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6.17 용성조사 탄신 157주년 기념법회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된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 근세 불교 중흥조이자 독립운동가이신 백용성(白龍城) 조사님의 탄생 157주년 기념일입니다.

서울 정토회관에서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한 후 6시에 장수 죽림정사로 출발했습니다.

죽림정사는 독립운동가이자 한국불교의 대선사이신 용성조사님의 생가터를 불심 도문 큰스님이 복원하여 지은 사찰입니다. 용성조사님의 탄생성지인 죽림정사에서 매년 기념법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9시에 장수 죽림정사에 도착하자 유수 스님과 원장인 여광 법사님, 그리고 담당 실무자가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행사 준비는 잘 되었어요? 전부 도시락 싸오라고 공지가 되었죠?”

“네. 봉사 온 모든 분들이 도시락을 싸왔습니다.”

행사 준비 상황을 점검한 후 용성조사님의 생가터에 가서 영정 사진에 참배했습니다.

영정 사진에 인사를 올린 후 기념식 생중계를 하기 위해 용성교육관으로 향했습니다.

먼저 부처님의 법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달되기까지 과거 7여래불과 69조사, 7대사 등에 대해 차 공양을 올리는 다례재를 올렸습니다.

정성껏 다례재를 올린 후 10시 30분부터 용성조사 탄신 157주년 기념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장수군 관계자와 봉사자 몇 명만 현장에 자리하고, 전국의 정토행자들은 온라인 생중계로 기념법회에 참석했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을 한 후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을 하고, 용성조사님의 행장을 영상으로 시청했습니다.

이어서 대중은 백용성조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이자 죽림정사 주지인 스님에게 기념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용성조사님이 백 년 전에 행한 업적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 있다가 나라가 독립된 뒤에 되돌아보면, 나라가 독립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만큼 어려운 일이고, 독립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민주화가 된 뒤에 돌아보면, 독재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군부독재 치하에서 저항운동을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세계 최대 빈곤 국가 중의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산업화를 이룬 것에 대해서도 지금 되돌아보면 산업화를 한 것이 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가난할 때 그런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30년 후에 대한민국이 이 정도로 잘 살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못 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만든 자동차나 전자 제품이 전 세계에 이렇게 많이 팔릴 것이라고 그 당시에는 꿈도 못 꿨습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

역사를 공부할 때 그냥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지만 다음 시대에서 볼 때는 ‘그때 사람들이 왜 그걸 안 했을까?’ 하는 그런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역사 공부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 알고 용기와 비전을 갖고 행동한 사람들이 바로 선각자로 추앙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선각자들을 그저 훌륭하다고 칭찬하는데 머무를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그들의 길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시대적 과제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시대적 과제는 바로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정착하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해서 조국의 미래 희망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의 희망을 만들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는 일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 경쟁을 하는데, 북한이 저렇게 행동하는데, 보수 세력이 반대하는데, 과연 통일이 되겠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평화 정착과 통일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고, 가난할 때 산업화의 꿈을 갖기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고, 군부독재 시대에 민주화의 꿈을 갖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얼마 전 세계 선진국 7개 나라가 만나는 G7 정상회담에 우리나라가 초청되어서 대통령이 다녀왔잖아요. 이제 대한민국은 더 이상 약소국가가 아닙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이 약소국가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해야 됩니다. 우리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고, 군사력으로는 세계 여섯 번째 가는 국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 천 년 동안 강대국에 짓눌려서 비굴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의 국력이 얼마나 신장되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남이 볼 때는 훌륭한 나라라고 칭찬하는데, 본인들은 위축이 되어서 아직도 옛날 힘이 없었던 시절에 의식이 머물러 있습니다. 교만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제 더 이상 비굴하게 굴지 말고 당당해져야 한다는 겁니다. 당당해져야 한다는 말은 남한테 잘난 척하고 교만하라는 뜻이 아니라 위축된 마음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된 이유

그럼 이런 대한민국을 누가 만들었을까요? 일제 식민지 치하에 그 어려운 시기에도 벌써 100년 후의 희망을 보고 꿈을 꾼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 중에 용성조사님보다 앞선 사람이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 선생입니다. 동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가 ‘후천개벽(後天開闢)’입니다. 선천(先天)의 시대는 임금이 주인인 나라였지만 후천(後天)의 시대에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사상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꿈도 못 꿨던 얘기였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면 바로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됐습니다. 그러나 최제우 선생은 그런 비전을 그렸습니다.

그 비전을 구체적인 현실에서 새로운 운동으로 제안하신 분이 용성조사님입니다. 백성이 주인 되는 새로운 세상을 단지 꿈으로만 가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슬로건으로 내걸고 공식화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기까지는 그전에 많은 준비 과정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전쟁에 져서 속국이 되었습니다. 병합된 것은 아니어서 백성과 영토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자주권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권을 포기하게 됐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제1번이 청나라는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고종은 이런 변화된 시대를 반영해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에서 대한(大韓)으로 바꿨습니다. ‘한나라’는 우리 민족의 첫 번째 나라 이름입니다. ‘한’이 크다는 뜻인데, 거기에 ‘대(大)’ 자를 붙여서 ‘더 큰 한나라’ 하는 뜻으로 ‘대한’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나라 이름을 선포했습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이 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독립운동은 ‘대한제국 부흥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백제 부흥군, 고구려 부흥군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용성조사께서는 이렇게 제안하셨습니다.

‘이제 왕이 주인이 된 시대는 끝났고, 새로운 시대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시대이다. 그러니 대한민국(大韓民國) 수립 운동을 하자.’

나라 이름은 그 전 나라 이름을 계승해서 ‘대한’이라고 했지만, ‘누가 주인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왕이 주인인 ‘제국’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인 ‘민국’을 수립해야 된다는 제안이었습니다. 3.1 독립운동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운동일뿐만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이 주창한 새로운 나라는 임금이 주인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인 나라입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것보다 백성이 주인이 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고 큰 이슈입니다. 용성 조사님은 이것을 제안하고 관철시켰습니다. 그 결과 상해에 임시정부가 들어설 때 ‘대한제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이름을 걸게 된 것입니다.

만일 나라의 독립만 생각했다면 1945년에 일제가 물러나고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순간 이 운동은 끝이 나야 됩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나라의 독립뿐만 아니라 새로운 나라인 ‘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1945년에 일제가 물러나도 이 운동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비록 그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했지만 아직도 민(民)이 주인은 아니었어요. 민이 주인인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뽑았지만 독재정부였기 때문에 여전히 백성이 주인 노릇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4.19 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촛불항쟁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향해 점점 더 업그레이드해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용성조사님이 대한민국을 제안한 그때부터 102년이 지났습니다. 용성조사님은 100년 후를 내다보고 이런 일을 했습니다. 3.1 운동 자체만 생각하면 일본의 폭력 앞에서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용성조사님의 이 운동을 제안한 그 뜻을 헤아린다면 그때 뿌린 씨앗이 지금 꽃피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백 년을 향한 꿈

그러나 아직도 우리에게는 미완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발전했고 민주화도 이루었지만 나라가 아직 통일이 되지 못해서 전쟁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전쟁의 위험이 없는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통일을 이룸으로써 용성조사님과 많은 선각자들의 꿈을 완성해야 합니다.

미래의 백 년은 과거의 백 년과는 달라야 합니다. 선조들의 희생 위에 그걸 딛고 서서 새로운 백 년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확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통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통일은 완성이 아닙니다. 새로운 백 년의 시작이 통일입니다. 통일된 대한민국은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 앞장서는 인류 문명의 중심 국가로 발돋움해야 됩니다.

문명의 중심은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아메리카에서 아시아로 점점 이동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아시아의 중심핵이 되어서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규모가 크고 세력이 큰 것이 문명의 중심이 아닙니다. 문명의 수준이 높음으로 해서 미래 문명을 선도해 나갈 수 있을 때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꿈을 갖고 미래 백 년을 그려야 됩니다.

선조들이 백 년 전에 그렸던 꿈이 지금 우리에게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독립운동이 무참하게 탄압을 받아 실패했고, 해방이 됐지만 분단이 되고 전쟁이 일어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났고, 한 발 후퇴하면 두 발 전진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앞으로도 우리가 백 년을 내다보는 꿈을 갖고 계속 나아간다면 비록 많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꿈이 미래에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용성조사님께서 백 년 전에 그렸던 꿈과 그 유훈들이 지금 오늘 우리들에게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룸과 동시에 다시 백 년 후를 내다보는 꿈을 그리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용성조사 탄생일을 맞아서 그런 발원을 우리 모두가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역사 속에서 나라의 독립과 산업화, 민주화를 위해 활동한 수많은 분들의 공덕과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그 유업을 계승해서 우리 또한 미래의 꿈을 갖고 우리 후손들이 우리를 딛고 나아갈 수 있도록 계단이 되겠다는 다짐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홍서원으로 기념식 생방송을 마친 후 점심 공양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과 수행팀 모두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각자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나서 도량을 둘러보았습니다.

“지난번에 가지치기를 했더니 시원해졌네요. 여기는 너무 텅 빈 느낌이어서 나무를 몇 그루 심어야겠어요.”

가지치기만 했기 때문에 세밀하게 모양을 다듬지는 못했습니다. 스님은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나무의 모양을 만들 수 있는지 요령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나무는 둥근 모양이 되도록 겉을 싹 깎아주어야 해요.”

다음 기념식 때 사전 영상으로 넣기 위해 생가터를 참배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한 후 기념식에 참석해 준 장수군 관계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바쁘신데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책 한 권씩을 선물로 드린 후 죽림정사를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3시 30분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하니 두북 공동체 성원들 모두가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도 곧바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비닐하우스로 향했습니다.

행자들은 모두 비닐하우스 2동에서 고추에 약을 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고추에 진딧물이 생겼는데 며칠 사이에 비닐하우스 전체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농약을 치면 빠르게 잡을 수 있지만 유기농법을 실험하고 있기 때문에 국화로 만든 유기농 약으로 진딧물을 퇴치해 보기로 했습니다.


스님도 함께 약을 치다가 기계가 방전되었습니다. 배터리를 충전하는 사이 스님은 비닐하우스 4동으로 가보았습니다. 논이었던 땅에 비닐하우스를 지었기 때문에 비닐하우스 네 동 모두 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거기다 4동은 예전에 기와를 굽던 땅이라 물이 더욱 빠지지 않습니다. 계속 물이 고여서 지난번에 스님이 물길을 만들어두었지만 또 고랑에 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괭이를 가져와 물이 고인 곳에서부터 비닐하우스 바깥까지 다시 물길을 깊이 파주었습니다.


그래도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바가지를 가져와 물을 직접 퍼냈습니다.




옆 고랑에 물도 퍼내고 여러 번 고랑을 오가며 물을 퍼냈습니다. 습한 비닐하우스에서 달리다시피 하며 물을 퍼내니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정말 덥네요.”

“스님, 몸은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요. 그래도 일이 있으니 하는 거죠.”

비닐하우스 바깥에도 물이 잘 빠지도록 물길을 터놓았습니다.

진흙범벅이 된 도구를 씻어놓고 다시 2동으로 가보았습니다. 기계가 충전되어 있었습니다.

“스님, 울력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만 하시면 어떨까요?”

“다만 10분이라도 더 하는 게 좋죠.”

고춧잎 하나하나, 고추 하나하나를 다 씻어내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고추가 과연 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해보는 데 까지 해봅시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가 다 되어 농사일을 마쳤습니다.

저절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한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지만 스님의 하루에 다른 점이 있다면 괴로움에 빠지는 시간 없이 묵묵히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간다는 점입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하고, 오전에는 콘텐츠 담당자들과 화상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공동체 법사단과 화상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2

0/200

최은영

전쟁의 위험이 없는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통일을 이룸으로써 용성조사님과 많은 선각자들의 꿈을 완성해야 합니다. 잘 새기겠습니다.

2021-07-12 07:11:03

김민정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면서 새로운 백년을 만들어갑니다

2021-06-23 13:47:28

굴뚝연기

이라면,이제는 우리가 나서서 더 늦기전에 용성조사님의 행적을 알리는 작업을 행동으로 옮겨야하지 않을까 늘 생각합니다^^용성스님이 너무나 자랑스럽고,그렇게 올곶은 용성스님의 불교 법맥을 이어받으신,법륜스님과 정토회가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저역시,몸약한 아들 부처님전 빌고비시며 불교와 인연되신 어머니 영향이,결국 정토회를 알게된 연으로 이어진것같음을느낍니다~

2021-06-23 08:28:53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