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충주지회
보리수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기까지

현재 충주지회 지원담당 소임을 맡고 있는 박숙희 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사회활동 담당, 제천법당 총무,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진행자 등 다양하고 굵직한 봉사를 꾸준히 해온 박숙희 님. 여러 어려움에도 소임을 놓지 않고 꾸준히 활동해 온 박숙희 님은 2018년 5월 15일 <정토행자의 하루> ‘콩 씨앗을 심을 것인가, 보리수 씨앗을 심을 것인가?’의 주인공이었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 박숙희 님의 보리수 씨앗이 어떻게 자라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게 되었는지 수행담을 들어봅니다.

정토회와 함께 한 지난 10년

정토회에는 50살이 되던 2014년에 왔습니다. 이번에 인터뷰를 하면서 제 수행을 조금 돌아봅니다. 소임을 하면서 제 업식대로 끌고 갔던 데 대해 참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동안 도반들에게 ‘같이 활동해야지, 수행해야지’라고 말하면서 앞장서고 있지만, 사실 나 자신은 얼마나 잘하고 있나 돌아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정토회에서 활동한 50대가 제 인생의 황금기였습니다. 저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고 가까운 도반들에게 마음을 터놓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에서도 법당에서도 날카로웠습니다. 일마다 잘못된 게 눈에 들어오고, 회의에 들어가서는 회의록 작성 안 한다고 성질도 부렸습니다. 요즘엔 도반들이 제 얼굴이 활짝 폈다고 뭐 좋은 일 있냐고 묻습니다. 사실 달라진 것은 없는데 제 마음이 편하다 보니 주변에서 저를 그렇게 봐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젊을 때부터 절에 가는 게 좋았습니다. 어머니가 비구니 스님이 있는 절에서 공양주를 꽤 오래 했습니다. 저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잘 모르면서 어머니가 다니던 절에서 자연스럽게 법당 청소를 도왔습니다. 2012년 제천 여성회관에서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 강연을 들었습니다. 강연장에서 들은 충격적인 답변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 무렵 교회 집사인 친구가 ‘나는 법륜스님 영상을 밤새도록 틀어 놓고 잔다, 너는 절에 다니니까 꼭 들어봐라.’라고 해서 듣다가 제천법당을 찾아갔습니다. 수행법회에 참석하며 8-4차 천일결사에 입재했고, 2015년 3월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초파일 마야부인 봉사 중 박충렬 님과 함께(오른쪽 박숙희 님)
▲ 초파일 마야부인 봉사 중 박충렬 님과 함께(오른쪽 박숙희 님)

고단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어머니의 삶

저는 살면서 남편이 속 썩이거나 자식이 속 썩이는 일 없이 무탈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일찍 돌아가셔서 제 안에 뭔가 허전하고 성에 안 차는 것이 있었습니다. 막연히 뭔가 채워지지 않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는 데 걱정은 없는데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버지는 종갓집 종손에 8남매의 장남으로 결혼을 일찍 해 저희 7남매를 낳았습니다. 귀하게 자라다 보니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했고, 그러던 중 강원도 탄광촌에서 일하다 제가 열 살 때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막내가 태어났고 이후 가족 모두 아버지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가면서 어머니의 시집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드센 할머니 밑에서 삶이 고단했던 어머니는 일곱 형제 중 딱 중간에 있는 제게 하소연을 하시곤 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도망가도 저는 밭에 나가 엄마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제게 더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착한 사람이었고, 고단한 시집살이에도 불구하고 밝고 지혜롭고 명랑하게 살았습니다. 저 역시 어머니의 그런 밝고 명랑한 성격을 닮았습니다.

하지만 정토회에서 수행을 하다 보니 어머니에게도 어두운 면이 있었고, 저 역시 그런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어둡고 무거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수행을 하다 보니 삶의 무게가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져 나왔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나옵니다. 어머니는 제가 정토회에 오기 전 2014년 1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49재 회향 후 어머니가 다니던 절의 스님이 권한 《금강경》 사경을 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씻고 청수 올린 후 사경을 하였지만 뭔가 답답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을 때 법륜스님을 좋아하던 기독교 친구가 정토회를 권했고, 이제는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제 발로 정토회를 찾아갔습니다.

출가열반재일(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박숙희님)
▲ 출가열반재일(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박숙희님)

코로나 19와 함께 한 총무 소임

2017년 사회활동 담당을 맡으면서 정토회 소임을 할지 아니면 돈을 벌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남편과 함께 월급쟁이 맞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형편이 좋은 건 아니었습니다. 노후 걱정도 되고, 자식들 시집 장가도 보내야 하고, 당시 제 월급이 300만 원 정도였는데 적은 돈은 아니어서 놓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구글이 뭔지도 몰라 회사 가서도 정토회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회사 가서 정토회 일을 하다 보니 회사 일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6개월 동안 아침마다 정진하면서 고민하다가, 한순간에 직장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직장을 그만둔 후 주간 팀장 소임을 맡았고, 그때부터 일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시예불, 통일기도, 불교 7대 행사 등 많은 행사가 있었고, 또 주간 불교대학 담당도 맡았습니다. 일에 밀리고 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법당에서 스님 법문 듣는 게 너무 좋아, 나는 그렇게 살 거야’라는 생각에 딱 정토회 소임을 선택했고,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 같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2007년에 개원한 제천법당은 오래되고 좁은 터라, 2019년 무렵에는 법당에서 행사를 다 치르기가 어려웠습니다. 도반들도 확장 불사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해 9차 년도 총무를 중심으로 도반들의 동의 하에 법당 확장 불사 발대식을 7월에 하였고, 제가 불사 담당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2020년 제가 총무 소임을 맡은 후에는 코로나19 발생과 온라인 정토회 전환으로 오히려 법당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법당 대의원들 이하 지원담당, 모둠장 외 여러 도반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법당 정리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분별심 많고 감사할 줄 모르던 제가 거의 처음으로 도반이 수행의 전부라는 감사의 마음을 새록새록 새겼던 시간이었습니다. 만일 코로나19가 6개월 정도 늦게 발생해 큰 법당으로 이사를 갔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어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그랬다면 커다란 법당에 회원들은 오지 않고 월세는 꼬박꼬박 나가고...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하고 수도 없이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충주지회 도반들과 함께(가운데 박숙희 님)
▲ 충주지회 도반들과 함께(가운데 박숙희 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2020년 어느날 몸이 좋지 않아 감기려니 생각하고 병원에 갔다가 심전도 검사를 했습니다. 온라인 정토회의 새로운 시스템 적응으로 바쁜 가운데 총무 소임과 경전대학 학사 담당 소임을 맡아 하던 중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대학병원 입원을 권유했고, 그때 제가 심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입원실에서도 제 몸 생각할 겨를 없이 경전대 진행자들과 온라인으로 회의를 하며 학사 일정에 집중했습니다. 제 병을 잘 아는 간호사 도반이 제게 쉬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경전대 입학식을 3일 남겨 둔 상태라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약 잘 먹으면 된다는 의사의 말만 믿었고, 별것 아닌데 유난 떤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임감 없는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병원에 두세 번 실려 갔고, 2021년 1월 응급실에 도착해서는 심정지가 왔습니다. 그제야 저도 '심각한 병이구나' 하고 놀랐습니다. 사위가 당장 정토회 활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찾아가 난리를 치겠다고 말했습니다. 학사 졸업식이 얼마 안 남았기에 저는 소임을 그만두는 대신 휴가를 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죽으면 그때 안 하지 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소임에 집착하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때는 정말 한순간에 훅 갈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요즘은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수행하면서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또 스님이 말씀하신 ‘살아 있어서 감사하구나’ 하는 게 저절로 느껴집니다. 지금은 의학 발전 덕분에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 약을 타 먹으면서 문제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친척 형님 딸 손주와 함께(왼쪽 박숙희 님)
▲ 친척 형님 딸 손주와 함께(왼쪽 박숙희 님)

내가 심은 보리수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어

2018년 1월 인도성지순례를 다녀 온 후 한껏 들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스님의 책을 읽다가 ‘어떤 씨앗을 심을 것인가? 콩 씨앗은 일 년이면 쓰러져 없어지지만, 보리수 씨앗을 심으면 커다란 나무가 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나도 콩 씨앗이 아니라 보리수 씨앗을 심어야겠다, 수행도 활동도 업식도 바꿔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토회 활동을 놓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행은 오로지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꾸준한 마음으로 하는 거라 생각했고, 아직도 그 생각에서 크게 바뀐 건 없습니다. 매일 아침 수행으로 저를 돌아보면서 제 업식이 파도 파도 또 나온다는 걸 알았습니다. 수행은 하루만 하고 안 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임이 새삼 느낍니다.

빠지지 않고 수행정진하는 것과 주어지는 소임을 인연 따라 해나가는 것, 이 두 가지를 새깁니다. 소임을 해야지 자신을 돌아보면서 알아차림이 있는 듯합니다. 도반들을 생각하면 항상 감사한 마음이 올라오고, 온라인으로 도반들을 만나면 반가워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나중에 눈 감을 때 베사카 부인처럼 ‘이제 내 할 일 다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다 가고 싶습니다. 이 시대에 태어나 법륜스님을 만났으니 정말 스님 장삼 자락이라도 잡고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입니다.

초파일 마야 부인 봉사(오른쪽 박숙희 님)
▲ 초파일 마야 부인 봉사(오른쪽 박숙희 님)


인터뷰 내내 밝고 온화한 모습으로 수행담을 들려준 박숙희 님은 처음에는 특별한 이야기 거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잔잔한 수행담을 들으며 때론 같이 웃고 때론 함께 눈물 흘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행의 중요성, 소임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며, 저도 박숙희 님처럼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글_김용태 희망리포터(인천경기서부지부 광명지회)
편집_이혜수(서울제주지부 성동지회)

전체댓글 38

0/200

이남수

더욱 열심히 수행하겠습니다

2023-09-09 18:01:37

무구의

고맙습니다.

2023-08-25 11:11:32

보현

고맙습니다

2023-08-25 08: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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