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 수행과 실천
  • 스님의하루

2015.4.10. 기획위 회의 및 나무심기

nbsp nbsp 스님께서는 오늘 아침 대중공사시간을 통해 몇가지 당부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대중들이 저녁예불에 빠졌다고 참회하는 내용을 들으시고는 업무상 그리고 사무실 거리상 빠지게 되는데, “계율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계율을 수정하던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무변심 법사님께 방안을 마련할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의 경우, 택시운전사가 기도 시간이 되면 손님이 차를 타고 있음에도 양해를 구하고 기도 시간을 지킨다.”고 말씀하시면서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업무상 현실적으로 지키기가 어려운 계율은 개선해나가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nbsp nbsp 대중부는 ‘일반대중에게 공지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으로 강조하였는데 공동체 성원들이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 공동체 대중과 일반대중들과의 사이에 미묘한 갈등과 어려움이 있다고 하시면서 다시 한 번, 수행의 방향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정리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 “요즘은 어떤 업무지시가 있을 때 아래로 갈수록 칙에 대하여 아주 경직되게 적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행은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원칙을 잘 고수하되 대중에게는 유연해야 합니다. 이것은 ’원칙은 나에게만 엄격하게 적용하고 남에게 잣대를 대지 않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유연해지지요. 자율적이면서도 질서가 잡히는 것은 그 원칙에 철저했을 때 가능합니다. 스스로는 원칙을 잘 지키되 대중에게는 유연해야 됩니다. 본인은 안 지키면서 남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갈등이 심해집니다.” nbsp nbsp 그러시면서 공동체 성원들이 대중부와 함께 하면서 꼭 지켜야 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먼저, 법회시간에는 핸드폰을 다 끄도록 하기 때문에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둘째, 이번에 통일학교의 경우 공동체 대중들이 법회후 나누기를 빠지면서 분위기가 안좋아졌다고 하는데, 대중부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는 나누기까지 다 참여하도록 한다. 세 번째, 명상할 때 일체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명상시간에 주로 공동체 성원들이 움직인다는 문제제기가 있다.”고 하시면서 대중들과 할 때 공동체 성원들이 업무 때문에 놓치기 쉬운 것들을 짚어주시면서 서로 협력해 나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nbsp nbsp 끝으로 스님께서는 내일 두북 수련원에서 가질 운력 일정과 모레 용성큰스님 오도일의 일정에 대해서 점검 하신 후 회의에 참가하시느라 서둘러 일어섰습니다. nbsp 곧바로 평화재단에서 기획위 모임에 참여하셨습니다. 이후에 몇가지 업무를 보신 후 점심공양을 하고 두북으로 이동하셨습니다. nbsp nbsp 5시 30분경 두북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부모님 산소로 가서 벚꽃을 심으셨고, 또 주변 정비도 함께 하셨습니다. nbsp 7시가 넘어 모든 운력을 마무리 한 후 오늘은 일찍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2015.04.11. 16,875 읽음 댓글 8개

2015.4.9. 정토불교대학 담당자 수련

nbsp nbsp 두북수련원에서 새벽예불을 드린 후 6시 30분경 유수스님과 교육팀 2분, 해외에서 오신 2분과 함께 마곡사로 출발하였습니다.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꽃으로 추위를 잊게 하는 화창한 봄날, 전국에서 모인 정토불교대학 담당자들은 마곡사 입구에 모여 즐겁게 나들이를 준비하고 있었니다. nbsp 일주문을 지나 다함께 모일수 있는 장소에서 간단히 입재식을 한 후 해탈문을 지나 마곡사의 솔바람 길, 백범 김구선생의 명상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평온한 마음을 주는 편한 길도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오르막 길, 돌들이 알알이 박힌 길을 조금은 힘겹게 걷다가 문득 고개 돌려 보니 마치 진연분홍 구름이 연상되는 진달래꽃 길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nbsp nbsp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며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이었습니다. 진달래꽃이 봄이 왔음을 알리며 우리들을 반기듯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빠져있는 것 같았습니다. nbsp nbsp 따뜻한 햇볕아래 야외에서 스님의 지도에 따라 20분간 명상을 하며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어 봅니다. 솔잎 부비는 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모두가 한 몸이 되는 순간입니다. 명상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스님과 함께 잠시 대화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nbsp 어느 지역 법당의 담당자분이 스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소속된 법당이 이제 갓 생긴 신생 법당이어서 시시콜콜 빚어지는 내부갈등에 대한 고민과 일부 신도님들이 사소하지만 법당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에 분별심이 나고, 또 그런 사람을 보고 신규 불자들이 보고 배울까봐 걱정되고, 얘기하면 가르친다고 뭐라하는 것 같아 갈등이 생긴다고 합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질문을 듣고 웃으시며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질문자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자기 이익과 물질적 편의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적게 자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정토회가 창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질문자는 이런 사람이 와서 맑은 물을 흐린다고 생각하고 흐린 물 때문에 맑은 물을 버릴까 염려된다는 질문자의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정토행자로서는 아닙니다. 정토행자는 흐려진 세상을 맑게 만들겠다고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진흙탕을 두려워 할 게 아니라 깨끗하게 만들자는 게 정토회의 취지입니다. 대다수 사람이 정토회에 오지를 않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정토회에 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로 불편해 하면 안됩니다. ‘나의 수행문제이다.’라는 관점을 정확하게 잡고 일해야 합니다. nbsp nbsp 불편한 마음을 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아까 산에 오르막을 오를때 힘들었지만 이후에 이렇게 편안하게 있게되는 것처럼 이런 사람을 수용하며 힘든 경험을 해보고 극복하면 앞으로 어느 누구를 만나도 편안함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nbspnbsp nbsp 스님과의 짧은 대화시간이었지만 질문자의 답답한 마음을 뚫어주는 답변이었습니다. 이후 마곡사 보물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에 대해 스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빠르게 산을 내려왔습니다. nbsp 경내에 참배의 예를 취하고 공양 후 수련관에서 본격적인 불교대학 담당자들을 위한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산에서의 질문자처럼 솔직히 이야기해야 한다 하시며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불교대학 담당자들의 고민이 녹아있는 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습니다. 그 중에 몇가지를 소개하면, nbsp nbsp 첫 번째 질문은 “큰 아이가 사춘기때 힘든 고비가 와서 정토회에 온 덕분에 잘 넘겨 그 은혜를 갚으러 불교대학 담당자가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맡은 지역 법당 입학생이 적어 참가자들이 야간으로 이동하고 안 나올까봐 걱정이 되어 수업전날 떨리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까?” nbsp 스님께서는 “정토회 창립목표는 2600년전 근본불교 사상을 이 땅에 다시 구현하는게 설립취지입니다. 인구의 1 정도만 올바른 관점을 갖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의 접근이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읍,면,동에 수행처 한 개 쯤 두려고 합니다. 그러면 가르침이 생활 속에서 실현되고 그 길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입학생이 많으면 좋지만,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면 됩니다. 일은 사람이 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면 됩니다. 불교대학 학생이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가면 좋지만 중도에 그만둬도 좋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좋지만 수행자는 날씨에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수행의 관점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자는 농사철 최선을 다하되 수확에 연연해하지 않고, 어떤 일의 결과에도 연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답해주셨습니다. nbsp 두 번째는 “서대문 법당에서는 2년간 불교대학 진행해보니 입학생들이 첫 수업때 처음nbsp해 보는 예불의식과 불교용어 등으로 당황해합니다. 입학하기 전 이런 것들을 알려주었으면 합니다”라고 건의하였습니다. 이 건의사항에 대해서 스님께서는 칭찬 아끼지 않으시며 수용하시겠다고 답하셨습니다. nbsp 세 번째 질문은 “담당을 맡으면서 나는 편한데 남편은 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편은 이번에 불교대학 졸업하고 정토회 그만두면 명품백을 사주겠다고 합니다. 불편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1년만 하고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이 질문에 답변을 하시기 전 어떤 봉사자의 남편분께서 쓰신 편지를 읽어 주셨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정토회 활동으로 아이와 남편의 불만을 토로한 내용이었습니다. 스님께서 남편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된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정토회에서 봉사하는 일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남편에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짜증내면서 우울하게 남편과 하루 종일 보내는 것보다는 밥 한끼 덜 해줘도 성질 고쳐 남편 마음 이해하며 함께 보내는 게 낫지 않습니까? 내가 바른 길이라 생각하면 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하고 숙이며 성질부리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남편이 불평하더라도 위축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고비를 넘어가면 그게 어떤 길이 되든 괴로워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게 됩니다. 누군가의 노예가 되는게 아니라 내 길을 분명하게 걸어가는 것이 행복의 길입니다.”라고 답을 주셨습니다. nbsp nbsp 네 번째 질문은 “엄마, 아빠가 이혼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왔으며, 엄마와의 성격차이로 누군가에게 맞추는 것이 힘이 듭니다. 그런데 불교대학 담당을 맡으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이 불편하고 일반사람을 만나면 힘들고, 저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으려 하는게 힘듭니다.”라고 질문하니 스님께서는 nbsp “수행은 나의 욕구를 알아차릴 뿐 억누르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업식으로 일어난 상태를 올바로 알아차리는 연습은 금방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늘 일어납니다. 마음을 자기 쪽으로 돌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연습해 나가다 보면 옛날보다 좋아집니다. 그 문제를 안 보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과제로 삼고 연습하다 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뛰어넘다보면 부처의 길로 가게 됩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질문을 계속 받으시면서 담당자들의 고민을 들어주시려 애쓰셨습니다. 담당자가 JTS, 통일활동 등에 대해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와서 고민하는 것, 윗사람과 부딪치는 고민 등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많은 분들이 고민하는 정토회 활동하면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한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해주셨습니다. nbsp “아이 나이에 맞는 정토회 활동범위는 3세 전까지는 무조건 아이곁에 있어야 합니다. 4세에서 7세에는 엄마가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엄마가 자기 중심을 잡으면서 아이에게 늘 웃으며 이야기해야 합니다. 엄마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요. 아이에게도 조금씩 역할을 주어 설거지도 나눠할 수 있으면서 같이 보내야 합니다. 초등학교때 50 정도 함께 하고, 중고생이 되면 30정도 함께 해서 이렇게 조금씩 독립할 수 있는 범위를 만들어 주세요” nbsp nbsp 긴 시간 불교대학 담당자들의 고민을 열성적으로 들어주시고 함께 나눠주시는 스님의 열정에 감사한 마음이 컸습니다. 스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각 지부별로 나와 자신의 지부를 대표하는 응원메세지를 발표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물단지 한 가득 안고 가는 기분으로 봄 나들이를 마쳤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서울로 출발하셔서 9시에 외부인사와 만남을 가진 후 정토회관으로 오셔서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nbsp 내일은 조찬을 겸한 기획위 회의가 있습니다.

2015.04.10. 22,220 읽음 댓글 12개

2015.4.8. 정토회 활동가 수련 이틀째

nbsp nbsp 오늘은 활동가 수련 이틀째입니다.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여 5시부터 법륜스님과 함께 유수스님의 집전에 맞추어 천일결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참가 대중 모두가 108배를 하며 기도를 하기에는 두북수련원 강당이 좁아서 지부별로 나누어 잠을 잤던 각 방에서 도반의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기도를 마쳤습니다. nbsp nbsp 천일결사 기도가 끝난 후 일정은 스님과 함께 산책을 하는 순서였습니다. 그런데 부슬비가 내려서 산책을 하지 못하고 강당에 다함께 모여 어제 밤늦게까지 진행했던 활동가 수련을 이어갔습니다. 정토회 봉사 활동을 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고민을 대중 앞에 내어놓고 의문이 드는 것은 스님께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대중에게 “잘 주무셨어요. 불편하지 않으셨어요?”하시며 인사를 하신 후 “어제 문제 제기 했던 것에 대해서 제가 의견을 말씀 드렸는데 그래도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 하는 추가 의견이 있으면 말씀하세요.”하시며 질의응답을 시작하셨습니다. nbsp nbsp 추가 의견이 없자 스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이런 얘기들이 ‘현안의 실무’인데 수행 차원에서는 다 중도적 관점입니다.”하시며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nbsp “불교에서는 이것을 ‘중도’라 하고, 유교에서는 ‘중용’이라 하고, 플라톤은 ‘The golden mean’이라 하며 조금씩 다르지만 이것이 모두 중도의 개념입니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이쪽에 치우치지지도 않고 저쪽에 치우치지지도 않고, 또 ‘시중’이라 해서 그 때 그 때 적절함이라 합니다. nbsp nbsp 딱 정해져 있지 않고 그 때 그 때의 적절함이라 하는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하는 이런 개념은 아닙니다. 원칙은 지키데 그것이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데 혼란스럽지 않은 이것을 중도라 합니다.nbsp 그러니깐 우리가 해탈로 나아가야 하는 그 길에서 원칙은 지키되 경직되지 않는 것입니다. nbsp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면 출가수행자는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먹는 것에 있어서 걸식을 하고 음식에 탐착하지 않으며 하루 한 끼를 먹고, 입는 것은 분소의를 주워 입고, 자는 것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잔다.’라 되어 있는데 부처님 당시 제자들은 법에 따라서 적절하게 수행 정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제자 데바닷타가 고행주의자에 비해 부처님 제자들이 더 유연하다 보니깐 문란한 것이 아니냐 해서 원칙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하며 문제 제기하였습니다. nbsp nbsp 지금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냇가에 가서 목욕을 하고, 풀 한 움큼을 땅에 깔고 앉고, 굶어서 쓰러져 의식을 잃을 정도가 되어서 미움을 끓여서 먹는 이런 정도가 경직된 고행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출가수행자 답지 못하지 않느냐 하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nbsp 데바닷타는 다섯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어야지 가끔 두 끼를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걸식을 해서 얻어 먹어야만 하는데, 식사 초대에 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다. 채식만 해야 하는데, 물고기가 든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소의만 주워 입어야 하는데, 새 옷을 입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무 밑, 동굴 속이 아니라 처마 밑, 빈 집 등 인공적인 곳에서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수행자의 생활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엄격하게 생활원칙을 확인해주십시오.’하며 부처님께 건의를 하였습니다. nbsp 이런 문제제기에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로서 하루 한 끼만 먹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하루 한 끼만 먹어야 된다. 이렇게 경직되게 정하면 안 된다. 왜냐면 환자는 치료를 위해, 어린 사미들은 성장하는 시기이므로 하루 두 끼 먹을 수도 있다. nbsp nbsp 수행자가 걸식을 하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믿음 있는 신자들의 공양 초대에 응할 수도 있다. 채식을 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걸식을 하는데 고기가 들어오면 먹을 수도 있고 어린아이나 환자들은 필요에 의해 약으로 먹을 수도 있다. nbsp 나무 밑이나 동굴 속에서 자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일 경우에 동굴이 없으면 사람이 안 사는 집 또는 처마 밑에서 잘 수가 있다. nbsp 분소의를 입는 것은 정말 훌륭한 일이다.그러나 분소의가 없을 때는 새 옷을 입을 수도 있다.’라며 원칙을 지키되 너무 경직되게 적용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분소의를 입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분소의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때 경직되게 생각을 하면 벗고 있던지 아니면 새 옷을 시체를 한 번 쌌다가 입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럴 때는 새 옷을 입어도 된다.’하셨습니다. nbsp nbsp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문란하게 되겠지만, 이것은 문란한 것이 아니라 경직된 것을 유연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원칙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기본 정신을 갖되 그것을 너무 경직되게 적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nbsp 이게 ‘적절함’입니다. 불교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유교의 핵심이고, 플라톤 철학의 핵심입니다. 정치 또한 적절해야 합니다. 갈등이라는 것도 치우치니깐 생기는 것입니다. nbsp 부처님 당시에는 제1의 길은 욕망을 따라가는 쾌락이고, 제2의 길은 욕망을 억압하는 고행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 두 길, 치우친 길밖에 없었는데 이것을 떠난 중도의 길을 발견하신 것이 부처님의 위대함입니다. nbsp 여러분들도 일을 하면서 늘 치우칩니다. 원칙을 지켜라 하면 경직되게, 유연하게 해라 하면 문란하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적용을 합니다. nbsp 이것은 마음 밑에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에 대한 대응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욕구를 따라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억제하는 것입니다. nbsp nbsp 자기 욕구가 있으니깐 이렇게 하고 싶으면 원칙을 내걸어 강요하고, 싫으면 ‘대중이 이렇게 원합니다.’ 하며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nbsp 수행자는 원칙에도 맞고 대중이 요구한 것도 수용해야 하는데, 자기 욕망을 가지고 경직되게 적용을 합니다. 전체 원칙을 어기면서 대중 핑계를 대고, 또는 대중의 요구를 안 받고 비민주적으로 하면서 원칙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마음 밑뿌리에 자기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nbsp 우리가 명상을 할 때 통증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통증을 통증으로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듯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연습을 계속해서 극복하려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nbsp nbsp 지금은 안 되지만 원칙도 지키고 유연도 해지는 그런 적절함을 구사할 수가 있도록 노력을 해 나가야 합니다. nbsp 수행과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어떤 형식이 아닙니다. 일을 하든 무엇을 하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그 마음을 살펴서 불편한 것은 자기에게 돌이켜 편안하게 하고 이 편안함 가운데서 대중에게 이익이 되고 좀 더 효과적인 것을 끊임없이 찾아가서 만들어 나가는 연구를 늘 해야 합니다. nbsp 봄에 꽃이 피고, 잎이 피는 것은 이 시기에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꽃과 잎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때 이미 이 새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꽃 피고 잎 필 때 무관심한 것을 ‘도’다. 이러면 안 됩니다. 꽃 필 때는 꽃을 좋아하데, 그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낙엽이 떨어질 때 슬프지 않습니다. 이런 적절함이 중도입니다. nbsp nbsp 우리가 지금 제기하는 모든 문제는 중도에서 어긋나서 생기는 것이고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중도를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연습하면서 터득해 나가는 이게 수행입니다.” 이렇게 중도에 관해서 설명을 마치시고 스님께서는 추가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nbsp 세 개의 의견이 나왔습니다. 법당으로 들어오는 보시물을 비용 처리 할 수 있는지?’, ‘다과 비용을 공금처리 할 수 있는지?’, ‘경전반 운영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관한 건의와 질문이 있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다시 묻고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간 주부에게 적용한 것이 저녁 직장인에게 꼭 맞는 것도 아니고, 국내에서 ‘맞다.’ 고 해외에서도 ‘맞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연구를 해야 합니다. 서울에서 제기되는 것이 지방에서는 안 맞을 수도 있고, 큰 법당에서 적용되는 것이 작은 법당에서는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nbsp nbsp 이런 경우에는 수행적 관점에서 정토회 취지에 관계되는 것은 해외고 국내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화나 정서와 관계되는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논의해서 조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nbsp 부처님 법에 관한 것은 시간이 흐르든 지역이 달라지든 일치해야 하고, 문화적인 요소는 시대가 달라지면 바뀌고 지역이 달라지면 바뀌어야 합니다.” 하시며 여러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시면서 질의응답 시간을 마쳤습니다. nbsp nbsp 질의응답이 끝난 후에는 두북 수련원에서 정성껏 준비한 아침공양을 먹고 두 번째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수련을 시작하기 전 “대구 보살 나와 노래공양 올리세요”하시니 대구법당 총무를 맡고 있는 이명숙 보살님께서 나와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한층 돋구었습니다. 이명숙 보살님은 ‘신곡을 발표하겠습니다.’ 하시며 ‘당돌한 여자’를 신나게 불렀고 이어서는 대전법당의 김민아 보살님이 ‘섬마을 선생님’을 열창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 “질문 세 개 받고 노래 한 번 하고 또 질문 받는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하시며 다소 지루해 질 수 있는 시간을 놀이와 함께 엮어서 분위기를 신나게 만들어 주시자 대중 모두는 웃으면서 수련을 시작하였습니다. nbsp ‘함께 일하는 봉사자가 매사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서 어떡해야 하는지?’ ‘저녁부의 공양문제에 관한 건의’ ‘가을 경전반 수업을 봄불대 운영방식과 같게 적용하는 것에 대한 질문’ 등이 있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매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상가가 망하지 않는 7가지 방법 중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함부로 정하지 말고, 이미 정해진 것은 함부로 허물지 마라’는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 때나 없앨 때는 충분히 검토하고 사안에 따라서는 대의원회를 거치는 절차상의 민주주의와 대중의견을 수렴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필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nbsp 이렇게 답변을 하신 후에는 행정처장님을 비롯하여 각 지부 사무국장님들께 지금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듣는 순서를 가졌습니다. nbsp nbsp 각 지부 사무국장님들이 어려움과 고민을 이야기 할 때 대중은 공감하였고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도반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nbsp 두 번째 질의응답을 끝낸 후에는 점심 공양을 하고 대청소를 한 후 스님과 함께 남산으로 출발하였습니다. nbsp nbsp 삼릉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스님과 함께 벚꽃이 만개한 도로변을 걸어 포석정까지 간 후 남산 오솔길을 따라 되돌아와 삼릉에서 회향식을 가졌습니다. nbsp 회향식에서 스님께서는 “정토회 창립의 목표가 하나는 불교중흥이고 또 하나는 민족중흥입니다. 불교중흥의 핵심은 이 ?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구현하는 것이고, 민족중흥의 핵심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으니깐 이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자는 것인데 이것은 분단된 이 나라를 통일해서 천 년의 한을 풀어 민족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nbsp nbsp 대중들은 1박 2일 동안의 수련으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천 년의 한을 풀 통일의 꿈’을 안고 각 지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nbsp 원래 오후에는 대중들과 남산을 오르는 일정이었으나 내리는 비로 인해 삼릉에서 벚꽃을 보고 헤어진 것이 아쉬우셔서 대중들이 모두 떠나고 난 후 스님께서는 다시 남산을 올랐습니다. 해외지부 사무국장인 김순영보살님, 호주에서 온 유영진 보살님, 무변심법사님과 함께 남산의 남쪽인 열암곡 석불좌상이 있는 곳까지 다녀왔습니다. 아직도 위에는 진달래가 한창이었습니다. nbsp nbsp 내일은 공주 마곡사에서 불교대 담당자, 경전반 담당자 수련이 있습니다.

2015.04.09. 21,479 읽음 댓글 12개

2015.4.7. 제1기 통일학교 경주역사기행

nbsp nbsp 오늘 새벽 2시 30분경 경주에 도착하신 스님께서는 휴식을 취하시다가 오전 9시부터 경주 역사기행 일정에 합류하셨습니다. 오늘은 제1기 통일학교 역사기행이 있는 날입니다. 오늘 기행에는 제1기 통일학교 수강생들과 간부 활동가 등 총 220여 명이 함께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제일 먼저 법흥왕릉에서 입재 법문을 하셨습니다. 법흥왕은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여기 벚꽃길이 좋으니 걸어 다니면서 역사기행을 해야 하는데, 참가자들이 늙어서 버스 타고 다니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셔서 참가자들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nbsp nbsp “오늘 경주 역사기행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첫째, 우리 민족사의 활동무대 가운데 한반도의 동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인 신라가 어떻게 민족사의 주류로 등장할 수 있었는가? 둘째,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국력이 작은 신라가 어떻게 통일의 중심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셋째,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않은 신라가 통일을 함으로써 민족사 전체로 볼 때 어떤 손실이 있었는가? 우리가 앞으로 통일을 해나갈 때 신라처럼 비약적 발전을 하며 주변 환경의 주역이 될 수 있는지, 이럴 때 역사의식의 부재가 나중에 민족사에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알아보려합니다. nbsp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 비로소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 중 절반은 작은 부족국가였습니다. 이때 낙동강 유역에서 6개의 가야는 부족국가 연맹체였으며, 신라보다 국력이 컸습니다. 신라는 기원후 514년 법흥왕 때부터 비약적 발전을 이뤘고, 개혁개방 정책을 폈습니다. 그 당시 신라는 폐쇄적으로 외래문물을 금지하고 불교를 철저히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nbsp nbsp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내부의 개혁을 통해 신라의 국력을 강화시키고 쇠락해진 가야와의 통일을 논의했습니다. 지난 시간 가야의 침공을 받았지만 무력으로 되갚지 않고, 신라는 가야를 포용하려 했고, 가야 또한 자존심을 끝까지 내세우지 않고 통합에 합류를 했습니다. 신라의 포용 정책의 첫 번째는 가야의 국교인 불교를 수용하고 공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nbsp 두 번째,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유신 장군같이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가 삼국통일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들 중에는 가야인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신라는 이처럼 가야와 합의 통합으로, 영토의 확대, 문명의 발전, 인재의 육성으로 비약적인 상승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통합은 112가 아니라 115나 10이 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nbsp nbsp 동독과 서독의 통일 과정에서 보더라도 서독은 통일 이전에 공산당 활동 등을 인정해 주었고, 연방제가 이미 되어 있었기에 동독은 각 주별로 합류만 하면 되었습니다. 정치적 탄압도 없었고, 당시 동독 화폐 마르크는 서독 마르크의 절반의 가치였지만 동일한 금액으로 교환 해주었습니다. 이로써 동독인들은 두 배의 이익을 보게 되었습니다. 동독은 통일을 통해서 손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 이후 저항세력이 없었습니다. nbsp 신라도 율령반포라는 개혁정책과 불교공인이라는 개방정책을 통해 가야와 통합을 함으로써 해서 순식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라가 한반도의 변방에서 주류로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nbsp “법흥왕릉은 경주의 외진 곳에 있어 오기가 쉽지 않지만, 통일역사기행을 한층 더 의미 있게 시작하고자 이곳에서부터 출발지를 잡았다”는 스님의 말씀을 새기며 ‘통합’이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오는지 다시 한 번 가슴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nbsp 다음은 진흥왕릉으로 이동했습니다. 무열왕릉에 주차를 한 후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니 신라왕들의 무덤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초기 왕들의 무덤들이라서 그런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참가자들이 오는 대로 진흥왕릉이 잘 보이는 곳에 둘러앉도록 한 후에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nbsp “법흥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다음 왕위 계승자는 어머니계로 따지면 법흥왕의 외손자이고, 아버지계로 따지면 법흥왕의 조카입니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것이 당시 신라의 최고 순수혈통이었습니다. 형제간에는 결혼을 안 하기 때문에 형제를 제외하고 가까울수록 순수혈통인 성골이고, 멀수록 진골입니다. 성골이 되려면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왕의 자식이라야 합니다. 조선시대 유교방식대로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신라의 독특한 혈통을 통한 질서유지 방법입니다. 진흥왕의 치세 중 3분의1은 실제로는 어머니인 법흥왕의 딸의 치세입니다. 보통 부모의 유업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은 아들보다는 딸이 더 잘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nbsp nbsp 신라는 진흥왕 시절,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나라의 국력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삼국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황룡사도 이때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통일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다음왕인 진평왕은 이때 확대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바다 건너 수나라와 외교를 긴밀히 해서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막아내었습니다. 땅을 뺏기고 찾고 하는 전쟁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nbsp 진흥왕릉을 떠나 태종무열왕릉으로 걸어갔습니다. 진흥왕릉의 규모보다는 더 크고 정비된 왕릉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nbsp nbsp “진평왕이 죽은 뒤 왕위 계승권에 문제가 생기자 내부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김춘추는 무리하게 왕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고, 이모를 왕위에 옹립합니다. 그분이 선덕여왕입니다. 이 시절 김춘추가 한 일은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역할을 많이 하였습니다. 특히 선덕여왕 때는 백제 의자왕 초기였는데, 매우 강성할 때였습니다. 신라로서는 백제와 끊임없는 무력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의자왕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내치에 소홀해지면서 백제 내부의 혼란이 가중되던 차에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nbsp nbsp 김춘추는 54세쯤 왕위에 오르고, 재위 시절에 삼국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8년간 재위하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에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태종이라는 칭호는 나라를 굳건히 한 사람에게 부여 합니다.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 김인문은 당나라와의 외교에 긴밀하게 협조하여 사후에 태대각간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태종무열왕릉의 비석 받침대인 거북이는 용맹하게 머리를 쳐들고 섬세한 조각으로 몸통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듯이 조각됐는데,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있습니다.” nbsp nbsp 통일의 기초를 확실히 다진 태종무열왕릉에 삼배를 올리고, 친한 친구이자 처남이며 통일 전쟁의 최고의 조력자인 김유신 장군묘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김유신 장군묘를 가는 길은 경주에서도 소문난 벚꽃명소입니다. 벚꽃이 많이 떨어졌지만, 아직도 화사한 풍경을 선사하여 보는 참가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기나긴 벚꽃터널을 지나 김유신 장군묘에 도착했습니다. nbsp 김유신 장군묘는 마치 왕릉처럼 울타리까지 둘러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김유신 장군의 묘가 아니라 왕릉이 아니냐는 오해가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신라 말기에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이라는 추대를 받았던 점을 감안하면, 왕릉의 규모로 재정비했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nbsp nbsp “김유신 장군은 가야의 마지막 왕의 증손자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신으로 추앙받는 사람은 김유신이 유일합니다. 김유신은 담이 크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몰락 왕족의 후예로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김유신의 어머니는 아들의 출세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김유신은 젊은 나이에 화랑으로써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에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에 1개의 도독부를 설치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한미연합군이 북한을 제패해서 통일이 될 줄 알았는데, 미군이 한국군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북한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nbsp nbsp 당시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옛땅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에 공격을 감행합니다. 그 뒤 나당전쟁이 8년 동안 이어집니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였지만,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676년,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서 삼국통일을 이룩합니다.” nbsp 신라의 자주성을 지키는 데 김유신 장군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이라는 칭호에 이어 신으로 숭상받기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bsp nbsp 김유신 장군 묘를 내려오는 동안에도 여전히 날씨는 쌀쌀하고 추웠습니다. 어느덧 점심식사 시간이었기에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옹기종기 모여앉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각 지역별로 스님과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친 뒤 사천왕사지와 선덕왕릉, 능지탑으로 이동했습니다. 스님께서는 호국사찰에 얽힌 신라의 자주성과 신라 백성들의 염원을 재미난 전설로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선덕여왕릉에서는 “주변국의 조롱도 많이 받고, 내부의 반란도 많았지만 지혜로운 리더십으로 극복해나갔던 선덕여왕을 본받아, 우리 통일의병들도 주위의 비난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하셨습니다. nbsp nbsp 능지탑을 지나서 마지막 일정인 황룡사지와 분황사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경주의 곳곳은 만개한 벚꽃의 아름다움이 화사하게 펼쳐졌습니다. 분황사를 바라보며 통일역사기행 회향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신라가 갑자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가야와 합의통일을 하면서였습니다. 신라는 내부적으로 개혁을 하고, 가야의 것을 수용해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법흥왕의 유지를 진흥왕의 어머니인 딸이 잘 계승했고, 손자인 진흥왕이 잘 계승했습니다. 진흥왕의 치적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비견할만합니다. 당시 세계패권국가인 당과 손을 잡아 신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현상을 보면, 현재 남한이 미국과 손잡고 유리한 국면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부상하면서 불리해 질 수도 있습니다. 남한이 북한을 포용해서 통일을 하면 민족에 번영이 오고, 동아시아의 번영을 가져옵니다. nbsp nbsp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통일운동은 통일 의지를 가진 좋은 지도자를 만들어야 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정부를 선택해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의병의 역할입니다. 선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사람이 잘하고 있는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요행을 바라는 방식은 안 됩니다. 통일을 추진할 정부를 구성해서 미·중을 잘 아우르는 외교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변국에 다 이익이 되는 외교 정책이어야 합니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실현해 가야합니다. 불교는 자기를 행복하게 가꾸는 수행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토로 가꾸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곳에 통일국가를 만드는 것이 민족중흥이고, 전 세계인을 위한 보살행을 해 나가는 것이 불교중흥입니다. 우리 후손은 넓은 시야로 넓은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우리가 계획하고 기초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nbsp nbsp 경주역사기행을 통해서 우리가 통일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통일운동에 앞장서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nbsp 경주역사기행을 마치고 정토회 간부 활동가들 약 200여명은 다시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와서 저녁 7시 30분부터는 간부 활동가 수련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자연 속에 살면 꽃이 피는 시기와 어떻게 피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주역사기행을 했지만, 꽃놀이도 겸했습니다. 기분이 좋으셨습니까?”라고 인사를 건네시며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nbsp nbsp “인도 운전수들은 희한하게 푯말이 없는데도, 또 안개가 자욱한데도 길을 잘 압니다. 인간 네비게이션처럼 방향과 남은 거리를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도는 카스트 사회다보니 운전수도 계급이 있어 어릴 때부터 아버지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한 10년쯤 지켜보다가 운전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운전을 하려면 차 정비를 먼저 배우고 익힌 뒤에 운전대를 잡게 되니, 본능적으로 운전을 할 수 있는 겁니다. nbsp nbsp 그래서 어릴 때 어떻게 자라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빨래나 청소, 일하는 걸 보면 다 큰 대학생인데도 70살 넘은 노인보다 못합니다. 어릴 때 손빨래를 안 해 보니까 백일행자들도 잘 못해요. 사람들의 기본 기능은 잘 쓰면 발달하고, 안 쓰면 둔해집니다. 아이들을 보호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자립할 수 없게 만든 결과가 된 겁니다. nbsp 그래서 내가 어떻게 형성됐느냐에 따라 감정이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선악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과 마음은 어릴 때부터 형성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것이 업식이고, 까르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의 노예입니다.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인생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형성된 것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전생이 있어서 운명이 고정됐다고 봤어요. 그런데 불교는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한 것으로 봤습니다.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까르마도 변할 수 있는 것이고, 해탈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현재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습니다. nbsp nbsp 현재 내가 움직이는 뿌리가 까르마라면,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운 대로, 습관대로 삽니다. 이 사실을 알면 손실이 예측되는 것은 하지 않게 되죠. 또 하기 싫어도 이익이 있는 거면 능히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존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형성된 것에 의한 정신작용 또는 마음작용의 문제이므로, 수행문을 늘 정성들여 읽도록 합니다. nbsp 둘째, 수행자라면 관점이 정확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나에게 적용하면 보약이지만, 남에게 적용하면 비수가 됩니다. 잘 관찰해보면, 정토회원들이 일반인보다 훨씬 포용력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 다른 일반 신도들보다 분별심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nbsp 정토회는 다른 절에 비하면 천주교나 교회처럼 잘 조직되고 훈련이 되어있어 장점이 있지만 그 잣대로 남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분별심이 많을 수 있어요. 그래서 자원활동가들 사이에 다툼이 많습니다. 자기 틀이 강한 사람들은 보통 사회생활에서 만족이 안 되니까, 다른 곳보다 정토회가 맞을 것 같아 활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잣대를 내려놓고 다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늘 분별이 많습니다. nbsp 변화의 잣대는 나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내가 어제의 나보다 나아졌는가? 이것이 내 질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들이 까다로운 사람인지 알고 있어요? 정토회 활동가들을 보면, 똑똑하지만 분별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남이 보면 ‘사회활동하면서 봉사도 하고, 주체적이다’ 이렇게 보는 장점이 있지만, 여러분들의 분별심 때문에 일반인들이 정토회에 적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nbsp nbsp 특히 활동 초심자는 정토회 원칙에 대해 경직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정토회 전체가 경직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순입니다. 늘 법문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수행의 관점을 놓치지 말고, 수행을 기초로 환경 봉사나 통일 운동, 복지 운동을 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불편함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활동도 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자기 마음에 불편함이 있으면 지치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자기를 봐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정해진 원칙으로 하되, 남에게 강요하지는 말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불편해져서 하는 얘기는 내 분별심일 뿐입니다. 우리 활동가들은 일사분란하게 일하고, 원칙을 잘 지켜야 하지만, 법당은 유연하고 부드럽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올해의 과제로 삼고 해보면 좋겠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간부활동가들에게 수행이 무엇인지, 수행자로서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길고도 상세하게 다시 일러주셨습니다. 수행의 원칙은 철저히 나에게 적용하되, 일반인들은 포용하면서, 정토회를 찾는 모든 분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바른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하라는 스님의 당부 말씀을 깊이 새겼습니다. nbsp nbsp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활동가들의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올해부터 불대수업 중에 30분 정도 봉사를 해보는 방식을 시행 중인데, 저녁 반은 시간이 길어져서 어려움이 있다는 질문, 가을불대 등은 중간에 봉사 30분을 하는 것으로 바꿔서 불만이 있다는 질문, 정초 순회 법회 때 사회자 멘트를 급하게 수정하거나 또 밴드 방을 갑자기 폐쇄해서 불만을 제기받았다는 질문, 사시예불을 하는데 다른 행사가 옆에서 열리는 바람에 예불에 방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질문, 출가열반재일 기도 때 300배 정진을 다 못하시는 분들에게 어떻게 안내를 해줘야 하는지 궁금하다는 질문 등 실무 차원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쏟아내고, 말씀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nbsp nbsp 법당에서 중요한 소임을 맡아 그만큼 열심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느꼈던 답답함과 고충들이 여실히 느껴졌습니다. 질의응답시간은 예상보다 뜨거운 열기 속에 두북 수련원의 밤이 깊도록 끝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내일 수련 일정을 진행해야 하므로, 아쉬움을 접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

2015.04.08. 20,091 읽음 댓글 8개

2015.4.6. 길벗 강연, 종교인 모임

nbsp nbsp 오늘 새벽 3시에 경주에서 출발하여 7시 10분 평화재단에 도착하신 스님께서는 7시 30분부터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 참석하셨습니다. nbsp 오늘은 특별히 통일부 관계자분이 참석하셔서 현재 북한의 상황과 남북관계 현황, 그리고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nbsp 참석하신 분들 모두 20여년 넘게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면서, 북한과 교류경험이 많으신 분들이고, 특히 종교인모임으로 모여 활동한 것도 이미 10년이 넘었기 때문에, 질문의 내용이나 대화는 현실의 난제를 풀어갈 해법들로 모아졌습니다. nbsp nbsp 종교인모임 참가자들은 인도주의 지원을 하면서 “생색을 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쉽게 취약계층이란 표현을 쓰지만 북한 측에서는 전부 다 취약계층이거나 아예 취약계층이 없다고 할 정도로 정치적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북한과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북한이 좋다는 게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출발해야 문제가 풀릴 수 있습니다”는 등 접근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누셨습니다. nbsp 현재 북한 측에서 개성공단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는 데, “다른 나라에 비하면 저임금이니, 임금을 인상은 해주되 협의의 절차를 제대로 밟아 가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nbspnbsp 인도주의 지원경험이나 교류협력의 경험이 오래되다보니 북한 정부나 현 남한 정부 양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런저런 정책 제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대북접근방식이 북한에 미끼를 던지거나 생색내려는 모습, 또 우리 식만 강조하고 고집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애정 어린 비판이 주를 이뤘습니다. 종교를 떠나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하고,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나눠지려는 진지한 제안이 넘쳐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nbsp 이후 스님께서는 연속해서 방문자들과 면담을 하셨는데, 필리핀에서 활동하다가 들어온 오성근 법우님의 인사를 받았고, 또 김은숙 처장님과 간단히 업무논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nbsp nbsp 점심 공양 후 3번의 만남을 더 가진 후 저녁 7시부터는 정토회 길벗모임에서 주관한 강연에 참석하셨습니다. 강연을 준비한 길벗은 종교와 상관없이 방송, 영화, 연극 등 예술인들이 모여서 마음공부와 사회봉사를 함께 하는 모임입니다. nbsp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대중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연기자들, 드라마 작가들, 제작자들과 감독들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일까요? 또 그들에게 스님은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요? nbsp 지난 10여 년 동안 길벗은 봄가을로 법륜스님을 모시고 즉문즉설을 열어왔습니다. 최근에는 강연이 커져서 500여 석의 강당을 꽉 채우고도 통로와 강단 위에서까지 들어야 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지만 정작 주최자인 길벗 종사자들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다 보니 자신들의 고민을 솔직하게 나누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이런 애로사항을 아시고 이번에는 작은 모임으로 준비해 보라 하셔서 오랜만에 방송, 문화, 예술인들만이 모여 작지만 깊은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첫 인사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고민을 터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터놓기도 쉽지 않은데 대중 앞에서 그런 고민을 꺼내놓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대중 앞에 자기 고민을 꺼낸다면 그것만으로도 반은 해결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하시면서 개인 상담보다 여러 사람 앞에 고민을 터놓았을 때 효과가 좋다고 하셨습니다. nbsp 그 이유에 대해서는 “첫째 그만큼 이미 자신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배심원 제도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대중들이 객관적인 판단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혼자서 생각할 때는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꺼내놓고 보면 세상에 특별할 일은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꺼내놓고 이야기 하다보면 고뇌하던 일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고, 더 좋은 것은 “고민이 아니네” 혹은 “별일 아니네”, “울 것도 없네”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그 문제를 직시해서 해결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정말 더 중요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구나” 이렇게 자각하는 것이야 말로 아주 좋은 해결책이라고 하셨습니다. nbsp 해결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시며, 남이 들으면 어떡하나 너무 고민하지 말고 친구에게 털어놓듯 주제에 구애 받지 않고 편안하게 생각하라며 강연장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풀어주셨습니다. nbsp 사회자가 먼저 길벗모임을 대표하여, 공통적으로 느끼고 고민하는 문제를 질문하였습니다. nbsp “저희 길벗에는 많은 작가와 연기자들이 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을 하지만 오랜 동안 무명의 시간을 보내면서 원망과 자책이 늘어만 갑니다. 포기할까 고민도 하지만 결국 다시 이 길로 돌아오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작품을 쓰고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까요?” nbsp nbsp 이 기조 질문에 스님께서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작품을 쓰고 연기할 수 있을까 이지만, 결국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요?” 로 들린다는 직설로 답변을 시작하셨습니다. nbsp “요즘은 교회나 절의 성공조차 교회가 크고 신도가 많다는 식의 물량으로 계산을 하려는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사회, 즉 돈이 주인인 사회에 살기 때문입니다. 직업이나 남편을 선택할 때도 돈을 기준으로 삼는데, 그렇다면 시청률이 높아 돈을 많이 버는 작품이 좋은 작품일까요? 지금 인기가 좋아도 10년, 100년 후면 쓰레기가 될 작품과 지금 인정을 받지 못해도 100년 뒤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 중 어느 것이 좋은 작품일까요? nbsp 좋은 작품이란 남의 평가에 연연하기보다는 자신이 쓰고 싶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며 행복해야 하는데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작품을 쓰다보면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다 보면 인기 있는 다른 사람 작품을 따라 하게 되는데 그게 과연 오래 갈 수 있을까요? 어찌어찌해서 일시적으로 인기를 끌다가 상황이 바뀌어 인기가 떨어지면 엄청난 좌절감을 느끼는데 그것은 대중에게 끌려 다니는 것이지 자신이 주인인 삶이 아닙니다. nbsp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도 그들의 문제고, 안 쳐다보는 것도 그들의 문제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을 쓰되, 인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편하게 쓰면 됩니다. 편하게 연기하고 노래를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 누구라도 집중해서 하게 되고, 속된 표현으로 미치게 되는데, 이렇게 집중이 되면 창조가 시작됩니다. 쓰고 싶어 쓰고, 연기하고 싶어 연기하고, 그리고 싶어 그리고, 노래하고 싶어 노래하면 그것이 곧 놀이가 되고 노동이 되지만 돈에 팔려서 글을 쓰고 연기를 하니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nbsp nbsp 그리고 인기에 연연하여 좀 높아지면 교만해졌다가 인기가 떨어지면 좌절하게 되는데, 대중이란 늘 불을 쫓는 나방처럼 이 사람 좋아했다, 저 사람 좋아했다 하는 법입니다. 거기에 너무 끌려 다니며 자기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됩니다. nbsp 특히 길벗은 매일 평가 받으며 살아야 하는 직업 종사자들인 만큼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 인기가 높아지든 낮아지든 ‘저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즐기면서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품 같은 인기에 끌려 살다보면, 남이 볼 때는 부러울지 모르지만 본인에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남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하시며 좋은 연기란 본인이 만족하는 연기이고, 좋은 작품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예수님도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한 채 십자가에 못 박혔고, 원효대사도 명예 회복되기까지 500년이 걸렸으며, 천주교 신자들이 100년 전엔 수난을 당했으나 지금은 성인으로 추대된 것을 예로 드시면서 성인으로 추대 받든 악평을 받든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평가할 뿐, 그것이 그 분들의 본질과 상관없는 것처럼 좋은 연기, 나쁜 연기라는 남의 평가에 중독되지 말고 연기를 하는 분은 마음껏 자신의 연기를 하고 작가는 자신의 글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nbsp “내일 죽어도, 모레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고, 늙어도, 인기가 떨어져도 아무 문제가 없도록 내가 좋아하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관점을 갖고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비슷하니 오히려 더 많은 호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인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 늘 대중의 인기에 연연해 할 수밖에 없고 방송사의 요구에 맞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길벗 모임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시는 한편 따끔한 일침이 들어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nbsp 첫 번째 공통 질문에 이어 젊은 신인 연기자가 두 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nbsp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정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학교 다닐 때 왕따를 당하다 보니까 연기를 하면서도 악역이나 다양한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하면서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제 마음 속에서는 어렸을 적 상처가 떠오를 때도 있고, 그때의 나로 돌아가서 힘들어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 속 번뇌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nbsp nbsp “그러니까 어렸을 때 왕따를 좀 당했어요?” “네.” “그러면 지금 자기가 왕따 당하는 연기를 하면 잘 할 수 있을까요?” “잘할 수 있겠죠.” “그래요, 왕따를 당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왕따를 당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왕따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연기를 하면 잘 할 수 있으니까 유리하겠지요. 왕따 경험이 없는 사람이 감독의 지시에 따라 연기를 하면 부자연스러운데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 그런 연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더 잘할 수 있겠죠. 어떤 경험이든 경험 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만들면 본인이 연기하는데 자산이 되지만, 그것을 상처로 가지고 있으면 지금 말한 대로 연기가 끝난 뒤 괴로워지는 겁니다. 경험이 모두 상처가 되는 건 아니에요. 상처라는 것은 심리적으로 그 경험의 응어리, 심리적 흉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 심리적 흉터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아 내가 어릴 때 왕따를 당했던 것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어서 이렇게 힘들구나’ 자각하는 거예요. 치유하려고 하면 상처가 오히려 덧나게 됩니다. 아직 상처가 있으면 ‘아 아직 상처가 남아있구나 육체에 흉터가 남듯이 마음에도 아직 남아있어 괴로움으로 일어나는구나.’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상처에 빠져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놈의 자식이 이랬지, 저랬지.’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요. nbsp 반대로 자기가 왕따 시키는 역을 하면 어떨까요? 왕따 시키는 역을 해보면 왕따를 시키는 사람은 왕따를 시킨 게 아니라 ‘그냥 그때 자신의 성질나는 대로 했을 뿐이구나 나는 괴로웠는데 본인은 괴롭힌 기억을 못하는 구나.’를 알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괴롭힌 게 아니기 때문에 기억도 못해요. 그런데 상처 받은 사람은 아무 때 어느 곳에서 어떻게 괴롭힘을 당했는지까지 다 기억하죠. 그래서 세상에는 상처 받은 사람은 많은 데, 상처를 준 사람은 별로 없어요. nbsp nbsp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상대를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누구도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내 속에 상처가 있다는 것이거든요. 과거의 상처를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경험이 돼서 자산이 되지만, 그것을 상처로 움켜쥐고 있으면 죽을 때까지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어렸을 때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그 부분에 있어서는 사고가 성장을 하지 않습니다. 성장이 멈추는 거죠, 내가 여덟 살 때 엄마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자신이 술을 먹거나 어떤 상황이 되면 여덟 살 때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풀어줘야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해서 어른이 됩니다. 그렇다고 그때 상처를 풀어야겠다고 조급함을 가지면 안 되고 상처를 알아차리면 조금씩 풀리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릴 때 왕따 당한 경험을 상처로 움켜쥐고 있지 말고 경험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를 기억해도 기억은 있지만 괴롭지는 않게 됩니다. 오히려 어려운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nbsp “상처를 경험으로 승화시켜서 연기의 자산으로 쓰라”는 스님의 말씀은 창작자들의 모임인 길벗에게 꼭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 nbsp nbsp 다음 질문자는 운이 좋아 작은 방송사의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지만 더 큰 방송사로 나가기 위해 계속 면접을 보고 경쟁을 하다 보니 자꾸 이기적이고 독해지는데, 간절한 마음은 유지하되 이기적인 마음은 비우고 싶다는 질문을 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많은 대학 졸업자가 취직을 못하고 있는데, 작은 방송사 계약직이라도 취직을 한 것은 좋은 일이니 먼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지금 취직 못한 사람이 더 많고, 지금 가진 직장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니 고마운 줄 알아야 합니다. nbsp 더 나은 방송사에 가고 못 가고는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방송사에서 원해야 되는 일이니 나는 다만 내게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지금 업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일해야 합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웃으면서 있다 보면 더 나은 곳에 갈 확률도 높습니다.”라며 지금 현재에 감사하고, 그리고 항상 웃으며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nbsp 덧붙여 방송 연예인, 아나운서, 작가는 사회적으로 선호하는 직업이므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인기의 수명이 짧아 그 인기에 목을 매는 순간 불행해진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치열한 경쟁이 싫다면 월급과 직위도 없고 은퇴도 없는 스님과 농부가 최고라고 우스개 말씀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직종이다 보니 치열한 경쟁과 짧은 인기는 당연한 것이지만, 한 때 꽃으로 피워보는 것이라며 “길게 가고 싶으면 잎으로 살면 되고, 그래도 꽃으로 한 번 펴 봤다, 일장춘몽이라도 이걸로 한 번 해봤다며 여기에 만족할 줄 알고 가볍게 받아들이면 결과적으로 롱런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롱런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불안하고 초조해져 오히려 나쁜 결과가 올 수 있습니다”는 말씀을 들으니, 어떤 목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셨습니다. nbsp nbsp 늘 시청자들과 방송사에게 평가를 받아야 하니 불안과 긴장 속에 지내는 시간은 많고,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지면 질수록 쉽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던 길벗 종사자들은 비슷한 고민에 시원한 답변을 주시는 스님 말씀에 완전히 몰입한 듯, 강연장은 진지한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nbsp 그 외도 글을 쓰고 싶은 작가 지망생인데, 천성이 게을러서 그런지 인내심이 부족해서 그런지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열심히 집중해서 일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런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는지 묻는 분, 반려자 문제로 고민하는 여성 질문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이혼한 뒤 다시 연애를 해 봐도 첫 남편만한 남자가 없는 것 같아 전 남편과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질문들도 있었습니다. nbsp nbsp 벚꽃망울만큼이나 터뜨리고 싶은 궁금증이 눈망울마다 가득했지만, 어느새 예정된 시간이 훌쩍 지나자 스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강연을 총정리 해주셨습니다. nbsp “결론적으로 첫째, 방송인, 연예인, 연기자, 작가라는 직업이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을 알면서 여러분이 선택한 것이니 그걸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설악산 가겠다는 사람이 고무신 신고 오르면서 ‘산이 왜 이리 높냐’고 타박하면 안 되듯이, 고무신 신었으면 뒷동산을 가야하고, 설악산 가려면 그만큼 장비를 준비해서 힘이 들 각오를 해야 합니다. 꼭 설악산이 뒷동산 보다 낫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nbsp 그리고 두 번째 인기라는 것은 경쟁이 치열한 만큼 수명이 짧다는 것입니다. 이 직업을 선택할 때 그런 예측을 했다면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봄에 잎이 필 때 낙엽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봄 잎이 낙엽 흉내를 내면 애 늙은이가 되는 것이고, 봄 잎이 낙엽을 못 보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니까낙엽을 보되 봄 잎은 봄 잎으로 피어나고, 꽃은 꽃으로 3일 만에 떨어져도 만족해야 합니다, 그래도 한 번은 폈다가 떨어지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인기가 중요하되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기다움이 중요하고 작가는 쓸 뿐이지 평가에 연연해하지 마세요. 물론 그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평가와 인기에 연연하지 않을 때, 여러분 자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나날이 행복하십시오” nbsp nbsp 지난 주말,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 덕분에 파릇한 새싹과 예쁜 꽃망울이 터져 나왔듯이 스님의 시원한 즉문즉설에 길벗들의 창작 싹이 저마다 움을 틔우길 기대해 봅니다. 강연을 다 마친 후 다함께 기념 촬영을 한 후 스님께서는 내일 있을 제1기 통일학교 경주역사기행을 위해 또 밤길을 달렸습니다. 경주로 가는 길에 잠시 서초동에 들러서 오늘 귀국한 ‘정토회 해외지부 사무국장’인 김순영보살님의 인사를 받은 후 바로 경주로 향하셨습니다. nbsp nbsp nbsp

2015.04.07. 22,332 읽음 댓글 8개

2015.4.5.두북 수련원에서 서울, 문경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nbsp nbsp 스님께서는 모처럼 여유로운 주말을 맞으셨습니다. 숨 쉴 틈도 없이 하루에도 몇 건씩 중요한 일정을 소화하시느라 늘 바쁜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서울 공동체 대중들과 탑곡수련원에서 농사운력을 하기로 했는데 어제 저녁부터 비가 와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 여유로운 일정이었습니다. nbsp 서울 대중들은 원래대로라면 아침 일찍부터 탑곡수련원에 올라가 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운력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밭이랑마다 비닐을 씌우는 일을 하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땅이 너무 질척거려 흙을 덮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탑곡수련원 운력을 못하게 됐으니 두북수련원에 있는 JTS창고를 어떻게 정리하면 될지 살펴보고 의논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몸이 너무 피곤한 사람은 울력에 나오지 말고 푹 쉬다가 같이 점심식사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몸이 아파서 공동체 울력에 빠지고 쉬게 되면 알게 모르게 마음의 부담을 느끼게 마련인데, 스님께서 먼저 배려해주시니 휴식을 취하는 대중들도 모처럼 마음 편히 쉬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대중들이 JTS 창고 운력을 하는 동안 화광법사님과 수련원 안팎을 돌아보면서 수련원 내에서 정비해야 할 것과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안내를 받으면서 수련원을 둘러보셨습니다. nbsp 그리고 JTS 창고에 잠시 들러 어떤 물건들이 얼마나 있는지 한번 둘러보시고 창고에 보관된 물품들을 어디에 어떻게 지원하고 정리할 것인지에 대해 잠시 의논하시기도 하셨습니다. nbsp nbsp 두북수련원을 둘러보신 후 탑곡수련원으로 이동하셨습니다. 탑곡수련원에서는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농사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들을 주고 받으셨습니다. nbsp 점심 식사 시간에는 마을잔치가 열린 것 같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최말순 보살님께서 대중들을 위해 부추전과 파전, 그리고 맛있는 후식들까지 맛깔난 식단을 마련해주시고, 어제 도반의 언니가 보시해주신 먹거리까지 더해져 식탁이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습니다. 한쪽에서는 고소한 기름을 둘러 부추전과 파전을 지지고, 한쪽에서는 쉼 없이 웃음꽃이 피어나는 정겨운 풍경이었습니다. SBS 촬영팀도 오늘은 카메라를 놓고 마음 편히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nbsp nbsp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소임에 따라 뒷정리를 했는데, 서울 대중들이 가고 나면 곧 문경 대중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본래 사용하기 전의 자리처럼 깔끔하게 치웠습니다. 그리고는 곧 스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식사를 잘 했는지 물어보시고는, 어제 역사기행 다녀온 소감을 나눠보자고 하십니다. nbsp nbsp 스님 옆에 앉아 있던 도반부터 한 사람, 한 사람 어제 청년대학생 청년들의 역사기행에 뒤따라 다녀온 소감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꽃놀이를 실컷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고, 300명 넘는 젊은 청년대학생들을 만나 덩달아 기분이 즐거웠다는 얘기, 예전에는 꽃이 예쁜 줄 모르겠더니 나이가 들면서 꽃이 정말 예뻐지더라, 스님을 닮아서인지 꽃이 좋아졌다는 얘기, 스님의 배려 덕분에 역사기행까지 할 수 있어 감사했다는 소감이 이어졌습니다. 스님께 감사한 마음을 표할 때마다 스님께서는 “아유 낯간지럽다”시며 웃으셨습니다. nbsp 공동체 성원으로 같이 살지만, 그동안 서로 맡은 소임이 달라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별로 없는데, 이번에 두북수련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차량 안에서 큰 소리로 통일노래를 메들리로 부르면서 피로가 확 풀렸고, 또 스님과 함께 역사기행을 다녀서 들뜬 기분이었다는 소감도 있었습니다. nbsp nbsp 또 통일의 기회가 이번 한 번뿐이라는 스님 말씀에 정말 가능할까 회의적인 마음도 있었는데,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서 신라와 가야가 통합한 사례를 다시 돌아보면서 ‘우리도 가능하겠구나’ 희망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라와 가야가 통합해서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루고 국가 발전을 이룬 얘기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대목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과 빗대어 말씀해주셔서 이해하기가 쉬웠고, 신라와 가야의 통합 얘기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생생한 과제로 다가왔습니다. nbsp 자기 업무와 연관시켜 스님의 통일강좌와 역사기행을 통해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의 이 좋은 컨텐츠들을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접근하기 쉽고 편리하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알리면 좋을지,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연구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nbsp 자연스럽게 우리는 도반들의 생각과 소감 속에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며 성장합니다. 여기에는 늘 스승님의 통찰력과 구체적이고도 실현가능한 조언이 더해져 언젠가 현실로 이뤄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간이 그냥 흘려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놀면서 일하는 일과 수행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소감을 귀 기울여 들으시고는, 봄에는 공동체 성원들과 꽃놀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경위를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나도 사실은 경주 기행을 한 것이, 예전에 대불련 학생들이나 청년들 데리고 현장 학습을 하러 다닐 때 한창 다니다가 중간에는 평리아나 청리아 등 특별한 일정 빼고는 안했어요. 예전에는 꽃 피는 순서도 다 알았는데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어요. 그러다 전국 300강하면서 전국을 다니잖아요.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어떤 꽃이 피는지, 산 아래에서 산 위로 언제 꽃이 피는지, 꽃 피는 시기가 달라지는 것을 다시 알게 된 거야. 그러니 우리 대중들도 봄에는 자연을 느끼는 게 좋겠다 싶어서 4월 한 달만이라도 주말에는 두북에 내려오자고 제안을 하게 된 겁니다. 이번 역사기행은 청년들의 수가 많고, 꽃놀이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일반적으로 역사 강의를 할 때보다 12이나 23 수준밖에 못했어요. 만약 촬영을 한다면 통일의병 역사기행 할 때나 이렇게 집중적으로 역사 얘기를 할 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사람 수도 많고, 시간에 쫓기니까 그렇게까지 자세히 얘기는 못했어요. 이번 4월 주말에는 여기 계속 있게 되는 것 같아요. 통일의병 역사기행도 있고, 청리아와 평리아 역사기행도 있고, 불대생 경주 남산 순례도 있고. 나도 이런 일들이 안내하는 것이기도 하고, 놀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해요. 다만 봄에는 농사를 좀 지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잘 안 나네요. 앞으로는 여러분들도 봄에 여기 내려오는 것을 정례화 하다시피 해서 꽃놀이도 하고 자연을 벗삼아 그렇게 지내봅시다. 내년에는 백운산 등반을 하면 좋겠어요. 저도 여기 살면서 치술령이라고, 초등학교 교가에도 ‘치술령 정기를 받아’ 이런 가사가 있는데, 한 번도 못 올라가봤어요. 단석산에도 못 올라가봤고. 거기 가려고 해도 한나절은 시간을 내야 해요. 이번에는 그럴 시간이 없지만, 다음에는 운동 삼아 기분 전환겸 한 번 가보는 것도 좋겠어요.” nbsp lt벚꽃 나무gt 벌써 내년 4월 일정을 짜는 스님 말씀에 공동체 성원들의 얼굴이 저절로 밝아집니다. 지난 2주 연속 두북수련원에서 일정을 보내고 있는데, 서울을 떠나 자연과 벗 삼는 것이 왜 필요한지 다들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불현 듯 당신의 마지막 과제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 “제가 법문이나 사회활동이나 이런 데서 은퇴하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게 농사와 수행을 결합하는 농업공동체를 구성해보는 일이에요. 자원봉사와 전문가가 결합해서, 또 도시문명과 농촌문명을 결합하고, 일과 수행이 결합되는, 그래서 놀이를 생산화사키는 이런 모델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이게 미래 문명 전환의 계기가 될 거라고 봐요. 꼭 앉아서 명상을 한다든지, 운동한다고 밥 먹고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한다던지,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낭비하는 거잖아요. 동물은 어때요? 노동이 운동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공짜로 먹으니까 운동을 따로 한단 말이죠. 그래서 이런 것을 결합하는 방식, 이게 미래 문명을 여는 길이 될 것으로 생각해요. 우리가 민족의 과제인 통일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민족이니 통일이니 이런 것을 넘어서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이런 것을 실험해보는 것이 필요해요.” nbsp 모든 일은 정토행자들이 스스로 일궈나가도록 하고, 우리 공동체 성원들은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생태문명을 실험해보자는 말씀을 이전에도 여러 차례 듣기는 했지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는 하루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일 문제가 어서 평화롭고 지혜롭게 해결돼서 우리 스님께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시면서 인류문명의 새 기틀을 닦는 일에 기여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nbsp 업무관련 논의까지 간단히 마친 뒤, 스님께서는 서둘러 일어나시며 두북수련원 앞마당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셨습니다. 커다란 벚꽃나무 두 그루가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는 앞에서, 스님께서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위치를 잡아보시면서, “어느 게 더 낫나. 벚꽃나무가 한 그루만 나오는 게 낫나, 두 그루가 다 나오는 게 낫나?” 물어보셨습니다. 대중들은 웃으면서 카메라 위치를 잘 잡는 도반에게 부탁하는 게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스님께서도 곧 카메라를 넘겨주시고는 대중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SBS촬영팀과의 기념 촬영까지 마친 뒤 모두 각 차량에 탑승해 백운산으로 향했습니다. nbsp 급경사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을 오르고 올라 평평한 산길에 이르러 차량들을 먼저 보내고 대중들은 내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백운산에는 유독 연분홍 진달래꽃이 많이 보였습니다. 간혹 꽃망울이 크고 진한 분홍 꽃도 보였는데, 그럴 때마다 스님께서는 발을 멈추시고는 대중들에게 여기 보라며 손짓을 해주셨습니다. 대중들은 스님께서 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잘 알기에 꽃이 보이면 “우와아” 평소보다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서로 “좀 더 영혼을 담아서 감탄해야지”라며 한바탕 웃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산나물 이름과 꽃 얘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다들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서울 공기가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됐노라고 말씀드리니, 스님께서는 “그렇지. 나도 서울에서 자면 5시간을 자도 머리가 안 개운해. 그런데 여기 오면 하루에 3시간만 자도 아주 가볍고 개운하게 일어나. 그러니 사람은 공기 맑은 데서 살아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거야”라며 시골예찬을 하셨습니다. nbsp nbsp 스님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저 앞에 차량 운전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서있습니다. 스님과 대중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던 가 봅니다. 시간이 늦어지기도 하고 비가 온 뒤라 춥기도 해서 더 걷지는 못하고, 다시 차량에 올라타 언양의 작천정으로 향했습니다. 작천정은 마침 벚꽃축제가 열려 수많은 인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벚꽃터널 밑으로 사람들이 물결처럼 올라갔다 내려오고 길목 옆에는 온갖 먹거리와 볼거리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일행들을 놓칠까 싶어 종종걸음으로 선두에 가시는 스님 뒤를 따라붙으면서도, 대중들은 연신 핸드폰 카메라를 들어 쏟아질 것 같은 벚꽃을 찍기에 바쁩니다. 몽실몽실한 벚꽃이 얼마나 탐스럽게 피었는지 사진을 찍으면서도 절로 입이 벌어집니다. nbsp 작천정은 “수석이 기이해서 마치 술잔을 주렁주렁 걸어놓은 듯 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조선 세종대왕 시절에 지방의 학자들이 세종대왕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작천정이라는 정자도 있고, 임진왜란 때는 많은 의병이 순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nbsp lt탑곡 수련원의 앵두나무gt 기나긴 벚꽃터널을 지나 시끌벅적한 거리를 빠져나오자, 작괘천이라는 시내가 흐르는 조용한 계곡이 나타납니다. 몇 년 전에 스님께서 친히 일러주셔서 이곳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한 기억이 났습니다. 스님께서는 위에 온천장이 생기면서 물이 그렇게 맑지는 않다고 하셨습니다. 어제 내린 비로 강물은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넘쳐흘렀습니다. nbsp 계곡을 짧게 둘러보신 스님께서는 저녁에 문경대중들과 일정이 잡혀있어 여기서 그만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과 헤어지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할 만한 장소가 없으니 각자 알아서 먹고 싶은 것 사먹고 가라며 용돈을 주기 시작하자 또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께 세뱃돈으로 천원만 받아도 다음 생에 스님 따라 인도에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익히 들어온 터라, 스님 용돈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스님께 용돈 받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어 대중들은 한 사람, 한 사람 합장하고 용돈을 받아들었습니다. 대중들은 간단히 저녁 요기를 한 뒤 서울로 향하기로 하고, 스님께서는 문경 대중들과 일정을 보내기 전에 모종을 심어야 한다며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nbsp nbsp 문경 공동체 대중들과의 일정은 저녁 7시 30분부터 시작됐습니다. 문경 공동체에는 수련을 진행하는 법사님들과 교육팀, 수련팀, 살림팀 그리고 행자원 등이 있습니다. 이번 모임에는 각 부서에서 소임을 맡고 있는 실무자와 상근자 40여 명이 함께 했습니다. 서울 공동체에는 10년, 20년이 넘는 오래된 실무자들이 모여 있다면, 문경 공동체에는 갓 백일을 넘긴 상근자들로 초심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스님께 인사 올리는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문경 대중들은 내일 천마총 앞에서 자전거를 빌려 첨성대와 계림을 지나 교동 최씨 저택을 구경하고, 교촌교와 월정교 앞으로 해서 경주박물관을 거쳐 황룡사지에서 사시예불을 드린 뒤 분황사에 갔다가 보문단지를 둘러보는 일정을 보낼 계획이라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일정을 가만히 들어보시더니 차로도 15분 걸리는 거리를 자전거로 20분을 잡았다며, 그렇게 주파할 수 있겠느냐 웃으며 물으셨습니다. 스님 머릿속에는 지명만 들어도 거리와 시간이 착착 계산되는 자동계산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면 꽃놀이를 더 잘 할 수 있을지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nbsp nbsp nbsp 일정 공유를 한 뒤에 곧이어 상근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수련팀에서 수련장 시설을 맡고 있는 한 상근자는 불쌍한 아이들을 돕고 싶어 소득이 적은데도 봉사활동을 해왔는데,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딸이 시력을 잃어가고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돕고 살았는데도 내 딸에게 힘든 일이 오니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병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자기 안의 모순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순에 어떻게 처신해야 될지 여쭤보았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진단을 통해 암을 발견하면 좋은 일입니다. 발견을 못했으면 암인 줄 모르고 살다가 죽었을 텐데, 암인 줄 알았으니 이제는 선택이 자신한테 주어진 게 아니겠어요? 알기 전에도 잘 살았으면, 알고 난 뒤에 방황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으니 이게 더 큰 모순입니다. 자기가 모순된 마음을 가진 줄 딱 알아차리고 각성한다면 내 아이를 돕는 데 남의 아이 돕는 것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있어서 내 아이만큼은 병에 안 들기를 원하는 것은 절에 들어와서 살아도 수행과 아무 관계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놓쳤을 때 놓쳤구나 바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놓칠 수 있지만 놓쳤을 때 바로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게 수행입니다.” nbsp 행자원에서 백일출가 스텝 소임을 맡고 있는 한 젊은 상근자는 스님께 무대공포증을 호소했는데, “무대공포증이 있는 걸 알면 됩니다. 무대공포증이 있는데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자기가 문제를 만드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있어서 말이 잘 안 나와요.’ 이렇게 사람들 앞에 솔직하게 인정하고 생활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극복이 되는데, 그걸 숨기고 없는 것처럼 살려고 하니 더 긴장되고 자꾸 안 되는 쪽으로 가는 겁니다. 이처럼 부족한 게 있기 때문에 여기 들어와서 사는 것이 아니겠어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준 이 과제를 문제 삼지 말고,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이런 생각 자체를 놓아버리고 수행정진하세요.”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nbsp 올해 1년 째 상근중인 대학 휴학생인 상근자도 “잘하려고 하면 완벽하게 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자포자기로 빠지고, 또 완벽하게 하다가 자포자기 했다가 반복합니다. 최근에는 우울증 진단을 받아 일을 편하게 하다가도 잘하려다 보면 숨이 턱 막힙니다. 정도를 어떻게 맞춰야 될지 어렵습니다.”라고 스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잘 해야지 하면서 노력은 안하니까 모순이 생긴다”고 집어주셨습니다. 또 ‘잘 한다’의 기준은 상대적인 데 있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상대 평가는 내가 속해있는 상황에 따라 나오기 때문에 내 실력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며, 나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일에 목매달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안하는 것보다는 열심히 하는 게 낫지만 그 결과가 좋을지 나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할 뿐”이라 말해주십니다. nbsp “수행이라는 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부딪히면서 ‘내가 성질이 이렇구나, 내가 저런 점에 집착했네.’ 발견하면서 자기 상태를 점검하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내 습관을 잘 알면 더 이상 그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법사님들 보고 나는 언제 법사님들처럼 될까하는 마음도 욕심입니다. 수행한지 20년, 30년이 되도 부족하지만, 그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런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지만 계속 노력할 뿐입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시면서 내 능력이 어떠했다가 아니라 ‘지난 오십 몇 년 동안 근면하고 성실하게 정진해왔노라.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nbsp nbsp 스님과의 시간을 마친 문경공동체 상근자들의 얼굴이 밝아보였습니다. 절에 들어와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불편한 마음들을 보게 되는데, “놓치지 않는 게 수행이 아니라 놓쳐도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것이 수행”이라는 말씀에 한결 가벼워진 모습입니다. “자전거를 배우며 수없이 타다가 넘어져도 내가 타고자 연습하고 있다면, 그건 넘어져도 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문경 대중들은 조금 더 자기 과제에 집중하고자 새롭게 발심하며 스님께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늦은 시각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질문에 정성껏 대답해주셨습니다. 내일은 아침부터 평화재단에서 종교인모임 조찬이 있어 새벽 3시에 서울로 출발할 예정입니다.nbsp

2015.04.06. 22,434 읽음 댓글 15개

2015.4.4.청년경주역사기행

nbsp nbsp 새벽 기도를 마치자 어느새 동이 튼 두북수련원의 아침은 만개한 벚꽃들로 절로 탄성이 터집니다. 스님께서는 답사를 다녀오겠다시며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섰습니다. 어젯밤 늦게 도착한 서울 공동체 대중들을 위해 개나리, 진달래, 벚꽃구경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를 알아보려고 바쁜 시간 또 짬을 내시는 겁니다. 내일 울력 할 탑곡수련원에도 들르시고, 어디에 볼거리가 있을지 여기저기 둘러보셨습니다. nbsp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신 스님은 서울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오늘 있을 청년정토회 역사기행 장소로 이동하셨습니다. 두북수련원에서 경주 태종무열왕릉 쪽으로 가는 동안, 스님께서 타신 차량이 선두에 섰습니다. 평소라면 짧은 직선거리를 택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돌아가는 길로 들어섰는데 온 길가에 벚꽃나무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벚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하신 겁니다. 대중들은 끝도 없이 물결처럼 장관을 이루는 벚꽃나무에 정신없이 기뻐하며, 여기저기서 웃고 박수치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습니다. 봄만 되면 가요순위 1위에 오르는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따라 부르다가 올라가는 음이 너무 어려워 삑사리가 나자 다시 또 한바탕 웃습니다. 소풍 나온 어린아이들의 심정이 되었습니다. 한 도반이 “우리 스님께 감사함을 표하자”며 스님께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대중들의 환호성과 함께 “스님 감사해요”, “스님, 정말 벚꽃이 멋져요” 너도나도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시끄러워서 잘못 걸려온 전화인줄 알고 끊어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음성녹음을 해서 보내드렸습니다. 공동체 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신 스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태종무열왕릉에 도착하자 청년정토회 스탭들과 청년대학생 참가자들이 벌써 와 있습니다. 역시 봄날 벚꽃에 어울리는 밝고 화사한 청춘들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모여 있습니다. 역시나 청년 대학생들도 들떠있는 분위기입니다. 태종무열왕릉 앞에서 스님과 서울, 인천, 부천, 분당 수원, 청주, 대전, 광주, 대구, 포항, 부산, 울산, 진주, 창원 등 총14개 지역에서 온 청년 316명이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법륜스님께서는 행사에 앞서 원래는 대학생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었는데, 점점 연령대가 올라가고 있어요. 여기 대학교 신입생 손 들어봐요. 몇 명 안 되잖아. 그러면 대학생 손들어 봐요. 뭐라고? 불교대학생이라고? 그러면 불교대학생들 손 들어봐요. 와 많네. 그런데 35살까지는 어떻게 청년이라고 봐주겠는데, 서른다섯 살이 넘는 사람? 네 모두들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 하셨어요. 오면서 꽃을 정말 많이 봤는데 오늘은 봄 꽃 나들이 반, 역사기행 반이라고 생각하고 기행합시다” 라고 말하시며 일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일정은 ‘무열왕릉진흥왕릉김유신장군묘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능지탑황룡사지분황사’로 예정돼 있습니다. nbsp nbsp 무열왕릉과 진흥왕릉에서는 작은 부족 국가였던 신라가 어떻게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지, 특히 신라와 가야의 통일 과정에서 오늘날 우리가 남북통일에 참조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설명해주셨습니다. 진흥왕릉은 작년까지 가보지 못했지만 올해 새로 단장해서 가보았는데, 처음에는 진지왕릉이 진흥왕릉인줄 알았습니다. 통상적으로 선대의 무덤이 위에 위치한다는 스님 말씀에 이제부터는 무덤의 위치도 눈 여겨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신라가 금관가야와 통합을 하게 되면서 한 단계 도약하게 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법흥왕은 금관가야와 통합하면서 가야의 종교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가야의 왕족 또한 신라의 귀족으로 차별 없이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차 부족국가에서 영토 확장은 물론 수준 높은 철기문명을 이뤘던 가야문명으로부터 직수입한 문화로 한 층 도약하는 계기를 이루게 됩니다. 또 훌륭한 인재들이 보다 많아져 삼국통일의 기반을 이루게 됩니다. 112가 아니라 5가 되고 10이 되는 선례를 남긴 자랑스러운 통합의 역사입니다. 굳이 우리가 동서독 통일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배울 점이 뚜렷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이후 스님과 청년들은 흥무공원까지 40분 정도 벚꽃이 만발한 벚꽃터널길을 걸었습니다. 김유신 장군묘에 도착해서 삼배를 드린 뒤, 옹기종기 모여앉아 또 스님의 재미난 옛날 얘기를 들었습니다. nbsp nbsp “세상 어머니들에게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김유신 같은 아들을 낳으라고 할만큼, 그 어머니에게는 정말 엄청난 효자였습니다. 그런데 애인 입장에서는 어떨까? 천관이라는 애인과의 얘기 알아요?” 기생 천관녀와의 일화는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아주 유명하지요. 그렇지만 스님께 다시 들어도 재미납니다. 한때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던 젊은 유신에게 어머니가 엄하게 훈계를 하셨다죠. 유신은 어머니 말씀에 각성하고 술도 끊고 갑자기 여자의 집에 발길도 끊었다고 합니다. “ 사정이 이러이러하게 됐다 이렇게 미리 말을 해주면 좋을 텐데, 김유신 장군은 어떻게 했어요? 어느 날 발을 딱 끊어버린 거야. 그러다 어느 날 술 먹고 취해서 말을 탔는데 그 말이 자연히 여자 집으로 간 거야. 여자는 아주 반가운 마음에, 어때요? 신발도 안 신고, 요즘 말로 하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그리운 사람이니까 안으로 들였겠지. 나중에 유신이 술에서 깨고 보니, 그 여자네 집인 거야. 갑자기 칼을 빼 들어서 말의 목을 탁 내리쳐버린 거야. 아무 말도 안 해. 그 길로 뒤돌아가서는 다시는 안 나타게 된 거지. 여자 입장에서 보면 좋은 남자여, 나쁜 남자여? 그래, 어머니한테는 세상 둘도 없는 좋은 아들인데, 여자한테는 아주 못 된 남자인 거야. 김유신이 말의 목을 단칼에 베 버릴 정도로 그런 단단한 성정이 있었던가 봐요.” nbsp nbsp nbsp 나중에 천관녀가 좌절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자, 김유신 장군이 천관녀의 원혼을 달래주려고 절을 지었는데, 바로 ‘천관사’라고 합니다.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김유신 장군의 단호한 성격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천관녀와의 설화보다, 후세에 신하로서는 처음으로 ‘흥무대왕’이라는 칭호까지 받을 만큼 통일신라를 건설하는 데 김춘추 태종무열왕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웠던 김유신 장군이 사실은 가야 출신이라는 점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신라는 피를 흘리지 않고 금관가야와 통합하면서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장군을 얻은 것입니다. 끝까지 신라에 항전했던 대가야는 무력으로 짓밟히면서 역사의 흔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죠. nbsp nbsp 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8년 동안 전쟁을 할 때도 김유신 장군의 결단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당시 김유신 장군의 대 당나라 전쟁에 대해 “지금으로 치면, 한미연합군이 북한을 무력으로 제압했는데 미국이 물러나는 게 아니라 미군정을 실시하려고 한 것과 같아요. 그럼 과연 남한에서 미국과 싸워서라도 북한을 찾아야 한다고 나설 장군이 있을까?”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모두들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나라에 항전했던 김유신 장군의 결단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역사의식이 없었으므로 삼국통일이 신라에게는 성공이지만 민족사 전체로 볼때는 우리 민족사를 한반도 내로 축소시켜 버린, 그래서 대륙의 변방으로 전락한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또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 백제의 계백장군,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어쩌면 당시에는 상대국에 철천지원수였겠지만, 지금 우리 후손들에게는 각각 훌륭한 장군들이고 다 우리의 조상인 것처럼, 남북한에서 기리는 군인들도 지금은 서로 원수지만 나중에 통일이 되면 다 존경받는 군인들이 되지 않겠느냐”고 비유해주셨습니다. 통일이 되면 정말 우리의 인식 체계가 확 바뀌겠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재미나게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어느덧 점심식사 시간이 지났습니다. 청년 대학생들은 김유신 장군묘 아래에 있는 흥무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하고, 각 모둠별로 모여 스님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nbsp 약간 날이 쌀쌀해지면서 슬슬 몸이 떨려오기는 했지만 즐거운 점심식사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천왕사로 향했는데 전국 관광객들이 경주로 모여들었는지, 도로에 차량들이 거북이걸음으로 가면서 주차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예정 시각보다 많이 늦게 사천왕사에 도착했습니다. 사천왕사는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이 깨지면서 당나라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건립된 호국사찰입니다. 이곳은 명랑법사와 12명의 유가승들이 신과 부처님의 힘을 빌어 기적을 만드는 문두루 비법을 행했다고 전해집니다. 명랑법사와 12명의 유가승이 행한 문두루 비법의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신라를 침략하려던 당나라군 20만 명은 신라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서해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수장됐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했지만, 민족의 자주적 입장에서 당나라와 협력한 최소한 우리의 이익을 지켜내는 신라의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통일을 하게 되면 다른 외세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지켜내면 좋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nbsp 사천왕사지에서 낭산 중턱으로 이어진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선덕여왕릉이 나왔습니다.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른 후 국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만의 리더십으로 인재를 육성하고, 황룡사 9층탑과 첨성대와 같이 후대에 길이 남을 훌륭한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선덕여왕에 대한 지혜로운 이야기 세 가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덕여왕릉을 지나 언덕을 내려오니 능지탑이 나왔습니다. 능지탑은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문무대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유골은 동해바다 대왕암에 묻고 재를 모아 이곳에 탑을 쌓았습니다. 능과 같은 탑이라 하여 능지탑이라 이름 지어진 곳입니다. 이런 능지탑은 발해 외에 신라에는 이곳밖에 없다고 합니다. 부쩍 차가워진 날씨에 하루 종일 강의를 듣다보니 청년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스님께서는 황룡사지까지 걷지 말고 버스를 타고 가자고 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청년들이 환호하며 버스로 향했습니다. 황룡사지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nbsp 황룡사지에 허허벌판뿐이었지만,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신라의 9층 석탑을 보는 것처럼 생생히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곧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마치 한여름 집중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황급히 분황사지로 이동했지만 더 이상 강의를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굵은 비가 세차게 쏟아져서 분황사는 아쉽게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비소식이 예고된 터라 다들 우산과 비옷을 꺼내들긴 했지만, 워낙 세찬 비라 다들 바지와 신발이 젖어 추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서둘러 버스에 올라탄 청년 대학생들은 저녁식사와 마지막 일정을 하기 위해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nbsp 다들 하루 종일 걸었던 터라 배가 고팠던지, 거의 남김없이 밥을 쓱싹쓱싹 다 비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강당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몹시 노곤했을 법도 한데, 청년들은 기대되는 얼굴로 스님의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이날 질문에는 조선소에서 일하는데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다는 분, 욱하는 성질을 고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분, 엄마의 집착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려는데 망설이고 있는 분, 역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에 대해 궁금한 분, 출가하면 세속과 다른지 묻는 분, 사회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결 하면 좋을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nbsp 그 중 역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해드립니다. “역사 문제가 나오면 늘 하는 말인데 일제시대 때 태어난 학생이 소학교에 들어가 수석을 해요. 이 아이 꿈이 인생을 성공시켜보는 건데, 시골에서 자라 도시 중학교까지 가서 1등을 해요.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1등을 해요. 서울 경성대학교를 가서도 1등을 하고, 학교 다닐 동안 고시를 거쳐 졸업하자마자 지방의 검사나 군수가 되면 옛날에 영감이라 불렀는데 더 열심히 해서 서른도 안 돼 지검장이 되요. 그러면 시골에선 완전 출세한 사람이지. 근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나라가 해방이 됐어. 어제 저녁까지 성공한 인생이 오늘 아침에 실패한 인생이 돼버렸어요. 친일매국노가 돼버린 거지. 일제치하의 지검장 정도면 일제 앞장이 중 핵심인물이잖아요. 근데 이 사람이 남을 때린 것도 아니고 죽이거나 욕한 것도 아니고 술 먹고 행패부린 적도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아무 잘 못을 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근데 왜 어제 저녁까지 대성공을 거둔 사람이 오늘부터 비난받는 인생이 되느냐? 옛날식으로 얘기하면 ‘사주에 그렇게 되었다. 전생에 과보를 받았다’ 그리 생각할 수 있잖아요. 달리 설명이 어렵잖아요. 하지만 이게 설명이 되는 게 역사의식이에요. 일제시대에도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인생의 과제가 있었어요. 농부, 학생, 장사하는 사람 등 각 개인은 나름대로 삶의 과제가 있었지만 3천만 민중의 공통된 과제는 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내가 밭을 일구는 농부라도, 장사를 떠난 장돌뱅이라도, 기생이라도 그 누구라도 나라의 독립이 되어야 한다 했지요. 일본의 지배에 이익을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전체에겐 손해였지요. nbsp 우리 모두 해결해야할 과제를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라 하는데 공동체의 일원인 나는 두 가지 존재인거에요. 내 개인의 인생도 있지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내 삶도 있는 거예요. 나라가 잘 되면 나도 덕을 보는 거죠. 이게 왜 이럴까? 개인 윤리로는 설명이 안 돼요. 구성원으로서 나의 존재 방식이니까 그래서 내가 사는 방식이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과 같은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시대의 과제를 환경문제라 보면 내가 많이 벌고 많이 쓰는 게 역방향이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아요. 만약에 앞에 말한 사람이 일반 범죄는 법대로 벌을 주는 등 자기역할을 하지만, 독립운동과 관계되면 형을 감해주거나 자기 나름대로 풀어주는 방법을 찾아볼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잘못하면 배신자로 찍혀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렇게 할때 독립이라는 방향에 동참할 수도 있어요. 역사의식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근데 역사의식 없으면 눈앞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자기가 예측할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게 되죠. 남이 보면 그 불행이 당연한데. 본인은 억울할 수가 있지요. 그렇다고 당장 그만두라는 아닙니다. 그만 두고 안 두고는 개인의 선택문제죠. nbsp 그래서 첫 번째 자기 인생의 목표를 두고 성취해야합니다. 두 번째 공동의 과제를 두고 거기에 기여하는 길에 동참해야 합니다. 빈곤할 땐 경제건설을 하고 억압받을 땐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공동의 과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지금은 뭐냐. 남북한의 평화로운 통일에 기여하는 일이 바로 공동의 과제입니다. 직장 그만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직장에서 개인의 삶과 동시에 역사의식만 있으면 자기분야에서 열심히 하면서 통일에 동참하면 전체 공동체에서 순기능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꽃놀이 간다고 해놓고 비 맞아가면서 공부 너무 많이 해서 속은 기분이에요? 혹시 추웠다, 속았다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면 좋은 일입니다.” nbsp 질문자들의 진솔한 자기 얘기와 스님의 재기 넘치면서도 지혜로운 말씀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바깥에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 도반의 언니네 가족이 부산에서 달려와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울공동체 식구들을 위해 먹거리를 준비해오셨는데, 마침 스님께 인사를 여쭙고 가려고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서울 공동체 대중들에게 즉문즉설을 듣다가 저녁이 깊어지면 보문단지에 가서 아름다운 벚꽃 야경을 구경하라고 하셨는데, 비가 많이 내려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스님의 즉문즉설을 늘 영상으로만 보다가 현장에서 재미나게 들을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봄날 벚꽃의 향연을 만끽한 하루를 보내서인지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스님의 일정은 일찍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2015.04.05. 21,322 읽음 댓글 9개

2015.4.3. 열반재일 법회, 통일학교 제5강

nbsp nbsp nbsp오늘은 열반재일입니다. 스님께서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중들과 함께 기도를 한 후 발우공양을 마치고 대중공사 시간에 몇 가지 업무와 일들을 직접 챙기셨습니다. nbspnbsp 유수스님께는 “다음에 죽림정사에 갈 때 법사들은 큰 스님과 함께 발우공양할 때 이번에 받은 발우를 가지고 가서 발우공양에 참여하도록 일정을 고려해 달라”고 하시면서 발우를 챙겨가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지난 3월 1일, 죽림정사에서 3.1절 기념 법회와 신규 법사 수계식이 있었는데, 도문 큰스님께서는 직접 수계식을 관장하시면서 스님과 법사님들께 새 발우를 내려주신 바 있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에 있을 용성조사 열반일에 유수스님을 비롯한 법사님들이 죽림정사에 가게 되면 큰스님께 받은 발우를 꼭 가져가서 함께 발우공양을 해달라는 당부셨습니다. 스승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묻어나는 말씀이셨습니다. nbsp nbsp 또 청년정토회에서는 1천 명이 모이는 행사를 위해 장소를 알아보는 중인데, 천명이 모일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민이라고 합니다. 마침 서울에 올라와있던 문경 교육팀에서 연수원 부지를 찾느라 다녀온 곳이 있는데 5천 명이 들어갈 만한 장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문경 교육팀에서 다녀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행사를 진행하는 부서에서 직접 답사를 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셨습니다. nbsp 그리고 이번 주말 서울공동체 대중들의 일정 중에서 “일요일 저녁을 언양 작천정에 가서 벚꽃을 보고 저녁을 먹고 올 수 있는 일정으로 하고, 또 아침 7시부터 울력을 하면 아침부터 일정에 쫓길 수 있으니 8시부터 하는 것이 좋겠다”며 주말을 좀 더 여유롭게 운영할 수 있도록 조언해 주셨습니다. 울력을 마치고 오후에는 어느 쪽으로 가야 진달래 등 화사한 꽃놀이를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겠다고 하시며, 대중들이 봄에 업무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만끽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이셨습니다. nbsp nbsp 또 오늘 회향하는 두 분에게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한 도반은 우울증이 심해서 회향해서 치료에 집중하겠다고 하니“우울증을 숨기거나 별 것 아닌 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울증은 호르몬이나 물질의 분비 이상으로 생기는 것과 심리적인 상처가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심리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수행해서 한 번 치료해 보겠다는 것보다는 약을 먹고 치료하는 것이 빠릅니다. 약 먹는 것을 꺼리면 안 됩니다. 정기적으로 약을 먹다가 어느 정도 괜찮아지면 의사와 상담한 연후에 끊어야 합니다. 그래도 비상약은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심리가 불안해지면 약을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 병을 알고 통제를 해야 합니다. nbsp 항상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도록 하고 만성화 되면 치료가 어렵습니다. 사회적으로 자살이 많아지는 것도 핵심은 우울증입니다. 여기 공동체에 있거나 나가 살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간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현대 의학만으로는 치료가 잘 안 됩니다. 자기가 약을 잘 챙겨먹어야 합니다. 밥은 하루 3번 먹는데, 약은 못 챙겨 먹는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밥은 한 그릇 먹어야 하는데, 약은 하나만 먹으면 됩니다. 가볍게 생각하되 치료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라며 회향해서 나가더라도 치료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짚어 주셨습니다. nbsp 오전 10시부터는 열반재일 법문이 있었습니다. 서초법당의 정토행자들은 지난 달 31일부터 부처님의 출가와 열반을 기념하여 부처님처럼 닮아가기 위해 용맹정진을 해왔습니다. 180여명의 정토행자들은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자세를 가지런히 합니다. nbsp “오늘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날입니다. 올해를 불기 2559년이라 하는데, 불기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날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열반일은 음력 2월 15일입니다.”라며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어 어떤 달력을 쓰느냐에 따라 열반절을 비롯해 출가절, 탄생일, 성도절이 나라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열반절이 인도 달력으로는 두 번째 달 마지막 날인 2월 보름이라 하셨습니다. nbsp 그리고 열반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열반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인도 빨리어로는 ‘니빠나’,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입니다.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진 경지,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멸,nbspnbsp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적멸입니다. 고집멸도의 ‘멸’입니다. nbsp 고와 락은 돌고 돕니다. 이를 윤회라고 합니다. 고와 락이 윤회하는 이것이 괴로움입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되어 있는데, 우리는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는 것을 추구합니다. 고와 락의 뿌리가 욕망입니다. 욕망이 사라지면 고락이 동시에 사라집니다. 고락이 사라진 상태를, 모든 번뇌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열반이라고 하고, 윤회의 사슬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에서 해탈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행복이라 할 수 있고 해탈을 자유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쓰는 행복, 자유와는 다릅니다. nbsp 우리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를 자유라고 하고,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불행이 동반됩니다. 출가절 때 말씀드렸듯이 집은 굴레와 안온함이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집을 불살라버려야 해탈할 수 있습니다. ‘고’에서 벗어나려면 ‘락’마저 버려야합니다.nbspnbsp우리는 늘 ‘락’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를 동반합니다. 열반은 ‘고’와 ‘락’이 모두 사라져서 고요적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더 이상 ‘고’와 ‘락’이 윤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열반’이라는 말은 고락의 사슬에서 벗어난 상태, 다시 말해 번뇌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수행자에게 수행의 목적은 ‘열반’과 ‘해탈’이어야 합니다. nbsp nbsp 윤회는 고와 락이, 행과 불행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고락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고 윤회입니다. 여러분은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고 싶지 않겠지요? 락이 없어지니까. 그래서 윤회의 씨앗을 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쾌락에 대한 중독성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습니다. 법의 가피를 받아 행복해져야 하는데, 이를 추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nbsp 삶의 조건이 10배, 100배, 1000배 좋아졌는데, 고뇌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잖아요. 그런데도 부처님께 물질을 달라고 그래요. 돈을 달라, 지위를 달라, 애를 낳게 해달라...... . 스스로 생각해봐요. 한심하지 않아요? 부처님이 다 해주면 자기는 뭐해요? 설사 부처님이 해주겠다고 해도 ‘아이고, 돈은 제가 벌게요. 부처님은 돈이 없으시잖아요’ 이래야 하지요. 그분이 우리에게 내린 선물은 번뇌를 벗어나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금을 주셨는데 잡석만 줍고 있잖아요. nbsp 열반과 해탈은 지고한 행복과 지고한 자유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행복을 얻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자유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 뿌리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가야 10년 하고, 20년 하고, 30년 하면 번뇌가 사라집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훨씬 더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가벼워졌어요? nbsp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날에 열반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열반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을 언제 증득하셨습니까? 성도하신 뒤에 증득하셨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의 즐거움을 즐기셨다고 말할 수도 있고 열반락을 즐기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nbsp 열반이라는 용어가 현실에서는 두 가지 의미입니다. 첫째, 부처님은 살아계셔도 열반적정 상태였습니다. 둘째,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열반의 상태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심리적으로 완전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아프고, 배고프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칭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고 한 것입니다. 반열반이라고도 하고 아무 흔적이 남지 않는 상태라고해서 무여열반에 드셨다고도 말합니다. 육신을 갖고 있을 때는 흔적이 남아있는 유여열반이라고 합니다.nbspnbsp nbsp nbsp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미 열반을 증득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는 열반에 드셨습니다. 인간의 고뇌중 제일 큰 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부처님은 죽음에 대해 아무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며 바닷물이 출렁거리듯이, 봄이 오면 잎이 피고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지듯이 삶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지옥 간다, 천당 간다’ 이런 말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열반의 여정, 1년간을 기록한 열반경을 보면 죽음을 향한 삶이 일상생활과 똑같아요. 죽음 앞에서도 마음이 고요적정했습니다. 자기 죽음 앞에서도 고요적정한데 남의 죽음 앞에서 무엇이 두려울까요? nbsp 불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사라지게 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래서 열반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일을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고락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부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죽는 것을 잠자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십니다. nbsp 예를 들어, 법륜스님이 죽었다 하면 내가 설령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어도 여러분이 안 울어야 제가 열반에 드는 것이 되는 거예요. 내가 설령 열반에 들었어도 여러분이 울면 열반에 든 게 아닙니다. 저의 죽음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때 아니룻다가 사념처관을 할 것을 제안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조용한 상태에 들었어요. nbsp 그렇다면 부처님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쿠시나가라로 가셔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가족 단위로 마지막 친견을 하셨습니다. 마지막 사람까지 친견하시고 열반에 드시려 할 때 이교도 수바드라가 부처님 만날 것을 청합니다. 아난다는 안 된다고 하고 수바드라는 ‘꼭 만나야 한다.’ 하며 옥신각신했어요.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그는 나를 귀찮게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 물을 것이 있어 찾아왔다.’고 하셨습니다. nbsp 수바드라는 부처님께 자기의 고민을 질문하기보다는 누구는 무얼 주장했고 등 수행자들 사이의 논쟁거리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집을 나와 출가해서 51년 동안 부지런히 정진했다.’고 하시면서 8가지 삿된 길과 8가지 바른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nbspnbsp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아난다여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지금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 세상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nbsp nbsp 부처님이 살아계셨으면 세상이 더 나아졌을까요? 오히려 부처님이 돌아가시니까 제자들이 다 부처님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4월 초파일을 중요시하는데, 실은 깨달음을 얻으셨기 때문에 부처님입니다. 세상 사람은 룸비니를 중시하지만, 수행자는 보드가야를 중시합니다. 부처님은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을 하셨기에 중생에게는 처음으로 부처가 출현한 것입니다. 설법을 안 하면 중생에게는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면서 우리 모두가 부처의 길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 열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수백의 싹을 틔우듯이. 우리 모두가 붓다로서 싹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성해야 열반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nbspnbsp 우리들을 하나하나 보면 붓다가 아니지만, 모두 모으면 붓다입니다. 모자이크붓다예요. 여러분은 수행자이지 신자가 아닙니다. 부처의 길로 가는 수행자입니다. 옛날로 치면 어린애가 어려도 왕자이듯이 여러분은 부처의 길로 가는 수행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nbsp 스님께서는 우리가 부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완전한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며 부지런히 수행정진 할 것을 당부하며 열반재일 법문을 마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깨우쳐주려고 하셨던 일화는 들을 때마다 참 감동입니다. 내 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당장 인상부터 찌푸려지고,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걸어도 대꾸조차 하기 힘들어지는데,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여여하셨던 부처님, 그것이 육체의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부처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시려는 연민과 자비에서 나온 것임을 마음 깊이 느낍니다. 부처님께서 떠나실 때 울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어쩐지 눈물이 났습니다. 일부 제자들이 울다가 사념처에 들자는 아니룻다의 제안에 모두 사념처에 들어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는 대목에서도 어쩐지 울컥합니다. 우리도 스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실 때 어떠한 마음일지, 또 그 자세는 어떠해야할지 부처님과 제자들의 모습에서 배워봅니다. nbsp 열반재일 법회가 끝난 뒤 점심 공양을 드신 스님께서는 원고교정업무를 보신 후, 오후 2시부터 다시 통일학교 제5강 강의를 하셨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강의였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후 1시부터 책상과 방석을 펴고, 조용하고 신속하게 학생들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앞자리부터 앉아 핸드폰을 끄고 수업을 기다립니다. 103명의 학생이 모두 앉고 오늘도 어김없이 2시 정각에 수업이 시작됩니다. 법상으로 올라가시는 법륜스님의 오른쪽 양말이 닳아서 발뒤꿈치가 살짝 비칩니다. 스님의 검소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nbsp “안녕하세요 오늘로 강의가 끝이네요, 안 빠지고 듣는다고 수고하셨어요.” 라고 환하게 웃으시며 강의를 시작하십니다. nbsp nbsp “어제까지 강의한 걸 돌아보면 첫째, 왜 이 시점에서 통일이 필요한가를 진단했고, 둘째 우리 민족의 뿌리에 해당하는 상고사 부분, 셋째 한반도로 민족사가 축소되어 지금에 이른 과정, 특히 나라를 일본에 뺏길 수밖에 없었던 근세 100년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 돌아봤고, 어제 분단 70년사, 남한과 북한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지점에 이르게 됐는지 살펴봤습니다. nbsp 오늘 강의는 2가지인데 이런 우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일만이 그 해결책이라는 통일한국의 비전에 대한 얘기고, 두 번째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써 통일의 길로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nbsp 첫 번째 강의 시간에 이대로 내버려두면 통일 될 가능성이 10도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전략이 있어야 할 지 알아 보겠습니다. 마지막 강의는 여기서 다 얘기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일단 대략의 틀만 잡고 다음에 활동하면서 구체적으로 더 잡아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 nbsp 먼저 통일이 된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nbsp “제일 중요한 게 경제력입니다. 가장 경제력이 큰 미국의 GDP가 17조 달러 가까이 됩니다. 중국은 9조달라가 넘어 미국의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10년 정도 지나면 중국이 미국을 앞지른다는 얘기도 있고, 실질구매력 기준으로 따지면 이미 중국이 미국을 앞섰어요. 미중이 경제력에 있어서는 거의 균형점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일본이 약 5조에 달해 중국의 절반을 조금 넘습니다. 현재 미국의 절반이 중국이고, 중국의 절반이 일본이에요. 그 다음이 독일, 이 4개국이 경제력에 있어 초강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한때 11위까지 올라갔다가 15위로 미끄러졌어요. nbsp 분단된 상태로는 더 이상 별 수가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노력한다고 경제성장률이 10 넘고 이럴 수가 없어요. 죽기 살기로 해야 3 유지하고, 안 그러면 더 떨어지게 됩니다. 만약 통일을 하면 우선 면적이 9만8천㎢에서 21만㎢로 2배 이상 늘어납니다. 인구도 5천만에서 7천5백만 명으로 늘어나지요. 남한만으로는 GDP로선 일본의 14밖에 안되고 영토는 13, 인구는 25밖에 안되는데, 남북한이 합하면 영토는 23가 되고, 인구는 절반이 넘습니다. nbsp nbsp 북한이 1인당 GDP가 현재 1천 달러밖에 안되지만, 통일되면 1년에 100 이상 성장할 수 있어요. 한 10년만 노력한다면, 통일 한국은 세계 10위 권 안에 진입이 가능합니다. 경쟁상대가 이탈리아, 스페인 정도 되고 그것을 추월해서 최고로 올라가면 8위권까지도 가능합니다. 영국과 프랑스와 경쟁할 수 있어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홍콩이나 싱가폴, 대만이 세계 10위 권 안에 들어가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통일만 되면 가능합니다. nbsp 일본은 정체국면에 들어섰는데 몸부림을 쳐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는 질적 향상이고 하나는 양적 팽창을 해야 극복이 가능한데, 질적 향상은 창조력이 있어야 되는 일인데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양적으로 넘어가는 방법은 영토 확장입니다. 일본은 100년 전에 한 번 해봤어요. 한국을 합병하고 만주를 점령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전망이 없습니다. nbsp 그런데 우리에게는 일본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의 가능성이 있어요. 일본과 달리 우리에게 창조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대중문화 분야입니다. 이른바 한류지요. 한국에서는 잘 모르지만, 밖에 나가면 동남아에서 기업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게 KPOP입니다. nbsp 두 번째, 양적 팽창에 있어 우리는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통일입니다. 북한개발이 우리들에게 창조력을 키울 동안의 필요한 시간을 좀 벌어줍니다. 정책은 2가지로 가야합니다. 하나는 통일경제를 통해서 양적 팽창을 시키고, 다른 하나는nbspnbsp창조력을 키우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nbsp 현재 북한은 중국에 값싼 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또 중국에 소비시장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 중국의 동북3성 지역이 오히려 우리에게 노동력을 제공해주고 소비시장이 되어줄 것입니다. 한국이 발전하려면 첫째는 통일이 중요하고, 둘째는 통일된 한국은 중국 동북 3성지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룰 것입니다. 중국 안에 있는 다른 지역보다 한국이 기술도 앞서고 자본도 있고 영토도 가까우니까 경제협력은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새삼스럽게 영토를 차지하지 않더라도 실제로는 옛 영토를 우리경제의 영향권에 둘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고 시베리아까지 협력하면, 환동해경제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단순히 11이 2가 되는 게 아니라 3이 되고 5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통일의 비전입니다. nbsp 첫째 통일 자체가 가져오는 이익이 있고, 통일을 해야 동북아경제공동체가 가능해집니다. 통일을 안 하면 불가능합니다. 북한이 가운데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제는 우리에게 기회도 되지만 위협도 됩니다. 우리 단독으로 여기에 대항하는 것은 어려워요. 우리의 높은 문명과 높은 기술력으로 중국과 상호협력 관계에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으려면, 한국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일본과 협력해야 가능해집니다. 일본과 우리는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모든 것이 중국보다 가깝습니다. 다만 과거사의 상처 때문에 원한이 깊어서 그렇지. 우리는 제일 가까운 북한과 가장 원한이 크고, 그 다음으로 가까운 일본과 원한이 깊습니다. 일본더러 사과하라고 자꾸 요청하고 있는데, 우리가 통일을 해버리면 과거 상처에 우리가 연연해하지 않게 됩니다. 일본에 피해의식이 없어져 별 신경을 안 쓰는 거죠. 이렇게 한일협력을 해나간다면 중국보다 상당부분 앞선 문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nbsp 통일이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을 치유해준다는 말씀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이어서 스님께서는 경제력만으로는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창조력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 “통일은 우리의 평화와 번영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오고, 동아시아 번영에 핵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일본과 중국을 설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거예요. 그들의 이해관계에 끌려가서 이쪽 편을 들었다가 저쪽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중심을 잡고 협력을 끌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힘이 세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종의 캐스팅보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nbsp 한중일에 동남아까지 하면 인구가 25억 가까이 됩니다. 그러면 세계 인구가 75억이니까 13에 해당한 인구가 여기 삽니다. GDP는 지금 세계의 14 정도인데, 얼마 안가면 13이 될 수 있어요. 동아시아는 앞으로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겁니다. nbsp nbsp 그러나 아시아 시대가 오려면 경제력이나 군사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중국이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담당한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신장이라든지 인권 문제, 환경, 복지 등은 누가 이끌어야 할까요? 한국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중국은 미국의 것은 자기네와 안 맞는다고 안 받아들이지만, 한국이라면 다릅니다. ‘한국도 하는데 우리가 왜 못하겠나’ 이러면서 따라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인권이 신장되면, 중국도 그렇게 되고, 민주주의도 그렇고 환경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이 한국을 경계하지 않으니까 가능합니다. nbsp 우리나라가 주변보다 더 창조력이 있고, 더 많은 이익을 주변 나라에 같이 나눠주면, 주변 나라 국민들이 몸은 자기 나라에 소속해있지만 마음으로는 한국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협력을 이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명감을 가지고 아시아 평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nbsp 이렇게 통일한국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100년의 한을 풀 수 있고, 동북아시아공동체나 동아시아 공동체로 간다면 1천년의 한을 풀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3천년 만에 본래 가졌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1의 가능성이 있어도 투자하겠는데, 지금은 어때요? 이건 조금만 물꼬를 트면 그런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nbsp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통일에 투자하겠는 스님의 말씀에 간절함이 묻어납니다. 스님께서는 이어서 통일은 남한이 주도해야하고 남한이 주도하려면 남한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한다고 하셨습니다. nbsp “통일을 추동할 주체가 남한인데 남한 국민이 관심이 없으면 실현이 안 되겠지요. 보통 사람들은 통일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자기가 손해 보면서까지 통일을 하려고 하지는 않잖아요? 일단 자기에게 이익이 있어야 통일을 하겠다고 나서지요. 통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남한 국민의 요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한 국민의 요구가 무엇일까요? 첫째, 국민들은 성장을 좀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은 이념을 떠나 경제이익이 됩니다. 둘째, 고른 분배가 필요합니다. 고른 분배의 중요 조건으로 하나는 경쟁이 공정해야 합니다. 현재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사회 전반적으로 불공정이 굉장히 심합니다. 특히 재벌기업의 불공정이 심하지요. 그러니까 기업을 한 20개쯤 가지고 있는 재벌그룹 회장이 자기들 필요한 물건을 회사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 손자에게 줍니다. 그리고 다 거기서 구입하도록 하면 금방 회사가 커집니다. 금방 키워서 주식 상장해버리면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nbspnbsp nbsp nbsp 공정하다는 것은 출발선상에서의 기회의 균등입니다. 둘째, 경쟁과정에서 룰이 공정해야 하고 집행도 공정해야 합니다. 셋째, 끝나고 나서 시상할 때 공평해야 합니다. 공평한 시상이 뭘까요? 운동회 하는데 상 줄 공책이 6권 밖에 없었다면 1등한테 3권 주고, 2등한테는 2권, 3등에게 1권 주면 남는 게 없지요.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못 받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요새는 먹고 살만해지니까 16권이 주어졌어요. 그럼 옛날 방식으로 1등 10권, 2등 4권, 3등 2권 이렇게 주기보다는 먼저 10명에게 다 1권씩 나눠주고 다음에 1, 2, 3등에게 나눠주면 1등은 4권, 2등은 3권, 3등은 2권을 갖습니다. 잘 하는 사람은 더 갖되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1권씩 갖는 것입니다. 1권씩 준다는 건 안전망 구축입니다. 이제 한국은 옛날에는 공책이 6권밖에 없는 나라에서 지금은 16권 정도는 되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공평한 분배에도 신경을 쓸 때가 왔습니다.” nbsp 운동회 때 저도 1등으로 달리다가 막판에 넘어지는 바람에 3등 밖으로 밀려나서 공책 한 권 못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운동회가 끝나고 어머니가 짜장면을 사주시는데도 어린 마음에 공책 한 권 못 받은 것이 어찌 그리 속상하고, 응원해주신 어머니께 미안하기도 하든지요. 운동회의 상으로 비유해주시니, 안전망에 대한 이해가 쉽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우리나라도 경제성장을 해서 지금은 공책이 16권으로 늘어났는데, 아직 일부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책을 1권씩 나눠주면 달리기를 아예 안 하는 사람이 생긴다며 반대하기도 합니다. 게을러진다고 하면서 노동의 윤리를 들어 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nbsp “경제성장에 따라 일정한 단계가 되면 복지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요구 때문에 복지수준을 한꺼번에 빨리 올렸을 때 비용문제가 발생해서 줬다가 빼앗는 일이 생기고, 그러면 저항이 생깁니다. 계산을 잘 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가 세금을 더 내고 복지를 받는 거니까. 모두들 세금은 더 내기 싫고 혜택은 더 받고 싶으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도가 잘 못 된 것은 개선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세금을 더 내고 혜택을 더 받는 쪽으로 가야하는데, 고부담 고혜택으로 할거냐, 중부담 중혜택으로 할거냐, 저부담 저혜택으로 할거냐인데, 지금은 저부담 저혜택이니까 바로 고부담 고혜택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중부담 중혜택으로 가야합니다. 국가에서 이것을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나가 조세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재정정책입니다. 조세와 재정 두 가지를 통해서 경쟁사회에서 벌어지는 빈부격차를 조정해 주는게 복지정책입니다. nbsp nbsp 두 번째가 정치문제입니다. 북한은 지금 세습이라고 해서 지도자를 뽑을 권리가 국민에게 없습니다. 우리도 옛날에 그랬는데 6월 항쟁을 통해 지도자를 뽑는 권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런데 뽑을 권리는 가졌는데 뽑힌 지도자가 임명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이 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문제가 생겼어요. 선거할 때 국민이 주인이라고 하는 건 딱 보름이에요. 조금 더 길면 한 달이고. 그 기간에는 어떤 후보든 우리에게 와서 절하지요. 그 다음에는 만나자고 해도 만나기 힘들고 부탁해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에게는 사람을 뽑는 권리만 있지, 뽑힌 사람이 민주적으로 권리를 행사하게 하는 제도를 안 만들어놨어요, 내가 머슴을 뽑는다고 뽑았는데, 종노릇은 내가 해야 하는 셈입니다. nbsp 권력 행사 면에서는 중국의 지도자나 한국의 지도자나 사실 별 차이가 없어요, 권력이 너무 집중돼있어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승자독식으로 권력을 다 차지해버리지만, 앞으로는 소수의견이 국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가야 합니다.” nbsp 스님께서는 분권과 지자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중앙의 권력이 지방으로 가야하고, 하나는 국민의 다양한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나와서 지지받는 만큼 의석을 갖는 다당제가 돼야하고, 연립정부를 세우는 방향으로 가야 정국이 안정된다고 하셨습니다. 지방 정부끼리 준 연방식으로 만들어야, 북한의 각지방이 연방에 들어오면 통일도 쉽고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도 부합한다고 하시며,nbspnbsp지방자치의 예로 스위스를 말씀하셨습니다.nbsp “스위스는 인구가 800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연방에 소속된 주만 26개예요. 모두 독자적으로 이뤄집니다. 스위스 전체가 잘 사는 것은 맞지만, 강연 가는 길에 시골로 돌아서 가봤는데 지방에 권한을 주고 자기네 삶을 자기네가 결정하니까 특히 시골이 깔끔하고 잘 삽니다. 물론 잘 사는 데가 있으면 못 사는 데가 있지 않겠어요? 그럴 때 중앙정부가 나서서 못 사는데 보조금을 더 주고, 잘 사는 데는 덜 주고 이러면서 격차를 줄여줘야 합니다. 각자 자기 동네가 알아서 하니까 격차가 날 수밖에 없지만, 격차가 덜 벌어지도록 조정해주는 것입니다.”nbsp nbsp 이어서 외교문제도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예로 들어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항상 사례를 들어 어려운 문제도 쉽게 설명해주십니다. nbsp “셋째, 외교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한국이 되면 전적으로 미국 편을 들어도 안 되고 중국 편을 들어도 안 되고, 중립이 되기도 어렵습니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도 미국에 물어보면 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줘서 감사하다. 그런데 나가겠다고 하면 알겠다. 우리가 이 정도 사는데 아직도 도와달라고 하면 염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가도 좋다. 이제 우리 안보는 우리가 지킬 게.’ 그러고 더 있겠다고 하면 ‘그래 있으려면 언제든 있어라. 우리가 과거에 신세를 졌으니 그정도야 못해주겠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겠다고 하는 걸 바짓가랑이 잡고 당기니까 주둔비용을 우리더러 내라고 하는 거예요. 또 일부에서는 안 가겠다는 걸 발로 차내니까 기분이 나쁜 거예요. 반미도 친미도 답이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있으면 돈을 우리가 낼 필요도 없고, 가겠다고 하면 보내면 되는 거예요. nbsp 동아시아는 한미동맹이니 한중동맹이니 양자동맹으로 가면 계속 갈등이 생기니까 다자동맹으로 가면 됩니다. 주변 6개국이 공동으로 군사안보체제를 형성해서 간다든지 하면 됩니다. 이때 우리는 패싸움의 하수인이 되지 말고 가능한 협력할 수 있는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통일이 되면 우리가 이런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통일로 가려고 해도 이런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nbsp 우리가 어느 정도 복지사회가 돼야 통일이 쉽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한에 사는 사람도 가난하게 사는 걸 보고 북한 사람들이 ‘저 수준이라면, 우리가 통일해서 가봐야 저 취급을 받지 않겠나 ’하고 통일을 안 하고 싶겠지요? 그런데 남한에 가서 바닥에 있어도 지금보다 낫다고 하면 통합하자고 하지요. 힘으로 통일하려고 하면 북한 내부에서 저항이 일어나고, 또 중국이 그 저항을 도울 겁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나서서 통일하자고 하면 중국이 못하게 할 수 있을까요? 북한 정부가 중국의 하수인이 되면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아직까지는 북한이 자주권을 내세우고 있으니까 통일에 유리한 점이 있어요.” nbsp 복지사회와 통일을 연결시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스님 말씀에 저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되어 얼굴이 환해집니다.nbspnbsp nbsp nbsp “통일의 의지를 갖고 자신감으로 북한을 포용해줘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를 통일지향적 사회, 한국 사회가 더 선진적인 사회로 가도록 추진해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한국 정부가 한국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통일지향 정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nbsp 그런데 통일지향적인 정부를 어떻게 구성할까요? 결정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권리 행세를 안 하고 있어요. 권리 행세를 굉장히 잘못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조선총독부에 대항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민주화운동 할 때 독재정부에 대항해서 감옥에 갔어요. 그런데 통일지향적인 정부를 선택하는 투표를 한다고 우리가 죽을 일이 있나요? 감옥 갈 일이 있나요? 그런데 이것도 안하려고 합니다. nbsp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입니다. 나라의 주인이 우리예요. 그런데 아직도 대한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의병은 총 들고 하자는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최선이면 좋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도 좋다, 차선이 없고 차악과 최악밖에 없다면 둘 다 꼴 보기 싫다고 외면하지 말고, 차악이라도 선택하는 것이 이 순간의 최선입니다. 이게 주식투자에서 손절매예요. 손해보고도 판다, 적게 손해 보고 파는 게 이익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nbsp 헌법 전문을 다시 읽어보세요, 통일지향이 국가의 가장 큰 목표가 되어있어요. 국민이 먼저 각성하고, 각성한 국민이 그런 정부를 구성해서 난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것을 할 사람이 바로 통일의병입니다. 총을 안 들어도 됩니다. 생각이 똑바르면 됩니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nbsp nbsp 2시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았는데 아무도 졸지 않고 집중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명상이 끝나고 몇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nbsp 우리나라의 창의력과 자본주의의 창의력에 대한 질문, 스님 말씀은 이상적인데 현 상황에서 어렵지 않겠냐는 우려, 통일지향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다당제와 지방분권 등이 언제쯤 될지 막막하다는 분 등 세 명의 참가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nbsp “헌법 개정이 핵심입니다. 현재 이미 국회의원들 중 3분의 2 이상이 지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역사 속에서 혁명적일 때 헌법을 개정해왔기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지역주의를 개선하고, 비례대표를 지역에 주는 제도, 석패율제는 중앙선관위에서도 개선책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올해가 개헌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 딱 한 가지 문제는 국민의 지지를 못 받고 있다는 거예요. 많은 질문이 있겠지만 다음 시간에 기회가 되면 더 하기로 하고,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4월 7일에는 통일학교 마지막 수업으로 경주역사기행이 있어요. 벚꽃이 아주 좋으니 도시락 싸들고 오세요.” nbsp nbsp 스님 말씀에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네”라고 대답합니다. 수업이 끝나고 모둠별로 마음나누기를 했습니다.“구체적 대안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헌법 개정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이 눈에 들어왔다” “통일학교 5일 연속해서 듣는 게 처음에는 부담이었는데 끝나니 아쉽다. 확실히 통일에 대한 관점이 잡혔다.” “지금 상황에서 가능할까 싶지만 열정을 가지고 통일 학교를 진행해야겠다.” “통일의병 하나하나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열의에 불탄다. 할 일은 명확한 것 같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할 것인가 방법을 찾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나눴습니다. 끝으로 지난 4일간 103명의 수업모습을 찍은 영상을 보며 수업을 마쳤습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탄성이 나왔고, 환한 연꽃 같은 모습을 보는데 뭉클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우리는 웃음이 가장 큰 무기인 환하게 웃는 통일의병입니다. nbsp nbsp 통일학교 강의를 마친뒤 스님께서는 서울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두북수련원으로 향하셨습니다. 10시 30분경 경주IC를 통과 한 후 경주보문단지 벚꽃 야경을 보고 두북 수련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내일은 청년 경주역사기행이 있을 예정입니다.nbsp

2015.04.04. 23,018 읽음 댓글 10개

2015.4.2. 통일학교 제4강

nbsp nbsp 4시 30분, 세상을 깨우는 도량석 소리가 법당 가득히 울려 퍼지면서 아침 일정이 시작됩니다. 스님께서는 오늘도 여느 대중들보다 이른 시간에 법당에 내려오셔서 개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5시에 종성이 끝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집전자의 목탁이 또르르 구르며, 새벽예불과 천일결사 기도가 이어집니다. 스님께서 함께 하시니 대중들의 기도 소리도 어쩐지 더 우렁차게 느껴집니다. nbsp nbsp nbsp 아침 청소가 끝나고 발우공양에 참석하신 스님께서는 퇴수통의 퇴수물이 맑지 못하다며, “여기 새로운 사람이 없고 오래 된 사람들만 있는데 이렇게 퇴수물이 더러워서 되겠느냐. 이것은 여러분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며, 발우공양 시간에도 깨어있어야 한다고 다시 일러주셨습니다. nbsp 그리고는 4월 주말 일정에 대해 가볍게 논의하셨습니다. 이번 주말에 서울 공동체 성원들은 청년정토회의 경주 역사기행에 참여하고, 저녁에는 스님의 강의를 잠깐 듣다가 벚꽃 야경이 절경인 보문단지에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청년 정토회 역사기행에는 스탭들 포함해서 370 여 명이 참가한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서울 공동체 대중들은 그 꽁무니에 뒤따라오면서 느긋하게 벚꽃 구경이나 실컷 하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 날엔 아침 일찍부터 탑곡 수련원에 가서 농사 준비를 좀 해두고, 오후에는 그 뒷산을 등산하거나 작천정에 가보자고 하십니다. 스님께서는 일요일 저녁에 문경 공동체 대중들과의 일정이 있어서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저녁 늦게까지 충분히 야경을 구경하고 서울로 올라가라고 권하셨습니다. nbsp 다음 주 토요일에도 두북 수련원에서 오전에 포살을 하고 오후에는 운력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도 일부러 그날은 운력하는 일정으로 잡으시고 일거리를 모아놓았다고 하셨습니다. 운력을 마치고 스님과 잠깐 시간을 보낸 뒤 다음날은 용성조사 열반일이어서 죽림정사에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죽림정사 앞산에 진달래꽃이 또 그렇게 장관일 수가 없다며 진달래꽃구경을 하자고 하십니다. 용성조사 열반일 참석보다 진달래 꽃구경이 우선인 것처럼 들려서 대중들이 ‘와아’ 하고 웃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 제안해 주신 봄소풍 소식만으로도 서울 공동체 대중들의 얼굴이 더욱 환하게 밝아보였습니다. 발우공양과 대중공사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원고를 교정하신 후, 곧 통일학교 강의를 준비하셨습니다. nbsp 오후 2시부터 통일학교 네 번째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통일학교 두 번째 시간에는 상고사를 살폈고, 세 번째는 민족사가 한반도로 축소된, 동북아에서 주도국이 아닌 변방으로 전락한 역사, 그 가운데서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기 전 100년의 근대사와 민중의 고통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오늘은 광복이 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지난 70년이 어떻게 전개돼 왔는가, 그간 통일을 위해 어떤 노력들이 있었는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현재 분단된 상태로 남북한은 어떤 과제를 안고 있는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nbsp 올해가 분단 70주년입니다. 2차 대전 후 분단된 나라가 여럿 있어요. 먼저 독일은 침략국이니까 다시는 침략을 못하도록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4개 연합국이 분할통치 하기로 했습니다. 전후에 세계가 미, 소 양 진영으로 나뉘니까 미, 프, 영 3국이 분할 통치하던 지역은 합쳐서 서독이 되고, 소련이 통치한 지역은 동독이 됩니다. 베를린도 그렇게 해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나뉘죠. 일본은 침략국임에도 미국이 단독으로 지배를 했고 이탈리아는 일찍 항복을 했으므로 분할을 면했습니다. 일본은 미국이 무장 해제시키고 만주는 소련이 무장 해제시키고, 한반도는 38선을 나눠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들어와 무장해제하면서 분할 지배를 하게 되요. 이게 분단의 시작이죠. nbsp nbsp nbsp 우리는 해방이 되니까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다 들어오고 국내에서는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자발적으로 형성돼서 일제로부터 모든 행정을 인수받으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미군이 직접 통치를 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일본군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서 미·소군대가 남북한에 들어와 있었는데 미, 소, 영 3국이 모스크바에서 3상회의를 열어 미군과 소련군이 행정을 맡아 3년간 한반도를 신탁 통치하기로 결정한 거예요. 우리 국민들은 여기 반대해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죠.” nbsp 이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려옵니다. 침략국은 일본인데 왜 침략의 피해국인 한반도가 분할통치의 희생자가 돼야 했는지, 냉엄한 국제정치가 비정하게만 느껴집니다. 스님께서는 담담하게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nbsp “당시 국내 상황을 보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세력 중에 공산당 조직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왜냐하면 공산당은 소작농 해방이랄지 토지개혁 같은 생활에 밀착된 주장을 하니까 민중 가운데 존재하기가 가능한데, 그냥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운동하자는 것은 아주 깨인 사람이 아니면 참여하기 어려워 세를 확대하기가 힘들었어요. 종교 지도자들이나 개별 지사들, 또는 개별 명망가들 정도가 있었죠. nbsp 먼저 북한을 볼까요? 해방 후 북한은 조선 공산당, 중국 연안파, 소련 유학파, 김일성의 갑산파 등이 nbsp연합하여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소련 입장에서는 소련 유학파 중에 명망가가 없었으므로 소련과 연계도 있고 국내에 명망도 있던 김일성을 지원키로 결정합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돼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지주계급은 원한을 가졌겠지만 절대다수의 소작농과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nbsp 이런 상황에서 남한이 먼저 1948년 5월10일에 단독으로 선거를 실시한 뒤 8.15에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합니다. 북한도 이에 8월에 선거를 거쳐 9.9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합니다. 형식상 자주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외세에 의해 강제 됐던 분단이 내부적으로 고착됩니다.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을 분단 원년으로 볼 수도 있겠죠. nbsp nbsp 이제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수상이 되고 조선공산당 당수였던 박헌영과 벽초 홍명희가 부수상 자리에 오릅니다. 남쪽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해서 정부가 구성되는데, 일제 식민시대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하니 인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데다 단독정부에 반대하던 김구 선생이 1949년에 암살당하면서 민심이 매우 뒤숭숭해집니다. 농민을 중심으로 토지개혁을 주장하면서 빨치산 투쟁이 일어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니까 북한은 이를 통일의 기회라 보고 남침을 감행하여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합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참전하고 또 나중에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전쟁 중에 남북은 서로 한쪽은 적화통일, 또 한쪽은 승공통일을 주장하죠. 결국 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는데, 북한은 이날을 승전기념일로 기립니다. 북한이 통일을 목표로 했다면 이것은 실패한 전쟁입니다. 그러나 자기 체제를 지켜낸 측면에서 보면 승전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 전쟁은 남북한 군인과 유엔군, 중국군, 민간인 다 합해서 280만 가량이 죽고, 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이 생기면서 민족사의 최대 비극으로 끝납니다. nbsp 전쟁 후 북한에서는 전쟁에 대해 책임 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nbsp전쟁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는 점과 미국의 첩자라는 명목을 들어 박헌영을 숙청합니다. 또, 56년에 종파주의자들을 숙청한다면서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하면서 김일성 독재체제를 강화해 나갑니다. 이문제로 인해서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북한은 50년대 후반부터 천리마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50년대 후반과 60년대에 이르러 소위 대동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룹니다. nbsp nbsp 이 무렵 소련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소련은 이미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된 지 오래되어 생산성이 정체되니 인센티브를 주기 시작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수정주의라고 비판합니다. 북한은 양쪽을 nbsp살피다 72년에 주체사상을 표명하면서 완전히 김일성 nbsp유일사상체제로 바뀌어요. 그러면서 70년대 저성장, 80년대 정체에 이어 90년대에는 쇠퇴국면에 들어갑니다. 92년에는 맑스레닌주의를 헌법에서 삭제하고 98년에는 공산주의도 헌법에서 삭제하면서 주체사상, 선군정치, 백두혈통을 주장합니다. 사회주의로 시작했는데 김씨왕조체제가 돼버린 거예요. 이렇게 되니 자발적 지지가 아니라 억압과 통제로 통치되니까 정치적으로 취약하고 또, 경제적으로 취약하다보니까 안보위기를 느껴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거예요. 늘 통일을 주장해왔으므로 지금도 통일을 말하기는 하지만 현재 내적으로는 자기 체제 유지에 몰두해 있습니다. nbsp 이렇게 북한이 급격하게 쇠락한 것은 자신들의 잘못도 있지만, 약소국의 운명이 배후의 강대국에 좌우되기 때문이에요. 2차 대전 후 사회주의가 확대되는 분위기에서는 nbsp경제적으로는 미국이 컸어도 경제 발전 속도에 있어서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가 훨씬 빨랐습니다. 그러다 70년대 이후 미국의 기술력이 높아지면서 기술과 생산성에서 소련이 밀리게 되고 사회주의 전체의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북한도 그런 데서 영향을 받습니다. 90년대 들어서는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동유럽이 붕괴되고 미국의 경제봉쇄로 북한 경제는 무역 통로를 잃습니다. nbsp nbsp 북한이 겪게 되는 경제위기의 원인은 첫 번째, nbsp외환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외환이 없으니 에너지 자원인 석유를 사올 수 없고, 에너지 부족으로 전기 생산이 줄어들고, 전기 공급이 안 되니 모든 산업이 순식간에 멈춥니다. 트랙터니 비료니 농자재 공급이 안 되니까 농업생산량이 떨어집니다. 북한은 황해도, 평안도가 곡창지대여서 여기서 생산한 곡물로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줘야 하는데 생산량이 떨어져 배급할 식량이 부족하니 동쪽의 함경도 쪽과 노동자층이 먼저 위기를 겪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지난 1990년대말 고난의 행군 시기에 사단법인 좋은벗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약 300만 가량의 북한 주민이 식량난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300만이면 6.25전쟁의 희생자보다 많은 수입니다. 스님은 식량난으로 막대한 인명피해가 있었으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소리 없이 죽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조용한 전쟁 하나가 일어났는데 아무도 바깥으로 아우성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고통을 대변해서 한국 사회와 국제 사회에 알려내려고 좋은벗들을 설립하고 활동에 나섰노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북한 식량난 실태에 대해 많이 알려졌지만, 근래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다시 듣노라니 마음이 아파옵니다. nbsp “북한은 이런 위기에 처하면서 경제, 사회적으로는 붕괴 직전에 놓이지만 정치, 군사적으로는 잘 조직되어 그대로 통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두고 어떤 사람들은 북한이 내일 망할 거라고 하면서도 또 내일 쳐들어올 거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는데, 북한은 경제사회적으로 피폐해서 장기적으로 보면 생존하기 힘들지만, 정치군사적으로 잘 짜여 있어서 단기적으로는 붕괴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nbsp 이제 남한을 볼까요. 45년에 해방이 되고 건준위가 구성되어 활동했으나 인정받지 못 받고 여운형이 암살됩니다. 48년 단독정부 수립 후 김구 선생이 암살됩니다. 내부적으로 정치적인 혼란이 많았습니다. 6.25 전쟁중 우리정부가 부산에 피난가서 겨우 유지되던 시기에 이승만이 헌법을 개정하여 정권의 연장을 꾀합니다. 휴전협정 후 전국토가 피폐화되고 미국이 주는 구호품으로 간신히 유지가 됩니다. 경제적으로도 약하고 군사적으로도 미군에 의해 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장기집권을 꾀합니다. 부패가 만연하고 국민적 저항에 부딪치니,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마산에서 희생자가 발생하고 학생들이 의거하지요. 그 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쿠데타의 주역들이 정부에 참여하면서 집권합니다. 이때부터 정치는 강압통치, 경제는 계획경제를 가동하면서 80년대 들어 마침내 고도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nbsp nbsp 박정희 대통령은 67년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3선 개헌을 시도하지요, 엄청난 국민적 저항이 있었지만 3선에 당선되고 72년도에 유신헌법을 통과시키면서 유신체제를 정립합니다. 79년에 10.26 시해가 있고 전두환의 12.12사태가 일어나면서 80년 광주항쟁으로 이어집니다. 80년대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과 함께 시민참여가 늘어나면서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맞이합니다. 현재 우리헌법은 87년 체제로 당시는 독재를 막자는 데 핵심이 있었으므로 변화된 상황에 맞게 헌법을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현재 있는 것입니다.” nbsp 스님께서는 내부적으로만 보면 남한이, 혹은 북한이 그때그때 잘했다고 평가하겠지만 외적으로 보면 미, 소가 팽팽할 때 분단이 되었고, 소련이 우위에 있을 때 북한이 우위를 점하고, 미국이 절대 우위에 있을 때 남한이 우세했던 걸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상황을 냉철히 판단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통일을 위한 노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nbsp “통일을 위한 노력 가운데 첫째는 신탁통치 반대와 단독정부 수립반대를 들 수 있습니다. 또 6.25전쟁도 무력 통일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침통일이나 북진통일은 군사력을 불사하는 적극적 통일운동으로 양쪽 다 자기식의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우리가 겪어서 잘 알지 않습니까. 요즘 한국 내 극우세력이 주장하는 힘에 의한 흡수통일은 6·25때 북한이 저지른 오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며칠 만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전쟁은 승패에 관계없이 엄청난 피해를 야기하기 때문에 다시는 무력통일을 거론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nbsp 4.19 후 학생들의 통일 운동도 있었습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 아래 통일의 의지를 펼쳤지만 5.16쿠데타로 제압당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 양쪽 다 이제 흡수통일은 어렵다는 인식하에 7.4 남북공동성명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는 외세를 끌어들이지 말고 자주적으로 하자, 군사력을 사용하지 말고 평화적으로 하자, 민족대단결로 하자는 세가지 원칙을 합의합니다. 그러나 공동성명 얼마 후 남쪽은 유신체제, 북쪽은 주체 체제로 각각의 독재를 굳히는 방향으로 갑니다. nbsp nbsp 남북합의는 노태우 정부 때 제일 진전이 있었어요. 1991년도에 남북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상호불가침, 상호체제 존중, 유엔 동시가입, 교류협력에 대한 합의를 하게 되죠. 다음 김영삼 정부는 94년에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는데 갑자기 김일성이 타계합니다. 이 때 조문을 가고 그랬으면 잘 풀렸을지도 모르는데, 김일성이 사망하니까 북한이 곧 망하겠다고 판단해서 조문도 안가고, 가겠다는 사람도 못 가게 하니까 악감정이 생겨서 아예 남북교류가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nbsp 김대중 정부 들어 6.15공동선언이 나오면서 남북한의 교류협력이 굉장히 증대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통일론이 논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체제를 인정한 위에 통일정부를 구성하는데 북쪽은 통일강도를 높이자하여 연방제, 남쪽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즉 연합제를 주장했어요. 연합제는 유럽 연합처럼 완전히 독립국가로 유엔도 따로 가입하고 군대와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갖되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고, 연방제는 미합중국연방처럼 결합의 정도가 높은 거예요. 6.15 선언에서는 남한에서 주장한 연합제가 북한주장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공통점이 있다고 합의하죠. 이것은 사실상 남한의 주장에 북한이 합의한 것이죠. 남북한에 적대감정이 없어지면 연합제로는 쉽게 갈 수 있어요. 서로 왕래하고 경제교류를 확대하고, 국제경기 공동출전하고 문화교류하고 1년에 몇 차례씩 고위급 회담 진행하고, 이렇게만 해도 상당히 자유로워져요. nbsp 노무현 정부에서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자 외교론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을 너무 일찍 내세운 거예요. 말은 맞는데 미국의 영향력이 아직 강한 상태에서 미국의 우려와 경계를 사고 맙니다. 마치 갑신정변이 조급하게 진행되면서 오히려 개혁을 후퇴시킨 것과 같은 결과를 낳았죠. nbsp nbsp 이명박 정부는 역대 정부 중 가장 친미 일변도의 정책을 폅니다. 한국도 이 정도 국력이 되면 한미가 동맹을 하되 자주성이 있어야 하는데, 완전히 종속적으로 가면서 남북관계가 파탄 나고 한일군사정보교류 협정까지 비밀리에 맺으려다 들통이 나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죠. 박근혜 정부에서 얼마 전에 한일군사정보교류 협정을 맺었는데도 국민이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지나갑니다. 요즘 뉴스에 오르는 AIIB도 그렇고 사드도 그렇고, 미국의 요구에 따라 미국 요구 들어주고, 중국 요구에 따라 중국 요구 들어주면서, 강대국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요. 자기가 중심을 잡고 가야 하는데 중심 없이 내몰리고 있어요. 조선조 말에는 국력이 없어서 그랬다 치지만, 현재는 국력이 충분한데도 역사의식이 없고 애국심이나 결단력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nbsp 지금 남북은 교류협력이 다 중단되고 적대감이 분출되고 안보가 불안정해서 통일은 고사하고 평화도 보장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요. 남한 안에서 언론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고 민족통합은 말도 꺼낼 수도 없고 통일과 평화를 말하면 오히려 공격받는 상황입니다. 민주주의도 후퇴하고 자주성도 후퇴하고 있어요. 우리가 옛날보다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것 빼고는 민족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올바르게 발전한다고 상황으로 가고 있어요.” 스님께서는 역량으로 보면 남한이 통일 중심세력이 되어야 하는데 통일의지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과거 통일운동 세력이 사라진데다 북한은 자기체제유지에 급급해서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고려한 만큼 지도자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지도자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고 북한까지도 통합해서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고통 받는 북한 민중을 구제하고 민족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정말 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면 한결 신명이 날 것 같습니다. 스님은 이어 현재 북한 사회의 과제는 무엇이고, 남한 사회의 과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지시는 것으로 다음 강의를 이어가셨습니다. nbsp nbsp “북한은 안보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돼 있습니다. 이렇게 안보위기에 처해 있으니까 모든 관심이 거기 쏠려서 오직 체제유지를 위해 핵을 개발하고 생화학무기 등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니 국제사회에서 더욱 비난받고 고립되는 겁니다. nbsp 심각한 에너지 위기가 발단이 된 경제 위기 상황도 아직 회복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면에서는 인민의 민심 이탈이 심해지고 감시와 처벌 위주로 나가니 인권이 침해되어 민심은 더 떠나는 상황입니다. 사회면에서는 모든 게 통제중심으로 가다보니 자유와 활기가 없습니다. nbsp 북한이 개혁개방을 못하는 이유는 안보위기 때문이에요. 미국에게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라는 게 북한의 요구예요. 미국은 핵개발을 포기하고 개방을 하라고 요구하지만, 미국과 협상했던 이라크나 리비아가 붕괴하는 전례를 보면서 더욱 폐쇄적인 길로 가고 있습니다. nbsp 이런 것은 작게 보면 북한이 잘못하는 것 같지만 크게 보면 분단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적대관계가 해소되어 안보 문제만 서로 보장돼도 인권문제가 상당히 개선될 수 있어요. 북한 지배세력은 통일의지가 없지만 북한 인민은 우리보다 더 통일에 대한 원이 간절합니다. 남한은 능력은 있지만 통일에 대한 관심이나 의지가 없어서 통일이라는 민족의 문제가 방치된 상태입니다. nbsp 남한은 역사적으로 통일의지도 적은데다, 지난 50년간 통일하지 않고도 잘 살아왔는데 지금 통일할 필요가 뭐 있느냐, 못사는 북한과 통일하면 손해 아니냐는 생각이 많습니다. 기성세대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면서도 통일에 대해 호의적인 면이 있었는데 젊은이들은 적대도 호의도 없이 아예 관심이 없어요. 젊은 세대가 통일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려면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통일의 당위성만으로는 부족하므로, 현재 통일이 우리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려주어야 합니다. nbsp nbsp 남한은 남한대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의 동력이 소진됐어요. 외적으로는 우리를 둘러싼 국제 사회의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한국을 둘러싸고 미·일·러·중 4강이 충돌하는 게 백 년 전과 꼭 같은 양상입니다. 강대국의 이해가 충돌할 때 내부적으로 단결돼 있으면 뭔가 해볼 수가 있는데 남북이 분단되어 적대하고 있는 상태하에서는 아예 선택지가 없어집니다. 아무런 미래의 희망이 없는 길로 가는 거예요.” 스님께서는 국제적으로 우리의 위상을 찾기 위해서도 통일이 유일한 길이라며 통일된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통일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nbsp “결국 높은 수준의 문명이 되려면, 보다 민주적인 사회시스템과 높은 창조성이 발현돼 훌륭한 문학작품, 예술작품, 위대한 사상가들이 나와야 합니다. 창조력을 키우려면 창조경제라고 말만 한다고, 또 강압적으로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연구하고 도전하도록 열어줘야 합니다. 이게 과제인데, 이 모든 것이 다 분단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단과 밀접하게 관계돼있습니다. 개인의 살 길이든 나라의 발전이든, 남한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나 북한 민중을 돕거나 국제정세 속에서 국가의 위상을 찾기 위해서도 통일이 유일한 희망일지 모릅니다.” nbsp nbsp nbsp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라는 당부 말씀으로, 오늘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어제보다 10분 늦게 끝났습니다. 스님께서도 점점 길어진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으시고는 “시간 맞추는 게 잘 안되네. 나중에 영상 편집을 잘 해 달라”고 주문하시고는 또 웃으십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참가 대중들도 나누기를 급히 마치고 종종 돌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nbsp nbsp 오후 6시에는 평화재단에서 최상용 교수님과 저녁식사 일정이 있었습니다. 최상용 교수님께서는 오늘 평화리더십아카데미에 강사로 오셔서 ‘중용의 민주주의를 말하다정의는 중용이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실 예정입니다. 강의 전에 스님께서 교수님을 맞이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요즘 저녁을 드시지 않기 때문에 최상용 교수님 부부만 식사를 하시면서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중용, 플라톤의 중용에 대해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nbsp nbspnbsp 최상용 교수님을 강의 하실 수 있도록 청중들에게 소개하시고 스님께서는 이기혜 대표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들르셨습니다. 간단히 문상을 한 후 상주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신 후,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님의 어머님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현대아산병원에 들러 문상을 한 후 정토회관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문상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시니 벌써 밤이 늦었는데도, 스님께서는 바로 주무시지 않고 정토회관 집무실에서 내일 있을 통일학교 강의를 준비하시며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2015.04.03. 21,056 읽음 댓글 1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