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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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5.두북 수련원에서 서울, 문경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nbsp nbsp 스님께서는 모처럼 여유로운 주말을 맞으셨습니다. 숨 쉴 틈도 없이 하루에도 몇 건씩 중요한 일정을 소화하시느라 늘 바쁜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서울 공동체 대중들과 탑곡수련원에서 농사운력을 하기로 했는데 어제 저녁부터 비가 와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 여유로운 일정이었습니다. nbsp 서울 대중들은 원래대로라면 아침 일찍부터 탑곡수련원에 올라가 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운력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밭이랑마다 비닐을 씌우는 일을 하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땅이 너무 질척거려 흙을 덮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탑곡수련원 운력을 못하게 됐으니 두북수련원에 있는 JTS창고를 어떻게 정리하면 될지 살펴보고 의논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몸이 너무 피곤한 사람은 울력에 나오지 말고 푹 쉬다가 같이 점심식사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몸이 아파서 공동체 울력에 빠지고 쉬게 되면 알게 모르게 마음의 부담을 느끼게 마련인데, 스님께서 먼저 배려해주시니 휴식을 취하는 대중들도 모처럼 마음 편히 쉬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는 대중들이 JTS 창고 운력을 하는 동안 화광법사님과 수련원 안팎을 돌아보면서 수련원 내에서 정비해야 할 것과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안내를 받으면서 수련원을 둘러보셨습니다. nbsp 그리고 JTS 창고에 잠시 들러 어떤 물건들이 얼마나 있는지 한번 둘러보시고 창고에 보관된 물품들을 어디에 어떻게 지원하고 정리할 것인지에 대해 잠시 의논하시기도 하셨습니다. nbsp nbsp 두북수련원을 둘러보신 후 탑곡수련원으로 이동하셨습니다. 탑곡수련원에서는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농사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들을 주고 받으셨습니다. nbsp 점심 식사 시간에는 마을잔치가 열린 것 같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최말순 보살님께서 대중들을 위해 부추전과 파전, 그리고 맛있는 후식들까지 맛깔난 식단을 마련해주시고, 어제 도반의 언니가 보시해주신 먹거리까지 더해져 식탁이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습니다. 한쪽에서는 고소한 기름을 둘러 부추전과 파전을 지지고, 한쪽에서는 쉼 없이 웃음꽃이 피어나는 정겨운 풍경이었습니다. SBS 촬영팀도 오늘은 카메라를 놓고 마음 편히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nbsp nbsp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소임에 따라 뒷정리를 했는데, 서울 대중들이 가고 나면 곧 문경 대중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본래 사용하기 전의 자리처럼 깔끔하게 치웠습니다. 그리고는 곧 스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식사를 잘 했는지 물어보시고는, 어제 역사기행 다녀온 소감을 나눠보자고 하십니다. nbsp nbsp 스님 옆에 앉아 있던 도반부터 한 사람, 한 사람 어제 청년대학생 청년들의 역사기행에 뒤따라 다녀온 소감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꽃놀이를 실컷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고, 300명 넘는 젊은 청년대학생들을 만나 덩달아 기분이 즐거웠다는 얘기, 예전에는 꽃이 예쁜 줄 모르겠더니 나이가 들면서 꽃이 정말 예뻐지더라, 스님을 닮아서인지 꽃이 좋아졌다는 얘기, 스님의 배려 덕분에 역사기행까지 할 수 있어 감사했다는 소감이 이어졌습니다. 스님께 감사한 마음을 표할 때마다 스님께서는 “아유 낯간지럽다”시며 웃으셨습니다. nbsp 공동체 성원으로 같이 살지만, 그동안 서로 맡은 소임이 달라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별로 없는데, 이번에 두북수련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차량 안에서 큰 소리로 통일노래를 메들리로 부르면서 피로가 확 풀렸고, 또 스님과 함께 역사기행을 다녀서 들뜬 기분이었다는 소감도 있었습니다. nbsp nbsp 또 통일의 기회가 이번 한 번뿐이라는 스님 말씀에 정말 가능할까 회의적인 마음도 있었는데,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서 신라와 가야가 통합한 사례를 다시 돌아보면서 ‘우리도 가능하겠구나’ 희망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라와 가야가 통합해서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루고 국가 발전을 이룬 얘기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대목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과 빗대어 말씀해주셔서 이해하기가 쉬웠고, 신라와 가야의 통합 얘기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생생한 과제로 다가왔습니다. nbsp 자기 업무와 연관시켜 스님의 통일강좌와 역사기행을 통해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의 이 좋은 컨텐츠들을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접근하기 쉽고 편리하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알리면 좋을지,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연구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nbsp 자연스럽게 우리는 도반들의 생각과 소감 속에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며 성장합니다. 여기에는 늘 스승님의 통찰력과 구체적이고도 실현가능한 조언이 더해져 언젠가 현실로 이뤄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간이 그냥 흘려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놀면서 일하는 일과 수행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소감을 귀 기울여 들으시고는, 봄에는 공동체 성원들과 꽃놀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경위를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나도 사실은 경주 기행을 한 것이, 예전에 대불련 학생들이나 청년들 데리고 현장 학습을 하러 다닐 때 한창 다니다가 중간에는 평리아나 청리아 등 특별한 일정 빼고는 안했어요. 예전에는 꽃 피는 순서도 다 알았는데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어요. 그러다 전국 300강하면서 전국을 다니잖아요.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어떤 꽃이 피는지, 산 아래에서 산 위로 언제 꽃이 피는지, 꽃 피는 시기가 달라지는 것을 다시 알게 된 거야. 그러니 우리 대중들도 봄에는 자연을 느끼는 게 좋겠다 싶어서 4월 한 달만이라도 주말에는 두북에 내려오자고 제안을 하게 된 겁니다. 이번 역사기행은 청년들의 수가 많고, 꽃놀이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일반적으로 역사 강의를 할 때보다 12이나 23 수준밖에 못했어요. 만약 촬영을 한다면 통일의병 역사기행 할 때나 이렇게 집중적으로 역사 얘기를 할 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사람 수도 많고, 시간에 쫓기니까 그렇게까지 자세히 얘기는 못했어요. 이번 4월 주말에는 여기 계속 있게 되는 것 같아요. 통일의병 역사기행도 있고, 청리아와 평리아 역사기행도 있고, 불대생 경주 남산 순례도 있고. 나도 이런 일들이 안내하는 것이기도 하고, 놀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해요. 다만 봄에는 농사를 좀 지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잘 안 나네요. 앞으로는 여러분들도 봄에 여기 내려오는 것을 정례화 하다시피 해서 꽃놀이도 하고 자연을 벗삼아 그렇게 지내봅시다. 내년에는 백운산 등반을 하면 좋겠어요. 저도 여기 살면서 치술령이라고, 초등학교 교가에도 ‘치술령 정기를 받아’ 이런 가사가 있는데, 한 번도 못 올라가봤어요. 단석산에도 못 올라가봤고. 거기 가려고 해도 한나절은 시간을 내야 해요. 이번에는 그럴 시간이 없지만, 다음에는 운동 삼아 기분 전환겸 한 번 가보는 것도 좋겠어요.” nbsp lt벚꽃 나무gt 벌써 내년 4월 일정을 짜는 스님 말씀에 공동체 성원들의 얼굴이 저절로 밝아집니다. 지난 2주 연속 두북수련원에서 일정을 보내고 있는데, 서울을 떠나 자연과 벗 삼는 것이 왜 필요한지 다들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불현 듯 당신의 마지막 과제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 “제가 법문이나 사회활동이나 이런 데서 은퇴하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게 농사와 수행을 결합하는 농업공동체를 구성해보는 일이에요. 자원봉사와 전문가가 결합해서, 또 도시문명과 농촌문명을 결합하고, 일과 수행이 결합되는, 그래서 놀이를 생산화사키는 이런 모델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이게 미래 문명 전환의 계기가 될 거라고 봐요. 꼭 앉아서 명상을 한다든지, 운동한다고 밥 먹고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한다던지,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낭비하는 거잖아요. 동물은 어때요? 노동이 운동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공짜로 먹으니까 운동을 따로 한단 말이죠. 그래서 이런 것을 결합하는 방식, 이게 미래 문명을 여는 길이 될 것으로 생각해요. 우리가 민족의 과제인 통일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민족이니 통일이니 이런 것을 넘어서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이런 것을 실험해보는 것이 필요해요.” nbsp 모든 일은 정토행자들이 스스로 일궈나가도록 하고, 우리 공동체 성원들은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생태문명을 실험해보자는 말씀을 이전에도 여러 차례 듣기는 했지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는 하루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일 문제가 어서 평화롭고 지혜롭게 해결돼서 우리 스님께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시면서 인류문명의 새 기틀을 닦는 일에 기여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nbsp 업무관련 논의까지 간단히 마친 뒤, 스님께서는 서둘러 일어나시며 두북수련원 앞마당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셨습니다. 커다란 벚꽃나무 두 그루가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는 앞에서, 스님께서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위치를 잡아보시면서, “어느 게 더 낫나. 벚꽃나무가 한 그루만 나오는 게 낫나, 두 그루가 다 나오는 게 낫나?” 물어보셨습니다. 대중들은 웃으면서 카메라 위치를 잘 잡는 도반에게 부탁하는 게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스님께서도 곧 카메라를 넘겨주시고는 대중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SBS촬영팀과의 기념 촬영까지 마친 뒤 모두 각 차량에 탑승해 백운산으로 향했습니다. nbsp 급경사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을 오르고 올라 평평한 산길에 이르러 차량들을 먼저 보내고 대중들은 내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백운산에는 유독 연분홍 진달래꽃이 많이 보였습니다. 간혹 꽃망울이 크고 진한 분홍 꽃도 보였는데, 그럴 때마다 스님께서는 발을 멈추시고는 대중들에게 여기 보라며 손짓을 해주셨습니다. 대중들은 스님께서 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잘 알기에 꽃이 보이면 “우와아” 평소보다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서로 “좀 더 영혼을 담아서 감탄해야지”라며 한바탕 웃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산나물 이름과 꽃 얘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다들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서울 공기가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됐노라고 말씀드리니, 스님께서는 “그렇지. 나도 서울에서 자면 5시간을 자도 머리가 안 개운해. 그런데 여기 오면 하루에 3시간만 자도 아주 가볍고 개운하게 일어나. 그러니 사람은 공기 맑은 데서 살아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거야”라며 시골예찬을 하셨습니다. nbsp nbsp 스님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저 앞에 차량 운전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서있습니다. 스님과 대중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던 가 봅니다. 시간이 늦어지기도 하고 비가 온 뒤라 춥기도 해서 더 걷지는 못하고, 다시 차량에 올라타 언양의 작천정으로 향했습니다. 작천정은 마침 벚꽃축제가 열려 수많은 인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벚꽃터널 밑으로 사람들이 물결처럼 올라갔다 내려오고 길목 옆에는 온갖 먹거리와 볼거리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일행들을 놓칠까 싶어 종종걸음으로 선두에 가시는 스님 뒤를 따라붙으면서도, 대중들은 연신 핸드폰 카메라를 들어 쏟아질 것 같은 벚꽃을 찍기에 바쁩니다. 몽실몽실한 벚꽃이 얼마나 탐스럽게 피었는지 사진을 찍으면서도 절로 입이 벌어집니다. nbsp 작천정은 “수석이 기이해서 마치 술잔을 주렁주렁 걸어놓은 듯 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조선 세종대왕 시절에 지방의 학자들이 세종대왕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작천정이라는 정자도 있고, 임진왜란 때는 많은 의병이 순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nbsp lt탑곡 수련원의 앵두나무gt 기나긴 벚꽃터널을 지나 시끌벅적한 거리를 빠져나오자, 작괘천이라는 시내가 흐르는 조용한 계곡이 나타납니다. 몇 년 전에 스님께서 친히 일러주셔서 이곳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한 기억이 났습니다. 스님께서는 위에 온천장이 생기면서 물이 그렇게 맑지는 않다고 하셨습니다. 어제 내린 비로 강물은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넘쳐흘렀습니다. nbsp 계곡을 짧게 둘러보신 스님께서는 저녁에 문경대중들과 일정이 잡혀있어 여기서 그만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과 헤어지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할 만한 장소가 없으니 각자 알아서 먹고 싶은 것 사먹고 가라며 용돈을 주기 시작하자 또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께 세뱃돈으로 천원만 받아도 다음 생에 스님 따라 인도에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익히 들어온 터라, 스님 용돈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스님께 용돈 받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어 대중들은 한 사람, 한 사람 합장하고 용돈을 받아들었습니다. 대중들은 간단히 저녁 요기를 한 뒤 서울로 향하기로 하고, 스님께서는 문경 대중들과 일정을 보내기 전에 모종을 심어야 한다며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nbsp nbsp 문경 공동체 대중들과의 일정은 저녁 7시 30분부터 시작됐습니다. 문경 공동체에는 수련을 진행하는 법사님들과 교육팀, 수련팀, 살림팀 그리고 행자원 등이 있습니다. 이번 모임에는 각 부서에서 소임을 맡고 있는 실무자와 상근자 40여 명이 함께 했습니다. 서울 공동체에는 10년, 20년이 넘는 오래된 실무자들이 모여 있다면, 문경 공동체에는 갓 백일을 넘긴 상근자들로 초심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스님께 인사 올리는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문경 대중들은 내일 천마총 앞에서 자전거를 빌려 첨성대와 계림을 지나 교동 최씨 저택을 구경하고, 교촌교와 월정교 앞으로 해서 경주박물관을 거쳐 황룡사지에서 사시예불을 드린 뒤 분황사에 갔다가 보문단지를 둘러보는 일정을 보낼 계획이라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일정을 가만히 들어보시더니 차로도 15분 걸리는 거리를 자전거로 20분을 잡았다며, 그렇게 주파할 수 있겠느냐 웃으며 물으셨습니다. 스님 머릿속에는 지명만 들어도 거리와 시간이 착착 계산되는 자동계산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면 꽃놀이를 더 잘 할 수 있을지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nbsp nbsp nbsp 일정 공유를 한 뒤에 곧이어 상근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수련팀에서 수련장 시설을 맡고 있는 한 상근자는 불쌍한 아이들을 돕고 싶어 소득이 적은데도 봉사활동을 해왔는데,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딸이 시력을 잃어가고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돕고 살았는데도 내 딸에게 힘든 일이 오니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병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자기 안의 모순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순에 어떻게 처신해야 될지 여쭤보았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진단을 통해 암을 발견하면 좋은 일입니다. 발견을 못했으면 암인 줄 모르고 살다가 죽었을 텐데, 암인 줄 알았으니 이제는 선택이 자신한테 주어진 게 아니겠어요? 알기 전에도 잘 살았으면, 알고 난 뒤에 방황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으니 이게 더 큰 모순입니다. 자기가 모순된 마음을 가진 줄 딱 알아차리고 각성한다면 내 아이를 돕는 데 남의 아이 돕는 것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있어서 내 아이만큼은 병에 안 들기를 원하는 것은 절에 들어와서 살아도 수행과 아무 관계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놓쳤을 때 놓쳤구나 바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놓칠 수 있지만 놓쳤을 때 바로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게 수행입니다.” nbsp 행자원에서 백일출가 스텝 소임을 맡고 있는 한 젊은 상근자는 스님께 무대공포증을 호소했는데, “무대공포증이 있는 걸 알면 됩니다. 무대공포증이 있는데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자기가 문제를 만드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있어서 말이 잘 안 나와요.’ 이렇게 사람들 앞에 솔직하게 인정하고 생활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극복이 되는데, 그걸 숨기고 없는 것처럼 살려고 하니 더 긴장되고 자꾸 안 되는 쪽으로 가는 겁니다. 이처럼 부족한 게 있기 때문에 여기 들어와서 사는 것이 아니겠어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준 이 과제를 문제 삼지 말고,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이런 생각 자체를 놓아버리고 수행정진하세요.”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nbsp 올해 1년 째 상근중인 대학 휴학생인 상근자도 “잘하려고 하면 완벽하게 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자포자기로 빠지고, 또 완벽하게 하다가 자포자기 했다가 반복합니다. 최근에는 우울증 진단을 받아 일을 편하게 하다가도 잘하려다 보면 숨이 턱 막힙니다. 정도를 어떻게 맞춰야 될지 어렵습니다.”라고 스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잘 해야지 하면서 노력은 안하니까 모순이 생긴다”고 집어주셨습니다. 또 ‘잘 한다’의 기준은 상대적인 데 있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상대 평가는 내가 속해있는 상황에 따라 나오기 때문에 내 실력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며, 나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일에 목매달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안하는 것보다는 열심히 하는 게 낫지만 그 결과가 좋을지 나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할 뿐”이라 말해주십니다. nbsp “수행이라는 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부딪히면서 ‘내가 성질이 이렇구나, 내가 저런 점에 집착했네.’ 발견하면서 자기 상태를 점검하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내 습관을 잘 알면 더 이상 그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법사님들 보고 나는 언제 법사님들처럼 될까하는 마음도 욕심입니다. 수행한지 20년, 30년이 되도 부족하지만, 그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런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지만 계속 노력할 뿐입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시면서 내 능력이 어떠했다가 아니라 ‘지난 오십 몇 년 동안 근면하고 성실하게 정진해왔노라.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nbsp nbsp 스님과의 시간을 마친 문경공동체 상근자들의 얼굴이 밝아보였습니다. 절에 들어와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불편한 마음들을 보게 되는데, “놓치지 않는 게 수행이 아니라 놓쳐도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것이 수행”이라는 말씀에 한결 가벼워진 모습입니다. “자전거를 배우며 수없이 타다가 넘어져도 내가 타고자 연습하고 있다면, 그건 넘어져도 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문경 대중들은 조금 더 자기 과제에 집중하고자 새롭게 발심하며 스님께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늦은 시각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질문에 정성껏 대답해주셨습니다. 내일은 아침부터 평화재단에서 종교인모임 조찬이 있어 새벽 3시에 서울로 출발할 예정입니다.nbsp

2015.04.06. 22,712 읽음 댓글 15개

2015.4.4.청년경주역사기행

nbsp nbsp 새벽 기도를 마치자 어느새 동이 튼 두북수련원의 아침은 만개한 벚꽃들로 절로 탄성이 터집니다. 스님께서는 답사를 다녀오겠다시며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섰습니다. 어젯밤 늦게 도착한 서울 공동체 대중들을 위해 개나리, 진달래, 벚꽃구경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를 알아보려고 바쁜 시간 또 짬을 내시는 겁니다. 내일 울력 할 탑곡수련원에도 들르시고, 어디에 볼거리가 있을지 여기저기 둘러보셨습니다. nbsp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신 스님은 서울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오늘 있을 청년정토회 역사기행 장소로 이동하셨습니다. 두북수련원에서 경주 태종무열왕릉 쪽으로 가는 동안, 스님께서 타신 차량이 선두에 섰습니다. 평소라면 짧은 직선거리를 택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돌아가는 길로 들어섰는데 온 길가에 벚꽃나무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벚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하신 겁니다. 대중들은 끝도 없이 물결처럼 장관을 이루는 벚꽃나무에 정신없이 기뻐하며, 여기저기서 웃고 박수치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습니다. 봄만 되면 가요순위 1위에 오르는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따라 부르다가 올라가는 음이 너무 어려워 삑사리가 나자 다시 또 한바탕 웃습니다. 소풍 나온 어린아이들의 심정이 되었습니다. 한 도반이 “우리 스님께 감사함을 표하자”며 스님께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대중들의 환호성과 함께 “스님 감사해요”, “스님, 정말 벚꽃이 멋져요” 너도나도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시끄러워서 잘못 걸려온 전화인줄 알고 끊어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음성녹음을 해서 보내드렸습니다. 공동체 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신 스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태종무열왕릉에 도착하자 청년정토회 스탭들과 청년대학생 참가자들이 벌써 와 있습니다. 역시 봄날 벚꽃에 어울리는 밝고 화사한 청춘들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모여 있습니다. 역시나 청년 대학생들도 들떠있는 분위기입니다. 태종무열왕릉 앞에서 스님과 서울, 인천, 부천, 분당 수원, 청주, 대전, 광주, 대구, 포항, 부산, 울산, 진주, 창원 등 총14개 지역에서 온 청년 316명이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 법륜스님께서는 행사에 앞서 원래는 대학생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었는데, 점점 연령대가 올라가고 있어요. 여기 대학교 신입생 손 들어봐요. 몇 명 안 되잖아. 그러면 대학생 손들어 봐요. 뭐라고? 불교대학생이라고? 그러면 불교대학생들 손 들어봐요. 와 많네. 그런데 35살까지는 어떻게 청년이라고 봐주겠는데, 서른다섯 살이 넘는 사람? 네 모두들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 하셨어요. 오면서 꽃을 정말 많이 봤는데 오늘은 봄 꽃 나들이 반, 역사기행 반이라고 생각하고 기행합시다” 라고 말하시며 일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일정은 ‘무열왕릉진흥왕릉김유신장군묘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능지탑황룡사지분황사’로 예정돼 있습니다. nbsp nbsp 무열왕릉과 진흥왕릉에서는 작은 부족 국가였던 신라가 어떻게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지, 특히 신라와 가야의 통일 과정에서 오늘날 우리가 남북통일에 참조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설명해주셨습니다. 진흥왕릉은 작년까지 가보지 못했지만 올해 새로 단장해서 가보았는데, 처음에는 진지왕릉이 진흥왕릉인줄 알았습니다. 통상적으로 선대의 무덤이 위에 위치한다는 스님 말씀에 이제부터는 무덤의 위치도 눈 여겨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신라가 금관가야와 통합을 하게 되면서 한 단계 도약하게 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법흥왕은 금관가야와 통합하면서 가야의 종교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가야의 왕족 또한 신라의 귀족으로 차별 없이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차 부족국가에서 영토 확장은 물론 수준 높은 철기문명을 이뤘던 가야문명으로부터 직수입한 문화로 한 층 도약하는 계기를 이루게 됩니다. 또 훌륭한 인재들이 보다 많아져 삼국통일의 기반을 이루게 됩니다. 112가 아니라 5가 되고 10이 되는 선례를 남긴 자랑스러운 통합의 역사입니다. 굳이 우리가 동서독 통일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배울 점이 뚜렷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이후 스님과 청년들은 흥무공원까지 40분 정도 벚꽃이 만발한 벚꽃터널길을 걸었습니다. 김유신 장군묘에 도착해서 삼배를 드린 뒤, 옹기종기 모여앉아 또 스님의 재미난 옛날 얘기를 들었습니다. nbsp nbsp “세상 어머니들에게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김유신 같은 아들을 낳으라고 할만큼, 그 어머니에게는 정말 엄청난 효자였습니다. 그런데 애인 입장에서는 어떨까? 천관이라는 애인과의 얘기 알아요?” 기생 천관녀와의 일화는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아주 유명하지요. 그렇지만 스님께 다시 들어도 재미납니다. 한때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던 젊은 유신에게 어머니가 엄하게 훈계를 하셨다죠. 유신은 어머니 말씀에 각성하고 술도 끊고 갑자기 여자의 집에 발길도 끊었다고 합니다. “ 사정이 이러이러하게 됐다 이렇게 미리 말을 해주면 좋을 텐데, 김유신 장군은 어떻게 했어요? 어느 날 발을 딱 끊어버린 거야. 그러다 어느 날 술 먹고 취해서 말을 탔는데 그 말이 자연히 여자 집으로 간 거야. 여자는 아주 반가운 마음에, 어때요? 신발도 안 신고, 요즘 말로 하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그리운 사람이니까 안으로 들였겠지. 나중에 유신이 술에서 깨고 보니, 그 여자네 집인 거야. 갑자기 칼을 빼 들어서 말의 목을 탁 내리쳐버린 거야. 아무 말도 안 해. 그 길로 뒤돌아가서는 다시는 안 나타게 된 거지. 여자 입장에서 보면 좋은 남자여, 나쁜 남자여? 그래, 어머니한테는 세상 둘도 없는 좋은 아들인데, 여자한테는 아주 못 된 남자인 거야. 김유신이 말의 목을 단칼에 베 버릴 정도로 그런 단단한 성정이 있었던가 봐요.” nbsp nbsp nbsp 나중에 천관녀가 좌절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자, 김유신 장군이 천관녀의 원혼을 달래주려고 절을 지었는데, 바로 ‘천관사’라고 합니다.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김유신 장군의 단호한 성격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천관녀와의 설화보다, 후세에 신하로서는 처음으로 ‘흥무대왕’이라는 칭호까지 받을 만큼 통일신라를 건설하는 데 김춘추 태종무열왕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웠던 김유신 장군이 사실은 가야 출신이라는 점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신라는 피를 흘리지 않고 금관가야와 통합하면서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장군을 얻은 것입니다. 끝까지 신라에 항전했던 대가야는 무력으로 짓밟히면서 역사의 흔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죠. nbsp nbsp 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8년 동안 전쟁을 할 때도 김유신 장군의 결단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당시 김유신 장군의 대 당나라 전쟁에 대해 “지금으로 치면, 한미연합군이 북한을 무력으로 제압했는데 미국이 물러나는 게 아니라 미군정을 실시하려고 한 것과 같아요. 그럼 과연 남한에서 미국과 싸워서라도 북한을 찾아야 한다고 나설 장군이 있을까?”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모두들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나라에 항전했던 김유신 장군의 결단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역사의식이 없었으므로 삼국통일이 신라에게는 성공이지만 민족사 전체로 볼때는 우리 민족사를 한반도 내로 축소시켜 버린, 그래서 대륙의 변방으로 전락한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또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 백제의 계백장군,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어쩌면 당시에는 상대국에 철천지원수였겠지만, 지금 우리 후손들에게는 각각 훌륭한 장군들이고 다 우리의 조상인 것처럼, 남북한에서 기리는 군인들도 지금은 서로 원수지만 나중에 통일이 되면 다 존경받는 군인들이 되지 않겠느냐”고 비유해주셨습니다. 통일이 되면 정말 우리의 인식 체계가 확 바뀌겠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재미나게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어느덧 점심식사 시간이 지났습니다. 청년 대학생들은 김유신 장군묘 아래에 있는 흥무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하고, 각 모둠별로 모여 스님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nbsp 약간 날이 쌀쌀해지면서 슬슬 몸이 떨려오기는 했지만 즐거운 점심식사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천왕사로 향했는데 전국 관광객들이 경주로 모여들었는지, 도로에 차량들이 거북이걸음으로 가면서 주차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예정 시각보다 많이 늦게 사천왕사에 도착했습니다. 사천왕사는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이 깨지면서 당나라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건립된 호국사찰입니다. 이곳은 명랑법사와 12명의 유가승들이 신과 부처님의 힘을 빌어 기적을 만드는 문두루 비법을 행했다고 전해집니다. 명랑법사와 12명의 유가승이 행한 문두루 비법의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신라를 침략하려던 당나라군 20만 명은 신라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서해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수장됐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했지만, 민족의 자주적 입장에서 당나라와 협력한 최소한 우리의 이익을 지켜내는 신라의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통일을 하게 되면 다른 외세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지켜내면 좋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nbsp 사천왕사지에서 낭산 중턱으로 이어진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선덕여왕릉이 나왔습니다.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른 후 국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만의 리더십으로 인재를 육성하고, 황룡사 9층탑과 첨성대와 같이 후대에 길이 남을 훌륭한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선덕여왕에 대한 지혜로운 이야기 세 가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덕여왕릉을 지나 언덕을 내려오니 능지탑이 나왔습니다. 능지탑은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문무대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유골은 동해바다 대왕암에 묻고 재를 모아 이곳에 탑을 쌓았습니다. 능과 같은 탑이라 하여 능지탑이라 이름 지어진 곳입니다. 이런 능지탑은 발해 외에 신라에는 이곳밖에 없다고 합니다. 부쩍 차가워진 날씨에 하루 종일 강의를 듣다보니 청년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스님께서는 황룡사지까지 걷지 말고 버스를 타고 가자고 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청년들이 환호하며 버스로 향했습니다. 황룡사지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nbsp 황룡사지에 허허벌판뿐이었지만,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신라의 9층 석탑을 보는 것처럼 생생히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곧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마치 한여름 집중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황급히 분황사지로 이동했지만 더 이상 강의를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굵은 비가 세차게 쏟아져서 분황사는 아쉽게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비소식이 예고된 터라 다들 우산과 비옷을 꺼내들긴 했지만, 워낙 세찬 비라 다들 바지와 신발이 젖어 추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서둘러 버스에 올라탄 청년 대학생들은 저녁식사와 마지막 일정을 하기 위해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nbsp 다들 하루 종일 걸었던 터라 배가 고팠던지, 거의 남김없이 밥을 쓱싹쓱싹 다 비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강당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몹시 노곤했을 법도 한데, 청년들은 기대되는 얼굴로 스님의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이날 질문에는 조선소에서 일하는데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다는 분, 욱하는 성질을 고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분, 엄마의 집착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려는데 망설이고 있는 분, 역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에 대해 궁금한 분, 출가하면 세속과 다른지 묻는 분, 사회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결 하면 좋을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nbsp 그 중 역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해드립니다. “역사 문제가 나오면 늘 하는 말인데 일제시대 때 태어난 학생이 소학교에 들어가 수석을 해요. 이 아이 꿈이 인생을 성공시켜보는 건데, 시골에서 자라 도시 중학교까지 가서 1등을 해요.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1등을 해요. 서울 경성대학교를 가서도 1등을 하고, 학교 다닐 동안 고시를 거쳐 졸업하자마자 지방의 검사나 군수가 되면 옛날에 영감이라 불렀는데 더 열심히 해서 서른도 안 돼 지검장이 되요. 그러면 시골에선 완전 출세한 사람이지. 근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나라가 해방이 됐어. 어제 저녁까지 성공한 인생이 오늘 아침에 실패한 인생이 돼버렸어요. 친일매국노가 돼버린 거지. 일제치하의 지검장 정도면 일제 앞장이 중 핵심인물이잖아요. 근데 이 사람이 남을 때린 것도 아니고 죽이거나 욕한 것도 아니고 술 먹고 행패부린 적도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아무 잘 못을 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근데 왜 어제 저녁까지 대성공을 거둔 사람이 오늘부터 비난받는 인생이 되느냐? 옛날식으로 얘기하면 ‘사주에 그렇게 되었다. 전생에 과보를 받았다’ 그리 생각할 수 있잖아요. 달리 설명이 어렵잖아요. 하지만 이게 설명이 되는 게 역사의식이에요. 일제시대에도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인생의 과제가 있었어요. 농부, 학생, 장사하는 사람 등 각 개인은 나름대로 삶의 과제가 있었지만 3천만 민중의 공통된 과제는 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내가 밭을 일구는 농부라도, 장사를 떠난 장돌뱅이라도, 기생이라도 그 누구라도 나라의 독립이 되어야 한다 했지요. 일본의 지배에 이익을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전체에겐 손해였지요. nbsp 우리 모두 해결해야할 과제를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라 하는데 공동체의 일원인 나는 두 가지 존재인거에요. 내 개인의 인생도 있지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내 삶도 있는 거예요. 나라가 잘 되면 나도 덕을 보는 거죠. 이게 왜 이럴까? 개인 윤리로는 설명이 안 돼요. 구성원으로서 나의 존재 방식이니까 그래서 내가 사는 방식이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과 같은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시대의 과제를 환경문제라 보면 내가 많이 벌고 많이 쓰는 게 역방향이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아요. 만약에 앞에 말한 사람이 일반 범죄는 법대로 벌을 주는 등 자기역할을 하지만, 독립운동과 관계되면 형을 감해주거나 자기 나름대로 풀어주는 방법을 찾아볼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잘못하면 배신자로 찍혀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렇게 할때 독립이라는 방향에 동참할 수도 있어요. 역사의식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근데 역사의식 없으면 눈앞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자기가 예측할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게 되죠. 남이 보면 그 불행이 당연한데. 본인은 억울할 수가 있지요. 그렇다고 당장 그만두라는 아닙니다. 그만 두고 안 두고는 개인의 선택문제죠. nbsp 그래서 첫 번째 자기 인생의 목표를 두고 성취해야합니다. 두 번째 공동의 과제를 두고 거기에 기여하는 길에 동참해야 합니다. 빈곤할 땐 경제건설을 하고 억압받을 땐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공동의 과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지금은 뭐냐. 남북한의 평화로운 통일에 기여하는 일이 바로 공동의 과제입니다. 직장 그만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직장에서 개인의 삶과 동시에 역사의식만 있으면 자기분야에서 열심히 하면서 통일에 동참하면 전체 공동체에서 순기능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꽃놀이 간다고 해놓고 비 맞아가면서 공부 너무 많이 해서 속은 기분이에요? 혹시 추웠다, 속았다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면 좋은 일입니다.” nbsp 질문자들의 진솔한 자기 얘기와 스님의 재기 넘치면서도 지혜로운 말씀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바깥에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 도반의 언니네 가족이 부산에서 달려와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울공동체 식구들을 위해 먹거리를 준비해오셨는데, 마침 스님께 인사를 여쭙고 가려고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서울 공동체 대중들에게 즉문즉설을 듣다가 저녁이 깊어지면 보문단지에 가서 아름다운 벚꽃 야경을 구경하라고 하셨는데, 비가 많이 내려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스님의 즉문즉설을 늘 영상으로만 보다가 현장에서 재미나게 들을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봄날 벚꽃의 향연을 만끽한 하루를 보내서인지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스님의 일정은 일찍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2015.04.05. 21,595 읽음 댓글 9개

2015.4.3. 열반재일 법회, 통일학교 제5강

nbsp nbsp nbsp오늘은 열반재일입니다. 스님께서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중들과 함께 기도를 한 후 발우공양을 마치고 대중공사 시간에 몇 가지 업무와 일들을 직접 챙기셨습니다. nbspnbsp 유수스님께는 “다음에 죽림정사에 갈 때 법사들은 큰 스님과 함께 발우공양할 때 이번에 받은 발우를 가지고 가서 발우공양에 참여하도록 일정을 고려해 달라”고 하시면서 발우를 챙겨가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지난 3월 1일, 죽림정사에서 3.1절 기념 법회와 신규 법사 수계식이 있었는데, 도문 큰스님께서는 직접 수계식을 관장하시면서 스님과 법사님들께 새 발우를 내려주신 바 있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에 있을 용성조사 열반일에 유수스님을 비롯한 법사님들이 죽림정사에 가게 되면 큰스님께 받은 발우를 꼭 가져가서 함께 발우공양을 해달라는 당부셨습니다. 스승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묻어나는 말씀이셨습니다. nbsp nbsp 또 청년정토회에서는 1천 명이 모이는 행사를 위해 장소를 알아보는 중인데, 천명이 모일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민이라고 합니다. 마침 서울에 올라와있던 문경 교육팀에서 연수원 부지를 찾느라 다녀온 곳이 있는데 5천 명이 들어갈 만한 장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문경 교육팀에서 다녀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행사를 진행하는 부서에서 직접 답사를 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셨습니다. nbsp 그리고 이번 주말 서울공동체 대중들의 일정 중에서 “일요일 저녁을 언양 작천정에 가서 벚꽃을 보고 저녁을 먹고 올 수 있는 일정으로 하고, 또 아침 7시부터 울력을 하면 아침부터 일정에 쫓길 수 있으니 8시부터 하는 것이 좋겠다”며 주말을 좀 더 여유롭게 운영할 수 있도록 조언해 주셨습니다. 울력을 마치고 오후에는 어느 쪽으로 가야 진달래 등 화사한 꽃놀이를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겠다고 하시며, 대중들이 봄에 업무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만끽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이셨습니다. nbsp nbsp 또 오늘 회향하는 두 분에게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한 도반은 우울증이 심해서 회향해서 치료에 집중하겠다고 하니“우울증을 숨기거나 별 것 아닌 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울증은 호르몬이나 물질의 분비 이상으로 생기는 것과 심리적인 상처가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심리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수행해서 한 번 치료해 보겠다는 것보다는 약을 먹고 치료하는 것이 빠릅니다. 약 먹는 것을 꺼리면 안 됩니다. 정기적으로 약을 먹다가 어느 정도 괜찮아지면 의사와 상담한 연후에 끊어야 합니다. 그래도 비상약은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심리가 불안해지면 약을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 병을 알고 통제를 해야 합니다. nbsp 항상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도록 하고 만성화 되면 치료가 어렵습니다. 사회적으로 자살이 많아지는 것도 핵심은 우울증입니다. 여기 공동체에 있거나 나가 살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간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현대 의학만으로는 치료가 잘 안 됩니다. 자기가 약을 잘 챙겨먹어야 합니다. 밥은 하루 3번 먹는데, 약은 못 챙겨 먹는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밥은 한 그릇 먹어야 하는데, 약은 하나만 먹으면 됩니다. 가볍게 생각하되 치료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라며 회향해서 나가더라도 치료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짚어 주셨습니다. nbsp 오전 10시부터는 열반재일 법문이 있었습니다. 서초법당의 정토행자들은 지난 달 31일부터 부처님의 출가와 열반을 기념하여 부처님처럼 닮아가기 위해 용맹정진을 해왔습니다. 180여명의 정토행자들은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자세를 가지런히 합니다. nbsp “오늘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날입니다. 올해를 불기 2559년이라 하는데, 불기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날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열반일은 음력 2월 15일입니다.”라며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어 어떤 달력을 쓰느냐에 따라 열반절을 비롯해 출가절, 탄생일, 성도절이 나라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열반절이 인도 달력으로는 두 번째 달 마지막 날인 2월 보름이라 하셨습니다. nbsp 그리고 열반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열반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인도 빨리어로는 ‘니빠나’,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입니다.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진 경지,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멸,nbspnbsp좀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적멸입니다. 고집멸도의 ‘멸’입니다. nbsp 고와 락은 돌고 돕니다. 이를 윤회라고 합니다. 고와 락이 윤회하는 이것이 괴로움입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되어 있는데, 우리는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는 것을 추구합니다. 고와 락의 뿌리가 욕망입니다. 욕망이 사라지면 고락이 동시에 사라집니다. 고락이 사라진 상태를, 모든 번뇌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열반이라고 하고, 윤회의 사슬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뜻에서 해탈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행복이라 할 수 있고 해탈을 자유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쓰는 행복, 자유와는 다릅니다. nbsp 우리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를 자유라고 하고,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불행이 동반됩니다. 출가절 때 말씀드렸듯이 집은 굴레와 안온함이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집을 불살라버려야 해탈할 수 있습니다. ‘고’에서 벗어나려면 ‘락’마저 버려야합니다.nbspnbsp우리는 늘 ‘락’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를 동반합니다. 열반은 ‘고’와 ‘락’이 모두 사라져서 고요적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더 이상 ‘고’와 ‘락’이 윤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열반’이라는 말은 고락의 사슬에서 벗어난 상태, 다시 말해 번뇌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수행자에게 수행의 목적은 ‘열반’과 ‘해탈’이어야 합니다. nbsp nbsp 윤회는 고와 락이, 행과 불행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고락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고 윤회입니다. 여러분은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고 싶지 않겠지요? 락이 없어지니까. 그래서 윤회의 씨앗을 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쾌락에 대한 중독성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습니다. 법의 가피를 받아 행복해져야 하는데, 이를 추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nbsp 삶의 조건이 10배, 100배, 1000배 좋아졌는데, 고뇌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잖아요. 그런데도 부처님께 물질을 달라고 그래요. 돈을 달라, 지위를 달라, 애를 낳게 해달라...... . 스스로 생각해봐요. 한심하지 않아요? 부처님이 다 해주면 자기는 뭐해요? 설사 부처님이 해주겠다고 해도 ‘아이고, 돈은 제가 벌게요. 부처님은 돈이 없으시잖아요’ 이래야 하지요. 그분이 우리에게 내린 선물은 번뇌를 벗어나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금을 주셨는데 잡석만 줍고 있잖아요. nbsp 열반과 해탈은 지고한 행복과 지고한 자유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행복을 얻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자유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 뿌리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가야 10년 하고, 20년 하고, 30년 하면 번뇌가 사라집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훨씬 더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가벼워졌어요? nbsp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날에 열반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열반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을 언제 증득하셨습니까? 성도하신 뒤에 증득하셨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의 즐거움을 즐기셨다고 말할 수도 있고 열반락을 즐기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nbsp 열반이라는 용어가 현실에서는 두 가지 의미입니다. 첫째, 부처님은 살아계셔도 열반적정 상태였습니다. 둘째,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열반의 상태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심리적으로 완전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아프고, 배고프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칭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고 한 것입니다. 반열반이라고도 하고 아무 흔적이 남지 않는 상태라고해서 무여열반에 드셨다고도 말합니다. 육신을 갖고 있을 때는 흔적이 남아있는 유여열반이라고 합니다.nbspnbsp nbsp nbsp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미 열반을 증득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는 열반에 드셨습니다. 인간의 고뇌중 제일 큰 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부처님은 죽음에 대해 아무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며 바닷물이 출렁거리듯이, 봄이 오면 잎이 피고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지듯이 삶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지옥 간다, 천당 간다’ 이런 말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열반의 여정, 1년간을 기록한 열반경을 보면 죽음을 향한 삶이 일상생활과 똑같아요. 죽음 앞에서도 마음이 고요적정했습니다. 자기 죽음 앞에서도 고요적정한데 남의 죽음 앞에서 무엇이 두려울까요? nbsp 불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사라지게 하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래서 열반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일을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고락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부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죽는 것을 잠자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십니다. nbsp 예를 들어, 법륜스님이 죽었다 하면 내가 설령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어도 여러분이 안 울어야 제가 열반에 드는 것이 되는 거예요. 내가 설령 열반에 들었어도 여러분이 울면 열반에 든 게 아닙니다. 저의 죽음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때 아니룻다가 사념처관을 할 것을 제안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조용한 상태에 들었어요. nbsp 그렇다면 부처님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쿠시나가라로 가셔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가족 단위로 마지막 친견을 하셨습니다. 마지막 사람까지 친견하시고 열반에 드시려 할 때 이교도 수바드라가 부처님 만날 것을 청합니다. 아난다는 안 된다고 하고 수바드라는 ‘꼭 만나야 한다.’ 하며 옥신각신했어요.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그는 나를 귀찮게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 물을 것이 있어 찾아왔다.’고 하셨습니다. nbsp 수바드라는 부처님께 자기의 고민을 질문하기보다는 누구는 무얼 주장했고 등 수행자들 사이의 논쟁거리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집을 나와 출가해서 51년 동안 부지런히 정진했다.’고 하시면서 8가지 삿된 길과 8가지 바른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nbspnbsp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아난다여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지금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 세상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nbsp nbsp 부처님이 살아계셨으면 세상이 더 나아졌을까요? 오히려 부처님이 돌아가시니까 제자들이 다 부처님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4월 초파일을 중요시하는데, 실은 깨달음을 얻으셨기 때문에 부처님입니다. 세상 사람은 룸비니를 중시하지만, 수행자는 보드가야를 중시합니다. 부처님은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을 하셨기에 중생에게는 처음으로 부처가 출현한 것입니다. 설법을 안 하면 중생에게는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면서 우리 모두가 부처의 길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 열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수백의 싹을 틔우듯이. 우리 모두가 붓다로서 싹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성해야 열반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nbspnbsp 우리들을 하나하나 보면 붓다가 아니지만, 모두 모으면 붓다입니다. 모자이크붓다예요. 여러분은 수행자이지 신자가 아닙니다. 부처의 길로 가는 수행자입니다. 옛날로 치면 어린애가 어려도 왕자이듯이 여러분은 부처의 길로 가는 수행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nbsp 스님께서는 우리가 부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완전한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며 부지런히 수행정진 할 것을 당부하며 열반재일 법문을 마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깨우쳐주려고 하셨던 일화는 들을 때마다 참 감동입니다. 내 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당장 인상부터 찌푸려지고,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걸어도 대꾸조차 하기 힘들어지는데,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여여하셨던 부처님, 그것이 육체의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부처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시려는 연민과 자비에서 나온 것임을 마음 깊이 느낍니다. 부처님께서 떠나실 때 울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어쩐지 눈물이 났습니다. 일부 제자들이 울다가 사념처에 들자는 아니룻다의 제안에 모두 사념처에 들어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는 대목에서도 어쩐지 울컥합니다. 우리도 스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실 때 어떠한 마음일지, 또 그 자세는 어떠해야할지 부처님과 제자들의 모습에서 배워봅니다. nbsp 열반재일 법회가 끝난 뒤 점심 공양을 드신 스님께서는 원고교정업무를 보신 후, 오후 2시부터 다시 통일학교 제5강 강의를 하셨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강의였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후 1시부터 책상과 방석을 펴고, 조용하고 신속하게 학생들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앞자리부터 앉아 핸드폰을 끄고 수업을 기다립니다. 103명의 학생이 모두 앉고 오늘도 어김없이 2시 정각에 수업이 시작됩니다. 법상으로 올라가시는 법륜스님의 오른쪽 양말이 닳아서 발뒤꿈치가 살짝 비칩니다. 스님의 검소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nbsp “안녕하세요 오늘로 강의가 끝이네요, 안 빠지고 듣는다고 수고하셨어요.” 라고 환하게 웃으시며 강의를 시작하십니다. nbsp nbsp “어제까지 강의한 걸 돌아보면 첫째, 왜 이 시점에서 통일이 필요한가를 진단했고, 둘째 우리 민족의 뿌리에 해당하는 상고사 부분, 셋째 한반도로 민족사가 축소되어 지금에 이른 과정, 특히 나라를 일본에 뺏길 수밖에 없었던 근세 100년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 돌아봤고, 어제 분단 70년사, 남한과 북한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지점에 이르게 됐는지 살펴봤습니다. nbsp 오늘 강의는 2가지인데 이런 우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일만이 그 해결책이라는 통일한국의 비전에 대한 얘기고, 두 번째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써 통일의 길로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nbsp 첫 번째 강의 시간에 이대로 내버려두면 통일 될 가능성이 10도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전략이 있어야 할 지 알아 보겠습니다. 마지막 강의는 여기서 다 얘기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일단 대략의 틀만 잡고 다음에 활동하면서 구체적으로 더 잡아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 nbsp 먼저 통일이 된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nbsp “제일 중요한 게 경제력입니다. 가장 경제력이 큰 미국의 GDP가 17조 달러 가까이 됩니다. 중국은 9조달라가 넘어 미국의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10년 정도 지나면 중국이 미국을 앞지른다는 얘기도 있고, 실질구매력 기준으로 따지면 이미 중국이 미국을 앞섰어요. 미중이 경제력에 있어서는 거의 균형점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일본이 약 5조에 달해 중국의 절반을 조금 넘습니다. 현재 미국의 절반이 중국이고, 중국의 절반이 일본이에요. 그 다음이 독일, 이 4개국이 경제력에 있어 초강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한때 11위까지 올라갔다가 15위로 미끄러졌어요. nbsp 분단된 상태로는 더 이상 별 수가 없습니다. 새삼스럽게 노력한다고 경제성장률이 10 넘고 이럴 수가 없어요. 죽기 살기로 해야 3 유지하고, 안 그러면 더 떨어지게 됩니다. 만약 통일을 하면 우선 면적이 9만8천㎢에서 21만㎢로 2배 이상 늘어납니다. 인구도 5천만에서 7천5백만 명으로 늘어나지요. 남한만으로는 GDP로선 일본의 14밖에 안되고 영토는 13, 인구는 25밖에 안되는데, 남북한이 합하면 영토는 23가 되고, 인구는 절반이 넘습니다. nbsp nbsp 북한이 1인당 GDP가 현재 1천 달러밖에 안되지만, 통일되면 1년에 100 이상 성장할 수 있어요. 한 10년만 노력한다면, 통일 한국은 세계 10위 권 안에 진입이 가능합니다. 경쟁상대가 이탈리아, 스페인 정도 되고 그것을 추월해서 최고로 올라가면 8위권까지도 가능합니다. 영국과 프랑스와 경쟁할 수 있어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홍콩이나 싱가폴, 대만이 세계 10위 권 안에 들어가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통일만 되면 가능합니다. nbsp 일본은 정체국면에 들어섰는데 몸부림을 쳐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는 질적 향상이고 하나는 양적 팽창을 해야 극복이 가능한데, 질적 향상은 창조력이 있어야 되는 일인데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양적으로 넘어가는 방법은 영토 확장입니다. 일본은 100년 전에 한 번 해봤어요. 한국을 합병하고 만주를 점령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전망이 없습니다. nbsp 그런데 우리에게는 일본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의 가능성이 있어요. 일본과 달리 우리에게 창조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대중문화 분야입니다. 이른바 한류지요. 한국에서는 잘 모르지만, 밖에 나가면 동남아에서 기업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게 KPOP입니다. nbsp 두 번째, 양적 팽창에 있어 우리는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통일입니다. 북한개발이 우리들에게 창조력을 키울 동안의 필요한 시간을 좀 벌어줍니다. 정책은 2가지로 가야합니다. 하나는 통일경제를 통해서 양적 팽창을 시키고, 다른 하나는nbspnbsp창조력을 키우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nbsp 현재 북한은 중국에 값싼 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또 중국에 소비시장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 중국의 동북3성 지역이 오히려 우리에게 노동력을 제공해주고 소비시장이 되어줄 것입니다. 한국이 발전하려면 첫째는 통일이 중요하고, 둘째는 통일된 한국은 중국 동북 3성지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룰 것입니다. 중국 안에 있는 다른 지역보다 한국이 기술도 앞서고 자본도 있고 영토도 가까우니까 경제협력은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새삼스럽게 영토를 차지하지 않더라도 실제로는 옛 영토를 우리경제의 영향권에 둘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고 시베리아까지 협력하면, 환동해경제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단순히 11이 2가 되는 게 아니라 3이 되고 5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통일의 비전입니다. nbsp 첫째 통일 자체가 가져오는 이익이 있고, 통일을 해야 동북아경제공동체가 가능해집니다. 통일을 안 하면 불가능합니다. 북한이 가운데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제는 우리에게 기회도 되지만 위협도 됩니다. 우리 단독으로 여기에 대항하는 것은 어려워요. 우리의 높은 문명과 높은 기술력으로 중국과 상호협력 관계에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으려면, 한국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일본과 협력해야 가능해집니다. 일본과 우리는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모든 것이 중국보다 가깝습니다. 다만 과거사의 상처 때문에 원한이 깊어서 그렇지. 우리는 제일 가까운 북한과 가장 원한이 크고, 그 다음으로 가까운 일본과 원한이 깊습니다. 일본더러 사과하라고 자꾸 요청하고 있는데, 우리가 통일을 해버리면 과거 상처에 우리가 연연해하지 않게 됩니다. 일본에 피해의식이 없어져 별 신경을 안 쓰는 거죠. 이렇게 한일협력을 해나간다면 중국보다 상당부분 앞선 문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nbsp 통일이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을 치유해준다는 말씀에 귀가 솔깃해집니다. 이어서 스님께서는 경제력만으로는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창조력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 “통일은 우리의 평화와 번영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오고, 동아시아 번영에 핵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일본과 중국을 설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거예요. 그들의 이해관계에 끌려가서 이쪽 편을 들었다가 저쪽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중심을 잡고 협력을 끌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힘이 세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종의 캐스팅보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nbsp 한중일에 동남아까지 하면 인구가 25억 가까이 됩니다. 그러면 세계 인구가 75억이니까 13에 해당한 인구가 여기 삽니다. GDP는 지금 세계의 14 정도인데, 얼마 안가면 13이 될 수 있어요. 동아시아는 앞으로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겁니다. nbsp nbsp 그러나 아시아 시대가 오려면 경제력이나 군사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중국이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담당한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신장이라든지 인권 문제, 환경, 복지 등은 누가 이끌어야 할까요? 한국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중국은 미국의 것은 자기네와 안 맞는다고 안 받아들이지만, 한국이라면 다릅니다. ‘한국도 하는데 우리가 왜 못하겠나’ 이러면서 따라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인권이 신장되면, 중국도 그렇게 되고, 민주주의도 그렇고 환경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이 한국을 경계하지 않으니까 가능합니다. nbsp 우리나라가 주변보다 더 창조력이 있고, 더 많은 이익을 주변 나라에 같이 나눠주면, 주변 나라 국민들이 몸은 자기 나라에 소속해있지만 마음으로는 한국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협력을 이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명감을 가지고 아시아 평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nbsp 이렇게 통일한국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100년의 한을 풀 수 있고, 동북아시아공동체나 동아시아 공동체로 간다면 1천년의 한을 풀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3천년 만에 본래 가졌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1의 가능성이 있어도 투자하겠는데, 지금은 어때요? 이건 조금만 물꼬를 트면 그런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nbsp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통일에 투자하겠는 스님의 말씀에 간절함이 묻어납니다. 스님께서는 이어서 통일은 남한이 주도해야하고 남한이 주도하려면 남한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한다고 하셨습니다. nbsp “통일을 추동할 주체가 남한인데 남한 국민이 관심이 없으면 실현이 안 되겠지요. 보통 사람들은 통일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자기가 손해 보면서까지 통일을 하려고 하지는 않잖아요? 일단 자기에게 이익이 있어야 통일을 하겠다고 나서지요. 통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남한 국민의 요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한 국민의 요구가 무엇일까요? 첫째, 국민들은 성장을 좀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은 이념을 떠나 경제이익이 됩니다. 둘째, 고른 분배가 필요합니다. 고른 분배의 중요 조건으로 하나는 경쟁이 공정해야 합니다. 현재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사회 전반적으로 불공정이 굉장히 심합니다. 특히 재벌기업의 불공정이 심하지요. 그러니까 기업을 한 20개쯤 가지고 있는 재벌그룹 회장이 자기들 필요한 물건을 회사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 손자에게 줍니다. 그리고 다 거기서 구입하도록 하면 금방 회사가 커집니다. 금방 키워서 주식 상장해버리면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nbspnbsp nbsp nbsp 공정하다는 것은 출발선상에서의 기회의 균등입니다. 둘째, 경쟁과정에서 룰이 공정해야 하고 집행도 공정해야 합니다. 셋째, 끝나고 나서 시상할 때 공평해야 합니다. 공평한 시상이 뭘까요? 운동회 하는데 상 줄 공책이 6권 밖에 없었다면 1등한테 3권 주고, 2등한테는 2권, 3등에게 1권 주면 남는 게 없지요.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못 받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요새는 먹고 살만해지니까 16권이 주어졌어요. 그럼 옛날 방식으로 1등 10권, 2등 4권, 3등 2권 이렇게 주기보다는 먼저 10명에게 다 1권씩 나눠주고 다음에 1, 2, 3등에게 나눠주면 1등은 4권, 2등은 3권, 3등은 2권을 갖습니다. 잘 하는 사람은 더 갖되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1권씩 갖는 것입니다. 1권씩 준다는 건 안전망 구축입니다. 이제 한국은 옛날에는 공책이 6권밖에 없는 나라에서 지금은 16권 정도는 되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공평한 분배에도 신경을 쓸 때가 왔습니다.” nbsp 운동회 때 저도 1등으로 달리다가 막판에 넘어지는 바람에 3등 밖으로 밀려나서 공책 한 권 못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운동회가 끝나고 어머니가 짜장면을 사주시는데도 어린 마음에 공책 한 권 못 받은 것이 어찌 그리 속상하고, 응원해주신 어머니께 미안하기도 하든지요. 운동회의 상으로 비유해주시니, 안전망에 대한 이해가 쉽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우리나라도 경제성장을 해서 지금은 공책이 16권으로 늘어났는데, 아직 일부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책을 1권씩 나눠주면 달리기를 아예 안 하는 사람이 생긴다며 반대하기도 합니다. 게을러진다고 하면서 노동의 윤리를 들어 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nbsp “경제성장에 따라 일정한 단계가 되면 복지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요구 때문에 복지수준을 한꺼번에 빨리 올렸을 때 비용문제가 발생해서 줬다가 빼앗는 일이 생기고, 그러면 저항이 생깁니다. 계산을 잘 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가 세금을 더 내고 복지를 받는 거니까. 모두들 세금은 더 내기 싫고 혜택은 더 받고 싶으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도가 잘 못 된 것은 개선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세금을 더 내고 혜택을 더 받는 쪽으로 가야하는데, 고부담 고혜택으로 할거냐, 중부담 중혜택으로 할거냐, 저부담 저혜택으로 할거냐인데, 지금은 저부담 저혜택이니까 바로 고부담 고혜택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중부담 중혜택으로 가야합니다. 국가에서 이것을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나가 조세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재정정책입니다. 조세와 재정 두 가지를 통해서 경쟁사회에서 벌어지는 빈부격차를 조정해 주는게 복지정책입니다. nbsp nbsp 두 번째가 정치문제입니다. 북한은 지금 세습이라고 해서 지도자를 뽑을 권리가 국민에게 없습니다. 우리도 옛날에 그랬는데 6월 항쟁을 통해 지도자를 뽑는 권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런데 뽑을 권리는 가졌는데 뽑힌 지도자가 임명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이 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문제가 생겼어요. 선거할 때 국민이 주인이라고 하는 건 딱 보름이에요. 조금 더 길면 한 달이고. 그 기간에는 어떤 후보든 우리에게 와서 절하지요. 그 다음에는 만나자고 해도 만나기 힘들고 부탁해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에게는 사람을 뽑는 권리만 있지, 뽑힌 사람이 민주적으로 권리를 행사하게 하는 제도를 안 만들어놨어요, 내가 머슴을 뽑는다고 뽑았는데, 종노릇은 내가 해야 하는 셈입니다. nbsp 권력 행사 면에서는 중국의 지도자나 한국의 지도자나 사실 별 차이가 없어요, 권력이 너무 집중돼있어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승자독식으로 권력을 다 차지해버리지만, 앞으로는 소수의견이 국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가야 합니다.” nbsp 스님께서는 분권과 지자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중앙의 권력이 지방으로 가야하고, 하나는 국민의 다양한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나와서 지지받는 만큼 의석을 갖는 다당제가 돼야하고, 연립정부를 세우는 방향으로 가야 정국이 안정된다고 하셨습니다. 지방 정부끼리 준 연방식으로 만들어야, 북한의 각지방이 연방에 들어오면 통일도 쉽고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도 부합한다고 하시며,nbspnbsp지방자치의 예로 스위스를 말씀하셨습니다.nbsp “스위스는 인구가 800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연방에 소속된 주만 26개예요. 모두 독자적으로 이뤄집니다. 스위스 전체가 잘 사는 것은 맞지만, 강연 가는 길에 시골로 돌아서 가봤는데 지방에 권한을 주고 자기네 삶을 자기네가 결정하니까 특히 시골이 깔끔하고 잘 삽니다. 물론 잘 사는 데가 있으면 못 사는 데가 있지 않겠어요? 그럴 때 중앙정부가 나서서 못 사는데 보조금을 더 주고, 잘 사는 데는 덜 주고 이러면서 격차를 줄여줘야 합니다. 각자 자기 동네가 알아서 하니까 격차가 날 수밖에 없지만, 격차가 덜 벌어지도록 조정해주는 것입니다.”nbsp nbsp 이어서 외교문제도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예로 들어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항상 사례를 들어 어려운 문제도 쉽게 설명해주십니다. nbsp “셋째, 외교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한국이 되면 전적으로 미국 편을 들어도 안 되고 중국 편을 들어도 안 되고, 중립이 되기도 어렵습니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도 미국에 물어보면 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줘서 감사하다. 그런데 나가겠다고 하면 알겠다. 우리가 이 정도 사는데 아직도 도와달라고 하면 염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가도 좋다. 이제 우리 안보는 우리가 지킬 게.’ 그러고 더 있겠다고 하면 ‘그래 있으려면 언제든 있어라. 우리가 과거에 신세를 졌으니 그정도야 못해주겠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겠다고 하는 걸 바짓가랑이 잡고 당기니까 주둔비용을 우리더러 내라고 하는 거예요. 또 일부에서는 안 가겠다는 걸 발로 차내니까 기분이 나쁜 거예요. 반미도 친미도 답이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있으면 돈을 우리가 낼 필요도 없고, 가겠다고 하면 보내면 되는 거예요. nbsp 동아시아는 한미동맹이니 한중동맹이니 양자동맹으로 가면 계속 갈등이 생기니까 다자동맹으로 가면 됩니다. 주변 6개국이 공동으로 군사안보체제를 형성해서 간다든지 하면 됩니다. 이때 우리는 패싸움의 하수인이 되지 말고 가능한 협력할 수 있는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통일이 되면 우리가 이런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통일로 가려고 해도 이런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nbsp 우리가 어느 정도 복지사회가 돼야 통일이 쉽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한에 사는 사람도 가난하게 사는 걸 보고 북한 사람들이 ‘저 수준이라면, 우리가 통일해서 가봐야 저 취급을 받지 않겠나 ’하고 통일을 안 하고 싶겠지요? 그런데 남한에 가서 바닥에 있어도 지금보다 낫다고 하면 통합하자고 하지요. 힘으로 통일하려고 하면 북한 내부에서 저항이 일어나고, 또 중국이 그 저항을 도울 겁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나서서 통일하자고 하면 중국이 못하게 할 수 있을까요? 북한 정부가 중국의 하수인이 되면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아직까지는 북한이 자주권을 내세우고 있으니까 통일에 유리한 점이 있어요.” nbsp 복지사회와 통일을 연결시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스님 말씀에 저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되어 얼굴이 환해집니다.nbspnbsp nbsp nbsp “통일의 의지를 갖고 자신감으로 북한을 포용해줘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를 통일지향적 사회, 한국 사회가 더 선진적인 사회로 가도록 추진해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한국 정부가 한국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통일지향 정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nbsp 그런데 통일지향적인 정부를 어떻게 구성할까요? 결정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권리 행세를 안 하고 있어요. 권리 행세를 굉장히 잘못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조선총독부에 대항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민주화운동 할 때 독재정부에 대항해서 감옥에 갔어요. 그런데 통일지향적인 정부를 선택하는 투표를 한다고 우리가 죽을 일이 있나요? 감옥 갈 일이 있나요? 그런데 이것도 안하려고 합니다. nbsp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입니다. 나라의 주인이 우리예요. 그런데 아직도 대한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의병은 총 들고 하자는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최선이면 좋다, 최선이 없으면 차선도 좋다, 차선이 없고 차악과 최악밖에 없다면 둘 다 꼴 보기 싫다고 외면하지 말고, 차악이라도 선택하는 것이 이 순간의 최선입니다. 이게 주식투자에서 손절매예요. 손해보고도 판다, 적게 손해 보고 파는 게 이익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nbsp 헌법 전문을 다시 읽어보세요, 통일지향이 국가의 가장 큰 목표가 되어있어요. 국민이 먼저 각성하고, 각성한 국민이 그런 정부를 구성해서 난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것을 할 사람이 바로 통일의병입니다. 총을 안 들어도 됩니다. 생각이 똑바르면 됩니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nbsp nbsp 2시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았는데 아무도 졸지 않고 집중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명상이 끝나고 몇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nbsp 우리나라의 창의력과 자본주의의 창의력에 대한 질문, 스님 말씀은 이상적인데 현 상황에서 어렵지 않겠냐는 우려, 통일지향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다당제와 지방분권 등이 언제쯤 될지 막막하다는 분 등 세 명의 참가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nbsp “헌법 개정이 핵심입니다. 현재 이미 국회의원들 중 3분의 2 이상이 지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역사 속에서 혁명적일 때 헌법을 개정해왔기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지역주의를 개선하고, 비례대표를 지역에 주는 제도, 석패율제는 중앙선관위에서도 개선책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올해가 개헌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 딱 한 가지 문제는 국민의 지지를 못 받고 있다는 거예요. 많은 질문이 있겠지만 다음 시간에 기회가 되면 더 하기로 하고,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4월 7일에는 통일학교 마지막 수업으로 경주역사기행이 있어요. 벚꽃이 아주 좋으니 도시락 싸들고 오세요.” nbsp nbsp 스님 말씀에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네”라고 대답합니다. 수업이 끝나고 모둠별로 마음나누기를 했습니다.“구체적 대안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헌법 개정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이 눈에 들어왔다” “통일학교 5일 연속해서 듣는 게 처음에는 부담이었는데 끝나니 아쉽다. 확실히 통일에 대한 관점이 잡혔다.” “지금 상황에서 가능할까 싶지만 열정을 가지고 통일 학교를 진행해야겠다.” “통일의병 하나하나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열의에 불탄다. 할 일은 명확한 것 같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할 것인가 방법을 찾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나눴습니다. 끝으로 지난 4일간 103명의 수업모습을 찍은 영상을 보며 수업을 마쳤습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탄성이 나왔고, 환한 연꽃 같은 모습을 보는데 뭉클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우리는 웃음이 가장 큰 무기인 환하게 웃는 통일의병입니다. nbsp nbsp 통일학교 강의를 마친뒤 스님께서는 서울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두북수련원으로 향하셨습니다. 10시 30분경 경주IC를 통과 한 후 경주보문단지 벚꽃 야경을 보고 두북 수련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내일은 청년 경주역사기행이 있을 예정입니다.nbsp

2015.04.04. 23,297 읽음 댓글 10개

2015.4.2. 통일학교 제4강

nbsp nbsp 4시 30분, 세상을 깨우는 도량석 소리가 법당 가득히 울려 퍼지면서 아침 일정이 시작됩니다. 스님께서는 오늘도 여느 대중들보다 이른 시간에 법당에 내려오셔서 개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5시에 종성이 끝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집전자의 목탁이 또르르 구르며, 새벽예불과 천일결사 기도가 이어집니다. 스님께서 함께 하시니 대중들의 기도 소리도 어쩐지 더 우렁차게 느껴집니다. nbsp nbsp nbsp 아침 청소가 끝나고 발우공양에 참석하신 스님께서는 퇴수통의 퇴수물이 맑지 못하다며, “여기 새로운 사람이 없고 오래 된 사람들만 있는데 이렇게 퇴수물이 더러워서 되겠느냐. 이것은 여러분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며, 발우공양 시간에도 깨어있어야 한다고 다시 일러주셨습니다. nbsp 그리고는 4월 주말 일정에 대해 가볍게 논의하셨습니다. 이번 주말에 서울 공동체 성원들은 청년정토회의 경주 역사기행에 참여하고, 저녁에는 스님의 강의를 잠깐 듣다가 벚꽃 야경이 절경인 보문단지에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청년 정토회 역사기행에는 스탭들 포함해서 370 여 명이 참가한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서울 공동체 대중들은 그 꽁무니에 뒤따라오면서 느긋하게 벚꽃 구경이나 실컷 하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 날엔 아침 일찍부터 탑곡 수련원에 가서 농사 준비를 좀 해두고, 오후에는 그 뒷산을 등산하거나 작천정에 가보자고 하십니다. 스님께서는 일요일 저녁에 문경 공동체 대중들과의 일정이 있어서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저녁 늦게까지 충분히 야경을 구경하고 서울로 올라가라고 권하셨습니다. nbsp 다음 주 토요일에도 두북 수련원에서 오전에 포살을 하고 오후에는 운력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도 일부러 그날은 운력하는 일정으로 잡으시고 일거리를 모아놓았다고 하셨습니다. 운력을 마치고 스님과 잠깐 시간을 보낸 뒤 다음날은 용성조사 열반일이어서 죽림정사에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죽림정사 앞산에 진달래꽃이 또 그렇게 장관일 수가 없다며 진달래꽃구경을 하자고 하십니다. 용성조사 열반일 참석보다 진달래 꽃구경이 우선인 것처럼 들려서 대중들이 ‘와아’ 하고 웃었습니다. nbsp nbsp 스님께서 제안해 주신 봄소풍 소식만으로도 서울 공동체 대중들의 얼굴이 더욱 환하게 밝아보였습니다. 발우공양과 대중공사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원고를 교정하신 후, 곧 통일학교 강의를 준비하셨습니다. nbsp 오후 2시부터 통일학교 네 번째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통일학교 두 번째 시간에는 상고사를 살폈고, 세 번째는 민족사가 한반도로 축소된, 동북아에서 주도국이 아닌 변방으로 전락한 역사, 그 가운데서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기 전 100년의 근대사와 민중의 고통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nbsp “오늘은 광복이 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지난 70년이 어떻게 전개돼 왔는가, 그간 통일을 위해 어떤 노력들이 있었는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현재 분단된 상태로 남북한은 어떤 과제를 안고 있는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nbsp 올해가 분단 70주년입니다. 2차 대전 후 분단된 나라가 여럿 있어요. 먼저 독일은 침략국이니까 다시는 침략을 못하도록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4개 연합국이 분할통치 하기로 했습니다. 전후에 세계가 미, 소 양 진영으로 나뉘니까 미, 프, 영 3국이 분할 통치하던 지역은 합쳐서 서독이 되고, 소련이 통치한 지역은 동독이 됩니다. 베를린도 그렇게 해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나뉘죠. 일본은 침략국임에도 미국이 단독으로 지배를 했고 이탈리아는 일찍 항복을 했으므로 분할을 면했습니다. 일본은 미국이 무장 해제시키고 만주는 소련이 무장 해제시키고, 한반도는 38선을 나눠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들어와 무장해제하면서 분할 지배를 하게 되요. 이게 분단의 시작이죠. nbsp nbsp nbsp 우리는 해방이 되니까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다 들어오고 국내에서는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자발적으로 형성돼서 일제로부터 모든 행정을 인수받으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미군이 직접 통치를 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일본군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서 미·소군대가 남북한에 들어와 있었는데 미, 소, 영 3국이 모스크바에서 3상회의를 열어 미군과 소련군이 행정을 맡아 3년간 한반도를 신탁 통치하기로 결정한 거예요. 우리 국민들은 여기 반대해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죠.” nbsp 이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려옵니다. 침략국은 일본인데 왜 침략의 피해국인 한반도가 분할통치의 희생자가 돼야 했는지, 냉엄한 국제정치가 비정하게만 느껴집니다. 스님께서는 담담하게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nbsp “당시 국내 상황을 보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세력 중에 공산당 조직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왜냐하면 공산당은 소작농 해방이랄지 토지개혁 같은 생활에 밀착된 주장을 하니까 민중 가운데 존재하기가 가능한데, 그냥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운동하자는 것은 아주 깨인 사람이 아니면 참여하기 어려워 세를 확대하기가 힘들었어요. 종교 지도자들이나 개별 지사들, 또는 개별 명망가들 정도가 있었죠. nbsp 먼저 북한을 볼까요? 해방 후 북한은 조선 공산당, 중국 연안파, 소련 유학파, 김일성의 갑산파 등이 nbsp연합하여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소련 입장에서는 소련 유학파 중에 명망가가 없었으므로 소련과 연계도 있고 국내에 명망도 있던 김일성을 지원키로 결정합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돼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지주계급은 원한을 가졌겠지만 절대다수의 소작농과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nbsp 이런 상황에서 남한이 먼저 1948년 5월10일에 단독으로 선거를 실시한 뒤 8.15에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합니다. 북한도 이에 8월에 선거를 거쳐 9.9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합니다. 형식상 자주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외세에 의해 강제 됐던 분단이 내부적으로 고착됩니다.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을 분단 원년으로 볼 수도 있겠죠. nbsp nbsp 이제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수상이 되고 조선공산당 당수였던 박헌영과 벽초 홍명희가 부수상 자리에 오릅니다. 남쪽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해서 정부가 구성되는데, 일제 식민시대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하니 인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데다 단독정부에 반대하던 김구 선생이 1949년에 암살당하면서 민심이 매우 뒤숭숭해집니다. 농민을 중심으로 토지개혁을 주장하면서 빨치산 투쟁이 일어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니까 북한은 이를 통일의 기회라 보고 남침을 감행하여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합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참전하고 또 나중에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전쟁 중에 남북은 서로 한쪽은 적화통일, 또 한쪽은 승공통일을 주장하죠. 결국 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는데, 북한은 이날을 승전기념일로 기립니다. 북한이 통일을 목표로 했다면 이것은 실패한 전쟁입니다. 그러나 자기 체제를 지켜낸 측면에서 보면 승전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 전쟁은 남북한 군인과 유엔군, 중국군, 민간인 다 합해서 280만 가량이 죽고, 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이 생기면서 민족사의 최대 비극으로 끝납니다. nbsp 전쟁 후 북한에서는 전쟁에 대해 책임 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nbsp전쟁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는 점과 미국의 첩자라는 명목을 들어 박헌영을 숙청합니다. 또, 56년에 종파주의자들을 숙청한다면서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하면서 김일성 독재체제를 강화해 나갑니다. 이문제로 인해서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북한은 50년대 후반부터 천리마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50년대 후반과 60년대에 이르러 소위 대동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룹니다. nbsp nbsp 이 무렵 소련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소련은 이미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된 지 오래되어 생산성이 정체되니 인센티브를 주기 시작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수정주의라고 비판합니다. 북한은 양쪽을 nbsp살피다 72년에 주체사상을 표명하면서 완전히 김일성 nbsp유일사상체제로 바뀌어요. 그러면서 70년대 저성장, 80년대 정체에 이어 90년대에는 쇠퇴국면에 들어갑니다. 92년에는 맑스레닌주의를 헌법에서 삭제하고 98년에는 공산주의도 헌법에서 삭제하면서 주체사상, 선군정치, 백두혈통을 주장합니다. 사회주의로 시작했는데 김씨왕조체제가 돼버린 거예요. 이렇게 되니 자발적 지지가 아니라 억압과 통제로 통치되니까 정치적으로 취약하고 또, 경제적으로 취약하다보니까 안보위기를 느껴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거예요. 늘 통일을 주장해왔으므로 지금도 통일을 말하기는 하지만 현재 내적으로는 자기 체제 유지에 몰두해 있습니다. nbsp 이렇게 북한이 급격하게 쇠락한 것은 자신들의 잘못도 있지만, 약소국의 운명이 배후의 강대국에 좌우되기 때문이에요. 2차 대전 후 사회주의가 확대되는 분위기에서는 nbsp경제적으로는 미국이 컸어도 경제 발전 속도에 있어서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가 훨씬 빨랐습니다. 그러다 70년대 이후 미국의 기술력이 높아지면서 기술과 생산성에서 소련이 밀리게 되고 사회주의 전체의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북한도 그런 데서 영향을 받습니다. 90년대 들어서는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동유럽이 붕괴되고 미국의 경제봉쇄로 북한 경제는 무역 통로를 잃습니다. nbsp nbsp 북한이 겪게 되는 경제위기의 원인은 첫 번째, nbsp외환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외환이 없으니 에너지 자원인 석유를 사올 수 없고, 에너지 부족으로 전기 생산이 줄어들고, 전기 공급이 안 되니 모든 산업이 순식간에 멈춥니다. 트랙터니 비료니 농자재 공급이 안 되니까 농업생산량이 떨어집니다. 북한은 황해도, 평안도가 곡창지대여서 여기서 생산한 곡물로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줘야 하는데 생산량이 떨어져 배급할 식량이 부족하니 동쪽의 함경도 쪽과 노동자층이 먼저 위기를 겪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지난 1990년대말 고난의 행군 시기에 사단법인 좋은벗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약 300만 가량의 북한 주민이 식량난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300만이면 6.25전쟁의 희생자보다 많은 수입니다. 스님은 식량난으로 막대한 인명피해가 있었으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소리 없이 죽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조용한 전쟁 하나가 일어났는데 아무도 바깥으로 아우성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고통을 대변해서 한국 사회와 국제 사회에 알려내려고 좋은벗들을 설립하고 활동에 나섰노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북한 식량난 실태에 대해 많이 알려졌지만, 근래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다시 듣노라니 마음이 아파옵니다. nbsp “북한은 이런 위기에 처하면서 경제, 사회적으로는 붕괴 직전에 놓이지만 정치, 군사적으로는 잘 조직되어 그대로 통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두고 어떤 사람들은 북한이 내일 망할 거라고 하면서도 또 내일 쳐들어올 거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는데, 북한은 경제사회적으로 피폐해서 장기적으로 보면 생존하기 힘들지만, 정치군사적으로 잘 짜여 있어서 단기적으로는 붕괴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nbsp 이제 남한을 볼까요. 45년에 해방이 되고 건준위가 구성되어 활동했으나 인정받지 못 받고 여운형이 암살됩니다. 48년 단독정부 수립 후 김구 선생이 암살됩니다. 내부적으로 정치적인 혼란이 많았습니다. 6.25 전쟁중 우리정부가 부산에 피난가서 겨우 유지되던 시기에 이승만이 헌법을 개정하여 정권의 연장을 꾀합니다. 휴전협정 후 전국토가 피폐화되고 미국이 주는 구호품으로 간신히 유지가 됩니다. 경제적으로도 약하고 군사적으로도 미군에 의해 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장기집권을 꾀합니다. 부패가 만연하고 국민적 저항에 부딪치니,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마산에서 희생자가 발생하고 학생들이 의거하지요. 그 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쿠데타의 주역들이 정부에 참여하면서 집권합니다. 이때부터 정치는 강압통치, 경제는 계획경제를 가동하면서 80년대 들어 마침내 고도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nbsp nbsp 박정희 대통령은 67년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3선 개헌을 시도하지요, 엄청난 국민적 저항이 있었지만 3선에 당선되고 72년도에 유신헌법을 통과시키면서 유신체제를 정립합니다. 79년에 10.26 시해가 있고 전두환의 12.12사태가 일어나면서 80년 광주항쟁으로 이어집니다. 80년대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과 함께 시민참여가 늘어나면서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맞이합니다. 현재 우리헌법은 87년 체제로 당시는 독재를 막자는 데 핵심이 있었으므로 변화된 상황에 맞게 헌법을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현재 있는 것입니다.” nbsp 스님께서는 내부적으로만 보면 남한이, 혹은 북한이 그때그때 잘했다고 평가하겠지만 외적으로 보면 미, 소가 팽팽할 때 분단이 되었고, 소련이 우위에 있을 때 북한이 우위를 점하고, 미국이 절대 우위에 있을 때 남한이 우세했던 걸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상황을 냉철히 판단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통일을 위한 노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nbsp “통일을 위한 노력 가운데 첫째는 신탁통치 반대와 단독정부 수립반대를 들 수 있습니다. 또 6.25전쟁도 무력 통일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침통일이나 북진통일은 군사력을 불사하는 적극적 통일운동으로 양쪽 다 자기식의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우리가 겪어서 잘 알지 않습니까. 요즘 한국 내 극우세력이 주장하는 힘에 의한 흡수통일은 6·25때 북한이 저지른 오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며칠 만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전쟁은 승패에 관계없이 엄청난 피해를 야기하기 때문에 다시는 무력통일을 거론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nbsp 4.19 후 학생들의 통일 운동도 있었습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 아래 통일의 의지를 펼쳤지만 5.16쿠데타로 제압당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 양쪽 다 이제 흡수통일은 어렵다는 인식하에 7.4 남북공동성명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는 외세를 끌어들이지 말고 자주적으로 하자, 군사력을 사용하지 말고 평화적으로 하자, 민족대단결로 하자는 세가지 원칙을 합의합니다. 그러나 공동성명 얼마 후 남쪽은 유신체제, 북쪽은 주체 체제로 각각의 독재를 굳히는 방향으로 갑니다. nbsp nbsp 남북합의는 노태우 정부 때 제일 진전이 있었어요. 1991년도에 남북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상호불가침, 상호체제 존중, 유엔 동시가입, 교류협력에 대한 합의를 하게 되죠. 다음 김영삼 정부는 94년에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는데 갑자기 김일성이 타계합니다. 이 때 조문을 가고 그랬으면 잘 풀렸을지도 모르는데, 김일성이 사망하니까 북한이 곧 망하겠다고 판단해서 조문도 안가고, 가겠다는 사람도 못 가게 하니까 악감정이 생겨서 아예 남북교류가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nbsp 김대중 정부 들어 6.15공동선언이 나오면서 남북한의 교류협력이 굉장히 증대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통일론이 논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체제를 인정한 위에 통일정부를 구성하는데 북쪽은 통일강도를 높이자하여 연방제, 남쪽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즉 연합제를 주장했어요. 연합제는 유럽 연합처럼 완전히 독립국가로 유엔도 따로 가입하고 군대와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갖되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고, 연방제는 미합중국연방처럼 결합의 정도가 높은 거예요. 6.15 선언에서는 남한에서 주장한 연합제가 북한주장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공통점이 있다고 합의하죠. 이것은 사실상 남한의 주장에 북한이 합의한 것이죠. 남북한에 적대감정이 없어지면 연합제로는 쉽게 갈 수 있어요. 서로 왕래하고 경제교류를 확대하고, 국제경기 공동출전하고 문화교류하고 1년에 몇 차례씩 고위급 회담 진행하고, 이렇게만 해도 상당히 자유로워져요. nbsp 노무현 정부에서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자 외교론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을 너무 일찍 내세운 거예요. 말은 맞는데 미국의 영향력이 아직 강한 상태에서 미국의 우려와 경계를 사고 맙니다. 마치 갑신정변이 조급하게 진행되면서 오히려 개혁을 후퇴시킨 것과 같은 결과를 낳았죠. nbsp nbsp 이명박 정부는 역대 정부 중 가장 친미 일변도의 정책을 폅니다. 한국도 이 정도 국력이 되면 한미가 동맹을 하되 자주성이 있어야 하는데, 완전히 종속적으로 가면서 남북관계가 파탄 나고 한일군사정보교류 협정까지 비밀리에 맺으려다 들통이 나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죠. 박근혜 정부에서 얼마 전에 한일군사정보교류 협정을 맺었는데도 국민이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지나갑니다. 요즘 뉴스에 오르는 AIIB도 그렇고 사드도 그렇고, 미국의 요구에 따라 미국 요구 들어주고, 중국 요구에 따라 중국 요구 들어주면서, 강대국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요. 자기가 중심을 잡고 가야 하는데 중심 없이 내몰리고 있어요. 조선조 말에는 국력이 없어서 그랬다 치지만, 현재는 국력이 충분한데도 역사의식이 없고 애국심이나 결단력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nbsp 지금 남북은 교류협력이 다 중단되고 적대감이 분출되고 안보가 불안정해서 통일은 고사하고 평화도 보장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요. 남한 안에서 언론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고 민족통합은 말도 꺼낼 수도 없고 통일과 평화를 말하면 오히려 공격받는 상황입니다. 민주주의도 후퇴하고 자주성도 후퇴하고 있어요. 우리가 옛날보다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것 빼고는 민족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올바르게 발전한다고 상황으로 가고 있어요.” 스님께서는 역량으로 보면 남한이 통일 중심세력이 되어야 하는데 통일의지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과거 통일운동 세력이 사라진데다 북한은 자기체제유지에 급급해서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고려한 만큼 지도자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지도자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고 북한까지도 통합해서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고통 받는 북한 민중을 구제하고 민족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정말 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면 한결 신명이 날 것 같습니다. 스님은 이어 현재 북한 사회의 과제는 무엇이고, 남한 사회의 과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지시는 것으로 다음 강의를 이어가셨습니다. nbsp nbsp “북한은 안보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돼 있습니다. 이렇게 안보위기에 처해 있으니까 모든 관심이 거기 쏠려서 오직 체제유지를 위해 핵을 개발하고 생화학무기 등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니 국제사회에서 더욱 비난받고 고립되는 겁니다. nbsp 심각한 에너지 위기가 발단이 된 경제 위기 상황도 아직 회복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면에서는 인민의 민심 이탈이 심해지고 감시와 처벌 위주로 나가니 인권이 침해되어 민심은 더 떠나는 상황입니다. 사회면에서는 모든 게 통제중심으로 가다보니 자유와 활기가 없습니다. nbsp 북한이 개혁개방을 못하는 이유는 안보위기 때문이에요. 미국에게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라는 게 북한의 요구예요. 미국은 핵개발을 포기하고 개방을 하라고 요구하지만, 미국과 협상했던 이라크나 리비아가 붕괴하는 전례를 보면서 더욱 폐쇄적인 길로 가고 있습니다. nbsp 이런 것은 작게 보면 북한이 잘못하는 것 같지만 크게 보면 분단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적대관계가 해소되어 안보 문제만 서로 보장돼도 인권문제가 상당히 개선될 수 있어요. 북한 지배세력은 통일의지가 없지만 북한 인민은 우리보다 더 통일에 대한 원이 간절합니다. 남한은 능력은 있지만 통일에 대한 관심이나 의지가 없어서 통일이라는 민족의 문제가 방치된 상태입니다. nbsp 남한은 역사적으로 통일의지도 적은데다, 지난 50년간 통일하지 않고도 잘 살아왔는데 지금 통일할 필요가 뭐 있느냐, 못사는 북한과 통일하면 손해 아니냐는 생각이 많습니다. 기성세대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면서도 통일에 대해 호의적인 면이 있었는데 젊은이들은 적대도 호의도 없이 아예 관심이 없어요. 젊은 세대가 통일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려면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통일의 당위성만으로는 부족하므로, 현재 통일이 우리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려주어야 합니다. nbsp nbsp 남한은 남한대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의 동력이 소진됐어요. 외적으로는 우리를 둘러싼 국제 사회의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한국을 둘러싸고 미·일·러·중 4강이 충돌하는 게 백 년 전과 꼭 같은 양상입니다. 강대국의 이해가 충돌할 때 내부적으로 단결돼 있으면 뭔가 해볼 수가 있는데 남북이 분단되어 적대하고 있는 상태하에서는 아예 선택지가 없어집니다. 아무런 미래의 희망이 없는 길로 가는 거예요.” 스님께서는 국제적으로 우리의 위상을 찾기 위해서도 통일이 유일한 길이라며 통일된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통일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nbsp “결국 높은 수준의 문명이 되려면, 보다 민주적인 사회시스템과 높은 창조성이 발현돼 훌륭한 문학작품, 예술작품, 위대한 사상가들이 나와야 합니다. 창조력을 키우려면 창조경제라고 말만 한다고, 또 강압적으로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연구하고 도전하도록 열어줘야 합니다. 이게 과제인데, 이 모든 것이 다 분단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단과 밀접하게 관계돼있습니다. 개인의 살 길이든 나라의 발전이든, 남한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나 북한 민중을 돕거나 국제정세 속에서 국가의 위상을 찾기 위해서도 통일이 유일한 희망일지 모릅니다.” nbsp nbsp nbsp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라는 당부 말씀으로, 오늘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어제보다 10분 늦게 끝났습니다. 스님께서도 점점 길어진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으시고는 “시간 맞추는 게 잘 안되네. 나중에 영상 편집을 잘 해 달라”고 주문하시고는 또 웃으십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참가 대중들도 나누기를 급히 마치고 종종 돌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nbsp nbsp 오후 6시에는 평화재단에서 최상용 교수님과 저녁식사 일정이 있었습니다. 최상용 교수님께서는 오늘 평화리더십아카데미에 강사로 오셔서 ‘중용의 민주주의를 말하다정의는 중용이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실 예정입니다. 강의 전에 스님께서 교수님을 맞이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요즘 저녁을 드시지 않기 때문에 최상용 교수님 부부만 식사를 하시면서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중용, 플라톤의 중용에 대해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nbsp nbspnbsp 최상용 교수님을 강의 하실 수 있도록 청중들에게 소개하시고 스님께서는 이기혜 대표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들르셨습니다. 간단히 문상을 한 후 상주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신 후,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님의 어머님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현대아산병원에 들러 문상을 한 후 정토회관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문상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시니 벌써 밤이 늦었는데도, 스님께서는 바로 주무시지 않고 정토회관 집무실에서 내일 있을 통일학교 강의를 준비하시며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2015.04.03. 21,334 읽음 댓글 10개

2015.4.1 통일학교 제 3강

nbsp nbsp 스님께서는 오늘도 새벽예불과 기도 발우공양을 함께 하시고는 대중공사를 통해 환경적인 검소한 생활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nbspnbsp “우리가 검소하게 살면서 환경운동을 한다고 하는데 화장실에 사람이 없는 데도 불이 켜져 있고, 사무실 곳곳에 사람이 없는 곳에 전등을 켜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환경실천이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속에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에코붓다에서 점검을 안해서 그런가요? 실천이 불편하다고 느낄 것이 아니라 실천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대중들에게는 환경실천 교육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안 살고 있다면 우리의 삶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성화되어 버립니다. 실천을 몸에 배게 해서 생활화 하면 좋겠습니다.nbsp그리고 낮에는 창문을 열어서 자연채광을 최대한 이용해서 전기를 아껴 쓰도록 해야합니다.”라며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근검절약하는 것이 몸에 배도록 하며 대중들에게 환경운동을 이야기 하려면 우선 내가 몸에 배어야 함을 다시한번 알려주셨습니다. nbsp 그리고, 또 대중공사에서 참회를 할 때 몇가지 고쳐야 할 것들도 지적해 주셨습니다. “참회를 할 때, ‘예불 참석시 1분 늦었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밖에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대중살이가 참 팍팍해 보인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1분 늦었다, 몇 분 늦었다’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변명조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nbspnbsp12시간 늦었다는 것은 많이 늦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지만, ‘조금 졸았다. 12분 늦었다.’는 것은 조금 늦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라고 하시며 참회가 자기변명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의 발로참회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살펴보기를 당부하셨습니다. nbsp 그 외에도 건강을 위해 두북이나 문경으로 가서 몸과 마음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해보자고도 제안해 주셨습니다. nbsp 대중공사 이후에 스님께서는 오늘 통일학교 제3강을 위해 집무실에서 강의준비를 하셨습니다. nbsp nbsp 오늘은 통일의병학교 세 번째 강의가 있는 날입니다. 오늘도 역시나 강의 5분 전에 좌석이 이미 꽉 찼습니다.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앉아있었습니다.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모든 행사는 언제나 어김없이 정시에 시작합니다. 참석자들이 아직 덜 와서, 준비가 덜 돼서 같은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걸 익히 아는 참석자들인지라 일찌감치 와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다리는 모습이 선생님을 기다리는 어린 학생들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nbsp 스님께서는 어제 역사 강의할 때 지도를 놓고 영역을 표시하면서 했으면 효과가 높았겠다는 말씀으로 가볍게 서두를 꺼내셨습니다. 어제 강의는 상고사에 대해서였는데, “상고사가 찬란한 영광의 역사였다면 오늘은 고난의 역사를 이야기할 차례”라고 하시며,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시대의 흐름을 환기시키기 위해 어제 강의를 약간 상세하게 요약해주셨습니다.nbspnbsp nbsp nbsp “우리 민족은 일찍이 눈부신 청동기 문명을 이루고 한나라, 배달나라, 고조선으로 발전해 옵니다. 그러다 고조선 문명은 2500년 전 즈음에 발전 속도가 중원에 뒤지게 됩니다. 청동기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다 보니 그에 안주하여 철기문명의 발달이 늦어진 것입니다. nbsp 청동문명은 주로 제기와 무기로 사용되는 데 반해 철기문명은 우선 무기가 뛰어난데다 생활도구로 만들어지니 농업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합니다. 중원에서는 철기문명의 발달로 양자강 이남이 개척됩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전부 건조지대, 초원지대입니다. 석기로는 나무를 벨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철기문명이 발달하면서 온대산림지대인 양자강 이남이 개척되어 중원지역에서는 물질적 토대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됐습니다. 또 무기가 발달하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나라들이 부국강병책을 추구하면서 경제가 성장하고 제자백가라고 부르는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nbsp BC 3세기에 들어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하지만 곧 망하고, 한나라가 다시 통일하면서 고조선을 침입합니다. 이 때는 이미 생산량이나 인구나 무기나 중원 쪽이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고조선은 번조선, 막조선, 진조선 세 부분으로 분할된 시점이라 한군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가장 서쪽에 있던 번조선의 후예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됩니다. 이런 시대적 변환기에 해모수가 일어나 단군직을 계승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부여라고 하게 됩니다.nbspnbsp nbsp nbsp 부여 역시 한나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면서 곳곳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 침략군에 대응하는데 기존의 부여 왕이 투쟁에 미온적이라 동쪽으로 보내니 ?겨나니 동부여, 부여의 본진을 차지한 것이 북부여, 그 북부여를 계승한 것이 바로 고구려의 고주몽입니다. 고구려의 후예들은 주몽을 나라의 시작으로 삼기 때문에, 주몽이 왕위에 오른 BC 37년을 시작으로 보지만, 중국 쪽 기록에는 부여까지 고구려로 봅니다. 부여시대는 부여 외에도 여러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열국시대라고도 하는데 맹주역할은 부여가 합니다. 나중에는 고구려가 맹주 역할을 했지요. nbsp 부여의 후손은 고구려, 백제, 동부여 세 갈래로 나뉘는데, 서로 자기가 적통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백제의 경우, 소서노의 두 아들이 부여의 적통은 맞는데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면서 주몽의 아들이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에 소서노의 두 아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합니다. 본토에서 남하하기는 했지만, 백제 역시 자기들이 부여의 적통을 계승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 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의 5국 시대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 발해의 이국시대로 이어집니다.nbspnbsp nbsp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북쪽으로 흑룡강까지 올라가 영토를 넓힙니다. 영토가 늘면서 고구려인이 소수가 되고, 다수는 말갈족이 되지요. 왕족이나 중요한 간부들은 고구려인이지만, 중하급 관리들은 대부분 말갈족이었어요. 발해가 고구려 말갈연합정부라는 주장이 있는데 청나라가 한족비율이 많고 한족 관리를 많이 등용했어도 연합정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입니다.” nbsp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도 이처럼 자세하고 생생한 강의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나게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머릿속에 역사의 흐름이 잘 정리됩니다. nbsp nbsp “발해가 신라에게 망했다면 그 영토가 신라 땅이 되었겠지만, 요나라에게 멸망하면서 요나라 땅이 됩니다. 고려가 의식적으로나 역사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지만, 사람과 영토는 신라를 계승한 셈이었습니다. 여기에 고려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라와 발해를 건너뛰어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게 된 겁니다. 고려는 정신적으로 굉장한 역사의식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갖고 있지 못했어요. 북벌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북쪽의 요나라와 금나라에 막히면서 점점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옛 땅을 되찾자는 북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한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고려에 이런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기록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배달시대의 기록을 남겨놓은 게 고조선이고 환웅시대와 단군시대의 역사기록을 남겨놓은 게 고구려이고 발해 때 일부가 복원됐지만 망하면서 불타버렸는데. 고려가 역사의식이 있었으므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같은 데 옛 기록이 일부 남아 있는 것입니다. nbsp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중국에서 주자학이 들어옵니다. 주자학을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한 신진사대부들은 중하급 관리 밖에 될 수 없고 상층관리는 세습이었어요. 신진사대부들이 국가를 개혁하려고 해도 기득권 세력 때문에 안 되니까, 무장인 이성계를 내세워 새 나라를 세우고 친명정책을 취합니다. 고려가 동북지방이 우리 땅이라 생각했지만 힘에 밀려 못했다면 조선은 그런 의식이 전혀 없었어요. 조선은 자발적으로 사대를 취했죠. 우리 역사가 중국에 앞섰다든지 문명이 앞섰다든지 하는 기록은 읽는 것만으로도 불온하게 여겨서 금서로 폐기해 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조선은 역사의식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도 불온하다고 반대 주장이 일어나고, 우리글을 언문이라고 무시하고, 달력도 중국 것을 기준으로 하고, 심지어 청이 들어선 후에도 명나라 연호를 계속 사용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nbsp nbsp 스님께서는 이 시점에서 ‘역사를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시며 주의를 다시 한 번 환기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역사를 평가할 때, 하나는 사람을 기준으로, 또 하나는 나라를 기준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나라는 자주적인데 백성이 괴로운 경우가 있고, 백성은 먹고살 만한데 나라가 자주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nbsp “고구려는 자주적이었으나 당나라와 오랜 전투 속에서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도망가는 사람이 생기고 그것을 막으려다 보니 독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망하고도 백성들이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니 부흥운동이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지금 북한을 보면 그 전철을 밟는 것 같아요. 남한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주적인데, 백성들의 삶이 완전히 피폐해지고, 이탈자가 생기니까 독재를 더 심하게 합니다. 반면 신라는 삶이 윤택하고 문명의 수준도 높았습니다. 고려도 문명이 굉장히 발달했지요. 조선도 초기에 명나라와 관계를 잘 맺으면서 세종대왕 때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한글이 창제되는 등 백성의 삶이 굉장히 좋아졌지만 역사의식이나 민족의식이 별로 없어서 나중에 화근이 됐습니다. nbsp nbsp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 국토가 완전히 유린되고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지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와서 도와줬는데 사대부들은 그것 때문에 더욱 명나라에 충성하는 길로 갑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완전히 속국이 됩니다. 왜란, 호란 두 전쟁을 겪으면서 국가는 완전히 피폐해집니다. 이것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 영조와 정조였죠. 그러나 역부족인 상황에서 정조가 죽고 어린 아들 순조가 등극하면서 외척이 등장합니다. 정조가 죽은 후 100년 동안 나라는 쇠락에 쇠락을 거듭합니다. 당시 서구열강이 몰려올 때인데 나라를 혁신하지 못하고 결국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죠. nbsp 그럼 그 시대의 변화가 어땠냐. 1800년에 11살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이 너무 어리니까 처음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 나중에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외척이 세도정치를 합니다. 그nbspnbsp대표적인 게 매관매직이죠. 돈 주고 관직을 샀으니까 본전 이상 뽑으려고 하지 않겠어요. 삼정의 문란이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순조가 죽고 헌종이 역시 8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가 또 일찍 죽습니다. 직계가 없다보니 저 멀리 강화도 시골까지 찾아가서 왕의 7촌뻘을 모셔다 왕으로 즉위시키는데 바로 철종입니다. 국가는 쇠락의 길을 걷고 맙니다.” nbsp 나라가 망해가는 얘기를 듣다보니 참가자들 가운데 개탄의 소리가 간간히 들려옵니다. 우리가 현재 분단의 고통을 겪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구한말 나라를 지키지 못했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한층 더 안타깝고, 사무치는 바가 있습니다. nbsp nbsp “이렇게 되면서 결국 민중의 불만이 표출되는데 제일 먼저 터진 게 ‘홍경래의 난’이라고 불리는 서북민중봉기입니다. 또 진주민란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국이 봉기한 삼도민중봉기도 있었죠. 이런 국내 혼란 속에서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학, 즉 천주교가 몰락양반과 양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졌는데 아무리 탄압해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거기에 의지하는 것을 보고, 최제우 선생이 서학에 맞서는 동학을 세웁니다. 그러나 혹세무민한다 하여 최제우 선생은 1864년 대구에서 참형을 당합니다. 최제우 선생이 전라도 남원에 피신해 있을 때 용성스님이 출가하신 덕밀암에 8개월간 숨어 사셨어요. 해월선사 보호하에. 천도교에서는 덕밀암이 교주가 피신해있던 성지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최제우, 최시형의 제자인 손병희와 해월의 제자인 용성스님이 손잡고 3.1운동을 전개하는 인연이 됩니다.” nbsp 이렇게 역사의 사담을 곳곳에 풀어내 주시니 스님의 역사 강의는 그래서 더 재미있고 생동감있게 들립니다.nbspnbsp nbsp nbsp “아편전쟁 이후 유럽이 중국에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조선에까지 눈을 돌립니다. 외세가 점점 다가오는데 국내에서는 알지도 못하고 아무도 대응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외부적으로 개방의 요구가 강해지는 때에 내부적으로는 고종이 즉위하면서 대원군이 세력을 잡고 개혁을 펼칩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망가진 법도와 체계를 바로잡는 개혁이었으나 외부에 대해서는 개방을 해야 할 시기에 쇄국정책을 취했어요. 대원군은 원래 개혁적인 사람이었는데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판단을 잘못하면서 결국 반개혁 세력으로 평가받게 되죠. 이런 가운데 신문물이 들어오고 개화파가 등장합니다. 젊은 개화파들이 개혁하겠다는 뜻으로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 정변을 일으킨 게 갑신정변입니다. 그러나 3일 만에 청나라 군대에 제압당하고 개화파는 일본으로 도망가 나중에는 친일파가 됩니다. 이 사람들은 개혁파였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어요.” nbsp 대원군이나 개화파나 모두 처음 뜻은 좋았는데 시대를 잘못 읽으면서 역사의 평가가 뒤바뀌었습니다. 이래서 역사의식이 중요하고 역사를 바로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불가능해지자 아래로부터 개혁이 시도됐는데, 바로 동학혁명입니다. nbsp “동학혁명은 삼도민중봉기와는 달라요. 전국 조직이 있었고 개혁적인 이념과 지향점이 있었고,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전국적인 파급력이 있었어요. 전주감영을 접수할 정도로 실행력과 힘도 있었죠. 그러나 임금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니 조직원의 대부분이었던 농민군들이 자진해산합니다. 해체 후 정부가 지도자를 잡아들이니 2차 봉기가 일어나죠. 그래서 정부가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청나라 군이 들어오니 일본군도 자동으로 따라 들어옵니다. 정부가 외세를 끌어들여서 국민을 제압했으니 이런 상항에서 국민이 정부를 불신할 수밖에 없죠.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가 2천만이 안됐는데 그때 20만이 죽었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민중이 죽임을 당한 거죠.nbsp nbsp 이러면서 청의 군대가 일본 군대와 맞붙은 게 청일전쟁입니다. 여기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갑니다. 더불어 전쟁 보상으로 대만도 일본에 할애됩니다. 대만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가 우리보다 더 길어요. nbsp nbsp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 후 이에 분노한 민중이 봉기하여 을미의병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제1차 항일의병입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러시아가 사할린 섬을 일본에 내주게 됩니다. 2차 대전 후 사할린뿐 아니라 일본의 북방 4개 섬까지 소련이 가져가긴 하지만, 지금 동북아의 영토분쟁은 모두 일본의 침략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할린, 댜오위다오, 독도 모두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라 역사문제입니다. 일본이 식민 지배를 진지하게 사과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 가운데는 해양세력으로 미국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기로 미국과 일본이 서로 용인한 게 가쓰라테프트 조약입니다. 협약설립 후 일본은 거칠 것이 없어집니다. 통감부를 설치하고, 을사늑약과 함께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경찰권을 빼앗고 군대를 해산합니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니 이것이 제 2차 의병인 정미의병이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자 일본은 국내 모든 의병운동의 씨를 말리겠다며 철저히 탄압하는데, 이러면서 대다수가 국외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발전해갑니다.” nbsp 스님께서는 당시 백성의 도탄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며, 당시 너무 오래 굶주린 할머니가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가 노는 것을 보고 펄펄 끓는 물에 잡아먹었는데 나중에 보니 손자였다는, 너무 끔찍해서 믿기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북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나무껍질로 간신히 연명하던 어린아이가 변비에 걸려 항문을 수저로 파냈다는 얘기, 사람 잡아먹은 얘기 등을 숱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불가촉천민을 도우려고 저 머나먼 인도까지 날아가는데, 북한 실상을 보시곤, ‘내 민족이 굶고 있는데 멀리 와서 이러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엄청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스님께서 북한동포 돕기를 시작한 이유였습니다.nbspnbsp nbsp nbsp nbsp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자 의병출신들은 대부분 만주로 건너갑니다. 삼도민중봉기 시기에 이미 국내에서 많은 농민들이 간도와 연해주로 넘어가 빈 땅, 주인 없는 땅을 일구며 살고 있었어요. 독립운동을 하러 넘어가는 사람들 중엔 국내의 땅과 집을 팔아 이주하여 그쪽에 학교도 세우고 군대도 양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nbsp 국제적으로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가 대두됩니다. 그러니 국내에서도 독립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3.1운동이 일어나 들불처럼 번져가고, 전 세계에 나가있던 독립운동가들도 곧 독립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상해에 모여들어 상해임시정부를 세우지요.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라는 게 패망국인 독일의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었지, 승전한 연합군의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일본은 당시 연합군 세력으로 승전국이 되어 중국 내 독일이 차지했던 이권을 가져갑니다. 그러니 한반도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독립이 진척되지 않자 실망한 사람들이 다시 북간도와 만주로 넘어가 일본과는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무장투쟁에 들어가죠. 1920년도 6월의 봉오동 전투나 10월의 청산리전투는 조선 게릴라 군이 일본의 정규군과 싸워 이긴 사건으로 우리 민중에게 크나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nbsp 그러나 결국 비폭력투쟁도 무장투쟁도 실패하면서 이때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소비에트가 건설된 후이므로 젊은 독립군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많이 받아들입니다. 당시 국제사회주의의 흐름은 민족해방세력과 공산주의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일어나고 조선에서도 조선판 국공합작인 신간회가 1927년에 조직되어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협력하게 됩니다. nbsp nbsp nbsp 당시 코민테른의 정책은 1국 1당주의였습니다. 중국 내에서 공산당을 또 하나 만들 수 없으므로, 동북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군들은 중국 공산당 산하 동북연군에 소속돼서 활동합니다. 당시 동북연군의 주요 구성원이 조선인이었어요. 또, 소련 영역내에는 소련 공산당 소속의 독립군들도 있었습니다. 국내에도 박헌영을 필두로 하는 조선 공산당이 있었고, 사회주의 계열이지만 그보다 조금 온건한 여운형, 그리고 민족주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중국에는 장개석의 지지를 받는 광복군이 있었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nbsp 카이로에서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게 카이로 회담인데 참석국이 미국, 영국, 중국이었어요.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이 만났는데 장개석 밑에 김구 선생이 있었으므로 장개석의 강력한 주장으로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을 독립시킬 것을 약속한 거죠. 그러나 나중에 독립 약속을 번복하고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고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분단시켜 소련군정, 미군정이 실시됐어요. nbsp nbsp nbsp 초기 북한 정부에는 소련이 지지하는 김일성파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연안파, 소련유학파, 조선공산당, 조만식 같은 민족주의 세력이 혼재돼 있었어요. 북쪽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친일청산이 빨리 이뤄졌습니다. 남측은 민족주의 계열의 상해임정파와 미국의 후원을 받은 이승만이 있었는데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정적인 필요에 따라 식민시대의 관료를 다시 등용해서 민중들의 반발이 대단히 심했습니다. nbsp 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은 누구도 사회주의 요소를 드러내기 어렵게 되고, 저쪽은 자유주의 요소를 드러내기 어렵게 되었죠. 분단이 길어지고 전쟁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서로를 적대하다보니 더욱 사상적으로 편협해지고 분단이 점점 길어지게 된 겁니다.” nbsp 스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9천년 역사의 광대하고 활달한 정신도 가지고 있지만, 1천 년 동안 강대국의 속국으로 지내온 비굴함과 지난 2백년의 피해의식이 뒤엉켜 있습니다. 이것이 개인과 사회에 스며있어요. 이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안의 부정적인 요소를 보고 자학하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과 국가, 문화를 유지해온 것도 대단한 겁니다. 그게 6천년의 뿌리가 있기에 나온 거예요. 2002년 월드컵의 폭발력이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에요. 일제 식민지배 이후 100년의 한, 민중의 고통 측면에서 200년의 한, 민족 전체로 보면 1천년의 한을 풀 수 있는 게 바로 통일입니다.” nbsp 스님께서는 통일이 되면 다 해원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이기고 지거나, 네 편 내 편을 떠나 다 원한을 풀어주고 대통합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일본과도 손잡고 중국과도 손잡는데, 북한과 손잡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북한과 손 잡을 수 있다면 남한 안에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왜 함께 하지 못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통일을 해서 과거를 청산해야 우리 무의식 속에 있는 한도 풀리고 자존감도 생기고 희망도 생긴다는 스님 말씀이 오늘따라 가슴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통일을 통해 어떤 희망을 만들 것인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밟아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며 다음 강의를 약속하시곤 3강을 마치셨습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강의 후 JTS 해외활동가 보고회장에 잠시 들렀습니다. 라오스 JTS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배혜정, 박용대 님과와 필리핀 JTS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이재곤 법우님의 보고회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도착하셨을때 이미 보고회 끝나고 뒷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3분의 활동가는 스님께 삼배를 드렸고, 스님께서는 라오스에서 짓고 있는 학교는 다 마무리 하고 왔는지등 모든 활동들을 잘 마무리 하고 왔는지 물으시며 수고했다며 용돈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nbsp nbsp 저녁시간에는 스님께서 산행을 갔다올까 하시다가 점검 못한 원고가 있어서 다시 집무실로 들어가셔서 원고수정과 강의준비를 하는등 업무를 보셨습니다.

2015.04.02. 20,543 읽음 댓글 9개

2015.3.31. 통일학교 제2강, 제9기 청년리더십아카데미 입학식등

nbsp nbsp 스님께서는 새벽 5시에 예불과 기도를nbspnbsp대중들과 함께 하고 발우공양도 함께 하셨습니다. nbsp nbspnbsp 스님께서는 오늘 대중공사 시간을 통해 지난 일요일에 서울공동체 대중들이 경주 남산을 다녀와서 다들 몸이 괜찮은지 확인하시면서 특히, 몸이 좋지 않은 대중들을 한명한명 거명하면서 확인하셨습니다. nbsp 또, 이번 주말에 있을 청년정토회에서 진행하는 경주역사기행에 서울공동체 대중들도 함께 하자고 하시면서 언제 경주로 이동할 것인지, 코스를 어디로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nbsp 그리고 어제 필리핀에서 그동안의 활동을 마치고 들어온 이재곤 법우님에게도 지난 2년 8개월간 필리핀에서 학교 짓는다고 수고했다고 격려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nbspnbsp nbsp 대중공사가 끝나자마자 스님께서는 7시부터 진행된 기획위 회의에 늦었다면서 바삐 움직이셨습니다. nbsp 11시가 넘어 기획위 회의를 마친 스님께서는 유수스님과 평화재단에서 점심공양을 한 후 2시 통일학교 제2강을 위해 정토회관으로 오셨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어제 강의가 어려웠어요? 내가 중학생 실력도 안 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요?”라며 웃음 섞인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어제 강의가 어려웠던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니까 손든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의가 어려웠다고 말씀을 전한 분이 유수스님이었던지, “여기 어렵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혹시 유수스님만 중학생 실력도 안 되는 것이 아니에요?”고 하셔서 다들 왁자하게 한바탕 웃어댔습니다. nbspnbsp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풀어지자, 곧장 강연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제는 의병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지금 우리가 통일의병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근대사를 국제정세와 연관 지어 설명을 해주셨다면, 오늘은 앞으로 남은 강의들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간단히 정리해주셨습니다. 불교식으로 하면 고집멸도에 해당하는 구성이었습니다. nbsp nbsp nbsp“그러니까 정확하게 지금의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알고, 이 문제점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고,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어떤 희망이 있느냐, 그렇게 가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무엇부터 어떻게 하나하나 실천해나가야 하겠느냐. 그러니까 ‘개인 수행처럼 자기 까르마로 인해 형성된 이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야겠느냐? 업식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야 되겠느냐?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겠느냐?’ 이런 시각에서 우리 사회문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수행 차원에서의 고집멸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나름대로 까르마를 갖고 있으므로, 어떻게 이 까르마를 극복해서 정토를, 통일조국을 건설할 수 있겠느냐, 이런 시각에서 공부를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nbsp 그래서 어제는 고에 대해서 진단을 했다면, 오늘부터는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남북한이 처해있는 고통의 현실에 대해서도 더 세세하게 진단을 해봐야 해요. 이런 문제를 극복한 통일국가는 어떠해야하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로만 통일해야 한다고 하지, 사실 통일이 되면 뭐가 좋은지 확실히 안 잡히지 않습니까? 그저 막연하게 이산가족이 만난다든지, 아니면 땅덩어리가 넓어진다든지 이런 것들이죠. 통일이 되면 구체적으로 내 삶의 현실에서 어떤 점이 좋아지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nbsp ‘분단이 왜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왜 분단이 우리 고통의 최대 원인이 되는가.’ 어제 강의에서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 확연히 알 수가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과연 통일 문제가 고집멸도에 어떻게 대입되는지, 스님 말씀을 계속 집중하며 들었습니다. nbsp nbsp “우리가 통일을 과제로 안고 있는데, 이 과제는 분단이 돼있어서 그렇고, 이 분단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가 왜 극복하기 어려운가 이것을 역사적으로 짚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통일강좌 기간 동안 역사공부를 적어도 2회 정도는 해야 합니다. 역사를 돌아본 뒤에는 그 다음 단계로 남북이 분단된 뒤, 북한은 북한대로 나름대로 발전해왔고 남한은 남한대로 발전해 왔는데, 북한은 현재 무엇을 과제로 안고 있는지, 남한은 또 어떤 성과와 과제를 안고 있는지 각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체제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이것이 진단돼야 합니다. nbsp 그런 연후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통일로 가야한다고 할 때, 통일이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익이 있는지, 통일된 국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또 어떤 과정을 거쳐서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지, 이런 실천 방향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고집멸도입니다.” nbsp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회 문제를 인식하고 통찰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데도 아주 유용한 방법론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고집멸도 방법론에 입각한 통일강좌라니, 세상에 이런 강의가 또 있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또 그 가르침을 현실에서 치열하게 실천해온 스승님이 계셔서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bsp nbsp 오늘은 원인분석으로 상고사를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상고사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옛날 옛날 아주 옛날, 전설 따라 삼천리’ 식의 신화로 남아있습니다. nbsp 스님 설명에 따르면, 삼국유사에는 “옛날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하늘세상에서 인간세상으로 하강했다. 그때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비, 구름, 바람을 다스리는 신하를 거느리고 신시를 건국했다. 그때의 건국이념이 홍익인간 재세이화이다.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하고, 하늘에서의 이치를 인간 세상에 그대로 한 번 실현해보겠다는 이념이다. 이렇게 해서 환웅천황이 배달나라를 건국했다. 그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 되기를 원해서, 마늘과 쑥을 먹고 동굴에서 100일을 어떤 곳에서는 21일을 있으라고 했더니, 호랑이는 뛰쳐나가고 곰은 여자가 됐다. 결혼처가 마땅치 않아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더니, 환웅이 부인으로 맞아 단군이 태어나셨다. 단군이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다. 조선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간략하게 기록돼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nbsp 일부에서는 삼국유사가 고려시대에 써진 점을 들어,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게 되자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런 설화 또는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라며 역사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왔습니다. 사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썼던 목적은 ‘고구려, 백제, 신라’ 즉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것으로, 배달나라와 조선나라의 역사는 그저 뿌리를 설명하기 위한 도입부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nbsp nbsp 환웅시대와 단군시대의 역사기록이 보다 상세하게 남아있는 책은 환단고기라는 책입니다. 환웅과 단군, 즉 환단의 옛 이야기를 적은 책입니다. 그런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식민사관이 우리 주류 사학으로 자리 잡는 바람에 이 책이 진위논쟁에 휘말려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쪽에서는 우리도 한때 광활한 영토를 지배한 제국이었다고 열광하며, 환단고기를 도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 비서로 추앙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환단고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환빠’라고 경멸하며, 상상책에 불과한 내용을 마치 역사의 사실인양 호도하고 있다고 맞섭니다.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로선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어리둥절할 뿐이지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이 역사책에 쓰인 내용을 100 진실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 늘 역사의 맥락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nbsp “이 환단고기가 옛 기록 그대로 남아있다면 논란이 없을 텐데, 고구려가 망하면서 다 유실됐다가 발해 시대에 일부 복원됐다가, 또 발해가 망하면서 유실됐다가 고려 시대에 일부 복원되고, 또 고려가 망하면서 유실됐다가 조선 시대에 일부 복원되는 등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기록이 축소되거나 소실되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본이라고 하기에는 몇 가지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죠. 그러나 중간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일부 문제가 있다고는 해도, 현재 고고학의 발전에 따라 사실로 입증되고 있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 옛 선조들의 역사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nbspnbspltif supportEmptyParasgtnbspltendifgtnbspnbsp nbsp 사실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종이기술이 발달해서 고구려의 경우 역사서만 100여 종이 넘고, 백제에도 많은 역사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당나라에 패망한 뒤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고 하지요. 백제는 더더욱 그 찬란했던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물이 사라져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어떤 나라든 패망하면 역사에서 잊히기 마련이라지만, 그 후손들이 역사를 복원하기는커녕 식민사관에 물들어 제 뿌리조차 모르고 살아간다는 게 부끄럽기도 합니다. nbsp 스님께서는 “역사교육의 식민사관을 빨리 극복하지 않으면, 민족 정체성의 혼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상고사 얘기를 이어가셨습니다. nbsp “상고사는 크게 환인시대, 환웅시대, 단군시대 3개로 나눕니다. 환인은 임금의 이름으로, 그때의 나라는 ‘한나라’입니다.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 이렇게 3개입니다. 우리가 배달의 자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인데, 여기에 한이 또 들어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쓴 것은 이렇게 ‘한나라’, ‘배달나라’, ‘조선’, 그리고 ‘고구려고려’ 이 4가지이고, 영어로 하면 ‘코리아’, ‘꼬리아’, ‘꼬레’ 이렇게 됩니다. nbsp 첫 번째 환인의 한나라는 지금부터 약 9천 2백여 년 전에 생겨서 3,301년 동안 지속됐다고 합니다. 두 번째 배달나라는 환웅이 이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신시 개천이 지금으로부터 약 6천 년 전입니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단군이 제창한 것이 아니라 환웅천황이 한 것입니다. 단군왕검으로부턴 4,348년으로 즉 반만년의 역사이고, 환웅의 신시개천으로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역사가 6천 년 전이지만, 가장 길게 보면 환인시대로 약 1만 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nbsp nbsp nbsp환인의 한나라가 9천 2백여 년 전에 시작됐고, 당시로서는 최고의 문명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는 배우지 못했던 내용입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로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의 4대 문명이라는 것만 주구장창 외웠으니까요. 지금에서야 4대문명으로 국한하기 어렵다, 마야문명도 있었다, 최근에 발견된 요하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훨씬 앞섰다는 등 고고학의 성과가 속속 밝혀지면서 새로운 내용이 발표되고 있지만, 그 전에는 4대문명만을 확고부동한 도식처럼 외웠더랬습니다. nbsp 환단고기의 내용이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과학기술과 고고학의 발전으로 하나둘 입증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몇 년 전에 환단고기에 기록된 오성취루 현상을 입증했다는 천문학자의 발표도 있었습니다. 환인의 한나라 시대는 인류문명으로 치면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데, 얼마 전만 해도 최고로 오래된 신석기 유물이 5천 년 전에 불과했지만, 최근 중국 요하강 상류 지역에 거의 8천 년 전의 유물이 발굴된 데 이어 인류 최대로는 1만 2천 년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9천 년 전의 환인시대가 신석기 문명의 기원이라고 해도 어불성설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한나라가 현재 우리가 말하는 국가의 형태는 아니었겠지만, 우리 민족의 뿌리가 그 연원으로 올라간다는 것에는 왠지 장구한 역사의 흐름이 느껴져 괜히 으쓱해집니다. nbsp nbsp 중국에서는 새로운 유물이 계속 발견되는데 대신 역사가 없습니다. 우리는 전설따라 삼천리 식의 역사가 있는데, 유물이 부족하죠. 중국으로치면 오랑캐들이 살았던 지역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곳인데, 이제 그곳에서 아주 오래된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nbsp 그렇다면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는 하늘세계에서 인간세계로 하강한 것이 아니라, 선진문명에서 미개문명으로 이주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스님께서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선진문명에서 한 세력이 떨어져나와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는데, 그것이 신시였습니다. nbsp “신시의 도시 이름으로 ‘아사달’입니다. ‘앗시’라는 말은 순 우리말로 ‘처음’이라는 뜻이에요. 달은 ‘땅’이라는 뜻으로, ‘처음 시작된 땅’이라는 뜻이 됩니다. 나중에 나라 이름을 ‘배달나라’라고 했어요. 이렇게 이주세력이 토착세력이 있는 곳에 선진문명을 가져와서 새로 나라를 건설했는데, 그들은 하늘을 믿는 신앙이 있었고, 고도의 문명 수준을 갖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했어요. 그 징표로 ‘천부인’ 3개, 즉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뭘 말합니까? 배달나라가 청동기 문명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nbsp nbsp 환인의 한나라가 신석기 문명의 시원이듯이 환웅의 배달나라는 청동기문명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 구전으로만 내려왔기에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6천 년 전에 무슨 청동기 문명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오래된 청동기 유물도 3천년 전의 것이고, 세계에서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고 해도 그만큼 안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역시 최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6천 년 전은 물론 7천 년 전의 청동기가 발견됐고, 중국 은나라 지역에서 34천 년 전의 유물들이 대거 발견되면서 그 이전에 세워진 배달나라가 청동기 문명이었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문물이든 다 중국에서 전해온 것이라고 해석하는 시각이 일반적인데, 배달의 후손 일단이 동쪽으로 이주해서 조선을 세웠다면, 서쪽으로 가서 세운 나라가 은나라로 알려지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즉 배달나라의 후손이 청동기를 중원에 전달해준 것이지, 우리가 중원에 전달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nbsp 그런데 이런 유물을 둘러싼 문명 논쟁보다 더 특별한 점은, 바로 건국이념에 있습니다.nbsp홍익인간 재세이화,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한다. 하늘의 이치를 땅에서도 이룬다”는 이 고귀한 이념으로 나라를 세운 선례가 인류문명사에 우리 말고 또 있을까요? 스님께서도 이 부분을 다시 짚어주셨습니다. nbsp “하늘에서 왔다고 했지만, 하늘에서 온 이주민이 원주민을 지배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원주민에게 이익을 주려고 나라를 건국한다는 사상입니다. 토착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라가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취지입니다. 이런 국가 설립 취지는 그 어떤 종교보다 고귀하지 않습니까? 재세이화도 보세요. 하늘의 이치를 이 세상에 실현하겠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늘에서 이뤄진 것을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여지이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 인류사에서 18세기만 보더라도 유럽문명이 아프리카 등에 가서 어떻게 했나요? 원주민을 이익되게 했습니까, 착취하고 지배하지 않았습니까? 또 임금이 백성을 이롭게 하기보다, 백성들을 지배하고 모든 재산과 인명을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nbsp nbsp nbsp 지금 우리보고 건국이념을 만들어보라고 해도 이보다 더 고귀한 정신을 담기는 어려울 겁니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부분이 헌법 전문에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환웅천황의 신시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건국이념을 계승한다고 분명히 명시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지금의 건국이념이라고 해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nbsp ‘홍익인간 재세이화’가 헌법 전문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이보다 더 좋은 건국이념이 있을까요? 이 건국이념을 되살리는 것이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통일한국을 만들어가는 데 가장 선결과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환웅의 배달나라에는 청동기 문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옥기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히고 있다는 것도 상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좋은벗들에서 주관하는 8월 동북아 역사기행에 가면, 중국 심양에서 요녕성 박물관을 방문하게 되는데, 요하문명의 유물들을 두 눈으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그냥 몇 세기 어느 지역 출토 유물 정도로 써있다고 해요. 역사가 있는 우리나라와 공동으로 발굴하고 함께 연구하면 훨씬 풍부한 설명을 할 수 있을 텐데 참 아쉽기만 합니다. nbsp nbsp 환웅시대에 이주세력이 토착세력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고, 그 사이에 낳은 자녀가 왕위에 오르면서 단군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단군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주세력과 토착세력이 통합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 말씀에 따르면, 이 단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허물어진 율법을 바로 세우고 다시 정비해서 신시를 새롭게 했다고 합니다. 신시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개혁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는 우리의 개천절이 단군왕검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환웅천황을 기리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보았습니다. nbsp 스님의 역사 강의는 들으면 들을수록 넋을 잃고 빠져들게 됩니다. 재미나게 말씀해주기도 하시지만,nbspnbsp군데군데 비어있는 부분을 스님의 통찰력으로 전혀 어색함이 없이, 그러나 사실에 입각해서 하나로 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학계가 실증주의를 표방하면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너무 많은데, 연구방법론적으로도 풍부하게 상상하되 이런 부분을 더 치열하게 연구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노력하는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직 주류 사학은 우리 정체성을 밝히는데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서요. nbsp 오늘 재미나게 말씀을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우리의 시야가 확 넓어진 것은 바로 북방영토를 둘러싼 한족과 우리 민족의 주도권 다툼 부분이었습니다. 북방영토는 원래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자 대대로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중원에서는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땅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북방영토를 고조선 시대에 처음으로 중원의 침입을 받아 빼앗깁니다. 중원은 한사군을 설치해 이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조선나라의 관군이 패망하자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다물군이 나섰다는 어제의 강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 민족 최초의 의병이 바로 다물군이라고 하셨죠. 그 다물군의 기상을 이어받아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고, 미천왕 시대에 이르러 낙랑군을 몰아냄으로써 비로소 영토를 회복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낙랑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한사군이었습니다. nbsp nbsp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해 동북아의 맹주가 되었다가 당나라에 패망합니다. 이때 고구려 밑에 있다가 발해가 일어나자 다시 발해 밑에 있던 거란족이 요나라로 독립한 뒤에 발해를 멸망시킵니다. 그러면서 동북지역을 요나라가 차지합니다. 요나라는 원래 고조선 민족으로, 우리 사촌 격입니다.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도 멸망한 뒤에 고려가 세워졌는데, 고토회복이라는 건국이념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제 민족들이 강성하게 일어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워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워서 멸망시키고, 그 몽골족이 고려까지 침공해 들어온 것이죠. nbsp 그러니 고려는 북방을 되찾겠다고 원을 세웠지만, 첫 번째 같은 북방민족인 요나라에, 그 다음에는 금나라에, 그 다음엔 원나라에 부딪혀서 그 원이 좌절됐습니다. 사실 원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몽골족입니다. 그 사람들이 중원에 내려가서 송나라를 멸망시켰어요. 중국 사극을 보면 주로 민족의식이 부딪히는 게 요나라 침공에 대한 송나라 사람들의 싸움, 금나라 군사와의 싸움, 원나라의 싸움 등입니다. 원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다 점령해버렸어요. 이미 요·금시대에 북경까지 다 북방민족이 차지했고, 송나라는 남쪽으로 쫓겨서 남송이라고 했는데 그마저 원나라는 침략해서 다 차지해버렸습니다. 우리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사촌들이 차지한 것입니다. nbsp 그런데 한족들의 반원운동으로 원나라가 망하면서 북방민족이 차지하고 있던 땅이 다 중국땅이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원래 우리민족의 본거지였던 북방영토, 즉 동북지역이 한사군 다음으로 두 번째로 중국의 영토가 됐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고대로 북방영토에대해 자기 것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다시 북방민족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입니다. 나중에 일본도 어때요? 여기다 만주국을 건설했죠. 일본도 엄밀히 말하면 북방민족의 한 갈래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그 영토를 중화인민공화국이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고래로부터 중국이 이 지역을 세 번째로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nbsp nbsp 우리는 이 지역을 잃었지만, 우리 밑에 있던 소수민족이 일어나서 제국을 한 번씩 건설했어요. 거란족이 요나라를, 여진족이 금나라를, 몽골족이 원나라를, 만주족이 청나라를, 그리고 일본까지 대제국을 한 번씩 건설했습니다. 자 그럼, 다시 어디로 올까요?” nbsp “ 자 그럼, 다시 어디로 올까요?” 스님의 마지막 물음에 통일의병 교육 참가자들은 와아 하고 웃었습니다. 어떤 대답이 숨어있기 때문일까요?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그대로일 겁니다. nbsp 천년의 꿈’을 말씀하셨지만, 오늘은 무려 ‘3천년의 꿈’을 말씀하셨습니다. 9천 년의 우리 역사 속에서, 배달나라로 치면 6천 년이지만, 약 3천 년 전부터 중원과의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완전히 주변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일은 문명사적으로 무려 ‘3천 년 전의 본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통일을 한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통일이 없으면 그럴 가능성도 없다”며, “우리가 그 큰 꿈을 실현해보자”고 다시 한 번 당부하셨습니다. 내일은 근대에 이르러 우리 민족이 어떤 고통을 겪었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을 해왔는지 살펴보겠다고 하시며 오늘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nbsp 참가자들은 강의를 마치고 약간 흥분된 상태에서 조별 나누기를 했는데, 어제보다 확실히 분위기가 밝았습니다. 참가자 한 분에게 어제 강의가 진짜 어려워서 분위기가 무거웠던 거냐고 물으니, “아 그런 게 아니고요, 강의가 어려운 게 아니라, 어제 스님께서 우리가 통일할 기회가 10도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다들 우리가 무슨 힘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3천 년의 꿈을 말씀하시면서, 1천 년 동안 우리가 주변국으로 전락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니 뭔가 해볼만하다고 느꼈어요.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우리 조원들은 다들 공감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다들 왁자하게 떠들면서 신나하는 모습이었어요”라고 소감을 나눠주셨습니다. nbsp 또 북방영토를 둘러싸고,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사촌격인 민족들이 9천 년 역사에서 중원에 이 땅의 지배권을 내어준 게 고작 3차례에 불과하다는 말씀을 들으니, 아무리 중국이 G2로 급부상하고 있다지만 그렇게 두려워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얘기도 나눴습니다. 이렇게 한 회, 한 회 강의가 이어지면서, 우리 통일의병의 의식도 점점 성숙해지고 깊어지는 모습입니다. 스님께 다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nbsp nbsp 강의가 끝나고 스님께서는 정토회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셨습니다. 강의 후 스님의 집무실까지 따라간 SBS촬영팀은 스님께 이렇게 통일강의를 하는 이유와 역사 강의에 대한 질문들을 다시 하기도 하였습니다. nbsp nbsp 그리고 스님께서는 이번 통일학교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경주역사기행이 있는데, 어디서 출발해서 어떻게 코스를 정하고, 숙소는 어디로 할 것인지등에 대해 행정처 김은숙처장님, 이상옥보살님과 잠시 논의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nbsp nbsp 회의를 마친 후 스님께서는 계속해서 원고교정작업과 통일학교 강의 준비에 전념하셨습니다. nbsp 저녁 7시 30분부터는 평화재단 3층 강당에서 제9기 청년리더십아카데미 입학식이 있었는데, 스님께서도 함께 하셔서 입학생들을 격려하고 축하 해주셨습니다. nbsp “어떤 사람이 일제시대에 태어나 소학교에서 1등하고, 지방에 좋은 중학교에서도 1등, 고등학교도 1등해서 경성제대 법과대에 입학을 했어요. 거기서도 사시에 합격해서 졸업하자마자 검사가 되었어요. 이정도면 성공했죠? 서른이 되어서 지검장까지 오르면 대성공이죠? 부모에 효도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서 도덕적으로도 하자가 없었는데, 해방이 되니 하루아침에 매국노가 된 거예요.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가게 됐어요.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대 실패인 인생이 되었어요. 하루 아침에 대성공에서 대실패로 바뀌었어요. 이 사람이 하루 사이에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강도짓 하거나, 거짓말 하거나, 성추행 하거나, 술먹고 행패를 부리거나 한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어떤 윤리적 도덕적 법률적 하자가 없었는데도 왜 불행이 온 것일까요? 무엇이 잘못되어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것만을 보면, 이 사람으로서는 억울하겠죠? 뭐가 문제였을까요? nbsp nbsp 이 사람이 불행을 자초한 한가지는 바로 ‘역사의식’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몰랐다, 무지했다고 할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과제와 목표가 있어요. 그런데, 그 시대에 각 개인이나 계층이 아니라 이천만 민중 전체, 삼천만 민중 전체의 삶을 괴롭게 하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일본의 ‘식민통치’였겠죠? 그것이 크던 작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공통의 문제, 근본의 문제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nbspnbsp 그것을 깨닫는 것을 ‘역사의식이 있다’고 하고, 삼천만 동포의 시대적 과제가 ‘나라의 독립’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독립은 식민지 지배하에서 국가 보안법 위반이었어요. 식민지 지배 체제를 반대했다는 것이 ‘국가 보안법 위반’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애국자’라고 하죠. nbsp nbspnbsp nbsp그렇다면 시대적 과제를 알려면 첫째,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 사회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합니다. nbsp 여러분들이 이것을 자각하는데 도움을 주기위해 청년리더십아카데를 개설한 것입니다. 둘째 자각했다면, 그렇다고 행동으로 다 옮길 것이냐? 불이익이 있고, 목숨을 걸어야 해서 행동을 하기는 어렵더라도 시대적 과제를 이해한다면, 자신의 재량 범위 안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겠죠. 우리 청년들은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이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행동해 나갔으면 합니다.” nbsp nbsp 이렇게 스님께서는 입학식 축하 인사를 하시면서 현실에서만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시대적 과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면서 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청년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말씀해주시면서 재단을 떠나셨습니다. nbspnbsp 9시경 정토회관으로 오신 스님께서는 통일학교 강의준비를 하시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2015.04.01. 20,334 읽음 댓글 13개

2015.3.30.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통일학교 제1강

nbsp nbsp 오늘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신 스님께서는 새벽 기도 후 5시 30분에 아침공양을 하시고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탑곡으로 산책을 나가셨습니다. nbsp nbsp nbsp 작년에 봤을 때 약간 특이한 색깔의 진달래가 있었는데, 다시한번 그 진달래꽃을 관찰하기 위해 탑곡 저수지로 향했습니다. 작년에는 탑곡으로 오는 시기가 늦어져 진달래꽃을 많이 보지 못했었는데, 오늘 가보니 온산에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분홍빛깔의 특이한 진달래꽃도 피어 있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예전에는 진달래꽃으로 꽃망방이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오졌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직접 꽃송이가 많은 꽃을 보여주며 설명해주셨습니다. 요즘 우리가 보는 진달래는 꽃이 23개씩 달렸는데, 스님이 보여주신 진달래는 5개의 꽃이 한꺼번에 달려 있어 보기에도 훨씬 풍성해보였습니다. nbsp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탑곡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 산소에 잠깐 들러 산소상태를 체크하신 후 서울로 향했습니다. nbsp 11시 30분에는 평화재단에서 예전에 스님께서 가르친 제자분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현재 큰 회사의 사장님이신데, 스님께 인사도 드릴 겸, 또 강의 요청도 할 겸 찾아오셔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환담을 나누셨습니다. nbsp 그리고 지난번에 스님께서 민중미술가이며 설치미술가이신 임옥상 미술작가님이 하시는 ‘헌법을 다시 읽읍시다.’는 운동에 후원을 하신 적이 있는데, 임옥상 작가님께서 헌법 읽기 운동을 후원해주신 분들께 헌법을 새긴 종이병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직접 검은색과 흰색 종이에 헌법을 새겨서 병풍처럼 만든 것인데, 보기에도 너무 정성스럽고 감동스러워 보였습니다. nbsp nbsp nbsp 오후 2시부터는 서울 서초법당에서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제 1기 통일학교가 열렸습니다. 이날 강의는 사전에 접수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집중 밀착 강의였습니다. 시작 30분 전부터 이미 많은 대중들이 속속 모여들어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보통의 법회나 강의와는 다르게 법당에는 통일학교 학생을 위한 100여 개의 앉은뱅이 책상이 마련되어 벌써 ‘학교’의 분위기가 물씬 났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기획되고 기다려온 강의이기에 시작 전부터 조용한 가운데서도 기대감이 흘렀습니다. 통일의병학교는 오늘 입학을 시작으로 마지막 역사기행까지 총 6강으로 진행이 됩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의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nbsp nbsp nbsp“의병이 무엇입니까? 의병은 관병에 반대되는 말, 즉 정규군이나 직업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하므로 보통 민병이라고도 부릅니다. 의병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이후의 용어고 그 전에는 주로 민병이라고 썼습니다. 의병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은 다물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조선 말기에 중국에서 한군이 고조선을 침략했는데 이것이 단군 조선 이래 최초의 외세침략일 겁니다. 이때 관병이 전쟁에서 지고 나라가 망하니까 관병이 해체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애국심이 강한 민간인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한사군에 대항하며 ‘한군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자, 우리 조국을 되찾자’는 민병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게 다물군입니다. nbsp 다물군에 참여해 그것을 계승한 사람이 고주몽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건국이념이 다물사상이예요. 그냥 나라 하나를 세우는 게 목적이 아니고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자는 큰 원을 가지고 시작이 된 거에요. 때문에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어서 동북아 대륙에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 후에도 나라마다 시대마다 민병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의병이 눈부신 활약을 합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해서 1차 의병봉기, 2차 의병봉기가 있었고 이 의병운동을 계승해서 나라 밖에서 독립군이 조직됐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정의로운 뜻을 가지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재산을 다 바쳐 헌신했지요. 이를 일컬어 의병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nbsp nbspnbsp 그러므로 의병은 첫째,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꼭 싸워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후원을 받는 것도 아니에요. 무기도 식량도 의복도 자기가 알아서 구해야 돼요. 다만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하는 두 가지 이유를 위해. 그래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와 백성이 고통 받을 때 의병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의병은 반군하고는 달라요. 반군은 나라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할 때 임금을 갈아치우고자 일어나서 관군과 싸우지요. 그러니까 의로운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을 잡으면 보상이 따르죠. nbsp 그러나 의병은 반군이 아니에요 정부군과 싸우는 게 아니에요. 제 역할을 못한 나라, 그 관군을 도와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겁니다. 의병은 실패하면 목숨도, 재산도 다 잃습니다. 비난도 받습니다. 그러나 관군은 죽으면 국립묘지에 안장된다든지 인정을 받습니다. 그럼 성공을 하면 어떠냐. 관군은 출세를 합니다. 반군은 권력을 잡으니까 이 또한 이득을 얻죠. 근데 의병은 승리해도 아무 얻는 게 없어요. 자기 본래 직업으로 돌아가야 해요. 때로는 관군으로부터 공로에 대해서 시기, 질투를 받고 모함을 받아 오히려 희생이 될 때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관병하기가 제일 쉽고 두 번째 반군은 위험도 따르지만 잘하면 보상을 받는데, 의병하기가 제일 어려운 겁니다. nbsp nbsp nbsp 그러니까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정의로운 생각으로 나서는 것이지 어떤 이익을 추구한다면 의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데서 의병의 성격이 규정됩니다. 비전문적이고, 자발적이며, 자급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공하면 자기 직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의병은 관군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의병이 관군에 아무리 지극히 협력을 하더라도, 관군은 의병을 달가워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 오히려 사지로 내몰기도 합니다. 의병은 처음부터 이런 걸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점을 알고, 여러분들이 의병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의병이라는 용어가 부담스럽다고 바꾸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성격상 의병이라는 말이 가장 맞아요.” nbsp 스님의 재치 있는 설명에 간간이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만, 강연은 어느 때보다 숙연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됐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렇다면 왜 지금 이때 통일의병이냐?”는 질문을 던지시며 강연을 이어가셨습니다. nbsp “의병이라는 것은 백성이 처한 고통을 해결하고자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가장 큰 어려움, 국민의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분단에 있다는 인식이 있어야 통일의병이 일어납니다. 마치 일제 식민지배가 그 당시 백성이 처한 가장 큰 고통이라는 인식에서 항일독립의병이 일어났듯이, 분단상황에 대한 문제인식이 있어야 통일운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nbsp nbsp nbspnbsp nbsp 그런데 그런 인식이 없는 이유는 두 가지에요65279. 하나는 이해관계, 즉 같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외세의 침략에 큰 손실을 보는 집단이 있는 반면, 오히려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어요. 이익을 보는 집단에서는 외세의 지배를 반대할 이유가 없겠죠. 두 번째는 식민지배가 많은 불이익이 있어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이 아니고,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 고통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nbsp 예나 지금이나 모든 국민이 이런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들 자기 사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출발할 때는 올바르게 인식한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소수의 사람들이 거병을 해서 그들의 주장이 세상에 알려지고, 또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면 대중 참여가 이뤄지기는 어렵습니다. 일정한 성과가 있어서 가능성이 열리면 대중 참여는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거기까지 만드는 게 사실 제일 힘들어요. 가능성 있는 데까지 끌어올리는 데 열정과 시간이 가장 많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 거기까지 만들어가야 합니다. nbsp 그럼 통일에 있어 관군은 누구일까. 첫째 정부, 그중에서도 통일부가 대표적이죠. 국방부도 막강한 힘이 있습니다. 이런 주체들이 관군이라 할 수 있죠. 관군을 지원하는 통일연구원이나 민주평통 같은 준 관군도 있습니다. 이런 관군이 통일을 추진하는데 역부족이라면 밀어줘야 하고, 추진할 생각이 없다면 비판을 해야겠죠. nbsp 옛날 같으면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에 임금이 안하겠다고 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국민이 주인이니까 정부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면, 정부를 비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오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하면 반군이 되는 것 아니냐 하는 걱정이 그겁니다. 아닙니다. 민주국가에서 정부를 비판하거나 교체하는 것을 반군이라고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지금은 국민이 주인이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에 맞지 않게 정부가 운영되거나 통일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요구하고 또 통일을 지향하는 정부를 구성하도록 여론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병의 역할입니다.” nbsp 참가자들은 스님의 한 말씀, 말씀마다 깊이 호응하면서 높은 집중력을 보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그렇다면 “지금 국민의 가장 큰 고통이 과연 분단 때문인가 검토해보자”고 하셨습니다. 크게 국내요인과 국제요인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국제정치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근 중국이 급격히 부상하면서 우리를 둘러싼 역학관계, 즉 힘의 관계가 변화하고 있어 통일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nbsp 현재 국제정치 역학을 설명하기 전에, 분단 70년의 역사를 먼저 짚어주셨는데, 지난 1945년 전후로 국제 정치의 역학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에 따라 왜 우리가 이런 분단 상황을 맞게 됐는지 설명해주셨는데, 정말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학교에서 1945년 전후의 세계사와 국내 상황을 배울 때는 세력의 충돌과 계파가 하도 많아서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스님 설명 덕분에 통시적으로 그러면서도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nbsp nbsp nbspnbsp nbsp “1945년 이전은 어땠냐.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 시대였고, 우리는 그에 저항했지만 힘이 못 미쳐서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어요. 일본제국주의와 적대관계로 대항하고 있던 것은 연합군이었습니다. 연합군의 주축은 미국과 소련이었고, 작게는 중국도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에 패망하면서 국제 질서는 연합군으로 함께 활동하던 미국과 소련이 양대 세력이 된 거예요. 당시 중국은 항일을 하던 세력이 둘이었는데,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었습니다. 이 둘도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한반도는 전후처리를 두고 연합국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nbsp 남측은 미국의 후원을 받는 세력이, 북측은 소련의 후원을 받는 세력이 장악하게 되죠. 우리로서는 상해임시정부가 정통인데, 이미 들어와 있는 미국이나 소련으로서는 자기네들이 후원하는 세력이 주도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임정요원들은 남북 양쪽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지요. nbsp 그런데 당시 미국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국제 여론은 인민해방의 기치를 걸었던 소비에트가 더 컸어요. 봉건제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개혁, 혁명, 즉 민족해방이든 계급해방이든 여성해방이든 토지개혁이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명분 면에서 훨씬 앞섰던 거죠. 또,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도 한반도의 지형지세로 보면, 중국 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한 사람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드나들며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소비에트도 한반도와 연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쪽은 소비에트가 자기 세력을 형성하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미국은 이남에서 자기 세력을 형성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미국이 후원하는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무장투쟁을 할 수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미국은 남한 내에서 주도를 잡는데 많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미국이 미국에서 공부한 소수의 사람으로 중심을 세우면서 다수의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에 이런데서 남한 안에는 사회적 갈등이 많이 생겼습니다. nbsp nbsp nbsp 북한은 이런 남한 내부 정세를 보고, 힘으로 밀어붙이면 통일할 수 있겠다 판단해서 전쟁을 일으켰죠. 사실 이 판단은 비교적 정확해서 한 달 만에 부산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내부 정세는 정확했지만, 국제정세를 오판했습니다. 국제정세 측면에서 보면 당시 미소경쟁이라고 하지만 미국이 최대 세력이었고, 미국이 용납을 안 하니까 UN에서 침략으로 규정받고 미국을 비롯한 UN군이 참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nbsp 미국의 참전으로 당장 전세가 뒤바뀌어서 이북으로 막 밀고 올라가니까 이번에는 중국이 나섭니다. 38선 위로 올라오면 자기네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한 것이지요. 당시 중국은 1949년도에 국·공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겨우 공산정부를 수립했는데 미군이 올라오니까 자기들 체제가 위태롭다고 보지 않았겠어요? 평양까지 올라가니까, 이것은 우리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하겠다고 하고는 100만군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 말로는 항미원조전쟁에서 참여한 것이지요. nbsp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시간은 흐르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는 어려울 것 같으니 1953년에 휴전협정을 맺습니다. 그 전에는 북한에도 북한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고, 남한에도 남한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쟁을 거치면서 각 진영내 반대세력은 모두 말살되다시피 합니다. nbsp 미국은 점점 초강대국이 되니 미국이 후원하는 한국은 점점 발전하고, 반대로 북한은 소련의 세력이 축소되는데다, 소련과 중국이 싸우면서 주체경제를 내세웠지만 경제가 점점 취약해집니다. 처음에는 북쪽이 우세했지만 점점 남쪽이 경제를 성장시키면서 70년대 들어 남북한 양쪽의 세력이 비슷해지면서 이제는 누구도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을 흡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자각이 생기면서 탄생한 게 7.4 남북공동성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90년대 들어 세력판도가 급속도로 바뀌게 됩니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유럽이 해체되고, 미국이 세계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죠. 한국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니 안보가 튼튼하고 미국과의 경제협력으로 국제무대에서 더욱 성장해갑니다. 북한은 공산진영 자체가 붕괴되니 판로가 없어지고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으로 자본주의 사회와는 차단돼 있어 급속히 경제가 추락합니다. nbsp nbsp nbsp 중국은 개혁개방을 하면서 다시 일어났지만 체제의 성격이 바뀌었죠. 정치는 사회주의라지만 경제는 시장경제로 바뀌어, 북한과 정치적으로 안 맞아서 북중 사이에 갈등이 심화됩니다. 이러니까 북한은 더욱 체제붕괴위험에 몰리게 됩니다. 경제를 회복할 가능성도 없고 안보가 불안하니까 핵을 개발하는 쪽으로 가죠.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 6.15 공동선언이 일어납니다. ‘남북한이 각자의 체제를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위해서 상호협력하자.’ 이렇게 됩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국내 변화는 국제 변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nbsp 스님 말씀 덕분에 우리나라가 국제정치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미국과 함께 이른바 ‘G2’ 시대에 돌입하면서 또 다시 달라졌습니다. 남한은 중국이 부상하면서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20년 전에 한중수교를 맺은 바 있습니다. 중국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경제적으로 대중의존도도 급격히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한중교역액이 한미와 한일교역액을 합친 것보다 1.5배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나 안보적으로는 여전히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즉 경제로는 중국의 눈치를 봐야 하고, 안보적으로는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스님은 이런 상황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려말 ‘원청 교체기’와 조선 중기 ‘명청교체기’, 그리고 구한말 ‘청일교체기’와 비교하면서, 그 시점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왔고,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nbsp “우리는 늘 대륙세력의 교체기에 우리끼리 싸웠습니다. 명나라와 원나라가 교체되던 시기에 고려말 기득권 세력은 원나라를 지지하고 신진세력은 명나라를 선택해서 이성계의 반정으로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그러면서 명나라에 자발적으로 사대주의를 선택했습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에는 어떻습니까?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이유로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아서 두 번의 침략을 받고 결국은 패해서 속국이 돼버렸습니다. 삼전도의 굴욕을 다 들어보셨을 겁니다. 구한말에는 청의 지배를 받던 시기였는데 일본이 부상하니까 다시 우리나라에서 각축이 벌어졌습니다. 주변세력을 등에 업고 우리끼리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결국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nbsp 일제 강점기말에는 일본이 주변 연합군과 싸우다가 망해버렸습니다. 만약 일본이 어느 한 나라와 싸워서 망했다면, 또 그 나라의 속국이 됐을지 모르지만, 연합군과 싸우다가 망하니까 그 연합국이 후원했던 세력이 제각각이라 우리 내부에서 또 여러 갈래로 분열하게 된 것입니다.” nbsp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우리는 역사의 중요 고비마다 내부 분열 때문에 미래를 안전하게 선택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위기와 참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스님께서 “우리 민족은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동안 주변 강대국에 좌우되는 약소국으로 전락했고, 그것이 지금껏 유지돼왔다”며 지금도 마찬가지임을 짚어주셨습니다. nbsp “중국이 부상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유동적인 상태입니다. 중국이 완전히 뜨는 해가 될지, 아니면 뜨다가 가라앉을지, 미국이 예측대로 서서히 가라앉을지, 아니면 다시 부상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 정부는 아직도 중국에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 정부가 굉장히 문제가 많은 정부이지만, 통일의 시각에서 보면 아직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반대로 북한 정부가 얼마 못 버티고 중국에 고개를 숙이면, 통일은 더 어려워집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는 통일 후의 전망에 대해서도 잠깐 말씀해주셨습니다. 통일을 하면 저성장 정체기에 접어든 한국 경제의 활로를 찾을 수 있고, 동아시아의 통합과 평화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우리였습니다. nbsp “통일된 한국이 미국에 붙을지, 중국에 붙을지에 따라 동북아 정세가 달라집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주변국들 입장에서는 남북한이 통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니까 통일을 하려면 어때요? 우리의 통일이 너희 두 나라에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통일을 하겠다고 우리가 마음을 똘똘 뭉쳐도 그들을 설득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우리 내부가 분열돼있기 때문에 그리고 국제정세의 흐름을 본다면 90는 계속 분단상태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nbsp 우리 개인적인 삶은 어때요? 우리 까르마를 보면 대충 미래가 예측되잖아요? 우리 업식도 바꾸기가 굉장히 어렵죠. 그래도 한 번 바꿔보자는 것이 수행아닙니까? 가만히 있어도 성불할 바에야 우리가 뭣 하러 수행하겠습니까?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죠. 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통일이 된다면 뭣 하러 노력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냥두면 안 되니까 우리가 나서서 ㅂㅏ꾸어 보자는 겁니다. nbsp 통일만이 전쟁의 위험을 막는 항구적 평화요, 희망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넘게 주변국으로 전락해서 늘 우리의 운명이 주변 강대국의 운명에 좌우되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즉 통일은 우리 민족이 천년의 한을 푸는 일이고, 천년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런 역사적 전환기에 우리가 의병으로 일어나 통일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게 부담이 아니라 큰 은혜요, 혜택을 입은 거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nbsp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옛날에 왕이 주인이던 시대의 백성 의식이 있어서 ‘주인들이 안 하는데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이제 ‘국민이 주인이니,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통일의병이 되어 통일운동을 한번 일으켜보자는 것입니다. 정토회 창립의 꿈이 하나는 불교중흥이고, 하나는 민족중흥인데, 민족중흥의 핵심은 분단된 나라를 통일해서 천년의 한을 풀어 천년의 꿈을 실현시켜보자는 것입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시도해볼 때가 왔습니다.” nbsp nbsp nbsp 의병이 무엇인지 의미를 규정하면서 시작했던 첫 강의는, 이렇게 우리가 왜 통일의병이 되어야 하는지 당부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2시간여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스님의 첫 강의는 우리에게 ‘천년의 꿈’을 되살려주었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누구랄 것 없이 한 마음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정토회 김은숙 행정처장의 입학 환영 인사가 이어졌는데,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습니다. 김은숙 처장은 “이젠 정말 통일을 이룰 시간과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앞으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 거린다”며 감동받은 소감을 나눠주었습니다. nbsp nbsp nbsp “통일의병, 하자, 하자, 하자”라는 구호 선창에 따라 힘차게 외치며 사진기를 향해 함박웃음을 짓는 새내기 ‘의병’들의 모습을 보니, 그 어떤 장애와 곤란이 오더라도 희망하는 이가 있는 한 꿈은 꼭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병 정신으로 우리부터 똘똘 뭉치면, 통일을 앞당길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nbsp 강의 후 스님께서는 앞으로 5일동안 계속 진행되는 통일학교 강의를 위해 강의내용을 정리하시는 등 서울정토회관에서 업무를 보셨습니다. nbsp 내일은 아침 7시에 기획위회의, 통일학교 제2강, 청년리더십아카데미 입학식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2015.03.31. 22,609 읽음 댓글 13개

2015.3.29. 수도권 가을불교대 특강, 서울공동체 봄 나들이

nbsp nbsp nbsp 어제 청년학교 마치고 문경수련원에 도착하니 새벽 12시 40분경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잠시 휴식을 취하신 후 방에서 새벽예불을 드리고 5시에 간단히 아침공양을 한 후 새벽 6시부터 있을 2015년 가을불교대학 수도권지역 특강을 위해 대수련장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오늘 특강은 불대생들이 그동안 불교대학공부를 하면서 들었던 궁금한 것들을 스님께 물어보는 즉문즉설로 진행되었습니다. 불대생들이 미리 적어 낸 질문지를 보고 스님께서 답을 해주셨습니다. 스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던 학생들은 이른 새벽이지만 가르침을 받고자 똘망똘망한 눈으로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먼저 서두에 “요즘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 대중들과 함께 수련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예요. 수련장에서 불편을 느낄 때 불편에 빠지지 말고 습관성에서 오는 불편임을 알고 직접 경험을 통하여 습관을 바꾸면 매사가 좋아집니다.”는 말씀으로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함으로서 오는 불편함을 잘 살펴보도록 지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특강은 한학기 동안 공부하면서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시간이니 주로 불대에서 배운 것을 중심으로 질문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하다보니 전체 학습에 대한 질문보다는 근래에 배운 것에 대한 내용, 특히 근본불교사상에 대한 질문이 많아요. 그리고 새벽부터 수업을 하니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지금 좀 졸릴 때니 졸리는 사람은 앉아서 졸지 말고 자리에서 서서 들으세요. 한명 서고 두 명 서고, 열 명 서고, 오십 명이 서면 휴식시간을 드리겠습니다.”라고 가볍게 웃으시며 첫 질문을 읽으셨습니다. nbsp nbsp Q. “희망편지로 희망을 만나고 정토회를 만나 희망을 갖고 살고 있고 제 인생을 다르게 살게 해주신 은혜로 길게 수행·보시·봉사하며 정진하겠습니다. 제 질문은 중도가 무엇인지, 마음을 절제하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고 하면 기쁨,슬픔,분노를 돌이키고 알아차리면 된다면 중도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왜 꼭 중도의 삶을 사는 건지 헷갈립니다. ” nbsp 스님께서는 “수업 시간을 제대로 안 들은 거 같아요. 불교사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또, 들어도 들어도 이해가 어려운 것 중 첫째가 중도, 둘째가 무아, 셋째가 연기입니다. 이 3가지는 이치가 힘든 건 아니에요. 이치는 아주 간단해요. 들으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어요. 그런데도 이것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중도적으로 생활을 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이런 것들을 경험해본 바가 없어요. 늘 치우쳐서 생각하고 생활했기 때문에 이게 뭘 의미하는지 들을 때는 알겠는데, 지나고 나면 금방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즉, 쾌락도 아니고 고행도 아닌 제 3의 길이 중도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시고는 대중들이 중도를 익히 알 수 있도록 따라 해보라고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nbsp nbsp “한번 따라 해보세요. 뭐도 아니고? 뭐도 아니고? .”대중들은 스님의 말씀에 따라 신나게 따라 합니다. nbsp “제1의 길 쾌락, 제 2의 길 고행, 제 3의 길 중도, 이렇게 말합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줄을 매달아 놓고 줄타기하는 사람이 그 줄을 딛고 건너갑니다. 그러면 이치로 설명할 때 줄타기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왼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오른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똑바로 가면 돼요. 쉽죠? 그런데 자기가 직접 올라가서 해보면 될까요? 왼쪽으로 치우치든, 오른쪽으로 치우치든 떨어지겠죠. 그러면 ‘이거는 몇 번 해보니까 안 된다, 이건 불가능한 거야. 말도 안 돼.’라고 하는데 실제로 불가능한 것일까요? 내가 안 되는 거지 이치로는 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이치로는 가능한데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면 이 갭을 어떻게 맞추느냐? 연습을 많이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분이 또는 여러분들이 줄타기를 하면서 떨어지면 또 하고, 또 떨어지고, 이렇게 몇 번쯤 연습하면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최소 만 번 이상은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섯 번 해보고 난 안된다. 열 번 해보고 ‘아, 난 줄타기가 안 돼.’ 그러면 이사람은 재능이 없는 사람이에요? 욕심쟁이에요? 만 번 해야 되는 걸 다섯 번, 열 번 해서 안된다고 포기합니다. 좌절과 절망은 해봐도 안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욕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nbsp nbsp nbsp 그래서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합니다. 될 때까지 꾸준히 하는 걸 정진이라고 합니다. 되고 안 되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돼도 하고 안 돼도 하고. 그렇게 꾸준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침에 참회 기도할 때 절을 하고 싶어도, 절이 하기 싫어도, 절을 하면 다리가 아파도, 다리가 안 아파도, 꾸준히 하는 걸 정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중도는 이렇게 경험을 해야 합니다. nbsp 그러면 제 1의 길, 쾌락이란 건 뭘까요? 쾌락이란 건 철학적 용어이지 생활용어가 아닙니다. 술 먹고, 영화보고, 놀고 이런 걸 쾌락이라고 하는데 여기선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여러분은 뭔가 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욕구는 삶의 동력입니다. 그 욕구가 일어날 때 그 욕구를 채워주고 충족시키면 정신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것을 즐거움이라하고 그게 충족이 안 되고 뜻대로 안되면 기분이 나빠지는데 그것을 괴로움이라 합니다. 이걸 한문으로 ‘즐거움은 락, 괴로움은 고.’라고 합니다. nbsp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때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끝이 나나요? 오히려 욕구가 좀 더 커집니다. 그 다음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원히 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노력을 하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고와 락이 늘 이렇게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고락이 되풀이 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nbsp 사람이 죽어서 소 되고, 개 되고, 말 되고 하는 이것도 윤회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도의 전통 민간사상인 힌두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nbsp nbsp nbsp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고와 락이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고락이 똑같이 50, 50로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떨 때는 고가 70, 락이 30일 때도 있고, 락의 비중이 점점 많아져서 거의 100에 근접하면 락이 지극히 많다고 해서 극락이라고 합니다. 고가 점점 많아져서 고가 지극히 많아지면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가 많아져도 고만 100프로가 될까요? 거기에 락도 조금 있을까요? 아무리 락이 많아도 거기 락이 100프로가 될까요? 고도 조금 있을까요? 그래서 고락은 떨어질 수가 없이 돌고도는 것입니다. nbsp 우리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고는 없어지고 락만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락이 되풀이 되는 이 사슬, 쳇바퀴처럼 얽혀진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해탈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은 고락이 윤회하는 세계 안에서 고와 락을 분리시켜서 고는 없고, 락만 있으면 좋겠다는 이런 허황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복을 구하는 윤회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nbsp 욕구가 있으면 욕구가 충족이 돼야 즐거움이 생기니까 중생은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좀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 복을 구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복을 구하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하면 불교의 ㅂ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천당 가는 게 목표이고 이것이 불교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불교의 ㅂ자도 모르는 것입니다. nbsp 사람은 욕구가 일어나면 그 욕구를 충족시킴으로 해서 일어나는 기분 좋음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하는 것이 쾌락주의가 아니고 욕구를 충족시켜서 일어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라고 쾌락주의에 대해서 설명을 하신 후 불대생들이 알아듣기 쉽게 다시 예를 들어서 설명도 해주셨습니다. nbsp “예를 들어, ‘누가 나한테 100만원만 줬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100만원을 주면 기분이 좋아지죠. 그 다음달에도 주면 기분이 좋아지죠. 그런데 그 기분 좋음이 계속 늘어날까요? 똑같을까요? 줄어들까요? nbsp nbsp nbsp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하면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이 귀찮아지고, ‘그냥 통장으로 넣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통장으로 10년째 100만원이 들어오면 감각이 있을까요? 아무 감각이 없어집니다. 이 기분좋음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00만원 들어오고, 그 다음에 200만원 들어오고, 300만원, 500만원 점점 늘어나야 합니다. 마약과 똑같습니다. 기분 좋음을 유지하거나, 기분 좋음을 점점 높이려면, 마약 투여량을 늘여야 합니다. 나중에는 한달치 한꺼번에 맞아도 별로예요. 그래서 마약과 똑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먹는 것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배고플 때는 종류를 따지지 않고 배만 불렀으면 합니다. 그런데 충분히 먹을 게 주어지면 맛있는 것을 따지게 됩니다. 맛있는 것만 따지나요? 영양도 따지고, 어느 그릇에 담았는지도 따지게 됩니다. nbspnbsp 이처럼 욕구를 따라가서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치로 알아지나요? 대답이 신통찮네요. nbsp nbsp 욕구, 욕망이라는 것은 용납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아예 용납을 안 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도 씨를 말려야 합니다. 먹고 싶어도 안 먹고, 자고 싶어도 안 자고, 가고 싶어도 안 가고. 더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에 필요한 먹는 것까지 부처님께서는 안 먹었잖아요. 잠도 안 자고, 목욕도 안 하고 그래서 아무리 작은 어떤 욕구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철학적으로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nbsp 꼭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고 하는 것이 고행이 아니라 욕구를 참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고행주의이고, 욕구 따라가서 해결하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nbsp 부처님은 29살 출가하기 전까지 쾌락주의를 따랐습니다. 이건 기존의 길이었고, 세속의 길이었습니다. 출가 이후에는 이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으니까 고행주의자의 길, 잠도 들에서 자고, 콩 한알만을 먹기도 하고, 그렇게 6년을 했는데 해결이 안 되었어요. 그래서 뭐가 문제일까?’고민하며 자기 삶을 돌아봤더니 지금 이야기한 이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nbsp 출가하기 전에는 욕망을 쫓아갔고, 출가한 후에는 욕망을 억제했던 것입니다. 둘 다 심리가 편안한 상태가 안돼요. 욕망을 따르는 것은 욕망을 수용하는 것이고, 억제하는 것은 욕망을 반대하는 것 같지만 둘 다 욕망의 노예입니다. 욕망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욕망을 참는 것도 욕망의 노예인 것입니다. nbsp 여기서 제 3의 길은 욕망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욕구가 있는데 욕구에 대응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즉, 이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저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간다는 것입니다. 다만 욕구를 알아차릴 뿐입니다. 이처럼 중도는 욕구를 따르지 않고, 욕구를 알아차리고, 욕구를 지켜보는 것입니다.”라며 현실적인 문제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주시니 중도가 좀 더 명확하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nbsp nbsp nbsp 그 외에도 무아, 윤회에 대한 질문, 계급타파를 위해 부처님은 어떤 실천을 하셨는지, 통일의병 양성, 북한에 정토행자 만들기등의 계획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 부처님은 열반후에 극락에 계시는지 궁금해 하는 질문, 욕구와 집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달라는 분,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살행이 오히려 자본주의 더 강화시키는게 아닌지 궁금해 하는 질문, 내가 없다는 것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모순 되는 것은 아닌지,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연기법이 진리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치열한 경쟁사회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의 실체가 공하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하는 질문,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다겁생래 지은 업장이라는 말에는 나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해 하는 질문, 부처님의 신통력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 기독교의 유일신과 불교에서도 부처님만을 모시고 태어난 곳, 설법하신곳등을 순례하고 성도제일을 기념하는 것이 비슷한 것은 아닌지 궁금해 하는 천주교 신자분, 불교의 많은 부처와 보살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 중도에 대해 실제로 본인이 고민되는 질문을 하신 분등 다양한 질문들도 이어졌습니다. nbsp 약 3시간 30분동안 스님께서는 불대생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해주시고 두북으로 이동하셨습니다. nbsp nbsp 서울공동체 대중들 20여 명과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미리 약속을 해둔 터였습니다. 서울공동체 상주자들은 전날 두북수련원에서 자고, 오늘 아침엔 나물 캐기와 연등 울력을 하고, 또 일부는 저녁 식사 준비 등을 미리 해두었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거의 주말마다 경주에 오시는 일정이신데, 올해부터는 서울 공동체 성원들도 두북수련원에서 울력을 하거나 짬짬이 스님과 일정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다음 주에는 청년정토회 평지순례가 있고, 그 다음 주에는 불교대생들의 남산 순례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서울 공동체 대중들은 업무 때문에 참석이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4월 한 달 동안엔 가급적 주말마다 두북수련원에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업무 중심의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심신을 새롭게 하고, 활력을 키워보자는 스님의 제안이십니다. nbsp 그래서 오늘은 가볍게 아주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남산 산행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아무리 ‘가볍게’라고 하셨지만, 이미 정토회에서 수십 년 장판 때를 묻히고 살아온 노회한 공동체 식구들은 압니다. 그렇게 만만한 산행이 아니라는 것을요. 역시나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장장 4시간의 시간이 잡혀있습니다. 공동체 대중들은 각자 물병과 모자, 등산화 등을 단단히 챙기고 나섰습니다. nbsp nbsp nbsp 경주 남산 부처바위골로 올라 탑곡 마애여래상군을 참배하는 것으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바위에는 삼존불과 독립된 불상, 본존과 보살상, 7구의 비천상, 그리고 9층목탑과 7층 목탑이 남면, 동면, 북면 등에 멋지게 새겨있습니다. 마모되기도 해서 찾아보기 힘든 그림도 있지만, 그만큼의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어 그 앞에 서면 그저 경이롭기만 합니다. nbsp nbsp 어딜 가나 늘 스님께서 먼저 설명하곤 하시는데, 갑자기 묘덕법사님더러 설명해보라 하십니다. 다다음주에 있을 불대생 남산순례에서 이곳은 묘덕법사님이 담당하게 되는 코스라고 합니다. 묘덕법사님이 약간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기억을 되살려 열심히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공동체 대중들은 “법사님, 설명이 너무 짧아요. 좀 더 길게요. ”, “법사님 공부하시라고 일부러 스님이 여기로 오자고 하셨나 봐요” 등 그저 법사님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봅니다. nbsp 부처바위의 부처님들께 참배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아픈 환자들도 몇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오늘 죽기 살기로 한 번 가보자”며 격려하신 터여서 나름 각오를 다지는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가장 팔팔해야 할 스물 두 살 풋풋한 대학생 친구가 어쩐지 비틀비틀합니다. 스님의 ‘가벼운’ 산책을 곧이곧대로 듣고, 운동화를 신고 온지라 아직 낙엽이 쌓여있는 길이 미끄럽기도 합니다. 나이든 실무자들은 “다음부터는 아무리 스님께서 가볍게 산책하자고 하셔도 중장비를 갖추고 떠나야 한다”며 실실 웃으며 한 마디씩 던집니다. 중장비라고 해봤자 바닥이 덜 미끄러운 등산화를 이르는 말이지만요. nbsp 그런데 실제로 예전에 비하면 정말 가벼운 산행이었습니다. 오르막길을 최소화하고, 아주 평평한 길을 택하셨습니다. 중간 중간 자주 쉬기도 하셨습니다. nbsp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산에 다닐 수 있을까? 최장으로 잡아도 한 십년쯤 될까? 아니면 5년 정도가 최대로 잡은 것이지 않을까?” nbsp nbsp 누구도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집니다. 우리 스님은 안 늙으시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게나 좋아하시는 산행인데 못할 때를 꼽아보신다니, 이제 스님도 세월의 흐름을 의식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스님과 함께 산행을 못할 때가 언젠가 오긴 하겠지만, 오늘은 그저 봄날의 축복을 만끽해봅니다.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연분홍, 진분홍 진달래가 산허리 둘레둘레 어디나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눈이 즐거웠습니다. 키 큰 진달래나무들이 넝쿨을 이뤄 꽃 동굴을 만들어놓은 곳도 많았습니다. 아직 꽃봉오리가 활짝 피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34일이면 온천지 사방에 꽃 동굴들이 만들어져 장관을 이룰 것 같습니다. nbsp 스님 뒤를 종종 따라가면서 여쭤보았습니다. “스님, 스님께서도 여기 남산에서 못 가본 곳이 있으신가요?” nbsp 안 가본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답변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딱 한 군데 못 가봤다고 하십니다. 아시겠지만 경주 남산에는 약 40여 개의 골짜기가 있지요. 122개의 절터와 57개의 석불, 64개의 석탑 등 불교 유적지가 곳곳에 있고, 수많은 산길이 있어 답사코스만 70여개에 달한다고 하지요. nbsp “비파골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는 유적지가 별로 없어서 지금껏 가보지를 못했어. 전설은 있지. 무슨 전설이냐면, 옛날 신라시대에 어느 왕이 무슨 낙성식에 참석을 했는데 아주 행색이 남루한 스님이 찾아왔다는 거야. 사람들이 문전박대를 했겠지. 스님이 그래도 왕께 참석하게 해달라고 청하니까 왕이 뭐 허락을 하기는 했는데 ‘어디 가서 왕이 함께 한 불사에 참석했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대. 그러니까 그 스님이 왕한테 ‘왕께서도 어디 가서 진신석가를 친견했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하고는 구름 위로 사라져버렸다는 거야. 왕이 부랴부랴 그 스님을 따라가 보라고 시켰는데, 신하들이 거기 비파골까지 가보니까 스님은 온데간데없고 발우가 떡 하니 있더라는 거야. 그래서 부처님이 없다고 해서 불무사라고 이름을 짓고 부처님께 공양을 했다는 전설이 있어. 그런데 거기를 내가 못 가봤어.” nbsp nbsp 아마 머지않아 그곳에도 가볼 날이 있으시겠지요. 봉화대를 지나 칠불암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바위에서 숨고르기를 한 뒤 하산 길을 잡았습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새갓골 석불좌상이 있는 곳으로 왔는데, 사실 스님께서 보여주고 싶어 하신 부처님은 석불좌상이 아니라, 그 옆에 보호막이 쳐있는 마애불입상이었습니다. 입상이었다는데 무슨 연유인지 부처님 얼굴이 땅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엎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옆모습이 정말 예술입니다. 눈과 코, 얼굴 옆선이 마치 그리스 조각상처럼 아주 뚜렷하고 부드러우며 우아합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되면 아름다운 부처님을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nbsp 그런데 워낙 무너진 바위의 크기가 거대해서 복구 작업이 만만치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는데, 내려오는 길이 또 진달래꽃들로 장관입니다. “여기는 남 남산이라고 해. 남산의 남쪽이라는 말인데, 그러니까 봐라, 진달래꽃들이 여기는 더 활짝 폈잖으냐. 저기도 봐라. 저 진달래꽃은 나무가 아주 훌륭하네. 저쪽 옆에도 봐라. 저 멀리도 봐라. 다 진달래꽃들이잖으냐.” 스님께서는 여기, 저기 사방팔방 손으로 진달래꽃을 가리키시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십니다. nbsp 차량 운전자들은 산행 중간에 내려가 차를 미리 하산 지점에 대기해놓고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얼른 올라갔다 와봐라. 조금만 올라가면 진달래꽃들이 아주 멋지다”며 꽃구경을 하라고 권유하십니다. 몸은 어느덧 노곤해졌지만, 스님 뒤를 열심히 따라나선 덕분에 진달래 삼매경에 푹 빠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남산에서 스승님과 또 한 편의 소중한 추억을 쌓았습니다. 스님 덕분에 서울 공동체 대중들도 진달래꽃을 사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nbsp nbsp 남산을 내려와서는 다함께 목욕을 하고 두북수련원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스님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각자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논의할 것을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nbsp 먼저 문화사업부부터 이번에 나오게 될 스님 책과 관련해서 책제목부터 언제쯤 어떤형식으로 나올 것인지에 대해 의논하기도 하였고, 평화재단 교육원과는 다음에 있을 평화리더십 경주역사기행과 관련하여 숙소등을 답사한 것을 가지고 어떤 숙소로 할 것인지등에 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nbsp 또, 4월 마지막주에 한국을 방문할 필리핀 송코 마을 사람들의 한국일정과 숙소, 차량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부서들이 스님과 함께 고민되는 것들을 논의하였습니다. nbsp 오늘 모임은 다들 산행후 피곤할 것을 감안해서 9시 30분경에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 11시 30분에 평화재단에서 모임이 있으셔서 아침 7시에 모두 함께 출발하자고 하시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2015.03.30. 21,211 읽음 댓글 12개

2015.3.28 제12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강의, 청년학교 행복특강

nbsp 스님께서는 오늘 오전 9시부터 예정된 12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의 강연을 위해 입학 워크숍이 진행되고 있는 용인의 대웅경영개발원으로 울산 두북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하셨습니다. 이틀 전 목요일에 입학식을 마친 12기 평리아 수강생들은 잠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1박 2일 워크숍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하룻밤을 함께 보내서인지 서로 친해져서 다음 날 아침, 모두 환한 표정으로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nbsp nbsp nbsp 진정 성공한 삶을 꿈꾼다는 주제로 가볍고 유쾌하게 시작된 강의는 2시간 동안 이어졌지만, 전날 새벽까지의 늦은 일정에 피곤할법한데 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이 경청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따라 웃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필기를 하면서 서로 공감이 이뤄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nbsp “우리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라는 것이 뭘까요? 어떤 상태를 행복하다고 볼까요?”라는 질문과 함께 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잘 살피면 어떻게 심리가 작용하는지 알아야 자신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기분이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음이 일어날 때를 살펴보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면 기분이 좋아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우리의 기분은 욕구의 충족과 불충족이라는 것에 따라 좋고 나쁘게 반응하고, 이렇게 좋고 나쁨을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괴로움과 즐거움 이 둘을 분리시켜 즐거움만이 있는 인생을 꿈꿉니다. 그러나 고락이 함께 윤회하기 때문에, 고락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려면 ‘락’이 곧 ‘고’임을 알아야 합니다. nbsp nbsp nbsp 인생은 ‘고락’인데, ‘락’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입니다. ‘락’이 곧 ‘고’임을 꿰뚫어 알아야합니다. nbsp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늘 재미를 쫓아 살고 있습니다. 그 재미란 것도 지나고 보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즉 재미를 쫓아서 하다보면 지금은 ‘락’인데, 나중에 ‘고’가 되는 일이 있는 반면에, 일할 때는 힘들었지만 지나놓고 보면 보람으로 다가오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좋게 평가되는 것이 나중에 달리 나쁘게 평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nbsp 예를 들어 저는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구슬치기를 했습니다. 구슬치기를 해서 딴 구슬을 모아서 집에 항아리에 보물처럼 가득 채워놓았는데, 지금은 그 구슬들이 어디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구슬은 그때는 소중했는데 지금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어렸을 때 구슬 같은 것이 뭘까요? 이처럼 지나놓고 보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nbsp nbsp nbsp 여러분들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던 것들이 10년, 20년이 지나서 돌아보면 오히려 실패임을 느낄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20대 초반에 고시에 합격해서 성공일로를 달리던 검사가 8·15 해방되던 날 갑자기 친일매국노로 실패한 인생이 되어 버린 사례를 보면, 이 사람의 삶은 윤리, 법률, 신앙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개인의 삶과 시대적 과제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 됐습니다. 이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일원으로써 국민 전체가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과제가 무엇인지 시대적 과제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nbsp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 앞으로 12주 동안 전문가들의 강의 내용도 듣고, 각기 다른 전문 분야를 가진 30여명이 서로 토론을 하면서 어떤 것이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과제인지 알아보고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함께 일을 해 나가야 하는지 알아보시기 바랍니다.”라는 당부의 말씀을 끝으로 강연을 마무리하셨습니다. nbsp nbsp nbsp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서서 지친 기색도 없이 물 흐르는 듯 한 강연을 마치시고 질의응답에 답변을 해주시고 수강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마친 후에 떠나셨습니다. nbsp 다음 일정은 경기도 여주에서 열리는 평화재단 청년포럼 주최 ‘새로운 백년 청년학교5기 첫걸음 워크숍’ 이었는데, 스님께서는 청년들을 위한 행복특강을 해주기로 하셨습니다. 일정이 저녁 7시 30분부터 시작하는 관계로, 스님께서는 중간에 비는 시간을 이용해서 양지IC 근방, 백암 지역 쪽에 수련원 부지를 둘러보셨습니다. 그리고 청주에도 조그마한 부지가 있어서 둘러보시고 난 후 여주 행사장으로 이동하셨습니다. nbsp nbsp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스님께서는 담당자인 평화재단 청년포럼 오태양 국장과 청년학교 교장인 최광수 교수님을 만나 잠시 이번 행사에 대해 말씀을 나눈 뒤 시간이 될 때까지 원고 교정을 보셨습니다. ‘새로운 백년 청년학교’는 전국의 2030대 청년들이 8주 동안 스님의 책을 읽으면서 인생관과 사회관, 시대관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배우는 과정입니다. 이날은 특별히 새벽 일찍부터 전국 38개 지역에서 속속 모여들어 총 366명이나 참석했습니다. nbsp nbsp nbsp 스님께서 강연장에 들어서시자, 청년들이 일제히 뜨거운 환호를 보냈습니다. 스님께서는 단상에 오르신 뒤 “저녁은 잘 먹었느냐?”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얼마 전 필리핀, 라오스, 인도 등을 다녀오셨는데, 남방불교에서 스님들은 오후 불식을 한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오후에 식사를 안 하고 계시는데, “내가 안 먹었으니 여러분도 안 먹어야 되는 거 아니냐?”며 가볍게 농담을 하시면서 “듣자하니 오늘 오기로 한 청년들 중에 새벽에 못 일어나서 30명이 못 왔다고 하는데, 초등학생들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새벽부터 먼 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라며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풀어주셨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개인의 고민을 많은 대중들 앞에서 얘기하라고 하면 부담을 느끼니, 그 전에 스님 근황부터 얘기해주겠노라며 말문을 터주셨습니다. 최근 인도에 다녀온 말씀을 해주셨는데, 사실 이번에 스님께서 둥게스와리 지역 15개 불가촉천민마을 1430집을 한 집, 한 집 다 방문하면서 마을의 앞으로의 발전계획을 세웠다고 이야기 해주셨습니다.nbsp각 마을을 방문하실때 nbsp청년 자원봉사자 몇몇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하셨답니다. 40년 넘게 자전거를 안 타보시다가 이번에 장장 80km를 주파하셨는데, 그 뒤 며칠 동안 골반이 아파서 몹시 힘들더라는 말씀도 재밌게 해주셨습니다. nbsp nbsp nbsp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앞을 보고 해야 해요. 지금 당장 요청되는 일이라도 10년, 20년이 지나면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또 지금은 별로 현실성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10년, 20년 지나면 아주 중요해지는 게 있고요. 그러니 미래까지 고려해야, 실패할 확률이 적어집니다. 그러려면 첫째 방향을 잘 잡아야 하고, 두 번째 헌신적으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원래 미래를 바라보고 하는 일은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시행착오도 많고요. 그러니 시작할 때 각오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요새 여러분들을 보면 제가 느끼기에 안전한 것에 보다 집중하는 것 같아요. 공무원이나 교사, 관청 직원, 아니면 대기업 등에 몰리지 않습니까? 안전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렇게 안하려고 해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젊음이란 뭔가요? 도전성 아닙니까? 필리핀이나 이런 데 가서 한 3년 일한다면, 해마다 2,500만원 정도 연봉을 받는다고 치면 한 67천 만원 정도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현장 경험을 쌓는 측면에서는 손해가 아닐 수도 있어요. 오히려 자기 삶의 큰 자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청년들의 도전성을 격려하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 nbsp 질문이 시작되자 많은 청년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10년 된 친구들이 있는데 작년에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그렇고, 최근 집수리할 때도 자기를 외면하는 바람에 친구들이 너무 미워져서 절교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 친한 동생이 사고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돼서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질문, 자신이 바보 같은 부분이 많고 후회를 되풀이하는 데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지 알려달라는 질문,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소비욕구가 심한 것 같아 고민이라는 질문, 남자친구가 있는데 다른 남자가 더 좋아진다는 질문, 아버지의 암 선고와 이모의 죽음에 이어 언니까지 암에 걸려 집안에 우환이 계속되자 점집이며 철학관에 다녔는데 모두들 조상님께 천도재를 지내라고 해서 고민이라는 질문, 군대까지 기다리며 3년 사귄 남자 친구랑 헤어져서 힘들다는 질문, 가정사가 힘든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있는데 조언에 한계를 느껴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질문, 사람을 인상 보고 판단하고 싶지 않은데 인상을 보고 판단해서 고민이라는 질문, 어떻게 스님처럼 현명해질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등 아주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nbsp 이 중에서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4년제 대졸 출신이 아니면 승진 기회를 주지 않아 고민이라는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nbsp nbsp nbsp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4년제 대졸 출신이 아닌 사원은 승진이라든지 상위 직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의 별따기 수준인데 막상 그만두려고 하니 우리나라 경제 상황 상 다른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제 스펙에서도 힘듭니다. 첫 번째는 이런 직장을 단ㅕ야 하는지를 고민 하는 게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두 번째는 이런 걸 감안하고 계속 회사에 다닐 거라면 어떤 마음으로 다녀야 되는지 궁금합니다.” nbsp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선, 질문자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걸 고민해서 뭐해요. 다른 직장을 가질 기회가 있다고 하면 미래를 생각해서 옮겨야 할까, 현실을 생각해서 그냥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할 수가 있지만, 지금 질문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 아닙니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승진의 기회가 없는 구조라면, 승진할 생각을 안 하면 됩니다. 농땡이 치라는 소리가 아니고, 승진 같은 것에 고민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자기는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nbsp 그런데 이런 문제이면 다릅니다. 사회가 헌법에 어긋나는 규정을 갖고 있다면 노동청이나 법원에 이런 규정이 합당하지 않다고 제안해서 변화를 시킬 수는 있습니다. 이때도 자신은 회사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안 그러면 자기 기분이 나빠서 먼저 떨어져 나가버려요. 이 회사가 승진을 안 시켜주지만, 그래도 나를 고용해주니 정말 고맙다, 이런 마음을 내야 합니다. ‘사장님, 그러나 이 문제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가 지켜야 할 헌법에 어긋나네요. 개선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해보세요. 그렇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nbsp nbsp 우리 사회는 경쟁사회입니다. 경쟁사회는 경쟁이 공정해야 합니다. 경쟁이 공정하다는 것은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출발선상에서 기회가 균등한가. 둘째, 경쟁 과정에서 적용되는 규칙이 공정한가. 즉 집행이 공정한가. 셋째, 결과가 공평한가. 그런데 어떻습니까? 첫째, 둘째도 어렵지만 셋째는 더 어렵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승자독식이라서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지난 20여년간 신자유주의 열풍이 불었잖아요.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다 갖고, 진 사람은 못 갖습니다. 결과에서도 공정하려면 어떻습니까? 이긴 사람이 많이 갖고, 진 사람이 적게 갖는다고 해도, 적절한 비율로 나눠야 합니다. nbsp 예를 들어, 우리가 예전에 가난하고 못 살 때는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10명이 100m 달리기하면 상으로 줄 공책이 6권밖에 없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1등에게 3권, 2등에게 2권, 3등에게 1권 이런 식으로, 1, 2, 3등에게 6권을 몰아줍니다. 나머지 7명은 아무 것도 못 받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경제가 좋아져서 상품이 많아져서 공책이 16권이나 된다고 합시다. 그럼 예전 방식대로 하면 1등에게 10권 주고 2등 4권, 3등 2권 이런 식으로 3명에게 다 몰아주겠지요? 그런데 참가자 전원에게 1권씩 주고, 또 경쟁은 경쟁이니까 나머지 6권에 대해서 1등에게 3권 주고, 2등에게 2권 주고, 3등에게 1권 준다고 하면 어때요? 우승한 사람이 많이 가져가지만, 동시에 진 사람들도 일정 비율 배분받을 수 있는 안전망이 구축되는 거죠. 이게 공평한 분배라는 겁니다. 공평하다는 건 똑같은 분배를 한다는 말이 아니고요. nbsp nbsp 대한민국은 그렇다면 공정사회냐? 대한민국은 공정한 사회가 아닙니다. 과거와 동일한 분배방식을 주장하잖아요. 아까도 말했듯이 출발선상에서의 균등한 기회, 과정에서의 공정성,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공평한 분배가 공정사회인데, 우리 사회는 모든 면에서 매우 부족합니다. 그래서 사회 불만이 생깁니다. 지금 질문자가 불공평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겁니다. 그런데 이런 관습이나 체제는 혼자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남녀차별, 학벌 차별, 지역 차별 등 이런 건 모두 헌법정신에 어긋나지만, 관습이 아주 강고하게 남아있으니까요. 그러니 경쟁 사회 속에서도 모든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런 사회를 바로 복지사회라고 하는 겁니다. nbsp 즉 안전망을 구축해야 하는 건데, 경쟁 자체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 그리고 장애인, 환자, 재난을 당했거나 실업을 했거나 등등 이런 사람들은 경쟁 자체에 포함시키면 안 됩니다. 둘째, 자유경쟁을 하더라도 조세정책이 바르게 집행돼야 합니다. 즉 바른 조세정책과 재정정책에서 바른 복지정책이 나옵니다. 마치 복지정책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뭐를 자꾸 나눠주는 거라고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예전처럼 최저빈곤선에서는 벗어났지만, 현재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 불공정이 극심해지면서, 상대적 빈곤감이 깊어졌습니다. 자기가 불공정함을 느끼는 것도 이런 이유 아니겠어요? nbsp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거냐 이럴 때는 ‘고용해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이래야 하지만, 불공정성에 눈감아서는 안 됩니다. 불공정한 것을 빤히 보고도 눈감는 건 오히려 사회 발전의 장애 요소입니다. 자기 마음은 편안히 하더라도, 불공정은 시정하려고 해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들이 민주사회에서 불공정을 시정할 수 있는 수단 바로 투표입니다. 모든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주권 행사를 안 하기 때문에 이 불공정이 시정되기 어려운 겁니다. nbsp 사회에 불만이 있거나 불공정을 느끼는 세력일수록 투표를 거의 안합니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에 차선도 아니면 차악이라도 투표를 해야 하는데, 이도 저도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아예 투표를 안 하죠. 우리에게 선택지가 최악과 차악밖에 없다고 하면, 우리는 그래도 차악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투표를 아예 안하니까 결과적으로 최악을 늘 온전 시킵니다. 우리에게는 불공정을 개선해나가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nbsp 그런데 합법적인 절차로 파업을 하더라도 악을 쓰고 분노를 표현 하면 오래 못합니다. 하다가 관두게 되고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는 게 오래 갈까요? 악을 쓰면서 하는 게 오래 갈까요? 그러니까 개선이 필요하면, 그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래하지 못합니다. nbsp nbsp 질문자도 문제를 개선하려면 그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합니다. 상사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못 견뎌서 자기가 고치도록 말이죠. 수행과 사회 변화는 상반되는게 아닙니다. 개인이 행복한 것과 사회를 좋게 만드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동시에 할 수 있는 겁니다. 국가를 부정하지 않고 헌법의 틀 안에서도 할 수 있고, 헌법이 잘 못 됐다면 그것마저 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저 누가 해주기를 바랍니다. 기성세대가 뭣 때문에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기득권이 나쁘다고 비판하면서, 그 사람들이 알아서 바꿔주기를 바랍니다. 알아서 바꿔주면 그 사람들이 천사잖아요. 그러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개선을 하려면 여러분부터가 노력을 해야 하고 희생을 해야 합니다. 나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되, 불공정한 것들은 시정해나가려고 해야 하는 겁니다.” nbsp 개인의 고민에서 비롯된 질문이었지만, 스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떤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nbsp 이 질문 외에도 청년들의 다양하고 유쾌한 질문과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행복특강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nbsp 질문 중간에 한 청년이 “스님 저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너 잘하고 있어’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못 해줘”라고 말씀해줘서 강연장에 큰 웃음이 터졌습니다. 스님께서는 “스님은 위로해주는 사람은 아니라 다만 진실을 말할 뿐입니다. 남을 비난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위로해주는 사람도 아니에요. 그런 말은 옆에 있는 남학생한테 해달라고 해요”라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nbsp 마지막으로 스님께서 정리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도 이틀을 살아도 연애를 하든 헤어지든, 헤어져 우는 가운데 행복해야 합니다. ‘헤어지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슬퍼도 슬픔에 깊이 빠지지 않습니다. 둘째, 스무 살이 넘었으면 자립을 해야 합니다. 자립하는 것이 꼭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집에서 먹고 살면 밥값을 해야 해요. 엄마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해드리고, 파출부로 생각해서 50만원어치는 내가 해야 하는 겁니다. 어린애처럼 굴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nbsp nbsp 그리고 이 사회의 민주화가 더 심화될 수 있도록, 좀 더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평화통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심화된 나라에서 투표 의무제가 있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호주같은 경우는 투표율이 90 가까이 나옵니다. 투표는 국민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는 겁니다. 만약 투표를 안한다고 하면, 주권을 가졌다고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의식이 좀 약한 것 같아요. nbsp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느끼면 시정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은 행복하도록 하되, 사회의 불공정은 시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의 불공정을 시정하면 어때요? 개인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좋은 조건이 되기도 하죠. 기성세대처럼 그저 니가 문제야 이렇게 얘기하지 말고, 투표를 통해서 개선해가도록 해보세요. 여러분들이 힘을 합해야 하는 겁니다. 할아버지 세대와 아버지 세대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투신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투신해야 할까? 공공의 정의를 위해 한번쯤 노력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통일이야말로 우리시대의 큰 과제가 아니겠습니까? 이건 할아버지도 못했고, 아버지도 못했잖아요. 이 통일조국을 건설하겠다는 큰 비전을 갖고 노력하면,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큰 자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개인의 꿈도 필요하지만, 우리 모두의 꿈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삶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기쁩니다. 좋은 질문을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nbsp 스님의 마지막 정리 말씀에서 청년들이 세상을 바꾸는데 큰 용기를 주고자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nbsp nbsp nbsp 강의가 끝나고 참가자가 많은 관계로 앉아서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떠나시는데 스님이 들어오셨을 때보다 더 큰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스님이 나가는 길목마다 많은 청년들이 나와서 악수를 청하면서 스님께 “스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를 외쳤습니다. 뜨거운 환호성 속에 청년들의 고민들도 날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결국 밤 11시가 넘어서야 강의장을 나설 수 있으셨습니다. nbsp 질문을 했던 참가자들은 “답은 내 안에 있었는데 스스로 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청년학교에서 방황해도 괜찮아 세미나를 하고 와서 오늘 스님 말씀이 더 크게 와 닿았습니다.”, “개인의 고민에 대한 조언에서 우리 사회를 보는 시각까지 넓혀 깊이 있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는 소감을 전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nbsp 스님께서는 내일 새벽 6시부터 가을 불교대 특강이 있어서 바로 문경수련원으로 이동하셨습니다. nbsp

2015.03.29. 20,364 읽음 댓글 12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