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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6~7 청년학교 청춘캠프 및 각종 미팅과 회의
▲ 청년학교 임명장 수여식nbsp안녕하세요. 스님께서는 지난 9박10일 동안의 필리핀JTS 사업장 방문을 마치시고 6일 새벽 6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셨습니다. 도착하시자 마자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하셔서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실무자들과의 기획회의에 참석하셨습니다. 긴 시간 동안의 회의를 마치시고 12시부터는 연이어서 정토회 대표님과 행정처 집행위원 등 대중부와 최근 진행되고 있는 사업 현안에 대해 회의를 하셨습니다.nbspnbsp▲ 정토회 대중부와 함께 회의nbsp정토회 대중부와의 회의를 마치시고 연이어 오후2시부터는 묘수법사님, 안병주님과 함께 필리핀JTS의 인력 파견 문제와 관련해 회의를 하셨습니다.nbspnbsp▲ 묘수법사님과 회의nbsp이어서 오후3시부터는 외부 일정은 갖지 않으시면서 서울 정토회관에서 업무를 계속 보시고 하루 일과를 마치셨습니다.nbspnbsp오늘 아침에는 7시부터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 참석하셔서 김명혁 목사님, 김홍진 신부님, 박종화 목사님, 박경조 주교님, 박남수 교령님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여 최근 한국 사회의 현안과 종교인 모임의 역할에 대해 회의를 하셨습니다.nbspnbsp오늘 회의에서는 남·북 현안 뿐만 아니라 미래 시대의 희망인 어린이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들을 나누셨습니다. 어린이가 학대 받고 내쳐지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데 공감하고 어린이 보육 제도의 개선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하였습니다.nbspnbsp▲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nbsp이어서 오전 10시에는 손님이 찾아오셔서 미팅을 가지신 후, 12시에는 양산 부산대학병원에 계시는 백승완 이사장님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면서 동남아시아 및 인도의 빈공층 보건·의료 지원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협력을 하기로 하셨습니다.nbspnbsp▲ 양산 부산대학병원 백승완 이사장님nbsp오후 1시에는 차를 타고 대전 근교 금산으로 이동하셔서 연수원 부지로 좋겠다고 추천된 곳이 여러군데 있어서 스님께서 직접 둘러보시고 답사를 하셨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진흙길에 바퀴가 빠지기도 하고, 산행을 하기도 하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보기도 하면서 해가 질 무렵까지 답사는 계속 되었습니다.nbspnbsp▲ 연수원 부지 답사nbspnbsp답사 일정이 늦어져서 오늘 평화재단 청년학교에서 주최하는 ‘청춘캠프’가 열리고 있는 마딜피 삼육청소년수련원에는 저녁 7시20분에 도착했습니다. 7시30분부터 강의가 시작되어서 저녁을 드실 시간 여유가 없어 간단히 국물만 드시고 바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nbspnbsp오늘 행사는 ‘2015년 새봄 여는 청춘캠프’라는 이름으로 평화재단 청년포럼에서 준비한 행사인데, 스님께서는 전국에서 모인 100여명의 청년들을 위해 ‘인생과 세상의 주인으로 서다’는 주제로 2시간 30분 동안 열정적인 강연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 2015 새봄여는 청춘캠프.nbspnbsp청년학교는 지난 2013년에 처음 문을 열어 올해로 5기째 신입생을 모집하게 되었는데 지난 2년 동안 빠르게 확산이 되어서 올해부터는 전국 40여개 지역에서 문을 열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번 청춘캠프는 이 40개 지역에서 청년학교를 담당해 운영할 주인장, 조장, 팀장들이 모여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서로 힘을 다지고 멤버십을 기르는 시간으로 준비되었습니다.nbspnbsp먼저 스님께서는 작년에 세계 100회 강연을 통해 얻은 경험과 교훈을 들려주시면서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세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현재 대한민국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이고 청년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자원활동을 하면서도 마음공부를 해야 하는 필요성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nbsp“첫째는 여러분들이 좀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예요. 결혼을 못한다고 불행해질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저는 불행해야 하잖아요. 나이 들었다고 불행하다면 그럼 저는 불행해야 하잖아요. 재산이 없다고 불행하다고 해도 저는 불행해야 하잖아요. 돈이 많고 적고, 결혼 하고 안하고, 나이 많고 적고, 몸이 아프고 안 아프고 하는 것은 사람따라 다르지만, 그것이 불행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결혼을 안해서 불행하다, 나는 취직을 못해서 불행하다, 나는 애인이 없어서 불행하다 하는 얘기는 자신이 불행하고 싶다는 얘기 밖에 안됩니다. 불행이 그렇게 좋은가 봐요. nbspnbsp그래서 첫째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은 이런 조건을 가져다 붙이면 안됩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눈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밥만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부모님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이렇게 자꾸 자신이 행복하다고 해놓고 왜 행복한지 그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요. 저도 이번에 필리핀 민다나오에 가서 밀림을 지나고 산을 오르고 하면서 제일 고마웠던 것이 두 다리였어요. 그 험난한 계곡과 정글을 이 두 다리가 없으면 어떻게 가겠어요? 거기에 헬리곱터가 갈 수 있겠어요? 자동차가 갈 수 있겠어요? 오직 갈 수 있는 것은 다리 밖에 없었어요. 다리와 신발이 흙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아이고, 다리야 고맙다. 니 없으면 내가 여기에 어떻게 오겠노’ 그랬거든요. 그러니 옆에 사람들이 죽겠다고 그러더라구요. nbspnbspnbspnbsp그러니 이 행복이라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자꾸 불행할 요구 조건을 걸면 모든 것이 다 불행해집니다. 부모가 있어서 잔소리를 해서 불행하고, 돌아가시면 없어서 불행하고, 학교 다니면 공부하기 싫어서 불행하거든요. 그러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런 행복한 마음을 갖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필요한 일들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런 강의도 듣고 그런 실천활동도 해서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nbspnbsp두 번째는 너무 허황된 생각만 하지 말고 IT 산업에서 일하든 바이오 산업을 연구하든 기술적인 연구 뿐만 아니라 환경적인 연구를 하든 생활적인 연구를 하든, 이렇게 연구를 해가면서 거기서 보람을 느끼고, 주말이 되면 봉사활동도 하고 사회 기여도 하는 자기 삶을 개발해 가야 합니다.nbspnbspnbspnbspnbsp세 번째는 연대해서 제도를 바꾸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체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보는 눈도 있어야 하고 사회 구조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연대를 해야합니다. 민주사회에서 가진 것이 없는 젊은 사람들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장 큰 수단은 선거입니다. 어떻게 다수가 연대해서 선거에 영향을 미쳐서 변화를 가져오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다 포기해 버리잖아요. 연대를 해서 요구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청년학교에서 ‘새로운 100년’ 책으로 공부를 한다던가 역사 공부와 사회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이뤄지고 어떻게 운행 되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젊은이가 눈을 떠야 합니다. 단순히 불평불만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해서 청년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주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공부하는 이런 청년학교 같은 모임들을 확산시켜 나간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역동성이 있게 되겠죠. 이런 일을 위해 여러분들이 중심 역할을 해주시면 좋겠어요.nbspnbspnbspnbsp옛날에는 어떤 극단적인 주장을 해야 지지를 받았는데 요즘은 운동도 재미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부담 안되게 해야 하고, 주장도 현실 가능해야 대중이 참여합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주장하고 악을 쓰면 대중이 참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게 방식도 바꾸어야 하고, 동조 안하는 사람들도 비판하면 안됩니다. 동조 안하는 사람들도 우군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대중을 적대해버리면 자기 기반을 스스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도록, 올해 못하면 내년에 하도록 열어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해나시기 바랍니다.”nbsp이렇게 2시간 동안 열강을 해주신 스님께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주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그리고 이어서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는 질의응답 시간이 30분간 이어졌습니다. 청년학교에서 6개월마다 새롭게 소임을 받아서 함께해 왔는데 소임을 받을 때마다 두렵고 망설임이 많은데 이 마음을 어떻게 극복할지, 점점 사회 문제에 무관심해지는 청년들이 많아지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청년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는 분이 스님께 질문을 했고 스님께서는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어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40개 청년학교를 힘차게 출발시키면서 ‘Let’s go 5기 청년학교’를 주제로 촌극 공연을 보았습니다. 1800년대의 시대 상황을 현재 청년들이 겪고 있는 고민들로 재현해서 전국 방방 곡곡으로 청년학교가 뻗어나가면 참 좋겠다는 바램을 아주 재미있게 표현해서 큰 환호와 박수를 받았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이어서 각자 색종이에 청년학교를 향한 각자의 소망을 적어서 종이비행기로 접어서 날리는 퍼포먼스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도 소망을 직접 적으셔서 종이비행기를 날려 청년들이 아주 좋아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스님께서는 “청년학교를 전국으로 늘려 젊은이가 원한다면 누구나 어디서나 다닐 수 있도록 해주세요” 라고 색종이에 적으셨는데 사회자가 스님께서 적은 소망을 읽어주자 청년학교를 응원하는 스님의 마음에 청년들도 모두 기뻐했습니다.nbspnbsp nbspnbsp이어서 청년학교를 이끌어가는 지도 그룹인 협동담임 4명의 임명장 수여식이 이어졌고, 다음은 전국에서 청년학교를 담당하고 있는 주인장들의 임명식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nbspnbspnbsp한명 한명 앞으로 나와서 스님께 임명장을 부여 받으며 스님과 악수까지 나누어서 모두들 영광스러워 하며 좋아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새롭게 임명장을 부여받은 전국의 청년학교 주인장들에게 간단히 격려 말씀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인생에는 두가지가 있어요. 첫째,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즐겁고 기쁘죠. 이것이 하나의 인생의 기쁨이죠. 두 번째는 내가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거나 보탬이 되었을 때 일어나는 보람이라는 감정이 있어요. 보람은 시간이 조금 지나야 나한테 기쁨을 가져와요. 즐거움이라는 것은 지금 일어나는 것이고, 보람이라는 것은 시간이 좀 지나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에게 좋은 일은 즐거움으로 일어나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을 때는 보람이라는 감정이 일어나서 나중에 즐거움을 가져옵니다. nbspnbspnbspnbspnbsp그래서 인생을 재미있게도 살아야 하지만 보람있게도 살아야 합니다. 청년학교 주인장을 했을 때 느낌은 보람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청년학교를 다니면서 막 재미있어 하면 그것은 즐거움으로 나타나고요. 반면에 내가 조금 힘이 들어도 다른 사람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봤을 때 느끼는 감정은 보람이예요. 그래서 인생은 이 두 가지가 겸해져야 행복해집니다. 여러분들이 처음에는 조금 힘들거예요. 시간도 들고 신경써야 될 일도 많지만, 시간이 지나놓고 보면 ‘그 때 내가 한 일이 참 보람있었다’ 하는 새로운 행복을 자신에게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 보람있는 주인장이 되시기 바랍니다.” nbspnbsp스님의 격려 말씀에 100여명의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갈채와 환호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스님의 격려 말씀과 다양한 퍼포먼스들을 보고 나니 40개 청년학교가 출발하는 오늘이 정말 축제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5기 청년학교 개강을 축하하는 케이크 컷팅식을 했습니다. 케이크를 학교 모양으로 만들어서 모두의 관심을 끌었는데 스님께서는 “이게 케익이 맞느냐?” 하시며 크림을 칼로 찔러보기도 하며 웃으셨습니다. 아무튼 청년들의 밝고 명랑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케이크 컷팅식이 끝나자 청년들은 ‘젊은 그대’ 노래를 다같이 열창하며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다시한번 열기를 발산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앞으로 나와 스님과 함께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올해는 청년학교가 전국 방방 곡곡으로 뿌리를 내리는 한해가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청년들의 ‘화이팅’ 구호를 들으며, 청년학교를 통해 건강한 의식을 가진 청년들이 많이 nbsp양산되어서 통일 한국을 향해 달려가는 굳건한 연대의 힘을 보여주길 간절히 기원해 보았습니다.nbspnbsp사진을 찍고 나서 스님께서는 곧바로 행사장을 나와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향하셨습니다. 수련원에서 하룻밤 주무신 스님께서는 내일 아침 충주 호암체육관으로 가서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및 수계식에 참여하실 예정입니다. 내일 찾아뵙겠습니다.nbspnbsp
2015.2.3 민다나오 활동가 수련 & 대사관저 만찬_필리핀JTS 사업장 방문 7일째
▲ JTS 센터 앞으로 보이는 풍경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필리핀JTS 사업장을 방문하기 위해 민다나오 섬을 방문한지 7일째 되는 날입니다. 스님께서는 오늘 오전에는 민다나오에서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는 자원활동가들과 수련을 하신 후 가가얀데오로로 이동해 전 부키논 주 교육감을 지내신 닥터 라코마씨와 미팅을 하신 후 오후에는 마닐라로 이동해 주 필리핀 한국 대사님과 대사관저에서 저녁 만찬을 하셨습니다.nbspnbsp새벽 4시, 스님께서는 민다나오 JTS센터 3층 강당에서 활동가들과 함께 새벽 예불과 108배 정진을 하신 후 6시에 아침식사를 하시고 이원주 필리핀JTS 대표님과 함께 다음달 완공 예정인 JTS센터 기숙사 공사 현장을 둘러보셨습니다.nbspnbspnbsp▲ JTS센터 기숙사 공사 현장nbsp이 건물은 앞으로 JTS 활동가들이 파견되어 오면 머물게 될 숙소라고 합니다. 가운데 넓은 홀과 주방이 있고, 양 옆으로 남자 숙소와 여자 숙소, 손님들 숙소와 화장실이 깔끔하게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많은 자원활동가들이 머물며 민다나오 구호활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어 나가길 기원해 봅니다.nbspnbsp새벽녘 아침 햇살이 비치는 JTS센터 앞 풍경은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첩첩 산중의 풍경 위로 안개가 서서히 피어올라 오면서 마치 구름 위 신선들이 사는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nbspnbsp▲ JTS 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시범농장nbsp▲ JTS 센터에서 보유하고 있는 중장비들nbsp오전 7시부터 9시30분까지는 어제에 이어서 JTS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평가회와 수련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먼저 지금 민다나오 사업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재곤님, 박영일님, 김희자님이 그동안 활동해 온 이야기와 힘들었던 점을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이재곤님은 백일출가 15기를 졸업하고 한국JTS에서 교육을 받은 후 필리핀 민다나오에 와서활동한지 2년 7개월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보고서를 잘못써서 많이 혼나기도 하고, 마을에 가서 답사를 하다가 책상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보기만 했는데 책상을 만들어라는 뜻으로 이해한 주민들이 다음에 갔을 때 나무를 미리 다 잘라놓아 당황했던 이야기, 알라원 마을로 가는 다리를 놓아주기 위해 매주 2번씩 산행을 6시간 동안 해야 했던 이야기, 최근 기숙사 건축을 하며 힘들었던 점 등을 들려주었습니다. 이재곤님은 이번달 말에 자원봉사를 그만두게 되는데 모두들 “1년은 더 해야 한다”며 아쉬워했습니다. nbspnbspnbsp▲ 이재곤님nbsp김희자님은 2013년 9월에 이곳에 파견되어 현재 1년 9개월째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교육을 3개월 이수 받고 만타부 학교 건축을 담담했다가 작년 5월부터 기숙사 건축하는 일을 하고 있고, 대외협력 파트에서 외부 인사들을 만나고 조율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세금 면제 혜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놀로폴티치 군, 리보나 군과 함께 MOU를 체결하는 일, 다물록 마카파리 고등학교와 보건서 건축 마무리하는 일 등도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몸도 약해졌지만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옴을 절실히 느낀 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nbspnbsp▲ 김희자님nbsp박영일님은 2014년 3월에 필리핀에 파견되어 현재까지 11개월 정도 활동해 오고 있고, 시범농장을 관리하는 일, 회의록 작성, 홍보 자료 정리, 시설 점검, 본부에 소식지 보내는 업무, 재정 등 사무국 업무를 주로 해오다가 요즘에는 만타부 마을개발 업무와 재정, 시범농장 업무를 맡고 합니다. 처음에는 재정 업무가 익숙하지 않아 하기 싫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가볍게 하고 있고, 동료들과 부딪힐 때도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이해하는 마음이 들면서 조금씩 편해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nbspnbspnbsp▲ 박영일님nbsp스님께서는 세 명의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라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JTS의 조직 구조, 한국JTS와 필리핀JTS 양쪽으로 보고 체계를 어떻게 갖추어야 하는지, 회계를 투명하게 하는 것의 중요성, 예산 집행에 있어서 민다나오 사업과 긴급구호 사업의 구분 필요성, 실무자들의 장기 체류를 위해 비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센터에 상주하는 활동가들의 건강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신규 사업 확대에 따른 인력 배치를 어떻게 할지 등에 대해 스님의 아이디어를 들려주시고 현지 활동가들의 의견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nbspnbsp특히 스님께서는 활동가들의 애로사항을 경청하신 후 이곳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스님께서 활동가들에게 갖는 애정을 가득 느낄 수 있었습니다. nbspnbsp“활동가의 자세는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업무에 대한 ‘자기 책임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일이 아니다’ 하면서 대충 해버리는 게 아니라 내 일이라고 여기는 자기 책임성이 중요합니다.nbspnbsp둘째, 동료들과 늘 회의를 해서 집행하는 ‘협력성’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책임성이 강한 사람은 협력이 잘 안돼요. 자기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많고요. 반면에 협력하고 의논하는 것을 비교적 문제 없이 잘하는 사람은 자기 책임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고요. 이 두 가지가 같이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아요.nbspnbsp셋째, 조직성이 필요합니다. 조직성의 핵심은 보고를 하고 결재를 받는 훈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책임성이 강한 사람이 가장 취약한 부분이 협력하는 것과 보고하고 결재 받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 독고다이식으로 일 처리를 해버려서 동료들과 협력이 잘 안되거나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 잘 안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반대로 보고하고 결재받는 것을 원할히 잘하는 사람은 자기 일처럼 책임지고 하는 것이 약한 경향이 있는데,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합니다. nbspnbspnbspnbsp자기 일처럼 하다보면 자기가 결정을 내리니까 보고를 하거나 결재받는 것을 소홀히 할 가능성이 많죠. 조직원으로서는 항상 업무를 보고하고 결재를 받아서 일을 집행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 일을 자기 일로서 책임지고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조금만 수행을 하면 전혀 모순이 안됩니다. 오히려 보고하고 결재를 받음으로해서 훨씬 더 안심이 되어서 자기 책임성이 강해질 수 있고, 또 자기 책임성이 강하더라도 현장에 가서 일을 해보면 약간 결정내리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든요. 이 때는 본부의 승인을 받아서 결정하겠다고 돌리고 다시 의논해서 결정내려야 하거든요. 이 세가지 문제를 잘 명심해야 합니다.nbspnbsp건축을 하든 마을 사람들과 만나든 자기가 자기 일을 하듯이 책임을 지고 추진해야 하고, 또 동료들과 의논해서 회의를 통해 결정된 것을 집행해야 하고, 만약에 회의에서 결정한 것과 현장에서 본 것이 약간 차이가 생길 때는,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결정을 해야 되면 약간 수정했다고 바로 사후 보고를 하거나, 현장에서는 결정을 미루고 들어와서 다시 의논해서 처리하는, 이런 수평적 협력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수평적 협력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이 안에서 같이 살면서도 각자 따로 살게 되는 겁니다. 항상 회의를 해서 의논해서 결정하고 그것을 집행하고 다시 평가회의를 하고 공유하는 것이 늘 원활하게 이뤄져야 합니다.nbspnbsp이것이 가능하려면 자기 책임성도 강해야 하지만 불교 수행으로 말하면 무아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즉 고집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런데 책임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고집이 강해요. 자기가 생각하고 확인한 것은 무조건 고집하고, 안 된다고 두세번 얘기해도 고집하고, 심지어는 뜻대로 안되면 보고를 안해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집행해 버리고 이렇게 되니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거든요. 힘이 부치는 것까지 책임지라는 것이 아니예요. 항상 공유하고 협력해서 수평적으로 회의하고, 위로 보고하고 결재 받고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사고가 나면 즉각 보고를 해야 하거든요. 사고가 날 때 현장에 있는 사람이 이것을 덮으려고 하다가 보면 사고가 더 커집니다. 어떤 사고든 바로 보고를 해서 결재를 받아 해결해야 하거든요. 이 세 가지가 사업을 집행하는데 중요한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nbspnbsp여러분들은 이곳에 수행자로서 와 있는 것입니다. 정토회는 자기 수행도 하고 세상에 잘 쓰이는 봉사도 한다는 두 개의 수레바퀴를 함께 갖고 있는데, 그래도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우선이냐면 수행이 더 우선입니다. 정토회의 설립취지가 그렇습니다. 수행자로서 우리가 세상에 잘 쓰이는 봉사를 하자는 것이지 자기는 화내고 짜증내고 괴로워하면서 남을 위해서만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기에게 돌이키는 수행적 관점을 놓치지 않으면서 세상에 봉사를 해나가는 겁니다. 원래 저희가 세운 원칙에 따르면 갈등과 언쟁이 폭력적으로 번지게 되면 즉각 귀국 조치, 즉 소환이 됩니다. 이런 수행적 원칙을 갖고 일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nbspnbsp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각자 무엇이 나에게는 부족한지 살펴보고 앞으로 어떤 점을 더 보완해야 할지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원주 대표님도 세 명의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인력이 있어야 계획된 사업들이 진행되는데, 벌어놓은 일은 많지 인력은 부족하지 그래서 여기 파견된 사람들이 정말 고생이 많았다”며 그 노고를 헤아려주셨습니다. 현재 이곳 센터에서 진행되는 업무들을 보니 내부적으로는 사무, 총무, 재정, 외부적으로는 기숙사 건축, 다물록 프로젝트 모니터링, 만타부 교실 증축과 농장 실험 운영, 마놀로폴티치 학교 건축, 대외협력 등 이 많은 업무들을 세 명이서 주말도 없이 바쁘게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도 앞으로 필리핀JTS로의 인력 파견이 더 많이 이뤄질 수 있도록 고려하겠다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nbspnbsp그리고 어제는 향후 10년의 큰 방향을 스님께서 그려주셨다면, 오늘은 우선 급한 업무들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알라원 학교에 선생님을 어떻게 파견할지, 까나안 학교에 정상 운영되면 시설 보수를 하는 것, 가가호만 학교 수리 보수 및 상수도 시설 추가 보완 해주는 것, SPED 학교시설 수리해주는 것, 발라 마을에 상수도 시설 지원하는 것, 송코의 PEACE HALL 옆에 기숙사 건물 수리해 주는 것, 마긴다나오에 새로 학교 지어주는 것 등을 비롯해 nbsp교사정토회와 연계해서 교사 연수 프로그램을 보강하는 방안, 대학생 선재수련을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을지 등을 두루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홍서원을 끝으로 필리핀JTS 평가회 및 수련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nbsp곧바로 스님 일행은 짐을 챙겨서 가가얀데오로로 향했습니다. 11시30분에 가가얀데오로에 있는 한 식당에서 부키논 주의 교육감이셨던 닥터 라코마씨를 만나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학교 운영을 위해 어떻게 교육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요청하거나 조언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왼쪽 두 번째가 전 부키논 주 교육감인 닥터 라코마씨nbsp스님께서는 닥터 라코마씨에게 알라원 마을에 선생님이 파견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까나안 학교가 마을 주민들을 위해 다시 개원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 가가후만에도 정식 선생님을 배치해 줄 수 있는지, 딸라각의 SPED 기숙사 시설에도 더 선생님이 파견되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물록의 마카파리 고등학교를 기술 학교로 전환할 계획은 없는지, 교사 연수 프로그램을 하게 되면 JTS센터에 오셔서 강의를 해주실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nbspnbsp또 스님께서는 “JTS 때문에 교육청에서도 수고가 많으시다”고 하시면서 “JTS가 지원하는 학교는 대부분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각 주의 경계 지점에 위치해 있어서 서로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데, 지원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인 뒤 “그러나 배움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라며 교육청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셨습니다. 닥터 라코마씨도 스님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라며 답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바쁘신 가운데 항상 JTS의 노력을 이해해 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닥터 라코마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스님의 영문번역책 ‘기도’를 선물하셨습니다. 닥터 라코마씨는 스님의 친필 사인이 든 책을 받고 너무 기뻐하면서 스님과 기념 사진을 찍기를 원해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스님께 영문번역책 ‘기도’를 선물 받은 닥터 라코마씨.nbspnbsp오후1시에는 시간 여유가 조금 생겨서 라긴딩안 공항으로 가는 길에 바닷가에 위치한 카페에 들려 팥빙수를 함께 먹었습니다. 이재곤님이 곧 자원봉사를 그만두기 때문에 모두들 이재곤님이 한국에 들어갔다가 민다나오에 다시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원주 대표님은 “재곤이가 없는 민다나오는 앙꼬 없는 찐빵” 이라고 하시면서 여러번 애정을 비추셨는데, 아무튼 민다나오에 한국의 젊은 청년들이 많이 와서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필리핀정토회 활동가들의 간절한 바램을 가득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 라긴딩안 공항으로 가는 길에 펼쳐진 바닷가nbsp가가얀데오로의 라긴딩안 공항에 도착한 스님 일행은 지난 6박7일 동안 고생한 김희자, 박영일, 이재곤님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후3시30분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로 향했습니다.nbspnbsp▲ 민다나오 방문을 마치고 마닐라로 향하는 비행장에서nbsp오후5시10분에 마닐라에 도착한 스님 일행은 이원주 대표님의 집에 들러 간단히 세면을 하고 옷을 갈아 입은 뒤 주 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저로 향했습니다. 오후6시30분부터는 이혁 대사님의 초청으로 대사관 직원 분들과 함께 대사관저에서 저녁 만찬을 함께 했습니다.nbspnbsp▲ 대사관저에 방명록을 남기시고 계신 스님nbsp이혁 대사님은 “스님께서 민다나오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오신 것을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모시고 식사라도 한끼 대접하지 못해 늘 죄송했다”고 하시면서 “오늘 이렇게 식사 초대를 할 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스님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nbspnbsp▲ 대사님의 안내로 잘 가꾸어진 대사관저의 정원을 둘러보시는 모습. nbspnbsp스님께서는 먼저 JTS가 분쟁 지역인 민다나오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사관에서 안전 문제에 대해 걱정이 많으심을 헤아리셔서 “안전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나름대로 철저하게 위험사항을 대비하면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 며 안심을 시켜 드렸습니다. 이원주 대표님도 이중 삼중으로 어떻게 안전 문제를 보완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말씀하셔서 대사님도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nbspnbsp▲ 이혁 주 필리핀 대한민국 대사님nbsp저녁식사에는 KOCIA에서 송민현 소장님도 함께 하셨는데, 소장님은 예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하실 때 JTS 활동가들을 자주 만나셨는데 “치안이 너무 불안정해지니까 WFP가 나눠줘야 할 식량을 JTS가 대신해서 나눠주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시면서 “한국 NGO 중에서 봉사 자체를 자기 수행으로 삼는 내핍 생활을 하는 곳은 JTS 밖에 없다” 며 당시의 기억을 함께 나눠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JTS는 현지인들과 같은 수준인 1달러 미만의 생활 수준으로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고 하시면서 “오지로 갈수록 똑같은 돈이지만 엄청난 큰 돈으로 바뀌게 된다” 며 “비록 작은 단제이지만 주민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유는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로 가서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이런 오지는 공기도 맑고 물도 정말 깨끗한데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은 이런 경험을 못해본다”고 말씀하시자 대사님도 “저도 은퇴하면 스님을 따라 민다나오에 한번 다녀보고 싶습니다”고 답하며 함께 웃으셨습니다. nbspnbsp▲ 이혁 대사님 부부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분들과 저녁 식사nbsp스님께서는 이 외에도 이번 방문 기간 중에 마간다나오의 무슬림 MILF Vice President를 만난 이야기, 작년 태풍 하이옌 이후 타클로반과 마라봇에서 긴급 복구를 한 이야기, 젊은층들이 종교를 점점 기피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한국 사회에 갈수록 늘어나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심의 필요성, 필리핀 교민 사회의 안전 문제에 대한 대사관의 고민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nbspnbsp저녁식사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스님께서는 학교 짓기나 마을 개발에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유도해서 자기 마을을 자기들이 잘 가꾸어나가도록 하는 JTS의 원칙들을 소개해 주시면서 “조만간 대사관 분들을 민다나오의 저희 센터로 모두 초대하겠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혁 대사님도 “오늘은 즉문즉설이 아니라 스님께서 직접 행동하시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며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란 걸 크게 느꼈고, 앞으로도 한국 사회가 더 맑아질 수 있게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을 스님께 요청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식사 초대를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대사님 부부를 비롯해 대사관 직원 분들 모두에게 새책 lt지금 여기 깨어있기gt를 선물하시고, 직원 분들과 다함께 사진을 찍으시고, 또 각각 일대일로도 기념 사진을 모두 찍어주셨습니다.nbspnbsp▲ 대사관 직원 분들과 JTS 활동가 분들이 다함께nbspnbsp대사관저에서 다시 이원주 대표님 댁으로 돌아오니 밤9시가 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한국에서 온 이메일 등을 체크하시며 업무를 보신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치셨습니다.nbspnbsp내일은 마닐라에서 필리핀정토회 정토불교대학 졸업식과 수계식이 오전에 있고, 오후에는 태풍 하이옌 피해 지역 복구 사업이 마무리되고 있는 타클로반과 마라봇을 방문하실 계획입니다. 내일 또 생생한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2015.1.31 까나안 & 토니 대주교님 미팅_필리핀JTS 사업장 방문 4일째
nbsp▲ 까나안 학교로 향하는 길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필리핀JTS 사업장을 방문한지 4일째 되는 날입니다. 스님께서는 오전에 JTS의 지원으로 세워진 까나안 학교 현장을 방문하고, 오후에는 장애인 학교 시설인 SPED를 방문한 후, 저녁에는 토니 대주교님과의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nbspnbspnbsp송코 마을의 PEACE HALL에서 하룻밤을 묵은 스님 일행은 아침에 일어나 타투 가족이 정성껏 차려준 아침 식사를 맛있게 먹고 PEACE HALL 앞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 송코 마을 사람들과 작별 인사nbspnbsp스님께서는 타투에게 스님의 영문 번역책 ‘기도’를 선물하면서 타투의 이름인 ‘미끼다이’를 한글로 적어 선물했는데 타투는 무척 좋아했습니다.nbspnbspnbsp아침 6시45분에 송코 마을을 출발한 스님 일행은 비포장 도로와 포장된 도로를 번갈아 가며 3시간을 열심히 달려 9시 40분에 티가손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티가손 마을 입구에 차를 주차해 놓고 JTS가 세운 까나안 마을의 학교로 걸어 갔습니다.nbspnbspnbsp▲ 티가손 마을에서 까나안 마을로 들어가는 길nbsp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가운데 가끔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날씨는 아주 좋았습니다. 엊그제 알라원 마을을 방문하면서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까나안 마을로 향하는 길은 평평한 평지에 가끔 진흙이 나타날 뿐 아주 가벼운 걸음이었습니다. 70분 정도를 걸은 후 10시 50분이 되자 드디어 까나안 학교가 나타났습니다.nbspnbsp▲ 까나안 학교 도착nbsp까나안 학교에 도착하니 마을 리더와 학부모들은 예정된 것과는 달리 함께 모여있지 않았고, 예전에 마을 리더였던 써니 보이의 아내 앨리스씨만 스님 일행을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연인 즉, 스님 일행을 마중 나오기로 한 리지아씨가 스님 일행이 내일 학교를 방문하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을 미리 불러놓지 못해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시간은 갖지 못하고 앨리스씨로부터 학교 운영현황와 마을 주민들의 상황을 들었습니다.nbspnbsp▲ 앨리스와 함께 까나안 학교 운영 방안에 대해 논의 중nbsp앨리스씨는 자신의 집에 스님 일행을 초대해 식사 접대를 해주었고, 스님 일행은 앨리스씨의 집에서 학교 운영 전반에 대해 함께 의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을 리더였던 써니 보이는 MNLF라고 하는 모로민족해방전선 소속의 전사였는데 여기에 살고 있는 기독교 출신의 앨리스씨와 결혼하면서 이 마을의 리더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과 만나 함께 호흡을 맞추며 열심히 이곳에 학교를 지었는데, 아내인 앨리스씨가 다른 도시로 가게 되면서 써니 보이도 이곳을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써니 보이가 마을을 떠나면서 무슬림 자치주인 라나오 델수르주의 분바란 지역 사람들이 그동안 써니 보이 때문에 주장하지 못했던 땅의 소유를 주장하고 나오면서 분쟁이 일어나 사람들이 죽는 등 이 분쟁으로 인해 선생님들이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학교에 오지 않게 되고, 딸라각 교육부도 선생님의 파견을 중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13년까지는 학교가 잘 운영되었는데 2014년부터 운영이 멈추게 되었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앨리스씨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며 대화를 나누셨습니다.nbspnbsp▲ 앨리스네 집에서 준비해주신 점심 식사nbsp“학생들이 7km 정도 떨어진 아랫 마을인 타가손에 있는 학교에는 얼마나 갑니까?”nbspnbsp“학생들은 타가손을 비롯해 바깥으로 나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요. 얼마나 다른 학교에 가고 얼마나 학업을 중단하고 있는지 자세한 조사가 필요합니다.”nbspnbsp“지금 학생들이 다른 곳으로 가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면 이 학교는 운영하지 않는 것이 나아요? 어쨌든 학교를 운영하도록 교육청과 의논하는 게 나아요? 앨리스의 의견은 어때요?”nbspnbsp“저는 학교가 운영이 되면 좋겠습니다. 저희 부부가 갖고 있던 리더십을 리지아씨에게 넘겨 주고 이사를 갔는데, 처음에는 잘 했는데 깔리가난이라는 지역의 경찰 한 사람이 리지아씨로부터 이 마을 사람들을 깔리가난으로 등록을 해서 선거하도록 조정을 해서 일부 사람들은 깔리가난으로 가고, 일부 사람들은 티가손으로 가서 지금 마을 주민들이 갈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깔리가난으로 따라가지 않고 이곳에 남은 주민들에게는 리지아씨가 전혀 리더십이 없습니다.”nbsp“지금 이 학교가 딸라각과 라나우 델수르주의 분바란 지역과 경계 지점에 있어요?”nbspnbsp“네. 땅은 딸라각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실제 학교 운영은 딸라각의 교육부에서 운영을 했습니다. 땅은 원래 딸라각 사람들의 땅이 아니고 라나우 델수르주의 분바란 사람들의 땅이었는데 딸라각 사람들이 와서 개간을 해서 살고 있는데 지금에 와서 분바란 사람들이 땅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분쟁이 생겼습니다. 사실은 국가 땅이여서 개간하는 사람들이 주인이였는데 지금 와서 다시 협박을 해서 마을 사람들을 떠나게 해 분바란 사람들이 차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마을 총회를 열어서 새로운 리더를 뽑으라고 했지만 주민들은 아직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nbspnbsp분쟁이 한번 일어났고 또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나니까 선생님들이 더욱 더 안오려고 하는 상황이고요. 선생님들이 왔다가 안왔다가 불성실 했던 이유도 이런 분쟁에 대한 소문 때문이였습니다. 이 분쟁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교육부에서도 학교 운영을 허락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문제를 누군가가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nbspnbsp“네, 알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의논을 해서 결론을 내면 거기에 맞춰서 JTS에서는 지원을 해주겠습니다. 만약 학교를 오픈하기를 희망하면 거기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해주겠습니다.”nbspnbsp앨리스씨와 대화가 길어져서 다음 일정이 촉박해진 스님 일행은 거의 뛰다 싶이 마을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nbsp▲ 분쟁이 있는 지역이여서 스님 일행을 에스코트해 주는 군인nbsp▲ 중간에 길을 잃어버려 정신이 아찔했다는 한금화님과 김명옥님.nbspnbsp차를 타고 이동을 하면서 필리핀 JTS이원주 대표님에게 “분쟁이 있든 어떻든 아이들은 우선 공부를 해야 하잖아요. 어떻게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7km를 걸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어요? 5,6학년은 티가손까지 걸어다니더라도 14학년 정도는 까나안 학교를 최대한 빨리 오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교사 수급은 JTS가 교육부와 접촉해서 최대한 빨리 파견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우선 딸라각에서 시작해서 나중에 깔리가난이나 분바란으로 넘기든지 하더라도 그건 나중에 해야 할 일이고요.” 라고 하시면서 신속히 학교가 다시 시작될 수 있게 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nbspnbsp오후1시30분에 티가손을 출발한 스님 일행은 오후3시30분에 딸라각에 도착했습니다. 딸라각에는 JTS가 지원해서 세운 장애인 교육 시설 SPED에 도착했습니다. 이 학교 선생님 2명이 도착해서 스님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교실로 들어가서 학교 운영 현황에 대해 이야기 듣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nbspnbsp특히 기숙사 시설이 많이 열악해 보였습니다. 이 건물은 2004년에 JTS가 지은 건물인데 아직 10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학교에서 아무런 보수가 없어서 곳곳에 낡거나 부서진 것이 많았습니다. 스님께서는 무엇이 당장 필요한지 선생님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nbspnbsp“눈이 안보이는 사람이라든지 장애별로 각각 몇 명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nbspnbsp“청각 장애인이 11명, 정신지체아 12명, 다운증후군 3명, 학습지진아 6명, 시각 장애인이 1명, 이렇게 총 33명이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nbspnbsp“눈이 안보이는 사람이 1명 밖에 없네요. 제가 처음에 이 학교를 지을 때는 눈 안보이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이렇게 갑자기 줄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옆에 기숙사를 지은 이유도 시각장애인들이 많다고 해서 지어준 것이거든요. 눈이 안보이면 학교를 다니기가 힘드니까요.”nbspnbsp“시각 장애는 다중 장애인데 이 다중 장애를 보살펴줄 사람이 없습니다. 3년 전까지는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해주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그만둔 이후에는 다른 지원이 없어서 보살펴주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12월에 시각장애인 2명이 딸라각으로 오는 과정에서 교통사고로 죽는 사고도 있었습니다.”nbspnbsp“돌보지 못해서 입학이 더 없는 거예요? 아니면 장애를 가진 사람이 점점 줄고 있는 거예요?”nbspnbsp“이 학교에 지원하는 장애인 학생은 많은데 예산이 없어서 더 입학을 허용하지 못하는 것이고요. 가가얀데오르나 다른 도시에서도 여기로 보내고 싶어하는 수요가 있는데, 선생님들은 가정이 있어서 기숙사에서 아이들을 함께 돌봐주기가 어려우니 부모 입장에서는 여기로 보낼 수가 없고요.” nbspnbspnbsp“어떤 시설이 가장 필요해요?”nbspnbsp“미끄럼 방지 기능을 하는 깔개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자주 넘어져서요. 그리고 기숙사 안 부엌에 물이 안빠져 나가서 수리가 필요합니다. 방충망도 다 찢어져서 모기가 들어오는데 새로 바꾸야 합니다. 그리고 교실 천장이 부서진 곳이 있어서 보완을 해야 합니다. 또 창문이 나무로 되어 있는데 철망을 쳐서 도둑이 못 들어오게 해주면 좋겠습니다.nbsp그리고 시각장애인들이 기숙사에 살게 하려면 돌봐주는 사람이 가장 필요하고요. 또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육부에서는 이런 지원이 없습니다.”nbsp“건물 짓는 것은 JTS에서 해주었지만 수리는 교육청이나 정부에서는 안해줍니까?”nbspnbsp“학교 수리에 대해서는 예산이 없고 교구들에 대해서만 예산이 책정되어 있습니다.”nbspnbsp“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학생들이 어디로 갑니까?”nbspnbsp“고등학교에 진학 못한 초등학교 아이들은 부모님들이 더 이상 학교에 안보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시각 장애 아이들은 마사지를 배워서 자기 밥벌이를 하고, 청각 장애 아이들은 요리와 제빵을 배워서 먹고 살고 있습니다.”nbspnbsp“어려운 조건에서 아이들 돌보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건물만 지어주면 교육청에서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할 것이라고 했는데... 우선 건물부터 다시 수리합시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적어주시면 수리해 드릴게요.”nbspnbsp이렇게 선생님들과의 대화를 마치고 학교 건물과 기숙사 건물을 둘러보았습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기숙사는 문이 닫겨 있어서 안에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창문에 방충망이 구멍난 것이 많고, 방치되어 있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건물을 지어주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잘 유지되도록 관리하는 일은 더욱더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nbsp▲ SPED 기숙사 창문nbspnbsp필리핀JTS 이원주 대표님은 “조만간 다시 이곳을 방문해서 최대한 빨리 수리 보완을 하겠다”고 선생님들께 약속을 하셨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선생님들에게 사인한 영문책을 선물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오후 4시30분경 다음 일정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nbspnbsp▲ 장애인 교육시설 SPED 선생님들과 함께nbsp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리고 나니 드디어 가가얀데오르가 가까워졌는지 말끔히 포장된 도로가 나타났습니다. 5시 50분에 토니 주교님이 머무시는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6시부터는 토니 주교님과의 저녁식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토니 주교님은 스님께서 2002년 막사이사이상 평화와 국제이해 부문 수상을 받으실 때 스님을 영접해 주셨던 인연으로 스님께서 이곳 민다나오에서 구호활동을 할 수 있게 가교 역할을 해주신 분입니다.nbspnbsp성당에 도착하니 주교님이 직접 나오셔서 스님과 포옹을 하며 반갑게 환영을 해주셨습니다. 주교님의 안내에 따라 성당으로 들어가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수녀님들이 나오셔서 정성껏 음식을 차려주셔서 스님 일행은 아주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토니 대주교님과 함께nbsp그리고 반가운 손님이 더 찾아왔습니다. 필리핀JTS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도동과 트렐 부부가 와서 스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도동과 트렐 부부는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필리핀 JTS 사업에 대해서 스님과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nbspnbspnbsp먼저 주교님이 JTS 센터가 어떻게 운영이 되고 있는지 스님께 물어보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번에 민다나오를 방문한 이유가 JTS 사업을 전체적으로 다시 점검하기 위함이라고 알려주시면서 주교님과 도동과 트렐 부부에게 다시한번 JTS 사업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부탁하셨습니다.nbspnbsp“JTS 센터는 운영이 잘 되고 있습니까?”nbspnbsp“문맹 퇴치를 위한 학교 짓기를 그동안 확대만 했는데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이번에 열흘 정도 시간을 내어서 점검을 하고 있습니다. 준공식에 와주셨던 SPED 학교에도 가보았는데 운영이 많이 부실했어요. 교육청에서도 별로 관심을 안 두는 것 같았습니다. 시설이 10년 되었는데 많이 낡아서 수리도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기숙사 운영에 어려움도 있습니다. 알라원 같은 경우는 선생님이 왔다가 자꾸 가버려서 운영이 스톱되었어요. 정부 차원에서는 해결이 안될 것 같아요.nbspnbsp이제 JTS가 민다나오에 구호활동을 시작한지 10년이 넘었는데요. 지금까지는 주로 문맹 퇴치를 위해 학교 짓는 일을 많이 했는데, 다시 사업장을 돌아보면서는 그런 일들도 해나가야 하지만 선생님들 훈련이나 주민들과 마을 리더들의 훈련이나 학생들 교육 등 내실을 기하는데 더 집중해서 일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센터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주교님께서 센터가 잘 활용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십시오.nbspnbsp특히 트렐은 교수님이시니까 다시 많은 도움을 주시고요. 손자만 보고 있으면 안됩니다.” nbspnbsp스님의 설명을 듣고 트렐씨는 JTS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NGO를 소개해 주기도 했습니다.nbspnbsp▲ 도동과 트렐nbsp“‘시너리어’라고 하는 NGO가 있는데 그곳도 선생님의 퀄리티를 어떻게 올려서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갖고 일을 하고 있어요. 12개 지역의 시장과 협력해서 일하고 있는데, 이 단체와 연계해서 JTS가 사업을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일하는 방식도 JTS와 많이 흡사합니다. 돈을 주는 것은 전혀 없고 주민들이 필요한 물건이나 자재를 지원해 줍니다. 지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주민들을 유도하는 모습이 JTS와 비슷해서 같이 협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알라원 학교에 선생님을 어떻게 확보하면 좋을지 도동과 트렐 부부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nbspnbsp“알라원 같이 선생님들이 잘 가지 않으려는 지역에는 어떻게 선생님을 파견할 수 있을까요?”nbspnbsp“우선 안전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하고요. 선생님들이 위협을 느끼거든요. 알라원의 안전 문제가 해결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nbsp알라원의 학교 문제를 명확히 해결할 수 있는 대답을 듣지는 못했는데, 이것은 JTS가 계속해서 더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트렐씨가 소개해준 NGO와 함께 협력해보는 것도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토니 주교님에게 “이렇게 식사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시간까지 내어주시고, 음악회도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주교님께 스님의 영문 번역책과 작은 선물을 함께 드렸습니다.nbspnbspnbspnbsp그리고 도동과 트렐 부부에게도 필리핀JTS 사업의 초기부터 많은 도움을 준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스님의 영문 번역책과 작은 선물을 드렸습니다.nbspnbspnbspnbsp그리고 성당에서 주교님과 함께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nbsp▲ 토니 대주교님과 함께nbsp이어서 주교님이 운전해주시는 차를 타고 성당 측에서 마련한 음악 콘서트에 함께 참석했습니다. 신학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 준비한 콘서트인데 많은 신자들이 참석하여 도네이션도 하고 아름다운 노래도 함께 듣는 멋진 콘서트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콘서트에 끝까지 자리하셔서 콘서트가 마치고 나서 주교님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하셨습니다. nbspnbsp▲ 토니 대주교님이 초청한 음악 콘서트nbsp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콘서트 중간에 잠시 시간을 내셔서 오늘 오후에 까나안 마을에서 만나지 못했던 써니 보이를 만나셨습니다. 써니 보이는 추위에 노출되면 피부병이 일어나서 햇?을 계속 쬐야 하고, 밤마다 잠을 못자고 있어서 우울증 약을 매일 먹어야 잘 수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도 다니고 있는데, 스님께서는 써니 보이의 딱한 사정을 듣고 병원 치료비에 쓰라고 지원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써니 보이는 “까나안 학교가 운영되고 있지 않아서 걱정”이라면서 “그것 때문에 잠이 더 오질 않는다”고 해서 스님께서는 “걱정하지 마라. 스님이 다 해결할 테니까 신경쓰지 말고 푹 쉬어라” 고 말하시며 써니 보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셨습니다.nbspnbsp▲ 까나안 학교를 함께 만든nbsp써니 보이와 앨리스nbsp써니 보이는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며 스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부인인 앨리스도 옆에서 통역을 하면서 갑자기 스님께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든 나머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스님께 “고맙다”고 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필리핀JTS가 구호활동을 시작하면서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주었던 그 인연을 잊지 않으시고 먼 이국 땅의 한 청년을 이렇게 알뜰히 챙기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함께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가가얀데오르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스님께서는 밤10시 무렵 출발하여 실리폰에 있는 JTS 센터에 밤 11시30분에 도착해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nbspnbsp내일은 마놀로폴티치 군의 길랑길랑 면을 지나서 콘솔라시온 마을의 새로운 사업장을 보시고, 가가후만 마을을 방문하여 학교운영 실태를 살펴 보신 후 다시 JTS 센터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nbsp nbsp nbsp
2015.1.27 성도재일 기념법회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후 전정각산에서 6년의 고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신 것을 기념하는 성도재일 법회가 있는 날입니다.nbspnbsp전국의 정토법당에서는 어젯밤 9시30분부터 오늘 새벽 6시까지 많은 분들이 철야 정진을 했습니다. 영상으로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밤새 정진을 하신 분들은 유미죽을 간단히 먹고 새벽 5시에 천일결사 정진을 마친 후 부처님처럼 동쪽 하늘에 뜬 샛별을 보며 각자의 집으로 귀가하였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께서 머무시고 계신 서울 정토회관에서는 오늘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 50여명의 정토행자들이 1시간 동안 300배 정진을 하는 등 성도 재일의 의미를 자신의 수행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열기가 가득했습니다.nbspnbsp▲ 스님의 법문을 듣기에 앞서 300배 정진을 하고 있는 서울정토회 대중들nbspnbsp300배 정진의 후끈한 열기가 다 빠져나가기 전에 곧바로 이어서 10시부터 삼귀의 반야심경을 시작으로 성도재일 기념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스님의 직강을 듣기 위해 서울 정토회관에는 300여명의 대중들이 자리를 가득 메워 부처님 성도의 뜻을 가슴에 새겨보고자 귀를 쫑긋 세우고 스님의 법문을 경청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여 6년 간 고행 끝에 마침내 성도에 이르는 과정을 경전의 기록을 근거로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들려 주신 뒤 부처님의 삶을 통해 우리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법문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오늘은 부처님께서 6년 고행 후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이 되셨다고 하는 성도재일입니다. 올해가 불기 2559년, 부처님이 성도 후 45년에 열반에 드셨으니 지금으로부터 2604년 전의 일입니다.nbspnbsp부처님은 룸비니에서 태어나 29살 되던 해에 인간의 참자유과 참행복 즉,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과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경지인 열반을 얻기 위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으로 가셔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 부지런히 정진하여 스승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지만 그것은 완전한 해탈이 아님을 깨닫고 스승의 곁을 떠나 ‘가야’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시체를 버리는 곳이었던 가야 근교의 시타림인 전정각산 아래에서 목숨을 걸고 정진을 하셨습니다. 더위와 추위, 벌레 등에 아랑곳 하지 않고 식음도 전폐하다시피 해서 갈비뼈가 드러나고 뱃가죽이 등허리에 달라붙어 얼핏 보면 죽은 사람 같았습니다. 천민 아이들이 숲속에서 부처님을 보고 ‘저 사람이 살았나, 죽었나’ 하며 막대기로 때리고 찌르고 할 정도였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릴 정도로 그렇게 무려 6년이나 고행을 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nbspnbsp6년이 지난 뒤 가만히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니 12살 때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살려면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하며 염부수 아래에서 사색할 때 보다도 오히려 지금의 선정이 더 못한 수준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행을 자세히 점검해보니 세속에 살 땐 욕망을 좇아서,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것을 행복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들도 기분 좋은 걸 추구하며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나 욕망이 채워지면 그 만족감이 지속되지 않고 욕망이 계속 커집니다. ‘1억만 있음 좋겠다’ 생각했는데 1억이 들어오면 ‘아이고, 저 사람은 10억이 있네’ 하면서 그렇게 크던 1억이 이제 별것 아니게 돼요. 이렇게 또 욕구가 일어나고 번뇌가 따릅니다. 그래서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을 때 그 행복은 지속이 안돼요. 하나를 만족시키면 또 다른 괴로움이 생겨요. 그래서 욕망을 따라가면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만족했다 불만족 했다가 이렇게 고락이 반복됩니다. 그것을 윤회라고 해요. 고락이 되풀이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 앉아 있는 것도 고락이 되풀이 돼요. ‘스님 직강이란다’ 하면 기분이 좋다가 한 시간이 넘어가면 ‘아 길다’, 두 시간 넘어가면 ‘아, 스님 말씀이 너무 많다’, 즐거움은 온데 간데 없고 괴로움만 남습니다. nbspnbsp결혼하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결혼하고 나면 결혼 때문에 괴롭고, 자식이 안 생겨서 괴롭다가 자식이 생기면 좋지만 오히려 그것이 또 괴로움이 되고... 정토회 와서도 마찬가지에요. 괴로워서 왔는데 정토회 와서 봉사하다가 괴로워진 사람이 많아요. ‘정토회만 안 나가도, 총무만 안 맡아도 살만한데...’ 이런 마음이 반복되는 겁니다. nbspnbspnbsp고락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가 없어요. 고락의 뿌리는 욕망이에요. 뿌리인 욕망으로부터 충족과 불충족이 생기고 이렇게 되풀이 돼요. 끝이 안나는데 우리는 늘 이것만 충족되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 집만 마련하면 무슨 걱정이 있나’ 해도 그게 끝이 안나요.nbsp모든 고락의 원인은 욕망입니다. 욕망을 따라가면 평생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욕망의 씨를 말려 용납하지 않아야 진정한 자유가 온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은 6년을 욕망과 싸웠습니다. 어떠한 욕망도 용납 안하는 심한 고행을 했는데 이것 또한 완전한 해탈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결국 욕망을 따라가는 것도 욕망의 노예이지만 욕망을 억압하는 것도 욕망의 노예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욕망을 따라가는 것도 욕망에 대한 대응이고 거부하는 것도 욕망에 대한 대응입니다. 누가 손을 잡아 끌어당기면 끌려가는 것도 대응이지만 안가겠다고 버티는 것도 대응입니다. 현상은 정반대이지만 뿌리를 보면 같은 것이에요. 바로 이것을 발견한 것이 붓다의 위대함입니다. 욕구가 나쁘다고 정반대의 길로 갔는데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대단한 것이에요. 그 고행마저도 욕망의 대응이라는 것이지요.nbspnbsp우리는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면 두 가지 길 밖에 없잖아요. 하든지 아니면 참든지 말이죠. 다리가 아프면 펴든지 아니면 이를 악물고 참든지 이 두 길 밖에 없는데 이게 양 극단이에요. 이쪽 아니면 저쪽 두 길에 치우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발견한 제 3의 길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욕망을 욕망이라고 알아차리는 것. 다리에 통증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이 알아차림을 찰나 찰나로 지속하는 것을 ‘지켜보기’라고 합니다. ‘담배가 피우고 싶다’ 하면 ‘담배 피우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는구나’ 하고 다만 알아차릴 뿐이지 참는 것이 아닙니다.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이것은 고행이 아닙니다. 안한다는 면에서는 고행과 같지만 참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고행이 아닙니다.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도’라고 말은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이것이 붓다가 발견한 완전히 새로운 방법이에요.nbspnbspnbsp무언가를 안한다 하는 것만으로는 수행이 아니에요. 단지 그것을 알아차리는 거에요. 붓다는 잘못된 길에 대해 반성하고 잘못된 길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이지, 처음부터 쾌락주의에서 바로 중도를 발견했을까요? 아니에요. 여러번 시행착오를 거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이에요. 그것도 양쪽을 끝가지 가봤으니 알았지 중간쯤 갔으면 몰랐을 거에요.nbsp그러니 시행착오는 낭비가 아니에요. 잘못된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 길을 갈 필요가 없어요. 아닌 것을 확인 할수록 제대로 가는 길을 발견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무턱대고 가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갔는데도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쁜 게 아니에요. 큰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아닌 것을 아닌 줄 모르는 게 대부분입니다.nbsp그렇게 온갖 번뇌와 유혹을 뛰어넘어 깨달음을 얻으신 날이 음력으로 12월 8일입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마음 속에서 모든 번뇌가 사라져 버렸어요. 우리는 무의식 즉, 자신의 까르마로부터 늘 영향을 받고 있어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경지, 이것이 해탈과 열반의 경지입니다. 무의식에 지배를 안 받는 것은 아무런 편견이 없다는 거에요. 우리는 자유를 나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인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과 번뇌, 속박이 없는 상태가 해탈입니다.nbspnbsp부처님께서 이 좋은 법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고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된다고 자세히 알려줬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가기가 무척 쉬운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싫다는 거에요. 부처님처럼 밥도 안먹고 잠도 안자고 옷도 안입고 들판에 혼자 있고 갈비뼈가 나오도록 그렇게 수행할 것을 요구하지 않잖아요.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뭘 먹든지 그저 조금만 먹어서 배만 채우면 된다 이런 정도로 생각하면 먹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한 끼 굶었다고 괴롭지 않습니다. 시체 쌌던 옷을 주워 입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옷을 입으면 되지 명품에 좀 껄떡거리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모양 색상에 껄떡거리지 마라 이거에요.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집 평수와 모양에 껄떡거리지 마라 이런 얘기입니다. 맨발로 다니라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발에 가시만 안 박히면 됐지 명품 구두 찾고, 구두 장사도 아닌데 집에서는 종류별 색깔별로 쫙 놔두고 그러지 말라는 거에요. 대중교통이든 자가용이든 타고 다니면 되지 더 폼잡고 타기 위해 돈 많이 들이고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nbspnbspnbsp자기 인생도 제대로 못 살아서 건강도, 돈도, 아이도, 시험도, 승진도, 이런 것들을 다 부처님에게 해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부처님께서 다 해주려면 여러분들이 도대체 노력하는 일은 뭐가 있어요? 동물들도 자기가 먹을 것 알아서 먹고 사는데 왜 인간이 그것을 남한테 해달라고 합니까? nbspnbspnbsp부처님의 법을 천분의 일만 알아도 ‘아 부처님은 안 먹고도 살았는데 이 정도면 됐지. 분소의를 입었다는데 이 정도면 되었지’ 하게 됩니다. 부처가 되겠다는 사람이 왜 부처님한테 해달라고 합니까? 붓다의 지혜를 조금만 살피면 얼마든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nbsp부처님의 성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놓으신 거에요. 여러분들이 조금만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면 삶을 만끽하며 자유롭게 그리고 세상을 유익하게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절에 오래 다닌다고 법문 많이 듣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생각이 탁 바뀌어야 합니다. 머리 안 깍아도 출가자의 마음을 내야 돼요. 그러면 세상이 혼탁한 것을 해결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 생각에 빠져서 욕망의 세계에 갇혀 지옥의 불덩이 위에 사는 것과 똑같아요.nbspnbsp그러니 탁 내려놓으면 우리는 지옥으로 가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연초에 인터뷰를 하면서 ‘지옥가면 할 일도 많고 좋다. 벌 받아서 가면 고통스럽지만 지옥 중생을 불쌍히 여겨서 가는 것은 괜찮다’ 말했는데, 종교를 부정하는 것 같다고 야단들이더군요. 그러니까 덕 볼려고 하지말고 ‘내 인생 정도는 내가 알아서 살고, 내 주위에 조금이라도 도움주는 사람이 되자’ 이런 관점을 가지면 성도의 은혜, 붓다의 깨달음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nbspnbsp그러니 오늘 짧은 시간이라도 정진을 하세요. 복 비는 정진을 하지 마시고요. ‘나도 오늘 생각을 바꿔 살아야겠다. 까르마에 끌려 다니는 삶을 그만 살아야겠다’ 다짐 하는 기도를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큰 변화가 올 거에요. 성도의 은혜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nbspnbsp부처님의 삶을 이야기하실 때는 부처님의 삶을 닮고자 하는 스님의 간절한 원이 느껴졌고, 껄떡거리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실 때는 대중들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 가득 느껴졌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대중들의 큰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셨습니다. 잠시 자리를 정비하고 남은 대중들은 관세음보살 염불 소리에 맞춰 정진을 하였습니다. 정진을 하며 스님 법문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 하고, 부처님의 삶과 나의 삶을 반추하며 습관에 끌려다니지 않는 삶을 다짐하는 108배 정진을 했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오후에는 평화재단으로 가겨서 미팅을 가지신 후, 다시 정토회관으로 돌아오셔서 업무를 보셨습니다. 오후 3시30분터는 인터넷 방송 사업 준비를 위한 회의에 참석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인터넷 방송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어떤 내용을 기획할 것인지, 행정처 기획홍보국국과 평화재단 미디어팀 책임자의 아이디어를 수렴하고 역할분담을 논의 하셨습니다.nbspnbsp▲ 인터넷 방송 관련 회의nbsp회의를 마치고 5시부터는 내일 필리핀 사업장 방문을 위한 출장 준비와 출장 전 처리할 업무들을 보시며 정토회관에 머무셨습니다.nbspnbsp내일 스님께서는 오전8시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필리핀 민다나오로 가십니다. 1월28일부터 2월5일까지 약 열흘 동안 필리핀 사업장 전체를 직접 방문해 보시면서 필리핀JTS 사업을 전체적으로 점검하실 예정입니다. 내일은 필리핀에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nbspnbsp
2015.1.22 인도 델리 즉문즉설 강연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께서는 인도 델리에 머무시면서 아침 일찍부터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식과 성지순례 인도국립박물관 안내, 델리 한국문화원 인도인 통역 강연, 한국인 즉문즉설 강연 등 하루 종일 바쁜 일정을 보내셨습니다.nbspnbsp인도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는 자혜정사에서 하루밤을 묵은 스님께서는 오전 8시 같은 장소에서 델리 정토불교대학 수계식 및 졸업식에 참석하여 졸업생들을 위해 수계 및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델리에는 아직 정토법당이 마련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델리 정토불교대학생 5명은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학사 일정을 완수하여 오늘 스님으로부터 수계 및 졸업식을 갖게 되었습니다.nbspnbsp▲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및 수계식nbsp스님께서는 5명을 앞에 두고 2시간 동안 정성을 기울여 수계의 의미에 대해 설법하시고 수계를 해주셨으며 한명 한명에게 불명도 주시고 그 의미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항상 100명, 500명, 1000명의 대중들에게 법문해주시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는데 오늘은 이렇게 5명을 위해서도 한결 같이 정성껏 법문을 해주시는 모습을 보니 ‘스님에게는 한명이나 오백명이나 차이가 없구나’ 하는 잔잔한 감동이 일었습니다.nbspnbsp▲ 참회게를 부르며 스님께 연비를 받는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nbsp수계식에 이어서 곧바로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5명이 전원 졸업한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졸업률이 100 네요. 한국은 졸업률이 50 밖에 안되는데요” 하시면서 출석 체크와 봉사 시간 체크를 정확하게 했는지 물으시고는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다시한번 정리해주시면서 졸업생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당부의 말씀과 더불어 격려도 해주셨습니다.nbspnbsp▲ 졸업생 한명 한명에게 불명을 주시고 그 의미를 설명해주시는 스님nbsp이렇게 5명의 정토행자가 머나먼 이국땅 이곳 델리에서 탄생하였습니다. 5명의 졸업생들은 앞으로 수행, 보시, 봉사하는 삶을 다짐하며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하고 졸업식까지 원만히 잘 마쳤습니다.nbspnbsp▲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과 델리 불자회 분들nbsp스님께서는 졸업생들을 비롯하여 함께 참석한 델리 불자회 분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참석한 델리 불자회 회장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에게는 새책 lt지금 여기 깨어있기gt에 사인을 해서 선물하셨습니다. 델리 불자회 분들은 1년만에 델리를 찾으신 스님과 더 여유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셨지만 곧 11시부터 델리에 하루 더 남은 성지순례객들을 위해 인도국립박물관 안내를 해야 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곧바로 박물관으로 출발하셨습니다.nbspnbsp차가 막혀서 11시 10분경에 박물관에 도착한 스님은 박물관을 관람하고 있던 1,2,8호차 순례객들을 위해 인도의 역사와 불교 유물, 부처님의 진신사리에 대해서 정성껏 안내를 해주셨습니다.nbspnbsp박물관 안내를 마치고 곧바로 델리 한국 문화원으로 향했습니다. 12시30분경 한국 문화원에 도착한 스님께서는 김근평 문화원장님과 함께 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차도 같이 마시면서 지난해 세계 100회 강연을 다녀오신 소회와 가야 근교에서 수자타아카데미를 운영해온 경험, 인도 불교 성지 복원 및 정비 사업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nbspnbsp▲ 인도 델리 한국 문화원nbsp특히 김 원장님은 스님께서 3월에 수자타아카데미에 머무실 때 직접 둥게스와리를 방문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스님께서도 흔쾌히 환영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김 원장님은 이번에 3년 더 인도에서 근무하게 되셨는데, 원장님과 스님의 좋은 인연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오후2시부터는 델리 한국문화원 주관으로 인도인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한국문화원 지하 강당에서 쁘리앙카님의 힌디어 통역으로 열렸습니다. 쁘리앙카님은 정토회 실무자로 근무하고 있는데 그동안 석가족들과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 교육 때는 힌디어 통역을 여러차례 해왔지만, 즉문즉설 강연을 통역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nbspnbsp▲ 인도인 대상 힌디어 통역 즉문즉설 강연nbsp총 40여명이 인도인들이 참석하여 스님께 다양한 질문을 했습니다. 한국은 원래 불교가 번성했는데 왜 크리스쳔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는지 묻는 분, 스스로 자기 구제를 해야지 신을 믿을 필요가 있는지 묻는 분, 비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불교에서도 자기 종교가 더 우월하다고 얘기하는 내용이 있는지 묻는 분, 불교를 믿어야 해탈할 수 있는지 묻는 분,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괴로워진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건지 묻는 분, 내 성격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수행을 하면 나의 중요한 색깔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지 묻는 분 등 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스님께서는 2시간 30분 동안 다양한 비유를 들어가며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쁘리앙카님의 유창한 힌디어 통역 덕분에 스님의 법문이 인도인들에게 잘 전달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nbspnbsp▲ 힌디어 통역을 해준 쁘리앙카님nbsp그 중에서 인도인 학생 중에 한명이 질문한 “불교를 믿어야 해탈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간단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힌두교를 대부분 믿고 있는 인도인들에게 이렇게 답변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고뇌가 어떻게 생기는지 이치를 깨달아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불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불교, 힌두교, 기독교라고 불리우는 종교로서의 불교입니다. 어떤 것이 더 높고 어떤 것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없고 서로 다르다고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nbspnbsp다른 하나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닌 진리로서의 불교가 있습니다. 그가 갖고 있는 종교가 무엇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힌두교라 하더라도 진리를 깨달으면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불교인도 깨닫지 못하면 자유롭지 못해지는 것입니다. 붓다의 본래 가르침은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권유하고 싶은 것은 이것에 대한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무지가 해? nbspnbspnbsp그런데 여러분들은 제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한국에서는 종교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종교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나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family name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 주어지는 것이듯이 인도에서는 아버지가 무슬림이면 나도 무슬림이고 부모가 힌두이면 나도 힌두가 됩니다. 그런데 진리의 가리침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힌두라고 하는 주어진 종교는 그대로 간직하고 진리에 대해서는 선택해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최’라고 하는 family name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디스트인 것과 같습니다. 담마를 공부해서 해탈하는 것이 중요하지 최씨라는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은 진리를 가르친 것이지 종교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nbsp인도인들은 스님의 답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강연을 모두 마치고 스님께서는 한국문화원 원장님으로부터 꽃다발을 선물 받으셨습니다.nbspnbsp▲ 델리 한국문화원 김근평 원장님nbsp그리고 오늘 강연을 들은 인도인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즉문즉설 강연에 참석한 인도인들과 함께nbspnbsp스님의 답변이 너무 좋았는지 강연이 끝나고 나서도 무대 앞으로 다가와 다음 한국인 강연이 있기 전까지 계속해서 스님께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쉴 시간도 없이 계속해서 인도인들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 미진한 점들을 더 묻기 위해 무대 앞으로 나온 인도 학생들nbsp이어서 오후 5시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델리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총 100여명이 참석하여 한국 문화원 강당은 자리가 꽉 찼고, 서서 강의를 듣는 사람도 생겨서 추가로 의자를 더 가져오는 등 스님의 강연에 대한 델리 교민사회의 높은 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인도 델리 한국인 대상 강연nbsp스님께서는 지난해 세계 100회 강연을 다니시며 전세계의 많은 교민들을 만나셨는데 그 소회를 함께 나눠주시면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스님께서 “즉문즉설은 주제에 관계 없이 무엇이든지 묻고 대화하면서 진리를 규명해가는 자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자기 고민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 라고 하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고 곧바로 즉문즉설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nbsp앞서 외국인 강연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지금 뮤지컬을 배우고 있는 학생인데 가보지 못한 길을 가야해서 두려움이 크고 내가 재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분, 부처님은 신이 아니고 사람인데 다른 종교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불교는 왜 채식을 하게 되었는지, 불교는 범어로 기도를 많이 하는데 한글로 된 기도 방법은 없는지, 인도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 많이 힘들다고 묻는 분, 세입자가 아직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 사정이 급해서 보증금을 먼저 빼달라고 하는데 남편과 의견이 달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인 분, 13살이 되는 초등학생인데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으니까 어른들이 안좋게 바라보셔서 고민이라는 학생, 수익을 극대화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경쟁 사회가 심해지는 것 같은데 이런 시대에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묻는 분, 만드는 것을 잘하고 손재주가 있어서 꿈이 건축가인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인 학생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정성껏 답변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그 중에서 남편이 강아지 키우는 걸 싫어해서 고민인 여성 분의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웃음이 빵빵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저는 작년에 강아지 두 마리를 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그런데 남편이 강아지를 너무 싫어했지만 겨우 승낙을 받았어요. 강아지가 처음에는 작았는데 지금은 너무 커져서 남편의 불만이 너무 많이 쌓이고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는 강아지 옷도 만들고 가능하면 남편이 신경을 안쓰도록 노력도 했는데 최근에는 남편과 강아지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또 한편으로는 강아지들이 너무 불쌍해서 잘 키우려고 데리고 왔는데 다른 곳으로 보내기가 그렇고, 강아지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하니까 아이들도 ”엄마, 우리도 힘들어지면 다른 곳으로 보낼거야?“ 이런 얘기를 해요. 강아지를 생각하자니 남편이 마음에 걸리고, 남편을 생각하자니 강아지가 마음에 걸리고 그렇습니다.”nbsp“질문자가 관점이 틀렸어요. 어떻게 남편을 강아지와 비교해요? 수준 이하네요. 어떻게 남편의 의견을 강아지의 입장과 비교해서 얘기를 합니까? 남자가 뭣 때문에 저런 여자랑 사는지 모르겠네요, nbspnbsp남편이 싫다고 하면 어디든지 강아지를 딱 보내야지요. 처음에는 강아지가 어릴 때 동의를 했지만 이제 강아지가 커서 동의가 안되면 남편의 의견을 존중해야지요.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거면 혼자 살지 왜 결혼해서 같이 살아요?“nbsp“저도 고기를 정말 안 좋아하는데 고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생각해서 고기를 먹기 시작했거든요.”nbspnbsp“그렇게 내가 하나 맞춰주었으니 너도 하나 맞춰달라고 하면 그건 장사이지요. 그렇게 장사를 하려면 결혼을 안했어야죠. 내가 열 개 맞춰 주었는데 너는 왜 한 개 밖에 안 맞춰주냐 이렇게 거래를 하면 안돼요.” nbspnbsp“그럼 강아지를 어떻게 처리해야죠?”nbspnbsp“그거야 질문자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지요. 남편이 강아지가 싫다고 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처리하기로 먼저 결정을 해놓고 어디로 보낼건지는 연구하면 방법이 나오지요. 어떻게 남편과 강아지를 비교해요? 그것은 동물애호가이기 때문이 아니예요. 부부 지간에 자기 취향을 고집하는 겁니다.”nbsp“아이들의 정서적은 부분은 어떻게 제가 다독여야 하나요?”nbspnbsp“가정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아이들과 남편을 동격으로 두면 질문자 때문에 아이들이 나빠집니다. 집안의 질서는 사람이 똑같다고 일대일이 아니예요. 남편의 의견이 우선이고, 아이들의 의견은 보조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강아지의 의견은 그 밑에 두어야 해요.” nbspnbspnbsp“예, 알겠습니다. 혹시 청중들 중에 제 강아지를 잘 키우주실 분 없을까요?” nbspnbsp“강아지를 주면서 잘 키워줄 사람을 찾으면 안됩니다. 잘 키우든지 못 키우든지 그건 가져간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요. 거기에 얽매여서 ‘강아지를 데려가서 그렇게 키우면 어떡하냐?’ 하면 그건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이 됩니다. 어떻게 키우든지 주었으면 그걸로 끝내야 합니다.”nbsp“감사합니다. 정말 명쾌한 답이 되었습니다.” nbspnbsp“그런 질문을 해서 제가 이제 강아지랑 원수가 되겠네요. 왜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해서 강아지한테 업을 짓게 해요? 일은 자기가 벌여놓고요.” nbspnbsp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청중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강연은 무려 2시간 30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강연을 마무리하시며 스님께서는 법의 이치를 깨달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마무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진리와 법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열심히 빈다고 부처님이 그것을 들어주면 그럼 부처님은 입시 브로커가 되잖아요. 입시 브로커가 아닌 이상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줄 수가 있어요? 넣어주려면 실력이 되는 아이를 빼고 넣어주어야 하잖아요. 이런 일을 부처님이 하셔야 할 일이예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믿는 부처님은 입시 브로커와 같은 존재예요. 그래야 소원이 이뤄지니까요. 부처님은 공평하시고 모든 중생을 자비롭게 여기시는 분인데 왜 그런 일을 하시겠어요? 부처님은 이런 세속의 모습을 깊이 관조하시고 이것을 뛰어넘어서 6년 간 수행 끝에 이런 제로섬 게임을 벗어나는 연기법과 공존의 길을 발견하신 것이거든요. 열심히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 왜 부처님한테 돈을 달라고 해요? 부처님은 자기 돈도 버렸는데 왜 여러분 돈을 벌어주는 일을 하겠어요?nbspnbsp부처님한테 비는 것이 꼭 나쁘냐? 그건 아니예요. 다만 붓다의 가르침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도 믿고 의지하면 불안한 심리가 안정되기 때문에 도움이 되긴 해요. 그래서 함부로 부정하면 안돼요. 그러나 이것은 해탈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대해서 좀 관심을 가지셔야 해요. 여러분들이 믿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버려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평생 교회 다니다가 절에 오면 친구도 없지 가족도 반대하지 힘들잖아요. 부처님은 그런 걸 바꾸게 해서 복잡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예요. 그것은 그것대로 유지하시되 우리가 가진 가치관의 모순, 생각의 잘못을 깨우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면 됩니다.nbspnbspnbspnbsp‘이것은 커피잔이다’ 하는 것이 상입니다. 그럼 이것으로 물은 못 마시잖아요. 그러나 이것은 ‘공’이예요. 다만 그릇이예요.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되고, 커피를 담으면 커피잔이 되고, 우유를 담으면 우유잔이 되고, 아이 오줌 눌 때 받으면 요강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공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겁니다. 그 무엇도 아니기에 그 무엇도 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연기법과 제법의 공한 이치를 깨달으면 여러분의 삶이 훨씬 더 자유로워집니다. 그렇게 공부를 한번 해나가시면 좋겠습니다.nbspnbsp자신의 소중함을 아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괴롭히지도 말아야 하지만 자신을 학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하나 하나는 굉장히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안 죽고 살은 것만 해도 대성공입니다. 다 성공적인 삶을 지금 살고 있는 거예요. nbspnbsp내가 아닌 지위, 돈 이런 것 갖고 자기를 학대하면서 열등의식을 갖지 마시고 존재의 귀중함을 아시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인도에 사시면서 인도를 사랑하시고, 한국에 가시면 한국을 또 사랑하시고요. 인도에서는 맨날 한국 그리워하고, 한국에서는 맨날 한국 욕하고 그러지 말고 지금 여기 행복해야 합니다.”nbspnbsp긴 시간 동안 열강을 해주신 스님께 델리 교민들도 다시한번 뜨거운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내주었습니다.nbspnbspnbsp강연을 마치고 참석한 교민들과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인원이 많아서 두 번에 걸쳐 나눠서 사진을 찍은 후, 한국 문화원 1층 카페로 올라왔습니다.nbspnbspnbsp한국 문화원 원장님을 비롯해 관계자 분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더 나누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인도성지순례를 시작하면서부터 남방 스님들처럼 오후 불식을 계속 해오시고 계셔서 물 한잔만 드시면서 문화원 관계자들과 계속 대화를 나누셨습니다.nbspnbspnbsp문화원 관계자 분들과 델리 불자회 분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저녁 8시30분 무렵 한국문화원을 나와 델리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9시30분 무렵 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은 후 스님께서는 1시간 30분 가량 라운지에 머무시며 아이패드로 업무를 보시다가 밤 12시 20분 비행기로 방콕으로 출발하셨습니다.nbspnbsp내일은 방콕에 도착하셔서 방콕 정토불교대학생들의 졸업식과 수계 법회에 참석하셔서 법문을 해주신 후, 정토회 4차 백일기도 입재식에 참석하기 위해 밤 비행기로 한국으로 귀국하실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
2015.1.19 인도성지순례 13일째 상카시아
▲ 상카시아 탑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3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제 8대 성지의 마지막 여정인 상카시아로 향합니다.nbspnbsp새벽 3시에 일어나 짐을 챙겨서 버스에 올라타니 500여명이 탑승한 13대의 버스는 새벽 4시에 일제히 상카시아로 출발했습니다. 이른 출발이지만 늦게 일어나 허둥대는 사람이 없습니다. 순례 초에는 처음 하는 순례에 긴장해서 그랬는데, 지금은 익숙해 져서 인 듯 합니다. 어떤 도반은 일찍 눈이 뜨여 5분만 더 눈 붙이고 싶었으나 매일 108배를 마치고 명상 중인 옆 자리의 도반님을 보고는 벌떡 일어난다고 합니다.nbspnbsp새벽 4시에 차가 출발하자 여느 아침처럼 스님께서 수신기로 “잘 주무셨어요” 하시며 오늘의 일정을 짧게 알려 주십니다. “쉬라바스터를 출발하여 럭나우를 거쳐 8대 성지의 마지막 여정인 상카시아로 갑니다. 안개가 끼지 않아 버스가 잘 가네요. 차량별로 새벽 예불 해주세요.” 차량 별로 약 30분간 새벽 예불을 마치니 버스 안의 불이 꺼지고 순례단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nbspnbsp▲ 쉬라바스티에서 상카시아로 향하는 길nbspnbsp아침 7시경 차에서 내려 10여분 휴식을 하며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13일 동안 늘 그래왔듯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으로 흩어져 자연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해결하고 옵니다. 습기를 한껏 머금은 인도의 아침공기가 참 상쾌했습니다.nbspnbsp▲ 버스에서 내려 야외 화장실을 향해nbsp한참을 달려가는데 스님께서 미국에서 순례에 참가한 한 보살님의 아드님이 뇌사 상태에 빠져 위독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주시면서 함께 생전예수재를 지내고 기도를 하자고 하십니다. 유수스님의 염불과 무변심 법사님의 집전으로 500여명의 순례단은 버스 안에 앉은 채로 다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nbspnbsp▲ 순례객 중 한 분의 아드님이 위독해서 함께 생전예수재를 지냈습니다.nbspnbsp아드님이 위독한 보살님은 함께 기도를 하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보살님이 최대한 빨리 미국의 아드님 곁으로 가실 수 있게 계속 전화통화를 하며 교통편을 알아보시고, 또 어제 기원정사에서 경전독송을 통해 만났던 아들을 잃은 여인, 손자를 잃은 베사카 부인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보살님을 위로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럭나우 공항 근처에 보살님을 내려드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고 순례의 여정은 계속 되었습니다. nbspnbsp▲ 아드님이 위독해서 급히 미국으로 돌아가시는 순례객을 배웅해 주시는 스님nbsp한참을 달려가는데 스님께서는 곧 강가강이 5개 지류로 나눠지기 전의 원류가 되는 강가 강을 지날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가 나타나자 강변 모래사장 위에 기도를 하기 위해 온 힌두교 순례자들이 초막을 치고 빼곡이 들어선 풍경이 펼쳐집니다. 인도 사람들은 강가 강을 무척 신성하게 여기는데, 이곳에 초막을 치고 보름씩 한달씩 머물며 기도한다고 합니다.nbspnbsp▲ 인도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강가강nbsp스님께서는 “힌두인들이 믿음이 얼마나 굳건한지를 알 수 있다”하시면서 “인도인들은 이렇게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무슬림이 침공해도 기독교가 들어와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 “이렇게 믿음이 굳건해야 실천행동이 나오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믿음이 갖는 힘을 강조해 주셨습니다.nbspnbsp10시 30분경 차를 멈추고 볕과 그늘이 적절한 곳에서 아침 겸 점심 공양을 했습니다. 순례단이 공양 준비를 하자 근처 숲에서 야생 원숭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에 100마리 이상의 원숭이가 살고 있다”고 하시면서 원숭이가 몰려오는 입구에서 직접 원숭이들을 쫓으셨습니다. “망고 나무의 원숭이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원숭이는 망고를 따서 던진다고 해요. 저기 보세요, 원숭이 엉덩이가 빨간게 맞죠” 하시면서 순례단이 공양을 시작한 이후까지 원숭이 떼를 쫓아 주시고 공양 분위기도 가볍게 띄워 주신 후 다소 늦게 공양을 하셨습니다. 3호차에서 준비한 반찬으로 9조와 함께 공양게송을 시작으로 함께 공양을 드셨습니다. 야외에서 하는 공양이었지만 접시에 예쁘게 깍아 놓인 사과와 포도에서 스승님께 공양을 드리는 도반님들의 정성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공양 후에는 근처 유채밭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유채밭에 물 주고 있는 보살님들 빨리 오세요.” 라며 버스 탑승을 유머있게 재촉하셨습니다. nbspnbsp도로 양쪽으로 이어지는 평원에는 노란 유채밭과 아직 꽃이 피지 않은 감자밭이 넓고 푸르게 펼쳐져 우리나라의 봄날 같은 풍경이 이어 졌고 그 뒤로 키가 훌쩍한 나무들이 드문드문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였습니다.nbspnbsp버스 안에서는 차량 별로 이번 순례에 대한 소감 나누기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천상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신 후 하강하신 곳인 상카시아 유적지로 가고 있는 중이여서 그런지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경전반 수강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경전반 등록을 결심했다”는 말에 차안의 모든 순례자들이 환호의 박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한자로 된 경전을 뜻도 모르고 읽었는데 처음으로 쉬운 경전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하고, 어떤 분은 “평소 배려해 주고 맞추어 준 남편에게 처음으로 감사했고, 순례기간 동안 도반들에게 받은 도움들을 어려운 이웃에게 회향하겠다”고 하고, 어떤 분은 “싯타르타의 출가 노래를 함께 불렀을 때 생노병사에 대해 오랫동안 느껴왔던 것이라 너무 공감이 되어서 눈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순례를 하면서 법륜 스님이 인간 붓다의 삶에 대해 가지는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어서 감동이었다” 고 하고, 어떤 분은 “기원정사를 포행 할 때 나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느낌들의 나누기로 차안의 분위기가 한층 훈훈해 졌습니다. nbspnbspnbsp▲ 버스 안 마음나누기nbsp스님께서는 “각 차량별로 나누기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송수신기 채널을 돌려 가면서 다 들었다”고 하시면서 “어떤 차는 노래도 부르고 기타도 연주하고 꼭 소풍 온 것 같더라”며 웃으셨습니다.nbspnbsp새벽 4시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3시가 되어서야 드디어 상카시아에 도착했습니다. 무려 11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스님께서는 예상보다 1시간 늦었다고 하십니다. 가사를 수하고 향에 불을 붙이고 탑을 세바퀴 돈 후 공양 예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곳의 탑터는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 법을 설한 후 하강한 곳으로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소라고 합니다.nbspnbsp▲ 상카시아 탑nbsp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은 부처님이 태어나시자마자 일주일 만에 돌아가셔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어느해 안거 때 도리천궁으로 가셔서 마야부인에게 3달간 법을 설하고 하강하셨다는 이 곳에 이후 아쇼카 왕은 석주들과 대규모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nbspnbsp스님은 상카시아 탑 앞에서 간절한 발원을 하셨습니다.nbspnbsp“대한민국에서 온 정토행자 대중 오백여명 일동은 차사천하 남섬부주 인디아 우프라 프라데시주의 이곳 상카시아, 부처님이 천상에서 하강하신, 8대 성지 중 마지막 성지를 참배하고 부처님께 공양 예불 올리고 찬탄 공경하면서 발원하옵나니 저희 상카시아 대탑 참배 인연공덕으로 다생겁래로 지어온 모든 업장 소멸되고 성불하는 그날까지 세세생생 보살도 행하기를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또한 부처님께서 탄생하신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때 안거 중에 도리천으로 승천하셔서 어머니 마하마야 대비와 천상의 대중 일동을 위하여 설법하시고 대범천과 제석천을 대동하시고 이곳 상카시아 성밖으로 하강하신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어떤 사람도 어머니의 끝없는 공덕을 입고 태어나고 자랐으니 그 어머니의 공덕을 잊지 않고 어머니의 공덕을 길이길이 기억하고 그 은혜를 갚으라는 뜻으로 이와같이 보이신 것입니다. 저희 또한 이곳을 참배하며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며 그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nbspnbsp이와 같은 참배 인연 공덕으로 먼저 돌아가신 조상영가님들 모두 왕생극락케 하여 저희들이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소서.nbspnbsp오늘 이렇게 부처님 태어나시고 성도하시고 설법하시고 열반하신 곳을 포함하여 부처님께서 교화활동하신 저 왕사성 저 사위성 저 바이샬리 이곳 상카시아까지 8대 성지를 모두 참배하였으며, 또 부처님이 6년 고행하신 전정각산과 부처님께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카필라성 등 10대 성지를 순례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중 발견된 3개의 탑, 바이샬리와 랑그람,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 참배한 이 모든 공덕을 고통받는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배고픈 자는 배불러 지고, 병든 자는 속히 쾌차하여지고,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배움이 성취되는 등 고통받는 일체 중생들 모두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nbspnbsp또한 저희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연으로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 병고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들 하루 속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갖가지 인권침해로 인간다운 삶이 영위되지 않는 북한동포들에게 자유와 행복이 속히 도래될 수 있게 옹호하여 주옵소서. 올해로 해방 70주년 분단 70주년 이산가족의 애환이 깊으니 올해 분단 70주년을 기하여 남북한이 화해하고 교류하고 협력하여 한반도의 다시는 분쟁과 전쟁이 없도록 나아가 서로 협력하여 통일의 기운을 만들어 마침내 한반도가 통일될 수 있도록, 뿐만 아니라 한중관계 한일관계도 개선되어 동양 삼국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여 함께 번영하므로써 이웃나라가 서로 공생공존할 수 있어 세계 문명의 중심을 이룰 수 있도록 발원하옵나니 성지순례 참배 인연공덕으로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천륭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또한 지난 2주 성지순례 기간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이와같이 오백 대중이 순례를 마칠 수 있게 됨에 제불 보살님들께 감사드리오며 남은 일정 또한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성지순례 참배 대중 일동은 성지순례를 통하여 이제 사람으로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때리거나 죽이거나 헤치는 행위를 하지 않고, 훔치거나 빼앗는 손해끼치는 행위를 하지 않고, 성추행 성폭행 등 괴롭히는 행위를 하지 않고, 거짓말 욕설 등 말로도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술을 먹고 취하여 행패 피우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사람다운 길을 갈 수 있는 그런 서원을 꼭 지킬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시고 더 나아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베풀고 돌볼 수 있도록,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괴로운 이를 위로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밝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순례를 마치며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대승보살의 길을 갈 수 있길 순례 참배 대중 일동은 서원을 세웁니다.nbspnbsp또한 검소하게 살되 당당하며 겸손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서 세상에 불자됨이 자랑스럽고 이 세상에 불자가 있음으로해서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그런 불자 되기를 발원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은 저희 참배 대중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륭팔부 신중님들은 저희의 이 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이어서 스님은 “장시간 버스타고 온다고 힘들었어요?” 물어 보시면서 이곳 상카시아 성지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잘 오셨습니다. 이곳이 마지막 성지입니다. 어느해 우기철 안거에 부처님이 일체 보이시질 않았습니다. 누구도 부처님을 본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근심이 많았습니다. 부처님이 어디 가셨을까?nbspnbsp그런데 신통제일 목갈리나 존자께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도리천궁에 가셔 계신다. 어머니를 위해서 설법을 하러 가셨다” 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태어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으니까 부처님의 설법을 못 들었잖아요. 그래서 어머니를 비롯한 도리천궁에 있는 천인들을 위해서 설법하러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오시는지 물어보니 10월 보름날 이곳에서 하강하신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를 기념한 탑이 이 상카시아 스투파입니다.”nbspnbspnbsp법문을 마치고 상카시아에 관련된 경전을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경전독송을 마치고 잠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상 후에는 스님의 요청으로 한 법우가 나와서 ‘어머니의 은혜’를 선창하고 오백 순례단도 모두 함께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 스승님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스승의 은혜’를 불러보자”고 하셔서 이번에는 무변심 법사님의 선창으로 ‘스승의 은혜’를 함께 불러 보았습니다.nbspnbspnbsp곳곳에서 눈시울을 붉히거나 조용히 눈물을 닦는 순레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조금씩 저물어 가는 주위에 까마귀 떼가 낮게 날아서 숙연한 분위기를 더하는 듯 했습니다.nbspnbsp▲ 어머님의 은혜,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히는 순례객nbsp스님께서도 노래를 함께 부르신 후 “우리 모두는 부모님과 스승의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시며 법문을 마치시고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서둘러 버스에 탑승하라 하셨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성지를 나서며 어김없이 동네 아이들을 위해 사탕을 나눠주시며 아이들의 행복과 인도 불교의 부흥을 발원하셨습니다.nbspnbsp▲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시는 스님nbsp버스를 타고 5분쯤 가니 스님께서 상카시아 석가족을 위해 담마 센터를 지어주려고 마련한 부지가 나타났습니다. 아직 담마 센터는 지어지지 않았고 주위에 벽만 네모나게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순례단 일행이 부지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석가족 청년들이 나와서 스님과 순례단을 환영해 주었습니다.nbspnbsp▲ 상카시아 담마 센터 건립 부지. 인도성지순례 회향식nbsp오후 5시30분경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시작으로 제26차 인도성지순례 회향식이 열렸습니다. 스님께서는 해가 져서 어두워진 으스름 속에서 마지막 회향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오계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500여 대중을 한명이라도 더 깨우쳐 주시려는 스님의 간절한 마음과 순례단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nbspnbspnbsp“여러분들이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바라나시의 사르나트에서 구리가 장자의 부부처럼 삼귀의 오계를 받고 출가한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시작한지 오늘로써 열하루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열흘 간 단기 출가를 했다고 볼 수 있죠. 그 열흘 동안 우리는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바라나시의 사르나트, 6년 고행하신 전정각산,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 일천 비구를 교화하신 우리벨라 가섭터, 가야 가섭을 교화한 가야산, 처음 사찰이 건립된 죽림정사, 왕사성, 영축산, 칠엽굴을 순례하고, 그리고 바이샬리의 진신사리탑과 원후봉밀터를, 그리고 께사르 스투파를 거쳐서 파바마을의 춘다 공양터, 쿠시나가라의 열반당, 부처님을 화장한 라마바르총, 그리고 네팔로 넘어 가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29세까지 성장하신 카필라성, 그리고 석가족이 부처님을 영접한 쿠단과 꼴리족이 세운 랑그람 진신사리탑을 참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도로 와서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그리고 천불화현탑을, 그리고 사위성의 기원정사를 참배하고, 오늘 이제 상카시아의 부처님이 하강한 곳의 탑을 참배함으로 해서 10대 성지순례를 마치고 3개의 진신사리탑까지 참배를 마쳤습니다.nbspnbsp진행되는 과정에 자는 것도 불편하고 씻는 것도 불편하고 대소변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불편하고 많은 것이 불편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많은 대중이 움직이다 보니 복잡하기도 하고 쫓기기도 하고 그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아무 차질 없이 오백 대중이 성지순례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신중님들이 옹호하셨나 싶을 정도였습니다.nbspnbspnbspnbsp오늘 회향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부디스트라고 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잖아요. 붓다라는 사람은 수행자예요. 우리가 부디스트가 된다는 것은 불교를 믿는 종교인이 된다는 개념이 아니예요. 수행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부처님의 법에 귀의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여러분들은 성지순례까지 하셨으니까 불자로서 미니멈은 좀 지켜주셨으면 해요. 자신이 불자라고 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면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둘째, 남에게 손해는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아무리 성질이 나도 욕설을 하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섯째, 술을 안 먹으면 좋지만 먹더라도 취해서 주정을 해서는 안됩니다. 부디스트가 이것을 증명하는 징표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미니멈이 안지켜지기 때문에 수행자는 고사하고 평범한 인간도 못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처님이 정한 이 다섯가지 계율은 무슨 성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워라 이런 얘기입니다.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오계는 지킨다’ 이것 하나는 결심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무지로 인해서 일어났다면 깊이 참회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nbspnbsp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다든지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준다든지 남을 위로해 준다든지 하면 더 좋죠. 돈 벌 일이 있으면 열심히 버세요. 벌어서 베푸는 데에 쓰면 되잖아요. 여기 보니까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습니까? 미국이나 한국에서 낭비하지 말고 이런 곳에 주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사는 데에 도움이 되겠어요?nbspnbsp그러니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아닌 것으로 자꾸 나를 삼지 마세요. 나이가 내가 아니며, 지위가 내가 아니며, 재물도 내가 아닙니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삼고 그게 부족하다고 비굴하거나 그게 좀 있다고 교만하거나 그러지 말고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nbspnbspnbsp그런데 부처님은 2600여년 전에 바라문이라고 목에 힘주고, 왕이라고 목에 힘주고, 돈 많다고 목에 힘주고, 천민이라고 고개도 못 들고, 여자라고 고개도 못 들고 사는 그런 세상에 평등한 인간 존엄을 선언했기 때문에 존경이 되는 겁니다. 지금 시대에 그런 얘기를 하셨으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얘기라서 그렇게 할 수 있겠다 싶은데, 지금 들어도 훌륭한데 그 시대에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 시대에 상가 안에서만이라도 모델을 만들려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는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한 인간이 그렇게 올바르게 사물을 인식했다는 것, 나아가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다는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세상은 붓다가 말한 쪽으로 한발 한발 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도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 대로 행하면 아마 인류 사회에서 가장 선각자가 될 거예요. 가장 진보적이고 앞선 사람이 될 거예요.nbspnbsp그러니 우리 불자들이 세상에 뒤쳐진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을 한발 앞서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까 전세계적으로 상위 1가 가진 재산이 나머지 99가 가진 재산을 넘어섰다고 해요. 이건 새로운 계급 사회예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이것을 완화시키는 쪽으로, 지구환경을 보존하는 쪽으로,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 쪽으로, 평화가 도래하는 쪽으로, 개인이 행복한 쪽으로 나부터 우리가 함께 해나간다면 개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나 얼마나 소중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성지순례 오셔서 붓다가 2600년 전에 깨닫고 실험적으로 시도한 이런 일을, 붓다는 위대하다고 이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그분이 뿌린 씨앗을 우리가 가꾸고 수확하는, 그것을 우리가 이 세상에 실현하는 사람이 되자는 큰 원을 한번 세워보시기 바랍니다.nbsp▲ 회향 법문을 하는 동안 날이 저물었습니다.nbspnbsp열흘 동안 수행 생활을 하시고 오늘 이제 가사를 반납하게 되는데 수행 생활이 만만치 않았죠? 이렇게 수행 생활 체험한 것을 일상 생활 속에 적용해보면 그래도 자그마한 집이라도 있는 것이 고맙고, 세끼 밥먹는 것이 고맙고, 가족이 있는 것이 고맙고,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이 고맙습니다. 이렇게 고맙게 생각하고 살면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것으로 성지순례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일어나셔서 저 멀리 부처님을 향해 삼배를 드리고 또 법사님들에게 삼배를 하고 가사를 반납하겠습니다.“nbspnbsp해가 다 지고 컴컴한 저녁 6시 20분경 차량 및 조별로 각각 수계를 받았던 법사님들께 가사를 반납하면서 회향식은 끝이 났습니다.nbspnbsp▲ 법사님께 가사를 반납하며nbsp스님께서 웃으시면서 “법적으로 일곱번 까지는 출가를 거듭할 수 있다”고 말씀하셔서 순례단들 모두 웃었는데 가사를 벗을 때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nbsp이어서 석가족 청년들이 준비한 스님과 성지순례단 환영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상카시아에는 전 인도에서 석가족이 제일 많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석가족 청년들은 스님께 꽃목걸이를 하나씩 걸어주며 스님께 합장 공경을 표했습니다. 어두워서 석가족들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nbspnbspnbsp스님께서는 이곳 부지에 석가족의 불교 교육을 위한 담마 센타를 지어주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상카시아 스투파 위에 힌두 탬플이 있어서 석가족과 갈등이 있으므로 스님께서 이곳 부지에 부처님께서 하강하시는 모습으로 불상을 하나 지어주고 대중이 집회할 수 있는 큰 강당도 지어주기로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불사를 추진할 책임자가 없어서 지금은 조그만 사무실만 지어놓고 추진을 못하셨는데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석가족이 200만 정도 살고 있는데 대부분 힌두교이고 절도 없고 해서 스님께서 여기 석가족 집성촌 마을에 불상 점안식을 해주고 법회와 수련도 일년에 한차례씩 해오고 있으십니다. 스님께서는 순례객들에게 석가족 청년들의 활동에 후원과 관심을 당부하셨습니다. 스님의 당부를 듣고 순례객들 모두 십시일반으로 상카시아 석가족 불자 모임을 위해 후원금을 즉석에서 내어 주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석가족을 대표해서 수바스지가 순례단을 환영하는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성지순례객들을 가족처럼 반갑게 맞이해준 석가족 분들nbsp“상카시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을 환영하러 석가족이 여기 올 수 있어서 너무 너무 기쁩니다. 밥과 계란, 짜이를 준비했는데 맛있게 드셔주십시오. 스님과 인연을 맺은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일년에 이렇게 하루만 뵐 수 있어서 너무 섭섭합니다. 한달만이라도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스님께서는 저희들을 위해 많은 불상을 보시하셨고, 저희들이 기도할 수 있게 기도집을 만들어주셨고,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저희 석가족을 위해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감사드립니다.”nbsp▲ 석가족들로부터 불교 포교의 바램을 듣고 기립박수로 응원의 마음을 보내주는 순례객들nbsp수바스지의 환영 인사에 순례단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주었고, 많은 분들이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하며 응원의 마음을 보내주었습니다. 아마도 스님께서 발원하신 인도 불교 부흥 사업이 이 석가족 청년들을 시작으로 활짝 꽃피기를 바라는 순례단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nbspnbsp환영식 후 순례단은 석가족 청년들이 준비해준 밥과 짜이를 맛있게 먹었습니다.nbsp▲nbsp석가족들이 준비해준 짜이와 밥nbsp그리고 각 숙소로 나뉘어 들어가서 성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nbspnbsp이제 인도성지순례는 후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짐은 점점 가벼워 지고 마음은 풍성해지는 듯 합니다. 내일은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로 유명한 아그라로 가서 자유일정으로 인도의 또다른 모습을 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
2015.1.15 인도성지순례 9일째 쿠시나가라
nbsp▲ 쿠시나가라 열반당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9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오시다가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그 음식을 드시고 큰 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카쿠타 강에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시고 이곳 쿠시나가라 사라나무 숲에 이르러서 그날 밤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오늘은 그 여정을 따라 어제 왔던 길을 17km 정도 다시 돌아가서 춘다의 공양터를 참배하고, 또 부처님께서 마지막 목욕을 하셨다는 카쿠타 강을 참배한 후 쿠시나가라로 다시 와서 열반당을 참배하는 일정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국경을 통과하여 네팔로 넘어갑니다.nbspnbsp새벽 5시, 성지순례단은 쿠시나가라의 곳곳에 흩어진 숙소에서 각 숙소별로 송수신기로 새벽 예불을 올리면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nbspnbsp▲ 쿠시나가라 숙소에서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정진nbsp예불을 마치자마자 각자의 짐을 버스에 싣고, 어제 쿠시나가라에 늦게 도착하여 가보지 못한 ‘춘다의 공양터’로 출발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열반 전 마지막으로 공양을 드신 곳입니다. 밖은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공기는 축축하였으나, 1월이라 많이 추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인도의 1월은 얼어죽을 정도는 아니구나 하며 버스에 올랐습니다.nbspnbsp‘춘다의 공양터’로 가는 길에 스님께서는, 이번 성지순례 참가자 중에 가을 불대생이 많은 관계로 부처님의 일생 중 열반 부분은 공부하지 못한 이가 다수 있음을 아시고, 버스 안에서 특별히nbsp자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nbsp아난다 존자가 시냇가에 가보지도 않고 물이 흐려 부처님이 드실 수 없다고 만류한 대목을 이야기 해주시면서,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부처님 말씀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법문해 주셨습니다.nbspnbsp모두들 이른 새벽 일정이 계속 되다보니 잠에 들었는지 조용하자 스님께서는 “누가 스님 법문은 시작하면 졸린다고 수면제라고 하던데, 내 법문이 얼마나 하찮으면 수면제로 써요”라고 농담을 하셔서 모두들 웃으며 덜 깬 잠을 깨고,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스님의 법문을 계속 들었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이곳 쿠시나가라로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왜 이곳으로 오셨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부처님도 돌아가실 때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겠느냐며, 카필라바스투로 돌아가기 위해 이 길로 지나가시다가 열반에 드셨다고 설명하는 분도 있는데 아무튼 이곳 쿠시나가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바야샬리의 사람들을 충분히 위로해드리고 간타키 강을 건너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아난다 존자에게 하신 법문을 옛날 이야기를 해주시듯 술술 풀어 주시며 춘다의 공양이 갖는 의미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몸이 몹시 아프셨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춘다가 올린 공양 때문에 부처님이 병이 나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가난하면 차라리 공양을 올리지 말 것이지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다 춘다 때문이라고 힐책할 것과, 춘다가 자책하고 있을 것을 염려하셔서 부처님께서 춘다에게 해준 이야기를, 스님께서 들려주셨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춘다가 걱정하고 있으니까 ”네가 올린 공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다“ 라고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춘다의 공양은 기독교의 유다처럼 나쁘게 비칠 수도 있었는데,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서 여래에게 올린 마지막 공양이 되어서, 춘다의 공양은 불교사에 길이 길이 칭송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춘다의 공양터까지 참배를 하러 가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위대함입니다.nbspnbsp어떤 사람은 음식에 독성이 든 줄 미리 알고 안 먹는 사람도 있고, 독성 있는 음식을 먹고도 끄떡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독성이 든 음식을 먹고 토해버리고 괜찮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그 음식을 먹고 죽으면서 그 음식을 제공한 자를 위로하고 칭찬한 자는 역사 상에서 없었습니다. 그만큼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을 위대하게 하셨습니다. 육신에 집착하지 않고 공양 올린 자의 마음을 살피시는 부처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라고 한 예수님의 사랑과 비견되는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도 공양 올린 자의 아픔을 살피셔서 위로하셨습니다.”nbspnbsp스님께서는 이어서 카쿳타강에서 목욕을 하신 부처님의 행적을 이야기하시면서 “절반이 졸고 있네 안 잔다고 하더니” 하시며, 9일째로 접어들면서 마음과는 달리 지친 육신으로 피곤해하는 순례객들에게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밤에는 누워 자고 낮에는 앉아서 자고. 한국 가서 새벽 3시에 일어났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하셔서, 저희는 스님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는지 겸연쩍어 하면서도 덕분에 한참을 웃었습니다.nbspnbsp500여명의 순례객이 참여한 이번 성지순례에는 1호차부터 13호차까지 모든 이가 스님의 타신 6호차에 맞춰 수신기를 조정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서, 법륜스님은 이어폰을 타고 오신다는 유수스님의 말씀대로 한쪽 귀를 종긋 세우고 법문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감복하기도 하며 부지런히 스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nbspnbsp스님 법문을 들으며 도착한 춘다의 공양터에는 안개가 자욱하였고, 500여명의 발소리와 목탁소리에 맞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는 낯선 광경에 주변 새들과 벌레들, 동네 개들이 일제히 잠을 깨었는지 유난히 크게 울어대는 것 같았습니다.nbspnbsp▲ 춘다의 공양터에 세워진 탑nbsp예불이 끝나자 스님께서는 대중을 향해 뒤로 돌아앉으셔서, 안개가 자욱한 춘다의 공양터에서 새벽 예불을 잘 마쳤다고 말씀하시면서 춘다의 공양과 관련한 경전 독송을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nbspnbsp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그 당시를 떠올리며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nbspnbspnbsp명상까지 마치고 이를 지켜보던 힌두의 바라문에게도 보시와 공양물로 올렸던 사탕을 선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침부터 찾아온 순례객들의 방문에 처음에는 상당히 까칠하게 굴던 힌두의 바라문도, 스님의 마음 쓰심에 기분이 누그러졌는지 다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 파바마을 아이들이 무척 사납고 거친데, 우리가 사탕을 나눠주면 통제가 안 되어서 이곳 힌두 바라문에게 사탕을 공평하게 나눠주라고 부탁했어요” 라며, 아이들에게 사탕을 최대한 공평하게 나눠주려고 세심히 살피셨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신 카쿳타강이었습니다. 강물이 공기보다 따뜻한지 물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강가로 내려가 손을 씻으시며 순례객들에게 “아픈 사람이 이 강물을 마시면 낫는다”고 하시자 어떤 거사님께서 한 움큼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시고 “강물 마시고 설사해서 열반당 가서 열반하세요. 부처님도 강물 드시고 나서 열반하셨어요” 하시면서 “복잡한 세상 오래 살아서 뭐하노, 이런데서 죽으면 바로 그슬러서 강물에 뿌려주고 좋지”하고 농담을 하시면서 순례객들을 즐겁게 해주셨습니다. 또 스님께서도 “나도 요즘 몸이 아파서 이 물을 좀 먹어야 겠어요” 하면서 물을 한모금 축이셨습니다.nbspnbsp▲ 카쿳타 강nbsp카쿳타 강에 손을 담가보니 물이 그리 차지 않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신 부처님을 생각하며 강을 향해 반야심경을 함께 외우고 돌아서서 가려는데 스님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그렇게 느리게 힘없이 하면 안 돼요.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란 뜻인데, 저 언덕으로 가기 싫다는 거예요?” 스님 말씀에 새롭게 안 이들과 다시 한번 깨우친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뜻을 모르니 어떻게 잘 하겠느냐” 라고 하셔서 모두들 스님 말씀에 웃고 말았습니다.nbspnbsp▲ 카쿳타 강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독송을 해보았습니다.nbspnbsp스님 건강을 걱정하는 순례객들과는 달리, 스님께서 지친 순례객들을 웃음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강행군의 피로를 덜어주시니 한결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nbspnbsp동그란 아침해가 오히려 둥근 보름달처럼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500여명은 열반당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탔습니다. 10시를 조금 지나 열반당에 도착한 순례객은 예불 준비 후 자리에 앉아, 스님께서 해주시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들으며 부처님의 전 생애에 대해 반추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열반당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쿠시나가라 열반당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600 여년전 저 히말라야 산기슭 카필라바스투의 룸비니에서 태어나셔서, 카필라성에서 29년의 생활을 하시다가 29살에 출가하셔서 쿠시나가라를 지나서 바이샬리를 지나서 왕사성 라자그라하에서, 두 분의 스승 아라라카라마와 웃타카 라마 푸트라를 모시고 수행정진을 하셨습니다.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의 경지가 아님을 아시고, 스승의 곁을 떠나 다섯 도반들과 함께 가야 근교의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간 용맹 정진을 하셨습니다. 6년 간의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수행생활을 되돌아보니 세속에 있을 때는 욕망을 따라 쾌락을 쫓았고, 출가해서는 욕망을 억압하는 고행을 행했습니다. 둘은 정반대이지만 사실은 욕구에 따른 작용 반작용일 뿐임을 아시고, 그 둘을 버리고 욕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중도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정각산을 내려와서 니련선하에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목동이 준 길상초를 깔고 앉으셔서 대결정심을 일으켜서 마지막 정진에 들어가셨습니다.nbspnbspnbsp49일 간의 용맹정진 끝에 12월8일 마침내 동녘 샛별이 뜨는 것을 보는 순간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49일 동안 깨달음의 법열을 만끽하시다가 이 좋은 법을 나눠가질 사람을 생각했는데, 이미 두 스승은 돌아가셨고 자신의 다섯 도반을 생각하면서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트로 가셔서 처음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다섯 비구가 제자가 되고 야사 등 55인을 교화하시고 nbsp60인을 앞에 두고 전법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루벨라촌으로 돌아오셔서 가섭 삼형제 일천인을 교화하셔서 가야산에서 탐진치 삼독의 불을 끄라는 설법을 하시고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왕사성에 이르렀습니다.nbspnbsp왕사성 밖 제띠안에서 빔비사라왕을 만나 교화하고 빔비사라왕의 기증으로 최초의 절 죽림정사를 창건하셨습니다. 그곳에 계실 때 산자야의 제자였던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가 부처님께 귀의를 했고, 마하가섭 존자도 부처님께 귀의를 했습니다. 성도 3년 째 수닷타장자의 초청으로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으로 가셔서 기원정사를 창건하시고 그곳에서 많은 교화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 후 6년째 되는 해에 정반왕의 초청을 받아 카필라성으로 가셔서 자신의 친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민중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교화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45년을 행한 후에 세속 나이로 팔십, 성도 후 45년째 되는 해에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영축산에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곱가지 법을 설하시고, 죽림정사에서 상가가 멸하지 않는 일곱가지 법을 설하시고, 암라파티카 동산에서 계정혜 삼학을 설하시고, 나란다에서 머무시고 파탈리푸트라에서 미래에 이곳은 큰 도시가 될 것이니 그 때 세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물의 재앙, 불의 재앙 , 사람의 재앙을 들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강가강을 건너서 바이샬리로 오셨고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으시고 암나팔리의 망고원을 기증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에서 안거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안거를 했던 마을이 밸루바나라고 하는 죽림촌이었습니다. 그해 흉년이 심해서 걸식을 할 수가 없어서 대중 오백명을 다 흩어서 한 마을에 한명씩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과 아난존자는 밸루바나에 머무셨습니다. 얼마나 그해 가뭄이 심했냐면 부처님이 걸식을 가셨는데 말먹이 밀기울을 받아서 드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 안거 기간동안 부처님은 많이 편찮으셔서 거의 돌아가실 정도였는데, 안거 기간이라 흩어져 있는 대중의 불편을 생각하셔서 유수행이라고 수명을 연장하는 수행을 하셔서 그 위기를 극복하셨습니다.nbspnbsp안거가 끝나자 부처님은 바이샬리의 중각 강당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해서 앞으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리라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를 법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바이샬리를 떠나셔서 간타키 강을 건너 파바 마을에 이르러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큰 병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나 카쿳타 강가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시고 춘다를 위로하는 좋은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마치 낡은 수레가 삐그덕 삐그덕 겨우 굴러가듯이 부처님의 육신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부처님은 사자처럼 당당하게 대중의 앞에 서서 쿠시나가라로 오셨습니다. 이곳 사라나무 숲에 이르셔서 가사를 접어서 바닥에 깔고 그곳에 누우셨습니다.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머리는 북쪽으로 발은 남쪽으로 해서 서쪽을 향해서 누우셨습니다. 이것이 열반상입니다.nbspnbsp그 때 아난다는 너무 슬퍼하면서 물었습니다. “왜 외로운 이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저 왕사성이라든지 사위성이라든지 코삼비라든지 바라나시라든지 바이샬리라든지 부처님의 제자도 많고 재가신자도 많은 그런 곳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렇게 외로운 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그런 걱정을 하지 마라. 비록 이곳이 지금은 외로운 곳이지만 미래에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하셨어요. 아난다가 다시 “그렇다면 왕족들이 있는 성 안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 숲속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하니 “숲속에서 열반에 들어야 누구든지 여래를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다 친견할 수 있다” 하셨어요. 만약에 궁중에서 열반에 드신다면 왕족이라든지 바라문만 친견할 수 있죠. 천민들은 들어올 수가 없잖아요. 아무런 울타리가 없는 이곳 숲속에서 열반에 드심으로 해서 누구든지 신분에 고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짐승들이라 하더라도 여래를 친견할 수 있게 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아난다는 위대한 스승 붓다께서 열반에 든다고 하니 많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할 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하는 유명한 마지막 유언을 하셨습니다.nbspnbsp그 때 아난다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를 생각하니까 여러 걱정이 되었어요.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사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하니 부처님께서 “여래가 열반에 든 뒤에는 4성지를 생각하라” 하셨어요. 여기가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인데 태어나실 때의 정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곳인데 깨달음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곳인데 설법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인데 열반의 모습은 이러하다, 이것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순례를 하는 것도 이 유훈에 따른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nbspnbsp비록 흔적이 없고 부서진 벽돌과 소똥만 널려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순례하는 이곳들은 성스러운 곳입니다. 성스러움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니까요.nbspnbsp그리고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에 의심이 있거든 나에게 물어라.” 하고 세 번씩이나 물었지만 아무도 질문이 없었어요. 그러자 아난 존자는 “여래의 법은 잘 설해져 있고 우리들은 이미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안온하게 열반에 드소서” 라고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나는 51년 전에 저 카필라성을 떠나서 하루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했다. 그러니 너희들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부처님의 맨 마지막 말씀입니다.nbspnbsp그런데 여러분들은 욕심이 많아서 수행도 바짝 해서 그게 안되면 나는 수행과 인연이 없나 보다 하면서 내팽겨쳐버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다생겁래로 지은 업인데 그것을 어떻게 한순간에 없애려고 해요? 그래서 정진은 한발 한발 걸어가듯이 꾸준하게 해나가야 합니다.nbspnbsp자, 그러면 지금부터 열반당에 들어가는데 오백명이 저 안에 한번 다 들어가보는 거예요. 아마 역사 기록일 거예요. 꽉 찬 상태에서 저 열반당 안에서 예불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발원문을 함께 읽고 축원하고 마치겠습니다.”nbspnbsp500 대중은 열반당 안에 빼곡히 들어가 예불공양과 ‘석가모니불’ 정근을 올렸고 열반당의 높은 돔천장 안은 목탁소리와 정근소리로 가득 차 울려퍼져 마치 부처님의 열반하신 날처럼 장엄하게 느껴졌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눈물을 훌쩍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nbspnbspnbspnbsp예불 공양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거룩하신 부처님께 한국에서 온 500여명이 두손 모아 합장하며 기도하옵니다” 하며 45년간을 쉼 없이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해오신 부처님의 행적을 상기시켜주시고, 이제 평온히 쉬시고 우리가 부처님 뜻을 이어받아 남은 일을 하겠다는 발원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nbsp“거룩하신 부처님 저희들 한국에서 온 불자 대중 500여명은 이렇게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 서서 두손 모아 합장하오며 발원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 히말라야 산 기슭 카필라성의 룸비니에서 태어나셔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뭇 중생의 고통을 보시고 그 아픔을 함께 하시고 그 고통을 구제하시고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셨습니다.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 간 고행하신 끝에 니련선하 강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르나트에서 처음 설법을 한 이래 45년 동안 하루도 쉼 없이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곳에 부처님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nbspnbsp어리석은 자는 깨우치고 가난한 자는 돌보고 고통받는 자는 위로하셨습니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마치 낡은 수레를 삐그덕 삐그덕 몰고 가듯이 그 육신을 이끌고 이곳 쿠시나가라에 이르러서 마침내 열반에 드셨습니다.nbspnbsp부처님이시여 이제 안온히 쉬소서. 이제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고통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가진 우리들이, 작은 부처가 되어 고통 받는 중생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여래의 사도로써 전법의 역사를 쓰겠습니다.nbspnbsp다시는 부처님께 무엇을 해달라 도와달라 빌지 않고, 부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일들을 우리가 대신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시여 이곳에 안온히 머무소서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nbspnbsp이렇게 오늘 간절히 발원을 하오니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께서는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nbsp500여명이 가득 들어섰던 열반당 안에서의 예불을 마치고, 스님의 지도하에 실타래를 풀 듯 안쪽부터 부처님을 뵙고 돌아나와서, 열반당을 배경으로nbsp조별로nbsp스님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순례객은 11시45분경에 라마바르총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쿠시나가라 왕족의 대관식을 하던 장소로 바쿠다 반다나 영지인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세상 풍속대로 장례를 치르라는 말씀대로, 왕족이신 부처님의 신분에 맞게 이루어 진 것이라 하시면서, 당시의 상황을 nbsp자세히 법문해 주셨습니다.nbspnbsp▲ 라마바르총nbsp“이곳은 원래 왕위를 계승할 때 대관식을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사라나무 숲 속에서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이 최후로 물을 드셨다는 히란나바티 강가에서 다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왕위를 계승하는 대관식을 하는 성스러운 이곳에서 다비식을 준비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오백 대중을 이끌고 부처님의 뒤를 따라 왔는데 결국 부처님을 뵙지 못하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열반하시고 일주일 뒤에 마하가섭 존자가 도착했어요.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도 오백 대중이 있었어요. 여러분들이 오늘 열반당에 들어가서 그 때의 오백 대중처럼 똑같이 부처님의 열반상을 보고 눈물도 짓고 그러셨는데, 그 당시의 대중들도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 주위에 둘러서서 우는 사람도 있고 그랬다고 해요. 그랬을 때 천안제일 아니룻다 존자가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시다 하면서 사념처관을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대중이 모두 몸이라는 것은 부정하고, 느낌이라는 것은 고일 뿐이고, 마음이라는 것은 무상하고, 법은 무아다 하는 것을 관하게 되니까 마음이 전부 고요해졌습니다. nbsp그래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지만 대중들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부처님의 유골은 티끌이 없이 깨끗이 타서 아주 깔끔했어요. 그것을 다 수습을 했는데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 왕도 부처님의 유골을 자기 나라에 모셔서 기념탑을 쌓겠다고 하고, 바이샬리의 리차비족도 그러고,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도 그러고, 다 와서 각자 자기 나라에 모시겠다고 해서 전쟁까지 일어날만큼 험악했다고 해요. 그래서 도나 바라문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아무리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지만 부처님의 사리를 서로 가져가려고 전쟁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하면서 여덟 나라에게 여덟 몫으로 공평히 나눠주었다고 해요. 그리고 도나 바라문은 사리를 담았던 그 용기를 가지고 기념탑을 쌓았고, 한 종족은 늦게 와서 부처님을 화장한 재를 가져가서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덟 개의 진신사리탑과 한 개의 항아리탑, 한 개의 재탑이 있었습니다.nbspnbsp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한 삶은 여기서 마감이 됩니다. 부처님을 여기서 화장을 하고, 그 자리에 이를 기념해서 후대에 크게 기념탑을 쌓았어요. 이것을 ‘라마바르총’ 이라고 해요. 자, 이 내용을 경전으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nbsp경전을 독송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다시 구체적으로 만나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경전독송과 명상까지 마치고 조별로 흩어져서 아침 겸 점심 식사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는 가운데 성지에서 먹는 밥맛이 정말 꿀맛입니다.nbspnbspnbsp오후에는 네팔국경을 넘어, 붓다 이전에 한 젊은이로서의 삶을 만나보기 위하여 룸비니로 향했습니다. 네팔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소감 나누기와 자기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누기와 소감을 듣다 보니 다들 한분 한분 모두 참 소중한 인연으로 오신 분이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500여명이 함께 움직여야 하고 시간에 쫓길 때도 많아서 한분 한분의 소중함을 잘 몰랐구나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nbsp순례단은 오후 6시경에야 국경에 도착하였고, 출입국심사를 위해 네팔국경에서 3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으나 해가 진 후라 주변이 어두워져 둘러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nbspnbsp▲ 네팔 국경nbsp스님은 네팔에 오면 꼭 들린다는 식당에서 로티와 달로 요기를 하셨고, 순례객들도 환전을 하거나 식당이나 가판대에서 각종 네팔 음식들을 맛보고 과일이나 야채,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 네팔에 있는 한국절인 대성 석가사에 9시경에 도착해 절에서 준비해준 음식으로 늦은 공양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깍두기와 나물반찬을 맛있게 먹고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며 조별 나누기를 한 뒤 취침에 들었습니다.nbspnbsp오늘은 부처님의 마지막 가신 길을 함께 했는데요. 내일은 부처님 탄생 이야기를 따라 카필라성과 룸비니로 가는 날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공간도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오니 저녁 기온이 한층 쌀쌀해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
2015.1.13 인도성지순례 7일째 라즈길
▲ 칠엽굴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출발한지 7일째 되는 날입니다. 3일 동안 머물렀던 수자타 아카데미를 떠나려하니 이 곳 실무자들을 먼 곳에 두고 가서 애처롭고 미안한 생각도 듭니다. 정문 앞까지 배웅 나온 현지 실무자의 얼굴이 우리가 떠나는 걸 아는지 슬픈 얼굴로 서 있는 모습에서 새로운 얼굴을 본 것 같아 가슴이 짠하였습니다. 순례단은 이제 이들의 수고로움을 많이 알아버린 까닭인 것 같습니다.nbspnbsp▲ 새벽 5시. 순례객을 기다리며 수자타아카데미 앞에 서 있는 버스들nbsp이젠 몸도 새벽 일찍 일어나는 것에 적응되었는지 새벽 4시 전에 벌떡 일어나지고 몸도 개운하였습니다. 아직도 깜깜한 새벽을 뚫고 짐을 버스에 모두 싣고 nbsp전정각산을 뒤로 한 채 분주히 라즈기르로 출발한 시각은 새벽 5시였습니다.nbsp버스에 타자마자 흔들리는 차 안에서 아침예불을 하고 6시 40분쯤 라즈길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남문을 통과한 후 버스 왼쪽과 오른쪽으로 흩어져 시원하게 노상방뇨를 하고, 부처님 당시 마차바퀴 자국이 돌에 선명히 남은 장소에 모두 앉아 오늘의 일정과 가게 될 곳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날씨가 추워 몸이 오싹 하기도 했지만, 스님의 애정어린 설명에 금새 집중이 되어 추위도 잊었습니다.nbspnbspnbsp▲ 마차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곳nbsp라즈길은 왕사성이라고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곳으로 원래 이름은 라자그라하인데 왕의 집이란 뜻입니다. 왕사성은 부처님 당시 북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서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왕사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천년의 요새였습니다.nbsp이 곳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전에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한 곳이었고, 수행하시는 부처님의 청청한 모습을 보고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서 성도하시면 자기를 깨우쳐 달라고 부탁한 곳이기도 합니다.nbsp스님의 설명을 다 들은 후 오늘의 첫 목적지인 영축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영축산은 부처님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법화경, 반야심경, 열반경이 설해진 곳이고 염화시중의 미소가 행해진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nbsp영축산을 오르는 길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길이라고 하여 빔비사라왕의 길이라고 불립니다. 왕이 마차로 산 아래까지 와서는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500미터 정도 산으로 오르다가 다시 100m 정도 걸어갔다고 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 빔비사라 왕이 영축산에 계신 부처님을 만나러 다녔다는 빔비사라왕의 길nbsp영축산 가는 길 초입에는 부처님의 주치의인 지바카의 망고원이 있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가기 시작한 곳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헤치려고 던진 돌 파편에 부처님이 발을 다쳐 제자 아난다에게 업혀 내려와 지바카의 응급치료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고, 육방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육방예경은 부처님 당시 어리석은 젊은이를 깨우치기 위하여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부부, 친구, 주인과 하인 관계에서 각각 가져야할 마음자세를 가르친 이야기라고 합니다. 스님의 인기 저서 ‘스님의 주례사’도 이 육방예경을 바탕으로 주례를 본 것이라고 합니다.nbspnbsp영축산 정상에는 신기하게도 여러 크고 작은 굴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곳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굴 이름도 제자들의 이름을 따서 아난다굴, 사리불굴, 목련굴, 마하가섭굴 등으로 불렸고 차례대로 참배하였습니다.nbsp▲ 아난다 존자가 수행했다고 하는 아난다 굴nbsp또한 산의 정상부근에는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돌을 던졌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자만심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해주는 일화였습니다.nbsp▲ 데바닷타가 부처님께 돌을 던진 곳.nbsp영축산 정상에는 독수리를 닮은 바위가 있었고 그래서 이름이 인도말로 ‘그리드라쿠타’ 즉 독수리봉이라고 불리우는데, 한문으로는 ‘영축산’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nbspnbsp영축산의 정상이 좁아서 순례단의 일부만 정상에 앉고, 나머지 순례단은 모두 정상 바로 밑으로 차례대로 앉아 영축산 정상을 향하여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 당시에 설한 경전을 독송하였습니다. 500명이 읊는 예불은 장엄하기까지 했습니다.nbspnbspnbsp공간이 비좁아서 예불은 앉은 자리에서 그냥 했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당시 수불부촉...’ 에서 바로 그 영산이 이곳인데, 예불을 하면서 “영산당시” 라고 읊으면서 무언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설법을 하신 바로 그곳에 지금 500여명의 순례단이 다시 찾아와 예불을 올리고 있으니 참으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nbspnbspnbspnbsp영축산을 내려오는 길에 영축산 정상이 잘 보이는 곳에서 차량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영축산을 배경으로 차량별로 사진을 찍는 시간.nbspnbsp버스로 5분쯤 걸리는 곳인 빔비사라왕의 감옥터로 갔습니다. 감옥터는 왕사성의 내성 맨 끝에 위치한 곳으로 감옥터의 외곽만 남아 여기가 감옥이었구나 짐작하게 할 뿐이였습니다. 아침 내내 끼여있던 안개가 많이 걷혀졌고 해가 밝게 비추고 있어 따뜻하기까지 했습니다. 순례단은 조별로 정렬하여 앉아 가사를 수하고 예불을 드렸습니다.nbspnbsp스님께 빔비사라 왕이 아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 사연과 그런 왕을 위로하신 부처님의 이야기, 감옥에 갇혀 굶고 있는 왕에게 음식을 몰래 전하려던 왕비 위제희 부인이, 아들에게 이 사실을 들켜 골방에 갇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처님의 위로를 청하고, 부처님은 그런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관무량수경을 설하신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nbsp▲ 빔비사라왕의 감옥터. 안개 때문에 안보이지만 스님 뒤로 저 멀리 영축산이 있습니다.nbspnbsp“이곳은 빔비사라왕의 감옥터입니다. 왕이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힌 겁니다. 빔비사라왕은 당시 인도 강국의 절대왕인데 나이가 사십이 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어요. 당시에는 왕위를 아들이 잇잖아요. 아들이 없으니까 정정이 불안한 거예요. 어느날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니까 3년 후에 아들이 생긴다는 거예요. 저 히말라야 산에서 수도하는 수도승이 명이 3년 남았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아들로 태어나도록 인연이 되어있다고 했어요. 왕이 사실을 확인해보고 아들 갖고 싶은 마음이 급하니까 그 수도승이 빨리 죽으면 아들이 빨리 태어날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사람을 보내서 ”빨리 죽어라“고 했더니 그 수도승이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왕명을 거역했다고 해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겁니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 ‘내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 하고 죽은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위제희 부인에게서 애기가 생긴 겁니다.nbspnbspnbsp그래서 왕은 애기를 갖게 된 기쁨과 원수라는 사실에 대한 불안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애기를 낳자 마자 2층에서 아래층으로 던져버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애기가 땅에 떨어졌는데도 손가락 하나만 부러지고 무사한 겁니다. 그래서 왕이 다시 마음이 바뀌어서 애기를 극진히 키웠습니다. 그 애기가 바로 아자타사투 왕자입니다.nbspnbsp세월이 흐르고 데바닷타가 부처님 교단의 새로운 리더가 되려고 하는 시도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아자타사투와 데바닷타는 모의를 해서 아자타사투 왕자는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고, 데바닷타는 부처를 해치고 자기가 새 부처가 된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겁니다. 그 때 데바닷타가 아자타사투를 꼬드긴 이야기가 “왕은 너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너의 원수다” 하는 비밀을 이야기해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자타사투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려고 한 겁니다.nbspnbsp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왕의 부인이면서 왕의 어머니가 될 위제희 부인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권력을 쟁취하는 싸움을 하게 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이기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아들이 이기면 자기 남편이 죽고, 누가 이겨도 진 자는 역적이 되고, 역적은 살려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가 된 것입니다. 해결책이 없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nbspnbsp그런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리려고 하니까 아자타사투 왕은 어머니도 아버지와 한패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도 감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위제희 부인은 저 멀리 영축산을 바라보면서 자기 신세 타령을 하면서 부처님께 기도를 합니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아들을 낳게 되었고, 부처님은 왜 데바닷타 같은 저런 악인을 친족으로 두었나 원망을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지금 너가 억울하고 분한 것 같지만 사실 빔비사라 왕은 자기 아들을 얻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너도 너의 아들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방치했고, 아들은 제 원수를 갚는다고 제 아비를 죽이는 이런 중생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위제희 부인은 ’나는 이런 세상은 싫습니다. 이런 괴로움이 없는 세상은 없습니까?‘ 하니까 부처님이 극락 세상을 보여주자 위제희 부인은 극락 세상에 나기를 발원합니다.nbspnbsp위제희 부인은 “나는 지금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려서 극락 세상을 볼 수 있지만 후세 대중은 어떻게 극락을 볼 수 있겠느냐?”며 부처님께 청하니 부처님께서 극락을 보는 16가지 관법을 설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관무량수경’입니다. 대부분의 경전이 부처님의 제자들이 거룩한 질문을 해서 법문이 설해지는데, 이 경은 가장 곤궁에 처한 여인이 울부짖으면서 부처님께 기도한 데 따른 부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는 더 소중하지 않나 생각합니다.nbspnbsp지금 우리가 앉은 방향이 영축산이예요. 위제희 부인처럼 영축산을 향해서 경전을 독송해 보겠습니다.”nbsp스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위제희 부인의 간절한 마음이 되어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었다면 위제희 부인이 얼마나 더 고통스러웠을까 헤아려 봅니다. nbspnbspnbsp빔비사라왕 감옥터에 조별로 돗자리를 펴고 모여 앉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해 준 밥을 반찬과 함께 맛있게 먹은 후 다음 장소인 죽림정사로 떠났습니다.nbsp날씨가 갑자기 더워집니다. 버스 안에서 새벽에 추워 껴 입었던 옷들을 벗었습니다. 날씨가 요동을 치니 벗어 놓은 옷이 한 짐이나 됩니다. 5분쯤 달려 죽림 정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콧물이 흐르는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손을 내밀며 우리를 먼저 반깁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딱하고 안스럽습니다. 스님께서는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이 아이들의 다음 세상을 위해 발원을 하십니다.nbspnbsp죽림정사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 부처님과 1,000명의 제자가 머물 곳을 보시한 곳으로 초기 사찰의 원형이 된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도 예불과 공양을 올리고 이곳에서 설한 경을 함께 읊고 명상도 했습니다. 명상을 하며 지금 맡고 있는 공기를 부처님과 제자들도 맡았을까 생각하니 부처님이 더 생생하게 느껴집니다.nbsp▲ 죽림정사에 도착해 예불을 정성껏 올립니다.nbspnbsp예불을 올린 후 스님께서는 이 곳에서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며,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보시한 이야기 등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이곳이 1,250명의 대중이 있었던 죽림정사입니다. 우리가 늘 예불문에 ‘천이백 제대 아라한’ 또는 금강경에 ‘천이백오십 대 비구중’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바라나시 사르타트로 가셔서 교진녀 등 오비구와 야사 등 육십명을 모아놓고 전법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우루벨라촌으로 오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 등 일천명을 교화하셔서 가야산에서 탐진치 삼독의 불을 끄라는 유명한 설법을 하신 뒤에 그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이곳 왕사성으로 오셨습니다.nbspnbspnbsp왕은 왕사성 서문 밖 제띠안까지 마중을 나왔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왕은 바로 그 이치를 깨닫자 너무 기뻐 부처님을 왕궁으로 초대했습니다. “내가 왕이 되었고,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 부처님이 출현하셨고, 내가 부처님을 친견해서 이렇게 법문을 듣게 되었고, 또 내가 그 법문을 이해하게 되어서 지혜의 눈이 열렸다” 면서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는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거였다” 라고 하고 “왕궁에 오셔서 저의 공양을 받으옵소서” 청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거절을 하셨어요. 즉 수행자는 궁중에 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왕은 부처님이 머무실 좋은 자리가 어디일까 생각해봤는데, 성 안은 너무 번다하고 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탁발하기 어려우니 성으로부터 적당히 떨어져 있는 곳이 좋겠다 해서, 북문 밖에 있는 자신이 아주 아끼던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보시했습니다.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죽림이라고 합니다.nbspnbsp대나무 숲에서 어떻게 머무는가 하는데 여기 보시면 알지만 인도 대나무는 하나씩 솟는 것이 아니고 무리를 지어서 이렇게 솟아서 마치 보리수나 느티나무 모양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대나무 숲은 수행자들이 정진하기에 좋고, 그래서 이곳이 불교 교단에 처음으로 세워진 죽림정사입니다.nbspnbsp인도 풍습으로는 항상 절에 연못이 있었어요. 이곳 죽림정사의 연못은 카란다카 연못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장자 카란다카가 보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천이백 대중이 이곳에 머무실 때 아난다 존자는 이 물을 떠서 부처님이 발을 씻을 수 있도록 해드린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눈을 감고 가만히 명상을 하면 부처님과 아난다 존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nbspnbspnbsp부처님이 이곳에 머무실 때 ‘앗사지’라는 비구가 있었어요. 앗사지는 사르나트에서 오비구 가운데 마지막에 깨달은 비구예요. 앗사지가 왕사성 안에서 탁발을 하고 다녔어요. 수행자는 두리번 두리번 하지 않고 발 끝 한치 앞만 보면서 정진을 하며 걷습니다. 그 걷는 모습이 너무나 수행자다워서 이 모습을 사리푸트라가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 분은 참 위대한 수행자다 해서 사리푸트라가 가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니 “저는 붓다의 제자입니다” 라고 대답했어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과 비견되는 여섯명의 스승이 있었고 이것을 육사외도라고 하는데, 사리푸트라는 그 중에 산자야라는 분의 제자였어요. 그런데 그 앗사지의 거동을 보고 감동을 해서 “당신의 스승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니 “그분이 계신 곳에 가서 여쭤보십시오” 그랬어요. 그래도 한마디만 이야기해 달라고 하니 앗사지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라고 하면서 설했어요. 이것을 듣고 사리푸트라는 마음 속에 많은 의문이 풀렸어요.nbspnbsp그래서 사리푸트라는 자신의 그 기쁜 마음을 자신의 친구인 목갈리나와 나누기 위해 수행처로 돌아왔습니다. 목갈리나가 사리푸트라의 환한 얼굴을 보고 “무슨 좋은 일이 있소?” 라고 물어서 그 내막을 이야기해 주니 목갈리나도 바로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스승인 산자야를 찾아가서 “이런 위대한 수행자가 출현했는데 우리 같이 가서 법문을 들으면 어떻겠소?” 그러니 산자야는 “그것은 믿을 수가 없소” 하면서 회의론을 폈어요. 그래서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는 스승을 두고 자기들만 붓다에게로 갔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자신의 제자 100명씩 총 200명을 데리고 붓다에게 가서 법을 청해 듣고 다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러니 천명이 함께 왔는데다가 이백명이 더 합류했으니 이제 천이백명이 되었습니다. 또 그 전에 육십명의 아라한이 있었죠. 그래서 이 분들은 부처님이 성도하고 1년 안에 제자가 되신 분들이니까 불교 교단 안에서는 모두 장로가 되잖아요. 그래서 늘 천이백 제대 아라한을 칭송하는 이유가 이 분들이 가장 교단의 장로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천이백오십 대중과 함께 계셨다고 경전에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소중한 곳이 바로 이곳 죽림정사입니다.”nbspnbsp그리고 죽림정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nbsp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nbspnbsp오늘은 일정이 많아 바쁘게 다음 장소인 칠엽굴로 갔습니다. 칠엽굴로 가는 길은 ‘온천정사’라는 목욕을 하는 곳이 있어 초입부터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온천정사의 맨 위쪽은 높은 카스트가 목욕하지만 맨 아래쪽의 더러운 물에서는 낮은 카스트가 목욕을 한다는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다시한번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nbspnbsp▲ 온천정사를 지나 칠엽굴을 향해 오르는 길.nbsp산 꼭대기에 자이나교의 성지가 있어서 그런지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멀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 칠엽굴에 도착했고, 이어폰을 통해 스님께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시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경전에는 칠엽굴에 아라한 500명이 모여 앉아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는데, 스님께서 “여기 500명이 진짜 다 앉을 수 있는지 보기 위해 500명을 데려왔다” 고 하시면서 “봐라. 500명 다 앉을 수 있네” 하시자 다 같이 크게 웃었습니다.nbspnbsp▲ 경전을 결집할 당시처럼 칠엽굴 앞에 오백 대중이 앉았습니다.nbspnbsp칠엽굴은 부처님 사후 부처님 말씀을 최초로 결집한 제1결집이 행하진 터로 아난다와 우파리가 초안을 내고, 마하가섭 존자가 사회를 보고, 500명의 아라한이 초안을 검증하는 형식으로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nbsp스님께서는 칠엽굴에서의 경전을 결집할 당시의 상황과 부처님 입멸 후에 불교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nbspnbsp“여러분들 여기까지 올라오신다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이곳이 바로 경전이 처음으로 결집된 칠엽굴입니다. 왜 칠엽굴이라고 부르냐면 나뭇가지 잎사귀처럼 일곱 개의 굴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칠엽굴에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니까 무슨 제주도 만장굴 같은 곳에 들어가서 하신 줄 아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가 앉은 여기서 결집을 했습니다. 굴 속은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경전을 결집했겠어요? 여기 동굴이 후끈 후끈 하잖아요. 수행자들이 동굴 안에서 정진하기 좋았기 때문에 많이 알려진 곳이였어요.nbspnbspnbsp그런데 왜 여기까지 올라와서 경전을 결집했을까요?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참여하겠다고 한 겁니다. 만약에 저 밑에서 하면 누구는 참여하고 누구는 참여 안 하고 통제를 못합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올라와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해요.nbspnbsp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를 때 대부분 슬퍼했어요. 그런데 몇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특히 젊은 사람들 중에는 ‘아이고, 그 늙은이 잘 죽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하지마라’ 이런 잔소리가 많았다고 받아들인 거예요. 이 얘기를 장로들이 듣고 굉장히 걱정을 한 거예요. 지금 부처님이 돌아가시자마자 저런 사람들이 생기는데 세월이 흐르면 어떨까요? 온갖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나는 부처님 말씀을 이렇게 들었다 하는 문제가 생기면 진위를 규명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부 모아 놓아서 가짜가 생기더라도 막을 수 있게 해야겠다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하겠다고 하니까 수천명이 다 참가하려고 해서 마하가섭 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에 한한다고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여기 500명이 모인 겁니다. 그 때 재정 후원을 아자타사투 왕이 했다고 합니다.nbspnbsp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을 25년 동안 시봉한 아난다가 그때까지 아라한과를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는 것이였죠. 부처님을 시봉하고 법문을 듣기만 했지 아직 자기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거예요. 아난다는 당연히 자기가 참가할 줄 알았는데 참가가 안되었어요. 아난다에게도 불명예이지만 아난다가 없으면 경전을 결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아난다가 그날 밤에 백천간두 진일보의 정신으로 목숨을 건 정진을 해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해요. 아난다는 맨 마지막으로 오백 대중에 함께한 겁니다.nbspnbspnbsp우리도 여기 오백 명이 모였는데 지금 조는 사람도 있네요. 오백명이 모여서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려면 소란했겠죠. 그래서 사회를 마하가섭 존자가 보고 경의 초안을 아난다가 내었어요. 아난다가 먼저 초안을 내면 다른 사람들이 다 듣고 검증을 했어요. 아난다가 언제 어디서 부처님이 누구에게 어떤 법문을 했는지를 읊조리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옳소. 나도 그렇게 들었소”, “그것은 다른 곳에서 하신 말씀과 섞였소” 이렇게 하나하나 검증을 했어요. 그래서 성경보다는 월등하게 정확합니다. 불경은 깨달은 오백명이 모여서 하나 하나 검증해서 확인된 것을 결집을 시켰으니 정확도에 있어서는 비교가 안됩니다.nbspnbsp초기에 모든 경전은 암송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고 500년이 지난 뒤에 문자로 적게 된 것입니다. 암송이 기록보다 더 정확합니다. 글로 쓴 것은 글자가 틀리면 완전히 오류가 생기거든요. 아난다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의 곡조까지 흉내를 그대로 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가지 의심이 들었다고 해요. 첫째, 부처님이 살아서 돌아오셨는가. 둘째, 타방에 계신 부처님이 이곳에 오셨는가. 셋째, 아난다가 성불했는가. nbspnbspnbsp이런 의심이 들만큼 녹음기 틀어놓은 것처럼 그대로 재현이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오백명이 다 검증을 해서 모든 경전을 결집한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한번 보세요. 오백명이 앉아도 충분하죠? 딱 오백명이 앉으면 되는 자리네요. 가섭 존자가 오백명 이상은 안된다고 한 이유도 자리가 좁아서 안되었겠어요.” nbsp오백 대중이 모여 경전을 읊는 모습을 상상하며 명상도 하고 경전 독송도 함께 했습니다. 2,600년이 흘러 오늘 오백 대중이 이렇게 다시 모여 이곳에 앉아 당시 상황을 다시 재현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다함께 “만세”를 힘차게 부르면서 기념사진을 찍고 산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nbsp칠엽굴을 바쁘게 나와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나란다 대학으로 갔습니다. 나란다 대학 유적지 맞은 편에 작은 박물관이 하나 있어서 먼저 그곳부터 들어가서 이곳에서 발굴된 불상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여러 불상들 중에 특히 부처님의 8대 성지가 다 나와있는 불상이 있어서 관심있게 보기도 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 나란다 대학의 전체 규모를 알 수 있는 모형이 있었는데, 현재 발굴된 것은 10분의1도 안된다고 하니 당시에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나란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상. 8대 성지가 한 불상 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nbspnbsp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란다 대학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란다 대학은 불교를 가르치던 곳으로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대학이었는데 교사만 천오백명이였고 학생은 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적이고 온갖 지혜가 넘쳐났을 곳을 무슬림이 침공해서 모두 불 태워버렸고, 더군다나 도서관은 6개월이나 불 탔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nbsp▲ 나란다 대학. 네모난 곳이 스님 한 명이 명상을 하던 방이라고 합니다.nbspnbsp나란다 대학을 끝으로 오늘의 많은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순례단은 모두 라즈길에 예약된 숙소 곳곳으로 흩어져서 하루종일 걷고 걸었던 여독을 풀었습니다.nbsp내일은 새벽 3시30분에 기상해서 4시에 출발하는 일정입니다. 바이샬리로 가서 아직 3개 밖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또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원후봉밀터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2015.1.12 인도성지순례 6일째 수자타아카데미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인도성지순례 6일째로 오전에는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1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둥게스와리 마을 방문을 하는 날입니다. nbspnbsp오늘도 새벽 4시에 기상하여 4시30분에 수자타아카데미 쁘락보디홀에 모여서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500명의 대중이 가사를 걸치고 함께 하는 새벽 예불은 참으로 장엄하고 엄숙합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전정각산에 오르기 위해 6시 20분에 교문 앞에 모였습니다. 새벽에 짙은 안개가 끼여 등산이 가능할까 걱정하였는데 예정대로 진행되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nbspnbsp어제 순례길 행군으로 피곤한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라고 공지하였지만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동참하였습니다. 등산길 입구에 있는 돌무더기를 가르키며 스님은 ‘탑터’라고 말씀하시면서 탑에 관한 사연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nbspnbsp▲ 부처님께서 죽어가는 여인의 분소의를 입은 곳에 세워진 탑터nbspnbsp“탑 하나는 부처님의 수행 자리를 기리면서 지은 것이고, 또 하나의 조그마한 탑은 버려진 여인이 죽어가면서 부처님이 수행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죽으면 분소의를 저 분이 입어주시기를 소원하였는데 부처님이 그 마음을 아시고 나중에 분소의를 입으시자 그 여인은 곧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사연이 있는 탑입니다. 부처님은 이 전정각산 지역에서 무려 6년이나 수행하셨기에 이곳저곳 부처님이 머무르시지 않은 곳이 없다고 볼 수 있어요. 다 사연이 있어서 산봉우리마다 탑이 세워졌고 마을 근처에도 여기 저기 남아 있는 탑터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을에서 가까운 탑들의 경우 훼손이 심각한데 이는 불교가 쇠퇴하면서 마을사람들이 집수리 하거나 생활에 필요한 돌이나 벽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가져다 갔기 때문입니다.nbspnbsp현재 여러분이 보듯이 전정각산은 돌산이지만 부처님이 수행하던 당시에는 아마도 울창한 숲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는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부정한 땅이라는 뜻인 둥게스와리로 불리었는데 사람들이 여기로 오길 꺼려했습니다. 지금은 근처 마을사람들이 밥을 짓는데 땔감으로 산의 나무를 베어가기 때문에 나무가 자라기가 어렵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의 대다수가 산의 돌을 깨어서 먹고 사는데 산의 일부분이 사라질 정도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불교의 성지로서 세계적 문화유산이 될 전정각산의 바위들이 최근 급격하게 증가하는 도로 포장용 자갈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현재는 정부에서 전정각산을 성지로 보호하면서 함부로 나무를 자르지 못하게 하고 나무를 심도록 지원하고 있고 돌 채취도 금하는데도 실제적으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nbspnbsp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한참 오르다 보니 마을의 짙은 안개들이 엷어지고 산으로 올라갈수록 날씨가 좋아지는 듯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전정각산을 오르시면서 “작은 가시나무들이 바지 가랑이를 붙잡아도 살살 달래면서 털고 오세요. 힘껏 잡아채면 옷의 올이 다 풀려서 상합니다” 라고 하시면서 “여기는 나무들도 척박한 곳이라서 외로워서 사람을 잡으니 살살 달래야 합니다.” 라고 덧붙이십니다.nbspnbsp조금 더 오르니 꽤 큰 웅덩이가 보이는데 물이 뿌옇습니다. 스님께서 물 웅덩이를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십니다.nbspnbsp▲ 부처님이 전정각산에 머무시면서 물을 드셨다는 샘터nbsp“이 곳이 전정각산에서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곳입니다. 부처님도 이곳에서 물을 드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마셔 볼래요? 배탈 나도 책임 못 집니다. 이곳은 석회석 암반이라서 물이 희뿌였습니다. 아마도 부처님이 마셨던 우물은 기슭의 이 조그마한 샘터일 것입니다. 지금은 건기라서 물이 없네요.”nbspnbsp조금 더 가니 바위로 둘러싸인 평안해 보이는 곳이 나옵니다.nbspnbsp▲ 부처님께서 명상하시던 자리의 탑터nbspnbsp“이곳은 바람을 막아주어서 안온합니다. 아마도 겨울에는 여기서 주로 부처님이 머무셨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와 저기에 탑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명상하던 자리로서 탑을 세웠던 곳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20분 정도 명상 하겠습니다.”nbspnbsp스님은 몸소 바위에 자리를 깔고서 자세를 바로 하시고 간략하게 명상하시는 법을 알려주시고 함께 명상을 하셨습니다.nbspnbspnbsp8호차부터 13호차까지 약 250명의 대중이 모두 조용히 자리를 잡고 명상을 하는 가운데 시원한 바람이 살살 불어오고 부처님께서 정진하셨던 이곳에 2500여년이 지나 그 제자인 정토행자들이 명상을 한다고 하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이 새롭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 명상의 공덕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nbspnbsp“부처님이 명상하셨던 이곳에서 잠깐이라도 명상을 해본 것은 인도성지순례의 큰 공덕입니다. 이 잠깐 동안의 명상만으로도 여러분은 본전을 뽑은 겁니다. 나머지는 인도까지 왔으니까 곁다리로 보는 것이예요.”nbspnbsp순식간에 시간이 흘러서 스님께서는 좌선을 풀고 단체 사진을 찍자고 하셨습니다. 그 때 스님이 앉았던 바위 밑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모두 신기해하였습니다. “명상 중에 따뜻하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더니 이래서 그랬나 보다” 하시면서 웃으셨고 많은 분들이 바위 밑을 들여다 보겠다고 모여 들자 “아이고 이것도 구경이라고 난리다” 하십니다.nbspnbsp▲ 새벽녘 전정각산 위에 올라 힘차게 두 손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봅니다.nbspnbsp모든 사람들이 바위에 기대여 단체사진을 찍고 나자 아래 마을 쪽에서 짙은 안개가 빠르게 올라오는데 장관이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사진도 찍지 못할 뻔 했습니다. 스님이 앞장서시고 서둘러 길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아침 식사를 맛있게 하고 8시 30분부터 설성봉 거사님 추모식을 거행하였습니다.nbspnbspnbsp장도연 행자님은 추모문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순례객들도 추모문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nbspnbspnbsp설거사님 부를 때마다 안경 너머 작은 눈은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 줄 채비를 갖춘 선한 눈매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옅은 웃음으로 대답하셨죠. 세상 살이에 아무런 욕심이 없어. 어디 살든 나는 정토행자이고 정토행자로 살다 부처님 법다이 살다 죽으면 되지... 언젠가 옥상에서 전장각산을 바라보고 허허 웃으며 하시던 말씀. 지지리도 못 살아 인간 대접 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땀이 많으신 분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인도 땅을 밟으심은 바로 그 이유였습니까? 중학교 건물 콘크리트 친다고 인도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대야에 시멘트를 이고 나르던 당신의 모습. 눈물이 납니다. 당신의 모습이 수자타아카데미 전정각산과 더불어 더 큰 무게로 가슴을 누릅니다. 당신의 크나큰 사랑, 남아 있는 저희들이 이루겠습니다. 설성봉 거사님 부처님 고행하신 전정각산 바람따라 네이란자라강 흐르는 강물따라 몸 편히 누이시고 고이 가소서 빛으로 돌아오소서nbspnbsp그리고 유수스님의 염불과 함께 정성스럽게 천도재를 올렸습니다.nbsp척박한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다가 무장 강도의 총격에 숨진 거사님이 있었기에 오늘의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부디 왕생극락하시고 빛으로 돌아오소서’ 하는 마음으로 지극정성으로 재를 지내고, 설 거사님의 뜻을 이제 우리가 이어받아서 인도JTS를 잘 가꾸어 나가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nbspnbspnbsp추모식을 하는 동안에 학교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부다가야의 외국절 스님들 그리고 이 지역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내빈들이 21주년 개교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내빈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행사가 열리는 쁘락보디홀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nbspnbspnbsp요란한 축하 음악과 함께 기념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는 인도어로 진행되었고 오늘을 위해서 오랫동안 준비한 학생들의 공연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공연 하나 하나 신나고 재미있고 멋졌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정말 다채롭고 인상적인 인도 공연을 보는 듯 했습니다. 때로는 인도 음악에 때로는 한국 전통 음악에 맞추어서 신명나게 즐기는 모습에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nbspnbspnbspnbsp특히 인도 남자 아이들의 힘차고 멋진 군무에 보살님들의 탄성과 박수가 커 보였습니다. 또 아이들은 평소에 갈고 닦은 태권도 실력도 뽐냈습니다. 한국말로 “하나”, “둘”, “태권” 하는 소리에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nbsp저렇게 멋지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들에서 어제까지 관광지에서 보았던 구걸하는 인도 아이들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정성으로 교육한 힘은 컸고 기적을 보는 듯하였습니다.nbspnbspnbsp한참 신나게 공연을 즐기고 드디어 스님께서 감사의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먼저 개교 기념식에 참석한 분들을 하나 하나 언급하면서 감사의 말씀을 하는데 학생들을 제일 먼저 말씀하면서 고맙다고 하십니다.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를 오랫동안 지원해 주셨던 미얀마 스님을 위시하여 근처의 베트남, 방글라데시, 티벳 스님들 그리고 지역 유지들 그리고 학교를 세울 당시 땅을 보시하였던 이곳의 가난하고 헐벗은 동네사람들, 하나라도 빠질세라 스님의 세심한 모습이 엿보입니다.nbspnbspnbsp“1993년 시작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특히 3번이나 무장강도가 들어서 설성봉 거사님이 총에 맞고 돌아가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부다가야 스님들이 오셔서 위로하였고 도움을 주셨습니다. 경찰서장님도 이곳의 치안에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 오신 동네 어르신들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15개 동네 1만여명의 주민들이 있는 이곳에서 이제는 대부분의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고 결핵환자가 거의 없어졌고 유아 사망자가 크게 줄었습니다. 핸드펌프 설치로 식수도 개선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할 일들이 더 많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지원과 협력이 필요합니다.nbspnbsp둥게스와리 nbsp아이들도 교육시키면 다른 도시의 어느 아이들과 똑같이 잘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의 기회가 없다면 구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이곳에서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듯이 이 아들들도 교육 받으면 이 사회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부처님처럼 잘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nbspnbspnbsp마지막 공연에서는 아이들이 법륜스님과 여러 귀빈들을 모시고 무대 위로 올라와서 꽃목걸이를 걸고 “세상을 함께 치유하자”는 노래를 부르며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대미를 장식하였습니다.nbspnbsp학교를 세우신 스님에 대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 속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스님이 아니였다면 지금도 굶주림에 허덕이며 구걸을 하고 있었을 아이들인데...’ 순례객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힙니다.nbspnbspnbsp성지순례객들도 오늘은 인도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나뭇잎으로 만든 접시 위에 유미죽, 뿌리, 달 그리고 오렌지를 담아서 야외 잔디밭에 조별로 올망졸망 모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오늘은 숟가락도 사용하지 않고 인도인들처럼 손으로 식사를 해봅니다.nbspnbspnbsp▲ 인도 아이들처럼 인도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는 시간nbsp점심식사 후에는 직접 마을 방문을 하였습니다. 약 500명의 순례객들이 각각의 마을로 나뉘어져 실제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 위에 올려져 있는 접시와 냄비가 갖고 있는 살림의 전부라고 합니다.nbspnbsp방문한 마을의 아이들은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때로 몰려와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건네는데 사탕이나 초콜렛을 원하는 듯 했습니다. 안내해주는 법사님이 “아이들에게 자꾸 무엇을 주지 마세요. 아이들을 거지로 만들지 마시고 의젓한 청년으로 자라게 해주세요.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저희 JTS에 주시면 저희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얘기해주시는데 JTS가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교육시켜 왔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두르가푸르 마을을 방문해 부엌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고 있는 선주 법사님.nbspnbsp직접 들여다 본 방 안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깜깜한지 놀라웠고 염소나 닭과 함께 생활해서 염소 똥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어찌 사는가 싶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밝게 웃으면서 사진 촬영에도 응하고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였습니다. 순례객이 직접 방문한 집은 모두 마을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집이였는데, 인도JTS에서 제공하는 구호물품을 함께 나눠주었습니다.nbspnbsp방문 후 조별로 소감문을 작성하고 나누기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기준에 그들은 너무나 가난하지만 누가 더 자유롭고 행복한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보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비위생적이었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알겠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께서는 잠깐 시간을 내셔서 JTS에서 수자타아카데미로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현지 활동가들에게 새책 lt지금 여기 깨어있기gt를 선물하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인도JTS 활동가들에게 새책을 선물하고 기념사진 촬영.nbspnbsp저녁 식사로 맛있는 라면을 끓여 먹고 나서 저녁 예불 후 강당에서 소감 발표시간을 가졌습니다. 소감과 더불어 둥게스와리의 발전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도 많이 나왔습니다.nbspnbsp▲ 둥게스와리 마을 방문을 한 소감문을 발표하는 시간nbsp스님께서는 각 조별로 나온 의견들에 대해 대답을 해주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nbspnbsp“여기서 3일 됐는데 생활할만 해요? 힘들지만 마을 사람이 볼 땐 학교가 어떻게 보일까요? 궁궐처럼 보입니다. 만약 마을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사는 곳을 보면 왕궁에 사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 곳에 사는데 여러분들은 힘들어 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천당에 가도 며칠만 살면 또 힘들다고 할 거에요.nbspnbspnbsp여러분들이 보기에 땅이 넓으니 농사도 제대로 짓고 텃밭도 만들면 좋겠다 제안하셨는데, 현실적으로는 어렵습니다. 왜 땅이 비어있겠어요? 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기 때만 비가 내리고 다른 때는 비가 안 와요. 또 이 지역은 비가 오면 금방 빠져버려요. 좋은 점은 홍수가 절대로 안 난다는 거에요. 학교 운영하는 데에는 좋은 조건입니다. 습지가 없고 물웅덩이가 없으니 모기가 적거든요. 그러나 농사 짓는 데에는 부적절합니다. 지하수 파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거기에도 문제가 있어요. 식수 정도는 핸드펌프로 파는 것이 괜찮은데 농업용수를 전기로 펑펑 올리게 되면 지하수면이 낮아지고 그러면 그 나마 조금 있는 나무들도 다 말라버립니다. 환경적으로 검토했는데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어요.nbspnbsp또 들판에 물이 잘 공급되는 땅을 가진 분이 말하길 ‘농사 지어서 남는 게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물을 발전기로 끌어 올려서 농사 짓게 되면 남는 게 없어요. 경제성이 없어요. 늘 주민들이 우리에게 양수기를 설치해달라고 해서 시범적으로 한번 해줬는데 운영이 안 돼요. 기름 살 돈이 없어서 양수기를 결국 방치하더라구요. 집집마다 핸드펌프로 올려서 텃밭 가꾼다 하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물물 파서 채소를 가꾼다는 건 현실성이 없어요.nbspnbsp여긴 원래 사람 살 수 있는 데가 아니에요. 그런데 왜 사람이 사느냐면 보통 마을은 양민이 100명 살면 한쪽 구석에 천민이 100명이 살아요. 천민들이 양민 동네에 가서 일해주고 먹고 살지요. 여기 산 주위에만 천민 집단 부락이 있어요. 평지에는 천민만 있는 집단 부락이 없어요. 항상 양민 주변에 거주하게 됩니다.nbspnbsp그러니 누군가가 여기 살아보면서 사정에 맞게끔 주택개량을 해야 해요. 제가 주민들에게 물어봤어요. 집짓는 비용을 빌려 준다 치고 1년에 얼마나 갚을 수 있겠느냐 했더니, 1000루피 갚을 수 있다고 해요. 집 짓는데 3만 루피를 빌려준다면 이자 없이 무이자로 빌려준다고 해도 30년 갚아야 해요. 그런데 3만 루피로 집을 지을 수 있느냐?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15만루피가 드는데 빌려주면 150년 동안 갚아야 해요. 불가능해요. 여러 채의 집을 지으면서 실험해봐야 해요. 돈도 적게 들고 짓는 기술도 간단한 방식으로 연구해야 해요.nbspnbsp그리고 건조한 지역에도 자라는 식물을 개발하는 거에요. 실험농장을 마련해서 지하수를 파지 않고 물을 적게 주고도 자라는, 그래서 황무지에도 쉽게 키울 수 있는 농법 연구를 해야 합니다. 방목은 안 됩니다. 풀이 없어서 소가 산에 올라가서 나무 가지를 다 먹어버려 나무를 죽이게 됩니다.nbspnbsp학교에서 공사를 계속 하는 것도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수입원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어요. 공사를 관리할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제일 필요한 건 마을개발 자원봉사자에요. 학교, 병원, 마을개발 이 세가지 활동 중에서 마을개발이 제일 답보 상태예요. 경험과 아이디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 와서 해결해 주었으면 해요.nbspnbsp아이들 문맹퇴치는 100프로 달성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때부터 노동을 해야 농사일이든 노가다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까지 나오면 노동을 하지 않아 평생 룸펜이 되기 쉽습니다. 핸드폰도 구해야지 자전거도 타야지 소비성이 더 늘어나요. 이런 걸 보면 제가 교육을 해놓고도 잘 한 건지 못한 건지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기숙사에 아이들 두는 것도 중지했어요. 여기서 생활하면 자기집에서 생활을 못 합니다. 주간에는 반드시 집에 가서 농사 짓는 것을 도와야 합니다. 학교 와서 잘못 물들면 집에 가서 농사를 못 지어요. 그리고 ‘학교 졸업하고 농사 일할 바에야 학교 뭐하러 다녔나’ 하는 소리를 듣고, 도시 취업은 쉽지 않아요. 이들이 취직할 수 있는 건 경찰, 군인, 공무원 밖에 없어요. 개인사업을 하려면 카스트가 바이샤라야 되고 아버지가 장사를 물려줘야 되는데 자본과 계급이 둘 다 안 돼요. 공무원은 자리가 있는데 시험 쳐서 걸리는 것도 어렵지만 뒷돈을 대야하는데 학교에서 뒷돈까지 대주기는 어려워요. 공부를 시켜도 이런 문제가 있어요.nbsp노동학교에서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되면 월급이 두배가 돼요. 동네에 미장하는 일은 수요가 언제든지 있어요. 공사장에서 보조로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건 어려움이 있어요. 계속 막노동만 하게 되니까요. JTS에서 건축회사를 하나 만들어도 좋은데 할 사람이 없어요.nbspnbsp마을 주민들도 어차피 소비를 해요. 시멘트, 벽돌, 볏짚도 돈주고 사야 합니다. 싸게 구입하려면 공동 구매를 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협동조합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마을금고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강도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100루피만 있어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형편이에요. 고 설성봉 거사 이후 10년 동안 수자타아카데미 안에 경찰이 주둔하고 있어서 지금은 또 치안이 좋은 편이에요. 동네에 가보면 집집마다 연장이 전부 JTS 연장을 씁니다. 일하다가 호미든 낫이든 담장 너머로 던지는 겁니다. JTS가 연장 보급은 많이 했어요. nbspnbsp도난 사고는 훔쳐가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훔칠 수 없는 시스템이 되도록 해야 해요.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면 왜 줄을 안 서고 무질서하게 하느냐 하면 자기에게 불이익이 닥칠까 싶어서 그런 거에요. 안 주든지, 주면 줄을 세워서 끝까지 주든지 해야 해요. 그리고 다 줄 때까지 못 일어나도록 하고 주면 질서가 잡혀요.nbspnbsp제안해주신 것처럼, 여기서 공부해서 여기서 취직이 된다면 도시로 나가지 않아도 되죠. 이 마을에서 자라서 이 마을에 환원되게 하려면 여기에 수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초 자재가 없어요. 관광사업은 잘못하면 사람을 나쁘게 만들 우려가 있고요.nbspnbsp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곳 교육을 통해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취직을 위해서는 도시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지만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 곳 현지 상황을 기반으로 주택개발, 협동조합과 같은 마을 공동 사업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봉사할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nbspnbspnbsp이번 방문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얘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여러분은 이미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여기서 멈춰 주어야 이들이 조금이라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도 한국도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고자 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더욱 빈곤해지는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들은 한국에서는 경제적으로 약자일지 모르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 많이 가진 자입니다. 그러니 검소하게 생활할 것을 부탁드립니다.nbspnbsp둘째는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가진 것이면 충분히 나눌 수 있습니다. 1년에 20만원이면 여기 한 아이가 일년 동안 입고 먹고 교육 받을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돈이 있더라도 아끼면서 소박하게 살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극빈자 한 사람은 살리면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그 당시에 이미 화려한 궁중 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많은 농민들과 노예들의 고달픈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모순을 간파하시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몸소 소박한 삶을 사시어서 이 모순을 타파하고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번 경험이 여러분들이 행복을 찾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nbsp nbspnbsp수자타아카데미 개교기념식과 마을 방문을 하면서 열악환 환경을 보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JTS의 사업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이 들었는데, 순례단이 의문을 가진 점들에 대해서 스님께서 다시한번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시니 ‘아, 정말 온갖 고민과 실험을 다 해보셨구나’ 알게 되었고, ‘나도 한번 기여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인도JTS의 사업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나길 기원해 봅니다.nbspnbsp스님께서 1시간 동안의 열강을 해주시니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각자 숙소로 돌아가 다시 내일부터 먼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잠자리에 듭니다.nbspnbsp내일은 부처님께서 1000명의 비구들과 함께 왕사성으로 가서 빔비사라 왕을 교화하고 설법을 하신 영축산, 죽림정사, 열반하신 후 500 아라한이 모여 경전을 결집한 칠엽굴, 불교가 번창하면서 세워진 나란다 대학 등이 있는 라즈길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합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