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01.30. 인도 성지순례 10일째, 쉬라바스티
“순례하면서 남편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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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다시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가서 쉬라바스티를 순례했습니다.

새벽 3시, 이틀간 머물렀던 대성석가사를 나와 다시 인도-네팔 국경으로 출발했습니다.


3시 40분에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출입국사무소에는 다행히 한 사람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한 명이라도 업무를 봐주어서 감사했습니다.

스님은 6시 30분에 네팔-인도 출입국 절차를 모두 마쳤습니다. 절차가 먼저 끝난 순례단과 함께 바로 삐쁘라하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약 1시간 30분가량 이동하니 삐쁘라하와에 도착했습니다. 삐쁘라하와는 석가족이 세운 부처님의 진신 사리탑입니다. 순례단은 가사를 수하고 삼배를 드렸습니다.

다시 쉬라바스티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잠깐 멈춰서 야외에서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2시간을 더 이동하니 쉬라바스티 천불화현탑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정근을 하면서 천불화현탑으로 올라갔습니다. 천불화현탑 위에서 다 같이 예불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쉬라바스티와 천불화현탑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부처님은 많은 재가 제자들도 가르치셨는데 그중에는 수닷타 장자라는 분도 있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쉬라바스티 사업가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후 쉬라바스티로 부처님을 초청했습니다.

쉬라바스티 지역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처음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대중 앞에서 망고나무 씨앗을 땅에 심었고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더니 모두 부처님 모양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이 기적 이후로 쉬라바스티 일대의 교화가 점차 이루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스님과 함께 먼저 온 순례단은 설명을 듣고 동원정사로 출발했습니다. 이어서 출입국 절차를 마친 두 번째 팀이 천불화현탑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순례단과 함께 탑을 돈 후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안내를 마치고 탑을 내려오는데 세 번째 팀이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세 번째 팀까지 직접 설명한 후 동원정사로 갔습니다.

먼저 도착한 순례단은 경전을 독송하고 있었습니다. 스님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같이 경전을 독송하고, 예불을 드렸습니다.


이어서 동원정사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동원정사입니다.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왼쪽 담장 너머로 숲이 보이죠? 그곳이 사위성입니다. 수닷타 장자가 사위성 서쪽 문밖에 기원정사를 세웠고, 베사카(Vesakha) 부인은 그것을 본떠서 동문 밖에 이렇게 동원정사를 지었습니다. 수닷타 장자를 아난드핀디카(외로운 이를 돕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베사카 부인에게는 ‘미가라의 어머니(鹿子母)’라는 별명이 있었어요. 그래서 여기를 녹자모 강당이라고 부릅니다. 경전에 나오는 녹자모 강당과 동원정사는 같은 절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손녀가 죽었어요, 어떡하죠?

어느 날 베사카 부인의 손녀가 죽었어요. 손녀를 사랑하는 보통의 할머니들 마음이 그렇듯이 베사카 부인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베사카 부인은 비가 오는데, 우산도 안 쓰고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이 계시는 기원정사를 찾아왔습니다. 부처님이 무슨 일인지 물으니 부인은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손녀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슬픕니다’ 하고 하소연을 했어요.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위로를 하겠지요. 하지만 부처님은 이야기의 주제를 바꿔서 베사카 부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부인,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 게 좋겠습니까? 두 명이면 좋겠습니까?’

‘두 명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두 명인 게 좋다면 세 명이 되면 어떨까요?’

‘더 좋겠지요.’

부처님은 베사카 부인에게 계속 묻습니다. 다섯 명, 열 명, 백 명, 더 나아가 사위성에 사는 사람 전체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느냐고요. 그러자 부인은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다시 묻습니다.

‘부인, 이 사위성에서 하루에 몇 명이나 죽습니까?’

‘많이 죽겠지요. 하루에 다섯 명, 세 명, 적어도 하루에 한 명 이상은 죽을 겁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베사카 부인에게 말합니다.

‘부인,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매일매일 슬퍼서 울겠구려.’

이 말을 듣자 베사카 부인은 탁 깨달아 버렸어요. 처음에 부인은 사랑하는 손녀가 죽어서 너무너무 슬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위성 사람 전체만큼 많으면 어떻겠냐고 물었어요. 베사카 부인은 ‘그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베사카 부인에게 사위성에서 하루에 사람이 몇 명이 죽는지 물었어요. 베사카 부인은 적어도 하루에 한 명은 죽는다고 답합니다. 부처님은 이 문답을 통해 사람이 많으면 매일매일 죽는 사람이 생기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매일매일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니 매일매일 슬피 울 것이라는 모순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 순간 베사카 부인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조금 전까지 슬퍼서 울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베사카 부인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알았습니다, 부처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베사카 부인과 부처님의 문답은 선문답하고 거의 같은 거예요. 사랑하는 손녀가 죽었는데도 슬픔이 가셨다면 남편이 죽어도 슬픔이 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잃어버려도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그냥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꿈속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눈을 뜨면 다만 꿈일 뿐인 것과 같습니다. 경전 속 베사카 부인의 이야기에서 그가 좋은 일을 하고 보시를 많이 했다는 것은 세속적인 얘기이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베사카 부인이 법을 깨달은 이 문답입니다.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지 집을 팔아 보시를 했다고 해도 그것은 다 꿈속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물론 베사카 부인은 깨달음의 지혜가 열렸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많은 보시행과 보살행을 했습니다.

동원정사가 생긴 연유

어느 날 베사카(Vesakha) 부인이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러 기원정사에 갔다가 할아버지가 결혼 선물로 사준 온갖 보석이 장식된 아주 비싼 외투를 두고 왔습니다. 하인을 시켜서 옷을 벗어놓은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가져오고, 아난다 존자가 챙겨두었으면 보시하라고 했습니다.

하인이 가보니 옷은 아난다 존자가 이미 챙겨놓아서 보시하려고 했지만, 아난다 존자가 받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수행에 필요한 보시만 받지, 수행에 필요 없는 것은 못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보시하지 못하고 도로 가져오자, 베사카 부인은 이미 보시하고자 마음을 냈기 때문에 옷을 팔아서 승려들에게 필요한 보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팔려고 내놔도 워낙 값비싼 외투라서 아무도 사지 못하니까, 베사카 부인이 자기가 도로 사서 그 돈으로 동원정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동원정사는 초기에 사리푸트라 등 비구들이 머무르는 절이었는데 나중에 이곳이 성문과 가까이 있어서인지 비구니들의 절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동원정사를 지을 당시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비구니 절로 지은 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성지순례를 와도 이곳 동원정사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이곳을 찾아온 우리만 해도 여성 수행자들이 많은데, 옛날에는 수행자의 모델이 다 남자밖에 없었잖아요. 10대 제자도 다 남자이고, 재가 신자도 수닷타 장자의 이야기만 유명하지, 여자 수행자들의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베사카 부인처럼 뛰어난 재가 여성 수행자도 있었고, 출가 여성 수행자 중에는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를 증득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는 여성의 활동이 적어서라기보다는 기록자가 주로 비구승이니까 승려와 남자들의 이야기를 위주로 기록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설명을 마치고 동원정사를 나오니 공터에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아이들에게 한 줄로 질서 있게 줄 서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질서 있게 줄을 서자 스님은 공평하게 사탕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에게 사탕이 돌아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렸습니다. 사탕을 모두 받고 나자 아이들이 무척 기뻐했습니다.

스님은 시골 논둑길을 걸어서 천축선원으로 향했습니다.


천축선원 주지 대인스님은 순례단의 저녁 공양을 준비하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식기를 챙기러 가는 중에 천축선원에 도착한 스님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공양을 한 후 천축선원 마당에서 저녁예불을 했습니다.

이어서 그 자리에서 저녁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법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대인스님의 인사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각 나라에서 세운 절이 있었는데 한국 절은 없었습니다. 제가 한 생각을 일으켜 절을 짓고 산 지가 올해로 25년째입니다. 법륜스님께서는 천축선원 불사를 시작한 초기부터 한결같이 관심을 가지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해마다 조금씩 불사를 진행할 수 있었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유훈 십사목 중 제6대목은 ‘인도 4대 성지와 더불어 기원정사를 잘 가꾸고 이웃들에게 부처님 법이 쇠하지 않도록 전법하여 이 나라에 다시 부처님 법이 부흥하도록 하라’입니다. 정토행자님들과 함께 천축선원이 용성조사님의 유훈 실현의 바탕이 되는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인스님의 인사말을 듣고 잠시 명상을 한 후 즉문즉설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누구든지 성지순례 중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네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순례하는 도중에 남편이 자꾸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며 한국에 돌아가서도 깨달은 마음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순례하면서 남편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납니다.

“제가 이번 성지순례에 와서 세 번 정도 눈물을 흘렸는데요. 눈물 속에서 저희 신랑이 자꾸 나타났습니다. 신랑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다. 어떻게 그렇게 괴로운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생각이 계속 올라옵니다. ‘나는 그래도 불교를 만나 자유로운 삶을 찾아가고 있는데, 괴로움 속에 있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품어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신랑을 마주치게 되면 또 가슴이 답답할 것 같습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제로 신랑을 봤을 때 올라오는 답답한 마음 때문에 제가 깨달은 것이 제대로 실천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집에 가서 저희 남편을 봤을 때 어떻게 하면 지금 깨달은 이 마음을 놓치지 않고 남편을 대할 수 있을까요?”

“깨달음이라는 용어만 쓰면 깨달아진 줄 아세요? 남편하고 떨어지면 남편이 불쌍해 보이고, 막상 실제로 남편을 보면 답답하고, 두 가지 마음은 다 똑같은 마음이에요. 모두 경계 따라 일어나는 내 마음일 뿐입니다. 남편과 떨어져 있을 때 남편을 생각하니 ‘남편이 참 불쌍하다.’, ‘남편을 잘 돌봐줘야 하겠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을 세속에서는 선심이라고 합니다. 남편만 보면 미워지고 답답해지는 것을 세상에서는 악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악심과 선심은 다 경계 따라 일어나는 거예요. 내 마음이 한 번은 이렇게 일어났다가 한 번은 저렇게 일어났다가 하는 것은 망념일 뿐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 혜능대사가 ‘전심은 무엇이고 후심은 무엇이냐? 어떤 것이 너의 본래 면목인가?’ 하고 말했잖아요.

선심이니 악심이니 이런 걸 논하는 것은 깨달음 하고는 거리가 먼 그냥 세속놀음에 불과합니다. 이럴 때는 선심이 일어나고 저럴 때는 악심이 일어나는 것은 그냥 경계 따라 일어나는 중생심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이 제 아들을 보거나 할 때는 선심이 일어나고, 또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악심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선심이 일어났다가 악심이 일어났다가 하는 것이 중생심의 본질이에요. 그러니 ‘선심과 악심 너머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이것을 탐구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본래 마음이 그렇다.’ 이렇게 전제를 하면 그것은 탐구가 아니에요. 믿음이고 배움이지요. ‘왜 마음이 이래도 일어나고 저래도 일어났느냐’고 탐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불쌍하게 여겨지는 마음을 탐구해서 마음이 이렇게 일어나도 저렇게 일어나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남편과 떨어져 있어도 불쌍한 마음이 전혀 안 일어나야 함께 있을 때도 전혀 미운 마음이 안 일어납니다. 그래야 털끝만큼이라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하고 떨어져 있으면 질문자만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에요. 여기에 순례를 온 사람 대부분이 남편과 떨어져 있으면서 고생을 하다 보니까 집이 그리워지고 집에 빨리 가고 싶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가서 문만 열고 들어서면 벌써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그것은 깨달음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냥 ‘경계 따라 마음이 이렇게 일어나는구나!’, ‘남편의 얼굴을 보면 미움이 일어나고, 남편과 떨어져 있으면 연민이 일어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서 붙어사는 것입니다. 얼굴만 보아도 싫은 마음이 일관되게 일어난다면 벌써 헤어졌겠지요. 반대로 항상 연민만 일어나면 벌써 번뇌가 없어졌을 겁니다. 인연 따라 마음이 이렇게 되었다 저렇게 되었다 하는 것이 바로 중생심입니다.

이것은 남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남편 걱정하지 말고 질문자나 잘하면 좋겠어요.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자신의 마음이나 잘 관찰하고 단속을 잘해라’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일한 마음이란 것은 마음이 항상 똑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이란 이렇게도 일어나고 저렇게도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관심무상’이라고 합니다. 마음이란 것은 늘 죽 끓듯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일어나든 저렇게 마음이 일어나든 거기에 별 의미를 안 둔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럴 때 마음이 ‘일심’이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좋아하는 그 마음이 계속 쭉 유지되는 것이 일심이 아닙니다.

마음이란 원래 경계 따라 늘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든 저렇든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란 원래 무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이렇게도 일어나고 저렇게도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마음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의 마음을 ‘일심’이라고 이름 붙인 겁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해가 지면서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스님은 순례단이 혹시 감기에 걸릴까 우려하여 일찍 법문을 마쳤습니다.

쉬라바스티에서의 첫날이 저물었습니다. 내일은 앙굴리말라 스투파, 수닷타장자 스투파, 기원정사를 순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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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75

0/200

드림하이

이것은 남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남편 걱정하지 말고 질문자나 잘하면 좋겠어요.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자신의 마음이나 잘 관찰하고 단속을 잘해라’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2024-03-26 14:30:53

급고독장자

이번 스님 법문이 유독 가슴에 와 닿네요. 감사합니다. 스님..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겠습니다.

2024-02-23 20:50:19

수행자

감사합니다 스님()

2024-02-11 14: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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