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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일정을 잡기 위한 첫 통화에서 나경자 님은 “저는 특별히 할 얘기가 없어요.”라고 합니다. 수화기 너머 나경자 님의 표정과 절레절레 손 흔드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평탄하게 살아와 기사 쓸 내용이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뷰가 시작되고, 물 흐르듯 덤덤히 말하는 이야기에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지금부터 정토회에서 마음공부를 하며 나를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진 나경자 님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2011년 봄, 친구가 《스님의 주례사》의 한 단락을 메일로 보내 법륜스님을 처음 알았습니다. 계산원으로 일하는 저는 슈퍼 안, 서점에 진열된 《스님의 주례사》 책을 발견하고 틈틈이 읽었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깨달음의 장〉1이 아주 궁금했습니다. ‘왜 거기만 가면 사람들의 마음이 변할까?’ 너무 궁금하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토법당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원주에서는 가정법회가 열린다고 알려주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불교대학 홍보 기간이었는지, 법문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가 “정토불교대학에 다닐 생각은 없냐?”라고 물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이 워낙 좋아 ‘법문만 들으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고, 그때는 마음의 여유도 없어 “생각해 보겠다”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왔습니다. 이후 다음 법회에 다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그래, 한 번만 더 가보자’라는 생각으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인연이 지금까지 정토회와 이어졌습니다.
법회에 참석했을 때, 연세가 지긋한 한 노보살님께서 매일 은행에 가서 보시금을 입금해야 하는 일을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ATM기에 입금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해 달라고 하셔서 보시금을 대신 입금해 드렸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회계 소임을 맡게 되었고, 그것이 제 소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컴퓨터로 메일을 열거나 간단한 검색을 하는 정도밖에 할 줄 몰라 무척 서툴렀습니다. 딸에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배우느라 2~3년 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르바이트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웠기에 불교대학에 갈 만큼 여유가 없었습니다. 불교대학 입학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입학이 어려워진 한 보살님이 입학금을 지원해 주어 1년간 불교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경전대학까지 졸업하고 2013년 5월 〈깨달음의 장〉에 다녀왔습니다.
〈깨달음의 장〉은 정말 좋았습니다. ‘앗 뜨거워, 앗 뜨거워!’ 하면서 이쪽저쪽 손을 옮겨가며 살아왔던 저는 '그냥 놓으면 된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확 놓고 나니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다녀온 일은 ‘태어나서 제일 잘 한 일’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다녀와 다니던 마트에서 경리에 지원했습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당시 계산기에 숫자를 지우는 화살표가 있는 줄도 몰라 1년간 일 배우느라 고생했습니다. 힘들어도 배우면서 보람도 느껴 열심히 했습니다.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불교대학 돕는이 소임을 맡았습니다. 돕는이를 하면서 웹자보 만들고 영상 편집하고 공유하는 것까지 유튜브로 열심히 배웠습니다.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너무 기뻤습니다. 알고리즘에 뜨면 또 하나 알게 되고, 내가 배운 것을 다른 도반들에게 알려주면서 참 재미있었습니다. 소임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일입니다. 수업 시간에 화면을 공유할 때는 어찌나 긴장했는지 마우스에 올린 오른손 집게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갔습니다. ‘틀리면 안 돼, 1분 1초도 차이가 나면 안 돼, 잘 넘어가야 해!’라며 틀린 걸 들키기 싫어하는 제 마음을 보았습니다. 제가 완벽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예민한 것도 알았습니다. 어느 날 나누기 때 "제가 예민한 줄 몰랐는데, 돕는이 소임을 하면서 알게 됐다"라고 하니, 한 거사님이 “보살님만 몰라요.”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예민한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정토회에서 봉사하며 조금씩 알았고, 지금도 알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4남 1녀 중 넷째입니다. 아버지는 매우 엄했고, 오빠들의 감시도 심했습니다. 특히 큰오빠의 간섭이 심했습니다. 제가 체육과에 진학할 때 남녀공학은 못 가게 했습니다.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어 친구도 몰래 만나야 했고, 남자 친구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제 결정은 중요하지 않았고, 오빠의 결정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마음에 깊이 남아, 엄한 아버지도 싫고 제 행동을 규제하는 오빠도 싫었습니다.
또 ‘끝에서 두 번째’라는 서열도 늘 불만이었습니다. ‘왜 나는 끝에서 두 번째, 여자로 태어나 이렇게 살고 있나. 첫째로 태어났다면 여자라 해도 이렇게까지 눌려 살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공부를 못한 것도, 하고 싶은 일을 못 한 것도 결국 제 노력 부족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억눌린 채 살아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시집가면 오빠에게 해방된다는 생각에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너무 잘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워, 집에서 권하는 선 자리는 모두 사양하고 같은 직장에 다니던 언니의 소개로 만난 남편과 스물여섯 살에 결혼했습니다. 오빠들에게서 해방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기뻐 서둘러 시집갔지만, 결혼 후에 알게 된 남편은 제가 바라던 가정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결혼 당시에는 오빠들에게 벗어나는 것만 생각해 ‘직업만 안정적이면 잘 살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세밀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은행에 다녔습니다. 많은 돈을 다루다 보니 그런지, 돈을 비교적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100만 원이면 큰돈이라고 느끼는데, 남편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딸이 백일쯤 되었을 무렵, 친정 부모님도 돈을 맡겼는데 남편은 그 돈마저 모두 써버렸습니다. 부모님은 검소하고 성실한 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차곡차곡 모은 돈을 사위가 다 써버리는 바람에 서울에 부모님 집을 마련하면서 대출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제 입장이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인지, 그 후로도 돈 문제로 저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잦았습니다. 계속해서 어디선가 돈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은 더 이상 손 벌릴 곳도 없고 앞이 막막해 눈물만 흘리고 있는데, 남편은 “운다고 해결되냐?”라며 저를 다그쳤습니다. 그 말이 제 가슴에 깊이 박혔습니다.
〈깨달음의 장〉에서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했던 남편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 이 사람도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첫 단추를 잘못 끼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비로소 원망 대신 이해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처음 정일사를 할 때, 유수스님은 3년 동안 남편에게 참회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 사람에게 절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하고 했습니다. 첫날 108배를 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억울했습니다. 억울한 마음이 너무 커서 절하는 내내 소리 내 불평했습니다. 그렇게 떠들며 절을 절반쯤 했을 때, 저도 모르게 가슴에서 뜨거운 열기가 한순간에 훅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어떤 날은 200배를, 어떤 날은 300배를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정진했습니다. 그렇게 3년을 채우고 나니, 이혼한 남편과 다시 함께 살 수는 없더라도 ‘방 한 칸은 내어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미쳤다고 하지만, 그 마음은 여전합니다.
딸이 곧 아이를 낳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기 몫을 묵묵히 해내며 잘 자라 주었고, 지금도 자기 삶을 잘 살아가고 있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혼 후 제가 남편을 나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 탓에, 딸은 아빠를 절대로 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만약 제가 불법 공부를 하지 않았고 이런 경험도 없었다면, 아마 계속해서 ‘아빠는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공부하며 깨달은 바가 생기면서, 요즘에는 딸에게 아빠와의 좋은 추억, 아빠의 좋은 점만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딸에게도 아빠가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퇴근 후, 집에 오면 짜증과 화를 자주 냈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집에만 오면 짜증과 화를 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다 보니 저도, 주변 사람들도 힘들 때면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우리 아버지도 힘드셨구나. 혼자서 5남매를 키우려니 책임감 강한 아버지가 부담이 컸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이해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참 평탄하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때는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나?' 하며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런 것들이 경험되었습니다. 그 경험 덕분에 오빠도 아버지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딸이 중학교 2학년 때 남편이 사고를 치면서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었는데, 엄마가 저와 딸을 받아주어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냈습니다. “왜 나를 낳았어? 나를 낳지 말지. 왜 여자로 태어나게 하고, 왜 끝에서 두 번째로 태어나게 했어?” 하며 엄마에게 모든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지금도 너무 미안합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엄마는 묵묵히 저를 응원했습니다. 나를 받아주고 이만큼 살게 해준 엄마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엄마의 큰 사랑만큼 제가 보답을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도 큽니다. 사랑을 많이 주셔서 감사하고 태어나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원주지회 반곡모둠장을 맡고 있습니다. 반곡모둠은 오래 활동한 분들이 많아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의 노보살님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키오스크로 물건을 구매하는 것들을 힘들어합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에 갈 때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햄버거 가게에 들어가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방법을 함께 배우고, 원주에서는 JTS거리캠페인 후 유명 샌드위치 가게에서 함께 주문해서 배운 걸 익히기도 했습니다. 도반들이 뒤에 줄을 서 주니, 키오스크에서 천천히 주문해도 문제없으니 여유롭게 해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드라이브 스루도 한번 해보자 했는데 아직 못했습니다.
온라인으로 법회가 진행되면서 미트와 줌 사용도 어려워했습니다. 학교 운동장 나무 그늘에 앉아 알려드리니, 모두 법회에 잘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연세가 있어 금방 잊어버려 일주일 뒤 다시 만나면 처음 알려드릴 때처럼 같은 설명을 반복하게 됩니다. 아홉 번, 열 번까지는 괜찮았는데, 열한 번째는 제가 “공부하세요”라고 하니, 한 보살님이 저보고 "쌀쌀맞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런 활동이 참 재미있고 뿌듯함을 느낍니다. 제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모둠의 한 도반이 공간을 마련해준 덕분에, 3~4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은 수행법회를 오프라인으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법하게 법회를 마친 뒤에는 예전 법당에서처럼 집주인이 마련해 준 밥에, 각자 한 가지씩 반찬을 가져와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밥도 먹고 수다도 떨어야지, 너무 잘했다.”라며, 노보살님들이 특히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모둠원들이 오프라인 법회에 참석하기 어렵다고 하여, 온라인으로 진행해야 하나 망설이다 예정대로 오프라인 법회를 열었습니다. 두세 명만 참석할 정도로 참석률이 저조할 때는 "오프라인 법회를 그만두어야 하지 않냐?"라고 의견을 물었는데, 한 도반이 "한 명이 오더라도 그냥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얼굴 보고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나 봅니다.
모둠 소통방에 공지문을 올려도 반응이 없으면, '봉사활동 진행이 어렵지 않을까?'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지난 2025년 6월 JTS캠페인 때도 모두 참석이 어렵다고 해서 ‘혼자라도 나가야 하나?’ 했는데 한 도반이 나왔습니다. “내가 도와줘야지 누가 도와주냐?”라는 그 한마디에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이렇게 도와주는 도반이 있으니 다시 힘이 납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활동해 오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4~5년 전부터 갱년기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다 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었고, 절도 예전처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아프니 소임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순간순간 올라왔지만, 그래도 계속 활동해 온 것이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마음공부를 꾸준하게 하는 게 제 소원입니다. 제 마음을 잘 살피며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고 남을 도우며 살겠습니다.
나경자 님은 자신을 예민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의 인상은 참으로 따뜻하고 여유로웠습니다. 노보살님들을 인솔해 햄버거 매장 키오스크 앞에 서 있던 모습, 수행법회가 끝난 뒤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며 하하호호 웃고 있는 나경자 님과 도반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꾸준히 정토회에서 활동하며 수행을 이어온 점이 가장 본받을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지나오며 이제는 편안한 미소로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는 나경자 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의 활동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글_배해정 희망리포터(강원경기동부지부 화성지회)
편집_박선희(강원경기동부지부 수원지회)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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