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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9. 동북아 역사기행 일곱째 날 - 청산리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대성중학교
아침 3시 20분 모닝콜을 시작으로 동북아 역사기행 마지막 날의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어젯밤 숙소가 있었던 연길에서 정각 4시에 출발하여 화룡에 5시 2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화룡에 있는 새벽시장에 들려 오늘 아침 식사거리를 구입하였습니다. 오늘 일정이 바빠서 시장 보는 시간을 20분 주었는데 역사기행 팀들은 능숙하게 먹을 것을 구입하여 버스에 올랐습니다. 며칠 전에 림강에서 새벽시장을 다닌 경험으로 오늘은 맛있는 음식을 과하지 않게 샀습니다. 역시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간접 경험인 것 같습니다. nbsp 오늘 첫 답사지는 청산리 유적지입니다. 화룡에서 청산리 유적지에 오르는 길옆 옥수수 밭 가운데로 멀리 발해의 옛 산성도 보이고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아스라이 느끼다보니 어느덧 굽이쳐 흐르는 해란강이 나타났습니다. 독립군이 일본군을 무찔렀던 청산리전투가 있었던 직소택에 오르려면 왕복 12키로 미터를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비가 온지 오래되어서 비포장도로가 비교적 단단하고 유실된 곳이 없어 버스로 백운평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왕복 4키로미터를 걸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저 해란강 상류의 산언덕을 넘으면 백두산의 고원지대로 연결됩니다”는 말씀으로 스님께서는 이곳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을 피하여 백두산으로 가고자 했던 당시의 독립군들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밀림이 무성한 산길을 굶주림과 추위로 떨면서 그 길을 올랐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졌습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그들의 기상보다는 굶주림에 떠는 나이어린 아들 또래의 남자 아이들의 모습이 더 먼저 떠올랐습니다. 산길을 차를 타고 달리다보니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nbspnbspnbsp현재 조선족 마을은 인원이 점차 줄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 나가는 조선족들이 많아져서 이곳에 있던 조선족 초등학교가 지금은 빈 건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점차 상류로 올라갔습니다. 스님께서는 산기슭에 아늑한 분위기로 자리 잡은 옛 마을 터에 정토법당과 정토수련원을 짓고 아울러 숙박시설을 지어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이곳에 수학여행을 오도록 하려고 계획하기도 했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청소년에게 되찾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도 하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버스에서 하차한 지점은 ‘백운평’이었습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진 일본군이 무고한 양민을nbspnbsp학살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던 터였습니다. 지금은 사람의 흔적은 없고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쑥대밭을 눈으로 직접 보니 가슴이 아련해져 왔습니다. 잠자다가 총칼 앞에 목숨을 잃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생각하니 순간 일본군이 미운 생각이 일어났습니다.nbsp 그곳을 출발하여 스님과 함께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침 이슬로 바짓가랭이가 젖어오는 가운데도 역사기행 팀들은 서둘러 산을 올랐습니다. 어떤 분은 그 바쁜 걸음 가운데서도 길섶에 핀 들꽃을 한 송이씩 꺾으며 산길을 올랐습니다. 아마도 청산리 전투에서 희생된 분들에게 재를 올릴 때 재단에 올리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손길에 들린 들꽃처럼 예쁜 그 분의 정성어린 마음이 느껴지니 올라가는 발걸음이 더 숙연해졌습니다. 예전에 독립군들이 올랐던 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얼음처럼 차가운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널 수 있도록 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nbspnbsp그 다리는 지난 7월에 통일의병 역사기행에 참여하였던 어느 거사님이 남아서 이곳에 다리를 놓았다고 합니다. 그 분의 수고로움으로 놓인 다리로 건너면서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습니다.nbspnbspnbsp물길을 건너고 산길을 돌아 올라가는데 뒤에 중국 공안이 같이 산에 오른다는 안내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발걸음을 더욱 빨리 하여 ‘직소택’에 하나 둘 모여서 독립군들에게 올릴 재준비를 하였으나 대표만 절을 올리고 해탈주를 급하게 낭송하고 마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은 아니나 중국에서는 재를 지내지 못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묵념을 올렸습니다. 묵념을 하기 전 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우리는 묵념을 할 때 독립군의 죽음만 애도하지 말고 역사의 기록에 없는 민간인의 죽음도 함께 애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권력에 의해 자신의 의도 없이 이곳에서 죽어간 일본군의 죽음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다시는 이웃 간에 전쟁이 없어야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을 내면서 그들의 영혼까지도 천도하며 묵념하겠습니다.” 비록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스님의 안내로 그 어느 때 보다도 진심을 모아 묵념을 올렸습니다. 묵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아까 올라오는 길에 한 보살님이 꺽은 한 웅큼의 꽃다발이 나뭇가지에 걸쳐져 있었습니다.nbspnbsp그 꽃다발이 준비한 재를 올리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더 색색으로 예쁘게 보였습니다. nbspnbspnbsp다시 2.5 키로미터를 내려와 버스를 타고 청산리 전투 기념탑 앞에서 내려 간단히 단체사진을 찍고 무산의 철광산을 보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에 있는 양로원과 고아원을 지원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하시기 위하여 이곳에서 도움을 주실 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따로 가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평화재단의 이승룡 국장님의 안내로 철광석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 보이는 화룡시의 남평진에 도착하니 두만강 상류 물줄기를 앞에 두고 북한의 무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산시내 바로 뒤쪽에 회색빛의 철광산이 높다랗게 솟아있고 그곳으로 거대한 트럭이 줄을 지어 달리고 있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트럭이 이곳에 다 모인 것처럼 커다란 트럭들이 가득 길을 메우고 있었는데, 며칠전 압록강변을 하루 종일 달리면서도 차를 보지 못했는데 이곳 무산광산에는 수많은 트럭이 철광석을 실어 중국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곳 무산에서 채취한 철광석은 무산화룡백두산이도백하백산통화로 연결되는 기차로 통화에 있는 제철소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북한이 중국에게 앞으로 50년 동안 철광석을 가져가는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 백두산을 지나는 기차길을 새로 놓아서 이렇게 철광석을 가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땅의 저 철광석이 싼 가격으로 중국으로 권리가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차라리 우리가 가져왔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더 생기지 않도록 우리 정부가 좀 더 북한에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고 바램을 가져보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남평진을 출발하여 오면서 북한주민이 이곳에서 탈북하여 얼마나 인권을 잃고 살아가고 있었는지 설명을 들었습니다. 탈북 남성들의 귀환조치, 여성들의 인신매매, 어린아이들의 꽃제비 생활을 들으니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 사람이 겪는 고통에 나의 작은 힘이나마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합니다.nbspnbspnbsp다시 화룡으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마친 역사 기행 팀은 12시에 대종교 3인묘로 출발하였습니다. 다른 때는 이곳에 올 때 낫을 가져와 벌초를 하였다고 하는데 오늘은 와서 보니 벌초가 깨끗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꾸준히 역사 기행을 다닌 성과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곳에 묻혀 있는 분들은 항일운동의 중심에 계셨던 분들이라 하는데 그분들의 유해가 아직도 이곳 중국 화룡시에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분들의 이름도 몰랐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런 분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업적을 높이 새기는 것이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후손들의 당연한 도리라 생각 하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일송정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일송정으로 가는 도로를 공사하고 있어서 도로공사를 하는 지점에서 멀리 정자를 보고 ‘선구자’노래를 불렀습니다. 비록 일송정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이곳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던 그들의 마음이 가슴시리도록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가족, 고향을 떠나와 낯선 중국 땅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기개를 놓치지 않았던 그분들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 선구자는 그렇게 가슴에 긴 여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nbsp 선구자의 노랫말에 나오는 ‘용두레 우물’을 보고 우리 일행은 옛 대성중학교로 갔습니다. 대성중학교는 그동안 용정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윤동주 시인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활동하신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이 후학을 바르게 육성하는 것임을 깨닫고 이곳에 학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교육받은 이들 중 후에 나라를 위하여 평생을 바치신 분들이 많음을 새삼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 지금 우리나라가 새로운 문명의 주인 되는 역사를 세우기 위해서는 바르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 일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번 동북아 역사기행 동안 두발로 걸으면서 알게 된 배달문명, 환인, 환웅을 거쳐 단군조선, 그리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새로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깨우침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가슴 가득히 생기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우리의 길임을 다시금 각오하게 됩니다.nbsp이렇게 마지막 기행까지 마치고 마지막 강의를 듣기 위해 용정으로 향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아침에 청산리에서 일행과 떨어져서 예전에 스님께서 도와줬던 조선족 사기 피해자들이 그 인연으로 북한 난민을 적극 도와주셨는데 그분들께 점심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연길로 가셨습니다. 만나기로 한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모여 계신 분들이 스님을 너무나 반가이 맞아 주셨습니다. 벌써 20여 년 전 인연이라서 벌써 팔순이 넘으신 분도 있고 제일 젊은 분이 예순이 넘으신 분들이었는데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민족정신이 투철하고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만은 청년보다도 열성적이셨습니다. 이 분들은 아리랑상조협회 소속으로 지금도 나진8729선봉 지역을 오가며 북한 주민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계셨습니다. 회원 중 한 분은 몸이 불편한 남편을 돌보면서 자신은 지난 6개월간 이상 출혈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북한의 일명 꽃제비 아이들을 위해 샤워 시설을 만들어 주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셨다는데 다음 주에 병원에 입원을 하신다는 말을 들으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북한 주민을 알뜰하게 보살펴주는 조선족 동포들이 계셔서 지금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남북 관계의 교량 역할을 톡톡히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인생수업 책을 한분 한분에게 성명을 적어주시며 선물해 주셨고 이 분들도 각자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을 스님께 선물하셨습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하고 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행에게 강의를 해주시기 위해 서둘러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기행을 마친 참가자들과 만나서 역사기행의 의의에 대한 스님의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이런 역사순례를 왜 하느냐? 뭣 때문에 9천년 전, 6천년 전, 천년 전의 이야기를 하느냐? 핵심은 첫째, 지금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길을 모색하기 위함입니다. 그 길을 찾으려면 과거 역사 속에서 어떤 것을 계승하고 어떤 것을 반성할 건가,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좀 더 좋게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지만 그때 그랬으면 하는 후회없이 미래를 맞으려면 과거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자존에 대한 회복도 있어야겠습니다.”nbspnbspnbsp인간 존재는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제는 그제, 올해는 작년, 이렇게 과거의 인연과보로 현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과거를 바로 알면 내일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를 높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과거와 달리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해 나갈 수가 있다, 미래는 우리의 주체성, 자주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역사를 모르는 자는 미래를 살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하시며 역사의식이 없는 자가 미래를 창조할 수 없다,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또한 좋은 씨앗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밭에 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처럼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가려면 현재의 조건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미래에 꽃이 잘 피고 자라기 위해서는 현재의 밭갈이와 씨앗 심는 실천을 어떻게 할 거냐가 중요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현재의 실천을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사관 정립, 현재에 대한 분석과 판단,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전략과 전술, 이를 실천할 주체세력의 역량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갖춰질 때 역사는 타성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체역량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오늘날은 인민의 시대, 민중의 시대이므로 인민이 깨어야 합니다. 민중이 깨지 않으면 특별한 영웅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메시아, 성군, 전륜성왕 등 누군가가 나타나 천하를 구제하기를 꿈꿉니다. 이제는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사람이, 혼자가 아닌 다수가 그런 역할을 하는 모자이크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한 사람의 깨달은 붓다가 아닌 모자이크 붓다가 필요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그리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사회의 방향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개인의 수행에 달려있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며, 사회적 조건을 모두가 행복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빈부격차가 큰 사회에서 인간이 행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경쟁의 공정성과 분배의 공평함을 구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경쟁의 공정성이란 출발선에서의 기회 균등을 말하는 것이며, 여자라고 혹은 장애인이라고, 소수자라고 차별받지 않는 것, 기초교육을 모두 균등하게 받게 하는 것, 경쟁 관점에서의 룰의 공정성과 공정한 관리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경쟁조건을 중소기업이 불리하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게임이 끝났을 때 결과에 대해 평가가 공평해야 한다며 운동회의 달리기를 예로 드셨습니다. nbspnbspnbsp“옛날에는 운동회 때 8명이 뛰면 3등까지만 상을 줬어요. 공책이 부족하니까. 하지만 요즘은 공책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옛날처럼 3등한테까지만 다 몰아주면 불만이 생기겠지요. 그러니까 모두에게 참가상 1권씩을 주고 나머지 가지고 1,2,3등한테 나눠줘야 해요. 이게 최저생계비 보장이고 사회 안전망 구축이에요. 이렇게 게임의 공정성과 분배의 공평함이 구현되어야 복지사회예요. 이건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좌니 우니 하는 것과 상관없어요. 변화한 사회에서 조금만 지혜로우면 알 수 있는 상식이에요.”nbspnbspnbspnbspnbspnbspnbsp이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가 문명사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의 문명에서 교훈을 얻어서 이 문명의 근본적 모순을 진단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그래야 새로운 문명의 선구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우리의 현실을 살피면 우리가 이전 1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분단이 되고 전쟁을 겪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건 그 전 100년이 어리석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100년이 다음 100년을 규정합니다. 아무 손도 안대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결과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nbspnbsp우리가 지금 잘못하면 영구분단, 강대국의 하위변수로 전락하겠지만 잘 하면 이 변화의 시점에서 통일한국을 이룩하여 동아시아의 주인공이 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그런데 분노를 통해서는 잘못된 것을 파괴할 수는 있으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제는 분노를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해야 하며, 그렇기에 남과 북, 남한 안의 성장주도세력과 민주화 주도세력 간의 적대관계를 서로의 공과 과를 인정하는 관계로 전환하고 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통일이 단순히 112가 아닌 3,4,5가 되는 비전을 향해 가려면 독립이 대한제국의 부흥이 아닌 대한민국의 수립이었듯이 통일도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우리가 역사기행을 하면서 이런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것이라 하시면서, 배달문명이 수많은 소수민족을 아울렀듯이 동아시아 문명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명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세계인, 지구인의 개방성을 가지면서 민족 정체성이 있어야 새로운 문명을 선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되었으면 합니다”라는 간곡한 말씀을 끝으로 강의는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남았습니다. 이 역사기행의 끝이 우리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되길 발원합니다. nbspnbspnbspnbspnbsp25일간 단식을 하시고 유동식으로만 복식 중인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안내해 주시고 강의를 해주신 법륜스님께 참가자들이 큰 박수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다음은 참가자들이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별로 한 명씩 대표로 소감문을 발표했는데 각자 받은 감동의 크기가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어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기행 내내 운전 안전으로 고생하신 기사 3분과 가이드 조춘호 선생님과 따님인 조신 님에게 선물을 증정한 후 스탭과 스님의 하루와 강의 속기 적어주신 분, 사진을 찍어주신 분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몇 년 전까지 역사기행을 함께 하셨던 방학봉 교수님이 오셔서 참가자들에게 소개를 하고 간단히 말씀을 들었습니다.nbsp65279nbsp이렇게 전체 일정을 마치고 내일 오전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심양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2014.8.8.동북아 역사기행 여섯째 날 - 발해진, 봉오동, 두만강 유역
동북아 역사기행 여섯째 날이 밝았습니다. 모두 버스에 오르고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로 시작하는 새벽 4시. 오늘도 하루의 여행 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스님. 오늘 지나갈 돈화평야와 목단강에 대해서도 알려주십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만주의 드넓은 벌과 긴 물줄기를 잠시 바라봅니다.nbsp1시간을 달려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다는 ‘요전자 24개석’을 찾아갔습니다. 분꽃, 접시꽃 등이 예쁘게 핀 깔끔한 시골마을 옆길을 지나 옥수수밭 옆길을 한 줄로 들어가 24개석을 보고 나왔습니다.nbsp다시 길을 달려 길림성에서 흑룡강성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고속도로를 지나면 길가를 따라 용암이 막혀 형성된, 길이 23km에 달하는 호수 ‘경박호’를 만납니다. 멀리 북만주 평야가 보입니다. 오래 보고 있어도 참 좋고 부럽습니다. 천혜의 자연이 이렇게나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니 또, 여기에서 우리가 한국에서는 잃어버린 고향의 정겨운 풍경을 만나다니 저 벌판을 뛰어다녔을 유전자에 각인된 무의식이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nbspnbspnbspnbspnbsp남한에서는 1년에 식량이 총 500만 톤 생산되는데 여기 동북3성중 길림성에서만 1800만 톤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북한은 최소 400만 톤만 있어도 식량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이곳은 석탄, 철광의 산지로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우리 한민족에겐 피눈물의 사연을 가진 간도의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발해진 쌀은 청 황제가 먹던 쌀입니다. 이 지역은 용암 위에 흙이 230cm 덮여있는데, 수원이 보장되고 물이 따뜻해서 위도가 높음에도 쌀농사가 가능한 곳입니다. 접근이 금지된 이 지역에서, 청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틈새에 쌀농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조선인입니다. 1860년대의 관리들의 조세징수의 횡포를 피해서 두만강을 건넜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은 ‘두만강 안에 있는 섬’이라는 뜻의 ‘간도’로 불리게 됐습니다. 청나라 건국 후 중국 전역으로 만주족의 지배층이 옮겨가면서 이 지역은 신성한 땅으로 봉금지역이었습니다. 발해의 땅이었으나, 발해 멸망 이후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었던 까닭으로, 지명도 용정을 제외하고는 거의 여진어를 음차한 것입니다. 조8729청 간의 협약으로 현재의 국경이 확정되었지만, 남북통일 이후 이 지역은 국경분쟁의 소지가 있습니다. 중국은 이런 동북아의 230년 후를 내다보고 지금 동북공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이 중국과 협의해 북한을 압박하면 이후 국경협상에서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멀리 내다보며 통일 이후를 생각해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랜 시간 달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당시 발해의 수도 주 하나였던, 상경용천부의 성터. 외성은 토석혼축성으로 한 변이 4km, 전체 16km에 달합니다. 지금은 성벽 위로 백양나무가 자라고 있어 멀리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터 정문 앞길인 주작대로를 따라 외성터 내에 있는 흥륭사로 갔습니다. 흥륭사는 당시 상경용천부에 있던 9개의 절 중 유일하게 유물이 나온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흥륭사의 석등을 먼저 보고, 얼굴과 손가락의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지금은 수리되어 깨끗해지신 부처님의 석상 앞에서 예불을 올렸습니다.nbsp스님이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생겨나지 않기를, 기아로 생존을 위협 받는 북한주민에게 생존권이 보장되기를, 우리의 여행이 원만하기를, 한인하느님, 환웅천황, 단군, 해모수, 고주몽, 대조영, 호국영령, 민주열사, 혁명열사, 사고와 재난으로 목숨을 잃은 영가, 조상 영가의 이름으로” 기원하셨고, 우리도 간절한 마음을 모았습니다. 천 년 전의 역사와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nbspnbspnbspnbsp다음 박물관에서 발해의 영역지도와 궁성 조감도를 보고 내성 길을 걸었습니다. 상경용천부 성터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장안성 못지 않게 큰 규모였습니다. 동궁 앞의 사람 얼굴 모양의 연못을 한 바퀴 돈 뒤, 내성의 궁성으로 들어서 제1궁성부터 제5궁성까지 갔습니다. 뒤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져 앞에서 바라보면 한 눈에 뒤쪽의 궁터가 들어옵니다.nbsp다음은 성을 쌓기 위해 돌을 채취한 자리에 생긴 현무호 호수를 보고, 목단강으로nbspnbsp걸어가 7공교를 찾아봅니다. 7공교는 발해시대 북쪽 거란지역으로 통하는 길에 있던 교각의 흔적입니다만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리만 확인하고 다음 장소로 옮겼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항일유적지인 봉오동 전투 기념비로 이동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실패 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무장독립운동 중 성공적인 전투의 하나였습니다. 버스에서 이 전투를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의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는 감격 어리게 기념비 앞에 서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조선 내에 반일투지를 높이는 데 기여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무장독립투쟁입니다. 이후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졌으나, 우리 선조들은 많은 희생을 거치면서 접경 지역의 중국, 러시아 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 중국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계열이든 민족주의 계열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소중한 독립운동 역사를 민족의 자긍심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nbsp다음으로 버스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하류로 가서 우리나라의 최북단 함북 온성군 풍서리를 건너다 봅니다.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가는 동안 이쪽의 풍요로운 자연과 저쪽의 가난한 자연이 대비되어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두만강 가에서는 97년부터 몇 년간 봄에 얼음이 풀리면 도강하던 탈북민들의 시신이 다수 발견됐다고 합니다.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를 돕는 ‘좋은벗들’의 활동은 그 동포들의 참혹한 모습이 계기가 되었고, 언젠가 이런 민족의 비극이 세상에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북한돕기를 할 때 누군가는 “북한 주민을 다 살릴 수 있나?”하고 물었는데, 스님은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티끌 보아 태산이라고, 살려야 한다. 현실의 일이 한계가 있으나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준비된 상황이 역사적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nbsp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도문시에서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조8729중우호다리가 두만강 압록강의 교각 중 가장 큰 규모랍니다. 기근이 심하던 시기에 이 지역 사람을 통해 옥수수를 트럭에 싣고 갖다 주었다고 하는데 어떤 날은 하루에 수백 명이 기다리기도 했답니다. 이 옥수수는 온성 근처의 탄광과 공장 노동자에게 지원되었고, 그곳에는 국군포로 가족도 있었는데 ‘좋은벗들’이 난민지원 활동을 하던 중, 중국 공안에게 간첩협의로 잡혀 모든 장비를 압수당하고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이때 탈북민을 인터뷰한 자료가 당시 가장 북한난민에 대한 정확한 자료였답니다. nbspnbspnbspnbspnbsp지금도 북한의 식량난을 여전하다고 합니다.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한주민에 대한 지원은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이 만주를 활보했던 발해의 역사를 안고,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의 현실을 아픈 마음으로 보듬어야 할 것입니다.nbspnbspnbspnbsp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이동했는데 이번 기행 중 다녀본 연회장 중 가장 깨끗하고 화려한 곳이라서 모두들 신기해했습니다. 원래 비싼 곳인데 공무원이었다가 퇴직하신 분의 도움으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합니다. 식사 전에 참가자들은 그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 그 분은 법륜스님이 하시는 일에 존경을 나타내며 맛있게 식사하라고 겸손의 미소를 보이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제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 제일 맛있다며 참가자들의 얼굴이 마치 아이들처럼 환해졌습니다. 식사 후 항일독립운동을 주제로 저녁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먼저 조선조 500년과 구한말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정리 말씀으로 강의를 여셨습니다. 조선이 개국하여 임진왜란이 있기 전까지는 평화로웠으나 국란을 겪으면서 외세의 도움을 받았고, 전쟁의 피해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등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배세력이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는 주변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영8729정조 때 개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순조에 이르러 세도정치가 강화되며 가렴주구와 매관매직 등으로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였고 세금을 견디지 못하여 유민이 되었고 홍경래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고, 삼도민란이 일어났지만 이념과 조직이 없는 자발적, 산발적 봉기로 대부분 진압이 되고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혼란기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최제우 선생의 동학이 일어나 아주 빠른 속도로 전파가 되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또한 이 시기의 지배세력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지만 국내적으로는 개혁을, 국외적으로는 개방을 했어야 했는데 국제정세에 대한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고 결국은 수구세력으로 그치고 만 것입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하여 경복궁을 재건한다는 등 백성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했어요”nbspnbspnbspnbspnbspnbsp“외국에 가보고 온 젊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도움을 얻어 개혁을 추진하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어요. 갑신정변이 실패한 것은 이들이 아직 국가 경영을 할 준비도 안되어 있었고 역사의식의 부재로 외세를 등에 업고 한 요인이 컸고 그래서 나중에 이들이 친일세력이 된 것이에요”nbspnbspnbspnbspnbspnbspnbsp이때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서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나 지배세력은 청나라 군대를 끌여들였고 일본과 청의 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조선땅에 들어와 우리 동학혁명군 약 30만 이상을 학살한 과정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 외세에 의한 개혁인 갑오경장, 그리고 이어지는 아관파천, 을사보호조약, 군대해산, 마침내 1910년의 한일합방에 이르는 안타까운 역사의 과정에 대한 말씀에 이어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3.1운동의 실패로 현장독립운동가들은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이곳 만주에 유격부대를 만들어 국내의 일본 초소를 침공하는 전략을 펼치자 일본이 국경을 넘어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한 것이 봉오동 전투, 여기서 실패한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중국영토에 정규군을 보내 독립군을 소탕하려고 한 것이 청산리 전투인데, 이 전투들에서 일본의 주력부대가 수천명이 사상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격부대의 승리는 전투에서의 승리이지 전쟁에서의 승리는 아니지만 일본제국주의의 강력한 부대가 이렇게 크게 패한 것은 엄청난 일이고 3.1운동이 실패로 끝난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nbspnbsp이러한 독립운동이 이후 사회주의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독립운동으로 갈라져 노선갈등이 생기고, 이를 통합하려는 신간회 등의 움직임이 수포로 돌아가고, 분단을 통해 이러한 분열이 심화되어 오늘에 이른 과정을 설명하시면서 이제는 편가르기를 하며 서로 상대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그가 기생이든 승려든, 양반이든 평민이든, 사회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직업이 뭐든 중요하지 않아요. 독립운동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중요해요. 그가 나라를 위해 정말 노력을 했느냐를 보아야 해요. 그리고 젊을 때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변절한 사람을 모두 빼버리면 독립운동한 사람은 얼마 남지 않게 돼요. 역사에 대해서는 포용적으로 바라보아야 해요. 통합을 해야 하잖아요. 과거에 대해서 진실을 밝히되 화해를 하고 앞으로는 우리의 힘을 통일을 위해서 쏟아야 해요”nbspnbspnbspnbspnbsp이 말씀을 하시면서 다만 식민지시대에 친일로 일관하고 해방 후에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분단과 독재와 반민주에 일조한 사람들은 반드시 진상을 밝혀 문책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선을 그으셨습니다. 그리고 일견 실패한 것 같은 역사에 대한 의의를 이야기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동학농민운동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떤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3.1운동이 실패했지만, 없었다면 어떤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4.19도 마찬가지고.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서는 성공한 것이에요. 통일도, 우리가 노력해서 통일을 이루면 좋고, 설령 실패해도 우리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후손들에게 자랑이 되고 성공의 단초가 되는 것이에요” nbspnbspnbspnbspnbsp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이 열등의식과 상처를 치유하고 인류문명의 주인공이 되는 길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독립운동사가 정리가 안되면 일본에 대한 열등의식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힘으로 통일을 한다면 우리의 민족적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고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상고사에 대해 정리한다면 중국에 대한 변방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현대문명에 대한 문제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개인 수행이나 환경 문제 같은 서구에 대한 열등의식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겪은 고통을 경험삼아 가난한 나라를 도울 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돕는다면 서양 사람들보다 더욱 인도적으로 하게 될 겁니다. 자신이 입었던 상처를 치유하게 되면 다른 이들을 이해하게 되고 해결책을 찾게도 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그래서 이 역사기행은 ‘민족사 전체에 대한 치유’라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까마득한 우리 역사의 시원과, 선조들의 진취적 기상과 훌륭한 문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을 현장에서 보고 느낀 자긍심과 감동으로, 민족의 사명인 통일은 물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지금 서있는 이 자리에서 한발짝 나아가는 힘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역사기행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오늘 밤이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입니다. 내일은 저녁식사 후 밤새도록 심양으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버스에서 자게 됩니다. 참가자들은 남은 무박 2일의 일정을 잘 보내기 위해 짐을 정비하고 역시 새벽 4시에 출발하기 위해 서둘러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내일은 청산리 전투터를 시작으로8729 항일항쟁지를 둘러보고 용정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바로 심양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2014.8.7. 동북아 역사기행 다섯째날 - 백두산, 비룡폭포 소천지, 지하삼림, 돈화
오늘은 동북아 역사기행 다섯째 날로서 백두산과 발해 유적지 일부를 돌아보는 일정입니다. 어제 날씨는 좋았으나 남편 산문이 폐쇄되어 오르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인지 4시 50분부터 버스에 오른 참가자들의 표정에서 천지를 보고싶어 하는 열망과 설레임이 느껴졌습니다. 백두산 아래 마을 이도백하는 다른 곳과는 달리 아침 공기가 싸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고 맑아서 상쾌했습니다. 여름 휴가철이 겹친 시기이고 최근 들어 중국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라 사람들이 많으면 고생한다고 아침밥은 옥수수 두 개씩으로 해결하고 서둘러서 출발하였습니다. nbsp이도백하에서 백두산 북편산문까지 가는 40여분 동안 자작나무와 각종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원시림을 보며 마음까지 시원해짐을 느꼈습니다. 북쪽산문 매표소 입구에 버스가 다다를 무렵 원시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천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입장 시각이 한참 남았고 참가자들이 추울까봐 스님께서는 걱정하시며 미리 나가지 말고 버스에서 대기하라고 하셨습니다. 6시쯤 버스에서 내려보니 우리 일행이 1등일 줄 알았건만 먼저 와 있는 중국 관광객들이 꽤 되어 다들 놀라워했고,nbspnbsp스님께서는 청년대학생 일정에서는 30분정도 더 앞당겨봐야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6시 30분 매표시간이 되자 표를 사기위해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매표소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놀라워했고 우리나라에 비해 공중도덕이나 줄서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것에 대해 모두들 한마디씩 하며 표를 기다렸습니다.nbspnbspnbsp오늘 첫 번째 일정인 천지를 보기 위해 셔틀버스와 승합차로 두 번 갈아타고 올라갔습니다. 스님께서는 멀리 보이는 백두산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아래에서는 잘 보여도 또 올라가면 못 볼 때도 있습니다.”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승합차에 오르니 운전기사가 우리나라 가수가 부르는 신나는 가요를 틀어주고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 같은 느낌이 나도록 달리는 바람에 모두들 짜릿한 즐거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느끼며 15분 정도를 달려서 천지에 도착했습니다. 듬성듬성한 구름 사이로 활짝 열린 파란 하늘 아래 그 보다 더 짙푸른 천지 물과 웅장한 바위산들의 위용에 흥분한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백두산 정상을 좀 더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하시기 위해 여러 번 왔다갔다 하시며 챙기셨습니다. nbsp조금 춥기는 했지만 모두들 개인사진과 스님과 함께 하는 조별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올라갈 때와 같은 승합차를 타고 다음 순례 장소인 비룡폭포로 향했습니다. 비룡폭포로 갈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주차장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참가자 중 한 명이 휴대전화를 잃어버려서 찾지 못할 것이라고 당황하며 걱정하고 있었는데 중국관광객이 주워서 경찰에게 가져다 준 것을 우리 스탭에게 알려주어 찾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 일행과 스님까지 모두 박수를 치고 그 분들께 감사를 표했습니다. 20인승 셔틀버스를 잠시 타고 내린 후 1.2Km쯤 걸어가니 군데군데 누런색 유황 노천온천이 보이고 길게 내려오는 새하얀 물줄기를 따라 눈을 돌리니 멀리 회색의 화산 지형 사이로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비룡폭포가 보였다. 따가운 햇살이지만 스님께서는 한 명 한 명 비룡폭포를 배경으로 개인 사진을 찍어 주시고 비룡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원리에 대해 잠시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소천지로 향했습니다. 소천지는 작은 화산호인데, 모양은 둥글고 아담하며 호의 안은 평탄해 보였습니다. 주변에 사스레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있어서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함께 잔잔한 물에 비춰진 모습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스님을 따라 돌로 포장된 사스레나무 사잇길로 산책을 하니 고요하여 저절로 명상이 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소천지를 나와 스님을 따라 800여 미터를 걸으니 건너편에 위치한 녹연담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보았던 소천지는 맑은 물인데 비해 녹연담에 고인 물은 신비하게도 옥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도 이렇게 예쁘게 만들 수 있을까 싶은 폭포가 세 줄기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는 몇 마리의 노란 잉어를 보고 함께 간 일행들은 “이렇게 넓고 깨끗한 연못에서 살고 있는 너희들은 참 행복하겠다.”하여서 함께 웃었습니다.nbspnbspnbsp지하삼림을 가기 위해 셔틀버스 주차장에 줄을 서려고 하니 수많은 인파로 인해 많은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6년 전 쯤에 비하면 한국 사람은 거의 볼 수가 없고 중국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을 보니 백두산이 중국인들에게도 의미가 있고 인기가 있는 곳임이 실감이 났습니다. nbspnbsp지하삼림은 말처럼 땅속에 숲이 있는 것은 아니고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함몰된 넓은 면적의 땅에 숲이 형성된 곳을 말하며 주변을 삥 둘러서 절벽이 있으므로 마치 땅 아래에 숲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이 지역은 용암이 갈라진 틈 사이로 깊고 좁은 계곡을 이루어 물이 흐르거나 지하로 흘러가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삼림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 활엽수들로 원시림을 이루고 있으며 쭉쭉 뻗은 나무, 오래된 이끼 위에 다시 자라는 어린 나무, 쓰러진 나무, 연리지나무 등 온갖 나무들뿐만 아니라 풀향기와 꽃향기 등이 어우러져서 스님께서는 “지하삼림은 가는 길 자체가 볼거리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홍신작가께서 ‘대발해’ 글을 쓰실 때 지하삼림을 보고 발해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그렸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nbspnbspnbsp1시간여의 지하삼림 순례를 마치고 버스 승차를 위해 또다시 줄을 서서 기다린 후 버스에 올랐습니다. 스님께서는 점심 먹으러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백두산 천지 잘 봤느냐며 물으시고 “백두산은 산을 넘어 민족의 혼입니다. 백두산을 본 공덕으로 맑은 기상을 갖고 살았으면 합니다. 공동체의 소금과 빛이 되고 천지를 본 힘으로 통일의 힘이 되세요.”라고 말씀하셔서 뭉클한 감동과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힘들게 다니느라 몸이 피곤한데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밥을 빨리 먹으면 체하니 조심하라고 당부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어제 저녁에 맛있었지만 아쉽게도 넉넉한 시간으로 즐기지 못한 식당에 다시 가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하고 2시 50분쯤 발해의 첫 수도인 돈화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차에 타자마자 새벽부터 서두르느라 힘들테니 돈화가는 길에 2시간쯤 쉬라고 하셨고 그 말씀이 떨어지기도 전에 모두들 달콤한 낮잠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nbspnbsp5시쯤 돈화의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동모산성은 대조영이 영주에서 탈출해 와서 이 곳 돈화에 자리잡은 후 세운 산성입니다. 주위는 평지이고 얕은 야산에 산성을 쌓은 것이라 주변에서 오는 적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대석하가 흐르고 있고, 우물도 있고, 병영자리, 거주지도 있다고 합니다. 평지성은 영승유지로 추정되지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nbsp그리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육정산에 발해 왕실의 공동묘지가 있는데 여기서 정혜공주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발해인의 기록물이 나왔는데,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발해인 스스로가 기록한 기록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최근에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는데, 아직 중국 정부가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이 공개될 때 발해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오늘 일정의 마지막으로 돈화 시내에 있는 강동 24개석을 보러 갔습니다. 녹슬고 덜컹거리는 철조망 속에서 함부로 방치되고 있는 듯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강동 24석은 건축물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아직 정확하게 무엇에 쓰였던 것인지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고 합니다. nbsp시내의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이어 저녁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오늘 일정을 돌아보시고 음식 먹고 체한 분들을 통해 욕구를 조절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작은 실수를 통해 더 큰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오늘 백두산 잘 다녀오셨지요? 피곤하지요? 구경하는데 6시간이나 걸려 점심이 늦었습니다. 일반 관광객은 우리처럼 자세하게 안 봐요. 천지 호수가 제일 크게 보이는 것은 북편이에요. 서편에서는 작게 보여요. 남편에서는 북한쪽 계단 내려가는 것이 안 보여요. 그런데 북편은 혼잡한 것이 문제에요. 하지만 오늘은 아주 한가한 편이었어요. 오늘 구경을 아주 잘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스님이 그렇게 주의를 주셨는데도 10명 이상이 체해서 강의를 못 듣고 있는 걸 예를 드시면서“허기질수록 음식을 조금 먹어야 합니다. 25일 단식했으면 25일 넘게 음식을 거의 안 먹어야 해요. 폭식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피곤한데다 과식하고 버스를 계속 타서 체할 조건이 됐어요. 음식 먹는 까르마를 자기가 조절해야 합니다. 몸을 통제 못하면 성질도 통제하지 못해요. 자기 몸을 갖고 실험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해요. 이 세상에 공부거리가 아닌 게 없어요. 한 순간 놓치면 몸이 고생이에요. 하지만 작은 실수를 통해 배우면 더 큰 실수를 예방할 수 있어요.”nbspnbsp“인생이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걸 통해 뭔가를 배우는 것이에요. 상황은 내 뜻대로 할 수 없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내게 유리하도록 바꿀 수 있어요. 이것이 수행이에요. 우리는 욕구대로 되어야 기분 좋아하는데 미래를 위해 몸을 위해 결국 나를 위해 욕구를 조절해야 합니다.“ nbsp이어서 오늘 주제인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의를 계속하셨습니다. 발해는 처음 당나라에서 멀리 옛 고구려 북쪽 국경인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위쪽 흑수말갈을 흡수하여 영토를 넓혔는데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통치했고 5경 중 3개 경인 중경, 상경, 동경을 이 지역에 두어 발해 중심지로 삼았다고 하셨습니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영토가 큰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오늘날 발해 역사가 논쟁거리가 되니까 중국이 발해 유물을 공개하지 않고 현재 흑룡강성의 상경용천부만 공개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학교 역사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상경용천부를 보게 되는데 학교에서는 발해 석등사진 정도만 다루죠?nbspnbsp발해에 대한 기초 지식이 너무 없어요. 특히 신라와 발해가 싸워서 발해를 계승하는 자세가 부족했습니다. 실학이 들어오면서 발해 역사 연구가 비로소 시작되었어요.nbspnbsp 발해는 잃어버린 역사입니다. 되찾아야 해요. 역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역사를 잊는 거예요.“ nbsp유대인은 자기 말은 지키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탈무드를 통해 민족의 역사, 신앙, 문화를 학교와 가정에서 철저히 가르쳐서 매우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반면, 연변 조선족은 말은 지켰지만 조선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비교하시면서 역사기행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중국내 고구려, 발해 유적지 안내 책과 우리 말로 된 우리 역사책과 중국안 독립운동가 이야기책을 보급하는 일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우리나라 역사 교육은 왜곡되어 있어요. 국수주의적 역사를 가르치라는 게 아닙니다. 내 존재를 이해하려면 나의 뿌리와 사회적 관계를 알아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예측하지 못해요. 교사는 너무 디테일한 지식에 매달리지 말아야 해요. 줄거리를 잡아 핵심을 가르치고, 의미를 부여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발해에 대한 객관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세워지는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nbspnbsp“중국 사서에는 발해를 고구려의 별종 즉 고구려의 한 무리라고 나와요. 고구려 지배계층이 권력 투쟁으로 분열할 때 중간층은 내 나라를 지켜야할 이유가 없어져요. 이럴 때 지도자는 백성들의 삶과 가까이 있고 지도부부터 힘을 합해야 합니다. 세월호 문제가 났을 때 여야가 분열하여 싸우면 국민은 양쪽이 똑같게 느껴지고 피곤해요. 고구려도 이런 상태에서 강력한 외부 공격에 지배 계층이 항복하고 고구려 유민들이 왕족을 내세워 저항하지만 실패하고 말아요. 고구려가 멸망한 후 696년 거란족 이진충의 난이 난 틈을 이용해 고구려 대조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영주를 탈출하여 추격하는 당군을 격파하고 진국을 세웠어요. 진국이란 큰 나라라는 뜻이에요.“ 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발해의 흥망성쇠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 처음에 당은 발해가 변방 국가라서 별로 관심이 없었고 당나라 측천무후도 가능한 전쟁을 안 하려고 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셨습니다. 대조영이 죽자 큰아들 무왕는 당나라에 강경 입장이라서 당나라와 연합하는 흑수말갈을 치려고 했는데 대문예가 전쟁을 반대하고 당나라로 도망을 갔지만 결국 흑수말갈지역을 흡수하여 발해 영토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왕이 죽고 문왕의 문예부흥 시대를 설명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문왕은 정벌 중심이 아닌 문치를 하고 당나라와 친하게 지냈어요.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그리고 동경용원부로 옮겼어요. 정혜공주는 문왕의 셋째 딸이고 정효공주는 다섯째 딸이에요. 왕위에 48년이나 있어서 치적이 깁니다. 산둥반도 절도사로 고구려 사람인 이정기가 임명되어 제나라를 세웠는데 제나라와 발해는 아주 사이가 좋았어요. 문왕은 당나라와 직접 부딪치지 않고 거란이나 일본과도 사이가 좋았어요. 다만 신라와는 전쟁은 안 했지만 관계가 소원했던 것 같아요. 남경남해부는 신라와 일본로는 왜와 연관이 있어요.nbspnbspnbspnbsp발해는 229년간 지속할 때까지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어요. 발해를 공격하거나 위협하는 세력이 없었어요. 그런데 뜻하지 않게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침공하여 부여성이 함락되고 상경용천부를 공격하자 왕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당나라가 먼저 멸망하고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가 멸망합니다. 이들은 자체 붕괴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결국 중국 본토는 송나라가, 북쪽은 요나라가, 남쪽은 고려가 건국됩니다.”nbsp발해는 고구려 역사의 전통성을 계승했고 발해사와 독립운동사 그리고 상고사를 새롭게 정비하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면서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대발해가 왜 갑자기 멸망했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입니다. 일본 학자는 백두산 폭발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 폭발은 폼페이 화산보다 100배 이상 위력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주변국도 혼란기라서 갑자기 망한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발해 유물로는 내일 가는 상경용천부와 발해석등, 대불상 그리고 영광탑, 강동24석 등 많지 않아요.“nbspnbsp 강의가 끝나고 호텔로 이동하여 한 대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짐 운반용으로만 사용하고 각자 걸어서 숙소로 올라갔습니다. 내일은 발해 유적지와 봉오동 전투터, 그리고 두만강 순례를 위해 4시에 출발 예정입니다.
2014.8.6.동북아 역사기행 넷째날 - 림강, 압록강, 장백, 이도백하
이제 동북아 역사기행 넷째 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압록강을 따라 버스로 이동하면서 강 건너편 북한 땅을 보고 북한 사람들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보는 날입니다. 림강을 거쳐, 장백, 백두산 아래 동네 이도백하까지 가는 여정이 길어서 이른 새벽에 출발했습니다. 새벽 3시 20분에 기상을 해서 4시에 출발 예정이었는데 모닝콜 소리를 못 듣고 늦잠을 잔사람, 방에 물건을 두고 온 사람 등 이런 저런 사연들로 예상보다 20분 정도 출발이 늦었습니다. 전 날 호텔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컴컴한 방안에서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서 더듬더듬 짐을 싸고 내려왔기 때문인 듯합니다.nbsp 한 시간 후, 림강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아침식사는 림강 아침시장에서 각 자 사 먹기로 했습니다.nbsp새벽 5시인데 이미 해는 환하게 떠 있고 길거리 시장에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각종 과일들, 야채들, 튀김류, 빵, 돼지고기, 생선들 등 갖가지 음식들이 푸짐합니다. 30분 이내로 각자 아침거리를 구입해서 버스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과일과 땅콩, 만두, 튀김, 빵, 옥수수, 사과, 블루베리, 복숭아, 바나나 등을 사서 버스로 부리나케 돌아옵니다. 버스 밖 길거리에서 서로 사 온 음식들을 나누어 맛나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스님은 2원으로 아침 식사를 구입하셨다고 하시는데 참가자들은 저마다 얼마를 썼는지도 모르게 이 음식, 저 음식을 산 거 같습니다. 간단하게 음식을 맛보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장백으로 향합니다. nbsp림강에서 압록강 상류를 향해 4시간 동안 올라가는 여정입니다. 림강에서 백두산 최상류까지 중국 쪽에서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계곡물을 번호를 붙여 24도구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nbsp 압록강 너머 북한 땅을 바라보니 산은 온통 뙈기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계단식도 아닙니다. 사람이 서 있기도 힘든 가파른 산에 옥수수, 콩 등 작물을 심어서 산에 있어야할 나무는 모두 잘려 보이지 않고 곡식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연두색의 조각보가 온산에 빼곡히 펼쳐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뙈기밭 주인들은 직장에 가기 전이나 퇴근 후 밭을 매우 열심히 일군다고 합니다. 직장에서의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각자의 뙈기밭을 열심히 가꾸어 식구들의 식량을 마련한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건너편에 보이는 집들은 검은 회색빛으로 오랫동안 손을 못 보아 한눈에도 남루함이 느껴집니다. 북한이 조금씩 자유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고 한다니 그나마 다행스럽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우리나라가 통일되고, 주변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여 동아시아 공동체가 만들어져서 모두 함께 잘 사는 날이 얼른 오기를 기원해봅니다.nbsp65279nbsp버스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압록강 위로 떠내려 오는 커다란 북한 뗏목을 만납니다. 커다란 오징어 모양으로 나무를 주렁주렁 엮어서 뗏목을 만들어 강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 내려가서 자른 나무들을 판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네다섯 명 타고 조정을 하는데 뗏목 크기에 비해 그들은 아주 작아 보입니다. 연이어 뗏목들이 내려와서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고 사진을 계속 찍었습니다. 방학인지 아이들이 여러 가지 색깔의 튜브를 타고 물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여자들은 강에 빨래를 하고 군인들이 목욕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저 강 하나만 건너면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동포들을 우리는 왜 그리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요? 많은 수의 남한 사람들이 통일을 원하지 않고 북한의 가난을 도우려고 하지 않는 현실 속에 스님같이 통일을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 계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의 지혜로운 생각과 실천을 배워 저희들도 통일을 위해 조금씩 노력하도록 해야겠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긴 시간을 달려 장백에 도착했습니다. 장백에는 발해시대의 유일한 탑인 영광탑이 남아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영광탑을 볼 수 있는데 유일하게 남은 발해의 영광탑에 와서 천년 후의 후예들이 선조의 기상을 이어받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을 발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하루빨리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생존권과 인권이 보장되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여기 모인 사람들이 기꺼이 최선을 다하기 바라는 스님의 발원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북한 혜산시가 아래로 훤하게 내려다 보였는데 제법 큰 도시였습니다. nbsp1990년대 좋은 벗들에서 북한 돕기를 할 때 많은 도움을 주셨던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시고 그 부인인 할머니가 식당으로 스님을 만나러 오셔서 가슴 아픈 경험담을 나눠주셨습니다. 북한을 탈출하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어느 여자 분을 우연히 알게 된 할머니가 그녀가 뇌종양이라는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도울 방법이 없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결국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탈출한 북한 난민들을 돕는 일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북한에서의 삶이 힘들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 사연들입니다. nbspnbspnbspnbspnbsp점심 식사 후 백두산으로 향했습니다. 압록강 상류로 갈수록 강폭은 좁아지고, 나중에는 작은 냇가처럼 좁아졌습니다. 폴짝 뛰면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함부로 건널 수 없는 곳인가 봅니다. 버스에서 잠시 내려 압록강 물에 발을 담그고 강 건너편 사람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해 봅니다.nbspnbspnbspnbspnbsp한참 후에 드디어 백두산 남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오르는 길이 산사태로 파괴되어 도로공사 한다고 지금은 남문으로는 오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중국에 비싼 입장료내고, 눈치를 보면서 천지를 오를 것이 아니라 북한 땅을 통해 백두산 동문으로 오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남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천지를 못 본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문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에 지루할 때쯤이면 다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조별 대항 노래자랑을 하고 또 야외에 내려 수박을 잘라 나눠먹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특히 스님께서 수박을 자르는 시범을 보여주셔서 참가자들을 즐겁게 하셨습니다.nbsp계속해서 장백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3호차 타이어가 펑크가 났습니다. 다른 버스가 타이어를 가지고 와서 교체하는 동안 3호차 탑승자들은 버스에서 내려 20분가량 도로를 따라 다른 버스 탑승자들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습니다. 버스 속에서 오랜 시간 접혀 있던 다리도 펴고 백두산 야생화가 그득한 길을 걸으니 모두들 행복해합니다.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는 신기한 자작나무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버스를 수리하는 동안 참가자들은 버스에서 내려 잠시 산책도 하고 법륜스님 사회로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예기치 못한 일이 하루에 한번 꼴로 일어나지만, 그 때마다 적절하게 참가자들이 불편하지 않고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상황을 이끌어 나가시는 지혜가 빛나는 것 같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흐르는 마을인 이도백하에 있는 숙소에 도착한 후 스님의 저녁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nbsp백두산 천지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천지의 물은 북쪽으로 흘러 송하강으로 가고, 백두산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남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간다고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백두산에 이어서 스님은 오늘 압록강 1도구부터 24도구까지 오면서 고개가 아프도록 바라봤던 맞은편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압록강을 쭉 따라오면서 북한을 보셨는데 소감이 어때요?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은 면도 있고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감정이 교차했을 겁니다.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 왜 북한이 이렇게 되었나? 첫 번째, 대외적으로는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경제 봉쇄정책 때문입니다. 두 번째, 대내적으로는 소위 말해서 김일성 유일사상으로 가면서 기술보다 이념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군비에 GDP의 25 이상을 사용하는 등 비경제적인 것에 돈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북한이 왜 못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부터, 왜 북한동포 돕기를 하게 되었는지,왜 북한을 돕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그동안의 스님의 북한동포 돕기 활동 경험 이야기를 나눠주시며, 북한 동포들이 겪는 고통, 탈북한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하나하나 말씀을 해주십니다. nbsp“이런 아픈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보면 북한동포 돕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십년 넘게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하면서 얻은 결과는, 이 문제는 통일을 해야만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스님과 통일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북한 동포들의 고통과 아픔을 결코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통일을 해야 하고, 통일을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불철주야 가리지 않고 하고 계십니다. 내일은 백두산 북문으로 올라가서 천지를 보고, 오후에는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 볼 예정입니다. 일반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새벽 일찍 출발해서 매표소 앞에 가장 먼저 도착하려고 합니다. 부디 천지의 선명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nbspnbsp
2014.8.5. 동북아 역사기행 셋째날 - 국동대혈, 국내성,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역사 기행을 시작한 지 오늘은 셋째날입니다. 오늘 오전에는 고구려 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국동대혈과 국내성,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우는 장군총, 그리고 드넓은 영토를 확장했던 광개토대왕의 비와 릉에 갑니다. 그리고 이 곳 집안에서 점심을 먹고 북로를 따라 채석강, 관마산성, 서대묘, 천추묘를 차창으로 본 후 통화를 거쳐 백두산 관광지 거점인 백산을 향해 갈 예정입니다. nbsp 어제 공지했던 대로 국동대혈로 가는 버스는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하는 인사말이 떨어지자마자 새벽 4시에 바로 출발했습니다. 무릎관절이 아프신 한분의 보살님만 빼고 3대의 버스가 새벽의 어둠을 뚫고 압록강을 끼고 달려갑니다. 출발할 때는 밖이 어두워 산을 어찌 올라가나 걱정스러웠는데 이내 환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맞이하는 이 새벽여명이 이 역사기행을 다니면서 생기는 역사의식과 같게 느껴집니다. 새록새록 솟아나는 역사의식을 맛보는 기쁨이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저녁 늦은 시간까지의 살인적인 일정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nbspnbsp65279nbsp국동대혈은 국내성의 동쪽에 있는 큰 굴을 의미하며, 고구려의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30분가량 올라갑니다. 국동대혈이 있는 산은 개인이 관리하고 있는 산에 위치하고 있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올라가는 중에 오토바이를 탄 현지인이 쫓아와서 중국공안인줄 알고 살짝 긴장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산에 투자한 사람이 고용한 관리인이라고 하여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관음보살을 보시고 있는 관음굴에 도착하였습니다. nbsp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중국인들처럼 행복과 건강과 재물을 위해 빌어 봅니다.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니 장상애라고 쓰인 큰 바위벽이 나타납니다. 중국에서는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긴 장자를 쓴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제2대왕 유리왕에게 권력가의 딸과 사랑하는 애첩이 있었는데 둘이 싸우다가 집으로 돌아가버린 애첩을 데리러 갔다가 혼자 돌아오면서 이 곳에서 황조가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장소라고 스님께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참가자 중 한 국어 선생님이 황조가를 멋들어지게 낭송하는 것을 들으면서 사랑 바위를 보니 정말 애닯은 연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nbsp다시 조금 더 올라가니 드디어 앞뒤로 시원하게 뚫린 국동대혈이 나타났습니다. 하늘로 통한다고 하여 통천동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정성스레 제단을 차리고 옥기 문명을 발달시킨 한나라 환인하느님, 청동기를 발달시킨 홍산문명을 기반으로 배달을 세운 환웅천왕님, 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님, 그리고 부여의 해모수님, 고구려의 동명성왕 이렇게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해가 뜨기 전 지내는 이 제사에서 신령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스님께서 고구려의 후예로써 1400여 년만에야 찾아옴을 참회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동아시아 공동체 출현을 천지신명께 간절히 기원하셨습니다. 제물로 올린 음식과 술로 다함께 음복하고 나서 둥글게 서서 남북한이 하나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며 ‘우리의 소원을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국동대혈에서 걸어내려오니 바로 앞에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먼저 내려온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두고도 북녘 땅에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강물에 손발을 담그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습니다. 다시 숙소로 가기 위해 압록강변을 따라 내려가니 올 때 보이지 않았던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 멀리 자전거타고 가는 사람,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아낙네, 물가에서 놓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반갑게 느껴집니다. 건너편은 자강도의 만포라는 곳인데 이곳과 집안사이에 하루 한번씩 기차가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 빨리 이 한반도가 평화통일이 되어 만포, 평양을 통과하여 집으로 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봅니다. nbspnbspnbsp 아침 식사 후에는 고구려의 산성인 환도산성과 짝을 이루는 평시성인 국내성을 한바퀴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9시도 안된 시간인데 햇볕이 벌써 따갑게 내리쬡니다. 북쪽과 동쪽 성벽의 모서리 지점에서 순례를 시작하면서 국내성에 대해 스님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국내성은 동쪽, 서쪽 길이가 짧고 남쪽, 북쪽 길이가 긴 직사각형 모양입니다. 가장 공격받기 쉬운 곳은 성문과 모서리입니다. 고구려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 공자성을 쌓았으며, 모서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치성을 쌓거나 각지기 않게 둥글게 굴려서 쌓았습니다. 동쪽 성벽이 가장 파괴가 심한데 이유는 도시화가 되면서 사람들이 이 돌로 집을 짓거나 때론 성벽을 허물고 그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북쪽, 서쪽은 보존 상태가 그래도 조금 좋고 남쪽은 현재 복원중입니다.” nbsp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성벽 위에 나물을 말리거나 빨래가 널려진 모습을 보면서 425년 동안 강성했던 한 나라 수도의 유적지가 이렇게 남의 땅에서 푸대접받고 있는 모습 속에서 처량함과 슬픔이 느껴집니다. 멀리 북쪽으로 어제 보았던 환도산성이 보입니다. 서쪽 벽에는 통구하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해자기능을 하고 있는데 백암산성, 환도산성, 오녀산성 그리고 오늘 국내성에서 자연지형을 잘 활용하는 고구려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감탄하게 하는 기술과 지혜는 한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연구를 거쳐 이루어졌을 것인데 틀리면 묻고 잘못되면 고치고 안 되면 다시 하는 우리 정토행자들은 고구려의 후예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nbspnbspnbspnbspnbsp통구하는 남쪽 성벽 앞을 흐르는 압록강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따라 걸으면서 스님께서는 북한돕기를 시작한 계기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주셨습니다. 1995년도에 북한 압록강에 대홍수가 나고 나서 식량난이 심해졌다고 들으셨는데 처음엔 믿지 못하다가 가이드가 직접 배를 태워 비참한 실상을 보시고야 북한 돕기에 적극 뛰어드셨다고 합니다. 북한 아이들은 배고프지만 인도의 아이처럼 “박시시”하면서 구걸할 자유도 없다는 것을 아시고 북한아이를 돕기를 발심하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이 세상의 어느 한 곳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 비만으로 고생하고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는 이러한 불균형을 생각하면 어이없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18년nbspnbsp동안 주어진 처지에서 최대한 북한을 돕고자 노력하신 스님과 이제는 JTS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 통로가 있음에 대해 고마움을 느껴봅니다. nbsp다음은 2000년 동안 그 웅장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군총으로 향합니다. 장군총에서 스님과 조별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사료가 아쉽게도 없습니다. 중원을 차지했던 중국의 입장에서 고구려를 변방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무덤은 왕의 무덤이 아니라 장군의 무덤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 같습니다. 장군총은 7층 22계단으로 되어 있고 전체 돌이 1100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돌에 홈을 새겨서 돌이 밀리지 않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돌이 밀리지 않도록 주위에 호석이라 불리는 받침대를 3개씩 두었는데 12개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하나가 없어진 곳은 찌그러져있습니다. 그리고 관을 두는 석실의 뚜껑을 덮는 돌이 무게가 50톤이나 됩니다. 또한 지반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땅속에 진흙과 강에서 나온 돌을 넣었습니다. 진흙은 지진이 발생할 시 탄력성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5층에 석실이 있었고 꼭대기위에는 누각이 있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장군총 뒤쪽엔 제단과 함께 장수왕의 후비무덤으로 보이는 배묘가 있는데 그 모양이 고인돌과 거의 같습니다. 이곳 집안에서 많이 발견되는 고구려의 돌무더기 무덤양식에서 청동기시대 유행했던 고인돌묘가 조금씩 변화되어 옴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민족의 정통성에 대한 줄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어 한민족의 자손으로써 긍지가 느껴집니다. 이곳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빨리 통일이 되어 육로로 통해 이 곳 집안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광개토대왕비로 이동을 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때 만든 것으로 높이 6.39m, 너비는 1.34m에서 2m입니다. 장수왕은 그의 아버지가 이룬 역사를 기록하고 건국부터 호태왕까지의 역사도 기록했습니다. 중심은 호태왕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비석은 어마어마한 큰 돌을 자연스럽게 다듬고 글자를 새긴 것인데, 웅대한 자연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nbsp nbsp광개토대왕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광개토대왕릉이 있습니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로 죽음을 맞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확장했던 광개토대왕의 묘입니다. 그 업적에 걸맞게 묘의 크기는 장군총의 크기보다 훨씬 큽니다. 장군총은 한변의 길이가 32.6m이지만 광개토왕릉은 65m나 되고 호석도 한 변에 5개나 둘러져 있습니다. 그러나 급히 쌓다보니 강돌이 아닌 산돌까지 넣고 쌓아서 많이 무너져 상당 부분이 돌무지처럼 변했습니다. 제대로 된 발굴과 보존작업이 시급해 보이는데 남의 나라에 있어 손쉽게도 이런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애석하게 느껴집니다. nbspnbspnbspnbspnbsp 집안으로 다시 돌아와 점심을 먹고 큰 돌무지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갔습니다. 이 일대에서 가장 크기가 큰 묘는 천추묘라고 합니다. 서대묘도 보고 내일 만나게 될 백두산에 가기 위해 백산으로 출발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도중에 계곡에서 아침에 산 수박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통화를 가는 길은 집안으로 가는 길 중 북로인데nbspnbsp가는 길에는 관마산성 성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산과 산이 조금씩 좁혀들면서 마주 보는 곳에 병목현상이 생기는데 이곳에 적을 효율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산성을 쌓은 곳입니다.nbsp백산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전처럼 로비에 짐을 가지런히 놓은 채 바로 강의장으로 모였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답사의 부족한 부분을 정리해 주시다가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해서는 띄어쓰기 오류, 지워진 글자로 인해 생긴 임나일본설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표와 지도를 보고 우리 민족의 시대적 흐름을 알기 쉽게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우리가 살았던 지도를 보면 만주벌판, 북경, 산동반도, 내몽골이 다 배달나라의 영역에 있는데 점점 축소되어 현재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요하문명은 배달 문명의 중심지역이며 그 일파가 서남쪽으로 내려가 중원에 근접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은나라가 멸망하고 일부 유민은 고조선지역으로 철수하고, 또 일파가 동쪽으로 이주해서 평양까지 내려오는데 이쪽까지 고조선의 영역입니다. 부여시대는 동북쪽은 부여가 차지했고, 반도 쪽으로 마한, 진한, 변한, 옥저, 동예. 동쪽은 여진족, 서북쪽은 거란족, 선비족 흉노족이 분포하고 있었어요. 고구려가 건국되면서 만주벌판 국가들은 고구려로 통합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의 과정에서 당나라의 힘을 빌렸기에 역사의식의 부재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주성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당나라는 백제 멸망후 부여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멸망후 평양에 안동도호부와 그 밑에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의 야욕을 눈치채고 당나라와 8년간 다시 싸워 당나라를 몰아낸 부분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다만 고구려 옛땅을 차지할 생각을 안했다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반도만 차지한 것만도 감지덕지해서 당나라 황제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극진한 태도를 취했거든요”nbspnbspnbspnbspnbsp또, 고구려의 패망과 발해의 재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시다가 창조성을 이끌어 내주셨습니다.nbspnbspnbsp“당나라는 고구려를 663년에 두 차례 침공을 했으나 실패했어요,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형이 당나라로 가서 군대를 빌려주면 당나라에 조공의 예를 갖추겠다고 하지요. 결국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참여한 전쟁에서 고구려는 패망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인구의 5인 20만명을 중국 전역에 분산 귀양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고구려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nbspnbspnbspnbspnbsp꼭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만이 창조가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끊임없이 조정해 나가는 것도 창조라는 것을 이번 역사기행 일정을 현지 상황에 따라 조정해 가는 것과 비유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고구려는 자주성은 있는데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데다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안주해 버리니까 결국 패한 것입니다. 역사공부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배우고 실패하고 도전하고 늘 나아가야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답습하면 정체가 되므로 있는 것도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공해도 조정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중국의 변방국가, 일제침략, 서양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중국은 자기 대륙 안에 들어와서 이룬 몽골의 원나라, 선비의 연나라까지도 자기 역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역사가 더 커졌어요. 반대로 우리는 배달 문명의 후예인 여진, 거란, 선비까지 중국 역사로 치부해 버려서 역사의 폭이 좁아졌어요. 하지만 우리는 중원과 대등한 역사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어요. 배달민족 아래 조선족이 중심이 되었다가,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족이 한번 큰 세를 이루며 형제에게 밀렸고 지금 남은 것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남북통일은 물론 일본과 문명적 연대 그리고 중원까지 연대하면서 서양문명을 극복하고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강의가 끝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친목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내일 일정을 위해 아쉬움을 남긴채 즐거운 시간을 마무리했지만 참가자들이 한결 더 친밀해진 것 같습니다. 내일은 림강을 거쳐 압록강을 따라 이도백하까지 가는 일정입니다.
2014.8.4. 동북아 역사기행 둘째날-홀본산성, 5회분5호묘, 환도산성
오늘은 동북아 역사기행 둘째날입니다. 어제 첫날부터 강행군으로 시작되었지만 참가자들 모두 제 시간에 맞춰 버스에 탑승하여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홀본산성으로 출발하였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차창 밖에는 40여년 전의 시골 고향집에 보았던 백일홍, 과꽃, 맨드라미, 채송화, 봉숭아, 호박, 박꽃, 가지 대추나무, 복숭아나무 등이 보여 낯익고 정겨웠습니다. 벽과 간판에 쓰여진 한문만 없다면 영락없이 어린시절 살던 고향길로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여행 길 같습니다. 홀본산성은 아래 마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괴물을 물리친 다섯 선녀의 설화가 생겨 오녀산성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어느덧 홀본산성 기념관에 도착하여 스님으로부터 홀본산성의 지형과 유물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습니다. 어제 본 백암산성에 이어 고구려의 첫 수도 홀본산성의 특유한 축성 기술에 관해 자세히 들은 설명을 듣고 나니 민족에 대한 자긍심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드디어 산성으로 올라가는 셔틀버스에 타고 구비구비 산모롱이를 돌아서 도착하니 입구에 오녀산성비가 보였습니다. 비문이 잘 보이도록 서서 도착하는 대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좁고도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 역사기행동안 스님을 따라 이 땅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으면서 민족의 숨결을 느끼고 오리라 발원했었는데 스님 바로 뒤에서 한 걸음의 발치로 따라 가게 되어 산성 올라가는 길이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돌계단을 오르시면서 이 홀본산성을 처음 답사하실 때의 재밌는 사연을 들려 주셨습니다. 참가자들은 스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모두 하나가 된 듯 신기해하고 재밌게 들었는데 이 경험을 사례로써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과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지혜의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65279nbsp. 7월 명상부터 단식을 하시다가 역사기행 출발 직전부터 보식을 시작하신 스님은 기운이 좀 없으신지 평소와 달리 걸음을 자주 멈추시고 숨을 고르시곤 하셨습니다. 스님의 재밌는 이야기를 들으며 계단을 오르다보니 별 힘든지도 모르게 어느 덧 정상 가까이에 도착했습니다. 아래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평평한 곳에 오밀조밀 앉게 하시고 스님께서는 서신 채로 주몽의 탄생과 고구려가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임을 일깨워 주시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분으로부터도 들어본 적 없는 가슴 벅찬 우리들의 역사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nbsp65279nbsp65279다음은 서문 자리에 가서 어제 백암산성에서 봤던 모습과 꼭 같은 성벽의 모습과 성문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평평한 가운데 천지가 나타났는데 왼쪽은 사람의 식수로 사용한 우물과 오른쪽에는 동물들의 우물로 사용했다는 산 중의 우물이 지금도 맑았습니다. 다시 좀 더 길을 따라 가니 곡식창고가 보이고 세계에서 세 민족에게만 있는 온돌 문화를 그 옛날 고구려 조상의 유적에서 가장 우수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집터도 보입니다. 이렇게 이곳은 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물, 곡식, 잠자리의 세 박자를 다 갖춘 곳이라고 하니 고구려의 후예됨이 자랑스러웠습니다65279nbspnbsp.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은 안개가 낀 신비로움을 안고 유유히 흐르고 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운 이 곳에 정말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우리의 소중한 유적의 돌길을 쓸고 있는 중국의 아주머니까지도 정답고 고맙게 다가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섶에 보이는 풀들과 야생화도 대부분 낯익은 것이었습니다. 싸리꽃, 애기똥풀, 쑥, 둥글레, 질경이, 비단초, 이름 모르는 익숙한 풀과 나무 그리고 땅내음 그 곳은 내가 이미 살았던 곳처럼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면면히 이어져 온 그 생명들에게 경배하게 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아침 7시에 출발하여 밟았던 고구려 옛 수도 홀본산성의 3시간 30분간의 도보기행을 마치고 다시 셔틀버스에 올랐지만 돌아 보이는 이 마음은 그 곳에 둔 것만 같았습니다.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서 오후에는 원래 국내성을 둘러볼 계획이었는데 내일 보게 될 5회분 5호묘 벽화 설명에 시간이 많이 걸려 다른 관광객이 별로 없는 오후 시간에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일정을 변경하여 5회분 5호묘로 향했습니다. 4개 조로 나누어 교대로 박물관에서 스님께 벽화에 대한 사전 안내를 받거나 시원한 지하 고분에 들어가 조춘호 선생님에게 벽화 설명을 듣기도 했습니다. nbspnbspnbspnbsp여행 내내 항상 후발이었던 3호차 교사팀이 이번에서 선발팀이 되어 출발하도록 스님께서 배려주시니 3호차 탑승자들은 함성으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3호차에 해당하는 조가 먼저 고분 속으로 들어가 조춘호 가이드님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니 1500년 전의 오색의 색채가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는 신비로움과 벽화 속에 담긴 민족의 생각과 기술은 놀라움 그대로였습니다. 고분에서 나와 전시실로 들어서니 여러 고분에서 나온 벽화 전시물을 가지고 스님께서 설명을 해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벽화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고분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더 명확하게 정리 되었습니다. 이 무덤은 현재까지 집안에서 확인된 20기의 고구려 벽화 고분 중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일반의 내부 관람이 허용된 곳이라고 합니다. 해의 신과 달의 신, 수레바퀴 신, 농사의 신의 벽화를 통해 듣게 된 민족의 신앙, 당시의 시대상과 5부족에 대한 설명은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감동이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5회분 5회묘 관람을 마친 호차는 다음 목적지인 환도산성으로 향했는데 산성의 규모는 매우 크고 웅장하였습니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 중 하나는 평지성과 산성이 한조를 이루게 되는데 환도 산성과 국내성이 한조를 이루어 평상시에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전쟁 시에는 환도산성으로 이동하여 항전하였다고 합니다. nbspnbspnbspnbsp환도산성 입구에는 산성하 무덤떼가 널리 자리잡고 있었고 마을의 주택 가운데도 무덤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산성하무덤떼란 산성 아래 무덤들이라는 뜻인데 이는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으로 기단을 쌓고 맨 위에는 큰 돌을 얹은 적석무덤입니다. 이런 무덤형식은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양식인데 계급이 높을수록 기단의 수가 많아지게 쌓았다고 합니다. 황혼이 내리는 고구려 환도산성아래 무덤길을 여유롭게 걷는 모습이 아름다워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됩니다. 해질녘의 길을 걸어가는 행렬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환도산성에 가장 늦게 도착한 1호차는 중간에 공사 차량으로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걸어오다가 공사가 진행이 잘 안 된 덕분에 가까스로 다시 버스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이번 기행은 순조로운듯 하면서도 가끔씩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참가자들은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평탄한 여행보다 우여곡절이 있는 여행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걸 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계속 전체 참가자들이 같이 움직이다가 호차별로 일정을 교대로 하다보니 각각 경험하는 것도 달라 한 여행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재밌고 환도산성 옆으로 흐르는 통구하 상류에서 여유롭게 발을 담그는 망중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해진 일정대로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물 흐르듯이 여행을 즐기니 이 속에서도 무유정법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nbspnbspnbsp저녁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서 근처 압록강변도 잠시 구경한 다음 호텔로 이동하여 간단히 짐을 풀고 샤워도 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서 강의장에 모여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한 두 번째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먼저 동부여를 떠나온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후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유리가 아들의 증표를 가지고 찾아와 주몽 사망 1년 전에 태자로 즉위했지만 세력 기반이 약해 결국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던 상황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한 고구려가 고토회복을 외치며 요동으로 진출하다 보니 중국의 여러 나라와 부딪치게 되어 결국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425년 동안 3번이나 국내성이 함락됐던 과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고구려가 집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나서 고토회복을 위해 요동으로 나아가다 보니 한나라와 부딪치게 되었지요. 그래서 요동태수 공손씨의 침략을 받게 된 것이지요. 고구려가 한나라의 4군들을 격파하게 되고 한나라를 이은 위나라와 부딪치니 고구려는 관구검의 침략 당하게 되었어요. 결국 동천왕이 전쟁에 패하고 국내성, 환도산성까지 함락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어 연나라 모용왕과의 전쟁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 때 연나라와 부딪치게 되고 모용왕이 쳐들어왔어요. 국내성으로 오는 길은 북로와 남로가 있어요. 북로가 쉬운 길이고 남로가 조금 어려웠어요, 고국원왕은 틀림없이 북로로 쳐들어 올 거라 생각해 주력군을 북로 쪽에 배치했는데 모용왕이 남로로 쳐들어와서 국내성은 물론 환도산성도 함락되었어요. 모용왕은 고구려의 주력군과 부딪치면 위험하므로 뒤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황후와 왕의 어머니를 납치하고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파가고 포로 오만명을 데려갔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고 조공을 바치며 신하의 예를 갖췄는데nbspnbsp아버지 미천왕의 시신만 1년 뒤에 받고, 어머니와 부인은 20년 뒤에나 돌려받는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nbspnbspnbsp이러한 고구려의 난세에 이루어진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이 훗날 고구려와 백제간 원한의 원인이 되었으니 보복의 역사는 항상 또 다른 보복을 부른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이런 상황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쳐들어왔고 고국원왕이 전사했어요. 같은 부여족의 후예끼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해서 고구려는 백제에게 원한이 생겼어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은 대부분 백제를 공격해서 확보한 거예요. 원한에 사무쳐서 백제의 하남 위례성을 공격하고 백제는 조공의 예를 갖추었어요. 그런데 백제는 다시 고구려에 저항을 해서 장수왕때는 철저하게 위례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어요. 그때 백제는 공주로 내려갔고 그래서 고구려 영토가 충주 지역까지 확장된 겁니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도 굉장했어요.“ 계속해서 오늘의 주제인 민족의 시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 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고구려는 부여가 뿌리이고, 부여의 뿌리는 단군조선, 배달나라, 환인 한나라라고 했어요. 문명의 후진국인 토착 세력 중에 곰족은 이주민과 결혼하고, 호랑이족은 배타적이고 저항을 했기 때문에 호랑이족은 정벌을 당했어요. 이곳에 몽골, 거란, 여진, 선비, 갈족, 강족, 저족 등의 민족들이 살았는데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 속에 선진문명이 들어왔고 곰 토템 민족만 이주민과 결혼을 할 수 있었어요. 이것이 배달나라에 있었던 일이고 계몽을 하면서 국가를 경영하는 능력을 키웠어요. 이중에서 흉노족, 선비족이 먼저 독립적으로 국가를 형성했어요. 고구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거란족, 여진족이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를 세우게 되지요. 몽골의 원나라는 중국을 정복했지요. 이들 민족 전체가 배달문명의 후예들이고, 환단고기에는 민족이 9개가 나눠져 있었다고 표기되어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일제강점기때 유행했던 실증주의의 관점으로만 봐서 환단고기를 무조건 위서라고 하지 말고 오류는 오류대로 인정하되, 전반적인 기록에 대해서는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서 누구의 역사냐가 아니라 문명의 진실을 찾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찬란한 배달 문명을 밝힐 수 있지 않겠나 제시하셨습니다.또한 우리 역사의 지난 2천년은 역사의식이 부족했다면서 앞으로 어떤 자세로 세계의 변화에 대응할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역사의식은 동아시아 변화, 세계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와 아주 밀접해요. 북한까지 포함해서 이 문제를 푸느냐, 일본은 물론 중국과 협력해서 어떻게 할 건지를 생각하게 해요. 주인의식을 가지면 큰 틀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의식이 있으면 비굴함이 없이 당당할 수 있어요. 서양인을 만나도 영어를 못해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잘못한 것은 서로 인정하고 앞으로 발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특히 상고사는 조작하자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을 확인하자는 것입이다.” nbspnbspnbsp마지막으로 자랑스러운 상고사를 되찾음으로써 우리의 민족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역사관을 넓혀서 거란, 여진, 몽골 등의 배달의 후예들을 포용하고 그들을 지원하여 배달 문명의 역사를 발전시켜야 할 우리의 사명을 명확하게 짚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야 민족의 상처가 치유되고 주변국에의 열등의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변방이 아닙니다. 동아시아의 문명의 큰 두 축, 즉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중 요하문명을 계승한 민족입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좀 더 역사관을 넓혀서 우리 민족과 함께 했던 거란, 여진, 몽골 등도 배달 민족과 고조선의 후예인 형제와 이웃으로 생각해야 우리의 역사가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만주어나 여진어의 회복, 몽골인들을 지원하여 소수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도와줘야 합니다. 요즘 세태처럼 몰민족적인 사고를 하거나 지나치게 배타적 민족주의적 사고를 하지 말고 역사의식을 키워 함께 발전시켜 우리나라의 역사가 변방의 역사가 아니라 자주적 문화를 가진 민족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nbspnbspnbspnbspnbsp이렇게 강의가 끝나니 역사기행 두 번째 날도 어느새 지나가고 있습니다. 내일은 국동대혈과 국내성,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을 둘러보고 백산으로 이동하는 일정으로 3시 20분 기상 예정입니다. nbsp65279nbsp오늘 스님의 하루 기행 부분은 박영미님이, 강의 요약은 김정윤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2014..8.3. 동북아 역사기행 첫째날 - 요녕성 박물관, 백암산성
올해로 스무 해를 맞은 동북아 역사기행, 2014년 8월 3일 오늘, 그 7박 8일간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역사 기행단은 법륜스님의 안내 하에 특별히 평화재단 평화연구원 김형기 원장님과 묘당, 덕생 두 분의 법사님이 동행하셨고, 좋은 벗들 스텝들, 일반 참가자를 포함하여 총 138명으로 꾸려졌습니다. 휴가철을 맞아 인천국제공항은 이른 아침부터 여행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140여명의 우리 일행은 질서정연하게 출국수속을 밟고 심양으로 향했습니다.nbsp65279nbsp65279nbsp심양공항에 도착하여 무사히 입국 심사대를 빠져나와 일행을 기다리는 3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일정의 첫 코스인 요녕성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스님께서는 수신기를 통해 인사와 함께 요하 문명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하문명과 황하문명의 시원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환인환웅단군에 이르는 한나라, 배달나라, 조선나라로 이어지는 우리 상고사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주시며 환웅천황의 신시 개천 이래 6천 년을 넘게 동북아를 중심 무대로 활약했던 한민족의 기개와 그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켜 주셨습니다. 스님의 음성으로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한 개요를 듣고 나니 수천 년 전의 과거로 떠나는 역사기행이 비로소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음을 실감하며 스님의 설명을 듣는 중에 번화한 심양 시내를 30여분 달려 요녕성 박물관에 도착하였습니다.nbspnbspnbsp“이곳 요녕성 박물관은 요하문명 중 요녕성에서 발견된 일부 유물만 전시되어 있습니다. 요하문명의 유물, 유적은 내몽고 자치구에 많습니다. 고조선 시대를 중심으로 발달된 청동기 문화, 배달문명시대에 해당되는 잘 다음어진 옥기문화, 그보다 앞선 신석기 문화가 요하문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녕성 박물관은 제1관은 구석기와 신석기, 동석병용기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2관은 중국의 상주나라 시대에 해당하는 요녕성 지역의 청동기 유물들이, 제3관은 진한시대 이후 당나라시대까지 이 요녕성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스님의 자상한 해설과 함께 한 시간가량 관람을 마치고 나와 각 차량에 준비된 삶은 옥수수를 점심으로 먹으며 이동하는 동안 스님께서는 스텝 소개와 이번 여행의 주의사항 등을 거듭 챙기셨습니다. 오늘로 단식 26일째를 진행하고 계신 스님께서는 참가자들이 옥수수 점심을 먹으면서 심양 시내를 벗어나는 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수신기를 통해 여행 중 주의사항 등 이런 저런 것을 챙기셨습니다.nbsp65279nbspnbsp한 말씀 한 말씀에서 어린 제자들과 함께 수학여행 떠나온 담임선생님의 챙기는 마음이 온전히 전해집니다. 말씀을 마치신 후 ‘한 30분 휴식하다 보면 백암산성에 도착할 테니까 휴식하면서 가자.’고 하신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움직이지 않는 느낌에 눈을 떠보니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길가에 버스가 정차하여 있습니다. 꽤 많은 시간을 그렇게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야기인 즉, 마을 비포장도로를 정비, 포장 공사를 하는 중이어서 통행이 차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차량이 통행할 방편을 마련하지 않은 채 왕복 도로 전체를 점령하며 공사를 하고 있는 그들과 30분 넘게 통과할 방법을 협상하셨지만 결국 수용되지 않아 왔던 길을 다시 나가 우회하기로 하여 한 시간 이상을 달리다가 다시 차가 섰습니다. nbsp65279nbsp65279노천 화장실에 다녀오라는 안내가 있은 후 스님께서는 마을 주민들과 한참동안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버스기사가 길을 잘못 들어 길을 잃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처음 그 자리 차를 돌려 나간 공사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년과 다르게 빠른 길로 가보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패드로 계속 지도를 보고 계셨던 스님께서는 빙빙 돌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지만 버스 기사는 길만 보고 다니니 같은 지역을 빙빙 돌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습니다. 법을 가르쳐 주시는 지도법사님이나 길을 알려주시는 지도법사님이나 결국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을 구제하시는 건 같은 것 같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공사 구간을 뚫고 나오는 데 20분이 넘게 걸려 1시간 늦게서야 드디어 백암산성 입구에 당도하였습니다. 백암산성을 직접 올라볼 수 있게 된 감회를 스님께서는 해년마다 백암산성 오는 길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표현하시며 우리 일정 중 백두산 다음으로 보기 힘든 곳이 바로 백암산성이라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 “백암산성은 고구려가 축성한 100개가 넘는 성 중에서 현존하는 것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것으로 현재 중국에서는 연주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만주 벌판이 끝나면서 백두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경계에 자리하고 있어 북쪽으로 높고 남쪽이 낮습니다. 산성의 왼편 즉, 동쪽으로는 깎아 지르는 절벽 아래로 태자하가 흐르고 있어 적의 침입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동쪽은 비교적 성벽을 쌓지 않았거나 아주 느슨하게 쌓았으며 만주벌판에 면해 있는 남쪽과 서쪽으로 침입할 적에 대비하여 남쪽 서쪽 성벽을 가장 견고하게 쌓았습니다. 또한 산성을 보호하기 위해 덧성을 쌓았고, 성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치성을 쌓았습니다. 고구려 성의 특징은 돌을 마름모꼴로 다듬어 마름모의 끝이 서로 맞물리도록 하여 서로 지탱할 수 있도록 견고하게 성을 쌓았습니다. 현재 서쪽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남쪽 성벽은 많이 훼손됐는데 남쪽에 마을이 있어서 주민들이 이 돌을 가져다가 집을 집의 담장을 치는데 사용해서 그렇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스님의 해설을 들으며 남서쪽으로 빙 둘러친 성의 외벽을 돌아 망루까지 올랐습니다. 망대에 올라 사위를 돌아보니 과연 뻥 뚫린 남서쪽 벌판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는 것이 이쪽을 향해 접근하는 무엇이 있다면 개미 한 마리까지도 다 보일 듯 탁 트인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망루에는 과일 서너 점을 바치고 복을 빌고 간 흔적이 있었으며 바로 옆에 마시고 버리고 간 페트병이 눈이 띄자 스님께서 직접 주우시며 내려가는 길에 버려진 쓰레기 좀 주워서 내려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살피시는 모습에서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하시는 모습에서 항상 감동하고 스님 모습 그대로 닮아가야겠다는 발심을 하곤 합니다. 성을 다 내려와서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백암산성은 평지에 닿는 부분에까지 외벽을 둘러쳐 놓아 산성의 크기와 웅장한 자태에서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던 옛 고구려인의 웅장한 기상과 스케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nbspnbspnbspnbsp 백암산성을 둘러보고 내려와 오늘 묵을 환인현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중간에 본계현에서 저녁 공양시간을 가진 후 다시 2시간 30분을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길이 바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가 졸본에 수도를 정하고 또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단군조선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요동으로 요서로 진출해 가던 바로 그 주요 이동통로라고 하셨습니다. 밤길에 그냥 지나갈 뿐인 단순한 그런 길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경로임을 일러주셨습니다. 또 이번 역사 기행에서 돌아보게 될 동북 3성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 숙소가 있는 환인에 도착하자마자 짐은 로비에 가지런히 모아둔 채 강의장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라 참가자들이 피곤할 것으로 생각하신 스님께서는 관광이 아닌 역사 공부하러 온 것이니만큼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보자고 기운을 북돋워 주시며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해 정성스럽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우선 가까이부터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대한민국대한제국조선고려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고구려의 뿌리인 부여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하였으므로 우리 민족의 시원은 환웅의 배달나라, 환인의 한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설명해 주시고 고려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함으로써 우리의 역사가 2천년에 그치지 않고 9천여년에 이를 수 있었고 강동6주를 되찾은 서희 장군의 담판의 배경에는 역사의식이 있었음을 설명해 주시면서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아울러 신라의 백성과 영토를 계승한 고려가 발해를 계승한다고 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족사의 축소를 가져온 것처럼 앞으로 통일 한국이 남북한의 역사를 함께 포용하지 못하면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축소될 것을 우려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앞으로 대한민국이 과거를 정리할 때에 북한에 대하여 어떻게 볼 것인가 규정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통일한 후에 북한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면 북한의 많은 독립운동들이 인정되지만, 북한 역사를 부정해버리면 독립운동사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남한의 독립기념관이나 독립역사를 보면 독립운동사의 일부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면서 우리의 독립 역사가 왜곡된 것입니다. 이는 남북한이 각각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면 상대를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아야하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의식이란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지금 힘들게 여행하는 것도 바로 역사의식을 가지기 위한 것입니다.”nbspnbspnbspnbspnbsp또한 중국은 자기 영토내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배달 문명을 같이 물려받고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웃 민족들을 도외시하여 역사를 축소시키고 있는 것을 스님의 설명을 통해 들으면서 우리도 모르게 중국의 관점에서 오랑캐로 치부해버린 이웃 민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nbsp“동북아 대륙에서 수많은 부족들의 합류 결과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고, 그 속에 신라, 발해, 백제, 가야, 옥저, 맥, 동예 등 모두 들어옵니다. 하지만 원줄기는 환인의 한나라이고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 해모수의 부여나라, 고주몽의 고구려로 연결되어 오다가 잠시 신라와 발해 2국 시대로 나눠졌다가 고려, 조선, 대한민국에 이른 것입니다. 중국은 계속해서 영토의 주인이 바뀌면서 각 나라의 수명이 짧았을 뿐 아니라 외세가 세운 나라도 모두 중국의 역사로 흡수하였기 때문에 역사가 풍부한 반면에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물게 각 나라의 수명이 길었고 사촌에 해당하는 여진, 거란, 선비, 몽골, 만주 등의 민족사를 모두 빼버리니 역사가 단출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북방민족에 해당하는 모든 민족들을 다 배달의 후예로 보아야 합니다.” nbspnbspnbspnbspnbsp“황하의 문명이 동아시아에서 앞섰다고 생각했으나 요하문명이 2천년 더 앞선 것이 밝혀지니 지금의 중국은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을 두 개의 물줄기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큰 역사의 왜곡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요하문명을 뿌리로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의 뿌리는 요하문명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무덤 문화만 해도 한족에게는 이를 계승했다고 할 만한 유적과 유물이 없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레 집안에 가서 고구려 벽화를 보면, 일연의 설화 이야기가 나오는 신단수, 동굴, 곰, 호랑이 등이 정확하게 나옵니다. 이는 위조할 수 있는 유물도 아닐뿐더러 5천년 전 홍산 문명 유적지에 이미 곰의 손모양을 한 여신의 유물이 나온 것과 연결해본다면 이는 단순히 설화라고 볼 수 없습니다.“nbspnbspnbspnbsp 우리조차 단순 설화로 치부하고 있는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를 이미 세상에 드러난 홍산문명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실들에 비추어 자세히 설명을 듣다보니 책 속의 신화가 우리 조상들의 삶의 이야기로 살아나오는 것 같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배달나라를 계승한 것이 조선나라이고. 조선나라의 일파가 남서쪽으로 가서 은나라를 세우고, 은나라가 망하자 고향으로 돌아온 게 기자조선입니다. 이때까지는 조선이 중국보다 앞섰는데, 후기 조선, 기자조선 이후에 문명이 주나라와 비등해지고 조선 말기엔 문명이 역전되었습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철기 문명이 발달하고 조선은 청동기 문명에 안주하다 한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그 이후로 수세에 몰리고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렇게 과거 역사 속에서 앞선 문명을 갖고 있다가 중국에 역전된 사례를 설명해 주시면서 지금의 우리에게 또다시 과거 역사의 반복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각심을 심어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지금 문명적으로 누가 앞서 있을까요? 땅 덩어리는 우리가 월등히 작지만 현재 한국이 중국에게 문명적으로는 앞서 있고 모든 것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같은 사상이나 산업 기술 등 여러 가지가 앞서 있는데 20년 후면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살려 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인류 최고의 문명을 가진 배달문명의 DNA를 민족혼 속에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신라의 목판인쇄, 고려의 금속활자, 조선 초기 과학기술 문명은 서양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는데 조선시대 자발적 사대로 인해 민족의 기상이 달라졌습니다. 문명의 뿌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nbspnbspnbspnbspnbsp마지막으로 우리가 역사기행을 온 목적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환기시켜 주시며 앞으로 남은 일정동안 참가자들이 역사기행을 진지하게 해 나갈 수 있도록 조언해 주셨습니다.“ 환단시대, 즉 환인, 환웅, 단군 시대는 사실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요하문명의 유적지가 있지만 다만 추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일부터 보는 고구려 유적은 기록도 분명하고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걸 보면서 이것이 어디서 왔느냐를 찾아가다보면 부여, 단군조선, 환웅의 배달나라로 갈 수 있고 또 이걸 누가 계승했을까 찾아가 보면 발해, 고려로 갈 수 있습니다. 고구려를 통해 상고사의 뿌리를 찾고, 계승자로 발해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고구려 유적을 둘러보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명심해서 여러분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역사 순례를 진지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이렇게 진지한 분위기 가운데 강의를 마치고, 내일의 일정을 위해 모두 숙소로 올라갔습니다. 내일은 오녀산성과 환도산성 그리고 국내성을 들러볼 계획입니다.nbsp65279nbsp오늘 스님의 하루 기행 부분은 전서영님, 강의 속기는 이선민, 김정윤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2014.8.2. 세월호 유가족 방문 및 전국교사불자연합회 법회
오늘 새벽 3시에 경주에서 출발하신 스님께서는 7시경에 서울 평화재단에 도착하셔서 7시 30분 조찬모임을 시작으로 9시에 회의가 있었고, 11시에는 대중부 임원들과 2015년 일정에 대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단식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 방문하셨습니다.nbsp오늘 오전회의도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사람들과 만나 의논하셨고, 또 정토회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들을 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이제 막 단식을 끝내고 보식을 시작하셔서 물 종류만 마시고 있는데, 실무자 안거에서도 실무자들과 함께 업무논의와 수행지도를 해주시다 보니 너무 무리하셨는데, 오늘도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오전 일정을 마치고 오후에는 먼저 국회의사당에서 단식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을 찾아서 위로를 하셨습니다. 먼저 유가족들의 아픔과 활동들을 위로한 다음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갈 것인지를 이야기 해주시면서 유가족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nbsp세월호 유가족분들은 스님의 의견에 동의 하면서 또, 스님께 유가족들 전체를 모아놓고 이야기 해주면 유가족들이 힘을 얻을 수 있겠다며 유가족들을 위해 법문을 해주기를 요청하기도 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국회의사당에서 단식중인 세월호 유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국회의사당을 떠나 광화문에서 단식중인 세월호 유가족도 찾아 위로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 방문한 이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야,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 및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전화를 하면서 조언과 해결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nbsp저녁 7시부터는 전국교사불자연합회에서 주관하는 수련회에서 법문이 육지장사에서 있었습니다. 법회에 앞서 스님께서는 육지장사 주지스님이자 조계종 포교원장이신 지원스님과 차담을 하시면 불교계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차담후 스님께서는 대웅전에서 오늘 법회를 즉문즉설로 진행하셨습니다. 종교적인 신앙에 대한 질문, 개인적인 질문, 세월호 사건으로 죽어간 학생의 형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선생님의 입장, 실천적 불교에 대한 질문등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광주에서 온 한 남자 선생님은 “생활불교, 실천불교를 하려고 하는데, 현장의 조직문화는 결과만을 요구하니 갈등을 느끼고 되고 갈등을 느낄때마다 기도를 하는데도 계속 상황이 반복됩니다. 갈등을 느낄때마다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와 한국불교가 정치적으로 진보와 보수가 우리가 볼 때 보수와 진보가 추구하는 면이 같다고 보는데, 종교는 어떤 방향으로 사회참여를 해야 할지요?”라며 스님께 물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여러분들은 원하는 만큼 돈을 못 벌고, 승진을 못하면 부처님께 돈 많이 벌고, 승진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하면 이럴때 이 사람은 자기 인생 문제를 자기 힘으로 못 풀어서 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 남편과 갈등이 생겨서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내가 힘들 때 도와달라고 하는데, 자기 생활도 해결을 못해서 여기저기 도와 달라고 다니는데 남을 도와주는 것을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을까요?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에게 손 벌리는 수준의 자식이 있다면 그가 어떻게 사회와 부모를 도울 수 있겠어요?nbspnbspnbspnbspnbsp남을 도우려면 먼저 자기문제는 자기가 풀어야 합니다. 자신이 여유가 있을때 옆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내 짐이 무거우면 무거운 짐을 진 옆 사람이 안보이고, 보이더라도 짐을 덜어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짐이 없어야 주위를 둘러보면서 무거운 짐을 진 옆 사람이 보이고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남을 도울려면 먼저 자기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nbsp한국사회가 물질적으로 먹고 살만한데 인간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법의 불법을 꽃 피울 수 있습니다. 원장스님과 이야기해보니 여기 탬플스테이를 하면 20명 중에 45명이 불교신자라고 합니다. 대부분 다른 종교이거나 무종교라고 합니다. 종교를 넘어서서 불법이 사람들에게 수요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불교계가 전법을 제대로 할 준비가 안되어 있습니다. 신도들은 전법은 감히 손도 못대는 것이라고 알고 있고, 우리는 복이나 빌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법이 가장 쉬운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인간의 고뇌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것입니다. nbspnbspnbspnbspnbsp직장에서 승진하려고 시기하고 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장하면 뭐하노’ 하면서 애들 가르치고, 태평같이 사는데 교장이 담임하라고 하면 ‘나는 수행자라서 안합니다.’ 라고 하면 소승입니다. 하라고 하니깐 해보는 것입니다. ‘학교의 변화를 위해서 상담교사, 지도교사를 제가 해보겠습니다.’하면 되고, 능력이 안되면 안하면 됩니다.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됩니다. nbspnbspnbspnbspnbsp부처님의 가르침은 5계입니다. 불살생계에는 때리지 말라는 것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불교신자인 선생님에게는 맞을 일은 없겠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자라면 폭력, 도둑질, 성추행, 욕설과 거짓말, 술 먹고 취하지는 않는다에 대해서는 보증수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아주 기본적인 것,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지켜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불교인들이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서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학교폭력은 때리고, 욕하고, 성추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오계를 지키도록 가르치면 학교폭력은 일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해서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조는 것은 남을 괴롭히지도, 손해 끼치지도 않은 것입니다. 엎드려 잔다는 것도 다른 이에겐 아무런 피해를 안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단치면 안됩니다. 떠는 것은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기에 잘못된 것입니다. 때리면 1번 계율에 어긋나니 밖으로 조용히 내보내면 됩니다. 조는 것은 계율에 안들어가지만 자기손해입니다. 자기 손해는 어리석은 것이니 깨우쳐줘야 합니다. 야단치는 것과 깨우치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구분을 안하고 섞어서 하니깐 학생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의식이 없습니다. 이건 불교와 기독교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입니다. 불자라면 불법에 대해서 진리의 문제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법에 대한 믿음,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적인 실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사회가 성과를 요구한다면 요구하는 대로 두면 됩니다. 이것은 나는 담배를 안피우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술도, 아무리 좋은 마약도 안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게 길이 아니면 안가면 되는 것입니다. 욕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 삶의 길을 딱 정하고 그 길에서 남을 돕고, 사회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라며 불자로서 불법을 믿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며 거기에 남을 돕는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또, 진보, 보수로 나뉘어진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자고 하고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이야기 하면 우리사회에서는 진보라고 하고, 북한 핵을 반대하고 북한 인권을 이야기하면 보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보보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으면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하고, 인권이 침해받는다면 해결해야 하고, 핵은 반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는 유지해야 합니다. 이건 상식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행하는 것이고, 그들은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보, 보수로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당시에 비난을 받았었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비난을 안받고 살겠어요? 예수님도 좋은 일만 했는데도 혹세무민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비난을 피해 가려는 것은 욕심입니다. nbsp세월호 사고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보상을 지나치게 한다면 그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보상은 해야 하지만 적정해야 하고, 진실은 확실하게 규명해 줘야 합니다. 진실규명을 너무 정치적으로 나가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어떤 오류가 있는지를 밝히는 것과 이 건을 가지고 하야 하라고 공격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중도의 길로 가야 합니다. nbspnbspnbspnbspnbsp대승불교는 사회실천 불교입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탄압 받았던 비정상적인 조선불교만 볼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 국가가 바르게 가도록 스님들이 지도를 했고, 초기의 화랑제도는 스님들이 젊은이들을 지도한 사회의 엘리트 교육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스님이 되면 천민이었고 노예로써 일년에 베 2포를 세금으로 내었습니다. 양반들이 절에 오면 ‘여봐라’고 했습니다. 중은 승을 번역한 복수의 계념인데 종놈처럼 놈을 붙여서 중놈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 여인의 치마폭에 싸이고 민간신앙과 결합하면서 겨우 명맥이 안 끊기고 이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원래 모습대로 회복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교사가 앞장서서 해야 합니다. 교사들이 아이들이 바른길로 가도록 하듯이, 교사들이 불교가 바른길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5계를 지키고, 야단치고 깨우치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다른 아이들 성적을 올려준 것이기에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손해 본 것으로 희생정신은 좋지만 너무 손해보면 되겠냐고 하면서 이야기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선생님의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조직과 형식을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nbspnbspnbspnbspnbsp교사불자연합회에서 개인 수행으로 나부터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두 번째 내가 잘 살고 나면 선생님으로서 교과에 대해서 창의적인 교육, 붓다처럼 깨달음을 향한 교육을 학교에서 시행해 가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바뀌어도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혼자 아이를 감당을 못하면 불자 선생님 3명 정도 모여서 연찬을 해보고, 학년이 바뀌면 정보를 서로 전해주고, 방황하는 아이들에 대한 실험 결과를 정리하면 책을 내어도 됩니다. 이름만 박사이고 해결 능력이 없고 남의 것에 주석만 단 책은 도움이 안됩니다.nbspnbspnbspnbspnbsp불자는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 자기 입지를 굳히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이웃에 조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nbspnbsp미래문명은 창조를 해야 합니다. 주입식교육으로는 창조가 안됩니다. 창조는 사상의 자유, 삶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창조적으로 아이를 키우려면 정답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과제를 주고 의견 발표를 할 때 ‘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니?’라며 그 아이가 제시한 내용 중에 앞뒤 말이 안맞는 것은 지적해 줄 수는 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제가 조금 창조적인 면이 있다면 어릴 때 불법을 만나서 불교적 사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화두는 고도의 창조성입니다. 모든 믿음을 부정하고, 주입식을 부정하고, ‘이 뭣고?’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의 미래가 바뀌고, 학교의 미래도 바뀌게 됩니다.”라며 교사불자로서 사회적 실천 활동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스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교사불자들에게 법에 대한 믿음과 삶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개인이 수행정진을 더 열심히 해야 하고 계율을 지키면서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밤 9시 30분이 넘어서야 모든 일정을 마무리 하고 정토회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11시 가까이가 되어 회관에 도착하셔서는 내일부터 있을 중국역사기행을 위한 짐을 꾸리시고 스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점검하셨습니다.
2014.8.1. 실무자 안거 수련 회향
65279nbsp오늘은 스님과 함께하는 실무자 안거 수련 3일째입니다. 오늘로써 지난 7월10일부터 시작된 실무자 안거 수련이 모두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스님께서 단식을 하신지 24일째 되는 날입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새벽4시30분부터 명상과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두북정토수련원 둘레 텃밭에 잡초 뽑는 일을 간단히 한 후, 아침7시30분부터 다시 연찬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께서 경주 황남빵을 사 오셔서 인도인 활동가인 쁘리앙카 법우가 끓여준 짜이와 함께 아침 간식도 맛있게 먹고, 활기차게 수련이 시작되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어제는 새롭게 제안된 아이디어들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는데, 오늘은 스님께서 “각 부서별 2015년 사업 계획을 점검하는 것이 더 급한 것 같다”고 제안해 주셔서 부서별 사업부터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두북정토수련원의 시설 보완과 농장 운영, JTS 창고 정리를 어떻게 할지, 2015년에는 어떤 내용으로 책을 출간할지, 평화재단 교육원에서 진행되는 강의를 정토회 회원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홍보하는 게 적절한지, 11월에 있을 평화재단 10주년 기념행사를 어떻게 준비할지, 청년정토회와 청년포럼, 청년리더십아카데미 3개 단위가 어떻게 서로 협조하며 시너지 효과를 낼지, JTS의 해외 사업장에 파견되는 인력에 대한 관리 방안... nbspnbspnbspnbspnbsp그리고, 갈수록 늘어가는 외국인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지원 대책, 올해 겨울에 있을 인도성지순례 준비 방안, 2015년 동북아 역사기행 개선 방안, 용성조사 기념사업 개선 방안, 인터넷방송 준비 방안, 실무자들의 행자교육 방안, 문경 수행공동체 운영을 위한 원칙과 기준, 늘어나는 여행 업무를 전담해줄 부서 신설에 대한 검토, 각종 여행 사업 진행 시 안전요원의 배치 문제 등... 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실무자들이 질문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정성을 다해 방향을 일러주시고 관점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오전 7시30분에 시작된 연찬은 오후5시가 되어서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저녁을 간단히 먹은 후, 저녁6시30분부터는 지난 23일 간의 실무자 안거 수련을 마무리하며 각자 소감문을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감문 발표를 모두 들으시고, 스님께서는 앞으로 사무실로 돌아가서도 어떻게 일상에서 마음 수행을 계속 해나갈 수 있을지 회향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여러분들 이야기 듣고 참 좋았습니다. 어떤 분은 ‘따로 시간을 내어 108배를 더 하겠다’ 고 하고, 어떤 분은 ‘명상을 매일 40분씩 더 하겠다’ 했는데, 공동체에서 정해준 수행만 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어 수행을 더 해보면 좋겠습니다. 정해진 것만 하면 소극적이 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해보는 것이 작지만 삶을 더 적극적으로 만듭니다. 실무자들 건강이 늘 걱정이었는데, 다들 건강이 좀 회복된 것 같아서 좋네요. 의견 발표할 때 또박또박 얘기하는 분들을 보면서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기 의견을 얘기할 때 조금 들뜨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자기 의견이 있을 때 ‘내가 말해서 뭐해’ 이렇게 하시지 말고, 의견을 또박또박 표현해 보는 게 좋습니다. 자기 의견을 가볍게 내고, 다른 의견이 나오거나 비판이 있어도 가볍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 게 필요합니다. 특히 평화재단 사무국 사람들은 스님을 만나러 오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접대 한다고 애 많이 쓰셨어요.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립니다. 서로 좋아서 결혼한 부부도 의견이 안 맞아서 싸웁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같이 살다보니 의견 다툼이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무런 사심이 없지 않습니까. 돈 벌려고 여기 들어온 것도 아니고, 출세하려고 여기 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일을 잘하려다 보니까 충돌을 하는 건데, 그럴 때 조금 더 큰 목표를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의견이 서로 다른 것을 조율하고 맞춰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아집을 내려놓는 연습입니다. 자기 의견을 고집해서가 아니라 이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더 많은 설명과 설득을 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큰 목표를 놓치고 작은 문제에 사로잡히면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사업을 할 때도 전체 사업이 잘되는 것 안에서 자기 사업이 잘되어야 합니다. 아직 정진 중이니까 개인 간에 충돌이 있을 수 있지만 항상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야 합니다. 말투도 지역 따라 다릅니다.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은 본인도 고치려고 해야 하지만, 도반들도 그런 성질을 받아들이고 수용해줘야 합니다.nbspnbsp 공동체 안에서 살다가 나중에 늙으면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여기 있는 35명이 힘을 합해 살면 설령 최악의 경우가 생겨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전체 사업은 시간이 흐를수록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문명적인 비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경파괴, 인간성 상실, 구호문제, 평화문제 이런 것들을 다 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사회에서도 항상 진보의 방향에 놓여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런 사회를 개선해나갈 역량이 얼마나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욕구를 억압하지 않되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에 맞게 우리의 욕구를 절제해야 하고 혐오를 뛰어넘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여기에서 억압받지 말아야 해요. 그런 면에서 마음을 편안하고 가볍게 했으면 합니다. 눈치 볼 필요가 뭐가 있나요? 좀 더 자유롭게 살았으면 해요. 다만 몇 가지 정한 원칙이 있습니다. 생활의 원칙은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중간층 이하로 살자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하층으로 살아야 전 세계적으로 중간층 정도가 됩니다. 특히 젊은 대중들은 욕망대로 살아야 하는데, 여기 와서 절하면서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결국 꿈을 향해 사는 것으로 바꿔치기 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우리들의 인생이 행복해지고 사회가 진보하는 쪽으로 온 역량을 쏟으며 함께 살아가 봅시다.”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 해주신 회향 법문을 끝으로 지난 7월10일 시작한 23일 간의 실무자 안거는 모두 마무리 되었습니다. 실무자 상근자 모두가 적극 참여하는 모습이 참 감동이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마지막으로 실무자들은 안거를 만들어주고 서로 탁마해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고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주신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정성껏 삼배를 올렸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간단히 다과를 하며 못 다한 이야기를 더 나누며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일 새벽부터 서울에서 일정이 빡빡히 잡혀 있으셔서, 다과회에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시고 휴식을 취하신 후 새벽 3시 경에 서울로 출발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