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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계기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시애틀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 있다고 해서 아는 분과 함께 가 봤는데, 일반 강연과는 다르게 스님께서는 먼저 질문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 당시 제 마음에 늘 갈등하던 문제를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은 “우리 남편하고 큰딸이 성격이 똑같아서 늘 싸웁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였어요. 그때 저는 아둔해서 스님이 설해주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 지는 불과 몇 년 안되었습니다. 그것이 첫 만남이긴 했지만, 유튜브로 즉문즉설을 듣던 남편이 먼저 정토회에 가자고 해서 그것이 제 시작이 되었습니다.
<깨달음의 장>입니다! 제 삶이 어떤 극적인 인생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늘 혼자 인생의 의문, 혹은 풀어야 할 문제 몇 가지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걸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혼자서 끌어안고 못 풀고 있다가 <깨달음의 장>에 가서 비로소 그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나는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칭찬할 때 함께 칭찬하지 못할까?'였습니다. 예를 들면 여덟 명이 그룹으로 있을때 A라는 사람이 B를 칭찬하면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칭찬을 하는데 저는 칭찬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우린 배움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남들이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해 주고, 남들이 슬퍼할 때는 함께 슬퍼해 줘야 한다고 들으면서 자랐기에 생각은 알겠는데 실제로 제 마음은 그렇게 가지 않았습니다.그게 늘 저한테는 고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못하는 저’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판단하지 않고 제 생각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저 사람은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인데, 제 안의 어떤 고집이 혹은 욕심과 질투심 등으로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런 것들이 제가 다른 이를 칭찬하는 것을 막아버리더라고요. ‘아 그랬었구나 내가 자만과 아집 때문에 지금껏 그랬었구나’. 그 뒤로 그것을 내려놓고 나니 예전에 정말 칭찬에 박했던 저에게 신기할 정도로 주변 모든 사람이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며 살고 있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근 30년간 가지고 있던 화두를 깨치게 되어서 날아갈 듯이 행복했었어요.
또 하나, 산다는 것에 대한 나의 인식을 완전히 바꾼 충격적인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집에서 맏딸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모든 집안일을 어렸을 때부터 다 하고 살았어야 했고, 그 이후의 삶도 지독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제가 이 세상에서 이렇게나마 살아가는 것은 다른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순전히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저는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던 거지요. 실제로 저는 누구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깨달음의 장>에서 ‘아,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게 내 힘이 아니었구나’하는 깨달음과 함께 누가 제 머리를 탕!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컥합니다. ‘아! 내가 숨 한번 쉬고 물 한 모금 먹는 것조차 내 힘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내 힘이 아니었구나’ 하는 경이로움과 함께 저의 자만에 대한 부끄러움이 올라왔습니다. 그 순간 그동안 가졌던 마음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세상과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지금은 딱히 과제로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현재 제가 불편함이 생기면 그것을 바라보고 ‘아 이런 불편함 마음이 있구나’ 합니다. 이것을 제 마음이라고만 생각하기보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도 또한 이러하겠구나' 하고 바라봅니다. 제 마음을 통해서 세상의 마음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는 기회로 여깁니다. 제가 어떤 상황에 짜증이 일어나거나 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생긴다면 ‘아 이럴 때 다른 사람도 이런 마음이 생기겠구나’하고 그 마음을 배우고, 다른 이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지금은 과제는 아니고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그걸 기쁘게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20살 넘게 나이 차가 납니다. 아버지가 두 집 살림하셨어요. 제 어머니가 남들이 말하는 첩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아버지가 능력이 없으셔서 어머니가 큰 집의 일까지 나서서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여장부였어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 그런 가정환경이 제게는 큰 트라우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늘 아버지를 미워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도덕적인 부분을 증오했기 때문에, 절대 그것을 닮지 않으려고 나도 모르게 굉장히 도덕적이려고 애쓰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항상 모범생처럼 살았던 것 같아요.
그것이 남편을 선택하는데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버지와 닮은 남편을 만난 것이지요.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임신하고 낙태를 하게 되었습니다. 도덕적인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가치관이었던 제게 이런 비도덕적인 일을 하게 만든 사람이 남편이라는 생각에, 그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남편도 은연중에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저희 결혼 생활에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싸운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고집스러움을 남편이 비슷하게 가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20여 년은 ‘그냥 사는 거지’ 하고 살았는데, 갱년기가 되니까 20년간 참았던 것이 다 올라오더군요. 저는 어렸을 때도 아버지하고 잘 싸우던 성격이었기 때문에 남편과도 많이 싸웠습니다. 싸운다기보다 제가 제 생각을 자꾸 관철하고 싶은 마음에 일방적으로 잔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남편은 고집은 셌지만, 잔소리를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저로 인해 잔소리도 많아졌고, 스스로 잠재웠던 욱함도 깨우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갱년기 6개월은 완전 지옥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장>이후에 원망스럽던 제 남편이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과 저는 180도 다른 것이 많습니다. 식성이 비슷한 것 빼고는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요. 그 사람은 직관적인 사람이라서 바른 말을 많이 합니다. 그 사람이 저와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그 사람을 통해 제가 할 수 있는 공부들이 많아서 좋습니다. 제게 잘해주기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저는 여전히 별로 배우는 것 없이 그냥 살았을 텐데 너무나 다르고 강하니 자연히 제가 배우는 것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칭찬할 수 있게 된 대상에 저희 남편도 포함됩니다. 제 생각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그 사람을 보니 배울 것이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달라서 불편한 점이 있기도 하지만 그 사람도 역시 저로 인한 불편함이 크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저보다 훨씬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존경합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저는 전체 조회 시간에 애국가나 교가를 부를 때 지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때 저는 가정형편도 어려워서 지휘를 배울 수도 없었고 음악에 대한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저는 정말 지휘를 하고 싶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지휘하는 아이를 뽑기 위해서 반 아이들 한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해서 지휘를 시켰습니다. 제 순서가 되자, 저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너무나 쑥스러워서 그냥 대충하고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도 무언가를 정말 하고 싶은데, 막상 그 순간에 닥치면 못한 적이 참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사람을 많이 의식하는구나' 하는 것은 알았는데, 왜 의식하는지를 모르니까 그걸 버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커서 의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몰랐어요. 왜냐하면 저는 남들처럼 공부를 특별하게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어떤 재능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또 선생님이 이름을 알까 모를까 할 정도로 평범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제가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어렸을 적 가정형편 때문에 시장에 무언가를 팔러 가야 할 때라든가, 어머니가 양장점을 하셨는데 그 당시 교복홍보를 위해 같은 학급의 아이들이 다니는 교문 앞에서 전단을 돌린다던가 할 때 전혀 아무렇지 않게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언가를 간절히 하고 싶을 때는 남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면서 ‘내가 꼭 잘해야지’하는 생각이 드니까 더 의식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원인을 몰랐기 때문에 해결도 하지 못했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오십 평생을 살았던 것이지요. ‘아,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것을 알아가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되고, 남들이 말하는 숨겨졌던 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아이디어도 떠오르고 늘 즐겁습니다. 계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면 자유롭게 저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옆에서 남편이 “하지마, 하지마~~”한답니다. 부끄러운가 봐요. (웃음)
지금 이대로! 예전에는 수행하는 과정속에 저대로의 욕심이 있었습니다. ‘정토회는 이렇게 이렇게 되어야 해!’하면서요. 그것에 합당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거나 일이 생기면 제 욕심에 부딪혀 불편한 마음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이제는 사람들 뜻에 함께 섞여서 살면 인연대로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딱히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고 '지금 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자!' 정도가 전부입니다.
인터뷰하는 내내 김순미 님의 수행 이야기 속에서 저의 마음도 함께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노래하고 춤추고 싶어도 자유롭지 못했던 마음, 질투와 욕심 속에 남을 칭찬해 주지 못했던 마음, 자신이 잘하고 열심히 해서 세상을 사는 줄 알았던 마음! 같은 마음을 보고 배웁니다. <깨달음의 장>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은 김순미 님은 이제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깨달음의 장> 홍보대사’입니다. 닮고 싶은 그 미소를 그 곳에서 찾을 수 있다면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하는 곳인가 봅니다. 아직 <깨달음의 장>을 망설이는 분 계신가요? 김순미 님 이야기에 이제 결심이 서셨지요?
끝으로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 준 김순미 님에게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글_박근애 희망리포터 (시애틀법당)
편집_박승희 (해외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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