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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진 님은 아버지의 '말'에 가장 많은 상처를 받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마음을 금이 간 꽃병에 빗대어 표현했는데요. 어떤 마음일지 알 것 같아 참 애잔했습니다. 방송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하다 만 36세 젊은 나이에 유방암 환자가 되었지만, 이를 치료하며 깨달음의 장과 바라지장을 다녀오게 되었는데요. 누가 작가 아니랄까봐 이를 계기로 참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시죠? 확실한 건 해피엔딩이라는 겁니다.
“부모 은혜도 모르고 배은망덕하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늘 최악, 그 자체였습니다. 아버지는 여자라는 이유로 남동생과 나를 차별하는 사람,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폭군, 몽둥이질보다 더한 언어폭력으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대학도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고, 성인이 된 후로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집에 갔지만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이틀만 지나면 숨통이 조여오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의 '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혹은 다른 의견을 말하기라도 하면 무차별적인 폭언을 쏟아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악의 인간’이 된 듯한 좌절에 빠지곤 했습니다. 떨어져 살면서도 이따금 아버지와 부딪혔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했지만, 금이 간 꽃병 같은 제 마음엔 늘 물기가 새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이제 내 편이 생겼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일까요? 어느 날 문득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지?’ 싶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부모님 집에 발길을 뚝 끊었고, 연락이 와도 무응답으로 일관했습니다. 마치 부모란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일방적으로 연을 끊은 채 1년, 2년, 3년… 아버지가 늘 달고 살던 말처럼 부모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고 나니 차라리 편했습니다. 매년 돌아오는 어버이날이나 명절이면 가슴에 무언가 얹혀있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에게 시달리는 것에 비하면 그건 ‘잠깐의 불편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버지와의 관계로 제 마음에는 원망과 분노가 쌓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밥을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사람처럼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참 열심히도 일했습니다. 방송작가로 일하며 방송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습니다. 때때로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혹사하면서 일하냐?”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저 자신을 갈아 넣었습니다. 그렇게 이틀에 한 번꼴로 밤새는 일상을 당연히 여기며 산 지 12년째인 지난해 7월, 병원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 몸에 암이 자라고 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게 딱 이런 걸까요? 불과 몇 달 전에 제가 만든 방송에서 젊은 유방암 환자가 요새 얼마나 급증하는지, 어떤 생활 습관이 유방암을 일으키는지 잘난 척 떠들어댔는데…. 만 36세, 그 젊은 유방암 환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두 달 후 유방암 수술을 받고 반강제적인 휴식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동안 욕심부리며 하던 모든 일을 내려놓고, 건강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컨디션이 돌아온 후 11월, ‘깨달음의 장’(이하 ‘깨장’)을 신청했습니다. 불교대학, 경전대학을 졸업하고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가지 못했는데, 쉬는 김에 다녀오자 가볍게 생각하고 ‘깨장’에 참가했습니다. 깨장에서 역시 저의 화두는 ‘아버지’였습니다. 4박 5일간 집요하게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비로소 나를 괴롭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내려놓았을 때, 일순간 해방되는 듯하던 자유로움과 후련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그동안 나를 괴롭히고 얽매이게 한 건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온몸으로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그 강렬한 경험은 제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분명 모든 것이 변함없고 그대로인데,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뜬 것만 같았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으니 하루하루가 편안했고,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딱 두 달 후, 바라지로 다시 한번 문경수련원을 찾았습니다.

2025년 1월 넷째 주 바라지장에는 총 17명의 바라지들이 모였습니다. 저처럼 처음 온 사람도 있었고, 이미 여러 번 바라지를 오신 분도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낯설었지만, 또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공양간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만 같고 ‘수련생들에게 나갈 음식을 망치면 어떡하지?’ 하며 물러서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가장 만만해 보이는 과일 손질을 하겠다고 지원했습니다. ‘과일 손질이 별 게 있겠나’ 하며 사과를 자르는데, 마침 잠시 들른 팀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다 베어버리면 어떡해요! 버려지는 부분이 너무 많잖아요. 아직 시간 많으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요. 천천히 하나씩, 정성 들여야 해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보니 ‘깨장’에서 먹었던 음식이 그토록 맛있었던 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정성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고 정성을 쏟으니 “이 음식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입니다”라는 명심문을 할 때마다 코끝이 찡했습니다. 식재료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고, 물 한 방울 그냥 흘려버리지 않는 것을 보며 평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낭비하는지,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고 살았는지도 저절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지 않아도 누군가 설거지를 하면 바로 옆에서 물기를 닦아내고, 누군가 식재료를 손질하면 조용히 도마와 칼을 들고 와서 거들고, 분명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도 매 순간 감동이었습니다. 소리 없는 배려가 몸으로 느껴지니 한발 물러서던 마음이 적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먹는 사람을 생각하고, 함께 일하는 도반을 생각하며 나 자신을 잘 쓰는 것 즉,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갗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월에 첫 바라지장을 다녀온 후 2월에 한 번, 3월에 한 번 또 바라지장을 갔습니다. 바라지장을 한 번 다녀올 때마다 제 삶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1월 바라지장을 다녀와서는 3년 만에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먼저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동안 주변에서 아무리 설득해도 요지부동, 문자 한 통 보낼 마음조차 들지 않았는데 바라지장에서 도반들의 나누기를 들으며 ‘아버지 마음도 그랬겠구나’ 이해하게 된 덕분이었습니다. 2월에 다시 바라지장을 갔을 때는 묘당 법사님께 질문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와 연을 끊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식은 그렇게 부모에게 모질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부모는 그렇지 않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냥, 그냥 가면 된다.”

그렇게 법사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바로 다음 주에 부모님 집에 내려갔습니다. 3년 만에 처음 간 부모님 집인데 놀랍도록 모든 것이 똑같았습니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어제도 그제도 봤던 것처럼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던 중, 바라지장 팀장님에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혜진 법우, 3월 첫째 주에 바라지가 부족해요. 혹시 시간 되면 도와줄 수 있어요?”
전화를 끊고, 순간 부모님도 같이 문경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거기에 가면 뭘 하냐? 뭐 하는 곳이냐?” 묻는 부모님에게 ‘깨장’을 자세히 설명할 수 없어서 “내가 다시 집에 오게 된 것도 여기를 갔다 왔기 때문이야! 가보면 알아”라고만 말하고, 그 자리에서 부모님 이름으로 ‘깨장’ 신청을 해버렸습니다. 며칠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련생으로, 저는 바라지로 문경수련원을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수련 전날까지도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그런 아버지와 문경수련원에 함께 왔다는 자체가 기적 같았습니다. 결국 딸에게 못 이겨 따라온 아버지가 우습기도 하고, 조금 귀엽게도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을 등 떠밀어 수련생으로 보내고, 공양 준비를 하는데 사과를 자르다가 문득 ‘내 손으로 부모님께 과일 한 번 깎아드린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지껏 아무 사랑도 받지 못했고, 그래서 나 혼자 이렇게 큰 줄 알았는데, 부모님이 해주는 모든 것을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지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평생 바라지를 받으면서도 바라지를 받는 줄도 모르고 살았구나!’라고 번뜩 정신이 들자, 그저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 사랑받지 않고 보살핌받지 않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습니다. 그곳이 어딘지, 뭐 하는 곳인지 몰라도 자식이 가자니 무작정 따라나선 것만 봐도 사랑이 없었으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 적이 부모님은 살면서 단 하루라도 있었을까? 아마 ‘깨장’에서 보내는 이 시간이 평생 처음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 부모의 무수한 지난 세월은 누구를 위해 쓰였을까? 바라지를 하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서 애썼지만 무슨 수를 써도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아서 늘 허덕였는데, 눈을 뜨고 보니 내가 간절히 바라던 모든 것은 이미 넘치도록 내 손안에 있었습니다.

모든 수련이 끝나고 부모님을 만났을 때 어쩌면 살면서 처음으로 서로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부모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본 것도 처음이고, 저 또한 부모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본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서로 상처 내지 못해 안달이 난 듯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내던 아버지와 저에게 이런 순간이 찾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요? 그냥 ‘고마워’ 한마디면 되는 거였습니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어서 가족이 지독하다 여겼는데, 가족이라는 말 한마디에 그 오랜 응어리가 다 풀어졌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와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대화’를 아주 천천히, 오랜 시간 공들여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삶에 ‘가족’을 되찾아준 깨달음의 장과 바라지장에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글_천혜진(청년특별지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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