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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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2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 백두산 그리고 발해의 역사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를 맞이하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 오른 후 북쪽으로 올라가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을 둘러보고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드디어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가는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들뜬 마음으로 4시에 일어나 중국식 아침 뷔페를 먹고 백두산 매표소로 향했습니다. 보다 빠른 시간 안에 백두산 천지를 보고자 각 조에서 한명씩 가서 매표소가 열기 전부터 줄을 섰습니다.nbspnbsp▲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매표소 앞.nbsp6시 정각 매표소가 열렸고, 선발대로 출발했던 매표 담당팀이 표를 흔들며 정문 앞 일행에게 다가왔을 때 모두 환호를 보냈습니다. 표를 나눠받은 조원들은 최대한 빨리 천지에 올라서 스님과 함께 경치를 즐기고픈 마음에 어린 아이들처럼 버스를 타는 곳까지 신나게 달렸습니다.nbspnbsp▲ 표를 받자 버스를 타기 위해 달려가는 청년들nbsp천지를 올라가는 봉고차는 89명이 탈수 있는 작은 차였는데 높은 천지까지 가파른 길을 롤러코스터처럼 올라 커브를 돌 때마다 짜릿한 기분에 모두 소리를 질렀습니다. 중국인 기사 아저씨께서 흥겨워하는 저희를 위해 한국 노래까지 서비스로 틀어주셨습니다. 커브를 돌아 한단 한단 올라가 천지에 가까워질 때마다 옆으로 보이는 경치는 놀라웠습니다.nbspnbsp▲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는 길nbsp끝없이 펼쳐진 푸르고 너른 광원, 그리고 빛나는 아침햇살이 점점 짙어지는 안개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햇살이 보기 어렵다는 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어 매우 설레였습니다.nbspnbsp직접 눈으로 본 백두산 천지는 어느 사진, 어느 그림으로 보았던 것과도 달랐습니다. 크기는 백록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활했으며 호수의 푸르름은 영롱했습니다. 한반도에 이런 경치가 있었다니, 풍경을 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백두산 천지는 아름다웠습니다.nbspnbsp▲ 백두산 천지nbsp걸어도 걸어도 계속 바위사이로 보이는 천지의 모습 때문에 호수가 34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전날 늦게까지 있었던 일정으로 인해 쌓인 피로가 천지를 보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천지는 워낙 높은 곳에 있어 구름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날씨가 바뀌어 천지가 보였다 안보였다 했는데 저희가 올라갔을 때 눈부신 모습을 보여줘 참 감사했습니다.nbspnbsp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청년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스님의 법복이 얇아 보여서 무척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천지의 감동을 뒤로하고 비룡 폭포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유황 냄새와 함께 땅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백두산이 화산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나무 계단을 지나 도착한 비룡폭포 역시 그 웅장함에 모두 탄성이 나왔습니다.nbspnbsp▲ 비룡폭포nbsp폭포에서 흘러내려온 물에 손을 담가 보았는데 유황 온천수와 섞여 그런지 제법 높은 고도였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차갑지 않고 미지근해서 신기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참가자 전원과 개별로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청년들은 “스님 곁에서 있는 것만도 감사한데 사진까지 찍어주시니 더욱 감사하다”며 기뻐했습니다. nbsp nbspnbspnbsp비룡폭포를 감상하고 울창한 삼림을 지나 모두 함께 동요를 부르며 소천지로 걸어갔습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동요를 부르니 마음도 함께 어려지고 순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걸으면서 보이는 원시림의 자연그대로 모습도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용암으로 인해 생긴 커다란 바위를 뒤덮은 이끼와 군데군데 쓰러져있는 상태 그대로 있는 나무들이 멋스러웠습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바위에 놀랐고 보송보송한 들풀이 예뻤습니다.nbspnbsp▲ 비룡폭포에서 소천지로 내려가는 길nbsp소천지는 정갈하고 고요했습니다. 물결이 없으면 완전히 거울같다고 하는 스님의 말씀에 그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경쾌한 저희 일행의 발걸음 때문인지 비온 뒤 수량이 많아져서인지 물결이 멈추지 않아 은거울의 모습은 보지 못해 살짝 아쉬웠습니다.nbsp▲ 소천지nbsp소천지를 나와 찾아간 녹연담은 정말 짙은 에메랄드빛의 녹색 호수였습니다. 군데군데 보이는 황금 잉어 때문에 호수는 더욱 신비로워 보였습니다.nbspnbsp▲ 녹연담nbsp어떻게 그리 아름다운 녹색이 나는지 궁금증을 가지며 지하삼림으로 향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내 발 아래 숲의 모습에 놀랍고도 신기했습니다.nbspnbspnbsp▲ 지하삼림삼림욕을 몇 시간에 걸쳐 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백두산은 여러 가지 매력을 가지고 있는 웅장한 산이었습니다.nbspnbsp점심을 맛있게 먹고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을 가는 길에 스님께서는 즉문즉설을 해주셨습니다. 각 차별로 한 명씩 질문을 했는데 통일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솔직한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인상적이었습니다.nbspnbspnbsp통일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어렵다고 포기하는 방법이 한가지이고, 어려운 와중에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라고 하셨을 때 무엇인가에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단순하게 두가지 길이 있고 그 중 후자를 고르면 되는 것인데 어려운 문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통일만 잘하면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남부럽지 않은 나라가 될 거라는 말씀에, 우리나라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또한 통일을 하려면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에 모든 상황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초자연적 존재, 운에 맡기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종속적으로 살지 말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nbspnbsp강대국과 항상 부대껴 살아온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 주시면서 하셨던 말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강대국에 치여 산게 아니라 강대국과 맞서 싸우며 살아온 것이고, 나라가 크다고 좋은 게 아니라 신라가 유지할 수 있었던 저력이 고유한 문화였듯이 우리나라도 작지만 자긍심을 가질만 하다는 말씀에 이때까지 해왔던 인식이 전환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보리수 나무도 그 씨앗은 콩알 만하다.”는 말씀에 정토회도 그 씨앗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씨앗이 발아하여 보리수 나무가 되어 남부럽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그려보았습니다. nbspnbsp즉문즉설을 하며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버스는 벌써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거대했고 찬란했던 발해의 자취를 느끼기에는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동모산의 경우 중국에서 출입을 금지한다고 하여 더욱 아쉬웠고 무력한 기분도 들었습니다.nbspnbsp▲ 동모산nbsp그러나 스님은 이런 실망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비록 시작은 작게 했지만 얼마나 큰 나라가 되었냐며 오히려 더 의미를 부여하며 동모산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제가 처음에 고구려 발해 유적지 답사를 할 때 누구의 안내도 안 받고 찾아 다녔어요. 그 때 제일 찾기 어려운 곳이 동모산이였어요. 아무리 봐도 성이 어디서 어디로 연결이 되어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런데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작죠. 아마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nbspnbsp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렇게 조그맣게 시작을 했는데 그렇게 큰 나라를 이룬 것이잖아요. 그러니 시작이 중요한 거예요.nbspnbspnbsp서쪽에는 대석하라고 하는 조그만 강이 흐릅니다. 이 강을 자연 해자로 하고, 저쪽 능선을 따라서 성벽이 쌓여져 있어요. 저쪽에 꺽인 부분이 서문 자리입니다. 봉우리를 성벽이 빙 둘러싸고 있어요. 예전에는 서문 자리로 올라가서 성벽을 따라 빙 돌면서 함께 노래도 불렀는데 지금은 접근 금지를 시켜 놓아서 78년을 쳐다 보기만 하고 지나갑니다. 처음에는 쳐다 보는 것도 금지를 시켰었어요.nbspnbsp봉우리에 올라가서 보면 ‘이곳에 성을 쌓을 만했구나’ 알 수 있는데 옆에서 보면 평면으로 보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겁니다. 사면이 다 평지예요. 섬처럼 되어 있죠. 어느 곳에서 적이 쳐들어 와도 다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가 이 먼 곳까지 쳐들어 올 이유도 적고, 쳐들어 오더라도 소규모 부대만 올 수 있으니까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겠다 싶죠.nbspnbspnbsp첫 시작은 이곳에서 했지만 여기서 계속 살지는 않았겠구나 알 수 있죠. 그래서 여기서 2km 정도 떨어진 목단강 변에 영승유지라는 곳이 있어요. 그곳이 평지성 자리가 아닌가 싶어요. 평지성은 토성으로 쌓았기 때문에 거의 다 붕괴가 되었지만, 산성은 돌로 쌓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냥 남아 있죠.”nbsp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먼 길을 도망쳐 온 대조영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기에는 이곳이 적절했음이 헤아려졌습니다.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 앞에서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nbspnbspnbsp다음은 강동 24개석을 찾아 갔습니다. 24개석은 발해의 대표적인 유물인데 아직 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도시의 도로가에 철창으로 둘러싸여 횡그러니 있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nbspnbsp▲ 강동 24개석nbsp무엇보다 ‘돈화’라고 하는 이 도시는 조선족자치주에 속해 있는데 간판에 한자와 함께 한글이 써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말이 써있어 반가웠으나 법으로 규정되어 있어 무조건 사전적으로 직역하여 써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글자는 거꾸로 뒤집혀 있고 단순히 한자를 번역해 놓는 수준에서 한글이 간판 표기용으로 이용되고 있어 사실상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고, 이곳 사람들이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게끔 통일이 되어 한단계 도약하는 부국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nbspnbsp▲ 한글을 잘못 붙인 간판nbsp저녁 식사 후 이어지는 스님의 강의는 발해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발해의 수도에서 강의를 들으니 몇 천년 전으로 돌아가 발해 조상들의 정신과 이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nbspnbspnbsp하지만 발해에 대해서 일정이 원래 3일이었는데 1.5일로 줄어들 정도로 방문할 유적지가 없고, 있어도 중국의 방해에 의해 방문할 수 없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하기에 앞서 스님은 고구려 패망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60년간 당나라와 전쟁했고, 강력한 독재 정책을 썼던 고구려의 마지막 모습이 오늘날 북한과 닮아있어 놀랐습니다.nbspnbsp“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공도 잘 막아내었지만 결국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고개를 숙이자는 온건 세력과 끝까지 싸우자는 강경 세력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마련이였습니다. 왕정파 세력은 온건 세력이 많았고, 연개소문을 비롯한 군인 세력 중에는 강경 세력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오랜 시간 지나면 내분이 일어나게 되죠. 왕이 강경 세력을 배제하고 온견 세력의 뜻에 따라 당나라와 화친 관계를 맺으려고 하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갈아치워 버렸습니다.nbspnbspnbsp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독재가 이뤄지고 천리장성을 쌓으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어요. 현대판 천리장성이 바로 핵개발이예요.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북한의 핵개발과 닮았어요.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천리장성을 쌓듯이 북한의 핵개발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죠.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도 미국을 때리기 위한 것이죠. 그로 인해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고 난리가 나죠.nbspnbsp위기에 처해서 독재를 하게 되면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한도 지금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잖아요. 감옥에 넣어도 되는데 그냥 죽어버려서 누구도 반대를 못하게 하죠. 저도 옛날에는 연개소문이 나라를 위해서 외세를 막아내었다는 생각만 했는데, 북한을 경험하면서 저도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연개소문이 외적을 물리친 것은 잘한 것이지만 과연 백성들은 행복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결국 당나라로부터 고구려를 지킨 것도 연개소문이지만 장기적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것도 연개고문의 영향이 컸던 겁니다. 그것처럼 북한의 체제를 지켜내는 것도 강경 세력 때문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들 때문에 지탱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nbspnbsp국가라는 것은 지켜내야 하는 것이고 자주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그것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기 때문에 자주를 지켜야 하고, 사람을 위하기 때문에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은 죽어도 되는 것은 안 됩니다. 통일을 하더라도 그 속에 사는 사람을 외면한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nbspnbsp이념적인 강경 세력이 꼭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죠. 어릴 때 민족적인 성향을 공부하던 것과 현재의 북한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갖고 공부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가를 위하는 것은 참 중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국가주의가 되면 그 국가 안에 살고 있는 국민들이 희생된다는 것입니다.nbspnbsp고구려가 단기적으로는 당나라에 강경하게 대응해서 굴복하지 않았지만 연개소문이 죽자 그 독재 권력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갖고 아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권력을 잃은 아들이 당나라를 끌고 들어와서 결국 나라가 패망하는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했습니다.nbspnbsp고구려 패망의 원인은 첫째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인 당나라와 60년 전쟁을 하다보니 점점 피패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그러다보니 강경 세력과 온건 세력이 있는데 온건 세력이 타협을 하려 하니까 강경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더욱더 강경하게 나가게 되었습니다. 셋째, 천리장성이라는 엄청난 공사가 주민들을 곤궁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애국심을 갖게 한 것이 아니라 강경한 강요에 의한 저항을 하게 되니까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되었고, 나라를 지켜야 할 자발적 저항 정신도 점점 약해졌습니다. 넷째, 마지막 계기는 권력 분쟁이 일어나면서 오히려 적에 가서 아부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nbspnbsp연개소문이 적을 물리치는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잘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늘날 북한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졌다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고구려의 백성들이 행복했을지, 오늘날 북한의 국민들은 어떨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역사가 이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nbspnbsp북한 이야기가 나오자 통일과 인도적 지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통일을 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도적 지원이 없는 통일, 북한의 체제가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통일은 ‘사람을 외면한 통일’이었습니다. 스님이 직접 북한의 대량 아사사태를 접하고 행하셨던 ‘북한동포살리기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장애물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북한하면 북한의 사람보다 막연히 김정은이라는 독재자 한명으로 대등시하고 있지 않았는지 반성했습니다. nbsp nbspnbsp마지막으로 중국은 역사를 문명사적으로 접근하고 우리 나라는 민족적으로 접근하여 역사를 다루는 범위가 훨씬 중국에 비해 적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도 문명사적으로 접근하여 보다 폭넓은 역사관을 가지고 다양했던 우리의 선대와 이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발해가 멸망하면서 동북아에는 큰 역사적인 전이가 일어났습니다. 요나라가 동북아를 지배하고 송나라를 압박했죠. 그 다음에 나라를 한 번도 세워본 적이 없던 여진족이 일어나서 금나라를 세워서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서 남송을 만들었죠. 송나라 황제가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저 서쪽에 있던 몽골족이 일어나서 원나라를 세워서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저 아래로 내려가서 송나라도 멸망시키고 대제국을 건설했죠.nbspnbspnbsp아무튼 발해 시대까지는 우리 민족이 중심이 되다가 발해가 멸망하면서는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민족들이 전부 일어나서 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래서 동북아의 역사를 우리 민족에만 한정하면 대륙을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민족이 아니라 문명적으로 보면 동북아 대륙은 우리가 잃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래 있던 다른 민족이 일어나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를 세웠고, 한족에게는 명나라 때 이 지역을 한번 빼겼을 뿐이죠. 다시 청나라가 일어나서 또 장악을 했죠. 그 뒤는 일본이 들어와서 만주국을 건설했죠. 그래서 동북아 지역이 한족의 지배를 받은 것은 첫번째가 한사군에 의해서였고, 두번째가 원나라가 망하면서 명나라에 의해서였고, 세 번째는 지금입니다. 이렇게 단 세 번 밖에 없어요.nbspnbsp오히려 동북 민족이 중원을 재패한 것은 여러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민족이였던 은나라였고, 그 다음은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였고, 그 다음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그 다음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가서 장악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크게 문명사적으로 보면 자기 지역을 장악한 것이고 자기 지역 안에서 정권 교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작은 민족 단위로 보기 보다는 문명사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역사를 민족사적으로 보지 않고 문명사적으로 보니까 원나라와 청나라도 자기 역사의 일부로 보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너무 좁은 의미의 민족사로만 보니까 우리 역사는 작아지는데, 중국은 그것까지 다 포용해서 자기들의 역사로 만드니까 역사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버린 것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이것을 북방 민족과 남방 민족의 문명사적 갈등과 협력 관계로 본다면 지금까지는 아직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민족사로 보면 발해 이후의 역사를 잃었다고 볼 수 있지만, 발해 이후에는 우리의 다른 종족들이 일어나서 동북아 대륙을 점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서 이제는 인류 문명사적인 관점으로 크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도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이제는 하나로 연대하잖아요. 그것은 다시 이슬람 문명과 충돌하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중국과 인도 문명도 있고요. 이제는 이웃나라만 보는, 적의 적은 동지라고 하는 원교근공책의 문제가 아니예요. 문명적으로 비슷한 나라끼리 통합해가는 이런 시대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배우면서 우리는 늘 미래를 생각해야 돼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기억하려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다니는 게 아니잖아요.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어서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고 개척할 것인가가 핵심입니다.”nbspnbsp문명사적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면 우리의 정신과 역사적 감수성이 좀 더 풍부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직접 찾아다니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도 중요하다는 말씀에 좀 더 우리의 역사관을 동북아 지역으로 확장시켜 생각의 깊이를 넓히고 싶어졌습니다. nbspnbsp이어지는 조별 나누기에서도 가장 많이 나왔던 이야기는 단연 사람을 앞세운 통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동북아 역사기행을 왔던 이유도 모두 사람을 위해서인데 홍익인간을 제창했던 우리 민족이 왜 통일을 말할 때 자꾸 사람을 배제할까 하는 어느 조원의 나누기에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북한이 극한에 처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남한도 통일에 있어서는 극한에 처해있는 것 같아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nbspnbspnbsp더 많은 청년들이 동북아 역사기행에 와 선조들의 역사가 스며든 이 땅을 직접 두 발로 느끼고 같은 역사를 지녔던 북한의 국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커지기를 기원했습니다. 비록 동북아 역사기행의 하이라이트였던 백두산은 오늘 여정으로 끝이 났지만 우리의 가슴은 뜨거운 무엇인가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몇 천년 전 선조들과의 교감, 북한 주민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nbspnbspnbsp내일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유적을 둘러본 후 오후에는 봉오동 전투터로 가서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두만강 건너편으로 한반도 최북단 마을과 함북 온성군을 바라본 후 연길로 가는 일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오늘 현장 스케치는 김다정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nbsp

2015.08.14. 48,619 읽음 댓글 27개

2015.8.10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 고구려의 역사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를 맞이하여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안내하며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동북아 역사 대장정 2일째 새벽이 밝았습니다. 낯선 중국 땅에서 처음 보낸 밤이라 피곤했을 텐데도 단 한명도 지각하지 않고 어제 밤 약속한대로 4시 40분까지 버스 탑승을 하고 새벽5시 정각에 송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아침 인사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nbspnbsp고구려의 유적을 보러 환인에서 집안으로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인데도 너무 느려서 이상하다 했는데 스님이 “지난 번 관광버스가 전복된 사고가 났던 지역인데 경찰차가 앞에서 통제를 하고 있어서 서행을 한다” 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버스를 멈춰 세우더니 공안이 들어와 검문을 하기도 해서 뭔가 위험한 지역을 가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일기도 했습니다.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흔들리며 이동을 하였습니다.nbspnbsp▲ 북한의 뙈기밭. 가파픈 절벽까지 뙈기밭으로 만들어져 있는 모습.nbspnbsp그 때 스님이 “지금 오른쪽으로 보이는 강이 압록강이고 강 건너는 북한 땅입니다”라는 말을 하시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북한 땅이 있고, 내 눈앞에 보이는데 직접 갈 수 없다는 분단의 현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특히 절벽 꼭대기까지 뙈기밭을 만든 모습을 보고 무변심 법사님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굶주림에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 것일까... 목이 메였습니다.nbspnbsp압록강을 따라 조금 더 가니 오늘의 첫 일정인 국동대혈에 도착하였습니다. 국동대혈은 나라의 동쪽으로 가면 큰 대혈이 있다는 뜻으로 이때 국은 고구려 시대의 국내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국동대혈을 보러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우산을 들고 우비를 입느라 출발 준비가 더 분주해졌습니다. 이런 비 걱정도 잠시 조금 걷기 시작하니 신기하게도 비가 멈췄고 이동하기엔 한결 수월해졌습니다.nbspnbspnbsp국동대혈에 올라 고구려의 선조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모습을 떠올리며 대한민국에서 온 140명의 청년들도 함께 그 뜻을 기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국동대혈nbsp1300년 전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는 게 신기하였습니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듯 한 오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1300년 전까지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던 조상들은 자신의 후손들의 우리의 땅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땅이 되어 이렇게 찾아와야하는 것을 어떻게 여기실까’ 하는 생각에 빠지며 우리의 역사인데 중국 땅에 있는 것이 아쉽기도 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청년 역사기행단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기울여 발원과 축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 세상에서 가장 크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밝으신 환인 하느님,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처음 나라를 세우신 환웅 천황님,환웅 천황님께서 세우신 배달 나라의 건국 이념 홍익인간 재세이화,nbsp환웅 천황님의 건국 이념을 계승한 단군 왕검님,nbsp단군 왕검님께서 신시를 새롭게 하여 세운 조선 나라,nbsp조선 나라를 계승한 해모수님의 부여 나라,nbsp그 뜻을 계승한 고주몽님의 고구려, 온조님의 백제, 박혁거세님의 신라, 김수로님의 가야,고구려의 뜻을 계승한 대조영님의 발해,nbsp남북으로 흩어진 민족의 뜻을 이은 왕건의 고려,nbsp그 영토와 사람을 계승한 이성계의 조선,nbsp조국이 광복되어 세운진 나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nbsp오늘 우리를 있게 한 하느님을 비롯한 조상님들께 삼가 합장하오며 발원하옵니다.nbspnbsp우리가 여기까지 오도록 나라를 지켜주고 백성을 지켜준 모든 호국 영령들의 은혜에 보답하며 하나된 조국 통일 대한민국을 발원하옵니다. 통일된 우리 나라는 우리만이 아니라 이웃 나라들과 더불어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여 인류 문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될 것을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이곳에 일찍 찾아오지 못하고 고구려 멸망 이후 1300여년 만에 찾아온 것을 참회드리오며 늦게 나마 이렇게 찾아와 인사를 올립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온 130여명 청년들의 이 간절한 발원을 받아들여 주옵소서. 저희들은 그동안 개인의 행복 제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통일을 향해 나아갈 것을 발원하옵니다. 저희들의 이 간절한 발원을 들어 주옵소서.nbspnbsp북녘 동포들 굶주림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고 병듦에서 벗어나고 인권이 개선되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길 발원하며, 남한의 젊은이들도 절망을 딛고 일어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빈부격차 해소되어 모두 다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발원하며, 남북이 하나되는 새로운 나라 통일 한국을 발원하옵니다. 오늘 이 발원하는 젊은이들 모두 건강하고, 이 여행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저희들을 보살펴 주시옵소서.”nbspnbsp스님의 발원을 들으며 ‘선조들은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들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울음이 울컥하고 올라오기도 했습니다.nbspnbsp국동대혈에서 나와 집안에 있는 장수왕릉,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을 보러 이동하였습니다. 이동하면서 이번엔 버스 왼쪽으로 조금 전에 이동하면서 보았던 압록강 넘어 북한 땅이 보였습니다. 해가 나고 날씨가 더워진 탓인지 북한 어린이들이 물가로 나와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을 보며 ‘북한 아이들도 물놀이 하는 것은 우리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의 한편으로는 멀리서 봐도 너무 마른 아이들의 모습에 일정 중에 조금만 배가 고파도 틈틈이 맛있는 간식을 챙겨먹는 우리들이 미안해지기도 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북한의 마른 아이들, 나무는 다 베어버리고 없는 민둥산, 검은 연기를 내 뿜고 있는 시멘트 공장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nbspnbsp▲ 북한의 시멘트 공장nbsp다음은 장군총을 보았습니다. 그 웅장함은 책과 영상자료로 봐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 위엄은 더 대단하였습니다. 역사기행을 온 우리들의 추억을 배려해 스님은 조별로 사진 촬영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햇빛이 강렬함에도 늘 한결같은 미소를 지어주시는 스님의 편안한 마음에 장군총에 대한 추억이 더 편안하게 남을 것 같습니다.nbspnbsp▲ 장군총에서 조별 기념 사진nbsp무덤을 만드는데 사용한 돌이 여기에서 20km 떨어진 우리가 지나온 도로를 개발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게 신기하고 유적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개발로 알게 되었다는 게 엉뚱하기도 했습니다. 1600년 전 만주 땅에서의 고구려의 위엄과 위대함이 그 유적의 규모로도 크게 다가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위대한 유적이 잘 관리하고 보전되고 있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nbspnbsp이어서 조춘호 선생님과 이승용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 순서로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 광개토대왕비nbsp▲ 광개토대왕릉nbsp가장 안타까운 것은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과 달리 절반 이상 무너져 내렸는데 이것은 무덤 속에 사용한 돌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은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으면서 무덤을 만들 때 미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튼튼한 강돌을 넣은 게 아니라 주변 산돌을 넣어서 오랜시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라고 합니다. 무너져 내린 무덤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nbspnbsp집안 무덤에 있는 고구려 무덤 중 벽화가 발견된 무덤은 30곳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공개된 5회분5호묘로 이동하여 직접 무덤 속으로 들어가서 벽화를 보았습니다.nbspnbsp▲ 5회분 5호묘로 들어가는 길nbsp조춘호 선생님의 후레쉬를 비춰가며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고, 늘 말로만 하던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모습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땡볕을 걸어다니다가 지하 무덤으로 들어오니 거대한 냉장고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시원함이 느껴져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마저 행복했습니다.nbspnbsp무덤 앞에 있는 박물관으로 이동하여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벽화를 한 장 한 장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그 중에서 우리 고구려의 벽화를 중국식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부분에서 틀렸고 어떤 부분에선 일리가 있는지도 짚어주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청년들의 ‘아’ 하고 외치는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 5회분 벽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스님nbsp“원래 고구려 무덤은 돌로 쌓아서 덮개를 덮은 적석총입니다. 이 무덤이 점점 커져서 장군총에 오면 무덤이 7층까지 올라갑니다. 여기에 무덤실은 5층에 배치가 됩니다. 이렇게 무덤실은 주로 지상에 있었는데 어떤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점점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지하로 내려가면서도 석실은 그대로 가져갔기 때문에 위치만 바꾼 것 밖에 아니였어요. 그러면서 나타난 것이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nbspnbsp초기 벽화는 주로 생활상을 그렸어요. 후기 벽화로 갈수록 불교 영향을 받아서 연꽃을 그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신도를 많이 그렸습니다. 오늘 들어가본 5호묘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후기 것임을 알 수 있죠. 여기에 전시된 것들은 생활도가 많아요.”nbsp그러면서 스님은 전시된 벽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여기 벽화를 보시면 머리가 소머리로 그려져 있죠. 소머리로 되어 있으니까 이것은 고구려에 있었던 ‘우가’를 표현한 겁니다. 5가 아시죠?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양가라는 다섯 개의 부족이 있었어요. 각 부족은 거의 독립되어 있었어요. 군대도 다 따로 가지고 있었고요. 고구려는 일종의 연방 국가 같은 것이였어요. 나중에 각 부족은 왕권이 점점 강화되면서 다섯 부서의 장관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다섯 개의 지방자치와 같은 연방 국가였다가 점점 중앙 정부의 각부 책임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임금도 이 5가가 합의해서 뽑았습니다. 이것은 신라의 화백 제도와도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렇게 초기에 연방 형식을 갖추고 있었어요.nbspnbsp이 ‘우가’는 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 시기에는 농업을 담당했습니다. 식량과 농업을 담당하는 부서가 ‘우가’였는데 이 우가 출신 중에 단군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왕의 아들이 건실하면 그대로 왕이 되지면 왕이 아들이 없으면 5가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을 선택해서 뽑았던 것이죠. 그리고 왕의 아들이 여러명 있어도 맞이가 시원치 않으면 또 의논을 해야 합니다.nbspnbsp이 벽화는 ‘우가’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보면 되는데 밑에 ‘신농씨’라고 적혀 있죠. 이것은 중국식 해석입니다. 중국에서는 농업의 신을 신농씨라고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농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신이 신농씨입니다. 그래서 이 벽화를 신농씨라고 표현했지만 이 벽화는 중국의 그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고구려의 우가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신농씨도 배달나라 출신입니다. 선진 문명인 배달 나라의 일부가 중국 쪽으로 내려가서 처음으로 농사 짓는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신이 된 거예요. 우리 나라 사람 중에 일본에 가서 신 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호미를 전했다면 일본에서 호미 신이 됩니다...”nbsp큰 유적 뿐 아니라 그 속에 그려진 벽화의 의미까지 다 알고 계신 스님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그 내용들을 다 알고 계실까?’ 라고 옆에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공부를 많이 하셔서 그럴 것’ 이라는 친구도 있고, ‘워낙 직관력이 뛰어나신 분이니깐 바로 아시는 것’ 이라는 친구도 있고,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옆에 있던 종합 생활도에 대해 특별히 중요성을 강조하며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nbspnbspnbsp“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할 것은 왼쪽 아래쪽에 있는 이 그림입니다. 이 나무는 신단수입니다. 여기 신단수 아래에 동굴이 하나 있죠. 동굴 안을 자세히 보시면 곰이 한 마리 앉아 있어요. 호랑이는 동굴 밖에 있는데 화살을 맞고 있어요. 이 그림은 단군 설화와 내용이 똑같습니다.nbspnbspnbsp단군 설화를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비판이 있는데, 일연은 12세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벽화는 5세기 벽화예요. 그러니까 단군 설화는 민족 전통적으로 주욱 내려온 이야기니까 여기에 그림으로 그린 것이죠.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후 사료가 유실한 상태에서 일부 자료를 보고 일연이 그것을 요약해서 기술했던 것이죠.nbspnbsp토착 세력은 다 자기 부족의 상징이 있습니다. 곰을 섬기는 부족, 호랑이를 상징물로 여기는 부족, 각 부족이 있었어요. 그런데 선진 문명을 가진 이주민이 오니까 토착 세력과 이주민이 서로 사이좋게 협력하기도 했지만 저항하는 경우도 있었겠죠. 단군 설화를 보면 호랑이족은 저항을 했다고 볼 수 있고, 곰족은 서로 협력했고 특히 결혼 동맹을 맺었다고 볼 수 있죠. 고구려 건국에서도 보면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제일 먼저 합병한 나라가 송양국이거든요. 전쟁을 해서 합병한 것이 아니고 합의해서 합병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초기에는 반드시 송양국의 공주를 왕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2대 유리왕의 부인도 송양국의 공주였습니다. 첫 부인이 결혼하고 2년 안에 죽자 다시 송양국의 둘째 딸을 왕후로 데려옵니다. 이처럼 선진 이주민 세력인 환웅족과 토착 세력인 웅족이 결혼 동맹을 맺었고 그 사이에 난 아들이 단군 왕검인 것입니다.”nbspnbsp한 친구는 스님의 벽화 설명 중에서 마지막에 설명해 준 종합생활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벽화 왼쪽 아래에 아주 조그맣게 그린 부분을 찾아내면서 이 속에서 우리 단군 신화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느냐라고 설명해주신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신단수 아래에 웅크린 곰을 보기 위해 우르르 모여들었고 곰을 알아 보지 못한 친구들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스님은 “곰이 안 보이는 사람은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며 농담을 던졌습니다. 단군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임이 벽화로 증명된 것을 알게 된 이 순간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nbspnbsp시원했던 5회분5호묘 벽화 냉장고에서 빠져나와 다음으로 간 곳은 환도산성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성인 국내성에 있다가 외적의 침입시 방어를 위해 환도산성을 지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나무와 풀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발굴 작업을 진행해 지금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직접 가 보니 지금도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습니다.nbspnbsp▲ 환도산성 남문 앞에서 전체 기념사진nbsp환도산성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 보기도 하고, 아래에 내려와 발굴된 산성하 무덤떼를 하나씩 둘러보며 아래에서 환도산성 위를 올려다 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 환도산성을 올려다 보았을 때 지는 해가 환도산성 너머 산에 늬엿늬엿 걸린 모습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해주었습니다.nbspnbsp▲ 산성하 무덤떼에서 바라본 환도 산성nbsp산성하 무덤떼에서는 전체 일행이 바닥에 주저 앉아 조용히 사방을 둘러본 후 잠시 명상을 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머릿 속에는 산성을 쌓고 나라를 지키려고 부단히 애를 쓰던 고구려인들의 모습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nbspnbsp▲ 산성하 무덤떼에 앉아 잠시 명상의 시간nbsp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국내성을 둘러보았습니다. 국내성이라고 해서 궁궐을 상상하며 한껏 기대감을 갖고 갔는데 중국인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성벽 터가 조금 남아있는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방치해둔 것에 대해 또 다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nbspnbsp▲ 국내성nbsp국내성 북쪽 성벽에서 시작하여 서쪽 성벽이 끝날 때까지 걸으면서 성벽을 유심히 살펴보는 우리 일행을 중국인들은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운동하고 밥먹고 휴식하고 걸어다니는 일상 거리인데 우리들에게는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유산인 것이죠.nbspnbsp서쪽 성벽을 돌고 남쪽 성벽이 시작되면서부터 통구하와 압록강도 함께 합해졌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걸으면서는 이승용 국장님으로부터 좋은벗들이 96년부터 북한동포돕기 운동과 통일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nbspnbsp▲ 국내성의 남쪽 성벽을 따라 압록강변을 거닐며nbsp저녁 식사는 압록강변에 위치한 조선족 식당에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법륜 스님의 역사 강의였습니다.nbspnbsp강의 내용은 고구려의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이고, 고구려 역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부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면서 “우리 역사에서 부여, 발해에 대해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고구려가 425년 동안 수도로 정한 곳입니다. 환웅의 배달 문명을 계승한 나라가 단군의 조선 나라이고, 그 조선 나라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고 하면서 세운 나라가 고구려입니다. 이것이 다물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배달의 문명을 계승했고, 조선의 문명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배달 나라와 조선 나라에 대해 여러 가지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고구려를 보면서 우리는 고구려가 이 문명을 계승한 동북아의 독특한 민족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nbspnbsp그동안 고구려가 마치 창조한 것으로 말해진 것들도 그 이전을 알게 되면서 계승했다고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비석에도 ‘북부여의 후손이고, 북부여로부터 말을 타고 남으로 내려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기에 보면 해모수가 ‘나는 단군의 후예로서 단군의 조선 나라를 계승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여는 조선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부여라고 불리우는 현이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에도 천리장성 중에 부여성이 있었습니다. 이 부여에서 고주몽은 남쪽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여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발해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의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부여입니다. 부여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요. 이것은 발해와 부여 모두 지금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가 아닌 저 동북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그러니 다물 사상에 의해서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로 바로 이어진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부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여와 고구려를 하나로 봐야 합니다. 부여 고구려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죠.nbsp지금 현재로 보니까 고구려가 처음부터 강성했던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고, 동부여와 고구려의 경쟁에서 고구려가 이기게 되면서 그 정통성을 이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동부여는 만만한 나라는 아니였습니다. 고구려 문자 명왕 때인 6세기까지 유지가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있을 때도 부여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6세기 초까지 삼국 시대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오국 시대였습니다. 남쪽에 가야가 있었고, 북쪽에 부여가 있었기 때문에 삼국에 두 나라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6세기에 들어와서야 가야가 신라에 합병이 되었고, 6세기에 들어와서야 부여가 고구려에 합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삼국이 유지된 것은 6세기와 7세기에 한 160년 정도 밖에 안 됩니다.”nbsp이어서 스님은 고구려의 성장과 쇠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특히 신라가 어떻게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nbspnbsp“고구려는 북위와 화친을 맺으면서 서북 쪽이 안정이 되고 그러자 장수왕은 주력군을 백제 공격에 사용하여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평성대가 오래가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사람들이 사치하기 시작하고, 둘째, 부정부패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셋째, 왕위 쟁탈전이 생기면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겉으로는 영토도 크고 힘도 있었지만 내부는 점점 취약해져 가게 됩니다.nbspnbspnbsp이때 신라는 5세기 때까지만 해도 가야의 침공을 받고 망할 지경이 되어서 광개토대왕에게 부탁해서 5만 군사의 지원을 받아 겨우 나라를 유지했는데 6세기에 접어들면서 법흥왕 때 율령을 선포하고 불교를 공인합니다. 불교를 공인한 이유는 가야와 합병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야는 원래부터 불교 국가였어요. 왜냐하면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삼국 가운데 철저하게 불교를 금지한 국가가 신라였습니다. 옛날로 치면 가야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였지만 거꾸로 개혁 개방 정책을 하면서 신라가 강성해지고 가야는 점점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가야를 침공하기 보다는 합의 통일을 했습니다. 국명은 신라로 하기로 하되 대신에 신라가 가야를 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nbspnbsp첫째, 가야인들의 신앙을 신라가 수용해야 된다고 해서 불교를 공인한 것입니다. 신라 안에서도 반대가 심했지만 이차돈 같은 젊은 사람이 반대를 해서 결국 한 사람이 죽고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불교가 공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라도 가야와의 통합이 쉬운 일은 아니였어요. 둘째,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가야 귀족들의 신분 보장을 해주었습니다. 이것을 지금의 남북 관계에 비유를 하면 불교를 공인한 것은 공산주의의 합법적인 활동을 허용한 것과 같습니다.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받아들인 것은 북한의 장성을 통합군의 장성으로 임명한 것과 같습니다. 또한 함경북도의 도지사를 통합된 나라에서도 도지사의 자리를 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야가 이런 통합 신라와의 합의 통합을 받아들인 것입니다.nbspnbsp신라 중심으로 통일을 하려고 했으니까 이렇게 가야를 포용한 것이겠죠. 그렇다면 지금 남한이 남한 중심으로 통일을 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두려면 북한을 포용해줘야겠지요? 그런데 지금의 남한은 이 정도의 포용 정책을 할 수 있나요? 이 정도를 못하면 북한이 수용을 안 하겠죠. 죽기 살기로 저항을 하겠죠. 지금 남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강자가 약자를 포용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이렇게 신라는 가야와의 통합을 통해 갑자기 성장을 하게 됩니다. 인재도 두배로 늘어났고, 가야의 앞선 철기 문명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생산량이 늘어나고, 무기가 개발이 되고, 그래서 진흥왕이 나제 동맹을 맺어서 고구려를 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자 고구려는 한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라는 함흥, 원산까지 밀고 올라갑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북방도 막아야 하고 남쪽도 막아야 하고 두 개의 전쟁을 할 여력이 도저히 안 되었던 겁니다.nbspnbsp어쨌든 신라가 단시간 내에 갑자기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야와의 합의 통합 때문이였습니다. 신라는 가야에게 조금 양보했지만 얻은 것은 열배를 더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남북한도 합의 통일을 하게 되면 통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까지 만들어나가게 되면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됩니다. 유라시아로 확장해 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북한 개발을 하기 위해서 돈이 조금 드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nbspnbspnbsp나아가서 신라는 통일이라는 계획을 세워 놓고 통일을 한 것이 아니고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다가 결과적으로 통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대륙을 차지하겠다는 생각도 전혀 없어서 통일을 했다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대륙을 잃어버린 한계가 있었죠. 물론 잃어버린 것은 아니죠. 발해가 다시 생겼으니까요.nbspnbsp고구려 멸망 후 30년만에 북방 영토에는 발해, 즉 대진국이 일어났죠.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가 망했다는 의미에서는 삼국 통일이지만 실제로는 삼국 통일이라기 보다는 신라와 발해라는 이국 시대라고 볼 수 있죠. 이때 또 재미있는 점은 고구려를 잃고 나라를 되찾고자 한 부흥군과 신라군이 합동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였지만 그 보다 더 큰 원수가 당나라였습니다.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쫓아내기 위해서는 고구려 부흥군이 신라군과 연합해서 가장 활발하게 싸웠던 것입니다. 신라는 무기와 물자를 대고 실제 인력은 고구려군이 전면에 나서 싸워서 결국 당나라군을 한반도 안에서 쫓아내게 됩니다.nbspnbspnbspnbsp고구려의 영토 일부를 신라가 차지했지만 그것은 반도 안에 불과했고, 실제로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는 발해가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삼국통일이라기 보다는 북발해와 남신라라고 하는 이국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의 기운은 발해로 그 역사적 전통성이 계승되었기 때문에 환단고기에 신라는 언급을 안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다음에 대진국이 나옵니다. 발해 사람들은 자기들을 발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자신들의 나라를 진국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고구려는 후대로는 발해로 계승이 되었습니다.” nbspnbsp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한반도 동쪽 아래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신라가 짧은 시간에 어떻게 비약적 성장을 할 수 있었는지는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특히 신라가 가야를 포용해서 합의 통일을 한 것에서 분단 국가인 우리가 독일 통일이라는 외국의 사례만 보고 통일의 방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경험 속에서도 보고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은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nbspnbsp이렇게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오국시대의 방대한 역사를 단 2시간 만의 강의로 우리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춰 적절히 비유로 강의를 해준 스님이 더 대단해 보였습니다. 에어컨도 잘 안 나오고 2시간 내내 서서 열정적으로 강의해주는 스님 앞에서 체력적 한계와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는 우리들이 많이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nbspnbsp잠자리에 들기 전 조별로 모여 마음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거대한 유적지를 돌아보며 느낀 점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체력적인 소모가 커서 많이들 지쳐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여러 명의 친구들이 환도산성 아래에서 산성을 올려다 보며 바라본 해질녘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보았던 초록색 중 가장 아름다웠던 색이었다고 이야기한 친구도 있었습니다.nbspnbsp▲ 조별 마음 나누기 시간nbsp그리고 책에서만 보던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을 실제로 보니 그 거대함에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식사 전에 압록강변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이 불빛 하나 없는 암흑이었던 것과 달리 이곳 중국은 알록달록한 불빛으로 휘향찬란한 것을 보면서 북한을 껴안지 못하고 있는 우리 남한의 현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고 했습니다.nbspnbsp내일은 하루 종일 압록강변을 따라 북한의 모습을 보면서 북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볼 예정입니다. 어떤 모습을 보게 되고 그 속에서 무엇을 느끼게 될지 기대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오늘 스케치는 김양숙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nbsp

2015.08.12. 48,897 읽음 댓글 31개

2015.8.8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 백암산성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를 맞이하여 고구려의 요동성을 지키는 산성인 백암산성에 오른 후 7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마무리하는 강연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지난 8월2일에 심양에서 출발한 동북아 역사기행은 7일 동안 고구려, 발해, 독립운동,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을 달리고 달려 오늘 백암산성 답사를 끝으로 마치게 됩니다. 오늘도 어김 없이 숙소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난 기행단은 5시에 버스에 올라타 역사기행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껏 한 사람도 늦는 사람 없이 정시 출발입니다. 이번 역사기행은 통일의병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해서 그런지 뭔가 남다릅니다.nbspnbsp버스에 올라타니 스님은 “잘 주무셨어요?” 하는 인사와 함께 “오늘은 먼 길을 가야 해서 점심을 식당에서 따로 먹을 시간이 없다”며 “새벽 시장에 내려줄테니 아침과 점심 먹을 것을 미리 사 두세요”라고 얘기합니다. 새벽에 비가 살짝 내렸기 때문에 시장에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지만 새벽 5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죽, 과일, 빵 등 요기할 것들을 주섬 주섬 챙기고 버스에 올라탔습니다.nbspnbsp▲ 길림 새벽 시장nbspnbsp길림에서 심양 근처의 백암산성까지 가는 길은 대략 7시간 정도 걸리는데 버스 안에서의 긴 시간을 활용하여 오늘도 즉문즉설이 진행되었습니다. 스님은 “스님께 묻고 싶은 점, 다른 사람에게 묻고 싶은 점, 역사기행을 통해 느낀 소감, 부르고 싶은 노래, 이 4가지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보라”고 하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 버스 안 즉문즉설nbsp즐겁게 즉문즉설이 오가는 사이 오후1시가 다 되어서야 백암산성 입구에 당도하였습니다.nbspnbsp송수신기로 스님의 해설을 들으며 남서쪽으로 빙 둘러친 성의 외벽을 돌았습니다. 처음에는 성벽 위를 걷다가 성벽에서 내려와 다시 성벽을 바라보니 그 웅장함에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스님은 성벽을 오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성의 이곳 저곳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 백암산성nbsp“이쪽이 서쪽 성벽입니다. 여기 성벽의 특징은 치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도 있다는 점입니다. 치라는 것은 사실 밖에서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쌓는 것인데, 안에도 치를 쌓은 이유는 아마도 성벽 위에서의 방어 면적을 넓히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아요.nbspnbsp치의 간격은 50m60m 정도 됩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에 화살로 공격할 수 있는 유효 거리가 30m 정도 되지 않았겠나 싶어요. 성벽을 쌓은 돌은 전부 이 산에서 파낸 겁니다. 이 산이 돌산이거든요.nbspnbspnbsp저기 지금 발굴하고 있는 곳이 다 병영 자리입니다. 올라가시다 보면 오른쪽에 돌로 빗물을 모으기 위해 바위를 판 자리가 있어요. 병사들의 물 사용을 위해 거기에 빗물을 저장했어요. 저 아래에서 물을 들고 오기가 어렵잖아요. 산성은 반드시 우물을 확보해야 산성이 됩니다.nbspnbsp▲ 빗물을 모으기 위해 바위를 판 자리nbsp저기 위에 망대가 보입니까. 망대 주위가 내성입니다. 망대에서 남문까지 남북으로 480m입니다. 동서로는 440m입니다. 외성을 한바퀴 돌면 2km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어요. 여기는 성벽이 있는데 저쪽 반대편에는 성벽이 없어요. 왜냐하면 저쪽편은 깍아지른 절벽이거든요.nbspnbspnbsp여기 보시면 7단까지는 피라미드식으로 쌓아올려서 안정성을 확보하고 그 위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쌓았죠. 외벽 바깥에는 회를 바릅니다. 회를 발라야 미끌미끌해서 기어오르기 어렵죠. 그리고 여기는 성벽 밖에 한 3m 정도 떨어져서 별로 높지 않은 작은 덧성을 또 주욱 쌓았어요. 해자를 못 만드니까 해자 대신에 덧성을 쌓은 겁니다. 적이 성벽 위로 기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죠.nbspnbsp현재 고구려 성 중에 그 웅장함이 제대로 남아있는 대표적인 성입니다. 국내성도 파손이 너무 많이 되었고, 환도산성도 파손이 많이 된 것을 최근에 새로 복원한 것인데, 이 성은 원래 있던 그대로입니다. 얼마나 돌이 잘 맞물려 있습니까.”nbsp돌멩이 하나 하나 마다 선조들의 숨결이 닿아 있을 터입니다. 조심스레 손끝으로 돌멩이를 만져보며 장구한 시간을 느껴봅니다. 스님은 성벽의 웅장한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서서 대중들이 지나가는 순서대로 10여명씩 무리지어 기념 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nbspnbspnbsp백암산성은 집안처럼 유적들이 무리지어 있지 않고 외진 곳에 있어서 혼자서 이곳에 다시 오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다시 이곳에 와볼까 하는 심정으로 스님의 목소리, 발걸음, 시원한 바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더욱 또렷이 집중해 봅니다.nbspnbsp성벽을 오르며 스님은 “우리가 이렇게 성벽을 밟고 다니는 것도 길게 보면 엄청난 파괴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번 올라갔다 내려올 때마다 돌멩이 하나는 굴릴 것 아니겠어요?” 라며 걱정스런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대중들도 조심스레 걸음을 걷기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뻥 뚫린 남서쪽 벌판이 훤히 내려다 보여서 고구려를 향해 접근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보일 듯 전망이 탁 트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망대에 우뚝 서서 주변 사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것이 망대예요. 여기 와서 보세요. 사방으로 오는 적을 한눈에 딱 내려다 볼 수 있죠.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요양시가 있는데, 요양이 옛날에 요동성이였어요. 이 성은 요동성을 보호하기 위한 산성이예요. 요동성은 저기 산 보이죠. 저 산 넘어 뒤쪽에 있어요.nbspnbsp▲ 망대에서 바라 본 전경nbsp동쪽으로 흐르는 강 이름이 태자하입니다. 이 강은 흘러서 발해만으로 들어 갑니다. 동쪽은 강을 끼고 완전히 절벽이죠. 이 강을 동쪽 해자로 하고, 성벽은 남쪽과 서쪽, 북쪽으로 아주 튼튼하게 쌓았습니다. 주로 서쪽에서 적이 공격을 해 오므로 서쪽 성벽이 가장 두껍습니다. 남쪽은 절벽 위에 성벽이 쌓여져 있고요.”nbspnbsp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절경이였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성을 튼튼하게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성을 지키는 사람도 중요하다며 백암산성과 관련해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nbspnbspnbsp“이 성을 몇 년도에 쌓았는지는 기록이 없고요. 547년에 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리고 549년에 돌궐족 1만명이 침입했는데 함락을 못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요. 당태종의 공격으로 요동성을 함락되니까 이곳 성주가 자발적으로 항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시성의 양만춘은 끝까지 저항을 해서 결국 물리쳤죠. 이것을 보면 성을 얼마나 견고하게 쌓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성을 지키는 사람이 어떠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nbspnbsp망대에 올라 탁 트인 시야를 보고 기뻐하는 대중들에게 스님은 한마디 덧붙였습니다.nbspnbsp“마지막날 고구려의 기상을 많이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좀 쫀쫀하게 굴지 마세요. 아이들 성적이 좀 떨어지면 어때요? 아내와 남편에게도 너무 쫀쫀하게 굴지 마세요. 아시겠어요?”nbspnbsp▲ 망대nbsp모두들 “예” 하고 크게 대답했습니다. 백암산성 망대에 올라서 광활한 만주 벌판을 보고 있으니 정말 가슴이 탁 트이면서 그동안 얼마나 작은 것에 연연하며 안절부절 했는지 돌아봐졌습니다. 이제는 통일 한국을 건설하는데 작은 정성이라도 보태어 보는 삶을 살아보겠노라 다짐하며 산성에서 내려왔습니다.nbspnbspnbsp성을 다 내려와 다시 마을을 빠져 나가는 길에는 다시 한 번 백암산성을 먼 발치서 볼 수 있었습니다. 깍아진 절벽을 한쪽 성벽으로 하고, 평지에 닿는 부분까지 외성이 둘러쳐져 있어 산성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그 크기와 웅장한 자태에 광할한 대륙을 지배하던 옛 고구려인의 웅장한 기상과 스케일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멀리서 본 백암산성의 모습nbsp백암산성을 끝으로 역사기행의 모든 일정을 마친 기행단을 위해 스님은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지 “심양으로 들어가는 길에 요동성을 한 반퀴 둘러보면서 가자”고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스님은 “저기 오른쪽이 요동성이예요” 라고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 고구려 당시 요동성이 위치했던 요양시.nbspnbsp심양 시내에 있는 숙소에 도착한 기행단은 짐을 모두 내리고 내일부터 이 버스를 다시 이용하게 될 청년 역사기행팀을 위해 버스 안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짐을 숙소에 풀고 곧바로 강당에 모인 대중들을 위해 스님은 “수고 많으셨다”고 격려해 주면서 7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마무리하는 정리 강연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먼저 기행 일정이 너무 빡빡했다고 하면서 혹시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한 것이 상처가 되었거나, 개인 사진 찍자고 했는데 응해주지 않아서 서운했을 수 있다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독립군은 원래 쫓겨다니며 싸우는 것이라며 모두 웃고 넘어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여행은 좀 한가해야 하는데, 좀 빠듯했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원래 독립군이 쫓겨 다니지 한가하게 다니겠습니까? 쫓겨 다니는 가운데서 마음을 한가하게 가져야 되는 거겠죠.” nbspnbsp원래 오늘 계획은 박물관에 가서 요하 문명의 유물을 보면서 전체 마무리를 할 계획이었는데 박물관을 이전하는 관계로 아쉽게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스님은 이런 아쉬움을 잠깐 언급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소중하다고 강조하면서 마지막 정리 강연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유물과 유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발로 밟아 볼 수 있으면서도 우리 민족의 기상을 갖고 있는 나라가 바로 고구려와 발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장에 와서 내 눈으로 이것을 확인하면서 도대체 이 문명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계승이 되어 갔느냐를 살펴보았죠.nbspnbsp고구려의 문명은 부여를 계승했고, 부여는 단군 조선을 계승했고, 단군 조선은 배달 나라를 계승했고, 배달 나라는 자기의 연원을 환인의 한나라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서 뿌리를 찾았고, 그 다음에 이 고구려와 발해의 문명은 어떻게 이어져 내려갔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문명이 내려가다가 끊긴 부분이 발해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대로 이어가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nbspnbsp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지만 그 뿌리가 없는 문명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신라 문명입니다. 신라는 무엇을 계승했다고 하는 뿌리가 단절되었다면 발해는 후손이 단절된 경우입니다. 그 두 나라의 가교 역할을 한, 즉 위로도 잇고 아래로도 이어주는 것이 고려입니다. 그래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함으로 해서 후손이 없는 발해와 조상이 없는 신라를 건너뛰어 다 포함해 버렸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라도 잇고 발해도 이었습니다. 신라와 발해가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지만 하나는 후손은 있는데 조상이 없고, 하나는 조상은 있는데 후손이 없는 이 간극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면서 이어냈습니다.nbspnbsp그렇게 해서 조선으로 이어지고 상해 임시정부로 이어져서 오늘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갈라졌는데, 여기서 또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하나는 후손이 없고 하나는 뿌리가 없는 이런 일이 또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nbsp고려가 후손이 없는 발해와 조상이 없는 신라가 갖는 한계를 서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말씀에 모두 공감을 했지만, 마지막에 지금의 남북도 그런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씀은 큰 경종으로 들렸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역사 의식과 민족사관을 제대로 갖는 것은 지금 당면한 남북의 통일 문제를 풀어가는 올바른 해법을 제시해 줄 수 있고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일이 됨을 강조했습니다.nbspnbsp“그래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통일의 문제를 다루려면 결국은 대한민국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 문제인데,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아가보면 장대한 민족사의 뿌리로서 연결되기에는 약간 부족함이 남아있습니다. 만약에 이것만 이어 가게 되면 우리의 역사적인 정통성이 위축되고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침략시기에 독립투쟁을 했던 부분을 그래도 비교적 많이 계승한 북한의 역사를 민족사에서 제외시킬 게 아니라 이것을 우리의 역사 일부로 받아들여주는 역사 의식이 필요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대한민국이 이 문제를 중심에 놓고 풀어야 되지만 결국 북한을 포용해서 북한의 역사도 껴안아줘야 우리 역사의 상처를 치유해 낼 수 있습니다.nbspnbsp과연 이것을 우리가 해낼 만한 포용성이 있겠느냐. 또 그만한 역사 의식이 있겠느냐. 또 과거를 돌아봤을 때 신라와 발해가 겪었던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할 만큼 미래를 보고 이 문제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니면 현재 당면한 남북 간의 적대적인 이것만 보고 문제를 풀겠느냐 이런 문제죠. 그래서 남북은 현재 상태라면 따로 따로 오랜 기간 흘러갈 가능성이 높고, 또 통합을 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통합이 되느냐에 따라서 뭔가 결손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합이 되도록 해야 될 당면 과제가 있고, 통합만 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 통합이 상승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 즉 민족사를 온전히 계승할 수 있는 그런 통합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남한의 정치 지도자가 얼마 만큼 또는 국민들이 얼마나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느냐 이런 문제죠.nbspnbsp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보면서 민족사관을 제대로 정립하는 것은 과거의 뿌리를 찾는 것 뿐만 아니라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 가는 데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려인들이 그런 역사의식이 없었다면 서희의 담판은 꿈도 꿀 수가 없는 일인데, 바로 그런 역사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서희의 담판이 승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nbsp역사 의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깊이 와닿았습니다. 더군다나 지난 7일 동안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그 중요성을 더욱 체감했기에 스님의 말씀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배달 문명과 단군 조선 문명을 함께 살펴보았던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nbspnbsp“그런 면에서 과거 환인 하느님의 한나라라고 하는 것은 꼭 우리 나라의 시작이라고 볼 수 없지만 우리 민족의 연원이고 원류라고 볼 수 있겠죠. 우리 민족의 시작은 하늘이 처음 열렸다고 하는 신시 개천, 즉 배달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배달 나라를 온전하게 계승한 것이, 즉 신시를 새롭게 하고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건국이념으로 재정립한 것이 단군의 조선 나라입니다. 이런 배달 나라와 조선 나라의 문명 수준은 발생 연대로나 문명의 수준으로나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곳들의 문명 수준 보다 앞섰으면 앞섰지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역사로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을 증거 할 수는 없지 않느냐 했지만 그것은 바로 요하 문명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해결되었습니다. nbspnbspnbsp요하 문명에는 고구려 무덤의 원형인 돌로 쌓은 거대한 피라미드가 가장 많이 남아있고, 고구려 유적은 15001600년이 지나면서 많이 파괴 되었는데 하물며 이것은 50006000년 전의 것이니까 어떻겠어요? 피라미드처럼 남아 있기는 어렵겠죠. 그러나 발굴을 몇 개 했을 때의 그 규모는 돌로 쌓은 7층 적석총으로nbsp밝혀지고 있습니다.nbspnbsp산성에 대해서는 석성을 쌓는 고구려 성곽의 독특함이 있는데, 이와 똑같지 않지만 성산자 산성이라고 하는데 산성의 흔적이 5천년 전 것이 남아있고, 또 적봉시 가까운 곳에 있는 큰 댐 때문에 많이 파괴가 되긴 했지만 치의 기본 형태를 가진 것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그냥 석기시대의 수준 갖고는 그런 규모의 무덤이나 성을 쌓을 수도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당히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권력이 결집된 고대 국가의 형태를 이루어야만 이것은 가능합니다. 거기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특히 옥기는 그 정교함이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입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우리는 배달 문명과 단군 조선의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nbspnbsp또 스님은 선비족의 연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도 고조선의 구성원으로 품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며 역사를 보는 더 큰 시야를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 문명은 마치 아리안족이 서쪽으로 간 서아리안과 동쪽으로 간 동아리아인이 있듯이 오늘의 유럽인이 있고, 서쪽인 하북성 쪽으로 내려간 집단은 은허라고 하는 곳에 수도를 정하고 은나라를 세워서 청동기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웠고, 이것은 중국 문명의 일부가 현재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일파가 동쪽으로 이동해 온 것이 요동 지역이죠. 그리고 그 일파가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것이 있는데, 북쪽으로 올라간 부여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가 되어야 될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단군을 계승했다고 하지만 문명의 이동 과정으로 볼 때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 일은 사실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가 인류학적으로 추정해 본다면 오히려 토착 세력의 일파가 단군 문명을 받아들이고 강성해져서 단군 조선의 혼란기에 단군을 계승했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나 싶어요.nbspnbspnbsp그들이 남하 해서 내려온 것이 고구려라면, 그것이 동쪽으로 내려간 것이 동부여가 됩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비석에도 주몽이 말을 타고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거든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서쪽으로 간 것은 은나라이고, 은나라가 멸망하고 중산국이라는 나라를 그 후에 재건해서 북경 근방에서 상당기간 존속한 그런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가 끊겨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 역사로 계승해서 계속 못 가고 중국의 역사 일부로 편재가 되었죠.nbspnbsp다만 그 활동 지역인 북경 근처에는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선비족이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건국하고, 진나라에 멸망했다가 남북조 시대에 또 일어나 연나라를 만듭니다. 소수 민족으로 있던 나라 중에 가장 먼저 독립해서 제국을 구성한 게 선비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은나라, 중상국, 그리고 선비족의 연나라 이렇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nbspnbsp그리고 이 고조선의 영토 중 서쪽 일부를 한사군이 점령하게 되면서 원래 본거지에 내려와서 동쪽으로 이동해 온 것이 후기 고조선이고, 후기 고조선 중에 약간 북쪽에서 일어나서 이것을 계승한 것이 부여입니다. 그러나 부여가 고조선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의식이 적었기 때문에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의 후예인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서 다물군을 조직해 한의 침략을 막아내고 부여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한 것이 북부여이고, 동쪽으로 이주시킨 게 동부여가 됐어요, 여기서 북부여와 동부여가 갈라지고, 주몽은 북부여의 후예라고 하지만 살기는 동부여에 살다가 다시 쫓겨나서 북부여로 와서 고구려를 건국한 것입니다. 주몽은 다물군에 참여했는데,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것은 곧 다물 정신을 계승했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nbspnbsp고구려는 조선 나라의 영토를 다 차지한 것이 아니라 그 영역에다가 한사군이 점령했던 영역의 일부와 새롭게 동쪽으로 확대해서 토착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많은 부족들을 정복해서 대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여기에 초기에는 위나라와 부딪혀서 관구검의 침입이 있었고, 그 다음에 연나라가 일어나서 연나라와 부딪힌 것이 모용왕의 침입입니다.nbspnbsp결국 우리 민족의 중심 지역은 고조선 이후로 지금의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요서 지역에서 동쪽으로 더 치우쳐서 왔고, 서쪽으로 내려간 건 망했고, 본거지 영역은 다른 민족인 선비족이 차지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가 발해로 계승될 때는 또 동쪽으로 옮겨가서 토착세력인 흑수말갈까지 흡수해서 대제국 건설하기는 하지만, 백제는 남쪽으로 내려오고 신라가 부흥하면서 민족의 중심은 원 출발지에서 더 동쪽으로 치우치고 더 남쪽으로 점점 이동해 가는 이런 우리 민족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거지였던 이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죠. 그 빈자리에 다시 일어난 것이 거란족입니다. 고구려 아래에 있던 거란족이 고구려 멸망 후에 발해에 약간 소속되어 있다가 그 빈자리에서 일어나서 요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말갈족은 고구려의 후예들과 연합을 해서 발해를 세웠다면, 거란족은 거기서 빠져나와 있다가 독립된 나라인 요를 건국하였고, 발해가 멸망하고 결국 말갈족도 여진족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다시 일어난 게 금나라입니다. 여진족들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우게 됩니다.nbspnbsp여기서 우리는 발해 멸망을 통해 고구려의 계승이 끊어지고, 남하해 내려온 백제가 신라에 통합되어 신라가 되고, 이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결국은 중심지가 한반도로 국한이 되는 벌어지게 됩니다. 즉, 신라 시대에는 신라는 반도에 있지만 발해는 대륙에 있었는데 발해가 멸망하면서 결국 반도만 갖게 되고, 함께 발해를 유지했던 말갈족들이 여진족이 되어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우리의 본 영토인 고조선의 옛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북방에 있던 몽골이 다시 일어나서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복속시키고 중국의 남송까지 정복해서 대제국을 형성하게 됩니다.nbspnbsp이렇게 해서 결국 몽골족의 원나라가 일어났고, 그 전에 여진족의 금나라, 그 전에 거란족의 요나라, 훌쩍 더 뛰어서 그 전에는 선비족의 연나라가 일어났는데, 이런 나라들은 다 고조선의 민족 구성원들입니다. 소위 말하면 토착 세력에 속합니다. 이 배달나라와 고조선의 사람들은 선진 문명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예요. 여기에 토착해 있던 세력들이 이 문명을 전수받아서 동북아 대륙에서 차례차례로 제국을 건설해 나가게 되고, 소위 문명의 출발인 우리는 반도 남쪽으로 밀려 나 있게 되었습니다.nbspnbsp그래서 우리가 이런 나라들을 자꾸 중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우리 역사는 쪼그라 들고 중국의 역사는 자꾸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 모든 동북아 역사가 다 중국 역사의 일부가 되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어요.nbspnbsp거기다 고려를 계승한 조선은 자발적 사대를 했습니다. 고려는 민족 의식은 있었는데 힘이 부족했어요. 고려는 동북아에 있는 민족들이 강성해지면서 그 원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조선은 북방 민족이 아닌 한족인 중국에 대해 자발적 사대를 함으로 해서 우리 민족의 정기가 왜곡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제의 침략을 받으면서 더 왜곡이 되고, 최근에는 서양문명이 들어오면서 민족의 정기 측면에서는 더욱더 위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우리가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를 다시 강조하면서 시대적 과제인 통일을 향해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가져줄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nbsp“그러나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물질적인 문명의 기술은 지금의 정도까지 회복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국력은 신라나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만에 가장 좋아진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nbsp그러나 이 좋아진 상태가 지속되겠느냐? 아닙니다. 지속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롤 모델로 삼은 미국이 점점 정체 국면에 들어 후퇴하고 있고, 또 중간 모델로 삼은 일본도 지금 정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뒤따라 정체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자기 토대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최근에 중국의 경제 성장에 의해서 10년 넘은 정체를 겨우 면하고 경제 성장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이 만약 저성장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바로 후퇴로 갈 위험이 굉장히 높습니다. 거기다가 미중의 경쟁에서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으로 우리가 편재되면 현재의 남한만 지키는 안보는 가능할지 몰라도 통일도 어려워지고 경제 성장도 굉장히 어려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가능했기 때문에 미래에도 계속 잘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만약 조금만 잘하면, 즉 이러한 성장을 좀 더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사실 통일이 없이는 불가능해요.nbspnbsp통일은 어떻게 보면 돈이 드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투자처가 생기기 때문에 미국의 서부 개척처럼 이것은 당분간 성장의 동력이 됩니다. 투자는 돈이 부족하면 빌려서 투자하면 됩니다. 소비는 돈을 빌려서 하면 안 되지만 투자는 돈을 빌려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는 안 돼요. 그래서 창조성이 사실은 핵심인데, 우리가 이러한 성장의 동력을 좀 유지하면서 대대적인 혁신을 해서 전체적인 창조성을 키우는 이런 사회 개혁을 해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 놓은 여기에서 주저앉기에는 좀 아깝지 않냐. 이것을 더 끌고 나갈 수 있는 우리의 비전을 마련할 수 있는데, 그 첫 단계가 통일이고, 두 번째 단계가 동아시아 공동체이고, 세 번째 단계가 그것을 기초로 세계 문명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백 년의 계획을 우리가 설정해 볼 수 있습니다.nbspnbsp가능성이 있느냐? 가능성이 있습니다. 필리핀이 이런 계획을 세우면 가능하냐? 그건 안 됩니다. 옛날에 우리가 이런 가능성을 세우면 되었느냐?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 기회를 잘 살리면 그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말로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nbsp자랑스러운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지금 조금만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다들 개인생활에 빠져있고 분열해 있고 이런 것은 좀 안타까운 것 같아요.nbspnbsp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출발이 되는 통일을 첫 발로 내디더야 되고, 그 통일의 첫 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즉, 남한만 어떻게 잘 하겠다 하는 이런 의식이 아니라 남한을 잘 지켜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북한까지 포함해서 전 민족적인 전체 이익을 어떻게 지켜내고 확장할 거냐 이런 의식이 있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70년 역사는 남한 지키기에 급급한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에 민족 전체의 이익을 보는 관점이 부족합니다.nbspnbsp또 너무 이웃과 싸우는 배타적 민족주의는 세계 문명의 조류와 안 맞습니다. 이웃 나라도 이익이 되고 평화도 공유하고 이익도 공유하는 그런 의미에 있어서의 열린 민족주의적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은 갖되 다른 이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의식이 아주 부재하거나 아니면 아예 배타적 민족의식으로 주장합니다. 그래서 nbsp세계인이 봤을 때는 인류의 보편성에 떨어지는 주장을 하거나 아예 자기 아이덴티티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극복을 해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nbspnbsp우리가 역사 기행을 하는 이유는 여행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얘기를 우리가 한국에서 앉아서 한다면 지식으로는 다가올지 몰라도 마음에 다가오기는 어렵고, 마음에 다가오지 않으면 행동은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결국 행동하자는 것인데, 행동을 하려면 마음이 동해야 되고, 마음이 동하려면 현장에서 보고 느꼈을 때 사람의 마음이 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돈을 들이고 아까운 시간을 내어서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는 이렇게라도 우리가 방향을 잡아서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책임을 다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nbspnbsp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일을 도모하는 건 사람이 하지만 뜻을 이루는 건 하늘이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늘 후회하게 됩니다. 차 가고 손들기 식의 이런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겁니다.nbspnbsp그러다보니까 먹는 것도 좀 부실하고, 자는 것도 부실하고,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오늘 같은 날은 오줌도 제대로 못 누고요... 이런 목표로 기행을 했다는 말을 다시 한번 드리면서 전체 일정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nbspnbsp마지막까지 정성을 기울여 바른 관점을 잡아주시는 스님께 대중들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역사기행을 통해 느낀 점을 정리해보는 소감문 작성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별로 소감문을 함께 읽고 들으며 서로의 느낀 점을 공유하고 나니 역사기행을 더욱 풍성해진 느낌입니다.nbspnbsp▲ 소감문 작성nbsp자연스럽게 저녁 식사가 나오면서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 지고, 스님은 “역사기행 실무를 맡아 준 조춘호 선생님께 소감을 들어보자”고 하며 송수신기를 넘겼습니다. 조 선생님은 “서먹서먹했던 얼굴이 벌써 정이 들었다” 며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이치”라며 시원섭섭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남북 통일”을 외치며 건배 제의를 하자, 대중들은 많은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각 차량을 담당한 차장들이 나와 기행단을 오지 시골마을 구석구석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준 운전 기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운전 기사들은 부끄러워서 앞에 나오지 못했고 조 선생님이 대신 선물을 받았습니다.nbspnbspnbsp마지막으로 조별로 소감나누기를 한 후 추천된 소감문을 한 명씩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통일의병 교육을 받고 역사기행에 참가한 한 분은 밀림의 생명력을 느끼게 해 준 백두산 전경과 물속을 걷고 부서진 나무 다리를 건너며 독립군이 되어 본 청산리 전투터의 기억을 말하며 “일상으로 돌아가면 화내고 절망하기 보다는 통일을 위해 작은 기여라도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nbspnbsp▲ 소감문 발표nbsp또 어떤 분은 “황하 문명보다 2천년 앞선 요하 문명을 이야기해 준 스님의 역사 강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해준 가슴 뛰는 감동의 시간이었다”고 하고, 어떤 분은 “선비족의 연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를 고조선의 구성원으로 품어 안자는 스님의 창의적인 역사관을 듣고 말할 수 없이 벅차 올랐다”고 소감을 나눠주었고, 또 어떤 분은 “좋은벗들의 난민 구호 활동 이야기를 듣고, 끊임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보면서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는 북한 동포들이 떠올라 목이 메어졌다”며 울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알려주려고 한 스님의 자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nbspnbsp소감문이 한줄씩 읽어내려갈 때마다 대중들은 지난 7일 동안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때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nbspnbsp소감문 발표 후에는 해당 조의 사람들이 함께 나와 역사기행을 통해 느낀 점을 노래와 율동으로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7일 동안 금새 친해졌는지 조별로 기발한 아이디어로 노래를 개사하거나 율동을 준비해 와서 모두를 웃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nbsp통일에 대한 열망이 무르익었는지 통일을 주제로 개사한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nbspnbspnbspnbsp조별 발표를 모두 마치고 밤 9시가 되어 오늘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대중들은 그동안 역사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조별로 대화를 많이 나눠보지 못했는데 삼삼 오오 모여서 조금 더 회포를 푸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역사기행의 마지막 밤이 저물었습니다.nbspnbsp내일 역사기행단은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심양 공항으로 이동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님은 계속 중국에 남아서 이번에는 청년 역사기행팀을 맞이해 다시 역사기행 안내를 시작합니다. 내일부터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역사기행 소식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nbsp

2015.08.10. 54,332 읽음 댓글 35개

2015.8.6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 발해진과 봉오동전투터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역사기행 5일째를 맞이하여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유적과 봉오동 전투터를 둘러본 후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오늘도 어김없이 5시 정각에 모두 버스에 탑승한 기행단은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 하는 아침 인사와 함께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버스 창 밖으로는 돈화벌의 넓은 평야가 드넓게 펼쳐졌습니다.nbspnbsp1시간을 달려 어제 보았던 강동 24개석과 같은 형태의 요전자 24개석 유적을 찾아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기행단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nbspnbspnbsp어제는 돈화 시내 한 가운데에 24개석이 있었는데 오늘은 밭 한 가운데에 24개석이 있었습니다. 옥수수밭 옆길을 한 줄로 들어가 한바퀴 돌면서 24개석을 보고 나왔습니다. 풀과 꽃이 무성하게 자라서 24개석이 모두 보이지는 않았지만 예쁘게 핀 꽃들과 함께 사진 몇 장을 남기고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nbspnbsp▲ 요전자 24개석nbsp버스에 타고 나서 스님은 발해가 남긴 24개석은 과연 무엇이였는지 학자들의 견해를 빌어 몇가지 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nbspnbsp“상경용천부에서 중경현덕부, 동경용현부, 남경남해부 이 사이에 난 길에 이 24개석이 군데 군데에 있습니다. 이건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주요 교통로에 있는 ‘역참’이라는 주장도 있고요. 역참인데 돌을 왜 저렇게 놓았느냐 하기도 하지만 주요 교통로에 있기 때문에 역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둘째, 왕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 때 관을 받아서 보관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셋째, 양식 창고라는 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춧돌이 이렇게 여려개 놓여있다는 것은 그 위에 엄청나게 무거운 것을 올렸다는 것을 말하거든요.nbspnbsp현재 확실하게 공통적으로 밝혀진 것은 건축 유지라는 것입니다.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여기에 건축물을 세웠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건축물이 어떤 건축물이냐는 문제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확정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만약 이것을 연구해서 발표하면 박사 학위감이 될 수 있어요.”nbspnbspnbsp어제부터 무척 궁금해 하던 내용이었는데 몇가지 제기된 설을 들으니 모두 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발해의 역사가 조금 더 깊이 연구되길 기원해 봅니다.nbspnbsp다시 한참을 지나니 용암이 막혀 형성된 길이 23km에 달하는 ‘경박호’ 호수를 만났습니다. 저 멀리 작은 호수처럼 보이는 듯 시작된 경박호는 계속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은 채 마침내 마치 바다로 생각될 정도로 아주 넓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호수는 넓은 평야와 어우러져 또다른 아름다움을 주었습니다.nbspnbsp▲ 저 멀리 경박호의 꼬리 부분이 보입니다nbsp오랜시간 버스가 달려 도착한 곳은 당시 발해의 수도 중 하나였던 상경용천부의 왕궁터 유적입니다. 스님은 버스에서 내리기 전 상경용천부 유적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발해는 비록 시작은 동모산에서 좁쌀 만하게 시작했지만 3대 문왕 때까지 오면서 50년 만에 동북아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는 대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견현덕부의 경우 한 주의 중심도시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수도를 상경용천부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방어벽이 멀리 있고 가운데가 정말 넓은 터를 잡아서 자기들의 중심 도시를 만들었습니다.nbspnbsp▲ 외성 위로 백양 나무가 늘어선 모습nbsp외성의 길이가 4km 정도 됩니다. 돌과 흙을 같이 섞은 토석혼축성으로 지금도 비교적 형태가 잘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외성을 쌓고 외성 안에 내성을 쌓고 그 안에 궁성을 쌓았습니다. 기본 모형은 당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장안성을 참고한 것 같아요. 돌로 쌓았기 때문에 많이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기본형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입니다.”nbspnbsp외성의 한 변이 4km 전체는 16km에 달한다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은 성벽 위로 백양 나무가 높게 자라고 있어 멀리서도 금방 그 윤곽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차창 밖으로 정말로 백양 나무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nbspnbspnbsp다음은 박물관으로 이동해 발해의 영역 지도와 궁성 조감도를 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상경용천부 성터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장안성 못지 않게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성터에는 토대와 흔적만 남아 있기에 그 위에 어떤 건물들이 지어졌을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박물관에서 모형도를 보고 스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성터로 가보니 단순한 돌덩어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돌은 어떤 역할을 했겠구나’ 떠올려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nbspnbspnbsp동궁 옆의 사람 얼굴 모양의 연못을 한 바퀴 돈 후 내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전생에 우리는 발해인이지 않았을까’ 하면서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의 안내에 따라 내성 안의 궁성으로 들어가서 제1궁성부터 제5궁성까지 차례대로 걸어가 보았습니다. 뒤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져 앞에서 바라보면 한 눈에 뒤쪽의 왕궁터가 보였습니다.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계획되고 관측되어서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오봉루에서 바라본 주작대로nbsp▲ 제1궁에서 바라본 제2궁, 제3궁, 제4궁의 모습nbsp▲ 궁성의 북쪽에 난 두 개의 문nbsp이렇게 상경용천부 성터를 모두 둘러본 후 다음은 성터의 정문 앞길인 주작대로를 따라 외성터 내에 위치해 있는 흥륭사를 찾아 갔습니다.nbspnbsp▲ 흥륜사nbsp흥륭사는 상경용천부에 있는 9개의 절 중 유일하게 유물이 나온 곳이라고 합니다. 흥륜사 경내의 맨 뒤편에 위치한 법당에 들어가 큰 불상 앞에 선 기행단은 스님의 제안에 따라 예불 의식을 했습니다.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은 기행단을 위해 축원과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들께 지성귀의 하오며, 저희 한국에서 온 동북아 역사기행 통일의병 대중 일동은 고구려, 발해,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이곳 발해의 상경용천부 흥륜사 대법당 큰 부처님 앞에 찾아와 합장하고 발원하옵니다.nbspnbsp발해 멸망 이후 1100여년 만에 발해인들이 하듯이 저희들이 이와 같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부처님께 공양 올린 이 인연 공덕으로 환인 하느님, 환웅 천왕님, 단군 왕검님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사의 정통성이 잘 계승되고, 발해의 옛 터들이 다시 복원되기를 간절히 발원하오며, 참배한 우리 또한 부여 고구려 발해의 민족 정기를 잘 계승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 인연 공덕으로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서로 협력하고 하나되는 통일을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저희의 이 간절한 발원을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과 조상 영가님들께서는 이 원이 성취될 수 있게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또한 북녘 동포들의 생존권과 인권이 보장되어 사람답게 살 수 있기를, 또한 남한도 빈부격차가 해소되며 젊은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nbspnbsp오늘 이와 같이 발해의 옛터에 찾아와 왕궁터를 둘러보고 대불 앞에서 합장하고 불공 올린 이 인연 공덕으로 참여 대중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며, 갖가지 소원 모두 성취되게 하옵소서. 오늘 저희가 참배하고 발원한 인연 공덕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지이다. 이 무량 공덕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조상 영가님들과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부디 왕생 극락 하옵소서. 제불 보살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스님의 간절한 발원에 역사기행 대중들도 함께 간절한 마음을 모아 보았습니다. 마음은 숙연해지고 곳곳에서 훌쩍 거리며 눈시울을 붉히는 대중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역사 속에서 점점 잊혀져간 발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움이 많았는데, 진정으로 발해인들의 뜻을 계승한다는 것은 통일 한국과 동북아 공동체 건설이 아닐까 상상해 보며 스님의 발원을 나의 발원으로 새겨 봅니다. 천년 전의 역사와 오늘의 내가 만나는 순간이였습니다.nbspnbsp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이어서 성을 쌓기 위해 돌을 채취한 자리에 생긴 현무호 호수를 버스의 차창 밖으로 잠시 살펴본 후 목단강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목단강 앞에 다다르자 스님은 당시에 거란으로 가는 통로가 있었다며 칠공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nbspnbspnbsp“저 목단강을 건너는 다리가 놓아져 있었는데 그 다리는 발해 당시에 거란으로 가는 통로였습니다. 돌을 쌓아서 다리의 기둥을 일곱개 놓았는데 그 유지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칠공교라고 불렀습니다.”nbsp칠공교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려고 도로가 지나가는 다리 위로 걸어갔으나 마침 공사가 진행 중이여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발해의 유적지를 모두 살펴본 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는 이제 독립운동 유적지를 향해 달렸습니다. nbspnbsp발해진에서 도문으로 가는 길은 버스를 오래 타게 되는데 스님은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면서 궁금했던 점이 있다면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을 갖자”고 했습니다. 1,2,3호차 각각에서 송수신기로 질문하고 스님이 다시 송수신기로 답하는 방식으로 버스 안 즉문즉설이 이뤄졌습니다.nbspnbspnbsp총 8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1호차, 2호차, 3호차에서 골고루 질문이 나왔습니다. 중국에 와서 보니까 옥수수가 정말 많이 보이는데 옥수수를 어떻게 심고 어떻게 수확하는지 궁금하다는 분, 고구려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왜 그렇게 강력했던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하지 못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는 분, 어머니가 만주에서 태어나셔서 만주가 정말 궁금했는데 만주가 어떤 곳을 말하는지 궁금하다는 분, 스님의 활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분, 통일의병이 생긴지 1년 반이 넘었고 아직 걸음마 단계인 것 같은데 평가를 좀 해주고, 통일의병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해 달라는 분, 동북아 역사기행 말고 또다른 역사기행 코스를 개발할 생각은 없으신지, 이번으로 역사기행이 끝나서 너무 아쉽다는 분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nbspnbsp그 중 아이들에게 어떻게 역사 의식을 심어주어야 하는지 묻는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nbsp“책으로만 보던 역사를 직접 발로 걸으며 느끼니까 더 감동적이고 자부심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3학년과 6학년인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 아이들도 역사 의식이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nbspnbsp▲ 버스 안 즉문즉설nbsp“아이들에게 역사 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엄마가 너무 욕심을 내어서 하면 안 됩니다. 엄마가 모든 생활에 있어서 그런 쪽으로 살아가면 아이는 저절로 역사 의식을 갖게 됩니다. 엄마가 강제로 책을 주고 읽어라고 하면 저항이 생기죠. 부담도 되고요. 어릴 때 잠시는 공부할 줄 몰라도 커서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엄마가 모금할 때도 같이 데려가고, 기회가 되면 경주 남산도 손 잡고 가고, 천천히 같이 다니면 조금씩 안개에 옷이 젖듯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놔두고 본인이 그런 의식을 갖고 살아가세요.nbspnbspnbsp두 번째는 아이들과 대화할 때 아이를 그렇게 만들려고 말하고 행동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기쁨으로 그런 얘기를 아이와 재미있게 나누면 아이도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기도 하다가 때론 저항이 생겼다가 다시 그렇게 가다가 다시 저항이 생겼다가 이런 과정을 계속 겪는 겁니다. 아이가 클 때 일직선으로 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말썽꾸러기가 되었다가 갑자기 착해졌다가 또 말썽꾸러기가 되었다가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무엇이든지 욕심을 내어서 접근하면 안 됩니다.nbspnbsp그래서 본인부터 먼저 할 것. 그렇게 자기 삶이 변해나가면 아이도 저절로 됩니다. 아이와 손 잡고 무조건 놀이 공원에만 가지 말고, 한 번은 손잡고 놀이 공원 갔다가 한 번은 성곽을 찾아가 본다든지 할 수 있죠. 아이한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질리도록 하면 안 돼요. 저도 지금 여러분들에게 너무 질리도록 하는 거 아니예요? nbspnbsp부모가 아이들에게 너무 그렇게 접근하는 것은 안 좋아요. 아이는 부모를 부모라고만 생각하지 선생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자기 몸에 베인 것만 영향을 주지 선생님이 되어서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저는 질문자가 약간 걱정이 되네요. 역사기행이 좋았다고 또 집에 가서 아이들 데리고 못 살게 굴지 않을까 싶네요. 역사기행은 잊어버리고요. 아이는 놔두고 당분간 자기부터 먼저 그렇게 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nbsp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질문자는 환한 웃음을 보이며 “네, 알겠습니다” 대답했습니다. 버스 안의 대중들도 박수를 치며 공감도 하고 질문자도 격려해 주었습니다. 질문과 답변이 길어진다 싶을 때면 노래 한 자락이 불러서 금새 기분을 환기시켜 주었습니다.nbspnbsp스님의 지혜가 담긴 대답을 들으며 울고 웃다 보니 어느새 봉오동 전투 기념비에 도착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실패 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무장 독립운동 중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최초의 성공적인 전투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기념비 앞에 선 기행단 일행에게 봉오동 전투가 일어났을 때의 정황과 그 의미에 대해 간략히 소개를 해주었습니다.nbsp▲ 봉오동 전투 기념비nbsp“저희는 지금 봉오동 전투터에 왔습니다.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19010년 나라가 망하자 급격하게 세력이 약해졌습니다. 물론 일제가 군대를 통해 진압을 강하게 한 것도 있었지만, 희망이 없어져 버려서 저항의지도 약해졌습니다. 독립운동이 급격하게 쇠퇴하면서 두 번째 나타난 증상은 의병을 했던 분들이 이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나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미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던 이곳으로 오게 된 겁니다. 처음 이주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이민이 이뤄진 것인데, 이때부터 넘어온 사람들은 독립이라는 목적 의식을 갖고 이민을 와서 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독립운동을 준비했습니다.nbspnbsp그런데 갑자기 한국 안에서 1919년에 3.1 만세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세계 정세에서도 민족 자결주의가 나오고, 이렇게 되니까 ‘우리도 독립할 수 있겠다’ 하는 희망이 생기면서 독립운동에 관심있던 모든 사람들이 상해에 모여서 임시 정부를 구성한 것입니다. 임시 정부를 구성했지만 국내의 3.1운동 세력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갈수록 약해지고,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독립이라는 것이 손으로 만세 부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였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는 모이기는 모였지만 아무런 대응책도 없었고, 누가 대통령을 할 것인지 내분만 일어났어요.nbspnbspnbsp그래서 1919년 가을부터 현장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팠던 겁니다. ‘총을 쥔 놈들과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도 무장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다. 앉아서 회의만 해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현장으로 가자’ 이렇게 하면서 현장으로 속속 복귀를 해서 무장 운동을 준비합니다. 독립군 자금을 모아서 무기를 사서 유격전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겁니다.nbspnbsp1920년에 들어와서 홍범도 장군은 여기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무기를 구입하고 훈련을 시키고 양식을 모우고... 이곳이 이 지역 독립군의 근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약 300명 정도 되는 부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20년 6월 4일과 5일에 이 부대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고 돌아옵니다. 그러다가 6월 6일에는 대대 병력이 이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월경을 해서 독립군들이 회의하고 있는 곳을 공격해서 모두 산 속으로 피신을 갔습니다. 6월 7일 추격군은 독립군의 본거지를 소탕하기 위해 봉오골로 기어들어 왔습니다.nbspnbsp홍범도 장군은 상대는 최정예 부대이기 때문에 직접 대응해서는 이길 수가 없어 전략을 세운 겁니다. 이 봉오골은 아래에서부터 하동, 중동, 상동이 있는데 하동, 중동을 싹 비워버리고 상동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정찰병이 지나갔지만 공격하지 않고 계속 매복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찰병이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본대를 불렀고, 그 때 세 방면에서 매복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일본군의 지원병이 들어왔는데 앞이 안 보이니까 저희들끼리 또 공격하면서 사상자가 더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300여명 중에서 157명이 죽었고, 이것은 게릴라전 치고는 굉장한 성과였습니다. 이 전투가 봉오동 전투입니다.nbspnbsp이 전투 때문에 나중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합니다. 항상 우리는 승리한 전투만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일제는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고 집을 불태우고... 그래서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많이 납니다. 일본은 다시 사단 병력을 데리고 공격을 준비하게 되고, 독립군은 백두산으로 후퇴를 하다가 청산리를 중심으로 다시 맞붙게 되어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nbspnbspnbsp세계 최강의 정규군과 약소 민족의 게릴라 부대가 싸워서 이런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니까 3.1운동의 패배감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오게 된 것이죠. 봉오동, 청산리 전투는 3.1 독립운동이 실패한 이후 첫 번째로 일어난 대단위 무장 투쟁이였습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참배를 하겠습니다.”nbsp봉오동 전투는 조선 내에 반일투지를 높이는 데 기여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무장 독립투쟁이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졌으나 우리 선조들은 많은 희생을 거치며 접경 지역인 중국, 러시아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런 소중한 독립 운동의 역사를 민족의 자긍심으로 끌어안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함께 기념비를 향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nbspnbspnbsp참가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최가람님과 남자 참가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곽영술님, 여자 참가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최경숙님, 이렇게 세분이서 기행단을 대표해서 참배를 했습니다. nbspnbspnbsp이어서 대중들도 모두 참배를 했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오늘 우리들은 통일 한국을 이루는데 기여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묵념도 하였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하류로 가서 우리 나라의 최북단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를 건너다 보았습니다.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쪽의 풍요로움과 북한 쪽의 가난이 계속 대비가 되었습니다.nbspnbsp▲ 두만강 건너편에 보이는 우리나라 최북단 함북 온성군 풍서리nbsp스님은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해 보기 위해 북한의 온성군 하나를 연결해서 비료를 제공해 주고 농법을 개선해서 식량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려보는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며 경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지는 못했다”며 “앞으로도 꿈이 있다면 군 하나를 모델로 해서 식량 생산을 늘여서 그 모델을 전파해 보는 것” 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다음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도문시에 있는 조중우호다리로 가서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읍을 바라보았습니다.nbspnbsp▲ 조중우호다리. 건너편은 함북 온성군 남양읍.nbsp조중우호다리 앞에서는 극심했던 북한의 식량난과 탈북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식량난이 극심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이 근처에서 수많은 북한 동포들이 탈북을 했다고 합니다.nbspnbspnbsp강 사이에 섬처럼 되어 있는 부분에는 강을 넘다가 얼어 죽은 시체들도 자주 볼 수 있었고, 그 이후에도 중국에 친척을 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친척들에게 먹을 것을 보내달라고 쪽지를 전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철조망이 이중 삼중으로 쳐지면서 경계가 삼엄해 지고, 탈북을 해도 중국에서의 인권 유린이 심한 점이 알려지면서 탈북은 거의 멈춘 상태라고 합니다.nbspnbsp그리고 두만강변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거닐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두만강에 직접 손을 담가 보며 북한 땅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 순간을 잠시라도 더 기억해 보고자 해 봅니다.nbspnbsp▲ 건너편 북한 땅을 바라보고 두만강에 손을 담가보며nbsp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연길시로 이동하면서 스님은 수월스님 이야기와 용성스님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금 좋은벗들과 평화재단이 하고 있는 일은 우리가 새로 하는 일이 아니라 이런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한 것도 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시대와 조건을 뛰어넘어 그 정신은 항상 계승되고 있음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연길시에 도착해 들른 식당은 북한 여성들이 공연을 보여주는 특별한 식당이였습니다. 스님은 “이곳까지 왔으니 북한 사람을 가까이서 보며 그들의 가진 재능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이라며 식당으로 안내했습니다. 우리들에게 낯익은 한국 가요와 북한 노래를 번갈아 가며 들려주며 정말 해맑은 목소리와 얼굴 표정을 보여주는 북한 공연단에게 대중들은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만약 통일이 되어 우리와 이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면 또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날지 기대가 되고 설레였습니다.nbspnbsp그리고 역사기행을 처음 개척할 때부터 지난 21년 동안 많은 가르침과 애정을 보여주신 연변대학교 방학봉 교수님 부부가 식당을 찾아와 기행단 대중들을 위해 격려의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방학봉 교수님은 “20여년 간 스님의 지도 하에 역사기행을 해오며, 또 한국의 해결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면서 “이번 역사기행도 무사히 마무리 되길 기원한다”고 축원해 주셨습니다.nbspnbsp▲ 평생 동안 발해사 연구를 해온 방학봉 교수님 부부nbsp또 좋은벗들이 북한돕기 활동을 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도움을 준 조선족 사기 피해자 협회 분들도 식당을 찾아와 기행단 대중들을 위해 격려의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발걸음을 해준 모든 분들 한분 한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식사 후에는 숙소로 이동해 짐을 푼 후 곧바로 저녁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강의는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긴 시간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남한에서 중요시 여기는 독립운동 성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의 역사도 함께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또한 전쟁에 참여한 일본의 병사들의 아픔도 생각해야 함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지금 우리가 와 있는 이곳은 단순히 과거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문제 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 문제의 뿌리도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 경신년 대참사라는 사건이 있어요. 청산리 전투를 승리할 때 우리는 승리만 이야기하는데 이럴 때 일본은 어떻게 하겠어요? 이곳에서 수십년 간 농경지 개간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농경지와 집을 다 버리고 내려오라고 그랬잖아요. 몇십년 땅을 일구고 집 짓고 살아왔는데 독립군의 근거지가 되니 내려오라고 하고, 안 내려오니까 집에 불 지르고 죽여서 수천명이 학살을 당하고 재산을 잃어버린 정도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nbspnbsp그래서 이겨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지면 그 부대만 죽고, 이기면 열배로 주민이 학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가게 되는 백운평 마을도 일본이 청산리 전투에서 져서 후퇴하면서 이 마을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버렸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이런 그들의 아픔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을 승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비극이라는 것입니다.nbspnbspnbsp둘째,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지만 일본 젊은이들도 일제에 아무 이유없이 징집되어 와서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한 것이잖아요. 그런데서 우리가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해야지 일본 민중들을 미워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런 비극을 잊지 않고 개선하되 평화로 가야 하거든요. 희생자들 중에 우리의 독립군들만 추모할 것이 아니라 비극적으로 죽은 민중들의 영혼도 위로해야 하고, 죽은 일본 병사들도 우리가 위로를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nbspnbsp이 땅은 고조선 시대에도 우리의 영토였고, 고구려 시대에는 변방이였고, 발해 시대에는 중심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독립운동의 가장 주된 활동 무대였습니다. 어쩌면 시대가 좋아지면 김일성의 홍기와 전투터도 방문해야 합니다. 지금은 나무 푯말 하나만 세워져 있고 아무 것도 없거든요. 북한의 젊은이들과 남한의 젊은이들이 함께 청산리 전투터도 가고, 홍기와 전투터도 가보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nbspnbspnbsp우리 조상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조상들이 볼 때는 같은 민족인데 서로 싸우고, 한쪽이 굶어 죽고 있는데 식량을 주지도 않고 굶겨 죽이고 이렇게 하는 것은 조상들이 볼 때 적절치 않죠. 후손들이 그렇게 살아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잖아요. 여러분들도 형제끼리 싸울 때 ‘부모가 볼 때는 어떻게 여기실까’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타협점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nbsp남한 만의 독립운동사에서 북한의 입장까지 생각해 보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대해 더욱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소중한 가르침이었습니다.nbspnbsp밤 10시가 넘어 강연이 끝났고, 대중들은 모두 휴식을 하러 숙소로 돌아갔습니다.nbspnbsp내일은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여 4시에 연길 새벽 시장을 방문해 아침식사를 할 예정입니다. 오전에는 깊은 산속으로 산행을 하며 청산리 전투터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대종교 3인묘, 일송정, 용정중학교를 둘러보며 독립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

2015.08.08. 55,943 읽음 댓글 45개

2015.8.1 평화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선언 관련 불교계 만남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선언을 하기 위해 이웃 종교인들과 회의를 하였습니다.nbspnbsp어제밤 봉화에서 출발해 새벽 1시에 서울에 도착한 스님은 잠시 눈을 붙인 후 새벽 4시에 일어나 서울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기도 후에는 발우공양에 참석해 어제부로 안거를 마친 공동체 대중들을 위해 이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 법문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먼저 스님은 “안거를 마치고 이제 일상 생활로 돌아왔습니다. 다들 안거 때 가졌던 마음가짐으로 일상 속에서도 평정심을 가지고 잘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라고 당부하면서 일상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보림을 해볼 것을 제안했습니다.nbspnbsp“우리 의식의 저 밑바닥에 있는 까르마는 아주 교묘해서 ‘야, 안거 끝났다. 이제 현실에 맞게 살아’ 이렇게 자꾸 속삭입니다. 마치 마구니가 유혹하듯이 ‘수행 꼭 안 해도 돼’ 하면서 저 밑에서 속삭입니다. nbspnbsp그래서 거기에 휘둘리지 않도록 늘 살펴야 합니다. 몸이 힘들다면 ‘정말 몸이 힘든 것인가’ 살펴서 정말 몸이 힘든 것이라면 쉬어줘야 하고요. 그게 아니라 마음이 힘들다면 마음이 어디에 사로잡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 내가 지금 이것을 싫어해서 그러는구나’, ‘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지 못해서 지금 기분이 다운되는구나’ 이렇게 살펴서 거기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합니다.nbspnbsp진짜 수행은 일상 생활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경계에 부딪히면 깊이 숨겨져 있던 업식이 교묘하게 들어납니다. 경계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안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수련원에서 살 때는 아예 ‘여기는 수련원이니까 너 까불지 마’ 이렇게 딱 제어를 하게 되기 때문에 깊숙이 숨겨진 것들은 잘 안 드러나요. 아무리 긴장을 풀어도 ‘여기는 수련원이야’ 하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마음대로 행동을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는 더 안 된다고 볼 수도 있고, 또 잘 보면 업식이 드러남으로 잘 볼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에 수행이 더 잘 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nbspnbspnbsp이번 안거를 통해 훨씬 더 자기를 투명하게 보고 그것을 끊임없이 내어 놓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 이것을 일상 속에서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선에서는 ‘보림’이라고 부릅니다. 딱 본질을 꿰뚤어 본 것을 ‘초견성’이라고 한다면 견성을 한 후에는 보림을 해야 합니다. 보림은 5년이 걸릴 수도 있고, 10년이 걸릴 수도 있고, 2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보림은 작은 깨달음의 불빛이 어떤 장애가 와도 꺼지지 않도록 온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이런 경우에도 부딪혀 보고, 저런 경우에도 부딪혀 보고, 밥을 해먹어 보기도 하고, 얻어 먹어 보기도 하고,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해보고, 시장통에서 장사도 해보고, 이렇게 주욱 해보면서 늘 평정심이 유지되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보림 기간은 늘 장애 속에서 사는 기간입니다. 큰 장애 속에서도 잘 되는지 점검이 되어야 일상 생활 속에서도 큰 문제가 없어지게 됩니다.nbspnbsp세상 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되고, 상대는 요구가 많고, 상호 모순이고,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정진을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nbsp진짜 수행은 현실 속에서 하는 것이며 알아차림을 잘 유지해서 경계에 휘둘리지 않도록 해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보라는 말씀이였습니다.nbspnbsp이어서 요즘 아침마다 읽고 있는 경전 독송의 내용은 우리가 꼭 유념해야 하는 내용이 들어있다며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어제부터 시작된 경전 독송을 조금 더 유의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재가 수행자는 8계를 지켜야 하는데 그 8계에 대한 포살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삼보에 귀의하고 나서 8계를 지키는 것이니까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부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알면 마음이 청정해진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마음이 청정해진다, 승가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알면 마음이 지극히 귀의가 되고, 귀의가 되면 마음이 청정해진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수행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도록 해주고 있습니다.nbspnbspnbsp8계는 5계에다가 3가지 계율을 더한 것입니다. 하루 한 끼만 먹고, 오후 불식하고, 때 아닌 때에 먹지 않는 음식에 대한 계율과 머리에 장식하지 않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고, 패물을 차지 않고, 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곳에 가지 않는다는 옷에 관련된 계율과 높은 침대에 자지 않고 좋은 집에 살지 않는 집에 대한 것 등 의식주에 대한 3가지 계율이 추가됩니다. 재가 수행자는 계율을 매일 지키지는 못해도 적어도 6재일 또는 10재일이라고 해서 재일이 있는 10일 간은 스님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생활을 합니다. 그 날은 절에 와서 스님과 똑같이 생활하는 날이기 때문에 신자가 아니라 재가 수행자인 것입니다.nbspnbsp이번 100일 동안의 경전 독송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탐진치 삼독이 얼마나 해악이 있느냐, 그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얼마나 공덕이 있느냐 하는 부분입니다.nbspnbsp그리고 중간에 나온 내용 중에는 마을 사람들이 와서 ‘어떤 사람이 자기 주장만 하고 남의 주장은 틀렸다고 할 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부처님께 물었더니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 이런 것에 의해서 진리는 검증되지 않는다. 정말 그것이 현실에서 바른가. 정말 양식 있는 사람이 봤을 때 합리적인가?’ 이런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나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진실에 근거하도록 부처님이 얼마나 세세하고 명확하게 이야기했는지 다시 한 번 각인을 해야 합니다.nbspnbspnbsp많은 종교인들과 사상가들이 그저 옛날부터 전해내려 왔다고, 우리 스승이 한 말이라고 하면서 아무런 근거 없는 믿음으로 근거 없는 해석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우리는 현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요즘 읽어도 굉장한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굉장했겠어요? 그래서 경전의 문장을 항상 외울 수 있을 정도로 각인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포살 계본도 꼭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nbsp부처님은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항상 진실에 근거하도록 가르침을 주었다는 말씀이 깊이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재가 수행자가 지켜야 할 8재계의 의미에 대해서도 곱씹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해 아침 7시 30분부터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오늘 종교인 모임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선언을 준비하기 위한 실무 논의에 주안점을 두고 진행되었습니다.nbspnbspnbsp각 종교계 별로 선언 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울 수 있을지, 계획을 세운다면 어떤 내용이 될지에 대해 서로의 현황을 파악하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10시부터는 정토회 본부 불사 추진위원들과 본부 건물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의견 교환이 있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오후 1시에는 조계종 화쟁위원장을 맡고 있는 도법 스님을 찾아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선언과 관련해 불교계의 참여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했습니다. 조계종 화쟁위원실에 들어가니 위원장인 도법 스님과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본부장인 지홍 스님, 정웅기 붓다로 살자 편집장이 함께 자리해 평화와 통일에 대한 불교계의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도법 스님과 지홍 스님, 정욱기 위원장님에게 왜 지금 시기에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가 필요한지 설명해 주면서 불교계 쪽의 적극적인 동참을 부탁했습니다.nbspnbsp“이 선언문을 발표한 후 불교,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 천도교 등 5대 종교에서 각 교단별로 251개 지역씩 1000여곳에서 1000일 동안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통일 기도를 하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매주 한 번씩 오늘은 조계사에서 하고, 내일은 불광사에서 하고, 이렇게 돌아가면서 통일에 대한 강연회를 전문가들을 불러서 계속 열어나가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nbspnbspnbsp통일 기도를 하겠다고 서명한 각 사찰에서는 아침 기도에 공동 발원문을 낭독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통일을 정부에 맡겨 놓고만 있기에는 국가적 위기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까지 이뤄지면 나중에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중국과의 관계도 나빠지고 미국이 짠 판에 거의 종속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미국에 대해서는 한미 동맹을 굳건히 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되 종속적 한미 동맹에서 자주적 한미 동맹으로 나아가야 합니다.nbspnbspnbsp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의 이익을 우선하고 미국이 돕도록 하고, 나머지 세계 문제는 우리가 미국의 이익을 돕겠다, 이렇게 되어야 한반도 문제가 풀리는데 지금은 한반도 문제가 미국의 대 중국 봉쇄 정책의 일환으로 규정을 받고 있어서 우리의 이익을 해치는 동맹 관계로 내몰릴 위험이 있거든요.”nbspnbsp종교인 모임에서는 작년부터 한달에 한 두 번씩 모여서 내내 걱정만 하다가 이번에는 선언문까지 내기로 이야기가 되었고, 불교계 스님들의 동참도 거듭 호소하게 된 것입니다. 또 스님은 신라와 가야의 통합 과정을 예로 들며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어떻게 포용해야 하는지, 불교는 통일 문제에 있어서 타 종교에 비해 역사적으로도 긴밀함이 높다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nbspnbsp“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보면 신라와 가야의 통합 과정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라와 가야는 원수 지간이였지만 신라로 나라를 통일하는 대신에 신라는 가야의 국교인 불교를 공인해 주고, 가야의 지배 계층을 신라의 왕족으로 포용해 주면서 신라는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강자가 약자를 포용해줘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상대를 굴복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상대는 끝까지 저항하게 됩니다. nbspnbspnbsp불교는 통일 문제에 있어서 단순히 한 종교로서 참여하기 보다는 이런 역사성과 결합해서 nbsp참여할 수 있는 폭이 민주화 운동이나 다른 운동에 비해서 훨씬 큰 것 같아요. 평화와 통일은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많은 교훈을 찾아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딱 두 가지 운동만 열심히 해도 불교의 위상이 높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통일 운동과 환경 운동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정말 우리 불교가 잘 할 수 있고 우리 사회에서도 정말 미래지향적인 운동입니다. 종단 차원에서 좀 많이 참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nbspnbsp저희도 매일 기도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사실 국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제도 어렵고, 안보도 위기입니다. 종단에서 나서주면 저희들 NGO 수준에서라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nbspnbspnbsp다른 종교나 단체들은 통일 관련해서 휴전선 기행 밖에 못하는데 우리 불교계는 역사 속에서 삼국통일, 의병 등 여러 가지 소재가 많잖아요. 또 임진왜란 때는 승병이 있었지 않습니까. 승병 본부였던 중흥사를 순례해 볼 수도 있고요. 우리 불교인은 사회 의식이 부족해도 이런 역사성과 신앙성이 결합하면 오히려 활동하기 좋은 측면이 있습니다.”nbsp도법 스님과 지홍 스님, 정웅기 편집장은 스님의 이런 생각에 적극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전국 사찰에 민족공동체추진본부과 화쟁위원회 이름으로 동참할 스님들을 모아보기로 약속했고, 스님은 이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후 조계사를 나왔습니다.nbspnbsp평화재단에 도착한 스님은 집무실에서 원고 교정 업무를 보았고, 이어서 찾아온 손님들과 4차례 미팅을 더 가진 후 정토회관으로 들어왔습니다. 내일부터 역사기행이 시작되기 때문에 관련해서 자료를 찾아보고 준비사항을 점검하는 등 업무를 더 보시다가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부터는 고구려 발해 백두산 역사기행이 8월 2일부터 16일까지 1차와 2차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됩니다. 스님은 역사기행을 통해 천손의 나라 배달 나라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일제 식민지배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의 현장, 분단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북한 국경변을 안내하며 대중들에게 통일 한국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예정입니다. 생생한 소식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 nbsp

2015.08.02. 50,697 읽음 댓글 40개

2015.7.18 9박10일 명상수련 회향

nbsp안녕하세요. 스님은 지난 7월 9일부터 대중들과 함께 명상수련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9박10일 명상수련을 마친 대중들과 안거 중인 공동체 성원들을 위해 회향 법문을 했습니다.nbspnbsp지난 7월 9일에 시작한 9박10일 명상수련을 오늘 무사히 마쳤습니다. 스님은 명상수련의 시작과 함께 단식을 하며 정진에 임했습니다. 수련에 참가한 200여명의 대중들도 스님께서 단식 중임에도 정성을 다해 가르침을 준 덕분에 모두들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nbspnbsp▲ 9박 10일 명상수련을 마치고 나서nbsp명상수련을 무사히 마친 대중들은 스님과 함께 솔숲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묵언 중이여서 조용한 가운데 카메라 앞에 선 대중들은 스텝 봉사자들이 ‘김치’ 하자 환한 웃음을 내비쳤습니다. 깊은 정진의 끝자락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속에는 평안함이 느껴졌습니다.nbspnbspnbspnbsp웃다가 울다가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소감문 발표의 시간이 지나가고, 이어서 지난 열흘 동안 정해진 수련 프로그램에 따라 부지런히 정진에 임해준 대중들을 위해 스님은 격려의 말씀과 함께 회향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지난 열흘 동안의 정진이 어떤 공덕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일러주자 대중들은 모두 기쁜 마음이 일었습니다. nbspnbsp“열흘 간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이 잘 쉬어졌기를 바랍니다. 지난 열흘 간 우리가 수행한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많습니다.nbspnbsp수련 중 아무 것도 얻지 못 하고 열흘 간 입을 꼭 다물고 참기만 했다고 하더라도 공덕이 있습니다. 어떤 공덕이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화에 사로잡힌다든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회사를 다니다가 순간적으로 사표를 집어던져 버린다든지, 홧김에 이혼을 한다든지, 홧김에 누구를 한 대 때린다든지, 홧김에 욕설을 한다든지, 욕심에 사로잡혀서 순간적으로 물건을 훔친다든지, 욕망에 사로잡혀서 허락 없이 남의 몸을 만진다든지, 순간적인 찰나에 자기도 모르게 획 돌아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지나놓고 보면 그 순간을 못 참아서 자신에게 많은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허다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를 악 다물고 열흘 동안 눕고 싶은데도 못 눕고, 졸린데도 못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다리 아픈데도 참고, 평상시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을 수련이라는 미명 하에 대중과 함께하는 속에서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참는 경험이 쌓이면 여러분들이 순간적으로 사표를 던져버릴 상황도 참아낼 수 있게 되고, 욕설할 것도 한 번 더 참아지고, 욕심낼 것도 한 번 더 참아지게 됩니다. ‘너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하는 이런 운명에서 자기도 모르게 벗어나는, 즉 재앙과 손실을 막는 공덕을 여러분들이 지은 것입니다.nbspnbspnbsp앞으로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확률을 많이 낮춘 것입니다. 평상시 같으면 열 번 일어날 일이 다섯 번만 일어난다든지, 평상시 같으면 100이라는 자극에 반응하는 사람이 이제는 적어도 150이 넘어야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이 볼 때는 그 성질을 완전히 버렸다고 할 수 없겠지만, 실제로는 성질이 많이 죽었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참기만 했어도 공덕이 있습니다.nbspnbsp또 참는 것을 넘어서서 앉아서 눈을 감고 있어도 졸리지가 않고 혼미하지도 않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몸에 누적된 피로가 그만큼 풀린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의 체내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피로가 빠져나갔기 때문에 눈 감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혼미해지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몸의 건강도 아주 좋아졌습니다.nbspnbsp또 정신적으로도 눈을 감고 있는데 혼미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맑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앉아 있으면 눈만 감으면 이런 저런 망상이 떠오르는데, 눈을 감고 있어도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그만큼 스트레스가 해소된 것입니다. 정신이 맑아진 것입니다. 유리에 가려 뿌옇게 보이던 것이 창문을 열고 보면 환하게 보이듯이 맑게 보이고, 남의 이야기도 더 잘 들리고, 자료를 보더라도 파악이 금방 됩니다. 평소에 우리는 자기 생각에 갇혀서 살기 때문에 사물이 뚜렷이 잘 안 보입니다. 사실은 거의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다니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막이 좀 사라지면 애써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잘 보이고 잘 들립니다. 이렇게 조금만 정진했음에도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많이 풀린 것입니다. 이것만 해도 큰 공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nbspnbsp조금 더 나아가면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이구나’, ‘내가 욕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욕심이 참 많구나’, ‘내가 겸손한 줄 알았는데 잘난 척 많이 하고 살았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다 나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나를 못 보고 살았는데, 이제는 남들이 아는 만큼 나를 알게 되었고, 남이 모르는 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마땅히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내 까르마라면 당연히 그렇게 대응을 했을 수 밖에 없었지’ 이렇게 자기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나에게 손해라고 하면 다음에는 반응을 좀 덜 하도록 조정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면 대응을 할 때 유리해집니다. 공연히 남을 탓하지도 않고, 공연히 자기를 탓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내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우리 인생의 제일 큰 문제는 대부분 남을 탓하거나 자기를 탓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연구하며 앞으로 가기 보다는 주저 앉아서 탓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길을 가다가 돌이 떨어져서 머리를 다쳤으면 먼저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한 후에 어떻게 돌이 떨어졌는지 조사를 해야 되는데. ‘어떤 놈이 돌을 떨어뜨렸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치료를 하지 않겠다’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nbspnbsp누가 돌을 던졌든, 어떤 원인 때문에 다쳤든, 일단 치료부터 먼저 하고 나머지는 다음의 예방을 위해서 원인을 밝혀야 하는 것이죠. 원인을 밝힌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앞으로 가야 합니다. 이런 사고를 앞으로 당하지 않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을 검토하는 것이지 과거의 경험을 검토한다고 지금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항상 남을 탓하거나 자책을 했는데, 이제는 남을 탓하지도 않고 자책도 하지 않고,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음에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공덕이 생겼습니다.nbspnbsp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사람은 이제 평정심을 유지하고 깨어있는 연습이 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감정적 대응을 즉각적으로 하는 것으로부터 예전보다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지켜봄으로 해서 예전 보다 훨씬 더 재빨리 자기 조절이 가능해졌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자신이 한 만큼 공덕을 얻었습니다. 아무 것도 못했다고 하더라도 공덕이 있었고요. 이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계산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여러분들의 삶에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지식으로 배운 것은 마치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지만 영화관 문을 나오면 아무런 기억이 안 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들이 열흘 간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이 공덕은 사라지지 않고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에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에 보이지 않게 작용을 합니다. 재앙은 미연에 막아주고, 복은 짓는 쪽으로 작용할 확률이 커지고 늘어났습니다.”nbsp수련이 모두 끝나자 오히려 마음이 조금 위축된 대중들도 있었는데 자신들도 모르고 있었던 공덕에 대해 스님이 자세히 얘기해주자 많은 위안을 받은 느낌이었나 봅니다. 환한 미소 속에 눈물이 고인 대중들이 많았습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수없이 올라왔지만 모두 어려운 고비들을 잘 넘겨왔기에 스님의 법문은 더욱더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이제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가게 되는데, 수련을 마치고 나서는 어떻게 계속 수행을 이어나가야 하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었습니다.nbspnbsp“이제 내려가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정진의 자세를 내려가자 마자 풀어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짜장면을 먹지 마라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좀 있다가 먹어라는 것입니다. 조금 진정을 해서 풀더라도 천천히 푸세요. 100을 쌓았는데 팍 풀어버리면 10으로 돌아가지만, 천천히 풀면 돌아가더라도 30 정도의 기본 베이스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단식을 할 때 굶는 것 보다는 복식이 중요하듯이 금방 풀지 않도록 진정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려가면 조건이 안 그렇죠. 먹을 것이 자꾸 생기잖아요. 그래서 원래 까르마대로 바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데, 조금 평정심을 유지하고 진정을 하시기 바랍니다.nbspnbsp당장 오늘 집에 가시면 잠이 안 올 겁니다. 그리고 몸에 기운이 누적되었기 때문에 욕심을 내어 밤새 일해도 하루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피곤이 팍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저녁에 10시가 되면 무조건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세요. 잠이 안 오면 누워서 명상을 하세요. 그렇게 해서 이 상태를 조금 온전시키세요. 힘이 난다고 3일만에 다 써버리면 피로를 푼 것이 금방 본래대로 되어 버립니다. 이 상태를 조금 더 길게 가져가려면 푸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 필요합니다.nbspnbsp그리고 그동안 호흡 관찰을 꾸준히 했기 때문에 이제 어떤 일을 하다가 약간 마음이 흥분되거나 피곤하면 잠시 눈을 감고 호흡에 딱 집중을 해보세요. 앉으면 바로 탁 호흡으로 바로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흥분이 되고 뛰었다 하더라도 호흡에 집중하면 10분 정도만 지나면 가라 앉습니다. 10분만 딱 호흡에 집중하면 어떤 흥분도 가라 앉힐 수가 있습니다. 대신 그 때 생각을 다 놓아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다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마음이 들뜬다 싶으면 하루에도 자주 자주 눈을 감고 호흡으로 돌아가서 숨이 가라앉듯이 마음도 같이 가라앉도록 해보시기 바랍니다.nbspnbspnbsp그리고 하루에 50분씩 명상을 하면 좋습니다. 더 나아가면 50분 명상만 하는 것 보다는 20분은 108배 절을 먼저 하고 30분 명상을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108배 절을 하면 우선 몸이 풀어지고, 마음도 참회가 되고, 절을 한 후에 바로 앉으면 호흡이 거칠기 때문에 처음에 호흡이 잘 잡힙니다. 호흡이 가라앉는 속도 대로 마음을 딱 집중시켜서 안전하게 명상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108배 절을 한 후에 명상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nbspnbsp그리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다시 때가 묻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해 줍니다. 매일 1시간씩 30년 동안 명상을 한다고 해서 때가 닦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명상은 6일 위에 7일, 7일 위에 8일, 8일 위에 9일, 이렇게 나아가야 업식의 때가 닦여 나가기 때문입니다. 매일 명상을 하는 것은 지금의 상태를 90 선에서 멈추느냐, 80 선에서 멈추느냐 하는 문제이지 더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아가려면 집중 명상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1년에 한 차례 내지 두 차례는 집중 명상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명상하는 것이 매일 샤워하는 것이라면, 집중 명상하는 것은 목욕탕에서 때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매일 샤워해도 목욕탕에 가면 때가 줄줄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들의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때가 맺혀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명상하는 프로그램이 이곳 문경 수련원에서 격주로 있으니까 조용히 와서 참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조금씩 조금씩 진척이 되어 나갈 수 있습니다. nbspnbsp명상을 해보니 어떤 과제가 딱 교통정리가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었잖아요. 그렇게 욕망, 욕구, 바램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은 아주 청명한 상태에서 방향을 딱 잡아야 합니다. 그런 후 밀고 나가야 우선 자신에게 확신이 생깁니다. 내가 확신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도 그 뜻을 전하는 파워가 생깁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을 말할 때는 목소리만 크지 전달이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한 것은 조금 이야기해도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약회사 직원이 약의 성분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그 약을 먹어본 사람이 ‘이 약 먹으면 직빵으로 낫는다’고 하면 귀가 솔깃해지죠. 그렇듯이 자기가 경험한 것이 그만큼 파워가 있습니다.nbspnbsp세상 살이가 바쁘지만 10일 명상을 안 하고 365일 일하는 것보다 10일 명상을 하고 355일 일하는 것이 일을 하는 데에도 효과적이고, 개인도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세속적으로 봐도 낭비가 아닙니다. 회사에서 명상을 안 보내준다면 사표를 내겠다는 배짱이 있어야 해요. 가게에서 하루에 수백만원 매출이 있어도 명상을 위해서는 문을 탁 닫고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가게에 연연하며 묶여 살게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부부지간에도 ‘평소에 바가지 안 긁고 잘할 테니까 대신 이건 꼭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자기 삶이 자유로워지지 늘 아웅다웅 하고 살면 피곤한 인생이 됩니다. 이런 자기 인생의 중심을 잡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수련의 시작부터 끝까지 필요할 때 마다 매일 매일 자상한 법문을 해준 것도 큰 감동이었는데, 집으로 돌아갔을 때도 어떤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는지 자상하게 일러주자, 또 한번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나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인연을 맺워주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일을 악을 쓰면서 할 것이 아니라 더 재미있고 기쁜 마음으로 해보자고 당부했습니다.nbspnbsp“우리가 대승 수행자라면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그 일에만 머무르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도록 인연을 맺어주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조금 더 평화롭고 정의롭도록, 환경이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주위와 더불어 함께 해나간다면 더더욱 좋은 일입니다.nbspnbspnbsp그러나 좋은 일은 악을 쓰고 하면 안 됩니다. 악을 쓰고 하게 되면 다시 자기를 해치게 됩니다. 효과도 안 납니다. 어떤 일을 즐겁고 재미있게 기쁨으로 해야 옆에 사람들도 좋은가 보다 싶어서 따라 옵니다. 악을 쓰고 하면 이해는 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중성이 떨어집니다. 여러분들이 굉장히 검소하지만 그것이 힘들어 보이면 사람들이 불쌍해서 돈을 좀 주긴 해도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걸식을 하더라도 떳떳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해야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나도 한번 해볼까’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의 부러움을 사야지 동정을 사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오무러 들어서 남으로부터 동정을 사려고 합니다. 그것은 중생의 심리입니다. 오히려 떳떳하고 넉넉하게 살아서 세상의 부러움을 사야 이 일이 자꾸 확산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토로 가는 길입니다.”nbsp수련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혜와 자비로 소중한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스님에게 뜨거운 박수 갈채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회향 법문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중들 모두에게 스님은 한명씩 악수를 건내며 “수고했어요”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nbsp시끌벅적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대중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문경정토수련원은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습니다.nbspnbsp오후 4시부터는 이번 명상수련에 이어서 안거에 들어가는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로 다른 소임을 맡아 흩어져 살고 있던 대중들은 오랜만에 함께 모인 것을 기념하여 스님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공동체 안거에 참가하고 있는 상주 대중들nbsp공동체 대중들은 각자 작성한 명상수련 소감문을 모두 발표했고, 스님은 집중해서 소감문 발표를 경청했습니다.nbspnbsp▲ 명상수련을 마친 안거 공동체 상주 대중들과의 대화 시간nbsp소감문 발표가 모두 끝난 후 스님은 몇 가지 소회와 당부의 말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특히 명상수련을 통해 느낀 점들을 일상 생활 속에서도 한번 적용해 볼 것을 제안해 주었습니다.nbspnbsp“소감을 들어보며 느낀 점은 다들 자기 상태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이였던 것 같아요. 남이 지적을 하면 마음도 상하고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죠. 그런데 자기 스스로 ‘아, 내가 이런 성질이 있구나’ 이렇게 자각을 하니까 마음에 상처도 없고, 원래 있던 상처도 해소가 되고, 자각한 것이니까 스스로도 잘 받아들여지죠. 그래서 되고 안 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상태를 알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nbspnbsp앞으로는 일을 하더라도 편안한 가운데 꾸준히 해보면 좋겠어요. 정토회의 일은 다 바쁘죠. 그런데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편안히 하면서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짝 달려갔다가 퍼져서 쉬고 또 다시 바짝 달려가는 토끼 같은 방식이 아니라 거북이 같이 꾸준히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요.nbspnbsp자기를 살펴봤을 때 ‘내가 꾀를 내는가?’ 물어보고 그것이 아니라면 천천히 가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면 좋겠어요. 또한 ‘내가 일에 집착하는가?’ 물어보고 그것이 아니라면 늦게 까지 업무를 해도 괜찮습니다. 명상을 할 때 편안한 가운데 집중해 보듯이, 일상 생활 속에서도 게으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일에 빠져서 집착하는 것도 아닌, 수행하듯이 한번 해봤으면 합니다.”nbspnbspnbsp거북이 같이 꾸준히 가보라는 말씀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아무래도 정토회가 전체적으로 바쁘게 일하는 경향이 많은데 조금 더 여유를 갖되 꾸준히 하는 자세를 가져보라는 당부였습니다.nbspnbsp특히 소감문 발표 중에 좌절하고 싶을 때 다시 발심해서 편안한 상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정토회는 수많은 실패를 통해서 조금씩 발전되어 여기까지 왔다”고 강조하면서 “우리는 욕심으로 성과만 내려고 하는데,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연습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보면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공동체에 들어와서 살고 있으면 주위 가족들이 노후 보장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는데 경제적 측면의 노후 보장을 넘어서서 우리 스스로가 수행 정진을 통해 죽음에도 두려움이 없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도 서로 보살피는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자는 제안도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명상수련 소감문에서 나온 여러 가지 내용들을 점검해 주면서,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었습니다. 체하는 것을 주의하고, 음식을 적게 먹고, 천천히 먹는 자세를 갖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편안한 옷을 입도록 하고, 앉는 자세를 편안하게 하고, 가능한 문을 닫아서 샌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고, 스텝들은 수련장 주위에서 가급적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 등에 대해 스님의 경험담과 함께 구체적인 방법들을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또 대중을 안내하는 법사님들에게는 “너무 목적 의식을 갖고 안내하지 말고, 지적하거나 원칙을 들이밀기 보다는 대중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고 포용해주는 문화를 만들어가면 좋겠다”고 당부하면서 “행사 프로그램도 너무 쪼들리게 잡지 말고 여유있게 해서 서로 인사도 나누고 갈 수 있게 하고, 그렇게 해야 포용성이 있는 문화가 생겨날 수 있다”고 조언해 주었습니다.nbsp단식 중임에도 불구하고 집중해서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동체 대중들 한명 한명의 상태를 세심히 챙겨주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아낌 없는 조언을 해준 스님에게 대중들은 감사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7월31일까지 안거가 계속되는데 남은 기간 부지런히 정진할 것을 다짐하며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드린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 스님께 삼배로 감사 인사를 올리는 공동체 대중들nbsp내일은 충주 호암체육관에서 열리는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에 참가해 졸업생들을 위해 법문과 함께 수계식을 해줄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2015.07.19. 94,820 읽음 댓글 48개

2015.7.9~31 명상수련 및 안거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 4시 30분에 도량석 소리와 함께 법당으로 내려온 스님은 정토회 서울 공동체 대중들과 새벽 예불 및 108배와 명상을 함께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명상을 마치고 나서는 발우공양에 참석해 오늘부터 21일 동안 명상 수련 및 하안거 수련을 시작하는 상주 대중들을 위해 ‘명상 수련에 임하는 마음자세’에 대해 법문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먼저 “어제 인도JTS에서 연락이 왔는데 수자타아카데미가 사립학교 허가가 났다고 합니다” 라며 반가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대중들은 큰 박수로 함께 기뻐했습니다. 스님은 허가 받기 위해 수고한 권도영 법우가 한국에 오면 수고했다고 인사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이 불교라고 하면서 계정혜 삼학을 닦는 원리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불교 수행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입니다. 명상 수련 기간 동안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율은 저절로 지켜지겠죠. 그래서 명상을 하는 10일 동안은 주로 선정을 닦게 됩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마음을 코 끝에 딱 집중해서 호흡을 알아차리고 감각을 알아차리고, 움직을 때는 자세를 알아차리고, 경계에 부딪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뚜렷이 알아차림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선정을 닦는 요체입니다.nbspnbspnbsp그러면 선정을 닦는 것이 목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와 외도의 큰 차이는 선정을 닦기 위해 고요히 집중하는 데 까지는 동일한데 불교는 그렇게 해서 지혜를 증득하는 데 까지 나아갑니다. 고요하게 있는 것만이 핵심이 아닙니다.nbsp지혜는 8정도에서 ‘정견’과 ‘정사’입니다. ‘정견’은 세상 만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든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잘 보면 공간적으로도 서로 연관이 되어있고, 시간적으로도 전과 후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전과 후가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을 ‘인과’라고 합니다. 이 세상 만물이 움직이는 현상에는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그 이전에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일어나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서 다음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의 현상을 보면 이 현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알 수가 있고, 또 하나의 현상을 보면 이 현상이 원인이 되어서 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지 예측이 됩니다. 그래서 이 인과에 밝은 것이 지혜입니다.nbsp지혜라는 것은 이 세상 만물이 시공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연기법을 뚜렷이 아는 것이고, 시간적으로는 인과가 분명함을 아는 것입니다. 인과가 분명함을 아는 것을 조금 더 세세하게 아는 것이 십이연기입니다. 원인의 원인, 원인의 원인을 자세히 규명해 놓은 것입니다.nbspnbsp또 현재 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면 괴로움입니다. 그 괴로움이라는 것은 괴롭다 하는 것만이 괴로움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상태는 즐겁고 괴롭고 하는 것이 되풀이되고 있는데, 이 되풀이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집멸도에서 ‘고제’라고 합니다.nbspnbsp그렇다면 이런 괴로움은 원인이 있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구가 일어나는데 그 욕구는 하고 싶다는 것과 하기 싫다는 것 두 가지로 일어나죠. 욕구가 일어나면 그 욕구대로 할려는 집착이 일어나고, 그 집착으로 인해서 행이 일어나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서 고가 발생합니다. 이런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집멸도에서 ‘집제’라고 합니다.nbsp이 괴로움은 원인이 있어 생겨난 것이니까 원인이 소멸되면 이 괴로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멸제’입니다.nbspnbsp그러면 이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원인을 소멸하는 방법으로 여덟가지 바른 길인 ‘도제’가 나오고, ‘도제’에 의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난 상태인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성제의 원리에 대해 뚜렷이 밝은 것, 8정도에 대해 뚜렷이 밝은 것, 중도에 대해서 뚜렷이 밝은 것, 이런 이치에 환하게 밝은 것이 바른 견해, 즉 ‘정견’입니다. nbspnbspnbsp결국 이런 이치에 의해서 ‘이런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일은 해야 한다’ 하는 바른 사유인 ‘정사’가 나오게 됩니다. 즉 탐진치 삼독은 멀리 떠나야 한다는 ‘출리’와 남을 해치거나 남을 괴롭히거나 남을 손해끼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불해’를 바르게 알게 됩니다. 이런 출리와 불해에 대한 바른 생각이 있음으로 해서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이라는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행이 나오게 됩니다. 계율을 잘 지킴으로 해서 선정을 닦는 기초가 되고, 선정을 닦음으로 해서 이치를 온전하게 터득하는 지혜를 증득하게 되고, 지혜를 증득함으로 해서 다시 마음이 점점 고요해집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이치에 밝으면 갈애에 끄달리지 않고 계율이 저절로 지켜집니다. 그래서 이것은 꼭 단계적 개념이 아니고 세가지가 서로 상호보완적입니다.”nbsp단순히 마음만 고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명상을 통해 지혜를 증득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이였습니다. 무엇보다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는 상호 연관된 원리가 아주 명쾌하게 다가왔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은 제한된 공간에서 이뤄지는 수련이여서 중요 계율이 저절로 지켜지지만 대신 정해진 일반 규칙들을 잘 지켜야 함을 강조했습니다.nbspnbspnbsp“명상을 하는 제한된 공간에서는 중요 계율을 저절로 잘 지키게 되는데 꼭 오계만이 아니라 수련에서 정해진 규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규칙을 안 지킬 때는 나의 까르마에 끌려가는 것이죠. 일어나는 시간인데도 ‘아이고, 뭐 더 누워있자’, 먹지마라고 하는데도 ‘배가 고픈데 좀 먹지 뭐’, 이런 것들은 다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고요한 마음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계율을 속박으로 느끼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임하세요. 수련에 필요한 주어진 규칙을 잘 지키는 토대 위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뚜렷이 깨어있는 것을 꾸준히 연습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꾸준히 연습해 나감으로해서 이치를 터득할 수 있습니다. 이치를 터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이 깨어있음으로 해서 작용과 법칙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편안한 마음으로 꾸준히 연습하면 이치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면서 명상 수련에 임하는 마음 자세를 구체적으로 일러주었습니다. nbspnbsp“연기법을 안다는 것을 무상함을 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감각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늘 일어나고 사라지고 항상함이 없죠. 어떤 것도 늘 일어나고 사라지는데 우리는 그것이 일어나면 항상하는 줄 착각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것이 흘러갈 뿐임을 알게 되면 집착을 하지 않게 되죠. 그래서 ‘무상’이라는 것을 늘 터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연기법인 ‘무아’를 늘 터득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원리를 발견해 나가는 것입니다.nbspnbspnbsp꾸준히 연습하면서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면서 ‘아, 이치가 이렇구나’, ‘나의 까르마는 이렇구나’, ‘번뇌에 순간적으로 이렇게 끌려가는구나’ 이런 것들을 늘 발견해가면서 정진을 하면 정진이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이럴까 저럴까 공상하거나 교리를 떠올리는 것은 생각으로 망상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실제로 경험하면서 이치를 적용해보는 것은 끊임없는 연습입니다.nbspnbsp그래서 이번 10일은 억지로 하지 마세요. 억지로 하면 긴장을 하거나, 하다가 안 되면 포기를 해서 나태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초기에는 주로 긴장을 하고, 5일을 넘어가면 대부분 나태해 집니다. ‘재미가 없다’, ‘계속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되나’, ‘이렇게 해서 뭐하지?’ 하면서 자꾸 나태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꾸준히 연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10일만 갖고 부족합니다. 3년을 앉아서 연습해도 될까말까 한 것이니까, 주어진 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연습을 하세요.nbspnbsp목적의식이 너무 강하면 긴장이 되지만, 긴장이 없는 상태에서도 원을 발해야 합니다. ‘내가 이번에 이것은 꼭 지키고, 이것은 꼭 경험해 보겠다’ 이렇게요. 욕심으로 하면 긴장이 되니까 욕심을 내지 말고 꾸준히 연습하는 자세가 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가고 안 가고에 구애받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의 까르마를, 또 자기의 까르마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치를 자기가 터득해야 합니다. 안 되는 것도 안 되는 이치를 알면 그것도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했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nbsp처음에는 ‘다리 아프다’, ‘졸린다’ 하면서 어떻게든 해볼려고 애를 쓰고, 얼굴이 상기가 되고, 잘 안되어서 힘들어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중간이 넘어가면 다리 아픈 것도 넘어가고 졸리는 것도 넘어가니까 이제 지루해 하면서 연습을 하지 않는 게으름을 피웁니다. 그렇게 시간 낭비 하지 말고, 편안한 가운데 꾸준히 합니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아무리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을 해야 남에게 얘기할 때도 구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론만 알아서 얘기하면 공중에 뜬 얘기가 되고, 항상 10가 부족한 현상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번에 편안한 가운데 연습을 잘 해보시기 바랍니다.”nbsp스님의 말씀을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꾸준히 연습해 보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대중들은 스님의 자상한 안내 덕분에 명상을 하기 전 약간의 걱정스런 마음과 나태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며 모두들 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nbspnbsp발우공양을 마치고 곧바로 스님은 명상 수련이 진행되는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문경 정토수련원에서는 오후 1시부터 수련 참가자 접수와 함께 10일 동안의 명상 수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10일 명상 수련 후에도 7월31일까지 2차, 3차 명상수련을 연이어 진행할 예정입니다. 정토회 공동체 상주대중들은 10일 명상 수련 후 7월31일까지 하안거 수련을 갖습니다.nbspnbsp 오늘 7월9일부터 31일까지 21일 동안 정토회는 1차, 2차, 3차 명상 수련 및 공동체 안거 기간을 갖습니다. 스님은 차수별 수련생들의 명상을 지도하면서 정진의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묵언의 명상을 해야 하므로 이 기간 동안 ‘스님의 하루’도 묵언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21일 동안의 용맹 정진을 마치고 8월1일날 더욱 맑고 편안해진 모습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015.07.09. 95,224 읽음 댓글 69개

2015.7.8 ‘안거에 임하는 자세’ 법문 및 영문책 출판 회의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서울 공동체의 발우공양에 참석해 내일부터 안거에 들어가는 상주대중들을 위해 ‘안거에 임하는 마음자세’에 대해 법문했습니다.nbsp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대중들과 함께 새벽 예불 및 108배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 스님은 기도를 마치고 발우공양에 참석했습니다.nbsp▲ 새벽 예불발우공양 후에는 내일부터 명상수련 및 안거에 들어가는 공동체 상주 대중들을 위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먼저 스님은 평소 과로를 많이 하는 공동체 상주 대중들이 어떤 마음 자세로 수련에 임해야 하는지 당부했습니다.nbsp“내일부터 명상수련에 들어갑니다. 충분히 자고 시작해도 앉으면 또 졸리긴 할 겁니다. 그러나 깜박 깜박 졸리는 정도이면 편안한 마음으로 명상을 할 수 있는데, 몸을 피곤하게 하거나 잠을 제대로 못자고 내려가게 되면 앉아서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자게 됩니다. 너무 졸린데 앉아 있으면 괴롭잖아요. 괴로우면 수행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다. ‘이걸 해야 하나?’, ‘내가 왜 이러고 앉아있나?’, ‘나는 왜 이 정도 밖에 안 될까?’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데 다시 괴로워지게 됩니다. 통증은 통증일 뿐인데 통증이 괴로움이 되는 이유는 싫은 마음을 내기 때문입니다.”nbsp몸이 피곤한 상태에서 억지로 수련에 임하면 부작용이 생긴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오전까지만 일하든지 저녁 먹기 전까지는 업무를 모두 종료하고 일찍 주무시기 바랍니다” 라며 다시 한번 휴식을 취한 후 수련에 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이어서 이번 안거 기간에는 과로로 인해 비정상이 된 몸을 모두 정상화시켰으면 좋겠다며 말을 이었습니다.nbsp“우리가 수행자로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밥 먹고,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이렇게 정상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도 편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시 한가운데서 사회적 실천을 하면서 생활하기 때문에 규칙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nbsp▲ 발우공양세속 사람들은 밤에 늦게까지 일하는 대신에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든지, 필요하면 아무 때나 잔다든지, 밤늦게까지 일해도 아침에 늦게 일어날 수 있으니까 조정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행자로써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기상 원칙은 그대로 정해 놓은 채 밤에는 늦게까지 일을 합니다. nbsp세상 일을 하다보니 잠은 12시나 1시에 자면서 아침에는 4시30분에 기상을 하니까 처음에는 괜찮은데 시간이 흐르면 점점 몸에 무리가 되고, 그래서 마음이 자꾸 힘들어지고, 그래서 규칙을 자꾸 어기게 되고, 그래서 피로도 많이 누적되고, 수면도 부족하고, 마음도 어쩌면 지쳐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웃고 생기발랄 하지 못합니다. 몸이 아프고 지쳐있는데 억지로 웃으려니까 자연스럽지가 못합니다. 이런 비정상이 오래 지속이 되면 비정상이 습관이 됩니다.nbsp그래서 이번 안거 기간에 모든 비정상을 정상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피로도 싹 풀어야 되고, 건강이 안 좋은 것도 회복을 해야 합니다. 안거에 들어가는 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과식하지 않고, 과자, 술, 커피도 일체 먹지 않고, 계속 선정을 닦고 마음을 편안히 가진 채 열흘 정도 명상을 하게 되면 몸에 있는 독성이 다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안거는 우리에게 최고의 휴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시기 바랍니다.그러나 관성의 법칙이 있다 보니 일하다가 휴식을 하면 휴식이 안 되고 오히려 일의 관성 때문에 앉아 있는 것이 더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12일은 힘들지만 관성이 멈추면 이제 편안해집니다.스님도 잠자는 시간도 안 지키고, 식사도 제 시간에 못 하고, 과로를 하다 보니까, 일은 해야 되는데 몸은 못 견뎌서, 해열제도 먹고, 진통제도 먹고 해서 지금 몸에 독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에 명상을 하면서 비정상을 정상화시키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1년 동안 약간의 비정상이 있더라도 건강을 유지 해나갈 수 있으니까요.”nbsp이번 안거 기간 동안 과로로 인해 생긴 모든 비정상을 정상화시키는 일을 하자는 말씀이였습니다. 그러면서 간혹 단식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단식은 가능한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단식은 가능한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단식 끝나고 나서 다시 20일 동안 복식하기 위해 가만히 앉아 있을 여가가 없어요. 그래서 단식 후 에너지를 과하게 쓰게 되고 그러면 몸에 무리가 갑니다. 또 허기가 지니까 복식을 제대로 못해서 오히려 위에 탈이 납니다. 수련 기간 중 제공되는 음식은 매우 적은 양이므로 거의 단식 효과가 납니다.nbsp만약 단식을 하는 분들이 있다면 절대 과로를 하면 안 됩니다. 공급되는 에너지보다 사용되는 에너지를 초과하게 되면 고장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입에 집착하면 해도 될 것 같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즉 무지의 소산으로 몸을 함부로 쓰게 되는 것이지요.nbsp반대로 몸을 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일을 해도 되는데 마음에서 두려움이 생겨서 하면 안 될 것 같은 심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꾸 몸을 사리게 됩니다. 이것도 실재를 모르는 무지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럴 때는 과감하게 해버려야 됩니다. 하기 전에는 두렵지만 하고 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명상을 할 때 다리가 아프다든지 졸립다든지 해서 명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실제로는 해도 되는데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해버려야 해결이 됩니다. 자기가 싫어하거나 취향에 안 맞거나 기분이 나쁘면 바로 몸 핑계를 대고 몸을 사리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것이 모두 무지의 소산임을 알고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nbsp몸을 함부로 하거나 몸을 사리거나 두 가지 경우 모두 원인이 무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안거 기간 동안 새롭게 충전을 해서 몸을 잘 추스르기 바랍니다. 편안하게 몸과 마음을 정상화시켜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하더라도 늘 웃으면서 기쁘게 일을 해야 합니다. 억지로 참고 일을 한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 안거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몸을 사리지도 말고 몸을 함부로 하지도 말고 실제 어떤지를 살펴서 편안하게 몸과 마음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말씀이였습니다. 스님의 애정이 담긴 조언을 새겨 들으며 모두 환한 웃음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했습니다.nbsp이제 내일부터 명상수련을 시작으로 정토회는 공동체 안거가 시작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우기가 되면 수행자들이 한 곳에 머물며 집중적으로 정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전통에 따라 정토회도 바쁜 일상과 업무를 내려놓고 집중적으로 정진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스님을 비롯해 공동체 대중들 모두 비정상화 되어 있던 몸과 마음을 다시 정상화시켜서 한해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충분히 회복하기를 기원해 봅니다.nbsp발우공양 후 스님은 원고 교정 업무를 보다가 오전 9시부터는 정토회 행정처, 평화재단, 청년포럼, 청년정토회 등 각 단위 부서장들과 하반기 행사일정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 하반기 일정 논의연말까지 수많은 강연과 미팅 등 조금의 빈틈도 없이 채워지는 스님의 스케쥴을 보니 스님의 건강이 많이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명상수련과 안거는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nbsp이어서 스님은 하루 종일 집무실에 머물면서 명상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보았습니다.nbsp저녁 8시에는 미국에서 제이슨 임이 가족들과 함께 귀국해 스님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왔습니다. 제이슨 임은 스님이 미국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미팅을 갖거나 강연을 할 때 스님의 입이 되어 통역을 해주는 분입니다. 통역 솜씨가 매우 뛰어나서 스님도 늘 감사함을 많이 느끼는 분입니다. nbspnbsp▲ 제이슨 임의 가족과 함께제이슨 임의 아들은 스님을 보자마자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면서 스님에게 초코렛을 선물했습니다. 스님은 감사히 선물을 받고 가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밤 9시부터는 제이슨 임과 함께 스님의 영문책 출판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회의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불교 서적 출판은 현재 어떤 추세에 있고, 한국과는 달리 스님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영미권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에 대한 많은 의견을 주고 받았습니다.nbsp▲ 스님의 영문책 출판 회의특히 스님은 현대 사회는 과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불교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대안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해 정치, 종교, 문화, 역사, 과학 등 다방면에서 스님의 고견을 들려주었습니다.nbsp제이슨 임은 스님의 통찰을 듣고 무척 좋아했고, 최근 자신이 직접 스님의 법문을 번역하여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집필하고 있는 책의 컨셉과 방향에 대해서도 공유해 주었습니다. 조만간 외국인들이 스님의 법문을 제대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또다른 영문책이 출간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nbsp제이슨 임과의 영문책 출판 관련 회의는 밤12시가 다 되어서 마쳤습니다.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에 귀가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2015.07.09. 51,939 읽음 댓글 32개

2015.7.7 발우공양 후 ‘선정을 닦는 방법’에 대한 법문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서울공동체의 발우공양에 참석해 명상수련에 들어가는 상주대중들을 위해 ‘선정을 닦는 요체’에 대해 법문했습니다.nbsp새벽 4시 30분에 도량석 소리와 함께 법당에 내려온 스님은 서울공동체 상주대중들과 함께 새벽 예불과 108배, 명상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기도 후에는 발우를 펴고 앉아 공양을 들었습니다. 공양 후에는 어떤 대중들이 발우공양에 참석했는지 살펴본 후 말문을 열었습니다. 먼저 인도JTS의 의료 파트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박종화님이 비자 갱신을 위해 잠시 한국에 머물게 되었다고 해서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얼마 전 인도는 45도가 넘을 정도로 무더운 날씨였는데 “더운 날씨에 수고가 많았죠?”라고 스님이 묻자, 박종화님은 “한국에 오니까 너무 춥다” 며 몸을 움추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다들 덥다고 아우성인데 인도의 더위를 경험하고 오니 오히려 춥게 느껴진다는 말에 대중들도 눈을 크게 뜨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nbspnbsp그리고 “내일 모레부터 안거에 들어가면서 명상수련을 하게 됩니다”라며 명상수련에 임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 법문해 주었습니다. 정토회의 공동체에 상주하는 대중들은 7월9일부터 31일까지 하안거 수련 기간을 갖게 됩니다. 하안거 수련 중에는 명상수련을 10일 동안 하게 되는데, 스님은 명상은 선정을 닦는 과정이고 선정을 닦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먼저 수행자는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기본이고 그 다음은 선정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nbspnbsp“수행자가 첫째 해야될 일은 계율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계율을 잘 지키게 되면 나쁜 짓은 하지 않게 되니까 사람들이 볼 때 훌륭한 인격이 되죠. 그래서 수행자와 보통 사람이 구분이 되는 것은 계율입니다. 계율을 지킴으로 해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즉,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인격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 마음 씀씀이, 이런 것들을 보면 ‘저분은 수행자이구나’ 하는 것이 들어나게 됩니다.nbspnbspnbsp그러나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수행자들이라고 다 마음이 편안한가. 다 행복한가. 그것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우리가 양반들을 보면 굉장히 엄격하게 자기를 관리하지만 마음은 굉장히 불안한 사람도 있고, 긴장이 되어 있는 사람도 있고, 괴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수행자도 마찬가지입니다.nbspnbsp그래서 두 번째는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계율은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덕목에 들어가기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 수행을 잘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기본 토대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꾸준히 정진을 한다고 할 때는 선정을 닦는 것을 의미합니다.”nbsp계율을 잘 지키면 훌륭한 인격이 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을 수 있으니 선정을 닦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선정을 닦기 위한 요체에는 세가지가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nbspnbsp“선정의 요체는 세가지입니다. 첫째,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마음이 편안한가. 자기 혼자 누워있을 때는 편안하지만, 사람들과 같이 있거나, 발우공양을 하거나, 어른을 만나거나, 어떤 일을 할 때는 마음이 늘 긴장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늘 불안합니다. 긴장이 되거나 불안해서는 안 되고,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을 살펴서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야 합니다. 어느 때나 어디를 가나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야 합니다.nbspnbspnbsp둘째,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 또렷이 집중이 되어야 합니다. 여름날 강아지가 마루 밑에서 잘 때 편안하죠. 아무런 긴장도 불안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아지가 선정을 닦는 것은 아닙니다. 멍청한 상태입니다. 편안하면 멍청해지기가 쉽습니다. 편안하기는 한데 졸음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깨어있지 못합니다. 편안하기는 한데 마음이 산만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한 쪽으로 집중이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선정을 닦는다 할 때는 편안한 가운데 마음이 또렷이 집중이 되어야 합니다.nbspnbsp셋째, 깨어있어야 됩니다. 깨어있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주어진 바깥 상황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운전수가 운전을 하면서 앞에 가는 차, 옆에 오는 차를 알아차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바깥 상황에 깨어있는 것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에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지금 불안하면 불안한 줄 알고, 긴장이 되면 긴장이 되는 줄 알고, 산만하면 산만한 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상태에 뚜렷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뚜렷이 깨어있는 것을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 깨어있는다, 알아차린다. 이런 여러 가지 용어를 씁니다. 선에서는 ‘소소영영하다’고 표현합니다. ‘화두에 뚜렷이 깨어있다’, ‘화두를 들고 있다’고 표현합니다.nbspnbsp우선 호흡에 깨어있어서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미세한 감각에까지 깨어있으면, 욕망이 일어나거나 화가 일어나면 몸에서 약간 열기가 느껴지거나, 호흡이 약간 가빠짐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호흡이 약간 가빠지기 시작하면 ‘어, 내가 지금 욕망이 일어나는구나’, ‘내가 지금 화가 일어나려는 조짐이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nbspnbsp첫째, 마음이 들뜨지 않고 항상 편안하게 가지는 것, 둘째, 마음이 산만하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하는 것, 셋째, 마음이 뚜렷이 깨어있는 것, 즉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 이 세가지가 선정을 닦는 요체입니다.”nbspnbsp선정을 닦는 방법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가지를 모두 실천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면 깨어있기가 약해질 것이고, 깨어있으려고 하면 마음이 긴장되어서 편안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편안한 가운데 집중이 되었다고 해도 망상이 자꾸 끼어들면 알아차림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nbspnbsp스님은 그렇기 때문에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무한한 연습 가운데 점점 되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죠.nbspnbsp“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왜냐하면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기 위해서는 먼저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연습장에서 먼저 연습을 한 후 도로 주행을 연습해야 하는 것처럼 앉아서 좌선을 할 때는 고요한 가운데 알아차림을 유지하지만 목표는 일상 생활 가운데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는 계속 앉아만 있을 수 없잖아요. 행주자와 어묵동정 간에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상 생활 속에서는 잘 안 되죠. 그래서 꾸준히 연습을 해야 됩니다.nbspnbspnbsp일상 생활 속에서도 잘 하기 위해서는 특히 이번 안거 중에 집중적인 연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편안한 가운데 딱 집중을 해서 자신의 호흡에, 자신의 감각에 분명히 깨어있는 연습을 열흘 동안 꾸준히 해봅니다. 연습한다는 마음으로 하세요. 안 되면 또 하고, 안 되면 또 하고, 이렇게 임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연습한다는 마음으로 안 하니까 명상이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졸다가 시간을 다 보내고, 졸음이 좀 가시면 통증 때문에 참다가 시간을 다 보내고, 졸음과 통증이 좀 가시면 망상을 피우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시간 죽이기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졸음이 오는 가운데도, 통증이 좀 있는 가운데도, 목표를 세우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집중을 해서 꾸준히 연습해 봅니다.nbspnbspnbsp한 열흘 정도 지속적으로 연습을 하면 일상 생활 속에서도 알아차림을 어느 정도 유지시킬 수가 있습니다. ‘연습해야지’ 이렇게 마음을 내면 명상이 기다려지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이고, 앉으면 다리 아프고, 졸면서 어떻게 앉아 있을까?’ 이렇게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좀 편안하게 그러나 적극적으로 마음을 내서 명상수련에 기쁜 마음으로 임하시기 바랍니다.”nbsp시간 낭비가 되지 않으려면 연습한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말씀이였습니다. 바쁜 일상 생활 가운데에서는 이렇게 집중적으로 연습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니 열흘 동안 집중적으로 연습하면 일상 생활 속에서도 어느정도 유지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들었습니다.nbspnbsp걱정스런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명상수련에 임해보라는 스님의 격려 말씀에 모두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스님께 감사한 마음을 표했습니다.nbspnbspnbsp발우공양 후에는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해 평화재단 평화교육원 조민 원장님과 평화연구원 김형기 원장님, 윤여준 전 장관님과 평화재단의 향후 운영 방향에 대해 회의를 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회의 후에도 스님은 하루 종일 평화재단에 머물면서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 및 회의를 가졌습니다. 밤 10시가 넘어서 서울 정토회관에 귀가한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nbspnbspnbsp내일도 하반기 일정 논의, 인도성지순례 준비 회의, JTS 대표님과 미팅, 영문책 출판 회의 등 하루 종일 미팅 및 회의를 가질 예정입니다.

2015.07.08. 58,611 읽음 댓글 34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