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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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 방콕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및 수계식

▲ 방콕과 프놈펜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및 수계식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방콕 정토법당에서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및 수계식이 열리는 날입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밤 12시20분 비행기로 델리 공항을 출발하여 현지 시간으로 새벽 5시30분에 방콕 공항에 도착하셨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방콕 공항에 내리니 방콕정토회 황소연 총무님과 남동생 분이 함께 마중을 나오셔서 스님 일행을 방콕정토법당까지 무사히 운전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아침 7시30분쯤 방콕 정토법당에 도착한 스님께서는 아침 일찍부터 신도님들이 정성껏 준비해주신 떡국으로 식사를 하신 후 9시20분부터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및 수계식에 함께 하셨습니다.nbspnbspnbsp오늘 졸업식 및 수계식에서는 방콕정토법당에서 불교대학을 수료하신 분 2명과 경전반을 수료하신 분 2명, 그리고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불교대학을 수료하신 분 2명까지 총 6명이 스님께 수계를 받았습니다. nbspnbspnbsp어제 일찍 도착한 무변심 법사님도 함께해서 수계식 인례를 맡아주셔서 여법하게 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 당시에 수계가 처음 시작된 유래와 그 의미에 대해 자세히 법문해 주신 후 호궤합장을 하고 참회게를 염하는 졸업생들에게 연비를 해주셨습니다.nbspnbsp▲ 스님께 연비를 받는 불교대학 졸업생들nbsp“이 수계식은 부처님 당시로부터 시작해서 긴 역사를 두고 2600년이 지나도록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수계식도 그 전래를 따라 시행합니다. 부처님을 대신하여 여러분들이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 받기를 청하기에 오늘 이렇게 수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법을 잘 받아 지녀서 수평적으로는 이 법을 널리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고, 수직적으로는 미래의 후세들에게 대를 이어서 전해서 미륵 부처님이 오실 때까지 이 바른 법을 계승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은 그런 소중한 자리입니다.”nbsp연비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졸업생 한명 한명에게 불명을 주시고, 불명의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후 염주와 함께 직접 사인한 ‘기도’ 책을 선물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콕정토회 홍정혜 대표님은 졸업생들에게 정진할 때 입을 수 있는 계량한복 상의를 선물해서 졸업생 모두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았습니다.nbspnbspnbsp수계식을 잘 마치고 이어서 졸업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방콕정토회 황소연 총무님의 정토불교대학 경과보고에 이어서 홍정혜 대표님의 영접사를 들은 후 스님께서 졸업생들을 위해 기념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다시한번 정리해주시면서 졸업생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당부의 말씀과 더불어 격려도 해주셨습니다.nbspnbsp“불자가 된다는 것은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상에 태어난다, 복을 받는다, 이것이 불자의 목표가 아닙니다.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탈과 열반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부터 계를 받았으니 이제 붓다로 가는 첫걸음을 뗀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공부를 하셨습니다. 둘째, 부처님은 누구인가. 어릴 때는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수행을 했고, 깨닫고 난 이후에 그분은 어떻게 살았고 어떤 법문을 했는지 자세히 공부했습니다. 셋째, 대승불교를 하더라도 근본불교를 공부하고 그 위에 대승불교를 해야 합니다. 근본불교 없는 선불교를 하면 부처님 없는 선을 하게 돼요. 그러면 신앙의 중심이 제대로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연기법과 사성제, 팔정도, 중도, 이런 기본을 제대로 알아야 여기서부터 대승이 나오고 선이 나오게 됩니다. 넷째, 불교의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근본불교, 대승불교, 밀교, 선불교는 역사적인 변천과정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공부해서 이름이 어떻든 불교의 근본 정신이 꿰뚫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점점 발전해온 것임을 알아야 선불교의 아이덴티티도 가지고 다른 불교를 포용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 역사 공부를 하더라도 근본 가르침이 이어져가는 그 맥을 잡고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알아야 여러 불교 간에 모순이 안생깁니다. 그동안 공부한다고 수고가 많으셨고요. 이제 다음은 경전반에 입학하셔야 합니다.nbspnbsp졸업이 공부의 끝이 아니고 이제 기초가 잡혔으니 앞으로는 더욱 정진을 하셔야 합니다. ‘나’ 아닌 것으로 ‘나’를 삼으면 안됩니다. 옷이 ‘나’가 아니고 지위가 ‘나’가 아닙니다. 육신도 ‘나’가 아닌데 무엇이 ‘나’ 이겠어요? 그런 것에 정신을 팔면 죽을 때까지 헐떡거리며 살게 돼요. 그래서 항상 중심을 딱 잡고 살아야 해요. 그런 좋은 법을 우리에게 깨우쳐주신 분이 부처님이시고, 나도 이 좋은 법을 따라서 붓다처럼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불자의 길입니다.”nbsp감로의 법문을 들은 졸업생들은 바른 가르침으로 인도해 주신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정성껏 삼배를 하고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꽃다발을 선물했습니다.nbspnbsp▲ ‘스승의 은혜’ 노래로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졸업생들nbsp졸업식을 모두 마치고 스님께서는 졸업생 모두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으시고, 또 이어서 졸업생 한명 한명과도 일대일로 기념사진을 찍으셨습니다.nbspnbsp▲ 오늘 스님께 수계를 받은 방콕과 프놈펜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nbsp기념사진 촬영을 모두 마치고 나서는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서 먼 길을 달려오신 스님과 오순도순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을 다 가졌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오후에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인도성지순례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쉴틈 없이 바쁜 일정을 강행해 오셨고 특히 어제는 하루종일 4번의 강연을 소화하시느라 피로가 많이 누적되어 있으셨는데, 건강을 회복하시기 위해 모처럼 휴식을 취하실 수 있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 휴식하시는 동안 무변심 법사님은 방콕과 프놈펜에서 오신 불교대학 졸업생들과 정토회 회원들을 위해 정토회의 사상과 운영 방침 등에 대한 직무 교육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 무변심 법사님과 함께한 직무 교육nbsp그동안 해외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정토회의 원칙과 그 취지를 잘 몰라 어려움이 많았던 분들은 법사님의 강연과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명쾌하게 궁금증이 다 해소되었다며 좋아했습니다.nbspnbsp무변심 법사님과 함께하는 직무 교육까지 모두 마치고 스님 일행은 신도님들이 정성껏 차려주신 저녁식사를 함께 먹고 저녁7시에 방콕정토법당을 나왔습니다. 신도님들은 스님께 삼배를 올리면서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며 지낼 것을 다짐했습니다.nbspnbsp방콕정토회 황소연 총무님이 법당으로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건물 답사를 하기 위해 잠시 들렀습니다.nbspnbspnbsp2층으로 된 주택인데 거실과 방이 넓직해서 법회와 불교대학을 진행하기에는 적절해 보였습니다. 방콕은 동남아시아에서 교통의 중심이 되는 도시여서 주변 다른 도시들에서 접근하기가 아주 좋은 위치인데, 방콕정토법당이 조금 더 규모있게 확장되어서 다양한 수련과 교육이 이곳에서 이뤄져서 동남아시아 포교가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보았습니다.nbspnbsp방콕 공항에 저녁8시30분경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고 게이트로 들어오니 비행기 이륙 시간까지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라운지에서 한국에서 온 이메일 등을 체크하시며 업무를 보시다가 밤 11시20분 비행기로 한국으로 출발하셨습니다.nbspnbspnbsp내일은 오전 6시30분에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하셔서 서울에서 일정을 보내신 후 모레는 정토회 4차 백일기도 입재식에 참석하실 예정입니다.nbsp

2015.01.24. 24,307 읽음 댓글 19개

2015.1.22 인도 델리 즉문즉설 강연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께서는 인도 델리에 머무시면서 아침 일찍부터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식과 성지순례 인도국립박물관 안내, 델리 한국문화원 인도인 통역 강연, 한국인 즉문즉설 강연 등 하루 종일 바쁜 일정을 보내셨습니다.nbspnbsp인도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는 자혜정사에서 하루밤을 묵은 스님께서는 오전 8시 같은 장소에서 델리 정토불교대학 수계식 및 졸업식에 참석하여 졸업생들을 위해 수계 및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델리에는 아직 정토법당이 마련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델리 정토불교대학생 5명은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학사 일정을 완수하여 오늘 스님으로부터 수계 및 졸업식을 갖게 되었습니다.nbspnbsp▲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및 수계식nbsp스님께서는 5명을 앞에 두고 2시간 동안 정성을 기울여 수계의 의미에 대해 설법하시고 수계를 해주셨으며 한명 한명에게 불명도 주시고 그 의미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항상 100명, 500명, 1000명의 대중들에게 법문해주시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는데 오늘은 이렇게 5명을 위해서도 한결 같이 정성껏 법문을 해주시는 모습을 보니 ‘스님에게는 한명이나 오백명이나 차이가 없구나’ 하는 잔잔한 감동이 일었습니다.nbspnbsp▲ 참회게를 부르며 스님께 연비를 받는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nbsp수계식에 이어서 곧바로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5명이 전원 졸업한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졸업률이 100 네요. 한국은 졸업률이 50 밖에 안되는데요” 하시면서 출석 체크와 봉사 시간 체크를 정확하게 했는지 물으시고는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다시한번 정리해주시면서 졸업생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당부의 말씀과 더불어 격려도 해주셨습니다.nbspnbsp▲ 졸업생 한명 한명에게 불명을 주시고 그 의미를 설명해주시는 스님nbsp이렇게 5명의 정토행자가 머나먼 이국땅 이곳 델리에서 탄생하였습니다. 5명의 졸업생들은 앞으로 수행, 보시, 봉사하는 삶을 다짐하며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하고 졸업식까지 원만히 잘 마쳤습니다.nbspnbsp▲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과 델리 불자회 분들nbsp스님께서는 졸업생들을 비롯하여 함께 참석한 델리 불자회 분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참석한 델리 불자회 회장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에게는 새책 lt지금 여기 깨어있기gt에 사인을 해서 선물하셨습니다. 델리 불자회 분들은 1년만에 델리를 찾으신 스님과 더 여유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셨지만 곧 11시부터 델리에 하루 더 남은 성지순례객들을 위해 인도국립박물관 안내를 해야 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곧바로 박물관으로 출발하셨습니다.nbspnbsp차가 막혀서 11시 10분경에 박물관에 도착한 스님은 박물관을 관람하고 있던 1,2,8호차 순례객들을 위해 인도의 역사와 불교 유물, 부처님의 진신사리에 대해서 정성껏 안내를 해주셨습니다.nbspnbsp박물관 안내를 마치고 곧바로 델리 한국 문화원으로 향했습니다. 12시30분경 한국 문화원에 도착한 스님께서는 김근평 문화원장님과 함께 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차도 같이 마시면서 지난해 세계 100회 강연을 다녀오신 소회와 가야 근교에서 수자타아카데미를 운영해온 경험, 인도 불교 성지 복원 및 정비 사업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nbspnbsp▲ 인도 델리 한국 문화원nbsp특히 김 원장님은 스님께서 3월에 수자타아카데미에 머무실 때 직접 둥게스와리를 방문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스님께서도 흔쾌히 환영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김 원장님은 이번에 3년 더 인도에서 근무하게 되셨는데, 원장님과 스님의 좋은 인연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오후2시부터는 델리 한국문화원 주관으로 인도인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한국문화원 지하 강당에서 쁘리앙카님의 힌디어 통역으로 열렸습니다. 쁘리앙카님은 정토회 실무자로 근무하고 있는데 그동안 석가족들과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 교육 때는 힌디어 통역을 여러차례 해왔지만, 즉문즉설 강연을 통역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nbspnbsp▲ 인도인 대상 힌디어 통역 즉문즉설 강연nbsp총 40여명이 인도인들이 참석하여 스님께 다양한 질문을 했습니다. 한국은 원래 불교가 번성했는데 왜 크리스쳔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는지 묻는 분, 스스로 자기 구제를 해야지 신을 믿을 필요가 있는지 묻는 분, 비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불교에서도 자기 종교가 더 우월하다고 얘기하는 내용이 있는지 묻는 분, 불교를 믿어야 해탈할 수 있는지 묻는 분,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괴로워진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건지 묻는 분, 내 성격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수행을 하면 나의 중요한 색깔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지 묻는 분 등 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스님께서는 2시간 30분 동안 다양한 비유를 들어가며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쁘리앙카님의 유창한 힌디어 통역 덕분에 스님의 법문이 인도인들에게 잘 전달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nbspnbsp▲ 힌디어 통역을 해준 쁘리앙카님nbsp그 중에서 인도인 학생 중에 한명이 질문한 “불교를 믿어야 해탈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간단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힌두교를 대부분 믿고 있는 인도인들에게 이렇게 답변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고뇌가 어떻게 생기는지 이치를 깨달아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불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불교, 힌두교, 기독교라고 불리우는 종교로서의 불교입니다. 어떤 것이 더 높고 어떤 것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없고 서로 다르다고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nbspnbsp다른 하나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닌 진리로서의 불교가 있습니다. 그가 갖고 있는 종교가 무엇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힌두교라 하더라도 진리를 깨달으면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불교인도 깨닫지 못하면 자유롭지 못해지는 것입니다. 붓다의 본래 가르침은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권유하고 싶은 것은 이것에 대한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무지가 해? nbspnbspnbsp그런데 여러분들은 제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한국에서는 종교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종교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나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family name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 주어지는 것이듯이 인도에서는 아버지가 무슬림이면 나도 무슬림이고 부모가 힌두이면 나도 힌두가 됩니다. 그런데 진리의 가리침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힌두라고 하는 주어진 종교는 그대로 간직하고 진리에 대해서는 선택해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최’라고 하는 family name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디스트인 것과 같습니다. 담마를 공부해서 해탈하는 것이 중요하지 최씨라는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은 진리를 가르친 것이지 종교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nbsp인도인들은 스님의 답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강연을 모두 마치고 스님께서는 한국문화원 원장님으로부터 꽃다발을 선물 받으셨습니다.nbspnbsp▲ 델리 한국문화원 김근평 원장님nbsp그리고 오늘 강연을 들은 인도인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즉문즉설 강연에 참석한 인도인들과 함께nbspnbsp스님의 답변이 너무 좋았는지 강연이 끝나고 나서도 무대 앞으로 다가와 다음 한국인 강연이 있기 전까지 계속해서 스님께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쉴 시간도 없이 계속해서 인도인들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 미진한 점들을 더 묻기 위해 무대 앞으로 나온 인도 학생들nbsp이어서 오후 5시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델리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총 100여명이 참석하여 한국 문화원 강당은 자리가 꽉 찼고, 서서 강의를 듣는 사람도 생겨서 추가로 의자를 더 가져오는 등 스님의 강연에 대한 델리 교민사회의 높은 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인도 델리 한국인 대상 강연nbsp스님께서는 지난해 세계 100회 강연을 다니시며 전세계의 많은 교민들을 만나셨는데 그 소회를 함께 나눠주시면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스님께서 “즉문즉설은 주제에 관계 없이 무엇이든지 묻고 대화하면서 진리를 규명해가는 자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자기 고민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 라고 하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고 곧바로 즉문즉설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nbsp앞서 외국인 강연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지금 뮤지컬을 배우고 있는 학생인데 가보지 못한 길을 가야해서 두려움이 크고 내가 재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분,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사람인데 다른 종교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불교는 왜 채식을 하게 되었는지, 불교는 범어로 기도를 많이 하는데 한글로 된 기도 방법은 없는지, 인도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 많이 힘들다고 묻는 분, 세입자가 아직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 사정이 급해서 보증금을 먼저 빼달라고 하는데 남편과 의견이 달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인 분, 13살이 되는 초등학생인데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으니까 어른들이 안좋게 바라보셔서 고민이라는 학생, 수익을 극대화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경쟁 사회가 심해지는 것 같은데 이런 시대에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묻는 분, 만드는 것을 잘하고 손재주가 있어서 꿈이 건축가인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인 학생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정성껏 답변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그 중에서 남편이 강아지 키우는 걸 싫어해서 고민인 여성 분의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웃음이 빵빵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저는 작년에 강아지 두 마리를 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그런데 남편이 강아지를 너무 싫어했지만 겨우 승낙을 받았어요. 강아지가 처음에는 작았는데 지금은 너무 커져서 남편의 불만이 너무 많이 쌓이고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는 강아지 옷도 만들고 가능하면 남편이 신경을 안쓰도록 노력도 했는데 최근에는 남편과 강아지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또 한편으로는 강아지들이 너무 불쌍해서 잘 키우려고 데리고 왔는데 다른 곳으로 보내기가 그렇고, 강아지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하니까 아이들도 ”엄마, 우리도 힘들어지면 다른 곳으로 보낼거야?“ 이런 얘기를 해요. 강아지를 생각하자니 남편이 마음에 걸리고, 남편을 생각하자니 강아지가 마음에 걸리고 그렇습니다.”nbsp“질문자가 관점이 틀렸어요. 어떻게 남편을 강아지와 비교해요? 수준 이하네요. 어떻게 남편의 의견을 강아지의 입장과 비교해서 얘기를 합니까? 남자가 뭣 때문에 저런 여자랑 사는지 모르겠네요, nbspnbsp남편이 싫다고 하면 어디든지 강아지를 딱 보내야지요. 처음에는 강아지가 어릴 때 동의를 했지만 이제 강아지가 커서 동의가 안되면 남편의 의견을 존중해야지요.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거면 혼자 살지 왜 결혼해서 같이 살아요?“nbsp“저도 고기를 정말 안 좋아하는데 고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생각해서 고기를 먹기 시작했거든요.”nbspnbsp“그렇게 내가 하나 맞춰주었으니 너도 하나 맞춰달라고 하면 그건 장사이지요. 그렇게 장사를 하려면 결혼을 안했어야죠. 내가 열 개 맞춰 주었는데 너는 왜 한 개 밖에 안 맞춰주냐 이렇게 거래를 하면 안돼요.” nbspnbsp“그럼 강아지를 어떻게 처리해야죠?”nbspnbsp“그거야 질문자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지요. 남편이 강아지가 싫다고 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처리하기로 먼저 결정을 해놓고 어디로 보낼건지는 연구하면 방법이 나오지요. 어떻게 남편과 강아지를 비교해요? 그것은 동물애호가이기 때문이 아니예요. 부부 지간에 자기 취향을 고집하는 겁니다.”nbsp“아이들의 정서적은 부분은 어떻게 제가 다독여야 하나요?”nbspnbsp“가정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아이들과 남편을 동격으로 두면 질문자 때문에 아이들이 나빠집니다. 집안의 질서는 사람이 똑같다고 일대일이 아니예요. 남편의 의견이 우선이고, 아이들의 의견은 보조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강아지의 의견은 그 밑에 두어야 해요.” nbspnbspnbsp“예, 알겠습니다. 혹시 청중들 중에 제 강아지를 잘 키우주실 분 없을까요?” nbspnbsp“강아지를 주면서 잘 키워줄 사람을 찾으면 안됩니다. 잘 키우든지 못 키우든지 그건 가져간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요. 거기에 얽매여서 ‘강아지를 데려가서 그렇게 키우면 어떡하냐?’ 하면 그건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이 됩니다. 어떻게 키우든지 주었으면 그걸로 끝내야 합니다.”nbsp“감사합니다. 정말 명쾌한 답이 되었습니다.” nbspnbsp“그런 질문을 해서 제가 이제 강아지랑 원수가 되겠네요. 왜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해서 강아지한테 업을 짓게 해요? 일은 자기가 벌여놓고요.” nbspnbsp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청중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강연은 무려 2시간 30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강연을 마무리하시며 스님께서는 법의 이치를 깨달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마무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진리와 법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열심히 빈다고 부처님이 그것을 들어주면 그럼 부처님은 입시 브로커가 되잖아요. 입시 브로커가 아닌 이상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줄 수가 있어요? 넣어주려면 실력이 되는 아이를 빼고 넣어주어야 하잖아요. 이런 일을 부처님이 하셔야 할 일이예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믿는 부처님은 입시 브로커와 같은 존재예요. 그래야 소원이 이뤄지니까요. 부처님은 공평하시고 모든 중생을 자비롭게 여기시는 분인데 왜 그런 일을 하시겠어요? 부처님은 이런 세속의 모습을 깊이 관조하시고 이것을 뛰어넘어서 6년 간 수행 끝에 이런 제로섬 게임을 벗어나는 연기법과 공존의 길을 발견하신 것이거든요. 열심히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 왜 부처님한테 돈을 달라고 해요? 부처님은 자기 돈도 버렸는데 왜 여러분 돈을 벌어주는 일을 하겠어요?nbspnbsp부처님한테 비는 것이 꼭 나쁘냐? 그건 아니예요. 다만 붓다의 가르침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도 믿고 의지하면 불안한 심리가 안정되기 때문에 도움이 되긴 해요. 그래서 함부로 부정하면 안돼요. 그러나 이것은 해탈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대해서 좀 관심을 가지셔야 해요. 여러분들이 믿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버려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평생 교회 다니다가 절에 오면 친구도 없지 가족도 반대하지 힘들잖아요. 부처님은 그런 걸 바꾸게 해서 복잡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예요. 그것은 그것대로 유지하시되 우리가 가진 가치관의 모순, 생각의 잘못을 깨우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면 됩니다.nbspnbspnbspnbsp‘이것은 커피잔이다’ 하는 것이 상입니다. 그럼 이것으로 물은 못 마시잖아요. 그러나 이것은 ‘공’이예요. 다만 그릇이예요.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되고, 커피를 담으면 커피잔이 되고, 우유를 담으면 우유잔이 되고, 아이 오줌 눌 때 받으면 요강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공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겁니다. 그 무엇도 아니기에 그 무엇도 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연기법과 제법의 공한 이치를 깨달으면 여러분의 삶이 훨씬 더 자유로워집니다. 그렇게 공부를 한번 해나가시면 좋겠습니다.nbspnbsp자신의 소중함을 아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괴롭히지도 말아야 하지만 자신을 학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하나 하나는 굉장히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안 죽고 살은 것만 해도 대성공입니다. 다 성공적인 삶을 지금 살고 있는 거예요. nbspnbsp내가 아닌 지위, 돈 이런 것 갖고 자기를 학대하면서 열등의식을 갖지 마시고 존재의 귀중함을 아시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인도에 사시면서 인도를 사랑하시고, 한국에 가시면 한국을 또 사랑하시고요. 인도에서는 맨날 한국 그리워하고, 한국에서는 맨날 한국 욕하고 그러지 말고 지금 여기 행복해야 합니다.”nbspnbsp긴 시간 동안 열강을 해주신 스님께 델리 교민들도 다시한번 뜨거운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내주었습니다.nbspnbspnbsp강연을 마치고 참석한 교민들과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인원이 많아서 두 번에 걸쳐 나눠서 사진을 찍은 후, 한국 문화원 1층 카페로 올라왔습니다.nbspnbspnbsp한국 문화원 원장님을 비롯해 관계자 분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더 나누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인도성지순례를 시작하면서부터 남방 스님들처럼 오후 불식을 계속 해오시고 계셔서 물 한잔만 드시면서 문화원 관계자들과 계속 대화를 나누셨습니다.nbspnbspnbsp문화원 관계자 분들과 델리 불자회 분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저녁 8시30분 무렵 한국문화원을 나와 델리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9시30분 무렵 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은 후 스님께서는 1시간 30분 가량 라운지에 머무시며 아이패드로 업무를 보시다가 밤 12시 20분 비행기로 방콕으로 출발하셨습니다.nbspnbsp내일은 방콕에 도착하셔서 방콕 정토불교대학생들의 졸업식과 수계 법회에 참석하셔서 법문을 해주신 후, 정토회 4차 백일기도 입재식에 참석하기 위해 밤 비행기로 한국으로 귀국하실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

2015.01.23. 32,695 읽음 댓글 20개

2015.1.21 인도성지순례 15일째 델리

▲nbsp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델리 인도국립박물관nbsp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마지막 날인 15일째가 되는 날입니다.nbspnbsp아그라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늘은 오전 8시에 숙소를 출발합니다. 순례 기간 동안 매일 새벽3시, 4시에 출발했는데, 어제 일정 공지 시간에 스님께서 “비싼 호텔에 잤으니까 본전을 좀 뽑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8시에 출발한다” 고 하니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습니다. 7시부터 로비로 내려오는 순례객들의 얼굴을 보니 다들 샤워도 하고 머리도 감았는지 깔끔한 모습들입니다.nbspnbsp버스에 올라타 이제 마지막 여정인 델리로 향합니다. 버스가 델리를 향해 출발하자 스님께서는 송수신기로 “잘 주무셨어요?” 라고 인사를 하십니다. 순례단의 밝은 표정들을 보며 스님께서 “좀 씻으니까 좋아요? 뭐 씻으나 안 씻으나 달라진 게 없네” 농담을 하시니 모두들 크게 웃습니다. 그리고 또 “이제 오늘부터는 노상 방뇨의 자유가 사라졌어요. 노상 방뇨하던 버릇을 한국, 미국, 독일로 가져가면 안돼요” 말씀하시니 다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노상 방뇨를 할 수도 있겠다’ 싶은 공감이 되었는지 깔깔깔 웃습니다.nbspnbsp아그라에서 델리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성지순례를 다니며 보았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4차선 고속도로가 깨끗하게 펼쳐져 있고, 양 옆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건축되고 있고, 사람들이 모두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순례단이 다닌 비하르주에서 만난 맨발로 헐벗은 차림의 인도인들과 허름한 집들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풍경이었습니다.nbspnbsp▲ 인도에서 유일한 고속도로라고 하는 아그라와 델리 사이의 야무나 익스프레스nbsp고속도로를 달리는 중간에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가 버스 안에서 어젯밤 숙소에서 미리 싸둔 주먹밥을 꺼내 먹었습니다. 다들 우리 조가 싼 주먹밥이 더 맛있다며 자랑도 하면서 함께 나눠먹고, 마지막 여정의 아쉬움을 달래며 쉴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nbspnbsp▲ 버스 안에서 먹는 주먹밥nbsp오전 12시20분경 무렵 델리 박물관에 도착한 순례단은 도착한 순서대로 세 그룹으로 나뉘어서 스님께서 해주시는 박물관 안내를 들었습니다. 검색대를 통과해야 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길었지만, 도반들과 정겹게 이야기도 나누느라 모두들 표정이 밝습니다. 특히 박물관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다들 기대감을 안고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nbspnbsp박물관에 안에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까지 스님께서 차례대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이곳은 델리 인도국립박물관입니다. 인도의 모든 문화유물을 전시하고 있어요. 첫 번째 전시실에는 고대 인도 문화인 인더스 문명에 대한 유물이 있습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가 여기 그려져 있는데, 우리 입장에서 보면 황하 문명 보다도 천년 내지 2천년 앞선 요하 문명이 발견되었어요. 우리의 배달문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앞으로 세계적으로 인정이 되어서 밝혀지면 세계 4대 문명이 아니라 세계 5대 문명이 될 수 있죠.nbspnbsp▲ 국립인도박물관nbsp인더스강 유역에 영국 사람들이 철도를 놓다가 노동자들이 자꾸 어디서 벽돌을 가져와서 “어디서 가져오느냐?” 물었더니 “땅에서 캔다”고 하는 겁니다. 벽돌을 땅에서 캔다는 것이 말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가봤더니 진짜 땅 속에 벽돌이 가득한 거예요. 조사해 보니 고대에 아주 발달된 도시의 집터와 신전터인 5천년 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초기에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지역에서 발견되면서 이 지역이 유명해졌는데, 여기 점 찍어 있는 지역에서 유적이 다량으로 발견되었어요. 구자라트, 하리아나 지역까지 포함한 이 전체를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릅니다. 인더스 문명은 유물로 연대 측정을 했을 때 한 5천년에서 4천년 전의 문명입니다. 문자가 일부 발견되었는데 아직 해독이 안되고 있고, 이 문명이 왜 어느날 갑자기 망했는지는 현재로서는 아직 밝혀지지가 않았습니다. 현재 추산하기로는 원주민이였던 흑인 계열의 드라비다족의 문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nbspnbsp이것이 망하고 지금으로부터 3천5백년 전에 북쪽에 있는 아라안족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으로 내려와서 동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 동아리안, 서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 서아리안입니다. 서아라인이 오늘날 유로피안이 되고, 동아리아인이 인도의 브라만 문명이 됩니다. 브라만 문명의 마지막 쇠퇴기에 붓다가 출현합니다. 붓다가 출현했을 당시에 문명의 중심은 힌두스탄 평원에 있었고, 고대 문명의 중심은 인더스강 유역에 있었습니다. 비옥한 토지가 다 갠지스강 유역에 있는데 왜 고대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 발달했을까요?nbspnbsp고대 문명은 모두 산림 지대가 아닌 건조 지대인 초원에 발달했어요. 그 이유는 당시에 사용하던 도구가 석기였는데 석기로는 풀은 벨 수 있지만 나무는 벨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원 지대에 초기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그 다음에 제기로 청동기가 나오고, 결국 청동기로 무기도 만듭니다. 그리고 철기가 나오면서 도끼, 칼 같은 도구도 만들면서 산림 벌채가 가능해졌고, 그러면서 온대 산림 지역이 개간되기 시작한 겁니다. 중국도 첫 문명에 황하문명이었는데 나중에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인도도 마찬가지로 인더스 문명은 초기 문명이고 3천5백년 전부터 철기가 나오면서 갠지스강 유역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은 5천년 전에서 4천 8백년 전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오래된 유물들이죠.nbspnbsp여기 보시면 장신구가 많이 있죠. 4천 5백년 전의 장신구인데 지금 목에 걸어도 괜찮을 정도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걸이 귀걸이 다는 것은 역사가 오래된 겁니다.nbspnbsp여기는 마우리안 왕조 때 것인데 BC43세기 부처님 입멸 후 200년 뒤에 아쇼카왕이 탑을 쌓고 하면서 조각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조각이 굉장히 정교한데 당시의 문명 수준이 아주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nbspnbsp여기에 돌 색깔이 흰색 비슷하게 나는 것을 ‘아무라바티’라고 합니다. 남인도에 가면 두 종류의 불교 유적이 있는데 하나가 ‘아무라바티’, 하나가 ‘나가르쥬나콘다’입니다. 나가르쥬나콘다 양식은 아주 활석 같은 맨들맨들한 돌에 새겨진 것이고, 아무라바티 양식은 약간 흰색이 나는데 거칠어요. 여기 문양은 다 부처님의 일생과 전생 이야기가 새겨져 있습니다.nbspnbspnbsp▲ 아시타 선인에 관한 이야기가 새겨진 조각nbsp이 문양은 어떤 이야기인지 금방 알 수 있는데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정반왕이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시타 선인이예요. 무릎 꿇고 무얼 하나 얹어 놓고 있지요. 그게 싣다르타 태자예요. 태자의 관상을 보는 것을 조각으로 표현한 겁니다.”nbsp아시타 선인이 태자의 관상을 보고 예언하는 장면은 엊그제 카필라성에서 스님으로부터 자세히 설명을 들은 부분이여서 그런지 순례객들 모두 “오호”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바보도 티는 소리 나온다” 라고 농담을 하셔서 또 모두들 크게 웃었습니다. 다음은 쿠샨 왕조의 유물이 있는 칸으로 넘어왔습니다.nbspnbsp“여기서부터는 쿠산 왕조인데 AD 1세기에서 3세기 경의 유물입니다. 간다라 미술이 발달하고 마투라 조각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마투라 조각은 붉은 사암에 여성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어요. 마투라 조각은 여성의 성기도 노출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뭘 그렇게 거기를 자세히 보려고 해요?” nbspnbsp▲ 붉은 사암으로 만든 마투라 양식의 조각nbsp마투라 양식의 여성 신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는 순례객들을 스님께서 농담을 하자 또한번 모두들 크게 웃었습니다.nbspnbsp칸을 넘어가며 시대 순으로 다양한 불상들이 펼쳐졌습니다. 다만 5세기 굽타시대까지는 불상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 이후에는 대부분 힌두교 신상들이 많아지면서 인도에서 불교가 세력이 약해져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습니다.nbspnbsp“여기 불상을 보시면 상호와 어깨를 보면 힘이 느껴지죠? 간다라 시대의 불상입니다.nbspnbsp▲ 간다라 시대의 불상nbsp여기는 굽타 왕조인데 AD 5세기 경의 유물입니다. 굽타 왕조까지가 불교 국가의 모습입니다. 여기 보시면 부처님 허리에 끈을 맨 자국이 있고 얼굴이 동굴동굴하게 동안으로 되어있죠. 이것은 사르나트식 불상입니다.nbspnbsp▲ 사르나트식 불상nbsp힌두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슈누의 8번째 화신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힌두교 안에서는 하나의 신이 되어 버렸습니다.nbspnbsp여기는 다 힌두교 신상입니다. 불상처럼 생겼는데 아랫도리가 노출되어 있는 이것은 자이나교의 마하비라상입니다.nbspnbsp▲ 자이나교의 마하비라상nbsp나머지는 다 신상입니다. 이 신상은 사람들이 가슴을 하도 많이 만져서 반짝거리네요.” nbspnbsp▲ 사람들이 많이 만진 부위가 반짝 거리는 힌두교 신상.nbspnbsp힌두교 신상의 가슴이 반짝 거리는 것을 보며 다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연대 순에 관계 없이 여러 가지 불상들이 모셔져 있는 칸에 들어왔는데 스님께서 “바로 이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시자 모두들 “와” 하면서 감탄사를 쏟아내었습니다. 눈이 동그래져서 진신사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순례객들에게 스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nbspnbsp▲ 삐쁘라하와에서 발굴된 부처님의 진신 사리nbspnbsp“여기에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3군데에서 나왔다고 했죠. 바이샬리에서 나온 진신사리는 현재 파트나 박물관에 있고요. 랑그람 진신사리탑은 아직 발굴을 안했다고 했고요. 이것은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를 여기로 옮겨온 것입니다. 1800년대 말에 영국 사람이 거기서 이 사리 용기를 발굴했어요. 그리고 1900년대 중반에 다시 발굴을 했는데 탑의 더 밑부분에서 또 사리 용기가 나왔어요. 저 유리관 속에 있는 것이 부처님의 진신사리입니다.nbspnbsp사리는 유골을 의미합니다. 유골이 그냥 방치되면 썩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미라처럼 오랫동안 용기에 보관이 되면서 돌처럼 되었어요. 그러나 뼛조각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nbspnbspnbsp예전에 한번 한국 스님들이 와서 이것을 보고 “가짜다” 라고 말하는 모습을 봤어요.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사리라고 하면 아주 영롱한 보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세히 보시면 뼛조각 모양이 확실합니다.” nbspnbsp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은 엊그제 순례단이 직접 가서 참배하고 예불 공양을 올린 곳이어서 스님의 설명이 더 사실적으로 와닿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사리는 보석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자 또한번 모두들 자신도 그러했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nbspnbsp부처님의 진신사리를 30cm 앞에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꼬집어 보고 싶을 정도로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2600여년 전 고통받는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길에서 살다가신 그 분의 흔적이구나’ 하며 찬탄 공경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향해 우슬착지로 찬탄 공경합시다” 하시자 모두들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진신사리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공경의 예를 포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오른쪽으로 빙 돌면서 더 가까이서 진신사리를 친견하는 시간을 가진 후, 스님께서는 박물관 안내를 모두 마치셨습니다.nbspnbsp시간 여유가 좀 생겨서 박물관 안쪽 정원에서 짜이와 음료를 나눠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오후 2시가 되어서 ‘라즈가트’로 이동했습니다. 라즈가트는 인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이라고 합니다. 무너진 벽돌 더미에 황량하기만 했던 부처님의 성지와는 달리 라즈가트는 넓은 공간에 잔디밭으로 깔끔하게 둘러싸여 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간디를 화장했다는 그곳으로 걸어가면서 스님께서는 간디의 삶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해주셨습니다.nbspnbsp▲ 간디를 화장한 곳인 라즈가트nbsp“이곳 라즈가트는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인데 인도 사람들이 굉장히 성스럽게 여기는 곳입니다. 간디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이며 국부라고 말할 수 있죠. 비폭력 운동을 해서 인도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대항하려 할 때 오히려 단식을 해서 폭력을 하지 못하도록 했죠. 간디를 화장한 후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해서 계속 불꽃이 타오르도록 해놓고 있습니다.nbspnbsp인도가 원래 면화 생산이 많고 면직물이 발달해서 그것을 주변 나라에도 수출하면서 부를 축적했는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면직물 생산이 기계화되고 인도는 오히려 원료 공급처가 되고 모든 면직물들이 소비시장으로 전락했어요. 거기에 반대해서 간디가 운동을 한 것이 물레 운동입니다. 자기가 직접 실을 뽑아서 베를 짜서 옷을 입으면서 영국에 저항을 했습니다. 또 영국 사람들이 소금에다가 세금을 많이 부과한다고 해서 그것을 안 사먹고 바닷가에 가서 직접 소금을 생산하는 저항 운동도 했습니다.nbspnbsp인도 사람들이 많이 지지한 것도 있지만, 사실은 영국 사람들이 감동을 해서 오히려 독립의 길이 열렸다고 볼 수도 있어요. 식민지 지배를 했던 총독의 딸이 간디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같이 따라다니고 했다고 해요.nbspnbsp간디는 근대에 출현한 성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인도 사람들에게는 부처님과 같은 반열에 오를 만큼 존경을 받는 분이죠. 인도인에게는 거의 신이 된 분이예요. 부처님처럼 비폭력 운동 등 인류에게 많은 희망을 준 분입니다.nbspnbsp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할 즈음에 힌두와 무슬림과의 갈등이 심해집니다. 힌두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으로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분리독립을 하게 되었는데, 간디는 이 분리독립을 막으려고 “정권을 무슬림에게 넘겨주더라도 우리는 분리하면 안된다” 이렇게 주장을 했어요. 그래서 힌두의 극단적인 청년한테 결국 암살을 당했습니다. 1947년 1월 26일날 인도가 독립을 했거든요. 독립된 인도에서 1년 밖에 못 살았어요. 1948년 1월 30일날 암살을 당했으니까요. 독립을 위해서 50년을 싸웠는데 독립된 나라에서는 1년 밖에 못 살고 돌아가셨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이렇게 설명을 마치고 “모두 라즈가트를 향해 서서 삼배를 드리고 해탈주 일편을 독송하자”고 하셨습니다. 순례단은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준 간디의 삶을 떠올리며 정성껏 삼배를 하고, 화장터를 향해 해탈주를 독송했습니다.nbspnbspnbsp화장터 자리에는 지금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 계속 활활 타오르며 간디의 넋을 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원 한켠에 “My life is my message” 라고 적힌 간디의 명언이 잔잔한 여운을 남겨주기도 했습니다.nbspnbsp라즈가트를 나와 길을 건너니 간디 박물관이 나왔습니다. 간디의 전 생애가 다양한 사진들로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주마간산 식으로 쭈욱 훑어보고만 나왔습니다. 간디가 얼마나 인도 민중들의 행복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는지 사진으로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간디 박물관nbspnbsp오후4시에 다시 버스에 올라타 공항 근처에 있는 만찬장으로 향했습니다. 만찬장에 도착한 순례객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곧 있으면 한국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분에 살짝 들떠있는 것 같았습니다.nbspnbsp▲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만찬장nbsp만찬을 시작하면서 스님께서 가장 먼저 인도인 한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수쿨라지’ 라는 분인데 1991년 스님께서 처음 인도성지순례를 하러 오셨을 때, 영축산이 있는 라즈길에서 처음 만나 그곳 성지를 이분이 안내해 주셨다고 합니다. 수쿨라지는 스님께 환영의 의미로 작은 선물을 전달했습니다.nbspnbsp▲ 스님의 첫 인도성지순례 때부터 인연이 된 수쿨라지nbsp성지순례의 시작과 함께한 인연이라고 하니 순례객 모두 뜨거운 박수갈채로 수쿨라지를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인도 델리 불자회에서 두 분이 오셔서 스님께 꽃다발을 선물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일 인도 델리 불자회 분들을 위해 법회를 해주실 예정입니다.nbspnbsp▲ 스님께 꽃다발을 전달하는 인도 델리 불자회 분들nbsp이어서 13대의 차량을 각각 담당해준 차장님들이 앞으로 나와서 그동안의 소감을 이야기하고 인솔에 잘 따라준 순례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 차량별로 노래를 잘하는 분들이 나오셔서 즐겁게 노래하며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수고가 많으셨던 법사님들도 앞으로 나와서 인사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이번 성지순례 운영을 전체 총괄한 선주 법사님은 “부처님 당시를 재현한 듯한 오백 대중 중에 한명이어서 너무나 영광이었다”고 하면서 “언젠가는 천이백오십명이 함께 순례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고 말씀하셔서 순례객들도 큰 박수로 호응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차량별로 비행기 출발시간이 모두 달라서 만찬 도중에 공항으로 먼저 출발하는 차량들도 있었습니다. 먼저 저녁7시에는 유수스님과 함께 11호, 13호 차량이 공항으로 출발했고, 7시20분에는 묘덕 법사님과 함께 3호, 7호 차량이 출발했습니다. 7시50분에는 선주법사님, 보수법사님, 묘당법사님과 함께 1호, 2호, 8호 차량이 출발했습니다. 선주법사님과 함께 가는 이 차량들은 오늘 델리에 하루 더 숙박한 후 내일 델리 인도국립박물관을 관람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nbspnbsp일찍 떠나야 하는 차량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나머지 분들은 더 남아서 서로 소감을 나누고 어울리는 시간을 더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만찬을 마무리하시면서 “순례 기간 동안 한국 돈 339만원, 인도 돈 33만 루피, 달러 11,000, 영국 돈 250 파운드가 보시 들어왔다”고 전해주시고, “이 돈은 수자타아카데미에 기증해서 아이들을 위해 잘 사용하겠다”며 순례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셨습니다. 8시20분 무렵 모든 일정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공항으로 출발하는 6호차를 향해 작별의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버스 안에서도 스님께 작별의 손을 크게 흔들었습니다.nbspnbsp▲ 마지막으로 공항으로 출발한 6호차를 향해 손을 흔드시는 스님nbsp스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전화 통화를 하시며, 순례단이 모두 공항에 잘 도착했는지 출국 수속을 무사히 잘 밟았는지 확인하시며 순례단을 애정있게 챙기셨습니다.nbspnbsp이상으로 지난 15박 16일 동안의 제26차 인도성지순례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성지순례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스님의 하루를 열심히 읽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 말씀 드립니다.nbspnbsp오늘밤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는 법당에서 하룻밤 주무시는 스님께서는, 내일 오전8시부터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을 위한 수계식을 비롯하여, 1,2,8호차의 인도국립박물관 관람 안내, 델리 교민들을 위한 강연, 인도인들을 위한 통역 강연까지 쉴틈 없는 일정을 하루 종일 가지실 예정입니다. 그리고 방콕에 들러 방콕 정토불교대학 졸업 및 수계식을 하고, 정토회 제4차 백일기도 입재식 참가를 위해 모레 한국으로 귀국하실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

2015.01.22. 30,726 읽음 댓글 35개

2015.1.20 인도성지순례 14일째 아그라

nbsp안녕하세요.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4일째 되는 날입니다. 어제 스리랑카절, 미얀마절 등 다섯 개의 숙소에 흩어져 묵었던 오백 대중은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하여 4시 정각에 아그라로 출발하였습니다.nbspnbsp이제 빡빡한 순례일정에 익숙해져 모두들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싸는 바람에, 오히려 드라이버지들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너무 일찍 버스에 탑승하지 말라고 스님께서 주의 방송을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어제로서 부처님이 머무신 8대 성지를 모두 참배하고 가사를 반납한 순례객들은 교복을 벗은 학생들처럼 마음이 가볍습니다. 오늘은 재가수행자로서 다시 맞는 첫날이기도 하니까요. 막바지의 순례길, 그래서인지 버스 안에서의 새벽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는 더욱 간절하게 울려 퍼졌습니다.nbspnbsp오늘의 일정은 무굴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황제 샤 자한 부부의 무덤인 타지마할과 아그라 포트를 둘러보고 자유시간을 가진 뒤, 성지순례 평가회와 만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nbspnbsp▲ 강가강의 한 지류인 야무나 강nbsp새벽예불 후 버스에서 잠들었던 순례객들은 짙은 안개와 밤이슬이 내려앉은 들판에서 볼일을 보고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예정보다 한 시간 이른 8시 쯤 타지마할 동쪽 주차장에 도착하여, 어제 숙소에서 해놓은 전기밥솥의 밥과 반찬으로 아침밥을 먹었습니다.nbspnbsp식사시간에도 스님과 법사님들은 공양도 거른 채 주차장 한켠에서 선 채로 회의를 하셨습니다. 대중들이 공양을 마치자 스님께서는 타지마할과 아그라 포트에 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오늘은 성지순례가 아니고 관광입니다. 이곳 아그라는 인도 무굴 제국의 수도였어요. 무굴 제국의 여러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무굴 제국은 이슬람 왕조 국가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있는 지역에서 일어난 티무르의 후예들인데,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인도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했어요. 인도 대륙은 역사적으로 세 번 정복이 되었어요. 첫 번째는 아리안족이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내려와서 인도를 지배하면서 브라만 문화를 만들었고요. 두 번째는 1세기 경에 쿠샨 왕조도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내려와서 인도 대륙을 지배했어요. 세 번째는 이슬람이 내려와서 인도 대륙을 지배한 것이 무굴 제국이예요.nbspnbspnbsp무굴 제국은 1530년에 시작이 되어서 1600년대에 가장 번성을 했고, 1700년대에 들어가면서 쇠락하기 시작해서 1800년대 후반에 망했어요. 여기 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1600년대의 유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니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조선시대 쯤 됩니다.nbspnbsp무굴 제국은 바부르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후마윤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건국이 되는데 그 아들인 악바르 대제 때 전 인도를 통일합니다. 다음 황제는 자한기르이고 그 다음에 샤자한에 이르는데, 악바르 대제는 인도 대륙을 지배하면서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힌두 여자를 황후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그라 포트에 가면 부인이 힌두 절을 성 안에 지을 수 있도록 종교 융화책을 썼습니다. 무슬림은 이런 경우가 별로 없는데 이 사람은 전 인도를 통일하려다 보니까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한기르는 엄마를 인도 사람으로 두다 보니까 무슬림이라 하더라도 좀 유화적이었던 것 같습니다.nbspnbsp그 다음 황제인 샤자한은 부인이 애를 열네명째 낳다가 죽었어요. 그 부인을 위해서 세운 무덤이 타지마할입니다. 너무 부인을 사랑해서 그렇게 무덤을 아름답게 지은 거예요. 그 강 건너편에 자기 무덤을 만들고 다리를 놓아서 영원히 사랑을 나눌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무덤을 짓는데 국고를 너무 많이 낭비해서 결국 아들이 참다 못해 나라가 망하게 생겨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를 무덤 지으려던 그곳에 가두어서 유배시킵니다. 그 아들이 아우랑제브왕입니다. 그런 사랑과 비극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nbspnbsp타지마할 무덤을 짓는데 전문 기술자가 2만명 있었다고 해요. 왕이 “새로 짓는다면 이것보다 더 잘 지을 수 있느냐?” 물으니까 기술자들이 “새로 지으면 더 잘 지을 수 있다”고 말했데요. 그래서 그 2만명의 손목을 다 잘라버렸데요. 다시는 이런 것을 못 짓도록. 그런 비극이 있는 곳입니다.nbspnbsp그래서 한번 가보시는데, 안 가보면 후회하고 가보면 별 것 없고 그래요. nbspnbsp타지마할은 안에 들어가보면 흰 대리석을 파서 거기에 온갖 꽃무늬로 보석을 박아 놓았어요. 위에 무덤이 아주 아름답게 되어 있고 지하에 진짜 무덤이 있어요. 도굴할까 싶어서 위에 아름다운 관은 가짜이고, 지하에는 아무 무늬 없는 진짜 관이 있어요. 아그라 포트는 엄청나게 큰 성인데 현재는 절반만 개방이 되어 있습니다. 성문을 들어가서 한바퀴 돌아보면 돼요.”nbsp아들이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라즈길에서 스님께서 들려주신 빔비사라왕이 그의 아들 아자타삿투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야기가 겹쳐집니다. 권력을 가래 같은 것이라 하던 부처님의 말씀도 떠올려봅니다.nbsp스님께서는 이렇게 아그라에 대해 안내만 해주시고 성지순례 평가회 준비를 위해 숙소로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순례객들은 두 팀으로 나눠 타지마할로 갈 팀은 조별로 릭샤를 타고 출발하고, 아그라 포트로 갈 팀은 버스에 탑승해 출발했습니다. 타지마할은 검색이 엄격해 주머니 속에 있는 사탕도 반입이 불허 되어 사탕을 입에 나눠 먹으며 입장했습니다.nbspnbspnbsp▲ 타지마할nbsp안개 속에서 드러내는 타지마할은 사진 속의 모습보다 아름답고, 두 부부의 사연 때문인지 슬픔이 안개 속에 부서지는 듯 했습니다. 만약에 죽은 후에 남편이 저런 건물을 지어주면 행복하겠냐는 미혼의 한 법우님의 말에 한 보살님은 단칼에 “지 좋아서 하는 일에 죽은 내가 행복할 게 뭐가 있겠어요?” 라고 답해서 웃으며 타지마할을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 아그라 포트nbsp그리고 아그라 포트로 가서 산책하듯이 빙 둘러보았습니다. 순례객들은 조별로 모여 즐겁게 사진을 찍으며 친목도 도모하고 여유도 즐겼습니다. 몇몇 순례객들은 “성지순례할 때는 눈을 감고 명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 마음이 잘 알아차려지고 차분해져서 좋았는데, 관광을 하니까 바깥으로 눈이 팔려서 피곤하다”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 쇼핑센터nbsp오후 2시30분, 관광과 쇼핑을 마친 순례객들은 마지막으로 묵을 숙소인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짐이 검색대를 통과하느라 혼잡했지만 검색대를 통과하는 호텔은 처음 자 본다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짜증내지 않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쇼핑하면서 들떴던 마음을 내려놓고 수행자로 돌아온 듯 했습니다.nbspnbsp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은 대중들은 3시에 호텔 1층의 큰 홀에 개인 매트를 깔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부처님 당시의 풍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흙과 풀들 위에 깔았던 매트를 네모반듯한 대리석 홀 위에 까니 퍽 어색합니다. 그러나 성지순례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이 자리에 대한 감동이 교차하는 듯 순례객들이 스님께 올리는 청법가는 어느 때보다 우렁찹니다. 제 26차 인도성지순례 평가회는 법륜 스님의 법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 제26차 인도성지순례 평가 법회nbsp스님께서는 어제 버스 안에서 차량별로 나누기를 할 때 채널을 바꿔가며 모니터링을 하셨는데, ‘너무 많은 곳을 돌아봐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부처님의 생애를 룸비니부터 순서대로 순례했으면 덜 헷갈렸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있었다며, “그런데 부처님이 인도 전역을 왔다갔다 했는데 그걸 다 왔다갔다 하려면 45년이 걸려요.” 라고 하시고는 “그래도 순서가 덜 헷갈리게 잡은 게 이 정도”라고 하자 순례객들은 한바탕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생애를 탄생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2시간에 걸쳐 촘촘히 정리해서 복습해주시고 이어 지난 며칠간의 순례 일정에 따라 순서대로 복기해주시니 순례를 다시 다녀온 듯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풀밭에서, 석산에서, 탑 앞에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강당에서, 버스 안에서, 밤낮으로 펼쳐주셨던 법문을 대중들이 조금이라도 놓쳤을 새라 살뜰히 챙겨주시는 스님의 마음이 감동으로 전해집니다.nbspnbsp각 성지에 얽힌 중요한 교화이야기와 신화적 표현 속에 숨은 인류문화사적, 상징적 의미도 다시 짚어주셨습니다. 룸비니에서 부처님이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왕족출신을 상징하고, 일곱 발자국을 걸은 것은 육도윤회에서 한걸음 나아가 해탈열반을 상징한다는 것,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뜻을 의미한다는 것, 아시타 선인의 예언에서 혼란스러웠던 인도 사회를 세속적으로 다스려줄 전륜성왕과 가치관의 혼란을 잡아줄 붓다의 출현을 희원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카필라성에서 두 스승님에게 받은 교육이 왕이나 브라만을 교화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는 바탕이 되었음을, 사문유관을 통해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같이 행복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시혜적 자비’가 아닌 ‘자기화된 자비’를 보여주셨음을, 당대 육사외도 등의 출가사문은 인도의 전통사상에 반대하는 비주류였음을, 히말라야산 아래 카필라성의 지리적 환경이 뒤가 높고 앞이 트여 심리가 안정된 심성을 형성하는 데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 왕위를 버림으로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머리를 자름으로서 기존의 가치관을 버렸다는 것, 고행하는 이들을 보면서 복진타락의 한계를 깨닫고, 빔비사라왕과의 일화에서 왕위를 가래에 비유하며 권력을 버린 이야기, 전정각산에서의 6년 고행에서 욕망을 따르는 거나 억압하는 것 모두 욕망에 대한 작용 반작용에 불과함을 알고 악 쓰고 참는 수행이 아니라 편안한 상태에서 미세한 것을 알아차리는 중도의 길을 가셨음을, 다양한 교화사례를 통해 재가자도, 여성들도 모두 수행해서 해탈할 수 있음을 알게 해준 이야기 등을 구슬에 실을 꿰듯 찬찬히 꿰어주셨습니다.nbspnbsp스님은 여성과 관련된 설법을 순례 중에 빼먹으셨다며 연화색녀 교화사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이어서 보름 동안 바라나시부터 어제 샹카시아까지 순례한 공간들을 모두 훑어주시니 복잡하게 얽혀있던 지난 일정들이 환하게 정리되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다시 압축적으로 체험한 것 같아 환희심과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nbspnbsp그리고 스님은 성지순례를 마치며 이제 더 이상 껄떡거리지 말고, 겸손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삶의 방식을 바꾸자고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법문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이제 정리가 좀 돼요? 성지순례를 하면서 바깥으로 보면서는 ‘우리가 가진 것이 참 많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죠. 그러니 첫째, 이제 더 이상 껄떡거리지 말고 있는 것만으로도 풍요롭게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보세요. 둘째, 조금이라도 나눠가져야겠다는 마음을 좀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껄떡거리지 않으려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해요. 검소하게 살고 겸손하게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겨야 해요. 그래야 당당해질 수 있어요.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 버리고 출가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방향을 그쪽으로 잡고 항상 지금 누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참 미안하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해요. 부처님보다 더 많이 먹고 잘 입고 잘 자고 하면서도 늘 괴로워하는데 이 먹고 입고 자는 문제로 인생의 행복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nbspnbspnbsp그래서 돈이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제 돈에 너무 껄떡거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화장하지 마라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은 하지 마라는 것이예요. 머리를 손질하지 마라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하지는 마라는 겁니다. 옷을 아무렇게나 입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입으면 되지 옷으로 너무 폼 잡으려고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열등의식이 있으니까 자꾸 옷으로 커버하려고 하고, 얼굴로 커버하려고 하고, 머리 모양으로 커버하려고 하고, 큰 집으로 커버하려고 하고, 차로 커버하려고 하는데, 아무리 해봐야 그건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몸둥이도 내 것이 아닌데 그것이 어떻게 내 것이 될 수 있겠어요?nbspnbsp이렇게 헐떡거리며 살면 죽을 때가 되어서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법에 귀의함으로써 삶의 자유와 행복을 얻어야 되고, 우리가 사는 모습이 현대 문명이 갖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그 길에 우리가 서 있어야 합니다.nbspnbsp성지순례를 마치셨으니 이제 법에 귀의하는 불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탈 열반을 수행의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도 새로운 희망이지만 이런 방향으로 살면 우리 인류에게도 새로운 희망이 됩니다. 그렇게 해야 환경문제도 해결되고, 양극화문제도 해소되고, 계급차별도 해결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좀 더 앞서가는 문명을 만드는 선진적인 사람이 되자는 발원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불교가 최고야’, ‘불교 믿으면 부자가 된다’ 이런 신심이 아니라 법의 이치를 깨닫고 삶이 좀 차분해져서 좋다고 들뜨지 않고 뜻대로 안된다고 가라앉지도 않고 거기에 빠지지 않는 여여한 삶을 우리가 살아갔으면 해요.nbspnbsp요즘 세상이 얼마나 좋습니까? 옛날에는 불법을 공부하려면 머리 깍고 스님이 안되면 접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직장 다니면서도 불교 공부할 수 있지, 결혼하고도 공부할 수 있지, 이렇게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공부가 제대로 안되는 것 같아요.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다 버려라 하는 것도 아니고 좀 껄떡거리지만 말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나에게도 남에게도 자랑이 되는 그런 불자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그렇게 발심이 되면 이 보름이 아깝지가 않습니다. 돈 삼백만원이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술먹고 옷사고 낭비할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돈 축에도 안들어가는 액수잖아요. 앞으로 평생 껄떡거리면서 보석 사고 화장품 사고 좋은 술 사고 비싼 향수 뿌리고 하는데 쓸 돈은 죽을 때까지 수십만 달러가 될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성지순례 왔다 간 덕분에 엄청난 돈을 버신 거예요. nbspnbspnbsp인간적으로 따지면 밥도 똥밭에서 먹고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덜덜덜 떨면서 다니는 것 보면 마음이 안되었어요. 모두 집에 가면 마나님이고 사회에서는 목에 힘주고 다니는 분들인데 이런 숙소에 재우고 오라 가라 하는 것이 미안할 때도 있는데, 그렇게 정에 끄달리면 제대로 가르쳐주질 못해요.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좀 미안해요. 나이 오십이 넘어서 스님한테 야단 맞아 가면서 다니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집에 가면 다 자기가 왕인데... 그런데 우리 인생의 행복을 위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려면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야단을 치고 구박을 안 하면 누가 그렇게 해주겠어요? nbspnbspnbsp대구에 있는 어떤 분은 남편이 죽고 굉장히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성지순례 한번 왔다가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이렇게 느끼고 애들 셋을 혼자서 키우는데 아무 열등의식이 없이 아주 당당하게 키웠어요. 그래서 저를 만나면 늘 “저는 온전히 성지순례 다녀온 덕택입니다” 라고 얘기하는 분이 있어요. 여러분들도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삶이 조금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서 저의 역할은 마치겠습니다.”nbsp대중은 그동안의 고생이 다 풀린 듯 박수를 치며 끄덕끄덕합니다. 모두들 스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며 환호를 보내었습니다.nbspnbsp법문 후에는 각 조별로 나누기가 진행되었습니다. 조별 나누기 후 6시 20분부터 전체 나누기가 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차량별로 한명씩 13호차부터 소감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소감문에는 순례 기간 중에 느꼈던 감상과 순례 기간 중 개선해야 할 부분으로 나누어 발표하였습니다.nbspnbsp▲ 소감문 발표 시간nbsp한 발표자는 순례기간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울먹이기도 하였는데 순례객들은 발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신 박수로 열렬한 공감을 표현했습니다. 아마 보름 동안 동고동락한 경험이 서로 공유되어 있어서 그런 것일 겁니다.nbspnbsp막내라는 이유로 조장을 맡았지만 일의 흐름을 몰라 헤매었는데 조원들의 도움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는 분, 캘커타에서 구걸하는 아이들과 병든 노인들을 보며 IT강국 인도에 대해 화가 났으나 2600년 전 수행자들처럼 행선을 하고 정진하다 보니 앞으로 가족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자등명 법등명하며 여여한 삶을 살겠다고 발원하셨다는 분, 법륜 스님의 크신 사랑에 힘입어 8대 성지를 모두 참배하게 된 공덕에 감사하고 이를 모두 중생에게 회향하며 소승의 기본원칙에 충실하여 대승으로 나아가겠다는 분, 부처님이 춘다를 위로하시는 마음에서 자신도 위로 받으셨다는 분, 부처님이 설법하셨던 장소에서 그 경전을 독송했던 매일매일이 감동이었고 오백 대중과 함께 해서 더욱 여법하고 장엄했다는 분, 업식대로 짐을 많이 싸가지고 와서 고행을 했으나 다 보시하고 가방이 반으로 줄어 기쁘고 내 꼬라지를 볼 수 있어 좋았다는 분, 바이샬리에 비구니 절을 세우는 것에 대한 법륜 스님의 원에 대해 생각해보시게 되었다는 이번 순례에 함께 하신 비구니 스님 등 다양한 소감이 발표되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분은 꼭 해야 한다고 추천받아 발표하신 고정석님의 소감문 일부를 소개합니다.nbspnbspnbsp“부처님이 이루신 것은 없고, 다만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큰 서원이 있었을 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법륜 스님이 이루신 것을 보고 많이 감탄했는데, 인도에 와서 보니 법륜스님이 이루신 것들이 생각보다 더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스님 자신은 이루신 것이 없고, 다만 커다란 원을 세우고 현재에 깨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실 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스님의 서원과 아름다운 마음들이 얽히고 설키여 이루어낸 많은 일들을 보며 저 또한 지금 이 순간 깨어서 삶을 살아가겠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순례단의 소감을 다 들으신 후 간단하게 정리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이제 내일 끝나면 고생했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자발적 고생은 고생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자발적 고생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 회사 직원 훈련을 이렇게 시켰으면 어떻게 될까요? 월급을 주고 이렇게 해도 굉장히 불평이 많이 나오겠죠? 군대 훈련을 이렇게 시켜도 불평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고행과 고문의 차이는 고문은 타의에 의해서 하기 때문에 상처가 굉장히 많이 남고, 고행은 스스로 행하기 때문에 통증은 똑같은데 지나놓고 보면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수행은 자발성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번 성지순례도 자기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오신 분들은 아마 좋았을 거예요. 그런데 누가 가라고 해서 왔거나 멋 모르고 왔거나 하는 분들은 똑같이 힘든데도 마음에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년에 성지순례 가는 사람들에게 꼭 이렇게 말해주세요. “거기 절대로 가지 마라. 갈려면 고생을 각오하고 가거라” 이렇게 얘기해 줘야 아주 기쁜 마음으로 순례를 하게 되는데, 편안한 해외 여행 오듯이 오면 본인이 괴롭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괴롭히려고 이런 일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가보라고 너무 권유하지 마세요.”nbsp그리고 똑같이 돈을 내고 왔는데 차장들은 특별히 소임을 더 맡아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모두 일으켜 세우고 크게 박수를 쳐주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박수를 안 쳐주면 공덕이 쌓이기 때문에 박수를 쳐주어서 공덕을 까먹게 해야 돼요. 공덕도 많이 갖고 있으면 무거우서 안돼요.” 하셔서 모두들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수고한 조장들도 모두 일으켜 세워서 “공덕을 까먹게 해주자”라고 하셔서 박수를 일제히 쳐주니 서로 격려하는 분위기가 되고 평가회장은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nbspnbsp▲ 박수 받는 차장님들, 조장님들nbsp스님은 어제 저녁에 만난 석가족들에 대해서도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석가족들의 저녁공양을 받은 후 대중들이 낸 보시금이 7만 루피가 되었다며 석가족에게 잘 전달했다고 감사를 표하셨습니다. 석가족들은 인도에서 힌두교라는 바다에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존재들인데 스님께서는 담마 센터를 세우고 큰 불상을 세워 이를 방편 삼아 위축된 이들의 기를 살려주고 불자라는 자긍심을 길러주려 한다고 합니다. 또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에게도 문맹퇴치의 단계를 넘어 자긍심을 심어주고 경제적 자립을 도와주는 대안을 모색 중이라고 합니다. 우리 순례단에게도 열등의식을 넘어 자긍심을 가지고 내면의 당당함과 여유를 가진 삶을 살 것을 강조하시면서 돈의 욕망을 쫓는 기복 신앙을 넘어 자본주의 물결에서 거뜬히 이겨나오는 그런 불자가 될 것을 독려해 주셨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하여 바깥의 성지를 보면서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지켜보라고 자주 강조하셨는데 많은 발표자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을 발표해서 감동이 컸던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을 찾으셨어요?” 물으시면서 마지막 마무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nbspnbsp“여러분들이 부처님 찾기를 했잖아요. 부처님을 찾아서 룸비니도 가보고 카필라성도 가보고 바이샬리도 가보았는데 부처님을 찾으셨어요? 부처님은 그런 곳에는 없어요. 우리가 있을만 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있을 분이 아니예요. 부처님은 두 종류에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하나는 내 마음 속에 한참 분별을 일으키는 그것을 잘 보면 그 밑에 부처님이 계실 수 있어요. 하나는 어쩌면 구걸하는 아이들 속에서, 길거리에 쓰러져있는 노파들 속에서, 나한테 물건 팔려고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상인들 속에서 부처님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천백억화신 한다고 하시니까요. 그런 모습을 보고 불쌍하게 여기든 귀찮게 여기든, 일으키는 내 마음 속에서 부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찾으신 분은 별도로 저한테 오세요.” nbspnbspnbsp소감 발표 후 호텔 야외정원에서 만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얀 식탁보가 차려져있고 반짝이는 꼬마전구가 커튼처럼 내려오는 만찬장은 어제까지 보았던 인도와는 다른 이면을 보게 했습니다. 남겨진 음식들을 보며 거지들이 생각나고, 쏟아지는 분수를 돌리는 전기와 물이 아깝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간 쌓은 공덕을 다 까먹고 가야한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신 스님의 본 뜻은, 인도를 한 측면만 보고 섯부른 시혜적 자비심을 내지 말고 다양한 측면을 고루 보고 바른 통찰과 지혜를 내길 원하시는 듯 했습니다.nbspnbsp▲ 만찬장nbsp대중들은 조별로 둘러 앉아 인도 요리들을 맛보며, 며칠 간의 고생한 기억을 말끔히 씻어낼 듯 즐거운 한 때를 보내었습니다. 스님은 법사님들, 스텝들, 기사님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감사를 표한 뒤, 함께 노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순례단을 안전하게 모셔준 버스 기사님들을 격려해 주시는 스님nbspnbsp노래를 못하면 나오지 말라는 스님의 말씀에도 즐겁게 나와 노래하시는 순례객들 덕분에 모두 웃었습니다. 인도성지순례에 우쿠렐라, 태평소를 갖고 오신 분들이 있어 만찬 분위기를 한껏 북돋아 주셨습니다.nbspnbsp만찬 후 순례단은 내일 델리로 가면서 먹을 주먹밥을 조별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사용했던 바랑, 요가매트, 돗자리, 반찬통, 그리고 인도에 보시할 옷이나 반찬 등을 모두 내어 놓았습니다.nbsp스님께서는 만찬을 마치고 13대의 차량을 담당하여 대중을 인솔해준 차장님들을 모두 불러서 다시한번 “수고 많았다”고 격려를 해주시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순례 중에 대중들이 불편해 했던 점을 다시한번 물어보신 후, 한국에 돌아가서 개선점에 대해 잘 정리해서 JTS에 제출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법사단과 평가회의를 하시고, 이어서 실무자 스탭들과 평가회의를 하시는 등 밤12시가 넘을 때까지 계속 평가하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성지순례 때마다 이렇게 꼼꼼한 평가와 점검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개선을 해나가시는구나 느낄 수 있었고, 지금의 성지순례 프로그램이 이런 노고 위에 개선되어 왔음을 다시한번 알 수 있었습니다. nbspnbspnbsp내일은 인도성지순례의 마지막 날로 델리에 도착 후 박물관을 관람하고 공항으로 가서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nbsp

2015.01.21. 27,527 읽음 댓글 23개

2015.1.19 인도성지순례 13일째 상카시아

▲ 상카시아 탑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3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제 8대 성지의 마지막 여정인 상카시아로 향합니다.nbspnbsp새벽 3시에 일어나 짐을 챙겨서 버스에 올라타니 500여명이 탑승한 13대의 버스는 새벽 4시에 일제히 상카시아로 출발했습니다. 이른 출발이지만 늦게 일어나 허둥대는 사람이 없습니다. 순례 초에는 처음 하는 순례에 긴장해서 그랬는데, 지금은 익숙해 져서 인 듯 합니다. 어떤 도반은 일찍 눈이 뜨여 5분만 더 눈 붙이고 싶었으나 매일 108배를 마치고 명상 중인 옆 자리의 도반님을 보고는 벌떡 일어난다고 합니다.nbspnbsp새벽 4시에 차가 출발하자 여느 아침처럼 스님께서 수신기로 “잘 주무셨어요” 하시며 오늘의 일정을 짧게 알려 주십니다. “쉬라바스터를 출발하여 럭나우를 거쳐 8대 성지의 마지막 여정인 상카시아로 갑니다. 안개가 끼지 않아 버스가 잘 가네요. 차량별로 새벽 예불 해주세요.” 차량 별로 약 30분간 새벽 예불을 마치니 버스 안의 불이 꺼지고 순례단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nbspnbsp▲ 쉬라바스티에서 상카시아로 향하는 길nbspnbsp아침 7시경 차에서 내려 10여분 휴식을 하며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13일 동안 늘 그래왔듯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으로 흩어져 자연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해결하고 옵니다. 습기를 한껏 머금은 인도의 아침공기가 참 상쾌했습니다.nbspnbsp▲ 버스에서 내려 야외 화장실을 향해nbsp한참을 달려가는데 스님께서 미국에서 순례에 참가한 한 보살님의 아드님이 뇌사 상태에 빠져 위독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주시면서 함께 생전예수재를 지내고 기도를 하자고 하십니다. 유수스님의 염불과 무변심 법사님의 집전으로 500여명의 순례단은 버스 안에 앉은 채로 다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nbspnbsp▲ 순례객 중 한 분의 아드님이 위독해서 함께 생전예수재를 지냈습니다.nbspnbsp아드님이 위독한 보살님은 함께 기도를 하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보살님이 최대한 빨리 미국의 아드님 곁으로 가실 수 있게 계속 전화통화를 하며 교통편을 알아보시고, 또 어제 기원정사에서 경전독송을 통해 만났던 아들을 잃은 여인, 손자를 잃은 베사카 부인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보살님을 위로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럭나우 공항 근처에 보살님을 내려드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고 순례의 여정은 계속 되었습니다. nbspnbsp▲ 아드님이 위독해서 급히 미국으로 돌아가시는 순례객을 배웅해 주시는 스님nbsp한참을 달려가는데 스님께서는 곧 강가강이 5개 지류로 나눠지기 전의 원류가 되는 강가 강을 지날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가 나타나자 강변 모래사장 위에 기도를 하기 위해 온 힌두교 순례자들이 초막을 치고 빼곡이 들어선 풍경이 펼쳐집니다. 인도 사람들은 강가 강을 무척 신성하게 여기는데, 이곳에 초막을 치고 보름씩 한달씩 머물며 기도한다고 합니다.nbspnbsp▲ 인도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강가강nbsp스님께서는 “힌두인들이 믿음이 얼마나 굳건한지를 알 수 있다”하시면서 “인도인들은 이렇게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무슬림이 침공해도 기독교가 들어와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 “이렇게 믿음이 굳건해야 실천행동이 나오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믿음이 갖는 힘을 강조해 주셨습니다.nbspnbsp10시 30분경 차를 멈추고 볕과 그늘이 적절한 곳에서 아침 겸 점심 공양을 했습니다. 순례단이 공양 준비를 하자 근처 숲에서 야생 원숭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에 100마리 이상의 원숭이가 살고 있다”고 하시면서 원숭이가 몰려오는 입구에서 직접 원숭이들을 쫓으셨습니다. “망고 나무의 원숭이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원숭이는 망고를 따서 던진다고 해요. 저기 보세요, 원숭이 엉덩이가 빨간게 맞죠” 하시면서 순례단이 공양을 시작한 이후까지 원숭이 떼를 쫓아 주시고 공양 분위기도 가볍게 띄워 주신 후 다소 늦게 공양을 하셨습니다. 3호차에서 준비한 반찬으로 9조와 함께 공양게송을 시작으로 함께 공양을 드셨습니다. 야외에서 하는 공양이었지만 접시에 예쁘게 깍아 놓인 사과와 포도에서 스승님께 공양을 드리는 도반님들의 정성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공양 후에는 근처 유채밭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유채밭에 물 주고 있는 보살님들 빨리 오세요.” 라며 버스 탑승을 유머있게 재촉하셨습니다. nbspnbsp도로 양쪽으로 이어지는 평원에는 노란 유채밭과 아직 꽃이 피지 않은 감자밭이 넓고 푸르게 펼쳐져 우리나라의 봄날 같은 풍경이 이어 졌고 그 뒤로 키가 훌쩍한 나무들이 드문드문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였습니다.nbspnbsp버스 안에서는 차량 별로 이번 순례에 대한 소감 나누기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천상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신 후 하강하신 곳인 상카시아 유적지로 가고 있는 중이여서 그런지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경전반 수강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경전반 등록을 결심했다”는 말에 차안의 모든 순례자들이 환호의 박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한자로 된 경전을 뜻도 모르고 읽었는데 처음으로 쉬운 경전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하고, 어떤 분은 “평소 배려해 주고 맞추어 준 남편에게 처음으로 감사했고, 순례기간 동안 도반들에게 받은 도움들을 어려운 이웃에게 회향하겠다”고 하고, 어떤 분은 “싯타르타의 출가 노래를 함께 불렀을 때 생노병사에 대해 오랫동안 느껴왔던 것이라 너무 공감이 되어서 눈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순례를 하면서 법륜 스님이 인간 붓다의 삶에 대해 가지는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어서 감동이었다” 고 하고, 어떤 분은 “기원정사를 포행 할 때 나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느낌들의 나누기로 차안의 분위기가 한층 훈훈해 졌습니다. nbspnbspnbsp▲ 버스 안 마음나누기nbsp스님께서는 “각 차량별로 나누기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송수신기 채널을 돌려 가면서 다 들었다”고 하시면서 “어떤 차는 노래도 부르고 기타도 연주하고 꼭 소풍 온 것 같더라”며 웃으셨습니다.nbspnbsp새벽 4시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3시가 되어서야 드디어 상카시아에 도착했습니다. 무려 11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스님께서는 예상보다 1시간 늦었다고 하십니다. 가사를 수하고 향에 불을 붙이고 탑을 세바퀴 돈 후 공양 예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곳의 탑터는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 법을 설한 후 하강한 곳으로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소라고 합니다.nbspnbsp▲ 상카시아 탑nbsp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은 부처님이 태어나시자마자 일주일 만에 돌아가셔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어느해 안거 때 도리천궁으로 가셔서 마야부인에게 3달간 법을 설하고 하강하셨다는 이 곳에 이후 아쇼카 왕은 석주들과 대규모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nbspnbsp스님은 상카시아 탑 앞에서 간절한 발원을 하셨습니다.nbspnbsp“대한민국에서 온 정토행자 대중 오백여명 일동은 차사천하 남섬부주 인디아 우프라 프라데시주의 이곳 상카시아, 부처님이 천상에서 하강하신, 8대 성지 중 마지막 성지를 참배하고 부처님께 공양 예불 올리고 찬탄 공경하면서 발원하옵나니 저희 상카시아 대탑 참배 인연공덕으로 다생겁래로 지어온 모든 업장 소멸되고 성불하는 그날까지 세세생생 보살도 행하기를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또한 부처님께서 탄생하신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때 안거 중에 도리천으로 승천하셔서 어머니 마하마야 대비와 천상의 대중 일동을 위하여 설법하시고 대범천과 제석천을 대동하시고 이곳 상카시아 성밖으로 하강하신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어떤 사람도 어머니의 끝없는 공덕을 입고 태어나고 자랐으니 그 어머니의 공덕을 잊지 않고 어머니의 공덕을 길이길이 기억하고 그 은혜를 갚으라는 뜻으로 이와같이 보이신 것입니다. 저희 또한 이곳을 참배하며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며 그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nbspnbsp이와 같은 참배 인연 공덕으로 먼저 돌아가신 조상영가님들 모두 왕생극락케 하여 저희들이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소서.nbspnbsp오늘 이렇게 부처님 태어나시고 성도하시고 설법하시고 열반하신 곳을 포함하여 부처님께서 교화활동하신 저 왕사성 저 사위성 저 바이샬리 이곳 상카시아까지 8대 성지를 모두 참배하였으며, 또 부처님이 6년 고행하신 전정각산과 부처님께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카필라성 등 10대 성지를 순례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중 발견된 3개의 탑, 바이샬리와 랑그람,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 참배한 이 모든 공덕을 고통받는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배고픈 자는 배불러 지고, 병든 자는 속히 쾌차하여지고,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배움이 성취되는 등 고통받는 일체 중생들 모두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nbspnbsp또한 저희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연으로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 병고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들 하루 속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갖가지 인권침해로 인간다운 삶이 영위되지 않는 북한동포들에게 자유와 행복이 속히 도래될 수 있게 옹호하여 주옵소서. 올해로 해방 70주년 분단 70주년 이산가족의 애환이 깊으니 올해 분단 70주년을 기하여 남북한이 화해하고 교류하고 협력하여 한반도의 다시는 분쟁과 전쟁이 없도록 나아가 서로 협력하여 통일의 기운을 만들어 마침내 한반도가 통일될 수 있도록, 뿐만 아니라 한중관계 한일관계도 개선되어 동양 삼국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여 함께 번영하므로써 이웃나라가 서로 공생공존할 수 있어 세계 문명의 중심을 이룰 수 있도록 발원하옵나니 성지순례 참배 인연공덕으로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천륭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또한 지난 2주 성지순례 기간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이와같이 오백 대중이 순례를 마칠 수 있게 됨에 제불 보살님들께 감사드리오며 남은 일정 또한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성지순례 참배 대중 일동은 성지순례를 통하여 이제 사람으로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때리거나 죽이거나 헤치는 행위를 하지 않고, 훔치거나 빼앗는 손해끼치는 행위를 하지 않고, 성추행 성폭행 등 괴롭히는 행위를 하지 않고, 거짓말 욕설 등 말로도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술을 먹고 취하여 행패 피우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사람다운 길을 갈 수 있는 그런 서원을 꼭 지킬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시고 더 나아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베풀고 돌볼 수 있도록,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괴로운 이를 위로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밝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순례를 마치며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대승보살의 길을 갈 수 있길 순례 참배 대중 일동은 서원을 세웁니다.nbspnbsp또한 검소하게 살되 당당하며 겸손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서 세상에 불자됨이 자랑스럽고 이 세상에 불자가 있음으로해서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그런 불자 되기를 발원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은 저희 참배 대중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륭팔부 신중님들은 저희의 이 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이어서 스님은 “장시간 버스타고 온다고 힘들었어요?” 물어 보시면서 이곳 상카시아 성지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잘 오셨습니다. 이곳이 마지막 성지입니다. 어느해 우기철 안거에 부처님이 일체 보이시질 않았습니다. 누구도 부처님을 본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근심이 많았습니다. 부처님이 어디 가셨을까?nbspnbsp그런데 신통제일 목갈리나 존자께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도리천궁에 가셔 계신다. 어머니를 위해서 설법을 하러 가셨다” 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태어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으니까 부처님의 설법을 못 들었잖아요. 그래서 어머니를 비롯한 도리천궁에 있는 천인들을 위해서 설법하러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오시는지 물어보니 10월 보름날 이곳에서 하강하신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를 기념한 탑이 이 상카시아 스투파입니다.”nbspnbspnbsp법문을 마치고 상카시아에 관련된 경전을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경전독송을 마치고 잠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상 후에는 스님의 요청으로 한 법우가 나와서 ‘어머니의 은혜’를 선창하고 오백 순례단도 모두 함께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 스승님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스승의 은혜’를 불러보자”고 하셔서 이번에는 무변심 법사님의 선창으로 ‘스승의 은혜’를 함께 불러 보았습니다.nbspnbspnbsp곳곳에서 눈시울을 붉히거나 조용히 눈물을 닦는 순레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조금씩 저물어 가는 주위에 까마귀 떼가 낮게 날아서 숙연한 분위기를 더하는 듯 했습니다.nbspnbsp▲ 어머님의 은혜,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히는 순례객nbsp스님께서도 노래를 함께 부르신 후 “우리 모두는 부모님과 스승의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시며 법문을 마치시고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서둘러 버스에 탑승하라 하셨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성지를 나서며 어김없이 동네 아이들을 위해 사탕을 나눠주시며 아이들의 행복과 인도 불교의 부흥을 발원하셨습니다.nbspnbsp▲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시는 스님nbsp버스를 타고 5분쯤 가니 스님께서 상카시아 석가족을 위해 담마 센터를 지어주려고 마련한 부지가 나타났습니다. 아직 담마 센터는 지어지지 않았고 주위에 벽만 네모나게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순례단 일행이 부지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석가족 청년들이 나와서 스님과 순례단을 환영해 주었습니다.nbspnbsp▲ 상카시아 담마 센터 건립 부지. 인도성지순례 회향식nbsp오후 5시30분경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시작으로 제26차 인도성지순례 회향식이 열렸습니다. 스님께서는 해가 져서 어두워진 으스름 속에서 마지막 회향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오계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500여 대중을 한명이라도 더 깨우쳐 주시려는 스님의 간절한 마음과 순례단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nbspnbspnbsp“여러분들이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바라나시의 사르나트에서 구리가 장자의 부부처럼 삼귀의 오계를 받고 출가한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시작한지 오늘로써 열하루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열흘 간 단기 출가를 했다고 볼 수 있죠. 그 열흘 동안 우리는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바라나시의 사르나트, 6년 고행하신 전정각산,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 일천 비구를 교화하신 우리벨라 가섭터, 가야 가섭을 교화한 가야산, 처음 사찰이 건립된 죽림정사, 왕사성, 영축산, 칠엽굴을 순례하고, 그리고 바이샬리의 진신사리탑과 원후봉밀터를, 그리고 께사르 스투파를 거쳐서 파바마을의 춘다 공양터, 쿠시나가라의 열반당, 부처님을 화장한 라마바르총, 그리고 네팔로 넘어 가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29세까지 성장하신 카필라성, 그리고 석가족이 부처님을 영접한 쿠단과 꼴리족이 세운 랑그람 진신사리탑을 참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도로 와서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그리고 천불화현탑을, 그리고 사위성의 기원정사를 참배하고, 오늘 이제 상카시아의 부처님이 하강한 곳의 탑을 참배함으로 해서 10대 성지순례를 마치고 3개의 진신사리탑까지 참배를 마쳤습니다.nbspnbsp진행되는 과정에 자는 것도 불편하고 씻는 것도 불편하고 대소변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불편하고 많은 것이 불편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많은 대중이 움직이다 보니 복잡하기도 하고 쫓기기도 하고 그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아무 차질 없이 오백 대중이 성지순례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신중님들이 옹호하셨나 싶을 정도였습니다.nbspnbspnbspnbsp오늘 회향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부디스트라고 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잖아요. 붓다라는 사람은 수행자예요. 우리가 부디스트가 된다는 것은 불교를 믿는 종교인이 된다는 개념이 아니예요. 수행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부처님의 법에 귀의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여러분들은 성지순례까지 하셨으니까 불자로서 미니멈은 좀 지켜주셨으면 해요. 자신이 불자라고 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면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둘째, 남에게 손해는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아무리 성질이 나도 욕설을 하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섯째, 술을 안 먹으면 좋지만 먹더라도 취해서 주정을 해서는 안됩니다. 부디스트가 이것을 증명하는 징표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미니멈이 안지켜지기 때문에 수행자는 고사하고 평범한 인간도 못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처님이 정한 이 다섯가지 계율은 무슨 성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워라 이런 얘기입니다.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오계는 지킨다’ 이것 하나는 결심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무지로 인해서 일어났다면 깊이 참회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nbspnbsp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든지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준다든지 남을 위로해 준다든지 하면 더 좋죠. 돈 벌 일이 있으면 열심히 버세요. 벌어서 베푸는 데에 쓰면 되잖아요. 여기 보니까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습니까? 미국이나 한국에서 낭비하지 말고 이런 곳에 주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사는 데에 도움이 되겠어요?nbspnbsp그러니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아닌 것으로 자꾸 나를 삼지 마세요. 나이가 내가 아니며, 지위가 내가 아니며, 재물도 내가 아닙니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삼고 그게 부족하다고 비굴하거나 그게 좀 있다고 교만하거나 그러지 말고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nbspnbspnbsp그런데 부처님은 2600여년 전에 바라문이라고 목에 힘주고, 왕이라고 목에 힘주고, 돈 많다고 목에 힘주고, 천민이라고 고개도 못 들고, 여자라고 고개도 못 들고 사는 그런 세상에 평등한 인간 존엄을 선언했기 때문에 존경이 되는 겁니다. 지금 시대에 그런 얘기를 하셨으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얘기라서 그렇게 할 수 있겠다 싶은데, 지금 들어도 훌륭한데 그 시대에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 시대에 상가 안에서만이라도 모델을 만들려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는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한 인간이 그렇게 올바르게 사물을 인식했다는 것, 나아가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다는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세상은 붓다가 말한 쪽으로 한발 한발 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도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 대로 행하면 아마 인류 사회에서 가장 선각자가 될 거예요. 가장 진보적이고 앞선 사람이 될 거예요.nbspnbsp그러니 우리 불자들이 세상에 뒤쳐진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을 한발 앞서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까 전세계적으로 상위 1가 가진 재산이 나머지 99가 가진 재산을 넘어섰다고 해요. 이건 새로운 계급 사회예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이것을 완화시키는 쪽으로, 지구환경을 보존하는 쪽으로,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 쪽으로, 평화가 도래하는 쪽으로, 개인이 행복한 쪽으로 나부터 우리가 함께 해나간다면 개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나 얼마나 소중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성지순례 오셔서 붓다가 2600년 전에 깨닫고 실험적으로 시도한 이런 일을, 붓다는 위대하다고 이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그분이 뿌린 씨앗을 우리가 가꾸고 수확하는, 그것을 우리가 이 세상에 실현하는 사람이 되자는 큰 원을 한번 세워보시기 바랍니다.nbsp▲ 회향 법문을 하는 동안 날이 저물었습니다.nbspnbsp열흘 동안 수행 생활을 하시고 오늘 이제 가사를 반납하게 되는데 수행 생활이 만만치 않았죠? 이렇게 수행 생활 체험한 것을 일상 생활 속에 적용해보면 그래도 자그마한 집이라도 있는 것이 고맙고, 세끼 밥먹는 것이 고맙고, 가족이 있는 것이 고맙고,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이 고맙습니다. 이렇게 고맙게 생각하고 살면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것으로 성지순례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일어나셔서 저 멀리 부처님을 향해 삼배를 드리고 또 법사님들에게 삼배를 하고 가사를 반납하겠습니다.“nbspnbsp해가 다 지고 컴컴한 저녁 6시 20분경 차량 및 조별로 각각 수계를 받았던 법사님들께 가사를 반납하면서 회향식은 끝이 났습니다.nbspnbsp▲ 법사님께 가사를 반납하며nbsp스님께서 웃으시면서 “법적으로 일곱번 까지는 출가를 거듭할 수 있다”고 말씀하셔서 순례단들 모두 웃었는데 가사를 벗을 때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nbsp이어서 석가족 청년들이 준비한 스님과 성지순례단 환영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상카시아에는 전 인도에서 석가족이 제일 많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석가족 청년들은 스님께 꽃목걸이를 하나씩 걸어주며 스님께 합장 공경을 표했습니다. 어두워서 석가족들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이곳 부지에 석가족의 불교 교육을 위한 담마 센타를 지어주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상카시아 스투파 위에 힌두 탬플이 있어서 석가족과 갈등이 있으므로 스님께서 이곳 부지에 부처님께서 하강하시는 모습으로 불상을 하나 지어주고 대중이 집회할 수 있는 큰 강당도 지어주기로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불사를 추진할 책임자가 없어서 지금은 조그만 사무실만 지어놓고 추진을 못하셨는데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석가족이 200만 정도 살고 있는데 대부분 힌두교이고 절도 없고 해서 스님께서 여기 석가족 집성촌 마을에 불상 점안식을 해주고 법회와 수련도 일년에 한차례씩 해오고 있으십니다. 스님께서는 순례객들에게 석가족 청년들의 활동에 후원과 관심을 당부하셨습니다. 스님의 당부를 듣고 순례객들 모두 십시일반으로 상카시아 석가족 불자 모임을 위해 후원금을 즉석에서 내어 주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석가족을 대표해서 수바스지가 순례단을 환영하는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성지순례객들을 가족처럼 반갑게 맞이해준 석가족 분들nbsp“상카시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을 환영하러 석가족이 여기 올 수 있어서 너무 너무 기쁩니다. 밥과 계란, 짜이를 준비했는데 맛있게 드셔주십시오. 스님과 인연을 맺은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일년에 이렇게 하루만 뵐 수 있어서 너무 섭섭합니다. 한달만이라도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스님께서는 저희들을 위해 많은 불상을 보시하셨고, 저희들이 기도할 수 있게 기도집을 만들어주셨고,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저희 석가족을 위해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감사드립니다.”nbsp▲ 석가족들로부터 불교 포교의 바램을 듣고 기립박수로 응원의 마음을 보내주는 순례객들nbsp수바스지의 환영 인사에 순례단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주었고, 많은 분들이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하며 응원의 마음을 보내주었습니다. 아마도 스님께서 발원하신 인도 불교 부흥 사업이 이 석가족 청년들을 시작으로 활짝 꽃피기를 바라는 순례단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nbspnbsp환영식 후 순례단은 석가족 청년들이 준비해준 밥과 짜이를 맛있게 먹었습니다.nbsp▲nbsp석가족들이 준비해준 짜이와 밥nbsp그리고 각 숙소로 나뉘어 들어가서 성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nbspnbsp이제 인도성지순례는 후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짐은 점점 가벼워 지고 마음은 풍성해지는 듯 합니다. 내일은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로 유명한 아그라로 가서 자유일정으로 인도의 또다른 모습을 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

2015.01.21. 24,335 읽음 댓글 19개

2015.1.18 인도성지순례 12일째 쉬라바스티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2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부처님이 성도 후 가장 오랜 기간 머무셨다는 기원정사가 있는 쉬라바스티에서 그 숨결을 느끼며 하루 종일 머뭅니다.nbspnbsp기원정사 가까이에 있는 한국 절인 천축선원과 스리랑카 절에서 하룻밤을 묵은 순례단은 새벽 4시30분에 일제히 기상하여 5시에 법당과 법당 복도에 줄을 맞추고 앉아 새벽 예불을 함께 올렸습니다. 천축선원의 법당은 복도 끝에 위치해 있는데 내부는 하얀 벽면으로 정갈하고 포근한 분위기였습니다. 어제 하루 동안 순례를 하며 불편함에 사로잡혀 바깥 경계를 탓하며 내 마음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 하루를 시작합니다.nbspnbspnbsp▲ 천축선원에서의 새벽 예불nbsp아침 예불 후 500여명의 순례객은 가사를 정갈히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정문 앞에서 천불화현탑까지 한줄로 서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앞뒤 간격이 떨어지지 않게 왼발 오른발을 알아차리며 ‘행선’을 하면서 길고 긴 줄을 지어 새벽 안개를 가릅니다. 스님께서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한 눈 팔지 말고 오백 비구가 기러기처럼 걸어갔던 것처럼 천천히 한 시간 가량 정진하며 가자”고 하십니다.nbspnbsp조금 벗어나니 도로가 나왔습니다. 어스럼한 불빛에 수행자들이 도로에 한줄로 길게 늘어선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간간이 트럭이 몇 대 지나갈 뿐 주변은 어둠이 자욱한 가운데 천불화현탑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nbsp동산 모양을 한 탑을 중심으로 우리 500여명 순례객은 석가모니 염불을 하며 스님을 따라 두 줄 세 줄 질서있게 탑돌이를 하는데, 이는 마치 바다를 가르는 날렵한 보트가 파도를 가르듯 멋지고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nbspnbspnbsp탑돌이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천불화현탑은 어떤 곳인지 간단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nbspnbspnbsp“이곳 사위성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인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수행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자타장자 등 많은 분들이 ”이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무언가 기적을 보여주셔야 이들에게 믿음이 생기겠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 간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들의 얘기가 합당하다고 생각하셔서 아무날 아무시에 성 밖에 나오너라 하시고는 이 지점을 지정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이곳에 모였을 때 부처님께서 망고씨 하나를 이곳에 심어서 조금 기다리니까 싹이 트고 점점 자라서 나무가 큰 고목이 되어 꽃이 피고 망고가 주렁주렁 열렸다고 합니다. 조금 있으니까 그 망고가 전부 부처님으로 화해서 천 부처님이 동시에 출현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위성 사람들은 그제서야 부처님 법을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쉬라바스티를 상징할 때는 천불화현의 그림이 그려집니다.nbsp이것은 부처님의 법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얘기인데 인도의 종교적인 성향과 맞딱드려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이 초기부터 널리 알려진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성스러운 곳에 저희들이 왔기 때문에 탑을 향해 삼배를 먼저 하겠습니다.“nbsp이어서 선 채로 탑을 향해 삼배를 하고 반야심경을 봉독하였습니다.nbspnbsp순례단은 다시 그 정열 그대로 기원정사를 향해 도보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도중 어느덧 날이 밝아 자전거 탄 주민들도 보이고 형제인지 친구인지 모를 소년 둘이서 따라오며 꽃을 팔기도 했습니다.nbspnbsp가다가 Korea Temple 이라고 씌어진 간판을 지나갔는데 알고 보니 순례단이 묵었던 천축선원이었습니다. 양옆에 태극 모양의 돌이 눈에 들어오니 인도 불교성지에 한국 절이 있어 자랑스러웠습니다.nbspnbspnbsp오백명이 한줄로 길게 서서 기원정사를 향해 걷는 길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오백 제자들과 함께 사위성으로 걸식을 하러 가기 위해 이렇게 걸어가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치 당시의 부처님 제자 중에 한 명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무변심 법사님의 낭랑하고도 맑은 목소리를 따라 한발 한발 계속 걷다보니 어느덧 서서히 기원정사가 가까워져 왔습니다.nbspnbspnbsp7시 30분쯤이되자 공원처럼 꾸며놓은 기원정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례객들은 향에 불을 붙이고 석가모나불 정근을 하면서 드디어 기원정사로 들어갑니다. 500여명이 길게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질 않았는데, 긴 행렬이 기원정사 곳곳을 스님을 따라 물흐르듯이 밟아보며 부처님과 당시 제자들의 숨결을 느껴봅니다.nbsp부처님이 머무셨다는 자리에 세워진 ‘간디 쿠타’ 라고 하는 작은 탑을 바라보며 500여명의 순례객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섰습니다. 스님께서는 기원정사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여기까지 걸어오신다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이곳이 부처님이 작은 초막에 머무셨던 ‘간다쿠티’ 자리입니다. 성도 후 3년 만에 수다타장자가 이 아름다운 동산을 부처님께 기증을 해서 이곳 기원정사에 부처님과 천이백오십명의 비구와 함께 머무셨습니다.nbspnbsp아까 전에 우물을 하나 돌았는데 그것은 부처님이 드시던 우물입니다. 아난 존자가 그 물을 퍼서 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발을 씻을 물을 떠드렸다고 합니다.nbspnbsp또 아까전에 직사각형으로 네모난 부분을 돌았는데 그 자리는 부처님이 행선하셨던 자리입니다. 열아홉 발자욱이니까 부처님의 보폭이 어느 정도이셨는지 한번 재어보면 됩니다. 편안하게 걷는데도 스물네 발자욱이 되면 부처님이 나보다 보폭이 크셨다고 생각하면 되고, 열일곱 발자국 밖에 안된다고 하면 부처님이 나보다 보폭이 적으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nbsp부처님이 성도 후 45년 동안 24안거를 사위성에서 보내셨는데, 그러니까 절반이 넘는 시간을 사위성에서 보내신 겁니다. 그 가운데 19안거를 이곳 기원정사에서 보냈습니다. 즉 이곳은 부처님이 가장 오래 주석하셨던 곳입니다. 그래서 불교 경전의 절반 가까이가 이곳에서 설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부처님이 머무셨던 자리를 향해서 먼저 삼배를 드리겠습니다.”nbsp삼배를 정성껏 올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공양 예불을 올립니다.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바로 이곳에서 예불을 올리다니 또한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bspnbspnbsp예불을 마치고 이어서 스님께서 간절한 발원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저희 한국에서 온 정토불교대학생과 졸업생과 정토행자 대중 오백여 일동은 부처님께서 장기 주석하셨던 코살라국 쉬라바스티 사위성 기원정사에 두손 모아 합장하옵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면서 간절하게 발원하옵니다. 부처님께서 장기 주석하시고 금강경이 설해진 이곳 기원정사 참배 인연 공덕으로 대중 일동은 다생겁래의 업장이 소멸하고 세세생생 보살도 행하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또한 우리가 태어난 대한민국에 회향하오니 이 인연공덕으로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병듦에서 벗어나고 갖가지 인권침해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런 복덕이 내리기를 발원하옵니다. 또한 남북 간의 전쟁이 없는 항구적 평화체제가 수립되고 한발 나아가 통일 대한민국을 발원하오며, 통일 대한민국은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과 협력하여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여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하늘의 모든 신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또한 저희들의 기원정사 참배 인연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세계는 평화롭고 세계 만민은 행복하여지이다. 인간 세상에 갖가지 차별을 떠나고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부처의 본성을 밝혀 해탈열반을 성취하기를 발원하옵니다. 또한 이곳을 참배한 인연공덕으로 조상 영가님들과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함께 왕생극락하옵소서. 제불보살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륭팔부 모든 신중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이어서 순례단은 모두 자리에 앉고, 스님께서는 기원정사의 창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스님은 항상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머릿 속으로 그릴 수 있게 묘사해 주십니다. 그래서 벽돌 더미의 유적지가 곧 부처님 당시의 상황으로 금새 재현이 됩니다.nbspnbspnbsp“저희가 참배한 이곳은 여기 말로 ‘제따바나’입니다. 제따는 사람 이름이고 바나는 숲이란 뜻입니다. 즉 제따의 숲이란 뜻입니다. 제따를 한문으로 써서 우리식으로 읽으면 ‘기타’가 됩니다. 기타 태자의 숲인데 이것을 한문으로 옮기면 ‘기수급고독원’입니다. 그리고 ‘급고독’ 이란 말은 수닷타장자의 한문 이름입니다. 외로운 이를 돕는 자란 뜻입니다. 그래서 기타 태자의 숲인 ‘기수’에 ‘급고독’ 장자가 절을 지엇다고 해서 합하니까 ‘기수급고독원’이 되는 것입니다. 기수급고독원을 줄인 말이 ‘기원정사’가 됩니다.nbspnbsp이 절이 어떻게 지어졌느냐 하면요. 부처님께서 성도 후 3년 죽림정사에 계실 때 사위성에 사는 수자타장자가 사업을 하러 왕사성에 갔어요. 왕사성의 친구 집에 갔더니 몇 번을 불러도 안나와서 섭섭해 하고 있는데, 친구가 급히 나오면서 “내일 아침에 부처님과 대중들을 공양 초대를 해서 그거 준비하느라고 바빴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수닷타장자는 부처님의 법문과 그 행적에 대해 친구로부터 얘기를 듣게 됩니다. 친구는 들어가고 밤에 잠을 자는데 내일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다고 하니까 잠이 오질 않는 거예요. 밤을 새고 안개가 자욱한 새벽녘에 숲속을 산책하는데 저 나무 밑에 수행자가 앉아 있는데 너무나 거룩해 보이는 거였어요. 그래서 다가가서 절을 하면서 “부처님이 아니십니까?” 하니까 그렇다고 하시면서 “장자여, 내 당신이 오기를 이미 오래 기다렸소” 라고 하십니다. 장자는 부처님께 설법을 청했고 그 설법을 듣고 장자는 마음의 무지가 다 사라지고 법열의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저희 나라 사위성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법을 듣기를 원합니다” 하고 요청하니 침묵으로 승낙하십니다.nbspnbspnbsp장자는 기쁜 마음으로 사위성에 돌아와서 3개월 후에 부처님이 오실 것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죽림정사처럼 성으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이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소유주가 이 나라의 기타 태자였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찾아가서 “이 숲을 저에게 파십시오” 한 거예요. 그런데 이 기타 태자가 기분이 좀 나빴나봐요. ‘이게 돈 좀 있다고 그러는가’ 싶어서 “안 판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자타장자가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하니 태자는 파지 않을 심상으로 “금화를 깐다면 그만큼 팔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자는 창고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금을 가져와서 이 땅에 깔았습니다. 그런데 그 양이 입구에 좀 깔고 마는 정도 밖에 안되었어요. 이 소식을 듣고 태자가 깜짝 놀라 가보니 진짜 금을 깔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는 친구들에게 다 연락해서 금을 빌려와서 깔고 온갖 방법으로 금을 깔려고 했어요. 그래서 기타 태자가 “도대체 이 땅을 사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고 묻습니다. 그러자 장자는 자신이 만난 부처님에 대해서 주욱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태자가 감동을 해서 “그렇게 좋은 일이라면 나머지 땅은 내가 기증을 하겠소” 라고 합니다.nbspnbsp그래서 이곳이 기타 태자의 이름을 따서 제따의 숲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제따의 숲이라고 하면 급고독 장자의 노고는 빠지게 되잖아요. 그래서 제따의 숲에 급고독 장자가 절을 지었다고 해서 ‘기수급고독원’ 이를 줄여서 ‘기원정사’라고 한 겁니다. 많은 조각과 그림에 기원정사의 창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수닷타장자는 부처님을 만나기 전에도 자선 사업가로서 좋은 일을 많이 해왔으며, 부처님을 만난 이후에는 재가 신자였지만 10대 제자에 버금가는 역할을 했다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닷타장자처럼 10대 제자에 버금가는 역할을 한 재가 신자로 왕사성의 지이바카, 사위성의 베사카 부인도 함께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 분들은 승단을 운영하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해서 경전에도 수없이 언급된다고 합니다.nbspnbspnbsp그리고 이곳 사위성에 있었던 다양한 교화 사례를 재미있고 실감나게 들려주셨습니다. 먼저 왕이 백성을 마음대로 죽이고 하찮은 물건처럼 취급하던 시대에 프리세나짓왕이 찾아와서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서 부처님께서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십시오” 라고 대답해주신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청와대에 찾아가서 이런 얘기를 하기가 어려운데 절대 왕정의 시대에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하니 부처님의 사회적 인식과 그 당당함에 깊은 존경의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곳 기원정사는 45안거 중에 19안거를 부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수많은 설법이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교화 사례들을 주욱 들려주셨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듣듯 눈을 감고 수신기로 스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머리 속으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nbspnbsp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앙굴리말라를 교화한 이야기, 눈먼 비구를 교화한 이야기, 병든 비구를 교화한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경전을 통해 만나고 스님의 생생한 법문을 통해 다시 만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nbspnbspnbsp하지만 부처님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비난이나 위협도 많았다고 합니다. 육사외도의 한 종파가 자기 신자의 딸에게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법문을 하고 있는데 가서 임신한 배를 보이면서 “당신은 제자들만 돌보고, 당신 애기가 낳을 때가 다 되어가는데 왜 돌보지 않느냐?” 고 하면서 난처한 상황을 만들게 한 이야기, 아주 예쁜 처녀에게 저녁만 되면 정사 쪽으로 걸어가게 하고 아침만 되면 정사에서 걸어나오게 해서 그 처녀를 실종시킨 다음 기원정사에서 비구들이 성추행을 하고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려서 비구들이 탁발을 하나도 못 얻어먹게 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 왕사성에서 “어제는 누구의 아들을 뺏어가더니, 오늘은 누구의 남편을 뺏어가더니, 내일은 또 누구의 제자를 뺏어갈고?” 이런 노래를 부른 이야기 등을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nbsp그러나 많은 비난을 받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여래는 다만 진리의 길을 갈 뿐이다. 그 진리의 길을 듣고 귀의하지 않는 자 누가 있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스님께서는 “우리도 늘 오해를 받고 비난을 받을 수 있는데 그 때 우리는 늘 붓다를 생각해야 합니다. 붓다처럼 위대한 분도 비난을 받고 곤궁에 처했는데 우리 같은 수준에서 뭐 그렇게 억울해할 필요가 있겠어요?” 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비난이나 오해를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수용할 것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nbspnbsp또 부처님께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병든 비구를 찾아가서 위로해 주시면서 정진도 해야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도 늘 함께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수행자들이 왜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가 되는 이야기라며 자세히 들려주셨습니다. 특히 대만의 자재공덕회가 이런 사상을 기초로 일천만명의 봉사자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는 사례를 함께 소개해 주셨습니다.nbspnbsp그리고 부처님께서 이곳 기원정사에 계실 때 천이백오십명이 한 줄로 서서 골목골목 들어가서 차례로 밥빌기를 마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셔서 밥을 먹고 발우를 씻고 옷을 접어두고 명상에 들었는데, 그 때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보고 장로 수보리가 일어나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금강경’도 바로 이곳 기원정사가 배경이라고 강조하시면서 다함께 그 내용이 되는 경전을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500여명의 순례단은 세 번에 걸쳐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치면 다시 스님의 설명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아니룻다가 “눈은 잠을 먹이로 하는데, 해탈열반은 정진을 먹이로 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잠을 자지 않고 정진을 하다가 눈이 멀었지만 천안통을 얻었다는 이야기, 마하가섭 존자가 한번 지적을 받고 소박하게 살아서 두타 제일이 된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법에 귀의한 사람들의 마음 자세에 대해서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암나빨리는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왕자들이 천금을 준다고 했지만 부처님께 공양 올릴 기회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그 당당함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nbsp또 절약하는 승가, 계급차별을 타파한 이야기,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에게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서 해방시킨 아름다운 모습, 손녀를 잃고 슬퍼하다가 부처님의 법을 듣고 밝아진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임을 강조해 주셨습니다.nbspnbsp“부처님 문답의 가장 큰 특징은 대화의 화제를 바꾸면서 스스로 모순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이렇다 저렇다라고 답을 하는 것이 아니고 너가 그렇다면 이렇게 되겠네 하시며 그 모순을 바로 깨치게 해주셨습니다. 부처님이 어느날 바라문의 집에 탁발을 하러 갔더니 그 바라문이 막 욕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빙긋이 웃으셨어요. 우리라면 입씨름을 했겠지만 ”왜 웃나?“고 따지는 말에 부처님께서는 화제를 딱 바꾸면서 ”당신 집에 손님이 가끔 옵니까? 그 사람이 선물 사올 때가 있죠. 선물을 사왔는데 그 선물을 안 받으면 그 선물이 누구 것이요?“ 라고 묻습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냐?“고 답하자 부처님은 ”당신이 지금 나한테 욕을 선물했는데 그 욕을 내가 안받으면 그 욕은 누구 것이요?“ 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 때 그 바라문이 탁 깨닫고 부처님을 극진히 모셨다고 합니다. 이 모습만 보면 어떻습니까? 저 두 사람은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기에 보자마자 공양을 올리나 싶죠. 그러니까 우리가 자꾸 전생과 내생 이야기를 하는데 삼생이 지금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하는 것이 내생에도 영향을 주지만 전생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 바라문이 욕을 한다고 같이 맞대응을 해서 욕을 했으면 삼생이 악연이 되는데, 부처님은 빙긋이 웃음으로해서 삼생이 선연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의 길은 먼 것이 아니고 상대가 욕을 할 때 빙긋이 웃어주면 삼생의 업이 다 녹는 겁니다. 그런 부처님의 법을 생각하면서 다음 경전독송을 해보겠습니다.”nbsp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며 다시 경전독송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를 떠올리며 명상의 시간도 가져봅니다.nbspnbspnbsp명상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이렇게 화제를 바꾸어서 자신의 모순을 깨닫게 한 부처님의 교화사례를 다양하게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이어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별로 모여 앉아 점심 공양도 하고, 산책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공양을 하고 있는데 주위에 원숭이들이 곳곳을 습격해서 먹을 것을 뺏어갔습니다. 어떤 분은 원숭이가 밥을 담은 락앤락 통을 뺏어 들고 나무 위로 달아나서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또 스텝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은 곳에는 원숭이가 간식이 가득 든 봉지를 들고 달아나서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원숭이들은 사탕봉지를 뜯어서 사탕을 하나씩 까서 먹기까지 했습니다.nbspnbsp▲ 락앤락 통을 뺏어간 원숭이nbsp원숭이에게 음식을 뺏기기는 했지만 순례객들은 모두 다 이런 상황을 재미있어 했습니다. 더군다나 바이샬리에서는 원숭이들이 부처님을 알아보고 꿀공양을 올렸다는데 이런 원숭이들이 그렇게 했다니 참으로 희귀한 일이였구나 다시한번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머물렀던 간다 쿠티, 부처님이 드셨던 우물, 부처님의 제자들이 머무셨다고 하는 곳곳의 정사터, 부처님을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했던 코삼비 쿠티, 부처님이 행선하셨던 곳,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생각하라고 아난 존자가 보드가야에서 가져온 보리수 나무 등에 대해서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곳곳을 둘러보며 기원정사에서의 부처님의 체취를 느껴봅니다.nbspnbsp▲ 간디쿠티 위에 올라가 기념 사진을 찍는 순례객들nbsp▲ 부처님이 행선을 하셨다는 곳을 직접 거닐어 보며nbsp▲ 아난다가 부처님께 드릴 물을 떳다는 우물nbsp▲ 아난다가 보드가야에서 가져왔다는 보디 트리nbspnbsp휴식 중간에 공양을 하고 있는데 스님께서는 쉬시지도 않으시고 “그래도 인도에 왔는데 스님과 개별 사진을 다들 찍고 싶다고 하니까 시간을 드리겠다” 고 하시면서 일대일로 스님과 개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내주셨습니다. 500여명이 한명씩 나와 사진을 찍어야 해서 일인당 3초씩 “하나, 둘, 셋” 하면 나와서 찍고 들어가고 하는 식으로 1시간이 넘게 사진만 찍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이어서 경전독송과 법문 시간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인격은 그 자체로도 빛나지만 더욱더 빛나는 것은 나쁜 이를 만났을 때 더욱 빛을 발하셨다”고 하시면서 춘다의 공양과 마지막 제자 수바드라를 대했던 부처님의 태도, 앙굴리말라의 교화이야기 등을 들려주시며 붓다의 위대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99명을 죽인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닫고 귀의를 한 후에 하루는 걸식을 나갔어요. 어떤 집에 걸식을 하러 갔는데 앙굴리말라가 오니 산모가 이를 보고 놀라서 기절을 하고 쓰러졌어요.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부처님께 돌아가서 ”내가 이미 지난 악행을 참회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아힘사 비구여,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한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해라. 그리고 “당신이 출가한 이후로는 그런 적이 없지 않소?” 이렇게 말씀하지자 앙굴리말라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말을 하니 그 여인이 정신이 들어서 애기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괴력을 가진 사나이가 아니고 온순한 수행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다시 돌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제 앙굴리말라가 나타나도 도망을 가지 않고, 전부 돌멩이를 가져와서 집어 던졌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시내에 탁발을 하러 갔다가 무수한 돌멩이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결국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품에서 ”저는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하면서 순교를 했습니다. 이렇게 괴력을 가진 사람이 불법에 귀의하게 되면 자기가 죽어도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잖아요. 우리는 자기가 위험하면 괴력을 드러내서 사람들을 다 도망가게 해버렸을 겁니다. 앙굴리말라에게는 죽는 것보다 불법이 더 우위에 있었던 겁니다.”nbsp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머리를 내리쳐서 겸손하게 만들었고, 또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를 주셨고,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위로하고 격려해서 자신감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이런 부처님의 여러 모습을 스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이곳은 금강경이 설해준 곳이기 때문에 한국 불자들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한국에 돌아가서 아함경을 비롯해서 금강경을 꼭 공부해 볼 것”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그리고 성지를 참배할 때마다 예불문을 계속 되뇌였는데 스님께서는 예불문의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께서 직접 쓰신 부처님의 삶을 묘사한 발원문을 함께 읽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발원문을 다 읽고 스님께서 “불자로서의 자부심을 좀 느껴요?”라고 물으셨고 대중은 힘차게 “네”라고 답했습니다. “우리는 불법을 많이 알기는 하는데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하시며 “자기를 괴롭히지 말고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안 죽고 산 것만 해도 인생은 성공한 것이예요” 라고 덧붙이시고, “자기를 아끼며 살자”는 말씀으로 법문을 마무리해주셨습니다.nbspnbsp오후 3시 무렵 사홍서원으로 마무리하고 다시 순례단은 가사를 수하고 한 줄로 서서 사위성을 향해 갑니다.nbspnbspnbsp앙굴라말라의 탑과 수닷타장자의 탑이 마주보고 있는 사위성에 도착하여 앙굴라말라의 탑을 먼저 한바퀴 돌고 계속해서 수닷타장자탑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앙굴리말라의 탑은 아마도 앙굴리말라가 돌멩이를 맞고 쓰러진 곳에 세워진 곳이 아니겠냐며 스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nbsp▲ 앙굴리말라의 탑nbsp그리고 수닷타장자의 탑 주변을 둘러싸고 삼귀의 반야심경을 올렸습니다. 재가신자로서 10대 제자만큼이나 큰 공로를 하신 그 마음을 생각하며 탑을 향해 정성껏 합장을 했습니다.nbspnbsp▲ 수닷타장자의 탑nbsp삼삼오오 모여 사진도 찍고 화장실도 다녀온 후 모두 천축선원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도착하니 오늘 저녁공양은 라면이라는 유수 스님의 공지가 나옵니다. 오랜만에 나온 특별식에 모두들 기뻐하면서 공양간으로 향했습니다. 라면을 후후 불어서 먹는데 추운 날씨 긴 여정에도 모두 활기차고 환한 모습입니다.nbsp▲ 천축선원nbsp오후 6시 10분, 공양 후 천축선원 야외에 모셔진 불상 앞에서 야단법석이 열렸습니다. 천축선원 주지스님이신 대인 스님께 법문을 청하여 들었습니다.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시는 법륜 스님과 정토행자님들이 한국 불교의 진정한 대안이 아닌가” 하시면서 대인스님 또한 정토행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감동적인 법문을 들려주셨습니다.nbsp▲ 천축선원의 대인스님nbsp이어서 법륜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오늘 법문 내용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nbsp“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가 무엇인가 많은 불자들이 궁금함이 많은데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간에도 서로 벽이 있죠.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나라 모든 인종 모든 계급, 이런 칸막이를 무너뜨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 통찰하는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즉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진리의 요소가 있으면 수용을 해가는 그런 가르침인데 어찌 불교 안에 소승이니 대승이니 칸막이를 가르고 우열을 논하는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소승은 살생만 안하면 된다, 도둑질만 안하면 된다, 사음만 안하면 된다, 거짓말만 안하면 된다는 이 미니멈에 너무 집착한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죠. 그러나 소승의 장점은 그건 지킨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대승은 살생 안하는 것이나 도둑질 안하는 것으로 부처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고, 가난한 이를 위해서 베풀고, 거짓말 안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알려주고, 욕설 안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자비롭게 위로해 주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이익되게 하라는 것이 원래 대승의 정신이었습니다. 소승이 미니멈에만 만족하기 때문에 그 한계를 지적하고 더 적극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대승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대승이 되려면 소승 수행을 다 지키고 대승을 해야 합니다.nbspnbspnbsp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해탈 즉 성불입니다. 자기가 괴롭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만 괴롭지 않으면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대승의 수행법은 그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 베풀어라는 것입니다. 대승은 어느정도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느냐면 그 표현이 ‘비록 내가 성불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중생을 다 구제해야 되겠다’ 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대승이 잘못된 것은 자기 정진을 안한다는 겁니다. 남을 다 돕지 못해서 괴롭고, 일을 벌려놓고 수습을 못해서 괴롭고, 불쌍한 사람을 보고 불쌍해서 괴롭고, 이렇게 세상에 좋은 일을 하지만 스스로 괴로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세상에서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수행자는 아닙니다. 그래서 이 대승의 문제점은 미니멈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멕시멈의 베푸는 원은 있는데 미니멈의 자기 원칙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세속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 대승불교인들이 깊이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괴롭지 않는 경지로 가는 수행은 기본입니다. 그것을 딛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nbspnbsp수행의 관점을 놓치면 불평불만이 생깁니다. 수행의 관점을 놓치면 우리가 이렇게 순례를 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요. 우리가 이렇게 불편을 감수하면서 순례를 하는 이유는 그 미묘한 법을 가르치셨던 그 분에 대한 존경 때문에 순례를 하는 것이거든요.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에 이 세상에 출현해서 인간이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이 미묘한 법을 설한 그 분을 존경해서 나도 그분처럼 조금이라도 닮아가려고 하고, 또 이런 사람이 직접 있었는지 정말 이런 법문을 설했는지 이렇게 직접 확인하러 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다니면서 불평불만을 하고 다닌다면 좀 문제겠죠. 불편하면 짜증이 나게 되어있는 우리의 이 업식을 보고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잖아요. 그런데서 우리는 수행자로서 순례하는 것이지 여행객이 아닙니다. 스님도 이렇게 다니면 불편해요. 그러나 이 불편이 불만이 되면 안됩니다. 나도 모르게 불만으로 나타나면 즉시 되돌이키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nbspnbsp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대승이니 소승이니 너무 나누면 안됩니다. 다만 대승은 소승이 갖는 한계를 극복해보려고 일어난 새로운 운동입니다. 그래서 소승인 테라바타보다 우리가 조금 더 나아가야 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테라바타 보다 더 나은 것이 별로 없어요. 이론적으로만대승을 주장하지 실제 삶이 미니멈의 인격을 안 갖추고 있습니다. 대승이 대승답지가 못하죠. 당연히 선불교도 대승불교가 갖는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나온 불교인데 이것 또한 선불교가 선불교답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것이 선불교인데 지금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테바바타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 기본을 조금 더 다지자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발 한발 나아가서 대승의 종지와 선의 종지를 이어나가자는 것입니다.nbspnbsp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다는 이치가 일치가 안되면 대승은 세속화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서 우리는 늘 수행자로서의 미니멈인 기본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미니멈을 딱 잡고 남을 손해 끼치지 않는 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수행자로서의 기본을 하고 다음으로 보디사트바로 한발 더 나아가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걸 순례를 하면서 다시 돌아봤으면 해요.”nbsp스님의 법문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500명 순레객들은 일찍 취침을 하였습니다. 어느새 내일 상카시아가 8대 성지 순례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은 새벽 3시20분에 기상하여 4시에 상카시아로 출발합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

2015.01.20. 25,613 읽음 댓글 12개

2015.1.17 인도성지순례 11일째 탄센, 삐쁘라하와

▲ 탄센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1일째 되는 날입니다.nbspnbsp이른 새벽 2시 30분, 룸비니 대성 석가사의 정원에는 하늘의 별과 옅은 안개가 탄센으로 떠나는 순례객들을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품과도 같았던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짐을 버스로 옮기며 좌석에 앉으니 수신기에서는 스님의 익숙하고도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와 출발을 독려했습니다.nbspnbsp▲ 새벽 2시 30분, 룸비니 대성석가사를 출발하며nbsp오늘 일정은 히말라야 설산인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를 볼 수 있는 탄센의 언덕까지 오르는 산행으로 시작합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 안에서 천일결사 기도가 시작됩니다. 버스 좌석에 앉아 다리와 양손을 모으고 새벽 예불이 시작됩니다. 낮으면서도 또렷한 음성으로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를 마쳤습니다.nbspnbsp천일결사기도가 끝나자, 버스 불이 꺼지고 순례객들은 앉은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버스가 절벽과도 같은 위험한 길을 따라 해발 2000미터를 오르는 동안에도 순례객들은 잠에 빠져 있다가, 탄센 도착을 알리는 스님의 음성에 따라 옷을 주섬거려 입고, 무지 추울 것이라 예상하고 겹겹이 껴입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nbspnbsp500여명의 순례단 선두에 서신 스님께서는 대중들에게 누차에 걸쳐 천천히 오라며 당부하셨습니다. 선두가 너무 빨리 가면 후미가 힘들다 하시며, 올라가는 길의 왼쪽으로 붙어서 오라고 당부하셨지만, 대중들은 조금이라도 스님 곁에 서서 오르려고 줄이 두터워지는 모양새였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여기는 옛 탄센 왕국의 땅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도이며 몽골리안인데 아무리 지형이 험해도 물만 있으면 어디든 사람들은 살 수 있다” 고 하시면서 이곳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산 곳곳에 물을 뜰 수 있는 샘터가 보였습니다. 이 산에는 나무가 많아서 이렇게 물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리는 깨끗하고, 길가 나무들은 꽃들이 노랗게 빨갛게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탄센 마을 사람들은 순례단을 신기해하면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습니다.nbspnbsp꼬불꼬불 언덕길로 1km 정도를 가다보니 계단이 나왔습니다. 계단 길 옆으로는 벌써 복사꽃이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한 계단씩 올라가자, 여기가 고지대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발 아래 산들 사이로 안개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안개바다 위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며, 청명한 하늘이 열렸습니다.nbspnbspnbsp햇살을 받으며 아름다운 여인의 머릿결 같은 솔잎이 반짝였습니다. 키가 커다란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가자, 폭신한 흙길과 소나무 내음에 그간 먼지와 긴 이동거리에 피곤했던 순례객들의 심신이 치유되는 듯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길을 걸으시면서도 설산의 위치를 짚어주시며 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카필라성에서 설산을 보시면서 성장하셨을 것라고 일러주시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 저 멀리 안나푸르나가 보입니다.nbspnbsp언덕 위에 전망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가 돌아 나오면서 달맞이꽃 같은 노란꽃 무리를 만나고, 길을 안내해주려는 것인양 스님 뒤를 따라 다니는 동네 개들도 보았습니다.nbspnbspnbsp햇살 따뜻한 넓은 터가 있는 곳에 다다라 조금 쉬기로 했습니다. 휴식 후 스님께서 노래 잘 하는 사람들 나오라 하셔서 몇 분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신기로 구성진 노래 가락을 들려오자 몇몇 분들은 추임새를 넣고 순례단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nbspnbspnbsp순식간에 흥이 오르고 너도 나도 서로 노래를 부르려는 사람들이 손을 듭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아쉽게도 “이제 그만해요. 오늘 갈 길이 바빠요.” 하셔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산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내려오는 길은 가벼웠습니다. 목표를 향해 올라갈 때보다 여유가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 사는 모습이 눈에 정겹게 들어왔습니다. 버스 주차한 곳으로 가서 조별로 모여 도란도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는데 상쾌하고 쾌적한 산행 이후의 밥맛이 꿀맛입니다.nbspnbspnbsp이어서 스님께서는 대성 석가사의 총무 스님을 소개해주셨고 총무 스님은 산행 동행 이후 남은 순례 일정 동안 건강하시라는 인사 말씀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식사 후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먼 길을 출발입니다. 인도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국경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미리 도착하여 출입국 수속 준비를 해주신 실무자 스텝분들 덕분으로, 순례객들은 편안하게 빠른 수속을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nbspnbsp국경을 통과해서 쉬라바스티로 가는 길에 카필라성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러 출발합니다. 차창 너머로 수평선까지 펼쳐진 연두빛 밀밭과 노란 유채밭이 보입니다. 간혹 차창을 통해 만나는 아이들은 활짝 웃으며 손을 힘껏 흔들어줍니다. 울퉁불퉁 비포장 시골길을 한참 동안 달려야 했는데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순례객들은 피곤하여 모두다 잠을 청하느라 조용했습니다,nbspnbsp덜컹 거리며 달린 끝에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터에 도착했습니다. 오는 도중에 2호차는 차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를 하러 가야 해서 2호차 순례객들은 모두 다른 차로 나뉘어서 탑승했고, 13호차가 도중에 접촉사고가 나서 수습을 하고 오느라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약간의 사고가 있었지만 먼길을 무사히 도착해서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nbspnbsp▲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nbsp도착하자마자 공양물 준비팀은 제기와 제상, 과일과 과자, 사탕을 가지고 공양올릴 준비를 합니다. 스님과 대중들은 향에 불을 켜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탑을 세 바퀴 돌았습니다.nbspnbspnbsp향받이에 향을 모으고 500 대중 각자의 자리를 잡고 예불 준비를 합니다. 자리가 정돈되자 무변심 법사님의 목탁에 맞추어 일제히 예불을 올립니다. 합장하고 몸을 숙여 절을 올립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께서 발원문을 낭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오늘 저희들은 카필라바스투 샤끼야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을 친견하오니 이같은 공덕은 참으로 희유하고도 희유한 공덕이라, 다생겁래로 지어온 한량없는 공덕이 있기에 오늘 이렇게 진신사립탑 세 군데를 마지막으로 친견하오니 이와 같이 진신사리탑 친견 인연공덕으로 대중 일동은 다생겁래로 지은 업장 모두 소멸하고 이 공덕을 고통받는 이들에게 회향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이러한 발원 공덕을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조상 영가님들 또한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극락왕생 하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nbsp예불과 발원문이 끝나자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터에 대한 스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스님께서는 아주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듯이 말씀해주십니다.nbspnbsp“먼 길을 돌아 잘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입니다. nbsp우리가 세가지 진신사리탑을 친견했는데 그 첫째가 바이샬리 진신사리탑, 둘째가 랑그람 진신사리탑, 셋째는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입니다.nbspnbsp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은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이 부처님의 진신사리 8분의1을 가져가서 세운 탑입니다. 이 지역 이름을 따서 유적지의 이름은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입니다. 너무 많이 봐서 뭐가 뭔지 분간이 잘 안갈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그거인 것 같고, 사진을 봐도 구분이 안될 거예요. nbspnbspnbsp카필라성도 네팔에 있고, 부처님을 영접한 쿠단 유적지도 네팔에 있고, 룸비니도 네팔에 있고, 랑그람 스투파도 네팔에 있는데, 왜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은 인도에 있을까요? 여기서 3km만 가면 국경입니다. 국경을 통과하여 돌아오다보니까 5시간 걸렸지만 사실은 바로 곁에 있습니다. 카필라성과 룸비니의 중간쯤 되는 곳의 약간 아래 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카필라국의 영토 안에 있었고요.nbspnbsp이 사리탑은 1800년대 후반에 영국 사람이 이 탑을 발굴 했습니다. 사리 용기에서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나왔는데 델리 박물관에 지금 보관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인도가 독립한 후 이 사리탑을 재발굴 했는데 사리탑의 더 아래쪽에 다시 사리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탑이 덧붙여 쌓다 보니 그렇습니다. 이 진신사리탑은 아쇼카 왕 이전에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바로 세워진 탑입니다. 이 사리탑에서는 유골 일부와 명문도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곳은 확정적인 곳입니다.nbspnbspnbsp코살라국의 프리세나짓 왕이 부처님께 귀의한 후 부처님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석가족의 공주를 자신의 후비로 받아들이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이 석가족들이 자존심이 세니까 그렇게 하기는 싫은데 안할 수는 없으니까 하녀를 공주로 분장을 시켜서 시집을 보냈어요. 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이 여인은 왕후는 아니지만 아주 대우받는 후비였어요. 그런데 다른 비의 아들들은 어머니의 고향에 다녀오는데, 이 비의 아들은 어머니가 친정에 가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커서 계속 조르니까 할 수 없이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한 겁니다. 카필라바스투에서는 코살라국의 왕자가 오니까 잘 대우를 해서 보냈어요. 그런데 이 왕자가 돌아가다가 무엇을 방에 두고와서 그것을 가지러 다시 방에 들어가니까 자신이 잤던 방을 하인들이 청소를 하다가 “에이, 더러워” 하면서 소금을 막 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하녀 출신의 아들이 궁중으로 들어가 좋은 방을 차지했으니까 부정 탔다는 겁니다. 그러니 비밀을 아는 사람이 볼 때는 저 아들이 왕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하녀의 아들이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어머니한테 따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사정을 이야기 한 겁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석가족에 대해서 굉장히 적개심을 갖게 되었습니다.nbspnbsp이런 인연이 있는데, 프리세나짓 왕의 아들들이 수십명이여서 왕위를 갖고 쟁탈전을 했는데 결국 이 석가족 하녀의 아들이 형제들을 다 죽이고 왕이 됩니다. 권력을 잡고 나서 제일 먼저 복수하려고 한 대상이 석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서 석가족을 멸해라고 명령합니다. 엄청난 군대가 공격 명령을 받고 카필라성으로 향하는데 그 소식을 듣고 부처님은 군대가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뙤약볕에서 명상을 딱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군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면서 “부처님, 왜 뙤약볕에 앉아 계십니까? 저기 나무 그늘도 있는데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무리 나무 그늘이 좋다 해도 친족의 그늘보다는 못하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장군이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다시 명을 받고 왔는데 또 부처님께서 같은 자리에 앉아 계신 거예요. 똑같은 문답이 오고 갑니다. 이제 세 번째는 ‘부처님이 계시더라도 그냥 갈 수 밖에 없다’ 하고 각오를 하고 나오니 부처님께서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가보니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안 나오셨어요.nbspnbspnbsp결국 성이 함락되고 왕도 잡힌 겁니다. 그런데 왕이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였어요. 명령이 석가족을 멸종시켜라는 것이니까 아이든 어른이든 남자란 남자는 다 죽인 겁니다. 그런에 이 왕이 사정을 했어요. 내가 이 연못에 들어가서 나올 동안까지만 이 사람들을 도망가게 놓아 주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물을 파내니 왕이 물 속에 들어가서 그 머리를 풀어서 나무 뿌리에 묶어 놓고 죽은 겁니다. 그동안에 석가족의 일부가 도망을 갈 수 있었습니다. 도망간 석가족은 왕족이 아니라 수드라의 신분으로 전락해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석가족도 크샤트리아 계급이 아니고 수드라에 속해 있습니다. 대부분 농사 짓고 살고 있고 자녀들은 공무원을 하기도 하고 있습니다.nbspnbsp그런데 이 석가족은 자신의 뿌리가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어요. 인도에 불교가 없어지고 700년이 흘렀으니까요. 다 힌두교 신자가 되었죠. 그러다가 근대 교육이 시작되면서 자신이 부처님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많은 석가족들이 불교 개종 운동을 지금 하고 있어요. 상카시아 지역에 가면 사키아라는 카스트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데 지금 힌두교에서 불교로 한 20 정도 개종을 했습니다. 인구로 따지만 20만명 정도 될 겁니다. 그래서 저희 정토회에서도 그들을 위해서 상카시아에 석가족들을 위한 절을 지어주려고 불사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nbspnbspnbspnbsp그러니 참 묘하죠. 부처님도 왕위를 버렸고, 아들도 출가를 했고, 부인도 출가를 했는데, 이 출가한 사람들은 다 살았어요. 부귀를 누리던 사람은 역사적인 변화 속에서 살해를 당하거나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불멸 후에 이 탑이 쌓아진 것을 보면, 출가한 스님들 중에 석가족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에 탑을 쌓았을 수 있고요. 또 이런 역사와 관계 없이 카필라성이 복속되었지만 이 도시가 없어질 수는 없으니까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탑을 쌓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이런 큰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것은 인연의 이치가 그랬기 때문에 부처님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어요. 그러나 부처님은 법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어요. 이런 성스러운 곳에 지금 우리가 와 있습니다.”nbsp이어서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친견히고 공양을 올리고 108배를 올리면서 순례객들은 스님께서 누차에 걸쳐 말씀하긴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더 느꼈습니다.nbspnbsp진신사리탑터를 나와서 스님께서는 구걸하는 아이들을 일렬로 앉혀서 한명 한명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탕을 똑같이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 사탕 먹고 다음 생애에는 스님이 되겠습니다” 라고 따라하라고 하십니다.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른채 무작정 따라하면서 사탕을 받고선 마냥 좋아합니다.nbspnbspnbsp버스에 올라타서는 쉬라바스티 천축선원에 도착할 때까지 8대 성지와 3군데의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면서 그동안 느꼈던 나누기와 장기자랑 시간을 가지면서 하루의 회포를 풀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먼 거리를 달려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오늘 숙소인 쉬라바스티의 천축선원에 도착했습니다. 별을 보고 시작한 이른 하루를 밤이 깊어 별을 보면서 길고 뿌듯한 하루 일과를 마칩니다. 숙소에 짐을 풀자 일정을 정리하는 잔잔하고 세심한 스님의 안내 음성이 수신기를 통해 들려왔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순례단이 모두 숙소로 들어간 후, 천축선원 주지 대인 스님을 비롯해 이곳에서 불사를 하고 계신 스님 분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같이 차담을 나누셨습니다. 천축선원에서는 정토회 순례단을 위해 오늘과 내일 국과 밥, 반찬 등을 정성껏 지어 주신다고 하셔서 스님들께서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새책 lt지금여기 깨어있기gt와 수건, 양말, 다이어리, 치약, 비누, 볼펜, 커피, 샴푸, 런닝 등 생필품 한 박스를 선물했습니다.nbspnbspnbsp내일은 기원정사가 있는 이곳 쉬라바스티에서 새벽 정진으로 하루를 시작해 천불화현탑과 기원정사, 앙굴리말라탑, 수자타장자탑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이곳 쉬라바스트에서 하루 종일 부처님의 숨결을 느끼며 머물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nbspnbspnbsp

2015.01.19. 25,362 읽음 댓글 15개

2015.1.16 인도성지순례 10일째 룸비니

▲ 부처님이 태어나고 자란 카필라성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0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자라신 네팔 룸비니에서 하루를 시작합니다.nbspnbsp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 4시30분 대웅전에서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오백여 대중이 모여 법륜 스님과 대성 석가사 총무 보현 스님과 함께 부처님이 태어나신 이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불을 드리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nbspnbsp▲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의 새벽 예불nbsp아직은 캄캄한 새벽,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천일결사기도를 올리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해졌습니다.nbspnbsp▲ 버스 안에서의 천일결사 기도nbsp고요한 새벽 들길을 달리는 버스 안, 차가운 기온으로 뿌옇게 흐려진 창을 연신 닦아내는 버스 조수와 먼 순례 여정을 함께하는 운전기사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한 마음입니다.nbspnbsp이윽고 버스는 안개가 자욱한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캄캄한 어둠을 뚫고 모두들 헤드 랜턴을 비추며 발을 딛고 가사를 여법하게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카필라성의 서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경주의 반월성처럼 생긴 성터에 자리를 잡고 안아 순례단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의 삶에 대하여 스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nbspnbsp▲ 카필라성 안의 태자 궁터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의 고국인 카필라바스투라는 나라이고요. 또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이기도 하고,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이 터는 태자 궁터입니다. 부처님의 집터이죠. 부처님의 고향에 오셔서 부처님이 자란 터에 지금 앉아 있습니다. nbspnbsp정반왕은 40세가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그 기쁨이 너무 컸고 그래서 아들 이름을 싣다르타라고 지었습니다. 싣다르타는 ‘모든 것이 다 뜻대로 이루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히말라야 산에 사는 아시타 선인을 불러서 아이의 운명을 점치게 했습니다. 아시타 선인은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눈물을 흘립니다. 정반왕이 왜 그런가 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세속에 남아 있다면 왕들 중에 왕인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 수도를 하게 되면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가 혼란스럽다 보니 세상을 태평스럽게 하는 성왕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거나 전통 사상이 무너지고 사상이 혼란스러워지니까 모든 것을 깨달은 이 붓다의 출현을 기대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아시타 선인은 ”이 아이는 출가 사문이 되어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다만 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이 분의 가르침을 듣고 나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해서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납니다” 라고 말합니다.nbspnbspnbsp태자는 어느덧 자라서 12살이 되었고 왕이 되는 학습을 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농경제에 참석했습니다. 농부가 밭갈이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농부의 몰골이 너무 비참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고통스러울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부가 쟁기질을 하면서 소를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 채찍을 맞은 소의 엉덩이에 피가 맺혔습니다. 왜 사람은 조금 편리하기 위해서 저렇게 소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쟁기가 땅을 갈자 땅 속에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 나왔습니다. 새들이 날아와서 그 벌레들을 쪼아 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태자는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는 죽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이런 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농경제에 참석하지 않고 염부수 나무 아래에 앉아 소의 큰 눈망울에 고인 눈물을 생각하면서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정반왕은 농경제가 끝나고 아들을 찾았습니다. 아들이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이 너무나 거룩해서 자기도 모르게 절을 했다고 합니다.nbspnbsp이 사건 이후로 싣다르타 태자는 즐거움은 잠시 뿐이고 늘 농경제에서 본 중생의 고통이 생각나고 그러면 즐거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또 사색에 잠기는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반왕은 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많은 별궁을 짓고 연회를 베풀고 했지만 아들의 얼굴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습니다.nbspnbsp농경제 사건 이후 얼마 뒤에 세상에 나가서 민중들의 생활을 시찰했는데, 동쪽 문으로 나가서 늙은이를 만났고, 남쪽 문으로 나가서는 병든 이를 만났습니다. 서쪽 문으로 나가서 죽은 이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기도 하지만 당시 계급 사회에서 민중의 고통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싣다르타는 중생의 고통에 대해서 깊이 느끼게 되고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서서 그 고통이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출가가 인생이 뜻대로 안되어서 하는 것으로 많이들 생각하는데 경전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출가를 했다는 그 원력이 경전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사회 도피처럼 생각하는 이 이미지를 우리가 바꿔야 합니다. 출가는 큰 원을 세워 세상을 뛰어넘는 행위입니다.nbspnbspnbsp북쪽 문으로 나갔을 때 수행자를 만났습니다. 거기에 한 수행자가 조용히 앉아 있는데 몰골은 늙고 병든 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습니다. 입고 입는 옷은 초라하고 몰골은 늙었지만 그의 품위는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그래서 싣다르타는 그 출가사문을 만나면서 모든 고뇌를 벗어날 새로운 길을 발견한 듯 했습니다. 즉 ‘껍데기의 모습은 거지와 똑같은데 인간이 어떻게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저렇게 품위있게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nbspnbsp그래서 정반왕은 혹시 자기가 오래 왕을 해서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해 그런가 해서 한 지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태자가 그 지역에 갔을 때 역시 노예 계급은 헐떡 거리며 일을 하고 있고 소도 숨을 헐떡거리며 쟁기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잘 다스린다는 것은 소에게도 고통이고 노예에게도 고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의 고삐를 풀어서 자연으로 돌려보내라, 그리고 노예 계급을 해방시켜라”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인류사에서 주인이 하인을 해방시킨 첫 번째 시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아무리 잘 통치한다고 해도 그것은 계급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싣다르타가 더욱더 세상에서는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없다고 느낀 계기가 돕니다. 즉 세상의 평화와 행복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 계층의 평화와 행복이지 또 다른 계층에는 큰 고통이고 속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는 불행해야 하는 그런 모순을 느낀 것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출가를 굳건히 결심하고 부모에게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는 길이 있다면 나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누구도 저에게 그 길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 길을 찾아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눈물도 싣다르타의 출가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nbspnbsp출가하는 그날 밤 새벽에 일어나서 아기가 마음에 걸려 문을 살짝 열어보니 부인이 아기를 품에 안고 자고 있었어요. 부인이 깰까 해서 그만두고 나와서 동쪽 문을 뛰어넘었다고 합니다. 왜 성을 뛰어넘었다고 말할까요? 우리 모두는 왕이 되는 것이 꿈이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왕의 지위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왕궁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는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자세여야 합니다. 그 때 출가할 때 ‘내가 깨달아서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할 수 있는 그 좋은 법을 얻기 전까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이런 대결정심을 내고 출가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이곳에서 사셨던 29년 동안의 삶입니다.nbspnbspnbsp어쩌면 이 이야기가 우리와는 더 가깝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붓다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지만 젊은 시절의 붓다는 우리와 똑같이 고뇌하고 헤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청년 싣다르타의 고뇌를 느껴보는 것은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대중과 함께 경전독송을 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다시한번 순례단에게 nbsp“오늘을 사는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지는 못하더라도 좀 검소하게 살아보자”고 하셨습니다. “적게 먹고, 옷을 검소하게 입고, 큰 집으로 자꾸 이사 가려고 하지 말고 좀 검소하게 살아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인류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을 추구하자”고 덧붙이셨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슬이 내린 새벽 카필라성에 앉아 청아한 무변심 법사님의 선창에 따라서 ‘싣다르타의 출가’ 노래를 따라 부르니 한국으로 돌아가면 헐떡거림과 욕심을 좀 내려놓고 더불어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 무변심 법사님이 부르는 ‘싣다르타의 출가’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며nbsp그리고 부처님이 유성출가를 하셨다는 동문으로 가 보았습니다. 원래는 이곳에서 ‘출가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데 이번에는 순례객이 너무 많아 그러지 못하고 잠시 둘러보기만 했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유성출가를 했다는 카필라성의 동문nbsp순례단 전체는 부처님처럼 동문을 뛰어넘지는 못하고, 북문 쪽으로 난 작은 개구멍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소년 싣다르타가 걸었을 논밭이 보이는 시골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탑터가 나타났는데 정반왕과 마야부인을 기린 탑이거나 싣다르타가 북문에서 수행자를 만난 것을 기념한 탑일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탑돌이를 하고 다시 돌아나왔습니다.nbspnbspnbsp카필라성 주위 마을은 2600여년 전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곳 사람들은 헐벗어 있었고 지나가는 순례객들을 향해 구걸의 눈빛을 간절히 보내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다음 순례지인 쿠단으로 향했습니다. 쿠단은 성도 후 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처님을 정반왕이 마중나온 곳으로 이를 기념한 탑이 있는 성지입니다. 스님께서는 성도 후 사위성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들은 정반왕이 부처님께 사신을 보내 왕궁으로 초청하였지만 사신으로 간 사람들 모두 부처님을 친견 후 깨달음을 얻어 출가해 버려서 함흥차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 주셨습니다.nbsp▲ 쿠단nbsp그리고 석가족이 모두 깨달음을 얻었는데 유독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가 정반왕이었다고 합니다. 정반왕에게 부처님은 오직 아들로만 보였기 때문에 그 집착심으로 인해 가장 가까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정반왕의 얘기를 듣고 나니 아무리 부처님과 가까워도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깨달음의 기회도 놓치게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쿠단에 세워진 탑에는 옛날 당시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문양을 직접 보고 만져보며 옛 숨결을 그대로 느껴보았습니다.nbspnbspnbsp다시 대성 석가사로 돌아와서 점심 공양을 맛있게 먹고 룸비니로 걸어갔습니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긴 수로를 따라 1km 걸어가니 드디어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도착했습니다. 어여쁜 꽃이 피어있고, 아름드리 보리수가 있는 아름다운 이곳에서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 스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순례단을 위해 발원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 룸비니nbspnbsp그리고 부처님의 전생담을 기록한 본생경과 부처님의 탄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 동산입니다. 아까 전에 갔던 카필라성과는 28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아이를 낳기 위해 아침 일찍 카필라성을 출발하여 마야 부인의 고향인 데바다하로 가다가 카필라성과 데바다하의 중간 쯤인 이곳에서 산기를 느끼고 아이를 낳았습니다.nbspnbspnbsp그러니 부처님께서는 태어날 때도 길에서, 도를 이룬 것도 길에서, 설법도 길에서, 돌아가시는 것도 길에서,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전 생애가 ‘도’와 관계가 깊습니다. nbspnbsp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즉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과거 수행 이야기가 담긴 자아카타, 한문으로는 본생담이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무려 547편이 남아 있습니다. 내용 전체를 대강 보면 부처님이 처음 발원해서 보디사트바가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보살로 살아간 이야기이고, 마지막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과거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에 선혜라는 이름의 한 동자로 태어나셨습니다. 고귀한 바라문 집안에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20대 초반에 모든 재산을 물려 받았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부모님이 지금의 재산을 모으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는데 돌아가시면서 한푼도 못가져 가는 것을 보고 진정으로 자기 것이 아닌 재산과 명예와 지위에 한평생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를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많은 재산을 왕에게 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숲속으로 가서 수행자가 됩니다.nbspnbspnbsp스승을 찾아 나섰다가 오백 바라문이 모여서 진리를 논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오백 바라문이 묻는 질문에는 선혜 동자가 다 대답을 하는데, 선혜 동자가 묻는 질문에는 오백 바라문이 아무도 대답을 못했어요. 그래서 오백 바라문 중에 한 사람이 “여기서 당신의 스승이 될 사람은 없소. 지금 이 세상에는 연등부처님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라면 당신의 스승이 될 수도 있소” 라고 말하자, 선혜 동자는 연등부처님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연등부처님 근방에는 사람들이 구름때처럼 모여서 곁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견을 못하고 교외로 나가니까 사람들이 길을 닦고 있었어요. 부처님이 이 길로 지나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혜 동자도 길을 닦기로 했습니다. 신통력이 있었기 때문에 신통력으로 길을 닦을 수도 있었는데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몸으로 길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연등부처님과 대중이 오는데 길을 다 못 닦았어요. 그래서 자기 옷을 벗어서 깔았어요. 그래도 모자라서 자기 몸을 뉘었어요. 그래도 모자라서 자기 머리를 풀어서 던졌어요. 그러면서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과 상가 대중이 저를 밟고 지나가십시오” 이렇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신심이 깊구나. 이 인연 공덕으로 다음 생에 부처를 이루리라” 하셨어요.nbspnbsp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보디사트바가 되어서 어떤 때는 원숭이로, 어떤 때는 코끼리로 태어나서 행하는 수많은 보살행이 나옵니다. 그 끝부분에 해당된다고 생각되어지는 얘기가 도솔천의 천주인 호명 보살이 된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세상 사람들이 붓다의 출현을 갈구하는데 그 붓다가 되실 예정자가 호명보살이예요. 그래서 호명보살이 저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누구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할 것인지 살펴서 마야부인을 어머니로 정반왕을 아버지로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 몸을 나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아가 여섯인 흰 코끼리가 되어 마야 부인의 태중에 드는 모습이죠. 이런 전생 이야기가 나옵니다.”nbsp이렇게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듣고, 또 마야부인의 몸에서 태어난 이야기, 태어나서 동서남북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첫 일성을 하신 이야기, 이것은 육도 윤회를 벗어나서 해탈하리란 것과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의미란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신 이유를 들으니 참으로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부처님의 탄생의 과정이 쓰여져 있는 경전을 독송한 후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아쇼카 석주와 부처님의 발자국과 부처님 탄생 설화를 새겨놓은 건물 안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조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무려 52조나 되다 보니 사진 촬영을 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스님과 함께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다며 모두들 기뻐하면서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편안하고 안온한 룸비니 동산을 뒤로하고 다음 순례지인 로히니 강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nbsp nbsp nbspnbsp로히니 강은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와 마야부인의 고향인 꼴리족의 데바다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어느해 가뭄이 심해 석가족과 부처님의 외가족인 꼴리족이 서로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싸움이 시작되어 급기야는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를 부처님께서 중재하셨던 일화가 있는 곳이여서 스님께서는 지나가는 길에 그 일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 로히니 강nbsp“로히니 강 분쟁 사건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부처님이 이를 말린 사건입니다. 석가족과 꼴리족 양쪽 종족의 논밭이 가뭄이 들어서 타들어 갔어요. 이렇게 가다가는 농사를 다 망치게 되니까 한쪽만이라도 곡식을 살리자고 해서 서로 물을 가져가려고 입씨름을 하게 된 거예요. 입씨름을 하다가 결국 주먹 싸움이 되고 주먹 싸움이 서로 돌멩이를 집어 던지는 패싸움이 된 겁니다. 농민들의 분쟁이 결국 군대가 개입하면서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살상을 막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분쟁의 현장에 오십니다.nbspnbsp양쪽 지도자를 불러놓고 물어봅니다. “물이 귀합니까? 사람의 피가 귀합니까?” 그러자 양쪽 지도자가 “어떻게 귀한 피를 하찮은 물에 비유합니까” 대답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그 하찮은 물을 위해서 그 소중한 피를 흘리려고 하지 않소” 라고 얘기합니다. 그 때 그들은 감정에 휩싸여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격화된 감정이 누그러지고 양 종족은 협력을 해서 수로를 새로 개발해 가뭄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nbspnbsp우리는 바로 그 로히니 강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경전을 읽으면서 강이 얼마나 좁으면 서로 돌멩이를 던지며 싸우나 했는데, 정말 돌멩이 갖고 싸울만한 거리죠?nbsp이렇게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두 부족은 전쟁을 멈추고 오히려 수로를 확충하는 쪽으로 힘을 모음으로 해서 더 발전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미움 있는 곳에서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워할 일 없는 곳에서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워할만한 일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미워하지 않을 때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우리 남북 간에도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nbsp그러니 우리 불자들이라면 미워할 만한 상황에서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반도에서도 미워하는 증오의 감정을 종식시키는데 우리 불자들이 좀 더 앞장선다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가져오는데 더 기여를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nbsp그리고 버스 안에서 로히니강에 관한 경전을 읽었습니다. 하루 빨리 남북 대결이 청산되어 통일이 이루어져 남북한 국민들의 고통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 버스 안에서 로히니 강에 관련된 일화가 담긴 경전 독송nbsp다음은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랑그람을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진신사리는 8등분이 되어 각 나라에 모셔졌는데 그 중 부처님의 외가 쪽인 꼴리족이 사리를 가져와 세운 이 탑은 아쇼카 왕 때도 헐리지가 않았다고 합니다.nbspnbsp아직까지 원형이 잘 보존된 귀한 진신사리탑인데, 스님께서는 “이 곳은 성지 순례객 만 명 중에 한 명이 겨우 왔다 가는 곳입니다. 이곳에 온 것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하며 이곳에 참배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인연인지 알려주시며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nbspnbsp“이곳은 라마 마을의 꼴리족이 부처님의 사리 일부를 가져가서 탑을 쌓은 곳입니다. 이곳이 더 소중한 이유는 아쇼카 왕이 사리탑을 헐어서 사리를 꺼내었는데 이곳만은 헐지를 못했다고 해요. 그것은 여기를 지키는 용왕이 ”당신이 나 보다 사리를 더 잘 지킬 수 있으면 모셔가라“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여기 주위가 빙 돌아가면서 강입니다. 호수 속에 탑을 쌓아놓은 것처럼 섬과 같이 딱 형성되어 있어요. 묘합니다. 이 탑을 헐려고 할 때 큰 뱀이 나타나지 않았겠느냐 싶어요. 인도에서는 뱀을 용왕이라고 해서 성스럽게 생각하거든요.nbspnbsp▲ 랑그람 진신사리탑nbsp그 이후에도 동네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이 탑을 도굴하려고 하는 사람이 탑에 손을 대면 동네 사람들에 얘기에 의하면 천둥이 치거나 사람이 즉사하거나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요. 그래서 여기는 손을 대면 안된다는 소문이 나서 이 탑은 도굴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발굴도 하지 못했다고 해요. 얼마 전에 발굴 했는데, 탑 자체에도 손을 안 대고 변두리만 파서 탑의 형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확인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다른 탑은 다 발굴을 해서 사리를 꺼내었는데, 여기는 아직 발굴이 안되었으니 만약 발굴이 된다면 사리 용기에 부처님 몸의 유골 중에 8분의 1이 가득히 담겨 있겠죠. 그래서 8개의 사리탑 중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랑그람 진신사리탑입니다.nbsp그런데 우리나라 성지순례객들도 여기 와서 참배를 하고 가야 하는데, 이런 사리탑이 있는지도 모르는 분이 많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여기 참배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한국 불교인들을 대표해서 왔다고 생각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불 공양을 올리겠습니다.“nbsp순례단은 진신사리탑을 빙 둘러싸고 정성스럽게 마련한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드리고, 108배 정진을 하였습니다.nbspnbspnbsp이곳은 아이들이 거칠고 위험한 지역이여서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해서 108배 정진을 하는 동안 몇 분씩 자신이 정진하던 자리 앞으로 나와 탑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특히 랑그람 사리탑 앞에서는 이번 인도 성지순례 스탭들과 법사단도 스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인도성지순례 스탭들과 함께nbsp▲ 법사단과 함께nbsp▲ 그룹별로 사진 촬영nbsp오늘 마지막 순례 일정을 마치고 대성 석가사로 돌아왔습니다. 석가사에서 준비한 맛있는 공양을 도반들과 함께 나눠 먹으며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 nbspnbsp저녁 식사 후에는 대웅전에 모여 기쁜 마음으로 저녁예불을 장엄하게 드렸습니다. 예불 후에는 바로 이어서 스님의 즉문즉설 시간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동안 성지순례를 하며 궁금한 점들이 많이 있었을텐데 스님께 직접 질문해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질문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니 곳곳에서 쉴새 없이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자상하게 대답해 주셨고, 또 성지순례를 하며 잠자리를 비롯해 여러 가지가 불편한데 처음 성지순례를 할 때의 경험담을 들려주시면서 순례단을 다시한번 격려해 주셨습닌다.nbspnbsp▲ 대성 석가사 대웅전에서 즉문즉설nbsp“한꺼번에 많이 오다 보니까 불편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조사를 해봅시다. 생각보다 고생이 심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겁을 되게 주더니 생각보다는 낫네 이런 분 손들어 보세요. 오리엔테이션 한 수준 그대로다 이런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제가 입재식 할 때 입 나온다고 얘기했죠? 그래서 성지순례도 하지만 마음 공부도 좀 하라고 했죠? 그동안 입이 좀 나오신 분 손들어 보세요. 다시 들어갔어요? 아직도 입이 나와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직도 입이 잘 안들어가는 사람은 저한테 알려주세요. 제가 가위로 잘라 드릴게요. nbspnbspnbsp사실은 남자들도 군대 다녀온 이후로 이런 생활은 처음 해보셨죠? 군대 말고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런 생활을 할 기회가 없을 거예요. 지금 저희도 대대 병력이 아마 넘을 거예요. 그러니 남자 분들은 군대에 다시 온 기분일 것이고, 여자 분들은 이런 경험이 아마 처음일 거예요. 수학 여행을 가도 이렇게는 안하잖아요. nbspnbsp여러분들이 너무 편하게 살아서 이런 생활을 한번 해봐야 되는데... 제가 룸비니에 처음 왔을 때는 네팔 절에서 잤어요. 바닥이 시멘트였는데 주지 스님이 동네에 가서 멍석을 빌려와서 그것을 깔고 그 위에 잤어요. 처음에 1차, 2차, 3차 성지순례는 굉장했습니다. 바이샬리에서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자는데 침대 한개에 두명이 올라가서 자다가 침대가 무너졌어요. 내일 가는 기원정사에서도 그 때는 스리랑카 게스트하우스 하나 정도 있었거든요. 거기서는 바깥 처마 밑에서 잔 적도 있었어요. 자고 일어나니까 침낭 밖에는 물이 흥건하더라구요. 그래도 우리는 침낭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남방 불교 사람들은 담요 한 장 덮고 그냥 자요. 따뜻한 곳에 사니까 우리보다 더 추울텐데 말이죠.nbspnbsp그래서 기준이 무엇이냐가 중요해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불편하다고 해도 저는 처음 순례왔을 때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만하면 괜찮다’, ‘그래도 옛날보다는 낫다’ 이런 생각을 하고 다니는데, 여러분들은 많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nbspnbsp첫째 숙소가 좀 불편하고, 둘째는 대중이 이렇게 많이 모여 다니는 것이 불편하고, 셋째 항상 화장실이 급하죠. 일정이 이렇게 빡빡한 이유는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일정을 다른 성지순례의 두 배인 17일이나 잡고 왔는데도 늘 시간에 쫓기는데, 사실은 다른 순례객들보다 하루에 34시간을 더 많이 써요. 대부분 아침 먹고 8시쯤 출발하는데 우리는 새벽3시에 출발 하잖아요. nbspnbspnbsp저 같은 특수한 경우는 자주 오지만 여러분들은 두 번 올 일은 아니니까 한번 온 김에 최대한 많이 보여드리려고 해요. 언제 랑그람을 다시 가볼 것이며, 설산 이름만 들었지 쳐다보기라도 한번 해봐야 할 것 아니예요? 지금 프로그램이 조금 힘들기는 해도 앞에 다녀온 사람보다는 훨씬 수월한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은 다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개선한 결과이고, 초기에는 욕심만 내어서 시행착오를 많이 했거든요. 전기밥솥 들고 오는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처음에는 가스 버너 들고 다녔거든요. 아무튼 여러분들이 힘든 것은 맞지만 그래도 상당히 개선된 것입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힘들다고 느끼신 분은 내년에 올려고 하는 사람들을 좀 말리세요. nbspnbsp아무튼 이곳에 오기가 정말 어렵기 때문에 조금 쫓기더라도 열심히 다녀야 돼요. 그래도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고생을 감수해 주시니까 밝은 얼굴로 다닐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nbsp스님의 격려를 듣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났습니다. 스님의 자상한 배려 속에서 고생은 좀 하지만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는 시간임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힘을 불어넣어 주신 스님께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오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잠자리에 듭니다.nbspnbsp내일은 새벽 2시20분에 기상해서 3시에 출발하는 일정입니다. 탄센으로 가서 해발 2천미터의 산 위에 올라 저 멀리 8천미터 높이의 히말라야 산 봉우리들과 일출 모습을 보고 내려올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다시 국경을 넘어 인도로 와서 삐쁘라와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쉬라바스티로 갑니다. 한국에 있는 도반들도 성지순례의 감동을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

2015.01.18. 27,329 읽음 댓글 23개

2015.1.15 인도성지순례 9일째 쿠시나가라

nbsp▲ 쿠시나가라 열반당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9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오시다가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그 음식을 드시고 큰 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카쿠타 강에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시고 이곳 쿠시나가라 사라나무 숲에 이르러서 그날 밤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오늘은 그 여정을 따라 어제 왔던 길을 17km 정도 다시 돌아가서 춘다의 공양터를 참배하고, 또 부처님께서 마지막 목욕을 하셨다는 카쿠타 강을 참배한 후 쿠시나가라로 다시 와서 열반당을 참배하는 일정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국경을 통과하여 네팔로 넘어갑니다.nbspnbsp새벽 5시, 성지순례단은 쿠시나가라의 곳곳에 흩어진 숙소에서 각 숙소별로 송수신기로 새벽 예불을 올리면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nbspnbsp▲ 쿠시나가라 숙소에서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정진nbsp예불을 마치자마자 각자의 짐을 버스에 싣고, 어제 쿠시나가라에 늦게 도착하여 가보지 못한 ‘춘다의 공양터’로 출발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열반 전 마지막으로 공양을 드신 곳입니다. 밖은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공기는 축축하였으나, 1월이라 많이 추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인도의 1월은 얼어죽을 정도는 아니구나 하며 버스에 올랐습니다.nbspnbsp‘춘다의 공양터’로 가는 길에 스님께서는, 이번 성지순례 참가자 중에 가을 불대생이 많은 관계로 부처님의 일생 중 열반 부분은 공부하지 못한 이가 다수 있음을 아시고, 버스 안에서 특별히nbsp자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nbsp아난다 존자가 시냇가에 가보지도 않고 물이 흐려 부처님이 드실 수 없다고 만류한 대목을 이야기 해주시면서,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부처님 말씀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법문해 주셨습니다.nbspnbsp모두들 이른 새벽 일정이 계속 되다보니 잠에 들었는지 조용하자 스님께서는 “누가 스님 법문은 시작하면 졸린다고 수면제라고 하던데, 내 법문이 얼마나 하찮으면 수면제로 써요”라고 농담을 하셔서 모두들 웃으며 덜 깬 잠을 깨고,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스님의 법문을 계속 들었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이곳 쿠시나가라로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왜 이곳으로 오셨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부처님도 돌아가실 때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겠느냐며, 카필라바스투로 돌아가기 위해 이 길로 지나가시다가 열반에 드셨다고 설명하는 분도 있는데 아무튼 이곳 쿠시나가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바야샬리의 사람들을 충분히 위로해드리고 간타키 강을 건너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아난다 존자에게 하신 법문을 옛날 이야기를 해주시듯 술술 풀어 주시며 춘다의 공양이 갖는 의미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몸이 몹시 아프셨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춘다가 올린 공양 때문에 부처님이 병이 나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가난하면 차라리 공양을 올리지 말 것이지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다 춘다 때문이라고 힐책할 것과, 춘다가 자책하고 있을 것을 염려하셔서 부처님께서 춘다에게 해준 이야기를, 스님께서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춘다가 걱정하고 있으니까 ”네가 올린 공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다“ 라고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춘다의 공양은 기독교의 유다처럼 나쁘게 비칠 수도 있었는데,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서 여래에게 올린 마지막 공양이 되어서, 춘다의 공양은 불교사에 길이 길이 칭송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춘다의 공양터까지 참배를 하러 가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위대함입니다.nbspnbsp어떤 사람은 음식에 독성이 든 줄 미리 알고 안 먹는 사람도 있고, 독성 있는 음식을 먹고도 끄떡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독성이 든 음식을 먹고 토해버리고 괜찮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그 음식을 먹고 죽으면서 그 음식을 제공한 자를 위로하고 칭찬한 자는 역사 상에서 없었습니다. 그만큼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을 위대하게 하셨습니다. 육신에 집착하지 않고 공양 올린 자의 마음을 살피시는 부처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라고 한 예수님의 사랑과 비견되는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도 공양 올린 자의 아픔을 살피셔서 위로하셨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이어서 카쿳타강에서 목욕을 하신 부처님의 행적을 이야기하시면서 “절반이 졸고 있네 안 잔다고 하더니” 하시며, 9일째로 접어들면서 마음과는 달리 지친 육신으로 피곤해하는 순례객들에게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밤에는 누워 자고 낮에는 앉아서 자고. 한국 가서 새벽 3시에 일어났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하셔서, 저희는 스님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는지 겸연쩍어 하면서도 덕분에 한참을 웃었습니다.nbspnbsp500여명의 순례객이 참여한 이번 성지순례에는 1호차부터 13호차까지 모든 이가 스님의 타신 6호차에 맞춰 수신기를 조정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서, 법륜스님은 이어폰을 타고 오신다는 유수스님의 말씀대로 한쪽 귀를 종긋 세우고 법문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감복하기도 하며 부지런히 스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nbspnbsp스님 법문을 들으며 도착한 춘다의 공양터에는 안개가 자욱하였고, 500여명의 발소리와 목탁소리에 맞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는 낯선 광경에 주변 새들과 벌레들, 동네 개들이 일제히 잠을 깨었는지 유난히 크게 울어대는 것 같았습니다.nbspnbsp▲ 춘다의 공양터에 세워진 탑nbsp예불이 끝나자 스님께서는 대중을 향해 뒤로 돌아앉으셔서, 안개가 자욱한 춘다의 공양터에서 새벽 예불을 잘 마쳤다고 말씀하시면서 춘다의 공양과 관련한 경전 독송을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nbspnbsp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그 당시를 떠올리며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nbspnbspnbsp명상까지 마치고 이를 지켜보던 힌두의 바라문에게도 보시와 공양물로 올렸던 사탕을 선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침부터 찾아온 순례객들의 방문에 처음에는 상당히 까칠하게 굴던 힌두의 바라문도, 스님의 마음 쓰심에 기분이 누그러졌는지 다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 파바마을 아이들이 무척 사납고 거친데, 우리가 사탕을 나눠주면 통제가 안 되어서 이곳 힌두 바라문에게 사탕을 공평하게 나눠주라고 부탁했어요” 라며, 아이들에게 사탕을 최대한 공평하게 나눠주려고 세심히 살피셨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신 카쿳타강이었습니다. 강물이 공기보다 따뜻한지 물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강가로 내려가 손을 씻으시며 순례객들에게 “아픈 사람이 이 강물을 마시면 낫는다”고 하시자 어떤 거사님께서 한 움큼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시고 “강물 마시고 설사해서 열반당 가서 열반하세요. 부처님도 강물 드시고 나서 열반하셨어요” 하시면서 “복잡한 세상 오래 살아서 뭐하노, 이런데서 죽으면 바로 그슬러서 강물에 뿌려주고 좋지”하고 농담을 하시면서 순례객들을 즐겁게 해주셨습니다. 또 스님께서도 “나도 요즘 몸이 아파서 이 물을 좀 먹어야 겠어요” 하면서 물을 한모금 축이셨습니다.nbspnbsp▲ 카쿳타 강nbsp카쿳타 강에 손을 담가보니 물이 그리 차지 않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신 부처님을 생각하며 강을 향해 반야심경을 함께 외우고 돌아서서 가려는데 스님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그렇게 느리게 힘없이 하면 안 돼요.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란 뜻인데, 저 언덕으로 가기 싫다는 거예요?” 스님 말씀에 새롭게 안 이들과 다시 한번 깨우친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뜻을 모르니 어떻게 잘 하겠느냐” 라고 하셔서 모두들 스님 말씀에 웃고 말았습니다.nbspnbsp▲ 카쿳타 강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독송을 해보았습니다.nbspnbsp스님 건강을 걱정하는 순례객들과는 달리, 스님께서 지친 순례객들을 웃음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강행군의 피로를 덜어주시니 한결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nbspnbsp동그란 아침해가 오히려 둥근 보름달처럼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500여명은 열반당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탔습니다. 10시를 조금 지나 열반당에 도착한 순례객은 예불 준비 후 자리에 앉아, 스님께서 해주시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들으며 부처님의 전 생애에 대해 반추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열반당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쿠시나가라 열반당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600 여년전 저 히말라야 산기슭 카필라바스투의 룸비니에서 태어나셔서, 카필라성에서 29년의 생활을 하시다가 29살에 출가하셔서 쿠시나가라를 지나서 바이샬리를 지나서 왕사성 라자그라하에서, 두 분의 스승 아라라카라마와 웃타카 라마 푸트라를 모시고 수행정진을 하셨습니다.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의 경지가 아님을 아시고, 스승의 곁을 떠나 다섯 도반들과 함께 가야 근교의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간 용맹 정진을 하셨습니다. 6년 간의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수행생활을 되돌아보니 세속에 있을 때는 욕망을 따라 쾌락을 쫓았고, 출가해서는 욕망을 억압하는 고행을 행했습니다. 둘은 정반대이지만 사실은 욕구에 따른 작용 반작용일 뿐임을 아시고, 그 둘을 버리고 욕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중도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정각산을 내려와서 니련선하에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목동이 준 길상초를 깔고 앉으셔서 대결정심을 일으켜서 마지막 정진에 들어가셨습니다.nbspnbspnbsp49일 간의 용맹정진 끝에 12월8일 마침내 동녘 샛별이 뜨는 것을 보는 순간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49일 동안 깨달음의 법열을 만끽하시다가 이 좋은 법을 나눠가질 사람을 생각했는데, 이미 두 스승은 돌아가셨고 자신의 다섯 도반을 생각하면서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트로 가셔서 처음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다섯 비구가 제자가 되고 야사 등 55인을 교화하시고 nbsp60인을 앞에 두고 전법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루벨라촌으로 돌아오셔서 가섭 삼형제 일천인을 교화하셔서 가야산에서 탐진치 삼독의 불을 끄라는 설법을 하시고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왕사성에 이르렀습니다.nbspnbsp왕사성 밖 제띠안에서 빔비사라왕을 만나 교화하고 빔비사라왕의 기증으로 최초의 절 죽림정사를 창건하셨습니다. 그곳에 계실 때 산자야의 제자였던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가 부처님께 귀의를 했고, 마하가섭 존자도 부처님께 귀의를 했습니다. 성도 3년 째 수닷타장자의 초청으로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으로 가셔서 기원정사를 창건하시고 그곳에서 많은 교화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 후 6년째 되는 해에 정반왕의 초청을 받아 카필라성으로 가셔서 자신의 친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민중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교화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45년을 행한 후에 세속 나이로 팔십, 성도 후 45년째 되는 해에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영축산에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곱가지 법을 설하시고, 죽림정사에서 상가가 멸하지 않는 일곱가지 법을 설하시고, 암라파티카 동산에서 계정혜 삼학을 설하시고, 나란다에서 머무시고 파탈리푸트라에서 미래에 이곳은 큰 도시가 될 것이니 그 때 세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물의 재앙, 불의 재앙 , 사람의 재앙을 들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강가강을 건너서 바이샬리로 오셨고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으시고 암나팔리의 망고원을 기증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에서 안거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안거를 했던 마을이 밸루바나라고 하는 죽림촌이었습니다. 그해 흉년이 심해서 걸식을 할 수가 없어서 대중 오백명을 다 흩어서 한 마을에 한명씩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과 아난존자는 밸루바나에 머무셨습니다. 얼마나 그해 가뭄이 심했냐면 부처님이 걸식을 가셨는데 말먹이 밀기울을 받아서 드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 안거 기간동안 부처님은 많이 편찮으셔서 거의 돌아가실 정도였는데, 안거 기간이라 흩어져 있는 대중의 불편을 생각하셔서 유수행이라고 수명을 연장하는 수행을 하셔서 그 위기를 극복하셨습니다.nbspnbsp안거가 끝나자 부처님은 바이샬리의 중각 강당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해서 앞으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리라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를 법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바이샬리를 떠나셔서 간타키 강을 건너 파바 마을에 이르러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큰 병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나 카쿳타 강가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시고 춘다를 위로하는 좋은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마치 낡은 수레가 삐그덕 삐그덕 겨우 굴러가듯이 부처님의 육신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부처님은 사자처럼 당당하게 대중의 앞에 서서 쿠시나가라로 오셨습니다. 이곳 사라나무 숲에 이르셔서 가사를 접어서 바닥에 깔고 그곳에 누우셨습니다.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머리는 북쪽으로 발은 남쪽으로 해서 서쪽을 향해서 누우셨습니다. 이것이 열반상입니다.nbspnbsp그 때 아난다는 너무 슬퍼하면서 물었습니다. “왜 외로운 이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저 왕사성이라든지 사위성이라든지 코삼비라든지 바라나시라든지 바이샬리라든지 부처님의 제자도 많고 재가신자도 많은 그런 곳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렇게 외로운 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그런 걱정을 하지 마라. 비록 이곳이 지금은 외로운 곳이지만 미래에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하셨어요. 아난다가 다시 “그렇다면 왕족들이 있는 성 안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 숲속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하니 “숲속에서 열반에 들어야 누구든지 여래를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다 친견할 수 있다” 하셨어요. 만약에 궁중에서 열반에 드신다면 왕족이라든지 바라문만 친견할 수 있죠. 천민들은 들어올 수가 없잖아요. 아무런 울타리가 없는 이곳 숲속에서 열반에 드심으로 해서 누구든지 신분에 고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짐승들이라 하더라도 여래를 친견할 수 있게 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아난다는 위대한 스승 붓다께서 열반에 든다고 하니 많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할 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하는 유명한 마지막 유언을 하셨습니다.nbspnbsp그 때 아난다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를 생각하니까 여러 걱정이 되었어요.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사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하니 부처님께서 “여래가 열반에 든 뒤에는 4성지를 생각하라” 하셨어요. 여기가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인데 태어나실 때의 정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곳인데 깨달음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곳인데 설법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인데 열반의 모습은 이러하다, 이것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순례를 하는 것도 이 유훈에 따른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nbspnbsp비록 흔적이 없고 부서진 벽돌과 소똥만 널려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순례하는 이곳들은 성스러운 곳입니다. 성스러움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니까요.nbspnbsp그리고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에 의심이 있거든 나에게 물어라.” 하고 세 번씩이나 물었지만 아무도 질문이 없었어요. 그러자 아난 존자는 “여래의 법은 잘 설해져 있고 우리들은 이미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안온하게 열반에 드소서” 라고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나는 51년 전에 저 카필라성을 떠나서 하루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했다. 그러니 너희들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부처님의 맨 마지막 말씀입니다.nbspnbsp그런데 여러분들은 욕심이 많아서 수행도 바짝 해서 그게 안되면 나는 수행과 인연이 없나 보다 하면서 내팽겨쳐버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다생겁래로 지은 업인데 그것을 어떻게 한순간에 없애려고 해요? 그래서 정진은 한발 한발 걸어가듯이 꾸준하게 해나가야 합니다.nbspnbsp자, 그러면 지금부터 열반당에 들어가는데 오백명이 저 안에 한번 다 들어가보는 거예요. 아마 역사 기록일 거예요. 꽉 찬 상태에서 저 열반당 안에서 예불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발원문을 함께 읽고 축원하고 마치겠습니다.”nbspnbsp500 대중은 열반당 안에 빼곡히 들어가 예불공양과 ‘석가모니불’ 정근을 올렸고 열반당의 높은 돔천장 안은 목탁소리와 정근소리로 가득 차 울려퍼져 마치 부처님의 열반하신 날처럼 장엄하게 느껴졌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눈물을 훌쩍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nbspnbspnbspnbsp예불 공양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거룩하신 부처님께 한국에서 온 500여명이 두손 모아 합장하며 기도하옵니다” 하며 45년간을 쉼 없이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해오신 부처님의 행적을 상기시켜주시고, 이제 평온히 쉬시고 우리가 부처님 뜻을 이어받아 남은 일을 하겠다는 발원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거룩하신 부처님 저희들 한국에서 온 불자 대중 500여명은 이렇게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 서서 두손 모아 합장하오며 발원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 히말라야 산 기슭 카필라성의 룸비니에서 태어나셔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뭇 중생의 고통을 보시고 그 아픔을 함께 하시고 그 고통을 구제하시고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셨습니다.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 간 고행하신 끝에 니련선하 강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르나트에서 처음 설법을 한 이래 45년 동안 하루도 쉼 없이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곳에 부처님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nbspnbsp어리석은 자는 깨우치고 가난한 자는 돌보고 고통받는 자는 위로하셨습니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마치 낡은 수레를 삐그덕 삐그덕 몰고 가듯이 그 육신을 이끌고 이곳 쿠시나가라에 이르러서 마침내 열반에 드셨습니다.nbspnbsp부처님이시여 이제 안온히 쉬소서. 이제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고통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가진 우리들이, 작은 부처가 되어 고통 받는 중생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여래의 사도로써 전법의 역사를 쓰겠습니다.nbspnbsp다시는 부처님께 무엇을 해달라 도와달라 빌지 않고, 부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일들을 우리가 대신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시여 이곳에 안온히 머무소서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nbspnbsp이렇게 오늘 간절히 발원을 하오니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께서는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nbsp500여명이 가득 들어섰던 열반당 안에서의 예불을 마치고, 스님의 지도하에 실타래를 풀 듯 안쪽부터 부처님을 뵙고 돌아나와서, 열반당을 배경으로nbsp조별로nbsp스님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순례객은 11시45분경에 라마바르총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쿠시나가라 왕족의 대관식을 하던 장소로 바쿠다 반다나 영지인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세상 풍속대로 장례를 치르라는 말씀대로, 왕족이신 부처님의 신분에 맞게 이루어 진 것이라 하시면서, 당시의 상황을 nbsp자세히 법문해 주셨습니다.nbspnbsp▲ 라마바르총nbsp“이곳은 원래 왕위를 계승할 때 대관식을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사라나무 숲 속에서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이 최후로 물을 드셨다는 히란나바티 강가에서 다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왕위를 계승하는 대관식을 하는 성스러운 이곳에서 다비식을 준비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오백 대중을 이끌고 부처님의 뒤를 따라 왔는데 결국 부처님을 뵙지 못하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열반하시고 일주일 뒤에 마하가섭 존자가 도착했어요.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도 오백 대중이 있었어요. 여러분들이 오늘 열반당에 들어가서 그 때의 오백 대중처럼 똑같이 부처님의 열반상을 보고 눈물도 짓고 그러셨는데, 그 당시의 대중들도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 주위에 둘러서서 우는 사람도 있고 그랬다고 해요. 그랬을 때 천안제일 아니룻다 존자가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시다 하면서 사념처관을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대중이 모두 몸이라는 것은 부정하고, 느낌이라는 것은 고일 뿐이고, 마음이라는 것은 무상하고, 법은 무아다 하는 것을 관하게 되니까 마음이 전부 고요해졌습니다. nbsp그래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지만 대중들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부처님의 유골은 티끌이 없이 깨끗이 타서 아주 깔끔했어요. 그것을 다 수습을 했는데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 왕도 부처님의 유골을 자기 나라에 모셔서 기념탑을 쌓겠다고 하고, 바이샬리의 리차비족도 그러고,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도 그러고, 다 와서 각자 자기 나라에 모시겠다고 해서 전쟁까지 일어날만큼 험악했다고 해요. 그래서 도나 바라문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아무리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지만 부처님의 사리를 서로 가져가려고 전쟁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하면서 여덟 나라에게 여덟 몫으로 공평히 나눠주었다고 해요. 그리고 도나 바라문은 사리를 담았던 그 용기를 가지고 기념탑을 쌓았고, 한 종족은 늦게 와서 부처님을 화장한 재를 가져가서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덟 개의 진신사리탑과 한 개의 항아리탑, 한 개의 재탑이 있었습니다.nbspnbsp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한 삶은 여기서 마감이 됩니다. 부처님을 여기서 화장을 하고, 그 자리에 이를 기념해서 후대에 크게 기념탑을 쌓았어요. 이것을 ‘라마바르총’ 이라고 해요. 자, 이 내용을 경전으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nbsp경전을 독송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다시 구체적으로 만나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경전독송과 명상까지 마치고 조별로 흩어져서 아침 겸 점심 식사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는 가운데 성지에서 먹는 밥맛이 정말 꿀맛입니다.nbspnbspnbsp오후에는 네팔국경을 넘어, 붓다 이전에 한 젊은이로서의 삶을 만나보기 위하여 룸비니로 향했습니다. 네팔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소감 나누기와 자기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누기와 소감을 듣다 보니 다들 한분 한분 모두 참 소중한 인연으로 오신 분이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500여명이 함께 움직여야 하고 시간에 쫓길 때도 많아서 한분 한분의 소중함을 잘 몰랐구나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nbsp순례단은 오후 6시경에야 국경에 도착하였고, 출입국심사를 위해 네팔국경에서 3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으나 해가 진 후라 주변이 어두워져 둘러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nbspnbsp▲ 네팔 국경nbsp스님은 네팔에 오면 꼭 들린다는 식당에서 로티와 달로 요기를 하셨고, 순례객들도 환전을 하거나 식당이나 가판대에서 각종 네팔 음식들을 맛보고 과일이나 야채,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 네팔에 있는 한국절인 대성 석가사에 9시경에 도착해 절에서 준비해준 음식으로 늦은 공양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깍두기와 나물반찬을 맛있게 먹고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며 조별 나누기를 한 뒤 취침에 들었습니다.nbspnbsp오늘은 부처님의 마지막 가신 길을 함께 했는데요. 내일은 부처님 탄생 이야기를 따라 카필라성과 룸비니로 가는 날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공간도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오니 저녁 기온이 한층 쌀쌀해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

2015.01.17. 27,544 읽음 댓글 26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