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수행하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가진 나

최진희 님은 불편한 다리 때문에 어떤 날은 서서 절하고, 어떤 날은 섰다가 앉아서 절하고, 어떤 날은 앉아서만 절하면서도 천일결사 기도를 하루도 빠뜨린 적이 없습니다.
꾸준히 수행한 덕분에 이제 더 이상 장애도, 병원 치료의 아픔도, 주변의 차별 어린 시선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행하기에 참 좋은 조건이라는 최진희 님의 들꽃같이 묵묵한 수행 이야기 들려드립니다.

아이들의 놀림감에서 연합고사 전교 일등으로

저는 3남매 중 둘째로, 선천성 백내장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두 눈동자가 백태로 가려져서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생후 95일에 첫 수술을 받았고, 그 후 네 번의 개안 수술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제 시력은 양안 0.2 혹은 0.3 소위 약시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또 양쪽 무릎 관절이 탈구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수술을 받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양쪽 고관절부터 탈구되어 네 번의 수술을 연이어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가슴부터 양 골반을 지나 양쪽 발목까지 Y자형으로 몸통과 두 다리를 감싸는 거대한 깁스를 한 채 수개월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부모님과 오빠 그리고 남동생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

자식을 위해 절망과 아픔을 기꺼이 감내하신 부모님과 우애 있는 형제들의 배려로 집에서는 귀한 딸로 자랐습니다. 하지만 집 밖에서 저는 병신이자 절름발이, 도깨비로 불렸고, 짓궂은 아이들의 좋은 놀림감으로 괴롭힘도 당하고 맞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저를 보는 몇몇 어른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 그렇다고, 계속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부모님까지 벌 받게 될 거라고 해서 정말 무서웠습니다.

부모님이 불자라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새벽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어머니의 새벽 기도는 제 새벽 기도의 원동력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모님이 벌을 받을 거라니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었지만, 그 불안감은 너무도 컸습니다.

그러던 6학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의 제안으로 체육 시간에 벤치에서 반 아이들의 활동을 부러워하며 지켜보는 대신, 교실에 남아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 이상으로 시험 점수가 올랐습니다. 부모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더 힘을 내어 공부에 집중하니, 놀랍게 성적이 향상되어 갔습니다. 이런 제 모습에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이 깊어지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게 되니 짓궂은 아이들도 더는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치매로 투병중이신 존경하는 아버지와 함께
▲ 치매로 투병중이신 존경하는 아버지와 함께

초중고 학창 시절 중, 가장 잊지 못하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왔던 당시, 제 도시락에 분필 가루를 털며 깔깔거리고 웃는 아이들 모습과 졸업식 날 그 아이들 앞에서 연합고사 전교 1등으로 단상에 올라가서 보란 듯이 우등상을 받고 내려오던 순간입니다. 이 일은 지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합니다. 같이 놀 친구가 없으니 계속 공부에 매진하게 되어, 제가 원하던 서울 명문대 특수교육과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후, 곡절 많은 가정은 수행터

졸업 후 장애인복지관에 근무하면서 대학교 수어 연합 동아리 친구로 알고 지냈던 지금의 남편을 다시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당신들의 귀한 막내아들을 데려온 죄로, 맞벌이로 2년간 아들의 양육을 시부모님께 부탁드린 과보로, 근 7년 동안 시부모님의 모진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만.

처음에는 제가 잘하면 나아질 거라 믿었지만 그건 세상을 모르는 제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던 날, 시부모님의 꾸지람을 듣느라 낯선 동네 놀이터로 놀러 간 아이와의 약속 시간을 놓쳐 잃어버렸을 때는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미친 사람처럼 아이 이름을 부르며 온 동네를 찾아 다녔습니다. 다행히도 얼마 후, 아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오열은 날마다 계속되었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서너 시간씩 울었습니다. 그런 저를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 보건교사의 간곡한 조언을 듣고 저는 정신과에 갔고, 심각한 스트레스성 우울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의 요청으로 1년간 부부상담 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한 결과 우울증이 나아졌습니다.

딸을 입양하다

그리고 남편과 약속한 대로 둘째를 입양할 방안을 알아보았습니다. 7년의 기도 끝에 마침내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생후 20개월이던 제 딸을 데려왔습니다. 입양 아이들 특성이라는 산만한 행동, 오빠에게 심술부리는 행동, 심지어 위험한 행동을 할 때, 설명하고 달래어도 소용이 없을 때는 때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딸아이가 초등 4학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어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ADHD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ADHD 진단을 받았지만 골목대장처럼 온 동네를 휘젓고 놀며 밝았던 딸아이가 5학년 때에는 학교에 가기 싫다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순간, 무언가 크게 잘못됐음을 알고 ADHD로 치료받고 있던 병원에서 2주의 관찰 결과 스트레스성 우울증, 소아 정서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치료 과정에서 딸아이가 평소 친한 친구라고 믿었던 아이에게 자신이 입양아라고 했던 말이 퍼져서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 ‘지금 엄마는 장애인’, 그러니까 언젠가는 또 버림받을 거라는 잔인한 말로 놀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이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아이가 수업 시간에 챙겨간 준비물로 학급 전체 아이들이 장난을 쳤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이와 부산 감천문화마을에서
▲ 사랑하는 딸아이와 부산 감천문화마을에서

그 얘기를 듣고,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했습니다. 학교에 조처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당시 제가 교사로 재직 중이었지만 교육청에서 열린 학교폭력위원회는 너무나 형식적이라 도움이 안 됐습니다. 소송을 하면 이길 수는 있지만, 이삼 년간 정말로 힘들 거라는 변호사 말을 참고했습니다. 저는 보왕삼매론의 열 번째 문구대로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기보다, 수행관점으로 돌려 소송에 소모될 에너지와 경비를, 딸아이의 회복을 위해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아이의 불안 행동과 공포반응, 우울 행동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제가 가르쳤던 어떤 특수교육 대상 학생보다 더 많은 인내와 정성과 손길이 필요했습니다. 극도로 흥분한 딸아이가 거실의 텔레비전을 갖다 버리겠다며 들고 씩씩거리기도 했고, 작년 봄 어느 날엔 저와 소소한 말다툼 끝에 자기 목과 방문에 줄을 매고 죽은 듯이 누워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와 딸아이는 근 3년간 진흙탕 속을 허우적거렸습니다.

천일결사에 입재하다

만약 그때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면, 천일결사에 입재하여 매일 정진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저 자신과 딸에게 아주 끔찍한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그냥 아침에 눈 떠서 제가 살아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 바로 정진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수술 이후, 양쪽 무릎이 굽혀지지 않아 처음에는 친정어머니께서 주신 천주를 돌리면서 관음보살을 염하다가,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내고 서서 허리만 조금 숙이다가, 허리를 좀 더 깊이 숙여보고, 마침내 두 손을 이마 옆에 대는 동작까지 성공했습니다. 물론 절하고 명상하면서 무릎과 골반 통증이 너무나 심했고, 다리가 마비되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정진을 빠뜨린 적 없이 매일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몸 상태에 따라 어떤 날은 서서 절하고, 어떤 날은 섰다가 앉아서 절하고, 어떤 날은 앉아서만 절했습니다.

수원영통 법당 철거 작업 중(맨 오른쪽이 글쓴이)
▲ 수원영통 법당 철거 작업 중(맨 오른쪽이 글쓴이)

수행만 했을 뿐인데

지금은 제 딸도, 저도 많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의 난리 중에 아들은 혼자서 공부해 지방 국립대 의예과에 진학했습니다. 엄마의 눈물, 동생의 아픔, 그런 가운데 아빠로써 남편으로써 별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빠를 지켜보던 아들이 대학교로 내려가기 전에 말했습니다. “엄마, 너무 힘드시면 아빠하고 이혼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제발 죽지만 마셔요.” 아들의 말에 곧바로 대답해주었습니다. “엄마 안 죽어.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할 일도 많아.”

이제는 그냥 다 털고 웃을 수 있습니다. 시부모님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지 못했던 남편이 이제 밉지 않습니다. 시부모님도 지금은 저를 귀한 막내며느리로 대해주십니다. 저는 그냥 수행만 했을 뿐인데, 어느 날 보니 주변이 너무나 변해있었습니다.

불교대학 거리 홍보(왼쪽에서 두 번째가 글쓴이)
▲ 불교대학 거리 홍보(왼쪽에서 두 번째가 글쓴이)

저의 명심문은 ‘범사가 수행입니다. 물처럼 꾸준히, 들꽃처럼 묵묵히’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장애도, 병원 치료의 아픔도, 주변의 차별 어린 시선도, 제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 괜찮습니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일입니다.

저는 몸이 허락하지 않아서 실천장소 봉사도, 인도성지순례도 못 가고, 전법활동가도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글 자막화팀 꼭지로서 스님 법문을 한글 자막화하며 잘 쓰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수행하기에 딱 좋은 조건에 놓였을 뿐입니다. 남은 인생도 세상에 잘 쓰이다가 어느 날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떠날 겁니다. 지금 저는 참으로 행복하기에, 행복을 전하는 수행자입니다. 감사합니다.

JTS 거리모금 (뒷줄 가운데가 글쓴이)
▲ JTS 거리모금 (뒷줄 가운데가 글쓴이)

이 글은 <월간정토> 2023년 3월호에 수록된 국제특별지부 아태지회 최진희 님의 수행담입니다.

글_최진희(국제특별지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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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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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숙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눈물이 핑 돌았어요..ㅜㅜ
늘행복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2024-01-16 23:02:23

조애자

마음 담담히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24-01-16 16:44:05

김남희

수행하기 딱 좋은 조건, 나는 수행만 했을 뿐인데 어느 날 보니 주변이 모두 변해 있었다는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01-15 08: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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