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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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8 JTS 안산 다문화센터 개원식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JTS 안산 다문화센터 개원식에 참석해 “다문화센터의 개원 취지와 앞으로의 역할”에 대해 법문했습니다.nbspnbsp어제밤 두북에서 주무신 스님은 새벽 5시에 두북을 출발하여 오전 9시 무렵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후 평화재단에서 연이어 미팅을 가진 후 목소리가 갈라지고 편두가 붓는 통증이 있어서 이비인후과에 들러 진료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단식 후 연이어 동북아 역사기행에서 과로를 했는데다가 입재식과 간담회에서 계속 법문을 하다보니 목에 무리가 간 것 같았습니다.nbspnbsp저녁 7시 30분부터는 JTS 안산 다문화센터 개원식에 참석했습니다. 안산시 단원구에 새롭게 자리잡은 JTS 다문화센터 입구에 들어서자 많은 봉사자들이 환한 웃음으로 반갑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nbspnbsp▲ nbsp안산시 단원구에 위치한 JTS 다문화센터nbsp▲ 개원식에 참석해 방명록을 적고 있는 스님nbspnbsp개원식에는 인근 태국 절에서 스님 두 분이 오셨다가 가셨고, 스리랑카 공동체 대표인 닐락샤님, 조선족 분들 등과 안산 지역의 정토회 회원분들 170여명이 함께 자리해 발디딜 틈도 없이 빼곡이 자리를 메워주었습니다.nbspnbspnbsp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정토회 이기혜 대표님과 JTS 김기진 대표님의 인사 말씀이 있었습니다. 정토회 이기혜 대표님은 “지금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이 170만명을 넘어섰고,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들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고 하면서 “이런 시기에 안산 다문화센터가 개원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축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 인사 말씀을 하고 있는 정토회 이기혜 대표님nbspJTS 김기진 대표님은 “오늘 개원하기까지 많은 봉사자들과 후원회원들의 정성이 있었다”며 “JTS도 외국인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을 위해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nbspnbsp▲ 개원을 위해 정성을 모아준 회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JTS 김기진 대표님nbsp다음은 개원 준비를 하신 정토회 인천경기서부 사무국장 송순애님의 경과보고와 회계보고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모여져 이렇게 정갈한 공간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안산정토법당 회원들의 축하 공연이 있었습니다. 노래 ‘터’와 ‘행복의 나라’를 기타 반주에 맞춰 신나게 부르자 대중들도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치며 함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마치 잔칫집 같은 분위기 속에서 개원식은 한껏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습니다.nbspnbsp▲ 안산정토법당 회원들의 축하 공연nbsp대중들은 스님께 청법가를 부르고 삼배를 하며 개원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오늘 한국JTS가 안산 지역에 다문화센터를 개원하면서 ‘죄송합니다’라고 먼저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늦게나마 다문화센터를 개원하게 됨을 기뻐하며 축하를 드립니다. 왜 제가 다문화센터를 개원하는 날에 ‘죄송합니다’ 하는 말을 맨 먼저 드리냐 하면,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이해학 목사님이 계신 성남 주민교회 한 켠을 빌려 김해성 목사님이 처음으로 외국인노동자센터를 개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에 참석해서 종교를 떠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함께 풀어나가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지키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왜 이렇게 되었냐면, 그렇게 약속을 하고 나서 한달도 지나지 않아서 중국 조선족 분들이 한국에 오려고 했다가 비자 정책이 바뀌면서 사기 피해자가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 사기 피해자 협회가 구성되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사기 피해자를 돕기 위해서 중국을 오가게 되었고, 또 연이어 북한 주민들의 아사 소식을 듣게 되어서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고 국경을 넘어온 북한 난민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23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거기에 지난 20년을 온통 집중을 하다가 국내에 나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10만명에서 170만명으로 늘어났고 임금을 못 받는 사람, 불법 체류, 의료 사고 등 여러 가지 인권 침해가 발생하면서 법률적인 지원과 쉼터 제공 등 여러 지원이 필요함에도 조그마한 도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인권 문제에 몰두해 있으면서도 이 부분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nbspnbsp그래서 한국에 공부하러 온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스님들에게 ‘JTS에서 사무실 한 칸을 내어줄 테니까 여러분들의 나라 국민들이니까 여러분들이 좀 이 일을 하셨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들도 북한에서 굶어 죽는다고 하기 때문에 제가 도저히 이 일을 할 형편이 못 됩니다’ 라고 말했어요. 그 분들은 그렇게 할 의향은 있었지만 대부분 한국에 공부하러 오셨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어요. 이렇게 해서 이 사업이 20년 동안 지체가 되었습니다.nbspnbsp또, 제가 스리랑카에 가면 스리랑카 스님들이 저에게 불평을 많이 해요. ‘스리랑카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식민지 지배를 겪은지 3백년이 지나도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한국만 갔다오면 다 기독교인이 되어서 오느냐. 도대체 한국이 어떤 나라이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며 항의를 해요. 그러면 제가 할 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때 주로 개신교 사람들이 그 분들을 여러 가지로 많이 돕기 때문에 아마 종교까지도 바꾸게 된 것 아닌가’ 이렇게 얘기했더니 ‘그럼 불교는 뭐 하고 있느냐?’ 그래요. 그래서 ‘부끄럽지만 한국 불교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 자기도 적응을 제대로 못해서 헐떡거리고 있어서 남을 도울 여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안하다. 그러니 당신들이 한국에 와서 당신들의 국민들을 좀 챙겨라’ 이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nbsp오늘 스님은 20년 전에 한 약속을 이제서야 지킬 수 있게 되었다며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지만 ‘먼저 간 자 나중 가고, 나중 간 자 먼저 간다’는 성경 구절처럼 비록 시작은 늦었지만 그동안 쌓아온 JTS의 튼튼한 신뢰의 기반 위에서 앞으로는 더욱 의미있는 활동들을 많이 해나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JTS의 창립 취지를 이야기하면서 그 연결선 상에서 오늘의 다문화센터를 개원하게 되었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nbspnbsp“JTS를 창립할 때 인도의 불가촉천민 아이들을 보면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는데 나라, 민족, 인종, 계급, 종교 이런 것들을 따져서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 받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별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초등학교도 못 다니고 글자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셈본은 할 줄 알아야 하고 글자는 읽고 쓸 줄 알아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nbspnbspnbsp이 세가지는 우리 인류가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니까 기독교인이니까 무슬림이니까 이런 이유로 배제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났다고 한국 문제에만 늘 빠져있었는데 이제 우리 나라 문제에만 빠져있어서는 안 되고 인류로서의 책임을 지고 도움을 받는 존재에서 도움을 주는 존재로 전환해야 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으로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에 JTS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nbspnbsp그리고 외국인노동자센터라고 하지 않고 다문화센터라고 이름을 붙이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문화센터가 한국 사회에서 해나가야 할 역할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외국인노동자센터라고 하지 않고 다문화센터라고 한 것은 외국에서 태어나 한국에 이주해 와서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크게 네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국인노동자입니다. 가장 숫자가 많고 실제로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들어와 있는 분들도 있고 불법 체류를 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특히 불법 체류하시는 분들은 법적으로는 문제의 소지가 있지만 인권적으로는 가장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nbspnbspnbsp둘째, 한국의 농촌 남성들과 결혼하기 위해 이주해온 외국인 여성들입니다. 한국이 잘 산다는 것만 생각하고 결혼해서 왔는데 와보니까 결혼 상대자가 한국 안에서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실망도 크고 말이 안 통하니까 결혼 생활도 어려워서 정신적으로 굉장한 고통을 겪습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학교에 가면 놀림도 당하게 되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nbspnbsp셋째, 중국에서 온 조선족입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한 60만명 정도 된다고 해요. 이분들은 한국말도 할 줄 알고 민족적으로도 한국 사람이니까 외국인노동자들 보다는 훨씬 월급도 많고 적응도 쉽지만 그래도 국적이 중국이다보니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비자 문제도 있었고 나름대로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부분들이 많습니다.nbspnbsp넷째, 북한을 이탈해서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3만 5천명 정도 되는데 이 분들은 한국 국적을 바로 취득할 수 있고 정착금까지 지원받는 등 최고의 혜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았다 보니까 여기 와서 적응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nbspnbsp이렇게 이주민은 크게 네 종류가 있습니다. 낯설고 물설은 곳에 와서 적응해서 살기 위해서는 갖가지 애로점이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별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도 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이야기인데 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상처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nbspnbspnbsp이를 막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다문화 사회를 이해하는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남을 차별해서 생기는 피해는 오히려 적고, 몰라서 자기 식대로 행동하는데 실제로 상대에게는 엄청난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사람도 해외에 나가서 사는 사람들이 지금 700만명인데, 이 700만명의 역사를 보면 정말 피눈물이 나는 고통의 역사입니다. 이런 고통을 겪었으면 이제 우리도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사는 이주민들에 대한 포용이 더 나아져야 하는데 거꾸로 더 못합니다. 외국인들에게 물어보면 제일 살기 힘든 나라가 한국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일 민족이여서 다른 민족이나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같이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하는 행동인데 상대는 굉장히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 사회에 들어와 있는 동남아시아의 제 국가의 제 민족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또 이 분들은 불교 신자가 많은데 현실적으로 도움은 기독교에서 받아야 해서 종교도 바꾸게 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면 종교 때문에 또 전통 사회와 충돌을 겪어야 합니다. 즉 현실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 기독교로 개종하면 또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nbspnbsp이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분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예요. 다 그 나라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예요. 불쌍하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고 그들이 가진 정당한 권리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피부 색깔이 다르다고 왜 차별을 받아야 하고, 나라가 다르다고 왜 차별을 받아야 합니까. 그래서 첫째, 도와주기에 앞서 우선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니까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말을 잘 모르면 말을 가르쳐주고, 문화를 잘 모르면 문화를 가르쳐주고, 또 외국인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법률적 도움을 받기기 힘들기 때문에 법률적인 상담을 받을 수 있게 도움을 준다든지,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으니까 진료비가 비싸서 치료를 제 때에 안 받는 것을 도와준다든지 등 이런 일들을 해나간다면 그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큰 병을 고쳐주라는 얘기가 아니라 작게라도 우리가 할 수 있들을 많이 있습니다. 만약 불교 신자들이라면 이런 공간을 빌려줘서 한국 불교를 가르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전통 방식으로 법회를 할 수 있게 해주고, 꼭 불교 신자만이 아니라 힌두교나 무슬림들을 위해서도 이런 공간을 마련해준다면 작은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자기 전통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우리는 큰 힘이 들지 않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nbspnbsp자신들의 고국에서 큰 스님이 온다고 하면 JTS 다문화센터 이름을 강당 대여도 해줄 수 있을 것이고요. 정신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상담도 해주고, 한국말과 문화도 배울 수 있게 해주고, 스리랑카의 날이나 미얀마의 날 같은 것도 마련해서 자기들끼리 전통 문화를 즐길 수 있게 지원도 해주고, 그렇게 이 땅에 와서 사시는 분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우리가 작게라도 시작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안산에서 이 일을 먼저 시작하는 이유는 앞으로 한 30년이 지나면 인구의 10가 외국인 거주자가 된다고 해요. 그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굉장히 많은 문제가 나타납니다. 특히 외국인 여성들이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에 대한 차별은 굉장한 사회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런데 안산 지역은 이미 외국인 거주자가 인구의 10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안산 지역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한국 사회 전체가 직면해야 할 문제의 샘플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작은 첫발을 우리가 내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작지만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안산 지역에서 더욱더 확대해 나갈 수도 있고, 창원 공단이나 지방의 중소 공단과 농촌 지역으로도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늦었지만 소박하게 출발해보고자 하니까 여러분들께서 관심을 갖고 참여를 해주면 좋겠습니다. 재정 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원봉사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다들 살기 바쁘시겠지만 시간을 내어서 봉사를 많이 해주십시오.”nbsp이주민 여성들이 낳은 자녀들이 받는 차별은 나중에 굉장한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말씀에 많은 대중들이 안타까워하며 탄성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법문을 통해 우리 주위에 소외받는 이웃들이 이렇게 많이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자 자신의 안위 만을 생각해 온 우리들의 모습에 많은 반성이 일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안산 다문화센터 원장으로 취임한 월광 법사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월광 법사님이 이 다문화센터 운영에는 가장 적격인 것 같아요. 월광 법사님은 아무 하고나 잘 지냅니다. 노숙자들과도 잘 지내고, 경찰들과도 잘 지내고, 군인들과도 잘 지내고, 외국인들과도 잘 지내거든요. nbspnbsp처음 만나도 오랜 만난 친구처럼 잘 해주시기 때문에 가장 적격이신 것 같아요. 그래서 월광 법사님이 다문화센터 원장님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nbspnbsp대중들은 다문화센터 원장으로 월광 법사님이 적격이라는 사실에 크게 웃으며 전적으로 공감하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월광 법사님은 대중들의 환호에 응답하며 간단한 인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JTS 안산 다문화센터 원장 월광 법사님nbsp“인도 어린이들과 북한 동포들을 돕는 스님을 통해서 저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구걸하는 마음을 버리고 돕는 마음으로 전환했던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안산 지역을 행복이 피어나는 동네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과 정성으로 이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희망과 자신감을 갖고 오늘 출발합니다. 고맙습니다.”nbsp다시 큰 박수가 이어지면서 개원식장은 훈훈한 열기가 감돌았습니다. 이어서 스리랑카 공동체 닐락샤 대표님이 외국인들 대표해서 다문화센터의 개원을 축하하는 인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nbspnbspnbsp“외국인노동자들을 돕는 센터들은 많이 있지만 정말로 외국인노동자들이 자신의 힘든 점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센터는 보기 힘든 것 같아요. JTS 다문화센터는 다른 센터에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지금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3개월간 구직 기간이 있는데 이 때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안산 지역에 없는 것 같아요.nbspnbsp그리고 저는 불교 신자인데 불교에서 만든 센터는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모두 교회에서 운영하는 것들인데 제가 가진 종교에서 이런 센터를 운영한다고 하니까 너무 반가워요. 저는 스리랑카에서 태어남과 동시에 불교를 갖게 되었거든요. 한국이 불교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막상 와보니 불자들을 만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많은 불교인들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nbspnbsp한국 사회에서 저같은 외국인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을 느낍니다. 저도 작은 역할을 하겠습니다.”nbsp다른 외국인노동자센터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달라는 부탁에 JTS 봉사자들도 공감을 표현하며 명심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불교에서 만든 센터는 오늘 처음 보았다는 닐락샤님의 이야기는 오늘 개원식의 의미를 더욱 뜻깊게 여기도록 해주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스리랑카 닐락샤 대표님의 제안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조금 더 실태 조사를 해보고 차근차근 시작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답해 주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태국에서 오신 분도 휠체어에 앉은 채 환하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기쁜 마음을 표현하였고, 도문이 고향인 조선족 분도 자리에서 일어나 기쁜 마음을 표현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우리도 의지할 곳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저희 동포 하나가 4개월 동안 월급을 못 받고 있지만 어디서 하소연 할 곳이 없었는데 오늘 다문화센터가 생기니까 우리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저도 도움을 줄 일이 있으면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nbsp다문화센터를 보고 희망이 생겼다는 말씀에 개원식장은 감동의 물결로 출렁였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개원식을 축하하기 위해 와 준 대중들을 위해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가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것 같아 오히려 사회적인 활동을 많이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어머님의 질문과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는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남성 분의 질문, 이렇게 두 명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각각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며 우리가 어떻게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지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nbspnbsp▲ 즉문즉설 시간nbsp마지막의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케익 켓팅식을 가졌습니다. 대중들이 축하 노래를 부르자 내외빈들이 앞으로 나와 컷팅식을 가졌습니다.nbspnbsp“개원 축하합니다 ♬ 개원 축하 합니다 ♬ 다문화센터의 개원 축하합니다”nbspnbsp▲ 케익 컷팅식nbsp대중들의 열띤 합창 속에서 드디어 외국인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을 돕기 위한 JTS의 활동이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큰 박수가 쏟아지고 잔잔한 기쁨이 일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소외받는 이웃들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해 보고, 내가 작은 역할이라도 해보기를 다짐해 봅니다.nbspnbsp▲ 다과 시간nbsp이어서 다과 시간이 이어졌고, 대중들이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내외빈들은 현수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nbspJTS 안산 다문화센터는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1시까지 외국인노동자들과 이주민 여성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을 운영합니다. 그리고 센터 운영을 위한 봉사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변호사, 의사, 노무사, 한국어 교사, 공양, 당직, 센터 관리에 관심 있는 분들의 재능 기부를 기다립니다. nbsp행사장을 나온 스님은 밤 10시 30분이 다 돼서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해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장수 죽림정사로 가서 도문 큰스님을 찾아뵐 예정입니다.nbspnbsp 법륜 스님이 안내하는 마음공부 불교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이해, 가슴으로 다가오는 쉽고 명쾌한 강의 정토불교대학이 전국 114개 지역과 해외 33개 지역에서 개강합니다.nbsp nbsp nbsp 내 삶을 변화시키는 법륜 스님의 명강의를 지금 만나보세요.nbsp

2015.08.19. 43,474 읽음 댓글 35개

2015.8.17 공동체·대중부 간담회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두북 정토수련원에서 정토회 공동체와 대중부와 함께 모임을 하며 정토회의 사업 방향에 대해 법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새벽 5시, 스님은 전국에서 모인 70여명의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기도 후 따뜻한 국과 반찬으로 아침 식사를 한 후 7시 30분부터 간담회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먼저 오늘 간담회를 갖게 된 취지에 대해서 스님이 공유를 해주었습니다. 1년에 두 번 1박2일 동안의 전국대의원회의를 통해서는 정토회의 전체 사업을 꼼꼼하게 챙기기가 어렵고, 또 모든 사업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대중부, 공동체, 사회활동위원회가 각각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여서 통합적인 기능이 보완되기 전까지 우선 세 단위가 모여서 함께 의견 교환을 하는 자리라도 가져보기 위해 오늘 간담회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nbspnbsp집중적인 토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토회의 설립 취지와 창립 목적’에 대해 스님이 기조 발제를 해주었습니다. 공동체와 대중부 활동가들은 정토회가 어떤 취지로 창립이 되었는지 다시 한번 새겨들을 수 있어서 무척 뜻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nbspnbsp“정토회가 창립된 목표는 인류의 새로운 문명 전환을 선도해보자는 것입니다. 문명 전환의 가장 핵심적인 기초는 근본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근대 문명이 갖는 문제는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환경 파괴가 가장 크고, 인간 사회를 보면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고, 개인으로 보면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 이 세가지를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문명의 해답을 붓다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1차 만일결사든, 2차 만일결사든, 3차 만일결사든 할 것 없이 정토회의 설립 목표입니다.nbspnbspnbsp그 가운데서 1차 만일결사의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불교 중흥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중흥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나라 안의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새로운 문명을 향도하기 위해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입각해서 해법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정토회의 근본 설립 취지이기 때문에 1차 만일결사에서 하고자 하는 불교 중흥은 불교 신도 수가 늘어나고 절이 많이 생기고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문명 전환을 할 수 있는 근본 불교적 입장에서 수행 정진하는 불교를 현실 속에서 재현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되면 우리가 이 땅에 불교를 다시 중흥시키는 기초를 닦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 인구의 1 정도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약 50만명 정도가 될 것입니다. 즉 수행을 해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모임을 마을마다 만들자는 것입니다. 1 정도만 되어도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nbspnbsp‘바른 불교’가 근본 불교를 의미한다면, ‘쉬운 불교’는 누구나 일상적인 용어로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생활 불교’는 일상 생활이 수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관점에서 근본 불교를 현실에 재현해보자는 것이 우리들의 원입니다.nbspnbsp그리고 다른 하나의 원이 민족 중흥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져 갈등하고 있고, 이미 전쟁을 치뤘고, 다시 전쟁을 치룰 위험이 있으니까, 이 땅에 어떤 이유로도 다시는 전쟁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을 잿더미로 만들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발전하려면 통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국제 정세의 조건 속에서도 통일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비전이 없고, 지금 우리 경제가 처한 현실을 봐도 통일 없이는 더 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합니다.nbspnbsp그러면 왜 지금 시기에 통일이 다가왔다고 강조하느냐? 20년 전, 10년 전에 통일을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 때는 통일을 안 하고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통일을 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위협도 높아졌고, 경제도 정체와 후퇴 국면으로 갈 위험이 생기면서 통일은 이제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예전에는 통일이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문제였다면, 지금은 통일을 안 하면 안 되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통일의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국민들이 통일에 대한 관심이 작지만 점점 절박해지면 통일이 일순간에 시대적 과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통일은 지금 오히려 더 가까워져 있는지 모릅니다. 또한 일제 시대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분단이라는 미완의 독립을 완성시키는 것이 통일입니다. 이렇게 민족 중흥의 의미는 바로 평화와 통일입니다.nbspnbsp물론 대부분의 정토행자들이 수행을 하려고 정토회에 왔기 때문에 ‘엉뚱하게 웬 통일 이야기냐?’ 할지 모르지만 정토회의 설립 취지의 두 가지 축 중에 하나가 통일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지금 통일을 강력하게 추진할 정부가 들어서지 않으면 통일은 더 어려워집니다. 우선 미국과 중국이 세력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운 판이 짜여져 가고 있는데 그 판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강대국 간의 세력 판이 짜여져 버리면 우리가 그 판을 변화시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판이 어떻게 짜여질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조금씩 조금씩 판이 짜여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즉 미국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을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이미 선정을 했고, 한국은 그 밑으로 넣는 것으로 입장을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이 한미일 군사동맹체제에 들어가게 되면 중국과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집니다. 안보는 미국의 보호를 받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중국의 공격 포인트가 되는 위험이 동시에 따르게 됩니다.nbspnbsp그리고 북한이 점점 고립이 되고 있고 아직은 저렇게 자주성을 갖고 버티고 있으니까 통일의 기회가 있는데, 만약 민족주의적인 정권이 무너지고 친중적인 정권이 드러서면 통일의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러면 북한의 안보가 중국의 보호 하에 들어가면서 북한 정부의 정책이 개혁 개방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그러나 통일은 물건너 가게 됩니다.nbspnbsp그럼 평화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미중이 첨예하게 경쟁하게 되면 그것의 실제적인 부딪힘은 결국 한반도에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전쟁의 위험이 높아집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안보도 위태롭고 경제로 어려운 지경이 되고, 우리의 배후인 일본과 미국은 지금은 가장 큰 세력이지만 점점 지는 해에 속하기 때문에 결국 앞으로 더 큰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판이 짜여지면 통일의 희망이 없어지게 됩니다. nbspnbsp그런 의미에서 한번 더 통일의 기회를 잡아보자는 것입니다. 정토회의 발전도 좋지만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우리가 한번 미약하지만 작은 힘이라도 보태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안 되겠죠. 다른 종교나 다른 사회 단체들과 협력을 해서 만들어 가야겠죠.”nbspnbsp스님이 그려주시는 큰 그림을 들으며 활동가들은 큰 박수로 공감을 표현했습니다. 무엇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하지만 지금 현실은 녹록치 않아서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스님의 간곡한 호소에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의 기조 발제를 토대로 이어서 활동가들이 함께 토론해보고 싶은 내용들을 자유롭게 발표하였습니다. 오전에는 크게 4가지 주제에 대해 집중적인 토론이 전개되었습니다.nbspnbspnbsp봉사할 수 있는 인력풀은 많지만 봉사 인력을 전문적으로 개발해내는 부서와 전담자가 없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유튜브에 즉문즉설이 올라가는 것과 수행법회에 대중들이 안 오게 되는 문제 사이에서 종합적인 컨텐츠 관리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힘들어 하는 내부 활동가들을 우선적으로 상담해주는 시스템 마련의 필요성, 불교대학 학생들을 관리할 때 원칙은 있되 유연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활동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고 스님은 이를 경청하고 이에 대한 스님의 지혜를 들려주었습니다. nbspnbspnbsp오후에도 다양한 주제에 대해 집중적인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1000일 기도를 가을부터 시작하게 되는데 각 지역 법당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진행할지, 감사 기능은 강화하지만 행정 절차는 간소화하는 방안의 필요성, 중앙에서 지역으로 권한을 내려주는 방안 등에 대해서 토론이 있었고, 스님께서도 많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집중 토론을 마치고 나서는 오늘 제기된 문제들을 포함해 인력 양성, 불교대학 운영 등에 대해 더욱더 전문적인 의견을 수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새로운 팀을 구성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오늘 논의된 것을 각 파트별로 더욱 세부 계획을 세워서 전국 대의원회에서 사업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면 좋겠다”고 당부하였고, 사홍서원을 끝으로 오후 2시 30분 무렵 오늘 모임을 모두 마쳤습니다. nbspnbspnbsp활동가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행정처 임원들과 대구경북지부 임원들은 스님과 함께 오는 9월에 있을 제1차 통일의병대회 답사를 위해 경주 지역 일대를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먼저 입재식이 열릴 황룡사터에 가서 설법단을 어디에 놓을지, 대중들은 어느 방향으로 어디에 앉히게 할지, 참가자 모두가 앉을 수 있는지, 현수막은 어디에 걸지 등 실무적으로 점검해야 할 것들을 꼼꼼히 체크하였습니다.nbspnbspnbsp▲ 황룡사터nbspnbsp그리고 능지탑과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를 걸으며 중간에 간식 먹는 시간을 어디서 주고, 특히 사천왕사지에서 기도를 할 때는 어느 곳에 앉아서 하는 것이 좋을지를 점검했습니다.nbspnbsp▲ 선덕여왕릉 가는 길nbsp▲ 사천왕사지nbsp이어서 회향식이 열리는 통일암으로 가서 설법단을 어디에 놓을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땅을 고를 것인지, 화장실 사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등에 대해 체크했습니다.nbspnbsp▲ 통일암nbsp행정처와 대구경북지부 임원들은 직접 답사를 하면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우려 사항을 꼼꼼히 체크하는 스님의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많은 대중이 이동할 때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지 스님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듣고 감탄을 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답사는 3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스님은 무더위 속에서 오후 내내 답사를 하면서 허기가 진 행정처와 대구경북지부 임원들에게 칼국수를 사준 후 두북으로 돌아왔습니다.nbsp내일은 두북에서 서울로 올라가 오전부터 평화재단에 찾아온 손님들과 연이어 미팅을 갖고, 저녁 7시 30분에는 안산 JTS 다문화센터 개원식에 참여해 격려 말씀과 더불어 다문화센터의 역할에 대해 법문을 해주실 예정입니다.nbsp

2015.08.18. 30,428 읽음 댓글 31개

2015.8.16 8차 천일결사 6차 백일기도 입재식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을 실현하고자 큰 서원을 세우고 시작한 만일결사 중 제8차 천일결사 5차 백일기도 회향식 및 6차 백일기도 입재식이 있는 날입니다. 스님은 입재식에 참가한 대중들을 위해 새로운 백일을 맞이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입추가 지나 더위가 한 풀 꺾인 가운데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정토행자들이 알알이 여무는 곡식처럼 김천 실내체육관을 가득 채웠습니다.nbspnbspnbsp회향식은 예불과 반야심경에 이어서 사회자 김병조님과 힘찬 파이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정토회 대표 이기혜님의 인사 후 호주와 뉴욕에서 오신 행자님과 전국 각 지역 정토회 및 청년대학생, 교사정토회, 길벗, 공동체, 상근 및 자원활동가 등 총 4,001명의 소개와 인사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일어나 환하게 웃으시며 따뜻한 눈길로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nbspnbspnbsp다음은 백일출가 25기생들의 합창 공연이 있었습니다. ‘슈퍼스타’와 ‘여름’ 노래를 따라 부르며 모두 즐거웠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준 백일출가생들에게 환호와 힘찬 박수를 보냈습니다. 백가지 기교보다 한 가지 순수함이 더 낫다는 말이 와 닿는 무대였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백일간의 발자취’ 영상을 통해 통일 역사기행, 부처님 오신 날, 명상수련 및 바라지, 불교대학경전반 졸업식 및 수계식, 불사 신규 법당 소개, 통일 의병학교, 희망세상만들기 즉문즉설 강연 등 수행, 보시, 봉사로 백일을 채워온 정토행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백일 동안의 활동 모습을 모아보니 시간을 정말 알차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이었습니다.nbspnbspnbsp그 후 85차 실천과제 발표가 있었는데, 법당 과제인 ‘총3회 이상 모둠 법회 열기’는 62가 달성했고, 개인과제 ‘통일 활동 3회 이상 참여하기’는 25가 달성하여 개개인의 과제는 아직 달성률이 낮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다음은 정토세상 만들기를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행 정진해 오신 분들의 수행담을 들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세 분의 발표가 있었는데 정토회 행사에 처음 참석했을 때의 느낌에 공감하며 웃기도 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정진해가고 있다는데 모두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보내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3,000배 정진은 불가능 할 것 같았지만 절하다 죽는 사람 못 봤다는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무릎 통증이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실상보다 더 큰 통증으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육체적 통증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으나 불대 담당을 맡으면서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입학해 심리적 불안감이 증폭되었습니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법당에서 새벽 정진을 결심하였습니다. 법당 새벽정진의 백일 서원이 이루어지던 날 눈물이 펑펑 쏟아지며 그냥 하면 된다는 스님 말씀이 온 몸과 마음으로 체득되었습니다. ‘노력은 적게 하면서 얻는 것은 많기를 바랐으니 잘 될 턱이 없었구나’, ‘불대 봉사를 한다고 했는데 내가 오히려 배우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잘하겠다는 부담이 줄었습니다. 법당 새벽 정진을 시작한지 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불대생들을 귀한 인연으로 여기고 불법 깨닫고 끝까지 배우도록 도와주겠다는 굳건한 원이 생겼습니다.” nbsp nbsp여수정토회 이미순님nbspnbsp“인터넷에서 스님 즉문즉설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점에서 ‘답답하면 물어라’는 책을 보고 법당에 찾아갔습니다. 천일결사 입재식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진짜 가기 싫었습니다. 워낙 간곡한 말씀에 참석은 했지만 이건 더 가관이었습니다. 넓은 체육관에 뭔가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 ‘이건 사이비다’ 싶었지만 나만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된다 생각했습니다. nbsp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보자. 사람들이 왜 열심이지? 이건 뭐지? 스님께서 ‘백일을 기도하면 내 꼬라지를 볼 수 있다. 천일기도 하면 스스로를 바꿀 수 있고 운명도 바꿀 수 있다’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아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열심히 기도를 하다 보니 5시를 기다리다 어떤 때는 3시부터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샌 적도 있습니다. nbspnbsp천일 기도가 끝났지만 저는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제가 변했다고 합니다. 여전히 아이들은 만나보지 못하고 있고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나 자신을 예전처럼 괴롭히지는 않습니다. 천천히 끊임없이 정진하겠습니다.”nbsp 대전정토회 김태우님nbspnbsp“스물한살 때 야간 대학에서 강직성 척추염을 앓는 남편을 만났습니다. 난치성 질환자이지만 그가 좋아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살다보니 모든 것을 남편 탓으로 돌리고 속으로 무시하고 ‘몰라’ 하는 대답을 자주 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법당에 못나가다가 출가열반재일을 맞이해 8일간 용맹 정진 중 ‘내가 참 많은 은혜 속에서 살고 있구나,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서 5개월 동안 열린 법회 후 바쁜 생활 속에서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토회 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nbspnbsp그러던 중 큰 아들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너무나 건강하고 독립적이던 둘째 아들이 작년 12월에 하늘 나라로 떠났습니다. 18세 나이였습니다. 일요일 저녁 머리가 너무 아프다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뇌출혈이었고 수술했으나 3일째 뇌사 상태였습니다.nbspnbsp눈물만 났습니다. 남편은 귀하고 예쁜 아이를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했고,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사후 장기 기증 서약을 했습니다. 워낙 건강했던 아이는 여섯 명에게 새 생명을 선사하고 떠났습니다. nbspnbsp아이를 보내고 열흘 뒤부터 49재 동안 사시예불 집전을 했습니다. 눈물이 나면 울면서 염불 집전을 했습니다. 아이는 아빠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형이랑 비교하지 않아서... 자기는 정말 행복한 집에서 큰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제사 비용을 모두 기부하고 집에서 제사를 지냅니다.nbsp어느새 제 입에서 ‘몰라’라는 말 대신 ‘예, 알겠습니다’ 는 말이 나옵니다. 남편을 미워한다는 말 대신 고마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 한마디 바뀌는데도 수행해서 3년이 걸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행에 욕심 부리지 않고 서두르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괴롭지 않고 행복하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냥 일일 뿐, 그것을 복으로 만들지 재앙으로 만들지는 나의 몫입니다. 저는 삶이 수행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제 남편을 가장 존경합니다.”nbsp 창원정토회 이숙미님nbsp하늘 나라로 간 아이 이야기에 많은 대중들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마지막에 남편을 죽도록 미워했으나 지금은 남편을 가장 존경하는 말에는 울컥 눈물이 나왔습니다. 기적이 있다면 이런 것이 기적이겠지요.nbspnbspnbsp감동적인 수행담을 들으며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뜨끈해지더니 ‘지난 백일을 나만 혼자 넘어지고 깨진 것은 아니구나’ 싶어지면서 ‘내 고민은 저 분들에 비하면 가벼운 고민이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nbspnbsp수행담의 깊은 울림을 느끼며 입정 후 법륜스님 백일기도 회향 법문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천일결사자들에게 왕의 제자인지 부처님의 제자인지 되물으며 무엇이 수행자인지를 상기시켜 준 후 왜 우리가 백일 마다 이렇게 모임을 갖는지 그 취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우리가 아무리 돈을 많이 모아도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아무리 얼굴이 잘 생겨도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나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 더 지위가 높은 사람 더 잘 생긴 사람 더 능력있는 사람과 같이 있게 되면 우리는 열등의식과 빈곤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이 열등의식과 빈곤의식은 능력을 키운다고 돈을 더 번다고 지위가 더 높아진다고 성형을 한다고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돈을 더 벌면 해결될 것이다, 더 승진하면 해결될 것이다, 기술을 더 익히면 해결될 것이다, 코만 성형하면 해결될 것이다, 눈만 동그랗게 하면 해결될 것이다, 가슴에 뭘 짚어 넣으면 해결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데 그렇게 하면 이 문제는 죽을 때까지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nbspnbsp그래서 인간의 고뇌는 나이가 든다고 해결되어지지 않고, 돈이 많아진다고 해결되어지지 않고,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결되어지지 않습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요. 논을 99마지기 가진 사람과 1마지기 가진 사람이 만났을 때 99마지기 가진 사람이 1마지기 가진 사람에게 1마지기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고 하잖아요. 그 이유는 100마지기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인물이 잘났거나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 행복해 보입니다. ‘저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이 드는데 정작 그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온갖 고뇌를 가지고 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300여개 나라 중에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왕은 누가 보기에도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인생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늘 부처님을 찾아와서 인생 고민을 하소연하고 법문을 듣고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왕은 부처님께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괴로우면 스스로 부처님을 찾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가진 왕은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아무것도 갖지 않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맨발로 밥을 얻어 먹고 나무 밑에서 자는 부처님은 아무런 괴로움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왕이 부처님을 도와주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부처님이 왕을 늘 도와주었습니다. 고민이 있어서 찾아오면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고, 욕심을 부리면 욕심을 내려놓게 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면 아집을 내려놓게 하고, 때로는 위로도 해주고, 때로는 깨우쳐 주었습니다.nbspnbsp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왕의 제자입니까?nbspnbsp만약 여러분들이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할 수 있다’, ‘출세하면 행복할 수 있다’, ‘이뻐지면 행복할 수 있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행복할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을 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고 왕의 제자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것들이 우리들을 진정한 자유와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다고 자각하시고 왕위를 버리시고 모든 재물을 버리시고 잘못된 행복관을 버리시고 새로운 길을 찾아 온갖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정진을 하시다가 마침내 중도를 발견하시고 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신 후에도 45년 평생을 분소의를 입으시고 맨발로 걸으시고 나무 밑에서 잠자고 남의 집에서 얻어 먹는 등 거지와 다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nbspnbsp그러니 물질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물질만으로 행복해질 수가 없고, 지위를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위만으로 행복해 질 수가 없고, 몸뚱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를 만족시킨다고 행복해질 수가 없고, 인기를 누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인기가 행복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고 싶다면 여기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지위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인기의 노예가 되지 말고, 돈의 노예가 되지 마라. 거기에 집착할 때 그것이 사라지면 우리는 다시 더 큰 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것으로 복을 삼으면 복이 곧 재앙이 됩니다.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면 그것이 곧 괴로움이 됩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복되는 세상이 윤회의 세상이고, 윤회의 세상이 곧 괴로움의 세상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우리 모두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자는 취지로 정토회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토행자는 신자가 아니라 수행자입니다. 신자는 부처님을 신처럼 생각하고 복을 비는 사람이고, 수행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해탈과 열반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부처님 당시를 보면 이 붓다의 길을 깨우친 사람들 중에는 지위를 버리고 인기를 버리고 출가하여 출가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나 자신의 삶의 처지가 그렇게까지 할 수 없을 때는 재가에 있으면서 수행자로 살아가는 길도 열어주었습니다.nbspnbsp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누누이 얘기하잖아요. 많은 절들이 있고 많은 종파가 있는데 거기에 가면 되지 왜 주지도 없고 시내 한 가운데에 사무실 하나 내어 놓고 그것도 없으면 가정집에 모여서 활동하는 정토회로 오느냐? 그래서 누구는 사이비 같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왜 이렇게 하느냐?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신자가 아니고 수행자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닦는 자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여러분들은 하루 종일 수행하지는 못하더라도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한 시간은 수행을 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세속에 살지만 내가 수행자라는 것을 늘 자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처럼 장사도 그만두고 직장도 그만두고 딱 절에 들어와서 수행자처럼 사는 것이 제일 좋은데 그게 안 된다고 하니까 조금 풀어준 겁니다. 그래서 ‘내가 신자이다’ 하고 생각할 때는 정토회가 좀 센 편이에요. 그런데 ‘내가 수행자이다’ 하고 생각할 때는 많이 풀어준 겁니다. 그래서 평상 시에도 검소하게 살면 좋은데 재일날 만큼은 검소하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도록 했을까요? 너가 비록 몸은 세속에 있지만 수행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하는 뜻입니다. 매일 매일 나무 밑에서 자고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 먹고 그렇게 안 해도 된다. 그러나 조금은 해야 된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재가 수행자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길을 열어준 것에 대해 너무 너무 감사했기 때문에 출가 수행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그들이 수행정진 하는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도운 것입니다.nbspnbsp그런데 오늘날 출가 수행자는 복을 빌어주는 사제로 전락하고, 재가 수행자는 복을 비는 신자로 전락해서, 마치 돈을 내고 물건을 구입하듯 거래하는 것과 같이 세속적으로 변해 있습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수행자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만일결사, 천일결사, 백일정진을 하는 거예요. 한번 수행자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세상에 살다보면 지켜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에 와서 ‘아, 내가 정진을 놓쳤구나’ 반성을 하고 다시 또 입재를 해서 ‘내가 수행자이지. 나는 붓다의 길을 가는 자야’ 이렇게 다짐을 하고 또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놓치고, 또 와서 다짐하고, 또 놓치고, 또 와서 다짐하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오기만 하면요. nbspnbspnbsp그래서 앞에서 세 사람이 나와서 세 가지 다른 차원의 수행담을 들려주었잖아요. 넘어지고 자빠지다가 길을 찾았다는 사람이 있고, 길을 찾아서 좀 더 나아갔다는 사람도 있고, 나만이 아니라 길을 잃고 헤매이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는 쪽으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다른 세 사람의 경우를 보았습니다.nbspnbsp왜 이렇게 백일 마다 모일까요? 이렇게 백일 마다 모여서 다시 환기시키지 않으면 만일 끝나고 나서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예요. nbspnbspnbsp‘내가 수행자다’ 하는 것을 놓친 분들에게 ‘내가 수행자다’ 하는 것을 자각하게 하고 다시 발심해서 다음 백일은 정진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모임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을 환기시켜 주려고 중국에 있다가 어제밤 비행기 타고 한국에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본래의 목적인 해탈과 열반에 중심을 두고 한발 한발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nbspnbsp스님은 우리는 수행자임을 늘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차례 반복해서 자각시켜 주었습니다. 또 그런 취지로 오늘의 백일 입재식이 매번 열리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지난 백일 동안 수고가 많았던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잘 안내해준 담당자들, 모둠을 잘 관리해준 모둠장들,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정토회활동의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활동을 해 온 저녁부 활동가들, 이 전체를 총괄하면서 자기 수행을 해나가고 있는 임원과 간부들, 사천왕사지와 임진각, 봉림사지에서 자발적으로 통일 기도를 하고 있는 대구경북지부, 인천경기서부지부, 경남지부 활동가들, 바쁜 중에도 통일의병학교를 이수하신 분들을 차례대로 언급하면서 대중들에게 이들의 노고에 대해 큰 박수를 부탁했습니다. 대중들은 뜨거운 박수 갈채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어제가 광복 70주년인 동시에 분단 70년이 되었다고 하면서 아직도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1000일 동안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1초도 쉬지 않고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nbspnbsp“어제는 광복 70주년이면서 분단 70주년이었습니다. 광북 70주년을 마냥 기뻐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광복이 되자마자 분단이 되어서 70년이 지나도록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번 8.15에서도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확대될 수 있는 대통령 담화가 나오지 않겠나 기대했는데 지금 상황은 거꾸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 간에는 오히려 국지전이 생길지도 모를 일촉즉발의 험악한 말들이 오고가는 상황입니다.nbspnbspnbsp우리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많은 선조들이 투쟁을 하면서 희생을 했습니다. 저는 대중들을 데리고 봉오동 전투터, 청산리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용정중학교 이런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명복을 빌고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당신들이 없었다면 어찌 지금의 대한민국의 번영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당신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당신들이 그렇게 바라던 독립이 지금도 미완성이니 완전한 독립인 통일을 이루겠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nbspnbsp대종교 3인묘의 시신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도 우리가 분단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나철 선생님이 죽으면서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이 땅에 나를 묻지 마라’고 하셔서 지금까지 백두산 아래 화룡에 묻혀 있는데, 나라가 두 쪽이 났기 때문에 돌아갈 곳이 없어 초라한 묘소가 그대로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통일이 된다면 그들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할까요. 이렇게 3.1 독립운동을 비롯해서 수많은 운동이 있었지만 우리의 힘만으로 독립을 이뤄내지 못하고 결국 연합군에 일본이 패함으로 해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즉 남의 도움으로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해방이 된 것은 좋은 일이였지만 그들에 의해서 우리는 분단의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해방이 분단보다 낫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분단의 고통도 식민 지배의 고통에 못지 않은 고통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특히 6.25 전쟁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우리는 7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나아지기는커녕 관계가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백용성 조사님께서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저 백운산에 수백만평에 화과원이라는 과수원을 만들어서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을 몰래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했습니다. 거지로 분장을 해서 전달하기도 하고, 불상 안에 숨겨서 전달하기도 하고, 그래서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3.1독립선언의 불교계 대표로 참석하셨을 뿐만 아니라 용정에는 대각교당을 지어서 교민들을 위로하고 거기서도 농장을 지어서 그 수입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이들의 가족들이 그곳에서 살게 하고, 국내에서도 그냥 자금을 모으면 들통이 나니까 과수원을 만들어서 그 수익금을 전달했습니다. 아무도 몰랐는데 결국 용성 스님이 돌아가시고 김구 선생이 1945년에 귀국해서 대각사를 방문해 용성 스님의 영정 앞에서 ‘스님께서 이렇게 독립 군자금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고백함으로 해서 그 때 그 돈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여졌음을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다.nbspnbsp그러니 우리는 용성 조사님의 법을 계승하고 그 분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했기 때문에 우리 정토행자들은 한쪽으로는 바른 법을 따라서 수행정진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사님께서 독립을 위해 활동했듯이 우리는 통일을 염원하고 통일을 성취하는데에 한발 나아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nbspnbsp그래서 이번 입재식이 끝나고 가을부터는 1000일 동안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는 기도를 1초도 쉬지 않고 매일 매일 하려고 합니다. 남북이 갈등이 첨예한 이럴 때 우리는 불보살님의 힘을 빌어서 평화와 통일을 성취하자는 취지로 통일 기도를 시작하니까 여기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줄 것을 당부드립니다.”nbsp용성 조사님의 헌신적인 활동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해져 오면서 지금 이 시대에는 통일을 위해 우리가 그 역할을 해내자는 스님의 간곡한 호소도 가슴 깊이 새겨졌습니다. 1초도 쉬지 않고 1000일 동안 기도하자는 제안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을 감동시켜서라도 통일을 이뤄내자는 스님의 간절한 염원이 느껴졌는지 많은 대중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nbspnbspnbsp점심 시간에는 오랜만에 만난 도반들과 돗자리에 둘러앉아 소박한 도시락을 함께 했습니다. 스님도 대중들과 인사를 나누고, 홍보 부스를 돌아보았습니다.nbspnbsp2부 여는 마당에서는 창원, 대구, 울산, 마산, 양덕 법당의 통일염원을 담은 영상을 모아보았습니다. 각 법당의 보살님들 중에는 핸드폰으로 직접 찍은 영상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며 행복해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nbspnbsp다음은 순천정토회 순천법당 정호원님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일어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떨린다고 하면서도 박수를 유도하고, 혼자 하모니카, 기타까지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외모까지 가수 김건모씨를 닮아 순간 정말 유명 가수의 콘서트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nbspnbspnbsp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뒤로 서울제주지부 신규발심행자 25명의 특별한 무대가 있었습니다. nbsp랩에서부터 트로트까지 뮤지컬처럼 가사를 쓰고 춤을 추는 멋진 무대 여럿이 저렇게 노래를 하고, 춤을 추려면 얼마나 고민하고 연습을 했을까? 도반들과 땀 흘리며 보냈을 시간들이 여름날의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았으리라는 생각에 빙긋이 웃음이 났습니다.nbspnbspnbsp다음은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신규 천일결사자 결의식이 있었습니다. 천일결사자의 다짐을 하는 모습에서 초심자의 굳건한 결의가 느껴졌습니다. 선배 행자들도 초심을 떠올리며 새롭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법사님들이 직접 환하게 웃으며 염주를 일일이 목에 걸어주었는데 앞으로 백일, 천일, 나아가 새로운 만일결사 동안 이 많은 사람들이 든든한 도반으로 함께하기를 발원하였습니다.nbspnbsp“이제 부처님 법 만나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발원하지만 그러나 내일은 경계에 부딪혀 원망하고 탓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제불 보살님께서는 저희들이 수행정진 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신중님들, 조상 영가님들께도 이 수행 대중을 잘 보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수행정진 출발한 도반들도 처음 발심한 결사자들을 잘 도와주옵소서. 이제 껍데기는 범부중생이지만 그 속에 부처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것이 자라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수행 정진하도록 하십시오. 잘 된다고 자만하지도, 안 된다고 좌절하지도 말고 나아가십시오.”nbsp제불 보살님과, 신중님, 조상 영가님들에게 까지 꾸준히 수행할 수 있도록 보살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스님을 보니 그 정성에 감동해서라도 계속 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진 입재 법문에서는 삼귀의부터 수행문, 참회, 명상, 경전독송, 정토행자의 서원, 천일결사의 목표, 보왕삼매론, 사홍서원, 수행나누기, 보시, 봉사의 의미까지 그 의미와 방법을 세세히 알려주셨습니다. 특히 스님은 참회 기도를 하면서 대중들이 오해하기 쉬운 내용을 강조하면서 참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불자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 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첫째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둘째 선정을 닦고, 셋째, 지혜를 증득해야 합니다. 수행 원칙의 첫 번째가 계율을 지키는 것이예요. 그럼에도 계울을 어기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선 어긴 것을 알아야 하고 다시는 안 어기겠다는 참회와 발원을 해야해요. ‘아이고, 내가 어겼구나’ 알아차리는 것이 참회이고, ‘다시는 어기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발원입니다. 참회 뿐만 아니라 발원까지 해야 합니다. 참회와 발원을 할 때는 그냥 앉아서 하는 ‘어기지 말아야지’ 하는 방법이 있고, 그것을 좀 더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엎드려 절을 하면서 ‘죄송합니다. 제가 어겼습니다. 다시는 안 어기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율에 따른 수행입니다.nbspnbspnbsp‘내가 옳다’는 한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하니까 ‘그럼 상대는 잘하고 나는 잘못했다는 것이냐’ 하는데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본래 제법이 공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없는데 내가 내 관점에서 보고 내가 옳다고 고집하니까 상대는 저절로 틀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는 맞고 나는 틀렸다’는 것이 참회가 아닙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내려놓으면 그것이 참회입니다. 본래 옳고 그름이 없는데 내가 옳다고 상을 짓고 집착했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놓아버리는 것이 참회입니다. 참회는 상대에게 싹싹 빌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옳다’고 움켜진 것이 진리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nbspnbsp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렇게 참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까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다가 ‘뭐 나만 잘못했나? 니는 잘못 안 했나?’ 이렇게 악에 받치게 됩니다. 그래서 염주도 집어 던져 버리고 ‘참회 안 할거야’ 이러잖아요. 이것은 참회를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옳고 그름이 없는데 내가 옳다고 상을 짓다가 보니 너는 틀렸다고 상이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했는데 ‘내가 옳다’는 상을 놓아버리는 것이 참회입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내가 사로잡혔구나’ 하고 놓아버리면 상대가 틀렸다는 생각도 저절로 없어집니다.nbspnbsp그러면 남편에게 절을 하면서 ‘죄송합니다’ 하는 것은 남편이 잘했고 나는 잘못해서 참회를 하는 것이예요? 본래 잘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옳다고 고집을 해서 남편을 미워한 것을 참회하는 것입니까? 남편을 미워한 것을 참회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잘했고 나는 틀려서 참회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잘한 것이 없으면서 잘했다고 착각을 해서 상대를 미워했기 때문에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절을 한다는 것을 미워한 것을 참회하는 것이지 ‘너는 잘했고 나는 틀렸다’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미워하는 것은 내가 일으킨 것입니다. 그것을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정말 잘못했다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는 절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했다고 하면 고개를 쳐들고 잘못했다고 하면 고개를 숙이게 되잖아요. 그래서 엎드리면서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나의 어리석음에 대해 참회하고, 일어날 때는 ‘다시는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하고 발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때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해도 되고 그냥 절만 해도 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자꾸 복을 비는 쪽으로 가기 쉬워요. 그러나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진짜 이유는 내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복을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은 누구든지 중생이 괴로움에 처하면 그 부모보다도 그 자식보다도 그 부부보다도 더 빨리 아시고 그 괴로움을 덜어주려고 그를 돕는 자가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관세음보살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죄인까지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인데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은 닮아야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그래서 ‘우선 내 남편 하나 정도는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좀 보살펴 주어야겠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닮아가고자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작은 관세음보살이 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nbspnbsp관세음보살이 되겠다는 것은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해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사랑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참회를 하면서 ‘아, 내가 사랑 받겠다는 마음을 내다 보니 상대를 미워하게 되었구나. 오히려 내가 상대를 이해하고 내가 베풀어주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마음을 내라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그렇게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참회 기도를 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냥 ‘죄송합니다. 제가 또 당신에게 짜증을 내었군요’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 생각하면서 참회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관세음보살을 닮아가겠다고 마음을 내면 ‘관세음보살은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데 나는 속이 좁아서 내 남편 한 명에게도 마음을 내지 못하고 싸우고 있구나’ 하는 반성이 되고 그런 의미에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방법이 있습니다.nbsp그 다음에 선정을 닦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것이고,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 이어서 경전을 독송하는 것입니다.”nbsp대중들은 참회 기도의 의미에 대해 듣고 나서는 모두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항상 의문이 들었던 점들이 명쾌하게 해소되면서 마음도 한결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입재 법문 후 김해정토회 김해법당 이지영님의 ‘청산에 살리라’ ‘once upon a dream’ 성악 공연이 있었습니다. 식사 후 조금은 나른해진 분위기에 청량제 같은 목소리와 맑은 피아노 연주를 들으니 비타민을 먹은 듯 다시 힘이 났습니다.nbspnbsp이번 입재식 명심문은 ‘나는 법을 전하는 정토행자입니다’라는 것과 ‘우리동네 열린강좌 3회 열기, 우리 동네 열린강좌에 3번 참여하기 혹은 3명 인연맺기’ 실천 과제를 안내받고 옆 도반들과 손을 잡고 산회가를 부르며 헤어졌습니다. 스님과 법사님들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도록 무대에서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nbspnbsp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피곤하지만 맑은 기운이 퐁퐁 솟아나 보였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또 다른 백일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에게로 시원한 바람이 새로운 계절을 알리듯 불어왔습니다.nbspnbsp이렇게 백일기도 입재식을 성황리에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두북 정토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까지 두북 정토수련원에서는 전국에서 정토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스님과의 간담회를 가집니다. 오후 6시30분에 두북에 도착한 스님은 입재식 행사 후 곧장 두북으로 달려온 정토회 활동가들과 함께 저녁 예불을 올린 후 곧이어 간담회를 이어갔습니다.nbspnbsp스님은 간담회에서 “상반기 동안 모두들 고생이 많으셨어요” 라고 활동가들을 모두 격려해 주신 후 “그동안 힘들었던 것이 있으면 마음껏 하소연을 해보라”고 하면서 활동가들이 그동안 마음 속에 쌓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도록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활동가들은 그동안 힘들었던 점들을 편안하게 이야기하였고, 스님은 각각의 제안에 대해 그 해법을 조언해 주었습니다. 10시 30분이 되어 간담회를 마무리 짓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nbsp내일은 계속 이어서 정토회가 갖고 잇는 각종 현안과 방향에 대해 주제를 잡아서 스님의 기조 발제와 그에 따른 활동가들의 집중적인 토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nbspnbsp ▼ 법륜 스님의 명쾌한 강의 ‘2015년 정토불교대학’에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8월23일에 신청 접수가 마감되오니 많은 신청 바랍니다. nbsp

2015.08.18. 57,550 읽음 댓글 28개

2015.8.15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 백암산성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를 맞이하여 백암산성에 올라 고구려의 기상을 느끼고 청년들과 함께 버스 안에서 즉문즉설의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4시에 기상해 버스에 몸을 싣고 동북아 역사기행의 마지막 7일째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길림 시내에 위치한 새벽 시장을 찾아갔습니다. 오늘은 길림에서 심양까지 꼬박 7시간을 버스로 달려가야 하는 일정이여서 각자 아침과 점심을 미리 시장에서 구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길림 새벽 시장nbsp중국 사람들은 아침 식사를 직접 요리하지 않고 사먹는 경우가 많아서 새벽 시장이 굉장히 활성화 되어 있다고 합니다. 새벽 5시부터 새벽 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활기를 띠었습니다. 콩국, 연두부, 죽, 빵, 튀김, 과일 등 먹을 거리를 주섬 주섬 들고 버스에 올라타 먼 거리를 달릴 채비를 마쳤습니다.nbspnbsp길림에서 심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들에 대해 스님께 마음껏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청년들은 지난 6일 동안 하루 종일 스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방대한 시간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더 알고 싶은 점과 의문이 들었던 점이 많았는지 1호차, 2호차, 3호차 차량별로 연이어 많은 질문들을 쏟아내었습니다.nbspnbsp▲ 버스 안 즉문즉설nbsp자칫하면 버스 안에서 잠만 자며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스님은 이 시간 조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시려고 즉문즉설 시간을 마련한 것 같았습니다. 스님은 한 명 한 명의 질문에 대해 애정을 갖고 정성껏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청년들은 지난 6일 동안의 역사기행 소감을 간단히 말하거나 노래 한자락을 신나게 부른 후 자신의 질문을 스님에게 말했습니다.nbspnbsp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우리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반성하는 마음이 많이 들었다는 한 친구는 “위안부 문제를 보면 식민지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것 같은데, 일본과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하기 위해서 한국 국민들은 어떤 시각을 가지면 좋을지요?” 라고 질문했고, 어떤 친구는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다문화 시대에는 자기 정체성을 갖기 위한 민족적인 역사관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nbspnbsp스님과 같이 역사기행을 하면서 민족적 열등의식에 대해 집단적인 심리 치료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한 친구는 “사회 초년생으로서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어서 사회 변화에 대한 동참이 망설여집니다” 라고 자신의 고민을 말했습니다. 또 한 친구는 “통일 이전에 대한민국은 남남 갈등이 심각한데 갈등의 해결 방법과 통일을 위해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 있는지?” 물었고, 스님이 항일무장투쟁에서 희생된 민간인들과 일본 군인들까지 헤아리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 친구는 “통일을 위해서 정부는 현재 어떤 노력을 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nbspnbsp또 어떤 친구는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불안해 하는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통일에 대해 지지해 줄지 걱정이 됩니다.”라고 질문했고, “통일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어떤 직업이 전망이 있어질까요?” 라고 묻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또, “개인적인 문제이든 사회적인 문제이든 객관화해서 바라보려면 어떤 연습을 해야 하나요?”, “스님은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시는지요?”, nbsp“일본 천황이 백제의 후예라고 알고 있는데 일본을 답사하는 기행을 해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중성화 시키는 것이 좋을지 고민입니다”, “안중근은 나라의 영웅이였지만 가족에게는 큰 고통이였다는 말에 대해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훌륭한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며 그런 지도자를 알아보려면 어떤 안목을 가져야 하는지요?” 등 다양한 질문들이 연이어 펼쳐졌습니다.nbspnbsp각각의 스님의 답변이 모두 궁금하실테지만 그 중에서 많은 감동을 주었던 한 가지 질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일정이 빡빡해서 피곤했지만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어 보람있었다는 한 친구가 스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통일의 모습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nbspnbsp“솔직히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 입장에서는 돈 많다고 잘난체 하는 남한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고 느낄 것이고, 남한 주민 입장에서는 북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세금을 많이 내야 해서 힘들어진다고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통일 이전에 미리 투자를 해서 북한과 남한의 수준과 차이를 일정 수준까지 맞추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스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통일의 모습이 궁금합니다.”nbspnbsp▲ 송수신기로 스님께 질문하는 청년nbsp“통일을 하는 것이 좋은지 안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 젊은 사람들은 ‘굳이 할 필요가 있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것은 너무 좁은 생각입니다. 앞으로 우리 주변의 정세가 바뀌어 나가고 새로운 세계 질서가 성립되고 또 우리 경제의 성장이 둔화되는 이런 모든 상황들을 감안할 때 통일로 가지 않고는 지속적 성장도 어렵고, 우리의 자주권을 지키기도 어렵고, 평화를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nbspnbspnbsp지금까지 분단된 상태로도 안보를 지키고, 경제 성장도 이루었고, 민주화도 이루었으니 앞으로도 분단된 상태에서 안보가 지켜지고, 경제도 계속 성장하고, 민주주의는 더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통일을 꼭 해야하나’ 하고 마음 속에서 망설임이 생겨나는 것이겠죠. nbspnbsp지금까지와 앞으로가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경제 성장은 둔화될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정체 국면에서 후퇴 국면으로 갈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미중의 패권 경쟁이 강화되면 될수록 우리의 입지가 넓어지는 것이 아니고 좁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미일 삼각군사동맹 체제에 묶일 가능성이 높아서 미국에 대한 예속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본에 대한 예속까지도 조금씩 조금씩 진행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 문제에 있어서도 미·중 두 개의 판이 충돌할 때 그 충돌판이 남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미래가 매우 불확실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100년 전의 재판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똑같은 건 아니지만 판이 그런 구조로 갈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nbspnbsp그러나 우리가 100년 전에는 잘못 대응해서 실패를 했다면 굳이 같은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를 교훈 삼아서 우리가 잘 대응한다면 이미 짜여진 판에서 일방적으로 규정 받는 것이 아니라 판이 짜여오는 속에서 우리의 이익과 안전, 평화를 관철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일은 우리의 지속적인 성장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고, 이 판에서 자주성을 확보할 수도 있고, 지속적 평화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통일 없이는 이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통일을 얘기하는 것입니다.nbspnbsp질문자는 통일을 하면 오히려 손해가 생기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북한은 지하 자원이 많습니다. 무역 규제만 안 받으면 지하 자원만 팔아도 북한은 경제 회복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원자재 값이 좀 떨어지기는 해도 적게 잡아도 1조, 많이 잡으면 8조 달러 가치의 지하 자원이 있습니다. 특히 희토류 등 희귀 금속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nbspnbsp둘째, 북한이 갖고 있는 노동력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필리핀에 비해 굉장히 우수합니다. 현재 임금도 훨씬 더 쌉니다. 이것은 단순히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 드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이 값싼 노동력이다 하는 측면에서는 굉장한 자산입니다. 북한 주민들에 대한 규제가 풀려서 해외에 나가서 1인당 한달에 500불만 벌어 들여도 북한 경제는 굉장히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개성공단에서 1인당 57불 주면서 남북이 서로 갈등하고 그러잖아요. 수당까지 다 합해도 임금이 150불이 채 안 되는데 이것은 임금 착취에 해당합니다. 전 세계에 그런 임금은 없습니다. 현재 도문시에 있는 조중 공단에 북한 노동자들이 3천명 와서 일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지급되는 임금도 250불에서 300불이 안 됩니다. 중국에서는 최저 임금에 해당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그 돈 받고 일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일하는 것이죠.nbspnbsp▲ 스님의 답변을 송수신기로 듣고 있는 청년들nbsp북한 주민들의 노동력을 소비의 관점에서 볼 거냐, 생산적 관점에서 볼 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북한 사회의 여러 산업을 재건시키는 것을 투자로 볼 것이냐, 소비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와도 같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나라에 와서 철도도 놓고 도로도 닦았는데 그것은 한국 사람을 위해서 해준 것이냐,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했느냐 하는 문제죠. 남의 나라 땅도 뺏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건설을 하잖아요. 하물며 북한은 앞으로 돌려줘야 할 남의 나라가 아니고 앞으로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나라 땅인데 거기에 재건설하는 것이 왜 낭비가 됩니까? 그것은 투자이지요. 그래서 통일을 위해 북한을 개발하는 것은 투자의 관점에서 봐야지 소비의 관점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투자는 돈이 모자라면 외자 유치를 하면 돼요. 북한 개발을 한다고 하면 해외에서 투자하겠다는 곳이 무궁무진할 거예요. 왜냐하면 돈은 있는데 투자처를 못 찾아서 특정한 곳에 돈이 몰리면서 지금 금융 위기가 오고 하잖아요. 안전된 투자처를 제공하면 투자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통일 문제를 새로 봐야 합니다.nbspnbsp통일은 내일 휴전선 싹 허물어 버리고 두 나라를 당장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또 그렇게 하면 혼란이 엄청나게 가중됩니다. 우리가 통일을 하자고 아무리 방침을 정하고, 설령 통일 지향적 정부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완전히 하나가 되는 통일은 시간이 꽤 걸립니다. 그러니 하나가 다 되어야 통일이 아니라 그런 입장이 딱 정해지면 그게 바로 통일인 것입니다. 모든 투자가 통일 지향적으로 이뤄지게 되면 그것은 이미 통일된 사회입니다.nbspnbsp나무도 심으면 금방 자라는 것이 아니잖아요. 현재 남북한 간에 갈등이 있는 이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생각하면서 일단 북한에 나무부터 심는 겁니다. 나무는 앞으로 30년 자라야 하니까요. 현재 북한에 나무 한그루 심는 데는 100원이면 되는데, 통일된 뒤에 나무를 심으려면 5000원으로도 못 심습니다. 나무 값 뿐만 아니라 인건비가 엄청나게 오르기 때문이죠. 지금 북한 주민들이 하루 종일 뙈기밭에서 일해 봐야 1000원의 생산량도 못 만들어내는데, 뙈기밭 하지 말고 여기 와서 나무를 심으면 쌀 1kg을 주겠다든지, 밀가를 2kg을 주겠다고 하면 전부 나무 심으러 올 겁니다. 그러면 하루에 2000원만 갖고도 나무를 심을 수 있는 거예요.nbspnbsp통일 지향적이 되면 투자도 달라집니다. 철도도 러시아와 중국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모두 개선을 해야 되는데, 통일된 후에 이 일을 하려면 너무 늦습니다. 이런 식으로 도로도 닦고, 하천 재방도 쌓고, 전기도 넣어서 주민 생활도 개선하고, 산업 시설도 돌리고, 이를 위해 남한의 중소기업이 여기저기 공단을 만들어서 북한으로 들어가 생산을 해낼 수 있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이 중국에 와서도 일을 하는데 북한 안에 공단을 만들어서 전기는 우리가 지원해 주면서 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겠어요?nbspnbspnbsp이렇게 추진해 나가는 과정이 곧 통일입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협력해 나가는 것이죠. 그러면 북한에서도 우선 100불, 200불 짜리 일자리라도 늘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서 생산한 물건들이 가치가 있다면 노동 인건비도 올려줘야 하겠죠. 처음에는 필리핀이나 베트남 수준에서 시작하고, 다음에는 중국 수준으로 올려주고, 이렇게 조금씩 향상시켜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 남북 간의 교류와 방문도 자유로워져야 하겠죠. 또 기업인들의 북한 투자에 대한 보장도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부동산을 무작위로 매매하게 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또 개발의 이익이 남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어야 합니다.nbspnbsp흡수 통일처럼 그냥 합치게 되면 북한은 2등 국민이 되고 개발의 이익이 남한의 자본가들에게 다 돌아가게 되겠죠. 그러면 북한 사람들도 남한 수준의 최저 임금으로 먹여 살려야 하니까 사회적 부담도 엄청나게 늘어나겠죠. 그러면 세금을 많이 내야 하니까 남한 사람들의 불만이 늘어납니다. 왜냐하면 남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통일에 대한 이익이 없고, 그 이익을 재벌기업이 다 가져가니까요. 그런데 하나의 나라가 갑자기 되면 북한 사람에게도 남한 수준의 사회 보장 제도를 해야 되잖아요. 그럴려면 세금이 두 배로 뛰어야 되고 사람들의 불만도 가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흡수 통일은 일어나기도 어렵지만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nbspnbspnbsp그리고 북한이 어느 정도 개발을 한 뒤에 통일을 해야 된다고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꾸준히 통일의 기반을 구축해 나가면 됩니다. 북한 주민들이 투표에 의해서 합하자고 결정이 되면 부담이 좀 되더라도 하나의 시스템으로 가야 하고요. 반면 북한 주민들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당분간 유지하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가면 됩니다.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되고, 통일을 선택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에게 그 권리를 주어야 해요. 북한이 통일하자고 하면 하고, 지금 이대로 당분간 가자고 하면 그렇게 해주는, 그러나 상호 협력 체제를 가져야 합니다.nbspnbsp지금 남한의 입장에서도 지방자치제를 강화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남한이 5도, 북한이 3도라면 남북한이 8도 연방이 되도록 해서 북한이 남한에 예속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제가 강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북한이 자신들이 선택하는 체제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남한의 경상도처럼 신자유주의적 시장 질서가 좀 강한 곳도 있고, 북한의 평양이나 평안도처럼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한 곳도 있죠. 한 나라 안에서도 이렇게 다양할 수 있습니다. 도 마다 집권 세력이 다르고요. 그러면서 연방 정부를 어떻게 구성할지 서로 경쟁을 하게 되겠죠. 사회주의를 더 지지하면 어떤 지방 정부는 거기에 맞게끔 추진해 나가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열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주민들의 의사가 최대한 반영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nbspnbsp자기 지방의 결정권을 자기 지방이 갖도록 권리를 돌려주는 것을 분권이라고 합니다. 권리를 먼저 주고 발전의 속도가 낙후한 곳을 지원해서 균형을 잡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하겠죠. 그래서 권리를 주는 것과 동시에 경제적인 발전의 격차를 줄여주는 지방 발전 계획도 함께 수립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통일을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교, 안보, 국방은 중앙 정부가 해야 하지만, 나머지는 다 자신의 처지에 맞게끔 시간을 좀 더 가지면서 풀어나가면 됩니다.nbspnbsp통일은 단순히 남북이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제2건국입니다. 그래서 많은 정치 시스템, 경제 시스템 등이 재구성 되어야 합니다. 분단 국가는 불안정한 정부이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통일 코리아를 건국하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nbsp통일은 제2건국 운동이라는 말에 버스 안의 청년들도 큰 박수로 공감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질문을 주고 받으며 미진했던 부분들은 점점 사라져갔고, 그럴수록 역사적 자부심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nbspnbsp버스 안에서 즐겁고 명쾌한 즉문즉설을 들으며 7시간을 달려 낮 12시 30분 무렵 이번 역사기행의 마지막 코스인 백암산성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 백암산성으로 올라가는 길nbsp스님은 청년 130여명을 이끌고 맨 앞에 서서 백암산성의 남문에서 시작해 웅장하게 쌓여진 서쪽 성벽 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성벽을 오르느라 송수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 사이로 스님은 백암산성의 구석 구석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고구려는 수도인 본거지는 깊은 산 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졸본성이든 국내성이든 우리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보았죠. 깊은 산 속에 딱 숨어 있다가 광할한 만주벌에 나와서 대륙을 경영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 드러난 부분에 크게 성을 쌓은 것이 요동성입니다. 즉 요동성을 중심으로 해서 대륙을 경영했던 것이죠. 미국 같으면 수도는 워싱턴이지만 실제로 큰 도시는 뉴욕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요동성이 훨씬 컸습니다.nbspnbsp▲ 백암산성nbsp요동성을 대륙에 딱 배치해 놓고, 그러다가 만약 위기에 처하면 요동성은 포기하더라도 자신들의 본거지는 유지를 해야 하니까 치고 빠졌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산속으로 들어가 버려서 추격해 오면 산 속에서 공격을 해서 적을 막아 내었습니다. 그래서 적이 도망가면 다시 뒤따라가서 공격을 했습니다. 이렇게 산 속에 수도를 정한 것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고, 대륙에서 요동성을 경영했던 것은 고조선의 옛 영토를 확보하기 위함이였습니다.nbspnbsp이 요동성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안시성이 있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건안성이 있고, 지금의 요동 받도 끝인 대련에 비사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개모성, 신성, 저 위쪽으로 부여성까지 있었고, 나중에 당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그 사이 사이를 연결했는데 그것을 천리장성이라고 합니다.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기 위해 엄청난 국력을 소모했고, 이로 인해 국민들이 도탄에 빠지고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nbspnbspnbsp이 백암산성은 만주벌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요동성을 보호하는 산성입니다. 환도산성이 국내성을 보호하는 산성이듯이 요동성을 보호하는 산성이 백암산성입니다. 요동성에서 도저히 못 견디면 백암산성으로 도망올 수도 있고, 적의 공격을 여기서 막아내는 역할도 한 곳입니다. 왕이 있는 성을 보호하는 산성이 아니고 대륙을 경영하기 위한 고구려의 제2도시 요동성을 보호했던 산성입니다.nbspnbsp산을 보면 동모산과 비슷합니다. 환도산성처럼 험준한 것도 아니고, 홀본산성처럼 웅장한 것도 아니고, 그냥 들판에 있는 언덕 같은 산에 쌓은 산성입니다. 그런데 꼭대기에 있는 망대에 올라가면 사면이 훤히 보입니다. 특히 적이 쳐들어오는 서쪽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동쪽에는 태자하가 흘러서 자연 해자가 이루어져 있고, 남쪽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산성 안에는 샘물이 있어서 아주 천연의 요새입니다.nbspnbspnbsp547년에 돌궐족 부대가 1만명이 공격했는데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할만큼 견고한 성이였습니다. 또 당태종이 침입했을 때 요동성이 함락되었는데, 요동성이 함락이 되자 이 성의 성주가 항복을 해버렸다고 해요. 아무리 성이 견고해도 그 성을 지키는 사람이 나약하면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 성입니다.”nbsp고구려의 웅장함이 많이 이야기 되었지만 실제로 환도산성과 국내성은 대부분 허물어져 있었던 반면 이곳 백암산성은 지금 봐도 ‘우와, 잘 쌓았다’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nbspnbspnbsp남쪽 성벽을 통과한 전체 대중은 먼저 서쪽 성벽 위를 걸으며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그 웅장함을 느껴보았습니다. 이어서 다시 성벽 아래로 내려가 성벽 위를 쳐다보며 다시 그 웅장함을 느껴보았습니다.nbspnbsp아랫 기단은 피라미드처럼 탄탄하게 계단식으로 받추고 있고, 그 위로는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수직으로 우뚝 솟아있는 모습은 고구려의 기개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nbspnbspnbsp적을 공격하기 위해 5060미터 간격으로 설치한 ‘치’는 성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 안에도 있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스님은 “아마도 적을 공격하기 위해 물자를 비축하는 등 방어 면적을 더 확보하기 위해 그런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성 밖에 23미터 떨어진 지점에 작은 성벽을 더 쌓은 덧성의 흔적도 보였습니다. 얼마나 정교하게 적의 공격에 대비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전체 대중은 높고 튼튼한 서쪽 성벽을 지나 이제 북쪽 성벽 위를 걸었습니다.nbspnbspnbsp북쪽 성벽 끝에는 깍아지른 절벽과 맞닿아 있었고, 그 아래로 태자하가 유유히 흐르는 모습과 광활한 벌판이 시야에 펼쳐졌습니다. ‘과연 천연의 요새이구나’ 하는 탄성이 나왔습니다.nbspnbspnbsp내성 안으로 들어와 망대에 오른 스님은 사방이 훤히 보이는 풍경을 가르키며 이곳 저곳을 짚어가며 당시에 백암산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망대까지 오르느라 흘린 땀방울이 만주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맞닿으며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내려오는 길에는 빗물을 저장하기 위해 바위를 파서 만든 샘터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여유있게 가지며 고구려인들의 숨결을 깊이 느껴보고 싶었으나 내일이 정토회 천일결사 백일기도 입재식이기 때문에 스님께서 오후에 심양공항으로 바로 이동하셔야 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종종 걸음으로 백암산성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아래 마을에서 수박을 깨어 먹으며 땀을 식힌 후 곧바로 버스를 타고 심양 공항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공항에 내리기 전 스님은 동북아 청년 역사기행팀을 향해 “마지막 마무리 잘 하고 오세요. 저는 먼저 갈게요” 라고 인사한 후 공항 출국심사대로 향했습니다.nbspnbsp오후 4시 35분에 심양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저녁 7시 45분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정토회관에 도착해 짐을 푼 스님은 늦게까지 그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하시다가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은 정토회 제8차 천일결사 제6차 백일기도 입재식이 열리는 날입니다. 지난 백일을 돌아보고 새로운 백일을 맞이하는 스님의 법문과 정토행자들의 다채로운 모습들을 담아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nbsp

2015.08.16. 52,042 읽음 댓글 36개

2015.8.14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 열등의식의 극복과 통일코리아

▲ 일송정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를 맞이하여 청산리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용정중학교 등 독립운동의 현장을 둘러보고 민족적 열등의식의 극복과 통일코리아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오늘은 동북아 역사대장정 6일차,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보는 날입니다. 연길 새벽시장에 가기 위해 평소보다 1시간 일찍 3시 20분에 기상을 하고 4시에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시장을 향해 출발했습니다.nbspnbsp▲ 연길 새벽 시장으로 가는 길nbsp이른 시간인데도 시장의 상인들은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중국식 빵, 떡, 두유, 장국, 도시락, 신선한 과일에서부터 한국 음식인 김밥까지 다양한 음식이 있는 중국 시장은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nbsp시장에서 산 음식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오늘의 첫 번째 답사지인 청산리로 출발했습니다. 청산리 전투가 있었던 백운평 마을 옛터에서 스님으로부터 청산리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nbspnbsp▲ 백운평nbsp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가 합동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벌인 10여차례의 전투를 통틀어 청산리 전투라 하며, 상대적으로 열세인 독립군 유격대가 적은 병력과 무기로 일본군 사단 병력을 물리친 전쟁사에 길이 남을 만한 전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깜깜한 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유격대가 청산리 협곡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이 협곡 안으로 들어왔을 때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어 200명의 일본군이 사망하였고, 이 기세를 몰아 천수평에 주둔하고 있던 기마 중대를 기습 공격하여 120여명을 사살하고 많은 무기 뿐만 아니라 군사 배치도도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이 군사 배치도를 이용해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본대를 사방에서 포위하여 공격했지만 포병 연대까지 갖춘 일본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홍범도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김좌진, 홍범도 두 부대가 협동하여 일본군 1000여명이 사살되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로써 사단 병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300여명의 사상자를 내어 일본군 토벌대를 사실상 궤멸시켰다고 합니다.nbspnbsp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스님의 말씀에 청년들은 저절로 조상님들에 대한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그러나 자랑스러운 항일 운동의 이면에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답사를 시작한 곳은 백운평 마을 옛터로 20여가구 정도가 모여 살던 마을이었으나,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마을로 내려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뛰어나오는 사람을 총으로 사살하여 마을은 초토화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는 스님의 말씀에 청년들도 모두 숙연해졌습니다.nbspnbsp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사건 발생일 이웃 마을에 갔다가 그 이튿날 돌아와서 보니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있고 모든 사람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는데 그들이 당했던 고통이 그려져 마음이 아팠습니다.nbspnbsp스님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실제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직소택이란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백운평에서 직소택으로 향하는 길에는 물을 건너야 했는데 물살이 강해서 철퍼덩 물에 주저 앉는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손을 맞잡고 서로를 지탱해 주며 모두가 안전하게 물길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nbspnbsp또 도중에는 끊어진 나무 다리도 나왔습니다. 이 때도 먼저 건넌 사람이 손을 당겨주며 전체가 무사히 끊어진 나무 다리를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산길을 누비니 마치 독립군이 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직소택에 모인 청년들은 전투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의 넋을 기리며 잠시나마 묵념을 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민간인과 희생된 한국 독립군 뿐만 아니라 이국 땅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은 일본군 병사 모두가 군국주의 전쟁의 희생자라고 하셨습니다. 청년들은 희생된 모든 분께 묵념을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차가운 계곡물, 좁은 협곡에서 변변한 군복도 없이 전투에 임했던 젊은 병사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nbspnbspnbsp다음으로 대종교 3인묘로 향했습니다. 항일운동의 지도자이자 대종교를 이끌던 나철, 서일, 김교헌의 세 개 묘소는 대종교의 발상지인 청호리의 탁트인 언덕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준비해온 음식과 술을 올려 제사를 지내고 묵념을 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대종교 3인묘nbsp나철은 국조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를 창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매국노를 암살하는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활동했지만 결국 일본의 폭정을 규탄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유서에 자신의 유해를 백두산 밑에 안장해 달라고 했다는 설명에 대중은 숙연해졌습니다. 통일이 되지 않아 묘소를 한국에 안장시키지 못했다는 스님의 말씀에 빨리 통일이 되어 이 분들을 고국에 모셨으면 좋겠다는 발원을 해보았습니다. nbspnbspnbsp점심시간이 되어 화룡에서 냉면을 맛있게 먹고 다음 목적지인 일송정으로 향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130여명의 청년들은 비암산의 일송정 언덕에 올라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주변 일대에 대한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nbspnbsp▲ 일송정nbsp일송정에 오르니 탁트인 전망에 해란강과 용정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와 더위를 식혀주었습니다. 모두 일송정 정자에 모여 해금 반주에 맞춰 ‘일송정’,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일송정에 찾아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을 조상들을 생각했습니다.nbspnbsp▲ 해금 반주에 맞춰 부르는 ‘일송정’ 노래nbsp이어서 ‘고향의 봄’을 다함께 부르니 고향을 떠나 만주 벌판에서 삶을 일구어 낸 우리 선조들의 고향을 그리워했던 마음이 느껴지고 넓은 들판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버스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용두레 우물을 구경하고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용정중학교로 향했습니다. 용정중학교 옛 건물은 조선족 사회의 독립운동 역사, 윤동주 시인, 학교 연혁에 대한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nbspnbsp▲ 용정중학교nbsp전시관을 둘러보며 만주의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배울 수 nbsp있었습니다. 한국 교과서에는 깊이 다루지 않는 독립운동 역사를 세세히 배우고, 조선족 사회에 대한 이해도 한층 깊어진 시간이었습니다. 타국에서 이렇게 우리 조상들의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전시해 놓은 모습을 보니 조상에 대한 자긍심이 깊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전시관에는 윤동주시인이 친필로 쓴 서시의 원고지도 전시해놓고 윤동주 시집도 판매 하는 등, 윤동주 시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학교 차원에서의 노력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하루 답사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스님은 즉문즉설을 해주었습니다. 통일이야기를 친구에게 하면 친구는 통일보다 나 자신 내 가족의 안보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는 분의 질문에 대해 스님은 “일제 강점기 때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도 인구의 극소수였다”고 하며 “분단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지금 세대에게는 통일이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절실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한국이 직면한 문제를 말하며 통일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한국은 모방을 통해 성장을 이루어왔는데 모방에는 한계가 있고 창조를 통해서만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국내 저성장의 한계를 과거에는 식민지화 등 영토 확장을 통해 벗어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창조를 통해서만 저성장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이를 위해서는 교육, 제도 등 사회의 변화도 함께 일구어 가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성장 국면을 맞은 한국에서 통일은 양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이고, 사람들이 서서히 이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를 대비해 통일의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주니 청년들도 “아하” 하며 공감했습니다.nbspnbsp여러 시간 버스로 달려 길림에 도착해 저녁 식사를 한 후 이번 역사기행에서 스님의 마지막 저녁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nbsp강의에서 스님은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천 및 과거의 실패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강대국들의 역학 변화에 따라 한국이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지,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등에 대해 스님은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역사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알려고 하는 지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과 미래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답을 찾는데에 과거의 경험을 살려서 좀 더 정확하고 알맞은 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nbspnbsp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했다고 하죠. 명나라는 그 당시에 세계 최대 강국이였습니다. 그런 중국과 우리가 같이 살면서 그 문명을 받아들였는데 거기다가 임진왜란 때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공했는데 명나라가 원군을 파견해서 막아주기도 했었죠. 명나라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는데 국력을 많이 낭비했기 때문에 명나라 자국의 관리는 되었지만 변방의 관리는 소홀하게 되었고 그 소홀한 틈을 타서 청나라가 일어난 겁니다.nbspnbspnbsp그 때 토요도미 히데요시는 조선 사람으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한 명나라를 정벌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게 ‘야, 우리는 명나라를 침공할테니 너희는 길을 열어주라’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런데 조선은 자신이 부모처럼 생각하는 명나라를 치겠다는데 그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겠죠. 그래서 결국 조선이 공격의 포인트가 된 것입니다. 어찌보면 명나라의 대리 전쟁을 해준 셈이 된 것이죠. 그래서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였습니다. 조선이 패하게 되면 결국 명나라에게 피해가 오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조선을 도와준 것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가 명나라를 위해서 방패 막이가을 되어 준 것입니다.nbsp이럴 때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나 그 시대로 돌아가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어요.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 조선 관리들의 의식구조,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감히 왜인 오랑캐가 부모 국인 명나라를 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고, 그런 불충한 나라에게 우리는 길도 비켜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유 방식으로는 어쩔 수 없던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우리는 그 일에 관계가 없으니까 너희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해라. 그러나 우리 영토 안에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런 자주성이 당시 우리들에겐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명나라는 곧 우리 나라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쨌든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nbspnbsp일본의 침략은 막아내었지만 국토는 엄청나게 황패화 되었죠. 조선, 명, 일본이 싸우는 틈에 만주 지역에 대한 관리가 비니까 이곳에서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서 청나라를 세웠습니다. 청나라는 똑같이 일본처럼 우리에게 ‘명나라와 단교하고 우리와 관계를 맺자’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여진족을 야만인으로 봤거든요. 그런 여진족이 ‘내가 형님할게. 니가 동생해라’ 하니까 엄청 기분 나빠 한 겁니다. 그래서 ‘No’ 했더니 청나라의 침공을 받아서 완전히 굴복해서 신하가 되어버렸습니다.nbspnbspnbsp그러나 그 때는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뜰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을 못한 겁니다. 만주의 여진족이 일어나서 중원을 점령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죠. 그런데 역사는 실제로 그렇게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청의 속국이 되었는데, 청이 다시 기울기 시작하고 일본이 다시 일어나서 조선을 두고 청과 대립을 하게 되었죠. 그럴 때 다시 우리는 청이 지는 해이고 일본이 뜨는 해라는 것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포지션을 가져야 이 기회를 활용해서 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고, 독립함과 동시에 자칫 잘못하면 일본에게 먹힐 수 있으니 일본으로부터의 위험은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 예상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청으로부터 어떻게 독립할 것인가만 생각했지 일본이 어떤 위협이 될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수구파들은 일본이 우리들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청이 멸망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청은 몰락하고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하게 되었죠.nbspnbsp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했을 때 우리는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 때도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고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해서 이기고 일본이 베트남, 미얀마, 필리핀까지 지배하니까 일본이 마치 세계를 재패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1940년대로 들어오면서 거의 다 친일로 바뀌어 버립니다. 희망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본에 협력하는 수 밖에 없다고 여긴 겁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그 때 모두 자진 패간 했거든요. 기미독립선언에 서명했던 대다수의 사람들도 일본에 협력하게 됩니다. 조금만 참으면 독립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겠죠. 그런데 사실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잖아요. 5년 앞을 못 본 겁니다.nbspnbsp지금 시대에서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중국이 뜨는 해로 올라올 것이고, 미국은 지는 해로 가게 되겠죠. 그러나 소비에트처럼 중국이 뜨다가 가라앉고 미국이 패권을 유지할지, 이번에는 확실히 중국이 뜨고 미국이 가라앉을지는 또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요. 아무튼 이런 세력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이 지금입니다. 이런 시점에 잘만 하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판이 짜여지면 분단이 고착화되는데, 이런 세력 변화가 일어날 때는 잘만 하면 통일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즉 미국의 단독 판에서 미국과 중국의 판으로 새롭게 짜여질 때 이것이 고정화되면 다시 몇십 년은 꼼짝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세력 변화의 기회를 활용할 시기는 아주 짧습니다. 우리가 마음 먹는다고 언제든지 통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nbspnbspnbsp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문제는 이런 좋은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주체 세력이 지금 없는 것입니다. 북한은 예전에는 통일의 주체 세력으로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자신들의 체제 방어에 급급하고, 남한은 역량은 되는데 과거 체제 유지에 급급했던 습관이 남아서 아직도 북한에 대한 두려움으로 체제 유지에 급급합니다. 즉 이제 우리의 책임은 남한을 어떻게 발전시키냐 만이 아니라 북한까지 포함한 전 민족적인 이익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키느냐 이렇게 책임의 범위가 넓어져야 하는데, 지금 민족 전체에 대한 아무런 책임 의식을 안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의 기회는 왔지만 통일의 길로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평화는 유지되었는데 이제는 평화마저도 깨지고 있는 겁니다.nbspnbsp만약에 북한에 친중 정부가 들어서서 우리가 미국에게 하듯이 북한이 안보도 중국에게 맡기고 핵우산도 쓰게 되면 첫째 통일은 물건너 가게 되고, 둘째 평화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미중의 세력 충돌이 남북의 충돌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남북의 갈등은 옛날에 비해서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0년 전에 평화재단을 세우고 이에 대한 대비를 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이렇게까지 반통일로 가버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nbspnbsp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미래 이익을 지혜롭게 찾아낼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사실 분단된 한국에서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안보와 성장은 중국 없이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미국 없이도 어렵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붙는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판이 짜여지기 전에 통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국이 갖는 앞으로의 위험에 대비해서 미국과의 관계도 잘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하는 종속적 한미 관계가 아닌 한반도에서는 우리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주적 한미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즉 옛 친구도 잘 관리하고 새 친구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아요. 양다리를 잘 못 걸치면 낭패 당하기기 쉽죠.nbspnbspnbsp그래서 남한이 지혜가 있다면, 우선 남북 관계를 초보적으로라도 풀어야 합니다. 너무 남북 관계를 많이 풀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흐트러 놓으니까 미국에게 뒷통수를 맞게 되요. 미국 입장에서는 남북 관계의 긴장이 고조되어야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과의 군사 협력에 동의하겠죠. 이 흐름을 깨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긴장을 약간 낮추면 한일 간의 군사 협력을 할 필요성이 떨어지게 되니까 국민들이 동의를 안 하게 되어 미국이 무조건 밀어 붙이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nbspnbsp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를 적대시 하면 이것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어긋나니까 군사적인 관계만 빼고 다른 것은 오히려 과거사 문제를 갖고 있으면서도 일본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면 됩니다. 한미 동맹만 갖고도 충분히 북한에 대응을 할 수가 있는데 여기에 일본의 군사적인 도움까지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군사 협력은 중국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중국과의 우호 협력을 위해서도 한일 간 군사 협력은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nbspnbsp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바른 답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 역사를 살펴보고 지금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찾기 위해서 역사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nbspnbsp특히 스님은 강대국과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시간을 많이 할애해 설명했는데, 강대국들의 세력 판이 이미 짜여 졌을 때는 변화를 꾀하기가 어려우니 기존의 판이 무너지고 새로운 판으로 고착되기 전에 통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대목에서 청년들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세가지 열등의식이 있다고 하면서 이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통일 한국을 만들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보자는 가슴 뛰는 비전을 제시해 주었습니다.nbspnbsp“우리 국민들은 민족적으로 세 가지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첫째, 상고사에 대해서 중국 문명의 아류라고 생각하는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둘째, 근대사에 있어서는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셋째, 현대사에 들어와서는 서양 문명을 벤치 마킹하고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열등의식은 심리적으로 병에 속합니다. 이것이 극복되어야 심리가 덜 불안해지고 떳떳함이 생깁니다.nbspnbspnbsp이 중에 서양으로부터 갖는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이것은 역사기행의 주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일입니다.nbspnbsp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독립이 외세에 의해서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독립운동에 소홀한 것은 아니였음을 알아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통일 만큼은 우리 손으로 이뤄내면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많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 유적지를 우리가 살펴보는 것입니다.nbspnbsp그리고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100만 대군을 막아내었습니다. 중국의 주변에서 이런 정도의 전투력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히 드문 경우입니다. 세계 최강이였던 원나라와도 고려 시대 때 90년이 넘게 전쟁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쉽게 복속되지 않았습니다. 발해는 당나라가 한참 번영할 시기에 당나라의 추격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새로 만들어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보여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였습니다.nbspnbsp그런 고구려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전통을 가져왔느냐. 고구려의 뿌리는 부여였습니다. 또 유물과 유적으로는 배달 문명을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연결해보니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은 부여를 계승하고 조선을 계승하고 배달 문명을 계승한 것이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국 문명과는 처음부터 갈래가 다른 문명이었음도 알았습니다. 우리는 중국 문명의 아류가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다르지만 인접했기 때문에 서로 교류 협력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고구려를 보면서 민족의 뿌리에 대해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고구려는 다시 신라로 계승된 것이 아니라 발해로 계승되었습니다. 발해 이후부터 우리 역사의 단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라는 또 조상 없는 역사로서 부강하게 등장했습니다. 이 연결 고리가 고구려에서 고려로 연결되게 됩니다. 그 사이인 발해를 고려로 연결하고, 신라를 고구려로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고구려에서 고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혼란을 겪었지만 그러나 대를 이어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또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면서 역사적 위기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해서 남북 간이 멀어지면 북한이 멸망하고 중국으로 흡수되어도 남한에서는 ‘적이 없어져서 좋다’ 이렇게 생각해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발해 시대의 실수를 되풀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민족사의 왜곡이 또 되풀이 될 수 있습니다.nbspnbsp그래서 우리는 통일로 나갈 때 남북의 갈라진 두 역사를 모두 계승해 주어야 합니다. 남한이 중심이 되어 통일을 하더라도 북한을 포용해서 그 역사를 같이 계승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독립운동사가 완성이 됩니다. 북한의 역사를 없애버리면 독립운동사가 아주 빈곤해지기 때문입니다.nbspnbsp이제 우리의 주 과제는 통일입니다. 통일은 우리 삶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통일로 가는 핵심 키는 남한 정부입니다. 만약 남한에 통일의 주체 세력이 형성되면 당연히 북한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토만 통합할 것이 아니라 민족사도 통합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통일 한국은 다시 한일 간의 협력을 통해서 또 한중일 삼국 간의 협력을 통해서 또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창조성을 확보해서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웠고, 로마도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웠는데, 왜 우리가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우지 못하겠습니까. 반도 국가는 양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도 반도 국가였습니다.nbspnbsp노력하다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젊은이가 이런 꿈이라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꿈도 없이 돈만 벌어서 뭐 하려구요? 이런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삶이 전혀 달라집니다. 만약 의사라면 환자 치료도 열심히 하지만 돈이 벌리면 그 돈 갖고 북한의 의료 개선에 투자를 할 것이고, 역사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것을 꿈꾸며 동북아 역사기행에 여러분들을 초청했는데 여러분들은 백두산 천지 보러 온 것 같아요. nbspnbspnbsp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의 다이어트를 좀 하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은 지금 너무 비만적인 삶을 살아요. 삶을 다이어트해서 심플하게 만들면 시간이 좀 남게 됩니다. 돈도 좀 남게 됩니다. 그 시간과 돈을 통일이라는 우리들의 목표를 향해 좀 쓰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선거 때가 되면 손가락만 좀 저한테 빌려주세요. 손가락만 좀 잘 놀려도 세상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nbspnbsp이제는 총 들고, 돌멩이 들고 안 싸워도 세상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것은 우리 선배들이 우리 사회를 민주 사회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손가락만 잘 놀리면 되는데 대신 나 혼자만 잘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액주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동의하는 인원을 많이 모아야 합니다.nbspnbsp이런 목표를 딱 갖고 살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 하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필요할 때 손가락을 좀 빌려야 되기 때문이죠. 이 목표를 달성시키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라는 말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손가락을 좀 빌릴려면 평소에 잘 해야 합니다. 평소에 말도 안 듣고 맨날 싸우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 얘기를 꺼내면 미워서 엉뚱한 사람에게 투표합니다. 그러나 이런 목표 의식이 분명히 있으면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두 고마운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꿈꾸는 문명의 전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인간 관계를 맺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nbspnbspnbsp그러니 매일 절을 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라 이렇게 관점만 바꾸어도 벌써 여러분들의 삶의 자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그런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그리고 이런 기적이 지속되려면 한 세대가 노력해야 합니다. 한 세대가 노력하면 저는 그런 기적이 정말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 기적이지 그 과정을 아는 사람이 볼 때는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은 하나 하나 쌓아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nbsp강연은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이어졌습니다. 청년들은 졸린 눈을 부릎뜨고서라도 강연에 집중하기 위해 벌떡 일어서서 강연을 듣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nbspnbsp무엇보다 스님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보자고 하자 청년들의 얼굴에도 희망이 엿보였습니다. 통일 더 나아가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이라는 문명 전환의 원을 세우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사소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고 하면서 통일을 실현할 정부를 선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니 평소에 사람들에게 잘해줘야 한다고 하자 청년들 모두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기적을 만들고 이를 지속하려면 한 세대가 힘써서 노력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많은 청년들이 스님의 강연을 듣고 나서 조금 더 활기있어지고 자긍심이 생긴 분위기가 되었는데, 한 청년은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 청년들 모두가 스님으로부터 열등의식 극복이라는 집단적인 심리 치료를 받은 것 같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내일은 버스로 장시간 이동하기 때문에 길림의 새벽 시장에 들러 각자 아침과 점심 식사 끼니를 구입한 후 오후에는 고구려의 성곽이 가장 잘 남아있는 백암산성에 도착해 고구려의 기상을 마지막으로 느껴보면서 역사기행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게 됩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은 내일 있을 정토회 천일결사 86차 백일기도 입재식에 참석하기 위해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팀 보다 하루 일찍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nbspnbsp 오늘 현장 스케치는 임여원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nbsp

2015.08.15. 40,282 읽음 댓글 27개

2015.8.13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 독립운동의 역사

▲ 발해 흥륭사의 대불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를 맞이하여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를 둘러본 후 봉오동 전투 기념비를 참배하고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동북아 역사 대장정 넷째날이 밝았습니다. 어제 백두산 천지를 보고 와서 즐거운 마음에 4시 40분까지 버스 탑승을 하고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은 발해의 유적을 보러 발해진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아침 식사는 버스에서 옥수수로 가볍게 먹었습니다. 발해진으로 이동하던 길에서 오전 6시쯤 요전자 24개석에 들러 다함께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 요전자 24개석nbsp요전자 24개석은 돈화시 대산저자향 요전자촌 동쪽의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발해시대의 유적입니다. 유적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골목길로 들어서니 코스코스가 예쁘게 피어 있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nbspnbspnbsp아직 이 유물의 사용 용도는 밝혀지지 않고 있어서 스님은 “오늘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가 이것을 밝혀내면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것” 이라며 웃었습니다.nbspnbsp다시 버스로 이동해 오전 7시 30분경 발해 시대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왕궁터가 있던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상경용천부는 발해의 세 번째 및 다섯 번째 수도로서 약 162년간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던 곳입니다. 우선 상경용천부 전체 모형이 있는 박물관에 들러 발해의 영토와 외성과 내성 및 궁성의 모습 등을 살펴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nbspnbsp▲ 상경용천부의 동궁 옆에 위치한 연못인 ‘어화원’이 있었던 자리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nbsp스님은 발해의 내성이 외성의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그 이유는 “옛날 문명에서는 앞으로만 공격하고 뒤로 공격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였습니다. 왜 신분의 차이가 나는 이민족에게 쉽게 망하는 약점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이 “설마” 하며 웃음을 짓자, 스님은 즉문즉설에서 보듯이 관점의 전환은 쉽지 않음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사고가 그렇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나니 평소 우리가 풀 수 없는 문제도 관점만 바꿀 수 있다면 쉽게 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 오봉루의 양쪽으로 난 문nbsp이어서 상경용천부 일대를 거닐며 얼굴 모양의 연못으로 만들어진 어화원과 오봉루, 회랑의 주춧돌, 궁전터, 성터 등을 직접 발로 밟고 손으로 만져보며 1000년 전 발해 당시를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양 옆으로 문이 나 있는 오봉루의 성벽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nbsp그리고 수풀이 우거진 옛 발해 궁터를 거닐며 그 옛날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회랑의 주춧돌을 가르키며 규모 면에서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지금 우리는 궁성의 서쪽 회랑에 왔습니다. 회랑은 보통 비도 피하고 햇빛도 피하는 역할을 하죠. 여기도 주춧돌이 있고, 저기도 주춧돌이 있고, 저기도 주춧돌이 또 있죠. 여기에 집을 지어서 가운데로 다니는 것이 회랑이죠. 그런데 이곳 회랑은 길이 세 개예요. 그래서 회랑의 폭이 엄청나게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죠.nbspnbsp▲ 서쪽 회랑이 있었던 자리nbsp가운데는 임금이나 왕족들이 다니는 길이고, 오른쪽은 시녀들이 다녔거나, 왼쪽은 대신들이 다녔거나 했을 것 같아요.nbspnbsp여러분들이 실눈을 감고 가만히 걸었을 때 회랑 바깥쪽 길로 가는 것이 편안하면 전생에 하인이였고, 여기 안쪽 길로 가는 것이 편안하면 궁중에 살았던 궁녀였고, 가운데 길로 가는 것이 편안하면 왕족입니다. 하하하.” nbspnbsp스님이 이렇게 농담을 하자 청년들은 웃으면서 서로 가운데 길로 걸어가려고 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오봉루, 제1궁전부터 제2궁전, 제3궁전, 제4궁전, 제5궁전과 북문까지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nbspnbsp▲ 1,2,3호차 차량별로 단체 사진nbsp▲ 제5궁전 터에서 바라본 제4, 제3, 제2, 제1 궁전 터의 모습nbsp다시 성터를 걸어나오는 길에 꽃이 만발한 제1궁전 앞마당 터에 앉아 무변심 법사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nbspnbspnbsp법사님의 노래를 들으며 성터를 바라보니 그 당시 동북아 최대 영토를 가졌던 대국의 느낌과 감동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궁터 안에는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있어서 청년들의 얼굴에도 꽃이 피었습니다.nbspnbspnbsp궁성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북문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큰 호수인 현무호를 보았습니다. 현무호는 상경용천부 왕궁터의 성벽을 쌓는데 쓰인 돌을 채석하느라 생긴 얕은 호수라고 합니다. 호수의 크기를 보며 성벽을 쌓는데 얼마나 많은 현무암이 들어갔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현무호nbsp다음은 상경용천부 외성 안에 위치한 흥륭사를 방문했습니다. 흥륭사는 발해 시기에 건립된 절인데 발해가 멸망한 후에 불이 나서 없어졌다가 청나라 강희제 때 다시 복원된 곳입니다. 석등의 크기로 봐서 대웅전이 얼마나 컸을까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흥륭사nbsp스님은 발해 시대의 대불이 모셔져 있는 법당으로 들어가 사시불공을 올린 후 청년 역사기행팀을 위해 발원과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nbspnbsp“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들께 지성귀의 하오며 간절히 발원하옵나이다. 발해 시대 상경용천부 내에 소재한 흥륜사 대불 앞에 선 저희들은 한국에서 온 청년정토회 대중 일동과 청년 포럼 대중 일동과 청년리더십아카데미 대중 일동 등 130여명이옵니다. 발해 멸망 이후 110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렇게 부처님을 찾아 뵙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예불을 드리오니 지난 천년 동안 저희가 찾아뵙지 못함을 굽어 용서하옵소서.nbspnbspnbsp때가 이르러 이제 이렇게 찾아 뵙고 두 손 모아 합장하오며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고 갈라진 남북을 통일하고 온갖 갈등 속에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발원하옵나니 저희의 이 귀한 발걸음과 간절한 발원을 어여삐 여기시어 증명하여 주옵시고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한나라를 계승한 배달 나라, 배달 나라를 계승한 조선 나라, 조선 나라를 계승한 부여 나라, 부여 나라를 계승한 고구려 나라, 고구려 나라를 계승한 발해 나라, 하늘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천손의 역사가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동안 후손을 잃고 역사를 잃어버리고 민족 혼이 없는 백성으로 떠돌며 조그만 반도 이남에 갖혀 동북아 대륙의 변방으로 떨어져 스스로를 약소 민족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지고 사대에 치우쳐 남의 손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려고 했었습니다. 오늘 발해의 기상을 받아 모든 부족함을 떨쳐버리고 스스로 자존심을 회복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하고 남북 통일을 이루고 동북아 이웃 나라들과 함께 손을 잡고 동아시아 문명의 꽃을 피워 인류 문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을 발원하옵고, 저희 ?은이들이 이런 기상을 갖고 큰 원을 발하고 그 발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살아갈 것을 맹세하오니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과 조상 모든 신들은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오늘 이와 같이 발원한 인연 공덕으로 동북아 역사기행에 참여한 청년 대중 일동은 사대가 강건하고 정신이 맑고 뚜렷하여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시고, 과거 생애 지은 잘못으로 받아야 할 인연의 과보가 있다면 기꺼이 받아 넘기는 용기가 있고 갖가지 재앙이 물러날 것을 발원하옵나니 이 젊은이들을 굽어살펴 주옵소서.nbspnbsp이 역사기행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천신과 조상신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nbsp발해의 기상을 이어 받아 남북 통일을 이루고 동북아 공동체로 나아가 아시아 문명의 꽃을 피워보자는 스님의 간절한 발원을 나의 발원으로 되새겨보며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대불이 모셔진 법당 밖으로 나오니 큰 석등이 그 위용을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석등은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어서 발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물 가운데 하나인데 대중들은 석등 앞에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발해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석등nbsp흥륭사를 나와 발해진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11시 30분경 식사를 마치고 도문으로 출발했습니다. 버스에서는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청년이 “스님이 북한돕기를 하시는 열정은 어디서 나오시는지 궁금하다”고 묻자, 스님은 “사람이 굶어죽는 모습을 직접 본 경험이 컸다”고 이야기해 주어서 경험이야 말로 가장 큰 원동력이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오후 3시경에는 1920년대 있었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 전투터인 봉오동 전투 기념비를 참배했습니다. 봉오동은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의 홍범도 장군이 반일 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핀 곳입니다. 역사기행단은 먼저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을 함께 읽으며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nbspnbspnbsp▲ 봉오동 전투 기념비nbsp“1920년 6월 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nbsp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사령으로 한 조선민족독립운동 대한북로독군부는 협산벽곡 봉오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소좌가 거느린 일본군 19사단 소속부대, 아라요시 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강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었다. 반일 독립군은 빈틈 없이 매복전을 쳐놓고 있다가 오후 한시경 일본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 맹격전에서 일본군 150여명을 사살하고 10명을 부상 입혔으며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연번반일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 침략자들의 기염을 여지없이 꺽어 놓았으며 인민 대중의 반일 투지를 크게 북돋아주었다.”nbsp그리고 이 전투 이후 일제는 경신참변을 일으켜 민간인 3600여명을 학살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당시 간도에서 독립군들을 위해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희생된 수많은 조선족 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nbspnbspnbsp봉오동 전투터는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7.5km 떨어져 있는데 지금은 도문시 ‘봉오동 저수지’가 축성되어 전투가 일어났던 현장은 안타깝게도 수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봉오동 전투 기념비 앞에서 스님께 봉오동 전투의 경과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후 다함께 그 뜻을 기리는 묵념과 제사를 함께 지냈습니다.nbspnbspnbsp참배를 마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도문으로 이동했습니다. 도문시에서 두만강을 따라 10여분 올라가니 한반도 최북단 마을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를 먼 발치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두만강을 끼고 우리 나라 최북단을 바라보니 마치 지도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 한반도 최북단 마을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nbsp도문시는 두만강과 부르하퉁하가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말 가렴주구와 일제 침략을 피해 이 지역으로 사람들이 피난오면서 이곳에 많은 조선족들이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만강을 바라보며 ‘눈물 젖은 두만강’과 ‘라구요’를 함께 부르면서 다시한번 울컥한 마음이 들었고, 다시 한번 통일에 대한 열기가 마음 속에 뜨겁게 올라왔습니다.nbspnbspnbsp▲ 두만강nbsp다음으로 인근의 조중우호다리를 찾았습니다. 조중우호다리는 민족의 삶과 애환이 점철돼 있는 곳입니다. 두만강 유역의 여러 세관 중에서도 북한과 인적 물적 교류가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도로와 함께 철도 교통도 편리한 요충지입니다. 이곳에서 좋은벗들 활동을 했던 이승용 선생님은 대중들에게 “북한이 고난의 행군시절 이곳으로 수많은 난민이 건너왔다”고 하면서 당시에 난민들이 중국으로 넘어와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nbspnbspnbsp▲ 조중우호다리nbsp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연길로 출발했습니다. 연길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인민 정부의 소재지이며 자치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조선족이 인구의 59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연길의 한 북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북한 식당에서 북한 종업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식사 후에 ‘반갑습니다’ 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북한 노래와 한국 동요들을 부르는 공연을 볼 수 있었고, 노래 부르는 북한 공연팀을 보면서는 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보았습니다.nbspnbsp식사 후 연길의 숙소에 도착한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다섯 번째 주제로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강연을 했습니다.nbspnbspnbsp먼저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을 통합해내는 힘이 부족했음을 언급하면서 지금의 우리는 어떤 점을 배울 수 있는지 말씀해준 부분은 많은 깨우침을 주었습니다.nbspnbsp“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처지에 따라 무장투쟁을 하게 된 사람도 있고, nbsp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 독립 준비를 해야 된다는 사람도 있고, 외교를 해야 된다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미국에 간 사람은 미국에서 어떻게 무장 투쟁을 할 수 있었겠어요? 미국과 외교를 좀 잘해서 미국의 힘을 빌리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어쨌든 총 들고 싸우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죠.nbspnbspnbsp그래서 이 사람은 잘 했고, 저 사람은 못했다가 아니라 각각 다 자기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외교도 해야 하고, 국내에서는 무장 투쟁을 못하니까 평화적인 운동을 해야 하고, 국경 넘어서는 무장 투쟁도 해야 하고, 그런 가운데 아이들은 교육시켜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 산업은 진흥시켜야 하고, 모두 다 필요한 일들이었던 것입니다.nbspnbsp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을 인정하면서 서로 역할 분담을 하지 않고 ‘너는 틀렸다’ 고 하면서 갈등을 했기 때문에 똑같이 독립을 지향하면서도 통합이 되지 못하고 분열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서울로 가기 위해서 춘천에서는 서쪽으로 가고, 수원에서는 북쪽으로 가고, 인천에서는 동쪽으로 가면 되는데, ‘동쪽으로 가야 되는데 왜 너는 북쪽으러 가자고 그러느냐?’ 이렇게 싸운 겁니다. 이건 싸울 일이 아니였어요. ‘너는 너 처지에서 산업을 진흥해라’, ‘너는 너 처지에서 외교를 잘 해라’, ‘너는 너 처지에서 무장 투쟁을 해라’ 이렇게 해서 모아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수평적으로 같을 수는 없어요. 비중을 둬야 할 수 있습니다. 무장 투쟁을 1순위로 두되 외교도 한다든지, 비폭력 투쟁을 1순위로 하되 일부 소수 무장 투쟁을 한다든지 이렇게 역할 배치를 하는 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그런 정치력이 부족했습니다. 정치는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 관계를 조율하는 등 현실에서 가장 적절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절대적 선이란 정치에서 없습니다.nbspnbsp오늘날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친미파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고, 친중파는 중국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고, 친북파는 북한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죠. 그런데 서로 다른 세력을 통합시켜서 우리의 이익을 최대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nbspnbsp친미파가 미국을 설득하기 쉬울까요, 반미파가 미국을 설득하기 쉬울까요? 친미파죠.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친북파가 설득하기 쉬울까요, 반북파가 설득하기 쉬울까요? 친북파죠. 그래서 우리는 친미파도 필요하고, 친북파도 필요합니다. 자꾸 저 사람들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역할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가 중요한 겁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으로 기록된 청산리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전쟁을 과연 어떤 관점에서 조망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약 일주일 동안 청산리 지역 인근에서 벌어진 78차례의 전투를 통해 일본군 사망자만 1500여명, 부상자까지 포함하면 33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즉 사단 병력의 4분의 1이 괴멸된 것입니다. 유격대에 불과한 독립군들이 일본의 정규군을 상대로 이뤄낸 성과이기 때문에 이 청산리 전투는 전쟁사에서도 길이 빛나는 일이 되었고, 한국 사람들에게도 큰 감흥을 준 것입니다.nbspnbspnbsp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전투의 승리만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공격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고 쫓겨 다니다가 반격을 해서 승리한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추격하는 정규군이 더욱 증강이 되고 그 성격도 더욱 악랄해졌습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독립군도 쫓았지만 독립군을 협조했다는 명분으로 이곳에서 수십년을 대를 이어 땅을 개간하며 살아온 조선족 마을을 불질러 버리고 총을 쏘았습니다. 36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 당하고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일본군의 만행을 우리는 ‘간도 참사’ 또는 ‘경신년 대참사’라고 부릅니다.nbspnbsp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청산리 전투에서 이겼다’, ‘봉오동 전투에서 이겼다’ 이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살던 민간인들은 아무런 나라의 보호도 못 받고 착취만 당하다가 겨우 이곳으로 넘어와 자기 힘으로 살고 있었고, 이 분들 입장에서는 나라가 독립되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또 찾아와서 독립해야 된다고 해서 양식도 주고, 아들도 독립군으로 보내주고 했는데, 이번에는 일본군에 의해 독립군을 도와주었다고 목숨도 잃고 엄청난 재산도 파괴되는 고통을 겪게 된 겁니다.nbspnbsp그런데 이 사람들의 공로와 애환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김좌진 장군이 승리했다, 이런 이야기만 하잖아요. 백운평 골짜기에 20여 가구가 살았는데 독립군들이 찾아오니 밥을 해줄 수 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독립군들은 밥 먹고 쉬고 올라갔을 뿐인데, 일본군이 추격해 왔다가 매복전에 당해서 사상자가 생기니까 산에서 내려오다가 화가 나 백운평 동네에 불을 지르고 ‘불이야’ 하고 뛰어나오는 마을 사람 100여명을 다 조준해서 쏴 죽인 겁니다. 이런 참사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죠.nbspnbspnbsp그래서 전쟁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항상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 참여한 일본 군인들도 나쁘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도 사실 무슨 죄가 있어요?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강제 징집을 당해서 그 먼 곳까지 와서 골짜기에서 개죽음을 당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을 새롭게 조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 위해서는 이런 희생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록되어 있는 몇몇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보다 열배 백배 천배 더 많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 위에 오늘 우리들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nbspnbsp역사에 기록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분단으로 인해 독립운동사가 어떻게 왜곡이 되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었습니다. 독립운동사의 재정립 필요성과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nbspnbsp“전 세계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그 처지에 맞게끔 효과적으로 활동을 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승만은 무장 투쟁을 안 했나?’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이곳 만주는 조국과 가까워서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또 강을 사이에 두고 있고, 이곳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정글입니다. 은폐하기가 쉬웠죠.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동포가 살고 있었습니다. 유격전을 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일 합방이 될 당시에 북간도와 서간도 합해서 이미 30만 가까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무장 투쟁의 좋은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nbspnbspnbsp아무튼 미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장개석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모택동 밑에서 하려고 했든, 러시아 밑에서 하려고 했든,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하려고 했든, 사회주의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민족주의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거기에 관계 없이 조선 민족이라면 누구나 독립을 원하고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하지는 못했습니다.nbspnbsp그러데 남북이 갈라지니까 남북이 서로 ‘내가 더 민족사적 정통성을 갖는다’고 경쟁했죠. 그러니 남한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 했던 것을 가르치면 이승만 정권의 정당성이 훼손이 되니까 이 부분을 다 빼버린 겁니다. 천안 독립 기념관에 가보세요. 이에 대한 내용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무의식 세계에는 독립운동을 한 것이 별로 없어요. 유관순 누나가 만세 불렀다, 윤동주 시인이 시를 썼다, 이런 것 외에는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잖아요. 그 정신은 숭고했지만 그것이 식민지배를 종식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독립운동을 안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엄청난 독립 투쟁을 하고 희생을 치뤘지만 분단 속에서 자기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 부분들 다 제외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독립운동의 빈곤감을 갖고 있습니다.nbspnbsp반대로 북한은 이런 독립운동을 다 인정하면 김일성의 신화가 존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 없애버리고 오직 독립운동은 김일성 혼자 한 것처럼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이 독립운동 한 것만 알지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렇게 남북이 모두 역사 왜곡이 심각한데 이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체제 경쟁 속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이로 인해 우리는 근대사에 대한 열등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본에게 져서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도 열등 의식이지만 힘이 부족해 나라를 빼앗겼지만 어떤 노력을 해서 되찾았느냐 하는 이것도 없다 보니까 더욱 열등 의식을 갖게 된 겁니다. 또 해방이 주어졌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미국이 해방을 해주었다고 생각하니까 다시 미국에 대해 사대가 더 커진 겁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생겨도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미국 눈치만 보고 그러잖아요.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예요.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이런 근현대사의 왜곡은 분단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nbspnbsp이 왜곡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쉽지 않아요. 상고사 부분은 유물과 유적, 사례 등 많은 것을 연구해야 극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근현대사 부분은 통일되기 전까지는 극복되기가 어렵습니다. 북한이 정당성이 있었다고 얘기하면 금방 종북주의자가 되고, 또 현재 북한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고 얘기하면 이제는 반북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nbspnbsp역사는 사실에 근거해야 되는데 남한과 북한의 인식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남한에서는 김일성은 만주의 마적당 출신이고 김일성 장군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 이름을 차용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하고, 그런데 북한에서는 모든 독립운동은 김일성 장군님이 다 했다고 합니다. 조금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고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김일성 주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인정하고, 또 반대로 보천보 전투가 국경을 넘어가서 초소 하나 습격한 것이지 무슨 큰 전투는 아니였고, 홍기와 전투는 100여명 정도 사상한 규모 있는 전투였고, 또 1940년대에 그 정도의 성과를 낸 것은 굉장한 일이었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독립이 된 것은 또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사실에 근거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는데, 독립운동 했다고 인정하면 친북주의자가 되고, 별로 큰 성과가 아니라고 하면 수령님을 모독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 놀음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nbspnbspnbsp그리고 이 독립운동이 있기 까지는 그 전의 이민사와 의병운동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배경을 알려면 1800년대 이후의 민중의 고통의 역사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사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고 어떤 것을 계승해야 하는지 이렇게 지금의 답을 찾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nbspnbsp분단으로 인해 너무나 차이가 나버린 독립운동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청산리 전투터와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게 되는데 오늘 스님의 강의가 내일 답사에 큰 여운을 남겨줄 것 같습니다.nbspnbsp조별 마음나누기에서는 오늘은 발해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것과 발해 궁터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얘기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만강을 보면서 ‘라구요’라는 노래를 부를 때 슬펐다는 얘기도 나왔고, 또 스님의 독립운동사 강의를 들으면서는 친미파, 친북파도 능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는 얘기, 항일무장독립운동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인물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의 희생과 일본군들의 희생도 컸다는 사실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는 얘기 등이 많이 나왔습니다. nbspnbsp이렇게 스님의 강의와 마음나누기까지 마치니 밤11시가 넘었습니다. 피곤한 몸이였지만 오늘은 발해의 역사로부터 독립운동의 역사까지 방대한 시간 여행을 해서 그런지 마음은 뿌듯한 충만함으로 가득찬 것 같습니다.nbspnbsp내일은 긴 시간 산행을 하며 청산리 전투터를 가보고 이어서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대성중학교를 방문해 보며 독립운동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더 깊이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볼 예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nbspnbspnbsp 오늘 현장 스케치는 이유미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nbsp

2015.08.15. 39,808 읽음 댓글 22개

2015.8.12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 백두산 그리고 발해의 역사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를 맞이하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 오른 후 북쪽으로 올라가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을 둘러보고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드디어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가는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들뜬 마음으로 4시에 일어나 중국식 아침 뷔페를 먹고 백두산 매표소로 향했습니다. 보다 빠른 시간 안에 백두산 천지를 보고자 각 조에서 한명씩 가서 매표소가 열기 전부터 줄을 섰습니다.nbspnbsp▲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매표소 앞.nbsp6시 정각 매표소가 열렸고, 선발대로 출발했던 매표 담당팀이 표를 흔들며 정문 앞 일행에게 다가왔을 때 모두 환호를 보냈습니다. 표를 나눠받은 조원들은 최대한 빨리 천지에 올라서 스님과 함께 경치를 즐기고픈 마음에 어린 아이들처럼 버스를 타는 곳까지 신나게 달렸습니다.nbspnbsp▲ 표를 받자 버스를 타기 위해 달려가는 청년들nbsp천지를 올라가는 봉고차는 89명이 탈수 있는 작은 차였는데 높은 천지까지 가파른 길을 롤러코스터처럼 올라 커브를 돌 때마다 짜릿한 기분에 모두 소리를 질렀습니다. 중국인 기사 아저씨께서 흥겨워하는 저희를 위해 한국 노래까지 서비스로 틀어주셨습니다. 커브를 돌아 한단 한단 올라가 천지에 가까워질 때마다 옆으로 보이는 경치는 놀라웠습니다.nbspnbsp▲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는 길nbsp끝없이 펼쳐진 푸르고 너른 광원, 그리고 빛나는 아침햇살이 점점 짙어지는 안개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햇살이 보기 어렵다는 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어 매우 설레였습니다.nbspnbsp직접 눈으로 본 백두산 천지는 어느 사진, 어느 그림으로 보았던 것과도 달랐습니다. 크기는 백록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활했으며 호수의 푸르름은 영롱했습니다. 한반도에 이런 경치가 있었다니, 풍경을 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백두산 천지는 아름다웠습니다.nbspnbsp▲ 백두산 천지nbsp걸어도 걸어도 계속 바위사이로 보이는 천지의 모습 때문에 호수가 34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전날 늦게까지 있었던 일정으로 인해 쌓인 피로가 천지를 보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천지는 워낙 높은 곳에 있어 구름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날씨가 바뀌어 천지가 보였다 안보였다 했는데 저희가 올라갔을 때 눈부신 모습을 보여줘 참 감사했습니다.nbspnbsp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청년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스님의 법복이 얇아 보여서 무척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천지의 감동을 뒤로하고 비룡 폭포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유황 냄새와 함께 땅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백두산이 화산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나무 계단을 지나 도착한 비룡폭포 역시 그 웅장함에 모두 탄성이 나왔습니다.nbspnbsp▲ 비룡폭포nbsp폭포에서 흘러내려온 물에 손을 담가 보았는데 유황 온천수와 섞여 그런지 제법 높은 고도였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차갑지 않고 미지근해서 신기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참가자 전원과 개별로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청년들은 “스님 곁에서 있는 것만도 감사한데 사진까지 찍어주시니 더욱 감사하다”며 기뻐했습니다. nbsp nbspnbspnbsp비룡폭포를 감상하고 울창한 삼림을 지나 모두 함께 동요를 부르며 소천지로 걸어갔습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동요를 부르니 마음도 함께 어려지고 순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걸으면서 보이는 원시림의 자연그대로 모습도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용암으로 인해 생긴 커다란 바위를 뒤덮은 이끼와 군데군데 쓰러져있는 상태 그대로 있는 나무들이 멋스러웠습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바위에 놀랐고 보송보송한 들풀이 예뻤습니다.nbspnbsp▲ 비룡폭포에서 소천지로 내려가는 길nbsp소천지는 정갈하고 고요했습니다. 물결이 없으면 완전히 거울같다고 하는 스님의 말씀에 그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경쾌한 저희 일행의 발걸음 때문인지 비온 뒤 수량이 많아져서인지 물결이 멈추지 않아 은거울의 모습은 보지 못해 살짝 아쉬웠습니다.nbsp▲ 소천지nbsp소천지를 나와 찾아간 녹연담은 정말 짙은 에메랄드빛의 녹색 호수였습니다. 군데군데 보이는 황금 잉어 때문에 호수는 더욱 신비로워 보였습니다.nbspnbsp▲ 녹연담nbsp어떻게 그리 아름다운 녹색이 나는지 궁금증을 가지며 지하삼림으로 향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내 발 아래 숲의 모습에 놀랍고도 신기했습니다.nbspnbspnbsp▲ 지하삼림삼림욕을 몇 시간에 걸쳐 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백두산은 여러 가지 매력을 가지고 있는 웅장한 산이었습니다.nbspnbsp점심을 맛있게 먹고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을 가는 길에 스님께서는 즉문즉설을 해주셨습니다. 각 차별로 한 명씩 질문을 했는데 통일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솔직한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인상적이었습니다.nbspnbspnbsp통일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어렵다고 포기하는 방법이 한가지이고, 어려운 와중에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라고 하셨을 때 무엇인가에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단순하게 두가지 길이 있고 그 중 후자를 고르면 되는 것인데 어려운 문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통일만 잘하면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남부럽지 않은 나라가 될 거라는 말씀에, 우리나라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또한 통일을 하려면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에 모든 상황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초자연적 존재, 운에 맡기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종속적으로 살지 말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nbspnbsp강대국과 항상 부대껴 살아온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 주시면서 하셨던 말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강대국에 치여 산게 아니라 강대국과 맞서 싸우며 살아온 것이고, 나라가 크다고 좋은 게 아니라 신라가 유지할 수 있었던 저력이 고유한 문화였듯이 우리나라도 작지만 자긍심을 가질만 하다는 말씀에 이때까지 해왔던 인식이 전환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보리수 나무도 그 씨앗은 콩알 만하다.”는 말씀에 정토회도 그 씨앗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씨앗이 발아하여 보리수 나무가 되어 남부럽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그려보았습니다. nbspnbsp즉문즉설을 하며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버스는 벌써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거대했고 찬란했던 발해의 자취를 느끼기에는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동모산의 경우 중국에서 출입을 금지한다고 하여 더욱 아쉬웠고 무력한 기분도 들었습니다.nbspnbsp▲ 동모산nbsp그러나 스님은 이런 실망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비록 시작은 작게 했지만 얼마나 큰 나라가 되었냐며 오히려 더 의미를 부여하며 동모산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제가 처음에 고구려 발해 유적지 답사를 할 때 누구의 안내도 안 받고 찾아 다녔어요. 그 때 제일 찾기 어려운 곳이 동모산이였어요. 아무리 봐도 성이 어디서 어디로 연결이 되어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런데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작죠. 아마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nbspnbsp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렇게 조그맣게 시작을 했는데 그렇게 큰 나라를 이룬 것이잖아요. 그러니 시작이 중요한 거예요.nbspnbspnbsp서쪽에는 대석하라고 하는 조그만 강이 흐릅니다. 이 강을 자연 해자로 하고, 저쪽 능선을 따라서 성벽이 쌓여져 있어요. 저쪽에 꺽인 부분이 서문 자리입니다. 봉우리를 성벽이 빙 둘러싸고 있어요. 예전에는 서문 자리로 올라가서 성벽을 따라 빙 돌면서 함께 노래도 불렀는데 지금은 접근 금지를 시켜 놓아서 78년을 쳐다 보기만 하고 지나갑니다. 처음에는 쳐다 보는 것도 금지를 시켰었어요.nbspnbsp봉우리에 올라가서 보면 ‘이곳에 성을 쌓을 만했구나’ 알 수 있는데 옆에서 보면 평면으로 보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겁니다. 사면이 다 평지예요. 섬처럼 되어 있죠. 어느 곳에서 적이 쳐들어 와도 다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가 이 먼 곳까지 쳐들어 올 이유도 적고, 쳐들어 오더라도 소규모 부대만 올 수 있으니까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겠다 싶죠.nbspnbspnbsp첫 시작은 이곳에서 했지만 여기서 계속 살지는 않았겠구나 알 수 있죠. 그래서 여기서 2km 정도 떨어진 목단강 변에 영승유지라는 곳이 있어요. 그곳이 평지성 자리가 아닌가 싶어요. 평지성은 토성으로 쌓았기 때문에 거의 다 붕괴가 되었지만, 산성은 돌로 쌓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냥 남아 있죠.”nbsp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먼 길을 도망쳐 온 대조영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기에는 이곳이 적절했음이 헤아려졌습니다.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 앞에서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nbspnbspnbsp다음은 강동 24개석을 찾아 갔습니다. 24개석은 발해의 대표적인 유물인데 아직 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도시의 도로가에 철창으로 둘러싸여 횡그러니 있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nbspnbsp▲ 강동 24개석nbsp무엇보다 ‘돈화’라고 하는 이 도시는 조선족자치주에 속해 있는데 간판에 한자와 함께 한글이 써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말이 써있어 반가웠으나 법으로 규정되어 있어 무조건 사전적으로 직역하여 써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글자는 거꾸로 뒤집혀 있고 단순히 한자를 번역해 놓는 수준에서 한글이 간판 표기용으로 이용되고 있어 사실상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고, 이곳 사람들이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게끔 통일이 되어 한단계 도약하는 부국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nbspnbsp▲ 한글을 잘못 붙인 간판nbsp저녁 식사 후 이어지는 스님의 강의는 발해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발해의 수도에서 강의를 들으니 몇 천년 전으로 돌아가 발해 조상들의 정신과 이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nbspnbspnbsp하지만 발해에 대해서 일정이 원래 3일이었는데 1.5일로 줄어들 정도로 방문할 유적지가 없고, 있어도 중국의 방해에 의해 방문할 수 없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하기에 앞서 스님은 고구려 패망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60년간 당나라와 전쟁했고, 강력한 독재 정책을 썼던 고구려의 마지막 모습이 오늘날 북한과 닮아있어 놀랐습니다.nbspnbsp“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공도 잘 막아내었지만 결국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고개를 숙이자는 온건 세력과 끝까지 싸우자는 강경 세력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마련이였습니다. 왕정파 세력은 온건 세력이 많았고, 연개소문을 비롯한 군인 세력 중에는 강경 세력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오랜 시간 지나면 내분이 일어나게 되죠. 왕이 강경 세력을 배제하고 온견 세력의 뜻에 따라 당나라와 화친 관계를 맺으려고 하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갈아치워 버렸습니다.nbspnbspnbsp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독재가 이뤄지고 천리장성을 쌓으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어요. 현대판 천리장성이 바로 핵개발이예요.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북한의 핵개발과 닮았어요.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천리장성을 쌓듯이 북한의 핵개발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죠.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도 미국을 때리기 위한 것이죠. 그로 인해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고 난리가 나죠.nbspnbsp위기에 처해서 독재를 하게 되면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한도 지금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잖아요. 감옥에 넣어도 되는데 그냥 죽어버려서 누구도 반대를 못하게 하죠. 저도 옛날에는 연개소문이 나라를 위해서 외세를 막아내었다는 생각만 했는데, 북한을 경험하면서 저도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연개소문이 외적을 물리친 것은 잘한 것이지만 과연 백성들은 행복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결국 당나라로부터 고구려를 지킨 것도 연개소문이지만 장기적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것도 연개고문의 영향이 컸던 겁니다. 그것처럼 북한의 체제를 지켜내는 것도 강경 세력 때문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들 때문에 지탱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nbspnbsp국가라는 것은 지켜내야 하는 것이고 자주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그것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기 때문에 자주를 지켜야 하고, 사람을 위하기 때문에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은 죽어도 되는 것은 안 됩니다. 통일을 하더라도 그 속에 사는 사람을 외면한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nbspnbsp이념적인 강경 세력이 꼭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죠. 어릴 때 민족적인 성향을 공부하던 것과 현재의 북한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갖고 공부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가를 위하는 것은 참 중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국가주의가 되면 그 국가 안에 살고 있는 국민들이 희생된다는 것입니다.nbspnbsp고구려가 단기적으로는 당나라에 강경하게 대응해서 굴복하지 않았지만 연개소문이 죽자 그 독재 권력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갖고 아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권력을 잃은 아들이 당나라를 끌고 들어와서 결국 나라가 패망하는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했습니다.nbspnbsp고구려 패망의 원인은 첫째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인 당나라와 60년 전쟁을 하다보니 점점 피패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그러다보니 강경 세력과 온건 세력이 있는데 온건 세력이 타협을 하려 하니까 강경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더욱더 강경하게 나가게 되었습니다. 셋째, 천리장성이라는 엄청난 공사가 주민들을 곤궁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애국심을 갖게 한 것이 아니라 강경한 강요에 의한 저항을 하게 되니까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되었고, 나라를 지켜야 할 자발적 저항 정신도 점점 약해졌습니다. 넷째, 마지막 계기는 권력 분쟁이 일어나면서 오히려 적에 가서 아부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nbspnbsp연개소문이 적을 물리치는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잘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늘날 북한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졌다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고구려의 백성들이 행복했을지, 오늘날 북한의 국민들은 어떨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역사가 이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nbspnbsp북한 이야기가 나오자 통일과 인도적 지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통일을 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도적 지원이 없는 통일, 북한의 체제가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통일은 ‘사람을 외면한 통일’이었습니다. 스님이 직접 북한의 대량 아사사태를 접하고 행하셨던 ‘북한동포살리기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장애물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북한하면 북한의 사람보다 막연히 김정은이라는 독재자 한명으로 대등시하고 있지 않았는지 반성했습니다. nbsp nbspnbsp마지막으로 중국은 역사를 문명사적으로 접근하고 우리 나라는 민족적으로 접근하여 역사를 다루는 범위가 훨씬 중국에 비해 적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도 문명사적으로 접근하여 보다 폭넓은 역사관을 가지고 다양했던 우리의 선대와 이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발해가 멸망하면서 동북아에는 큰 역사적인 전이가 일어났습니다. 요나라가 동북아를 지배하고 송나라를 압박했죠. 그 다음에 나라를 한 번도 세워본 적이 없던 여진족이 일어나서 금나라를 세워서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서 남송을 만들었죠. 송나라 황제가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저 서쪽에 있던 몽골족이 일어나서 원나라를 세워서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저 아래로 내려가서 송나라도 멸망시키고 대제국을 건설했죠.nbspnbspnbsp아무튼 발해 시대까지는 우리 민족이 중심이 되다가 발해가 멸망하면서는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민족들이 전부 일어나서 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래서 동북아의 역사를 우리 민족에만 한정하면 대륙을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민족이 아니라 문명적으로 보면 동북아 대륙은 우리가 잃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래 있던 다른 민족이 일어나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를 세웠고, 한족에게는 명나라 때 이 지역을 한번 빼겼을 뿐이죠. 다시 청나라가 일어나서 또 장악을 했죠. 그 뒤는 일본이 들어와서 만주국을 건설했죠. 그래서 동북아 지역이 한족의 지배를 받은 것은 첫번째가 한사군에 의해서였고, 두번째가 원나라가 망하면서 명나라에 의해서였고, 세 번째는 지금입니다. 이렇게 단 세 번 밖에 없어요.nbspnbsp오히려 동북 민족이 중원을 재패한 것은 여러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민족이였던 은나라였고, 그 다음은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였고, 그 다음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그 다음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가서 장악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크게 문명사적으로 보면 자기 지역을 장악한 것이고 자기 지역 안에서 정권 교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작은 민족 단위로 보기 보다는 문명사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역사를 민족사적으로 보지 않고 문명사적으로 보니까 원나라와 청나라도 자기 역사의 일부로 보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너무 좁은 의미의 민족사로만 보니까 우리 역사는 작아지는데, 중국은 그것까지 다 포용해서 자기들의 역사로 만드니까 역사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버린 것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이것을 북방 민족과 남방 민족의 문명사적 갈등과 협력 관계로 본다면 지금까지는 아직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민족사로 보면 발해 이후의 역사를 잃었다고 볼 수 있지만, 발해 이후에는 우리의 다른 종족들이 일어나서 동북아 대륙을 점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서 이제는 인류 문명사적인 관점으로 크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도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이제는 하나로 연대하잖아요. 그것은 다시 이슬람 문명과 충돌하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중국과 인도 문명도 있고요. 이제는 이웃나라만 보는, 적의 적은 동지라고 하는 원교근공책의 문제가 아니예요. 문명적으로 비슷한 나라끼리 통합해가는 이런 시대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배우면서 우리는 늘 미래를 생각해야 돼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기억하려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다니는 게 아니잖아요.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어서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고 개척할 것인가가 핵심입니다.”nbspnbsp문명사적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면 우리의 정신과 역사적 감수성이 좀 더 풍부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직접 찾아다니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도 중요하다는 말씀에 좀 더 우리의 역사관을 동북아 지역으로 확장시켜 생각의 깊이를 넓히고 싶어졌습니다. nbspnbsp이어지는 조별 나누기에서도 가장 많이 나왔던 이야기는 단연 사람을 앞세운 통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동북아 역사기행을 왔던 이유도 모두 사람을 위해서인데 홍익인간을 제창했던 우리 민족이 왜 통일을 말할 때 자꾸 사람을 배제할까 하는 어느 조원의 나누기에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북한이 극한에 처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남한도 통일에 있어서는 극한에 처해있는 것 같아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nbspnbspnbsp더 많은 청년들이 동북아 역사기행에 와 선조들의 역사가 스며든 이 땅을 직접 두 발로 느끼고 같은 역사를 지녔던 북한의 국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커지기를 기원했습니다. 비록 동북아 역사기행의 하이라이트였던 백두산은 오늘 여정으로 끝이 났지만 우리의 가슴은 뜨거운 무엇인가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몇 천년 전 선조들과의 교감, 북한 주민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nbspnbspnbsp내일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유적을 둘러본 후 오후에는 봉오동 전투터로 가서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두만강 건너편으로 한반도 최북단 마을과 함북 온성군을 바라본 후 연길로 가는 일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오늘 현장 스케치는 김다정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nbsp

2015.08.14. 48,897 읽음 댓글 27개

2015.8.11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 압록강과 북한

▲ 발해 영광탑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를 맞이하여 압록강을 따라 달리며 북한의 모습을 본 후 북한의 현실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벌써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집안에서부터 통화, 백산, 림강, 장백을 거쳐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백두산 서편 산문을 통과해 이도백하까지 버스로만 10시간, 거리로는 7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그야말로 대장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정입니다.nbspnbsp1600여 년 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을 뒤로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장구하게 흘러온 강인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70년 전까지는 남과 북 모두를 감싸 흐르던 그 푸른 강물을 이제는 먼 나라 손님처럼 그 너머에서만 바라볼 수 있음에, 이 경계를 넘어서지 못함에 마음이 먹먹해집니다.nbsp▲ 북한의 뙈기밭nbsp버스 차창 밖으로는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 손에 닿을 듯 너무나도 가까운 북한 땅이 보입니다. 두 눈에 담기는 저 너머의 풍경이 너무 생생하고 가까워 오히려 여기가 정말 북한 땅이 맞나 하는 이질감이 들 정도입니다. 소를 치는 사람들, 강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만약 창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면 우리네 말로 대답이 돌아왔을지도 모릅니다.nbsp▲ 버스 창 밖으로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들nbspnbsp림강의 4도구를 지나면서 보이는 북한의 풍경은 마치 우도의 풍광처럼 약간은 이국적이며 멋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스님께서 들려주시는 북한의 실상을 듣고 나니 원경의 아름다움은 저 멀리 사라지고 근경의 처절함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45도 이상의 경사를 이루는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 산 정상까지도 뙈기밭으로 경작해야만 했던 상황 속에서 굶주림과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북한 동포들의 실상이 이제야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몇날며칠 끼니를 거른 채로 그냥 서있기 조차 힘든 가파른 경사를 올라 괭이질을 하고, 돌을 캐내고, 다시 강가까지 내려와 물을 퍼 올렸을 북한 동포의 전쟁 같은 하루하루가 그려지니 잠시나마 경치에 감탄한 자신이 부끄러워지며, 경치에 감동하던 감수성을 단도리하게 됩니다.nbsp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은 대동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가파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1958년부터 62년까지 대기근을 겪었던 중국의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넘어와 정착한 수만 10만을 넘었었고, 남한에 비해서도 훨씬 잘 사는 나라가 북한이었습니다. 그런 북한이 왜 갑자기 몰락하게 되었는지 스님은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 주었습니다.nbspnbsp“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식량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1953년에 한국 전쟁이 끝나고 북한은 미군 폭격에 의해서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천리마 운동이라고 해서 온 인민이 힘을 합해서 전쟁 복구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60년대에 들어오면서 10년 만에 북한은 제3세계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 중에서는 가장 잘 산다고 할 만큼 경제 성장을 했습니다. 세계에서는 대동강의 기적이라고 불릴만큼 발전이 앞섰습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농촌에서 트랙터로 농사를 짓는 기계화를 이미 완성했고요. 모든 시골에 전기가 다 들어가고, 전기로 상수도 시설을 만들고, 중국은 굶어죽는 사람이 있는 정도였는데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도 도로를 다 닦았습니다. 남한에 비해서도 훨씬 잘 살았습니다. 그런 북한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nbspnbspnbsp첫 번째 문제는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의 중소 분쟁입니다. 중국과 소련 간에 이념 갈등이 생겼어요. 중소 분쟁이 생기니까 북한 정부를 구성하던 사람들 중에는 중국 모택둥의 동북연군 산하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또 연해주에서 항일 운동하거나 소련 유학파들도 많았고, 또 국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박헌영을 주축으로 한 남노당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던 김두봉 부대 등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북한 정부를 구성한 주축 세력이였습니다. 그런데 6.25 전쟁의 실패 책임을 남노당에게 물어서 박헌영과 그 일파가 제거가 되었습니다. 즉 국내파는 다 제거되고 해외파만 남게 되었는데 중소 분쟁이 일어나니까 자신들의 배후가 하나는 중국, 하나는 소련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부에서 ‘중국 노선이 옳다’, ‘소련 노선이 옳다’ 이렇게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어요. 이럴 때 김일성 주석이 ‘우리는 중국도 소련도 아니고 우리가 주체이다’ 라고 하면서 주체 사상을 내세우면서 노선 투쟁을 하는 과정에 연안파와 소련파를 종파 분자로 낙인 찍어 모두 숙청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주체 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입니다. 정부를 구성하는 다양한 배경의 정치 세력이 있었는데 차례 차례로 숙청이 되면서 김일성의 유일 주체 사상으로 정리가 되고 독재 체제가 강화가 되는 형국으로 갔습니다.nbspnbsp그런데 70년대 들어오면서는 한국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로 북한 경제와 거의 비슷해집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상대를 제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자 72년도에 남북 간에는 7.4 공동성명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남쪽은 유신 체제를 통해 바로 독재로 가고, 북쪽은 유일 주체 사상을 통해 독재로 전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북한 경제는 60년대 고성장에서 70년대에는 저성장으로 빠져듭니다.nbspnbsp70년대부터는 사상 투쟁을 많이 벌립니다. 기술보다는 사상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절대 충성을 하는 사람이 대우 받고, 과학자라든지 합리적인 사람들이 밀려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북한은 저성장 국면으로 빠지고,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남쪽은 더욱 고성장을 하면서 남북 간에 치열한 경쟁이 이뤄집니다. 특히 88년도에는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은 서울을 새로 가꾸었고, 북한도 평양 시내를 서울에 버금가도록 만들기 위해서 과다한 투자를 하게 됩니다. 이런 과잉 투자가 나중에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을 주게 됩니다.nbspnbsp그리고 김일성 주체 사상을 주장하면서 주체탑, 주체동상 이런 것들을 전국에 건설하고, 사상을 강조하는 등 비경제적인 분야에 많이 투자를 함으로해서 경제가 정체 국면에 들어갔습니다.nbspnbspnbsp89년에는 동유럽이 해체되면서 동유럽에 수출하는 상품이 많았는데 수출의 활로가 막혀 버렸습니다. 또 중국이 시장경제화 되면서 사회주의식 물물교환 거래가 모두 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졸지에 무역 상대를 다 잃어버렸지만 미국의 대북 봉쇄 정책으로 인해 자본주의와의 일체 거래도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이 되어 버린 겁니다. 북한 경제는 급전직하로 내리막길로 갔습니다.nbspnbsp가장 핵심은 외환 고갈입니다. 무역 거래가 중단되니까 외환이 고갈되고, 외환이 고갈되니까 국가 부도가 나버린 겁니다. 그래서 석유 수입을 못하게 되니까 에너지가 없어서 자동차 운행을 못하고, 발전기도 멈춰버렸어요. 석탄 캐는 탄광은 물을 계속 퍼내면서 일해야 하는데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니까 물이 다 차버려서 탄광이 중지되어 버렸고, 무산 철광도 철광석을 자동으로 청진으로 이동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다 중지가 되어 버렸고, 기차도 못 다니고, 즉 전기 공급이 끊기면서 모든 산업이 다 중단되어 버린 겁니다.nbsp농업도 비료 생산도 안 되고, 비닐 생산도 안 되고, 농기계 생산도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식량 생산량도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식량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어드니까 농민들이 자신들도 먹을 것을 생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잉여 생산량을 정부에 제출할 수가 없게 되고, 정부는 이걸 받아서 노동자에게 공급해야 하는데 노동자들에게도 공급할 식량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함경도 지역의 노동자들이 식량 배급을 못 받게 되고, 배급을 받아서 먹고 사는 사람이 배급을 못 받으니까 그냥 다 굶어죽게 된 것입니다.nbspnbsp그렇게 90년대 들어와서 식량이 곤궁해지다가 94년, 95년에 대홍수가 일어나면서 식량 생산량이 더욱 떨어지게 되니까 한 두명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대량 아사로 가게 됩니다. 빈부 격차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부터 굶어죽을텐데 평등을 유지하다 보니까 집단으로 굶어죽게 된 겁니다.nbspnbsp이 대량아사는 지역적으로는 함경도 쪽의 동부에서 시작해서 서부로, 노동자 계층에서 시작해서 농민 계층으로 확대 되었습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니까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식량 생산이 떨어지니까 정부 입장에서는 군인도 먹어야 하고 관리도 먹어야 하니까 농민들이 먹을 양을 남겨 두고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10개월치 먹을 것만 남기고 가져가다가 이제는 6개월치 먹을 것만 남기고 가져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농민들도 봄이 되어서 굶어 죽게 된 겁니다.nbspnbsp농민들은 죽어라고 일해봐야 먹을 양식도 못 구하니까 집단 농장인 문전옥답에서 농사 짓는 것을 게을리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내고 자기가 개간한 뙈기밭을 만들게 됩니다. 뙈기밭에 옥수수와 콩을 심으면 그건 개인 소유가 되기 때문이죠.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새벽에 올라가서 개간하고, 퇴근하고 밤 늦게 오라가서 가꾼 땅이 뙈기밭입니다. 만약 뙈기밭이 없었다면 북한 주민들은 더 많이 굶어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집단 농장에서 짓는 농사는 자기 것이 안되니까 제대로 짓지 않게 되었겠죠. 힘을 비축해 둬야 저녁에 퇴근해 와서 또 뙈기밭에 올라갈 것 아니겠어요? 이렇게 노동력 마저도 농업에 제대로 제공이 안 되니까 식량 생산량은 더욱 떨어지게 된 겁니다. 국가적으로는 더욱 나빠졌지만 개인은 어느 정도 버틸 수가 있게 된 것이죠.nbspnbsp이렇게 해서 북한의 대량 아사는 도시 만이 아니라 농촌으로, 동부 만이 아니라 서부로, 일반 평민 뿐만 아니라 당원에게까지 확대되면서 94년부터 98년까지 일어났습니다. 저는 95년도에 역사기행을 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96년도에는 다시 와서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내 눈 앞에 벌어진 일을 내가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96년부터 북한동포돕기 해야 된다고 정토회에 제안을 했는데 정토회는 정토회관을 짓기 위해 모금도 하고 땅도 구입하고 설계도까지 완성해서 착공하기 직전이였기 때문에 반대가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nbspnbsp‘건물은 올해 못 지으면 내년에 짓고 내년에 못 지으면 10년 후에 지으면 되지만, 사람은 한번 굶어 죽어버리면 다시 못 살리지 않느냐’nbspnbsp그래도 어렵다고 해서 ‘그럼 나만 나와서 할게’ 했더니 실무자 두명을 붙여주어서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를 발족시키고 그해 연말부터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음해 2월에 강원도에 감자가 남아 돌아서 섞는다고 해서 종교단체들이 연합해서 감자 100트럭을 사서 북한에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북한 인도적 지원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전국을 울고 불고 다니면서 강연을 했습니다.nbspnbsp그 때 우파는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식량난을 과장하고 있다. 거기에 좌파들이 부화뇌동하고 있다. 우리가 보낸 식량 총알 되어 돌아온다.’ 이렇게 주장했어요. 그래서 정말 식량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제가 북한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허락을 안 해줘서 못갔어요. 대신 압록강과 두만강을 다니면서 이곳에서 북한 난민들을 만나 자세한 소식을 듣게 된 겁니다. 한 두명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을 바람에 낙옆 떨어지듯이 대량 아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아무리 얘기해도 논쟁만 되었고, 그러던 중 97년 하반기에 대통령 선거에 돌입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묻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호소하게 되었어요. 미국의 의회, 국무성, CIA 등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 미국 사람들은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북한에서는 이 문제를 자꾸 숨기니까nbspnbsp98년부터는 미국에서 북한에 인도적 지원이 재개가 되고, 국제 사회가 협력하고, 99년에는 한국 정부도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게 되고, 이러면서 북한의 대량 아사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지원이 있었던 것이 효과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죽을만큼 죽은 뒤였기 때문입니다. nbspnbspnbsp▲ 뙈기밭 사이로 흘러내린 토사가 삼각지를 이루며 그대로 쌓여 있는 모습. 중장비가 없어서 복구 작업도 요원한 상태.nbspnbsp저는 북한의 뙈기밭을 보면 세계 문화 유산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어느 정도로 할 수 있느냐. 사실 이건 기적이예요. 이렇게까지 사람이 죽지 않고 살려고 애를 썼다는 거잖아요. 여기만 이런 것이 아니라 전 국토가 이렇거든요. 북한이 잘 했다가 아니라 나쁜 짓을 많이 했더라도 거기에 살고 있는 일반 백성들이 저렇게까지 먹고 살려고 애를 쓰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이념을 떠나서 식량을 지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저런 놈들은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 점을 우리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살아있는 사람도 죽이게 되듯이 우리도 ‘그 놈의 새끼들, 왜 주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 북한 주민들의 대량 아사는 우리가 방조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nbspnbsp북한의 대량 아사는 우리가 방조한 것과 다름 없다는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그리고 건물은 올해 못 지으면 내년에 다시 지으면 되지만 사람은 굶어죽으면 다시 살릴 수 없지 않느냐는 말씀은 큰 울림이 되어 계속 뇌리에 남았습니다.nbspnbsp림강의 8도구를 지나고 저 멀리 김형직군이 보입니다. 김형직은 김일성의 아버지인데 이곳은 김일성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유일하게 김일성의 어린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을 세워두었습니다. 한 도시의 이름을 사람의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도 신기한데 버젓이 커다란 동상을 도시 한 가운데 세운 것을 직접 눈으로 보니 한 사람을 신격화하며 독재 체제를 유지해나가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nbsp스님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압록강을 타고 저 멀리서 나무를 운반하는 뗏목이 내려왔습니다. 정말 장관이였습니다. 오징어처럼 머리가 쭈삣하도록 해서 앞에서 조정을 하면서 내려왔습니다. 스님이 “통일이 되면 사흘 정도 압록강에서 저 뗏목을 타고 내려와보면 참 좋겠죠?” 하고 물으니 청년들은 “네” 라고 대답했습니다.nbspnbspnbsp▲ 북한에서 압록강을 통해 나무를 운반하는 뗏목nbsp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좋은 버스 타고 다니는 것도 힘들다고 하면서 뗏목이 과연 타질까?” 하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구경하는 사람은 좋지만 저 뗏목 위에서 먹고 살면서 내려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예요. 그래서 이것은 여름에만 볼 수 있어요”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뗏목은 이렇게 일곱 차례에 걸쳐 연달아 내려오면서 연신 탄성을 자아내었습니다.nbspnbsp어른 키보다 조금 더 높은 빽빽한 옥수수 밭을 지나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더 가니 ‘장백조선족자치현’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발해 유일의 탑인 ‘영광탑’이 남아 있었습니다.nbspnbsp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45도 경사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서 10분정도 올라가니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영광탑이 드러났습니다.nbspnbsp▲ 영광탑으로 올라가는 계단nbsp수학여행 때 눈앞에서 바라보던 신라, 백제의 탑과 같이 내 눈 앞에 실재하는 발해의 탑을 보고나니 발해의 역사가 저 너머 멀고 먼 만주벌판의 것이 아니라 우리 땅 안에서 버젓이 숨 쉬고 있는, 우리의 역사 속의 살아있는 유물이라는 것이 이제야 피부에 와 닿습니다.nbspnbsp스님은 영광탑 앞에 서서 먼 길을 달려 이곳까지 온 청년 역사기행단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발원과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발해 멸망 후 1100여년이 지난 뒤에서야 저희 후손들이 이곳에 찾아와 탑전에서 공양 올리고 예배하옵니다. 조상님들이시여. 저희들을 부디 나무라지 마시고 저희의 이 공양을 받으십시오.nbspnbsp저희 대중 일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환인 하느님, 환웅 천왕님, 단군 왕검님, 해모수님, 고주몽님, 대조영님을 비롯한 민족의 원류를 쫓아 그 발자취를 찾아다니며 학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거슬러 백두산에 올라 천지 신명님들께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정착되기를, 더 이상 남북이 갈등과 대립을 벗어나 서로 협력하고 마침내는 하나 되어 통일되기를 기원하며 이렇게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저희의 이 간절한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오늘 압록강 상류를 거슬러 오면서, 건너편 북녘 산하를 보면서, 동포들의 굶주림의 고통을 늦게 나마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고, 저렇게 살기 위하여 서 있기도 힘든 저 비탈에서 땅을 뒤지고 곡식을 심는 등 그 아픔을 저희들은 몰랐습니다. 곁에 있어도 알지 못하면 없던 일이 되듯이 저희들 살기가 바빠 동포의 아픔을 외면한 그 큰 죄를 이렇게 늦게 나마 참회하오니 저희의 이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300만이나 되는 동포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었고, 그 와중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으며 온갖 인권 침해를 받는 수모를 겼었지만, 저희들이 그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저희의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참회하며 지금이라도 이제 다시는 이런 아픔이 생겨나지 않도록 남북이 과거의 원한을 잊고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여 통일의 그날이 오도록 저희 청년 대중들 모두 정성을 다할 것을 발원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륭팔부 신중님들과 조상 영가님들께서는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또한 오늘 이렇게 발해의 영광탑을 참배하고 불공 올린 인연 공덕으로 이 젊은이들 행복하고 건강하고 슬기롭고 자신들이 세운 원들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해주시옵고, 또한 이 여행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천지 신명님들이시여 이들을 돌보고 옹호하여 주시옵소서.”nbsp스님께서 하시는 발원 속에서 1100년 만에 찾아온 후손으로서의 죄송함이 느껴지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잊어버리면 곧 잃어버리는 것인데 잊어버리지 않도록,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이 일게 됩니다.nbspnbsp그리고 영광탑 앞에서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영광탑 앞에서 바라보이는 북한 혜산시를 바라보며 이승용 선생님으로부터 좋은벗들의 난민 구호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nbspnbspnbsp이곳 ‘장백조선족자치현’은 또한 북한에서 넘어오기는 쉬우나 경비가 삼엄하고 주변 도시로의 교통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북한 난민들이 열이면 열, 다시 북한으로 붙잡혀 들어가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90년대 후반 북한의 대량아사로 인해 탈북한 동포들의 가장 처참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곳이지요. 스님께서 굶주림을 피해 이곳을 건너온 동포들을 돕기 위해 하셨던 수많은 일들을 듣고 나니 나만의 풍족함만을 쫓아 달려온 시간들이 죄스러워지고 앞으로 내가 동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힘들고 모두가 하기 꺼려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내가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백두산을 향해 4시간 여 정도를 더 달려 백두산 중턱의 서편 산문 입구에 있는 강원도 식당에 도착했고, 그 이름과 걸맞게 지금까지 중 가장 우리 입맛에 맞는 얼큰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식사가 후 모두가 진심으로 즐겼던 노래 장기자랑을 끝내고 스님의 lt북한사회 · 북한사람gt 강연을 들었습니다.nbspnbsp“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에서 백두산을 향해서 끝없이 올라와서 백두산의 남편과 서편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잠은 백두산 북편에 가서 잘 예정입니다. 지금 우리는 백두산의 몸 속을 달리고 있습니다. 내일 백두산 천지에 오른다는 것은 백두산의 얼굴을 본다는 뜻이 되겠죠.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단순한 산이 아니라 민족의 신앙입니다. 내일 백두산 천지에 올라보면 왜 우리 조상들이 민족 정기의 표상으로 삼았는지 아마 알 수 있을 겁니다.nbspnbsp그리고 우리는 압록강을 따라오면서 북한을 보았습니다. 북한이 왜 식량난을 겪게 되었는지는 앞서 말씀드렸고, 저희들은 그동안 많은 활동을 해오면서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 해결, 인권 개선도 결국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해결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자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대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든 다 마찬가지겠죠.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인민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체제 유지가 우선이기 때문에 인민의 생존권과 인권에 아랑곳하지 않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민중의 고통도 외면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의 긴장을 완화해야지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저도 미국에 찾아가서 한반도의 평화 문제를 간절히 호소했고, 특히 2005년 9.19 합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쪽 대표가 합의가 있자 마자 바로 메일을 보내서 스님의 고견이 합의를 이끄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9.19 합의가 문제를 합리적으로 푸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닌가 해서 희망을 가졌는데 이 합리성 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국에서도 정권이 바뀌고 남북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파탄에 이른 정도가 아니라 전쟁 위기에 내몰릴 정도가 되었습니다.nbspnbsp또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동아시아 전략으로 미일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거기에 한국을 참여시키기 위한 한미일 군사 동맹을 요구하고 있어서 지금 한국은 굉장히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습니다. 만약에 한미일 군사 동맹에 참여하게 되면 통일이 물건너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됨으로 해서 한국 경제는 그렇지 않아도 정체 국면인데 바로 마이너스 국면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이 문제를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갈 것인가. 이것이 과제입니다. 여러분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개인의 취직 문제나 결혼, 연애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제는 정체 국면에서 붕괴 국면으로 나아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첫째, 최소한 우리가 피땀으로 이뤄놓은 인명과 재산을 훼손하지는 말아야 겠다. 즉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은 없어야 되겠다 하는 우리들의 안전을 위한 우리들의 각오가 필요합니다.nbspnbsp둘째, 전쟁이 없는 것은 임시적 해결책이지 본질적 해결책은 아닙니다. 결국 완전환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통일입니다. 현재의 손실을 잃지 않는 것이 평화이지 미래의 이익까지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의 이익을 담보하려면 우리는 통일로 나아가야 됩니다.nbspnbsp그러면 어떻게 통일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선 주변에 있는 4강들이 한반도의 통일이 자신들에게 손해인지 이익인지 불확실해 합니다. 그래서 주변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통일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결국 당사자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당사자 중에서는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은 현재 통일을 추진할 만한 역량이 안 됩니다. 그래서 북한이 통일을 주도하길 바랄 수가 없습니다. 결국 통일을 주도할 만한 세력은 남한입니다. 남한은 통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통일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역량, 국제사회에서의 외교력이 어느 정도는 됩니다. 그래서 남한 사회 안에 통일 지향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통일의 첫 단계입니다.nbspnbspnbspnbsp그렇다면 남한이 중심이 된 통일을 하려면 북한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북한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북한이 동의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은 포용 정책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생존권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까 통일이 되면 생존권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경제적인 지원을 해야 하고, 북한의 지배 세력들은 통일이 되면 자신의 신분이 계속 유지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신분의 보장을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미리 인도적 지원이나 경제 협력을 통해서 북한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남한 안에서 진보 세력의 정치 활동을 인정하게 해줘서 통일이 된 후에 북한도 자신들의 정치적 활동이 자유롭게 보장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전에 남한의 헌법에 규정해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남한 사회 안에 북한을 포용할 수 있는 변화가 있어줘야 합니다. nbspnbspnbsp그리고 한미 동맹이 이제는 자주적 입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즉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미국이 우리를 도와라 해야 합니다. 그 외에 나머지 세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일에 우리가 협조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미국의 이익에 의해서 분단 고착화도 가능한 것이 된다면, 또 한일 간에 식민지 침략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한일 군사정보협력을 하라고 강요한다면 이것은 종속적 한미 동맹입니다.nbspnbsp대한민국의 국가 목표가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불분명합니다. 외교에 있어서 최우선 과제도 이것이 통일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생각해야 하고, 안보, 국방 문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nbspnbspnbspnbsp그런 면에서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첫째,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 셋째, 남북 간에는 정치적 이념이 달라도 과거사에 대해 화해를 하고 교류와 협력이 증대되어야 한다는 것과 남북 간의 경제 협력은 상호 이익이 된다는 것, 넷째, 여기서 더 나아가서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통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도 이익일 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도 가장 빨리 보장하는 길이 되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도 가장 빨리 되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여러분들이 조금 더 각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nbsp한반도의 완전한 평화를 위한 해결책은 결국 ‘통일’뿐이며 통일에 유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통일을 위한 ‘마음’을 다시 다잡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의 열정적인 강연에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숙소로 가는 길에 올려다본 백두산의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잊혀 지지 않습니다.nbsp이 백두산의 밤하늘을 이제는 언제든지, 어느 경로로든지 와서 한없이 바라볼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합니다.nbspnbsp내일은 백두산 천지에 오른 후 비룡폭포, 소천지, 녹연담, 지하산림을 차례대로 둘러본 후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고스란히 느껴볼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잊혀진 역사 발해의 땅으로 넘어가 대조영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이라고 하는 동모산으로 향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오늘 현장 스케치는 조희정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nbsp

2015.08.13. 49,269 읽음 댓글 32개

2015.8.10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 고구려의 역사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를 맞이하여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안내하며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동북아 역사 대장정 2일째 새벽이 밝았습니다. 낯선 중국 땅에서 처음 보낸 밤이라 피곤했을 텐데도 단 한명도 지각하지 않고 어제 밤 약속한대로 4시 40분까지 버스 탑승을 하고 새벽5시 정각에 송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아침 인사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nbspnbsp고구려의 유적을 보러 환인에서 집안으로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인데도 너무 느려서 이상하다 했는데 스님이 “지난 번 관광버스가 전복된 사고가 났던 지역인데 경찰차가 앞에서 통제를 하고 있어서 서행을 한다” 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버스를 멈춰 세우더니 공안이 들어와 검문을 하기도 해서 뭔가 위험한 지역을 가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일기도 했습니다.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흔들리며 이동을 하였습니다.nbspnbsp▲ 북한의 뙈기밭. 가파픈 절벽까지 뙈기밭으로 만들어져 있는 모습.nbspnbsp그 때 스님이 “지금 오른쪽으로 보이는 강이 압록강이고 강 건너는 북한 땅입니다”라는 말을 하시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북한 땅이 있고, 내 눈앞에 보이는데 직접 갈 수 없다는 분단의 현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특히 절벽 꼭대기까지 뙈기밭을 만든 모습을 보고 무변심 법사님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굶주림에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 것일까... 목이 메였습니다.nbspnbsp압록강을 따라 조금 더 가니 오늘의 첫 일정인 국동대혈에 도착하였습니다. 국동대혈은 나라의 동쪽으로 가면 큰 대혈이 있다는 뜻으로 이때 국은 고구려 시대의 국내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국동대혈을 보러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우산을 들고 우비를 입느라 출발 준비가 더 분주해졌습니다. 이런 비 걱정도 잠시 조금 걷기 시작하니 신기하게도 비가 멈췄고 이동하기엔 한결 수월해졌습니다.nbspnbspnbsp국동대혈에 올라 고구려의 선조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모습을 떠올리며 대한민국에서 온 140명의 청년들도 함께 그 뜻을 기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국동대혈nbsp1300년 전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는 게 신기하였습니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듯 한 오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1300년 전까지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던 조상들은 자신의 후손들의 우리의 땅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땅이 되어 이렇게 찾아와야하는 것을 어떻게 여기실까’ 하는 생각에 빠지며 우리의 역사인데 중국 땅에 있는 것이 아쉽기도 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청년 역사기행단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기울여 발원과 축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 세상에서 가장 크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밝으신 환인 하느님,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처음 나라를 세우신 환웅 천황님,환웅 천황님께서 세우신 배달 나라의 건국 이념 홍익인간 재세이화,nbsp환웅 천황님의 건국 이념을 계승한 단군 왕검님,nbsp단군 왕검님께서 신시를 새롭게 하여 세운 조선 나라,nbsp조선 나라를 계승한 해모수님의 부여 나라,nbsp그 뜻을 계승한 고주몽님의 고구려, 온조님의 백제, 박혁거세님의 신라, 김수로님의 가야,고구려의 뜻을 계승한 대조영님의 발해,nbsp남북으로 흩어진 민족의 뜻을 이은 왕건의 고려,nbsp그 영토와 사람을 계승한 이성계의 조선,nbsp조국이 광복되어 세운진 나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nbsp오늘 우리를 있게 한 하느님을 비롯한 조상님들께 삼가 합장하오며 발원하옵니다.nbspnbsp우리가 여기까지 오도록 나라를 지켜주고 백성을 지켜준 모든 호국 영령들의 은혜에 보답하며 하나된 조국 통일 대한민국을 발원하옵니다. 통일된 우리 나라는 우리만이 아니라 이웃 나라들과 더불어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여 인류 문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될 것을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이곳에 일찍 찾아오지 못하고 고구려 멸망 이후 1300여년 만에 찾아온 것을 참회드리오며 늦게 나마 이렇게 찾아와 인사를 올립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온 130여명 청년들의 이 간절한 발원을 받아들여 주옵소서. 저희들은 그동안 개인의 행복 제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통일을 향해 나아갈 것을 발원하옵니다. 저희들의 이 간절한 발원을 들어 주옵소서.nbspnbsp북녘 동포들 굶주림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고 병듦에서 벗어나고 인권이 개선되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길 발원하며, 남한의 젊은이들도 절망을 딛고 일어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빈부격차 해소되어 모두 다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발원하며, 남북이 하나되는 새로운 나라 통일 한국을 발원하옵니다. 오늘 이 발원하는 젊은이들 모두 건강하고, 이 여행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저희들을 보살펴 주시옵소서.”nbspnbsp스님의 발원을 들으며 ‘선조들은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들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울음이 울컥하고 올라오기도 했습니다.nbspnbsp국동대혈에서 나와 집안에 있는 장수왕릉,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을 보러 이동하였습니다. 이동하면서 이번엔 버스 왼쪽으로 조금 전에 이동하면서 보았던 압록강 넘어 북한 땅이 보였습니다. 해가 나고 날씨가 더워진 탓인지 북한 어린이들이 물가로 나와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을 보며 ‘북한 아이들도 물놀이 하는 것은 우리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의 한편으로는 멀리서 봐도 너무 마른 아이들의 모습에 일정 중에 조금만 배가 고파도 틈틈이 맛있는 간식을 챙겨먹는 우리들이 미안해지기도 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북한의 마른 아이들, 나무는 다 베어버리고 없는 민둥산, 검은 연기를 내 뿜고 있는 시멘트 공장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nbspnbsp▲ 북한의 시멘트 공장nbsp다음은 장군총을 보았습니다. 그 웅장함은 책과 영상자료로 봐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 위엄은 더 대단하였습니다. 역사기행을 온 우리들의 추억을 배려해 스님은 조별로 사진 촬영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햇빛이 강렬함에도 늘 한결같은 미소를 지어주시는 스님의 편안한 마음에 장군총에 대한 추억이 더 편안하게 남을 것 같습니다.nbspnbsp▲ 장군총에서 조별 기념 사진nbsp무덤을 만드는데 사용한 돌이 여기에서 20km 떨어진 우리가 지나온 도로를 개발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게 신기하고 유적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개발로 알게 되었다는 게 엉뚱하기도 했습니다. 1600년 전 만주 땅에서의 고구려의 위엄과 위대함이 그 유적의 규모로도 크게 다가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위대한 유적이 잘 관리하고 보전되고 있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nbspnbsp이어서 조춘호 선생님과 이승용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 순서로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 광개토대왕비nbsp▲ 광개토대왕릉nbsp가장 안타까운 것은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과 달리 절반 이상 무너져 내렸는데 이것은 무덤 속에 사용한 돌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은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으면서 무덤을 만들 때 미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튼튼한 강돌을 넣은 게 아니라 주변 산돌을 넣어서 오랜시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라고 합니다. 무너져 내린 무덤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nbspnbsp집안 무덤에 있는 고구려 무덤 중 벽화가 발견된 무덤은 30곳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공개된 5회분5호묘로 이동하여 직접 무덤 속으로 들어가서 벽화를 보았습니다.nbspnbsp▲ 5회분 5호묘로 들어가는 길nbsp조춘호 선생님의 후레쉬를 비춰가며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고, 늘 말로만 하던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모습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땡볕을 걸어다니다가 지하 무덤으로 들어오니 거대한 냉장고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시원함이 느껴져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마저 행복했습니다.nbspnbsp무덤 앞에 있는 박물관으로 이동하여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벽화를 한 장 한 장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그 중에서 우리 고구려의 벽화를 중국식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부분에서 틀렸고 어떤 부분에선 일리가 있는지도 짚어주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청년들의 ‘아’ 하고 외치는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 5회분 벽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스님nbsp“원래 고구려 무덤은 돌로 쌓아서 덮개를 덮은 적석총입니다. 이 무덤이 점점 커져서 장군총에 오면 무덤이 7층까지 올라갑니다. 여기에 무덤실은 5층에 배치가 됩니다. 이렇게 무덤실은 주로 지상에 있었는데 어떤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점점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지하로 내려가면서도 석실은 그대로 가져갔기 때문에 위치만 바꾼 것 밖에 아니였어요. 그러면서 나타난 것이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nbspnbsp초기 벽화는 주로 생활상을 그렸어요. 후기 벽화로 갈수록 불교 영향을 받아서 연꽃을 그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신도를 많이 그렸습니다. 오늘 들어가본 5호묘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후기 것임을 알 수 있죠. 여기에 전시된 것들은 생활도가 많아요.”nbsp그러면서 스님은 전시된 벽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여기 벽화를 보시면 머리가 소머리로 그려져 있죠. 소머리로 되어 있으니까 이것은 고구려에 있었던 ‘우가’를 표현한 겁니다. 5가 아시죠?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양가라는 다섯 개의 부족이 있었어요. 각 부족은 거의 독립되어 있었어요. 군대도 다 따로 가지고 있었고요. 고구려는 일종의 연방 국가 같은 것이였어요. 나중에 각 부족은 왕권이 점점 강화되면서 다섯 부서의 장관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다섯 개의 지방자치와 같은 연방 국가였다가 점점 중앙 정부의 각부 책임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임금도 이 5가가 합의해서 뽑았습니다. 이것은 신라의 화백 제도와도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렇게 초기에 연방 형식을 갖추고 있었어요.nbspnbsp이 ‘우가’는 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 시기에는 농업을 담당했습니다. 식량과 농업을 담당하는 부서가 ‘우가’였는데 이 우가 출신 중에 단군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왕의 아들이 건실하면 그대로 왕이 되지면 왕이 아들이 없으면 5가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을 선택해서 뽑았던 것이죠. 그리고 왕의 아들이 여러명 있어도 맞이가 시원치 않으면 또 의논을 해야 합니다.nbspnbsp이 벽화는 ‘우가’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보면 되는데 밑에 ‘신농씨’라고 적혀 있죠. 이것은 중국식 해석입니다. 중국에서는 농업의 신을 신농씨라고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농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신이 신농씨입니다. 그래서 이 벽화를 신농씨라고 표현했지만 이 벽화는 중국의 그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고구려의 우가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신농씨도 배달나라 출신입니다. 선진 문명인 배달 나라의 일부가 중국 쪽으로 내려가서 처음으로 농사 짓는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신이 된 거예요. 우리 나라 사람 중에 일본에 가서 신 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호미를 전했다면 일본에서 호미 신이 됩니다...”nbsp큰 유적 뿐 아니라 그 속에 그려진 벽화의 의미까지 다 알고 계신 스님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그 내용들을 다 알고 계실까?’ 라고 옆에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공부를 많이 하셔서 그럴 것’ 이라는 친구도 있고, ‘워낙 직관력이 뛰어나신 분이니깐 바로 아시는 것’ 이라는 친구도 있고,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옆에 있던 종합 생활도에 대해 특별히 중요성을 강조하며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nbspnbspnbsp“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할 것은 왼쪽 아래쪽에 있는 이 그림입니다. 이 나무는 신단수입니다. 여기 신단수 아래에 동굴이 하나 있죠. 동굴 안을 자세히 보시면 곰이 한 마리 앉아 있어요. 호랑이는 동굴 밖에 있는데 화살을 맞고 있어요. 이 그림은 단군 설화와 내용이 똑같습니다.nbspnbspnbsp단군 설화를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비판이 있는데, 일연은 12세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벽화는 5세기 벽화예요. 그러니까 단군 설화는 민족 전통적으로 주욱 내려온 이야기니까 여기에 그림으로 그린 것이죠.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후 사료가 유실한 상태에서 일부 자료를 보고 일연이 그것을 요약해서 기술했던 것이죠.nbspnbsp토착 세력은 다 자기 부족의 상징이 있습니다. 곰을 섬기는 부족, 호랑이를 상징물로 여기는 부족, 각 부족이 있었어요. 그런데 선진 문명을 가진 이주민이 오니까 토착 세력과 이주민이 서로 사이좋게 협력하기도 했지만 저항하는 경우도 있었겠죠. 단군 설화를 보면 호랑이족은 저항을 했다고 볼 수 있고, 곰족은 서로 협력했고 특히 결혼 동맹을 맺었다고 볼 수 있죠. 고구려 건국에서도 보면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제일 먼저 합병한 나라가 송양국이거든요. 전쟁을 해서 합병한 것이 아니고 합의해서 합병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초기에는 반드시 송양국의 공주를 왕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2대 유리왕의 부인도 송양국의 공주였습니다. 첫 부인이 결혼하고 2년 안에 죽자 다시 송양국의 둘째 딸을 왕후로 데려옵니다. 이처럼 선진 이주민 세력인 환웅족과 토착 세력인 웅족이 결혼 동맹을 맺었고 그 사이에 난 아들이 단군 왕검인 것입니다.”nbspnbsp한 친구는 스님의 벽화 설명 중에서 마지막에 설명해 준 종합생활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벽화 왼쪽 아래에 아주 조그맣게 그린 부분을 찾아내면서 이 속에서 우리 단군 신화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느냐라고 설명해주신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신단수 아래에 웅크린 곰을 보기 위해 우르르 모여들었고 곰을 알아 보지 못한 친구들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스님은 “곰이 안 보이는 사람은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며 농담을 던졌습니다. 단군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임이 벽화로 증명된 것을 알게 된 이 순간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nbspnbsp시원했던 5회분5호묘 벽화 냉장고에서 빠져나와 다음으로 간 곳은 환도산성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성인 국내성에 있다가 외적의 침입시 방어를 위해 환도산성을 지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나무와 풀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발굴 작업을 진행해 지금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직접 가 보니 지금도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습니다.nbspnbsp▲ 환도산성 남문 앞에서 전체 기념사진nbsp환도산성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 보기도 하고, 아래에 내려와 발굴된 산성하 무덤떼를 하나씩 둘러보며 아래에서 환도산성 위를 올려다 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 환도산성을 올려다 보았을 때 지는 해가 환도산성 너머 산에 늬엿늬엿 걸린 모습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해주었습니다.nbspnbsp▲ 산성하 무덤떼에서 바라본 환도 산성nbsp산성하 무덤떼에서는 전체 일행이 바닥에 주저 앉아 조용히 사방을 둘러본 후 잠시 명상을 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머릿 속에는 산성을 쌓고 나라를 지키려고 부단히 애를 쓰던 고구려인들의 모습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nbspnbsp▲ 산성하 무덤떼에 앉아 잠시 명상의 시간nbsp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국내성을 둘러보았습니다. 국내성이라고 해서 궁궐을 상상하며 한껏 기대감을 갖고 갔는데 중국인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성벽 터가 조금 남아있는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방치해둔 것에 대해 또 다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nbspnbsp▲ 국내성nbsp국내성 북쪽 성벽에서 시작하여 서쪽 성벽이 끝날 때까지 걸으면서 성벽을 유심히 살펴보는 우리 일행을 중국인들은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운동하고 밥먹고 휴식하고 걸어다니는 일상 거리인데 우리들에게는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유산인 것이죠.nbspnbsp서쪽 성벽을 돌고 남쪽 성벽이 시작되면서부터 통구하와 압록강도 함께 합해졌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걸으면서는 이승용 국장님으로부터 좋은벗들이 96년부터 북한동포돕기 운동과 통일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nbspnbsp▲ 국내성의 남쪽 성벽을 따라 압록강변을 거닐며nbsp저녁 식사는 압록강변에 위치한 조선족 식당에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법륜 스님의 역사 강의였습니다.nbspnbsp강의 내용은 고구려의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이고, 고구려 역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부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면서 “우리 역사에서 부여, 발해에 대해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고구려가 425년 동안 수도로 정한 곳입니다. 환웅의 배달 문명을 계승한 나라가 단군의 조선 나라이고, 그 조선 나라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고 하면서 세운 나라가 고구려입니다. 이것이 다물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배달의 문명을 계승했고, 조선의 문명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배달 나라와 조선 나라에 대해 여러 가지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고구려를 보면서 우리는 고구려가 이 문명을 계승한 동북아의 독특한 민족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nbspnbsp그동안 고구려가 마치 창조한 것으로 말해진 것들도 그 이전을 알게 되면서 계승했다고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비석에도 ‘북부여의 후손이고, 북부여로부터 말을 타고 남으로 내려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기에 보면 해모수가 ‘나는 단군의 후예로서 단군의 조선 나라를 계승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여는 조선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부여라고 불리우는 현이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에도 천리장성 중에 부여성이 있었습니다. 이 부여에서 고주몽은 남쪽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여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발해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의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부여입니다. 부여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요. 이것은 발해와 부여 모두 지금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가 아닌 저 동북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그러니 다물 사상에 의해서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로 바로 이어진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부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여와 고구려를 하나로 봐야 합니다. 부여 고구려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죠.nbsp지금 현재로 보니까 고구려가 처음부터 강성했던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고, 동부여와 고구려의 경쟁에서 고구려가 이기게 되면서 그 정통성을 이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동부여는 만만한 나라는 아니였습니다. 고구려 문자 명왕 때인 6세기까지 유지가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있을 때도 부여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6세기 초까지 삼국 시대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오국 시대였습니다. 남쪽에 가야가 있었고, 북쪽에 부여가 있었기 때문에 삼국에 두 나라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6세기에 들어와서야 가야가 신라에 합병이 되었고, 6세기에 들어와서야 부여가 고구려에 합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삼국이 유지된 것은 6세기와 7세기에 한 160년 정도 밖에 안 됩니다.”nbsp이어서 스님은 고구려의 성장과 쇠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특히 신라가 어떻게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nbspnbsp“고구려는 북위와 화친을 맺으면서 서북 쪽이 안정이 되고 그러자 장수왕은 주력군을 백제 공격에 사용하여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평성대가 오래가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사람들이 사치하기 시작하고, 둘째, 부정부패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셋째, 왕위 쟁탈전이 생기면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겉으로는 영토도 크고 힘도 있었지만 내부는 점점 취약해져 가게 됩니다.nbspnbspnbsp이때 신라는 5세기 때까지만 해도 가야의 침공을 받고 망할 지경이 되어서 광개토대왕에게 부탁해서 5만 군사의 지원을 받아 겨우 나라를 유지했는데 6세기에 접어들면서 법흥왕 때 율령을 선포하고 불교를 공인합니다. 불교를 공인한 이유는 가야와 합병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야는 원래부터 불교 국가였어요. 왜냐하면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삼국 가운데 철저하게 불교를 금지한 국가가 신라였습니다. 옛날로 치면 가야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였지만 거꾸로 개혁 개방 정책을 하면서 신라가 강성해지고 가야는 점점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가야를 침공하기 보다는 합의 통일을 했습니다. 국명은 신라로 하기로 하되 대신에 신라가 가야를 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nbspnbsp첫째, 가야인들의 신앙을 신라가 수용해야 된다고 해서 불교를 공인한 것입니다. 신라 안에서도 반대가 심했지만 이차돈 같은 젊은 사람이 반대를 해서 결국 한 사람이 죽고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불교가 공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라도 가야와의 통합이 쉬운 일은 아니였어요. 둘째,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가야 귀족들의 신분 보장을 해주었습니다. 이것을 지금의 남북 관계에 비유를 하면 불교를 공인한 것은 공산주의의 합법적인 활동을 허용한 것과 같습니다.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받아들인 것은 북한의 장성을 통합군의 장성으로 임명한 것과 같습니다. 또한 함경북도의 도지사를 통합된 나라에서도 도지사의 자리를 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야가 이런 통합 신라와의 합의 통합을 받아들인 것입니다.nbspnbsp신라 중심으로 통일을 하려고 했으니까 이렇게 가야를 포용한 것이겠죠. 그렇다면 지금 남한이 남한 중심으로 통일을 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두려면 북한을 포용해줘야겠지요? 그런데 지금의 남한은 이 정도의 포용 정책을 할 수 있나요? 이 정도를 못하면 북한이 수용을 안 하겠죠. 죽기 살기로 저항을 하겠죠. 지금 남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강자가 약자를 포용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이렇게 신라는 가야와의 통합을 통해 갑자기 성장을 하게 됩니다. 인재도 두배로 늘어났고, 가야의 앞선 철기 문명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생산량이 늘어나고, 무기가 개발이 되고, 그래서 진흥왕이 나제 동맹을 맺어서 고구려를 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자 고구려는 한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라는 함흥, 원산까지 밀고 올라갑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북방도 막아야 하고 남쪽도 막아야 하고 두 개의 전쟁을 할 여력이 도저히 안 되었던 겁니다.nbspnbsp어쨌든 신라가 단시간 내에 갑자기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야와의 합의 통합 때문이였습니다. 신라는 가야에게 조금 양보했지만 얻은 것은 열배를 더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남북한도 합의 통일을 하게 되면 통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까지 만들어나가게 되면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됩니다. 유라시아로 확장해 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북한 개발을 하기 위해서 돈이 조금 드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nbspnbspnbsp나아가서 신라는 통일이라는 계획을 세워 놓고 통일을 한 것이 아니고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다가 결과적으로 통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대륙을 차지하겠다는 생각도 전혀 없어서 통일을 했다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대륙을 잃어버린 한계가 있었죠. 물론 잃어버린 것은 아니죠. 발해가 다시 생겼으니까요.nbspnbsp고구려 멸망 후 30년만에 북방 영토에는 발해, 즉 대진국이 일어났죠.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가 망했다는 의미에서는 삼국 통일이지만 실제로는 삼국 통일이라기 보다는 신라와 발해라는 이국 시대라고 볼 수 있죠. 이때 또 재미있는 점은 고구려를 잃고 나라를 되찾고자 한 부흥군과 신라군이 합동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였지만 그 보다 더 큰 원수가 당나라였습니다.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쫓아내기 위해서는 고구려 부흥군이 신라군과 연합해서 가장 활발하게 싸웠던 것입니다. 신라는 무기와 물자를 대고 실제 인력은 고구려군이 전면에 나서 싸워서 결국 당나라군을 한반도 안에서 쫓아내게 됩니다.nbspnbspnbspnbsp고구려의 영토 일부를 신라가 차지했지만 그것은 반도 안에 불과했고, 실제로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는 발해가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삼국통일이라기 보다는 북발해와 남신라라고 하는 이국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의 기운은 발해로 그 역사적 전통성이 계승되었기 때문에 환단고기에 신라는 언급을 안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다음에 대진국이 나옵니다. 발해 사람들은 자기들을 발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자신들의 나라를 진국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고구려는 후대로는 발해로 계승이 되었습니다.” nbspnbsp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한반도 동쪽 아래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신라가 짧은 시간에 어떻게 비약적 성장을 할 수 있었는지는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특히 신라가 가야를 포용해서 합의 통일을 한 것에서 분단 국가인 우리가 독일 통일이라는 외국의 사례만 보고 통일의 방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경험 속에서도 보고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은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nbspnbsp이렇게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오국시대의 방대한 역사를 단 2시간 만의 강의로 우리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춰 적절히 비유로 강의를 해준 스님이 더 대단해 보였습니다. 에어컨도 잘 안 나오고 2시간 내내 서서 열정적으로 강의해주는 스님 앞에서 체력적 한계와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는 우리들이 많이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nbspnbsp잠자리에 들기 전 조별로 모여 마음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거대한 유적지를 돌아보며 느낀 점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체력적인 소모가 커서 많이들 지쳐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여러 명의 친구들이 환도산성 아래에서 산성을 올려다 보며 바라본 해질녘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보았던 초록색 중 가장 아름다웠던 색이었다고 이야기한 친구도 있었습니다.nbspnbsp▲ 조별 마음 나누기 시간nbsp그리고 책에서만 보던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을 실제로 보니 그 거대함에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식사 전에 압록강변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이 불빛 하나 없는 암흑이었던 것과 달리 이곳 중국은 알록달록한 불빛으로 휘향찬란한 것을 보면서 북한을 껴안지 못하고 있는 우리 남한의 현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고 했습니다.nbspnbsp내일은 하루 종일 압록강변을 따라 북한의 모습을 보면서 북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볼 예정입니다. 어떤 모습을 보게 되고 그 속에서 무엇을 느끼게 될지 기대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오늘 스케치는 김양숙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nbsp

2015.08.12. 49,173 읽음 댓글 31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