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1.28 인도성지순례 8일째, 카필라성
“여기가 부처님이 29년 동안 자란 카필라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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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도와 네팔 국경을 넘어 부처님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카필라성을 순례했습니다.

500명의 순례단이 인도와 네팔 국경을 통과하는 것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돌발 상황이라도 발생하면 국경을 넘는 시간을 예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순례단은 새벽 3시에 쿠시나가르를 출발해서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안개가 워낙 자욱해 1시간 늦게 6시 50분경에 네팔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국경 비자센터에는 주인도 한국대사관에서 강영우 비자 영사님과 장용준 실장님이 순례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00명의 순례단의 국경 통과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 어젯밤에 비행기를 타고 이곳 인도와 네팔 국경 센터까지 왔습니다.

“일찍 나오셨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국경 비자센터는 순례단이 도착하자마자 비자 관련 업무를 처리해 주었습니다. 영사님과 실무관님이 비자 수속 업무가 신속하게 진행되도록 인도인 센터 직원들과 사전에 소통을 해주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국경 통과 작업이 빠르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1시간 30분 만에 버스 4대가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인도 국경 통과 작업이 완료된 사람들과 다시 네팔 국경 수속을 밟은 뒤 10시에 랑그람으로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버스 수속 절차가 늦어졌습니다. 결국 차량 수속까지 2시간을 더 기다려서 오전 10시 30분이 되어서야 랑그람으로 출발했습니다. 30분 정도 이동하여 랑그람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천천히 랑그람을 한 바퀴 돌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랑그람 진신사리탑터를 향해 삼배로 인사를 하고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랑그람까지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현재 네팔 땅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인도에 크고 작은 나라가 300개 정도 있었습니다. 마가다국이나 코살라국처럼 절대 왕정이 수립된 제국의 형태도 있었고, 아직 왕족들의 연합체 같은 공화제 형태도 있었고, 도시국가처럼 작은 규모의 국가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종족들이 세운 나라가 많이 있는 가운데 석가족과 꼴리족은 결혼 동맹관계였습니다.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 부처님의 양모 마하파자파티, 부처님의 부인 야소다라 모두 꼴리족 출신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유골을 서로 가져가겠다고 하여 사리를 8등분 했습니다. 그중에 석가족도 한 부분을 가져오고, 꼴리족도 한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이 있는 지역의 이름은 ‘삐쁘라하와’입니다. 그래서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이라 하고, 거기서 나온 유골은 현재 델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꼴리족이 세운 탑이 바로 이 탑인데, 이 지역의 이름은 ‘랑그람’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랑그람 진신사리탑’이라고 합니다.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겠습니다.”


명상 후 스님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석가족의 나라는 카필라바스투이고, 꼴리족의 나라는 데바다하입니다. 카필라바스투와 데바다하 사이를 흐르는 강이 로히니 강입니다. 어느 해는 가뭄이 심하게 들어서 로히니 강의 물줄기가 작아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양쪽의 곡식이 마르기 시작했어요. 농부들은 농번기에 물이 마르면 가슴이 탑니다. 농촌의 순한 농민들도 물이 마르면 서로 제 논에 물을 대려고 사나워져요. 꼴리족과 석가족도 서로 물을 쓰려고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로히니 강변으로 나와서 서로 돌을 던지면서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양쪽에서 자기 국민을 보호한다고 전쟁까지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부처님이 싸움하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부처님이 오셔서 두 나라의 군대 장군을 불러서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의 피가 귀합니까? 물이 귀합니까?’
‘사람의 피가 더 귀합니다’
‘피가 물보다 중요한데 왜 물을 가지고 싸워서 피를 물처럼 흘리려고 합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해서 싸움을 중재했다는 경전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요즘 일어나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같은 국제분쟁이 이 사례와 비슷합니다. 결국은 작은 이익이나 감정적 싸움이 엄청난 살상 행위와 파괴를 불러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행위를 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어리석음을 자각하면 좋겠습니다. 가는 길에 로히니 강을 지나게 될 텐데 차 안에서 보고 카필라성으로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창 밖의 로히니강을 지나 카필라성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동쪽 문이 보이는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여러분들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카필라성입니다. 카필라성의 마야 부인이 아기를 가진 후 산달이 되어 낳을 때가 됐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친정에 가서 아기를 낳는 풍속이 있었어요. 그래서 마야부인은 이 성의 동문 쪽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동쪽으로 가면 꼴리족의 고향인 데바다하에 이르게 됩니다. 마야 부인이 저 문을 나서서 고향까지 가는 딱 중간쯤이었는데 그때 시간이 정오쯤 되었어요. 가령 아침 6시에 출발해서 저녁 6시에 도착한다고 하면 정오 즈음에 도착한 곳에 아름다운 숲이 있었는데 그 숲의 이름이 룸비니였습니다.

그 숲에 ‘아쇼카 트리’라고 하는 나무에 꽃이 아주 탐스럽게 피어 있어서 마야 부인은 ‘가마를 세워라. 꽃구경 좀 하고 가자’라고 했고 그렇게 꽃구경을 하는데 산기를 느꼈다고 합니다. 경전에는 ‘오른손을 들어서 아름답고 탐스러운 꽃가지를 하나 잡았는데 갑자기 산기를 느꼈고 그때 아기가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인도의 신화에 따르면 부처님이 왕족 출신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친정으로 가다가 중간에 길에서 아기가 태어났으니 다시 카필라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처님이 29년 동안 자란 카필라성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부처님이 이곳 카필라성에서 29년을 살았는데도 이곳은 성지가 되지 못하고, 룸비니에서는 잠시 태어나기만 했는데도 그곳은 성지가 됐어요. 왜냐하면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곳 카필라성에서 부처님의 어린 시절에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 하는 부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왕궁에서 자랐으니까 어려서부터 부러울 것 없이 자랐습니다. 어릴 때 두 분의 스승이 있었는데, 한 분에게서는 주로 왕이 될 사람으로서 익혀야 할 활쏘기, 무술, 전술 등 제왕학을 배웠습니다. 다른 한 분에게서는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이나 음악, 예술 등을 배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할 정도로 아주 똑똑했다고 합니다. 촉망받는 젊은이로 성장하다가 나이 12살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전통은 어릴 때는 스승 밑에서 배우고, 12세가 되면 직업이 세습이 되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배웁니다. 예를 들어 장사꾼의 자식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장사를 배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족이니까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세상을 통치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인도에서는 통상 30살이 되면 그 지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숲 속에 가서 수행을 합니다. 그리고 45세가 되면 아예 집을 나와 유행하고 걸식하고 다니면서 집착 없이 삽니다. 이렇게 네 단계로 인생의 길을 나누었다고 해요. 여기 오신 분들도 대부분 45살이 넘었죠. 그러니 모두 집을 나와야 됩니다. (웃음)

처음으로 세상의 모습을 본 싯다르타

싯다르타가 12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궁 밖에 나가서 농경제에 참석하게 됩니다. 농경제는 왕이 쟁기로 첫 밭갈이를 하며 그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왕은 금쟁기로, 신하들은 은쟁기로, 백성들은 쇠쟁기로 일제히 밭을 갈았습니다. 아버지인 정반왕은 아들인 싯다르타가 자신의 권위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의기양양해졌습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오히려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얼굴이 고통에 가득 차 있고, 몸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고, 햇볕에 새카맣게 그을려서 흙투성이가 된 몸으로 밭갈이를 하는 농부의 모습에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고통스럽고 가난하게 살게 되었습니까?’

농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생산한 곡식을 국가에서 세금으로 모두 걷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싯다르타는 왕궁에서 자신이 누리는 풍요로움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닌 농부들에 대한 착취와 고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다 함께 행복해지는 길은 없을까?

그런데 그 농부가 밭을 갈기 위해 밭 가는 소를 막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을 겪는 농부가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소를 모는데, 소는 입에 거품을 물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쟁기가 땅을 뒤집자 흙 속에 있던 벌레들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날아와 벌레를 쪼아 먹었습니다. 그때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하며, 왜 하나가 편리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불편해야 하며, 왜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괴로워해야 하는가? 함께 살고 함께 행복해지는 길은 없을까?’

싯다르타는 지금까지 스승들에게 수많은 학문을 배웠지만, 항상 승리하는 방식에 관한 기술과 방법만 배웠을 뿐 어떻게 하면 함께 살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지에 관한 가르침은 배울 수 없었습니다. 이런 큰 의문이 생겨서 나무 밑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왕은 싯다르타가 파종식을 거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행사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싯다르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싯다르타를 찾던 정반왕은 한 그루 나무 밑에 앉아서 명상하는 싯다르타 태자를 발견하고 그 모습이 존경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절을 했다고 합니다. 싯다르타는 궁으로 돌아온 후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늘 고심하는 모습으로 생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왜 그러냐?’ 물으니, 싯다르타는 ‘하나가 살기 위해서 하나가 죽어야 되는데, 같이 사는 길은 없는지요?’ 하고 되묻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아버지도 아무런 대답을 못했고, 스승도 아무런 대답을 못했습니다. 누구도 대답을 못해주니까 싯다르타는 혼자서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어요.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아시타 선인의 예언이 생각났어요.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아이가 계속 명상을 하니까 이 아이가 출가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세상의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제공해 줍니다. 무도회도 열어주고, 아름다운 시녀도 많이 붙여주고, 그래도 안 되니까 결혼도 시켜주고, 그래도 안 되니까 한 지역을 떼서 다스리라고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잠시 관심을 가지다가 다시 명상에 들었습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고뇌를 가중시킨 것이 ‘사문유관(四門遊觀)’입니다. 동쪽 문으로 나갔을 때 늙은이를 보았습니다. 늙은이를 처음 봤을 리는 없잖아요. 그런데 노예들은 늙으면 쓸모가 없으니 거리에 버려집니다. 거리의 늙은 노예들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초라하게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병든 이도 버려졌습니다. 노예의 시신은 아무 곳에나 쓰레기 버리듯이 버려졌습니다. 부처님이 경험한 사문유관은 인생이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추상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인구의 90퍼센트가 노예였던 상황을 고려하면 사문유관은 인간의 고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늙어도 보호받지 못하고, 병들어도 보호받지 못하고, 죽은 시신마저도 거둬지지 않는, 그런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고뇌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북쪽 문으로 나가서 수행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수행자는 행색이 매우 초라했지만 눈은 별빛처럼 반짝여서 부처님이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 수행자와의 문답을 통해서 부처님이 찾는 ‘모두가 같이 사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가를 결심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출가를 할 수 없었습니다. 10년에 걸쳐 여러 번 청하고 여러 번 거절을 당합니다.

그러다 29살 때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붓다는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더욱 출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여겨 출가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인도의 당시 문화를 고려하면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출가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도에서는 아들이 없으면 상속이 안 됩니다. 그러나 갓난 아기여도 아들이면 상속권을 가지므로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 부모가 출가하려는 아들을 붙들고 사정하며 ‘출가하기 전에 아들이라도 낳고 가라’ 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부처님도 아들이 태어난 일이 오히려 계기가 되어 출가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체중생을 구제할 방법을 얻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이렇게 부처님은 출가를 할 때 동문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부처님은 ‘내가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 법을 얻기 전에는, 차라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지언정, 극약을 먹고 죽을지언정,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고 결심을 했다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붙잡으러 올 수 있어서 일곱 나라를 지나고 아노마강이라는 큰 강을 건넌 후에야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출가합니다. 부처님은 세속에 있을 때 많은 하인이 있었는데 이때는 마부 한 명만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 마부에게 아버지께 돌아가서 나의 출가를 전하라고 하니, 마부는 주인을 버리고 가면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태자의 징표인 머리의 보석을 빼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아버지께 가서 ‘나는 자발적으로 출가했습니다. 누구의 꼬임에 빠진 것이 아니고 쾌락을 얻기 위해 출가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도를 얻으면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도 다 구제할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면서 마부를 돌려보냅니다. 여기서부터 싯다르타의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됩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이곳 카필라성은 부처님이 29년을 살았고, 젊은 시절에 많은 고뇌와 번민을 했던 곳입니다. 부처님의 청년기를 생각하면서 잠시 명상하겠습니다.”


명상 후 사문유관의 내용을 담은 ‘출가의 노래’를 다 같이 불렀습니다.

동쪽문 나갔을 적에 늙은 자 모습 보았네
세월이 흘러간 뒤에 그의 환영 보는 것 같아

남쪽문 나갔을 적에 병든 자 모습 보았네
괴로움 견디지 못해 신음하는 모습 보았네
허무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명상 속에 번민하셨네

서쪽문 나갔을 적에 죽은 자 모습 보았네
육체에 영혼이 떠난 제일 슬픈 이별 보았네
허무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명상 속에 번민하셨네

북쪽문 나갔을 적에 구도자 모습 보았네
남루한 옷차림 속에 눈빛만은 총명하였네
반가운 마음 깨달은 마음 출가의 길 결심하셨네

(중략)

노래의 뜻이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전달이 되었을까 해서 스님이 물었습니다.

“가사의 뜻을 통역해 주었나요? 어때요? 가사가 좋습니까?”

“네, 좋습니다.”

“그러면 출가하겠습니까?”

다 같이 박장대소하며 웃었습니다. 순례단은 카필라성 동쪽 문으로 나가서 넓은 들판을 따라 쭉 걸어 차를 타고 오늘 마지막 순례지인 쿠단으로 이동했습니다.

순례단은 천천히 탑돌이를 하며 두 탑 사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큰 탑을 향해 삼배를 한 후 스님의 안내가 시작되었습니다.

“쿠단은 부처님이 성도한 후에 다시 카필라성으로 돌아왔을 때 석가족 가족들과 만난 장소를 기념하는 장소입니다. 큰 탑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이고, 그 옆의 작은 탑은 부처님의 아버지를 상징하고, 그 사이의 작은 탑은 부처님의 어머니와 아들을 상징합니다.

가족들 중에 제일 깨닫기 어려운 사람이 정반왕이었어요. 부처님의 어머니와 부인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했는데, 정반왕은 늘 부처님을 아들로만 봤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가족에게는 전법을 하기가 어려워요.” (웃음)

스님은 부처님의 가족 일화를 한참 들려주고, 안내를 마치면서 다음날 일정을 안내했습니다.

“내일은 차에 타면 세 시간 정도 이동해서 탄센으로 이동합니다.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산악 지역입니다. 올라갈 때는 모르지만 내려올 때는 절벽 낭떠러지라서 아찔합니다. 설산이 보일지는 모르겠어요. 날이 맑아서 보이면 보고, 안 보이면 말지요. (웃음)

산 위로 올라가면 구름 위로 올라가니 날씨는 맑을 거예요. 며칠 계속 안갯속을 다니고 있는데 내일은 맑은 기운을 받아봅시다. 천천히 둘러보고 차에 탑승하기 바랍니다.”

순례단은 숙소로 이동해서 저녁 공양을 한 후 대성석가사에서 저녁 예불을 했습니다.

내일은 일찍 탄센으로 이동해서 부처님이 보고 자랐다는 설산을 보고, 오후에는 룸비니를 순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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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이곳 카필라성은 부처님이 29년을 살았고, 젊은 시절에 많은 고뇌와 번민을 했던 곳입니다. 부처님의 청년기를 생각하면서 잠시 명상하겠습니다.”

2024-03-26 12:46:55

진달래

오늘도 감사합니다.()

2024-02-06 11:02:10

바람

어리석음을 경계하며 살겠습니다.

2024-02-03 07: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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