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엄마잖아, 그 한마디에 시작한 바라지가
저를 살렸습니다

류양희 님은 직업군인이던 아들을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고 나서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냈다고 합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스님께 질문드렸고, 그에 대한 답을 들은 뒤부터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문경수련원에서 바라지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무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주 바라지장에 가서 소임을 해냈습니다. 류양희 님은 다른 이들의 공양을 위해 보낸 그 시간이 결국 나를 살리는 길이었다고 밝힙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지만, 결말이 아름다워 다행입니다.

류양희 님
▲ 류양희 님

“엄마잖아, 그냥 좀 그렇게 지내면 어때”

지난해 6월,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들을 하늘로 보내고 떠밀리듯 장례를 치렀습니다. 아들이 직업군인이었기에 일주일 안에 숙소를 정리해야 했고, 사고 조사를 위해 아들에 관한 모든 것을 조회해 군 경찰에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아무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라 여기저기 물어 가며 일을 처리했습니다. 마음 놓고 울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저를 걱정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잘 지내겠다고 말했지만, 정작 저는 그렇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무기력하게, 마치 시체처럼 하루하루를 보냈고 그런 제 모습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 저를 안타깝게 본 지회 법사님이 백일출가를 권하였습니다. 하지만 서른다섯에 사별하고 혼자 벌어서 먹고살아야 했던 업식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지내던 어느 날, 문득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때 법사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회사에 사직서를 내기로 마음먹고, 오도재일에 스님께 제 상태에 대해 질문하니 “엄마잖아. 그냥 그렇게 좀 지내면 어때?”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제가 조급한 마음에 너무 애쓰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두북 수련원 봉사 중에(뒷줄 맨 오른쪽이 류양희 님)
▲ 두북 수련원 봉사 중에(뒷줄 맨 오른쪽이 류양희 님)

그 후 사직서를 내고 문경수련원 바라지를 시작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무기력한 마음 때문인지 감기와 몸살이 반복되었습니다. 링거를 맞고 약을 먹으면서도 수련이 있을 때마다 문경으로 향했습니다. 아프면 환자 방에서 쉬고, 조금 나아지면 공양을 지었습니다. 바라지를 하던 중,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이 물 위에 뜬 기름처럼 하나둘 떠올랐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은 엄했고, 그런 부모님이 무서워 사춘기 때도 반항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말 잘 듣고 동생들을 잘 돌보는 맏딸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를 보내 줄 수 없으니 산업체 고등학교에 가라는 아버지 말에도 그저 제 운명이라 여기며 받아들였습니다. 제 기억 속 어머니는 해 뜨면 밭에 가고 해지면 잠자리에 드는 분이었습니다.

남편과 사별 후 기댈 곳이 없던 저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친정에 갔지만, 어머니는 늘 바빴고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저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때는 서운하다는 마음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불교대학 돕는이(맨 왼쪽이 류양희 님)
▲ 불교대학 돕는이(맨 왼쪽이 류양희 님)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미역국 한 그릇의 화해

아들의 장례를 치른 저에게 어머니는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너라도 정신 차려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제 가슴에 박혔는지 두고두고 생각이 났습니다. 한 치 건너 두 치라고, 어머니는 본인의 자식이 먼저였습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휴대전화에 남은 어머니의 부재중 전화도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일을 그만두고 문경에 가는 것을 못마땅해하신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습니다. “문경을 왜 가느냐?”는 질문에 “아들이 보고 싶고, 제가 살려고 간다”라고 답했을 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전화는 뜸해졌고, 어머니는 제 소식을 동생들과 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바라지를 하며 도반들과 나누기하던 시간에, 어머니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처음으로 꺼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원망과 서운함이 조금씩 옅어졌습니다. 공양을 짓고, 더운 여름날 대웅전 풀을 뽑으며 어머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어머니와 단둘이 2박 3일 여행을 하며 어머니와 친해지고 싶었던 제 마음을 알았습니다. 몇 달 만에 어머니 집에 가서 잤는데 생일에 못 먹었던 미역국을 끓여 주었습니다. 그 미역국을 먹으며, 제가 어릴 적 하지 못했던 사춘기 반항을 이제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그 모습으로 제 곁에 있었고, 표현은 서툴렀지만, 저를 더없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제는 어머니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너무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바라지장에서(뒷줄 맨 오른쪽이 류양희 님)
▲ 바라지장에서(뒷줄 맨 오른쪽이 류양희 님)

내가 필요한 곳에 쓰이는 기쁨, 소임이 복이다

바라지를 네 번째 갔을 때, 수련 담당자가 공양간 팀장을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이제 네 번밖에 안 왔고, 밥도 안 해 봤는데 어떻게 팀장을 하나요”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하지만 “횟수는 중요하지 않고, 밥은 팀장이 안 해도 된다”라는 법사님 말에 일단 “예, 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수련 담당자에게 그냥 바라지만 하게 해달라고 다시 부탁했는데, “수련원에서 보살님이 필요하다잖아요”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필요한 곳에 잘 쓰이겠다는 마음으로 수련원에 왔으면서, 정작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저를 보았습니다. 그 순간 “예, 해 보겠습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올해 1월 1일, 소임으로 첫 팀장을 하며 말 그대로 우왕좌왕 좌충우돌했습니다. 큰 밥솥에 밥물을 맞추는 것도 어려웠고, 양 조절을 못 해 국을 넘치게 끓이기도 했습니다. 수시로 수련 담당자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첫 소임을 마쳤는데, 다른 바라지 팀장이 성지순례에 가서 그 빈자리까지 메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1월 한 달 동안 팀장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안정이 되었고, 요령도 생겼습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을 해내며 느끼는 성취감과 자신감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값진 것이었습니다.

타인을 위한 공양이 나를 살리는 길이 되어

소임에 집중하니 잡생각을 할 수 없었고, 수시로 아프던 머리도 차츰 나아졌습니다. 평소에 “소임이 복이다”라는 선배 도반들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의례적인 말처럼 여겼는데 팀장 소임을 하며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1년 전 처음 문경에 왔을 때는 바라지를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습니다. 어느새 1년이 넘도록 수요일에 출근해 일요일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집에 있었다면 마냥 늘어져 있었을 시간을,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공양을 짓는 데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를 살리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괜찮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다 내 마음이 만든다”는 말을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많은 분의 도움과 보호 속에서 몸은 건강해지고 마음은 단단해졌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사람들과 어울려야 살 수 있음을 깊이 느낍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주신 모든 분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살아주고 있는 딸에게도 참 고맙습니다.

지리산 수련원 바라지장에서(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류양희 님)
▲ 지리산 수련원 바라지장에서(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류양희 님)


이 글은 <월간정토> 2026년 2월 호에 수록된 바라지장 소감문입니다.

글_류양희(대구경북지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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