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이런 마음으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준비해도 될까

사람을 겉모습 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좋지 못한 습관이기는 하지만, 강효미 님의 사진을 보면서 동화작가라는 직업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마치 바라지를 떠나는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듯했고, 경험과 깨달음도 덤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이해하기 쉽지만, 감동이 꽉 들어차 있는 동화를 읽고 나니, 바라지장은 깨달음의 장의 또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용기내어 한 번 다녀와 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깨달음의 장’ 이후 8년 만에 다시 찾은 문경

8년 만의 문경행이었습니다. 2015년 제1426차 ‘깨달음의 장’을 수료한 이후 저는 정토회 활동을 한 적이 없고, 문경을 떠올린 적조차 없었습니다. 25세 때 등단해 16년간 동화작가로 살아온 저는 어쩌면 작가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그렇게 큰돈을 번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인기를 얻은 것도 아니지만 온전히 글만 써서 먹고사는 일에 성공했기에 자부심이 컸습니다.

하지만 제가 쓰는 밝고 유쾌한 동화와 달리 제 이면에는 늘 지옥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켜켜이 쌓인 부모님과의 갈등, 오래 만나온 남자친구와의 계속되는 싸움, 게다가 저는 알코올중독에 심각한 우울증 환자이기도 했습니다. 남자친구의 권유로 병원 치료를 받으며 깨달음의 장을 수료했고, 법륜스님의 책과 즉문즉설을 통해 마음의 평온을 얻고자 수년간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0년 간의 연애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난 후 저는 다시 무너져 내렸습니다.

강효미 님
▲ 강효미 님

그때 문득 문경수련원이 떠올랐습니다. 정토회 홈페이지에 접속하니 깨달음의 장 수련생들을 위해 공양을 준비하는 ‘바라지장’ 신청자를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든 서울만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신청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문경에 돌아왔을 때 잊은 줄 알았던 깨달음의 장 수련 때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습니다. 공양간에 들어서니 절로 어깨가 펴지면서 행동 하나하나에 깨어 있게 되었고, 입에선 ‘네, 알겠습니다!’라는 명심문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싫거나 귀찮은 마음 없이 몸도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까맣게 잊은 줄 알았는데, 그때 얻었던 깨달음이 몸에 배어있었구나!’하는 생각에 웃겼습니다.

각자가 모여 온전한 하나가 완성되는 신기한 경험

어두운 표정의 제게 송지연 팀장님이 맡긴 소임은 재료 손질이었습니다. ‘이렇게 지치고 누더기인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러 온 분들의 식사를 준비해도 되는 걸까, 이런 마음으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만들면 나쁜 기운이 담기는 건 아닐까?’ 무겁고 심란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애호박을 씻고, 버섯을 썰고, 나물을 다듬으며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손끝에만 집중하며 재료들을 소중히 다루고 손질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몇 주간 저를 괴롭히던 고통을 잠시 까맣게 잊었다는 사실을.

‘아, 이런 거였구나! 고통이란 것이 자각하고 멈출 수 있는 것이구나, 그저 지난 일을 내가 머릿속에서 계속 되살리고 있었구나!’

저는 그저 재료를 손질하고 다듬었을 뿐인데, 어느새 공양간에 구수한 국 냄새가 퍼지고, 밥 냄새가 퍼지고, 곱고 정갈한 반찬들이 뚝딱뚝딱 만들어졌습니다.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각자의 작은 소임들이 모여 온전한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잘나서 동화책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창의력과 노력만으로 뚝딱 책이 만들어져 서점에 놓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고,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나는 착하고 남들에게 정말 잘하는데, 부모님과 남자친구가 저를 힘들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잘난 척하며 고개 빳빳이 들고 살던 제가, 음식의 주재료가 아니라 부재료인 깨를 빻고, 고추를 썰면서 참으로 편안했습니다. 누군가 버섯을 다듬지 않으면 버섯 조림은 만들어지지 않고, 누군가 당근을 채로 썰지 않으면 잡채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바라지장(뒷줄 왼쪽 첫 번째가 강효미 님)
▲ 바라지장(뒷줄 왼쪽 첫 번째가 강효미 님)

하루의 소임을 마치고, 저녁에는 바라지 도반들과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 고통이 가장 큰 줄 알았는데, 삶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은 무게라는 것을 도반님들과의 나누기를 통해 또 한 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은 원심 법우님이 늘 함께 해주셨는데, 어찌나 많이 웃었는지 자려고 누우면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4일이 지나고, 마지막 날 아침 예불을 드릴 때였습니다. 문득 삼귀의의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옴을 알아…’라는 구절이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희한하게도 늘 ‘나로부터 나아가…’라는 부분에만 집중해 왔습니다. 나아가면 반드시 돌아오는 것을, 내가 뿌린 모든 씨앗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임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어리석고 못돼서 저지른 잘못들,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저절로 참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다 옳다는 고집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부모님과 남자친구에게도 참회했습니다.

울며 갔다가 웃으며 떠나오다

문경으로 향하던 버스에서는 눈물을 꾹 삼켰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저는 웃고 있었습니다. 바라지장의 감동이 그대로 내내 마음을 짜릿하게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보쌈과 갖은 쌈을 준비해 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기 좋아하는 딸내미가 절에서 풀만 먹었을까봐 보쌈을 준비한 엄마가 웃겼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서로 외면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늘 저를 향해 있는 엄마를 보지 못했던 겁니다. 난생처음 엄마에게 편지를 썼고 어설프나마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제 불안과 결핍의 시작이었던 엄마. 엄마와 화해하고 나니 불안 때문에 늘 남자친구에게 의존하고 집착했던 마음이 비로소 보였습니다.

그 후, 바라지장을 함께한 공양간 도반님들과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매일 아침 마음 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문경이 그리워져 2주 후의 바라지장을 다시 신청했습니다. 이번에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 없는지 알았으니 짐도 단출할 것이고, 무엇보다 마음의 짐을 덜어낸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어디든 열심히 쓰여야지 다짐합니다.

다음번 문경에서는 또 어떤 즐거움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그날을 기다려봅니다.

문경수련원에서 도반들과(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강효미 님)
▲ 문경수련원에서 도반들과(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강효미 님)


이 글은 <월간정토> 2023년 8월호에 수록된 서울제주지부 강효미 님의 바라지장 소감문입니다.

글_강효미(서울제주지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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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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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명

역시 작가셔서 글이 더 잘 읽히네요
4월에 문경을 수 년 만에 가는데
어떤 경험이 절 기다릴지 궁금해지네요 😊

2024-03-12 15:33:43

온전한 사람



타고난 죄성을 다스리는 것도
부처고

타고난 마성을 다스리는 것도
부처니

내 마음 속에 부처가 있다는 사람도
조심해야 해.

그 부처가 언제 떠날지 어떻게 알아.

114세 할머니의 장수비결,

독같은 인간들을 멀리하세요.


2024-03-12 00:12:18

일반회원

불편한 집착에 대해 기도하고 절 할때 처음에는 더 힘들어 지다..나중에는 이해하면서 마음이 편해진고 눈물이 났던 일들이 많았는데, 이 수행담을 보고 제가 다시 비추어져 울컥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03-11 17: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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