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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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19. 필리핀 출국, 아라오 부대 강연

nbsp 스님께서는 아침 8시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1경에 마닐라공항에 도착하셨습니다. 도착 후 잠시 마닐라 정토법당에 오셔서 간단한 점심을 드신 후 다시 타클로반으로 출발하기 위해 마닐라 공항으로 향하셨습니다. 마닐라공항에서 오후 2시30분 비행기를 타고 4시경에 타클로반 공항에 도착하니 아라우부대에서 스님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습니다. 타클로반은 작년 말에 기상관측 이래 가장 강력한 태풍으로 해일까지 겹쳐 피해가 심각했던 지역으로 공항을 나왔을 땐 태풍의 피해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천막으로 지붕을 덮은 집, 뼈대만 남아 있는 집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야자수나무들은 힘 없이 바닥에 널 부러져 있고 아직 도로 곳곳이 정비되지 않았습니다. 아라우 부대는 작년 12월말에 필리핀 레이테주의 동부지역의 복구를 위하여 필리핀 합동지원단부대로 파병되었습니다. 아라우란 이름은 따갈로어로 태양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타클로반 주민들에게 태양같이 희망, 소망을 주는 존재가 되자는 뜻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피해지역의 학교, 공공기관 정리 및 보수, 의료지원, 방역활동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에 감동한 현지 주민들 또한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nbsp 부대장의 부대 안내시설에 대한 설명을 듣고 부대에서 준비한 저녁식사를 한 후 7시부터 300여명의 장병들을 대상으로 스님의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강당에 모인 300여명의 장병들은 스님께서 입장하자 큰 박수로 맞이해 주었습니다. 부대장님으로부터 스님에 대해 간단한 소개가 있은 후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서두법문에서 날씨가 더운데 고국을 떠나 필리핀까지 오신 장병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움과 노고에 감사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1960년대에는 필리핀이 우리나라를 지원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에 처해 있는 필리핀을 지원을 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고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필리핀에서의 구호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2002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후 천주교 대주교님의 조언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교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듯이 민다나오의 평화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민다나오는 원주민과 무슬림 지역에 정부의 지원 소외되고 있어서 이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인종, 종교, 민족, 신분에 관계없이 배고픈 아이들은 먹어야하고 아픈 아이들은 치료받아야 하며 아이들은 제때 배워야 한다며 JTS의 사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은 자기 스스로가 사는 것이지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살아가면서 물으면 내가 살아온 인생에 비춰서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조언은 할 수 있습니다. 인생, 종교, 과학, 구호활동, 한반도의 평화 등 다 물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불교를 믿으라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 선배로 편안하게 물어보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전에 질문지를 받았으나 직접 손을 들어 질문을 할수 있도록 하니 첫 번째 질문자는 파병이 끝나면 전역 한달이 남는데 전역후 안정적으로 살아가는게 좋을지 아니면 어렵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고, 두 번째 질문자는 세계역사에서 분쟁의 반 이상이 종교전쟁인데 왜 종교전쟁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하는 질문, 세 번째 질문은 지구의 종말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질문, 네 번째 질문은 스님께서는 많은 활동을 하시는데 그 일을 하는 신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다섯 번째 질문은 부대장님께서 젊은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은지 대한 말씀을 부탁하셨습니다. nbsp 스님께서는 “첫째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삶은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이 아니듯이 우리가 살아 가는데 내가 선택할 수 없는게 많습니다. 무엇을 믿든 자기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마십시오. 내가 할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일은 사람이 하고 뜻은 하늘이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데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되지 않을 때 다시 해보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고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마라.’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결과를 경험삼아 유용하게 활용하십시오. 실패를 상처로 간직하면 고통으로 살지만 내 경험으로 이용하면 자산이 됩니다. 시험에 떨어졌다면 그 떨어진 것을 경험삼아 다시 공부하면 전화위복이 될수도 있지만 주저앉아 버리면 상처가 됩니다.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 만드는 것 아니네.’ 그래서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생각해야 자긍심도 생기고 자기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nbsp 두 번째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도움이 되면 보람이라는 심리적인 현상이 생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세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꼭 있어야 되는 사람, 있으나 마나 하는 사람, 없으면 좋을 사람이다.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없어야 되는 사람은 남에게 손해나 피해를 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행복하면 나도 좋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니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은 인생이 행복으로 이끕니다. 지금 하는 일이 보람되면 젊은 시절 좋은 경험이 되어 내 삶에 여러 가지로 좋습니다. 힘들다 생각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그리고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인다면 여기 생활이 여러분 삶의 좋은 추억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nbsp 9시30분쯤 강연을 마치고 아라우부대를 출발하여 숙소에 도착하니 10시 가까이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숙소에 도착하셔서도 내일 있을 마라봇 시 학교준공식과 관련한 논의를 하셨습니다. 내일은 마라봇시 학교 준공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2014.08.21. 15,880 읽음 댓글 2개

2014.8.18. 한국 도착 그리고 5번의 회의

스님께서는 동북아 역사 대장정을 끝마친 청년들과 헤어져서 중국에서 하루 더 머무시면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사업등과 관련한 업무를 보신 후 밤 12시 30분경 인천공항에 도착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18일 새벽 1시 30분경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하여 짐을 정리하고 업무를 더 보신 후 또다시 아침 7시 30분부터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민통합회의’ 실무모임 모임이 있었습니다. 오늘 모임에서는 지난 6월 19일에 있었던 1주년 모임 이후 하반기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실무모임에서 초안을 만들어 9월 운영위에 제안을 해보자고 논의되었습니다. nbsp이어서 9시 30분에는 회향한 실무자 김재령법우님과 잠시 미팅을 한 후 다시 통일대담 8회분 원고교정의 업무를 보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12시에는 사회인사와 점심을 겸한 만남이 있었고, 오후 2시에는 JTS 실무진과 행정처 관계자들과 함께 2015년도 인도성지순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내년 인도성지순례때에는 500여명이 참여하기 때문에 지부별로 어떻게 준비하고 코스를 나눌 것인지, 거기에 따른 비행편, 숙소, 기차, 진행방안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중국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연속회의를 하시면서 오후 4시에는 평화재단 팀장들과도 사업점검을 하셨습니다. 내일이면 필리핀 마라봇에 지원한 학교의 준공식을 위해 필리핀으로 가시고, 25일부터는 해외 100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사실상 오늘이 스님의 얼굴을 뵈면서 회의하는 사실상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현재 진행되고 있는 청년포럼의 독일탐방사업 성격에 대한 진단과 홍보방식, 재단 활동과 연관된 대중활동, 교육원의 아카데미 홍보방식 등에 대해서 원칙을 확인하고 적용에서의 탄력적 범위를 공유했다. 특히 하반기 가장 큰 행사인 11월 18일의 재단 10주년 행사에 대해서 큰 얼개를 그렸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연구원의 창립 심포지엄과 함께 10년동안의 통일운동의 현재 활동성과를 알려내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번이라도 참여했던 모든 분들의 노력과 정성에 감사드리는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저녁시간에 별도로 갖기로 했습니다.연구원과 교육원의 활동에서 이제는 청년포럼과 통일의병의 대중활동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활동원칙과 과제들에 대해서 팀장들과 편안하게 질문을 주고받으며 논의하였다. 원칙에 대한 분명한 확인, 적용할 때의 탄력적 범위와 과제 등을 도출하는 과정은 늘 일의 성과에 쏠리기 쉬운 우리들에게 무엇을 중심에 두고 가야 하는 지를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nbsp오후 7시에는 평화재단 기획위 회의가 있었습니다. 정국의 흐름이 여전히 막혀있어 북한 관계는 답보상태 이다보니 논의는 시원하게 풀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4박5일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프란시스코 교황방문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과 역사적 의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하반기 스님의 해외 100강 동안 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적 과제를 어떻게 준비할지 각자 준비를 해 보기로 논의가 모아졌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 아침 7시 30분부터 진행된 스님의 하루는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마무리 되었고, 스님께서는 정토회관으로 돌아오셔서 남은 업무를 다시 점검하시면서 내일 필리핀으로 갈 준비를 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내일부터는 필리핀 방문 일정이 있습니다.

2014.08.19. 16,326 읽음 댓글 9개

2014.8.16. 동북아 역사 대장정 일곱째 날 - 청산리 전투터, JTS 중국지원 사업장 방문

65279nbsp동북아 역사 대장정 일곱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기상시간을 2시 50분으로 당기고 3시 30분에 출발했습니다.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은 화룡 새벽시장에서 아침거리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빡빡한 일정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에 참가자들은 시장 구경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새벽시장을 달궜습니다. 각종 과일과 꽈배기, 만두, 피자 등의 시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을 사와서 버스에서 하나씩 풀어가며 나누어 먹었습니다. 조끼리 서로 음식은 교환하기도 하고 귤 한 쪽까지도 나누어 먹으니, 7박8일 일정 중 마지막 아침식사답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버스는 벌써 청산리 지역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원래 스님은 청산리 계곡 밑에 농장을 만들어 수련원을 짓고 우리나라 청년들이 말도 타고 활도 쏘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게 할 계획이었는데,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실행에 옮기겠다는 스님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nbspnbsp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당시 주민 20여 가구가 살았다던 백운평 자리에 모여서 잠시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토벌작전을 개시하자 김좌진장군의 부대는 화룡의 언덕에서 회의를 한 후 청산리 계곡으로 후퇴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와 함께 우리독립운동 역사에서 큰 승리로 꼽을 수 있는 전투이고 청산리 일대에서 일주일간 일어난 여러 교전들을 통칭하여 넓은 의미로도 부른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절대적인 전투력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로 적군을 유인해서 기습하거나 야습하는 등의 방법으로 많은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얘기해 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승리를 자랑스러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것을 기억하고 이를 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시며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출발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산책하는 느낌보다는 진군을 한다는 마음으로 서둘러 가자는 스님의 말씀에, 우리 청년들은 독립 열사님들의 지난 행보를 상상하면서 사뭇 비장하게 산길을 올랐습니다. 독립군들이 적군을 유인한 후 삼면에서 기습을 했던 바로 그 현장에 도착해서, 제를 지내고 희생된 모든 원혼들의 원한을 달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를 드리기 전에, 스님께서는 돌아가신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따르다가 희생된 일본 젊은이들의 원혼 또한 미워하지 말고 달래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주지시켜 주었습니다. 일본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를 미워해야 한다는 그 뜻을 한번 더 되새겨보니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nbsp6527965279nbspnbsp숨이 찰만큼 빠른 걸음으로 올라오느라 힘들었지만, 기도가 끝난 후 다 같이 주변의 상쾌한 공기를 느껴보니 한층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스님께서도, 원래는 버스를 계곡 입구에 세우고 산을 더 많이 올라야 하는데 일정이 급하게 바빠져서 차를 타고 백운평까지 오게 된 것이 아쉽다고 말씀하시니 우리 청년들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청산리 전투터 기념탑 앞에서 잠시 내려 단체 사진을 찍고 강 건너 북한의 무산시를 보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오늘 중국 JTS에서 지원하고 있는 양로원 및 고아원, 장애자 시설 3곳을 지원하기 위해 여기서 참가자들과 헤어지고 용정으로 출발하셨습니다. 우선 JTS에서 운영하는 옥수수 국수공장에 들러 국수 생산 상황을 점검해 보고 조선족 자치현마다 운영되는 양로원 관계자들에게 국수를 나눠주신 후 이번 역사기행팀 편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들을 가지고 고아원, 중증 장애아 시설, 양로원을 차례로 방문하셨습니다. 주로 탈북 한 여성들이 중국에서 낳은 아이들을 수용한 고아원에는 23명의 아이들이 지내고 있었는데 전직 공무원이었던 분이 퇴직 후에 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국가의 지원이 미치지 못하는 그늘을 개인이 메꾸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밝은 표정의 원장님을 보면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전체 시설을 둘러보고 아이들 현황을 설명 들으신 후 아이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 준비해 간 선물을 직접 나눠 주셨습니다. nbspnbspnbsp이어 중증 장애아와 노인들이 지내고 있는 곳을 찾아갔는데 이곳 원장님은 작고 통통한 여성이었지만 성격이 밝고 시원시원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좋게 만드는 분이었습니다. 역시 공직에 있다가 퇴직하여 이런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데 사업 수완이 좋으신지 한 쪽에는 또 하나의 건물을 짓고 있었습니다. 전날 스님께 드릴 감사패를 급히 준비했는데 용정에서는 케이스를 구할 수가 없어서 예전에 본인이 탔던 상의 케이스로 대신했다고 솔직하고 유쾌하게 고백하자 스님께서는 케이스는 개인에게 소중한 것이니 감사패만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는 중증 장애아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원장님의 요청으로 건물 난간에 붙여놓은 플랭카드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nbsp마지막으로 국가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에 방문하여 선물을 나눠드리고 노인들이 거주하는 방을 일일이 열어보고 침대에도 누워보시면서 머리맡의 사물함 때문에 노인들이 다칠 수 있다고 걱정하시고 나무 침대 위에 얇게 깔린 매트리스를 보시고는 이 부분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관계자들과 상의하시며 꼼꼼하게 점검해 보셨습니다. 건물 앞에 모여 계셨던 할머니들은 낯선 방문객들을 매우 반가워하셨고 스님과 사진 찍기를 원하셔서 밝은 표정으로 소녀처럼 포즈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어가면서 예전에는 국가가 지원해주던 복지 부분이 오히려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하는데 중국 JTS에서는 이런 취약계층에 대해 지속적인 지원을 해나갈 계획이라 합니다. 양로원에서는 감사 깃발을 마련하여 스님께 감사의 뜻을 나타냈는데 제3세계의 어린이 뿐만 아니라 노인의 구호에도 관심을 갖고 지원을 확장해가는 JTS 사업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국수를 분배하면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던 점에 대해 구호활동에서는 공정하게 나눠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며 인도에서의 구호 경험을 나눠주셨습니다. nbsp스님께서 양로원, 고아원, 중증 장애우 시설을 방문하는 동안 참가자들은 평화재단 이승용 사무국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강 건너 북한의 무산시를 가까이 볼 수 있었고 독립투사들의 애환이 서린 일송정과 용정중학교를 둘러보고 스님의 7일째 강의를 듣기 위해 스님과 강의 장소에서 만났습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오늘 오후에 양로원과 고아원 등을 방문하셨던 내용을 공유해 주신 후 이어서 7일간의 동북아 역사 대장정에 대해 총 정리하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이제까지 우리는 요하 문명을 시작으로 고구려 역사를 보고 발해의 역사를 보아왔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이어 받았고, 고구려는 부여의 문화를 이어받아왔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nbspnbspnbspnbspnbsp모든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우리가 지금 통일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뭘까요? 현재 남한은 통일에 대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만 의지가 없고, 북한은 현재 통일을 주도할 역량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남한은 북한에 대해 어떠한 자세와 포용력을 가지냐에 따라 새로운 100년의 비젼을 만들 수도 있고, 아주 위험한 위기의 국면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는 말씀으로 우리 청년들에게 커다란 과제를 남겨주셨습니다.nbsp또한 미래지향적인 비전으로서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게 하셨습니다.“동북아 역사 대장정에 적지 않는 돈을 투자하고 입맛에 맞지 않는 식사와 짧은 취침시간을 감수하면서까지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에 다시 한 번 생각하였으면 좋겠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이렇게 마지막 강의가 끝나자 7월에 20여일간의 단식 후 보식을 하고 계신 상태임에도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청년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민족의 자긍심을 깨워주시는데 열정을 다해주신 법륜스님께 참가자들은 힘찬 박수로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나누기를 한 후 이번 역사기행을 위해 수고하신 분들에 대한 소개와 감사의 뜻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도 초기부터 법륜스님과 역사기행을 같이 해 오셨던 방학봉 교수님 내외분이 참석하여 참가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nbsp이렇게 7일간의 동북아 대장정이 막이 내려갑니다. 법륜스님께서는 참가자 일행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중국내 JTS 사업 점검차 내일 북경에 가셨다가 귀국하신다고 합니다.참가자들은 심양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실었고 법륜스님께서는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에 심양 공항에 도착하기 위해 밤새 길을 달려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참가자들은 버스에서 마지막 나누기를 한 후 광활한 대륙을 호령하던 조상들의 혼과 기상을 가슴에 담은 채 7일간의 피곤을 풀기라도 하듯 하나 둘 잠자리에 들어갑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임정수님이, 강의 속기는 이동훈님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2014.08.18. 17,488 읽음 댓글 3개

2014.8.15. 동북아 역사 대장정 여섯째 날 - 요전자 24개석, 흥륭사, 상경용천부, 봉오동 전투터

동북아대장정 여섯째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한 청년들은 4시에 오늘의 첫 목적지인 발해진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어제 천지를 본 여운이 아직 남아있어서 인지 다들 즐겁고 밝은 얼굴들입니다. 스님께서는 아침인사를 하시면서 오늘이 벌써 역사기행 여섯째 날인 것을 확인 하시고 “처음은 하루가 긴 것 같지만 금방 지나간다” 고 말씀하시며 오늘 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nbsp65279nbsp65279오늘은 옛 발해의 첫 수도였던 돈화를 출발하여 발해진으로 가는 도중에 어제 보았던 강동 24석과 같은 성격의 요전자 24개석과 동북지역에서 백두산 다음으로 많이 찾는다는 경박호를 거쳐 발해진에 도착해서는 흥륭사, 상경용천부와 박물관 등을 둘러본 후 점심식사를 하고 도문으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봉오동 전투터를 둘러보고 나서 한반도 최북단까지 둘러보는 일정이라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광복69주년을 맞는 광복절에 스님과 함께 봉오동 전투터를 비롯한 옛 발해 유적지를 둘러본다고 생각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시간 정도 버스를 달리니 한적한 농촌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요전자 24개석을 보러 가시면서 스님께서는 “춥지도 않고 시원한 날씨네요” 라고 운을 떼시면서 농촌치고는 깨끗한 마을이라고 주변을 둘러보시며 사뿐하게 걸어 가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요전자 24개석은 어제 돈화에서 봤던 강동 24개석 보다는 크기도 작고 잘 다듬어 지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첫줄 빼고는 2번째 3번째 줄 돌들은 코스모스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한 바퀴 둘러본 후 차량으로 이동하시면서 스님께서는 코스모스에 담겨있는 어렸을 때의 추억담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렸을 때 코스모스를 가지고 놀이를 즐기시는 스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발해진으로 다시 출발하기 전에 잠시 휴식을 갖고 나서 흑룡강쪽으로 20분 정도 버스를 달리니 경박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경박호는 2만년 전에 용암이 강으로 흘러내려 용암이 댐 역할을 해서 생긴 호수라고 합니다. nbspnbspnbspnbspnbsp경박호를 지나 조금 더 차를 달리자 광활한 만주 벌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1300년 전에 이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발해인들과 웅장한 발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그런 초원을 바라보면서 옛 발해성이 있었던 발해진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발해진에 도착해서는 외성의 남문으로 들어가서 발해시대에 세워졌다는 흥륭사를 제일 먼저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이 절은 발해시대때 만들어 졌지만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불에 탔던 절을 청나라때 복원하고 지금도 그 기초위에 복원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흥륭사 절에는 발해때 만들어진 석등, 석상과 함께 청나라때와 요즘 보수되어진 것까지 함께nbspnbsp시대의 잔상처럼 공존되어 지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흥륭사에는 입구부터 시작해서 석등이 있는 공간을 제외한 총 6개의 건물에 최근에 만든 각기 다른 상들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금강역사상을 시작으로 관세음보살상, 관음장, 복을 상징하는 포대화상, 삼전불상에 이어서 마지막 건물에는 발해시대에 만들어진 대불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이 불상은 돌로 만든 것으로는 동북지역에서 제일 큰 불상이라고 합니다. 우리 역사대장정 참가자들은 스님을 중심으로 대불상 앞에 둘러 모여서 예불과 스님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발원문에 이어서 반야심경을 봉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석등 앞에서는 스님과 함께 조별로 단체 사진을 찍고 특히 스님께서는 이번 기행동안 사진 봉사를 한 청년 두 사람과 함께 개인 사진을 찍어 주셨습니다. nbsp65279nbsp65279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상경성 이었습니다. 상경성은 발해가 망할 때까지 162년동안 발해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 였다고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내성내에 있는 궁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박물관에 들어가서 조감도를 먼저 보려고 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개관을 안 한 상태여서 스님께서는 어화원을 먼저 둘러보자고 하셨습니다. 어화원이란 “임금님이 놀던 정원” 이라고 알려주시면서 정원안에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은 사람의 얼굴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설명해 주셨지만 주변이 워낙 크고 넓어서 박물관에 들어가서 상경원 왕궁터의 전체 모형을 보고 나서야 연못의 얼굴 모양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연못을 둘러보는데만 도보로 10분 정도가 소요되었으니 상경원 전체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과 비슷한 것으로는 신라시대의 안압지를 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화원을 둘러보고 오자 박물관이 개장을 하여서 박물관에 들어가서 간략하게 발해의 역사와 유물, 그리고 상경성의 모형과 궁전들의 특징을 살펴 본 후에 성문인 오봉루를 통해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봉루는 성문에 문이 달려 있지 않고 성문의 양옆에 사람만 출입할 수 있을 정도의 문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봤을 때 마차는 궁성 안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봉루를 지나면 제1궁전을 시작으로 제5궁전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제2궁전에 모여 앉아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를 함께 들었습니다. “우리들이 항상 바라는 것, 서로가 웃고 돕고 사는 것, 이젠 함께 하나를 보며 나가요” 라는 가사말처럼 이제는 발해 시대의 광활한 영토를 꿈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남북한이 서로 돕고 화합해서 새로운 비전을 가진 통일한국을 이루어 내면 얼마나 기쁠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발해라는 나라가 결코 상상속의 나라가 아닌 살아있는 우리의 역사 였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점심을 좀 일찍 먹고 봉오동 전투터가 있는 도문으로 향하였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3시간 30분 정도 차를 달려서 봉오동 전투 전적지가 있는 도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작년에 새로 만들었다는 기념탑에 모여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희생하신 전사자 분들에게 참배를 하였습니다. 일제의 무력 탄압속에서 한줄기 희망이 되어 들려온 봉오동 전투의 승리 소식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큰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광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지금의 한반도는 아직 분단 상태에 있기 때문에 아직은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루 빨리 통일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화창한 날씨 그리고 높고 푸르른 하늘이 오늘 광복절을 맞아 이곳 봉오동 전투 기념탑에 모여서 동북아 역사대장정을 해나가고 있는 젊은 청년들이 대한민국에 있는 한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대답해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nbspnbspnbsp 우리 일행은 봉오동 전투터에서 발길을 돌려 한반도 최북단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왕청과 연길 등지에서 내려오던 가야하와 부르하퉁하가 두만강과 합수하게 되는데, 이 합수목이 크게 휘어지면서 잠시 북상하는 구간이 한반도의 최북단, 즉 지도에서 토끼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눈물 적은 두만강’과 강산에의 “라구요”를 다함께 불렀습니다. 북한에 있는 고향땅을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다는 가사가 가슴 깊이 울려 퍼졌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마지막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동쪽에 위치한 도문시의 조중우호다리 근방을 산책한 다음 두만강 광장로 가서 북한땅을 바라보며 사물놀이를 하며 광복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신명나는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저녁식사를 한 후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광복절을 맞이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되신 호국영령들의 왕생극락을 비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의가 시작된 후 스님께서는 오늘 둘러본 발해의 유적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해 주시며, 발해의 흔적은 찾을 수 있지만 후손들이 우리나라 역사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잃어버린 역사가 되어버렸다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nbspnbsp65279현재 드러난 현상은 과거의 결과이므로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 100년이 또 불안을 겪을 수 있으므로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어서 조선시대와 구한말, 일제 강점기 시대 및 해방 후 현대사를 정리해 주시며, 현재 남북한이 모두 이념 때문에 독립운동사를 왜곡하여 축소되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독립운동사를 회복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독립운동이 이념에 관계없이 객관적이고 포용력 있게 받아들여져야 통일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음을 강조하시며 6일차 강의를 마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로서 발해의 유적을 돌아보는 일정이 끝이 나고 내일은 항일항쟁유적지를 돌아보게 됩니다.nbsp65279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오광석님이, 강의 속기는 권지현님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2014.08.16. 17,595 읽음 댓글 2개

2014.8.14. 동북아 역사 대장정 다섯째 날 - 백두산, 동모산

동북아 역사 대장정 다섯째날인 오늘은 백두산과 발해 유적지를 둘러보는 일정입니다. 새벽 4시 반. 서둘러 백두산을 향해 출발하는 버스 안은 새벽의 고요함과 설레임 그리고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북편 산문을 향해 한 시간 반 가량 가는 동안 동이 터오기 시작했고 구름이 뒤덮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산문에 도착해 입장을 기다리는 사이 날씨는 화창해졌고 천지를 볼 수 있으리란 확신에 가슴이 뛰었습니다.nbsp nbsp 드디어 입장시간인 6시 15분. 관광객을 맞이하는 중국 직원들의 유쾌한 인사춤이 끝나자마자 선발대가 표를 끊기 위해 뛰어갔습니다. 스님께서는 입장을 기다리는 대중들에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안전에 주의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윽고 표를 받아든 우리도 서로를 챙기며 버스 승차장을 향해 힘껏 달리기 시작했습니다.nbspnbsp 버스에서 내려 다시 봉고로 갈아타고 천지를 향해 하늘 가까이 올라가는 시간. 굽이굽이 버스가 달리는 동안 눈부신 햇살이 차안을 가득 채웠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우리는 백두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nbspnbsp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이리저리 쏠리며 오르던 봉고차가 드디어 멈추었습니다. 머리위로 손에 잡힐 듯한 구름을 이고 계단을 한달음에 올라 도착한 그곳은 백두산 천지 눈부신 태양 아래 에메랄드 빛 천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수면위로 희미한 물결이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민족의 영산 천지. 우리의 선조는 떠난 지 오래지만 천지가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높고 자유로운 기상이 우리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곧 모두의 얼굴이 천지와 같이 맑아졌습니다. 스님께서는 장군봉 등 천지 둘레의 봉우리와 북한과 중국의 경계지점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가슴 뛰는 풍경을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고, 가슴에 담았습니다.nbsp 천지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비룡폭포였습니다. 회색빛의 화산지형 사이로 새하얀 물줄기가 떨어져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그 모습에, 이름처럼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스님께서는 참가자들 모두와 개인 사진을 찍어주셔서 모두들 멋진 사진을 남기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섰습니다. 마지막은 환한 미소를 띤 스님의 독사진으로 마무리하고 다음 장소로 향하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비룡폭포를 따라 내려오는 양옆으로는 구불구불한 자작나무와 싱싱한 야생화들이 마주보며 길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거대한 장막과도 같은 웅장한 화산지형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아래로는 온천수가 흘러 신묘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온천수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뜨거움, 그리고 온천수에 달궈진 계란 맛 또한 일품이었습니다.nbspnbspnbsp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소천지로 향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소천지는 마치 거울처럼 위쪽의 풍경을 수면 위에 똑같이 반사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설명을 해주시며 그 주위를 한바퀴 돌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면 위로 똑똑 떨어져 내리는 반짝거리는 빗방울들... 그 고요한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우리는 천천히 걸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 소천지에서 나와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녹연담이었습니다. 조각해 놓은 듯한 바위 위로 떨어지는 세 개의 물줄기가 진옥색의 물속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청명함에 우리는 감탄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 녹연담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뒤로 한 채, 암반 사이로 흐르는 차가운 물에 손을 적시기도 하며 우리는 지하 삼림으로 향했습니다. 지하 삼림은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함몰된 넓은 면적의 땅에 숲이 형성된 곳을 말하며 주변을 뺑 둘러서 절벽이 있으므로 마치 땅 아래에 숲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진 곳입니다. 바닥은 온통 화산석으로 이루어져있고 흙이 덮여있는 부분은 채 20cm 도 안되어 나무뿌리가 전을 부쳐놓은 것처럼 옆으로 퍼져있다는 스님의 설명에 청년들은 신기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태고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서 우리는 상쾌함과 웅장함을 만끽하였습니다.nbsp 백두산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나오는 길, 출입구의 장백산이라는 표지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중국에서 백두산을 빠른 속도로 관광지로 개발하는 탓에 한해 한해 달라져가는 그 모습 또한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nbsp65279nbsp 그래도 청년들이 힘들어하면서도 열심히 일정을 따라준 공덕으로 좋은 날씨 속에서 천지도 보고 백두산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는 스님의 말씀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시각각 날씨가 변하여 우리가 내려온 후 다시 안개로 뒤덮여버린 천지를 생각하니 이렇게 무사히 일정을 마친 것에 대한 감사함이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이도백하에서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으로 향했습니다. 대석하라는 개울 앞에서 둥글게 솟은 동모산을 바라보며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고구려 말기의 상황과 발해의 건국과정에 대한 스님의 설명을 듣는 청년들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발해 유적에 대한 중국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어 성벽 위에 올라가 볼 수가 없으며, 한때는 멀리 떨어져 서서 설명하는 것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2배에 달하는 영토를 이룰 정도로 번성했던 발해의 첫 시작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함에 안타까움이 몰려왔습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창밖으로 육정산과 정혜공주 무덤을 바라보며 최근에 발굴되고 있는 발해의유적지에 대한 정보가 아직은 공개되고 있지 않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중 24개의 돌은 오직 발해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유물입니다. 길가 한구석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강동 24개석의 모습을 바라보며 타국에서 선조들의 유물이 함부로 방치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리기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것의 용도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여러 가설만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시며 그 용도를 맞추어 보라고 우리에게 과제를 주셨습니다. 청년들은 그 쓰임새에 대해 궁금해 하며 저녁식사 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 nbsp65279nbsp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후 이어진 5일차 저녁강의에서는 동모산에 다녀온 말씀과 함께 발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백두산에서 제일 가까운 지역에 수도가 있다면 발해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고구려의 수도에서도 백두산까지는 45시간, 요하문명에서 백두산까지는 10시간, 그래서 발해야말로 백두산 아래 신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내일은 발해의 유적지를 직접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발해가 고려 시대에는 우리 민족의 정통 왕조로서 우리의 역사로 재조명 되었으나, 조선 시대에 오면서는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졌습니다. 주자학에만 몰두하던 조선 선비들이 명나라에만 사대를 취하다가 실학이 일어나면서 발해의 역사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그러나 이미 발해 멸망 800년 뒤라 이미 많은 자료가 사라진 뒤였습니다.”nbsp그러면서 우리의 전통과 정체성을 유지하며 창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80년대에 들어서서 민주화 이후 우린 전통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생겨나며, 전통 문화를 유지, 계승,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먹고 살기 힘들어 하다가 먹고 살만 하니까 자기 정체성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죠.요즘 우리나라의 한류처럼 전통문화에 서양 문물이 믹스되며 재창조되어 새로운 문화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류가 오래가려면 자기정체성을 둔 것이 나와야 되는데 우리나라는 모방에서 최고 수준이 되었지만, 없는데서 새로 개발이 되는 것은 아직 힘듭니다. 이러면 미래에는 힘들어지는 겁니다.”nbspnbspnbspnbspnbsp“전통에 너무 갇히게 되면 국제화가 안 되고 앞선 문명이 오래 못가는 이유가 자기도 모르게 안주하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방은 끊임없이 자기 개발을 합니다. 모방은 압축 성장이 가능하고 실패할 확률이 적지만 창조성이 없어 결국은 한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압축 성장의 신화가 있지만 이것은 창조성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성장속도가 느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창조성이 결여되어 성장이 점점 정체 국면에 들어서고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자기 정체성을 갖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우리나라는 서양을 모방하여 고속 성장을 해서 먹고 살기 시작하자 어느 날 내가 누구냐 하고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정체성이 있어야 도전의식도 있고 실패를 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 없으면 자기가 조금만 못하면 피해의식, 자기가 조금만 잘하면 우월의식이 생겨나게 됩니다.”nbsp“발해는 영토 뿐 아니라 역사도 잃어 버렸습니다. 역사를 간직하는 것이 영토를 간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중국 조선족은 우리의 언어는 가지고 있지만 민족 역사의식이 없습니다. 우리도 지금 역사의식이 부족합니다. 한국 사람의 전통이란 말 뿐, 집을 전통적으로 짓고 사나, 옷을 전통적으로 입나, 이걸 무조건 고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식을 회복해야 창조성이 나오는 것입니다.”nbspnbspnbspnbspnbsp“자기 정체성은 역사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개방성을 가져야 합니다. 남한은 정체성은 부족한데 개방성이 있고, 북한은 정체성은 있는데 개방성이 없어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중국에서는 한국에서 데모하는 거 보면 한국이 내일 망할 것 같은데 안 망한다고 합니다. 한국사회는 아침에 일어나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이 안 된다고도 합니다. 외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인데, 한국에서는 혜성처럼 나타나 사라지는 일이 많습니다. 좋게 말해 역동성, 나쁘게 말해 혼란스럽습니다. 여기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역동성과 질서를 어떻게 같이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그러면서 발해의 건국과 멸망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 해주셨습니다.“발해의 역사를 되찾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현장을 답사하고 이러는 거지, 중국 사람과 싸우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nbsp라고 마지막 말씀을 하시며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청년들의 심장엔 오늘도 또 하나의 역사의식을 새겨 주셨습니다. 오늘은 정말 하루가 길게 느껴집니다. 3시 40분에 출발한 면도 있지만, 백두산 천지와 비룡폭포, 녹연담 등 아름다운 여러 풍경을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내일은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볼 예정입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황지현님이, 강의 속기는 연아람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2014.08.16. 16,484 읽음 댓글 3개

2014.8.13. 동북아 역사 대장정 나흘째 날 - 압록강, 장백 영광탑, 백두산 남편

넷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집안에서 압록강을 따라 백두산 남편을 거쳐 서편으로 가는 일정입니다. 전날의 고된 일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백두산에 가까워진다는 설렘과 기대에 스님과 함께 121명의 청년들은 가볍게 버스에 올랐습니다.버스는 집안에서 통화와 백산을 거쳐 림강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쪽으로 향했습니다.통화로 가는 길에 관마산성과 고구려 장군총을 쌓는데 사용한 돌을 가져온 채석장을 지나갔습니다. 지나가는 곳마다 우리 선조들의 혼이 머물러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 벅찬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자욱하게 낀 안개가 걷히고 해가 떴습니다. 맑고 신나는 날씨처럼 내일 백두산에 오른다는 신나는 마음으로 버스에서 다 함께 ‘백두산’을 불렀습니다. ‘백두산’ 노래의 힘찬 기상이 노래 가사처럼 겨레의 숨소리로 동북아 대장정에 힘을 실어 줍니다. nbsp긴 이동시간을 버스에서 보내는 청년들을 위해 스님께서 즉문즉설을 해주셨습니다. ‘욕망과 욕구를 어떻게 구분하는가’라는 청년의 질문에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는 선악이 없지만 그 욕구를 넘어선 탐욕은 제어를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욕구로 옛날과 요즘 결혼 문화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버스가 림강에 이르러 압록강을 만났습니다. 구불구불하고 물빛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압록강으로 불리우며, 현재는 우리나라와 중국간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입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계곡의 물을 림강부터 시작해서 24개로 구분하여 1도구부터 24도구라 이름 붙였고, 버스가 지나갈 때 마다 각 도구의 위치와 함께 압록강 건너 보이는 북한의 모습과 자연경관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장백이 있는 19도구까지 굽이굽이 이루어진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였습니다. 강 건너 북한 동포들과 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낯익으면서 어색한 광경에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 하나 지나면 북한이라는 생각에 지난 긴 세월 가보지 못했던 지리적, 심리적 거리감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nbsp강 건너 북한의 산천은 버스가 달리는 중국에 비교해 황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원래 북한은 공업이 발달한 반면에 농업으로 자급자족이 어려운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는데, 8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침체와 중단된 무역 거래로 경제가 몰락하면서 식량부족이 시작됐고 결국 90년대에 들어서서는 대량 아사가 발생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협동 농장 이외의 개인 수확을 위해 뙈기밭을 만들려고 많은 산들이 개간되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90년대 북한의 대량 아사 때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하신 스님께서 그 당시 어려운 북한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스님께서 20년간 같은 길을 다녀보니 외적인 변화도 있지만 사실상 주민의 식량난은 10년간 변하지 않고 그 고통이 같다고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줌의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피눈물 날 정도의 고생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맑은 날 압록강에 나와 빨래와 목욕을 하는 북한 주민들과 물놀이를 하러 나온 아이들, 나무를 태워 움직이는 낯선 목탄차를 보며 장백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평화로운 모습에 우리가 휴전중인 상태라는 사실이 새삼 어색해 집니다.nbspnbspnbspnbspnbsp장백에 이르니 한글로 표시된 간판이 자주 보입니다. 스님께서는 장백에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여 조선족 자치현이 되었으나, 최근에는 조선족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족 양로원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는데 아직 보식 중이신 스님께서는 계속해서 된장국과 두부만으로 식사를 하셔서 한편으론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영광탑을 보러 이동하였습니다. 영광탑은 신령스럽고 빛나는 탑을 의미하며 유일하게 남아있는 발해의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영광탑에 다다르니 압록강과 북한의 혜산시를 굽어보는 광경이 장관이었습니다.nbsp영광탑은 무덤 위에 세워진 탑으로 남동쪽으로 약간 기울었지만 완전하게 남아있는 모습이 그 이름처럼 신령스러워 당시 웅장한 발해 문화의 모습이 상상되었습니다. 고구려 무덤양식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발해만이 갖는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어 국보급 유물이지만 남한에는 80년대 이후 늦게 알려져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발해의 후손으로서 탑 앞에서 참가자들이 함께 예불을 드렸습니다. 스님께서는 예불 중 굶주린 북한 주민들을 위해 기도하셨는데, 그 마음이 모아져서인지 탑 끝에 풍경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번 동북아 대장정에 참가한 청년들과 스님의 마음이 풍경소리가 되어 강 건너 북한 동포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광탑 옆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는데 이곳 주인이 불자라서 매년 스님이 영광탑을 방문하실 때면 친절하게 잘 대해주고 지난 번에는 선물까지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스님께서 중국어판으로 나온 스님의 주례사 등의 책을 선물하시니 매우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3가지로 서편과 남편, 북편이 있는데 서편으로 가는 길은 송강하에서 출발하고 북편은 이도백하, 남편은 장백에서 시작합니다. 백두산의 남편 산문은 산사태로 폐쇄된 상태라 잠깐 들러 단체 사진을 찍고, 오전에 스님이 직접 밭에서 사오신 수박을 나눠 먹고 난 뒤 서편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북한사회와 북한 주민에 대한 스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먼저 오늘의 일정 정리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백두산 남편에서 서편으로 오는 길에 만강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백두산에서 급하게 내려오는 물이 이 곳에서는 천천히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많은 난민들이 이 만강검문소에서 많이 붙잡혀 피의 만강이라 불리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내일 일정인 백두산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백두산과 천지의 장엄한 크기와 형성과정은 청년들의 기대감을 더욱 더 증폭시켜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오늘 주제에 따라 분단시기와 그 후 북한의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해방이 되었을 때, 연합국 핵심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습니다. 그 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을 해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하게 됩니다. 남한은 미국 유학생 출신인 이승만을 내세워 정부수립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뽑다보니 일제시대 때 일했던 사람들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한정부 수립은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국민의 지지가 매우 약했습니다. 그에 반해 북한은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정부를 수립하고 친일파를 제거하여 국민의 지지를 많이 받게 됩니다. 남북이 따로 단독정부로 가는 것에 대해 김구, 조만식 등이 반대해 남북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은 단독정부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북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할 당시의 기반은 월북자들이 많을 정도로 남한보다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북한의 경제가 쇠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88년도에 서울 올림픽의 성공 개최로 북한은 1989년에 세계청소년축전에 과도하게 재정을 투자하게 됩니다. 북한의 경제는 점차 피폐해지고 특히 에너지 공급이 중단되니 공장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비료가 생산이 안 되니 농사 또한 잘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경제 봉쇄정책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95년 98년 대량 아사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nbsp 스님께서는 그 당시 연길에서 만난 한 탈북자와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분은 북한의 노동당원으로 스님을 뵙자마자 “항복합니다”라며 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부모님이 아사로 돌아가셨을 때 노동당원으로서의 회의가 들었지만 충성심으로 버텼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식이 아사하자 충격을 받고 큰 회의가 들어 결국 자신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탈북자들이 탈북을 결심하기까지 마음의 장벽을 극복하는 게 가장 어려웠겠구나’ 하고 느끼셨다고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이러한 탈북난민들을 돕는 일을 하다보면 북한의 간부들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민족을 배신한 인간들을 왜 돕습니까?” 며 탈북자들을 민족 배신자 취급을 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스님의 말씀입니다.nbspnbspnbspnbspnbsp“탈북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탈북을 하면 경제적 난민이지만, 북한으로 붙잡혀 돌아가면 민족 배신자로 처벌을 받게 되니 정치적 난민이 됩니다. 이러한 문제로 유엔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어요. 그 때는 눈에 뵈는 게 없었어요. 울고 다녔으니까. 백두산 눈 속에 아이들이 떠돌고 강에서 시체가 떠다니는 것을 보니 눈에 뵈는 게 있었겠어요? 인간의 생존 앞에서는 종교, 사상 모두 다 허물어집니다. 사람이 굶어죽는 데에 이유는 없습니다. ‘국가’로서의 북한은 자주권을 인정해줘야 하고, ‘정부’로서의 북한은 확실히 독재정권으로서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주민’으로서의 북한은 지원받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로서의 북한을 확실히 구별해주어야 합니다.”nbsp북한의 핵 문제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북한은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그 권리를 유보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시민의 입장으로 보면 핵개발은 좋지가 않습니다. 미래문명에서의 대량학살 무기는 폐기를 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북한은 돌파구를 못 찾고 있습니다. 안보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개방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정은 정부가 붕괴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붕괴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과 안보적 결합을 하고 개혁개방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은 더욱 어렵게 됩니다. 현재 자주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자주적 입장으로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nbspnbspnbspnbspnbsp또한 스님께서는 새로운 문명의 인도주의는 사상, 국가, 종교 등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정부가 잘못했는데 주민이 고통이 받는 것은 인과관계에 맞지 않습니다. 주민들을 위해서는 생존을 위한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21세기 새로운 문명 인도주의는 사상, 국가, 종교 등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상을 넘어서서 인도적으로 생존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의 인권침해는 정말 지나칩니다. 인권개선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만, 정치적인 접근은 조심스럽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요즘 젊은이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하다며 아쉬워 하셨습니다. 현실을 보면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문제이며 살아있는 사람의 인권, 행복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청년들이 북한 문제와 통일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더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무리 말씀으로 강연을 마치셨습니다. 백두산의 기상을 닮으라는 스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 하루 일정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서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이른 새벽 3시 40분에 북편으로 이동해 백두산을 오를 예정입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김은지님이, 강의 속기는 김하정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2014.08.15. 19,967 읽음 댓글 1개

2014.8.12. 동북아 역사 대장정 사흘째 날 - 국동대혈, 광개토대왕릉, 비, 장군총, 환도산성, 국내성

65279오늘은 청년대학생 동북아 역사 대장정 3일째 날입니다. nbsp6527965279nbsp65279새벽 4시에 기상, 4시 반에 출발하여 버스 안에서 스님께서는 오늘의 일정에 대해 설명해 주셨고, 청년들은 압록강을 바라보고 저 멀리 강 건너 보이는 북한 아이들과 주민들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첫 목적지는 국동대혈로 고구려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었습니다. 국동대혈로 올라가는 산길에서 길 옆에 난 앵두, 쑥, 칡꽃, 다래, 장뇌삼 등에 대해 재미나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청년들은 가는 곳마다 걸음을 멈추고 식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새삼 자연 곳곳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요즘 청년들이 소소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며,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세심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가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국동대혈 밑에 위치한 관음굴 앞에서, 모두 함께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스님께서는 참가자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셨습니다. 유리왕의 황조가 전설이 서린 사랑바위를 구경하고 새로 만들어진 전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북녘 땅의 드높은 산과 압록강이 보였습니다. 드디어 뜨거운 태양 빛이nbspnbsp동굴 속으로 비추는 환상적인 곳, 국동대혈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천 삼백여년 만에 찾아온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참배를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민족은 하늘의 자손으로서 앞으로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이곳에 왔으며, 우리 청년들이 나라를 이끌어 갈 주인으로서, 고구려의 왕처럼 우리가 왕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제를 올려야 합니다.”며 청년들의 가슴에 열정과 숭고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또한, 이번엔 특히 최초 여성 제주라서 시대가 변했음을 알리며 특히나 여성 참가자들이 환호하였습니다. nbsp다음은 광개토대왕릉비를 방문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때 만든 것으로서, 장수왕은 비석에 그의 아버지가 이룬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돌이 자연스럽게 다듬어졌고 글자를 새겨 자연미를 그대로 나타내면서도 웅대한 느낌을 준다며 비석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비석에는 네 면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모두 1,775자가 쓰여져 있다고 하는데 막대한 군사력과 통치력으로 광개토대왕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비석으로부터 약 500m 떨어져 있는 웅대한 광개토대왕릉을 향하였습니다. 긴 네모꼴 돌덩어리를 쌓아 올린 돌무덤은 규모가 산에 비교될만큼 거대했고 돌무더기 가운데는 기와조각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덤 꼭대기에 기와건물이 있었다는 의미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버스를 타고 스님께서는 고구려의 피라미드, 장군총으로 청년들을 안내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주변 환경과 장군총이 세워진 역사배경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특히나 국내성의 위치는 북 우산, 동 용산, 서 칠성산, 남 초산에 둘러있어 풍수지리로 배산임수라며, 고구려의 수도를 졸본에서 집안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무덤의 양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돌이 밀려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랫 돌에 홈을 만들어 윗돌을 끼어서 쌓는 들여쌓기와, 강돌과 진흙을 섞어서 쌓음으로서 지진에 견딜 수 있게 했다며 고구려 조상들의 지혜를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고구려의 성 쌓기 기술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고유한 것이었다며, 고구려의 대표적인 산성, 환도산성으로 청년들은 안내하셨습니다. 환도산성은 비상시에 군사들이 가서 방어를 하고 임금이 피신해 있으면서 저항했던 곳으로, 궁성의 역할을 한 곳입니다. 청년들은 눈으로 고구려 산성의 특징인 계단식 쌓기와 개이빨식 쌓기 기술로 만들어진 긴 성을 바라보며 감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환도산성은 높은 산을 두르고 있고, 지세가 좋고 자연조건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참가자들을 2개 팀으로 나누어 각각 조춘호 가이드님과 이승용 국장님이 설명을 하는 동안 스님은 조금 위쪽에 있는 왕궁터에 올라가 보셨습니다. 잡풀과 쑥대가 사람키만큼 자라 있었지만 주춧돌이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다음번 기행때 참가자들이 올라가보게 할 것인지 확인하시기 위해 둘러보셨습니다.nbspnbspnbspnbsp 환도산성 아래쪽에는 크고 작은 무덤 떼가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무덤 떼 주변을 돌며 청년들은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들으며 조상들의 훌륭한 지혜와 국토를 지켜주신 희생정신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고구려인의 생활모습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벽화가 있는 5회분 5호묘로 향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실제 무덤 벽에 그려진 거북이, 용 그림을 보며 감탄했는데 특히나, 연꽃그림을 보며 고구려인들도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같은 민족,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동하였습니다. 120여명이 한꺼번에 고분에 들어가 벽화를 보기 힘들기 때문에 이번에는 4팀으로 나누어 고분 벽화를 보고 나온 참가자들에게 스님께서는 벽화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일신과 월신의 모습, 고구려인들이 씨름을 하는 모습, 여인들이 춤추는 모습, 나무아래에서 기도하는 모습 등 고구려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스님께서는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특히나, 동굴 속에 곰이 그려져 있고 호랑이는 화살에 맞아 도망가는 그림을 설명하며 우리가 알고 있던 단군신화는 고려의 일연스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5세기 그림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 민족의 전통 설화임을 강조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다음으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참가자들은 스님을 따라 북동쪽 성벽부터 시작하여 북쪽 성벽, 서쪽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국내성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지만 환도산성처럼 국내성도 복원 작업을 하면 웅장한 규모의 성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성을 쌓으려면 많은 인력, 수레, 식량 등이 필요한데 그만큼 당시 고구려인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들여쌓기 기술과 성벽 주변에 쌓은 치의 형태를 보며 고구려인들의 훌룡한 방어 전략을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서쪽 성벽의 치는 적의 공격 뿐 아니라 홍수에 대비한 것이고 성내의 물이 빠져나가고 역류되지 않도록 큰 돌로 막아놓은 배수구를 설명하시며 고구려인들의 지혜를 이야기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국내성 남쪽, 압록강을 따라 걸으며 스님께서는 북한돕기운동을 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였습니다. 95년 역사기행 때 북한에서 대홍수가 일어났고, 평양을 갔다 온 지인으로부터 북한 주민이 굶어 죽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스님은 그 사실을 믿지 않는데, 96년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배를 타고 압록강을 따라 만포까지 가서 북한 주민들의 처참한 실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굶주리고 있는 북한 어린이를 만났고, 불러도 고개를 숙이고 대답 없는 아이를 보면서 가이드는 “조선 아이들은 구걸할 자유도 없다”고 했답니다. 스님이 배를 가까이 대라고 하니까 국경이라 댈 수 없다는 가이드의 말에 과연 국경이란 게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는 회의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 뒤 주변의 만류에도 북한돕기운동을 시작하셨다는 말씀을 들으며 참가자들은 압록강 저 건너편 북한을 향해 연민과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미래 통일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다짐하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압록강변에 있는 식당에서 즐겁게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가 스님께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까지 3일 동안 우리는 웅장한 고구려의 기백과 기상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구려의 문명은 배달문명으로부터 계승됐습니다. 조선 나라는 배달 나라의 문화를 계승했고 고구려의 건국 이념 자체가 잃어버린 옛 조선의 영토를 되찾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 기행을 통해 본 것은 두 가지, 성과 무덤입니다. 성을 봤다는 것은 어떻게 국가를 지켜냈는가 즉, 국가 안보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무덤을 봤다는 것은 그들의 정신세계, 영혼,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죠. 고구려는 독창적이고 정교한 기술을 가지고 돌로 산성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5천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요하문명은 산성을 쌓고 무덤을 7단까지 쌓았는데 이것은 장수왕, 광개토대왕릉과 유사한 모습입니다. 또한 손이 곰 앞발 모양인 여신상이 발견되었고, 역시 고구려 벽화를 보면 신단수 아래에 곰이 나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우리 역사를 보완하기 위해 배달 문명의 후예인 동북아 대륙에 살았던 북방민족 전체에 대한 유물과 문화를 종합적으로 연구할 것을 제시하셨습니다.“고구려의 뿌리는 배달민족이고 요하문명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온 역사뿐만 아니라 유물과 유적이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우리는 배달문명을 더 이상 전설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의 오류로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역사라고 해서 지나치게 과대하게 주장해도 안 되고 사대주의에 젖어서 역사 자체를 부정해도 안 됩니다. 새로운 인류 문명을 창조하고자 한다면 진실에 근접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유적, 유물뿐만 아니라 몽골, 거란, 선비, 여진의 설화, 역사, 유물, 언어를 종합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 연구를 보완해야 합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내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민족의 시원, 계승을 알아나가야 합니다. 문명을 어떻게 계승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흘러갔느냐라는 것을 통해 역사를 알아야 해요. 그 국가의 문명 주도 세력이 누군지, 무덤양식은 얼마나 본받았는지, 그 뿌리가 어디냐, 뿌리를 따져보면 계승이 확실해요.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논리를 갖고 접근해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계속해서 오늘의 핵심 주제인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했습니다. 고주몽은 북부여를 계승해서 옛 조선의 땅을 되찾겠다는 이념에서 시작했습니다. 2대 유리왕은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고 내부를 정비하고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광개토대왕은 19살에 왕위에 올라 5년째 되는 해 백제를 복속시키고 대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은 장수왕 때 백제가 다시 고구려에 도전하였는데, 당시 고구려는 중국의 5호 16국을 통일한 북위와 화친을 맺었기 때문에 북쪽이 안정되어 남하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남 위례성을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개로왕을 죽였습니다. 지금의 경기도를 다 차지하고 충청북도까지 내려오게 됩니다.”nbspnbspnbspnbsp이어서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그 후 100년 이상 평화시대를 가다가 550년 즈음 북위가 다시 분열되어 고구려와 갈등을 일으키고 돌궐족이 고구려와 충돌을 일으켰고 고구려는 다시금 서북에 신경써야 했지만 내부는 계속된 평화에 안일함에 빠졌습니다. 그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어요. 신라는 법흥왕 때 가야와 합병하면서 영토를 넓히고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신라와 동맹이었던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고구려가 이를 듣지 않자, 30만 대군으로 침략했지만 실패했고 그 후 113만 대군을 데리고 갔는데 을지문덕에게 참패했습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당나라의 태종은 10만 대군을 끌고 쳐들어와 요동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안시성의 양만춘은 성을 지켜냄으로써 당나라의 1차 침략을 막아냅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가 그 지역을 차지하였고 662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실패하였으나,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아들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 결국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고 신라는 8년 간 당나라와의 전쟁을 벌이다 화친을 통해 676년에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고구려 멸망 30년 만에 고구려 유민들이 대조영을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유민들을 다 발해로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700년의 고구려 역사가 종결되고 그것을 발해가 계승하게 됩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도 고구려 역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신 스님께 참가자들은 힘찬 박수로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동북아대장정 3일째 밤이 깊었습니다. 내일은 림강에서 압록강 상류를 따라 올라가며 강 건너 북한 땅과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발해의 영광탑을 참배하는 일정입니다. 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김유정님이, 강의 속기는 송리라님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2014.08.14. 19,536 읽음 댓글 2개

2014.8.11. 동북아 역사 대장정 이틀째 날 - 백암산성, 홀본산성

동북아 역사 대장정 이틀째 날이 밝았습니다. 참가자들은 3시 40분에 기상하여 대련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요동성이 있던 요양을 거쳐 만주족 자치현인 환인으로 가게 됩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기 때문에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못하고 크고 맛있는 옥수수로 대신했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 답사가 시작되고 첫 목적지는 백암산성입니다.nbsp이동하는 차량에서 스님께서는 백암산성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비사성부터 건안성, 안시성, 요동성, 신성, 부여성까지를 연결하여 쌓은 천리장성 중 안시성과 요동성은 특히 당나라의 침공을 막는데 핵심이 되는 성이었는데 그 중 요동성을 보호하기 위한 산성이 백암산성이라고 합니다. 이 백암산성이 뚫리면 국내성과 평양성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에 최전방에 있는 군사적 요충지인데 수나라가 침공했을 때는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았고 당태종이 공격해 왔을 때는 주성인 요동성이 함락되자, 백암산성은 항복해 버렸다고 합니다. 반면 양만춘의 안시성은 끝까지 당의 공격을 막아내어 성을 지켜냈는데 이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성의 자연적 조건도 중요하지만 그 성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리더의 중요성도 매우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7시경 백암산성에 도착하여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홀본산성이 현지인들에게 오녀산성으로 불리우는 것처럼 백암산성도 현지에서는 연주산성이라 불리우고 있었습니다. 구름 낀 하늘과 시원한 바람, 성벽을 이루는 많은 돌들 사이로 피어난 들풀이 그 세월의 무게를 더함을 느끼며 스님의 상세한 안내에 따라 서쪽 성벽에 올랐습니다. 현장에서의 생생한 현장감과 스님의 자상한 설명에 이곳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그들도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가정을 위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을 것입니다.nbsp스님께서는 고구려 성의 몇가지 특징을 설명해 주셨는데,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돌을 맞물려 쌓아올린 점과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치성 그리고 덧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치성은 5060 미터 간격으로 쌓아 방어 공간을 넓게 하고 적에게 화살을 쏠 때 사정거리가 30미터를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성 바깥에만 치성을 쌓는데 유일하게 백암산성은 안쪽에도 치성이 있어서 물자를 보관하거나 병사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적의 침입이 잦은 서쪽 성벽은 높이가 10m에 이르고 아래 부분을 계단식으로 쌓아 안정성을 높인 것에 비해 적의 침입이 어려운 북쪽 성벽은 상대적으로 낮고 폭도 좁았습니다. 동쪽으로는 태자하라는 강이 흐르고 절벽으로 되어 있어 성벽이 아예 없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당연하면서도 이런 지형에 산성을 만든 점을 신기하게 느끼며, 참가자 일행은 백암산성의 정상에 있는 망대에 올라 저 넓은 요동벌을 바라보니,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현재는 중국의 영토에 속한 이 지역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nbsp크지 않은 규모지만 그 지형지세가 산성으로서 완벽해서인지 돌궐 1만 군사가 공격해왔어도 함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암산성의 정상을 둘러 본 후 내려오는 길에 바닥돌을 깨내어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하던 웅덩이도 보고 남쪽에 한창 발굴 중인 병영터를 보면서 내려왔습니다. 마을로 내려와 보니 동네 담장 대부분이 성벽 돌을 가져다가 쌓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마을과 가까운 남쪽 성벽이 상대적으로 파괴가 심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참가자들을 태운 버스는 다음 목적지인 홀본산성으로 가기 위해 환인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백암산성에서 환인으로 향하는 길은 옛날 고구려가 국내성에 근거지를 만들어 놓고 요동으로 진출하던 통로였다고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끊임없이 경쟁하고 교류했던 한족, 중국이 자기 역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에 대해 상세한 중국역사 강의를 듣다보니 어느덧 환인에 도착하였습니다. 먼저 점심식사를 한 후 바로 홀본산성으로 갔습니다. nbsp버스를 타고 산에 오르던 길에 보이던 홀본산성의 위엄은 사진에 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정도의 감격이었습니다. 고구려성의 특징은 절벽 등 지형 조건을 잘 활용하고 옆에 주변에 강으로 된 자연 해자가 있으며 평지성과 짝을 이루는 산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홀본산성은 해발 800m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징으로 동문의 공자형 성문과 서문의 옹자형 성문이 있습니다. 홀본산성에 오르기 전에 박물관에 들렀습니다. nbsp적석총은 고구려 초기 무덤 형태인데 깨지지 않는 강돌을 사용하였고 그 형태가 고인돌과 같습니다. 권력과 부에 따라 더 크고 높이 만드는데 그 높이가 점점 높아져 장수왕의 경우는 7층에 이릅니다. 흐르는 땀과 그 땀을 스치는 바람 덕분에 기분 좋게 산성을 오르고 난 후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풍경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장관이었습니다. nbsp다만 댐 건설로 인해 많은 유물이 수몰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좁고 경사가 심해 다리가 절로 후들거리는 계단을 내려와 산길을 걸으며 스님께서 열심히 설명해주신 공자형 동문도 살펴보고 이끼 낀 2천년된 성벽에 서서 단체 사진도 찍고 그 후 우리는 홀본산성을 내려와 숙소로 돌아왔습니다.nbsp물기를 머금은 풀잎향기, 하늘을 가득 메운 어두운 구름, 따스한 햇살과 우리들 몸을 슬그머니 감싸는 시원한 바람... 그 모든 것과 우리 선조들의 얼과 지혜를 느낄 수 있는 하루였습니다.nbspnbspnbspnbspnbsp환인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뒤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한 스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고구려 역사를 학교에서 책으로만 배웠는데 역사 현장을 발로 밟아보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면서 고구려가 동북아 대륙의 중심국가로 존재했음을 확인했습니다. 고구려는 어떤 문화를 계승해서 이런 위대한 문명을 이루었을까요? 고구려의 창건자 주몽은 ‘나는 부여의 자손이다’라고 스스로 주장했습니다. 부여의 창건자 해모수는 스스로 자신은 단군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어요. 연원을 따지면 환인의 한나라가 우리의 뿌리이고, 우리 민족 역사의 시작은 배달나라입니다. 그것을 계승하고 개혁한 국가가 단군의 조선나라입니다.”nbsp이어서 우리에게 익숙한 단군 설화를 들려주셨고 단군 조선이 어떤 나라였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단군 설화 내용을 다시 풀어본다면 배달나라 환웅 가운데 마지막 환웅의 왕위를 계승한 사람이 단군인데 이 단군은 천손이긴 하지만 어머니가 토착세력의 부족장, 소위 곰족의 부족장 딸이었습니다. 단군이 천왕으로 추대되어 제 1대 단군이 되었습니다. 단군이 세운 조선나라는 이주해서 새로 나라를 세운 게 아니고 있는 배달나라를 혁신해서 그 이름을 조선나라로 바꿨습니다. 단군의 조선나라는 현재 역사적 기록에 단군이 총 47분이 기록에 남아 있고 약 2100년 동안 계승되었습니다.nbspnbsp왕의 아들이 없거나 신통찮으면 5가 회의에서 왕을 뽑았는데 주로 우가의 사람이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우가가 농업을 담당이니 식량담당이 가장 중요한 관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단군조선 전반기 천년은 배달문명을 계승해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선 문명이었으나 중국 주나라 후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사상의 발전과 철기문명의 발달로 중국에 역전을 당하게 되고 결국 침략을 받게 되면서 고조선은 쇠퇴하고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게 됩니다.“고조선은 세력이 약화되고 동북쪽으로 진출한 해모수가 고조선을 계승하여 부여가nbspnbsp창건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여를 역사의 정통으로 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여는 그런 고조선의 옛터를 회복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부족했어요. 이 문제로 인해서 고주몽이 부여와 대치했습니다. 둘 사이의 갈등이 생겼고 결국 고구려가 역사의 중심이 됩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현재까지 내려온 배달문명의 흐름과 현 상황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배달문명 아래에 아홉 개의 다른 문화를 가진 종족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휘하에 있다가 몽골족, 선비족, 말갈족 등이 독자적인 민족의 문명을 만들어 나갑니다. 배달문명 산하의 민족들이 각자 나름대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한때 강성했지만 결과적으로 도태되어 소멸했어요. 만족만 해도 아직까지 인구가 천만명 정도 남아 있는데 말도 안 쓰고 글도 안 쓰고 한족과 차이가 없습니다. 호적에 만족이라고 표시하는 것 외에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게 없습니다. 행정적으로 만족 자치현인데 독립된 나라를 꿈꾸는 수준이 전혀 아닙니다.” nbsp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배달문명을 이어받은 다른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설명하셨습니다. “남아있는 민족 첫 번째가 대한민국, 두 번째가 몽골족입니다. 몽골은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뉜 상태인데 중국과 러시아 두 강대국 사이에서 통일의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동북아 대륙 중에 그래도 남아있는 건 조선족밖에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제를 넘어서서 배달문명의 영광을 되찾는 건 동북아 민족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입니다. 스케일을 크게 잡는다면 우리에게만 꿈과 희망이 아닌 것입니다.” nbspnbspnbspnbspnbsp한반도의 통일이 우리 민족만의 꿈과 희망이 아닌 배달문명의 영광을 찾아주는 일이라는 말씀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한편 스님께서는 우리 민족이 활동한 무대였던 동아시아 대륙이 현재 중국 땅이 된 연유도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 민족이 활동했던 건 줄곧 현재의 만주라고 불리는 동북아시아 대륙과 한반도입니다. 중국이 동북아 대륙을 밀고 들어온 때는 한사군 때이고, 거꾸로 동북민족이 대륙 쪽으로 밀고 들어간 게 원나라 때입니다. 동북아 대륙은 한사군 때 빼고는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 없었는데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동북아 대륙이 중국영토가 됐습니다. 동북아 대륙은 중국인이 점령한 게 아니고 원나라 땅이었다가 중국땅이 되어버려서 어쨌든 중국영토가 된 거죠.” 스님은 역사를 볼 때 문명적 사관에서 역사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 현재 우리의 과제인 통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을 남북한의 통합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문명적인 관점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통일이라는 건 이산가족이 만나고 경제가 통합되는 수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적으로 남북이 통일되는 건 원수가 형제가 되는 겁니다. 6·25때 남쪽 사람을 죽인 사람이 북한에서는 영웅이고 남한에서는 원수인데 통일이 되면 이 둘이 하나가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거죠. 엄청난 사상적 자유와 문명의 진보를 말하는 겁니다. 이건 정신적인 상처, 분단의 한계를 한꺼번에 극복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명이 세계의 선진문명으로 갈 수 있는 것으로 종교적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통일은 단순한 영토의 통합이 아니라 상상도 못할 훨씬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민주주의 심화, 소위 경제민주화 복지확대 이런 것들이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두 나라의 단순한 통합이 아니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나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단지 통일은 통일에서 끝나지 않고 동아시아 변영의 열쇠가 됩니다.”nbspnbspnbspnbspnbsp또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를 과거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주몽이 그냥 나라 세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역사의식을 가지고 나라 하나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라 선조의 옛 땅을 되찾는다는 목표를 가지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서 지금 우리 문제는 영토의 문제에 너무 집착하면 안됩니다. 영토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갖고 주변과 네트워킹과 협력을 잘하냐, 이게 핵심적인 관건이죠. 없는 역사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남의 역사를 가져오자는 것도 아니고 있는 우리의 역사 잊지 말자는 겁니다.” nbspnbspnbspnbspnbsp스님은 이 역사기행이 통일의 의지로 이어지길 청년에 당부하시고 토닥이시며 강의를 마무리하셨습니다.“경제발전과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우리가 통일을 할 만한 토대는 되는데 가장 중요한 건 통일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사회각계각층에서 어떤 희망을 향해 연대하고 협력해나갈 것인가가 숙제죠. 우리가 역사순례하는 건 배달문명의 후예로서의 자긍심을 가지려는 겁니다. 규모만 봐서는 안 되고 정교함, 독특함, 이런 것들은 어디서 왔는지, 이런 공부를 하러 여기에 왔습니다. 역사를 통해서는 기상을, 기를 좀 받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청년들은 위축되어 자살할 생각하지 말고, 친구하고 어떻게 경쟁해서 이길까 하지 말고 좀 더 대범하게 가세요. 고기 먹고 술 먹고 노래방 가고 연애에 집착하고 괴로워하는 건 삶의 희망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닌가요? 내 작은 재능을 쓸 수 있는 곳이 없어서 비전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요? 이런 게 나를 희생하는 게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는 일인 겁니다. 삶의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그런 측면에서도 기상이 있어야지요. 이곳이 혁명의 고장 아닙니까? 일제강점기때 독립을 위해 고난의 행군을 했던 곳이니까 우리 힘들어도 여기서 답사를 계속해봅시다.” nbspnbspnbspnbspnbsp이렇게 동북아 역사기행 둘째날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나누기 모임을 가진 후 내일 집안에서의 고구려 유적 답사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채희범님이, 강의 속기는 양이숙님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2014.08.13. 17,744 읽음 댓글 9개

2014.8.10.동북아 역사 대장정 첫째날 - 요녕성 박물관

연길을 출발해서 밤새 심양을 향해 출발한 버스는 운행금지시간인 새벽 2시부터 5시까지 고속도로 휴게소에 정차해 놓고 참가자들도 휴식을 취했습니다. 새벽 5시가 되자 바로 출발하여 심양공항에 도착, 탑승 수속을 밟고 7박 8일간의 역사기행의 감동을 안은 채 인천공항으로 떠났습니다. 스님께서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원고 교정을 하시고는 탑승하러 들어가는 참가자들을 환한 표정으로 일일이 악수하며 배웅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121명의 청년대학생들이 도착하여 또 한 팀의 7박 8일 역사기행단을 맞으셨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왔다고 하는데도 동북아 역사 대장정의 첫날이라 그런지 피곤한 기색 없이 들뜬 모습이었습니다. 공항에서 이곳저곳에 무리지어 사진을 찍고 왁자지껄 떠들었습니다. 참가자들을 반겨주듯 심양의 하늘도 푸르렀습니다.nbsp스님과 참가자들은 버스를 타고 심양에서의 첫 일정인 요녕성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버스에서 스님은 무전기로 전원 참가자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시고, 7박 8일 동북아 역사 대장정을 함께 할 버스기사분과 법사님과 스탭들을 소개하시고, 오늘의 전체적인 일정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가자들은 무전기에 나오는 스님의 말씀에 일제히 조용해졌습니다. nbspnbspnbsp스님께서는 전체적으로 동북3성과 심양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시고, 요녕성 박물관에 대해 1관 문명서광 전시실부터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참가자들은 스님 가까이서 설명을 듣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스님을 따라 다니며 경청했습니다. 요녕성 박물관은 요녕성의 대표적인 유물을 시대별로 나누어 다섯 전시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각 전시관에서 각 유물과 우리의 역사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설명하셨습니다.“지나간 문명은 어느 한 나라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재산입니다. 지금 요하문명이 중국의 땅에서 발견된 유물이라고 해서 그것이 중국의 역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은 유물·유적은 있지만 역사가 없어서 해석하는데 장애가 있고, 우리나라는 역사·신화는 있지만 유물·유적이 없어 역사를 고증하기가 어렵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유적인데 지금 중국 땅에 있다고 해서 중국의 역사로 왜곡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구나 하며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요녕성 박물관 견학을 마친 후, 스님과 참가자들은 북한 식당으로 향하였습니다. 남남북녀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듯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북한의 아리따운 여성분들이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중국에서의 기대했던 첫 식사는 평양냉면이었고, 새콤달콤한 김치와 평양냉면이 어우러져 한국에서 맛보았던 냉면과는 다른 특유의 평양냉면을 맛 볼 수 있었습니다. 평양냉면을 맛보는 동안 스님의 특별 요청으로 공연을 볼 수 있어서 혀뿐만 아니라 눈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반갑습니다’ 노래로 시작된 공연은 마지막에 ‘다시 만납시다’ 노래로 끝이 났는데 이 노래를 들으면서 많은 참가자들이 감동을 받아 눈가가 촉촉해졌고,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욱 간절해짐을 느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식사를 마친 후 숙소에 도착하여 각 조별로 인생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은 식사 장소로 이동하여 저녁식사를 했는데, 첫 중국식 식사에 신이 난 참가자들이 진행 스텝의 안내도 잘 듣지 않아 스님께서는 저녁 강의 시작 전에 기행 중 주의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고 이어 민족의 시원에 대한 법륜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동북아 역사 기행이 시작됩니다. 이번 기행은 역사적으로는 고구려8231발해8231독립운동 유적지를, 자연환경으로는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일대를 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난 역사 가운데 교훈이 되는 것은 계승하고,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앞으로 다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옛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먼저 이번 역사기행은 개인이 아닌 단체 생활이기 때문에 공동체로 생각하고 개인적인 욕망은 자제할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배려할 것을 당부하시며, 오늘 주제에 대해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민족의 시원은 민족의 뿌리입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낙동강도 여러 갈래의 하천이 합쳐져서 만들어지지만 모두가 시원은 아닙니다. 우리가 시원은 하나로 정해 놓지만 또 그것만이 낙동강은 아닙니다.”nbsp참가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민족의 시원을 강에 비유하여 쉽게 설명을 풀어 가시며 우리 민족의 시원을 찾아 현재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하나 정리해 주셨습니다. 대한민국부터 시작하여 단군 왕검, 환웅 천황까지 민족의 역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는 요하 상류에서 발견된 요하 문명 유적과 유물이 뒷받침 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환인의 한나라는 우리의 뿌리는 맞지만 한나라가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닙니다. 진짜 ‘우리나라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배달나라입니다. 배달나라는 곰을 섬기는 부족,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 등 여러 민족이 흩어져 살고 있는 곳에 선진문물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때 건국이념이 이런 후진 부족을 침략하여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던 행동양식입니다. 홍익인간은 환웅의 신시 건국이념입니다. 환웅은 5,900여년 전에nbspnbsp홍익인간의 이념을 가지고 3천여명의 무리를 끌고 동북아 지역에 이주해 와서 지역의 토착세력에게 문명을 전파하고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유전자를 보면 환웅족보다 토착세력의 인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환웅의 신시에 뿌리를 둡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흩어진 것을 보면 언어적 어순이 같을 것입니다. 토착민족이랑 합쳐졌기 때문에 생긴 모습은 다르지만, 어원이 비슷합니다. 하지만 중국은 우리와 생긴 것은 비슷하지만 어순이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문명의 뿌리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홍익인간, 재세이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하늘의 뜻을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환인의 한나라의 문명을 신시의 배달문명으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단기기원이 아니라 신시개천 몇 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단순히 신화라고만 알고 있던 단군왕검과 환웅천왕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로 생생히 살아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약 6천 년 전에 이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약한 다른 세력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전파하고 토착세력을 고도의 문명으로 이끌어 나갔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서 민족의 자긍심을 가질 것을 당부하시며 오늘 강의를 마무리 하셨습니다.“요하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에 걸맞는 역사와 전설을 가지고 있는 곳은 동북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피라미드처럼 무덤을 쌓은 것은 아시아에 고구려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7단 적석무덤 유적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요하문명이 고구려의 뿌리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아서 우리가 절대로 중국문명의 아류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는 변방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함께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 가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강의장이 다소 좁고 더웠지만 청년들은 스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나서 어느덧 동북아의 중심 문명을 이끌어 갈 꿈을 꾸는 듯 환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며 숙소로 돌아갔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내일부터 백암산성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역사기행이 시작됩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류희정님이, 강의 속기는 이윤미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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