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0.12 수행법회
“남편은 죽었지만, 여전히 제 곁에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예불과 기도를 마치고 오늘은 울력 대신 회의를 했습니다. 8시부터 상임 천일준비위원회와 온라인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10시부터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깊어가는 가을 날씨로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죠. 제가 있는 이곳은 남부 지방인데도 아침 기온이 7도까지 떨어져서 으슬으슬 추울 정도였습니다. 무더위로 땀을 많이 흘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들판에는 벼가 누렇게 익었고 일부 논은 벌써 수확을 하기 시작합니다.

지난 한 주는 시골에 내려와서 일상을 회복했습니다. 아침에는 밤을 줍고, 낮에도 일을 해야 하지만 만일결사 마무리하는 해라서 회의나 강의가 많다 보니 농사꾼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코스모스도 활짝 폈고, 국화꽃은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가을입니다.”

이어서 지난 주말에 있었던 으뜸절 실천활동 모습과 지난 한 주 동안 스님이 울력한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네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남편이 죽었지만, 그를 구성했던 성분들을 느낄 가능성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남편은 죽었지만, 그를 구성했던 성분을 느낄 수 있을까요?

“몇 년 전 남편이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장례식 때 시댁 식구들이 술에 취해 저희 가족에게 욕설을 하고 남편의 생명보험금까지 수령해 갔습니다. 당시 아직 어린아이들을 보며 막막했고 여러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이제 시간이 흘러 모두의 덕분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시댁 식구들에 대한 감정이 없습니다.

딸은 남편 사망 후에 충격으로 조현정동장애를 앓았다가 지금은 아주 좋아져서 약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고등학생이고 아주 큰 식당에서 육체적으로 힘든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아이는 가끔 감정 기복이 있어서, 그걸 보는 제 마음이 힘들 때도 있습니다.

남편은 화장을 했어요. 남편의 의식은 사라졌지만 가끔 남편을 구성하는 원소 성분이 혹시 제 곁을 도는 바람이나 다른 자연 물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혹시 아이들과 느끼는 산책길 바람 속에서 어쩌면 아이 아빠를 구성했던 성분을 느낄 가능성이 있을까요?”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된 인연은 굉장히 깊습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 입장에서는 ‘내 아내’, 아내 입장에서는 ‘내 남편’이 되죠. 그러나 이건 내 입장이고, 시댁에는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내 남편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있어요. ‘내 아들이다’라고 여기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있고 ‘내 형이다. 내 동생이다. 내 오빠다’라고 생각하는 형제들이 있어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다들 많이 늙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부부로 관계 맺은 세월이 3, 40년에 달하면, 내 남편이 자신의 형제들과 관계 맺은 세월보다 나와 관계 맺은 세월이 더 길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원래의 형제들은 조금은 남 같은 사이가 되고, 부부와 그 자녀가 하나의 독립된 가족이 됩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10년 정도밖에 안 지났을 즈음에는 아내보다 형제들이 한 집에서 남편과 관계 맺고 산 시간이 더 길거든요. 만약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면 시부모는 ‘내 아들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며느리는 눈에 안 보여요. ‘내 아들이 죽었다. 그러니까 내 아들 건 다 내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요. 형제들도 ‘우리 형님이 죽었다’, ‘내 동생이 죽었다’ 이게 더 우선이에요. 며느리나 형수는 부차적인 거예요. 그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그렇다는 겁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내 남편이 죽었을 때 남편이 온전한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남편이 소유했던 것도 다 내 것 같죠. 시댁 입장에서는 남편이 자기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그 소유했던 것도 다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자도 친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질문자와 친정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한번 보세요. 며느리는 뒷전이 될 겁니다. 그 형제들과 부모가 한 가족이 되기 때문이에요.

이런 문제가 있을 때 법적으로는 친 가족을 우선하도록 돼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사람의 사유나 관습에서는 며느리는 남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며느리는 애초에 밖에서 와서 가족이 된 사람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법과 현실이 좀 다를 때가 왕왕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어요.

또 시댁 식구들은 조의금도 그런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어요. 실제로 장례식에 돌아가신 분의 지인은 몇 명 안 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돌아가신 부모님의 친구들이 오는 게 아니라 상주, 자식의 지인이 와요.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큰아들이 아는 사람, 둘째 아들이 아는 사람, 셋째 아들이 아는 사람, 딸이 아는 사람들이 오게 마련입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들어온 부의금을 큰 아들이 중심이 돼서 장례를 치르는 데 쓰고 다 가졌는데, 요즘은 장례 치르는 경비만 딱 제한 뒤 남은 돈을 형제들이 다 나눕니다. 그게 처음엔 좀 이상하게 보이지만 이건 다 부조(扶助)니까 받은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갚아야 하는 돈이에요.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자기 몫을 갈라서 나누는 게 문화가 됐어요.

그러니 시댁에서는 자기들 때문에 조의금이 들어왔다고 생각했거나, ‘이건 내 아들이다’ 이런 생각이 강하거나 해서 아마 장례 치르고 남은 돈이며 생명보험금을 가져가지 않았나 싶네요.(스님 웃음) 지난 얘기지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편이 죽은 것도 섭섭하지만은 나도 나중에 혹시라도 아들을 먼저 잃어 보면, 남편 죽은 섭섭함과 아들 죽은 섭섭함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아들이 죽었을 때 훨씬 더 가슴 아파요. 아무리 부부가 정이 두터워도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정과 자식에 대한 정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자기가 낳아서 길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부모가 죽거나 남편이 죽거나 아내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녀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예요.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그저 부모님을 더 위로해 주는 게 좋아요. 나도 내 남편이 죽어서 정신이 없지만, 시부모님은 자기 아들이 죽어서 얼마나 정신이 없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오히려 시부모님을 위로를 해주는 마음을 내는 게 나에게 좋아요. 위로까지는 못 해줬다 하더라도, 섭섭해하거나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자기 아들 죽었다고 참 많이 가슴이 아팠겠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마음을 내면 지금 나에게 좋습니다. 그걸 섭섭해하면 나한테 늘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 있게 되거든요.

그리고 남편을 구성했던 성분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 즉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살아있을 때도 6개월이 지나면 대부분이 바뀝니다. 우리 몸의 모양은 6개월 뒤에도 이대로 유지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있는 세포들이 6개월 뒤에도 그대로 있는 게 아니에요. 계속 바뀌어 나갑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에너지로도 쓰이지만 물질 원소가 있어서 그것이 낡은 세포를 교체하는 데도 쓰여요. 며칠 만에 씻으면 때가 나오죠? 바깥 먼지도 있지만, 그때의 대부분은 죽은 세포입니다. 그렇게 죽은 세포를 비롯해 교체된 물질은 계속해서 오줌이며 똥으로도 배출되고, 한편으로는 계속 새로 재생돼요. 같은 세포가 계속 자리를 지킨다면 그 세포가 낡았을 때 몸을 못 쓰게 될 테니까요. 이렇게 계속 몸의 부분 부분이 조금씩 개선되어서, 6개월이나 1년 후에는 내 몸에 남아 있는 게 사실상 하나도 없습니다. 꼭 안 죽어도 그래요. 다시 말해 살아 있어도 작년에 내 몸을 이루던 것이 지금은 사과가 돼 있을 수도 있고, 작년에 내 몸을 이루던 것이 지금 풀이 되어 있을 수 있고, 작년에 내 몸을 이루던 것이 지금 나무가 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물질로 보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물질로 보면 내 거, 네 거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지금 이 공기는 숨을 들이쉴 때 내 코에 들어오니까 나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나 숨을 내쉴 때 이 공기가 밖으로 나갔다가 또 옆 사람이 숨을 들이쉴 때 그 사람 코로 들어가잖아요. 이처럼 공기는 지금 금방 내 것이 됐다가 네 것이 됐다가 하는데, 어떻게 내 것 네 것을 따질 수 있겠어요? 내 것이 아니고 네 것도 아니고, 만물은 필요한 대로 쓰여질 뿐입니다.

그러면 액체 혹은 수분 같은 건 어떨까요? 내가 물을 마시고 오줌을 누면 그것이 개울로 내려가서 상수도원으로 들어갔다가 다양한 과정을 거쳐 다시 옆 사람 입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순환은 공기로 대표되는 기체가 제일 빠르고, 물로 대표되는 액체가 두 번째, 대부분의 물질을 이루는 고체가 세 번째로 빠릅니다. 약간의 시간차는 있지만 모두 순환이 이루어져요. 나갔다가 1년 만에 돌아오는 것도 있고, 나갔다가 10년 만에 돌아오는 것도 있고, 나갔다가 100년 만에 돌아오는 것도 있다는 차이 정도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내 것이라 할 것도 없고 네 것이라 할 것도 없어요. 그냥 바다에서 물결이 출렁거리면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 하나하나만 보면 파도가 생겨나거나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바다 전체로 보면 생기고 사라지는 게 없어요. 그냥 출렁거릴 뿐이죠.

그처럼 물질세계 전체로 보면 물결이 한 번 출렁해서 일어나는 게 사람이 하나 태어나는 것이고, 물결이 한 번 출렁해서 가라앉는 게 사람이 하나 죽는 것과 같아요. 물질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이런 인연이 모여서 숲을 이루었다가, 인연이 사라지면 흙으로 돌아가거나 물로 돌아갔다가, 또 인연이 되면 올라오는 거예요. 물결은 그냥 금방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지지만 생명은 짧으면 5년, 혹은 10년, 100년, 1000년, 혹은 그 이상이라는 차이는 있겠죠. 어떤 나무는 수천 년도 산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늘 출렁거리고 순환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굳이 따지자면 어느 하나 내 것 아닌 게 없고, 어느 하나 내 것이라 할 게 없어요. 이 두 가지 말이 모두 맞아요. 내 것이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도 맞고, 모든 게 다 내 것이라는 말도 맞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의 몸을 이루었던 물질들은 남편이 살아있을 때도 이미 남편 게 됐다가 내 것이 됐다가, 또 내 것이 됐다가 남편 것이 되면서 오갔던 거예요. 내 몸에 남편의 원소가 숨으로 들어오고 물로 들어오는 일은 꼭 죽어서 이루어지는 일뿐만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형상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런 형상은 나다. 내 거다.’
‘저런 형상은 너다. 네 거다.’

질문자가 남편을 잊지 못해서 그런 남편의 원소라도 한번 느껴보고 싶다는 건 좋아요.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 뿐입니다. 남편이 죽어서 천당 갔다고 한들 ‘진짜 갔나, 안 갔나’ 이런 건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남편의 몸을 이루던 요소가 나한테 왔나, 안 왔나’ 이런 걸 과학적으로 지금 검증할 수가 없어요. 이런 건 생각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죽고 나면 ‘극락 간다, 천당 간다, 아무것도 없다, 지옥 간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라고 하는데 다 우리 생각이에요. 그렇게 믿는 게 내가 편안하다면 그렇게 믿으면 되고, 그렇게 믿어지지 않는다면 안 믿어도 됩니다. 이건 믿음의 영역이지, 객관적으로 ‘그렇다’, ‘아니다’ 하고 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남편은 좋은 곳에 가서 잘 지낼 거다. 살아있는 나는 사는 동안에 자녀와 같이 잘 살아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아니면 ‘아, 남편의 모양은 이제 없지만 남편은 늘 내 곁에 있을 거다. 곁에 있으면서 우리를 도와줄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게 더 편하면 그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늘 내 곁에 있으면서 나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면 외롭지 않고 좋은 점도 있지만, 다른 남자를 만나려면 그게 부담이 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다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 ‘남편이 나를 보고 있지 않나’ 이렇게 부담이 된단 말이에요. 혼자 살려면 내 옆에 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나한테 도움이 되는데, 그런 생각은 꼭 장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남편은 죽은 뒤 극락이든 천당이든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서 잘 지낼 거다. 그러니 나는 살아있는 동안 여기서 잘 살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만나도 전혀 구애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인도 사람들처럼 사람이 윤회한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쯤 남편은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서 살고 있겠죠. 이처럼 남편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지금 내가 잘 살아가면 됩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믿으면 안 된다’, ‘그렇게 믿으면 된다’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믿는 게 자기한테 좋으면 그냥 믿으면 되고, 그렇게 안 믿어지면 안 믿으면 됩니다. 믿음을 두고 ‘이런 믿음이 옳다’, ‘저런 믿음이 옳다’ 하는 거는 바람직하지 않고, 그 믿음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신의 존재도 그래요.

‘신이 있나, 없나! 어느 게 맞나!’

이렇게 접근하면 100년은커녕 1000년이 지나도 해결이 안 됩니다.

‘저 사람은 있다고 믿는구나.’
‘저 사람은 없다고 믿는구나.’
‘믿음이 서로 다르구나.’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신이 있다, 없다를 따지는 논쟁에 내가 휩쓸리지 않게 돼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다. 그러니 주님을 믿어야 된다’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생각은 자유니까’ 이렇게 받아들이고 그냥 넘어가면 됩니다. ‘저놈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 상대하면 괜히 나만 피곤해지는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아, 그런가? 진짜인가?’ 이렇게 생각해도 어리석습니다. ‘저렇게 믿는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 넘기면 돼요. 인도에 가보면 원숭이 사원도 있고, 쥐 사원도 있고, 뱀 사원도 있어요. 온갖 것을 다 믿습니다. 코끼리를 신으로 섬기기도 하고요. 그걸 보고 기독교인이나 한국 사람들은 ‘에이, 저런 건 미신이다!’ 이러지만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어요. 무엇을 믿든 그건 그들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옛날에 뒷간 신도 섬기고, 부엌 신도 섬기고, 나무 신도 섬겼잖아요. 그건 신앙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걸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질문자는 뭔가 과학적인 근거나 가능성을 물어본 것 같은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과학적으로는 천하 만물이 모두 나를 구성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구성할 수도 있어요. 그 구성 요소는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특정한 물질이나 원소가 남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잠시 남편을 거쳤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요.

자, 그런 관점으로 좀 더 편안하게 사시면 좋겠습니다. 원망은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동안 이렇게 기꺼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네, 스님. 잘 알겠습니다. 위로해 주는 마음과 이해해 주는 마음을 내었더니 지금 마음이 되게 보송보송하고 편안해졌습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두 명의 질문이 끝나고 현장에서 손을 들고 두 명의 질문을 더 받은 후 법회를 마쳤습니다.


오후에는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일도 손님들과 시간을 보낸 후 천룡사를 참배하는 경북 도지사 일행을 마중하고, 저녁에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5

0/200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2-11-08 06:16:36

보각

내것이라 할 것도 없고, 내 것이다 라고 하는 말도 맞구나 , 스쳐지나가는거구나 느껴집니다

2022-11-04 15:07:48

강희란

작년 10월18일
언니를 하늘나라 여행보내고
아직 까지도
언니 온기를 늘 느끼며
살고 있는 나에게
질문자님의 질문과 스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군요.
스님 감사합니다*^^*

2022-10-18 19:06:20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