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제주지회
티끌같은 존재임을 알고 나니 더욱 편안합니다

'이번 인터뷰는 꼭 직접 만나서 해야겠다.'라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인터뷰이가 제주지회 오정순 님으로 배정되었습니다. 갑자기 물러서는 마음이 확 일어났습니다. 아침 비행기 타고 당일치기로 다녀올까도 생각했지만 낭비이기도 하고, '환경'을 위해 참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안 가길 잘했습니다. 온라인에서도 오정순 님은 눈부시게 환하고 행복한 모습이라 대면했다면 자칫 제 눈이 멀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2 정토사회문화회관 개원식 봉사 후
▲ 2022 정토사회문화회관 개원식 봉사 후

성공, 불행, 정토회

가장 성공했지만 암울했던 시기에 정토회를 만났습니다. 저는 서울 토박이고 남편은 제주도 토박이 입니다. 양가 모두 반대하는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 나는 돈 많이 벌어서 보란 듯이 잘 살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때부터 돈 버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습니다. 돈만 보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지며 남편의 술 마시는 횟수가 늘었습니다. 저밖에 모르던 가정적인 남편이 사람들을 불러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점점 남편 주변에 술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남편은 술친구들과 밖으로 돌고, 저는 돈 버는 재미에 빠져 회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은 좋은 물건과 두둑한 용돈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때는 열심히 돈 벌어서 아이들에게 좋은 물건 사주고 맛있는 음식 사주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삐뚤어지는 아들을 보며 저의 양육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참 괴로웠습니다. '뭐가 잘못됐을까? 난 열심히 살았는데?' 갱년기까지 겹치며 혼자 방황하고 있을 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 SNS에서 한창 뜨고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스님 말씀에 위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2015년 제주도에서 열린 즉문즉설 강연에 참석한 후 바로 정토회에 들어왔습니다.

2023년 6월 4일, 제주시탑동_ 경전반JTS홍보활동 (아래왼쪽 두번째 오정순 님)
▲ 2023년 6월 4일, 제주시탑동_ 경전반JTS홍보활동 (아래왼쪽 두번째 오정순 님)

로맨티스트 아버지 그리고 엄마, 엄마, 엄마

저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했습니다. 육 남매 중 넷 째인 저만 할머니에게 맡겨져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로맨티스트여서 엄마가 세 분이었습니다. 저만 낳은 엄마와는 제가 3살 때 헤어졌습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 제가 서른네 살 때 두 번 가진 만남이 전부입니다. 엄마가 원하지 않아 만남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도 엄마가 원하지 않으면 안 보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 그 뒤로는 엄마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생활비를 주러 할머니 댁에 왔습니다. 만나면 아빠라고 불렀지만, 여러 친척이 있는 곳에서는 아빠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부르지 말라고 한 사람은 없지만 뭔가 어색했습니다. 아버지가 장손이라 행사 때마다 제가 사는 할머니 집에 친척들이 모였습니다. 그때는 엄마 아빠 손잡고 오는 사촌들이 부러웠습니다.

2022년 정토사회문화회관 개원식 봉사 후
▲ 2022년 정토사회문화회관 개원식 봉사 후

할머니는 실향민으로 남한에 와서 힘들게 정착하였습니다. 옛날 분이라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습니다. 저에게 툭하면 "여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죄가 많아서 여자로 태어난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밖에서 뛰어놀면 "계집애가 사내처럼 저러고 다녀서 저게 사람 구실을 하겠나?"라고 했습니다. 맘대로 뛰어놀지도 못하고 여자라고 구박받으니 슬펐습니다.

저는 할머니 밑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머나먼 외국으로 시집가는 상상을 자주 했습니다. 할머니는 사람 취급도 안 해주고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지도 못하니 정이 그리웠습니다. 특히 엄마의 정이 그리웠습니다. 결혼한 후 엄마에 대해 알게 됐지만, 그전까지는 집안에서 저의 엄마에 관한 얘기는 '금기어'였습니다. 베일에 싸인 엄마가 항상 그리웠습니다.

2019년 동북아역사기행 중 백두산에서
▲ 2019년 동북아역사기행 중 백두산에서

부모님의 결핍 때문인지 어린 시절에는 열등감이 강했습니다.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를 할 때면, 선생님은 집에 "티브이 있는 사람 손들어, 집에 자가용 있는 사람 손들어" 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집에 없는 것들도 모두 있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할머니를 호출해서 할머니와 둘이 살면서 정말 그렇게 갖추고 사는 게 맞는 지 확인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너희와는 달라!'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성장하면서 삐뚤어질 수 있는 요건들이 많았지만 강한 다짐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우리 집 부처님

제 핸드폰에 아들의 전화번호는 '우리 집 부처님'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아들 때문에 속상하지 않았다면 저를 돌아보고 바라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툭하면 사고를 치기에 '내가 나은 자식이 아닐 거다, 병원에서 바꿔치기 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 병원에 알아봤습니다. 그 시간에 태어난 아이는 2명밖에 없었고 아이는 줄곧 제 옆에 머물다 퇴원했기 때문에 아이가 바뀔 확률은 없었습니다.

2023년 8월, 불교대학홍보 플래시몹_제주도반들과 함께 (아래 오른쪽 네 번째 오정순 님)
▲ 2023년 8월, 불교대학홍보 플래시몹_제주도반들과 함께 (아래 오른쪽 네 번째 오정순 님)

아들 몰래 딸과 도망가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제 카드와 보험금으로 대출을 받아 노름을 하였습니다. 여기저기 은행에서 전화가 오고 빚 독촉을 받았습니다. 형편대로만 살았지 남에게 손을 벌려 본 적이 없었던 저는 정신이 나갈 만큼 힘들었습니다. 아들은 육지로 도망가고 뒷감당은 제 몫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아들은 연락이 끊겼습니다.

딸은 속 한 번 썩힌 적이 없습니다. 같이 장을 보면 딸은 굳이 장을 본 물건들을 자기가 다 들었습니다. 남이 보면 제가 계모인 줄 알 정도였습니다. 딸이 결혼한 후에 '너는 왜 그렇게 엄마를 도와주려고 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엄마랑 아빠가 자주 싸우는 걸 보고 학교 갔다 왔을 때 엄마가 안 보이면 자기를 두고 가버린 게 아닌지 늘 불안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 어디 가지 마! 내가 잘해줄게.' 그런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제 가슴이 정말 미어졌습니다.

티끌 같은 존재이나 행복합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몸 여기저기를 꼬집어 보니 감각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았습니다. 식구들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안 순간 덜컥 겁이 났습니다. 겁이 나니 몸이 더 굳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자면 내일 일어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구나.' '나 하나 없어진다고 해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2019년 노형법당 공양간 봉사를 마치고
▲ 2019년 노형법당 공양간 봉사를 마치고

제 존재가 정말 별것 없는 티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돈에 대한 집착도 사라지고 아들이 사고를 쳐도 '그래, 남에게 피해 안 끼치고 집을 담보로 대출받지 않은 게 어디냐?'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남편과는 결국 헤어지고 아들은 지금 육지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제주도에 돌아온다며 아들은 매달 저에게 정착금도 보내고 있습니다. 딸도 결혼해 독립하였습니다. 저는 수행하기에 딱 좋은 조건에 있습니다. 늦잠 자는 업식이 있었지만 3년 전 부터 천일 결사에 빠지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천일 결사 입재식에 참석하려 육지로 나가는데 비행기에서 한 도반이 '오정순 도반은 까칠해서 말도 붙이기 힘들었는데 언제부터인지 항상 웃고 계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자주 웃는 편인 줄 알았는데요?‘ 하니, "아니에요, 제가 처음 정토회 들어왔을 때 저 도반님 누구냐고, 왜 저렇게 무서워 보이냐고 다른 도반에게 물어봤다니까요. 정토회 도반 중 오정순 님이 제일 많이 바뀐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정말 바뀌긴 바뀌었나 봅니다. 수행을 하며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많이 웃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인터뷰한 오정순 님은 한 권의 책으론 부족한 '전집' (全集)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정순 님이 인터뷰 내내 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해서 저도 기분 좋게 인터뷰를 끝냈는데 기사를 작성하느라 녹음파일을 다시 듣고 글을 정리하면서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이런 얘기를 해맑게 웃으면서 할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바로 수행의 공덕인가?'하고 짐작해 봅니다.

글_홍정배 희망리포터 (서울제주지부 송파지회)
편집_최미영 (국제지부 아태지회)

전체댓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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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기

우주 먼지같은 우리의 존재. 매일 먼지끼리 만나고 부딪치고 괴로워하는 먼지신세.

2023-09-29 05:49:44

소명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23-09-19 14:30:33

박윤경

감사히잘들었습니다
그런어려움이 있었을거란 상상도하기힘들정도로
늘밝은 얼굴이셔서 몰랐습니다
수행의힘을 보여주심에 감사합니다

2023-09-18 00: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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