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01.31. 인도성지순례 11일째, 기원정사
“금강경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 함께 탁발을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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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이 가장 오랜 기간 머무셨던 곳이자 금강경의 배경지인 기원정사를 순례하는 날입니다.

천축선원 법당에서 새벽 기도를 하고 아침공양 후 6시 30분부터 수행법회 생방송을 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sh)주의 쉬라바스티에 와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가장 오랜 기간 머무셨던 곳으로, 금강경의 배경이 되는 곳입니다. 쉬라바스티를 우리말로 하면 사위성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곳에 있는 한국 절에서 여러분과 영상을 통해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즉문즉설을 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서둘러 동원정사로 갔습니다.

동원정사에 도착하니 오백 명의 순례단이 가지런히 줄을 서 있었습니다. 스님은 순례단과 함께 사위성으로 향했습니다.

“동원정사에서 출발해 사위성 동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자,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이 막힌 구간을 만났습니다. 다행히 사다리가 놓아져 있었습니다. 천축선원 대인스님께서 순례단을 위해 준비해 놓은 사다리였습니다. 한 줄로 사다리를 타고 넘었습니다. 사다리를 건너 계속 사위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1시간 정도 걷자 멀리 큰 탑이 보였습니다. 수닷타 장자 탑이었습니다.

가까이에 앙굴리말라 탑도 함께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먼저 수닷타 장자 탑을 돈 후 앙굴리말라 탑을 돌았습니다.




탑돌이를 마치고 앙굴리말라 탑에서 가사를 수하고 예불을 드린 후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스님이 수닷타 장자와 앙굴리말라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 당시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다고 하는 쉬라바스티, 사위성입니다. 신흥 강국이었던 코살라국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업가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많은 신흥 사상가들이 이곳에서 법을 전했습니다.

부처님은 사위성의 큰 사업가였던 수닷타 장자의 초청으로 이곳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을 만나기 전부터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사업을 했습니다. 선인 중에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과부, 홀아비, 독거노인, 고아를 항상 도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닷타 장자를 ‘외로운 사람을 돕는 사람’이라고 불렀어요. 한자로는 ‘급고독장자’, 이 나라의 말로는 ‘아난드삔디까’로 불렀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을 만난 뒤에는 돈을 벌기보다 부처님의 법을 널리 전하는 것에 전념하여 전 재산을 썼습니다. 그래서 후대에도 사람들은 수닷타 장자의 공덕을 칭송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돌고 나온 탑이 수닷타 장자를 기리는 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앉아있는 이 탑은 앙굴리말라 탑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살인자로 이름이 난 사람입니다. 수닷타 장자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죠. ‘앙굴리’는 손가락이라는 뜻입니다. 앙굴리말라는 100명의 사람을 죽여서 100개의 손가락을 목에 걸고 다니면 바로 승천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살인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분이 부처님을 만나서 깨달음을 얻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복수심이 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무리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도 그 사람이 잘 살아가는 것은 못 보죠.

그런데 이 두 탑을 보면 악인 출신 성자의 탑을 선인 출신 성자의 탑과 동등하게 쌓았어요. 두 분을 똑같이 공경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만 있는 일일지도 몰라요. 불교에서는 출가를 하면 세속에 있을 때에 악인이었던 성인이었던 과거는 다 꿈속의 이야기라고 봅니다. 깨달음을 얻어 성인이 되면 그의 과거 행적 또한 묻지 않죠. 깨달음이란 이렇게 위대합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앙굴리말라 탑을 바라보니 수닷타 장자 탑 옆에 위치한 앙굴리말라 탑의 의미가 깊게 다가옵니다. 불법의 이치에 새삼 경탄하게 됩니다. 순례단은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순례단은 명상을 마치고 탁발을 하기 위해 사위성을 나왔습니다. 두 손으로 발우를 모아 들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순례단이 지나가자 마을 사람들은 일과 대화를 멈추고, 순례단의 행렬을 바라보았습니다.

30분 정도 걷자 탁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발우에 공양물을 받았습니다.


2600년 전 부처님께서도 이 길을 걸어 마을로 나아가 탁발을 하시고 기원정사로 돌아와 공양을 하셨습니다. 오백 명의 순례단도 부처님을 떠올리며 발우를 들고 고요히 기원정사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기원정사에 들어온 순례단은 발우를 앞에 두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먼저 담마까말라 스님께서 테라밧다식으로 공양 염불을 했습니다.


이어서 한국에서 발우공양을 할 때 독송하는 소심경을 외운 후 공양을 시작했습니다.


더운 날씨에 1시간 동안 걷고 나니 탁발한 음식이 더욱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스님의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1,250명의 대중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정진하고 계셨습니다. 공양 때가 되어 부처님께서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舍衛城)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아침 공양하는 시간이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였는데, 공교롭게도 지금 시간이 마침 공양하는 시간이기도 하네요. 발우에 음식을 담아서 식사해 보니까 어때요? (웃음)

가사(袈裟)라고 하면 요즘은 일종의 유니폼과 같은 개념이지만 당시에는 몸에 두르는 윗옷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었다는 표현을 보면 평상시 나무 밑에 있을 때는 윗옷을 벗고 계셨던 모양이에요. 부처님과 대중들은 가사를 입고 성안의 골목골목에서 걸식을 한 후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했습니다. 거지라면 음식을 얻어서 아무 데서나 먹어도 상관없지만 수행자는 반드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여법하게 공양을 했습니다. 공양을 하신 후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는 말은 명상에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수보리 존자가 대중 가운데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질문을 하는 것으로 금강경이 시작됩니다.

금강경에 나온 모습을 재현해 보는 순례

작년에 1차 만일결사를 회향하면서 1,250명의 순례단과 함께 부처님 당시를 재연해 보았습니다. 1,250명이나 되는 대중이 어떻게 이 공간에 다 지냈나 싶었는데 기원정사 전체 규모를 봤을 때 충분히 인원을 수용하고도 남았습니다. 이번 순례단은 500명인데 지금 여러분이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나무 두세 그루 밑이면 충분하잖아요.

금강경에 차제걸이(次第乞已)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차제걸이란 차례로 걸식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걸식하면 되는데 왜 차례로 걸식했을까요? 처음부터 차제걸이를 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둘러앉아서 공양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둘러보니까 아난다의 발우에는 하얀 쌀밥이 가득하고, 마하가섭의 발우에는 적은 양의 꽁보리밥이 들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걸식을 어떻게 하는지 물으셨습니다. 아난다가 대답하기를, 가난한 집에 걸식을 가면 그들이 보시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번뇌를 일으키게 만드니 차라리 부잣집에만 가서 걸식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훌륭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물으셨습니다. 마하가섭이 대답하기를, 가난한 집은 복을 지을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걸식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복을 짓게 해주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하가섭에게도 훌륭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두 사람을 다 칭찬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분별해서 걸식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줄 사람이든 안 줄 사람이든, 무엇을 주든, 분별하지 않고 그냥 차례대로 밥을 빌어야 합니다.’

이렇게 밥을 주든 안 주든, 많이 주든 적게 주든, 이것을 주든 저것을 주든,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고 나는 다만 밥을 빌 뿐이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바로 차제걸이입니다.

걸식할 때는 ‘칠가식(七家食)’이라고 해서 순서대로 일곱 집까지만 돈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일곱 집까지 돌았는데 아무도 밥을 주지 않는다면 빈 발우를 가져와야 하고, 음식의 양이 적으면 적은 대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곱 집까지 갔는데 아무도 음식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도 먹을 음식이 없거나, 아니면 나쁜 소문이 돌아서 음식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먹을 음식이 없어서 수행자들에게 음식을 못 준다면 현재 사람들의 삶이 어떤지를 이해할 수 있고, 나쁜 소문이 돌아서 음식을 안 준다면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스스로 반성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일곱 집 이상은 걸식하지 않는 것을 칠가식이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머무는 곳이 절

부처님께서 머무신 절이 많은데, 그중에 가장 유명한 절이 기원정사(祇園精舍)이고, 두 번째가 죽림정사입니다. 지어진 순서로는 첫 번째가 죽림정사이고 두 번째가 기원정사인데, 경이 설해진 장소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은 쉬라바스티(Sravasti)에 있는 기원정사입니다. 빨리어로는 제타바나(Jetavana)라고 합니다. 경전 중에 사위성에서 설해졌다고 하는 내용이 거의 40퍼센트 정도는 될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위성 기원정사에 가장 오래 머무셨기 때문에 기록에 남아 있는 얘기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부처님 당시 절의 의미가 건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본다면 절의 의미는 수행자가 머무는 곳입니다. 원래는 숲인데 수행자가 머무르면 ‘정사(精舍)’라고 부릅니다. 당시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나중에 건물을 자꾸 짓다 보니까 건물을 절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한국 사람들은 기와집을 절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서울 용두리 판자촌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었을 때, 제 법문을 듣고 감동했다고 찾아온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와서 보니 제가 판자촌에 있단 말이에요. 그분이 하는 말이, ‘왜 스님이 절에 안 계시고 여기 계십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이 말은 ‘기와집에 안 있고 왜 판자촌에 있냐’ 하는 얘기죠. 수행자가 머무는 곳이 절이라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저한테 그 판자촌 천막 비닐하우스를 빌려준 분은 비록 판자촌에 살아도 절을 하나 짓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저를 만나서 알게 된 분인데, 어디 사느냐고 물으니까 서울 변두리에 산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저를 만날 때마다 호박도 가져오고 호박잎도 가져왔는데 도대체 서울 시내 어디에 살기에 이런 걸 가져오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한번 가봤더니, 판자촌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비어 있는 비닐하우스가 하나 있기에 물어보니, 동생이 살다가 방을 얻어서 나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내가 여기 살아도 됩니까?’ 하니까 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행자들과 그 비닐하우스에 살면서 깨달음의 장도 시작하고, 포교 활동도 하고 그랬습니다.

거기서 1년 정도 살다가 어느 날 대화를 했는데, 이 부부가 자기들의 꿈은 절을 하나 짓는 것인데 형편이 안 돼서 아직 꿈을 못 이루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소원이 벌써 이루어졌는데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하니까, 두 부부가 놀라면서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습니다. 수행자가 머무는 곳이 절인데, 제가 여기 살고 있으니 여기가 절이잖아요. 두 부부의 소원이 절을 하나 짓는 것이라고 해서 제가 거기 가서 살았단 말이에요. 그럼 소원이 벌써 성취된 것인데, 아직도 소원 성취를 하겠다고 하는 이유는 뭘까요? 기와집이 절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절의 원래 의미는 수행자가 머무는 곳이에요.

마음이 청정한 자가 스님입니다. 사무실이든 가정집이든 법담을 나누면 그곳이 절입니다. 이런 정신을 갖고 정토회가 시작됐어요. 정토회는 가정집에서 몇 명이 둘러앉아 불교 공부를 하면서 시작이 됐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따로 어떤 건물을 지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보리수나무 숲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행자가 머무르는 숲을 절이라고 불렀습니다. 건물의 모양을 한 절이 지어진 것은 훨씬 후대의 일입니다.

낙담하지 말고 꾸준히 정진해야 하는 이유

부처님과 부처님을 찾아온 사람들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 경전인데, 원래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법문은 즉문즉설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부처님께 뭐라고 하소연을 하면 부처님이 대답을 하셨습니다. 애가 죽었는데도 부처님과 대화를 나누고 나면 갑자기 얼굴이 밝아지면서 ‘알았습니다, 부처님’ 이러면서 돌아가거나 그 자리에서 출가를 했죠.

경전에서 이런 내용을 읽고 나서 여러분들은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 하고 얘기만 하면 다 깨닫는데, 우리는 왜 못 깨닫습니까?’ 하고 질문을 많이 합니다. 첫째, 부처님이라는 위대한 스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둘째, 깨달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위주로 기록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과 대화를 나눈 모든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도 못 깨달았잖아요. 부처님을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있었고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의 이야기만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힘든데,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어떻게 남기겠어요? 처음에는 못 깨달았지만 나중에 깨달았다는 이야기에는 못 깨달은 이야기도 있기는 합니다.

깨닫지 못한 이야기는 굳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경전만 읽어보면 부처님께서 한마디만 하면 사람들이 다 깨달은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어떻게 그렇게 되겠어요? 그러니 여러분도 너무 낙담하지 마시고 꾸준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나중에 지혜의 눈이 밝아지면 과거에 못 깨달았던 내용은 다 없어지고 법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언하에 깨쳤다고 기록이 됩니다. 세세하게 다 기록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자, 그럼 경전 독송을 하겠습니다.”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천축선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착해서 공양을 하고 저녁 예불을 했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함께 대화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대인스님과 함께 천축선원 불사를 해오신 적조행 보살님의 인사를 들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3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저도 인도에서 25년 살았습니다. 제가 마흔아홉에 흑발을 휘날리며 인도에 왔는데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일흔넷이 되었습니다.(웃음)

정토회에서 해마다 천축선원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 4월에 홍수가 나서 담마 홀이 다 무너졌는데, 정토회에서 도와주신 덕에 원상복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오시기 전에 깔끔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정비를 했습니다. 제가 잘하는 솜씨는 아니지만, 내년에도 다시 찾아주시면 따뜻한 국 한 그릇 끓여드리고 싶습니다. 내일 일찍 출발하신다고 들었는데 살펴가십시오.”

이어서 외국인 참가자들의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스님이 간략히 참가자들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에는 처음으로 외국인도 함께 했습니다. 국제참여불교연대(INEB) 활동가와 영어불교대학을 졸업을 한 분들입니다. 다른 나라 불교인으로서 정토회 성지순례를 참가한 소감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태국에서 온 INEB 집행위원장 안챌리 님의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감명을 받은 내용은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인 ‘담마를 보면 여래를 보는 것이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상이 더 크다든지 장소가 더 멋지다든지 하면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이미지만을 강조합니다. 이번 성지순례에 참가하여 담마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정진해서 담마를 제 가슴과 행동 속에 담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정토회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8시에 출발한다고 하면 정토회 사람들은 7시 40분에 모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상 시간보다 1시간 더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했습니다. 굉장히 놀라웠던 것은 빨리 먹고, 빨리 가고, 화장실도 빨리 갔다 온다는 점입니다. 이런 모습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가장 느린 그룹에 속했는데 잘 견뎌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웃음)

다음은 베트남 다낭에서 온 청년들의 소감을 들어 보았습니다. 티엔 님이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은 법문을 설하실 때 항상 사회적인 문제와 연결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저로서는 너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담마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의 말씀 속에서 사회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하는 점은 유일무이하게 다른 단체와는 다른 정토회 성지순례만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베트남 불교도 자선사업과 복지사업을 하고 있지만, 정토회는 그보다 더 깊이 사회적 참여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베트남 청년들과 베트남 불교도 정토회처럼 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사르나트 박물관에서 불교의 정의를 보았는데 ‘불교는 사회개혁 운동이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정토회 성지순례에 참여하면서 이것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베트남으로 돌아가면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정토회의 모델을 본받아 실천하겠습니다.”

이어서 태국에서 온 담마까말라 비구니 스님이 소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가 인도에 열 번 이상 왔는데 이번이 가장 특별한 성지순례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까지 계속 가지고 있었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500명이 순례를 해도 조용히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그 비결은 송수신기였습니다. (웃음)

제가 페이스북에 성지순례 소식을 공유했는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옷을 입고 있느냐? 모두 승려이냐?’ 하는 댓글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는 스님이 아니지만 15일 동안 수계를 받은 사람들로서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고 답을 달았습니다.”

순례단 모두가 박수를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어 정토불교대학을 다니고 있고 홍콩 불교신문의 기자이기도 한 크레이그 님이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과 사회 실천을 자연스럽게 결합한 분을 처음 봤기 때문입니다. 이번 순례를 통해 수행의 관점이 더욱 명확해지고 자신감이 생긴 것 같습니다. 개인 수행은 물론이고 사회참여도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두 큰 박수로 공감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스님은 한국인 순례자들을 안내해 왔는데, 이번 순례를 계기로 미래 30년은 전 세계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성지순례를 함께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소감을 듣고 마지막으로 스님이 정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모두 잘 들었습니다. 이번에 참가한 외국인은 9명뿐이었지만 준비해야 할 일은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들을 위해 국제지부에서는 안내책자와 경전을 미리 영어로 번역을 하고, 실시간으로 통역을 하면서 다녔습니다. 국제지부 회원들이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모두 박수)

우리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한데 섞여서 이렇게 먹고 자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오면 여러분의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렇게도 살았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웃음)

여러분이 한국에 돌아가서 가볍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성지순례를 통해 법의 가피를 입는 것입니다. 가피를 많이 입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내일은 새벽 2시 30분에 마지막 순례지인 상카시아로 이동해서 회향식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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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42

0/200

드림하이

여러분이 한국에 돌아가서 가볍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성지순례를 통해 법의 가피를 입는 것입니다. 가피를 많이 입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2024-03-26 15:06:08

진달래

오늘도 감사합니다.()

2024-02-12 15:00:03

지혜안

스님
감사합니다 ()()()

2024-02-05 10: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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