 하면서도 덕분에 한참을 웃었습니다.nbspnbsp500여명의 순례객이 참여한 이번 성지순례에는 1호차부터 13호차까지 모든 이가 스님의 타신 6호차에 맞춰 수신기를 조정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서, 법륜스님은 이어폰을 타고 오신다는 유수스님의 말씀대로 한쪽 귀를 종긋 세우고 법문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감복하기도 하며 부지런히 스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nbspnbsp스님 법문을 들으며 도착한 춘다의 공양터에는 안개가 자욱하였고, 500여명의 발소리와 목탁소리에 맞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는 낯선 광경에 주변 새들과 벌레들, 동네 개들이 일제히 잠을 깨었는지 유난히 크게 울어대는 것 같았습니다.nbspnbsp▲ 춘다의 공양터에 세워진 탑nbsp예불이 끝나자 스님께서는 대중을 향해 뒤로 돌아앉으셔서, 안개가 자욱한 춘다의 공양터에서 새벽 예불을 잘 마쳤다고 말씀하시면서 춘다의 공양과 관련한 경전 독송을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nbspnbsp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그 당시를 떠올리며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nbspnbspnbsp명상까지 마치고 이를 지켜보던 힌두의 바라문에게도 보시와 공양물로 올렸던 사탕을 선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침부터 찾아온 순례객들의 방문에 처음에는 상당히 까칠하게 굴던 힌두의 바라문도, 스님의 마음 쓰심에 기분이 누그러졌는지 다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 파바마을 아이들이 무척 사납고 거친데, 우리가 사탕을 나눠주면 통제가 안 되어서 이곳 힌두 바라문에게 사탕을 공평하게 나눠주라고 부탁했어요” 라며, 아이들에게 사탕을 최대한 공평하게 나눠주려고 세심히 살피셨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신 카쿳타강이었습니다. 강물이 공기보다 따뜻한지 물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강가로 내려가 손을 씻으시며 순례객들에게 “아픈 사람이 이 강물을 마시면 낫는다”고 하시자 어떤 거사님께서 한 움큼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시고 “강물 마시고 설사해서 열반당 가서 열반하세요. 부처님도 강물 드시고 나서 열반하셨어요” 하시면서 “복잡한 세상 오래 살아서 뭐하노, 이런데서 죽으면 바로 그슬러서 강물에 뿌려주고 좋지”하고 농담을 하시면서 순례객들을 즐겁게 해주셨습니다. 또 스님께서도 “나도 요즘 몸이 아파서 이 물을 좀 먹어야 겠어요” 하면서 물을 한모금 축이셨습니다.nbspnbsp▲ 카쿳타 강nbsp카쿳타 강에 손을 담가보니 물이 그리 차지 않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신 부처님을 생각하며 강을 향해 반야심경을 함께 외우고 돌아서서 가려는데 스님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그렇게 느리게 힘없이 하면 안 돼요.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란 뜻인데, 저 언덕으로 가기 싫다는 거예요?” 스님 말씀에 새롭게 안 이들과 다시 한번 깨우친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뜻을 모르니 어떻게 잘 하겠느냐” 라고 하셔서 모두들 스님 말씀에 웃고 말았습니다.nbspnbsp▲ 카쿳타 강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독송을 해보았습니다.nbspnbsp스님 건강을 걱정하는 순례객들과는 달리, 스님께서 지친 순례객들을 웃음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강행군의 피로를 덜어주시니 한결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nbspnbsp동그란 아침해가 오히려 둥근 보름달처럼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500여명은 열반당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탔습니다. 10시를 조금 지나 열반당에 도착한 순례객은 예불 준비 후 자리에 앉아, 스님께서 해주시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들으며 부처님의 전 생애에 대해 반추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열반당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쿠시나가라 열반당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600 여년전 저 히말라야 산기슭 카필라바스투의 룸비니에서 태어나셔서, 카필라성에서 29년의 생활을 하시다가 29살에 출가하셔서 쿠시나가라를 지나서 바이샬리를 지나서 왕사성 라자그라하에서, 두 분의 스승 아라라카라마와 웃타카 라마 푸트라를 모시고 수행정진을 하셨습니다.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의 경지가 아님을 아시고, 스승의 곁을 떠나 다섯 도반들과 함께 가야 근교의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간 용맹 정진을 하셨습니다. 6년 간의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수행생활을 되돌아보니 세속에 있을 때는 욕망을 따라 쾌락을 쫓았고, 출가해서는 욕망을 억압하는 고행을 행했습니다. 둘은 정반대이지만 사실은 욕구에 따른 작용 반작용일 뿐임을 아시고, 그 둘을 버리고 욕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중도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정각산을 내려와서 니련선하에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목동이 준 길상초를 깔고 앉으셔서 대결정심을 일으켜서 마지막 정진에 들어가셨습니다.nbspnbspnbsp49일 간의 용맹정진 끝에 12월8일 마침내 동녘 샛별이 뜨는 것을 보는 순간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49일 동안 깨달음의 법열을 만끽하시다가 이 좋은 법을 나눠가질 사람을 생각했는데, 이미 두 스승은 돌아가셨고 자신의 다섯 도반을 생각하면서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트로 가셔서 처음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다섯 비구가 제자가 되고 야사 등 55인을 교화하시고 nbsp60인을 앞에 두고 전법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루벨라촌으로 돌아오셔서 가섭 삼형제 일천인을 교화하셔서 가야산에서 탐진치 삼독의 불을 끄라는 설법을 하시고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왕사성에 이르렀습니다.nbspnbsp왕사성 밖 제띠안에서 빔비사라왕을 만나 교화하고 빔비사라왕의 기증으로 최초의 절 죽림정사를 창건하셨습니다. 그곳에 계실 때 산자야의 제자였던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가 부처님께 귀의를 했고, 마하가섭 존자도 부처님께 귀의를 했습니다. 성도 3년 째 수닷타장자의 초청으로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으로 가셔서 기원정사를 창건하시고 그곳에서 많은 교화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 후 6년째 되는 해에 정반왕의 초청을 받아 카필라성으로 가셔서 자신의 친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민중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교화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45년을 행한 후에 세속 나이로 팔십, 성도 후 45년째 되는 해에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영축산에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곱가지 법을 설하시고, 죽림정사에서 상가가 멸하지 않는 일곱가지 법을 설하시고, 암라파티카 동산에서 계정혜 삼학을 설하시고, 나란다에서 머무시고 파탈리푸트라에서 미래에 이곳은 큰 도시가 될 것이니 그 때 세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물의 재앙, 불의 재앙 , 사람의 재앙을 들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강가강을 건너서 바이샬리로 오셨고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으시고 암나팔리의 망고원을 기증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에서 안거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안거를 했던 마을이 밸루바나라고 하는 죽림촌이었습니다. 그해 흉년이 심해서 걸식을 할 수가 없어서 대중 오백명을 다 흩어서 한 마을에 한명씩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과 아난존자는 밸루바나에 머무셨습니다. 얼마나 그해 가뭄이 심했냐면 부처님이 걸식을 가셨는데 말먹이 밀기울을 받아서 드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 안거 기간동안 부처님은 많이 편찮으셔서 거의 돌아가실 정도였는데, 안거 기간이라 흩어져 있는 대중의 불편을 생각하셔서 유수행이라고 수명을 연장하는 수행을 하셔서 그 위기를 극복하셨습니다.nbspnbsp안거가 끝나자 부처님은 바이샬리의 중각 강당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해서 앞으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리라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를 법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바이샬리를 떠나셔서 간타키 강을 건너 파바 마을에 이르러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큰 병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나 카쿳타 강가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시고 춘다를 위로하는 좋은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마치 낡은 수레가 삐그덕 삐그덕 겨우 굴러가듯이 부처님의 육신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부처님은 사자처럼 당당하게 대중의 앞에 서서 쿠시나가라로 오셨습니다. 이곳 사라나무 숲에 이르셔서 가사를 접어서 바닥에 깔고 그곳에 누우셨습니다.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머리는 북쪽으로 발은 남쪽으로 해서 서쪽을 향해서 누우셨습니다. 이것이 열반상입니다.nbspnbsp그 때 아난다는 너무 슬퍼하면서 물었습니다. “왜 외로운 이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저 왕사성이라든지 사위성이라든지 코삼비라든지 바라나시라든지 바이샬리라든지 부처님의 제자도 많고 재가신자도 많은 그런 곳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렇게 외로운 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그런 걱정을 하지 마라. 비록 이곳이 지금은 외로운 곳이지만 미래에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하셨어요. 아난다가 다시 “그렇다면 왕족들이 있는 성 안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 숲속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하니 “숲속에서 열반에 들어야 누구든지 여래를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다 친견할 수 있다” 하셨어요. 만약에 궁중에서 열반에 드신다면 왕족이라든지 바라문만 친견할 수 있죠. 천민들은 들어올 수가 없잖아요. 아무런 울타리가 없는 이곳 숲속에서 열반에 드심으로 해서 누구든지 신분에 고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짐승들이라 하더라도 여래를 친견할 수 있게 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아난다는 위대한 스승 붓다께서 열반에 든다고 하니 많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할 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하는 유명한 마지막 유언을 하셨습니다.nbspnbsp그 때 아난다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를 생각하니까 여러 걱정이 되었어요.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사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하니 부처님께서 “여래가 열반에 든 뒤에는 4성지를 생각하라” 하셨어요. 여기가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인데 태어나실 때의 정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곳인데 깨달음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곳인데 설법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인데 열반의 모습은 이러하다, 이것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순례를 하는 것도 이 유훈에 따른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nbspnbsp비록 흔적이 없고 부서진 벽돌과 소똥만 널려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순례하는 이곳들은 성스러운 곳입니다. 성스러움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니까요.nbspnbsp그리고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에 의심이 있거든 나에게 물어라.” 하고 세 번씩이나 물었지만 아무도 질문이 없었어요. 그러자 아난 존자는 “여래의 법은 잘 설해져 있고 우리들은 이미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안온하게 열반에 드소서” 라고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나는 51년 전에 저 카필라성을 떠나서 하루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했다. 그러니 너희들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부처님의 맨 마지막 말씀입니다.nbspnbsp그런데 여러분들은 욕심이 많아서 수행도 바짝 해서 그게 안되면 나는 수행과 인연이 없나 보다 하면서 내팽겨쳐버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다생겁래로 지은 업인데 그것을 어떻게 한순간에 없애려고 해요? 그래서 정진은 한발 한발 걸어가듯이 꾸준하게 해나가야 합니다.nbspnbsp자, 그러면 지금부터 열반당에 들어가는데 오백명이 저 안에 한번 다 들어가보는 거예요. 아마 역사 기록일 거예요. 꽉 찬 상태에서 저 열반당 안에서 예불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발원문을 함께 읽고 축원하고 마치겠습니다.”nbspnbsp500 대중은 열반당 안에 빼곡히 들어가 예불공양과 ‘석가모니불’ 정근을 올렸고 열반당의 높은 돔천장 안은 목탁소리와 정근소리로 가득 차 울려퍼져 마치 부처님의 열반하신 날처럼 장엄하게 느껴졌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눈물을 훌쩍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nbspnbspnbspnbsp예불 공양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거룩하신 부처님께 한국에서 온 500여명이 두손 모아 합장하며 기도하옵니다” 하며 45년간을 쉼 없이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해오신 부처님의 행적을 상기시켜주시고, 이제 평온히 쉬시고 우리가 부처님 뜻을 이어받아 남은 일을 하겠다는 발원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거룩하신 부처님 저희들 한국에서 온 불자 대중 500여명은 이렇게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 서서 두손 모아 합장하오며 발원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 히말라야 산 기슭 카필라성의 룸비니에서 태어나셔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뭇 중생의 고통을 보시고 그 아픔을 함께 하시고 그 고통을 구제하시고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셨습니다.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 간 고행하신 끝에 니련선하 강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르나트에서 처음 설법을 한 이래 45년 동안 하루도 쉼 없이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곳에 부처님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nbspnbsp어리석은 자는 깨우치고 가난한 자는 돌보고 고통받는 자는 위로하셨습니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마치 낡은 수레를 삐그덕 삐그덕 몰고 가듯이 그 육신을 이끌고 이곳 쿠시나가라에 이르러서 마침내 열반에 드셨습니다.nbspnbsp부처님이시여 이제 안온히 쉬소서. 이제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고통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가진 우리들이, 작은 부처가 되어 고통 받는 중생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여래의 사도로써 전법의 역사를 쓰겠습니다.nbspnbsp다시는 부처님께 무엇을 해달라 도와달라 빌지 않고, 부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일들을 우리가 대신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시여 이곳에 안온히 머무소서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nbspnbsp이렇게 오늘 간절히 발원을 하오니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께서는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nbsp500여명이 가득 들어섰던 열반당 안에서의 예불을 마치고, 스님의 지도하에 실타래를 풀 듯 안쪽부터 부처님을 뵙고 돌아나와서, 열반당을 배경으로nbsp조별로nbsp스님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순례객은 11시45분경에 라마바르총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쿠시나가라 왕족의 대관식을 하던 장소로 바쿠다 반다나 영지인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세상 풍속대로 장례를 치르라는 말씀대로, 왕족이신 부처님의 신분에 맞게 이루어 진 것이라 하시면서, 당시의 상황을 nbsp자세히 법문해 주셨습니다.nbspnbsp▲ 라마바르총nbsp“이곳은 원래 왕위를 계승할 때 대관식을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사라나무 숲 속에서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이 최후로 물을 드셨다는 히란나바티 강가에서 다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왕위를 계승하는 대관식을 하는 성스러운 이곳에서 다비식을 준비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오백 대중을 이끌고 부처님의 뒤를 따라 왔는데 결국 부처님을 뵙지 못하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열반하시고 일주일 뒤에 마하가섭 존자가 도착했어요.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도 오백 대중이 있었어요. 여러분들이 오늘 열반당에 들어가서 그 때의 오백 대중처럼 똑같이 부처님의 열반상을 보고 눈물도 짓고 그러셨는데, 그 당시의 대중들도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 주위에 둘러서서 우는 사람도 있고 그랬다고 해요. 그랬을 때 천안제일 아니룻다 존자가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시다 하면서 사념처관을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대중이 모두 몸이라는 것은 부정하고, 느낌이라는 것은 고일 뿐이고, 마음이라는 것은 무상하고, 법은 무아다 하는 것을 관하게 되니까 마음이 전부 고요해졌습니다. nbsp그래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지만 대중들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부처님의 유골은 티끌이 없이 깨끗이 타서 아주 깔끔했어요. 그것을 다 수습을 했는데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 왕도 부처님의 유골을 자기 나라에 모셔서 기념탑을 쌓겠다고 하고, 바이샬리의 리차비족도 그러고,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도 그러고, 다 와서 각자 자기 나라에 모시겠다고 해서 전쟁까지 일어날만큼 험악했다고 해요. 그래서 도나 바라문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아무리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지만 부처님의 사리를 서로 가져가려고 전쟁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하면서 여덟 나라에게 여덟 몫으로 공평히 나눠주었다고 해요. 그리고 도나 바라문은 사리를 담았던 그 용기를 가지고 기념탑을 쌓았고, 한 종족은 늦게 와서 부처님을 화장한 재를 가져가서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덟 개의 진신사리탑과 한 개의 항아리탑, 한 개의 재탑이 있었습니다.nbspnbsp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한 삶은 여기서 마감이 됩니다. 부처님을 여기서 화장을 하고, 그 자리에 이를 기념해서 후대에 크게 기념탑을 쌓았어요. 이것을 ‘라마바르총’ 이라고 해요. 자, 이 내용을 경전으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nbsp경전을 독송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다시 구체적으로 만나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경전독송과 명상까지 마치고 조별로 흩어져서 아침 겸 점심 식사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는 가운데 성지에서 먹는 밥맛이 정말 꿀맛입니다.nbspnbspnbsp오후에는 네팔국경을 넘어, 붓다 이전에 한 젊은이로서의 삶을 만나보기 위하여 룸비니로 향했습니다. 네팔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소감 나누기와 자기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누기와 소감을 듣다 보니 다들 한분 한분 모두 참 소중한 인연으로 오신 분이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500여명이 함께 움직여야 하고 시간에 쫓길 때도 많아서 한분 한분의 소중함을 잘 몰랐구나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nbsp순례단은 오후 6시경에야 국경에 도착하였고, 출입국심사를 위해 네팔국경에서 3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으나 해가 진 후라 주변이 어두워져 둘러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nbspnbsp▲ 네팔 국경nbsp스님은 네팔에 오면 꼭 들린다는 식당에서 로티와 달로 요기를 하셨고, 순례객들도 환전을 하거나 식당이나 가판대에서 각종 네팔 음식들을 맛보고 과일이나 야채,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 네팔에 있는 한국절인 대성 석가사에 9시경에 도착해 절에서 준비해준 음식으로 늦은 공양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깍두기와 나물반찬을 맛있게 먹고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며 조별 나누기를 한 뒤 취침에 들었습니다.nbspnbsp오늘은 부처님의 마지막 가신 길을 함께 했는데요. 내일은 부처님 탄생 이야기를 따라 카필라성과 룸비니로 가는 날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공간도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오니 저녁 기온이 한층 쌀쌀해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
2015.1.14 인도성지순례 8일째 바이샬리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8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전 3시 20분, 새벽녘 일어나 짐싸고 움직이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졌습니다.nbspnbsp라즈길에서 5시간을 달려 바이샬리를 들러 쿠시나가르까지 가는 일정이라 평소보다 조금 이른 오전 4시에 출발하였습니다. 버스가 13대가 되다보니 일부는 라즈길의 숙소에서 출발하고 일부는 나란다의 숙소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비가 오는 듯한 짙은 안개 속을 무심히 달려나가는 버스 속에서 아침 예불을 하며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따릅니다.nbspnbsp▲ 새벽 4시 버스 안에서 예불을 하며 오늘 순례를 시작합니다.nbspnbsp오전 7시쯤, 스님께서는 수신기를 통해 버스 안에서 푹 자고 있던 순례단을 깨우시며 “지금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곳은 비하르주의 수도 파트나입니다. 비하르주는 인도에서 두 번째로 많은 8천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파트나는 야무나, 강가, 고그라, 간다키, 숀 등 다섯 개의 강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지금부터 다리가 시작되는데, 이 다리는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입니다. 다리 길이가 10km 정도 됩니다” 라며 지금 건너고 있는 다리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셨습니다. 또한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00년 뒤에 아쇼카 왕의 마우리안 왕조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작은 나루터였는데 당시 부처님께서 이곳에 큰 도시가 드러설 것이며 그 도시에는 물의 재앙, 불의 재앙, 사람의 재앙, 세 가지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후에 큰 홍수와 큰 불과 내분으로 결국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또 파탈리 푸트라는 왕궁 안의 사찰에서 일천 비구가 모여 제3결집이 이뤄진 곳입니다.” 라고 파탈리 푸트라에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바이샬리로 향하는 길에 4차선의 반듯한 도로가 새로 생긴 것에 스님께서도 놀라워하시며 평소에 걸리던 5시간 보다 시간을 줄일 수 있을 듯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안개가 짙어서 차 속도는 많이 내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도로의 지대가 높아서 도로가를 화장실로 이용할 수가 없다며 볼일이 급하신 분들을 챙겨주셨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에 “여기 망고나무 숲이 있는데, 급하니까 마음대로 누세요” 라는 말씀에 500여명의 인파가 오른쪽, 왼쪽으로 나눠 급한 볼일을 보았습니다. 볼일을 다 보고 나니 근처에 동네가 있어서 실례를 한 격이라 동네 사람들이 황당했을까 싶어 좀 미안했습니다.nbsp다시 버스가 움직이자 스님의 설명은 계속되었습니다. 공화정을 구성해 나라를 운영했던 민주적인 바이샬리를 부처님은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의 길을 떠나실 때, 코끼리처럼 고개를 천천히 돌려 바이샬리를 돌아보시며 “이 아름다운 도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또한 “도리천의 사람들을 보고 싶다면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을 보라”고 할 만큼 풍요롭고 자유로운 도시였으며 지금도 인도에서 국회가 개원할 때는 이곳 카라우나 포칼 연못의 물을 가져가 성수로 사용한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nbspnbsp오전 8시 30분경 진신사리탑 앞에 도착한 순례단은 4줄로 서서 가사를 입고 향을 피워들고 석가모니 정근을 하며 탑을 돌아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nbspnbspnbsp▲ 바이샬리 진신사리탑nbsp쌀쌀한 아침 날씨에 두텁게 입은 옷 위에 가사를 입은 대중을 보시며 스님은 “꼭 절구통처럼 입고 있다” 하시며 웃음과 함께 바이샬리의 역사적인 성지 중 하나인 이곳 진신사리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화장하고 남은 진신사리를 모신 탑입니다.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진신사리는 여덟 몫으로 나뉘어져 모셔졌습니다. 여덟 몫 가운데 하나가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에 모셔졌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200년이 지나고 아쇼카 왕에 이르러 부처님의 행적이 있는 곳마다 다 탑을 쌓았어요. 탑은 일종의 무덤인데 그냥 흙무더기만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여덟 개의 사리탑에서 사리를 꺼내어서 그것을 탑마다 다 하나씩 넣었습니다. 무려 8만4천개의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8만4천이라는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탑을 쌓았다는 뜻입니다.nbspnbspnbsp이런 사리 중에 아주 일부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중국으로 올 수는 있었겠죠. 그러나 많은 수가 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스리랑카를 비롯한 전세계에 흩어진 부처님의 사리를 다 모으면 아마 열 트럭이 넘을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사리가 귀하니까 부처님의 사리를 대신할 사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꼭 나쁜 의미는 아니예요. 부처님의 사리가 너무나 귀하니까 보석처럼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시지 않았는가 생각할 수가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자장율사에 의해서 사리가 중국으로부터 왔거든요. 그래서 통도사에 일부 모시고 황룡사에도 모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온 것은 여러군데에 모셨다고 하는데 현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인정되는 곳을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합니다.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이 다섯군데를 귀하게 여겨서 불자라면 보궁을 참배해야 한다고 하죠.nbspnbsp그런데 이 다섯군데를 참배하는 것도 정말 귀하게 여기는데, 거기에 비하면 이 진신사리탑은 백배 천배 귀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리탑입니다. 전 세계에 8개가 있는데 딱 3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곳을 지금 여러분들이 참배를 하신 겁니다.nbspnbspnbsp물론 부처님은 형상을 중요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음악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다 신기해했어요. 그래서 물으니 부처님께서 “저 하늘의 신들이 여래의 열반에 임해서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는 이곳을 참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해서 자기가 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하고 예배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바이샬리의 진신사리탑을 친견한 것은 신앙적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일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귀한 자리에 우리가 왔다 이것을 다시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nbsp그리고 바이샬리는 상업이 발달하고 진보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여성출가를 이곳에서 허용을 하셨어요. 석가족 출신의 여인들이 처음으로 부처님께 출가를 요청했거든요. 그 이유는 부처님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부처님의 어머님 되시는 분이 혼자가 되었어요. 또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분도 아들 라훌라마저 출가하면서 혼자가 되었어요. 부처님 당시에는 남자가 없으면 주인이 없는 존재가 되어서 아무나 데려가도 되었어요. 석가족 젊은이들이 많이 출가를 하다보니까 석가족 여인들에게 이런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마하파자파티’라는 부처님의 어머님이 되시는 분과 ‘야소다라’ 라고 하는 부처님의 아내 되셨던 분을 비롯한 석가족 여인 500명이 부처님의 법에 귀의해서 부처님께 출가를 요청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승낙을 안하셨어요. 그러니 오백 여인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이곳 바이샬리까지 부처님을 따라와 요청을 했어요. 남자 천민이 출가하는 것은 처음부터 쉽게 허용이 되었는데 여성 출가가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사회가 계급차별보다 성차별이 당시 사회에서는 더 심했다는 것을 말해요. 그러자 아난존자가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 “여성은 수행해서 해탈할 수 없습니까?” 묻자 부처님은 “여성도 해탈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왜 허용을 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어릴 때 부처님을 키울 때의 공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다고 하셨고, 이렇게 해서 여성의 출가가 이뤄졌습니다.nbspnbspnbsp왜 부처님이 카필라성에서 허용을 안하고 이곳 바이샬리까지 왔을까요? 바이샬리는 진보적인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바이샬리에서는 그래도 용납이 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성 출가가 사회적으로 용납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여성은 문제가 없지만,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삶의 가치관은 자기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의지심이 많습니다. 이 의지심이 극복되지 않고는 붓다는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여성들이 스스로 이곳까지 맨발로 걸어왔다는 것은 그만큼 독립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조건에서 능히 수행할 수 있겠다고 보시고 허용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바이샬리는 여성 출가의 성지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이곳이야말로 여성해방의 효시가 되는 곳입니다. 카톨릭은 아직도 수녀가 미사를 집전할 권리가 없고, 여성이 신부가 될 수 없잖아요. 부처님은 2600년 전에 비구니를 허용했다는 것은 종교 역사에는 유래가 없는 일입니다.nbspnbsp그리고 부처님의 마지막 여로를 기록한 열반경에 보면 이곳에서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고 그 해가 가뭄이 들어 굉장히 흉년이었어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한 마을에 한명씩 가라고 모두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아난다와 함께 벨루바나라는 마을에 가서 우기 안거를 지냈는데, 부처님의 몸이 굉장히 편찮으셨어요. 아난다도 어쩔 줄 몰라했는데 부처님은 유수행이라고 해서 수명을 연장하는 수행을 하셨어요. 그리고 안거가 끝나자 나는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대중들을 모아놓고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nbspnbspnbsp부처님은 이곳을 떠나서 북쪽으로 가시는데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과 헤어지는 게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돌아가질 않아요. 계속 따라와서 간타키 강을 건너는 데까지 따라왔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강을 건너시자 부처님이 가지고 있던 발우를 물에 띄워보내서 이별의 징표로 남겼습니다.nbspnbsp그러니까 이곳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처음 방문 하신 곳이고, 또 이곳은 여성이 처음 출가한 곳이고, 또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올린 곳이고, 또 부처님이 열반을 선언하신 곳이고,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은 곳이고, 또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세운 곳이기도 하고, 불멸 후 100년 후에 제2결집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고, 또 불멸 후 500년 경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유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 지금 우리가 앉아 있습니다. 자, 경전 독송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nbsp그러면서 지금까지 스님께서 먼저 설명하신 내용의 경전을 순례단이 함께 독송하였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미리 듣고 경전을 읽으니 더 생생하며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스님의 세심한 지도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바이샬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을 마음에 새기며 고요히 명상에 들었습니다. 그 사이 싸늘했던 날씨는 어느새 밝은 햇살로 바뀌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차량별로 진신사리탑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짝수 차와 홀수 차로 나뉘어서 짝수차는 스님과 함께 찍고, 홀수 차는 유수 스님과 함께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에 올라 원후봉밀터로 이동했습니다.nbsp500여명의 대중은 석가모니 정근을 하며 탑돌이를 한 후 자리를 하고 스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nbsp▲ 원후봉밀터nbsp“이곳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렸다고 하는 원후봉밀을 기념해서 세운 탑입니다.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 계실 때 주로 500 대중이 이동한 것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버스를 타고 500 대중이 이동해도 만만치 않은데 부처님과 500 대중이 이동할 때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짐작해 봅니다.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에 머물 때는 천이백 대중이 함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nbspnbspnbsp부처님이 500 대중과 함께 공양을 받으려고 발우를 주욱 펴 놓으니까 일단의 원숭이 무리가 오더니 그 500개의 발우 중에 딱 부처님의 발우에 꿀을 공양했어요. 그러니까 붓다를 원숭이와 같은 짐승도 알아봤다는 것이죠. 성난 코끼리도 부처님께 무릎을 꿇은 것처럼 원숭이도 부처님을 알아봤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원숭이들 수백마리가 흙을 파서 부처님이 목욕하실 연못을 만들었다고 해요.nbspnbsp옛날에 제가 왔을 때는 이 탑이 저 중간쯤까지 묻혀 있어서 여기가 평평했어요. 아쇼카 필라도 묻혀 있어서 위에만 나와 있었어요.nbspnbsp탑 오른쪽에 보면 방 자리가 있는 정사 터가 있어요. 저기는 비구니 승방이었다고 전해내려오고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한번 가서 보고 옛날 내가 살던 방이였는지 확인해 보세요. nbspnbspnbsp부처님의 위대함은 우리 스스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도록 많은 지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마라.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 법을 등불로 삼아라. 법 아닌 것을 등불로 삼지 마라.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중도를 지켜야 합니다. 법에 의지한다고 할 때 그 법이 지나치게 형식화되면 진리에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자신의 경험과 체험으로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즉 법을 배운 것을 자기 체험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또 자신의 체험은 반드시 부처님의 법에 근거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공부만 하고 자기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또 반대로 자기가 경험한 것을 부처님의 법인 것 마냥 행세하는 것도 사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를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nbspnbsp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면 불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부처님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고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실을 규명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가 그런 주장을 할 때 무조건 받아들여도 안되고 무조건 배척해도 안된다고 하시면서 그 얘기를 잘 들어보고 이미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과 경전에 잘 부합하는지 확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성제, 연기법, 팔정도 이런 원칙에 안맞는 내용은 어떤 이름이 붙어 있어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고, 반대로 그것이 예수님이 말했든 소크라테스가 말했든 공자님이 말했든 그 이치가 부처님의 말씀과 내용이 같다면 다른 종교 다른 사상이라고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큰 지침을 주셔서 우리가 어느 한 쪽에 매몰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흩어지지도 않고 원칙을 지키면서도 융통성 있고 포용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는데,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을 더 존경하는 원인이지 않나 생각합니다.nbspnbsp그리고 이곳에 비구니 요사가 있다고 하니까 어쩌면 이곳이 비구니 스님들이 출가한 성스러운 곳인지 모릅니다. 남방 불교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그걸 복원을 하려고 하니까 남방 불교 종단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곳 바이샬리에서 여성들이 수계를 받으면 누구도 거부하기가 어렵지 않느냐 싶거든요.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직접 행하신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곳에다가 비구니 사찰을 하나 지어서 남방 불교의 비구니 제도 복원 운동이나 여성의 권리 향상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한국 비구니회에 여러번 건의를 했지만 아직 한국에는 그런 대찬 비구니가 없는 것 같아요. nbspnbspnbsp스님이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제가 씨앗만 뿌려 놓았으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출가를 해서 하든 자원봉사를 하든 앞으로 성지마다 부처님의 유훈이 실현될 수 있는 그런 사업들을 해나가면 좋겠어요. 특히 이곳 바이샬리에는 꼭 비구니 절이나 여학교 같은 것이 있어서 인도 여성 운동의 효시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예불 공양을 올리겠습니다.”nbsp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보다 부족함이 있으나 비구니 제도를 허용한 것은 대승불교의 자랑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이 여성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기를 발원하며 스님과 함께 예불 공양을 올리고 명상도 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 올리듯 고통 받는 중생에게 공양 올리기를, 또한 태어난 조건에 의한 차별을 거부하고 인권을 수호할 수 있기를, 진신사리를 친견한 우리 모두가 업장소멸하여 성불하기를 발원하셨습니다. 순례단 또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함께 발원하니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nbspnbsp순례단은 오전 11시 30분경에야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원후봉밀터 주변의 평평한 잔디 밭에 자리를 펴고 둘러 앉아 어제 숙소에서 해놓은 전기 밥솥의 따뜻한 밥을 나눠담고 식사를 했습니다. 허기까지 보태어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습니다. 그동안 성지에서 공양 올린 사탕을 인도의 아이들에게 나눠주시던 스님께서 이번에는 우리 순례단의 성불을 기원하며 공양 올린 사탕을 순례단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주셔서 달달하게 입가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스님과 함께 차량별로 단체 사진을 찍고 다음 성지로 이동합니다.nbspnbspnbsp어느덧 날씨는 여름 날씨로 변해 입었던 옷들을 차례차례 벗어도 땀이 흐르고 차 속 공기는 후텁지근했습니다. 2시간 정도를 달려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인 케사리아 탑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신선하고 시원한 공기가 마치 부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처럼 감사했습니다.nbsp▲ 케이사르 탑nbsp고개를 들고 탑을 바라보니 탑이라기보다 동산 같았습니다. 한쪽 켠은 여전히 나무가 자라고 풀숲이 우거져 있는 이 탑은 스님께서 20여년 전 인도에 계실 때 처음 발견된 소식을 접하였으나 이렇게 큰 탑인 줄 모르고 그 사이 지나치기도 했다고 하셨습니다. 경전 기록에 보면 쿠시나가라로 길을 떠나시는 부처님을 따라오던 바이샬리 사람들과 헤어진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강을 건너신 부처님께서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에 띄웠고 떠내려 온 발우를 기념하는 탑을 이곳에 세운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순례단은 가사를 입고 줄을 서서 탑돌이를 했습니다. 스님의 제안에 탑을 빙 둘러 서서 인간 띠잇기를 하니 500명의 대중이 탑을 에둘러 쌀 수 있었습니다. 합장 삼배와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손에 손잡고 “부처님 만세”를 웃으며 힘차게 외쳤습니다.nbsp▲ 케이사르 탑을 둘러싸고 인간띠 잇기를 해보았습니다.nbspnbsp버스를 타고 다음 순례지를 찾아가는 길에 그 사이 분주했던 일정 속에 나누지 못했던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차를 2주간 함께 타고 다니는 인연 깊은 순례단은 각자의 모습과 이야기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가 부처님의 뜻을 따라 걷는 수행자라는 생각에 뭉클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 버스 안에서의 자기 소개 시간과 마음 나누기nbsp쉼 없이 달리는 버스라지만 지는 해는 거스르지 못해 이미 밖은 어둑어둑해졌습니다. 다음 순례지인 춘다의 공양터는 내일로 미루고 부처님의 열반 성지 쿠시나가라의 한국절인 대한사로 바로 향했습니다.nbspnbsp대한사에서 미리 준비해주신 공양 자리에는 이미 어둠과 함께 이슬이 내려 앉았고 새벽부터 준비해주신 음식들을 보니 객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듯 반갑고 힘이 났습니다. 대한사의 주지인 성관 스님께서는 제주도 관음사 출신으로 20여년 전 인도여행을 왔다 이곳에 한국절이 없음을 아시고 이곳에 불사를 발원하시고 지금까지도 절을 짓고 있으시다고 합니다.nbspnbspnbsp30명 밖에 머물 수 없는 숙소라 공양을 준비했으니 많이 드시고 순례를 잘 마치시기를 기원한다는 따뜻한 말씀을 해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공양 후 대한사의 불사가 원만히 성취할 수 있기를 발원해 주셨고, 500여명의 순례단도 스님과 함께 반야심경 봉독과 정근을 하며 함께 발원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 쿠시나가르의 한국절 대한사nbsp쿠시나가라의 곳곳에 흩어진 숙소로 버스는 멈췄고 순례단은 여독을 풀고 개인 정비 시간을 가졌습니다. 콘센트에는 전기 밥솥을 꽂고 내일 먹을 밥을 준비하고, 반찬도 락앤락 통에 담아 둡니다. 조장님들은 내일 네팔 국경을 넘을 때 필요한 서류를 챙기며 분주했던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이제 슬슬 하루하루가 아까워지는 것을 보면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오늘 하루도 행복했나 봅니다. nbspnbsp내일은 새벽부터 어제 가지 못한 춘다 공양터를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목욕하셨다는 카쿠타 강에 내려 강물에 손을 담궈보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열반당으로 갑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네팔 국경을 넘어갈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
2015.1.13 인도성지순례 7일째 라즈길
▲ 칠엽굴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출발한지 7일째 되는 날입니다. 3일 동안 머물렀던 수자타 아카데미를 떠나려하니 이 곳 실무자들을 먼 곳에 두고 가서 애처롭고 미안한 생각도 듭니다. 정문 앞까지 배웅 나온 현지 실무자의 얼굴이 우리가 떠나는 걸 아는지 슬픈 얼굴로 서 있는 모습에서 새로운 얼굴을 본 것 같아 가슴이 짠하였습니다. 순례단은 이제 이들의 수고로움을 많이 알아버린 까닭인 것 같습니다.nbspnbsp▲ 새벽 5시. 순례객을 기다리며 수자타아카데미 앞에 서 있는 버스들nbsp이젠 몸도 새벽 일찍 일어나는 것에 적응되었는지 새벽 4시 전에 벌떡 일어나지고 몸도 개운하였습니다. 아직도 깜깜한 새벽을 뚫고 짐을 버스에 모두 싣고 nbsp전정각산을 뒤로 한 채 분주히 라즈기르로 출발한 시각은 새벽 5시였습니다.nbsp버스에 타자마자 흔들리는 차 안에서 아침예불을 하고 6시 40분쯤 라즈길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남문을 통과한 후 버스 왼쪽과 오른쪽으로 흩어져 시원하게 노상방뇨를 하고, 부처님 당시 마차바퀴 자국이 돌에 선명히 남은 장소에 모두 앉아 오늘의 일정과 가게 될 곳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날씨가 추워 몸이 오싹 하기도 했지만, 스님의 애정어린 설명에 금새 집중이 되어 추위도 잊었습니다.nbspnbspnbsp▲ 마차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곳nbsp라즈길은 왕사성이라고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곳으로 원래 이름은 라자그라하인데 왕의 집이란 뜻입니다. 왕사성은 부처님 당시 북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왕사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천년의 요새였습니다.nbsp이 곳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전에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한 곳이었고, 수행하시는 부처님의 청청한 모습을 보고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서 성도하시면 자기를 깨우쳐 달라고 부탁한 곳이기도 합니다.nbsp스님의 설명을 다 들은 후 오늘의 첫 목적지인 영축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영축산은 부처님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법화경, 반야심경, 열반경이 설해진 곳이고 염화시중의 미소가 행해진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nbsp영축산을 오르는 길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길이라고 하여 빔비사라왕의 길이라고 불립니다. 왕이 마차로 산 아래까지 와서는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500미터 정도 산으로 오르다가 다시 100m 정도 걸어갔다고 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 빔비사라 왕이 영축산에 계신 부처님을 만나러 다녔다는 빔비사라왕의 길nbsp영축산 가는 길 초입에는 부처님의 주치의인 지바카의 망고원이 있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가기 시작한 곳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헤치려고 던진 돌 파편에 부처님이 발을 다쳐 제자 아난다에게 업혀 내려와 지바카의 응급치료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고, 육방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육방예경은 부처님 당시 어리석은 젊은이를 깨우치기 위하여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부부, 친구, 주인과 하인 관계에서 각각 가져야할 마음자세를 가르친 이야기라고 합니다. 스님의 인기 저서 ‘스님의 주례사’도 이 육방예경을 바탕으로 주례를 본 것이라고 합니다.nbspnbsp영축산 정상에는 신기하게도 여러 크고 작은 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곳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굴 이름도 제자들의 이름을 따서 아난다굴, 사리불굴, 목련굴, 마하가섭굴 등으로 불렸고 차례대로 참배하였습니다.nbsp▲ 아난다 존자가 수행했다고 하는 아난다 굴nbsp또한 산의 정상부근에는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돌을 던졌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자만심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해주는 일화였습니다.nbsp▲ 데바닷타가 부처님께 돌을 던진 곳.nbsp영축산 정상에는 독수리를 닮은 바위가 있었고 그래서 이름이 인도말로 ‘그리드라쿠타’ 즉 독수리봉이라고 불리우는데, 한문으로는 ‘영축산’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nbspnbsp영축산의 정상이 좁아서 순례단의 일부만 정상에 앉고, 나머지 순례단은 모두 정상 바로 밑으로 차례대로 앉아 영축산 정상을 향하여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 당시에 설한 경전을 독송하였습니다. 500명이 읊는 예불은 장엄하기까지 했습니다.nbspnbspnbsp공간이 비좁아서 예불은 앉은 자리에서 그냥 했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당시 수불부촉...’ 에서 바로 그 영산이 이곳인데, 예불을 하면서 “영산당시” 라고 읊으면서 무언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설법을 하신 바로 그곳에 지금 500여명의 순례단이 다시 찾아와 예불을 올리고 있으니 참으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nbspnbspnbspnbsp영축산을 내려오는 길에 영축산 정상이 잘 보이는 곳에서 차량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영축산을 배경으로 차량별로 사진을 찍는 시간.nbspnbsp버스로 5분쯤 걸리는 곳인 빔비사라왕의 감옥터로 갔습니다. 감옥터는 왕사성의 내성 맨 끝에 위치한 곳으로 감옥터의 외곽만 남아 여기가 감옥이었구나 짐작하게 할 뿐이였습니다. 아침 내내 끼여있던 안개가 많이 걷혀졌고 해가 밝게 비추고 있어 따뜻하기까지 했습니다. 순례단은 조별로 정렬하여 앉아 가사를 수하고 예불을 드렸습니다.nbspnbsp스님께 빔비사라 왕이 아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 사연과 그런 왕을 위로하신 부처님의 이야기, 감옥에 갇혀 굶고 있는 왕에게 음식을 몰래 전하려던 왕비 위제희 부인이, 아들에게 이 사실을 들켜 골방에 갇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처님의 위로를 청하고, 부처님은 그런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관무량수경을 설하신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nbsp▲ 빔비사라왕의 감옥터. 안개 때문에 안보이지만 스님 뒤로 저 멀리 영축산이 있습니다.nbspnbsp“이곳은 빔비사라왕의 감옥터입니다. 왕이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힌 겁니다. 빔비사라왕은 당시 인도 강국의 절대왕인데 나이가 사십이 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어요. 당시에는 왕위를 아들이 잇잖아요. 아들이 없으니까 정정이 불안한 거예요. 어느날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니까 3년 후에 아들이 생긴다는 거예요. 저 히말라야 산에서 수도하는 수도승이 명이 3년 남았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아들로 태어나도록 인연이 되어있다고 했어요. 왕이 사실을 확인해보고 아들 갖고 싶은 마음이 급하니까 그 수도승이 빨리 죽으면 아들이 빨리 태어날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사람을 보내서 ”빨리 죽어라“고 했더니 그 수도승이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왕명을 거역했다고 해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겁니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 ‘내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 하고 죽은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위제희 부인에게서 애기가 생긴 겁니다.nbspnbspnbsp그래서 왕은 애기를 갖게 된 기쁨과 원수라는 사실에 대한 불안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애기를 낳자 마자 2층에서 아래층으로 던져버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애기가 땅에 떨어졌는데도 손가락 하나만 부러지고 무사한 겁니다. 그래서 왕이 다시 마음이 바뀌어서 애기를 극진히 키웠습니다. 그 애기가 바로 아자타사투 왕자입니다.nbspnbsp세월이 흐르고 데바닷타가 부처님 교단의 새로운 리더가 되려고 하는 시도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아자타사투와 데바닷타는 모의를 해서 아자타사투 왕자는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고, 데바닷타는 부처를 해치고 자기가 새 부처가 된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겁니다. 그 때 데바닷타가 아자타사투를 꼬드긴 이야기가 “왕은 너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너의 원수다” 하는 비밀을 이야기해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자타사투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려고 한 겁니다.nbspnbsp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왕의 부인이면서 왕의 어머니가 될 위제희 부인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권력을 쟁취하는 싸움을 하게 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이기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아들이 이기면 자기 남편이 죽고, 누가 이겨도 진 자는 역적이 되고, 역적은 살려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가 된 것입니다. 해결책이 없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nbspnbsp그런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리려고 하니까 아자타사투 왕은 어머니도 아버지와 한패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도 감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위제희 부인은 저 멀리 영축산을 바라보면서 자기 신세 타령을 하면서 부처님께 기도를 합니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아들을 낳게 되었고, 부처님은 왜 데바닷타 같은 저런 악인을 친족으로 두었나 원망을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지금 너가 억울하고 분한 것 같지만 사실 빔비사라 왕은 자기 아들을 얻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너도 너의 아들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방치했고, 아들은 제 원수를 갚는다고 제 아비를 죽이는 이런 중생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위제희 부인은 ’나는 이런 세상은 싫습니다. 이런 괴로움이 없는 세상은 없습니까?‘ 하니까 부처님이 극락 세상을 보여주자 위제희 부인은 극락 세상에 나기를 발원합니다.nbspnbsp위제희 부인은 “나는 지금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려서 극락 세상을 볼 수 있지만 후세 대중은 어떻게 극락을 볼 수 있겠느냐?”며 부처님께 청하니 부처님께서 극락을 보는 16가지 관법을 설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관무량수경’입니다. 대부분의 경전이 부처님의 제자들이 거룩한 질문을 해서 법문이 설해지는데, 이 경은 가장 곤궁에 처한 여인이 울부짖으면서 부처님께 기도한 데 따른 부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는 더 소중하지 않나 생각합니다.nbspnbsp지금 우리가 앉은 방향이 영축산이예요. 위제희 부인처럼 영축산을 향해서 경전을 독송해 보겠습니다.”nbsp스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위제희 부인의 간절한 마음이 되어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었다면 위제희 부인이 얼마나 더 고통스러웠을까 헤아려 봅니다. nbspnbspnbsp빔비사라왕 감옥터에 조별로 돗자리를 펴고 모여 앉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해 준 밥을 반찬과 함께 맛있게 먹은 후 다음 장소인 죽림정사로 떠났습니다.nbsp날씨가 갑자기 더워집니다. 버스 안에서 새벽에 추워 껴 입었던 옷들을 벗었습니다. 날씨가 요동을 치니 벗어 놓은 옷이 한 짐이나 됩니다. 5분쯤 달려 죽림 정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콧물이 흐르는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손을 내밀며 우리를 먼저 반깁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딱하고 안스럽습니다. 스님께서는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이 아이들의 다음 세상을 위해 발원을 하십니다.nbspnbsp죽림정사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 부처님과 1,000명의 제자가 머물 곳을 보시한 곳으로 초기 사찰의 원형이 된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도 예불과 공양을 올리고 이곳에서 설한 경을 함께 읊고 명상도 했습니다. 명상을 하며 지금 맡고 있는 공기를 부처님과 제자들도 맡았을까 생각하니 부처님이 더 생생하게 느껴집니다.nbsp▲ 죽림정사에 도착해 예불을 정성껏 올립니다.nbspnbsp예불을 올린 후 스님께서는 이 곳에서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며,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보시한 이야기 등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이곳이 1,250명의 대중이 있었던 죽림정사입니다. 우리가 늘 예불문에 ‘천이백 제대 아라한’ 또는 금강경에 ‘천이백오십 대 비구중’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바라나시 사르타트로 가셔서 교진녀 등 오비구와 야사 등 육십명을 모아놓고 전법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우루벨라촌으로 오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 등 일천명을 교화하셔서 가야산에서 탐진치 삼독의 불을 끄라는 유명한 설법을 하신 뒤에 그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이곳 왕사성으로 오셨습니다.nbspnbspnbsp왕은 왕사성 서문 밖 제띠안까지 마중을 나왔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왕은 바로 그 이치를 깨닫자 너무 기뻐 부처님을 왕궁으로 초대했습니다. “내가 왕이 되었고,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 부처님이 출현하셨고, 내가 부처님을 친견해서 이렇게 법문을 듣게 되었고, 또 내가 그 법문을 이해하게 되어서 지혜의 눈이 열렸다” 면서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는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거였다” 라고 하고 “왕궁에 오셔서 저의 공양을 받으옵소서” 청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거절을 하셨어요. 즉 수행자는 궁중에 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왕은 부처님이 머무실 좋은 자리가 어디일까 생각해봤는데, 성 안은 너무 번다하고 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탁발하기 어려우니 성으로부터 적당히 떨어져 있는 곳이 좋겠다 해서, 북문 밖에 있는 자신이 아주 아끼던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보시했습니다.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죽림이라고 합니다.nbspnbsp대나무 숲에서 어떻게 머무는가 하는데 여기 보시면 알지만 인도 대나무는 하나씩 솟는 것이 아니고 무리를 지어서 이렇게 솟아서 마치 보리수나 느티나무 모양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대나무 숲은 수행자들이 정진하기에 좋고, 그래서 이곳이 불교 교단에 처음으로 세워진 죽림정사입니다.nbspnbsp인도 풍습으로는 항상 절에 연못이 있었어요. 이곳 죽림정사의 연못은 카란다카 연못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장자 카란다카가 보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천이백 대중이 이곳에 머무실 때 아난다 존자는 이 물을 떠서 부처님이 발을 씻을 수 있도록 해드린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눈을 감고 가만히 명상을 하면 부처님과 아난다 존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nbspnbspnbsp부처님이 이곳에 머무실 때 ‘앗사지’라는 비구가 있었어요. 앗사지는 사르나트에서 오비구 가운데 마지막에 깨달은 비구예요. 앗사지가 왕사성 안에서 탁발을 하고 다녔어요. 수행자는 두리번 두리번 하지 않고 발 끝 한치 앞만 보면서 정진을 하며 걷습니다. 그 걷는 모습이 너무나 수행자다워서 이 모습을 사리푸트라가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 분은 참 위대한 수행자다 해서 사리푸트라가 가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니 “저는 붓다의 제자입니다” 라고 대답했어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과 비견되는 여섯명의 스승이 있었고 이것을 육사외도라고 하는데, 사리푸트라는 그 중에 산자야라는 분의 제자였어요. 그런데 그 앗사지의 거동을 보고 감동을 해서 “당신의 스승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니 “그분이 계신 곳에 가서 여쭤보십시오” 그랬어요. 그래도 한마디만 이야기해 달라고 하니 앗사지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라고 하면서 설했어요. 이것을 듣고 사리푸트라는 마음 속에 많은 의문이 풀렸어요.nbspnbsp그래서 사리푸트라는 자신의 그 기쁜 마음을 자신의 친구인 목갈리나와 나누기 위해 수행처로 돌아왔습니다. 목갈리나가 사리푸트라의 환한 얼굴을 보고 “무슨 좋은 일이 있소?” 라고 물어서 그 내막을 이야기해 주니 목갈리나도 바로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스승인 산자야를 찾아가서 “이런 위대한 수행자가 출현했는데 우리 같이 가서 법문을 들으면 어떻겠소?” 그러니 산자야는 “그것은 믿을 수가 없소” 하면서 회의론을 폈어요. 그래서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는 스승을 두고 자기들만 붓다에게로 갔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자신의 제자 100명씩 총 200명을 데리고 붓다에게 가서 법을 청해 듣고 다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러니 천명이 함께 왔는데다가 이백명이 더 합류했으니 이제 천이백명이 되었습니다. 또 그 전에 육십명의 아라한이 있었죠. 그래서 이 분들은 부처님이 성도하고 1년 안에 제자가 되신 분들이니까 불교 교단 안에서는 모두 장로가 되잖아요. 그래서 늘 천이백 제대 아라한을 칭송하는 이유가 이 분들이 가장 교단의 장로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천이백오십 대중과 함께 계셨다고 경전에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소중한 곳이 바로 이곳 죽림정사입니다.”nbspnbsp그리고 죽림정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nbsp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nbspnbsp오늘은 일정이 많아 바쁘게 다음 장소인 칠엽굴로 갔습니다. 칠엽굴로 가는 길은 ‘온천정사’라는 목욕을 하는 곳이 있어 초입부터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온천정사의 맨 위쪽은 높은 카스트가 목욕하지만 맨 아래쪽의 더러운 물에서는 낮은 카스트가 목욕을 한다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다시한번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nbspnbsp▲ 온천정사를 지나 칠엽굴을 향해 오르는 길.nbsp산 꼭대기에 자이나교의 성지가 있어서 그런지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멀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 칠엽굴에 도착했고, 이어폰을 통해 스님께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시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경전에는 칠엽굴에 아라한 500명이 모여 앉아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는데, 스님께서 “여기 500명이 진짜 다 앉을 수 있는지 보기 위해 500명을 데려왔다” 고 하시면서 “봐라. 500명 다 앉을 수 있네” 하시자 다 같이 크게 웃었습니다.nbspnbsp▲ 경전을 결집할 당시처럼 칠엽굴 앞에 오백 대중이 앉았습니다.nbspnbsp칠엽굴은 부처님 사후 부처님 말씀을 최초로 결집한 제1결집이 행하진 터로 아난다와 우파리가 초안을 내고, 마하가섭 존자가 사회를 보고, 500명의 아라한이 초안을 검증하는 형식으로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nbsp스님께서는 칠엽굴에서의 경전을 결집할 당시의 상황과 부처님 입멸 후에 불교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여러분들 여기까지 올라오신다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이곳이 바로 경전이 처음으로 결집된 칠엽굴입니다. 왜 칠엽굴이라고 부르냐면 나뭇가지 잎사귀처럼 일곱 개의 굴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칠엽굴에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니까 무슨 제주도 만장굴 같은 곳에 들어가서 하신 줄 아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가 앉은 여기서 결집을 했습니다. 굴 속은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경전을 결집했겠어요? 여기 동굴이 후끈 후끈 하잖아요. 수행자들이 동굴 안에서 정진하기 좋았기 때문에 많이 알려진 곳이였어요.nbspnbspnbsp그런데 왜 여기까지 올라와서 경전을 결집했을까요?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참여하겠다고 한 겁니다. 만약에 저 밑에서 하면 누구는 참여하고 누구는 참여 안 하고 통제를 못합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올라와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해요.nbspnbsp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를 때 대부분 슬퍼했어요. 그런데 몇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특히 젊은 사람들 중에는 ‘아이고, 그 늙은이 잘 죽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하지마라’ 이런 잔소리가 많았다고 받아들인 거예요. 이 얘기를 장로들이 듣고 굉장히 걱정을 한 거예요. 지금 부처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저런 사람들이 생기는데 세월이 흐르면 어떨까요? 온갖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나는 부처님 말씀을 이렇게 들었다 하는 문제가 생기면 진위를 규명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부 모아 놓아서 가짜가 생기더라도 막을 수 있게 해야겠다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하겠다고 하니까 수천명이 다 참가하려고 해서 마하가섭 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에 한한다고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여기 500명이 모인 겁니다. 그 때 재정 후원을 아자타사투 왕이 했다고 합니다.nbspnbsp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을 25년 동안 시봉한 아난다가 그때까지 아라한과를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는 것이였죠. 부처님을 시봉하고 법문을 듣기만 했지 아직 자기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거예요. 아난다는 당연히 자기가 참가할 줄 알았는데 참가가 안되었어요. 아난다에게도 불명예이지만 아난다가 없으면 경전을 결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아난다가 그날 밤에 백천간두 진일보의 정신으로 목숨을 건 정진을 해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해요. 아난다는 맨 마지막으로 오백 대중에 함께한 겁니다.nbspnbspnbsp우리도 여기 오백 명이 모였는데 지금 조는 사람도 있네요. 오백명이 모여서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려면 소란했겠죠. 그래서 사회를 마하가섭 존자가 보고 경의 초안을 아난다가 내었어요. 아난다가 먼저 초안을 내면 다른 사람들이 다 듣고 검증을 했어요. 아난다가 언제 어디서 부처님이 누구에게 어떤 법문을 했는지를 읊조리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옳소. 나도 그렇게 들었소”, “그것은 다른 곳에서 하신 말씀과 섞였소” 이렇게 하나하나 검증을 했어요. 그래서 성경보다는 월등하게 정확합니다. 불경은 깨달은 오백명이 모여서 하나 하나 검증해서 확인된 것을 결집을 시켰으니 정확도에 있어서는 비교가 안됩니다.nbspnbsp초기에 모든 경전은 암송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고 500년이 지난 뒤에 문자로 적게 된 것입니다. 암송이 기록보다 더 정확합니다. 글로 쓴 것은 글자가 틀리면 완전히 오류가 생기거든요. 아난다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의 곡조까지 흉내를 그대로 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가지 의심이 들었다고 해요. 첫째, 부처님이 살아서 돌아오셨는가. 둘째, 타방에 계신 부처님이 이곳에 오셨는가. 셋째, 아난다가 성불했는가. nbspnbspnbsp이런 의심이 들만큼 녹음기 틀어놓은 것처럼 그대로 재현이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오백명이 다 검증을 해서 모든 경전을 결집한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한번 보세요. 오백명이 앉아도 충분하죠? 딱 오백명이 앉으면 되는 자리네요. 가섭 존자가 오백명 이상은 안된다고 한 이유도 자리가 좁아서 안되었겠어요.” nbsp오백 대중이 모여 경전을 읊는 모습을 상상하며 명상도 하고 경전 독송도 함께 했습니다. 2,600년이 흘러 오늘 오백 대중이 이렇게 다시 모여 이곳에 앉아 당시 상황을 다시 재현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다함께 “만세”를 힘차게 부르면서 기념사진을 찍고 산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nbsp칠엽굴을 바쁘게 나와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나란다 대학으로 갔습니다. 나란다 대학 유적지 맞은 편에 작은 박물관이 하나 있어서 먼저 그곳부터 들어가서 이곳에서 발굴된 불상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여러 불상들 중에 특히 부처님의 8대 성지가 다 나와있는 불상이 있어서 관심있게 보기도 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 나란다 대학의 전체 규모를 알 수 있는 모형이 있었는데, 현재 발굴된 것은 10분의1도 안된다고 하니 당시에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나란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상. 8대 성지가 한 불상 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nbspnbsp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란다 대학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란다 대학은 불교를 가르치던 곳으로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대학이었는데 교사만 천오백명이였고 학생은 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적이고 온갖 지혜가 넘쳐났을 곳을 무슬림이 침공해서 모두 불 태워버렸고, 더군다나 도서관은 6개월이나 불 탔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nbsp▲ 나란다 대학. 네모난 곳이 스님 한 명이 명상을 하던 방이라고 합니다.nbspnbsp나란다 대학을 끝으로 오늘의 많은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순례단은 모두 라즈길에 예약된 숙소 곳곳으로 흩어져서 하루종일 걷고 걸었던 여독을 풀었습니다.nbsp내일은 새벽 3시30분에 기상해서 4시에 출발하는 일정입니다. 바이샬리로 가서 아직 3개 밖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또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2015.1.12 인도성지순례 6일째 수자타아카데미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도성지순례 6일째로 오전에는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1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둥게스와리 마을 방문을 하는 날입니다. nbspnbsp오늘도 새벽 4시에 기상하여 4시30분에 수자타아카데미 쁘락보디홀에 모여서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500명의 대중이 가사를 걸치고 함께 하는 새벽 예불은 참으로 장엄하고 엄숙합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전정각산에 오르기 위해 6시 20분에 교문 앞에 모였습니다. 새벽에 짙은 안개가 끼여 등산이 가능할까 걱정하였는데 예정대로 진행되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nbspnbsp어제 순례길 행군으로 피곤한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라고 공지하였지만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동참하였습니다. 등산길 입구에 있는 돌무더기를 가르키며 스님은 ‘탑터’라고 말씀하시면서 탑에 관한 사연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nbspnbsp▲ 부처님께서 죽어가는 여인의 분소의를 입은 곳에 세워진 탑터nbspnbsp“탑 하나는 부처님의 수행 자리를 기리면서 지은 것이고, 또 하나의 조그마한 탑은 버려진 여인이 죽어가면서 부처님이 수행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죽으면 분소의를 저 분이 입어주시기를 소원하였는데 부처님이 그 마음을 아시고 나중에 분소의를 입으시자 그 여인은 곧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사연이 있는 탑입니다. 부처님은 이 전정각산 지역에서 무려 6년이나 수행하셨기에 이곳저곳 부처님이 머무르시지 않은 곳이 없다고 볼 수 있어요. 다 사연이 있어서 산봉우리마다 탑이 세워졌고 마을 근처에도 여기 저기 남아 있는 탑터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을에서 가까운 탑들의 경우 훼손이 심각한데 이는 불교가 쇠퇴하면서 마을사람들이 집수리 하거나 생활에 필요한 돌이나 벽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가져다 갔기 때문입니다.nbspnbsp현재 여러분이 보듯이 전정각산은 돌산이지만 부처님이 수행하던 당시에는 아마도 울창한 숲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는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부정한 땅이라는 뜻인 둥게스와리로 불리었는데 사람들이 여기로 오길 꺼려했습니다. 지금은 근처 마을사람들이 밥을 짓는데 땔감으로 산의 나무를 베어가기 때문에 나무가 자라기가 어렵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의 대다수가 산의 돌을 깨어서 먹고 사는데 산의 일부분이 사라질 정도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불교의 성지로서 세계적 문화유산이 될 전정각산의 바위들이 최근 급격하게 증가하는 도로 포장용 자갈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현재는 정부에서 전정각산을 성지로 보호하면서 함부로 나무를 자르지 못하게 하고 나무를 심도록 지원하고 있고 돌 채취도 금하는데도 실제적으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nbspnbsp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한참 오르다 보니 마을의 짙은 안개들이 엷어지고 산으로 올라갈수록 날씨가 좋아지는 듯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전정각산을 오르시면서 “작은 가시나무들이 바지 가랑이를 붙잡아도 살살 달래면서 털고 오세요. 힘껏 잡아채면 옷의 올이 다 풀려서 상합니다” 라고 하시면서 “여기는 나무들도 척박한 곳이라서 외로워서 사람을 잡으니 살살 달래야 합니다.” 라고 덧붙이십니다.nbspnbsp조금 더 오르니 꽤 큰 웅덩이가 보이는데 물이 뿌옇습니다. 스님께서 물 웅덩이를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십니다.nbspnbsp▲ 부처님이 전정각산에 머무시면서 물을 드셨다는 샘터nbsp“이 곳이 전정각산에서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곳입니다. 부처님도 이곳에서 물을 드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마셔 볼래요? 배탈 나도 책임 못 집니다. 이곳은 석회석 암반이라서 물이 희뿌였습니다. 아마도 부처님이 마셨던 우물은 기슭의 이 조그마한 샘터일 것입니다. 지금은 건기라서 물이 없네요.”nbspnbsp조금 더 가니 바위로 둘러싸인 평안해 보이는 곳이 나옵니다.nbspnbsp▲ 부처님께서 명상하시던 자리의 탑터nbspnbsp“이곳은 바람을 막아주어서 안온합니다. 아마도 겨울에는 여기서 주로 부처님이 머무셨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와 저기에 탑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명상하던 자리로서 탑을 세웠던 곳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20분 정도 명상 하겠습니다.”nbspnbsp스님은 몸소 바위에 자리를 깔고서 자세를 바로 하시고 간략하게 명상하시는 법을 알려주시고 함께 명상을 하셨습니다.nbspnbspnbsp8호차부터 13호차까지 약 250명의 대중이 모두 조용히 자리를 잡고 명상을 하는 가운데 시원한 바람이 살살 불어오고 부처님께서 정진하셨던 이곳에 2500여년이 지나 그 제자인 정토행자들이 명상을 한다고 하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이 새롭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 명상의 공덕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nbspnbsp“부처님이 명상하셨던 이곳에서 잠깐이라도 명상을 해본 것은 인도성지순례의 큰 공덕입니다. 이 잠깐 동안의 명상만으로도 여러분은 본전을 뽑은 겁니다. 나머지는 인도까지 왔으니까 곁다리로 보는 것이예요.”nbspnbsp순식간에 시간이 흘러서 스님께서는 좌선을 풀고 단체 사진을 찍자고 하셨습니다. 그 때 스님이 앉았던 바위 밑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모두 신기해하였습니다. “명상 중에 따뜻하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더니 이래서 그랬나 보다” 하시면서 웃으셨고 많은 분들이 바위 밑을 들여다 보겠다고 모여 들자 “아이고 이것도 구경이라고 난리다” 하십니다.nbspnbsp▲ 새벽녘 전정각산 위에 올라 힘차게 두 손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봅니다.nbspnbsp모든 사람들이 바위에 기대여 단체사진을 찍고 나자 아래 마을 쪽에서 짙은 안개가 빠르게 올라오는데 장관이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사진도 찍지 못할 뻔 했습니다. 스님이 앞장서시고 서둘러 길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아침 식사를 맛있게 하고 8시 30분부터 설성봉 거사님 추모식을 거행하였습니다.nbspnbspnbsp장도연 행자님은 추모문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순례객들도 추모문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nbspnbspnbsp설거사님 부를 때마다 안경 너머 작은 눈은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 줄 채비를 갖춘 선한 눈매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옅은 웃음으로 대답하셨죠. 세상 살이에 아무런 욕심이 없어. 어디 살든 나는 정토행자이고 정토행자로 살다 부처님 법다이 살다 죽으면 되지... 언젠가 옥상에서 전장각산을 바라보고 허허 웃으며 하시던 말씀. 지지리도 못 살아 인간 대접 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땀이 많으신 분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인도 땅을 밟으심은 바로 그 이유였습니까? 중학교 건물 콘크리트 친다고 인도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대야에 시멘트를 이고 나르던 당신의 모습. 눈물이 납니다. 당신의 모습이 수자타아카데미 전정각산과 더불어 더 큰 무게로 가슴을 누릅니다. 당신의 크나큰 사랑, 남아 있는 저희들이 이루겠습니다. 설성봉 거사님 부처님 고행하신 전정각산 바람따라 네이란자라강 흐르는 강물따라 몸 편히 누이시고 고이 가소서 빛으로 돌아오소서nbspnbsp그리고 유수스님의 염불과 함께 정성스럽게 천도재를 올렸습니다.nbsp척박한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다가 무장 강도의 총격에 숨진 거사님이 있었기에 오늘의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부디 왕생극락하시고 빛으로 돌아오소서’ 하는 마음으로 지극정성으로 재를 지내고, 설 거사님의 뜻을 이제 우리가 이어받아서 인도JTS를 잘 가꾸어 나가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nbspnbspnbsp추모식을 하는 동안에 학교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부다가야의 외국절 스님들 그리고 이 지역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내빈들이 21주년 개교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내빈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행사가 열리는 쁘락보디홀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nbspnbspnbsp요란한 축하 음악과 함께 기념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는 인도어로 진행되었고 오늘을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한 학생들의 공연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공연 하나 하나 신나고 재미있고 멋졌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정말 다채롭고 인상적인 인도 공연을 보는 듯 했습니다. 때로는 인도 음악에 때로는 한국 전통 음악에 맞추어서 신명나게 즐기는 모습에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nbspnbspnbspnbsp특히 인도 남자 아이들의 힘차고 멋진 군무에 보살님들의 탄성과 박수가 커 보였습니다. 또 아이들은 평소에 갈고 닦은 태권도 실력도 뽐냈습니다. 한국말로 “하나”, “둘”, “태권” 하는 소리에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nbsp저렇게 멋지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들에서 어제까지 관광지에서 보았던 구걸하는 인도 아이들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정성으로 교육한 힘은 컸고 기적을 보는 듯하였습니다.nbspnbspnbsp한참 신나게 공연을 즐기고 드디어 스님께서 감사의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먼저 개교 기념식에 참석한 분들을 하나 하나 언급하면서 감사의 말씀을 하는데 학생들을 제일 먼저 말씀하면서 고맙다고 하십니다.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를 오랫동안 지원해 주셨던 미얀마 스님을 위시하여 근처의 베트남, 방글라데시, 티벳 스님들 그리고 지역 유지들 그리고 학교를 세울 당시 땅을 보시하였던 이곳의 가난하고 헐벗은 동네사람들, 하나라도 빠질세라 스님의 세심한 모습이 엿보입니다.nbspnbspnbsp“1993년 시작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특히 3번이나 무장강도가 들어서 설성봉 거사님이 총에 맞고 돌아가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부다가야 스님들이 오셔서 위로하였고 도움을 주셨습니다. 경찰서장님도 이곳의 치안에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 오신 동네 어르신들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15개 동네 1만여명의 주민들이 있는 이곳에서 이제는 대부분의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고 결핵환자가 거의 없어졌고 유아 사망자가 크게 줄었습니다. 핸드펌프 설치로 식수도 개선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할 일들이 더 많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지원과 협력이 필요합니다.nbspnbsp둥게스와리 nbsp아이들도 교육시키면 다른 도시의 어느 아이들과 똑같이 잘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의 기회가 없다면 구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이곳에서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듯이 이 아들들도 교육 받으면 이 사회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부처님처럼 잘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nbspnbspnbsp마지막 공연에서는 아이들이 법륜스님과 여러 귀빈들을 모시고 무대 위로 올라와서 꽃목걸이를 걸고 “세상을 함께 치유하자”는 노래를 부르며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대미를 장식하였습니다.nbspnbsp학교를 세우신 스님에 대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 속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스님이 아니였다면 지금도 굶주림에 허덕이며 구걸을 하고 있었을 아이들인데...’ 순례객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힙니다.nbspnbspnbsp성지순례객들도 오늘은 인도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나뭇잎으로 만든 접시 위에 유미죽, 뿌리, 달 그리고 오렌지를 담아서 야외 잔디밭에 조별로 올망졸망 모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오늘은 숟가락도 사용하지 않고 인도인들처럼 손으로 식사를 해봅니다.nbspnbspnbsp▲ 인도 아이들처럼 인도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는 시간nbsp점심식사 후에는 직접 마을 방문을 하였습니다. 약 500명의 순례객들이 각각의 마을로 나뉘어져 실제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 위에 올려져 있는 접시와 냄비가 갖고 있는 살림의 전부라고 합니다.nbspnbsp방문한 마을의 아이들은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때로 몰려와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건네는데 사탕이나 초콜렛을 원하는 듯 했습니다. 안내해주는 법사님이 “아이들에게 자꾸 무엇을 주지 마세요. 아이들을 거지로 만들지 마시고 의젓한 청년으로 자라게 해주세요.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저희 JTS에 주시면 저희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얘기해주시는데 JTS가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교육시켜 왔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두르가푸르 마을을 방문해 부엌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고 있는 선주 법사님.nbspnbsp직접 들여다 본 방 안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깜깜한지 놀라웠고 염소나 닭과 함께 생활해서 염소 똥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어찌 사는가 싶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밝게 웃으면서 사진 촬영에도 응하고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였습니다. 순례객이 직접 방문한 집은 모두 마을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집이였는데, 인도JTS에서 제공하는 구호물품을 함께 나눠주었습니다.nbspnbsp방문 후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나누기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기준에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지만 누가 더 자유롭고 행복한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보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비위생적이었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알겠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잠깐 시간을 내셔서 JTS에서 수자타아카데미로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현지 활동가들에게 새책 lt지금 여기 깨어있기gt를 선물하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인도JTS 활동가들에게 새책을 선물하고 기념사진 촬영.nbspnbsp저녁 식사로 맛있는 라면을 끓여 먹고 나서 저녁 예불 후 강당에서 소감 발표시간을 가졌습니다. 소감과 더불어 둥게스와리의 발전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도 많이 나왔습니다.nbspnbsp▲ 둥게스와리 마을 방문을 한 소감문을 발표하는 시간nbsp스님께서는 각 조별로 나온 의견들에 대해 대답을 해주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nbspnbsp“여기서 3일 됐는데 생활할만 해요? 힘들지만 마을 사람이 볼 땐 학교가 어떻게 보일까요? 궁궐처럼 보입니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사는 곳을 보면 왕궁에 사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 곳에 사는데 여러분들은 힘들어 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천당에 가도 며칠만 살면 또 힘들다고 할 거에요.nbspnbspnbsp여러분들이 보기에 땅이 넓으니 농사도 제대로 짓고 텃밭도 만들면 좋겠다 제안하셨는데, 현실적으로는 어렵습니다. 왜 땅이 비어있겠어요? 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기 때만 비가 내리고 다른 때는 비가 안 와요. 또 이 지역은 비가 오면 금방 빠져버려요. 좋은 점은 홍수가 절대로 안 난다는 거에요. 학교 운영하는 데에는 좋은 조건입니다. 습지가 없고 물웅덩이가 없으니 모기가 적거든요. 그러나 농사 짓는 데에는 부적절합니다. 지하수 파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거기에도 문제가 있어요. 식수 정도는 핸드펌프로 파는 것이 괜찮은데 농업용수를 전기로 펑펑 올리게 되면 지하수면이 낮아지고 그러면 그 나마 조금 있는 나무들도 다 말라버립니다. 환경적으로 검토했는데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어요.nbspnbsp또 들판에 물이 잘 공급되는 땅을 가진 분이 말하길 ‘농사 지어서 남는 게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물을 발전기로 끌어 올려서 농사 짓게 되면 남는 게 없어요. 경제성이 없어요. 늘 주민들이 우리에게 양수기를 설치해달라고 해서 시범적으로 한번 해줬는데 운영이 안 돼요. 기름 살 돈이 없어서 양수기를 결국 방치하더라구요. 집집마다 핸드펌프로 올려서 텃밭 가꾼다 하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물물 파서 채소를 가꾼다는 건 현실성이 없어요.nbspnbsp여긴 원래 사람 살 수 있는 데가 아니에요. 그런데 왜 사람이 사느냐면 보통 마을은 양민이 100명 살면 한쪽 구석에 천민이 100명이 살아요. 천민들이 양민 동네에 가서 일해주고 먹고 살지요. 여기 산 주위에만 천민 집단 부락이 있어요. 평지에는 천민만 있는 집단 부락이 없어요. 항상 양민 주변에 거주하게 됩니다.nbspnbsp그러니 누군가가 여기 살아보면서 사정에 맞게끔 주택개량을 해야 해요. 제가 주민들에게 물어봤어요. 집짓는 비용을 빌려 준다 치고 1년에 얼마나 갚을 수 있겠느냐 했더니, 1000루피 갚을 수 있다고 해요. 집 짓는데 3만 루피를 빌려준다면 이자 없이 무이자로 빌려준다고 해도 30년 갚아야 해요. 그런데 3만 루피로 집을 지을 수 있느냐?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15만루피가 드는데 빌려주면 150년 동안 갚아야 해요. 불가능해요. 여러 채의 집을 지으면서 실험해봐야 해요. 돈도 적게 들고 짓는 기술도 간단한 방식으로 연구해야 해요.nbspnbsp그리고 건조한 지역에도 자라는 식물을 개발하는 거에요. 실험농장을 마련해서 지하수를 파지 않고 물을 적게 주고도 자라는, 그래서 황무지에도 쉽게 키울 수 있는 농법 연구를 해야 합니다. 방목은 안 됩니다. 풀이 없어서 소가 산에 올라가서 나무 가지를 다 먹어버려 나무를 죽이게 됩니다.nbspnbsp학교에서 공사를 계속 하는 것도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수입원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어요. 공사를 관리할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제일 필요한 건 마을개발 자원봉사자에요. 학교, 병원, 마을개발 이 세가지 활동 중에서 마을개발이 제일 답보 상태예요. 경험과 아이디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 와서 해결해 주었으면 해요.nbspnbsp아이들 문맹퇴치는 100프로 달성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때부터 노동을 해야 농사일이든 노가다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까지 나오면 노동을 하지 않아 평생 룸펜이 되기 쉽습니다. 핸드폰도 구해야지 자전거도 타야지 소비성이 더 늘어나요. 이런 걸 보면 제가 교육을 해놓고도 잘 한 건지 못한 건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기숙사에 아이들 두는 것도 중지했어요. 여기서 생활하면 자기집에서 생활을 못 합니다. 주간에는 반드시 집에 가서 농사 짓는 것을 도와야 합니다. 학교 와서 잘못 물들면 집에 가서 농사를 못 지어요. 그리고 ‘학교 졸업하고 농사 일할 바에야 학교 뭐하러 다녔나’ 하는 소리를 듣고, 도시 취업은 쉽지 않아요. 이들이 취직할 수 있는 건 경찰, 군인, 공무원 밖에 없어요. 개인사업을 하려면 카스트가 바이샤라야 되고 아버지가 장사를 물려줘야 되는데 자본과 계급이 둘 다 안 돼요. 공무원은 자리가 있는데 시험 쳐서 걸리는 것도 어렵지만 뒷돈을 대야하는데 학교에서 뒷돈까지 대주기는 어려워요. 공부를 시켜도 이런 문제가 있어요.nbsp노동학교에서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되면 월급이 두배가 돼요. 동네에 미장하는 일은 수요가 언제든지 있어요. 공사장에서 보조로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건 어려움이 있어요. 계속 막노동만 하게 되니까요. JTS에서 건축회사를 하나 만들어도 좋은데 할 사람이 없어요.nbspnbsp마을 주민들도 어차피 소비를 해요. 시멘트, 벽돌, 볏짚도 돈주고 사야 합니다. 싸게 구입하려면 공동 구매를 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협동조합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마을금고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강도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100루피만 있어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형편이에요. 고 설성봉 거사 이후 10년 동안 수자타아카데미 안에 경찰이 주둔하고 있어서 지금은 또 치안이 좋은 편이에요. 동네에 가보면 집집마다 연장이 전부 JTS 연장을 씁니다. 일하다가 호미든 낫이든 담장 너머로 던지는 겁니다. JTS가 연장 보급은 많이 했어요. nbspnbsp도난 사고는 훔쳐가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훔칠 수 없는 시스템이 되도록 해야 해요.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면 왜 줄을 안 서고 무질서하게 하느냐 하면 자기에게 불이익이 닥칠까 싶어서 그런 거에요. 안 주든지, 주면 줄을 세워서 끝까지 주든지 해야 해요. 그리고 다 줄 때까지 못 일어나도록 하고 주면 질서가 잡혀요.nbspnbsp제안해주신 것처럼, 여기서 공부해서 여기서 취직이 된다면 도시로 나가지 않아도 되죠. 이 마을에서 자라서 이 마을에 환원되게 하려면 여기에 수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초 자재가 없어요. 관광사업은 잘못하면 사람을 나쁘게 만들 우려가 있고요.nbspnbsp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곳 교육을 통해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취직을 위해서는 도시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지만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 곳 현지 상황을 기반으로 주택개발, 협동조합과 같은 마을 공동 사업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봉사할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nbspnbspnbsp이번 방문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얘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여러분은 이미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여기서 멈춰 주어야 이들이 조금이라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도 한국도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고자 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더욱 빈곤해지는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들은 한국에서는 경제적으로 약자일지 모르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 많이 가진 자입니다. 그러니 검소하게 생활할 것을 부탁드립니다.nbspnbsp둘째는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가진 것이면 충분히 나눌 수 있습니다. 1년에 20만원이면 여기 한 아이가 일년 동안 입고 먹고 교육 받을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돈이 있더라도 아끼면서 소박하게 살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극빈자 한 사람은 살리면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그 당시에 이미 화려한 궁중 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많은 농민들과 노예들의 고달픈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모순을 간파하시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몸소 소박한 삶을 사시어서 이 모순을 타파하고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번 경험이 여러분들이 행복을 찾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nbsp nbspnbsp수자타아카데미 개교기념식과 마을 방문을 하면서 열악환 환경을 보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JTS의 사업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이 들었는데, 순례단이 의문을 가진 점들에 대해서 스님께서 다시한번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시니 ‘아, 정말 온갖 고민과 실험을 다 해보셨구나’ 알게 되었고, ‘나도 한번 기여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인도JTS의 사업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나길 기원해 봅니다.nbspnbsp스님께서 1시간 동안의 열강을 해주시니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각자 숙소로 돌아가 다시 내일부터 먼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잠자리에 듭니다.nbspnbsp내일은 부처님께서 1000명의 비구들과 함께 왕사성으로 가서 빔비사라 왕을 교화하고 설법을 하신 영축산, 죽림정사, 열반하신 후 500 아라한이 모여 경전을 결집한 칠엽굴, 불교가 번창하면서 세워진 나란다 대학 등이 있는 라즈길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합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
2015.1.11 인도성지순례 5일째 보드가야
▲ 보드가야 대탑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도성지순례 5일째, 둥게스와리에서의 첫 새벽을 맞았습니다.nbspnbsp아직 어두운 이른 새벽, 가사를 수한 500명 대중이 수자타아카데미 쁘락보디홀 강당에 모여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니 정말 출가수행자가 된 듯 결연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운동장에서 보온병에 따뜻한 물과 아침 도시락을 받아들고 8km 떨어진 보드가야로 향한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욕망을 좇아가는 것도 억압하는 것도 모두 욕망에 매여 있는 것임을 깨달은 부처님이 6년간의 고행을 끝내고 전정각산에서 하산해 강에서 목욕을 하고 쓰러져 수자타의 유미죽으로 건강을 회복한 뒤 보드가야로 가서 성도에 이르신 여정을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nbspnbsp새벽 달빛이 밝아 순례단 일행은 “손전등을 끄고 가봅시다”는 스님의 제안에 따라 온전히 달빛에 의존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트기 전의 마을 길을 걸으며 순례단을 위해 무변심 법사님이 달밤에 어울리는 차분한 노래가락을 선사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순례단이 지나가는 두르가푸루 마을을 비롯한 4개 마을에 수자타 유치원이 있었는데 갈수록 기술이 발전해 가장 마지막에 지은 라훌라가르 유치원이 가장 잘 지어졌다고 합니다. 새벽 달빛으로 보는 유치원의 작고 아담한 정경 속에 건물을 지은 봉사자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nbspnbsp▲ 고행을 마치고 부처님이 건너셨다는 네이란자라강을 건너며nbspnbsp인도는 지금 건기로 네이란자라강이 대부분 모래바닥을 드러냈지만 강물이 얕게 흐르는 곳에 다다른 스님께서 징검다리를 찾아 날아다니듯 훌쩍 건너셨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건너기가 어려워 스님께서 “신발 벗고 맨발로 건너오세요” 라고 하셔서 일제히 맨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두발로 젖은 모래바닥의 시린 기운을 전해 받으니 정신이 또렷해집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네이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하면 천국에 이른다”면서 “우리는 발만 담그고 건넜으니 그 발만 천국에 가겠다”는 우스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전정각산을 내려와 강 건너편 쪽에서 목욕을 하셨다고 하는데, 스님은 “건기에는 강 건너편 쪽에만 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경전내용이 실제와 꼭 맞다”고 하셨습니다. 강 너머 마을로 들어서니 부지런한 마을 주민들이 새벽부터 군데군데 불을 피우고 몸을 덥히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마을을 지나면서 부처님이 네이란자라 강에서 목욕하시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하는 곳에 세워진 탑터를 지났습니다. 탑이 모두 허물어져 있고 쓰레기만 쌓여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설명을 해주셔서 알 수 있었지 자칫하면 지나칠 뻔 했습니다. 부처님의 유적지가 보존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목욕을 하시다가 쓰러지신 곳에 세워진 탑터nbsp스님은 부처님 성도 직전 유미죽을 올린 수자타의 공양이 왜 불교 최고의 공덕인지에 대해서 들려주셨습니다. “수자타는 부처님인 줄 알지 못하고 배고파 쓰러진 수행자에게 유미죽을 끓여 보시했기 때문에 그 공덕이 매우 크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인 줄 알면 너도나도 대접하려 했기 때문”이라면서 걸인에 대한 적선과 수자타 아카데미를 세우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인도의 구걸하는 아이들에 대해 주어도 문제이고 주지 않아도 문제였는데, 이 아이들이 거지가 되지도 않게 하면서 진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시다가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자타의 공양처럼 이들 중 부처가 있을지 어찌 아느냐” 하며 웃으셨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도 도와준다는 개념보다는 버려진 아이들을 부처님께 공양하듯이 하자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합니다.nbspnbsp밀밭 사이를 가던 중에 철문과 벽으로 경계 지워진 공간이 나타났는데, 들어가니 문밖이나 마찬가지로 풀만 가득했습니다. 이곳에서 자리를 깔고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준비해 준 주먹밥과 단무지 그리고 삶은 계란과 오렌지 등으로 아침식사를 맛나게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시고 스님께서는 “이 장소를 명상센터 건립부지로 구입했으나, 건축을 총괄할 사람을 못 찾아 몇 년째 계획이 미뤄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로 향하기까지의 행적에 대해 법문을 듣고 경전을 함께 독송하였습니다.nbspnbsp▲ 정토회 명상센터 건립 부지nbsp스님은 정토회 명상센터 건립 부지를 나서며 문 앞에 80명쯤 되는 많은 아이들에게 일일이 사탕을 한 웅큼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법문에서 자주 말씀하셨듯이 스님께서는 사탕을 나눠주시며 ‘다음 세상에는 스님의 제자가 되어 인도 불교 부흥을 함께 일구자’고 되뇌셨을 것 같습니다. nbspnbsp▲ 성지에서 늘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시는 스님nbsp명상센터를 나와 조금 가니까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탑터가 나왔습니다. 순례단은 탑 주위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하였습니다. 수자타의 공양탑 주위에 수자타 탬플이 있었는데 인도에 불교가 사라진 뒤 이 절은 지금까지도 힌두교 절로 되어 있습니다. 수자타 탬플 이름은 그대로인데 불교 절이 아니라 힌두신을 모신 절이라고 하니 마음이 몹시 서운했습니다.nbspnbsp▲ 수자타의 공양탑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봉독.nbsp수자타 탬플을 지나 강변에 있는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로 갔습니다. 우르벨라 가섭의 수행터에 이르자 스님은 웃으시며 “500명 제자가 정말 함께 수행을 하였는지 확인해 보자”며 들어가십니다. 당시 우르벨라 가섭은 80세로 이 지역에 명망이 있는 지도자였기에 35살 부처님은 풋내기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우르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는 부처님께 머물 곳이 없다며 거절을 하자, 부처님은 “어떤 자리도 좋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우르벨라 가섭은 부처님을 ?아낼 심산으로 “화룡이 있는 곳 밖에 없다”고 해서 부처님은 화룡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우르벨라 가섭은 ‘좋은 수행자를 잃었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사히 자고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360번의 신통력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루벨라 가섭은 젊은 수행자가 훌륭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해서 쉽게 교화되지 않았습니다. nbspnbsp▲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nbsp어느날 성대한 제사를 지낸 후 부처님께 “당신이 보았으면 좋았는데” 하면서 자랑하던 우르벨라 가섭에게 부처님은 “마음 속에 질투심이 있으면 해탈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우르벨라 가섭은 자신의 질투심을 알아차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500명의 제자들도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지금까지 사용하던 제사 용구를 모두 물에 던져버렸습니다. 물에 떠내려 오는 형님의 제사 용구를 보고 형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염려하여 쫓아온 동생 나디 가섭은 형님의 말을 듣고 300명 제자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막내 동생 가야 가섭 역시 200명의 제자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며 화룡 굴을 바라보고 그곳을 떠났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하룻밤 머무셨다는 화룡굴nbsp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를 지나자 밀밭이 펼쳐졌습니다. 수자타 마을은 땅이 비옥해 논밭이 많았습니다. 물안개가 가득한 논두렁길 위를 오백대중이 묵묵히 한줄로 걸으니 다시한번 장관이 펼쳐집니다.nbspnbspnbsp▲ 논두렁길 위를 오백 대중이 함께 걸으며nbsp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자타의 집이였던 곳에 세워진 수자타의 탑을 참배했습니다. 탑을 한바퀴 돌면서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보드가야로 향했습니다.nbspnbsp▲ 수자타의 집터에 세워진 탑.nbspnbsp4시간을 걸어 발바닥과 종아리와 어깨가 아플 무렵 보드가야 대탑에 도착했습니다. 오백 대중은 일제히 가사를 수하고 향을 든 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입장을 하였습니다.nbspnbspnbsp행렬의 선봉에 스님께서 서시고 그 뒤에 정성껏 준비한 공양물과 향을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다시 대탑을 돌아 부처님이 성도하신 보리수 나무 그늘 넓은 터에 이르러 예불을 올렸습니다.nbspnbspnbsp인도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방문객들도 모두 스님과 정토회 순례단의 예불 모습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nbspnbspnbsp▲ 부처님이 앉으셔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예불을 올립니다.nbspnbsp보드가야 대탑은 부처님이 성도하신 자리에 아쇼카 왕이 세운 불탑으로 ‘마하보디 수투파’라고도 합니다. 불교가 쇠퇴하자 힌두절이 되었는데 미얀마 왕이 거금을 주고 관리 권한을 얻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순례단 전체를 위해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있었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이곳은 강변이였어요. 부처님께서는 강변의 큰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으셔서 이곳에서 마지막 정진을 해야되겠다고 결심을 하십니다. ‘내가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즉 죽어도 좋다는 결심을 합니다. 이것을 대결정심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나서 49일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49일 동안 용맹 정진을 하셨으니까 적어도 49일은 음식을 전혀 안드셨던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깨달음을 얻기 직전의 마지막날 밤에 욕계의 맨 꼭대기에 있는 타화자재천궁이 흔들흔들 했어요. 그래서 자재천왕이 저 인간세상을 둘러보니까 한 미미한 인간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지에 이른 겁니다. 그래서 마왕의 세 딸을 보내서 욕망으로 유혹을 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만 가득한 것들아“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락’이 곧 ‘고’임을 아신 것입니다. 고만 고가 아니라 락도 곧 고임을 꿰뚫어 아신 겁니다. 부처님의 손끝이 마왕의 세 딸에게 향하자 세 딸은 노파로 변해서 부끄러워 도망을 가버렸다고 합니다.nbspnbspnbsp이렇게 아무런 미동이 없자 두번째는 마왕이 일만 군대를 보내서 부처님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해서 수행을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런 두려움이나 미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창과 화살이 부처님 몸에 닿자 다 연꽃이 되어 떨어졌습니다.nbspnbsp그래서 마왕은 부처님을 항복시킬 수 없다고 느끼고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수행을 포기하면 자재천왕의 자리를 주겠다. 그러니 그만두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저 같으면 아무래도 받았을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자재천왕의 자리를 저한테 주면 통일을 금방 이루게 되겠지요? 성평등도 금방 실현되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될테니까요. nbspnbsp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 이렇게 말했어요. 이렇게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붓다의 수행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자재천왕이 붓다에게 “해탈이나 열반이란 것은 그런 말만 있지 실제로는 그런 경지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은 너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나는 너와 비교할 수 없는 한없는 공덕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자재천왕이 이를 비웃자 부처님께서 “대지의 신이여, 나의 모든 공덕을 증명하라”고 하니까 대지의 신이 일어나서 붓다가 과거 생애에 한량없이 지었던 수많은 공덕을 찬양합니다. 그러니 마왕이 부끄러워 도망갔습니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수하항마상입니다.nbspnbsp마왕을 항복받고 새벽녘 동쪽에 샛별이 뜰 때 붓다께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이곳입니다.nbspnbsp깨달음을 얻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일주일 간 깨달음의 즐거움을 만끽했다고 해요. 그리고 nbsp장소를 조금 옮겨서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무를 응시하면서 일주일 간 선정에 들었습니다. 세 번째 주에는 보리수 나무 주위를 천천히 행선하면서 열아홉 발자욱을 왕복하며 걸었습니다. 이 대탑의 북편으로 가면 부처님이 걸었다는 곳에 연꽃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네 번째 주에는 부처님 몸에서 광명이 났다고 해요. 그리고 대탑의 동편 정문 앞에 계실 때 어떤 바라문이 지나가면서 “이 세상에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습니다. 원래 정답이 있는 질문이였어요. 가장 고귀한 것은 어머니 아버지의 윗대로 7대까지 브라만의 피만 섞여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청정한 자가 가장 성스러원 자이다” 라고 합니다. 그 바라문이 자기 생각과 틀리니까 “흥” 하고 콧방귀를 끼고 지나가버렸다고 해요. 자신의 고정관념 때문에 붓다를 친견하지 못한 거죠. 여섯째 주에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어요. 이 전체가 물바다가 되었는데 그 때 문차린다 용왕이 나타나서 부처님을 감싸서 비를 맞지 않게 보호했다고 합니다. 일곱째 주에는 두 상인이 지나가면서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면 복을 받는다고 해서 두 상인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어요. 그런데 그들은 부처님께 공양만 올렸지 법을 청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복은 받았지만 해탈은 얻지 못했습니다.nbspnbspnbsp바라문처럼 종교인이거나 지식인은 고정관념이 많아서 법을 듣지 못했고, 사업가들은 돈 버는데만 사로잡혀서 복을 구하느라 법을 듣지 못했습니다. 또 강가강을 건널 때 가난한 뱃사공은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법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어쨌든 성도 후 7주간 있었던 이야기를 법사님들이 다 안내해 드릴테니 한번 둘러보세요.nbsp그러니까 49일 동안 법열을 느끼는 시간을 갖고 상인으로부터 공양을 받은 이야기가 나오니까 최대한 98일 동안 밥을 안 먹었다고 볼 수 있죠. 일곱째 주의 첫 번째날에 상인으로부터 공양을 받았다면 적어도 91일 동안 공양을 안드신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가 단식을 해도 적어도 언제까지는 가능하겠습니까? 석달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석달을 해보려고 했는데 옆에서 말리는 바람에 70일까지는 단식을 해봤었어요. 20일만 더 해봤으면 죽는지 사는지 점검을 해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nbspnbsp부처님이 6년 고행하시고 파리한 몸으로 바로 성도하시면 이 고행이 성도의 원인이라고 오해를 하겠죠.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시고 성도를 하신 겁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여기서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nbsp이어서 당시의 부처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 독송했습니다.nbspnbsp▲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경전 독송nbsp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부처님을 생각하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상상을 하니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이 밀려왔습니다.nbspnbspnbsp명상을 마치고 그룹별로 법사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대탑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성도 후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장소들을 둘러보고 벽화에 관한 설명도 들었습니다. 다시 대탑 앞으로 돌아와 부처님의 수행과 성도, 교화활동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각자 108배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에는 오체투지를 하는 티벳 불교도인들이 많았고 사람들마다 절하는 방식도 다양해서 전세계의 불교도인들이 모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청년들에게 무차린다 용왕과 부처님의 일화를 설명해 주고 계신 유수 스님nbsp▲ 대탑 주위에 그려진 조각들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보수 법사님nbsp그리고 대탑을 배경으로 스님과 함께 차량별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모두들 성지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정진을 할 수 있었음에 기쁜 마음이 되어 활짝 웃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차량별로 스님과 함께 단체사진. 공양물을 올린 13호 차량의 순례단과 함께.nbsp순례단은 보드가야 대탑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왔습니다. 학교에서 순례객을 위해 따뜻하게 물을 데워주어서 오랜만에 샤워도 하고, 저녁식사도 맛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 예불을 드리고, 지이바카 병원 2층 홀에 모여 JTS 활동에 대한 소개를 들었습니다.nbspnbsp현지인 활동가 및 한국인 활동가 소개 후 JTS 21년의 성과를 ppt로 보고, 활동파트별로2014년 3대 뉴스를 전해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육팀의 3대 뉴스는 출석률 높이기, 정부학교 지원, 특별수업 강화라고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영양식을 줄 때에만 출석율이 높아지고 다른 날은 낮아서 알고보니 아이들이 여러 학교에 등록해놓고 여기저기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일 오지 않으면 스웨터를 주지 않는다고 했더니 출석율이 매우 높아졌다고 합니다. 매달 개근상 선물을 주는 등 유치원부터 학교 다니는 습관을 익히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부학교에 대한 문구류 지원 및 아이들의 학습능력에 대한 주기적인 체크를 한다고 합니다. 또 아이들이 학교오는 걸 즐거워할 수 있도록 태권도, 전통무용, 현대무용, 티비시청 등 다양하 특별수업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배우도록 하고 있답니다.nbspnbsp▲ 현지 활동가들로부터 인도JTS 사업에 대해 설명을 듣는 시간nbsp마을개발팀의 3대뉴스는 우리마을 서로돕기, 주민생활환경 개선, 소득창출사업이였습니다. “내가 할게요” 라는 뜻의 “함까렝게”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쉬람단이라고 말하는 공동울력을 통해 도로, 수로공사를 하고 있는데, 작년에는 마을청소 쉬람단을 만들어 내집앞은 자기가 공사하고 청소하도록 가르치고 있답니다. 핸드펌프 수리를 작년에 성지순례를 온 두 청년의 후원으로 신규 8회, 수리 135회를 했다며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물레공장을 만들어 소득창출사업을 하고 있는데, 물레 중급반을 졸업한 분들이 유치원 교복을 900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을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최동호님은 “인도의 마을이 한국의 6070년대 생활과 비슷하니, 그때의 아이디어들을 많이 내어주면 고맙겠다”고 당부했습니다.nbspnbsp▲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인도인 활동가들nbsp그리고 이번 인도성지순례 스텝으로 참가한 전 인도JTS 선배 활동가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21년 인도JTS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지바카 병원 초창기부터 21년 동안 함께해 오고 있는 진료담당 까메스와르, 유치원때부터 수자타를 다녔고 지금은 지이바카 병원의 모자보건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삼부. 유치원 교감선생님인 인드라짓, 노동학교를 나와서 지금은 전체 시설을 담당하고 있는 바브랄, 노동학교 출신이고 급식, 자전거를 담당하고 있는 아룬의 인사가 있었습니다.nbspnbsp▲ 9년간 인도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활동하셨던 장영주 행자님nbsp이후 질의응답 시간에 젊은 청년들이 해외 봉사에 지원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는 질문에 각각의 활동가들이 답을 해주었습니다. 이어 다년간 인도JTS에서 활동했던 분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보광화 행자님은 JTS의 경험을 자료화하는 작업을 했었고, 장영주 행자님은 9년간 있으시면서 급식 관련일부터 시작해서 마을 가구조사를 통한 기초자료 만들기 작업을 했고, 또 의식이 개선될 수 있도록 뭔가 꺼리를 만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주법사님은 초창기에 파견이 되어서 주로 학교 짓는 일을 많이 하셔서 한국에 오면 십장일을 해보겠다 할 정도였다고 하셔서 모두들 함께 웃었습니다.nbsp내일은 오전에 전정각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와 수자타아카데미 21주년 개교기념식을 하고, 오후에는 둥게스와리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둘러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매일 매일이 꽉찬 순례 일정인데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