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3.8.15. 민족의 영산, 그리고 웅장한 백두산

오늘은 백두산에서 하루종일 보내는 일정이었습니다. 다들 들뜨고 신나했습니다. 

새벽 3시에 장백에서 출발한 버스는 백두산 자락을 따라 이도백하로 갔습니다. 스님께서는 백두산 자락을 따라 고개를 넘어 백두산의 서쪽인 송강하를 지나 북쪽 아래인 이도백하로 가는 이 길은 해발 1,000미터를 거의 수평으로 계속 달리는데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곳은 없을 것이라고 감탄하십니다.  

백두산은 260만년전에 화산이 분출해서 생긴것이라고 합니다. 화산이 여러차례 폭발하고 함몰되고 또다시 폭발하기를 반복하면서 고인 천지는 칼데라 호에 해당합니다.

천지는 해발 2,200미터에 위치하며 수심이 384미터로 서해바다 어떤 곳도 이렇게 깊은 곳이 없다고 합니다. 천지는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긴 타원형으로 남북의 길이는 4.95km 정도이며, 동서의 길이는 3.35km 정도입니다. 천지의 물은 60%가 지하수이기에 비룡폭포의 물량이 가뭄이어도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아침을 먹고 백두산 북쪽으로 갔습니다. 오늘은 햇볕이 쨍쨍합니다. 북문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백두산의 정상에는 약간의 구름이 걸려 있었습니다.

표를 끊고 천지로 가는 짚차를 갈아타려고 중간 승차장에 내리니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천지가 있는 봉우리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고 구름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올라가도 천지를 볼 가능성이 없기에 비룡폭포부터 가기로 했습니다.

비룡폭포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참가한 학생들은 천지를 못볼까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비룡폭포에서 스님과 참가자들은 한명씩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동안 구름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비룡폭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룡폭포를 나와 소천지로 향했습니다. 소천지는 작은 천지라는 뜻으로 주변의 경관을 그대로 호수에 담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운데, 오늘은 역시 비가 내리고 있고 소천지로 흘러드는 물이 많다 보니 수면이 일렁거려 주변경관을 비추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소천지 주변을 한바퀴 돌아서 다시 녹연담으로 갔습니다. 



녹연담은 물이 매우 맑고 깊어서 물색이 짙은 녹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녹연담에 떨어지는 2개의 폭포도 작지만 예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녹연담을 둘러본 후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는 동안 조별로 스님과 김제동씨와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구름을 걷히기를 기다리는데, 오히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를 피해 기다리다가 비가 좀 잦아들자 천지를 가기는 어렵고 바로 지하산림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은 천지로 가는 짚차가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지하산림으로 이동했습니다. 지하산림으로 가는 동안 비는 더 세차게 내렸습니다. 비와 안개로 지하산림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하산림에서 나오니 해가 나기 시작합니다. 하늘을 보니 해는 나지만 구름이 하얗게 덮여 있습니다. 혹시나 천지에 갈 수 있을지 다시 물어보니 오늘은 천지로 올라가는 것이 폐쇄되고 천지에 있는 관리인들도 철수를 했다고 해서 아쉬움을 가지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스님 강의에 앞서 저희들도 간단히 광복절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애국가를 부르고 호국선열들에 대한 묵념하는 시간을 하졌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스님 강의에 이어 김제동씨의 강의도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 천지를 보지 못했기에 모레 일정을 조정해서 다시 천지를 볼 수 있도록 해보자고 하니까 참가한 젊은 청년들은 모두 환호를 지르고 좋아합니다. 내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문제없다고 흔쾌히 동의합니다.

오늘은 스님께서는 발해의 역사에 대해 정리해주셨습니다.

“발해는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서 잃어버린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발해의 역사를 다시 우리의 역사로 되찾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의 실학자들에게서부터 입니다. 발해는 학교에서도 수업시간에 1시간 내지는 2시간을 배우게 되는데, 제 기억에 남는 건 발해 제목하에 석등사진 하나입니다. 내일 가는 흥륭사에 그 석등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발해유물은 영광탑, 흥륭사 대웅전의 석불좌상, 석등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공개되지는 않지만 벽화와 왕관이 나오고 있고 많은 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발해인들은 스스로 발해역사를 써서 남아 있는 것은 한 점도 없었는데, 정혜공주묘가 발견되면서 그안에 발해역사 기록물이 나왔습니다. 발해인들이 쓴 발해역사기록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고구려는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부여를 계승하는 입장을 가졌고, 다물사상이라고 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것을 건국이념에서 밝혔습니다. 고려는 발해의 역사를 건너뛰어 고구려와 연결되어 계승되었습니다. 고려가 분열된 발해와 신라를 제치고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미도 되고, 분열된 국가를 모두 포용했다는 뜻도 됩니다.

대조영은 동모산에 산성을 짓고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698년으로 고구려 멸망이후 30년 만입니다. 발해는 순식간에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10대 선왕에 와서야 해동성왕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919년에 발해는 거란의 침입으로 많은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925년 2차 침입으로 부여성이 함락당하고 바로 수도까지 함락당하며 926년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발해의 유민들은 발해의 부흥을 위해 투쟁했지만, 역량이 부족하였습니다.

발해는 이제 우리 역사속으로 편재해서 역사의 정통성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역사의식은 고구려에서 발해로 그리고 고려로 이렇게 이어지고 또 현실적으로는 발해와 함께 신라를 이어 내려갑니다, 이 문제는 다시 와서 남북한을 어떻게 계승해 나갈것인지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어서 김제동씨는 청년들의 눈높이에서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아주 재밌게 풀어주셨습니다. 청년들은 중간중간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고 아주 즐거워 했습니다.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 하고 내일도 새벽 3시에 발해의 유물을 찾아 발해진으로 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

0/200

^^^^

발해유물이 남아있는것이 별로없고(영광탑,흥륭사석불좌상,석등등)..비공개이긴 하나,벽화와왕관,많은 성터..정혜공주묘안에서 발견된,발해인들이 쓴,중요한자료인 &lt;발해역사기록&gt;이 발견되고있다니 다행입니다^^<br />&lt;발해는 이제 우리 역사속으로 편재해서 역사의 정통성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역사의식은 고구려에서 발해로 그리고 고려로 이렇게 이어지고 또 현실적으로는 발해와 함께 신라를 이어 내려갑니다, 이 문제는 다시 와서 남북한을 어떻게 계승해 나갈것인지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gt;--역사속에 살아계시는 듯한 스님의 말씀도 참 와닿네요..제동님과 함께 해 특히 더 즐거우셨을거 같아요..^^<br />아래,8월9일자,스님의하루에는,흥륭사가 흥륜사로 되어있네요..^^

2013-08-22 00:15:21

홍한종

푸르고 강렬한 백두산의 기운이었습니다

2013-08-19 08:16:47

이경희

아들(김무석)~사진으로보니~빈갑다~^^
엄마는~문경에서~깨장바라지수런중이란다~
모든분들과함께~예쁜추억~많이담아오길~~~^^

2013-08-17 08:01:59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