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 수행과 실천
  • 스님의하루

2015.1.14 인도성지순례 8일째 바이샬리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8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전 3시 20분, 새벽녘 일어나 짐싸고 움직이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졌습니다.nbspnbsp라즈길에서 5시간을 달려 바이샬리를 들러 쿠시나가르까지 가는 일정이라 평소보다 조금 이른 오전 4시에 출발하였습니다. 버스가 13대가 되다보니 일부는 라즈길의 숙소에서 출발하고 일부는 나란다의 숙소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비가 오는 듯한 짙은 안개 속을 무심히 달려나가는 버스 속에서 아침 예불을 하며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따릅니다.nbspnbsp▲ 새벽 4시 버스 안에서 예불을 하며 오늘 순례를 시작합니다.nbspnbsp오전 7시쯤, 스님께서는 수신기를 통해 버스 안에서 푹 자고 있던 순례단을 깨우시며 “지금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곳은 비하르주의 수도 파트나입니다. 비하르주는 인도에서 두 번째로 많은 8천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파트나는 야무나, 강가, 고그라, 간다키, 숀 등 다섯 개의 강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지금부터 다리가 시작되는데, 이 다리는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입니다. 다리 길이가 10km 정도 됩니다” 라며 지금 건너고 있는 다리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셨습니다. 또한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00년 뒤에 아쇼카 왕의 마우리안 왕조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작은 나루터였는데 당시 부처님께서 이곳에 큰 도시가 드러설 것이며 그 도시에는 물의 재앙, 불의 재앙, 사람의 재앙, 세 가지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후에 큰 홍수와 큰 불과 내분으로 결국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또 파탈리 푸트라는 왕궁 안의 사찰에서 일천 비구가 모여 제3결집이 이뤄진 곳입니다.” 라고 파탈리 푸트라에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바이샬리로 향하는 길에 4차선의 반듯한 도로가 새로 생긴 것에 스님께서도 놀라워하시며 평소에 걸리던 5시간 보다 시간을 줄일 수 있을 듯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안개가 짙어서 차 속도는 많이 내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도로의 지대가 높아서 도로가를 화장실로 이용할 수가 없다며 볼일이 급하신 분들을 챙겨주셨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에 “여기 망고나무 숲이 있는데, 급하니까 마음대로 누세요” 라는 말씀에 500여명의 인파가 오른쪽, 왼쪽으로 나눠 급한 볼일을 보았습니다. 볼일을 다 보고 나니 근처에 동네가 있어서 실례를 한 격이라 동네 사람들이 황당했을까 싶어 좀 미안했습니다.nbsp다시 버스가 움직이자 스님의 설명은 계속되었습니다. 공화정을 구성해 나라를 운영했던 민주적인 바이샬리를 부처님은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의 길을 떠나실 때, 코끼리처럼 고개를 천천히 돌려 바이샬리를 돌아보시며 “이 아름다운 도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또한 “도리천의 사람들을 보고 싶다면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을 보라”고 할 만큼 풍요롭고 자유로운 도시였으며 지금도 인도에서 국회가 개원할 때는 이곳 카라우나 포칼 연못의 물을 가져가 성수로 사용한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nbspnbsp오전 8시 30분경 진신사리탑 앞에 도착한 순례단은 4줄로 서서 가사를 입고 향을 피워들고 석가모니 정근을 하며 탑을 돌아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nbspnbspnbsp▲ 바이샬리 진신사리탑nbsp쌀쌀한 아침 날씨에 두텁게 입은 옷 위에 가사를 입은 대중을 보시며 스님은 “꼭 절구통처럼 입고 있다” 하시며 웃음과 함께 바이샬리의 역사적인 성지 중 하나인 이곳 진신사리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화장하고 남은 진신사리를 모신 탑입니다.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진신사리는 여덟 몫으로 나뉘어져 모셔졌습니다. 여덟 몫 가운데 하나가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에 모셔졌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200년이 지나고 아쇼카 왕에 이르러 부처님의 행적이 있는 곳마다 다 탑을 쌓았어요. 탑은 일종의 무덤인데 그냥 흙무더기만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여덟 개의 사리탑에서 사리를 꺼내어서 그것을 탑마다 다 하나씩 넣었습니다. 무려 8만4천개의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8만4천이라는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탑을 쌓았다는 뜻입니다.nbspnbspnbsp이런 사리 중에 아주 일부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중국으로 올 수는 있었겠죠. 그러나 많은 수가 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스리랑카를 비롯한 전세계에 흩어진 부처님의 사리를 다 모으면 아마 열 트럭이 넘을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사리가 귀하니까 부처님의 사리를 대신할 사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꼭 나쁜 의미는 아니예요. 부처님의 사리가 너무나 귀하니까 보석처럼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시지 않았는가 생각할 수가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자장율사에 의해서 사리가 중국으로부터 왔거든요. 그래서 통도사에 일부 모시고 황룡사에도 모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온 것은 여러군데에 모셨다고 하는데 현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인정되는 곳을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합니다.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이 다섯군데를 귀하게 여겨서 불자라면 보궁을 참배해야 한다고 하죠.nbspnbsp그런데 이 다섯군데를 참배하는 것도 정말 귀하게 여기는데, 거기에 비하면 이 진신사리탑은 백배 천배 귀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리탑입니다. 전 세계에 8개가 있는데 딱 3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곳을 지금 여러분들이 참배를 하신 겁니다.nbspnbspnbsp물론 부처님은 형상을 중요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음악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다 신기해했어요. 그래서 물으니 부처님께서 “저 하늘의 신들이 여래의 열반에 임해서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는 이곳을 참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해서 자기가 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하고 예배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바이샬리의 진신사리탑을 친견한 것은 신앙적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일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귀한 자리에 우리가 왔다 이것을 다시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nbsp그리고 바이샬리는 상업이 발달하고 진보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여성출가를 이곳에서 허용을 하셨어요. 석가족 출신의 여인들이 처음으로 부처님께 출가를 요청했거든요. 그 이유는 부처님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부처님의 어머님 되시는 분이 혼자가 되었어요. 또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분도 아들 라훌라마저 출가하면서 혼자가 되었어요. 부처님 당시에는 남자가 없으면 주인이 없는 존재가 되어서 아무나 데려가도 되었어요. 석가족 젊은이들이 많이 출가를 하다보니까 석가족 여인들에게 이런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마하파자파티’라는 부처님의 어머님이 되시는 분과 ‘야소다라’ 라고 하는 부처님의 아내 되셨던 분을 비롯한 석가족 여인 500명이 부처님의 법에 귀의해서 부처님께 출가를 요청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승낙을 안하셨어요. 그러니 오백 여인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이곳 바이샬리까지 부처님을 따라와 요청을 했어요. 남자 천민이 출가하는 것은 처음부터 쉽게 허용이 되었는데 여성 출가가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사회가 계급차별보다 성차별이 당시 사회에서는 더 심했다는 것을 말해요. 그러자 아난존자가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 “여성은 수행해서 해탈할 수 없습니까?” 묻자 부처님은 “여성도 해탈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왜 허용을 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어릴 때 부처님을 키울 때의 공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다고 하셨고, 이렇게 해서 여성의 출가가 이뤄졌습니다.nbspnbspnbsp왜 부처님이 카필라성에서 허용을 안하고 이곳 바이샬리까지 왔을까요? 바이샬리는 진보적인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바이샬리에서는 그래도 용납이 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성 출가가 사회적으로 용납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여성은 문제가 없지만,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삶의 가치관은 자기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의지심이 많습니다. 이 의지심이 극복되지 않고는 붓다는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여성들이 스스로 이곳까지 맨발로 걸어왔다는 것은 그만큼 독립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조건에서 능히 수행할 수 있겠다고 보시고 허용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바이샬리는 여성 출가의 성지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이곳이야말로 여성해방의 효시가 되는 곳입니다. 카톨릭은 아직도 수녀가 미사를 집전할 권리가 없고, 여성이 신부가 될 수 없잖아요. 부처님은 2600년 전에 비구니를 허용했다는 것은 종교 역사에는 유래가 없는 일입니다.nbspnbsp그리고 부처님의 마지막 여로를 기록한 열반경에 보면 이곳에서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고 그 해가 가뭄이 들어 굉장히 흉년이었어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한 마을에 한명씩 가라고 모두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아난다와 함께 벨루바나라는 마을에 가서 우기 안거를 지냈는데, 부처님의 몸이 굉장히 편찮으셨어요. 아난다도 어쩔 줄 몰라했는데 부처님은 유수행이라고 해서 수명을 연장하는 수행을 하셨어요. 그리고 안거가 끝나자 나는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대중들을 모아놓고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nbspnbspnbsp부처님은 이곳을 떠나서 북쪽으로 가시는데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과 헤어지는 게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돌아가질 않아요. 계속 따라와서 간타키 강을 건너는 데까지 따라왔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강을 건너시자 부처님이 가지고 있던 발우를 물에 띄워보내서 이별의 징표로 남겼습니다.nbspnbsp그러니까 이곳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처음 방문 하신 곳이고, 또 이곳은 여성이 처음 출가한 곳이고, 또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올린 곳이고, 또 부처님이 열반을 선언하신 곳이고,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은 곳이고, 또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세운 곳이기도 하고, 불멸 후 100년 후에 제2결집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고, 또 불멸 후 500년 경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유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 지금 우리가 앉아 있습니다. 자, 경전 독송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nbsp그러면서 지금까지 스님께서 먼저 설명하신 내용의 경전을 순례단이 함께 독송하였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미리 듣고 경전을 읽으니 더 생생하며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스님의 세심한 지도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바이샬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을 마음에 새기며 고요히 명상에 들었습니다. 그 사이 싸늘했던 날씨는 어느새 밝은 햇살로 바뀌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차량별로 진신사리탑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짝수 차와 홀수 차로 나뉘어서 짝수차는 스님과 함께 찍고, 홀수 차는 유수 스님과 함께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에 올라 원후봉밀터로 이동했습니다.nbsp500여명의 대중은 석가모니 정근을 하며 탑돌이를 한 후 자리를 하고 스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nbsp▲ 원후봉밀터nbsp“이곳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렸다고 하는 원후봉밀을 기념해서 세운 탑입니다.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 계실 때 주로 500 대중이 이동한 것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버스를 타고 500 대중이 이동해도 만만치 않은데 부처님과 500 대중이 이동할 때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짐작해 봅니다.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에 머물 때는 천이백 대중이 함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nbspnbspnbsp부처님이 500 대중과 함께 공양을 받으려고 발우를 주욱 펴 놓으니까 일단의 원숭이 무리가 오더니 그 500개의 발우 중에 딱 부처님의 발우에 꿀을 공양했어요. 그러니까 붓다를 원숭이와 같은 짐승도 알아봤다는 것이죠. 성난 코끼리도 부처님께 무릎을 꿇은 것처럼 원숭이도 부처님을 알아봤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원숭이들 수백마리가 흙을 파서 부처님이 목욕하실 연못을 만들었다고 해요.nbspnbsp옛날에 제가 왔을 때는 이 탑이 저 중간쯤까지 묻혀 있어서 여기가 평평했어요. 아쇼카 필라도 묻혀 있어서 위에만 나와 있었어요.nbspnbsp탑 오른쪽에 보면 방 자리가 있는 정사 터가 있어요. 저기는 비구니 승방이었다고 전해내려오고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한번 가서 보고 옛날 내가 살던 방이였는지 확인해 보세요. nbspnbspnbsp부처님의 위대함은 우리 스스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도록 많은 지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마라.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 법을 등불로 삼아라. 법 아닌 것을 등불로 삼지 마라.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중도를 지켜야 합니다. 법에 의지한다고 할 때 그 법이 지나치게 형식화되면 진리에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자신의 경험과 체험으로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즉 법을 배운 것을 자기 체험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또 자신의 체험은 반드시 부처님의 법에 근거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공부만 하고 자기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또 반대로 자기가 경험한 것을 부처님의 법인 것 마냥 행세하는 것도 사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를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nbspnbsp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면 불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부처님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고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실을 규명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가 그런 주장을 할 때 무조건 받아들여도 안되고 무조건 배척해도 안된다고 하시면서 그 얘기를 잘 들어보고 이미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과 경전에 잘 부합하는지 확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성제, 연기법, 팔정도 이런 원칙에 안맞는 내용은 어떤 이름이 붙어 있어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고, 반대로 그것이 예수님이 말했든 소크라테스가 말했든 공자님이 말했든 그 이치가 부처님의 말씀과 내용이 같다면 다른 종교 다른 사상이라고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큰 지침을 주셔서 우리가 어느 한 쪽에 매몰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흩어지지도 않고 원칙을 지키면서도 융통성 있고 포용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는데,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을 더 존경하는 원인이지 않나 생각합니다.nbspnbsp그리고 이곳에 비구니 요사가 있다고 하니까 어쩌면 이곳이 비구니 스님들이 출가한 성스러운 곳인지 모릅니다. 남방 불교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그걸 복원을 하려고 하니까 남방 불교 종단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곳 바이샬리에서 여성들이 수계를 받으면 누구도 거부하기가 어렵지 않느냐 싶거든요.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직접 행하신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곳에다가 비구니 사찰을 하나 지어서 남방 불교의 비구니 제도 복원 운동이나 여성의 권리 향상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한국 비구니회에 여러번 건의를 했지만 아직 한국에는 그런 대찬 비구니가 없는 것 같아요. nbspnbspnbsp스님이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제가 씨앗만 뿌려 놓았으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출가를 해서 하든 자원봉사를 하든 앞으로 성지마다 부처님의 유훈이 실현될 수 있는 그런 사업들을 해나가면 좋겠어요. 특히 이곳 바이샬리에는 꼭 비구니 절이나 여학교 같은 것이 있어서 인도 여성 운동의 효시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예불 공양을 올리겠습니다.”nbsp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보다 부족함이 있으나 비구니 제도를 허용한 것은 대승불교의 자랑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이 여성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기를 발원하며 스님과 함께 예불 공양을 올리고 명상도 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 올리듯 고통 받는 중생에게 공양 올리기를, 또한 태어난 조건에 의한 차별을 거부하고 인권을 수호할 수 있기를, 진신사리를 친견한 우리 모두가 업장소멸하여 성불하기를 발원하셨습니다. 순례단 또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함께 발원하니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nbspnbsp순례단은 오전 11시 30분경에야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원후봉밀터 주변의 평평한 잔디 밭에 자리를 펴고 둘러 앉아 어제 숙소에서 해놓은 전기 밥솥의 따뜻한 밥을 나눠담고 식사를 했습니다. 허기까지 보태어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습니다. 그동안 성지에서 공양 올린 사탕을 인도의 아이들에게 나눠주시던 스님께서 이번에는 우리 순례단의 성불을 기원하며 공양 올린 사탕을 순례단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주셔서 달달하게 입가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스님과 함께 차량별로 단체 사진을 찍고 다음 성지로 이동합니다.nbspnbspnbsp어느덧 날씨는 여름 날씨로 변해 입었던 옷들을 차례차례 벗어도 땀이 흐르고 차 속 공기는 후텁지근했습니다. 2시간 정도를 달려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인 케사리아 탑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신선하고 시원한 공기가 마치 부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처럼 감사했습니다.nbsp▲ 케이사르 탑nbsp고개를 들고 탑을 바라보니 탑이라기보다 동산 같았습니다. 한쪽 켠은 여전히 나무가 자라고 풀숲이 우거져 있는 이 탑은 스님께서 20여년 전 인도에 계실 때 처음 발견된 소식을 접하였으나 이렇게 큰 탑인 줄 모르고 그 사이 지나치기도 했다고 하셨습니다. 경전 기록에 보면 쿠시나가라로 길을 떠나시는 부처님을 따라오던 바이샬리 사람들과 헤어진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강을 건너신 부처님께서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에 띄웠고 떠내려 온 발우를 기념하는 탑을 이곳에 세운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순례단은 가사를 입고 줄을 서서 탑돌이를 했습니다. 스님의 제안에 탑을 빙 둘러 서서 인간 띠잇기를 하니 500명의 대중이 탑을 에둘러 쌀 수 있었습니다. 합장 삼배와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손에 손잡고 “부처님 만세”를 웃으며 힘차게 외쳤습니다.nbsp▲ 케이사르 탑을 둘러싸고 인간띠 잇기를 해보았습니다.nbspnbsp버스를 타고 다음 순례지를 찾아가는 길에 그 사이 분주했던 일정 속에 나누지 못했던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차를 2주간 함께 타고 다니는 인연 깊은 순례단은 각자의 모습과 이야기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가 부처님의 뜻을 따라 걷는 수행자라는 생각에 뭉클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 버스 안에서의 자기 소개 시간과 마음 나누기nbsp쉼 없이 달리는 버스라지만 지는 해는 거스르지 못해 이미 밖은 어둑어둑해졌습니다. 다음 순례지인 춘다의 공양터는 내일로 미루고 부처님의 열반 성지 쿠시나가라의 한국절인 대한사로 바로 향했습니다.nbspnbsp대한사에서 미리 준비해주신 공양 자리에는 이미 어둠과 함께 이슬이 내려 앉았고 새벽부터 준비해주신 음식들을 보니 객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듯 반갑고 힘이 났습니다. 대한사의 주지인 성관 스님께서는 제주도 관음사 출신으로 20여년 전 인도여행을 왔다 이곳에 한국절이 없음을 아시고 이곳에 불사를 발원하시고 지금까지도 절을 짓고 있으시다고 합니다.nbspnbspnbsp30명 밖에 머물 수 없는 숙소라 공양을 준비했으니 많이 드시고 순례를 잘 마치시기를 기원한다는 따뜻한 말씀을 해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공양 후 대한사의 불사가 원만히 성취할 수 있기를 발원해 주셨고, 500여명의 순례단도 스님과 함께 반야심경 봉독과 정근을 하며 함께 발원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 쿠시나가르의 한국절 대한사nbsp쿠시나가라의 곳곳에 흩어진 숙소로 버스는 멈췄고 순례단은 여독을 풀고 개인 정비 시간을 가졌습니다. 콘센트에는 전기 밥솥을 꽂고 내일 먹을 밥을 준비하고, 반찬도 락앤락 통에 담아 둡니다. 조장님들은 내일 네팔 국경을 넘을 때 필요한 서류를 챙기며 분주했던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이제 슬슬 하루하루가 아까워지는 것을 보면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오늘 하루도 행복했나 봅니다. nbspnbsp내일은 새벽부터 어제 가지 못한 춘다 공양터를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목욕하셨다는 카쿠타 강에 내려 강물에 손을 담궈보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열반당으로 갑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네팔 국경을 넘어갈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

2015.01.16. 28,681 읽음 댓글 28개

2015.1.13 인도성지순례 7일째 라즈길

▲ 칠엽굴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출발한지 7일째 되는 날입니다. 3일 동안 머물렀던 수자타 아카데미를 떠나려하니 이 곳 실무자들을 먼 곳에 두고 가서 애처롭고 미안한 생각도 듭니다. 정문 앞까지 배웅 나온 현지 실무자의 얼굴이 우리가 떠나는 걸 아는지 슬픈 얼굴로 서 있는 모습에서 새로운 얼굴을 본 것 같아 가슴이 짠하였습니다. 순례단은 이제 이들의 수고로움을 많이 알아버린 까닭인 것 같습니다.nbspnbsp▲ 새벽 5시. 순례객을 기다리며 수자타아카데미 앞에 서 있는 버스들nbsp이젠 몸도 새벽 일찍 일어나는 것에 적응되었는지 새벽 4시 전에 벌떡 일어나지고 몸도 개운하였습니다. 아직도 깜깜한 새벽을 뚫고 짐을 버스에 모두 싣고 nbsp전정각산을 뒤로 한 채 분주히 라즈기르로 출발한 시각은 새벽 5시였습니다.nbsp버스에 타자마자 흔들리는 차 안에서 아침예불을 하고 6시 40분쯤 라즈길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남문을 통과한 후 버스 왼쪽과 오른쪽으로 흩어져 시원하게 노상방뇨를 하고, 부처님 당시 마차바퀴 자국이 돌에 선명히 남은 장소에 모두 앉아 오늘의 일정과 가게 될 곳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날씨가 추워 몸이 오싹 하기도 했지만, 스님의 애정어린 설명에 금새 집중이 되어 추위도 잊었습니다.nbspnbspnbsp▲ 마차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곳nbsp라즈길은 왕사성이라고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곳으로 원래 이름은 라자그라하인데 왕의 집이란 뜻입니다. 왕사성은 부처님 당시 북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왕사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천년의 요새였습니다.nbsp이 곳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전에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한 곳이었고, 수행하시는 부처님의 청청한 모습을 보고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서 성도하시면 자기를 깨우쳐 달라고 부탁한 곳이기도 합니다.nbsp스님의 설명을 다 들은 후 오늘의 첫 목적지인 영축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영축산은 부처님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법화경, 반야심경, 열반경이 설해진 곳이고 염화시중의 미소가 행해진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nbsp영축산을 오르는 길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길이라고 하여 빔비사라왕의 길이라고 불립니다. 왕이 마차로 산 아래까지 와서는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500미터 정도 산으로 오르다가 다시 100m 정도 걸어갔다고 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 빔비사라 왕이 영축산에 계신 부처님을 만나러 다녔다는 빔비사라왕의 길nbsp영축산 가는 길 초입에는 부처님의 주치의인 지바카의 망고원이 있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가기 시작한 곳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헤치려고 던진 돌 파편에 부처님이 발을 다쳐 제자 아난다에게 업혀 내려와 지바카의 응급치료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고, 육방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육방예경은 부처님 당시 어리석은 젊은이를 깨우치기 위하여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부부, 친구, 주인과 하인 관계에서 각각 가져야할 마음자세를 가르친 이야기라고 합니다. 스님의 인기 저서 ‘스님의 주례사’도 이 육방예경을 바탕으로 주례를 본 것이라고 합니다.nbspnbsp영축산 정상에는 신기하게도 여러 크고 작은 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곳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굴 이름도 제자들의 이름을 따서 아난다굴, 사리불굴, 목련굴, 마하가섭굴 등으로 불렸고 차례대로 참배하였습니다.nbsp▲ 아난다 존자가 수행했다고 하는 아난다 굴nbsp또한 산의 정상부근에는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돌을 던졌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자만심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해주는 일화였습니다.nbsp▲ 데바닷타가 부처님께 돌을 던진 곳.nbsp영축산 정상에는 독수리를 닮은 바위가 있었고 그래서 이름이 인도말로 ‘그리드라쿠타’ 즉 독수리봉이라고 불리우는데, 한문으로는 ‘영축산’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nbspnbsp영축산의 정상이 좁아서 순례단의 일부만 정상에 앉고, 나머지 순례단은 모두 정상 바로 밑으로 차례대로 앉아 영축산 정상을 향하여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 당시에 설한 경전을 독송하였습니다. 500명이 읊는 예불은 장엄하기까지 했습니다.nbspnbspnbsp공간이 비좁아서 예불은 앉은 자리에서 그냥 했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당시 수불부촉...’ 에서 바로 그 영산이 이곳인데, 예불을 하면서 “영산당시” 라고 읊으면서 무언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설법을 하신 바로 그곳에 지금 500여명의 순례단이 다시 찾아와 예불을 올리고 있으니 참으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nbspnbspnbspnbsp영축산을 내려오는 길에 영축산 정상이 잘 보이는 곳에서 차량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영축산을 배경으로 차량별로 사진을 찍는 시간.nbspnbsp버스로 5분쯤 걸리는 곳인 빔비사라왕의 감옥터로 갔습니다. 감옥터는 왕사성의 내성 맨 끝에 위치한 곳으로 감옥터의 외곽만 남아 여기가 감옥이었구나 짐작하게 할 뿐이였습니다. 아침 내내 끼여있던 안개가 많이 걷혀졌고 해가 밝게 비추고 있어 따뜻하기까지 했습니다. 순례단은 조별로 정렬하여 앉아 가사를 수하고 예불을 드렸습니다.nbspnbsp스님께 빔비사라 왕이 아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 사연과 그런 왕을 위로하신 부처님의 이야기, 감옥에 갇혀 굶고 있는 왕에게 음식을 몰래 전하려던 왕비 위제희 부인이, 아들에게 이 사실을 들켜 골방에 갇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처님의 위로를 청하고, 부처님은 그런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관무량수경을 설하신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nbsp▲ 빔비사라왕의 감옥터. 안개 때문에 안보이지만 스님 뒤로 저 멀리 영축산이 있습니다.nbspnbsp“이곳은 빔비사라왕의 감옥터입니다. 왕이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힌 겁니다. 빔비사라왕은 당시 인도 강국의 절대왕인데 나이가 사십이 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어요. 당시에는 왕위를 아들이 잇잖아요. 아들이 없으니까 정정이 불안한 거예요. 어느날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니까 3년 후에 아들이 생긴다는 거예요. 저 히말라야 산에서 수도하는 수도승이 명이 3년 남았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아들로 태어나도록 인연이 되어있다고 했어요. 왕이 사실을 확인해보고 아들 갖고 싶은 마음이 급하니까 그 수도승이 빨리 죽으면 아들이 빨리 태어날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사람을 보내서 ”빨리 죽어라“고 했더니 그 수도승이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왕명을 거역했다고 해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겁니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 ‘내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 하고 죽은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위제희 부인에게서 애기가 생긴 겁니다.nbspnbspnbsp그래서 왕은 애기를 갖게 된 기쁨과 원수라는 사실에 대한 불안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애기를 낳자 마자 2층에서 아래층으로 던져버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애기가 땅에 떨어졌는데도 손가락 하나만 부러지고 무사한 겁니다. 그래서 왕이 다시 마음이 바뀌어서 애기를 극진히 키웠습니다. 그 애기가 바로 아자타사투 왕자입니다.nbspnbsp세월이 흐르고 데바닷타가 부처님 교단의 새로운 리더가 되려고 하는 시도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아자타사투와 데바닷타는 모의를 해서 아자타사투 왕자는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고, 데바닷타는 부처를 해치고 자기가 새 부처가 된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겁니다. 그 때 데바닷타가 아자타사투를 꼬드긴 이야기가 “왕은 너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너의 원수다” 하는 비밀을 이야기해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자타사투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려고 한 겁니다.nbspnbsp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왕의 부인이면서 왕의 어머니가 될 위제희 부인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권력을 쟁취하는 싸움을 하게 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이기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아들이 이기면 자기 남편이 죽고, 누가 이겨도 진 자는 역적이 되고, 역적은 살려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가 된 것입니다. 해결책이 없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nbspnbsp그런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리려고 하니까 아자타사투 왕은 어머니도 아버지와 한패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도 감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위제희 부인은 저 멀리 영축산을 바라보면서 자기 신세 타령을 하면서 부처님께 기도를 합니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아들을 낳게 되었고, 부처님은 왜 데바닷타 같은 저런 악인을 친족으로 두었나 원망을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지금 너가 억울하고 분한 것 같지만 사실 빔비사라 왕은 자기 아들을 얻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너도 너의 아들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방치했고, 아들은 제 원수를 갚는다고 제 아비를 죽이는 이런 중생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위제희 부인은 ’나는 이런 세상은 싫습니다. 이런 괴로움이 없는 세상은 없습니까?‘ 하니까 부처님이 극락 세상을 보여주자 위제희 부인은 극락 세상에 나기를 발원합니다.nbspnbsp위제희 부인은 “나는 지금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려서 극락 세상을 볼 수 있지만 후세 대중은 어떻게 극락을 볼 수 있겠느냐?”며 부처님께 청하니 부처님께서 극락을 보는 16가지 관법을 설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관무량수경’입니다. 대부분의 경전이 부처님의 제자들이 거룩한 질문을 해서 법문이 설해지는데, 이 경은 가장 곤궁에 처한 여인이 울부짖으면서 부처님께 기도한 데 따른 부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는 더 소중하지 않나 생각합니다.nbspnbsp지금 우리가 앉은 방향이 영축산이예요. 위제희 부인처럼 영축산을 향해서 경전을 독송해 보겠습니다.”nbsp스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위제희 부인의 간절한 마음이 되어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었다면 위제희 부인이 얼마나 더 고통스러웠을까 헤아려 봅니다. nbspnbspnbsp빔비사라왕 감옥터에 조별로 돗자리를 펴고 모여 앉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해 준 밥을 반찬과 함께 맛있게 먹은 후 다음 장소인 죽림정사로 떠났습니다.nbsp날씨가 갑자기 더워집니다. 버스 안에서 새벽에 추워 껴 입었던 옷들을 벗었습니다. 날씨가 요동을 치니 벗어 놓은 옷이 한 짐이나 됩니다. 5분쯤 달려 죽림 정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콧물이 흐르는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손을 내밀며 우리를 먼저 반깁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딱하고 안스럽습니다. 스님께서는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이 아이들의 다음 세상을 위해 발원을 하십니다.nbspnbsp죽림정사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 부처님과 1,000명의 제자가 머물 곳을 보시한 곳으로 초기 사찰의 원형이 된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도 예불과 공양을 올리고 이곳에서 설한 경을 함께 읊고 명상도 했습니다. 명상을 하며 지금 맡고 있는 공기를 부처님과 제자들도 맡았을까 생각하니 부처님이 더 생생하게 느껴집니다.nbsp▲ 죽림정사에 도착해 예불을 정성껏 올립니다.nbspnbsp예불을 올린 후 스님께서는 이 곳에서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며,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보시한 이야기 등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이곳이 1,250명의 대중이 있었던 죽림정사입니다. 우리가 늘 예불문에 ‘천이백 제대 아라한’ 또는 금강경에 ‘천이백오십 대 비구중’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바라나시 사르타트로 가셔서 교진녀 등 오비구와 야사 등 육십명을 모아놓고 전법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우루벨라촌으로 오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 등 일천명을 교화하셔서 가야산에서 탐진치 삼독의 불을 끄라는 유명한 설법을 하신 뒤에 그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이곳 왕사성으로 오셨습니다.nbspnbspnbsp왕은 왕사성 서문 밖 제띠안까지 마중을 나왔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왕은 바로 그 이치를 깨닫자 너무 기뻐 부처님을 왕궁으로 초대했습니다. “내가 왕이 되었고,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 부처님이 출현하셨고, 내가 부처님을 친견해서 이렇게 법문을 듣게 되었고, 또 내가 그 법문을 이해하게 되어서 지혜의 눈이 열렸다” 면서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는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거였다” 라고 하고 “왕궁에 오셔서 저의 공양을 받으옵소서” 청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거절을 하셨어요. 즉 수행자는 궁중에 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왕은 부처님이 머무실 좋은 자리가 어디일까 생각해봤는데, 성 안은 너무 번다하고 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탁발하기 어려우니 성으로부터 적당히 떨어져 있는 곳이 좋겠다 해서, 북문 밖에 있는 자신이 아주 아끼던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보시했습니다.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죽림이라고 합니다.nbspnbsp대나무 숲에서 어떻게 머무는가 하는데 여기 보시면 알지만 인도 대나무는 하나씩 솟는 것이 아니고 무리를 지어서 이렇게 솟아서 마치 보리수나 느티나무 모양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대나무 숲은 수행자들이 정진하기에 좋고, 그래서 이곳이 불교 교단에 처음으로 세워진 죽림정사입니다.nbspnbsp인도 풍습으로는 항상 절에 연못이 있었어요. 이곳 죽림정사의 연못은 카란다카 연못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장자 카란다카가 보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천이백 대중이 이곳에 머무실 때 아난다 존자는 이 물을 떠서 부처님이 발을 씻을 수 있도록 해드린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눈을 감고 가만히 명상을 하면 부처님과 아난다 존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nbspnbspnbsp부처님이 이곳에 머무실 때 ‘앗사지’라는 비구가 있었어요. 앗사지는 사르나트에서 오비구 가운데 마지막에 깨달은 비구예요. 앗사지가 왕사성 안에서 탁발을 하고 다녔어요. 수행자는 두리번 두리번 하지 않고 발 끝 한치 앞만 보면서 정진을 하며 걷습니다. 그 걷는 모습이 너무나 수행자다워서 이 모습을 사리푸트라가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 분은 참 위대한 수행자다 해서 사리푸트라가 가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니 “저는 붓다의 제자입니다” 라고 대답했어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과 비견되는 여섯명의 스승이 있었고 이것을 육사외도라고 하는데, 사리푸트라는 그 중에 산자야라는 분의 제자였어요. 그런데 그 앗사지의 거동을 보고 감동을 해서 “당신의 스승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니 “그분이 계신 곳에 가서 여쭤보십시오” 그랬어요. 그래도 한마디만 이야기해 달라고 하니 앗사지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라고 하면서 설했어요. 이것을 듣고 사리푸트라는 마음 속에 많은 의문이 풀렸어요.nbspnbsp그래서 사리푸트라는 자신의 그 기쁜 마음을 자신의 친구인 목갈리나와 나누기 위해 수행처로 돌아왔습니다. 목갈리나가 사리푸트라의 환한 얼굴을 보고 “무슨 좋은 일이 있소?” 라고 물어서 그 내막을 이야기해 주니 목갈리나도 바로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스승인 산자야를 찾아가서 “이런 위대한 수행자가 출현했는데 우리 같이 가서 법문을 들으면 어떻겠소?” 그러니 산자야는 “그것은 믿을 수가 없소” 하면서 회의론을 폈어요. 그래서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는 스승을 두고 자기들만 붓다에게로 갔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자신의 제자 100명씩 총 200명을 데리고 붓다에게 가서 법을 청해 듣고 다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러니 천명이 함께 왔는데다가 이백명이 더 합류했으니 이제 천이백명이 되었습니다. 또 그 전에 육십명의 아라한이 있었죠. 그래서 이 분들은 부처님이 성도하고 1년 안에 제자가 되신 분들이니까 불교 교단 안에서는 모두 장로가 되잖아요. 그래서 늘 천이백 제대 아라한을 칭송하는 이유가 이 분들이 가장 교단의 장로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천이백오십 대중과 함께 계셨다고 경전에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소중한 곳이 바로 이곳 죽림정사입니다.”nbspnbsp그리고 죽림정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nbsp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nbspnbsp오늘은 일정이 많아 바쁘게 다음 장소인 칠엽굴로 갔습니다. 칠엽굴로 가는 길은 ‘온천정사’라는 목욕을 하는 곳이 있어 초입부터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온천정사의 맨 위쪽은 높은 카스트가 목욕하지만 맨 아래쪽의 더러운 물에서는 낮은 카스트가 목욕을 한다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다시한번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nbspnbsp▲ 온천정사를 지나 칠엽굴을 향해 오르는 길.nbsp산 꼭대기에 자이나교의 성지가 있어서 그런지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멀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 칠엽굴에 도착했고, 이어폰을 통해 스님께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시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경전에는 칠엽굴에 아라한 500명이 모여 앉아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는데, 스님께서 “여기 500명이 진짜 다 앉을 수 있는지 보기 위해 500명을 데려왔다” 고 하시면서 “봐라. 500명 다 앉을 수 있네” 하시자 다 같이 크게 웃었습니다.nbspnbsp▲ 경전을 결집할 당시처럼 칠엽굴 앞에 오백 대중이 앉았습니다.nbspnbsp칠엽굴은 부처님 사후 부처님 말씀을 최초로 결집한 제1결집이 행하진 터로 아난다와 우파리가 초안을 내고, 마하가섭 존자가 사회를 보고, 500명의 아라한이 초안을 검증하는 형식으로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nbsp스님께서는 칠엽굴에서의 경전을 결집할 당시의 상황과 부처님 입멸 후에 불교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여러분들 여기까지 올라오신다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이곳이 바로 경전이 처음으로 결집된 칠엽굴입니다. 왜 칠엽굴이라고 부르냐면 나뭇가지 잎사귀처럼 일곱 개의 굴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칠엽굴에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니까 무슨 제주도 만장굴 같은 곳에 들어가서 하신 줄 아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가 앉은 여기서 결집을 했습니다. 굴 속은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경전을 결집했겠어요? 여기 동굴이 후끈 후끈 하잖아요. 수행자들이 동굴 안에서 정진하기 좋았기 때문에 많이 알려진 곳이였어요.nbspnbspnbsp그런데 왜 여기까지 올라와서 경전을 결집했을까요?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참여하겠다고 한 겁니다. 만약에 저 밑에서 하면 누구는 참여하고 누구는 참여 안 하고 통제를 못합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올라와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해요.nbspnbsp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를 때 대부분 슬퍼했어요. 그런데 몇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특히 젊은 사람들 중에는 ‘아이고, 그 늙은이 잘 죽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하지마라’ 이런 잔소리가 많았다고 받아들인 거예요. 이 얘기를 장로들이 듣고 굉장히 걱정을 한 거예요. 지금 부처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저런 사람들이 생기는데 세월이 흐르면 어떨까요? 온갖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나는 부처님 말씀을 이렇게 들었다 하는 문제가 생기면 진위를 규명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부 모아 놓아서 가짜가 생기더라도 막을 수 있게 해야겠다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하겠다고 하니까 수천명이 다 참가하려고 해서 마하가섭 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에 한한다고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여기 500명이 모인 겁니다. 그 때 재정 후원을 아자타사투 왕이 했다고 합니다.nbspnbsp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을 25년 동안 시봉한 아난다가 그때까지 아라한과를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는 것이였죠. 부처님을 시봉하고 법문을 듣기만 했지 아직 자기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거예요. 아난다는 당연히 자기가 참가할 줄 알았는데 참가가 안되었어요. 아난다에게도 불명예이지만 아난다가 없으면 경전을 결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아난다가 그날 밤에 백천간두 진일보의 정신으로 목숨을 건 정진을 해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해요. 아난다는 맨 마지막으로 오백 대중에 함께한 겁니다.nbspnbspnbsp우리도 여기 오백 명이 모였는데 지금 조는 사람도 있네요. 오백명이 모여서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려면 소란했겠죠. 그래서 사회를 마하가섭 존자가 보고 경의 초안을 아난다가 내었어요. 아난다가 먼저 초안을 내면 다른 사람들이 다 듣고 검증을 했어요. 아난다가 언제 어디서 부처님이 누구에게 어떤 법문을 했는지를 읊조리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옳소. 나도 그렇게 들었소”, “그것은 다른 곳에서 하신 말씀과 섞였소” 이렇게 하나하나 검증을 했어요. 그래서 성경보다는 월등하게 정확합니다. 불경은 깨달은 오백명이 모여서 하나 하나 검증해서 확인된 것을 결집을 시켰으니 정확도에 있어서는 비교가 안됩니다.nbspnbsp초기에 모든 경전은 암송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고 500년이 지난 뒤에 문자로 적게 된 것입니다. 암송이 기록보다 더 정확합니다. 글로 쓴 것은 글자가 틀리면 완전히 오류가 생기거든요. 아난다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의 곡조까지 흉내를 그대로 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가지 의심이 들었다고 해요. 첫째, 부처님이 살아서 돌아오셨는가. 둘째, 타방에 계신 부처님이 이곳에 오셨는가. 셋째, 아난다가 성불했는가. nbspnbspnbsp이런 의심이 들만큼 녹음기 틀어놓은 것처럼 그대로 재현이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오백명이 다 검증을 해서 모든 경전을 결집한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한번 보세요. 오백명이 앉아도 충분하죠? 딱 오백명이 앉으면 되는 자리네요. 가섭 존자가 오백명 이상은 안된다고 한 이유도 자리가 좁아서 안되었겠어요.” nbsp오백 대중이 모여 경전을 읊는 모습을 상상하며 명상도 하고 경전 독송도 함께 했습니다. 2,600년이 흘러 오늘 오백 대중이 이렇게 다시 모여 이곳에 앉아 당시 상황을 다시 재현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다함께 “만세”를 힘차게 부르면서 기념사진을 찍고 산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nbsp칠엽굴을 바쁘게 나와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나란다 대학으로 갔습니다. 나란다 대학 유적지 맞은 편에 작은 박물관이 하나 있어서 먼저 그곳부터 들어가서 이곳에서 발굴된 불상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여러 불상들 중에 특히 부처님의 8대 성지가 다 나와있는 불상이 있어서 관심있게 보기도 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 나란다 대학의 전체 규모를 알 수 있는 모형이 있었는데, 현재 발굴된 것은 10분의1도 안된다고 하니 당시에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나란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상. 8대 성지가 한 불상 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nbspnbsp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란다 대학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란다 대학은 불교를 가르치던 곳으로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대학이었는데 교사만 천오백명이였고 학생은 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적이고 온갖 지혜가 넘쳐났을 곳을 무슬림이 침공해서 모두 불 태워버렸고, 더군다나 도서관은 6개월이나 불 탔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nbsp▲ 나란다 대학. 네모난 곳이 스님 한 명이 명상을 하던 방이라고 합니다.nbspnbsp나란다 대학을 끝으로 오늘의 많은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순례단은 모두 라즈길에 예약된 숙소 곳곳으로 흩어져서 하루종일 걷고 걸었던 여독을 풀었습니다.nbsp내일은 새벽 3시30분에 기상해서 4시에 출발하는 일정입니다. 바이샬리로 가서 아직 3개 밖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또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2015.01.15. 27,377 읽음 댓글 22개

2015.1.12 인도성지순례 6일째 수자타아카데미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도성지순례 6일째로 오전에는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1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둥게스와리 마을 방문을 하는 날입니다. nbspnbsp오늘도 새벽 4시에 기상하여 4시30분에 수자타아카데미 쁘락보디홀에 모여서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500명의 대중이 가사를 걸치고 함께 하는 새벽 예불은 참으로 장엄하고 엄숙합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전정각산에 오르기 위해 6시 20분에 교문 앞에 모였습니다. 새벽에 짙은 안개가 끼여 등산이 가능할까 걱정하였는데 예정대로 진행되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nbspnbsp어제 순례길 행군으로 피곤한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라고 공지하였지만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동참하였습니다. 등산길 입구에 있는 돌무더기를 가르키며 스님은 ‘탑터’라고 말씀하시면서 탑에 관한 사연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nbspnbsp▲ 부처님께서 죽어가는 여인의 분소의를 입은 곳에 세워진 탑터nbspnbsp“탑 하나는 부처님의 수행 자리를 기리면서 지은 것이고, 또 하나의 조그마한 탑은 버려진 여인이 죽어가면서 부처님이 수행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죽으면 분소의를 저 분이 입어주시기를 소원하였는데 부처님이 그 마음을 아시고 나중에 분소의를 입으시자 그 여인은 곧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사연이 있는 탑입니다. 부처님은 이 전정각산 지역에서 무려 6년이나 수행하셨기에 이곳저곳 부처님이 머무르시지 않은 곳이 없다고 볼 수 있어요. 다 사연이 있어서 산봉우리마다 탑이 세워졌고 마을 근처에도 여기 저기 남아 있는 탑터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을에서 가까운 탑들의 경우 훼손이 심각한데 이는 불교가 쇠퇴하면서 마을사람들이 집수리 하거나 생활에 필요한 돌이나 벽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가져다 갔기 때문입니다.nbspnbsp현재 여러분이 보듯이 전정각산은 돌산이지만 부처님이 수행하던 당시에는 아마도 울창한 숲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는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부정한 땅이라는 뜻인 둥게스와리로 불리었는데 사람들이 여기로 오길 꺼려했습니다. 지금은 근처 마을사람들이 밥을 짓는데 땔감으로 산의 나무를 베어가기 때문에 나무가 자라기가 어렵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의 대다수가 산의 돌을 깨어서 먹고 사는데 산의 일부분이 사라질 정도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불교의 성지로서 세계적 문화유산이 될 전정각산의 바위들이 최근 급격하게 증가하는 도로 포장용 자갈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현재는 정부에서 전정각산을 성지로 보호하면서 함부로 나무를 자르지 못하게 하고 나무를 심도록 지원하고 있고 돌 채취도 금하는데도 실제적으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nbspnbsp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한참 오르다 보니 마을의 짙은 안개들이 엷어지고 산으로 올라갈수록 날씨가 좋아지는 듯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전정각산을 오르시면서 “작은 가시나무들이 바지 가랑이를 붙잡아도 살살 달래면서 털고 오세요. 힘껏 잡아채면 옷의 올이 다 풀려서 상합니다” 라고 하시면서 “여기는 나무들도 척박한 곳이라서 외로워서 사람을 잡으니 살살 달래야 합니다.” 라고 덧붙이십니다.nbspnbsp조금 더 오르니 꽤 큰 웅덩이가 보이는데 물이 뿌옇습니다. 스님께서 물 웅덩이를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십니다.nbspnbsp▲ 부처님이 전정각산에 머무시면서 물을 드셨다는 샘터nbsp“이 곳이 전정각산에서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곳입니다. 부처님도 이곳에서 물을 드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마셔 볼래요? 배탈 나도 책임 못 집니다. 이곳은 석회석 암반이라서 물이 희뿌였습니다. 아마도 부처님이 마셨던 우물은 기슭의 이 조그마한 샘터일 것입니다. 지금은 건기라서 물이 없네요.”nbspnbsp조금 더 가니 바위로 둘러싸인 평안해 보이는 곳이 나옵니다.nbspnbsp▲ 부처님께서 명상하시던 자리의 탑터nbspnbsp“이곳은 바람을 막아주어서 안온합니다. 아마도 겨울에는 여기서 주로 부처님이 머무셨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와 저기에 탑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명상하던 자리로서 탑을 세웠던 곳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20분 정도 명상 하겠습니다.”nbspnbsp스님은 몸소 바위에 자리를 깔고서 자세를 바로 하시고 간략하게 명상하시는 법을 알려주시고 함께 명상을 하셨습니다.nbspnbspnbsp8호차부터 13호차까지 약 250명의 대중이 모두 조용히 자리를 잡고 명상을 하는 가운데 시원한 바람이 살살 불어오고 부처님께서 정진하셨던 이곳에 2500여년이 지나 그 제자인 정토행자들이 명상을 한다고 하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이 새롭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 명상의 공덕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nbspnbsp“부처님이 명상하셨던 이곳에서 잠깐이라도 명상을 해본 것은 인도성지순례의 큰 공덕입니다. 이 잠깐 동안의 명상만으로도 여러분은 본전을 뽑은 겁니다. 나머지는 인도까지 왔으니까 곁다리로 보는 것이예요.”nbspnbsp순식간에 시간이 흘러서 스님께서는 좌선을 풀고 단체 사진을 찍자고 하셨습니다. 그 때 스님이 앉았던 바위 밑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모두 신기해하였습니다. “명상 중에 따뜻하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더니 이래서 그랬나 보다” 하시면서 웃으셨고 많은 분들이 바위 밑을 들여다 보겠다고 모여 들자 “아이고 이것도 구경이라고 난리다” 하십니다.nbspnbsp▲ 새벽녘 전정각산 위에 올라 힘차게 두 손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봅니다.nbspnbsp모든 사람들이 바위에 기대여 단체사진을 찍고 나자 아래 마을 쪽에서 짙은 안개가 빠르게 올라오는데 장관이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사진도 찍지 못할 뻔 했습니다. 스님이 앞장서시고 서둘러 길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아침 식사를 맛있게 하고 8시 30분부터 설성봉 거사님 추모식을 거행하였습니다.nbspnbspnbsp장도연 행자님은 추모문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순례객들도 추모문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nbspnbspnbsp설거사님 부를 때마다 안경 너머 작은 눈은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 줄 채비를 갖춘 선한 눈매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옅은 웃음으로 대답하셨죠. 세상 살이에 아무런 욕심이 없어. 어디 살든 나는 정토행자이고 정토행자로 살다 부처님 법다이 살다 죽으면 되지... 언젠가 옥상에서 전장각산을 바라보고 허허 웃으며 하시던 말씀. 지지리도 못 살아 인간 대접 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땀이 많으신 분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인도 땅을 밟으심은 바로 그 이유였습니까? 중학교 건물 콘크리트 친다고 인도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대야에 시멘트를 이고 나르던 당신의 모습. 눈물이 납니다. 당신의 모습이 수자타아카데미 전정각산과 더불어 더 큰 무게로 가슴을 누릅니다. 당신의 크나큰 사랑, 남아 있는 저희들이 이루겠습니다. 설성봉 거사님 부처님 고행하신 전정각산 바람따라 네이란자라강 흐르는 강물따라 몸 편히 누이시고 고이 가소서 빛으로 돌아오소서nbspnbsp그리고 유수스님의 염불과 함께 정성스럽게 천도재를 올렸습니다.nbsp척박한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다가 무장 강도의 총격에 숨진 거사님이 있었기에 오늘의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부디 왕생극락하시고 빛으로 돌아오소서’ 하는 마음으로 지극정성으로 재를 지내고, 설 거사님의 뜻을 이제 우리가 이어받아서 인도JTS를 잘 가꾸어 나가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nbspnbspnbsp추모식을 하는 동안에 학교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부다가야의 외국절 스님들 그리고 이 지역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내빈들이 21주년 개교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내빈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행사가 열리는 쁘락보디홀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nbspnbspnbsp요란한 축하 음악과 함께 기념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는 인도어로 진행되었고 오늘을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한 학생들의 공연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공연 하나 하나 신나고 재미있고 멋졌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정말 다채롭고 인상적인 인도 공연을 보는 듯 했습니다. 때로는 인도 음악에 때로는 한국 전통 음악에 맞추어서 신명나게 즐기는 모습에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nbspnbspnbspnbsp특히 인도 남자 아이들의 힘차고 멋진 군무에 보살님들의 탄성과 박수가 커 보였습니다. 또 아이들은 평소에 갈고 닦은 태권도 실력도 뽐냈습니다. 한국말로 “하나”, “둘”, “태권” 하는 소리에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nbsp저렇게 멋지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들에서 어제까지 관광지에서 보았던 구걸하는 인도 아이들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정성으로 교육한 힘은 컸고 기적을 보는 듯하였습니다.nbspnbspnbsp한참 신나게 공연을 즐기고 드디어 스님께서 감사의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먼저 개교 기념식에 참석한 분들을 하나 하나 언급하면서 감사의 말씀을 하는데 학생들을 제일 먼저 말씀하면서 고맙다고 하십니다.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를 오랫동안 지원해 주셨던 미얀마 스님을 위시하여 근처의 베트남, 방글라데시, 티벳 스님들 그리고 지역 유지들 그리고 학교를 세울 당시 땅을 보시하였던 이곳의 가난하고 헐벗은 동네사람들, 하나라도 빠질세라 스님의 세심한 모습이 엿보입니다.nbspnbspnbsp“1993년 시작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특히 3번이나 무장강도가 들어서 설성봉 거사님이 총에 맞고 돌아가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부다가야 스님들이 오셔서 위로하였고 도움을 주셨습니다. 경찰서장님도 이곳의 치안에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 오신 동네 어르신들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15개 동네 1만여명의 주민들이 있는 이곳에서 이제는 대부분의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고 결핵환자가 거의 없어졌고 유아 사망자가 크게 줄었습니다. 핸드펌프 설치로 식수도 개선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할 일들이 더 많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지원과 협력이 필요합니다.nbspnbsp둥게스와리 nbsp아이들도 교육시키면 다른 도시의 어느 아이들과 똑같이 잘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의 기회가 없다면 구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이곳에서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듯이 이 아들들도 교육 받으면 이 사회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부처님처럼 잘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nbspnbspnbsp마지막 공연에서는 아이들이 법륜스님과 여러 귀빈들을 모시고 무대 위로 올라와서 꽃목걸이를 걸고 “세상을 함께 치유하자”는 노래를 부르며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대미를 장식하였습니다.nbspnbsp학교를 세우신 스님에 대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 속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스님이 아니였다면 지금도 굶주림에 허덕이며 구걸을 하고 있었을 아이들인데...’ 순례객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힙니다.nbspnbspnbsp성지순례객들도 오늘은 인도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나뭇잎으로 만든 접시 위에 유미죽, 뿌리, 달 그리고 오렌지를 담아서 야외 잔디밭에 조별로 올망졸망 모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오늘은 숟가락도 사용하지 않고 인도인들처럼 손으로 식사를 해봅니다.nbspnbspnbsp▲ 인도 아이들처럼 인도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는 시간nbsp점심식사 후에는 직접 마을 방문을 하였습니다. 약 500명의 순례객들이 각각의 마을로 나뉘어져 실제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 위에 올려져 있는 접시와 냄비가 갖고 있는 살림의 전부라고 합니다.nbspnbsp방문한 마을의 아이들은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때로 몰려와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건네는데 사탕이나 초콜렛을 원하는 듯 했습니다. 안내해주는 법사님이 “아이들에게 자꾸 무엇을 주지 마세요. 아이들을 거지로 만들지 마시고 의젓한 청년으로 자라게 해주세요.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저희 JTS에 주시면 저희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얘기해주시는데 JTS가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교육시켜 왔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두르가푸르 마을을 방문해 부엌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고 있는 선주 법사님.nbspnbsp직접 들여다 본 방 안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깜깜한지 놀라웠고 염소나 닭과 함께 생활해서 염소 똥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어찌 사는가 싶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밝게 웃으면서 사진 촬영에도 응하고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였습니다. 순례객이 직접 방문한 집은 모두 마을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집이였는데, 인도JTS에서 제공하는 구호물품을 함께 나눠주었습니다.nbspnbsp방문 후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나누기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기준에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지만 누가 더 자유롭고 행복한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보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비위생적이었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알겠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잠깐 시간을 내셔서 JTS에서 수자타아카데미로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현지 활동가들에게 새책 lt지금 여기 깨어있기gt를 선물하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인도JTS 활동가들에게 새책을 선물하고 기념사진 촬영.nbspnbsp저녁 식사로 맛있는 라면을 끓여 먹고 나서 저녁 예불 후 강당에서 소감 발표시간을 가졌습니다. 소감과 더불어 둥게스와리의 발전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도 많이 나왔습니다.nbspnbsp▲ 둥게스와리 마을 방문을 한 소감문을 발표하는 시간nbsp스님께서는 각 조별로 나온 의견들에 대해 대답을 해주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nbspnbsp“여기서 3일 됐는데 생활할만 해요? 힘들지만 마을 사람이 볼 땐 학교가 어떻게 보일까요? 궁궐처럼 보입니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사는 곳을 보면 왕궁에 사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 곳에 사는데 여러분들은 힘들어 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천당에 가도 며칠만 살면 또 힘들다고 할 거에요.nbspnbspnbsp여러분들이 보기에 땅이 넓으니 농사도 제대로 짓고 텃밭도 만들면 좋겠다 제안하셨는데, 현실적으로는 어렵습니다. 왜 땅이 비어있겠어요? 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기 때만 비가 내리고 다른 때는 비가 안 와요. 또 이 지역은 비가 오면 금방 빠져버려요. 좋은 점은 홍수가 절대로 안 난다는 거에요. 학교 운영하는 데에는 좋은 조건입니다. 습지가 없고 물웅덩이가 없으니 모기가 적거든요. 그러나 농사 짓는 데에는 부적절합니다. 지하수 파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거기에도 문제가 있어요. 식수 정도는 핸드펌프로 파는 것이 괜찮은데 농업용수를 전기로 펑펑 올리게 되면 지하수면이 낮아지고 그러면 그 나마 조금 있는 나무들도 다 말라버립니다. 환경적으로 검토했는데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어요.nbspnbsp또 들판에 물이 잘 공급되는 땅을 가진 분이 말하길 ‘농사 지어서 남는 게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물을 발전기로 끌어 올려서 농사 짓게 되면 남는 게 없어요. 경제성이 없어요. 늘 주민들이 우리에게 양수기를 설치해달라고 해서 시범적으로 한번 해줬는데 운영이 안 돼요. 기름 살 돈이 없어서 양수기를 결국 방치하더라구요. 집집마다 핸드펌프로 올려서 텃밭 가꾼다 하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물물 파서 채소를 가꾼다는 건 현실성이 없어요.nbspnbsp여긴 원래 사람 살 수 있는 데가 아니에요. 그런데 왜 사람이 사느냐면 보통 마을은 양민이 100명 살면 한쪽 구석에 천민이 100명이 살아요. 천민들이 양민 동네에 가서 일해주고 먹고 살지요. 여기 산 주위에만 천민 집단 부락이 있어요. 평지에는 천민만 있는 집단 부락이 없어요. 항상 양민 주변에 거주하게 됩니다.nbspnbsp그러니 누군가가 여기 살아보면서 사정에 맞게끔 주택개량을 해야 해요. 제가 주민들에게 물어봤어요. 집짓는 비용을 빌려 준다 치고 1년에 얼마나 갚을 수 있겠느냐 했더니, 1000루피 갚을 수 있다고 해요. 집 짓는데 3만 루피를 빌려준다면 이자 없이 무이자로 빌려준다고 해도 30년 갚아야 해요. 그런데 3만 루피로 집을 지을 수 있느냐?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15만루피가 드는데 빌려주면 150년 동안 갚아야 해요. 불가능해요. 여러 채의 집을 지으면서 실험해봐야 해요. 돈도 적게 들고 짓는 기술도 간단한 방식으로 연구해야 해요.nbspnbsp그리고 건조한 지역에도 자라는 식물을 개발하는 거에요. 실험농장을 마련해서 지하수를 파지 않고 물을 적게 주고도 자라는, 그래서 황무지에도 쉽게 키울 수 있는 농법 연구를 해야 합니다. 방목은 안 됩니다. 풀이 없어서 소가 산에 올라가서 나무 가지를 다 먹어버려 나무를 죽이게 됩니다.nbspnbsp학교에서 공사를 계속 하는 것도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수입원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어요. 공사를 관리할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제일 필요한 건 마을개발 자원봉사자에요. 학교, 병원, 마을개발 이 세가지 활동 중에서 마을개발이 제일 답보 상태예요. 경험과 아이디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 와서 해결해 주었으면 해요.nbspnbsp아이들 문맹퇴치는 100프로 달성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때부터 노동을 해야 농사일이든 노가다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까지 나오면 노동을 하지 않아 평생 룸펜이 되기 쉽습니다. 핸드폰도 구해야지 자전거도 타야지 소비성이 더 늘어나요. 이런 걸 보면 제가 교육을 해놓고도 잘 한 건지 못한 건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기숙사에 아이들 두는 것도 중지했어요. 여기서 생활하면 자기집에서 생활을 못 합니다. 주간에는 반드시 집에 가서 농사 짓는 것을 도와야 합니다. 학교 와서 잘못 물들면 집에 가서 농사를 못 지어요. 그리고 ‘학교 졸업하고 농사 일할 바에야 학교 뭐하러 다녔나’ 하는 소리를 듣고, 도시 취업은 쉽지 않아요. 이들이 취직할 수 있는 건 경찰, 군인, 공무원 밖에 없어요. 개인사업을 하려면 카스트가 바이샤라야 되고 아버지가 장사를 물려줘야 되는데 자본과 계급이 둘 다 안 돼요. 공무원은 자리가 있는데 시험 쳐서 걸리는 것도 어렵지만 뒷돈을 대야하는데 학교에서 뒷돈까지 대주기는 어려워요. 공부를 시켜도 이런 문제가 있어요.nbsp노동학교에서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되면 월급이 두배가 돼요. 동네에 미장하는 일은 수요가 언제든지 있어요. 공사장에서 보조로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건 어려움이 있어요. 계속 막노동만 하게 되니까요. JTS에서 건축회사를 하나 만들어도 좋은데 할 사람이 없어요.nbspnbsp마을 주민들도 어차피 소비를 해요. 시멘트, 벽돌, 볏짚도 돈주고 사야 합니다. 싸게 구입하려면 공동 구매를 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협동조합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마을금고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강도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100루피만 있어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형편이에요. 고 설성봉 거사 이후 10년 동안 수자타아카데미 안에 경찰이 주둔하고 있어서 지금은 또 치안이 좋은 편이에요. 동네에 가보면 집집마다 연장이 전부 JTS 연장을 씁니다. 일하다가 호미든 낫이든 담장 너머로 던지는 겁니다. JTS가 연장 보급은 많이 했어요. nbspnbsp도난 사고는 훔쳐가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훔칠 수 없는 시스템이 되도록 해야 해요.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면 왜 줄을 안 서고 무질서하게 하느냐 하면 자기에게 불이익이 닥칠까 싶어서 그런 거에요. 안 주든지, 주면 줄을 세워서 끝까지 주든지 해야 해요. 그리고 다 줄 때까지 못 일어나도록 하고 주면 질서가 잡혀요.nbspnbsp제안해주신 것처럼, 여기서 공부해서 여기서 취직이 된다면 도시로 나가지 않아도 되죠. 이 마을에서 자라서 이 마을에 환원되게 하려면 여기에 수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초 자재가 없어요. 관광사업은 잘못하면 사람을 나쁘게 만들 우려가 있고요.nbspnbsp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곳 교육을 통해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취직을 위해서는 도시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지만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 곳 현지 상황을 기반으로 주택개발, 협동조합과 같은 마을 공동 사업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봉사할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nbspnbspnbsp이번 방문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얘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여러분은 이미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여기서 멈춰 주어야 이들이 조금이라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도 한국도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고자 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더욱 빈곤해지는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들은 한국에서는 경제적으로 약자일지 모르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 많이 가진 자입니다. 그러니 검소하게 생활할 것을 부탁드립니다.nbspnbsp둘째는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가진 것이면 충분히 나눌 수 있습니다. 1년에 20만원이면 여기 한 아이가 일년 동안 입고 먹고 교육 받을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돈이 있더라도 아끼면서 소박하게 살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극빈자 한 사람은 살리면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그 당시에 이미 화려한 궁중 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많은 농민들과 노예들의 고달픈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모순을 간파하시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몸소 소박한 삶을 사시어서 이 모순을 타파하고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번 경험이 여러분들이 행복을 찾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nbsp nbspnbsp수자타아카데미 개교기념식과 마을 방문을 하면서 열악환 환경을 보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JTS의 사업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이 들었는데, 순례단이 의문을 가진 점들에 대해서 스님께서 다시한번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시니 ‘아, 정말 온갖 고민과 실험을 다 해보셨구나’ 알게 되었고, ‘나도 한번 기여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인도JTS의 사업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나길 기원해 봅니다.nbspnbsp스님께서 1시간 동안의 열강을 해주시니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각자 숙소로 돌아가 다시 내일부터 먼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잠자리에 듭니다.nbspnbsp내일은 부처님께서 1000명의 비구들과 함께 왕사성으로 가서 빔비사라 왕을 교화하고 설법을 하신 영축산, 죽림정사, 열반하신 후 500 아라한이 모여 경전을 결집한 칠엽굴, 불교가 번창하면서 세워진 나란다 대학 등이 있는 라즈길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합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

2015.01.14. 26,766 읽음 댓글 27개

2015.1.11 인도성지순례 5일째 보드가야

▲ 보드가야 대탑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도성지순례 5일째, 둥게스와리에서의 첫 새벽을 맞았습니다.nbspnbsp아직 어두운 이른 새벽, 가사를 수한 500명 대중이 수자타아카데미 쁘락보디홀 강당에 모여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니 정말 출가수행자가 된 듯 결연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운동장에서 보온병에 따뜻한 물과 아침 도시락을 받아들고 8km 떨어진 보드가야로 향한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욕망을 좇아가는 것도 억압하는 것도 모두 욕망에 매여 있는 것임을 깨달은 부처님이 6년간의 고행을 끝내고 전정각산에서 하산해 강에서 목욕을 하고 쓰러져 수자타의 유미죽으로 건강을 회복한 뒤 보드가야로 가서 성도에 이르신 여정을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nbspnbsp새벽 달빛이 밝아 순례단 일행은 “손전등을 끄고 가봅시다”는 스님의 제안에 따라 온전히 달빛에 의존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트기 전의 마을 길을 걸으며 순례단을 위해 무변심 법사님이 달밤에 어울리는 차분한 노래가락을 선사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순례단이 지나가는 두르가푸루 마을을 비롯한 4개 마을에 수자타 유치원이 있었는데 갈수록 기술이 발전해 가장 마지막에 지은 라훌라가르 유치원이 가장 잘 지어졌다고 합니다. 새벽 달빛으로 보는 유치원의 작고 아담한 정경 속에 건물을 지은 봉사자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nbspnbsp▲ 고행을 마치고 부처님이 건너셨다는 네이란자라강을 건너며nbspnbsp인도는 지금 건기로 네이란자라강이 대부분 모래바닥을 드러냈지만 강물이 얕게 흐르는 곳에 다다른 스님께서 징검다리를 찾아 날아다니듯 훌쩍 건너셨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건너기가 어려워 스님께서 “신발 벗고 맨발로 건너오세요” 라고 하셔서 일제히 맨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두발로 젖은 모래바닥의 시린 기운을 전해 받으니 정신이 또렷해집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네이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하면 천국에 이른다”면서 “우리는 발만 담그고 건넜으니 그 발만 천국에 가겠다”는 우스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전정각산을 내려와 강 건너편 쪽에서 목욕을 하셨다고 하는데, 스님은 “건기에는 강 건너편 쪽에만 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경전내용이 실제와 꼭 맞다”고 하셨습니다. 강 너머 마을로 들어서니 부지런한 마을 주민들이 새벽부터 군데군데 불을 피우고 몸을 덥히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마을을 지나면서 부처님이 네이란자라 강에서 목욕하시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하는 곳에 세워진 탑터를 지났습니다. 탑이 모두 허물어져 있고 쓰레기만 쌓여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설명을 해주셔서 알 수 있었지 자칫하면 지나칠 뻔 했습니다. 부처님의 유적지가 보존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목욕을 하시다가 쓰러지신 곳에 세워진 탑터nbsp스님은 부처님 성도 직전 유미죽을 올린 수자타의 공양이 왜 불교 최고의 공덕인지에 대해서 들려주셨습니다. “수자타는 부처님인 줄 알지 못하고 배고파 쓰러진 수행자에게 유미죽을 끓여 보시했기 때문에 그 공덕이 매우 크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인 줄 알면 너도나도 대접하려 했기 때문”이라면서 걸인에 대한 적선과 수자타 아카데미를 세우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인도의 구걸하는 아이들에 대해 주어도 문제이고 주지 않아도 문제였는데, 이 아이들이 거지가 되지도 않게 하면서 진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시다가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자타의 공양처럼 이들 중 부처가 있을지 어찌 아느냐” 하며 웃으셨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도 도와준다는 개념보다는 버려진 아이들을 부처님께 공양하듯이 하자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합니다.nbspnbsp밀밭 사이를 가던 중에 철문과 벽으로 경계 지워진 공간이 나타났는데, 들어가니 문밖이나 마찬가지로 풀만 가득했습니다. 이곳에서 자리를 깔고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준비해 준 주먹밥과 단무지 그리고 삶은 계란과 오렌지 등으로 아침식사를 맛나게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시고 스님께서는 “이 장소를 명상센터 건립부지로 구입했으나, 건축을 총괄할 사람을 못 찾아 몇 년째 계획이 미뤄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전정각산에서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로 향하기까지의 행적에 대해 법문을 듣고 경전을 함께 독송하였습니다.nbspnbsp▲ 정토회 명상센터 건립 부지nbsp스님은 정토회 명상센터 건립 부지를 나서며 문 앞에 80명쯤 되는 많은 아이들에게 일일이 사탕을 한 웅큼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법문에서 자주 말씀하셨듯이 스님께서는 사탕을 나눠주시며 ‘다음 세상에는 스님의 제자가 되어 인도 불교 부흥을 함께 일구자’고 되뇌셨을 것 같습니다. nbspnbsp▲ 성지에서 늘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시는 스님nbsp명상센터를 나와 조금 가니까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탑터가 나왔습니다. 순례단은 탑 주위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하였습니다. 수자타의 공양탑 주위에 수자타 탬플이 있었는데 인도에 불교가 사라진 뒤 이 절은 지금까지도 힌두교 절로 되어 있습니다. 수자타 탬플 이름은 그대로인데 불교 절이 아니라 힌두신을 모신 절이라고 하니 마음이 몹시 서운했습니다.nbspnbsp▲ 수자타의 공양탑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봉독.nbsp수자타 탬플을 지나 강변에 있는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로 갔습니다. 우르벨라 가섭의 수행터에 이르자 스님은 웃으시며 “500명 제자가 정말 함께 수행을 하였는지 확인해 보자”며 들어가십니다. 당시 우르벨라 가섭은 80세로 이 지역에 명망이 있는 지도자였기에 35살 부처님은 풋내기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우르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는 부처님께 머물 곳이 없다며 거절을 하자, 부처님은 “어떤 자리도 좋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우르벨라 가섭은 부처님을 ?아낼 심산으로 “화룡이 있는 곳 밖에 없다”고 해서 부처님은 화룡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우르벨라 가섭은 ‘좋은 수행자를 잃었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사히 자고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360번의 신통력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루벨라 가섭은 젊은 수행자가 훌륭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해서 쉽게 교화되지 않았습니다. nbspnbsp▲ 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nbsp어느날 성대한 제사를 지낸 후 부처님께 “당신이 보았으면 좋았는데” 하면서 자랑하던 우르벨라 가섭에게 부처님은 “마음 속에 질투심이 있으면 해탈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우르벨라 가섭은 자신의 질투심을 알아차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500명의 제자들도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지금까지 사용하던 제사 용구를 모두 물에 던져버렸습니다. 물에 떠내려 오는 형님의 제사 용구를 보고 형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염려하여 쫓아온 동생 나디 가섭은 형님의 말을 듣고 300명 제자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막내 동생 가야 가섭 역시 200명의 제자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며 화룡 굴을 바라보고 그곳을 떠났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기 위해 하룻밤 머무셨다는 화룡굴nbsp우루벨라 가섭의 수행터를 지나자 밀밭이 펼쳐졌습니다. 수자타 마을은 땅이 비옥해 논밭이 많았습니다. 물안개가 가득한 논두렁길 위를 오백대중이 묵묵히 한줄로 걸으니 다시한번 장관이 펼쳐집니다.nbspnbspnbsp▲ 논두렁길 위를 오백 대중이 함께 걸으며nbsp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자타의 집이였던 곳에 세워진 수자타의 탑을 참배했습니다. 탑을 한바퀴 돌면서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보드가야로 향했습니다.nbspnbsp▲ 수자타의 집터에 세워진 탑.nbspnbsp4시간을 걸어 발바닥과 종아리와 어깨가 아플 무렵 보드가야 대탑에 도착했습니다. 오백 대중은 일제히 가사를 수하고 향을 든 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입장을 하였습니다.nbspnbspnbsp행렬의 선봉에 스님께서 서시고 그 뒤에 정성껏 준비한 공양물과 향을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다시 대탑을 돌아 부처님이 성도하신 보리수 나무 그늘 넓은 터에 이르러 예불을 올렸습니다.nbspnbspnbsp인도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방문객들도 모두 스님과 정토회 순례단의 예불 모습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nbspnbspnbsp▲ 부처님이 앉으셔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예불을 올립니다.nbspnbsp보드가야 대탑은 부처님이 성도하신 자리에 아쇼카 왕이 세운 불탑으로 ‘마하보디 수투파’라고도 합니다. 불교가 쇠퇴하자 힌두절이 되었는데 미얀마 왕이 거금을 주고 관리 권한을 얻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순례단 전체를 위해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있었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이곳은 강변이였어요. 부처님께서는 강변의 큰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으셔서 이곳에서 마지막 정진을 해야되겠다고 결심을 하십니다. ‘내가 깨닫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즉 죽어도 좋다는 결심을 합니다. 이것을 대결정심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나서 49일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49일 동안 용맹 정진을 하셨으니까 적어도 49일은 음식을 전혀 안드셨던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깨달음을 얻기 직전의 마지막날 밤에 욕계의 맨 꼭대기에 있는 타화자재천궁이 흔들흔들 했어요. 그래서 자재천왕이 저 인간세상을 둘러보니까 한 미미한 인간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지에 이른 겁니다. 그래서 마왕의 세 딸을 보내서 욕망으로 유혹을 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만 가득한 것들아“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락’이 곧 ‘고’임을 아신 것입니다. 고만 고가 아니라 락도 곧 고임을 꿰뚫어 아신 겁니다. 부처님의 손끝이 마왕의 세 딸에게 향하자 세 딸은 노파로 변해서 부끄러워 도망을 가버렸다고 합니다.nbspnbspnbsp이렇게 아무런 미동이 없자 두번째는 마왕이 일만 군대를 보내서 부처님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해서 수행을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런 두려움이나 미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창과 화살이 부처님 몸에 닿자 다 연꽃이 되어 떨어졌습니다.nbspnbsp그래서 마왕은 부처님을 항복시킬 수 없다고 느끼고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수행을 포기하면 자재천왕의 자리를 주겠다. 그러니 그만두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저 같으면 아무래도 받았을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자재천왕의 자리를 저한테 주면 통일을 금방 이루게 되겠지요? 성평등도 금방 실현되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될테니까요. nbspnbsp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 이렇게 말했어요. 이렇게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붓다의 수행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자재천왕이 붓다에게 “해탈이나 열반이란 것은 그런 말만 있지 실제로는 그런 경지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은 너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나는 너와 비교할 수 없는 한없는 공덕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자재천왕이 이를 비웃자 부처님께서 “대지의 신이여, 나의 모든 공덕을 증명하라”고 하니까 대지의 신이 일어나서 붓다가 과거 생애에 한량없이 지었던 수많은 공덕을 찬양합니다. 그러니 마왕이 부끄러워 도망갔습니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수하항마상입니다.nbspnbsp마왕을 항복받고 새벽녘 동쪽에 샛별이 뜰 때 붓다께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이곳입니다.nbspnbsp깨달음을 얻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일주일 간 깨달음의 즐거움을 만끽했다고 해요. 그리고 nbsp장소를 조금 옮겨서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무를 응시하면서 일주일 간 선정에 들었습니다. 세 번째 주에는 보리수 나무 주위를 천천히 행선하면서 열아홉 발자욱을 왕복하며 걸었습니다. 이 대탑의 북편으로 가면 부처님이 걸었다는 곳에 연꽃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네 번째 주에는 부처님 몸에서 광명이 났다고 해요. 그리고 대탑의 동편 정문 앞에 계실 때 어떤 바라문이 지나가면서 “이 세상에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습니다. 원래 정답이 있는 질문이였어요. 가장 고귀한 것은 어머니 아버지의 윗대로 7대까지 브라만의 피만 섞여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청정한 자가 가장 성스러원 자이다” 라고 합니다. 그 바라문이 자기 생각과 틀리니까 “흥” 하고 콧방귀를 끼고 지나가버렸다고 해요. 자신의 고정관념 때문에 붓다를 친견하지 못한 거죠. 여섯째 주에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어요. 이 전체가 물바다가 되었는데 그 때 문차린다 용왕이 나타나서 부처님을 감싸서 비를 맞지 않게 보호했다고 합니다. 일곱째 주에는 두 상인이 지나가면서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면 복을 받는다고 해서 두 상인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어요. 그런데 그들은 부처님께 공양만 올렸지 법을 청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복은 받았지만 해탈은 얻지 못했습니다.nbspnbspnbsp바라문처럼 종교인이거나 지식인은 고정관념이 많아서 법을 듣지 못했고, 사업가들은 돈 버는데만 사로잡혀서 복을 구하느라 법을 듣지 못했습니다. 또 강가강을 건널 때 가난한 뱃사공은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법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어쨌든 성도 후 7주간 있었던 이야기를 법사님들이 다 안내해 드릴테니 한번 둘러보세요.nbsp그러니까 49일 동안 법열을 느끼는 시간을 갖고 상인으로부터 공양을 받은 이야기가 나오니까 최대한 98일 동안 밥을 안 먹었다고 볼 수 있죠. 일곱째 주의 첫 번째날에 상인으로부터 공양을 받았다면 적어도 91일 동안 공양을 안드신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가 단식을 해도 적어도 언제까지는 가능하겠습니까? 석달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석달을 해보려고 했는데 옆에서 말리는 바람에 70일까지는 단식을 해봤었어요. 20일만 더 해봤으면 죽는지 사는지 점검을 해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nbspnbsp부처님이 6년 고행하시고 파리한 몸으로 바로 성도하시면 이 고행이 성도의 원인이라고 오해를 하겠죠.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시고 성도를 하신 겁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여기서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nbsp이어서 당시의 부처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 독송했습니다.nbspnbsp▲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경전 독송nbsp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부처님을 생각하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상상을 하니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이 밀려왔습니다.nbspnbspnbsp명상을 마치고 그룹별로 법사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대탑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성도 후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장소들을 둘러보고 벽화에 관한 설명도 들었습니다. 다시 대탑 앞으로 돌아와 부처님의 수행과 성도, 교화활동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각자 108배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에는 오체투지를 하는 티벳 불교도인들이 많았고 사람들마다 절하는 방식도 다양해서 전세계의 불교도인들이 모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청년들에게 무차린다 용왕과 부처님의 일화를 설명해 주고 계신 유수 스님nbsp▲ 대탑 주위에 그려진 조각들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보수 법사님nbsp그리고 대탑을 배경으로 스님과 함께 차량별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모두들 성지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정진을 할 수 있었음에 기쁜 마음이 되어 활짝 웃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차량별로 스님과 함께 단체사진. 공양물을 올린 13호 차량의 순례단과 함께.nbsp순례단은 보드가야 대탑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왔습니다. 학교에서 순례객을 위해 따뜻하게 물을 데워주어서 오랜만에 샤워도 하고, 저녁식사도 맛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 예불을 드리고, 지이바카 병원 2층 홀에 모여 JTS 활동에 대한 소개를 들었습니다.nbspnbsp현지인 활동가 및 한국인 활동가 소개 후 JTS 21년의 성과를 ppt로 보고, 활동파트별로2014년 3대 뉴스를 전해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육팀의 3대 뉴스는 출석률 높이기, 정부학교 지원, 특별수업 강화라고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영양식을 줄 때에만 출석율이 높아지고 다른 날은 낮아서 알고보니 아이들이 여러 학교에 등록해놓고 여기저기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일 오지 않으면 스웨터를 주지 않는다고 했더니 출석율이 매우 높아졌다고 합니다. 매달 개근상 선물을 주는 등 유치원부터 학교 다니는 습관을 익히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부학교에 대한 문구류 지원 및 아이들의 학습능력에 대한 주기적인 체크를 한다고 합니다. 또 아이들이 학교오는 걸 즐거워할 수 있도록 태권도, 전통무용, 현대무용, 티비시청 등 다양하 특별수업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배우도록 하고 있답니다.nbspnbsp▲ 현지 활동가들로부터 인도JTS 사업에 대해 설명을 듣는 시간nbsp마을개발팀의 3대뉴스는 우리마을 서로돕기, 주민생활환경 개선, 소득창출사업이였습니다. “내가 할게요” 라는 뜻의 “함까렝게”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쉬람단이라고 말하는 공동울력을 통해 도로, 수로공사를 하고 있는데, 작년에는 마을청소 쉬람단을 만들어 내집앞은 자기가 공사하고 청소하도록 가르치고 있답니다. 핸드펌프 수리를 작년에 성지순례를 온 두 청년의 후원으로 신규 8회, 수리 135회를 했다며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물레공장을 만들어 소득창출사업을 하고 있는데, 물레 중급반을 졸업한 분들이 유치원 교복을 900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을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최동호님은 “인도의 마을이 한국의 6070년대 생활과 비슷하니, 그때의 아이디어들을 많이 내어주면 고맙겠다”고 당부했습니다.nbspnbsp▲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인도인 활동가들nbsp그리고 이번 인도성지순례 스텝으로 참가한 전 인도JTS 선배 활동가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21년 인도JTS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지바카 병원 초창기부터 21년 동안 함께해 오고 있는 진료담당 까메스와르, 유치원때부터 수자타를 다녔고 지금은 지이바카 병원의 모자보건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삼부. 유치원 교감선생님인 인드라짓, 노동학교를 나와서 지금은 전체 시설을 담당하고 있는 바브랄, 노동학교 출신이고 급식, 자전거를 담당하고 있는 아룬의 인사가 있었습니다.nbspnbsp▲ 9년간 인도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활동하셨던 장영주 행자님nbsp이후 질의응답 시간에 젊은 청년들이 해외 봉사에 지원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는 질문에 각각의 활동가들이 답을 해주었습니다. 이어 다년간 인도JTS에서 활동했던 분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보광화 행자님은 JTS의 경험을 자료화하는 작업을 했었고, 장영주 행자님은 9년간 있으시면서 급식 관련일부터 시작해서 마을 가구조사를 통한 기초자료 만들기 작업을 했고, 또 의식이 개선될 수 있도록 뭔가 꺼리를 만들어 주는 보이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주법사님은 초창기에 파견이 되어서 주로 학교 짓는 일을 많이 하셔서 한국에 오면 십장일을 해보겠다 할 정도였다고 하셔서 모두들 함께 웃었습니다.nbsp내일은 오전에 전정각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와 수자타아카데미 21주년 개교기념식을 하고, 오후에는 둥게스와리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둘러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매일 매일이 꽉찬 순례 일정인데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nbsp

2015.01.13. 26,926 읽음 댓글 20개

2015.1.10 인도성지순례 4일째 가야산, 전정각산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순례를 출발한지 4일째 되는 날입니다. 곳곳에 흩어져있는 바라나시 숙소의 각자 방에서 새벽 4시에 기상한 순례단은 짐을 챙겨 나와서 버스에 올라타 일제히 5시 정각에 출발을 했습니다. 오늘은 가야산을 거처 수자타아카데미와 전정각산을 오르는 일정입니다.nbspnbsp이번 순례는 500명의 대중이 함께하기 때문에 숙소가 차량별로 총 6곳으로 나뉘어져 배치가 되었습니다. 수루비 호텔, 로터스 인, 쉬밤 게스트하우스, 바즈라 비드야 하우스, 라즈 산티 게스트 하우스, 미얀마 절 등 곳곳에 흩어져 하룻밤을 묵었습니다.nbspnbsp오늘은 부처님이 다섯 비구와 야사 등 60명의 대중을 사르나트에서 교화하고 전법선언을 하신 후 가섭 형제를 교화하기 위해 다시 우루벨라 마을로 향하신 그 길을 따라 갑니다. 바라나시에서 가야까지 부처님이 전법을 위해 걸어가셨던 그 마음을 느껴보며 무려 250km에 달하는 머나먼 길을 버스를 타고 7시간 동안 달려가 봅니다.nbsp이동하는 도중 잠깐 차를 세우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인도는 도로가에 화장실이라는 것이 없고, 모든 곳이 다 화장실입니다. 화장실 위치에 대해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 하고 송수신기에서 공지가 나가자 일제히 버스에서 내려 밀밭에 숨어 앉거나, 키 높이의 나무 뒤에 나란히 앉거나 해서 볼일을 해결했습니다. 혹시나 누가 볼까봐 저 멀리까지 가신 분이 있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똥을 밟았다고 하면서 차량에 타면 냄새가 날까봐 봉지를 신발에 싸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인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재미난 풍경이었습니다. nbspnbspnbsp▲ 버스에서 내려 볼일을 보러 가는 모습nbspnbsp오전 10시 무렵에는 이동하는 도중 고속도로 옆 평탄한 공터 위에서 어제 저녁 밥솥에 해둔 밥과 한국에서 준비해 온 반찬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집안 냉장고만 열면 볼 수 있는 흔한 반찬들이었지만 모두들 탄성을 자아내며 맛있게 식사를 마쳤습니다. 스님께서도 조에 들어가셔서 순례객들이 싸온 반찬으로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nbspnbsp▲ 어제밤 전기밥솥으로 해둔 밥으로 점심 식사nbsp다시 버스를 타고 달리며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인도의 모습에 법사님들의 자세한 설명이 더 해지니 이곳 상황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다리 아래로 물이 말라 하얗게 강바닥의 모래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인도는 6월 말에서 9,10월까지는 우기이고 나머지 계절은 건기라고 합니다. 빨래를 하려는 듯이 여인들이 빨래 감과 양동이 같은 것을 들고 강을 지나거나 삼삼오오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물이 말라보이지만 모래를 파면 물이 나와 그것으로 빨래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nbspnbsp벽돌을 쌓아 집을 짓기 위해 담을 만드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인도에서는 벽돌도 항아리처럼 흙으로 빗어서 만든다고 합니다. 벽돌 공장도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버스 안에서 서로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정토회를 만나고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어제와 그제 성지순례을 하며 느낀 소감 등을 함께 나누며 서로 친해지는 시간도 가졌습니다.nbspnbspnbsp한 시간 정도를 더 달려 가야산에 도착해 산을 오르니 구걸하는 아이들이 따라 붙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구걸하는 사람이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어서인지 일행들은 잡힌 손을 쉽사리 뿌리치지 못했습니다.nbsp가야산 정상에 올라 부처님께서 수행하시던 곳에 모여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가야산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에 가야라는 나라가 있죠. 그 이름이 여기 가야에서 온 말이예요. 가야시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도시입니다. 이 산은 가야에 있다고 가야산이라고 불리었는데, 현재는 저 산꼭대기에 브라만 신을 모셔놓았기 때문에 ‘브람조니’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리고 멀리서 보면 꼭 코끼리 머리 같이 생겨서 한문으로는 ‘상두산’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래서 경전을 읽을 때 상두산이라고 적혀있으면 가야산을 말하는 것이라고 아시면 돼요.nbspnbspnbsp부처님이 카필라바스투에서 출가를 하셔서 왕사성으로 오셔서 두 분의 스승 아래에서 공부를 했고 그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배울 사람은 없으니 그 다음 단계는 스스로 증득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용맹정진하러 가야 쪽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 산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주욱 둘러보고 강의 동편 전정각산이 좋겠다 싶어 그곳으로 가서 6년 고행을 하셨습니다. 저 쪽을 한번 보세요. 저곳이 니련선하, 네이란자라강입니다. 저 네이란자라강 동편이 둥게스와리입니다. 둥게스와리는 부정한 곳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행하기에는 아주 좋아보이셨나봐요. 그곳으로 가서 거기서 6년간 용맹 정진을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가야산을 내려가면 이제 둥게스와리로 가게 됩니다.nbspnbsp경전의 기록에는 이 산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쫓아서 그것을 충족시켜서 만족을 얻는 쾌락을 추구하고, 또 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금 고행을 하는, 이런 수행을 하고 있다고 보시고 진정으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구하기 위해서 정진하겠다는 결심을 이 산 위에서 하십니다.nbspnbsp그리고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야사 등 60명을 교화하고 다시 이곳 가야 근교의 우루벨라 촌으로 오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 등 가섭 삼형제가 거느리고 있던 1000명의 제자들을 교화를 하게 됩니다. 그 1000명의 비구가 이 자리에 앉아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500명이 앉아 있는데 저 뒤의 남아 있는 공간을 보니 1000명이 다 앉아질까요? 충분히 앉아지겠죠. 이제 증명이 되었어요. nbspnbspnbsp그리고 여기는 그 1000명의 제자들에게 불의 설법을 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마음 속에 질투심이 있고 탐진치 삼독이 있는 한 해탈을 못한다’, ‘외부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 고 하면서 부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었어요. 그래서 불을 섬기는 제사 도구를 다 강물에 버리고 1000명의 제자들이 이 산에 모여서 부처님의 불의 설법을 들었어요. “너희들은 밖의 불은 껐다. 그러나 아직 마음 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부지런히 수행정진해서 마음 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 하는 유명한 설법을 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자, 이제는 다시 차를 타고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하셨다는 저 강 건너 동편의 언덕 전정각산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nbsp설명하시는 스님 곁에 산 아래에서부터 스님을 환영하며 따라오고 또 눈을 반짝이며 스님 옆에 앉아있던 인도 남성분이 계셨는데 이 분이 갑자기 등장하셔서 스님께서 이 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nbspnbsp“여기 저를 환영하고 따라와서 앉아 계신 이 분은 제가 1991년 인도에 처음 왔을 때 만난 분이세요. 그 때 저는 전정각산을 찾아간다고 갔는데 이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정각산 다녀왔다고 자랑을 했는데 저녁에 태국절 스님이 제 얘기를 듣더니 “거기는 브람조니이다” 그래요. 그래서 다시 지도를 봤더니 가야산에 갔다 온 거였어요. 그 때 왔을 때 저를 봤다고 지금 아는 체를 하네요. 인도 사람들이 기억력이 참 좋아요.” nbspnbsp스님과 인연이 있는 인도 남성분에게 순례객들 모두 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법문을 들은 바위보다 약간 아래쪽에 부처님이 앉으셨던 자리라고 해서 네모 모양으로 약간 움푹 패인 바위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무슨 철근도 아닌데 이렇게 움푹 패였어요” 하면서 웃자, 순례객들도 삼삼오오 그곳에 가서 앉아도 보고 사진도 찍고 주위를 빙 둘러본 후 산에서 내려왔습니다.nbspnbsp▲ 저 뒤에 바위 위에 순례객이 앉아 있는 곳이 부처님이 앉았다는 움푹 패인 곳.nbspnbsp가야시에서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둥게스와리까지는 11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둥게스와리는 불가촉 천민이 주로 사는 지역이고 여러 가지로 환경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스님께서도 처음에는 이곳을 못 찾아 엉뚱한 마을에 가져갔던 옷가지 등을 나눠주고 오실 정도로 외진 지역인데, 오늘은 아주 잘 포장된 길을 만났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도로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며 몇 년 전 이곳에 근무했던 장영주 행자님은 무척 놀라워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구걸하며 따라 붙는 아이들에게 돈을 줘 보기도하고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거치시다가 아이들이 구걸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방법으로 학교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합니다.nbspnbspnbsp가야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끈질기게 따라오며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며 스님께서 왜 둥게스와리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우셨는지 그 큰 뜻을 다시 헤아려 보기도 했습니다.nbspnbsp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하자 순례단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꽃 목걸이를 손에 들고 길 양 옆으로 학생들이 서서 뜨거운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가장 먼저 스님께서 걸어가자 선생님과 아이들 여러명이 꽃목걸이를 스님께 걸어주고, 맨 앞에 코끼리를 탄 아이는 스님의 머리 위로 꽃잎을 흩뿌리고, 인도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은 풍악을 연주하며 환영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학생들은 500명의 순례단 모두에게 꽃 목걸이를 걸어주었고, 순례단 모두가 꽃목걸이를 걸어 준 아이들의 손을 각각 잡고 수자타아카데미 교문으로 들어오는데, 그냥 가슴이 뭉클해지고 감동이 절로 일어났습니다. 구걸하던 아이들이 스님께서 세우신 학교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이제는 예쁜 교복을 차려입고 이렇게 순례단을 반갑게 환영해주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nbsp학교 안으로 들어와서는 고 설성봉 거사님의 추모비에 아이들로부터 받은 꽃목걸이를 헌화하고 참배를 하였습니다. 이곳 학교 건물을 짓는 봉사활동을 하시다가 도적대가 침입해 쏜 총을 맞고 운명을 달리하신 설성봉 거사님의 뜻을 기리며 삼배를 하면서 지금의 수자타아카데미가 있기까지 수고하신 많은 분들의 노고를 가슴에 깊이 새겨보았습니다. nbspnbspnbsp학교 건물 마당 안으로 들어오니 학교 안은 마치 운동회 날인 듯 꾸며져 있었습니다. 학교의 상급생들은 장시간 달려 온 순례단을 배려해서 짜이와 쿠키를 정성껏 대접해 주었습니다. 순례단을 맞이하는 학생들의 정성을 학교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짜이를 마시며 잠시 여유를 갖은 순례단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 학교 건물을 각각 소개하고, 오늘 오후 일정과 전정각산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서 잠깐 소개해 주셨습니다. 스님의 안내를 듣고 곧바로 전정각산에 올라 유영굴 앞의 넓은 공터에서 예불을 했습니다. 500명의 대중이 가사를 수하고 유영굴을 향해 “지심귀명례”를 우렁차게 부르며 머리 숙여 절을 하니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부처님께서 6년 간 고행하실 때의 얘기를 들려 주셨습니다.nbspnbspnbsp“이곳이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하셨다고 하는 전정각산입니다. 저기 보이는 흰 건물에 제1유영굴이 있고요. 잠시 후 산에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에 제2유영굴이 있고요. 저 높은 봉우리 밑에 제3유영굴이 있습니다.nbspnbsp부처님은 이곳에서 용맹정진을 하셨는데 대단한 결심을 하셨어요. 경전에 기록에 보면 음식도 나중에 가서는 하루에 대추 한알을 먹다가 3일에 한알을 먹다가 이렇게까지 했어요. 대추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마을에 가면 자연산으로 풍부한 것은 대추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학교를 지을 때도 마을 사람들이 저에게 공양 올리는 것은 대추였어요. 아마 그래서 대추를 드신 것 같아요. 그래서 거의 야생동물처럼 사셨는데, 음식도 제대로 안 먹고 추위도 피하지 않고 더위도 피하지 않고 그렇게 고행을 했어요. 그렇게 극심한 고행을 해서 여러분들이 고행상에서 보듯이 뱃가죽이 등허리에 붙어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6년이나 했는데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nbspnbsp그래서 자신의 수행을 다시 되돌아보았습니다. 욕구를 따라가는 것만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억압하는 것도 욕망에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정반대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욕구에 대응하는 거였어요. 이것을 발견하시자 밥을 안먹는다든지 잠을 안잔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것이 해탈에 도움이 안된다고 보시고 그것을 버리셨어요. 욕구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욕구를 참는 것도 아니고 욕구를 알아차리고 욕구를 지켜보는 제 3의 길인 ‘중도’를 발견하시고 이 산을 내려가셨어요.”nbsp그리고 부처님의 고행 당시의 정황이 잘 기록된 경전을 함께 독송하고, 또 고행하시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백명의 대중이 전정각산에서 명상하는 모습이 또한번 장관을 이루었습니다.nbspnbspnbsp8호차부터 13호차까지는 산 중턱에 위치한 유영굴에 참배를 하고 곧바로 숙소로 돌아왔고, 1호차부터 7호차까지는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의 능선 위로 올라 둥게스와리 마을 전체의 전경을 조망해보며 해질녘 풍경을 만끽하고 내려왔습니다.nbspnbspnbsp수자타아카데미로 내려온 순례단은 한국에서 준비해 온 반찬과 학교에서 제공해 준 밥과 된장국으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밥과 된장국이 너무 꿀맛이여서 500여명이 먹을 밥을 하느라 수고해준 인도JTS 현지 스탭 분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nbspnbsp저녁 7시 쁘락보디 홀 대강당에서 저녁 예불을 한 후 지이바카 병원 2층의 컬쳐홀에 모여 개교 21주년을 맞은 수자타아카데미 소개 영상을 보고 현재 이곳에서 생활하며 봉사하고 있는 행자님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모두 20대와 30대 젊은 청년들이었는데, 이 먼곳까지 와서 뜻깊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의젓해 보여서 순례객 모두 뜨거운 박수 갈채로 격려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스님으로부터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울 당시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살아있는 역사들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nbsp“1994년 1월에 학교가 처음 개교했습니다. 1993년 12월에 제가 이 지역을 처음 방문했고요. 성지순례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답사를 하러 왔었어요. 강 건너 편에 차를 세우고 여기까지 걸어와서 유영굴 참배를 갔는데,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구걸하고 있었고 특히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왜 학교를 가지 않고 아침부터 구걸을 하느냐 물었더니 학교가 없다는 거예요. 학교가 있는데 가난해서 학교를 못가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렇게 아이들이 많은데 학교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싶었어요. 그래서 참배하고 내려와서 밑에 있는 두르가푸르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더니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는 거였어요.nbspnbspnbspnbsp그래서 제가 “내 나라도 아니고 너희 나라이고 내 아이들도 아니고 너희 아이들이니 너희가 땅을 좀 내어놓아라” 그랬어요. 저는 가난한 사람들한테도 보시를 잘 받아요. 여기는 토지 문서를 보면 알지만 폭이 좁고 길쭉하게 땅이 갈라져 있어요. 산쪽에서 아래쪽으로 길게 짤라야 공평하게 쓰이거든요. 왜냐하면 산쪽은 건조하고 내려갈수록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1인당 1가타씩 10명이 보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1가타는 약 45평 정도 됩니다. 그것이 지금 초등학교가 세워진 그 부지입니다.nbspnbsp두 번째는 “건축 재료는 내가 사지만 일은 너희가 해야 될 것 아니냐” 그랬어요. 그래서 학교 지을 때 월급을 안 주었어요. 학부형들이 와서 일하면 식량을 제공해주는 방식으로 봉사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건물을 다 짓고 나서 나중에 공덕비를 세울 때 ‘누가 얼마 돈을 내었다’가 아니라 ‘누가 몇 일을 일했다’ 이렇게 적어주자고 했어요. nbspnbspnbsp이렇게 학교 공사가 시작되었어요.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 아이들을 모아서 나무 밑에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여기와서 살았습니다. 이 마을에 초등학교 나온 사람이 딱 두 사람 있어서 그 사람을 선생을 시키고, 그 선생 집에 제가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갔더니 염소가 있는 방이 있었는데 염소를 몰고 나가면서 거기에서 저보고 자라고 하더라구요. 나중에 염소는 자기 방에 데려갔어요. nbspnbspnbsp짚 위에 침낭을 깔고 살았는데 몸이 좀 가려와서 침낭을 햇볕에 말릴려고 풀어보니까 안에 회색 벌레가 스무마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렇게 생활을 했었어요. 그리고 밥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아빠 가랑이 밑으로 애들이 3명씩 4명씩 들어와 있는 거예요. 서른명 밥을 해서 같이 먹으려고 있는데 밥은 입에 데지도 못하게 되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제가 어릴 때랑 상황이 흡사한 거예요. 그래서 그 날 하루 밥을 세 번인가 네 번인가 했어요. 밥 하다가 하루가 다 갔어요. 그러면서 주민들과 친구가 되었어요. 이렇게 수자타아카데미가 시작된 겁니다.”nbsp스님께서는 이 외에도 교육, 의료, 마을개발 등 각 사업이 시작하게 된 사연과 지금까지의 변화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nbspnbsp2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어느덧 밤이 깊어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선주 법사님의 내일 일정에 대한 공지를 듣고 수자타 아카데미 교실과 기숙사 건물 곳곳으로 흩어져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nbsp내일은 새벽4시에 기상해서 강당에서 예불을 한 후 새벽5시에 출발해서 보드가야까지 걸어서 이동할 예정입니다. 둥게스와리의 새벽 달빛 아래에 마을을 가로질러 걸으며 부처님이 고행을 마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리수 나무로 향해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내일 또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nbspnbsp

2015.01.12. 27,143 읽음 댓글 22개

2015.1.9 인도성지순례 3일째 바라나시

▲ 초전법륜 성지 사르나트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순례를 출발한지 3일째 되는 날입니다.nbspnbsp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한참을 자고 새벽 4시30분에 눈을 떴습니다. 눈을 뜨니 찬바람도 많이 들어오고 바깥은 껌껌한 가운데 안개가 자욱한 느낌이고, 마치 완행 열차를 탄 것처럼 기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역에 설 때 마다 가끔씩 인도 사람들 목소리가 웅성이며 들리곤 했습니다.nbspnbsp▲ 달리는 기차 안에서의 천일결사 기도.nbspnbsp새벽5시 무변심 법사님의 집전으로 송수신기를 통해 천일결사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달리는 새벽 기차 안에서 도반들과 함께 기도하는 느낌은 무척 인상적이였습니다. 기도 중 예불문에서 “오백성” 이라는 문구가 나올 때 스님께서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말씀하셨듯 오백 아라한 중 한명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차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설레임이 들었습니다.nbspnbspnbsp새벽 예불이 끝나갈 무렵 예상보다 일찍 바라나시 근교의 무갈사라이 역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30분 일찍 도착했다고 합니다. 새벽 5시50분 무렵 사홍서원까지 다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짐을 싸서 기차에게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헤드랜턴을 끼고 어깨와 양손에 배낭과 캐리어를 둘러메고 철로 위로 난 육교를 오르락 내리락 하며 땀 범벅이가 되어 겨우 무갈사라이역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육교를 오를 때는 짐이 무거워서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바라나시로 들어오는 팀들을 통해 성지순례 물품들은 미리 이동되었기 때문에 예년보다 공용짐이 많이 줄어들어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짐운반을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정토회 성지순례단이 보름 동안 타고 다닐 버스. 총 13대가 줄을 지어 이동합니다. nbspnbsp무갈사라이역을 빠져나오니 큼직한 버스들이 순례단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버스에 모두 짐을 싣고 6시40분경 바라나시의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 이동 중에 창밖을 보니 소똥을 말리는 시골 풍경도 보이고 캘커타와는 또다른 느낌이었고, 새벽이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무척 활기차 보였습니다. 산스크리트 유니버시티 앞에서 하차하여 2인 1조씩 짝을 이루어 30루피 50루피씩 가격 흥정을 하면서 자전거 릭샤를 타고 강가강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자전거, 릭샤, 오토바이, 자동차, 소, 개까지 길거리를 지나가고, 차들은 쉴새없이 빵빵 경적을 울렸습니다.nbspnbsp▲ 자전거 릭샤를 타고 강가강으로 향하는 순례객들nbsp스님께서는 오토릭샤를 타고 가장 먼저 강가강에 도착해 순례단이 배를 타는데 문제가 없는지 점검을 하시고 어느 정도 다 왔을 때 스님께서도 순례단과 함께 배를 타셨습니다. 아침녘 노를 젓는 배를 타니 한층 운치가 더했습니다.nbspnbsp▲ 스님의 안내를 송수신기로 들으며 배를 타고 강가강을 느껴봅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강가강을 성스럽게 생각하는 힌두교인들의 문화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강가강에서 목욕을 하면 업이 사라진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부처님께서 “만약 그렇다면 강가강에 살고 있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해탈할 것”이라는 비유를 들려주어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준 일화를 들려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강 반대편에 보이는 모래벌이 우기가 되면 다 물에 잠긴다고 설명해 주셨는데, 정말 바다처럼 보일 것 같았습니다. 왜 인도 사람들이 고통 받는 세상에서 희망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강을 건넌다는 표현으로 사용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nbspnbsp▲ 강가강 화장터. 시체를 둘러쌌던 노란색 황금색 천조각들.nbspnbsp배를 타고 화장장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아침 일찍이여서 그런지 화장이 이뤄지는 모습은 보지 못했고, 대신 시체가 거의 다 타고 시신을 둘러쌌던 노란색, 황금색 천들이 연기가 자욱한 장작 더미 위로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호화로운 왕궁에서 사셨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는 시체를 둘러쌌던 저 노란색 황금색 천을 입고 평생을 사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스님께서 “화장장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돌아가신 영가의 왕생극락을 위해 해탈주를 하자”고 하셔서 배 위에서 다함께 해탈주 삼독을 하였습니다. 순례객들 중에는 나뭇잎 위에 꽃잎과 촛불을 담아 강 위에 띄우며 소원을 비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nbspnbspnbsp배에서 내려 다시 자전거릭샤, 오토릭샤를 삼삼오오 모여서 타고 산스크리트 유니버시티에 앞에 정차한 버스 주변에 도착했습니다. 버스는 오늘 머물 숙소로 각각 향했고, 11시 무렵 숙소에 도착해 어제 바라나시에 먼저 도착한 팀들이 해준 밥에 반찬을 곁들여 조별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밤새 기차를 타고 달려와서 아침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지 밥이 꿀맛이였습니다. 급하게 밥을 먹고 ‘사르나트’로 향했습니다.nbspnbsp사르나트는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던 곳입니다. 불교인들에게는 참으로 역사적인 장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있었고, 설한 법이 있었고, 법을 전해받은 다섯 비구가 있었기에 그 법이 26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에게 법이 전해진 것입니다.nbspnbsp▲ 스님을 따라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사르나트 성지로 입장하는 오백 대중nbsp사르나트에 도착한 500여명의 순례단은 성지 입구에서부터 맨 앞에 서 계신 스님을 따라 2줄씩 줄을 맞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일제히 입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정근을 하며 탑을 세바퀴 돌고 탑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간절한 마음으로 사시예불을 올렸습니다. 사시예불 후 스님께서는 순례단 전체를 위해 축원을 해주시고, 이곳 사르나트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스님께서 “여기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이 5백성 중 한명이였을지 모릅니다” 라고 하셔서 대중들 모두가 함께 웃었습니다.nbspnbsp“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이 부처님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또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초전법륜 성지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법 바퀴를 굴리신 곳인 사르나트, 녹야원입니다. 바로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최초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다섯 아라한이 출현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삼보가 성립되었습니다. 스스로 깨달은 이를 ‘붓다’라고 하고,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한 가르침을 ‘담마’라 하고,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하는데 이 분들은 혼자가 아니고 여러명이기 때문에 복수의 의미를 써서 ‘상가’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붓다, 담마, 상가가 성립했기 때문에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곳입니다.nbspnbspnbsp우리가 부처님이 태어났다 하지만 사실은 나중에 부처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처가 태어났다고 말하지 부처를 이루지 못했으면 태어난 것만으로는 부처가 아니지요. 부처님이 도를 이룬 곳이 보드가야인데 거기야 말로 부처님이 태어난 곳이죠. 그러나 부처님이 설법을 안했으면 우리가 부처님을 모르잖아요. 그러니 중생의 입장에서 부처가 출현한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이곳, 사르나트입니다. 우리가 법문을 듣고 우리가 깨달아봐야 붓다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곳이 불법승 삼보가 성립된 곳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성스럽게 여긴 것입니다.nbspnbsp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200년이 지난 후에 인도에서 제일 위대한 성군이였던 아쇼카 왕이 출현했는데, 그분은 인도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통일하고 불법에 귀의를 했습니다.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을 크게 참회하고 불법에 귀의하고나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기념탑을 쌓았어요. 이곳에는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곳이라고 해서 기념탑을 쌓고 아쇼카 석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에는 인도 불교가 다 망해버리고 600년이 지나니까 이곳이 다 정글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에 영국 사람이 이 아쇼카 석주를 발견하고 이곳이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곳임이 다시 밝혀지고 성지가 복원되기 시작했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곳은 재가신자가 처음으로 출현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뜻을 담아서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계를 받고 가사를 받아서 사미, 즉 예비승이 되는 겁니다. 오늘부터 계를 받으면 이제 여러분들은 ‘꼼짝 마라’ 가 되는 겁니다. nbspnbspnbsp예비승이 되었으니 이제 예불할 때마다 늘 가사를 수하고 수행자로서 8대 성지를 다 순례하고 상카시아에 가서 회향을 하게 되는데, 계속 수행할 사람은 정토회에 남아서 계속 수행을 하면 되고요. 집에 갈 사람은 가사를 반납하고 돌아가면 됩니다. 원래 계율에는 들어오고 나가고를 특별한 범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일곱 번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제 첫 번째로 한번 들어왔다가 나가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가 있으니까 경전 독송하고 수계식을 하겠습니다.”nbsp그리고 부처님의 초전법륜을 생각하며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다같이 명상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부처님이 머무셨던 이곳에 앉아서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하시던 그 모습을 떠올리니 그냥 눈물이 나올 것만 같기도 했습니다. 또 경전독송을 하면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경전을 통해 다시 만나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곳 성지에서 경전을 읽으니 마치 부처님이 살아서 다시 우리 곁에 오신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곳은 처음으로 구리가 장자가 삼귀의 오계 수계를 받은 곳입니다. 그래서 순례단도 그와 같이 이곳에서 삼귀의 오계를 수계 받아 단순한 여행객이 아니라 수행자로써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해 가자는 의미를 담아 수계식을 거행하였습니다.nbspnbsp▲ 호궤합장을 하고 보수 법사님 등 법사님들께 연비를 받는 순례객들nbsp법륜 스님을 수계법사로 모시고 호궤합장을 한 채, 향으로 연비를 함으로써 성지순례 참가자들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삼귀의 오계를 받았습니다. 참회게를 하며 연비를 받을 때는 그동안 지은 죄를 참회하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 들어 많은 분들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nbspnbsp▲ 유수 스님을 비롯한 법사님들께 가사를 받는 순례객들nbsp그리고 노란 가사까지 받아서 수행자로서의 위의까지 잘 갖추었습니다. 가사를 걸친 순례단은 모두들 기뻐하면서 기념사진을 서로 찍어주며 밝게 웃었습니다. 혜초스님께서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1년 간이나 배를 타고 인도에 와서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했던 그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우리도 성지순례기간 동안 수행자로서 하루 하루 생활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nbspnbsp수계식을 모두 마치고 가사를 걸친 채 진정으로 수행자의 마음이 되어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다시 사르나트 탑을 세바퀴 돌았습니다. 노란 가사를 걸친 오백 대중이 줄지어 탑을 도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nbspnbsp▲ 스님을 따라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성지를 거닐어 봅니다.nbsp그리고 사르나트 탑을 배경으로 순례단 오백 대중이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수행자로 거듭난 순례단의 얼굴에 모두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nbspnbsp▲ 오백 대중이 초전법륜 성지 사르나트 앞에 모였습니다.nbspnbsp그리고 차량별로도 단체 사진을 찍은 후 스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후 신물간다 쿠티와 영불탑 참배는 차량별로 법사님의 안내를 따라 각각 진행되었습니다. 법사님들은 각 차량별로 밀착해서 자세한 설명과 안내를 순례단에게 해주었습니다. 신물간간다 쿠티는 쇠퇴해버린 인도 불교 부흥을 위해 헌신하신 다르마팔라 스님의 사리와 동상이 모셔져 있는 곳인데, 순례객들은 다르마팔라 스님께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영불탑은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맞이했던 곳에 탑을 세운 것입니다. 굉장히 큰 규모의 탑에 다들 놀랐습니다.nbspnbsp▲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맞이했던 곳을 기념해 세운 영불탑nbsp다섯 비구에게 법을 전해주기 위해 먼길을 왔던 부처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떠올려보며 법사님의 축원을 듣고 우리들도 법을 전하는 역할을 해나가자는 발원도 하면서 영불탑 참배를 마쳤습니다.nbspnbsp오후6시부터는 수라비 호텔 강당에 모여 저녁 만찬을 함께 했습니다. 500여명의 대중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식당이 이곳 바라나시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사 중인 강당을 한 곳 빌려서 만찬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nbspnbsp만찬을 마치고 순례단 전체가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가장 먼 곳에서 오신 해외에서 참가한 분들을 스님께서 소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별 정토회 참가자들이 각각 자리에서 일어나 소개를 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모였음을 서로 얼굴을 보며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특히 이번 15일 동안 순례단을 안전하게 모셔줄 운전 기사 분들과 조수들을 소개했습니다. 운전 기사 분들을 소개할 때는 정말 강당이 떠나갈 정도의 응원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스님과 각 차량 법사님들은 순례단을 안전하게 모셔 주십사 운전기사 분들에게 선물과 수고비를 각각 선물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이번 15일 동안 성지순례를 위해 곳곳에서 수고해줄 스탭들 소개가 있었습니다. 순례단 모두 스탭들에게도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각 지부별 장기자랑이 이어졌습니다. 지부별로 한명씩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이 나와서 마음껏 끼를 발산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시간 남짓한 시간이어지만 500명의 순례단 전체가 금새 한 식구가 된 듯이 가까워진 느낌이었습니다.nbspnbsp내일은 부처님이 사르나트에서 전법선언을 하신 후 우루벨라 가섭 등 천이백 대중을 교화하기 위해 가야를 향해 떠나신 그 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5시간을 이동해 가야산을 비롯해 스님께서 21년 전에 세우신 보드가야 근교의 수자타 아카데미로 가서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하신 전정각산 위에도 올라가볼 에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nbspnbsp

2015.01.10. 30,506 읽음 댓글 38개

2014.1.8 인도성지순례 2일째 캘커타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순례를 출발한지 2일째 되는 날입니다. 새벽 5시, 순례단 일행이 머물고 있는 캘커타 세바켄드라 건물의 이방 저방 방마다에서 조그마한 소리로 기도 소리가 울려 나오기 시작합니다. 인도성지순례자들의 아름다운 기도 하모니입니다. 어제 밤 새벽2시에 잠자리에 들어 무척 피곤함에도 인도성지순례자들은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어제 방콕에서, 싱가폴에서 자유시간 동안 공항에서 여기저기 바닥에 조그만 깔개를 깔고 기도하던 모습만큼이나 감동입니다.nbsp숙소에는 나무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순례참가자들은 스님의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각오를 하고 와서인지 숙소에 대한 만족도가 아주 높았고 의외로 편안한 취침을 하였다고 고마워했습니다. nbspnbsp새벽부터 쁘리앙카를 비롯한 JTS 봉사자들 덕분에 계란후라이가 들어간 샌드위치와 바나나 한조각으로 간단히 아침 요기를 하고, 아침 8시부터 일부 순례단부터 캘커타 칼리사원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또 어제 법륜 스님과 함께 이동하지 못해 방콕 공항에서 스님의 OT를 듣지 못한 분들을 위해 숙소 2층 홀에서는 인도성지순례 OT가 진행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제 방콕 공항에서 소음이 많은 곳에서 목청껏 2시간 동안이나 열강을 하셔서 무리가 되셨음에도 오늘도 1시간 반 동안 ‘성지순례자의 마음과 자세’에 대해 열정적으로 법문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 성지순례에 임하는 마음자세에 대해 OT를 해주시고 계신 스님nbspnbsp숙소에서 깔리사원으로 향하면서는 인도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이며 도시 빈민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캘커타 시를 창밖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 대하게 되는 인도인들의 생활모습과 도시광경을 보면서, 어제 스님께서 던져주신 화두 ‘부처님이 출가하게 된 문제의식’ 부처님의 사문유관을 느껴보았습니다.순례객들은 또한 인도인들의 생활모습을 보면서, ‘왜 사람들은 모두 함께 행복하지 못한 것일까?’ 를 생각해보고 캘커타 방문 목적의 의미를 새겼습니다.nbspnbsp오전9시, 깔리사원에 속해 있는 ‘죽음을 기다리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 곳은 마더테레사 수녀님이 예수님의 고통을 잊지않도록 그 정신을 이어받아 인간답게 존중받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마련한 보호시설입니다. 1954년 길거리에서 죽어가던 한 여성을 만난 테레사 수녀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침대를 제공한 것이 시초가 되었는데, 지금은 수용인원이 많이 없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오늘은 휴일이라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고 순례객들의 정성을 모아 보시금만 전하고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이어가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삼배를 올리고 돌아나왔습니다.nbsp이어서 버스탑승 후 순례객들은 국립인도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순례객들보다 30분 일찍 9시30분에 인디안박물관에 도착하셨습니다. 10시부터 입장권 판매가 시작되는데 시간 여유가 있어서 박물관 옆 골목으로 가셔서 쁘리앙카가 사주는 짜이 한잔을 드시면서 쁘리앙카와 인도 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짜이 한잔이 10루피를 했는데, 스님께서는 “20년 전에 처음 왔을 때는 1루피였다”고 하시면서 “한 10년 넘도록 물가가 크게 오르지 않았는데, 최근에 갑자기 껑충 껑충 오른다” 고 이야기 하시니 급변하는 인도사회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nbspnbsp▲ 인도전통차 짜이를 드시며nbspnbsp200년의 역사를 가진 인도박물관에서는 스님께서 직접 불상에 대한 설명을 하셨습니다. 모두들 스님을 다시 만난 반가움에 설명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기울여 들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오전 10시부터 순례단을 3팀으로 나뉘어서 30분씩 3차례에 걸쳐 박물관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불상에 대해 하나하나 상세하고 자상하게 설명해주시는 목소리엔 어제보단 훨씬 힘이 느껴졌습니다.nbspnbsp“지금 보시는 이 석주들은 산치 대탑 같은 큰 수투파를 둘러싼 울타리로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문양을 넣어 장식한 조각들이 많지요. 이 조각들은 모두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이거나 부처님의 일생에 관계되는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는 547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조각만 보고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조각한 것이라고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조각은 금방 알 수 있어요. 여기 있는 조각 같으면 여인이 누워있고 코끼리가 그려져 있는데 마야 부인이 부처님을 잉태하는 태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nbspnbsp또 이 조각은 수다타 장자가 기원정사를 창건하던 모습입니다. 금괴를 바닦에 깔고 있잖아요.nbspnbsp그리고 초기에는 불상을 그리지 않았어요. 이 조각은 BC 2세기의 작품인데, 불상이 조각되기 시작한 것은 AD 1세기 경이였어요.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원정을 오게 되면서 그 영향으로 그리스의 조각이 인도로 전해져 AD 1세기 경에 부처님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조각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부처님을 사람 모양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발바닥 모양이나 보리수로 부처님을 상징했어요. 자, 여기를 보세요.nbspnbsp▲ 부처님을 상징하는 보리수 문양nbsp이렇게 보리수가 가운데 있고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으면 이것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돼요.nbsp여기 원숭이가 나무 위를 기어다니는 조각도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전생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전생에 원숭이 왕으로 태어났을 때 피난을 가야 하는데 나무와 나무 사이가 너무 멀어서 원숭이 왕이 자기 몸으로 나무를 연결해줘서 자기를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이야기를 조각한 것입니다.nbspnbspnbsp이 불상을 보면 머리가 툭 튀어 올라와 있죠. 한국에서는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정수리가 툭 튀어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다 이 조각을 보고 만든 얘기예요. 왜 부처님은 보통 사람들과 머리 모양이 다른지 그 원형이 되는 불상이 이 불상입니다.nbspnbspnbsp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는 머리를 묶어서 장식을 했거든요. 머리에 장식이 있으면 출가하기 전의 모습을 담은 조각이예요. 그러다가 출가하실 때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머리를 잘라버렸어요. 그래서 머리를 묶은 매듭과 머리 위에 잘려진 부위를 조각한 겁니다. 그러다가 매듭을 지은 부위가 조금씩 잘 안보이게 조각이 되다가 나중에는 곱슬머리처럼 동글동글하게 문양을 넣어서 조각을 합니다. 처음에 불상은 이런 모습이였어요.nbspnbspnbsp그리고 부처님의 모습이 굉장히 당당하죠. 우리나라 불상처럼 쭈그러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아주 활동적인 모습입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불상들이 굉장히 활동적인 모습입니다. 또 밑에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모습도 굉장히 호응하는 모습이죠. 초기 불교인들의 이런 당당함과 적극성이 이제는 복원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복을 구하는 힌두교와 결합하고 한국에서는 탄압을 받으면서 쭈그리고 있는 모습이 되어간 것입니다.” nbspnbspnbsp스님께서는 이렇게 불상 하나 하나마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초기의 불상은 당당함과 적극성이 있었다고 하니 스님께서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다니시며 종횡무진 하시는 이유가 어렴풋이 헤아려지기도 했습니다. 한시간 정도의 설명 이후 첫 번째 팀은 자유 관람을 하였고,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팀이 박물관 안으로 들어오자 스님께서는 다시 열정적인 설명을 다시 되풀이 하셨습니다. 한팀에 대한 설명이 끝나면 목이 아프셔서 목에 약을 뿌리고, 다시 또 다른 한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처음 설명하듯이 매번 정성껏 하시는 모습을 보니 잔잔한 감동이 일었습니다. nbspnbspnbspnbsp관람을 마치고 박물관을 나와 조별로 자유시간을 가지며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도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재미이고 신기한 체험들을 하였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박물관 근처 식당에 머무시며 스탭들과 실무를 점검하고 체크하셨습니다. 그리고 쁘리앙카와 함께 시장을 한바퀴 둘러보신 후 하우라역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하셨습니다.nbspnbsp순례객들 또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첫 교화를 하신 사르나트로 가기 위해 박물관 앞에서 버스에 탑승하여 하우라 역으로 향했습니다. 박물관 앞에 모인 많은 인원의 순례객들을 태우려다 보니, 거리에는 크락숀 소리가 유난히 더 커지기도 하였습니다.nbsp하우라역은 델리콜카타 선의 출발역인데, 규모와 사람, 복잡함이 어마어마했습니다. 버스 중 한 대에 짐을 실은 뒷문이 열리지 않아 출발시간을 놓칠까봐 걱정되는 상황이 생겼지만, 워낙 인도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하는 곳이라는 교육을 받아서인지, 아님 여행이 아닌 순례자로서의 마음가짐 덕분인지 어느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고 잘 기다려주는 가운데 해결이 되었습니다.nbspnbsp하우라역 안은 기차를 타려는 승객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순례객들은 이어폰으로 소통하며. 조 깃발을 따라 놓치지않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차량별로 짐을 모은 후, 짐을 빙 둘러 앉아 오늘 여정에 대한 나누기를 하는 광경 속에서 정토회 순례단이 아니고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여함과 부처님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자로서의 의젓함을 느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nbsp수자타 아카데미로 향하는 공용짐이 많아서 남자 순례객들과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미리 기차가 도착하는 플랫폼 위치로 공용짐을 옮겨 놓았습니다. 모두들 땀을 뻘뻘 흘리며 합심해서 하니 한결 수월하게 공용 짐을 모두 옮길 수 있었습니다. 박스 속에는 대부분 수자타아카데미 아이들이 사용할 학용품과 마을주민 지원 사업에 쓰일 생필품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순례객들이 수고스럽지만 직접 운반해 줌으로 인해 운송 경비를 절약하게 되고, 그 절약된 경비로 천민마을 아이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25년 전 처음 성지순례를 시작할 때부터 스님께서는 매년 이렇게 많은 짐들을 순례객들과 함께 가져오고 계십니다.nbspnbsp▲ 바나라시로 가는 도중 가야역에 내릴 수자타아카데미 학교 지원 물품들nbsp짐에 대한 걱정을 덜어서인지 본인의 무거운 짐을 들고 뛰어오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표정들이 한층 밝아 보였습니다. 스님께서는 그 복잡한 가운데 기차를 기다리시는 동안 역사 안에서 또 철로 옆에서 쉼없이 원고를 읽고 교정하셨는데, 그 모습을 본 순레단들은 늘 시간을 헛되이 보내시지 않는 그 모습에 한층 고개가 숙여졌습니다.nbspnbsp▲ 기차를 기다리며 원고 교정을 보고 계신 스님nbsp오후 7시30분 기차는 신기하게도 정각에 나타났습니다. 워낙 인도는 기차 출발 예정시간이 자유롭다는 선입견이 있어서인지 순례단들은 환성을 지르며 정각에 나타난 기차를 보고 고마워 했습니다.nbspnbspnbsp기차를 탄 순례객들은 조원들끼리 저녁을 챙겨먹으며 마음나누기를 했는데, 도란도란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웃음소리가 기차칸 곳곳으로 번져나갑니다.nbspnbsp▲ 기차를 타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마음나누기를 하는 순례객들nbsp내일은 선주 법사님과 함께 델리를 경유하여 바라나시로 오는 팀, 덕생 법사님과 함께 방콕에서 바라니시로 바로 들어오는 팀까지 포함하여 드디어 500명의 순레단이 모두 바라나시에 모이는 날입니다. 초전 법륜성지 사르나트에서 수계식을 하고, 이제 진정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내일은 바라나시에서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

2015.01.09. 28,235 읽음 댓글 35개

2015.1.7 인도성지순례 1일째 한국 출발

nbsp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나는 첫째날입니다. 법륜 스님과 함께하는 인도성지순례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서 500여명의 대중이 인천공항으로 새벽부터 모이기 시작했습니다.nbspnbsp인도성지순례 스탭들은 새벽 4시에 인도 수자타아카데미에 가지고 갈 짐을 트럭에 싣고 영하 8도의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새벽 5시부터 수하물로 붙일 공용짐을 카운터 앞에 차례로 열을 맞추어 세워두고, 순례객들에게 나눠줄 자료집, 조끼, 송수신기, 여권, 항공권 등을 셋팅했습니다.nbspnbsp오전 6시30분이 되자 많은 순례객들이 인천공항에 도착해 하늘색 JTS조끼로 갈아입고 벌써부터 인도로 가는 설레임에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조별로 모여서 조장의 안내를 받고, 조장은 다시 차량 담당 법사님에게 안내를 받으며 조금씩 호흡을 맞춰가기 시작했습니다. nbspnbsp스님께서는 7시 무렵 인천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고 순례객들과 함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모두들 “스님이 오셨다” 며 스님을 무척 반겼습니다. 작년부터 정토불교대학생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성지순례를 가고자 하는 대중들의 수요도 급격히 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지순례는 무려 500여명의 대중들이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정토불교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분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26년 전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오늘 성지순례를 출발합니다. 500여명의 대중이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오백 대중이 모여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는 모습도 떠오르고,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할 때 “오백성”처럼 오백 아라한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nbspnbsp인원이 500명이다보니 비행기도 한 비행기에 다 타지 못하고 5개의 비행기로 분산해서 인도로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오전9시에는 74명의 순례객이 싱가폴 항공을 타고 캘커타를 향해 출발했고, 오전9시35분에는 170명의 순례객이 타이 항공을 타고 캘커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오후3시15분에는 케세이퍼시픽 항공을 타고 77명이 캘커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렇게 321명은 모두 캘커타로 집결을 했습니다. 또 오후1시50분에는 에어인디아 항공을 타고 113명의 순례객이 델리를 경유해서 바라나시로 들어오고, 밤9시25분에는 타이 항공을 타고 43명의 순례객이 바라나시로 들어옵니다. 인원이 많다 보니 이렇게 분산해서 각각 인도로 입국해서 결국 모레 아침에 바라나시에서 전체 인원이 모두 집결하게 됩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가장 많은 인원이 탑승한 9시35분에 출발하는 타이항공을 함께 타고 순례객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스님과 함께 타이항공에 탑승한 순례객들은 현지 시간으로 오후1시30분 무렵 방콕 공항에 도착해 캘커타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공항에 머물렀습니다.nbspnbspnbsp방콕 공항에 모인 순례객들을 위해 스님께서는 인도성지순례 일정 전반에 대해 안내하고 순례 기간 동안 지녀야 할 마음 자세에 대해 법문을 해주시는 등 OT 시간을 함께해 주셨습니다. 먼저 삼귀의 반야심경 봉독을 하며 성지순례를 시작하는 첫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안녕하세요. 성지순례 함께 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라고 순례객들을 환영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인도성지순례를 하면서 밖으로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를 순례하고, 안으로는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하며 자기를 알아가는 시간이 될 것을 강조하시면서 15박16일 동안 꼭 명심해야 할 내용들을 법문해 주셨습니다.nbspnbsp“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신라시대에 혜초 스님은 불교를 배우러 중국까지 갔다가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인도의 유명한 나란다 대학까지 가서 공부를 하셨어요. 그 때 쓴 기행문이 왕오천축국전입니다. 그분들이 가셨던 길을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다니는 것이 힘든다 하지만 힘든 축에도 안들어 갑니다. 3년 걸려서 가야 될 거리를 하루 만에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되는 것이고, 인도 안에 도착해서도 정글 속을 걸어다니며 병 걸려 죽고 강도를 만나 죽고 엄청난 희생을 치루어야 할 것을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인도 성지순례 가서 안죽고 돌아가는 것은 요행에 속하는 것이였어요. 성지순례는 곧 죽음을 각오한 여행이였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여러분들이 순례자의 자세가 되어주셨으면 해요. 여행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10대 성지순례를 가는 것이기 때문에 고생하러 가는 겁니다. 여행이 아니라고 그렇게 사전설명회에서 얘기해도 자기 혼자 속으로는 여행을 가는 사람이 많아요. nbspnbsp고생을 할 각오를 하고 가면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네’ 하게 되는데, 여행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중에 후회가 막심해지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 먹어도 부처님이 하루 한끼 먹은 것보다는 많이 먹죠? 아무리 못 입어도 다 떨어진 옷 입고 맨발로 걸어다니신 부처님보다는 좋은 옷 입고 있죠? 아무리 잠자리가 나빠도 부처님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잤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동굴에서는 안재우잖아요. 저도 처음에 성지순례 다닐 때는 침낭 가지고 처마 밑에서 자면서 다녔어요. 그 때는 가스 버너로 밥해 먹는다고 시간을 많이 소비했는데, 지금은 전기 밥솥을 들고 다니면서 밥해 먹는 방식을 개발해서 시간이 많이 절약 되잖아요. 그러니까 ‘순례이다’ 하는 것을 꼭 생각하시고 오늘 출발하셔야 됩니다. nbspnbsp바깥을 보는 풍경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다양한 경계에 부딪힐 때 일어나는 자기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내 성질이 이렇게 더러웠나?’ 하고 처음으로 알게 될 겁니다. 온갖 경계에 들끓는 자기 마음을 구경할 수 있으면 여러분들 입가에 미소가 일거예요. 성질 내면서 웃을 거예요. 그래서 성지순례가 끝나면 ‘이것이 수행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을 놓치고 밖을 시비하기만 하면 성지순례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불교대학을 아마 안 나올 겁니다. nbspnbspnbsp이처럼 밖을 향한 성지순례와 안을 향한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바깥도 다양해서 볼 것이 참 많지만, 그 바깥 경계에 부딪힐 때마다 일어나는 자기 마음의 무궁무진한 변화를 한번 구경해보세요. 그러면 자기를 알게되는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nbspnbsp순례를 하면서 하나 하나 불평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길거리에서 밥 먹고, 똥 옆에서 밥 먹고, 아무데서나 자고, 차 타고, 씻지도 제대로 못하고, 불편을 생각하면 끝이 없어요. 그런데 이것을 재미로 생각하면 굉장히 재미있어요. 일생에서 가장 추억에 남을 온갖 에피소드가 생기고 한권의 책이 될만한 재미있는 여행이 돼요. 그리고 자기 마음 속을 잘 들여다보면 ‘내가 이것 밖에 안되나’ 할 정도로 온갖 까르마가 다 일어납니다. 다녀보면 재미있어요. 겉으로는 예의 바른 것 같은데, 같이 지내다보면 밥할 때 밥숟가락만 얹고 가는 사람도 있어서 밉상입니다. 몇일 지나보면 밥하는 사람은 내내 밥만 하고, 밥솥 들고 다니는 사람은 누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밥솥만 들고 다닙니다. 숟가락 들고 밥만 먹고 가는 사람은 내내 밥만 먹고 가고요. 이런 모습들을 보면 분별심이 생기겠죠? 이럴 때 이 문제를 짜증을 안내고 어떻게 해결할까, 이것은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그렇다고 성질을 내면 성질이 더럽다는 소릴 듣고,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세상이 불공평해지고요. 이런 것이 다 공부거리가 됩니다.nbspnbsp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여행을 하면서 스님 법문 듣고 경전 독송하고 성지를 순례하는 ‘밖’을 보는 여행이 하나 있고요. 다른 한쪽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하는 ‘안’을 보는 여행이 있습니다. 도반들과 생활하면서 맨날 같은 차 타고 같이 밥 해먹고 다니니까 한 식구와 다름 없습니다. 가족들 빼고는 보름 동안 이렇게 한방에서 같이 자고 밥해 먹고 다닌 적은 없었을 거예요. 싸우는 것도 원래 가족들과 많이 싸우잖아요. 그래서 같은 조 안에서 밉상인 사람이 생깁니다. nbspnbspnbsp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함께 해결해 나갈 것인가? 이것도 우리의 중요한 수행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좋은 성지순례는 안팎으로 다 하는 겁니다. 밖으로만 성지순례를 하시면 안됩니다. 볼펜으로 열심히 받아적기만 하지 마시고, 항상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고 도반들과의 관계를 바라보면서 역할을 함께 나눠서 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nbsp밖을 보는 순레도 좋지만 안을 보는 순례도 해야 한다는 말씀에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순례에 임해야 할지 확실히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보름 동안 정말 즐거운 공부가 되겠구나’ 하고 긍정적인 마음이 되니까 성지순례를 시작하는 마음이 한층 더 가벼워진 느낌입니다.nbspnbsp이어서 인도의 역사와 기후, 사회 문화 환경 등 인도 전반에 대해 지도를 짚어 가시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런 후 부처님의 생애와 순례객이 찾아갈 10대 성지에 대해서도 개괄적인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덧붙여 인도는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추워지고 또 건기여서 먼지가 많아 감기에 잘 걸리게 되는데, 감기에 걸리지 않게 꼭 조심할 것을 당부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연초부터 무리한 미팅 일정으로 목젖이 많이 부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2시간 동안이나 순례객들을 위해 열강을 해주셨습니다. 참가한 분들도 오랫동안 앉아 있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스님과 함께하는 순례여서 그런지 자료집에 열심히 메모를 하며 눈을 반짝이면서 스님의 법문을 경청했습니다.nbspnbsp스님의 법문을 통해 마음이 풍성해진 순례객들은 조별로 모여서 한국에서 싸온 도시락을 같이 나눠먹으며 공항에서 정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서로 자기 소개도 하고 마음 나누기도 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 한 식구가 되어갔습니다.nbspnbspnbspnbsp▲ 한국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조별로 저녁식사를 하는 순례객들nbsp이어서 자유시간을 갖고 저녁8시40분에 탑승구에 모여 비행기를 탄 후 밤12시에 캘커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매연의 매케한 냄새가 나면서 ‘이곳이 인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공항에는 인도JTS의 현지 활동가 최동호, 권도영, 김정준님이 트럭과 버스를 준비해서 마중을 나와 공용짐은 트럭에 싣고, 버스에는 개인짐을 실어서 숙소로 향했습니다.nbsp▲ 순례객들을 마중나온 현지 스탭 최동호님과 김정준님nbsp한편 싱가폴을 경유하여 캘커타로 온 11,13호차 순례단 70여명은 유수스님, 일륜광 행자님이 안내하였습니다. 전체 순례자들 중 가장 빨리 인도에 입국한 이 그룹은 싱가폴 공항에서 유수스님을 모시고 인도순례일정 및 순례 목적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가졌습니다. 유수스님은 “순례 중에 일어나는 마음을 잘 살펴 자기와의 여행을 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라 하시며 특히 “13호차가 뒤에 쳐지는 사람들을 챙기는 역할을 맡게 되어 다른 어느 조보다 입이 많이 나올 것”이라며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니 불편함을 감수하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신기 착용을 강조하시며 “법륜스님은 이어폰을 타고 우리에게 오신다”고 농담을 하시자 모두들 크게 웃었습니다. 일행은 캘커타에서 법륜 스님과 함께 타이 항공을 타고 온 본대와 합류해 인도에서의 첫 밤을 함께 보냈습니다. nbspnbsp또 한편, 순례단 80여명은 묘덕법사님과 불국화 행자님의 안내로 홍콩을 경유하여 캘커타 공항에 본대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함께 합류했습니다.nbspnbsp▲ 캘커타 공항에 도착한 성지순례객들nbsp오늘 캘커타에 도착한 321명의 순례객이 머물 숙소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교육 시설 ‘세바 켄드라’입니다.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되었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여로를 풀고 잠자리에 듭니다.nbspnbsp▲ 인도성지순례 첫날 숙소, 세바 켄드라nbsp내일은 캘커타에서 깔리가트 사원과 죽음을 기다리는 집을 보고 인디안 박물관을 관람한 후 하우라역에서 기차를 타고 밤새 바라나시 근교의 무갈사라이 역으로 이동할 계획입니다. 캘커타의 도심 속을 이동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인도를 느껴보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

2015.01.08. 32,093 읽음 댓글 58개

2015.1.5~6 평화재단 미팅 및 성지순례 점검회의

nbsp안녕하세요. 어제와 오늘 소식을 함께 전해 드립니다. 어제 스님께서는 두북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오전에는 원고 교정을 보시며 휴식을 하셨습니다. 연초부터 미팅을 연이어 하시고 지역으로 장거리 이동을 하시느라 몸이 많이 지치셔서 목이 붓고 온몸에 몸살 기운이 있으셨습니다. 오전에는 두북에서 휴식을 취하시고, 오전10시30분에 두북을 출발하셔서 서울에 오후3시에 도착하셨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시자마자 건강이 계속 안좋으셔서 곧바로 이비인후과에 가셔서 진료를 받으시고 의사선생님의 배려로 영양제를 맞으셨습니다. 진료 후에는 서울 정토회관에 머무시면서 휴식 겸 원고 교정과 업무를 보셨습니다.nbspnbsp오늘은 평화재단에서 하루종일 찾아오시는 손님들과 미팅을 하시고, 인도성지순례 출국 전 업무를 점검하는 회의를 실무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nbsp오전 10시에는 법사단 및 인도성지순례 스텝들과 성지순례 실무 준비사항 중 다시 점검해야 할 사항들을 함께 체크하시고 의논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특히 법사단은 성지순례 중 서로 어떻게 역할 배분을 하며 전체를 진행해갈지 꼼꼼히 큐시트를 함께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고, 스님께서는 큰 틀에서 우려되는 점들을 한번 더 점검해 주셨습니다.nbspnbsp▲ 인도성지순례 준비 점검회의nbspnbsp12시에는 참여연대 이태호 사무처장님과 우리민족서로돕기 강영식 사무총장님이 스님께 새해 인사를 하러 찾아오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최근 시민사회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으시고 시민사회 운동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 새해에는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또 대북 인도적 지원 현황을 들으시고는 새해에는 지원이 원활이 이루어지도록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서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면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nbspnbsp▲ 참여연대 이태호 사무처장 미팅nbsp2시에는 도문시 전임 종교국 국장이셨고 현재는 도문시 두만강문화발전촉진회 회장을 맡고 계신 김학길 선생님이 오셔서 한국에 들어오셔서 스님을 찾아와 새해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누셨습니다. 김학길 선생님은 스님께서 매년 8월에 동북아 역사기행을 가실 때 숙소와 식당을 손수 예약해주시고, 스님 일행을 항상 정성껏 맞이해 주고 계신 분입니다. 특히 조선족 사람들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지역 사회에서 하고 계십니다.nbspnbsp▲ 김학길 도문시 두만강문화발전촉진회 회장님 방문nbsp오후 3시30분에는 법사단과 다시 미팅을 갖고 인도성지순례 실무 준비 관련해서 미진한 부분을 더 점검하시고, 정토회 사업 전반에 대해서도 의논하고 회의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nbspnbsp▲ 정토회 법사단 회의nbsp오후 4시30분에는 평화재단 실무자들과 함께 2015년 평화재단 사업계획과 인사 이동에 대해 점검하고 의논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nbspnbsp이 외에도 이렇게 오늘 스님께서는 여러차례 미팅을 하시면서 바쁜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인도성지순례를 내일 떠나시면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시기 때문에 미리 의논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정토회관에 들어오셔서도 밤늦게까지 업무를 더 보시고, 인도성지순례에 챙겨갈 짐을 싸신 후 오늘 일정을 마치셨습니다.nbsp내일부터는 인도성지순례가 시작됩니다. 500여명의 대중들이 부처님의 가신 길을 따라 인도 전역을 14박15일 동안 순례를 하게 됩니다.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순간부터 순례가 끝나는 순간까지 생생한 소식을 매일 전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시고, 도를 이루시고, 전법을 하시고, 열반하신 인도로 가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nbsp

2015.01.07. 19,441 읽음 댓글 1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