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0.27 결사행자 회의, 사회활동위원회 간담회, 수행법회
“사주팔자,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정말 있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서울 정토회관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서울 공동체 대중과 함께 예불을 한 후 6시 30분에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자마자 오전 7시 20분부터는 결사행자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여했습니다.

정토회 1차 만일결사를 회향하는 10차 천일결사에는 만일결사의 목표 달성 여부가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하는데, 온라인 정토회로 변화한 상황에서 목표를 어떻게 수정할지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 만일결사 회향기념으로 스님이 불교대학 강의를 새롭게 해 보면 어떨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전법활동가 모두가 참여하는 공청회를 한 번 열어봐도 좋을 것 같아요.”

“네, 한 번 논의해 보겠습니다.”

다음 결사행자 회의 날짜를 잡은 후 9시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오전에는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점심에는 평화재단의 원로들인 고문님들을 모시고 식사 접대를 하였습니다.

오후 2시에는 평화재단과 에코붓다, 좋은벗들, JTS에서 일하는 실무자들과 간담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하고 나서 사회활동은 어떻게 전개하는 것이 좋을지, 현재 남북 관계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온라인 시대에 전체 홍보 전략 수립 방안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후 3시에는 북한에서 교육 기관에서 활동하셨던 캐나다 교민을 만나 북한의 상황과 앞으로 개발 지원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에는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420여 명의 저녁반 정토회 회원들이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고, 유튜브로 생방송을 하는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다음 주 주말인 11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두북 수련원에서는 전국 법당에서 철거한 물품들을 전시하고 나비 장터를 열기로 했습니다. 두북 공동체에서 생산한 쌀과 감자도 일부 실험 삼아 바자회 물품으로 내놓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호응도를 봐서 내년에 어떤 농사를 얼마나 지을 건지 참고하려고 해요. 올해까지는 공동체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농사를 지었는데, 내년부터는 일부 생산품을 정토회 회원 여러분들이 구입할 수 있도록 해보려고 합니다. 대신 여러분 중에서 자원봉사 와서 농사짓는 데 협조해주신 분들에게만 농산물을 제공하려고 해요. 아직은 생산량이 적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라도 생산량을 점점 늘려서 나중에는 정토회 회원이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도록 해보려고 지금 실험을 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웃음)

이렇게 나비 장터를 계획을 소개하면서 지난 주말에 벼를 추수했던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본 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정해진 사주팔자에 맞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착잡하다며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질문했습니다.

사주팔자,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정말 있는 건가요?

“저는 다섯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어릴 때부터 ‘부모 복이 없으면 남편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서 그런지, 가정을 갖는 것에 대해 집착과 기대가 굉장히 컸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어찌하다가 결혼 생활을 정리하게 되고, 정토회를 만났습니다. 수행을 하다 보니까 ‘내가 지금까지 정해진 사주팔자에 다 맞춰서 살아온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에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면서 지내다가, 결국은 그 모든 것에 맞춰졌다는 생각이 드니까, 마음이 착잡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움이 많이 생깁니다. 어떻게 해야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선 질문자가 한 말을 갖고 얘기해 볼게요. ‘과연 운명이 정해져 있느냐, 없느냐’ 이 문제는 놔두고, 질문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게 됐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 말을 어릴 때 들었는데 결과적으로 살아보니까 ‘나에게 어쩔 수 없이 정해진 운명이 있구나’ 이렇게 알게 됐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질문자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요.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있으면 오히려 걱정할 게 없잖아요. 정해져 있는데 왜 걱정을 해요? 어차피 다 정해진 대로 갈 테니 그냥 대충 살면 되잖아요. 바득바득 살아도 정해진 대로 갈 테고, 느긋하게 살아도 정해진 대로 갈 테니 걱정할 게 없잖아요. 정말로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에 두려움이 싹 없어져야 하잖아요.

‘정해져 있으니까 그냥 살면 되겠구나. 내가 애쓰지 않아도 정해진 대로 가겠구나.’

오히려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운명이 정해져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질문자가 한 말에 지금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는 겁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운명이 과연 정해져 있느냐, 정해져 있지 않느냐’ 이런 질문은 하등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정해져 있다면 정해져 있는 대로 갈 테니 괴로울 일이 없고, 정해져 있지 않다면 내가 하는 만큼 만들어가는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거나 안 정해져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욕심을 내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리석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사람이 환생하거나 환생하지 않는 것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환생하느냐, 안 하느냐?’ 이런 질문은 하등 중요하지 않아요. 환생한다면 모든 사람이 다 환생할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그런데 환생한다고 해놓고는 또 개중 몇 명만 환생한다고 하니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겁니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환생한다고 하면 ‘지금 생이 어떻든 다음에 또 태어나니까 별 걱정 없겠네’ 이렇게 생각하면 되고, 환생을 안 한다고 하면 ‘환생을 안 하니까 지금 생이 어떻든 별 걱정 없겠네’ 이렇게 생각하면 되잖아요.

‘천당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이런 질문도 마찬가지예요. 천당과 지옥이 정말로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나쁜 일을 하면 지옥 가고 좋은 일을 하면 천당 간다고 하면, 그냥 좋은 일을 하면 되잖아요. 아무런 걱정할 게 없습니다. 천당 가고 싶으면 좋은 일을 하면 되고, 나쁜 일을 했으면 지옥 갈 각오를 하면 돼요.

그런데도 왜 고민이 될까요? 천당 가느냐, 지옥 가느냐 때문에 인간의 고뇌가 생기는 게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해놓고 지옥을 안 가겠다고 버티고, 천당 갈 짓을 안 해놓고 천당에 가고 싶어 하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욕심입니다. 돈을 빌려놓고는 안 갚으려 하고, 저축도 안 해놓고는 목돈을 받으려고 하니까 괴로운 겁니다. 돈을 빌리거나 저축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어요. 빌렸으면 갚으면 되지 왜 그게 괴로울 일이며, 저축을 안 했으면 목돈 탈 생각을 안 하면 되지 왜 그게 괴로울 일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저축하면 복을 받고, 빚을 지면 재앙을 받는 것처럼 생각해요. 사실 그것과 괴로움은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에요.

마찬가지로 운명이 정해져 있든지 말든지, 천당과 지옥이 있든지 없든지, 다시 태어나든지 말든지, 그런 건 괴로움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꾸 그런 얘기를 하면 그냥 웃으셨어요.

‘사람은 환생을 합니까, 안 합니까?’
‘천당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부처님은 그저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네가 괴로워하는 문제와 그 질문은 아무 관계가 없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제가 이런 뜻으로 법문을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
‘스님은 내생을 부정한다’
‘스님은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건 부정하느냐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질문 자체가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왜 그럴까요?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간다면 나쁜 짓을 안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뭐가 걱정이에요? 어떻게 하면 천당에 가냐고 물었더니 어려운 사람을 돕고 좋은 일을 하면 천당에 간데요. 그러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좋은 일을 하면 되잖아요.

내가 교회를 안 다닌다 해도 하등 걱정할 게 없어요. 성경을 읽어보면 어떤 사람이 천당에 간다고 되어 있습니까? 최후의 심판 날에 주께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일으켜 세워서 양 떼와 염소 떼를 나누듯이 나누고, 한쪽에 앉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이 너희 것이니라.’

‘왜 그렇습니까?’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됐을 때에 영접하였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면회를 와주었다.’

‘저희가 언제 그리 하였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처럼 성경을 읽어보면, 내가 교회에 헌금을 얼마나 냈느냐, 교회에 얼마나 자주 다녔느냐, 성전을 얼마나 크게 지었느냐, 이런 게 천국에 가는 기준이란 내용이 한 줄도 없어요. 천국에 가는 기준은 딱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에게 베풀었느냐 이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가 누구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줬느냐? 배고픈 자에게 밥을 줬느냐? 헐벗은 자에게 옷을 줬느냐? 나그네를 잘 대접했느냐? ‘나그네’는 요즘 말로 하면 난민이라고 할 수 있어요. 환자를 보살폈느냐? 감옥에 갇힌 자를 잘 면회했느냐? ‘감옥에 갇힌 자’는 요즘 말로 하면 여러 억울한 사연으로 탄압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런 행동을 했으면 천당에 가고, 이런 행동을 안 했으면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교회를 안 다니더라도 걱정될 게 하나도 없잖아요. 천당 가고 싶으면 이렇게 하면 되니까요. 조금이라도 어려운 사람을 돕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도록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교회에 가고 안 가고는 걱정거리가 될 수 없고, 천당이 있느냐 지옥이 있느냐 이런 것도 하등 걱정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늘 천당과 지옥이 있느냐, 내생이 있느냐, 윤회를 하느냐, 이런 걸 두고 질문을 합니다. 돈을 빌려놓고는 안 갚겠다는 심보, 지옥 갈 짓을 해놓고는 천당 가고 싶어 하는 욕망, 이런 것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질문자도 ‘정해진 운명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 때문에 지금 괴로운 게 아니에요. 정해진 운명이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는 생년월일시가 운명을 관장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이 명부를 갖고 운명을 관장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생에 지은 업이 운명을 관장한다고 말하듯이 세상에서는 운명론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것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으셨어요.

전생이 정한 것이든, 하느님이 정한 것이든, 사주팔자가 정한 것이든, 그 이유에 관계없이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사람이 노력할 필요가 없잖아요. 정해져 있는 대로 가면 되니까요. 복을 지을 것도 없고, 죄를 안 지을 것도 없습니다. 나쁜 짓 하느니 좋은 짓 하느니 따질 필요도 없고요. 내가 남을 때려놓고도 이렇게 말하면 되잖아요.

‘내가 널 때리고 싶어서 때렸겠니? 네가 맞을 짓을 했던 전생의 업보가 있고, 나도 운명이 정해져 있어서 때렸을 뿐이다.’

하느님이 정한 것이라든지, 사주팔자에 정해져 있다든지, 전생의 결과라든지, 이런 얘기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얘기들은 다 이렇게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가 아픈 사람을 보고 돕는 마음을 내느냐, 외면할 거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질문자는 어릴 때 부모가 이혼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했어요.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부모가 이혼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보다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이혼할 확률이 더 높을까요, 낮을까요?”

“더 높을 것 같아요.”

“네, 더 높습니다. 그 이유는 운명이 정해져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부모가 헤어지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무의식 세계에 ‘헤어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같이 살다 보면 갈등이나 어려움이 있을 수가 있죠. 그런데 부모가 헤어지지 않은 집에서 자란 아이는 갈등이나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헤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헤어질 생각을 덜 하는 편입니다. 결혼 생활이 힘들지 않다는 뜻이 아니에요. 힘들기는 하지만 부모가 헤어지는 모습을 본 사람에 비해서는 헤어질 생각을 덜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이혼하지 않은 경우 자식도 무조건 이혼을 안 할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이혼하면 자식도 무조건 이혼할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부모가 이혼하는 집의 자녀는 훗날 이혼할 확률이 부모가 이혼을 안 한 집의 자녀에 비해 조금 높다고 말할 수는 있어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늘 어려움에 부닥치게 마련이잖아요. 그럴 때 어린 시절에 본 부모의 모습이 지금 어떤 결정을 하는 데에 영향을 준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이혼한 집에서 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릴 때의 경험을 두고 반드시 이혼한다거나 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확률이 높다거나 낮다고 말할 수 있겠죠.

부부가 갈등하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결혼하면 갈등할 확률이 높아요. 부부가 싸우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봤기 때문에 그 모습을 싫어하더라도 무의식 세계에서는 ‘싸우는구나’ 하는 생각이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뒤에 마음에 안 맞는 일이 있으면 싸우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안 싸우는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부부는 싸우는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알고 자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한 뒤에 마음에 안 맞는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자제하게 돼요.

그렇다고 해서 부부가 안 싸우는 집에서 자란 아이는 절대 안 싸운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굳이 비교한다면 부부가 싸우는 집의 아이는 훗날 싸울 가능성이 좀 더 높고, 안 싸우는 집의 아이는 훗날 안 싸울 가능성이 좀 더 높을 뿐이에요.

우선 질문자는 자란 환경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노력을 안 하면 영향받은 대로 살아갈 확률이 높아요. 그러나 오히려 상황을 직시하고 마음을 돌이키면 방향을 돌릴 수 있습니다.

‘아, 부모님이 그렇게 살았다 해도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는 그걸 극복하리라.’

이렇게 관점을 잡아버리면 오히려 싸우는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안 싸우는 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확률은 낮다고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이런 것을 ‘변화’라고 합니다.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서 교훈으로 삼는 게 수행의 길이에요. 형성된 습관대로 흘러가버리는 게 범부 중생의 길입니다.

질문자는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운명은 반드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문자는 변화를 위해 아무런 노력을 안 했기 때문에 주위의 영향을 그대로 받는 쪽으로 흘러왔다고 볼 수 있어요. 여기서 노력을 안 했다는 것은 뭔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치를 몰라 어리석게 살았다는 뜻이에요. 지금이라도 법의 이치를 알고 ‘이게 나한테 괴로움을 주는구나’ 하고 돌이키면 이런 환경이 오히려 변화를 가져오는 데 유리할 수도 있어요.

수행은 변화입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화를 내는 게 일반적이죠. 형성된 습관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통해서 수행을 해나가면 자기 마음에 안 들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 쪽으로 갈 수 있어요. 쉽지는 않지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줍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든 관계없이 내가 원하는 쪽으로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에요. 물질적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화내고 짜증내고 살았지만 화내고 짜증 내지 않는 쪽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까지 슬퍼하며 살았지만 슬퍼하지 않는 쪽으로 갈 수 있고, 지금까지 근심 걱정하고 살았지만 근심 걱정 안 하는 쪽으로 갈 수 있어요. 지금까지 과거 일을 상처로 안고 살았더라도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상처를 치유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의 길이에요.”

“예, 감사합니다.”

질문자와 스님의 대화가 끝나고 스님은 마이크를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방청객에게 넘겼습니다.

“자, 이 문제에 대해서 추가 질문이나 조언이나 자기 경험을 얘기하실 분 있으면 하세요.”

방청객은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스님도 한 마디씩 코멘트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가끔 힘들 때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돈은 아니지만 소액이라도 후원을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더 큰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식이 들고, 보람도 생기고, 내 삶도 좀 더 열심히 살게 되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네. 어려울 때 오히려 베풀어서 복을 짓는 마음을 낸다는 얘기 같네요. 아주 좋은 얘기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 엄청 많이 싸우셨어요. 저는 부모님이 싸우시는 모습을 보면서 싸우는 이유를 곰곰이 살펴봤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싫어하는 점은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하고 어렸을 때부터 알게 됐어요. 그 결과 오히려 제가 결혼생활을 할 때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싸우는 부모님 덕분에 배우자와 싸우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죠.”

“네, 운명을 거슬러간 여인입니다.” (웃음)

방청객들이 조금씩 대화에 참여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아 나가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불법을 만나 보시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세 대출을 받게 되어 억대의 빚이 생기니 기부하는 마음에 망설임이 듭니다. 보시하는 마음가짐이 궁금합니다.
  • 결혼해서 화목하고 건강한 가정을 꿈꾸지만, 한편으론 지금 나의 가족인 부모님과도 건강하게 소통하지 못하는데 과연 가능할까 혼란스러워요.
  • 왜 평범한 사람들보다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부정부패를 많이 저지르는 걸까요? 국가의 녹을 받는 사람들까지 본분을 잊고 재물을 탐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즉문즉설을 마치고 나서 마지막으로 스님이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사주팔자가 정말로 있는 것인지 질문했던 분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항상 남 탓을 하고 미련하고 게을렀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변화를 위해 노력하기보다 욕심을 너무 많이 냈던 것 같습니다. 스님과 대화하고 나서 저의 이런 상태를 잘 알게 되어 좋습니다. 매일매일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면서 수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홍서원으로 수행법회 생방송을 모두 마쳤습니다. 밤 9시가 넘었습니다. 스님은 곧이어 서울 정토회관을 찾아온 손님과 밤늦게까지 미팅을 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가진 후 BTN과 인터뷰를 하고, 오후에는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하여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4

0/200

박용삼

감사합니다

2021-11-07 20:04:00

ㅎㅎ

감사합니다 운명을 거슬러 가겠습니다

2021-11-06 12:12:12

조정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1-11-05 18: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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