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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13. 동북아 역사 대장정 나흘째 날 - 압록강, 장백 영광탑, 백두산 남편
넷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집안에서 압록강을 따라 백두산 남편을 거쳐 서편으로 가는 일정입니다. 전날의 고된 일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백두산에 가까워진다는 설렘과 기대에 스님과 함께 121명의 청년들은 가볍게 버스에 올랐습니다.버스는 집안에서 통화와 백산을 거쳐 림강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쪽으로 향했습니다.통화로 가는 길에 관마산성과 고구려 장군총을 쌓는데 사용한 돌을 가져온 채석장을 지나갔습니다. 지나가는 곳마다 우리 선조들의 혼이 머물러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 벅찬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자욱하게 낀 안개가 걷히고 해가 떴습니다. 맑고 신나는 날씨처럼 내일 백두산에 오른다는 신나는 마음으로 버스에서 다 함께 ‘백두산’을 불렀습니다. ‘백두산’ 노래의 힘찬 기상이 노래 가사처럼 겨레의 숨소리로 동북아 대장정에 힘을 실어 줍니다. nbsp긴 이동시간을 버스에서 보내는 청년들을 위해 스님께서 즉문즉설을 해주셨습니다. ‘욕망과 욕구를 어떻게 구분하는가’라는 청년의 질문에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는 선악이 없지만 그 욕구를 넘어선 탐욕은 제어를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욕구로 옛날과 요즘 결혼 문화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버스가 림강에 이르러 압록강을 만났습니다. 구불구불하고 물빛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압록강으로 불리우며, 현재는 우리나라와 중국간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입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계곡의 물을 림강부터 시작해서 24개로 구분하여 1도구부터 24도구라 이름 붙였고, 버스가 지나갈 때 마다 각 도구의 위치와 함께 압록강 건너 보이는 북한의 모습과 자연경관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장백이 있는 19도구까지 굽이굽이 이루어진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였습니다. 강 건너 북한 동포들과 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낯익으면서 어색한 광경에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 하나 지나면 북한이라는 생각에 지난 긴 세월 가보지 못했던 지리적, 심리적 거리감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nbsp강 건너 북한의 산천은 버스가 달리는 중국에 비교해 황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원래 북한은 공업이 발달한 반면에 농업으로 자급자족이 어려운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는데, 8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침체와 중단된 무역 거래로 경제가 몰락하면서 식량부족이 시작됐고 결국 90년대에 들어서서는 대량 아사가 발생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협동 농장 이외의 개인 수확을 위해 뙈기밭을 만들려고 많은 산들이 개간되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90년대 북한의 대량 아사 때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하신 스님께서 그 당시 어려운 북한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스님께서 20년간 같은 길을 다녀보니 외적인 변화도 있지만 사실상 주민의 식량난은 10년간 변하지 않고 그 고통이 같다고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줌의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피눈물 날 정도의 고생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맑은 날 압록강에 나와 빨래와 목욕을 하는 북한 주민들과 물놀이를 하러 나온 아이들, 나무를 태워 움직이는 낯선 목탄차를 보며 장백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평화로운 모습에 우리가 휴전중인 상태라는 사실이 새삼 어색해 집니다.nbspnbspnbspnbspnbsp장백에 이르니 한글로 표시된 간판이 자주 보입니다. 스님께서는 장백에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여 조선족 자치현이 되었으나, 최근에는 조선족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족 양로원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는데 아직 보식 중이신 스님께서는 계속해서 된장국과 두부만으로 식사를 하셔서 한편으론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영광탑을 보러 이동하였습니다. 영광탑은 신령스럽고 빛나는 탑을 의미하며 유일하게 남아있는 발해의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영광탑에 다다르니 압록강과 북한의 혜산시를 굽어보는 광경이 장관이었습니다.nbsp영광탑은 무덤 위에 세워진 탑으로 남동쪽으로 약간 기울었지만 완전하게 남아있는 모습이 그 이름처럼 신령스러워 당시 웅장한 발해 문화의 모습이 상상되었습니다. 고구려 무덤양식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발해만이 갖는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어 국보급 유물이지만 남한에는 80년대 이후 늦게 알려져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발해의 후손으로서 탑 앞에서 참가자들이 함께 예불을 드렸습니다. 스님께서는 예불 중 굶주린 북한 주민들을 위해 기도하셨는데, 그 마음이 모아져서인지 탑 끝에 풍경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번 동북아 대장정에 참가한 청년들과 스님의 마음이 풍경소리가 되어 강 건너 북한 동포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광탑 옆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는데 이곳 주인이 불자라서 매년 스님이 영광탑을 방문하실 때면 친절하게 잘 대해주고 지난 번에는 선물까지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스님께서 중국어판으로 나온 스님의 주례사 등의 책을 선물하시니 매우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3가지로 서편과 남편, 북편이 있는데 서편으로 가는 길은 송강하에서 출발하고 북편은 이도백하, 남편은 장백에서 시작합니다. 백두산의 남편 산문은 산사태로 폐쇄된 상태라 잠깐 들러 단체 사진을 찍고, 오전에 스님이 직접 밭에서 사오신 수박을 나눠 먹고 난 뒤 서편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북한사회와 북한 주민에 대한 스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먼저 오늘의 일정 정리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백두산 남편에서 서편으로 오는 길에 만강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백두산에서 급하게 내려오는 물이 이 곳에서는 천천히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많은 난민들이 이 만강검문소에서 많이 붙잡혀 피의 만강이라 불리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내일 일정인 백두산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백두산과 천지의 장엄한 크기와 형성과정은 청년들의 기대감을 더욱 더 증폭시켜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오늘 주제에 따라 분단시기와 그 후 북한의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해방이 되었을 때, 연합국 핵심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습니다. 그 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을 해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하게 됩니다. 남한은 미국 유학생 출신인 이승만을 내세워 정부수립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뽑다보니 일제시대 때 일했던 사람들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한정부 수립은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국민의 지지가 매우 약했습니다. 그에 반해 북한은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정부를 수립하고 친일파를 제거하여 국민의 지지를 많이 받게 됩니다. 남북이 따로 단독정부로 가는 것에 대해 김구, 조만식 등이 반대해 남북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은 단독정부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북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할 당시의 기반은 월북자들이 많을 정도로 남한보다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북한의 경제가 쇠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88년도에 서울 올림픽의 성공 개최로 북한은 1989년에 세계청소년축전에 과도하게 재정을 투자하게 됩니다. 북한의 경제는 점차 피폐해지고 특히 에너지 공급이 중단되니 공장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비료가 생산이 안 되니 농사 또한 잘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경제 봉쇄정책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95년 98년 대량 아사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nbsp 스님께서는 그 당시 연길에서 만난 한 탈북자와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분은 북한의 노동당원으로 스님을 뵙자마자 “항복합니다”라며 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부모님이 아사로 돌아가셨을 때 노동당원으로서의 회의가 들었지만 충성심으로 버텼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식이 아사하자 충격을 받고 큰 회의가 들어 결국 자신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탈북자들이 탈북을 결심하기까지 마음의 장벽을 극복하는 게 가장 어려웠겠구나’ 하고 느끼셨다고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이러한 탈북난민들을 돕는 일을 하다보면 북한의 간부들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민족을 배신한 인간들을 왜 돕습니까?” 며 탈북자들을 민족 배신자 취급을 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스님의 말씀입니다.nbspnbspnbspnbspnbsp“탈북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탈북을 하면 경제적 난민이지만, 북한으로 붙잡혀 돌아가면 민족 배신자로 처벌을 받게 되니 정치적 난민이 됩니다. 이러한 문제로 유엔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어요. 그 때는 눈에 뵈는 게 없었어요. 울고 다녔으니까. 백두산 눈 속에 아이들이 떠돌고 강에서 시체가 떠다니는 것을 보니 눈에 뵈는 게 있었겠어요? 인간의 생존 앞에서는 종교, 사상 모두 다 허물어집니다. 사람이 굶어죽는 데에 이유는 없습니다. ‘국가’로서의 북한은 자주권을 인정해줘야 하고, ‘정부’로서의 북한은 확실히 독재정권으로서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주민’으로서의 북한은 지원받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로서의 북한을 확실히 구별해주어야 합니다.”nbsp북한의 핵 문제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북한은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그 권리를 유보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시민의 입장으로 보면 핵개발은 좋지가 않습니다. 미래문명에서의 대량학살 무기는 폐기를 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북한은 돌파구를 못 찾고 있습니다. 안보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개방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정은 정부가 붕괴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붕괴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과 안보적 결합을 하고 개혁개방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은 더욱 어렵게 됩니다. 현재 자주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자주적 입장으로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nbspnbspnbspnbspnbsp또한 스님께서는 새로운 문명의 인도주의는 사상, 국가, 종교 등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정부가 잘못했는데 주민이 고통이 받는 것은 인과관계에 맞지 않습니다. 주민들을 위해서는 생존을 위한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21세기 새로운 문명 인도주의는 사상, 국가, 종교 등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상을 넘어서서 인도적으로 생존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의 인권침해는 정말 지나칩니다. 인권개선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만, 정치적인 접근은 조심스럽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요즘 젊은이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하다며 아쉬워 하셨습니다. 현실을 보면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문제이며 살아있는 사람의 인권, 행복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청년들이 북한 문제와 통일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더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무리 말씀으로 강연을 마치셨습니다. 백두산의 기상을 닮으라는 스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 하루 일정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서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이른 새벽 3시 40분에 북편으로 이동해 백두산을 오를 예정입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김은지님이, 강의 속기는 김하정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2014.8.12. 동북아 역사 대장정 사흘째 날 - 국동대혈, 광개토대왕릉, 비, 장군총, 환도산성, 국내성
65279오늘은 청년대학생 동북아 역사 대장정 3일째 날입니다. nbsp6527965279nbsp65279새벽 4시에 기상, 4시 반에 출발하여 버스 안에서 스님께서는 오늘의 일정에 대해 설명해 주셨고, 청년들은 압록강을 바라보고 저 멀리 강 건너 보이는 북한 아이들과 주민들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첫 목적지는 국동대혈로 고구려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었습니다. 국동대혈로 올라가는 산길에서 길 옆에 난 앵두, 쑥, 칡꽃, 다래, 장뇌삼 등에 대해 재미나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청년들은 가는 곳마다 걸음을 멈추고 식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새삼 자연 곳곳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요즘 청년들이 소소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며,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세심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가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국동대혈 밑에 위치한 관음굴 앞에서, 모두 함께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스님께서는 참가자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셨습니다. 유리왕의 황조가 전설이 서린 사랑바위를 구경하고 새로 만들어진 전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북녘 땅의 드높은 산과 압록강이 보였습니다. 드디어 뜨거운 태양 빛이nbspnbsp동굴 속으로 비추는 환상적인 곳, 국동대혈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천 삼백여년 만에 찾아온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참배를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민족은 하늘의 자손으로서 앞으로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이곳에 왔으며, 우리 청년들이 나라를 이끌어 갈 주인으로서, 고구려의 왕처럼 우리가 왕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제를 올려야 합니다.”며 청년들의 가슴에 열정과 숭고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또한, 이번엔 특히 최초 여성 제주라서 시대가 변했음을 알리며 특히나 여성 참가자들이 환호하였습니다. nbsp다음은 광개토대왕릉비를 방문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때 만든 것으로서, 장수왕은 비석에 그의 아버지가 이룬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돌이 자연스럽게 다듬어졌고 글자를 새겨 자연미를 그대로 나타내면서도 웅대한 느낌을 준다며 비석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비석에는 네 면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모두 1,775자가 쓰여져 있다고 하는데 막대한 군사력과 통치력으로 광개토대왕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비석으로부터 약 500m 떨어져 있는 웅대한 광개토대왕릉을 향하였습니다. 긴 네모꼴 돌덩어리를 쌓아 올린 돌무덤은 규모가 산에 비교될만큼 거대했고 돌무더기 가운데는 기와조각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덤 꼭대기에 기와건물이 있었다는 의미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버스를 타고 스님께서는 고구려의 피라미드, 장군총으로 청년들을 안내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주변 환경과 장군총이 세워진 역사배경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특히나 국내성의 위치는 북 우산, 동 용산, 서 칠성산, 남 초산에 둘러있어 풍수지리로 배산임수라며, 고구려의 수도를 졸본에서 집안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무덤의 양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돌이 밀려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랫 돌에 홈을 만들어 윗돌을 끼어서 쌓는 들여쌓기와, 강돌과 진흙을 섞어서 쌓음으로서 지진에 견딜 수 있게 했다며 고구려 조상들의 지혜를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고구려의 성 쌓기 기술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고유한 것이었다며, 고구려의 대표적인 산성, 환도산성으로 청년들은 안내하셨습니다. 환도산성은 비상시에 군사들이 가서 방어를 하고 임금이 피신해 있으면서 저항했던 곳으로, 궁성의 역할을 한 곳입니다. 청년들은 눈으로 고구려 산성의 특징인 계단식 쌓기와 개이빨식 쌓기 기술로 만들어진 긴 성을 바라보며 감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환도산성은 높은 산을 두르고 있고, 지세가 좋고 자연조건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참가자들을 2개 팀으로 나누어 각각 조춘호 가이드님과 이승용 국장님이 설명을 하는 동안 스님은 조금 위쪽에 있는 왕궁터에 올라가 보셨습니다. 잡풀과 쑥대가 사람키만큼 자라 있었지만 주춧돌이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다음번 기행때 참가자들이 올라가보게 할 것인지 확인하시기 위해 둘러보셨습니다.nbspnbspnbspnbsp 환도산성 아래쪽에는 크고 작은 무덤 떼가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무덤 떼 주변을 돌며 청년들은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들으며 조상들의 훌륭한 지혜와 국토를 지켜주신 희생정신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고구려인의 생활모습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벽화가 있는 5회분 5호묘로 향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실제 무덤 벽에 그려진 거북이, 용 그림을 보며 감탄했는데 특히나, 연꽃그림을 보며 고구려인들도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같은 민족,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동하였습니다. 120여명이 한꺼번에 고분에 들어가 벽화를 보기 힘들기 때문에 이번에는 4팀으로 나누어 고분 벽화를 보고 나온 참가자들에게 스님께서는 벽화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일신과 월신의 모습, 고구려인들이 씨름을 하는 모습, 여인들이 춤추는 모습, 나무아래에서 기도하는 모습 등 고구려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스님께서는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특히나, 동굴 속에 곰이 그려져 있고 호랑이는 화살에 맞아 도망가는 그림을 설명하며 우리가 알고 있던 단군신화는 고려의 일연스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5세기 그림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 민족의 전통 설화임을 강조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다음으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참가자들은 스님을 따라 북동쪽 성벽부터 시작하여 북쪽 성벽, 서쪽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국내성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지만 환도산성처럼 국내성도 복원 작업을 하면 웅장한 규모의 성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성을 쌓으려면 많은 인력, 수레, 식량 등이 필요한데 그만큼 당시 고구려인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들여쌓기 기술과 성벽 주변에 쌓은 치의 형태를 보며 고구려인들의 훌룡한 방어 전략을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서쪽 성벽의 치는 적의 공격 뿐 아니라 홍수에 대비한 것이고 성내의 물이 빠져나가고 역류되지 않도록 큰 돌로 막아놓은 배수구를 설명하시며 고구려인들의 지혜를 이야기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국내성 남쪽, 압록강을 따라 걸으며 스님께서는 북한돕기운동을 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였습니다. 95년 역사기행 때 북한에서 대홍수가 일어났고, 평양을 갔다 온 지인으로부터 북한 주민이 굶어 죽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스님은 그 사실을 믿지 않는데, 96년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배를 타고 압록강을 따라 만포까지 가서 북한 주민들의 처참한 실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굶주리고 있는 북한 어린이를 만났고, 불러도 고개를 숙이고 대답 없는 아이를 보면서 가이드는 “조선 아이들은 구걸할 자유도 없다”고 했답니다. 스님이 배를 가까이 대라고 하니까 국경이라 댈 수 없다는 가이드의 말에 과연 국경이란 게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는 회의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 뒤 주변의 만류에도 북한돕기운동을 시작하셨다는 말씀을 들으며 참가자들은 압록강 저 건너편 북한을 향해 연민과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미래 통일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다짐하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압록강변에 있는 식당에서 즐겁게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가 스님께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까지 3일 동안 우리는 웅장한 고구려의 기백과 기상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구려의 문명은 배달문명으로부터 계승됐습니다. 조선 나라는 배달 나라의 문화를 계승했고 고구려의 건국 이념 자체가 잃어버린 옛 조선의 영토를 되찾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 기행을 통해 본 것은 두 가지, 성과 무덤입니다. 성을 봤다는 것은 어떻게 국가를 지켜냈는가 즉, 국가 안보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무덤을 봤다는 것은 그들의 정신세계, 영혼,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죠. 고구려는 독창적이고 정교한 기술을 가지고 돌로 산성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5천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요하문명은 산성을 쌓고 무덤을 7단까지 쌓았는데 이것은 장수왕, 광개토대왕릉과 유사한 모습입니다. 또한 손이 곰 앞발 모양인 여신상이 발견되었고, 역시 고구려 벽화를 보면 신단수 아래에 곰이 나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우리 역사를 보완하기 위해 배달 문명의 후예인 동북아 대륙에 살았던 북방민족 전체에 대한 유물과 문화를 종합적으로 연구할 것을 제시하셨습니다.“고구려의 뿌리는 배달민족이고 요하문명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온 역사뿐만 아니라 유물과 유적이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우리는 배달문명을 더 이상 전설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의 오류로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역사라고 해서 지나치게 과대하게 주장해도 안 되고 사대주의에 젖어서 역사 자체를 부정해도 안 됩니다. 새로운 인류 문명을 창조하고자 한다면 진실에 근접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유적, 유물뿐만 아니라 몽골, 거란, 선비, 여진의 설화, 역사, 유물, 언어를 종합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 연구를 보완해야 합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내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민족의 시원, 계승을 알아나가야 합니다. 문명을 어떻게 계승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흘러갔느냐라는 것을 통해 역사를 알아야 해요. 그 국가의 문명 주도 세력이 누군지, 무덤양식은 얼마나 본받았는지, 그 뿌리가 어디냐, 뿌리를 따져보면 계승이 확실해요.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논리를 갖고 접근해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계속해서 오늘의 핵심 주제인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했습니다. 고주몽은 북부여를 계승해서 옛 조선의 땅을 되찾겠다는 이념에서 시작했습니다. 2대 유리왕은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고 내부를 정비하고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광개토대왕은 19살에 왕위에 올라 5년째 되는 해 백제를 복속시키고 대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은 장수왕 때 백제가 다시 고구려에 도전하였는데, 당시 고구려는 중국의 5호 16국을 통일한 북위와 화친을 맺었기 때문에 북쪽이 안정되어 남하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남 위례성을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개로왕을 죽였습니다. 지금의 경기도를 다 차지하고 충청북도까지 내려오게 됩니다.”nbspnbspnbspnbsp이어서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그 후 100년 이상 평화시대를 가다가 550년 즈음 북위가 다시 분열되어 고구려와 갈등을 일으키고 돌궐족이 고구려와 충돌을 일으켰고 고구려는 다시금 서북에 신경써야 했지만 내부는 계속된 평화에 안일함에 빠졌습니다. 그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어요. 신라는 법흥왕 때 가야와 합병하면서 영토를 넓히고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신라와 동맹이었던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고구려가 이를 듣지 않자, 30만 대군으로 침략했지만 실패했고 그 후 113만 대군을 데리고 갔는데 을지문덕에게 참패했습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당나라의 태종은 10만 대군을 끌고 쳐들어와 요동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안시성의 양만춘은 성을 지켜냄으로써 당나라의 1차 침략을 막아냅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가 그 지역을 차지하였고 662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실패하였으나,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아들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 결국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고 신라는 8년 간 당나라와의 전쟁을 벌이다 화친을 통해 676년에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고구려 멸망 30년 만에 고구려 유민들이 대조영을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유민들을 다 발해로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700년의 고구려 역사가 종결되고 그것을 발해가 계승하게 됩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도 고구려 역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신 스님께 참가자들은 힘찬 박수로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동북아대장정 3일째 밤이 깊었습니다. 내일은 림강에서 압록강 상류를 따라 올라가며 강 건너 북한 땅과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발해의 영광탑을 참배하는 일정입니다. 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김유정님이, 강의 속기는 송리라님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2014.8.11. 동북아 역사 대장정 이틀째 날 - 백암산성, 홀본산성
동북아 역사 대장정 이틀째 날이 밝았습니다. 참가자들은 3시 40분에 기상하여 대련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요동성이 있던 요양을 거쳐 만주족 자치현인 환인으로 가게 됩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기 때문에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못하고 크고 맛있는 옥수수로 대신했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 답사가 시작되고 첫 목적지는 백암산성입니다.nbsp이동하는 차량에서 스님께서는 백암산성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비사성부터 건안성, 안시성, 요동성, 신성, 부여성까지를 연결하여 쌓은 천리장성 중 안시성과 요동성은 특히 당나라의 침공을 막는데 핵심이 되는 성이었는데 그 중 요동성을 보호하기 위한 산성이 백암산성이라고 합니다. 이 백암산성이 뚫리면 국내성과 평양성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에 최전방에 있는 군사적 요충지인데 수나라가 침공했을 때는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았고 당태종이 공격해 왔을 때는 주성인 요동성이 함락되자, 백암산성은 항복해 버렸다고 합니다. 반면 양만춘의 안시성은 끝까지 당의 공격을 막아내어 성을 지켜냈는데 이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성의 자연적 조건도 중요하지만 그 성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리더의 중요성도 매우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7시경 백암산성에 도착하여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홀본산성이 현지인들에게 오녀산성으로 불리우는 것처럼 백암산성도 현지에서는 연주산성이라 불리우고 있었습니다. 구름 낀 하늘과 시원한 바람, 성벽을 이루는 많은 돌들 사이로 피어난 들풀이 그 세월의 무게를 더함을 느끼며 스님의 상세한 안내에 따라 서쪽 성벽에 올랐습니다. 현장에서의 생생한 현장감과 스님의 자상한 설명에 이곳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그들도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가정을 위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을 것입니다.nbsp스님께서는 고구려 성의 몇가지 특징을 설명해 주셨는데,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돌을 맞물려 쌓아올린 점과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치성 그리고 덧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치성은 5060 미터 간격으로 쌓아 방어 공간을 넓게 하고 적에게 화살을 쏠 때 사정거리가 30미터를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성 바깥에만 치성을 쌓는데 유일하게 백암산성은 안쪽에도 치성이 있어서 물자를 보관하거나 병사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적의 침입이 잦은 서쪽 성벽은 높이가 10m에 이르고 아래 부분을 계단식으로 쌓아 안정성을 높인 것에 비해 적의 침입이 어려운 북쪽 성벽은 상대적으로 낮고 폭도 좁았습니다. 동쪽으로는 태자하라는 강이 흐르고 절벽으로 되어 있어 성벽이 아예 없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당연하면서도 이런 지형에 산성을 만든 점을 신기하게 느끼며, 참가자 일행은 백암산성의 정상에 있는 망대에 올라 저 넓은 요동벌을 바라보니,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현재는 중국의 영토에 속한 이 지역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nbsp크지 않은 규모지만 그 지형지세가 산성으로서 완벽해서인지 돌궐 1만 군사가 공격해왔어도 함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암산성의 정상을 둘러 본 후 내려오는 길에 바닥돌을 깨내어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하던 웅덩이도 보고 남쪽에 한창 발굴 중인 병영터를 보면서 내려왔습니다. 마을로 내려와 보니 동네 담장 대부분이 성벽 돌을 가져다가 쌓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마을과 가까운 남쪽 성벽이 상대적으로 파괴가 심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참가자들을 태운 버스는 다음 목적지인 홀본산성으로 가기 위해 환인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백암산성에서 환인으로 향하는 길은 옛날 고구려가 국내성에 근거지를 만들어 놓고 요동으로 진출하던 통로였다고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끊임없이 경쟁하고 교류했던 한족, 중국이 자기 역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에 대해 상세한 중국역사 강의를 듣다보니 어느덧 환인에 도착하였습니다. 먼저 점심식사를 한 후 바로 홀본산성으로 갔습니다. nbsp버스를 타고 산에 오르던 길에 보이던 홀본산성의 위엄은 사진에 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정도의 감격이었습니다. 고구려성의 특징은 절벽 등 지형 조건을 잘 활용하고 옆에 주변에 강으로 된 자연 해자가 있으며 평지성과 짝을 이루는 산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홀본산성은 해발 800m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징으로 동문의 공자형 성문과 서문의 옹자형 성문이 있습니다. 홀본산성에 오르기 전에 박물관에 들렀습니다. nbsp적석총은 고구려 초기 무덤 형태인데 깨지지 않는 강돌을 사용하였고 그 형태가 고인돌과 같습니다. 권력과 부에 따라 더 크고 높이 만드는데 그 높이가 점점 높아져 장수왕의 경우는 7층에 이릅니다. 흐르는 땀과 그 땀을 스치는 바람 덕분에 기분 좋게 산성을 오르고 난 후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풍경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장관이었습니다. nbsp다만 댐 건설로 인해 많은 유물이 수몰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좁고 경사가 심해 다리가 절로 후들거리는 계단을 내려와 산길을 걸으며 스님께서 열심히 설명해주신 공자형 동문도 살펴보고 이끼 낀 2천년된 성벽에 서서 단체 사진도 찍고 그 후 우리는 홀본산성을 내려와 숙소로 돌아왔습니다.nbsp물기를 머금은 풀잎향기, 하늘을 가득 메운 어두운 구름, 따스한 햇살과 우리들 몸을 슬그머니 감싸는 시원한 바람... 그 모든 것과 우리 선조들의 얼과 지혜를 느낄 수 있는 하루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환인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뒤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한 스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고구려 역사를 학교에서 책으로만 배웠는데 역사 현장을 발로 밟아보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면서 고구려가 동북아 대륙의 중심국가로 존재했음을 확인했습니다. 고구려는 어떤 문화를 계승해서 이런 위대한 문명을 이루었을까요? 고구려의 창건자 주몽은 ‘나는 부여의 자손이다’라고 스스로 주장했습니다. 부여의 창건자 해모수는 스스로 자신은 단군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어요. 연원을 따지면 환인의 한나라가 우리의 뿌리이고, 우리 민족 역사의 시작은 배달나라입니다. 그것을 계승하고 개혁한 국가가 단군의 조선나라입니다.”nbsp이어서 우리에게 익숙한 단군 설화를 들려주셨고 단군 조선이 어떤 나라였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단군 설화 내용을 다시 풀어본다면 배달나라 환웅 가운데 마지막 환웅의 왕위를 계승한 사람이 단군인데 이 단군은 천손이긴 하지만 어머니가 토착세력의 부족장, 소위 곰족의 부족장 딸이었습니다. 단군이 천왕으로 추대되어 제 1대 단군이 되었습니다. 단군이 세운 조선나라는 이주해서 새로 나라를 세운 게 아니고 있는 배달나라를 혁신해서 그 이름을 조선나라로 바꿨습니다. 단군의 조선나라는 현재 역사적 기록에 단군이 총 47분이 기록에 남아 있고 약 2100년 동안 계승되었습니다.nbspnbsp왕의 아들이 없거나 신통찮으면 5가 회의에서 왕을 뽑았는데 주로 우가의 사람이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우가가 농업을 담당이니 식량담당이 가장 중요한 관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단군조선 전반기 천년은 배달문명을 계승해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선 문명이었으나 중국 주나라 후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사상의 발전과 철기문명의 발달로 중국에 역전을 당하게 되고 결국 침략을 받게 되면서 고조선은 쇠퇴하고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게 됩니다.“고조선은 세력이 약화되고 동북쪽으로 진출한 해모수가 고조선을 계승하여 부여가nbspnbsp창건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여를 역사의 정통으로 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여는 그런 고조선의 옛터를 회복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부족했어요. 이 문제로 인해서 고주몽이 부여와 대치했습니다. 둘 사이의 갈등이 생겼고 결국 고구려가 역사의 중심이 됩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현재까지 내려온 배달문명의 흐름과 현 상황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배달문명 아래에 아홉 개의 다른 문화를 가진 종족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휘하에 있다가 몽골족, 선비족, 말갈족 등이 독자적인 민족의 문명을 만들어 나갑니다. 배달문명 산하의 민족들이 각자 나름대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한때 강성했지만 결과적으로 도태되어 소멸했어요. 만족만 해도 아직까지 인구가 천만명 정도 남아 있는데 말도 안 쓰고 글도 안 쓰고 한족과 차이가 없습니다. 호적에 만족이라고 표시하는 것 외에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게 없습니다. 행정적으로 만족 자치현인데 독립된 나라를 꿈꾸는 수준이 전혀 아닙니다.” nbsp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배달문명을 이어받은 다른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설명하셨습니다. “남아있는 민족 첫 번째가 대한민국, 두 번째가 몽골족입니다. 몽골은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뉜 상태인데 중국과 러시아 두 강대국 사이에서 통일의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동북아 대륙 중에 그래도 남아있는 건 조선족밖에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제를 넘어서서 배달문명의 영광을 되찾는 건 동북아 민족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입니다. 스케일을 크게 잡는다면 우리에게만 꿈과 희망이 아닌 것입니다.” nbspnbspnbspnbspnbsp한반도의 통일이 우리 민족만의 꿈과 희망이 아닌 배달문명의 영광을 찾아주는 일이라는 말씀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한편 스님께서는 우리 민족이 활동한 무대였던 동아시아 대륙이 현재 중국 땅이 된 연유도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 민족이 활동했던 건 줄곧 현재의 만주라고 불리는 동북아시아 대륙과 한반도입니다. 중국이 동북아 대륙을 밀고 들어온 때는 한사군 때이고, 거꾸로 동북민족이 대륙 쪽으로 밀고 들어간 게 원나라 때입니다. 동북아 대륙은 한사군 때 빼고는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 없었는데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동북아 대륙이 중국영토가 됐습니다. 동북아 대륙은 중국인이 점령한 게 아니고 원나라 땅이었다가 중국땅이 되어버려서 어쨌든 중국영토가 된 거죠.” 스님은 역사를 볼 때 문명적 사관에서 역사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 현재 우리의 과제인 통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을 남북한의 통합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문명적인 관점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통일이라는 건 이산가족이 만나고 경제가 통합되는 수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적으로 남북이 통일되는 건 원수가 형제가 되는 겁니다. 6·25때 남쪽 사람을 죽인 사람이 북한에서는 영웅이고 남한에서는 원수인데 통일이 되면 이 둘이 하나가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거죠. 엄청난 사상적 자유와 문명의 진보를 말하는 겁니다. 이건 정신적인 상처, 분단의 한계를 한꺼번에 극복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명이 세계의 선진문명으로 갈 수 있는 것으로 종교적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통일은 단순한 영토의 통합이 아니라 상상도 못할 훨씬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민주주의 심화, 소위 경제민주화 복지확대 이런 것들이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두 나라의 단순한 통합이 아니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나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단지 통일은 통일에서 끝나지 않고 동아시아 변영의 열쇠가 됩니다.”nbspnbspnbspnbspnbsp또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를 과거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주몽이 그냥 나라 세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역사의식을 가지고 나라 하나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라 선조의 옛 땅을 되찾는다는 목표를 가지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서 지금 우리 문제는 영토의 문제에 너무 집착하면 안됩니다. 영토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갖고 주변과 네트워킹과 협력을 잘하냐, 이게 핵심적인 관건이죠. 없는 역사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남의 역사를 가져오자는 것도 아니고 있는 우리의 역사 잊지 말자는 겁니다.” nbspnbspnbspnbspnbsp스님은 이 역사기행이 통일의 의지로 이어지길 청년에 당부하시고 토닥이시며 강의를 마무리하셨습니다.“경제발전과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우리가 통일을 할 만한 토대는 되는데 가장 중요한 건 통일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사회각계각층에서 어떤 희망을 향해 연대하고 협력해나갈 것인가가 숙제죠. 우리가 역사순례하는 건 배달문명의 후예로서의 자긍심을 가지려는 겁니다. 규모만 봐서는 안 되고 정교함, 독특함, 이런 것들은 어디서 왔는지, 이런 공부를 하러 여기에 왔습니다. 역사를 통해서는 기상을, 기를 좀 받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청년들은 위축되어 자살할 생각하지 말고, 친구하고 어떻게 경쟁해서 이길까 하지 말고 좀 더 대범하게 가세요. 고기 먹고 술 먹고 노래방 가고 연애에 집착하고 괴로워하는 건 삶의 희망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닌가요? 내 작은 재능을 쓸 수 있는 곳이 없어서 비전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요? 이런 게 나를 희생하는 게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는 일인 겁니다. 삶의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그런 측면에서도 기상이 있어야지요. 이곳이 혁명의 고장 아닙니까? 일제강점기때 독립을 위해 고난의 행군을 했던 곳이니까 우리 힘들어도 여기서 답사를 계속해봅시다.” nbspnbspnbspnbspnbsp이렇게 동북아 역사기행 둘째날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나누기 모임을 가진 후 내일 집안에서의 고구려 유적 답사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채희범님이, 강의 속기는 양이숙님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2014.8.10.동북아 역사 대장정 첫째날 - 요녕성 박물관
연길을 출발해서 밤새 심양을 향해 출발한 버스는 운행금지시간인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고속도로 휴게소에 정차해 놓고 참가자들도 휴식을 취했습니다. 새벽 5시가 되자 바로 출발하여 심양공항에 도착, 탑승 수속을 밟고 7박 8일간의 역사기행의 감동을 안은 채 인천공항으로 떠났습니다. 스님께서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원고 교정을 하시고는 탑승하러 들어가는 참가자들을 환한 표정으로 일일이 악수하며 배웅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121명의 청년대학생들이 도착하여 또 한 팀의 7박 8일 역사기행단을 맞으셨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왔다고 하는데도 동북아 역사 대장정의 첫날이라 그런지 피곤한 기색 없이 들뜬 모습이었습니다. 공항에서 이곳저곳에 무리지어 사진을 찍고 왁자지껄 떠들었습니다. 참가자들을 반겨주듯 심양의 하늘도 푸르렀습니다.nbsp스님과 참가자들은 버스를 타고 심양에서의 첫 일정인 요녕성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버스에서 스님은 무전기로 전원 참가자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시고, 7박 8일 동북아 역사 대장정을 함께 할 버스기사분과 법사님과 스탭들을 소개하시고, 오늘의 전체적인 일정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가자들은 무전기에 나오는 스님의 말씀에 일제히 조용해졌습니다. nbspnbspnbsp스님께서는 전체적으로 동북3성과 심양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시고, 요녕성 박물관에 대해 1관 문명서광 전시실부터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참가자들은 스님 가까이서 설명을 듣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스님을 따라 다니며 경청했습니다. 요녕성 박물관은 요녕성의 대표적인 유물을 시대별로 나누어 다섯 전시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각 전시관에서 각 유물과 우리의 역사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설명하셨습니다.“지나간 문명은 어느 한 나라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재산입니다. 지금 요하문명이 중국의 땅에서 발견된 유물이라고 해서 그것이 중국의 역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은 유물·유적은 있지만 역사가 없어서 해석하는데 장애가 있고, 우리나라는 역사·신화는 있지만 유물·유적이 없어 역사를 고증하기가 어렵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유적인데 지금 중국 땅에 있다고 해서 중국의 역사로 왜곡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구나 하며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요녕성 박물관 견학을 마친 후, 스님과 참가자들은 북한 식당으로 향하였습니다. 남남북녀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듯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북한의 아리따운 여성분들이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중국에서의 기대했던 첫 식사는 평양냉면이었고, 새콤달콤한 김치와 평양냉면이 어우러져 한국에서 맛보았던 냉면과는 다른 특유의 평양냉면을 맛 볼 수 있었습니다. 평양냉면을 맛보는 동안 스님의 특별 요청으로 공연을 볼 수 있어서 혀뿐만 아니라 눈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반갑습니다’ 노래로 시작된 공연은 마지막에 ‘다시 만납시다’ 노래로 끝이 났는데 이 노래를 들으면서 많은 참가자들이 감동을 받아 눈가가 촉촉해졌고,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욱 간절해짐을 느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식사를 마친 후 숙소에 도착하여 각 조별로 인생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은 식사 장소로 이동하여 저녁식사를 했는데, 첫 중국식 식사에 신이 난 참가자들이 진행 스텝의 안내도 잘 듣지 않아 스님께서는 저녁 강의 시작 전에 기행 중 주의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고 이어 민족의 시원에 대한 법륜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동북아 역사 기행이 시작됩니다. 이번 기행은 역사적으로는 고구려8231발해8231독립운동 유적지를, 자연환경으로는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일대를 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난 역사 가운데 교훈이 되는 것은 계승하고,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앞으로 다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옛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먼저 이번 역사기행은 개인이 아닌 단체 생활이기 때문에 공동체로 생각하고 개인적인 욕망은 자제할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배려할 것을 당부하시며, 오늘 주제에 대해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민족의 시원은 민족의 뿌리입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낙동강도 여러 갈래의 하천이 합쳐져서 만들어지지만 모두가 시원은 아닙니다. 우리가 시원은 하나로 정해 놓지만 또 그것만이 낙동강은 아닙니다.”nbsp참가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민족의 시원을 강에 비유하여 쉽게 설명을 풀어 가시며 우리 민족의 시원을 찾아 현재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하나 정리해 주셨습니다. 대한민국부터 시작하여 단군 왕검, 환웅 천황까지 민족의 역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는 요하 상류에서 발견된 요하 문명 유적과 유물이 뒷받침 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환인의 한나라는 우리의 뿌리는 맞지만 한나라가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닙니다. 진짜 ‘우리나라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배달나라입니다. 배달나라는 곰을 섬기는 부족,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 등 여러 민족이 흩어져 살고 있는 곳에 선진문물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때 건국이념이 이런 후진 부족을 침략하여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던 행동양식입니다. 홍익인간은 환웅의 신시 건국이념입니다. 환웅은 5,900여년 전에nbspnbsp홍익인간의 이념을 가지고 3천여명의 무리를 끌고 동북아 지역에 이주해 와서 지역의 토착세력에게 문명을 전파하고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유전자를 보면 환웅족보다 토착세력의 인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환웅의 신시에 뿌리를 둡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흩어진 것을 보면 언어적 어순이 같을 것입니다. 토착민족이랑 합쳐졌기 때문에 생긴 모습은 다르지만, 어원이 비슷합니다. 하지만 중국은 우리와 생긴 것은 비슷하지만 어순이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문명의 뿌리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홍익인간, 재세이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하늘의 뜻을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환인의 한나라의 문명을 신시의 배달문명으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단기기원이 아니라 신시개천 몇 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단순히 신화라고만 알고 있던 단군왕검과 환웅천왕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로 생생히 살아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약 6천 년 전에 이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약한 다른 세력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전파하고 토착세력을 고도의 문명으로 이끌어 나갔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서 민족의 자긍심을 가질 것을 당부하시며 오늘 강의를 마무리 하셨습니다.“요하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에 걸맞는 역사와 전설을 가지고 있는 곳은 동북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피라미드처럼 무덤을 쌓은 것은 아시아에 고구려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7단 적석무덤 유적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요하문명이 고구려의 뿌리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아서 우리가 절대로 중국문명의 아류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는 변방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함께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 가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강의장이 다소 좁고 더웠지만 청년들은 스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나서 어느덧 동북아의 중심 문명을 이끌어 갈 꿈을 꾸는 듯 환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며 숙소로 돌아갔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내일부터 백암산성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역사기행이 시작됩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류희정님이, 강의 속기는 이윤미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2014.8.9. 동북아 역사기행 일곱째 날 - 청산리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대성중학교
아침 3시 20분 모닝콜을 시작으로 동북아 역사기행 마지막 날의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어젯밤 숙소가 있었던 연길에서 정각 4시에 출발하여 화룡에 5시 2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화룡에 있는 새벽시장에 들려 오늘 아침 식사거리를 구입하였습니다. 오늘 일정이 바빠서 시장 보는 시간을 20분 주었는데 역사기행 팀들은 능숙하게 먹을 것을 구입하여 버스에 올랐습니다. 며칠 전에 림강에서 새벽시장을 다닌 경험으로 오늘은 맛있는 음식을 과하지 않게 샀습니다. 역시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간접 경험인 것 같습니다. nbsp 오늘 첫 답사지는 청산리 유적지입니다. 화룡에서 청산리 유적지에 오르는 길옆 옥수수 밭 가운데로 멀리 발해의 옛 산성도 보이고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아스라이 느끼다보니 어느덧 굽이쳐 흐르는 해란강이 나타났습니다. 독립군이 일본군을 무찔렀던 청산리전투가 있었던 직소택에 오르려면 왕복 12키로 미터를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비가 온지 오래되어서 비포장도로가 비교적 단단하고 유실된 곳이 없어 버스로 백운평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왕복 4키로미터를 걸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저 해란강 상류의 산언덕을 넘으면 백두산의 고원지대로 연결됩니다”는 말씀으로 스님께서는 이곳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을 피하여 백두산으로 가고자 했던 당시의 독립군들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밀림이 무성한 산길을 굶주림과 추위로 떨면서 그 길을 올랐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졌습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그들의 기상보다는 굶주림에 떠는 나이어린 아들 또래의 남자 아이들의 모습이 더 먼저 떠올랐습니다. 산길을 차를 타고 달리다보니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nbspnbspnbsp현재 조선족 마을은 인원이 점차 줄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 나가는 조선족들이 많아져서 이곳에 있던 조선족 초등학교가 지금은 빈 건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점차 상류로 올라갔습니다. 스님께서는 산기슭에 아늑한 분위기로 자리 잡은 옛 마을 터에 정토법당과 정토수련원을 짓고 아울러 숙박시설을 지어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이곳에 수학여행을 오도록 하려고 계획하기도 했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청소년에게 되찾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도 하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버스에서 하차한 지점은 ‘백운평’이었습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진 일본군이 무고한 양민을nbspnbsp학살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던 터였습니다. 지금은 사람의 흔적은 없고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쑥대밭을 눈으로 직접 보니 가슴이 아련해져 왔습니다. 잠자다가 총칼 앞에 목숨을 잃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생각하니 순간 일본군이 미운 생각이 일어났습니다.nbsp 그곳을 출발하여 스님과 함께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침 이슬로 바짓가랭이가 젖어오는 가운데도 역사기행 팀들은 서둘러 산을 올랐습니다. 어떤 분은 그 바쁜 걸음 가운데서도 길섶에 핀 들꽃을 한 송이씩 꺾으며 산길을 올랐습니다. 아마도 청산리 전투에서 희생된 분들에게 재를 올릴 때 재단에 올리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손길에 들린 들꽃처럼 예쁜 그 분의 정성어린 마음이 느껴지니 올라가는 발걸음이 더 숙연해졌습니다. 예전에 독립군들이 올랐던 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얼음처럼 차가운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널 수 있도록 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nbspnbsp그 다리는 지난 7월에 통일의병 역사기행에 참여하였던 어느 거사님이 남아서 이곳에 다리를 놓았다고 합니다. 그 분의 수고로움으로 놓인 다리로 건너면서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습니다.nbspnbspnbsp물길을 건너고 산길을 돌아 올라가는데 뒤에 중국 공안이 같이 산에 오른다는 안내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발걸음을 더욱 빨리 하여 ‘직소택’에 하나 둘 모여서 독립군들에게 올릴 재준비를 하였으나 대표만 절을 올리고 해탈주를 급하게 낭송하고 마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은 아니나 중국에서는 재를 지내지 못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묵념을 올렸습니다. 묵념을 하기 전 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우리는 묵념을 할 때 독립군의 죽음만 애도하지 말고 역사의 기록에 없는 민간인의 죽음도 함께 애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권력에 의해 자신의 의도 없이 이곳에서 죽어간 일본군의 죽음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다시는 이웃 간에 전쟁이 없어야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을 내면서 그들의 영혼까지도 천도하며 묵념하겠습니다.” 비록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스님의 안내로 그 어느 때 보다도 진심을 모아 묵념을 올렸습니다. 묵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아까 올라오는 길에 한 보살님이 꺽은 한 웅큼의 꽃다발이 나뭇가지에 걸쳐져 있었습니다.nbspnbsp그 꽃다발이 준비한 재를 올리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더 색색으로 예쁘게 보였습니다. nbspnbspnbsp다시 2.5 키로미터를 내려와 버스를 타고 청산리 전투 기념탑 앞에서 내려 간단히 단체사진을 찍고 무산의 철광산을 보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에 있는 양로원과 고아원을 지원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하시기 위하여 이곳에서 도움을 주실 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따로 가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평화재단의 이승룡 국장님의 안내로 철광석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 보이는 화룡시의 남평진에 도착하니 두만강 상류 물줄기를 앞에 두고 북한의 무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산시내 바로 뒤쪽에 회색빛의 철광산이 높다랗게 솟아있고 그곳으로 거대한 트럭이 줄을 지어 달리고 있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트럭이 이곳에 다 모인 것처럼 커다란 트럭들이 가득 길을 메우고 있었는데, 며칠전 압록강변을 하루 종일 달리면서도 차를 보지 못했는데 이곳 무산광산에는 수많은 트럭이 철광석을 실어 중국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곳 무산에서 채취한 철광석은 무산화룡백두산이도백하백산통화로 연결되는 기차로 통화에 있는 제철소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북한이 중국에게 앞으로 50년 동안 철광석을 가져가는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 백두산을 지나는 기차길을 새로 놓아서 이렇게 철광석을 가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땅의 저 철광석이 싼 가격으로 중국으로 권리가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차라리 우리가 가져왔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더 생기지 않도록 우리 정부가 좀 더 북한에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고 바램을 가져보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남평진을 출발하여 오면서 북한주민이 이곳에서 탈북하여 얼마나 인권을 잃고 살아가고 있었는지 설명을 들었습니다. 탈북 남성들의 귀환조치, 여성들의 인신매매, 어린아이들의 꽃제비 생활을 들으니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 사람이 겪는 고통에 나의 작은 힘이나마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합니다.nbspnbspnbsp다시 화룡으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마친 역사 기행 팀은 12시에 대종교 3인묘로 출발하였습니다. 다른 때는 이곳에 올 때 낫을 가져와 벌초를 하였다고 하는데 오늘은 와서 보니 벌초가 깨끗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꾸준히 역사 기행을 다닌 성과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곳에 묻혀 있는 분들은 항일운동의 중심에 계셨던 분들이라 하는데 그분들의 유해가 아직도 이곳 중국 화룡시에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분들의 이름도 몰랐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런 분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업적을 높이 새기는 것이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후손들의 당연한 도리라 생각 하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일송정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일송정으로 가는 도로를 공사하고 있어서 도로공사를 하는 지점에서 멀리 정자를 보고 ‘선구자’노래를 불렀습니다. 비록 일송정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이곳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던 그들의 마음이 가슴시리도록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가족, 고향을 떠나와 낯선 중국 땅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기개를 놓치지 않았던 그분들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 선구자는 그렇게 가슴에 긴 여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nbsp 선구자의 노랫말에 나오는 ‘용두레 우물’을 보고 우리 일행은 옛 대성중학교로 갔습니다. 대성중학교는 그동안 용정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윤동주 시인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활동하신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이 후학을 바르게 육성하는 것임을 깨닫고 이곳에 학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교육받은 이들 중 후에 나라를 위하여 평생을 바치신 분들이 많음을 새삼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 지금 우리나라가 새로운 문명의 주인 되는 역사를 세우기 위해서는 바르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 일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번 동북아 역사기행 동안 두발로 걸으면서 알게 된 배달문명, 환인, 환웅을 거쳐 단군조선, 그리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새로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깨우침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가슴 가득히 생기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우리의 길임을 다시금 각오하게 됩니다.nbsp이렇게 마지막 기행까지 마치고 마지막 강의를 듣기 위해 용정으로 향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아침에 청산리에서 일행과 떨어져서 예전에 스님께서 도와줬던 조선족 사기 피해자들이 그 인연으로 북한 난민을 적극 도와주셨는데 그분들께 점심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연길로 가셨습니다. 만나기로 한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모여 계신 분들이 스님을 너무나 반가이 맞아 주셨습니다. 벌써 20여 년 전 인연이라서 벌써 팔순이 넘으신 분도 있고 제일 젊은 분이 예순이 넘으신 분들이었는데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민족정신이 투철하고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만은 청년보다도 열성적이셨습니다. 이 분들은 아리랑상조협회 소속으로 지금도 나진8729선봉 지역을 오가며 북한 주민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계셨습니다. 회원 중 한 분은 몸이 불편한 남편을 돌보면서 자신은 지난 6개월간 이상 출혈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북한의 일명 꽃제비 아이들을 위해 샤워 시설을 만들어 주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셨다는데 다음 주에 병원에 입원을 하신다는 말을 들으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북한 주민을 알뜰하게 보살펴주는 조선족 동포들이 계셔서 지금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남북 관계의 교량 역할을 톡톡히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인생수업 책을 한분 한분에게 성명을 적어주시며 선물해 주셨고 이 분들도 각자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을 스님께 선물하셨습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하고 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행에게 강의를 해주시기 위해 서둘러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기행을 마친 참가자들과 만나서 역사기행의 의의에 대한 스님의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이런 역사순례를 왜 하느냐? 뭣 때문에 9천년 전, 6천년 전, 천년 전의 이야기를 하느냐? 핵심은 첫째, 지금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길을 모색하기 위함입니다. 그 길을 찾으려면 과거 역사 속에서 어떤 것을 계승하고 어떤 것을 반성할 건가,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좀 더 좋게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지만 그때 그랬으면 하는 후회없이 미래를 맞으려면 과거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자존에 대한 회복도 있어야겠습니다.”nbspnbspnbsp인간 존재는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제는 그제, 올해는 작년, 이렇게 과거의 인연과보로 현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과거를 바로 알면 내일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를 높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과거와 달리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해 나갈 수가 있다, 미래는 우리의 주체성, 자주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역사를 모르는 자는 미래를 살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하시며 역사의식이 없는 자가 미래를 창조할 수 없다,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또한 좋은 씨앗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밭에 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처럼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가려면 현재의 조건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미래에 꽃이 잘 피고 자라기 위해서는 현재의 밭갈이와 씨앗 심는 실천을 어떻게 할 거냐가 중요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현재의 실천을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사관 정립, 현재에 대한 분석과 판단,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전략과 전술, 이를 실천할 주체세력의 역량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갖춰질 때 역사는 타성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체역량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오늘날은 인민의 시대, 민중의 시대이므로 인민이 깨어야 합니다. 민중이 깨지 않으면 특별한 영웅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메시아, 성군, 전륜성왕 등 누군가가 나타나 천하를 구제하기를 꿈꿉니다. 이제는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사람이, 혼자가 아닌 다수가 그런 역할을 하는 모자이크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한 사람의 깨달은 붓다가 아닌 모자이크 붓다가 필요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그리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사회의 방향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개인의 수행에 달려있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며, 사회적 조건을 모두가 행복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빈부격차가 큰 사회에서 인간이 행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경쟁의 공정성과 분배의 공평함을 구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경쟁의 공정성이란 출발선에서의 기회 균등을 말하는 것이며, 여자라고 혹은 장애인이라고, 소수자라고 차별받지 않는 것, 기초교육을 모두 균등하게 받게 하는 것, 경쟁 관점에서의 룰의 공정성과 공정한 관리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경쟁조건을 중소기업이 불리하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게임이 끝났을 때 결과에 대해 평가가 공평해야 한다며 운동회의 달리기를 예로 드셨습니다. nbspnbspnbsp“옛날에는 운동회 때 8명이 뛰면 3등까지만 상을 줬어요. 공책이 부족하니까. 하지만 요즘은 공책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옛날처럼 3등한테까지만 다 몰아주면 불만이 생기겠지요. 그러니까 모두에게 참가상 1권씩을 주고 나머지 가지고 1,2,3등한테 나눠줘야 해요. 이게 최저생계비 보장이고 사회 안전망 구축이에요. 이렇게 게임의 공정성과 분배의 공평함이 구현되어야 복지사회예요. 이건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좌니 우니 하는 것과 상관없어요. 변화한 사회에서 조금만 지혜로우면 알 수 있는 상식이에요.”nbspnbspnbspnbspnbspnbspnbsp이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가 문명사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의 문명에서 교훈을 얻어서 이 문명의 근본적 모순을 진단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그래야 새로운 문명의 선구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우리의 현실을 살피면 우리가 이전 1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분단이 되고 전쟁을 겪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건 그 전 100년이 어리석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100년이 다음 100년을 규정합니다. 아무 손도 안대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결과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nbspnbsp우리가 지금 잘못하면 영구분단, 강대국의 하위변수로 전락하겠지만 잘 하면 이 변화의 시점에서 통일한국을 이룩하여 동아시아의 주인공이 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그런데 분노를 통해서는 잘못된 것을 파괴할 수는 있으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제는 분노를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해야 하며, 그렇기에 남과 북, 남한 안의 성장주도세력과 민주화 주도세력 간의 적대관계를 서로의 공과 과를 인정하는 관계로 전환하고 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통일이 단순히 112가 아닌 3,4,5가 되는 비전을 향해 가려면 독립이 대한제국의 부흥이 아닌 대한민국의 수립이었듯이 통일도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우리가 역사기행을 하면서 이런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것이라 하시면서, 배달문명이 수많은 소수민족을 아울렀듯이 동아시아 문명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명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세계인, 지구인의 개방성을 가지면서 민족 정체성이 있어야 새로운 문명을 선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되었으면 합니다”라는 간곡한 말씀을 끝으로 강의는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남았습니다. 이 역사기행의 끝이 우리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되길 발원합니다. nbspnbspnbspnbspnbsp25일간 단식을 하시고 유동식으로만 복식 중인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안내해 주시고 강의를 해주신 법륜스님께 참가자들이 큰 박수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다음은 참가자들이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별로 한 명씩 대표로 소감문을 발표했는데 각자 받은 감동의 크기가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어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기행 내내 운전 안전으로 고생하신 기사 3분과 가이드 조춘호 선생님과 따님인 조신 님에게 선물을 증정한 후 스탭과 스님의 하루와 강의 속기 적어주신 분, 사진을 찍어주신 분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몇 년 전까지 역사기행을 함께 하셨던 방학봉 교수님이 오셔서 참가자들에게 소개를 하고 간단히 말씀을 들었습니다.nbsp65279nbsp이렇게 전체 일정을 마치고 내일 오전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심양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2014.8.8.동북아 역사기행 여섯째 날 - 발해진, 봉오동, 두만강 유역
동북아 역사기행 여섯째 날이 밝았습니다. 모두 버스에 오르고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로 시작하는 새벽 4시. 오늘도 하루의 여행 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스님. 오늘 지나갈 돈화평야와 목단강에 대해서도 알려주십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만주의 드넓은 벌과 긴 물줄기를 잠시 바라봅니다.nbsp1시간을 달려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다는 ‘요전자 24개석’을 찾아갔습니다. 분꽃, 접시꽃 등이 예쁘게 핀 깔끔한 시골마을 옆길을 지나 옥수수밭 옆길을 한 줄로 들어가 24개석을 보고 나왔습니다.nbsp다시 길을 달려 길림성에서 흑룡강성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고속도로를 지나면 길가를 따라 용암이 막혀 형성된, 길이 23km에 달하는 호수 ‘경박호’를 만납니다. 멀리 북만주 평야가 보입니다. 오래 보고 있어도 참 좋고 부럽습니다. 천혜의 자연이 이렇게나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니 또, 여기에서 우리가 한국에서는 잃어버린 고향의 정겨운 풍경을 만나다니 저 벌판을 뛰어다녔을 유전자에 각인된 무의식이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nbspnbspnbspnbspnbsp남한에서는 1년에 식량이 총 500만 톤 생산되는데 여기 동북3성중 길림성에서만 1800만 톤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북한은 최소 400만 톤만 있어도 식량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이곳은 석탄, 철광의 산지로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우리 한민족에겐 피눈물의 사연을 가진 간도의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발해진 쌀은 청 황제가 먹던 쌀입니다. 이 지역은 용암 위에 흙이 230cm 덮여있는데, 수원이 보장되고 물이 따뜻해서 위도가 높음에도 쌀농사가 가능한 곳입니다. 접근이 금지된 이 지역에서, 청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틈새에 쌀농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조선인입니다. 1860년대의 관리들의 조세징수의 횡포를 피해서 두만강을 건넜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은 ‘두만강 안에 있는 섬’이라는 뜻의 ‘간도’로 불리게 됐습니다. 청나라 건국 후 중국 전역으로 만주족의 지배층이 옮겨가면서 이 지역은 신성한 땅으로 봉금지역이었습니다. 발해의 땅이었으나, 발해 멸망 이후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었던 까닭으로, 지명도 용정을 제외하고는 거의 여진어를 음차한 것입니다. 조8729청 간의 협약으로 현재의 국경이 확정되었지만, 남북통일 이후 이 지역은 국경분쟁의 소지가 있습니다. 중국은 이런 동북아의 230년 후를 내다보고 지금 동북공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이 중국과 협의해 북한을 압박하면 이후 국경협상에서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멀리 내다보며 통일 이후를 생각해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랜 시간 달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당시 발해의 수도 주 하나였던, 상경용천부의 성터. 외성은 토석혼축성으로 한 변이 4km, 전체 16km에 달합니다. 지금은 성벽 위로 백양나무가 자라고 있어 멀리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터 정문 앞길인 주작대로를 따라 외성터 내에 있는 흥륭사로 갔습니다. 흥륭사는 당시 상경용천부에 있던 9개의 절 중 유일하게 유물이 나온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흥륭사의 석등을 먼저 보고, 얼굴과 손가락의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지금은 수리되어 깨끗해지신 부처님의 석상 앞에서 예불을 올렸습니다.nbsp스님이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생겨나지 않기를, 기아로 생존을 위협 받는 북한주민에게 생존권이 보장되기를, 우리의 여행이 원만하기를, 한인하느님, 환웅천황, 단군, 해모수, 고주몽, 대조영, 호국영령, 민주열사, 혁명열사, 사고와 재난으로 목숨을 잃은 영가, 조상 영가의 이름으로” 기원하셨고, 우리도 간절한 마음을 모았습니다. 천 년 전의 역사와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nbspnbspnbspnbsp다음 박물관에서 발해의 영역지도와 궁성 조감도를 보고 내성 길을 걸었습니다. 상경용천부 성터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장안성 못지 않게 큰 규모였습니다. 동궁 앞의 사람 얼굴 모양의 연못을 한 바퀴 돈 뒤, 내성의 궁성으로 들어서 제1궁성부터 제5궁성까지 갔습니다. 뒤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져 앞에서 바라보면 한 눈에 뒤쪽의 궁터가 들어옵니다.nbsp다음은 성을 쌓기 위해 돌을 채취한 자리에 생긴 현무호 호수를 보고, 목단강으로nbspnbsp걸어가 7공교를 찾아봅니다. 7공교는 발해시대 북쪽 거란지역으로 통하는 길에 있던 교각의 흔적입니다만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리만 확인하고 다음 장소로 옮겼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항일유적지인 봉오동 전투 기념비로 이동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실패 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무장독립운동 중 성공적인 전투의 하나였습니다. 버스에서 이 전투를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의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는 감격 어리게 기념비 앞에 서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조선 내에 반일투지를 높이는 데 기여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무장독립투쟁입니다. 이후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졌으나, 우리 선조들은 많은 희생을 거치면서 접경 지역의 중국, 러시아 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 중국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계열이든 민족주의 계열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소중한 독립운동 역사를 민족의 자긍심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nbsp다음으로 버스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하류로 가서 우리나라의 최북단 함북 온성군 풍서리를 건너다 봅니다.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가는 동안 이쪽의 풍요로운 자연과 저쪽의 가난한 자연이 대비되어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두만강 가에서는 97년부터 몇 년간 봄에 얼음이 풀리면 도강하던 탈북민들의 시신이 다수 발견됐다고 합니다.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를 돕는 ‘좋은벗들’의 활동은 그 동포들의 참혹한 모습이 계기가 되었고, 언젠가 이런 민족의 비극이 세상에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북한돕기를 할 때 누군가는 “북한 주민을 다 살릴 수 있나?”하고 물었는데, 스님은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티끌 보아 태산이라고, 살려야 한다. 현실의 일이 한계가 있으나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준비된 상황이 역사적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nbsp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도문시에서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조8729중우호다리가 두만강 압록강의 교각 중 가장 큰 규모랍니다. 기근이 심하던 시기에 이 지역 사람을 통해 옥수수를 트럭에 싣고 갖다 주었다고 하는데 어떤 날은 하루에 수백 명이 기다리기도 했답니다. 이 옥수수는 온성 근처의 탄광과 공장 노동자에게 지원되었고, 그곳에는 국군포로 가족도 있었는데 ‘좋은벗들’이 난민지원 활동을 하던 중, 중국 공안에게 간첩협의로 잡혀 모든 장비를 압수당하고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이때 탈북민을 인터뷰한 자료가 당시 가장 북한난민에 대한 정확한 자료였답니다. nbspnbspnbspnbspnbsp지금도 북한의 식량난을 여전하다고 합니다.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한주민에 대한 지원은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이 만주를 활보했던 발해의 역사를 안고,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의 현실을 아픈 마음으로 보듬어야 할 것입니다.nbspnbspnbspnbsp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이동했는데 이번 기행 중 다녀본 연회장 중 가장 깨끗하고 화려한 곳이라서 모두들 신기해했습니다. 원래 비싼 곳인데 공무원이었다가 퇴직하신 분의 도움으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합니다. 식사 전에 참가자들은 그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 그 분은 법륜스님이 하시는 일에 존경을 나타내며 맛있게 식사하라고 겸손의 미소를 보이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제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 제일 맛있다며 참가자들의 얼굴이 마치 아이들처럼 환해졌습니다. 식사 후 항일독립운동을 주제로 저녁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먼저 조선조 500년과 구한말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정리 말씀으로 강의를 여셨습니다. 조선이 개국하여 임진왜란이 있기 전까지는 평화로웠으나 국란을 겪으면서 외세의 도움을 받았고, 전쟁의 피해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등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배세력이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는 주변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영8729정조 때 개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순조에 이르러 세도정치가 강화되며 가렴주구와 매관매직 등으로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였고 세금을 견디지 못하여 유민이 되었고 홍경래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고, 삼도민란이 일어났지만 이념과 조직이 없는 자발적, 산발적 봉기로 대부분 진압이 되고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혼란기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최제우 선생의 동학이 일어나 아주 빠른 속도로 전파가 되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또한 이 시기의 지배세력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지만 국내적으로는 개혁을, 국외적으로는 개방을 했어야 했는데 국제정세에 대한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고 결국은 수구세력으로 그치고 만 것입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하여 경복궁을 재건한다는 등 백성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했어요”nbspnbspnbspnbspnbspnbsp“외국에 가보고 온 젊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도움을 얻어 개혁을 추진하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어요. 갑신정변이 실패한 것은 이들이 아직 국가 경영을 할 준비도 안되어 있었고 역사의식의 부재로 외세를 등에 업고 한 요인이 컸고 그래서 나중에 이들이 친일세력이 된 것이에요”nbspnbspnbspnbspnbspnbspnbsp이때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서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나 지배세력은 청나라 군대를 끌여들였고 일본과 청의 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조선땅에 들어와 우리 동학혁명군 약 30만 이상을 학살한 과정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 외세에 의한 개혁인 갑오경장, 그리고 이어지는 아관파천, 을사보호조약, 군대해산, 마침내 1910년의 한일합방에 이르는 안타까운 역사의 과정에 대한 말씀에 이어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3.1운동의 실패로 현장독립운동가들은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이곳 만주에 유격부대를 만들어 국내의 일본 초소를 침공하는 전략을 펼치자 일본이 국경을 넘어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한 것이 봉오동 전투, 여기서 실패한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중국영토에 정규군을 보내 독립군을 소탕하려고 한 것이 청산리 전투인데, 이 전투들에서 일본의 주력부대가 수천명이 사상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격부대의 승리는 전투에서의 승리이지 전쟁에서의 승리는 아니지만 일본제국주의의 강력한 부대가 이렇게 크게 패한 것은 엄청난 일이고 3.1운동이 실패로 끝난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nbspnbsp이러한 독립운동이 이후 사회주의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독립운동으로 갈라져 노선갈등이 생기고, 이를 통합하려는 신간회 등의 움직임이 수포로 돌아가고, 분단을 통해 이러한 분열이 심화되어 오늘에 이른 과정을 설명하시면서 이제는 편가르기를 하며 서로 상대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그가 기생이든 승려든, 양반이든 평민이든, 사회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직업이 뭐든 중요하지 않아요. 독립운동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중요해요. 그가 나라를 위해 정말 노력을 했느냐를 보아야 해요. 그리고 젊을 때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변절한 사람을 모두 빼버리면 독립운동한 사람은 얼마 남지 않게 돼요. 역사에 대해서는 포용적으로 바라보아야 해요. 통합을 해야 하잖아요. 과거에 대해서 진실을 밝히되 화해를 하고 앞으로는 우리의 힘을 통일을 위해서 쏟아야 해요”nbspnbspnbspnbspnbsp이 말씀을 하시면서 다만 식민지시대에 친일로 일관하고 해방 후에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분단과 독재와 반민주에 일조한 사람들은 반드시 진상을 밝혀 문책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선을 그으셨습니다. 그리고 일견 실패한 것 같은 역사에 대한 의의를 이야기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동학농민운동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떤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3.1운동이 실패했지만, 없었다면 어떤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4.19도 마찬가지고.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서는 성공한 것이에요. 통일도, 우리가 노력해서 통일을 이루면 좋고, 설령 실패해도 우리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후손들에게 자랑이 되고 성공의 단초가 되는 것이에요” nbspnbspnbspnbspnbsp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이 열등의식과 상처를 치유하고 인류문명의 주인공이 되는 길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독립운동사가 정리가 안되면 일본에 대한 열등의식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힘으로 통일을 한다면 우리의 민족적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고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상고사에 대해 정리한다면 중국에 대한 변방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현대문명에 대한 문제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개인 수행이나 환경 문제 같은 서구에 대한 열등의식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겪은 고통을 경험삼아 가난한 나라를 도울 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돕는다면 서양 사람들보다 더욱 인도적으로 하게 될 겁니다. 자신이 입었던 상처를 치유하게 되면 다른 이들을 이해하게 되고 해결책을 찾게도 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그래서 이 역사기행은 ‘민족사 전체에 대한 치유’라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까마득한 우리 역사의 시원과, 선조들의 진취적 기상과 훌륭한 문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을 현장에서 보고 느낀 자긍심과 감동으로, 민족의 사명인 통일은 물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지금 서있는 이 자리에서 한발짝 나아가는 힘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역사기행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오늘 밤이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입니다. 내일은 저녁식사 후 밤새도록 심양으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버스에서 자게 됩니다. 참가자들은 남은 무박 2일의 일정을 잘 보내기 위해 짐을 정비하고 역시 새벽 4시에 출발하기 위해 서둘러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내일은 청산리 전투터를 시작으로8729 항일항쟁지를 둘러보고 용정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바로 심양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2014.8.7. 동북아 역사기행 다섯째날 - 백두산, 비룡폭포 소천지, 지하삼림, 돈화
오늘은 동북아 역사기행 다섯째 날로서 백두산과 발해 유적지 일부를 돌아보는 일정입니다. 어제 날씨는 좋았으나 남편 산문이 폐쇄되어 오르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인지 4시 50분부터 버스에 오른 참가자들의 표정에서 천지를 보고싶어 하는 열망과 설레임이 느껴졌습니다. 백두산 아래 마을 이도백하는 다른 곳과는 달리 아침 공기가 싸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고 맑아서 상쾌했습니다. 여름 휴가철이 겹친 시기이고 최근 들어 중국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라 사람들이 많으면 고생한다고 아침밥은 옥수수 두 개씩으로 해결하고 서둘러서 출발하였습니다. nbsp이도백하에서 백두산 북편산문까지 가는 40여분 동안 자작나무와 각종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원시림을 보며 마음까지 시원해짐을 느꼈습니다. 북쪽산문 매표소 입구에 버스가 다다를 무렵 원시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천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입장 시각이 한참 남았고 참가자들이 추울까봐 스님께서는 걱정하시며 미리 나가지 말고 버스에서 대기하라고 하셨습니다. 6시쯤 버스에서 내려보니 우리 일행이 1등일 줄 알았건만 먼저 와 있는 중국 관광객들이 꽤 되어 다들 놀라워했고,nbspnbsp스님께서는 청년대학생 일정에서는 30분정도 더 앞당겨봐야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6시 30분 매표시간이 되자 표를 사기위해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매표소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놀라워했고 우리나라에 비해 공중도덕이나 줄서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것에 대해 모두들 한마디씩 하며 표를 기다렸습니다.nbspnbspnbsp오늘 첫 번째 일정인 천지를 보기 위해 셔틀버스와 승합차로 두 번 갈아타고 올라갔습니다. 스님께서는 멀리 보이는 백두산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아래에서는 잘 보여도 또 올라가면 못 볼 때도 있습니다.”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승합차에 오르니 운전기사가 우리나라 가수가 부르는 신나는 가요를 틀어주고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 같은 느낌이 나도록 달리는 바람에 모두들 짜릿한 즐거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느끼며 15분 정도를 달려서 천지에 도착했습니다. 듬성듬성한 구름 사이로 활짝 열린 파란 하늘 아래 그 보다 더 짙푸른 천지 물과 웅장한 바위산들의 위용에 흥분한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백두산 정상을 좀 더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하시기 위해 여러 번 왔다갔다 하시며 챙기셨습니다. nbsp조금 춥기는 했지만 모두들 개인사진과 스님과 함께 하는 조별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올라갈 때와 같은 승합차를 타고 다음 순례 장소인 비룡폭포로 향했습니다. 비룡폭포로 갈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주차장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참가자 중 한 명이 휴대전화를 잃어버려서 찾지 못할 것이라고 당황하며 걱정하고 있었는데 중국관광객이 주워서 경찰에게 가져다 준 것을 우리 스탭에게 알려주어 찾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 일행과 스님까지 모두 박수를 치고 그 분들께 감사를 표했습니다. 20인승 셔틀버스를 잠시 타고 내린 후 1.2Km쯤 걸어가니 군데군데 누런색 유황 노천온천이 보이고 길게 내려오는 새하얀 물줄기를 따라 눈을 돌리니 멀리 회색의 화산 지형 사이로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비룡폭포가 보였다. 따가운 햇살이지만 스님께서는 한 명 한 명 비룡폭포를 배경으로 개인 사진을 찍어 주시고 비룡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원리에 대해 잠시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소천지로 향했습니다. 소천지는 작은 화산호인데, 모양은 둥글고 아담하며 호의 안은 평탄해 보였습니다. 주변에 사스레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있어서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함께 잔잔한 물에 비춰진 모습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스님을 따라 돌로 포장된 사스레나무 사잇길로 산책을 하니 고요하여 저절로 명상이 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소천지를 나와 스님을 따라 800여 미터를 걸으니 건너편에 위치한 녹연담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보았던 소천지는 맑은 물인데 비해 녹연담에 고인 물은 신비하게도 옥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도 이렇게 예쁘게 만들 수 있을까 싶은 폭포가 세 줄기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는 몇 마리의 노란 잉어를 보고 함께 간 일행들은 “이렇게 넓고 깨끗한 연못에서 살고 있는 너희들은 참 행복하겠다.”하여서 함께 웃었습니다.nbspnbspnbsp지하삼림을 가기 위해 셔틀버스 주차장에 줄을 서려고 하니 수많은 인파로 인해 많은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6년 전 쯤에 비하면 한국 사람은 거의 볼 수가 없고 중국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을 보니 백두산이 중국인들에게도 의미가 있고 인기가 있는 곳임이 실감이 났습니다. nbspnbsp지하삼림은 말처럼 땅속에 숲이 있는 것은 아니고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함몰된 넓은 면적의 땅에 숲이 형성된 곳을 말하며 주변을 삥 둘러서 절벽이 있으므로 마치 땅 아래에 숲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이 지역은 용암이 갈라진 틈 사이로 깊고 좁은 계곡을 이루어 물이 흐르거나 지하로 흘러가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삼림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 활엽수들로 원시림을 이루고 있으며 쭉쭉 뻗은 나무, 오래된 이끼 위에 다시 자라는 어린 나무, 쓰러진 나무, 연리지나무 등 온갖 나무들뿐만 아니라 풀향기와 꽃향기 등이 어우러져서 스님께서는 “지하삼림은 가는 길 자체가 볼거리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홍신작가께서 ‘대발해’ 글을 쓰실 때 지하삼림을 보고 발해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그렸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nbspnbspnbsp1시간여의 지하삼림 순례를 마치고 버스 승차를 위해 또다시 줄을 서서 기다린 후 버스에 올랐습니다. 스님께서는 점심 먹으러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백두산 천지 잘 봤느냐며 물으시고 “백두산은 산을 넘어 민족의 혼입니다. 백두산을 본 공덕으로 맑은 기상을 갖고 살았으면 합니다. 공동체의 소금과 빛이 되고 천지를 본 힘으로 통일의 힘이 되세요.”라고 말씀하셔서 뭉클한 감동과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힘들게 다니느라 몸이 피곤한데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밥을 빨리 먹으면 체하니 조심하라고 당부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어제 저녁에 맛있었지만 아쉽게도 넉넉한 시간으로 즐기지 못한 식당에 다시 가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하고 2시 50분쯤 발해의 첫 수도인 돈화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차에 타자마자 새벽부터 서두르느라 힘들테니 돈화가는 길에 2시간쯤 쉬라고 하셨고 그 말씀이 떨어지기도 전에 모두들 달콤한 낮잠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nbspnbsp5시쯤 돈화의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동모산성은 대조영이 영주에서 탈출해 와서 이 곳 돈화에 자리잡은 후 세운 산성입니다. 주위는 평지이고 얕은 야산에 산성을 쌓은 것이라 주변에서 오는 적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대석하가 흐르고 있고, 우물도 있고, 병영자리, 거주지도 있다고 합니다. 평지성은 영승유지로 추정되지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nbsp그리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육정산에 발해 왕실의 공동묘지가 있는데 여기서 정혜공주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발해인의 기록물이 나왔는데,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발해인 스스로가 기록한 기록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최근에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는데, 아직 중국 정부가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이 공개될 때 발해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오늘 일정의 마지막으로 돈화 시내에 있는 강동 24개석을 보러 갔습니다. 녹슬고 덜컹거리는 철조망 속에서 함부로 방치되고 있는 듯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강동 24석은 건축물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아직 정확하게 무엇에 쓰였던 것인지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고 합니다. nbsp시내의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이어 저녁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오늘 일정을 돌아보시고 음식 먹고 체한 분들을 통해 욕구를 조절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작은 실수를 통해 더 큰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오늘 백두산 잘 다녀오셨지요? 피곤하지요? 구경하는데 6시간이나 걸려 점심이 늦었습니다. 일반 관광객은 우리처럼 자세하게 안 봐요. 천지 호수가 제일 크게 보이는 것은 북편이에요. 서편에서는 작게 보여요. 남편에서는 북한쪽 계단 내려가는 것이 안 보여요. 그런데 북편은 혼잡한 것이 문제에요. 하지만 오늘은 아주 한가한 편이었어요. 오늘 구경을 아주 잘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스님이 그렇게 주의를 주셨는데도 10명 이상이 체해서 강의를 못 듣고 있는 걸 예를 드시면서“허기질수록 음식을 조금 먹어야 합니다. 25일 단식했으면 25일 넘게 음식을 거의 안 먹어야 해요. 폭식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피곤한데다 과식하고 버스를 계속 타서 체할 조건이 됐어요. 음식 먹는 까르마를 자기가 조절해야 합니다. 몸을 통제 못하면 성질도 통제하지 못해요. 자기 몸을 갖고 실험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해요. 이 세상에 공부거리가 아닌 게 없어요. 한 순간 놓치면 몸이 고생이에요. 하지만 작은 실수를 통해 배우면 더 큰 실수를 예방할 수 있어요.”nbspnbsp“인생이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걸 통해 뭔가를 배우는 것이에요. 상황은 내 뜻대로 할 수 없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내게 유리하도록 바꿀 수 있어요. 이것이 수행이에요. 우리는 욕구대로 되어야 기분 좋아하는데 미래를 위해 몸을 위해 결국 나를 위해 욕구를 조절해야 합니다.“ nbsp이어서 오늘 주제인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의를 계속하셨습니다. 발해는 처음 당나라에서 멀리 옛 고구려 북쪽 국경인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위쪽 흑수말갈을 흡수하여 영토를 넓혔는데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통치했고 5경 중 3개 경인 중경, 상경, 동경을 이 지역에 두어 발해 중심지로 삼았다고 하셨습니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영토가 큰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오늘날 발해 역사가 논쟁거리가 되니까 중국이 발해 유물을 공개하지 않고 현재 흑룡강성의 상경용천부만 공개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학교 역사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상경용천부를 보게 되는데 학교에서는 발해 석등사진 정도만 다루죠?nbspnbsp발해에 대한 기초 지식이 너무 없어요. 특히 신라와 발해가 싸워서 발해를 계승하는 자세가 부족했습니다. 실학이 들어오면서 발해 역사 연구가 비로소 시작되었어요.nbspnbsp 발해는 잃어버린 역사입니다. 되찾아야 해요. 역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역사를 잊는 거예요.“ nbsp유대인은 자기 말은 지키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탈무드를 통해 민족의 역사, 신앙, 문화를 학교와 가정에서 철저히 가르쳐서 매우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반면, 연변 조선족은 말은 지켰지만 조선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비교하시면서 역사기행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중국내 고구려, 발해 유적지 안내 책과 우리 말로 된 우리 역사책과 중국안 독립운동가 이야기책을 보급하는 일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우리나라 역사 교육은 왜곡되어 있어요. 국수주의적 역사를 가르치라는 게 아닙니다. 내 존재를 이해하려면 나의 뿌리와 사회적 관계를 알아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예측하지 못해요. 교사는 너무 디테일한 지식에 매달리지 말아야 해요. 줄거리를 잡아 핵심을 가르치고, 의미를 부여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발해에 대한 객관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세워지는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nbspnbsp“중국 사서에는 발해를 고구려의 별종 즉 고구려의 한 무리라고 나와요. 고구려 지배계층이 권력 투쟁으로 분열할 때 중간층은 내 나라를 지켜야할 이유가 없어져요. 이럴 때 지도자는 백성들의 삶과 가까이 있고 지도부부터 힘을 합해야 합니다. 세월호 문제가 났을 때 여야가 분열하여 싸우면 국민은 양쪽이 똑같게 느껴지고 피곤해요. 고구려도 이런 상태에서 강력한 외부 공격에 지배 계층이 항복하고 고구려 유민들이 왕족을 내세워 저항하지만 실패하고 말아요. 고구려가 멸망한 후 696년 거란족 이진충의 난이 난 틈을 이용해 고구려 대조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영주를 탈출하여 추격하는 당군을 격파하고 진국을 세웠어요. 진국이란 큰 나라라는 뜻이에요.“ 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발해의 흥망성쇠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 처음에 당은 발해가 변방 국가라서 별로 관심이 없었고 당나라 측천무후도 가능한 전쟁을 안 하려고 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셨습니다. 대조영이 죽자 큰아들 무왕는 당나라에 강경 입장이라서 당나라와 연합하는 흑수말갈을 치려고 했는데 대문예가 전쟁을 반대하고 당나라로 도망을 갔지만 결국 흑수말갈지역을 흡수하여 발해 영토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왕이 죽고 문왕의 문예부흥 시대를 설명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문왕은 정벌 중심이 아닌 문치를 하고 당나라와 친하게 지냈어요.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그리고 동경용원부로 옮겼어요. 정혜공주는 문왕의 셋째 딸이고 정효공주는 다섯째 딸이에요. 왕위에 48년이나 있어서 치적이 깁니다. 산둥반도 절도사로 고구려 사람인 이정기가 임명되어 제나라를 세웠는데 제나라와 발해는 아주 사이가 좋았어요. 문왕은 당나라와 직접 부딪치지 않고 거란이나 일본과도 사이가 좋았어요. 다만 신라와는 전쟁은 안 했지만 관계가 소원했던 것 같아요. 남경남해부는 신라와 일본로는 왜와 연관이 있어요.nbspnbspnbspnbsp발해는 229년간 지속할 때까지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어요. 발해를 공격하거나 위협하는 세력이 없었어요. 그런데 뜻하지 않게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침공하여 부여성이 함락되고 상경용천부를 공격하자 왕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당나라가 먼저 멸망하고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가 멸망합니다. 이들은 자체 붕괴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결국 중국 본토는 송나라가, 북쪽은 요나라가, 남쪽은 고려가 건국됩니다.”nbsp발해는 고구려 역사의 전통성을 계승했고 발해사와 독립운동사 그리고 상고사를 새롭게 정비하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면서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대발해가 왜 갑자기 멸망했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입니다. 일본 학자는 백두산 폭발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 폭발은 폼페이 화산보다 100배 이상 위력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주변국도 혼란기라서 갑자기 망한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발해 유물로는 내일 가는 상경용천부와 발해석등, 대불상 그리고 영광탑, 강동24석 등 많지 않아요.“nbspnbsp 강의가 끝나고 호텔로 이동하여 한 대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짐 운반용으로만 사용하고 각자 걸어서 숙소로 올라갔습니다. 내일은 발해 유적지와 봉오동 전투터, 그리고 두만강 순례를 위해 4시에 출발 예정입니다.
2014.8.6.동북아 역사기행 넷째날 - 림강, 압록강, 장백, 이도백하
이제 동북아 역사기행 넷째 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압록강을 따라 버스로 이동하면서 강 건너편 북한 땅을 보고 북한 사람들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보는 날입니다. 림강을 거쳐, 장백, 백두산 아래 동네 이도백하까지 가는 여정이 길어서 이른 새벽에 출발했습니다. 새벽 3시 20분에 기상을 해서 4시에 출발 예정이었는데 모닝콜 소리를 못 듣고 늦잠을 잔사람, 방에 물건을 두고 온 사람 등 이런 저런 사연들로 예상보다 20분 정도 출발이 늦었습니다. 전 날 호텔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컴컴한 방안에서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서 더듬더듬 짐을 싸고 내려왔기 때문인 듯합니다.nbsp 한 시간 후, 림강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아침식사는 림강 아침시장에서 각 자 사 먹기로 했습니다.nbsp새벽 5시인데 이미 해는 환하게 떠 있고 길거리 시장에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각종 과일들, 야채들, 튀김류, 빵, 돼지고기, 생선들 등 갖가지 음식들이 푸짐합니다. 30분 이내로 각자 아침거리를 구입해서 버스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과일과 땅콩, 만두, 튀김, 빵, 옥수수, 사과, 블루베리, 복숭아, 바나나 등을 사서 버스로 부리나케 돌아옵니다. 버스 밖 길거리에서 서로 사 온 음식들을 나누어 맛나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스님은 2원으로 아침 식사를 구입하셨다고 하시는데 참가자들은 저마다 얼마를 썼는지도 모르게 이 음식, 저 음식을 산 거 같습니다. 간단하게 음식을 맛보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장백으로 향합니다. nbsp림강에서 압록강 상류를 향해 4시간 동안 올라가는 여정입니다. 림강에서 백두산 최상류까지 중국 쪽에서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계곡물을 번호를 붙여 24도구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nbsp 압록강 너머 북한 땅을 바라보니 산은 온통 뙈기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계단식도 아닙니다. 사람이 서 있기도 힘든 가파른 산에 옥수수, 콩 등 작물을 심어서 산에 있어야할 나무는 모두 잘려 보이지 않고 곡식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연두색의 조각보가 온산에 빼곡히 펼쳐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뙈기밭 주인들은 직장에 가기 전이나 퇴근 후 밭을 매우 열심히 일군다고 합니다. 직장에서의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각자의 뙈기밭을 열심히 가꾸어 식구들의 식량을 마련한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건너편에 보이는 집들은 검은 회색빛으로 오랫동안 손을 못 보아 한눈에도 남루함이 느껴집니다. 북한이 조금씩 자유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고 한다니 그나마 다행스럽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우리나라가 통일되고, 주변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여 동아시아 공동체가 만들어져서 모두 함께 잘 사는 날이 얼른 오기를 기원해봅니다.nbsp65279nbsp버스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압록강 위로 떠내려 오는 커다란 북한 뗏목을 만납니다. 커다란 오징어 모양으로 나무를 주렁주렁 엮어서 뗏목을 만들어 강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 내려가서 자른 나무들을 판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네다섯 명 타고 조정을 하는데 뗏목 크기에 비해 그들은 아주 작아 보입니다. 연이어 뗏목들이 내려와서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고 사진을 계속 찍었습니다. 방학인지 아이들이 여러 가지 색깔의 튜브를 타고 물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여자들은 강에 빨래를 하고 군인들이 목욕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저 강 하나만 건너면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동포들을 우리는 왜 그리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요? 많은 수의 남한 사람들이 통일을 원하지 않고 북한의 가난을 도우려고 하지 않는 현실 속에 스님같이 통일을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 계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의 지혜로운 생각과 실천을 배워 저희들도 통일을 위해 조금씩 노력하도록 해야겠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긴 시간을 달려 장백에 도착했습니다. 장백에는 발해시대의 유일한 탑인 영광탑이 남아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영광탑을 볼 수 있는데 유일하게 남은 발해의 영광탑에 와서 천년 후의 후예들이 선조의 기상을 이어받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을 발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하루빨리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생존권과 인권이 보장되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여기 모인 사람들이 기꺼이 최선을 다하기 바라는 스님의 발원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북한 혜산시가 아래로 훤하게 내려다 보였는데 제법 큰 도시였습니다. nbsp1990년대 좋은 벗들에서 북한 돕기를 할 때 많은 도움을 주셨던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시고 그 부인인 할머니가 식당으로 스님을 만나러 오셔서 가슴 아픈 경험담을 나눠주셨습니다. 북한을 탈출하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어느 여자 분을 우연히 알게 된 할머니가 그녀가 뇌종양이라는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도울 방법이 없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결국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탈출한 북한 난민들을 돕는 일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북한에서의 삶이 힘들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 사연들입니다. nbspnbspnbspnbspnbsp점심 식사 후 백두산으로 향했습니다. 압록강 상류로 갈수록 강폭은 좁아지고, 나중에는 작은 냇가처럼 좁아졌습니다. 폴짝 뛰면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함부로 건널 수 없는 곳인가 봅니다. 버스에서 잠시 내려 압록강 물에 발을 담그고 강 건너편 사람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해 봅니다.nbspnbspnbspnbspnbsp한참 후에 드디어 백두산 남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오르는 길이 산사태로 파괴되어 도로공사 한다고 지금은 남문으로는 오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중국에 비싼 입장료내고, 눈치를 보면서 천지를 오를 것이 아니라 북한 땅을 통해 백두산 동문으로 오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남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천지를 못 본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문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지루할 때쯤이면 다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조별 대항 노래자랑을 하고 또 야외에 내려 수박을 잘라 나눠먹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특히 스님께서 수박을 자르는 시범을 보여주셔서 참가자들을 즐겁게 하셨습니다.nbsp계속해서 장백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3호차 타이어가 펑크가 났습니다. 다른 버스가 타이어를 가지고 와서 교체하는 동안 3호차 탑승자들은 버스에서 내려 20분가량 도로를 따라 다른 버스 탑승자들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습니다. 버스 속에서 오랜 시간 접혀 있던 다리도 펴고 백두산 야생화가 그득한 길을 걸으니 모두들 행복해합니다.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는 신기한 자작나무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버스를 수리하는 동안 참가자들은 버스에서 내려 잠시 산책도 하고 법륜스님 사회로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예기치 못한 일이 하루에 한번 꼴로 일어나지만, 그 때마다 적절하게 참가자들이 불편하지 않고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상황을 이끌어 나가시는 지혜가 빛나는 것 같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흐르는 마을인 이도백하에 있는 숙소에 도착한 후 스님의 저녁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nbsp백두산 천지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천지의 물은 북쪽으로 흘러 송하강으로 가고, 백두산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남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간다고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백두산에 이어서 스님은 오늘 압록강 1도구부터 24도구까지 오면서 고개가 아프도록 바라봤던 맞은편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압록강을 쭉 따라오면서 북한을 보셨는데 소감이 어때요?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은 면도 있고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감정이 교차했을 겁니다.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 왜 북한이 이렇게 되었나? 첫 번째, 대외적으로는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경제 봉쇄정책 때문입니다. 두 번째, 대내적으로는 소위 말해서 김일성 유일사상으로 가면서 기술보다 이념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군비에 GDP의 25 이상을 사용하는 등 비경제적인 것에 돈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북한이 왜 못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부터, 왜 북한동포 돕기를 하게 되었는지,왜 북한을 돕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그동안의 스님의 북한동포 돕기 활동 경험 이야기를 나눠주시며, 북한 동포들이 겪는 고통, 탈북한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하나하나 말씀을 해주십니다. nbsp“이런 아픈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보면 북한동포 돕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십년 넘게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하면서 얻은 결과는, 이 문제는 통일을 해야만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스님과 통일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북한 동포들의 고통과 아픔을 결코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통일을 해야 하고, 통일을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불철주야 가리지 않고 하고 계십니다. 내일은 백두산 북문으로 올라가서 천지를 보고, 오후에는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 볼 예정입니다. 일반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새벽 일찍 출발해서 매표소 앞에 가장 먼저 도착하려고 합니다. 부디 천지의 선명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nbspnbsp
2014.8.5. 동북아 역사기행 셋째날 - 국동대혈, 국내성,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역사 기행을 시작한 지 오늘은 셋째날입니다. 오늘 오전에는 고구려 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국동대혈과 국내성,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우는 장군총, 그리고 드넓은 영토를 확장했던 광개토대왕의 비와 릉에 갑니다. 그리고 이 곳 집안에서 점심을 먹고 북로를 따라 채석강, 관마산성, 서대묘, 천추묘를 차창으로 본 후 통화를 거쳐 백두산 관광지 거점인 백산을 향해 갈 예정입니다. nbsp 어제 공지했던 대로 국동대혈로 가는 버스는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하는 인사말이 떨어지자마자 새벽 4시에 바로 출발했습니다. 무릎관절이 아프신 한분의 보살님만 빼고 3대의 버스가 새벽의 어둠을 뚫고 압록강을 끼고 달려갑니다. 출발할 때는 밖이 어두워 산을 어찌 올라가나 걱정스러웠는데 이내 환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맞이하는 이 새벽여명이 이 역사기행을 다니면서 생기는 역사의식과 같게 느껴집니다. 새록새록 솟아나는 역사의식을 맛보는 기쁨이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저녁 늦은 시간까지의 살인적인 일정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nbspnbsp65279nbsp국동대혈은 국내성의 동쪽에 있는 큰 굴을 의미하며, 고구려의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30분가량 올라갑니다. 국동대혈이 있는 산은 개인이 관리하고 있는 산에 위치하고 있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올라가는 중에 오토바이를 탄 현지인이 쫓아와서 중국공안인줄 알고 살짝 긴장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산에 투자한 사람이 고용한 관리인이라고 하여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관음보살을 보시고 있는 관음굴에 도착하였습니다. nbsp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중국인들처럼 행복과 건강과 재물을 위해 빌어 봅니다.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니 장상애라고 쓰인 큰 바위벽이 나타납니다. 중국에서는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긴 장자를 쓴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제2대왕 유리왕에게 권력가의 딸과 사랑하는 애첩이 있었는데 둘이 싸우다가 집으로 돌아가버린 애첩을 데리러 갔다가 혼자 돌아오면서 이 곳에서 황조가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장소라고 스님께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참가자 중 한 국어 선생님이 황조가를 멋들어지게 낭송하는 것을 들으면서 사랑 바위를 보니 정말 애닯은 연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nbsp다시 조금 더 올라가니 드디어 앞뒤로 시원하게 뚫린 국동대혈이 나타났습니다. 하늘로 통한다고 하여 통천동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정성스레 제단을 차리고 옥기 문명을 발달시킨 한나라 환인하느님, 청동기를 발달시킨 홍산문명을 기반으로 배달을 세운 환웅천왕님, 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님, 그리고 부여의 해모수님, 고구려의 동명성왕 이렇게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해가 뜨기 전 지내는 이 제사에서 신령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스님께서 고구려의 후예로써 1400여 년만에야 찾아옴을 참회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동아시아 공동체 출현을 천지신명께 간절히 기원하셨습니다. 제물로 올린 음식과 술로 다함께 음복하고 나서 둥글게 서서 남북한이 하나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며 ‘우리의 소원을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국동대혈에서 걸어내려오니 바로 앞에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먼저 내려온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두고도 북녘 땅에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강물에 손발을 담그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습니다. 다시 숙소로 가기 위해 압록강변을 따라 내려가니 올 때 보이지 않았던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 멀리 자전거타고 가는 사람,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아낙네, 물가에서 놓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반갑게 느껴집니다. 건너편은 자강도의 만포라는 곳인데 이곳과 집안사이에 하루 한번씩 기차가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 빨리 이 한반도가 평화통일이 되어 만포, 평양을 통과하여 집으로 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봅니다. nbspnbspnbsp 아침 식사 후에는 고구려의 산성인 환도산성과 짝을 이루는 평시성인 국내성을 한바퀴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9시도 안된 시간인데 햇볕이 벌써 따갑게 내리쬡니다. 북쪽과 동쪽 성벽의 모서리 지점에서 순례를 시작하면서 국내성에 대해 스님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국내성은 동쪽, 서쪽 길이가 짧고 남쪽, 북쪽 길이가 긴 직사각형 모양입니다. 가장 공격받기 쉬운 곳은 성문과 모서리입니다. 고구려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 공자성을 쌓았으며, 모서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치성을 쌓거나 각지기 않게 둥글게 굴려서 쌓았습니다. 동쪽 성벽이 가장 파괴가 심한데 이유는 도시화가 되면서 사람들이 이 돌로 집을 짓거나 때론 성벽을 허물고 그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북쪽, 서쪽은 보존 상태가 그래도 조금 좋고 남쪽은 현재 복원중입니다.” nbsp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성벽 위에 나물을 말리거나 빨래가 널려진 모습을 보면서 425년 동안 강성했던 한 나라 수도의 유적지가 이렇게 남의 땅에서 푸대접받고 있는 모습 속에서 처량함과 슬픔이 느껴집니다. 멀리 북쪽으로 어제 보았던 환도산성이 보입니다. 서쪽 벽에는 통구하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해자기능을 하고 있는데 백암산성, 환도산성, 오녀산성 그리고 오늘 국내성에서 자연지형을 잘 활용하는 고구려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감탄하게 하는 기술과 지혜는 한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연구를 거쳐 이루어졌을 것인데 틀리면 묻고 잘못되면 고치고 안 되면 다시 하는 우리 정토행자들은 고구려의 후예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nbspnbspnbspnbspnbsp통구하는 남쪽 성벽 앞을 흐르는 압록강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따라 걸으면서 스님께서는 북한돕기를 시작한 계기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주셨습니다. 1995년도에 북한 압록강에 대홍수가 나고 나서 식량난이 심해졌다고 들으셨는데 처음엔 믿지 못하다가 가이드가 직접 배를 태워 비참한 실상을 보시고야 북한 돕기에 적극 뛰어드셨다고 합니다. 북한 아이들은 배고프지만 인도의 아이처럼 “박시시”하면서 구걸할 자유도 없다는 것을 아시고 북한아이를 돕기를 발심하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이 세상의 어느 한 곳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 비만으로 고생하고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는 이러한 불균형을 생각하면 어이없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18년nbspnbsp동안 주어진 처지에서 최대한 북한을 돕고자 노력하신 스님과 이제는 JTS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 통로가 있음에 대해 고마움을 느껴봅니다. nbsp다음은 2000년 동안 그 웅장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군총으로 향합니다. 장군총에서 스님과 조별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사료가 아쉽게도 없습니다. 중원을 차지했던 중국의 입장에서 고구려를 변방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무덤은 왕의 무덤이 아니라 장군의 무덤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 같습니다. 장군총은 7층 22계단으로 되어 있고 전체 돌이 1100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돌에 홈을 새겨서 돌이 밀리지 않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돌이 밀리지 않도록 주위에 호석이라 불리는 받침대를 3개씩 두었는데 12개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하나가 없어진 곳은 찌그러져있습니다. 그리고 관을 두는 석실의 뚜껑을 덮는 돌이 무게가 50톤이나 됩니다. 또한 지반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땅속에 진흙과 강에서 나온 돌을 넣었습니다. 진흙은 지진이 발생할 시 탄력성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5층에 석실이 있었고 꼭대기위에는 누각이 있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장군총 뒤쪽엔 제단과 함께 장수왕의 후비무덤으로 보이는 배묘가 있는데 그 모양이 고인돌과 거의 같습니다. 이곳 집안에서 많이 발견되는 고구려의 돌무더기 무덤양식에서 청동기시대 유행했던 고인돌묘가 조금씩 변화되어 옴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민족의 정통성에 대한 줄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어 한민족의 자손으로써 긍지가 느껴집니다. 이곳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빨리 통일이 되어 육로로 통해 이 곳 집안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광개토대왕비로 이동을 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때 만든 것으로 높이 6.39m, 너비는 1.34m에서 2m입니다. 장수왕은 그의 아버지가 이룬 역사를 기록하고 건국부터 호태왕까지의 역사도 기록했습니다. 중심은 호태왕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비석은 어마어마한 큰 돌을 자연스럽게 다듬고 글자를 새긴 것인데, 웅대한 자연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nbsp nbsp광개토대왕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광개토대왕릉이 있습니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로 죽음을 맞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확장했던 광개토대왕의 묘입니다. 그 업적에 걸맞게 묘의 크기는 장군총의 크기보다 훨씬 큽니다. 장군총은 한변의 길이가 32.6m이지만 광개토왕릉은 65m나 되고 호석도 한 변에 5개나 둘러져 있습니다. 그러나 급히 쌓다보니 강돌이 아닌 산돌까지 넣고 쌓아서 많이 무너져 상당 부분이 돌무지처럼 변했습니다. 제대로 된 발굴과 보존작업이 시급해 보이는데 남의 나라에 있어 손쉽게도 이런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애석하게 느껴집니다. nbspnbspnbspnbspnbsp 집안으로 다시 돌아와 점심을 먹고 큰 돌무지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갔습니다. 이 일대에서 가장 크기가 큰 묘는 천추묘라고 합니다. 서대묘도 보고 내일 만나게 될 백두산에 가기 위해 백산으로 출발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도중에 계곡에서 아침에 산 수박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통화를 가는 길은 집안으로 가는 길 중 북로인데nbspnbsp가는 길에는 관마산성 성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산과 산이 조금씩 좁혀들면서 마주 보는 곳에 병목현상이 생기는데 이곳에 적을 효율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산성을 쌓은 곳입니다.nbsp백산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전처럼 로비에 짐을 가지런히 놓은 채 바로 강의장으로 모였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답사의 부족한 부분을 정리해 주시다가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해서는 띄어쓰기 오류, 지워진 글자로 인해 생긴 임나일본설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표와 지도를 보고 우리 민족의 시대적 흐름을 알기 쉽게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우리가 살았던 지도를 보면 만주벌판, 북경, 산동반도, 내몽골이 다 배달나라의 영역에 있는데 점점 축소되어 현재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요하문명은 배달 문명의 중심지역이며 그 일파가 서남쪽으로 내려가 중원에 근접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은나라가 멸망하고 일부 유민은 고조선지역으로 철수하고, 또 일파가 동쪽으로 이주해서 평양까지 내려오는데 이쪽까지 고조선의 영역입니다. 부여시대는 동북쪽은 부여가 차지했고, 반도 쪽으로 마한, 진한, 변한, 옥저, 동예. 동쪽은 여진족, 서북쪽은 거란족, 선비족 흉노족이 분포하고 있었어요. 고구려가 건국되면서 만주벌판 국가들은 고구려로 통합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의 과정에서 당나라의 힘을 빌렸기에 역사의식의 부재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주성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당나라는 백제 멸망후 부여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멸망후 평양에 안동도호부와 그 밑에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의 야욕을 눈치채고 당나라와 8년간 다시 싸워 당나라를 몰아낸 부분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다만 고구려 옛땅을 차지할 생각을 안했다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반도만 차지한 것만도 감지덕지해서 당나라 황제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극진한 태도를 취했거든요”nbspnbspnbspnbspnbsp또, 고구려의 패망과 발해의 재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시다가 창조성을 이끌어 내주셨습니다.nbspnbspnbsp“당나라는 고구려를 663년에 두 차례 침공을 했으나 실패했어요,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형이 당나라로 가서 군대를 빌려주면 당나라에 조공의 예를 갖추겠다고 하지요. 결국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참여한 전쟁에서 고구려는 패망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인구의 5인 20만명을 중국 전역에 분산 귀양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고구려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nbspnbspnbspnbspnbsp꼭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만이 창조가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끊임없이 조정해 나가는 것도 창조라는 것을 이번 역사기행 일정을 현지 상황에 따라 조정해 가는 것과 비유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고구려는 자주성은 있는데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데다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안주해 버리니까 결국 패한 것입니다. 역사공부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배우고 실패하고 도전하고 늘 나아가야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답습하면 정체가 되므로 있는 것도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공해도 조정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중국의 변방국가, 일제침략, 서양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중국은 자기 대륙 안에 들어와서 이룬 몽골의 원나라, 선비의 연나라까지도 자기 역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역사가 더 커졌어요. 반대로 우리는 배달 문명의 후예인 여진, 거란, 선비까지 중국 역사로 치부해 버려서 역사의 폭이 좁아졌어요. 하지만 우리는 중원과 대등한 역사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어요. 배달민족 아래 조선족이 중심이 되었다가,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족이 한번 큰 세를 이루며 형제에게 밀렸고 지금 남은 것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남북통일은 물론 일본과 문명적 연대 그리고 중원까지 연대하면서 서양문명을 극복하고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강의가 끝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친목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내일 일정을 위해 아쉬움을 남긴채 즐거운 시간을 마무리했지만 참가자들이 한결 더 친밀해진 것 같습니다. 내일은 림강을 거쳐 압록강을 따라 이도백하까지 가는 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