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용인법당
우린 모두 도반 가족!

둥실둥실한 얼굴처럼 잘 닦은 마음밭으로 가족 모두를 정토회 일꾼으로 만든 유명규 님. 유명규 님의 남편에게 "유명규 님이 정토회 다니는 것을 알고 어떠셨어요?" 물었습니다.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지요!”라는 즉각적인 답. 도대체 유명규 님이 어땠을까, 너무 궁금해졌습니다. 지금 바로 가족 모두를 도반으로 만든 유명규 님을 만나보겠습니다.

문경수련원에서 대의원 도반들과 함께(맨 오른쪽 유명규 님)
▲ 문경수련원에서 대의원 도반들과 함께(맨 오른쪽 유명규 님)

정토회를 알기 전 나의 삶

저는 판교에서 카톨릭 신자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연스레 유아 영세를 받았고, 신앙심 깊은 부모님의 나누는 삶을 보며 평이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서, 며느리 노릇 잘하며, 주변 어른들께 경우에 어긋남 없이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의 칭찬을 흠뻑 받으며 힘들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내가 옳다, 내가 잘났다는 자만으로 책잡히면 안 되니 웬만한 건 참았습니다. 그것이 엄마 삶의 모습이었고, 가르침이었으니 저도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 줄 알고 10여 년의 결혼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종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막연하게나마 마음 한 구석에 불교 공부, 절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30년 하는 기도

천도재 후, 공양간 뒷정리하시는 모습
▲ 천도재 후, 공양간 뒷정리하시는 모습

1990년 어느 날, 불교대학 홍보 포스터를 보고 성남법당을 찾아갔는데, 부처님은 계신 데 스님은 안 계시고, 머리 기른 분이 있어 혹시 사이비종교가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그래도 불교가 궁금하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낮에 시간도 있어 다녔습니다. 그때는 불교대학 강의를 법사님이 직접 했습니다. 법사님의 강의를 처음 듣고, 이런 공부도 있다니! 놀랍고 재미있었습니다. 완전히 제가 모르던 다른 세상 공부여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교대학 담당이 기도를 하자고 해서 무슨 기도를 얼마나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부연 설명 없이 "30년이요."했습니다. 30년 기도를 하려면 거의 한 평생을 하라는 말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불교대학생과 법사님과의 면담 시간이 있은 후, 문경에 행사가 있다고 갔는데 그것이 바로 천일결사1 입재식2이었습니다.

참회의 눈물

천일결사 입재식을 다녀오고, 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남편 아침 준비를 해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마다 왜 그리 눈물이 많이 나는지 참 많이 울었습니다. 시어른들이 '너나 되니깐 이 정도로 산다'는 말이 떠오르며 그동안 참았던 것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던 것입니다. 약 1년 후쯤, 법사님의 참회에 대한 말에, 저는 참회의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말하니 묘수 법사님이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억울해서 나는 눈물일 수도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대 맞은 듯 숨이 멈칫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사실 남편이 '너 참 애 많이 썼다.'라고 해도 모자랄 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하루는 새벽 기도를 하는데 삼귀의에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말이 가슴으로 확 들어왔습니다. 울컥하며 내가 다 만든 업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습니다. 그때는 서초 법당에서 스님이 그룹으로 수행을 점검해주었는데, 제가 삼귀의의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구절에 뭉클했다고 하니, 지그시 저를 바라보면서 "많이 부족하다. 더 하라."고 했습니다.

서초동 법당에서 활동가 일은 참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아침에 집안일을 다 해놓고 서초법당으로 가서 활동을 하고 남편 돌아오기 전에 집에 가서 가족들 저녁을 챙겼습니다. 처음에 제 이름이 불리는데 그게 저를 찾는 이름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결혼 후 제 이름은 호적등본에서 잠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부할수록 이렇게 사는 길도 있구나. '나도 안 괴롭고 너도 안 괴로운 삶, 상대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 삶' 그러는 중 몸이 힘들었는지 갑상선과 폐결핵이 와서 6개월간 치료를 받고 다시 활동가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족 모두를 도반으로

터키 이스탄불에서 남편과 함께
▲ 터키 이스탄불에서 남편과 함께

새벽에 식구들이 깰까봐 손전등을 켜놓고 거실에서 기도했습니다. 새벽에 화장실 다녀오다 기도하는 저를 보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라고 했던 남편이 제가 수행한지 10년 만에 깨달음의 장3에 다녀왔습니다. 남편을 깨달음의 장에 보내기 위해 저와 아들, 딸은 남편이 집에 들어올 무렵이면 함께 모여 이 얘기 저 얘기 하는 척하다 남편이 들어오는 순간,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를 몇 번 보자 남편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는 깨달음의 장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같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또 남편이 읽도록 법보집을 화장실에 놓는 등 아들, 딸과 함께 '남편 깨달음의 장 보내기 프로젝트'를 오랜 시간 노력했습니다. 드디어 궁금해진 남편은 깨달음의 장에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공들이고 간 깨달음의 장이라서 그런지 남편은 서둘러〈나눔의 장4〉까지 다녀오고 지금은 용인 정토회 대표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2003년 대학생이던 아들과 딸이 하루 3000배씩 3일간 만배를 하고, 인도 수자타 아카데미 대학생 봉사자로 갔습니다. 딸은 봉사를 마치고 귀국하고, 아들은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으로 다시 봉사를 떠났습니다. 새벽에 구호 물품을 나눠 주고 들어와, 기도하고 공양하며, 낮에는 한 발짝도 거처에서 움직이지 않고 지내는 봉사 생활을 4개월 남짓하고 돌아왔습니다.

저희집은 아들, 딸 배우자에게 결혼 허락 조건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위도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 며느리는 깨달음의 장과 100일 출가 생활을 한 후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도 부처님과 스승님의 은혜 속에 세상을 넓고 크게 그리며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부가 한 스승 밑에서 한 곳을 바라보고 가는 지금, 남편의 일상 모습이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들과 딸 그리고 며느리, 사위도 서로 도우며 마음 넉넉하게 살아가는 모습도 고맙습니다. 부처님과 스승님 가르침을 믿고 따른 20여 년의 수행생활 덕분입니다. 때론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가족들 모두 부처님과 스승님 품 안에서 도반 가족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남편의 힘찬 독경소리가 새벽을 가르고, 저의 기도는 그 힘으로 오롯해집니다.

▲ 화엄반 행자들과 화천 평화의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유명규 님이 여름날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그늘 좋은 느티나무 같았습니다. 20년 넘은 수행 연륜이 만들어낸 그 그늘에서 후배 도반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수행 봉사하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유명규 님이 현재 하는 화엄반 수련을 잘 마치기를 마음으로 합장합니다.

글_장준분 희망리포터(용인법당)
편집_손정화(수성법당)


  1.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2. 입재식정토행자 천일결사를 백일 단위로 나누어 매 백일 마다 함께 모여 수행을 점검하고, 새롭게 백일기도를 시작하는 의식. 

  3.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4. 나눔의 장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인간관계가 평화로워지는 4박 5일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참여자만 신청하여 참여할 수 있음. 

전체댓글 20

0/200

자재왕

우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네요. 저도 정토회 20년이 되면 우리 가족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2020-12-28 07:02:49

박신영

유명규님의 진심어린수행이 다른가족들의 귀감이 되는모습이 아름답습니다 ~

2020-12-25 06:09:04

공덕품

잘보았습니다. 진심 행복해보이십니다

2020-12-25 05:44:59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용인법당’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