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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5 (인도 31일째) 인도인 활동가 수련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인도인 활동가들과 함께 하루 종일 집중 수련을 했습니다.nbspnbsp새벽 4시 30분, 오늘도 도량석 소리와 함께 일어나 새벽예불과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기도를 마치고 법당을 나오니 전정각산 너머로 그믐달이 지면서 날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발우공양을 함께한 후 스님은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였습니다.nbspnbspnbspnbsp우선 자연 채광을 최대한 활용해서 전기를 절약할 것, 학교 교문 앞과 탑터가 있는 성지 주위가 지저분한 경우가 많은데 당번을 정하든지 해서 항상 청소를 해줄 것 등을 이야기한 후 특히 인도인들과 일할 때는 문화를 존중해 주는 자세가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nbspnbsp“같이 살면 서로의 먹는 음식이나 생활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한테 누가 와서 자기는 개고기를 좋아하니 같이 먹자고 하면 질겁할 사람 많잖아요. 그런 것처럼 인도 사람들은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안 먹어요. 그러니 한국에서 음식을 가져오더라도 소고기나 소가 그려진 라면, 소고기 스프 같은 건 안 돼요. 이미 가져와버린 건 어쩔 수 없이 우리끼리 먹더라도 가능하면 아예 가져오지 마세요. 지난번에 이야기 들으니까 애들이 한국 라면을 잘 먹었다가 나중에 소고기 스프가 든 줄 알고 다시는 한국 라면 안 먹으려고 했다는데,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세요.nbspnbspnbsp거꾸로 한번 생각해봐요. 누가 와서 자기 식성이라며 개고기를 먹고 권하면 민감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니 소고기라면 같은 건 한국에서 성지순례 올 때도 가져오지 않도록 앞으로 꼭 공지해 주세요. 고추장에 소고기 넣은 것도 가져오지 않도록 하고요. 그것도 가져와서 밥에 비벼 맛있게 먹었는데 나중에 소고기 들었다는 걸 알고 질겁했다고 들었어요. 우리는 그저 웃으면서 ‘지금까지 잘 먹다가 왜 그러냐’고 놀리듯 넘겨버리지만 그건 굉장히 실례입니다.nbspnbsp음식 문화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자꾸 거스르는 건 안 좋아요.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 문화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변화시킨다면 몰라도 우리 외국인이 와서 문화를 흐트러뜨리는 건 안 좋아요. 서양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우스갯거리로 만들고 제사 지내는 건 죄다 미신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은 웃고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번 그런 경험을 하면 다시는 신뢰하기 어렵거든요.nbspnbsp여기는 자이나교뿐 아니라 브라만 중에도 채식하는 사람이 많아서 채식 문화가 강합니다. 그러니 그런 걸 항상 존중해줘야 해요. 식성이 어떤지 늘 먼저 확인해서 그 사람한테는 그 사람의 식성에 맞도록 배려하는 걸 잊지 마세요. 여기 힌두문화는 일단 소고기를 안 먹으니까 그걸 꼭 지켜주세요. 나름대로 수천 년을 내려온 자기네 전통이 있는데 그걸 막 무시해버리면 안 돼요. 우리가 다른 문화에 속박 받을 필요는 없지만 그 문화를 존중해줘야 합니다.nbspnbspnbsp자칫 잘못하면 외국인이 들어와서 남의 문화를 파괴할 수 있어요. 세월이 흘러서 자기들이 스스로 변화시키는 것은 괜찮지만 우리가 문화를 함부로 흩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 계급차별이나 성차별 같은 것도 우리가 나서서 철폐해야 한다고 함부로 주장하면 안 돼요. 화장실 청소를 안 한다고 막무가내로 야단쳐도 안 됩니다. 우리가 먼저 청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같이 하자, 화장실 청소를 직접 해도 괜찮다’ 이렇게 설명을 해줘야죠. 자기들은 부모 대대로 평생 내려온 습관이기 때문에 그걸 함부로 가볍게 여기면 안 돼요. 여기도 처음에 화장실 청소를 절대로 안 하려고들 하고, 화장실 청소에 참여한 애들이 집에 가서 야단맞는 일도 많았어요. 화장실은 더럽다고 해서 천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천민이 청소해야 한다고 믿는 거예요. 계급 중에서도 제일 낮은 게 화장장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 다음이 화장실 청소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먼저 다 같이 청소를 하면서 설득하니까 애들이 조금씩 따라하게 된 겁니다.nbspnbsp20년 동안 그런 게 굉장히 많았어요. 교육을 통해서 애들이 계급이 달라도 같이 어울리고, 남녀가 학교 안에서는 그래도 평등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학교 안에서 똑같이 대우를 해주고 차별을 못하게는 하지만, 우리가 나서서 바꾸자고 막 주장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그건 여기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즉 자연스럽게 부처님 가르침을 들으면서 변화하도록 해야 하니까요. 다만 우리는 이 안에서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nbspnbsp옛날에 여기서 천민 교사가 양민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라르푸르 사람들이 몰려와서 시위를 하고 난리가 났을 때 제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nbsp‘좋습니다. 그러면 이 학교를 인도식으로 운영할까요, 한국식으로 운영할까요?’‘인도식 운영과 한국식 운영이 어떻게 다릅니까?’‘제가 인도 학교를 보니까 교사가 11시나 12시에 와서 2시간 정도 수업하고는 가버리고, 일주일에 34일 정도 문을 안 열던데요. 그렇게 인도식으로 운영할까요? 한국식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수업하고, 교사도 학생도 수업에 빠지면 안 되게끔 운영합니다.’‘한국식으로 운영해 주십시오.’‘그런데 한국에서는 교사가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만 따지지, 그 사람의 계급이 무엇이고 성별이 무엇인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계급을 따지려면 인도식으로 운영을 하고, 여러분이 한국식으로 운영하기를 원한다면 계급을 따지거나 여자가 선생님 되는 걸 반대하면 안 됩니다.’nbsp그렇게 해서 그 문제를 풀었어요. 주민들에게 ‘계급 차별은 나쁜 것이니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 게 아니라,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자’라고 했을 때 ‘그러면 한국식으로 해달라’고 해서 해결이 된 겁니다.nbspnbspnbsp쁘리앙카가 들어올 때는 또 여기 천민들이 반대를 했어요. 왜 우리 천민들을 위해 학교를 지었는데 우리 동네 천민들을 놔두고 밖에서 브라만을 데려오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때는 또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가르쳐야지, 가르칠 수 없는 사람이 가르쳐서 되겠습니까? 여기 천민들은 아직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잖아요. 천민, 양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를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nbspnbsp반대로 천민 교사를 채용하면 또 말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이 동네 천민들을 위해서 지은 학교였는데 급식을 시작한 이후로 양민 아이들이 대거 몰려와서 학생의 상당수가 양민이 됐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천민 아이들은 많이 떨어져나가서 동네 아이의 절반도 학교에 안 오고 양민 애들이 학교를 주름잡게 되다 보니 이런 불상사가 생겼어요.nbspnbsp이 지역은 혈연이나 가족주의가 굉장히 강해요. 교사 한 명이 문제가 있어서 선생 자격을 해고하니까 그 가문 전체 아이들이 학교를 다 안 나와 버렸어요. 원래 라르푸르 학생들이 여기에 제일 많이 다녔는데 그런 과정에서 라르푸르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서 이제는 라르푸르 학생이 하나도 없잖아요.nbspnbsp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게 한 20년 됐으니 이제 학교 안에서는 밥도 같이 먹지만 아직도 다른 교사들과 같이 안 먹는 교사들이 있어요. 여기 예능 선생들이 주로 브라만, 우리로 치자면 양반이 많잖아요. 원래 높은 계급의 사람이 낮은 계급의 사람에게 물을 떠다 줄 수는 있지만, 낮은 계급이 높은 계급의 사람에게는 물을 안 떠주게 돼 있어요. 암베드카르 법무부 장관이 호텔에 식사하러 갔는데 서빙하는 사람이 브라만 출신이어서 서빙을 안 하고 거부해 버렸다잖아요.nbspnbsp특히 이런 시골에는 계급의식이 굉장히 강해요. 우리가 그걸 굳이 따를 필요는 없지만, 그런 문화를 함부로 여기면 안 됩니다. 쁘리앙카도 여기 와서 봉사할 때 오빠가 가장 크게 화를 낸 것은 봉사하는 것 자체를 두고 그런 게 아니에요. 브라만인데 천민 아이들 목욕시켜주고 밥 먹여주면 집안 체면이 뭐가 되냐며 화를 내고 난리를 피운 거예요. 계급과 관련된 건 좋은 문화는 아니니까 굳이 우리가 따를 건 아니에요. 그렇다고 그걸 우리가 막 나서서 어떻게 할 것도 아닙니다. 교육을 받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스스로 변화되어 가는 거예요.nbspnbspnbsp음식 문화를 비롯한 다른 문화도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 해요. 생활을 같이 하려면 서로 존중해야 하잖아요. 우리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여기서 살면 우리도 모르게 소위 ‘갑질’을 하게 되어 있어요. 모르게 생겨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항상 유의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등하게 한다며 업무를 제대로 진행시키지 않거나 하면 안 돼요. 업무는 엄격하게 원칙대로 진행하되 나머지는 배려하고 조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nbsp문화 존중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이 이렇게 강조한 것은 그만큼 우리가 이곳에서 간과하기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nbspnbsp이어서 아침 8시 30분부터는 스님과 인도인 활동가들의 수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도인 활동가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포함해 부처님에 대해, 학교 운영에 대해, 마을 개발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하루 종일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풍성한 하루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우선 스님은 어제 도보로 전정각산에서 보드가야까지 다녀오면서 시간이 부족해 보드가야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다며 그 부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어제 보드가야 지역에서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보드가야 자체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못 했어요. 그래서 오늘 보드가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nbspnbspnbsp부처님께서 수자타의 공양을 받아 건강을 회복하시고 수행에 대해서도 중도를 발견하셨기에 이제는 좀 더 집중해서 정진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네이란자라강을 건너서 강 서편으로 가니 한 그루 큰 핍팔라나무가 있는데 아주 그늘이 좋았어요. 부처님은 이곳에서 정진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침 옆에서 어떤 목동이 풀을 베고 있었습니다. 풀이름을 물어보니 ‘쿠스’라고 해서 그걸 한 아름 얻어다가 나무 밑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nbsp핍팔라나무를 서쪽으로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고 앉으셨어요. 우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코끝에 집중해서 들숨을 들숨으로 알아차리고 날숨을 날숨으로 알아차렸습니다. 바깥의 소리에도 신경 쓰지 않고, 몸의 어떤 감각에도 신경 쓰지 않고, 머릿속에서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걱정 같은 것도 모두 내려놓고, 다만 코끝에 마음을 집중해서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자연 상태의 호흡에만 깨어 있었습니다.nbspnbsp여러분들도 앞으로 어디를 가든, 언제든, 자리를 잡고 앉아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 후에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코끝에 딱 모아서 숨이 들어가고 숨이 나오는 것을 다만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세요. 그러면 시간이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관계없이, 장소가 보드가야든 둥게스와리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관계없이 다만 살아 있는 한 생명의 호흡만이 존재할 뿐입니다.nbspnbspnbspnbsp부처님은 이렇게 조용히 명상에 들었습니다. 긴장하지도 않고, 나태하지도 않고, 졸지도 않고, 이런저런 생각도 하지 않고, 다만 호흡에 깨어있었습니다. 편안한 가운데 아주 분명한 알아차림을 유지했어요. 이게 말이 쉽지, 우리가 해보면 잘 안 됩니다. 졸거나, 머릿속에서 옛날 생각이 자꾸 떠오르거나, 미래의 이런 저런 생각이 들거나, 몸의 감각에 신경을 쓰거나, 바깥의 소리에 신경을 쓰거나 해서 집중이 잘 안 됩니다. 또 집중을 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면 몸과 마음이 긴장됩니다. 긴장이 된다는 것은 편안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게 말은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 우리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치우치기가 쉽습니다.nbspnbsp명상 이야기는 지금 길게 하기 어려우니 다음에 할게요. 어쨌든 부처님은 그렇게 깊이 정진을 할 때 이런 마음을 가졌습니다.nbspnbsp‘내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nbsp그렇게 정진에 들어가서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나고, 3주가 지나고, 4주가 지나고, 이렇게 7주 가까이가 되었어요. 그 때 마음속에서 어떤 번뇌가 일어났는데, 그것을 경전에서는 ‘마왕의 유혹’이라고 표현했어요. 첫째, 마왕이 세 딸에게 명령합니다. ‘저놈이 지금 욕망을 버리려고 하니 저놈의 욕망을 부추겨서 수행을 포기하도록 만들어라.’ 그래서 아름다운 세 신녀가 부처님 앞에 나타난 거예요. 부처님 앞에서 춤을 추면서 ‘고타마여, 우리의 아름다운 몸을 보소서. 젊을 때 오늘같이 따뜻한 봄날에 젊음을 만끽하는 게 좋소. 이렇게 수행을 하다가 죽어버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소?’ 이렇게 앞에서 유혹했습니다. 여러분들 같았으면 수행이고 뭐고 포기하고 갔겠죠?nbspnbspnbsp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미 모든 욕망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만 가득한 것들아’.nbspnbsp잘 채색된 항아리라는 것은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얻어지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안에 똥만 가득하다는 것은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는 괴로움이 온다는 것을 말해요. 얼른 보면 즐거움 같지만 사실은 그게 괴로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는데,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면 즐거움이 생기고 충족되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 바람대로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으니까 괴로웠다가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 즐거웠다가 할 수밖에 없어요.nbspnbsp이것을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합니다. 힌두교에서는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하며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해요.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나고 죽는 것의 반복이 아니라 괴로움과 즐거움이 반복되며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해요. 우리가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자동으로 따라와서 돌고 돌 수밖에 없는 겁니다.nbspnbsp우리가 바라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사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괴로움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즐거움만 100퍼센트 있는 게 아까 말한 자재천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즐거움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같이 돌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항상 함께 따른다는 거예요. 그러니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라는 걸 꿰뚫어 알아버리는 게 ‘일체가 고’인 줄 아는 겁니다.nbspnbspnbsp너무 어려운 이야기인가요? 이게 사실은 수행의 핵심이에요. ‘야, 이 채색한 항아리에 똥만 가득한 것들아’ 이 말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아름다움을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더럽다는 것은 괴로움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붓다는 즐거움이 괴로움인 줄 알기 때문에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여인들을 가리키자 아름다운 여인들이 갑자기 노파로 바뀌어 버렸어요. 그러자 그들이 부끄러워서 도망가버렸습니다.nbspnbsp그건 뭘 의미할까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은 즐거움을, 늙고 추한 노파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니까 아름다운 여인이 노파로 바뀌었다는 것은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꿰뚫어 알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즐거움이 부처님을 유혹할 수 없다는 이야기예요. 부처님의 내면에 있던 욕망의 뿌리가 그때 완전히 뽑혀 없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nbspnbsp이 모든 게 우리 동네에서 있었던 옛날 이야기입니다. 둥게스와리, 보드가야, 가야 디스트릭트, 비하르주, 힌두스탄 평원, 이런 걸 우리가 알아야 해요. 너무 많이 공부했나요? 머리가 아프죠?”nbsp“아니오, 재미있어요.”nbspnbsp이 외에도 스님은 법당 안쪽 벽면에 그려진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서도 주욱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법문을 마치면서는 앞으로 스님처럼 이렇게 붓다 담마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인도인 활동가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었습니다.nbspnbsp“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들이 지금은 잘 모르지만 5년이나 10년 뒤에는 그 중요성을 알게 될 거예요. 여러분들이 여기서 10년까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10년 이후부터는 법을 전하는 ‘담마 티처’가 되어야 해요. 외국인들이 오면 여기 숲에서 강의하고, 명상도 가르치고, 옷도 수행자 옷을 갖춰 입고 구루 역할을 해야죠.nbspnbspnbsp몸만 치료해주지 말고 마음도 치료해줘야 합니다. 지금은 몸이 아픈 사람이 많지만 앞으로 경제가 좋아지면 잘 사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인도에도 많아질 겁니다. 마음 치료가 큰 과제가 될 거예요. 앞으로 10년, 20년 후의 이야기입니다.nbspnbsp그러니 그렇게 될 때를 여러분들이 대비해서, 지금 20대니까 40살이 넘으면 그런 사람이 돼야 해요. 머리도 허옇고, 수염도 허옇고, 옷도 수행자복을 입고, 나무 밑에서 이렇게 법문을 하면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감동해서 귀의한다고 할 거예요. 돈 벌려고 막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돈이 들어와요.nbspnbspnbsp그러니 어디 가서 돈 벌려고 그렇게 너무 애쓰지 마세요. 지금은 조금 가난해도 여기에 좀 오래 있으면 달라집니다.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10년쯤 뒤에는 한국 같은 데 가서 불교 공부 더 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붓다 담마를 가르쳐야 합니다. ‘내 친구는 취직해서 5,000루피 버는데, 10,000루피 버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여기 일 못해요. 지금 조금 어려워도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알았죠?”nbsp“예스”nbsp스님의 이야기에 모두 가슴을 설레여 하며 크게 박수를 쳤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조금씩 변해가는 인도인 활동가들의 모습은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수련에 참여하러 들어왔기 때문에 점심은 간단히 라면을 끓여 먹어습니다. 아침에 발우공양 때 스님이 말씀하셨듯이 “오늘은 라면을 먹을 건데 소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채식 라면이니 마음껏 드세요” 라고 알려주자, 인도인 활동가들은 즐겁게 라면을 먹었습니다.nbspnbspnbspnbsp오후에는 학교 운영과 마을 개발 전반에 대해서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힘을 모아 학교를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어갈지, 마을 개발은 우선 무엇부터 시작해 볼 수 있을지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안 되었고, 스님은 각각에 대해 때론 더 큰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특히 둥게스와리가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부분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곳은 사실 다 공원으로 만들어야 해요. 지금은 난장판이잖아요. 여기 오면 정말로 조용히 명상하고 담마 공부하고 갈 수 있도록 해야 해요.nbspnbspnbsp그러니 여러분들이 땅을 자꾸 외부 사람에게 팔아버리면 나중에 이걸 전부 장사꾼이 차지해버리게 됩니다. 땅값이 오르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비싸져 버리면 우리가 도로 살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가 팔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어야 하는데, 땅값이 너무 높아져버리면 팔 때는 좋지만 다시 사는 건 불가능해집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20년 전부터 했는데 제 말이 벌써 현실화되기 시작하고 있어요.nbspnbsp그래서 여기 마을마다 땅을 많이는 못 사더라도 값 쌀 때 우리가 조금씩이라도 사놔야 해요. 앞으로 우리가 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면 창고도 지어야 하고 사무실도 만들어야 해요. 마련해둔 땅이 있어야 시설도 짓고 우리가 새마을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생기고 외부 사람이 자꾸 들어오면 이 지역은 발전할지 몰라도 그 주인이 우리가 아니라 외부 사람입니다. 주인이 우리가 아니면 발전을 해도 우리에게 이익이 오기 어렵고, 우리는 오히려 쫓겨나게 됩니다.”nbsp스님의 우려에 모두가 공감을 했습니다. 이렇게 둥게스와리 마을의 미래에 대해 늘 걱정하고 챙겨주는 스님이 있어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이 외에도 인도인 활동가들은 평소 궁금하던 것을 마음껏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대화는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nbspnbspnbsp특히 얼마 전 주니어 교사들 중에 한 명이 노트북을 훔쳐가는 일이 발생해서 주니어 교사들 전체를 학교를 그만두게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교사 수가 부족해져서 남은 스텝들이 수업을 대신 하느라 과부하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오랜 시간 토론이 있었습니다.nbspnbsp더 이야기할 주제가 많았는데 마쳐야 할 시간이 되어서 내일 아침 일찍 한번 더 모여서 마저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모두 운동장으로 나갔습니다.nbspnbsp오후 3시에는 옆 마을인 두르가푸르와 자그디스푸르에서 청년들과 함께 축구 시합을 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스님이 ‘학교 스텝팀 vs 마을 청년팀’ 이렇게 축구 시합을 하면 누가 이기냐고 물었을 때 서로 자신들이 이긴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오늘은 친목을 도모할 겸 실제 경기를 해보기로 한 것입니다.nbspnbspnbsp양팀 선수들이 모두 입장하자 스님이 공을 들고 와서 서로 인사시킨 후 너무 과열 경쟁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자칫하면 싸움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도인 스텝들에게는 스님이 ‘저주는 것이 더 낫다’고 귀뜸해 주기도 했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모두 이기려고 각오를 다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이 하늘 위로 공을 던지자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nbsp서로 실력이 비슷해서 전반전과 후반전 모두 팽팽한 접전을 벌였는데, 결국은 1대 1로 비긴 상태에서 경기를 마쳤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양팀을 모두 격려해주며 참가한 선수들 모두에게 비누 세트를 선물로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nbspnbspnbsp그러면서 “내년에는 상품을 더욱 푸짐하게 준비할 테니 더욱 재미있게 해보자”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습니다. 청년들도 함께 즐거워하면서 1년 동안 열심히 연습하겠다는 다짐을 보였습니다. 둥게스와리의 드림팀이 구성되면 이제 가야지역 전체 리그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되는 날이 곧 올 것 같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친선 경기를 한 기념으로 다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축구 시합으로 인해 학교 스텝들과 마을 청년들은 한층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습니다.nbspnbspnbsp축구 경기가 끝나고 다시 법당에 모여 잠깐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주니어 교사들의 복귀 문제에 대해 내일 아침 일찍 한번 더 모여서 더 의논하자고 한 후 인도인 활동가들 모두에게 선물과 용돈을 나눠주었습니다.nbspnbspnbsp저녁 7시부터는 한국인 활동가 전체가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내일 스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때문에 오늘은 각 파트별로 건의할 점을 모두 이야기하면서 전체적으로 크게 결정할 것들을 의논했습니다. 많은 논의 사항들이 제기 되면서 회의는 3시간 30분 동안이나 계속 되었습니다.nbspnbspnbsp내일은 오전 8시부터 9시 30분까지 인도인 활동가들과 한 차례 더 모임을 가진 후 10시에는 수자타아카데미를 출발해 보드가야에 들러 지역 인사 분들을 찾아뵌 후 오후 2시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내일을 끝으로 스님은 31일 동안의 인도, 스리랑카 방문 일정을 모두 마치게 됩니다.nbspnbsp ▼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 JTS는 인도 불가촉 천민 마을 둥게스와리 아이들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기아, 질병, 문맹 퇴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nbspnbsp
2016.1.29 (스리랑카 5일째) 아리야라트네 박사(Dr.Ariyaratne) 만남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사르보다야 운동을 이끌며 스리랑카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온 아리야라트네 박사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린 후 인도로 다시 돌아왔습니다.nbspnbsp새벽 5시에 숙소를 출발해 아리야라트네 박사님이 머물고 있는 콜롬보 근교의 ‘모라투라’로 향했습니다. 새벽에 차가 막히지 않아 1시간 일찍 박사님 댁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박사님은 올해 85세이신데, 스님은 1993년 보스톤에서 열린 ‘기독교불교의 대화’ 모임에서 처음 만난 후 지금까지 깊은 인연을 맺어오고 있습니다. 박사님의 연세가 많으셔서 오늘이 아니면 다시 얼굴을 못 볼수도 있다며 스님은 오늘 특별히 시간을 내어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nbspnbsp▲ 사르보다야 센터nbsp스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박사님은 매우 반가워하며 포옹을 하고 스님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스님은 박사님의 건강을 여쭌 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습니다.nbspnbsp▲ 아리야라트네 박사님nbspnbsp“스리랑카까지 왔는데 박사님 얼굴을 안 보고 갈 수가 없어서 찾아왔습니다. 3년 전에 뉴욕 맨하탄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뵈었었죠. 지금 스리랑카 상황은 어때요?”nbspnbsp“지금 스리랑카는 변화기에 있습니다. 새 대통령은 자기 권력을 내려놓고 다시 민주주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일절 돈을 받지 않고 대통령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갖게 되면 사람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저는 그동안 좋은 일을 해왔기 때문에 지금은 무척 행복합니다.”nbsp“박사님은 정치적 대통령이 아니라 정신적 대통령이 되셨잖아요. 그게 훨씬 더 나은 거예요. 이번에 와서 둘러보니까 도로도 깨끗해지고 경제도 좋아지고 사회 전체적인 환경이 많이 좋아진 것 같네요.nbspnbsp지난번에 전해주신 부처님 사리는 아직 탑을 세워서 모시지 못하고 있어요. 절이 새로 지어지면 모시려고 해요.“nbsp“부처님의 사리를 제대로 모시지 않으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버려요.” nbsp“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담마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고 하셨잖아요. 저에게는 담마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에 사리도 저와 함께 있을 것이어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nbspnbsp“언젠가 우리는 부처가 될 것입니다. 매일 아침 1시간씩 명상을 하면서 스님도 생각하고 모든 친구들을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제가 그동안 썼던 책을 다시 편집하고 있어요. 젊은 세대들이 우리가 했던 것들을 알아야 하니까요. 지금 인도에는 암베드카르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늘어났지만 그들은 아직 불법을 잘 모르고 있어요. 이제 인도에는 간디가 없고 암베드카르만 있는 것 같아요.nbspnbsp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 말씀 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스님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몇몇 스님들은 부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nbsp“붓다 담마를 가르쳐야 하는데 대부분의 스님들이 복을 빌어주는 일만 하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타밀 문제는 끝이 났어요? 아직도 남았어요?”nbsp“훨씬 많이 좋아졌어요. 이제는 타밀 사람들이 대통령을 서포터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과 스님들은 아직도 타밀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BBS 그룹이 그러한데, 지금 그들 중 일부는 감옥에 있습니다.nbspnbsp지금 ‘사르보다야’는 저를 대신해 아들 한 명과 딸 둘이서 운영하고 있어요. 여기 뒤에 고아원을 지어서 일곱, 여덟 살 된 아이들 60명도 돌보고 있어요. 더 큰 아이들은 여기서 1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26명을 키우고 있어요. 그 아이들은 제 아내가 돌보고 있어요. 제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지금 보시다 싶이 걷는 것도 이제는 힘들어요. 하지만 저는 죽기 직전까지 이 일을 할 겁니다.”nbspnbsp“박사님이 이미 하신 일만 해도 엄청난 일을 많이 하셨어요. 이제 남은 일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nbspnbsp스님의 이야기에 박사님은 너무나 기뻐하면서 아침 식사도 대접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박사님의 거동이 불편해서 이렇게 인사만 드린 후 스님은 ‘사르보다야’ 안에 세워진 건물들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가족 모임을 하는 오픈 강당, 법회가 열리는 곳, 외국인들을 위한 유스호스텔, 사무실 등을 차례대로 보았습니다.nbspnbspnbsp건물 뒤쪽에는 아이들에게 영양식을 공급해주는 고아원이 있다고 해서 방문해 보았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박사님 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nbspnbspnbsp▲ 아리 박사님이 운영하는 고아원nbsp또 사무실에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아리야라트네 박사님의 큰 아드님이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큰 아드님은 스님을 보자마자 포옹을 하며 무척 반가워 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여러 격려 말씀을 들려준 후 방명록에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 주었습니다. nbspnbspnbsp“아리야라트네 박사님의 뜻과 삶이 담겨있는 이곳 사르보다야를 방문하게 되어 기쁩니다. 아리 박사님이 하셨던 마을개발 사업을 전 세계로 확산하는데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2016. 1. 29 법륜.”nbsp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복도에는 아리 박사님이 그동안 활동해온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정말 열정적으로 마을개발 운동을 하셨음을 사진 속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그 당시에는 아리 박사님이 국민적으로 추앙을 받았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 아리 박사님의 젊은 시절 활동 모습nbsp아리 박사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려고 찾아갔더니 이번엔 박사님이 서재로 스님을 안내했습니다. 서재에는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박사님은 향에 불을 붙인 후 간절히 기도를 하시더니 스님에게 부처님의 사리를 전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스님의 머리에 부처님의 사리를 올린 후 다시 한 번 간절히 기도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부처님의 사리를 감사히 받아들고 박사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nbspnbsp“박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널리 전하겠습니다.”nbsp이렇게 인사를 드리고 떠나려는 찰나에 박사님은 이곳에서 5분 떨어진 곳에 평화 명상센터를 지어 놓았다며 다시 그곳으로 스님 일행을 안내했습니다. 아주 조용한 가운데 새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연못도 잘 조성해 놓았으며, 걷기 명상을 할 수 있게 숲길도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nbspnbsp▲ 평화 명상센터nbsp아리 박사님은 아주 단정하고 곱게 옷을 차려 입고 나와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아마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기에 기념사진을 꼭 남기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nbspnbsp▲ 아리야라트네 박사님과 법륜 스님nbsp스님은 평화 명상센터까지 모두 둘러본 후에야 아리 박사님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님은 스님이 떠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깊은 애정을 보였습니다.nbspnbsp아침 8시 30분에 모라투라를 출발하여 잠시 콜롬보에도 들렀습니다. 콜롬보에는 제작년 INEB 정토회 방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왔었던 스리랑카 스님이 있었는데, 얼마전 어떤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잠시 방문하여 위로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스리랑카 스님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nbspnbsp“어떤 경우에도 불자는 화를 내서 폭력을 쓰거나 폭언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나도 모르게 그랬다면 깊이 참회를 해야 합니다. 억울하다는 것은 내가 지은 인연을 모를 때 생기므로 지은 인연을 알아 깊이 참회하면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nbsp언제 어디서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라는 말씀에 어려움을 당한 스리랑카 스님도 무척 고마워하며 감사해 했습니다.nbspnbsp잠깐의 여유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힘을 실어주고 격려를 해주려는 스님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이 찡 했습니다.nbspnbsp12시에 공항에 도착해 일찍 출국 수속을 밟은 후 기다리는 시간에는 원고 교정을 보았습니다. 오후 2시에 콜롬보 국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오후 5시 30분이 되어 델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 콜롬보 국제공항을 이륙하는 비행기nbspnbsp델리 공항을 나와서는 차를 대절해 곧바로 ‘이따와’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퇴근 시간에 교통 체증이 무척 심해 델리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운전 기사가 길을 헤매자 스님이 길안내를 일일이 해주어서 겨우 델리 시내를 빠져나왔습니다. 스님은 “인도에 와서도 지도 법사 역할을 해야하나?”라고 해서 모두 웃었습니다.nbspnbsp▲ 델리 시내의 퇴근길 교통 체증nbsp약 6시간 30분 동안 차를 타고 새벽 1시가 다 되어 ‘이따와’에 있는 석가족 청년회 대표 수바스지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수바스지의 집에서는 간단히 수바스지와 인사만 나눈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인도의 이따와까지 정말 먼 거리를 부지런히 달려왔네요.nbspnbsp내일은 상카시아로 이동해 새로 개원하는 석가족의 법당 개원식에 참가해 기념 법문을 해준 후 저녁에는 석가족 청년회 회원들과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2016.1.24 (인도 19일째)_오후_델리 한국교민 즉문즉설
nbsp오전에 인도 사람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에 이어서 오후에는 델리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nbspnbsp▲ 델리 시내 곳곳에 붙은 한국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 포스터nbsp인도 사람들과 함께한 즉문즉설 강연이 끝난 후 식당으로 이동해 한국문화원 측에서 준비해 준 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nbspnbspnbsp식사 자리에는 한국문화원 원장님 부부, 총영사님, 주델리한국대사 부인이 함께 자리해 식사 후 잠시 담소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특히 스님이 그동안 인도에 있으면서 겪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자 모두들 공감을 하면서 크게 웃었습니다.nbspnbsp오후 1시에는 오전과 같은 장소에서 한국 교민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100여 명의 교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이 무대 위에 오르자 큰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습니다. 어린이 한 명이 무대로 올라와 스님께 꽃다발을 건네자 더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스님은 먼저 점심 식사는 다들 하고 왔는지 물어본 후 한국과 인도의 교류는 2천년 전에 아유다국의 공주가 가야에 불교를 전한 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하면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인도의 잠재적인 성장 가능성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먼저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인도는 면적이 330만 제곱킬로미터로 남한의 33배 이상이고, 인구는 12억 5천만 명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습니다. GDP도 세계 7위예요. 명목상 순위가 그렇고 구매력 기준으로는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입니다. 이처럼 잠재적인 강대국인 인도는 앞으로 발전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nbspnbsp중국은 국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한 계획경제를 통해 빠르게 성장한 반면, 인도는 굉장히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서 경제성장을 했기 때문에 초기에 발전 속도가 굉장히 늦었어요. 중국은 앞으로 민주화라는 혼란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지만 인도는 그런 것을 어느 정도 극복한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후 지속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런 곳에 일찍 와서 터를 잘 잡으셨어요. nbspnbspnbsp벌써 땅값이 많이 올라서 이제는 자리를 잡기에 좀 늦었어요. 제가 20년 전에 왔을 때는 한국사람이 땅을 사기가 쉬웠지만 지금은 한국사람이 사기는 벌써 힘들어졌어요. 도시는 땅값이 서울과 거의 비슷해졌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일찍 와서 돈 많이 벌어놓으셨죠? nbspnbspnbsp중국이 20년 전에는 개발했다 해도 형편없었지만 지금 완전히 변했듯, 앞으로 20년 지나면 인도도 굉장한 변화를 가져올 거예요. 비하르주 같은 시골에 가면 아직도 옛날 모습 그대로지만 델리는 벌써 많이 변했던데요. 제일 눈에 띄는 게 두 가지 같아요. 첫째, 도로를 포장하고 확장하는 곳이 많이 보였어요. 공사 때문에 차 다니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둘째, 새로운 집이며 건물을 많이 짓는 것 같아요. 제가 인도를 다닌지 20년이 넘었는데 처음 10년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더니 최근 10년은 눈에 띄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보입니다.nbsp개발이라는 게 꼭 다 좋지만은 않아요. 제가 20년 전에 중국 갔을 때는 조선족들이 착하고 성실했는데 요즘의 조선족들은 돈을 밝힌다고들 하잖아요. 공산주의의 순수함은 노인들에게나 남아 있고, 젊은 사람들은 한국사람들보다 더 영악하게 바뀌었어요. 인도도 좋게 말하면 개발이 되고 질서가 잡혔다고 볼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인도사람이 영악해졌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보기에 인도사람들은 다른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비해 순수함이 좀 적은 편인데, 여기서 더 영악해지면 상대하기 좀 어려울 거예요.nbspnbsp제가 생활해보니 인도는 모든 걸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살려면 정말 많이 부딪치고 피곤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만 놓아버리면 세상에 이보다 살기 좋은 곳이 없어요.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요. 중국은 살아보면 경찰국가예요. 온갖 것에 제재와 간섭이 심합니다. 낯선 동네에 가거나 남의 집을 방문하기만 해도 금방 신고가 들어가서 공안이 찾아와요. 인도는 나무 밑에 자든, 남의 집 처마 밑에 자든, 지나가면서 몸을 부딪치든, 밀치든, 밤새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든, 아무 데나 자리 펴고 밥을 먹든 도통 신경을 안 쓰니까 마음대로 살아도 되잖아요. 화장실도 사방에 너무 많아서 곤란할 정도고요. nbspnbspnbsp어떻게 생각하면 불편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참 편한 나라예요. 그래서 저는 인도에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벵갈로르 가 보셨어요? 저는 못 가봤는데, 벵갈로르는 IT산업도 급속히 발전하고 시 전체도 많이 발전해서 아주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인도 사는 사람들에게 제가 지금 인도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nbspnbspnbsp여러분들이 인도에 살면서 겪는 문제, 수행이나 불교에 대해서 의문 나는 점, 인생에 대한 고민 등 주제에 제한 없이 아무 이야기나 자유롭게 하는 시간이 즉문즉설입니다. 그럼 시작해 보죠.”nbsp스님의 이야기에 인도에서 오래 사신 분들은 박수를 치며 공감을 표했습니다. 어떤 분은 “인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보다 가끔씩 오는 스님이 인도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다”며 놀라워 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스님이 강연의 시작을 알리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많은 질문들 중에서 인도에 살고 있는 교민들이 많이 공감했던 질문과 답변을 소개합니다. 델리에 있는 교민들은 주재원으로 나온 경우가 많은데,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되는 마음에 대해 묻자 많은 교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의 마음을 내비쳤습니다.nbspnbspnbsp“저는 델리 인근에서 한국 기업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금 5년 정도 인도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나이가 많진 않지만 앞으로 어떻게 가정을 꾸려나갈지, 그리고 한국으로 복귀하면 어떻게 적응을 하고 살지 고민입니다.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제가 여기서 평생을 살 것 같진 않아요. 그래서 복귀를 한다고 해도 한국에서 또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두려움이 좀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 계신 분들도 많이 어렵다고들 하시고요. 아마 3040대 분들,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 자영업 하시는 분들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도에 계속 사는 것도 좋은 방안일 수 있겠지만... 앞으로 인생을 설계하는데 있어서 조언 부탁드립니다.”nbsp“너무 막연한 질문이에요. 질문자는 한국에 언제 갈 거예요?”nbsp“회사에서 들어오라 하면 들어가야죠.” nbspnbsp“그래도 질문자가 생각하기에 언제쯤이 될 것 같아요?”nbsp“제 생각으로는 최소 23년은 더 있을 것 같습니다.”nbsp“그러면 23년 뒤까지 질문자가 안 죽고 산다는 보장이 있어요?”nbsp“아직 젊어서 살 것 같습니다.” nbsp“확실히 그러리라는 보장이 있어요?”nbsp“없습니다.”nbsp“그래요. 여기서 ‘평생 안 살 것 같다’고 말해도 여기서 지금 당장 죽으면 평생 사는 게 되어 버려요.”nbsp“예, 맞습니다.”nbsp그러니 ‘여기서 평생 안 산다’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 살 땐 여기서 행복하게 살고, 한국 갈 땐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요. 인도에서도 행복하게 살았는데 한국 가서 행복하게 못 살 이유가 뭐 있어요? nbsp“예, 지금 인도에서 사는 건 무척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온 지 시간이 좀 흐르다 보니까 과연 복귀하면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특히 한국은 인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변화가 있다 보니 직장인으로서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nbsp“변화는 한국보다 인도가 더 많지요. 다만 한국과 인도 생활의 차이는 이거예요. 질문자는 인도에 왔지만 회사에서 주는 한국식 월급을 받으니까 여기 일반 주민보다는 월급이 많은 편이잖아요. 회사에서 준 집도 여기 동네 사람들의 평균에 비해서는 크고 좋아요. 여기서는 내가 사는 위치가 상위 10퍼센트 안에 들어간다면, 한국에 돌아가면 20퍼센트나 30퍼센트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게 차이에요. 서울의 중학교에서 공부를 중간 정도 하는 아이가 시골 중학교에 가면 1등할 수 있지만 시골 중학교에서 1등 하던 아이가 서울의 이름난 학교에 오면 중간밖에 못하는 것과 같아요. 시골에서는 놀아도 늘 1등 했는데 여기서는 죽어라 해도 중간밖에 못한다면 충격이 크죠. 지금껏 자기가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그리 잘 못하니까 힘들어요.nbspnbsp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언어가 힘들고 문화가 힘들긴 해도 정신적으로는 내가 약간 상위그룹에 속한단 말이에요. 사람을 부리고 살고, 상사가 있긴 하지만 거의 왕 노릇 하고 살아요. 그런데 한국에 들어가면 회사에서도 위로 층층이 높은 사람들이 포진하고, 집도 여기서만큼 상류에 속하지는 않아요. 평수로 따져도 중간 정도 될 거예요. 그런 차이 때문에 결핍감을 느껴서 사는 게 좀 빡빡해지지요.nbspnbsp그러나 질문자가 한국에 가서 밥만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 가도 아무 걱정이 없어요. 한국은 사회보장제도가 기본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인도보다 더 걱정이 없죠. 다만 그 상대적인 개념의 차이가 힘든 것뿐이에요. 또 누구나 다 한국에 살다가 인도에 오면 인도에 적응하기 힘들 듯, 인도에 5년이나 10년씩 살다가 한국에 들어가면 다시 적응하는 데 당연히 시간이 좀 걸려요.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학교 졸업하고 10년 가까이 공부 안 하다가 나이 먹어서 대학이나 대학원 가서 다시 공부하려면 힘들죠. 그건 두려워할 일은 아니에요. 장소를 옮기든, 직장을 옮기든, 공부를 다시 하든, 어떤 것이 바뀌면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어요.nbsp그러니 첫째는 옮겨가는 데 따르는 적응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게 하나 있고, 두 번째는 여기서 가졌던 만큼의 지위를 가지지 못하니까 그게 조금 힘들다는 게 있어요. 제3세계에 나오면 위험하고 어려운 점이 없진 않지만 대신 약간 속된 말로 하면 왕 노릇을 좀 할 수 있는데, 도로 들어가면 못하니까요. 그래서 마닐라를 ‘마나님들의 천국’이라고 불러요. 마닐라에 주재원들이 오면 그 지역에서 아주 왕 노릇을 하거든요. 보통 가정부 두 명에 운전수 두 명씩 두고 큰 집에 살다가 한국에 들어가면 다 자기 손으로 해야 하잖아요.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인도 오면 인도에 맞춰서 살고 한국 가면 한국에 맞춰서 살면 되지, 두려워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에요.”nbsp“잘 알겠습니다.” nbspnbsp“내일이라도 발령 나면 들어와서 살면 돼요. 처음에 한국에서 외국으로 발령 내면 싫어하지만 와서 살아보면 여기에도 괜찮은 점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여기서 살다가 또 한국 오라 그러면 어찌 적응할지 걱정하는데 들어가서 있어보면 또 괜찮아요. 회사에 20년, 30년씩 다니다가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살지 막막한 건 맞아요. 그렇다고 그게 욕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20년간 밥 먹고 살았으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와서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일에 적응해야죠.nbspnbsp제가 상담을 해보면 경찰서장이며 세무서장 했던 사람들이 은퇴 후 제일 힘들어합니다. 자기가 서장 할 때는 부하들이 전부 와서 굽신거렸는데 은퇴하고 나니 자식 결혼식장에 옛날 부하들이 코빼기도 하나 안 내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배신감을 느낀다기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nbspnbsp‘그 사람들이 당신한테 고개를 숙인 게 당신의 인격입니까, 당신의 직위입니까? 직위라면 당신은 이제 직위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많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다고 했어요. 당신이 경찰서장이든 세무서장이든 직장에서만 그 직위의 역할을 하고 퇴근 후 술을 한잔 하거나 밥을 먹으러 갈 때는 그냥 친구가 되어줬다면 상대는 당신이 직위가 없어졌어도 친구니까 왔을 겁니다. 이건 당신이 직장에 다닐 때 자기 직위의 권위만을 갖고 사람을 대했지, 사람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던 과보입니다. 현 상황은 당신이 만든 것이지, 그 사람들이 배신한 게 아닙니다.’nbsp여기 살면서 여기에 익숙했던 것을 움켜쥐고 한국에 가면 사는 게 힘들듯이 한국에 살던 버릇을 여기 와서 움켜쥐고 있으면 또한 힘들어요. ‘로마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라는 말처럼 여기서는 여기 사정에 맞추어 적응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또 한국 사회 안에 맞춰서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내가 사장 할 때는 사장을 했더라도 그만뒀으면 그냥 한 사람으로 돌아가 줘야 해요.nbspnbspnbsp그걸 못 버리면 ‘내가 옛날에는 그래도 한 자리 했는데’, ‘떵떵거리고 잘 살았는데’ 이런 생각에만 빠지면 노후에 살기가 굉장히 어려워져요. 서울역 앞에 노숙자가 300명쯤 되는데 노숙자 중 농민이 한 사람도 없어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노동자도 한 명도 없어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첫째, 거의 다 남자입니다. 어쩌다 여자가 한두 명 있긴 해도 거의 남자에요. 둘째, 직장에서 중간 이상의 지위를 가졌거나 작은 식당이라도 하나 열어서 자기가 사장 노릇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노숙자들이 대부분 과거 경력이 화려합니다. 사정이야 어쨌든 직장을 그만두거나 가게가 망했는데 집에는 회사 간다고 하고 나와서 빙빙 돌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정신적인 어려움을 못 이겨서 술도 마시고, 결국은 알콜 중독에 빠져 노숙자가 됩니다. 대부분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이에요. 지금이라도 가서 막노동하면 될 텐데 옛날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렇게 못하고 소위 ‘폐인’이 되어가는 거예요.nbspnbspnbsp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항상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늘 웃고 살 수 있습니다. ‘과거에 내가 어땠다’ 이게 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나는 어릴 때 가난했다’, ‘어릴 때 성추행 당했다’, ‘어릴 때 학대 받았다’, 늘 이런 과거 생각 때문에 힘들어요. 또 반대로 ‘내가 어릴 때 공부 잘 했다’, ‘어릴 때 예뻤다’, ‘젊을 때 잘 나갔다’ 이런 생각 때문에 인생살이가 피곤해집니다. 그런 생각을 버리고, 현재 주어지는 직위는 주어지는 대로 활용하되 직위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해요. 언제든지 한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자세를 잊지 않아야 사는 게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딜 가서 어떤 직책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결혼했어요?”nbsp“예, 했습니다.”nbsp“결혼까지 했겠다, 아이도 있겠다, 저보다 젊겠다, 그런데 왜 질문자가 걱정을 해요? 이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아이도 없는 저도 지금 웃으면서 사는데 질문자가 못 웃을 이유가 없잖아요.”nbsp“죄송합니다.” nbspnbspnbsp스님의 답변을 듣고 나니 질문자는 고민이 사라져버린 듯 오히려 스님에게 죄송하다며 크게 웃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청중들도 함께 웃으며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무엇보다 지금 살아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알면 늘 웃고 살 수 있다는 말씀이 가슴에 많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늘 과거 생각, 미래 생각으로 괴로워하는데 살아 숨쉬고 있는 지금 현재에 깨어있으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는 말씀에 질문자도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nbspnbsp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2시간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습니다. 질문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지만, 스님은 지금 곧바로 공항으로 가야 스리랑카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며 아쉬움을 달래며 마지막으로 격려 말씀을 덧붙여 주었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나중에 행복하게 살겠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마세요.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옛날에 내가 어떻게 태어났든 어떻게 자랐든 따질 필요 없어요. 지금 안 죽은 것만 해도 성공이에요. 죽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안 죽고 산 것만 해도 대성공이에요.nbspnbspnbsp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사물을 긍정적으로 봐야 해요. 이미 일어난 일을 갖고 자꾸 ‘안 그랬으면 좋겠다’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미 일어난 건 넘겨버리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얼굴에 미소가 돌고 마음이 훨씬 가볍습니다.nbspnbsp인도에 살면서 인도 욕하고 살지 마세요. 그런 사람은 바로 한국 가는 게 나아요. 인도에 살면 조금 불편한 것도 있고 먼지도 많지만 그래도 이곳의 좋은 점을 생각하고 기쁘게 살아야 해요. 부부도 그래요. 이왕 이 남자와, 이 여자와 살려면 기분 좋게 사세요. 욕하면서도 같이 살려면 피곤하잖아요. ‘이 사람 아니면 누가 나랑 살아주겠어’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nbspnbspnbsp종업원들에 대해서도 ‘나 같으면 그 돈 받고 일 안 할 텐데 일해주니 참 고맙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일 잘 하고 못 하고를 너무 따지지 말고요.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면 좋은데 자꾸 자기 생각대로 따지니까 인도 사는 게 지옥이고 스트레스잖아요.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면서 이 좋은 부처님의 나라에서 행복을 얻고 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nbsp비행기 시간이 다 되었지만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안내해 주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스님의 모습에 교민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스님의 이야기에 교민들도 큰 힘을 얻은 듯 곳곳에서 환호성도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치고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매년 인도 성지순례를 올 때마다 델리 교민들을 잊지 않고 법문을 꼭 설해주고 가시는 스님께 모두들 너무나 고마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곧바로 한국문화원을 출발하여 델리 국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강연을 예정보다 늦게 마친 것도 있고, 인도 공항은 늘 검색대 통과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어서, 여러 우여곡절 끝에 보딩을 끝마칠 시간인 6시에 겨우 맞춰서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nbspnbspnbsp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었는데 스님은 비행기 탑승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방금 전 법문 때 했던 말씀을 인용하는 듯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해서 함께 동행한 수행팀도 모두 웃었습니다.nbspnbsp저녁 6시 30분에 델리를 출발한 비행기는 3시간 30분을 비행하여 10시에 스리랑카 콜롬보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서 걸어나오니 정토회 국제부 최정연 팀장과 통역 봉사자 이진아님이 반갑게 스님 일행을 맞이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인도는 날씨가 무척 추워서 아침 저녁으로 파카를 입어야 할 정도였는데, 스리랑카는 열대 지방이어서 밤에도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땀을 계속 흘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스님 일행은 공항 근처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고 먼 길을 달려온 여독을 풀었습니다.nbspnbspnbspnbsp내일은 작년에 INEB 정토회 방문단에 참여해 스님과 인연이 되었던 적이 있는 스리랑카의 앗사지 스님을 만나 스님이 운영하는 절의 탑 준공식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INEB의 주관으로 열리는 국제 불교 지도자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대회장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nbsp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2016.1.20 (인도 15일째) 성지순례단 C팀 쉬라바스티 순례
nbsp안녕하세요? 인도에 온 지 15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과 B팀에 이어 C팀을 이끌고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신 곳 ‘쉬라바스티’를 순례했습니다.nbspnbsp새벽 5시에 천축선원 법당에서 예불과 기도를 한 후 6시 20분에 기원정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님이 맨 앞에 서고 그 뒤를 이어 기러기떼처럼 한 줄로 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천히 걸었습니다.nbspnbsp어둑한 새벽 안개를 가르며 기나긴 행렬을 이루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간간히 차들이 지나가면서 헤드라이트를 비추자 순례단의 기나긴 행렬이 잠시 불빛에 비춰질 뿐 순례단은 조용히 한 발 한 발에 집중했습니다.nbspnbspnbsp한참을 걷자 어느덧 새벽 안개가 걷히고 기원정사가 환하게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스님의 뒤를 따라 순례객들은 부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곳을 참배하고 탑돌이를 하였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설법을 했다고 하는 곳nbsp▲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 상징했다고 하는 보리수 나무nbsp마지막으로 부처님이 머무신 처소로 알려진 간다 쿠티 앞에 서서 합장하고 삼배를 한 후 탑돌이를 마쳤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머문 처소 ‘간다 쿠티’nbspnbsp이어서 간다 쿠티를 바라보며 예참 불공을 올렸습니다. “지심정례공양...” 하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기원정사에 울려퍼졌습니다.nbspnbsp▲ 예참 불공nbsp예참 불공을 마치고 스님은 상카시아를 제외한 9대 성지를 무사히 마친 순례단이 성지순례를 마지막까지 무사히 마칠 것과 그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며,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회향할 것을 발원하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기원정사를 창건했으며 신심이 깊은 재가 수행자로 널리 알려진 수닷타 장자의 nbsp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사위성은 부처님이 성도 후 45년 중에서 무려 25안거를 보낸 곳이기 때문에 초기 경전의 절반 정도가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스님은 사위성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화 사례들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경전 독송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위성에서 일어난 다양한 교화 사례는 경전 속에도 아주 실감나게 묘사가 되어 있어 어느 때보다 경전 독송이 재미있었습니다. nbspnbspnbsp▲ 경전 독송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스님은 2600년 전 당시 사회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면서 불법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스님의 설법이 시작되자 간간히 빗방울이 날리기 시작했지만, 순례객들은 전혀 동요 없이 모자를 쓰는 것을 제외하곤 오롯이 스님의 법문에 집중했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 법문하신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들어도 때로는 깨닫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신비주의, 계급적인 사고, 성차별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졌다는 이런 사실이야말로 정말 기적이라고 할 만합니다.nbspnbsp불교 가르침의 근본 목적은 우리 삶의 행복과 자유를 향한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듯이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구나 욕망을 굉장히 절제하는 가르침이에요. 그런데 그 절제가 단순히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도 아닙니다. 욕망대로 행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욕망과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욕망과 싸운다는 것 또한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잘 이해하고 욕망을 알아차리되 그 욕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가라고 가르칩니다.nbsp그런 관점을 보여주는 몇 가지 교화 사례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계율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었어요. 출가사문들은 대부분 먹는 것은 얻어서 먹고, 입는 것은 분소의를 주워서 입고, 자는 것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자는 것이 기본적인 생활이었어요. 부처님이 출가사문의 길을 처음 제시한 게 아니라 그 출가사문의 길에 부처님도 참여하신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하실 때도 절대 목욕을 하면 안 된다거나 자리를 살피면 안 된다거나 부드러운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식의 금기나 엄격함 같은 게 좀 있었어요. 그러나 붓다는 중도를 깨달으면서 그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해탈의 길에 들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6년 고행하실 때는 계율에 대해 굉장히 엄격했다면 중도를 발견하신 이후에는 유연해진 셈입니다. 친구들의 눈에는 그게 해이해진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 부처님은 해이해진 게 아니라 유연해지셨어요. 그래도 지금 우리가 보면 굉장히 엄격한 모습이지만 당시 고행주의의 기준에 비하면 유연해졌다고 볼 수 있어요.nbspnbsp그런데 교단 안에서 데바닷타라는 사람이 계율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데바닷타는 부처님과 같은 석가족 출신이고 재주가 뛰어나서 데바닷타를 따르는 재가신자들이 많았습니다. 데바닷타는 자기가 부처님의 뒤를 이어 교단을 이끌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해요. 그러나 그저 사람들이 부처님을 존경했을 뿐이지, 부처님은 당신이 교단의 지도자라든지 교단을 이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교단의 지도자는 누가 하거라’라는 이야기를 하실 분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그러나 데바닷타는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께 자기가 그런 역할을 좀 하겠다 말씀드렸지만 부처님께서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셨어요.nbspnbspnbsp‘데바닷타여, 상가에 특별히 지도자를 정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자기 수행을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럴 필요가 있다 해도 장로인 사리푸트라나 목갈리나가 있지 않느냐.’nbsp부처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자기가 후계자가 되기 어렵다는 걸 안 데바닷타는 이렇게 대중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의 지도력을 보이기 위해 어느 날 부처님께 ‘수행자라면 마땅히 이건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첫째, 먹는 음식은 하루 한 끼만 먹어야 하고, 걸식을 해야 하고, 물고기가 든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둘째, 입는 옷은 분소의만 입어야 한다는 거예요. 셋째, 자는 것은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만 자야지 처마 밑 같은 장소에서 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엄격주의라고 할 수 있겠죠.nbspnbsp부처님은 그게 틀렸다고도 맞다고도 하지 않으셨어요. 다만 그 엄격주의에서 생겨나는 모순을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출가수행자가 분소의를 입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지만, 분소의만 입어야 한다고 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정해놓으면 예를 들어 500명이 갑자기 출가를 했는데 화장장에 가보니 시체를 싸서 버린 분소의가 300벌밖에 없을 때 200명은 벌거벗고 지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렇다고 200명 분의 천을 마련해서 시체를 한번 쌌다가 다시 벗겨서 입는다면 인위적인 형식주의가 되는 거예요. nbspnbsp그러니 분소의를 주워 입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분소의가 없을 때는 그냥 새옷을 입어도 됩니다. 분소의를 놔두고 새 옷을 입자는 것도 아니고, 분소의만 입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에요. 분소의를 입는 것은 좋은 일이고 훌륭한 일이고 칭찬받을 일이지만 분소의만 입어야 된다고 단정하게 되면 이런 모순이 발생한다는 거예요.nbspnbsp수행자가 나무 밑이나 동굴에 자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부처님은 항상 자발성을 중시하셨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는 건 훌륭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만 해야 한다고 단정해버리면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데 동굴을 발견하지 못하면 비를 맞고 자야 하잖아요. 그럴 때는 빈집의 처마 밑 정도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집이나 좋다고 하진 않고 빈집이라는 제한을 두시기는 했습니다. 빈집의 처마 밑이라도 그건 인위적인 것이어서 원래 고행주의에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수행자가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데 해당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의 처마 밑이라면 나무 밑이나 동굴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겁니다.nbspnbsp마찬가지로, 걸식을 하는 건 좋은 일이고 훌륭한 일이지만 신심 있는 재가 수행자가 공양을 초대할 때 응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루 한 끼 먹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환자나 사미나 사미니는 두 끼 먹을 수도 있어요. 사미나 사미니는 미성년자가 출가한 경우라서 아직 더 성장해야 하니까요. 채식을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고기가 들어 있는 음식을 주면 먹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안 받는다 하면 걸식 정신에 어긋나고, 고기만 건져낸다고 해도 분별이잖아요. 수행의 핵심은 분별하지 않는 데 있지, 거기에 고기가 섞여 있나 안 섞여 있나가 핵심은 아니라는 거예요.nbspnbsp이걸 자칫 잘못 들으면 계율을 어기는 쪽으로 가기 쉽지만, 부처님 말씀의 뜻은 계율을 어기자는 게 아니라 그런 경직된 자세가 중도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이건 누가 들어도 합당한 이야기에요.nbspnbspnbsp이처럼 불교는 신행, 즉 말하고 행동하는 게 굉장히 절제돼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윤리나 도덕이 그 사람을 옭아매거나 속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속박이 안 되려면 스스로 행해야 해요. 남의 눈치를 보면서 하면 그게 감옥이 되지만, 스스로 즐거이 한다면 그게 속박이 되지 않습니다. 나무 밑에 자는 것도 걸식하는 것도 분소의 입는 것도 마찬가지에요.nbspnbsp종교라는 것도 그래요. 이렇게 깨달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사유가 자꾸 자유로워져야 해요. 이 ‘자유롭다’는 건 자기 욕망대로 한다는 것과는 개념이 조금 달라요. 이게 참 어렵죠. 우리는 자유라고 하면 자기 마음대로 하려 들고, 절제하라고 하면 억압하려 듭니다. 그래서 중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중도는 자발적인 선상에서 연습을 해야 중도가 되지, 억지로 해서는 중도를 터득할 수 없어요.nbspnbsp아무튼 부처님의 가르침은 2,600년 전의 가르침인데도 참으로 자유롭고 합리적이에요. 전법선언 할 때도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하라’ 이런 말이 나오잖아요.nbspnbsp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일부러 우상화시킬 필요가 없어요. 붓다의 인격 그 자체가 최상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상화시켜서 인격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더 많아요. 신격화시켜서 오히려 격하시키는 격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그대로가 ‘천인사’,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라고 하죠. 우리의 관념은 항상 인간 위에 신을 두는데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런 신의 관념보다 더 위여서 거기로부터 벗어난 개념이에요. 지금 우리의 학교 교육이나 세상의 윤리나 모든 사상은 신을 사람의 위에 둡니다. ‘천부인권’이란 말도 ‘하늘이 부여한 인권’이란 뜻이잖아요. 거기 비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신들까지 포함한 세계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신 아래에 존엄한 게 아니라 신을 넘어 존엄한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도 인권은 해칠 수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러니 여러분들은 불교를 자꾸 다른 종교와 비슷하게 만들면 안 돼요. 다른 종교와 경쟁하려 들거나 비교우위를 차지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러냐? 아이고, 그거 좋구나’ 하고 다른 종교를 그냥 다 인정해 주세요. 다른 철학, 다른 과학, 다른 사상, 다른 종교를 모두 그대로 두고도 불법은 그 한 단계 위에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걸 갖고 경쟁하거나 시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불교가 더 나으니 어쩌니 비교해서 시비하는 것 자체가 불교의 격을 낮추는 일입니다.”nbsp스님의 깊이 있는 법문에 순례객들도 모두 큰 박수를 보내며 공감을 표했습니다. 부처님이 많은 제자들과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설법을 하신 바로 이곳에서 스님으로부터 이렇게 깊이 있는 법문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순례객들은 모두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아침 겸 점심 식사 시간을 순례객들에게 주었습니다. 기원정사 밖을 나가 넓은 공터에서 조별로 자리를 깔고 앉아 전기밥솥을 꺼내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nbspnbsp식사 후에는 자유롭게 기원정사를 둘러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을 수 있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자유시간을 갖기 전에 스님은 일대일로 기념사진도 찍어 주었습니다.nbspnbsp▲ 스님과 일대일 기념사진 촬영nbsp스님과의 기념사진 촬영을 마친 순례객들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부처님이 머무신 간다 쿠티, 아난다 존자가 머물렀던 곳, 라훌라 존자가 머물렀던 곳,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던 곳,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생각하기 위해 심었다는 보리수 나무, 후세에 승려들이 머물기 위해 지어진 승방터 등 곳곳을 둘러보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다음은 1시간 동안의 개인 정진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을 찾아 108배를 하는 분, 명상을 하는 분 등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지에서의 감흥을 느끼며 정진을 했습니다.nbspnbspnbspnbsp이렇게 기원정사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후 다시 길게 한 줄을 이루어 사위성을 향해 들어갔습니다. 마치 부처님과 제자들이 탁발을 하러 사위성으로 들어가던 그 때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듯이 묵언을 한 채 천천히 사위성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었습니다.nbspnbsp▲ 기원정사를 나와 사위성을 향해 한 줄로 걸어가는 순례단nbspnbsp사위성 안에는 앙굴리말라 탑과 수닷타 장자의 탑이 높게 솟아 있었습니다. 묘하게도 악인으로서 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달은 사람과 선인으로서 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달은 사람의 탑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스님은 이것을 가르켜 “부처님의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것을 말해준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먼저 앙굴리말라 탑을 한 바퀴 돌고 삼배를 한 후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이 어떻게 99명을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를 교화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nbspnbsp▲ 앙굴리말라의 탑nbsp그리고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수닷타 장자의 탑으로 이동해 탑을 한바퀴 돈 후 삼배를 하고, 5분 간 자유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객들은 탑 위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탑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스님의 설명을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nbsp▲ 수닷타 장자의 탑nbsp다시 스님은 순례객들을 이끌고 사위성을 가로질러 동문쪽으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는 A팀과 B팀이 걸어갔던 길과는 달리 북문에서 남문 쪽으로 길게 뻗은 길을 향해 걸어보았습니다. 남문 쪽으로 난 길에는 한참 유적지 발굴이 이루어지다가 홍수가 나서 침수가 되어버린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nbspnbsp▲ 유적지 발굴이 이루어지다가 홍수로 침수가 된 흔적nbsp스님은 곧게 뻗어 있는 길이 지대가 낮은 것을 보고선 “이 길이 아마 사위성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주작대로인 것 같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에는 건물이 세워지지 않아서 후대에 건물이 무너져서 지대가 높아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nbspnbsp▲ 북문에서 남문으로 곧게 뻗은 주작대로로 추측되는 길nbsp곧게 뻗은 길을 한참 걸으니 남문 자리로 보이는 곳이 나타났고, 다른 곳과 달리 옹성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둔덕도 보였습니다. 조금더 고고학적인 고증이 필요해 보였습니다.nbspnbsp▲ 남문 자리로 통해 사위성을 나오고 있는 순례단nbsp이렇게 성문을 나오니 논길이 펼쳐졌습니다. 논길을 걸어 나오니 베사카 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동원정사’가 나왔습니다. 아쇼카석주로 추정되는 곳이 신령스럽게 모셔져 있었는데, 그곳을 순례객들은 세 바퀴 돌고 삼배를 했습니다.nbspnbsp▲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nbspnbsp자리에 앉은 순례객들을 향해 스님은 이곳에 절을 지은 베사카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먼저 이 절은 녹자모 강당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왜 그런 이름이 불려지게 되었는지 설명을 한 후, 이어서 이곳에 절이 지어진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자리에 앉은 채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베사카 부인이 어느 날 기원정사에 설법 들으러 가면서 아주 값비싼 외투를 걸치고 갔어요. 아버지가 아주 부자였는데, 시집올 때 아버지가 딸을 귀하게 여겨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외투를 주었거든요. 더운 지역에서 외투라고 하니 실제로는 무슨 옷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요즘으로 치면 수십 억, 수백 억 원쯤 되는 으리으리한 옷이었어요. 법문 듣는 동안 비싼 외투는 벗어서 하인더러 들고 있게 하고 법문을 들은 뒤 기뻐하며 돌아왔는데, 집에 와서 하인더러 옷을 달라고 하니까 그만 정사에 놔두고 왔다는 거예요. 빨리 가서 찾아오라고 하인을 보내려다가, 부인이 하인을 다시 불러 이렇게 일렀어요. ‘네가 놓아둔 자리에 옷이 그대로 있으면 가져오고, 아난존자가 이미 보관을 했거들랑 그냥 보시하고 오너라.’nbspnbspnbsp법회가 끝나면 아난존자가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둘러보고 두고 간 물건이 있으면 보관했다가 나중에 찾아주잖아요. 베사카 부인은 불자니까 보시를 할 인연이면 인연을 따라 보시하고 오라고 한 거예요.nbsp하인이 가봤더니 이미 아난존자가 외투를 보관하고 있다가 내어줬어요. 그래서 하인이 ‘아이고, 우리 주인님이 보시하고 오라고 했습니다’라고 했지만 아난존자가 보시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승단에는 값비싼 옷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하인이 할 수 없이 옷을 다시 가져왔어요. 베사카 부인은 마음에서 이미 보시를 해버렸으니 승단에서 이 옷을 받지 않는다면 옷을 팔아서 그 돈으로 보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곳 사위성 부자들이 왕사성 부자들보다 좀 못했는지, 워낙 비싼 물건이어서 아무도 살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베사카 부인이 천만 금을 내고 자기 옷을 자기가 샀어요. 그렇게 낸 옷값으로 지은 것이 이 동원정사라고 합니다.nbspnbsp당시에는 건물을 안 짓는 게 풍습이었으니 아마 땅을 구입해서 숲을 마련한 게 아닐까 해요. 그래서 부처님을 이곳에 머물도록 청해서 부처님은 이곳에서 여섯 번의 안거를 나셨다고 합니다. 기원정사에서 보낸 19번의 안거와 여기 동원정사에서 보낸 안거를 합쳐서 25번의 안거를 사위성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동원정사가 지어진 유래예요.nbspnbsp4대 정사라고 하면 첫 번째가 죽림정사, 두 번째가 기원정사, 세 번째가 이 동원정사예요. 네 번째는 암라빨리가 부처님의 마지막 여로에 기증한 암라원입니다. 암라빨리가 나중에 출가해 비구니가 되어서 암라원은 후대에 비구니절이 되었어요. 이곳 동원정사도 부처님이 머무시던 당시에는 비구니절이 아니었지만 기록을 보면 나중에 비구니절이 됩니다. 4대 정사 중 뒤의 2개가 비구니절이 되었고 둘 다 여성이 지었는데 모두 장부 같은 여성들이었어요.nbspnbsp저쪽을 보면 동쪽 성문 벽 밖에 프라세나짓왕이 비구니들을 위해서 마련해준 절이 있습니다. 스님들은 숲에서 살잖아요. 비구니, 즉 여성수행자들이 숲에서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지내다 보니 성추행을 많이 당했어요. 성 안에는 수행자가 못 사니까 성벽에 붙여서 절을 마련해 주어 비구니들을 보호하려 했던 것 같아요. 왕이 지은 절이라고 해서 절 이름이 ‘왕사’입니다. 저기도 비구니절이에요. 나중에는 물론 건물이 들어섰지만 초기에는 건물이 아니라 숲이에요.nbspnbsp경전에 기록된 비구니들의 게송을 보면 낮에 숲에서 정진을 하고 있는데 마왕 마라가 나타나서 유혹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나다니던 남자들이 유혹을 했던 거예요. 게송을 보면 그 당시 비구니들이 얼마나 정진의 힘이 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숲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지나가다가 ‘당신 눈이 참으로 아름답다’며 유혹을 했어요. 그러자 손가락으로 자기 눈알을 빼서 가져가라고 내어줬대요. nbspnbspnbsp굉장하지요? 눈을 빼서 내미는데 무슨 다른 욕망이 일어나겠어요? 정진의 힘이 그런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회적 조건이 여성이 출가해 수행하기에는 그만큼 어려웠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동원정사는 이런 유래가 있으니까 특히 여성 신자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곳입니다.nbsp그리고 동원정사가 여성이 지은 절이다 보니 여성 신자들이 많이 다녔나 봐요. 옛날 부처님 당시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신자들이 다 절에 와서 참회하고 포살을 합니다. 한 번은 베사카 부인이 포살에 참가한 약 500명의 여자들한테 각자 무슨 소원을 빌고 있는지 물어봤어요. 늙은 여성들은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어요. 중년 여성들은 남편이 하룻밤이라도 둘째 부인에게 안 가기를 원했어요. 결혼한 젊은 여자들은 아들 낳는 게 소원이라고 했어요. 처녀들은 인물 잘생기고 마음씨 너그럽고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는 게 소원이래요. 예나 지금이나 똑같죠? nbspnbsp그래서 베사카 부인이 그 500명의 여성을 데리고 기원정사로 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청하면서 ‘여기 500명의 대중이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했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법문하셨어요.nbspnbsp‘육신이라는 것은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중생들은 윤회의 사슬로 올가미를 만드는 것을 자청하느냐? 그러니 그런 무익한 것에 마음을 쓰지 말고 윤회의 사슬을 끊는 해탈을 향해 나아가라.’nbsp여기 성지순례에 오신 분들 보니까 일본이며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에서 많이들 왔는데 그 정도면 이미 받은 복이 충분하지 않아요? 아직도 부족해요? nbspnbspnbsp요즘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만 해도 받은 복이 충분해요. 밥 먹지, 옷 입지, 비 안 새는 집에서 잠 자지, 차 있지, 그러면 됐지요. 그러니 이제 복은 그만 구하고, 마음이 자유롭고 행복한 해탈의 길을 좀 더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까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 인생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nbspnbsp처음에는 규모가 너무 볼품 없어서 그 중요성이 다가오지 않았는데, 스님이 동원정사가 지어진 유래를 실감나게 들려주니 그제서야 비로소 그 의미가 깊이 다가왔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은 왜 이렇게 규모가 작은지, 힌두교의 링가가 왜 놓여 있는지 대중들이 의아해하는 것을 헤아리며 아직 고고학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곳 지형지세를 꼼꼼히 답사한 후 스님이 추측해본 나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nbspnbspnbsp“원래의 동원정사가 이렇게 작았을 리는 없어요. 제 생각에는 이 앞에 있는 동네가 전부 동원정사 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유적지가 오래되어 허물어진 곳은 지대가 높으니까 사람들이 다 거기에 집을 짓고 살거든요. 평지에는 별도의 언덕이 없는 데다가 지대가 낮은 곳은 쉽게 물에 잠기니까요. 상카시아도 내일 가서 보면 동네가 있는 곳이 지대가 높습니다. 사위성도 보면 바깥보다 지대가 높아요. 지난번에 여기 비가 와서 이곳 랍띠 강 전체가 범람해서 죄다 물바다가 되었는데 안 잠긴 곳이 사위성과 기원정사와 저 큰 도로뿐이었다고 해요.nbsp여기 보면 링가가 있지요. 링가는 힌두교에서 다산을 상징합니다. 불교가 사라지고 이곳은 나중에 힌두교, 즉 브라만이 지키고 있는 동네 기도처가 되었는데 사실은 이게 링가가 아니라 아쇼카석주라고 합니다. 여기가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라는 걸 알리는 석주였는데, 유적지가 파괴되면서 힌두교인들이 석주의 윗부분을 자르고 다듬어서 링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여기 계시는 스님은 브라만인데 머리 깎고 출가해서 여길 지키고 있어요.”nbsp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의문이 많이 풀어지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이렇게 동원정사 참배를 마치고 순례단은 논두렁 길을 따라 걸으며 숙소로 향했습니다.nbspnbsp그런데 동네 아이들 100여 명이 구걸을 하러 모여 들어서 아수라장이 될 뻔 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순례단을 먼저 보내고, 동네 아이들을 한 줄로 앉혀 모두가 안심하고 사탕 한 움큼씩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준 후 사탕을 나눠주었습니다.nbspnbspnbsp아이들이 온순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오랜 시간 인도에서 구호활동을 해 온 스님의 연륜과 경험이 느껴졌습니다. 아이들은 사탕을 받고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그럼에도 몇몇 아이들은 계속 순례객들 따라오며 구걸을 했습니다. 한 거사님은 땅바닥에 머리를 수 차례 조아리며 쫓아오는 아이들 때문에 무척 곤혼스러워 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 구걸을 하며 먼 길을 계속 따라오는 아이들nbsp그러나 한적한 논두렁길로 들어서니 시골 마을이 나타났고, 이 동네 아이들은 순례객을 봐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손을 흔들 뿐 아무도 구걸을 하지 않았습니다. 500미터 남짓한 거리의 두 마을이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 참 신기했습니다.nbspnbsp▲ 구걸하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웃기만 하는 시골 아이들nbsp스님은 이 모습을 보고 “관광객들이 자꾸 주기 때문에 아이들을 거지로 만드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왜 스님이 수자타아카데미를 만들었는지와도 일맥 상통하는 말씀이었습니다.nbspnbsp순례객들은 화사한 유채꽃밭과 망고나무 숲을 지나 서로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로 돌아왔습니다.nbspnbsp▲ 망고나무 숲nbsp저녁식사 후 저녁 6시 30분부터는 스님이 이번 성지순례를 총정리하는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바라나시를 시작으로 보드가야, 라즈길, 바이샬리, 쿠시나가라, 룸비니, 카필라바스투 등 이번 성지순례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이 중요했고, 무엇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스님의 명쾌한 정리 말씀에 성지순례의 감흥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습니다.nbspnbspnbsp강연을 마치면서 스님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자신을 가볍게 만들어나가야 함을 강조했습니다.nbspnbsp“옛날 이야기를 자꾸 할 필요도 없고, 미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고, 지금이 중요해요. 어쩌고 저쩌고 토를 달거나 머리 굴리지 말고, 상대가 욕할 때 빙긋이 웃는 연습을 한번 해보세요.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진찰을 해보더니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암인 것 같습니다’ 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발견하셨군요’ 라고 하세요. nbspnbspnbsp암은 오늘 생긴 게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이잖아요. 어차피 돈 들여 검사했는데 한 번에 발견했으니 좋은 일이에요. 지금 발견 못했다면 나중에 또 돈 들여서 검사를 해야 하잖아요. 의사가 기막혀 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소?’라고 물으면 ‘저는 부디스트입니다’라고 대답하세요. nbspnbspnbsp이것이 바로 유마거사가 병든 몸을 갖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과 같아요. 불행을 행복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재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재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재앙인 거예요. 그냥 하나의 사건인데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게 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이 말하는 재앙이 복인 줄 알아버리면 인생 해탈하는 거예요.nbspnbsp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불편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로워지면 그게 큰 복이에요. 불편한 것으로부터 자기가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세상살이에 훨씬 더 자유로워진 겁니다. 그런 공부를 하려고 돈 들여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런데 얼굴이 대부분 밝아진 것 같긴 하지만 몇몇은 내내 인상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먹는 게 못마땅했는지, 자는 게 못마땅했는지, 화장실이 못마땅했는지, 스님이 너무 늦게까지 붙들어서 잠 안 재우고 법문해서 못마땅했는지, 뭐가 그리 못마땅했는지 모르겠어요. nbsp이렇게 직접 경험하면서 배우는 거예요. 경험하면서 배워야 내 것이 되지, 지식으로 배우는 것은 지식으로 끝나요. 성지순례는 체험학습이에요. 어려움에 부닥쳐서 ‘아, 내가 사로잡혔구나’하고 알고, 넘어지면서 딱 깨치는 거예요. 넘어진 걸 보고 다른 사람이 걱정이 되어서 ‘아이고, 어째’ 하면서 일으켜 세워줄 때 빙긋이 웃어보세요. 그러면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겠죠. ‘당신은 뭔데 이럴 때 웃소?’ 하거들랑 ‘부디스트입니다’ 라고 하세요. nbspnbsp우리의 가장 큰 힘은 무슨 세력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고, 바로 이 행복입니다. 행복을 여러분들의 가장 큰 힘으로 삼으세요. ‘이 상황에서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다,’ 이게 가장 큰 힘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괴로워하겠지만 나는 이 상황에서도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거예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취해서 전봇대 붙들고 오줌누고, 지하철 계단에 쓰러져서 자는 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이에요. 내내 자기를 괴롭히면서 약 먹고 죽겠다고 하는 것도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어쨌고 어릴 때 가난했고 뭐가 어쨌고 하면서 지나간 이야기를 갖고 자기를 괴롭히잖아요.nbspnbspnbsp더 이상 자기 에너지를 자기를 괴롭히는 데 쓰지 말고 이렇게 자기를 가볍게 만들어 나가야 해요. 우리는 워낙 무겁게 사는 습관이 많이 들어서 잘 안 되는데, 그래도 자꾸 노력을 해야 해요. 가볍게, 좋게 생각하세요. 긍정적 사고는 낙관적 사고와는 달라요. ‘뭐든지 잘 될 거다’ 이런 게 아니라, 이미 일어나버린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넘어지면 앉아서 울지 말고 일어나야 해요. 지금 일어나는 게 중요하지, 앉아서 우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차가 지나가버렸으면 지나간 걸로 자꾸 시비하지 마세요. 이미 지나간 차는 잊어버리고 다음 차나 잘 잡을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nbsp이제 순례를 마치고 각자 사는 나라로 돌아가면 성지순례에서 배운 경험이 삶의 행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해주려는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은 깨달음은 논리를 뛰어넘는다고 하면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다시 한 번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부처님 말씀 중에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한번 보세요. 어느 동네를 갔더니 웬 아이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아버지 때문에 못 살겠어요’라는 거예요.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할머니 무덤가에 가서 뗏집을 짓고 하루 세 번씩 거기에 공양물을 갖다 올리며 운다는 거예요. 인도는 무덤이 없는데 왜 이런 묘사가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중국 사람이 번역하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어쨌든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러고 있어서 집안에 아무것도 일이 안 된대요. 부처님이 가만히 듣더니 아이한테 뭐라고 뭐라고 말했어요. 부처님 말씀을 들은 아이는 씩 웃으며 돌아갔습니다.nbspnbspnbsp조금 있으니 온 동네에 아무개네 집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이 났어요. 인도는 소가 죽어도 소고기를 안 먹으니까 그냥 버려둡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죽은 소 앞에 가서 꼴을 한 움큼 들이밀면서 ‘소야, 먹어라. 소야, 먹어라’ 이러는 거예요. 사람들이 ‘야 인마, 죽은 소가 어떻게 먹냐?’라고 해도 신경 안 쓰고 계속 ‘소야, 먹어라, 소야, 먹어라’ 이래요. 그래서 결국 그 집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이 퍼져서 무덤가에 있던 아버지에게까지 들어갔어요. 아들이 미쳤다니까 아버지가 찾아왔겠죠. 아이가 그 짓을 하는 걸 본 아버지가 ‘이 놈의 자식아, 죽은 소가 꼴 먹으라고 한다고 어떻게 먹냐’하고 화를 벌컥 내니까 아이가 올려다보면서 ‘그럼 아버지는요?’ 이랬대요. 그래서 아버지가 탁 깨달았어요. nbspnbsp이렇게 깨달음은 지식하고 좀 달라요. 깨달음은 논리가 있긴 하지만 논리도 초월합니다. 단순한 지식과는 개념이 좀 달라요.”nbsp스님은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 온갖 가지 이야기를 잘 알고 있어서 대중들의 상황을 살피며 그 때 그 때마다 적절한 부처님의 교화 사례들을 쑥쑥 꺼내어 주었습니다.nbspnbsp오늘도 스님이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세세히 설명을 해준 덕분에 부처님 당시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기분을 느끼며 기쁜 마음으로 오늘 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nbspA팀, B팀, C팀의 쉬라바스티 순례 안내를 모두 마쳤기 때문에 스님은 내일부터 다시 C팀을 따라 상카시아로 함께 이동할 예정입니다. 상카시아를 마지막으로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은 부처님의 10대 성지순례를 모두 마치게 됩니다. nbspnbsp※ 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nbsp쉽고 명쾌한 강의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시면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나는 인도 성지순례에도 우선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 nbsp
2016.1.19 (인도 14일째) 쉬라바스티 인근 절, 학교 방문 및 C팀 마중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쉬라바스티에 있는 인도 절과 인터 칼리지을 방문하여 보시금을 전달한 후 오후에는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과 함께 천불화현탑을 참배하고 저녁에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nbspnbsp새벽 3시 20분이 되자 성지순례단 B팀이 상카시아까지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스님도 새벽에 주차장에 나와 버스에 탑승한 순례객들이 출발하자 손을 흔들며 반갑게 배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안녕히 가세요”nbspnbsp스님의 환한 웃음에 순례객들도 아쉬움이 큰지 버스 창밖으로 계속 손을 흔들었습니다.nbspnbspB팀을 떠나보낸 후 오전에는 원고 교정과 한국에서 온 보고서들을 처리하며 숙소에 머물렀습니다. 점심 때가 되자 스님은 “주위에 방문할 곳이 있다”며 길을 나섰습니다. 먼저 쉬라바스티에 있는 인도 절을 방문하여 보시금을 전달했습니다.nbspnbsp▲ 쉬라바스티 인도 절nbsp현재 인도 절에는 5명의 스님들이 상주하고 있는데, 불교가 거의 사라진 인도에서 인도 절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무척 소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해마다 이곳 인도 절에 보시금을 전달하고 있는데, 오늘도 방문을 하니 인도 스님들은 반갑게 스님을 환영하면서 공경 합장하고 찬탄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스님은 작년에 비해 절이 많이 정비된 모습을 보고 인도 스님들을 더욱 격려해 주었습니다.nbspnbsp▲ 인도 스님들에게 보시금을 전달하는 스님nbsp이어서 쉬라바스티에서 운영되고 있는 인터 칼리지를 방문했습니다. 스님은 이 학교를 설립한 쁘라게난다 스님과 20여 년 전부터 인도 불교 부흥을 위한 활동과 관련해 인연을 맺어오고 있습니다.nbspnbsp▲ 제트완 인터 칼리지 방문nbsp스님이 학교에 도착하자 운영위원장님과 교장선생님이 반갑게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스님의 발에 손을 대며 합장 공경의 예를 한 후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nbspnbsp▲ 스님을 반갑게 환영하고 있는 학교 운영위원장nbsp스님은 학교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보시금을 전달한 후 학교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6학년부터 12학년까지 총 15개 반에 900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학년별로 각 반에 스님을 모시고 들어가자 학생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준비한 꽃송이를 스님께 전달했습니다.nbspnbsp▲ 스님께 꽃을 드리는 학생들nbsp스님은 수십 송이의 꽃을 받으며 학생들의 환영에 웃음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세요”라며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또 어떤 학생에게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 라고 물어보기도 했고, 또 어떤 반에는 스님들이 수업을 듣고 있어서 더욱더 격려를 해주기도 했습니다.nbspnbsp▲ 스님께 꽃을 건네는 스님들nbsp학교를 모두 둘러본 후 스님은 선생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각 선생님들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자세히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nbsp스님이 선생님들을 격려한 후 학교를 떠나려고 하자 선생님들은 학교 바로 옆에 이 지역에 근세에 와서 처음으로 지어진 절이 있는데 지금은 매우 낡아서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며 보수 공사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nbspnbsp▲ 낡아서 지붕이 일부 붕괴되어 있는 절nbsp스님은 그 자리에서 도와주겠다고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천축선원으로 돌아와서 천축선원이 공사를 도와주는 형식이 되도록 지원금을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돈이 다른 곳에 유용되지 않고 절을 짓는데에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쉬라바스티에 있는 중국 절로 향했습니다. 중국 절은 기원정사와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 붙어 있었습니다. 7층으로 된 큰 누각이 있어 멀리서도 금방 눈에 뛰었습니다.nbspnbsp▲ 중국 절nbsp스님은 중국 사람들이 이 절을 지을 때 7층 누각을 만든 이유에 대해 “현장 법사님이 인도 성지순례를 한 후 지은 책에 기원정사에 7층으로 된 큰 탑이 있었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현재 중국 절은 중국 사람들이 모두 철수하고 전혀 운영이 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이 절을 승려들을 교육하기 위한 사미 학교로 사용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곳곳을 꼼꼼히 점검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지만 방이 25개나 있고 잘 보수하면 아주 훌륭한 학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nbspnbsp중국 절 답사를 마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인도는 지금 건기에 해당하는데 비가 오는 모습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건기에는 밭이 바짝 마르게 되는데 비가 오니 밭작물에게 얼마나 좋아” 하면서 웃음을 지었습니다. nbspnbsp이렇게 쉬라바스티 주변에 있는 곳을 모두 방문한 후 스님은 다시 천축선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번 인연 맺은 사람들을 잊지 않고 늘 챙겨주는 스님의 모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nbspnbsp오후 4시가 되자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이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A팀과 B팀에 비해 1시간 30분이나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급하게 C팀을 환영하기 위해 천불화현탑으로 향했습니다. C팀은 네팔에서 인도국경을 통과할 때 대응을 비교적 잘 했는지 2시간 만에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nbspnbspC팀이 도착하자 스님은 손을 흔들며 “쉬라바스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송수신기로 익숙한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너무나 반가워하며 버스에서 내렸습니다.nbspnbsp▲ 천불화현탑nbsp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불화현탑에 올라 탑돌이를 한 후 자리에 앉아 저녁예불을 올렸습니다.nbspnbspnbsp예불을 마친 후 스님이 천불화현탑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쉬라바스티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300여 개 나라 중 16대국이 있었고 16대국 중 초강대국 둘이 있었는데 하나가 마가다국이고 다른 하나가 코살라국이었어요. 마가다국의 수도가 왕사성이고 코살라국의 수도가 사위성, 즉 이곳 쉬라바스티입니다.nbspnbsp‘쉬라바스티’는 ‘풍요롭다’는 뜻입니다. 마가다국은 전통적인 선진강국인데 코살라국은 신흥강국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이곳 사위성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군사적으로도 강력하지만 문화 수준은 좀 뒤처지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수닷타 장자의 초대를 받고 부처님이 이곳에 오시긴 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문명 수준이 좀 떨어지다 보니까 신통력을 보여주는 걸 좋아하고 복 빌기를 좋아해서 삿된 외도가 오히려 융성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오셨는데도 귀족이나 지식인 계층 일부를 제외하면 불법에 귀의하는 자가 많지 않았어요.nbspnbsp이를 안타까이 여긴 수닷타 장자가 부처님께 간절히 청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신통은 중생을 현혹하므로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곳 주민들이 어리석어서 외도가 융성하니 부처님께서 뭔가 이적을 좀 보여주셔야 이 사람들이 따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어느 날 쉬라바스티 성 동문 밖 이곳에 대중들을 모으라고 하셨대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부처님이 망고 한 개를 드시고 그 씨를 땅에 심었더니 대중이 보는 앞에서 싹이 트고 자라 금방 큰 망고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려 다시 노랗게 익었는데, 그 모든 망고가 다 부처님으로 화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천불화현이 출현한 뒤 부처님께서 하늘로 가셨다고 해요.nbsp그런데 이 이야기는 우리가 배운 부처님의 삶이며 인격과는 잘 안 맞아요. 나중에 대승불교에 들어와 생긴 이야기도 아니고 초기불교 때부터 있는 이야기인데 무슨 연유로 이런 이야기가 생겼을까요? nbspnbspnbsp‘부처님은 신통이 자재하시니까 그러실 수 있겠다’ 하는 신앙적인 것을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실제로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기록에 남았는지 아직 저도 확실히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어쨌든 이곳은 그런 이적을 보인 장소여서 이렇게 다른 곳보다 유별나게 큰 탑이 세워졌습니다.nbsp그 이후로 쉬라바스티에서 부처님 법에 귀의하는 자가 늘어나고 결국은 이곳에서 불법이 융성하게 되었다고 해요. 물론 그렇게 되어서 좋은 점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부처님을 시기 질투한 외도들이 부처님을 해치려 들었던 사건이 여기서 많이 생겼습니다. 왕사성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지만 여기서는 외도들이 부처님을 해치려고 다양한 음해를 벌였어요. 당시 여기가 문명이 뒤처진 곳이다 보니 신흥 사상가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천불화현은 그런 경쟁 속에서 불법이 우위에 서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까 해요.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이렇게 큰 탑을 세운 것 같습니다.nbspnbsp8대 성지를 상징하는 조각이 있다고 했죠? 우선 4대 성지가 있고, 그 다음에 왕사성을 상징하는 조각은 ‘취상조복’, 즉 술취한 코끼리가 부처님께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모양입니다. 바이샬리의 상징은 ‘원후봉밀’, 즉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리는 모양이고, 이곳 쉬라바스티는 ‘천불화현’이에요. 상카시아는 도리천에 가신 부처님이 하강하는 모습입니다. 인드라와 브라만이 부처님의 양쪽에 시립해서 계단을 타고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이에요.nbspnbspnbsp이 시간대에 여기 오면 석양을 볼 수 있어요. 맑은 날 여기 올라와서 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걸 마치 실제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만 오늘은 안개가 자욱해서 그런 풍경을 보기 어렵습니다. 일단 오늘은 이 천불화현탑을 친견하고 들어가서 저녁에 법회를 한 뒤 내일은 기원정사와 사위성을 둘러보겠습니다.”nbspnbsp스님의 말씀대로 어떤 사건이 이곳에서 있었기에 천불화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지 정말 궁금함이 일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꼭 고증이 되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순례객들은 천불화현탑에서의 옛일을 생각하면서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어둑해질 무렵 천불화현탑에서 내려와 숙소인 천축선원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천축선원에서 순례객들을 위해 따뜻한 국과 저녁식사를 마련해 주어 순례객들은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세면도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순례객들에게 저녁마다 맛있는 국을 끓여주고 있는 천축선원 적조행보살님nbsp이어서 저녁 7시부터는 천축선원 주지 대인스님을 모시고 저녁법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스님이 직접 대인 스님을 순례객들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 절을 창건하신 분이 대인 스님이십니다. 대인 스님께서 17년 전에 이곳에 오셔서 순례자들을 위해 숙소를 마련하시고, 이제는 동네 주민들을 위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도 지어주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보건소도 운영하고, 올해 3월부터는 학교도 열어서 수업도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nbspnbsp보통 순례자 숙소에 가보면 불사한다고 야단인데 진행은 잘 안되는 곳이 많아요. 그런데 이곳은 불사한다는 소리도 없이 매년 올 때마다 하나씩 진행이 되고 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조용히 이렇게 순례자들을 위한 아늑한 숙소를 마련해 주셨어요. 깊이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순례객 모두 대인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스님의 소개를 이어 받아 대인 스님이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온 인류에 부처님의 법을 전하시려고 다니시는 법륜 스님의 모습을 보면 부처님 당시가 절로 떠오릅니다. 저는 여기 있으면서 방문하는 순례자들과 이곳 주민들을 시봉하고 살고 있습니다. 걸망을 메고 부처님 8대 성지를 순례하다가 이곳에 와보니 여러 나라에서 도량을 지어놓고 있는데 오직 한국에서 지은 도량은 없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많은 한국 불자님들의 요청도 있고 해서 그냥 머슴 노릇 좀 해보자 해서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로 이곳에 온지 17년 째입니다.nbspnbsp매년 1월 마다 법륜 스님과 정토행자님들이 방문해 밝은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가시는 덕분에 저는 1년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습니다. 정토행자님들을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러요.” nbspnbsp대인 스님의 인자한 미소에 순례객들도 환하게 웃었고, 법당 안에는 훈훈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스님의 그을린 얼굴을 보니 머나먼 이국 땅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지 헤아려졌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과의 즉문즉설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스님은 먼저 밝게 웃으면서 순례객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특히 C팀은 세계 각국과 정토회 안팎에서 모인 분들이기 때문에 순례가 어땠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nbspnbspnbsp“제가 바라나시에서 여러분을 처음 만났을 때 세계 각국에서 그리고 전국에서, 또 정토행자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다국적군으로 C팀이 편성되어 있는 걸 보고 손발이 좀 안 맞아서 고생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땠어요? 다니면서 손발을 다 맞췄어요?”nbspnbsp“예”nbsp“훈련이 됐어요?”nbsp“예”nbsp“아이고, 다행이다.” nbspnbsp걱정이 되었는데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걸 보고 스님은 밝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오늘은 그동안 순례하면서 들었던 의문이나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하면 스님의 생각을 들려주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다양한 질문이 많았지만 모두가 궁금해할 수 있는 한 가지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nbsp성지순례를 하면서 각 성지마다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과 관련된 경전을 독송했는데, 경전의 내용이 실제 부처님의 말씀과 어느 정도 이질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는 질문이었습니다.nbspnbspnbsp“경전이 부처님 당시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기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종교들을 봐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의 손이 가면서 정치적인 내용도 개입이 되어 진리가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경전을 자세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불교 경전도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나중에 제자들이 구전으로 전하다가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때 실제 부처님의 말씀과 경전의 내용이 어느 정도 이질성이 있다고 봐야 하는지 궁금합니다.”nbspnbsp“오늘 제가 법문한 것도 그 뜻을 서로 달리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지금 이야기한 걸 금방 돌아가서 조별 나누기를 해도 ‘그게 아니라 이런 뜻이야’, ‘아니야, 네가 잘못 들었어’ 이러는 판에 어떻게 2600년 전 부처님 이야기가 그대로 전해지겠어요? 그것도 부처님이 한 자리에서 한 사람만 두고 이야기한 게 아니라 여기 가서 이 사람 두고 이야기하고, 저기 가서 저 사람 두고 이야기하고, 또 45년 동안 한 이야기를 또 500년이나 지난 뒤에 문서화했으니 고스란히 그대로 실릴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그러나 불경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부처님은 우선 어쨌든 80세까지 사셨잖아요. 여러 가지 비난도 받고 음해도 받았지만 그래도 예수님처럼 정치적으로 탄압받아 사형당하는 일은 안 겪었기에 깨달음 이후의 전법이 비교적 평탄한 편이었어요. 그리고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깨달았다고 하는 아라한이 500명이나 모여서 이게 부처님 말씀인지 아닌지 다 확인 작업을 거쳤습니다. 500명이 확인 작업을 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제일 많이 들은 아난다가 초안을 내면 500명이 다 들어보면서 ‘그건 아니야’ 하고 수정도 하고, ‘그게 빠졌어’ 해서 보충도 하고, 이렇게 하나하나 다 확인해서 결집을 했다는 거예요.nbspnbsp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걸 글로 쓰는 게 아니라 외워야 했어요. 외우려니까 부처님이 오래 말씀하셨다 해도 그 중 요지만 외워야 하잖아요. 그런데도 이걸 신문기사 쓰듯 반드시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이렇게 딱 붙여서 외웠습니다. 경전의 편집 방식이 그랬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금강경’에 나오는 ‘여시아문’, 즉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들은 사람이 기록자예요. 경전 내용을 요즘에 비유해서 신문기사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할 때의 ‘나’는 기사를 쓴 사람, 즉 기자입니다. 그는 바로 아난존자예요. 금강경 첫머리를 보면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의 1250명 대중과 함께 있을 때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고 나중에 수보리가 이러저러하게 질문하니 부처님이 이러저러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라는 식으로 시작해서 내용이 전개됩니다. 앞부분이 그렇게 정리되어 있어야 외우기가 쉽잖아요. 그런 식으로 정리해놓고 그 내용을 다 같이 확인했어요. 500명이 다 같이 확인해서 암송하고 하나 끝내고 또 하나 끝내는 식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불경에 기록된 내용은 비교적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500명이 일일이 확인하긴 했지만 그 뒤에 시간이 흐르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여기 편집에서는 빠졌다’ 이런 주장이 나왔어요. 그래서 그것이 경전 안에 안 들어갔는데도 계속 중요한 가르침으로 구전되어 내려와서, 100년쯤 지난 뒤에 그 중의 일부를 다시 보충했습니다.nbspnbsp그런데 부처님이 참 존경스러운 것은, 부처님이 이런 일이 생길 줄 미리 알고 기준을 정해놓았습니다. ‘내가 열반한 뒤에 분명히 부처님에게 직접 이야기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생기거든 기존에 없다고 하여 무조건 아니라고 하지도 말고, 부처님한테 들었다고 무조건 믿지도 말라. 지금까지 붓다에게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받은 바에 견주어서 이 가르침이 합당한지를 보고, 합당하거든 수용하고 합당하지 않거든 버려라.’ 라고 해요. 지금까지 정리되어 내려온 가르침에 견주어 판단하라는 겁니다.nbsp또 여래는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계율이나 경전에 의거해서 진리는 검증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어느 경전에 써놨다고 해서 그걸 무조건 진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nbspnbsp역사가 흘러내려오면서 부처님 이름을 빙자해서 소위 ‘위경’이라는 게 숱하게 제작되었습니다. 그런 것은 내용을 딱 보고 이런 기준으로 판단하면 됩니다. 우선 연기법에 어긋나면 진리가 아니에요. 뭘 어떻게 하면 복을 많이 받고 수명이 길어진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안 맞습니다. 이렇게 불법의 원칙을 딱 몇 가지만 알면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즉 중도에 어긋나도 불법이 아니고, 사성제에 어긋나도 불법이 아니고, 연기법에 어긋나도 불법이 아니고, 삼법인에 어긋나도 불법이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nbspnbsp부처님 법은 누구를 해치는 법이 아니고 이치에도 어긋남이 없어요. 전법선언에 ‘사람과 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누굴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라는 겁니다. 다음으로 ‘법을 설할 때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설하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치에 합당치 않은 이야기는 불법이 아니에요.nbspnbsp그러면 불법은 논리적인 지식일까요? 아닙니다. 때로는 논리를 뛰어넘는 것도 있어요. 논리에 어긋나는 것은 불법이 아니지만 또한 논리를 뛰어넘을 수도 있어요. 논리에도 갇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법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어요.nbspnbspnbsp논리를 뛰어넘는 것과 논리에 어긋나는 것은 달라요. 내일 기원정사에 가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참으로 합당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요. 요즘 우리가 들어도 놀랄만한 이야기들입니다.”nbsp경전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순례객이 궁금해하는 많은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순례객들이 먼 길을 달려와서 피곤한 것을 헤아리며 오늘은 일찍 잘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그런데 오늘은 좀 일찍 자야 해요. 내일은 어떻게 보면 차를 안 타니까 제일 좋은 날이지만, 어떻게 보면 제일 힘든 날이에요. 차를 타면 어쨌든 차 안에서 잘 수 있지만 내일은 차를 안 타니까 하루 종일 졸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힘들다면 힘든 날이고, 차를 안 타니까 좋다면 좋은 날인데 오늘 저녁에는 눈을 좀 붙여둬야 합니다. 그런데 내일은 밤새도록 안 자고 법문해도 괜찮아요. 모레 최장거리를 가기 때문에 차 안에서 계속 자야 해요. nbspnbspnbsp그러니 오늘은 일찍 끝내지요. 저는 언제든지 밤샘해서 법문을 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그만 하자’ 하면 그만하고 ‘더 하자’ 하면 더 하고. 저는 상관없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만 하자’ 할 걸 제가 알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nbspnbsp자, 오늘 먼 거리 오느라 피곤했으니 이만 자고 내일 또 공부합시다.”nbsp스님의 배려를 느끼며 오늘은 순례객 모두 10시도 안 되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nbsp내일은 하루 종일 사위성을 걸어서 순례할 예정입니다. 부처님은 사위성에서 24번 또는 25번의 안거를 지내셨다고 합니다. 기원정사에서 19년, 베사카 부인이 건립한 동원정사에서 5년 혹은 6년, 그래서 총 24년 또는 25년을 지내신 것이지요. nbspnbsp그동안 순례객들은 성지순례 일정이 빠듯해서 앞사람만 쳐다보고 쫓아가기 바빴지만, 내일은 하루 종일 차도 안 타고 걸어다니면서 여유롭게 기원정사를 둘러보고 법문도 충분히 듣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nbsp ※ 법륜 스님의 쉽고 명쾌한 강의를 1년 동안 들을 수 있는 2016년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시면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나는 인도 성지순례에도 우선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 nbsp
2016.1.18 (인도 13일째) 성지순례단 B팀 쉬라바스티 순례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B팀을 이끌고 부처님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 쉬라바스티를 순례한 후 저녁에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새벽 6시에 예불과 기도를 마친 성지순례단 B팀은 한 줄로 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기원정사로 향했습니다. 맨 앞에는 스님이 앞장섰습니다. 새벽 안개를 가르며 고요히 걸어가는 기나긴 행렬을 보니 이곳 사위성에서 설해진 금강경의 한 구절이 그대로 재현이 된 것 같았습니다. nbspnbspnbsp‘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성의 기수급고독원에 대비구중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 공양 때가 되어 큰 옷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신 채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로 밥을 빌어 본 곳으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nbspnbsp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10대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순례단은 이제 순례의 막바지에 이르러 기원정사에 당도하자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습니다.nbspnbspnbspnbsp스님은 손에 향을 든 순례단을 이끌고 기원정사 곳곳을 탑돌이하고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신 자리, 부처님이 머무신 처소, 아난 존자가 물을 떠서 부처님께 드렸다는 우물 터,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했던 자리,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생각하기 위해 심은 보리수 나무, 라훌라 존자의 처소, 앙굴리말라의 처소, 후대 승려들이 머문 승방터 등을 모두 참배한 후, 법회를 하기 위해 부처님이 머문 처소인 ‘간다 쿠티’ 앞에 다시 섰습니다.nbspnbsp▲ 부처님이 수행승들을 위해 설법을 했던 장소nbsp▲ 아난다가 부처님께 물을 떠다 주었다고 하는 우물nbsp▲ 라훌라 존자가 머무른 처소nbsp지심정례공양... 예참 불공과 함께 160여 명의 순례단이 간다 쿠티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하자 동쪽에서 붉은 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다고 하는 바로 이곳에서 예불을 올리는 이 순간은 순례객 모두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nbspnbsp▲ 아침 예불nbsp예불을 마치고 스님은 순례객을 위해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고, 이어서 이곳 기원정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창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경전 속에 등장하는 사위성에서 일어난 갖가지 교화 사례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또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실제 경전 속에서는 그 내용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함경의 절반 가까이가 이곳 사위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니 오늘 독송한 내용 말고도 어마어마한 사례들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경전 독송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부처님이 특히 사위성에서 외도들의 모함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새겨야 하는지 강조했습니다.nbspnbsp“사위성은 신흥강국으로 등장한 코살라국의 새로운 도시였기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문명이나 문화로 보면 수준이 좀 낮았나 봅니다. 그래서 삿된 외도들이 성행했어요. 부처님이 여기에서 외도들의 모함을 특히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방금 읽은 경전에 나와 있듯이 여러 가지 모함을 받고 승가가 오해를 받을 때마다 수닷타 장자나 베사카 부인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사성에 계실 때도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니까 이런 비난의 소리가 들렸다고 해요.nbspnbspnbsp‘어제는 누구의 아들을 빼앗아가더니 오늘은 누구의 남편을 빼앗아가네. 내일은 또 누구의 제자를 빼앗아 갈 것인가.’nbspnbsp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을 빼앗겼다는 관점으로 보고 이렇게 비난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말에는 이렇게 대답하라고 했어요.nbspnbsp‘여래는 진리를 설하는 자다. 법다이 설하는데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nbspnbspnbsp이렇게 해서 그 비난이 멈추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도 일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비난을 받게 되어 억울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위대하신 분도 오해와 비난을 받았는데 어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오해와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수행 중에 베푸는 보시도 중요하고, 계를 청정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억울하고 분한 일을 잘 참아내는 인욕 또한 매우 중요한 수행입니다.”nbspnbsp성지에서 직접 읽는 경전 독송의 감동도 컸지만, 스님이 핵심을 다시 짚어주니 당시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순례객 모두 매번 성지에 도착할 때마다 예불을 정성껏 올렸는데, 예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삼귀의를 좀 더 자세히 풀어놓은 것이 예불문입니다. 우리가 늘 조석으로 예불을 하고 다녔지요? 이 예불문은 ‘오분향 예불문’이라고 합니다. 다섯 가지 향을 부처님께 올리고 예불한다고 해서 ‘오분향 예불문’이라고 하고, 절을 일곱 번 한다고 해서 ‘칠정례 예불문’이라고도 합니다.nbspnbsp인도에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전단향처럼 좋은 향 다섯 가지를 꽂아서 향기를 피우면서 제사를 지내요.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께 올리는 향은 그런 전단향이니 무슨 향이니 하는 게 아닙니다.nbspnbsp첫째, 계향 즉 ‘계율을 청정하게 지킨다’, 또는 ‘언행이 바르다’고 이르는 인격의 향기예요. 계를 청정히 지키는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둘째, 그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 선정의 향기로 공양을 올립니다. 셋째, 어리석음을 없앤 지혜로운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넷째, 온갖 속박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해탈의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nbsp우리가 살다보면 남에게 이익을 주기보다는 손해를 끼칠 때가 많아요. 그런데 나를 때리는 사람, 내 물건에 자꾸 손해끼치는 사람, 나한테 성추행하는 사람, 나한테 욕설하고 사기 치는 사람,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사람과는 같이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부모라도 힘들고, 배우자라 해도 힘들고, 그런 자식이 있어도 힘듭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 사람, 즉 ‘그 사람은 나를 절대로 해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에게 절대로 손해 끼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한테 절대로 사기 치거나 욕설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한테 행패 부리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보통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착한 사람 즉 남에게 해를 안 끼치는 사람이 돼야 해요.nbspnbsp그런데 ‘우리 마누라나 남편은 착하기는 한데 늘 불안정하다’ 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늘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도 같이 살기엔 좀 힘들어요. 그래서 착한 것만 갖고는 안 되고, 두 번째로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nbspnbsp세 번째로, 착하기도 하고 마음도 편안한데 앞뒤가 꽉 막혀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어요.그러면 속이 터지죠.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이 살기 좀 힘들어요. 그러니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람이 좀 영리해서 말귀도 금방금방 알아듣고 일머리도 금방금방 돌아가야 같이 살기 쉽잖아요.nbspnbsp네 번째로,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그건 안 되겠는데요’, ‘그거 해봐도 안 될 거예요’ 라며 늘 사물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이에요. 그게 아니라 뭐든지 이야기하면 ‘네. 해보죠, 뭐’ 혹은 ‘네, 해봅시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해요. 이처럼 어떤 윤리나 도덕이나 의식에 꽉 묶여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좀 자유롭고 열려 있는 사람이 가지는 향기가 해탈의 향기예요.nbspnbsp다섯 번째로, 해탈지견향은 부처님의 지혜예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마지막 단계입니다.nbsp이런 다섯 가지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예불을 올릴 때 ‘계향’이라고 말할 때는 ‘계율을 청정히 지키겠습니다’ 라고 다짐해야 해요. ‘정향’이라고 말할 때는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을 닦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혜향’ 할 때는 ‘지혜를 증득하겠습니다’ 라고 다짐하세요.nbspnbspnbsp이 다섯 가지로 시방에 계시는 한량없는 불법승 삼보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공양을 올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수행의 다섯 가지 향으로 공양을 올린 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예불입니다.nbsp자, 그럼 이곳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각자 한가하게 정진을 좀 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nbsp예불문에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 뜻에 더욱더 집중해서 예불을 해봐야겠다는 다짐이 생겼습니다.nbspnbsp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순례객들은 기원정사 곳곳에 흩어져 개인 정진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무 밑에서 명상을 하는 사람, 조별로 모여서 공동 정진을 하는 사람들, 간다 쿠티를 바라보며 300배 절을 하는 사람 등 모두들 성지에서 받은 감동을 정진을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승화하고 있었습니다. nbspnbspnbsp▲ 개인 정진 시간nbsp대중들이 정진을 하고 있는 사이 차량별로 줄을 서서 스님과 일대일로 기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듯이 모두들 설레여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활짝 웃었습니다.nbspnbsp▲ 기념사진 촬영nbsp이렇게 기원정사에서 법회를 모두 마친 후 다함께 사위성을 향해 걸었습니다. 대중 일동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대로 걷기 시작하자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들어가는 순례단nbsp“이제 사위성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천이백오십명이 기러기떼처럼 한 줄로 성 안으로 들어가서 골목 골목으로 흩어진 다음 걸식을 하고 나서 기원정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을 금강경에는 ‘환지본처’라고 표현하죠. 본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드셨다는 뜻입니다. 천이백오십 대중이 매일 가서 걸식을 해도 괜찮을 정도였으니 이 사위성이 얼마나 크고 부유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죠.”nbspnbsp부처님 당시를 재현하듯 긴 행렬을 이루며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향했습니다. 160여 명이 한 줄로 가도 이렇게 긴 행렬이 되는데 천이백오십 명이 줄을 지어 걷는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스님 말씀처럼 사위성은 정말로 큰 규모였으리라 짐작해 볼 뿐입니다.nbspnbsp사위성 서문 쪽으로 들어서자 두 개의 큰 탑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스님이 송수신기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왼쪽에 보이는 이것은 앙굴리말라를 기념하는 탑이고, 저기 오른쪽에 있는 것은 수닷타 장자를 기념하는 탑입니다. 수닷타 장자는 선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사람이고, 앙굴리말라는 악인이었다가 참회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었어요. 먼저 앙굴리말라 수투파를 정근하면서 참배하겠습니다.”nbsp▲ 왼쪽이 앙굴리말라 스투파, 오른쪽이 수닷타 장자 스투파nbsp대중들은 스님을 따라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고 삼배를 한 후 자리를 깔고 앉았습니다.nbspnbsp▲ 앙굴리말라 스투파nbsp스님은 부처님이 어떻게 99명을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를 교화했는지 당시의 모습을 영화보듯이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앞에 있는 탑은 앙굴리말라를 기념해서 세운 앙굴리말라 수투파입니다. ‘앙굴리’는 ‘손가락’, ‘말라’는 ‘염주’라는 뜻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원래 이 지역의 부유하고 좋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여기서 서북쪽인 파키스탄 지역에 당시 유명했던 탁실라라는 교육 도시로 유학을 보냈어요. ‘부처님의 일생’에서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어린 시절은 ‘유학기’라고 해서 공부하는 시기예요. 그래서 78살 때 유학을 보내서 1617살까지 공부를 마친 뒤 돌아오는데, 그 당시에는 멀리 유학을 가면 우리의 옛날 서당처럼 스승의 집에 기숙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를 가르친 훌륭한 스승은 나이가 아주 많았습니다. 아마 5060살 정도였던 것 같지만, 당시에는 50살만 되어도 할아버지였으니까 요즘으로 치면 780살 정도 된 느낌이었나 봐요. 그런데 부인은 20대 중반이어서 아주 젊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어린 시절에 그 집에 들어가 공부하니까 스승의 부인인 사모님이 엄마처럼 잘 보살폈는데, 아이도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서 귀여움을 받았다고 해요.nbspnbspnbsp그러다 스승이 아이를 질투해서 문제가 생겼어요. 스승의 질투가 원인인 것은 맞지만, 질투가 생긴 이유에 대한 설명은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하나는 유학 온 아이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 하니까 그 지역 출신 학생들이 모함했다는 거예요. 앙굴리말라가 1516살이 되어 당시 기준으로는 장성했으니까 스승에게 ‘앙굴리말라와 사모님 사이가 수상하다’라고 고자질을 했어요. 스승이 줄곧 그 말을 믿지 않다가, 어느날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니 사모님이 손으로 밥을 앙굴리말라의 입에 떠넣어주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느꼈다고 해요.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잖아요. 떠넣어준 것은 어릴 때 해주던 버릇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nbsp또 다른 이야기로는 밥을 먹다가 방안에 쥐가 들어왔대요. 둘이서 쥐를 잡는다고 법석을 피우다가 옷자락이 엉키고 살갗이 드러났는데 마침 그때 스승이 돌아와서 보고 두 사람 사이를 오해했다고 기록한 것도 있습니다.nbspnbsp또 다른 하나는 남편은 나이가 많고 제자는 용모 반반한 청년이다 보니 사모님이 앙굴리말라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해요. 그래서 스승이 멀리 외출하고 둘만 있을 때 사랑을 나누자고 청했는데 앙굴리말라가 거절했다고 해요. 자기가 몇 년을 극진히 사랑으로 대해줬는데 자기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니까 굉장히 자존심도 상했고, 이 아이의 성격으로 보아 남편에게 이야기할 것 같으니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도 들었겠죠. 그래서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옷을 찢고 흐트러뜨린 뒤 막 울었다는 거예요. 놀란 남편이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내가 이 아이를 엄마처럼 돌봤는데 당신이 없는 사이 이 아이가 나를 추행하려 했소’ 라고 이야기했대요. 그래서 남편은 제자를 사랑하던 마음은 없어지고 제자를 나쁘게 생각하게 되었어요.nbsp구체적인 사정이 어떻든 오해가 생겼어요. 그래서 스승은 제자에게 ‘네게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라고 말했는데 이 아이 입장에서는 스승이 훌륭한 분이니 배울 게 더 있다고 생각해서 ‘아닙니다, 아직 저는 더 배울 게 많습니다’ 라고 답했어요. 있겠다고 하니 더 수상하게 보이잖아요. 가라는 스승과 계속 있겠다는 제자 사이의 실랑이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스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남았다. 승천, 즉 산 육신을 가진 채 바로 하늘나라에 가는 게 마지막 공부인데 그것은 실제로 행하기가 너무나 어려우니 가르쳐줘봐야 네가 할 수 없다.’nbsp그러자 이 청년이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 못 한다 하더라도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맹세한 거예요. 그래서 가르쳐준 비법이라는 게 사람을 100명 죽여서 그 손가락 1,000개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면 바로 승천한다는 것이었습니다.nbspnbsp이게 바로 사로잡힘이에요. 청년은 거기에 딱 빠져서 그날부터 수행이랍시고 사람을 죽인 뒤 손가락을 엮어서 목에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본래 이름은 없어지고 ‘앙굴리말라’, 즉 손가락 염주를 한 희대의 살인마가 되었어요.nbsp그러자 당시 사회에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전부 두려워하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사람을 죽여야 손가락 염주를 완성할 텐데 사람들이 도망가니까 사람을 따라 자꾸 내려와서 이제 쉬라바스티로 내려온다는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왕에게 탄원해서 요즘 말로 하자면 치안이 허술하니까 빨리 잡아달라고 졸랐습니다. 병사 몇 명쯤 보내봐야 숲속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공격하니까 도로 다 잡혀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다 보니 괴력을 가져서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는 헛소문까지 났어요. 어떤 확신을 가지면 두려움이 없으니까 실제로 그렇게 되는 면도 있었을 겁니다.nbsp그런데 여기서 경전의 기록이 또 두 가지로 다릅니다. 하나는 앙굴리말라가 99명을 죽이고 마지막 1명만 죽이면 승천한다고 믿는 상태에서 쉬라바스티 가까이에 왔다는 거예요. 왕이 나서서 이 사람을 잡겠다고 하니 그 어머니가 부처님께 찾아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nbspnbsp다른 하나는 부처님이 길을 가는데 사람들이 도망쳐오면서 ‘부처님, 그 길을 가지 마지 마십시오. 그리로 앙굴리말라가 옵니다’라고 외쳤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여래는 두려움이 없소’ 이렇게 답하고 계속 길을 갑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거슬러서 길을 갔습니다. 한참을 가니까 숲에서 칼과 방패를 든 앙굴리말라가 나타났어요. 앙굴리말라는 한 사람만 더 죽이면 자기가 승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다들 도망가서 사람을 만나기 어렵던 중에 부처님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칼을 쥐고 ‘사문아, 게 섰거라’ 하고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습니다.nbspnbsp그러나 부처님은 그러거나 말거나 평소 걷던 대로 천천히 걸어가셨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쫓아가도 부처님에게 닿지를 않는 거예요. 멈추라고 마구 소리를 지르다가 헐레벌떡 쫓아와서 부처님 앞을 막아서면서 ‘왜 멈추라는데 멈추지 않았느냐?’ 이렇게 화를 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나는 이미 멈춘 지 오래다.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너다’ 이렇게 말했어요. 부처님의 특이한 화법입니다. 화제를 바꿔버려요.nbspnbsp그러자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고, 이 말에 발끈한 앙굴리말라가 문제제기를 했어요. ‘말도 안 된다. 너는 계속 걸었고 나는 지금 멈춰 있는데 왜 네가 멈췄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고 하느냐?’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어요. ‘나는 남을 해치는 것을 멈춘 지 오래되었으나 너는 아직 남을 해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성냄을 멈춘 지 오래 되었으나 너는 아직 성냄을 멈추지 못했다.’nbspnbspnbsp앙굴리말라는 스승의 술수에 걸려들어 정신을 잃었다가 이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너무나 몹쓸 짓을 저지르고 엄청난 죄를 지은 거예요. 그래서 방패와 칼을 던지고 무릎을 꿇으며 출가하기를 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가 이미 진리에 눈을 뜨고 깨달음을 얻은 줄 알고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부지런히 정진해서 괴로움이 소멸되는 열반의 세계로 가라’ 라고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nbspnbsp그런데 부처님이 출가사문이 된 앙굴리말라를 데리고 기원정사로 돌아왔을 때 마침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께 인사를 왔어요. 정사에 들어올 때는 누구든지 무장을 해제해야 하니까 병사들을 밖에 세워두고 왕만 들어와 인사를 올리는데, 정사 밖에 잘 무장된 날랜 병사 1,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세워 두었어요. 게다가 그 중 500명은 기마부대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물어보셔습니다.nbspnbsp‘무슨 일이오? 전쟁이라도 났소?’‘아닙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지만 앙굴리말라라는 희대의 살인자가 나타나서 온 나라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군대를 끌고 잡으러 가는 중에 부처님께 인사드리러 들렀습니다.’‘대왕이시여, 만약 그 앙굴리말라가 모든 악행을 멈추고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면 어떻겠소?’‘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제가 그분께 예를 갖추고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그 살인자가 악행을 멈출 리 만무하며 출가사문이 될 리는 더욱 만무합니다.’nbspnbsp그러자 부처님이 옆에 앉아 있는 비구를 가리키며 ‘이 존자가 바로 앙굴리말라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왕이 갑자기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거예요. 괴력을 가졌다는 희대의 살인마를 지금 무장해제하고 호위병 한 명도 없이 마주했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자 부처님이 ‘대왕이여,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는 아힘사요. 더 이상 누구도 해치지 않는 사람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앙굴리말라의 법명은 ‘아힘사’입니다. ‘비폭력’, ‘불살생’이라는 뜻이에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안온한 수행자여서 대왕이 절을 하고 필요한 게 무엇이든 공양을 올리겠다고 하니까 앙굴리말라가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양을 사양했어요. 그때 왕이 부처님을 찬탄했습니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거룩하십니다. 누구도 조복하지 못할 사람을 조복하고, 길들이지 못할 사람을 길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창과 칼을 가지고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을 부처님은 오직 말씀으로 그를 조복하고 다스렸습니다.’nbsp춘다의 공양이 붓다를 위대하게 했듯이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더욱 더 위대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앙굴리말라 같은 사람이 법에 귀의해서 성자가 됨으로 해서 여래의 법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였으니까요.nbspnbsp우리 정토회도 그런 것 같아요. 착한 사람이 정토회에 와서 수행자가 되면 별로 영향력이 없는데, 성질 더럽고 못된 사람이 법문 듣고 변하니까 ‘어쩌다가 저렇게 됐냐’며 주위에서 난리가 나서 나중에는 형제며 가족들이 모두 정토회에 옵니다. nbspnbspnbsp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출가 스님이 되었다는 소문이 나니까 또 문제가 되었어요. 앙굴리말라가 출가하기 전에는 집집마다 줄을 묶고 줄에 종을 달아서 앙굴리말라가 나타나면 서로들 비상연락을 했습니다. 누가 줄을 잡아당겨 종소리로 알리면 온 도시가 전부 대문을 잠그고 창문을 닫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출가사문이 됐다니까 아침에 탁발하러 오는 스님들 중 누가 앙굴리말라인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전부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공양을 안 주는 거에요. 앙굴리말라를 출가시켜 놓으니까 다른 사람들까지 밥도 못 얻어먹게 생겼어요. 상가의 이미지가 확 떨어져 버렸습니다.nbspnbsp앙굴리말라도 발우를 들고 탁발하러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서 여인이 아이를 낳고 있었어요. 막 아기 머리가 나오던 참인데 ‘앙굴리말라가 온다’라고 누가 소리치니까 여인이 놀라서 그만 까무러쳐 버렸어요. 애가 나오다가 멈췄으니 산모도 아이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어요. 앙굴리말라가 기원정사로 와서 부처님께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nbsp‘앙굴리말라여, 다시 그 집으로 가거라. 그 집으로 가서 이렇게 말해라.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nbsp그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말이 안 맞지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는 ‘출가한 이래로’라는 뜻입니다. 그 전은 다 꿈속의 이야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집에 가서 이렇게 말했더니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고 합니다.nbsp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이제는 앙굴리말라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어요. 그러자 그 동안은 겁내서 도망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보복을 하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성내에 탁발을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몽둥이로 쳐서 결국은 깊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기록이 조금씩 달라요. 부처님이 소식을 듣고 앙굴리말라가 쓰러진 곳에 왔다고도 하고, 앙굴리말라가 피투성이가 되어 정사로 돌아왔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부처님이 오셨을 때 앙굴리말라는 이렇게 말했어요.nbspnbsp‘여래시여, 저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nbsp돌과 몽둥이에 맞아 죽으면서도 마음에 진심이 일어나지 않고 편안히 열반에 들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아라한과를 증득했기에 순교를 할 때도 아무런 번뇌가 없었어요.nbsp이것이 앙굴리말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위성 사람들이 앙굴리말라를 위한 탑을 이곳에 세운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왔을 때는 여기에서 앙굴리말라가 숨었다고 하면서 ‘앙굴리말라 굴’이라고 했어요. 저쪽으로 가서 보면 탑에 희한하게 굴이 뚫려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기어서 들어가 보고, 굴을 통과하면 오래 산다는 속설도 있었는데 지금은 막아놨네요. 생각해보면 시내 한복판인데 앙굴리말라가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나왔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 이곳은 앙굴리말라가 탁발하러 왔다가 돌에 맞아서 열반에 든 곳이어서 기념탑을 세운 것 같아요.nbsp저 건너편은 선인으로서, 즉 착한 사람으로서 제일 유명한 사람인 수닷타 장자의 집터예요. 그래서 저기에 또 그를 기리는 탑을 쌓아서 지금은 두 탑이 마주보고 있게 되었습니다.nbspnbsp앙굴리말라를 교화한 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법은 악한 이나 착한 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든 사람에게 평등합니다. ‘그가 과거에 어땠나’ 하는 것은 꿈속의 이야기이고, 어떤 사람이든 깨달을 수 있고, 깨달으면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과거에 지은 과보는 받아야 해요. 그래서 앙굴리말라는 과거에 지은 악업의 과보를 받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열반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는 일체의 두려움과 성냄도 없이 편안하게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자, 그럼 경전에 나오는 앙굴리말라의 이야기를 독송해보겠습니다.”nbsp스님이 말씀해준 내용이 경전 속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독송해 보았습니다. 부처님이 기절한 임산부를 보고 당황해하는 앙굴리말라를 보고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해라고 하는 대목과 마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저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목은 언제 들어도 큰 감동입니다.nbspnbsp이렇게 앙굴리말라 스투파 참배를 마치고 이어서 수닷타 장자의 스투파로 건너가 참배를 했습니다.nbspnbsp▲ 앙굴리말라 스투파를 나와서 수닷타 장자 스투파로 이동하는 순례단nbsp비록 지금은 허물어져 있지만 기단의 규모를 보니 당시에는 얼마나 크게 세워졌을지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수닷타 장자 스투파nbsp다시 순례객들은 지금은 정글로 변한 사위성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사위성의 동문으로 나와 베사카 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동원정사를 참배했습니다.nbspnbsp▲ 정글로 변한 사위성 안nbsp동원정사에서 스님은 베사카 부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또 실감나게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nbsp이렇게 순례를 마치고 나서 대중들은 숙소로 돌아와 세면을 마치고 조별로 모여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먹었습니다. 식사 후 6시부터는 스님의 성지순례 총정리 강연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약 10여 명이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들었던 의문에 대해 온갖 질문들을 쏟아내었습니다. 스님의 답변을 들으며 의문이 하나씩 하나씩 풀어지자 대중들의 얼굴도 점점 밝아져 갔습니다.nbspnbspnbsp오늘은 그 중에 부처님이 탁발을 하셨던 것은 어떤 수행적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물었던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오늘 순례객들은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직접 탁발을 하듯이 걸어가면서 많은 감흥을 느꼈는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더 깊이 부처님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오늘 사위성을 순례하면서 탁발하는 것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많은 수행자들이 탁발을 하시는데 그것이 어떤 수행적 의미를 가지는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nbspnbsp“머리를 깎고 집을 나오고 탁발하는 것은 부처님이 처음 만든 게 아니라 그런 인도의 문화에 부처님도 동참한 거예요. 브라마니즘에 반대한 비주류, 즉 사문류에 부처님도 합류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당시에는 ‘사문류’가 비주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기에 육사외도도 다 사문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이나교와 불교를 제외한 그 당시 사상들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우리 나라에는 자이나교가 없다 보니 이제 출가사문은 불교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 당시 하나의 수행적 문화였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nbspnbsp그리고 그걸 바꿀 수도 있는데 굳이 그대로 살리는 의미는 일체의 생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먹는 것은 그냥 얻어서 먹으면 되고, 입는 것은 남이 버린 옷을 주워서 입으면 되고, 자는 것은 아무데서나 자면 돼요. 그렇게 놓아버릴 수 있어야 우리가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nbspnbsp또 하나, 탁발에는 만인을 평등하게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만행을 해봤는데 얻어 먹어보면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나’라는 것을 털끝만큼이라도 움켜쥐고 있으면 얻어먹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JTS 모금할 때 나눠주는 팜플렛을 상대가 안 받아도 좀 머쓱하고, 모금함을 가져가서 이야기해도 열 명이면 열 명 다 그냥 가버리면 좀 머쓱하잖아요. 그냥 내 돈 확 집어넣고 와버리고 싶어져요. nbspnbspnbsp또 이 몸을 유지하는 약으로 밥을 먹기 위해서 탁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시해 주는 사람은 내 생존을 영위해주는 사람이에요. 비록 그 사람이 아무리 가난하고 천민이라도 내가 그 집에서 밥을 빌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잘난 척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니까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nbspnbsp또 한 끼 밥을 빌어서 먹는 걸 해결하니까 권력자나 부자에게 굳이 굽신거릴 이유가 없어요. 나에게 집이나 돈 같은 게 필요하면 돈 가진 사람이나 지위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겠지만, 나에게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데 임금이 있으면 뭐하고 부자가 있으면 뭐하겠어요? 그러니 임금한테도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임금 앞에서는 일부러 고개를 숙이지 않고 뻣뻣하게 군다는 뜻이 아니라, 임금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밥을 빌어서 먹기 위해서는 천민한테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서고 가장 높은 자의 위에 선다는 뜻입니다. 이게 출가사문의 길입니다. 만인을 평등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에는 차별이 있지만 붓다는 세상을 평등하게 본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걸식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nbspnbsp여러분들이 JTS 모금하는 것도 일종의 걸식 연습과 비슷해서 수행에 굉장히 도움이 돼요. 사실은 불교 교리 100번 공부하는 것보다 그거 한 번 해보는 게 더 나아요. 몇 번 해보면 괜찮아지지만 처음 할 땐 굉장히 어색합니다. 스님 강연 홍보한다고 길거리에서 1인용 피켓 들고 서 있어도 처음엔 좀 부끄럽잖아요. 괜히 다들 나만 보는 것 같고, 혹여 친구라도 만나면 ‘미쳤다’ 소리 들을 것 같고 온갖 생각이 들어요. nbspnbsp우리는 다 ‘나’라는 걸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탁 놓아버리면 편안해요. 그런데 이것은 무슨 불교 교리를 외우거나 불교학 박사학위를 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행해보면서 ‘아, 내가 지금 상을 짓고 집착하고 있구나’ 이런 걸 자각하고 자꾸 놓아보다 보면 어떤 것도 편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연습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nbsp단순히 남의 밥을 빌어먹는 것이 아니라 내 수행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이 탁발이고 모금활동임을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평생 동안 탁발을 함으로써 가장 낮은 자의 아래에 서고 가장 높은 자의 위에 섰다는 말씀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nbspnbsp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니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스님은 목에 파스를 붙이고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순례객들에게 “밤새 이야기해 보자”며 마음을 내었지만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순례객들을 위해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이 괴로운 이유는 기대가 높기 때문이예요. 나무 밑에서 잔다고 생각하고 성지순례를 오면 이 정도 숙소는 정말 괜찮게 느껴져요. 처음에 올 때 나무 밑에서 자는 수준이라고 미리 이야기 듣고 왔으니까 지금 괜찮지, 그냥 왔으면 시위를 하고 난리를 피웠겠죠. 스님 머리가 남아 있었으면 다 뜯겼을 거예요. nbspnbspnbsp성지순례하는 것만 공부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보는 것이 다 공부입니다. 여러분들이 침낭에서 자고, 밥도 그냥 밥통에 해서 하루 두 끼 먹고, 차에서 졸면서도 이렇게 웃고 재미있게 살 수 있다면 집에 가서 못 웃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아무리 남편이며 아내가 뭐라고 한들 저보다야 잘 해줄 거 아니에요. 남편이며 아내가 저처럼 여러분들을 붙잡고 종일 끌고 다니면 ‘사람 죽이려고 하나?’ 이러고 대번에 싸움이 났겠죠. 안그래요? nbsp여러분들이 이런 경험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조금씩 자유롭게 하는 법을 터득해가야 합니다. 제가 일부러 고생시키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자기 삶을 자유롭게 하려고 우리가 지금 이런 공부를 하는 거예요. 똑같은 벽돌 더미인데 그거 하나 더 보면 뭐하고, 덜 보면 뭐하겠어요? nbspnbspnbsp눈감고 마음을 코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관해버리면 시간도 없어지고 공간도 없어져요. 여기 앉아서 코끝을 보나, 한국에 앉아서 코끝을 보나, 어제 보나, 오늘 보나, 일체의 시공간이 사라지고 그냥 숨 들락거리는 것밖에 안 남아요.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사실 성지가 어디 있고 오지가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항상 우리는 공으로, 텅 빈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래도 이왕 성지에 왔으니 성스럽게 생각하는 마음도 내야 하겠죠. 먹는 거야 뭘 먹어도 좋지만 맛있는 걸 먹을 때는 맛있게 먹어야 해요. 맛에 집착하지 말라고 해서 맛있는 걸 굳이 인상 쓰고 먹을 필요는 없어요. nbsp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점점 자유로워지도록 하라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지, ‘부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이런 게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행복해지는 게 스님이 원하는 바지, ‘법륜 스님이 최고다’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가장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법에 귀의하면 그 길로 갈 수 있다 해서 법에 귀의하라는 것입니다.nbspnbsp그런 관점을 가져서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해 자기 삶을 행복하게 한 사람은 불법에 가까워진 사람이고, 성지 순례 하는 동안 괴로운 사람은 집에 가도 괴롭고 어디를 가도 괴로워요. 여기 가도 괴롭고, 저기 이사해도 괴롭고, 혼자 살아도 괴롭고, 결혼해도 괴롭고, 늙어도 괴롭고, 젊어도 괴롭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혼자 살면 귀찮은 게 없어 좋고, 같이 살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고, 늙으면 할 일 없어 좋고, 젊으면 할 일이 많아서 좋고, 이렇게 다 좋아요. 몸이 아파도 괜찮아요. 아프면 좀 누워 있을 수 있어서 좋고, 온갖 약도 먹어볼 수 있어서 좋아요. 안 아프면 그런 약을 언제 또 먹어보겠어요?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마련한 다양한 약도 한번 먹어봐야 할 거 아니에요. nbspnbspnbsp또 아프면 시봉도 좀 받을 수 있고 주변에서 걱정도 좀 해줍니다. 세상만사가 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조금씩 조금씩 더 자유로워져가야 합니다.nbsp내일은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하는 것 알고 있죠? 일찍 나가보는 것도 좋아요. 3시 반에 일어난다고 해도 한국 시간으로는 7시입니다. 7시에 일어나는 게 뭐가 힘들어요? 그러니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차피 한국 가면 한국 시간으로 살아야 하니까 아예 지금부터 한국 시간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3시, 4시에 일어나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은 것은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7시, 8시에 일어나는 셈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괜히 시차 적응했다가 한국에 돌아가서 또 힘들여 바꾸느니 여기서도 그냥 한국 시간 그대로 생활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nbspnbsp이렇게 해서 여행이 여러분들에게 큰 공덕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nbspnbsp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절로 힘이 났습니다. 몸이 편찮으심에도 오히려 대중들을 더욱 격려해주는 스님에게 모두 뜨겁게 박수를 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아무리 고단한 상황도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마음을 보는 순례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강조하는 스님의 모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성지순례단 B팀의 쉬라바스티 순례 일정도 모두 끝이 났습니다. B팀은 내일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해서 상카시아를 향해 출발합니다. 스님은 이어서 C팀을 환영 마중하고 천불화현탑을 참배한 후 즉문즉설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16 (인도 11일째) 성지순례단 A팀 기원정사 순례
nbsp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을 이끌고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래 머무신 곳인 쉬라바스티에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했습니다.nbsp nbsp 새벽예불 후 160여 명의 순례단은 가사를 정갈히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축선원을 출발하여 기원정사까지 한 줄로 서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앞뒤 간격이 떨어지지 않게 왼발 오른발을 알아차리며 행선을 하면서 기다랗게 줄을 지어 새벽 안개를 갈랐습니다.nbsp nbsp nbsp 천이백 비구가 기러기떼처럼 긴 행렬로 탁발을 하러 갔던 것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정진을 하듯이 걷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nbsp nbsp nbsp 가는 도중 어느덧 날이 밝아 자전거를 탄 주민들도 보이고, 어린 아이들이 꽃을 팔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한 인도인이 준 꽃을 한송이 들고 기원정사로 들어섰습니다.nbsp nbsp 아침이 밝자 공원처럼 깔끔하게 꾸며놓은 기원정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례단은 향에 불을 붙이고nbsp긴 행렬을 이루며 기원정사 곳곳을 스님을 따라 물 흐르듯이 밟아보며 부처님과 당시 제자들의 숨결을 느껴보았습니다.nbsp nbsp nbsp 부처님이 머무셨다는 자리에 세워진 ‘간다 쿠티’라는 곳을 바라보며 멈춰서서 삼배를 한 후 법회가 열리는 공터로 이동해 예불을 정성껏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바로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다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격스러웠습니다.nbsp nbsp nbsp 예불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간절한 목소리로 순례단을 위해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성지 어느 곳을 가든 항상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시는데 오늘따라 머나먼 이국 땅에서 다시 듣는 간절한 기도는 지금의 남북관계를 떠올릴 때 더욱 가슴이 아리는 것 같았습니다.nbsp nbsp nbsp 이어서 순례단이 모두 자리에 앉자, 스님은 기원정사의 창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해 주어서 벽돌 더미에 불과한 유적지가 영화를 보듯이 재현되는 기분이었습니다.nbsp nbsp “여기가 기원정사입니다. 인도 말로는 ‘제따 바나’라고 해요. ‘제따’는 사람 이름이고 ‘바나’는 숲이라는 뜻이에요. 우리말로는 ‘기원정사’, 금강경에는 ‘기수급고독원’이라고 표기된 곳입니다.nbsp nbsp nbsp 춥지만 그래도 여기 오니까 다른 성지보다는 아늑하죠? 다른 곳은 그냥 길가 같은데 여기는 사찰 같은 기분이 들어요. 부처님이 처음으로 기증받으신 절이 죽림정사입니다. 죽림정사에서 본 연못 이름이 칼란다카 연못이에요. 부처님이 성도 후 왕사성에 머물면서 교화활동을 왕성히 하셨는데 교화 3년째 되던 해에 칼란다카 연못을 부처님께 기증한 사람이 칼란다카 장자입니다. 장자는 요즘 말로 하면 사업가에 해당합니다. 사업을 해서 왕사성에서 손꼽히는 큰 부자였던 이 분은 부처님법에 귀의해서 아주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nbsp nbsp 칼란다카 장자는 사위성에 사는 수닷타 장자와 사업상 서로 교류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절친했습니다. 수닷타 장자가 왕사성에 가면 친구인 칼란다카 장자의 집에 머물면서 대화도 나누고 사업도 함께 했으므로nbsp늘 아주 반갑게 맞이해줬어요. 그런데 이번에 왕사성을 방문했을 때는 친구 본인이 안 나오고 하인이 나와서 주인이 좀 바쁘니까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안내하는 거예요.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친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헐레벌떡 오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섭섭했는지 수닷타 장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nbsp ‘뭐가 그리 바쁜가? 아들딸 시집 장가라도 보내는가?’ ‘아이고, 내가 아들 장가보내고 딸 시집보내는 그런 일로 자네같이 귀한 손님을 기다리게 하겠는가?’nbsp ‘그러면 그것보다 더 큰 일이 뭐가 있어서 그러나?’ ‘부처님이 내 식사 초대에 응하셔서 내일 우리 집에 식사하러 오신다네. 그래서 부처님과 일행분들께 대접할 음식을 일일이 감독하고 같이 준비하느라 바빴어.’ ‘부처님이라니? 아니, 이 세상에 부처님이 출현했단 말인가?’ ‘아니, 자네는 그것도 몰랐는가?’ nbsp nbsp 부처님은 그때 이미 왕사성에서는 유명하셨어요. 여러분들이 가서 봤듯이 빔비사라왕, 사리푸트라, 목갈리나, 마하가섭 존자 등이 모두 귀의해서 이미 천이백오십 대중이 성립했을 때이니까요. 그러나 사위성에서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수닷타 장자는 친구에게서 부처님의 설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친구의 이야기만 듣고도 감복을 한 거예요. 친구가 ‘자네는 정말 복이 많네. 부처님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내일 여기에서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어.’라고 말한 후 늦은 밤이라 자러 들어간 뒤에도 수닷타 장자는 흥분이 되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nbsp nbsp 그렇게 잠을 설치고 새벽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집을 나와 산책을 하다가 나무 밑에 누가 nbsp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앉아 있는 자세가 너무나 편안하고 여법해서 저 분이 부처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절을 하면서 ‘혹시 부처님이 아니십니까?’라고 했더니 ‘그렇소.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요.’ 이러는 거예요. 누가 처음으로 인사하는데 부처님이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 됐소’라고 답한 사람이 마하가섭존자를 비롯해 모두 세 사람인데 수닷타 장자가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법을 청했고, 법을 듣고 수닷타 장자가 초견성을 했습니다. 금강경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런 표현이 나오지요? 바로 그 수다원, 즉 첫 번째 단계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걸 빨리어로는 ‘소따빠나’라고 해요.nbsp nbsp 초견성을 얻은 수닷타 장자는 너무너무 기뻐서 부처님을 사위성으로 초대했습니다. ‘부처님, 저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저희 나라에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저희 나라로 와 주십시오.’ 이렇게 초대하자 부처님이 침묵으로 승낙하셨어요.nbsp nbsp 그래서 수닷타 장자는 장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부랴부랴 말을 타고 사위성으로 돌아와 부처님이 3개월 후에 와서 머무를 처소, 즉 부처님과 1250명의 비구 대중이 머무를 장소를 마련하러 나섰습니다. 죽림정사를 이미 봐서 모델로 삼을 수 있었어요. 수행자의 처소는 성에서 너무 가까우면 번다하고, 성에서 너무 멀면 걸식하거나 생활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성으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즉 조용하면서도 비교적 마을에 가까운 곳이 되어야 합니다. 왕사성의 북문에서 죽림정사까지의 거리랑 사위성의 서문에서 기원정사까지의 거리가 거의 같습니다. 성문 밖으로 500700미터 정도, 즉 1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위치에요.nbsp nbsp nbsp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가 적격이라 땅 주인을 알아봤더니 이 나라의 태자인 거예요. 이 큰 제국의 왕자가 소유한 땅이니까 당연히 팔지 않겠죠. 우리 같으면 안 되겠다고 바로 포기했겠지만 수닷타 장자는 이 좋은 숲을 반드시 부처님의 처소로 마련해드리고 싶었기에 태자를 찾아갔어요. 이 태자 이름이 ‘제따’입니다. 한자로는 ‘기타’라고 하고 빨리어로는 ‘제따’예요. 태자에게 찾아가서 서문 밖에 있는 이 땅을 사고 싶다니까 안 판대요. 그러자 장자가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소’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백지수표를 준 거예요.nbsp nbsp 그럴 때 바로 싫다고 거절하지 않는 게 당시의 예법이었습니다. 바로 ‘안 됩니다’라거나 ‘싫습니다’라는 말을 못 해요. 뭔가 거기에 대한 답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주겠소’라고 하니까 태자가 안 팔겠다는 뜻은 보여야겠고 답은 해야 하니까 ‘그러면 이 땅에 그 면적만큼 황금을 까시오’라고 답한 겁니다. 사실상 안 팔겠다는 뜻으로 가격을 터무니없이 매긴 거예요. 그럴 때 ‘그건 너무 비쌉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 말고 실제로 받을 금액을 말하세요’라고 할 수 없었어요. 이미 자기가 얼마든지 좋다며 백지수표를 냈기 때문에 가격 흥정은 더 이상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장자가 ‘알았습니다’ 이러고 갔어요. nbsp 태자는 장자가 포기하고 돌아간 줄 알았지만 수닷타 장자는 그 값으로 사려고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래서 금고를 열어 금화를 죄다 마차에 실어와 숲에다 깔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금으로 땅을 덮어봤자 얼마나 덮겠어요? 숲 입구에 조금 깔고 나니 금이 다 떨어져 버렸어요. 태자가 와서 보니까 턱도 없잖아요. 그래서 속으로 ‘그것 봐라, 네가 돈 좀 있다고 까불더니. 이제 안 사겠지’라고 생각하고 이제 포기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래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가진 어음을 전부 금으로 바꾸고 비밀창고에 두었던 돈까지 다 꺼내왔어요. 땅에 금을 까느라 친구들에게 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졸지에 집도 다 팔고 장자는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됐어요. 그래도 턱없이 조금밖에 못 깔았어요. nbsp 수닷타 장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개중에는 이런 설도 있어요. 그렇게 돈이 다 떨어졌는데도 장자는 포기를 하지 않고 구걸을 했어요. 요즘 말로 하면 보시 받으러 다녔다는 겁니다. 돈을 어쩌는지 보려고 태자가 금화를 한 닢 줬더니 거지가 된 장자가 그 금화를 가지고 바로 숲으로 달려가서 다시 땅에 깔았다고 합니다. nbsp nbsp nbsp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한 태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이 땅을 이렇게까지 구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장자가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실 땅을 구하려고 그럽니다’라고 답했어요. 태자가 그 답을 듣고 더 놀랐어요. 사업하는 사람이 이토록 탐을 내는 걸 보고 땅에 대단한 보물이라도 묻혀 있는 줄 알았는데 사업과는 전혀 관계없고 수행자들이 머물 처소를 마련하려고 그런다잖아요.nbsp nbsp 도대체 그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더니 장자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했습니다. 설명을 들은 기타 태자가 수닷타 장자의 정성에도 감동하고 부처님에 대해서도 감동해서 나머지 땅을 기증해준 겁니다. 돈을 안 받고 준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낸 돈만 받고 나머지 땅을 다 그냥 내어준 겁니다. 받은 금액은 원래 제시했던 금액의 10분의 1도 안 되지만 사실 땅값은 받을 만큼 다 받은 셈이에요. 그러나 제시한 금액에는 턱없이 못 미치기 때문에 이 숲은 기타 태자가 기증한 셈이 된 겁니다.nbsp nbsp 기타 태자가 기증한 땅에 급고독 장자가 정사를 지었다고 해서 기원정사를 ‘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부릅니다. 지금 둘러보면 건물터가 많지만 이 건물들은 모두 200300년 지난 뒤에 지은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건물을 짓지 않았고, 지어도 기껏해야 초막 정도였습니다.nbsp nbsp 이렇게 수닷타 장자가 제따바나를 얻어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처소를 마련했고, 부처님은 죽림정사에 이어 두 번째 정사를 기증받았습니다. 수닷타 장자의 기원정사 창건 이야기는 여러 설화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습니다. 박물관에 가보면 금을 실은 수레와 땅바닥에 깔린 금을 묘사한 그림이나 벽화가 수없이 많아요. 수닷타 장자는 교단에 기여한 정도는 물론이고 신심의 깊이와 수행 정도에서도 부처님의 10대 제자에 버금갑니다.nbsp nbsp 그런데 이곳 사위성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강국이었지만 신흥강국이어서 문화수준은 떨어지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이 지역에는 소위 삿된 외도들이 판을 치고 기복이 성했습니다. 누가 신통을 보이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이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바른 정법에 귀의하기가 어려운 상태였어요. 그래서 초기에는 이곳에서 교화하기가 좀 어려웠습니다.nbsp nbsp 그러나 사람들이 부처님과 불법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여기에서 많은 출가자들과 후원자들이 나타납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부처님께 ‘유행을 하실 때는 몰라도 우기 때 안거는 여기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청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45년 교화 활동 중 24안거를 여기서 했다고 해요. 이곳 기원정사에서 19안거를 하고 베사카 부인이 지은 동원정사에서 다섯 번 혹은 여섯 번의 안거를 해서 총 24안거 혹은 25안거를 했다고 합니다. 동원정사에 머무신 회수는 기록이 약간 차이나지만 기원정사에서 19안거를 했다는 기록은 일관됩니다. 전체 안거의 절반 이상을 사위성에서 머무르신 거예요. nbsp 이런 걸 보면 부처님이 이곳 사위성과 기원정사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어요. 어제 우리가 하루 만에 왔을 정도로 여기는 카필라성에서 가깝습니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언어나 종족이 석가족과 거의 같은 계열이어서 문화도 유사점이 많았을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이 우리나라 사람인데 미국에 가서 이름을 날리다가 북경에 와서 활동하시는 것과 비슷해요. 북경은 서울과 가깝기도 하고 문화나 언어, 음식 같은 데서 여러 가지 유사성이 많으니까 안거는 미국 뉴욕보다는 중국 북경 쪽에서 많이 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nbsp 그런데 이곳은 한국 불자들에게 특별히 더 유명합니다. 첫째, 금강경이 설해진 장소라고 알려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3.1독립운동의 불교계 대표이신 백용성 스님께서 ‘4대 성지를 가꾸어라’라고 하시면서 하나를 더 보태셨어요. 4대 성지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 도를 이루신 곳, 설법하신 곳, 열반하신 곳인데 여기에 부처님의 장기 주석지인 사위성의 기원정사를 잘 가꾸라는 말씀을 더하셨습니다. 8대 성지나 10대 성지가 아니라 이렇게 5대 성지를 지칭하셨어요. nbsp nbsp 이렇게 기원정사는 절이 지어진 계기가 아주 신심 깊은 재가 신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어요. 또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신 곳입니다. 가장 오래 머무셨으니까 설법도 여기에서 가장 많이 하셨겠죠. 그래서 경전을 보면 설법한 장소가 제따바나일 때가 가장 많습니다. 아함경 내용 중 거의 절반 가까이가 사위성 제따바나에서 설해졌어요. 금강경에서도 경이 설해진 장소가 제따바나, 즉 기원정사로 되어 있습니다. 조계종은 특히 금강경을 소위 경전으로 삼기 때문에 불자들이 늘 금강경을 독송하잖아요. 그래서 특히 한국 불교인들에게는 이 기원정사가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4대 성지를 제외하면 여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어요.” nbsp 스님의 실감나는 이야기에 순례단은 흠뻑 몰입되었습니다. 특히 수닷타장자가 기원정사를 마련한 것이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파산이 될 정도로 온갖 정성을 기울인 것이였다는 말씀은 새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경전을 읽을 때와 달리 스님의 육성으로 직접 들으니 수닷타장자의 신심이 얼마나 컸는지 가슴으로 다가왔습니다.nbsp nbsp 이어서 스님의 설명이 경전 속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또 이곳 사위성에서 일어난 수많은 부처님의 교화 사례들을 경전으로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 nbsp nbsp 특히 이곳 사위성은 금강경이 설해진 곳으로 한국 불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곳인데, 금강경도 함께 독송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금강경이 설해진 곳에서 금강경을 직접 읽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nbsp nbsp 경전 독송을 마치자 아침 안개가 짙게 드리우면서 제법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추위를 느끼는 대중들을 배려하며 따뜻한 국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면서 식사 시간을 주었습니다. 너무 추운지 어떤 조는 둥글게 원을 만들어 방한 체조를 하기도 해서 큰 웃음을 주기도 했습니다.nbsp nbsp ▲ 추위를 이기고자 방한 체조를 하는 순례객들 nbsp 천축선원에서 배달해 온 따뜻한 된장국은 추위를 녹이기에 충분했고 맛도 일품이었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니 드디어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nbsp nbsp nbsp nbsp nbsp 이어서 다시 법회 장소에 모여 스님의 설법이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렇게 쉬라바스티에 머물며 스님의 법비를 맞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nbsp nbsp 스님은 이곳 사위성에서 있었던 갖가지 교화 사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들도 많았는데 그 이야기들이 모두 이곳 사위성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니 더 귀를 쫑긋 세우게 되었습니다.nbsp nbsp nbsp 그 중에서 말리카부인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이야기한 대목과 프라세나짓왕과의 대화 내용은 무척 감명 깊게 다가왔습니다.nbsp nbsp “옛날의 왕조 사회에서 백성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제일 귀한 게 누구냐?’리고 물으면 왕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또 결혼한 부인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게 누구냐?’라고 물으면 남편이라고 대답해요. 그런데 이 여인은 굉장하지요? 남편이 왕이 아니어도 남편이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하물며 남편이 왕이면 당연히 ‘당신입니다’라고 해야 할 텐데 ‘나 자신입니다’라고 대답한 거예요. 옛날에 이런 말 하면 그대로 죽임을 당할 일이에요. 그런데 죽이지 않은 왕도 대단하죠. 그 말을 듣고 부처님께 여쭈니까 ‘그렇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이 소중하다 해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답하신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nbsp nbsp 그리고 프라세나짓왕과 부처님의 대화 중 아주 유명한 대화가 있습니다.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프라세나짓왕이 부처님께 여쭸어요. 그러면 보통 군대가 강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주로 할 텐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 nbsp nbsp 모든 산천초목까지 다 왕의 소유였던 절대왕정 시대에 백성을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라고 말한 거예요. 전 세계 어떤 사람도 절대 왕정 시대에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라. 그러면 굳이 왕이 복을 구하기 위해서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도 하셨고, ‘왕이 만약에 지혜가 없다면 한 나라를 바르게 이끌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생명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 한다’ 이런 말씀까지 하셨어요. 대통령은 국민의 머슴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주권재민 시대에도 청와대에 가서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성들 하나 하나의 고통을 자기 자식의 고통처럼 보고 대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도 우리 사회를 보면 세월호 사건이든 강정마을이든 대통령이 정말 자기 자식이며 자기 가족의 일처럼 생각해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 붓다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nbsp 이 외에도 스님은 부처님이 고통받는 사위성 대중들을 교화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듣듯 눈을 감고 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목소리는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nbsp nbsp 이어서 스님은 이번 순례객 중에서 어제 한국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신 분이 있다고 하면서 다함께 천도재를 같이 지내주자고 했습니다. 순례를 포기하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스님은 부처님의 성지인 바로 이곳에서 천도재를 함께 지내줄테니 순례를 함께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면서 상주를 위로하고 천도재를 여법하게 지내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영가시여,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지금에 이르러 영가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고?nbsp nbsp 영가시여, 만약에 영가가 살아 생전에 아무리 좋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죽어가는 생명을 한없이 살리고, 가난한자를 한없이 돌보고, 괴로워하는 자를 한없이 위로하고, 진실을 말하고 위로한 온갖 공덕을 쌓았다 하더라도 지금에 이르러 이 법사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꿈속에서 지은 공덕과 같아 해탈 열반에 이르지 못할지니. 영가시여, 살아 생전에 사람을 해치고, 남의 물건을 뺏고, 남을 괴롭히고, 거짓말을 하고, 욕설을 하고, 술 먹고 취했다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이 법사의 질문에 능히 답을 할 수 있다면 갖가지 모든 죄업이 꿈 속에서 저지른 것과 같아 능히 눈을 뜨고 꿈을 깨면 그 죄업이 흔적조차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영가시여, 영식을 오롯이 하여 이 법사의 질문에 능히 답해 보시오.nbsp nbsp 영가가 이 법사의 질문에 단박에 깨달음을 얻으면 즉시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지만, 만약 영가가 이 질문에 단박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오늘 여기 모인 청중들이 부처님께서 장기 주석하신 이 성스러운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영가를 위하여 해탈주를 독송할테니 이 해탈주를 잘 듣고 저 아마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로 왕생하시어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고 아미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 마침내 해탈열반을 성취하소서.” nbsp 스님의 설법이 끝나자 대중들은 아버님 상을 당한 순례객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해탈주를 함께 독송해 주었습니다. 상주가 된 분은 법을 설해준 스님과 대중들에게 삼배를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 nbsp nbsp 이어서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동안 일정에 쫓기어 성지에 도착해도 예불 올리고 설명이 끝나면 곧바로 버스에 다시 탑승하기 바빴는데, 오늘은 시간이 많이 주어져서 기원정사 곳곳을 거닐어보고, 혼자서 정진도 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 nbsp nbsp nbsp 순례객들은 아난존자가 부처님에게 물을 떠다주었다고 하는 우물, 부처님이 안 계실 때 부처님을 대신해서 모셨다고 하는 보리수나무,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을 했다고 하는 곳 등을 천천히 거닐어 보기도 하고, 부처님의 처소인 간다 쿠티 앞에서 108배 절을 하거나 명상을 하기도 했습니다.nbsp nbsp ▲ 부처님이 머무셨던 처소, 간다 쿠티 nbsp ▲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을 했다고 하는 곳 nbsp 그리고 대중들이 정진을 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순례단 전체를 위해 일대 일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순례객들에게는 이 사진 한 장이 평생을 두고 남을 기념이 될 것입니다. 마치 대학 졸업 사진을 찍듯이 모두들 가슴 설레여 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습니다.nbsp nbsp ▲ 스님과 일대 일로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 nbsp 이렇게 기원정사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후 순례단은 다시 장구한 행렬을 이루며 부처님의 제자들이 탁발을 하기 위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사위성으로 들어갔습니다.nbsp nbsp 사위성 서문을 지나 곧이어 앙굴리말라스투파, 수닷타장자의 스투파가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앙굴리말라스투파를 참배한 후 스님으로부터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어떻게 부처님을 만나 교화가 되었고, 그의 마지막 죽음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함께 그에 관련된 경전을 독송했습니다.nbsp nbsp ▲ 앙굴리말라스투파 nbsp 또 수닷타 장자의 스투파에서는 탑 위까지 줄을 지어 올라가 참배를 한 후 탑을 향해 삼배를 올렸습니다.nbsp nbsp ▲ 수닷타장자 스투파 nbsp 이어서 다시 사위성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이 코스는 27번째 성지순례를 오면서 처음으로 가보는 길입니다. 어제 스님이 답사를 마치고 새롭게 만든 코스입니다.nbsp nbsp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니 황량한 정글이 나타났습니다. 당시에는 가장 번성했을 도시였 텐데 황무지로 변해 있었고, 인적이라곤 구걸하는 아이들만 지치지 않고 끝까지 순례객을 따라왔습니다.nbsp nbsp ▲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는 순례단 nbsp 사위성 동문으로 나오니 부처님이 비구니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 왕사 터가 나왔고, 다시 논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베사카부인이 지었다고 하는 풀바람 비하르. ‘동원정사’가 나타났습니다. 어제 스님이 답사한 바로 그곳입니다.nbspnbspnbsp nbsp 순례단은 동원정사 유적지를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돈 후 자리를 펴고 앉아 스님으로부터 베사카부인의 깊은 신심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 nbsp ▲ 동원정사, 풀바람 비하르 nbsp 동원정사를 참배하는 것으로 쉬라바스티에서의 순례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새벽에 순례를 시작했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습니다. 다시 천축선원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유채꽃이 만발해 있어서 하루 종일 순례를 하느라 걸었던 노곤함을 달래 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스님은 “여러분이 언제 한번 이런 시골길을 걸어보겠어요?” 하면서 순례를 마친 대중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습니다.nbsp nbsp 조별로 전기밥솥에 밥을 지어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7시부터는 다시 저녁 법회가 열렸습니다. 스님은 이제 마지막 순례지로 상카시아만 남겨 놓고 있는 대중들을 위해 총정리가 될 수 있는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순례단이 그동안 돌아본 바라나시, 전정각산, 보드가야, 라즈길, 바이샬리, 쿠시나가라, 룸비니, 카필라바스투, 랑그람, 쿠단, 삐쁘라하와 등을 주욱 상기시켜주며 그곳에서 알아야 핵심 내용들을 다시 짚어 주었습니다. 14일 동안의 순례가 다시 한눈에 그려지는 기분이었습니다.nbsp nbsp 그리고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객들은 순례를 하면서 들었던 다양한 의문들을 스님께 질문했고,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nbsp nbsp nbsp 2시간 30분 동안의 강연을 모두 마치고 스님은 마지막으로 이제 순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면 좋을지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 nbsp “성지순례를 하면서 느낀 점이 좀 있어요?” nbsp “네” nbsp nbsp “첫째, 성지를 참배한 것 말고도 인도에 와서 보고 배운 것이 참 많았지요? 그러니 한국에 돌아가면 너무 물질에 연연하는 삶에 대해 좀 재고를 해보셨으면 해요. 그러면 죽을 때까지 근심 걱정이 끝이 안 나요. 조금 한 템포 떨어져서 삶을 바라보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nbsp nbsp 둘째, 우리가 불교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2600년 전이었는데도 얼마나 합리적이고 바르고 균형잡혀 있으셨습니까. 그 가르침은 지금 들어봐도 기가 막힌 얘기잖아요. 오늘날도 부처님 만큼 그렇게 유머있고 위트있고 똑바르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우리는 왕이 되려고 꿈을 꾸는데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버렸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 길은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nbsp nbsp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는 자세와 부처님의 인격을 닮아가려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자꾸 이러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닮아가려는 태도가 필요해요. 부처님과 당시 수행자들의 삶을 우리의 삶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그 때보다 더 잘 먹잖아요. 어디에 자도 그때보다 더 잘 자고요. 무엇을 입어도 그때보다는 잘 입고요. 일부러 입던 옷을 벗고 분소의를 입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먹고 입고 자는 것 가지고 안달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nbsp nbsp nbsp 누군가가 특별히 더 좋은 옷을 주지 않아도 지금 입고 있는 이 정도 옷은 입고 살 수 있잖아요. 그렇게 안달하지 않아도 어차피 먹게 되어 있고, 자게 되어 있고, 입게 되어 있어요. 적당하게 먹을수록 여러분들 건강에도 좋아요. 요즘 시대는 전부 다 비만이 문제이지 영양 실조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때가 지나면 안 먹어야 해요. 일부러 먹기 싫어서 안 먹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주는 대로 그냥 먹는 겁니다. 이렇게 살면 사는 것이 훨씬 편해져요.nbsp nbsp 마음이 편안해지면 내가 갖고 있는 재능도 효과가 더 나요. 그러면 능력이 더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효율이 더 생겨요. 재능을 다른 곳에 낭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길이 있어요. 또 이 길은 현재만 좋은 길이 아니고 미래도 좋은 길이에요.nbsp nbsp 그리고 정토회가 가는 방향은 진보적인 방향이기 때문에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잘 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것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차를 타면 가만히 있어도 목적지에 가게 되어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정토회에 몸을 담고 있으면 앞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본인이 안달이 나서 자꾸 내려서 문제죠. 그래서 제가 ‘붙어만 있어라’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장 다 버리고 들어와서 머리 깍고 스님이 되라는 얘기는 안 하잖아요. 다만 너무 세속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겁니다.nbsp nbsp 약간 한발 떨어지면 훨씬 행복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던 일을 다 해나갈 수 있어요. 한 템포만 늦추면 안달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해나갈 수 있어요. 스님도 침대에 누워서 안 잘 뿐이지 차를 타고 가면서 자든 어떻게든 다 자면서 사는 거예요. 잠을 안 자고 어떻게 살겠어요? 대신 몇 시에 누워서 자고, 몇 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없어서 좀 문제이긴 하지만요.nbsp nbsp 인도에서 한국식으로 살려하면 좀 힘들어요. 그런데 한국식으로 살겠다는 생각만 놓아버리면 인도만큼 살기 편한 곳이 없어요.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사람들 눈치 보고 잔뜩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데 여기는 긴장하고 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그러나 내 식대로 살려고 하면 뜻대로 잘 안 되어서 힘들어져요. 그러니 떠내려가는 물에 맡겨 놓고 그냥 살면 돼요. 그러면서 내 계획은 내 계획대로 갖고 있되 그것을 고집만 안 하면 됩니다.nbsp nbsp nbsp 성지순례도 절대로 인도식으로만 하지 않아요. 우리식으로 해요. 그런데 고집하면 갈등이 생겨요. 고집은 안 해요. 길이 막히면 내려서 밥 먹으면 되고, 국경을 막아도 별 차질이 안 생기잖아요. 왜냐하면 중간에 몇 시간씩 차질이 생겨도 늘이고 줄일 수 있도록 스폰지를 다 넣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룸비니 갈 때 몇 시간 늦게 가도 차질이 안 생겨요. 그 날은 가는 일정만 잡아 놓았거든요. 어제 늦게 도착해서 천불화현탑을 못보면 오늘 가서 보고 밥을 한 시간 늦게 먹으면 되잖아요. 이렇게 노하우가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 계획대로 가되 그러나 순간순간은 인도 현지 사정에 맞춰야 해요. 여기에 안달하면 성질이 나서 못 살아요. 버스가 털렁털렁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맞추되 계획은 딱 세워놓고 조정해 가면서 살면 되듯이 인생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세요.” nbsp 스님의 격려는 순례단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스님은 과로가 누적되어 편두통이 계속 있으신지 목 뒤에 파스를 계속 붙이고 있었음에도 열정적인 강연을 해주었습니다.nbsp nbsp 온 힘을 기울여 성지에 대해 설명하고, 부처님의 삶을 다시 재해석해 주고, 대중들이 순례를 잘 하도록 사전답사까지 꼼꼼히 챙겨준 스님에게 순례단은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nbsp nbsp nbsp 내일 순례단 A팀은 새벽 3시 20분에 기상해 4시에 상카시아로 출발합니다. 스님은 새벽에 A팀을 배웅한 후 오후에는 다시 B팀을 맞이해 천불화현탑을 함께 참배할 예정입니다. nbspnbsp 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10 (인도 5일째) 성지순례 B팀 사르나트 순례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B팀을 이끌고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바퀴를 굴린 초전법륜성지 사르나트를 안내한 후 강가강을 함께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새벽 5시에 일제히 기상해서 각자 숙소에서 예불과 기도를 마친 순례단은 6시 30분에 ‘사르나트’로 향했습니다. 날씨가 어제보다 더 쌀쌀해진 가운데 한기가 조금씩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길가에는 집집마다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nbspnbspA팀이 순례할 때와 마찬가지로 매표소 직원이 정문을 열어주자 스님이 가장 앞에 서서 순례단을 이끌고 사르나트에 들어섰습니다. 순례단 모두 향을 피우고 합장한 채로 ‘석가모니불’을 염하면서 한 발 한 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스님의 뒤를 좇았습니다.nbspnbsp▲ 다르마라지크 수투파nbsp먼저 부처님이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다르마라지크수투파를 한 바퀴 돌고, 이어서 두 번째로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다메크수투파를 세바퀴 돌았습니다. 장대한 행렬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 다메크 수투파nbsp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다메크수투파 앞에서 순례단은 예불공양을 올렸습니다. 예불이 끝나자 스님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순례단의 건강과 순례 공덕의 회향을 발원하자 순례단도 스님과 한 마음이 되어 그렇게 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nbspnbsp▲ 예불 공양nbsp스님은 예불공양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순례단을 향해 이곳 사르나트에 대해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특히 부처님이 사르나트에 오셨을 때 일어난 많은 일화들을 실감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먼저 부처님께서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곳 사르나트로 오기까지의 과정, 사르나트에서 다섯 비구를 만나 처음으로 법을 설하는 모습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초전법륜성지, 사르나트, 녹야원입니다. 여러분들은 조금 전 입구를 통해 들어오면서 탑의 기초석이 있는 동그란 부분을 한 바퀴 돌았는데요, 거기가 초전법륜성지, 즉 부처님께서 첫 번째로 설법을 하신 곳입니다. 탑 이름은 다르마라지크수투파, ‘법륜탑’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설법한 자리가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이 앞의 탑입니다. 이 탑은 다메크수투파라고 합니다. 다르마라지크수투파가 더 크고, 더 중요하지만 그것은 파괴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두 번째로 설법하신 곳을 상징하는 이 다메크수투파 앞에서 부처님께 예불공양을 올렸습니다. nbspnbspnbsp이곳 사르나트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이곳은 초전법륜성지이고, 불법승 삼보가 성립된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재가신자에게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nbspnbsp이어서 이 지역 최고 부자의 외동 아들이였던 야사의 출가 과정과 전법 선언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부처님을 포함해서 여섯 명의 아라한들이 이곳에서 정진을 하고 있는데, 아주 잘 차려입은 한 젊은이가 말을 타고 이 숲을 지나갔습니다. 부처님이 그 젊은이를 보시더니 ‘저 젊은이가 내일 아침이면 이곳에 와서 나의 제자가 되겠구나’ 하셨어요. 그러니까 다섯 명의 제자들이 ‘아이고, 부처님. 저 청년은 이곳 카시국의 최고 부자인 구리가장자의 외동아들입니다. 그는 온갖 친구들과 어울려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출가한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그 젊은이는 화려하게 차려입고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어떤 여인의 시체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에서 너무 냄새가 나니까 인상을 팍 썼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멀리 떨어져 있는 시체를 보고도 인상을 쓰며 지나가는데, 여러 시체들이 섞여있는 곳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수행자, 즉 부처님을 보고 너무 인상이 깊어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하며 지나갔습니다. 그 젊은이가 바로 야사입니다.nbspnbsp야사가 그날 밤 파티가 열린 연회장에서 무희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놀다가 술에 취해서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에 깨어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촛불이 휘황하게 타고 있는 가운데, 어제 저녁에 같이 놀던 그 아름다운 무희들이 전부 술에 취해서 엎어지고, 자빠져서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희들은 술을 먹고 자고 있었으니까, 어떤 사람은 코도 골고, 어떤 사람은 토해 놓고, 어떤 사람은 가슴을 드러내놓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야사는 어제 시타림에서 이리 저리 버려져 뒹굴던 시체들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 아름다운 연회장이 어찌 무덤과 같은 것인가?’라며 괴로워했습니다.nbspnbsp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젯밤에 아름다운 무희들과 춤을 춘 것은 ‘락’이고, 지금 시체더미처럼 보이는 것은 ‘고’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야사는 ‘락이 곧 고’임을 자각한 것입니다. ‘인생이 고다, 일체가 고다’ 하는 건 ‘일체는 고와 락의 윤회다’는 뜻입니다. 야사가 그날 새벽녘에 떠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어제 시체더미 속에서도 편안하게 있던 한 수행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나방이 불을 따라 날아가듯이, 어제 자기가 본 수행자에게 마음이 끌려서, 이곳 사르나트로 오는 길에는 바루나 강이 있는데, 그 강에 신발을 벗어놓고 강을 건너 이 숲으로 와서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야사를 맞았고, 야사는 부처님께 엎드려서 ‘괴로워 죽겠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법을 설했고, 야사는 그 법을 듣고 단박에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출가를 청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그러니 이 법에 따라 정진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라.’nbspnbspnbsp그래서 야사는 출가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섯 비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는 첫 번째 제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원래 수행자였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은 것이고, 야사는 어제까지만 해도 세속에서 오욕락을 즐기던 사람인데 바로 이렇게 단박에 깨달은 것입니다. 야사가 그렇게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밤에 락이 곧 고임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nbspnbsp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야사 비구와 그 가족을 교화했습니다. 그런데 ‘야사가 출가수행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니까, 바라나시에 사는 야사의 절친한 친구네 4명이 ‘야사처럼 그렇게 놀기 좋아하는 애가 출가수행자가 되다니’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경전에는 그 친구들이 ‘그렇게 훌륭한 친구가 출가수행자가 되었다니 우리도 한번 가보자’라고 했다고 좋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다른 경전에는 ‘저건 틀림없이 그 수행자가 괴력으로 야사를 꼬였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구하러 가자’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 친구 네 명이 부처님을 찾아왔다가 야사 비구가 편안하게 있는 것을 보고 우려를 덜었고, 야사 비구의 권유로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뒤 모두 출가했습니다.nbspnbsp부처님 당시에 인도에는 300여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 대국이 16개 국이었습니다. 야사 비구가 부잣집 아들이다 보니까 국제적으로 놀았는지, 국제적으로 50명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서로 연락을 해서 또 야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50명의 친구들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이제 총 60명의 아라한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가 다섯 비구, 두 번째가 야사와 네 명의 친구, 세 번째가 50명의 친구, 이렇게 해서 총 60명이 되었고, 부처님까지 포함하면 총 61명의 아라한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60명의 제자들을 두고 전법 선언을 했습니다.nbspnbsp‘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너희들도 해탈을 얻었다. 자, 이제 전법의 길을 떠나거라. 사람들과 신들의 안락과 이익을 위하여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하라.’nbspnbsp그래서 60명의 아라한이 흩어지게 됩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나도 우루벨라촌으로 가서 교화설법을 하겠다’라고 선언하시고, 부처님은 혼자서 우루벨라촌, 즉 지금의 보드가야가 있는 지역,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신 그 근방으로 가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 등 1,000명의 비구를 교화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원래 불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교화해서 1,000명의 대중을 이끌고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으로 가서 빔비사라왕을 교화하고, 빔비사라왕으로부터 죽림정사를 기증받게 됩니다.nbspnbspnbsp이런 교화의 역사가 바로 바라나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nbsp불법승 삼보가 최초로 성립된 곳일 뿐만 아니라 교화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는 점이 인상깊게 다가왔습니다. 사르나트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가슴 깊이 느껴졌습니다.nbspnbsp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설명해준 내용들이 경전 속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다함께 독송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경전 독송을 마치고 나서 한 참가자에게 소감을 물어보니 “그냥 경전을 읽을 때는 잘 와닿지가 않았는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다시 경전을 읽으니 한 구절 한 구절이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며 감격스러움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성지에 직접 와서 스님과 법사님의 안내를 직접 들어야 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제대로 알 것 같습니다.nbspnbsp다음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법바퀴를 굴리신 그 때의 정황을 떠올려보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침 일찍 입장한 덕분에 관광객이 별로 없어 아주 고요한 가운데 명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명상을 마치고 나니 배속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큰 아쇼카 나무가 있는 한쪽 구석을 가르키며 식사 장소를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 조별 식사 시간nbsp순례단 모두가 조별로 식사를 하러 간 사이 스님은 법회를 했던 다메크수투파 앞에서 자리를 지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잠시만 방심하면 인도 아이들이 물건을 훔쳐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식사를 마치고 수투파 앞으로 모두 모이자 곧이어 수계식이 열렸습니다. 스님은 순례단 B팀 160여 명에게 삼귀의 오계를 설하고 순례 기간 동안 출가수행자의 마음으로 오계를 잘 지킬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순례단은 “잘 지키겠습니다” 하고 크게 대답했습니다.nbspnbsp▲ 수계식nbsp수계를 받은 대중에게 법사님들이 가사와 바랑을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나눠주었습니다. 노란색 가사를 여법하게 수하자 방금 전까지 단순한 관광객이였던 사람들이 일순간 수행자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nbspnbsp▲ 연비nbsp스님은 가사를 수한 순례단을 향해 환한 웃음으로 격려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가사를 수하니 모두 승려 같네요. 머리만 깍으면 딱 좋겠는데, 머리도 깍을까요?”nbspnbsp“잘 안들려요.” nbsp“머리 깍기 싫으니까 안 들린다고 그러네요. 승려 생활이라고 해봤자 딱 12일이에요. 12일 동안은 예불할 때도 가사를 딱 수하고 해야 됩니다. 성지를 참배할 때도 반드시 입구에서 딱 가사를 수하고, 향을 하나씩 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알았지요?”nbsp“예.”nbspnbsp이렇게 A팀 160여 명에 이어 B팀에서도 수행자 160여 명이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수계식을 마친 대중들은 부처님이 법을 설한 곳에 세워진 수투파를 향해 삼배를 하면서 수행자의 마음을 다시 가슴에 새겼습니다. nbsp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사르나트에 있는 수투파와 유적들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졌는지 역사적 변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nbspnbsp“부처님이 이곳 사르나트에서 머무셨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입니다. 부처님이 계실 때는 여기가 숲이었습니다. 그것도 시체를 가져다 버리는, 사람들이 ‘부정 탄다’고 말하는 숲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머무셨기 때문에 이 땅이 부정한 곳에서 성스러운 곳으로 바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200년이 지나도록 여기엔 건물이 없었습니다. 수행자는 인공적으로 지은 건물 안에 들어가서 자지 않았고, 그저 인공적으로 짓는다는 게 비를 피하는 초막 정도였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200년 후에 전인도를 통일한 아쇼카대왕이 부처님을 너무 존경해서 불교에 귀의를 해습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부처님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다 찾아갔습니다. ‘이곳이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이다’ 라고 하면 거기에 기념탑을 세우고, 또 ‘수자타의 집이 여기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고, ‘여기가 부처님께서 수자타의 공양을 받은 곳이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고, ‘여기서 6년 동안 고행하셨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고, ‘여기서 물 드셨다’ 그러면 거기도 기념탑을 세우는 식으로,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때부터 열반하신 때까지 발자취를 모두 찾아가 탑을 세웠는데, 얼마나 많이 세웠느냐 하면, 인도에서 ‘수도 없이 많이 세웠다’는 의미로 ‘8만 4천개의 탑을 세웠다’라고 합니다.nbspnbsp그리고 원래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은 여덟 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개는 못 건드리고, 나머지 일곱 개 탑에서 사리를 일부 꺼내어서 자신이 탑을 세운 곳마다 넣어서 모든 부처님의 발자취를 징표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8대 성지에는 ‘아쇼카 석주’라고 하는 기둥도 세웠습니다. ‘여기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여기는 처음으로 설법하신 곳이다’라는 식으로 전부 기둥에 표시를 했습니다. 만약에 아쇼카왕이 그런 표시를 안 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이곳이 초전법륜성지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없어진지 700년이 되었기 때문에 성지가 다 황무지나 정글이 돼버렸거든요.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영국 사람들이 탐사를 하면서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를 발견하고, 또 거기에 기록돼 있는 문장도 발견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의 발자취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장 법사님이 ‘룸비니에서 어디만큼 동쪽으로 가니까 뭐가 있더라’고 기록한 것도 근거가 되어서 지금 부처님 성지가 대부분 복원된 것입니다.nbspnbspnbsp이렇게 해서 아쇼카왕 시대에 처음으로 기념탑이 세워졌습니다. 다만 절은 안 지었습니다. 아쇼카왕 당시를 ‘마우리아왕조’라고 하는데, 그게 B.C. 3세기입니다. 최초로 조각과 같은 형태를 만든 것은 마우리아왕조 시대입니다. 그리고 마우리아왕조가 망하고, 인도 전체가 다시 통일된 때가 A.D 1세기에서 3세기입니다. 이 때가 쿠산왕조 시대이고, 가장 유명한 왕은 카니시카왕입니다. 이 왕조는 원래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뒤 마치 아리안족이 남하해서 내려왔듯이 인도 대륙까지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1세기 내지 3세기 시대의 탑이 수 천 군데에 있습니다. 그것을 탈레반들이 대포를 쏴서 완전히 파괴하거나 부수었습니다. 제가 아프카니스탄에서 구호활동을 할 당시에 직접 돌아볼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프카니스탄이 무슬림 국가이지만 원래 불교 국가였습니다.nbspnbsp이 쿠산왕조 시대에 불상이 처음 나옵니다. 원래는 감히 부처님을 사람 모양으로 그리지 못했어요. 대신 마우리아왕조 시대에는 부처님을 보리수나 발바닥 모양으로 상징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우리아왕조가 멸망하고 알렉산더대왕이 펀잡 지방까지 쳐들어 왔어요. 그 영향을 받아서 조각이 발달합니다. 그게 간다라예술이라는 겁니다. 이 간다라예술 시대의 불상을 보면 조각이 사람 모양으로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또 쿠산왕조 시대 때 많은 절이 지어지기 시작합니다. 성지에 탑만 있는 게 아니라 스님들이 사는 집, 즉 절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nbspnbspnbsp그리고 쿠샨 왕조가 망한 뒤 5세기에 들어선 왕조가 굽타 왕조입니다. 여기 있는 탑들은 대부분 굽타왕조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한 1,600년 전의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이후인 장수왕 시대에 해당됩니다. 원래 있던 탑에다가 다음 시대에 더 덧붙여서 더 크게 만들고, 다음 시대에도 더 덧붙여서 더 크게 만들다 보니 탑이 이렇게 커진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크게 만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탑을 발굴하다 보면 여기까지는 마우리아시대의 것, 여기서부터는 쿠산시대의 것, 이 바깥은 굽타시대의 것, 또 이 바깥은 어느 시대의 것이라고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사르나트에 있는 현재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굽타시대의 것입니다. 여기서 나온 조각들도 대부분 굽타시대, 즉 5세기의 것입니다.”nbsp이 외에도 스님은 이곳 주변에 자리잡은 건물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설명을 다 듣고 나니 ‘그래서 오늘날 이런 모습이 되었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nbspnbsp마지막으로 다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처럼 네 줄로 서서 반팔 나란히를 한 다음 좌양좌를 하니 가지런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모두 환하게 웃으며 성지에서의 감격을 사진 한 장에 담아 두었습니다.nbspnbsp▲ B팀 단체 사진nbsp그리고 스님은 조별로도 한 장씩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순례단을 위해 계속 웃음을 보여주었습니다.nbspnbsp▲ 조별 사진nbsp이어서 무변심 법사님, 묘당 법사님, 여광 법사님, 대광 법사님, 네 분의 안내로 사르나트 지역의 유적지 곳곳을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법사님들을 따라 차량별로 흩어진 순례단은 부처님이 첫 안거를 보내신 곳에 지어진 물간다쿠티, 아쇼카대왕이 세운 석주, 사르나트박물관, 담마팔라 전법사가 세운 신물간다쿠티 비하르 등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nbspnbsp이렇게 사르나트 순례를 모두 마치고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영접한 자리에 세워진 영불탑으로 향했습니다. 영불탑의 앞면과 옆면, 뒷면까지 둘러본 후 탑 꼭대기에 있는 건물에 대해 모두들 의아해 하자 스님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nbspnbsp▲ 영불탑. 차우간디수투파.nbsp“탑 꼭대기에 있는 이상한 건물이 보이죠? 저것은 불교의 탑이 아닙니다. 무굴제국을 세운 사람이 처음 전쟁에서 패했을 때, 여기에 비구니 스님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으로 도망 와서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중에 대제국을 건설하자, 그걸 기념해서 탑 위에 저렇게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 저것은 무슬림이 세운 것입니다.”nbsp영불탑을 짧게 둘러본 후 곧바로 강가강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오늘은 일요일인데다가 시크교의 축제날이었습니다. 산스크리트대학에서 하차해 고돌리아촉까지는 무사히 들어갔으나 고돌리아촉부터 수많은 인파들이 축제 행렬을 구경하느라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nbspnbspnbsp겨우 인파를 뚫고 강가강 주변 다사스와메드 가트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보다 일찍 도착해 오는 순서대로 탈 수 있게 배를 잡아 주었습니다.nbspnbsp▲ 다사스와메드 가트nbsp배가 모두 출발하자 스님의 안내가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A팀과는 다른 코스로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A팀 때는 버스가 갓길 주차를 해서 벌금을 물고 먼 곳으로 이동이 되어 한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B팀 때는 스님의 제안에 따라 다사스와메드가트에서 배를 타고 강 하류로 내려가서 라즈가트에서 배에서 내리는 코스로 변경했습니다.nbspnbspnbsp유유히 강가강을 따라 내려가니 저 멀리 뿌연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에 화장터가 보였습니다. 스님은 배를 화장터 가까이에 다가가게 한 후 인도인들의 화장하는 문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이 앞에 보이는 곳이 그 유명한 강가강의 화장터입니다. 지금 누군가가 뭘 들고 강물 쪽으로 내려오고 있지요? 저 사람이 들고 있는 게 시신이고, 시신을 덮은 천이 분소의입니다. 저렇게 들고 와서 강물에 한 번 적셨다가 계단에 둔 뒤에 불에 태우는 겁니다. 살았을 때도 죄업를 씻기 위해 강물에 목욕을 하지만, 죽었을 때도 한 번 강물에 적셔지도록 하는 것입니다.nbspnbspnbsp장작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놓고, 다시 그 위에 장작을 쌓습니다. 그런 뒤에 장작더미 가장 밑에 지푸라기 같은 걸로 불을 붙입니다. 우리도 옛날에 상여를 메고 다리나 개울을 건널 때 상여꾼들이 ‘상여가 안 간다’며 제자리에 있으면 상주가 행여에 돈을 꽂아줘야 상여꾼들이 움직였듯이 여기도 ‘장작에 불이 안 붙는다’면서 불을 안 붙이고 있으면 상주가 와서 돈을 줘야 불을 붙이고 그럽니다.nbspnbsp이 전체가 화장터입니다. 한꺼번에 열 군데, 스므 군데씩 화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불붙고 있는 데는 전부 다 화장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이 붙는 데를 보세요. 시신이 보이지요? 시신이 불에 다 타면, 그 재를 모두 쓸어서 강에 넣어버립니다.nbspnbspnbsp기름이 지글지글 끓어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럽니다. 삼겹살 굽듯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삼겹살 구워서 먹는걸 좋아하는데, 그것도 다 남의 시신을 먹는 것 아닙니까? 뭐가 맛있다고 그렇게 구워먹습니까?” nbspnbsp시체가 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대중들에게 스님이 삼겹살은 뭐가 그렇게 맛있다고 구워먹냐고 하자 정신이 번쩍 차려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체가 타는 모습을 본 몇몇 사람들은 마음을 쉽게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nbspnbsp그러자 스님이 돌아가신 영가들을 위해 다함께 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nbspnbsp“자, 그럼 기도하겠습니다. 합장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열 번 하겠습니다.”nbspnbspnbsp간절히 염불을 한 후 다시 한번 화장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화장하려는 사람이 돈을 많이 주면 장작을 많이 쌓고, 적게 주면 적게 쌓아서 시신을 태워줍니다. 입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도 최소한 장작값은 벌어놓아야 자기가 죽었을 때 화장을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 사람들이 구걸하는 자리 밑에 보면 자기가 죽을 때 쓸 장작값은 모아놓고 있습니다.nbspnbspnbsp화장이 끝났을 때 시체가 하나도 안 남고 모조리 타야 되니까, 마지막에는 향나무를 뿌립니다. 그러면 마치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불이 확 타올라서 시체가 흔적도 없이 타는 겁니다. 화장이 끝나면 뼈만 남고 흔적도 없이 타야 되는데, 어린애들은 보통은 반만 타다가 맙니다. 그러면 강물에 쓸어 넣어버립니다. 한국에서도 애기들 무덤은 안 만들잖습니까. 여기도 애기들이 죽으면 몸에 돌을 매달아서 강에 던지는 식으로 수장도 합니다.nbspnbspnbsp여기는 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상주는 머리를 빡빡 깎고 꽁지만 조금 남겨 놓습니다. 저기에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들은 상주라는 뜻입니다.”nbsp강가강 화장터의 풍경이 순례객들에게 많은 충격을 던져준 것 같았습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도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겐 아직 낯선 풍경이라는 사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 라즈가트nbsp이렇게 강가강 순례까지 마치고 나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밥솥으로 조별로 저녁 식사를 해먹었습니다.nbspnbsp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자 김치, 깻잎, 고추장, 멸치볶음 등 온갖 반찬들이 꼬깃꼬깃 비닐에 싸인 채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성지순례의 백미는 바로 이렇게 식사를 조별로 직접 해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순례객들은 “돈 절약, 시간 절약, 배탈 예방, 입맛 최고, 일석사조인 것 같다” 하면서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nbspnbsp▲ 조별 식사 시간nbsp저녁 6시부터는 저녁 강연이 열렸습니다. 스님은 12일 동안 법사님들과 함께 부처님의 10대 성지를 순례하는 대중들에게 “자세한 설명은 성지에서 법사님들께 직접 들을 수 있다”고 하면서 10대 성지 전체와 부처님의 일생 전반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그 중에서 오늘은 부처님의 사문유관과 유성출가에 대한 스님의 법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사문유관’이라고 해서, 동쪽 문으로 나가서 늙은 사람을 보고, 남쪽 문으로 나가서 병든 사람을 보고, 서쪽 문으로 나가서 죽은 사람을 보면서, 삶의 생노병사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하셨고, 결국 북쪽 문으로 나가서 사문류 계통의 수행자를 만나 그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nbspnbspnbsp기존의 브라만교에서는 아무런 답을 못 찾다가, 그 사문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출가도 결심했지만, 부모의 강력한 반대로 출가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었어요.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출가를 결심하셨고, 스물아홉 살에 출가를 하셨으니까 거의 10년 동안, 이미 마음은 냈지만 부모의 반대 속에서 수행생활을 했습니다.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생활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6년 고행’만을 ‘수행’이라고 하면 너무 짧지요. 몸은 비록 세속에 있었지만 이미 엄청난 사색과 수행을 하셨기 때문에 출가하신 이후 금방 스승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부처님은 밤에 성벽을 넘어서 몰래 출가를 했습니다. 부모가 도저히 승인을 안 해 주니까 ‘유성출가’, 즉 몰래 성을 넘어서 출가를 했던 것입니다.nbspnbsp그런데 ‘왕’이나 ‘왕궁’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대상이잖습니까. 그래서 노래를 잘해도 가수왕이라고 하고, 뭐든지 좋은 것에는 왕을 붙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세속은 얼마나 왕이 되기를 추구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그 왕위를 버리셨습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도 제일 많이 갖고, 권력적으로도 제일 많이 갖고, 인기도 제일 많이 갖게 되는 것을 뜻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행복의 길이 아니라며 버리신 겁니다.nbspnbsp이것을 볼 때 현재의 우리 불교는 출가정신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다 부처님이 버리신 그 ‘왕위’를 얻기 위해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며 ‘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숫제 어느 신에게 빌면서 ‘나 왕 되게 해 주세요’, ‘나 뭐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논리적으로는 앞뒤가 맞습니다. 신은 우리가 빌면 해 준다고 전제를 하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서 이런 복을 구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그 복이 행복으로 가는 길, 열반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며 버리셨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그 ‘버림’이 얼마나 확실한 것이었느냐? 출가하셔서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 이르러 탁발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부처님께서 깨닫기 전으로써 수행자였을 때입니다. 그때 빔비사라왕과 길에서 만나게 됩니다. 왕이 보니까 수행자의 자태가 원만하거든요. 그래서 신하들에게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봐라’라고 하니 신하들이 알아보고는 ‘저 분은 카필라성의 왕자였는데, 지금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왕자가 출가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지 ‘왕자가 출가했다’는 소문이 벌써 세상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nbspnbsp그래서 빔비사라 왕이 수행자에 대한 예를 갖추면서 ‘당신은 누구요? 왕자가 출가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당신이 그 사람이오?’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서 ‘맞습니다. 제가 바로 카필라성의 고타마 시타르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빔비사라 왕이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수행자가 되는 것은 너무 아깝소. 그러니 내 여동생과 결혼을 해서 내 나라를 같이 다스립시다’ 라고 첫 번째 제안을 했습니다. 카필라성은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마가다국의 1개 주에도 해당이 안 될 정도로 작은 나라인데 왕은 부처님께 대국을 같이 경영하자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nbspnbsp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으로 거절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같이 경영을 하자는 제안이 부처님의 마음에 안 차나 보다 싶어서 두 번째로 ‘그렇다면 당신이 이 나라를 다스리시오’라며 선뜻 왕위를 내어줄 의향을 보였습니다.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승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왕은 세 번째로 ‘이분이 남의 것을 갖는 걸 미안해서 그러나 보다’ 싶어서 ‘나에게 강한 군대가 있는데, 내가 이 군대를 당신에게 빌려줄 테니, 이 군대로 이웃나라를 쳐서 대국을 만드시오’라고 제안을 했는데, 그때서야 부처님께서는 ‘대왕이시여, 어떤 사람이 입안에 있는 가래가 필요 없다고 탁 뱉었는데, 남이 뱉은 가래를 보고 자기 것보다 더 굵다며 그것을 집어먹을 사람이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nbspnbsp“없어요.”nbspnbsp“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왕위’를 ‘내 입에 있는 가래’에 비유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내 나라의 왕위도 버리고 나왔는데, 내가 왜 남의 나라를 다스리겠으며, 남의 나라를 빼앗아서 다스리는 것은 더더욱 당치도 않다’는 뜻인 것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는 ‘왕위’라는 것에 대한 붓다의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이 일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분명치 않으면, 우리가 출가 수행을 하면서도 늘 흔들리게 됩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유성출가, 즉 왕위를 버리고, 성을 뛰어넘어 출가하신 분입니다.”nbsp부처님은 왕위를 버리시고 출가하셨는데, 왜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왕위를 다시 찾고 있냐는 물음은 순례객들에게 성지순례 기간 동안 풀어야 할 큰 화두를 던져준 것 같았습니다.nbspnbsp이 외에도 스님은 부처님의 일생과 10대 성지에 대해서 약 두 시간 동안 강의를 해주었습니다. 스님께서 몸이 아프셔서 강연 중간에 한 차례 휴식을 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스님은 한 가지라도 순례객들에게 더 알려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강연을 마치면서 법사님들과 12일 동안 성지순례를 떠날 대중들에게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런 부처님의 삶을 잘 새겨서 좋은 마음으로 이 순례를 다니십시다. 인도까지 와서 인도사람 미워하고, 인도정부 욕하고 다니면 누구만 손해입니까? 나만 손해입니다. 그러니 좋게 생각하는 버릇을 자꾸 들이는 게 필요합니다.nbspnbsp다만 조심은 해야 되겠지요. 순례가 재미있도록 하되 조심도 해야 됩니다. 긴장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유의는 해야지, 막 방심해서 일행도 잃고 길도 잃어서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하세요.”nbsp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대중들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스님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짠해졌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오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순례객들은 모두 숙소로 돌아가 먼길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내일 스님은 성지순례 C팀을 마중하기 위해 바라나시 공항에 다녀온 후 저녁에는 입재 법문을 해줄 예정입니다.nbspnbsp※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1.9 (인도 4일째) 성지순례 B팀 입재식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 5시에 성지순례 A팀을 보드가야로 떠나보낸 후 오후 1시에는 성지순례 B팀을 마중 환영하고, 저녁에는 성지순례 입재 법문을 했습니다.nbspnbsp새벽 4시 20분이 되자 숙소 각 방마다 알람소리가 울렸습니다. 4시 50분까지 모든 짐을 싣고 출발 준비가 끝나자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스님이 걸어나왔습니다.nbspnbspnbsp버스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 스님은 순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송수신기로 말했습니다.nbspnbsp“쉬라바스티에서 다시 만나요. 그 때까지 즐겁게 순례하고 오세요”nbspnbsp순례객들도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웃음으로 답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정토회 성지순례단 A팀을 보드가야로 떠나보낸 후 오전에는 원고 교정 업무와 성지순례 준비 상황을 점검한 후 오전 11시가 되자 다시 성지순례단 B팀을 환영 마중하기 위해 바라나시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보자기로 싼 꽃목걸이를 풀어헤치고 순례객이 나올 때까지 뙤약볕 아래서 기다렸습니다. 긴 줄을 지어 순례객이 차례대로 출국장을 빠져나오자 스님이 환한 웃음으로 한 명 한 명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nbspnbsp“환영합니다.”nbspnbspnbsp스님의 한 마디에 순례객들은 어제밤 공항에서 노숙을 했던 고생스러움이 모두 녹아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떡해서 우리에게 이런 영광이” 하면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nbspnbspnbsp순례객 모두가 버스에 올라타자 드디어 바라나시 근교에 위치한 사르나트로 향해 출발했습니다. 송수신기를 통해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버스 안에서 일제히 환호가 터져나왔습니다. nbspnbsp“사르나트 녹야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nbspnbsp“스님, 반가워요”nbspnbspnbsp“어제 저녁에 잘 주무셨어요?”nbsp“네”nbspnbsp“얼굴 표정을 보니까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요.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은 이렇게 노숙하듯이 계속 다녀야 해요. 그런데 오늘과 내일 일정인 바라나시와 끝나는 날 일정인 아그라에서만 호텔에서 자고 나머지 일정은 전부 순례자 숙소에서 잡니다. 그래서 침낭을 꼭 챙겨야 해요.nbspnbsp침낭과 여권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14일 동안 밥은 안 먹어도 죽지는 않아요. 그래도 밥을 먹고 다녀야 하니까 전기밥솥을 잘 챙겨다녀야 하고요. 잠을 자려면 침낭이 꼭 있어야 되고요. 예불 공양을 올려야 하니까 가사, 깔판, 경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부터는 순례자로서 14박 15일 동안 지내는 겁니다. 알겠지요?”nbsp“네”nbspnbsp“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바라나시 국제공항입니다. 바라나시 시에서 서북쪽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동남쪽으로 내려가서 사르나트로 갑니다.nbspnbsp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도시의 역사가 4천년 정도 됩니다. 물론 바라나시보다 더 먼저 생긴 도시들이 있겠지만 그 도시들은 지금은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아요. 지금도 사람이 사는 도시 중에 부처님 당시에도 큰 도시였는데 지금도 큰 도시인 것은 바라나시가 유일합니다. 왕사성, 사위성, 바이샬리, 카필라바스투는 지금 작은 시골로 남아 있습니다.nbspnbsp그리고 바라나시는 힌두교의 최대 성지입니다. 강가강의 주변에 도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은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사르나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갖다 버렸던 시타림이었어요. 부처님께서 그곳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기 때문에 초전법륜성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사슴이 많이 살았나봐요. 그래서 사슴동산, 녹야원이라고 불리웠습니다.nbspnbsp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세수도 못했으니까 오늘 숙소에 들어가면 세수도 하시고 보름 동안 다닐 짐정리까지 다 해놓고 저녁식사 후에 입재식을 하겠습니다.”nbsp스님의 환영 인사와 간단한 안내가 끝나자 이제 순례객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늘 깨끗한 거리를 다녔는데, 하루 아침에 쓰레기와 짐승, 사람이 뒤섞인 혼잡한 거리를 보니 모두들 혀를 차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아이고, 저런 곳에 도대체 사람이 살 수가 있나?”, “소가 도로에 누워서 안 비키네요.”, “저기 사람들 바글바글한 것 좀 보세요.”nbspnbspnbsp낯선 인도의 풍경이 모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나 봅니다. 40분 남짓 지나자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숙소를 배정 받고 짐을 푼 후 어제밤 공항에서 뒤척이며 잔 피로를 풀었습니다.nbspnbsp오후 5시가 되자 방콕 공항을 경유해서 온 또다른 팀이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숙소 입구에서 한 명 한 명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역시 모두들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nbspnbspnbsp저녁 6시부터는 만찬과 더불어 입재식과 입재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은 오늘 첫날과 마지막 날 단 이틀 뿐입니다. 뷔페로 준비된 인도 음식들을 하나씩 접시에 담아와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nbspnbsp식사가 끝나갈 무렵 스님이 일어서서 어떤 사람들이 순례에 참가했는지 하나 하나 소개를 해주었습니다.nbsp서울정토회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서대문, 성동, 노원, 제주, 송파, 양천, 수원, 용인, 분당, 남양주, 춘천, 원주, 강릉, 인천, 일산, 안양, 부천, 대전, 천안, 청주, 광주, 순천, 목포정토회까지 전국 경향 각지에서 160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각 지역이 불려질 때마다 소속 정토회 참가자들은 환호를 하면서 손을 들었습니다. 특히 제주도와 남양주, 안양에서 많이 참가해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nbspnbspnbsp그리고 이번 순례를 준비할 스텝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1호차를 담당하면서 인도JTS에서 8년이나 근무한 여광 법사님, 2호차를 담당하면서 성지를 안내해 줄 무변심 법사님, 3호차를 담당하면서 인도JTS에서 5년 동안 근무한 대광 법사님, 4호차를 담당한 묘당 법사님, 인도인 스텝인 아미타부, 실무를 맡은 임혜진님이 차례로 소개되자 순례객들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특히 마지막에 “바라나시와 쉬라바스티 일정 안내를 맡은 법륜입니다.” 라고 스님이 당신을 소개하자 행사장은 떠나갈 듯한 함성과 환호가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목숨이죠. 우리들의 목숨을 담보해 줄 운전 기사님들을 소개합니다.” 라고 하자 스님이 소개될 때 질렀던 함성 만큼이나 큰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nbsp박지나 JTS 대표님과 여광 법사님이 기사님들 모두에게 선물을 건네자 기사님들 중 한 분이 답례로 인도 노래를 멋지게 불러주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도 “지금까지 인도인들이 불렀던 노래 중에서 가장 잘 부른 것 같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소개를 모두 마치고, 순례객들은 삼귀의, 반야심경, 청법가, 삼배를 하며 스님에게 입재 법문을 청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성지순례를 할 때의 마음 자세, 인도의 기후, 지형 등 자연환경과 사회 문화적 환경에 대해 알기 쉽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먼저 순례를 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서는 그동안 26번의 성지순례 기간 동안 있었던 온갖 사례들을 이야기 다양한 예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살피는 순례를 해볼 것을 제안했습니다.nbspnbsp“화장실을 어떻게 가는지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가다가 차를 세우고 “왼쪽 남자, 오른쪽 여자”라고 하면 그냥 가서 간단하게 누고 와야 됩니다. 여기는 화장실이 없는 게 아니라 화장실 아닌 곳이 없습니다. nbspnbspnbsp다만 동네에 가서 누면 안 됩니다. 인도 사람들도 아무 데나 누는 건 아니고, 다 벌판에, 사람이 없는 데로 가서 누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어차피 일주일만 지내고 나면 볼일 보러 갈 때 버스와의 간격이 점점 좁아져서, 심지어 버스 옆에서 눠서 민망할 정도입니다. nbsp그래도 한 10미터는 떨어져야지, 너무 차 옆 붙어서 누면 안 됩니다. 첫날은 한 200미터까지 걸어가서 누던데, 그러다가 점점 가까워져서 일주일 지나면 아무 데서나 그냥 눕니다. nbsp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 순례자들이 ‘인도에는 화장실이 없다’고 하니까 인도 스텝이 ‘인도에는 화장실 아닌 곳이 없다’고 했던 것이고, 둘째, 너무 차 옆에서 누는 걸 보고 ‘아이고, 좀 다른 데로 가지. 엉덩이가 다 보이잖아’ 라고 하니까 누군가가 ‘보는 자기만 괴롭지, 뭐’ 라고 했던 것입니다. nbspnbsp그러니까 보더라도 못 본 척 하세요. “봤다”고 하지 마세요. 그래야 아무 데나 누지요. 안 그러면 멀리 가야 되잖습니까. 그렇게 생활을 간편하게 해야 됩니다.nbspnbsp이렇게 한 열흘 살고 한국에 가면 여러분들이 뭘 먹어도 이 보다 잘 먹고, 뭘 입어도 이보다 잘 입고, 어디에 자도 이보다 잘 자기 때문에, 한국에서 살면서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꺼도 됩니다. 완전히 의식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며칠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문제지만요.nbspnbsp그래서 이 여행은 순례이기도 하지만, 마치 여러분들이 깨달음의 장에 가서 5일 동안 많은 걸 느끼고 오듯이, 새로운 걸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땀나도 씻지도 못하고, 국이 없어서 밥도 안 넘어간다’라고 생각하면 여행 내내 인상 쓰면서 괴롭게 보내야 됩니다.nbspnbsp그러나 정말 순례자의 마음을 가지면 여행 내내 기쁠 뿐만 아니라 한국에 돌아가서도 사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동안 늘 전전긍긍하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요. 순례 다녀와서 인생이 확 바뀌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보살님은 남편이 죽은 뒤 아이 셋을 키우느라고 굉장히 살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성지순례를 올까말까 망설였는데, 성지순례를 하면서 자기가 가진 게 너무 많다는 걸 자각했답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금 아주 자유롭게 자신 있게 산답니다. 순례의 공덕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상 쓰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nbsp성지순례에는 첫째 ‘바깥 구경’, 즉 바깥에 있는 성지를 보는 게 있고요, 둘째 ‘경계에 부딪쳐서 일어나는 자기 마음이 얼마나 죽 끊듯이 시쭉빼쭉 하는지’를 보는 게 있습니다. 자기의 분별심을 늘 살피면서 간다면 아마 순례 중에 깨달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순례를 하면서 바깥에 있는 다양한 것들을 구경하기도 하지만, 경계에 부딪쳐서 아주 다양하게 일어나는 자기 마음을 놓치지 말고 구경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은 더 큰 의미의 성지순례가 될지도 모릅니다.”nbsp이렇게 스님이 직접 재미있게 생활 안내를 해주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을 통해 순례객들이 어떻게 수행을 할 수 있는지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다음은 부처님이 태어나셨던 인도의 기후, 자연, 사회문화, 역사적인 환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문명입니다. 그럼 이 문명의 주체는 누구겠습니까? 인도 대륙에 원래 살고 있던 민족을 흑인 계열의 ‘드라비다족’이라고 하는데, 인더스 문명의 창조자는 이 드라비다족이라고 봅니다.nbspnbspnbsp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에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살던 종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인 계열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힌두쿠시를 넘어서 파키스탄, 즉 인도 북쪽에 있는 펀잡 지방으로 남하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내려와서 서쪽으로 간 사람들을 ‘서아리안’이라고 합니다. 이 서아리안이 중동의 이란 그리고 유럽까지 건너가서 오늘날 유럽 민족이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펀잡 지방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을 ‘동아리안’이라고 합니다. 이 동아리안족이 바로 브라만문명의 창시자들입니다.nbspnbsp이렇게 3,500년 전에 남하해서 내려왔을 때 이 사람들은 원래 유목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 신을 찬미했습니다. 그렇게 ‘찬미’한 여러 가지 노래를 우리가 ‘베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다문명’이 발달했습니다.nbspnbsp그 다음에 이 사람들이 갠지스강 유역의 힌두스탄 평원을 점점 정복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많이 세웠는데, 이 시대를 ‘종교시대’라고 합니다. 종교시대에 들어가서 카스트제도가 정립되었습니다. 신을 찬미하는 브라만계급, 정복을 하는 무사계급인 크사트리아 계급, 목축하고 농사짓고 장사하는 바이샤계급, 즉 평민계급. 그리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렸는데 그 노예 계급을 수드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4개의 계급이 발생하게 됩니다.nbspnbspnbsp그리고 정복이 거의 다 끝나자 제일 한가한 사람들이 무사계급들이 됩니다. 그래서 무사계급에서 많은 사색가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브라만 계급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적인 역할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철학적 사색을 많이 하면서 소위 ‘철학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걸 ‘우파니샤드 철학’이라고 합니다. 가장 핵심 되는 사상은 ‘범아일여설’입니다. 저 우주에 ‘브라만’이라는 신이 있고, 나에게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자아가 있는데, 이 ‘범아’가 하나가 되는 것이 해탈이고 구원이라는 게 ‘범아일여설’입니다.nbspnbsp그 다음에 네 번째 시기가,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입니다. 즉 브라만 사상의 많은 모순이 발생하게 되면서 전통으로 내려온 주류의 브라만들과 브라만사상에 문제제기를 하는 비주류의 사문이 출현했습니다. 혈통으로서의 종교인이 아니고 자기가 선택해서 출가하고 종교인이 되는, 즉 수행자가 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걸 ‘사문류’라 그럽니다. 이렇게 브라만의 가르침에 대해 모순을 많이 제기하면서, 마치 중국의 춘추시대에 출현했던 백가쟁명처럼 온갖 주장이 나오게 됩니다. 유물론을 비롯해서 신을 부정하는 얘기 등등 많은 사상이 나오는데, 이 시기를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라고 합니다.nbspnbsp그러니까 3,500년 전부터 시작된 브라만 문명은 부처님이 출현한 2,600년 전부터 쇠퇴기에 들어갑니다.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 즉 사상적, 정치적으로 굉장히 혼란한 시기, 소위 ‘대혼란의 시기’에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입니다.nbspnbsp부처님이 출현한 당시에 국제질서는 어땠을까요? 지금 지구상에는 UN에 가입한 나라만 200여 개가 되잖습니까. 그 당시 인도 대륙에는 크고, 작은 나라가 300여 개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16개의 대국이 있었고요. 그 중에 초강대국인 ‘G2’가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이었습니다. 마가다국의 수도가 왕사성이고, 코살라국의 수도가 사위성입니다. 부처님은 그 ‘G2’의 수도에서 제일 교화활동을 많이 하신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뉴욕과 베이징에서 주로 활동을 하신 것이고, 또 ‘G7’에 해당되는 런던, 파리, 베를린, 도쿄, 모스크바 등에서도 활동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16대국에 다 다니시면서, 즉 인도의 전 세계를 다니시면서 교화활동을 하신 것입니다.nbspnbsp지금의 인도 지도로 본다면 부처님의 활동 무대는 북인도에 속합니다. 북인도라고 해도 지금의 카슈미르 지역이 아니고, 델리에서 캘거타 사이의 힌두스탄 평원이 주로 부처님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이 지역에는 산이 거의 없고 전부 평원입니다.nbspnbspnbsp제일 위쪽은 히말라야 아래의 룸비니인데,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 바로 히말라야 산 아래에 속하는 카필라성의 룸비니입니다. 거기도 평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50㎞만 북쪽으로 가면 바로 히말라야 산맥이 시작됩니다. 여름엔 저 북쪽으로 히말라야 산맥이 병풍처럼 보였겠지만 실제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은 평지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도를 이루신 보드가야는 데칸고원의 끝자락입니다. 그러니까 200m 내지 300m 높이의 언덕 같은 산이 있는 지역입니다. ‘부처님이 수행했다’고 하는 라즈길이나 보드가야에는 200m 내지 300m의 낮은 산들이 있습니다. 전정각산도 히말라야 같은 산이 아닙니다. 이 두 군데를 빼고, 여러분들이 13일 동안 전인도를 다니시면서 산이라고는 조그만한것도 하나 구경을 못 하고, 대평원만 계속 다니게 되는 겁니다.nbspnbsp부처님은 카필라성의 룸비니, 즉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셔서 남쪽으로 내려가서, 그 당시에 최고의 번성지인 ‘왕들의 집’, 즉 ‘라자그라하’라고 불리는 왕사성에서 스승을 만나 공부를 하셨고, 그곳을 떠나 가야로 와서 6년 수행을 하시다가 성도를 하셨는데 그래서 그 지역은 ‘보드가야’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시국의 바라나시에 와서, 내일 우리가 가게 될 사르나트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드가야 우르벨라촌으로 가서 천 명의 수행자를 교화하시고, 다시 왕사성으로 오셔서 빔비사라왕을 교화하고, 수다타 장자의 초대를 받아 2대 초강대국이었던 사위성의 쉬라바스티로 가셔서 교화활동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성도 후 6년, 출가 후 12년 만에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돌아가셔서 석가족을 위해서 교화하셨습니다. 그렇게 전지역을 다니셨습니다.nbspnbsp부처님께서는 이런 자연과 역사, 사회적 조건 속에서 태어나 살면서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글자만 보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이, 그런 질문, 그런 대답이 있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알고 우리가 법을 이해해야 합니다.nbspnbsp우리나라에는 산이 많으니까 이상세계가 ‘산 너머’잖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리랑 고개를 넘는다’고 표현하는데, 인도문화에서는 강폭이 넓으니까 못 건너가잖습니까. 인도인들에게 이상세계는 ‘강 건너 저 언덕’입니다. 그래서 ‘피안’, 즉 ‘저 언덕’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또 ‘저 언덕으로 넘어가는’ 것이 주로 ‘배’로 묘사가 되어서 ‘반야용선’이라는 말도 쓰지요. 그런 용어들이 다 인도의 자연환경과 관계가 있는 겁니다.nbspnbsp스님들이 탁발을 하거나 한 벌의 옷을 입고 사는 문화는 이곳의 기후에서나 가능하지, 한국의 기후에서는 한 벌의 얇은 옷을 입고 추운 겨울을 못 견딜 것입니다. 그러나 남방불교, 즉 남쪽의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같은 따뜻한 나라에서는 인도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복장으로는 살 수가 없어서 승복도 바뀐 것입니다.nbspnbsp저도 여기 와서 있어보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은 인도보다 훨씬 따뜻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열대우림지역이니까요. 그런데 인도는 겨울에 춥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수행자들이 겨울에는 참 추웠겠다’는 걸 알 수 있고요. 또 여기는 안개가 너무 짙게 낍니다. 그래서 안개가 자욱한 속에서 만남이 이루지는 것도 여기 와서 직접 기후를 경험해 봐야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춥다, 덥다”만 하지 말고, ‘이런 기후, 이런 추위와 더위에서 어떻게 지내셨을까?’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nbspnbspnbsp또 여기서는 “박시시”, 즉 걸식을 요구하는 것이 천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지를 굉장히 천하게 보는데, 여기는 공무원도 “박시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러는 게 좀 이상하지만 여기서는 “선의를 베푸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요구한다고 꼭 다 줘야 되는 건 아닙니다. 이런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걸 이해하시면 됩니다. 특히 중국은 이런 것과 상반되는 문화라서, 걸식문화가 유지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절에서 밥을 해 먹게 된 것인데, 남방불교 스님들은 절에서 밥해 먹는 걸 보고 “절이 살림집이냐? 무슨 수행자들이 저러느냐?”고 하는 겁니다. 기후환경과 사회적 배경이 다르면 생활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nbsp부처님이 살았던 자연적인, 시대적인 배경에 대해 풍부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현재 인도에서 불교는 어떤 비중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근세에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무슬림을 믿는 파기스탄과 방글라데시, 힌두교를 믿는 인도, 불교를 믿는 스리랑카로 나뉘어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도 대륙 안에는 무슬림이 약 11, 힌두교가 80, 불교는 0.5, 자이나교도 0.5, 시크교가 한 2, 기독교가 한 2입니다. 그래서 인도는 현재 힌두교 국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불교인들은 동쪽인 버마의 경계지점에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 소수 민족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황인종인데, 그 사람들이 소수민족으로서 소승불교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곳에서는 티벳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여기도 소수민족입니다. 그 다음에 뭄바이를 중심으로 해서 중서부가 마하쉬트라 주인데, 인도 독립의 영웅이라는 천민 출신의 ‘암베드카르’가 힌두교로는 카스트 해방을 못 이끌기 때문에 불교로 개종을 해서 그 카스트 전체가 불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게 200만 명 내지 300만 명이 됩니다.nbspnbsp그래서 인도에는 동쪽의 소승불교, 북쪽의 탄트라, 즉 밀교, 최근에 일어난 신불교, 이렇게 해서 500만 명 내지 600만 명 정도 되는 불교 인구가 있습니다. 이 중에 소수민족들은 별로 힘이 없고, 암베드카르 계열은 정치적 파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계급해방론을 주장하면서 정당도 만들었는데, 그 정당은 인도 내에서 세 번째로 큰 정당으로서 연정을 통해 집권당이 되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지금 인도에서 불교는 거의 소수인데다가 주로 동쪽이나 북쪽에 치우친 소수민족 중심이기 때문에 대륙에서는 거의 보이지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부분의 성지가 다 힌두교의 소유로 돼버렸습니다. 부다가야 대탑까지도 힌두교 소유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불교를 배척하지는 않고, 자신들의 일부로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비쉬누신의 여덟 번째 화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났지만 힌두교와는 완전히 다른,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치적인 가르침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무슬림의 침입을 받고 나서 나중에 힌두교로 흡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오늘은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그 배경이 되는 많은 지식들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인도인들의 행동과 삶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nbspnbsp두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 준 스님에게 순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라고 말하자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출발해 이틀 동안 먼길을 오느라 너무 피곤한 것 같았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강연을 마친 후 순례객들은 숙소로 올라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nbsp내일은 새벽 4시 20분에 일어나 예불과 기도를 각자 숙소에서 한 후 6시 30분에 초전법륜성지인 ‘사르나트’로 이동합니다. 오전에는 사르나트에서 수계식을 하고, 오후에는 강가강을 둘러볼 예정입니다.nbsp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