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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11 세계 100회 강연(17) 덴마크 코펜하겐

▲ 덴마크 코펜하겐의 명소 뉘하운. 배가 다니는 운하인데 주위의 파스텔톤 색상의 집들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열일곱번째 강연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날입니다.nbsp노르웨이 오슬로의 유스호스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 5시에 호스텔 지하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6시에 오슬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공항에서의 대기 시간이 길었는데, 스님께서는 명상을 하시면서 대기 시간을 보내셨습니다.nbsp9시5분에 노르웨이 오슬로를 출발하여 10시20분에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했습니다.nbsp▲ 북유럽에 강연을 다니면서 스님 일행이 이용하고 있는 최저가 항공 ‘노르웨이 항공’.nbsp공항에는 이번 강연 담당자인 임미숙님과 오늘 유적지 안내를 해주실 오대환 목사님이 마중을 함께 나와주셨습니다.nbsp▲ 덴마크 코펜하겐 강연 담당을 맡아주신 임미숙님과 유적지 안내를 해주신 오대환 목사님▲ 덴마크 코펜하겐은 자전거 도시란 것을 실감할 정도로 곳곳에 자전거가 많았습니다.공항에서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들어가 한인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 스님께서는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세요” 라고 목사님께 nbsp식사 기도를 청하니 목사님께서는 우렁찬 목소리로 기독교식 예배를 해주셨습니다. 목사님은 평소 스님의 유튜브 즉문즉설을 들으며 많은 배움이 있었고, 최근에는 새로운 100년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스님께서 이곳 덴마크를 방문해주심을 무척 감사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 내내 코펜하겐의 주요 유적지를 안내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덴마크에 오신지 24년이나 되신 분입니다. nbsp덴마크는 도시가 작아서 걸어서 모든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목사님과 함께 덴마크의 역사와 현재 상황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며 걸으셨습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시청 앞 광장에 있는 안데르센 동상입니다. 안데르센은 미운오리새끼, 인어공주, 벌거숭이 임금님, 성냥팔이 소녀 등 주옥같은 동화작품들을 저술해 전세계 어린이들을 기쁘게 한 덴마크의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의 동상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nbsp▲ 안데르센 동상도심 한복판을 걷다가 큰 교회 앞에 도착했습니다. 교회가 크고 웅장해서 덴마크의 교회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요금을 지불하고 들어가 보았습니다. 4층까지 올라갔지만 예배당은 없고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을 해서 전시회만 열리고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와 보니 교회 외벽에 “Im not a church 라고 크게 현수막이 걸려 있어, 스님께서도 크게 웃으셨습니다.nbsp▲ 스님을 웃게 한 교회 앞에 적힌nbsp“Im not a church 문구.nbsp아마 많은 여행객들이 비슷한 오해를 많이 했나 봅니다. 대부분의 교회나 성당이 종교의 본연의 역할보다는 관광 또는 숙박업을 위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곳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nbsp계속 걸으니 배가 들어오는 뉘하운 운하에 도착했습니다. 운하의 양쪽에는 파스텔톤 색상의 각양각색의 집들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상점 앞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시식을 할 수 있게 호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이런 풍경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스님께서도 “정겹네” 하시며 웃으셨습니다.nbsp▲ 뉘하운 운하nbsp뉘하운 운하를 지나니 바닷가 부두가 나왔습니다. 건너편에는 웅장한 오페라하우스가 보였는데, 오슬로에서 본 오페라하우스가 생각나면서 서로 더 웅장해 보이려고 경쟁을 하는 둣해 보였습니다. nbsp수변 지구를 따라 조금 더 걸으니 광장을 둘러싼 네 채의 화려한 저택들로 이루어진 아말리엔보르 궁이 나타났습니다. 이 궁전은 크리스천보궁의 화재로 1794년 이래 왕실 처소로 이용되어 온 곳인데, 지금도 여왕 가족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고, 행사 때는 2층 테라스에 여왕 마르그레테 2세가 나와서 손을 흔드는데 많은 덴마크인들이 운집한다고 합니다.nbspnbsp▲ 덴마크의 여왕이 살고 있는 아말리엔보르 궁.nbsp이곳은 덴마크의 유명한 명소라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많이 있었는데, 스님을 알아보고는 많은 분들이 같이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 했습니다.nbsp▲ 스님을 알아보고는 너무나 반가워하는 한국인 관광객들.nbsp아말리엔보르 궁 앞의 광장을 지나 프로데릭스 거리를 따라 내륙으로 가니 화려한 프로데릭스 교회가 나타났습니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을 본 딴 듯한 웅장한 돔을 가진 이 교회는 ‘대리석 교회’ 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라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교회 안에 앉아 잠시 기도를 하고 나오셨습니다nbsp▲ 프로데릭스 교회nbspnbsp교회를 나와 계속 걸어 카스테릭 요새에 도착했습니다. 이 요새는 별 모양의 성벽과 해자로 이루어져 무척 독특했습니다.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산책을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nbsp요새의 성벽을 따로 조금 더 걸으니 덴마크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인 인어 공주 조각상이 나왔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의 이 조각상은 그 유명세와는 달리 무척 외소해 보였습니다.nbsp오대환 목사님은 덴마크의 교민 현황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덴마크에는 현재 약 300여명의 교민들이 살고 있는데, 과거에 낙농업을 배우러 왔거나 국제 결혼을 통해 정착하신 분이 많고,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정착하신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입양되어 온 분들도 많은데 덴마크에서만 대략 8500명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nbsp교민 수가 300여명 된다고 하니, 과연 오늘 강연에 몇 명이나 올지 걱정도 조금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연을 담당한 임미숙 보살님은 50명은 올 것이라며 자신있게 말해서 스님께서도 웃으셨습니다. nbspnbsp요새를 모두 둘러본 후, 시내로 나와 버스를 타고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인 헬러럽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nbsp교회에 도착해서 강연 준비는 스텝들을 포함하여 스님까지 나서서 모두 함께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봉사자들이 의자를 아무렇게 놓는 것을 보시곤 뒷사람의 시야가 앞사람의 머리에 가리지 않도록 배려하시며 정성껏 의자를 다시 배치하셨습니다. nbsp저녁 6시, 강연 시간이 되자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20명 정도 올까 예상했는데 65명이나 와서 빈자리 없이 자리를 빼곡이 채웠습니다. 그동안 한인 행사를 오랫동안 해왔지만 30명 모이기가 힘들었는데, 덴마크 교민사회에서 스님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nbsp▲ 덴마크 코펜하겐 강연이 열린 Hellerup 교회 강당.nbsp오늘 강연에는 특히 스웨덴 남부 지방에 사시는 분들이 많이 참석하였습니다. 그저께 스웨덴 스톡홀름 강연이 있었는데, 스톡홀름 보다 코펜하겐이 거리가 가까워서 오늘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nbspnbsp스님께서는 오늘 북유럽 4개국 강연을 마무리하시면서, 이렇게 여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nbsp“북유럽 하면 살기 좋은 곳이잖아요? 살기 좋은 곳에 살면서 힘들면 본인도 힘들지만 우리 인류 전체에도 희망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살기 힘들면 북유럽에 가면 좋아지지 않겠느냐 생각하는데, 막상 여기 와보니 여기 있는 사람들도 괴롭다 하면 nbsp우리 인류에게 희망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괴로우면 자기 문제를 넘어서서 nbsp인류를 절망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이에요.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이 있거나, 괴롭거나 힘든 게 있으면 같이 대화를 나눠봅시다.”오늘 강연에는 총 7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결혼 후 성격 차이로 남편과 많은 갈등을 겪고 도망치듯이 덴마크로 유학을 왔는데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지 묻는 분, 한국 사회는 왜 덴마크 사회만큼 행복하지 못한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습니다.nbsp그 중에서 해외에 살다보니 통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는데, 스님께 언제쯤 통일이 될 것이라 보는지 묻는 분의 질문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저는 나름대로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살고 있는데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항상 남이냐 북이냐 하고 묻습니다. 이곳에 이주하고 나서 통일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보실 때 과연 통일은 언제 될 것이며, 통일은 과연 될 것인지, 된다면 어떤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시부모님이 통일에 대해 자주 물어보시는데 제가 답변을 항상 못하고 있습니다.”“모르면 모른다고 답하면 되지요. 모르면서 아는 척 하려고 하니까 머리가 아픈 것이지요. 통일이 언제 될 것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통일은 될 것입니다” 라는 것은 말할 수가 있지요.nbsp그리고, 통일이 언제 될 것인지 묻는 질문은 외부 사람들은 그렇게 물을 수 있지만, 한국인들이 언제 될 것이지 묻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통일이 되도록 하면 통일이 될 것이고, 통일이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언제 될 거냐고 묻기만 할까요? 통일을 누가 할 겁니까? 왜 자기는 빠져 버리고 누가 대신해 주는 것처럼 말하나요? 통일이 언제 될 것이냐는 질문은 옳지 않습니다.nbsp통일 하는 것이 좋은가, 통일 안 하는 것이 좋은가,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막연히 ‘통일 하는 게 좋다’ 그렇게 생각하면 통일을 위한 노력을 하나도 안하게 됩니다. 통일이 되면 좋다 하지만 통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아무도 노력을 안 한다면 그것은 그냥 뜬구름 잡는 얘기에 불과합니다.nbsp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가 먼저 잡혀야 하고, 그 다음에 그런 통일을 하려면 어떤 문제가 예상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살펴나가야 합니다. 현재 객관적인 조건은 예전에 비해서 우리가 통일을 하겠다고만 한다면 통일을 하기에 유리한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 관계가 조금 유동적이 되었습니다. 유동적이 되었다는 말은 불안정해졌다는 것인데, 불안정해지면 넘어질 수도 있지만 속도를 빨리 낼 수도 있습니다. 유동적이 되었기 때문에 통일을 하려면 하는 쪽으로 더 쉽게 갈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버려두면 통일이 어려운 쪽으로 기울 수도 있습니다. 독일도 통일할 때는 그동안 있었던 양대 세력 사이에 균형이 깨어지면서 유동적이 되니까 그 기회를 잡아서 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한반도도 중국의 부상에 따라 힘의 균형이 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반도의 상황을 통일에 유리하도록 활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는 문제입니다.nbsp외부 상황은 좋아졌지만 실제로 통일을 하려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니까 통일의 주도 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통일의 주도 세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역사적으로 가장 나빠졌다고 볼 수 있어요. 통일을 주도할 세력이 없어졌습니다. 1960년대까지는 북한이라는 집단 전체가 통일에 목을 걸 정도로 주도 세력이 있었어요. 남한에서도 이것에 동조를 하면서 통일을 주장하는 일부 세력이 있었고요. 그런데 북한이 사회경제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남북 중에 어느 한쪽이 전 민족적 관점에서 어떻게 통일을 할 것이냐 고민하는 세력이 없어져버렸어요. 남한은 분단 초기에 북한보다 열세였기 때문에 전 민족적인 관점에서 통일을 다루기에는 역량이 작았고 남한의 체제를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이냐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한 안에 있는 통일지지 세력들은 남한 정부와 갈등 관계를 유지했던 것입니다.nbsp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이 사회경제적으로 붕괴되면서 지배세력들의 고민이 점점 체제 유지에만 집중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니 북한도 이제 통일 주도 세력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희망을 걸고 북한을 긍정적으로 보던 남한 안의 세력들도 북한의 체제가 쇠퇴하면서 같이 몰락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남한 안에도 통일 주도 세력이 없게 되었습니다.nbsp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남한의 발전을 넘어서서 북한까지 포함한 전 민족적인 관점에서 한반도를 발전시키겠다고 하는 지도자가 남한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남한의 지도자들은 오랜 역사 경험에서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안 해봤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북한은 지금 자기체제 방어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이고요. 민족 전체적으로 통일을 주도할 만한 세력이 없습니다. 외부 환경은 좋아졌는데 주체 세력은 미비한 이것이 지금 현재 우리 민족이 처한 형국입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과거와는 다른 개념에서 남한 안에 통일을 지향하는 세력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합니다.nbsp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가 남한 출신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남북 양측의 정치경제 시스템과 다양한 측면을 비교했을 때, 남한도 아직 부족한 것이 있고 북한에도 긍정적인 요소가 있지만, 북한 중심으로 통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해결책은 남한의 체제 시스템을 기본으로 깔고 이것을 조금 더 개선해서 통일의 중심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방법이 옳아서가 아니라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이죠. 통일 안하겠다면 모르지만 통일 하겠다고 할 때는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더 있겠느냐 싶어요.nbsp50년대의 적화통일 방식도 안 되고, 70년대의 남북 연방제 방식도 현실적으로 되기가 어렵고, 결국은 남한이 중심이 되어서 통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현재 남한의 상태로는 통일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통일 국가의 모델로서 현재 남한은 적절치 않습니다. 통일의 모델이 될 수 있게 현재의 남한을 바꿔야 합니다. 남한 사회를 위해서도 그렇고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nbsp두 번째, 북한 입장에서는 이 안을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북한을 해체하고 흡수통일 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처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이런 우려를 힘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포용해 주어야 합니다. 북한 내부를 분석해보면 3개의 계층으로 나눠집니다.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일반 주민들에게는 생존권을 보장해 줘야 하고, 생존권을 보장해 주려면 인도적 지원을 확대해야 합니다. 먹고는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인 중간층에게는 남북 간 경제협력이 되어서 통일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중국 제품 보다는 남한 제품이 훨씬 좋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통일의 중심 역할을 남한이 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는데 지장이 없는 상류층에게는 통일이 된 뒤의 신분 보장을 해주어야 합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체제 보장을 해주던지,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는다는 신분보장을 약속해 주던지 해서 이들이 통일 지향적인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적어도 이런 과감한 정책을 취해야 통일이 가능합니다.nbsp결국 주도하는 사람이 양보를 해야 합니다. 힘이 강한 사람이 양보하면 포용이라고 말하고, 힘이 약한 사람이 양보하면 굴복이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니 지금은 남한이 북한을 포용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북한 주민들과 지배세력들의 두려움이 없어지고 합의점도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현재 남한 정부의 정책은 무릎 꿇고 빌면 지원하겠다고 하니 한발도 못나가는 것입니다. 대화에는 전제 조건이 있으면 안 됩니다. 사과하면 대화한다, 이런 자세로는 안 됩니다. 대화를 먼저 시작하고 나서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과를 해야 테이블에 앉겠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런 것들이 남북 간에 가로 놓여 있고, 이것을 둘러싼 국제 정세도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nbsp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자국 힘만으로는 어려우니까 일본을 재무장시켜서 역할분담을 하려고 하는데 한국을 그 밑에 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재무장한 일본 nbsp밑에 붙으려고 하지 않죠. 한미일 삼각 군사협력을 하자는 것이 미국의 요구인데, 한국은 일본과 함께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이 일본과 군사 협력하는 것이 중국에 대한 적대행위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미국이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중국과 갈등이 생기고, 이걸 안 받아들이면 미국과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굉장히 딜레마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균형 있게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미국이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협력할 것은 협력하되 국가 이익을 위해 무조건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nbsp그런 면에서 이런 세력 변화 앞에서 통일 없이 미중 사이에 균형을 잡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한국은 미일 동맹체제로 편입되고, 북한은 현재까지는 잘 버티지만 내부에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 중국의 체제 아래로 편입되면, 미중의 갈등 구조 속에 남북이 강대국의 하위 변수로 편재되어 지난 100년과 같은 고통을 또다시 보내야 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nbsp그런 고통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거대한 중국 세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중국과 등지지도 않는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이냐. 거기에는 미국의 힘도 필요하고 일본의 힘도 필요합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에는 반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과 싸우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일본과 싸우면 앞으로 한국이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철저하게 반대하고, 그것을 일본 국민과 함께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일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도 일본의 군국주의를 반대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 협력을 하되 중국의 패권주의를 반대해야지 중국을 반대하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을 반대할 것이 아니라 미국의 군수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반대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미국의 평화주의자들과 미국의 양심적인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미국의 정책을 바꿀 수 있지 우리의 힘만으로는 미국의 정책을 바꾸기는 매우 어렵습니다.nbsp그런 면에서 유럽과의 협력이 돌파구를 열고 균형을 조금 깨어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여러분들에게 해준 것은 없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태어난 국가를 위해 국가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데 여러분들이 기여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일제시대 때 만주로 쫓겨나 힘들게 살았지만 그분들은 오히려 독립운동까지 하면서 희생을 치뤘잖아요. 사실은 국가가 그분들에게 해준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분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희생을 치뤘고, 그래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처럼 여러분들이 해외에 나와서도 정부나 국가가 해준 것이 없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고 이것을 극복하는데 기여를 해주셨으면 해요. 이번 유럽 강연을 하면서 국적을 바꿔버리고 싶다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는데 이것은 도피적인 사고입니다. 한국 안에서 한국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 못하면 내가 고국에 들어가서라도 해결을 해야 겠다 이렇게 보따리 싸서 들어올 생각을 해야지 도망갈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들어오지는 못하더라도 여기서라도 한국이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도록 댓글을 하나 달든, 편지를 하나 쓰든, 모금을 하든, 뭔가 한국이 긍정적으로 바뀌도록 노력해 주었으면 합니다.nbsp남북 간의 갈등에 너무 한쪽 편에 편들지 마시고, 여기서는 북한까지도 이해하면서 어떻게 지금 북한 주민들의 어려움에 우리들이 기여할 수 있느냐, 우선 인도적 지원 문제부터라도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셨으면 합니다.”해외에 사시는 많은 교민들의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오늘 스님 답변을 들으면서 균형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모두들 스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공감했습니다.nbsp마이크 시설이 옆 공간과 공용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어 마이크 사용을 하지 못하고 소형 마이크를 사용하다보니, 스님께서 목소리를 많이 높여야 했습니다. 목이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스님께서는 2시간 30분 동안 열정적으로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강연을 마치고 많은 분들이 스님께 찾아와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nbsp오늘 강연은 덴마크 한인여성회 모임에서 주축이 되어 준비해 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실무를 맡으신 임미숙 보살님을 비롯한 여성회 모임 분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단주를 선물했습니다.nbsp▲ 오늘 강연을 위해 자원봉사 해주신 덴마크 한인여성회 모임책 사인회를 하며 참석한 한분 한분과 인사를 나눈 후, 오늘 숙소인 박혜정 법우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박혜정 법우님은 한국에서 깨달음의장을 하고 수련 바라지 봉사와 희망세상 강연 봉사를 통해 정토회와 인연이 깊은 분입니다. 덴마크에 와서 정착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한참 적응해 가고 있는 시기인데, 오늘 스님 일행을 흔쾌히 받아 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하룻밤 재워준 박혜정 법우님에게 금강경 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nbsp▲ 덴마크에서 하룻밤 머물고 갈 수 있게 해준 박혜정 법우님.nbsp이곳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은 독일 함부르크로 이동합니다. 내일은 기차 타고 배를 타고 바다를 넘어 독일로 넘어가서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nbsp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지난 날짜 소식 보기

2014.09.12. 48,056 읽음 댓글 39개

2014.9.10 세계 100회 강연(16) 노르웨이 오슬로

▲ 오슬로의 오페라하우스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열여섯번째 강연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리는 날입니다.nbsp스웨덴 스톡홀름의 김태자 선생님 댁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새벽5시에 콜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6시반에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밟는 동안 스님께서는 원고 교정 업무를 보셨고, 출국 수속을 마친 후 어제와 그제 이동 중에 남은 빵과 약밥으로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였습니다. nbsp nbspnbsp▲ 노르웨이로 넘어가는 비행기 안아침8시35분에 스웨덴 스톡홀름을 출발하여 9시30분에 노르웨이 오슬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오슬로에 거주하는 봉사자가 미리 예약해 준 콜택시를 타고 오슬로 도심으로 들어왔습니다. 조주형씨는 오슬로에서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분인데, 바쁜 와중에서도 혼자서 열심히 강연을 준비해주셨습니다.nbsp먼저 오늘 숙소로 사용할 호스텔에 도착하여 짐 보관실에 짐을 모두 내려놓고 곧바로 유적지를 둘러보러 도심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곳 노르웨이 오슬로에는 마중을 나오거나 유적지 안내를 해주실 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스텔에서 나눠주는 관광 지도에 의지하여 대표적인 nbsp한두 곳만 둘러보기로 하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nbsp먼저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케르후스 요새에 가보았습니다. 1049년 하랄 하르드라다가 설립한 오슬로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입니다. 1299년 동쪽 스웨덴의 침략에 대비해 호콘 5세가 이곳에 흙벽을 올려 요새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도시는 1624년에 불에 타 사라져버렸는데 이후 크리스티안 4세가 보다 방어하기 쉬운 자리에 벽돌과 바위로 다시 재건했다고 합니다. 나무가 줄지어 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 오르니 성벽 너머로 오슬로 도심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졌습니다. nbspnbsp▲ 아게르후스 요새에서 바라본 오슬로 도시 전경.nbsp아게르후스 요새에서 해안을 따라 걸으니 거대한 오페라하우스가 나타났습니다. 2008년 오픈한 이 오페라하우스는 건설하는데 약 5천억원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오슬로 앞바다에 빙하가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건물 전체를 하얀 대리석으로 덮었다고 합니다. 건물 외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비스듬한 외벽 때문에 독특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 오슬로의 오페라하우스nbsp오페라하우스에서 10분 정도를 걸어 다시 시내로 들어가 오슬로 대성당 안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성당 안에는 에마누엘 비겔란이 만든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천장벽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nbsp▲ 오슬로 대성당nbsp노르웨이는 1인당 국민소득이 8만불이 넘고 물가가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점심을 어떻게 먹을지 고민했는데, 마침 오슬로 대성당 앞에 버거킹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버거킹이 가장 저렴하지 않을까 해서 들어갔는데, 햄버거 메뉴 하나가 12000원이 넘었습니다. 한국에 비해 2배 가량 비쌌습니다. 그래도 식당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저렴하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햄버거로 점심을 해결하였습니다.nbsp오슬로 대성당을 지나 메인 스트리트인 카를 요한스 게이트에 접어드니 상점들이 늘어선 차 없는 거리가 나왔습니다. 일직선의 대로 맨 끝에 왕궁이 보였습니다.nbsp▲ 왕궁산책 겸 왕궁까지 걸어가 주변을 둘러본 후, 다시 해안가로 내려와 노벨평화센터 앞을 지났습니다. 노벨평화센터는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 노벨이 창시한 노벨상의 역사를 비롯해 1901년부터 현재까지의 수상자가 안내되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건물 안에 들어가보려고 했으나 입장료가 너무 비싸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사진만 한 장 남기고 돌아섰습니다.nbspnbsp▲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이 안내되어 있는 노벨평화센터.nbsp노벨평화센터 앞에는 시청사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이곳 오슬로 시청에서는 매년 12월 10일 노벨 평화상 시상식이 거행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벽돌탑이 있는 건물 외관만 보면 전형적인 정부기관 건물로 보였지만, 로비 안으로 들어가면 노르웨이의 역사와 신화가 그려져 있는 벽화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스님 일행은 로비 안으로는 들어가 보지 않고 외관만 보고 지나쳤습니다.nbsp▲ 매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거행되는 오슬로 시청.nbsp오후3시 무렵, 다시 숙소인 호스텔로 돌아왔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이동과 강연 일정으로 스텝진들도 모두 피로가 누적되어 있어서, 오후5시까지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스텝진 모두 달콤하게 휴식을 가졌습니다. 오후7시부터 강연이 열리는 오슬로 문화센터 건물로 가서 강연 준비 담당자인 조주형씨를 만나 강연을 준비했습니다.nbsp▲ 노르웨이 오슬로 강연이 열린 문화센터, Litteraturhusetnbsp오늘 노르웨이 오슬로 강연은 총 55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뤘습니다. 준비한 40개의 의자가 부족해 바닥에 앉은 분들도 10명이 넘을 정도로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노르웨이에는 아무런 인연이 없어서 사람들이 적게 올 줄 알고 자리를 적게 준비했다” 며 죄송한 마음을 전하면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nbspnbsp오늘 오슬로 강연에서는 총 7명이 스님께 질문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 현재를 살 수 있는지 묻는 분, 작년에 명상수련을 배웠는데 해외에서 스승도 없이 어떻게 명상을 해야 할지 묻는 분, 어떻게 살아야 좋고 싫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묻는 분, 아이가 수학을 잘못하고 자꾸 저항을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문뜩 문뜩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부모님이 건강관리를 소홀히 해서 답답한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직장도 갖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고 많은 것이 이뤄졌는데도 마음 속에는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고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습니다.nbsp그 중에서 해외에서 생활하며 문뜩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는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한국에서 20대와 30대를 보내면서는 직장생활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산다고 외로움을 못 느꼈습니다. 그런데 노르웨이에 와서 시간적으로 여유롭고 아이도 크고 하니까 문뜩 문뜩 외롭다는 느낌이 자주 듭니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형제가 있고 다 있지만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 지혜롭게 넘어가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nbsp“현대인을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하죠. 많은 사람과 몸을 부딪치고 사는데 고독하다, 결혼해서 남편과 살을 맞대고 사는데 고독하다 하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산속에서 혼자 살아도 마음의 문을 닫고 있지 않으면 외롭지가 않아요. 나무 하고도 대화하고 새 하고도 대화하고 자연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살을 섞고 살아도 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면 외롭습니다. 남편의 돌아선 등이 마치 성벽처럼 느껴집니다.nbsp한마디로 진단하면 질문자가 지금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잘못이 아니에요. 바쁜 남편이나 가족이 볼 때는 ‘호강에 받쳐서 요강을 깬다’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네요. 편하니까 쓸데없는 걱정을 다한다 이렇게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본인도 바쁘면 외로움을 못느껴요. 그런데 한가하면 느껴지게 되거든요. 눈 감고 명상을 하면 망념이 일어나는 증상과 같습니다. 보통 우리는 의지로 이것을 억압하기 때문에 자신이 굉장히 도덕적인 인간 같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이거나 꿈속에서는 억압된 심리가 그냥 일어나서 외간 남자도 만나게 됩니다. 그것처럼 심리가 억압이 되어 있어서 못 느겼는데 한가해지니까 이런 것이 나타나는 겁니다. 바쁘다는 것은 억압이 되어 있다는 것이거든요.nbsp그래서 자기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세요. 외롭다 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 그럴까요? 질문자가 ‘지금 좀 마음의 문을 닫고 있구나’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을 가던지 생활을 바쁘게 해서 덮으려고 하지 말고, 명상을 통해서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편안할 수 있게 해보세요. 제일 중요한 것은 ‘내 까르마가 외로워하고 있구나, 내가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고 있구나’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금 질문자는 자기 생각에 좀 빠져 있어요. 남편과 아이들과 편안하게 대화를 하는 것이 좀 필요해요. 꼭 불만이 있어서 마음을 닫고 있는 건 아니고, 질문자가 어릴 때 이런 심성이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의 심리적인 근저는 주로 어릴 때 형성됩니다. 엄마의 성격을 닮거나 아니면 어릴 때 자란 환경이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형성하고, 이것이 평생 삶의 심리적 근저에서 작동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첫째,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를 알아야 됩니다.nbsp둘째, 외로움이라는 것은 노르웨이에 와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남편이 잘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다만 내 까르마가 이렇게 형성되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어떻게 극복을 할 것이냐 이게 문제죠. 만약 기도를 한다면 이렇게 해야 되요. ‘저는 편안합니다’ 이렇게 자꾸 자기 암시를 주세요. 그러면 편안하다는 자기 암시와 편안하지 못한 자신의 현실 사이에서 늘 충돌이 일어날 거예요. 편안하다고 기도하는데 현실은 늘 편안하지 못하죠. 그래도 계속 절을 하면서 ‘감사합니다. 저는 편안합니다.’ 이렇게 자꾸 자기 암시를 끝없이 해보세요.”nbsp질문한 여성분은 스님 말씀대로 실천해볼 것을 다짐하면서 “감사합니다” 하며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강연을 마무리 하시면서 참석한 교민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강조하셨습니다.nbsp“여기 와서 ‘힘든다’ 이런 생각은 가급적 하지 마세요. 100년 전에 태어났으면 노르웨이를 구경이나 한번 해봤겠어요? 구경도 하기 힘든데, 나는 구경도 하고, 여기 와서 살아도 봤고, 결혼하신 분은 외국 남자와도 살아도 봤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고국에 돌아가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요. 항상 지금의 생활에 감사를 하면 심리가 안정이 되고 몸에서도 좋은 에너지와 호르몬이 분비가 되고 항상 얼굴이 밝고 기분이 상쾌해져요. 상쾌해지면 아이디어도 좋게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도 호감이 많이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는 일도 잘 됩니다. 장사를 하거나 회사에 근무하는 내 자세가 편안하고 즐겁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손님이 한명이라도 더 오게 됩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사시면 좋겠습니다.”좁은 공간에 바닥에 앉으신 분들도 많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된 분위기로 즐겁게 강연이 진행되었습니다. 모두들 강연을 듣고 나갈 때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책 사인회를 하며 참석자들 한분 한분과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봉사자들과의 단체 사진은 봉사자가 조주형씨 한분이여서 조촐하게 함께 찍었습니다.nbsp스텝진들은 뒷정리를 모두 마치고 촬영장비와 현수막 등 짐들을 들고 오슬로의 메인스트리트인 칼 요한 게이트를 20분 가량 걸어서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숙소인 호스텔에 도착하니 밤10시가 넘었습니다.nbsp강연 전에 연락받기를 오슬로에 사시는 이민아 보살님이 점심 식사 접대를 하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으나, 초대 받은 장소가 시내 외곽 지역에 있어서 다녀올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성의에 응하지 못했는데, 보살님께서 강연장으로 직접 오셔서 라면과 김치를 보시해 주셨습니다. 강연을 준비하느라 스텝들은 저녁을 먹지 못했는데, 호스텔 지하 식당에서 이민아 보살님이 보시해주신 라면과 김치로 맛있게 저녁을 늦은 시간에 먹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nbsp내일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세계 100회 강연 중 열일곱번째 강연이 열립니다. 덴마크로 넘어가서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지난 날짜 소식 보기

2014.09.12. 49,032 읽음 댓글 50개

2014.9.8 세계 100회 강연(14) 핀란드 헬싱키

nbspnbsp▲ 핀란드 헬싱키에서 수오메린나 요새로 들어가는 배 위에서. 뒤에 헬싱키 도심이 보입니다.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세계 100회 강연 중 열네번째 강연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한국에서는 추석날 아침이기도 하네요.nbsp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성준 한인회장님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5시에 현지 교민 분인 김미미씨 부부가 새벽부터 정성껏 차려준 추석날의 아침 식사를 하고, 5시30분에 기차역으로 출발했습니다. 김미미씨 부부는 유튜브로 즉문즉설을 듣고 삶이 많이 행복해졌다며 스님께 식사 대접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nbsp▲ 추석날 아침 식사를 정성껏 차려주신 김미미씨 부부nbsp새벽부터 노성준 한인회장님이 마지막까지 직접 차를 운전하여 안전하게 기차역까지 태워주셨습니다.nbsp기차를 타고 오전 6시 40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하여 오전 9시 16분에 핀란드 헬싱키역에 도착했습니다. 시차가 1시간 있으니까 실제 이동 시간은 3시간 36분 걸렸습니다. 헬싱키역에는 핀란드에서 한인 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백솔 씨와 핀란드에서 한국관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최문기 거사님이 스님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nbsp▲ 핀란드 헬싱키역에 도착오늘은 최문기 거사님 댁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해서, 우선 거사님 댁에 짐을 옮겨 놓고, 거사님이 운영하는 헬싱키 유일의 한국 식당인 한국관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거사님 부부도 평소에 스님의 유튜브 즉문즉설을 보고 많은 도움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꼭 식사 대접을 해드리고 싶으셨다며 정성껏 음식을 차려 주셨습니다. 스텝진 일행은 음식이 맛있다고 다들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핀란드를 알 수 있는 유적지 몇 곳을 둘러보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nbsp▲ 스님 일행의 점심, 저녁 식사와 숙소 제공까지 정성껏 챙겨주신 최문기씨네 가족. nbsp헬싱키는 도시가 작아서 하루 종일 걷기로 하였습니다. 유적지 안내는 핀란드 한인 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백솔 학생이 해주었습니다. 백솔 학생은 헬싱키의 라우레아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는 4학년 학생입니다.nbsp우선, 시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인 성당 두 곳에 가보았습니다. 1868년에 지어졌고 양파 모양의 돔 외관을 가진 우스펜스킨 성당과 도심 한복판의 넓게 자리한 세나띤또리 광장에 우뚝 솟은 투오미오키르코 성당을 가보았는데, 두 성당은 서로 다른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nbsp▲ 우스펜스킨 성당특히 투오미오키르코 대성당은 내부로 들어가보니 실내 장식이 거의 없이 아주 심플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본 유럽의 많은 성당들이 화려한 장식을 갖추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성당은 아주 심플하고 단순해서, 스님께서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nbsp▲ 투오미오키르코 성당 외부▲ 투오미오키르코 성당 내부스님께서는 “성당이나 교회가 세속과 결탁하면 화려한 장식을 갖게 될 가능성이 많고, 종교의 순수성이 잘 유지되면 심플하고 단순한 경향을 갖게 되는 것 같다” 하시면서 심플한 핀란드의 투오미오키르코 대성당을 더욱 관심 있게 보셨습니다.nbsp성당을 나와 걸어서 카우파토리의 여객항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장날처럼 천막을 치고 각종 음식과 과일, 물건들을 판매하는 시장이 열려 눈길을 끌었습니다.nbsp▲ 여객항에 늘어서 있는 마켓들. 오른쪽에 보이는 친구가 스님 일행을 안내해준 헬싱키 라우레아 대학에 다니는 백솔씨입니다.nbsp블루베리와 몇가지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사서 먹고는 여객항에서 배를 타고 ‘수오메린나’로 불리우는 핀란드의 천연 요새를 가 보았습니다. 배를 타고 20분을 가니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섬이 보였습니다. ‘핀란드의 요새’로 널리 알려진 이 섬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곳입니다. 마침 날씨가 맑아서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nbsp▲ 수오메린나 요새nbsp이 섬 요새는 1748년 러시아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당시 핀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에서 지은 요새입니다. 한때는 이 요새에 헬싱키보다 더 많은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데, 1808년 오랜 전투 끝에 결국 러시아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nbsp▲ 수오메린나 요새의 성벽 중에서 왕이 출입하였다는 Kings Gate안내 유인물에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산책로를 따라가니 Kings Gate 라는 요새의 성문이 나타났는데, 이곳은 왕이 배를 타고 정박해 이 성문으로 들어왔다는 곳이었습니다. 자세히 둘러보니 성벽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중중 첩첩으로 성벽이 쌓여 있었습니다. 성벽마다 대포를 쏠 수 있게 구멍이 나 있고, 당시 사용했던 대포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성벽은 한겹 내지 두겹만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겹겹이 성벽이 설치된 것에 스님께서도 무척 신기해 하셨습니다. 그만큼 적으로부터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이 컸으리라 짐작이 되었습니다. nbsp핀란드는 강대국 사이에서 고통을 겪어왔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아 보였습니다. 스위덴으로부터 500년간 지배를 받아왔고, 또 러시아가 급부상 하면서는 수오멘린나 섬에 큰 요새까지 지었지만 러시아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러시아의 지배를 100년간 받게 되었답니다.nbsp수오메린나 요새를 모두 둘러보고 다시 카우파토리의 여객항으로 돌아왔습니다. 2시간 정도를 계속 걸었더니 스님께서도 조금 피곤하셨는지 배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여객항에 내려 헬싱키의 중심가인 에스프라나드 공원을 걸은 후 강연을 준비할 시간이 다 되어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nbspnbsp오늘 핀란드 헬싱키 강연은 Aalto 대학 Design Factory 강당에서 한인 학생회 분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해 주었습니다. 한인 학생회는 헬싱키에 있는 라우레아 대학, 메트로폴리아 대학, 알토 대학, 헬싱키 대학 4개 대학에 재학 중인 한국인 학생들의 모임입니다. 영상 상영, 사진 촬영, 강당 시설 사용 등이 학생들의 봉사 덕분에 매끄럽게 잘 진행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강연 준비를 위해 수고한 한인 학생회 친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nbsp▲ 헬싱키 강연이 열린 Aalto대 Design Factory 강당. 사진 촬영은 핀란드에서 포토그래피로 활동하고 있는 박재승씨가 재능기부로 담당해 주셨습니다.nbsp강연은 총 60명이 참석하여 진행되었고, 대부분 유학생들이 절반 정도를 이뤘고, 그 외 개인사업이나 여행 차 오신 분들도 보였습니다. 특히 헬싱키에 신혼여행을 온 부부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nbsp스님께서는 즉문즉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핀란드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먼저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핀란드 하면 첫째 우리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이라는 점이 떠오릅니다. 두번째는 헬싱키 프로세스가 떠오릅니다. 유럽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유럽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유럽이 대립과 갈등을 겪었는데, 이곳 헬싱키에서 1975년 동서 유럽 35개국의 나라가 모여서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첫째, 상호 불가침에 대한 약속을 하는 안보 협력을 하기로 했고, 둘째, 서로 경제협력구조가 달랐는데 상호 경제협력을 하기로 했고요. 셋째, 인권협력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 세 가지 협력을 하기로 한 것이 헬싱키 프로세스입니다.헬싱키 의정서가 맺어지고 동서 간의 교류와 협력이 증대되고 그것이 결국 동유럽의 붕괴, 소비에트의 해체, 독일의 통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갔기 때문에 한반도에 있어서도 헬싱키 프로세스가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느냐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남북과 주변국까지 해서 우선 안보협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6자회담으로 볼 수 있고요. 두 번째는 남북간의 경제협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북한 인권 문제가 중요한 사항으로 들어가야 함을 시사합니다.nbsp그러나, 상호 협력하면서 공존해야 한다는 의미보다는 헬싱키 프로세스가 동유럽의 해체를 가져왔기 때문에 결국 북한의 붕괴도 가져올 것이라는 의도로 오해되어 북한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헬싱키 프로세스로 인해 결과적으로 동유럽이 붕괴된 것이지, 붕괴 시키려고 헬싱키 의정서를 맺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서 헬싱키 프로세스는 한반도 통일문제와 외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 번째,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전체적으로 복지 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잘 갖춰져 있다는 것으로 우리사회에 알려져 있습니다.”헬싱키 프로세스의 의미에 대해 들으면서, 다시 한 번 통일의 희망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총 9명이 스님께 질문했습니다.nbsp전 세계에서 유독 우리나라만 아직도 분단 국가로 남아있는 원인을 묻는 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을지, 어떻게 아이를 행복하게 키울 수 있을지 묻는 분, 극단주의자가 주위에 있어서 피곤한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강박관념이 심하고 나쁜 기억이 순간적으로 올라와서 저를 괴롭혀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정토행자의 서원에서 오직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분, 아이가 컴퓨터 게임에 너무 빠져서 걱정인 분,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인과응보의 원리를 항상 들어왔는데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는 불행한 사람은 늘 불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분, 종교나 정치라는 것이 현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들이 나왔습니다.nbsp그 중에서 한국과 핀란드의 가치관 차이에서 오는 혼란스러움에 대해 묻는 한 여성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nbsp“핀란드에 온지 3년 되었고요.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가치관과 핀란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이 서로 다른데 그 안에서 가끔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한국인이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결혼은 몇 살에 해야 하고, 성공하려면 돈은 얼마를 벌어야 하고, 학벌을 중시한다든지 여러 가지 기준들이 있는데, 핀란드는 그런 기준이 없거든요. 그래서 혼란스럽습니다.”“예를 들어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식이 한국 사람과 결혼하지 않고 외국 사람과 결혼하면 반대하겠죠. 만약에 백인도 아니고 흑인이라면 어떨까요? 그것도 장애인이라면 어떨까요? 더더욱 반대하겠죠. 두 가지 문제입니다. 부모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모가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아요.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요즘 많은 이들이 계약 결혼을 해서 살잖아요. 이것을 한국 부모가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죠. 동성이 같이 산다는 것도 부모가 받아들이기 어렵겠죠. 부모는 잘못되었고 부모는 아직 미개해서 그런 게 아니라 부모님이 살아온 삶의 가치관과 사고에서는 이것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nbsp그러면 부모가 하자는 대로 내가 하면 부모의 노예만 되지 내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노예로 살고 싶다면 부모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되고요. 그러나, 스무살이 넘어서 한 사람의 성인이라면 부모님의 뜻이 그런 것은 이해하지만 내가 그렇게 살거냐 안 살거냐 하는 것은 내 선택입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어렵다 하더라도 ‘인종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볼 때 옳지가 않다,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사람인데 단지 피부가 검다는 한 가지 이유로 안 된다는 것은 옳지가 않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살면 됩니다.“nbsp“부모님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런 것 같습니다.” nbspnbsp“방금 부모의 예를 들었던 것처럼, 한국에서는 학벌을 갖고 굉장히 중요하게 평가했는데 내가 핀란드에 와보니 ‘그래, 학벌 그게 뭐가 중요하냐. 한국은 너무 학벌을 갖고 형식주의에 치우쳐있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부모가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나는 거기에 대해 구애받지 않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그래도 학벌이 중요하지’ 생각한다면 학벌을 중요시하면 되고요. nbsp만약 외국인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결혼식에 부모가 안 온다던지 해서 가족과 갈등이 생기겠죠.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한테서 외면당하는 걸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그들을 이해는 하되 나는 그들의 노예가 아니잖아요. 나의 길을 가야지요. 대신에 불이익을 감수해야죠. 질문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불이익은 안 받겠다고 하는데서 생기는 고민입니다. 그런 걸 욕심이라고 말합니다.nbsp그러니까 선택이에요. 내가 결혼할 때 부모가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부모가 결혼을 반대한다고 부모를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동안 살아온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하며 자식에 대한 우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기 체면이라는 것이 있단 말이에요. 사위가 누구냐 물으면 자기 친구들에게 말하기가 도저히 어렵단 말입니다. 자신의 체면 문제가 하나 있고, 진짜 자식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인생을 오래 산 부모님의 입장을 들어봐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알겠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얘기를 듣고 내가 깨닫고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뜻은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한다면 ‘저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결정하면 됩니다.nbsp그럴 때 부모는 자식의 결혼식에 참여 안한다던지 결혼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던지 그럴 수 있죠. 그것은 부모의 권리이니까요. 가족 간의 지지를 다 받으면 좋지만, 그럴 때는 부모의 지원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결혼도 하고, 또 가족의 지지도 다 받고 싶다 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겁니다. 지지를 받고 싶으면 가족의 비위를 맞추어서 내 요구를 좀 포기해야 하고, 내 옳다는 생각대로 가려면 지지도 포기하고 후원도 포기를 해야 합니다.”“부모님이 열심히 키워주셨는데 부모님 말을 안 들으면 불효가 아닐까요?”nbsp불효가 아니에요. 그러나, 부모님은 불효라고 그러겠지요. 반대하는 것은 부모님의 생각이고 나는 나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어릴 때부터 낳아서 열심히 키웠더니 이제 부모 말도 안 듣고 이렇게 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죠. 그것은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께 “죄송합니다”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부모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 갈 길을 가면 되는데, 후원도 받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도 하는 이것은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반대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대는 부모님의 의견이니까 인정은 하되, 지금까지 지원해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 인사를 해야지요.nbsp부모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곳 핀란드에 와서 이것이 좋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가 그 좋은 것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 시스템이 한국보다 참 좋다고 한다면, 그럴 때 내가 만약 정치를 한다면 한국 사회가 그것을 수용을 하도록 노력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한국 사회가 이것을 잘 안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5년, 10년, 20년 동안 지난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공할 수도 있고 성공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공 안했다고 실패했냐? 그건 아닙니다. 3.1운동도 그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역사적으로 길게 보면 성공한 것입니다. 헌법에도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라고 되어 있잖아요. 반면 5.16은 어때요? 그 당시에는 성공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실패했습니다. 헌법에 “5.16 군사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란 문구는 없잖아요. 역사적으로 헌정 질서를 문란 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면 앞으로 누구든지 헌법을 무시하고 쿠데타를 일으켜도 된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그러니까 당장 성공했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고, 당장 실패했다고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꾸준히 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nbsp그런 측면에서 한국사회가 지나친 학벌사회라고 한다면, 여기 와서 견문을 넓혀보니 ‘이 학벌주의는 국가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되고, 개인의 행복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세상 사람들이야 학벌주의를 하든지 말든지 나는 신경 안 쓰면 됩니다. 불이익을 주면 불이익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꾸준히 개선해 나가면 될 일이지 ‘여기는 이렇고 저기는 저런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정말 혼란스럽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다른 종교인들을 만나서 자꾸 대화를 나누니까 ‘내 신앙이 흔들립니다’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 사람들은 저렇게 믿는구나’, ‘저 사람들은 저 문제를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면 되지 내 생각과 다르다고 갈등을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서로 생각이 다 다르니까요.nbsp다름은 갈등의 요인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것들을 우리가 인정하고 이해하면 오히려 다양성의 조화가 일어납니다. 풍요로워집니다. 반찬이 딱 한 가지만 있는 게 좋아요? 열 가지 있는 게 좋아요? 열 가지가 있으면 밥상이 풍요로워지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획일적인 사고를 합니다. 이런 문화와 전통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저런 문화와 전통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류문화사를 연구하면 ‘어떤 문제마다 사람들은 여러 생각들을 하는 구나’ 이렇게 볼 수가 있죠. 생물학적으로 다양한 종을 모두 존중하듯이 인류학적으로 볼 때는 다양한 문화를 다 존중해야 합니다. 인류가 수 천년을 거쳐 오면서 나름대로 발전시켜 온 문화이기 때문에.nbspnbsp그런데 오늘날 우리사회는 자꾸 획일화되어 갑니다. 그런 것을 극복해 가는 것이 발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여기 와 공부하면서 좋다 싶었던 것들은 다 배워 와서 한국에서 저항을 받아가며 관철을 시켜 보세요. ‘이렇게 저항까지 받아가면서 해봐야 무슨 소용 있나’ 한다면 그냥 한국식으로 살면 되고요. 그건 자기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헷갈릴 일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힘들다 한다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다는 뜻입니다.“불효를 할까봐 걱정됩니다.”“성인이 되면 선택은 자기의 문제입니다. 성년은 각자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더 이상 지원해줘야 할 아무런 책임이 없고, 자식은 부모에게 어떤 명령도 들어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어요. 각자가 독립된 인간입니다. 부모 자식이란 것이 있지만 성년이 되면 일대일의 독립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의 자연의 원리입니다.” nbsp“그런데 한국의 문화는 보통 스무살이 넘어도 독립을 하지 않잖아요.”nbsp“제가 보기에는 부모도 자식을 독립시켜주지 않지만, 자식도 부모로부터 독립을 안 하고 있습니다. 울타리 안에서 오래 키우던 짐승을 산에 가져다 놓으면 못살고 다시 울타리로 돌아오듯이 자식을 너무 과잉보호 하면 독립을 못합니다. 한국 문화가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집의 문화가 그런 것이겠죠. 그런 집이 좀 많아서 한국 문화라고 그러는 것이지요. 서양은 그런 집이 없느냐? 그건 아닙니다. 서양은 독립시키는 것이 다수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국 사람은 다 그렇다”, “서양 사람은 다 안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nbsp자식을 독립시키는 문제는 서양 문화와 한국 문화의 문제로만 보면 안 됩니다. 항상 모든 것의 그 근본인 자연의 원리에 준해서 자연스럽냐 그렇지 않느냐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어떤 문제를 보는 것이 옳습니다. 한국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자연의 원리에 어긋나면 고쳐야 하고, 서양이 아무리 우리보다 앞서가고 잘산다 하더라도 자연의 원리에 어긋나면 따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양 것은 옳고 우리 것은 틀렸다 라든지 서양 것은 틀렸고 우리 것은 옳다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nbsp스님의 답변을 듣고 혼란스럽다고 했던 질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었습니다. 성년이 되면 부모와 자식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명쾌하게 정리해 주셔서 많은 분들이 좋아하셨습니다.nbsp강연을 마치고 책 사인회를 한 후, 기념 사진을 촬영하였습니다.nbsp스님께서는nbsp수고한 한인 학생회 친구들과nbsp간단히 소감 나누기를 함께 한 후, 한인 학생회 친구들에게 단주 하나씩을 선물하며 모두에게 행복이 깃들기를 기원해 주셨습니다.nbsp강연을 준비하느라 다들 저녁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강연을 마치고 난 후 다시 최문기 거사님이 운영하는 한국관으로 돌아와 사모님이 정성껏 차려주신 식사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습니다. 숙소인 최문기 거사님 댁에 들어오니 밤11시가 다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유럽 강연을 출발한 이후 계속 쉬지 못하고 강행군을 하셔서 그런지 다소 피곤한 기색이 많으셨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드시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하셨습니다.nbsp내일은 비행기를 타고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갑니다. 스웨덴에서 계속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nbsp

2014.09.10. 26,189 읽음 댓글 25개

2014.9.4 세계 100회 강연(10) 폴란드 바르샤바

▲ 폴란드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 앞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열 번째 강연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날입니다.nbsp체코 프라하에서 하룻밤을 묶고 새벽5시에 폴란드 바르샤바로 출발합니다. 오늘은 700km를 달려갈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 중 150km 이상을 국도로 달려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어 일찍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체코를 벗어나 폴란드 국경을 지나니 일직선의 고속도로가 계속 펼쳐졌습니다. 도로도 깔금하게 새로 잘 닦여져 있어서 덜컹거리지 않고 편안하게 계속 달릴 수 있었습니다.nbsp오전10시30분 무렵, 휴게소에 내려 일찍 점심을 먹었습니다. 날씨도 화창하고, 새벽에 전기 밥솥으로 해놓은 따뜻한 밥과 김치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또 작은 도시를 지나갈 때 스님께서 손수 빵집에 들러 빵을 사오셔서 함께 먹기도 했습니다.nbsp▲ 이동 중 휴게소에서 먹는 점심 식사2차선 국도가 계속 막혀 오후3시가 다 되어서야 바르샤바 시내로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고전풍의 오래된 건물들이 중심가에 자리 잡은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곳곳에서 최신식 빌딩들이 건축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나치 군에 의해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전후 폐허 위에 재건한 도시라고 하니 높은 빌딩들 속에 보이지 않은 아픔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nbsp오후5시까지는 강연장에 도착해야 해서 유적지를 둘러볼 시간 여유가 없었습니다. 바르샤바의 상징적인 건물인 문화과학궁전과 민중봉기박물관 2곳만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문화과학궁전은 1955년 전후 폐허 위에 가장 먼저 상징적으로 건축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도시 전체가 나치군에 의해 파괴되고 성한 건물이 없었는데, 구소련 연방이 폴란드 국민들에게 주는 선물 형식으로 건축된 것이라고 합니다.nbsp▲ 문화과학궁전nbsp바르샤바의 역사적 아픔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민중봉기박물관을 찾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참히 파괴되었던 바르샤바의 당시 상황을 3D 영상과 사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박물관을 모두 둘러보시고 “전쟁은 이기고 지는 것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이런 비극을 가져오게 하는 것” 이라 하시며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은 없어야 하고,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다” 며 짧게 소감을 말씀하셨습니다. nbsp▲ 2차세계대전으로 파괴된 바르샤바의 모습을 보여주는 민중봉기박물관nbsp오후 5시가 다 되어서 겨우 겨우 길을 찾아 폴란드 한국문화원에 도착했습니다. 문화원 앞에는 권영관 폴란드 한인회 회장님과 김현준 한국문화원장님이 스님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nbsp문화원에서 준비해 준 저녁 도시락과 한인회 불자모임에서 준비한 떡을 감사히 먹고 곧바로 강연 준비를 하였습니다. 폴란드 한인회 불자모임에서 7명이 나오셨는데, 매월 1회 정기법회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강연을 준비할 때도 많은 역할을 해주셨습니다.nbsp오후 6시30분에는 재 폴란드 한국대사님 부부가 강연장을 찾아오셔서 스님과 함께 차담을 나누셨습니다. 특히 대사님의 사모님은 평소에 스님의 유튜브 즉문즉설을 자주 듣는 열성펜이라 하시며 스님을 만나뵙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셨습니다.nbsp▲ 폴란드 대사님 부부nbsp대사님은 스님께서 매일 1개 도시를 이동하며 세계 100회 강연을 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하면서 스님의 건강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면서 “폴란드 교민들을 위해 행복을 나누어 주심에 무척 감사하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셨습니다. 대사님 부부는 강연이 끝날 때까지 맨 앞자리에서 스님의 설법을 함께 경청하셨습니다.nbsp한국과 폴란드는 1989년에 수교해서 올해로 수교 25년째를 맞는데, 현재 폴란드에 거주하는 교민은 1800여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중 바르샤바에 500여명이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LG 공장이 있는 지방 도시를 비롯한 여러 곳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한국 대기업에서 나온 주재원 가족들이 절반을 이루고 있고, 그 외 대사관 공무원들과 개인사업자들, 유학생들이 거주해 있다고 합니다. 개인 사업을 하는 교민들은 주로 식당업을 많이 하시는데 한류의 영향으로 한식과 일식이 호응이 좋은 편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잠시 머물렀다 가는 주재원 가족들이 많다 보니 교민 사회의 전체적인 안정성은 조금 떨어지지 않나 싶었습니다.nbsp▲ nbsp강연 시작 전 인사말을 해주시는 폴란드 대사님nbsp저녁7시부터 시작된 강연은 총 79명이 참석하여 빈자리 없이 꽉 찬 상태에서 활기차게 진행되었습니다.nbsp아이가 한국에서 일어난 윤일병 사건을 보고 국적을 포기하고 군대를 가기 싫어한다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결혼 10년 차인 가정 주부인데 남편이 밖에 나가서 일도 좀 하라고 해서 고민인 분,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남편과 성향이 맞지 않아 짜증이 자주 일어나서 고민인 분, 기독교를 신앙으로 갖고 있는데 불교 신앙을 갖고 있는 아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과연 희망이 있는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있었습니다. 특히 7살 아이가 번쩍 손을 들고 “빙하가 녹고 있어 지구 환경이 걱정돼요” 라고 질문에 대중들의 웃음을 자아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아이에게 왜 빙하가 녹고 있고 지구온난화를 막으려면 어떤 환경실천을 해야 하는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자상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nbsp오늘은 그 중에서 폴란드에서 자란 아이의 교육 문제에 대해 질문한 한 어머님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폴란드 남편과 살고 있어요. 폴란드 식으로 아이들이 배우고 있어요. 한국의 문화에 대해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데, 한국말도 하나도 할 줄 모르는데 어렸을 때 한국에 대해서 조금씩 이야기해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게 좋을지, 나중에 대학 다니고 커서 관심을 가지게 할지, 그냥 놔두는 게 좋을지요?”nbsp“애국적인 관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아이가 폴란드어 밖에 모른다던지, 폴란드어와 영어 밖에 할 줄 모른다는 것이 이 아이의 미래에 훨씬 활동 영역을 넓혀줄까요? 한국어까지 자유롭게 할 줄 아는 것이 이 아이의 미래에 선택의 폭을 넓혀줄까요?예전에는 미국에 있는 교민 2세들이 한국말을 거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30년 전에 교민 1세대가 미국에 갔을 때는 한국이 굉장히 가난했지 않습니까. 첫째는 1세대가 먹고 살기 바빠서 아이들 관리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둘째는 한국에 태어나서 살던 부모도 미국이 좋다고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에 태어난 아이가 미국에서 살지 한국으로 갈 일은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한국말을 안 가르치고 한국 문화도 안 가르쳤습니다. nbsp그런데 지금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교민 아이들은 거의 다 한국말을 잘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그것은 미국에 사는 교민 아이들이 한국말까지 할 줄 아는 것이 자신의 직업 선택과 활동에 유리해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불리한 것이 아니라, 한국말을 할 줄 앎으로 해서 삼성, 엘지, 현대 등 한국 기업에 취직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해졌습니다. 한국의 국가적 위상이 그만큼 높아짐으로 해서 교민들의 문화가 바뀐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통일이 되면 더 크게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통일이 안 되어도 한국의 국가적 위상은 지금 세계 14위 정도인데, 아마 통일이 되면 10위권 안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거든요. 그리고 군대에서 일어난 폭력이나 세월호 사고 등 여러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한류 등 여러 가지 긍정적인 측면도 굉장히 많거든요.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습니다.nbsp그런 면에서 아빠는 폴란드를 이야기하고 엄마는 한국을 이야기하는 갈등 구조가 아니고, 오히려 어릴 때부터 폴란드인으로 살면서도 자연스럽게 한국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아이의 미래에 훨씬 유리합니다. 그리고 한국문화나 글을 배우게 할 때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어릴 때부터 편안하게 접근하는 게 좋습니다. 엄마가 조금 더 지혜롭다면 자연스럽게 1,2년 만에 한 번씩 한국에 데려가서 한국 여행도 하고 한국 문화도 체험하게 하면 좋습니다. 본인이 관심을 가지면 한글학교도 다니게 하고, 폴란드에서 대학을 다니더라도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오게도 하고, 이것이 이 아이가 폴란드인으로 성장하는데도 훨씬 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nbsp대신 강요를 하면 안 됩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가 아이하고 얘기할 때 한국말로 얘기하면 세 살 때까지는 각인 작용이 일어납니다. 또 어린이 때는 각인에 준할 만큼 기억이 오래 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편안하게 엄마가 한국말을 씀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런데 엄마가 몰라서 그렇게 안 하고 폴란드식으로 키웠다면, 그래도 엄마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의 무의식에는 한국의 까르마가 깔려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자연스럽게 접근하면 도움이 됩니다.nbsp그런데 나이 들어서 갑자기 접근하면 아이가 당연히 거부 반응을 일으키죠. 그래서 돈이 조금 들더라도 한국에 여행을 가서, 설악산도 구경하고, 경주도 다녀오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한국 영화도 보고, 이렇게 하면서 아이에게 한국에 대해 조금 호기심을 유발시키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집에서도 엄마가 한국말을 쓰거나 한국 얘기를 하거나 해서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호기심을 먼저 불러일으킨 후에, 본인이 스스로 한국말을 한번 배워볼까 할 수 있도록 자발성을 일으키는 것이 학습 효과가 높습니다. 그래서 동기유발을 자꾸 해주세요. 아이와 대화하면서 엄마가 지혜롭게 기회 제공을 해줘야 합니다.nbsp요즘 한국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폴란드 사람들도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고 배우잖아요. 그런데 왜 엄마가 한국 사람인데 그런 기회를 제공 못할까요? 만약에 엄마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가 더 한국에 거부 반응이 있다면, 엄마에 대한 거부 반응 때문에 그래요. 엄마를 싫어하는 감정을 아이가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면 한국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만약에 그런 문제라면 엄마가 반성을 해야 합니다.nbsp그러니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여행을 한번 다녀오세요. 너무 한꺼번에 많이 가르칠려고 하지 말고, 아이가 한국에서 좋아할 만한 역사 유적이나, 문화체험을 하게 하면서 아이에게 호기심을 유발시켜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시간될 때 아이를 여기 폴란드 한국문화원에 데리고 나와서 차도 마시고 놀고 하면 좋겠다 싶어요.”nbsp스님의 답변에 질문자도 밝게 웃었습니다. 외국에서 다문화 가정을 이루게 되면 아이 교육 문제가 늘 고민이 되기 쉬운데, 스님께서 지혜로운 방법을 알려주셔서 참석한 교민들도 모두 공감하며 기뻐했습니다. nbsp강연을 마치고 책 사인회를 하며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강연 준비를 위해 수고한 봉사자들과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폴란드 대사님 부부도 끝까지 남으셔서 함께 기념촬영을 했습니다.nbsp오늘 숙소는 권영관 한인회장님 댁입니다. 숙소로 돌아오니 밤11시가 넘었습니다. 짐을 풀고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한인회 회장님 부부는 스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데도 꼭 아침을 먹고 떠나시라고 밤을 세워 식사 준비를 하시고 계십니다.nbsp▲ 권영관 폴란드 한인회장님 댁 가족들nbsp스님께서는 늦게까지 한국에서 메일로 보내 온 보고서와 원고들을 점검하시며 업무를 보시다가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내일은 독일 베를린에서 세계 100회 강연 중 열한번째 강연이 열립니다. 베를린에서 계속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2014.09.06. 27,056 읽음 댓글 31개

2014.8.31 세계 100회 강연(6) 독일 뮌헨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여섯 번째 강연이 독일 뮌헨에서 열리는 날입니다.nbsp로마에서 뮌헨까지 1000km를 차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이여서 새벽 3시에 기상하여 3시30분에 로마 Villa Benedetta 수도원을 빠져나왔습니다. 하루 종일 15시간을 부지런히 달려야 겨우 강연 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는 일정입니다. 운전을 담당하고 있는 김경희 법우님이 무사히 우리들을 인도해주길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nbsp4시간을 달려 오전 7시 무렵, 휴게소에 도착해 어제밤 미리 준비해둔 도시락을 펼쳐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은 점심을 먹을 여유가 없으니까 각자 알아서 챙겨 먹으세요” 하시며 식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전기밥솥을 차량에 싣고 다니고 있는데, 최말순 보살님이 밥을 항상 맛있게 해주셔서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꿀맛입니다. 여기다 김치와 김을 비롯해 각 도시에서 교민들이 주신 밑반찬 몇 가지들을 보태어 한상 차리면 최고의 밥상이 됩니다. 맛있게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뮌헨을 향해 달리고 달렸습니다. nbsp▲ 휴게소에 들러 챙겨온 도시락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nbsp차창 밖을 계속 구경하며 달리다가 오전 10시 무렵 산마리노 공화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산마리노는 티타노 산에 자리잡은 인구 3만명의 작은 나라인데, 티타노 산 정상부에 비탈을 따라 아름답고 웅장한 요새와 성벽, 다양한 형태의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곳입니다. 뮌헨까지 가려면 시간이 부족했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30분이라도 둘러보려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절벽 위에 골목골목마다 차량이 모두 들어갈 수 있게 아기자기하게 도로와 건물이 축조되어 있어 절로 감탄사가 나왔습니다.nbsp▲ 우뚝 솟은 절벽 위에 성곽 도시를 조성한 산마리노 공화국.nbsp▲ 산마리노 공화국의 성곽 위에서 바라본 풍경.nbsp스님께서는 성곽을 둘러보신 후 “아무 것도 없는 산꼭대기에도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힘과 정성을 모으니 이런 멋진 나라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이라며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규모라도 서로 협력하고 정성을 모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함을 배울 수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갈 길이 멀어 쓰윽 보고 후다닥 뛰어내려와 다시 차에 탑승했습니다.nbsp점심식사는 차량 안에 남아있는 빵조각으로 대충 때우고 뮌헨을 향해 달리고 달리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8월 마지막 주말이라 휴가 끝나고 돌아오는 차량이 늘어나 이탈리아부터 계속 길이 막혔습니다. 강의 시간 안에 도착하기 어려울 것 같아 마음을 졸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탈리아 국경을 넘고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독일 국경을 넘었습니다. 독일로 넘어오니 또 폭우가 쏟아지고 교통이 많이 정체되었습니다. 오늘은 새벽 3시에 일찍 출발했지만, 교통이 계속 정체되어 늦을 것 같아 뮌헨 강연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강연 시작 시간은 저녁6시였는데, 6시30분에 강연장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nbsp▲ 뮌헨에서 정기법회가 열리고 있는 곳, ASZ 센터. 오늘 뮌헨 강연도 이곳에서 열렸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늦게 도착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 시간을 가졌습니다. 뮌헨에서는 임해지 박사님을 중심으로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을 위한 다양한 실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오고 있던 터라, 오늘 강연장에도 한쪽 구석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nbsp뮌헨 강연에는 총 120여명이 참석하여 빈자리 없이 꽉 차 열띤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뮌헨은 송혜련 보살님을 중심으로 정토열린법회를 해 온지 10여년이 된 곳으로 매년 스님이 오실 때마다 불교를 넘어서서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처럼 좋은 분위기에서 법회를 해오고 계십니다.nbsp강연에는 총 5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결혼한 후 독일에서 살고 있는데,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의 관계 문제로 고민인 32살 여성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립니다.nbsp“결혼을 하고 독일에서 살게된지 3년차 되었습니다. 둘 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각자 주말에 집에 전화를 드리거든요. 전화를 끊고 나서 맨날 하게 되는 말이 ‘왜 우리 부모님은 자주 싸우실까’ 입니다. 저는 엄마랑 자주 통화를 하는데, 맨날 엄마가 아빠 흉을 보는 것으로 전화를 끊게 됩니다. 멀리 떨어져서 살다보니 엄마가 속상해하셔도 옆에서 위로해 드릴 수도 없고, 항상 별로 나아지지도 않는 것 같아 저도 속상하고 전화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nbsp“질문자는 어릴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는 모습을 본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싸우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네요. 그렇다면 이 두 분은 지난 20년간 똑같은 패턴으로 계속 싸우면서 살아오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이 성질이 과연 고쳐질까요? 부모도 자식의 성질을 못 고치는데, 어떻게 자식이 부모의 성질을 고칠 수가 있을까요? nbsp첫째, 애초에 안 되는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지금 질문자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에 질문자가 관여할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물론 부모님이 안 싸우면 좋겠지요. 그런데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데로 다 되나요? 노력해서 될 것이 있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성질을 바꾸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nbsp둘째, 부모님이 그렇게 싸우면서도 아직까지 함께 살아오셨다면 질문자의 판단으로 보면 같이 안 살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20년 간 계속 같이 살고 있으시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문제이지 두 부부 사이에는 문제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부부란 것은 그렇게 싸우면서 사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nbsp그러니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됩니다.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엄마가 전화해서 “니 아빠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 “네, 네” 하세요. 엄마 이야기만 듣고 ‘아빠는 왜 저러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아빠가 왜 저러지’ 하는 것은 아빠가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아빠를 미워하게 되요. 자식이 부모를 미워하면 안 되잖아요. ‘지금 엄마가 힘들어 하구나’ 하는 것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래서 아빠가 문제 있다고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엄마 이야기만 듣고 아빠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아빠가 나쁘다고 받아들입니다.nbsp또 중재를 선다고 ‘엄마가 자꾸 그러니까 아빠가 그러지’ 해서도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이렇게 해라” 해도 자식이 말을 안 듣는데, 자식이 어떻게 부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어머니는 남편과 대화가 안 되어서 딸한테 전화하는 건데, 딸까지도 남편처럼 이래라 저래라 말하면 ‘아이고 쟤도 제 아빠 닮아서 저러나’ 이렇게 됩니다. 엄마는 딸 한테도 성질이 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머니를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를 위로하는 방법은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아이고, 어머니 힘드셨군요”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 어머니의 감정 상태에 빠져서 아버지가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머니 힘드셨군요”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nbsp아무리 자식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부부 싸움에는 끼어 들면 안 됩니다. 내버려 둬야 합니다. 자기들끼리 이혼해서 살더라도 그들은 이미 성년이니까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들 인생은 자기들이 알아서 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교훈으로 삼아서 ‘부부는 누구나 이렇게 싸우고 살긴 하는데, 나도 남편과 이렇게 싸우면 우리 아이들이 참 힘들겠구나‘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른끼리는 싸울 수 있지만, 애들을 위해서는 안 싸우는 게 좋겠구나‘ 이렇게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교훈으로 얻어야지 두 부부의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질문자가 능력이 있어서 부모님의 성질을 고칠 수 있다면, 문제 있는 정치인들도 좀 고쳐주지 그래요? 정치인들이 저렇게 싸우는 것도 놔놓고 살면서 엄마 아빠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그것을 고치려고 그래요? 별 문제 없어요. 사는 게 다 그렇게 사는 거예요.nbsp부모님이 저렇게 싸우면서도 그동안 나를 안 버리고 키워준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나게 고마운 일이예요. 그러니 두 분에 대해서는 항상 ‘어머니 고맙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내가 관여할 일과 관여하지 않을 일이 있는데, 질문자는 관여하지 않을 일에 관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화가 오면 ‘네네, 알았어요. 오늘도 싸웠어요? 이번엔 누가 이겼어요?“ 이렇게 웃으면서 받아주고 즐겁게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면 어머니도 처음에는 성질을 내다가 나중에는 웃고 말아요.nbsp그런데 질문자가 중재를 선다고 엄마편이 되어서 아빠에게 이야기해주려 하거나, 아빠편이 되어 엄마에게 이야기해주려 해도 안 됩니다. 항상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끌려 들어가면 안됩니다. 만약 자기 통제가 안 되면 귀에다 음악을 틀어놓고 “네네” 듣는 척 하면서 안 들어도 됩니다. 엄마의 이야기에 내 감정이 자꾸 빠져 들어간다면, 엄마에게 전화가 오면 귀에다 먼저 이오폰을 꽂아 놓고 계속 입으로만 ’네네, 어머니 그러셨군요‘ 해도 죄가 안 됩니다. 어머니는 답답하니까 하소연 할 데가 없어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지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만 줘도 됩니다.”nbsp질문한 여성은 스님의 답변을 금새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받아주면서 부모님 사이의 문제에 관여하지는 않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며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독일로 간호사로 이민을 와서 살고 있는데 한국에서 부모님이 편찮으신데 계속 돈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서 힘들다는 분, 이스라엘에 파견 근무를 와 있는데 대부분 기독교를 가지고 있어서 이 사람들과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는 분, 스님께서는 왜 세계 100회 강연을 하시는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한분 한분에게 자상하게 답변해 주셨고, 강연은 무려 2시간 30분 동안이나 진행되었습니다. nbsp강연을 마치고 뮌헨에서 얼마전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다양한 실천활동을 해오고 계신 임혜지 보살님을 인터뷰 했습니다. 뮌헨에 살고 있는 교포들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들꼐 영상으로 소개합니다.nbsp 강연 시작 시간이 늦어져서 강연을 마치고 봉사자들과 소감 나누기는 함께하지 못하고 책 사인회만 함께 한 후, 밤 11시가 다 되어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nbsp오늘은 뮌헨에서 독일인 남편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살고 계신 김현정 보살님 댁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습니다. 보살님은 천주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으며 인생이 많이 행복해졌다고 합니다. 스님께 식사 대접을 꼭 해드리고 싶다고 하셔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습니다.nbsp▲ 뮌헨에서 하룻밤을 머물수 있게 집을 제공해 주신 김현정 보살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주신 박수미 보살님, 이스라엘에서 스님 강연을 듣기 위해서 휴가를 내어 온 강철민씨.nbsp스님께서는 새벽 2시가 넘어서까지 한국에서 요청 들어온 원고들에 대해 교정을 보시고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내일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세계 100회 강연 중 일곱 번째 강연이 열릴 예정입니다. 비엔나에서 계속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2014.09.02. 28,362 읽음 댓글 44개

2014.8.30. 세계 100회 강연(3) 밀라노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세 번째 강연이 열리는 날입니다. 스위스 베른시 근교 ‘툰’이라는 곳에 위치한 박향숙 보살님 댁에서 편안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보살님이 정성껏 준비해주신 아침식사를 든든히 먹고 6시에 오늘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nbsp오늘은 스위스 제네바를 지나 국경을 넘어 프랑스를 경유했다가 몽블랑 터널을 지나 다시 이탈리아 국경으로 넘어가는 일정입니다. 스님께서는 어제밤 구글 지도를 보시며 이동 경로를 연구하셨는데, 제네바까지 원래 고속도로를 탈 수 있었으나 국도가 왠지 더 괜찮을 것 같다 하시며 국도를 선택해서 갔습니다. 스님의 탁월한 선택 덕분에 스위스 시골 풍경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스위스는 도시도 깨끗하게 잘 가꾸어져 있지만, 시골도 이렇게 잘 가꾸어져 있다” 하시며, “대부분의 나라들은 도시는 잘 살아도 시골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스위스는 그만큼 국가 전체적으로 경제 수준이 높은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고 하셨습니다. 또 이어서 도착한 제네바 시의 잘 정돈된 도시 구역들을 보시면서도 “우리 나라도 조금만 정신 차리고 서로 협력하면 통일도 하고 이 정도로 발전시킬 수가 있는데, 맨날 서로 싸우기만 하고 있으니...” 하시며 약간의 안타까움을 보이셨습니다.nbsp2시간을 달려 오전 8시 무렵 스위스 ‘로잔’에 들렀습니다. 로잔에는 작년에 정토회와 인연이 되어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스님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인연을 맺어준 김이화씨가 살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아 어제 베른 강연에는 오시지 못했는데, 스님께서 “마침 제네바로 가는 길에 로잔에 들러 김이화씨 얼굴을 잠깐 보고 가자” 하셔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이화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 주자장에서 잠깐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김이화씨는 “스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며 다니면서 차안에서 먹을 빵과 음료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스위스에 처음으로 스님 강연의 인연을 맺어준 김이화씨.nbsp제네바로 가는 도중 휴게소에서 스님의 하루를 올리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습니다. 다시 1시간을 달려 오전 10시 무렵 스위스 제네바를 경유했습니다. 제네바에서는 시내 중심을 지나가다 호수 남쪽 끝부분에 있는 140m 높이의 제트 분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엄청난 힘으로 하늘에 거대한 물기둥을 만든 모습이 장관이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내러서 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nbsp▲ 스위스 제네바. 남쪽 호수가에 위치한 제트 분수 앞에서.nbsp다시 1시간을 달리니 몽블랑 터널이 나왔습니다. 터널에 들어가기 전, 정상 부위에 눈이 녹지 않은 아름다운 몽블랑의 설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휴게소가 나타났습니다. 이곳에서 박향숙 보살님과 김이화 보살님이 싸준 도시락도 먹고 사진도 몇 장 찍고 가기로 하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몽블랑 산은 알프스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4735미터나 됩니다. 날씨가 화창해 몽블랑의 아름다운 설경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nbsp몽블랑의 설경을 배경으로 휴게소 벤치에서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동안 바쁘게 다니면서 제때에 챙겨먹지 못했던 남은 음식물들을 모아보니 꽤 많은 양이 되어, 오늘 점심은 남은 음식물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김치만 먹는 데도 꿀맛처럼 맛있었습니다.nbsp▲ 뒤에 보이는 설경이 바로 알프스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몽블랑.nbsp길고긴 몽블랑 터널을 지나 이탈리아로 넘어왔습니다. 국경을 넘어오니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차이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탈리아의 시골 풍경은 그렇게 잘 가꾸어져 있지 않아 두 나라의 경제 수준이 많이 비교가 되었습니다. 한참을 달리고 달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밀라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현지 교민 분의 소개로 아파트 빈집을 빌려 숙소로 삼고 짐을 먼저 풀었습니다.nbsp스님께서는 숙소에서 간단히 밥과 김치로 식사를 하신 후 저녁 강연장으로 향하셨습니다. 오후 6시 45분쯤, 오늘 강연 장소인 베스트윈스턴 호텔에 도착해 일찍 도착한 교민들과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밀라노 강연에는 현지 교민들 총 30여명이 참석해 조촐하게 강연이 열렸습니다. 강연을 주최한 밀라노 현지 교민 한 분이 “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라고 하자, 스님께서는 “괜찮아요. 준비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상관하지 않는 것이예요” 하시며 따뜻하게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nbsp▲ 밀라노 강연이 열린 베스트윈스턴 호텔.nbsp밀라노 강연에는 총 5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오랫동안 이태리에 거주하면서 갖게 된 한국 사람과의 이질감에 대한 질문과 스님의 법문을 소개합니다.nbsp“밀라노라는 지역의 특성 상 이민을 온 사람보다는 유학을 왔거나 사업을 하기위해 정착한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여기서 10년 넘게 살면서 오랫동안 한국을 지켜봤을 때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내 가족이 살고 있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한 애착과 사랑보다는 한국에 대한 이질감을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 마음 이면에는 오히려 기대나 관심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멀리 살고 있으면서 계속 동질감을 갖게 위한 방법이 있을까요? 조국을 위해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nbsp“지금 이태리에 살고 있고 이태리 남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데 왜 자꾸 한국 사람들과 동질감을 가지려고 그래요? 한국말을 이미 할 줄 아는 것도 동질감이고, 얼굴이 노란 것도 동질감이고, 한국 역사를 아는 것도 동질감이고, 이미 동질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요. 이태리에서 오래 살면 한국에 사는 사람들과 이질감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니예요? 왜 자꾸 자연스러움을 이상하게 보려고 할까요?nbsp형제도 멀리 떨어져 살면 자연히 이질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부부도 한집에 안 살고 오랫동안 해외 출장을 가서 떨어져 살다가 다시 같이 살게 되면 불편해지기 마련입니다. 무엇이든지 오랫동안 지속되면 습관이 됩니다. 생명의 종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역적으로 분화되고 달라집니다. 나눠져 가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움입니다. 안 달라져야 된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입니다.nbsp이태리에 살면서 나는 한국 사람과는 인연을 끊겠다 이럴 필요도 없고, 몸은 늘 이태리에 살면서 머리는 늘 한국만 생각한다 이럴 필요도 없습니다. 늘 한국 생각만 해서, 맨날 한국 신문 복사해서 나눠보고 그러는데, 이태리 시민권을 얻었으면 이태리의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지 지나치게 한국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나의 출신이 한국이니까 한국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이 봤을 때 한국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문제가 무엇일까요?nbsp많은 외국 사람들이 묻기를 “혹시 한반도에 전쟁 나는 것 아닌가” 하고 묻습니다. 아직도 전쟁 우려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은 없어야 한다, 이것이 확고부동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싸우는 것을 보세요.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nbsp첫째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입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전쟁 우려에 대한 질문을 받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nbsp둘째,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고 있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도 굶어죽으면 돕는데... 굶어죽는 문제는 더 이상 자기 나라 문제도 아니고 인류의 문제입니다. 나라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기아 문제는 이제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북한 사람들의 영양실조가 심각하다고 하면,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남한에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같은 민족이라면 더더욱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대서 이것을 외면한다면 현대 인류가 발전시켜 온 세계시민의식 수준에 한참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전근대적인 보복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징벌적 사고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좀 더 고상해져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는 문제는 한국 사람으로서 창피한 일에 속합니다. 이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나머지 문제들은 어느 나라이든지 있는 문제입니다. nbsp여러분들이 정말 고민해야 할 것은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난리 나는 그런 일 말고, 이곳에 사는데 이태리 사람들도 한국을 걱정하는 그런 문제들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내가 태어난 나라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의 수준에 못미친다 하는 문제들, 즉 평화문제, 인도적지원, 인권문제 이런 것들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nbsp이런 문제들이 근원적으로 해결되려면 한반도가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다 임시방편적인 해결책들입니다. 통일이 되면 80 이상이 대부분 해결될 수 있습니다. 통일이 된다면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는 일은 없어집니다. 북한 자체가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려면 10년 20년 걸릴지 몰라도, 통일이 된다면 인권 문제의 개선이 가장 빠른 과정을 걸을 수 있을 겁니다. 내부 갈등도 있겠지만 평화문제도 근원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통일에 대해서는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nbsp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는 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보편적인 관점에서도 부족한 것에 일차적으로 먼저 관심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한국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관심에 대해서는 선택사항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한국 사람들이 해외에 살면서 자꾸 한국만 잘났다고 하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사람들이 앞서가는 세계 시민의식을 가질 때 한국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행사를 해도 한국 사람들은 분리수거를 정말 잘한다더라,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 사람들이 열성적이다, 이런 식으로 인류가 갖는 보편적인 문제에 앞서갈 때 우리 한국이 빛날 수 있다고 봅니다.물론 해외에서도 한국 사회의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한 요소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서명을 하거나 편지도 보내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못지않게 우리가 인류로서 나아가야 할 길에 더 많은 기여를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물질 수준에서는 유럽에 비해 조금 뒤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만, 정신적인 힘은 너희들보다 더 있다 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면 굉장한 자긍심이 될 수 있습니다. 너무 물질적인 것에 치중되지 않았으면 해요.”스님께서는 해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보다 인류 보편적인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질문자도 청중들도 모두 스님이 제시해주시는 더 큰 방향에 깊은 감명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조촐하게 진행된 강연이었지만, 내용은 깊고 폭넓은 이야기가 오가는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nbsp강연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참석한 교민들을 위해 책 사인을 해주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수고한 봉사자들과 소감 나누기를 함께 하셨습니다. 봉사자들은 “스님께서 밀라노에 온다는 소식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설레였다”고 하면서 “스님을 바로 앞에 두고 마음나누기를 하고 있는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며 감격스러움을 표현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봉사자들 한분 한분의 소감을 모두 듣고 단주를 하나씩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행복하기를” 하고 기도하셨습니다.nbsp숙소로 돌아오니 밤11시가 다 되었습니다. 오늘은 유럽 강연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김선희 법우님이 구토를 하고 몸이 계속 안좋았습니다. 장시간의 차량 이동으로 스텝들이 좀 지쳐있어서 최말순 보살님이 시장을 보셔서 간단한 상을 차려주셔서 조촐하게 먹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도 몸이 지친 스텝들을 보시고 조금이라도 강연을 일찍 마치려고 하셨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하시며 스텝들의 건강을 살피셨습니다. 기운을 내어서 다시 내일 일정을 시작해 봅니다. 내일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세계 100회 강연 중 4번째 강연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nbsp

2014.08.29. 29,403 읽음 댓글 43개

2014.8.16. 동북아 역사 대장정 일곱째 날 - 청산리 전투터, JTS 중국지원 사업장 방문

65279nbsp동북아 역사 대장정 일곱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기상시간을 2시 50분으로 당기고 3시 30분에 출발했습니다.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은 화룡 새벽시장에서 아침거리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빡빡한 일정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에 참가자들은 시장 구경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새벽시장을 달궜습니다. 각종 과일과 꽈배기, 만두, 피자 등의 시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을 사와서 버스에서 하나씩 풀어가며 나누어 먹었습니다. 조끼리 서로 음식은 교환하기도 하고 귤 한 쪽까지도 나누어 먹으니, 7박8일 일정 중 마지막 아침식사답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버스는 벌써 청산리 지역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원래 스님은 청산리 계곡 밑에 농장을 만들어 수련원을 짓고 우리나라 청년들이 말도 타고 활도 쏘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게 할 계획이었는데,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실행에 옮기겠다는 스님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nbspnbsp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당시 주민 20여 가구가 살았다던 백운평 자리에 모여서 잠시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토벌작전을 개시하자 김좌진장군의 부대는 화룡의 언덕에서 회의를 한 후 청산리 계곡으로 후퇴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와 함께 우리독립운동 역사에서 큰 승리로 꼽을 수 있는 전투이고 청산리 일대에서 일주일간 일어난 여러 교전들을 통칭하여 넓은 의미로도 부른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절대적인 전투력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로 적군을 유인해서 기습하거나 야습하는 등의 방법으로 많은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얘기해 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승리를 자랑스러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것을 기억하고 이를 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시며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출발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산책하는 느낌보다는 진군을 한다는 마음으로 서둘러 가자는 스님의 말씀에, 우리 청년들은 독립 열사님들의 지난 행보를 상상하면서 사뭇 비장하게 산길을 올랐습니다. 독립군들이 적군을 유인한 후 삼면에서 기습을 했던 바로 그 현장에 도착해서, 제를 지내고 희생된 모든 원혼들의 원한을 달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를 드리기 전에, 스님께서는 돌아가신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따르다가 희생된 일본 젊은이들의 원혼 또한 미워하지 말고 달래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주지시켜 주었습니다. 일본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를 미워해야 한다는 그 뜻을 한번 더 되새겨보니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nbsp6527965279nbspnbsp숨이 찰만큼 빠른 걸음으로 올라오느라 힘들었지만, 기도가 끝난 후 다 같이 주변의 상쾌한 공기를 느껴보니 한층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스님께서도, 원래는 버스를 계곡 입구에 세우고 산을 더 많이 올라야 하는데 일정이 급하게 바빠져서 차를 타고 백운평까지 오게 된 것이 아쉽다고 말씀하시니 우리 청년들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청산리 전투터 기념탑 앞에서 잠시 내려 단체 사진을 찍고 강 건너 북한의 무산시를 보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오늘 중국 JTS에서 지원하고 있는 양로원 및 고아원, 장애자 시설 3곳을 지원하기 위해 여기서 참가자들과 헤어지고 용정으로 출발하셨습니다. 우선 JTS에서 운영하는 옥수수 국수공장에 들러 국수 생산 상황을 점검해 보고 조선족 자치현마다 운영되는 양로원 관계자들에게 국수를 나눠주신 후 이번 역사기행팀 편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들을 가지고 고아원, 중증 장애아 시설, 양로원을 차례로 방문하셨습니다. 주로 탈북 한 여성들이 중국에서 낳은 아이들을 수용한 고아원에는 23명의 아이들이 지내고 있었는데 전직 공무원이었던 분이 퇴직 후에 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국가의 지원이 미치지 못하는 그늘을 개인이 메꾸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밝은 표정의 원장님을 보면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전체 시설을 둘러보고 아이들 현황을 설명 들으신 후 아이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 준비해 간 선물을 직접 나눠 주셨습니다. nbspnbspnbsp이어 중증 장애아와 노인들이 지내고 있는 곳을 찾아갔는데 이곳 원장님은 작고 통통한 여성이었지만 성격이 밝고 시원시원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좋게 만드는 분이었습니다. 역시 공직에 있다가 퇴직하여 이런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데 사업 수완이 좋으신지 한 쪽에는 또 하나의 건물을 짓고 있었습니다. 전날 스님께 드릴 감사패를 급히 준비했는데 용정에서는 케이스를 구할 수가 없어서 예전에 본인이 탔던 상의 케이스로 대신했다고 솔직하고 유쾌하게 고백하자 스님께서는 케이스는 개인에게 소중한 것이니 감사패만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는 중증 장애아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원장님의 요청으로 건물 난간에 붙여놓은 플랭카드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nbsp마지막으로 국가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에 방문하여 선물을 나눠드리고 노인들이 거주하는 방을 일일이 열어보고 침대에도 누워보시면서 머리맡의 사물함 때문에 노인들이 다칠 수 있다고 걱정하시고 나무 침대 위에 얇게 깔린 매트리스를 보시고는 이 부분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관계자들과 상의하시며 꼼꼼하게 점검해 보셨습니다. 건물 앞에 모여 계셨던 할머니들은 낯선 방문객들을 매우 반가워하셨고 스님과 사진 찍기를 원하셔서 밝은 표정으로 소녀처럼 포즈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어가면서 예전에는 국가가 지원해주던 복지 부분이 오히려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하는데 중국 JTS에서는 이런 취약계층에 대해 지속적인 지원을 해나갈 계획이라 합니다. 양로원에서는 감사 깃발을 마련하여 스님께 감사의 뜻을 나타냈는데 제3세계의 어린이 뿐만 아니라 노인의 구호에도 관심을 갖고 지원을 확장해가는 JTS 사업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국수를 분배하면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던 점에 대해 구호활동에서는 공정하게 나눠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며 인도에서의 구호 경험을 나눠주셨습니다. nbsp스님께서 양로원, 고아원, 중증 장애우 시설을 방문하는 동안 참가자들은 평화재단 이승용 사무국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강 건너 북한의 무산시를 가까이 볼 수 있었고 독립투사들의 애환이 서린 일송정과 용정중학교를 둘러보고 스님의 7일째 강의를 듣기 위해 스님과 강의 장소에서 만났습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오늘 오후에 양로원과 고아원 등을 방문하셨던 내용을 공유해 주신 후 이어서 7일간의 동북아 역사 대장정에 대해 총 정리하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이제까지 우리는 요하 문명을 시작으로 고구려 역사를 보고 발해의 역사를 보아왔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이어 받았고, 고구려는 부여의 문화를 이어받아왔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nbspnbspnbspnbspnbsp모든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우리가 지금 통일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뭘까요? 현재 남한은 통일에 대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만 의지가 없고, 북한은 현재 통일을 주도할 역량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남한은 북한에 대해 어떠한 자세와 포용력을 가지냐에 따라 새로운 100년의 비젼을 만들 수도 있고, 아주 위험한 위기의 국면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는 말씀으로 우리 청년들에게 커다란 과제를 남겨주셨습니다.nbsp또한 미래지향적인 비전으로서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게 하셨습니다.“동북아 역사 대장정에 적지 않는 돈을 투자하고 입맛에 맞지 않는 식사와 짧은 취침시간을 감수하면서까지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에 다시 한 번 생각하였으면 좋겠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이렇게 마지막 강의가 끝나자 7월에 20여일간의 단식 후 보식을 하고 계신 상태임에도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청년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민족의 자긍심을 깨워주시는데 열정을 다해주신 법륜스님께 참가자들은 힘찬 박수로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나누기를 한 후 이번 역사기행을 위해 수고하신 분들에 대한 소개와 감사의 뜻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도 초기부터 법륜스님과 역사기행을 같이 해 오셨던 방학봉 교수님 내외분이 참석하여 참가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nbsp이렇게 7일간의 동북아 대장정이 막이 내려갑니다. 법륜스님께서는 참가자 일행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중국내 JTS 사업 점검차 내일 북경에 가셨다가 귀국하신다고 합니다.참가자들은 심양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실었고 법륜스님께서는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에 심양 공항에 도착하기 위해 밤새 길을 달려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참가자들은 버스에서 마지막 나누기를 한 후 광활한 대륙을 호령하던 조상들의 혼과 기상을 가슴에 담은 채 7일간의 피곤을 풀기라도 하듯 하나 둘 잠자리에 들어갑니다.nbspnbspnbspnbspnbsp오늘 낮 기행부분은 임정수님이, 강의 속기는 이동훈님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2014.08.18. 17,623 읽음 댓글 3개

2014.8.7. 동북아 역사기행 다섯째날 - 백두산, 비룡폭포 소천지, 지하삼림, 돈화

오늘은 동북아 역사기행 다섯째 날로서 백두산과 발해 유적지 일부를 돌아보는 일정입니다. 어제 날씨는 좋았으나 남편 산문이 폐쇄되어 오르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인지 4시 50분부터 버스에 오른 참가자들의 표정에서 천지를 보고싶어 하는 열망과 설레임이 느껴졌습니다. 백두산 아래 마을 이도백하는 다른 곳과는 달리 아침 공기가 싸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고 맑아서 상쾌했습니다. 여름 휴가철이 겹친 시기이고 최근 들어 중국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라 사람들이 많으면 고생한다고 아침밥은 옥수수 두 개씩으로 해결하고 서둘러서 출발하였습니다. nbsp이도백하에서 백두산 북편산문까지 가는 40여분 동안 자작나무와 각종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원시림을 보며 마음까지 시원해짐을 느꼈습니다. 북쪽산문 매표소 입구에 버스가 다다를 무렵 원시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천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입장 시각이 한참 남았고 참가자들이 추울까봐 스님께서는 걱정하시며 미리 나가지 말고 버스에서 대기하라고 하셨습니다. 6시쯤 버스에서 내려보니 우리 일행이 1등일 줄 알았건만 먼저 와 있는 중국 관광객들이 꽤 되어 다들 놀라워했고,nbspnbsp스님께서는 청년대학생 일정에서는 30분정도 더 앞당겨봐야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6시 30분 매표시간이 되자 표를 사기위해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매표소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놀라워했고 우리나라에 비해 공중도덕이나 줄서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것에 대해 모두들 한마디씩 하며 표를 기다렸습니다.nbspnbspnbsp오늘 첫 번째 일정인 천지를 보기 위해 셔틀버스와 승합차로 두 번 갈아타고 올라갔습니다. 스님께서는 멀리 보이는 백두산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아래에서는 잘 보여도 또 올라가면 못 볼 때도 있습니다.”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승합차에 오르니 운전기사가 우리나라 가수가 부르는 신나는 가요를 틀어주고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 같은 느낌이 나도록 달리는 바람에 모두들 짜릿한 즐거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느끼며 15분 정도를 달려서 천지에 도착했습니다. 듬성듬성한 구름 사이로 활짝 열린 파란 하늘 아래 그 보다 더 짙푸른 천지 물과 웅장한 바위산들의 위용에 흥분한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백두산 정상을 좀 더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하시기 위해 여러 번 왔다갔다 하시며 챙기셨습니다. nbsp조금 춥기는 했지만 모두들 개인사진과 스님과 함께 하는 조별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올라갈 때와 같은 승합차를 타고 다음 순례 장소인 비룡폭포로 향했습니다. 비룡폭포로 갈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주차장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참가자 중 한 명이 휴대전화를 잃어버려서 찾지 못할 것이라고 당황하며 걱정하고 있었는데 중국관광객이 주워서 경찰에게 가져다 준 것을 우리 스탭에게 알려주어 찾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 일행과 스님까지 모두 박수를 치고 그 분들께 감사를 표했습니다. 20인승 셔틀버스를 잠시 타고 내린 후 1.2Km쯤 걸어가니 군데군데 누런색 유황 노천온천이 보이고 길게 내려오는 새하얀 물줄기를 따라 눈을 돌리니 멀리 회색의 화산 지형 사이로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비룡폭포가 보였다. 따가운 햇살이지만 스님께서는 한 명 한 명 비룡폭포를 배경으로 개인 사진을 찍어 주시고 비룡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원리에 대해 잠시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소천지로 향했습니다. 소천지는 작은 화산호인데, 모양은 둥글고 아담하며 호의 안은 평탄해 보였습니다. 주변에 사스레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있어서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함께 잔잔한 물에 비춰진 모습은 환상적이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스님을 따라 돌로 포장된 사스레나무 사잇길로 산책을 하니 고요하여 저절로 명상이 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소천지를 나와 스님을 따라 800여 미터를 걸으니 건너편에 위치한 녹연담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보았던 소천지는 맑은 물인데 비해 녹연담에 고인 물은 신비하게도 옥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도 이렇게 예쁘게 만들 수 있을까 싶은 폭포가 세 줄기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는 몇 마리의 노란 잉어를 보고 함께 간 일행들은 “이렇게 넓고 깨끗한 연못에서 살고 있는 너희들은 참 행복하겠다.”하여서 함께 웃었습니다.nbspnbspnbsp지하삼림을 가기 위해 셔틀버스 주차장에 줄을 서려고 하니 수많은 인파로 인해 많은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6년 전 쯤에 비하면 한국 사람은 거의 볼 수가 없고 중국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을 보니 백두산이 중국인들에게도 의미가 있고 인기가 있는 곳임이 실감이 났습니다. nbspnbsp지하삼림은 말처럼 땅속에 숲이 있는 것은 아니고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함몰된 넓은 면적의 땅에 숲이 형성된 곳을 말하며 주변을 삥 둘러서 절벽이 있으므로 마치 땅 아래에 숲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이 지역은 용암이 갈라진 틈 사이로 깊고 좁은 계곡을 이루어 물이 흐르거나 지하로 흘러가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삼림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 활엽수들로 원시림을 이루고 있으며 쭉쭉 뻗은 나무, 오래된 이끼 위에 다시 자라는 어린 나무, 쓰러진 나무, 연리지나무 등 온갖 나무들뿐만 아니라 풀향기와 꽃향기 등이 어우러져서 스님께서는 “지하삼림은 가는 길 자체가 볼거리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홍신작가께서 ‘대발해’ 글을 쓰실 때 지하삼림을 보고 발해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그렸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nbspnbspnbsp1시간여의 지하삼림 순례를 마치고 버스 승차를 위해 또다시 줄을 서서 기다린 후 버스에 올랐습니다. 스님께서는 점심 먹으러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백두산 천지 잘 봤느냐며 물으시고 “백두산은 산을 넘어 민족의 혼입니다. 백두산을 본 공덕으로 맑은 기상을 갖고 살았으면 합니다. 공동체의 소금과 빛이 되고 천지를 본 힘으로 통일의 힘이 되세요.”라고 말씀하셔서 뭉클한 감동과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힘들게 다니느라 몸이 피곤한데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밥을 빨리 먹으면 체하니 조심하라고 당부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어제 저녁에 맛있었지만 아쉽게도 넉넉한 시간으로 즐기지 못한 식당에 다시 가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하고 2시 50분쯤 발해의 첫 수도인 돈화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차에 타자마자 새벽부터 서두르느라 힘들테니 돈화가는 길에 2시간쯤 쉬라고 하셨고 그 말씀이 떨어지기도 전에 모두들 달콤한 낮잠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nbspnbsp5시쯤 돈화의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동모산성은 대조영이 영주에서 탈출해 와서 이 곳 돈화에 자리잡은 후 세운 산성입니다. 주위는 평지이고 얕은 야산에 산성을 쌓은 것이라 주변에서 오는 적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대석하가 흐르고 있고, 우물도 있고, 병영자리, 거주지도 있다고 합니다. 평지성은 영승유지로 추정되지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nbsp그리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육정산에 발해 왕실의 공동묘지가 있는데 여기서 정혜공주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발해인의 기록물이 나왔는데,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발해인 스스로가 기록한 기록물은 전혀 없었습니다. 최근에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는데, 아직 중국 정부가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이 공개될 때 발해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오늘 일정의 마지막으로 돈화 시내에 있는 강동 24개석을 보러 갔습니다. 녹슬고 덜컹거리는 철조망 속에서 함부로 방치되고 있는 듯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강동 24석은 건축물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아직 정확하게 무엇에 쓰였던 것인지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고 합니다. nbsp시내의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이어 저녁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오늘 일정을 돌아보시고 음식 먹고 체한 분들을 통해 욕구를 조절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작은 실수를 통해 더 큰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오늘 백두산 잘 다녀오셨지요? 피곤하지요? 구경하는데 6시간이나 걸려 점심이 늦었습니다. 일반 관광객은 우리처럼 자세하게 안 봐요. 천지 호수가 제일 크게 보이는 것은 북편이에요. 서편에서는 작게 보여요. 남편에서는 북한쪽 계단 내려가는 것이 안 보여요. 그런데 북편은 혼잡한 것이 문제에요. 하지만 오늘은 아주 한가한 편이었어요. 오늘 구경을 아주 잘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스님이 그렇게 주의를 주셨는데도 10명 이상이 체해서 강의를 못 듣고 있는 걸 예를 드시면서“허기질수록 음식을 조금 먹어야 합니다. 25일 단식했으면 25일 넘게 음식을 거의 안 먹어야 해요. 폭식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피곤한데다 과식하고 버스를 계속 타서 체할 조건이 됐어요. 음식 먹는 까르마를 자기가 조절해야 합니다. 몸을 통제 못하면 성질도 통제하지 못해요. 자기 몸을 갖고 실험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해요. 이 세상에 공부거리가 아닌 게 없어요. 한 순간 놓치면 몸이 고생이에요. 하지만 작은 실수를 통해 배우면 더 큰 실수를 예방할 수 있어요.”nbspnbsp“인생이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걸 통해 뭔가를 배우는 것이에요. 상황은 내 뜻대로 할 수 없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내게 유리하도록 바꿀 수 있어요. 이것이 수행이에요. 우리는 욕구대로 되어야 기분 좋아하는데 미래를 위해 몸을 위해 결국 나를 위해 욕구를 조절해야 합니다.“ nbsp이어서 오늘 주제인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의를 계속하셨습니다. 발해는 처음 당나라에서 멀리 옛 고구려 북쪽 국경인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위쪽 흑수말갈을 흡수하여 영토를 넓혔는데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통치했고 5경 중 3개 경인 중경, 상경, 동경을 이 지역에 두어 발해 중심지로 삼았다고 하셨습니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영토가 큰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오늘날 발해 역사가 논쟁거리가 되니까 중국이 발해 유물을 공개하지 않고 현재 흑룡강성의 상경용천부만 공개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학교 역사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상경용천부를 보게 되는데 학교에서는 발해 석등사진 정도만 다루죠?nbspnbsp발해에 대한 기초 지식이 너무 없어요. 특히 신라와 발해가 싸워서 발해를 계승하는 자세가 부족했습니다. 실학이 들어오면서 발해 역사 연구가 비로소 시작되었어요.nbspnbsp 발해는 잃어버린 역사입니다. 되찾아야 해요. 역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역사를 잊는 거예요.“ nbsp유대인은 자기 말은 지키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탈무드를 통해 민족의 역사, 신앙, 문화를 학교와 가정에서 철저히 가르쳐서 매우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반면, 연변 조선족은 말은 지켰지만 조선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비교하시면서 역사기행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중국내 고구려, 발해 유적지 안내 책과 우리 말로 된 우리 역사책과 중국안 독립운동가 이야기책을 보급하는 일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우리나라 역사 교육은 왜곡되어 있어요. 국수주의적 역사를 가르치라는 게 아닙니다. 내 존재를 이해하려면 나의 뿌리와 사회적 관계를 알아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예측하지 못해요. 교사는 너무 디테일한 지식에 매달리지 말아야 해요. 줄거리를 잡아 핵심을 가르치고, 의미를 부여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발해에 대한 객관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세워지는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nbspnbsp“중국 사서에는 발해를 고구려의 별종 즉 고구려의 한 무리라고 나와요. 고구려 지배계층이 권력 투쟁으로 분열할 때 중간층은 내 나라를 지켜야할 이유가 없어져요. 이럴 때 지도자는 백성들의 삶과 가까이 있고 지도부부터 힘을 합해야 합니다. 세월호 문제가 났을 때 여야가 분열하여 싸우면 국민은 양쪽이 똑같게 느껴지고 피곤해요. 고구려도 이런 상태에서 강력한 외부 공격에 지배 계층이 항복하고 고구려 유민들이 왕족을 내세워 저항하지만 실패하고 말아요. 고구려가 멸망한 후 696년 거란족 이진충의 난이 난 틈을 이용해 고구려 대조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영주를 탈출하여 추격하는 당군을 격파하고 진국을 세웠어요. 진국이란 큰 나라라는 뜻이에요.“ 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발해의 흥망성쇠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 처음에 당은 발해가 변방 국가라서 별로 관심이 없었고 당나라 측천무후도 가능한 전쟁을 안 하려고 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셨습니다. 대조영이 죽자 큰아들 무왕는 당나라에 강경 입장이라서 당나라와 연합하는 흑수말갈을 치려고 했는데 대문예가 전쟁을 반대하고 당나라로 도망을 갔지만 결국 흑수말갈지역을 흡수하여 발해 영토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왕이 죽고 문왕의 문예부흥 시대를 설명하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문왕은 정벌 중심이 아닌 문치를 하고 당나라와 친하게 지냈어요.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그리고 동경용원부로 옮겼어요. 정혜공주는 문왕의 셋째 딸이고 정효공주는 다섯째 딸이에요. 왕위에 48년이나 있어서 치적이 깁니다. 산둥반도 절도사로 고구려 사람인 이정기가 임명되어 제나라를 세웠는데 제나라와 발해는 아주 사이가 좋았어요. 문왕은 당나라와 직접 부딪치지 않고 거란이나 일본과도 사이가 좋았어요. 다만 신라와는 전쟁은 안 했지만 관계가 소원했던 것 같아요. 남경남해부는 신라와 일본로는 왜와 연관이 있어요.nbspnbspnbspnbsp발해는 229년간 지속할 때까지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어요. 발해를 공격하거나 위협하는 세력이 없었어요. 그런데 뜻하지 않게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침공하여 부여성이 함락되고 상경용천부를 공격하자 왕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당나라가 먼저 멸망하고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가 멸망합니다. 이들은 자체 붕괴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결국 중국 본토는 송나라가, 북쪽은 요나라가, 남쪽은 고려가 건국됩니다.”nbsp발해는 고구려 역사의 전통성을 계승했고 발해사와 독립운동사 그리고 상고사를 새롭게 정비하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면서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대발해가 왜 갑자기 멸망했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입니다. 일본 학자는 백두산 폭발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 폭발은 폼페이 화산보다 100배 이상 위력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주변국도 혼란기라서 갑자기 망한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발해 유물로는 내일 가는 상경용천부와 발해석등, 대불상 그리고 영광탑, 강동24석 등 많지 않아요.“nbspnbsp 강의가 끝나고 호텔로 이동하여 한 대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짐 운반용으로만 사용하고 각자 걸어서 숙소로 올라갔습니다. 내일은 발해 유적지와 봉오동 전투터, 그리고 두만강 순례를 위해 4시에 출발 예정입니다.

2014.08.09. 17,855 읽음 댓글 5개

2014.8.5. 동북아 역사기행 셋째날 - 국동대혈, 국내성,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역사 기행을 시작한 지 오늘은 셋째날입니다. 오늘 오전에는 고구려 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국동대혈과 국내성,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우는 장군총, 그리고 드넓은 영토를 확장했던 광개토대왕의 비와 릉에 갑니다. 그리고 이 곳 집안에서 점심을 먹고 북로를 따라 채석강, 관마산성, 서대묘, 천추묘를 차창으로 본 후 통화를 거쳐 백두산 관광지 거점인 백산을 향해 갈 예정입니다. nbsp 어제 공지했던 대로 국동대혈로 가는 버스는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하는 인사말이 떨어지자마자 새벽 4시에 바로 출발했습니다. 무릎관절이 아프신 한분의 보살님만 빼고 3대의 버스가 새벽의 어둠을 뚫고 압록강을 끼고 달려갑니다. 출발할 때는 밖이 어두워 산을 어찌 올라가나 걱정스러웠는데 이내 환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맞이하는 이 새벽여명이 이 역사기행을 다니면서 생기는 역사의식과 같게 느껴집니다. 새록새록 솟아나는 역사의식을 맛보는 기쁨이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저녁 늦은 시간까지의 살인적인 일정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nbspnbsp65279nbsp국동대혈은 국내성의 동쪽에 있는 큰 굴을 의미하며, 고구려의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30분가량 올라갑니다. 국동대혈이 있는 산은 개인이 관리하고 있는 산에 위치하고 있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올라가는 중에 오토바이를 탄 현지인이 쫓아와서 중국공안인줄 알고 살짝 긴장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산에 투자한 사람이 고용한 관리인이라고 하여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관음보살을 보시고 있는 관음굴에 도착하였습니다. nbsp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중국인들처럼 행복과 건강과 재물을 위해 빌어 봅니다.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니 장상애라고 쓰인 큰 바위벽이 나타납니다. 중국에서는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긴 장자를 쓴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제2대왕 유리왕에게 권력가의 딸과 사랑하는 애첩이 있었는데 둘이 싸우다가 집으로 돌아가버린 애첩을 데리러 갔다가 혼자 돌아오면서 이 곳에서 황조가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장소라고 스님께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참가자 중 한 국어 선생님이 황조가를 멋들어지게 낭송하는 것을 들으면서 사랑 바위를 보니 정말 애닯은 연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nbsp다시 조금 더 올라가니 드디어 앞뒤로 시원하게 뚫린 국동대혈이 나타났습니다. 하늘로 통한다고 하여 통천동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정성스레 제단을 차리고 옥기 문명을 발달시킨 한나라 환인하느님, 청동기를 발달시킨 홍산문명을 기반으로 배달을 세운 환웅천왕님, 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님, 그리고 부여의 해모수님, 고구려의 동명성왕 이렇게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해가 뜨기 전 지내는 이 제사에서 신령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스님께서 고구려의 후예로써 1400여 년만에야 찾아옴을 참회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동아시아 공동체 출현을 천지신명께 간절히 기원하셨습니다. 제물로 올린 음식과 술로 다함께 음복하고 나서 둥글게 서서 남북한이 하나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며 ‘우리의 소원을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국동대혈에서 걸어내려오니 바로 앞에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먼저 내려온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두고도 북녘 땅에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강물에 손발을 담그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습니다. 다시 숙소로 가기 위해 압록강변을 따라 내려가니 올 때 보이지 않았던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 멀리 자전거타고 가는 사람,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아낙네, 물가에서 놓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반갑게 느껴집니다. 건너편은 자강도의 만포라는 곳인데 이곳과 집안사이에 하루 한번씩 기차가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 빨리 이 한반도가 평화통일이 되어 만포, 평양을 통과하여 집으로 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봅니다. nbspnbspnbsp 아침 식사 후에는 고구려의 산성인 환도산성과 짝을 이루는 평시성인 국내성을 한바퀴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9시도 안된 시간인데 햇볕이 벌써 따갑게 내리쬡니다. 북쪽과 동쪽 성벽의 모서리 지점에서 순례를 시작하면서 국내성에 대해 스님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국내성은 동쪽, 서쪽 길이가 짧고 남쪽, 북쪽 길이가 긴 직사각형 모양입니다. 가장 공격받기 쉬운 곳은 성문과 모서리입니다. 고구려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 공자성을 쌓았으며, 모서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치성을 쌓거나 각지기 않게 둥글게 굴려서 쌓았습니다. 동쪽 성벽이 가장 파괴가 심한데 이유는 도시화가 되면서 사람들이 이 돌로 집을 짓거나 때론 성벽을 허물고 그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북쪽, 서쪽은 보존 상태가 그래도 조금 좋고 남쪽은 현재 복원중입니다.” nbsp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성벽 위에 나물을 말리거나 빨래가 널려진 모습을 보면서 425년 동안 강성했던 한 나라 수도의 유적지가 이렇게 남의 땅에서 푸대접받고 있는 모습 속에서 처량함과 슬픔이 느껴집니다. 멀리 북쪽으로 어제 보았던 환도산성이 보입니다. 서쪽 벽에는 통구하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해자기능을 하고 있는데 백암산성, 환도산성, 오녀산성 그리고 오늘 국내성에서 자연지형을 잘 활용하는 고구려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감탄하게 하는 기술과 지혜는 한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연구를 거쳐 이루어졌을 것인데 틀리면 묻고 잘못되면 고치고 안 되면 다시 하는 우리 정토행자들은 고구려의 후예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nbspnbspnbspnbspnbsp통구하는 남쪽 성벽 앞을 흐르는 압록강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따라 걸으면서 스님께서는 북한돕기를 시작한 계기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주셨습니다. 1995년도에 북한 압록강에 대홍수가 나고 나서 식량난이 심해졌다고 들으셨는데 처음엔 믿지 못하다가 가이드가 직접 배를 태워 비참한 실상을 보시고야 북한 돕기에 적극 뛰어드셨다고 합니다. 북한 아이들은 배고프지만 인도의 아이처럼 “박시시”하면서 구걸할 자유도 없다는 것을 아시고 북한아이를 돕기를 발심하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이 세상의 어느 한 곳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 비만으로 고생하고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는 이러한 불균형을 생각하면 어이없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18년nbspnbsp동안 주어진 처지에서 최대한 북한을 돕고자 노력하신 스님과 이제는 JTS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 통로가 있음에 대해 고마움을 느껴봅니다. nbsp다음은 2000년 동안 그 웅장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군총으로 향합니다. 장군총에서 스님과 조별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사료가 아쉽게도 없습니다. 중원을 차지했던 중국의 입장에서 고구려를 변방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무덤은 왕의 무덤이 아니라 장군의 무덤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 같습니다. 장군총은 7층 22계단으로 되어 있고 전체 돌이 1100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돌에 홈을 새겨서 돌이 밀리지 않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돌이 밀리지 않도록 주위에 호석이라 불리는 받침대를 3개씩 두었는데 12개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하나가 없어진 곳은 찌그러져있습니다. 그리고 관을 두는 석실의 뚜껑을 덮는 돌이 무게가 50톤이나 됩니다. 또한 지반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땅속에 진흙과 강에서 나온 돌을 넣었습니다. 진흙은 지진이 발생할 시 탄력성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5층에 석실이 있었고 꼭대기위에는 누각이 있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장군총 뒤쪽엔 제단과 함께 장수왕의 후비무덤으로 보이는 배묘가 있는데 그 모양이 고인돌과 거의 같습니다. 이곳 집안에서 많이 발견되는 고구려의 돌무더기 무덤양식에서 청동기시대 유행했던 고인돌묘가 조금씩 변화되어 옴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민족의 정통성에 대한 줄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어 한민족의 자손으로써 긍지가 느껴집니다. 이곳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빨리 통일이 되어 육로로 통해 이 곳 집안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nbspnbspnbspnbspnbsp다음은 광개토대왕비로 이동을 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때 만든 것으로 높이 6.39m, 너비는 1.34m에서 2m입니다. 장수왕은 그의 아버지가 이룬 역사를 기록하고 건국부터 호태왕까지의 역사도 기록했습니다. 중심은 호태왕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비석은 어마어마한 큰 돌을 자연스럽게 다듬고 글자를 새긴 것인데, 웅대한 자연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nbsp nbsp광개토대왕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광개토대왕릉이 있습니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로 죽음을 맞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확장했던 광개토대왕의 묘입니다. 그 업적에 걸맞게 묘의 크기는 장군총의 크기보다 훨씬 큽니다. 장군총은 한변의 길이가 32.6m이지만 광개토왕릉은 65m나 되고 호석도 한 변에 5개나 둘러져 있습니다. 그러나 급히 쌓다보니 강돌이 아닌 산돌까지 넣고 쌓아서 많이 무너져 상당 부분이 돌무지처럼 변했습니다. 제대로 된 발굴과 보존작업이 시급해 보이는데 남의 나라에 있어 손쉽게도 이런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애석하게 느껴집니다. nbspnbspnbspnbspnbsp 집안으로 다시 돌아와 점심을 먹고 큰 돌무지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갔습니다. 이 일대에서 가장 크기가 큰 묘는 천추묘라고 합니다. 서대묘도 보고 내일 만나게 될 백두산에 가기 위해 백산으로 출발했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도중에 계곡에서 아침에 산 수박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통화를 가는 길은 집안으로 가는 길 중 북로인데nbspnbsp가는 길에는 관마산성 성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산과 산이 조금씩 좁혀들면서 마주 보는 곳에 병목현상이 생기는데 이곳에 적을 효율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산성을 쌓은 곳입니다.nbsp백산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전처럼 로비에 짐을 가지런히 놓은 채 바로 강의장으로 모였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답사의 부족한 부분을 정리해 주시다가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해서는 띄어쓰기 오류, 지워진 글자로 인해 생긴 임나일본설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표와 지도를 보고 우리 민족의 시대적 흐름을 알기 쉽게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우리가 살았던 지도를 보면 만주벌판, 북경, 산동반도, 내몽골이 다 배달나라의 영역에 있는데 점점 축소되어 현재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요하문명은 배달 문명의 중심지역이며 그 일파가 서남쪽으로 내려가 중원에 근접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은나라가 멸망하고 일부 유민은 고조선지역으로 철수하고, 또 일파가 동쪽으로 이주해서 평양까지 내려오는데 이쪽까지 고조선의 영역입니다. 부여시대는 동북쪽은 부여가 차지했고, 반도 쪽으로 마한, 진한, 변한, 옥저, 동예. 동쪽은 여진족, 서북쪽은 거란족, 선비족 흉노족이 분포하고 있었어요. 고구려가 건국되면서 만주벌판 국가들은 고구려로 통합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의 과정에서 당나라의 힘을 빌렸기에 역사의식의 부재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주성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당나라는 백제 멸망후 부여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멸망후 평양에 안동도호부와 그 밑에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의 야욕을 눈치채고 당나라와 8년간 다시 싸워 당나라를 몰아낸 부분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다만 고구려 옛땅을 차지할 생각을 안했다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반도만 차지한 것만도 감지덕지해서 당나라 황제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극진한 태도를 취했거든요”nbspnbspnbspnbspnbsp또, 고구려의 패망과 발해의 재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시다가 창조성을 이끌어 내주셨습니다.nbspnbspnbsp“당나라는 고구려를 663년에 두 차례 침공을 했으나 실패했어요,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형이 당나라로 가서 군대를 빌려주면 당나라에 조공의 예를 갖추겠다고 하지요. 결국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참여한 전쟁에서 고구려는 패망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인구의 5인 20만명을 중국 전역에 분산 귀양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고구려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nbspnbspnbspnbspnbsp꼭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만이 창조가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끊임없이 조정해 나가는 것도 창조라는 것을 이번 역사기행 일정을 현지 상황에 따라 조정해 가는 것과 비유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고구려는 자주성은 있는데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데다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안주해 버리니까 결국 패한 것입니다. 역사공부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배우고 실패하고 도전하고 늘 나아가야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답습하면 정체가 되므로 있는 것도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공해도 조정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중국의 변방국가, 일제침략, 서양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중국은 자기 대륙 안에 들어와서 이룬 몽골의 원나라, 선비의 연나라까지도 자기 역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역사가 더 커졌어요. 반대로 우리는 배달 문명의 후예인 여진, 거란, 선비까지 중국 역사로 치부해 버려서 역사의 폭이 좁아졌어요. 하지만 우리는 중원과 대등한 역사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어요. 배달민족 아래 조선족이 중심이 되었다가,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족이 한번 큰 세를 이루며 형제에게 밀렸고 지금 남은 것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남북통일은 물론 일본과 문명적 연대 그리고 중원까지 연대하면서 서양문명을 극복하고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강의가 끝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친목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nbspnbspnbspnbsp내일 일정을 위해 아쉬움을 남긴채 즐거운 시간을 마무리했지만 참가자들이 한결 더 친밀해진 것 같습니다. 내일은 림강을 거쳐 압록강을 따라 이도백하까지 가는 일정입니다.

2014.08.07. 19,127 읽음 댓글 2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