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0.13 불국사, 천룡사, 분황사, 황룡사지, 경전대학 금강경 6강
“어떤 사람과도 다툼이 생기지는 않는 방법”

안녕하세요. 두 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 스님은 손님들이 연이어 찾아와서 경주에서 불국사, 천룡사, 분황사, 황룡사 지를 안내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아침 7시 30분에는 영화배우 조인성 씨와 드라마작가 노희경 씨 일행과 함께 불국사로 향했습니다. 조인성 씨가 불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스님도 특별히 시간을 내었습니다.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관광객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일주문 앞에서 시작하여 사천왕문을 지나 청운교와 백운교 앞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석축을 쌓은 방식이 의미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맨 밑의 석축은 자연석으로 쌓았습니다. 큰 돌도 있고, 작은 돌도 있고, 모난 돌도 있고, 이런 모습은 이 세상의 사실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일체중생을 의미합니다.

그 위에는 좀 다르게 쌓았죠? 기둥만 반듯하게 다듬었고 기둥 사이에 쌓은 돌은 다듬은 게 아니에요. 돌의 평평한 면만 밖으로 보이게 한 겁니다. 원을 세운 보살이 기둥처럼 중간마다 잘 서 있으면 보통 사람들은 그냥 살아도 세상은 평화롭다는 뜻입니다. 한 면만 평평한 것은 각자가 한 가지 역할만 충실히 하면 보살과 함께 세계의 질서가 잡힌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살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성실한 지도자는 100명 가운데 1명씩만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도 세상은 평화롭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모자이크 붓다를 표현한 거예요. 이렇게 돌을 쌓으면 전체가 똑같이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대웅전 앞마당으로 올라가 백운교와 청운교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다보탑과 석가탑을 둘러보았습니다.

“이 탑이 다보탑입니다. 마치 나무로 다듬은 것처럼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만들었죠? 사성제를 상징하는 사각 위에 팔정도를 상징하는 팔각을 얹은 모습입니다. 다보탑은 여러분이 책에서 봤을 때보다 직접 와서 보면 더 크게 보여요.”

대웅전을 참배하고 무설전에서 사리함을 친견한 후 가파른 계단을 올라 관음전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한국의 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풍경이에요. 탑과, 기와지붕, 처마가 한눈에 보이죠. 사진 한 장 찍고 갑시다.” (웃음)

“풍경이 너무 멋있네요.”

관음전을 지나 비로전 앞에서 스님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 불상은 8세기에 만들어진 불상인데 얼굴에 위엄이 있고 허리가 딱 펴져 있어서 당당해 보이죠? 이때까지만 해도 불상이 아주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 불상은 이와 달리 약간 쪼그라진 모습이에요.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탄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당당한 모습이네요.”

이어서 나한전을 지나 극락전을 본 후 안양문 위에서 칠보교와 연화교를 내려다보고 경내를 나왔습니다.

스님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자 계속 고개를 끄덕이던 조인성씨가 말했습니다.

“불국사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들어본 적은 처음이에요. 감사합니다. 스님.”

불국사를 출발하여 스님은 통일전 앞에서 내리고, 조인성씨와 노희경 작가님 일행은 천룡사로 향했습니다. 통일전에서는 10시부터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 서원제가 열렸습니다. 스님은 이철우 경북도지사님, 주낙영 경주시장님과 함께 행사에 참석한 후 행사가 끝나고 다 같이 경주 남산 천룡사로 이동했습니다.

경북도지사님, 경주시장님은 조인성씨와 노희경 작가님 일행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손님들과 함께 천룡사를 한 바퀴 둘러보며 이 절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천룡사는 예부터 ‘이 절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호국 사찰입니다.”

“국가의 대운이 열리는 사찰이라고 하니까 잘 복원을 해야겠네요.”

도량을 크게 둘러본 후 선당에 들어가 함께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사하며 스님은 천룡사에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시대에 악붕구라는 당나라 사신이 와서 이 절을 보고 ‘이 절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실제로 이 절이 망하고 신라가 망했어요.

고려가 건국된 후 최제안이라는 사람이 재상이 되자 고려의 발전을 위해 천룡사를 중창했습니다. 그래서 고려가 융창했는데 고려 말에 이 절이 망하자 다시 고려도 망하게 되었습니다. 새로 조선이 건국되자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임에도 무학대사가 조선왕조의 발전을 기원하며 이 절을 중창했어요. 그렇게 해서 다시 이 절이 번성하다가 영조 때 유생들이 불을 질러서 소실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이 있는 곳이다 보니 용성 조사님이 돌아가실 때 대한민국의 국운 융창을 위해 ‘천룡사를 복원하라’ 하는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그 국가가 발전하려면 이 절을 복원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천룡사는 그냥 일반 사찰이 아니라 호국 사찰이라고 해요.

지금 대한민국은 ‘국운이 더욱 열려 세계적 국가로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대한민국의 발전과 한반도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이 절의 복원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도지사님과 시장님에게 천룡사 복원에 대해 조금이라도 마음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앞마당으로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후 손님들을 배웅했습니다.

천룡사를 출발해 4륜 오프로드 차를 타고 경주남산을 내려오는데, 맨 뒷자리에 앉은 스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벌써 수차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모시고 와서 이렇게 천룡사를 안내해 주고 있는데, 천룡사 복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천룡사를 내려온 스님은 다시 조인성씨와 함께 경주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둘러보았습니다. 모전 석탑을 보고, 화쟁국사비부와 석정을 지나 보광전을 참배했습니다.

스님은 보광전에 있는 불상을 가리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분황사는 제가 출가한 절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절에 들어와 살았는데, 아직 어렸으니까 절 생활이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저희 스승님이 아주 엄하셨거든요. 그런데 절에는 어디 숨어 쉴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불상 뒤에 가서 몰래 자고 그랬어요.”

“스님도 그런 시절이 있으셨어요?”

“힘든데 어떡해요.” (웃음)

마지막으로 넓은 터에 조성된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동측 회랑이 있었던 자리를 지나 금당 터와 9층탑 터도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은 선덕여왕이 ‘삼한일통’을 염원하며 9층탑을 세우고 30년 안에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내력도 설명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본 후 황룡사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박물관에서 모형으로 만든 황룡사 9층 목탑을 보며 스님이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조인성 씨도 ‘안시성’이란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스님의 역사 이야기를 흥미롭게 경청했습니다.

“스님, 너무 설명을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조인성 씨는 혼자 안내를 받았네요. 저는 항상 대중들 수백 명을 데리고 오거든요.” (웃음)

조인성씨와 노희경 작가님 일행은 모두 서울로 돌아가고, 스님은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금강경 강의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제9분과 제10분에 대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테라밧다(Theravada) 불교에는 성문4과라는 수행의 네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는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네 단계가 있다는 겁니다. 아라한은 완전히 깨달은 자입니다. 그런데 수보리는 ‘이 법은 정함이 없는 법이고 얻으려야 얻을 수 없고 설할 수 없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는 네 가지 단계는 왜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수보리가 마음속에 의문이 생겨서 부처님께 묻는 대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내용은 금강경이 나온 역사적 배경을 살펴봤을 때 대승경전을 집필한 사람들이 ‘난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내 수행은 어느 단계다’ 하는 식의 당시 기존 불교가 갖고 있었던 권위주의를 비판한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깨달았다’라고 한다면

수보리가 이렇게 마음속에 의문을 가지니까 부처님께서 묻습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여러분은 지금 제 법문을 듣고 있는데 내용이 재밌으면 귀를 쫑긋해서 듣겠죠. 그런데 법문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 ‘나는 지금 법륜스님의 법문을 귀 기울여 듣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할까요?

‘법문에 집중해야지’, ‘법문을 잘 들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 법문을 잘 안 듣고 있는 거예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딱 집중이 되어 있을 때는 눈으로는 얼굴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에 ‘내가 법문을 잘 듣는 중이다’ 하는 생각이 안 일어납니다.

내가 재미있어서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안 합니다. 그냥 일하죠. 애들이 만화책을 보거나 게임을 할 때도 열심히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열심히 한다.’ 할 때는 주로 어떨 때예요? 보통 사람들은 하기 싫으면 안 하잖아요. 하기 싫어도 억지로 꾸준히 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열심히 한다’고 하면 마음으로는 하기 싫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면, 제가 ‘열심히 하지 마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렸을 때부터 늘 열심히 하라고 배웠는데 왜 스님은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할까?’ 하고 이상하게 여길 거예요. 제 말은 ‘그냥 해라’, ‘기꺼이 해라’ 이런 뜻입니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하기 싫은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좋아서 하면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샘에서 물을 먹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물을 먹어도 되느냐고 물어봤어요.

‘이 물 먹어도 돼요?’
‘드세요’

‘거기 물바가지 좀 주시겠습니까?’
‘네’

이럴 때는 ‘내 물을 너에게 준다.’ 이런 생각이 전혀 없잖아요. 물이니까요. 물은 내 것이라는 생각이 없으니까 준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다’, ‘너에게 베푼다’ 이런 생각이 들 때는 이미 ‘내 것’이라는 소유의 상을 지은 겁니다. 내 것을 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깔리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내가 깨달았다’라고 한다면, 뭘 깨달았는지는 모르지만, 해탈과는 거리가 먼 거예요. 깨달았다는 생각을 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지’, ‘부처님을 믿어야지’ 라는 말은 사실은 안 믿어진다는 뜻입니다. 안 믿어지어지니까 ‘믿어야지’ 하고 각오와 결심을 하는 거예요. 사실을 확인하면 ‘믿는다’고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믿어져요. 내가 믿는다는 생각 자체가 안 일어나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될 거 같은데 명확하지가 않죠? 비유를 들어서 한 번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동산을 주장하는 사람 VS 서산을 주장하는 사람

여기 산이 하나 있습니다. 산의 서쪽에 한 동네가 있고 동쪽에 한 동네가 있어요. 산의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해가 이 산에서 뜨니까 동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산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해가 이 산에서 지니까 서산이라고 불렀어요. 같은 산을 놓고 한 마을에서는 동산, 한 마을에서는 서산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두 마을에서 온 사람이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가, 한 사람이 ‘내가 어제 동산에 갔는데’ 하니까 다른 사람이 묻습니다.

‘동산이 어느 산이야?’
‘저 산’
‘그게 어떻게 동산이야 서산이지.’
‘해가 거기서 뜨는데 그게 어떻게 서산이야. 동산이지.’
‘해가 거기서 지는데 어떻게 동산이야. 서산이지.’
‘해가 거기서 진다고? 거기서 뜨는데…’

이렇게 시비가 붙었습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도저히 서로 이해가 안 되니까, 동네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자’,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자’ 이런 말을 자주 하죠. 다수로 결정하자는 거예요. 각자 자기 동네에 가서 사람들한테 물어봤더니, 다 자기처럼 알고 있어요.

‘거 봐라.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 그렇다.’

이렇게 되니까 다수결로는 해결이 안 돼요. 그래서 옛날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이쪽 마을에서는 전부 다 동산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저쪽 마을에서는 전부 서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이렇게 기록이 다르니까 또 결론이 안 났습니다. 그래서 직접 확인해 보자고 각자 자기 마을로 갔습니다.

‘내 눈으로 확인해봐도 동산이고,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동산이고, 옛날 기록에도 동산인데 이게 어떻게 서산이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이러니까 끝이 안 나요. 이렇게 동산과 서산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내와 남편이에요. 아내 입장에서는 술 먹는 남편의 행동이 이해가 안 돼요. 아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왜 술을 먹어서 돈은 돈대로 쓰고, 건강은 건강대로 나빠지는데 그런 백해무익한 짓을 왜 하느냐!’

그럼 남편도 할 말이 있습니다.

‘나 혼자 마신 것도 아니고 내 친구들도 다 같이 마신 거야. 내 친구들도 다 그런데 왜 유독 당신만 그렇게 시비냐.’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도 그런 적이 없어.’
‘무슨 소리냐. 우리 집에서는 남자들은 다 그런데.’

서로 얘기가 안 돼요. 그러면 ‘저 사람하고 얘기가 안 되니 말도 꺼내지 마라. 소귀에 경 읽기다’ 이렇게 말문을 닫아버려요.

그러다가 같이 살면서 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처음에는 큰소리치다가 나중에는 대화를 시도합니다.

‘여보, 대화 좀 합시다. 당신이 동산이라고 그랬어? 잘 생각해봐. 그게 동산이야? 잘 생각해봐.’
‘무슨 소리야. 또 그 얘기 하려고?’

이렇게 해서 대화가 또 깨지는 거예요. 소위 대화라고 하지만 결국 자기 의견을 관철하기 위한 설득을 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의견이 옳다고 윽박지르고 고함을 지르면 폭력적이고, 대화하자고 하면 평화적인 것 같지만 결국 같은 얘기에요. 그래서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지금 경상도와 전라도이고, 여당과 야당입니다. 요즘 국회에서 하는 거 한번 보세요. 동산 서산과 똑같습니다. 요즘 한창 국정감사를 하면서 나오는 얘기를 들어보세요. 재밌습니다. 이게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이고, 남한과 북한이에요. 요즘 남북한 얘기를 들어봐요. 딱 이렇죠. 이게 미국과 중국이고 나토와 러시아입니다. 이게 개발론자와 환경보전론자이고, 여성운동하는 사람과 그에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대화가 안 돼요. 양쪽 다 각자가 보는 사실이 다른 겁니다. ‘너 주장이 세다’, ‘고집한다’ 이렇게 얘기해주면, ‘내가 무슨 주장을 해. 나는 사실을 말하는데 고집이 세다고 한다’ 하면서 억울해합니다.

기독교와 불교도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 볼 때는 다른 종교인들이 이해가 안 됩니다. 만물을 창조한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 돼요. 어떻게 주님을 믿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저 사람 종교에 미쳐서 다닌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서로 대화가 안 돼요. 이걸 아상(我相)이라고 합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해서 아는 것이 진실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 동네에서 한번 나와 보는 겁니다. 그 동네에서 나와서 다른 위치에서 보면 ‘어? 동산이 아니네!’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틀렸다. 동산이 아니라 서산이 맞다’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내가 동산이라고 고집을 했는데, 동네에서 나와 보니까 동산이라고 할 수 없네.’
‘내가 서산이라고 고집을 했는데, 동네에서 나와 보니까 서산이라고 할 수는 없네.’

이렇게 그 동네에서 나오면 ‘어, 동산 아니네’, ‘어, 서산 아니네’ 하고 금방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안 나오면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해도 해결이 안 됩니다. 그 동네에서 나오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동산이라고 했는데 동산이 아니구나’, ‘서산이라고 했는데 서산이 아니구나’ 이렇게 깨달으면 갈등이 없어져 버려요. 동산이라고 고집할 것도 없고, 서산이라고 고집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깁니다. ‘이 산이 동산이 아니면 무슨 산이냐?’ 하는 의문이 또 생기는 거죠.

‘지금까지 동산이라고 했는데 동산이 아니면 서산인가요?’
‘서산도 아닙니다.’
‘그러면 동산인가요?’
‘동산도 아닙니다.’
‘그럼 이 산은 뭘까요?’

예전에는 동산이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동산이 아니고, 서산이라고 했는데 서산도 아니라면, 진짜는 뭐냐는 거예요.

‘실제는 뭐냐? 아, 알았다. 비동비서산이구나!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비동비서산이다!’

이걸 법상(法相) 또는 법집(法執)이라고 합니다. ‘비동비서산이 진실이다’ 이렇게 또 집착하는 거예요.

‘이거 동산이다.’
‘그거 동산 아니다.’
‘그럼 서산인가?’
‘서산도 아니다.’
‘그럼 뭔데?’
‘그거 비동비서산이야. 너희들 다 어리석어서 몰라서 그렇지, 깨달으면 비동비서산이야.’

이렇게 진리라는 것을 주장해서 ‘너 틀렸어’ 하고 또 다툽니다.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는 것으로 다투는 것만 다툼이 아니고, ‘비동비서산이 진실이야!’ 하면서 진실과 거짓을 두고 다투는 것도 다툼이에요. 동산도 가짜이고, 서산도 가짜이고, 이것만 진짜라고 하면서 남을 배타하는 거죠. 이것을 법상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진리다’ 하고 상을 지은 거죠.

어떤 사람과도 다툼이 생기지는 않는 방법

깨달은 사람은 ‘이 산이 무엇이다’ 하고 고집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럼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면 무슨 산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못 버리기 때문에 진리라는 상이 잡히는 겁니다. 동산이라고 주장했다가 거기서 나왔으면 ‘어, 동산 아니네’ 이걸로 끝나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럼 무슨 산이야?’ 하고 또 묻습니다. ‘비동비서산’이라는 새로운 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안 것이 바로 깨달음이에요.

그럼 깨달은 사람은 어떨까요? 누가 동산이라고 주장해도 다투지 않습니다. ‘아, 저 동네에서 왔구나’ 하고 압니다. 누가 서산이라고 주장하면 ‘아, 이 동네에 사는 분이구나’ 하고 압니다. 그래서 중생과 다툼이 없습니다. 누가 ‘신을 믿어야 해!’라고 주장하면 ‘틀렸어!’ 이렇게 다투지 않고, ‘아, 저 사람은 신을 믿는 사람이구나’ 하고 압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누구하고도 논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논쟁이 없는 삼매를 무쟁삼매(無諍三昧)라고 합니다. 이제 이해가 좀 되세요?

상을 짓는다는 것은 ‘내가 옳다’ 하고 고집하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니고 ‘이것이 진리다’ 이렇게 주장해도 상을 짓는 거예요. 상을 짓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제상이 비상인 줄 아는 것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뭘 정하려고 해요. ‘그 사람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쁜 사람 아니네’ 이렇게 알았으면 거기서 끝나면 되는데, ‘그럼 좋은 사람인가?’ 또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상을 짓습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 가지로 벌어졌지만 결국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도 상을 지으면 안 됩니다. 하나를 고집하게 되면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다투게 됩니다. 그러니 진짜 하나인 것은 상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입니다. ‘하나의 모양은 곧 모양이 없음이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의 모양을 고집하면 만 가지 모양으로 벌어집니다.

‘아상을 일으켜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요. 인상을 일으켜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요. 중생상을 일으켜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요. 수자상을 일으켜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요. 법상을 일으켜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을 짓지 말고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야 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고 합니다. 마땅히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은 정형화된 것이 아닙니다. 한 번 깨달아버리면 천국처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늘 깨어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천 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도 촛불을 켜면 일순간에 밝아지고, 천 년 동안 밝았던 동굴도 불을 끄면 일순간에 어두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중생이 깨달으면 부처요, 부처가 어리석으면 중생이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항상 깨어있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상을 짓고 집착하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오늘도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들깨 수확을 한 후 오후에는 INEB(참여불교세계대회) 실무 준비 회의에 온라인으로, 화엄반 회향 법문을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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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

범소유상 개시허망인데..
그래도 감사합니다.. 스님

2023-10-13 14:21:35

김민준

인성이형 보려고 들어왔다가 정말 좋은글에 감명받고 갑니다...

2023-09-13 15:38:49

보각

감사합니다 스님,

2022-11-04 15: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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