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5 수행법회
“차갑게 말하는 남편에게 상처를 받아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운동장으로 나오니 아침 해가 힘차게 떠올랐습니다. 아침 일찍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한 분이 화광 법사님의 부축을 받으며 두북 수련원을 찾았습니다.

할머니는 스님을 뵙자마자 절부터 했습니다.

“먼저 스님께 삼배를 하고 싶어요.”

“그냥 앉으세요. 팔십 넘은 노인은 예의를 안 지켜도 돼요. 올해 연세가 몇이세요?”

“95세입니다.”

“예의를 중요시하는 유교에서도 팔십이 넘으면 제사도 안 지내도 된다고 하잖아요. 왜냐하면 팔십이 넘으면 산 귀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웃음)

스님도 맞절을 하고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자살로 죽고 나서 힘든 나날을 보낼 때 스님의 법문을 듣고 고통에서 벗어난 인연이 있는 분입니다. 매년 두북 수련원에서 노인잔치를 열 때마다 남편과 함께 고운 한복을 입고 와서 멋들어지게 노래를 한 가락 불러주셨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남편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적적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급히 스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팔다리에 힘이 다 빠지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같이 살던 분이 돌아가시면 자꾸 생각나고 그래요. 누구나 그렇습니다. 제가 49재를 지내는 날 법문을 해드릴게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스님은 달력에 49재 날을 표시하고 할머니를 위로해 드렸습니다.

곧이어 오전 10시부터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수행법회는 새해 첫 법회이기 때문에 시무식을 겸해서 오전에도 생방송하고, 저녁에도 생방송하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올해가 정토회 1차 만일결사의 마지막 해라고 강조하며 정토회 회원들이 새해를 어떤 마음으로 지내면 좋을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전 법회에서는 사전에 두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결혼한 지 한 달이 된 분인데 남편이 정색하거나 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너무 싫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차가운 남편에게 상처를 받아요

“결혼한 지 한 달 조금 넘었는데 괴로운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대화를 하다가 남편이 정색하거나, 목소리 톤을 높이며 논리적으로 얘기하는 모습이 굉장히 차갑게 느껴지고 제가 상처를 받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무섭고, ‘도망가고 싶다. 결혼생활을 그만두고 싶다’ 이런 마음까지 올라옵니다.

제가 이런 부분이 왜 유난히 힘든지 생각해 봤더니, 집단 상담을 공부하고 나눔의 장에 참여했을 때도 제게 가장 불편하고 걸리는 사람은 그런 특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좀 감정적인 ‘가슴형’에 가깝기에 논리적인 ‘머리형’은 저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스타일인 사람과는 결혼도 안 해야겠다 했을 정도로 싫었는데, 왜 이렇게 정반대인 사람을 만났는지 후회되는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어요. 남편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얘기해도 저는 평소 말투에서도 짜증이 느껴지고 서로가 서로를 답답해하는 일이 많습니다.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이런 마음이 드는 자체가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져요.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 좀 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여쭙습니다.”

“‘내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먼저 질문자가 자기 인생의 가치관을 먼저 정립해야 합니다. 질문자는 둘 다 능력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거나 상대가 우유부단하더라도 서로 뜻과 마음이 맞는 편이 더 좋아요? 아니면 ‘마음 맞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편이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집이며 차 등 보통 사람 수준으로는 살아야 한다. 애들이 생기면 나중에 애들 대학 정도 보낼 경제력은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 먼저 점검해 봐야 해요. 지금 얘기를 들어보면 질문자는 가슴형 사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적어도 중간은 되는 생활을 하고 싶다는 욕심도 같이 있는 것 같은데요.”

“네...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이란 게 원래 그렇습니다. 평균적으로 보면, 대화도 잘 되고 가슴에 다가온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정을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경제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일을 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죠. 반면에 냉정하고 이성적이고 논리가 강한 사람은 사회에서 일 처리 능력이 조금 뛰어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질문자의 선택이에요. 본인이 마음 맞는 사람을 선택했으면 경제적인 욕망을 버려야 하고, 경제적 욕망을 우선해서 선택을 했으면 마음 맞는 부분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마음이 맞는 사람을 원하면서 동시에 능력도 좀 있는 사람을 원하고 있어요. 부드럽기도 하고 날카롭기도 한 사람을 구하는 거예요. 그러나 요리할 때는 칼로 사용할 만큼 날카로웠다가 옷이나 이불이 필요할 때는 솜처럼 부드러운 물건은 세상에 없어요. 질문자의 바람처럼 하나의 물건이 내 필요에 따라 성질이 이렇게 바뀌었다 저렇게 바뀌었다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지금 질문자는 칼을 선택해 놓고 칼이 날카롭고 부드럽지 못하다며 불만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질문자가 이 칼을 버리고 솜을 선택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요리를 할 때마다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겠죠.

같은 성향의 사람을 만나면 공감대가 형성되어 좋은 면이 있습니다. 또 성향이 다른 사람이 만나면 상호 보완이 됩니다. 옛날엔 누구나 다 똑같이 농사짓고 길쌈하고 사냥하면서 살았어요. 이렇게 하면 자립도는 굉장히 높지만 그 대신 생산 효과가 떨어져요. 그래서 한 사람은 전적으로 농사만 짓고, 한 사람은 전적으로 사냥만 하고, 한 사람은 전적으로 길쌈만 하고, 이렇게 분업을 했더니, 생산 효과가 굉장히 높아진 대신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어요. 전에는 나만 잘하면 됐지만 이제는 상대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니까요. 또 분배 문제도 있습니다. 전에는 내가 생산해서 내가 먹으면 되었지만, 이제 ‘농사지은 것과 사냥한 것을 어떻게 교환할 거냐?’, ‘옷하고 이걸 어떻게 교환할 거냐?’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니 사회적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죠.

부부도 하나의 공동체예요. 질문자는 같은 성향의 사람과 공동체를 이루어서 마음 편하게 지내되 경제적 효율이나 다른 일의 효율이 좀 떨어지는 쪽을 선택하는 게 좋겠어요? 아니면 질문자와 다른 성향의 사람을 만나서 서로 감정적인 교감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역할을 조율해서 효율을 높이는 게 낫겠어요? 질문자는 마음 편한 것과 효율성, 이 두 가지를 다 추구하기 때문에 지금의 어려움을 겪게 된 거예요.

물론 열에 한 명이나 백에 한 명은 그런 상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법륜 스님을 볼 때 무척 합리적이고 불편부당하니까 스님으로서는 굉장히 좋게 보일 거예요. 그러나 저 같은 사람이 만약에 한 여성의 남편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내 되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편하지 않을까요? 집에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고, 돈을 벌어도 다 세상에 나눠서 써버리고, 일가친척이라고 특별히 혜택을 주는 것도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면 가족의 입장에서는 같이 살기가 굉장히 어려운 사람입니다. 가족이라면 내 자식이라는 이유로 뭘 좀 더 주고, 내 친척이라는 이유로 안 되는 것도 되도록 특혜를 좀 주고, 집에도 일찍 들어오는 게 좋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이 보는 법륜 스님이 훌륭해 보인다고 해서 ‘법륜 스님하고 같이 생활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그런 남편이나 그런 아내를 만난 건 사실 본인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을 본인이 골라서 만난 거예요. 그런데도 거기에다 더 많은 욕심을 내고 있기 때문에 현재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이처럼 자기 배우자가 소중한 줄은 모르고 다른 사람만 쳐다본다면 이건 굉장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저와 3일만 같이 지내보면 ‘아이고, 이런 사람하고는 진짜 같이 못 살겠다!’ 이런 결론이 날 거예요. 제가 나쁜 사람이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저는 여러분과 가족 관계가 아니니까 여러분 눈에는 제가 좋아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이 보기에는 스님이 합리적이고, 어떤 여성이 와서 손을 잡아도 안 끌려가고 냉정하니까 훌륭하다고 말해요. 그런데 여러분이 스님의 손을 잡았다가 뿌리침을 당한 사람의 입장이라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이럴 거예요. 그리고 보시를 좀 많이 해도 별로 특별대우도 안 해주잖아요. 여러분이 볼 때는 보시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도 정토회에서 특별대우를 하지 않고 누구나 다 평등하게 대하니까 좋게 볼지 몰라요. 그러나 보시를 좀 많이 하거나 뭔가 공로를 세웠으면 자기는 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심리잖아요. 그게 안 되면 다 실망하고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정토회에 서운한 감정을 가지는 사람도 있어요.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다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밖에서 ‘훌륭하다’, ‘좋다’ 소리를 듣는 사람은 가정에서는 가족들의 불만이 굉장히 많아요. 그 사람이 밖에 가서 좋은 일을 하고 가정에서는 나쁜 일을 한다는 게 아니라, 가정의 요구가 다 수용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또 자기 집안, 자기 가족만 아는 사람은 가족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은 사람이지만 바깥에서는 ‘자기밖에 모른다’ 이렇게 비난을 받아요.

그러니까 질문자가 괴로운 원인은 남편 때문이 아니라 질문자 본인의 문제입니다.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게 좋으면 그런 사람을 만날 것이지, 왜 좀 냉정해 보이는 사람을 만났을까요? 질문자가 이 사람을 만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다른 이득을 보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눈에 들어온 거예요. 누가 잘못한 게 아니라, 다 자기 욕심에서 빚어진 문제라는 뜻입니다. 이 점을 첫 번째로 알아야 해요.

두 번째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질문자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어요? 어릴 때 자라면서 가장 먼저 경험한 남성이 아버지잖아요. 질문자의 아버지는 온화하고 따뜻한 편이었어요, 아니면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입은 편이에요?”

“아버지는 온화한 편이고 밖에서도 사람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분이셨지만 저와는 그렇게 가깝진 않았어요. 제가 그리 살갑게 굴지도 않았고요.”

“밖에서는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지만, 엄마가 볼 때는 아버지가 어땠을까요?”

“엄마는 그런 점을 싫어하셨어요.”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게 자기 사람으로 볼 때와 남으로 볼 때 관점이 서로 달라서 생긴 문제예요. 여기에 이중성이 있어요. 아버지가 정답고 좋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와 남편을 비교해서 남편에게 불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정다운 사람에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아버지가 차갑고 냉정해서 어릴 때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을 보면 아버지를 싫어하듯이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질문자의 아버지는 어땠는지 물어본 거예요.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입은 사람은 남편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아버지가 연상돼서 거부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건 트라우마 때문이에요.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버지는 참 따뜻하고 좋았는데 남편이 냉정하다고 느껴질 때도 거부 반응이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본인의 머릿속에서는 남성이라고 하면 아버지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에요. 이 경우는 트라우마는 아니지만, 기대감 때문에 남편에 대해서 거부 반응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것을 볼 때 다면적으로 봐야 해요. 예를 들어 절에 들어와 사는 스님들을 살펴봐도,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왔기 때문에 수행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결혼에 대해서 미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해보고 왔기 때문에 오히려 수행 생활을 못 견디는 사람이 있어요. 옛날의 자기 삶에 대한 집착을 못 끊는 거예요. 또 반대로 결혼 생활을 안 해보고 왔기 때문에 수행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세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집착도 없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 결혼을 안 하고 왔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수행 생활에 대해서 ‘결혼 한 번 하고 들어오는 게 낫다’, ‘결혼 안 하고 들어오는 게 낫다’ 이렇게 단정할 수가 없어요. 어떤 일을 했기 때문에 미련이 끊어질 때가 있고, 반대로 어떤 일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돼 있는 경우도 있거든요. 어떤 일을 하지 않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경우가 다 나타납니다.

이처럼 아버지로 인해서 상처 입었기 때문에 아버지 같은 인간을 싫어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아버지 같지 않는 인간을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질문자의 아버지가 어땠느냐고 물어본 거예요. 아버지가 비교적 따뜻한 가슴형 사람이었다면 질문자는 거기에 오랫동안 길들어 있었기 때문에 머리형 사람에게는 적응이 잘 안 된다고도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질문자 본인의 문제지, 남편의 문제는 아닙니다. 가슴형에 가까운 사람과 머리형에 가까운 사람이 만나면 같은 사람인데도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다 달라요. 그러나 이건 ‘남편이 잘못이냐, 내가 잘못이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다만 이러한 조건을 이해하고, 같은 유형의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사는 삶이 효과적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사는 삶이 효과적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각각 장점과 단점이 달라요.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 만나서 살면 서로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의 측면에서는 둘이 있으나 혼자 있으나 크게 보강되는 점이 없어요. 그런데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면 내가 못하는 걸 상대가 할 수 있고, 상대가 못하는 걸 내가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 한편, 갈등이 생긴다는 단점도 있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장점이 있으면 저런 단점을 부러워하면서 갈등하고, 반대로 저런 장점을 가지고 있을 때는 이런 단점만 보며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해요. 이렇게 해서 인생살이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질문자에게 삶의 가치관이 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나는 라면 먹고살아도 괜찮고, 침낭 덮고 자도 괜찮다. 상대와 마음이 맞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혼을 하고 마음 맞는 사람을 선택하면 됩니다.

‘그래도 생활을 하려면 이성적이고 능력이 있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 감정만 중심으로 삼고 얘기하면 안 돼요. 서로 이렇게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스님.”

“우리가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아서 아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질문자는 아마 아버지에 대한 상처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아버지와 상반된 유형인 사람에게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해요. 한국에 살던 사람이 미국에 가면 언어에 적응해야 하고, 도시에 살다가 농촌에 오면 농촌 환경에 적응해야 하잖아요. 질문자도 남편과 같은 사람과 대화하고 관계 맺는 것에 적응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싫은 마음에 사로잡히지 말고, 적응하는 훈련이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합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겠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따뜻한 면이 있다고 여겨서 결혼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스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를 다 얻으려는 욕심이 있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고 싶습니다. 매일 수행 정진할 때 어떤 기도문을 되뇌면서 하면 좋을까요?”

“남편을 바꾸려고 하면 안 돼요. 내가 따뜻함을 원한다고 해서 ‘남편을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면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에 목매달고 살아야 하잖아요. 남편의 있는 그대로를 내가 수용해야 합니다. 남편의 이런 행동은 좋고 저런 행동은 싫다고 따지면 안 돼요. 애초에 질문자가 상대의 능력을 보고 결혼을 결심했으면서 ‘이 사람은 따뜻하겠지’ 이렇게 지레짐작한 것이잖아요. 또 연애할 때는 차가운 사람도 다 따뜻하게 대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야 연애가 되지, 연애할 때부터 차갑게 대하면 연애가 되겠어요? 이처럼 객관적 현실을 보는 데 본인의 욕망이 장애가 된 거예요. 그건 질문자가 잘못 본 것이지, 남편이 변한 건 아닙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봤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거예요. 그리고 이미 결혼을 한 경우에 특별한 하자가 없다면, 즉 상대가 계약을 어긴 게 아니라 감정적 마찰이 문제라면, 이걸 그만둔다는 건 혼인의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남편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천일결사에서 독송한 경전 중 ‘어질고 노력하는 현명한 비구는 바른 지혜로써 관찰하고 싫어해야 할 상태를 싫어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요. 신심명의 ‘도는 어렵지 않다. 싫고 좋고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라는 내용이 떠오르면서 싫어해야 할 상태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홍서원으로 오전 수행법회를 마친 후 정토회 회원들은 각자 모둠별로 화상회의 방에 들어가 새해를 시작하는 마음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오후 내내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저녁반 회원들을 위해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두북 수련원 방송실에 설치된 화면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가득 차자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코로나 사태 이후 지난 2년 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며 코로나 사태가 새해에는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 것인지,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종식시킬 수 없다면 함께 사는 방향으로

“현재 우리 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여전히 코로나19 바이러스인 것 같습니다. 초기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무지하다 보니 안일하게 대응해서 전 세계로 확산이 돼버렸습니다. 그러자 각국에서는 방역을 강화한다고 야단법석을 피웠어요. 1년 후에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응할 백신이 나오자 곧 집단면역이 형성되어 코로나 사태가 종식될 거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백신 접종률이 70%가 넘으면 코로나가 종식될 거라고 해서 지난 1년간 백신 접종률을 높이는 대열에 많은 국민이 합류했습니다. 백신 접종률을 80%까지 높였지만 이마저도 코로나 종식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너무 가볍게 볼 것도 너무 무겁게 볼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종식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코로나가 있는 가운데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위드코로나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사스 같은 경우는 종식할 수 있었지만, 코로나는 종식이 어렵다고 본 겁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종식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실제 백신 접종을 해보니까 접종률 100%를 달성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에서는 20~30%의 사람들이 백신을 불신해서 접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국가에서도 이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녹록지 않습니다. 강제로 백신 접종을 추진하면 개인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후진국에서는 전 국민에게 백신을 맞출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부유한 나라도 빈곤한 나라도 백신 접종률을 80% 이상 달성하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계속되는 변종 바이러스의 출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추가 백신 접종을 장려하고 있지만 사실상 종식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백신을 접종하면 병이 위중증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아주고 치사율을 낮춰주기 때문에 백신 접중률을 높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3개월 단위로 추가 접종을 하면 코로나에 안 걸리거나 걸리더라도 중증으로 악화되는 비율을 낮출 수 있는 거예요. 치료약까지 개발하면 코로나에 대해서 이제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있는 가운데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스크는 껴야 하고, 확진자가 대량으로 발생하면 어느 정도 거리두기는 불가피합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방역 방식대로 식당 영업을 못 하도록 한다든지 극장과 경기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한다든지 여행을 제한하는 조처를 내려서 일상생활에 불편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유의는 하되 이제 어느 정도의 범위 안에서 일상이 진행될 수 있도록 규제는 풀어줘야 해요.

코로나 시국이 2년이 넘어가니까 개개인도 지쳐서 협조를 잘 안 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은 생존이 걸린 문제라 저항감마저 표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올해 설이 지나면 한시적으로 규제를 강화하는 정책이 아니라 일상 속 규제를 완화하면서 조심하는 정책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면 통제나 완전 개방이 아닌 계절에 따라 변종이 나오면 조금 더 조심하고 확산세가 꺾이면 활동을 푸는 방식을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코로나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은 어렵겠지만 일상의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화상통화 기술의 발달로 이제 직접 만나지 않고도 회의나 모임이 가능해졌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위험이 적어져서 대면할 수 있는 상황이 오더라도 편리함 때문에 비대면을 선호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사무직 직장인인 경우는 출근을 하지 않는 재택근무가 훨씬 더 늘어나서 교통량이 줄어들 수 있어요. 집의 개념이 단순히 숙식을 해결하는 생활 공간이 아니라 사무공간으로 확대되어 방 구조가 그것에 맞게 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도 많이 바뀌어서 도시집중형에서 분산형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고 보입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올지 지금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10년 후에 지금을 되돌아본다면 우리의 일상이 많이 바뀌어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옷 생산하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외출복이 잘 안 팔린다고 해요. 그리고 화장품 판매가 코로나 사태 이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면 사회에서 필요했던 물건들은 판매가 줄어들고 화상에 필요한 장치나 기계는 물건이 부족한 품귀현상이 생겨나고 있다고 해요. 이렇게 변화된 사회에 맞게 일상도 바뀌리라 봅니다.

그래서 정토회도 새로운 변화에 맞추어 대중이 많이 모이는 행사는 기획하지 않으려 합니다. 20명 단위의 소규모로 수련이 가능한 깨달음의 장이나 나눔의 장을 열려고 계획하고 있고요. 불교대학이나 경전대학에서 7명 단위로 하는 조별 활동은 대면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몇백 명이 모여야 하는 명상 수련이나 몇천 명이 모이는 입재식은 이미 온라인으로 전환했습니다. 또, 실내 행사는 줄이고 다수가 모여야 하는 행사는 가능하면 야외에서 진행을 해서 우리의 일상이 점점 안정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전에 세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어머니에게 폭언과 폭행을 하셨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남겨진 어머니와 저희 자매들은 생활고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가족밖에 모르는 착실한 남편과 흠잡을 때 없는 두 남매의 엄마로 잘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상황인데도 저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나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고 초조해요.
  • 요즘 회사 생활이 더 힘들어지고 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태입니다. 생각대로 업무도 잘 진행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승진 욕구는 별로 없고, 어떻게든 밥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관점을 잡아야 할까요?
  • 13년 전 언니 집에 함께 살 때 형부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습니다. 친정엄마와 언니는 이혼할까 봐 항상 절 공격하고, 저에 대한 악담을 합니다. 13년이 지나고 저도 결혼했지만 가족 모임에 참석도 못하게 하고 아직도 절 공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정토회 덕분에 밝게 가족들을 대하지만 언니가 부모님께 제 악담을 할 때면 너무 억울합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수행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주제 법문이 있을 예정이라는 점을 공지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마당을 정비하는 일과 그동안 미뤄두고 있었던 여러 가지 업무들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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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고맙습니다.

2022-12-30 21:26:34

김 선

스님 말씀 잘 듣고 삶의 지혜를 얻고 있습니다. 스님 건강 하세요.

2022-01-14 13:37:56

운정

모든 괴로움의 뿌리는 나로부터 시작됨을 알고나니 오히려 삶이 편안해졌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 누군가에게 시비분별을 가릴 필요가 없기때문에 그만큼 괴로울 일도 없습니다. 늘 소중한 법문 감사히 듣습니다.

2022-01-12 16: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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