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수영지회
어여쁜 소녀를 보았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이 환해진다. 나도 환해진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이 맑다.’ 오늘의 인터뷰 주인공 박은영 님의 첫인상입니다. 박은영 님은 부산울산지부 수영지회 우1모둠장입니다. 인터뷰 시작 전에는, 아픈 몸으로 정토회의 수행과 봉사를 병행해왔던 그의 열정이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가 진행되자 박은영 님과 제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 이야기 들려드리겠습니다.

항암

2014년, 작은 형부가 저에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유튜브를 들어보라 권했습니다. 그때 처음 법륜스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불교방송에 올라온 스님의 영상을 다 보았습니다. 다음 해 2015년 출근길 버스 창밖으로 정토회 대연법당 간판을 보고는, 퇴직 후 꼭 저곳을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같은 해 퇴직하여 불교대학에 입학하고 2년 후 경전대학을 졸업한 후, 정토회에서 수행과 봉사를 꾸준히 실천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2021년 11월 유방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2023년 행복학교 홍보 우1모둠 그룹장과 함께(왼쪽 박은영 님)
▲ 2023년 행복학교 홍보 우1모둠 그룹장과 함께(왼쪽 박은영 님)

작년 10월까지, 항암과 수술, 방사선치료를 거쳐 경구용 항암제를 복용하였습니다. 그 기간 코로나 유행으로 병원 가는 일 외에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일과 바깥일을 모두 중단했습니다. 불교대학 진행자였으나 중도에 소임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항암의 후유증으로 배가 아파, 수업 중 화장실을 계속 가야 하는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무 할 일이 없었습니다.

매일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재미있는 일과가 주어졌습니다. 지부회원담당, 지부회계담당 소임이었는데, 기도금, 보시금 입금, 예산편성, 지출 그리고 결산 처리를 맡았습니다. 부산시 영도구청 행정직 공무원으로 20년 근무한 경력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몸 상태를 살피면서 시간이 될 때 일을 했고 덕분에 항암치료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2020년 부처님 오신 날
▲ 2020년 부처님 오신 날

힘겨웠던 항암치료와 달리 처음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 마음의 동요가 없었습니다. “요즘 의술도 발달했는데 치료받으면 되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법의 단비를 꾸준히 맞는 기운 센 정토행자에, 어머니의 DNA를 물려받은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남겨준 것

제가 다섯 살 때 일입니다. 버스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오른쪽 종아리가 버스에 깔리는 큰 사고였습니다. 의사는 어머니에게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여자아이 다리 자르느니 죽는 게 낫다.”라며 어떻게든 다리를 살려낼 뜻을 밝혔습니다. 대수술 끝에 눈을 뜨자 제 옆 침대에 어머니가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엉덩이 살과 제 허벅지 살을 오른쪽 종아리에 붙인 것입니다.

흉터는 크게 남았고 다리를 절었습니다. 당시에는 끊어진 인대를 봉합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가 되자 예쁜 옷을 입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치마를 입을 수 없었습니다. 소녀 시절 저는 종종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의지가 제 오른쪽 종아리를 지켜냈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남겨 준 것은 살이 아니라 굳세게 살아가는 힘이었습니다.

2023년 5월 JTS 캠페인 중 우1 모둠원들과(왼쪽 첫 번째 박은영 님)
▲ 2023년 5월 JTS 캠페인 중 우1 모둠원들과(왼쪽 첫 번째 박은영 님)

이제야 알게 된 당신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몇 년 간 입원했습니다. 저에 이어 아버지 병구완까지 하게 된 어머니는 병원비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다섯 형제를 키우면서도 힘든 기색이 없었습니다. 긴 병원 생활 끝에 다리를 절게 된 아버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경제 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채 매일 술을 마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55세에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 어머니는 아버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60대 중반이 되어서야 여유를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73세에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입원해 있을 당시 어머니 말을 기억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너무 편하다.’ 죽음 앞에서도 담담할 수 있었던 어머니, 암을 얻고서야 하던 일을 접고 편안하게 쉬었습니다.

돌아가시기 1년 전 2008년, 박은영 님의 어머니 고 김종련  님
▲ 돌아가시기 1년 전 2008년, 박은영 님의 어머니 고 김종련 님

그런 어머니에게 사죄할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괜찮을 줄 알았던 건강에 문제가 생겨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열이 40도까지 오르자 잇몸이나 입술 등 몸의 약한 부분이 다 터졌습니다. 제 몸 상태를 미리 알지 못했던 탓이었습니다. 몸의 신호에 무감한 저에게서 불현듯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 견디고 있었구나. 어머니와 나, 두 사람 모두.’

당신이 늘 견디는 것을 보면서도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다시없을 어머니를 몰라보았습니다. 눈을 뜨고도 몰랐습니다. 그제야 뜨거운 눈물이 흘렀고 당신이 보였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에 등불이 켜졌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편안하게 잘 지내세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저는 20년을 딱 채우고 공무원직에서 일찍 퇴직했습니다. 완벽하게 일을 하려다 보니 민원 처리 과정이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남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알았더라면 달랐을 것입니다. 민원인에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2017년 여름 경전대학 졸업식 때 학생대표로 법륜스님께 꽃다발 전달
▲ 2017년 여름 경전대학 졸업식 때 학생대표로 법륜스님께 꽃다발 전달

시댁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아팠던 까닭인지 받는 게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반찬 해와라, 와서 청소해라, 물건 사 와라, 마음에 안 든다, 바꿔와라.” 등의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맞벌이에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로 남편과 빈번하게 다투었습니다. 남편은 시어머니의 편만 들었습니다. 어느 때는 둘이 대화 없이 몇 달을 지냈습니다. 3년을 침묵 속에서 산 적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화를 풀기라도 하듯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시어머니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더라면 달랐을 것입니다. 해줄 수 있는 것은 해주고, 해줄 수 없는 건 말 그대로 해줄 수 없다는 간단한 원리를 몰랐습니다.

그도 나도 몰랐을 뿐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정토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밤마다 유튜브로 <즉문즉설>을 들으며 잠들었습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원망한 진짜 이유가 저의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남편이 시어머니가 아니라 제 편을 들었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남편도 저를 따라 <즉문즉설>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과 서러움, 그토록 원했던 남편의 위로 한 마디, 모든 것들이 섞인 눈물이었습니다.

2018년 12월 광화문 평화운동 참여 (남편과 함께)
▲ 2018년 12월 광화문 평화운동 참여 (남편과 함께)

참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더 이상 애쓰며 살지 않습니다.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인정합니다. 지금은 어머니에 대한 남편의 요청이 있을 때 나섭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좋습니다. 불법을 공부하고 뉘우친 바가 있어 두 아들에게 어릴 적 때린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큰아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작은아들은 중고등학생 때까지 저를 원망했습니다.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어리석어서 그랬다, 남에게 좋게 보이느라 너희 소중한 걸 몰랐다.”

지금 작은아들은 제 사과에 장난스럽게 대답합니다. 물론 앞으로도 기회 될 때마다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정토회를 통해 불법을 만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진리를 알자 지난날 받은 상처들은 절로 치유되고, 오늘 매 순간 자유와 편안함을 누립니다. 이 기쁨을 나누며 살겠습니다. 진흙 길을 걷는 순간마다 새로이 태어나 꽃길을 피우겠습니다. 꾸준히 수행하겠습니다.

2017년 경전대학 수련 중 급우들과(앞에서 세 번째 박은영 님)
▲ 2017년 경전대학 수련 중 급우들과(앞에서 세 번째 박은영 님)


사연 없는 사람 없고 다 자기 사연이 제일 절절하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알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각자 걷는 길, 등짐의 무게가 다르듯 어찌 주어진 고통의 정도가 같을까 싶습니다. 남의 등짐을 바꿔 메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현재는 박은영 님의 걸음걸이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다리가 불편한 것이 표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아픔도 크지 않았을 것이라며 함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짐을 내려놓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가벼운 것을 지고 있던 이보다 훨씬 공부가 많이 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치마를 입지 못해 슬펐던 소녀는 어여쁜 정토 소녀로 성장했습니다. 제 짐이 무겁다고 느껴지는 날, 당신을 떠올리겠습니다. 박은영 님, 고맙습니다.

글_남궁천진 희망리포터(서울제주지부 노원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전체댓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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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란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23-12-22 13:03:19

명덕(섭)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2023-11-09 07:34:16

마음의 평화

도반이 전부입니다.
감사합니다.

2023-10-23 18: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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