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장유법당
어느샌가 자유로운 나

김해정토회 장유법당에는 행사 때마다 웃는 얼굴, 늘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진숙 님이 있습니다. 활기찬 모습에 늘 밝은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올까 궁금해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애광원 나들이 봉사중에(오른쪽 이진숙 님)
▲ 애광원 나들이 봉사중에(오른쪽 이진숙 님)

엄마와 새엄마

경남 고성군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릴 때 저는 순하고 건강해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다만 어머니와 남존여비 사상이 심한 할머니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제가 5살 때이고 여동생이 태어난 지 7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엄마는 할머니와 싸우고 약을 먹고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런 엄마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6개월 정도 지나, 햇볕이 따뜻한 겨울 어느 날 분홍색 한복을 입고 새엄마가 오셨습니다. 새엄마와는 친구처럼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늘 새엄마라는 인식이 있었고, 이 세상에 온전한 내 편은 없다는 생각이 늘 저를 지배했습니다. 이듬해 둘째 남동생이 태어났고 그때부터 저의 애 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섯 동생의 엄마 역할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상처 외엔 부족함이 없이 잘 살았고, 재혼으로 만난 부모님은 서로를 암소, 숫소로 부를 정도로 재미있게 사셨습니다. 그러다 제가 초등 5학년 되던해에 운동장에서 운동회 무용연습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해는 대풍년이 들어 온 사방이 노랗게 벼가 익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그 모습이 선합니다. 어린 나이었지만 아버지의 삶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때 새엄마 뱃속엔 막내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가장 역할을 해야했던 새엄마를 대신해 제가 동생들을 돌보며 엄마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신세 한탄을 하며 새엄마가 울기 시작했고, 다섯 동생들은 따라 울었지만 저는 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가 제겐 지옥이었습니다. 새엄마가 너무 불쌍했고, 따라 우는 동생들을 뭐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도반들과 남산순례 중인 이진숙 님
▲ 도반들과 남산순례 중인 이진숙 님

숨 가빴던 인생사

새엄마 나이 34세. 거의 손으로 농사짓던 시절이라 남자가 하는 일을 엄마가 혼자 해내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소여물을 자르다가 손가락이 잘린 적도 있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을 해내시는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다가도, 저에 대한 보살핌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미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덕분인지 학교생활은 좋았습니다. 집에서는 공부할 시간이 없었기에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제 힘으로 입학금만을 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졸업도 했습니다. 빵 공장에 들어가 일하다 4년 차에 손가락 사고를 당하고, 서울로 올라와 노무사 시험공부를 하고, 서울에서 결혼하고 큰아들을 낳고 부산으로 이사하고...그렇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제가 짠합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열심히만 살았습니다.

내 편, 내 것

저의 결혼생활은 어리석었습니다. 저의 맘 깊숙이에 친엄마는 부끄러운 사람이기에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저를 채찍질했습니다. 처음에는 결혼을 반대하시던 시부모님도 싹싹하게 대하는 저를 많이 좋아해 주었습니다. 저는 사랑받기 위해 잘했습니다. 그게 시부모님께는 통했지만, 남편은 제가 잘할수록 삐딱선을 탔습니다.

결혼으로 제 편인 남편이 생겨서 너무 좋았습니다. 남편은 온전히 내 편, 내 것이라는 생각에 저와 같기를 바랬습니다. 그런 제 주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남편과 다툼도 많아졌습니다. 남편은 제 새엄마를 지칭할 땐 언제나 '강순자, 강순자'라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럴때 마다 남편이 저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꽁꽁 눌려뒀던 상처에 생채기를 만드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법당 시무식에서 도반들과(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진숙 님)
▲ 법당 시무식에서 도반들과(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진숙 님)

달래고 얼레고

저는 남편과 싸울 땐 항상 제가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착하고 바른 사람이고 남편은 제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바꾸기 위해 달래고, 얼레고, 약한 척, 센 척 별짓을 다 했습니다.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내 것, 내 남편인 그를 사랑했고, 제 마음대로 바꾸려했습니다. 이런 저의 고집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저의 자존심은 바닥을 쳤습니다.

저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저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중에는 멋진 사람이 될 거야.” 항상 이렇게 되뇌었지만 현실은 바닥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누구보다 쉼 없이 착하게 살았지만 언젠가부터 체한 것 같은 묵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업식의 굴레에서 살면서 저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정토회, 터닝 포인트

처음 법륜스님을 본 것은 힐링캠프라는 TV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때는 “저런 스님도 있네”하고 넘겼습니다. 이렇게 인연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2015년 12월 갑갑한 마음에 핸드폰을 만지다가 정토불교대학 입학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침 장유정토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입학원서를 냈습니다.

제 인생의 전환점은 여러 번 있었지만 가장 큰 터닝 포인트는 정토회를 만난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 안개로 뒤덮인 제 눈에 안개가 걷히고 밝은 해가 되어준 정토회. 처음 불교대학입학 후 도반들 앞에서 많이도 울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흐릅니다.

인도성지순례 중인 이진숙 님(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 인도성지순례 중인 이진숙 님(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도반을 통해 나를 돌이키다

불교대학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봉사라는 말이 나왔을 때 싫었지만 거절하지 못해 조금만 도와 드리자는 맘에 사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회자가 안내하면 그 말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 도반들을 보면서 “왜 마음공부 하러 온 사람들이 사회자의 말을 안 듣지?”하고 화가 났습니다. 후에 다른 사람이 사회자 역할을 하는데도 말을 듣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누기 시간에 사회를 맡은 도반에게 물어봤습니다. “아까 사람들이 사회자가 하라는 대로 안 해서 화 안 났어요?“ “응? 왜 화가 나야 하는데요?” ‘?? 뭔가 이상하다. 내가 이상한가?‘ 그때부터 그 도반을 보면서 다르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목탁 치는 것을 시작으로 저의 정토회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불교대학 꼭지 소임을 맡았는데 팀장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컴퓨터가 손에 익지 않아 물어보면 대답을 안 해주고, 궁금한 게 있어 전화하면 받지 않고 여러 가지로 많이 불편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가 자기의 업식을 긁었다고 하더군요.

업식에서 자유로워지는 체험

도반들과 함께 봉사하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저를 돌아보고, 혹시라도 제 질문에 상대가 화를 내더라도 그것은 저의 잘못이 아니라 상대의 성격과 스타일이구나 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전에는 같이 일하는 사람이 화를 내면 제가 잘못을 해서 그런가 싶어서 전전긍긍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구나, 나와 다르구나, 기분 나쁘지 않으니 가볍게 불편하다는 말을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봉사를 통해서 저와 도반들과의 관계 속에서 “업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런 거구나”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학생 중에 가장 먼저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 1년 뒤 〈나눔의 장〉에 가서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엄마를 불렀습니다. 도반들 앞에서 소리 내 울고 엄마를 원 없이 불렀습니다. 그 이후〈바라지장〉, 코로나 전에는 〈명상수련〉을 취미활동으로 틈만 나면 참가했습니다. 이렇게 시멘트로 꼭꼭 묻어둔 상처들이 조금씩 치유되고 인간관계도 발전했습니다. 좋고 싫음에 제 자신을 얽매이게 해 불편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대회에 참가중인 이진숙 님(오른쪽)
▲ 한반도 평화대회에 참가중인 이진숙 님(오른쪽)

의지심의 실상

〈바라지장〉에 가서 법사님께 물었습니다. “〈나눔의 장〉 다녀온 뒤 돌아가신 엄마로 인해 눌려있던 감정들은 많이 날아갔는데, 그렇게 죽었다는 불편함과 부끄러움은 어떻게 없애나요?” 법사님은, '그것은 엄마를 나로 삼고 엄마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의 자랑스러움을 내 자랑으로 삼는데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엄마의 부족함은 엄마의 부족함이지 나의 부족함이 아니다. 엄마하고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의지심에서 나오는 저의 업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저를 천천히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사람을 잘 믿습니다. 그 만큼 또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상대에게 잘 보이고 의지하려 하는 저의 의지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업식 하나를 아는데 한참이나 걸렸습니다. 지금은 엄마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속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는지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픕니다.

오로지 법에 의지하라

저는 정토회에서 권유하는 것은 뭔지도 모르고 그냥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샌가 제가 자유롭고 행복해졌습니다. 지금도 아침수행은 힘듭니다. 욕심과 게으름과 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볍지 못하고 양극단에 달리고 좋고 싫음에 널뛰기를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 또한 제가 한 고개 넘어야 할 업식임을 압니다.

그래도 예전과는 달라져 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는 제가 좋습니다. 온라인으로 전환된 정토회 시스템 속에서 힘든 부분도 있지만 참 재미있습니다. 지금 행복합니다. 틈만 보이면 의지심은 발동합니다. 오로지 법에 의지하라는 말씀, 이 글을 쓰면서 깨우치고 또 깨우칩니다.

지리산 수련원에서 바라지봉사 중인 이진숙 님(맨 왼쪽)
▲ 지리산 수련원에서 바라지봉사 중인 이진숙 님(맨 왼쪽)


인터뷰 도중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지만 엄마처럼 안아주고 잘 살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괜찮다고 말하는 이진숙 보살님. 정토회 봉사가 힘들지 않느냐는 말에 재미가 있으면 힘든지도 모른다고 환하게 웃어주는 보살님 덕분에 제가 힐링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누구도 내 편일 수 없습니다. 오직 법에 의지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며 살겠습니다.

글_ 김미경 희망리포터(김해정토회 김해법당)
편집_ 이종명(전주정토회 전주법당)

전체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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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명

불법 만나 가볍고 자유로워지신 이진숙님의 진솔한 수행담 참으로 가슴 뭉클합니다. 감사합니다~^^

2024-04-02 22:32:12

김명진

장유법당 위치는 어디에 있나요? 평소 법륜스님 말씀 참 잘듣고있는데...일반인도 참가 가능한가요?

2021-04-25 23:13:04

이의수

잘봤습니다 화이팅입니다

2020-12-28 15: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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