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0.28. 북한 전문가 모임, 언론 인터뷰,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
“법에 의지하라고 하고, 법을 버리라고 하고, 헷갈립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서울에서의 모임 일정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 서울 공동체 대중과 오분향 예불문을 함께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예불과 기도를 마친 후 스님은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해 북한 전문가들과 함께 조찬 모임을 했습니다. 최근 남한 정부가 종전 선언 추진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가운데 남북 관계의 동향, 미국과 중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할지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조찬 모임을 마친 후에는 서울 정토회관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12시에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오늘로서 3일 동안의 서울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차 안에서 스님은 몸이 아파서 무균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는 행자님에게 전화를 걸어 격려를 했습니다.

“행자님, 치료받는 게 힘들지는 않아요?”

“네, 치료는 잘 받고 있습니다.”

“내가 헌혈이라도 해서 치료에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병원에 알아봤더니 65세 이상은 같은 혈액형이라고 해도 헌혈을 할 수 없다고 하네요.”

“괜찮습니다. 많은 분들이 헌혈을 해주셔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래요. 힘을 내서 치료를 잘 받으세요.”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해가 저물었습니다. 오후 5시 30분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해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23일 정토경전대학 특강에서 소개하지 못한 즉문즉설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법에 의지하라고 하고, 법을 버리라고 하고, 헷갈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처를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의지처로 삼아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 대해 공부해 보니까 아상을 포함해서 모든 상을 버리라고 하고, 법을 뗏목에 비유해서 강을 다 건너면 뗏목도 버리라고 나옵니다. 아상을 버리면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나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는 건가요? 법에 의지하라고 하면서 법 또한 버리라고 하니 모순이지 않나요? 어떨 때 아상을 버리고, 어떨 때 자신에 의지해야 하는지, 어떨 때 법에 의지하고, 어떨 때 법을 버려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논리를 따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는데 스님이 ‘동쪽으로 가라’ 했어요. 옆에서 이걸 본 사람이 ‘동쪽으로 가면 서울에 가는구나’ 하고 이해했는데, 다음 사람이 또 서울 가는 길을 물었어요. 그래서 ‘동쪽이야’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스님이 ‘서쪽으로 가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아, 서울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음 사람이 또 길을 물었습니다. ‘이번엔 두 길 중에 어느 길일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스님이 ‘북쪽으로 가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불교는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왜 이렇게 길이 많냐’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질문자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도 헷갈릴 것이 없어요. 첫 번째는 인천 사람이 물었으니까 대답이 동쪽입니다. 두 번째는 강릉 사람이 물었으니까 대답이 서쪽입니다. 세 번째는 수원 사람이 물었으니까 대답이 북쪽입니다. 현실에서는 하나도 헷갈릴 것이 없는데, 머릿속에서 논리를 만들면 헷갈릴 수밖에 없어요.

그것처럼 ‘자등명 법등명’도 하나도 헷갈릴 것이 없어요. ‘자등명’과 ‘법등명’은 전혀 다른 뜻이에요. 자등명(自燈明)은 남한테 의지하지 말고 자신에게 의지하라, 즉 주체를 분명히 하라는 뜻이고, 법등명(法燈明)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남한테 의지하지 말고 자신에게 의지하라

우리는 늘 남한테 의지하고 남을 얘기합니다. ‘남이 어떻고’,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내가 어떻고’ 이런 소리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그런 것은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나는 어떻게 할 거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 나에게 깨어있으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면, 바람피운 것은 남편 얘기이고,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길은 두 가지예요. 첫째, ‘안녕히 계세요. 그동안 당신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 만나서도 잘 사세요. 저는 제 인생을 살겠습니다’ 하고 이혼을 하는 겁니다. 둘째, ‘약간 흠집은 났지만 그래도 중고 시장에 내놓으면 다른 것보다는 낫다’ 이렇게 생각하고 단점을 감안하고 같이 사는 겁니다. 어느 길을 갈 것인지는 내가 결정해야 됩니다. 내 삶이기 때문이에요.

어릴 때 힘들게 자랐고, 성폭행을 당했고, 온갖 일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건 다 지나간 일이에요.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나는 평생 괴롭게 살아야 할까요? 아니에요. 그건 지나간 얘기입니다. 지금 나는 행복하게 살 건지, 울면서 살 건지, 내가 지금 선택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의지하라’ 하는 말의 뜻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여러분들이 부처님 법을 공부할 때, 법에 의지해야 할까요, 법륜스님에게 의지해야 할까요? ‘연기되어 있다’, ‘괴로울 일이 본래 없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모든 괴로움은 다 마음에서 일어난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면 내가 좋다’, ‘내가 남을 이해하면 내 마음이 편하다’ 이런 이치에 의지해야지, 법륜스님 개인에게 의지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법륜스님이 내일 어떤 여자를 만나서 머리 기르고 장가를 간다면, 앞에 얘기한 이치들이 다 허물어지나요? 아니잖아요. 법은 그대로 있습니다. 법륜스님이야 감옥을 가든지 죽든지 어떻게 되든지 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법륜스님은 손가락이에요. 이 손가락이 법이라는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법륜스님만 보고 있고 그 가르침은 전혀 안 봐요. ‘법륜스님의 건강이 좋으냐 나쁘냐’, ‘옷이 왜 떨어졌냐’, ‘오래 살아야 되는데’ 내내 이런 생각만 합니다.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도 그랬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어지간한 사람은 당시에 다 법을 이해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났는데, 초견 성도 못 이룬 사람이 정반왕입니다. 경전에 나와 있는 기록 중에 정반왕이 법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내용은 한 구절도 없어요. 항상 정반왕의 관심은 우리 아들이 뭐 먹는지, 뭐 입는지, 주위에 누구하고 있는지, 처소는 어떠한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아들을 만났을 때도 ‘옷이 그게 뭐냐’ 이런 것이 관심사였고, 사신을 보냈을 때도 ‘잠자리는 어떻더냐’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정반왕에게는 아들만 있고 부처님은 없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 정반왕은 자기 아들만 봤지 부처님을 뵙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부처님의 어머니는 달랐어요. 내 아들이지만 부처님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법을 듣고 나중에 정반왕이 죽자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야소다라 공주도 ‘내 남편이다’ 하는 생각을 버리고 스승으로서 부처님으로 봤기 때문에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들인 라훌라도 부처님으로 안 보고 아버지로만 보고 있다가 혼이 나고 나서 나중에는 부처님으로 봤죠. 부처님으로 본다는 것은 법을 본다는 뜻입니다.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본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법에 의지해야지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얘기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수행자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이런 말이 있죠. 여러분들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묻습니다.

‘부처님은 한 때는 겸손하라고 말했고, 한 때는 당당하라고 말했는데, 그럼 고개를 들어야 합니까, 숙여야 합니까?’

당당하라고 하니까 고개를 들어야 할 것 같고, 겸손하라고 하니까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고, 이렇게 두 가지 내용을 모순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겸손하라는 것은 잘난 척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라는 얘기예요.

‘비굴하게 굴지 말고 당당해라’ 하듯이 ‘비굴’과 ‘당당’이 대비되는 거예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하듯이 ‘겸손’과 ‘교만’이 대비되는 겁니다. ‘당당’과 ‘겸손’이 대비되는 용어가 아니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당당과 겸손을 대비시켜서 ‘당당하라니까 겸손이 안 되고, 겸손하려니까 당당한 것이 안 됩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겁니다. 이것은 비교를 잘못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그것처럼 ‘자등명 법등명’에서 자등명은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나에게 의지하라’ 하는 뜻이고, 법등명은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하는 뜻인데, 질문자는 지금 ‘나’와 ‘법’을 대비시켜서 ‘나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법에 의지해야 합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겁니다. 잘못 비교하기 때문에 모순을 느끼는 거예요. 한마디로 관점을 잘못 잡고 있는 겁니다. 이해가 되셨어요?”

“네, 이해가 됐습니다. 다시 한번 자등명 법등명의 세세한 뜻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중생에서 현인, 현인에서 성인이 되기 위해서 뗏목을 타고 가서 뗏목을 버릴 수 있는 그날까지 열심히 수행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정토대전 경전팀과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8

0/200

김정은

고맙습니다.

2023-08-07 07:59:13

신연희

오늘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2021-11-08 09:00:16

ㅎㅎ

법륜스님이 말씀하신 이치를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11-06 12: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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