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용산법당
28년을 이어온 수행과 봉사

코로나 시대로 접어들며 법당도 사라지고 많은 것이 변한 지금이지만, 우리 정토행자들의 수행 만큼은 여여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20년 7월에 발행되었던 용산법당 임춘자 님의 수행담 다시 읽기 입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작은 용산법당에는 총무님 곁을 항상 지키는 햇살 같은 미소의 노보살님이 계십니다.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해주셔서 감사하다.' 말씀을 드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에 있어 주는 것밖에 없다.' 며 손사래를 치는 임춘자 님. 야문 손끝과 바지런함으로 정토회와 28년의 인연을 꾸준히 이어온 수행담을 들어봅니다.

가을불교대학 홍보 활동 (왼쪽에서 세번째)
▲ 가을불교대학 홍보 활동 (왼쪽에서 세번째)

청각장애가 있었던 어린 시절

팔십 년 전,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태어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부모님도 형제들도 나를 지극한 사랑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몸이 약했고, 어릴 때부터 관절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딸아이의 아픈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남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혜화동 서울대병원까지 나를 업고 다녔습니다.

내가 듣지 못한다는 것도 6~7세 무렵까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말소리를 듣지 못하는 나를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 귀에 크게 되풀이해 들려주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작은 키가 아니었음에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읽고 쓰는 등 학업에는 어려움이 없었고 지금 생각해도 교육을 잘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듣지 못해도 문자와 친하여 눈으로 살아온 셈입니다.

지금도 일상적인 대화 소리는 듣지 못하고 입 모양을 보며 눈짐작으로 알아듣습니다. 요새 나오는 성능 좋은 보청기를 끼어도 상대방이 큰 목소리로 또렷이 말해야 들린답니다. 그럼에도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장애를 슬프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장애가 있으니 보육원이나 양로원 같은 곳에서 평생 봉사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 생각은 그렇지 않으셨는지 사람 됨됨이 하나 보고 혼사를 정했습니다.

3.1운동 100주년기념대회 (왼쪽에서 두번째)
▲ 3.1운동 100주년기념대회 (왼쪽에서 두번째)

인연의 시작

결혼 후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남편과 나는 서로 간섭하지 않았고 고맙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가족들을 대하여 집안은 평안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아이들은 공부를 잘했고 제 앞가림도 잘하며 바르게 자라주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부처님이다.'라는 고마운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젊을 때는 불교를 미신으로 생각하고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큰딸이 고등학교에서 불교 학생회에 다닌 뒤로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세 아이 모두 고등학교 때 법명을 받을 정도로 불교와 인연이 있었습니다.

큰딸이 결혼을 하자 많이 허전했습니다. 그 모습을 안쓰러워하던 둘째 딸이 일주일에 한 번 오는 불교신문을 구독해 주었습니다. 불교신문 광고에서 당시 양재동에 있던 선학대학(禪學大學)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주를 하고 복을 비는 종교로서 불교가 아닌, 부처님의 진짜 가르침을 알고 싶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정토회와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처음 느껴본 장애의 서러움

이즈음 어릴 때 앓던 관절염이 재발하였습니다. 목발을 짚고 버스를 타고 양재동까지 오가는 것은 나에게 무리였으나 불법이 너무나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어찌나 부처님 가르침이 궁금하던지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강의 중에 다른 학생들이 필기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듣지 못해서 메모할 수도 없고 그저 다른 사람의 필기노트를 곁눈질로 보면서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내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이 사무치게 가슴이 아파 옥상에 올라가서 목놓아 울었습니다.

실컷 울고 내려오니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신발을 꺼내려고 신발장에 가니 선반 위에 <<월간정토>>가 놓여 있었습니다. 펼쳐보니 세상에! 그렇게 알고 싶고 궁금하던 것들이 거기에 다 적혀 있지 않겠습니까? 법문, 봉사, 수행에 대한 프로그램이 지금과 별 차이 없이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 길로 먼저 대각사를 찾아갔고 거기에서 홍제동에 있는 정토회 포교원을 알게 되어 처음으로 법륜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용산법당 앞에서 (왼쪽 첫 번째)
▲ 용산법당 앞에서 (왼쪽 첫 번째)

법의 윤곽이 잡히다

그때 처음 본 스님의 인상은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스님의 모습이 어찌나 청정(淸淨)해 보이는지 비구인지 비구니인지도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습니다. 스님의 첫인상에서 받은 감동에 이끌려 이후 수요일마다 수요법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각사는 규모가 커서 보청기를 끼어도 청각장애가 있는 나로서는 법문을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홍제동 정토회는 공간도 작고 사람도 많지 않아서, 앞자리에 앉아 스님 입 모양을 보면서 법문을 이해하기 좋았습니다. 또한 매달 나오는 월간정토를 읽으며 궁금한 것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누기 시간에는 잘 들리지 않는 스님 말씀을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서 보청기를 끼고 항상 스님 옆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때 조각조각 들은 법문이 법을 이해하는 데 든든한 기둥이 되었습니다. 서초법당에서 영상법문이 시작된 이후로는 법문에 자막이 있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13년 정도 흐르자 내 안에서 법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봉사는 내 자부심

불기 닦는 봉사 중인 임춘자 님
▲ 불기 닦는 봉사 중인 임춘자 님

30여 년 전에는 홍제동도 문경도 초창기였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처녀 시절에 어머니의 권유로 배운 양재 기술이 큰 봉사 밑천이 되었습니다. 방석과 법복 등 바느질 일감이 많았고, 바느질 봉사를 하며 정토회에 잘 쓰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어머니의 혜안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법륜스님의 가사가 해져서 수선이 필요할 때도 기쁨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복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들리지 않지만 나쁜 이야기도 내 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법문을 온전히 못 들어 그 순간 한때의 원망이었지만, 내 탓으로 돌리고 언젠가는 알겠지 하는 위안을 했습니다

이제는 그것도 옛말. 세상이 좋아져서 태블릿PC로 녹화된 법문을 보면 자막이 뜨니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알람이 안 들려 기도시간을 못 지키는 날이 있었지만 지금은 손목시계 진동으로 일어납니다. 핸드폰으로 스님을 일주일에도 몇 번씩 만나고 도반들과 SNS로 눈과 손을 써 소통을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기도가 바로 생활이 된 것은 오래전입니다. 빈 그릇 운동은 정토회를 알기 전부터 해오던 것이었습니다. 옷 하나를 더 이상 못 입을 때까지 기워 입으시는 스님의 방식은 곧 제 방식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가득 차 있을 때보다 비워지면서 잘 쓰이는 것을 볼 때 더 좋고 뿌듯합니다. 채우는 기쁨보다 비우는 기쁨이 가벼워서 좋습니다.

바라는 것은 잘 쓰이는 것뿐

옳고 그른 것이 없으며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 열반으로 가는 길임을 경험으로 깨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불법을 배우면서 행복이란 좋은 집에 살며 좋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貪瞋癡)가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즘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법당에 나와 도반들과 함께 일하며 배우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한 분 한 분이 지닌 귀한 재능과 실력에 숙이게 되고 겸손한 마음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법당에 나오면 반드시 얻어가는 것이 있답니다.

2018년 연화회 가을 나들이
▲ 2018년 연화회 가을 나들이

스님과 연화회 나들이 중 기도를 하면서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여 청각장애의 고비를 넘기고, 걸림 없는 자유와 행복을 배우는 복을 누렸습니다. 인연으로 연결된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았으니 남은 여생 잘 쓰이다 가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임춘자 님은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고 언행이 참으로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 도반들은 보살님이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도 하고, 알아도 자꾸 놓치곤 합니다. 아프다가도 봉사할 때가 되면 신기하게 몸이 나아지는 것 같다며 웃음을 보이는 임춘자 님. 무엇 하나 탓할 것이 없으며 아픈 것도 감사할 일이라는 말씀을 들으니 인터뷰를 하면서 법문을 들은 듯한 충만함을 느꼈습니다. 25년 되었다는 임춘자 님의 여름 바지는 새로 지은 것처럼 깨끗했습니다. 용산법당의 보배로서 조용하고 담담하게 봉사하는 임춘자 님의 건강을 빕니다.


온라인 법당으로 변경이 된 지금. 임춘자 님은 여전히 용산법당 밴드에서 천일결사 나누기를 하고, 화상에도 가끔 참여를 합니다. 법문을 들으며 명상도 하며 온라인으로 변경된 지금도 여여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장애도 긴 호흡으로 넘기며 법을 만났듯 환경의 변화에도 또 적응해가는 임춘자 님의 모습에서 수행자의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글_이정민 희망리포터 (서대문정토회 용산법당)
편집_허란희(용인정토회 용인법당)

전체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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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25년 된 바지~~~
탐진치를 버리는 삶이 행복한 삶이 라는 말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2023-08-20 14:43:09

박신영

장애를 장애로 보지 않고 살아가시는 보살님의 웃는 모습이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성불 하세요~~

2021-03-28 06:13:46

경전반졸업생

보살님, 감동입니다. 존경합니다.

2021-03-26 01: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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