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제천덕산법당
산골마을로 귀농해서 법을 전하다!

충주에 이웃해 있는 덕산법당. 이곳은 면 단위 소재에 있는 유일한 정토회 법당입니다. 이곳에서 부총무 소임을 맡은 김승진 님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서울에서 기자 생활하며 서초법당에서 활동하다가, 제천시 덕산면으로 귀농하여 법당을 세우고, 아내 도반과 함께 좌충우돌 법당을 이끌어가는 이야기 소개합니다.

아내 도반과 함께
▲ 아내 도반과 함께

인생 자체가 개근인 마냥 착한 사람

어려서부터 유난히 순진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왔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찬사를 들었고, 학교에서도 선생님은 반 친구들 앞에서 나를 노력하는 학생의 모델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살다 보니 어느덧 행동에 일정한 패턴이 생겼습니다. 말 잘 듣는 모범생 같은 특성이 내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초•중•고에서부터 군대 3년, 직장 30년을 하면서 하루도 결석, 결근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인생 자체가 개근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솔직히 성실 하나는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합니다. 사람 관계에서는 누가 뭐라 해도 얼굴만 붉힐 뿐 화를 별로 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마냥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화에 대해서 알게 되다

그렇다고 속까지 착한 것은 아니었고, 어쩌면 위선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 안은 늘 화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절제하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전제하고 시비하니 속에서 늘 화가 치성했습니다. 내가 화난 것은 나만큼 못하는 다른 사람 탓이라고 자위하고 화를 삭이고 살아온 것일 뿐이었습니다. 평생 화를 삭이고 살아온 어머니처럼. 첫 직장에 출근하는 날 아침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장육부가 세 번 썩어 문드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참으라”고. 나는 그러리라 다짐했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쌓여온 내 안의 화는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대면접촉이 잦아지는 순간부터 서서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그로 인한 괴로움도 커져갔습니다. 약간의 갈등이라도 있으면 화를 내지 않았을 뿐 얼굴에 ‘나 화 났오’라고 쓰여 있듯이 화가 얼굴 밖으로 삐져나오곤 했습니다. 한번 삐지면 며칠이 지나도 풀릴 줄 몰랐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어도 스스로 푸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시간만 지나면 불편한 마음이 저절로 풀어지려니 생각했지만 풀어질 줄 몰랐습니다. 상대가 풀어주지 않으면 부지하세월이었고, 이렇게 나는 상대를 원망하면서 지쳐갔습니다. 그럴수록 나는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쯤 되고 보면 자신을 가장 옥죈 사람은 타인이 아닌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이렇게 내 안의 에너지를 너무 쓸데없이 까먹었습니다.
그런 내가 화의 실체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깨달음의 장>이었습니다. 화를 낸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착하고 옳다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혔었구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 나는 그때까지 화를 낸 것과 화가 난 상태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겉으로 화를 내지 않는 것을 화가 나지 않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일깨워 준 아내

담마로서의 불교를 만난 건 아내를 통해서였습니다. 학생 때 절에서 같이 공부하는 후배였던 아내는 정토불교대학 졸업장과 <월간정토>를 결혼혼수품(?)으로 가져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월간정토>를 첫 장 첫째 줄부터 마지막 장 마지막 줄까지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다 읽으면서 정토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철학을 먼발치에서 흠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앎으로서의 불교 공부가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종교의식을 시비하다 내가 크게 삐진 것입니다. 이 모습이 얼마나 찌질했는지 아내가 한 마디 쏘아붙였습니다. “불자가 왜 그래!” 이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쇠망치로 머리를 한 방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성실한 불자, 진실한 불자라고 자부했던 내가 이름만 불자였지 생활 속에서는 전혀 불자다운 구석이 없었다는 자각이 일어나면서 그간의 불자로서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재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불교와 정토회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였고, <월간정토>도 지식이 아닌 수행으로 이끄는 지침서로 다가왔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인생의 귀중한 전환점이 되었으니, 참으로 고맙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어리석은 나를 각성시켜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천일결사 입재식 후 도반들과 함께(맨오른쪽이 김승진 님)
▲ 천일결사 입재식 후 도반들과 함께(맨오른쪽이 김승진 님)

귀농을 결심하다

그 뒤, 일요일에 서초법당에 나가보니, 어린이법회가 우선이었습니다.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어린이법회 교사로 참여하고, 나는 학부모들과 같이 수행을 하는 식으로 정토회 활동에 본격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천일결사 입재(5-1차)와 <깨달음의 장>을 마치고 이어서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마쳤습니다. 당시 바쁜 기자 생활의 와중에서도 봉사시간 60시간을 훌쩍 넘기는 동안 익힌 정토회 관련한 여러 활동은 지금도 나의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토회와 함께 한 서울 생활은 나의 40대 생활을 꽃 피웠지만, 안타깝게도 탈장과 갑상선이 발병하여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신문사 업무의 특성상 직급이 올라갈수록 가중되는 스트레스와 과로를 몸이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사직 여부를 결정해야 할 즈음에 열린 입재식에서 법륜스님 말씀을 듣고, 용기를 내어 아내가 연수를 간 사이에 20년을 몸 바쳤던 직장에 덜컥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대책 없는 전격적인 결정에 어이없어하고 황당해했던 아내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무튼 일은 벌어진 것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다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제천시 덕산면 월악산 밑자락에 있는 제천간디학교 근처로 귀농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힘을 얻은 백일출가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하기 전 백일출가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50년 인생을 정리하고 인생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전환기라 여겨서입니다. 100일간은 그야말로 자신과 싸움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등 그전에 진지하게 해보지 않던 화두를 붙들고 많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시간이었습니다. 별 뾰족한 결론이 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소녀’라는 별명만 얻었습니다. 잘 삐져 소심하고 여리다는 게 지난 100일을 지켜본 동료 도반들의 결론이었던 셈입니다. ‘내 업식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그런데도 뭔가 모를 힘이 생긴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귀농해서 법당을 열다

귀농 초기엔 낯선 농촌 생활이 좀 두렵긴 했지만, 그런대로 이른 시일 안에 적응해 지금은 10년 차의 중견 농부가 되었습니다. 귀농하자마자 불교대학과 열린법회를 열었습니다. 열린법회를 회향하면 덕산에 법당을 개설해보라는 유수스님의 당부와 제천법당의 유윤식 총무와 안기숙 전법팀장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불교대학은 제천간디학교 대표교사였던 장희숙 님이, 열린법회는 우리 집에서 맡았습니다. 열린법회는 귀농•귀촌자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어서 의외로 쉽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마을의 누리어울림센터로, 간디문화센터로 옮겨 다니며 법회와 불교대학을 하다 불교대학 졸업생을 4회 배출했습니다. 게다가 경전반 졸업생까지 3명 배출되면서 법당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같은 도반이기도 한 아내는 면 인구가 2,400명밖에 되지 않는 산골동네에서 법당개설은 말도 안 된다고 극구 만류했습니다. 그런데 법사님과 행정처장님, 그리고 참석한 도반들은 1년 해보고 안 되면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해보라는 응원을 보내준 것입니다. 아내는 도반들의 응원에 힘입어 얼떨결에 할 수 없이 반대의견을 접고 불사에 동참했습니다. 그토록 반대한 아내는 모연활동에 눈부신 활약을 펼치면서 불교대학과 열린법회를 한 지 7년만인 2016년 9월 20일 드디어 법당개설이란 숙원을 이루어냈습니다. 사실상의 면 단위 최초로 말입니다. 법당이 개설되자 먼저 도반들이 좋아했습니다. 법회 하느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고 편안하게 수행 정진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지금도 법당 만들기를 정말 잘했다고 입을 모읍니다.

행복한 김승진 님 가족
▲ 행복한 김승진 님 가족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도반인 아내

내가 부총무이긴 하지만 법당의 진짜 살림꾼은 아내입니다. 아내는 회계와 불교대학, 사회활동을 담당하며 동분서주합니다. 정토회의 회의와 교육이 있어 대전과 청주, 충주, 문경으로 갈 때도 아무 소리 없이 도시락을 싸줍니다. 아내의 성원이 없었으면 농사지으며 법당 일을 하기란 요원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내이기에 앞서 선배 도반으로 불러야 할 정도로 아내는 나와 처가 식구들을 정토회로 이끈 고마운 사람입니다. 덕분에 우리부부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나 갈등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잣대로 해결하는데 익숙해져 사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부부의 연을 천생연분이라 표현하지만, 따지고 보면 부처님의 법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모두 대안학교를 나와 지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마음 한 켠에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만하면 잘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법비를 내려주신 법륜스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JTS 거리모금 활동(맨 오른쪽 김승진 님)
▲ JTS 거리모금 활동(맨 오른쪽 김승진 님)

전법의 씨앗을 뿌리며

이제는 나와 가족의 행복을 넘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수요일은 오전 오후로 법회를 열고 화요일은 불교대학을 하고, 이중 수행법회는 참석인원이 비록 미미하지만 혼자라도 반드시 열고 합니다. 혼자이면 어떤가, 법문을 들을 수 있어 행복한데...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동참자가 늘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법당에 나갑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지는 않고, 마을에 <월간정토>와 달력도 돌리고 행사가 있을 때면 포스터를 부착하고 현수막도 내거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7대행사가 되면 떡이나 팥죽도 돌립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뚜렷한 반응은 없지만, 법당에 대한 인지도만큼은 조금씩 늘어가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얼마 전에 달력을 돌리러 인근 철물점에 갔더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어 자연스럽게 정토법당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2,3년 후엔 불교대학에 입학하는 분들이 생깁니다. 우리 법당만의 노하우인데, 어쩌면 소법당이기에 가능한지도 모릅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었습니다. 부총무인 나부터 부족함이 많아 더 많이 뛰어야 합니다. 수행에서나 일에서나 타의 모범이 되는 것, 그것이 지금 시점의 나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덕산법당을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궁극에는 인접한 면 지역에도 전법의 씨앗을 뿌리는 그날을 그려봅니다.

글_김승진 님(청주정토회 덕산법당)
정리_최익란 희망리포터(청주정토회 충주법당)
편집_하은이(대전충청지부)

전체댓글 37

0/200

박순천

읽으면서 킥킥대며 웃다가 두 분이 계신 제천덕산법당에 가보고 싶은 맘이 모락모락~마음이 환해지는 수행담 고맙습니다.

2019-03-22 08:08:59

무지랭이

덕산법당이 잘되기를 기원합니다_()_

2019-03-14 16:57:09

세명화

아름다운 동화 한편을 읽는 감동을 느낍니다ㆍ소녀라는 별명도 너무 아름답습니다ㆍ 적은 규모의 법회를 이끌고 있어서 공감도 많이 되고요

2019-03-12 23: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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