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 수행과 실천
  • 스님의하루

2014.9.11 세계 100회 강연(17) 덴마크 코펜하겐

▲ 덴마크 코펜하겐의 명소 뉘하운. 배가 다니는 운하인데 주위의 파스텔톤 색상의 집들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열일곱번째 강연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날입니다.nbsp노르웨이 오슬로의 유스호스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 5시에 호스텔 지하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6시에 오슬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공항에서의 대기 시간이 길었는데, 스님께서는 명상을 하시면서 대기 시간을 보내셨습니다.nbsp9시5분에 노르웨이 오슬로를 출발하여 10시20분에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했습니다.nbsp▲ 북유럽에 강연을 다니면서 스님 일행이 이용하고 있는 최저가 항공 ‘노르웨이 항공’.nbsp공항에는 이번 강연 담당자인 임미숙님과 오늘 유적지 안내를 해주실 오대환 목사님이 마중을 함께 나와주셨습니다.nbsp▲ 덴마크 코펜하겐 강연 담당을 맡아주신 임미숙님과 유적지 안내를 해주신 오대환 목사님▲ 덴마크 코펜하겐은 자전거 도시란 것을 실감할 정도로 곳곳에 자전거가 많았습니다.공항에서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들어가 한인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 스님께서는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세요” 라고 목사님께 nbsp식사 기도를 청하니 목사님께서는 우렁찬 목소리로 기독교식 예배를 해주셨습니다. 목사님은 평소 스님의 유튜브 즉문즉설을 들으며 많은 배움이 있었고, 최근에는 새로운 100년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스님께서 이곳 덴마크를 방문해주심을 무척 감사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 내내 코펜하겐의 주요 유적지를 안내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덴마크에 오신지 24년이나 되신 분입니다. nbsp덴마크는 도시가 작아서 걸어서 모든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목사님과 함께 덴마크의 역사와 현재 상황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며 걸으셨습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시청 앞 광장에 있는 안데르센 동상입니다. 안데르센은 미운오리새끼, 인어공주, 벌거숭이 임금님, 성냥팔이 소녀 등 주옥같은 동화작품들을 저술해 전세계 어린이들을 기쁘게 한 덴마크의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의 동상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nbsp▲ 안데르센 동상도심 한복판을 걷다가 큰 교회 앞에 도착했습니다. 교회가 크고 웅장해서 덴마크의 교회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요금을 지불하고 들어가 보았습니다. 4층까지 올라갔지만 예배당은 없고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을 해서 전시회만 열리고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와 보니 교회 외벽에 “Im not a church 라고 크게 현수막이 걸려 있어, 스님께서도 크게 웃으셨습니다.nbsp▲ 스님을 웃게 한 교회 앞에 적힌nbsp“Im not a church 문구.nbsp아마 많은 여행객들이 비슷한 오해를 많이 했나 봅니다. 대부분의 교회나 성당이 종교의 본연의 역할보다는 관광 또는 숙박업을 위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곳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nbsp계속 걸으니 배가 들어오는 뉘하운 운하에 도착했습니다. 운하의 양쪽에는 파스텔톤 색상의 각양각색의 집들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상점 앞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시식을 할 수 있게 호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이런 풍경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스님께서도 “정겹네” 하시며 웃으셨습니다.nbsp▲ 뉘하운 운하nbsp뉘하운 운하를 지나니 바닷가 부두가 나왔습니다. 건너편에는 웅장한 오페라하우스가 보였는데, 오슬로에서 본 오페라하우스가 생각나면서 서로 더 웅장해 보이려고 경쟁을 하는 둣해 보였습니다. nbsp수변 지구를 따라 조금 더 걸으니 광장을 둘러싼 네 채의 화려한 저택들로 이루어진 아말리엔보르 궁이 나타났습니다. 이 궁전은 크리스천보궁의 화재로 1794년 이래 왕실 처소로 이용되어 온 곳인데, 지금도 여왕 가족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고, 행사 때는 2층 테라스에 여왕 마르그레테 2세가 나와서 손을 흔드는데 많은 덴마크인들이 운집한다고 합니다.nbspnbsp▲ 덴마크의 여왕이 살고 있는 아말리엔보르 궁.nbsp이곳은 덴마크의 유명한 명소라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많이 있었는데, 스님을 알아보고는 많은 분들이 같이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 했습니다.nbsp▲ 스님을 알아보고는 너무나 반가워하는 한국인 관광객들.nbsp아말리엔보르 궁 앞의 광장을 지나 프로데릭스 거리를 따라 내륙으로 가니 화려한 프로데릭스 교회가 나타났습니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을 본 딴 듯한 웅장한 돔을 가진 이 교회는 ‘대리석 교회’ 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라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교회 안에 앉아 잠시 기도를 하고 나오셨습니다nbsp▲ 프로데릭스 교회nbspnbsp교회를 나와 계속 걸어 카스테릭 요새에 도착했습니다. 이 요새는 별 모양의 성벽과 해자로 이루어져 무척 독특했습니다.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산책을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nbsp요새의 성벽을 따로 조금 더 걸으니 덴마크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인 인어 공주 조각상이 나왔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의 이 조각상은 그 유명세와는 달리 무척 외소해 보였습니다.nbsp오대환 목사님은 덴마크의 교민 현황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덴마크에는 현재 약 300여명의 교민들이 살고 있는데, 과거에 낙농업을 배우러 왔거나 국제 결혼을 통해 정착하신 분이 많고,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정착하신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입양되어 온 분들도 많은데 덴마크에서만 대략 8500명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nbsp교민 수가 300여명 된다고 하니, 과연 오늘 강연에 몇 명이나 올지 걱정도 조금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연을 담당한 임미숙 보살님은 50명은 올 것이라며 자신있게 말해서 스님께서도 웃으셨습니다. nbspnbsp요새를 모두 둘러본 후, 시내로 나와 버스를 타고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인 헬러럽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nbsp교회에 도착해서 강연 준비는 스텝들을 포함하여 스님까지 나서서 모두 함께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봉사자들이 의자를 아무렇게 놓는 것을 보시곤 뒷사람의 시야가 앞사람의 머리에 가리지 않도록 배려하시며 정성껏 의자를 다시 배치하셨습니다. nbsp저녁 6시, 강연 시간이 되자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20명 정도 올까 예상했는데 65명이나 와서 빈자리 없이 자리를 빼곡이 채웠습니다. 그동안 한인 행사를 오랫동안 해왔지만 30명 모이기가 힘들었는데, 덴마크 교민사회에서 스님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nbsp▲ 덴마크 코펜하겐 강연이 열린 Hellerup 교회 강당.nbsp오늘 강연에는 특히 스웨덴 남부 지방에 사시는 분들이 많이 참석하였습니다. 그저께 스웨덴 스톡홀름 강연이 있었는데, 스톡홀름 보다 코펜하겐이 거리가 가까워서 오늘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nbspnbsp스님께서는 오늘 북유럽 4개국 강연을 마무리하시면서, 이렇게 여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nbsp“북유럽 하면 살기 좋은 곳이잖아요? 살기 좋은 곳에 살면서 힘들면 본인도 힘들지만 우리 인류 전체에도 희망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살기 힘들면 북유럽에 가면 좋아지지 않겠느냐 생각하는데, 막상 여기 와보니 여기 있는 사람들도 괴롭다 하면 nbsp우리 인류에게 희망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괴로우면 자기 문제를 넘어서서 nbsp인류를 절망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이에요.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이 있거나, 괴롭거나 힘든 게 있으면 같이 대화를 나눠봅시다.”오늘 강연에는 총 7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결혼 후 성격 차이로 남편과 많은 갈등을 겪고 도망치듯이 덴마크로 유학을 왔는데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지 묻는 분, 한국 사회는 왜 덴마크 사회만큼 행복하지 못한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습니다.nbsp그 중에서 해외에 살다보니 통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는데, 스님께 언제쯤 통일이 될 것이라 보는지 묻는 분의 질문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저는 나름대로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살고 있는데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항상 남이냐 북이냐 하고 묻습니다. 이곳에 이주하고 나서 통일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보실 때 과연 통일은 언제 될 것이며, 통일은 과연 될 것인지, 된다면 어떤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시부모님이 통일에 대해 자주 물어보시는데 제가 답변을 항상 못하고 있습니다.”“모르면 모른다고 답하면 되지요. 모르면서 아는 척 하려고 하니까 머리가 아픈 것이지요. 통일이 언제 될 것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통일은 될 것입니다” 라는 것은 말할 수가 있지요.nbsp그리고, 통일이 언제 될 것인지 묻는 질문은 외부 사람들은 그렇게 물을 수 있지만, 한국인들이 언제 될 것이지 묻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통일이 되도록 하면 통일이 될 것이고, 통일이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언제 될 거냐고 묻기만 할까요? 통일을 누가 할 겁니까? 왜 자기는 빠져 버리고 누가 대신해 주는 것처럼 말하나요? 통일이 언제 될 것이냐는 질문은 옳지 않습니다.nbsp통일 하는 것이 좋은가, 통일 안 하는 것이 좋은가,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막연히 ‘통일 하는 게 좋다’ 그렇게 생각하면 통일을 위한 노력을 하나도 안하게 됩니다. 통일이 되면 좋다 하지만 통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아무도 노력을 안 한다면 그것은 그냥 뜬구름 잡는 얘기에 불과합니다.nbsp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가 먼저 잡혀야 하고, 그 다음에 그런 통일을 하려면 어떤 문제가 예상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살펴나가야 합니다. 현재 객관적인 조건은 예전에 비해서 우리가 통일을 하겠다고만 한다면 통일을 하기에 유리한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 관계가 조금 유동적이 되었습니다. 유동적이 되었다는 말은 불안정해졌다는 것인데, 불안정해지면 넘어질 수도 있지만 속도를 빨리 낼 수도 있습니다. 유동적이 되었기 때문에 통일을 하려면 하는 쪽으로 더 쉽게 갈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버려두면 통일이 어려운 쪽으로 기울 수도 있습니다. 독일도 통일할 때는 그동안 있었던 양대 세력 사이에 균형이 깨어지면서 유동적이 되니까 그 기회를 잡아서 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한반도도 중국의 부상에 따라 힘의 균형이 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반도의 상황을 통일에 유리하도록 활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는 문제입니다.nbsp외부 상황은 좋아졌지만 실제로 통일을 하려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니까 통일의 주도 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통일의 주도 세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역사적으로 가장 나빠졌다고 볼 수 있어요. 통일을 주도할 세력이 없어졌습니다. 1960년대까지는 북한이라는 집단 전체가 통일에 목을 걸 정도로 주도 세력이 있었어요. 남한에서도 이것에 동조를 하면서 통일을 주장하는 일부 세력이 있었고요. 그런데 북한이 사회경제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남북 중에 어느 한쪽이 전 민족적 관점에서 어떻게 통일을 할 것이냐 고민하는 세력이 없어져버렸어요. 남한은 분단 초기에 북한보다 열세였기 때문에 전 민족적인 관점에서 통일을 다루기에는 역량이 작았고 남한의 체제를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이냐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한 안에 있는 통일지지 세력들은 남한 정부와 갈등 관계를 유지했던 것입니다.nbsp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이 사회경제적으로 붕괴되면서 지배세력들의 고민이 점점 체제 유지에만 집중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니 북한도 이제 통일 주도 세력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희망을 걸고 북한을 긍정적으로 보던 남한 안의 세력들도 북한의 체제가 쇠퇴하면서 같이 몰락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남한 안에도 통일 주도 세력이 없게 되었습니다.nbsp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남한의 발전을 넘어서서 북한까지 포함한 전 민족적인 관점에서 한반도를 발전시키겠다고 하는 지도자가 남한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남한의 지도자들은 오랜 역사 경험에서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안 해봤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북한은 지금 자기체제 방어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이고요. 민족 전체적으로 통일을 주도할 만한 세력이 없습니다. 외부 환경은 좋아졌는데 주체 세력은 미비한 이것이 지금 현재 우리 민족이 처한 형국입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과거와는 다른 개념에서 남한 안에 통일을 지향하는 세력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합니다.nbsp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가 남한 출신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남북 양측의 정치경제 시스템과 다양한 측면을 비교했을 때, 남한도 아직 부족한 것이 있고 북한에도 긍정적인 요소가 있지만, 북한 중심으로 통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해결책은 남한의 체제 시스템을 기본으로 깔고 이것을 조금 더 개선해서 통일의 중심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방법이 옳아서가 아니라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이죠. 통일 안하겠다면 모르지만 통일 하겠다고 할 때는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더 있겠느냐 싶어요.nbsp50년대의 적화통일 방식도 안 되고, 70년대의 남북 연방제 방식도 현실적으로 되기가 어렵고, 결국은 남한이 중심이 되어서 통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현재 남한의 상태로는 통일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통일 국가의 모델로서 현재 남한은 적절치 않습니다. 통일의 모델이 될 수 있게 현재의 남한을 바꿔야 합니다. 남한 사회를 위해서도 그렇고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nbsp두 번째, 북한 입장에서는 이 안을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북한을 해체하고 흡수통일 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처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이런 우려를 힘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포용해 주어야 합니다. 북한 내부를 분석해보면 3개의 계층으로 나눠집니다.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일반 주민들에게는 생존권을 보장해 줘야 하고, 생존권을 보장해 주려면 인도적 지원을 확대해야 합니다. 먹고는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인 중간층에게는 남북 간 경제협력이 되어서 통일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중국 제품 보다는 남한 제품이 훨씬 좋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통일의 중심 역할을 남한이 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는데 지장이 없는 상류층에게는 통일이 된 뒤의 신분 보장을 해주어야 합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체제 보장을 해주던지,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는다는 신분보장을 약속해 주던지 해서 이들이 통일 지향적인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적어도 이런 과감한 정책을 취해야 통일이 가능합니다.nbsp결국 주도하는 사람이 양보를 해야 합니다. 힘이 강한 사람이 양보하면 포용이라고 말하고, 힘이 약한 사람이 양보하면 굴복이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니 지금은 남한이 북한을 포용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북한 주민들과 지배세력들의 두려움이 없어지고 합의점도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현재 남한 정부의 정책은 무릎 꿇고 빌면 지원하겠다고 하니 한발도 못나가는 것입니다. 대화에는 전제 조건이 있으면 안 됩니다. 사과하면 대화한다, 이런 자세로는 안 됩니다. 대화를 먼저 시작하고 나서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과를 해야 테이블에 앉겠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런 것들이 남북 간에 가로 놓여 있고, 이것을 둘러싼 국제 정세도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nbsp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자국 힘만으로는 어려우니까 일본을 재무장시켜서 역할분담을 하려고 하는데 한국을 그 밑에 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재무장한 일본 nbsp밑에 붙으려고 하지 않죠. 한미일 삼각 군사협력을 하자는 것이 미국의 요구인데, 한국은 일본과 함께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이 일본과 군사 협력하는 것이 중국에 대한 적대행위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미국이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중국과 갈등이 생기고, 이걸 안 받아들이면 미국과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굉장히 딜레마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균형 있게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미국이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협력할 것은 협력하되 국가 이익을 위해 무조건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nbsp그런 면에서 이런 세력 변화 앞에서 통일 없이 미중 사이에 균형을 잡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한국은 미일 동맹체제로 편입되고, 북한은 현재까지는 잘 버티지만 내부에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 중국의 체제 아래로 편입되면, 미중의 갈등 구조 속에 남북이 강대국의 하위 변수로 편재되어 지난 100년과 같은 고통을 또다시 보내야 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nbsp그런 고통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거대한 중국 세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중국과 등지지도 않는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이냐. 거기에는 미국의 힘도 필요하고 일본의 힘도 필요합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에는 반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과 싸우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일본과 싸우면 앞으로 한국이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철저하게 반대하고, 그것을 일본 국민과 함께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일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도 일본의 군국주의를 반대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 협력을 하되 중국의 패권주의를 반대해야지 중국을 반대하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을 반대할 것이 아니라 미국의 군수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반대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미국의 평화주의자들과 미국의 양심적인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미국의 정책을 바꿀 수 있지 우리의 힘만으로는 미국의 정책을 바꾸기는 매우 어렵습니다.nbsp그런 면에서 유럽과의 협력이 돌파구를 열고 균형을 조금 깨어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여러분들에게 해준 것은 없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태어난 국가를 위해 국가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데 여러분들이 기여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일제시대 때 만주로 쫓겨나 힘들게 살았지만 그분들은 오히려 독립운동까지 하면서 희생을 치뤘잖아요. 사실은 국가가 그분들에게 해준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분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희생을 치뤘고, 그래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처럼 여러분들이 해외에 나와서도 정부나 국가가 해준 것이 없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고 이것을 극복하는데 기여를 해주셨으면 해요. 이번 유럽 강연을 하면서 국적을 바꿔버리고 싶다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는데 이것은 도피적인 사고입니다. 한국 안에서 한국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 못하면 내가 고국에 들어가서라도 해결을 해야 겠다 이렇게 보따리 싸서 들어올 생각을 해야지 도망갈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들어오지는 못하더라도 여기서라도 한국이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도록 댓글을 하나 달든, 편지를 하나 쓰든, 모금을 하든, 뭔가 한국이 긍정적으로 바뀌도록 노력해 주었으면 합니다.nbsp남북 간의 갈등에 너무 한쪽 편에 편들지 마시고, 여기서는 북한까지도 이해하면서 어떻게 지금 북한 주민들의 어려움에 우리들이 기여할 수 있느냐, 우선 인도적 지원 문제부터라도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셨으면 합니다.”해외에 사시는 많은 교민들의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오늘 스님 답변을 들으면서 균형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모두들 스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공감했습니다.nbsp마이크 시설이 옆 공간과 공용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어 마이크 사용을 하지 못하고 소형 마이크를 사용하다보니, 스님께서 목소리를 많이 높여야 했습니다. 목이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스님께서는 2시간 30분 동안 열정적으로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강연을 마치고 많은 분들이 스님께 찾아와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nbsp오늘 강연은 덴마크 한인여성회 모임에서 주축이 되어 준비해 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실무를 맡으신 임미숙 보살님을 비롯한 여성회 모임 분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단주를 선물했습니다.nbsp▲ 오늘 강연을 위해 자원봉사 해주신 덴마크 한인여성회 모임책 사인회를 하며 참석한 한분 한분과 인사를 나눈 후, 오늘 숙소인 박혜정 법우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박혜정 법우님은 한국에서 깨달음의장을 하고 수련 바라지 봉사와 희망세상 강연 봉사를 통해 정토회와 인연이 깊은 분입니다. 덴마크에 와서 정착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한참 적응해 가고 있는 시기인데, 오늘 스님 일행을 흔쾌히 받아 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하룻밤 재워준 박혜정 법우님에게 금강경 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nbsp▲ 덴마크에서 하룻밤 머물고 갈 수 있게 해준 박혜정 법우님.nbsp이곳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은 독일 함부르크로 이동합니다. 내일은 기차 타고 배를 타고 바다를 넘어 독일로 넘어가서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nbsp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지난 날짜 소식 보기

2014.09.12. 48,280 읽음 댓글 39개

2014.9.10 세계 100회 강연(16) 노르웨이 오슬로

▲ 오슬로의 오페라하우스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열여섯번째 강연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리는 날입니다.nbsp스웨덴 스톡홀름의 김태자 선생님 댁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새벽5시에 콜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6시반에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밟는 동안 스님께서는 원고 교정 업무를 보셨고, 출국 수속을 마친 후 어제와 그제 이동 중에 남은 빵과 약밥으로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였습니다. nbsp nbspnbsp▲ 노르웨이로 넘어가는 비행기 안아침8시35분에 스웨덴 스톡홀름을 출발하여 9시30분에 노르웨이 오슬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오슬로에 거주하는 봉사자가 미리 예약해 준 콜택시를 타고 오슬로 도심으로 들어왔습니다. 조주형씨는 오슬로에서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분인데, 바쁜 와중에서도 혼자서 열심히 강연을 준비해주셨습니다.nbsp먼저 오늘 숙소로 사용할 호스텔에 도착하여 짐 보관실에 짐을 모두 내려놓고 곧바로 유적지를 둘러보러 도심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곳 노르웨이 오슬로에는 마중을 나오거나 유적지 안내를 해주실 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스텔에서 나눠주는 관광 지도에 의지하여 대표적인 nbsp한두 곳만 둘러보기로 하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nbsp먼저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케르후스 요새에 가보았습니다. 1049년 하랄 하르드라다가 설립한 오슬로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입니다. 1299년 동쪽 스웨덴의 침략에 대비해 호콘 5세가 이곳에 흙벽을 올려 요새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도시는 1624년에 불에 타 사라져버렸는데 이후 크리스티안 4세가 보다 방어하기 쉬운 자리에 벽돌과 바위로 다시 재건했다고 합니다. 나무가 줄지어 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 오르니 성벽 너머로 오슬로 도심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졌습니다. nbspnbsp▲ 아게르후스 요새에서 바라본 오슬로 도시 전경.nbsp아게르후스 요새에서 해안을 따라 걸으니 거대한 오페라하우스가 나타났습니다. 2008년 오픈한 이 오페라하우스는 건설하는데 약 5천억원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오슬로 앞바다에 빙하가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건물 전체를 하얀 대리석으로 덮었다고 합니다. 건물 외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비스듬한 외벽 때문에 독특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 오슬로의 오페라하우스nbsp오페라하우스에서 10분 정도를 걸어 다시 시내로 들어가 오슬로 대성당 안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성당 안에는 에마누엘 비겔란이 만든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천장벽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nbsp▲ 오슬로 대성당nbsp노르웨이는 1인당 국민소득이 8만불이 넘고 물가가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점심을 어떻게 먹을지 고민했는데, 마침 오슬로 대성당 앞에 버거킹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버거킹이 가장 저렴하지 않을까 해서 들어갔는데, 햄버거 메뉴 하나가 12000원이 넘었습니다. 한국에 비해 2배 가량 비쌌습니다. 그래도 식당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저렴하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햄버거로 점심을 해결하였습니다.nbsp오슬로 대성당을 지나 메인 스트리트인 카를 요한스 게이트에 접어드니 상점들이 늘어선 차 없는 거리가 나왔습니다. 일직선의 대로 맨 끝에 왕궁이 보였습니다.nbsp▲ 왕궁산책 겸 왕궁까지 걸어가 주변을 둘러본 후, 다시 해안가로 내려와 노벨평화센터 앞을 지났습니다. 노벨평화센터는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 노벨이 창시한 노벨상의 역사를 비롯해 1901년부터 현재까지의 수상자가 안내되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건물 안에 들어가보려고 했으나 입장료가 너무 비싸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사진만 한 장 남기고 돌아섰습니다.nbspnbsp▲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이 안내되어 있는 노벨평화센터.nbsp노벨평화센터 앞에는 시청사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이곳 오슬로 시청에서는 매년 12월 10일 노벨 평화상 시상식이 거행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벽돌탑이 있는 건물 외관만 보면 전형적인 정부기관 건물로 보였지만, 로비 안으로 들어가면 노르웨이의 역사와 신화가 그려져 있는 벽화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스님 일행은 로비 안으로는 들어가 보지 않고 외관만 보고 지나쳤습니다.nbsp▲ 매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거행되는 오슬로 시청.nbsp오후3시 무렵, 다시 숙소인 호스텔로 돌아왔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이동과 강연 일정으로 스텝진들도 모두 피로가 누적되어 있어서, 오후5시까지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스텝진 모두 달콤하게 휴식을 가졌습니다. 오후7시부터 강연이 열리는 오슬로 문화센터 건물로 가서 강연 준비 담당자인 조주형씨를 만나 강연을 준비했습니다.nbsp▲ 노르웨이 오슬로 강연이 열린 문화센터, Litteraturhusetnbsp오늘 노르웨이 오슬로 강연은 총 55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뤘습니다. 준비한 40개의 의자가 부족해 바닥에 앉은 분들도 10명이 넘을 정도로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노르웨이에는 아무런 인연이 없어서 사람들이 적게 올 줄 알고 자리를 적게 준비했다” 며 죄송한 마음을 전하면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nbspnbsp오늘 오슬로 강연에서는 총 7명이 스님께 질문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 현재를 살 수 있는지 묻는 분, 작년에 명상수련을 배웠는데 해외에서 스승도 없이 어떻게 명상을 해야 할지 묻는 분, 어떻게 살아야 좋고 싫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묻는 분, 아이가 수학을 잘못하고 자꾸 저항을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문뜩 문뜩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부모님이 건강관리를 소홀히 해서 답답한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직장도 갖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고 많은 것이 이뤄졌는데도 마음 속에는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고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습니다.nbsp그 중에서 해외에서 생활하며 문뜩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는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한국에서 20대와 30대를 보내면서는 직장생활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산다고 외로움을 못 느꼈습니다. 그런데 노르웨이에 와서 시간적으로 여유롭고 아이도 크고 하니까 문뜩 문뜩 외롭다는 느낌이 자주 듭니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형제가 있고 다 있지만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 지혜롭게 넘어가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nbsp“현대인을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하죠. 많은 사람과 몸을 부딪치고 사는데 고독하다, 결혼해서 남편과 살을 맞대고 사는데 고독하다 하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산속에서 혼자 살아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있지 않으면 외롭지가 않아요. 나무 하고도 대화하고 새 하고도 대화하고 자연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살을 섞고 살아도 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면 외롭습니다. 남편의 돌아선 등이 마치 성벽처럼 느껴집니다.nbsp한마디로 진단하면 질문자가 지금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잘못이 아니에요. 바쁜 남편이나 가족이 볼 때는 ‘호강에 받쳐서 요강을 깬다’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네요. 편하니까 쓸데없는 걱정을 다한다 이렇게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본인도 바쁘면 외로움을 못느껴요. 그런데 한가하면 느껴지게 되거든요. 눈 감고 명상을 하면 망념이 일어나는 증상과 같습니다. 보통 우리는 의지로 이것을 억압하기 때문에 자신이 굉장히 도덕적인 인간 같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이거나 꿈속에서는 억압된 심리가 그냥 일어나서 외간 남자도 만나게 됩니다. 그것처럼 심리가 억압이 되어 있어서 못 느겼는데 한가해지니까 이런 것이 나타나는 겁니다. 바쁘다는 것은 억압이 되어 있다는 것이거든요.nbsp그래서 자기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세요. 외롭다 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 그럴까요? 질문자가 ‘지금 좀 마음의 문을 닫고 있구나’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을 가던지 생활을 바쁘게 해서 덮으려고 하지 말고, 명상을 통해서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편안할 수 있게 해보세요. 제일 중요한 것은 ‘내 까르마가 외로워하고 있구나, 내가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고 있구나’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금 질문자는 자기 생각에 좀 빠져 있어요. 남편과 아이들과 편안하게 대화를 하는 것이 좀 필요해요. 꼭 불만이 있어서 마음을 닫고 있는 건 아니고, 질문자가 어릴 때 이런 심성이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의 심리적인 근저는 주로 어릴 때 형성됩니다. 엄마의 성격을 닮거나 아니면 어릴 때 자란 환경이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형성하고, 이것이 평생 삶의 심리적 근저에서 작동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첫째,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를 알아야 됩니다.nbsp둘째, 외로움이라는 것은 노르웨이에 와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남편이 잘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다만 내 까르마가 이렇게 형성되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어떻게 극복을 할 것이냐 이게 문제죠. 만약 기도를 한다면 이렇게 해야 되요. ‘저는 편안합니다’ 이렇게 자꾸 자기 암시를 주세요. 그러면 편안하다는 자기 암시와 편안하지 못한 자신의 현실 사이에서 늘 충돌이 일어날 거예요. 편안하다고 기도하는데 현실은 늘 편안하지 못하죠. 그래도 계속 절을 하면서 ‘감사합니다. 저는 편안합니다.’ 이렇게 자꾸 자기 암시를 끝없이 해보세요.”nbsp질문한 여성분은 스님 말씀대로 실천해볼 것을 다짐하면서 “감사합니다” 하며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강연을 마무리 하시면서 참석한 교민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강조하셨습니다.nbsp“여기 와서 ‘힘든다’ 이런 생각은 가급적 하지 마세요. 100년 전에 태어났으면 노르웨이를 구경이나 한번 해봤겠어요? 구경도 하기 힘든데, 나는 구경도 하고, 여기 와서 살아도 봤고, 결혼하신 분은 외국 남자와도 살아도 봤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고국에 돌아가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요. 항상 지금의 생활에 감사를 하면 심리가 안정이 되고 몸에서도 좋은 에너지와 호르몬이 분비가 되고 항상 얼굴이 밝고 기분이 상쾌해져요. 상쾌해지면 아이디어도 좋게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도 호감이 많이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는 일도 잘 됩니다. 장사를 하거나 회사에 근무하는 내 자세가 편안하고 즐겁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손님이 한명이라도 더 오게 됩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사시면 좋겠습니다.”좁은 공간에 바닥에 앉으신 분들도 많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된 분위기로 즐겁게 강연이 진행되었습니다. 모두들 강연을 듣고 나갈 때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책 사인회를 하며 참석자들 한분 한분과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봉사자들과의 단체 사진은 봉사자가 조주형씨 한분이여서 조촐하게 함께 찍었습니다.nbsp스텝진들은 뒷정리를 모두 마치고 촬영장비와 현수막 등 짐들을 들고 오슬로의 메인스트리트인 칼 요한 게이트를 20분 가량 걸어서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숙소인 호스텔에 도착하니 밤10시가 넘었습니다.nbsp강연 전에 연락받기를 오슬로에 사시는 이민아 보살님이 점심 식사 접대를 하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으나, 초대 받은 장소가 시내 외곽 지역에 있어서 다녀올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성의에 응하지 못했는데, 보살님께서 강연장으로 직접 오셔서 라면과 김치를 보시해 주셨습니다. 강연을 준비하느라 스텝들은 저녁을 먹지 못했는데, 호스텔 지하 식당에서 이민아 보살님이 보시해주신 라면과 김치로 맛있게 저녁을 늦은 시간에 먹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nbsp내일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세계 100회 강연 중 열일곱번째 강연이 열립니다. 덴마크로 넘어가서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지난 날짜 소식 보기

2014.09.12. 49,258 읽음 댓글 50개

2014.9.9 세계 100회 강연(15) 스웨덴 스톡홀름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열다섯번째 강연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날입니다.nbsp핀란드 헬싱키에서 최문기 거사님 댁에서 하룻밤을 잘 쉬고 새벽 5시에 공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헬싱키에서 오전 9시에 비행기를 타서 스웨덴 스톡홀름에 오전 9시5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헬싱키와 스톡홀름이 시차가 1시간 있으니까, 1시간 정도 걸린 셈입니다.nbsp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하니 윤사라씨와 김건씨가 스님 일행을 반갑게 마중나와 주셨습니다. 윤사라씨는 스웨덴에서 산지 20년이 되었는데, 한국에서 스웨덴으로 입양 온 아이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하는 분입니다. nbsp김건씨는 이번 스웨덴 강연 책임을 맡으신 분인데,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의료경제학자입니다. 스님 일행을 위해 오늘 하루 휴가를 내고 운전과 강연 준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nbsp우선 오늘 숙소로 사용할 예정인 김태자 보살님 댁에 가서 짐을 풀어놓기로 하였습니다. 김태자 보살님은 스웨덴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하고 계신 분인데 젊은 시절 이곳에 의학을 공부하러 왔다가 스웨덴인 남편을 만나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살님께서는 스님이 오신다고 갖가지 나물 반찬과 푸짐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 주셨습니다. 점심 식사를 감사히 먹고, 스웨덴 스톡홀름을 상징하는 몇몇 유적지를 둘러보러 나갔습니다.nbsp▲ 점심 식사와 저녁식사를 정성껏 준비해 주신 김태자, 마츠 선생님 부부nbsp오늘 유적지 안내는 정재욱씨가 해주셨습니다. 정재욱씨는 스웨덴에서 신도시 개발 및 독일자동차 디자인을 하고 있는 산업디자이너입니다. 스님 일행을 위해 스웨덴의 역사와 지리 등에 대해 풍부한 설명을 정성껏 해주었습니다. nbsp가장 먼저 들른 곳은 거대한 군함 바사호가 전시된 ‘바사 박물관’입니다. 1628년 8월 10일, 길이 69m 높이 48.8m에 달하는 대형 군함이 스웨덴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며 첫 항해에 나섰지만 몇분 후 침몰하면서 100여명의 탑승자들이 그대로 바닷속에 가라앉은 사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300년간 바닷 속에 잠겨 있던 배는 고고학자인 안데르스 프란센에 의해 발견되어 1961년이 되어서야 인양되었고, 1,4000 조각의 거대한 부품들이 퍼즐조각처럼 재조립되어 이곳 박물관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nbsp▲ 박물관에 복원된 바사호nbsp박물관에서 바사호의 침몰 원인에 대해서는 자세한 안내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스님께서는 “첫째,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배의 무게 중심이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데 잔돌을 채우지 않고 너무 큰 돌을 넣으면 사이사이에 구멍이 너무 많이 생겨서 예상보다 무게가 적게 나갈 수 있고, 둘째, 배의 가로 폭에 비해 높이가 너무 높아서 균형이 안 맞았던 것 같다” 하시며 침몰 원인을 예측해 주셨습니다. 또 바닷속에 300년간 묻혀 있었지만 배의 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었던 원인은 바닷물의 염분이 적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곳 스톡홀름의 앞바다는 특별히 염분이 적은 것이 특징인데, 그로 인해 미생물들과 조개류가 배를 공격하지 않았고, 또 제조 시에 은으로 만든 못을 사용하여 녹슬지 않았던 것도 원인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nbsp바사 박물관을 보면서 안내를 해주신 정재욱씨는 “스웨덴 사람들은 실패의 경험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서 후대인들에게 배움을 얻게 하도록 스토리를 잘 만드는 것 같다” 며 이 외에도 몇몇 유적지들에서 실수한 부분을 숨기지 않는 다른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nbsp바사 박물관 바로 옆에 민속박물관이 있어 빠른 속도로 휘이 둘러본 후, 스톡홀름의 역사가 담긴 상징적인 건물 시청사를 찾았습니다.nbsp▲ 스톡홀름 시청사시청사는 매년 노벨상 수상자들을 위한 만찬이 펼쳐지는 블루홀과 시의원들이 회의하고 결정을 내리는 의사당, 반대편에 보이는 호수가의 풍경을 대칭이 되도록 프레스코화로 그린 방, 스웨덴의 역사를 황금빛 모자이크로 꾸민 골든홀로 유명한데, 정재욱씨의 안내로 차례대로 둘러보았습니다.nbsp▲ 매년 노벨상 시상식 만찬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한 시청사의 블루홀nbsp다시 시내 중심가로 들어와서 ‘감라스탄’ 이라 불리우는 구시가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스웨덴어로 ‘감라’가 ‘오래된’이란 뜻이고, ‘스탄’이 ‘도시’라는 뜻이라고 하니 감라스탄은 ‘구시가지’ 라는 뜻이 됩니다. 스톡홀름은 13세기 이곳 감라스탄에서 시작된 도시라고 합니다. 국회의사당을 지나 감라스탄 안으로 들어가니 스웨덴 왕궁이 나타났습니다. 왕궁 안은 오후3시가 넘어 문을 닫아 입장을 할 수 없었는데, 왕궁 바로 옆에는 대성당이 있어 잠시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nbsp▲ 스톡홀름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피의 광장.nbsp좁은 골목을 더 깊이 들어가니 작은 광장이 나타났는데, 이곳은 스톡홀름 대학살 사건이 벌어진 곳이여서 ‘피의 광장’이라 불리는 곳이라 합니다. 1520년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2세가 침입해 이곳 광장에서 대학살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조금 더 골목을 따라 걷다보니 어떤 골목은 폭이 채 1m도 안 되는 곳도 나타났습니다. nbspnbsp▲ 1m가 채 안되는 감라스탄의 좁은 골목.nbsp감라스탄 골목을 빠져나와 왕궁을 둘러싼 성벽을 따라 걷다가 다리를 건너니 ‘왕의 정원’ 이라 불리우는 공원이 나타났습니다.nbsp▲ 뒤에 보이는 건물이 왕궁.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국회의사당.nbsp맑은 하늘에 시원한 바람을 쐬며 공원을 걷다가 중앙역 근처의 세르엘 광장과 컬쳐하우스를 지나 오늘 강연이 열리는 Samuelsgatan 건물에 들어왔습니다. 강연장에 들어서니 한국연구재단 소장님과 직원 분이 반갑게 스님 일행을 맞아주셨습니다.nbsp강연은 한국연구재단 스톡홀름 주재 사무소가 있는 Samuelsgatan 건물 9층에서 열렸습니다.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곳에서 이뤄지는 강연이다보니 많이는 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해서 마이크도 대여하지 않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빈자리 없이 95명이 참석하여 앉을 의자가 모자랄 정도로 발디딜틈 없이 성황을 이뤘습니다. nbspnbsp오늘 강연은 주 스웨덴 대사관에 근무하시는 김충환 홍보관님께서 뒤에서 많은 도움을 주시고, 김건씨를 비롯한 윤사라씨, 정재욱씨, 한국연구재단 한동성 소장님 등의 도움으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nbsp오늘 강연에서는 남편이 자주 상처 주는 말을 해서 힘들다는 분, 젊은 시절에 가게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때린 적이 있었던 기억 때문에 하루하루가 힘들다는 분, 고민이 있을 때마다 법륜 스님에게 항상 답을 구할 수가 없는데 그럴 때마다 어떻게 자기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묻는 분, 내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분, 서른살이 되니까 결혼에 대해 압박을 받는데 결혼은 왜 하는 걸까 의문이 든다는 분, 곧 아기 엄마가 되는데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는지 묻는 분, 습관적으로 불안해하는 심리 상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묻는 분 등 총 7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nbsp참석인원이 적을 것이라 예상하여 조촐하게 진행하려고 마이크 대여를 하지 않았는데, 많은 분들이 오셔서 한국에서 가져간 휴대용 마이크를 즉석에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마이크 볼륨이 작아서 뒤에 앉으신 분들이 불편해 하실 것을 고려하여 스님께서도 목소리를 많이 높이셨습니다. 그래도 스님의 답변 내용이 너무나 재미있고 유쾌해서 참석자들도 너무나 기뻐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nbsp오늘은 그 중에서 결혼 문제로 고민하는 여성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저는 얼마 전에 서른살이 되었습니다. 배우자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고, 부모님들도 결혼에 대해서 많이 물어보시고 압박을 주십니다. 이혼율이 50가 넘어가는데, 결혼이라는 것을 도대체 왜 하는 걸까 궁금합니다. 저도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보았지만 결국 헤어졌거든요. 결혼을 하더라도 함께 늙어가다가 혹시 다시 헤어짐이 찾아올 것 같아 겁도 납니다. 결혼을 할 때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결정을 해야 하고, 배우자를 정할 때도 어떤 기준으로 정해야 하나요?”“이런 질문은 결혼한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왜 스님한테 물어보세요? 결혼을 해야 된다 는 것도 없고, 결혼을 안해야 된다는 것도 없어요. 옛날에는 사회 전체적인 문화가 결혼을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런 환경이였죠. 그래서 결혼을 무조건 해야 되는 줄 알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대한 홍수가 나서 나무토막이 쓸려내려 가는 것과 같이 하나의 흐름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모 세대에서는 나이가 들면 결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자신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듯이 내 자식도 결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니까 부모는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것을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는 나의 선택입니다.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질문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결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때요?”nbsp“글쎄요. 잘 모르겠어요.”nbsp“결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니까 결혼을 못하는 겁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그냥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같이 사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안 올려도 됩니다. 자연계의 모든 짐승들이 결혼식 올리고 사는 것 봤어요? 그냥 살지요. 결혼식이라는 것은 하나의 문화 행위입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절대 헤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천주교나 유교 같은 경우는 남편이 결혼식만 하고 죽어버려도 평생 혼자 살아야 했죠. 그런 문화에서는 그렇게 살아야 했던 것이고, 또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내 손을 잡아 버리면 나는 그 사람의 부인이 되어야지 다른 선택을 하면 안 되었죠. 강제로 나를 하룻밤 껴안고 자버리면 성추행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남자의 사람이 되어야 했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몽골 같은 경우는 남자가 결혼하고 싶으면 부인이 될 사람을 목숨을 걸고 납치해야 하는 게 문화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태어나서 자라면 그 문화가 정상적인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어떻게 하느냐는 모두 하나의 문화입니다.nbsp여러분이 서구에 와서 교육받고 느끼고 본 생각과 몇십년 동안 한국에서만 보고 듣고 자란 부모님의 생각과는 당연히 결혼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죠. 프랑스 같은 경우는 젊은이들의 절반이 계약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문화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세대 차이에 의해서 문화가 다른 것이 있고, 나라 차이에 의해서 다른 것도 있고, 종교 차이에 따라서 다른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부모 세대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당연히 부모님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을 감수해야 합니다. 부모와 다른 문화를 선택하려면 갈등을 처음부터 예상해야 합니다. 갈등을 안 하려면 내가 사는 한국의 문화나 부모님의 문화를 수용해줘야 합니다. 부모님을 “어리석다, 틀리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부모님의 가치관과 문화, 도덕을 존중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의 생각이 있고 나는 내 생각이 있으니까 부모의 생각은 존중하되 나는 내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nbsp그런데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니 질문자는 효녀도 아니고 자기 줏대도 없고 그냥 왔다갔다 하는 것 같네요. 내 마음대로도 하고 싶고 부모님께 기대고 싶기도 하고 그런 것 같네요.nbsp결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째, ‘남자면 됐다, 미성년자는 안 되니까 20세가 넘고 60세 이하면 된다’ 이렇게 연령 폭을 확 넓히세요. 둘째, ‘총각도 좋지만 재혼도 괜찮다, 신체 장애인도 괜찮고, 외국인도 괜찮다’ 이렇게 상대를 확대하면 길거리 가는 사람 중에서도 부지기수로 상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질문자가 범위를 좁혀서 사람을 찾기 때문에 결혼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남자가 질문자의 요구에 맞춰주려고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런 남자는 없습니다. 그 남자도 ‘자기에게 맞는 여자가 어디 없나’ 하면서 찾으러 다니고 있겠지요. 그래서 나의 요구 조건대로 만나려고 하면 결혼은 절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중매를 설 때 다 거짓말을 조금씩 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나왔으면 전문대 나왔다고 말하고, 전문대 나왔으면 4년제 나왔다고 말하고, 키가 170이면 175라고 말하고, 선 보러 나갈 때는 구두 뒷축도 높이고 화장하고 호주머니에 돈을 더 넣어서 가고, 예절이 없던 사람이 의자도 빼주고 차문도 열어주고, 성격도 왈가닥 하던 사람이 얌전을 떨고, 이렇게 서로 속이기를 하는 것입니다. 속여야 결혼이 성립하지 안 속이면 결혼이 성립하지가 않는 것입니다.nbsp서로 덕 보려고 욕심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약간씩 속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건 아닙니다. 속아서 결혼했다 하더라도 ‘남편이 학벌을 속였다, 집안을 속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속여 주었기 때문에 내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안 속였으면 나하고 결혼을 못했을 겁니다. 속여준 걸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고 속여준 걸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nbsp질문자에게 제일 좋은 길은 결혼을 안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자신이 결혼할 수준이 안 되는 줄도 모르고 결혼하고 싶어 껄떡거리며 상대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괜찮은 남자를 골랐는데 막상 살아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려면 ‘어떤 인간을 고르면 결혼 생활이 좋을거냐’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남자면 됐고, 나이도 상관없고, 결혼만 해주면 다행이지’ 이렇게 기대를 안 하고 막상 결혼하면 ‘생각보다 괜찮네’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정도 깊어지고 점점 좋아집니다. 그런데 기대를 너무 높여 놓으니 괜찮은 인간도 내 눈에는 안 차는 겁니다. 질문자는 눈이 너무 높습니다. 결혼을 하려면 눈을 낮춰야 합니다. 결혼을 왜 해야 하는지 왜 물어요? 그냥 안하면 되지요. 그런 질문은 결혼을 하고 싶으니까 묻는 겁니다.”질문한 여성분은 스님이 답변을 금방 알아듣고 “네, 잘 알겠습니다.” 하며 밝게 웃었습니다. 오늘 스톡홀름 강연은 밝고 활기찬 분위기였습니다. 스님께서 재치있고 솔직하게 답변을 많이 해주셔서 청중들도 많이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강연을 마치고 책사인회를 하면서 참석자들과 짧게라도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유난히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이 보였는데, 의학 공부를 하러 왔다가 정착하게 되신 분, 적십자 병원에 근무하러 왔다가 정착하게 되신 분, 6.25 전쟁 때 참전한 스웨덴 사람과 국제결혼을 하게 되신 분들이라고 합니다.nbsp스님께서는 수고한 봉사자들, 그리고 장소를 빌려주신 한국연구재단 관계자 분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강연을 준비하면서 어땠는지 짧은 마음나누기를 함께 하셨습니다.nbsp▲ 스톡홀름 강연 준비 책임을 맡아 가장 많은 수고를 해주신 김건씨, 운전을 맡아주신 윤사라씨, 유적지 안내를 해주신 정재욱씨.nbsp봉사자들은 많은 사람이 참석할 것이라 예상치 못하고 마이크를 준비하지 못한 걸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스님 강의를 들어서 너무 좋았고, 참석한 분들도 행복한 마음이 되어 돌아가셔서 보람이 컸다”며 다들 기뻐했습니다. nbsp강연장 뒷정리를 마치고, 점심식사 접대를 받았던 김태자 선생님 댁에 돌아오니 밤11시가 다 되었습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강연을 준비한 스님과 스텝진들은 점심 때 식사하고 남은 반찬과 밥을 먹고 김태자 보살님께서 정성스럽게 마련해주신 잠자리에서 잘 잘 수 있었습니다. nbsp내일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세계 100회 강연이 계속됩니다. 노르웨이에서 계속 소식 전해 드리겠습니다. nbsp

2014.09.11. 26,394 읽음 댓글 25개

2014.9.8 세계 100회 강연(14) 핀란드 헬싱키

nbspnbsp▲ 핀란드 헬싱키에서 수오메린나 요새로 들어가는 배 위에서. 뒤에 헬싱키 도심이 보입니다.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세계 100회 강연 중 열네번째 강연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한국에서는 추석날 아침이기도 하네요.nbsp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성준 한인회장님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5시에 현지 교민 분인 김미미씨 부부가 새벽부터 정성껏 차려준 추석날의 아침 식사를 하고, 5시30분에 기차역으로 출발했습니다. 김미미씨 부부는 유튜브로 즉문즉설을 듣고 삶이 많이 행복해졌다며 스님께 식사 대접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nbsp▲ 추석날 아침 식사를 정성껏 차려주신 김미미씨 부부nbsp새벽부터 노성준 한인회장님이 마지막까지 직접 차를 운전하여 안전하게 기차역까지 태워주셨습니다.nbsp기차를 타고 오전 6시 40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하여 오전 9시 16분에 핀란드 헬싱키역에 도착했습니다. 시차가 1시간 있으니까 실제 이동 시간은 3시간 36분 걸렸습니다. 헬싱키역에는 핀란드에서 한인 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백솔 씨와 핀란드에서 한국관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최문기 거사님이 스님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nbsp▲ 핀란드 헬싱키역에 도착오늘은 최문기 거사님 댁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해서, 우선 거사님 댁에 짐을 옮겨 놓고, 거사님이 운영하는 헬싱키 유일의 한국 식당인 한국관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거사님 부부도 평소에 스님의 유튜브 즉문즉설을 보고 많은 도움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꼭 식사 대접을 해드리고 싶으셨다며 정성껏 음식을 차려 주셨습니다. 스텝진 일행은 음식이 맛있다고 다들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핀란드를 알 수 있는 유적지 몇 곳을 둘러보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nbsp▲ 스님 일행의 점심, 저녁 식사와 숙소 제공까지 정성껏 챙겨주신 최문기씨네 가족. nbsp헬싱키는 도시가 작아서 하루 종일 걷기로 하였습니다. 유적지 안내는 핀란드 한인 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백솔 학생이 해주었습니다. 백솔 학생은 헬싱키의 라우레아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는 4학년 학생입니다.nbsp우선, 시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인 성당 두 곳에 가보았습니다. 1868년에 지어졌고 양파 모양의 돔 외관을 가진 우스펜스킨 성당과 도심 한복판의 넓게 자리한 세나띤또리 광장에 우뚝 솟은 투오미오키르코 성당을 가보았는데, 두 성당은 서로 다른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nbsp▲ 우스펜스킨 성당특히 투오미오키르코 대성당은 내부로 들어가보니 실내 장식이 거의 없이 아주 심플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본 유럽의 많은 성당들이 화려한 장식을 갖추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성당은 아주 심플하고 단순해서, 스님께서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nbsp▲ 투오미오키르코 성당 외부▲ 투오미오키르코 성당 내부스님께서는 “성당이나 교회가 세속과 결탁하면 화려한 장식을 갖게 될 가능성이 많고, 종교의 순수성이 잘 유지되면 심플하고 단순한 경향을 갖게 되는 것 같다” 하시면서 심플한 핀란드의 투오미오키르코 대성당을 더욱 관심 있게 보셨습니다.nbsp성당을 나와 걸어서 카우파토리의 여객항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장날처럼 천막을 치고 각종 음식과 과일, 물건들을 판매하는 시장이 열려 눈길을 끌었습니다.nbsp▲ 여객항에 늘어서 있는 마켓들. 오른쪽에 보이는 친구가 스님 일행을 안내해준 헬싱키 라우레아 대학에 다니는 백솔씨입니다.nbsp블루베리와 몇가지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사서 먹고는 여객항에서 배를 타고 ‘수오메린나’로 불리우는 핀란드의 천연 요새를 가 보았습니다. 배를 타고 20분을 가니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섬이 보였습니다. ‘핀란드의 요새’로 널리 알려진 이 섬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곳입니다. 마침 날씨가 맑아서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nbsp▲ 수오메린나 요새nbsp이 섬 요새는 1748년 러시아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당시 핀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에서 지은 요새입니다. 한때는 이 요새에 헬싱키보다 더 많은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데, 1808년 오랜 전투 끝에 결국 러시아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nbsp▲ 수오메린나 요새의 성벽 중에서 왕이 출입하였다는 Kings Gate안내 유인물에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산책로를 따라가니 Kings Gate 라는 요새의 성문이 나타났는데, 이곳은 왕이 배를 타고 정박해 이 성문으로 들어왔다는 곳이었습니다. 자세히 둘러보니 성벽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중중 첩첩으로 성벽이 쌓여 있었습니다. 성벽마다 대포를 쏠 수 있게 구멍이 나 있고, 당시 사용했던 대포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성벽은 한겹 내지 두겹만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겹겹이 성벽이 설치된 것에 스님께서도 무척 신기해 하셨습니다. 그만큼 적으로부터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이 컸으리라 짐작이 되었습니다. nbsp핀란드는 강대국 사이에서 고통을 겪어왔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아 보였습니다. 스위덴으로부터 500년간 지배를 받아왔고, 또 러시아가 급부상 하면서는 수오멘린나 섬에 큰 요새까지 지었지만 러시아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러시아의 지배를 100년간 받게 되었답니다.nbsp수오메린나 요새를 모두 둘러보고 다시 카우파토리의 여객항으로 돌아왔습니다. 2시간 정도를 계속 걸었더니 스님께서도 조금 피곤하셨는지 배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여객항에 내려 헬싱키의 중심가인 에스프라나드 공원을 걸은 후 강연을 준비할 시간이 다 되어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nbspnbsp오늘 핀란드 헬싱키 강연은 Aalto 대학 Design Factory 강당에서 한인 학생회 분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해 주었습니다. 한인 학생회는 헬싱키에 있는 라우레아 대학, 메트로폴리아 대학, 알토 대학, 헬싱키 대학 4개 대학에 재학 중인 한국인 학생들의 모임입니다. 영상 상영, 사진 촬영, 강당 시설 사용 등이 학생들의 봉사 덕분에 매끄럽게 잘 진행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강연 준비를 위해 수고한 한인 학생회 친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nbsp▲ 헬싱키 강연이 열린 Aalto대 Design Factory 강당. 사진 촬영은 핀란드에서 포토그래피로 활동하고 있는 박재승씨가 재능기부로 담당해 주셨습니다.nbsp강연은 총 60명이 참석하여 진행되었고, 대부분 유학생들이 절반 정도를 이뤘고, 그 외 개인사업이나 여행 차 오신 분들도 보였습니다. 특히 헬싱키에 신혼여행을 온 부부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nbsp스님께서는 즉문즉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핀란드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먼저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핀란드 하면 첫째 우리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이라는 점이 떠오릅니다. 두번째는 헬싱키 프로세스가 떠오릅니다. 유럽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유럽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유럽이 대립과 갈등을 겪었는데, 이곳 헬싱키에서 1975년 동서 유럽 35개국의 나라가 모여서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첫째, 상호 불가침에 대한 약속을 하는 안보 협력을 하기로 했고, 둘째, 서로 경제협력구조가 달랐는데 상호 경제협력을 하기로 했고요. 셋째, 인권협력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 세 가지 협력을 하기로 한 것이 헬싱키 프로세스입니다.헬싱키 의정서가 맺어지고 동서 간의 교류와 협력이 증대되고 그것이 결국 동유럽의 붕괴, 소비에트의 해체, 독일의 통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갔기 때문에 한반도에 있어서도 헬싱키 프로세스가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느냐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남북과 주변국까지 해서 우선 안보협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6자회담으로 볼 수 있고요. 두 번째는 남북간의 경제협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북한 인권 문제가 중요한 사항으로 들어가야 함을 시사합니다.nbsp그러나, 상호 협력하면서 공존해야 한다는 의미보다는 헬싱키 프로세스가 동유럽의 해체를 가져왔기 때문에 결국 북한의 붕괴도 가져올 것이라는 의도로 오해되어 북한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헬싱키 프로세스로 인해 결과적으로 동유럽이 붕괴된 것이지, 붕괴 시키려고 헬싱키 의정서를 맺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서 헬싱키 프로세스는 한반도 통일문제와 외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 번째,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전체적으로 복지 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잘 갖춰져 있다는 것으로 우리사회에 알려져 있습니다.”헬싱키 프로세스의 의미에 대해 들으면서, 다시 한 번 통일의 희망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총 9명이 스님께 질문했습니다.nbsp전 세계에서 유독 우리나라만 아직도 분단 국가로 남아있는 원인을 묻는 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을지, 어떻게 아이를 행복하게 키울 수 있을지 묻는 분, 극단주의자가 주위에 있어서 피곤한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강박관념이 심하고 나쁜 기억이 순간적으로 올라와서 저를 괴롭혀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정토행자의 서원에서 오직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분, 아이가 컴퓨터 게임에 너무 빠져서 걱정인 분,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인과응보의 원리를 항상 들어왔는데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는 불행한 사람은 늘 불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분, 종교나 정치라는 것이 현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들이 나왔습니다.nbsp그 중에서 한국과 핀란드의 가치관 차이에서 오는 혼란스러움에 대해 묻는 한 여성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nbsp“핀란드에 온지 3년 되었고요.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가치관과 핀란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이 서로 다른데 그 안에서 가끔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한국인이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결혼은 몇 살에 해야 하고, 성공하려면 돈은 얼마를 벌어야 하고, 학벌을 중시한다든지 여러 가지 기준들이 있는데, 핀란드는 그런 기준이 없거든요. 그래서 혼란스럽습니다.”“예를 들어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식이 한국 사람과 결혼하지 않고 외국 사람과 결혼하면 반대하겠죠. 만약에 백인도 아니고 흑인이라면 어떨까요? 그것도 장애인이라면 어떨까요? 더더욱 반대하겠죠. 두 가지 문제입니다. 부모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모가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아요.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요즘 많은 이들이 계약 결혼을 해서 살잖아요. 이것을 한국 부모가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죠. 동성이 같이 산다는 것도 부모가 받아들이기 어렵겠죠. 부모는 잘못되었고 부모는 아직 미개해서 그런 게 아니라 부모님이 살아온 삶의 가치관과 사고에서는 이것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nbsp그러면 부모가 하자는 대로 내가 하면 부모의 노예만 되지 내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노예로 살고 싶다면 부모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되고요. 그러나, 스무살이 넘어서 한 사람의 성인이라면 부모님의 뜻이 그런 것은 이해하지만 내가 그렇게 살거냐 안 살거냐 하는 것은 내 선택입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어렵다 하더라도 ‘인종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볼 때 옳지가 않다,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사람인데 단지 피부가 검다는 한 가지 이유로 안 된다는 것은 옳지가 않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살면 됩니다.“nbsp“부모님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런 것 같습니다.” nbspnbsp“방금 부모의 예를 들었던 것처럼, 한국에서는 학벌을 갖고 굉장히 중요하게 평가했는데 내가 핀란드에 와보니 ‘그래, 학벌 그게 뭐가 중요하냐. 한국은 너무 학벌을 갖고 형식주의에 치우쳐있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부모가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나는 거기에 대해 구애받지 않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그래도 학벌이 중요하지’ 생각한다면 학벌을 중요시하면 되고요. nbsp만약 외국인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결혼식에 부모가 안 온다던지 해서 가족과 갈등이 생기겠죠.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한테서 외면당하는 걸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그들을 이해는 하되 나는 그들의 노예가 아니잖아요. 나의 길을 가야지요. 대신에 불이익을 감수해야죠. 질문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불이익은 안 받겠다고 하는데서 생기는 고민입니다. 그런 걸 욕심이라고 말합니다.nbsp그러니까 선택이에요. 내가 결혼할 때 부모가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부모가 결혼을 반대한다고 부모를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동안 살아온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하며 자식에 대한 우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기 체면이라는 것이 있단 말이에요. 사위가 누구냐 물으면 자기 친구들에게 말하기가 도저히 어렵단 말입니다. 자신의 체면 문제가 하나 있고, 진짜 자식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인생을 오래 산 부모님의 입장을 들어봐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알겠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얘기를 듣고 내가 깨닫고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뜻은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한다면 ‘저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결정하면 됩니다.nbsp그럴 때 부모는 자식의 결혼식에 참여 안한다던지 결혼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던지 그럴 수 있죠. 그것은 부모의 권리이니까요. 가족 간의 지지를 다 받으면 좋지만, 그럴 때는 부모의 지원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결혼도 하고, 또 가족의 지지도 다 받고 싶다 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겁니다. 지지를 받고 싶으면 가족의 비위를 맞추어서 내 요구를 좀 포기해야 하고, 내 옳다는 생각대로 가려면 지지도 포기하고 후원도 포기를 해야 합니다.”“부모님이 열심히 키워주셨는데 부모님 말을 안 들으면 불효가 아닐까요?”nbsp불효가 아니에요. 그러나, 부모님은 불효라고 그러겠지요. 반대하는 것은 부모님의 생각이고 나는 나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어릴 때부터 낳아서 열심히 키웠더니 이제 부모 말도 안 듣고 이렇게 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죠. 그것은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께 “죄송합니다”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부모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 갈 길을 가면 되는데, 후원도 받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도 하는 이것은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반대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대는 부모님의 의견이니까 인정은 하되, 지금까지 지원해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 인사를 해야지요.nbsp부모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곳 핀란드에 와서 이것이 좋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가 그 좋은 것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 시스템이 한국보다 참 좋다고 한다면, 그럴 때 내가 만약 정치를 한다면 한국 사회가 그것을 수용을 하도록 노력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한국 사회가 이것을 잘 안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5년, 10년, 20년 동안 지난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공할 수도 있고 성공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공 안했다고 실패했냐? 그건 아닙니다. 3.1운동도 그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역사적으로 길게 보면 성공한 것입니다. 헌법에도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라고 되어 있잖아요. 반면 5.16은 어때요? 그 당시에는 성공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실패했습니다. 헌법에 “5.16 군사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란 문구는 없잖아요. 역사적으로 헌정 질서를 문란 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면 앞으로 누구든지 헌법을 무시하고 쿠데타를 일으켜도 된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그러니까 당장 성공했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고, 당장 실패했다고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꾸준히 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nbsp그런 측면에서 한국사회가 지나친 학벌사회라고 한다면, 여기 와서 견문을 넓혀보니 ‘이 학벌주의는 국가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되고, 개인의 행복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세상 사람들이야 학벌주의를 하든지 말든지 나는 신경 안 쓰면 됩니다. 불이익을 주면 불이익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꾸준히 개선해 나가면 될 일이지 ‘여기는 이렇고 저기는 저런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정말 혼란스럽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다른 종교인들을 만나서 자꾸 대화를 나누니까 ‘내 신앙이 흔들립니다’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 사람들은 저렇게 믿는구나’, ‘저 사람들은 저 문제를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면 되지 내 생각과 다르다고 갈등을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서로 생각이 다 다르니까요.nbsp다름은 갈등의 요인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것들을 우리가 인정하고 이해하면 오히려 다양성의 조화가 일어납니다. 풍요로워집니다. 반찬이 딱 한 가지만 있는 게 좋아요? 열 가지 있는 게 좋아요? 열 가지가 있으면 밥상이 풍요로워지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획일적인 사고를 합니다. 이런 문화와 전통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저런 문화와 전통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류문화사를 연구하면 ‘어떤 문제마다 사람들은 여러 생각들을 하는 구나’ 이렇게 볼 수가 있죠. 생물학적으로 다양한 종을 모두 존중하듯이 인류학적으로 볼 때는 다양한 문화를 다 존중해야 합니다. 인류가 수 천년을 거쳐 오면서 나름대로 발전시켜 온 문화이기 때문에.nbspnbsp그런데 오늘날 우리사회는 자꾸 획일화되어 갑니다. 그런 것을 극복해 가는 것이 발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여기 와 공부하면서 좋다 싶었던 것들은 다 배워 와서 한국에서 저항을 받아가며 관철을 시켜 보세요. ‘이렇게 저항까지 받아가면서 해봐야 무슨 소용 있나’ 한다면 그냥 한국식으로 살면 되고요. 그건 자기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헷갈릴 일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힘들다 한다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다는 뜻입니다.“불효를 할까봐 걱정됩니다.”“성인이 되면 선택은 자기의 문제입니다. 성년은 각자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더 이상 지원해줘야 할 아무런 책임이 없고, 자식은 부모에게 어떤 명령도 들어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어요. 각자가 독립된 인간입니다. 부모 자식이란 것이 있지만 성년이 되면 일대일의 독립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의 자연의 원리입니다.” nbsp“그런데 한국의 문화는 보통 스무살이 넘어도 독립을 하지 않잖아요.”nbsp“제가 보기에는 부모도 자식을 독립시켜주지 않지만, 자식도 부모로부터 독립을 안 하고 있습니다. 울타리 안에서 오래 키우던 짐승을 산에 가져다 놓으면 못살고 다시 울타리로 돌아오듯이 자식을 너무 과잉보호 하면 독립을 못합니다. 한국 문화가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집의 문화가 그런 것이겠죠. 그런 집이 좀 많아서 한국 문화라고 그러는 것이지요. 서양은 그런 집이 없느냐? 그건 아닙니다. 서양은 독립시키는 것이 다수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국 사람은 다 그렇다”, “서양 사람은 다 안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nbsp자식을 독립시키는 문제는 서양 문화와 한국 문화의 문제로만 보면 안 됩니다. 항상 모든 것의 그 근본인 자연의 원리에 준해서 자연스럽냐 그렇지 않느냐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어떤 문제를 보는 것이 옳습니다. 한국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자연의 원리에 어긋나면 고쳐야 하고, 서양이 아무리 우리보다 앞서가고 잘산다 하더라도 자연의 원리에 어긋나면 따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양 것은 옳고 우리 것은 틀렸다 라든지 서양 것은 틀렸고 우리 것은 옳다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nbsp스님의 답변을 듣고 혼란스럽다고 했던 질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었습니다. 성년이 되면 부모와 자식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명쾌하게 정리해 주셔서 많은 분들이 좋아하셨습니다.nbsp강연을 마치고 책 사인회를 한 후, 기념 사진을 촬영하였습니다.nbsp스님께서는nbsp수고한 한인 학생회 친구들과nbsp간단히 소감 나누기를 함께 한 후, 한인 학생회 친구들에게 단주 하나씩을 선물하며 모두에게 행복이 깃들기를 기원해 주셨습니다.nbsp강연을 준비하느라 다들 저녁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강연을 마치고 난 후 다시 최문기 거사님이 운영하는 한국관으로 돌아와 사모님이 정성껏 차려주신 식사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습니다. 숙소인 최문기 거사님 댁에 들어오니 밤11시가 다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유럽 강연을 출발한 이후 계속 쉬지 못하고 강행군을 하셔서 그런지 다소 피곤한 기색이 많으셨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드시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하셨습니다.nbsp내일은 비행기를 타고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갑니다. 스웨덴에서 계속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nbsp

2014.09.10. 26,413 읽음 댓글 25개

2014.9.7 세계 100회 강연(13) 상트페테르부르크

▲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역사 깊은 장소, 드보르초야 플로샤트.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열세번째 강연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어제밤 11시55분 기차로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기차 안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7시55분에 상트페트르부르크에 도착했습니다.nbsp기차역에는 아침 일찍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회 노성준 회장님과 이미원 부회장님,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계신 유기인씨, 한국 기업의 법인장으로 나와계신 이민재씨 등 총 4명이 스님 일행을 마중하러 나와 주셨습니다. nbsp▲ 스님 일행을 맞이해 준 상트페테르부르크 교민분들. 왼쪽부터 이미원 한인회 부회장님, 유기인님, 노성준 한인회 회장님.nbsp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노성준 한인회장님의 안내로 시내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한때 레닌그라드라고 널리 알려진 도시입니다. 네바 강과 운하가 도시를 둘러싸고 있어 러시아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nbsp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인 넵스키 대로를 가로 질러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웅장한 규모의 카잔 대성당입니다. 1811년에 완공한 이 성당은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을 본따 만들었기에 마치 로마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공산주의가 집권한 이후에는 무신론 박물관으로 운영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마침 미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러시아정교회가 다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nbsp▲ 카잔 대성당.nbsp다음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방문했습니다. 1703년 군사적 요새로 건설되기 시작한 이곳은 궁전에 있던 왕족들이 노르웨이 바이킹이 침입할 시에 강 건너 편으로 최단거리로 피신하기 위해 만든 천연 요새입니다. 강 건너편에는 겨울 궁전이 위치해 있습니다. 성벽의 모서리는 화살표 모양으로 만들어서 방어가 쉽도록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벽과 다른 점은 성벽 자체가 방어의 기능도 하지만 생활 공간으로도 다양하게 활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요새 안에는 바늘처럼 뾰족한 탑과 바로크 양식 인터리어를 자랑하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성당이 있는데, 그 높이가 무려 127미터가 되며 표트르 대제 이후의 러시아 황제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1917년까지는 정치범 수용소로도 이용되었다고 합니다.nbsp▲ 요새 안에 위치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대성당nbsp다음은 1901년에 만들어져 러일전쟁에 참여했던 순양함 오로라가 정박해 있는 곳을 들렀습니다. 러일 전쟁 당시 지휘관이 이동 시간을 잘못 계산해서 병사들이 지치는 바람에 신식 무기를 갖춘 당시의 가장 최첨단 배였으나 패전했다고 합니다. 레닌 혁명 때는 사회주의 방송 전파를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 곳으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nbsp▲ 러일전쟁에 참여했던 순양함 오로라 앞에서다음은 프랑스의 몽테랑이라는 건축가가 일생을 바쳐 40년 동안 건축했다는 이삭 대성당에 들렀습니다.nbsp▲ 이삭 대성당도시의 실루엣 위로 불쑥 솟아 있는 황금빛 돔모양 지붕이 인상적인 성당인데, 262개의 계단을 따라 돔지붕에 올라가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멋진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nbsp▲ 이삭 대성당 돔 위에서 내려다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풍경. nbsp다음은 근사한 겨울 궁전 내에 들어서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들렀습니다. 이집트 미라와 스키타이인의 황금에서부터 마티스와 피카소 등 20세기 유럽 예술 작품들까지 수많은 귀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보려면 7일이나 걸린다는 미술관인데, 스님께서는 유기인씨의 안내로 1시간 30분 만에 순식간에 관람 하셨습니다. nbsp▲ 세계 3대 미술관 중에 하나인 에르미타주 미술관. 피카소의 작품을 관람하고 계신 스님.nbsp미술관의 정문이 있는 ‘궁전 광장’으로 나와 한인회 회장님, 부회장님과 함께 한국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습니다.nbsp▲ 궁전 광장. 뒤에 보이는 것이 겨울 궁전과 에르미타주 미술관.식사를 하면서 노성준 한인회장님께 이곳의 교민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현재 1200명 정도의 교민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 주재원이거나 선교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유학생은 100여명 정도 되는데, 최근 물가가 많이 오르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고, 특히 학제가 5년제가 많아서 한국과 사이클이 맞지 않아 유학 오는 것을 많이 꺼려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현대자동차 공장이 들어와서 30가정 정도가 살고 있고, 대부분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아서 시내에만 10개의 한국 교회가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nbsp오늘은 오후 4시부터 강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유적지를 더 둘러보지는 못하고 곧바로 강연을 준비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장로교회로 왔습니다. 한인회 회장님은 “강연 내용은 종교와 상관없지만 강사가 스님이다 보니 종교 행사로 오해될 수 있어서 행사 주최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부담이었지만 목사님이 흔쾌히 허락도 하시고 공간도 빌려주셔서 오늘 강연을 할 수 있었다”며 강연이 열리기까지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음을 알려주었습니다. nbspnbsp스님께서는 강연을 시작하면서 장소를 마련해주신 목사님과 강연 준비를 맡아주신 한인회 관계자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강연 공간을 빌려주신 장로교회 최영모 목사님.nbsp오늘은 교회에서 십자가 앞에서 스님께서 강연을 합니다. 총 77명이 참석하여 열띤 분위기 속에서 3시간 넘게 강의가 이뤄졌습니다.nbsp총 7명이 질문을 했는데 주로 현대자동차에서 주재원으로 나오신 분들의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회사 동료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고민하는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회사 내에서 이기적인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쟁을 하면서 풀어가야 할지 고민인데, 어떻게 풀어가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은 나 몰라라 하면서 자기 물건은 굉장히 챙기거나, 택시를 함께 타도 자기는 현금이 없다면서 쏙 빠지거나, 상대를 무시하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 친구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nbsp“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싶지만 질문이 좀 막연합니다. 4명이 술을 마시고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술값을 내기로 했는데 자기 차례가 되었는데도 술값을 안내면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죠. 그런데 자기 순번에 돈을 안 낸 그 사람이나, 친구가 술값 한번 안내었다고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질문자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친구라면 술값 한번 못 낼 수도 있지요. 술값 한번 안냈다고 저 사람은 이기주의라고 말하는 질문자 또한 이기주의가 아닐까요?nbsp▲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 장로 교회.nbsp그 사람은 자기가 이기주의자인지를 잘 몰라요. 그게 문제이지요. 그분은 자신이 이기주의자라고 자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삶의 습관이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는 지금 중국에 살던 조선족들이 많이 들어와서 살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갈등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살던 조선족들의 신원을 조사해보면 대부분 중국에서 굉장히 교육도 많이 받고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중국에서 선생님 했다고 한국에서도 선생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식당에서 서빙을 하던지 공사장에 가서 노가다를 하던지 허드렛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막노동 하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의 절반이 욕설입니다. 욕설과 반말이 하나의 자연스런 문화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투를 자기가 조선족이라 무시해서 반말하고 욕설한다 이렇게 오해합니다. 이런 감정들을 못 견뎌서 여러 가지 갈등이 생겨나곤 했습니다. nbsp그처럼 질문자가 볼 때는 무시를 당했다고 느끼는데, 무시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냥 그 사람의 일상생활이었을 뿐입니다. 그 친구가 살아온 삶이나 가정환경을 조사해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삶의 습관과 문화 속에서 아마 살았을 거예요. 외국인을 만났을 때 그 문화를 이해하듯이 ‘저 친구는 저런 습관이 있구나, 저런 문화가 있구나, 저런 버릇이 있구나’ 이렇게 이해를 하면 내가 화가 안 나는데, ‘저 자식 또 봐라, 술값 안 낸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nbsp미워한다는 것은 질문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버릇을 고쳐주어야 하느냐? 못 고칩니다. 부모도 못 고치는 걸 질문자가 어떻게 고쳐요? 상사도 부하를 못 고치는데 동료인 질문자가 어떻게 고쳐요? 못 고칩니다. 그래서 고칠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냥 놔두고 이해하는 겁니다. 고치려고 하면 질문자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안 고쳐지기 때문입니다.nbsp둘째, 내가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그 사람도 그것을 고치면 그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 좋겠지요?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저 사람을 위해서 고치도록 깨우쳐 주겠다 이런 마음을 내는 것은 좋습니다. 그럴 때는 그것이 쉬이 안 고쳐지는 것을 알고 조언을 해야 해요. 쉬이 안 고쳐지는 것을 알고 조언을 하면 그 사람이 안 고쳤을 때 내가 기분이 안 나쁩니다. 그리고 쉽게 못 고칠 줄 알기 때문에 꾸준히 얘기를 해줄 수 있어요. 왜냐하면 고치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nbsp그런데 한두마디 한다고 그 사람이 고칠 것이라고 지나친 기대를 하게 되면 안 고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다음에는 그냥 무시해버릴까 포기하는 생각이 듭니다. 포기해도 인생의 길이 아니고, 지나친 간섭을 해도 인생의 길이 아닙니다. 꾸준히 지적을 해줘야 합니다. ‘저걸 고치면 저 사람에게 좋다. 그러나 고치기 어렵다’ 는 두 가지 명제만 생각하면 저 사람을 위해서는 지적을 해주되 고치기 어려운 줄을 내가 이해하기 때문에 고칠 것이라고 쉬이 기대를 안 하게 되면 못 고쳐도 내가 스트레스를 안 받게 됩니다.그러나 우리는 ‘안 고칠 바에야 뭐하러 문제 제기 하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러면 사랑이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 문제제기 하면 꼭 고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면 꾸준히 할 수 있고, 미워해서 하면 바짝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해 버립니다. 성인의 말씀은 내가 굉장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행복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하게 되면 짧은 순간에 파워는 있는데 그게 뜻대로 안되면 스트레스를 받고 포기하게 되어 버려요. 그런데 그 사람을 위해서 얘기하게 되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한번 접근해 보면 좋겠다 싶어요.nbsp물론 쉽지 않아요. 그 사람이 자신을 고치는 것이 쉽지 않듯이 나도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아요. 오늘 스님 법문 듣고 나도 한번 해봐야지 하지만 자기도 그렇게 잘 안될 거예요. 안 되는 나를 보면 저 친구도 고치는 게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되지만 나도 꾸준히 해보듯이 저 친구도 안되지만 개선을 꾸준히 하도록 내가 도움을 줘야겠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좀 나을 것 같아요.”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직장 동료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쉽고 명쾌한 관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나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상대에게도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한 길을 스님께서는 늘 알려주십니다. 강연이 끝나고 다들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nbspnbsp스님께서도 책 사인회를 하며 참석한 청중들에게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강연 준비를 위해 도움주신 봉사자들과 한인회 분들, 목사님을 비롯한 교회 관계자 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오늘 행사를 마무리 하였습니다.nbsp▲ 오늘 강연에 함께해 주신 목사님을 비롯한 한인회 봉사자들과 함께nbsp강연을 마치고 한인회 회장님의 안내로 중국 식당을 찾았습니다.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한인회 회장님이 운영하는 민박집으로 들어오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가, 이곳 러시아 시간으로 오늘 밤 중에 한국은 추석날 아침이 밝아오기 때문에, 카카오스토리와 희망편지에 내보낼 추석 인사를 영상으로 촬영하였습니다.nbsp스님께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하는 추석 인사입니다.nbsp 영상 촬영을 마치고, 유럽 강연이 중반에 접어들고 있는데 그동안의 경과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담소를 나누시다가 새벽 1시가 넘어 잠자리에 드셨습니다.nbsp내일은 기차를 타고 핀란드로 넘어갑니다. 헬싱키 알토대학교 강당에서 세계 100회 강연 중 14번째 강연이 있습니다. 내일은 핀란드에서의 강연 소식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

2014.09.09. 28,488 읽음 댓글 35개

2014.9.6. 세계 100회 강연(12) 모스크바

▲ 크렘리 성 안에 위치한 러시아정교회 성당 앞에서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열두번째 강연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날입니다.nbsp어제밤 12시30분 비행기로 독일 베를린을 출발하여 밤새 비행기 안에서 잠깐 선잠을 잔 후 새벽 5시30분에 모스코바 공항에 도착했습니다.nbsp▲ 모스크바 공항nbsp공항에는 새벽부터 김혜경씨가 남편인 알렉스씨와 함께 마중을 나와주셨습니다.nbsp▲ 공항 마중과 모스크바 강연 준비를 맡아주신 김혜경씨 가족nbsp김혜경씨는 모스크바에 공부하러 왔다가 러시아인 남편과 결혼하여 자녀도 낳고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튜브로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다가 큰 감동을 받고 정토회를 알게 되었는데, 이번에 세계 100회 강연 소식을 듣고 모스크바 강연을 담당해 주시기로 마음을 내어 주셨습니다. 모스크바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곳인데 김혜경씨 덕분에 강연이 열리게 되었습니다.nbsp모스크바 공항을 빠져나와 이곳에 주재원으로 나와 계신 문성필 전미영씨 부부네 아파트에 잠시 들러 아침 식사 겸 잠깐의 휴식을 취했습니다.nbsp▲ 아침 식사를 준비해주신 문성필 전미영씨 부부.아파트로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고장이 나서 멈춰 서 버리는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김혜경씨가 러시아어를 잘해서 곧바로 관리소에 비상벨을 울려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냥 웃기만 하셨습니다.nbsp문성필씨 부부와 담소를 나누다가 오전 9시부터 시내 유적지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내 유적지 안내는 모스크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권자경씨와 그 어머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오후 4시에 강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아 모스크바를 상징하는 몇 곳만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nbsp▲ 모스크바 강연 준비와 유적지 안내를 맡아주신 분들. 왼쪽부터 김혜경씨, 권자경, 권진경 자매와 그 어머니.nbsp가장 먼저 러시아의 상징인 전승기념공원에 들러 전승기념탑과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나폴레옹 전쟁과 2차세계대전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한 곳이기도 하지만 두 전쟁으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수직으로 우뚝 솟은 기념탑은 높이가 151.7m 인데 2차세계대전으로 죽은 1,517만명의 희생을 추모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nbsp▲ 전승기념탑. 모스크바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 보입니다. 과거의 역사인 전승기념탑 뒤로 최신식 빌딩들이 건축되고 있습니다.nbsp기념탑 뒤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데 이것 역시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합장을 하고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천도하기 위해 잠시 기도를 하셨습니다.nbsp▲ 전승기념공원에 마련된 꺼지지 않는 불.nbsp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전쟁으로 죽은 아들을 끌어 안은 모습의 동상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잠시 가슴이 찡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의 상황들을 상세히 묘사한 다양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전쟁의 비참함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nbsp▲ 전승기념박물관. 2차세계대전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묘사한 그림들nbsp시내로 가니 마침 오늘이 ‘모스크바 시의 날’ 이여서 곳곳에서 축제와 공연이 열려 떠들썩 했습니다. 먼저, 옛 러시아 제국 시절의 궁전인 ‘크렘린’ 성을 찾았습니다. 2.25km에 달하는 성벽과 스무 개의 성문을 갖추고 있으며 내부에는 궁전을 비롯하여 러시아정교회 양식의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군주제가 폐지되고 1922년 소련 탄생 이후에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의회가 설치되었다고 하며, 오늘날에도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 관저와 정부 기관이 이곳에 있다고 합니다.nbsp▲ 러시아 제국 시절의 궁전, 크렘린 성궁 안으로 들어가서 러시아 황제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아르항겔스키 대성당과 왕이 예배를 올렸다는 블라고베쉬첸스키 대성당에 들어가 보았습니다.nbsp▲ 아르항겔스키 대성당과 블라고베쉬첸스키 대성당. nbspnbsp러시아정교회 양식의 성당이라 외부와 내부의 모습이 서유럽 쪽의 카톨릭 성당들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습니다. 내부 벽화에 그려진 성화들 속에서는 조금 더 인간적인 면이 느껴졌습니다.nbsp▲ 그리스정교회 양식으로 그려진 성화들.nbsp여러 가지 양식의 궁전들이 있었는데 다 보지는 못하고, 안내해주시는 분이 무기궁 안에 있는 박물관은 꼭 볼만 하다고 추천하셔서 빠른 발걸음으로 관람하였습니다. 왕과 왕비의 화려한 옷과 마차, 장식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왕궁의 사치스런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왕의 호화 생활을 위해 백성들이 참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도 동양에는 ‘왕은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정신이라도 있었는데 서양은 그런 면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하시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비치시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 것은 심리적으로 보면 열등의식”이라 말씀하셨습니다.nbsp참새언덕에 올라 모스크바 시내 전경을 잠시 살펴보니 오후1시가 다 되었습니다. 오후4시부터 강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한국 식당인 서울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강연은 ‘루스까야 빼스냐 소극장’ 이라는 곳에서 열립니다. 시내 곳곳의 축제로 인해 차량이 통제되어 강연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한 후 많이 걸어서 겨우 강연장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강연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도 대부분 멀리서 주차를 하고 걸어오셨다고 합니다.nbsp강연은 50여명이 참석하여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강연 준비는 모스크바 대학교 한인 학생회 분들이 일일 봉사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김혜경씨 혼자서 준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모스크바 대학교 학생들 덕분에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nbsp▲ 모스크바 강연이 열린nbsp루스까야 빼스냐 소극장.nbsp스님께서는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모스크바에 처음 왔습니다. 아무 인연도 없었는데 강연을 준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한국과 러시아의 과거 역사 속에서의 관계에 대해 먼저 법문을 해주셨습니다.nbsp“1894년,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해서 청나라가 졌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었는데, 청나라가 전쟁에 짐으로 해서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이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종 황제는 나라의 운명이 일본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르죠. 이것이 우리 역사에 러시아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첫 번째 관계였습니다.nbsp이런 문제로 인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가 각축을 벌이게 됩니다. 당시에 러시아는 동진 정책과 남진 정책을 써서 부동항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남쪽으로 내려오려고 했고, 서쪽으로는 흑해 연안에 진출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막으려는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막으려 했습니다. 단순히 러시아와 일본 간의 갈등이 아니고 그 배후에는 영국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과 러시아가 충돌한 1904년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할린 섬을 일본에 할양하게 됩니다.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함으로 해서 우리의 운명은 전적으로 일본에 넘어가게 됩니다.nbsp그리고 한반도를 일본이 장악하는 것에 대해서 일본과 미국이 합의를 봅니다. 당시에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였는데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함으로 해서 필리핀을 미국이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을 일본이 양해하는 대신에 한반도를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미국이 양해하는 카스라테프트 협약을 맺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참 묘합니다. 미국은 1905년에 카스라테프트 협약을 통해서 한반도의 지배권을 일본에게 양해하고, 또 미국은 1945년에 러시아와 함께 한반도를 양분하는 일을 하고, 지금은 또다시 중국과 한반도 문제를 우리의 등 너머에서 어떻게 결정할지 사실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를 위기에서 지켜준 중요한 은혜 국가이기도 하고 우리의 운명이 고난에 처하도록 방조한 국가이기도 한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nbsp어쨌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게 되고 결국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양해하게 되고 그러면서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급격하게 일본 지배로 넘어가게 되죠. 군대가 해산되고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됩니다.nbsp다음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수립된 소비에트 정권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갖고 있었던 식민지 지배를 포기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우리나라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마치 러시아가 약소국가들의 독립운동에 은혜로운 국가처럼 비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동인을 비롯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에 와서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초기 사회주의자가 됩니다. 독립운동의 강력한 후원 국가로서의 러시아는 당시 1920년 후반과 1930년대 무렵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의지하게 되는 국가였습니다. 또 원래 러시아를 비롯한 소비에트 국가들의 세계 전략은 민중혁명을 해야 하지만,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3세계 국가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에 투쟁하는 문제에 있어서 부르지아지와 협력할 수도 있다는 국공합작을 결의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으로 나타나고 우리 역사에서는 1927년에 신간회라는 진보와 보수가 함께하는 독립운동 조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nbsp그 다음에 2차세계대전에서 최대의 피해국가가 러시아였습니다. 전체 사망자의 절반이상이 사실 러시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최대의 피해국가이면서 나치의 파시즘이라는 야욕을 무산시킨 최고의 공헌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럽에서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동서 분할로 나타났다면 한반도에서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와 군정이 실시되고 이것이 남한에는 미국의 이익에 준하는 정부인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북한은 소비에트 정권을 지지하는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게 됨으로해서 한반도가 분단이 되게 되고, 결국 6.25 전쟁이라고 하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비참한 전쟁을 가져오게 됩니다. 또 1953년 휴전을 계기로 해서 정전협정을 맺어서 지금까지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남북이 서로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nbsp1988년 이후 한국에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북방정책이 시행되게 됩니다. 1989년에 헝가리, 폴란드와 국교가 수립되고 러시아와도 국교가 수립되면서 여러분들이 러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대부분 북한 학생들이 러시아에 유학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중요한 간부들은 러시아 유학생들이 많습니다. nbsp이런 과거 역사를 가진 나라일 뿐만 아니라 아직도 한반도의 중요한 주변 4대 강국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국과 중국에 비해서는 영향력이 비해서는 떨어지는 상태입니다만 우리 한반도의 통일을 생각해볼 때 우리가 절대로 배제할 수 없는 큰 세력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재 한국은 러시아가 가질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다소 과소 평가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러시아의 힘을 외교적으로 적절하게 활용하는데 좀 소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그런데 여러분들이 정부의 지원 없이 개인적으로 러시아에 와서 적응을 해나가고 있고, 앞으로 여러분들의 역할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큰 영향을 주지 않겠나 예상을 해 봅니다. 이국 생활에 조금 적응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자리를 잘 잡으셔서 여러분들 개인에게도 성공적인 삶이 되기를 기원하고, 또 개인의 삶을 넘어서서 여러분들의 고국인 대한민국이 다시는 전쟁이 없는 항구적인 평화가 이뤄지기를, 또 더 나아가서는 한반도가 통일이 되는데 여러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당부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이런 인연이 되어서 러시아에 대해서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nbsp강연에서는 총 5명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남을 잘 도와주는 성격인데 도와주면서도 스스로가 늘 스트레스를 받아 고민인 분, 만족하며 사는 것과 노력하는 것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는 분, 세월호 사고의 해결이 흐지부지 되어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데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묻는 분, 과거에 비해 한국에 대한 러시아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좋아졌음을 이야기해 주시는 분, 남편으로서 또 가장으로서 어떻게 남은 인생을 살면 좋을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이 있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질문자들의 답변에 모두 답변해 주신 후, 강연을 마무리 하며 특별히 강연 준비를 위해 봉사한 모스크바 대학교 학생들을 위해 격려의 말씀도 해주셨습니다.nbspnbsp“공부는 항상 궁금해 하고 재미있는 마음을 내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꾸 내일을 생각하면 오늘을 헛되이 보내게 됩니다. 오늘 하루가 마치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최선을 다하라고 해서 이를 꽉 물고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밖에 못산다면 뭐하고 살겠어요? 지금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산다면 재미있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 밖에 못산다면 공부하는 학생들은 다 공부를 그만두겠죠? 내일 하루 밖에 못 산다고 해도 ‘오늘 하고 있는 이 일 밖에 다른 할 일이 없다. 이 일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다’ 이런 자세로 삶에 임해야 오지 않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 현재에 충실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모스크바 유학을 재미있고 즐겁게 하기 바랍니다. 오늘 봉사활동 해준 것에 대한 선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nbsp강연은 무려 3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스님의 명쾌한 설법에 모두들 다들 감사해 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책사인회와 더불어 오늘 자원봉사 해준 모스크바 대학교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했습니다.nbsp▲ 오늘 강연 진행을 위해 봉사해준 모스크바 대학교 학생들강연장을 빠져나오니 저녁 7시, 아직 1시간 정도 시내를 더 둘러볼 여유가 생겨 붉은 광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모스크바 시의 날 행사로 인해 도로가 통제되어 광장 안으로 가보진 못했습니다. 저녁 식사 장소인 한국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바실리 대성당이라는 곳을 경유했습니다.nbsp바실리 대성당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황제였던 이반 4세가 러시아에서 카잔 한국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며 봉헌한 성당인데, 1555년 건축을 시작하여 1560년 완공했다고 합니다. 47미터 되는 팔각형의 첨탑을 중앙으로 하여 주변에 8개의 양파 모양의 지붕들이 배열되어 있어 그 독특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반 4세는 완공된 성 바실리 대성당의 모습에 반해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두 번 다시는 못 짓게끔 건축을 담당했던 바르마와 보스토니크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하는 전설로 널리 알려진 성당입니다.nbsp▲ 바실리 대성당nbsp너무 늦은 시간이라 안에 들어가보진 못하고 밖에서 풍경만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강연을 준비해 주신 분들, 유적지를 안내해 주신 분들과 함께 한인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식사를 한 후, 밤10시에 기차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nbsp▲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이동오늘은 밤11시50분 기차로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밤새 상트페트르부르크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내일 아침 7시에 상트페트르부르크에 도착합니다. 내일은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2014.09.08. 26,759 읽음 댓글 33개

2014.9.5 세계 100회 강연(11) 독일 베를린

▲ 베를린 장벽 앞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열한번째 강연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새벽5시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인 회장님 댁에서 정성껏 차려준 아침을 감사히 먹고, 새벽6시에 차량에 탑승하여 독일 베를린을 항해 출발합니다.nbsp시원하게 뚫린 폴란드의 고속도로를 따라 5시간을 달려 11시쯤 베를린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nbsp저녁6시에 강연이여서 시간 여유가 있어 독일 분단의 상징적인 장소 몇 곳을 방문해 보기로 했습니다.nbsp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통일 전 냉전이 최고조로 달했던 검문소인 ‘체크포인트 찰리’입니다. 동서 벨를린 국경 검문소는 체크포인트 알파, 체크포인트 브라보, 체크포인트 찰리 3곳이 있었는데, 각각 프랑수군, 영국군, 미국군 통제 아래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미군이 관할하던 베를린 장벽의 일부입니다.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다시 설치된 이곳은 베를린을 찾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 때 냉전의 중심이였고 금방이라도 불을 뽑을 것 같은 미국과 소련의 탱크가 마주했다는 장소였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군복을 입고 검문소를 지키는 흉내를 내고 있는 군인 2명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nbsp▲ 냉전의 상징적 장소였던 체크포인트 찰리nbsp다음은 베를린 장벽 추모관으로 갔습니다. 장벽이 있던 자리와 그 부근을 보전하여 분단의 비극을 후대에도 전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곳입니다. 장벽의 모습을 유지한 것이 있는가 하면 철골만 남은 것도 보였습니다. 장벽을 넘다가 사살된 이들의 사진도 간간히 보여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장벽 주위를 빙 둘러보신 후 조용히 장벽 앞에 서서 간절히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 그리고, 희망편지 카카오스토리에 전해줄 스님의 인사말을 동영상으로 전하기 위해 촬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 베를린 장벽 앞에서 전하는 말씀입니다.“잘 지내시죠? 저는 세계 100회 강연을 출발해서 이제 11일이 지났습니다. 오늘은 독일 베를린에서 강의가 있는 날입니다. 바르샤바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서 베를린에 도착해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이곳 베를린 장벽이 있는 곳입니다.nbsp독일은 이미 20년 전에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 독일을 이루고 유럽 연합의 중심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단 70년이 다가오는데도 아직도 통일은 고사하고 남북 간의 평화와 교류 협력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 정세는 빠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장벽 앞에 서서 우리도 하루 속히 통일의 꿈을 키워나가길 기원해 봅니다.nbsp이 장벽이 무너지듯이 우리의 휴전선도 무너지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서 통일 한국의 완성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공동체를 이뤄서 21세기 새로운 아시아 시대를 여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nbsp여러분께 통일을 염원하며 베를린 장벽 앞에서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다같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염원합시다.”다음은 유대인 학살 기억 조형물을 둘러보았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을 잊지 않고 그와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세워진 공간으로, 다양한 높이의 2711개의 시멘트 기둥이 둘쭉날쭉 세워져 있어 마치 희생된 유대인들의 묘지를 연상하게 해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는 곳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조용히 이곳을 둘러보시고 “반성을 하게 되면 반성을 하는 쪽한테 이익이 된다” 하시며 독일이 비록 전범 국가이지만 자신들의 만행을 반성하고 어떻게 피해국가들과 관계를 회복시켜 갔는지 상기 시켜 주셨습니다. 또 일본이 아직도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이 부족함도 지적하셨습니다. nbsp▲ 유대인 학살 기억 조형물다음은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 앞 공원에 들러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나무 그늘이 있는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어제밤 전기 밥솥으로 해놓은 따뜻한 밥과 김치 등 몇 가지 반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nbsp▲ 국회의사당 앞 공원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식사 후 오후에는 통일 독일의 상징적인 건물 국회의사당과 브라덴부르크 성문, 그리고 1953년 동베를린 시민들이 “우리는 같은 민족” 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궐기했던 역사적인 현장인 6월17일의 거리와 전승 기념탑을 차례대로 둘러보았습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이번 가을 불교대학 입학생들을 위한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촬영했고, 브란덴부르크 성문 앞에서는 경전반 입학생들을 위한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촬영했습니다. 그런데 햇빛이 너무 강해서 촬영에 다소 어려움이 있어서, 아마 모레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가서 다시 촬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nbsp▲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의 옥상은 유리로 된 돔 형태로 만들어져 있어 방문객들이 이곳에 올라 유리 바닥 아래로 국회의원들이 회의하는 모습들을 지켜볼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nbsp▲ 브란덴부르크 성문. nbsp178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령으로 지어졌고, 문 위에는 사두마차를 끄는 승리의 여신상이 그 위엄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광화문 광장처럼 독일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구심점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nbsp오후4시에는 베를린정토회 장서희 보살님 댁에 들러서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보살님이 정성껏 차려주신 된장국과 반찬들을 먹고 오늘 강연이 열릴 베를린 자유대학 강당으로 향했습니다.nbsp강연은 오후6시에 시작하였습니다. 총 180명이 참석하여 지금까지 진행된 유럽 강연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뤘습니다. 베를린정토회 회원 분들이 곳곳에서 역할분담하여 매끄럽게 행사가 잘 진행되었습니다.nbsp총 7명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기 싫은 마음이 들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유학을 왔는데 부모님의 도움을 계속 받고 싶은데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고민인 분,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유학을 왔는데 지금은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잘 서지 않아 고민인 분, 하루에도 수차례 마음이 들쑥날쑥 하는데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방법을 묻는 분, 오늘 강연장에 젊은 청년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그 의미를 스님께 묻는 분, 딸아이와 불편한 관계 때문에 힘들다는 분 등 많은 질문들에 대해 스님께서는 쉽고 편안하게 질문자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nbsp오늘은 그 중에서 첫 번째로 나왔던 질문인 독일인이 스님께 한 질문과 그 내용을 소개합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신 후 성인이 된 지금 다시 어머니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독일인 남성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입니다. 통역은 질문한 독일인의 부인인 한국 여성분이 즉석에서 해주면서 문답이 진행되었습니다.nbsp“안녕하세요. 저희는 하노버에서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열세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을 하셨어요. 그 이후로 어머니가 연락을 두절하셔서 지금 20년 지났는데도 연락이 안됩니다. 지금 어머니가 어디 사시는지도 알고 있고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것을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제가 찾아서 만난다고 해도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어머니와 관계를 엮어 나가야 할지 궁금합니다.”nbsp“첫째, 이미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설령 부모님이 계셔서 나를 키워주고 돌봐주고 했더라도 이제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릴 때 헤어져서 지금 보고 싶고 아쉽고 하지만, 이미 성년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nbsp부모님이 나를 낳고 키워주고 지금 다 살아계셔도 스무살이 넘어서 성년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야 해요. 독립을 한다는 것은 관계를 끊고 지내도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스님들이 스무살이 넘어서 출가를 하게 되면 집안과 관계를 완전히 끊고 아예 만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효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질문자가 스무살 이하라면 달라요. 그런데 질문자는 스무살이 넘었기 때문에 어릴 때 부모와 헤어졌던 안 헤어졌던 관계없이 스무살이 넘으면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해야 합니다.nbsp둘째, 그런데도 어머니가 계속 보고 싶다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을 못 들어줄 일은 아닙니다. 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서 잘 계시냐고 하면서 제가 어머니가 보고 싶으니까 한번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는 보기 싫다” 하면 “어머니께 제가 인사드리려고 전화를 했습니다. 저를 낳아주시고 열 살까지 저를 키워주셨는데 제가 감사 인사를 제대로 못드렀습니다. 전화로라도 감사인사 드리겠습니다. 낳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인사를 드리고 관계를 끝맺음하면 됩니다.그런데 어머니가 “그래 한번 보자” 하고 연락이 오면 만나면 됩니다. 만나서 아무 다른 얘기는 하지 말고, “어머니께서 저를 낳아주시고 열 살까지 잘 키워주셔서 지금 제가 성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를 한 번도 못드려서 그래서 뵙고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절을 하면서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면 됩니다. nbspnbsp그 다음부터는 어머니가 “또 보자” 고 하면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만나자고 요구하지는 마세요. 왜냐하면 어머니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 자식인 내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질문한 독일인과 한국인 부부는 스님의 답변을 듣고 밝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부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 강연은 3시간 동안 진행되어 스님께서 많은 이야기들을 애정 있게 들려주어 베를린 교민들 모두 감사해하고 기뻐했습니다. nbsp스님께서는 강연을 마치고 책 사인회를 하며 참석한 교민 분들과 인사를 나누신 후, 수고한 봉사자들과 기념사진도 촬영하고 마음나누기도 함께 하였습니다. 강연 준비하느라 수고하신 베를린정토회 회원 분들은 “작은 역할이라도 맡아서 잘 쓰일 수 있어 즐거웠다” 며 소감을 나눠주셨습니다.nbsp내일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강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밤12시30분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가는 일정입니다. 강연장을 뒷정리하고 비행기에 실을 짐 정리를 간단히 한 후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네비게이션에서 목적지를 제대로 입력하지 못해 계속 어려움을 겼었으나, 스님께서 아이패드로 지도를 보시더니 가장 빠른 길을 바로 찾아내어 주셔서 무사히 제시간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지난 12일간 사용했던 렌트카를 반납하고,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출발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공항에서 대기하는 동안 원고 교정을 보신 후 비행기에 탑승하셨습니다. 내일은 모스크바에서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2014.09.08. 25,939 읽음 댓글 34개

2014.9.4 세계 100회 강연(10) 폴란드 바르샤바

▲ 폴란드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 앞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열 번째 강연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날입니다.nbsp체코 프라하에서 하룻밤을 묶고 새벽5시에 폴란드 바르샤바로 출발합니다. 오늘은 700km를 달려갈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 중 150km 이상을 국도로 달려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어 일찍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체코를 벗어나 폴란드 국경을 지나니 일직선의 고속도로가 계속 펼쳐졌습니다. 도로도 깔금하게 새로 잘 닦여져 있어서 덜컹거리지 않고 편안하게 계속 달릴 수 있었습니다.nbsp오전10시30분 무렵, 휴게소에 내려 일찍 점심을 먹었습니다. 날씨도 화창하고, 새벽에 전기 밥솥으로 해놓은 따뜻한 밥과 김치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또 작은 도시를 지나갈 때 스님께서 손수 빵집에 들러 빵을 사오셔서 함께 먹기도 했습니다.nbsp▲ 이동 중 휴게소에서 먹는 점심 식사2차선 국도가 계속 막혀 오후3시가 다 되어서야 바르샤바 시내로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고전풍의 오래된 건물들이 중심가에 자리 잡은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곳곳에서 최신식 빌딩들이 건축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나치 군에 의해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전후 폐허 위에 재건한 도시라고 하니 높은 빌딩들 속에 보이지 않은 아픔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nbsp오후5시까지는 강연장에 도착해야 해서 유적지를 둘러볼 시간 여유가 없었습니다. 바르샤바의 상징적인 건물인 문화과학궁전과 민중봉기박물관 2곳만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문화과학궁전은 1955년 전후 폐허 위에 가장 먼저 상징적으로 건축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도시 전체가 나치군에 의해 파괴되고 성한 건물이 없었는데, 구소련 연방이 폴란드 국민들에게 주는 선물 형식으로 건축된 것이라고 합니다.nbsp▲ 문화과학궁전nbsp바르샤바의 역사적 아픔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민중봉기박물관을 찾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참히 파괴되었던 바르샤바의 당시 상황을 3D 영상과 사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박물관을 모두 둘러보시고 “전쟁은 이기고 지는 것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이런 비극을 가져오게 하는 것” 이라 하시며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은 없어야 하고,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다” 며 짧게 소감을 말씀하셨습니다. nbsp▲ 2차세계대전으로 파괴된 바르샤바의 모습을 보여주는 민중봉기박물관nbsp오후 5시가 다 되어서 겨우 겨우 길을 찾아 폴란드 한국문화원에 도착했습니다. 문화원 앞에는 권영관 폴란드 한인회 회장님과 김현준 한국문화원장님이 스님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nbsp문화원에서 준비해 준 저녁 도시락과 한인회 불자모임에서 준비한 떡을 감사히 먹고 곧바로 강연 준비를 하였습니다. 폴란드 한인회 불자모임에서 7명이 나오셨는데, 매월 1회 정기법회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강연을 준비할 때도 많은 역할을 해주셨습니다.nbsp오후 6시30분에는 재 폴란드 한국대사님 부부가 강연장을 찾아오셔서 스님과 함께 차담을 나누셨습니다. 특히 대사님의 사모님은 평소에 스님의 유튜브 즉문즉설을 자주 듣는 열성펜이라 하시며 스님을 만나뵙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셨습니다.nbsp▲ 폴란드 대사님 부부nbsp대사님은 스님께서 매일 1개 도시를 이동하며 세계 100회 강연을 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하면서 스님의 건강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면서 “폴란드 교민들을 위해 행복을 나누어 주심에 무척 감사하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셨습니다. 대사님 부부는 강연이 끝날 때까지 맨 앞자리에서 스님의 설법을 함께 경청하셨습니다.nbsp한국과 폴란드는 1989년에 수교해서 올해로 수교 25년째를 맞는데, 현재 폴란드에 거주하는 교민은 1800여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중 바르샤바에 500여명이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LG 공장이 있는 지방 도시를 비롯한 여러 곳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한국 대기업에서 나온 주재원 가족들이 절반을 이루고 있고, 그 외 대사관 공무원들과 개인사업자들, 유학생들이 거주해 있다고 합니다. 개인 사업을 하는 교민들은 주로 식당업을 많이 하시는데 한류의 영향으로 한식과 일식이 호응이 좋은 편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잠시 머물렀다 가는 주재원 가족들이 많다 보니 교민 사회의 전체적인 안정성은 조금 떨어지지 않나 싶었습니다.nbsp▲ nbsp강연 시작 전 인사말을 해주시는 폴란드 대사님nbsp저녁7시부터 시작된 강연은 총 79명이 참석하여 빈자리 없이 꽉 찬 상태에서 활기차게 진행되었습니다.nbsp아이가 한국에서 일어난 윤일병 사건을 보고 국적을 포기하고 군대를 가기 싫어한다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결혼 10년 차인 가정 주부인데 남편이 밖에 나가서 일도 좀 하라고 해서 고민인 분,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남편과 성향이 맞지 않아 짜증이 자주 일어나서 고민인 분, 기독교를 신앙으로 갖고 있는데 불교 신앙을 갖고 있는 아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과연 희망이 있는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있었습니다. 특히 7살 아이가 번쩍 손을 들고 “빙하가 녹고 있어 지구 환경이 걱정돼요” 라고 질문에 대중들의 웃음을 자아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아이에게 왜 빙하가 녹고 있고 지구온난화를 막으려면 어떤 환경실천을 해야 하는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자상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nbsp오늘은 그 중에서 폴란드에서 자란 아이의 교육 문제에 대해 질문한 한 어머님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폴란드 남편과 살고 있어요. 폴란드 식으로 아이들이 배우고 있어요. 한국의 문화에 대해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데, 한국말도 하나도 할 줄 모르는데 어렸을 때 한국에 대해서 조금씩 이야기해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게 좋을지, 나중에 대학 다니고 커서 관심을 가지게 할지, 그냥 놔두는 게 좋을지요?”nbsp“애국적인 관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아이가 폴란드어 밖에 모른다던지, 폴란드어와 영어 밖에 할 줄 모른다는 것이 이 아이의 미래에 훨씬 활동 영역을 넓혀줄까요? 한국어까지 자유롭게 할 줄 아는 것이 이 아이의 미래에 선택의 폭을 넓혀줄까요?예전에는 미국에 있는 교민 2세들이 한국말을 거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30년 전에 교민 1세대가 미국에 갔을 때는 한국이 굉장히 가난했지 않습니까. 첫째는 1세대가 먹고 살기 바빠서 아이들 관리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둘째는 한국에 태어나서 살던 부모도 미국이 좋다고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에 태어난 아이가 미국에서 살지 한국으로 갈 일은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한국말을 안 가르치고 한국 문화도 안 가르쳤습니다. nbsp그런데 지금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교민 아이들은 거의 다 한국말을 잘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그것은 미국에 사는 교민 아이들이 한국말까지 할 줄 아는 것이 자신의 직업 선택과 활동에 유리해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불리한 것이 아니라, 한국말을 할 줄 앎으로 해서 삼성, 엘지, 현대 등 한국 기업에 취직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해졌습니다. 한국의 국가적 위상이 그만큼 높아짐으로 해서 교민들의 문화가 바뀐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통일이 되면 더 크게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통일이 안 되어도 한국의 국가적 위상은 지금 세계 14위 정도인데, 아마 통일이 되면 10위권 안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거든요. 그리고 군대에서 일어난 폭력이나 세월호 사고 등 여러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한류 등 여러 가지 긍정적인 측면도 굉장히 많거든요.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습니다.nbsp그런 면에서 아빠는 폴란드를 이야기하고 엄마는 한국을 이야기하는 갈등 구조가 아니고, 오히려 어릴 때부터 폴란드인으로 살면서도 자연스럽게 한국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아이의 미래에 훨씬 유리합니다. 그리고 한국문화나 글을 배우게 할 때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어릴 때부터 편안하게 접근하는 게 좋습니다. 엄마가 조금 더 지혜롭다면 자연스럽게 1,2년 만에 한 번씩 한국에 데려가서 한국 여행도 하고 한국 문화도 체험하게 하면 좋습니다. 본인이 관심을 가지면 한글학교도 다니게 하고, 폴란드에서 대학을 다니더라도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오게도 하고, 이것이 이 아이가 폴란드인으로 성장하는데도 훨씬 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nbsp대신 강요를 하면 안 됩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가 아이하고 얘기할 때 한국말로 얘기하면 세 살 때까지는 각인 작용이 일어납니다. 또 어린이 때는 각인에 준할 만큼 기억이 오래 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편안하게 엄마가 한국말을 씀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런데 엄마가 몰라서 그렇게 안 하고 폴란드식으로 키웠다면, 그래도 엄마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의 무의식에는 한국의 까르마가 깔려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자연스럽게 접근하면 도움이 됩니다.nbsp그런데 나이 들어서 갑자기 접근하면 아이가 당연히 거부 반응을 일으키죠. 그래서 돈이 조금 들더라도 한국에 여행을 가서, 설악산도 구경하고, 경주도 다녀오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한국 영화도 보고, 이렇게 하면서 아이에게 한국에 대해 조금 호기심을 유발시키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집에서도 엄마가 한국말을 쓰거나 한국 얘기를 하거나 해서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호기심을 먼저 불러일으킨 후에, 본인이 스스로 한국말을 한번 배워볼까 할 수 있도록 자발성을 일으키는 것이 학습 효과가 높습니다. 그래서 동기유발을 자꾸 해주세요. 아이와 대화하면서 엄마가 지혜롭게 기회 제공을 해줘야 합니다.nbsp요즘 한국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폴란드 사람들도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고 배우잖아요. 그런데 왜 엄마가 한국 사람인데 그런 기회를 제공 못할까요? 만약에 엄마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가 더 한국에 거부 반응이 있다면, 엄마에 대한 거부 반응 때문에 그래요. 엄마를 싫어하는 감정을 아이가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면 한국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만약에 그런 문제라면 엄마가 반성을 해야 합니다.nbsp그러니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여행을 한번 다녀오세요. 너무 한꺼번에 많이 가르칠려고 하지 말고, 아이가 한국에서 좋아할 만한 역사 유적이나, 문화체험을 하게 하면서 아이에게 호기심을 유발시켜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시간될 때 아이를 여기 폴란드 한국문화원에 데리고 나와서 차도 마시고 놀고 하면 좋겠다 싶어요.”nbsp스님의 답변에 질문자도 밝게 웃었습니다. 외국에서 다문화 가정을 이루게 되면 아이 교육 문제가 늘 고민이 되기 쉬운데, 스님께서 지혜로운 방법을 알려주셔서 참석한 교민들도 모두 공감하며 기뻐했습니다. nbsp강연을 마치고 책 사인회를 하며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강연 준비를 위해 수고한 봉사자들과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폴란드 대사님 부부도 끝까지 남으셔서 함께 기념촬영을 했습니다.nbsp오늘 숙소는 권영관 한인회장님 댁입니다. 숙소로 돌아오니 밤11시가 넘었습니다. 짐을 풀고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한인회 회장님 부부는 스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데도 꼭 아침을 먹고 떠나시라고 밤을 세워 식사 준비를 하시고 계십니다.nbsp▲ 권영관 폴란드 한인회장님 댁 가족들nbsp스님께서는 늦게까지 한국에서 메일로 보내 온 보고서와 원고들을 점검하시며 업무를 보시다가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내일은 독일 베를린에서 세계 100회 강연 중 열한번째 강연이 열립니다. 베를린에서 계속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2014.09.06. 27,274 읽음 댓글 31개

2014.9.3. 세계 100회 강연(9) 체코 프라하

▲nbsp소련의 침략에 대한 저항하는 뜻으로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하여 목숨을 끊은nbsp얀 팔라흐 학생의 추모비.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아홉 번째 강연이 체코 프라하에서 열리는 날입니다.nbsp헝가리 주재원 가족인 이송혜 보살님 댁에서 아침식사를 맛있게 하고, 오늘도 어김없이 6시에 렌트카에 몸을 싣고 먼길을 달립니다. 오늘은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뒤로 하고 체코 국경을 넘어 프라하로 갑니다.nbsp도로 포장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덜컹거리는 고속도로를 한참을 달려 오전11시쯤 프라하에 거의 다 와서 휴게소에 들렀습니다. 도심에서 곧바로 유적지를 둘러볼 예정이여서 점심식사를 휴게소에서 하고 가기로 했습니다. 최말순 보살님이 어젯밤 전기밥솥으로 준비한 밥에 현지 교민들이 주신 김치, 김, 명이 나물을 반찬으로 뚝딱 한그릇씩 하고 프라하 시내로 들어섰습니다.nbsp먼저 오늘 스님 일행이 묵을 숙소인 Euro Wings 호텔에 짐을 풀고, 유적지 방문을 위해 시내로 나왔습니다. Euro Wings 호텔은 현지 교민인 김형수 거사님이 운영해 오고 있는 곳입니다.nbsp▲ 프라하 강연을 준비하고, 유적지 안내를 해주신 교민 네 분. 왼쪽부터 김형수님, 박미영님, 고주영님, 백승구님. nbsp오늘 프라하 유적지 방문 일정은 현지 교민 분들의 정성스런 준비 덕분에 짧은 시간에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프라하에서 여행 가이드업과 락 밴드 생활을 병행하며 살고 있는 백승구씨의 안내로 프라하의 핵심 유적지만 콕 짚어서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여행 위주의 설명이 아니라 역사적인 의미와 맥락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셔서 더욱 뜻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nbsp먼저 체코의 민족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시민회관에 들렀습니다. 체코는 400년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는데, 1880년에 이르러 도서관 사서들이 주축이 되어 민족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많은 역사서들이 슬라브족의 관점이 아닌 게르만족의 관점에서 채택되고 쓰여졌는데, 도서관 사서들이 역사자료를 새롭게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소설, 오페라 등이 만들어지면서 문화부흥운동이 일어나고, 그런 문화운동의 필요성으로 이 시민회관이 1912년에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체코 독립선언문이 맨 처음 낭독된 곳으로도 유명한 장소라고 합니다. nbspnbsp▲ 체코 민족문화운동의 부흥지인 시민회관 앞에서.nbsp쇼핑거리를 따라 주욱 걸어, 바츨라프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수백년 동안 체코인들은 합스부르크, 나치, 소련의 침략에 시달렸는데, 바츨라프 광장은 체코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장식한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길게 경사를 지며 이어진 광장의 중앙에는 성 바츨라프 동상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성 바츨라프 왕이 체코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곳에서 역사적인 활동이 많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nbsp▲ ‘프라하의 봄’으로 세계에 알려진 체코의 역사적인 광장. 바츨라프 광장.nbsp1차 세계대전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되면서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독립이 바츨라프 광장에서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1938년 9월 뮌헨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나치 독일이 슈덴텐란트를 병합하게 되고 수많은 체코 지식인들과 8만명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1968년에는 공산당 서기장 두브체크가 ‘인본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후일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개혁정책들을 도입하면서 소련군 및 바르샤바 조약군들이 수많은 탱크를 몰고 프라하를 점령하게 됩니다. 1989년에는 고르바쵸프가 페레스트로이커 정책을 발표했고 그해 11월 9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체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11월17일 프라하에서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이 경찰들에게 폭력진압을 당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이후 매일 같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11월 27일에는 총파업이 실시되면서 12월3일 공상당 정부와 정권 이양 협상을 벌여, 국민적 합의에 의한 정부가 수립되기에 이릅니다. 이런 평화적 정권 이양을 역사는 ‘벨벳 혁명’이라 부르며 자유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모범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체코인들은 인구 1천만명의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까지 자신들의 정체성을 불굴의 정신으로 이어오고 있었습니다.nbsp그 역사적인 현장이 이곳 바츨라프 광장이었다고 상상하니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지금 젊은 청년들은 아무렇지 않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지만, 오늘이 있기 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니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숙연해집니다.nbspnbsp바츨라프 광장을 뒤로하고 구시가 광장으로 갔습니다. 구시가 광장에는 시계탑이 유명했습니다. 매시 정각이 되면 천문 시계에서 12사도들의 모형과 종을 울리는 해골 모형이 펼치는 이색적인 쇼를 볼 수 있습니다. 정각 5분 전이 되자 갑자기 인파들이 몰리는 재밌는 풍경이 펼쳐졌습니다.nbsp▲ 프라하의 랜드마크인 천문시계.nbsp광장 중심부에는 유럽 종교 개혁의 시조에 해당하는 걸출한 종교개혁가였던 얀 후스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1415년 카를 대학교의 학장이었던 얀 후스가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는데 이로 인해 민중 봉기가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보헤미아는 1419년34년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시초가 되어 100년 후에는 마르틴 루터에 의해 본격적인 종교 개혁 운동이 진행되게 됩니다. 그래서 개신교의 시발점이 바로 얀 후스 라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후 이 기념비는 체코인들에게 있어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nbsp▲ 종교개혁가 얀 후스 기념비가 세워진 구시가 광장. 내년에는 얀 후스가 죽은 지 6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이곳에서 많은 기념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nbsp이 기념비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 제국 시대에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저항을 상징했고, 2차대전 기간에는 나치 침략에 대한 저항을 상징했고, 공산정권 기간에는 타락한 공산당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동상 앞에는 “진실만을 사랑하고, 진실만을 섬기고, 진실만을 말하고, 진실만을 행하라” 라는 얀 후스의 좌우명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네가지 문장이 축약되어서 현재 체코의 국훈은 “진실은 드러난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nbsp다음은 카를 교로 향했습니다. 18세기에 제작된 30개의 조각상들이 돋보이는 이 다리는 1841년까지만 해도 프라하에 하나 밖에 없는 다리였다고 합니다. 다리 중앙에는 성 얀 네포무츠키의 동상이 자리해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라는 바츨라프 4세의 요구를 묵살한 후 카를 교에서 왕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인물입니다. 머리 주위에 별 5개가 금색으로 반짝이는 것이 여러 동상들 중에 가장 눈길을 끌게 했습니다.nbsp▲ 각각의 사연을 가진 조각상들이 아름다운 카를 교.nbsp이렇게 몇몇 상징적인 유적지를 둘러 본 후 체코의 대중교통수단으로 유명한 ‘트렘’과 ‘지하철’을 타고 다시 바츨라프 광장을 찾았습니다.nbsp1969년 소련 침공에 항의해 분신자살을 한 얀 팔라흐, 얀 자이츠를 비롯한 공산 정권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성소가 있는데, 스님께서 직접 추모를 하고 가자 하셔서 다시 이곳을 찾았습니다. 스님께서는 합장을 하고 조용히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nbsp▲ 프라하의 봄, 체코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던진 두 청년을 추모하며.nbspnbsp얀 팔라흐의 죽음은 계속되는 점령에 대한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약 한 달 후인 1969년 2월 25일 같은 장소에서 또 다른 학생 얀 자이츠가 자신을 불살랐고 1969년 4월 에브젠 플로첵이 뒤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저항이 여론을 뒤흔들었지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 상황에 충격을 주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숭고한 정신은 20년 뒤 1989년 벨벳 혁명의 토대가 됩니다.nbsp체코의 역사를 들으니 한국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 놓여 있어서 이런저런 침공을 받았지만 그속에서 희망의 싹을 튀워나가는 민족의 저력이 느껴지는 것이 마치 한국과 흡사하게 느껴졌습니다. nbspnbspnbsp오후 5시에는 체코 교민 분이 운영하는 도쿄식당에 식사 초대를 받아 비빔밥을 먹었습니다. 오후 6시 무렵 강연장인 Vojtecha 성당에 도착하니 체코 교민 분들과 자녀들이 반갑게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스님을 무척 반가워해서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nbsp체코 프라하 즉문즉설 강연에는 총 55명이 참석했습니다. 특히 주 체코 한인경제인연합회 고주영 회장님의 후원과 이곳 한인 성당 박규남 신부님의 적극적인 홍보로 많은 분들이 참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nbsp스님께서는 강연이 있기까지 수고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린 후, 오늘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nbsp총 7명이 질문을 했는데, 그 중에서 60대 남성 분이 강연 맨 마지막에 불평등과 종교에 대해 질문한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불평등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 왜 막내로 태어났는지, 키가 왜 170밖에 안되는지, 다른 사람들은 180이 넘는데... 나는 왜 못 생겼는지, 그리고 세상에는 많이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들이 있고,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고, 이게 과연 세상의 법칙인지요? 하나님과 부처님이 얘기한 세상이 이런 세상인지요?”nbsp“남자에게는 특권이 주어지고 여자에게는 억압이 주어진 세상에서 만약 여자로 태어난다면, ‘왜 내가 여자로 태어났나’ 하면서 억울해하겠죠. 그런데 ‘왜 나는 여자로 태어났나’ 이런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에요. 여자로 태어나고 남자로 태어나는 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여자로 태어났고 남자로 태어났을 뿐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이 남자에게는 특권이 주어지고 여자에게는 억압이 주어지니까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 특권을 갖고 싶은데 못 가지니까 말이죠.nbsp남자, 여자의 차이를 없애버리면, 즉 남자라고 주어지는 아무런 특권이 없는 세상을 만들면 ‘내가 왜 여자로 태어났나’ 이런 질문 자체가 필요 없어져버립니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전생에 죄이거나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남녀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현실로 인정한 상태에서 생긴 의문이라는 것입니다.nbsp신체가 장애인 사람에게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차별을 주니까 ‘나는 왜 장애로 태어났는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종교에서는 “하나님을 안 믿어서 그렇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고 하며 이런 잘못된 현실을 합리화시키는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이 점이 잘못된 것입니다.nbsp그러나 예수님과 부처님은 남자, 여자의 차별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신체 장애에 의해서 인간을 차별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피부 빛깔에 의해서 인간을 차별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키가 큰 것이 좋고, 키가 작은 것이 나쁘다’ 하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키가 큰 것은 큰 데로, 키가 작은 것은 작은 데로 의미가 있습니다. 코끼리는 복이 많아서 코끼리로 태어나고 쥐는 죄가 많아서 쥐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종이 다를 뿐이에요. 얼굴 생김새가 다르지, 저 사람은 더 잘 생겼다 저 사람은 못생겼다가 아니라 그냥 다르게 생겼을 뿐입니다. 진리는 ‘다르게 생겼다’라는 것이지, 누구는 잘생겼다 하는 건 그때 그때 사람들의 관념에 따라 이뤄지는 것입니다.nbsp양반과 쌍놈의 차별이 없어지니까 ‘나는 왜 쌍놈으로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없어지잖아요. 이런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연에는 불평등이 없습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다고 개구리는 잘 못 태어났고 뱀이 더 좋게 태어난 게 아니에요. 그냥 종이 다를 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피부 빛깔이나 남녀와 같이 자연적인 것을 갖고 차별하면 안된다는 겁니다.nbsp돈이 아무리 많아도 인간의 행복도가 개선되지 않습니다. 빈부격차가 커지게 되면 행복도가 굉장히 떨어집니다. 국민 행복을 위해서는 정신 작용에 대한 수련도 해야 하지만, 빈부격차도 낮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경제민주화죠.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첫째 경쟁이 공정해야 해요. 그래서 부의 집중을 막고 격차를 줄여야 해요. 둘째, 경쟁 자체도 못하는 사람들, 어린아이, 노인, 장애인 등에게는 기본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것을 복지사회라고 하죠. 그런 면에서 유럽의 시스템을 잘 연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nbsp이곳 유럽에 나와 있으시면서, 우리보다 잘 산다 못 산다 이런 관점에서만 보지 마시고, 이 사회가 갖는 좋은 점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우리 사회보다 좋지 않은 점은 무엇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서로 나누면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는 게 필요합니다.nbsp부자는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그렇다는 것은 현재의 부를 합리화하는 지배자의 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복을 못 받아서 그렇다는 것도 지배자의 이데올리기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많이 복무해 왔습니다.이런데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 라는 것과 같은 혁명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도대체 키가 작은 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환경적으로 얼마나 좋아요? 옷감도 적게 쓰고 침대도 적어도 되고 에너지 절약에도 도움이 되고요. 선악의 개념이나 좋고 나쁨의 개념이 아닌 “다름”의 개념으로 봐야 합니다. 이런 철학적 정리가 우선 필요합니다.”질문하신 분도 스님의 답변을 듣고 밝게 웃었습니다. 스님께서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종합적으로 정리해주셔서 참 명쾌했습니다. 유럽에서 살다보면 성당과 교회 등 종교생활을 많이 접할 수밖에 없는데,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깊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nbsp강연을 마치고 책 사인회를 가졌습니다. 배낭 여행 중에 스님 강연 소식을 듣고 들렀다며 주머니의 돈을 털털 털어서 ‘새로운 백년’ 책을 구입하는 청년들, 4시간 동안 차를 타고 달려왔다는 주부 분 등 다양한 분들이 참석했음을 사인회를 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한분 한분 눈을 맞추며 인사하고 같이 기념 사진도 촬영해 주셨습니다.nbsp밤11시가 넘어 Euro Wings 호텔로 돌아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700km를 차로 달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세계 100회 강연 중 열 번째 강연이 열립니다. 내일은 폴란드에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2014.09.05. 27,829 읽음 댓글 35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