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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1 통일학교 제 3강
nbsp nbsp 스님께서는 오늘도 새벽예불과 기도 발우공양을 함께 하시고는 대중공사를 통해 환경적인 검소한 생활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nbspnbsp “우리가 검소하게 살면서 환경운동을 한다고 하는데 화장실에 사람이 없는 데도 불이 켜져 있고, 사무실 곳곳에 사람이 없는 곳에 전등을 켜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환경실천이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속에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에코붓다에서 점검을 안해서 그런가요? 실천이 불편하다고 느낄 것이 아니라 실천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대중들에게는 환경실천 교육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안 살고 있다면 우리의 삶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성화되어 버립니다. 실천을 몸에 배게 해서 생활화 하면 좋겠습니다.nbsp그리고 낮에는 창문을 열어서 자연채광을 최대한 이용해서 전기를 아껴 쓰도록 해야합니다.”라며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근검절약하는 것이 몸에 배도록 하며 대중들에게 환경운동을 이야기 하려면 우선 내가 몸에 배어야 함을 다시한번 알려주셨습니다. nbsp 그리고, 또 대중공사에서 참회를 할 때 몇가지 고쳐야 할 것들도 지적해 주셨습니다. “참회를 할 때, ‘예불 참석시 1분 늦었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밖에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대중살이가 참 팍팍해 보인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1분 늦었다, 몇 분 늦었다’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변명조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nbspnbsp12시간 늦었다는 것은 많이 늦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지만, ‘조금 졸았다. 12분 늦었다.’는 것은 조금 늦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라고 하시며 참회가 자기변명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의 발로참회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살펴보기를 당부하셨습니다. nbsp 그 외에도 건강을 위해 두북이나 문경으로 가서 몸과 마음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해보자고도 제안해 주셨습니다. nbsp 대중공사 이후에 스님께서는 오늘 통일학교 제3강을 위해 집무실에서 강의준비를 하셨습니다. nbsp nbsp 오늘은 통일의병학교 세 번째 강의가 있는 날입니다. 오늘도 역시나 강의 5분 전에 좌석이 이미 꽉 찼습니다.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앉아있었습니다.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모든 행사는 언제나 어김없이 정시에 시작합니다. 참석자들이 아직 덜 와서, 준비가 덜 돼서 같은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걸 익히 아는 참석자들인지라 일찌감치 와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다리는 모습이 선생님을 기다리는 어린 학생들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nbsp 스님께서는 어제 역사 강의할 때 지도를 놓고 영역을 표시하면서 했으면 효과가 높았겠다는 말씀으로 가볍게 서두를 꺼내셨습니다. 어제 강의는 상고사에 대해서였는데, “상고사가 찬란한 영광의 역사였다면 오늘은 고난의 역사를 이야기할 차례”라고 하시며,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시대의 흐름을 환기시키기 위해 어제 강의를 약간 상세하게 요약해주셨습니다.nbspnbsp nbsp nbsp “우리 민족은 일찍이 눈부신 청동기 문명을 이루고 한나라, 배달나라, 고조선으로 발전해 옵니다. 그러다 고조선 문명은 2500년 전 즈음에 발전 속도가 중원에 뒤지게 됩니다. 청동기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다 보니 그에 안주하여 철기문명의 발달이 늦어진 것입니다. nbsp 청동문명은 주로 제기와 무기로 사용되는 데 반해 철기문명은 우선 무기가 뛰어난데다 생활도구로 만들어지니 농업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합니다. 중원에서는 철기문명의 발달로 양자강 이남이 개척됩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전부 건조지대, 초원지대입니다. 석기로는 나무를 벨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철기문명이 발달하면서 온대산림지대인 양자강 이남이 개척되어 중원지역에서는 물질적 토대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됐습니다. 또 무기가 발달하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나라들이 부국강병책을 추구하면서 경제가 성장하고 제자백가라고 부르는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nbsp BC 3세기에 들어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하지만 곧 망하고, 한나라가 다시 통일하면서 고조선을 침입합니다. 이 때는 이미 생산량이나 인구나 무기나 중원 쪽이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고조선은 번조선, 막조선, 진조선 세 부분으로 분할된 시점이라 한군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가장 서쪽에 있던 번조선의 후예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됩니다. 이런 시대적 변환기에 해모수가 일어나 단군직을 계승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부여라고 하게 됩니다.nbspnbsp nbsp nbsp 부여 역시 한나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면서 곳곳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 침략군에 대응하는데 기존의 부여 왕이 투쟁에 미온적이라 동쪽으로 보내니 ?겨나니 동부여, 부여의 본진을 차지한 것이 북부여, 그 북부여를 계승한 것이 바로 고구려의 고주몽입니다. 고구려의 후예들은 주몽을 나라의 시작으로 삼기 때문에, 주몽이 왕위에 오른 BC 37년을 시작으로 보지만, 중국 쪽 기록에는 부여까지 고구려로 봅니다. 부여시대는 부여 외에도 여러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열국시대라고도 하는데 맹주역할은 부여가 합니다. 나중에는 고구려가 맹주 역할을 했지요. nbsp 부여의 후손은 고구려, 백제, 동부여 세 갈래로 나뉘는데, 서로 자기가 적통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백제의 경우, 소서노의 두 아들이 부여의 적통은 맞는데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면서 주몽의 아들이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에 소서노의 두 아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합니다. 본토에서 남하하기는 했지만, 백제 역시 자기들이 부여의 적통을 계승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 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의 5국 시대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 발해의 이국시대로 이어집니다.nbspnbsp nbsp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북쪽으로 흑룡강까지 올라가 영토를 넓힙니다. 영토가 늘면서 고구려인이 소수가 되고, 다수는 말갈족이 되지요. 왕족이나 중요한 간부들은 고구려인이지만, 중하급 관리들은 대부분 말갈족이었어요. 발해가 고구려 말갈연합정부라는 주장이 있는데 청나라가 한족비율이 많고 한족 관리를 많이 등용했어도 연합정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입니다.” nbsp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도 이처럼 자세하고 생생한 강의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나게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머릿속에 역사의 흐름이 잘 정리됩니다. nbsp nbsp “발해가 신라에게 망했다면 그 영토가 신라 땅이 되었겠지만, 요나라에게 멸망하면서 요나라 땅이 됩니다. 고려가 의식적으로나 역사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지만, 사람과 영토는 신라를 계승한 셈이었습니다. 여기에 고려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라와 발해를 건너뛰어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게 된 겁니다. 고려는 정신적으로 굉장한 역사의식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갖고 있지 못했어요. 북벌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북쪽의 요나라와 금나라에 막히면서 점점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옛 땅을 되찾자는 북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한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고려에 이런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기록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배달시대의 기록을 남겨놓은 게 고조선이고 환웅시대와 단군시대의 역사기록을 남겨놓은 게 고구려이고 발해 때 일부가 복원됐지만 망하면서 불타버렸는데. 고려가 역사의식이 있었으므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같은 데 옛 기록이 일부 남아 있는 것입니다. nbsp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중국에서 주자학이 들어옵니다. 주자학을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한 신진사대부들은 중하급 관리 밖에 될 수 없고 상층관리는 세습이었어요. 신진사대부들이 국가를 개혁하려고 해도 기득권 세력 때문에 안 되니까, 무장인 이성계를 내세워 새 나라를 세우고 친명정책을 취합니다. 고려가 동북지방이 우리 땅이라 생각했지만 힘에 밀려 못했다면 조선은 그런 의식이 전혀 없었어요. 조선은 자발적으로 사대를 취했죠. 우리 역사가 중국에 앞섰다든지 문명이 앞섰다든지 하는 기록은 읽는 것만으로도 불온하게 여겨서 금서로 폐기해 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조선은 역사의식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도 불온하다고 반대 주장이 일어나고, 우리글을 언문이라고 무시하고, 달력도 중국 것을 기준으로 하고, 심지어 청이 들어선 후에도 명나라 연호를 계속 사용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nbsp nbsp 스님께서는 이 시점에서 ‘역사를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시며 주의를 다시 한 번 환기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역사를 평가할 때, 하나는 사람을 기준으로, 또 하나는 나라를 기준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나라는 자주적인데 백성이 괴로운 경우가 있고, 백성은 먹고살 만한데 나라가 자주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nbsp “고구려는 자주적이었으나 당나라와 오랜 전투 속에서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도망가는 사람이 생기고 그것을 막으려다 보니 독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망하고도 백성들이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니 부흥운동이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지금 북한을 보면 그 전철을 밟는 것 같아요. 남한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주적인데, 백성들의 삶이 완전히 피폐해지고, 이탈자가 생기니까 독재를 더 심하게 합니다. 반면 신라는 삶이 윤택하고 문명의 수준도 높았습니다. 고려도 문명이 굉장히 발달했지요. 조선도 초기에 명나라와 관계를 잘 맺으면서 세종대왕 때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한글이 창제되는 등 백성의 삶이 굉장히 좋아졌지만 역사의식이나 민족의식이 별로 없어서 나중에 화근이 됐습니다. nbsp nbsp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 국토가 완전히 유린되고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지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와서 도와줬는데 사대부들은 그것 때문에 더욱 명나라에 충성하는 길로 갑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완전히 속국이 됩니다. 왜란, 호란 두 전쟁을 겪으면서 국가는 완전히 피폐해집니다. 이것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 영조와 정조였죠. 그러나 역부족인 상황에서 정조가 죽고 어린 아들 순조가 등극하면서 외척이 등장합니다. 정조가 죽은 후 100년 동안 나라는 쇠락에 쇠락을 거듭합니다. 당시 서구열강이 몰려올 때인데 나라를 혁신하지 못하고 결국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죠. nbsp 그럼 그 시대의 변화가 어땠냐. 1800년에 11살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이 너무 어리니까 처음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 나중에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외척이 세도정치를 합니다. 그nbspnbsp대표적인 게 매관매직이죠. 돈 주고 관직을 샀으니까 본전 이상 뽑으려고 하지 않겠어요. 삼정의 문란이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순조가 죽고 헌종이 역시 8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가 또 일찍 죽습니다. 직계가 없다보니 저 멀리 강화도 시골까지 찾아가서 왕의 7촌뻘을 모셔다 왕으로 즉위시키는데 바로 철종입니다. 국가는 쇠락의 길을 걷고 맙니다.” nbsp 나라가 망해가는 얘기를 듣다보니 참가자들 가운데 개탄의 소리가 간간히 들려옵니다. 우리가 현재 분단의 고통을 겪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구한말 나라를 지키지 못했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한층 더 안타깝고, 사무치는 바가 있습니다. nbsp nbsp “이렇게 되면서 결국 민중의 불만이 표출되는데 제일 먼저 터진 게 ‘홍경래의 난’이라고 불리는 서북민중봉기입니다. 또 진주민란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국이 봉기한 삼도민중봉기도 있었죠. 이런 국내 혼란 속에서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학, 즉 천주교가 몰락양반과 양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졌는데 아무리 탄압해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거기에 의지하는 것을 보고, 최제우 선생이 서학에 맞서는 동학을 세웁니다. 그러나 혹세무민한다 하여 최제우 선생은 1864년 대구에서 참형을 당합니다. 최제우 선생이 전라도 남원에 피신해 있을 때 용성스님이 출가하신 덕밀암에 8개월간 숨어 사셨어요. 해월선사 보호하에. 천도교에서는 덕밀암이 교주가 피신해있던 성지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최제우, 최시형의 제자인 손병희와 해월의 제자인 용성스님이 손잡고 3.1운동을 전개하는 인연이 됩니다.” nbsp 이렇게 역사의 사담을 곳곳에 풀어내 주시니 스님의 역사 강의는 그래서 더 재미있고 생동감있게 들립니다.nbspnbsp nbsp nbsp “아편전쟁 이후 유럽이 중국에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조선에까지 눈을 돌립니다. 외세가 점점 다가오는데 국내에서는 알지도 못하고 아무도 대응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외부적으로 개방의 요구가 강해지는 때에 내부적으로는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이 세력을 잡고 개혁을 펼칩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망가진 법도와 체계를 바로잡는 개혁이었으나 외부에 대해서는 개방을 해야 할 시기에 쇄국정책을 취했어요. 대원군은 원래 개혁적인 사람이었는데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판단을 잘못하면서 결국 반개혁 세력으로 평가받게 되죠. 이런 가운데 신문물이 들어오고 개화파가 등장합니다. 젊은 개화파들이 개혁하겠다는 뜻으로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 정변을 일으킨 게 갑신정변입니다. 그러나 3일 만에 청나라 군대에 제압당하고 개화파는 일본으로 도망가 나중에는 친일파가 됩니다. 이 사람들은 개혁파였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어요.” nbsp 대원군이나 개화파나 모두 처음 뜻은 좋았는데 시대를 잘못 읽으면서 역사의 평가가 뒤바뀌었습니다. 이래서 역사의식이 중요하고 역사를 바로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불가능해지자 아래로부터 개혁이 시도됐는데, 바로 동학혁명입니다. nbsp “동학혁명은 삼도민중봉기와는 달라요. 전국 조직이 있었고 개혁적인 이념과 지향점이 있었고,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전국적인 파급력이 있었어요. 전주감영을 접수할 정도로 실행력과 힘도 있었죠. 그러나 임금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니 조직원의 대부분이었던 농민군들이 자진해산합니다. 해체 후 정부가 지도자를 잡아들이니 2차 봉기가 일어나죠. 그래서 정부가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청나라 군이 들어오니 일본군도 자동으로 따라 들어옵니다. 정부가 외세를 끌어들여서 국민을 제압했으니 이런 상항에서 국민이 정부를 불신할 수밖에 없죠.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가 2천만이 안됐는데 그때 20만이 죽었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민중이 죽임을 당한 거죠.nbsp nbsp 이러면서 청의 군대가 일본 군대와 맞붙은 게 청일전쟁입니다. 여기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갑니다. 더불어 전쟁 보상으로 대만도 일본에 할애됩니다. 대만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가 우리보다 더 길어요. nbsp nbsp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 후 이에 분노한 민중이 봉기하여 을미의병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제1차 항일의병입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러시아가 사할린 섬을 일본에 내주게 됩니다. 2차 대전 후 사할린뿐 아니라 일본의 북방 4개 섬까지 소련이 가져가긴 하지만, 지금 동북아의 영토분쟁은 모두 일본의 침략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할린, 댜오위다오, 독도 모두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라 역사문제입니다. 일본이 식민 지배를 진지하게 사과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 가운데는 해양세력으로 미국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기로 미국과 일본이 서로 용인한 게 가쓰라테프트 조약입니다. 협약설립 후 일본은 거칠 것이 없어집니다. 통감부를 설치하고, 을사늑약과 함께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경찰권을 빼앗고 군대를 해산합니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니 이것이 제 2차 의병인 정미의병이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자 일본은 국내 모든 의병운동의 씨를 말리겠다며 철저히 탄압하는데, 이러면서 대다수가 국외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발전해갑니다.” nbsp 스님께서는 당시 백성의 도탄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며, 당시 너무 오래 굶주린 할머니가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가 노는 것을 보고 펄펄 끓는 물에 잡아먹었는데 나중에 보니 손자였다는, 너무 끔찍해서 믿기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북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나무껍질로 간신히 연명하던 어린아이가 변비에 걸려 항문을 수저로 파냈다는 얘기, 사람 잡아먹은 얘기 등을 숱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불가촉천민을 도우려고 저 머나먼 인도까지 날아가는데, 북한 실상을 보시곤, ‘내 민족이 굶고 있는데 멀리 와서 이러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엄청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스님께서 북한동포 돕기를 시작한 이유였습니다.nbspnbsp nbsp nbsp nbsp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자 의병출신들은 대부분 만주로 건너갑니다. 삼도민중봉기 시기에 이미 국내에서 많은 농민들이 간도와 연해주로 넘어가 빈 땅, 주인 없는 땅을 일구며 살고 있었어요. 독립운동을 하러 넘어가는 사람들 중엔 국내의 땅과 집을 팔아 이주하여 그쪽에 학교도 세우고 군대도 양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nbsp 국제적으로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가 대두됩니다. 그러니 국내에서도 독립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3.1운동이 일어나 들불처럼 번져가고, 전 세계에 나가있던 독립운동가들도 곧 독립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상해에 모여들어 상해임시정부를 세우지요.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라는 게 패망국인 독일의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었지, 승전한 연합군의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일본은 당시 연합군 세력으로 승전국이 되어 중국 내 독일이 차지했던 이권을 가져갑니다. 그러니 한반도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독립이 진척되지 않자 실망한 사람들이 다시 북간도와 만주로 넘어가 일본과는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무장투쟁에 들어가죠. 1920년도 6월의 봉오동 전투나 10월의 청산리전투는 조선 게릴라 군이 일본의 정규군과 싸워 이긴 사건으로 우리 민중에게 크나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nbsp 그러나 결국 비폭력투쟁도 무장투쟁도 실패하면서 이때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소비에트가 건설된 후이므로 젊은 독립군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많이 받아들입니다. 당시 국제사회주의의 흐름은 민족해방세력과 공산주의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일어나고 조선에서도 조선판 국공합작인 신간회가 1927년에 조직되어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협력하게 됩니다. nbsp nbsp nbsp 당시 코민테른의 정책은 1국 1당주의였습니다. 중국 내에서 공산당을 또 하나 만들 수 없으므로, 동북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군들은 중국 공산당 산하 동북연군에 소속돼서 활동합니다. 당시 동북연군의 주요 구성원이 조선인이었어요. 또, 소련 영역내에는 소련 공산당 소속의 독립군들도 있었습니다. 국내에도 박헌영을 필두로 하는 조선 공산당이 있었고, 사회주의 계열이지만 그보다 조금 온건한 여운형, 그리고 민족주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중국에는 장개석의 지지를 받는 광복군이 있었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nbsp 카이로에서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게 카이로 회담인데 참석국이 미국, 영국, 중국이었어요.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이 만났는데 장개석 밑에 김구 선생이 있었으므로 장개석의 강력한 주장으로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을 독립시킬 것을 약속한 거죠. 그러나 나중에 독립 약속을 번복하고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고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분단시켜 소련군정, 미군정이 실시됐어요. nbsp nbsp nbsp 초기 북한 정부에는 소련이 지지하는 김일성파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연안파, 소련유학파, 조선공산당, 조만식 같은 민족주의 세력이 혼재돼 있었어요. 북쪽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친일청산이 빨리 이뤄졌습니다. 남측은 민족주의 계열의 상해임정파와 미국의 후원을 받은 이승만이 있었는데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정적인 필요에 따라 식민시대의 관료를 다시 등용해서 민중들의 반발이 대단히 심했습니다. nbsp 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은 누구도 사회주의 요소를 드러내기 어렵게 되고, 저쪽은 자유주의 요소를 드러내기 어렵게 되었죠. 분단이 길어지고 전쟁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서로를 적대하다보니 더욱 사상적으로 편협해지고 분단이 점점 길어지게 된 겁니다.” nbsp 스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9천년 역사의 광대하고 활달한 정신도 가지고 있지만, 1천 년 동안 강대국의 속국으로 지내온 비굴함과 지난 2백년의 피해의식이 뒤엉켜 있습니다. 이것이 개인과 사회에 스며있어요. 이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안의 부정적인 요소를 보고 자학하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과 국가, 문화를 유지해온 것도 대단한 겁니다. 그게 6천년의 뿌리가 있기에 나온 거예요. 2002년 월드컵의 폭발력이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에요. 일제 식민지배 이후 100년의 한, 민중의 고통 측면에서 200년의 한, 민족 전체로 보면 1천년의 한을 풀 수 있는 게 바로 통일입니다.” nbsp 스님께서는 통일이 되면 다 해원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이기고 지거나, 네 편 내 편을 떠나 다 원한을 풀어주고 대통합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일본과도 손잡고 중국과도 손잡는데, 북한과 손잡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북한과 손 잡을 수 있다면 남한 안에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왜 함께 하지 못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통일을 해서 과거를 청산해야 우리 무의식 속에 있는 한도 풀리고 자존감도 생기고 희망도 생긴다는 스님 말씀이 오늘따라 가슴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통일을 통해 어떤 희망을 만들 것인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밟아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며 다음 강의를 약속하시곤 3강을 마치셨습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강의 후 JTS 해외활동가 보고회장에 잠시 들렀습니다. 라오스 JTS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배혜정, 박용대 님과와 필리핀 JTS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이재곤 법우님의 보고회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도착하셨을때 이미 보고회 끝나고 뒷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3분의 활동가는 스님께 삼배를 드렸고, 스님께서는 라오스에서 짓고 있는 학교는 다 마무리 하고 왔는지등 모든 활동들을 잘 마무리 하고 왔는지 물으시며 수고했다며 용돈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nbsp nbsp 저녁시간에는 스님께서 산행을 갔다올까 하시다가 점검 못한 원고가 있어서 다시 집무실로 들어가셔서 원고수정과 강의준비를 하는등 업무를 보셨습니다.
2015.3.31. 통일학교 제2강, 제9기 청년리더십아카데미 입학식등
nbsp nbsp 스님께서는 새벽 5시에 예불과 기도를nbspnbsp대중들과 함께 하고 발우공양도 함께 하셨습니다. nbsp nbspnbsp 스님께서는 오늘 대중공사 시간을 통해 지난 일요일에 서울공동체 대중들이 경주 남산을 다녀와서 다들 몸이 괜찮은지 확인하시면서 특히, 몸이 좋지 않은 대중들을 한명한명 거명하면서 확인하셨습니다. nbsp 또, 이번 주말에 있을 청년정토회에서 진행하는 경주역사기행에 서울공동체 대중들도 함께 하자고 하시면서 언제 경주로 이동할 것인지, 코스를 어디로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nbsp 그리고 어제 필리핀에서 그동안의 활동을 마치고 들어온 이재곤 법우님에게도 지난 2년 8개월간 필리핀에서 학교 짓는다고 수고했다고 격려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nbspnbsp nbsp 대중공사가 끝나자마자 스님께서는 7시부터 진행된 기획위 회의에 늦었다면서 바삐 움직이셨습니다. nbsp 11시가 넘어 기획위 회의를 마친 스님께서는 유수스님과 평화재단에서 점심공양을 한 후 2시 통일학교 제2강을 위해 정토회관으로 오셨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어제 강의가 어려웠어요? 내가 중학생 실력도 안 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요?”라며 웃음 섞인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어제 강의가 어려웠던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니까 손든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의가 어려웠다고 말씀을 전한 분이 유수스님이었던지, “여기 어렵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혹시 유수스님만 중학생 실력도 안 되는 것이 아니에요?”고 하셔서 다들 왁자하게 한바탕 웃어댔습니다. nbspnbsp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풀어지자, 곧장 강연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제는 의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지금 우리가 통일의병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근대사를 국제정세와 연관 지어 설명을 해주셨다면, 오늘은 앞으로 남은 강의들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간단히 정리해주셨습니다. 불교식으로 하면 고집멸도에 해당하는 구성이었습니다. nbsp nbsp nbsp“그러니까 정확하게 지금의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알고, 이 문제점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고,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어떤 희망이 있느냐, 그렇게 가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무엇부터 어떻게 하나하나 실천해나가야 하겠느냐. 그러니까 ‘개인 수행처럼 자기 까르마로 인해 형성된 이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야겠느냐? 업식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야 되겠느냐?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겠느냐?’ 이런 시각에서 우리 사회문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수행 차원에서의 고집멸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나름대로 까르마를 갖고 있으므로, 어떻게 이 까르마를 극복해서 정토를, 통일조국을 건설할 수 있겠느냐, 이런 시각에서 공부를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nbsp 그래서 어제는 고에 대해서 진단을 했다면, 오늘부터는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남북한이 처해있는 고통의 현실에 대해서도 더 세세하게 진단을 해봐야 해요. 이런 문제를 극복한 통일국가는 어떠해야하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로만 통일해야 한다고 하지, 사실 통일이 되면 뭐가 좋은지 확실히 안 잡히지 않습니까? 그저 막연하게 이산가족이 만난다든지, 아니면 땅덩어리가 넓어진다든지 이런 것들이죠. 통일이 되면 구체적으로 내 삶의 현실에서 어떤 점이 좋아지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nbsp ‘분단이 왜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왜 분단이 우리 고통의 최대 원인이 되는가.’ 어제 강의에서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 확연히 알 수가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과연 통일 문제가 고집멸도에 어떻게 대입되는지, 스님 말씀을 계속 집중하며 들었습니다. nbsp nbsp “우리가 통일을 과제로 안고 있는데, 이 과제는 분단이 돼있어서 그렇고, 이 분단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가 왜 극복하기 어려운가 이것을 역사적으로 짚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통일강좌 기간 동안 역사공부를 적어도 2회 정도는 해야 합니다. 역사를 돌아본 뒤에는 그 다음 단계로 남북이 분단된 뒤, 북한은 북한대로 나름대로 발전해왔고 남한은 남한대로 발전해 왔는데, 북한은 현재 무엇을 과제로 안고 있는지, 남한은 또 어떤 성과와 과제를 안고 있는지 각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체제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이것이 진단돼야 합니다. nbsp 그런 연후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통일로 가야한다고 할 때, 통일이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익이 있는지, 통일된 국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또 어떤 과정을 거쳐서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지, 이런 실천 방향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고집멸도입니다.” nbsp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회 문제를 인식하고 통찰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데도 아주 유용한 방법론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고집멸도 방법론에 입각한 통일강좌라니, 세상에 이런 강의가 또 있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또 그 가르침을 현실에서 치열하게 실천해온 스승님이 계셔서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bsp nbsp 오늘은 원인분석으로 상고사를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상고사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옛날 옛날 아주 옛날, 전설 따라 삼천리’ 식의 신화로 남아있습니다. nbsp 스님 설명에 따르면, 삼국유사에는 “옛날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하늘세상에서 인간세상으로 하강했다. 그때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비, 구름, 바람을 다스리는 신하를 거느리고 신시를 건국했다. 그때의 건국이념이 홍익인간 재세이화이다.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하고, 하늘에서의 이치를 인간 세상에 그대로 한 번 실현해보겠다는 이념이다. 이렇게 해서 환웅천황이 배달나라를 건국했다. 그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 되기를 원해서, 마늘과 쑥을 먹고 동굴에서 100일을 어떤 곳에서는 21일을 있으라고 했더니, 호랑이는 뛰쳐나가고 곰은 여자가 됐다. 결혼처가 마땅치 않아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더니, 환웅이 부인으로 맞아 단군이 태어나셨다. 단군이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다. 조선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간략하게 기록돼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nbsp 일부에서는 삼국유사가 고려시대에 써진 점을 들어,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게 되자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런 설화 또는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라며 역사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왔습니다. 사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썼던 목적은 ‘고구려, 백제, 신라’ 즉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것으로, 배달나라와 조선나라의 역사는 그저 뿌리를 설명하기 위한 도입부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nbsp nbsp 환웅시대와 단군시대의 역사기록이 보다 상세하게 남아있는 책은 환단고기라는 책입니다. 환웅과 단군, 즉 환단의 옛 이야기를 적은 책입니다. 그런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식민사관이 우리 주류 사학으로 자리 잡는 바람에 이 책이 진위논쟁에 휘말려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쪽에서는 우리도 한때 광활한 영토를 지배한 제국이었다고 열광하며, 환단고기를 도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 비서로 추앙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환단고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환빠’라고 경멸하며, 상상책에 불과한 내용을 마치 역사의 사실인양 호도하고 있다고 맞섭니다.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로선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어리둥절할 뿐이지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이 역사책에 쓰인 내용을 100 진실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 늘 역사의 맥락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nbsp “이 환단고기가 옛 기록 그대로 남아있다면 논란이 없을 텐데, 고구려가 망하면서 다 유실됐다가 발해 시대에 일부 복원됐다가, 또 발해가 망하면서 유실됐다가 고려 시대에 일부 복원되고, 또 고려가 망하면서 유실됐다가 조선 시대에 일부 복원되는 등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기록이 축소되거나 소실되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본이라고 하기에는 몇 가지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죠. 그러나 중간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일부 문제가 있다고는 해도, 현재 고고학의 발전에 따라 사실로 입증되고 있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 옛 선조들의 역사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nbspnbspltif supportEmptyParasgtnbspltendifgtnbspnbsp nbsp 사실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종이기술이 발달해서 고구려의 경우 역사서만 100여 종이 넘고, 백제에도 많은 역사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당나라에 패망한 뒤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고 하지요. 백제는 더더욱 그 찬란했던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물이 사라져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어떤 나라든 패망하면 역사에서 잊히기 마련이라지만, 그 후손들이 역사를 복원하기는커녕 식민사관에 물들어 제 뿌리조차 모르고 살아간다는 게 부끄럽기도 합니다. nbsp 스님께서는 “역사교육의 식민사관을 빨리 극복하지 않으면, 민족 정체성의 혼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상고사 얘기를 이어가셨습니다. nbsp “상고사는 크게 환인시대, 환웅시대, 단군시대 3개로 나눕니다. 환인은 임금의 이름으로, 그때의 나라는 ‘한나라’입니다.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 이렇게 3개입니다. 우리가 배달의 자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인데, 여기에 한이 또 들어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쓴 것은 이렇게 ‘한나라’, ‘배달나라’, ‘조선’, 그리고 ‘고구려고려’ 이 4가지이고, 영어로 하면 ‘코리아’, ‘꼬리아’, ‘꼬레’ 이렇게 됩니다. nbsp 첫 번째 환인의 한나라는 지금부터 약 9천 2백여 년 전에 생겨서 3,301년 동안 지속됐다고 합니다. 두 번째 배달나라는 환웅이 이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신시 개천이 지금으로부터 약 6천 년 전입니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단군이 제창한 것이 아니라 환웅천황이 한 것입니다. 단군왕검으로부턴 4,348년으로 즉 반만년의 역사이고, 환웅의 신시개천으로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역사가 6천 년 전이지만, 가장 길게 보면 환인시대로 약 1만 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nbsp nbsp nbsp환인의 한나라가 9천 2백여 년 전에 시작됐고, 당시로서는 최고의 문명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는 배우지 못했던 내용입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로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의 4대 문명이라는 것만 주구장창 외웠으니까요. 지금에서야 4대문명으로 국한하기 어렵다, 마야문명도 있었다, 최근에 발견된 요하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훨씬 앞섰다는 등 고고학의 성과가 속속 밝혀지면서 새로운 내용이 발표되고 있지만, 그 전에는 4대문명만을 확고부동한 도식처럼 외웠더랬습니다. nbsp 환단고기의 내용이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과학기술과 고고학의 발전으로 하나둘 입증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몇 년 전에 환단고기에 기록된 오성취루 현상을 입증했다는 천문학자의 발표도 있었습니다. 환인의 한나라 시대는 인류문명으로 치면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데, 얼마 전만 해도 최고로 오래된 신석기 유물이 5천 년 전에 불과했지만, 최근 중국 요하강 상류 지역에 거의 8천 년 전의 유물이 발굴된 데 이어 인류 최대로는 1만 2천 년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9천 년 전의 환인시대가 신석기 문명의 기원이라고 해도 어불성설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한나라가 현재 우리가 말하는 국가의 형태는 아니었겠지만, 우리 민족의 뿌리가 그 연원으로 올라간다는 것에는 왠지 장구한 역사의 흐름이 느껴져 괜히 으쓱해집니다. nbsp nbsp 중국에서는 새로운 유물이 계속 발견되는데 대신 역사가 없습니다. 우리는 전설따라 삼천리 식의 역사가 있는데, 유물이 부족하죠. 중국으로치면 오랑캐들이 살았던 지역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곳인데, 이제 그곳에서 아주 오래된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nbsp 그렇다면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는 하늘세계에서 인간세계로 하강한 것이 아니라, 선진문명에서 미개문명으로 이주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스님께서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선진문명에서 한 세력이 떨어져나와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는데, 그것이 신시였습니다. nbsp “신시의 도시 이름으로 ‘아사달’입니다. ‘앗시’라는 말은 순 우리말로 ‘처음’이라는 뜻이에요. 달은 ‘땅’이라는 뜻으로, ‘처음 시작된 땅’이라는 뜻이 됩니다. 나중에 나라 이름을 ‘배달나라’라고 했어요. 이렇게 이주세력이 토착세력이 있는 곳에 선진문명을 가져와서 새로 나라를 건설했는데, 그들은 하늘을 믿는 신앙이 있었고, 고도의 문명 수준을 갖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했어요. 그 징표로 ‘천부인’ 3개, 즉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뭘 말합니까? 배달나라가 청동기 문명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nbsp nbsp 환인의 한나라가 신석기 문명의 시원이듯이 환웅의 배달나라는 청동기문명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 구전으로만 내려왔기에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6천 년 전에 무슨 청동기 문명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오래된 청동기 유물도 3천년 전의 것이고, 세계에서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고 해도 그만큼 안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역시 최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6천 년 전은 물론 7천 년 전의 청동기가 발견됐고, 중국 은나라 지역에서 34천 년 전의 유물들이 대거 발견되면서 그 이전에 세워진 배달나라가 청동기 문명이었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문물이든 다 중국에서 전해온 것이라고 해석하는 시각이 일반적인데, 배달의 후손 일단이 동쪽으로 이주해서 조선을 세웠다면, 서쪽으로 가서 세운 나라가 은나라로 알려지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즉 배달나라의 후손이 청동기를 중원에 전달해준 것이지, 우리가 중원에 전달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nbsp 그런데 이런 유물을 둘러싼 문명 논쟁보다 더 특별한 점은, 바로 건국이념에 있습니다.nbsp홍익인간 재세이화,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한다. 하늘의 이치를 땅에서도 이룬다”는 이 고귀한 이념으로 나라를 세운 선례가 인류문명사에 우리 말고 또 있을까요? 스님께서도 이 부분을 다시 짚어주셨습니다. nbsp “하늘에서 왔다고 했지만, 하늘에서 온 이주민이 원주민을 지배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원주민에게 이익을 주려고 나라를 건국한다는 사상입니다. 토착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라가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취지입니다. 이런 국가 설립 취지는 그 어떤 종교보다 고귀하지 않습니까? 재세이화도 보세요. 하늘의 이치를 이 세상에 실현하겠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늘에서 이뤄진 것을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여지이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 인류사에서 18세기만 보더라도 유럽문명이 아프리카 등에 가서 어떻게 했나요? 원주민을 이익되게 했습니까, 착취하고 지배하지 않았습니까? 또 임금이 백성을 이롭게 하기보다, 백성들을 지배하고 모든 재산과 인명을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nbsp nbsp nbsp 지금 우리보고 건국이념을 만들어보라고 해도 이보다 더 고귀한 정신을 담기는 어려울 겁니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부분이 헌법 전문에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환웅천황의 신시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건국이념을 계승한다고 분명히 명시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지금의 건국이념이라고 해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nbsp ‘홍익인간 재세이화’가 헌법 전문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이보다 더 좋은 건국이념이 있을까요? 이 건국이념을 되살리는 것이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통일한국을 만들어가는 데 가장 선결과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환웅의 배달나라에는 청동기 문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옥기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히고 있다는 것도 상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좋은벗들에서 주관하는 8월 동북아 역사기행에 가면, 중국 심양에서 요녕성 박물관을 방문하게 되는데, 요하문명의 유물들을 두 눈으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그냥 몇 세기 어느 지역 출토 유물 정도로 써있다고 해요. 역사가 있는 우리나라와 공동으로 발굴하고 함께 연구하면 훨씬 풍부한 설명을 할 수 있을 텐데 참 아쉽기만 합니다. nbsp nbsp 환웅시대에 이주세력이 토착세력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고, 그 사이에 낳은 자녀가 왕위에 오르면서 단군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단군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주세력과 토착세력이 통합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 말씀에 따르면, 이 단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허물어진 율법을 바로 세우고 다시 정비해서 신시를 새롭게 했다고 합니다. 신시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개혁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는 우리의 개천절이 단군왕검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환웅천황을 기리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보았습니다. nbsp 스님의 역사 강의는 들으면 들을수록 넋을 잃고 빠져들게 됩니다. 재미나게 말씀해주기도 하시지만,nbspnbsp군데군데 비어있는 부분을 스님의 통찰력으로 전혀 어색함이 없이, 그러나 사실에 입각해서 하나로 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학계가 실증주의를 표방하면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 연구방법론적으로도 풍부하게 상상하되 이런 부분을 더 치열하게 연구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노력하는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직 주류 사학은 우리 정체성을 밝히는데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서요. nbsp 오늘 재미나게 말씀을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우리의 시야가 확 넓어진 것은 바로 북방영토를 둘러싼 한족과 우리 민족의 주도권 다툼 부분이었습니다. 북방영토는 원래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자 대대로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중원에서는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땅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북방영토를 고조선 시대에 처음으로 중원의 침입을 받아 빼앗깁니다. 중원은 한사군을 설치해 이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조선나라의 관군이 패망하자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다물군이 나섰다는 어제의 강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 민족 최초의 의병이 바로 다물군이라고 하셨죠. 그 다물군의 기상을 이어받아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고, 미천왕 시대에 이르러 낙랑군을 몰아냄으로써 비로소 영토를 회복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낙랑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한사군이었습니다. nbsp nbsp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해 동북아의 맹주가 되었다가 당나라에 패망합니다. 이때 고구려 밑에 있다가 발해가 일어나자 다시 발해 밑에 있던 거란족이 요나라로 독립한 뒤에 발해를 멸망시킵니다. 그러면서 동북지역을 요나라가 차지합니다. 요나라는 원래 고조선 민족으로, 우리 사촌 격입니다.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도 멸망한 뒤에 고려가 세워졌는데, 고토회복이라는 건국이념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제 민족들이 강성하게 일어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워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워서 멸망시키고, 그 몽골족이 고려까지 침공해 들어온 것이죠. nbsp 그러니 고려는 북방을 되찾겠다고 원을 세웠지만, 첫 번째 같은 북방민족인 요나라에, 그 다음에는 금나라에, 그 다음엔 원나라에 부딪혀서 그 원이 좌절됐습니다. 사실 원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몽골족입니다. 그 사람들이 중원에 내려가서 송나라를 멸망시켰어요. 중국 사극을 보면 주로 민족의식이 부딪히는 게 요나라 침공에 대한 송나라 사람들의 싸움, 금나라 군사와의 싸움, 원나라의 싸움 등입니다. 원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다 점령해버렸어요. 이미 요·금시대에 북경까지 다 북방민족이 차지했고, 송나라는 남쪽으로 쫓겨서 남송이라고 했는데 그마저 원나라는 침략해서 다 차지해버렸습니다. 우리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사촌들이 차지한 것입니다. nbsp 그런데 한족들의 반원운동으로 원나라가 망하면서 북방민족이 차지하고 있던 땅이 다 중국땅이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원래 우리민족의 본거지였던 북방영토, 즉 동북지역이 한사군 다음으로 두 번째로 중국의 영토가 됐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고대로 북방영토에대해 자기 것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다시 북방민족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입니다. 나중에 일본도 어때요? 여기다 만주국을 건설했죠. 일본도 엄밀히 말하면 북방민족의 한 갈래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그 영토를 중화인민공화국이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고래로부터 중국이 이 지역을 세 번째로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nbsp nbsp 우리는 이 지역을 잃었지만, 우리 밑에 있던 소수민족이 일어나서 제국을 한 번씩 건설했어요. 거란족이 요나라를, 여진족이 금나라를, 몽골족이 원나라를, 만주족이 청나라를, 그리고 일본까지 대제국을 한 번씩 건설했습니다. 자 그럼, 다시 어디로 올까요?” nbsp “ 자 그럼, 다시 어디로 올까요?” 스님의 마지막 물음에 통일의병 교육 참가자들은 와아 하고 웃었습니다. 어떤 대답이 숨어있기 때문일까요?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그대로일 겁니다. nbsp 천년의 꿈’을 말씀하셨지만, 오늘은 무려 ‘3천년의 꿈’을 말씀하셨습니다. 9천 년의 우리 역사 속에서, 배달나라로 치면 6천 년이지만, 약 3천 년 전부터 중원과의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완전히 주변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일은 문명사적으로 무려 ‘3천 년 전의 본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통일을 한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통일이 없으면 그럴 가능성도 없다”며, “우리가 그 큰 꿈을 실현해보자”고 다시 한 번 당부하셨습니다. 내일은 근대에 이르러 우리 민족이 어떤 고통을 겪었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을 해왔는지 살펴보겠다고 하시며 오늘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nbsp 참가자들은 강의를 마치고 약간 흥분된 상태에서 조별 나누기를 했는데, 어제보다 확실히 분위기가 밝았습니다. 참가자 한 분에게 어제 강의가 진짜 어려워서 분위기가 무거웠던 거냐고 물으니, “아 그런 게 아니고요, 강의가 어려운 게 아니라, 어제 스님께서 우리가 통일할 기회가 10도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다들 우리가 무슨 힘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3천 년의 꿈을 말씀하시면서, 1천 년 동안 우리가 주변국으로 전락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니 뭔가 해볼만하다고 느꼈어요.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우리 조원들은 다들 공감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다들 왁자하게 떠들면서 신나하는 모습이었어요”라고 소감을 나눠주셨습니다. nbsp 또 북방영토를 둘러싸고,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사촌격인 민족들이 9천 년 역사에서 중원에 이 땅의 지배권을 내어준 게 고작 3차례에 불과하다는 말씀을 들으니, 아무리 중국이 G2로 급부상하고 있다지만 그렇게 두려워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얘기도 나눴습니다. 이렇게 한 회, 한 회 강의가 이어지면서, 우리 통일의병의 의식도 점점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모습입니다. 스님께 다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nbsp nbsp 강의가 끝나고 스님께서는 정토회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셨습니다. 강의 후 스님의 집무실까지 따라간 SBS촬영팀은 스님께 이렇게 통일강의를 하는 이유와 역사 강의에 대한 질문들을 다시 하기도 하였습니다. nbsp nbsp 그리고 스님께서는 이번 통일학교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경주역사기행이 있는데, 어디서 출발해서 어떻게 코스를 정하고, 숙소는 어디로 할 것인지등에 대해 행정처 김은숙처장님, 이상옥보살님과 잠시 논의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nbsp nbsp 회의를 마친 후 스님께서는 계속해서 원고교정작업과 통일학교 강의 준비에 전념하셨습니다. nbsp 저녁 7시 30분부터는 평화재단 3층 강당에서 제9기 청년리더십아카데미 입학식이 있었는데, 스님께서도 함께 하셔서 입학생들을 격려하고 축하 해주셨습니다. nbsp “어떤 사람이 일제시대에 태어나 소학교에서 1등하고, 지방에 좋은 중학교에서도 1등, 고등학교도 1등해서 경성제대 법과대에 입학을 했어요. 거기서도 사시에 합격해서 졸업하자마자 검사가 되었어요. 이정도면 성공했죠? 서른이 되어서 지검장까지 오르면 대성공이죠? 부모에 효도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서 도덕적으로도 하자가 없었는데, 해방이 되니 하루아침에 매국노가 된 거예요.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가게 됐어요.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대 실패인 인생이 되었어요. 하루 아침에 대성공에서 대실패로 바뀌었어요. 이 사람이 하루 사이에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강도짓 하거나, 거짓말 하거나, 성추행 하거나, 술먹고 행패를 부리거나 한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어떤 윤리적 도덕적 법률적 하자가 없었는데도 왜 불행이 온 것일까요? 무엇이 잘못되어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것만을 보면, 이 사람으로서는 억울하겠죠? 뭐가 문제였을까요? nbsp nbsp 이 사람이 불행을 자초한 한가지는 바로 ‘역사의식’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몰랐다, 무지했다고 할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과제와 목표가 있어요. 그런데, 그 시대에 각 개인이나 계층이 아니라 이천만 민중 전체, 삼천만 민중 전체의 삶을 괴롭게 하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일본의 ‘식민통치’였겠죠? 그것이 크던 작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공통의 문제, 근본의 문제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nbspnbsp 그것을 깨닫는 것을 ‘역사의식이 있다’고 하고, 삼천만 동포의 시대적 과제가 ‘나라의 독립’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독립은 식민지 지배하에서 국가 보안법 위반이었어요. 식민지 지배 체제를 반대했다는 것이 ‘국가 보안법 위반’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애국자’라고 하죠. nbsp nbspnbsp nbsp그렇다면 시대적 과제를 알려면 첫째,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 사회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합니다. nbsp 여러분들이 이것을 자각하는데 도움을 주기위해 청년리더십아카데를 개설한 것입니다. 둘째 자각했다면, 그렇다고 행동으로 다 옮길 것이냐? 불이익이 있고, 목숨을 걸어야 해서 행동을 하기는 어렵더라도 시대적 과제를 이해한다면, 자신의 재량 범위 안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겠죠. 우리 청년들은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이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행동해 나갔으면 합니다.” nbsp nbsp 이렇게 스님께서는 입학식 축하 인사를 하시면서 현실에서만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시대적 과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면서 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청년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말씀해주시면서 재단을 떠나셨습니다. nbspnbsp 9시경 정토회관으로 오신 스님께서는 통일학교 강의준비를 하시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2015.3.30.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통일학교 제1강
nbsp nbsp 오늘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신 스님께서는 새벽 기도 후 5시 30분에 아침공양을 하시고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탑곡으로 산책을 나가셨습니다. nbsp nbsp nbsp 작년에 봤을 때 약간 특이한 색깔의 진달래가 있었는데, 다시한번 그 진달래꽃을 관찰하기 위해 탑곡 저수지로 향했습니다. 작년에는 탑곡으로 오는 시기가 늦어져 진달래꽃을 많이 보지 못했었는데, 오늘 가보니 온산에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분홍빛깔의 특이한 진달래꽃도 피어 있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예전에는 진달래꽃으로 꽃망방이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오졌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직접 꽃송이가 많은 꽃을 보여주며 설명해주셨습니다. 요즘 우리가 보는 진달래는 꽃이 23개씩 달렸는데, 스님이 보여주신 진달래는 5개의 꽃이 한꺼번에 달려 있어 보기에도 훨씬 풍성해보였습니다. nbsp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탑곡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 산소에 잠깐 들러 산소상태를 체크하신 후 서울로 향했습니다. nbsp 11시 30분에는 평화재단에서 예전에 스님께서 가르친 제자분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현재 큰 회사의 사장님이신데, 스님께 인사도 드릴 겸, 또 강의 요청도 할 겸 찾아오셔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환담을 나누셨습니다. nbsp 그리고 지난번에 스님께서 민중미술가이며 설치미술가이신 임옥상 미술작가님이 하시는 ‘헌법을 다시 읽읍시다.’는 운동에 후원을 하신 적이 있는데, 임옥상 작가님께서 헌법 읽기 운동을 후원해주신 분들께 헌법을 새긴 종이병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직접 검은색과 흰색 종이에 헌법을 새겨서 병풍처럼 만든 것인데, 보기에도 너무 정성스럽고 감동스러워 보였습니다. nbsp nbsp nbsp 오후 2시부터는 서울 서초법당에서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제 1기 통일학교가 열렸습니다. 이날 강의는 사전에 접수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집중 밀착 강의였습니다. 시작 30분 전부터 이미 많은 대중들이 속속 모여들어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보통의 법회나 강의와는 다르게 법당에는 통일학교 학생을 위한 100여 개의 앉은뱅이 책상이 마련되어 벌써 ‘학교’의 분위기가 물씬 났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기획되고 기다려온 강의이기에 시작 전부터 조용한 가운데서도 기대감이 흘렀습니다. 통일의병학교는 오늘 입학을 시작으로 마지막 역사기행까지 총 6강으로 진행이 됩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의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nbsp nbsp nbsp“의병이 무엇입니까? 의병은 관병에 반대되는 말, 즉 정규군이나 직업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하므로 보통 민병이라고도 부릅니다. 의병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이후의 용어고 그 전에는 주로 민병이라고 썼습니다. 의병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은 다물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조선 말기에 중국에서 한군이 고조선을 침략했는데 이것이 단군 조선 이래 최초의 외세침략일 겁니다. 이때 관병이 전쟁에서 지고 나라가 망하니까 관병이 해체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애국심이 강한 민간인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한사군에 대항하며 ‘한군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자, 우리 조국을 되찾자’는 민병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게 다물군입니다. nbsp 다물군에 참여해 그것을 계승한 사람이 고주몽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건국이념이 다물사상이예요. 그냥 나라 하나를 세우는 게 목적이 아니고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자는 큰 원을 가지고 시작이 된 거에요. 때문에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어서 동북아 대륙에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 후에도 나라마다 시대마다 민병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의병이 눈부신 활약을 합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해서 1차 의병봉기, 2차 의병봉기가 있었고 이 의병운동을 계승해서 나라 밖에서 독립군이 조직됐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정의로운 뜻을 가지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재산을 다 바쳐 헌신했지요. 이를 일컬어 의병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nbsp nbspnbsp 그러므로 의병은 첫째,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꼭 싸워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후원을 받는 것도 아니에요. 무기도 식량도 의복도 자기가 알아서 구해야 돼요. 다만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하는 두 가지 이유를 위해. 그래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와 백성이 고통 받을 때 의병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의병은 반군하고는 달라요. 반군은 나라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할 때 임금을 갈아치우고자 일어나서 관군과 싸우지요. 그러니까 의로운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을 잡으면 보상이 따르죠. nbsp 그러나 의병은 반군이 아니에요 정부군과 싸우는 게 아니에요. 제 역할을 못한 나라, 그 관군을 도와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겁니다. 의병은 실패하면 목숨도, 재산도 다 잃습니다. 비난도 받습니다. 그러나 관군은 죽으면 국립묘지에 안장된다든지 인정을 받습니다. 그럼 성공을 하면 어떠냐. 관군은 출세를 합니다. 반군은 권력을 잡으니까 이 또한 이득을 얻죠. 근데 의병은 승리해도 아무 얻는 게 없어요. 자기 본래 직업으로 돌아가야 해요. 때로는 관군으로부터 공로에 대해서 시기, 질투를 받고 모함을 받아 오히려 희생이 될 때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관병하기가 제일 쉽고 두 번째 반군은 위험도 따르지만 잘하면 보상을 받는데, 의병하기가 제일 어려운 겁니다. nbsp nbsp nbsp 그러니까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정의로운 생각으로 나서는 것이지 어떤 이익을 추구한다면 의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데서 의병의 성격이 규정됩니다. 비전문적이고, 자발적이며, 자급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공하면 자기 직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의병은 관군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의병이 관군에 아무리 지극히 협력을 하더라도, 관군은 의병을 달가워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 오히려 사지로 내몰기도 합니다. 의병은 처음부터 이런 걸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점을 알고, 여러분들이 의병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의병이라는 용어가 부담스럽다고 바꾸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성격상 의병이라는 말이 가장 맞아요.” nbsp 스님의 재치 있는 설명에 간간이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만, 강연은 어느 때보다 숙연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됐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렇다면 왜 지금 이때 통일의병이냐?”는 질문을 던지시며 강연을 이어가셨습니다. nbsp “의병이라는 것은 백성이 처한 고통을 해결하고자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가장 큰 어려움, 국민의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분단에 있다는 인식이 있어야 통일의병이 일어납니다. 마치 일제 식민지배가 그 당시 백성이 처한 가장 큰 고통이라는 인식에서 항일독립의병이 일어났듯이, 분단상황에 대한 문제인식이 있어야 통일운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nbsp nbsp nbspnbsp nbsp 그런데 그런 인식이 없는 이유는 두 가지에요65279. 하나는 이해관계, 즉 같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외세의 침략에 큰 손실을 보는 집단이 있는 반면, 오히려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어요. 이익을 보는 집단에서는 외세의 지배를 반대할 이유가 없겠죠. 두 번째는 식민지배가 많은 불이익이 있어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이 아니고,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 고통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nbsp 예나 지금이나 모든 국민이 이런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들 자기 사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출발할 때는 올바르게 인식한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소수의 사람들이 거병을 해서 그들의 주장이 세상에 알려지고, 또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면 대중 참여가 이뤄지기는 어렵습니다. 일정한 성과가 있어서 가능성이 열리면 대중 참여는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거기까지 만드는 게 사실 제일 힘들어요. 가능성 있는 데까지 끌어올리는 데 열정과 시간이 가장 많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 거기까지 만들어가야 합니다. nbsp 그럼 통일에 있어 관군은 누구일까. 첫째 정부, 그중에서도 통일부가 대표적이죠. 국방부도 막강한 힘이 있습니다. 이런 주체들이 관군이라 할 수 있죠. 관군을 지원하는 통일연구원이나 민주평통 같은 준 관군도 있습니다. 이런 관군이 통일을 추진하는데 역부족이라면 밀어줘야 하고, 추진할 생각이 없다면 비판을 해야겠죠. nbsp 옛날 같으면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에 임금이 안하겠다고 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국민이 주인이니까 정부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면, 정부를 비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오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하면 반군이 되는 것 아니냐 하는 걱정이 그겁니다. 아닙니다. 민주국가에서 정부를 비판하거나 교체하는 것을 반군이라고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지금은 국민이 주인이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에 맞지 않게 정부가 운영되거나 통일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요구하고 또 통일을 지향하는 정부를 구성하도록 여론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병의 역할입니다.” nbsp 참가자들은 스님의 한 말씀, 말씀마다 깊이 호응하면서 높은 집중력을 보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그렇다면 “지금 국민의 가장 큰 고통이 과연 분단 때문인가 검토해보자”고 하셨습니다. 크게 국내요인과 국제요인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국제정치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근 중국이 급격히 부상하면서 우리를 둘러싼 역학관계, 즉 힘의 관계가 변화하고 있어 통일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nbsp 현재 국제정치 역학을 설명하기 전에, 분단 70년의 역사를 먼저 짚어주셨는데, 지난 1945년 전후로 국제 정치의 역학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에 따라 왜 우리가 이런 분단 상황을 맞게 됐는지 설명해주셨는데, 정말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학교에서 1945년 전후의 세계사와 국내 상황을 배울 때는 세력의 충돌과 계파가 하도 많아서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스님 설명 덕분에 통시적으로 그러면서도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nbsp nbsp nbspnbsp nbsp “1945년 이전은 어땠냐.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 시대였고, 우리는 그에 저항했지만 힘이 못 미쳐서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어요. 일본제국주의와 적대관계로 대항하고 있던 것은 연합군이었습니다. 연합군의 주축은 미국과 소련이었고, 작게는 중국도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에 패망하면서 국제 질서는 연합군으로 함께 활동하던 미국과 소련이 양대 세력이 된 거예요. 당시 중국은 항일을 하던 세력이 둘이었는데,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었습니다. 이 둘도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한반도는 전후처리를 두고 연합국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nbsp 남측은 미국의 후원을 받는 세력이, 북측은 소련의 후원을 받는 세력이 장악하게 되죠. 우리로서는 상해임시정부가 정통인데, 이미 들어와 있는 미국이나 소련으로서는 자기네들이 후원하는 세력이 주도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임정요원들은 남북 양쪽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지요. nbsp 그런데 당시 미국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국제 여론은 인민해방의 기치를 걸었던 소비에트가 더 컸어요. 봉건제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개혁, 혁명, 즉 민족해방이든 계급해방이든 여성해방이든 토지개혁이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명분 면에서 훨씬 앞섰던 거죠. 또,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도 한반도의 지형지세로 보면, 중국 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한 사람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드나들며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소비에트도 한반도와 연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쪽은 소비에트가 자기 세력을 형성하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미국은 이남에서 자기 세력을 형성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미국이 후원하는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무장투쟁을 할 수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미국은 남한 내에서 주도를 잡는데 많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미국이 미국에서 공부한 소수의 사람으로 중심을 세우면서 다수의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에 이런데서 남한 안에는 사회적 갈등이 많이 생겼습니다. nbsp nbsp nbsp 북한은 이런 남한 내부 정세를 보고, 힘으로 밀어붙이면 통일할 수 있겠다 판단해서 전쟁을 일으켰죠. 사실 이 판단은 비교적 정확해서 한 달 만에 부산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내부 정세는 정확했지만, 국제정세를 오판했습니다. 국제정세 측면에서 보면 당시 미소경쟁이라고 하지만 미국이 최대 세력이었고, 미국이 용납을 안 하니까 UN에서 침략으로 규정받고 미국을 비롯한 UN군이 참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nbsp 미국의 참전으로 당장 전세가 뒤바뀌어서 이북으로 막 밀고 올라가니까 이번에는 중국이 나섭니다. 38선 위로 올라오면 자기네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한 것이지요. 당시 중국은 1949년도에 국·공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겨우 공산정부를 수립했는데 미군이 올라오니까 자기들 체제가 위태롭다고 보지 않았겠어요? 평양까지 올라가니까, 이것은 우리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하겠다고 하고는 100만군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 말로는 항미원조전쟁에서 참여한 것이지요. nbsp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시간은 흐르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는 어려울 것 같으니 1953년에 휴전협정을 맺습니다. 그 전에는 북한에도 북한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고, 남한에도 남한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쟁을 거치면서 각 진영내 반대세력은 모두 말살되다시피 합니다. nbsp 미국은 점점 초강대국이 되니 미국이 후원하는 한국은 점점 발전하고, 반대로 북한은 소련의 세력이 축소되는데다, 소련과 중국이 싸우면서 주체경제를 내세웠지만 경제가 점점 취약해집니다. 처음에는 북쪽이 우세했지만 점점 남쪽이 경제를 성장시키면서 70년대 들어 남북한 양쪽의 세력이 비슷해지면서 이제는 누구도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을 흡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자각이 생기면서 탄생한 게 7.4 남북공동성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90년대 들어 세력판도가 급속도로 바뀌게 됩니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유럽이 해체되고, 미국이 세계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죠. 한국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니 안보가 튼튼하고 미국과의 경제협력으로 국제무대에서 더욱 성장해갑니다. 북한은 공산진영 자체가 붕괴되니 판로가 없어지고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으로 자본주의 사회와는 차단돼 있어 급속히 경제가 추락합니다. nbsp nbsp nbsp 중국은 개혁개방을 하면서 다시 일어났지만 체제의 성격이 바뀌었죠. 정치는 사회주의라지만 경제는 시장경제로 바뀌어, 북한과 정치적으로 안 맞아서 북중 사이에 갈등이 심화됩니다. 이러니까 북한은 더욱 체제붕괴위험에 몰리게 됩니다. 경제를 회복할 가능성도 없고 안보가 불안하니까 핵을 개발하는 쪽으로 가죠.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 6.15 공동선언이 일어납니다. ‘남북한이 각자의 체제를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위해서 상호협력하자.’ 이렇게 됩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국내 변화는 국제 변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nbsp 스님 말씀 덕분에 우리나라가 국제정치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미국과 함께 이른바 ‘G2’ 시대에 돌입하면서 또 다시 달라졌습니다. 남한은 중국이 부상하면서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20년 전에 한중수교를 맺은 바 있습니다. 중국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경제적으로 대중의존도도 급격히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한중교역액이 한미와 한일교역액을 합친 것보다 1.5배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나 안보적으로는 여전히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즉 경제로는 중국의 눈치를 봐야 하고, 안보적으로는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스님은 이런 상황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려말 ‘원청 교체기’와 조선 중기 ‘명청교체기’, 그리고 구한말 ‘청일교체기’와 비교하면서, 그 시점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왔고,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nbsp “우리는 늘 대륙세력의 교체기에 우리끼리 싸웠습니다. 명나라와 원나라가 교체되던 시기에 고려말 기득권 세력은 원나라를 지지하고 신진세력은 명나라를 선택해서 이성계의 반정으로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그러면서 명나라에 자발적으로 사대주의를 선택했습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에는 어떻습니까?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이유로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아서 두 번의 침략을 받고 결국은 패해서 속국이 돼버렸습니다. 삼전도의 굴욕을 다 들어보셨을 겁니다. 구한말에는 청의 지배를 받던 시기였는데 일본이 부상하니까 다시 우리나라에서 각축이 벌어졌습니다. 주변세력을 등에 업고 우리끼리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결국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nbsp 일제 강점기말에는 일본이 주변 연합군과 싸우다가 망해버렸습니다. 만약 일본이 어느 한 나라와 싸워서 망했다면, 또 그 나라의 속국이 됐을지 모르지만, 연합군과 싸우다가 망하니까 그 연합국이 후원했던 세력이 제각각이라 우리 내부에서 또 여러 갈래로 분열하게 된 것입니다.” nbsp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우리는 역사의 중요 고비마다 내부 분열 때문에 미래를 안전하게 선택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위기와 참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스님께서 “우리 민족은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동안 주변 강대국에 좌우되는 약소국으로 전락했고, 그것이 지금껏 유지돼왔다”며 지금도 마찬가지임을 짚어주셨습니다. nbsp “중국이 부상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유동적인 상태입니다. 중국이 완전히 뜨는 해가 될지, 아니면 뜨다가 가라앉을지, 미국이 예측대로 서서히 가라앉을지, 아니면 다시 부상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 정부는 아직도 중국에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 정부가 굉장히 문제가 많은 정부이지만, 통일의 시각에서 보면 아직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반대로 북한 정부가 얼마 못 버티고 중국에 고개를 숙이면, 통일은 더 어려워집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통일 후의 전망에 대해서도 잠깐 말씀해주셨습니다. 통일을 하면 저성장 정체기에 접어든 한국 경제의 활로를 찾을 수 있고, 동아시아의 통합과 평화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우리였습니다. nbsp “통일된 한국이 미국에 붙을지, 중국에 붙을지에 따라 동북아 정세가 달라집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주변국들 입장에서는 남북한이 통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니까 통일을 하려면 어때요? 우리의 통일이 너희 두 나라에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통일을 하겠다고 우리가 마음을 똘똘 뭉쳐도 그들을 설득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우리 내부가 분열돼있기 때문에 그리고 국제정세의 흐름을 본다면 90는 계속 분단상태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nbsp 우리 개인적인 삶은 어때요? 우리 까르마를 보면 대충 미래가 예측되잖아요? 우리 업식도 바꾸기가 굉장히 어렵죠. 그래도 한 번 바꿔보자는 것이 수행아닙니까? 가만히 있어도 성불할 바에야 우리가 뭣 하러 수행하겠습니까?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죠. 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통일이 된다면 뭣 하러 노력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냥두면 안 되니까 우리가 나서서 ㅂㅏ꾸어 보자는 겁니다. nbsp 통일만이 전쟁의 위험을 막는 항구적 평화요, 희망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넘게 주변국으로 전락해서 늘 우리의 운명이 주변 강대국의 운명에 좌우되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즉 통일은 우리 민족이 천년의 한을 푸는 일이고, 천년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런 역사적 전환기에 우리가 의병으로 일어나 통일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게 부담이 아니라 큰 은혜요, 혜택을 입은 거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nbsp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옛날에 왕이 주인이던 시대의 백성 의식이 있어서 ‘주인들이 안 하는데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이제 ‘국민이 주인이니,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통일의병이 되어 통일운동을 한번 일으켜보자는 것입니다. 정토회 창립의 꿈이 하나는 불교중흥이고, 하나는 민족중흥인데, 민족중흥의 핵심은 분단된 나라를 통일해서 천년의 한을 풀어 천년의 꿈을 실현시켜보자는 것입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시도해볼 때가 왔습니다.” nbsp nbsp nbsp 의병이 무엇인지 의미를 규정하면서 시작했던 첫 강의는, 이렇게 우리가 왜 통일의병이 되어야 하는지 당부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2시간여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스님의 첫 강의는 우리에게 ‘천년의 꿈’을 되살려주었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누구랄 것 없이 한 마음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정토회 김은숙 행정처장의 입학 환영 인사가 이어졌는데,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습니다. 김은숙 처장은 “이젠 정말 통일을 이룰 시간과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앞으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 거린다”며 감동받은 소감을 나눠주었습니다. nbsp nbsp nbsp “통일의병, 하자, 하자, 하자”라는 구호 선창에 따라 힘차게 외치며 사진기를 향해 함박웃음을 짓는 새내기 ‘의병’들의 모습을 보니, 그 어떤 장애와 곤란이 오더라도 희망하는 이가 있는 한 꿈은 꼭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병 정신으로 우리부터 똘똘 뭉치면, 통일을 앞당길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nbsp 강의 후 스님께서는 앞으로 5일동안 계속 진행되는 통일학교 강의를 위해 강의내용을 정리하시는 등 서울정토회관에서 업무를 보셨습니다. nbsp 내일은 아침 7시에 기획위회의, 통일학교 제2강, 청년리더십아카데미 입학식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2015.3.29. 수도권 가을불교대 특강, 서울공동체 봄 나들이
nbsp nbsp nbsp 어제 청년학교 마치고 문경수련원에 도착하니 새벽 12시 40분경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잠시 휴식을 취하신 후 방에서 새벽예불을 드리고 5시에 간단히 아침공양을 한 후 새벽 6시부터 있을 2015년 가을불교대학 수도권지역 특강을 위해 대수련장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오늘 특강은 불대생들이 그동안 불교대학공부를 하면서 들었던 궁금한 것들을 스님께 물어보는 즉문즉설로 진행되었습니다. 불대생들이 미리 적어 낸 질문지를 보고 스님께서 답을 해주셨습니다. 스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던 학생들은 이른 새벽이지만 가르침을 받고자 똘망똘망한 눈으로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먼저 서두에 “요즘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 대중들과 함께 수련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예요. 수련장에서 불편을 느낄 때 불편에 빠지지 말고 습관성에서 오는 불편임을 알고 직접 경험을 통하여 습관을 바꾸면 매사가 좋아집니다.”는 말씀으로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함으로서 오는 불편함을 잘 살펴보도록 지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특강은 한학기 동안 공부하면서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시간이니 주로 불대에서 배운 것을 중심으로 질문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하다보니 전체 학습에 대한 질문보다는 근래에 배운 것에 대한 내용, 특히 근본불교사상에 대한 질문이 많아요. 그리고 새벽부터 수업을 하니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지금 좀 졸릴 때니 졸리는 사람은 앉아서 졸지 말고 자리에서 서서 들으세요. 한명 서고 두 명 서고, 열 명 서고, 오십 명이 서면 휴식시간을 드리겠습니다.”라고 가볍게 웃으시며 첫 질문을 읽으셨습니다. nbsp nbsp Q. “희망편지로 희망을 만나고 정토회를 만나 희망을 갖고 살고 있고 제 인생을 다르게 살게 해주신 은혜로 길게 수행·보시·봉사하며 정진하겠습니다. 제 질문은 중도가 무엇인지, 마음을 절제하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고 하면 기쁨,슬픔,분노를 돌이키고 알아차리면 된다면 중도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왜 꼭 중도의 삶을 사는 건지 헷갈립니다. ” nbsp 스님께서는 “수업 시간을 제대로 안 들은 거 같아요. 불교사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또, 들어도 들어도 이해가 어려운 것 중 첫째가 중도, 둘째가 무아, 셋째가 연기입니다. 이 3가지는 이치가 힘든 건 아니에요. 이치는 아주 간단해요. 들으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런데도 이것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중도적으로 생활을 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이런 것들을 경험해본 바가 없어요. 늘 치우쳐서 생각하고 생활했기 때문에 이게 뭘 의미하는지 들을 때는 알겠는데, 지나고 나면 금방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즉, 쾌락도 아니고 고행도 아닌 제 3의 길이 중도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시고는 대중들이 중도를 익히 알 수 있도록 따라 해보라고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nbsp nbsp “한번 따라 해보세요. 뭐도 아니고? 뭐도 아니고? .”대중들은 스님의 말씀에 따라 신나게 따라 합니다. nbsp “제1의 길 쾌락, 제 2의 길 고행, 제 3의 길 중도, 이렇게 말합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줄을 매달아 놓고 줄타기하는 사람이 그 줄을 딛고 건너갑니다. 그러면 이치로 설명할 때 줄타기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왼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오른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똑바로 가면 돼요. 쉽죠? 그런데 자기가 직접 올라가서 해보면 될까요? 왼쪽으로 치우치든, 오른쪽으로 치우치든 떨어지겠죠. 그러면 ‘이거는 몇 번 해보니까 안 된다, 이건 불가능한 거야. 말도 안 돼.’라고 하는데 실제로 불가능한 것일까요? 내가 안 되는 거지 이치로는 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이치로는 가능한데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면 이 갭을 어떻게 맞추느냐? 연습을 많이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분이 또는 여러분들이 줄타기를 하면서 떨어지면 또 하고, 또 떨어지고, 이렇게 몇 번쯤 연습하면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최소 만 번 이상은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섯 번 해보고 난 안된다. 열 번 해보고 ‘아, 난 줄타기가 안 돼.’ 그러면 이사람은 재능이 없는 사람이에요? 욕심쟁이에요? 만 번 해야 되는 걸 다섯 번, 열 번 해서 안된다고 포기합니다. 좌절과 절망은 해봐도 안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욕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nbsp nbsp nbsp 그래서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합니다. 될 때까지 꾸준히 하는 걸 정진이라고 합니다. 되고 안 되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돼도 하고 안 돼도 하고. 그렇게 꾸준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침에 참회 기도할 때 절을 하고 싶어도, 절이 하기 싫어도, 절을 하면 다리가 아파도, 다리가 안 아파도, 꾸준히 하는 걸 정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중도는 이렇게 경험을 해야 합니다. nbsp 그러면 제 1의 길, 쾌락이란 건 뭘까요? 쾌락이란 건 철학적 용어이지 생활용어가 아닙니다. 술 먹고, 영화보고, 놀고 이런 걸 쾌락이라고 하는데 여기선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여러분은 뭔가 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욕구는 삶의 동력입니다. 그 욕구가 일어날 때 그 욕구를 채워주고 충족시키면 정신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것을 즐거움이라하고 그게 충족이 안 되고 뜻대로 안되면 기분이 나빠지는데 그것을 괴로움이라 합니다. 이걸 한문으로 ‘즐거움은 락, 괴로움은 고.’라고 합니다. nbsp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때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끝이 나나요? 오히려 욕구가 좀 더 커집니다. 그 다음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원히 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노력을 하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고와 락이 늘 이렇게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고락이 되풀이 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nbsp 사람이 죽어서 소 되고, 개 되고, 말 되고 하는 이것도 윤회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도의 전통 민간사상인 힌두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nbsp nbsp nbsp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고와 락이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고락이 똑같이 50, 50로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떨 때는 고가 70, 락이 30일 때도 있고, 락의 비중이 점점 많아져서 거의 100에 근접하면 락이 지극히 많다고 해서 극락이라고 합니다. 고가 점점 많아져서 고가 지극히 많아지면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가 많아져도 고만 100프로가 될까요? 거기에 락도 조금 있을까요? 아무리 락이 많아도 거기 락이 100프로가 될까요? 고도 조금 있을까요? 그래서 고락은 떨어질 수가 없이 돌고도는 것입니다. nbsp 우리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고는 없어지고 락만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락이 되풀이 되는 이 사슬, 쳇바퀴처럼 얽혀진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해탈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은 고락이 윤회하는 세계 안에서 고와 락을 분리시켜서 고는 없고, 락만 있으면 좋겠다는 이런 허황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복을 구하는 윤회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nbsp 욕구가 있으면 욕구가 충족이 돼야 즐거움이 생기니까 중생은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좀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 복을 구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복을 구하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하면 불교의 ㅂ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천당 가는 게 목표이고 이것이 불교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불교의 ㅂ자도 모르는 것입니다. nbsp 사람은 욕구가 일어나면 그 욕구를 충족시킴으로 해서 일어나는 기분 좋음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하는 것이 쾌락주의가 아니고 욕구를 충족시켜서 일어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라고 쾌락주의에 대해서 설명을 하신 후 불대생들이 알아듣기 쉽게 다시 예를 들어서 설명도 해주셨습니다. nbsp “예를 들어, ‘누가 나한테 100만원만 줬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100만원을 주면 기분이 좋아지죠. 그 다음달에도 주면 기분이 좋아지죠. 그런데 그 기분 좋음이 계속 늘어날까요? 똑같을까요? 줄어들까요? nbsp nbsp nbsp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하면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이 귀찮아지고, ‘그냥 통장으로 넣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통장으로 10년째 100만원이 들어오면 감각이 있을까요? 아무 감각이 없어집니다. 이 기분좋음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00만원 들어오고, 그 다음에 200만원 들어오고, 300만원, 500만원 점점 늘어나야 합니다. 마약과 똑같습니다. 기분 좋음을 유지하거나, 기분 좋음을 점점 높이려면, 마약 투여량을 늘여야 합니다. 나중에는 한달치 한꺼번에 맞아도 별로예요. 그래서 마약과 똑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먹는 것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배고플 때는 종류를 따지지 않고 배만 불렀으면 합니다. 그런데 충분히 먹을 게 주어지면 맛있는 것을 따지게 됩니다. 맛있는 것만 따지나요? 영양도 따지고, 어느 그릇에 담았는지도 따지게 됩니다. nbspnbsp 이처럼 욕구를 따라가서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치로 알아지나요? 대답이 신통찮네요. nbsp nbsp 욕구, 욕망이라는 것은 용납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아예 용납을 안 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도 씨를 말려야 합니다. 먹고 싶어도 안 먹고, 자고 싶어도 안 자고, 가고 싶어도 안 가고. 더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에 필요한 먹는 것까지 부처님께서는 안 먹었잖아요. 잠도 안 자고, 목욕도 안 하고 그래서 아무리 작은 어떤 욕구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철학적으로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nbsp 꼭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고 하는 것이 고행이 아니라 욕구를 참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고행주의이고, 욕구 따라가서 해결하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nbsp 부처님은 29살 출가하기 전까지 쾌락주의를 따랐습니다. 이건 기존의 길이었고, 세속의 길이었습니다. 출가 이후에는 이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으니까 고행주의자의 길, 잠도 들에서 자고, 콩 한알만을 먹기도 하고, 그렇게 6년을 했는데 해결이 안 되었어요. 그래서 뭐가 문제일까?’고민하며 자기 삶을 돌아봤더니 지금 이야기한 이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nbsp 출가하기 전에는 욕망을 쫓아갔고, 출가한 후에는 욕망을 억제했던 것입니다. 둘 다 심리가 편안한 상태가 안돼요. 욕망을 따르는 것은 욕망을 수용하는 것이고, 억제하는 것은 욕망을 반대하는 것 같지만 둘 다 욕망의 노예입니다. 욕망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욕망을 참는 것도 욕망의 노예인 것입니다. nbsp 여기서 제 3의 길은 욕망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욕구가 있는데 욕구에 대응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즉, 이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저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간다는 것입니다. 다만 욕구를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처럼 중도는 욕구를 따르지 않고, 욕구를 알아차리고, 욕구를 지켜보는 것입니다.”라며 현실적인 문제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주시니 중도가 좀 더 명확하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nbsp nbsp nbsp 그 외에도 무아, 윤회에 대한 질문, 계급타파를 위해 부처님은 어떤 실천을 하셨는지, 통일의병 양성, 북한에 정토행자 만들기등의 계획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 부처님은 열반후에 극락에 계시는지 궁금해 하는 질문, 욕구와 집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달라는 분,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살행이 오히려 자본주의 더 강화시키는게 아닌지 궁금해 하는 질문, 내가 없다는 것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모순 되는 것은 아닌지,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연기법이 진리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치열한 경쟁사회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의 실체가 공하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하는 질문,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다겁생래 지은 업장이라는 말에는 나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해 하는 질문, 부처님의 신통력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 기독교의 유일신과 불교에서도 부처님만을 모시고 태어난 곳, 설법하신곳등을 순례하고 성도제일을 기념하는 것이 비슷한 것은 아닌지 궁금해 하는 천주교 신자분, 불교의 많은 부처와 보살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 중도에 대해 실제로 본인이 고민되는 질문을 하신 분등 다양한 질문들도 이어졌습니다. nbsp 약 3시간 30분동안 스님께서는 불대생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해주시고 두북으로 이동하셨습니다. nbsp nbsp 서울공동체 대중들 20여 명과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미리 약속을 해둔 터였습니다. 서울공동체 상주자들은 전날 두북수련원에서 자고, 오늘 아침엔 나물 캐기와 연등 울력을 하고, 또 일부는 저녁 식사 준비 등을 미리 해두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거의 주말마다 경주에 오시는 일정이신데, 올해부터는 서울 공동체 성원들도 두북수련원에서 울력을 하거나 짬짬이 스님과 일정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다음 주에는 청년정토회 평지순례가 있고, 그 다음 주에는 불교대생들의 남산 순례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서울 공동체 대중들은 업무 때문에 참석이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4월 한 달 동안엔 가급적 주말마다 두북수련원에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업무 중심의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심신을 새롭게 하고, 활력을 키워보자는 스님의 제안이십니다. nbsp 그래서 오늘은 가볍게 아주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남산 산행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아무리 ‘가볍게’라고 하셨지만, 이미 정토회에서 수십 년 장판 때를 묻히고 살아온 노회한 공동체 식구들은 압니다. 그렇게 만만한 산행이 아니라는 것을요. 역시나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장장 4시간의 시간이 잡혀있습니다. 공동체 대중들은 각자 물병과 모자, 등산화 등을 단단히 챙기고 나섰습니다. nbsp nbsp nbsp 경주 남산 부처바위골로 올라 탑곡 마애여래상군을 참배하는 것으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바위에는 삼존불과 독립된 불상, 본존과 보살상, 7구의 비천상, 그리고 9층목탑과 7층 목탑이 남면, 동면, 북면 등에 멋지게 새겨있습니다. 마모되기도 해서 찾아보기 힘든 그림도 있지만, 그만큼의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어 그 앞에 서면 그저 경이롭기만 합니다. nbsp nbsp 어딜 가나 늘 스님께서 먼저 설명하곤 하시는데, 갑자기 묘덕법사님더러 설명해보라 하십니다. 다다음주에 있을 불대생 남산순례에서 이곳은 묘덕법사님이 담당하게 되는 코스라고 합니다. 묘덕법사님이 약간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기억을 되살려 열심히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공동체 대중들은 “법사님, 설명이 너무 짧아요. 좀 더 길게요. ”, “법사님 공부하시라고 일부러 스님이 여기로 오자고 하셨나 봐요” 등 그저 법사님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봅니다. nbsp 부처바위의 부처님들께 참배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아픈 환자들도 몇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오늘 죽기 살기로 한 번 가보자”며 격려하신 터여서 나름 각오를 다지는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가장 팔팔해야 할 스물 두 살 풋풋한 대학생 친구가 어쩐지 비틀비틀합니다. 스님의 ‘가벼운’ 산책을 곧이곧대로 듣고, 운동화를 신고 온지라 아직 낙엽이 쌓여있는 길이 미끄럽기도 합니다. 나이든 실무자들은 “다음부터는 아무리 스님께서 가볍게 산책하자고 하셔도 중장비를 갖추고 떠나야 한다”며 실실 웃으며 한 마디씩 던집니다. 중장비라고 해봤자 바닥이 덜 미끄러운 등산화를 이르는 말이지만요. nbsp 그런데 실제로 예전에 비하면 정말 가벼운 산행이었습니다. 오르막길을 최소화하고, 아주 평평한 길을 택하셨습니다. 중간 중간 자주 쉬기도 하셨습니다. nbsp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산에 다닐 수 있을까? 최장으로 잡아도 한 십년쯤 될까? 아니면 5년 정도가 최대로 잡은 것이지 않을까?” nbsp nbsp 누구도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집니다. 우리 스님은 안 늙으시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게나 좋아하시는 산행인데 못할 때를 꼽아보신다니, 이제 스님도 세월의 흐름을 의식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스님과 함께 산행을 못할 때가 언젠가 오긴 하겠지만, 오늘은 그저 봄날의 축복을 만끽해봅니다.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연분홍, 진분홍 진달래가 산허리 둘레둘레 어디나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눈이 즐거웠습니다. 키 큰 진달래나무들이 넝쿨을 이뤄 꽃 동굴을 만들어놓은 곳도 많았습니다. 아직 꽃봉오리가 활짝 피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34일이면 온천지 사방에 꽃 동굴들이 만들어져 장관을 이룰 것 같습니다. nbsp 스님 뒤를 종종 따라가면서 여쭤보았습니다. “스님, 스님께서도 여기 남산에서 못 가본 곳이 있으신가요?” nbsp 안 가본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답변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딱 한 군데 못 가봤다고 하십니다. 아시겠지만 경주 남산에는 약 40여 개의 골짜기가 있지요. 122개의 절터와 57개의 석불, 64개의 석탑 등 불교 유적지가 곳곳에 있고, 수많은 산길이 있어 답사코스만 70여개에 달한다고 하지요. nbsp “비파골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는 유적지가 별로 없어서 지금껏 가보지를 못했어. 전설은 있지. 무슨 전설이냐면, 옛날 신라시대에 어느 왕이 무슨 낙성식에 참석을 했는데 아주 행색이 남루한 스님이 찾아왔다는 거야. 사람들이 문전박대를 했겠지. 스님이 그래도 왕께 참석하게 해달라고 청하니까 왕이 뭐 허락을 하기는 했는데 ‘어디 가서 왕이 함께 한 불사에 참석했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대. 그러니까 그 스님이 왕한테 ‘왕께서도 어디 가서 진신석가를 친견했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하고는 구름 위로 사라져버렸다는 거야. 왕이 부랴부랴 그 스님을 따라가 보라고 시켰는데, 신하들이 거기 비파골까지 가보니까 스님은 온데간데없고 발우가 떡 하니 있더라는 거야. 그래서 부처님이 없다고 해서 불무사라고 이름을 짓고 부처님께 공양을 했다는 전설이 있어. 그런데 거기를 내가 못 가봤어.” nbsp nbsp 아마 머지않아 그곳에도 가볼 날이 있으시겠지요. 봉화대를 지나 칠불암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바위에서 숨고르기를 한 뒤 하산 길을 잡았습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새갓골 석불좌상이 있는 곳으로 왔는데, 사실 스님께서 보여주고 싶어 하신 부처님은 석불좌상이 아니라, 그 옆에 보호막이 쳐있는 마애불입상이었습니다. 입상이었다는데 무슨 연유인지 부처님 얼굴이 땅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엎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옆모습이 정말 예술입니다. 눈과 코, 얼굴 옆선이 마치 그리스 조각상처럼 아주 뚜렷하고 부드러우며 우아합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되면 아름다운 부처님을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nbsp 그런데 워낙 무너진 바위의 크기가 거대해서 복구 작업이 만만치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는데, 내려오는 길이 또 진달래꽃들로 장관입니다. “여기는 남 남산이라고 해. 남산의 남쪽이라는 말인데, 그러니까 봐라, 진달래꽃들이 여기는 더 활짝 폈잖으냐. 저기도 봐라. 저 진달래꽃은 나무가 아주 훌륭하네. 저쪽 옆에도 봐라. 저 멀리도 봐라. 다 진달래꽃들이잖으냐.” 스님께서는 여기, 저기 사방팔방 손으로 진달래꽃을 가리키시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십니다. nbsp 차량 운전자들은 산행 중간에 내려가 차를 미리 하산 지점에 대기해놓고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얼른 올라갔다 와봐라. 조금만 올라가면 진달래꽃들이 아주 멋지다”며 꽃구경을 하라고 권유하십니다. 몸은 어느덧 노곤해졌지만, 스님 뒤를 열심히 따라나선 덕분에 진달래 삼매경에 푹 빠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남산에서 스승님과 또 한 편의 소중한 추억을 쌓았습니다. 스님 덕분에 서울 공동체 대중들도 진달래꽃을 사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nbsp nbsp 남산을 내려와서는 다함께 목욕을 하고 두북수련원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스님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각자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논의할 것을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nbsp 먼저 문화사업부부터 이번에 나오게 될 스님 책과 관련해서 책제목부터 언제쯤 어떤형식으로 나올 것인지에 대해 의논하기도 하였고, 평화재단 교육원과는 다음에 있을 평화리더십 경주역사기행과 관련하여 숙소등을 답사한 것을 가지고 어떤 숙소로 할 것인지등에 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nbsp 또, 4월 마지막주에 한국을 방문할 필리핀 송코 마을 사람들의 한국일정과 숙소, 차량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부서들이 스님과 함께 고민되는 것들을 논의하였습니다. nbsp 오늘 모임은 다들 산행후 피곤할 것을 감안해서 9시 30분경에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 11시 30분에 평화재단에서 모임이 있으셔서 아침 7시에 모두 함께 출발하자고 하시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2015.3.28 제12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강의, 청년학교 행복특강
nbsp 스님께서는 오늘 오전 9시부터 예정된 12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의 강연을 위해 입학 워크숍이 진행되고 있는 용인의 대웅경영개발원으로 울산 두북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하셨습니다. 이틀 전 목요일에 입학식을 마친 12기 평리아 수강생들은 잠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1박 2일 워크숍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하룻밤을 함께 보내서인지 서로 친해져서 다음 날 아침, 모두 환한 표정으로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nbsp nbsp nbsp 진정 성공한 삶을 꿈꾼다는 주제로 가볍고 유쾌하게 시작된 강의는 2시간 동안 이어졌지만, 전날 새벽까지의 늦은 일정에 피곤할법한데 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이 경청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따라 웃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필기를 하면서 서로 공감이 이뤄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nbsp “우리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라는 것이 뭘까요? 어떤 상태를 행복하다고 볼까요?”라는 질문과 함께 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잘 살피면 어떻게 심리가 작용하는지 알아야 자신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기분이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음이 일어날 때를 살펴보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면 기분이 좋아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우리의 기분은 욕구의 충족과 불충족이라는 것에 따라 좋고 나쁘게 반응하고, 이렇게 좋고 나쁨을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괴로움과 즐거움 이 둘을 분리시켜 즐거움만이 있는 인생을 꿈꿉니다. 그러나 고락이 함께 윤회하기 때문에, 고락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려면 ‘락’이 곧 ‘고’임을 알아야 합니다. nbsp nbsp nbsp 인생은 ‘고락’인데, ‘락’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입니다. ‘락’이 곧 ‘고’임을 꿰뚫어 알아야합니다. nbsp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늘 재미를 쫓아 살고 있습니다. 그 재미란 것도 지나고 보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즉 재미를 쫓아서 하다보면 지금은 ‘락’인데, 나중에 ‘고’가 되는 일이 있는 반면에, 일할 때는 힘들었지만 지나놓고 보면 보람으로 다가오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좋게 평가되는 것이 나중에 달리 나쁘게 평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nbsp 예를 들어 저는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구슬치기를 했습니다. 구슬치기를 해서 딴 구슬을 모아서 집에 항아리에 보물처럼 가득 채워놓았는데, 지금은 그 구슬들이 어디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구슬은 그때는 소중했는데 지금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어렸을 때 구슬 같은 것이 뭘까요? 이처럼 지나놓고 보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nbsp nbsp nbsp 여러분들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던 것들이 10년, 20년이 지나서 돌아보면 오히려 실패임을 느낄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20대 초반에 고시에 합격해서 성공일로를 달리던 검사가 8·15 해방되던 날 갑자기 친일매국노로 실패한 인생이 되어 버린 사례를 보면, 이 사람의 삶은 윤리, 법률, 신앙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개인의 삶과 시대적 과제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 됐습니다. 이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일원으로써 국민 전체가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과제가 무엇인지 시대적 과제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nbsp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 앞으로 12주 동안 전문가들의 강의 내용도 듣고, 각기 다른 전문 분야를 가진 30여명이 서로 토론을 하면서 어떤 것이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과제인지 알아보고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함께 일을 해 나가야 하는지 알아보시기 바랍니다.”라는 당부의 말씀을 끝으로 강연을 마무리하셨습니다. nbsp nbsp nbsp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서서 지친 기색도 없이 물 흐르는 듯 한 강연을 마치시고 질의응답에 답변을 해주시고 수강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마친 후에 떠나셨습니다. nbsp 다음 일정은 경기도 여주에서 열리는 평화재단 청년포럼 주최 ‘새로운 백년 청년학교5기 첫걸음 워크숍’ 이었는데, 스님께서는 청년들을 위한 행복특강을 해주기로 하셨습니다. 일정이 저녁 7시 30분부터 시작하는 관계로, 스님께서는 중간에 비는 시간을 이용해서 양지IC 근방, 백암 지역 쪽에 수련원 부지를 둘러보셨습니다. 그리고 청주에도 조그마한 부지가 있어서 둘러보시고 난 후 여주 행사장으로 이동하셨습니다. nbsp nbsp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스님께서는 담당자인 평화재단 청년포럼 오태양 국장과 청년학교 교장인 최광수 교수님을 만나 잠시 이번 행사에 대해 말씀을 나눈 뒤 시간이 될 때까지 원고 교정을 보셨습니다. ‘새로운 백년 청년학교’는 전국의 2030대 청년들이 8주 동안 스님의 책을 읽으면서 인생관과 사회관, 시대관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배우는 과정입니다. 이날은 특별히 새벽 일찍부터 전국 38개 지역에서 속속 모여들어 총 366명이나 참석했습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 강연장에 들어서시자, 청년들이 일제히 뜨거운 환호를 보냈습니다. 스님께서는 단상에 오르신 뒤 “저녁은 잘 먹었느냐?”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얼마 전 필리핀, 라오스, 인도 등을 다녀오셨는데, 남방불교에서 스님들은 오후 불식을 한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오후에 식사를 안 하고 계시는데, “내가 안 먹었으니 여러분도 안 먹어야 되는 거 아니냐?”며 가볍게 농담을 하시면서 “듣자하니 오늘 오기로 한 청년들 중에 새벽에 못 일어나서 30명이 못 왔다고 하는데, 초등학생들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새벽부터 먼 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라며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풀어주셨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개인의 고민을 많은 대중들 앞에서 얘기하라고 하면 부담을 느끼니, 그 전에 스님 근황부터 얘기해주겠노라며 말문을 터주셨습니다. 최근 인도에 다녀온 말씀을 해주셨는데, 사실 이번에 스님께서 둥게스와리 지역 15개 불가촉천민마을 1430집을 한 집, 한 집 다 방문하면서 마을의 앞으로의 발전계획을 세웠다고 이야기 해주셨습니다.nbsp각 마을을 방문하실때 nbsp청년 자원봉사자 몇몇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하셨답니다. 40년 넘게 자전거를 안 타보시다가 이번에 장장 80km를 주파하셨는데, 그 뒤 며칠 동안 골반이 아파서 몹시 힘들더라는 말씀도 재밌게 해주셨습니다. nbsp nbsp nbsp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앞을 보고 해야 해요. 지금 당장 요청되는 일이라도 10년, 20년이 지나면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또 지금은 별로 현실성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10년, 20년 지나면 아주 중요해지는 게 있고요. 그러니 미래까지 고려해야, 실패할 확률이 적어집니다. 그러려면 첫째 방향을 잘 잡아야 하고, 두 번째 헌신적으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원래 미래를 바라보고 하는 일은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시행착오도 많고요. 그러니 시작할 때 각오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요새 여러분들을 보면 제가 느끼기에 안전한 것에 보다 집중하는 것 같아요. 공무원이나 교사, 관청 직원, 아니면 대기업 등에 몰리지 않습니까? 안전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렇게 안하려고 해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젊음이란 뭔가요? 도전성 아닙니까? 필리핀이나 이런 데 가서 한 3년 일한다면, 해마다 2,500만원 정도 연봉을 받는다고 치면 한 67천 만원 정도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현장 경험을 쌓는 측면에서는 손해가 아닐 수도 있어요. 오히려 자기 삶의 큰 자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청년들의 도전성을 격려하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 nbsp 질문이 시작되자 많은 청년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10년 된 친구들이 있는데 작년에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그렇고, 최근 집수리할 때도 자기를 외면하는 바람에 친구들이 너무 미워져서 절교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 친한 동생이 사고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돼서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질문, 자신이 바보 같은 부분이 많고 후회를 되풀이하는 데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지 알려달라는 질문,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소비욕구가 심한 것 같아 고민이라는 질문, 남자친구가 있는데 다른 남자가 더 좋아진다는 질문, 아버지의 암 선고와 이모의 죽음에 이어 언니까지 암에 걸려 집안에 우환이 계속되자 점집이며 철학관에 다녔는데 모두들 조상님께 천도재를 지내라고 해서 고민이라는 질문, 군대까지 기다리며 3년 사귄 남자 친구랑 헤어져서 힘들다는 질문, 가정사가 힘든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있는데 조언에 한계를 느껴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질문, 사람을 인상 보고 판단하고 싶지 않은데 인상을 보고 판단해서 고민이라는 질문, 어떻게 스님처럼 현명해질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등 아주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nbsp 이 중에서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4년제 대졸 출신이 아니면 승진 기회를 주지 않아 고민이라는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nbsp nbsp nbsp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4년제 대졸 출신이 아닌 사원은 승진이라든지 상위 직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의 별따기 수준인데 막상 그만두려고 하니 우리나라 경제 상황 상 다른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제 스펙에서도 힘듭니다. 첫 번째는 이런 직장을 단ㅕ야 하는지를 고민 하는 게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두 번째는 이런 걸 감안하고 계속 회사에 다닐 거라면 어떤 마음으로 다녀야 되는지 궁금합니다.” nbsp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선, 질문자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걸 고민해서 뭐해요. 다른 직장을 가질 기회가 있다고 하면 미래를 생각해서 옮겨야 할까, 현실을 생각해서 그냥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할 수가 있지만, 지금 질문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 아닙니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승진의 기회가 없는 구조라면, 승진할 생각을 안 하면 됩니다. 농땡이 치라는 소리가 아니고, 승진 같은 것에 고민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자기는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nbsp 그런데 이런 문제이면 다릅니다. 사회가 헌법에 어긋나는 규정을 갖고 있다면 노동청이나 법원에 이런 규정이 합당하지 않다고 제안해서 변화를 시킬 수는 있습니다. 이때도 자신은 회사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안 그러면 자기 기분이 나빠서 먼저 떨어져 나가버려요. 이 회사가 승진을 안 시켜주지만, 그래도 나를 고용해주니 정말 고맙다, 이런 마음을 내야 합니다. ‘사장님, 그러나 이 문제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가 지켜야 할 헌법에 어긋나네요. 개선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해보세요. 그렇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nbsp nbsp 우리 사회는 경쟁사회입니다. 경쟁사회는 경쟁이 공정해야 합니다. 경쟁이 공정하다는 것은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출발선상에서 기회가 균등한가. 둘째, 경쟁 과정에서 적용되는 규칙이 공정한가. 즉 집행이 공정한가. 셋째, 결과가 공평한가. 그런데 어떻습니까? 첫째, 둘째도 어렵지만 셋째는 더 어렵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승자독식이라서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지난 20여년간 신자유주의 열풍이 불었잖아요.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다 갖고, 진 사람은 못 갖습니다. 결과에서도 공정하려면 어떻습니까? 이긴 사람이 많이 갖고, 진 사람이 적게 갖는다고 해도, 적절한 비율로 나눠야 합니다. nbsp 예를 들어, 우리가 예전에 가난하고 못 살 때는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10명이 100m 달리기하면 상으로 줄 공책이 6권밖에 없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1등에게 3권, 2등에게 2권, 3등에게 1권 이런 식으로, 1, 2, 3등에게 6권을 몰아줍니다. 나머지 7명은 아무 것도 못 받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경제가 좋아져서 상품이 많아져서 공책이 16권이나 된다고 합시다. 그럼 예전 방식대로 하면 1등에게 10권 주고 2등 4권, 3등 2권 이런 식으로 3명에게 다 몰아주겠지요? 그런데 참가자 전원에게 1권씩 주고, 또 경쟁은 경쟁이니까 나머지 6권에 대해서 1등에게 3권 주고, 2등에게 2권 주고, 3등에게 1권 준다고 하면 어때요? 우승한 사람이 많이 가져가지만, 동시에 진 사람들도 일정 비율 배분받을 수 있는 안전망이 구축되는 거죠. 이게 공평한 분배라는 겁니다. 공평하다는 건 똑같은 분배를 한다는 말이 아니고요. nbsp nbsp 대한민국은 그렇다면 공정사회냐? 대한민국은 공정한 사회가 아닙니다. 과거와 동일한 분배방식을 주장하잖아요. 아까도 말했듯이 출발선상에서의 균등한 기회, 과정에서의 공정성,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공평한 분배가 공정사회인데, 우리 사회는 모든 면에서 매우 부족합니다. 그래서 사회 불만이 생깁니다. 지금 질문자가 불공평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겁니다. 그런데 이런 관습이나 체제는 혼자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남녀차별, 학벌 차별, 지역 차별 등 이런 건 모두 헌법정신에 어긋나지만, 관습이 아주 강고하게 남아있으니까요. 그러니 경쟁 사회 속에서도 모든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런 사회를 바로 복지사회라고 하는 겁니다. nbsp 즉 안전망을 구축해야 하는 건데, 경쟁 자체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 그리고 장애인, 환자, 재난을 당했거나 실업을 했거나 등등 이런 사람들은 경쟁 자체에 포함시키면 안 됩니다. 둘째, 자유경쟁을 하더라도 조세정책이 바르게 집행돼야 합니다. 즉 바른 조세정책과 재정정책에서 바른 복지정책이 나옵니다. 마치 복지정책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뭐를 자꾸 나눠주는 거라고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예전처럼 최저빈곤선에서는 벗어났지만, 현재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 불공정이 극심해지면서, 상대적 빈곤감이 깊어졌습니다. 자기가 불공정함을 느끼는 것도 이런 이유 아니겠어요? nbsp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거냐 이럴 때는 ‘고용해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이래야 하지만, 불공정성에 눈감아서는 안 됩니다. 불공정한 것을 빤히 보고도 눈감는 건 오히려 사회 발전의 장애 요소입니다. 자기 마음은 편안히 하더라도, 불공정은 시정하려고 해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들이 민주사회에서 불공정을 시정할 수 있는 수단 바로 투표입니다. 모든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주권 행사를 안 하기 때문에 이 불공정이 시정되기 어려운 겁니다. nbsp 사회에 불만이 있거나 불공정을 느끼는 세력일수록 투표를 거의 안합니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에 차선도 아니면 차악이라도 투표를 해야 하는데, 이도 저도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아예 투표를 안 하죠. 우리에게 선택지가 최악과 차악밖에 없다고 하면, 우리는 그래도 차악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투표를 아예 안하니까 결과적으로 최악을 늘 온전 시킵니다. 우리에게는 불공정을 개선해나가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nbsp 그런데 합법적인 절차로 파업을 하더라도 악을 쓰고 분노를 표현 하면 오래 못합니다. 하다가 관두게 되고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는 게 오래 갈까요? 악을 쓰면서 하는 게 오래 갈까요? 그러니까 개선이 필요하면, 그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래하지 못합니다. nbsp nbsp 질문자도 문제를 개선하려면 그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합니다. 상사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못 견뎌서 자기가 고치도록 말이죠. 수행과 사회 변화는 상반되는게 아닙니다. 개인이 행복한 것과 사회를 좋게 만드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동시에 할 수 있는 겁니다. 국가를 부정하지 않고 헌법의 틀 안에서도 할 수 있고, 헌법이 잘 못 됐다면 그것마저 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저 누가 해주기를 바랍니다. 기성세대가 뭣 때문에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기득권이 나쁘다고 비판하면서, 그 사람들이 알아서 바꿔주기를 바랍니다. 알아서 바꿔주면 그 사람들이 천사잖아요. 그러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개선을 하려면 여러분부터가 노력을 해야 하고 희생을 해야 합니다. 나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되, 불공정한 것들은 시정해나가려고 해야 하는 겁니다.” nbsp 개인의 고민에서 비롯된 질문이었지만, 스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떤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nbsp 이 질문 외에도 청년들의 다양하고 유쾌한 질문과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행복특강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nbsp 질문 중간에 한 청년이 “스님 저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너 잘하고 있어’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못 해줘”라고 말씀해줘서 강연장에 큰 웃음이 터졌습니다. 스님께서는 “스님은 위로해주는 사람은 아니라 다만 진실을 말할 뿐입니다. 남을 비난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위로해주는 사람도 아니에요. 그런 말은 옆에 있는 남학생한테 해달라고 해요”라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nbsp 마지막으로 스님께서 정리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도 이틀을 살아도 연애를 하든 헤어지든, 헤어져 우는 가운데 행복해야 합니다. ‘헤어지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슬퍼도 슬픔에 깊이 빠지지 않습니다. 둘째, 스무 살이 넘었으면 자립을 해야 합니다. 자립하는 것이 꼭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집에서 먹고 살면 밥값을 해야 해요. 엄마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해드리고, 파출부로 생각해서 50만원어치는 내가 해야 하는 겁니다. 어린애처럼 굴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nbsp nbsp 그리고 이 사회의 민주화가 더 심화될 수 있도록, 좀 더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평화통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심화된 나라에서 투표 의무제가 있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호주같은 경우는 투표율이 90 가까이 나옵니다. 투표는 국민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는 겁니다. 만약 투표를 안한다고 하면, 주권을 가졌다고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의식이 좀 약한 것 같아요. nbsp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느끼면 시정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은 행복하도록 하되, 사회의 불공정은 시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의 불공정을 시정하면 어때요? 개인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좋은 조건이 되기도 하죠. 기성세대처럼 그저 니가 문제야 이렇게 얘기하지 말고, 투표를 통해서 개선해가도록 해보세요. 여러분들이 힘을 합해야 하는 겁니다. 할아버지 세대와 아버지 세대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투신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투신해야 할까? 공공의 정의를 위해 한번쯤 노력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통일이야말로 우리시대의 큰 과제가 아니겠습니까? 이건 할아버지도 못했고, 아버지도 못했잖아요. 이 통일조국을 건설하겠다는 큰 비전을 갖고 노력하면,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큰 자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개인의 꿈도 필요하지만, 우리 모두의 꿈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삶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기쁩니다. 좋은 질문을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nbsp 스님의 마지막 정리 말씀에서 청년들이 세상을 바꾸는데 큰 용기를 주고자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nbsp nbsp nbsp 강의가 끝나고 참가자가 많은 관계로 앉아서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떠나시는데 스님이 들어오셨을 때보다 더 큰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스님이 나가는 길목마다 많은 청년들이 나와서 악수를 청하면서 스님께 “스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를 외쳤습니다. 뜨거운 환호성 속에 청년들의 고민들도 날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결국 밤 11시가 넘어서야 강의장을 나설 수 있으셨습니다. nbsp 질문을 했던 참가자들은 “답은 내 안에 있었는데 스스로 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청년학교에서 방황해도 괜찮아 세미나를 하고 와서 오늘 스님 말씀이 더 크게 와 닿았습니다.”, “개인의 고민에 대한 조언에서 우리 사회를 보는 시각까지 넓혀 깊이 있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는 소감을 전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nbsp 스님께서는 내일 새벽 6시부터 가을 불교대 특강이 있어서 바로 문경수련원으로 이동하셨습니다. nbsp
2015.3.27. 출가재일 기념법문
nbsp nbsp 어제 해관 장두석 선생님의 시타림에 다녀오니 새벽 3시 40분이었는데, 스님께서는 잠시 개인정비를 하신 후 바로 새벽기도와 발우공양에 참가하셨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오늘이 출가재일이라고 하시면서 “출가열반절 사이 일주일간 정토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든 일을 쉬고 용맹정진 해왔어요. 이런 정진기간 중에는 개별적 외식은 삼가주시고 각자 정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가자는 출가열반재일이라고 모두 절에 와서 정진하는데, 여기 절에 사는 대중들은 업무 본다고 정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대중들 정진기간이라는 것 명심해서 공동체 대중들은 정진 중에 잠시 나와서 일 본다는 생각으로 업무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출가·열반재일 입재·회향법문은 직강이니 가능한 법회에 참가하기 바랍니다.”라며 공동체 성원들도 이번 출가열반재일기간에는 업무보다는 정진에 중심을 두고 생활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nbsp 발우공양후 7시 30분부터는 평화재단에서 헌법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시는 사회원로분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누신 후 10시부터는 서초동 정토법당에서 출가재일기념법문을 하셨습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오늘은 부처님께서 수행하기 위해 출가하신, 29년간 살던 집을 나오신 출가일입니다. 날짜로는 음력 2월 8일, 나이는 29세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여 6년간 고행하신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시고 45년간 쉬임없이 전법을 하시다가 80세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정토회에서는 출가일인 음력 2월 8일에 입재하여 열반일인 음력 2월 15일 회향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용맹정진을 하고 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nbsp 이어서 스님께서는 출가절을 비롯한 4대 명절과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2600여년전 인도의 브라만 시대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브라만시대는 역사적으로 1천여년간 지속되었는데, 베다시대, 종교시대, 철학시대, 쇠퇴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 nbsp 브라만시대의 특징은 세가지인데 첫째가 우주만물을 신이 창조했다는 창조설이고, 둘째는 신이 인간을 4개의 계급으로 창조했으므로, 인간은 신의 창조질서에 따라 계급질서에 맞게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 의식을 통해 죄를 사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이라고 설명해 주시면서 nbsp “그런데 사회가 발전, 변화하면서 이러한 주장에 모순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에서 무기 등 군사력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신의 보살핌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믿음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제계급의 권위가 떨어지고 왕족의 힘이 강해지고 장자계급의 힘이 커졌습니다. 급기야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신은 없다는 주장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이처럼 이런저런 다양한 주장이 나타나고 지지자가 등장하여 브라만 사상에 반대하는 비주류를 형성해 갔습니다. 그런 많은 견해 중에 영향력이 큰 세력을 불교에서는 ‘6사외도’라고 합니다.” nbsp nbsp “이러한 때에 부처님이 태어나셨는데, 부처님은 전통 브라만 사회에서 자랐으므로 기본적으로는 전통 브라만 사상을 지녔습니다. 부처님은 성장하면서 사회의 여러 모순을 접하게 되고 그동안 믿었던 전통 브라만 사상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오히려 비주류의 주장에 동조하는 등 13년 동안 많은 고뇌를 하고 사색을 하게 됩니다. 부모의 권유로 결혼하고 애를 낳기도 했고, 왕인 아버지의 명령으로 한 지역을 맡아 다스려 보기도 했는데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nbsp 결국 29세때 집을 나와 스승을 찾아 답을 구했지만 여전히 의문을 풀지 못해서 결국은 스스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야 근방의 전정각산으로 가셔서 6년 동안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6년의 고행 끝에 욕구를 따라가는 쾌락의 길도, 욕구를 억압하는 고행의 길도 해탈의 길이 아님을 깨달으시고 중도의 길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nbsp 부처님은 출가 전에는 주류의 길인 쾌락주의를 ?다가 출가 후에는 비주류의 길인 고행주의를 ?다가 다시 이 길, 저 길을 다 버리고 새로운 길을 발견하셨습니다. 이것이 중도이고 이 중도의 수행을 하셔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nbsp nbsp nbsp 부처님이 어떻게 출가하시고 어떻게 중도의 길을 발견하셨는지 열정적으로 설명하실 때 대중의 분위기가 숙연해 집니다. 출가가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해 보기도 했습니다. nbsp 스님은 이어서 부처님이 출가 전과 출가 후의 어떤 옷을 입으시고, 어떤 음식을 드시고, 어떤 집에서 사셨는지를 말씀하시면서 출가정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nbsp “부처님은 당시 최고의 옷을 입으시다가 출가해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덮는 천, 부정한 것으로 여겨 아무도 손대지 않는 분소의를 입으셨습니다. 부처님은 당시 최고의 음식을 드시다가 출가해서 얻어먹었습니다. 어떤 사람보다 더 못한 음식을 드셨습니다. 부처님은 비단으로 장식하고 향을 피운 최고의 집에서 사시다가 출가해서 나무밑이나 동굴에서 사셨습니다. nbsp nbsp 의식주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바꿔지는 게 출가입니다. 스님 된다고 다 출가가 아닙니다. 가치관과 생활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스님이 된다고 다 출가가 아닌 이유는 가치관이 안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출가하고도 높은 지위, 부귀영화를 못 버리잖아요. nbsp 집이 무엇인가요? 집이 상징하는 것은 안온한 곳입니다. 동시에 속박, 구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 으로 돌아간다’, ‘집을 뛰쳐 나간다’고 말하잖아요. nbsp 정토행자 한 분이 지금까지 여기에서 사시다가 오늘 집으로 돌아간대요. 왜 절에 왔을까? 그때는 집이 속박으로 느껴지니 뛰쳐나온 거예요. 그럼 왜 다시 들어가는가? 집이 안온한 보호처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다시 들어가면 처음에는 안온하지만 다시 또, 속박으로 느껴지겠지요. 그럼 또 집을 나오겠죠. 이렇게 갔다 왔다 하는 것은 출가가 아니고 가출이라고 합니다. 더 좋은 보호처를 찾아가는 것은 가출입니다. 더 좋은 보호처는 더 큰 속박이 됩니다. nbsp nbsp 부자집이나 지위가 높은 집으로 시집가면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집에서 살겠지만, 속박은 커지고 하녀가 되기 쉽습니다. 이것이 과연 행복일까요? 사람들은 더 좋은 안온한 곳을 찾는데, 이것이 더 큰 속박이 된다는 것을 잘 꿰뚫어봐야 합니다. 안온처가 되었다가, 굴레가 되었다가, 이렇게 늘 뒤바뀌는 게 윤회입니다. 그래서 해탈은 ‘윤회를 끊어버린다, 집을 불살라 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nbsp 속박과 안온처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끔찍이 사랑받고 싶지요? 끔찍이 사랑받을 때 속박이 더 심해지지요. 그래서 제가 늘 말하잖아요. 누가 나를 좋아 한다고 하면 나는 겁난다고. nbsp 중생은 낙만 있고 고는 없고, 안온처는 되고 굴레는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움직입니다. 이를 꿰뚫어 알아야 고집멸도에서 ‘일체가 고이다’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낙이 고인줄 알아야 고성제를 아는 것입니다. ‘낙이 고’인줄 알아야 낙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nbsp 집을 불살라버리는 게 출가입니다. 더 좋은 집을 찾아 집을 떠나는 것은 가출입니다. 과연 집을 불살라버리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요? 집이 고임을 꿰뚫어 아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요?” nbsp nbsp 이 대목에서 대중들은 모두 숙연해 집니다 nbsp “이게 딱 안 잡히면서, 절에 다니며 ‘불교가 좋다’, ‘정토회가 좋다’하는 것은 모래 위에 성 쌓기입니다. 출가하겠다고 절에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가출한 사람입니다. 집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가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갔다 오너라’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좋은 옷 입고 마차 타고 다니면 어땠을까요?” nbsp 스님은 분위기를 바꿔 다정한 어조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대중은 중간중간에 밝은 목소리로 일제히 “예, 쉬워요.”라고 대답합니다. nbsp “출가절을 맞아서 오늘부터 열반일까지 1주일만 출가정신으로 살아봅니다. 출가의 자세로 살아보기 위해 작은 거 몇 개만 지켜서 해봅시다. 여러분, 하실 수 있어요?” 첫째, 걸식하라는 소리는 안할테니, 일주일만 더 맛있는 거 찾지 않도록 합니다. 있는 것만 먹지, 먹는 거 가지고 껄떡거리지 않습니다. 둘째, 하루 한끼 먹으라 소리는 안할테니까 정해진 3끼 이외에는 먹지 않습니다. 쉬워요? 안쉬워요? 셋째, 일주일만 고기 안 먹는다. 이미 섞여있는 것을 골라낼 것까지는 없지만, 일부러 먹지는 않습니다. 넷째, 분소의를 입으라는 소리는 안할테니까 옷 입을 때 고르지 않고, 무얼 입을까 머리 굴리지 않습니다. 입는 것 가지고 신경쓰지 않습니다. 다섯째, 나무 밑이나 동굴에 자라고는 하지 않을테니까, 때 아닌 때에 졸거나 자지 않습니다. 밤에 자지 말라는 게 아니고, 낮에 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섯가지를 지켜서 해보고 괜찮으면 계속하고 못하면 열반절까지 해봅니다. nbsp nbsp 머리 장식은 꾸며서 잘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거 못하게 하려고 머리 깎게 한 것입니다. 머리를 자르고 분소의를 입었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관과 기득권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번주 수행중에는 사장이라 하더라도 권위를 부리지 않습니다. 이번 주 중에는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에게 권위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라는 뜻입니다. 이번 주에는 어떤 권위에도 기죽지 않고, 비굴하지 않고, 당당해야 합니다. 자기가 교만해지거나 비굴해 질 때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nbsp 작은 거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해 봅니다. 자기 습관으로 살아가는 것을 극복해 봅니다. 욕망의 노예, 습관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욕망과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이번 주만이라도 결심을 해서 5가지를 지키면서 300배 정진을 해봅시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고, 자기가 자기를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래야 출가절의 의미가 있습니다.”라며 출가열반절을 맞이하여 5가지를 지키면서 정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nbsp 오늘 참석한 대중들은 모두 힘차게 “네”라 답하여 스님께서 당부하신 것을 지켜서 해보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nbsp 이렇게 출가절 법륜스님의 법문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태산 같은 가르침을 주시고 출가열반재일 용맹정진 기간 동안 지켜야 할 과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습관 때문에 과제를 이행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자상하고 따뜻한 가르침에 감사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법문이 끝나자 스님의 가르침을 새기며 300배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4월 3일 회향법문 때 뵐 때까지 300배 정진과 출가정신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nbsp nbsp 법회후 JTS 관계자와 간단히 업무 논의를 한 후 이어서 법사단 회의가 방 1에서 12401510까지 두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오늘 논의는 전국 가을불대생 대상으로 진행되는 4월 경주남산순례 일정 및 코스 점검, 신규법사님들의 역할 배정, 9월 미주행자대회에 참가할 법사 배정, 초파일 이후 진행될 법사단 수련 일정, 본부불사, 연수원 불사, 인도와 필리핀 공동체 운영, 의식 및 염불 등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nbsp 경주남산순례에 대해서는 참가자 수에 따라서 순례횟수를 조정하고 코스 조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방침을 정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답사를 먼저 다녀오신 뒤에 법사단에서 담당 코스별로 답사를 할 때 체크해야 할 사항들을 알려주셨습니다. 특히 가장 위험한 코스, 가장 먼 코스, 가장 볼 것이 없는 코스 등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대중이 안전하면서도, 시간에 맞추어서, 볼 것도 많도록 할 것인지 의견을 주셨습니다. nbsp 매년 틈나는대로 자주 자주 올라보는 남산인데도 행사 전에는 다시 한번 답사를 하며 꼼꼼하게 볼거리와 안전문제, 시간 등을 체크하시면서 연구하시는 스님의 모습을 뵈면서 큰 배움을 얻습니다. nbsp nbsp 신규법사님들에 대한 역할을 배정하면서도 개개인의 부족함에 초점을 맞추고 이제는 극복하는 방식보다는 이미 갖고 있는 장점이 잘 살려지도록 기회를 주고자 고려하시는 모습에서 법사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게 됩니다. nbsp 인도와 필리핀에 공동체가 다시 자리를 잡으면서 제이티에스 사업과 공동체 살이가 섞이거나 충돌이 되지 않도록 다시 정리해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이런 저런 논의를 하다보니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졌습니다. nbsp 법사단 회의를 마치자 마자 스님께서는 정토회 고문이신 각해보살님을 문병하기 위해 오후 3시 부산으로 출발하셨습니다. 가는 길에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님의 어머님 별세소식을 듣고 병원에 먼저 들러 문상을 한 후 성불사를 찾아 각해보살님 병문안을 하셨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계속해서 해외 일정이 있어서 병환소식을 듣고도 찾아뵙지 못하다가 오늘 찾아뵈니 각해보살님께서는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이렇게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신 후 두북 숙소로 들어가니 밤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nbsp 내일은 아침 9시부터 용인에서 평화리더십아카데미 강의가 있습니다.
2015.3.26.SBS촬영팀과 식사및 회의, 제12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입학식등
오늘 새벽 12시 40분경 인천공항에 도착하신 스님께서는 새벽 1시 40분경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하셨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계속 원고수정등 업무를 보시다가 새벽 5시 기도와 발우공양에 나오셨습니다. 오늘 스님께서는 대중공사를 통해 공동체 봄 나들이 일정을 확정지었고, 스님께서 일정중에 언제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할 것인지를 의논하셨습니다. 또, 어제 대중공사에서 스님께서 발우공양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오늘은 누가 공양당번이었는지를 확인하시고는 어제 스님께서 짚어주신대로 잘 하셨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오늘은 두부구이가 나와서 기름이 좀 있었는데, 팔팔 끓는 숭늉을 잘 준비하였고, 밥도 촉촉하게 잘 했다고 대중들앞에서 공양당번들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nbsp nbsp 발우공양을 마치고나서 스님께서는 어제 밤 잠을 주무시지 않아서 오전은 휴식을 취하셨다가 12시부터 평화재단에서 SBS촬영팀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촬영할 것인지, 스님께서 어떤 것을 더 지원해주면 되는지를 논의하셨고, 또 촬영팀은 스님을 더 이해하기 위해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기도 하였습니다. nbsp 촬영팀 중 한 분이 스님께 스님에 대해 취재하고 공부하면 할수록,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우울해진다고 말씀하시니 스님께서는 잘 전달하고 싶다는 것은 괜찮지만, 잘 전달하고 싶다는 것에 너무 집착을 하게 되면 지금과 같이 우울해 지게 된다면서, 어차피 100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30를 전달할 때도 있고, 70를 전달할 수도 있는데. 가능하면 조금 더 퍼센테이지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하라는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nbsp nbsp 이어서, 촬영팀에서 “이틀전 평화나눔연구소 개소식에서 종교인이라면 정부가 막는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넘어서서 감옥에 가더라도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이것을 방송에서 방영해도 괜찮을까요?”하며 질문하셨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제가 말 표현을 세련되게 하지 못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종교인들은 신앙의 원칙과 목표가 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 하고 병든 사람이 있으면 치료해야 합니다. 일반인은 사람이 굶어 죽어도 범죄인이니까, 적이니까 죽는 게 잘된 것이란 식의 사고를 하기 쉽지만, 이는 감정에 치우친 것입니다. 그것은 보통사람의 이야기이고, 종교인이면 그 감정을 뛰어넘어서 국적, 성별, 인종과 상관없이 굶어죽는 사람을 먹여 살리고 아픈 사람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 정신이 적십자 정신 이고 인도주의 정신입니다. nbsp 북쪽에 어린이, 환자 등 소위 말하면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정부에게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해야 합니다. 각 국의 법을 넘어선 보편적 윤리가 바로 유엔인권헌장입니다. 다시 말해 한 나라의 입장이 아니라 전 인류의 입장에서 본 원칙입니다. 정부가 이 원칙을 지키지 않을 때 우리가 정부를 설득해야하지만 그래도 정부가 지원을 반대한다면 시민단체는 이것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인이라면 때로는 이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거기에 갇혀 있으면 굳이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종교인들은 법을 어겨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법을 어겨서 처벌은 받게 된다면 그 처벌도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이야기 인데 발표장에서 짧게 얘기하다보면 오해가 생길 수가 있는 것 같아요. nbsp nbsp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5년 동안 인도적 지원이 잘 안되었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인도적 지원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이 없으면 정부가 지원하라고 해도 지원할 필요가 없고,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면 정부가 지원하지 말라도 해도 해야 합니다. 지금 북쪽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데, 북한 권력자가 미워서 안 돕는다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이중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nbsp 다만 그것이 북한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북한지도자가 밉다고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nbsp 정말 도움이 필요하다면 사람들이 정말 굶어 죽고 있는지, 영양실조 상태가 심각한 지를 먼저 조사해야 하고 또, 우리가 지원한 것이 그들의 열악한 상태를 개선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가를 모니터링 해야 합니다. 제가 볼 때는 지원하면 100 가는 것은 아니고, 하나도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일부가 유출됩니다. 그것을 감안하고라도 지원하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 된다고 판단된다면 지원해야 합니다. 그런 원칙에서 벌써 56년 이상 있으니까 이제는 종교인들이 너무 정부눈치 보지 말고 굶어죽는 거 알면서 못 돕고 있으니까 좀 극복해야 합니다. 첫째 정부를 설득 해야 하고, 더 이상 설득 안 되면 지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비난은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을 십자가를 질어진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라면 마땅히 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에겐 그런 십자가 정신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그런 측면에서 얘기 한 것입니다. 요약하면 인도주의적 원칙에 어긋난다면 현행법에 연연할 필요 없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런데서 오는 불이익을 감수할 수 밖에 없지 않나? 하는 뜻으로 말했는데. 과격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라며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 종교인이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 다시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nbsp nbsp 이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해나 무지가 있습니다. 스님께서 여러 가지 사회활동, 환경활동 등을 하시는데 이런 것들을 일반인들이 하면 되지, 왜 불교에 있는 스님께서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가? 하는 궁금증들을 갖고 있습니다.”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nbsp “여러분들은 스님이다 하면 스님이라는 정해진 울타리 안아 가두게 됩니다. 예를 들면 결혼했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남편이고, 아이와의 관계에서는 아버지이고, 회사와의 관계에서는 직원이 됩니다. 가정에서 부인이 아내 역할만 충실하기만을 바라고, 아이는 아버지 역할만 제대로 하기를 바라고, 회사에서는 직원으로 보고 직원으로 충실하길 바란다면, 이것만 가지고도 갈등이 됩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교회를 다닌다면 교회에서 신도 역할을 해야 하고 학교에 가면 학생, 가게에 가면 손님역할을 해야 합니다. 존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법륜스님 뿐만 아니라 누구든 마찬가지로 역할이 많고 바쁩니다. 근데 이게 현실인데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신자 역할만 해라, 직원 역할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nbsp 또 사회 구성원의 한사람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일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제가 사는데 승려니까 승려로써 요구되는 일이 있어요. 승려는 수행자입니다. 수행자가 뭐냐 하면,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자입니다. 내가 나라가 독립이 안 되었다고 괴로워하면 애국자는 되더라도 수행자는 아닙니다. 인도에 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돕는다고 괴로워하면 사회사업가는 될지언정 수행자는 아니에요. 수행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이것이 주 역할이에요. nbsp nbsp 그 다음에 수행자는 자기만 행복해지면 된다고 하면 소승불교에요. 그리고 자기도 행복하고 남이 행복하고 자유로운데 기여하는 게 대승불교에요. 그 기여하는 방법은 첫째 이 좋은 법을 남에게 알려야 합니다. 불교 신자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깨달은 이런 이치를 다른 사람도 배우면 자유로워지니까 ‘괴로운 사람들 이거 한번 해 봐라’하고 권하는 것이에요. 또 내가 수행자인데 초심자가 아니라 시니어 그룹에 속하면 다른 사람이 행복해 지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해 줘야 합니다. nbsp 저는 정토회에서 지도 법사입니다. 이 길을 가는 데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무작위 대중을 위해서는 즉문즉설을 해서 도움을 줍니다. 그 다음에 불교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불교진리에 근거해서 체계적으로 가르칩니다. 그 다음에 황사 문제가 있고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이 문제된다면 수행자라고 황사나 방사능 오염의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수행을 하던 안하던 다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단체, 시민단체 할 것 없이 다 같이 해야 합니다. nbsp 그러니까 나도 숨 쉬고 사니까 인류의 한 사람으로 환경은 보존해야 하고, 한민족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나서 수백만 명이 죽고 재산을 잃는 고통은 수행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안 일어나야 하고 평화를 유지하려면 미래를 보고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옛날 얘기만 하면 부부싸움도 끝이 안 납니다. 우리사회도 마찬가지에요. 계속 옛날 얘기만 하면 갈등이 끝이 없습니다. 서로 부족함이 있지만 협력하는 게 이익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평화 통일을 얘기해야 합니다. nbsp 또 인류의 한 사람으로써 인도 불가촉천민들처럼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도와야 합니다. ‘왜 이런 일 하느냐?’고 질문 하는데 이게 맞는 얘기인가요? ‘너는 왜 네 남편 네 자식만 돌보느냐’고 사람들이 문제제기 하지, ‘왜 이웃집 애까지 돌보냐?’ 하는 것은 말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nbsp 정리해 본다면, 우리는 사회적 존재인데 자기가 생각하는 특정 존재로 규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 영향력을 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영향력을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인도에서도, 여기에서도 열 가지를 얘기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때리지 말고 훔치지 말자. 성추행 하지말자. 거짓말하지 말자. 욕설 하지 말자. 그 다음에 술 먹고 취해서, 취한 행동 하지 말자. 화내거나 짜증 내지 말자. 잔소리 하지 말자. 음식에 욕심내지 말자. 물건에 탐착하지 말자등 열 가지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거는 법보다도 더한 윤리를 지키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법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얘기한 인도적 지원에 해당하는 것에 있어서 정부의 정책은 인도주의 지원을 현행법이 막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법은 우리가 잘못 되었다고 지적을 해야 합니다. 조선시대에 남녀 차별하는 관습이 있고, 제가 조선시대 태어낫다면 이런 관습을 시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회지배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저항을 받겠지요. 그러니까 어떤 관습이냐가 중요합니다. 남녀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등은 극복해야 합니다.” nbsp nbsp 또한 스님은 촬영팀과 촬영일정과 인터뷰 대상자에 관한 사항을 의논하시고, 앞으로 촬영을 진행하면서 필요하면 중간에 다시 회의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nbsp 이후에 윤여준 전 교육원장님과 조민 현 교육원장님과의 만남이 있은 후 저녁 7시 30분부터는 평화재단 3층 강당에서 12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입학식에 함께 참석하셔서 축하해주셨습니다. nbsp “한국사회가 지나온 모습을 보면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로, 민주화에서 이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류 역사의 발전을 볼 때, 민주화는 지방자치가 더 심화되어야 하고, 경제적인 것은 이제는 생산만이 아니라, ‘어떻게 삶의 질을 높여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통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불행히도 현재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념 논쟁을 하고 있고, 지금의 정치인들은 한쪽에서는 산업화의 공로를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민주화의 공로를 주장하면서, 과거를 먹고 사는 세력만 있지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nbsp nbsp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향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성과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목표가 없기 때문에, 지금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젊은이들이 어떤 꿈을 가지게 할 것이고, 어떤 성취를 할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통일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통일없이 지속가능한 성장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앞선 민주화 세대라면 통일 시대의 길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바로 청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여러분들처럼 어느 정도 성공하신 분들은 그런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에서 평화리더십 아카데미 강좌를 개설하였습니다. 이제는 통일 국가의 비전을 논해야 합니다. nbsp nbsp nbsp 우리의 지향은 통일 국가이고, 그것의 첫 발은 통일을 지향하는 남한의 새로운 정치세력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정치하겠다, 국회의원을 하겠다, 시장을 하겠다는 이런 문제가 아니라, 통일국가를 만들어가는 중심세력이 되어야겠다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현재 하는 직업이 무엇이든 그것을 넘어서 통일에 부합할 수 있도록 본 강좌에 참여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며 스님께서는 입학식 축하 인사를 하시면서 통일한국의 비전 및 이를 위해 평화리더십 아카데미 수강생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면서 인사말씀을 마무리하시고, 재단을 떠나셨습니다. nbsp nbsp nbsp 그리고 그동안 스님과 관계를 맺어오던 해관 장두석 한민족생활문화연구회 이사장님이 별세 하셔서 저녁 8시에 광주로 이동하셨습니다. 밤 11시 30분경 광주 조선대병원에 도착한 스님께서는 장두석 선생님의 영정에 인사를 한 후 상주와 장례위원 분들과 만나 장례식에는 참여를 못하지만 49재때 참석하겠다고 약속하신 후 12시 30분경에 다시 서울로 이동하시면서 하루를 마무리하셨습니다. nbsp nbsp 내일은 새벽 7시 30분부터 조찬모임이 있으시고 오후에는 부산으로 이동할 계획입니다.
2015.3.25 서울 공동체 새벽기도, 발우공양
nbsp 스님께서는 오늘도 새벽 5시부터 대중들과 함께 기도하시고 발우공양하시면서 서울 공동체 대중들의 수행을 지도해 주셨습니다. nbsp nbsp 985170수행생활을 할 때 질서를 중요시 합니다. 단지 보기 좋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깨어 있어라, ’자신의 동작에 깨어 있어라, ‘정신없이 살지 말고 매 순간 깨어 있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질서로 나타납니다. ‘방석을 가지런히 놓으라는 것은 보기 좋고 사용하기 편하게 한다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방석을 놓는 그 순간에 깨어 있어라’는 것이 그 취지입니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라’는 것도 ‘신발을 벗을 때 깨어 있어라’는 것입니다. nbsp 법당에 예불 준비하는 사람은 촛불을 켜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난 후, 불상을 가운데 두고 양쪽 촛대가 균형 있게 놓여 있는가, 향로와 공양구가 중심에 있는가, 앞에 놓인 법상이 딱 가운데 놓여 있는가, 스님 방석을 놓는다면 균형이 맞게 놓여 있는가 잘 살펴야 합니다. nbsp nbsp 발우를 놓으면서도 상석을 기준으로 하여 줄을 맞춰서 놓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군대식으로 선을 그어 줄을 맞추라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라면 누구든지 들고 날 때 살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항상 무슨 일을 하든지 깨어서 살피면서 하도록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스님께서 한 선방의 부목으로 살 때 선방스님들의 쓰레기통을 치우면서 쓰레기의 내용을 보면 수행자들이 얼마나 깨어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경험을 얘기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발우공양 좌석을 준비하면서 제대로 살피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주셨습니다. nbsp 985170첫째, 여러분들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살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매사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지적하면 이것만 하고, 다른 것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연등을 달면 연등 간격이 바른지, 처진 것은 없는지, 불 꺼진 것은 없는지 등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연등에 불이 꺼져 있어도 아무도 얘기하지 않고 몇날며칠이 지나가기도 합니다. 회관 옆에 부착되어 있는 현수막도 행사기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붙어 있습니다. 여기 대중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살고 있는데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도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처리하도록 알려야 합니다.” 나 자신만을 살피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정토회관의 여러 가지 일들도 잘 챙겨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발우공양을 준비하면서 좌석을 배치할 때 유의점, 공양을 준비할 때 유의해야 할 점에 대해서도 다시 짚어주셨습니다. nbsp nbsp “음식을 준비할 때도 반찬에 기름이 들어갔다고 하면 숭늉을 팔팔 끓여서 내야합니다. 기름기와 고춧가루는 섞이게 되면 붉은 색깔이 잘 닦이지 않기 때문에 뜨거운 물을 부어 깨끗이 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아예 기름을 쓰지 마라’고 이해하기도 하는데, 가능하면 발우공양에는 기름을 안 쓰거나 적게 쓰고, 기름을 쓸 때는 거기에 맞추어서 뜨거운 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수도 보통 때는 차게 해도 되지만, 오늘처럼 기름기가 있는 음식이 있을 때는 청수도 데워서 준비해야 합니다. 공양을 준비하는 사람이 주변을 살피고 상황을 살펴서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이 다 수행입니다. 수행을 형식화 하면 군대처럼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늘 긴장해서 살아야 합니다. 군대생활처럼 외출 나오면 퍼지게 되고, 다시 복귀하게 되면 긴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명상할 때 편안한 가운데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은 긴장을 풀고 편안히 하라는 것입니다. 편안한 가운데 또렷이 깨어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상생활에 적용되도록 해야 합니다. 편안하면 얼굴이 밝을 것이고, 긴장하면 얼굴이 굳고 건드리면 터지게 됩니다. 편안한 가운데 뚜렷이 깨어 있으면 됩니다. 여기 이곳은 우리가 계속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집입니다. 여기서 계속 긴장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생활하면서 수행자로 살펴서 사는 것이 바로 생활불교, 불교의 생활화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겸해서 정진을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라며 우리가 일상에서도 편안하면서 깨어 있도록 지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참회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nbsp “대중 공사에서 참회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놓친 것을 자각해서 참회하는 것이고, 다음은 대중들의 의혹을 풀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계율을 놓쳐서 이렇게 참회합니다.’ 그러면 대중들은 ‘저 사람은 자기가 계율을 어긴 것을 알고 있네.’ 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사정이 있어서 계율을 어긴 것을 대중 참회를 통해 대중들에게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의혹을 해소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침에 기도하다가 갑자기 밖에 나갔다 왔는데, ‘저 사람은 왜 나가나’ 하는 의혹이 들게 됩니다. 나갔다 온 사람은 대중공사시간에 ‘내가 아침에 설사를 해서 기도 중에 나갔다 왔습니다.’고 참회를 하면 됩니다. 나갔다 온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의혹이 생긴 것을 대중 참회를 통해서 풀어주고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nbsp 똑같은 계율을 가지고 참회가 오늘도, 내일도 계속 반복된다면 이번 달에는 이중에 한 개는 꼭 지켜봐야겠다고 목표를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꺼번에 하려고 하지 말고 ‘때 아닌 때 먹지 말자’, ‘비닐에 든 것을 먹지 말자’등을 이번 달에 1개를 정해서 지켜서 해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녁예불을 빠진다고 참회를 매일 반복한다면 이번 달에는 내가 사업은 사업대로 하더라도 예불은 예불대로 꼭 지켜서 해야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중심을 가지고 해보면 일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nbsp 천주교에서는 12시 종을 치면 면담하다가도 ‘죄송합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하고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하고 끝나면 다시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기분 나빠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오히려 저 사람들은 저렇게 하는구나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nbsp 전에 아프간에서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택시기사가 가다가 기도시간이라고 택시를 세우고 그 자리에다 자리를 깔고 기도를 마친 후 다시 갔습니다. 그럴 때 그것을 미쳤다고 하기보다는 이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nbsp 저는 지난 1월부터 인도, 동남아 지역을 다니다 보니 남방불교의 관습대로 지금 오후불식중입니다. 손님과 저녁 일정이 잡혔어도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식사초대를 해놓고 나는 안 먹으면 실례입니다. 그렇기에 가능한 저녁 식사 일정은 안 잡는 것이 제일 좋고, 어쩔 수 없다면 비록 실례이긴 하지만 내가 정한 것을 하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생활의 원칙을 정하고 지켜나가는 것은 업무에 방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심을 잡고 있으면 일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불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계율은 한 가지씩 목표를 세우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율이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면 1년에 한 번씩 건의를 하거나 또, 지역에 따라 맞지 않다면 일정기간 유보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 nbsp “인도 짜이나 한국의 차처럼, 필리핀 원주민 마을에는 커피가 기호식품이 아니라 식음료에 해당합니다. 그동안 행자들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더라도 나는 무조건 지키는 것이 방침이었는데, 필리핀의 경우 이번에 행자들까지도 커피는 마시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수행이나 계율은 다 잘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정토회에 살다보면 주로 행자들이 엄격하게 잘하고, 신참들이 잘 지키고, 오래된 사람들은 적당히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보고 나도 빨리 고참 되기를 바라기만 합니다. 계율보다 관습이 더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서 여기 정토행자들은 선배도 그렇다, 법사도 그렇다고 하면서 따라하지 말고 여기에 수행하러 왔으니까, 남을 따지지 말고 나는 한 번 해본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물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사람이 많아져서 분위기가 좋은 쪽으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안한다고 이야기 하지 말고 내가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살피면 됩니다. 그래야 새로운 분위기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생활해 봅시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지나온 습관대로 살기보다는 내가 새로운 바람이 되어 수행정진 해 나가기를 당부하셨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이렇게 대중들과 함께 아침 일정을 마치시고 중국 방문 일정으로 공항으로 출발하셨습니다.
2015.3.24. 공동체 발우공양 및 천주교 평화나눔연구소 개소식
스님께서는 오늘 새벽 약 20여일간의 인도 일정을 마친 후 오랜만에 서울 정토회관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기도를 올린 후 발우공양을 함께 하셨습니다. nbsp nbsp nbsp 스님과 함께 한 새벽기도 시간은 평소보다는 더 경건하고 감동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좀 더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에 이어 스님과 함께 발우공양을 한 후 스님께서는 대중들의 모습을 지켜본 후 대중들이 발우공양에 임하면서 간과하는 몇가지를 짚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nbsp nbsp nbsp 먼저 발우공양 좌석에 대해 대중들의 드나듦이 많아 좌석배치에 혼란함이 오는 것에 대해 “발우공양 좌석 배치는 원래 발우공양을 하기로 한 사람들을 우선 배정하고 갑자기 일정이 변경되어 발우공양을 하게 되는 사람들은 바라지 옆 말석에 배치하도록 해라”고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야 혼란을 최대로 줄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 또, 대중들이 참회하는 내용을 들으시면서 참회에 대해서도 다시 짚어주셨습니다. nbsp nbsp “참회는 계율에 따라 하는 것으로 계율은 내가 행복과 자유로 가는데 어긋나지 않게 나를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찰라무지가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어기게 됩니다. 그럴 때 자기도 모르게 놓친 것을 아이고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되돌아오는 것이 참회입니다. 그러나 알고도 어기는 것은 참회가 아니고, 계율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반복되는 참회는 잘 살펴봐야 합니다. ‘때 아닌 때 먹었습니다’라고 참회를 일상적으로 한다면 그 사람의 내면에는 때 아닌 때 먹는게 뭐가 문제인가, 계율은 그렇게 되어 있지만, 나는 내 식대로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계율을 지키려는데 과거의 습관 때문에 잘 안되어서 어기게 되므로 고쳐나가는 연습 기간인지, 고칠 의지가 전혀 없는 형식적 참회인지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고칠의지가 없는 것은 참회가 아닙니다. nbsp nbsp nbsp 회의등 업무적 일정으로 인해서 예불, 잠자는 시간이 안지켜지겠다고 하면 미리 체크해서, 사전에 공지를 해야 합니다. 지키는 것이 원칙인데 어떤 상황 때문에 어긴다고 각성하고 있어야 상황이 달라지면 바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계율이 이치에 안 맞다고 생각이 들면 이의를 제기해서 재검토하도록 해야 합니다. 타성적인 참회가 되지 않게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안그러면 절에 10년을 넘게 살아도 개인의 변화가 없습니다.”라며 서울 공동체 대중들이 절에 살면서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수행생활부분에 대해서도 짚어주시니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수행자로서의 자세가 맞는지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nbsp 그 외에도 스님께서는 소심경 게송의 음이 늘어지는 부분에 대해서도 세세히 짚어주셨고, 신규법사님들과 대중들이 인사하는 시간도 가지면서 신규법사님들이 만행을 떠나는데, 법사수계를 받고 만행을 떠나는 것은 정토회의 오랜 전통이라고도 알려주셨습니다. nbsp 또, 서울 공동체의 식목행사를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 또 봄이 되었는데도 몸이 좋지 않아 움츠러 든 대중들을 살피시면서 다함께 봄에는 야외로 나가서 자연을 만끽하는 것을 제안해 주셨습니다. nbsp 이렇게 스님께서는 공동체 대중들에게 수행지도를 해주시고는 평화재단으로 이동하셨습니다. nbsp 아침 7시부터 기획위 회의가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대중들과 발우공양을 함께 하느라 회의에 조금 늦게 참석하셨습니다. nbsp 4시간여의 긴회의를 하다보니 12시 가까이가 되어 회의를 마치신 후 다시 몇 분의 기획위원들과 점심공양을 겸한 논의 시간을 더 가지시고는 천주교 평화나눔연구소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명동성당으로 이동하셨습니다. nbsp 그동안 천주교가 평화통일에 관계된 기관이 없었는데, 이번에 평화나눔연구소를 개소하면서 앞으로 남북관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활동을 할 것임을 밝히면서 목사님, 신부님, 스님을 모시고 통일에 대해 함께 나누는 평화토크를 마련한 것입니다. nbsp nbsp nbsp 행사에 앞서 염수정 추기경님, 박종화 목사님, 최창무 대주교님과 함께 차담을 하면서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995년도에 북한 동포돕기를 위해 김수환 추기경님과 강원룡목사님을 모시고 천주교, 기독교, 불교가 함께 힘을 모아 북한돕기를 시작한 이야기등 약 20여년전부터 함께 해 온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늦게 오태순 신부님까지 자리를 함께 하면서 20여년 전에 북한동포돕기를 시작한 주 멤버들이 다모여서 그때를 다시 회상하면서 차담을 나누기도 하셨습니다. nbsp nbsp 행사시간이 가까워지자 행사장인 프란체스코홀로 이동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평화나눔연구소를 개소한 것에 대해서 축하를 하면서도 천주교가 가진 역량에 비해 너무 늦었다고 아쉬움을 밝히면서 평화나눔 연구소가 한반도의 평화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큰 역할을 해주기를 당부하시면서 지금의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지금 다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다 하는 것은 중국의 부상으로 미·중이 경쟁 관계가 치열해지는 등 동아시아의 주변 정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자기 힘에 걸맞는 세계적 역할을 하고자 하고 미국은 과거에 자기 패권을 그대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둘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북한은 오직 자기 체제 유지를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하는 등 이런 각각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남북갈등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럴때 대한민국은 국가 목표가 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분명합니다. 지난 50여년간 피땀 흘려 모은 재산과 인명을 온전히 지키려면 어떤 이유로든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지금까지는 분단상태 만으로도 성장이 가능하고 번영이 가능했지만 현재 주어진 국내외 조건은 더 이상 분단 상태로는 국가 발전을 모색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체제 붕괴 위험에, 남한은 성장한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어내려면 통일만이 유일한 해법입니다. 남북한 양쪽 다 그 부분에 있어 뚜렷한 국가비전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요즘 일어나는 현상처럼 한쪽은 미국의 요구에 끌려가고, 한쪽은 중국의 요구에 끌려가고 이러지도 저라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모습입니다. 이 사이에서 적극적 평화를 주도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하위 변수로 끌려다니는 모습이 우리 민족의 장래에 큰 불행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평화를 유지하고 통일을 만들어가는 자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라며 지금 우리 한반도 놓여진 상황에 대해서 먼저 짚어주셨습니다. nbsp nbsp 그리고 어떤 요소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에 갈등이 심합니다. 세대간에 갈등, 지역간의 갈등, 노사간의 갈등, 진보보수간의 갈등 등이 많은데 그 갈등들의 근저에 있는 주원인은 분단 갈등입니다. 분단 상황이 극복되지 않고는 남한사회 안에 진정한 국민화합과 계층간의 협력은 어렵습니다. 평화는 남북간의 평화만이 아니라, 남한안의 화합과 협력을 가져오기 위해서도 유지되어야 합니다. 남북간에 분단 70년이 됐는데도 왜 이렇게 대립 갈등이 심한가하고 돌아보면, 일본에 36년간 지배당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해방 후 20년만에 한일 국교정상화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한일간에 많은 교류 협력이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일본은 독도문제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이 부족합니다. 그런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 협력은 우리에게도 이익이고 동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또, 한국 전쟁때 중국은 100만 군대 보내서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를 줬습니다. nbsp nbsp 그러나 지금은 한중수교 20년이 넘었고. 한중간에 무역교류액은 한미, 한일 합한 것보다 1.5배이상 많습니다. 중국을 생각하지 않고는 이제 우리의 경제성장을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중국이 우리에게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을 반성했냐면 아닙니다. 시진핑 주석이 부주석으로 있을 때 한국전쟁에 대해서 소위 항미원조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까지 했는데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민족인 일본과 중국에게는 이렇게 관용하면서 왜 같은 민족인 북한에게는 관용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남북 간의 문제가 풀리기 어렵습니다. 물론 북쪽에서 내려오신 분들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해야 하고, 전쟁때 돌아가신 많은 분들의 원한을 이해해야 합니다. nbsp 그러나 계속 원한을 가지고 살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픔을 뛰어넘고 미래를 희망적으로 만들어 가야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남북이 협력하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 더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 번영 위해서 큰 이익입니다. 자꾸 과거 이야기로 풀려고 하지 말고, 미래 희망으로 이 문제를 풀면 능히 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야 정치 갈등도 과거에 경제성장을 이루어 낸 쪽과, 민주화를 이룬 쪽이 서로 자기가 한 이야기만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는 이해하지만 미래를 보고 서로 공동의 이익을 위해 나아가는 자세가 된다면 우리가 갈등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라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남북갈등이 해결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남남갈등부터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nbsp nbsp nbsp 그리고 오늘 행사는 종교인들이 모여서 평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시간이다 보니 한반도 평화에 대해 종교인들의 소명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종교인들은 보통사람보다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싸우면서 북한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인은 남을 미워하는데 앞장서는 경우는 없어야 합니다. 만약 북한에서 총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종교인이 앞장서서 ‘한 대 때리면 다섯대 때리자.’고 한다면 맞지 않습니다. 보통사람보다 못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듯이 우리가 대신 참회하는 운동이 이뤄져야 합니다. 대신 참회하지 않으면 원한이 풀리지 않습니다. 남북정부간에 갈등이 일어나도 우리 종교인들은 그런 것을 넘어서서 북한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합니다. nbsp 일본이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를 사과하지 않고 우리 감정을 건드려도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 때 우리는 일본을 도왔습니다. 종교인들은 이런 불행이 왔을 때 원수도 도와야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종교인들은 정부간의 갈등이 생겨도 지속적 지원을 해야 합니다. 이런 활동이 국민의 저항을 받아도 종교인은 이런 저항마저 기꺼히 받아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인도적 지원을 허용하고 종교인이 정부에 호소해서도 안되면 직접 인도적 지원을 해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문제입니다.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는 특별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nbsp nbsp nbsp 그리고 북한 난민을 지원하고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남북 관계 갈등이 분쟁으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면 북한의 반발이 있더라도 인권개선, 난민지원문제는 꾸준히 해 나가야 합니다. 또, 남북간의 교류 협력을 계속 확대해 나가는 것이야 말로 정말 북한 민심을 잡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면 감동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도적 지원인 동시에 통일정책입니다. 종교인들은 일반인들과 다르게 십자가를 지는 행동이 필요합니다.”라며 종교인들이라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nbsp nbsp nbsp 그리고 행사를 마무리 하면서 스님께서는 “처음에 천주교, 개신교, 불교, 민간단체가 협력해서 북한인도적 지원을 함께 했습니다. 민간 종교단체가 조금 더 종교적 실효성이 나타나려면 현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가난이라는 말이 똑같지, 가난이 처해있는 상황은 남북간에 천양지차입니다. 그런 면에서 조금 더 기부하는 문화, 적극적으로 모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지원단체들은 정부허락을 얻어서 해야 하지만. 정부가 하겠다고 한 영유아 지원등 인도적 지원마저도 허가를 안해주면 종교인들은 감옥가게 된다 하더라도 그냥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적지원 원칙을 지키는 입장을 고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부가 인도적 지원의 원칙을 어기는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민간단체는 할 수 없습니다. 인도적 지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생색내려고도 하지 말고 공덕을 땅에 묻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종교적으로 말해서 천국가서 이자 붙여 받을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일 해서 금방 복 받으려 하니까 성과가 제대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시민단체는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종교단체는 숨은 공덕을 만들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나아갔으면 합니다.”라며 우리가 하는 활동이 비록 인정받지 못하고 비난과 저항에 부딪히더라도 종교인이라면 담담히 받아안고 나아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nbsp nbsp 행사가 모두 끝나고 스님께서는 평화나눔연구소 현판식에도 함께 하셔서 ‘나중 간자가 앞서간다.’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시면서 늦었지만 앞서 가 줄 것을 당부하면서 다시한번 축하드렸습니다. nbsp 그리고 정토회관으로 돌아오셔서 못다 한 업무를 하시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